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독 어려워했던 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쌀사다”와 “쌀팔다”이다. “쌀사다”는 쌀을 팔아 돈으로 바꾼다는 뜻이고 “쌀팔다”는 돈을 주고 쌀을 산다는 뜻이다.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만 이미 나부터도 쓰지 않는 말이 되었으니 내 부모 세대 어른들의 언어에만 남아 거의 폐어가 되어버린 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이 말을 많이 들었고 더러 내 입으로 내뱉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데다 종종 “쌀사다”를 돈을 주고 쌀을 산다는 뜻으로 “쌀팔다”를 쌀을 팔아 돈으로 바꾼다는 뜻으로 잘못 쓰기도 했다. 그러니 결국 그 말은 내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시절에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 가운데 하나가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이었다. 장날이 공휴일과 겹치면 어머니가 나를 시장에 데려가주지 않을까 싶어 잔뜩 기대에 부풀었고 매번은 아니었지만 서너 번에 한 번쯤은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갈 수 있었다. 시장으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루에 대여섯 번 다니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시간을 잘 맞추어야 했고 가는 데 한 시간 오는 데 한 시간씩 걸렸으며 비포장 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에 앉아 있노라면 멀미가 나고 기운이 쏙 빠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장 초입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언제 멀미가 났느냐 싶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기름집에서 퍼져 나와 시장의 골목을 물들인 고소한 참기름 냄새부터가 가슴을 간질이는 거였다. 이제 두어 시간만 꾹 참고 어머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면 호떡과 도넛 같은 주전부리부터 시작해 짜장면까지 먹을 수 있을 테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장에 도착해 어머니와 맨 먼저 들르는 곳은 단골 싸전이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가져온 쌀자루를 저울에 올려놓고 이 사정 저 사정 다 알던 싸전 주인과 신경전을 벌였는데 마침내 싸전 주인의 손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얼마간의 돈이 건네지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밑졌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 돈으로 어머니는 장을 보았고 내게 호떡이나 도넛을 사주었으며 마지막 의식이라도 치르듯 버스 정류장 근처의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한 그릇씩 먹는 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면 아쉬움도 없지 않았으나 포만감 덕에 대체로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 기분이었기에 어머니의 쓸쓸한 표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장바구니를 발치에 두고 차창 밖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에 깃든 우수가 나로서는 기이할 뿐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서 그 시절에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어머니의 머뭇거림들, 양품점이나 미용실이나 화장품 가게처럼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곳들은 들르지 못한 채 오직 가계에 소용되는 물목들을 갖춘 상점들만 다니면서, 그것도 한 푼이라도 더 적게 들고 더 좋은 물건을 찾아 발품을 팔아야 했던 어머니의 심사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건, 장날 아침이면 어머니가 그날 구입할 물목들을 헤아리고 비용을 셈한 뒤 필요한 쌀을 사려면 쌀을 얼마나 가져가야 할지를 결정하거나 이번에 쌀사면 다음번에 쌀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내게는 그 말이 어리둥절할 만큼 어렵기도 했거니와 그 어려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당신이 신기하기도 했다.

‘쌀’이라는 말에 쌀의 의미도 있고 돈의 의미도 있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이 말을 한 문장에 아울러서 쓸 수 있으려면 쌀이 곧 돈이고 돈이 곧 쌀이지만 쌀은 돈이 아니고 돈은 쌀이 아니라는 걸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쌀과 돈 앞에서 절망해 본 사람들만이, 쌀과 돈 앞에서 피눈물을 흘려 쌀이 쌀인 동시에 돈이고 돈이 돈인 동시에 쌀임을 너무 잘 알아 잠든 동안에도 잊은 적 없는 사람들만이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말인 듯하다. 삶이 깃든 모든 언어가 피멍이 든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인 듯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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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출간되어 크게 주목받은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은 스탈린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권력 앞에 나약한 예술가의 복잡한 내면과 고뇌를 그려내며, ‘체제에 순응해 살아남은 비겁한 작곡가’ 혹은 ‘음악으로 압제에 은밀히 저항한 예술가’라는 이분법적 평가로는 가닿을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문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얼마 전 발간된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라는 부제처럼, 혹독한 전쟁 시기 탄생한 교향곡 7번을 둘러싼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역사서이자 작곡가의 모습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평전이다.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이 널리 읽혔음에도 그에 관한 책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만큼 격동의 현대사와 맞물려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작곡가가 드물기 때문이리라.

그런 관심은 음악회장으로도 이어져 롯데콘서트홀은 탄생·서거 백주년도 아닌 쇼스타코비치를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해 그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쇼스타코비치와 검은 수사’라는 음악회가 눈길을 끈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14번을 안톤 체호프의 소설 <검은 수사>와 결합해 만든 이 공연은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 필립 세처와 연극 연출가 제임스 글로스먼의 공동 창작물이다.

이들은 말년의 쇼스타코비치가 체호프의 이 단편에 매료되어 오페라를 구상했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현악사중주 14번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고, 체호프의 소설 내용과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엮어 에머슨 사중주단과 일곱 명의 배우 앙상블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음악-연극’을 만들었다. 소설의 등장인물 코브린과 페소츠키가 젊은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으로 중첩되는 대본만큼이나, 현악사중주 14번을 중심에 두고 자전적인 8번을 비롯한 여러 곡들이 극의 흐름에 따라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음악 구성이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의 15개 현악사중주 전곡 음반을 냈던 에머슨 사중주단은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연극 속에 녹여내며 색다른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기존 음악을 새로운 서사 안에서 재배치하는 작업은 2018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초연된 음악극 ‘귀향’에서도 엿볼 수 있다. 17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한국 전통 가곡을 교차해 만든 이 음악극에는 연출과 음악감독 외에 ‘음악 드라마투르그’가 따로 있어 바로크 오페라와 전통 가곡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귀환>을 해체하고 15개의 여창 가곡에서 적절한 부분을 선택해 극에 부합하는 음악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고향과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이 작품에서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도, 한국 전통 가곡도, 현재적 의미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지난 주말 열린 소리꾼 이희문의 ‘민요 삼천리’(‘깊은舍廊사랑’ 세 번째 프로젝트)도 과거의 노래가 흥미로운 서사 안에서 어떻게 생명력을 얻는지 보여준 공연이었다. 1968년 출시된 ‘민요삼천리’ 음반 얘기로 시작해 그 음반을 들으며 민요가수를 꿈꾸던 여성 화자의 사연을 따라가면서 그때 불렸던 노래들을 듣노라면, 익히 알던 민요들도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개성 넘치는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라이브 공연의 감동과 현장감을 대체할 수는 없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공연장까지 찾아오게 하려면 그만큼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공해야 할 터. 서양 고전음악의 미적 가치도, 전통 음악의 깊이도 그것을 행하는 음악가들의 자기 서사로 구현될 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아닐까.

훌륭한 연주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에도 관습적인 프로그램 외에 참신한 시도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클래식 공연은 별로 없다. 기존 레퍼토리도 어떤 서사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진대, 세상의 이슈와 접목해 고전을 현재화하는 음악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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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원로서예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상당한 양의 서적과 카메라 수집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동양의 고전을 비롯해 수많은 한문책과 중국 서적들로 가득 찬 서가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자학과 서예, 전각과 관련된 주옥같은 책들이 주욱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당연히 있을 법한 골동품이나 고서화는 한 점도 눈에 띄지 않아 물어봤더니 자신의 눈에 차는 게 없어 수집한 게 없다는 답변이 왔다. 나름의 감식안에 대한 자신감과 자기 취향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수집이란 횡적인 수집이 아니라 종적인 수집이며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뛰어난 질을 확보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선적으로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는 충만한 느낌이 탁월해야 한다. 사실 예술가란 존재는 그가 수집하고 있는 물건들을 통해 자신의 안목,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편이다. 물론 본인의 작품 자체가 이미 그 자신의 감각의 결정체에 다름 아니다. 결국 한 인간의 삶이나 작품, 그의 수집품은 그만의 감수성, 감각, 취향을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고 발화하고 있다. 예술은 전적으로 그것을 가시화하는 일이자 독하게 뿜어내는 일이다.

