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이 다르다고 일하다 다친 상처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이 다르다고 작은 휴대전화 화면 속 가족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그리움이 묻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땀 흘려 일하고 난 뒤 느끼는 바람의 싱그러움을 모르지 않는다. 월급날이면 괜히 마음 한쪽 두둑해져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술이라도 한 잔 사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만나보면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일하려면 피부색이 다르면 아픔을 느끼지 못해야 한다. 지난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다 다칠 확률이 내국인보다 6배 높았다. 문진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이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산재보험에 가입된 내국인 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은 0.18%인 반면 외국인 노동자는 1.16%로 6배 높았다. 또한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2012년 0.59%에서 2016년 0.49%로 낮아졌지만 같은 기간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6.9%에서 7.4%로 오히려 증가했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일터가 안전해지고 있는데, 피부색이 다른 이주민들이 일하는 일터만 오히려 더 위험해지고, 더 쉽게 다치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처리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일하다 다치고도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못한 경우까지 보태어 보면 사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올해 초 대구·경북지역에서 이주노동자 378명을 대상으로 산업재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 중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않고 스스로 치료비를 부담한 경우가 37.9%, 회사에서 치료비를 지급받은 경우가 35%로 조사되었다. 산재보험으로 치료받은 경우는 27.1%로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보호 장비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다치더라도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올해 5월 한 달 동안에 양돈축사에서 분뇨를 치우던 이주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작업하던 양돈장 정화조는 악취뿐만 아니라 몸에 치명적인 황화수소나 암모니아 등 유해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기계가 하거나, 제대로 된 보호 장비가 지급되어야 했지만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월급도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올 추석을 앞두고 고용노동부가 공식 확인한 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액은 515억원을 넘었다. 2012년 240억원이던 임금체불액은 5년 만에 두 배를 넘었다.

얼마 전 1960~1970년대 독일로 이주했던 한국 간호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전시를 관람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또 다른 분단국가 독일, 특히 분단의 도시인 베를린에서 낯선 한국여성으로 삶을 꾸려가고, 독일 사회에 뿌리내린 이주민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중 흥미로웠던 점은 그녀들이 당시 독일 사회에서 여성인권과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새로운 눈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한국의 짙은 가부장제 그늘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기도 했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독일과 한국 모두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오고 있다.

인권 선진국을 자임하는 한국의 모습은 이에 비하면 매우 부끄러운 수준이다. 고향을 떠나 먼 한국땅에서 마주한 열악한 노동환경, 장시간 저임금 노동, 높은 산재 발생률과 만성적인 임금체불은 이주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들 뿐이다. 언제쯤 우리는 이들에게 차별과 고통이 아닌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삶의 경험을 온전히 전해줄 수 있을까?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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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긴 연휴 동안 마을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저녁마다 집집이 마당에 불이 환했다.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도 나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자동차 트렁크에서 집 마당으로 짐을 날랐다. 할매 할배들도 바빴다. 챙길 것이 많고, 볼 것이 많고, 짬짬이 이야기도 풀어놓고.

“추석도 추석이라고는 별로 안 하고, 그냥 팔월이라고 했지, 팔월. 아직 일이 바쁘니까. 먹고 노는 거는 백중이 크고. 백중에는 집집이 풀 거름 마련하고 나서 놀고, 추석은 식구들하고, 친척들하고 지내는 날이고 그랬지. 추석에는 집안 살림 싹 깔끔시럽게 해야지. 여기서는 송편 같은 거는 잘 안 해 묵었어. 송편 말고, 올벼 가져다가 콩고물해서 찰떡하고, 박나물하고, 토란국 끓이고 그랬지.” 추석이 가까워오면 그 바쁜 때에 집안 정리하는 것부터 한다고 했다. 이불 홑청을 다 벗겨서는 삶아 빨아서 가을볕에 말려 너는 것부터. 마당에 희고 너른 광목이 펄럭이는 것으로 명절이 시작인 셈이다. 문짝을 하나씩 떼어다가 종이를 벗기고, 수세미로 문살을 하나씩 다 문질러 닦은 다음 새 종이를 바르기까지 하는 집도 있었고. 새 종이를 발라 문틀에 끼우면 방안으로 맑은 빛이 든다. “밝은 보름밤이면 문살이 더 빛이 나지.” 이곳에 이사를 와서 낡은 집을 고치고, 새 문종이를 발라 잠이 들었던 날에도 달빛이 밝았다. 10년 지난 지금도 종이 바르는 문짝을 쓰고 있으니 할매 하는 소리를 조금은 알아듣는다.

추석맞이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일찌감치 모여 청소를 했다. 도로 공사 때문에 방앗간이 허물어진 첫 번째 추석. 공사판을 앞에 두고 지난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마을 사람들끼리야 백중에 더 놀아. 추석이야 피붙이 보는 날이잖아. 그러니까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노는 날은 백중이지. 동네 사람들끼리 보신하고, 놀고, 그랬어. 아이들도 그날 기다리지. 먹을 게 많으니까. 냇가 좋은 마을은 천렵도 하고.” 설날 가까운 대보름이 그랬던 것처럼, 추석 가까운 백중은 여름 대보름 같은 날이었을 터. 하지만 대보름은 남았어도 백중은 이름만 남았다. 이제는 들에서 일하는 사람 먹으라고 참을 마련하는 일도 없고, 냇가에 모여서 천렵을 하는 일도 보기 어려우니.

새로 포장하는 길 아래 차곡차곡 사라진 논 이야기도 나온다. 누구네 집 논이 어쩌고 하다가, 당신들 어릴 적 한두 대목이 올라온다. “그게, 메뚜기가 흔했어. 논둑에 나가 가지고 메뚜기가 후두둑 날 때, 손으로 휙 거므면 몇 마리씩 잡혔다고. 그거 마른 냄비에 넣어서 구워 먹었지.” “도랑에 물 뺄 때, 이제 가서 소쿠리를 댄다고. 그러면 새우가 많이 잡혔어. 속이 다 보여. 자잘해 가지고. 익으면 빨개지는데 것도 맛이 좋았어. 벼 베고 나면 도랑에 흙 치면서 미꾸라지도 잡고, 논고둥도 잡고. 벼 베고 있으면 또 금방 밀, 보리 갈잖아. 그러니 그때는 기다렸다가 얼른 잡아왔지.” “참게가 이제 개울에 살다가 비 많이 오고 물 불고 그러면, 논으로도 막 가고 그런다고. 그러면 그냥 손으로 딱 잡고 그러지. 많았어. 제 딴에는 숨는다고 풀섶에 가 숨어. 그래 봐야 다 보여. 게나 꿩이나 한가지야.” 지금 농사짓는 논에도 약을 치지는 않는다. 10년 가까이 되었으니, 어지간한 벌레들은 바글대는 것 같고, 미꾸라지나 멧밭쥐나 이런 것들도 종종 보이기는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논에 나락 말고 이 많은 것들이 어디서 살았다는 것인지 어른들 말만 들어서는 도무지 알기 어렵다.

온갖 것이 모여 살았던 논도, 젊고 어리고 늙고 하는 사람들 골고루 모여 살았다던 마을도 이야기 몇 대목으로만 적어 둘 수 있을 뿐이다. 통계로 나온 숫자로만 헤아려 보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농사꾼이 농사지어서 얻은 농업소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한다. 물론 농사짓는 데에 써야 하는 돈(농업경영비)은 40%쯤 늘어났고. 아직 연휴는 끝나지 않았지만,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이들도, 젊은 사람들도 없고, 금세 깨 터는 소리, 밤 고르는 소리가 나고, 길가에는 고추며 토란대가 널렸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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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9월25일부터 27일까지 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주최로 ‘지속가능도시주간’ 포럼이 열렸다. 포럼 마지막 날 오전에 마을공동체, 도시재생, 사회적경제 등 주제별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이 중 마을공동체에 대한 주제는 ‘마을르네상스의 융복합 발전과제’였다. 이제는 마을의 부활을 넘어 여러 분야의 ‘융복합’을 이루는 게 마을공동체의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융복합이 이슈가 되는 맥락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관료제로 인해 수많은 부처와 부서로 나뉜 정부나 지자체의 구조와 달리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통합적이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러 분야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른바 ‘칸막이 행정’의 극복이 공동체 활성화의 관건인 셈이다.

둘째, 정부의 주요정책인 도시재생의 등장도 현장에서 융복합을 고민하게 하는 요인이다. 도시재생의 기본방침을 살펴보면 ‘주민역량 강화 및 공동체 활성화’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도시의 전반적인 쇠퇴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들이 직접 도시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이다.

