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일원에서 사단법인 숲길(이사장 도법)이 주최하는 행사 ‘지리산프로젝트 2016: 우주여자’(10·22~11·20, 전북 남원 실상사 및 경남 하동 일대)가 열리고 있다. 필자가 예술감독으로 동참해온 이 프로젝트는 예술과 학술의 소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 지리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예술적 감성과 과학적 진리의 수준에서 접목하는 우주적 관점의 융합프로젝트다. 자연과 공동체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지리산둘레길 일원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답사와 토론, 캠핑, 퍼포먼스, 지리산 종주, 공연, 학술, 전시 프로그램을 열었다. 지리산 종주와 둘레길 걷기, 강연과 토론 등으로 배움의 시간을 가졌고, 기획전시와 학술심포지엄으로 그 뜻을 나눈다.

2014년 ‘우주예술집’, 2015년 ‘우주산책’에 이은 세 번째 지리산프로젝트의 주제는 ‘우주여자’다. 이번 행사는 남성-자본 중심의 현대사회가 인간과 자연에 가하는 모든 종류의 지배, 억압과 착취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동시에 인간해방의 차원에서 자연의 섭리와 생태 질서를 돌아보는 자리다. 남원 실상사와 하동 둘레길 일원에서의 전시행사와 더불어, 현재 진행 중인 여성담론의 쟁점들을 살펴보는 학술심포지엄 ‘다시, 여성주의와 예술’(경남도립미술관, 11·4)이 열린다. 여성주의 연구자 및 활동가들이 ‘현실 운용 원리로서의 여성혐오-남성공포에서 통감과 분노의 정치학으로’(윤지영),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운동’(정필주), ‘지리산의 여성주의 예술활동’(이유진) 등의 주제로 발제하고 토론한다.

지리산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 그것은 생명과 포용, 자비, 해방을 뜻한다. 그러나 지리산에 덧붙는 ‘어머니’는 여성에게 희생과 순종을 강요한다는 면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 지리산’ 담론에 대한 예찬 수준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차별과 억압의 기제를 걷어내고, 자유와 평화, 공존, 공유 등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대를 모색할 일이다.

특히 지리산에 사는 여성들의 생활 속 여성주의 운동은 매우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메갈 논쟁’이라는 혐오의 정치학이 남긴 것은 상처만이 아니었다. 여성주의 의제들이 미해결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데 주목하고 메갈 논쟁의 경과와 함의를 돌아봐야 한다.

이렇듯 지리산의 가치를 우주적 관점에서 성찰하고자 하는 지리산프로젝트가 현 시국과 맞물려 묘하게 읽히고 있다. 정권의 스캔들과 얽혀들어 ‘우주’와 ‘여자’라는 단어가 오해를 받고 있다. 억울하고 못마땅한 일이다. ‘우주’를 그렇게 쉽사리 오염된 단어로 치부하기에는, 인류가 갈망해온 천문우주에 관한 경이로운 세계가 너무나도 넓고 크다. 게다가 지금껏 남자들이 저질러온 죄악이 훨씬 더 극심한데도, ‘여자’라는 단어를 조롱과 멸시의 뜻을 담아 사용하는 데에는 공감할 수 없다. 자신이 싫어하는 누군가가 우주를 언급했다고 해서 우주라는 개념을 폄하할 이유가 없고, ‘여자(들)’ 운운하며 양성평등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더욱 한심한 일은 ‘무당정치’라는 말을 동원해, 최근의 국정혼란 상황에 대한 비판을 샤머니즘에 대한 공격으로 돌리는 반문화적 태도다. 민속학 전공자인 주강현 박사는 최근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다음과 같이 무당정치 담론을 언급했다. “무당정치라는 말보다 그냥 신정정치라 명명하고 쓰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굳이 복잡하게 말한다면 기독교 영생에 기반을 둔 무속기독교융합과 삼류정치권력의 권력독점 야망이 결합되고, 자본의 부패와 관료 전문가 사회의 침묵과 동조가 빚어낸 퇴행적 신정정치다.” 우주적 존재론과 여성주의, 샤머니즘에 관한 재인식이 없는 한 우리는 퇴행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뿌리에 자리 잡은 정신문화이기 때문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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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할 때 아내가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소설가들은 이혼도 밥 먹듯이 한다던데 그 사람과 결혼해서 잘살 수 있겠냐는 식의 충고들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을 때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소설가에 대한 그런 식의 오해가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소설가라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오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설가에 대한 이 뿌리 깊은 편견은 내게 소중하지 않다. 내게 소중한 건 그런 편견들이 버젓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소설가인 나를 이해해주려는 시선이다. 이를테면 결혼을 앞두었을 때 처가 식구들이 아내와 나의 결혼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내 나이가 마흔에 가까움에도 전 재산이 몇천만원밖에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도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 사실이니까. 그런 정당한 반대 사유가 있었음에도 내가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금의 장인어른 말씀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 장인어른은 다른 식구들을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소설가다. 소설가가 돈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으냐. 내게 소중한 건 바로 이거다. 서로 다르고 어쩌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고유한 장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장인어른과 나는 세계관이 무척 다르다. 장인어른은 새누리당 지지자다. 그 탓에 사위들과 모인 자리에서 조금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동서 중에 맏형님이 대표가 되어 장인어른과 말씨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다툼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해도 알지 못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결코 용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듯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차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 단순하기 짝이 없고 순결한 노력 하나뿐이다.

소설에 관한 정의야 다양하겠지만 인물에 한정 지어 말하자면 현실 세계에서 이해 불가한 인물을 이해 가능한 인물로 제시하는 게 소설이다. 그래서 소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고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상을 이해의 여지가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소설의 인물은 실재 인물과는 다른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재 인물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인물일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가들이 현실의 어떤 인물보다 실재에 가까운 인물,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어떤 가능성을 지녔는지를 소설에서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인물을 소설의 인물로 고려하지 않는 이유는 그 인물이 너무나 불가해하기에 소설에서 이해 가능한 인물로 묘사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외려 그 인물이 너무나 뻔해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 인간의 가장 탐욕스러운 부분을 상징하기에 소설로 그린다면 한심한 유형적인 인물이 될 것이기에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삼류 소설 중에 전형적인 악당의 유형으로 묘사되어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리하여 감히 장담하건대 동시대의 소설가뿐만 아니라 내 후대의 소설가들 중에도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인물을 모델로 삼아 소설의 인물로 제시하는 경우란 없을 것이다. 요컨대 고뇌하는 인물만이 소설의 인물이 될 수 있다. 고뇌하지 않는 인물은 현실 세계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하며(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집권 여당의 대표와 같은) 부유하게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소설의 인물은 될 수 없다. 어떤 소설가도 인간의 희망을 그런 인물에게서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혹여 소설의 인물이 못 되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까 봐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해준다면, 그건 곧 역사가 그대를 지워버릴 거라는 의미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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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낙원상가와 익선동 일대에서 문자와 빛의 축제가 열린다. 사단법인 세계문자연구소가 여는 문화예술축제 ‘세계문자심포지아 2016 : 행랑’(10·3~9)과 서울시 역사도심재생과의 프로젝트 ‘익선.낙원. 세운’(10·3~31)이 그것이다. ‘익선(益善)하면 낙원(樂園)이니, 행랑(行廊)에 세운(世運)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흥미롭다. ‘선을 쌓으면 낙원이 열리니, 세상의 행랑을 따라 좋은 기운이 가득 찬다’는 뜻이다. 낙원악기상가와 익선동은 서울 원도심의 문화공간 인사동과 맞붙어있어 최근 들어 시민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다. 문자 매개의 문화예술축제와 역사성을 살린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열려 생활공간 속의 축제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문자심포지아는 ‘행랑’을 주제로 골목골목마다 문자의 가치를 짓고 나누는 일을 한다. 한옥의 문 옆에서 안팎을 이어주는 열린 공간 ‘행랑’은 소통을 매개하는 확장지향의 언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전문상가인 낙원상가는 음악인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공간이다. 익선동은 ‘ㄱ, ㄴ, ㅁ’자 모양의 한옥들과 골목 사이로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익선.낙원. 세운’은 세운상가의 조명으로 낙원상가 하부를 밝힌다. 인사동과 익선동 사이의 도로 위에 세워진 낙원상가 건물 하부에서 열리는 빛의 축제다. 상가와 골목의 예술은 문자를 매개로 시민들의 감성적 소통을 촉매한다.

