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미술은 타지역의 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역동적이고 뜨거운 편이다. 그만큼 한국의 근현대사가 격동 그 자체였고 지금도 매일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지 않은 날이 없으니 이러한 현실로부터 발아하는 미술이 그런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이인성의 그림을 시작으로 이후 1950,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과 빈곤을 정면으로 응시한 박수근, 이중섭의 경우가 그런 선구적인 예로 떠오른다. 오윤과 손장섭, 신학철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첨예한 모순을 고발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남관과 권순철은 한국전쟁 때 죽은 이들의 얼굴, 넋을 형상화했다. 박생광의 작업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들만큼이나 이런 작업의 선구적인 사례가 바로 김영덕의 그림이다. 지금 그의 미수전이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1949년 그는 어린 학생이었는데도 경찰에 연행돼 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은 후 겨우 살아남은 경험이 있었는데, 이른바 남로당의 조직원, 빨갱이로 몰렸던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생애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시대적 모순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의 평생의 작업 화두는 바로 어린 나이에 보고만 온갖 불의와 압제,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로 인한 무수한 죽음과 피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장면, 상처가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것들은 수시로 출몰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따라서 김영덕의 그림은 그렇게 떠도는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려는 지난한 시도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그린 ‘인탁-인혁당의 사람들’(1976)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망자들에 대한 애도와 비애의 감정을 진하게 담고 있는 그림이다.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8월, 이른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인민혁명당사건’(1차)과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2차)으로 나뉜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자 재야세력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고 유신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위반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 했다.

1974년 4월25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정부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농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발표하였다.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고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으며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다음 날 4월9일 형을 집행하였다. 채 20시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으며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에 해당한다.

김영덕의 그림은 몇 개의 층위로 구분되는데 화면 상단은 눈부시게 하얀빛으로 물든 공간에 흰색의 한복을 입은 망자들이 이제 막 시선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설핏 보여준다. 하단에 그려 넣은 군모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한 핵심을 지시하고 있다. 당시 엄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미술인 대부분이 서구의 전위미술이나 단색주의회화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당시의 참혹한 사건을 형상화한 이가 바로 김영덕이란 작가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 그림은 철저하게 망각되어 있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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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잊히지 않는 분들이 있다. 대학시절 잠깐 얹혀 살았던 친구 자취방의 주인 노부부였다. 그 집에 들어가던 날 나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우선 노부부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주인 노부부의 성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단아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거실 한가운데 엉거주춤 선 채 꾸벅 인사를 드렸다. 주인 노부부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노려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친구에게 들어 은퇴한 교육공무원이라는 건 알았지만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교육공무원이 아니라 사법공무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노인의 근엄한 얼굴과 그에 못지않게 위엄이 서린 노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단번에 기가 죽었다.

눈에 거슬리는 짓이라도 했다간 쫓겨날 게 뻔해 보여 단칸방 벽 너머가 노부부의 거실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말소리조차 죽이며 지냈다.

이십대 내내 나는 연례행사처럼 한 해에 한 번씩 편도선염을 앓아 고열에 시달리곤 했는데 그 시절이 이 연례행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던 듯하다. 친구는 학교에 가버렸고 몸살기가 있어 혼자 방에 남았던 나는 점점 열이 올라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러는 동안 내내 눈을 감고 있었던 이유는 눈을 뜨면 눈앞이 빙빙 돌아 더 어지러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잠들지는 못하고 눈만 감은 채 열에 시달리는 동안 낮이 깊었고 일상에서 생겨나는 자잘한 소음들이 파도처럼 내 귓가로 다가왔다 멀어지길 되풀이했다. 노부인이 외출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약국이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지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잠깐 뒤척이기라도 하면 바닥에 닿거나 쓸린 몸의 어느 부분이나 눌린 팔뚝 따위가 아파서 절로 끙 소리가 났다. 서울살이가 처음이었던 나는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게 바로 타향살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결국 혼자라는 생각 탓에 잔뜩 주눅이 들었던 나는 다시 몸을 뒤척이다 신음을 냈는데 곧이어 똑, 똑, 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벽 너머 저쪽 거실에서 노인이 노크를 한 거였다. 아무래도 조용히 하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속으로 ‘노인네가 귀만 밝아서는’ 하며 투덜대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조금 뒤 다시 똑, 똑, 똑 소리가 들렸다. 무척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두드림이었고 문득 그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괜찮냐고 묻는 뜻이라는 걸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괜찮다는 의미로 벽을 조심스럽게 세 번 두드렸다.

그날 오후 외출에서 돌아온 노부인이 단칸방을 찾아와 상비약에서 골라온 몇 가지 약을 내게 주었다. 그 약 덕분인지 부었던 편도선도 이틀 사이에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어느 한가했던 오후 나는 방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다가 벽 너머 거실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음이었다. 노부인은 외출을 했으니 노인의 신음인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벽을 똑, 똑, 똑 두드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 나는 후닥닥 뛰어나갔다. 노부부 집의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단아하고 정갈한 거실 한가운데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대원들이 들이닥치고 노인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다행히 노인은 때를 놓치지 않아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며칠 뒤에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부인은 아무 말 없이 과일이 든 바구니를 우리 자취방 앞에 놓아두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그 과일을 먹으며 분명 노쇠해진 탓에 귀가 어두웠을 노인이 어떻게 내 신음을 들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고 사람이란 그러니까 그게 누구든 사람이란 다른 어떤 소리보다 고통 받는 타인의 소리에 예민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설령 귀가 먼다 해도 그 소리는 가슴으로 듣는 것이기에 듣지 못할 수가 없다는 이 신비로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로 치부하며 살아가는 그이들을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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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섬 제주의 봄은 유채꽃 만발한 풍광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 아름다운 자연에 깊은 상처와 아픈 역사가 서려 있음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기 예능프로들에서도 잇달아 언급되며 제주의 산천에 아로새겨진 4·3사건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너븐숭이, 다랑쉬굴, 섯알오름 등 70년 전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그대로 품고 있는 땅. 섬사람들에게 그때의 사건은 발설은커녕 기억에서조차 지워야 했던 천형과도 같은 일이었다. 제주 4·3을 평생의 문학적 화두로 삼아온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이를 ‘기억의 자살’이라 불렀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것. 냉전과 분단체제, 독재정권하에서 그렇게 기억은 말살당했지만, 무고한 수만명의 억울한 죽음이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제주 유채꽃. 제주관광공사 제공

30년의 세월이 흐른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4·3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했고, 1980년대 말 일기 시작한 4·3진상규명운동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2003년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주민들에 대한 대통령의 첫 공식사과 후, 2008년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제주4·3평화공원’이 문을 열었지만, 그 후로도 4·3은 외딴 섬 제주의 아픔으로만 여겨져 왔다.

역사적 진실은 때로 문학적·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더 강렬하게 전해지곤 한다. 5년 전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자행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피해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간 주민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 큰 울림을 남겼다. 수십년에 걸쳐 창작된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도 몇 년 전 한글완역본이 출간되며 한국 현대사에서 4·3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시와 노래, 춤과 연극, 그림과 영화로 이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려 애써왔다. 30년 전 ‘잠들지 않는 남도’를 작곡한 가수 안치환이 최근 ‘4월 동백’을 발표하며 다시 이 섬의 슬픔을 노래하듯이.

올해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일며 각지에서 전시·공연·퍼포먼스·씻김굿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클래식 음악인들도 4월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섬의 아픔을 뭍에서 기억하다’라는 추념음악회를 마련했다. 구자범의 지휘로 네 명의 독창자와 ‘참 필하모닉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국립합창단·안양시립합창단이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한 이 음악회는 전국의 뜻있는 음악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해 오케스트라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80명의 오케스트라와 90명의 합창단이 모아낸 진혼의 목소리는 음악회장에 온 청중에게는 물론이고 참여한 음악가들의 마음속에 제주 4·3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영원한 안식을”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레퀴엠’은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산 사람을 위로하는 진혼미사곡이다. 그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 20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창작되고 연주되는 것은 잔혹한 폭력과 전쟁에 스러진 원혼들이 넘쳐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제주 4·3을 비롯해 여수·순천, 거창 등지에서 벌어진 억울한 죽음들이 많았다. 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보듬고 우리 사회가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할 터. ‘영원한 안식’은 그런 연후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만 비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거친 후 4월의 진혼곡이 해마다 울려 퍼지며 한반도에 마침내 평화롭고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기를….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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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 35인이 모였다. 몇몇을 빼면 서로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사람이 모일 때는 대개 이유가 있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거나, 나눌 이익이 있거나, 짝이 필요하거나,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떠한 공통점도 없고, 나눌 만한 이익도 없으며, 신상 정보 또한 모르는 35인은 제주도 성산에 모여 2박3일을 보내게 됐다. 이 시간의 이름은 ‘낯선 컨퍼런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열렸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강한 연결’과 ‘약한 연결’로 나눈다. 전자가 가족, 친구, 동료라면 후자는 낯선 사람, 뜸하게 아는 사람 등 ‘지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그룹이다. 이 책은 강한 연결보다 약한 연결을 통해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한다. ‘낯선 컨퍼런스’는 이 책의 제목과 내용에서 이름을 빌려 온 행사다.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저자들이 진행하는 것도 아니니, 말하자면 그 이론을 검증해보려는 일종의 실험인 셈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스태프로 참여, 초기 기획부터 진행을 함께했다.