그런데 도시재생은 주무 부처의 특성상 단기간의 개발성과 위주로 흐를 우려가 있다. 성과를 우선하는 정책은 경쟁을 부추기기에 연대와 협동을 기본철학으로 하는 공동체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과 예산에 의존해야 하는 지자체는 큰 예산이 편성되는 도시재생정책에 맞추어 정책과 조직을 조정하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지원센터’를 ‘도시재생센터’에 집어넣는 식의 개편이 이뤄진다. 정부 주도의 경쟁적인 도시재생은 공동체를 깨뜨릴 수 있으니 이런 위협을 막아내면서 공동체 활성화를 이루기 위해 현장의 활동가들은 도시재생과 공동체의 융합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 현장에 이런 고민을 안기는 ‘칸막이 행정’이나 ‘하향식 정책’은 지방자치가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으니 중앙의 칸막이마저 지역공동체까지 이어진다.

전쟁과 독재 아래에서도 꾸준히 유지되며 발전되던 지방자치는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1991년까지 중지되었다. 민주화 이후 지방자치가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1960년대에 비해서도 오히려 퇴보한 수준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1960년 기초의원은 1만6909명이었다. 총인구를 고려하면 기초의원 1명이 1500명 정도를 대표했던 셈이다. 그런데 현재 기초의원은 2898명이다. 기초의원 1인당 1만8000명 정도를 대표하는 셈이다. 공동체의 대표를 뽑는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풀뿌리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체 활성화가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발표한 ‘2016년도 공공기관 청렴도 측정 결과’를 살펴보면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등 중간지원조직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곳에서 종합청렴도가 높게 나타난다. 공동체 활성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지자체의 청렴도가 높은 것이다. 좀 더 연구해 봐야겠으나 활성화된 공동체는 적극적인 주민참여를 바탕으로 지방행정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올바르게 이끄는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어떤 광역지자체에서 공동체 관련 중간지원조직에 대해서 고강도의 감사를 진행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또 다른 광역지자체에서는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조직진단이 한창이라고 한다. 그 지자체의 거버넌스 담당 공무원은 중간지원조직의 활동가를 모아두고는 “당신들은 우리 업무를 대행하는 것에 불과하니 지시에 따르라”는 훈시를 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풀뿌리민주주의 활성화에 대한 공공의 반발이나 견제가 아니기를 바란다.

<강세진 | 박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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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경험한 두 가지 에피소드. 토론토에는 대형 한국식품점이 몇 개 있다. 고객과 직원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고 영어 쓸 일이 없으니 식품점 분위기는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날 물건을 하나 들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섰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새치기하지 마세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조금 전 그 사람은 무엇을 빠뜨렸는지 자기 수레를 내 뒤에 두고 매장 안으로 급히 들어갔었다. 계산대 앞으로 돌아온 그는 내가 자기 앞에 끼어든 걸로 착각했다.

창졸간에 새치기꾼이 되어버린 나는 “새치기 아닌데요?”라고 항변했다. 계산대 직원이 개입해 확인해주었기 망정이지,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소리 높여 싸움을 할 뻔했다.

캐나다 TD은행에는 ‘비즈니스 서비스’라는 창구가 있다. 비즈니스 계좌를 가진 자영업자들을 배려해 따로 만든 창구이다.

언젠가 내 비즈니스 계좌에서 출금을 하려고 그 창구로 갔다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할 뻔했다. 일반 창구 앞에 줄을 섰던 중년 백인이 다가오더니 소리를 질러댔다. 그이도 내가 새치기한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그의 말은 “왜 새치기를 하느냐?”가 아니었다. “왜 새치기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느냐?”였다. 그러니까 지적과 항의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이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비즈니스 창구 직원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내가 당사자이긴 했으나, 항의를 받고 말싸움을 벌인 사람은 은행 직원이지 내가 아니었다.

지난 9월5일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 교육감-주민 토론회’ 소식이 언론과 SNS를 타고 널리 알려졌다. 이 토론회가 주목받은 까닭은 장애학생 학부모와 지역 주민들이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주민들을 향해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지 말아 달라”고 했고, 지역 주민들은 “특수학교 대신 국립한방병원을 짓게 해달라”고 했다. 두 목소리가 충돌하자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었다. 주민들도 따라 꿇었다.

언뜻 보기에 당사자들끼리의 ‘토론’이자 ‘대화’일 수도 있겠으나, 따지고 보면 문제 해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만남이다. 당사자들이 얼굴 맞대고 언성을 높이면 해결은커녕 서로 감정만 상하고 문제는 더 악화하기 십상이다. 가령 식당 옆자리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아파트 위층에서 쿵쿵 소음을 내거나, 기내에서 이어폰 끼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피해 당사자인 내가 다른 당사자에게 직접 지적을 하면, 서로가 불쾌해질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은행의 백인 고객처럼 직원에게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을 요청하는 것이다.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부모와 지역 주민들이 왜 서로를 향해 호소하고 야유까지 해가며 얼굴을 붉히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주민들에게 한방병원 설립이라는, 법적으로 되지도 않는 일을 약속한 사람은 그 지역 국회의원 김성태이다. 특수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주체는 서울시교육청이다. 주민들은 자기네에게 공약한 김성태 의원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학부모들은 서울시교육청에 “예정대로 추진하라”고 요구하면 그만이다. 토론을 하든 싸움을 하든 김성태 의원과 서울시교육청이 붙어서 할 일이다. 그들이 ‘관계 직원’이다. 직원 대신 양 당사자가 맞붙어 갈등하면, 문제는 다른 쪽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은 “당신들끼리 싸워라” 하고 그 사안에서 슬쩍 빠져나갈 수도 있다. 토론회장에서 김성태 의원이 중간에 빠져나갔듯이 말이다.

아무리 올바른 지적이라 해도 당하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감정싸움을 할 것인가. 싸움이 목적이라면 매너 따위는 필요 없고.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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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원도 홍천에 있는 초등학교에 법교육 강의를 다녀왔다. 서울에서 차로 꼬박 두 시간, 고속도로를 벗어나 굽이굽이 산과 물이 어우러진 시골길을 제법 달려 마주한 산촌마을, 전교생이 서른여섯 명인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 5학년과 6학년인 13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한 교실에 모여 앉았다. 선생님보다 더 능숙하게 사회를 보던 6학년 친구의 진행으로 법과 관련한 짧은 강의와 질문과 답변 형식의 토크콘서트 시간을 가졌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다는 아이들의 질문 수준이 상당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 사람을 한국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야 할까?”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던 내용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분위기를 한번 몰아가봤다. “외국에서 돈 벌러 온 사람들은 일하다가 언젠가 자기 나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잖아, 그리고 요즘 우리나라 경제도 어려운데 한국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주면 우리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닐까? 어디 손 한번 들어볼까?”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든 아이도 있었고, 고민 끝에 살며시 손을 올린 아이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13명의 아이들 모두 외국인을 우리나라 사람과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 들뜬 감정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왜 그렇게 생각해? 외국에서 온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에 이런저런 문제도 생기잖아”라고 묻자, 맨 앞자리에서 조용하게 앉아 있던 한 아이가 대답했다. “그런 걸(차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을 되뇌었다. 차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난 13일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바른정당 홍철호 의원(경기 김포을)은 ‘우리나라 청년들 대학까지 나와서 외국인 근로자와 같은 대우받기를 싫어한다. 막장인생 된 것으로 느낀다’고 하면서 ‘산업연수생제도를 도입하면 200만원 주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100만원만 줘도 된다. 그 100만원을 가져다가 청년들에게 300만원 주면 우리 청년들에게 자긍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경제·노동정책의 기본적인 이해도 부족하지만, 인권 선진국을 자임하는 나라의 국회의원의 공식 발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혐오와 차별에 대한 맹목, 법과 국제인권규약에 대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반인권적 인종차별 발언이다.

게다가 산업연수생제도는 완벽히 실패한 제도다. 똑같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일 배우는 연수생’으로 이름표만 바꿔달고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 한 달에 수백 시간 일을 시키면서 월급은 50만~60만원에 그쳤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일하다 다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외국인들이 사업장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신분증을 빼앗는 경우가 허다했는데도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사업장을 이탈하는 비율이 80%를 넘기도 했다.

2004년 고용허가제로 전환되면서 대부분 없어졌지만, 아직도 일부 남은 해외투자기업 산업연수생들의 경우 최근까지도 한 달에 평균 300시간 일하면서 겨우 85만원을 받고, 일하다 다쳐도 치료는커녕 회사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2007년 헌법재판소가 산업연수생제도는 외국인 근로자를 부당하게 차별하는 제도로 ‘위헌’이라는 뒤늦은 사망선고를 내렸을까. 홍 의원의 주장은 현대판 노예제도를 되살려 외국인들의 임금을 빼앗아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자긍심이란 결코 다른 사람의 월급을 빼앗아 내가 돈을 더 받는다고 생기는 천박한 감정이 아니다. 자긍심은 무릇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생겨난다. 부정한 권력의 특권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흘린 땀방울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받는 것이 그 출발이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언제나 어린이는 옹졸하고 부족한 어른들의 아버지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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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에 ‘아무말 대잔치’라는 제목의 코너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던 몇몇 이들은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며 짜증섞인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생겨난 단어, 개념, 유행이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에 차용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점심시간에 SNS에서 있었던 논란이 저녁 즈음이면 기사화되고, 예능프로에서는 속보 경쟁이라도 하듯 신조어를 받아들여 남발한다. 이쯤 되니 개그콘서트는 차라리 느긋한 편에 속할 지경이다.