두 행사가 지향하는 바는 도시공간과 예술의 창조적인 결합이다. 그것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과 직결하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낙후된 공간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개발이나 재개발이 아닌 재생 개념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아래 수조원의 예산으로 전국 도처에서 도시재생사업이 한창이다. 이러한 재생사업에 예술이 결합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이른바 ‘문화적 도시재생’이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는 것만 봐도 예술과 재생사업의 결합의 당위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도시재생에 문화적 요소를 가미하자는 논의는 결국 도시재생에 예술가들의 노동을 장착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미 상당수의 예술가들이 전국의 도시재생사업에 참여하고 있고, 비평가들도 공공미술과 공동체예술, 사회(적)예술 등의 관점으로 이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예술과 재생사업의 결합은 예술의 사회화를 앞당긴다는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술이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제반 영역과 밀착해 있던 것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이후 예술의 자율성을 확립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회체제로부터의 이탈이 가져온 고립과 폐쇄의 상황은 예술노동의 소외를 불러왔다.

연간 소득 1000만원 미만의 대다수 예술가들에게 예술노동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환류할 수 없는 것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나마 작동하는 미술시장마저도 예술 본연의 정신적 가치보다는 미술투자라는 이름의 교환가치에 경도돼있으니 예술노동의 소외는 이미 구조적 모순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도 예술노동은 경직된 미술시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그것이 선순환의 얼개 속에서 잘 굴러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문화적 도시재생에서 정작 중요한 문화의 내용은 부재한 채 공허만 문화 타령만 오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토목과 건축의 몫으로 95% 이상의 예산을 쓰고, 나머지 일부 예산으로 문화를 담아 달라는 요구로 예술가들을 동원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관협치 차원의 구조변동이 필수적이다. 특히 마을 만들기 활동가들과 예술가들이 도시재생의 구상단계부터 진행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가하여 도시재생의 주체를 발견하고, 이들과 협력하여 도시재생의 내용과 방법을 만들고, 공동체적 가치에 따라 문화적 도시재생을 추진할 수 있도록 열린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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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광주비엔날레를 보고 왔다. 광주까지의 먼 여정과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전시를 둘러보았다. 문득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 광주를 오갔던 그간의 날들이 거칠게 스친다. 올해로 11회째인 광주비엔날레는 그간 2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광주비엔날레는 광주 화단, 나아가 한국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비엔날레를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국의 그 많은 미술인들에게 비엔날레는 또 무엇인가?

현재 한국에서는 무려 4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큰 예산이 소요되는 행사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다. 세계에서는 매년 약 100개의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고 또 그만큼의 아트페어가 열린다. 그것들을 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세계적인 비엔날레와 아트페어를 둘러보는 것이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능력(?)있는 자들만이 전 세계를 무대로 그 같은 행사를 보러 다닌다. 이른바 미술계의 귀족들이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경향과 담론, 전시유형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관람하는 일은 중요하고 필요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시들은 상당한 피로감을 준다. 현학적이고 난해한 주제와 글들, 비슷비슷한 작품들, 동일한 스타일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인상이며 그것들은 전 세계 미술계를 동일한 경향으로 지극히 납작하게, 평면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다.

알다시피 비엔날레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전시로서 문화 전반적으로 시급한 근본적인 이슈들을 다룬다. 특히 비엔날레는 1989년 무렵부터 시작된 ‘지정학적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동시대 미술’의 측면으로 부상했다. 마시밀리아 노조니의 지적처럼 오늘날 비엔날레는 새로운 지식의 ‘무역로(trade routes)’가 되고 있다. 분명 비엔날레는 ‘예술제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끊임없이 수정하며 동시대 미술에 대한 담론을 보다 탐구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으로 변화시키는 한편 복잡한 문화와 각기 다른 지역들에 대해 인식할 기회 또한 제공해준다. 동시대 미술계의 주체가 주로 동시대의 비엔날레 전시들이 제공하는 동시대성에 대한 경험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세계 미술 현장을 좀 더 다루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은 비엔날레에서 아트페어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주제는 ‘제8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이다. 제목부터 난해하다. 스웨덴 출신의 예술감독인 마리아 린드는 제8기후대를 “현실에 없는 예술만이 펼쳐내는 상상적 세계와 공간”이라고 정의하면서, “제8기후대는 이러한 작품이 개입하는 것, 중앙무대로 다가가는 바로 이 특정한 방식을 통해 미술을 위치시키는 것을 하나의 포부로 품고 있다. 이것은 기술 그 자체의 관련성에 대하여 재활성화하거나 가속화한 이해와 연관된 미래의 행위 주체성에 관한 발언”이라고 서문에 쓰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전시 역시 해당 주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감동을 주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을 찾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현재와 미래의 미술이란 무엇인가와 미술의 사회적 실천 기능을 찾아본다는 취지를 내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또 나아가 그에 대한 미술적 대안이나 비평적 초점을 작업을 통해 찾기도 쉽지 않았다고들 지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비엔날레는 왜 계속해야 하는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엔날레를 치르기 위해 투여하는 막대한 예산과 인력 등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비엔날레가 지닌 여러 장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보면서 매번 유사한 대규모 전시를 반복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행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무엇을 얻고, 무엇이 변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비엔날레는 거대한 제도가 되었고 그저 형식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열악한 광주 화단이나 변함없는 비엔날레관 주변의 스산하고 조악한 경관을 보면서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않는 비엔날레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비엔날레를 거듭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감각의 화석들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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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에 다녀와야 할 일이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의 탑승 게이트에 도착하니 탑승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단체로 여행을 떠나는지 대기실은 빈자리 하나 없었다. 이윽고 탑승 시간이 되어 선생님으로 보이는 인솔자들이 웃고 떠들고 셀카를 찍느라 바쁜 학생들을 불러 모아 줄을 세웠다. 나는 그 줄 맨 뒤에 붙어 섰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또 한 무리가 내 뒤로 줄을 서는 바람에 나는 꼼짝없이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인 셈이 되었다. 아이들을 단속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화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인 셈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이즈음의 내가 결코 들어본 적 없는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던 것은.

나는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걸어서 한 시간쯤 되는 곳이었고 중학교도 한 시간 반쯤은 족히 걸리는 곳이었다. 아침마다 정신이 없었다. 가방에 그날의 교과서며 공책이 제대로 들었는지 그 밖의 준비물을 빠트리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어머니가 차려 준 밥을 먹고 가방을 메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을 나설 때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당부를 챙겨 들어야 비로소 등굣길이 시작되었다.

해찰하지 말고 싸게 댕겨오거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가 내게 일러주었던 말은 해찰하지 말라는 거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어머니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부지게 대답도 했겠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 말을 흘려듣고, 외려 그 말을 아직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한 꾸지람쯤으로 이해해 아예 마음 놓고 해찰해도 된다는 식으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등굣길에서야 해찰하지 말라는 당부가 없더라도 해찰할 겨를도 없었겠지만 하굣길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 기억 속에 선연한데 어차피 일찍 돌아가 봐야 적막한 집에서 딱히 누릴 만한 즐거운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껏 한눈을 팔면서 한 시간 거리의 길을 두어 시간 길이로 늘려 걷곤 했다. 용이 승천하면서 지붕에 구멍이 뚫렸다는 폐가를 서성이고 샛강을 건너고 탄가루를 날리며 달리는 연탄 배달 트럭과 양조장의 막걸리 배달 아저씨가 모는 삼륜차를 뒤쫓으면서 길을 걷고 달리되 길이 아닌 곳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어 가야 했던 하굣길이야말로 지루한 학교생활에 대한 정당한 보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야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즐겼던 건 해찰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어겼다는 데서 오는 은밀한 기쁨, 이처럼 해찰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왜 아직까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걱정하며 일을 하다 말고 이마에 손그늘을 만들어 마을 초입의 신작로 쪽을 바라보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는 기쁨이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제 누가 내게 해찰하지 말라고 변함없이 다정하게 일러줄 것인가. 이런 상념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비행기 앞쪽 좌석에 앉아 있었고 학생들은 중간부터 뒤쪽까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승무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들어서 속력을 높였다. 차분한 긴장의 시간이 잠깐 흐른 뒤 비행기가 중력을 거슬러 사뿐하게 광활한 하늘로 뛰어오르자 아이들이 깊은숨을 토하듯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듣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순결한 감탄들이었다. 아마도 그날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부모로부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라는 잔소리를 들었을 그 아이들도 언젠가 무엇 때문에 그 순간이 그토록 행복했는지를 헤아리는 때가 오겠지. 해찰하지 말라는 당부를 이제는 결코 들을 수 없게 된, 할 수 없게 된 많은 이들이 느닷없이 숨죽여 울 수도 있다는 걸, 내가 왜 그 사소한 그리움을 되새기며 이런 글을 써야만 하는지도.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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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어린 시절에 ‘근대화 슈퍼’라는 간판을 단 상점을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당시 ‘근대화’는 ‘새마을’이라는 구호와도 짝을 이루는 국민적 과제로 제시되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를 거의 매일 방송과 야외 스피커를 통해 듣던 시절이었다. 이 노래의 2절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초가집을 허문 자리에 콘크리트 양옥의 ‘근대화 슈퍼’가 들어섰던 셈이다.

