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음악 축제의 계절이다. 록이나 재즈만이 아니라 클래식과 국악에서도 그렇다.

지난 1일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공원 곳곳에 놓인 피아노들에서 차례로 연주가 시작된다. 바이올린·첼로·더블베이스·플루트·오보에·기타는 물론이고 하프나 아코디언처럼 흔히 볼 수 없는 악기도 등장한다. 갖가지 악기가 빚어내는 소리에 지나가던 이들도 연주자들 주위로 모여든다.

주말 늦은 오후 공원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음악 소리. 30분쯤 지나자 24개 팀 전체가 펼치는 음악이 여기저기 울려 퍼지더니 한 팀씩 차례로 연주가 끝난다. 이 동시다발 클래식 버스킹 공연은 ‘원먼스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프롬나드 콘서트’. 말 그대로 공원을 산책하며 듣는 음악회다. 모여든 관객들은 야외공연장에서 이어진 오케스트라 연주에도 함께했다. 7월 한 달 내내 전 세계 30여개 나라에서 400개 이상의 공연이 열리는 ‘원먼스 페스티벌’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으로 라이브 생중계되며 이렇게 개막을 알렸다.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문화가 있는 삶’을 모토로 내건 이 페스티벌은 ‘하우스콘서트’(대표 박창수)가 3년 전부터 열고 있는 여름 음악 축제다.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에서 즐기는 음악문화를 정착시킨 ‘하우스콘서트’의 글로벌 버전으로 시작해 매년 새로운 콘셉트로 진화하고 있다.

작년에는 페이스북 라이브를 도입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공연을 생생하게 전했고, 올해는 오픈 플랫폼을 마련해 누구나 다양한 콘텐츠로 직접 축제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칠레·인도·독일 등 세계 각지의 무대, 함안·순천·파주 등 국내 24개 스쿨 콘서트 현장, 대학 연습실과 출연자의 집, 문화원과 마을 도서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은 갖가지 문화 행사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라이브로 전해지고, 그 게시물은 원먼스 페스티벌의 홈페이지에 링크된다. 시간과 공간, 콘텐츠의 제약을 없애고 참여자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들로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 이는 연대와 공감, 소통의 새로운 예술 향유 방식을 실험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여우락 페스티벌’은 대표적인 여름 음악 축제다. ‘여기 우리 음악(樂)이 있다’(여우락)는 이름처럼 ‘국악’을 기반으로 하되 지난 7년간 과감한 외연 확장을 꾀했다면, 올해는 원일(타악·피리 주자)을 예술감독으로 영입해 내적인 질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개막공연 ‘장단 DNA - 김용배적 감각’은 사물놀이 창단 멤버였으나 1986년 요절한 전설적인 상쇠 고 김용배를 소환하며, 전통의 현재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 무대였다. 전자음향·풍물·굿이 어우러지는 색다른 구성, 설치미술가의 감각적인 무대디자인과 연출, 신명나는 에너지가 분출된 탁월한 연주로 관객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독창성, 절심함, 새로움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선정되었다는 올해 여우락의 15개 참가팀의 면면을 보면 인디밴드들과 젊은 음악가들이 눈에 띄지만, 공연에서 더욱 돋보였던 점은 중견 국악인이나 원로 명인들이 젊은이들과 한 무대에서 음악을 만들어간 것이었다. 서로 다른 분야나 세대의 접속에서 생겨나는 긴장이야말로 각자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창조로 이어질 수 있음에 천착한 결과이리라.

올여름 이 두 음악 축제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예술적 고민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지원 사업이든, 예술가와 애호가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것이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각자의 위치에서 질문하며 실천해가고 있다고 보인다.

음악 축제의 성패는 이미 확립된 포맷이나 스타 연주자 혹은 지원금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세상의 이슈와 접목하여 적절한 주제와 서사로 엮어낼 때 예술적 공감은 생겨날 수 있다. 음악 축제 역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기진화를 거듭할 때 살아남게 되지 않을까.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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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맛있다는 건 무엇인가.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맵고, 이 오미(五味)의 강약과 조화일 것이다. 지방의 고소함, 아미노산염의 감칠맛 역시 맛의 요소다. 그 외에도 담백한 맛, 진한 맛 등등…. 대부분이 공감하는 맛들이 있다. 공감대의 영역을 벗어났을 때 맛은 사라진다. 단어의 기의가 기표에 부합하지 않거나 혹은 과도하게 넘쳐났을 때, 우리는 맛없다는 말을 쓴다. 이걸로 충분한가. 물론 그럴 리가. 세상에는 맛있음과 맛없음의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맛이 존재한다. 그 맛은 취향을 탄다. 부합하는 자에게는 그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침샘을 활성화시키고 부합하지 않는 자에게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단어를 던진다. 홍어. 침이 고이는가? 아님 고개가 저어지는가? 나는 전자다. 한 개의 히읗, 두 개의 이응, ㅗ와 ㅓ. 총 다섯 개의 자음과 모음이 결합할 때 나는 아득해진다. 넓을 홍(洪)을 써서 홍어다. 살점의 색 때문에 붉을 홍(紅)을 쓸 거라 생각했는데 몸통이 가오리처럼 널찍하다 보니 그렇게 불렀나 보다. 어원은 아무래도 좋다. 난 그저 그 두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으로 내뱉기도 전에 침이 용천수처럼 샘솟는다. 이제 글을 시작했는데 모든 걸 작파하고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홍어의 맛을 뭐라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호불호가 강한 맛. 타협이란 없다.

몇 번인가, 홍어 미경험자들을 데리고 먹으러 간 적이 있다. 홍어는 단호한 음식이다. 체험의 시간, 표정의 변화가 그만큼 확실한 음식도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불행하다. 그 몇 번의 경험 중 나로 인해 홍어의 세계에 개화를 했다는 이를 만난 적이 없다. 늘,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하품이나 하는 알피니스트를 보는 셰르파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검증된 집도 그러할진대 나조차 가본 적 없는 곳을 홍어 초행자들과 함께한다는 건 모험이다. 홍어 연대의 제보자들을 믿을 수밖에. 국내산 삼합을 시켰다. 홍어를 닮았으며, 스스로를 홍어 연구소장으로 일컫는 사장님이 접시를 내왔다. 반찬은 단출했다. 콩나물과 미나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홍어와 삼겹살, 5년 된 묵은지의 등장. 때깔이, 때깔이 남달랐다. 넓을 홍(洪)자의 홍어가 아니라 붉을 홍(紅)자의 홍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빛이었다. 사장님의 인도에 따라 한 점을 소금에 살짝 찍어 50번을 씹었다. 향기롭게(반어법이 아니다) 삭힌 홍어에서 암모니아를 머금은 입자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우흡, 기침 비슷한 것을 한 후 찌그러진 양은잔의 막걸리를 쫙 들이켰다. “이게 진짜 홍어 먹는 법이지라~.” 사장님은 말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홍어를 탐했다. 묵은지와 수육에 삼합으로도 먹고, 홍어회만 먹기도 했다. 뿌듯했다.    

배를 어느 정도 채웠을 때 초행자들의 표정은 마치 시나이산에서 석판을 득템한 모세의 그것과 같았다. 홍어는커녕 아직 제대로 된 평양냉면도 못 먹어본 20대 초반 친구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한겨울 에베레스트 북벽으로 알피니스트를 정상에 올리고 만 셰르파의 기분이었다. 홍어계의 텐징 노르가이가 된 것이다. 이날의 피크는 홍어애였다. 어지간한 홍어애는 웬만한 푸아그라의 뺨을 때리고도 남는다. 이 집의 홍어애는, 웬만한 푸아그라의 뺨을 때리는 어지간한 홍어애의 뺨을 난타하고 말았다. 이런 홍어를 맛봤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친하지 않았던 우리는 기꺼이 친구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릴 땐 홍어의 맛을 몰랐다. 주변에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자연히 접할 기회가 없었다. 혹여 그 전에 먹어봤나 기억을 짜봐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최소한 아무런 인상이 없었던 건 분명하다. 선플도 악플도 아닌 무플이었다니, 안타깝지 않은가. 결혼 예정인 여자 친구가 있다. 그녀와의 만남에 결정적인 진전의 계기를 마련해준 게 홍어다. 어릴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보다 가열차게 홍어를 먹고 다녔을 것이다. 훗날의 나를 위하여. 남들은 달달하고 ‘샤방샤방한’ 음식을 먹으며 사랑을 싹틔운다는데 고작 홍어라니,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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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년 전 그림의 역사가 시작될 때 동굴 벽면에 그려진 최초의 이미지는 현생 소의 먼 선조라고 하는 오로크스 내지는 순록 등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후 미술사에서 동물의 형상은 주술이나 신화, 종교, 권력 등과 결부되어 다양한 상징으로 출몰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는 인간의 삶과 밀접한 생애를 함께해온 가장 친근한 반려동물이었던 관계로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도 매우 빈번하게 그림 속에 재현되어왔다.

