진한 커피 한 잔, 또는 시원한 아이스티가 절실한 순간. 마침 카페 하나가 눈에 띈다. 하지만 난 문을 여는 대신 꾹 참으며 발길을 돌린다. 에이, 차라리 안 마시고 말지. 이미 수차례의 경험 끝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음료를 받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나의 요구가 의외로 수월하게 관철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카페에서 일회용품을 최소화한 주문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투쟁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업소 안에서 마실 거니 머그잔에다 담아달라고 하지만, 아예 비치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 있다 하더라도 음료에 따라 잔의 용적이 다르다며 거절당하기도 한다. 양의 손해를 봐도 좋으니 그리 해달라고 고집을 피우면 바리스타의 진한 불쾌감을 피할 수 없다. 



머그잔의 요구가 수용되었다 하더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주문을 받은 이와 커피를 만드는 이 사이에서 이 메시지가 누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카운터 뒤 세 명에게 줄줄이 애원하고도 플라스틱 컵을 받은 적이 있다. 가장 어려운 건 뚜껑, 빨대, 그리고 컵홀더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음료를 받아내는 일이다. 극미한 기능만 수행하다가 바로 버려지는 이 자원의 의무적인 낭비를 피하는 것이 나에겐 무엇을 마시느냐 보다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잘 안 된다. 그래서 난 아예 마시지 않는 편을 택한다. 목마른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나더러 유난스럽다고 한다. 평소에 일회용품을 전혀 안 쓰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까다롭게 구냐고 반문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종이, 플라스틱, 유리나 금속 중 적어도 한두 가지 재료는 사용하고 버리는 생활을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일회용 커피 잔에 대한 집착은 비논리적이다. 말하자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하려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약과 환경보호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태평양 플라스틱 아일랜드


플라스틱 낭비를 운운할 것 같으면 편의점 생수도 절대 사 마시지 말아야 하고, 육식이 어떻다고 할라치면 가죽 혁대와 신발은 그 자리에서 벗어버려야 한다. 언행일치와 일관성이라는 말 앞에 모두 고개를 숙일지어다. 암 그렇고말고.


지당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일관성이 부족해도 좋은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바로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렇다. 대쪽 같은 일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용인될 수 있고, 다소 모순되는 면이 있더라도 좋다. 한 가지라도 아끼고, 보호하고, 경감시키려는 노력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언제나 낫기 때문이다. 


보다 친환경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세는 하나의 생활철학이자 신념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이 지구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느냐에 대한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정도를 줄이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환경의 관점에서 보면 오십 보와 백 보는 분명히 다르다. 소를 훔치건 바늘을 훔치건 둘 다 도둑이지만, 그 절도에는 규모와 여파의 측면에서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차이가 하나 둘 모여 더 큰 차이를 만들어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 각자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다. 평소에 종이를 많이 쓰더라도 식당에서 냅킨의 사용만큼은 자제한다고 하면 그거라도 하는 것이 옳다. 물론 환경을 핑계로 생활의 모순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이다. 요는 환경에 관해서는 뭐라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이다. 일관되게 반환경적인 사람보다는, 비(非)일관되게 친환경적인 사람이 낫다.



