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계를 뒤흔든 일련의 사건들이 개인의 윤리는 물론 집단 윤리의 부재와 결핍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법은 개인과 집단의 윤리를 최소한의 수준에서 합의하는 공공의 약속이다. 최근 미술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술시장 개혁과 미술진흥 관련 입법 논의가 일고 있다. 문체부가 추진하고 있는 미술품 유통 투명화 및 활성화 관련 법률과 미술진흥법 제정 논의가 그것이다. 이번 일은 이중섭, 박수근 등 근대 작가들을 비롯 천경자, 이우환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끊이지 않는 미술계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책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미술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술품 유통업 허가 및 등록제, 미술품 이력관리제, 미술품 감정사제도 및 미술품감정업 등록제, 화랑·경매·감정 겸업 금지, (가칭)국가미술품감정연구원 설립, 위작 유통 관련 범죄 처벌 명문화, 특별사법경찰제 도입 등의 구체적인 개혁입법안들이 논의 과정에 있다. 화랑과 경매, 감정 등 3개 영역의 주체들이 겹쳐 있는 것은 한국미술계의 문제점으로 꼽혀왔는데, 이 3각 연대체를 상호견제와 균형의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의지가 확고해 보인다. 미술시장 이해당사자들의 복잡한 구도가 얽혀 있어 입법화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자칫 시장 주체들을 개혁 대상으로 내몰아 역풍을 맞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 안팎의 합리적인 논의로 새로운 개혁의 주체를 세우는 데 뜻을 모을 시점이다.

미술진흥위원회와 한국미술재단 설립 조항을 둔 미술진흥법 논의에도 몇 가지 논쟁점이 있다. 하지만 일부 우려가 있다고 해서 입법 취지 자체를 낮게 평가할 일은 아니다. 이미 예술장르별로 진흥법 제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장르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중대 조치가 입법형태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서 차분하게 논의의 장을 열어 볼 일이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문화예술진흥법을 근거로 한 미술관 지원정책과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그리고 예술경영지원센터 사업이 상충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비해 꼼꼼한 상황 점검으로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 법안은 창작과 전시로 이뤄지는 표준계약서 및 아티스트 피 규정 등 다양한 지원과 규제 조항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거래되는 경우 그 이익의 일부를 저작권자에게 지급하는 작가보상금 제도 논의도 있다. 전시회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도 준비 중이다. 10년 전만 해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주느냐’며 볼멘소리하던 공무원들의 말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든다. 영화계나 공연계가 출연료로 예술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미술계에서도 출품료 개념을 정착해야 한다. 핵심은 한국미술진흥재단이다. 미술창작과 전시 및 유통, 미술문화 전반, 미술인력 양성, 미술은행 관리 등을 총괄하는 거대 기구가 탄생한다. 기존의 제도와 중복이나 상충하는 바가 없는지 현장의 의견을 들어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대목이다.

예술은 사회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규범이자 규칙이다. 따라서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본질과 현상을 담은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평이다. 예술비평은 예술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의식을 기반으로 가치의 문제를 논하는 공론의 장이다. 하지만 비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특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대목에서는 더 그렇다. 이런 경우의 문제해결을 위해 작동하는 제도가 바로 법률이다. 지금껏 개인의 윤리에 주목해서 특정 사안을 비판하기 바빴던 한국미술계로서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의 윤리를 재정립한다는 차원에서 미술개혁 입법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론을 모을 일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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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매미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러더니 날이 서늘해지고 바람이 분다. 지독한 여름 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지난여름은 몸이 힘들어 쉬는 날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올여름을 나기가 무척 힘이 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더운 날씨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정치소식이었다. 그것을 듣자면 울화가 치밀고 우울증이 마냥 심해지는 기분이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말을 듣기가 힘들었다. 소통되지 못하는 말들이 어지럽게 부유하고 내용 없는 말, 수사에 불과한 말, 억측과 궤변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달되고 증폭되고 다시 옮겨지는 방송과 신문의 행태도 놀랍기만 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 그리고 방송에 등장하는 온갖 평론가라는 이들의 말은 상당 부분 그것이 과연 어떤 사실에 근거해서 나온 말인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허황되고 거짓된 말들의 요란한 소음이 이 나라를 죄다 뒤덮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새삼 교육의 부재를 절감한다. 올바로 생각하고 그에 근거해 정확하게 말하는 방법, 그리고 그 말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구체성과 진실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두렵다. 이는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모든 곳에서 반복된다. 말에 대한 사실 여부와 진실의 정도가 논의되지 않고, 그 말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내용과는 무관한 수사나 공허한 개념어들이 춤을 추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우리에게 말은,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그저 수사에 불과하고 요식행위에 해당한다. 진실을 담고 사실에 근거하고 말하는 이의 세계관, 가치, 믿음을 반영하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림 그리는 이들 또한 자신의 그림에 대해 언어와 문자를 빌려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지만 결국 글과 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읽을 때마다 대부분 판독이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직접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술관 전시 관람에서 도슨트들이 해당 작품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 우연찮게 그 설명을 엿듣고 있자면 과연 그 말과 저 작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작품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가능한 한 그것을 정확하게 간결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너무 아쉬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케이블TV에서 방영하는 작가 아틀리에 탐방프로그램을 볼 때도 있는데 이때 작업실을 방문하는 대담자와 작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이게 한국어인지 외계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작가는 무슨 도인이나 신선처럼 자기 작품을 설명하고 있고 대담자는 감탄사와 놀라움만을 쏟아낼 뿐이다. 자신의 작업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동양정신을 구현한 작업”, “무극에서 무극으로 가는 여정”, “수신의 과정” 등으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치 대단한 사상가나 도사처럼 말하고 있는 모습, 그 허위의식과 말의 가벼움과 공허함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과도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상당수 작가들은 예술가란 고매한 사상과 철학으로 무장한 이가 되어야 하고 그런 것으로 포장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강박증 환자들 같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때, 또는 방송이나 언론에서 미술작품을 설명하거나 전시를 소개하는 말과 글 역시 마찬가지다. 한결같은 수사와 공허한 말투, 똑같은 문장의 반복이다. 그와 같은 말들은 미술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개별성,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나 의미에 대해 어떠한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침묵한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이 나라 정치판이나 미술판이나 공허한 수사와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말들이 앞서면서 내용을 속이거나 감싸고 있음을 본다. 새삼 정확한 말의 소통을 꿈꿔본다. 그것은 단지 말의 차원만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내용의 확보를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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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이 열렸다. 열한번째 행사였다. 2006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이 페스티벌을 다녔다. 모든 라인업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페스티벌만은 꼭 가야 한다는 당위 같은 게 언제부턴가 있었다. 의리라 불러도 좋다. 1999년의 기록적 폭우로 하루 만에 취소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이후, 수년간 ‘이 땅에서 록 페스티벌은 안된다’는 자조 같은 게 있었다. 이를 깨부순 첫번째 사례가 펜타포트였다. 2006년 3일간의 행사를 ‘완수’한 후 페스티벌은 조금씩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지분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거품도 잠시나마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한국은 최소한 매달 한 두 개의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나라가 됐다. 그 시발점 중의 하나이자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게 펜타포트다. 그러니 음악 애호가로서, 그리고 록 페스티벌을 열망했던 한때의 젊은이로서 펜타포트에 의리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14일 오후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열린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불꽃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인천시 제공 = 연합뉴스

이번 펜타포트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들이 있었다. 한동안 페스티벌이나 공연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대답은 하나같았다. 누군가의 아빠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오랜만에 거대한 무대 앞으로, 너른 잔디밭으로 놀러 온 것이다. 아이를 데려온 이도 있었고, 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펜타포트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들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친구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공연장과 술집 등 홍대앞이 보다 음악적 지역이었던 시절의 공간에서 놀았던 이들이다. 누군가가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된다는 생각 따위 없이 그저 놀았다. 철들기 싫다며 놀았다. 세월은 모두에게 흐르고 인간관계에도 유통 기한은 존재하는 법.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갔다. 남은 이들과의 세월은 자연스레 흘렀다. 청첩장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출산 소식을 듣고 돌잔치에도 참가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떠나간 이들과의 유통 기한은 종종 끊겼다. 남은 이들끼리의 대화에 등장하는 빈도도 줄어들더니, 결국 사라지곤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멀어져 자신의 세계를 살아온 이들과 우리의 세계에서 다시 만났다. 어색하지만 아득했다.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느낌이었달까. 그중 압권은 한 부부를 만났을 때였다. “형, 기억 안 나요? 우리가 2006년 펜타포트에서 만나서 사귀게 된 거잖아요.” 물론 기억할 리가 없었지만 “아, 그랬지”하며 얼버무렸다. 내 기억은 당시에 남자가 여자를 슬쩍 마음에 두고 있는 정도였는데 아무튼, 중요한 건 그들이 다섯살 된 아들과 함께였다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문장 하나가 감정으로 박혔다. 하나의 시대가 완전히 지나갔구나 하는, 일종의 생경한 탄식이.