어쨌거나 ‘아무말 대잔치’는 그 제목 만으로 이미 시대의 핵심을 선취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지난 일주일간 들어야 했던 ‘아무말’만 떠올려 봐도, 대잔치를 넘어 프로리그를 출범해도 손색이 없다. 상임위의 인사청문회에서 지구의 나이가 6000살이라고 믿고 있다는 장관 후보며, 동학농민혁명이 “비폭력 평화 정권교체”의 기원이라는 야당의 대표에다, 대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장에서 “성소수자 인정하면 근친상간·수간으로 비화”한다고 말하는 국회의원 등등. 여기에다 SNS를 타고 넘어오는 유명인과 일반인들의 아무말까지 더하면 내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저주로 느껴질 정도다.

물론 공사를 막론하고 언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무너짐은 맞춤법을 “파.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언어가 말 그대로 무의미해진다는 것에 가깝다. 명연설가로 이름난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좌파 신자유주의”같은 기묘한 조어로 이 혼란의 서막을 열었고, MB정부는 기존의 민주화와 사회운동의 가치를 멋대로 도용하여 본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로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침묵만도 못한 말들을 드문드문 내뱉다가 촛불의 심판을 받았다. 오죽하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이 제대로 말을 한다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놀라운 일로 여겨졌을 정도다.

그러나 여전히 공적인 영역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말들의 폐허는 점점 커져간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내뱉고, 가짜뉴스와 비이성적인 색깔론을 도배하는 정치인들은 그 행동에 대해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언론은 경영난을 탓하며 부채질에 열중하고, 정치인들은 그런 언론에 자기 이름 한 줄을 내보내기 위해 기꺼이 저열함에 타협한다. 책임 있는 이들도 이렇게 행동하는데, 책임도 권한도 없는 이들이 품위를 지킬 이유는 딱히 없다. 논리들이 경합하고 당위가 맞서는 대신에, 모두가 소리 높여 자신의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방언대결이 펼쳐진다. 비판과 분석이 무색해지는 동안, 일침과 사이다라는 이름의 뻔한 얘기가 시끄러운 소음을 더한다.

이 아무말 대잔치를 끝내기 위해서는 국립국어원이 아니라 정치의 책임이 막중하다. 지킬 수 있는 말을 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실천이 반복되어야 한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면 면피나 책임 미루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원인을 분석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국민들이 마땅히 들어야 하는 말을 건네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악의적인 말과 행동에는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힘 있는 이들일수록 그 책임은 더 커야 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예측 가능한 뻔한 것들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파격’은 이 뻔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돌려줄 수 있다면,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외침과 울부짖음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말들도 의사소통을 위한 말들로 다듬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정치는 아무 걱정 말고 본업에만 충실해주길 바란다. 예능정치의 조기종영을 손 모아 기원한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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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나무판자를 잇대어 만든 작은 문을 열고 새로 온 병아리들을 한 마리씩 살펴본다. 하루 이틀 지나면 병아리들이 닭장에서 나와서 널찍하게 쳐진 울타리 안을 돌아다닐 것이다. 세 아이 모두 밭에 오면 닭장부터 들렀다. 새 병아리를 들이면 더 자주 와서는 병아리를 보고, 낯을 익히고, 그렇게 몇 번 지나서 아이들은 병아리마다 별명 비슷한 것을 붙였다. 시골에 내려와 밭을 마련한 다음, 곧바로 한 것이 밭 한쪽에 닭장을 짠 일이었다. 닭장을 짜고는 얼마쯤 자란 병아리를 구해다가 닭장에 풀어놓았다. 봄에 넣은 병아리가 중닭이 되고, 제법 자라면 어느 때부터 달걀을 하나씩 낳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닭이 방금 낳은 따뜻한 달걀을 쥐어 보기도 했다. 며칠 달걀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식구 수만큼 차면 아침 밥상에 달걀 하나씩을 올린다. 그렇게 닭을 키웠다가 올해는 닭장이 비었다. 봄에 들개들이 닭장을 헤집어 놓았기 때문. 다시 병아리를 구하려고 했지만, 올해 봄에는 조류독감과 구제역 같은 이유로 작은 병아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 해 꼬박 빈 닭장. 그렇게 닭장은 비었는데, 한 해 내내 닭과 달걀 소식이 오르내렸다.

DDT가 달걀과 닭에서 검출된 경북 영천시 도동의 양계농가. 케이지에서 밀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흙목욕을 할 수 있도록 양호한 시설을 갖춘 농가이지만 DDT가 검출되어 토양오염이 의심되는 상황. 우철훈 기자

달걀을 얻으려고 기르는 많은 닭들은 대규모 농장의 좁은 닭장(케이지) 안에 산다. 토막내어 잘려진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가 얼기설기 놓여 있는 종이 상자. 그거 서너 개쯤 쌓아 놓은 부피 안에, 온전한 모습을 한 닭이 서 있다. 아마도 뒤돌아 서기 어려운 작은 샤워 박스 같은 것보다 더 좁은 느낌일 것이다. 하루를 꼬박 그 안에서 보낸다. 사료를 먹고, 똥을 누고, 세상을 둘러보고, 주위의 소리를 듣고, 잠을 잔다. 닭은 날마다 같은 날을 보내고, 달걀을 낳는다.

닭은 온 세계로 보아도 사람이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과 가금 가운데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다. 마릿수로 보면, 나머지 모든 잡아먹는 새와 짐승의 숫자를 합친 것보다 예닐곱 배쯤 되는 닭을 잡는다는 통계도 있다. 온 세계 사람 숫자에 견주면 한 해에 한 사람이 일여덟 마리 닭을 잡아먹는다. 양념치킨, 혹은 치맥이야말로 한국의 음식이니까, 우리나라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고. 이어서 들리는 소식은 상자를 조금 더 키운다고도 하고, 닭장 안을 더 깨끗이 한다고도 한다. 약을 뿌리는 방법을 다시 교육시킨다고도 한다.

어디에선가는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DDT) 성분이 나왔다고도 했다. 시골에서는 아직도 이것을 마법의 흰 가루로 여기는 할매들도 있다. “무 심궈 먹을 적에는 DDT 좀 뿌려야 해.” 십 년 전 처음 무밭을 가꿨을 때, 서툴기 짝이 없는 젊은이가 안쓰러워서 마을 누군가는 주인 몰래 DDT를 뿌려주기도 했다. 결국 그것은 갈아엎고, 그 자리에는 작은 뒷간이 들어섰다. 그래도 DDT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DDT가 뿌려지지 않은 밭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닭들은 여느 닭하고는 다르게 맨땅을 밟고, 하늘을 보고, 흙에 날개를 비비며 살았다고 했다. 물통 가장자리에 늘어서서 물 한 모금을 먹고, 하늘 한 번 보고, 물 먹고 하늘 보고 그랬을 것이다. 농부는 그렇게 닭과 함께 살았다. 아마도 건강했을 것이다. 닭도 농부도. 

박선미의 책 <달걀 한 개>에는 마당을 헤집으며 장독을 깨기도 하고, 세이레 동안 꼼짝 않고 알을 품기도 하며 살아가는 닭의 이야기가 있다. 어렵사리 달걀 한 개를 얻은 아이가 강 건너 할머니에게 이것을 가져다줄까 하는 대목도 있다. 이제 그런 풍경은 수십 년 전 이야기가 되어서 도무지 이곳에 있었던 일로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다. 우리나라 시장에서는 심지어 흰 달걀마저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으니까. 다만 이제는 꼼짝 못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닭과 충분히 더 무해한 화학약품 따위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달걀 한 개, 두 개가 아니라 달걀 몇 줄, 몇 판 하는 식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달걀을 재어 두고 사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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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이 옆 사무실에 출판사를 차렸다. 이름을 ‘바틀비’로 지으려 한단 얘기를 들으니 ‘필경사’에 대한 예전의 궁금증이 떠올랐다. 필경(筆耕)이란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는 필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속 등장인물인 바틀비의 직업이 필경사였다.

작중 그의 행동이 특이함에도 작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풀어가는 경우도 있고, 작중인물들을 분석하여 사무직이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병증’에 대해 고찰하는 경우도 있다. 주거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당시 뉴욕의 월세는 소득에 비해 얼마나 비쌌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게 한다. 바틀비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홈리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하던 변호사 사무소에서는 필경사들에게 100단어당 4센트를 지불하였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5초에 1단어를 쓸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필사 6시간 정도를 가정하여 하루에 2달러 정도 벌었을 것이다. 한 달 꼬박 일하면 50달러 정도 벌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나는 그 일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어”라면서 창밖의 벽을 보며 백일몽에 빠져드는 것이 일상이었으므로 훨씬 수입이 적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뉴욕에서 제일 저렴한 하숙비는 한 달에 15달러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필경사로 쉬지 않고 일해서 벌 수 있는 소득의 30%에 해당한다.

