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다낭을 거쳐 후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몹시 내렸다. 베트남 어느 도시나 그렇듯 오토바이는 개미떼처럼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걷기 힘든 곳 투성이였다. 날씨까지 안 좋았으니 첫인상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 지역의 명승지는 가지 않는 편이다. 런던에 갔을 때 비교적 오랜 시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빅벤이나 버킹엄 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도쿄, 오사카, 방콕, 뉴욕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유산은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하다는 게 지론이기 때문이다. 대신 동시대의 문화를 느끼러 가곤 한다. 클럽을 다니고 레코드 스토어를 들른다. 그런데 후에라니? 여행, 하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지인이 후에가 미식의 도시라는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먹어댔다.

이태원을 연상케 하는 여행자 거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화려한 곳을 쏘다니며 배를 불렸다.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 할 요량이었다. 어느 도시에나 음악 술집은 있기 마련. 앱을 켜서 찾아보니 음악을 주요 해시태그로 내세운 바가 있었다. 여행자 거리 외각의 어두운 골목 한쪽, 라이브 음악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10여석이 채 안되는 작은 바였다. 그 바의 한구석에서 무대조차 없이 현지의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었다. 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어디서 왔냐는 직원의 말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래하던 20대 초반 여성이 또렷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하는 거 아닌가. 그러더니 “한국 노래 하나 불러드릴까요?”라며 “잘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밴드 뷰렛이라고…” 하면서 뷰렛의 ‘거짓말’을 불렀다. 연주력, 사운드 같은 걸 따질 계제는 아니었지만 보컬의 한국어 노래 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단순히 가사를 외워서 부르는 걸 넘어서 어미 처리라든가, 감정 표현이라든가 하는 게 완전히 한국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물어보니 현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란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어디서나 한국 아이돌의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밴드 음악은, 그것도 라이브로는 처음이었다. 예전 미국에서 양희은과 송창식을 알고 있는 백인 청년을 만났을 때만큼 신기했다.

이 친구의 순서가 끝난 후에는 그 또래 청년이 나와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했다. 자세히 보니 이쪽에 드문드문 손님들이 있는 데 비해 무대(?) 옆쪽으로는 현지 젊은이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맨손으로 드럼 연습을 하고 누군가는 악보를 보고 있다. 보아하니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음악 술집이라기보다는 후에 음악 애호가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은 청년 하위 문화다. 기성세대의 인정, 주류 유행과는 상관없이 확고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1970년대의 무교동, 80년대의 신촌과 이태원, 그리고 90년대의 홍대 앞 문화가 모두 그런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바일과 SNS가 완전히 자리 잡은 지금, 즉 문화적 경계와 시차가 의미 없어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풍경일 것이다. ‘작은 세계’에서 문화적 역량이 축적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을 좇는 이들은 그 작은 세계를 과잉 소비한다. 순식간에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가 덮친다. 일상화된 구조다.

록과 한국 밴드 음악, 그리고 케니지까지 장르도 스타일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후에의 청년들을 위해 작은 액수나마 팁을 자리에 놓고 나왔다. 덥고 조금은 습한 밤거리 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배웅해준 건 역시 그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베트남 음악이었다. 홍대 앞에서 버스킹이란 이름의 소음을 유발하는 이들보다는 실력이 좋았고, 실용음악 시스템에서 학점에 길들여진 이들보다는 표현력이 좋았다. 후에의 이름 모를 젊은이들에게서 청년문화의 추억을 떠올렸던 이유일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후에에서 만난 ‘청년 문화’  (0) 2017.12.07
최후의 얼굴인 ‘돌’  (0) 2017.11.30
바람이 분다  (0) 2017.11.23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  (0) 2017.11.16
가정의 탄생  (0) 2017.11.09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얼마 전 충주에 갔다가 문을 닫은 여러 수석 가게를 보았다. 그 앞에 흩어진 돌들이 흡사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골동가게와 옹기를 파는 상점들도 썰렁하고 마냥 적조했다. 차가운 날씨와 인적이 그친 거리에서 만난 그 풍경이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수석을 수집하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난이나 분재, 골동 수집 등도 그렇다. 하여간 격조 있는 취미들이 빠르게 사라지며 밀려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선인들의 돌 사랑은 유별났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말년의 취미로 수석만 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마당에 큰 괴석을 놓아두고 방안에는 자그마한 돌 하나를 갖다 두어 수시로 눈을 맞추었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라 그 작은 돌에서 거대한 산의 자태를 헤아렸다. 선인들은 산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자 형상을 지닌 채 굴곡을 이루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 굴곡과 연속됨은 다양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숨결이자 밀집된 에너지와 같은 것이고 그것에 의해 어떠한 강요된 형태도 지니지 않는 가능한 모든 형태들이 역동적으로 응고된 것이라고 인식했다. 아울러 산은 치솟으면서도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전진해 나가면서도 자체적으로 응축되며 펼쳐져 나가기에 그 크고 웅장한 산은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덕 있는 존재로도 보았다.

이처럼 산과 그 축소된 돌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해서 선인들은 수석을 완상하면서 우주자연의 이치를 헤아리는가 하면 돌이 지닌 미덕을 인간 삶의 궁극적인 덕목으로 끌어안으며 살고자 했다. 돌이 지닌 진중함과 침묵, 장수와 부동의 자리에서 그 무엇인가를 살피고자 욕망한 것이다. 아마도 늙어 침침한 눈으로 돌의 얼굴을 애써 바라보며 자신의 최후의 얼굴을 염두에 두며 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돌에서 각자 어떤 얼굴을 떠올렸을까? 돌은 또한 그림 그리는 작가들에게도 무한한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질로서 환상을 심어주고 환영을 자극했으며 또 다른 존재를 그 돌 안에서 찾아내도록 권유해준 매개였다. 그것은 자연이 만든, 시간이 빚어낸 기이한 형태이자 신비다. 최초의 예술작품인 돌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하고 이미지를 연상하는 ‘사유하는 인간’ ‘예술 하는 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작가들에게 돌은 익숙한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다.

최근 경기도 양평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한 동양화가의 작업실을 다녀왔다. 돌을 유난히 사랑하는 그는 화면에 검은 돌 하나를 그려놓았다. 수평으로 길게 누운, 평원석을 닮은 까만 돌은 오석과도 같은 단호한 검정의 색과 견고한 물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매우 거칠고 조밀한 표면의 상처, 질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업이다. 돌이 지닌 단호한 물질감이 화면 위에 부착되면서 그림과 조각의 경계가 슬그머니 주저앉고 촉각성을 지닌 까만 돌이 납작한 평면의 화면을 무한한 공간으로 물리면서 돌진하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었다. 순간 그것은 광활하고 막막한 우주공간에 단 하나의 돌이 되어 자기 존재를 극대화하고 있다. 나는 그 돌 그림을 보면서 수석을 완상하는 체험을 떠올렸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자 아득한 시간의 흔적으로 인해 이루어진 최후의 얼굴이자 무수한 세월의 시련을 제 몸으로 손수 겪어낸, 치러낸 상처로서의 피부를 간직하고 여기까지 살아온 이력을 지녔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의 축적이 놓여있고 자연의 힘에 의해 창조된, 형언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흔적이고, 인위가 아니라 무위의 소산이다.

돌을 그리는 작가는 그 무위를 인위로 다시 복기한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무수한 기억을 더듬는다. 돌이 지닌 무거운 기억과 시간을 덩어리로, 질료로 구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돌 안에 박힌 정신 하나를 애써 찾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돌의 마지막 얼굴이고 여기까지 살아남아 이룬 기적 같은 얼굴이다. 우리 모두도 저 하나의 돌처럼 최후의 얼굴 하나를 그야말로 절박하게 만들며 살고 있는 셈이다. 돌 하나에도 그토록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피던 선인들의 시선과 마음이 새삼스럽다. 충주의 어느 수석 가게 앞에서 뒹굴던 돌들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후에에서 만난 ‘청년 문화’  (0) 2017.12.07
최후의 얼굴인 ‘돌’  (0) 2017.11.30
바람이 분다  (0) 2017.11.23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  (0) 2017.11.16
가정의 탄생  (0) 2017.11.09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유독 마음이 기우는 문장들이 있다. 아직 다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저리고 아끼고 아껴 읽어야 했는데 너무 빨리 읽어버린 것 같아 속상하고 다 읽은 뒤에도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있다. 별것 아닌 듯한 이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글쓴이가 얼마나 오래 머뭇거렸는지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문장들에 나는 유독 마음이 기울곤 한다.