개가 인간의 파트너로서 사랑받는 애완동물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여받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이른바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가 익명성을 지닌 채 생동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짜인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초래하자 이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려는 욕망이 반려견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인간이 현대 사회의 소외 조건들로 인하여 갈수록 고립되어 외로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개가 애완동물이자 자녀의 대용물로 격상하게 된 것이다.

이효리는 유기동물 입양을 후원해온 대표적 인물이다. 최근 JTBC <효리네 민박집>에서 반려동물들과의 행복한 모습이 전파를 탔다. 그가 기르는 반려동물들은 모두 유기동물이었다. 북하우스 제공

인간 상호 간의 관계가 갈수록 계산된 목적성을 띠면서 냉랭한 소외감을 드러내는 이 시대에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율적이고 따뜻한 인간적인 접촉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 상호 간에 그와 같은 접촉이 이루어지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신 아무 조건 없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을 점점 더 찾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굴곡 심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질 때 개는 그 빈틈을 파고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여러 작업을 접하고 있다. 자신의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회화를 선보인 노석미와 박형진, 다양한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윤정미의 사진작업, 한때 반려견이었다가 이후 잔인하게 버려진 유기견을 다룬 윤석남 등의 작업이 그렇다. 이들은 작업을 통해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근 인구동향자료를 보면 1인 가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결혼이나 가족관계를 맺는 대신에 동물과 사는 삶을 적극 선택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인간과 동물이 특별한 인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도시인의 상당수가 이전과는 다른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반려동물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외로움을 극복하거나 상처를 치유하는가 하면 나름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의 강도가 무척 ‘세졌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와의 피로감 높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대신해 그 자리를 반려동물로 대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그만큼 무한경쟁사회로 초래된 인간 간의 피로감, 굴곡 심한 감정의 교류와 왜곡되고 피곤한 소통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여러 환멸을 지닌 사람들이 인간 대신 차라리 언어적, 문자적 소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려동물을 사랑과 애정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정황의 방증이다.

인간과의 매우 까다롭고 성가시며 공을 들여야 하는 감정적, 언어적, 육체적 관계에 절망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상처받지 않는 반려견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타자화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보다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삶이 늘어나고 있거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 반려동물들은 인간이 안기는 상처와 배신, 치욕 대신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물론 그만큼 배려와 돌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마다 행복하게 살고 싶고 외롭지 않기 위해 반려동물에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결국 그만큼 현대인들이 인간으로부터 너무 많은 상처를 받고 있고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뜻일 게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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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때였다. 문학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어느 봄밤이었다. 우리는 충무로 극동극장 앞에서 매일경제 쪽으로 걷고 있었다. 지금은 시인이 된 선배가 무랑루즈라는 카페가 있던 골목 어귀에 멈춰서더니 혼잣말이라도 하듯 말했다. 이 골목 끝에서…… 죽었어.

우물 속을 들여다볼 때처럼 아득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말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나는 이후에도 성균관대 불문과 학생이었던 김귀정 열사가 경찰의 토끼몰이로 죽었다는 그 골목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다. 기어오르거나 뛰어넘기에는 조금 어려운 벽이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이 갈리는 참혹한 벽이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고, 당혹스럽거나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골목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연세대 법학과 학생이었던 노수석 열사가 죽던 날이었다. 경찰이 국립의료원에 안치된 노수석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을지로 인쇄골목에 갔을 때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밤이었다. 하수구에서 빗물이 역류하여 발목까지 잠기던 그 골목들은 여기저기로 이어져 있었건만 나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국립의료원 앞 을지로를 가득 메운 전경들 위로도, 골목마다 가득 메운 시위대의 머리 위로도 비는 무차별적으로 쏟아졌고, 막다른 골목도 아니었건만, 국립의료원을 지척에 두었건만 거기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채 발목까지 잠기던 빗물이 정강이까지 차오르도록 내리는 비를 속절없이 맞으며 젖어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던 바로 그 골목 어느 인쇄소 건물에서 경찰의 곤봉과 군홧발을 맞아가며 조여드는 가슴을 움켜쥐고 나보다 어린 한 학생이 죽어갔던 거였다.

그제야 나는 무랑루즈 골목 어귀에서 선배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던 말에 담긴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이 골목 끝에서…… 죽었어. 그때 선배는 막다른 골목을 보았던 게 아니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스스로를 보았던 것이리라. 그날 이후로 내게 막다른 골목의 이미지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이미지로만 떠올랐다. 벽에 가로막혀 있어도 막다른 골목이었고, 가로막은 벽이 없어도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리고 지금 9년 동안의 암흑의 시기를 지나 새로운 민주정부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나는 여전히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거리는 기분이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던 세월은 얼마나 참혹했던가. 용산참사가 그러했고 한 노동자가 목을 매달아 죽었던 크레인에 또 다른 노동자가 올라 300여일을 견뎌야 했으며,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하나둘씩 자살했고, 세월호 참사로 수백명이 몰살당했으며 농민은 물대포에 맞아죽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과 같은 권력기관의 협잡과 공작과 폭력은 한결같았으며 재벌과 재벌을 기반으로 한 정당 역시 기승을 부렸다.

이 고통, 이 슬픔, 이 헤어날 수 없는 삶의 진창들, 그 길고 긴 골목을 통과해 이제 겨우 문재인이라는 기착지에 이르렀을 뿐이다. 저 드넓은 도로도 확장된 골목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 지평선으로만 구획될 수 있는 광활한 대지라 해도 인간에게는 하나의 골목일 뿐이다.

9년 동안 골목을 헤매다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삶이 골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지금까지 우리를 토끼처럼 몰아대어 이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던 자들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민주정부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사회적 총파업이 예정되어 있다. 가로막은 벽이 없어도 뒤돌아서는 이유는 그이들 역시 매번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스스로를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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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취임 일성, “문화예술 지원하되 간섭 않는 원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말 한마디를 얼마나 기다려왔단 말인가. 이 말은 DJ정부 때 확립되어 참여정부 때까지 이어진 표어였다. 이명박 시절에는 지원하되 간섭도 했다. 박근혜 일당은 지원보다 간섭이 많았다. 아니, 지원은 없고 간섭만 있었다 해도 허무맹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 이후 대중음악 지원 정책은 음반 제작과 신인 발굴, 해외 공연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흘러왔다. 아직 디지털 음원이 음반을 완전히 대체하기 전에는 음반 제작비를 지원했다. 그 후 신인 발굴 및 지원 프로그램이 생겼으며 최근에는 해외 페스티벌 및 쇼케이스에 참가하는 국내 음악가의 경비를 지원하는 정책이 생겼다. 근 10년 가까이 지속된 흐름이다. 장점도 있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성과도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사이 음악 시장의 지형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태어난 세대가 음악 시장의 주된 소비자가 됐다. 그들이 철들 무렵, 즉 가장 예민하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무렵은 아이돌이 TV와 인터넷을 완전히 점령했을 때였다. 음악잡지는커녕 라디오의 시대도 끝난 지 오래다. 수동적으로 음악을 듣는 대다수는 그전 세대에 비해 오히려 다채로운 음악적인 경험을 하기 힘들었다. 음악을 하고 싶은 친구들 역시 그전 세대와는 달리 부모의 박해를 받지 않았다. 대신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해서 입시를 준비하면 됐다. 어렵사리 실용음악과에 진학해도 교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이론에 얼마나 정합되는지를 학점으로 평가받게 됐다. 주변에서 들리는 음악만 듣는 수동적인 계층이나, 음악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계층이나 그전보다 견고한 상자에 갇히게 된 게 지난 10년간의 흐름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사이 인디 음악의 중심지라 여겨졌던 홍대 앞은 명동과 다를 바 없는 상업지구가 됐고, 난무하는 음악 페스티벌들은 거기서 거기인 출연진으로 정체성 없는 ‘여가 산업’의 일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책이 의미가 있을까? 음원 제작의 리스크는 그전에 비할 바 없이 줄어들었다. 신인 발굴 오디션에서 1등을 해봤자 상금과 보도자료에 한 줄 쓸 수 있는 경력만 있을 뿐, 대중적 파급력은 전무하다. 해외 페스티벌에 참가해도 ‘좋은 추억과 영감’ 정도가 남을 뿐, 실질적 비즈니스 기회는 힘들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우선 ‘지역 밀착형 정책’이다. 페스티벌을 비롯한 한국의 모든 공연은 중앙 집중이다. 장소를 하나 잡으려고 해도 얼마나 서울에서 가까운지가 최우선 고려 대상이다. 당장의 수익을 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품’을 진짜 ‘문화’로 바꾸기 위해서 아예 고립된 지역에서 공연자와 관람자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작은 페스티벌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영국의 글래스턴베리를 비롯한 해외 유명 페스티벌들의 뿌리도 그랬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축제의 유니폼이 꼭 개량한복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 ‘생활음악 정책’이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대학에 총 51개의 실용음악과가 개설돼 있다. 2006년 대비 2배가 넘는다. 해마다 그만큼의 음악 전공자가 쏟아져 나오지만 대부분은 백수가 되거나 학원에서 입시생을 가르치는 처지가 된다. 클래식이나 국악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초·중등교육에 연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돌봄교사나 방과후수업 등 입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영역에 생활음악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악기를 배워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비트 메이킹을 배워 랩을 잘하는 친구와 힙합팀을 결성할 수도 있다. 수학여행에서 디제잉을 할 수도 있다.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인 이후에나 시도할 수 있는 음악적 경험들을 청소년기에 한다면, 음악을 수용하는 환경도 자연스럽게 넓어질 수밖에 없다. 결과보다는 뿌리에 집중하는 정책이야말로 한국 음악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큰 줄기가 될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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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힘은 막강하다. 누구라도 한번쯤 무심코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잊었던 옛 추억이 한순간에 떠오르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삶의 한 장면에 각인된 노래는 세월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 순간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노래는 일종의 기억장치인 셈이다. 이는 개개인의 경험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집단의식에서도 작동한다.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이들에게 그때의 기억은 함께 불렀던 노래들을 통해 순식간에 재생된다. 지난 주말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광야에서’ 같은 당시 곡들이 기악 연주로 혹은 노래로 울려 퍼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이 곡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기념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일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그림으로, 노래로, 연극으로, 춤으로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했다. 이때 만들어진 수많은 ‘민중가요’는 엄혹했던 시절 젊은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대변하고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며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1980년대 활발하게 전개된 노래운동의 물꼬를 튼 것은 1970년대 김민기의 작업이었다. 유신정권하에서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과 ‘상록수’는 저항가요의 상징이었고, 1978년 나온 노래굿 ‘공장의 불빛’ 비합법 테이프는 이후 노래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그 후 노래모임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 고 김광석, 안치환, 윤선애, 꽃다지 등 많은 이들이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널리 유포된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노래로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었다. 1960~1970년대 전 세계적인 저항의 물결 속에서 반전·평화 운동에 앞장선 미국 포크 가수들, 그리스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라틴아메리카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운동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음악가들이 부당한 억압과 인권 유린,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을 노래했다. 특히 1973년 군부쿠데타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망명길에 오른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는 독재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오늘날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것처럼.