세계적으로 야생동물 보존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극동아시아 지역은 악명이 높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수준의 유난스러움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의 온갖 희귀동물이 소위 아시아 전통의학의 재료에 쓰이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냥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곰에서 추출한 쓸개즙, 호랑이 뼈를 갈아서 만든 고약, 정력제와 해열제로 쓰이는 코뿔소 뿔, 그리고 고래 사냥.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우리로서는 싸잡아서 비난받는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한국도 억울할 만큼 깨끗한 나라는 아니다. 우리에게 어떤 유난을 떠는 능력이 있다면, 짐승을 하나라도 더 잡아먹는데 쓰지 말고, 하나라도 더 보호하는데 쓰는 것이 마땅하다. 환경에 해가 되는 쪽이 아니라, 득이 되는 긍정적인 유난스러움을, 야생학교는 희망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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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 있는 말 중에서 외국어로 정확하게 옮기기가 어려운 단어가 간혹 있다. 가령, ‘여유’라는 말에 꼭 맞는 영단어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나 공간의 여유와 같은 물리적인 개념을 영어로 표현할 때는 그나마 가능하지만, 생활의 여유와 같은 용법으로 쓰일 때는 직역이 거의 불가능하다. 일대일 대응이 되는 단어를 찾는 대신 대충 풀어서 쓰면 물론 의미는 전달된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못지않게 그 표현의 맛과 느낌도 중요하다. ‘멋’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의복의 멋이야 ‘스타일’로 대체하면 되지만, ‘멋을 아는 사람’이라 할 때는 딱 맞는 영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 사용하는 어휘 중 이런 말이 많은 사람은, 외국 사람과 얘기할 때 말문이 툭툭 막히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좋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는 ‘멋’과 ‘여유’를 아는 민족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거론될 만큼 그 개념들을 단어로 정비를 해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상황이라도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버젓이 쓰이는 우리말인데 어째 외국어로 말하려니 쑥스럽거나 창피한 단어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대지’ 혹은 ‘노는 땅’이라는 말이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다가 공터 같은 곳을 지나치면 아저씨들이 이 단어를 쓰는 것을 엿들을 수 있다. “여기 전부 노는 땅이여!” 또는 부동산에 들어가 상담을 받다보면 으레 몇 번은 등장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건설이나 투자에 밝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영어에 황무지를 뜻하는 ‘wasteland’는 있어도 땅이 놀고 있다는 표현은 없다. 직역을 하면 ‘playing ground’이지만 이건 놀이터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우리말로 ‘논다’는 말이 가지는 약간의 부정적 색채가 가미된 의미로는 더더욱 영어 번역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건물이나 담, 또는 그 밖의 인공물이 없는 땅을 가리켜 우리는 그 땅이 ‘놀고 있다’고 얘기한다. 초목이 바람에 나부끼고, 돌 위엔 잠자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놀고 있다. 버섯이 포자를 터뜨려 날려 보내고, 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는 곳이지만, 놀고 있다. 광합성에 의해 탄소가 저장이 되고, 물과 무기물이 토양에서 순환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은 놀고 있다.


수자원공사 성남권 관리단 직원들이 노는땅에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 (경향DB)


과연 뭘 그리 놀고 있을까? 한번 들여다볼 일이다. 아저씨와 부동산업자와 건설 투자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연이 어떻게 팔자 좋게 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실제로 동물의 놀이행동은 중요한 생물학 연구 분야 중 하나다. 놀이는 동물 신체의 성장을 돕고, 성체가 되었을 때 필요한 각종 사냥, 도피, 교미 행동 등을 미리 연마하게 해준다. 또한 놀이를 통해 집단의 여러 구성원들을 알게 돼 장차 사회구조에 무리 없이 편입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놀이는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에 익숙해지고, 환경에 대해 배우며, 정신건강의 증진을 가져오기도 한다. 놀이 행동은 거의 모든 포유류에서 나타나고, 새에서는 까마귀과와 앵무새, 코뿔새 등 몇몇 분류군에서 관찰된다. 동물이 논다는 것은 그들의 심리 및 생리 상태가 양호하다는 인자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사육시설의 질을 평가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


DMZ에서 헤엄을 치며 놀고 있는 고라니 (경향DB)


그렇다. 소위 노는 땅이라는 곳에서 동물들은 실제로 놀고 있을 것이다. 놀기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밥도 먹고, 보금자리도 찾고, 짝짓기도 하고, 잠도 잘 것이다. 중요한 건, 노는 행위조차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이 돌아가는 방식 중 하나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건, 비유적인 의미에서건 마찬가지다. 인간이 지은 구조물이 없다고 해서 땅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보통 그렇게 불리는 땅은 여지없이 자연이 조용히 돌아와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잠시 잊은 틈을 타서 동식물이 소박하게 이사를 와있는 공간이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머지않아 훌륭한 숲이나 습지가 될 수도 있다. 인간에 의해 변형된 곳에 간섭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자연이 스스로 야생의 모습을 되찾도록 하는 것을 영어로 ‘rewilding’이라 한다. 마땅한 번역어가 무엇인지 난 아직 못 찾고 있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다. 자연이 팽팽 놀고 있든, 열심히 일하고 있든, 우리 인간이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조용히 지켜보는 자세만 있으면 족하리라. 노는 땅은 없다. 야생학교는 외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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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돌아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나는 틈틈이 공원에서 산책을 즐긴다. 마음 같아선 이야기책에 나오는 예쁘고 작은 오솔길이나 탁 트인 들판에 나가 홀로 호젓하게 걷고 싶지만, 도시에 살면서 내 구미에 딱 맞는 자연을 찾기란 지나친 욕심이다. 이 빌딩 천지에 간간이 주어진 녹지라도 사실 감지덕지다. 어떻게 이 땅만큼은 시멘트로 숨구멍이 막히지 않을 수 있었는지, 때로는 신기해하며 천천히 한 걸음씩 옮겨본다.