참가 인원을 60명에서 35명으로 줄였다. 2박3일 동안 인사도 한 번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기본적인 원칙은 같았다. 첫 번째, 장소는 제주도다. 광화문이나 테헤란로 등 일상의 지역에서 행사를 갖게 되면 사람을 만날 때도 관성적이 된다. 비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일상을 단절하되, 여권이 필요없는 제주도는 그래서 ‘약한 연결’의 낯선 공간이다. 두 번째, 참가자를 신청이 아닌 초대로 모집한다.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건,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사람이건 상관없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면 된다. 초대장엔 이렇게 썼다. “ ‘낯선 컨퍼런스’는 형식보다 내용을 고민합니다. 2박3일의 느슨한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매뉴얼에 담긴 인사이트가 아닌, 각자의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 생각을 나눕니다. 엄선된 호기심으로 초청된 낯선 사람들의 수다로 각자의 물음표를 섞으려 합니다. 2박3일이 지났을 때 서울에서의 물음표가 제주에서의 느낌표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글을 보고 35명이 항공권을 끊고 적지 않은 참가비를 냈다. 그리고 지난 23일, 성산 플레이스 캠프에 낯선 사람들이 모였다.

1인당 3분씩의 자기 소개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철제가구를 만드는 이, 베개를 만드는 이, 숙취해소제를 만드는 이, 파티를 만드는 이… 이름을 걸고 유무형의 무엇을 창조하는 이들의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 작은 탄식이 일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놀라움, 저런 사람 만나고 싶었다는 발견의 기쁨이 어우러지는 탄식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인사의 내용은 참신했다. 한국인의 인사법인 호구조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소개에서 알게 된 간략한 정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각자의 세계 속으로 훅훅 들어갔다. 생전 만나본 적 없는 직업군의 사람들이 여러 프로그램을 거치며 밀도있는 관계로 나아갔다. 행사가 끝날 무렵,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이나 직장의 워크숍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친밀감이 그들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사람과 마주칠 만큼 마주쳐온 그들이다. 지칠 만큼 지쳐온 그들이다. 이 35개의 세계는 어떻게 이토록 가까워졌을까. 강하지도 흐릿하지도 않은 낯선 호기심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서의 삶을 지향해왔던 이들이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동인이 진심의 교환으로 바로 이어질 수야 없을 테지만 그 지점으로 향하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오프라인에서 쉬이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온라인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온갖 분쟁들에 지쳐가는 지금, 새로운 관계의 활력을 만끽할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 말이다. 처음 듣고 꽂히는 음악이 있다. 첫술에 침이 솟구치는 음식이 있다. 늘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음악과 음식 같은 사람들에 굶주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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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주 대상으로 미술평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관람하고 공부하는 시간 못지않게 전통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고미술품을 감상하고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현대미술이니 전통미술이니 하는 구분이나 경계라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 모두를 하나의 조형으로 보고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박물관과 골동품 가게 등에서 접한 우리 고미술품 중 상당수가 감동적인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삼국시대 토기 잔과 직선무늬떡살, 그리고 옹기에 주목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옹기를 보러 여러 곳을 다녔고 그러한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하나씩 구입하고 있다. 가장 흔하고 저렴한 옹기에서 절묘한 것을 찾는다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보았으며 우리네 일상적인 삶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쓰였던 옹기의 매력을 순수한 조형적인 차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고미술상가를 비롯해 양평, 충주, 천안, 부안, 광주, 순천 등지에 산개한 옹기 가게나 경매장을 틈틈이 찾아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근자에 부안에 가서 여러 옹기를 보고 왔다. 사방은 적조하고 다만 멀리서 이곳까지 기어이 밀려와 다소 거칠게 흩어지는 바닷바람과 ‘짠내’만이 가득한 곳에서 겅중거리며 마음에 드는 옹기를 찾아다녔다. 우선 형태가 완벽한 것, 색채가 묵을 대로 묵어 그 맛이 희한한 것, 오랜 시간의 땟물이 가득 차 올라와 있는 것, 옹기 표면에 그려진 선이 절묘한 회화적 맛을 거느린 것 등이 하나로 모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찾는다라고밖에는 말하기 어렵다. 사실 그 선택은 무척 직관적이고 인상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편이다.

옹기를 볼수록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소박하며 무심하면서도 절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음에 감동하고 있다. 옹기는 청자와 백자에 비해 다소 투박하고 수수해 보이지만 그 자체로 소박한 미감이 번득이는데 나는 그런 맛이 참 좋다. 이는 마치 서민적인 민화나 소박한 목기를 접하는 맛과도 유사하다. 옹기는 찰흙으로 만든 후 잿물 유약을 묻혀 1200도 온도에서 10여일 동안 구워내는 그릇을 말한다. 옹(甕)이란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로 저장 용기인 그릇의 형태를 일컫는 말인데 옹기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져 이후 한국인들의 실생활 여러 곳에서 부담 없이 활용된 그릇으로 철저히 실용성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정해진 틀이 없이 그저 사용에 편리하게 자유롭게 변형되어왔으며 그만큼 많이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살펴보면 옹기의 주원료인 찰흙은 산에서 얻는 것이고, 진흙을 굽기 전에 바르는 잿물의 재료 역시 나뭇잎이 썩어서 만들어지는 부엽토와 재다. 더구나 옹기가 깨져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자연으로, 흙으로 돌아가니 참으로 자연친화적인 그릇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알갱이가 섞여 있는 질(점토)로 만들어지고 가마에서 소성될 때 질이 녹으면서 미세한 기공이 형성되고 그로 인해 공기·미생물·효모 등이 통과할 수 있는 이른바 숨 쉬는 옹기,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닌 옹기이기도 하다. 이런 그릇이 있었기에 한국 고유의 발효 식품들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보다도 나는 옹기의 그 소박한 미감과 풍성한 형태, 그리고 옹기 표면에 무심하고도 놀라운 솜씨로 쓱쓱 그려나간 선의 맛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 옹기 만든 이가 평생을 그어 이룬 어떤 경지일 것이다. 나는 저런 선 하나를 애타게 찾는다. 사실 옹기의 매력은 이 특징적인 무늬에 있다. 시유 단계에서 넣는 손가락 그림인데 손놀림을 이용하여 무늬를 만드는 것을 흔히 ‘환을 친다’고 표현한다. 환을 치는 것은 무늬를 낼 뿐 아니라 표면의 유약을 부분적으로 닦아 내어 옹기의 통기성을 높여주는 역할도 하는데 하여간 이 환치기로 그려진 자국은 속도감이 있고 즉흥적이며 생동감을 보여준다. 자생적으로 몸이 기억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그려낸, 자유분방한 무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절묘한 선,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모든 그림 그리는 이들이 마땅히 보고 깨달아야 할 선·회화의 한 경지를 그야말로 놀라운 경지에서 부려놓고 있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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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사연을 글로 풀어내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말,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로도 부족하다는 이 말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유장하고 웅숭깊을 수 있는가를 뜻하지만 삶을 소설로 풀어내기가 생각처럼 여의치 않다는 뜻으로 새겨들을 수도 있다.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삶을 살아왔는데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자신의 사연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온전히 소유해 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사소설은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며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주된 내용인 소설이다. 사소설이 하나의 장르를 뜻할 때에는 일본의 특유한 소설 형식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사소설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다자이 오사무이고 그의 딸인 쓰시마 유코 역시 현대 일본 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 소개된 쓰시마 유코의 작품 가운데 <욕실>이라는 단편소설에는 작가인 유코라 여겨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중학생인 유코는 어느 날 방과 후에 오빠가 입원한 병실에 들른다. 오랫동안 감기로 누워 있던 오빠가 입원한 거였다. 그러나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유코는 오빠가 죽었음을 직감한다.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이미 가슴 깊은 곳에서 알아차렸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가서도 유코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는 개와 장난을 친다. 그런 유코에게 숙모가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오빠가 죽었다, 하고는 울음을 터뜨린다. 유코도 죽은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고 장례까지 치르지만 그러는 내내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모르는 체하기. 여기에는 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유코가 오빠의 죽음을 직감했음에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유코가 어리기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주변사람의 단정적인 언행 탓에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벗어나 나 자신이 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욕실>에서도 유코의 회한은 그 지점을 향하지만 또 다른 단편 <슬픔에 관하여>에서는 그런 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은 실제로 어린 아들을 잃은 유코가 아들의 죽음 이후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유코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위로와 동정이 아무리 예의 바르고 인간적이라 해도 결국 슬픔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그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잘 보여준다. 내가 느끼는 슬픔, 기쁨, 괴로움, 외로움 등은 나의 것이기에 누구보다 절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의 감정에 몰두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위로의 말에 고맙다거나 괜찮다고 대답해줘야 하고 내 감정을 타인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억눌러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감정은 설령 이미 존재했다 해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실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감정과 감정에 대한 반응에도 시차가 있을 수 있으므로 때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모른 척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감정이란 사적인 것이기에 박탈당할 수 없다고 간주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순수하게 홀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도 그와 똑같이 맞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 가운데 누구의 것이 더 소중하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연이 반드시 글이 될 필요도 없고 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것과 사연을 온전히 소유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내가 살아온 이 신산한 삶이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건 내 삶이 아닌 셈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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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부산 영도구 동삼동 바닷가 조개더미에서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조개껍질 하나가 발견되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그 조개껍질에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구멍이 세 개 나 있다. 마치 사람의 눈과 크게 벌린 입처럼 보이게 만든 구멍으로 인해 흡사 비명을 지르거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 연상되었다. 속살을 발라먹고 내다 버린 조개껍질 따위를 한군데에 차곡차곡 쌓은 조개더미를 패총(貝塚)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나온 이 조개껍질은 아마도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얼굴 이미지이자 최초의 미술작품(?)일 것이다. 일종의 이 가면은 길이가 11.5㎝라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신으로 변신하고자 했던 당시에 도구적 기능을 지녔던, 주술적인 용도로 쓰였던 가면으로 추정된다.