참혹한 역사의 현장은 음악에 담겨 후세에 전해지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는 망명지에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접하고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썼다. 사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철저하게 음악 작품의 내적 세계에 몰두했던 이 작곡가조차 인류 최대의 비극을 지나치긴 어려웠던 것이다.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내레이터가 가스실로 향하는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찬 히브리어 합창으로 끝나는 이 곡은 전쟁의 공포와 대학살의 악몽을 소리로 재현한다. 

윤이상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역시 고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광경을 목도한 작곡가의 피맺힌 절규였다. 미국 작곡가 프레데릭 제프스키는 칠레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단결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를 주제로 한 36개의 변주곡을 써서 그에 대한 강한 연대감을 표했다. 앞의 두 곡과 달리 아방가르드에서 블루스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어법이 한데 어우러지고, 이탈리아 민중가요 ‘반디에라 로사’와 브레히트-아이슬러의 ‘연대가’도 곳곳에 출몰한다. 이 장대한 변주곡은 저항과 연대의 정신이 요구되는 시대에는 어김없이 소환되었다. 지난 촛불집회의 과정에서도.

1980년 광주와 6월 민주항쟁을 겪은 세대에게 그 시절은 30년 전 불렀던 노래들과 함께 기억된다. 세월호 참사와 촛불혁명을 경험한 지금의 젊은 세대는 훗날 이 시기를 어떤 노래들로 기억하게 될까? 이 시대는 음악가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겨놓았을까? 음악역사가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궁금하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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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부산아트페어를 관람하고 왔다. 화랑들 간의 편차는 컸지만 흥미로운 작품들이 더러 있었다. 좋은 작품은 기존 미술작품들이 주지 못한 낯선 감각과 감수성을 안겨주며 미술에 대한 새로운 생각거리를 동반한다. 그런가하면 절묘한 조형미로 ‘딴딴한’ 것들이다.

그것을 적절한 언어와 문자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거의 직관적인 느낌이고 순간적인 깨달음 같은 것이다. 평론가이면서 동시에 수집가인 나는 그 많은 작품들의 밀림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내 감각을 사로잡는 기막힌 조형미를 지닌 것, 그 작가만의 고유한 감각과 감수성으로 빚어진 것, 또는 그만의 미술에 대한 기발한 생각이 절묘하게 물질화되어 나온 것을 애써 골라내고자 한다. 그러나 나를 전적으로 사로잡는 것을 만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술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나와 다른 이의 사유, 감각, 감수성을 접촉시킨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미술작품이란 작가들마다 사물과 세계를 보는 다양한 관점,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만의 조형미를 체득시켜주는 하나의 거울 같은 것들이다. 미술은 고정된 시각, 감각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마다 자신의 해석에 따른 또 다른 감각의 세계를 가설하는 일이기에 보는 이들은 작가들이 만든 작품을 통해 그만큼 다채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트페어를 둘러보면 그러한 작품들보다는 지나치게 익숙하고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상당수다. 매번 보아왔던 작품들, 어디선가 본 듯한 작품 내지 특정인의 작품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들이다. 작가들은 학습과정을 통해 미술이란 것을 배운다. 그것을 모방하고 그와 유사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한편 특정 작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불가피한 통과의례이고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을 지낸 후에는 그 영향관계로부터 부단한 탈주를 감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배운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매번 누군가의 작품에 슬쩍 기생해나가면서 베끼고 짜깁기한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주어진 정보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다.

근자에 아트페어나 전시장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바로 백자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다.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무수한 그림들을 만난다. 이미 1930년대부터 이른바 동양주의 담론의 영향으로 수많은 작가들이 백자를 즐겨 그려왔다. 도상봉, 김환기 같은 작가들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이른바 단색주의 작가들 역시 백자의 백색을 화면 전면에 배치하고 도자기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연출을 시도했다. 박서보, 정상화 등이 그렇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정말 많은 작가들이 백자를 다루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똑같은 소재를 유사한 기법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다소 질린다. 나로서는 그런 광경이 너무 의아하기만 하다. 그릇 위에 가득 담긴 꽃, 밥을 그리는 경우도 갑자기 흔해졌다. 임영숙 작가가 오래전에 해왔던 작업인데 수년 전부터 많은 작가들이 그대로 베끼다시피 따라 하고 있다. 물론 백자를 그리거나 그릇 안에 꽃이나 밥을 얹어 그리는 게 특정인만이 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이미 있는 그림과 거의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분명 표절에 해당한다.

얼마 전에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원로 서예작가의 작품을 접했는데 작년에 전시했던 서예가 김정환의 작품과 거의 일치해 무척 놀랐다. 완전히 베꼈다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사실 이런 경우는 다반사다. 물론 외형적인 유사성만으로 표절이라 단정 짓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해당 작가들의 이전 작품과 비교해보면 그런 징후를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표절하고 고스란히 흉내 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트페어에 출품하고 개인전시에 내면서 활동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무척 난감하다. 그러니 더욱더 전시기획자, 평론가, 화상들의 밝은 눈이 요구된다. 아울러 컬렉터들 역시 모방과 표절의 혐의가 짙은 작품들을 적극 배제해야 한다. 이처럼 현재 우리 미술계에서는 남의 작품을 몰래 갖다 쓰고, 표절하는 경우가 너무 심각하다. 미술이 자신만의 감수성과 감각을 보여주고 고유한 조형적 안목으로 존립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이 이곳 미술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되고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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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본질적으로 산문에 속하기에 소설의 문장들은 산문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산문정신이란 대상에 대한 철저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접근 태도를 뜻하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한 편의 시는 사랑을 가리켜 ‘그것은 하나의 사태였다’라고 간결하게 보여줄 수 있으나 한 편의 소설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서로에게 이끌렸고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서로를 밀어내는 동시에 끌어당겼는지와 같은 감정과 행동의 사소하고 세부적인 결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차이 탓에 소설의 문장들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것 같다. 좋은 소설 문장이란 산문정신에 얼마나 근접했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불필요한 수사와 어리석은 말장난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오해 말이다.

