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작곡가 진은숙의 ‘시벨리우스 음악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연주자들의 국제콩쿠르 수상도 반가운 일이지만, 내겐 이 소식이 훨씬 묵직하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국제콩쿠르가 세계무대로 나가려는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 구실을 한다면, 이 상은 이미 거장이 된 이에게 부여되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연주가 아닌 작곡의 영역에서 이런 경지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음을, 또한 세계무대에서 이를 제대로 인정받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이 소식이 남달리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상의 권위는 수상자들의 면면에서 나온다. ‘시벨리우스 음악상’은 몇 년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당대의 저명 클래식 음악 작곡가에게 주는 상이다. 1953년 핀란드 ‘비후리 재단’이 시벨리우스에게 첫 상을 수여하며 그의 이름을 따 ‘비후리 시벨리우스 상’이라 이름 붙였고, 이후 힌데미트·쇼스타코비치·스트라빈스키·브리튼·메시앙·루토스와프스키·펜데레츠키·리게티·쿠르탁 같은 20세기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들이 이 상을 받았다. 시벨리우스의 뒤를 잇는 라우타바라·린드베리·사리아호 같은 핀란드 작곡가들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15년 버트휘슬에 이어 올해 스무 번째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진은숙은 최초의 아시아 출신에다 사리아호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작곡가다.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존재 조건에서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확고한 음악세계를 구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은숙의 음악은 유럽인들이 흔히 떠올리는 아시아 작곡가의 표상에서 벗어난다. 1985년 유럽으로 건너간 그녀는 자신을 타자화하는 이런 선입견에 맞서야 했다. 새롭고 대체 불가능하며 유의미한 작품을 쓰는 데 출신 지역의 정체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빈 오선지를 앞에 두고 오롯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숙성시킨 아이디어가 원하는 음악의 형태를 갖추도록 정교하게 세공해나가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벌레로 느껴지고 수없이 지옥을 경험하면서도 진은숙은 음악의 완성도에만 천착했다. 작품 위촉만으로 살아가는 전업 작곡가의 삶을 고수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이 훌륭하면 결국 청중이 알아줄 거라는 믿음, 온 힘을 다해 그에 걸맞은 수준의 작품만 세상에 내놓겠다는 의지, 그것이 오늘의 진은숙을 만든 원동력 아니었을까.

국내 청중에게 진은숙의 음악은 아직 낯설다. 하지만 음악회장에서 혹은 음반이나 유튜브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생황 협주곡들을 들어본 이라면 그녀의 음악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명료함 가운데 펼쳐지는 환상적인 음향적 색채에 매료된다.

최근 그녀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나 우주의 생성 같은 묵직한 질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작년 8월 서울에서 초연된 혼성합창·어린이합창·관현악을 위한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는 클래식 FM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되며 온라인으로도 많은 이들이 들었는데, 공연 후 나온 기사나 소셜미디어에는 현대음악에 대한 편견을 날려준 감동적인 음악이었다는 얘기가 오갔다. 이 작품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린 이들도 있었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안에 담긴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각자의 방식대로 청중의 마음에 가 닿아 공명했던 것이리라.

문학상을 받으면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현대 작곡가가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조차 당대의 음악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즐겨 듣는 고전들도 한때 새로운 음악이었다. 낯선 음악이 연주를 거듭하며 점차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고전이 되어온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은 미래의 고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은숙의 이번 수상이 그녀의 음악을 접하는 계기가 되길, 나아가 새롭게 창작되는 이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개인의 예술적 성취가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발판이 되는 것. 작곡가가 받은 상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그럴 때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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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의 재현은 묘사, 상징, 구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의 현존을 전제로,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재현이란 단어에는 ‘다시 나타나다 혹은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다. 재현은 표상이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지울 수 없는 거리를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인식이 다름 아닌 ‘표상’이다. 그러니까 재현이란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고 보았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을 연상하게 하고 추측하게 해준다. 즉 재현이라는 말에는 현상에 대한 부정, 그리고 현상 뒤의 어떤 실체나 본질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더불어 그것은 항상 부재를 환기하는 안타까운 상실감의 정서를 간직하면서 진행된다. 재현적 회화는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대상의 모방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간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닮았다는 것이 전적으로 재현으로만 귀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현에 의해 전적으로 흡수되거나 점령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림의 세계이지 않을까? 서구의 전통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를 강박적으로 재현하려 했고 이후 현대미술은 그러한 전통을 해체한 결과 즉물적인 사물로 귀결되어 종내 미술이 사라지는 아이러니를 초래했다. 반면 우리 전통회화에서 재현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존재의 닮은꼴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큰 의미가 없는 일이거나 가당치 않다고 보았다. 그림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그림이었던 것이다. 망막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접한 세계의 기운을 통감각적으로 전달하려는 시도, 어쩌면 현상학적인 체험을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최근 한국 화단에 새삼 재현 회화, 이른바 극사실 회화가 번성하고 있다. 미국에서 1970년대 대두된 포토리얼리즘과 한국에서도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극사실주의가 지금 왜 다시 부활하고 있을까? 혹자는 손의 기능이나 묘사력에 의존하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그림을 두고 회화의 복원 내지는 손의 회복 같은 거창한 의미로 포장하고 있고 작가들 또한 이러한 수사를 자신의 작업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

우선 새로운 환영주의로 재편되고 있는 이 회화는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의 첨단화와 대중화의 결과로 보인다. 이른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회화적 분열’ 현상이 그것이다. 대부분 화가들이 모니터를 통해 습득한 이미지 정보를 조합하는 것으로 회화를 구성하고 있기에 정작 현실은 지워지고 매체가 생산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를 재조합하는 현재적 상황을 가지고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캔버스가 아니라 일종의 ‘스크린의 확장’으로 보인다. 이른바 ‘시뮬라크라’가 회화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회화는 무척 공허하다. 따라서 오늘날 극사실적인 회화는 대부분 주어진 사물의 표면을 기계적으로 묘사하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감정을 지우고 서늘하게 대상의 피부에 육박해 관능적으로 표면에 집착한다. 매끈하고 선명하며 오로지 표면밖에는 없다. 언어와 개념을 지우고 그저 사진처럼, 스크린처럼 그리고 예쁘고 감각적인 사물의 표면만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를 대신하는 집요한 그리기인데 여기서 그 집요하고 지루한 묘사는 일종의 권태로움의 반영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사물과 기호들을 가지고 유희하는 일이자 그것들과 한 몸으로 접속되는 이 회화는 매우 자폐적인 그리기이자 동시에 그러한 삶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담론과 주제를 지워버리고 그저 그린다는 사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단조로운 그리기일 수 있다. 미술·회화가 무엇인지, 재현이 또 무엇인지 등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밀어낸 자리에, 현실이 사라진 장소에 단지 오늘날 시각 환경이 되어버린 스크린을 닮은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그저 그림을 지속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를 미술·회화로 대신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다소 편하게 제공해주는 것이 지금의 극사실주의 그림의 저간에 짙게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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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하나도 없는 매장 앞을 지나다가 느닷없이 슬픔에 사로잡힌 나는 왜 이런 광경을 보면 매번 슬퍼지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뜻밖에도 삼십년 전쯤의 기억을 불러내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농사를 작파하고 경운기 운전대 대신 1t 트럭의 운전대를 잡았다. 트럭 행상을 시작한 건데 두어 달이 채 못 되어 품목을 바꾸는 바람에 우리 집 헛간과 마루에는 팔지 못하고 남은 잡화들이 쌓여갔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정말 장사가 잘될 거라며 서울의 공장에 주문서를 보내 한 트럭 분량의 운동화를 도매로 구입했다. 마침 그날 오일장이 열리는 곳은 고창 읍내였고 주말이었던 터라 아버지가 행상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아버지를 돕기 위해 조수석에 올랐다. 우리는 시장 상인들의 텃세를 피해 시장 입구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가 흐르는 하수도 위에 짝퉁 나이키, 아식스,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늘어놓았다. 하수도에서 피어오르는 냄새에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아파 절로 인상이 구겨졌는데 우리는 이걸 노련한 장사꾼들처럼, 그러니까 이처럼 좋은 물건을 헐값에 팔러 나와 속이 상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검수과정에서 불량판정을 받아 떨이로 내놓은 운동화였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그냥 짝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품의 절반 가격이었던 터라 지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제법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하루 종일 인상을 쓰고 견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세 켤레를 팔았을 뿐이다. 허리가 굽은 노부인이 손주가 좋아하겠다며 아동화 한 켤레를 사갔고 내 또래의 비쩍 마르고 새까만 사내아이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프로스펙스 운동화 한 켤레를 사갔다. 해가 이울어 파장을 고심할 때 아버지 또래의 사내가 스무 켤레쯤을 신어 본 뒤 나이키 운동화를 한 켤레 사갔다. 운동화를 거두어 트럭에 싣고 떠나려 할 때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사갔던 사내가 돌아와서는 물러주라 했다. 아버지는 군말 없이 운동화를 받아들고 돈을 돌려주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장사에 재능이 없는 아버지. 운동화 보고 가세요,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던 아버지. 워낙 말주변도 없고 사근사근한 성격도 못 되었던지라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나 무기력한 아버지를 보면서 슬픔과 분노를 느꼈고 그 감정이 잠복했다가(잠복했던 이유는 어쨌든 아버지가 트럭 행상으로 식구를 먹여 살렸으므로)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만나면 불쑥 되살아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우리는 두 켤레를 팔았던 셈이고 내가 알기로 6000원쯤을 벌었다. 동네 이웃집에 놉으로 가서 하루 종일 논일을 거들면 1만5000원을 벌 수 있었는데 경운기 몰던 손으로 트럭을 몰고 논두렁에 앉아 새참을 먹는 대신 구멍가게에서 사 온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며 대지와 하늘이 아니고서는 한 번도 허리를 굽힌 적 없는 당신이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도 하루 품팔이만도 못한 품삯을 쥔 채 캄캄한 국도를 달려갈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헤아리게 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고창 읍내에서 고향집까지 가면서 내가 보았던 건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전조등이 비춘 만큼만이 열려 있었고 우리가 지나가면 그 공간 역시 어둠에 잠겼다. 끝도 없는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가면서 아버지의 삶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기분이었다.