가면은 특정 물질로 만든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용, 주문, 의식으로 이루어진 복합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힘차고 동적인 물건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가면이 죽은 사람에게 영원한 젊음을 부여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면 속에서 비로소 영생과 불사를 간직할 수 있었으며 내세의 영원한 복락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고대 희랍에서는 죽은 사람을 보호하고 내세로 가는 여행을 도와주기 위해 지옥의 여신 페르세포네의 가면을 죽은 사람의 얼굴에 씌웠다고 한다. 옛날부터 티베트와 부탄에서는 머리 전체를 시체에서 떼어서 고인의 귀한 유물로 보존해왔다고 한다. 시체는 새들에게 먹이로 주지만 머리는 신성한 가보로 언제나 보존한 것이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고대에는 패배한 적의 머리를 정복자의 집에 걸었는데, 그 머리가 ‘그 집을 지키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적의 영혼이 머리에 들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영혼이 얼굴 속에 있다는 것을 믿었으므로 신과 정령의 형상을 얼굴 모습으로, 가면으로 만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면은 본래의 몸을 지우고 또 다른 존재로 비약하거나 현세의 얼굴이나 육체를 대신해 초월적인 존재로 비상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것은 실제의 얼굴을 지우고 다른 얼굴로 대신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가면이란 버릴 수 있는 얼굴을 말한다. 가면은 우리의 흔들리는 얼굴을 가리고, 낯설고 고정된 모습을 선사한다. 이는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얼마 전 가면을 둘러싼 해프닝이 있었다. 지난 2월11일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예선 코리아-스위스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이 김일성 가면을 쓰고 응원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론 이내 오보로 판명 났다. 그러나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하는 북한 응원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유하면서 “정부가 이를 결코 몰랐을 리 없다. 저 흉물스러운 것을 응원 도구라고 허락했나? 남북 단일팀 밀어붙이기로 우리 선수들 기회를 박탈한 것도 모자라 경기장에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선수들과 관중들이 경기 안 일으킨 게 다행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벌이지 못하는 일이 없구나.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누가 협조하고 누가 기획했는지. 대한민국 무너지는 소리가 평창의 응원소리보다 높구나”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하태경 바른정당 최고위원은 “북한 응원단이 대놓고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한다. 여기는 평양올림픽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한국 대통령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김일성 가면을 감히 쓸까”라며 “평양올림픽의 말로를 본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이는 김정은의 지시가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오래전 신학철의 ‘모내기’ 작품을 놓고 김일성의 생가를 그린 것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한 그림이라고 해석한 공안 검사들의 시각이 연상되는 발언들이다. 이처럼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읽고 싶은 대로 읽어대는 이 막무가내식의 감상법에 대해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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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누구나 한번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장소를 찾았을 때 그곳이 기억에 남은 장소와는 달라 놀랐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성인이 되어 투표를 위해 고향을 찾았을 때였다. 투표장은 내가 다닌 초등학교였는데 기억에 남은 것과 달리 운동장이 퍽 작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광활하다 할 만큼 컸던 것만 같은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작고 평범한 운동장일 뿐이었다. 세월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때때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새삼스럽기는 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기억과 실재의 차이를 자연스레 인정하게 되어서였던 듯하다.

그리고 며칠 전 사십여년 동안 기억에만 있던 장소를 찾게 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부모님과 더불어 사십여년 전 당신들이 살았던 셋집을 찾은 거였다. 그 시절 당신들은 세 살짜리 아들 하나를 슬하에 둔 삼십대의 젊은 부부였고 셋집 주인은 사십대의 부부였다. 부모님은 그 시절을 가장 찬란했던 순간처럼 회상하곤 했던 터라 나는 언제든 기회가 되면 그 옛집을 더불어 찾아가고 싶었다. 물론 그 집을 단번에 찾은 건 아니었다. 우선은 당신들의 기억에 남은 마을 이름에 의지해 그런 이름을 지닌 마을을 찾아간 뒤 마을회관에 들렀다. 다행히 그곳에서 당신들보다 나이 든 노인 한 분이 셋집 주인의 이름을 기억해주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른 마을이라는 것도 일러주었다. 그곳을 찾아가다 들른 삼거리 슈퍼 주인은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고 그 뒤로는 별로 헤매지 않고 그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당신들은 옛 마을에 들어서자 기억이 났던 모양인지 바로 여기라며 장담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무척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어서 내 기억에는 몇 가지 인상으로만 남았던 터라 사십여년 만에 찾은 그곳이 낯설기만 했다. 내가 지닌 몇 가지 인상이라는 것도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그 집이 무척 크고 대문이 높고 마당이 그윽했다는 등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옛집에 이르렀다.

