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주변이 없어 사람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터라 나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부러웠다. 그런 이들을 흉내도 내보았지만 그이들의 재미난 이야기도 내가 옮겨 하면 별 재미가 없는 듯했고 외려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져 난처해진 경우가 더 많았다. 대체 말 잘하는 이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겨우 찾아낸 게 하나 있다. 이게 정말 비결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말 잘하는 이들은 대체로 남의 말에도 귀를 잘 기울였다.

이문구 선생은 어느 산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낙향해 살던 선생은 어느 날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갔다가 맘에 쏙 드는 생선을 보았으나 혼자서 사 먹기에는 분에 넘치는 반찬거리인지라 값을 물을 엄두도 내지 못한채 머뭇거렸다. 한 노부인이 생선장수 함지박 앞에 서더니 다짜고짜 넙치를 손에 들고 “월매나 헌댜?”라고 물었다. 생선장수는 만원은 받아야 하지만 마수걸이니 팔천원만 달라고 했다. 노부인은 넙치를 던지듯이 놓으면서 “팔천원이라구 이름 붙였남” 하고 불퉁거렸다. 그때부터 생선장수와 노부인 사이에 흥정이 시작되는 거였다.

소설가 한창훈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고추를 좀 사기 위해 여수항 근처를 기웃거리던 그는 때깔 좋은 고추를 늘어놓은 노점상을 발견하곤 주인사내에게 얼마냐고 물었다. 그해 고추 작황이 좋지 않아 웬만하지는 않으리라 짐작은 했으나 듣기에 귀가 아플 만큼 비쌌던지라 그도 고추값이 뭐 이리 비싸냐고 투덜댔다. 그 말에 주인사내는 기분이 좋다 나쁘다 식의 말 대신 “그러게 말이오, 사람 고추값은 싸디 싼디”라고 하는 거였다. 주인사내의 신세한탄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고추를 두어 근쯤 팔아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인정일 테다.

그 소설가들의 문장이 일상에서 길어올린 평범한 언어임에도 싱싱하고 눈부실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이들이 남의 말에 무심하기는커녕 외려 사소한 한마디에 담긴 진정을 헤아릴 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말 잘하는 이들은 그냥 말을 잘하는 이들이 아니라 분주하고 각다분한 일상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일 줄 아는 이들이려니 싶은 것이다. 그에 비견할 만한 나만의 언어와 문장이 없다는 건 곧 내가 그이들만큼 남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탓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럼에도 늘 이처럼 새해 벽두가 되어 올해를 어찌 살아갈지 생각하다보면 나를 사로잡았던 지난날의 한 풍경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여름이었다. 가망도 없는 소설을 계속 써야 할지 아니면 다른 학생들을 본받아 취업준비를 해야 할지 작정하지 못했던 나는 고향집 대문을 나서는 것으로 도보여행을 떠났다.

더러 가스 배달차며 우유 배달차며 지나가는 승용차도 얻어 타면서 일정을 맞췄는데 해남에서 강진으로 건너갈 때는 버스를 탔다. 승객이라곤 나 말고 강진읍내로 가는 아낙 두엇뿐인 버스가 어느 정류장에 섰다. 버스 기사가 뒤돌아보며 마을 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오고 있으니 기다려도 되겠냐기에 다들 그러자고 했다. 마을은 정류장에서 이삼백 미터쯤 안쪽으로 쑥 들어간 곳이었고 거기에서 허리가 심하게 굽은 노부인 한 분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노부인은 좀처럼 버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지 못했고 오 분쯤 지난 뒤에야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노부인은 두 팔을 단거리 선수처럼 앞뒤로 흔들기는 했으나 두 다리는 아주 느릿느릿 떼었던 거다. 멀리서 보기에는 마구 달려오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오 분이 지나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오른 노부인은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잠시나마 마음속에 짜증이 치솟기도 했던 스스로가 열없어서 나야말로 그이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두 팔을 힘차게 흔들던 그이가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사람과 세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를 매번 일깨워줄 것임을 알아서였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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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을 더 먹었다. 나이를 의식하고 사는 편은 아니라 큰 감흥은 없지만, 친구들과의 대화를 생각해 보면 노화를 자각하게 된다. 음악을 비롯한 온갖 풍류를 소재로 밤을 지새우던 이들과 하는 이야기의 주된 주제가 어느새 건강이 됐다.

최신 음악의 동향을 논하던 때엔 알지도 못했던, 간수치와 혈당, 혈압 같은 것들이 등장하고 또한 모두가 알아듣는다. 주거 환경, 즉 부동산에 대한 근심도 빼놓을 수 없다. 어디가 얼마 올랐다더라류의 화제면 얼마나 좋겠냐만 현실은 그래도 거긴 싸다더라류가 전부다. 벌어 놓은 건 없고 생물학적 노화는 시작된 이들의 술자리다. 술마저 끊은 친구들을 보면 세월이란 영원할 것 같던, 남다른 청춘도 풍화시킴을 새삼 깨닫곤 한다. 육체가 풍화하는 대신 연륜이라든가 식견 등이 쌓이면 괜찮을 텐데, 알다시피 잘 늙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지간하면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관찰해온 바, 꼰대로 가는 으뜸의 징후가 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느 술자리에서 있던 일. 그렇잖아도 원래 제 말만 하기로 유명한 인물이 오랜만에 동석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필드의 지배자라도 된 것처럼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하루 이틀 그런 모습을 본 게 아니다. 우리도 대처 요령이 생겼다. 남이 말하는 동안 손을 내민다든가, “그러니까~” “내가 있잖아~” 등의 문장이 등장할 때 과감히 무시하고 하던 말을 계속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말을 끝내면 잽싸게 다른 사람이 받는다. 마치 스페인 축구팀의 티키타카 전술처럼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대화 점유를 내주지 않자 그는 파할 때까지 안절부절못하며 온몸을 비틀었다. 주변에 그런 캐릭터가 그 한 명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패스를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고 오로지 ‘뻥축구’만 하는 선수들이 많아지면 경기가 재미있을 리가 없다.

태아가 외부와 소통하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수단은 듣기다. 태아는 달팽이관이 형성되는 4개월 반이 되기 전부터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양수의 진동을 통해서 말이다. 자궁에 빛이 없으므로 10개월 내내 보지 못한다. 탯줄로 영양을 공급받기에 먹지 못한다. 태아가 만질 수 있는 건 고작 태반의 벽일 뿐이다. 오직 듣는다.

그래서 옛 인디언 임신부들은 끊임없이 자연의 소리를 태아에게 들려주고 인디언의 이야기를 노랫가락으로 불러줬다. 소리로 상상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렇게 10개월 내내 소리로 태교를 받은 인디언 아이는 태어나서도 칭얼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듣는 걸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너무 빨리 청각에 민감해진 탓일까. 가장 빨리 보수화가 되는 감각도 청각인 듯하다. 대부분 20대가 지나면 새로운 음악에 귀를 열지 않는다. 능동적으로 음악을 찾아 듣지 않고 들리는 음악만 듣는다. 혹은 그때까지 들었던 음악만 평생 들으며 산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보위가 특별했던 이유는 일생에 걸쳐 새로운 해석과 시도로 무장한 신예들을 발굴하고 자기 음악에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과거의 거장이 아닌 동시대에 머물 수 있던 이유이리라.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학생부터 로타리클럽까지, 각계각층을 상대로 강연을 하며 전국을 누비는 친구가 있다. 그는 미리 강연 장소에 가곤 한다. 화장실이나 로비 등에 앉아 그들의 언어 습관을 캐치하여 강연 내용에 녹인다. 그러면 청중의 집중도뿐 아니라 자기 말의 밀도도 높아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자기 말도 잘한다.

나이를 먹으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금언이 있다. 끝없는 불황의 시대, 나이를 먹었다고 지갑이 두툼해지는 건 옛말이다. 그러니 귀라도 열자. 귀가 닫혀 있어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 유형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이름 박근혜. 두렵지 않은가? 그러니 출생연도가 e메일 주소에 붙어 있는 게 스트레스가 될 무렵의 사람들은 더더욱 잘 듣는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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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농단에서 비롯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촛불에서 횃불로 옮겨붙었다. 부문별, 계열별 전문가 집단이나 협회, 단체들의 자잘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대한민국의 기틀을 혁신하려는 이 도도한 흐름은 국민·시민 주체가 만들어내는 촛불공론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이나 시민이라 불리는 주체들이 단일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따로따로 존재하지만 서로 강고하게 연대한 개별주체들이다. 이렇듯 파편화한 개인들을 엮어주는 공론장은 소셜미디어로 무장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일궈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거대한 퍼포먼스와 섬세한 몸짓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내는 시민운동가와 문화예술인들의 역할도 매우 크다.