차갑고 어둡고 막막한 삶.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오가는 사람조차 드문 어느 골목 초입에 결코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을 늘어놓은 노점상 앞을 지날 때거나 퇴직금으로 장사를 시작한 게 분명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가 자신들의 가게 구석에 시름에 잠겨 멍하니 앉은 걸 보게 되면 그이들이 서 있는 경계, 그이들이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는 없지만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그 날선 자리에 발바닥을 베이지 않고 부디 오래오래 서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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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저마다의 소리를 품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베를린 유학 시절, 거리 곳곳에서 우연히 접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나 연주는 칙칙한 날씨에도 그곳 생활을 견디게 한 힘이었다. 지하철역이나 카페, 관광지나 극장 앞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음악가들이 전해 준 행복. 물론 아바도와 베를린 필이 들려줬던 잊지 못할 말러 9번 교향곡까지, 20년 전 살았던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내게 이런 음악적 경험들로 기억된다.

예술 체험이 공연장이나 미술관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상의 공간에서 맞닥뜨린 낯선 음악이 잠시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할 수도 있고, 그 찰나의 경험이 때론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연주회장을 벗어나 색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눈길이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북촌일대 한옥이나 갤러리에서 클래식과 재즈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몇 년 전 국악앙상블 ‘불세출’은 종로구의 이색적인 공간들(옥인상영관·은덕문화원·보안여관)에서 도심 속 풍류방 문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쇠락하던 철공소 골목에 모여든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특유의 감성을 지닌 곳으로 탈바꿈한 문래 창작촌의 크고 작은 공간에서도 실험적인 사운드와 퍼포먼스 공연이 열리곤 한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왼쪽에서 두번째)가 7월 5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윤이상 선생 묘지 앞에 동백나무를 심고 참배한 뒤 윤 선생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베를린 _ 서성일 기자

최근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도심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프롬나드 콘서트’ 역시 도시의 소리풍경을 풍성하게 만든다. 문화역서울284, 윤동주문학관, 서울로7017,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다시세운광장 등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윤이상 음악을 문학·힙합·국악 등과 접목해 선보이고 있다. 특히 청운동 시인의 언덕에서 열렸던 ‘100년의 예술가, 윤이상×윤동주’ 공연은 시와 연극, 음악이 함께하며 주말 가족 단위 관객들에게 특별함을 선사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귀뚜라미 소리와 어우러진 음악을 듣고 있자니, 작년 가을 지리산 ‘화엄음악제’의 잊지 못할 순간이 떠올랐다. 깊은 산사에서 달빛 아래 듣는 음악소리는 도시에서는 접할 수 없는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청각만이 아니라 인간의 온 감각이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1960년대 말 캐나다 작곡가 머레이 셰이퍼가 제창한 ‘사운드스케이프’(소리풍경)라는 용어는 바로 그런 상황을 포착하기 위해 나온 말이다. 셰이퍼는 만드는 것만큼이나 주위 소리를 잘 ‘듣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한 음악가였다. 1950년대 초 존 케이지도 ‘4분33초’라는 침묵 음악을 써서 음악으로 가려졌던 일상의 소리, 존재하나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역설한 바 있지만, 셰이퍼는 인간과 소리 환경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했다. 점차 심해지는 소음공해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삼라만상의 소리를 예민하게 들음으로써 일상의 환경과 생생하고 풍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듣기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유네스코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도시의 소리풍경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신이 살던 밴쿠버의 소리풍경을 음반으로 남기기도 했다. 청각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지각하고 인식하게 만들려 한 그의 문제의식은 이후 음향생태학과 환경운동으로 이어졌고, 도시 디자이너나 사운드 아티스트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요즘 우리는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고 살아간다. 현대인들에게 필수품이 된 이어폰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이자 동시에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원치 않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만큼 소리 환경이 열악하다는 반증일 터. 난무하는 소리들 가운데 정작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무심히 흘려버린다. 한번쯤 귀를 열고 주변의 소리에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윙 돌아가는 컴퓨터 소리, 이웃의 발자국 소리, 교실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공사장 굴삭기 소리, 다양한 내연기관의 소리, 풀벌레와 새소리….

소리를 듣기 위해선 고요함이 필요하지만, 그 고요함 위에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소리들이 펼쳐질 수도 있다. 가을의 문턱에 접어든 요즘, 살고 있는 곳의 소리풍경을 만끽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희경 | 한예종 강사·음악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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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언저리였다. 친구가 책 한 권을 빌려줬다. 고인이 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였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친구에게 술까지 사줬다. 이미 판매금지가 된 소설이었다. 깊은 밤에 읽었다. 문장을 읽는 맛은 좋았다. 책장이 쑥쑥 넘어갔다. 하지만 실망했다. 수위가 한참 낮았다. 이 정도는 이미 마스터한지 오래였다. ‘빽판’을 사러 다니던 세운상가에서 구한 일본 ‘야설’ 번역본은 물론이요, 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었던 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보다 못했다. 책을 반납하며 친구에게 얻어 마신 술을 뱉어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자기도 실망했다는 친구의 자백을 이끌어냈던 기억도.

이 책을 구해보려 얇은 지갑을 열었던 이유는 이미 <즐거운 사라>로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걸 봤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단과 학계를 가리지 않고 마 교수를 천하의 색마로 몰아가지 않았는가. 검찰의 구속 이유가 무려 ‘음란문서 제조 반포’였으니 호기심 많은 청년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사는 판결문에 이렇게 남겼다.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예언이 실현되는 데는 10년씩이나 필요없었다. 그가 사면되어 복직한 1998년의 세상만 해도 충분히 그랬으니. 어쨌거나, 이 필화사건 이후 마광수는 작품으로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아니, 이후 종종 “자기 검열 때문에 아무 것도 쓸 수가 없다”라 했다하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리라.

작가 마광수

자기 검열이란 보이지 않는 상자에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다. 신념에 의해 스스로를 검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외부적 상황에 의해 생겨난다. 한참 ‘청소년 유해 매체 판정’으로 음악계가 들썩였던 이명박 정권 시절에 가사에 술이나 담배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면 무조건 19금 판정이 내려졌다. 여성가족부가 담당했던 심의다. 해당 노래 하나에만 적용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문제는 그 음반에 통째로 주홍글씨가 찍혔다는 거다. 건전한(?) 노래도 청소년들이 들을 수 없는 웃기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행여 술이나 담배를 연상케 하는 단어라도 들어갈까봐 가사를 몇 번씩 들여다 보는 음악가들이 생겨났다. 200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직후, 한 음악가를 만났다. 멀지 않은 과거에 음악계에 꽤 높은 영향력을 가졌던 그는 갑자기 잊혀지다시피 했다. 어쩌다 내놓는 음악은 지루했으며 그나마도 조용히 흘러갔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지난 9년동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어. 내가 이런 음악을 해도 될까? 무슨 일을 당할까봐가 아니었어. 세상이 이런데 내가 만드는 음악을 사람들이 태평한 소리 한다며 손가락질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의 말이 근거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명박근혜 시대에 정신적으로 곤란함을 겪은 음악가들을 몇 알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다가 공황장애에 걸린, 사회적 메시지를 은유하던 음악가가 있었고 세월호 이후 일년간 작업했던 음반을 엎어버린 음악가도 있었다. 블랙리스트로 대변되는, 사회적 공기가 그들에게는 법과 제도보다 강력한 자기 검열의 칼날로 작용했던 셈이다.