기억에 남은 것과는 다르리라 짐작은 했지만 달라도 너무 달라서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의 집이라는 건 기억과 같았지만 작아도 너무 작았다.  대문 양쪽으로 문간방이 달리고 집채가 작은 마당을 둘러싼 형태였는데 마당도 두어 평에 지나지 않아 햇빛이 겨우 들 만큼 조붓했다. 노인은 돌아가신 지 조금 되었고 노부인이 살아 계신 터라 부모님은 노부인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 나왔다.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머물렀던 대문 오른쪽 문간방을 들여다보았다. 층이 진 두 칸짜리 방이었는데 손바닥만 한 창이 하나 달렸을 뿐이어서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니까 사십여년 전 그 방에서 삼십대의 하사관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세 살짜리 아들이 꿈을 꾸며 잠들곤 했던 거였다. 노부인은 다시 찾아오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말로 찾아온 사람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마당으로 내려앉은 한 줌 햇살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집을 다녀온 뒤 한동안 나는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기억에 남은 집과 실제로 찾은 집이 그처럼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섯 살인 딸아이는 이즈음 사물의 크기를 가늠할 때 아빠인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커다란 차가 지나갈 때면 아빠보다 크다 하며 놀라고 무언가를 설명할 때도 아빠보다 크거나 작다, 아빠보다 힘이 세거나 약하다 식이다.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기억의 집은 집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장소나 사물을 실제보다 크고 아름답고 멋지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곳에 깃든 정서가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꿈을 꾸며 살았고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기에 기억 속에서 그곳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하고 고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장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든 실제로 기억하는 건 사람과 사랑뿐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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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다닐 때 들은 얘기다. 인문대 신임 교수가 술자리에서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대학원생들이 그 교수에게 찾아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있지 않겠노라 경고했더니 그 다음부터 아예 술자리에 나타나질 않았단다. 그 교수가 누구인지, 그 후로도 문제가 없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30여년 전 흘려들었던 이 얘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음은 교수의 잘못된 행동에 즉각 응분의 조치를 취한 학생들의 행동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음대에도 성추행을 일삼는 교수가 있었다. 학생회가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지만 학교는 그를 잠시 해외에 나가있게 하는 걸로 무마했고 얼마 후 그는 다시 복귀했다. 실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성희롱을 고발한 한 조교의 용기로 대학 내 성희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사회의 권력형 성범죄는 여전하고 피해자 다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 내 여검사들조차도 성추행 가해자를 폭로하는 것이 어려운 사회에서, 하물며 아무런 힘도 없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제대로 대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수년 전 교수들의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며 파면에 이른 경우도 있었지만, 성희롱을 가볍게 여기는 남성중심 문화, 성추행이 밝혀져도 기껏해야 정직 몇 달에 그치는 교수사회의 온정주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2016년 가을,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가 대두되며 피해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의 심각성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단, 미술계, 영화계는 물론이고, 예술학교에도 피해자들의 고발이 쏟아졌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계는 조용했다. 피해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부 고발이 어려운 집단이어서다. 오랜 기간 일대일 레슨으로 형성된 교수와의 수직적 관계는 평생 음악 활동의 기반이고 그 관계를 벗어나 살아남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 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제자 성추행 문제로 파면에 이른 음대 교수를 제자들이 옹호하며 피케팅을 하고 거리음악회를 열었던 것은 이런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일부 음대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지만, 영향력이 큰 인물일수록 학생들도 그와 이해관계를 공유하기에 내부 문제는 밖으로 발설되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음대 교수들의 폭언, 폭행, 티켓 강매, 성희롱, 성추행 사건들은 안에서 곪고 곪아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문제가 드러나야 개선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논란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없다. 뼈아픈 반성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는 그 집단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문제는 성폭력을 비롯한 온갖 잘못된 관행들을 학생들이 당연시하거나 체념해버리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침묵하도록 강요받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다.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목소리 덕에 간과했던 문제를 깨달았고, 여전히 강고한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될 그들 옆에서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권력관계에서 약자에 놓인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인 것이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세계적인 노 지휘자 두 사람의 수십년 전 성범죄 고발로까지 이어졌다. 대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바뀌며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화한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성추행과 성폭행 피해자 156명의 증언을 일일이 경청하고 격려하며 가해자에게 175년을 선고한 미국 여성 판사의 얘기가 단지 먼 나라의 일이 아니기를… 앞서 용기를 낸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우리를 일깨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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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커피가 강배전으로 쓴맛만 내는 것은 커피가 식었을 때에조차 그 잡내들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그는 후일 프랜차이즈 커피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설탕에 대해 “무뇌아적 중독을 일으키는 ‘환상’의 맛”이라고, 고추장에 대해 “맛을 얼버무리기 위한 술책”이라고 썼다. 설탕과 고추장의 조합인 떡볶이 광고에 출연했다. 방송에서도 “길들여진 맛”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떡볶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얘기다. 먹방, 쿡방은 여러 스타를 만들어냈다. 요리사와 사업가가 대부분인 가운데 황교익은 직접 음식을 만들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명세를 탄 인물일 것이다.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 전국을 누비며 보고 먹은 식재료에 대한 지식, 유려하고 또렷한 문체로 이미 팬이 적지 않았던 그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왼쪽부터), 유시민 작가, 장동선 박사, 건축가 유현준, 가수 유희열이 2017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tvN '알쓸신잡2'(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송을 타며 날개를 달았다. <수요미식회>에 이어 <알쓸신잡>까지 히트했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 권위자이자 전문가가 됐다. 무거운 이름이 됐다. 이름에 무게가 생기면 신중해지기 마련이다. 가볍게 소비되는 연예인이 아닌, 전문가라면 더욱 그렇다. 직업윤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황교익의 최근 행보는 그래서 실망스럽다. 떡볶이가 맛없는 음식이라고 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음악평론가인 내가 차트 1위를 하는 곡이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평론가의 기준은 상업적 잣대와는 다를 수 있다. 영화를 고를 때 차트나 입소문 말고도 굳이 영화 평론가의 리뷰를 찾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뭔가에 대해 말해서 업을 일구는 사람에게 논란이란 일종의 세금과 같다. 논란이 주장 그 자체일 때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주장의 앞뒤가 다를 때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고추장과 설탕의 황금 조합인 떡볶이, 방송에서 맛없는 음식이라 설파했던 그 떡볶이 광고에 본인이 출연한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광고료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조금의 사례비를 받고 찍은 것”이라며 “불우 어린이 돕기에 응해줬던 회사이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에 찍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의 해명은 문제의 본질에서 비켜 있다.

광고를 볼 때 모델이 얼마를 받았는지 따져가며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 광고에 출연한 배경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욱 없을 거다. 전문가가 광고에 출연했을 때 발생하는 상품의 신뢰도는 연예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를 모르고 ‘선의’로 출연했다면 순진무구한 거고, 알면서도 했다면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오랫동안 언론에 몸담았던 그가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뒤 다시 내놓은 입장이 점입가경이다. 이명박 정부의 한식 세계화 정책으로 떡볶이가 국민 간식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대단히 아쉬웠다. 전형적인 진영론자의 대처지, 평론가이자 전문가의 말은 아니다. 백번 양보해도 이명박근혜 정부 이전에도 떡볶이는 대표적인 한국의 간식 아니었던가? 사실 이 모든 게 그가 떡볶이 광고만 찍지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나 꼽자면, 한결같이 사는 거라 말하고 싶다. 우리가 그런 이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닌가.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의 언행과 지금의 처신이 맞지 않을 때 비판을 겸허히 수용할 줄 아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름에 무게가 더해질수록 그런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 비판의 방향을 호도하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진영론으로 대처하는 게 어른의 자세는 아니다. 전문가의 자세는 더더욱 아니다. 그와 함께 <알쓸신잡>에 출연한 정재승 박사는 밀려드는 CF를 모두 고사했다고 한다. 부끄러워서였다고 하지만 광고와 전문가가 만났을 때 파급되는 효과를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 작가도 유희열에게 “광고는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듣고도 광고 섭외를 거부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만든 구두 홍보를 위해 처음으로 CF를 찍었다. 무게가 있는 이름이란 그렇게 쓰는 것 아닐까.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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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종숙의 전시를 흥미롭게 보았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천진한 제스처로 자욱하다. 우선적인 인상이 그렇다. 그리다 만 그림, 마구잡이로 ‘쓱쓱’ 선을 그어놓은 낙서 같은 붓질, 화면에 물감을 ‘북북’ 칠해놓고 그 위로 산과 나무, 풀, 새 혹은 자연풍경의 일부가 연상되는 암시적인 흔적을 산개시켜놓은 듯하다. 얼핏 전통적인 동양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위에 추상표현주의풍의 과감하고 드라마틱한 붓질이 다소 난폭하게, 공격적으로 지나간다. 이른바 드로잉적 요소가 무척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조가 깔린 바닥면에 부분적으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형상과 그 형상을 지우고 칠해서 덮어나가는 붓질이 몇 겹의 공간을 만들고 있는 화면 위로 마치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는 선들이 상당히 회화적인 맛으로 조율되면서 화려하게 춤춘다. 선, 붓질은 그리기와 칠하기, 선적이면서도 면적인 역할을 동시에 겸하고 있으며 특정 산수화를 해체하고 붓질로 환원한 것도 같다. 이렇듯 붓질을 상당히 감각적으로 운용해나가면서 그 붓질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표정의 여러 차이를 발생시키는 그림이다.

그림이란 결국 붓과 화면이 만나는 일이고 작가의 신체가 붓에 의탁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림은 그렇게 그 작가만의 고유한 붓질의 향연, 특이한 붓질들의 신체화를 개별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맛을 힘껏 즐긴다. 그것은 한 개인의 고유성과 헤아릴 수 없이 누적된 시간과 경험, 축적된 문화와 기억 등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니 붓질의 독자성을 추적해 한 작가의 고유한 미의식을 엿보는 것이 또한 현대미술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의 감각과 개념을 신체화시키는 가장 우선적인 정보, 단위가 바로 붓질인 것이다. 또한 붓질은 화가가 사고하고 통찰한 모든 것들, 개념의 신체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것은 화가의 무수한 행위들, 화면 위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붓질을 단순히 어떤 대상의 재현에 종속되는 단위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풍성한 의미의 다발을 지니고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이란 이렇듯 하나의 붓질에 담겨져 있다. 그러니 그림은 결국 붓질이기도 하다. 붓질을 잘 볼 수 있다면 그림을 분별하는 좋은 눈을 가질 수 있다.