이번 펜타포트에 참여한 해외의 동시대 밴드들 중 록의 고전을 리메이크한 팀들이 있었다. 패닉 앳 더 디스코가 부른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90년대에도 이미 고전이었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룹 러브가 비스티 보이스의 ‘사보타지’를, 낫싱 벗 띠브스가 픽시스의 ‘웨어 이즈 마이 마인드’를 부를 때는 90년대 명곡들이 이제 클래식의 영역으로 넘어갔음에 얄궂은 기분이 들었다. 두번째 날의 헤드라이너이자, 90년대의 영웅이었던 위저는 아예 작심하고 초·중기의 히트곡들을 중심으로 연주했다. 얼마나 명곡이 많은지 메들리로 묶어서 부를 정도였다. 옛 친구들의 얼굴을 가장 많이 본 시간도 그때였다. 첫번째 펜타포트에서 썸을 탔는지 사귀게 됐는지 어쨌든 지금은 부부가 된 커플도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거기 있었다.

열한번째 펜타포트에서도 썸 또는 커플은 탄생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부부의 연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이를 데리고 페스티벌에 찾아올 여유를 허락받게 될 때 송도에서 여전히 펜타포트의 커다란 무대가 기다리고 있을까. 한 세대가 또 다른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 줌으로써 역사의 탑은 쌓인다. 지난 펜타포트의 세월이 그 주춧돌이 되길, 앞으로의 시간이 기둥이 되길 바란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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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은 적이 없다 해도 “무심한 이의 입을 통해 그이의 죽음을 듣게 되었네. 무심히 나는 그 소식을 들었네”라는 구절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젊은 시절에는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조차 무심한 이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삶의 지리멸렬함에 마음이 더 끌렸다면 지금은 그런 소식조차 무심하게 들을 수밖에 없게 된 살아남은 자의 회한에 마음이 더 끌린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느낄 수밖에 없는 참담함을 강조하거나 과장하기는커녕 외려 ‘무심히’라고 표현한 태도에 담긴 진심이 더욱 애틋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나 역시 그런 순간에 맞닥뜨리곤 한다. 얼마 전의 일이다. 서평을 청탁받은 책을 펼치다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 한 작가의 이름 앞에 내 눈길이 무심히 머물렀다. 약력을 읽고 나서야 그이가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책을 덮고 우연히 알게 된 그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암향처럼 내 주변에 고이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터키의 소설가 야사르 케말이다. 여러 해 전 터키에 반년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체류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여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통역해 줄 분과 함께 숙소를 나서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안을 오가는 연락선을 타고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가던 날은 맑고 쌀쌀한 겨울이었다.

내가 만났을 무렵의 그는 파킨슨병을 앓은 지 오래된 여든여덟 살의 평범한 노인이었다. 우리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서재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수히 많은 배들이 느릿느릿 해협을 통과해 갔다. 어느새 사위는 어두워졌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이미 하나의 추억이 되어갈 때 어쩐지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인 것만 같고 쓸모없는 것만 같아 가슴이 허우룩해졌다.

물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쩌면 그가 불편했을 수도 있는 질문들, 예를 들어 오르한 파묵과 스스로를 비교해달라거나 아지즈 네신과의 문학적 지향점의 차이를 설명해달라는 식으로 노작가의 입장에서 마땅치 않았을 질문들도 했고 그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대답도 들었던 터라 아쉬움이 있을 리 없었음에도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은 것만 같고 정말로 해야 할 말을 나누지 못한 것만 같아 쓸쓸해졌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런 나의 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공산주의자이며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탄압을 받았지만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고 마찬가지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눈과 노안으로 침침해진 눈, 이렇게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결코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튀르크인의 나라에서 소수 민족인 쿠르드인으로 태어나 자신의 모국어인 쿠르드어가 아닌 튀르크어로 소설을 써왔던 한 사람은, 가난한 이와 힘없는 이를 사랑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를 사랑했던 한 사람은 이제 없다. 나는 신념을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온 그의 사람됨이 부러웠고 그가 소설을 쓰며 고뇌하던 시간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흔하고 볼품없으나 분명히 나보다 인생의 비밀에 더 가까이 다가갔을 사람들과 그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부러웠다. 언제나 내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그 무수한 비밀들, 사람들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앉아 이야기가 되길 기다리는 비밀들을 배신하며 살아온 것 같아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나는 무심히 내 앞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으며 앞으로는 그의 유작으로만 그를 만나게 될 것임을 알고 조용히 책을 펼쳤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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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큼 무식하고 용감하게 로마자를 학대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한 로마자 표기법이 있지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은 제각각이다. 지명이나 기관명 등 공공영역에서 관할하는 표기는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고 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로 넘어가면 ‘식민스럽기’ 짝이 없다. 김씨는 킴(Kim)씨로 돌변하고, 박씨는 파크(Park), 이씨는 리(Lee), 전씨는 춘(Chun), 최씨는 초이(Choi)로 둔갑한다. 김준기를 ‘Gim Jungi’로 표기하면 ‘짐준지’로 읽어버리는 왜곡된 로마자 인식은 일제가 종용했던 창씨개명을 떠올릴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문자는 공동체가 약속한 고유한 규칙이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있어 대한민국은 문자공동체로서의 면모가 현격히 떨어지는 미성숙한 국가다. 해방 후 나라를 세운 지 이제 겨우 70년 지난 신생 국가의 한계다. 일본과 중국은 각자의 문자체계에 맞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을 체계화했다. 한국도 로마자 표기법을 정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있어서는 태반이 문맹 수준이다.

한글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일은 각자의 취향대로 할 일이 아니라 통일된 문자체계로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수천년 운운하는 문화국가라고 하지만, 조선의 언어가 중국과 달라 서로 맞지 않아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들어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근대를 겪으며 서양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문화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마자 표기와 영어 표기를 동일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은 미국이고 미국인이 쓰는 말인 영어를 쓰는 것이 곧 한글의 음운체계를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이다. 한국인 여권에 적힌 로마자 이름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면, 미국인 기준에 맞춘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글의 소리값을 외국인들이 알아채도록 알파벳으로 쓰는 것은 영어를 쓰는 게 아니라 로마자를 빌려쓰는 것이다. 세상에는 영미권 외에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로마자를 뿌리로 하는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다.

문화사대주의 관점은 문장이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의 문화에 맞춰 성과 이름을 뒤바꿔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철수’가 ‘철수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인의 대다수는 ‘마이 네임 이즈 마오 쩌뚱’이라고 한다. ‘쩌뚱 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일본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토로 동아시아 질서를 거부하고 서구와 손잡으며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생각 때문인지, 대다수가 ‘하루키 무라카미’라고 한다. 한국인도 절반 이상이 뒤집는다.

자국의 문화를 서구의 잣대에 맞게 왜곡하려 드는 이 습성은 문화식민주의 태도다.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는 중심주의 사고를 스스로 내면화한 나머지 우리 스스로 문화제국주의의 논리에 발맞추고 있다. 성명의 로마자 표기 오류를 지적하면 어릴 적 멋모르고 적어낸 여권의 로마자 표기를 바꿀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둔다는 이들도 많다. 정부와 국회는 식민주의 청산 차원에서 법제도를 정비하고 정책수단을 동원하고 문화적 굴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원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문화사회로 가는 기본이다. 한국사회의 표준에 관한 인식은 지나치게 느슨하다. 표준이 있은 후에라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상력이 발동할 수 있다. 문자표기 하나 표준에 따라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원칙과 상식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표준은 공동체의 약속이다. 표준이 없는 사회는 약속을 지킬 수 없고 그만큼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미성숙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로마자 표기를 바르게 하는 것은 문화식민주의를 극복하는 일상의 실천이자 문화적 규칙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본을 키우는 일이다.

김준기 | 미술평론가·예술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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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작은 그림에 바짝 달라붙어 보고 있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보러 온 사람들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이고 특히 ‘비운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신화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문인들의 글이 한몫을 했다.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그림에 관한 객관적인 평보다는 그의 삶에 대한 다소 드라마틱하고 과장된 것들이 많았다.

이중섭의 고향은 평남 평원이지만 17세 때 이후 원산에 정착했다. 일본 체류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0년 12월4일, 월남하기까지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원산이다. 분단으로 인해 가볼 수 없는 곳이 됐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원산의 풍경과 그곳의 정황에 대해 적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홀로 남하해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죄의식을 번민처럼 간직한 아버지는 평생 알코올에 의지해 사셨다.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무능하게 살다 돌아가셨던 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원망이 더 컸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도 같다. 이중섭이 남긴 그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들은 모두 모친을 두고 가족과 함께 남하해 거지처럼 떠돌며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그린 것들이다. 이후 가족과 헤어지고 거주할 곳도 없이 부유하면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더구나 그림 재료나 판매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극한 상황에서도 지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것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또한 그것이 진정 화가의 삶이라 여겼던 이다.

그와 절친했던 시인 구상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대포 집 목로주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량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천직이 화공이라고 자처한 이중섭은 그림으로써 생활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화가이겠는가라는 생각에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술가적 기질과 근성에 기반을 둔 것이자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만을 그렸다. 이처럼 그의 모든 그림은 철저히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체험과 고통, 그 안에서의 희구로 점철돼 있다. 이중섭의 삶 자체는 곧 예술이고 그림은 그의 분신이었다. 순간순간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모든 열정을 쏟아가며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이 내게는 나를 말하는 수단 밖에 다른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대다수 작가들의 그림이 특정한 소재를 특정한 방법으로 그리는 것으로 관습화돼 있었다면 이로부터 벗어난 이는 이중섭과 박수근 같은 경우가 거의 유일하다. 이 둘은 모두 자신들의 삶의 체험, 주어진 현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그것을 올바로 재현하기 위한 방법론에 천착했으며 그로 인해 전통의 계승과 민족미학의 구현이란 과제에도 도달한 경우다.