판사조차 미심쩍어 했던 법 적용은 아득한 과거가 됐다. 여성가족부의 존재이유에 의문을 갖게 했던 무분별한 심의도 사그라들었다. 박근혜는 전 대통령이란 호칭 대신 수인번호로 불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기검열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법과 제도라는 공적 권력의 검열을, 배타적 진영논리의 그것이 대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잊을만 하면 SNS상에서 벌어지는 조리돌림이 ‘고발’과 ‘불편 유발’이라는 이름아래 욕망과 자유의 손발을 잘라내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감시탑이 사라진 자리에, 만인의 만인을 향한 패놉티콘(Panopticon·전방위 감시 체계)이 세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와 피아의 구분이 없는 건축물이다. 처벌과 금지에 대한 두려움 대신, 매장과 손가락질에 대한 공포가 표현의 물길에 스스로 둑을 설치하게 하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를 추모하는 글에서 종종 ‘시대를 앞서갔다’는 문장을 봤다. ‘사라’의 시대는 지금일까. 그 즐거움이 소설 속의 상징으로나마 존중받을 수 있었을까. 역시,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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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반격  (0) 201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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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야구 경기를 즐겨 보았다. 야구를 보면서 문외한으로서 느낀 게 있는데 뛰어난 타자들에게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타자들은 스탠딩 삼진을 당하더라도 절대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구를 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타석에 선 채로 삼진을 당하면 기분이 무척 복잡할 듯하다. 그래서인지 스탠딩 삼진을 당한 타자들은 보통 선수 대기석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투수 쪽을 한 번 본다. 물론 그들이 삼진을 당했다는 이유로 투수에게 원한을 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능적인 일별이라고나 할까. 사람이니까 두고 보자 식의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몇 몇 타자들, 특히 뛰어난 타자들은 그런 일을 겪어도 투수 쪽을 바라보거나 투수를 노려보지는 않는다. 또한 그런 타자들은 공에 맞았을 경우에도 아파서 인상을 쓰고 입모양으로 보아 욕설도 하는 게 분명하지만 투수를 노려보지는 않는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물론 스탠딩 삼진을 당하거나 공에 맞았을 때 투수를 노려보는 타자들 중에도 타율이 높은 수위타자들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타율과 같은 성적에 대해서가 아니다. 나는 결코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 타자에게서 자신에게 몰두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 그런 타자들은 야구란 상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투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자신이 던진 공이 타자에게 얻어맞아 홈런이 되었다고 해서 타자를 노려보는 경우란 거의 없다.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하면서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거나 잠시 주저앉기는 한다. 아마도 투수라는 직책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어떤 공을 던져야 하는지에만 몰두하게 하는 듯하다. 투수는 자신이 어떤 공을 던지든 타자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상대하는 것임을 어쩔 수 없이 잘 아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가장 서글픈 직책은 포수인 것 같다. 포수는 자신이 받아야 할 공이 상대편 타자에게 얻어맞아 홈런이나 안타가 되었을 때 거의 예외 없이 공만 바라본다. 실투를 했다고 해서 투수를 노려보지도 않고 그 공을 때려 홈런을 만들었다고 해서 혹은 안타를 만들었다고 해서 타자를 노려보지도 않는다. 포수는 서글픈 눈길로 날아가는 공을 뒤쫓을 뿐이다. 포수의 그런 태도에는 저 날아가는 공을 집 나간 자식처럼, 할 수만 있다면 뒤쫓아서 안전하게 자신의 미트에 넣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게 엿보인다. 특히 타자가 때린 공이 포수 머리 위쪽으로 솟아오르는 파울공이 되었을 때 마스크를 벗어던지며 공의 낙하지점을 찾아 포구할 때의 표정에는 타자를 아웃시켰다는 희열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집나간 자식을 자기 품에 안았다는 안도감이 역력하다. 포수란 직책은 아예 야구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상징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니까. 어쨌든 포수는 다른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신경 쓸 겨를도 없다. 오로지 공에만,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

야구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의 본질에는 서글픈 무언가가 있다. 글쓰기에도 그런 구석이 있다. 한 편의 글은 글쓴이의 손을 떠나는 순간 결코 회수할 수 없는 영역으로 달아나버리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좋으나 싫으나 공만 보는 포수처럼 글의 운명을 지켜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 글의 운명이 글쓴이의 마음에 흡족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번 떠나버린 글은 여간해서는 되찾을 수가 없다.

그런 경우에 맞닥뜨리게 되는 뒤늦은 후회란 대부분의 경우 이런 것이리라. 왜 나는 글을 쓰는 순간 글 자체에만 몰두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이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도 당신을 아프게 했을까.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당신을 떠나야 했을까. 결코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 타자. 다른 누구도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아프게 돌아볼 수 있으려면 얼마나 당신에게 몰두해야 하는가.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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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야구, 타자

무더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궜던 육군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사건, 교수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집단행동에 나선 학생들 기사를 접하며, 내가 속한 음악계를 돌아본다.

오토바이 길 만든다며 고3 수험생 시켜 산림을 벌목해 고발된 성악가, 제자 폭행과 성추행으로 파면된 교수들, 직원들에게 폭언을 퍼부어 인권침해로 물러난 단체장 등 지난 10년간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만 떠올려봐도 처참하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선의’ 혹은 조직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문제임을 몰랐다고 항변한다. 피해 당사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도 없다. 몇달 전 음대 교수들의 환갑 기념 공연과 종교 봉사활동에 학생들이 동원되었다는 기사에서도 교수들은 그것이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였다고 믿고 있었다.

수십년간 도제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스승에 대한 섬김과 복종을 당연시해 온 음악계에선 부당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가 쉽지 않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대학 내 군기 잡기는 잘못된 관행이 젊은 세대에도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배움이 일어나야 하는 교육 현장은 갑을 관계로 전락해버렸고,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권위주의 문화는 도처에 횡행한다.

2014년 여름 사이먼 래틀이 이끈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음악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지휘자가 마주 보이는 무대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내게, 연주가 끝난 후 관객을 뒤로하고 젊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일일이 눈을 맞추며 격려와 신뢰를 보내는 지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매해 전 세계 30세 이하 젊은 연주자들을 선발해 3주간 현대 곡을 집중적으로 익히는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지휘자와 함께 무대에 세운다. 어려운 현대 곡들을 기성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열정적인 패기와 활력으로 멋지게 소화해 낸 젊은 연주자들을 향해 래틀은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미래를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것을 도전하게 만들고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공유하며 그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것. 그게 ‘사회적 어른’의 몫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의 리더십은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투영한다. 33년간 베를린 필의 제왕적 존재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물러나고 1989년 지휘봉을 넘겨받은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대신 단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구축했다. 2002년 부임한 사이먼 래틀은 단원들과 친밀하게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베를린 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2009년 베네수엘라 출신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28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것은 그가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년 전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했을 때, 연주가 끝난 후 연단을 내려와 단원들 속에서 그들과 나란히 인사하는 두다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와 별개의 개체로 여겨지는 시대는 지나갔으며,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일부이고, 자신도 한 명의 단원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는 더 이상 군림하며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인권의식이 부재했던 지난날을 살아온 기성세대는 한국 사회의 오랜 폐습을 청산하자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혼란스럽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리더십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 관행에 젖은 이들은 변화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어른이 아니라 꼰대가 되어간다. 권위는 지위가 아니라 실력과 공정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존경이 뒷받침될 때 큰 힘을 갖는다. 젊은이들의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격의 없이 토론하고 공감하는 어른들이 많아지길 바라지만, 반세기 이상 이어져 온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권위의식이나 편견은 없는지 살펴야겠다. 나부터 달라져야 세상이 바뀔 테니.