탄핵안 가결 이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변혁의 에너지를 지켜내는 일은 100만 촛불의 몫으로만 남겨진 것은 아니다. 그 힘을 연결해주는 매개자들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업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한겨울 추위가 강해질수록 현장을 지키는 문화예술인들의 강단있는 활동이 도드라져 보인다. 단 한 명의 입건 사례 없이 평화롭게 이어온 촛불집회는 공연을 매개로 한 정서적 공감의 장이다. 그것은 장르와 세대를 넘어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게 만드는 예술의 역할을 재확인시켜준다. 민중가요와 대중가요가 공존하는 촛불문화제는 투쟁의 장을 축제의 장으로 확장시켜 놓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12일 서울 대치동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사무실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과 관련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특검에 고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여기에 더해서 시각예술가들의 다양한 표현물들이 집회장을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텍스트 작업은 물론 걸개그림과 포스터, 깃발, 퍼포먼스, 스티커,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풍자와 비판정신 가득한 작품들로 광화문광장을 예술의 거리로 만들고 있다. 100만의 촛불파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여서 예술적 이벤트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광장의 갤러리 ‘궁핍현대미술광장’을 열고 개관전 ‘내가 왜’를 시작했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공론장을 기록하고 그것을 재해석하고 확산하는 예술적 소통공간이다.

이제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마음은 국가위기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넘어 이성적인 합의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 일의 초기부터 광장에 자리 잡고 광화문텐트촌을 꾸리고 있는 예술인들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집회 현장의 공연 및 전시 프로그램을 통하여 광장의 에너지를 집결하는 한편, 그 너머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문화예술 개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론 보도가 아무래도 비리의 폭로에 주력하느라 차분한 성찰과 대안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들의 광장토론은 성숙한 시민사회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이번 국정농단 사건이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과 사업 분야에 집중해 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인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예술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돌았다. 민관협치 개념으로 출범했던 예술위원회는 오작동을 연발했다. 공공기관의 인사 문제 또한 무방비로 농단의 무대로 전락했으며, 문화융성의 이름으로 깨알 같은 사익편취가 만발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는 동안 문체부의 행정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행정적 과실 유무 여부를 떠나서 공직자 윤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참담하기 그지없으니, 이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도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시 논의할 때가 왔다.

국가단위 행정을 지자체단위 행정으로 세분화·지역화하고, 아카데미와 시장과 행정이 주도하는 제도예술과 그 바깥 비제도예술의 공존과 균형을 맞추며, 예술위원회를 되살려 민관협치를 복원하고, 기관장 인선 관련 전문성 강화 및 국정농단의 비리 관련 부역행위에 관한 행정적·윤리적 책임을 묻는 일 등 무수한 사안들이 있다. 나아가 국정 전반에서 문화예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재구조화 논의가 절실하다.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최순실은 현 정권의 비선 실세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도처에 똬리 틀고 있는 모순덩어리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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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에 거친 바람이 매섭게 몰려다닌다. 몸을 피할 곳이 없어 나는 저 바람을 고스란히, 죄다 받아냈다. 비교적 이른 아침이고 인적이 없는 경주 황룡사 폐사지에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갑자기 현실로부터 이격되어 이곳에 던져진 느낌이다. 그저 남은 것이라곤 땅에 박힌 몇 개의 둥글고 납작한 돌뿐이거나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그 거대한 돌들, 한때는 구체적인 형상을 지녔다가 지금은 모조리 마모되고 문드러져 버린 최후의 흔적만을 겨우 거느린 파편들이 드센 바람과 추위 속에 완강하게 박혀 있다. 아득한 시간의 입김 아래 무너진 돌은 거의 땅과 하나가 되어 가라앉아 있다. 모든 것은 결국 이렇게 수평의 존재가 되어 지워질 것이다. 이곳은 그렇게 지워져 버린 것들, 비어 버린 것들로 채워진 역설의 공간이다. 텅 빈 자리를 대신해 바람소리와 지난 자취들이 환영처럼 몰려다닌다. 이 자리에서 지난 시간을 악착스레 기억하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와 생의 욕망을 위무하고 그들 하나하나의 존재에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곳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이 점이 지금 살아있는 존재를 흔드는 마력인가 보다.

저쪽으로 황룡사 복원연구소인가 하는 건물이 거창하게 자리하고 있다. 조악하고 괴이하다. 앞으로 이 자리에 황룡사를 복원할 예정이라고도 한다. 과연 그런 황룡사는 어떤 황룡사일까? 왜 이 빈자리, 소멸의 자리, 텅 빈 공간 그 자체를 남겨두지 않으려 할까? 산 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볼 수 없는 것을 통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헤아리고 부재와 소멸을 기억하고 앞서 간 모든 이들을 애도하는 자리를 남겨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황룡사 절터와 그 앞에 위치한 분황사, 저쪽으로 보이는 첨성대 그리고 계림과 양동마을 등을 둘러보는 짧은 경주의 일정이었다. 경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이곳은 죽은 이와 산 자들이 공존하는 공간이고 옛사람들의 유물과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의 삶의 힘들이 공모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자리는 형편없이 사라지거나 끔찍하게 각색되어 버렸다. 도시 전체가 전통의 키치화로 포장되거나 조악한 사물들로 대체되고 있다. 이상하고 조잡한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는 경주는 진정한 애도의 흔적을 만나려는 이들을 억압한다.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폐사지와 흩어진 돌무더기, 마모된 석불, 곳곳에 융기된 큰 무덤과 오래된 나무만으로도 경주는 여전히 경주다. 특히 나는 계림 안에서 크고 둥근 무덤과 느티나무를 보았다. 단단하고 차가운 피부로 응축된 나무는 길고 혹독한 겨울추위를 견딜 최소한의 신체성으로 직립하고 있었다. 그 단호한 나무의 물성과 색채는 처연하고 신비로웠다. 언어와 문자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색채,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색상을 몸에 감은 나무들 사이로 벅차게 부풀어 오르는 무덤들은 수평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던 이들의 간절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항거와 불멸에 대한 기원이 들러붙어 이룬 무덤의 곡선이 태양을 향해 이룬 수직의 나무들과 공존하는 계림은 죽음과 삶, 부재와 영원이 길항하는 공간이다. 동에서 터 오는 태양빛을 가장 먼저, 충만하게 받아내는 이 계림은 죽은 이가 영생을 도모하는 공간적 연출이자 영원한 생명의 순환을 몸소 겪어내는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장소성을 제공한다.

경주에 머문 반나절의 여정은 소멸과 부재, 죽은 이들의 빈자리를 둘러보는 일이었다. 유적지를 다니는 일이나 예술작품을 보는 일도 그렇고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들을 응시하는 일도 결국은 무엇인가를 애도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애도란 단지 죽은 이를 추억하고 기념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삶을 반성하고 지금의 삶에 구멍을 내는 일이기도 하다. 나를 있게 한 기원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일이자 신비하면서도 덧없는 조건인 삶을 헤아리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살아남은 자의 소명은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곳에서 선인들의 자취를 헤아리고 그들의 삶을 떠올리고 부재의 자리를 들춰낸다.

문화와 예술은 그 애도를 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애도의 의미와 의례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사라진 이들과 남은 이들에 대한 애도가 절실한 때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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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이면 고드름을 씹어 먹던 열두어 살 무렵의 내가 떠오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윗방을 쓰고 내가 아랫방을 쓰던 시절이었으니 그 무렵이 맞을 것이다. 그날 정확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화를 낼 만한 짓을 해서 야단을 맞았고 저녁밥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다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얻어맞았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내 방으로 쓰던 아랫방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아 달아오른 얼굴이나 식혀보려 마당에 나섰다. 어두운 마당을 서성거리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을 보았다. 꽝꽝 얼었으나 손으로 비틀면 마른 명태처럼 쩍쩍 소리를 내며 구부러졌다. 소매 끝에 매달린 작은 고드름을 툭 떼어내 어둠 속으로 던지면 얼어붙은 마당 위를 구르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빨랫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옷가지들에 매달린 고드름을 전부 따 어둠 속으로 던졌다. 그중 몇 개는 입에 넣고 씹어 먹기도 했다.