반면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상당수는 작가들의 삶과 유리돼 있다. 자신의 삶에서 미술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작품을 슬쩍 흉내 내거나 현학적인 현대미술의 이론이나 개념을 빌려 그럴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작업이 되고 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폼을 잡는 것이 오늘날 미술이 됐다는 얘기다.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허위의식이고 속임수며 일종의 사기다. 그런 작업은 하등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 안에서 작가가 체험하고 인식하고 깨달은 것, 진실한 육성과 그만의 감각 및 삶의 결 같은 것은 결코 느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차가운 모조품이거나 영혼 없는 박제일 뿐이다. 미술 역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오로지 자기 몸으로 살아내는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 이중섭의 전시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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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여우락(樂) 페스티벌’이 있다. ‘여우락’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를 줄인 말이다. 올해로 7회째를 맞은 이 음악축제는 한국 전통음악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믿기 어려운 수준의 유료 객석 점유율을 자랑한다. 초창기부터 양방언 등과 같은 대중적 음악가들을 내세워 축제의 성격을 크로스오버와 퓨전에 맞추고, ‘여우톡’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관객의 접근성을 높였다. 장르 혼합 시도는 올해 더욱 과감해져 재즈 연주자들은 물론 송창식과 같은 대중음악가들, 심지어 서울시향 부지휘자 최수열이 지휘하는 클래식 앙상블의 무대까지 수용했다.

이쯤 되면 이 축제의 성공을 ‘국악(國樂)의 대중화’라는 식으로 수식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국악’이라는 용어가 시효를 상실했음을 알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이 축제가 표방하는 ‘우리 음악’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 음악’이 단지 관습적 의미의 ‘국악’이 아니라면 이 물음은 적잖이 복잡하고 민감하며,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에 의한, 말하자면 ‘음악적 시민권’에 대한 자기주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우락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지난 7월26일에 열렸던 ‘작은 밤의 노래’는 이 점에서 흥미로웠다. 지휘자 최수열이 이끌었던 이 음악회는 클래식 음악이 ‘우리 음악’이기 위한 조건을 묻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새삼스러운 물음들이다. 대금으로 슈베르트를 연주하면 ‘우리 음악’인가? 실내악 앙상블로 편곡된 아리랑을 연주하면? 여기에 적잖이 파격적인 물음이 더해졌다. 전통가곡 창자가 클래식 현대음악을 협연하면 ‘우리 음악’인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벤저민 브리튼의 연가곡 형식의 실내악 작품, <테너와 혼, 그리고 현을 위한 세레나데>에서 네 곡을 뽑아 가사를 한글로 번안했다. 그리고 일찍이 전위적 퍼포먼스를 통해 전통 가곡의 ‘현대음악화’를 실험해 온 여성 가객 박민희가 목소리 협연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그것은 전통음악 재료를 이용한 평범한 창작음악보다도 한층 더 위험하고 급진적인 크로스오버 연주 실험이라 할 만했다.

이날 음악회의 클라이맥스로 기대됐던 이 흥미로운 연주 실험은 유감스럽게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박민희가 부르는 브리튼의 노래는 악보에 기록된 난해한 음표들을 읽어 내는 데 급급해 전통 가곡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음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예술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했는데, 음악의 현대성과 진정성은 매끈하게 마름질된 성공보다는 미학적으로 예정된 실패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제도적으로 규정된 ‘국악’, 박제화된 ‘전통’만이 ‘우리 음악’으로 여겨졌을 때는 차라리 편했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나아가 최근 한국의 전통음악계 일반은 거침없이 크로스오버와 퓨전 그리고 대중화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되었다. 문화적 전 지구화 상황에서 새롭게 정체성 정치에 직면한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클래식까지 포함하여 재즈, 블루스, 포크, 록, 그리고 온갖 종류의 에스닉 음악의 뮤지션들이 ‘우리 음악’을 위한 시민권을 요청해 오고 있다. 이렇듯 ‘국민의 음악(국악)’이 아닌 ‘시민의 음악(우리 음악)’에 대한 광범위한 문화적 요청을 확인하게 해준 데에 여우락 페스티벌의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

하버마스가 말한 근대적 ‘문예공론장’으로서의 공공음악회는 시민적 주체의 자기탐구를 위한 공간이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저렴한 가격의 티켓이 한 등급으로 일원화돼 있다. 어떤 공감과 공통의 것을 창출하면서 ‘우리’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인가. 공공음악회의 미학적·인류학적 가치 중의 하나는 이런 질문을 은유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현실에서 개나 돼지 취급을 받는 한국인들이 가상으로나마 ‘우리’라는 이름의 평등한 공동체를 체험해볼 수 있는 것은 음악회와 축제에서뿐이지 않던가.

최유준 |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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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아들로 자란 터라 아버지의 사촌누이 그러니까 내게는 당고모 되시는 분의 자녀들인 재종형제만 찾아와도 반갑고 살가웠다. 재종형제는 촌수로 따지자면 육촌인지라 가깝다고 하기는 어려웠으나 두루 제사며 명절을 함께 치러 친형제나 사촌 못지않게 가깝게 느껴졌다. 그도 그런 재종형제 가운데 한 명이었다.

후미진 산골에 살던 나는 방학을 맞으면 도시에 살던 재종형제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내 또래였던 그는 도시에서 자란 녀석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듯 피부도 하얗고 키도 크고 말투에도 사투리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처음 그를 알게 되었던 초등학생 무렵 나는 그에게 가진 호기심만큼의 질투심도 지니고 있었다. 발등부터 장딴지까지 손등부터 이마까지 새까맣던 나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런 질투심 탓이었겠지만 나는 그에게 좀 으스대고 싶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 이를테면 알몸으로 웅덩이에 풍덩 뛰어들어 온몸에 거머리를 달고 나와서는 귀찮다는 듯 한 마리 한 마리 떼어낸다거나 참나무를 더듬어 집게벌레를 잡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녀석이 깜짝 놀랄 일들을 감행해서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호기롭게 보여준 모든 일들에 겁을 먹거나 진저리를 치는 대신 즐거워했다. 그는 시골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일들에 호기심을 보였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라 하며 차분하게 감탄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경탄했던 그의 매력이란 바로 내가 지겨워하고 심상해하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을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 것처럼 대하던 그의 태도였던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고 해마다 방학이 되면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여름 방학을 맞아 시골을 찾아온 그와 시냇가에 갔다.

그즈음의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게 있어서 내가 족대를 집어 들자 그가 양동이를 들고 따라나선 거였다. 우리는 시냇가에서 슬리퍼 신은 발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장맛비 그친 뒤의 시내는 물살이 제법 거셌던지라 그대로 들어가면 슬리퍼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시내에 맨발로 들어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당부가 떠오르긴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우리는 족대를 들고 맨발로 성큼성큼 시내로 들어섰다. 차가운 시냇물이 발목부터 무릎까지 휘감아 올라와서는 혓바닥처럼 장딴지를 간질였다. 우리는 기운차게 첨벙거리며 수초가 자란 곳들을 향해 족대를 밀고 나갔다.

이윽고 그가 짤막한 신음을 냈다. 나는 절룩이는 그를 부축해 시냇가로 빠져나왔다. 그의 발바닥에서 피가 아슴아슴 배어나왔다. 깨진 농약병 조각에 발바닥을 베인 듯했다. 나는 퍼뜩 겁이 났다. 도시에서 내려온 육촌형제를 무람없이 다치게 한 죄로 어른들에게 단단히 혼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이처럼 비겁한 생각에 잠겨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이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였다. ‘너는 매일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그러니 나도 괜찮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몰랐던 게 하나 있는데 평소의 나라면 결코 맨발로 시내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거였다. 나는 원래 겁쟁이니까.

그는 가끔 고개를 돌려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면서 절룩이며 걸어갔다. 그 이후 그는 시골에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저마다 바빠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저마다 바빠서 우리는 간신히 어른들이 나누는 말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부고를 들었다. 갓 스물을 넘긴 그가 등록금을 벌겠다며 하수도를 매설하는 공사에 잡부로 갔다가 구덩이에 매몰되어 죽었다. 그 당시 일당 삼만원.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청년들이 인간적인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오늘도 어딘가에서 죽어간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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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한창이던 아침, 고통으로 깨어났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귀가 후벼 파듯 아팠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중이염이란 판정을 받았다. 며칠이면 나아질 거라던 병이 몇 주가 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그사이 봄은 여름이 됐다. 거의 두 달간 아침마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을 닦아야 했다. 끼니마다 항생제를 먹어야 했다. 다행인 것은 어느 시점부터 통증이 사라졌고 고막이 부어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다행스러움의 원인이 계속되는 염증으로 인해 고막이 녹았기 때문이라는 게 불행이었지만.

