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눈앞에 다가온 이 즈음이면 여러 해 전 잠시 들렀던 크레타가 떠오른다. 그리스 여행을 마음먹었을 때 내가 염두에 두었던 곳은 아테네가 아닌 크레타였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거기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어서였다. 죽어 묻힌 이를 그리워하는 건 내가 오래된 책들에서 위안을 구하는 것과 비슷했지만 무엇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어서였다. 크레타는 포근했다.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납지 않았다. 옛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라클리온 구시가는 미로와 같은 골목을 품은 살아 있는 유적지였고 국가부도 사태로 어수선했던 아테네와는 달리 차분한 활기가 정갈하게 내려앉은 곳이었다. 계절 탓에 관광객이 드물었음에도 야외 테이블은 식사를 하며 맥주를 마시거나 물을 타면 우윳빛으로 변하는 우조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렌지 나무 우듬지에는 수백마리의 지빠귀가 깃들었고 해질 무렵이면 새떼가 허공에 그물을 치며 날아다녔다. 

오후 늦게 그곳에 도착한 나는 물어물어 예약한 호텔을 찾아갔고 이름은 호텔이지만 여관이나 다름없는 방에 짐을 풀고 산책을 나섰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에는 늘 비슷한 기분이 되곤 했는데, 이를테면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제주도 사람에게 “육지에서 왔수꽈?”라는 질문을 듣고 새삼 나는 육지 출신이구나 하고 깨달았듯이 낯설고 이질적인 그 공간이 내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소리 없는 질문에 대답을 해보려 애썼지만 어떤 말도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이 곤혹을 실감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며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와 쉬이 잠들 수 없는 방에서 두 손으로 무릎을 그러안은 채 왜 이토록 먼 곳까지 와야만 했는지, 촌놈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뛰어넘은 게 아닌지, 그런 두려움을 곱씹으며 졸다 깨다를 반복했고 피곤이 덜 가신 채 아침을 맞았다.

첫 행선지는 카잔차키스의 무덤이었다. 나는 지도를 짚어가며 방향을 잡았지만 주택가를 지날 때는 길을 잃은 게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었다. 마침 슈퍼에서 장을 보고 나온 중년의 부인에게 길을 물었고 그이는 한참을 설명하다가 내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타라고 했다. 그이는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나는 답했다. 무얼 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소설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다, 환영한다, 영광이다 등의 말을 했고 자신이 카잔차키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덧붙였다. 나는 아마 얼굴이 달아올랐을 테다. 그이는 계단만 오르면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닿는 성벽 아래 나를 내려주었고 깊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기대한 대로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평평한 돌과 십자가 하나, 묘석 하나가 전부였고 묘석에는 그의 소설에서 따온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 파문을 당해 살아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그. 주검이 되어 이 고즈넉한 성채 위에 몸을 누인 채 영원한 침묵에 들어간 그. 나는 고개를 돌려서 이라클리온 앞바다, 에게해를 보았다. 그리고 돌담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는 내 또래의 사내를 보았다. 관광객은 아닌 듯 그는 가벼운 차림이었고 우수에 잠긴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과 비슷한 걸 보았다. 우리 모두 말없이 누운 한 소설가를 등진 채 바다를 보는 중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한국어로 글을 쓰는데 내 자부심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그를 슬프게 하는 게 무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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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발을 디뎠던 시절에도 서울은 1000만이었다. 한마디로 어딜 가나 사람,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시에 살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도시인들이 보여준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물론 그보다 앞서 혼란스러웠던 사소한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학교 근처 식당의 물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이 3000~4000원쯤이었다. 거기에 밥 한 공기를 추가하려면 1000원을 더 내야 했는데 나는 이 셈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밥 한 톨이라도 흘렸다간 보릿고개부터 시작해 박통시절을 지나 신토불이에 이르기까지 지겹게 훈계를 들어야 했던 나로서는 찌개 값의 8할은 밥값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밥 한 공기를 추가하려면 2000~3000원쯤을 더 지불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거다. 내가 보기에 밥 한 공기가 1000원이라는 건 정말 헐값이었고 그렇게 헐값에 먹어도 좋을 만큼 쌀밥 한 그릇이 대수롭지 않은 양식이라는 점을 납득하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는 그런 사실들에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건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너무 흔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태도였다. 물론 이런 시구가 하나의 수사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선뜻 마음이 열리는 수사도 아니었다. 아무리 서울이 넓다 해도 1000만이라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어디에서나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그런 환경에서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 서울보다 지겨운 곳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단 한 명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렵고 외롭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일 테니까.

나는 그 지옥이 싫지 않았다. 사람이 그냥 무서울 때도 있고 관계 맺기와 소통의 어려움 탓에 무서울 때도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나를 늑대처럼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사람의 일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해도 기적처럼 소통이 이뤄지는 짧은 한순간이 없지 않을 테고 절망이 만연해도 희망이 전멸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 또 하나의 모래알로 섞여들고 싶었고 그들과 사연을 만들고 싶었다. 사연이란, 적어도 내게 사연이란 삶의 요체였다. 고향마을은 오래전부터 쇠락해가는 중이었고 내가 떠나올 무렵에는 이미 반쯤 부서진 곳이었다. 이내가 끼고 땅거미가 드리워지면 밤보다 먼저 침묵이 찾아왔고 기나긴 밤을 지키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땅을 떠나 어딘가를 헤매는 중이었고 그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는 일도 드물었다. 하루하루가 100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되풀이되었다. 사람마저 어제의 그 사람이 내일의 그 사람일 거였다. 그러나 어느 이슥한 밤, 누군가의 방에 모여 소일거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면 그이들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한 낯선 사람들이 되곤 했다. 그이들의 가슴 바닥에 쟁여졌던 사연들이 풀려나와 이야기의 그물이 만들어졌고 침침한 백열등으로는 결코 그러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그이들은 상심과 회한과 그리움만을 그물에 남겨둔 채 그물을 빠져나가는 물처럼 캄캄한 마당을 흘러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갔고 아마도 내가 알던 그 사람으로 되돌아와 잠자리에 누울 거였다.

사연을 지닌 존재들. 나이를 먹어가는 게 아니라 사연을 쌓아가던 사람들. 사람이 떠난 자리를 기억하고 그 빈자리에 이야기를 채워 넣어 세계를 무한히 확장하며 살던 사람들. 그런 이유로 내게 서울은, 1000만이 북적이며 사는 서울은, 1000만의 사연이 어우러져 1000만배로 확장된 공간이며 가능성이었다. 사람이 흔할수록 사연은 깊어지고 내밀해진다. 사람이 흔할수록 사연이 확장시킬 영토는 무한에 가까워지며 이 작은 지구에 우주 전체를 이주시킬 수 있게 된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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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비유로 삼은 표현들은 많으나 그중 내 마음에 가장 깊숙이 들어와 날마다 피어나는 게 바로 이야기꽃이라는 표현이다. 누군가 웃을 때 그냥 웃는 게 아니라 웃음꽃이 피어났다고 표현하면 혼자 외롭게 피어나는 꽃을 떠올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흔한 들꽃이라 해도 무리지어 피어나면 장관을 이루듯 사람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꽃은 전염성이 있어서 금세 다른 이의 얼굴에서도 꽃이 피어나게 마련이고 이처럼 함께 마주보거나 둘러앉은 이들이 더불어 웃을 때 웃음꽃이라는 낱말도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야기꽃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꽃은 한 송이 고독한 꽃의 이미지보다는 반딧불이 무리가 낮은 허공에서 끝없이 반짝이듯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봉오리들이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툭툭 터지며 피어나는 꽃무리의 이미지에 가깝다.