오늘 난 뭘 잘하고 뭘 못했더라…. 그런데 정신 집중이 잘되질 않는다. 복잡한 인간사를 피해 찾아온 곳인데 생각만큼 충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원이란 단지 건물이 없는 공간이 아니라, 인공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야생의 자연을 얼마라도 대표하는 곳이라야 한다. 쫓기고 쫓겨 마지막 살 곳을 찾아 모여든 도시의 여러 동물, 제아무리 꽃가루를 휘날려도 작은 종자 하나 뿌리 내릴 곳 없어 허탈한 도시의 여러 식물이 잠시라도 쉬어갈 곳, 그런 곳이 공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곳이라야 공원을 찾는 우리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얼핏 보면 나무도 많고, 풀도 많고 멀쩡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야생학교에 다니는 이의 눈에는 도시의 마지막 남은 이 녹색 무인도들이 못내 안타깝고 슬프기만 하다.


(경향DB)


자연이 있어야 할 공원이지만, 흙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둔 곳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 보행자 배려와 관리의 편의를 위해 이곳마저 다양한 포장 자재로 덮여버린다. 도시에서 자연은 절대로 ‘생얼’을 드러낼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식물이 싹을 트거나 동물이 굴을 파기 어려워지는 건 물론이요, 빗물이 내려도 골고루 적시지 못하고 배수로를 따라 빠져나간다. 많은 공원은 원래 있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일단 갈아엎은 다음에 새로 심어서 나무가 작고 그늘이 적다. 다분히 인간 중심의 조경으로 인해 곤충이나 여러 무척추동물의 먹이가 될 만한 초본식물도 마찬가지로 희귀하다. 은신처로 삼을 만한 곳이 적은 것은 당연지사. 그나마 나무라도 몇 그루 심어져 있으면 다행이다. 공원의 큼지막한 부분에 온갖 괴상한 모양의 운동기구가 설치되는 것도 예사이다. 이런 기구는 헬스장에 있어도 되지 않냐는 말은 통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나무그늘 아래, 금쪽같은 녹지의 면적까지 빼앗아 가면서 있어야 한다. 사실 공원을 오로지 운동의 공간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파워 워킹에서 뒤로 걷는 사람까지, 손뼉치며 가는 이에서 배를 두들기며 행진하는 이까지, 요란한 동작의 행렬이 공원을 수놓는다. 아니 힘차게 걷는 것조차 잘못이냐고? 그 소리에 놀라 공원을 떠나야 하는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 있다. 우리가 싫든 좋든 대부분의 동물은 조심스럽고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보행로를 벗어나 도토리나 은행을 줍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가장 깊은 슬픔을 자아내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바로 공원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말없는 살육, 그리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익숙함이다. 음침한 푸른빛의 형광등으로 곤충을 유인해서 전기로 죽이는 기계는 요즘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틱, 틱, 하는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알리는 이 흉측한 기계 밑에는 다양한 곤충의 사체가 덩그러니 널린다. 물론 모기와 같은 소위 ‘해충’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 공원에는 왜 안 세워 주냐고 민원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퍼런 사형장 덕분에 모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는 아무도 없으며, 이것이 모기만 골라 죽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나방과 하루살이까지 무더기로 희생됨으로써 새나 박쥐 등 다른 동물의 먹잇감만 감소시킬 뿐이다. 공원의 생물다양성이 감소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공원에 누가 사는지조차 우리 인간이 결정할 것인가. 당신은 모기 안 죽이고 삽니까? 당연히 예상되는 첫 질문이다. 물론 죽인다. 사실 열대지방에서 오래 산 덕분에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모기 사냥 실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은 모기의 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내 허벅지에 앉은 놈을 잡는 것과, 이들과 여러 곤충 이웃을 지속적으로 죽이는 장치를 그들의 집에 설치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잠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공원의 산책로에서 자연이 죽는 소리가 들려서는 안된다. 야생학교는 말하고 싶다.