서양 클래식 음악, 특히 서양 오케스트라는 ‘근대화’에 대한 시청각적 모델을 구체화하여 제시했다. 그것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한목소리로 전진해 가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클래식 음악과 서양 관현악을 실제로 즐기느냐는 둘째 문제다. ‘근대화’에 대한 선망을 가진 이들에게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이상향을 묘사한 그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총체적인 계획(지휘자의 총보) 아래 개인에게 주어진 분업화된 업무들(단원들의 파트보)을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 그 어떤 예술적 풍경도 이보다 더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정교하게 창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탈산업화 사회에서 근대화의 스펙터클은 ‘근대화 슈퍼’ 시절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나 ‘국가’를 표상하는 일사불란한 오케스트라의 은유는 ‘완전 고용’에 가깝던 옛 시절에나 통했다. 멀게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의 붕괴부터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분업화된 업무는 무책임과 방관을 낳았고, 대의적 체계는 부패와 부도덕, 경제적 양극화를 확대 재생산해 왔을 뿐이다. 조화로운 합주를 만드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한국 사회를 표상할 수 있으리라고 이제 더는 믿기 어렵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에게 지휘봉을 선사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퍼포먼스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다른 정치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그 시대착오적 성격 때문이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더 이상 개인들의 조화로운 목소리를 이끌어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근대의 근대화’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제시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건설한 도시, 즉 ‘새마을’이 전통적 ‘마을’에 대한 부정이었다면, 그 ‘부정의 부정’으로서 ‘근대의 근대화’는 ‘마을의 재발견’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재발견된 ‘마을’은 혈연, 지연과 같은 연고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들의 자발적 공동체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다시 오케스트라의 은유로 돌아온다면,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전문 연주자들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마을 오케스트라’ 혹은 ‘공동체 오케스트라(community orchestra)’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은유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주의에 바탕을 둔 ‘대의 민주주의’로부터 지역에 바탕을 둔 ‘참여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구체화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2014년부터 3년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따르면, 성인 중심의 자생적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만 전국에서 395개 단체가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밖에 학교 오케스트라와 동문 오케스트라 등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까지 합산하면 무려 768개 단체에 이른다.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음악 양식이나 수단이 아니다. 기획과 연습, 연주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 합리적 소통 모델이 적용되는 사회나 공동체 그 자체다.

음악이 다가올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성격’을 갖는다는 자크 아탈리의 주장 역시 이런 맥락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번번이 ‘국론 통합’을 외치는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근대화 슈퍼’의 촌스러운 풍경이 겹쳐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1세기의 시민들은 이미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스스로 조화시켜가며 서로 다른 색깔의 공동체들을 만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지휘봉을 저 찬란한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위해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최유준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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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계를 뒤흔든 일련의 사건들이 개인의 윤리는 물론 집단 윤리의 부재와 결핍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법은 개인과 집단의 윤리를 최소한의 수준에서 합의하는 공공의 약속이다. 최근 미술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술시장 개혁과 미술진흥 관련 입법 논의가 일고 있다. 문체부가 추진하고 있는 미술품 유통 투명화 및 활성화 관련 법률과 미술진흥법 제정 논의가 그것이다. 이번 일은 이중섭, 박수근 등 근대 작가들을 비롯 천경자, 이우환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끊이지 않는 미술계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책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미술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술품 유통업 허가 및 등록제, 미술품 이력관리제, 미술품 감정사제도 및 미술품감정업 등록제, 화랑·경매·감정 겸업 금지, (가칭)국가미술품감정연구원 설립, 위작 유통 관련 범죄 처벌 명문화, 특별사법경찰제 도입 등의 구체적인 개혁입법안들이 논의 과정에 있다. 화랑과 경매, 감정 등 3개 영역의 주체들이 겹쳐 있는 것은 한국미술계의 문제점으로 꼽혀왔는데, 이 3각 연대체를 상호견제와 균형의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의지가 확고해 보인다. 미술시장 이해당사자들의 복잡한 구도가 얽혀 있어 입법화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자칫 시장 주체들을 개혁 대상으로 내몰아 역풍을 맞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 안팎의 합리적인 논의로 새로운 개혁의 주체를 세우는 데 뜻을 모을 시점이다.

미술진흥위원회와 한국미술재단 설립 조항을 둔 미술진흥법 논의에도 몇 가지 논쟁점이 있다. 하지만 일부 우려가 있다고 해서 입법 취지 자체를 낮게 평가할 일은 아니다. 이미 예술장르별로 진흥법 제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장르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중대 조치가 입법형태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서 차분하게 논의의 장을 열어 볼 일이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문화예술진흥법을 근거로 한 미술관 지원정책과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그리고 예술경영지원센터 사업이 상충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비해 꼼꼼한 상황 점검으로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 법안은 창작과 전시로 이뤄지는 표준계약서 및 아티스트 피 규정 등 다양한 지원과 규제 조항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거래되는 경우 그 이익의 일부를 저작권자에게 지급하는 작가보상금 제도 논의도 있다. 전시회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도 준비 중이다. 10년 전만 해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주느냐’며 볼멘소리하던 공무원들의 말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든다. 영화계나 공연계가 출연료로 예술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미술계에서도 출품료 개념을 정착해야 한다. 핵심은 한국미술진흥재단이다. 미술창작과 전시 및 유통, 미술문화 전반, 미술인력 양성, 미술은행 관리 등을 총괄하는 거대 기구가 탄생한다. 기존의 제도와 중복이나 상충하는 바가 없는지 현장의 의견을 들어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대목이다.

예술은 사회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규범이자 규칙이다. 따라서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본질과 현상을 담은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평이다. 예술비평은 예술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의식을 기반으로 가치의 문제를 논하는 공론의 장이다. 하지만 비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특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대목에서는 더 그렇다. 이런 경우의 문제해결을 위해 작동하는 제도가 바로 법률이다. 지금껏 개인의 윤리에 주목해서 특정 사안을 비판하기 바빴던 한국미술계로서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의 윤리를 재정립한다는 차원에서 미술개혁 입법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론을 모을 일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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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매미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러더니 날이 서늘해지고 바람이 분다. 지독한 여름 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지난여름은 몸이 힘들어 쉬는 날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올여름을 나기가 무척 힘이 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더운 날씨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정치소식이었다. 그것을 듣자면 울화가 치밀고 우울증이 마냥 심해지는 기분이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말을 듣기가 힘들었다. 소통되지 못하는 말들이 어지럽게 부유하고 내용 없는 말, 수사에 불과한 말, 억측과 궤변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달되고 증폭되고 다시 옮겨지는 방송과 신문의 행태도 놀랍기만 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 그리고 방송에 등장하는 온갖 평론가라는 이들의 말은 상당 부분 그것이 과연 어떤 사실에 근거해서 나온 말인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허황되고 거짓된 말들의 요란한 소음이 이 나라를 죄다 뒤덮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새삼 교육의 부재를 절감한다. 올바로 생각하고 그에 근거해 정확하게 말하는 방법, 그리고 그 말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구체성과 진실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두렵다. 이는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모든 곳에서 반복된다. 말에 대한 사실 여부와 진실의 정도가 논의되지 않고, 그 말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내용과는 무관한 수사나 공허한 개념어들이 춤을 추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우리에게 말은,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그저 수사에 불과하고 요식행위에 해당한다. 진실을 담고 사실에 근거하고 말하는 이의 세계관, 가치, 믿음을 반영하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림 그리는 이들 또한 자신의 그림에 대해 언어와 문자를 빌려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지만 결국 글과 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읽을 때마다 대부분 판독이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직접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술관 전시 관람에서 도슨트들이 해당 작품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 우연찮게 그 설명을 엿듣고 있자면 과연 그 말과 저 작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작품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가능한 한 그것을 정확하게 간결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너무 아쉬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케이블TV에서 방영하는 작가 아틀리에 탐방프로그램을 볼 때도 있는데 이때 작업실을 방문하는 대담자와 작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이게 한국어인지 외계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작가는 무슨 도인이나 신선처럼 자기 작품을 설명하고 있고 대담자는 감탄사와 놀라움만을 쏟아낼 뿐이다. 자신의 작업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동양정신을 구현한 작업”, “무극에서 무극으로 가는 여정”, “수신의 과정” 등으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치 대단한 사상가나 도사처럼 말하고 있는 모습, 그 허위의식과 말의 가벼움과 공허함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과도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상당수 작가들은 예술가란 고매한 사상과 철학으로 무장한 이가 되어야 하고 그런 것으로 포장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강박증 환자들 같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때, 또는 방송이나 언론에서 미술작품을 설명하거나 전시를 소개하는 말과 글 역시 마찬가지다. 한결같은 수사와 공허한 말투, 똑같은 문장의 반복이다. 그와 같은 말들은 미술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개별성,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나 의미에 대해 어떠한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침묵한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이 나라 정치판이나 미술판이나 공허한 수사와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말들이 앞서면서 내용을 속이거나 감싸고 있음을 본다. 새삼 정확한 말의 소통을 꿈꿔본다. 그것은 단지 말의 차원만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내용의 확보를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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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이 열렸다. 열한번째 행사였다. 2006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이 페스티벌을 다녔다. 모든 라인업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페스티벌만은 꼭 가야 한다는 당위 같은 게 언제부턴가 있었다. 의리라 불러도 좋다. 1999년의 기록적 폭우로 하루 만에 취소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이후, 수년간 ‘이 땅에서 록 페스티벌은 안된다’는 자조 같은 게 있었다. 이를 깨부순 첫번째 사례가 펜타포트였다. 2006년 3일간의 행사를 ‘완수’한 후 페스티벌은 조금씩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지분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거품도 잠시나마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한국은 최소한 매달 한 두 개의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나라가 됐다. 그 시발점 중의 하나이자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게 펜타포트다. 그러니 음악 애호가로서, 그리고 록 페스티벌을 열망했던 한때의 젊은이로서 펜타포트에 의리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14일 오후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열린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불꽃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인천시 제공 = 연합뉴스