<이희경 한예종 강사·음악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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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마침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된 2010년 즈음, 나는 결국 CD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아이폰3GS를 처음으로 샀던 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CD플레이어를 서랍에 넣어 두는 것이었으니까. 그 전까지는 항상 음반으로 음악을 들었다. 처음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에 입문했을 때, 선망했던 건 LP였다. 용돈을 모아 테이프를 하나씩 사면서도 언젠가는 나도 방에 전축을 놓고 LP(그때는 ‘판’이라고 불렀다)로 음악을 듣겠다고 꿈꾸곤 했다. 그 꿈이 이뤄진 건 고등학교 입학 후였다. 주말만 되면 청계천 4가와 8가의 음반 도매상을 돌아다니면서 음반들을 사곤 했다. 테이프와 판 사이에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물성’의 차이가 있었다. 한 뼘이 넘는 정사각형 재킷에 담긴 지름 17인치의 플라스틱 원반을 손에 잡았을 때의 만족감은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테이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세트 데크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테이프보다는 턴테이블에 얹은 후 조심스레 바늘을 얹어야 하는 판은 뭐랄까, 진짜 음악을 듣고 있다는 숭고한 마음마저 들게 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까지, 그 기분은 판을 살 때마다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음반의 패러다임이 CD로 바뀌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더 이상 LP를 사게 되지 않았다. 아날로그 음반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음질도 좋았고 사이즈도 작았지만 LP로 음악을 듣던 때의 그 기분은 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음악을 듣고 쓰는 것이 직업이 됐다. CD는 벽 2개를 가득 채울 만큼 쌓였다. 다행히 LP를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턴테이블은 진작 처분한 지 오래였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직전,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을 마련했다. 보관하고 있는 LP들을 짐짝에서 ‘음반’으로 다시 돌려놓고 싶었기 때문일까. 저렴한 턴테이블도 하나 샀다. 약 15년 만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선물로 받았던, 포장도 뜯지 않고 있었던 노라 존스의 2집을 얹었다. 레코드의 소리골을 타고 바늘이 흘렀다. 그리고 노라 존스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 순간, 잊고 있던 감각이 떠올랐다. 클릭 몇 번으로 mp3를 들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신간 <아날로그의 반격>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완벽히 대체한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 왜 다시 아날로그가 돌아오고 있는지를 탐사,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음악은 이 책의 주요 모티브다. 현재 음악 시장에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분야는 둘이다. 스트리밍과 LP다. 다운로드와 CD는 끝없는 하락세다. 미국 기준으로 LP 판매량은 2007년 99만장에서 2015년 1200만장 이상으로 늘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통해 디지털 음원을 산업화시킬 때만 해도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던 LP가 부활을 넘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 말하듯 단순한 추억 때문이 아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LP를 구경하지 못했던 세대가 이 시장의 주요 고객이 돼가고 있다. 힙스터의 상징처럼 여겨지며(이는 한국도 비슷하다). 이런 현상의 이유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내시빌에 위치한 레코드 공장으로 가 음반의 생산 과정과 공장의 부활 과정을 취재하고, 레코드 스토어 연합(레코드 부서)이 어떻게 레코드 스토어 데이라는, LP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 축제를 만들게 됐는지를 밝힌다(한국에도 레코드 페어라는 비슷한 연례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리하여 한 달에 1만원 남짓이면 무한정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왜 20달러 이상을 내고 레코드를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왜 현재의 아티스트들이 새 앨범을 LP로 찍어내는지를 말한다.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나 테일러 스위프트가 스트리밍 서비스와 계약하지 않으려는 것은 거기에서 얻는 수익이 푼돈이기 때문이다. 스트리밍은 검증된 기술이지만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성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이미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과 만나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포맷으로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의 시대에 디지털 퍼스트를 외치는 이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이 세상은 0과 1만으로는 담겨지지 않으니까.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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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화랑협회와 한국미술협회가 ‘문재인 정부에 바란다-미술인 창작환경 개선과 글로벌 마켓 도약을 위한 정책제안’이라는 제목하에 정책세미나를 열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각 분야에서 다양한 요구들이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책 제안 역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정책 기조는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문화예술기관의 독립성과 개인 예술 활동에 있어 표현의 자유, 문예진흥기금의 안정적 재원확보, 분권적 지역 문화진흥체계 구축, 예술인 실업급여제도, 문화체육관광 지출비 세액공제 등 법제도 개선, 지역문화재생사업, 창작·주거인프라 조성 등이다. 특히 예술인의 복지강화에 주목하고 있고 그런 차원에서 예술인의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보장의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를 주도한 화랑협회 측은 이러한 문재인 정부의 문화정책에서 미술 분야로 국한하자면, 시장활성화의 해법과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책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깔려있다는 인상이다. 본질적인 문화예술의 진흥방안이나 예술영역을 통한 경제적 부가가치의 확대, 시장활성화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래서 국가지원정책을 통해 미술시장을 강화하는 정책과 글로벌시대에 부흥하는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 특별법 차원의 획기적 정책개발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이 세미나의 핵심적인 내용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미술시장에 도움을 주는 정책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로 받아들여진다. 간단히 말해 화랑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화랑주들은 화랑의 유통행위는 순수예술창작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전시기능과 작가에 대한 후원이라는 공적 역할을 수행하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아울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한국작가와 한국미술을 만들어내는 한편 한국미술시장의 건강한 발전과 안정화를 추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한국 화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대략 10만명 이상인데 그중 화랑을 통해 전시되는 작가, 이른바 시장에 노출되는 작가가 1만5000명가량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김환기,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등이 전체 판매액의 약 63%를 차지하고 있다. 지독한 편중현상이 아닐 수 없다. <군함도>의 스크린 독과점 논란은 욕을 먹어도 이런 현상은 당연시된다. 대부분의 화랑들이 돈이 되는 이 작가들의 그림만을 들고 나간다는 얘기다. 그래서 화랑들이 다양한 작가들을 선별해 전속작가로 삼아 시장에 선보일 테니 이에 대해 정부의 지원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구입비를 현재의 40억~50억원 수준에서 150억~200억원으로 대폭 확대하고, 시립미술관이 있는 지자체의 구입비도 100억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되어야 한다면서, 또한 미술은행의 작품당 구입액도 상향조정되어야 하며, 미술관 가격 대신 시장가격에 입각한 작품구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화랑의 전속 작가들이 해외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지원하고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출품해도 과감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윤추구행위제라는 명목으로 인해 배제되고 있는 각종 심의 및 자문 등에 화랑 참여를 보장해달라고도 한다. 아울러 현금영수증 의무발행 및 소득세법 시행령을 폐기 혹은 10년 정도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술품 거래 면세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미술시장을 성공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번 세미나의 핵심은 화랑에 대한 지원을 단순히 개인사업자 지원이 아닌 가장 효율적인 미술 후원 정책으로 보아야 하고 여기에 중점을 두어 미술문화정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분명 타당한 부분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화랑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작가와 미술계에 대한 재투자는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오로지 인기작가의 경쟁적인 독점, 과도한 영리 추구만을 일삼아온 것이 사실인데 이에 대한 반성과 개선점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 상태에서 온갖 지원만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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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래된 글쓰기 습관 가운데 하나는 초고를 탈고한 뒤라면 그때가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상관없이 술을 한잔 마시는 거다. 그 이유는 내가 방금 쓴 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로부터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며 퇴고를 한다. 겨우 하루 이틀 만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보듯 내가 쓴 글을 보기란 쉽지 않지만 술을 한잔 마시면서 글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던 게 퍽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술 마실 핑계에 불과하다는 힐난도 들어봤고 나도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다른 소설가들의 좀 더 고상한 습관을 배우지 못해 스스로도 아쉽지만 징크스에 민감한 운동선수처럼 이 습관을 지키지 못하면 글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탓에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어느 토요일 새벽이었다. 소설 초고를 탈고한 뒤 집을 나섰다.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사는 동네는 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데 비해 상가구역이 협소해서 주말 새벽인데도 마땅히 술 한잔 마실 곳이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2㎞쯤 떨어진 번화한 지역을 찾아가야 했다. 그곳에 가려면 4차선 도로를 따라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고 길지 않은 터널도 지나야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 수월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성업 중인 한 술집에서 고픈 배도 채우고 술도 한잔 마셨다. 토요일 새벽이라 술집에는 사람들이 그득했고 저마다의 기쁨, 슬픔, 고민, 희망 등을 동석한 사람들과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 틈에 홀로 앉아 자작하는 내 꼴이 아마도 처량하게 보였던지 내 부실한 안주를 걱정하며 자신들의 안주를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토요일 새벽, 술꾼 아닌 술꾼들로 가득한 술집에 앉아본 적 있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그 소리들, 젓가락질 하는 소리, 술잔 부딪는 소리, 술 따르는 소리, 권하고 말리고 받아들이며 실랑이하는 소리, 호언장담과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식의 고백투의 목소리, 웃다 울다 울다 웃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웃음과 울음들.

사실 내가 기꺼워 마다하지 않는 이 소리들에 둘러싸여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적어도 내게는 흥겹고 즐거운 일이며 방금까지도 곤두섰던 신경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즐거웠다. 취기가 올라 한결 느슨해진 상태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차는커녕 사람 하나 없고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가면 그 새벽을 완벽하게 혼자 소유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저 앞에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의 양복은 후줄근해 보였는데 작은 키에 헐렁한 양복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오십대로 여겨지는 그 사내는 너무나 흔한 가죽 서류 가방을 든 채 비틀거리긴 했지만 부단히 앞으로 걸었고 비명을 지르는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그저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것일 뿐이었다. 술집에서 보았던 사내 같았고 술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노래는 서글펐다. 그의 노래는 무척이나 배타적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온전히 몰두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노래였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일 그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술을 마신 게 아니었을까. 술을 마시는 순간에도 그를 떠나지 않던 걱정들에서 순수하게 풀려난 찰나의 순간. 그가 유일하게 그 자신일 수 있는 시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사랑하는 노래를 음정 박자 틀려가며 목청이 터져라 부를 수 있는, 그에게 허용된 아주 짧은 순간. 집으로 돌아가는 그 새벽. 나는 감히 그를 지나쳐가지 못하고 그와 거리를 둔 채 페달을 천천히 밟아가며 그의 구슬픈 노래를 들었다. 고독할 권리를 누리는 그를 손톱만큼이라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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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음악 축제의 계절이다. 록이나 재즈만이 아니라 클래식과 국악에서도 그렇다.