소득대비임대료(RIR·Rent to Income Ratio)가 25%를 넘어가면 주거비 부담이 무겁다고 본다. 필경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장 질이 낮은 하숙방도 어렵게 구해야 하는 처지였던 셈이다. 그가 사무실을 거처로 삼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집이 아닌 사무실, 공장 구석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고시원이나 찜질방 신세를 지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찜질방도 이용하기 어려우면 결국 노숙을 하게 된다. 이런 사례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소득에 비해 주거비용이 높기 때문이다. 80만원 남짓 벌어 40만원짜리 고시원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다. 사회보장제도나 주거복지라는 개념도 없었던 19세기 뉴욕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상황이 씁쓸하기만 하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여러 지자체에서 주목하고 있는 대안이 사회주택이다. 당사자들이 힘을 모아 스스로 주택을 마련해보자는 움직임이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주거문제 해결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자구책이다. 여러 주택협동조합이 결성되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만의 힘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 지자체에서 ‘사회주택조례’를 만들어 지원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좀 더 효과적으로 다듬어 나갈 필요가 있다.

현재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공사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사회주택모델을 만들기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공공임대 사업에 사회주택 개념을 연계하여 공동체와 수요자가 직접 건설에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주택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건설되고 관리되는 사회주택이 실현되면 현장의 여건과 주민의 목소리를 반영한 도시재생을 이루는 주요 수단이 될 수 있다.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걸 알게 된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긴다. 거처를 잃고 부랑자가 된 바틀비는 교도소에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한다. 만약 사회주택에서 서로 소통하고 아옹다옹하기도 하며 생활하였다면 그도 태도를 바꾸고 삶을 이어가지 않았을까? 쉽지 않지만 사회주택을 포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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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애쓰는 일은 밥을 시간을 들여 15분 이상 천천히 먹는 것이다. 꼭꼭 씹어 먹고, 먹으면서 여유 있게 담소도 좀 나누라는 아내의 조언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퍼붓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도 해 주란다. 점점 음식을 빨리 먹는 것의 신체적 한계도 느낀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 선배와 함께 회를 먹었는데, 회가 맛있어서 허겁지겁 집어 씹지도 않고 삼킨 채 ‘소맥’을 퍼부었더니 몇 년 만에 ‘오바이트’를 흥건하게 해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술을 많이 마신 것보다 회를 꼭꼭 씹지 않고 먹어 사달이 났다면서 혼을 낸다. 밥 빨리 먹는 사람에 대한 규탄은 드문 일이 아니다. 친구들과 열어둔 단체 카톡방에는 밥 빨리 먹는 회사 상사들을 보고 있자면 체할 것 같다는 기분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허겁지겁 먹고 허겁지겁 마시는 건 이미 세련되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캐릭터가 됐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성도 있겠지만 자라면서 더 밥을 빨리 먹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빠르게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흡입’은 내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어릴 적 밥상에서 들은 가장 무서운 두 가지 말은 “시조가락 떨지 말고 얼른 밥 먹어라”와 “밥상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였다. 일일연속극에 나오는 단독주택의 식사에서는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지만 나는 밥상의 의논을 경험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기엔 부모님은 늘 바빴다. 밥은 하여간 후딱후딱 먹어야 하는 걸로 느꼈다. 초등학생 시절 도시락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을 지키는 방법은 싸움을 잘하는 녀석들이 뺏어 먹기 전에 빨리 먹어 치우는 거였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천 명의 훈련생들이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따금 지체가 생기면 밥 먹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수저를 직각으로 움직이며 식사를 하는 도중 훈육관은 꾸물댄다면서 식판을 엎기도 했다. 회사 다닐 때 인사팀 선배가 구내식당에서 식사시간을 재어봤더니 평균 7분이 나왔다고 한다. 몇 년 전 본 경제 다큐멘터리에는 그렇게 밥 빨리 먹는 문화가 전형적인 대기업 중 하나의 기업문화로 묘사되기도 한다. 밥을 빨리 먹어야 한다. 얼른 담배도 한 대 피우고 낮잠으로 피로도 풀어야 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까지 ‘흡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사였다. 술을 마실 때 ‘달린다’는 표현도 함께 포개진다. 쉴 새 없이 ‘흡입’하고 ‘달리는’ 것은 쫓김에서 오는 ‘조급함’과 식생활의 결합이다. 의사나 가사 전문가들, ‘웰빙’을 말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밥 먹으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지만 그건 매일 바삐 쫓기는 ‘보통’의 한국사람들에게 심정적으로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물론 밥을 느긋하게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세련되다는 것 정도는 성인이라면 모두가 안다. 한 시간 정도의 점심시간을 가진 도심의 직장인들과 공무원들은 이제 아메리카노 한 잔의 ‘여유’를 알고 ‘점심 맛집’에서 음미하는 법도 익히는 중이다. 성장하면서 빨라진 식사속도는 이쯤에서 브레이크가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인이 되고 나서도 점심시간 한 시간의 여유 없이 한 끼를 ‘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늘어나는 서비스 노동과 불안정 노동은 훨씬 더 사람을 촉박하게 만든다. 예컨대 영업사원과 서비스센터의 출장 수리기사, 택배기사, 대형마트의 캐셔, 제조업체의 사내하청 노동자 등에게 한 시간의 점심시간과 ‘여유’는 그대로 사치다. 안다고 모두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밥을 빨리 먹어야 하는 ‘생존형’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전제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휴식시간과 안정적인 최소한의 밥벌이다. 노동정책의 비전 중 하나로 느긋한 식사시간이 들어간다면 어떨까. 한갓지게 밥 먹으면서 편안하게 주변 풍경을 보며 쉴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으면. 지금까지 끼니를 급히 때우던 사람들이 가족에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며 잔소리를 할 수 있게 됐으면 한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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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얼마나 뜨거운가, 등짝을 뜯어묵을라 카네.” 밭에 매달려 있다가 돌아오는 아주머니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고, 어린 고양이 두 마리가 가만히 지켜본다. 올해 마을에서 보는 새끼 고양이 전부. 여름내 제법 몸이 불어난 녀석들은 볕이 뜨거울 때는 나무 그늘이 지는 돌담에 올라앉아 있거나, 우리집 계단참 밑에 웅크리고 있거나 했다. 여름 내내 집을 나설 때마다 고양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이 몸에 익었다. 막내 아이는 유난히 고양이를 좋아해서 한참 울다가도 고양이 소리만 나면 울음을 그치고 쫓아간다. 혼자 고양이 흉내를 내면서 놀기도 하고, 저녁이 되어서 뜨거운 바람이 조금 식으면 아이 손을 잡고 고양이를 찾아가는 고양이 산책도 한다.

지난 십 년 사이 해마다 마을에는 대여섯 마리, 혹은 예닐곱 마리쯤 되는 새끼 고양이들이 태어났다. 마을에 눌러사는, 사람과 고양이와 개를 헤아리면 고양이가 사람만큼은 살고 있겠다 싶은 정도였다. 사람과는 달리 고양이는 젊은 고양이도, 어린 고양이도, 늙은 고양이도 있어야 할 만큼 적당히 어울려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다들 어디로 가는지 마을에 사는 고양이 숫자는 늘 고만고만했는데, 그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집이 두 집, 앵두나무집과 동사(마을회관) 뒷집. 거기에 동사에 모여서 밥을 해 먹는 할매들 중에도 고양이 밥을 챙기는 분이 있어서, 마을 고양이들은 동사와 그 두 집을 오가며 지냈다. 사람들 일하러 나간 때에는 앵두나무집 마루에도 올라앉아 있고, 돌담 위에서 마을 사람들 지나다니는 것도 쳐다보고, 산나물 해 와서 널어놓으면 빙 둘러갈 줄도 알고, 깻단 세워 놓은 사이를 빙글빙글 돌아다니거나, 경운기 짐칸 밑에 길게 늘어져 있거나.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랬던 것이 지난해, 마을에 몇 집 빈집이 생겼다. 앵두나무집과 동사 뒷집도 고양이들한테는 빈집이나 마찬가지인 집이 되었다. 동사 뒷집 할매는 요양원에 갔고, 앵두나무집도 할배가 떠나시고는 늘 골목길에 세워져 있던 경운기가 치워졌다. 그 집 할매는 오랫동안 병원에 다녀와야 했고. 빈 앵두나무집에는 깜깜해질 때까지 마루청에서 내려오지 않는 고양이들이 있었다. 동사에 모여 밥을 해 먹는 할매들도 몇이 줄었다. 고양이 밥이 따로 놓이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 되었다. 대여섯 마리쯤 돌아다니던 새끼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털은 ‘우시우시’하고, 얼굴은 쪼삣한 채로 여름을 보냈다. 어미들도 돌담 위를 걷다가 우아하고 가볍게 지붕 위를 타넘고 다니던 녀석들이, 몇 걸음 더 돌아가서 처마 끄트머리를 붙잡고서야 지붕 위로 올라가고는 했다. 고양이들은 식구들 여럿이 함께 모여서 가만히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여름을 그렇게 보낸 새끼들은, 가을이 와도 몸집이 작았다. 그래서인지 새끼들이 어미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 새끼들이나 어미들이나 겨우 비쩍 마르지만 않은 정도로 겨울을 맞았다. 좀체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마을 어귀에 내어놓은 쓰레기봉투가 찢어지는 일도 생겼다. 그렇게 지난 한 해 동안, 마을 고양이들은 빈집 살림을 살았다. 한 해를 그렇게 보낸 고양이들은 올해 새끼를 두 마리만 낳았다.