딱딱하게 굳은 옷가지들의 근육을 풀어주듯 구부리고 문지른 뒤 한결 부드러워진 거기에 얼굴을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새물 냄새가 나던 그 옷가지에는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체취도 조금쯤은 남아 있는 듯했다. 머리끝까지 솟았던 열기가 사라지자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늬 아버지가 너 미워서 그런 게 아녀. 소리 없이 마당가에 섰던 어머니는 마치 내 물음에 답해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말을 툭 내던진 뒤 한밤중에 당신이 늘 하던 일, 아궁이에서 불이 뻗쳐 나오지는 않았는지,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이 얼어 죽지는 않았는지 등을 살피고 뒷간에 들렀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물론 어머니의 그 말에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면 거짓일 테다. 미워서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이런 반발이 왜 생기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얼마 전 촛불집회에서 아내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나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젊은 시인·소설가 137인 선언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당해 재판을 받았다. 그때 아내는 지금의 딸아이를 임신 중이어서 몸과 마음이 힘든 상태였다. 아내는 그때 나를 껴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듣자 순식간에 삼십여년 저쪽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어머니는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싶었는지 잘 알았다. 억울했던 나는 당장에는 그 말을 귀에 담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에서 위안을 찾았을 테고 겨울날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걸린 채로 낮과 밤을 보내다 어느 결에 다 말라 곱게 개켜 옷장 속에 들어가게 되듯 나의 상심도 스르르 녹아 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가 직접 그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버지야 워낙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치고 어머니마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오래도록 속을 끓였을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노라고. 나는 상처받지 않았노라고. 그런데도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주어 고맙다고.

대체로 우리는 우리가 했던 일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보다 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더 많다. 실수로 그랬든, 고의적으로 그랬든 이미 저질러진 일이 두 사람의 관계를 영영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악화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지 않은 일 탓에 그렇게 될 수는 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한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박근혜와 그의 정부는 그들이 했던 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지 않은 일, 아마 그들이 앞으로도 결코 할 생각이 없는 일, 바로 그 일 탓에 국민과 영영 화해 불가능한 상태에서 망각의 늪에 고이 모셔질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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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과 관광을 포함해서 소위 문화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몇몇 사람들의 작당으로 좌우된 정황들이 드러나 전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 정국과 맞물려 예술계 안팎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건설하거나 회복하는 일과 같은 맥락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국정농단의 주요 대상으로서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문화는 국정철학의 부재와 정책기조의 결핍 속에서 완벽하게 유린당했다. 차관에서부터 실국장, 과장에 이르기까지 행정관료 조직의 골간이 흔들린 상태에서 무방비로 당했다. 대통령의 거취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치와 행정의 오작동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의 일단이 제주도와 서울 성북구에 있다.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중심과 변방으로서의 서울과 제주를 집약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옛말일 뿐이다. ‘사람도 말도 제주로.’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사회 및 환경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제주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가운데 가장 뜨거운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제주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녀오고 싶다’에서 ‘살아보고 싶다’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제주도의 정책은 관광 일방주의에서 탈피해 관광과 주거의 두 축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다. 다녀가는 여행지에서 머물러 살고 싶은 거주지로 확장하고 있는 제주도는 도민의 문화향유권 신장을 위해 ‘문화예술의 섬’을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원희룡 도정의 핵심 정책으로 자리 잡으면서 3%에 근접하는 문화예산 수립을 목전에 두고 있다.

제주도의 문화정치는 ‘문화예술의 섬’이라는 정책의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예산배치와 더불어 민간의 공론을 행정에 반영하는 민관협치에 의해 작동한다. 그것은 문화국과 문화재단, 박물관, 미술관 등의 행정조직이 정책수립과 실행과정에서 제주도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의 대리보충 역할과 만나는 구조다. 도지사와 함께 김수열 시인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예술위는 도정 전반의 문화정책을 다루는데, 단기 현안들은 물론 중장기 현안에 대해서도 심의 의결하는 기능을 가짐으로써 ‘제주문화정책의 주류화’를 위해 민간과 관료의 협치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 성북구는 스물다섯개의 서울 자치구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김영배 구청장은 민관협치의 관점으로 마을 만들기와 협동조합, 청년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지방자치구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생활정치로 주목받고 있다. 성북문화재단은 정릉, 성북동, 미아리고개 등의 거점 공간에 예술마을 만들기를 추진하면서, 인문학, 역사문화, 생활문화의 3대 축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재단의 김종휘 대표는 홍대 앞 인디레이블 실험과 노리단 등을 주도했던 경험을 살려 성북구 전반의 문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성북구를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문체부는 탐욕스러운 통치자의 그물망에 포획된 후 스스로 국정농단의 한가운데 들어서 버렸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행정조직으로 낙인찍혀 이제는 문체부 해체 주장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문체부는 처절한 자기반성과 더불어 강도 높은 개혁의 과제를 안고 있다. 가장 큰 과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민관협치 구조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행정조직과 협의하여 민간의 소통능력을 배가하는 자문기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예술위를 되돌려놔야 한다. 그것이 비선 실세의 음험한 농단으로부터 벗어나 행정과 민간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집단지성의 묘미를 살리는 지름길이다.

서울에는 성북이 있고, 대한민국에는 제주가 있다. 제주도와 성북구의 문화정치는 행정과 민간 간의 소통 가능성을 넓히는 협치의 문화정치다. 민간의 참여와 협업을 중요시하는 제주도의 예술위는 무늬만 위원회가 아니다. 문화를 도정 전면에 내세운 만큼 문화 관련 정책과제의 발굴과 토론, 자문을 맡는 실질적인 정책자문기구로 작동하고 있다. 서울시 성북구의 문화정치는 마을과 청년 속에서 공동체예술과 행동하는 예술을 길러내는 사회예술로 이어진다. 혼돈의 와중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 문화정책 행정을 차분하게 돌아보고 행정의 오작동을 대리보충할 수 있는 기제로 민관협치에 주목해볼 일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 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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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의 갖가지 추문을 단박에 잠재운 강력한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이다. 이 사건은 미르와 K스포츠재단 등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간 박근혜 정권 아래 이루어진 모든 일과 맞물려있다. ‘문화융성’이란 모토 아래 추진된 여러 행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내지 문화예술 관련 기관장 선임이 최순실의 영향력 아래 이루어졌다.

그 무리들에 의해 온갖 비리가 저질러졌고 블랙리스트도 작성되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문화예술계의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하라는 등의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당시 정무장관이었던 조윤선 현 문체부 장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의심을 사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작성한 리스트란다. 2014년부터 2015년 1월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지원하지 말아야 할 문화예술계 인사와 단체들의 명단을 작성했고, 이 명단을 교육문화수석실을 거쳐 문체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내려 보내 지원사업 선정에 반영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옥죄고 탄압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방증하고 있다. 이미 이명박 정권 때부터 정부는 돈줄을 풀거나 조이는 방식으로 문화계를 길들여왔다. 자신들과 정치적 이념이 다르거나 비판적인 이들을 모조리 좌파로, 빨갱이로 몰아 뽑아내고는 전문성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선거캠프와 새누리당 출신 친정부 인사들을 기관장으로 내리꽂았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갖은 비리와 전횡을 일삼아 왔음도 익히 접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동일한 욕망으로 공동체를 이룬 무리이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 자본을 확장하고 대를 이어 보존하고자 하는 탐욕으로만 점철된 강고한 카르텔이다.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은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인물인 차은택의 스승이란 이유로 장관에 임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형태 전 국립박물관 문화재단 사장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에서 활동한 이였는데 최근 성추행과 인사전횡 등으로 해임됐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대통령 관심사항인 전시를 추진하지 않는다고 진즉에 파리 목숨이 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운영부를 관리하는 간부직엔 대선캠프에서 활약한 기업인이 추천한 인사가 낙하산 임용됐다는 설이 오래전부터 파다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국내 미술상황에 대해 거의 무지할 수밖에 없고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외국인 관장 뒤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로 인해 서울관의 위상이 추락하고 전시 내용이 부실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덕 전 장관이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에 응모해서 선별된 후보자를 선임하지 않고 미루다가 끝내 무산시키고 뜬금없이 낯선 외국인을 관장으로 선임한 배경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여타 미술관의 관장이나 문화재단 이사장 선임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윗선과 연결된 문체부 관리들이 주축이 돼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진보나 좌파적 성향이 있다고 여겨지는 인사들을 적극 소탕하고 내치는 한편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입맛에 맞는 인사를 조직적으로 앉혀왔다고 본다.