전시장에 자리한 윤종숙의 그림에서 저 탄력적이고 감각적이며 무엇보다도 회화적 감수성을 잔뜩 거느리고 부유하는 붓질, 그 붓질이 자아내는 매력을 즐겁게 보았다. 상당한 내공이 깃든 붓질로서 작가의 신체성, 감각이 직접적으로 발화되는 흔적이기도 하다. 한편 이 그림은 추상과 구상이 충돌하고 선과 면, 바탕과 형상이 구분 없이 공존한다. 산의 능선과 산봉우리, 사찰이나 정자를 연상시키는 기와집, 수직으로 치솟는 나무, 새나 나비, 벌레들이 물감의 질료와 붓질 사이사이로 출몰한다.

작가의 의도는 관람자들에게 자신이 자연에서 보고 접했던 바로 그 느낌의 전달에 있어 보인다. 자신의 그림이 관람자 스스로 제각기 자신만의 추억, 기억, 감상의 폭을 넓히도록 해주는, 그러한 열린 상태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인 산수화 감상 및 그런 그림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체험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단지 그림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주어진 그림을 단서 삼아, 징검다리 삼아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자연에서 접했던 체험,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권유받는다. 작가는 자연의 어느 한순간이 안겨준 감각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동시에 모종의 활력과 기운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것은 작가의 몸과 감각, 기억에 의해 번안된 어느 한순간이고 그림 안에서만 기록된 모습이자 결국 작가의 신체와 지각으로 인해 가능한 풍경이다. 윤종숙은 이를 ‘마인드 랜드스케이프’라 부르고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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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는 종종 다쳐서 돌아왔다. 첫날부터 야산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밤송이에 손바닥을 찔려 돌아왔는데 이런 일에 능숙한 어린이집 선생님이 핀셋과 바늘로 가시 대부분을 뽑아주었다. 그렇다 해도 눈으로 보기 어려운 작은 가시 두어 개는 피부과에서 처치를 받아야 했다. 덩굴에 쓸려 자잘한 상처를 안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고 때로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를 넘어뜨려 그 아이의 치료에 필요한 소소한 약품들을 사주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다행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크게 다친 적은 없지만 지난가을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족들과 어울려 야외음악회에 간 날이었다.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음악회를 관람하는데 아이는 신이 나서 내 등과 머리에 올라타고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두 손목을 잡고 얼러주는데 아이가 갑자기 팔이 아프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는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살짝 붙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른쪽 손목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하필이면 그 자리를 모기에 물려 손목이 부은 건지 모기 물린 자국이란 그런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건드리면 아프다고는 했으나 울거나 떼를 쓰지는 않아서 괜찮으려니 했으나 처형네에 도착해 두어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자세로 손목을 어루만지기에 안되겠다 싶어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을 옮겨 다니는 우여곡절 끝에 아이가 손목을 다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른쪽 팔꿈치가 탈골한 거였다. 의사는 아이의 팔을 붙잡고 간단하게 팔꿈치뼈를 맞춰주었다. 아이에게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이제 아프지 않다고 했다. 인대 손상이나 골절과 같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고 방금까지도 얼굴을 찌푸렸던 아이가 환하게 웃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의 그 손 모양이 눈에 어른거렸다. 오른쪽 손을 달래기 위해 왼손을 살풋 얹은 듯한 모양새였고 아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위로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오른손을 달래는 왼손. 스스로를 달래는 아이. 거기에는 비장하다고도 할 법한 무언가가 있었는데 이처럼 우리는 오래전부터 결국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최선의 혹은 최소의 방법은 자신에게 기대는 것임을,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 속한다는 걸, 설령 부모라 해도 그다음일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돌아보니 나도 어린 시절에 무던히도 다쳐서 집에 돌아갔다. 손바닥, 무릎, 정강이가 까져서 돌아오기 일쑤였고 십여마리 벌에 쏘여 돌아와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일은 드물어졌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런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돌아오지 않게 되었으나 마음을 다쳐 마음을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몸은 멀쩡하지만 나처럼 마음을 다친 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퇴근 시간 무렵의 길거리에서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피곤한 얼굴로 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거나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 오른쪽 손을 달래기 위해 왼손을 살풋 얹을 힘조차 없어 보이는 사람들.

아이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다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점점 드물어질 테고 대신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이 많아지리라. 몸이 멀쩡해도 마음이 아프다는 걸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을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마음을 치유하는 일도 전적으로 아이에게 속하고 말 것이다. 아이는 혼자 고통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고 이 모든 걸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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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볼 빨간 사춘기의 고향이자 부석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전주 한옥마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운 무섬마을, 이 마을 앞의 외나무 다리 등이 참 좋다. 시내에서 한참 벗어나 소백산 자락 입구에 무쇠달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초겨울 시골 마을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옷을 벗은 나무들이 즐비했고 많지 않은 주택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간이역인 희방사역이 있다. 곧 폐역을 앞두고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제법 번성했던 역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 자체가 역이 생기고 돈이 모여들면서 생긴, 철교에서 따왔으니 평범한 농촌이 번성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은 근대화의 흔적을 나이테처럼 두르고 있었다. 일제시대 역무원들이 묵었던 건물이 폐가로 남아 존재한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아치형의 큰 터널도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건축물을 가까이서 보는 게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다. 사진을 찍으니 그대로 그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인 슬레이트 지붕도 곳곳에서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농촌진흥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여러 시설들까지, 20세기의 풍경이 이곳저곳에 쌓였다. 새로운 흐름이 생기면 지난 시간의 잔재들을 싹 밀어버리는 대도시의 생태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 낯설었다. 내용에 대한 고민 없이 토건 사업으로 정책의 흔적을 남겨온 지난 시간의 증거 같기도 했다.

시골 마을을 방문하기 좋은 때는 역시 초목에 색이 도는 봄부터 가을이다. 그럼에도 겨울의 초입에 이 마을을 찾은 건 캐러밴에서 숙박하기 위해서다. 난방도 잘되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수압도 좋다. 무엇보다 철로변에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가끔 지나다니는 기차 소리는 비록 ‘칙칙폭폭’ 소리를 내지 않아도 운치가 있으니까. 숙소에 짐을 풀고 부석사에 올랐다. 108계단을 오르려니 절로 번뇌가 찾아왔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약수 한 바가지를 마셨다. 어느 새 내린 석양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때마침 약하게 깔린 안개에 수묵화가 따로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영주의 명물이라는 랜드로바 떡볶이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여길 누가 올까 싶었는데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굽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바비큐, 하면 으레 떠들썩한 풍경을 연상하지만 마을을 닮아 조용했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숯불을 바라보는 그들에게선 고기 구워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우리 차로 들어가 떡볶이와 어묵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차창 밖으로 간혹 기차가 지나갔다. 덜컹덜컹, 무심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완행열차와 함께 밤도 깊어갔다.

여행을 갈 때는 명승지나 빼어난 풍광이 있는 곳으로 간다.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는다. 호텔이나 모텔 등에서 잠을 청한다. 일상화된 여행의 풍경이다. 빼곡한 계획으로 시간이 채워진다. 나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좀 더 게으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제법 배치한다. 아니,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최적이었다. 일반적인 도시나 관광지였다면 식사시간 외에 카페에서 차라도 한잔하고 그랬을 것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무쇠달마을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앞서 썼던 문장들 외에 그리 덧붙일 게 없다. 다만 민박이나 여관 대신 캐러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느 여행과는 달랐던 이유다. 볼 것도, 할 것도 딱히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일상의 틈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내면의 소리와 감정이 만드는 파동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아를 찾기 위해 굳이 갠지스강까지 간다지만, 거기 자아 자판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루 편히 묵을 수 있는 시설이 있는 곳에, 침묵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주변 환경이 있다는 건 오히려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없기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쾌적한 결핍이라 이름 지었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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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수업이 끝났다. 학교에서의 강의가 이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최근에 와서 그런 기미가 더욱 강해졌다.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집중도나 열의를 찾기가 어렵고 대신 권태로움과 무료함이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어서 난감했다. 