여기 악양면은 오래전부터 농사가 잘되는 땅이라, 살림이 넉넉한 시골 마을이었다. 농사 잘되는 것을 두고 “각설이패가 들어와서 삼 년을 빌어먹고도 한 집이 남는” 동네라고도 말했다. 지금도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면에 있는 초등학교에는 아이들이 백 명쯤 다니고, 새로 이사 들어오는 젊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여유롭게 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 다른 시골 마을에 견주어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할매 할배들 돌아가시면서 빈집이 늘고, 자기 살림과 마을 살림을 함께 꾸려갈 줄 알았던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은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다. 용케 빈집이 많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앞으로 빈집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저녁이면 빈집들 사이에서 고양이들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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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5일, 최저임금위원회는 정부세종청사에서 11차 전원회의를 열고 2018년 최저임금을 7530원으로 확정했다.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고용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찬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지만, ‘고용감소가 불가피하다.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우려에 많은 국민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언론들이 ‘업주보다 더 많이 벌어가는 알바’라는 선정적인 문구로 국민들의 불안을 파고든다. 최저임금 문제를 이른바 ‘을과 을’의 전쟁으로 몰아가려는 뻔한 수법이다.

자영업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비용 중에 일부일 뿐이다. 설비비, 인테리어비, 전기요금, 관리비, 임대료, 가맹점비, 대출이자 등 많은 비용이 있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비용의 지출은 당연히 여기면서 인건비의 지출에 유독 인색한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의 ‘시장경제’는 계속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경제의 초석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자본의 이익을 최소화하고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경제체제로 ‘시장경제’를 구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교과서를 살펴보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 시장에서 적정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적정한 가격’을 찾아보기 어렵다. 애덤 스미스는 적정하지 않은 가격은 임금이 높아서가 아니라 자본가의 욕심에 따라 이윤이 오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정의롭고 올바른’ 완전경쟁시장으로 발전하면 이윤이 줄어든다는 것, 그러기 위해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 즉, 자본가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걸러내야 한다는 것이 <국부론>의 주요 논점이다.

자본에 대해 이처럼 박한 평가를 한 이유는 국부창출에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이윤’만을 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21세기 자영업 현장에 적용해보면 열심히 일하면서 노동을 하는 자영업자와 알바는 노동자에 해당하고, 건물주, 가맹점본부, 금융기관은 자본가에 해당한다. 최저임금을 올리기 어려운 이유는 공정하지 않은 임대료, 수수료, 이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애덤 스미스가 우려했던 대로 우리 ‘을’들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다.

공정하지 않은 임대료로 논의를 좁혀보면, 스스로 자영업을 영위할 생각이 없으면서 점포를 소유하고 임대료를 자영업자에게 거둬들이는 구조가 자영업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다. 실수요자, 즉 자영업자가 아닌 ‘돈 많은’ 사람들이 점포를 매입하겠다고 뛰어드는 순간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게 되고, 그에 대한 투자비를 회수하겠다고 임대료를 올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런 행태는 낮은 비용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경제를 어지럽히는 매점매석과 동일한 부작용을 낳고 자유주의 이념에도 배치된다.

정리하자면,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구조는 ‘을과 을’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공정한 노동대가에 대한 불로소득의 침해’를 막아내기 위한 사회적 합의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저임금은 불로소득을 줄여 적정한 노동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수단의 하나이다. 따라서 불공정한 갑의 횡포를 막고 자영업용 부동산의 불합리한 소유 및 임대구조를 개선하려는 정책이 병행되어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불로소득을 재테크 따위로 부르면서 장려하거나, 취할 수 있는데 안 하면 바보가 되는, 재력가나 고위공직자의 필수 덕목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부’가 철학적으로 용인되는 근거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대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땀 흘린 대가가 불로소득보다 존중받을 수 있어야 정상적인 사회이며 튼튼한 시장경제가 지속될 수 있다.

강세진 | 박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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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명목으로 독일을 쏘다니는 중이다. 독일에서 여행자로서 곧바로 운전하며 다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운전하던 대로 했더니 졸지에 ‘난폭자’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움직일 기미만 있으면 차들은 멈춰섰고, 자전거가 옆에 지나가면 차들은 속도를 줄였다. 깜빡이를 켜면 옆 차로의 차는 속도를 줄이면서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아우토반에서도 거친 운전자들은 차량이 가진 최고의 역량을 다 해 속도를 냈지만, 위험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속도가 아찔한 운전자들은 자연스럽게 우측 차로로 빠른 차들을 피했고 그때 역시 우측 차로의 차들이 충분한 안전거리를 만들어 줬다. 그들은 ‘안전거리’ 확보를 하나의 규칙으로 숙지하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를 약간이라도 침범하거나 보행하려는 사람들보다 먼저 가려고 할 때 독일 사람들은 한결같이 항의했다. 독일어는 몰라도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차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딱 제자리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항의한다는 점이었다. 슈투트가르트 시내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 중, 카운터의 직원은 한국의 알파벳 철자를 찾지 못해 헤맸다. 성격 급한 나는 “도와드릴까요”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카운터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 직원은 곧바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아, 제발 제자리를 지켜주세요”하고 제지했다. 내 무례함을 곧바로 인지했다. 그건 바로 ‘거리’였다.

한두 달 전쯤 미군이 운영하는 영어회화 클럽에 간 적이 있다. 미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거리’가 주제가 됐다. 20대 초반의 미군 남성은 한국인들이 아무 때나 ‘치고 들어오는’ 혹은 ‘들이대는’ 것 때문에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밝히기 꺼리는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물어본다는 거였다.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 대해서 신랄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던 영국사람들이 기억났다.

한국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숫자를 채웠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에 자란 젊은 세대는 대개 개인주의자로 자랐다. 그러나 상사, 고객사, 주인 등 ‘갑’들에게 무력한 ‘을’들은 ‘거리’를 두고 싶지만 살기 위해 ‘눈치’를 보고 ‘무난한’ 모습을 연출한다. ‘무난한’ 모습은 모두의 탈진에 의존한다. 게다가 ‘탈락’의 공포를 완충해줄 정도로 사회적 보호망은 없다. 그러니 ‘개인적 공간’은커녕 ‘감정’마저 소진해야 하는 사람들이 헛헛한 마음으로 ‘혼밥’을 하고 그게 익숙해지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 관계적 고립이 지속되면 사람이 상한다. 반드시 고립된 개인들을 함께하게 할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독일에서 부러운 것은 ‘개인적 공간’을 잘 지켜주는 것에 대한 부러움보다는 이를 사회적 ‘연대’로 잘 가꿀 수 있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란 책에 따르면 독일의 노동조합과 직장협의회가 경영에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적 공간을 지킬 수 있다. 9시 출근 6시 퇴근을 보장하고 어떤 형태로 일해도 생활에 위협을 느끼지 않기에 뜻이 맞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저녁 있는 삶’을 누릴 시간 여유가 있고,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평일 중에도 노동조합이 확보하기에 ‘연대’의 가치가 더욱더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항의하는 것도 스스로의 존엄을 유지하게끔 제도적 보호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연대가 그나마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이방인도 편안하고 소수자도 편안하다.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탈진하는 사람이 넘치는 지금, 그런 장치들은 더 빠르게 효과적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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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제103조)고 선언하여 법관(판사)의 독립을 사법부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법관이 지켜야 할 윤리기준과 행위규범을 정한 ‘법관윤리강령’에서도 가장 첫 번째로 ‘법관은 모든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 나간다’(제1조)고 하면서 독립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독립성’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독립성은 재판의 공정성이 보장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공정성은 사법절차에서 지켜져야 하는 절대 원칙이다. 공정하지 않은 판결에 대해 당사자에게 승복을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법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성장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다양해지면서 새로운 법리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 기존의 해석이 수정될 필요도 있다. 특히, 사법부가 다수결의 현실에서 외면받기 쉬운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양한 판결이 필수적이다. 자유로운 비판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이다.