그렇게 기관의 장이 된 이들이 각종 행사에 나와서 문화융성에 대해, 문화예술의 창조성에 대해 온갖 수사로 지껄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공무원들은 그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주도해나갔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특정 예술인들을 속아내고 지원금을 차단하고, 직장에서 내쫓거나 검열을 일삼는가 하면 대통령 측근 인사를 심어주는 일을 충실히 집행한 대가로 승진하거나 해외 문화원 원장으로 영전돼 나갔다. 이게 우리나라 문화현실의 꼬락서니다. 이러한 문체부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본다. 괴벨스나 매카시, 박정희가 지배했던 그 시대를 아직도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참담하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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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마감일을 앞두고 한 편의 글을 써보려고 애쓰다 결국 쓰지 못한 일이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어떻게 써야 할까 고심하다 포기했고 글쓰기를 포기했다는 사실 탓에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사소해 보이는 이 문제가 내게는 퍽 중요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지 십오륙 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청탁받은 원고를 쓰지 못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감일을 넘기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되도록 마감일에 맞춰 송고하기 위해 애썼다. 때로는 마음에 흡족한 글일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지만 단번에 명문이나 명작을 쓰겠다는 야심은 없었으므로 끈질긴 글쓰기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쪽이었다. 그런 내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냈다.

마감일이 다가왔다는 재촉 문자를 받은 뒤부터 마감일이 지났으나 며칠 더 말미를 주겠다는 문자를 받게 된 날까지, 기어이 그 며칠의 말미를 넘길 때까지도 쓸 수 없었다. 다뤄야 할 소재가 주어진 원고였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학살이나 다름없는 백남기 농민 사건을 프리즘 삼아 국가폭력을 논하기로 한 시론(時論)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그때그때 일어나는 시사에 대한 평론이나 의론’인 시론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태, 그이의 죽음이라는 막대한 사태 앞에 속수무책이어서였다. 진정으로 그이가 살아 돌아오길 바랐기에 내가 맞닥뜨린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상상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그 현실을 다루는 글을 쓴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한 사람의 목숨조차 지켜낼 수 없는 글쓰기, 사후에 그 의미를 다루는 글쓰기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글쓰기 자체를 회의하게 되는 이런 순간을 처음으로 겪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수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놀라움을 느꼈고 여태까지 내가 써왔던 모든 글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 하나의 추문으로만 여겨졌던 대통령에 관한 소문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온 나라가 들끓게 되었다.

지난 주말 아내와 더불어 세 살배기 딸을 유모차에 태워 광화문으로 나갔다.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라서 더는 글 뒤에 숨을 명분도 없었으므로 한 목소리나 보태자는 심산이었다. 백만의 인파가 몰려든 그곳에서 뜻밖에도 수많은 글들과 마주쳤다. 박근혜 하야,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너 없이 더 잘산다, 민주주의 파괴자 박근혜를 우주로, 우주가 무슨 죄냐…. 이 단순하고 명쾌한 문장들이 어떤 명문장보다 절실하게 다가온 이유는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여서만은 아니었으리라. 현실이 아무리 압도적일지라도 인간의 희망을 짓밟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현실은 없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글 앞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왜 구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내가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던 글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위는 어두웠으나 그날 거리에는 어둠이 내려앉지 못했다. 우리는 어깨 위에 머문 밤이 그 위에서 홀로 깊어가게 내버려두었다.

작가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 증오, 슬픔, 기쁨, 고통 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작가에게서 그가 무얼 확신하는가를 느끼는 대신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아파하는지를 느끼게 된다. 나는 그날 광화문 거리에서 보았다. 한 시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름다운 작가로 빚어내는지, 한두 사람이 아니라 100만을 1000만을 어떻게 아름다운 작가로 만드는지. 나도 거기에 편승하여 문장 하나를 지어보았다. 박근혜씨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오시죠. 흡족하지는 않으나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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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일원에서 사단법인 숲길(이사장 도법)이 주최하는 행사 ‘지리산프로젝트 2016: 우주여자’(10·22~11·20, 전북 남원 실상사 및 경남 하동 일대)가 열리고 있다. 필자가 예술감독으로 동참해온 이 프로젝트는 예술과 학술의 소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 지리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예술적 감성과 과학적 진리의 수준에서 접목하는 우주적 관점의 융합프로젝트다. 자연과 공동체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지리산둘레길 일원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답사와 토론, 캠핑, 퍼포먼스, 지리산 종주, 공연, 학술, 전시 프로그램을 열었다. 지리산 종주와 둘레길 걷기, 강연과 토론 등으로 배움의 시간을 가졌고, 기획전시와 학술심포지엄으로 그 뜻을 나눈다.

2014년 ‘우주예술집’, 2015년 ‘우주산책’에 이은 세 번째 지리산프로젝트의 주제는 ‘우주여자’다. 이번 행사는 남성-자본 중심의 현대사회가 인간과 자연에 가하는 모든 종류의 지배, 억압과 착취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동시에 인간해방의 차원에서 자연의 섭리와 생태 질서를 돌아보는 자리다. 남원 실상사와 하동 둘레길 일원에서의 전시행사와 더불어, 현재 진행 중인 여성담론의 쟁점들을 살펴보는 학술심포지엄 ‘다시, 여성주의와 예술’(경남도립미술관, 11·4)이 열린다. 여성주의 연구자 및 활동가들이 ‘현실 운용 원리로서의 여성혐오-남성공포에서 통감과 분노의 정치학으로’(윤지영),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운동’(정필주), ‘지리산의 여성주의 예술활동’(이유진) 등의 주제로 발제하고 토론한다.

지리산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 그것은 생명과 포용, 자비, 해방을 뜻한다. 그러나 지리산에 덧붙는 ‘어머니’는 여성에게 희생과 순종을 강요한다는 면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 지리산’ 담론에 대한 예찬 수준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차별과 억압의 기제를 걷어내고, 자유와 평화, 공존, 공유 등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대를 모색할 일이다.

특히 지리산에 사는 여성들의 생활 속 여성주의 운동은 매우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메갈 논쟁’이라는 혐오의 정치학이 남긴 것은 상처만이 아니었다. 여성주의 의제들이 미해결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데 주목하고 메갈 논쟁의 경과와 함의를 돌아봐야 한다.

이렇듯 지리산의 가치를 우주적 관점에서 성찰하고자 하는 지리산프로젝트가 현 시국과 맞물려 묘하게 읽히고 있다. 정권의 스캔들과 얽혀들어 ‘우주’와 ‘여자’라는 단어가 오해를 받고 있다. 억울하고 못마땅한 일이다. ‘우주’를 그렇게 쉽사리 오염된 단어로 치부하기에는, 인류가 갈망해온 천문우주에 관한 경이로운 세계가 너무나도 넓고 크다. 게다가 지금껏 남자들이 저질러온 죄악이 훨씬 더 극심한데도, ‘여자’라는 단어를 조롱과 멸시의 뜻을 담아 사용하는 데에는 공감할 수 없다. 자신이 싫어하는 누군가가 우주를 언급했다고 해서 우주라는 개념을 폄하할 이유가 없고, ‘여자(들)’ 운운하며 양성평등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더욱 한심한 일은 ‘무당정치’라는 말을 동원해, 최근의 국정혼란 상황에 대한 비판을 샤머니즘에 대한 공격으로 돌리는 반문화적 태도다. 민속학 전공자인 주강현 박사는 최근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다음과 같이 무당정치 담론을 언급했다. “무당정치라는 말보다 그냥 신정정치라 명명하고 쓰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굳이 복잡하게 말한다면 기독교 영생에 기반을 둔 무속기독교융합과 삼류정치권력의 권력독점 야망이 결합되고, 자본의 부패와 관료 전문가 사회의 침묵과 동조가 빚어낸 퇴행적 신정정치다.” 우주적 존재론과 여성주의, 샤머니즘에 관한 재인식이 없는 한 우리는 퇴행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뿌리에 자리 잡은 정신문화이기 때문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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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할 때 아내가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소설가들은 이혼도 밥 먹듯이 한다던데 그 사람과 결혼해서 잘살 수 있겠냐는 식의 충고들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을 때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소설가에 대한 그런 식의 오해가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소설가라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오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설가에 대한 이 뿌리 깊은 편견은 내게 소중하지 않다. 내게 소중한 건 그런 편견들이 버젓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소설가인 나를 이해해주려는 시선이다. 이를테면 결혼을 앞두었을 때 처가 식구들이 아내와 나의 결혼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내 나이가 마흔에 가까움에도 전 재산이 몇천만원밖에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도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 사실이니까. 그런 정당한 반대 사유가 있었음에도 내가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금의 장인어른 말씀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 장인어른은 다른 식구들을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소설가다. 소설가가 돈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으냐. 내게 소중한 건 바로 이거다. 서로 다르고 어쩌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고유한 장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장인어른과 나는 세계관이 무척 다르다. 장인어른은 새누리당 지지자다. 그 탓에 사위들과 모인 자리에서 조금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동서 중에 맏형님이 대표가 되어 장인어른과 말씨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다툼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해도 알지 못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결코 용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듯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차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 단순하기 짝이 없고 순결한 노력 하나뿐이다.