어느 순간 큐레이터와 평론가가 직업이 된 후로 나는 자연스레 다양한 것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당연히 여러 종류의 책들이 뒤를 잇고 화집과 전시도록 등 많은 자료들을 욕심껏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각종 문구류, 상당한 양의 CD와 골동품, 다양한 미술작품 등을 구입해 탐닉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과 함께 생애를 기꺼이 소진시킨다. 책은 읽고 문구류는 쓰는 한편 CD는 듣지만 골동품과 작품 혹은 매력적인 오브제라 모아둔 것들은 전적으로 완상하는 차원에서 수집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해서 내 좁은 연구실에는 수많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내 한몸이 겨우 비집고 들어올 만한 여유밖에는 없는, 마치 통조림통 속같이 좁고 밀폐된 곳, 사물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그 사물들만을 그토록 편애한다. 실용적 차원에서 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형태와 색상, 질감과 디자인을 마음껏 감상하고 향유하는 일이다. 이는 사물과 유희하는 일이자 그것과 더불어 몽상에 잠기는 일이다. 고독한 나를 그 사물들이 구원해 준다는 느낌이다.

이처럼 나는 매일 무엇인가를 수집하고 바라보고 좋아하면서 은밀한 시간을 보낸다. 이 자폐적인 사물과의 독대는 그것들이 발화하는 음성을 듣는 일이자 그 생김새와 색채, 질감을 편애하는 일이다. 미술평론가로서 작품을 보러 다니고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일과지만 실은 틈틈이 골동 가게와 서점, 문방구 또는 온갖 가게들을 들락거리면서 내 마음에 ‘쏘옥’ 드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수집하는 것이 주된 일인 것도 같다.

나는 깜찍하고 귀엽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 그러나 기품 있고 자연스러우며 과도하지 않은 미감을 두른 것들을 찾는다. 그것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보는 순간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그토록 예민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골라내는 안목과 마음을 갖고 싶기도 하다.

그것들을 지독히 편애하면서 살고 싶다. 결코 문드러지지 않는 감수성과 좋은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끝까지 가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사는 동안 나의 소원이 있다면, 꿈이 있다면 첫번째는 그동안 사 모은 책을 다 읽고 죽는 것, 두번째는 역시 수집해놓은 CD음반을 반복해서 다 듣고 가는 것, 세번째가 이렇게나 많은 필기구와 수첩, 노트를 죄다 쓰고 죽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필사적으로(?) 수집한 골동품을 마음껏 완상하고 이후 이를 책으로 엮은 후 정리하고 가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떠한 소원도 희망도 꿈도 가진 적이 없다. 진정으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나마 내가 욕망하는 것이라면 빼어난 아름다움과 탁월한 조형미를 두른 것들을 통해 내 안목과 감각을 고양하고 높은 취향과 눈썰미를 갖기를 간절히 원한다. 놀라운 눈을 애타게 갈구하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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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시간보다 아직은 글을 읽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읽는 이유는 영감을 받기 위해서고 영감이 필요한 이유는 글을 쓰지 못해서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삶의 일부를 낭비해버린 듯 허탈하기까지 하지만 좋은 글을 읽게 되면 외려 과분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송구하기까지 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많은 글을 읽었다. 내가 읽은 글들은 대부분 소설이다.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동시대의 소설이든 오래된 소설이든 가리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읽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면 고전을 읽는 것이다. 사전은 고전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작품이라 정의하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내게 고전이란 영감을 주는 작품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전이 반드시 오래된 작품일 필요도 없고 많은 이들이 아는 작품일 필요도 없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베트남의 소설가인 바오 닌의 단편 ‘물결의 비밀’이다. 단편이라 하기에는 너무 짧은 탓에 미니픽션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록 원고지 스무 장에 불과하다 해도 이천 장 못지않은 무게를 지니게 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읽은 이가 언제까지나 그 작품을 되풀이하여 곱씹어서 실제보다 두껍게 기억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처럼 이 소설은 처음 내 안에 자리 잡은 뒤 수백수천 번 불려나와 나와 대면하였기에 이제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지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좀 절망적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소설가라면 이런 소설 한 편쯤은 남겨야 할 것 같았고 이런 소설 한 편 쓰기가 난망하기 이를 데 없음을, 어쩌면 평생을 다해 쓰더라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절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유혹임을 느낀다.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 도달한 지점에 나 역시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절망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임을 느낀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 소설가가 바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은 여느 소설가들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을 능가하는 것임을. 오늘 내가 단어 하나에 일 분을 문장 하나에 십 분을 바쳤다면 내일의 나는 단어 하나에 십 분을 문장 하나에 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 바오 닌 역시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능가했을 테고 아름다운 소설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불안을 견뎠을 테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글을 쓰려는 열망만이 가득할 때 그 사람을 죽이는 건 글을 쓰려는 열망이므로 살기 위해서는 글을 쓰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사뮈엘 베케트와 필립 로스의 말을 떠올린다. 베케트의 “실패하고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문장에는 이어져야 할 문장이 있다. “더 나은 실패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실패하고 실패하여 최악에 이르러 끝장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므로 나는 베케트의 문장을 신입사원 연수회에서 정력적인 강사가 주장할 법한 성공하는 사람의 자세와 같은 것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실패가 분명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용기,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 창의적으로 실패하여 실패조차 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다.

필립 로스는 파리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글쓰기를 의심해야 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동안에는 진정으로 글쓰기가 이뤄지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순간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직전에 있는 셈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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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쯤 독일에서 출간되는 현대음악 사전에 ‘코리아’ 항목 원고를 부탁받은 적이 있다. 별 어려움 없이 쓸 거라 여겨 수락했는데, 요청사항에 북한 현대음악도 들어있어 멈칫 당황했다.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했거니와 ‘코리아’에 북한도 포함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분단은 다른 한쪽의 존재조차 의식에서 지워버렸던가 보다. 우리에게 북한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폐쇄된 사회, 지척에 놓여있으나 심리적으로는 머나먼 존재였다.

최근 북한의 삼지연관현악단과 남한의 대중예술단이 상호 방문 공연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다른 체제의 이질적인 문화라도 음악을 통해 거리감이 좁혀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음악정치’가 양 진영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었다면, 남북 간의 그것은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어야 하지 않을까.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4월 3일 열린 ‘북남 예술인들의 련환공연무대 우리는 하나’에서 남북 가수들이 ‘우리의 소원’을 함께 부르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한 가수들이 남한의 대중가요를 부르듯이 남한에서 연주되는 북한 음악도 있다. 아리랑 선율을 관현악으로 자유롭게 풀어낸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 환상곡’.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서울에 온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연주에서 소개되었고, 2002년 KBS교향악단의 평양 공연에서도 두 악단의 합동 연주로 울려 퍼졌다. 2008년 로린 마젤이 이끈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 2012년 정명훈이 주도한 북한 은하수관현악단과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의 파리 합동 공연에서도 앙코르로 연주되며 널리 알려져, 이제는 우리 교향악단과 국악관현악단도 즐겨 연주하는 곡목이 되었다. 거문고 독주곡 ‘출강’ 역시 남한으로 월경한 북한 창작곡이다. ‘쇠가 나온다’는 뜻의 이 곡은 북한 작곡가 김용실이 1960년대 흥남제련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활력과 고단함을 담아낸 작품으로 1990년대 중반 일본을 통해 남한에 전해졌다 한다. 북한에선 악기개량 후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아 오히려 남한에서 거문고 레퍼토리로 정착했다.

민족성과 대중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북한 음악에는 순수기악곡보다 성악곡이나 민요 선율을 토대로 한 기악곡이 흔하다. 2012년 은하수관현악단의 파리 공연에서 악장 문경진이 앙코르로 연주한 백고산의 ‘닐리리야’도 그 한 예다. 일제강점기 조선 반도 전체에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고 1950년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배웠으며 이후 북한 바이올린계의 멘토였던 백고산. 그가 남긴 무반주 바이올린 곡들도 우리에게는 관심이 가는 대상이다.