고막이 녹고, 그 안쪽에 고름이 차오르면 당연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한쪽 청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불편함과 곤란함이 생겼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힘들어지는 게 불편하다. 한쪽 눈을 가리면 초점이 안 맞듯 한쪽 귀가 안 들려도 마찬가지다. 청각 정보의 절반이 날아가면서 귀에 들어오는 발음이 뿌옇게 된다. 짙은 안갯속을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기분이다. 이 불편함 때문에 한동안 약속을 아예 잡지 못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곤란함이었다. 평소에 주로 듣는, 록이나 일렉트로닉처럼 사운드와 비트가 강한 장르가 오른쪽 귀를 파고들면 고막 안이 울리면서 미세한 고통이 뇌까지 번지는 듯했다. 초기에 멋모르고 공연장에 갔다가 30분 만에 도망치듯 나온 후에는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 소식을 듣고도 한숨만 쉬어야 했다. 음악을 듣는 게 직업인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곧 강제휴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안 들려서 겪는 이 불편함과 곤란함에 비하면, 그 기간에 내려진 강제금주는 차라리 나았다. 간과 피부의 회복이라는 보상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병원을 옮겨 다닌 끝에 3차 의료기관에서만 처방가능하다는 신약을 먹었다. 딱 3일, 3일 만이었다. 거짓말처럼 고름이 멈췄다. 염증이 가라앉은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고막도 재생되기 시작했다. 텃밭의 상추를 따는 건 순간이지만 다시 자라는 건 느리듯, 소리를 잃은 건 하루아침이었지만 복원은 천천히 이뤄졌다. 답답했지만 좋았다. 아침과 저녁, 그 다음날의 변화와 차이를 조금씩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말을 되묻는 횟수가 줄어들고, 음악은 서서히 선명해졌으며, 메탈마저 예전처럼 들을 수 있게 됐다. 결국 얼마 전 열린 레코드 페어에서 음반을 잔뜩 사서 밤이 깊어가도록 턴테이블에 얹고 돌렸다. 음악이 온전히 들린다는 건, 양쪽의 풍성한 소리로 듣는다는 건, 음악이 일상이 되면서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쁨이었다. 음악에 빠져들던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한편으로는 ‘나아진다’는 상태가 사람에게 주는 활기가 놀라웠다. 흔한 말이지만 경험하기 힘든 그 상태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세대는 일생을 나아지는 상태로 살아왔다. 과거보다 현재가 풍요로웠고,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개념은 부지불식간에 현실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청년들의 역동성은 이를 바탕으로 생성된 것이었으리라. 경제, 정치가 양쪽으로 날갯짓하던 무렵 태어나 투표권을 가지게 된 세대들은 그리하여 결국 2002년 대선의 드라마의 한 축을 써내기까지 했다. 나아짐을 경험하며 자랐고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며 더 나아져야 한다는 확신이, 그럴 수 있던 힘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 세대다. 그 전과는 달리 88만원, 5포 등 처음으로 비관적 단어들로 명명된 세대들은 나아지는 사회를 살아본 적이 없다. 2008년 이래 경제지표는 끊임없이 안 좋아졌으며 체감경기는 지표 이상이었다. 나의 한 표로 정치적 지형이 변하는 기쁨도 거의 누려본 적이 없다.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은커녕, 기대조차 갖기 어려운 것이다. 부시 정권 8년간 나락으로 떨어졌던 미국은 ‘변화’를 기치로 내건 오바마 정권 8년 동안 어쨌건 나아졌다.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보장과 동성결혼 등 이전의 패권국가 미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긍정적 변화들이었다. 그런 변화를 우리는 ‘나아짐’이라고 한다. 서식지의 파괴가 극에 달하면 야생동물은 번식을 포기하고 멸종을 택한다. 유전자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계속되는 저출산으로 인구 절벽 앞에 선 한국 사회를 구출하는 근본 역시 나아진다는 경험의 복원일 것이다. 그제서야 미래를 포기하게 하는 안개가 걷히고 분노와 체념이 지배하는 현재가 바뀔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의 씨앗이나마 뿌릴 수 있으리라.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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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서 주인공은 반드시 서울말을 써야 한다는 오랜 관행이 지켜져 왔다. 오죽하면 광주 5·18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2007)에서조차 두 남녀 주인공은 서울말을 써야 했을까? 영화 속 두 주인공이 광주사투리를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사투리가 계속 희화화하고 있어 영화 자체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솔직하게 밝힌 적이 있다.

2010년 이후로 넘어오면서 그러한 관행이 조금씩 깨져가고 있는데, 올해 개봉된 영화 <곡성>은 꽤나 징후적이다. 이 영화에는 서울말을 쓰는 인물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서 전라도사투리가 아닌 언어라고는 과묵한 일본인이 단편적으로 구사하는 일본어뿐이다. 이것은 어떤 문화적 변동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일까?

시각에 비해 청각은 좀 더 신체에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장소와도 밀착되어 있다. 예컨대 토건세력과 결탁한 정부가 도시의 시각적 풍경을 동질화해도, 그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소 이분법적이지만, 시각이 근대성을 상징한다면 청각은 그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와 같은 해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서울말을 쓰는 주인공 신애(전도연)와 경상도사투리를 쓰는 지역민들 사이의 대조를 통해 이 점을 매우 예민하게 드러냈다. 신애가 부동산과 관련한 욕망을 내보인 뒤 지역 유괴범의 손에 아들을 잃게 된다는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이로써 역사적 은유를 얻게 된다. 한국의 근대화, 투기적 자본주의의 횡포가 만들어낸 희생자는 지역민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 유괴살인은 ‘서울사람’에 대한 지역민의 왜곡된 원한 감정과 관련된 것으로 은유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따라서 영화 <밀양>이 던지는 물음,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유괴범과 피해자 부모 사이의 문제로 그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주변화되고 타자화된 지역(들)의 정치적 소외와 관련된 문제이며, 나아가 ‘억압된 것의 귀환’에 직면한 역사적 주체의 자기화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신애의 집 마당에서 그녀의 거울을 잡아주는 밀양의 노총각 종찬(송강호)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결국 절망적인 상황 묘사 속에서도 주체와 타자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암시한다. ‘밀양’은 그렇게 어둠이 되어버린 ‘근대의 빛’을 향해 “비밀스러운 빛(密陽)”을 비추는 것이다.


영화 곡성의 한장면_경향DB



영화 <곡성>에서는 전면화된 사투리 사용을 통해 청각적 타자성을 더욱 과감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 사투리에 얽힌 장소성은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주체라 할 만한 존재도 미약하다.

영화 속 주인공 종구를 포함한 경찰들은 사실상 어린아이보다 나약해 보이며,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면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기는커녕 스스로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이 무기력한 시골 경찰들이 상대하는 적은 무려 ‘일본인’인 것이다. 이것은 전 지구화 시대의 ‘지역’이 처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지역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제 서울만이 아니다. 지역은 제 나름의 이국성(異國性)을 갖춘, 말하자면 한국 속의 ‘외국’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전라도사투리의 효과는 종구와 그의 딸이 구사하는 욕설에서 가장 빛난다. 고통과 불안, 분노에서 비롯된 그들의 욕설은 신체에서 직접적으로 터져나오는 비이성적 언어라는 점에서 사투리가 가진 청각적 타자성을 극대화한다. 영화 전반에서 전라도사투리의 사용은 위와 같은 타자성의 효과에 도구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여기서 사투리는 소통불가능한 현실을 경험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자기소외적 언어처럼 들린다.

영화 <밀양>의 ‘비밀스러운 빛’은 9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곡성>에 이르러 ‘통곡하는 소리(哭聲)’가 되었다. <밀양>이 제기했던 ‘화해’에 대한 물음은 오히려 오리무중 상태로 빠진 듯하다. <화려한 휴가>와는 달리 주인공들이 광주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영화 <광주>가 제작되는 날, 이 물음에 대한 또 다른 ‘빛’이 제시될 수 있을까?



최유준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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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에 앤디 워홀은 즐겨 다니던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화랑에서 재스퍼 존스와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를 접했다. 당시 존스는 성조기를,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캔버스 표면에 그대로 옮겨 그렸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2차원의 표면에 눈속임을 부여해 3차원의 환영을 만들고자 했던 르네상스 회화의 전통을 거부하고 캔버스의 평면성을 유지하면서도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이미지를 올려놓았다. 그림이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표명했던 것이다.

이에 영감을 얻은 워홀 역시 본래 평면인 기존 이미지를 캔버스 표면에 평면적으로(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밀착시켰다. 이처럼 워홀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 했고, 의도적으로 비개성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며 대중적인 이미지를 약간 변형함으로써 인생과 예술의 폭을 좁히려 했다.

이처럼 팝아트는 그 이전의 추상회화가 지나치게 작가의 개성, 독창성과 창조성을 강조하고 회화의 평면성에 집착하면서 이미지를 배제한 데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작업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워홀은 의도적으로 기존의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조수를 시켜 판화를 찍고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factory)’라 칭했다.