이 오해가 오해인 이유는 앞서 설명한 산문정신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서다. 대상에 대한 철저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접근 태도와 그런 태도가 바탕이 되어 태어난 문장이 반드시 표면적으로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정직한 단어만을 고를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정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정직한 언어만을 구사하려 한다면 아모스 오즈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 “너무 못생겨서 아름답기까지 하다”와 같은 삶의 언어를 구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 때로는 슬픔에 눈이 부실 수도 있고 기쁨에 절망할 수도 있으며 행복 탓에 불행할 수도 있는, 삶의 도처에 존재하는 아이러니를 똑바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오해가 풀렸다고 해서 소설 문장의 정수에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오해 혹은 용납해야 할 모순이 하나 더 있다. 기이하게도 아름다운 한 편의 시는 예외 없이 자신의 내부에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어서 독자는 결국 아름다운 한 편의 시를 읽었을 뿐인데도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과 비슷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반대로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은 아무리 길고 긴 장편소설이라 해도 예외 없이 시와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길고 긴 독서 끝에 남는 건 거대한 하나의 이미지다.

그러므로 문장의 정수는 어느 한 기법이나 기교에 있지 않다. 문장의 정수는 시이거나 소설이거나 상관없이, 시적인 정신을 드러내려는 시도이거나 산문적인 정신을 드러내려는 시도이거나 무관하게, 시가 소설이 되고 소설이 시가 된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다고 믿는 데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미움 때문에 다툴 일도 많지만, 사랑 때문에 다툴 일은 더 많지”라는 식의 무수한 말장난이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인정한다면 결국 문장의 정수가 말장난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에 있지 않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말장난이어도 괜찮다. 말장난이어서 문제인 것은 아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말장난을 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말장난의 최대치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장 주네의 소설 <도둑일기>의 한 문장인 “스페인 그리고 그곳에서의 나의 비렁뱅이 생활은 호화로운 비천함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에서 ‘호화로운 비천함’은 초보적인 말장난 같은 형용모순에 불과하지만 ‘호화롭다’에도 속하지 않고 ‘비천하다’에도 속하지 않는 낯선 이미지를 느낄 수 있듯이, 비천함이 비천함으로만 머물지 않고 어떤 호화로움보다 호화로울 수도 있다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당한 이들이 매순간 느껴야 하는 비천함이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억압하고 소외시킨 이들이 누리는 호화로움보다 정의롭고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던 의미의 비약이 이루어진 순간에 언뜻 드러나는 것이 바로 문장의 정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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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겪은 기억이 거의 없다. 반항아도 아니었고 매사에 순종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 무렵, 음악에 빠져 들기 시작하면서 돌부리 같은 감정들을 음악으로 해소했다. 이유도 없이 분노가 치솟고 우울이 가득한 나이에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 이유도 없이 마음은 잔잔해졌다. 헤비메탈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부수고,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으며 심미안이란 걸 싹틔웠다. 주로 해외 음악을 들었으니 가사보다는 소리 그 자체를 통해 내면의 감정들과 교류했다. 그러니 세상과 부딪힐 일도 없었다. 아니, 부딪혀도 부딪힌 줄 모르고 예민한 시기를 지나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그 시절, 음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존재였다고 세월이 흐르고서야 생각하곤 한다.

새장 밖으로 나와 시작한 대학 생활의 첫걸음은 혼돈 그 자체였다. 주어진 목표란 게 사라지고, 밤마다 퍼마신 술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꺼내는 촉매제였다. 방황이란 게 시작됐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 전까지 여자랑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해보고 살다가 인간관계에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추가된 거다.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짝사랑 말이다. 난생처음 맞게 된 호르몬의 폭풍 앞에서 나는 너무나 미숙했다. 마치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자마자 F1 레이스에 참가한 심경이었다. 어떤 음악을 들어도 그 감정에는 포개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걸 참다 못해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나에게 호된 참교육을 하고 싶어질 정도다. 상대에 대한 전략도, 배려도 없이 혼자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대놓고 거절을 당한 날, 선배에게 상담을 청했다. 둘 다 취해 있었다. 선배는 뭐라 뭐라 말해줬지만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연애의 달인 기질이 있었던 동기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들에게 구한 것은 위로와 격려였을 테지만 어쨌든 스무 살 언저리의 미숙한 남자들끼리 ‘말발’을 세워봤자 무슨 효과가 있었겠나.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하다 눈물을 흘린 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 여자 선배 한 명을 믿고 따르게 됐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던 5월의 캠퍼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100원짜리 커피를 뽑아 대화를 나눴다. 상담을 빙자한 횡설수설이었다. 누나 또한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연배에 불과했지만 죽비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답은 네가 알고 있잖아. 누가 무슨 말을 해줘도 넌 네가 알고 있는 답을 그대로 듣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러면서 후련해하고 싶은 거 아니야?”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말로 하는 위로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스무 살의 나는 깨달았다. 그 후로 한 살 한 살씩 먹어가며 위로의 무용함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친구나 후배들이 힘든 상황을 털어놓으면 나는 위로의 언어 대신 그 누나와 비슷한 말을 해줬다. ‘멘토’와 ‘힐링’ 같은 단어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위로란 걸 믿지 않게 됐다.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 울먹이며 편지를 낭독한 유가족 김소형씨를 문재인 대통령은 예정에 없이 무대에 올라가 포옹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는 큰 울림이었다. 마침내 다시 울려 퍼진 ‘님을 위한 행진곡’의 장중함을 능가했다. 씻김굿의 절정에 다름아니었다. 단지 광주의 영령과 유가족들뿐 아니라, 지난 9년간 민주주의의 퇴행에 괴로워했던 이들, 세월호 참사 이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던 이들의 마음까지 안아주는 듯했다. 그들에게 ‘힘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해줬을까. 그래봤자 힘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들이 있었고 이는 제도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근원적 슬픔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김소형씨는 통곡하듯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제도란 언어로 구성되고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역시 현실을 재구성하고 규정한다. 그 언어적 현실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을 대통령은 포옹으로 보듬었다. 그간 믿지 않았던 본질적 ‘위로’였다. 어린 시절, 나를 엇나가지 않게, 우울하지 않게 해줬던 음악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 누가 기대했을까. 국가 행사에서 이런 장면을 보는 날이 올 거라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적어도 나는 몰랐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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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어린아이들의 그림을 심사한 바 있다. 드물게 이런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내게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다.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의 그림은 기발하고 희한한 게 다수 있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가는 순간 그림들은 거의 다 경직되고 도식적이며 따분해진다. 희한한 일이다. 교육을 받을수록, 아이들이 커갈수록 그림을 망친다는 얘기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이’란 근대기에 태동된 새로운 개념이다. 서구의 경우 중세 유럽에는 지금과 같은 ‘어른’과 어린이의 구별이 없었으며 오직 어른과 ‘작은 어른’이라는 크기상의 차이만 있었다고 한다.

어른에 대한 ‘아동기’의 출현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17세기 중반, 근대적 가족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는데, 이때부터 작은 어른들은 새롭게 ‘귀여움을 받고’ 보호되는 대상으로 재해석되었다. 여기서 사회적 약함이나 의존성이 특별히 강조된 ‘어린이다움’이 나타나고, 어린이는 시민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따르도록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정과 학교에 둘러싸이게 되었으니 이른바 ‘아동’이 탄생한 것이라고 아리에스는 말한다.

근대 국가는 아동을 국민구성원으로 훈육하고 양성하는 일을 조직, 체계화해 가정, 학교에서 맡도록 하였다. 아이들은 주어진 사회현실과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길러져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아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고 성숙되지 않았으며, 어른이라는 질서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있고 동시에 아이들을 어른의 일방적 시선 아래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른들이 원하는,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어린이들 역시 자기다움을 감춤으로써 질서 안에 편입되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아동을 교육시킨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교육시킬 수 있는가, 과연 어른의 시선으로 어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충분한 것이냐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창의력과 상상력, 사물과 세계를 보는 길들여지지 않는 눈을 요구하는 미술의 경우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어린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칠 수 있느냐,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미술이란 사물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기르는 일이고 인습적이고 상투화된 사고, 안목, 감각을 벗어나는, 뛰어넘는 것이자 그런 몸을 가꾸는 일이다. 종래의 나와는 다른 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교육의 힘이란 사람을 ‘한 가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때때로 아주 고통스럽고 고민스럽게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강요하는 일’이 된다. ‘성장 과정을 통해 암암리에 훈육되고 다져진 인식의 터전을 흔들어 혼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또한 미술교육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해하고 있는 사물과 세계는 모두 특정한 가치나 신화, 이념, 욕망에 의해 매개되어 있어서 그 본래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 눈과 의식으로 세상을 보기보다는 이미 주입받은, 학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코 자신의 눈과 사고로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대상에 대해 배운 대로, 학습된 대로, 경험한 대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눈으로 보고, 반복해서 보면서 깨닫는 것이다. 기존 미술계에 공식화된 어른 중심의 미술언어를 아이들에게 추종하게 하거나 익숙하게 훈련시키는 것은 진정한 미술교육이 아니다.