사실 남북한 음악교류의 물꼬를 튼 건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었다. 그가 1990년 10월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성사시켜 황병기를 단장으로 한 서울전통예술단이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그해 12월 평양민족음악단이 서울에 왔을 때 북한의 대표적인 개량악기 ‘옥류금’이 소개되어 우리 국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국악과 양악으로 양분된 남한과 달리 북한은 개량된 전통악기와 서양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배합관현악’ 편성이 특징이고, 관현악단 레퍼토리도 서양 클래식보다는 북한 작곡가들의 창작곡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음악적 유산이 최근 늘어나는 남한의 서양악기와 국악기 혼합 앙상블 시도에 또 다른 상상력을 제공할지 모를 일이다. 남북 예술교류가 본격화되면 음악가들의 합동 공연도 활발해질 것이다. 교향악단 연주에선 클래식 음악이 주 레퍼토리가 되겠지만, 여러 형태의 앙상블에서 남북이 함께 연주할 만한 좋은 창작곡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매년 가을 평양에서는 윤이상음악회가 열린다. 1998년 남북한의 연주자들이 첫 합동 공연을 가진 이래, 2008년 첼리스트 고봉인의 협연 외엔 어떤 만남도 이어지지 못했다. 올가을에는 남북의 음악가들이 그곳에서 윤이상의 작품으로 하나 될 수 있을까? 매년 봄 찾아오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윤이상관현악단의 연주를 듣게 될 날은 언제일까? 북한의 젊은 연주자들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게 될 날도.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가 정착되기를 온 마음을 다해 빌어본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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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은 타지역의 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역동적이고 뜨거운 편이다. 그만큼 한국의 근현대사가 격동 그 자체였고 지금도 매일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지 않은 날이 없으니 이러한 현실로부터 발아하는 미술이 그런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이인성의 그림을 시작으로 이후 1950,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과 빈곤을 정면으로 응시한 박수근, 이중섭의 경우가 그런 선구적인 예로 떠오른다. 오윤과 손장섭, 신학철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첨예한 모순을 고발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남관과 권순철은 한국전쟁 때 죽은 이들의 얼굴, 넋을 형상화했다. 박생광의 작업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들만큼이나 이런 작업의 선구적인 사례가 바로 김영덕의 그림이다. 지금 그의 미수전이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1949년 그는 어린 학생이었는데도 경찰에 연행돼 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은 후 겨우 살아남은 경험이 있었는데, 이른바 남로당의 조직원, 빨갱이로 몰렸던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생애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시대적 모순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의 평생의 작업 화두는 바로 어린 나이에 보고만 온갖 불의와 압제,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로 인한 무수한 죽음과 피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장면, 상처가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것들은 수시로 출몰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따라서 김영덕의 그림은 그렇게 떠도는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려는 지난한 시도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그린 ‘인탁-인혁당의 사람들’(1976)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망자들에 대한 애도와 비애의 감정을 진하게 담고 있는 그림이다.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8월, 이른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인민혁명당사건’(1차)과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2차)으로 나뉜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자 재야세력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고 유신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위반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 했다.

1974년 4월25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정부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농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발표하였다.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고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으며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다음 날 4월9일 형을 집행하였다. 채 20시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으며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에 해당한다.

김영덕의 그림은 몇 개의 층위로 구분되는데 화면 상단은 눈부시게 하얀빛으로 물든 공간에 흰색의 한복을 입은 망자들이 이제 막 시선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설핏 보여준다. 하단에 그려 넣은 군모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한 핵심을 지시하고 있다. 당시 엄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미술인 대부분이 서구의 전위미술이나 단색주의회화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당시의 참혹한 사건을 형상화한 이가 바로 김영덕이란 작가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 그림은 철저하게 망각되어 있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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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잊히지 않는 분들이 있다. 대학시절 잠깐 얹혀 살았던 친구 자취방의 주인 노부부였다. 그 집에 들어가던 날 나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우선 노부부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주인 노부부의 성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단아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거실 한가운데 엉거주춤 선 채 꾸벅 인사를 드렸다. 주인 노부부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노려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친구에게 들어 은퇴한 교육공무원이라는 건 알았지만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교육공무원이 아니라 사법공무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노인의 근엄한 얼굴과 그에 못지않게 위엄이 서린 노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단번에 기가 죽었다.

눈에 거슬리는 짓이라도 했다간 쫓겨날 게 뻔해 보여 단칸방 벽 너머가 노부부의 거실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말소리조차 죽이며 지냈다.

이십대 내내 나는 연례행사처럼 한 해에 한 번씩 편도선염을 앓아 고열에 시달리곤 했는데 그 시절이 이 연례행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던 듯하다. 친구는 학교에 가버렸고 몸살기가 있어 혼자 방에 남았던 나는 점점 열이 올라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러는 동안 내내 눈을 감고 있었던 이유는 눈을 뜨면 눈앞이 빙빙 돌아 더 어지러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잠들지는 못하고 눈만 감은 채 열에 시달리는 동안 낮이 깊었고 일상에서 생겨나는 자잘한 소음들이 파도처럼 내 귓가로 다가왔다 멀어지길 되풀이했다. 노부인이 외출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약국이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지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잠깐 뒤척이기라도 하면 바닥에 닿거나 쓸린 몸의 어느 부분이나 눌린 팔뚝 따위가 아파서 절로 끙 소리가 났다. 서울살이가 처음이었던 나는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게 바로 타향살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결국 혼자라는 생각 탓에 잔뜩 주눅이 들었던 나는 다시 몸을 뒤척이다 신음을 냈는데 곧이어 똑, 똑, 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벽 너머 저쪽 거실에서 노인이 노크를 한 거였다. 아무래도 조용히 하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속으로 ‘노인네가 귀만 밝아서는’ 하며 투덜대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조금 뒤 다시 똑, 똑, 똑 소리가 들렸다. 무척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두드림이었고 문득 그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괜찮냐고 묻는 뜻이라는 걸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괜찮다는 의미로 벽을 조심스럽게 세 번 두드렸다.

그날 오후 외출에서 돌아온 노부인이 단칸방을 찾아와 상비약에서 골라온 몇 가지 약을 내게 주었다. 그 약 덕분인지 부었던 편도선도 이틀 사이에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어느 한가했던 오후 나는 방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다가 벽 너머 거실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음이었다. 노부인은 외출을 했으니 노인의 신음인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벽을 똑, 똑, 똑 두드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 나는 후닥닥 뛰어나갔다. 노부부 집의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단아하고 정갈한 거실 한가운데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119에 전화를 걸고 구급대원들이 들이닥치고 노인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다행히 노인은 때를 놓치지 않아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며칠 뒤에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부인은 아무 말 없이 과일이 든 바구니를 우리 자취방 앞에 놓아두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그 과일을 먹으며 분명 노쇠해진 탓에 귀가 어두웠을 노인이 어떻게 내 신음을 들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고 사람이란 그러니까 그게 누구든 사람이란 다른 어떤 소리보다 고통 받는 타인의 소리에 예민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설령 귀가 먼다 해도 그 소리는 가슴으로 듣는 것이기에 듣지 못할 수가 없다는 이 신비로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로 치부하며 살아가는 그이들을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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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섬 제주의 봄은 유채꽃 만발한 풍광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 아름다운 자연에 깊은 상처와 아픈 역사가 서려 있음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기 예능프로들에서도 잇달아 언급되며 제주의 산천에 아로새겨진 4·3사건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너븐숭이, 다랑쉬굴, 섯알오름 등 70년 전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그대로 품고 있는 땅. 섬사람들에게 그때의 사건은 발설은커녕 기억에서조차 지워야 했던 천형과도 같은 일이었다. 제주 4·3을 평생의 문학적 화두로 삼아온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이를 ‘기억의 자살’이라 불렀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것. 냉전과 분단체제, 독재정권하에서 그렇게 기억은 말살당했지만, 무고한 수만명의 억울한 죽음이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제주 유채꽃. 제주관광공사 제공

30년의 세월이 흐른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4·3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했고, 1980년대 말 일기 시작한 4·3진상규명운동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2003년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주민들에 대한 대통령의 첫 공식사과 후, 2008년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제주4·3평화공원’이 문을 열었지만, 그 후로도 4·3은 외딴 섬 제주의 아픔으로만 여겨져 왔다.

역사적 진실은 때로 문학적·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더 강렬하게 전해지곤 한다. 5년 전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자행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피해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간 주민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 큰 울림을 남겼다. 수십년에 걸쳐 창작된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도 몇 년 전 한글완역본이 출간되며 한국 현대사에서 4·3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시와 노래, 춤과 연극, 그림과 영화로 이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려 애써왔다. 30년 전 ‘잠들지 않는 남도’를 작곡한 가수 안치환이 최근 ‘4월 동백’을 발표하며 다시 이 섬의 슬픔을 노래하듯이.