세월호 선체조사에서도 끝내 유해를 찾지 못한 미수습자 고 권재근씨와 혁규군 부자의 안치식이 열린 20일 오전 인천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내 화장시설인 승화원에 혁규군의 영정과 관이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아무리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쓴다한들 결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으로 써 온 문장들이 내게도 있다. 그 문장들은 대부분 할머니에 대한 것들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홉 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로 내가 겪었다고 할 법한 최초의 죽음이었다. 그보다 몇해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관념이 내 심중에 자리 잡았던 게 바로 그때여서였다. 그렇게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게 있었다. 아홉 살이 되던 그해 들머리, 아직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지난 세밑부터 내내 윗방 아랫목에 자리보전을 한 채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씩 할머니의 가느다란 팔뚝에 링거 주삿바늘을 꽂았고 마당에 쌓여가던 눈보다 희디흰 머리칼 몇 오라기가 할머니의 이마에 들러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끔 정신을 차린 할머니는 당신이 왜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할머니가 무서웠다. 내게 가장 살가웠던 한 사람이 죽어간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그냥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두려웠다. 어느 날 밤 할머니의 임종이 가까워서 그랬는지 부모님은 나를 아랫집으로 보냈다. 밤이 깊었고 아랫집 육촌 형제들이 너희 할머니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집으로 올라가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곡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나는 아랫집 육촌 형제들의 방에서 자다 깨다를 되풀이하다 다음 날 아침에야 집으로 갔다. 병풍으로 가려진 탓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볼 수는 없었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른다는 태도를 유지했고 출상하던 날에도 마을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채 멀어져가는 상여를 눈으로만 배웅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무수한 문장을 썼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그 마음을 문장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 탓에 비참한 기분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죽음을 직시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며 스스로를 달래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오랜 세월 할머니를 글로 쓰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비록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해도 내가 만약 그때 할머니 곁에서 임종을 지켰더라면, 죽어가는 할머니의 손을 어루만져 보았더라면, 당신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줬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대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면서 한바탕 서럽게 울었더라면 이토록 쓸모없는 문장들을 아프도록 되풀이하여 쓰는 일에서 오래전에 놓여났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얼마 전 세월호 희생자 가운데 미수습자 5인의 유족들이 유해 수색을 포기하고 장례를 치렀다. 아마도 그이들은 죽은 이의 낯을 한 번만이라도 쓸어보고 싶었으리라. 죽은 이의 차가운 두 손을 어루만져보고도 싶었으리라. 얼마나 외로웠냐고 얼마나 무서웠냐고 이제 그만 외로워하라고 이제 그만 무서워하라고 죽은 이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고 싶었으리라. 이제 그이들은 허공에 손을 내밀어 허공을 쓰다듬어야 하고 허공을 어루만져야 하고 허공에 대고 속삭여야 하리라. 허공이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므로 한평생 그래야 하리라. 바람만 불어도 허공에 속삭인 말은 흩어질 것이므로 바람보다 먼저 속삭이고 바람보다 오래 속삭이고 바람보다 빨리 울고, 바람보다, 언제나 바람보다.

<소설가 손홍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후에에서 만난 ‘청년 문화’  (0) 2017.12.07
최후의 얼굴인 ‘돌’  (0) 2017.11.30
바람이 분다  (0) 2017.11.23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  (0) 2017.11.16
가정의 탄생  (0) 2017.11.09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 주목받은 이는 작곡가 윤이상이 아닐까 싶다. 매년 봄이면 그의 고향에서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TIMF)’가 오페라와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을 집중 조명한 것은 물론이고, 여러 오케스트라와 앙상블의 정기 연주회, 독주회와 독창회 등 크고 작은 음악회들에서 1년 내내 그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클래식 음악계는 매년 탄생·서거 몇 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들로 넘쳐나지만, 20세기 한국 작곡가의 음악이 중심에 놓인 적은 별로 없었다. 서양음악 도입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이제 우리도 100주년을 기릴 만한 작곡가를 갖게 된 것이다.

작곡가 윤이상 (출처:경향신문DB)

이뿐이 아니다. 서울문화재단은 ‘프롬나드 콘서트’를 기획해 서울 도심 곳곳에서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인간 윤이상의 모습을 담담히 풀어낸 연극 <상처입은 용>(이오진 작, 이대웅 연출)을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은 경기도립극단은 서울에서도 재공연을 했으며, 서울오페라앙상블은 동백림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600일간을 다룬 나실인의 창작오페라 <나비의 꿈>을 선보였다. 하지만 촛불집회와 탄핵으로 변화된 정국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광범위한 윤이상 재조명이 가능했을까? 작년 연말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좌초 위기에 처했던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몇 달 후 추경예산 편성으로 기사회생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지휘자 성시연이 이끄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베를린음악축제’ 초청 윤이상 공연에 경기도지사와 도의회 의장까지 동행한 것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1970~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윤이상의 음악은 국내 연주자에게는 물론이고 내한 공연 온 외국 연주자의 프로그램에서도 삭제되곤 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4년 예음문화재단이 주최한 ‘윤이상 음악축제’를 계기로 그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윤이상을 ‘친북인사’로만 여긴 정치세력은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분단과 냉전 체제에 온몸으로 맞서며 상처투성이가 된 음악가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에 관한 왜곡과 음해는 사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민족의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세대, 불혹의 나이에 유럽 유학을 떠나 10년 만에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자마자 국가권력에 의해 납치되어 간첩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예술가, 전 세계 음악인과 지식인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독일로 돌아간 뒤 음악으로 남북의 평화 공존에 기여하려 한 이상주의자, 음악은 ‘진실하게 살려는 처절한 노력의 표현’임을 평생 간직했던 작곡가. 낡은 이념 프레임에 갇힌 우리 사회는 아직 한 예술가를 그가 처한 역사적 조건과 시대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초기 가곡집 <달무리>에서 마지막곡 ‘에필로그’에 이르는 120여곡의 작품만이 아니다. 모순에 찬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그의 존재는 분단과 냉전 체제에서 형성된 이념 대립을 넘어설 때 온전히 평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과 문화의식이 얼마나 성숙해 가는지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100주년을 맞아 윤이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났지만, 그의 음악은 많은 이들에게 아직 낯설게 다가온다.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후반은 어느 때보다 새로운 음악어법이 모색되던 시기였고 그 역시 한국의 음 관념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방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올해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여 선보였듯이, 윤이상의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이제 우리 음악인들의 몫이다. ‘예악’ ‘무악’ 같은 역동적인 관현악곡이든, 자전적인 첼로 협주곡이나 ‘밤이여 나뉘어라’ 같은 강렬한 메시지의 곡이든, 특유의 음향제스처로 표현된 실내악곡·독주곡이든, 아니면 한국에서 쓴 가곡·동요·교가든, 윤이상의 음악 한 자락을 즐겨 들을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후의 얼굴인 ‘돌’  (0) 2017.11.30
바람이 분다  (0) 2017.11.23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  (0) 2017.11.16
가정의 탄생  (0) 2017.11.09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헛것들을 사랑함  (0) 2017.10.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겨울의 노량진은 좀 특별했다. 활어 수족관 대신 스티로폼 박스가 주욱 늘어선 도매시장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하는 친구 따라 간 덕에 TV에서나 보던 경매도 직접 봤다. 귀공자처럼 스티로폼 박스 사이를 누비며 필요한 물건들을 찍어 놓은 그와 시장 뒤편 포장마차로 향했다. 겨울바람에 강바람까지 더해진 노량진에서 그 허름한 포장마차는 이글루처럼 느껴졌다. 상인과 경매인, 트럭 운전사 등 새벽 시장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모여 드는 곳이었다.

어둑한 내부를 연탄 난로가 덥혔다.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나가는 이들이 있었고, 손맛 좋은 이모가 프라이팬 하나로 만들어내는 계란말이 등을 안주 삼아 소주 한 병 비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 틈에 비집고 앉아 친구가 가져온 고등어를 난로에 구워 소맥을 말아 마셨다. 팔도에서 모여든 이들이 나누는 새벽의 대화는 어떤 활어보다 싱싱했다. 난방 따위 없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찬물에 손을 대야만 살아가는 이들만의 치열함은 난로보다 뜨거웠다. 난 그때 옆에 있던 일행에게 말했다. “이게 진짜 삶이라는, 그 무엇 같아.”

막상 쓰려니 민망한 그 대사를 친 일행과 연애를 하게 됐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복잡하다면 제법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연애를 제법 해봤으나, 이전과는 좀 달랐다. 결혼한 사람들에게 가끔 듣는 “왠지 이 사람 하고는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프러포즈를 했다. 승낙을 받은 후엔 일사천리였다. 시간에 가속도가 몇 배로 붙었다. ‘그래도 한참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청첩장을 찍고 있었다. 마치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에 들어와있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보면 식장에서 사진 찍고 있을 거라고 하더니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을 앞둔 사람들의 최대 고민이 시작됐다. 청첩장을 어디까지 돌려야 하나, 몇 년 만에 연락해서 결혼 소식을 전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누구나 했을 그런 고민들. 그런 나에게 한 선배는 말했다. “판단은 상대의 몫이야. 일단 연락하는 걸로 너의 몫은 끝이고.” 그 말에 따라 연락처를 쭉 훑었다. 세상에, 꿈에도 몰랐다. 내 전화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번호가 들어 있을 줄은. 이 사람이 누군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번호도 엄청났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는 자기 얼굴이었던 프로필 사진이, 아기 사진으로 바뀐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술잔을 부딪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추려내던 중, 역시 한 인생 선배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결혼을 앞두면 반드시 자기 삶을 되돌아볼 때가 생겨. 넌 나이가 있으니 더할 거야.”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자기 얼굴 대신 아이 얼굴을 정체성으로 내건 사람들은 진작 깨달았을 사실일 테다.

마치 텔레마케터라도 된 양 계속 전화를 돌렸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카톡까지 동원했다. 다들 이래서 카톡으로 청첩장을 보냈으리라. 그때마다 섭섭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김씨를 거쳐 박씨 정도까지 왔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는 여자친구와 노량진으로 향했다. 지난겨울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에게 도매시장의 세계를 알려준 친구와도 함께했다. 다시 이글루 같은 포장마차에서 우리는 소맥을 마셨다. 시큼한 섞박지와 계란말이, 동태찌개, 목살볶음 등을 이모는 계속 내왔다. 손맛이 여전했다. 시장의 풍경 또한 여전했다. 여전한 풍경과 맛에 취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집으로 돌아올 사람이 있다는 것만 달라졌다.