이번 펜타포트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들이 있었다. 한동안 페스티벌이나 공연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대답은 하나같았다. 누군가의 아빠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오랜만에 거대한 무대 앞으로, 너른 잔디밭으로 놀러 온 것이다. 아이를 데려온 이도 있었고, 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펜타포트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들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친구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공연장과 술집 등 홍대앞이 보다 음악적 지역이었던 시절의 공간에서 놀았던 이들이다. 누군가가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된다는 생각 따위 없이 그저 놀았다. 철들기 싫다며 놀았다. 세월은 모두에게 흐르고 인간관계에도 유통 기한은 존재하는 법.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갔다. 남은 이들과의 세월은 자연스레 흘렀다. 청첩장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출산 소식을 듣고 돌잔치에도 참가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떠나간 이들과의 유통 기한은 종종 끊겼다. 남은 이들끼리의 대화에 등장하는 빈도도 줄어들더니, 결국 사라지곤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멀어져 자신의 세계를 살아온 이들과 우리의 세계에서 다시 만났다. 어색하지만 아득했다.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느낌이었달까. 그중 압권은 한 부부를 만났을 때였다. “형, 기억 안 나요? 우리가 2006년 펜타포트에서 만나서 사귀게 된 거잖아요.” 물론 기억할 리가 없었지만 “아, 그랬지”하며 얼버무렸다. 내 기억은 당시에 남자가 여자를 슬쩍 마음에 두고 있는 정도였는데 아무튼, 중요한 건 그들이 다섯살 된 아들과 함께였다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문장 하나가 감정으로 박혔다. 하나의 시대가 완전히 지나갔구나 하는, 일종의 생경한 탄식이.

이번 펜타포트에 참여한 해외의 동시대 밴드들 중 록의 고전을 리메이크한 팀들이 있었다. 패닉 앳 더 디스코가 부른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90년대에도 이미 고전이었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룹 러브가 비스티 보이스의 ‘사보타지’를, 낫싱 벗 띠브스가 픽시스의 ‘웨어 이즈 마이 마인드’를 부를 때는 90년대 명곡들이 이제 클래식의 영역으로 넘어갔음에 얄궂은 기분이 들었다. 두번째 날의 헤드라이너이자, 90년대의 영웅이었던 위저는 아예 작심하고 초·중기의 히트곡들을 중심으로 연주했다. 얼마나 명곡이 많은지 메들리로 묶어서 부를 정도였다. 옛 친구들의 얼굴을 가장 많이 본 시간도 그때였다. 첫번째 펜타포트에서 썸을 탔는지 사귀게 됐는지 어쨌든 지금은 부부가 된 커플도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거기 있었다.

열한번째 펜타포트에서도 썸 또는 커플은 탄생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부부의 연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이를 데리고 페스티벌에 찾아올 여유를 허락받게 될 때 송도에서 여전히 펜타포트의 커다란 무대가 기다리고 있을까. 한 세대가 또 다른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 줌으로써 역사의 탑은 쌓인다. 지난 펜타포트의 세월이 그 주춧돌이 되길, 앞으로의 시간이 기둥이 되길 바란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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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은 적이 없다 해도 “무심한 이의 입을 통해 그이의 죽음을 듣게 되었네. 무심히 나는 그 소식을 들었네”라는 구절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젊은 시절에는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조차 무심한 이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삶의 지리멸렬함에 마음이 더 끌렸다면 지금은 그런 소식조차 무심하게 들을 수밖에 없게 된 살아남은 자의 회한에 마음이 더 끌린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느낄 수밖에 없는 참담함을 강조하거나 과장하기는커녕 외려 ‘무심히’라고 표현한 태도에 담긴 진심이 더욱 애틋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나 역시 그런 순간에 맞닥뜨리곤 한다. 얼마 전의 일이다. 서평을 청탁받은 책을 펼치다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 한 작가의 이름 앞에 내 눈길이 무심히 머물렀다. 약력을 읽고 나서야 그이가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책을 덮고 우연히 알게 된 그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암향처럼 내 주변에 고이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터키의 소설가 야사르 케말이다. 여러 해 전 터키에 반년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체류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여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통역해 줄 분과 함께 숙소를 나서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안을 오가는 연락선을 타고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가던 날은 맑고 쌀쌀한 겨울이었다.

내가 만났을 무렵의 그는 파킨슨병을 앓은 지 오래된 여든여덟 살의 평범한 노인이었다. 우리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서재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수히 많은 배들이 느릿느릿 해협을 통과해 갔다. 어느새 사위는 어두워졌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이미 하나의 추억이 되어갈 때 어쩐지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인 것만 같고 쓸모없는 것만 같아 가슴이 허우룩해졌다.

물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쩌면 그가 불편했을 수도 있는 질문들, 예를 들어 오르한 파묵과 스스로를 비교해달라거나 아지즈 네신과의 문학적 지향점의 차이를 설명해달라는 식으로 노작가의 입장에서 마땅치 않았을 질문들도 했고 그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대답도 들었던 터라 아쉬움이 있을 리 없었음에도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은 것만 같고 정말로 해야 할 말을 나누지 못한 것만 같아 쓸쓸해졌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런 나의 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공산주의자이며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탄압을 받았지만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고 마찬가지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눈과 노안으로 침침해진 눈, 이렇게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결코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튀르크인의 나라에서 소수 민족인 쿠르드인으로 태어나 자신의 모국어인 쿠르드어가 아닌 튀르크어로 소설을 써왔던 한 사람은, 가난한 이와 힘없는 이를 사랑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를 사랑했던 한 사람은 이제 없다. 나는 신념을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온 그의 사람됨이 부러웠고 그가 소설을 쓰며 고뇌하던 시간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흔하고 볼품없으나 분명히 나보다 인생의 비밀에 더 가까이 다가갔을 사람들과 그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부러웠다. 언제나 내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그 무수한 비밀들, 사람들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앉아 이야기가 되길 기다리는 비밀들을 배신하며 살아온 것 같아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나는 무심히 내 앞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으며 앞으로는 그의 유작으로만 그를 만나게 될 것임을 알고 조용히 책을 펼쳤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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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큼 무식하고 용감하게 로마자를 학대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한 로마자 표기법이 있지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은 제각각이다. 지명이나 기관명 등 공공영역에서 관할하는 표기는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고 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로 넘어가면 ‘식민스럽기’ 짝이 없다. 김씨는 킴(Kim)씨로 돌변하고, 박씨는 파크(Park), 이씨는 리(Lee), 전씨는 춘(Chun), 최씨는 초이(Choi)로 둔갑한다. 김준기를 ‘Gim Jungi’로 표기하면 ‘짐준지’로 읽어버리는 왜곡된 로마자 인식은 일제가 종용했던 창씨개명을 떠올릴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문자는 공동체가 약속한 고유한 규칙이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있어 대한민국은 문자공동체로서의 면모가 현격히 떨어지는 미성숙한 국가다. 해방 후 나라를 세운 지 이제 겨우 70년 지난 신생 국가의 한계다. 일본과 중국은 각자의 문자체계에 맞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을 체계화했다. 한국도 로마자 표기법을 정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있어서는 태반이 문맹 수준이다.

한글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일은 각자의 취향대로 할 일이 아니라 통일된 문자체계로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수천년 운운하는 문화국가라고 하지만, 조선의 언어가 중국과 달라 서로 맞지 않아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들어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근대를 겪으며 서양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문화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마자 표기와 영어 표기를 동일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은 미국이고 미국인이 쓰는 말인 영어를 쓰는 것이 곧 한글의 음운체계를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이다. 한국인 여권에 적힌 로마자 이름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면, 미국인 기준에 맞춘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글의 소리값을 외국인들이 알아채도록 알파벳으로 쓰는 것은 영어를 쓰는 게 아니라 로마자를 빌려쓰는 것이다. 세상에는 영미권 외에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로마자를 뿌리로 하는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다.