올해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일며 각지에서 전시·공연·퍼포먼스·씻김굿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클래식 음악인들도 4월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섬의 아픔을 뭍에서 기억하다’라는 추념음악회를 마련했다. 구자범의 지휘로 네 명의 독창자와 ‘참 필하모닉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국립합창단·안양시립합창단이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한 이 음악회는 전국의 뜻있는 음악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해 오케스트라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80명의 오케스트라와 90명의 합창단이 모아낸 진혼의 목소리는 음악회장에 온 청중에게는 물론이고 참여한 음악가들의 마음속에 제주 4·3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영원한 안식을”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레퀴엠’은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산 사람을 위로하는 진혼미사곡이다. 그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 20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창작되고 연주되는 것은 잔혹한 폭력과 전쟁에 스러진 원혼들이 넘쳐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제주 4·3을 비롯해 여수·순천, 거창 등지에서 벌어진 억울한 죽음들이 많았다. 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보듬고 우리 사회가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할 터. ‘영원한 안식’은 그런 연후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만 비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거친 후 4월의 진혼곡이 해마다 울려 퍼지며 한반도에 마침내 평화롭고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기를….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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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 35인이 모였다. 몇몇을 빼면 서로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사람이 모일 때는 대개 이유가 있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거나, 나눌 이익이 있거나, 짝이 필요하거나,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떠한 공통점도 없고, 나눌 만한 이익도 없으며, 신상 정보 또한 모르는 35인은 제주도 성산에 모여 2박3일을 보내게 됐다. 이 시간의 이름은 ‘낯선 컨퍼런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열렸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강한 연결’과 ‘약한 연결’로 나눈다. 전자가 가족, 친구, 동료라면 후자는 낯선 사람, 뜸하게 아는 사람 등 ‘지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그룹이다. 이 책은 강한 연결보다 약한 연결을 통해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한다. ‘낯선 컨퍼런스’는 이 책의 제목과 내용에서 이름을 빌려 온 행사다.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저자들이 진행하는 것도 아니니, 말하자면 그 이론을 검증해보려는 일종의 실험인 셈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스태프로 참여, 초기 기획부터 진행을 함께했다.

참가 인원을 60명에서 35명으로 줄였다. 2박3일 동안 인사도 한 번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기본적인 원칙은 같았다. 첫 번째, 장소는 제주도다. 광화문이나 테헤란로 등 일상의 지역에서 행사를 갖게 되면 사람을 만날 때도 관성적이 된다. 비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일상을 단절하되, 여권이 필요없는 제주도는 그래서 ‘약한 연결’의 낯선 공간이다. 두 번째, 참가자를 신청이 아닌 초대로 모집한다.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건,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사람이건 상관없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면 된다. 초대장엔 이렇게 썼다. “ ‘낯선 컨퍼런스’는 형식보다 내용을 고민합니다. 2박3일의 느슨한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매뉴얼에 담긴 인사이트가 아닌, 각자의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 생각을 나눕니다. 엄선된 호기심으로 초청된 낯선 사람들의 수다로 각자의 물음표를 섞으려 합니다. 2박3일이 지났을 때 서울에서의 물음표가 제주에서의 느낌표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글을 보고 35명이 항공권을 끊고 적지 않은 참가비를 냈다. 그리고 지난 23일, 성산 플레이스 캠프에 낯선 사람들이 모였다.

1인당 3분씩의 자기 소개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철제가구를 만드는 이, 베개를 만드는 이, 숙취해소제를 만드는 이, 파티를 만드는 이… 이름을 걸고 유무형의 무엇을 창조하는 이들의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 작은 탄식이 일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놀라움, 저런 사람 만나고 싶었다는 발견의 기쁨이 어우러지는 탄식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인사의 내용은 참신했다. 한국인의 인사법인 호구조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소개에서 알게 된 간략한 정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각자의 세계 속으로 훅훅 들어갔다. 생전 만나본 적 없는 직업군의 사람들이 여러 프로그램을 거치며 밀도있는 관계로 나아갔다. 행사가 끝날 무렵,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이나 직장의 워크숍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친밀감이 그들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사람과 마주칠 만큼 마주쳐온 그들이다. 지칠 만큼 지쳐온 그들이다. 이 35개의 세계는 어떻게 이토록 가까워졌을까. 강하지도 흐릿하지도 않은 낯선 호기심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서의 삶을 지향해왔던 이들이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동인이 진심의 교환으로 바로 이어질 수야 없을 테지만 그 지점으로 향하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오프라인에서 쉬이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온라인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온갖 분쟁들에 지쳐가는 지금, 새로운 관계의 활력을 만끽할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 말이다. 처음 듣고 꽂히는 음악이 있다. 첫술에 침이 솟구치는 음식이 있다. 늘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음악과 음식 같은 사람들에 굶주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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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주 대상으로 미술평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관람하고 공부하는 시간 못지않게 전통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고미술품을 감상하고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현대미술이니 전통미술이니 하는 구분이나 경계라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 모두를 하나의 조형으로 보고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박물관과 골동품 가게 등에서 접한 우리 고미술품 중 상당수가 감동적인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삼국시대 토기 잔과 직선무늬떡살, 그리고 옹기에 주목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옹기를 보러 여러 곳을 다녔고 그러한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하나씩 구입하고 있다. 가장 흔하고 저렴한 옹기에서 절묘한 것을 찾는다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보았으며 우리네 일상적인 삶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쓰였던 옹기의 매력을 순수한 조형적인 차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고미술상가를 비롯해 양평, 충주, 천안, 부안, 광주, 순천 등지에 산개한 옹기 가게나 경매장을 틈틈이 찾아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근자에 부안에 가서 여러 옹기를 보고 왔다. 사방은 적조하고 다만 멀리서 이곳까지 기어이 밀려와 다소 거칠게 흩어지는 바닷바람과 ‘짠내’만이 가득한 곳에서 겅중거리며 마음에 드는 옹기를 찾아다녔다. 우선 형태가 완벽한 것, 색채가 묵을 대로 묵어 그 맛이 희한한 것, 오랜 시간의 땟물이 가득 차 올라와 있는 것, 옹기 표면에 그려진 선이 절묘한 회화적 맛을 거느린 것 등이 하나로 모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찾는다라고밖에는 말하기 어렵다. 사실 그 선택은 무척 직관적이고 인상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편이다.