무엇보다도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현재의 시간을 압도하고 있으며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앞당겨 지금의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사는 것이고 결국 지금은 사라진 이상한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정신병자들이거나 유령들이다. 대다수 학생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갖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표정들을 짓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거나 자고 있다.

중·고등학교까지의 생활이란 게 오로지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만 설정되어 있기에 정작 그 목표가 달성된 순간 아이들은 맥없이 풀려나버린 존재가 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격렬하게 맴돈다. 

그 어떤 목표도 죄다 사라져버린 공황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적극 찾아나가는 것에 대해 배운 적이 전혀 없고 그런 습관 또한 몸에 배지 않은 아이들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니 이들이 대학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열렬히 찾아나가며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를 갖기는 지난한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오로지 취업률과 성과 위주로 대학평가가 강제되는 상황에서 예술대학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었다. 현재 지방의 미술대학들은 거의 사라져버렸거나 디자인과에 수렴되거나 혹은 문화산업적이고 경영학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묘한 이름으로 겨우 살아남고 있는 형국이다. 진정으로 아티스트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갈 만한 대학 자체가 드물고 정작 들어와도 워낙에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대화하는 터에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면서 지레 전공을 포기하거나 타 전공을 기웃거리면서 스펙을 쌓도록 부추기는 현실에 종속되고 있는 지경이다.

학생들이 대학에서의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부모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학부모들 자체가 우리 사회 현실이 요구하는 삶의 논리에 길들여져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무서운 불안과 공포를 지니고 있기에 아이들에게 권하는 전공이란 결국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돈벌이가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되는 전공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는 안이한 소시민적 삶에 한정 없이 굴복시키는 생의 논리를 내재화한다. 그러니 미술대학 자체를 외면할 것이다. 혹 미술대학에 보내는 경우에도 디자인이나 취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전공으로 제한하려 든다. 

그러한 부모의 인식에 따라 전공을 선택한 아이들, 4년제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강박에 따라 점수에 맞춰 들어온 아이들 혹은 전공 불문하고 어떤 식으로든 들어온 아이들에게 대학에서의 전공이란 자신의 소질, 생의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겉돈다. 그러니 학교생활과 수업 역시 매번 미끄러질 뿐이다. 따라서 이런 학생들이 졸업을 해서 미술계로 나가 좋은 작가가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아니 미술대학에서의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

한편 미술대학에 와서 작업을 하겠다는 학생들은 좋은 작품을 하는 작가가 되는 게 목표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취업률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너무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올 한 해 수많은 아트페어를 보았고 적지 않은 전시를 봤지만 눈에 띄는 좋은 작가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좋은 전시도 극히 드물었다. 아트페어에 참여한 그 많은 작가들은 시장에서 팔리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을 노골적으로 베끼느라 엉망진창이었다. 한 작가의 미술에 대한 생각, 그만의 감각, 감수성과 고유한 그림의 맛이 논의되는 게 아니라 그저 시장에서 얼마나 팔리느냐 라는 정량적 평가가 작가 작품의 질을 압도하는 형국이 빚은 참사다. 이는 결국 대학에서, 아니 그 이전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과 마음으로 사물과 세계를 보고 이를 애써 자기 식으로 표현해내면서 열정적으로 살아오는 대신에 정답 같다고 여겨지는 것을 슬쩍 간편하게 차용해서 교묘하게 자기 것으로 포장하고, 작업하는 일 역시 상품제작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미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불거져 나온 왜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 화단이 빚고 있는 이 온갖 병리적 현상의 기원은 이미 우리의 교육제도 안에 깊게 자리를 틀고 있는 셈이자 더불어 학부모들이 지닌 비겁한 생의 논리로 인해서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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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을 거쳐 후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몹시 내렸다. 베트남 어느 도시나 그렇듯 오토바이는 개미떼처럼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걷기 힘든 곳 투성이였다. 날씨까지 안 좋았으니 첫인상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 지역의 명승지는 가지 않는 편이다. 런던에 갔을 때 비교적 오랜 시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빅벤이나 버킹엄 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도쿄, 오사카, 방콕, 뉴욕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유산은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하다는 게 지론이기 때문이다. 대신 동시대의 문화를 느끼러 가곤 한다. 클럽을 다니고 레코드 스토어를 들른다. 그런데 후에라니? 여행, 하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지인이 후에가 미식의 도시라는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먹어댔다.

이태원을 연상케 하는 여행자 거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화려한 곳을 쏘다니며 배를 불렸다.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 할 요량이었다. 어느 도시에나 음악 술집은 있기 마련. 앱을 켜서 찾아보니 음악을 주요 해시태그로 내세운 바가 있었다. 여행자 거리 외각의 어두운 골목 한쪽, 라이브 음악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10여석이 채 안되는 작은 바였다. 그 바의 한구석에서 무대조차 없이 현지의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었다. 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어디서 왔냐는 직원의 말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래하던 20대 초반 여성이 또렷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하는 거 아닌가. 그러더니 “한국 노래 하나 불러드릴까요?”라며 “잘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밴드 뷰렛이라고…” 하면서 뷰렛의 ‘거짓말’을 불렀다. 연주력, 사운드 같은 걸 따질 계제는 아니었지만 보컬의 한국어 노래 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단순히 가사를 외워서 부르는 걸 넘어서 어미 처리라든가, 감정 표현이라든가 하는 게 완전히 한국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물어보니 현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란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어디서나 한국 아이돌의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밴드 음악은, 그것도 라이브로는 처음이었다. 예전 미국에서 양희은과 송창식을 알고 있는 백인 청년을 만났을 때만큼 신기했다.

이 친구의 순서가 끝난 후에는 그 또래 청년이 나와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했다. 자세히 보니 이쪽에 드문드문 손님들이 있는 데 비해 무대(?) 옆쪽으로는 현지 젊은이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맨손으로 드럼 연습을 하고 누군가는 악보를 보고 있다. 보아하니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음악 술집이라기보다는 후에 음악 애호가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은 청년 하위 문화다. 기성세대의 인정, 주류 유행과는 상관없이 확고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1970년대의 무교동, 80년대의 신촌과 이태원, 그리고 90년대의 홍대 앞 문화가 모두 그런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바일과 SNS가 완전히 자리 잡은 지금, 즉 문화적 경계와 시차가 의미 없어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풍경일 것이다. ‘작은 세계’에서 문화적 역량이 축적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을 좇는 이들은 그 작은 세계를 과잉 소비한다. 순식간에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가 덮친다. 일상화된 구조다.

록과 한국 밴드 음악, 그리고 케니지까지 장르도 스타일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후에의 청년들을 위해 작은 액수나마 팁을 자리에 놓고 나왔다. 덥고 조금은 습한 밤거리 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배웅해준 건 역시 그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베트남 음악이었다. 홍대 앞에서 버스킹이란 이름의 소음을 유발하는 이들보다는 실력이 좋았고, 실용음악 시스템에서 학점에 길들여진 이들보다는 표현력이 좋았다. 후에의 이름 모를 젊은이들에게서 청년문화의 추억을 떠올렸던 이유일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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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충주에 갔다가 문을 닫은 여러 수석 가게를 보았다. 그 앞에 흩어진 돌들이 흡사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골동가게와 옹기를 파는 상점들도 썰렁하고 마냥 적조했다. 차가운 날씨와 인적이 그친 거리에서 만난 그 풍경이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수석을 수집하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난이나 분재, 골동 수집 등도 그렇다. 하여간 격조 있는 취미들이 빠르게 사라지며 밀려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선인들의 돌 사랑은 유별났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말년의 취미로 수석만 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마당에 큰 괴석을 놓아두고 방안에는 자그마한 돌 하나를 갖다 두어 수시로 눈을 맞추었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라 그 작은 돌에서 거대한 산의 자태를 헤아렸다. 선인들은 산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자 형상을 지닌 채 굴곡을 이루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 굴곡과 연속됨은 다양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숨결이자 밀집된 에너지와 같은 것이고 그것에 의해 어떠한 강요된 형태도 지니지 않는 가능한 모든 형태들이 역동적으로 응고된 것이라고 인식했다. 아울러 산은 치솟으면서도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전진해 나가면서도 자체적으로 응축되며 펼쳐져 나가기에 그 크고 웅장한 산은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덕 있는 존재로도 보았다.