문화사대주의 관점은 문장이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의 문화에 맞춰 성과 이름을 뒤바꿔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철수’가 ‘철수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인의 대다수는 ‘마이 네임 이즈 마오 쩌뚱’이라고 한다. ‘쩌뚱 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일본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토로 동아시아 질서를 거부하고 서구와 손잡으며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생각 때문인지, 대다수가 ‘하루키 무라카미’라고 한다. 한국인도 절반 이상이 뒤집는다.

자국의 문화를 서구의 잣대에 맞게 왜곡하려 드는 이 습성은 문화식민주의 태도다.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는 중심주의 사고를 스스로 내면화한 나머지 우리 스스로 문화제국주의의 논리에 발맞추고 있다. 성명의 로마자 표기 오류를 지적하면 어릴 적 멋모르고 적어낸 여권의 로마자 표기를 바꿀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둔다는 이들도 많다. 정부와 국회는 식민주의 청산 차원에서 법제도를 정비하고 정책수단을 동원하고 문화적 굴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원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문화사회로 가는 기본이다. 한국사회의 표준에 관한 인식은 지나치게 느슨하다. 표준이 있은 후에라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상력이 발동할 수 있다. 문자표기 하나 표준에 따라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원칙과 상식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표준은 공동체의 약속이다. 표준이 없는 사회는 약속을 지킬 수 없고 그만큼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미성숙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로마자 표기를 바르게 하는 것은 문화식민주의를 극복하는 일상의 실천이자 문화적 규칙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본을 키우는 일이다.

김준기 | 미술평론가·예술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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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작은 그림에 바짝 달라붙어 보고 있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보러 온 사람들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이고 특히 ‘비운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신화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문인들의 글이 한몫을 했다.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그림에 관한 객관적인 평보다는 그의 삶에 대한 다소 드라마틱하고 과장된 것들이 많았다.

이중섭의 고향은 평남 평원이지만 17세 때 이후 원산에 정착했다. 일본 체류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0년 12월4일, 월남하기까지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원산이다. 분단으로 인해 가볼 수 없는 곳이 됐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원산의 풍경과 그곳의 정황에 대해 적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홀로 남하해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죄의식을 번민처럼 간직한 아버지는 평생 알코올에 의지해 사셨다.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무능하게 살다 돌아가셨던 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원망이 더 컸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도 같다. 이중섭이 남긴 그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들은 모두 모친을 두고 가족과 함께 남하해 거지처럼 떠돌며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그린 것들이다. 이후 가족과 헤어지고 거주할 곳도 없이 부유하면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더구나 그림 재료나 판매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극한 상황에서도 지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것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또한 그것이 진정 화가의 삶이라 여겼던 이다.

그와 절친했던 시인 구상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대포 집 목로주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량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천직이 화공이라고 자처한 이중섭은 그림으로써 생활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화가이겠는가라는 생각에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술가적 기질과 근성에 기반을 둔 것이자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만을 그렸다. 이처럼 그의 모든 그림은 철저히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체험과 고통, 그 안에서의 희구로 점철돼 있다. 이중섭의 삶 자체는 곧 예술이고 그림은 그의 분신이었다. 순간순간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모든 열정을 쏟아가며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이 내게는 나를 말하는 수단 밖에 다른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대다수 작가들의 그림이 특정한 소재를 특정한 방법으로 그리는 것으로 관습화돼 있었다면 이로부터 벗어난 이는 이중섭과 박수근 같은 경우가 거의 유일하다. 이 둘은 모두 자신들의 삶의 체험, 주어진 현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그것을 올바로 재현하기 위한 방법론에 천착했으며 그로 인해 전통의 계승과 민족미학의 구현이란 과제에도 도달한 경우다.

반면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상당수는 작가들의 삶과 유리돼 있다. 자신의 삶에서 미술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작품을 슬쩍 흉내 내거나 현학적인 현대미술의 이론이나 개념을 빌려 그럴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작업이 되고 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폼을 잡는 것이 오늘날 미술이 됐다는 얘기다.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허위의식이고 속임수며 일종의 사기다. 그런 작업은 하등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 안에서 작가가 체험하고 인식하고 깨달은 것, 진실한 육성과 그만의 감각 및 삶의 결 같은 것은 결코 느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차가운 모조품이거나 영혼 없는 박제일 뿐이다. 미술 역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오로지 자기 몸으로 살아내는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 이중섭의 전시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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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여우락(樂) 페스티벌’이 있다. ‘여우락’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를 줄인 말이다. 올해로 7회째를 맞은 이 음악축제는 한국 전통음악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믿기 어려운 수준의 유료 객석 점유율을 자랑한다. 초창기부터 양방언 등과 같은 대중적 음악가들을 내세워 축제의 성격을 크로스오버와 퓨전에 맞추고, ‘여우톡’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관객의 접근성을 높였다. 장르 혼합 시도는 올해 더욱 과감해져 재즈 연주자들은 물론 송창식과 같은 대중음악가들, 심지어 서울시향 부지휘자 최수열이 지휘하는 클래식 앙상블의 무대까지 수용했다.

이쯤 되면 이 축제의 성공을 ‘국악(國樂)의 대중화’라는 식으로 수식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국악’이라는 용어가 시효를 상실했음을 알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이 축제가 표방하는 ‘우리 음악’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 음악’이 단지 관습적 의미의 ‘국악’이 아니라면 이 물음은 적잖이 복잡하고 민감하며,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에 의한, 말하자면 ‘음악적 시민권’에 대한 자기주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우락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지난 7월26일에 열렸던 ‘작은 밤의 노래’는 이 점에서 흥미로웠다. 지휘자 최수열이 이끌었던 이 음악회는 클래식 음악이 ‘우리 음악’이기 위한 조건을 묻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새삼스러운 물음들이다. 대금으로 슈베르트를 연주하면 ‘우리 음악’인가? 실내악 앙상블로 편곡된 아리랑을 연주하면? 여기에 적잖이 파격적인 물음이 더해졌다. 전통가곡 창자가 클래식 현대음악을 협연하면 ‘우리 음악’인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벤저민 브리튼의 연가곡 형식의 실내악 작품, <테너와 혼, 그리고 현을 위한 세레나데>에서 네 곡을 뽑아 가사를 한글로 번안했다. 그리고 일찍이 전위적 퍼포먼스를 통해 전통 가곡의 ‘현대음악화’를 실험해 온 여성 가객 박민희가 목소리 협연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그것은 전통음악 재료를 이용한 평범한 창작음악보다도 한층 더 위험하고 급진적인 크로스오버 연주 실험이라 할 만했다.

이날 음악회의 클라이맥스로 기대됐던 이 흥미로운 연주 실험은 유감스럽게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박민희가 부르는 브리튼의 노래는 악보에 기록된 난해한 음표들을 읽어 내는 데 급급해 전통 가곡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음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예술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했는데, 음악의 현대성과 진정성은 매끈하게 마름질된 성공보다는 미학적으로 예정된 실패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제도적으로 규정된 ‘국악’, 박제화된 ‘전통’만이 ‘우리 음악’으로 여겨졌을 때는 차라리 편했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나아가 최근 한국의 전통음악계 일반은 거침없이 크로스오버와 퓨전 그리고 대중화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되었다. 문화적 전 지구화 상황에서 새롭게 정체성 정치에 직면한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클래식까지 포함하여 재즈, 블루스, 포크, 록, 그리고 온갖 종류의 에스닉 음악의 뮤지션들이 ‘우리 음악’을 위한 시민권을 요청해 오고 있다. 이렇듯 ‘국민의 음악(국악)’이 아닌 ‘시민의 음악(우리 음악)’에 대한 광범위한 문화적 요청을 확인하게 해준 데에 여우락 페스티벌의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

하버마스가 말한 근대적 ‘문예공론장’으로서의 공공음악회는 시민적 주체의 자기탐구를 위한 공간이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저렴한 가격의 티켓이 한 등급으로 일원화돼 있다. 어떤 공감과 공통의 것을 창출하면서 ‘우리’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인가. 공공음악회의 미학적·인류학적 가치 중의 하나는 이런 질문을 은유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현실에서 개나 돼지 취급을 받는 한국인들이 가상으로나마 ‘우리’라는 이름의 평등한 공동체를 체험해볼 수 있는 것은 음악회와 축제에서뿐이지 않던가.

최유준 |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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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아들로 자란 터라 아버지의 사촌누이 그러니까 내게는 당고모 되시는 분의 자녀들인 재종형제만 찾아와도 반갑고 살가웠다. 재종형제는 촌수로 따지자면 육촌인지라 가깝다고 하기는 어려웠으나 두루 제사며 명절을 함께 치러 친형제나 사촌 못지않게 가깝게 느껴졌다. 그도 그런 재종형제 가운데 한 명이었다.