옹기를 볼수록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소박하며 무심하면서도 절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음에 감동하고 있다. 옹기는 청자와 백자에 비해 다소 투박하고 수수해 보이지만 그 자체로 소박한 미감이 번득이는데 나는 그런 맛이 참 좋다. 이는 마치 서민적인 민화나 소박한 목기를 접하는 맛과도 유사하다. 옹기는 찰흙으로 만든 후 잿물 유약을 묻혀 1200도 온도에서 10여일 동안 구워내는 그릇을 말한다. 옹(甕)이란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로 저장 용기인 그릇의 형태를 일컫는 말인데 옹기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져 이후 한국인들의 실생활 여러 곳에서 부담 없이 활용된 그릇으로 철저히 실용성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정해진 틀이 없이 그저 사용에 편리하게 자유롭게 변형되어왔으며 그만큼 많이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살펴보면 옹기의 주원료인 찰흙은 산에서 얻는 것이고, 진흙을 굽기 전에 바르는 잿물의 재료 역시 나뭇잎이 썩어서 만들어지는 부엽토와 재다. 더구나 옹기가 깨져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자연으로, 흙으로 돌아가니 참으로 자연친화적인 그릇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알갱이가 섞여 있는 질(점토)로 만들어지고 가마에서 소성될 때 질이 녹으면서 미세한 기공이 형성되고 그로 인해 공기·미생물·효모 등이 통과할 수 있는 이른바 숨 쉬는 옹기,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닌 옹기이기도 하다. 이런 그릇이 있었기에 한국 고유의 발효 식품들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보다도 나는 옹기의 그 소박한 미감과 풍성한 형태, 그리고 옹기 표면에 무심하고도 놀라운 솜씨로 쓱쓱 그려나간 선의 맛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 옹기 만든 이가 평생을 그어 이룬 어떤 경지일 것이다. 나는 저런 선 하나를 애타게 찾는다. 사실 옹기의 매력은 이 특징적인 무늬에 있다. 시유 단계에서 넣는 손가락 그림인데 손놀림을 이용하여 무늬를 만드는 것을 흔히 ‘환을 친다’고 표현한다. 환을 치는 것은 무늬를 낼 뿐 아니라 표면의 유약을 부분적으로 닦아 내어 옹기의 통기성을 높여주는 역할도 하는데 하여간 이 환치기로 그려진 자국은 속도감이 있고 즉흥적이며 생동감을 보여준다. 자생적으로 몸이 기억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그려낸, 자유분방한 무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절묘한 선,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모든 그림 그리는 이들이 마땅히 보고 깨달아야 할 선·회화의 한 경지를 그야말로 놀라운 경지에서 부려놓고 있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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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사연을 글로 풀어내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말,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로도 부족하다는 이 말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유장하고 웅숭깊을 수 있는가를 뜻하지만 삶을 소설로 풀어내기가 생각처럼 여의치 않다는 뜻으로 새겨들을 수도 있다.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삶을 살아왔는데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자신의 사연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온전히 소유해 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사소설은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며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주된 내용인 소설이다. 사소설이 하나의 장르를 뜻할 때에는 일본의 특유한 소설 형식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사소설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다자이 오사무이고 그의 딸인 쓰시마 유코 역시 현대 일본 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 소개된 쓰시마 유코의 작품 가운데 <욕실>이라는 단편소설에는 작가인 유코라 여겨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중학생인 유코는 어느 날 방과 후에 오빠가 입원한 병실에 들른다. 오랫동안 감기로 누워 있던 오빠가 입원한 거였다. 그러나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유코는 오빠가 죽었음을 직감한다.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이미 가슴 깊은 곳에서 알아차렸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가서도 유코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는 개와 장난을 친다. 그런 유코에게 숙모가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오빠가 죽었다, 하고는 울음을 터뜨린다. 유코도 죽은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고 장례까지 치르지만 그러는 내내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모르는 체하기. 여기에는 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유코가 오빠의 죽음을 직감했음에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유코가 어리기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주변사람의 단정적인 언행 탓에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벗어나 나 자신이 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욕실>에서도 유코의 회한은 그 지점을 향하지만 또 다른 단편 <슬픔에 관하여>에서는 그런 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은 실제로 어린 아들을 잃은 유코가 아들의 죽음 이후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유코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위로와 동정이 아무리 예의 바르고 인간적이라 해도 결국 슬픔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그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잘 보여준다. 내가 느끼는 슬픔, 기쁨, 괴로움, 외로움 등은 나의 것이기에 누구보다 절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의 감정에 몰두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위로의 말에 고맙다거나 괜찮다고 대답해줘야 하고 내 감정을 타인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억눌러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감정은 설령 이미 존재했다 해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실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감정과 감정에 대한 반응에도 시차가 있을 수 있으므로 때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모른 척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감정이란 사적인 것이기에 박탈당할 수 없다고 간주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순수하게 홀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도 그와 똑같이 맞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 가운데 누구의 것이 더 소중하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연이 반드시 글이 될 필요도 없고 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것과 사연을 온전히 소유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내가 살아온 이 신산한 삶이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건 내 삶이 아닌 셈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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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부산 영도구 동삼동 바닷가 조개더미에서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조개껍질 하나가 발견되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그 조개껍질에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구멍이 세 개 나 있다. 마치 사람의 눈과 크게 벌린 입처럼 보이게 만든 구멍으로 인해 흡사 비명을 지르거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 연상되었다. 속살을 발라먹고 내다 버린 조개껍질 따위를 한군데에 차곡차곡 쌓은 조개더미를 패총(貝塚)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나온 이 조개껍질은 아마도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얼굴 이미지이자 최초의 미술작품(?)일 것이다. 일종의 이 가면은 길이가 11.5㎝라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신으로 변신하고자 했던 당시에 도구적 기능을 지녔던, 주술적인 용도로 쓰였던 가면으로 추정된다.

가면은 특정 물질로 만든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용, 주문, 의식으로 이루어진 복합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힘차고 동적인 물건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가면이 죽은 사람에게 영원한 젊음을 부여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면 속에서 비로소 영생과 불사를 간직할 수 있었으며 내세의 영원한 복락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고대 희랍에서는 죽은 사람을 보호하고 내세로 가는 여행을 도와주기 위해 지옥의 여신 페르세포네의 가면을 죽은 사람의 얼굴에 씌웠다고 한다. 옛날부터 티베트와 부탄에서는 머리 전체를 시체에서 떼어서 고인의 귀한 유물로 보존해왔다고 한다. 시체는 새들에게 먹이로 주지만 머리는 신성한 가보로 언제나 보존한 것이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고대에는 패배한 적의 머리를 정복자의 집에 걸었는데, 그 머리가 ‘그 집을 지키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적의 영혼이 머리에 들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영혼이 얼굴 속에 있다는 것을 믿었으므로 신과 정령의 형상을 얼굴 모습으로, 가면으로 만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면은 본래의 몸을 지우고 또 다른 존재로 비약하거나 현세의 얼굴이나 육체를 대신해 초월적인 존재로 비상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것은 실제의 얼굴을 지우고 다른 얼굴로 대신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가면이란 버릴 수 있는 얼굴을 말한다. 가면은 우리의 흔들리는 얼굴을 가리고, 낯설고 고정된 모습을 선사한다. 이는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얼마 전 가면을 둘러싼 해프닝이 있었다. 지난 2월11일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예선 코리아-스위스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이 김일성 가면을 쓰고 응원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론 이내 오보로 판명 났다. 그러나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하는 북한 응원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유하면서 “정부가 이를 결코 몰랐을 리 없다. 저 흉물스러운 것을 응원 도구라고 허락했나? 남북 단일팀 밀어붙이기로 우리 선수들 기회를 박탈한 것도 모자라 경기장에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선수들과 관중들이 경기 안 일으킨 게 다행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벌이지 못하는 일이 없구나.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누가 협조하고 누가 기획했는지. 대한민국 무너지는 소리가 평창의 응원소리보다 높구나”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하태경 바른정당 최고위원은 “북한 응원단이 대놓고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한다. 여기는 평양올림픽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한국 대통령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김일성 가면을 감히 쓸까”라며 “평양올림픽의 말로를 본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이는 김정은의 지시가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오래전 신학철의 ‘모내기’ 작품을 놓고 김일성의 생가를 그린 것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한 그림이라고 해석한 공안 검사들의 시각이 연상되는 발언들이다. 이처럼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읽고 싶은 대로 읽어대는 이 막무가내식의 감상법에 대해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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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누구나 한번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장소를 찾았을 때 그곳이 기억에 남은 장소와는 달라 놀랐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성인이 되어 투표를 위해 고향을 찾았을 때였다. 투표장은 내가 다닌 초등학교였는데 기억에 남은 것과 달리 운동장이 퍽 작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광활하다 할 만큼 컸던 것만 같은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작고 평범한 운동장일 뿐이었다. 세월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때때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새삼스럽기는 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기억과 실재의 차이를 자연스레 인정하게 되어서였던 듯하다.

그리고 며칠 전 사십여년 동안 기억에만 있던 장소를 찾게 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부모님과 더불어 사십여년 전 당신들이 살았던 셋집을 찾은 거였다. 그 시절 당신들은 세 살짜리 아들 하나를 슬하에 둔 삼십대의 젊은 부부였고 셋집 주인은 사십대의 부부였다. 부모님은 그 시절을 가장 찬란했던 순간처럼 회상하곤 했던 터라 나는 언제든 기회가 되면 그 옛집을 더불어 찾아가고 싶었다. 물론 그 집을 단번에 찾은 건 아니었다. 우선은 당신들의 기억에 남은 마을 이름에 의지해 그런 이름을 지닌 마을을 찾아간 뒤 마을회관에 들렀다. 다행히 그곳에서 당신들보다 나이 든 노인 한 분이 셋집 주인의 이름을 기억해주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른 마을이라는 것도 일러주었다. 그곳을 찾아가다 들른 삼거리 슈퍼 주인은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고 그 뒤로는 별로 헤매지 않고 그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당신들은 옛 마을에 들어서자 기억이 났던 모양인지 바로 여기라며 장담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무척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어서 내 기억에는 몇 가지 인상으로만 남았던 터라 사십여년 만에 찾은 그곳이 낯설기만 했다. 내가 지닌 몇 가지 인상이라는 것도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그 집이 무척 크고 대문이 높고 마당이 그윽했다는 등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옛집에 이르렀다.