어린 시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열 살 무렵의 어느 겨울 새벽에 깨어났다가 어머니가 없는 걸 알고 공포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이야 자주 있었겠지만 유독 그 무렵의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그때를 경계로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졌기 때문일 테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이런저런 생각들, 어머니가 보따리를 싸 도망을 쳤을지도 모른다거나 전래동화처럼 시체를 파내러 갔다거나 혹은 부엌에 칼을 갈러 갔다거나, 지금까지 어머니라 알고 있던 당신이 정말 내 어머니가 맞을까 등등 끔찍한 상상들을 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물론 어머니는 연탄을 갈러 갔거나 볼일을 보러 간 것에 불과할 테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이상하게도 이 불쾌한 상상들, 최악을 가정하는 상상들이 사실은 나를 구원해준 게 아닌가 싶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정당성과 인과관계를 부여해 안심하려는 성향은 어쩌면 본능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란 본질적으로 그런 속성을 지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상이 불안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오래도록 불분명했다. 이즈음 들어 깨닫는 건 이야기가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이야기꽃이 될 수 있으려면 그 이야기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점이다. 만약 어머니가 잠시 부재했던 겨울 새벽의 짧은 순간을 나 혼자 이야기로 만들어 간직하는 대신 어머니와 나누었더라면,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그날을 상기시키면서, 저놈이 어렸을 때 얼마나 겁이 많았는지 몰라, 연탄불 갈려고 새벽에 잠깐 나갔다 왔는데 내 차디찬 발목을 붙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어, 하며 웃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그때 정말 보따리를 싸서 도망가려고 작심했는데 어린 아들의 눈물바람을 보고 마음을 돌려세웠노라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꽃을 피우려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맞장구를 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빠뜨린 부분을 일러줄 사람이 있어야 하며, 그럴 수 있으려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모두 사연의 당사자여야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연이 생기려면 늘 보던 얼굴도 날마다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하며 매순간 최선과 진심을 다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는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난 세월 서로에게 무심했음을, 우리에게 사연이 없다면 우리가 헛되이 함께 살아오기만 했음을 말해준다.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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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집에 갔을 때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혼자 마당에 나와 담배를 피웠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니 이제 좀 철이 들겠거니 싶었는데 여태도 담배를 피우냐며 지청구가 이어졌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아내 역시 시부모 편을 들며 어찌해 볼 도리가 없노라고 한탄 같은 비난을 덧붙였다. 그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저 놈이 누구 자식인지 모르겠다며 오래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 집안에 술 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저 놈 혼자 이기지도 못할 술을 처먹고 부대껴서 바르작거리기 일쑤였다며 끌탕을 하고는 지 아비도 안 피우는 담배를 자식 놈이 뻐끔대는 게 얼마나 불상놈 같은 짓거리인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속창아리 없는 놈, 뼈가 녹아서 죽어봐야 알지 등등 온갖 악담으로 나를 궁지로 몰았다. 종내 나는 이 지청구들이 담배 끊으라는 애정 어린 충고인지 혹은 묵은 감정을 털어내려는 시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며느리의 환심 좀 사보려는 당신들의 소심한 작당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참을 그러다 어머니가 당장 끊어라, 죽어도 못 끊겠냐, 그럼 거시기라도 해봐라 하기에, 거시기가 뭔데요 물었더니 거 뭣이냐, 건성으로 피우는 담배, 그거라도 해봐라 하는 거였다.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전자담배와 같은 단어가 입에 붙지 않았을 테고 설령 그 단어가 혀끝에서 맴돈다 해도 당신이 기억하고 느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수월했을 테다. 어머니가 보기에 전자담배는 건성으로 피우는 담배이고 그렇게 성의 없이 대충대충 피우다 보면 결국 담배 자체에도 무심해져 끊게 되지 않겠느냐는 속내까지 담은 표현이었던 셈이다. 어머니의 이 말이 그려낸 이미지가 너무나 흐뭇해서 전자담배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던 이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날의 풍경이 들어서고 말았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전유했던 한 단어의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재전유했던 거다. 이미지의 재전유는 정치보다 효과적인 문화적 전복이다. 전범기의 경우도 그렇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는 오랜 세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우리에게는 전범기이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욱일기이다. 그들은 한 번 전유한 욱일기의 이미지인 아침에 떠오르는 해, 다시 말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정복자라는 알레고리를 어떤 정치적 공세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한 비판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그들의 확고부동한 이미지에 균열을 내는 건 생각처럼 어렵지 않다. 나는 그런 방식을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다. 커트 보니것 소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에는 항문을 그린 삽화가 있다. 한눈에 보아도 그가 그린 항문은 일제 전범기와 놀라울 만큼 똑같다. 동그란 항문이 있고 항문 주변의 주름살을 표현한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선들까지 일치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욱일기의 항문이 조금 더 크다는 것과 항문을 비롯해 항문의 주름살이 새빨갛다는 점뿐이다.

아마 보니것이라면 자신의 그림과 욱일기의 차이를 치핵을 앓는 항문과 그렇지 않은 항문이라고 설명했을 듯하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보니것의 그림은 보편적인 항문을 가리키는 듯하고 욱일기의 항문은 항문 자체가 너무 커다랗기 때문에 무언가를 배설하는 구멍이 아니라 외려 배설물을 삼키는 구멍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욱일기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이처럼 항문과 항문 주변의 주름이 새빨갛게 그려진 걸 보면 치질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하며 내치핵이 바깥으로 심각하게 탈출하여 손가락으로 밀어 넣어도 들어가지 않는 상태인 듯하다. 너무나 오랜 세월 노출되어 괴사가 진행되는 중이니 한시도 지체 말고 병원에 가보시라고. 보니것의 소설을 읽은 뒤로 나는 즐겁다. 내가 재전유한 욱일기는 더 이상 전범기로만 인지되지 않지만 아쉽거나 속상하지는 않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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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부터 3일간 개최된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한국 최초의 대형 록 페스티벌이자 이제는 마지막 여름 록 페스티벌이 됐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여름의 송도에 갔다. 늘 그렇듯 밴드티를 입고 갔다. 지나가던 한 록 팬이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티셔츠 이뻐요!” 얼마전 일본 출장길에서 사온 오아시스 티셔츠. 페스티벌 현장이 아니라면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일 것이다. 현장까지 가는 지하철 옆자리에는 한 여성이 둘째 날의 헤드라이너인 나인 인치 네일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사람도 거기 가는구나, 딱 알 수 있었다. 록 팬이자 밴드티 마니아만의 즐거움이, 이럴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다.

밴드티 수집의 역사는 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제’라는 브랜드가 있었다. 헤비메탈 밴드의 앨범 재킷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회사였는데 그때 한국 사회가 대부분 그랬듯 밴드 측과의 라이선스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주다스 프리스트, 오지 오스본, 메탈리카 등의 밴드티를 유일하게 찍어내는 곳이었으니 용돈을 모아 제제티를 사곤 했다. 하지만 이 브랜드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으니, 품질이 아주 형편없다는 것이다. 한 번 빨면 프린트가 벗겨지고, 두 번 빨면 목이 늘어났다. 옷의 ‘간지’에 신경쓰지 않던 나였지만 다섯 번쯤 빨았을 때 프린트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메가데스 티셔츠는 보는 것만으로도 살인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중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메탈의 도를 논하곤 하던 친구들을 통해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보물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달려갔다. 오오, 세상에. 외국 밴드 사진에서나 보던 바로 그 티셔츠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물론 그전에도 이태원 등에서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의 짝퉁 티는 팔았다. 하지만 우리는 당당한 1980년대의 청소년. 1970년대 밴드 티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눈앞에 걸려있는 메가데스, 슬레이어, 앤스랙스의 티셔츠는 진정한 메탈 키드가 되기 위한 면허증과 같았다. 제제티와는 달리, 한눈에 보기에도 품질이 꽤 괜찮았다. 적어도 몇 번 빤다고 프린트가 지워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우리는 교복 밑에 이들 티를 받쳐 입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오비추어리(부고장), 오톱시(시체해부), 오버킬(과잉살상) 같은 데스 메탈 밴드들의 티는 우리의 교복이자 수도복 그 자체였다.

대학에 가선 술과 여학생에게 관심이 갔다. 밴드티가 옷장에서 사라진 건 필연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예쁘장한 여학생 앞에서 부고장, 시체해부, 과잉살상 등의 문구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야 곤란한 것이다. 그렇게 멀어졌던 밴드티는 음악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다시 가까워졌다. 펑크 밴드들이 스스로 티를 만들었고, 가끔 내한공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오아시스의 첫 내한을 시작으로 동시대 밴드들은 종종 한국을 찾았고 록페스티벌도 열렸다. ‘쌔삥한’ 밴드티를 살 기회가 그만큼 많아졌다. 게다가 외국 가서 공연 볼 기회도 종종 생기곤 했으니 옷걸이에 걸리는 밴드티가 쑥쑥 늘어났다. 물건은 써야 제 맛이라는 평소 신념으로, 그 티셔츠들을 마구마구 입고 다녔다.

몇년 전, 일본에서 열린 머틀리 크루 공연에 갔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헤비메탈 밴드의 콘서트답게 관객 연령층이 제법 높았다. ‘굿즈의 나라’ 일본답게 많은 관객들이 밴드티를 입고 있었는데, 그중 놀라운 건 1980년대 중반 그들이 처음으로 일본 공연을 했을 때의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온 관객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보풀도 좀 일어나고 목도 좀 늘어났지만 세월을 타고 클래식이 된 머틀리 크루의 음악처럼 그 낡은 티셔츠도 빈티지가 돼있었다.