후미진 산골에 살던 나는 방학을 맞으면 도시에 살던 재종형제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내 또래였던 그는 도시에서 자란 녀석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듯 피부도 하얗고 키도 크고 말투에도 사투리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처음 그를 알게 되었던 초등학생 무렵 나는 그에게 가진 호기심만큼의 질투심도 지니고 있었다. 발등부터 장딴지까지 손등부터 이마까지 새까맣던 나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런 질투심 탓이었겠지만 나는 그에게 좀 으스대고 싶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 이를테면 알몸으로 웅덩이에 풍덩 뛰어들어 온몸에 거머리를 달고 나와서는 귀찮다는 듯 한 마리 한 마리 떼어낸다거나 참나무를 더듬어 집게벌레를 잡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녀석이 깜짝 놀랄 일들을 감행해서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호기롭게 보여준 모든 일들에 겁을 먹거나 진저리를 치는 대신 즐거워했다. 그는 시골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일들에 호기심을 보였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라 하며 차분하게 감탄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경탄했던 그의 매력이란 바로 내가 지겨워하고 심상해하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을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 것처럼 대하던 그의 태도였던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고 해마다 방학이 되면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여름 방학을 맞아 시골을 찾아온 그와 시냇가에 갔다.

그즈음의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게 있어서 내가 족대를 집어 들자 그가 양동이를 들고 따라나선 거였다. 우리는 시냇가에서 슬리퍼 신은 발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장맛비 그친 뒤의 시내는 물살이 제법 거셌던지라 그대로 들어가면 슬리퍼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시내에 맨발로 들어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당부가 떠오르긴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우리는 족대를 들고 맨발로 성큼성큼 시내로 들어섰다. 차가운 시냇물이 발목부터 무릎까지 휘감아 올라와서는 혓바닥처럼 장딴지를 간질였다. 우리는 기운차게 첨벙거리며 수초가 자란 곳들을 향해 족대를 밀고 나갔다.

이윽고 그가 짤막한 신음을 냈다. 나는 절룩이는 그를 부축해 시냇가로 빠져나왔다. 그의 발바닥에서 피가 아슴아슴 배어나왔다. 깨진 농약병 조각에 발바닥을 베인 듯했다. 나는 퍼뜩 겁이 났다. 도시에서 내려온 육촌형제를 무람없이 다치게 한 죄로 어른들에게 단단히 혼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이처럼 비겁한 생각에 잠겨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이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였다. ‘너는 매일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그러니 나도 괜찮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몰랐던 게 하나 있는데 평소의 나라면 결코 맨발로 시내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거였다. 나는 원래 겁쟁이니까.

그는 가끔 고개를 돌려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면서 절룩이며 걸어갔다. 그 이후 그는 시골에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저마다 바빠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저마다 바빠서 우리는 간신히 어른들이 나누는 말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부고를 들었다. 갓 스물을 넘긴 그가 등록금을 벌겠다며 하수도를 매설하는 공사에 잡부로 갔다가 구덩이에 매몰되어 죽었다. 그 당시 일당 삼만원.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청년들이 인간적인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오늘도 어딘가에서 죽어간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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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한창이던 아침, 고통으로 깨어났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귀가 후벼 파듯 아팠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중이염이란 판정을 받았다. 며칠이면 나아질 거라던 병이 몇 주가 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그사이 봄은 여름이 됐다. 거의 두 달간 아침마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을 닦아야 했다. 끼니마다 항생제를 먹어야 했다. 다행인 것은 어느 시점부터 통증이 사라졌고 고막이 부어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다행스러움의 원인이 계속되는 염증으로 인해 고막이 녹았기 때문이라는 게 불행이었지만.

고막이 녹고, 그 안쪽에 고름이 차오르면 당연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한쪽 청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불편함과 곤란함이 생겼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힘들어지는 게 불편하다. 한쪽 눈을 가리면 초점이 안 맞듯 한쪽 귀가 안 들려도 마찬가지다. 청각 정보의 절반이 날아가면서 귀에 들어오는 발음이 뿌옇게 된다. 짙은 안갯속을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기분이다. 이 불편함 때문에 한동안 약속을 아예 잡지 못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곤란함이었다. 평소에 주로 듣는, 록이나 일렉트로닉처럼 사운드와 비트가 강한 장르가 오른쪽 귀를 파고들면 고막 안이 울리면서 미세한 고통이 뇌까지 번지는 듯했다. 초기에 멋모르고 공연장에 갔다가 30분 만에 도망치듯 나온 후에는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 소식을 듣고도 한숨만 쉬어야 했다. 음악을 듣는 게 직업인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곧 강제휴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안 들려서 겪는 이 불편함과 곤란함에 비하면, 그 기간에 내려진 강제금주는 차라리 나았다. 간과 피부의 회복이라는 보상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병원을 옮겨 다닌 끝에 3차 의료기관에서만 처방가능하다는 신약을 먹었다. 딱 3일, 3일 만이었다. 거짓말처럼 고름이 멈췄다. 염증이 가라앉은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고막도 재생되기 시작했다. 텃밭의 상추를 따는 건 순간이지만 다시 자라는 건 느리듯, 소리를 잃은 건 하루아침이었지만 복원은 천천히 이뤄졌다. 답답했지만 좋았다. 아침과 저녁, 그 다음날의 변화와 차이를 조금씩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말을 되묻는 횟수가 줄어들고, 음악은 서서히 선명해졌으며, 메탈마저 예전처럼 들을 수 있게 됐다. 결국 얼마 전 열린 레코드 페어에서 음반을 잔뜩 사서 밤이 깊어가도록 턴테이블에 얹고 돌렸다. 음악이 온전히 들린다는 건, 양쪽의 풍성한 소리로 듣는다는 건, 음악이 일상이 되면서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쁨이었다. 음악에 빠져들던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한편으로는 ‘나아진다’는 상태가 사람에게 주는 활기가 놀라웠다. 흔한 말이지만 경험하기 힘든 그 상태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세대는 일생을 나아지는 상태로 살아왔다. 과거보다 현재가 풍요로웠고,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개념은 부지불식간에 현실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청년들의 역동성은 이를 바탕으로 생성된 것이었으리라. 경제, 정치가 양쪽으로 날갯짓하던 무렵 태어나 투표권을 가지게 된 세대들은 그리하여 결국 2002년 대선의 드라마의 한 축을 써내기까지 했다. 나아짐을 경험하며 자랐고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며 더 나아져야 한다는 확신이, 그럴 수 있던 힘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 세대다. 그 전과는 달리 88만원, 5포 등 처음으로 비관적 단어들로 명명된 세대들은 나아지는 사회를 살아본 적이 없다. 2008년 이래 경제지표는 끊임없이 안 좋아졌으며 체감경기는 지표 이상이었다. 나의 한 표로 정치적 지형이 변하는 기쁨도 거의 누려본 적이 없다.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은커녕, 기대조차 갖기 어려운 것이다. 부시 정권 8년간 나락으로 떨어졌던 미국은 ‘변화’를 기치로 내건 오바마 정권 8년 동안 어쨌건 나아졌다.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보장과 동성결혼 등 이전의 패권국가 미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긍정적 변화들이었다. 그런 변화를 우리는 ‘나아짐’이라고 한다. 서식지의 파괴가 극에 달하면 야생동물은 번식을 포기하고 멸종을 택한다. 유전자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계속되는 저출산으로 인구 절벽 앞에 선 한국 사회를 구출하는 근본 역시 나아진다는 경험의 복원일 것이다. 그제서야 미래를 포기하게 하는 안개가 걷히고 분노와 체념이 지배하는 현재가 바뀔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의 씨앗이나마 뿌릴 수 있으리라.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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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서 주인공은 반드시 서울말을 써야 한다는 오랜 관행이 지켜져 왔다. 오죽하면 광주 5·18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2007)에서조차 두 남녀 주인공은 서울말을 써야 했을까? 영화 속 두 주인공이 광주사투리를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사투리가 계속 희화화하고 있어 영화 자체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솔직하게 밝힌 적이 있다.

2010년 이후로 넘어오면서 그러한 관행이 조금씩 깨져가고 있는데, 올해 개봉된 영화 <곡성>은 꽤나 징후적이다. 이 영화에는 서울말을 쓰는 인물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서 전라도사투리가 아닌 언어라고는 과묵한 일본인이 단편적으로 구사하는 일본어뿐이다. 이것은 어떤 문화적 변동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일까?