기억에 남은 것과는 다르리라 짐작은 했지만 달라도 너무 달라서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의 집이라는 건 기억과 같았지만 작아도 너무 작았다.  대문 양쪽으로 문간방이 달리고 집채가 작은 마당을 둘러싼 형태였는데 마당도 두어 평에 지나지 않아 햇빛이 겨우 들 만큼 조붓했다. 노인은 돌아가신 지 조금 되었고 노부인이 살아 계신 터라 부모님은 노부인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 나왔다.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머물렀던 대문 오른쪽 문간방을 들여다보았다. 층이 진 두 칸짜리 방이었는데 손바닥만 한 창이 하나 달렸을 뿐이어서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니까 사십여년 전 그 방에서 삼십대의 하사관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세 살짜리 아들이 꿈을 꾸며 잠들곤 했던 거였다. 노부인은 다시 찾아오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말로 찾아온 사람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마당으로 내려앉은 한 줌 햇살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집을 다녀온 뒤 한동안 나는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기억에 남은 집과 실제로 찾은 집이 그처럼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섯 살인 딸아이는 이즈음 사물의 크기를 가늠할 때 아빠인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커다란 차가 지나갈 때면 아빠보다 크다 하며 놀라고 무언가를 설명할 때도 아빠보다 크거나 작다, 아빠보다 힘이 세거나 약하다 식이다.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기억의 집은 집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장소나 사물을 실제보다 크고 아름답고 멋지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곳에 깃든 정서가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꿈을 꾸며 살았고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기에 기억 속에서 그곳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하고 고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장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든 실제로 기억하는 건 사람과 사랑뿐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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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다닐 때 들은 얘기다. 인문대 신임 교수가 술자리에서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대학원생들이 그 교수에게 찾아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있지 않겠노라 경고했더니 그 다음부터 아예 술자리에 나타나질 않았단다. 그 교수가 누구인지, 그 후로도 문제가 없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30여년 전 흘려들었던 이 얘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음은 교수의 잘못된 행동에 즉각 응분의 조치를 취한 학생들의 행동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음대에도 성추행을 일삼는 교수가 있었다. 학생회가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지만 학교는 그를 잠시 해외에 나가있게 하는 걸로 무마했고 얼마 후 그는 다시 복귀했다. 실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성희롱을 고발한 한 조교의 용기로 대학 내 성희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사회의 권력형 성범죄는 여전하고 피해자 다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 내 여검사들조차도 성추행 가해자를 폭로하는 것이 어려운 사회에서, 하물며 아무런 힘도 없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제대로 대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수년 전 교수들의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며 파면에 이른 경우도 있었지만, 성희롱을 가볍게 여기는 남성중심 문화, 성추행이 밝혀져도 기껏해야 정직 몇 달에 그치는 교수사회의 온정주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2016년 가을,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가 대두되며 피해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의 심각성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단, 미술계, 영화계는 물론이고, 예술학교에도 피해자들의 고발이 쏟아졌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계는 조용했다. 피해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부 고발이 어려운 집단이어서다. 오랜 기간 일대일 레슨으로 형성된 교수와의 수직적 관계는 평생 음악 활동의 기반이고 그 관계를 벗어나 살아남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 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제자 성추행 문제로 파면에 이른 음대 교수를 제자들이 옹호하며 피케팅을 하고 거리음악회를 열었던 것은 이런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일부 음대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지만, 영향력이 큰 인물일수록 학생들도 그와 이해관계를 공유하기에 내부 문제는 밖으로 발설되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음대 교수들의 폭언, 폭행, 티켓 강매, 성희롱, 성추행 사건들은 안에서 곪고 곪아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문제가 드러나야 개선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논란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없다. 뼈아픈 반성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는 그 집단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문제는 성폭력을 비롯한 온갖 잘못된 관행들을 학생들이 당연시하거나 체념해버리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침묵하도록 강요받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다.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목소리 덕에 간과했던 문제를 깨달았고, 여전히 강고한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될 그들 옆에서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권력관계에서 약자에 놓인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인 것이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세계적인 노 지휘자 두 사람의 수십년 전 성범죄 고발로까지 이어졌다. 대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바뀌며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화한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성추행과 성폭행 피해자 156명의 증언을 일일이 경청하고 격려하며 가해자에게 175년을 선고한 미국 여성 판사의 얘기가 단지 먼 나라의 일이 아니기를… 앞서 용기를 낸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우리를 일깨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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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커피가 강배전으로 쓴맛만 내는 것은 커피가 식었을 때에조차 그 잡내들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그는 후일 프랜차이즈 커피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설탕에 대해 “무뇌아적 중독을 일으키는 ‘환상’의 맛”이라고, 고추장에 대해 “맛을 얼버무리기 위한 술책”이라고 썼다. 설탕과 고추장의 조합인 떡볶이 광고에 출연했다. 방송에서도 “길들여진 맛”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떡볶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얘기다. 먹방, 쿡방은 여러 스타를 만들어냈다. 요리사와 사업가가 대부분인 가운데 황교익은 직접 음식을 만들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명세를 탄 인물일 것이다.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 전국을 누비며 보고 먹은 식재료에 대한 지식, 유려하고 또렷한 문체로 이미 팬이 적지 않았던 그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왼쪽부터), 유시민 작가, 장동선 박사, 건축가 유현준, 가수 유희열이 2017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tvN '알쓸신잡2'(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송을 타며 날개를 달았다. <수요미식회>에 이어 <알쓸신잡>까지 히트했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 권위자이자 전문가가 됐다. 무거운 이름이 됐다. 이름에 무게가 생기면 신중해지기 마련이다. 가볍게 소비되는 연예인이 아닌, 전문가라면 더욱 그렇다. 직업윤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황교익의 최근 행보는 그래서 실망스럽다. 떡볶이가 맛없는 음식이라고 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음악평론가인 내가 차트 1위를 하는 곡이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평론가의 기준은 상업적 잣대와는 다를 수 있다. 영화를 고를 때 차트나 입소문 말고도 굳이 영화 평론가의 리뷰를 찾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뭔가에 대해 말해서 업을 일구는 사람에게 논란이란 일종의 세금과 같다. 논란이 주장 그 자체일 때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주장의 앞뒤가 다를 때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고추장과 설탕의 황금 조합인 떡볶이, 방송에서 맛없는 음식이라 설파했던 그 떡볶이 광고에 본인이 출연한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광고료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조금의 사례비를 받고 찍은 것”이라며 “불우 어린이 돕기에 응해줬던 회사이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에 찍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의 해명은 문제의 본질에서 비켜 있다.

광고를 볼 때 모델이 얼마를 받았는지 따져가며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 광고에 출연한 배경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욱 없을 거다. 전문가가 광고에 출연했을 때 발생하는 상품의 신뢰도는 연예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를 모르고 ‘선의’로 출연했다면 순진무구한 거고, 알면서도 했다면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오랫동안 언론에 몸담았던 그가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뒤 다시 내놓은 입장이 점입가경이다. 이명박 정부의 한식 세계화 정책으로 떡볶이가 국민 간식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대단히 아쉬웠다. 전형적인 진영론자의 대처지, 평론가이자 전문가의 말은 아니다. 백번 양보해도 이명박근혜 정부 이전에도 떡볶이는 대표적인 한국의 간식 아니었던가? 사실 이 모든 게 그가 떡볶이 광고만 찍지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나 꼽자면, 한결같이 사는 거라 말하고 싶다. 우리가 그런 이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닌가.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의 언행과 지금의 처신이 맞지 않을 때 비판을 겸허히 수용할 줄 아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름에 무게가 더해질수록 그런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 비판의 방향을 호도하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진영론으로 대처하는 게 어른의 자세는 아니다. 전문가의 자세는 더더욱 아니다. 그와 함께 <알쓸신잡>에 출연한 정재승 박사는 밀려드는 CF를 모두 고사했다고 한다. 부끄러워서였다고 하지만 광고와 전문가가 만났을 때 파급되는 효과를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 작가도 유희열에게 “광고는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듣고도 광고 섭외를 거부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만든 구두 홍보를 위해 처음으로 CF를 찍었다. 무게가 있는 이름이란 그렇게 쓰는 것 아닐까.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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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종숙의 전시를 흥미롭게 보았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천진한 제스처로 자욱하다. 우선적인 인상이 그렇다. 그리다 만 그림, 마구잡이로 ‘쓱쓱’ 선을 그어놓은 낙서 같은 붓질, 화면에 물감을 ‘북북’ 칠해놓고 그 위로 산과 나무, 풀, 새 혹은 자연풍경의 일부가 연상되는 암시적인 흔적을 산개시켜놓은 듯하다. 얼핏 전통적인 동양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위에 추상표현주의풍의 과감하고 드라마틱한 붓질이 다소 난폭하게, 공격적으로 지나간다. 이른바 드로잉적 요소가 무척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조가 깔린 바닥면에 부분적으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형상과 그 형상을 지우고 칠해서 덮어나가는 붓질이 몇 겹의 공간을 만들고 있는 화면 위로 마치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는 선들이 상당히 회화적인 맛으로 조율되면서 화려하게 춤춘다. 선, 붓질은 그리기와 칠하기, 선적이면서도 면적인 역할을 동시에 겸하고 있으며 특정 산수화를 해체하고 붓질로 환원한 것도 같다. 이렇듯 붓질을 상당히 감각적으로 운용해나가면서 그 붓질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표정의 여러 차이를 발생시키는 그림이다.