이처럼 산과 그 축소된 돌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해서 선인들은 수석을 완상하면서 우주자연의 이치를 헤아리는가 하면 돌이 지닌 미덕을 인간 삶의 궁극적인 덕목으로 끌어안으며 살고자 했다. 돌이 지닌 진중함과 침묵, 장수와 부동의 자리에서 그 무엇인가를 살피고자 욕망한 것이다. 아마도 늙어 침침한 눈으로 돌의 얼굴을 애써 바라보며 자신의 최후의 얼굴을 염두에 두며 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돌에서 각자 어떤 얼굴을 떠올렸을까? 돌은 또한 그림 그리는 작가들에게도 무한한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질로서 환상을 심어주고 환영을 자극했으며 또 다른 존재를 그 돌 안에서 찾아내도록 권유해준 매개였다. 그것은 자연이 만든, 시간이 빚어낸 기이한 형태이자 신비다. 최초의 예술작품인 돌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하고 이미지를 연상하는 ‘사유하는 인간’ ‘예술 하는 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작가들에게 돌은 익숙한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다.

최근 경기도 양평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한 동양화가의 작업실을 다녀왔다. 돌을 유난히 사랑하는 그는 화면에 검은 돌 하나를 그려놓았다. 수평으로 길게 누운, 평원석을 닮은 까만 돌은 오석과도 같은 단호한 검정의 색과 견고한 물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매우 거칠고 조밀한 표면의 상처, 질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업이다. 돌이 지닌 단호한 물질감이 화면 위에 부착되면서 그림과 조각의 경계가 슬그머니 주저앉고 촉각성을 지닌 까만 돌이 납작한 평면의 화면을 무한한 공간으로 물리면서 돌진하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었다. 순간 그것은 광활하고 막막한 우주공간에 단 하나의 돌이 되어 자기 존재를 극대화하고 있다. 나는 그 돌 그림을 보면서 수석을 완상하는 체험을 떠올렸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자 아득한 시간의 흔적으로 인해 이루어진 최후의 얼굴이자 무수한 세월의 시련을 제 몸으로 손수 겪어낸, 치러낸 상처로서의 피부를 간직하고 여기까지 살아온 이력을 지녔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의 축적이 놓여있고 자연의 힘에 의해 창조된, 형언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흔적이고, 인위가 아니라 무위의 소산이다.

돌을 그리는 작가는 그 무위를 인위로 다시 복기한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무수한 기억을 더듬는다. 돌이 지닌 무거운 기억과 시간을 덩어리로, 질료로 구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돌 안에 박힌 정신 하나를 애써 찾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돌의 마지막 얼굴이고 여기까지 살아남아 이룬 기적 같은 얼굴이다. 우리 모두도 저 하나의 돌처럼 최후의 얼굴 하나를 그야말로 절박하게 만들며 살고 있는 셈이다. 돌 하나에도 그토록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피던 선인들의 시선과 마음이 새삼스럽다. 충주의 어느 수석 가게 앞에서 뒹굴던 돌들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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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마음이 기우는 문장들이 있다. 아직 다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저리고 아끼고 아껴 읽어야 했는데 너무 빨리 읽어버린 것 같아 속상하고 다 읽은 뒤에도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있다. 별것 아닌 듯한 이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글쓴이가 얼마나 오래 머뭇거렸는지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문장들에 나는 유독 마음이 기울곤 한다.

세월호 선체조사에서도 끝내 유해를 찾지 못한 미수습자 고 권재근씨와 혁규군 부자의 안치식이 열린 20일 오전 인천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내 화장시설인 승화원에 혁규군의 영정과 관이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아무리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쓴다한들 결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으로 써 온 문장들이 내게도 있다. 그 문장들은 대부분 할머니에 대한 것들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홉 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로 내가 겪었다고 할 법한 최초의 죽음이었다. 그보다 몇해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관념이 내 심중에 자리 잡았던 게 바로 그때여서였다. 그렇게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게 있었다. 아홉 살이 되던 그해 들머리, 아직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지난 세밑부터 내내 윗방 아랫목에 자리보전을 한 채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씩 할머니의 가느다란 팔뚝에 링거 주삿바늘을 꽂았고 마당에 쌓여가던 눈보다 희디흰 머리칼 몇 오라기가 할머니의 이마에 들러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끔 정신을 차린 할머니는 당신이 왜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할머니가 무서웠다. 내게 가장 살가웠던 한 사람이 죽어간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그냥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두려웠다. 어느 날 밤 할머니의 임종이 가까워서 그랬는지 부모님은 나를 아랫집으로 보냈다. 밤이 깊었고 아랫집 육촌 형제들이 너희 할머니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집으로 올라가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곡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나는 아랫집 육촌 형제들의 방에서 자다 깨다를 되풀이하다 다음 날 아침에야 집으로 갔다. 병풍으로 가려진 탓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볼 수는 없었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른다는 태도를 유지했고 출상하던 날에도 마을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채 멀어져가는 상여를 눈으로만 배웅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무수한 문장을 썼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그 마음을 문장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 탓에 비참한 기분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죽음을 직시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며 스스로를 달래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오랜 세월 할머니를 글로 쓰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비록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해도 내가 만약 그때 할머니 곁에서 임종을 지켰더라면, 죽어가는 할머니의 손을 어루만져 보았더라면, 당신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줬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대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면서 한바탕 서럽게 울었더라면 이토록 쓸모없는 문장들을 아프도록 되풀이하여 쓰는 일에서 오래전에 놓여났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얼마 전 세월호 희생자 가운데 미수습자 5인의 유족들이 유해 수색을 포기하고 장례를 치렀다. 아마도 그이들은 죽은 이의 낯을 한 번만이라도 쓸어보고 싶었으리라. 죽은 이의 차가운 두 손을 어루만져보고도 싶었으리라. 얼마나 외로웠냐고 얼마나 무서웠냐고 이제 그만 외로워하라고 이제 그만 무서워하라고 죽은 이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고 싶었으리라. 이제 그이들은 허공에 손을 내밀어 허공을 쓰다듬어야 하고 허공을 어루만져야 하고 허공에 대고 속삭여야 하리라. 허공이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므로 한평생 그래야 하리라. 바람만 불어도 허공에 속삭인 말은 흩어질 것이므로 바람보다 먼저 속삭이고 바람보다 오래 속삭이고 바람보다 빨리 울고, 바람보다, 언제나 바람보다.

<소설가 손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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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 주목받은 이는 작곡가 윤이상이 아닐까 싶다. 매년 봄이면 그의 고향에서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TIMF)’가 오페라와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을 집중 조명한 것은 물론이고, 여러 오케스트라와 앙상블의 정기 연주회, 독주회와 독창회 등 크고 작은 음악회들에서 1년 내내 그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클래식 음악계는 매년 탄생·서거 몇 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들로 넘쳐나지만, 20세기 한국 작곡가의 음악이 중심에 놓인 적은 별로 없었다. 서양음악 도입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이제 우리도 100주년을 기릴 만한 작곡가를 갖게 된 것이다.

작곡가 윤이상 (출처:경향신문DB)

이뿐이 아니다. 서울문화재단은 ‘프롬나드 콘서트’를 기획해 서울 도심 곳곳에서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인간 윤이상의 모습을 담담히 풀어낸 연극 <상처입은 용>(이오진 작, 이대웅 연출)을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은 경기도립극단은 서울에서도 재공연을 했으며, 서울오페라앙상블은 동백림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600일간을 다룬 나실인의 창작오페라 <나비의 꿈>을 선보였다. 하지만 촛불집회와 탄핵으로 변화된 정국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광범위한 윤이상 재조명이 가능했을까? 작년 연말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좌초 위기에 처했던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몇 달 후 추경예산 편성으로 기사회생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지휘자 성시연이 이끄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베를린음악축제’ 초청 윤이상 공연에 경기도지사와 도의회 의장까지 동행한 것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1970~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윤이상의 음악은 국내 연주자에게는 물론이고 내한 공연 온 외국 연주자의 프로그램에서도 삭제되곤 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4년 예음문화재단이 주최한 ‘윤이상 음악축제’를 계기로 그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윤이상을 ‘친북인사’로만 여긴 정치세력은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분단과 냉전 체제에 온몸으로 맞서며 상처투성이가 된 음악가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에 관한 왜곡과 음해는 사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민족의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세대, 불혹의 나이에 유럽 유학을 떠나 10년 만에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자마자 국가권력에 의해 납치되어 간첩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예술가, 전 세계 음악인과 지식인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독일로 돌아간 뒤 음악으로 남북의 평화 공존에 기여하려 한 이상주의자, 음악은 ‘진실하게 살려는 처절한 노력의 표현’임을 평생 간직했던 작곡가. 낡은 이념 프레임에 갇힌 우리 사회는 아직 한 예술가를 그가 처한 역사적 조건과 시대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초기 가곡집 <달무리>에서 마지막곡 ‘에필로그’에 이르는 120여곡의 작품만이 아니다. 모순에 찬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그의 존재는 분단과 냉전 체제에서 형성된 이념 대립을 넘어설 때 온전히 평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과 문화의식이 얼마나 성숙해 가는지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100주년을 맞아 윤이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났지만, 그의 음악은 많은 이들에게 아직 낯설게 다가온다.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후반은 어느 때보다 새로운 음악어법이 모색되던 시기였고 그 역시 한국의 음 관념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방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올해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여 선보였듯이, 윤이상의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이제 우리 음악인들의 몫이다. ‘예악’ ‘무악’ 같은 역동적인 관현악곡이든, 자전적인 첼로 협주곡이나 ‘밤이여 나뉘어라’ 같은 강렬한 메시지의 곡이든, 특유의 음향제스처로 표현된 실내악곡·독주곡이든, 아니면 한국에서 쓴 가곡·동요·교가든, 윤이상의 음악 한 자락을 즐겨 들을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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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의 노량진은 좀 특별했다. 활어 수족관 대신 스티로폼 박스가 주욱 늘어선 도매시장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하는 친구 따라 간 덕에 TV에서나 보던 경매도 직접 봤다. 귀공자처럼 스티로폼 박스 사이를 누비며 필요한 물건들을 찍어 놓은 그와 시장 뒤편 포장마차로 향했다. 겨울바람에 강바람까지 더해진 노량진에서 그 허름한 포장마차는 이글루처럼 느껴졌다. 상인과 경매인, 트럭 운전사 등 새벽 시장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모여 드는 곳이었다.