지난 1일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공원 곳곳에 놓인 피아노들에서 차례로 연주가 시작된다. 바이올린·첼로·더블베이스·플루트·오보에·기타는 물론이고 하프나 아코디언처럼 흔히 볼 수 없는 악기도 등장한다. 갖가지 악기가 빚어내는 소리에 지나가던 이들도 연주자들 주위로 모여든다.

주말 늦은 오후 공원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음악 소리. 30분쯤 지나자 24개 팀 전체가 펼치는 음악이 여기저기 울려 퍼지더니 한 팀씩 차례로 연주가 끝난다. 이 동시다발 클래식 버스킹 공연은 ‘원먼스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프롬나드 콘서트’. 말 그대로 공원을 산책하며 듣는 음악회다. 모여든 관객들은 야외공연장에서 이어진 오케스트라 연주에도 함께했다. 7월 한 달 내내 전 세계 30여개 나라에서 400개 이상의 공연이 열리는 ‘원먼스 페스티벌’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으로 라이브 생중계되며 이렇게 개막을 알렸다.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문화가 있는 삶’을 모토로 내건 이 페스티벌은 ‘하우스콘서트’(대표 박창수)가 3년 전부터 열고 있는 여름 음악 축제다.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에서 즐기는 음악문화를 정착시킨 ‘하우스콘서트’의 글로벌 버전으로 시작해 매년 새로운 콘셉트로 진화하고 있다.

작년에는 페이스북 라이브를 도입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공연을 생생하게 전했고, 올해는 오픈 플랫폼을 마련해 누구나 다양한 콘텐츠로 직접 축제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칠레·인도·독일 등 세계 각지의 무대, 함안·순천·파주 등 국내 24개 스쿨 콘서트 현장, 대학 연습실과 출연자의 집, 문화원과 마을 도서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은 갖가지 문화 행사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라이브로 전해지고, 그 게시물은 원먼스 페스티벌의 홈페이지에 링크된다. 시간과 공간, 콘텐츠의 제약을 없애고 참여자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들로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 이는 연대와 공감, 소통의 새로운 예술 향유 방식을 실험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여우락 페스티벌’은 대표적인 여름 음악 축제다. ‘여기 우리 음악(樂)이 있다’(여우락)는 이름처럼 ‘국악’을 기반으로 하되 지난 7년간 과감한 외연 확장을 꾀했다면, 올해는 원일(타악·피리 주자)을 예술감독으로 영입해 내적인 질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개막공연 ‘장단 DNA - 김용배적 감각’은 사물놀이 창단 멤버였으나 1986년 요절한 전설적인 상쇠 고 김용배를 소환하며, 전통의 현재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 무대였다. 전자음향·풍물·굿이 어우러지는 색다른 구성, 설치미술가의 감각적인 무대디자인과 연출, 신명나는 에너지가 분출된 탁월한 연주로 관객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독창성, 절심함, 새로움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선정되었다는 올해 여우락의 15개 참가팀의 면면을 보면 인디밴드들과 젊은 음악가들이 눈에 띄지만, 공연에서 더욱 돋보였던 점은 중견 국악인이나 원로 명인들이 젊은이들과 한 무대에서 음악을 만들어간 것이었다. 서로 다른 분야나 세대의 접속에서 생겨나는 긴장이야말로 각자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창조로 이어질 수 있음에 천착한 결과이리라.

올여름 이 두 음악 축제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예술적 고민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지원 사업이든, 예술가와 애호가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것이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각자의 위치에서 질문하며 실천해가고 있다고 보인다.

음악 축제의 성패는 이미 확립된 포맷이나 스타 연주자 혹은 지원금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세상의 이슈와 접목하여 적절한 주제와 서사로 엮어낼 때 예술적 공감은 생겨날 수 있다. 음악 축제 역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기진화를 거듭할 때 살아남게 되지 않을까.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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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맛있다는 건 무엇인가.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맵고, 이 오미(五味)의 강약과 조화일 것이다. 지방의 고소함, 아미노산염의 감칠맛 역시 맛의 요소다. 그 외에도 담백한 맛, 진한 맛 등등…. 대부분이 공감하는 맛들이 있다. 공감대의 영역을 벗어났을 때 맛은 사라진다. 단어의 기의가 기표에 부합하지 않거나 혹은 과도하게 넘쳐났을 때, 우리는 맛없다는 말을 쓴다. 이걸로 충분한가. 물론 그럴 리가. 세상에는 맛있음과 맛없음의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맛이 존재한다. 그 맛은 취향을 탄다. 부합하는 자에게는 그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침샘을 활성화시키고 부합하지 않는 자에게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단어를 던진다. 홍어. 침이 고이는가? 아님 고개가 저어지는가? 나는 전자다. 한 개의 히읗, 두 개의 이응, ㅗ와 ㅓ. 총 다섯 개의 자음과 모음이 결합할 때 나는 아득해진다. 넓을 홍(洪)을 써서 홍어다. 살점의 색 때문에 붉을 홍(紅)을 쓸 거라 생각했는데 몸통이 가오리처럼 널찍하다 보니 그렇게 불렀나 보다. 어원은 아무래도 좋다. 난 그저 그 두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으로 내뱉기도 전에 침이 용천수처럼 샘솟는다. 이제 글을 시작했는데 모든 걸 작파하고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홍어의 맛을 뭐라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호불호가 강한 맛. 타협이란 없다.

몇 번인가, 홍어 미경험자들을 데리고 먹으러 간 적이 있다. 홍어는 단호한 음식이다. 체험의 시간, 표정의 변화가 그만큼 확실한 음식도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불행하다. 그 몇 번의 경험 중 나로 인해 홍어의 세계에 개화를 했다는 이를 만난 적이 없다. 늘,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하품이나 하는 알피니스트를 보는 셰르파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검증된 집도 그러할진대 나조차 가본 적 없는 곳을 홍어 초행자들과 함께한다는 건 모험이다. 홍어 연대의 제보자들을 믿을 수밖에. 국내산 삼합을 시켰다. 홍어를 닮았으며, 스스로를 홍어 연구소장으로 일컫는 사장님이 접시를 내왔다. 반찬은 단출했다. 콩나물과 미나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홍어와 삼겹살, 5년 된 묵은지의 등장. 때깔이, 때깔이 남달랐다. 넓을 홍(洪)자의 홍어가 아니라 붉을 홍(紅)자의 홍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빛이었다. 사장님의 인도에 따라 한 점을 소금에 살짝 찍어 50번을 씹었다. 향기롭게(반어법이 아니다) 삭힌 홍어에서 암모니아를 머금은 입자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우흡, 기침 비슷한 것을 한 후 찌그러진 양은잔의 막걸리를 쫙 들이켰다. “이게 진짜 홍어 먹는 법이지라~.” 사장님은 말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홍어를 탐했다. 묵은지와 수육에 삼합으로도 먹고, 홍어회만 먹기도 했다. 뿌듯했다.    

배를 어느 정도 채웠을 때 초행자들의 표정은 마치 시나이산에서 석판을 득템한 모세의 그것과 같았다. 홍어는커녕 아직 제대로 된 평양냉면도 못 먹어본 20대 초반 친구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한겨울 에베레스트 북벽으로 알피니스트를 정상에 올리고 만 셰르파의 기분이었다. 홍어계의 텐징 노르가이가 된 것이다. 이날의 피크는 홍어애였다. 어지간한 홍어애는 웬만한 푸아그라의 뺨을 때리고도 남는다. 이 집의 홍어애는, 웬만한 푸아그라의 뺨을 때리는 어지간한 홍어애의 뺨을 난타하고 말았다. 이런 홍어를 맛봤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친하지 않았던 우리는 기꺼이 친구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릴 땐 홍어의 맛을 몰랐다. 주변에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자연히 접할 기회가 없었다. 혹여 그 전에 먹어봤나 기억을 짜봐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최소한 아무런 인상이 없었던 건 분명하다. 선플도 악플도 아닌 무플이었다니, 안타깝지 않은가. 결혼 예정인 여자 친구가 있다. 그녀와의 만남에 결정적인 진전의 계기를 마련해준 게 홍어다. 어릴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보다 가열차게 홍어를 먹고 다녔을 것이다. 훗날의 나를 위하여. 남들은 달달하고 ‘샤방샤방한’ 음식을 먹으며 사랑을 싹틔운다는데 고작 홍어라니,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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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년 전 그림의 역사가 시작될 때 동굴 벽면에 그려진 최초의 이미지는 현생 소의 먼 선조라고 하는 오로크스 내지는 순록 등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후 미술사에서 동물의 형상은 주술이나 신화, 종교, 권력 등과 결부되어 다양한 상징으로 출몰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는 인간의 삶과 밀접한 생애를 함께해온 가장 친근한 반려동물이었던 관계로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도 매우 빈번하게 그림 속에 재현되어왔다.