그림이란 결국 붓과 화면이 만나는 일이고 작가의 신체가 붓에 의탁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림은 그렇게 그 작가만의 고유한 붓질의 향연, 특이한 붓질들의 신체화를 개별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맛을 힘껏 즐긴다. 그것은 한 개인의 고유성과 헤아릴 수 없이 누적된 시간과 경험, 축적된 문화와 기억 등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니 붓질의 독자성을 추적해 한 작가의 고유한 미의식을 엿보는 것이 또한 현대미술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의 감각과 개념을 신체화시키는 가장 우선적인 정보, 단위가 바로 붓질인 것이다. 또한 붓질은 화가가 사고하고 통찰한 모든 것들, 개념의 신체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것은 화가의 무수한 행위들, 화면 위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붓질을 단순히 어떤 대상의 재현에 종속되는 단위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풍성한 의미의 다발을 지니고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이란 이렇듯 하나의 붓질에 담겨져 있다. 그러니 그림은 결국 붓질이기도 하다. 붓질을 잘 볼 수 있다면 그림을 분별하는 좋은 눈을 가질 수 있다.

전시장에 자리한 윤종숙의 그림에서 저 탄력적이고 감각적이며 무엇보다도 회화적 감수성을 잔뜩 거느리고 부유하는 붓질, 그 붓질이 자아내는 매력을 즐겁게 보았다. 상당한 내공이 깃든 붓질로서 작가의 신체성, 감각이 직접적으로 발화되는 흔적이기도 하다. 한편 이 그림은 추상과 구상이 충돌하고 선과 면, 바탕과 형상이 구분 없이 공존한다. 산의 능선과 산봉우리, 사찰이나 정자를 연상시키는 기와집, 수직으로 치솟는 나무, 새나 나비, 벌레들이 물감의 질료와 붓질 사이사이로 출몰한다.

작가의 의도는 관람자들에게 자신이 자연에서 보고 접했던 바로 그 느낌의 전달에 있어 보인다. 자신의 그림이 관람자 스스로 제각기 자신만의 추억, 기억, 감상의 폭을 넓히도록 해주는, 그러한 열린 상태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인 산수화 감상 및 그런 그림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체험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단지 그림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주어진 그림을 단서 삼아, 징검다리 삼아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자연에서 접했던 체험,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권유받는다. 작가는 자연의 어느 한순간이 안겨준 감각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동시에 모종의 활력과 기운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것은 작가의 몸과 감각, 기억에 의해 번안된 어느 한순간이고 그림 안에서만 기록된 모습이자 결국 작가의 신체와 지각으로 인해 가능한 풍경이다. 윤종숙은 이를 ‘마인드 랜드스케이프’라 부르고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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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는 종종 다쳐서 돌아왔다. 첫날부터 야산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밤송이에 손바닥을 찔려 돌아왔는데 이런 일에 능숙한 어린이집 선생님이 핀셋과 바늘로 가시 대부분을 뽑아주었다. 그렇다 해도 눈으로 보기 어려운 작은 가시 두어 개는 피부과에서 처치를 받아야 했다. 덩굴에 쓸려 자잘한 상처를 안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고 때로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를 넘어뜨려 그 아이의 치료에 필요한 소소한 약품들을 사주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다행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크게 다친 적은 없지만 지난가을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족들과 어울려 야외음악회에 간 날이었다.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음악회를 관람하는데 아이는 신이 나서 내 등과 머리에 올라타고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두 손목을 잡고 얼러주는데 아이가 갑자기 팔이 아프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는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살짝 붙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른쪽 손목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하필이면 그 자리를 모기에 물려 손목이 부은 건지 모기 물린 자국이란 그런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건드리면 아프다고는 했으나 울거나 떼를 쓰지는 않아서 괜찮으려니 했으나 처형네에 도착해 두어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자세로 손목을 어루만지기에 안되겠다 싶어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을 옮겨 다니는 우여곡절 끝에 아이가 손목을 다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른쪽 팔꿈치가 탈골한 거였다. 의사는 아이의 팔을 붙잡고 간단하게 팔꿈치뼈를 맞춰주었다. 아이에게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이제 아프지 않다고 했다. 인대 손상이나 골절과 같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고 방금까지도 얼굴을 찌푸렸던 아이가 환하게 웃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의 그 손 모양이 눈에 어른거렸다. 오른쪽 손을 달래기 위해 왼손을 살풋 얹은 듯한 모양새였고 아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위로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오른손을 달래는 왼손. 스스로를 달래는 아이. 거기에는 비장하다고도 할 법한 무언가가 있었는데 이처럼 우리는 오래전부터 결국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최선의 혹은 최소의 방법은 자신에게 기대는 것임을,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 속한다는 걸, 설령 부모라 해도 그다음일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돌아보니 나도 어린 시절에 무던히도 다쳐서 집에 돌아갔다. 손바닥, 무릎, 정강이가 까져서 돌아오기 일쑤였고 십여마리 벌에 쏘여 돌아와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일은 드물어졌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런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돌아오지 않게 되었으나 마음을 다쳐 마음을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몸은 멀쩡하지만 나처럼 마음을 다친 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퇴근 시간 무렵의 길거리에서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피곤한 얼굴로 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거나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 오른쪽 손을 달래기 위해 왼손을 살풋 얹을 힘조차 없어 보이는 사람들.

아이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다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점점 드물어질 테고 대신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이 많아지리라. 몸이 멀쩡해도 마음이 아프다는 걸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을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마음을 치유하는 일도 전적으로 아이에게 속하고 말 것이다. 아이는 혼자 고통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고 이 모든 걸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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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볼 빨간 사춘기의 고향이자 부석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전주 한옥마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운 무섬마을, 이 마을 앞의 외나무 다리 등이 참 좋다. 시내에서 한참 벗어나 소백산 자락 입구에 무쇠달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초겨울 시골 마을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옷을 벗은 나무들이 즐비했고 많지 않은 주택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간이역인 희방사역이 있다. 곧 폐역을 앞두고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제법 번성했던 역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 자체가 역이 생기고 돈이 모여들면서 생긴, 철교에서 따왔으니 평범한 농촌이 번성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은 근대화의 흔적을 나이테처럼 두르고 있었다. 일제시대 역무원들이 묵었던 건물이 폐가로 남아 존재한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아치형의 큰 터널도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건축물을 가까이서 보는 게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다. 사진을 찍으니 그대로 그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인 슬레이트 지붕도 곳곳에서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농촌진흥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여러 시설들까지, 20세기의 풍경이 이곳저곳에 쌓였다. 새로운 흐름이 생기면 지난 시간의 잔재들을 싹 밀어버리는 대도시의 생태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 낯설었다. 내용에 대한 고민 없이 토건 사업으로 정책의 흔적을 남겨온 지난 시간의 증거 같기도 했다.

시골 마을을 방문하기 좋은 때는 역시 초목에 색이 도는 봄부터 가을이다. 그럼에도 겨울의 초입에 이 마을을 찾은 건 캐러밴에서 숙박하기 위해서다. 난방도 잘되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수압도 좋다. 무엇보다 철로변에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가끔 지나다니는 기차 소리는 비록 ‘칙칙폭폭’ 소리를 내지 않아도 운치가 있으니까. 숙소에 짐을 풀고 부석사에 올랐다. 108계단을 오르려니 절로 번뇌가 찾아왔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약수 한 바가지를 마셨다. 어느 새 내린 석양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때마침 약하게 깔린 안개에 수묵화가 따로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영주의 명물이라는 랜드로바 떡볶이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여길 누가 올까 싶었는데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굽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바비큐, 하면 으레 떠들썩한 풍경을 연상하지만 마을을 닮아 조용했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숯불을 바라보는 그들에게선 고기 구워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우리 차로 들어가 떡볶이와 어묵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차창 밖으로 간혹 기차가 지나갔다. 덜컹덜컹, 무심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완행열차와 함께 밤도 깊어갔다.