어둑한 내부를 연탄 난로가 덥혔다.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나가는 이들이 있었고, 손맛 좋은 이모가 프라이팬 하나로 만들어내는 계란말이 등을 안주 삼아 소주 한 병 비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 틈에 비집고 앉아 친구가 가져온 고등어를 난로에 구워 소맥을 말아 마셨다. 팔도에서 모여든 이들이 나누는 새벽의 대화는 어떤 활어보다 싱싱했다. 난방 따위 없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찬물에 손을 대야만 살아가는 이들만의 치열함은 난로보다 뜨거웠다. 난 그때 옆에 있던 일행에게 말했다. “이게 진짜 삶이라는, 그 무엇 같아.”

막상 쓰려니 민망한 그 대사를 친 일행과 연애를 하게 됐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복잡하다면 제법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연애를 제법 해봤으나, 이전과는 좀 달랐다. 결혼한 사람들에게 가끔 듣는 “왠지 이 사람 하고는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프러포즈를 했다. 승낙을 받은 후엔 일사천리였다. 시간에 가속도가 몇 배로 붙었다. ‘그래도 한참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청첩장을 찍고 있었다. 마치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에 들어와있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보면 식장에서 사진 찍고 있을 거라고 하더니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을 앞둔 사람들의 최대 고민이 시작됐다. 청첩장을 어디까지 돌려야 하나, 몇 년 만에 연락해서 결혼 소식을 전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누구나 했을 그런 고민들. 그런 나에게 한 선배는 말했다. “판단은 상대의 몫이야. 일단 연락하는 걸로 너의 몫은 끝이고.” 그 말에 따라 연락처를 쭉 훑었다. 세상에, 꿈에도 몰랐다. 내 전화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번호가 들어 있을 줄은. 이 사람이 누군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번호도 엄청났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는 자기 얼굴이었던 프로필 사진이, 아기 사진으로 바뀐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술잔을 부딪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추려내던 중, 역시 한 인생 선배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결혼을 앞두면 반드시 자기 삶을 되돌아볼 때가 생겨. 넌 나이가 있으니 더할 거야.”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자기 얼굴 대신 아이 얼굴을 정체성으로 내건 사람들은 진작 깨달았을 사실일 테다.

마치 텔레마케터라도 된 양 계속 전화를 돌렸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카톡까지 동원했다. 다들 이래서 카톡으로 청첩장을 보냈으리라. 그때마다 섭섭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김씨를 거쳐 박씨 정도까지 왔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는 여자친구와 노량진으로 향했다. 지난겨울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에게 도매시장의 세계를 알려준 친구와도 함께했다. 다시 이글루 같은 포장마차에서 우리는 소맥을 마셨다. 시큼한 섞박지와 계란말이, 동태찌개, 목살볶음 등을 이모는 계속 내왔다. 손맛이 여전했다. 시장의 풍경 또한 여전했다. 여전한 풍경과 맛에 취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집으로 돌아올 사람이 있다는 것만 달라졌다.

여자친구는 침대에 누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삶을 되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 같아.” 그 말을 하루의 유언처럼 남긴 후, 그녀는 잠들었다. 왠지 찡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존재가 생긴다는 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이게 진짜 삶이라는, 그 무엇 같았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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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거리는 인간다운 보행을 거부한다. 서울은 쾌적하고 아름다우며 아득한 시간의 층과 생의 이력과 문화의 무수한 결을 함축하고 있는 도시가 아니다. 오로지 현재의 욕망만이 수시로 교체되는 공간, 과거가 부재한 유령 같은 도시다. 그곳에서의 삶은 불편하고 거칠며 더러 폭력적이자 자본의 힘에 눌린 구조물로 채워져 있다.

그 피곤한 길들을 따라 걷다 보면 으레 고층빌딩의 주변으로 이른바 환경조형물이란 것들이 튀어나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도시공간에는 이런 조형물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고 이제는 간판처럼 붙어있다. 그것은 조각 작품인가 아니면 공공미술인가, 괴이한 물질덩어리인가? 마지못해 건물과 건물 사이에 겨우 끼어들어가 있는 그 사물들은 이름을 지을 수 없는 변종들로 주변 공간과 그곳을 생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과 무관한 표정으로, 홀로 창백하게 고립되어 있다. 이른바 공공조형물조례법의 혜택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다분히 형식적인 절차에 따라 마지못해 세상 밖으로 나온 이 애물단지, 천덕꾸러기들은 그동안 숱하게 욕도 얻어먹고 이런저런 구설에 무수히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조형물들은 흉물스럽게 들어서고 매번 보던 작가의 작품만이 반복해서 세워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 그 많은 조형물, 공공미술 중에서 볼만한 수준의 작품은 극히 드물다. 나로서는 흥국생명 사옥 앞에 위치한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과 같은 수준의 것을 찾기가 힘들다.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장군상이나 세종대왕상 같은 것은 공공조형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인 의도를 지닌 조형물로서의 성격이 짙다. 여타 대부분의 공공조형물이라는 것들은 한 공장에서 일괄 납품한 것처럼 획일적이고 조악하며 이상한 형태로 마감되어 있다.

조형적인 미도 없을뿐더러 특정 공간과의 맥락도 부재하다. 문화는 없고 문화라는 껍데기만을 걸치기에 급급한 우리네 상황이 고스란히 그 조형물의 표면에 얼룩져있다. 진정한 환경조형물, 공공미술은 실종되고 그 탈을 뒤집어쓴 키치적인 오브제 혹은 사이비 공공미술들만 버글거린다. 그러한 조형물은 건축업자나 건물주의 자의적 결정과 형식적 통과의례를 거쳐 그저 빈자리에 ‘쿵’ 하고 던져놓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것이 떨어질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의 질이나 주변 환경과의 고려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좋은 작가의 작품을 신중하게 선정하려는 생각도 없고 전문가의 조언이나 의견 역시 참고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거칠게 말해 천박한 자본의 횡포와 상업화랑과의 협잡, 작가들의 굴욕적 타협, 관계자들의 이해관계가 복마전처럼 얽힐 대로 얽혀 처절해진 것이 우리네 공공미술, 환경조형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조형물 설치란 것이 작품 구매결정과정에서의 합의 도출, 전문가의 참여와 공공적 논의과정이 생략되어 이루어지고 있고 공공미술의 기획이란 큰 틀에서 도시공간의 조형물 구성에 대한 일정한 조율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었음은 매번 지적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성과 환경과 공간에 대한 인간중심의 사고와 문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인간의 감각과 문화가 개진되고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의 확보와 공간의 정치화는 오늘날 무척 예민한 문제가 되었다. 저급한 자본주의문화로 기형화된 우리들 삶의 공간에 공공미술이라고 들어와 앉아 있는 그 무수한 조형물들이 도대체 무얼 하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날 미술작업은 그 자체의 미학적인 가치나 물질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과의 소통에 의하여 진행되고 완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보다 민주적인 예술가와 관람객 간의 관계 정립, 그리고 개방된 사회 네트워크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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