소설에 관한 정의야 다양하겠지만 인물에 한정 지어 말하자면 현실 세계에서 이해 불가한 인물을 이해 가능한 인물로 제시하는 게 소설이다. 그래서 소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고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상을 이해의 여지가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소설의 인물은 실재 인물과는 다른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재 인물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인물일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가들이 현실의 어떤 인물보다 실재에 가까운 인물,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어떤 가능성을 지녔는지를 소설에서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인물을 소설의 인물로 고려하지 않는 이유는 그 인물이 너무나 불가해하기에 소설에서 이해 가능한 인물로 묘사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외려 그 인물이 너무나 뻔해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 인간의 가장 탐욕스러운 부분을 상징하기에 소설로 그린다면 한심한 유형적인 인물이 될 것이기에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삼류 소설 중에 전형적인 악당의 유형으로 묘사되어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리하여 감히 장담하건대 동시대의 소설가뿐만 아니라 내 후대의 소설가들 중에도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인물을 모델로 삼아 소설의 인물로 제시하는 경우란 없을 것이다. 요컨대 고뇌하는 인물만이 소설의 인물이 될 수 있다. 고뇌하지 않는 인물은 현실 세계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하며(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집권 여당의 대표와 같은) 부유하게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소설의 인물은 될 수 없다. 어떤 소설가도 인간의 희망을 그런 인물에게서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혹여 소설의 인물이 못 되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까 봐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해준다면, 그건 곧 역사가 그대를 지워버릴 거라는 의미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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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낙원상가와 익선동 일대에서 문자와 빛의 축제가 열린다. 사단법인 세계문자연구소가 여는 문화예술축제 ‘세계문자심포지아 2016 : 행랑’(10·3~9)과 서울시 역사도심재생과의 프로젝트 ‘익선.낙원. 세운’(10·3~31)이 그것이다. ‘익선(益善)하면 낙원(樂園)이니, 행랑(行廊)에 세운(世運)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흥미롭다. ‘선을 쌓으면 낙원이 열리니, 세상의 행랑을 따라 좋은 기운이 가득 찬다’는 뜻이다. 낙원악기상가와 익선동은 서울 원도심의 문화공간 인사동과 맞붙어있어 최근 들어 시민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다. 문자 매개의 문화예술축제와 역사성을 살린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열려 생활공간 속의 축제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문자심포지아는 ‘행랑’을 주제로 골목골목마다 문자의 가치를 짓고 나누는 일을 한다. 한옥의 문 옆에서 안팎을 이어주는 열린 공간 ‘행랑’은 소통을 매개하는 확장지향의 언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전문상가인 낙원상가는 음악인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공간이다. 익선동은 ‘ㄱ, ㄴ, ㅁ’자 모양의 한옥들과 골목 사이로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익선.낙원. 세운’은 세운상가의 조명으로 낙원상가 하부를 밝힌다. 인사동과 익선동 사이의 도로 위에 세워진 낙원상가 건물 하부에서 열리는 빛의 축제다. 상가와 골목의 예술은 문자를 매개로 시민들의 감성적 소통을 촉매한다.

두 행사가 지향하는 바는 도시공간과 예술의 창조적인 결합이다. 그것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과 직결하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낙후된 공간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개발이나 재개발이 아닌 재생 개념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아래 수조원의 예산으로 전국 도처에서 도시재생사업이 한창이다. 이러한 재생사업에 예술이 결합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이른바 ‘문화적 도시재생’이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는 것만 봐도 예술과 재생사업의 결합의 당위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도시재생에 문화적 요소를 가미하자는 논의는 결국 도시재생에 예술가들의 노동을 장착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미 상당수의 예술가들이 전국의 도시재생사업에 참여하고 있고, 비평가들도 공공미술과 공동체예술, 사회(적)예술 등의 관점으로 이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예술과 재생사업의 결합은 예술의 사회화를 앞당긴다는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술이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제반 영역과 밀착해 있던 것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이후 예술의 자율성을 확립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회체제로부터의 이탈이 가져온 고립과 폐쇄의 상황은 예술노동의 소외를 불러왔다.

연간 소득 1000만원 미만의 대다수 예술가들에게 예술노동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환류할 수 없는 것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나마 작동하는 미술시장마저도 예술 본연의 정신적 가치보다는 미술투자라는 이름의 교환가치에 경도돼있으니 예술노동의 소외는 이미 구조적 모순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도 예술노동은 경직된 미술시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그것이 선순환의 얼개 속에서 잘 굴러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문화적 도시재생에서 정작 중요한 문화의 내용은 부재한 채 공허만 문화 타령만 오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토목과 건축의 몫으로 95% 이상의 예산을 쓰고, 나머지 일부 예산으로 문화를 담아 달라는 요구로 예술가들을 동원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관협치 차원의 구조변동이 필수적이다. 특히 마을 만들기 활동가들과 예술가들이 도시재생의 구상단계부터 진행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가하여 도시재생의 주체를 발견하고, 이들과 협력하여 도시재생의 내용과 방법을 만들고, 공동체적 가치에 따라 문화적 도시재생을 추진할 수 있도록 열린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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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광주비엔날레를 보고 왔다. 광주까지의 먼 여정과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전시를 둘러보았다. 문득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 광주를 오갔던 그간의 날들이 거칠게 스친다. 올해로 11회째인 광주비엔날레는 그간 2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광주비엔날레는 광주 화단, 나아가 한국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비엔날레를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국의 그 많은 미술인들에게 비엔날레는 또 무엇인가?

현재 한국에서는 무려 4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큰 예산이 소요되는 행사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다. 세계에서는 매년 약 100개의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고 또 그만큼의 아트페어가 열린다. 그것들을 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세계적인 비엔날레와 아트페어를 둘러보는 것이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능력(?)있는 자들만이 전 세계를 무대로 그 같은 행사를 보러 다닌다. 이른바 미술계의 귀족들이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경향과 담론, 전시유형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관람하는 일은 중요하고 필요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시들은 상당한 피로감을 준다. 현학적이고 난해한 주제와 글들, 비슷비슷한 작품들, 동일한 스타일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인상이며 그것들은 전 세계 미술계를 동일한 경향으로 지극히 납작하게, 평면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다.

알다시피 비엔날레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전시로서 문화 전반적으로 시급한 근본적인 이슈들을 다룬다. 특히 비엔날레는 1989년 무렵부터 시작된 ‘지정학적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동시대 미술’의 측면으로 부상했다. 마시밀리아 노조니의 지적처럼 오늘날 비엔날레는 새로운 지식의 ‘무역로(trade routes)’가 되고 있다. 분명 비엔날레는 ‘예술제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끊임없이 수정하며 동시대 미술에 대한 담론을 보다 탐구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으로 변화시키는 한편 복잡한 문화와 각기 다른 지역들에 대해 인식할 기회 또한 제공해준다. 동시대 미술계의 주체가 주로 동시대의 비엔날레 전시들이 제공하는 동시대성에 대한 경험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세계 미술 현장을 좀 더 다루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은 비엔날레에서 아트페어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주제는 ‘제8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이다. 제목부터 난해하다. 스웨덴 출신의 예술감독인 마리아 린드는 제8기후대를 “현실에 없는 예술만이 펼쳐내는 상상적 세계와 공간”이라고 정의하면서, “제8기후대는 이러한 작품이 개입하는 것, 중앙무대로 다가가는 바로 이 특정한 방식을 통해 미술을 위치시키는 것을 하나의 포부로 품고 있다. 이것은 기술 그 자체의 관련성에 대하여 재활성화하거나 가속화한 이해와 연관된 미래의 행위 주체성에 관한 발언”이라고 서문에 쓰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전시 역시 해당 주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감동을 주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을 찾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현재와 미래의 미술이란 무엇인가와 미술의 사회적 실천 기능을 찾아본다는 취지를 내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또 나아가 그에 대한 미술적 대안이나 비평적 초점을 작업을 통해 찾기도 쉽지 않았다고들 지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비엔날레는 왜 계속해야 하는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엔날레를 치르기 위해 투여하는 막대한 예산과 인력 등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비엔날레가 지닌 여러 장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보면서 매번 유사한 대규모 전시를 반복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행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무엇을 얻고, 무엇이 변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비엔날레는 거대한 제도가 되었고 그저 형식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열악한 광주 화단이나 변함없는 비엔날레관 주변의 스산하고 조악한 경관을 보면서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않는 비엔날레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비엔날레를 거듭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감각의 화석들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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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에 다녀와야 할 일이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의 탑승 게이트에 도착하니 탑승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단체로 여행을 떠나는지 대기실은 빈자리 하나 없었다. 이윽고 탑승 시간이 되어 선생님으로 보이는 인솔자들이 웃고 떠들고 셀카를 찍느라 바쁜 학생들을 불러 모아 줄을 세웠다. 나는 그 줄 맨 뒤에 붙어 섰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또 한 무리가 내 뒤로 줄을 서는 바람에 나는 꼼짝없이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인 셈이 되었다. 아이들을 단속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화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인 셈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이즈음의 내가 결코 들어본 적 없는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던 것은.