김산하|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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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탈 때 많이들 심심풀이로 보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행인에게 장난을 치고 그 반응을 몰래카메라로 보는 내용이다. 가령 길을 묻고선 알려준 방향 정반대로 가는 식이다. 사람들이 놀라거나 당황하는 반응이 계속 반복되는데도 시청자들은 이를 즐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순진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인간적인 모습이라고나 할까?


누군가 실수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이 다칠 정도가 아니라면, 친구가 넘어질 때 우리는 하나같이 깔깔댄다. 사실 생각해보면 넘어지는 것 자체가 그렇게 재미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실수는 언제나 사람들의 웃음을 유발하고 때로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준다. 냉철한 줄만 알았던 이가 예기치 못한 실수로 ‘인간적인 면’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를 더 좋아하게 된다. 뭔가 순수하고 불완전한 면을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느끼는 모양이다. 위에서 말한 코미디 프로에서 행인들이 전혀 놀라지 않고 상황에 완벽하게 대처했다면 재미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적당히 당황해할 만한 때에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오히려 비인간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뛰어난 이성과 고도의 기술이야말로 우리 인간만의 특징인데, 굳이 그런 어리석은 면을 콕 집어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사실이 말이다. 동시에 동물적이라는 수식어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인다. 욕설이나 비방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게 동물이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인간으로서 어떤 경우든 동물에 빗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예의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짐승 같은’ 짓이며, 우리의 고결한 ‘인간성’은 저열한 ‘동물성’과 확연히 구분되는 무엇이다. 인간성이 좋다는 건 최고의 칭찬이고, 동물만도 못하다는 건 최악의 욕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토록 (비)인간적인 동물은 과연 어떤가? 이들이 우리처럼 인간적인 면모를 보일 때는 없는가? 야생의 생존경쟁 속에서 사는 이들은 우리와는 달리 전혀 어설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완벽히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한번의 실수가 생사를 가르기도 하는 생활 때문일까? 인간적인 우리는 길을 가다가도 넘어지지만, 동물은 매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험난한 먹이그물 속에 살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참 비인간적인 녀석들이다.


꼭 그럴까? 얼마 전 호주의 남동부에 있는 한 국유림에서 수십그루의 나무가 잘렸다. 목재 생산을 목적으로 조성된 숲이라 벌채가 예정되어 있었고 당국은 작업에 앞서 그곳의 야생동물을 인근 숲으로 옮겨주었다. 그런데 나무가 다 사라진 며칠 후 그 빈자리에서 코알라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이 갑작스러운 허허벌판에 몇 시간째 앉아 있었던 것이다. 동물구호단체에 의해 이 코알라는 다른 숲으로 옮겨졌지만, 삽시간에 사라진 보금자리를 바라보던 그 멍한 얼굴은 나의 가슴을 후벼판다. 자동차 위에 그 소중한 알을 낳는 잠자리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하늘을 비추는 보닛이 물의 수면인 줄 아는 거다.


망연자실한 코알라 (구글)


좀처럼 잘 안 보여주는 동물들의 이런 ‘약한 모습’을 목격하고 나면, 그 ‘인간적인 면’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다리가 엉켜 넘어지는 모기와 착지를 잘 못해 구르는 파리를 본 적이 있다. 이들에게 우리와 똑같은 실수를 하는 귀여운 모습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도 물론 보았다. 원숭이들은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마치 창피한 듯 얼른 일어나 주변을 살핀다. 


또 아마존 밀림의 어느 부족 마을에서 아나콘다를 만난 적이 있다. 뱀의 머리에 피 빨아먹는 진드기가 붙어있어 떼어주었더니 아나콘다가 움찔거렸다. 따끔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냉혈동물이 보여준 가슴 뭉클한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동물들이 이렇다면, 굳이 ‘인간적’이란 말이 필요할까. 인간다움과 동물다움의 구분 대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자연스러움’이 답이 아닐까, 야생학교는 제안한다.