여자친구는 침대에 누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삶을 되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 같아.” 그 말을 하루의 유언처럼 남긴 후, 그녀는 잠들었다. 왠지 찡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존재가 생긴다는 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이게 진짜 삶이라는, 그 무엇 같았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이 분다  (0) 2017.11.23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  (0) 2017.11.16
가정의 탄생  (0) 2017.11.09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헛것들을 사랑함  (0) 2017.10.26
작곡상의 의미  (0) 2017.10.1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서울의 거리는 인간다운 보행을 거부한다. 서울은 쾌적하고 아름다우며 아득한 시간의 층과 생의 이력과 문화의 무수한 결을 함축하고 있는 도시가 아니다. 오로지 현재의 욕망만이 수시로 교체되는 공간, 과거가 부재한 유령 같은 도시다. 그곳에서의 삶은 불편하고 거칠며 더러 폭력적이자 자본의 힘에 눌린 구조물로 채워져 있다.

그 피곤한 길들을 따라 걷다 보면 으레 고층빌딩의 주변으로 이른바 환경조형물이란 것들이 튀어나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도시공간에는 이런 조형물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고 이제는 간판처럼 붙어있다. 그것은 조각 작품인가 아니면 공공미술인가, 괴이한 물질덩어리인가? 마지못해 건물과 건물 사이에 겨우 끼어들어가 있는 그 사물들은 이름을 지을 수 없는 변종들로 주변 공간과 그곳을 생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과 무관한 표정으로, 홀로 창백하게 고립되어 있다. 이른바 공공조형물조례법의 혜택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다분히 형식적인 절차에 따라 마지못해 세상 밖으로 나온 이 애물단지, 천덕꾸러기들은 그동안 숱하게 욕도 얻어먹고 이런저런 구설에 무수히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조형물들은 흉물스럽게 들어서고 매번 보던 작가의 작품만이 반복해서 세워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 그 많은 조형물, 공공미술 중에서 볼만한 수준의 작품은 극히 드물다. 나로서는 흥국생명 사옥 앞에 위치한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과 같은 수준의 것을 찾기가 힘들다.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장군상이나 세종대왕상 같은 것은 공공조형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인 의도를 지닌 조형물로서의 성격이 짙다. 여타 대부분의 공공조형물이라는 것들은 한 공장에서 일괄 납품한 것처럼 획일적이고 조악하며 이상한 형태로 마감되어 있다.

조형적인 미도 없을뿐더러 특정 공간과의 맥락도 부재하다. 문화는 없고 문화라는 껍데기만을 걸치기에 급급한 우리네 상황이 고스란히 그 조형물의 표면에 얼룩져있다. 진정한 환경조형물, 공공미술은 실종되고 그 탈을 뒤집어쓴 키치적인 오브제 혹은 사이비 공공미술들만 버글거린다. 그러한 조형물은 건축업자나 건물주의 자의적 결정과 형식적 통과의례를 거쳐 그저 빈자리에 ‘쿵’ 하고 던져놓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것이 떨어질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의 질이나 주변 환경과의 고려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좋은 작가의 작품을 신중하게 선정하려는 생각도 없고 전문가의 조언이나 의견 역시 참고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거칠게 말해 천박한 자본의 횡포와 상업화랑과의 협잡, 작가들의 굴욕적 타협, 관계자들의 이해관계가 복마전처럼 얽힐 대로 얽혀 처절해진 것이 우리네 공공미술, 환경조형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조형물 설치란 것이 작품 구매결정과정에서의 합의 도출, 전문가의 참여와 공공적 논의과정이 생략되어 이루어지고 있고 공공미술의 기획이란 큰 틀에서 도시공간의 조형물 구성에 대한 일정한 조율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었음은 매번 지적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성과 환경과 공간에 대한 인간중심의 사고와 문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인간의 감각과 문화가 개진되고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의 확보와 공간의 정치화는 오늘날 무척 예민한 문제가 되었다. 저급한 자본주의문화로 기형화된 우리들 삶의 공간에 공공미술이라고 들어와 앉아 있는 그 무수한 조형물들이 도대체 무얼 하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날 미술작업은 그 자체의 미학적인 가치나 물질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과의 소통에 의하여 진행되고 완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보다 민주적인 예술가와 관람객 간의 관계 정립, 그리고 개방된 사회 네트워크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  (0) 2017.11.16
가정의 탄생  (0) 2017.11.09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헛것들을 사랑함  (0) 2017.10.26
작곡상의 의미  (0) 2017.10.19
새삼 번성하는 ‘극사실 회화’  (0) 2017.09.2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젊은 시절의 사르트르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 즉 상상력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미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나 말년의 사르트르는 젊은 시절의 주장을 부정하는데, 그가 문제 삼았던 것은 이른바 이미지의 “본질적 빈곤성”이었다.

사르트르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젊은 시절의 그와 말년의 그가 이토록 다른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주장 앞에서 가장 당황했던 이는 사르트르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이미지란 본질적으로 빈곤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생각이 만약 누군가를 서글프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해낸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서이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거실에 가보니 건조대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제 익숙해져서 내 아이의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곰과 나비와 꽃들이 프린트된 작고 앙증맞은 옷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비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정말 비애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는데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처럼 느낄 수 있음을 잘 알지만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진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저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아이가 제 엄마 옆에 잠들어 있을 테니 언제든 그 매끄러운 이마에 입을 맞출 수도 있고 손안에 쏙 들어오는 발을 어루만질 수도 있으며 귀를 가까이 대고 쌕쌕대는 숨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련만 그립고 애달프고 서러우며 이미 상실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건조대에 걸린 양말이며 손수건이며 쫄바지며 셔츠며 그 모든 것들이 유품처럼 느껴졌고 정말로 그것들이 내게 유품처럼 말을 걸고 유품처럼 증언하여 실체를 곁에 두고도 실체에 다가서지는 못한 채 실체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에만 강렬하게 얽매일 수밖에 없는 나를 비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실체가 아닌 이미지, 다시 말해 헛것을 사랑하는 게 어쩌면 나의 본성일 거라는 생각마저 드는 거였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빈곤하다. 내가 아이의 사진을 어루만진다고 해서 아이의 두 볼을 직접 어루만지는 것과 같을 수는 없으며 아이의 옷가지에 밴 체취를 맡는다 해도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파묻고 체취를 맡을 때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아닌 아이와 관련된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건 내가 소심해서일 수도 있고 이미지와 같은 헛것에만 마음이 기우는 못난 녀석이라서 그럴 수도 있으며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오랜 세월이 흘러(어쩌면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닐 수도 있다) 아이가 자라 내 곁을 떠나가면, 학업이나 일, 결혼 등으로 왕래하기 힘든 먼 곳에 자리를 잡거나 독립을 하게 되면, 혹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나는 무엇으로 아이를 실감할 수 있을까.

아이와 더불어 보냈던 시간들을 재현할 수는 없을 테니 그 세월 동안 만들어 온 아이에 대한 이미지 말고는 없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곁에 두고도 현관에 널브러진 운동화와 수저통에 꽂힌 작은 숟가락과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 등을 보면서 아이를 실감하는 이유는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어쩌면 다시 만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마치 곁에 두고 지내는 것처럼 아이의 숨결마저 느끼는 것처럼 아이의 사소한 몸짓마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한숨과 웃음을 듣는 것처럼 한 번도 내 곁에서 너를 떠나보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네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외롭거나 비참하거나 어떤 순간이든 네 곁에 내가 있고 내 곁에 네가 있음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연습하는 거라고 여겨서는 안될까. 이별은 필연일 것이므로.

<손홍규 소설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정의 탄생  (0) 2017.11.09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헛것들을 사랑함  (0) 2017.10.26
작곡상의 의미  (0) 2017.10.19
새삼 번성하는 ‘극사실 회화’  (0) 2017.09.28
경계에 선 사람들  (0) 2017.09.2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얼마 전 작곡가 진은숙의 ‘시벨리우스 음악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연주자들의 국제콩쿠르 수상도 반가운 일이지만, 내겐 이 소식이 훨씬 묵직하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국제콩쿠르가 세계무대로 나가려는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 구실을 한다면, 이 상은 이미 거장이 된 이에게 부여되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연주가 아닌 작곡의 영역에서 이런 경지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음을, 또한 세계무대에서 이를 제대로 인정받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이 소식이 남달리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상의 권위는 수상자들의 면면에서 나온다. ‘시벨리우스 음악상’은 몇 년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당대의 저명 클래식 음악 작곡가에게 주는 상이다. 1953년 핀란드 ‘비후리 재단’이 시벨리우스에게 첫 상을 수여하며 그의 이름을 따 ‘비후리 시벨리우스 상’이라 이름 붙였고, 이후 힌데미트·쇼스타코비치·스트라빈스키·브리튼·메시앙·루토스와프스키·펜데레츠키·리게티·쿠르탁 같은 20세기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들이 이 상을 받았다. 시벨리우스의 뒤를 잇는 라우타바라·린드베리·사리아호 같은 핀란드 작곡가들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15년 버트휘슬에 이어 올해 스무 번째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진은숙은 최초의 아시아 출신에다 사리아호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작곡가다.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존재 조건에서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확고한 음악세계를 구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은숙의 음악은 유럽인들이 흔히 떠올리는 아시아 작곡가의 표상에서 벗어난다. 1985년 유럽으로 건너간 그녀는 자신을 타자화하는 이런 선입견에 맞서야 했다. 새롭고 대체 불가능하며 유의미한 작품을 쓰는 데 출신 지역의 정체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빈 오선지를 앞에 두고 오롯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숙성시킨 아이디어가 원하는 음악의 형태를 갖추도록 정교하게 세공해나가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벌레로 느껴지고 수없이 지옥을 경험하면서도 진은숙은 음악의 완성도에만 천착했다. 작품 위촉만으로 살아가는 전업 작곡가의 삶을 고수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이 훌륭하면 결국 청중이 알아줄 거라는 믿음, 온 힘을 다해 그에 걸맞은 수준의 작품만 세상에 내놓겠다는 의지, 그것이 오늘의 진은숙을 만든 원동력 아니었을까.