좋은 미술작품은 사물과 세계에 드리워진 모든 편견과 허위의식을 거둬 내는 일이며 그로 인해 그 아이만의 독특한 감성과 감각의 힘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따라서 그런 그림은 학원 등에서 관습적으로 만들어주는 그림이나 어른들이 손을 댄 그림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과 대상에 대한 관찰력을 키우고 자발적으로 느끼고 깨달은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담아내는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 당대의 지배논리가 현실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동일화된 감성에 순응하지 못하고 그것과 불화를 일으키고 저항하는 사유를 지닌 아이들을 길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아이들이 결국 한 개인으로 살아남으며 상상력과 창의성을 지닌 인간, 예술가적인 인간이 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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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소설가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체험이 소설에 드러나는 양상은 다양하다. 소설가가 완벽하게 지워진 소설이 있는 반면 소설가의 실제 모습이 생생하게 만져지는 소설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자전적인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어디까지가 작가의 체험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작가의 흔적이 전혀 없는 소설이라면 그런 구별이 쉽지 않다.

1925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단편 ‘불효자식’에는 마약 중독자로 인생을 망친 인물이 등장한다. 작중 화자와 동향이자 같은 집에 세들어 사는 칠복이라는 인물은 마약 중독자인데 절도죄로 인한 수감생활, 어머니의 간곡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마약을 끊지 못하고 파멸해 간다. 이처럼 마약에 중독된 인물의 몰락 과정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던지 이 소설을 발표한 뒤 채만식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 마약에 중독된 적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다. 물론 채만식과 소설의 인물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채만식의 개인적 체험과 완벽하게 무관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비약하자면 채만식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게 분명해 보이는 소설가의 길을 걷는 심정을 몰락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마약에 빠져드는 인물에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호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용어가 ‘미적 거리’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세월호 참사를 소설로 쓰려고 한다면 그이는 우선 세월호 참사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멀어지면 안된다. 작가라면 익숙하고 밀접하기 때문에 잘 안다고 믿는 것들을 의심할 줄 알아야 하며 한 걸음 떨어져서 객관적 시선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적이고 은밀한 체험을 소설로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미적 거리에 대한 오래된 오해라고 여긴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는 카메라의 눈이라 일컫는 기법으로 서술되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언뜻 보기에 세밀화에 가까운 정교하고 객관적인 묘사에 있는 것 같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대상에 대해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언급했듯이 <질투>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곳에 있다. 감정이 제거된 객관화된 장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질투를 느낄 수 있다. 감정을 제거하여 감정을 재현해낸 셈인데 그럴 수 있었던 건 소설의 내부에 존재하면서도 소설의 바깥에 있는 듯한 서술태도가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긴장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 소설의 화자는 남편인 것처럼 보인다. 그건 곧 화자가 소설의 인물이라는 뜻이며 소설의 내부에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뜻이다. 하지만 <질투>의 화자는 마치 소설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로 이 불가능해 보이는 위치, 내부에 존재하는 동시에 외부에 존재하는 화자, 동시에 존재하면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화자가 <질투>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미적 거리라는 게 없다. 만약 있다면 동요하고 갈팡질팡하는 화자가 있을 뿐이다. 전혀 객관적이지도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도 못하는 화자가 있을 뿐이다. 질투에 사로잡혀 집요하게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이 있을 뿐이다.

다시 돌아가 보자. 만약 누군가가 세월호 참사를 소설로 쓰려고 한다면 그이는 우선 세월호 참사 앞에서 한없이 흔들려야 한다. 세월호 참사로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거기에서 길을 잃어야 한다. 그 내부에서 기꺼이 흔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미적 거리가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미적 거리를 실현하려는 시도가 대체로 실패하는 이유는 한 걸음 멀어져서가 아니라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미적 거리를 실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질투에 사로잡힌 남편의 집요한 시선이 그러했듯이 세월호 내부에서 더 흔들리고 아파하고 분노해야 한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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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촛불정국의 하이라이트는 12월29일이었다. 전인권과 신대철이 무대에 올라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노래하고 연주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박근혜 정부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오염된 태극기, 그리고 태극기를 든 일련의 친박세력들이 불렀던 이 노래가 원작자의 아들에 의해 본래 의미를 찾는 순간이었다. 이미 그 전에 촛불집회에 참석, ‘애국가’ 등을 불렀던 전인권은 다시 한번 촛불 광장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랬던 전인권이 곤욕을 치렀다.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여 뭇매를 맞은 것이다. 실망했다, 배신자다, 공연티켓을 취소하겠다, 심지어 ‘적폐가수’다 등 화살 더미가 꽂혔다. 문재인 후보가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국민으로서 감사”하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문재인 캠프에서 문화예술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신대철 또한 “누구를 지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전인권에 대한 일각의 악의적 반응이 멈추는 것 같지는 않다.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렬 문재인 지지자,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문빠’라 지칭되는 이들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적폐’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왜 한국의 연예인들은 보다 정치적이지 않느냐고, 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느냐고.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선거 시즌에 배우와 음악가들이 일제히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걸 부러워하며 한국도 그런 분위기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한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가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기 힘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정권 차원의 보복이 따른다.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정부에 대항하여 소신껏 발언하고 행동해온 가수들은 작게는 방송 출연 금지부터 크게는 세무조사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실제로 지난해 있었던 일 하나만 밝히겠다. 한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가수를 섭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행사의 성격에 딱 맞는 이를 골라 섭외했다. 그 가수는 망설였다. 이 행사가 대통령 직속 기관의 최종 재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주최 기업 선에서는 통과됐기에 자신있게 밀어붙였다. 섭외가 완료됐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그 직속 기관에서 “다른 사람은 다 돼도 ○○○는 안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의 가장 큰 문제는 누구는 지원하고 누구는 지원하지 않고의 차원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 하여 그 대상을 ‘배제’해 버리는 행위가 정권 차원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두번째, 그 배제가 단지 정치권에서만 행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은 스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 욕망은 당연하게도 여러 층위를 갖는다. 인기가 많을수록 그 층위도 다양해진다. 그 층위의 무시할 수 없는 부분 중 하나는 ‘스타는 정치적이어서는 안된다’,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연예인이 소신 발언을 할 때 반대층의 맹렬한 비난을 받는 일이 다반사다. 최근 전인권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이분법적 잣대로 내 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일 또한 종종 목격된다. 아이돌 그룹을 정치·사회적 행사에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상황은 우리 사회가 ‘다름’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제 웬만한 슈퍼히어로 영화에서조차 선악의 구분이 단면적이지 않건만, 당위의 잣대로 피아를 구분하는 것이다. 상대를 몰아치고 배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넌 주적이다’라고 규정하는 캐릭터의 전형을 우리는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목격하고 있다. 홍준표다. 그를 보며 뒷목을 잡는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런 홍준표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낄 터다. 홍준표를 보며 분노할 일만은 아니다. 그는 진영을 떠나 한국 사회의 어떤 무의식을 선연히 투영하는 거울에 불과하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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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상당수 미술인들의 소원이 서울 중심가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세워지는 것이었다. 과천의 깊은 산속에 있는 미술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고 근처 동물원과 놀이공원의 짐승 울음소리와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전시를 관람하러 가는 길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곳까지의 길고 먼 길을 가야만 했고 또 그렇게 가는 날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떠나야 하는 일이었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도 코끼리열차를 타거나 꽤 먼 길을 걸어야만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 점지해준 곳이 이곳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이 길을 걸어서 한 번이라도 가봤을까?

그래서 우리도 유럽처럼 시내를 걷다가 미술관으로 불쑥 찾아들어가는 꿈도 꿔보고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 전시를 보거나 일과를 끝낸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감상하며 좀 고상해 보이는 문화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만들려는 노력이 꽤나 오랫동안 진행되었고 그 결과 이명박 정부 들어 무슨 비밀작전처럼 전격 발표되어 그 숙원이 드디어 해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사간동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섰고 또 몇 해가 지났다. 그 전후 동안 여러 명의 관장이 업무역량 부족이나 채용비리 등의 이유로 모두 쫓겨나다시피 공직에서 물러났고 우여곡절 끝에 외국인 관장이 취임했다.