팝아트의 여러 전략은 그런 의도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된 것이다. 사실 현대미술은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 이후로 작가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관례에서 벗어났으며 차용과 선택이 보편화되었고 따라서 작가의 손작업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도 사실이다. 그런 것들을 흔히 개념적인 작업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런 것과는 달리 여전히 작가만의 손의 감각을 중시하는 작업도 분명 존재한다.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회화의 상당수가 그런 예다. 조수를 이용하고 공장시스템에서 주문 제작되는 방식의 작업과 손을 이용한 작업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우선적으로 표명되어야 하고 그 이유가 합당하게 개진되어야 하며 그것이 미술계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가수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하고 이를 자신의 작업으로 위장해 시장에 판매한 것에 대해 사기혐의를 받고 있다.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대신 그리게 한 것이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념적인 성향의 작업들이 조수를 시켜 제작하는 것이 관행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조수를 써야 하는 개념적인 작업도 아니고 그동안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말해왔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생각이다.

분명 동시대 미술을 구성하는 것의 하나가 작품 창작의 물리적인 노동은 전문 인력이 대체하고 작품의 브랜드를 작가 이름으로 사용하는 현상이며, 수많은 작가들이 조수를 동원해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주문-제작 관행’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주문-제작으로 얻은 작업을 기획하고, 감상하고, 호평해 온 갤러리와 관객과 평론이 부지불식간에 연루된 결과물이 그간 미술계의 관행임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반이정은 이번 사건을 “동시대 미술의 풍경 속에 굳게 자리한 비밀스러운 작동 원리가 본의 아니게 미술계 바깥으로 노출된 지극히 희귀한 사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그러한 지점이 현대미술에서 비록 보편적인 추이라 하더라도 이는 작업의 개념과 성격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조영남의 작가로서의 양심,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 현대미술과 작가에 대한 매우 위험한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전시할 수 있으며 판매할 수 있다. 문제는 전문성 및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전문성의 판단과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미술시장에서는 오직 작가의 지명도, 명성만이 지배한다.

그래서 연예인들의 작품은 비교적 손쉽게 판매된다. 조영남의 경우도 그것을 이용한 사례다. 작품 자체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평가에 의해 작품판매가 되지도 않는 것이 우리 미술판의 허접함이다.

따라서 조영남과 같은 이가 화가로 행세하고 미술 전문프로그램의 패널을 맡고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쓰는가 하면 전시를 하고 그 작품이 다수 판매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는 우선 화랑이 문제다. 그저 연예인의 명망성에 기대어 작품을 판매해 보려는 얄팍한 의도밖에 없기에 말이다. 전문성에 대한 평가와 작품을 보는 눈이 없기는 구매자들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작품을 구매하려면 진정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거나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고 논의되는 작품을 구입해야 하는 게 지극히 정상 아닌가?

물론 조영남을 진정으로 실력 있는 화가로, 그의 화투그림이 매우 뛰어난 그림이라고 믿고 있다면 할 말은 없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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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여느 부자가 그렇듯이 데면데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십 여 년을 부자지간으로 살아오면서 툭 터놓고 말을 나눈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몇 번 내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는데 기억에 남는 거짓말 가운데 하나는 초등학생 시절 유리 겔러가 한국을 방문해서 초능력 쇼를 할 때의 일이었다. 숟가락 구부리기에 실패해 풀 죽었던 나는 고장 난 손목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초능력에 기대를 걸었다.

마침 우리 집에는 고장 난 ‘스텐 손목시계’가 하나 있었고 나는 그걸 찾아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유리 겔러를 따라 ‘움직여!’하고 소리 질렀다.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마구 흔들어대자 바늘이 움직였던 거다. 아버지는 흔흔하게 웃으면서 장하다고 말해줬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칭찬이 썩 달갑지가 않았다. 그 손목시계가 원래 흔들어 대면 로터라는 추가 움직여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종류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초능력을 확인한 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버지에게 그 시절 시골집에 굴러다니는 소품이라기엔 무척 세련된 문명의 기기처럼 여겨지던 손목시계의 사연을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포탄이 바로 옆에서 터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전우는 죽고 당신만 살아남았으며 그 손목시계는 전우의 것인데 멈춘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이 바로 포탄이 떨어진 시간이라는 거였다. 베트남, 전쟁, 참전, 포탄, 전사 등등이 불러일으키는 낯설고 이국적인 이미지도 강렬하긴 했으나 무엇보다 어린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를 처음으로 엿본 듯해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전까지 알던 아버지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사연을 자랑삼아 친구들에게 풀어놓곤 했으며 친구들은 아버지를 영화의 주인공처럼 추켜올려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정도쯤이야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혜영 작품 아버지_프린트 베이커리



물론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아버지가 베트남은커녕 제주도에도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가장 최근의 거짓말은 십 년 안쪽의 일인데 그때 아버지는 추락사고로 목뼈에 심각한 금이 가서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담당의가 ‘까다로운 수술’이라고 말했을 때 단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수술이라는 뜻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수술을 하다 환자가 죽을 수도 있는 수술이라는 말로 들렸다. 환자의 보호자 입장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나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수술을 앞둔 아버지에게 집도의가 경추 수술 부문에서는 최고의 외과의며 그런 사람이 간단한 수술이라고 말했으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라는 둥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까 사실 나도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던 셈인데 아버지는 그 거짓말이 진짜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면서 처음으로 보게 된 고분고분한 아버지였다.

이윽고 수술 시간이 다가왔다. 이동침대에 아버지를 옮겨 뉘고 조무사와 함께 마취실로 향했다. 마취실 입구에서 조무사는 내게 보호자는 마취실에 들어갈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조무사가 어디론가 가버린 틈을 타 나는 마취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침대 옆에 선 채 아버지 손을 잡았다. 강제로 쫓아낼 때까지는 아버지 옆에 있을 작정이었다. 십 여 분이 흘렀다. 그사이 내가 아버지의 손을 쥔 건지 아버지가 내 손을 쥔 건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마취의는 내가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가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버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아버지의 손을 통해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아버지, 괜찮으시죠?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괜찮다. 말로는 그렇게 했으나 내 손을 쥔 아버지의 손은 단단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 그 손을 놓는 순간 내 몸의 일부마저 떨어져 나갈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가 내게 했던 거짓말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고 이 우아하고 품위 있는 거짓말이 마지막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손홍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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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다. 여전히 머리와 마음이 무겁다.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프리즘이 됐고 포스트잇으로 덮인 강남역 10번 출구는 추모와 충돌을 실시간으로 비추는 스크린이 됐다. 치료를 요할 만큼 정신이 아파본 적도 없고,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40년을 살아온 입장에서는 이 프리즘과 스크린을 보며 말을 아끼게 된다.

의도하지 않은 섣부름에 괜한 불편함을 더할까봐 그렇다. 하지만 이 신중함의 고려 대상에는 어떤 남성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사건의 가해자를 비난하고 희생자를 애도했으며, 평소 성범죄 관련 형량이 너무 낮은 게 아니냐고 비분강개하며, 선거 때 새누리당을 찍지 않은, 이 사건이 ‘여혐 살인’이 아닌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라며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남성들 말이다.

이 사건의 법적, 형사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도리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이 끄집어낸 평범한 여성들의 아픈 과거와 두려움이다. 그들이 털어놓은 고백에서 일상은 늘 보이지 않는 위험이었다. 밤거리, 혼자 타는 택시, 출퇴근 지하철에서 여성들은 마음이 편할 수 없다. 혹시 몰카라도 설치돼있을까봐 화장실 벽에 붙은 나사못이 두렵고, 밥벌이를 위한 사무실에서조차 성희롱은 유의미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국민안전처에서 제공하는 생활안전 서비스 지도에서 ‘여성 밤길 성폭력’ 항목을 체크한 후 내가 사는 홍대앞을 살펴봤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젊은이들이 모이는 그곳, 그중에서도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일수록 유혈이 낭자한 듯 지도가 시뻘겠다. 사람이 적은 곳이건, 많은 곳이건, 미어터져 나가는 곳이건, 불안은 공기 한쪽에 숨어 있다.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_경향DB

그래도 억울할 것이다. 내 주변에선 그런 여자를 본 적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당연하지. 초등학교 때 성폭행당한 것을 지나간 연애 이야기처럼 남성에게 털어놓을 여성이 얼마나 있겠나. 아직까지도 성폭행 피해가 주홍글씨가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런 극단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온갖 불쾌한 경험들이 역치 아래의 분노가 되어 묻히고 흘러간다. 만원 지하철속 의도치 않은 신체 접촉조차 불안과 의심으로 이어지는 건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어온 경험 때문이다.