나는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걸어서 한 시간쯤 되는 곳이었고 중학교도 한 시간 반쯤은 족히 걸리는 곳이었다. 아침마다 정신이 없었다. 가방에 그날의 교과서며 공책이 제대로 들었는지 그 밖의 준비물을 빠트리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어머니가 차려 준 밥을 먹고 가방을 메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을 나설 때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당부를 챙겨 들어야 비로소 등굣길이 시작되었다.

해찰하지 말고 싸게 댕겨오거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가 내게 일러주었던 말은 해찰하지 말라는 거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어머니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부지게 대답도 했겠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 말을 흘려듣고, 외려 그 말을 아직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한 꾸지람쯤으로 이해해 아예 마음 놓고 해찰해도 된다는 식으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등굣길에서야 해찰하지 말라는 당부가 없더라도 해찰할 겨를도 없었겠지만 하굣길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 기억 속에 선연한데 어차피 일찍 돌아가 봐야 적막한 집에서 딱히 누릴 만한 즐거운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껏 한눈을 팔면서 한 시간 거리의 길을 두어 시간 길이로 늘려 걷곤 했다. 용이 승천하면서 지붕에 구멍이 뚫렸다는 폐가를 서성이고 샛강을 건너고 탄가루를 날리며 달리는 연탄 배달 트럭과 양조장의 막걸리 배달 아저씨가 모는 삼륜차를 뒤쫓으면서 길을 걷고 달리되 길이 아닌 곳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어 가야 했던 하굣길이야말로 지루한 학교생활에 대한 정당한 보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야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즐겼던 건 해찰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어겼다는 데서 오는 은밀한 기쁨, 이처럼 해찰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왜 아직까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걱정하며 일을 하다 말고 이마에 손그늘을 만들어 마을 초입의 신작로 쪽을 바라보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는 기쁨이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제 누가 내게 해찰하지 말라고 변함없이 다정하게 일러줄 것인가. 이런 상념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비행기 앞쪽 좌석에 앉아 있었고 학생들은 중간부터 뒤쪽까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승무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들어서 속력을 높였다. 차분한 긴장의 시간이 잠깐 흐른 뒤 비행기가 중력을 거슬러 사뿐하게 광활한 하늘로 뛰어오르자 아이들이 깊은숨을 토하듯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듣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순결한 감탄들이었다. 아마도 그날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부모로부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라는 잔소리를 들었을 그 아이들도 언젠가 무엇 때문에 그 순간이 그토록 행복했는지를 헤아리는 때가 오겠지. 해찰하지 말라는 당부를 이제는 결코 들을 수 없게 된, 할 수 없게 된 많은 이들이 느닷없이 숨죽여 울 수도 있다는 걸, 내가 왜 그 사소한 그리움을 되새기며 이런 글을 써야만 하는지도.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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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어린 시절에 ‘근대화 슈퍼’라는 간판을 단 상점을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당시 ‘근대화’는 ‘새마을’이라는 구호와도 짝을 이루는 국민적 과제로 제시되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를 거의 매일 방송과 야외 스피커를 통해 듣던 시절이었다. 이 노래의 2절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초가집을 허문 자리에 콘크리트 양옥의 ‘근대화 슈퍼’가 들어섰던 셈이다.

서양 클래식 음악, 특히 서양 오케스트라는 ‘근대화’에 대한 시청각적 모델을 구체화하여 제시했다. 그것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한목소리로 전진해 가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클래식 음악과 서양 관현악을 실제로 즐기느냐는 둘째 문제다. ‘근대화’에 대한 선망을 가진 이들에게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이상향을 묘사한 그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총체적인 계획(지휘자의 총보) 아래 개인에게 주어진 분업화된 업무들(단원들의 파트보)을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 그 어떤 예술적 풍경도 이보다 더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정교하게 창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탈산업화 사회에서 근대화의 스펙터클은 ‘근대화 슈퍼’ 시절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나 ‘국가’를 표상하는 일사불란한 오케스트라의 은유는 ‘완전 고용’에 가깝던 옛 시절에나 통했다. 멀게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의 붕괴부터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분업화된 업무는 무책임과 방관을 낳았고, 대의적 체계는 부패와 부도덕, 경제적 양극화를 확대 재생산해 왔을 뿐이다. 조화로운 합주를 만드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한국 사회를 표상할 수 있으리라고 이제 더는 믿기 어렵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에게 지휘봉을 선사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퍼포먼스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다른 정치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그 시대착오적 성격 때문이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더 이상 개인들의 조화로운 목소리를 이끌어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근대의 근대화’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제시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건설한 도시, 즉 ‘새마을’이 전통적 ‘마을’에 대한 부정이었다면, 그 ‘부정의 부정’으로서 ‘근대의 근대화’는 ‘마을의 재발견’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재발견된 ‘마을’은 혈연, 지연과 같은 연고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들의 자발적 공동체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다시 오케스트라의 은유로 돌아온다면,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전문 연주자들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마을 오케스트라’ 혹은 ‘공동체 오케스트라(community orchestra)’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은유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주의에 바탕을 둔 ‘대의 민주주의’로부터 지역에 바탕을 둔 ‘참여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구체화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2014년부터 3년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따르면, 성인 중심의 자생적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만 전국에서 395개 단체가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밖에 학교 오케스트라와 동문 오케스트라 등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까지 합산하면 무려 768개 단체에 이른다.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음악 양식이나 수단이 아니다. 기획과 연습, 연주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 합리적 소통 모델이 적용되는 사회나 공동체 그 자체다.

음악이 다가올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성격’을 갖는다는 자크 아탈리의 주장 역시 이런 맥락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번번이 ‘국론 통합’을 외치는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근대화 슈퍼’의 촌스러운 풍경이 겹쳐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1세기의 시민들은 이미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스스로 조화시켜가며 서로 다른 색깔의 공동체들을 만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지휘봉을 저 찬란한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위해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최유준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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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계를 뒤흔든 일련의 사건들이 개인의 윤리는 물론 집단 윤리의 부재와 결핍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법은 개인과 집단의 윤리를 최소한의 수준에서 합의하는 공공의 약속이다. 최근 미술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술시장 개혁과 미술진흥 관련 입법 논의가 일고 있다. 문체부가 추진하고 있는 미술품 유통 투명화 및 활성화 관련 법률과 미술진흥법 제정 논의가 그것이다. 이번 일은 이중섭, 박수근 등 근대 작가들을 비롯 천경자, 이우환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끊이지 않는 미술계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책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미술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술품 유통업 허가 및 등록제, 미술품 이력관리제, 미술품 감정사제도 및 미술품감정업 등록제, 화랑·경매·감정 겸업 금지, (가칭)국가미술품감정연구원 설립, 위작 유통 관련 범죄 처벌 명문화, 특별사법경찰제 도입 등의 구체적인 개혁입법안들이 논의 과정에 있다. 화랑과 경매, 감정 등 3개 영역의 주체들이 겹쳐 있는 것은 한국미술계의 문제점으로 꼽혀왔는데, 이 3각 연대체를 상호견제와 균형의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의지가 확고해 보인다. 미술시장 이해당사자들의 복잡한 구도가 얽혀 있어 입법화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자칫 시장 주체들을 개혁 대상으로 내몰아 역풍을 맞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 안팎의 합리적인 논의로 새로운 개혁의 주체를 세우는 데 뜻을 모을 시점이다.

미술진흥위원회와 한국미술재단 설립 조항을 둔 미술진흥법 논의에도 몇 가지 논쟁점이 있다. 하지만 일부 우려가 있다고 해서 입법 취지 자체를 낮게 평가할 일은 아니다. 이미 예술장르별로 진흥법 제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장르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중대 조치가 입법형태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서 차분하게 논의의 장을 열어 볼 일이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문화예술진흥법을 근거로 한 미술관 지원정책과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그리고 예술경영지원센터 사업이 상충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비해 꼼꼼한 상황 점검으로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 법안은 창작과 전시로 이뤄지는 표준계약서 및 아티스트 피 규정 등 다양한 지원과 규제 조항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거래되는 경우 그 이익의 일부를 저작권자에게 지급하는 작가보상금 제도 논의도 있다. 전시회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도 준비 중이다. 10년 전만 해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주느냐’며 볼멘소리하던 공무원들의 말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든다. 영화계나 공연계가 출연료로 예술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미술계에서도 출품료 개념을 정착해야 한다. 핵심은 한국미술진흥재단이다. 미술창작과 전시 및 유통, 미술문화 전반, 미술인력 양성, 미술은행 관리 등을 총괄하는 거대 기구가 탄생한다. 기존의 제도와 중복이나 상충하는 바가 없는지 현장의 의견을 들어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대목이다.