펜타포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록스, 프란츠 퍼디넌드, 블랙 아이드 피스가 찾아왔던 2006년 첫 펜타포트 티셔츠를 입고 온 관객이 있었다. 글래스톤베리, 프리마베라 등 세계 유수의 페스티벌 티셔츠들 사이에서 가장 빛났다. 페스티벌의 전통이 쌓일 때만 만들어지는, ‘그때 그 자리’에 머물렀던 이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멋이었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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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일자 지면기사-

내가 사는 지역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버려지다시피 한 공터가 제법 많다. 개발이 이루어진 택지라 해도 드문드문 공터가 있고 상업지의 경우 건물이 들어섰다 해도 빈 점포가 많아 차라리 없느니만 못할 만큼 을씨년스러운 경우도 있다. 공터는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쓰레기가 쌓여 악취를 풍기게 되고 그러면 민원이 들어가서인지 당장 뭔가를 짓지 않는다 해도 울타리를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게 된다. 그런 울타리에 경작금지, 출입금지 등의 경고문구가 붙은 걸 볼 수 있는데 경고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섬세하게 이랑을 내어 밭을 갈아먹는 이가 꼭 몇씩은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옥수수나 콩 따위로 부룩까지 치며 알뜰하게 가꾸는 손길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혈통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처럼 작은 밭에서 무성해지는 채소들을 보고 있노라면 원래 거기가 논과 밭이었음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수런거림이 들리는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터는 무엇보다 폐허에 가깝다. 불법 경작자와 공무원들 사이의 숨바꼭질, 울타리를 넘어 와 새로이 쌓여가는 쓰레기들,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들, 무엇이 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잔뜩 웅크리고 있는 듯한 공터 자체의 침울한 분위기들이 뒤엉켜서 그렇다. 폐허란 문명의 결과다. 자연 상태 그대로인 곳을 폐허라 부르지는 않는다. 폐허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반드시 문명이 있던 곳이며 그런 점에서 볼 때 조금 과장한다면 모든 도시는 자기 내부에 폐허라는 미래를 품고 있는 셈이다. 폐허가 되기 위해 세워지는 도시는 없겠지만 폐허라는 운명을 영원히 피해갈 수 있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공터는 아직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폐허보다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가까워야 하지만 거기에서 무엇이 실현되든 언젠가 다시 그 공터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언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고 그곳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나 역시 언젠가 그처럼 폐허가 되고 말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종종 다니는 식당 옆에도 그런 공터가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철제 울타리 옆에 서서 담배를 한 대씩 피우면서 그처럼 불편한 마음으로 나의 폐허를 연상시키는 공터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곳 역시 일반적으로 공터가 겪는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무심히 공터를 바라보다 내게 다가오는 파문을 지켜보면서, 방금 그 파문을 일으킨 바람이 나를 맴돌아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차분히 허리를 굽혔다가 흔들거리며 몸을 곧추세우는 개망초들을 보면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저 공터는 내버려두면 이처럼 개망초가 무성한데, 아무리 지천에 흔한 개망초라 해도 작고 하얀 꽃들이 몸살이라도 앓듯 흐드러지게 피어나 온통 꽃밭을 이루는데, 왜 사람은 내버려두면 폐허가 되고 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한 뒤 뜻밖의 꽃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폐허를 가꾼 건 불법 경작자도 아니었고 나와 같은 구경꾼도 아니었다. 비와 바람과 햇살이었다. 사람을 키우는 비와 바람과 햇살은 무엇일까를 헤아리다가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폐허라고만 여겼던 그 공터에 비와 바람과 햇살이 다녀갔듯이 사람의 가슴에 다녀간 것들,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나를 다녀간 모든 이들, 지금까지 나를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이들이 순식간에 그리워졌다. 언젠가 저 공터는 무참히 갈아엎어져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자리에 얼마나 높은 건물이 들어서든 이 기억은 언제까지고 사람의 빈 가슴은 꽃밭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꽃씨를 뿌리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해야 할 일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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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보기 힘든 풍경 가운데 하나가 등짐을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싸구려 잡화를 팔던 행상이다. 행상이 모두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 덩치의 두 배는 되는 등짐을 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학비를 벌던 앳된 대학생들은 이제 없는 듯하다.

내 기억으로는 그런 대학생들이 내 고향 마을 같은 촌구석까지 찾아다니며 행상을 하던 것도 서너 해가 절정이었다. 정말 대학생이어서 그랬는지 처음 잡화 행상을 보았던 것도 방학 중이었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바지게보다 커다란 등짐을 지고 성큼 마당으로 들어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은 어른이 없었던 터라 등짐 행상은 아무것도 팔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잡화들-빨래집게, 옷걸이, 바구니, 바가지, 파리채 등등을 교묘하게 쌓고 엮고 매단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그 행상이 어느 집의 늙수그레한 가장이 아니라 앳된 대학생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채로울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겨우 한 명쯤 있을까 말까 할 만큼 대학생이 귀한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인 밤 마실 자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얻어 들었다. 내가 보았던 바로 그 대학생 행상들 중에 잡놈들이 있다는 거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돈 될 만한 걸 훔쳐가는 좀도둑 같은 녀석도 있고 대학생 행세를 하는 가짜도 있다는 거였다. 아주머니들은 한결같이 몹쓸 놈들, 썩을 놈들, 호랭이 물어갈 놈들 어쩌구 하며 탄식을 했고 그러면서 한 번씩 나를 힐끔거리기도 했는데 장차 저 녀석도 자라 그런 잡놈이 될 기미가 있는지 탐색이라도 하는 것 같아 괜히 열없고 섬뜩하기도 한 거였다. 나는 속으로 대학생 행상의 정체를 내 손으로 까발린 뒤 내게 씌워진 혐의를 벗어나겠다고 다짐했다.

얼마 뒤 여전히 무더운 한낮에 대학생 행상이 마당에 들어섰다. 그날은 어머니가 있었던 터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머니가 종종 내게 그러듯이 그 가짜 대학생에게 부지깽이를 휘두를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더운 날 무슨 고생이냐며 차가운 물을 한 그릇 가져다주고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남아도는 게 빨래집게였는데도 그걸 한 줄이나 사주고는 보냈다. 나는 그 행상이 뭐라도 집어가지 않을까 감시하며 눈을 부릅뜬 채 어머니의 이 모든 배신행위를 지켜보았다. 대학생 행상이 가고 난 뒤 나는 어머니를 힐난했다. 대학생 아닐 수도 있다면서? 그러자 어머니는 흔흔히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아니면 어떠냐? 이 더운 날 땀 뻘뻘 흘리면서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등짐 지고 다니는 젊은인데…….

여전히 입이 댓 발 나왔던 나는 마을 들머리 정자에 갔다가 거기에서 쉬고 있는 대학생 행상을 보았다. 그이는 환히 웃으며 몇 살이냐, 몇 학년이냐, 방학숙제는 하고 있냐 시시콜콜 묻고는 안녕하세요를 영어로 해 봐라, 근의 공식을 말해봐라 등등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까지 하더니 앞날이 캄캄해도 용기를 잃으면 안된다는 식의 조언을 하며 알사탕 하나를 쥐여주고 떠나갔다. 어려운 질문 탓이 아니라 내가 그이를 환대하지 않았음에도 그이가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하게 말해준 까닭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낯선 사람의 환대를 받았음에도 내 마음은 불편했다. 그처럼 환대받을 자격이 없다고 자책해서였으리라. 물론 그이가 어머니의 환대를 기억하고 내게 살갑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생 행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들을 모르지 않았을 테고 가끔은 정말 냉대도 당해보았을 테고 모욕도 받았겠지. 그이에게 건네진 한 대접의 냉수는 그냥 냉수가 아니라 그 모든 의심과 편견을 넘어선 이해와 공감이 담긴 환대의 한 형식이었을 테고 어쩌면 그이 역시 마음이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데리다가 언급했던 절대적 환대가 말처럼 쉬우리라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지 않을까. 환대하지 않는 사람 역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함을.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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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립국악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토요상설 국악공연’의 전통음악 레퍼토리를 섭렵해볼 심산이었는데, 예악당 큰 무대에서 스피커를 통해 전해진 연주들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종묘제례악을 현장에서 듣겠다며 5월 따가운 햇살의 종묘 마당에 앉았을 땐 ‘밤에 해야 멋질 텐데…’ 힘들기만 했다. 2000년대 초의 일이다.