여전히 억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활을 벗어나 미디어로 가보자. 한국에서 젊은 여성이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걸그룹이 되는 거다. 그조차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배우나 방송인에 비하면 그나마 진입 장벽이 낮다. 걸그룹이 된다는 건, 철저히 자신을 소비하는 남성들의 시선에 맞게 자신을 가공하는 것이다. 벗은 거에 진배없는 옷을 입고, 유사성행위에 가까운 춤을 추며, 유혹하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볼 때 평범한 소녀는 아이돌이 된다. 단, 전제가 있다. 함부로 자의식을 드러내면 안된다. 우리는 한창때의 아이돌이 욕망을 드러낼 때 어떤 봉변을 겪는지 설리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확인한 바 있다. 짜인 섹스 어필을 하면 열광의 대상이 되지만, 개인 SNS에서 욕망을 표현하면 논란의 타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거세된 채 남성들의 판타지에 맞춰 활동하는 걸그룹을, 일반 남성들은 ‘삼촌 팬’이란 안전장치 속에 숨은 채 수용한다. 그런데 실제 조카가 눈앞에서 그런 옷과 그런 춤을 선보이면 흐뭇해할 삼촌들이 얼마나 될까. 무엇보다 같은 아이돌을 해도 여성은 남성보다 활동상의 제약이 많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혐오는 상징적 단어다. 한국 사회에서의 성별 권력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다만, 그 장치에 비하와 성적 대상화, 복속시키고자 하는 인식 같은 것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일간베스트, 메갈리아로 대변되는 양극단의 행위에 분노할 필요는 없다. 심사할 때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나머지의 평균값으로 최종 점수를 매기듯, 이 사건의 여파로 드러나고 있는 여성들의 불안과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수용할 때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 성별을 막론하고 개인의 아픔이 보호받고, 욕망이 인정되는 사회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묶인다 해도, 당신이 손해볼 것은 고작해야 기분 나빠지는 것밖에는 없을 테니까.

<김작가 ㅣ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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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5·18민주화운동 주간 때마다 음악용어 때문에 어리둥절해진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것은 좋지만 ‘제창’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보훈처의 반복되는 입장표명 때문이다. 여기서 ‘합창’과 ‘제창’의 차이는 뭘까? 보훈처 홈페이지 게시판의 자료에 따르면, 기념식에서 “참여자에게 의무적으로 부르게 하는 것”이 ‘제창(齊唱)’인 반면, “합창단이 합창하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따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합창(合唱)’이라고 한다. 보훈처가 조선시대의 음악 관장 기관인 장악원(掌樂院)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5·18민주화운동기념일’과 같은 보훈처 지정 국가기념일은 총 45개다. 이들 기념일에 거행되는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포함한 기념 노래(‘현충일의 노래’, ‘개천절 노래’, ‘4·19의 노래’ 등)는 대부분 보훈처 식으로 ‘제창’된다. 그런데, 기념식의 ‘제창’에서 “의무적으로” 노래를 해야 하는 이들이란 일반 참석자들이라기보다는 기념식의 VIP들, 더 정확히는 기념식 중계 카메라에 포착돼 대중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정·관계의 귀빈 참석자들이다. ‘제창’이냐 ‘합창’이냐가 예민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취임 첫해였던 2013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5·18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았고 그런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보훈처의 의미규정상 “제창”이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님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제정과 ‘제창 허용’을 요구해 온 이들도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보훈처가 규정한 의미의 ‘제창’은 과연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의 역사적 의미에 부합할까? “참여자에게 의무적으로 부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제창’은 적절한 영어 번역어조차 찾기 어려운 비민주적이며 비음악적이기까지 한 용어다. ‘제창’이 정말 그런 뜻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합창’이면 족하다.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518민중항쟁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_이준헌 기자

제창을 합창으로, 예컨대 ‘애국가 제창’을 ‘애국가 합창’으로 바꿔 쓴다고 문제될 것은 조금도 없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활동을 기록한 ‘독립신문’에서, 해방 이후 건국의 벅찬 희망 속에 서술된 ‘동아일보’ 등의 신문기사에서 “애국가 합창”이란 표현은 수없이 등장한다. 근대 시민 민주주의의 음악적 표상인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부제도 한글 용어로 옮기자면 ‘제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합창’에는 색깔이 다른 목소리들을 함께 맞추어 간다는 민주적 의미가 담겨 있는 반면 “기미가요 제창”을 연상시키는 ‘제창’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기를 지나면서 획일적 군국주의와 국가주의에 오염됐다. 요컨대 모든 국가기념식의 기념 노래에 대해 ‘제창’을 없애고 ‘합창’으로 용어를 단일화한다면, ‘님을 위한 행진곡’ 논란도 자연스럽게 종식될 것이다. ‘국론분열’에 대한 음악학적 해법이다. 기념식의 기념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따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사실상 당연한 일 아닌가. 다만, ‘5·18 기념식’만이 아닌 모든 기념식 노래에 이 ‘합창’의 규정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음악이나 노래는 정치에 대한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나아가 일상의 여러 순간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졌으며, 그 진지한 음악적 의미화 과정은 대부분 5·18의 기억과 결부돼 있었다. 이 시기 ‘대통령 직접선거 개헌’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여느 기념곡들처럼 기념식의 귀빈들이 악보를 손에 쥐고 우물쭈물 ‘제창’하게 되는 노래가 아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시민들의 자발적 ‘합창’의 기억을 담고 있는 노래로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부르던 ‘애국가’와 닮았다. 두 노래의 가창 방식이 다르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최유준 ㅣ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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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에 대구에 있는 작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상가 건물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작가는 내게 보이차를 대접했다. 비교적 이른 아침이었다. 앞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작품과 보이차를 동시에 흡입하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자 온몸이 훈훈해지는 듯했다. 신기하고 묘했다. 보이차를 처음 마셔본 것이다. 당시 믹스커피나 즐겨 마시던 나에게 보이차의 맛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 후 나는 틈나는 대로 좋은 보이차를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보이차 파는 곳을 소개받기도 하고 중국에 들어가는 지인에게 부탁도 해보고 보이차 전문가란 이들도 여럿 만나서 토막 정보나마 귀동냥을 해서 얻어들었다. 얼마 전에는 순천에 계신 분이 좋은 황차를 전해주셨다. 내 연구실 한쪽에는 그렇게 모인 차들이 제법 쌓여있다. 틈틈이 그 차를 우려 마신다. 아직 차 맛을 모르는 내게 좋은 차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차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혀’를 간절히 원한다. 각각의 차 맛의 차이를 감지하는 감각을 극대화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차에 머물지만은 않는 것 같다. 그림을 보는 게 직업인 나로서는 전시장이나 일상에서 몸의 감각의 밸브를 최대한 열어놓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내 감각의 촉수에 달라붙는 매혹적인 것, 아름다운 것, 놀라운 것, 재미있고 낯선 것들 말이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혹은 책, 오브제, 문구류, 차가 모두 그렇다.

중앙대에 있는 김모 교수는 차에 일가를 이룬 이다. 그는 한 달치 교수 월급에 해당하는 보이차 150~200g 정도를 구입하는 것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 년에 한, 두 번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게 고작이지만 나는 그 시간에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한 100여 종의 차 중에서 가장 좋은 차를 골라내는 미각, 감각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좋은 차를 고르는 미각을 소유한다는 것도 좋은 그림을 골라내는 안목과 하등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시각, 미각 그리고 패션은 결국 한 사람이 자신의 감각, 취향과 세계관을 전면화하는 일이다. 이 감각의 일관성! 바로 그것이 진정한 예술교육이 아닐까?

한국의 예술교육은 단지 기계적인 실기교육에 의존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입시미술이 그 적나라한 예다. 학원은 미술을 교육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이들의 미적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라는 틀을 기계적으로 반복, 암기시켜 입시시험을 치르게 하는 곳이다. 석고데생과 정물데생, 그리고 무슨 무슨 구성으로 치러지는 시험이란 것이 죄다 그렇다. 회화나 디자인을 하기 위한 기초적인 훈련일 수는 있지만 수년간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이루어지는 입시미술이란 한 개인의 독창성, 감각의 극대화, 미적 안목의 구현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의 구체성에서 왜 미술을 해야 하는지,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차단시킨 채 단지 대학에 진학하는 수단으로만 그 일을 시키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다 보니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보낸 수년의 시간 동안 학생들은 획일적인 기술과 도식적으로 그리는 방식에 매우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있다. 이런 학생들이 대학에 가서 좋은 작가, 개별적인 감각을 가진 아티스트, 독창성을 지닌 디자이너 등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학에 와서는 추상적인 개념어에 의존해서 현대미술을 받아들이거나 미술계라는 제도에서 용인되고 있는 작품을 부단히 답습, 모방해내면서 마치 기성 작가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이 허위의식이 한국미술계의 문제라면 문제다. 단 한 번도 자기 삶과 자기 감각에 의존해서 미술을 사유해 보는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것처럼 하거나, 또는 자신이 하는 작업조차 그것이 도대체 무슨 작업인지 모르면서도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작품으로 보여주는 존재인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작가나 작품이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도 안 풀리고 작업도 당연히 안 풀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구체성으로부터 길어 올린 자기 감각의 부재가 빚어낸 참극이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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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일 서울 도봉구 창동역 1번 출구에 ‘플랫폼 창동 61’이 개관했다. 컨테이너를 쌓아 음악, 패션, 음식 등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음악과 관련된 시설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딩 공연장이 있고 녹음실, 합주실, 스튜디오 등 음악 창작에 필요한 시설이 올인원으로 갖춰져 있다. 시나위의 신대철, 이한철, 아시안 체어샷, 잠비나이, 숨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이 우선 입주하고 20개 팀을 추가로 모집한다고 한다. 그동안 서울시가 추진해온 대중문화 관련 정책 중 가장 구체적이다. 새로운 음악 생태계 구축을 위한 플랫폼인 셈이다. 근 10년간 인디음악과 관련된 지원 정책은 시설만 갖춰놓고 소프트웨어를 고민하지 않았다면, 이 프로젝트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활성화를 꾀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이 계획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비대칭적이고 폐쇄적이며 망가지기까지 한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장르 음악이 설 자리는 없다. 혁오, 10센치 등 음원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음악가들의 지분은 아이돌과 오디션 프로그램 가수에 비하면 ‘기타’로 분류하기도 민망할 만큼 미미한 게 현실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하향식으로 대중에게 살포되는 음악과 달리, 바닥에서 음악 그 자체의 힘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하는 음악인들에게 이런 지원책은 당연히 필요하다. 철강산업의 퇴조와 함께 쇠락하기 시작한 영국의 셰필드시가 1988년부터 시행한 문화산업지구제가 후일 펄프, 악틱 몽키스 등 지역 출신의 스타 밴드를 낳은 사례는 지역 문화정책이 시장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음악적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플랫폼 창동 61’의 성공을 바라는 이유다.