예술은 사회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규범이자 규칙이다. 따라서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본질과 현상을 담은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평이다. 예술비평은 예술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의식을 기반으로 가치의 문제를 논하는 공론의 장이다. 하지만 비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특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대목에서는 더 그렇다. 이런 경우의 문제해결을 위해 작동하는 제도가 바로 법률이다. 지금껏 개인의 윤리에 주목해서 특정 사안을 비판하기 바빴던 한국미술계로서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의 윤리를 재정립한다는 차원에서 미술개혁 입법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론을 모을 일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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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매미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러더니 날이 서늘해지고 바람이 분다. 지독한 여름 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지난여름은 몸이 힘들어 쉬는 날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올여름을 나기가 무척 힘이 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더운 날씨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정치소식이었다. 그것을 듣자면 울화가 치밀고 우울증이 마냥 심해지는 기분이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말을 듣기가 힘들었다. 소통되지 못하는 말들이 어지럽게 부유하고 내용 없는 말, 수사에 불과한 말, 억측과 궤변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달되고 증폭되고 다시 옮겨지는 방송과 신문의 행태도 놀랍기만 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 그리고 방송에 등장하는 온갖 평론가라는 이들의 말은 상당 부분 그것이 과연 어떤 사실에 근거해서 나온 말인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허황되고 거짓된 말들의 요란한 소음이 이 나라를 죄다 뒤덮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새삼 교육의 부재를 절감한다. 올바로 생각하고 그에 근거해 정확하게 말하는 방법, 그리고 그 말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구체성과 진실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두렵다. 이는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모든 곳에서 반복된다. 말에 대한 사실 여부와 진실의 정도가 논의되지 않고, 그 말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내용과는 무관한 수사나 공허한 개념어들이 춤을 추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우리에게 말은,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그저 수사에 불과하고 요식행위에 해당한다. 진실을 담고 사실에 근거하고 말하는 이의 세계관, 가치, 믿음을 반영하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림 그리는 이들 또한 자신의 그림에 대해 언어와 문자를 빌려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지만 결국 글과 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읽을 때마다 대부분 판독이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직접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술관 전시 관람에서 도슨트들이 해당 작품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 우연찮게 그 설명을 엿듣고 있자면 과연 그 말과 저 작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작품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가능한 한 그것을 정확하게 간결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너무 아쉬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케이블TV에서 방영하는 작가 아틀리에 탐방프로그램을 볼 때도 있는데 이때 작업실을 방문하는 대담자와 작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이게 한국어인지 외계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작가는 무슨 도인이나 신선처럼 자기 작품을 설명하고 있고 대담자는 감탄사와 놀라움만을 쏟아낼 뿐이다. 자신의 작업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동양정신을 구현한 작업”, “무극에서 무극으로 가는 여정”, “수신의 과정” 등으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치 대단한 사상가나 도사처럼 말하고 있는 모습, 그 허위의식과 말의 가벼움과 공허함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과도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상당수 작가들은 예술가란 고매한 사상과 철학으로 무장한 이가 되어야 하고 그런 것으로 포장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강박증 환자들 같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때, 또는 방송이나 언론에서 미술작품을 설명하거나 전시를 소개하는 말과 글 역시 마찬가지다. 한결같은 수사와 공허한 말투, 똑같은 문장의 반복이다. 그와 같은 말들은 미술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개별성,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나 의미에 대해 어떠한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침묵한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이 나라 정치판이나 미술판이나 공허한 수사와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말들이 앞서면서 내용을 속이거나 감싸고 있음을 본다. 새삼 정확한 말의 소통을 꿈꿔본다. 그것은 단지 말의 차원만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내용의 확보를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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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이 열렸다. 열한번째 행사였다. 2006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이 페스티벌을 다녔다. 모든 라인업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페스티벌만은 꼭 가야 한다는 당위 같은 게 언제부턴가 있었다. 의리라 불러도 좋다. 1999년의 기록적 폭우로 하루 만에 취소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이후, 수년간 ‘이 땅에서 록 페스티벌은 안된다’는 자조 같은 게 있었다. 이를 깨부순 첫번째 사례가 펜타포트였다. 2006년 3일간의 행사를 ‘완수’한 후 페스티벌은 조금씩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지분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거품도 잠시나마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한국은 최소한 매달 한 두 개의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나라가 됐다. 그 시발점 중의 하나이자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게 펜타포트다. 그러니 음악 애호가로서, 그리고 록 페스티벌을 열망했던 한때의 젊은이로서 펜타포트에 의리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14일 오후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열린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불꽃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인천시 제공 = 연합뉴스

이번 펜타포트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들이 있었다. 한동안 페스티벌이나 공연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대답은 하나같았다. 누군가의 아빠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오랜만에 거대한 무대 앞으로, 너른 잔디밭으로 놀러 온 것이다. 아이를 데려온 이도 있었고, 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펜타포트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들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친구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공연장과 술집 등 홍대앞이 보다 음악적 지역이었던 시절의 공간에서 놀았던 이들이다. 누군가가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된다는 생각 따위 없이 그저 놀았다. 철들기 싫다며 놀았다. 세월은 모두에게 흐르고 인간관계에도 유통 기한은 존재하는 법.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갔다. 남은 이들과의 세월은 자연스레 흘렀다. 청첩장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출산 소식을 듣고 돌잔치에도 참가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떠나간 이들과의 유통 기한은 종종 끊겼다. 남은 이들끼리의 대화에 등장하는 빈도도 줄어들더니, 결국 사라지곤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멀어져 자신의 세계를 살아온 이들과 우리의 세계에서 다시 만났다. 어색하지만 아득했다.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느낌이었달까. 그중 압권은 한 부부를 만났을 때였다. “형, 기억 안 나요? 우리가 2006년 펜타포트에서 만나서 사귀게 된 거잖아요.” 물론 기억할 리가 없었지만 “아, 그랬지”하며 얼버무렸다. 내 기억은 당시에 남자가 여자를 슬쩍 마음에 두고 있는 정도였는데 아무튼, 중요한 건 그들이 다섯살 된 아들과 함께였다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문장 하나가 감정으로 박혔다. 하나의 시대가 완전히 지나갔구나 하는, 일종의 생경한 탄식이.

이번 펜타포트에 참여한 해외의 동시대 밴드들 중 록의 고전을 리메이크한 팀들이 있었다. 패닉 앳 더 디스코가 부른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90년대에도 이미 고전이었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룹 러브가 비스티 보이스의 ‘사보타지’를, 낫싱 벗 띠브스가 픽시스의 ‘웨어 이즈 마이 마인드’를 부를 때는 90년대 명곡들이 이제 클래식의 영역으로 넘어갔음에 얄궂은 기분이 들었다. 두번째 날의 헤드라이너이자, 90년대의 영웅이었던 위저는 아예 작심하고 초·중기의 히트곡들을 중심으로 연주했다. 얼마나 명곡이 많은지 메들리로 묶어서 부를 정도였다. 옛 친구들의 얼굴을 가장 많이 본 시간도 그때였다. 첫번째 펜타포트에서 썸을 탔는지 사귀게 됐는지 어쨌든 지금은 부부가 된 커플도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거기 있었다.

열한번째 펜타포트에서도 썸 또는 커플은 탄생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부부의 연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이를 데리고 페스티벌에 찾아올 여유를 허락받게 될 때 송도에서 여전히 펜타포트의 커다란 무대가 기다리고 있을까. 한 세대가 또 다른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 줌으로써 역사의 탑은 쌓인다. 지난 펜타포트의 세월이 그 주춧돌이 되길, 앞으로의 시간이 기둥이 되길 바란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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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은 적이 없다 해도 “무심한 이의 입을 통해 그이의 죽음을 듣게 되었네. 무심히 나는 그 소식을 들었네”라는 구절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젊은 시절에는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조차 무심한 이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삶의 지리멸렬함에 마음이 더 끌렸다면 지금은 그런 소식조차 무심하게 들을 수밖에 없게 된 살아남은 자의 회한에 마음이 더 끌린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느낄 수밖에 없는 참담함을 강조하거나 과장하기는커녕 외려 ‘무심히’라고 표현한 태도에 담긴 진심이 더욱 애틋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나 역시 그런 순간에 맞닥뜨리곤 한다. 얼마 전의 일이다. 서평을 청탁받은 책을 펼치다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 한 작가의 이름 앞에 내 눈길이 무심히 머물렀다. 약력을 읽고 나서야 그이가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책을 덮고 우연히 알게 된 그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암향처럼 내 주변에 고이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터키의 소설가 야사르 케말이다. 여러 해 전 터키에 반년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체류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여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통역해 줄 분과 함께 숙소를 나서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안을 오가는 연락선을 타고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가던 날은 맑고 쌀쌀한 겨울이었다.