오히려 잊지 못할 장면은 1986년 창덕궁 옆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봤던 사물놀이 상쇠 고 김용배 추모굿. 1990년대 초반 지리산 자락에서 들은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였다. 공간사옥 앞마당까지 가득 메운 인파 속에 처음 본 굿판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면, 학술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초야의 한 노인이 들려준 역동적인 가야금 소리는 전통음악을 온몸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몇 년 후 석 달 속성으로 배운 가야금을 들고 독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그때의 경험에서 촉발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후반 베를린에서 본 박병천의 진도 씻김굿과 김금화 만신의 진오귀굿 공연도 기억에 또렷하다.

귀국 후에는 남도들노래를 부른 조공례의 놀라운 내공과 정권진 판소리의 품격에 깊이 매료되었고, 국악 연주자 지인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우리 장단의 무궁무진한 변화 가능성, ‘성음’이나 ‘이면’ 같은 미묘한 소리 세계를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작업에 매진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 ‘수제천’의 미적 특징을 내재적으로 변화하는 선적 흐름과 그 속에 존재하는 미시적인 음향세계로 분석한 논문도 썼지만, 전통음악 연구를 이어가지 못한 것은 어설프게 한 발만 담가선 다루기 힘든 엄청난 복잡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북촌 일대의 한옥들과 원서공원에서 열린 ‘북촌우리음악축제’(예술감독 허윤정)를 보며 전통음악의 장소성을 생각했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공간’과 달리 ‘장소’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고, 개인이나 공동체가 오랜 시간 관계 맺으며 형성되는 것이 장소성이다.

전통음악은 우리의 역사와 삶 속에 녹아든 것이었음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놓인 북촌을 전통음악의 숨결이 살아있는 장소로 만들어가는 일은 잃어버린 터전을 현재의 삶 속에 복원하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북촌의 한옥·갤러리·공방 등에서 6년째 이어져 온 이 축제는 전통국악과 창작국악을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젊은 국악인들이 전통을 그들의 감각으로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전통이 깃든 장소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새롭게 거듭난다.

대형 공연장의 관행적인 전통음악 연주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건 그 음악의 고유한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해서다. 5월 말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마련한 ‘경복궁 음악회’는 연주자들을 따라 궁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야경 속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색다른 시도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 레퍼토리를 경복궁이라는 장소의 특성에 맞게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흥례문 광장에서 ‘대취타’로 시작해 왕의 집무실과 침소 옆 우물, 왕비의 후원을 지나며 ‘상령산’, 정악시나위, 경기 잡가 등을 연주하고, 마지막 교태전에서 ‘춘앵무’로 끝나는 이 공연에서 관객들은 그것이 향유되던 장소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옛 음악을 한층 가깝게 느낄 수 있었으리라. 고궁음악회는 국악만이 아니라 클래식·재즈·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장소성을 고려한 프로그램 구성은 흔치 않다.

창덕궁 앞에서 종로3가 네거리에 이르는 길은 ‘국악로’라 불린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국악교육기관이 밀집해 있던 국악 활동의 근거지였다 한다. 2016년 이 역사적인 장소에 ‘돈화문국악당’이 개관했다. 근현대사에서 전통음악이 깃든 장소들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옛 레퍼토리를 현재화하는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마련된다면, 전통음악도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고전으로 감상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종묘제례악 야간 공연이 생겼다. 종묘에서 밤에 듣는 보태평과 정대업은 어떨지 내년에는 꼭 다시 찾아가보리라.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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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독 어려워했던 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쌀사다”와 “쌀팔다”이다. “쌀사다”는 쌀을 팔아 돈으로 바꾼다는 뜻이고 “쌀팔다”는 돈을 주고 쌀을 산다는 뜻이다.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만 이미 나부터도 쓰지 않는 말이 되었으니 내 부모 세대 어른들의 언어에만 남아 거의 폐어가 되어버린 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이 말을 많이 들었고 더러 내 입으로 내뱉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데다 종종 “쌀사다”를 돈을 주고 쌀을 산다는 뜻으로 “쌀팔다”를 쌀을 팔아 돈으로 바꾼다는 뜻으로 잘못 쓰기도 했다. 그러니 결국 그 말은 내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시절에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 가운데 하나가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이었다. 장날이 공휴일과 겹치면 어머니가 나를 시장에 데려가주지 않을까 싶어 잔뜩 기대에 부풀었고 매번은 아니었지만 서너 번에 한 번쯤은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갈 수 있었다. 시장으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루에 대여섯 번 다니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시간을 잘 맞추어야 했고 가는 데 한 시간 오는 데 한 시간씩 걸렸으며 비포장 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에 앉아 있노라면 멀미가 나고 기운이 쏙 빠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장 초입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언제 멀미가 났느냐 싶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기름집에서 퍼져 나와 시장의 골목을 물들인 고소한 참기름 냄새부터가 가슴을 간질이는 거였다. 이제 두어 시간만 꾹 참고 어머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면 호떡과 도넛 같은 주전부리부터 시작해 짜장면까지 먹을 수 있을 테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장에 도착해 어머니와 맨 먼저 들르는 곳은 단골 싸전이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가져온 쌀자루를 저울에 올려놓고 이 사정 저 사정 다 알던 싸전 주인과 신경전을 벌였는데 마침내 싸전 주인의 손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얼마간의 돈이 건네지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밑졌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 돈으로 어머니는 장을 보았고 내게 호떡이나 도넛을 사주었으며 마지막 의식이라도 치르듯 버스 정류장 근처의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한 그릇씩 먹는 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면 아쉬움도 없지 않았으나 포만감 덕에 대체로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 기분이었기에 어머니의 쓸쓸한 표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장바구니를 발치에 두고 차창 밖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에 깃든 우수가 나로서는 기이할 뿐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서 그 시절에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어머니의 머뭇거림들, 양품점이나 미용실이나 화장품 가게처럼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곳들은 들르지 못한 채 오직 가계에 소용되는 물목들을 갖춘 상점들만 다니면서, 그것도 한 푼이라도 더 적게 들고 더 좋은 물건을 찾아 발품을 팔아야 했던 어머니의 심사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건, 장날 아침이면 어머니가 그날 구입할 물목들을 헤아리고 비용을 셈한 뒤 필요한 쌀을 사려면 쌀을 얼마나 가져가야 할지를 결정하거나 이번에 쌀사면 다음번에 쌀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내게는 그 말이 어리둥절할 만큼 어렵기도 했거니와 그 어려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당신이 신기하기도 했다.

‘쌀’이라는 말에 쌀의 의미도 있고 돈의 의미도 있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이 말을 한 문장에 아울러서 쓸 수 있으려면 쌀이 곧 돈이고 돈이 곧 쌀이지만 쌀은 돈이 아니고 돈은 쌀이 아니라는 걸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쌀과 돈 앞에서 절망해 본 사람들만이, 쌀과 돈 앞에서 피눈물을 흘려 쌀이 쌀인 동시에 돈이고 돈이 돈인 동시에 쌀임을 너무 잘 알아 잠든 동안에도 잊은 적 없는 사람들만이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말인 듯하다. 삶이 깃든 모든 언어가 피멍이 든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인 듯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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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출간되어 크게 주목받은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은 스탈린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권력 앞에 나약한 예술가의 복잡한 내면과 고뇌를 그려내며, ‘체제에 순응해 살아남은 비겁한 작곡가’ 혹은 ‘음악으로 압제에 은밀히 저항한 예술가’라는 이분법적 평가로는 가닿을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문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얼마 전 발간된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라는 부제처럼, 혹독한 전쟁 시기 탄생한 교향곡 7번을 둘러싼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역사서이자 작곡가의 모습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평전이다.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이 널리 읽혔음에도 그에 관한 책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만큼 격동의 현대사와 맞물려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작곡가가 드물기 때문이리라.

그런 관심은 음악회장으로도 이어져 롯데콘서트홀은 탄생·서거 백주년도 아닌 쇼스타코비치를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해 그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쇼스타코비치와 검은 수사’라는 음악회가 눈길을 끈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14번을 안톤 체호프의 소설 <검은 수사>와 결합해 만든 이 공연은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 필립 세처와 연극 연출가 제임스 글로스먼의 공동 창작물이다.