서울 창동에 29일 문을 여는 복합문화공간 플랫폼 창동 61._경향DB

다만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국에서 더 이상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하위 문화 신(scene)이 자생적으로 탄생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쎄시봉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명동의 청년 문화를 시작으로 1980년대 신촌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1990년대 홍대앞 인디음악의 탄생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이 있다. 명동은 산업화로 인한 경제성장 시기에 청년기를 누린 전후세대의 놀이문화로 시작했다.

5공화국 정권 출범과 함께 대학 정원이 대폭 늘어나면서 대학교가 밀집한 신촌에서 새로운 블루스와 록이 탄생했다. 1968년부터 1974년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이미 사막화되기 시작한 신촌을 떠나 근처의 홍대앞에서 펑크와 모던 록을 중심으로 한 인디 신을 생성했다. 투박한 분류지만 경제적 환경과 인구 분포가 하위문화의 장소 이동을 견인한 셈이다. 하나를 더한다면 서구 음악 흐름의 변화가 동시대에 이식되면서 새로운 수요를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홍대앞 이후 문래동, 석관동 등지에서 새로운 신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확장되지 않았다. 연남동, 경리단길처럼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동네에는 하위문화가 없다. 30대 이상을 중심으로 한 먹고 마시는 소비문화만 있을 뿐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나는 생각한다. 결국 ‘쪽수’와 경제의 문제라고. 새로운 청년문화를 생성할 수 있는 연령대는 인구절벽 앞에 서 있다. 게다가 그들이 처한 현실은 88만원 세대를 지나 N포세대라는 용어로 정리된다. 여가는커녕 생존도 벅찬 세대다. 새로운 문화로 주장과 욕망을 펼칠 수도 없고, 설령 할 수 있어도 호응할 수 있는 아군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

‘플랫폼 창동 61’의 탄생은 한국 사회에서 하위문화 신의 탄생이 기존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이 아닐까 싶다. 스타가 되기 위해 주체와 자아를 거세하고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컨베이어 벨트를 통과해야 되듯, 오디션을 통해 기성세대의 틀에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재단당해야 하듯, 어쩌면 장르 음악(또는 하위문화)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는 게 아닐까. 젠트리피케이션의 절정에 와 있는 홍대앞 이후의 대안을, ‘플랫폼 창동 61’은 마련할 수 있을까.


김작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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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다. 어느 문학 강좌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세 딸이 달려왔다. 그중 누가 가장 서글프게 울까. 학생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큰딸을, 작은딸을, 막내를 꼽았다. 그때 나는 딴생각이 있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세 딸 가운데 가장 섧게 우는 이는 큰딸도, 작은딸도, 막내도 아니다. 그럼 누구인가요? 학생들이 묻자 교수는 그중 가장 가난한 이라고 답했다. 가장 가난한 이가 가장 섧게 운다. 퍽 인상적이었던 터라 이후로도 나는 이 장면을 복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애정의 유무나 깊이와는 무관하게 어머니의 초상을 비빌 언덕 삼아 마음 놓고 울 수 있으려면 얼마나 한이 쌓여야 하는지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그런 생각에는 순결하고 비참한 삶의 진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누군가를 깊은 울음으로 인도하는 슬픔이 그 자신의 존재의 형식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진실이 담긴 것만 같았다.

이 진실 탓에 나는 오랫동안 불편했다. 그 장면을 복기할 때마다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또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중학생이었을 때 가까운 친척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솔밭에서 갈퀴질을 하다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당신을 보았던 터라 내게는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 가운데 하나다. 타지에 사는 어르신의 피붙이들이 달려왔다. 과묵한 아들들의 조용한 곡소리야 그러려니 했으나 딸의 울음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역시 딸자식밖에 없다며 눈가의 눈물을 찍어냈는데 큰며느리가 상가에 도착하자 삽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돌아가신 어르신은 욕쟁이 할머니로 유명짜했고 큰며느리는 천하제일의 ‘백여시’ ‘불여시’ ‘구미호’로 일컬어지는 분이었다.

장편소설 <서울>출간한 소설가 손홍규 _김정근기자


이 두 거인이 서로를 노려보면 볕 좋은 겨울날 떨어질락 말락 간당거리는 팔뚝만 한 고드름 밑에 선 것처럼 지켜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해졌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앙숙이었고 비록 큰며느리가 타지에 살아 일 년에 몇 번 모습을 드러내는 게 고작이었음에도 동네 사람들은 이웃하여 사는 것처럼 일쑤 큰며느리의 언행을 화제에 올리곤 했던 거였다. 어쩌면 모두들 큰며느리의 분탕질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큰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영정을 부여잡고 숨이 넘어가도록 통곡하고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고 땅바닥을 구르고 기어이 피를 흘릴 때까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큰며느리의 절망적인 통곡에 비하자면 심금을 울리던 딸의 울음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며느리의 통곡에는 까맣게 잊었던 고통스러운 기억마저도 불러들이는 힘이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린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큰며느리의 효심을 칭송했다.

이로써 사태는 완전하게 정리가 되었다. 초상집의 승자는 큰며느리였고 길이길이 효부로 회자될 운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이들의 눈을 잊을 수 없다. 절규하는 큰며느리가 불러일으킨 당혹, 순수에 가까운 몸부림이 불러일으킨 슬픔, 둘 사이가 어떠했느냐를 넘어 과연 인간이란 이처럼 외롭고 쓸쓸하며 불쌍한 존재가 아니냐는 깨달음이 번져가던 눈동자들. 원망을 담아 하늘을 우러르던 큰며느리의 눈까지도.

사실을 말하자면 가장 가난한 이가 가장 서럽게 운다는 해석에 동감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가난해서였고 언제든 핑계만 생기면 울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동시에 완벽하게 공감하지 못한 이유는 서른 해 가까이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어쩌면 큰며느리가 그토록 섧게 울었던 건 이제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절망, 서로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을 단 한순간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역시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널브러진 갈퀴 옆에 곱게 쓰러져 있던 어르신을 등에 업은 막내아들이 고무신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맨발로 울면서 달려가던 장면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른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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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다가 광주지역 외국어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의 ‘전라도 사투리 배우기’ 코너를 듣게 됐다. 장난기에 그치는 예능 코너라기보다는 지역 문화를 이해한다는 목표의식이 드러나는, 유쾌하지만 진지한 코너였다. 진행자들은 모두 영어가 모국어인 듯했는데, 외국어수업과 음악수업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기묘한 학습 풍경이 진지한 만큼 웃음을 자아냈다. 혼자서 미소를 지으며 방송을 듣다가 어느 순간 낯선 미학적 감흥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애써 모방하는 전라도 사투리가 새삼 아름답게 들렸던 것이다.

사투리를 ‘촌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문화적으로 학습된 반응임이 분명하다. 처음부터 사투리인 언어는 없기 때문이다. 사투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형성된 ‘중심-주변’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호명된다. 하지만, 지구적으로 시야를 넓히면 그러한 정치적 구도는 흐려지거나 다른 양상으로 포착될 수 있다. 외국어 방송의 전라도 사투리가 아름답게 들린 것은 이러한 ‘지구화’의 문화적 효과와 연관될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스스로 ‘촌스럽다’고 여기는, 사투리를 둘러싼 정서의 식민화 현상과 관련해 음악은 흥미로운 관찰거리다. 최근 개봉한 영화 <해어화>의 중심 소재를 이런 문제와 관련해 볼 수 있다. ‘조선 최후의 기생 이야기’를 표방하는 이 영화는 모더니티의 충격 속에서 한국 전통음악이 변방의 음악언어로, 곧 음악적 ‘사투리’로 전락하면서 20세기 내내 시달려온 문화적 열등감을 다루고 있다. 식민지 경성의 권번에서 한국 전통가곡을 전수받은 주인공 소율이 권번의 단짝 연희가 유행가수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극심한 열등감과 질투심에 빠져 파멸에 이른다는 줄거리다. 그런데 소율의 비뚤어진 인정 욕구는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보상받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방송국 PD의 인정을 받은 늙은 소율은 후회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좋은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요?”