국내 청중에게 진은숙의 음악은 아직 낯설다. 하지만 음악회장에서 혹은 음반이나 유튜브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생황 협주곡들을 들어본 이라면 그녀의 음악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명료함 가운데 펼쳐지는 환상적인 음향적 색채에 매료된다.

최근 그녀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나 우주의 생성 같은 묵직한 질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작년 8월 서울에서 초연된 혼성합창·어린이합창·관현악을 위한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는 클래식 FM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되며 온라인으로도 많은 이들이 들었는데, 공연 후 나온 기사나 소셜미디어에는 현대음악에 대한 편견을 날려준 감동적인 음악이었다는 얘기가 오갔다. 이 작품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린 이들도 있었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안에 담긴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각자의 방식대로 청중의 마음에 가 닿아 공명했던 것이리라.

문학상을 받으면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현대 작곡가가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조차 당대의 음악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즐겨 듣는 고전들도 한때 새로운 음악이었다. 낯선 음악이 연주를 거듭하며 점차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고전이 되어온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은 미래의 고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은숙의 이번 수상이 그녀의 음악을 접하는 계기가 되길, 나아가 새롭게 창작되는 이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개인의 예술적 성취가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발판이 되는 것. 작곡가가 받은 상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그럴 때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 없는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  (0) 2017.11.02
헛것들을 사랑함  (0) 2017.10.26
작곡상의 의미  (0) 2017.10.19
새삼 번성하는 ‘극사실 회화’  (0) 2017.09.28
경계에 선 사람들  (0) 2017.09.21
도시의 소리풍경  (0) 2017.09.1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사전적 의미의 재현은 묘사, 상징, 구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의 현존을 전제로,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재현이란 단어에는 ‘다시 나타나다 혹은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다. 재현은 표상이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지울 수 없는 거리를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인식이 다름 아닌 ‘표상’이다. 그러니까 재현이란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고 보았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을 연상하게 하고 추측하게 해준다. 즉 재현이라는 말에는 현상에 대한 부정, 그리고 현상 뒤의 어떤 실체나 본질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더불어 그것은 항상 부재를 환기하는 안타까운 상실감의 정서를 간직하면서 진행된다. 재현적 회화는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대상의 모방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간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닮았다는 것이 전적으로 재현으로만 귀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현에 의해 전적으로 흡수되거나 점령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림의 세계이지 않을까? 서구의 전통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를 강박적으로 재현하려 했고 이후 현대미술은 그러한 전통을 해체한 결과 즉물적인 사물로 귀결되어 종내 미술이 사라지는 아이러니를 초래했다. 반면 우리 전통회화에서 재현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존재의 닮은꼴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큰 의미가 없는 일이거나 가당치 않다고 보았다. 그림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그림이었던 것이다. 망막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접한 세계의 기운을 통감각적으로 전달하려는 시도, 어쩌면 현상학적인 체험을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최근 한국 화단에 새삼 재현 회화, 이른바 극사실 회화가 번성하고 있다. 미국에서 1970년대 대두된 포토리얼리즘과 한국에서도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극사실주의가 지금 왜 다시 부활하고 있을까? 혹자는 손의 기능이나 묘사력에 의존하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그림을 두고 회화의 복원 내지는 손의 회복 같은 거창한 의미로 포장하고 있고 작가들 또한 이러한 수사를 자신의 작업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

우선 새로운 환영주의로 재편되고 있는 이 회화는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의 첨단화와 대중화의 결과로 보인다. 이른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회화적 분열’ 현상이 그것이다. 대부분 화가들이 모니터를 통해 습득한 이미지 정보를 조합하는 것으로 회화를 구성하고 있기에 정작 현실은 지워지고 매체가 생산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를 재조합하는 현재적 상황을 가지고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캔버스가 아니라 일종의 ‘스크린의 확장’으로 보인다. 이른바 ‘시뮬라크라’가 회화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회화는 무척 공허하다. 따라서 오늘날 극사실적인 회화는 대부분 주어진 사물의 표면을 기계적으로 묘사하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감정을 지우고 서늘하게 대상의 피부에 육박해 관능적으로 표면에 집착한다. 매끈하고 선명하며 오로지 표면밖에는 없다. 언어와 개념을 지우고 그저 사진처럼, 스크린처럼 그리고 예쁘고 감각적인 사물의 표면만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를 대신하는 집요한 그리기인데 여기서 그 집요하고 지루한 묘사는 일종의 권태로움의 반영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사물과 기호들을 가지고 유희하는 일이자 그것들과 한 몸으로 접속되는 이 회화는 매우 자폐적인 그리기이자 동시에 그러한 삶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담론과 주제를 지워버리고 그저 그린다는 사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단조로운 그리기일 수 있다. 미술·회화가 무엇인지, 재현이 또 무엇인지 등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밀어낸 자리에, 현실이 사라진 장소에 단지 오늘날 시각 환경이 되어버린 스크린을 닮은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그저 그림을 지속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를 미술·회화로 대신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다소 편하게 제공해주는 것이 지금의 극사실주의 그림의 저간에 짙게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헛것들을 사랑함  (0) 2017.10.26
작곡상의 의미  (0) 2017.10.19
새삼 번성하는 ‘극사실 회화’  (0) 2017.09.28
경계에 선 사람들  (0) 2017.09.21
도시의 소리풍경  (0) 2017.09.13
지금, 사라는 즐거울까  (0) 2017.09.0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손님이 하나도 없는 매장 앞을 지나다가 느닷없이 슬픔에 사로잡힌 나는 왜 이런 광경을 보면 매번 슬퍼지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뜻밖에도 삼십년 전쯤의 기억을 불러내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농사를 작파하고 경운기 운전대 대신 1t 트럭의 운전대를 잡았다. 트럭 행상을 시작한 건데 두어 달이 채 못 되어 품목을 바꾸는 바람에 우리 집 헛간과 마루에는 팔지 못하고 남은 잡화들이 쌓여갔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정말 장사가 잘될 거라며 서울의 공장에 주문서를 보내 한 트럭 분량의 운동화를 도매로 구입했다. 마침 그날 오일장이 열리는 곳은 고창 읍내였고 주말이었던 터라 아버지가 행상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아버지를 돕기 위해 조수석에 올랐다. 우리는 시장 상인들의 텃세를 피해 시장 입구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가 흐르는 하수도 위에 짝퉁 나이키, 아식스,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늘어놓았다. 하수도에서 피어오르는 냄새에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아파 절로 인상이 구겨졌는데 우리는 이걸 노련한 장사꾼들처럼, 그러니까 이처럼 좋은 물건을 헐값에 팔러 나와 속이 상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검수과정에서 불량판정을 받아 떨이로 내놓은 운동화였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그냥 짝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품의 절반 가격이었던 터라 지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제법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하루 종일 인상을 쓰고 견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세 켤레를 팔았을 뿐이다. 허리가 굽은 노부인이 손주가 좋아하겠다며 아동화 한 켤레를 사갔고 내 또래의 비쩍 마르고 새까만 사내아이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프로스펙스 운동화 한 켤레를 사갔다. 해가 이울어 파장을 고심할 때 아버지 또래의 사내가 스무 켤레쯤을 신어 본 뒤 나이키 운동화를 한 켤레 사갔다. 운동화를 거두어 트럭에 싣고 떠나려 할 때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사갔던 사내가 돌아와서는 물러주라 했다. 아버지는 군말 없이 운동화를 받아들고 돈을 돌려주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장사에 재능이 없는 아버지. 운동화 보고 가세요,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던 아버지. 워낙 말주변도 없고 사근사근한 성격도 못 되었던지라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나 무기력한 아버지를 보면서 슬픔과 분노를 느꼈고 그 감정이 잠복했다가(잠복했던 이유는 어쨌든 아버지가 트럭 행상으로 식구를 먹여 살렸으므로)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만나면 불쑥 되살아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우리는 두 켤레를 팔았던 셈이고 내가 알기로 6000원쯤을 벌었다. 동네 이웃집에 놉으로 가서 하루 종일 논일을 거들면 1만5000원을 벌 수 있었는데 경운기 몰던 손으로 트럭을 몰고 논두렁에 앉아 새참을 먹는 대신 구멍가게에서 사 온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며 대지와 하늘이 아니고서는 한 번도 허리를 굽힌 적 없는 당신이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도 하루 품팔이만도 못한 품삯을 쥔 채 캄캄한 국도를 달려갈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헤아리게 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고창 읍내에서 고향집까지 가면서 내가 보았던 건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전조등이 비춘 만큼만이 열려 있었고 우리가 지나가면 그 공간 역시 어둠에 잠겼다. 끝도 없는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가면서 아버지의 삶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기분이었다.