이들은 말년의 쇼스타코비치가 체호프의 이 단편에 매료되어 오페라를 구상했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현악사중주 14번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고, 체호프의 소설 내용과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엮어 에머슨 사중주단과 일곱 명의 배우 앙상블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음악-연극’을 만들었다. 소설의 등장인물 코브린과 페소츠키가 젊은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으로 중첩되는 대본만큼이나, 현악사중주 14번을 중심에 두고 자전적인 8번을 비롯한 여러 곡들이 극의 흐름에 따라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음악 구성이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의 15개 현악사중주 전곡 음반을 냈던 에머슨 사중주단은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연극 속에 녹여내며 색다른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기존 음악을 새로운 서사 안에서 재배치하는 작업은 2018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초연된 음악극 ‘귀향’에서도 엿볼 수 있다. 17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한국 전통 가곡을 교차해 만든 이 음악극에는 연출과 음악감독 외에 ‘음악 드라마투르그’가 따로 있어 바로크 오페라와 전통 가곡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귀환>을 해체하고 15개의 여창 가곡에서 적절한 부분을 선택해 극에 부합하는 음악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고향과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이 작품에서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도, 한국 전통 가곡도, 현재적 의미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지난 주말 열린 소리꾼 이희문의 ‘민요 삼천리’(‘깊은舍廊사랑’ 세 번째 프로젝트)도 과거의 노래가 흥미로운 서사 안에서 어떻게 생명력을 얻는지 보여준 공연이었다. 1968년 출시된 ‘민요삼천리’ 음반 얘기로 시작해 그 음반을 들으며 민요가수를 꿈꾸던 여성 화자의 사연을 따라가면서 그때 불렸던 노래들을 듣노라면, 익히 알던 민요들도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개성 넘치는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라이브 공연의 감동과 현장감을 대체할 수는 없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공연장까지 찾아오게 하려면 그만큼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공해야 할 터. 서양 고전음악의 미적 가치도, 전통 음악의 깊이도 그것을 행하는 음악가들의 자기 서사로 구현될 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아닐까.

훌륭한 연주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에도 관습적인 프로그램 외에 참신한 시도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클래식 공연은 별로 없다. 기존 레퍼토리도 어떤 서사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진대, 세상의 이슈와 접목해 고전을 현재화하는 음악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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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원로서예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상당한 양의 서적과 카메라 수집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동양의 고전을 비롯해 수많은 한문책과 중국 서적들로 가득 찬 서가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자학과 서예, 전각과 관련된 주옥같은 책들이 주욱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당연히 있을 법한 골동품이나 고서화는 한 점도 눈에 띄지 않아 물어봤더니 자신의 눈에 차는 게 없어 수집한 게 없다는 답변이 왔다. 나름의 감식안에 대한 자신감과 자기 취향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수집이란 횡적인 수집이 아니라 종적인 수집이며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뛰어난 질을 확보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선적으로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는 충만한 느낌이 탁월해야 한다. 사실 예술가란 존재는 그가 수집하고 있는 물건들을 통해 자신의 안목,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편이다. 물론 본인의 작품 자체가 이미 그 자신의 감각의 결정체에 다름 아니다. 결국 한 인간의 삶이나 작품, 그의 수집품은 그만의 감수성, 감각, 취향을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고 발화하고 있다. 예술은 전적으로 그것을 가시화하는 일이자 독하게 뿜어내는 일이다.

어느 순간 큐레이터와 평론가가 직업이 된 후로 나는 자연스레 다양한 것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당연히 여러 종류의 책들이 뒤를 잇고 화집과 전시도록 등 많은 자료들을 욕심껏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각종 문구류, 상당한 양의 CD와 골동품, 다양한 미술작품 등을 구입해 탐닉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과 함께 생애를 기꺼이 소진시킨다. 책은 읽고 문구류는 쓰는 한편 CD는 듣지만 골동품과 작품 혹은 매력적인 오브제라 모아둔 것들은 전적으로 완상하는 차원에서 수집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해서 내 좁은 연구실에는 수많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내 한몸이 겨우 비집고 들어올 만한 여유밖에는 없는, 마치 통조림통 속같이 좁고 밀폐된 곳, 사물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그 사물들만을 그토록 편애한다. 실용적 차원에서 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형태와 색상, 질감과 디자인을 마음껏 감상하고 향유하는 일이다. 이는 사물과 유희하는 일이자 그것과 더불어 몽상에 잠기는 일이다. 고독한 나를 그 사물들이 구원해 준다는 느낌이다.

이처럼 나는 매일 무엇인가를 수집하고 바라보고 좋아하면서 은밀한 시간을 보낸다. 이 자폐적인 사물과의 독대는 그것들이 발화하는 음성을 듣는 일이자 그 생김새와 색채, 질감을 편애하는 일이다. 미술평론가로서 작품을 보러 다니고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일과지만 실은 틈틈이 골동 가게와 서점, 문방구 또는 온갖 가게들을 들락거리면서 내 마음에 ‘쏘옥’ 드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수집하는 것이 주된 일인 것도 같다.

나는 깜찍하고 귀엽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 그러나 기품 있고 자연스러우며 과도하지 않은 미감을 두른 것들을 찾는다. 그것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보는 순간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그토록 예민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골라내는 안목과 마음을 갖고 싶기도 하다.

그것들을 지독히 편애하면서 살고 싶다. 결코 문드러지지 않는 감수성과 좋은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끝까지 가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사는 동안 나의 소원이 있다면, 꿈이 있다면 첫번째는 그동안 사 모은 책을 다 읽고 죽는 것, 두번째는 역시 수집해놓은 CD음반을 반복해서 다 듣고 가는 것, 세번째가 이렇게나 많은 필기구와 수첩, 노트를 죄다 쓰고 죽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필사적으로(?) 수집한 골동품을 마음껏 완상하고 이후 이를 책으로 엮은 후 정리하고 가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떠한 소원도 희망도 꿈도 가진 적이 없다. 진정으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나마 내가 욕망하는 것이라면 빼어난 아름다움과 탁월한 조형미를 두른 것들을 통해 내 안목과 감각을 고양하고 높은 취향과 눈썰미를 갖기를 간절히 원한다. 놀라운 눈을 애타게 갈구하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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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시간보다 아직은 글을 읽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읽는 이유는 영감을 받기 위해서고 영감이 필요한 이유는 글을 쓰지 못해서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삶의 일부를 낭비해버린 듯 허탈하기까지 하지만 좋은 글을 읽게 되면 외려 과분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송구하기까지 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많은 글을 읽었다. 내가 읽은 글들은 대부분 소설이다.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동시대의 소설이든 오래된 소설이든 가리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읽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면 고전을 읽는 것이다. 사전은 고전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작품이라 정의하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내게 고전이란 영감을 주는 작품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전이 반드시 오래된 작품일 필요도 없고 많은 이들이 아는 작품일 필요도 없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베트남의 소설가인 바오 닌의 단편 ‘물결의 비밀’이다. 단편이라 하기에는 너무 짧은 탓에 미니픽션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록 원고지 스무 장에 불과하다 해도 이천 장 못지않은 무게를 지니게 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읽은 이가 언제까지나 그 작품을 되풀이하여 곱씹어서 실제보다 두껍게 기억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처럼 이 소설은 처음 내 안에 자리 잡은 뒤 수백수천 번 불려나와 나와 대면하였기에 이제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지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좀 절망적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소설가라면 이런 소설 한 편쯤은 남겨야 할 것 같았고 이런 소설 한 편 쓰기가 난망하기 이를 데 없음을, 어쩌면 평생을 다해 쓰더라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절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유혹임을 느낀다.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 도달한 지점에 나 역시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절망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임을 느낀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 소설가가 바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은 여느 소설가들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을 능가하는 것임을. 오늘 내가 단어 하나에 일 분을 문장 하나에 십 분을 바쳤다면 내일의 나는 단어 하나에 십 분을 문장 하나에 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 바오 닌 역시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능가했을 테고 아름다운 소설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불안을 견뎠을 테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글을 쓰려는 열망만이 가득할 때 그 사람을 죽이는 건 글을 쓰려는 열망이므로 살기 위해서는 글을 쓰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사뮈엘 베케트와 필립 로스의 말을 떠올린다. 베케트의 “실패하고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문장에는 이어져야 할 문장이 있다. “더 나은 실패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실패하고 실패하여 최악에 이르러 끝장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므로 나는 베케트의 문장을 신입사원 연수회에서 정력적인 강사가 주장할 법한 성공하는 사람의 자세와 같은 것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실패가 분명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용기,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 창의적으로 실패하여 실패조차 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다.

필립 로스는 파리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글쓰기를 의심해야 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동안에는 진정으로 글쓰기가 이뤄지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순간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직전에 있는 셈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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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쯤 독일에서 출간되는 현대음악 사전에 ‘코리아’ 항목 원고를 부탁받은 적이 있다. 별 어려움 없이 쓸 거라 여겨 수락했는데, 요청사항에 북한 현대음악도 들어있어 멈칫 당황했다.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했거니와 ‘코리아’에 북한도 포함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분단은 다른 한쪽의 존재조차 의식에서 지워버렸던가 보다. 우리에게 북한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폐쇄된 사회, 지척에 놓여있으나 심리적으로는 머나먼 존재였다.