여행을 갈 때는 명승지나 빼어난 풍광이 있는 곳으로 간다.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는다. 호텔이나 모텔 등에서 잠을 청한다. 일상화된 여행의 풍경이다. 빼곡한 계획으로 시간이 채워진다. 나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좀 더 게으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제법 배치한다. 아니,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최적이었다. 일반적인 도시나 관광지였다면 식사시간 외에 카페에서 차라도 한잔하고 그랬을 것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무쇠달마을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앞서 썼던 문장들 외에 그리 덧붙일 게 없다. 다만 민박이나 여관 대신 캐러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느 여행과는 달랐던 이유다. 볼 것도, 할 것도 딱히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일상의 틈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내면의 소리와 감정이 만드는 파동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아를 찾기 위해 굳이 갠지스강까지 간다지만, 거기 자아 자판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루 편히 묵을 수 있는 시설이 있는 곳에, 침묵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주변 환경이 있다는 건 오히려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없기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쾌적한 결핍이라 이름 지었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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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수업이 끝났다. 학교에서의 강의가 이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최근에 와서 그런 기미가 더욱 강해졌다.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집중도나 열의를 찾기가 어렵고 대신 권태로움과 무료함이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어서 난감했다. 

무엇보다도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현재의 시간을 압도하고 있으며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앞당겨 지금의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사는 것이고 결국 지금은 사라진 이상한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정신병자들이거나 유령들이다. 대다수 학생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갖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표정들을 짓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거나 자고 있다.

중·고등학교까지의 생활이란 게 오로지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만 설정되어 있기에 정작 그 목표가 달성된 순간 아이들은 맥없이 풀려나버린 존재가 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격렬하게 맴돈다. 

그 어떤 목표도 죄다 사라져버린 공황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적극 찾아나가는 것에 대해 배운 적이 전혀 없고 그런 습관 또한 몸에 배지 않은 아이들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니 이들이 대학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열렬히 찾아나가며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를 갖기는 지난한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오로지 취업률과 성과 위주로 대학평가가 강제되는 상황에서 예술대학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었다. 현재 지방의 미술대학들은 거의 사라져버렸거나 디자인과에 수렴되거나 혹은 문화산업적이고 경영학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묘한 이름으로 겨우 살아남고 있는 형국이다. 진정으로 아티스트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갈 만한 대학 자체가 드물고 정작 들어와도 워낙에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대화하는 터에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면서 지레 전공을 포기하거나 타 전공을 기웃거리면서 스펙을 쌓도록 부추기는 현실에 종속되고 있는 지경이다.

학생들이 대학에서의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부모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학부모들 자체가 우리 사회 현실이 요구하는 삶의 논리에 길들여져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무서운 불안과 공포를 지니고 있기에 아이들에게 권하는 전공이란 결국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돈벌이가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되는 전공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는 안이한 소시민적 삶에 한정 없이 굴복시키는 생의 논리를 내재화한다. 그러니 미술대학 자체를 외면할 것이다. 혹 미술대학에 보내는 경우에도 디자인이나 취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전공으로 제한하려 든다. 

그러한 부모의 인식에 따라 전공을 선택한 아이들, 4년제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강박에 따라 점수에 맞춰 들어온 아이들 혹은 전공 불문하고 어떤 식으로든 들어온 아이들에게 대학에서의 전공이란 자신의 소질, 생의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겉돈다. 그러니 학교생활과 수업 역시 매번 미끄러질 뿐이다. 따라서 이런 학생들이 졸업을 해서 미술계로 나가 좋은 작가가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아니 미술대학에서의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

한편 미술대학에 와서 작업을 하겠다는 학생들은 좋은 작품을 하는 작가가 되는 게 목표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취업률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너무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올 한 해 수많은 아트페어를 보았고 적지 않은 전시를 봤지만 눈에 띄는 좋은 작가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좋은 전시도 극히 드물었다. 아트페어에 참여한 그 많은 작가들은 시장에서 팔리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을 노골적으로 베끼느라 엉망진창이었다. 한 작가의 미술에 대한 생각, 그만의 감각, 감수성과 고유한 그림의 맛이 논의되는 게 아니라 그저 시장에서 얼마나 팔리느냐 라는 정량적 평가가 작가 작품의 질을 압도하는 형국이 빚은 참사다. 이는 결국 대학에서, 아니 그 이전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과 마음으로 사물과 세계를 보고 이를 애써 자기 식으로 표현해내면서 열정적으로 살아오는 대신에 정답 같다고 여겨지는 것을 슬쩍 간편하게 차용해서 교묘하게 자기 것으로 포장하고, 작업하는 일 역시 상품제작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미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불거져 나온 왜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 화단이 빚고 있는 이 온갖 병리적 현상의 기원은 이미 우리의 교육제도 안에 깊게 자리를 틀고 있는 셈이자 더불어 학부모들이 지닌 비겁한 생의 논리로 인해서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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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을 거쳐 후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몹시 내렸다. 베트남 어느 도시나 그렇듯 오토바이는 개미떼처럼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걷기 힘든 곳 투성이였다. 날씨까지 안 좋았으니 첫인상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 지역의 명승지는 가지 않는 편이다. 런던에 갔을 때 비교적 오랜 시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빅벤이나 버킹엄 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도쿄, 오사카, 방콕, 뉴욕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유산은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하다는 게 지론이기 때문이다. 대신 동시대의 문화를 느끼러 가곤 한다. 클럽을 다니고 레코드 스토어를 들른다. 그런데 후에라니? 여행, 하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지인이 후에가 미식의 도시라는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먹어댔다.

이태원을 연상케 하는 여행자 거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화려한 곳을 쏘다니며 배를 불렸다.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 할 요량이었다. 어느 도시에나 음악 술집은 있기 마련. 앱을 켜서 찾아보니 음악을 주요 해시태그로 내세운 바가 있었다. 여행자 거리 외각의 어두운 골목 한쪽, 라이브 음악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10여석이 채 안되는 작은 바였다. 그 바의 한구석에서 무대조차 없이 현지의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었다. 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어디서 왔냐는 직원의 말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래하던 20대 초반 여성이 또렷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하는 거 아닌가. 그러더니 “한국 노래 하나 불러드릴까요?”라며 “잘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밴드 뷰렛이라고…” 하면서 뷰렛의 ‘거짓말’을 불렀다. 연주력, 사운드 같은 걸 따질 계제는 아니었지만 보컬의 한국어 노래 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단순히 가사를 외워서 부르는 걸 넘어서 어미 처리라든가, 감정 표현이라든가 하는 게 완전히 한국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물어보니 현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란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어디서나 한국 아이돌의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밴드 음악은, 그것도 라이브로는 처음이었다. 예전 미국에서 양희은과 송창식을 알고 있는 백인 청년을 만났을 때만큼 신기했다.

이 친구의 순서가 끝난 후에는 그 또래 청년이 나와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했다. 자세히 보니 이쪽에 드문드문 손님들이 있는 데 비해 무대(?) 옆쪽으로는 현지 젊은이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맨손으로 드럼 연습을 하고 누군가는 악보를 보고 있다. 보아하니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음악 술집이라기보다는 후에 음악 애호가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은 청년 하위 문화다. 기성세대의 인정, 주류 유행과는 상관없이 확고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1970년대의 무교동, 80년대의 신촌과 이태원, 그리고 90년대의 홍대 앞 문화가 모두 그런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바일과 SNS가 완전히 자리 잡은 지금, 즉 문화적 경계와 시차가 의미 없어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풍경일 것이다. ‘작은 세계’에서 문화적 역량이 축적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을 좇는 이들은 그 작은 세계를 과잉 소비한다. 순식간에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가 덮친다. 일상화된 구조다.

록과 한국 밴드 음악, 그리고 케니지까지 장르도 스타일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후에의 청년들을 위해 작은 액수나마 팁을 자리에 놓고 나왔다. 덥고 조금은 습한 밤거리 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배웅해준 건 역시 그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베트남 음악이었다. 홍대 앞에서 버스킹이란 이름의 소음을 유발하는 이들보다는 실력이 좋았고, 실용음악 시스템에서 학점에 길들여진 이들보다는 표현력이 좋았다. 후에의 이름 모를 젊은이들에게서 청년문화의 추억을 떠올렸던 이유일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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