그런데 얼마 전, 법원에서 판사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판사들의 자발적인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개선 방향과 관련한 토론회를 마련하자, 법원행정처가 이 토론회를 가능한 한 조용하게 진행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토론회는 다양한 국제 사례를 통해서 법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인사제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로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으로 나타난 상황에서 법관의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법원행정처 소속 고위법관들은 수차례 회의를 거쳐 토론회 발표 내용 중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언론에 배포하지 말라는 등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고, 새삼스럽게 판사들의 학술모임 중복가입을 제한하겠다고 했다. 결국 해당 업무를 담당할 판사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며 사직서를 내자, 법원행정처는 판사의 법원행정처 발령 당일 다시 원래 근무지로 돌려보내는 초유의 인사발령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법원행정처에 비밀번호가 설정된 ‘판사 뒷조사 파일’이라는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의혹도 함께 제기되었다. 법원이 조직적으로 판사들의 자율적인 연구활동을 방해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의적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법원의 대응은 더 큰 충격이었다. 대법원장이 전권을 부여한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법원행정처장이 조사를 거부하여 결국 의혹이 제기된 블랙리스트 파일에 대해서 조사하지 못했다. 대법원장의 권한이 하급자인 법원행정처장에게서 막힌 것이다. 결국 전국 각 법원 판사들이 수차례 판사회의를 열어, 법원별로 대표자를 선출하고 사법부 역사상 최초로 전국법관대표회의도 열렸다. 그리고 대표회의에서 블랙리스트에 대한 추가조사를 대법원장에게 요구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를 거부했다. 재판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판사의 독립성을 고위법관들이 스스로 허물고서 이에 대해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오늘 사법연수원에서는 2차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린다. 대표회의를 앞두고 인천지방법원 최한돈 부장판사는 블랙리스트 재조사를 요청하며 대법원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고,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차성안 판사는 다음 아고라 이슈청원 게시판에 판사 블랙리스트에 대한 10만인 청원을 올리고, 눈물로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법관대표회의 결정에 대한 양 대법원장의 용단을 촉구한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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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세’라니, 세금이라는 건 버는 돈, 쓰는 돈, 가진 돈에 붙는 거 아닌가. 무슨 세금이지? 찾아 보니 고향세는 일본에서 먼저 시행하고 있는 제도라고 한다. 지방정부에 돈이 없으니까,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내는 세금 가운데 일부를 자기가 원하는 지자체에 보내는 제도이다. 일본에서는 제법 자리를 잡아 지방세보다 고향세를 더 많이 거두는 지자체도 있다. 우리나라도 곧 구체적인 방법을 정해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고향세 같은 아이디어를 내야 할 만큼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는 처참하다. 자기 살림을 늘 중앙정부에서 돈을 받아서 꾸려 나가는 입장이다 보니,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자체장의 선거나 지역 국회의원 선거 자료의 핵심은 늘 “내가 중앙정부에서 돈을 이만큼이나 끌어왔다” 혹은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시골로 돈을 보내는 사업 가운데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으로 하는 ‘창조적 마을 만들기’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같은 게 있다. 지역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해마다 전국 각지의 마을들을 선정해서 수십억원을 쓴다. 돈 쓰임새에 대해서는 농식품부에서 일정한 비율로 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자체 형편에 맞춰 필요한 일에 쓸 수 있다. 돈이 내려와서 어떻게 쓰이는지 시골 사람들이 쉽게 체감하는 사업이다. 작은 지자체 살림에 견주면 적지 않은 돈이 내려온다. 한데 이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살펴보면, 정말 돈 없는 곳이 어렵사리 받아다 쓰는 것인지 맞나 싶다. 관광객을 위한 안내판, 편의시설, 공연장 같은 것을 짓거나, 도로를 내거나, 뜬금없는 문화사업 따위를 하거나. 심지어는 할매들 모여서 같이 밥해 먹고 쉬고 하는 마을회관에 값비싼 헬스기구 따위를 줄줄이 들여오기도 한다. 문화, 관광, 생활 시설, 경관 개선 등 여러 가지 명목이되 실제 내용은 한결같이 토목, 건축, 시설 구입 비용이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지역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몇몇 ‘장년층 남성’의 의견만으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진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쓸 수 있는 공동의 농업 재산을 만들거나, 마을 살림의 기반이 될 농림어업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거나, 점점 기력이 없어지는 할매·할배들이 좀 더 수월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등에 돈이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 길을 새로 내더라도, 보행기를 끌고다니는 할매들이 안심하고 편히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트럭과 농기계들이 좀 더 빨리, 편하게 다니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 면에 하나쯤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몇 안되는 아이들이 지내는 것을 돌아보는 일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지방정부는 돈이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다달이 어디에선가 열리고 있는 지역축제들은 행사 수익으로 충당하는 비용이 평균 30% 안팎이라고 한다. 70%의 돈을 해마다 퍼부으면서 빚을 내서까지 지역축제를 하는 것이다. 돈을 더 마련해서, 지방자치를 활성화하는 것은 당연히 밀고나가야 할 일이겠다. 하지만 돈을 더 마련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돈 쓰는 방식에 대해 지방정부가 지역의 시민들과 훨씬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고, 몇몇 사람들만의 의견으로 세금이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어쨌든 고향세는 마음을 움직이는 세금이 될 것이다. 돈을 보내고 있으니, 들리는 소식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귀를 기울이고, 더 발걸음을 하고, 대도시와 지방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더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야말로 지방정부에 대해 보는 눈이 많아지겠지. 다행히 일본에서 10년쯤 이 일을 하면서 우리도 비슷하게 겪을 여러 문제들을 미리 보여주었다. 굵직한 잘못 몇 가지는 피해갈 수 있을 터이다. 중앙정부는 어느 때보다 믿음직스럽게 일을 해 나가고 있다. 지방정부도 살림과 운영을 바꾸기에 지금만큼 좋은 때가 없는 것 같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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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나는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을 비판했다. 그해 11월엔 바이오매스,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칼럼을 썼다. 그러나 2017년 7월의 나는 당시의 나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9년쯤 됐으니 입장이 바뀔 법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다. 첫째, 신재생에너지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기대치가 수정됐다. 둘째,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변하고 있다. 셋째, 환경오염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나씩 짚어보자. 내 입장이 달라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 가령 구글의 판단도 그렇다. 2007년 11월27일 구글은 google.org라는 비영리법인을 통해 ‘석탄보다 저렴한 재생가능에너지’(RE<C) 계획을 발표했다. 지열발전을 개량해 석탄보다 낮은 가격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유가가 하늘로 치솟고 수많은 기술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라는 난제에 덤벼들던 시절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2011년 11월22일, 구글은 RE<C 계획의 실패를 선언했다. 대신 그 외의 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에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기대치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의 주요 수출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가솔린 혹은 디젤이 아니라 전기를 동력원으로 삼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지난 5일, 스웨덴의 자동차 메이커 볼보는 2019년부터 전기차 혹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만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아이폰이 휴대폰 시장을 스마트폰 시장으로 바꿔놓았듯, 테슬라의 국내 진출은 전기차로의 전환에 있어서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전기차는 전기를 연료로 삼는다. 따라서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발전량을 줄이고 냉장고를 없애자는 식의 주장은 너무도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2008년과 달리 미세먼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중이다. 미세먼지의 주요 발생 원인으로는 석탄화력발전과 디젤 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정부는 대신 액화천연가스(LNG)발전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석탄에 비해 비싸고 가격 변동이 심할뿐더러, 정도가 덜하다뿐이지 역시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은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LNG 등 화력발전소가 더 자주 가동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친환경적인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탈핵 선언 철회를 촉구한 환경단체 ‘환경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대표 마이클 쉘렌버거 역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해 입장을 바꾼 경우에 속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동시에 개인과 산업체가 모두 안정적으로 충분한 전기를 공급받으려면 ‘탈핵’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유지하고 늘려나가되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석탄에 비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은 현재까지 원자력뿐이다. 원자로 해체, 사용후 핵연료 처분, 중·저준위 폐기물 관리 비용을 모두 포함해도 그렇다. 원전 사고의 우려는 최대한 안전성을 높이고 운영 과정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대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사회적 위험 요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저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했다고 여겨지는 이 말은,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유작인 <When The Facts Change>의 제목이 되었다. 그렇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경향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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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통계를 보면 중학교 한 학급에는 학생이 평균 30명 있다. 이 중 6~25등은 일반고에 가는 학생들이고, 대학입시에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하지만 대학은 진학하는 수험생들이고, 대기업에는 가지 못해도 중소기업의 대부분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입시 문제는 중학생 때부터 1~5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림잡아 1~2등을 모아놓은 과학고와 외고 등 특수목적고, 3~5등을 모아놓게 될 자립형 사립고가 쟁점이 된다. 특목고와 자사고를 해체하지 않을 경우 일반고는 실업계에 진학하는 나머지를 제외하면 중학교 때 6~25등을 하던 학생들의 학교가 된다. 대학입시에서 ‘성공’할 수 있는 1~5등을 어떻게든 확보해 실적과 학급 분위기를 잡으려는 공립 일반고의 발버둥을 읽어낼 수 있다. “수능 정시냐, 학생부종합전형이냐”라는 대입전형 논쟁도 초점은 1등급과 2등급이 나올 수험생들의 경쟁에서 제기되는 공정성에 대한 이야기다. 3등급 이하 수험생의 이야기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고등학생 중 75%가 대학에 진학하는 시대에, 60%가 넘는 수험생의 사정은 음소거 처리되는 셈이다.