개가 인간의 파트너로서 사랑받는 애완동물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여받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이른바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가 익명성을 지닌 채 생동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짜인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초래하자 이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려는 욕망이 반려견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인간이 현대 사회의 소외 조건들로 인하여 갈수록 고립되어 외로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개가 애완동물이자 자녀의 대용물로 격상하게 된 것이다.

이효리는 유기동물 입양을 후원해온 대표적 인물이다. 최근 JTBC <효리네 민박집>에서 반려동물들과의 행복한 모습이 전파를 탔다. 그가 기르는 반려동물들은 모두 유기동물이었다. 북하우스 제공

인간 상호 간의 관계가 갈수록 계산된 목적성을 띠면서 냉랭한 소외감을 드러내는 이 시대에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율적이고 따뜻한 인간적인 접촉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 상호 간에 그와 같은 접촉이 이루어지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신 아무 조건 없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을 점점 더 찾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굴곡 심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질 때 개는 그 빈틈을 파고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여러 작업을 접하고 있다. 자신의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회화를 선보인 노석미와 박형진, 다양한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윤정미의 사진작업, 한때 반려견이었다가 이후 잔인하게 버려진 유기견을 다룬 윤석남 등의 작업이 그렇다. 이들은 작업을 통해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근 인구동향자료를 보면 1인 가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결혼이나 가족관계를 맺는 대신에 동물과 사는 삶을 적극 선택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인간과 동물이 특별한 인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도시인의 상당수가 이전과는 다른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반려동물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외로움을 극복하거나 상처를 치유하는가 하면 나름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의 강도가 무척 ‘세졌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와의 피로감 높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대신해 그 자리를 반려동물로 대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그만큼 무한경쟁사회로 초래된 인간 간의 피로감, 굴곡 심한 감정의 교류와 왜곡되고 피곤한 소통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여러 환멸을 지닌 사람들이 인간 대신 차라리 언어적, 문자적 소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려동물을 사랑과 애정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정황의 방증이다.

인간과의 매우 까다롭고 성가시며 공을 들여야 하는 감정적, 언어적, 육체적 관계에 절망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상처받지 않는 반려견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타자화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보다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삶이 늘어나고 있거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 반려동물들은 인간이 안기는 상처와 배신, 치욕 대신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물론 그만큼 배려와 돌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마다 행복하게 살고 싶고 외롭지 않기 위해 반려동물에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결국 그만큼 현대인들이 인간으로부터 너무 많은 상처를 받고 있고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뜻일 게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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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때였다. 문학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어느 봄밤이었다. 우리는 충무로 극동극장 앞에서 매일경제 쪽으로 걷고 있었다. 지금은 시인이 된 선배가 무랑루즈라는 카페가 있던 골목 어귀에 멈춰서더니 혼잣말이라도 하듯 말했다. 이 골목 끝에서…… 죽었어.

우물 속을 들여다볼 때처럼 아득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말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나는 이후에도 성균관대 불문과 학생이었던 김귀정 열사가 경찰의 토끼몰이로 죽었다는 그 골목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다. 기어오르거나 뛰어넘기에는 조금 어려운 벽이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이 갈리는 참혹한 벽이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고, 당혹스럽거나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골목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연세대 법학과 학생이었던 노수석 열사가 죽던 날이었다. 경찰이 국립의료원에 안치된 노수석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을지로 인쇄골목에 갔을 때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밤이었다. 하수구에서 빗물이 역류하여 발목까지 잠기던 그 골목들은 여기저기로 이어져 있었건만 나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국립의료원 앞 을지로를 가득 메운 전경들 위로도, 골목마다 가득 메운 시위대의 머리 위로도 비는 무차별적으로 쏟아졌고, 막다른 골목도 아니었건만, 국립의료원을 지척에 두었건만 거기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채 발목까지 잠기던 빗물이 정강이까지 차오르도록 내리는 비를 속절없이 맞으며 젖어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던 바로 그 골목 어느 인쇄소 건물에서 경찰의 곤봉과 군홧발을 맞아가며 조여드는 가슴을 움켜쥐고 나보다 어린 한 학생이 죽어갔던 거였다.

그제야 나는 무랑루즈 골목 어귀에서 선배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던 말에 담긴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이 골목 끝에서…… 죽었어. 그때 선배는 막다른 골목을 보았던 게 아니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스스로를 보았던 것이리라. 그날 이후로 내게 막다른 골목의 이미지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이미지로만 떠올랐다. 벽에 가로막혀 있어도 막다른 골목이었고, 가로막은 벽이 없어도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리고 지금 9년 동안의 암흑의 시기를 지나 새로운 민주정부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나는 여전히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거리는 기분이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던 세월은 얼마나 참혹했던가. 용산참사가 그러했고 한 노동자가 목을 매달아 죽었던 크레인에 또 다른 노동자가 올라 300여일을 견뎌야 했으며,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하나둘씩 자살했고, 세월호 참사로 수백명이 몰살당했으며 농민은 물대포에 맞아죽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과 같은 권력기관의 협잡과 공작과 폭력은 한결같았으며 재벌과 재벌을 기반으로 한 정당 역시 기승을 부렸다.

이 고통, 이 슬픔, 이 헤어날 수 없는 삶의 진창들, 그 길고 긴 골목을 통과해 이제 겨우 문재인이라는 기착지에 이르렀을 뿐이다. 저 드넓은 도로도 확장된 골목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 지평선으로만 구획될 수 있는 광활한 대지라 해도 인간에게는 하나의 골목일 뿐이다.

9년 동안 골목을 헤매다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삶이 골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지금까지 우리를 토끼처럼 몰아대어 이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던 자들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민주정부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사회적 총파업이 예정되어 있다. 가로막은 벽이 없어도 뒤돌아서는 이유는 그이들 역시 매번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스스로를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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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취임 일성, “문화예술 지원하되 간섭 않는 원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말 한마디를 얼마나 기다려왔단 말인가. 이 말은 DJ정부 때 확립되어 참여정부 때까지 이어진 표어였다. 이명박 시절에는 지원하되 간섭도 했다. 박근혜 일당은 지원보다 간섭이 많았다. 아니, 지원은 없고 간섭만 있었다 해도 허무맹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 이후 대중음악 지원 정책은 음반 제작과 신인 발굴, 해외 공연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흘러왔다. 아직 디지털 음원이 음반을 완전히 대체하기 전에는 음반 제작비를 지원했다. 그 후 신인 발굴 및 지원 프로그램이 생겼으며 최근에는 해외 페스티벌 및 쇼케이스에 참가하는 국내 음악가의 경비를 지원하는 정책이 생겼다. 근 10년 가까이 지속된 흐름이다. 장점도 있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성과도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사이 음악 시장의 지형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태어난 세대가 음악 시장의 주된 소비자가 됐다. 그들이 철들 무렵, 즉 가장 예민하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무렵은 아이돌이 TV와 인터넷을 완전히 점령했을 때였다. 음악잡지는커녕 라디오의 시대도 끝난 지 오래다. 수동적으로 음악을 듣는 대다수는 그전 세대에 비해 오히려 다채로운 음악적인 경험을 하기 힘들었다. 음악을 하고 싶은 친구들 역시 그전 세대와는 달리 부모의 박해를 받지 않았다. 대신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해서 입시를 준비하면 됐다. 어렵사리 실용음악과에 진학해도 교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이론에 얼마나 정합되는지를 학점으로 평가받게 됐다. 주변에서 들리는 음악만 듣는 수동적인 계층이나, 음악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계층이나 그전보다 견고한 상자에 갇히게 된 게 지난 10년간의 흐름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사이 인디 음악의 중심지라 여겨졌던 홍대 앞은 명동과 다를 바 없는 상업지구가 됐고, 난무하는 음악 페스티벌들은 거기서 거기인 출연진으로 정체성 없는 ‘여가 산업’의 일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책이 의미가 있을까? 음원 제작의 리스크는 그전에 비할 바 없이 줄어들었다. 신인 발굴 오디션에서 1등을 해봤자 상금과 보도자료에 한 줄 쓸 수 있는 경력만 있을 뿐, 대중적 파급력은 전무하다. 해외 페스티벌에 참가해도 ‘좋은 추억과 영감’ 정도가 남을 뿐, 실질적 비즈니스 기회는 힘들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우선 ‘지역 밀착형 정책’이다. 페스티벌을 비롯한 한국의 모든 공연은 중앙 집중이다. 장소를 하나 잡으려고 해도 얼마나 서울에서 가까운지가 최우선 고려 대상이다. 당장의 수익을 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품’을 진짜 ‘문화’로 바꾸기 위해서 아예 고립된 지역에서 공연자와 관람자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작은 페스티벌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영국의 글래스턴베리를 비롯한 해외 유명 페스티벌들의 뿌리도 그랬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축제의 유니폼이 꼭 개량한복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 ‘생활음악 정책’이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대학에 총 51개의 실용음악과가 개설돼 있다. 2006년 대비 2배가 넘는다. 해마다 그만큼의 음악 전공자가 쏟아져 나오지만 대부분은 백수가 되거나 학원에서 입시생을 가르치는 처지가 된다. 클래식이나 국악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초·중등교육에 연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돌봄교사나 방과후수업 등 입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영역에 생활음악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악기를 배워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비트 메이킹을 배워 랩을 잘하는 친구와 힙합팀을 결성할 수도 있다. 수학여행에서 디제잉을 할 수도 있다.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인 이후에나 시도할 수 있는 음악적 경험들을 청소년기에 한다면, 음악을 수용하는 환경도 자연스럽게 넓어질 수밖에 없다. 결과보다는 뿌리에 집중하는 정책이야말로 한국 음악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큰 줄기가 될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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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힘은 막강하다. 누구라도 한번쯤 무심코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잊었던 옛 추억이 한순간에 떠오르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삶의 한 장면에 각인된 노래는 세월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 순간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노래는 일종의 기억장치인 셈이다. 이는 개개인의 경험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집단의식에서도 작동한다.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이들에게 그때의 기억은 함께 불렀던 노래들을 통해 순식간에 재생된다. 지난 주말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광야에서’ 같은 당시 곡들이 기악 연주로 혹은 노래로 울려 퍼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이 곡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기념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일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그림으로, 노래로, 연극으로, 춤으로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했다. 이때 만들어진 수많은 ‘민중가요’는 엄혹했던 시절 젊은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대변하고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며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1980년대 활발하게 전개된 노래운동의 물꼬를 튼 것은 1970년대 김민기의 작업이었다. 유신정권하에서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과 ‘상록수’는 저항가요의 상징이었고, 1978년 나온 노래굿 ‘공장의 불빛’ 비합법 테이프는 이후 노래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그 후 노래모임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 고 김광석, 안치환, 윤선애, 꽃다지 등 많은 이들이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널리 유포된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노래로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었다. 1960~1970년대 전 세계적인 저항의 물결 속에서 반전·평화 운동에 앞장선 미국 포크 가수들, 그리스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라틴아메리카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운동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음악가들이 부당한 억압과 인권 유린,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을 노래했다. 특히 1973년 군부쿠데타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망명길에 오른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는 독재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오늘날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것처럼.