관장 선임에서도 많은 파열음이 있었다. 최종 후보에 오른 후보자들 중에서 끝내 선임하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더니 갑자기 외국인 관장을 임명해버렸다. 후보자들 중에서 적임자가 없었다거나 온갖 투서가 난무해서 도저히 뽑을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과연 그랬을까? 나로서는 누군가가 아마도 국내 미술계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 관장을 앉히고 대신 미술계를 좌지우지하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그를 낙점한 궁극적인 이유가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또 1년의 시간이 지났다. 분명 그동안 우리는 사간동 길을 걷다 이 미술관에 들러 다양한 전시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과천에 있는 미술관까지의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 도심에 미술관이 들어서면 근사한 혜택이 벌어지고 대단한 볼거리와 수준 높은 전시를 편리하게 향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꿈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우선 수준 높은 전시가 거의 없었고 이전과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러 전시들이 무슨 행사를 치러내듯 산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구나 미술관의 조직개편을 둘러싼 잡음과 함께 상당수 직원들이 떠났으며 또한 올해 기획된 전시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리 관장이 올해 취임 1주년 간담회에서 의욕적으로 발표한 앤디 워홀전과 피카소전, 이집트 초현실주의 미술전 등이 사전협의 미흡과 예산 미비 등의 사유로 갑자기 취소, 연기되었다. 그러고는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술관이 전시를 기획한다면 최소 1~2년의 시간을 두고 준비해야 하는데 전시를 몇 달 앞두고 느닷없이 취소하는가 하면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의 현실이다. 더구나 모 미술전문지가 국립현대미술관의 마리 관장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싣고 난 후 지속되던 광고가 곧바로 끊어졌다고 한다. 2016년에는 총 14페이지에 걸쳐 광고가 게재되었는데 올해에는 단 한 건도 광고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술관 측의 한 인사는 “관장을 나가라고 해놓고 광고를 기대하냐”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나라꼴이 엉망이다 보니 국립현대미술관 돌아가는 모양새도 판박이가 되어 닮아가는 모양이다. 미술관이 지어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어느 곳에 놓여있다고 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결국 사람이다. 누가 그것을 운영하는가, 어떤 인식과 태도로 운영하는가가 사실 더 핵심적인 문제다. 오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도 결국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잘못 뽑아 생긴 일이 아닌가? 선거를 앞두고 우리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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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은 흔히 남김없이 쓴다 해도 결코 완전하게 쓸 수 없으리라는, 아무리 적게 쓴다 해도 너무 많이 쓰게 되리라는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이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가로막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글을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으리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편의 글이 완전하다면 그 이유는 글 자체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해서가 아니라 글의 틈이나 군더더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우고 소거하며 읽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이 그러하듯이 말 또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완전해지는 듯하다.

여러 해 전 작가 체류 프로그램에 참여해 인도에 머문 적이 있다.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에 속한 오로빌이라는 곳이었는데 일종의 생활공동체였다. 거기에 정착한 사람들을 오로빌리언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 한국인 오로빌리언도 예닐곱가량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인도에서 여러 해를 지냈지만 형편이 닿지 않아 한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느 해 여름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그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날아왔다. 공항이 있는 도시까지 마중을 나간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가 사는 곳으로 왔다.

그가 머무는 공동체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도 현지인들의 마을을 지나야 했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노인들이 반얀나무 그늘 아래 주르르 앉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노인들 옆에 앉더니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노부인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뜨거운 여름날 고향 마을 들머리 정자에 모여 잠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그러하듯이 무람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말에 맞장구도 치고 고개도 끄덕이고 혀도 차면서. 그는 재촉하지 않고 두 노부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의 심사는 복잡해졌다. 어머니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노부인은 열다섯 개나 되는 인도의 공용어 중 하나인 타밀어를 쓰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역시 표준 한국어가 아닌 고향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족히 한 시간쯤 즐겁게 대화를 나눈 뒤에야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그가 어머니에게 말도 안 통하는데 무슨 얘기를 그리 오래 나누었냐고 묻자 어머니는 그게 대수냐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저이도 사는 게 힘든가보더라” 하고는 그만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흔흔히 웃고 말았지만 곱씹어 보면 기이한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지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을 서로에게 비끄러매어준 힘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뜻해졌다.

인종도 국가도 언어도 경험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발견했던 것들, 어쩌면 볕에 그을리고 주름이 고랑을 이룬 얼굴이었거나 염소 목줄에 쓸려 생겨난 손목의 상처였거나 마디 굵은 손가락이었거나 혹은 푸른 하늘에 높이 뜬 부드러운 조각구름 하나였거나 반얀나무 잎사귀를 흔들고 지나는 바람이었을지도 모르는, 눈을 감아도 보이기에 서로에게서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하면 ‘저이도 사는 게 힘든가보더라’는 말에 담긴 무수한 의미들이 섬돌에서 튀어 오르는 자디잔 빛 알갱이로 눈앞에 떠올랐다.

두 사람의 언어는 무관했지만 그러한 사실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애틋함과 공감을 느끼는 걸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본 게 아니라 서로의 삶을 통째로 단번에 알아보았던 거다. 서로의 가슴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물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도 여느 소설가들처럼 소설을 쓸 때마다 불안하다. 내 소설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흠투성이의 글이라 할지라도 평생을 두고 쓰게 되면 소설을 쓰며 살았던 세월을 알아봐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아 기꺼이 지나온 삶을 각자의 언어로 들려주고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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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과 혼술이 보편화됐다. 서울의 뜨는 동네들은 대규모 연회석보다는 1~2명을 상대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예 ‘혼술 환영’을 내건 가게들도 종종 보인다. 20대의 17%, 30대는 18%가 1인 가구다. 30대도 지난 나 또한 1인 가구다. 언젠가 생각을 해봤다. 이대로 혼자 살아도 괜찮을까?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살림 같은 건 충분히 가능하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을 거의 타지 않는 편인 데다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기에 혼자서 밥도 잘 먹고 자잘한 살림도 싫지 않다. 여전히 혼자 사는 친구들도 많으니 밤이 외롭지도 않다. 유효 기간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연애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가정을 이룬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여행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물론 이건 프리랜서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어느 나이가 되면 대학을 가야 하고 또 어느 나이가 되면 취직을 해야 하고 그리고 어느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국 어느 나이가 되면 부모가 되어야 하는, 당연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은 인생의 매뉴얼북만 집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면 혼자 산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이다.

서울의 한 할리스 커피 매장에서 손님들이 1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다. 혼밥, 혼술 등 ‘1인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할리스는 최근 주요 매장에 1인 좌석 및 도서관 형태의 분리형 좌석을 설치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인생이란 뭔가가 일어나기 때문에 인생인 법이다. 나에게든, 남에게든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일어난다. 반드시 그렇다. 몇 년 전, 혼자 살던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전날 밤까지 친구들이랑 거하게 마신 후 집에서 쓰러졌다. 함께 사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119를 불렀을 것이고, 소생의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동안 꼬박 방치돼 있었다. 그는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갔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혼자 살았다. 슬픔을 나누고자 만든 술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우리 매일, 아니 며칠에 한 번이라도 안부 문자라도 주고받으면서 살자.” 물론 말뿐이었다. 혼자 살지언정 매일 가족들과 안부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또 하나의 리스크가 있다. 늙어가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은 끼리끼리 갈라진다. 가족을 꾸리면 가족 단위의 모임이 생기고, 아직 그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은 소외된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더니 그렇게 비웃던 카카오스토리에 아기 사진을 올리는 친구를 봤을 때의 당혹감이란! 그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나만 쏙 빼놓고 가족끼리 휴가를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서러움이란! 술자리 맹세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가정을 만들기는 싫고 (혹은 자신이 없고)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공동체를 만든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이는 작은 공동체부터, 아예 시민운동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공동체까지. 1인 가구가 늘어가면서 후자의 실험들도 이어지고 있다. 혼자 사는, 그러나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며 일상 속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꾸려내고자 만들어진 서울 성수동의 ‘디웰’ 같은 경우도 있고 시민단체에서 주택을 구입, 개조한 후 임대하는 형태도 있다. 이런 시도의 공통점은 현대의 주거 문화와는 달리 교류를 중점에 둔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라. 이웃집 사람과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우리의 생활이다. 아파트에 살건, 원룸에 살건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알고 산다는 시골 마을을 부러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런데 막상 닥치면 불편하다.) 요컨대 집단주의의 환상과 개인주의의 편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과도기적 상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갈망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의 절충점일 것이다. 가족으로 대변되는 1차 집단도, 학교로 대변되는 2차 집단도 아닌 세대와 취향의 새로운 집단. 디지털시대가 만든 3차 집단 내부의 시도라는 이야기다. 원치 않는 간섭은 피하되, 이웃의 따뜻함은 누릴 수 있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시도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인류는 주거 환경을 바꿔 왔다. 세대라는 개념이 등장한 게 반세기가 지나지 않은 지금, 인생의 매뉴얼북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세대의 실험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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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사인 지인이 “요즘 학생들은 선생님을 존경하지도, 정을 주지도 않아서 예전만큼 가르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탄하자, 부인께서 담담한 어조로 폐부를 찔렀다고 한다. “그 아이들도 젊은 선생님들한텐 다를걸.”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크게 웃다가,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늙음에 대한 자인(自認)은 환멸을 수반하는 계몽적 인식과도 같다는 사실을.