대학생활도 1~5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거점 국립대학 학생들의 공부와 대학원 진학, 취업이 주된 이슈가 된다.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로 대표 되는 영어점수, 각종 자격증, 인턴십, 교환학생, 해외 연수 등 자기계발에만 열중한다는 말도 1~5등 이야기다. 취업 준비에 대한 제대로 된 목표조차 정하기 어려운 지방대생들은 언급의 대상에서 빠지게 된다. 취업난도 1~5등 이야기다. 연초 대기업 집단의 경영계획이 발표되면 신규 채용 인원이 나온다. 언론은 대기업 공채, 공기업, 공사, 공무원 채용 인원을 통해 청년 취업문제에 대한 기사를 쓴다. 지레 겁먹고 9급 공무원 도전도 저어하고 중소기업에 가겠다고 말하는 지방대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채용부터 ‘제도’와 ‘프로세스’가 미비한 중소기업의 실정은 예외일 따름이다. 그만두는 날까지 ‘부당함’에 대해 다른 감각을 갖고 살게 될 이들의 이야기는 ‘노동이슈’로만 등장한다.

대학교육이 취업으로 인해 본연의 가치가 사라졌다는 말이 10년이 넘게 반복 중이다. 한국사회학회에 발표된 최종렬의 ‘복학왕의 사회학’이라는 논문은 그 말이 얼마나 현실감이 없는지 드러낸다. 중·고등학교부터 교육은 그들에게 적절한 목표를 준 적이 없고 부족한 점을 채워준 적이 없다. ‘대학생이면 으레 기대되는’ 목표와 자신들의 삶이 유리되어 있음을 간파한 6~25등은 전공공부와 치열한 자기계발, 적극적인 구직 모두 동참할 생각이 없다. ‘복학왕’에 등장하는 행태만 떠돌 뿐 맥락은 묻히고 마는 게 문제다. 다른 한 편, 중소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가지 않는다는 한탄이 줄을 잇는다. 그런 서사 속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1~5등이다. 성실함으로 회사를 떠받치고 있는 6~25등들은 자신들의 현장에 대한 이야기에서조차 주눅이 든다.

나는 6~25등의 관점에서 사회를 읽어보는 게 지금까지 다뤄보지 않은 한국 사회의 혁신이고 진보의 출발점이라 본다. 이들이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에서 배움의 재미를 포기하지 않고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면 교육이 혁신한다. 이들의 직무역량이 올라가면 중소기업이 혁신된다. 이들이 직장에서 제 대접을 받으면 한국의 노동인권이 진보한다. 이들이 다니는 직장에서 여성들이 경력단절에서 밀려나지 않으면 한국의 유리천장에 큰 균열이 간다. 정권이 바뀌고, 수월성 교육에 대한 반성과 공교육 정상화에 대한 이야기가 늘었다. 교육과 노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지금 시급히 바꿔야 하는 것은 초점을 맞출 대상이다. 6~25등이 교육과 노동의 목표에서 유리되지 말아야 한다. 1~5등에 대한 투자는 이미 수확체감의 포화상태다. 6~25등에 대한 투자가 미래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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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다문화가정 학부모와 상담하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초등학생 자녀들은 방과후 동네에 있는 공부방(지역아동센터)에 다녔다. 대부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이용하는 시설인데, 아이들이 오랫동안 공부방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해온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는 것이다.

공부방 교사는 아이들에게 학습지를 풀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숙제를 다  못하거나 풀어온 문제가 틀린 경우 그 개수만큼 플라스틱 자와 장구채, 노트 등으로 때렸다. 아이들은 수십 대에서 많은 경우에 100대 넘게 맞기도 했다. 머리가 길다고 다른 아이들 앞에서 가위로 머리카락 일부를 자르기도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폭언이나 욕설로 공포심을 주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피해를 당한 아이들은 자해, 등교거부, 부모와 대화 단절 등 이상행동 증상을 보였고, 우울증 진단까지 받은 아이도 있다. 이는 명백한 아동학대다.

부적절한 회계운영이 의심되는 정황도 있다. 학부모들은 센터의 요청에 따라 센터 운영기관의 후원계좌 또는 시설 대표자 개인계좌로 매월 5만~10만원씩 돈을 보냈다. 지역아동센터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보조금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무료이용이 원칙이다. 보건복지부 지침에서는 교재비, 야외현장체험비 등의 실비를 받는 경우에도 그 대상을 중위소득 85%를 초과하는 가정(4인 가구 기준 월수입 379만7000원 이상)으로 하되 최대 5만원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설의 이용 아동 및 아동의 보호자로부터 센터 후원금을 받는 것은 지양하고, 지급된 후원금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부금 영수증 발급 및 사용결과 보고를 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과태료 300만원이 부과된다. 그러나 한국어가 능숙하지 못하고 한국 생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다문화가정 학부모들은 센터가 납부하라는 대로 매달 돈을 낼 수밖에 없었고, 이후 어떠한 기부금 영수증이나 사용내역도 받지 못했다.

지역아동센터는 아동복지법에 규정된 아동복지시설이다. 방과후 돌봄 서비스가 필요한 18세 미만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보호·교육, 놀이와 오락의 제공, 보호자와 지역사회의 연계 등 아동의 건전 육성을 위하여 필요한 아동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과거 민간에서 공부방이라는 이름으로 소규모 자생적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4년경 아동복지법에 따른 복지시설로 법제화되고 보조금이 지원되면서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작년 기준 전국적으로 4100여개의 지역아동센터를 평균 10만명 이상의 아이들이 이용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매우 소중한 공간이다. 가정을 넘어 사회의 세심한 보호가 필요한 한부모·조손·다문화 가정이나, 부모가 모두 일하는 맞벌이 가정의 자녀들이 방과후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꼭 필요한 사회적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장이다. 소규모 가정 형태의 이용시설로 충분하지 않은 정부 지원과 박봉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아동학대 사례가 지역아동센터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관리감독이 세심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복지부 지침에 따르면 지역아동센터는 신규 시설의 경우 1회 진입평가를 받고, 이후 3년에 한 번 심화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평가 방법이 해당 시설이 자체적으로 평가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전문가 2인이 1조가 되어 해당 시설을 방문해 관련 서류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시설의 회계부정이나 아동학대를 방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시설 이용 아동의 학부모가 평가에 직접 참여하거나, 시설 이용 아이들에 대한 아동보호 전문기관의 정기적인 심리상담 프로그램 등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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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섬진강에 나섰다. 다행히 4대강 축에 끼지 못했던 섬진강에는 모래사장이 남아 있다. 발목쯤 잠기는 자리, 물속 모래를 헤치면 재첩이 있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모래를 휘저으면서 걷는다. 발가락에 단단한 껍질이 걸린다. 하나씩 재첩을 집어 올린다. 둘이 같이할 때는 한 사람은 모래를 헤집으면서 걷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드러난 재첩을 줍는다. 이렇게만 해도 식구들이 두고두고 먹을 만치 재첩을 잡을 수 있다. 봄에 산나물하듯, 때맞춰 하는 살림살이. 아이들도 저마다 한 움큼 재첩을 잡았다.

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으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 아이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먼저 귀가 쏠린다. 그렇게 듣는 이야기가 노골적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부모가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친구 같은 아빠’다. 아이들이 친구와 노는 것이 그만큼 어려우니까 아빠한테 친구 노릇까지 떠맡기는 것이겠지. 친구 노릇에는 젬병인 나는, 내 속 편하자고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친구처럼 같이 노는 일은 아무래도 능력 밖의 일이니까, 재첩을 잡으러 갈 때에 섬진강에 함께 가고, 논두렁을 바를 때는 봇도랑에서 놀라 하고, 겨울에는 함께 산에 가서 갈잎과 잔가지를 주워 모은다. 때맞춰 일하러 나가는 길에 아이들이 가서 놀 만하다 싶으면, 아이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속으로는 놀면서 봐 두었다가 어여 너희들이 이 일을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심산인데,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따라나선 길에 스스로 잘 논다는 것. 아마도 세 아이가 함께 있어서일 것이다. 저들끼리만도 친구처럼 놀 수 있으니까.