참혹한 역사의 현장은 음악에 담겨 후세에 전해지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는 망명지에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접하고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썼다. 사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철저하게 음악 작품의 내적 세계에 몰두했던 이 작곡가조차 인류 최대의 비극을 지나치긴 어려웠던 것이다.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내레이터가 가스실로 향하는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찬 히브리어 합창으로 끝나는 이 곡은 전쟁의 공포와 대학살의 악몽을 소리로 재현한다. 

윤이상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역시 고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광경을 목도한 작곡가의 피맺힌 절규였다. 미국 작곡가 프레데릭 제프스키는 칠레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단결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를 주제로 한 36개의 변주곡을 써서 그에 대한 강한 연대감을 표했다. 앞의 두 곡과 달리 아방가르드에서 블루스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어법이 한데 어우러지고, 이탈리아 민중가요 ‘반디에라 로사’와 브레히트-아이슬러의 ‘연대가’도 곳곳에 출몰한다. 이 장대한 변주곡은 저항과 연대의 정신이 요구되는 시대에는 어김없이 소환되었다. 지난 촛불집회의 과정에서도.

1980년 광주와 6월 민주항쟁을 겪은 세대에게 그 시절은 30년 전 불렀던 노래들과 함께 기억된다. 세월호 참사와 촛불혁명을 경험한 지금의 젊은 세대는 훗날 이 시기를 어떤 노래들로 기억하게 될까? 이 시대는 음악가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겨놓았을까? 음악역사가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궁금하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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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부산아트페어를 관람하고 왔다. 화랑들 간의 편차는 컸지만 흥미로운 작품들이 더러 있었다. 좋은 작품은 기존 미술작품들이 주지 못한 낯선 감각과 감수성을 안겨주며 미술에 대한 새로운 생각거리를 동반한다. 그런가하면 절묘한 조형미로 ‘딴딴한’ 것들이다.

그것을 적절한 언어와 문자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거의 직관적인 느낌이고 순간적인 깨달음 같은 것이다. 평론가이면서 동시에 수집가인 나는 그 많은 작품들의 밀림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내 감각을 사로잡는 기막힌 조형미를 지닌 것, 그 작가만의 고유한 감각과 감수성으로 빚어진 것, 또는 그만의 미술에 대한 기발한 생각이 절묘하게 물질화되어 나온 것을 애써 골라내고자 한다. 그러나 나를 전적으로 사로잡는 것을 만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술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나와 다른 이의 사유, 감각, 감수성을 접촉시킨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미술작품이란 작가들마다 사물과 세계를 보는 다양한 관점,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만의 조형미를 체득시켜주는 하나의 거울 같은 것들이다. 미술은 고정된 시각, 감각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마다 자신의 해석에 따른 또 다른 감각의 세계를 가설하는 일이기에 보는 이들은 작가들이 만든 작품을 통해 그만큼 다채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트페어를 둘러보면 그러한 작품들보다는 지나치게 익숙하고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상당수다. 매번 보아왔던 작품들, 어디선가 본 듯한 작품 내지 특정인의 작품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들이다. 작가들은 학습과정을 통해 미술이란 것을 배운다. 그것을 모방하고 그와 유사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한편 특정 작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불가피한 통과의례이고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을 지낸 후에는 그 영향관계로부터 부단한 탈주를 감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배운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매번 누군가의 작품에 슬쩍 기생해나가면서 베끼고 짜깁기한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주어진 정보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다.

근자에 아트페어나 전시장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바로 백자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다.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무수한 그림들을 만난다. 이미 1930년대부터 이른바 동양주의 담론의 영향으로 수많은 작가들이 백자를 즐겨 그려왔다. 도상봉, 김환기 같은 작가들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이른바 단색주의 작가들 역시 백자의 백색을 화면 전면에 배치하고 도자기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연출을 시도했다. 박서보, 정상화 등이 그렇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정말 많은 작가들이 백자를 다루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똑같은 소재를 유사한 기법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다소 질린다. 나로서는 그런 광경이 너무 의아하기만 하다. 그릇 위에 가득 담긴 꽃, 밥을 그리는 경우도 갑자기 흔해졌다. 임영숙 작가가 오래전에 해왔던 작업인데 수년 전부터 많은 작가들이 그대로 베끼다시피 따라 하고 있다. 물론 백자를 그리거나 그릇 안에 꽃이나 밥을 얹어 그리는 게 특정인만이 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이미 있는 그림과 거의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분명 표절에 해당한다.

얼마 전에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원로 서예작가의 작품을 접했는데 작년에 전시했던 서예가 김정환의 작품과 거의 일치해 무척 놀랐다. 완전히 베꼈다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사실 이런 경우는 다반사다. 물론 외형적인 유사성만으로 표절이라 단정 짓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해당 작가들의 이전 작품과 비교해보면 그런 징후를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표절하고 고스란히 흉내 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트페어에 출품하고 개인전시에 내면서 활동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무척 난감하다. 그러니 더욱더 전시기획자, 평론가, 화상들의 밝은 눈이 요구된다. 아울러 컬렉터들 역시 모방과 표절의 혐의가 짙은 작품들을 적극 배제해야 한다. 이처럼 현재 우리 미술계에서는 남의 작품을 몰래 갖다 쓰고, 표절하는 경우가 너무 심각하다. 미술이 자신만의 감수성과 감각을 보여주고 고유한 조형적 안목으로 존립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이 이곳 미술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되고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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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본질적으로 산문에 속하기에 소설의 문장들은 산문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산문정신이란 대상에 대한 철저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접근 태도를 뜻하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한 편의 시는 사랑을 가리켜 ‘그것은 하나의 사태였다’라고 간결하게 보여줄 수 있으나 한 편의 소설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서로에게 이끌렸고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서로를 밀어내는 동시에 끌어당겼는지와 같은 감정과 행동의 사소하고 세부적인 결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차이 탓에 소설의 문장들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것 같다. 좋은 소설 문장이란 산문정신에 얼마나 근접했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불필요한 수사와 어리석은 말장난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오해 말이다.

이 오해가 오해인 이유는 앞서 설명한 산문정신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서다. 대상에 대한 철저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접근 태도와 그런 태도가 바탕이 되어 태어난 문장이 반드시 표면적으로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정직한 단어만을 고를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정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정직한 언어만을 구사하려 한다면 아모스 오즈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 “너무 못생겨서 아름답기까지 하다”와 같은 삶의 언어를 구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 때로는 슬픔에 눈이 부실 수도 있고 기쁨에 절망할 수도 있으며 행복 탓에 불행할 수도 있는, 삶의 도처에 존재하는 아이러니를 똑바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오해가 풀렸다고 해서 소설 문장의 정수에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오해 혹은 용납해야 할 모순이 하나 더 있다. 기이하게도 아름다운 한 편의 시는 예외 없이 자신의 내부에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어서 독자는 결국 아름다운 한 편의 시를 읽었을 뿐인데도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과 비슷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반대로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은 아무리 길고 긴 장편소설이라 해도 예외 없이 시와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길고 긴 독서 끝에 남는 건 거대한 하나의 이미지다.