차갑고 어둡고 막막한 삶.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오가는 사람조차 드문 어느 골목 초입에 결코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을 늘어놓은 노점상 앞을 지날 때거나 퇴직금으로 장사를 시작한 게 분명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가 자신들의 가게 구석에 시름에 잠겨 멍하니 앉은 걸 보게 되면 그이들이 서 있는 경계, 그이들이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는 없지만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그 날선 자리에 발바닥을 베이지 않고 부디 오래오래 서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곡상의 의미  (0) 2017.10.19
새삼 번성하는 ‘극사실 회화’  (0) 2017.09.28
경계에 선 사람들  (0) 2017.09.21
도시의 소리풍경  (0) 2017.09.13
지금, 사라는 즐거울까  (0) 2017.09.06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 타자  (0) 2017.08.2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도시는 저마다의 소리를 품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베를린 유학 시절, 거리 곳곳에서 우연히 접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나 연주는 칙칙한 날씨에도 그곳 생활을 견디게 한 힘이었다. 지하철역이나 카페, 관광지나 극장 앞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음악가들이 전해 준 행복. 물론 아바도와 베를린 필이 들려줬던 잊지 못할 말러 9번 교향곡까지, 20년 전 살았던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내게 이런 음악적 경험들로 기억된다.

예술 체험이 공연장이나 미술관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상의 공간에서 맞닥뜨린 낯선 음악이 잠시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할 수도 있고, 그 찰나의 경험이 때론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연주회장을 벗어나 색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눈길이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북촌일대 한옥이나 갤러리에서 클래식과 재즈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몇 년 전 국악앙상블 ‘불세출’은 종로구의 이색적인 공간들(옥인상영관·은덕문화원·보안여관)에서 도심 속 풍류방 문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쇠락하던 철공소 골목에 모여든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특유의 감성을 지닌 곳으로 탈바꿈한 문래 창작촌의 크고 작은 공간에서도 실험적인 사운드와 퍼포먼스 공연이 열리곤 한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왼쪽에서 두번째)가 7월 5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윤이상 선생 묘지 앞에 동백나무를 심고 참배한 뒤 윤 선생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베를린 _ 서성일 기자

최근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도심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프롬나드 콘서트’ 역시 도시의 소리풍경을 풍성하게 만든다. 문화역서울284, 윤동주문학관, 서울로7017,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다시세운광장 등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윤이상 음악을 문학·힙합·국악 등과 접목해 선보이고 있다. 특히 청운동 시인의 언덕에서 열렸던 ‘100년의 예술가, 윤이상×윤동주’ 공연은 시와 연극, 음악이 함께하며 주말 가족 단위 관객들에게 특별함을 선사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귀뚜라미 소리와 어우러진 음악을 듣고 있자니, 작년 가을 지리산 ‘화엄음악제’의 잊지 못할 순간이 떠올랐다. 깊은 산사에서 달빛 아래 듣는 음악소리는 도시에서는 접할 수 없는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청각만이 아니라 인간의 온 감각이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1960년대 말 캐나다 작곡가 머레이 셰이퍼가 제창한 ‘사운드스케이프’(소리풍경)라는 용어는 바로 그런 상황을 포착하기 위해 나온 말이다. 셰이퍼는 만드는 것만큼이나 주위 소리를 잘 ‘듣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한 음악가였다. 1950년대 초 존 케이지도 ‘4분33초’라는 침묵 음악을 써서 음악으로 가려졌던 일상의 소리, 존재하나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역설한 바 있지만, 셰이퍼는 인간과 소리 환경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했다. 점차 심해지는 소음공해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삼라만상의 소리를 예민하게 들음으로써 일상의 환경과 생생하고 풍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듣기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유네스코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도시의 소리풍경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신이 살던 밴쿠버의 소리풍경을 음반으로 남기기도 했다. 청각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지각하고 인식하게 만들려 한 그의 문제의식은 이후 음향생태학과 환경운동으로 이어졌고, 도시 디자이너나 사운드 아티스트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요즘 우리는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고 살아간다. 현대인들에게 필수품이 된 이어폰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이자 동시에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원치 않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만큼 소리 환경이 열악하다는 반증일 터. 난무하는 소리들 가운데 정작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무심히 흘려버린다. 한번쯤 귀를 열고 주변의 소리에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윙 돌아가는 컴퓨터 소리, 이웃의 발자국 소리, 교실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공사장 굴삭기 소리, 다양한 내연기관의 소리, 풀벌레와 새소리….

소리를 듣기 위해선 고요함이 필요하지만, 그 고요함 위에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소리들이 펼쳐질 수도 있다. 가을의 문턱에 접어든 요즘, 살고 있는 곳의 소리풍경을 만끽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희경 | 한예종 강사·음악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스무살 언저리였다. 친구가 책 한 권을 빌려줬다. 고인이 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였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친구에게 술까지 사줬다. 이미 판매금지가 된 소설이었다. 깊은 밤에 읽었다. 문장을 읽는 맛은 좋았다. 책장이 쑥쑥 넘어갔다. 하지만 실망했다. 수위가 한참 낮았다. 이 정도는 이미 마스터한지 오래였다. ‘빽판’을 사러 다니던 세운상가에서 구한 일본 ‘야설’ 번역본은 물론이요, 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었던 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보다 못했다. 책을 반납하며 친구에게 얻어 마신 술을 뱉어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자기도 실망했다는 친구의 자백을 이끌어냈던 기억도.

이 책을 구해보려 얇은 지갑을 열었던 이유는 이미 <즐거운 사라>로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걸 봤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단과 학계를 가리지 않고 마 교수를 천하의 색마로 몰아가지 않았는가. 검찰의 구속 이유가 무려 ‘음란문서 제조 반포’였으니 호기심 많은 청년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사는 판결문에 이렇게 남겼다.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예언이 실현되는 데는 10년씩이나 필요없었다. 그가 사면되어 복직한 1998년의 세상만 해도 충분히 그랬으니. 어쨌거나, 이 필화사건 이후 마광수는 작품으로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아니, 이후 종종 “자기 검열 때문에 아무 것도 쓸 수가 없다”라 했다하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리라.

작가 마광수

자기 검열이란 보이지 않는 상자에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다. 신념에 의해 스스로를 검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외부적 상황에 의해 생겨난다. 한참 ‘청소년 유해 매체 판정’으로 음악계가 들썩였던 이명박 정권 시절에 가사에 술이나 담배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면 무조건 19금 판정이 내려졌다. 여성가족부가 담당했던 심의다. 해당 노래 하나에만 적용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문제는 그 음반에 통째로 주홍글씨가 찍혔다는 거다. 건전한(?) 노래도 청소년들이 들을 수 없는 웃기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행여 술이나 담배를 연상케 하는 단어라도 들어갈까봐 가사를 몇 번씩 들여다 보는 음악가들이 생겨났다. 200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직후, 한 음악가를 만났다. 멀지 않은 과거에 음악계에 꽤 높은 영향력을 가졌던 그는 갑자기 잊혀지다시피 했다. 어쩌다 내놓는 음악은 지루했으며 그나마도 조용히 흘러갔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지난 9년동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어. 내가 이런 음악을 해도 될까? 무슨 일을 당할까봐가 아니었어. 세상이 이런데 내가 만드는 음악을 사람들이 태평한 소리 한다며 손가락질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의 말이 근거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명박근혜 시대에 정신적으로 곤란함을 겪은 음악가들을 몇 알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다가 공황장애에 걸린, 사회적 메시지를 은유하던 음악가가 있었고 세월호 이후 일년간 작업했던 음반을 엎어버린 음악가도 있었다. 블랙리스트로 대변되는, 사회적 공기가 그들에게는 법과 제도보다 강력한 자기 검열의 칼날로 작용했던 셈이다.

판사조차 미심쩍어 했던 법 적용은 아득한 과거가 됐다. 여성가족부의 존재이유에 의문을 갖게 했던 무분별한 심의도 사그라들었다. 박근혜는 전 대통령이란 호칭 대신 수인번호로 불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기검열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법과 제도라는 공적 권력의 검열을, 배타적 진영논리의 그것이 대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잊을만 하면 SNS상에서 벌어지는 조리돌림이 ‘고발’과 ‘불편 유발’이라는 이름아래 욕망과 자유의 손발을 잘라내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감시탑이 사라진 자리에, 만인의 만인을 향한 패놉티콘(Panopticon·전방위 감시 체계)이 세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와 피아의 구분이 없는 건축물이다. 처벌과 금지에 대한 두려움 대신, 매장과 손가락질에 대한 공포가 표현의 물길에 스스로 둑을 설치하게 하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를 추모하는 글에서 종종 ‘시대를 앞서갔다’는 문장을 봤다. ‘사라’의 시대는 지금일까. 그 즐거움이 소설 속의 상징으로나마 존중받을 수 있었을까. 역시,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계에 선 사람들  (0) 2017.09.21
도시의 소리풍경  (0) 2017.09.13
지금, 사라는 즐거울까  (0) 2017.09.06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 타자  (0) 2017.08.23
[문화와 삶]수평적 리더십이 절실한 시대  (0) 2017.08.17
아날로그의 반격  (0) 2017.08.1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야구 경기를 즐겨 보았다. 야구를 보면서 문외한으로서 느낀 게 있는데 뛰어난 타자들에게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타자들은 스탠딩 삼진을 당하더라도 절대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구를 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타석에 선 채로 삼진을 당하면 기분이 무척 복잡할 듯하다. 그래서인지 스탠딩 삼진을 당한 타자들은 보통 선수 대기석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투수 쪽을 한 번 본다. 물론 그들이 삼진을 당했다는 이유로 투수에게 원한을 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능적인 일별이라고나 할까. 사람이니까 두고 보자 식의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몇 몇 타자들, 특히 뛰어난 타자들은 그런 일을 겪어도 투수 쪽을 바라보거나 투수를 노려보지는 않는다. 또한 그런 타자들은 공에 맞았을 경우에도 아파서 인상을 쓰고 입모양으로 보아 욕설도 하는 게 분명하지만 투수를 노려보지는 않는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물론 스탠딩 삼진을 당하거나 공에 맞았을 때 투수를 노려보는 타자들 중에도 타율이 높은 수위타자들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타율과 같은 성적에 대해서가 아니다. 나는 결코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 타자에게서 자신에게 몰두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 그런 타자들은 야구란 상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투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자신이 던진 공이 타자에게 얻어맞아 홈런이 되었다고 해서 타자를 노려보는 경우란 거의 없다.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하면서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거나 잠시 주저앉기는 한다. 아마도 투수라는 직책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어떤 공을 던져야 하는지에만 몰두하게 하는 듯하다. 투수는 자신이 어떤 공을 던지든 타자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상대하는 것임을 어쩔 수 없이 잘 아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가장 서글픈 직책은 포수인 것 같다. 포수는 자신이 받아야 할 공이 상대편 타자에게 얻어맞아 홈런이나 안타가 되었을 때 거의 예외 없이 공만 바라본다. 실투를 했다고 해서 투수를 노려보지도 않고 그 공을 때려 홈런을 만들었다고 해서 혹은 안타를 만들었다고 해서 타자를 노려보지도 않는다. 포수는 서글픈 눈길로 날아가는 공을 뒤쫓을 뿐이다. 포수의 그런 태도에는 저 날아가는 공을 집 나간 자식처럼, 할 수만 있다면 뒤쫓아서 안전하게 자신의 미트에 넣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게 엿보인다. 특히 타자가 때린 공이 포수 머리 위쪽으로 솟아오르는 파울공이 되었을 때 마스크를 벗어던지며 공의 낙하지점을 찾아 포구할 때의 표정에는 타자를 아웃시켰다는 희열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집나간 자식을 자기 품에 안았다는 안도감이 역력하다. 포수란 직책은 아예 야구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상징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니까. 어쨌든 포수는 다른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신경 쓸 겨를도 없다. 오로지 공에만,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