오늘날 노년이나 늙음과 관련된 문제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형편에 처한 듯하다. 늙음 자체보다는 제대로 늙을 수 없다는 것이 새로운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평생직장 개념이 붕괴한 무한 경쟁사회, 끝없는 자기혁신과 평생학습의 구호 속에서 한국인들은 더 이상 늙을 수가 없다.

사회적 안전망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호모헌드레드’ 시대의 개막이라는 소문은 불안만을 가중시킨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허튼 표현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실제로 늙지 못한 채 나이만 먹고 있다. 낡은 것이 초단위로 폐기되는 사회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젊음을 유지하고자 한다.

늙거나 낡아서 오히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고전문학이나 고전음악과 같은 ‘고전(古典)’ 텍스트가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고전의 가치조차 ‘새로운 것’ 혹은 ‘미래의 것’과의 관련성을 증명할 때에만 비로소 승인된다.

이 시대의 고전은 ‘명문대 선정 고전문학 100선’과 같은 표식을 붙이고서야, 혹은 종종 ‘K’자가 붙는 한류 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한 문화자원으로서 내세워질 때에야 그 효용이 인정된다. 미래를 위한 전략과 투자에 쓸모 있는 낡은 것들, 한국에서 고전이란 말하자면 재건축 가능성이 있는 낡고 비싼 아파트와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전체가 사실상 ‘새로운 것’에 대한 추종과 ‘낡은 것’에 대한 폐기와 개조의 역사다.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맹종이 극에 달했던 시기가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박정희의 철권통치 시절이다. ‘근대화’가 동네 슈퍼의 이름이기까지 했던 당시에 ‘새로워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이었다. ‘새마을운동’과 ‘새마음운동’, 이 시대 권력의 요구에 응답했던 순박한 국민들은 ‘새로움’을 향한 일사불란의 행진 대열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리고 한 세대 이상이 지난 지금, 그들 가운데 일부가 리프팅 시술을 거듭한 ‘유신(維新)의 공주’와 함께 제때 늙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채 이른바 ‘태극기집회’에 모였다. 한 손에 성조기를 들고 여전히 저 1970년대식 근대화에 대한 청춘의 신념을 불태우면서.

그러니 촛불광장의 젊은이들로부터 ‘틀딱’(틀니 부딪치는 소리라는 뜻)이라 조롱받는다고 해서 그들을 주책없는 ‘늙은이’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새로움’을 추구했던 세대라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요컨대 우리가 ‘틀딱세대’로부터 진정으로 청산하고 결별해야 할 것은 그들이 가진 유신의 기억, 반공 이념으로 화한 맹목적 개신(改新)의 신앙이다.

촛불시민의 자격이 ‘젊음’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청산해야 할 적폐를 늙음이나 낡음 그 자체로 착각할 경우 ‘틀딱’은 차례로 1980년대 민주화 세대, 1990년대의 IMF 세대, 심지어 2010년대의 세월호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돌아보면 세월호 참사의 주원인 가운데 하나가 불법적 ‘개조’였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대응 또한 적반하장 ‘국가개조’였다. 대통령 탄핵선고 이후에도 적폐의 정치인들은 대놓고 ‘개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새로워져야 할까?

모든 나이 듦이 ‘꼰대질’과 ‘갑질’이 되는 사회, 더 이상 향기 나게 늙지 못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죽은 시니어의 사회’는 젊은이들에게도 불행한 사회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미래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촛불의 광장은 ‘새로운 것’을 위한 자리만은 아니었다. 광장의 촛불이 밝혀주었던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낡고 진부한 이념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소중한 것은 종종 그렇게 낡고 오래된 것들 속에 있다.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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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풍경 묘사는 언제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된 풍경은 그 시선에 의해 새로이 부각되거나 부식되거나 하기 때문이다.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날 바다 앞에 선 이가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를 가리켜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해도, 이와 반대로 폭풍우가 치는 날 바다 앞에 선 이가 숨 막힐 듯 고요하다 말한다 해도 기꺼이 동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이가 보는 바다가 그이의 내면이 그려낸 풍경임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풍경은 내면의 연장이며 형상을 부여받은 내면이다.

풍경과 내면은 구분하기 힘들 만큼 뒤엉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경우도 있고, 완벽하게 무관한 것처럼 암시적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유명한 예 가운데 하나는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에서 에마의 내면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녀의 삶은 마치 햇빛받이 창이 북쪽으로 나 있는 지붕 밑 골방처럼 냉랭했고 소리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에서 에마의 내면은 골방의 거미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월 25일 열린 17차 범국민행동의날 집회에서 한 시민이 촛불을 켜고 있다. 강윤중 기자

후자의 유명한 예 가운데 하나는 헤밍웨이의 단편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강 건너 저 멀리에 산들이 있었다. 구름 한 점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곡식밭을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고 아가씨는 나무 사이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 건너의 산, 구름 한 점이 떠가는 곡식밭, 나무 사이로 보이는 강 등은 인물의 시선과는 무관해 보이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풍경으로 비치지만 두 인물의 대화 도중 한 인물의 시선에 포착된 이 무심한 풍경이야말로 시선을 보낸 이의 내면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머뭇거림이자 부드러운 질책이며 잠시 상대방을 잊어버린 자기몰입이기도 하다.

플로베르와 헤밍웨이는 풍경과 내면을 긴밀하게 엮었느냐 아니냐는 스타일의 차이는 있지만 풍경이 내면의 연장이며 형상을 부여받은 내면이라는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창가에 선 채 목탄화로 그린 듯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이 쓸쓸하고 막막한 풍경이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내가 무척 좋아하던 풍경이었다. 해가 질 무렵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광야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던 시간들, 차갑지는 않으나 질감이 느껴지는 근육질의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던 시간들, 장막이라도 쳐버린 듯 새까맣게 내리던 눈과 비의 시간들, 불길하게 새떼가 날아오르고 먹장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점령해버리던….

그 시간들처럼 사위가 온통 잿빛으로 물들고 습한 공기를 호흡하며 불안에 떨어야 했던 그날 하루는 정말로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비가 내리는 어둑어둑한 세상 풍경에 마음이 끌리는 건 풍경이 내면의 반영이기 때문이며 나의 황량한 내면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다는 기이함과 그 풍경이 생각처럼 추하기는커녕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데서 오는 위로와 안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 풍경이 나의 내면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내면이기도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쓸쓸한 풍경은 누구의 내면일까. 창가에 바투 붙어 커튼을 살짝 젖혀 밖을 내다보는 당신의 내면이 아니던가. 우산을 쓰고 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비스듬히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 당신의 내면이 아니던가. 버스 차창에 이마를 대고 우울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당신의 내면이 아니던가.

저기 광화문광장의 촛불도 누군가의 내면일 것이며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그게 누구든 미래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 풍경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렸고 내면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내면은 풍경의 연장이며 의미를 부여받은 풍경이기도 하다.

소설가 손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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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음악사를 다룬 알렉스 로스의 저서 <나머지는 소음이다>에 소개된 뜻밖의 사실 한 가지.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을 점령한 미군정(OMGUS)이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하계음악제가 출범할 때부터 예산의 20%가량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다름슈타트의 하계음악제는 이후 아방가르드 현대음악의 국제적 산실이 된다. 슈토크하우젠, 불레즈, 존 케이지와 같은 굴지의 현대음악가들이 이 음악제를 거쳐갔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윤이상도 예외가 아니다.

미군정이 현대음악을 지원한 것은 독일의 ‘탈나치화’를 위한 이른바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이해가 쉽고 집단적 정서에 호소하는 조성음악 대신에 개인화된 자유로운 아방가르드 음악의 미학적 가치를 우위에 둠으로써 전체주의의 발흥을 저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것은 물론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 로스에 따르면, “OMGUS의 뒤를 따라 중앙정보국(CIA)이 가끔씩 심히 복잡한 아방가르드 작품들이 포함된 축제의 자금을 지원했다.”