시각에 비해 청각은 좀 더 신체에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장소와도 밀착되어 있다. 예컨대 토건세력과 결탁한 정부가 도시의 시각적 풍경을 동질화해도, 그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소 이분법적이지만, 시각이 근대성을 상징한다면 청각은 그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와 같은 해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서울말을 쓰는 주인공 신애(전도연)와 경상도사투리를 쓰는 지역민들 사이의 대조를 통해 이 점을 매우 예민하게 드러냈다. 신애가 부동산과 관련한 욕망을 내보인 뒤 지역 유괴범의 손에 아들을 잃게 된다는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이로써 역사적 은유를 얻게 된다. 한국의 근대화, 투기적 자본주의의 횡포가 만들어낸 희생자는 지역민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 유괴살인은 ‘서울사람’에 대한 지역민의 왜곡된 원한 감정과 관련된 것으로 은유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따라서 영화 <밀양>이 던지는 물음,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유괴범과 피해자 부모 사이의 문제로 그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주변화되고 타자화된 지역(들)의 정치적 소외와 관련된 문제이며, 나아가 ‘억압된 것의 귀환’에 직면한 역사적 주체의 자기화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신애의 집 마당에서 그녀의 거울을 잡아주는 밀양의 노총각 종찬(송강호)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결국 절망적인 상황 묘사 속에서도 주체와 타자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암시한다. ‘밀양’은 그렇게 어둠이 되어버린 ‘근대의 빛’을 향해 “비밀스러운 빛(密陽)”을 비추는 것이다.


영화 곡성의 한장면_경향DB



영화 <곡성>에서는 전면화된 사투리 사용을 통해 청각적 타자성을 더욱 과감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 사투리에 얽힌 장소성은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주체라 할 만한 존재도 미약하다.

영화 속 주인공 종구를 포함한 경찰들은 사실상 어린아이보다 나약해 보이며,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면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기는커녕 스스로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이 무기력한 시골 경찰들이 상대하는 적은 무려 ‘일본인’인 것이다. 이것은 전 지구화 시대의 ‘지역’이 처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지역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제 서울만이 아니다. 지역은 제 나름의 이국성(異國性)을 갖춘, 말하자면 한국 속의 ‘외국’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전라도사투리의 효과는 종구와 그의 딸이 구사하는 욕설에서 가장 빛난다. 고통과 불안, 분노에서 비롯된 그들의 욕설은 신체에서 직접적으로 터져나오는 비이성적 언어라는 점에서 사투리가 가진 청각적 타자성을 극대화한다. 영화 전반에서 전라도사투리의 사용은 위와 같은 타자성의 효과에 도구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여기서 사투리는 소통불가능한 현실을 경험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자기소외적 언어처럼 들린다.

영화 <밀양>의 ‘비밀스러운 빛’은 9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곡성>에 이르러 ‘통곡하는 소리(哭聲)’가 되었다. <밀양>이 제기했던 ‘화해’에 대한 물음은 오히려 오리무중 상태로 빠진 듯하다. <화려한 휴가>와는 달리 주인공들이 광주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영화 <광주>가 제작되는 날, 이 물음에 대한 또 다른 ‘빛’이 제시될 수 있을까?



최유준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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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에 앤디 워홀은 즐겨 다니던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화랑에서 재스퍼 존스와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를 접했다. 당시 존스는 성조기를,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캔버스 표면에 그대로 옮겨 그렸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2차원의 표면에 눈속임을 부여해 3차원의 환영을 만들고자 했던 르네상스 회화의 전통을 거부하고 캔버스의 평면성을 유지하면서도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이미지를 올려놓았다. 그림이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표명했던 것이다.

이에 영감을 얻은 워홀 역시 본래 평면인 기존 이미지를 캔버스 표면에 평면적으로(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밀착시켰다. 이처럼 워홀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 했고, 의도적으로 비개성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며 대중적인 이미지를 약간 변형함으로써 인생과 예술의 폭을 좁히려 했다.

이처럼 팝아트는 그 이전의 추상회화가 지나치게 작가의 개성, 독창성과 창조성을 강조하고 회화의 평면성에 집착하면서 이미지를 배제한 데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작업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워홀은 의도적으로 기존의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조수를 시켜 판화를 찍고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factory)’라 칭했다.

팝아트의 여러 전략은 그런 의도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된 것이다. 사실 현대미술은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 이후로 작가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관례에서 벗어났으며 차용과 선택이 보편화되었고 따라서 작가의 손작업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도 사실이다. 그런 것들을 흔히 개념적인 작업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런 것과는 달리 여전히 작가만의 손의 감각을 중시하는 작업도 분명 존재한다.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회화의 상당수가 그런 예다. 조수를 이용하고 공장시스템에서 주문 제작되는 방식의 작업과 손을 이용한 작업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우선적으로 표명되어야 하고 그 이유가 합당하게 개진되어야 하며 그것이 미술계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가수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하고 이를 자신의 작업으로 위장해 시장에 판매한 것에 대해 사기혐의를 받고 있다.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대신 그리게 한 것이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념적인 성향의 작업들이 조수를 시켜 제작하는 것이 관행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조수를 써야 하는 개념적인 작업도 아니고 그동안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말해왔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생각이다.

분명 동시대 미술을 구성하는 것의 하나가 작품 창작의 물리적인 노동은 전문 인력이 대체하고 작품의 브랜드를 작가 이름으로 사용하는 현상이며, 수많은 작가들이 조수를 동원해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주문-제작 관행’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주문-제작으로 얻은 작업을 기획하고, 감상하고, 호평해 온 갤러리와 관객과 평론이 부지불식간에 연루된 결과물이 그간 미술계의 관행임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반이정은 이번 사건을 “동시대 미술의 풍경 속에 굳게 자리한 비밀스러운 작동 원리가 본의 아니게 미술계 바깥으로 노출된 지극히 희귀한 사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그러한 지점이 현대미술에서 비록 보편적인 추이라 하더라도 이는 작업의 개념과 성격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조영남의 작가로서의 양심,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 현대미술과 작가에 대한 매우 위험한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전시할 수 있으며 판매할 수 있다. 문제는 전문성 및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전문성의 판단과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미술시장에서는 오직 작가의 지명도, 명성만이 지배한다.

그래서 연예인들의 작품은 비교적 손쉽게 판매된다. 조영남의 경우도 그것을 이용한 사례다. 작품 자체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평가에 의해 작품판매가 되지도 않는 것이 우리 미술판의 허접함이다.

따라서 조영남과 같은 이가 화가로 행세하고 미술 전문프로그램의 패널을 맡고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쓰는가 하면 전시를 하고 그 작품이 다수 판매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는 우선 화랑이 문제다. 그저 연예인의 명망성에 기대어 작품을 판매해 보려는 얄팍한 의도밖에 없기에 말이다. 전문성에 대한 평가와 작품을 보는 눈이 없기는 구매자들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작품을 구매하려면 진정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거나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고 논의되는 작품을 구입해야 하는 게 지극히 정상 아닌가?

물론 조영남을 진정으로 실력 있는 화가로, 그의 화투그림이 매우 뛰어난 그림이라고 믿고 있다면 할 말은 없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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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여느 부자가 그렇듯이 데면데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십 여 년을 부자지간으로 살아오면서 툭 터놓고 말을 나눈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몇 번 내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는데 기억에 남는 거짓말 가운데 하나는 초등학생 시절 유리 겔러가 한국을 방문해서 초능력 쇼를 할 때의 일이었다. 숟가락 구부리기에 실패해 풀 죽었던 나는 고장 난 손목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초능력에 기대를 걸었다.

마침 우리 집에는 고장 난 ‘스텐 손목시계’가 하나 있었고 나는 그걸 찾아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유리 겔러를 따라 ‘움직여!’하고 소리 질렀다.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마구 흔들어대자 바늘이 움직였던 거다. 아버지는 흔흔하게 웃으면서 장하다고 말해줬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칭찬이 썩 달갑지가 않았다. 그 손목시계가 원래 흔들어 대면 로터라는 추가 움직여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종류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초능력을 확인한 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버지에게 그 시절 시골집에 굴러다니는 소품이라기엔 무척 세련된 문명의 기기처럼 여겨지던 손목시계의 사연을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포탄이 바로 옆에서 터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전우는 죽고 당신만 살아남았으며 그 손목시계는 전우의 것인데 멈춘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이 바로 포탄이 떨어진 시간이라는 거였다. 베트남, 전쟁, 참전, 포탄, 전사 등등이 불러일으키는 낯설고 이국적인 이미지도 강렬하긴 했으나 무엇보다 어린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를 처음으로 엿본 듯해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전까지 알던 아버지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사연을 자랑삼아 친구들에게 풀어놓곤 했으며 친구들은 아버지를 영화의 주인공처럼 추켜올려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정도쯤이야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혜영 작품 아버지_프린트 베이커리



물론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아버지가 베트남은커녕 제주도에도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가장 최근의 거짓말은 십 년 안쪽의 일인데 그때 아버지는 추락사고로 목뼈에 심각한 금이 가서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담당의가 ‘까다로운 수술’이라고 말했을 때 단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수술이라는 뜻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수술을 하다 환자가 죽을 수도 있는 수술이라는 말로 들렸다. 환자의 보호자 입장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나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수술을 앞둔 아버지에게 집도의가 경추 수술 부문에서는 최고의 외과의며 그런 사람이 간단한 수술이라고 말했으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라는 둥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까 사실 나도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던 셈인데 아버지는 그 거짓말이 진짜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면서 처음으로 보게 된 고분고분한 아버지였다.