야구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의 본질에는 서글픈 무언가가 있다. 글쓰기에도 그런 구석이 있다. 한 편의 글은 글쓴이의 손을 떠나는 순간 결코 회수할 수 없는 영역으로 달아나버리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좋으나 싫으나 공만 보는 포수처럼 글의 운명을 지켜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 글의 운명이 글쓴이의 마음에 흡족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번 떠나버린 글은 여간해서는 되찾을 수가 없다.

그런 경우에 맞닥뜨리게 되는 뒤늦은 후회란 대부분의 경우 이런 것이리라. 왜 나는 글을 쓰는 순간 글 자체에만 몰두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이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도 당신을 아프게 했을까.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당신을 떠나야 했을까. 결코 투수를 노려보지 않는 타자. 다른 누구도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아프게 돌아볼 수 있으려면 얼마나 당신에게 몰두해야 하는가.

<손홍규 소설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TAG 야구, 타자

무더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궜던 육군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사건, 교수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집단행동에 나선 학생들 기사를 접하며, 내가 속한 음악계를 돌아본다.

오토바이 길 만든다며 고3 수험생 시켜 산림을 벌목해 고발된 성악가, 제자 폭행과 성추행으로 파면된 교수들, 직원들에게 폭언을 퍼부어 인권침해로 물러난 단체장 등 지난 10년간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만 떠올려봐도 처참하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선의’ 혹은 조직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문제임을 몰랐다고 항변한다. 피해 당사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도 없다. 몇달 전 음대 교수들의 환갑 기념 공연과 종교 봉사활동에 학생들이 동원되었다는 기사에서도 교수들은 그것이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였다고 믿고 있었다.

수십년간 도제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스승에 대한 섬김과 복종을 당연시해 온 음악계에선 부당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가 쉽지 않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대학 내 군기 잡기는 잘못된 관행이 젊은 세대에도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배움이 일어나야 하는 교육 현장은 갑을 관계로 전락해버렸고,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권위주의 문화는 도처에 횡행한다.

2014년 여름 사이먼 래틀이 이끈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음악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지휘자가 마주 보이는 무대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내게, 연주가 끝난 후 관객을 뒤로하고 젊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일일이 눈을 맞추며 격려와 신뢰를 보내는 지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매해 전 세계 30세 이하 젊은 연주자들을 선발해 3주간 현대 곡을 집중적으로 익히는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지휘자와 함께 무대에 세운다. 어려운 현대 곡들을 기성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열정적인 패기와 활력으로 멋지게 소화해 낸 젊은 연주자들을 향해 래틀은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미래를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것을 도전하게 만들고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공유하며 그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것. 그게 ‘사회적 어른’의 몫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의 리더십은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투영한다. 33년간 베를린 필의 제왕적 존재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물러나고 1989년 지휘봉을 넘겨받은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대신 단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구축했다. 2002년 부임한 사이먼 래틀은 단원들과 친밀하게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베를린 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2009년 베네수엘라 출신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28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것은 그가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년 전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했을 때, 연주가 끝난 후 연단을 내려와 단원들 속에서 그들과 나란히 인사하는 두다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와 별개의 개체로 여겨지는 시대는 지나갔으며,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일부이고, 자신도 한 명의 단원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는 더 이상 군림하며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인권의식이 부재했던 지난날을 살아온 기성세대는 한국 사회의 오랜 폐습을 청산하자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혼란스럽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리더십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 관행에 젖은 이들은 변화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어른이 아니라 꼰대가 되어간다. 권위는 지위가 아니라 실력과 공정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존경이 뒷받침될 때 큰 힘을 갖는다. 젊은이들의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격의 없이 토론하고 공감하는 어른들이 많아지길 바라지만, 반세기 이상 이어져 온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권위의식이나 편견은 없는지 살펴야겠다. 나부터 달라져야 세상이 바뀔 테니.