윤이상 (출처: 경향신문DB)

위와 같은 사실은 한국의 냉전 정치세력들이 작곡가 윤이상을 대해왔던 방식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동백림 사건’의 간첩 혐의로 윤이상을 독일에서 국내로 납치해와 고문을 자행하고 2년 가까이 교도소에 감금했으며, 세계적 비난 여론이 들끓자 마지못해 석방한 뒤 추방했다. 미국 정부와 CIA라면 음렬기법과 무조성을 고수했던 윤이상의 아방가르드적 현대음악을 오히려 지원했을 것(최소한 공산주의자로 몰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1980년대 이후로 특히 자주 있었던 윤이상의 방북 활동은 한국 내 냉전세력들이 최근까지 그의 이념을 문제 삼도록 만든 빌미가 되었다. 남한 입국이 거부되어 있던 당시에 윤이상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조국 방문’이었음을 고려해야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북한 정권은 왜 윤이상과 그의 음악을 받아들였을까? 윤이상의 난해한 현대음악은 ‘인민이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전체주의적 기조로 삼는 북한의 관료화된 문예정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동백림 사건’이 없었다면, 북한 정권이 윤이상의 급진적 현대음악을 지원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사실상 ‘남한 정부의 정치적 핍박을 받고 있는 세계적 명성의 작곡가’라는 윤이상 카드를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는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북한 정권의 환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윤이상의 음악 그 자체는 대중적 조성음악 언어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 즉 그의 음악은 단 한번도 ‘친북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윤이상의 한국 방문이 시도됐다. 하지만 “지난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는 것과 앞으로는 예술에만 전념하시겠다는 뜻을 밝혀” 달라는 당시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의 서신을 전달받고 윤이상은 정중히 한국 방문을 거절했다. 이듬해에도 방한 기회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주사파 성향의 활동가들이 그를 찾아가 한국 방문을 강행할 경우 공항에서 분신자살이 행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통일운동가’라는 이들의 위선적 행태에 실망한 나머지 윤이상은 이날 심장 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한다. 그해에 윤이상은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독일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고향 통영에서는 윤이상을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최근 ‘윤이상 콩쿠르’의 지원금 중단 해프닝에서 볼 수 있었듯이 그는 여전히 누군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조차 종종 “예술에만 전념”이라는, 작곡가 자신이 모욕을 느꼈던 누군가의 바람을 넘어서지 못하는 듯하다. 윤이상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찬 한국의 현대사이자 냉전의 세계사 그 자체다. 탄생 100주년, 윤이상을 기억하는 일이 작곡가로서 그의 세계적 명성이나 순수음악적 가치를 재확인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되는 이유다.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한반도 평화의 미래를 향한 미학적·정치적 공감의 교두보다.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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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회화의 전통에서 누드란 궁극적으로 그것을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그림 속 여자는 미리 잘 검토된 여성성을 구경거리로 제공하고 있다. 그림은 화가의 예술적 비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소유한 자의 지위와 재산을 표현하고 그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하는 차원에서 기능한다. 이처럼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다. 마네는 이런 장르에 대해 질문을 던진 최초의 작가다. 그의 그림으로 인해 누드화의 이상은 깨졌다. 바로 ‘올랭피아’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관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올랭피아는 실재하는 인간이고 완전 나체다. 여인의 다리 부분에는 흑인 하녀가 흰 종이에 싸인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다. 당시 파리의 젊은 여성들 중에는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고급매춘부, 즉 ‘코르티잔’들이 많았고 그들의 일을 거드는 역할은 흑인여자들이 도맡았다고 전한다. 마네는 이런 당시의 현실을 그림 속에 반영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65년 살롱전에 출품되었는데 전례가 없을 정도로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 신화가 아니고 현실 속의 여인을 나체로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55개 예술단체 예술인들이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나체를 표현한 그림 ‘더러운 잠’ 훼손 사건을 비판하는 기자회견과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당시 서구미술에서 여성 누드를 표현할 때는 실제 모델이 아니라 미의 여신인 비너스나 사냥의 여신인 디아나 같은 여신들을 빗대어 이상화된 누드를 그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마네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현실 속 여인의 벗은 모습을 전혀 미화하지 않은 채 그렸기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신화 속의 누드, 이상화된 누드가 아니라 그냥 회화로서의 누드를 그렸고 그에 따라 회화는 신화나 종교적 담론의 기능에서 해방되었으며 지배계급의 지위와 욕망, 그들의 관음증을 제공하는 차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배경의 깊이는 차단되어 있고 인체 묘사 역시 납작하게 칠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회화란 평면의 캔버스에 물감으로 이루어진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구전통회화가 추구해온 원근법과 눈속임을 기반으로 한 회화의 역사에 이의제기를 한 최초의 작품에 해당한다. 비로소 현대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1월20일 국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연대’가 주최한 ‘곧, BYE’전이 열렸다.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을 등장시킨 이구영의 작품 ‘더러운 잠’이 새누리당과 보수단체에 의해 격렬한 비판을 받고 결국 전시 중에 무자비하게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새누리당은 “풍자를 가장한 인격모독과 질 낮은 성희롱이 난무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인격살인 행위에 다름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이 전시를 주선한 표창훈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한 정치인은 “대통령을 소재로 한 여성비하”이며 “성폭력 수준”이라고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표 의원에게 당직 정지 6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정작 이 일에 대해 미술계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미술작품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평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42년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이 현재 이곳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의아했고 외설, 예술의 논의가 오래전 종결된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오늘날 올랭피아는 모든 서양미술사 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화가 되었고, 현대미술을 태동시킨 중요 작품으로 인정된 지 오래다. 그리고 올랭피아를 통한 풍자와 패러디는 흔해 빠졌다. 더러운 잠과 같은 유형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무수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을 두고 성폭력, 여성혐오, 국격을 훼손한 작품이라는 등의 궤변으로 폄하하는 이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에 놀랐고 더구나 민주와 진보를 표방한다는 더불어민주당 역시 표 의원에게 6개월의 당직 정지를 내렸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정치인들의 이런 저급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인식이 우리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미술전문가가 배제된 상태에서 미술이 논의되고 재단되는 이 희한한 상황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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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잘 모른다. 내 기억력이 유독 허약해서였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가 다섯 살 무렵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아도 생판 모르는 남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었을 거라는 짐작이 짐작으로 그치지 않고 확고한 이미지로 내 가슴에 남은 이유는 작은할아버지 때문이었다.

다른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누가 형제 아니라고 할까봐 부러 유세라도 하듯 답답할 만큼 무던한 성격이며 잔입이라고는 모르는 과묵함 등이 판박이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말에 익숙해진 터라 아직 살아 계신 작은할아버지에게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찾아내려 했을 테고 부지불식간에 할아버지를 보듯 작은할아버지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중학생 시절까지 내가 지켜본 작은할아버지는 측은하기 짝이 없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여기게 된 이유는 작은할머니 때문이었다. 작은할머니는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근동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뜨르르한 욕쟁이였다. 첫닭이 울고 나면 작은할머니의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는 하루 종일 내가 어디에 있든 환청처럼 들려왔으며 밤이 이슥해져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작은할머니의 삿대질과 바가지 욕설을 누군들 피해갈 수 있었으랴만 하물며 매일처럼 밥상에 마주 앉아야 했던 작은할아버지가 어떠했을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작은할아버지는 가히 성불에 가까울 만큼 초연했는데 어쩌면 작은할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작은할머니의 부아를 돋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되도록 작은할머니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척만 들려도 도망가거나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뒤로는 일가붙이 가운데 가장 큰 어른이 작은할아버지와 작은할머니 내외였던지라 시늉일지언정 어려운 어른 대하듯 조심스러워서가 아니라 기가 막히게도 야단칠 꼬투리를 잡아내는 작은할머니가 무섭고 지긋지긋해서였다. 언젠가는 머리에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갔다가 작은할머니의 부지깽이에 호되게 얻어맞기도 했던 터라 일가 어른만 아니었다면 나 역시 동네의 다른 아이들처럼 등 뒤에서 주먹감자를 날리는 졸렬하고도 통쾌한 짓을 서슴지 않았을 거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더위 먹어 골골대는 작은할아버지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보건소에 다녀와야 했다. 무엇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무척 귀찮고 짜증이 났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좁다란 신작로에서 마주 오는 차를 비켜 가다 논두렁에 처박힐 뻔한 위태로운 순간을 겪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뙤약볕을 맞으며 먼 길을 갔고 링거 주사를 맞으며 잠든 작은할아버지를 두 시간 동안 지켜보다 다시 오토바이에 태워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기진맥진해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해질 무렵이었다. 자박자박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작은할머니였다. 보건소 댕겨오느라 욕봤다. 아나, 아이스께끼 사 먹어라. 꼬깃꼬깃 접힌 지폐가 내 앞에 툭 떨어졌다. 펴보니 삼천원이었다. 부라보콘을 열다섯개나 까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세뱃돈으로 오백원짜리 동전 한 번 준 적 없던 당신이었는데 말이다.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작은할머니는 마을 근처 솔밭에서 솔가리를 긁다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문상객으로 북적이던 작은집에서 시중을 들다 아랫방 문을 벌컥 열었던 나는 어두운 방에 홀로 앉은 작은할아버지를 보았고 그 순간 무언가가 내 가슴을 슬쩍 베고 사라졌다.

이듬해에는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냥 허깨비처럼 살다 가셨다. 그 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내 가슴을 슬쩍 베고 사라졌던, 내가 방문을 열었을 때 그 안으로 스며든 빛낱이 작은할아버지의 눈물에 닿아 번득였을 그 날카로운 그리움에 머물러야 했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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