최근 북한의 삼지연관현악단과 남한의 대중예술단이 상호 방문 공연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다른 체제의 이질적인 문화라도 음악을 통해 거리감이 좁혀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음악정치’가 양 진영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었다면, 남북 간의 그것은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어야 하지 않을까.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4월 3일 열린 ‘북남 예술인들의 련환공연무대 우리는 하나’에서 남북 가수들이 ‘우리의 소원’을 함께 부르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한 가수들이 남한의 대중가요를 부르듯이 남한에서 연주되는 북한 음악도 있다. 아리랑 선율을 관현악으로 자유롭게 풀어낸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 환상곡’.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서울에 온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연주에서 소개되었고, 2002년 KBS교향악단의 평양 공연에서도 두 악단의 합동 연주로 울려 퍼졌다. 2008년 로린 마젤이 이끈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 2012년 정명훈이 주도한 북한 은하수관현악단과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의 파리 합동 공연에서도 앙코르로 연주되며 널리 알려져, 이제는 우리 교향악단과 국악관현악단도 즐겨 연주하는 곡목이 되었다. 거문고 독주곡 ‘출강’ 역시 남한으로 월경한 북한 창작곡이다. ‘쇠가 나온다’는 뜻의 이 곡은 북한 작곡가 김용실이 1960년대 흥남제련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활력과 고단함을 담아낸 작품으로 1990년대 중반 일본을 통해 남한에 전해졌다 한다. 북한에선 악기개량 후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아 오히려 남한에서 거문고 레퍼토리로 정착했다.

민족성과 대중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북한 음악에는 순수기악곡보다 성악곡이나 민요 선율을 토대로 한 기악곡이 흔하다. 2012년 은하수관현악단의 파리 공연에서 악장 문경진이 앙코르로 연주한 백고산의 ‘닐리리야’도 그 한 예다. 일제강점기 조선 반도 전체에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고 1950년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배웠으며 이후 북한 바이올린계의 멘토였던 백고산. 그가 남긴 무반주 바이올린 곡들도 우리에게는 관심이 가는 대상이다.

사실 남북한 음악교류의 물꼬를 튼 건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었다. 그가 1990년 10월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성사시켜 황병기를 단장으로 한 서울전통예술단이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그해 12월 평양민족음악단이 서울에 왔을 때 북한의 대표적인 개량악기 ‘옥류금’이 소개되어 우리 국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국악과 양악으로 양분된 남한과 달리 북한은 개량된 전통악기와 서양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배합관현악’ 편성이 특징이고, 관현악단 레퍼토리도 서양 클래식보다는 북한 작곡가들의 창작곡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음악적 유산이 최근 늘어나는 남한의 서양악기와 국악기 혼합 앙상블 시도에 또 다른 상상력을 제공할지 모를 일이다. 남북 예술교류가 본격화되면 음악가들의 합동 공연도 활발해질 것이다. 교향악단 연주에선 클래식 음악이 주 레퍼토리가 되겠지만, 여러 형태의 앙상블에서 남북이 함께 연주할 만한 좋은 창작곡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매년 가을 평양에서는 윤이상음악회가 열린다. 1998년 남북한의 연주자들이 첫 합동 공연을 가진 이래, 2008년 첼리스트 고봉인의 협연 외엔 어떤 만남도 이어지지 못했다. 올가을에는 남북의 음악가들이 그곳에서 윤이상의 작품으로 하나 될 수 있을까? 매년 봄 찾아오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윤이상관현악단의 연주를 듣게 될 날은 언제일까? 북한의 젊은 연주자들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게 될 날도.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가 정착되기를 온 마음을 다해 빌어본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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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은 타지역의 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역동적이고 뜨거운 편이다. 그만큼 한국의 근현대사가 격동 그 자체였고 지금도 매일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지 않은 날이 없으니 이러한 현실로부터 발아하는 미술이 그런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이인성의 그림을 시작으로 이후 1950,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과 빈곤을 정면으로 응시한 박수근, 이중섭의 경우가 그런 선구적인 예로 떠오른다. 오윤과 손장섭, 신학철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첨예한 모순을 고발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남관과 권순철은 한국전쟁 때 죽은 이들의 얼굴, 넋을 형상화했다. 박생광의 작업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들만큼이나 이런 작업의 선구적인 사례가 바로 김영덕의 그림이다. 지금 그의 미수전이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1949년 그는 어린 학생이었는데도 경찰에 연행돼 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은 후 겨우 살아남은 경험이 있었는데, 이른바 남로당의 조직원, 빨갱이로 몰렸던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생애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시대적 모순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의 평생의 작업 화두는 바로 어린 나이에 보고만 온갖 불의와 압제,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로 인한 무수한 죽음과 피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장면, 상처가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것들은 수시로 출몰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따라서 김영덕의 그림은 그렇게 떠도는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려는 지난한 시도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그린 ‘인탁-인혁당의 사람들’(1976)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망자들에 대한 애도와 비애의 감정을 진하게 담고 있는 그림이다.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8월, 이른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인민혁명당사건’(1차)과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2차)으로 나뉜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자 재야세력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고 유신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위반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 했다.

1974년 4월25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정부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농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발표하였다.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고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으며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다음 날 4월9일 형을 집행하였다. 채 20시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으며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에 해당한다.

김영덕의 그림은 몇 개의 층위로 구분되는데 화면 상단은 눈부시게 하얀빛으로 물든 공간에 흰색의 한복을 입은 망자들이 이제 막 시선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설핏 보여준다. 하단에 그려 넣은 군모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한 핵심을 지시하고 있다. 당시 엄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미술인 대부분이 서구의 전위미술이나 단색주의회화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당시의 참혹한 사건을 형상화한 이가 바로 김영덕이란 작가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 그림은 철저하게 망각되어 있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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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잊히지 않는 분들이 있다. 대학시절 잠깐 얹혀 살았던 친구 자취방의 주인 노부부였다. 그 집에 들어가던 날 나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우선 노부부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주인 노부부의 성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단아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거실 한가운데 엉거주춤 선 채 꾸벅 인사를 드렸다. 주인 노부부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노려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친구에게 들어 은퇴한 교육공무원이라는 건 알았지만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교육공무원이 아니라 사법공무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노인의 근엄한 얼굴과 그에 못지않게 위엄이 서린 노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단번에 기가 죽었다.

눈에 거슬리는 짓이라도 했다간 쫓겨날 게 뻔해 보여 단칸방 벽 너머가 노부부의 거실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말소리조차 죽이며 지냈다.

이십대 내내 나는 연례행사처럼 한 해에 한 번씩 편도선염을 앓아 고열에 시달리곤 했는데 그 시절이 이 연례행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던 듯하다. 친구는 학교에 가버렸고 몸살기가 있어 혼자 방에 남았던 나는 점점 열이 올라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러는 동안 내내 눈을 감고 있었던 이유는 눈을 뜨면 눈앞이 빙빙 돌아 더 어지러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잠들지는 못하고 눈만 감은 채 열에 시달리는 동안 낮이 깊었고 일상에서 생겨나는 자잘한 소음들이 파도처럼 내 귓가로 다가왔다 멀어지길 되풀이했다. 노부인이 외출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약국이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지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잠깐 뒤척이기라도 하면 바닥에 닿거나 쓸린 몸의 어느 부분이나 눌린 팔뚝 따위가 아파서 절로 끙 소리가 났다. 서울살이가 처음이었던 나는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게 바로 타향살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결국 혼자라는 생각 탓에 잔뜩 주눅이 들었던 나는 다시 몸을 뒤척이다 신음을 냈는데 곧이어 똑, 똑, 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벽 너머 저쪽 거실에서 노인이 노크를 한 거였다. 아무래도 조용히 하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속으로 ‘노인네가 귀만 밝아서는’ 하며 투덜대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조금 뒤 다시 똑, 똑, 똑 소리가 들렸다. 무척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두드림이었고 문득 그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괜찮냐고 묻는 뜻이라는 걸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괜찮다는 의미로 벽을 조심스럽게 세 번 두드렸다.