(연합뉴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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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창밖을 바라보라. 바깥세상은 저토록 모진 풍파에 시달리지만 실내에 있는 나는 아늑하고 안전하다. 그건 좋은데 이따금씩 어떤 걱정이 들 때가 있다. 이 궂은 날씨 속에서 다른 동물은 과연 어떻게 지내는지 염려가 되는 것이다. 비를 피하기라도 하는 걸까, 바람에 실려 원치 않은 여행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언제나 바깥에 있어야 하는 삶은 어떨지, 견고한 은신처에 숨어 지내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야생의 생활에 적응된 동물들은 물론 제 나름대로의 대처 방안을 가지고 있다. 땅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있거나, 잎이 풍성한 나무속으로 피난을 가기도 한다. 사람들과 가깝게 사는 종은 처마 밑이나 지붕 틈새 등 인공 구조물을 이용할 줄도 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동물이 험한 날씨로부터 도망다니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더 안전한 곳을 찾을 법한데도 그냥 있던 곳에 머무는 녀석들이 있다. 차가운 눈이나 뜨거운 햇볕을 그대로 감수하면서 말이다. 열대우림에서 영장류를 연구하는 나도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보았다. 옆 나무로만 가도 훨씬 나을 텐데 긴팔원숭이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묵묵히 맞으며 그냥 끝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마음 같아선 우산이라도 나눠 쓰고 싶었지만 심히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참았던 기억이 있다.



비가 오면 좀 젖는 것이 당연하다는 자세, 어쩌면 우리에게 이것이 부족해서 이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건지도 모른다. 어떤 동물이든 체온과 몸 상태를 알맞게 관리하려 하지만, 환경에 적절히 반응할 뿐 거스르려고 하지는 않는다. 웬만하면 환경과 대적하려는 우리와는 참으로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일 년 내내 자연에 반(反)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직 봄이라도 조금만 답답하면 에어컨을 가동하고, 아직 가을이라도 조금만 서늘하면 보일러를 튼다. 대중교통 운영자들은 어느 계절이든 너무 춥다는 사람과 너무 덥다는 사람의 이중 민원을 해결하는 데 안간힘을 쓴다. 심지어 위에서는 냉방이, 아래에서는 난방이 나오는 충격적인 지하철을 타본 적도 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모든 공간은 절대적으로 뽀송뽀송해야 하므로 수십만장의 일회용 비닐이 난잡하게 쓰였다 버려진다. 우리는 밤이 되면 어두워지는 법칙도 수용하길 거부한다. 영업이 끝난 상점도 불을 켜고, 수술실을 방불케 하는 형광조명이 편의점마다 쨍쨍하다. 물론 낮은 낮대로 부정된다. 산책을 나가는 이들도 용접가면 수준으로 얼굴을 가리고, 건물은 일부러 창을 없애는 대신 ‘간접조명’으로 내부를 밝힌다.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물과 흙, 모두 제거되거나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무엇이 되어버렸다.


실내의 에어컨때문에 냉방병에 걸린 여성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경향DB)


야생에서 살 수 없는 현대인이 살기 위해 자연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 과할 때가 문제이다. 자칫하면 우리의 감각과 감수성이 변질되기 때문이다. 여름은 여름이기에 마땅히 더워야 하지만, 냉방병으로 여름철을 보내고 나면 더위의 이 마땅함이 점점 사라진다. 계절과 상반된 환경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계절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더워서 냉방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름의 더위를 인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적정 온도를 찾는 대신 ‘빵빵한’ 냉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위와 추위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공간에서야 비로소 편안함이 찾아오는, 그런 감각과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동물들이 이런 걸 다 알아서 비를 맞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속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자연이 그날그날 선사하는 날씨를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문명의 이기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몸이 쾌적함의 극상에 있도록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따뜻한 곳을 찾는 데는 귀신이지만, 보일러를 올려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리보다 덜 똑똑하지만, 우리보다 점잖은 구석이 있다.


(경향DB)


우리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전 지구적 문제를 일으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우리 모두가 살면서 쓴 에너지가 모여서 생긴 결과이다. 어쩌면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뭔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기도 하다. 창문을 통해 바깥 경치를 구경만 할 게 아니라, 세상을 한껏 만끽하는 화려한 외출이 필요한 시대이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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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들은 전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말이 있다. 10년 이상에 이르는 학창 시절 동안 배우는 거야 많지만 인간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배우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인가? 야생학교의 설립자로서 나는 거리낌 없이 선언한다. 인간이 배워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다른 생명과 사는 법’이다.