영화 <해어화>

소율의 가곡 창법에 연희의 유행가 창법과는 다른 미적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고, 영화 <해어화>는 결론 삼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최근 문화적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 전통음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자신감이 배경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실제로 2003년에 판소리가, 2010년에 영화 속 소율이 부르는 전통가곡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다른 한편 ‘월드뮤직’ 시장이 형성된 1990년대 이래로 한국의 젊은 전통음악인들의 참여가 가속화되면서 최근 들어 세계 음악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이 점에서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 ‘소율’에서 미국 대중음악 장르 명칭인 ‘소울’이 연상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삼성이 한국기업이라는 점이 더 이상 크게 의식되지 않듯이 지구화의 흐름은 기존의 근대적 국민국가시스템이 형성한 ‘중심-주변’의 정치적 구도를 해체, 재편하고 있다. ‘지구화’가 역설적으로 ‘지역화’를 추동함으로써 ‘지구지역화’가 논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의 외국어 라디오방송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촌스럽지 않게 들렸던 것처럼 한국의 전통음악 언어 또한 이러한 ‘지구지역화’의 부쩍 넓어진 시야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젊은 문화수용자들의 편견 없는 태도와도 결합된 문화적·미학적 가능성이지만, 아직은 잠재성이나 착시효과에 머무는 것도 사실이다. “그땐 왜 몰랐을까요?”라는 성찰적 물음이 “외국인들이 저렇게 인정하는데”라는 탄식에 머물거나 국수주의적 자부심으로 회귀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사실상 영화 <해어화> 속 소율의 왜곡된 인정 욕구와 다르지 않다.

모든 지역 언어가 온전히 촌스러움의 멍에를 벗는 날, 비로소 전통음악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문화도 고유한 미학적 차원을 회복하게 되지 않을까? 그 ‘촌스러움’과 열등감 형성의 정치적 메커니즘이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는 제 나름의 표준어일 수 있다는 것이 지구화 시대의 미학적 평등을 위한 실천적 명제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전라도 사투리는 판소리의 표준어가 아니던가.


최유준 |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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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주 인사동과 사간동의 전시장에 나가서 전시를 보는 편이다.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곳뿐만 아니라 골동품 가게들 역시 부지런히 다닌다. 해찰이 심한 나로서는 다양한 볼거리에 탐닉한다. 가능하면 많은 전시를 보려고 애쓴다. 미술평론가로서의 죄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혹적인 미술작품을 보면 여전히 감동스럽고 흥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순간이 좋다. 내 몸의 감각이 죄다 살아나 발기하는 순간이다. 그러니 내 삶은 평생 나를 사로잡는 이미지 하나를 찾아 절박하게 떠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소박한 골동품이다. 선인들이 만든 작고 아담하고 기품 있는 물건들 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취향에 따른 것이다. 취향은 특정 이미지를 편애하고 옹호하는 일이다. 또한 취향은 단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감정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내 취향을 전적으로 만족시켜주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생활에서 자연스레 길어 올린 소박한 아름다움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손맛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밀어낸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동시대 미술보다 옛사람들이 만든 것들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선인들이 만든 것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쓰였던 실용적 차원의 물건이자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기능했던 것들이다. 근대 이후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 탈각된 그 사물들이 박물관으로 이동하면서 전시가치로, 미술작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인들이 남겨 놓은 상당수 물건, 이미지에는 신실한 마음과 한없는 정성, 그리고 무심함이 스며들어 있고 당대 삶의 이치와 그로 인한 배태된 아름다움의 형식이 격조 있게 놓여있다. 과도함과 억지, 기이하거나 천박한 장식이 없다. 의도적인 꾸밈이나 과장된 수사가 지워진 저 물질의 민낯과 그 표면에 최소한으로 개입해 만든 인공의 흔적들이 조화를 이룬 것들을 보는 재미는 대단하다.

10일 서울 인사동 우림갤러리에서 열린 ‘인사 고미술 잔치’에서 관람객들이 도자기와 민속품 등 다양한 유물들을 관람하고 있다._경향DB

우리 옛사람들이 만든 모든 것들이 지닌 미감의 특성은 ‘생활 감정의 규모’를 결코 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활환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연한, 자연스러운 미감을 즐겨왔고 생활 가운데서 우러난 아름다움을 즐겼다.

지난주 인사동에 나가 작은 토기 잔 하나를 구입했다. 삼국시대 것이다. 오래전부터 옛사람들의 것을 하나씩 사서 모아두고 있다. 내 삶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작고 저렴한 것들이다. 그렇다 해도 분명 내 살림에는 부담이 되는 가격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 돈을 지불해 구입한 작은 토기나 목기 등을 연구실 책상에 풀어놓고 반복해서 바라본다. 이 비좁은 연구실에서 나는 저 사물들과 독대하면서 늙어간다. 책을 읽다가, 원고를 쓰다가 문득 고인들의 그림이나 그릇, 연장 등을 바라보면 문득 내 삶의 근원을 새삼 추억하게 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억척스레 살아낸, 그 생의 이력들 속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아름다움의 비밀도 마주한다.

미술이란 것이 결국 아름다운 생활을 위한 시각적 안목을 키우고 생활 속의 시각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미술의 가치는 삶의 의미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데 있다. 반면 오늘날 생산되는 무수한 미술품들은 과연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 우리 삶의 어떤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과연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으로부터 고민해서 길어 올린 흔적들이나 자기 생의 가치와 철학, 의미를 담보하고 있기나 한 걸까?

그보다는 과도하게 현학적인 주제 혹은 서구의 현대사상과 미술개념 등에 휘둘리거나 과장된 수사, 공허한 수식어에 기대어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거나 천박한 장식물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삶의 필요성에서 길어 올리면서도 그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을 절묘하게 두르고 있는 저 작은 토기 잔 하나를 보면서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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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오늘은 너에게 아마 네가 읽어본 적이 없을 모옌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단편소설 <아들의 적>을 들려주고 싶구나. 어느 날 한 여인 앞에 아들의 동료 병사들이 시체 한 구를 가지고 오지. 그리고 여인에게 이 시체가 아들이 맞는지를 묻는단다. 여인이 아들임을 확인해 주면 정성껏 장례를 치러줄 테고 아들이 아니라고 일러주면 아마도 그들은 들개나 물어뜯으라며 길가에 아무렇게나 그 시체를 버려두겠지. 다른 사람은 알아볼 수 없다 해도 여인만은 단번에 그 시체가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되지.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여인은 죽은 병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단다.

그러면서 미간에 관통상을 입고 죽은 시체를 자세히 묘사하는 문장이 이어지는데 이 문장들이 미묘한 떨림을 전달해주지. 마치 마르케스의 소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익사체>에 등장하는 시체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에서처럼, 로런스의 소설 <국화 냄새>에서 죽은 광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에서처럼 경탄이라 해도 좋을 감정까지 느낄 수 있어.

모옌이 이 장면을 참혹하고 끔찍하게만 그리지 않은 이유는 죽은 적군 병사의 얼굴에서라도 아들의 얼굴을 연상해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심정을 그 문장들에 새겨넣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아들 또래의 사내만 보아도 아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보통의 어머니들이 그러듯이 말이야.

이윽고 여인은 대담하게도 죽은 병사의 손목을 들어 올리지. 그리고 유별나게 굵고 거친 손가락 마디를 알아본단다. 담뱃진에 찌든 손바닥의 굳은살까지도 알아보면서 여인은 이렇게 중얼거려. “이 역시 고생을 많이 겪어 본 아이였구나!” 바로 이 장면, 여인의 마음속에서 적군의 병사를 자신의 아들과 최초로 동일시하게 되는 이 장면이 내게 서글프고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이유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사람들끼리만의 무언의 연대의식을 굵고 거친 손가락,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등을 통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한 수도원 인근 언덕에서 예수의 십자가 고행을 재현하는 폴란드 청년들_AP연합뉴스


잠시 상념에 잠겼던 여인은 죽은 병사의 속삭임을 환청으로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그리고 죽은 병사의 뺨에 얼굴을 갖다 대며 이렇게 말해. “그래, 얘야, 넌 바로 내 아들이야.” 자신의 아들을 총으로 쏴 죽였을지도 모르는 적군 병사를 아들로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소설의 주요 내용인데 이 소설의 절정은 여인의 깨달음과 용기, 다시 말해 자기 앞에 놓인 적군 병사의 시체와 어딘가에 죽어 있을 자신의 아들의 본질적 동일성을 깨닫는 그 순간의 참혹한 진실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가 너에게 이 소설을 들려주고 싶었던 이유는 언젠가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서였어. 그날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말 가까이 하기 어려운 인간이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았지. 다양한 악인들이 떠올랐어. 곁에 있다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종류의 악당들을 하나씩 언급하면서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

놀라웠던 건 그렇게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곱씹으니 이해하지 못할 인간이 없다는 사실이었지. 단 하나 인간의 욕망을 날것으로 체현했다고 여겨지는 어떤 정당의 지지자들만 빼고 말이야. 그렇지만 친구야 나는 이제 그날의 대화에서 그이들을 가까이 할 수 없고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최후의 악인으로 인정했던 견해를 철회하고 싶구나.

설령 누군가가 심각한 과오를 저질렀다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언덕을 오르면서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나이다”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정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소설의 여인이 보여준 것과 같은 깨달음의 순간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만약 정말로 인간의 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면서도 저지르는 자일 것이며, 그자들이 누구인지는 너 역시 잘 알 것이라 믿기에 이만 줄이려 한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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