그날 오후 외출에서 돌아온 노부인이 단칸방을 찾아와 상비약에서 골라온 몇 가지 약을 내게 주었다. 그 약 덕분인지 부었던 편도선도 이틀 사이에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어느 한가했던 오후 나는 방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다가 벽 너머 거실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음이었다. 노부인은 외출을 했으니 노인의 신음인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벽을 똑, 똑, 똑 두드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 나는 후닥닥 뛰어나갔다. 노부부 집의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단아하고 정갈한 거실 한가운데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대원들이 들이닥치고 노인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다행히 노인은 때를 놓치지 않아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며칠 뒤에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부인은 아무 말 없이 과일이 든 바구니를 우리 자취방 앞에 놓아두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그 과일을 먹으며 분명 노쇠해진 탓에 귀가 어두웠을 노인이 어떻게 내 신음을 들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고 사람이란 그러니까 그게 누구든 사람이란 다른 어떤 소리보다 고통 받는 타인의 소리에 예민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설령 귀가 먼다 해도 그 소리는 가슴으로 듣는 것이기에 듣지 못할 수가 없다는 이 신비로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로 치부하며 살아가는 그이들을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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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섬 제주의 봄은 유채꽃 만발한 풍광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 아름다운 자연에 깊은 상처와 아픈 역사가 서려 있음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기 예능프로들에서도 잇달아 언급되며 제주의 산천에 아로새겨진 4·3사건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너븐숭이, 다랑쉬굴, 섯알오름 등 70년 전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그대로 품고 있는 땅. 섬사람들에게 그때의 사건은 발설은커녕 기억에서조차 지워야 했던 천형과도 같은 일이었다. 제주 4·3을 평생의 문학적 화두로 삼아온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이를 ‘기억의 자살’이라 불렀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것. 냉전과 분단체제, 독재정권하에서 그렇게 기억은 말살당했지만, 무고한 수만명의 억울한 죽음이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제주 유채꽃. 제주관광공사 제공

30년의 세월이 흐른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4·3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했고, 1980년대 말 일기 시작한 4·3진상규명운동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2003년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주민들에 대한 대통령의 첫 공식사과 후, 2008년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제주4·3평화공원’이 문을 열었지만, 그 후로도 4·3은 외딴 섬 제주의 아픔으로만 여겨져 왔다.

역사적 진실은 때로 문학적·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더 강렬하게 전해지곤 한다. 5년 전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자행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피해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간 주민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 큰 울림을 남겼다. 수십년에 걸쳐 창작된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도 몇 년 전 한글완역본이 출간되며 한국 현대사에서 4·3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시와 노래, 춤과 연극, 그림과 영화로 이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려 애써왔다. 30년 전 ‘잠들지 않는 남도’를 작곡한 가수 안치환이 최근 ‘4월 동백’을 발표하며 다시 이 섬의 슬픔을 노래하듯이.

올해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일며 각지에서 전시·공연·퍼포먼스·씻김굿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클래식 음악인들도 4월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섬의 아픔을 뭍에서 기억하다’라는 추념음악회를 마련했다. 구자범의 지휘로 네 명의 독창자와 ‘참 필하모닉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국립합창단·안양시립합창단이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한 이 음악회는 전국의 뜻있는 음악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해 오케스트라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80명의 오케스트라와 90명의 합창단이 모아낸 진혼의 목소리는 음악회장에 온 청중에게는 물론이고 참여한 음악가들의 마음속에 제주 4·3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영원한 안식을”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레퀴엠’은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산 사람을 위로하는 진혼미사곡이다. 그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 20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창작되고 연주되는 것은 잔혹한 폭력과 전쟁에 스러진 원혼들이 넘쳐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제주 4·3을 비롯해 여수·순천, 거창 등지에서 벌어진 억울한 죽음들이 많았다. 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보듬고 우리 사회가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할 터. ‘영원한 안식’은 그런 연후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만 비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거친 후 4월의 진혼곡이 해마다 울려 퍼지며 한반도에 마침내 평화롭고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기를….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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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 35인이 모였다. 몇몇을 빼면 서로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사람이 모일 때는 대개 이유가 있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거나, 나눌 이익이 있거나, 짝이 필요하거나,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떠한 공통점도 없고, 나눌 만한 이익도 없으며, 신상 정보 또한 모르는 35인은 제주도 성산에 모여 2박3일을 보내게 됐다. 이 시간의 이름은 ‘낯선 컨퍼런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열렸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강한 연결’과 ‘약한 연결’로 나눈다. 전자가 가족, 친구, 동료라면 후자는 낯선 사람, 뜸하게 아는 사람 등 ‘지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그룹이다. 이 책은 강한 연결보다 약한 연결을 통해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한다. ‘낯선 컨퍼런스’는 이 책의 제목과 내용에서 이름을 빌려 온 행사다.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저자들이 진행하는 것도 아니니, 말하자면 그 이론을 검증해보려는 일종의 실험인 셈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스태프로 참여, 초기 기획부터 진행을 함께했다.

참가 인원을 60명에서 35명으로 줄였다. 2박3일 동안 인사도 한 번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기본적인 원칙은 같았다. 첫 번째, 장소는 제주도다. 광화문이나 테헤란로 등 일상의 지역에서 행사를 갖게 되면 사람을 만날 때도 관성적이 된다. 비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일상을 단절하되, 여권이 필요없는 제주도는 그래서 ‘약한 연결’의 낯선 공간이다. 두 번째, 참가자를 신청이 아닌 초대로 모집한다.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건,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사람이건 상관없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면 된다. 초대장엔 이렇게 썼다. “ ‘낯선 컨퍼런스’는 형식보다 내용을 고민합니다. 2박3일의 느슨한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매뉴얼에 담긴 인사이트가 아닌, 각자의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 생각을 나눕니다. 엄선된 호기심으로 초청된 낯선 사람들의 수다로 각자의 물음표를 섞으려 합니다. 2박3일이 지났을 때 서울에서의 물음표가 제주에서의 느낌표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글을 보고 35명이 항공권을 끊고 적지 않은 참가비를 냈다. 그리고 지난 23일, 성산 플레이스 캠프에 낯선 사람들이 모였다.

1인당 3분씩의 자기 소개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철제가구를 만드는 이, 베개를 만드는 이, 숙취해소제를 만드는 이, 파티를 만드는 이… 이름을 걸고 유무형의 무엇을 창조하는 이들의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 작은 탄식이 일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놀라움, 저런 사람 만나고 싶었다는 발견의 기쁨이 어우러지는 탄식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인사의 내용은 참신했다. 한국인의 인사법인 호구조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소개에서 알게 된 간략한 정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각자의 세계 속으로 훅훅 들어갔다. 생전 만나본 적 없는 직업군의 사람들이 여러 프로그램을 거치며 밀도있는 관계로 나아갔다. 행사가 끝날 무렵,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이나 직장의 워크숍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친밀감이 그들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사람과 마주칠 만큼 마주쳐온 그들이다. 지칠 만큼 지쳐온 그들이다. 이 35개의 세계는 어떻게 이토록 가까워졌을까. 강하지도 흐릿하지도 않은 낯선 호기심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서의 삶을 지향해왔던 이들이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동인이 진심의 교환으로 바로 이어질 수야 없을 테지만 그 지점으로 향하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오프라인에서 쉬이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온라인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온갖 분쟁들에 지쳐가는 지금, 새로운 관계의 활력을 만끽할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 말이다. 처음 듣고 꽂히는 음악이 있다. 첫술에 침이 솟구치는 음식이 있다. 늘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음악과 음식 같은 사람들에 굶주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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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주 대상으로 미술평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관람하고 공부하는 시간 못지않게 전통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고미술품을 감상하고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현대미술이니 전통미술이니 하는 구분이나 경계라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 모두를 하나의 조형으로 보고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박물관과 골동품 가게 등에서 접한 우리 고미술품 중 상당수가 감동적인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삼국시대 토기 잔과 직선무늬떡살, 그리고 옹기에 주목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옹기를 보러 여러 곳을 다녔고 그러한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하나씩 구입하고 있다. 가장 흔하고 저렴한 옹기에서 절묘한 것을 찾는다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보았으며 우리네 일상적인 삶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쓰였던 옹기의 매력을 순수한 조형적인 차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고미술상가를 비롯해 양평, 충주, 천안, 부안, 광주, 순천 등지에 산개한 옹기 가게나 경매장을 틈틈이 찾아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근자에 부안에 가서 여러 옹기를 보고 왔다. 사방은 적조하고 다만 멀리서 이곳까지 기어이 밀려와 다소 거칠게 흩어지는 바닷바람과 ‘짠내’만이 가득한 곳에서 겅중거리며 마음에 드는 옹기를 찾아다녔다. 우선 형태가 완벽한 것, 색채가 묵을 대로 묵어 그 맛이 희한한 것, 오랜 시간의 땟물이 가득 차 올라와 있는 것, 옹기 표면에 그려진 선이 절묘한 회화적 맛을 거느린 것 등이 하나로 모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찾는다라고밖에는 말하기 어렵다. 사실 그 선택은 무척 직관적이고 인상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편이다.