<이희경 한예종 강사·음악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스마트폰이 마침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된 2010년 즈음, 나는 결국 CD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아이폰3GS를 처음으로 샀던 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CD플레이어를 서랍에 넣어 두는 것이었으니까. 그 전까지는 항상 음반으로 음악을 들었다. 처음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에 입문했을 때, 선망했던 건 LP였다. 용돈을 모아 테이프를 하나씩 사면서도 언젠가는 나도 방에 전축을 놓고 LP(그때는 ‘판’이라고 불렀다)로 음악을 듣겠다고 꿈꾸곤 했다. 그 꿈이 이뤄진 건 고등학교 입학 후였다. 주말만 되면 청계천 4가와 8가의 음반 도매상을 돌아다니면서 음반들을 사곤 했다. 테이프와 판 사이에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물성’의 차이가 있었다. 한 뼘이 넘는 정사각형 재킷에 담긴 지름 17인치의 플라스틱 원반을 손에 잡았을 때의 만족감은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테이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세트 데크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테이프보다는 턴테이블에 얹은 후 조심스레 바늘을 얹어야 하는 판은 뭐랄까, 진짜 음악을 듣고 있다는 숭고한 마음마저 들게 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까지, 그 기분은 판을 살 때마다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음반의 패러다임이 CD로 바뀌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더 이상 LP를 사게 되지 않았다. 아날로그 음반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음질도 좋았고 사이즈도 작았지만 LP로 음악을 듣던 때의 그 기분은 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음악을 듣고 쓰는 것이 직업이 됐다. CD는 벽 2개를 가득 채울 만큼 쌓였다. 다행히 LP를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턴테이블은 진작 처분한 지 오래였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직전,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을 마련했다. 보관하고 있는 LP들을 짐짝에서 ‘음반’으로 다시 돌려놓고 싶었기 때문일까. 저렴한 턴테이블도 하나 샀다. 약 15년 만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선물로 받았던, 포장도 뜯지 않고 있었던 노라 존스의 2집을 얹었다. 레코드의 소리골을 타고 바늘이 흘렀다. 그리고 노라 존스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 순간, 잊고 있던 감각이 떠올랐다. 클릭 몇 번으로 mp3를 들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신간 <아날로그의 반격>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완벽히 대체한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 왜 다시 아날로그가 돌아오고 있는지를 탐사,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음악은 이 책의 주요 모티브다. 현재 음악 시장에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분야는 둘이다. 스트리밍과 LP다. 다운로드와 CD는 끝없는 하락세다. 미국 기준으로 LP 판매량은 2007년 99만장에서 2015년 1200만장 이상으로 늘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통해 디지털 음원을 산업화시킬 때만 해도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던 LP가 부활을 넘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 말하듯 단순한 추억 때문이 아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LP를 구경하지 못했던 세대가 이 시장의 주요 고객이 돼가고 있다. 힙스터의 상징처럼 여겨지며(이는 한국도 비슷하다). 이런 현상의 이유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내시빌에 위치한 레코드 공장으로 가 음반의 생산 과정과 공장의 부활 과정을 취재하고, 레코드 스토어 연합(레코드 부서)이 어떻게 레코드 스토어 데이라는, LP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 축제를 만들게 됐는지를 밝힌다(한국에도 레코드 페어라는 비슷한 연례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리하여 한 달에 1만원 남짓이면 무한정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왜 20달러 이상을 내고 레코드를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왜 현재의 아티스트들이 새 앨범을 LP로 찍어내는지를 말한다.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나 테일러 스위프트가 스트리밍 서비스와 계약하지 않으려는 것은 거기에서 얻는 수익이 푼돈이기 때문이다. 스트리밍은 검증된 기술이지만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성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이미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과 만나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포맷으로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의 시대에 디지털 퍼스트를 외치는 이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이 세상은 0과 1만으로는 담겨지지 않으니까.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얼마 전 한국화랑협회와 한국미술협회가 ‘문재인 정부에 바란다-미술인 창작환경 개선과 글로벌 마켓 도약을 위한 정책제안’이라는 제목하에 정책세미나를 열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각 분야에서 다양한 요구들이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책 제안 역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정책 기조는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문화예술기관의 독립성과 개인 예술 활동에 있어 표현의 자유, 문예진흥기금의 안정적 재원확보, 분권적 지역 문화진흥체계 구축, 예술인 실업급여제도, 문화체육관광 지출비 세액공제 등 법제도 개선, 지역문화재생사업, 창작·주거인프라 조성 등이다. 특히 예술인의 복지강화에 주목하고 있고 그런 차원에서 예술인의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보장의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를 주도한 화랑협회 측은 이러한 문재인 정부의 문화정책에서 미술 분야로 국한하자면, 시장활성화의 해법과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책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깔려있다는 인상이다. 본질적인 문화예술의 진흥방안이나 예술영역을 통한 경제적 부가가치의 확대, 시장활성화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래서 국가지원정책을 통해 미술시장을 강화하는 정책과 글로벌시대에 부흥하는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 특별법 차원의 획기적 정책개발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이 세미나의 핵심적인 내용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미술시장에 도움을 주는 정책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로 받아들여진다. 간단히 말해 화랑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화랑주들은 화랑의 유통행위는 순수예술창작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전시기능과 작가에 대한 후원이라는 공적 역할을 수행하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아울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한국작가와 한국미술을 만들어내는 한편 한국미술시장의 건강한 발전과 안정화를 추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한국 화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대략 10만명 이상인데 그중 화랑을 통해 전시되는 작가, 이른바 시장에 노출되는 작가가 1만5000명가량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김환기,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등이 전체 판매액의 약 63%를 차지하고 있다. 지독한 편중현상이 아닐 수 없다. <군함도>의 스크린 독과점 논란은 욕을 먹어도 이런 현상은 당연시된다. 대부분의 화랑들이 돈이 되는 이 작가들의 그림만을 들고 나간다는 얘기다. 그래서 화랑들이 다양한 작가들을 선별해 전속작가로 삼아 시장에 선보일 테니 이에 대해 정부의 지원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구입비를 현재의 40억~50억원 수준에서 150억~200억원으로 대폭 확대하고, 시립미술관이 있는 지자체의 구입비도 100억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되어야 한다면서, 또한 미술은행의 작품당 구입액도 상향조정되어야 하며, 미술관 가격 대신 시장가격에 입각한 작품구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화랑의 전속 작가들이 해외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지원하고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출품해도 과감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윤추구행위제라는 명목으로 인해 배제되고 있는 각종 심의 및 자문 등에 화랑 참여를 보장해달라고도 한다. 아울러 현금영수증 의무발행 및 소득세법 시행령을 폐기 혹은 10년 정도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술품 거래 면세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미술시장을 성공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번 세미나의 핵심은 화랑에 대한 지원을 단순히 개인사업자 지원이 아닌 가장 효율적인 미술 후원 정책으로 보아야 하고 여기에 중점을 두어 미술문화정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분명 타당한 부분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화랑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작가와 미술계에 대한 재투자는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오로지 인기작가의 경쟁적인 독점, 과도한 영리 추구만을 일삼아온 것이 사실인데 이에 대한 반성과 개선점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 상태에서 온갖 지원만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내 오래된 글쓰기 습관 가운데 하나는 초고를 탈고한 뒤라면 그때가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상관없이 술을 한잔 마시는 거다. 그 이유는 내가 방금 쓴 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로부터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며 퇴고를 한다. 겨우 하루 이틀 만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보듯 내가 쓴 글을 보기란 쉽지 않지만 술을 한잔 마시면서 글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던 게 퍽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술 마실 핑계에 불과하다는 힐난도 들어봤고 나도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다른 소설가들의 좀 더 고상한 습관을 배우지 못해 스스로도 아쉽지만 징크스에 민감한 운동선수처럼 이 습관을 지키지 못하면 글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탓에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어느 토요일 새벽이었다. 소설 초고를 탈고한 뒤 집을 나섰다.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사는 동네는 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데 비해 상가구역이 협소해서 주말 새벽인데도 마땅히 술 한잔 마실 곳이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2㎞쯤 떨어진 번화한 지역을 찾아가야 했다. 그곳에 가려면 4차선 도로를 따라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고 길지 않은 터널도 지나야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 수월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성업 중인 한 술집에서 고픈 배도 채우고 술도 한잔 마셨다. 토요일 새벽이라 술집에는 사람들이 그득했고 저마다의 기쁨, 슬픔, 고민, 희망 등을 동석한 사람들과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 틈에 홀로 앉아 자작하는 내 꼴이 아마도 처량하게 보였던지 내 부실한 안주를 걱정하며 자신들의 안주를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토요일 새벽, 술꾼 아닌 술꾼들로 가득한 술집에 앉아본 적 있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그 소리들, 젓가락질 하는 소리, 술잔 부딪는 소리, 술 따르는 소리, 권하고 말리고 받아들이며 실랑이하는 소리, 호언장담과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식의 고백투의 목소리, 웃다 울다 울다 웃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웃음과 울음들.

사실 내가 기꺼워 마다하지 않는 이 소리들에 둘러싸여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적어도 내게는 흥겹고 즐거운 일이며 방금까지도 곤두섰던 신경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즐거웠다. 취기가 올라 한결 느슨해진 상태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차는커녕 사람 하나 없고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가면 그 새벽을 완벽하게 혼자 소유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저 앞에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의 양복은 후줄근해 보였는데 작은 키에 헐렁한 양복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오십대로 여겨지는 그 사내는 너무나 흔한 가죽 서류 가방을 든 채 비틀거리긴 했지만 부단히 앞으로 걸었고 비명을 지르는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그저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것일 뿐이었다. 술집에서 보았던 사내 같았고 술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노래는 서글펐다. 그의 노래는 무척이나 배타적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온전히 몰두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노래였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일 그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술을 마신 게 아니었을까. 술을 마시는 순간에도 그를 떠나지 않던 걱정들에서 순수하게 풀려난 찰나의 순간. 그가 유일하게 그 자신일 수 있는 시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사랑하는 노래를 음정 박자 틀려가며 목청이 터져라 부를 수 있는, 그에게 허용된 아주 짧은 순간. 집으로 돌아가는 그 새벽. 나는 감히 그를 지나쳐가지 못하고 그와 거리를 둔 채 페달을 천천히 밟아가며 그의 구슬픈 노래를 들었다. 고독할 권리를 누리는 그를 손톱만큼이라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손홍규 소설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날로그의 반격  (0) 2017.08.10
국내 화랑들, 정부 지원 바라기 전에…  (0) 2017.08.03
배타적인 슬픔  (0) 2017.07.27
진화하는 음악 축제  (0) 2017.07.20
홍어, 너 없인 못 살아  (0) 2017.07.14
반려동물이 ‘대체’한 삶  (0) 2017.07.0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여름은 음악 축제의 계절이다. 록이나 재즈만이 아니라 클래식과 국악에서도 그렇다.

지난 1일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공원 곳곳에 놓인 피아노들에서 차례로 연주가 시작된다. 바이올린·첼로·더블베이스·플루트·오보에·기타는 물론이고 하프나 아코디언처럼 흔히 볼 수 없는 악기도 등장한다. 갖가지 악기가 빚어내는 소리에 지나가던 이들도 연주자들 주위로 모여든다.

주말 늦은 오후 공원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음악 소리. 30분쯤 지나자 24개 팀 전체가 펼치는 음악이 여기저기 울려 퍼지더니 한 팀씩 차례로 연주가 끝난다. 이 동시다발 클래식 버스킹 공연은 ‘원먼스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프롬나드 콘서트’. 말 그대로 공원을 산책하며 듣는 음악회다. 모여든 관객들은 야외공연장에서 이어진 오케스트라 연주에도 함께했다. 7월 한 달 내내 전 세계 30여개 나라에서 400개 이상의 공연이 열리는 ‘원먼스 페스티벌’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으로 라이브 생중계되며 이렇게 개막을 알렸다.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문화가 있는 삶’을 모토로 내건 이 페스티벌은 ‘하우스콘서트’(대표 박창수)가 3년 전부터 열고 있는 여름 음악 축제다.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에서 즐기는 음악문화를 정착시킨 ‘하우스콘서트’의 글로벌 버전으로 시작해 매년 새로운 콘셉트로 진화하고 있다.

작년에는 페이스북 라이브를 도입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공연을 생생하게 전했고, 올해는 오픈 플랫폼을 마련해 누구나 다양한 콘텐츠로 직접 축제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칠레·인도·독일 등 세계 각지의 무대, 함안·순천·파주 등 국내 24개 스쿨 콘서트 현장, 대학 연습실과 출연자의 집, 문화원과 마을 도서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은 갖가지 문화 행사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라이브로 전해지고, 그 게시물은 원먼스 페스티벌의 홈페이지에 링크된다. 시간과 공간, 콘텐츠의 제약을 없애고 참여자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들로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 이는 연대와 공감, 소통의 새로운 예술 향유 방식을 실험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여우락 페스티벌’은 대표적인 여름 음악 축제다. ‘여기 우리 음악(樂)이 있다’(여우락)는 이름처럼 ‘국악’을 기반으로 하되 지난 7년간 과감한 외연 확장을 꾀했다면, 올해는 원일(타악·피리 주자)을 예술감독으로 영입해 내적인 질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개막공연 ‘장단 DNA - 김용배적 감각’은 사물놀이 창단 멤버였으나 1986년 요절한 전설적인 상쇠 고 김용배를 소환하며, 전통의 현재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 무대였다. 전자음향·풍물·굿이 어우러지는 색다른 구성, 설치미술가의 감각적인 무대디자인과 연출, 신명나는 에너지가 분출된 탁월한 연주로 관객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독창성, 절심함, 새로움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선정되었다는 올해 여우락의 15개 참가팀의 면면을 보면 인디밴드들과 젊은 음악가들이 눈에 띄지만, 공연에서 더욱 돋보였던 점은 중견 국악인이나 원로 명인들이 젊은이들과 한 무대에서 음악을 만들어간 것이었다. 서로 다른 분야나 세대의 접속에서 생겨나는 긴장이야말로 각자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창조로 이어질 수 있음에 천착한 결과이리라.