내가 만났을 무렵의 그는 파킨슨병을 앓은 지 오래된 여든여덟 살의 평범한 노인이었다. 우리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서재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수히 많은 배들이 느릿느릿 해협을 통과해 갔다. 어느새 사위는 어두워졌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이미 하나의 추억이 되어갈 때 어쩐지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인 것만 같고 쓸모없는 것만 같아 가슴이 허우룩해졌다.

물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쩌면 그가 불편했을 수도 있는 질문들, 예를 들어 오르한 파묵과 스스로를 비교해달라거나 아지즈 네신과의 문학적 지향점의 차이를 설명해달라는 식으로 노작가의 입장에서 마땅치 않았을 질문들도 했고 그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대답도 들었던 터라 아쉬움이 있을 리 없었음에도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은 것만 같고 정말로 해야 할 말을 나누지 못한 것만 같아 쓸쓸해졌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런 나의 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공산주의자이며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탄압을 받았지만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고 마찬가지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눈과 노안으로 침침해진 눈, 이렇게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결코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튀르크인의 나라에서 소수 민족인 쿠르드인으로 태어나 자신의 모국어인 쿠르드어가 아닌 튀르크어로 소설을 써왔던 한 사람은, 가난한 이와 힘없는 이를 사랑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를 사랑했던 한 사람은 이제 없다. 나는 신념을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온 그의 사람됨이 부러웠고 그가 소설을 쓰며 고뇌하던 시간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흔하고 볼품없으나 분명히 나보다 인생의 비밀에 더 가까이 다가갔을 사람들과 그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부러웠다. 언제나 내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그 무수한 비밀들, 사람들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앉아 이야기가 되길 기다리는 비밀들을 배신하며 살아온 것 같아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나는 무심히 내 앞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으며 앞으로는 그의 유작으로만 그를 만나게 될 것임을 알고 조용히 책을 펼쳤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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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큼 무식하고 용감하게 로마자를 학대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한 로마자 표기법이 있지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은 제각각이다. 지명이나 기관명 등 공공영역에서 관할하는 표기는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고 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로 넘어가면 ‘식민스럽기’ 짝이 없다. 김씨는 킴(Kim)씨로 돌변하고, 박씨는 파크(Park), 이씨는 리(Lee), 전씨는 춘(Chun), 최씨는 초이(Choi)로 둔갑한다. 김준기를 ‘Gim Jungi’로 표기하면 ‘짐준지’로 읽어버리는 왜곡된 로마자 인식은 일제가 종용했던 창씨개명을 떠올릴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문자는 공동체가 약속한 고유한 규칙이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있어 대한민국은 문자공동체로서의 면모가 현격히 떨어지는 미성숙한 국가다. 해방 후 나라를 세운 지 이제 겨우 70년 지난 신생 국가의 한계다. 일본과 중국은 각자의 문자체계에 맞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을 체계화했다. 한국도 로마자 표기법을 정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있어서는 태반이 문맹 수준이다.

한글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일은 각자의 취향대로 할 일이 아니라 통일된 문자체계로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수천년 운운하는 문화국가라고 하지만, 조선의 언어가 중국과 달라 서로 맞지 않아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들어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근대를 겪으며 서양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문화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마자 표기와 영어 표기를 동일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은 미국이고 미국인이 쓰는 말인 영어를 쓰는 것이 곧 한글의 음운체계를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이다. 한국인 여권에 적힌 로마자 이름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면, 미국인 기준에 맞춘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글의 소리값을 외국인들이 알아채도록 알파벳으로 쓰는 것은 영어를 쓰는 게 아니라 로마자를 빌려쓰는 것이다. 세상에는 영미권 외에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로마자를 뿌리로 하는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다.

문화사대주의 관점은 문장이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의 문화에 맞춰 성과 이름을 뒤바꿔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철수’가 ‘철수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인의 대다수는 ‘마이 네임 이즈 마오 쩌뚱’이라고 한다. ‘쩌뚱 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일본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토로 동아시아 질서를 거부하고 서구와 손잡으며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생각 때문인지, 대다수가 ‘하루키 무라카미’라고 한다. 한국인도 절반 이상이 뒤집는다.

자국의 문화를 서구의 잣대에 맞게 왜곡하려 드는 이 습성은 문화식민주의 태도다.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는 중심주의 사고를 스스로 내면화한 나머지 우리 스스로 문화제국주의의 논리에 발맞추고 있다. 성명의 로마자 표기 오류를 지적하면 어릴 적 멋모르고 적어낸 여권의 로마자 표기를 바꿀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둔다는 이들도 많다. 정부와 국회는 식민주의 청산 차원에서 법제도를 정비하고 정책수단을 동원하고 문화적 굴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원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문화사회로 가는 기본이다. 한국사회의 표준에 관한 인식은 지나치게 느슨하다. 표준이 있은 후에라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상력이 발동할 수 있다. 문자표기 하나 표준에 따라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원칙과 상식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표준은 공동체의 약속이다. 표준이 없는 사회는 약속을 지킬 수 없고 그만큼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미성숙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로마자 표기를 바르게 하는 것은 문화식민주의를 극복하는 일상의 실천이자 문화적 규칙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본을 키우는 일이다.

김준기 | 미술평론가·예술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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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작은 그림에 바짝 달라붙어 보고 있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보러 온 사람들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이고 특히 ‘비운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신화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문인들의 글이 한몫을 했다.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그림에 관한 객관적인 평보다는 그의 삶에 대한 다소 드라마틱하고 과장된 것들이 많았다.

이중섭의 고향은 평남 평원이지만 17세 때 이후 원산에 정착했다. 일본 체류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0년 12월4일, 월남하기까지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원산이다. 분단으로 인해 가볼 수 없는 곳이 됐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원산의 풍경과 그곳의 정황에 대해 적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홀로 남하해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죄의식을 번민처럼 간직한 아버지는 평생 알코올에 의지해 사셨다.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무능하게 살다 돌아가셨던 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원망이 더 컸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도 같다. 이중섭이 남긴 그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들은 모두 모친을 두고 가족과 함께 남하해 거지처럼 떠돌며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그린 것들이다. 이후 가족과 헤어지고 거주할 곳도 없이 부유하면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더구나 그림 재료나 판매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극한 상황에서도 지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것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또한 그것이 진정 화가의 삶이라 여겼던 이다.

그와 절친했던 시인 구상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대포 집 목로주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량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천직이 화공이라고 자처한 이중섭은 그림으로써 생활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화가이겠는가라는 생각에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술가적 기질과 근성에 기반을 둔 것이자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만을 그렸다. 이처럼 그의 모든 그림은 철저히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체험과 고통, 그 안에서의 희구로 점철돼 있다. 이중섭의 삶 자체는 곧 예술이고 그림은 그의 분신이었다. 순간순간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모든 열정을 쏟아가며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이 내게는 나를 말하는 수단 밖에 다른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대다수 작가들의 그림이 특정한 소재를 특정한 방법으로 그리는 것으로 관습화돼 있었다면 이로부터 벗어난 이는 이중섭과 박수근 같은 경우가 거의 유일하다. 이 둘은 모두 자신들의 삶의 체험, 주어진 현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그것을 올바로 재현하기 위한 방법론에 천착했으며 그로 인해 전통의 계승과 민족미학의 구현이란 과제에도 도달한 경우다.

반면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상당수는 작가들의 삶과 유리돼 있다. 자신의 삶에서 미술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작품을 슬쩍 흉내 내거나 현학적인 현대미술의 이론이나 개념을 빌려 그럴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작업이 되고 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폼을 잡는 것이 오늘날 미술이 됐다는 얘기다.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허위의식이고 속임수며 일종의 사기다. 그런 작업은 하등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 안에서 작가가 체험하고 인식하고 깨달은 것, 진실한 육성과 그만의 감각 및 삶의 결 같은 것은 결코 느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차가운 모조품이거나 영혼 없는 박제일 뿐이다. 미술 역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오로지 자기 몸으로 살아내는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 이중섭의 전시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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