옹기를 볼수록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소박하며 무심하면서도 절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음에 감동하고 있다. 옹기는 청자와 백자에 비해 다소 투박하고 수수해 보이지만 그 자체로 소박한 미감이 번득이는데 나는 그런 맛이 참 좋다. 이는 마치 서민적인 민화나 소박한 목기를 접하는 맛과도 유사하다. 옹기는 찰흙으로 만든 후 잿물 유약을 묻혀 1200도 온도에서 10여일 동안 구워내는 그릇을 말한다. 옹(甕)이란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로 저장 용기인 그릇의 형태를 일컫는 말인데 옹기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져 이후 한국인들의 실생활 여러 곳에서 부담 없이 활용된 그릇으로 철저히 실용성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정해진 틀이 없이 그저 사용에 편리하게 자유롭게 변형되어왔으며 그만큼 많이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살펴보면 옹기의 주원료인 찰흙은 산에서 얻는 것이고, 진흙을 굽기 전에 바르는 잿물의 재료 역시 나뭇잎이 썩어서 만들어지는 부엽토와 재다. 더구나 옹기가 깨져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자연으로, 흙으로 돌아가니 참으로 자연친화적인 그릇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알갱이가 섞여 있는 질(점토)로 만들어지고 가마에서 소성될 때 질이 녹으면서 미세한 기공이 형성되고 그로 인해 공기·미생물·효모 등이 통과할 수 있는 이른바 숨 쉬는 옹기,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닌 옹기이기도 하다. 이런 그릇이 있었기에 한국 고유의 발효 식품들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보다도 나는 옹기의 그 소박한 미감과 풍성한 형태, 그리고 옹기 표면에 무심하고도 놀라운 솜씨로 쓱쓱 그려나간 선의 맛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 옹기 만든 이가 평생을 그어 이룬 어떤 경지일 것이다. 나는 저런 선 하나를 애타게 찾는다. 사실 옹기의 매력은 이 특징적인 무늬에 있다. 시유 단계에서 넣는 손가락 그림인데 손놀림을 이용하여 무늬를 만드는 것을 흔히 ‘환을 친다’고 표현한다. 환을 치는 것은 무늬를 낼 뿐 아니라 표면의 유약을 부분적으로 닦아 내어 옹기의 통기성을 높여주는 역할도 하는데 하여간 이 환치기로 그려진 자국은 속도감이 있고 즉흥적이며 생동감을 보여준다. 자생적으로 몸이 기억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그려낸, 자유분방한 무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절묘한 선,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모든 그림 그리는 이들이 마땅히 보고 깨달아야 할 선·회화의 한 경지를 그야말로 놀라운 경지에서 부려놓고 있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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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사연을 글로 풀어내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말,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로도 부족하다는 이 말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유장하고 웅숭깊을 수 있는가를 뜻하지만 삶을 소설로 풀어내기가 생각처럼 여의치 않다는 뜻으로 새겨들을 수도 있다.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삶을 살아왔는데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자신의 사연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온전히 소유해 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사소설은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며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주된 내용인 소설이다. 사소설이 하나의 장르를 뜻할 때에는 일본의 특유한 소설 형식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사소설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다자이 오사무이고 그의 딸인 쓰시마 유코 역시 현대 일본 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 소개된 쓰시마 유코의 작품 가운데 <욕실>이라는 단편소설에는 작가인 유코라 여겨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중학생인 유코는 어느 날 방과 후에 오빠가 입원한 병실에 들른다. 오랫동안 감기로 누워 있던 오빠가 입원한 거였다. 그러나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유코는 오빠가 죽었음을 직감한다.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이미 가슴 깊은 곳에서 알아차렸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가서도 유코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는 개와 장난을 친다. 그런 유코에게 숙모가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오빠가 죽었다, 하고는 울음을 터뜨린다. 유코도 죽은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고 장례까지 치르지만 그러는 내내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모르는 체하기. 여기에는 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유코가 오빠의 죽음을 직감했음에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유코가 어리기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주변사람의 단정적인 언행 탓에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벗어나 나 자신이 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욕실>에서도 유코의 회한은 그 지점을 향하지만 또 다른 단편 <슬픔에 관하여>에서는 그런 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은 실제로 어린 아들을 잃은 유코가 아들의 죽음 이후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유코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위로와 동정이 아무리 예의 바르고 인간적이라 해도 결국 슬픔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그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잘 보여준다. 내가 느끼는 슬픔, 기쁨, 괴로움, 외로움 등은 나의 것이기에 누구보다 절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의 감정에 몰두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위로의 말에 고맙다거나 괜찮다고 대답해줘야 하고 내 감정을 타인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억눌러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감정은 설령 이미 존재했다 해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실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감정과 감정에 대한 반응에도 시차가 있을 수 있으므로 때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모른 척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감정이란 사적인 것이기에 박탈당할 수 없다고 간주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순수하게 홀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도 그와 똑같이 맞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 가운데 누구의 것이 더 소중하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연이 반드시 글이 될 필요도 없고 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것과 사연을 온전히 소유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내가 살아온 이 신산한 삶이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건 내 삶이 아닌 셈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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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부산 영도구 동삼동 바닷가 조개더미에서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조개껍질 하나가 발견되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그 조개껍질에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구멍이 세 개 나 있다. 마치 사람의 눈과 크게 벌린 입처럼 보이게 만든 구멍으로 인해 흡사 비명을 지르거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 연상되었다. 속살을 발라먹고 내다 버린 조개껍질 따위를 한군데에 차곡차곡 쌓은 조개더미를 패총(貝塚)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나온 이 조개껍질은 아마도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얼굴 이미지이자 최초의 미술작품(?)일 것이다. 일종의 이 가면은 길이가 11.5㎝라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신으로 변신하고자 했던 당시에 도구적 기능을 지녔던, 주술적인 용도로 쓰였던 가면으로 추정된다.

가면은 특정 물질로 만든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용, 주문, 의식으로 이루어진 복합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힘차고 동적인 물건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가면이 죽은 사람에게 영원한 젊음을 부여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면 속에서 비로소 영생과 불사를 간직할 수 있었으며 내세의 영원한 복락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고대 희랍에서는 죽은 사람을 보호하고 내세로 가는 여행을 도와주기 위해 지옥의 여신 페르세포네의 가면을 죽은 사람의 얼굴에 씌웠다고 한다. 옛날부터 티베트와 부탄에서는 머리 전체를 시체에서 떼어서 고인의 귀한 유물로 보존해왔다고 한다. 시체는 새들에게 먹이로 주지만 머리는 신성한 가보로 언제나 보존한 것이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고대에는 패배한 적의 머리를 정복자의 집에 걸었는데, 그 머리가 ‘그 집을 지키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적의 영혼이 머리에 들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영혼이 얼굴 속에 있다는 것을 믿었으므로 신과 정령의 형상을 얼굴 모습으로, 가면으로 만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면은 본래의 몸을 지우고 또 다른 존재로 비약하거나 현세의 얼굴이나 육체를 대신해 초월적인 존재로 비상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것은 실제의 얼굴을 지우고 다른 얼굴로 대신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가면이란 버릴 수 있는 얼굴을 말한다. 가면은 우리의 흔들리는 얼굴을 가리고, 낯설고 고정된 모습을 선사한다. 이는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얼마 전 가면을 둘러싼 해프닝이 있었다. 지난 2월11일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예선 코리아-스위스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이 김일성 가면을 쓰고 응원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론 이내 오보로 판명 났다. 그러나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하는 북한 응원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유하면서 “정부가 이를 결코 몰랐을 리 없다. 저 흉물스러운 것을 응원 도구라고 허락했나? 남북 단일팀 밀어붙이기로 우리 선수들 기회를 박탈한 것도 모자라 경기장에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선수들과 관중들이 경기 안 일으킨 게 다행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벌이지 못하는 일이 없구나.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누가 협조하고 누가 기획했는지. 대한민국 무너지는 소리가 평창의 응원소리보다 높구나”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하태경 바른정당 최고위원은 “북한 응원단이 대놓고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한다. 여기는 평양올림픽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한국 대통령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김일성 가면을 감히 쓸까”라며 “평양올림픽의 말로를 본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이는 김정은의 지시가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오래전 신학철의 ‘모내기’ 작품을 놓고 김일성의 생가를 그린 것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한 그림이라고 해석한 공안 검사들의 시각이 연상되는 발언들이다. 이처럼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읽고 싶은 대로 읽어대는 이 막무가내식의 감상법에 대해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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