그러므로 문장의 정수는 어느 한 기법이나 기교에 있지 않다. 문장의 정수는 시이거나 소설이거나 상관없이, 시적인 정신을 드러내려는 시도이거나 산문적인 정신을 드러내려는 시도이거나 무관하게, 시가 소설이 되고 소설이 시가 된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다고 믿는 데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미움 때문에 다툴 일도 많지만, 사랑 때문에 다툴 일은 더 많지”라는 식의 무수한 말장난이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인정한다면 결국 문장의 정수가 말장난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에 있지 않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말장난이어도 괜찮다. 말장난이어서 문제인 것은 아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말장난을 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말장난의 최대치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장 주네의 소설 <도둑일기>의 한 문장인 “스페인 그리고 그곳에서의 나의 비렁뱅이 생활은 호화로운 비천함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에서 ‘호화로운 비천함’은 초보적인 말장난 같은 형용모순에 불과하지만 ‘호화롭다’에도 속하지 않고 ‘비천하다’에도 속하지 않는 낯선 이미지를 느낄 수 있듯이, 비천함이 비천함으로만 머물지 않고 어떤 호화로움보다 호화로울 수도 있다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당한 이들이 매순간 느껴야 하는 비천함이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억압하고 소외시킨 이들이 누리는 호화로움보다 정의롭고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던 의미의 비약이 이루어진 순간에 언뜻 드러나는 것이 바로 문장의 정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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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겪은 기억이 거의 없다. 반항아도 아니었고 매사에 순종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 무렵, 음악에 빠져 들기 시작하면서 돌부리 같은 감정들을 음악으로 해소했다. 이유도 없이 분노가 치솟고 우울이 가득한 나이에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 이유도 없이 마음은 잔잔해졌다. 헤비메탈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부수고,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으며 심미안이란 걸 싹틔웠다. 주로 해외 음악을 들었으니 가사보다는 소리 그 자체를 통해 내면의 감정들과 교류했다. 그러니 세상과 부딪힐 일도 없었다. 아니, 부딪혀도 부딪힌 줄 모르고 예민한 시기를 지나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그 시절, 음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존재였다고 세월이 흐르고서야 생각하곤 한다.

새장 밖으로 나와 시작한 대학 생활의 첫걸음은 혼돈 그 자체였다. 주어진 목표란 게 사라지고, 밤마다 퍼마신 술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꺼내는 촉매제였다. 방황이란 게 시작됐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 전까지 여자랑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해보고 살다가 인간관계에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추가된 거다.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짝사랑 말이다. 난생처음 맞게 된 호르몬의 폭풍 앞에서 나는 너무나 미숙했다. 마치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자마자 F1 레이스에 참가한 심경이었다. 어떤 음악을 들어도 그 감정에는 포개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걸 참다 못해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나에게 호된 참교육을 하고 싶어질 정도다. 상대에 대한 전략도, 배려도 없이 혼자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대놓고 거절을 당한 날, 선배에게 상담을 청했다. 둘 다 취해 있었다. 선배는 뭐라 뭐라 말해줬지만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연애의 달인 기질이 있었던 동기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들에게 구한 것은 위로와 격려였을 테지만 어쨌든 스무 살 언저리의 미숙한 남자들끼리 ‘말발’을 세워봤자 무슨 효과가 있었겠나.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하다 눈물을 흘린 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 여자 선배 한 명을 믿고 따르게 됐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던 5월의 캠퍼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100원짜리 커피를 뽑아 대화를 나눴다. 상담을 빙자한 횡설수설이었다. 누나 또한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연배에 불과했지만 죽비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답은 네가 알고 있잖아. 누가 무슨 말을 해줘도 넌 네가 알고 있는 답을 그대로 듣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러면서 후련해하고 싶은 거 아니야?”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말로 하는 위로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스무 살의 나는 깨달았다. 그 후로 한 살 한 살씩 먹어가며 위로의 무용함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친구나 후배들이 힘든 상황을 털어놓으면 나는 위로의 언어 대신 그 누나와 비슷한 말을 해줬다. ‘멘토’와 ‘힐링’ 같은 단어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위로란 걸 믿지 않게 됐다.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 울먹이며 편지를 낭독한 유가족 김소형씨를 문재인 대통령은 예정에 없이 무대에 올라가 포옹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는 큰 울림이었다. 마침내 다시 울려 퍼진 ‘님을 위한 행진곡’의 장중함을 능가했다. 씻김굿의 절정에 다름아니었다. 단지 광주의 영령과 유가족들뿐 아니라, 지난 9년간 민주주의의 퇴행에 괴로워했던 이들, 세월호 참사 이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던 이들의 마음까지 안아주는 듯했다. 그들에게 ‘힘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해줬을까. 그래봤자 힘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들이 있었고 이는 제도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근원적 슬픔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김소형씨는 통곡하듯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제도란 언어로 구성되고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역시 현실을 재구성하고 규정한다. 그 언어적 현실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을 대통령은 포옹으로 보듬었다. 그간 믿지 않았던 본질적 ‘위로’였다. 어린 시절, 나를 엇나가지 않게, 우울하지 않게 해줬던 음악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 누가 기대했을까. 국가 행사에서 이런 장면을 보는 날이 올 거라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적어도 나는 몰랐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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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어린아이들의 그림을 심사한 바 있다. 드물게 이런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내게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다.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의 그림은 기발하고 희한한 게 다수 있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가는 순간 그림들은 거의 다 경직되고 도식적이며 따분해진다. 희한한 일이다. 교육을 받을수록, 아이들이 커갈수록 그림을 망친다는 얘기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이’란 근대기에 태동된 새로운 개념이다. 서구의 경우 중세 유럽에는 지금과 같은 ‘어른’과 어린이의 구별이 없었으며 오직 어른과 ‘작은 어른’이라는 크기상의 차이만 있었다고 한다.

어른에 대한 ‘아동기’의 출현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17세기 중반, 근대적 가족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는데, 이때부터 작은 어른들은 새롭게 ‘귀여움을 받고’ 보호되는 대상으로 재해석되었다. 여기서 사회적 약함이나 의존성이 특별히 강조된 ‘어린이다움’이 나타나고, 어린이는 시민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따르도록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정과 학교에 둘러싸이게 되었으니 이른바 ‘아동’이 탄생한 것이라고 아리에스는 말한다.

근대 국가는 아동을 국민구성원으로 훈육하고 양성하는 일을 조직, 체계화해 가정, 학교에서 맡도록 하였다. 아이들은 주어진 사회현실과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길러져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아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고 성숙되지 않았으며, 어른이라는 질서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있고 동시에 아이들을 어른의 일방적 시선 아래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른들이 원하는,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어린이들 역시 자기다움을 감춤으로써 질서 안에 편입되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아동을 교육시킨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교육시킬 수 있는가, 과연 어른의 시선으로 어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충분한 것이냐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창의력과 상상력, 사물과 세계를 보는 길들여지지 않는 눈을 요구하는 미술의 경우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어린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칠 수 있느냐,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미술이란 사물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기르는 일이고 인습적이고 상투화된 사고, 안목, 감각을 벗어나는, 뛰어넘는 것이자 그런 몸을 가꾸는 일이다. 종래의 나와는 다른 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교육의 힘이란 사람을 ‘한 가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때때로 아주 고통스럽고 고민스럽게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강요하는 일’이 된다. ‘성장 과정을 통해 암암리에 훈육되고 다져진 인식의 터전을 흔들어 혼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또한 미술교육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해하고 있는 사물과 세계는 모두 특정한 가치나 신화, 이념, 욕망에 의해 매개되어 있어서 그 본래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 눈과 의식으로 세상을 보기보다는 이미 주입받은, 학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코 자신의 눈과 사고로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대상에 대해 배운 대로, 학습된 대로, 경험한 대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눈으로 보고, 반복해서 보면서 깨닫는 것이다. 기존 미술계에 공식화된 어른 중심의 미술언어를 아이들에게 추종하게 하거나 익숙하게 훈련시키는 것은 진정한 미술교육이 아니다.

좋은 미술작품은 사물과 세계에 드리워진 모든 편견과 허위의식을 거둬 내는 일이며 그로 인해 그 아이만의 독특한 감성과 감각의 힘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따라서 그런 그림은 학원 등에서 관습적으로 만들어주는 그림이나 어른들이 손을 댄 그림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과 대상에 대한 관찰력을 키우고 자발적으로 느끼고 깨달은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담아내는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 당대의 지배논리가 현실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동일화된 감성에 순응하지 못하고 그것과 불화를 일으키고 저항하는 사유를 지닌 아이들을 길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아이들이 결국 한 개인으로 살아남으며 상상력과 창의성을 지닌 인간, 예술가적인 인간이 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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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