이윽고 수술 시간이 다가왔다. 이동침대에 아버지를 옮겨 뉘고 조무사와 함께 마취실로 향했다. 마취실 입구에서 조무사는 내게 보호자는 마취실에 들어갈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조무사가 어디론가 가버린 틈을 타 나는 마취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침대 옆에 선 채 아버지 손을 잡았다. 강제로 쫓아낼 때까지는 아버지 옆에 있을 작정이었다. 십 여 분이 흘렀다. 그사이 내가 아버지의 손을 쥔 건지 아버지가 내 손을 쥔 건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마취의는 내가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가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버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아버지의 손을 통해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아버지, 괜찮으시죠?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괜찮다. 말로는 그렇게 했으나 내 손을 쥔 아버지의 손은 단단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 그 손을 놓는 순간 내 몸의 일부마저 떨어져 나갈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가 내게 했던 거짓말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고 이 우아하고 품위 있는 거짓말이 마지막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손홍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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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다. 여전히 머리와 마음이 무겁다.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프리즘이 됐고 포스트잇으로 덮인 강남역 10번 출구는 추모와 충돌을 실시간으로 비추는 스크린이 됐다. 치료를 요할 만큼 정신이 아파본 적도 없고,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40년을 살아온 입장에서는 이 프리즘과 스크린을 보며 말을 아끼게 된다.

의도하지 않은 섣부름에 괜한 불편함을 더할까봐 그렇다. 하지만 이 신중함의 고려 대상에는 어떤 남성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사건의 가해자를 비난하고 희생자를 애도했으며, 평소 성범죄 관련 형량이 너무 낮은 게 아니냐고 비분강개하며, 선거 때 새누리당을 찍지 않은, 이 사건이 ‘여혐 살인’이 아닌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라며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남성들 말이다.

이 사건의 법적, 형사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도리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이 끄집어낸 평범한 여성들의 아픈 과거와 두려움이다. 그들이 털어놓은 고백에서 일상은 늘 보이지 않는 위험이었다. 밤거리, 혼자 타는 택시, 출퇴근 지하철에서 여성들은 마음이 편할 수 없다. 혹시 몰카라도 설치돼있을까봐 화장실 벽에 붙은 나사못이 두렵고, 밥벌이를 위한 사무실에서조차 성희롱은 유의미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국민안전처에서 제공하는 생활안전 서비스 지도에서 ‘여성 밤길 성폭력’ 항목을 체크한 후 내가 사는 홍대앞을 살펴봤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젊은이들이 모이는 그곳, 그중에서도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일수록 유혈이 낭자한 듯 지도가 시뻘겠다. 사람이 적은 곳이건, 많은 곳이건, 미어터져 나가는 곳이건, 불안은 공기 한쪽에 숨어 있다.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_경향DB

그래도 억울할 것이다. 내 주변에선 그런 여자를 본 적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당연하지. 초등학교 때 성폭행당한 것을 지나간 연애 이야기처럼 남성에게 털어놓을 여성이 얼마나 있겠나. 아직까지도 성폭행 피해가 주홍글씨가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런 극단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온갖 불쾌한 경험들이 역치 아래의 분노가 되어 묻히고 흘러간다. 만원 지하철속 의도치 않은 신체 접촉조차 불안과 의심으로 이어지는 건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어온 경험 때문이다.

여전히 억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활을 벗어나 미디어로 가보자. 한국에서 젊은 여성이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걸그룹이 되는 거다. 그조차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배우나 방송인에 비하면 그나마 진입 장벽이 낮다. 걸그룹이 된다는 건, 철저히 자신을 소비하는 남성들의 시선에 맞게 자신을 가공하는 것이다. 벗은 거에 진배없는 옷을 입고, 유사성행위에 가까운 춤을 추며, 유혹하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볼 때 평범한 소녀는 아이돌이 된다. 단, 전제가 있다. 함부로 자의식을 드러내면 안된다. 우리는 한창때의 아이돌이 욕망을 드러낼 때 어떤 봉변을 겪는지 설리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확인한 바 있다. 짜인 섹스 어필을 하면 열광의 대상이 되지만, 개인 SNS에서 욕망을 표현하면 논란의 타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거세된 채 남성들의 판타지에 맞춰 활동하는 걸그룹을, 일반 남성들은 ‘삼촌 팬’이란 안전장치 속에 숨은 채 수용한다. 그런데 실제 조카가 눈앞에서 그런 옷과 그런 춤을 선보이면 흐뭇해할 삼촌들이 얼마나 될까. 무엇보다 같은 아이돌을 해도 여성은 남성보다 활동상의 제약이 많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혐오는 상징적 단어다. 한국 사회에서의 성별 권력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다만, 그 장치에 비하와 성적 대상화, 복속시키고자 하는 인식 같은 것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일간베스트, 메갈리아로 대변되는 양극단의 행위에 분노할 필요는 없다. 심사할 때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나머지의 평균값으로 최종 점수를 매기듯, 이 사건의 여파로 드러나고 있는 여성들의 불안과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수용할 때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 성별을 막론하고 개인의 아픔이 보호받고, 욕망이 인정되는 사회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묶인다 해도, 당신이 손해볼 것은 고작해야 기분 나빠지는 것밖에는 없을 테니까.

<김작가 ㅣ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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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5·18민주화운동 주간 때마다 음악용어 때문에 어리둥절해진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것은 좋지만 ‘제창’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보훈처의 반복되는 입장표명 때문이다. 여기서 ‘합창’과 ‘제창’의 차이는 뭘까? 보훈처 홈페이지 게시판의 자료에 따르면, 기념식에서 “참여자에게 의무적으로 부르게 하는 것”이 ‘제창(齊唱)’인 반면, “합창단이 합창하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따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합창(合唱)’이라고 한다. 보훈처가 조선시대의 음악 관장 기관인 장악원(掌樂院)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5·18민주화운동기념일’과 같은 보훈처 지정 국가기념일은 총 45개다. 이들 기념일에 거행되는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포함한 기념 노래(‘현충일의 노래’, ‘개천절 노래’, ‘4·19의 노래’ 등)는 대부분 보훈처 식으로 ‘제창’된다. 그런데, 기념식의 ‘제창’에서 “의무적으로” 노래를 해야 하는 이들이란 일반 참석자들이라기보다는 기념식의 VIP들, 더 정확히는 기념식 중계 카메라에 포착돼 대중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정·관계의 귀빈 참석자들이다. ‘제창’이냐 ‘합창’이냐가 예민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취임 첫해였던 2013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5·18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았고 그런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보훈처의 의미규정상 “제창”이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님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제정과 ‘제창 허용’을 요구해 온 이들도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보훈처가 규정한 의미의 ‘제창’은 과연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의 역사적 의미에 부합할까? “참여자에게 의무적으로 부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제창’은 적절한 영어 번역어조차 찾기 어려운 비민주적이며 비음악적이기까지 한 용어다. ‘제창’이 정말 그런 뜻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합창’이면 족하다.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518민중항쟁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_이준헌 기자

제창을 합창으로, 예컨대 ‘애국가 제창’을 ‘애국가 합창’으로 바꿔 쓴다고 문제될 것은 조금도 없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활동을 기록한 ‘독립신문’에서, 해방 이후 건국의 벅찬 희망 속에 서술된 ‘동아일보’ 등의 신문기사에서 “애국가 합창”이란 표현은 수없이 등장한다. 근대 시민 민주주의의 음악적 표상인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부제도 한글 용어로 옮기자면 ‘제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합창’에는 색깔이 다른 목소리들을 함께 맞추어 간다는 민주적 의미가 담겨 있는 반면 “기미가요 제창”을 연상시키는 ‘제창’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기를 지나면서 획일적 군국주의와 국가주의에 오염됐다. 요컨대 모든 국가기념식의 기념 노래에 대해 ‘제창’을 없애고 ‘합창’으로 용어를 단일화한다면, ‘님을 위한 행진곡’ 논란도 자연스럽게 종식될 것이다. ‘국론분열’에 대한 음악학적 해법이다. 기념식의 기념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따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사실상 당연한 일 아닌가. 다만, ‘5·18 기념식’만이 아닌 모든 기념식 노래에 이 ‘합창’의 규정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음악이나 노래는 정치에 대한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나아가 일상의 여러 순간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졌으며, 그 진지한 음악적 의미화 과정은 대부분 5·18의 기억과 결부돼 있었다. 이 시기 ‘대통령 직접선거 개헌’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여느 기념곡들처럼 기념식의 귀빈들이 악보를 손에 쥐고 우물쭈물 ‘제창’하게 되는 노래가 아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시민들의 자발적 ‘합창’의 기억을 담고 있는 노래로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부르던 ‘애국가’와 닮았다. 두 노래의 가창 방식이 다르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최유준 ㅣ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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