자주 듣는 이야기로, 아이가 셋이나 되니 얼마나 힘들겠냐고 한다. 하지만 세 아이가 모여서 늘 우당탕거리는 집구석에 살게 된 이후로, 우당탕의 힘겨움이야 뼈저린 것이 되었을지언정, 하루 종일을 아이 한 명과 단둘이 지내야 하는 엄마, 혹은 아빠의 괴로움은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되었다. 한 아이와 지내는 부모일수록 ‘친구 같은’의 압박에 더 시달리는 것 같다. 그래 보인다. 일단 아이가 둘이면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니까,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아이들도 쉽게 알아채지만, 아이가 혼자면 그것도 어렵다. 어쨌거나 세 아이와 함께 살면서,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으면, (내가 듣기로는) 아이가 바라는 것도 결국은 ‘친구 같은 아빠’보다야 그냥 친구이다. 아빠는 아빠고, 친구는 친구. 좀 더 다정하다거나,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눌 수 있다거나, 아이 생활에 관심이 많다거나 하는, 아이가 그런 아빠를 바랄 수는 있겠지만.

아이는 여러 식구와 이웃,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자라게끔 되어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자면 아빠가 친구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부모 말고 다른 관계들이 파탄나면서, 그리고 그야말로 아이와 사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당장에 그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맡던 역할들이 거의 부모한테로 넘겨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뾰족한 수가 없는 부모들은, (특히 육아를 전담하는 한쪽은) 그렇게 부여받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차서는, 수시로 내 잘못이라고 되뇌고, 아이한테는 미안하다는 소리를 한다.

주위에서 누군가 아이를 낳고, 필요한 물건이 뭐냐 하고 물으면, 우선 두 가지를 먼저 얘기해 준다. 하나는 아기를 오래 업어도 불편하지 않을 아기띠(이것은 포대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아무래도 이 물건을 만든 것은 아이를 업고도 다른 일을 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게 아닐까 싶다), 또 하나는 무릎의자(닐링체어).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잠든 아기를 업은 채로 책상머리에 앉아 꽤 오랜 시간 뭔가를 할 수 있다. 청소든 빨래든 집안 꼴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잠시라도 짬이 나면, 나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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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에 대한 청와대의 태도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 대체 왜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일까? 어차피 미국은 사드를 못 뺀다는 전제하에 벌이는 벼랑 끝 전술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판단은 미국과 한·미동맹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다. 하나씩 따져보자.

‘한반도는 미국에 이른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먼저 파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럴 리가.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가 결코 아니다. 미국에 전략적 요충지란 석유가 나오는 중동, 유럽을 향해 띄운 ‘항공모함’ 영국,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한 최대 거점인 일본 등이다. 과거에 그어졌던 ‘애치슨 라인’이 보여주었다시피 한반도는 그에 포함되지 않는다. 2002~2004년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한국통’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책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보자.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 전까지 한국은 미국에 전략적 중요성이 없었으며 아시아 본토에 미국의 병력이 존재할 경우 미국에 과도한 리스크만 안길 뿐이라는 것이 워싱턴 정가의 일치된 견해였다. (중략)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4만2000명에 이르는 미국 시민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이 때문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는 남한을 ‘잃어버려서’, 그런 희생을 헛된 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했다.”(50쪽) 미국에 한반도는 ‘중요하기 때문에 지키는’ 땅이 아니다. ‘지켰기 때문에 중요해진’ 곳에 가깝다. 한국 정부가 미국을 어떻게 대하건 미군이 남아 있으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한미군이 철수한다 해도 북한은 한국을 선제공격할 수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게 진짜 문제다.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을 폭격해도 미군이 직접 반격을 당할 위험이 거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 병력의 손실 없이 폭격이 가능할 경우 결코 폭탄을 아끼지 않는 나라다. 주한미군은 북한보다 오히려 미국의 군사 행동을 제약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안전핀이라는 뜻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북한의 반격은 주일미군을 향할까, 한국을 겨냥할까? 진보 진영 자주파들은 ‘북한의 주적은 미국이지 한국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북한은 미국이 아무 공격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연평도를 포격하고 천안함에 어뢰를 쏜 바 있다. 북한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그릇된 종교적 믿음을 안보의 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일 경우 발생하게 될 경제적 혼란을 미국이 원치 않으므로 북한 선제타격은 있을 수 없다?’ 과연 그럴까? 물론 미국은 혼란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사정이 다르다.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폭로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임기를 다 채워나간다고 가정해 보자. 형사 피의자 신세로 전락하기 싫다면 무조건 재선에 성공해야 한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쇼’를 벌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지난 4월13일, 별다른 전략적 실익 없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가(IS) 지하기지에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지닌 GBU-43/B를 투하했다. 핵무기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폭탄이다. 그리고 언론 앞에서 우쭐거렸다. 트럼프가 재선용 카드로 북핵 문제를 ‘날려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고? 불과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트럼프의 당선 자체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자주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과 세계에 대한 관념은 1970년대의 리영희가 1960년대 일본 좌파들의 그것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2017년 현재, 반세기 전의 세계관에 입각해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 정책이 짜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의 정직한 입장 표명과 대국민 토론이 필요하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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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5시30분. 서울역이나 삼성역, 또는 종합운동장역 근처에 가면 수십명 또는 100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젊은 남자들은 주말에 한 소개팅 이야기 또는 애인 이야기를 하고 40대가 넘어 뵈는 남자들은 애들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창원, 울산, 거제, 여수 등 산업도시 일터로 돌아가는 회사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이다. 1990년대 중후반엔 주로 40~50대 ‘기러기 아빠’들이 셔틀버스에 탑승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부터는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아빠들은 전세 등을 얻어 아내와 아이를 서울로 보냈다.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세주고 아빠는 사택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셔틀버스의 구성원은 훨씬 젊어졌다. 20~30대 남성들이 늘었다. 주말에는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소개팅을 하고, 주중에는 산업도시에서 근무하는 남자들이다.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한 주말부부는 남성 가장 한 명이 식구를 먹여살리는 ‘남성 생계부양자’ 시대의 산물이었다. 고소득과 장기근속의 힘이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2017년 젊은 부부에게 맞벌이는 시대정신에 가깝다. 높아지는 주거비 등 생활비,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혼자 벌어 먹이는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은 더 이상 재생산이 가능하지 않다고 그들은 판단한다. 떨어져 있더라도 둘 다 벌어야 한다. 

산업도시 지방정부에 셔틀버스는 예민한 문제다. 주말 셔틀버스야 막을 수 없지만, 근처 대도시로 매일 통근하는 버스 운용에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직원들이 스스로 버스를 임차해 이동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지방정부의 행태는 인구감소를 막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직원들의 관점에서는 그저 복지를 막는 몽니일 뿐이다. 재생산에 대한 낡은 관점이 문제다. ‘든든한 남편 직장’이 있으면 여전히 여성들이 ‘전업 주부’로 남편을 따라올 거라는 가정 말이다. 회사의 시니어들은 후배들에게 젊은 때는 부부가 같이 사는 게 좋지 않냐고 설득한다. 젊은 남성 직원들에게는 이 말은 수도권에 간신히 일자리를 잡아 일하는 아내의 ‘경력 단절’로 다가올 뿐이다. 아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도 어렵다. 어느 지역이든 원할 때마다 옮겨가면서 일할 수 없는 직군이라면 당연히 그렇다. 현실적으로 지방의 산업도시를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은 남초 집단인 중공업 현장에 여성 엔지니어를 충분히 채용하는 것이다. 2016년 산업기술인력 수급 실태조사의 결과를 보면 조선·석유화학·자동차·기계 등의 산업을 보유한 경남, 울산, 전남의 여성 인력 채용은 10%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미래’를 보여주는 20대 여성 고용 또한 모두 7% 이내에 그친다. 공대 신입생의 4분의 1가량이 여학생이고, 자연계는 절반이 넘었지만 기업의 시선은 ‘제조업은 남자’라는 편견으로 가득하다. ‘남성 공대생’의 안전한 전공 선택지로 간주되는 ‘전화기’(전기·전자, 화공, 기계)를 선택한 여학생들은 동기 남학생보다 더 높은 취업 경쟁 앞에 망연자실한다. 지방근무를 여성들이 기피한다고만 말할 수 없다. 지방근무를 ‘회사가 막고’ 있는 상황도 적지 않다.

도시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창조적 인재가 몰려야 기업과 도시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했다. 다양성 수용과 기술적 인프라가 그 핵심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통한 성평등, 산업도시의 재생산을 통한 균형발전, 산업의 진화를 통한 경쟁력 향상. 여성 엔지니어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채용하려는 산업도시의 제조기업이 출발점이다. 여성 엔지니어가 산업도시의 기둥이 되도록 도시 인프라와 돌봄환경을 정비하고 기업의 채용을 확장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일.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등 이미 지방 이전이 완료됐거나 이전이 진행 중인 공기업도 같은 궤에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국토의 균형발전과 산업진화뿐 아니라, 수많은 젊은 주말 엔지니어 커플의 생이별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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