올여름 이 두 음악 축제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예술적 고민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지원 사업이든, 예술가와 애호가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것이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각자의 위치에서 질문하며 실천해가고 있다고 보인다.

음악 축제의 성패는 이미 확립된 포맷이나 스타 연주자 혹은 지원금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세상의 이슈와 접목하여 적절한 주제와 서사로 엮어낼 때 예술적 공감은 생겨날 수 있다. 음악 축제 역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기진화를 거듭할 때 살아남게 되지 않을까.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내 화랑들, 정부 지원 바라기 전에…  (0) 2017.08.03
배타적인 슬픔  (0) 2017.07.27
진화하는 음악 축제  (0) 2017.07.20
홍어, 너 없인 못 살아  (0) 2017.07.14
반려동물이 ‘대체’한 삶  (0) 2017.07.06
막다른 골목  (0) 2017.06.2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맛있다는 건 무엇인가.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맵고, 이 오미(五味)의 강약과 조화일 것이다. 지방의 고소함, 아미노산염의 감칠맛 역시 맛의 요소다. 그 외에도 담백한 맛, 진한 맛 등등…. 대부분이 공감하는 맛들이 있다. 공감대의 영역을 벗어났을 때 맛은 사라진다. 단어의 기의가 기표에 부합하지 않거나 혹은 과도하게 넘쳐났을 때, 우리는 맛없다는 말을 쓴다. 이걸로 충분한가. 물론 그럴 리가. 세상에는 맛있음과 맛없음의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맛이 존재한다. 그 맛은 취향을 탄다. 부합하는 자에게는 그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침샘을 활성화시키고 부합하지 않는 자에게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단어를 던진다. 홍어. 침이 고이는가? 아님 고개가 저어지는가? 나는 전자다. 한 개의 히읗, 두 개의 이응, ㅗ와 ㅓ. 총 다섯 개의 자음과 모음이 결합할 때 나는 아득해진다. 넓을 홍(洪)을 써서 홍어다. 살점의 색 때문에 붉을 홍(紅)을 쓸 거라 생각했는데 몸통이 가오리처럼 널찍하다 보니 그렇게 불렀나 보다. 어원은 아무래도 좋다. 난 그저 그 두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으로 내뱉기도 전에 침이 용천수처럼 샘솟는다. 이제 글을 시작했는데 모든 걸 작파하고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홍어의 맛을 뭐라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호불호가 강한 맛. 타협이란 없다.

몇 번인가, 홍어 미경험자들을 데리고 먹으러 간 적이 있다. 홍어는 단호한 음식이다. 체험의 시간, 표정의 변화가 그만큼 확실한 음식도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불행하다. 그 몇 번의 경험 중 나로 인해 홍어의 세계에 개화를 했다는 이를 만난 적이 없다. 늘,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하품이나 하는 알피니스트를 보는 셰르파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검증된 집도 그러할진대 나조차 가본 적 없는 곳을 홍어 초행자들과 함께한다는 건 모험이다. 홍어 연대의 제보자들을 믿을 수밖에. 국내산 삼합을 시켰다. 홍어를 닮았으며, 스스로를 홍어 연구소장으로 일컫는 사장님이 접시를 내왔다. 반찬은 단출했다. 콩나물과 미나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홍어와 삼겹살, 5년 된 묵은지의 등장. 때깔이, 때깔이 남달랐다. 넓을 홍(洪)자의 홍어가 아니라 붉을 홍(紅)자의 홍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빛이었다. 사장님의 인도에 따라 한 점을 소금에 살짝 찍어 50번을 씹었다. 향기롭게(반어법이 아니다) 삭힌 홍어에서 암모니아를 머금은 입자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우흡, 기침 비슷한 것을 한 후 찌그러진 양은잔의 막걸리를 쫙 들이켰다. “이게 진짜 홍어 먹는 법이지라~.” 사장님은 말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홍어를 탐했다. 묵은지와 수육에 삼합으로도 먹고, 홍어회만 먹기도 했다. 뿌듯했다.    

배를 어느 정도 채웠을 때 초행자들의 표정은 마치 시나이산에서 석판을 득템한 모세의 그것과 같았다. 홍어는커녕 아직 제대로 된 평양냉면도 못 먹어본 20대 초반 친구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한겨울 에베레스트 북벽으로 알피니스트를 정상에 올리고 만 셰르파의 기분이었다. 홍어계의 텐징 노르가이가 된 것이다. 이날의 피크는 홍어애였다. 어지간한 홍어애는 웬만한 푸아그라의 뺨을 때리고도 남는다. 이 집의 홍어애는, 웬만한 푸아그라의 뺨을 때리는 어지간한 홍어애의 뺨을 난타하고 말았다. 이런 홍어를 맛봤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친하지 않았던 우리는 기꺼이 친구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릴 땐 홍어의 맛을 몰랐다. 주변에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자연히 접할 기회가 없었다. 혹여 그 전에 먹어봤나 기억을 짜봐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최소한 아무런 인상이 없었던 건 분명하다. 선플도 악플도 아닌 무플이었다니, 안타깝지 않은가. 결혼 예정인 여자 친구가 있다. 그녀와의 만남에 결정적인 진전의 계기를 마련해준 게 홍어다. 어릴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보다 가열차게 홍어를 먹고 다녔을 것이다. 훗날의 나를 위하여. 남들은 달달하고 ‘샤방샤방한’ 음식을 먹으며 사랑을 싹틔운다는데 고작 홍어라니,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타적인 슬픔  (0) 2017.07.27
진화하는 음악 축제  (0) 2017.07.20
홍어, 너 없인 못 살아  (0) 2017.07.14
반려동물이 ‘대체’한 삶  (0) 2017.07.06
막다른 골목  (0) 2017.06.29
탈서울·탈입시의 대중음악을 위해  (0) 2017.06.2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3만년 전 그림의 역사가 시작될 때 동굴 벽면에 그려진 최초의 이미지는 현생 소의 먼 선조라고 하는 오로크스 내지는 순록 등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후 미술사에서 동물의 형상은 주술이나 신화, 종교, 권력 등과 결부되어 다양한 상징으로 출몰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는 인간의 삶과 밀접한 생애를 함께해온 가장 친근한 반려동물이었던 관계로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도 매우 빈번하게 그림 속에 재현되어왔다.

개가 인간의 파트너로서 사랑받는 애완동물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여받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이른바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가 익명성을 지닌 채 생동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짜인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초래하자 이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려는 욕망이 반려견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인간이 현대 사회의 소외 조건들로 인하여 갈수록 고립되어 외로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개가 애완동물이자 자녀의 대용물로 격상하게 된 것이다.

이효리는 유기동물 입양을 후원해온 대표적 인물이다. 최근 JTBC <효리네 민박집>에서 반려동물들과의 행복한 모습이 전파를 탔다. 그가 기르는 반려동물들은 모두 유기동물이었다. 북하우스 제공

인간 상호 간의 관계가 갈수록 계산된 목적성을 띠면서 냉랭한 소외감을 드러내는 이 시대에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율적이고 따뜻한 인간적인 접촉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 상호 간에 그와 같은 접촉이 이루어지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신 아무 조건 없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을 점점 더 찾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굴곡 심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질 때 개는 그 빈틈을 파고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여러 작업을 접하고 있다. 자신의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회화를 선보인 노석미와 박형진, 다양한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윤정미의 사진작업, 한때 반려견이었다가 이후 잔인하게 버려진 유기견을 다룬 윤석남 등의 작업이 그렇다. 이들은 작업을 통해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근 인구동향자료를 보면 1인 가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결혼이나 가족관계를 맺는 대신에 동물과 사는 삶을 적극 선택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인간과 동물이 특별한 인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도시인의 상당수가 이전과는 다른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반려동물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외로움을 극복하거나 상처를 치유하는가 하면 나름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의 강도가 무척 ‘세졌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와의 피로감 높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대신해 그 자리를 반려동물로 대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그만큼 무한경쟁사회로 초래된 인간 간의 피로감, 굴곡 심한 감정의 교류와 왜곡되고 피곤한 소통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여러 환멸을 지닌 사람들이 인간 대신 차라리 언어적, 문자적 소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려동물을 사랑과 애정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정황의 방증이다.

인간과의 매우 까다롭고 성가시며 공을 들여야 하는 감정적, 언어적, 육체적 관계에 절망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상처받지 않는 반려견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타자화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보다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삶이 늘어나고 있거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 반려동물들은 인간이 안기는 상처와 배신, 치욕 대신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물론 그만큼 배려와 돌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마다 행복하게 살고 싶고 외롭지 않기 위해 반려동물에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결국 그만큼 현대인들이 인간으로부터 너무 많은 상처를 받고 있고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뜻일 게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화하는 음악 축제  (0) 2017.07.20
홍어, 너 없인 못 살아  (0) 2017.07.14
반려동물이 ‘대체’한 삶  (0) 2017.07.06
막다른 골목  (0) 2017.06.29
탈서울·탈입시의 대중음악을 위해  (0) 2017.06.22
역사에 스민 노래  (0) 2017.06.1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