꺅!! 길거리를 걷다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치한인가? 유명 연예인이 나타났나? 아니면 누군가 복권이라도 당첨된 건가? 아니다.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려보면 불쌍한 비둘기 한 마리와 그로부터 최대한 멀리 가려는 여성 한 명이 눈에 띈다. 비둘기가 무슨 외계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혐오로 몸서리친다. 물론 비둘기가 다소 가까이 날아 왔을 수도 있다. 물론 비둘기의 깃털이 노숙인 같은 바랜 회색빛일지도 모른다. 물론 비둘기의 한쪽 발이 불구였을 가능성도 인정된다. 하지만 심심찮게 도심 속에 울려 퍼지는 이 작은 새를 향한 거친 야유는 온당치 않다. 인간이 무심하게 버린 쓰레기와 토해낸 오물을 치우며 평생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가 해주는 인사가 이렇게 정색한 거부반응이어야 하는 것인가? 야생학교는 묻는다.  


징그러운데 어쩌란 말인가요? 싫다는 말 앞에선 그 어떤 논리도, 사상도, 정당화도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마음이 동하지 않고 몸이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면 말해봤자 소용없는 거다. 여기서 상황을 살짝 바꿔보자. 남자가 혐오스러운 여자, 또는 여자가 거북한 남자. 이런 사람을 떠올려보자. 성장과정에 겪은 어떤 사건으로 초래된 결과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자를 만드는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제로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이성을 대할 때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그냥 취향의 문제거니 하며 돌아서지 않는다. 때로는 정성스러운 대화와 상담으로, 때로는 전문적인 치료와 다양한 경험으로 생명의 근본적인 기쁨인 사랑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노력한다. 싫다고 해서 그뿐이 아니다.



지난 2월 초 영국 런던의 한가운데에서 여우가 가정집에 들어와 잠자던 한 살배기 아기의 손가락을 물어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한 낌새를 채고 마침 방에 들어온 엄마가 아니었다면 데니라는 이 아기는 하마터면 여우 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론은 당장 들고 일어났다. 점점 개체수가 늘어나는 도시 여우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여기서 대책이란 여우의 숫자를 ‘줄이는’ 일이다. 잡아 죽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점잖은 언론용 표현이다. 실제로 영국에서 여우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이 일상이 됐을 정도로 도시에 잘 적응한 종이다. 민가에 서식하는 개체가 3만여마리에 이르고, 중형 개 정도의 크기에 송곳니를 가진 사냥꾼이다 보니 어른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무방비 상태의 아이는 여우도 눈독을 들이는 대상이다. 멀쩡히 자다가 손가락을 잃은 아기를 계기로 불거진 시민들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우 사건이 보도된 같은 날에 필리핀의 어느 마을에서 50년 먹은 대형 악어가 생포된 소식이 전해졌다. 저수지 같은 곳에 우연히 갇힌 악어는 동네 어부 여러 명을 앗아간 후 밧줄을 삼키다 그만 잡히고 만 것이었다. 위험한 정도로 말할 것 같으면 여우는 비교도 안되지만, 이 악어는 당국에 의해 안전한 서식지로 옮겨졌다. 모든 악어를 말살해야 한다는 길거리 시위는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생물과 말 그대로 함께 산다. 열대우림에 사는 사람들은 밤중에 다닐 때에는 특별히 뱀을 밟을까 조심한다. 북극지역의 주민은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부족해진 먹이를 찾아 민가에 찾아오는 북극곰 걱정을 한다. 호랑이가 사는 숲 인근의 마을 사람들은 산책 한 번 잘못 나갔다가 생길 위험을 인지하고 다닌다. 하지만 이들은 버젓이 이 동물들과 같은 땅을 공유하며, 동물과 갈등을 겪더라도 여전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국제사회도 이 귀중한 동물들과 공존하도록 지역주민을 설득 및 지원하고 각종 보전 사업을 벌이고 있다.


위험하든 징그럽든, 싫든 좋든 우리는 이 지구를 여러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아니 사실은 대부분의 동식물을 쓸어내 버리고 우리끼리 살고 있다. 주변을 보라. 인간 외에 남은 자가 대체 누구인가? 우리밖에 없는 이 도시의 무자비함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비둘기가 시사하는 바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들에게 야유를 퍼붓는 대신, 이제는 야생학교의 선생님으로 삼아보자. 야생학교, 이제 개강이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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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