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세계인권선언 제1조)

지금으로부터 69년 전, 1948년 12월10일 프랑스 파리의 샤이요궁(Palais de Chaillot)에 모인 각 나라의 대표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희생과 전 세계에 만연한 인권침해에 대해 반성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존엄과 권리의 최소한을 선언했다. ‘세계인권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2년 뒤인 1950년에 열린 제5차 유엔총회에서 매년 12월10일을 세계인권선언 선포일로 기념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에서는 이날을 ‘세계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짧은 전문과 30개 조항의 본문으로 이루어진 ‘세계인권선언’은 꼭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41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유엔총회 문서 중에 가장 많이 번역된 문서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도 70년 전이라는 긴 시간이 부끄러울 만큼 2017년 한국에서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

지난 8일 한국에서도 세계인권선언 69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축사에서 “인류 역사는 인권 신장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인권 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개의 사건으로 18세기 시민혁명과 20세기의 세계인권선언을 꼽았다. 특히, 세계인권선언은 강제력을 갖지 못한 선언이지만, “역사에서는 선언 이상의 강력한 기여를 해왔”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인권을 우선하는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서 인권 사각지대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과제들 중 단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나는 보편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은 세계인권선언에서 선언한 ‘존엄한 인간’과 우리 헌법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생활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을 금지·예방하고 불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법이다. 독일의 평등대우에 관한 법률, 캐나다의 인권법, 미국의 민권법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일반적 차별금지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고 고령자에 대해서 고용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체류 외국인의 숫자가 200만을 넘어섰고, 성(性)소수자에 대한 국제적 인권 수준이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영역과 제한된 분야를 넘어서 모든 생활영역에서 인간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보편적 차별금지법 제정의 가장 큰 필요성이다.

국제인권기구의 권고도 매년 반복되고 있다. 2014년 방한했던 무투마 루티에레 유엔 인종차별 특별보고관은 개인 간에 발생하는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 등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고, 2017년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도 2009년에 이어 거듭 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지난달 있었던 한국의 국가별인권상황정기검토(UPR) 제3차 심의에서도 미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가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과 감각적 오독(誤讀)이 심각하다. 동성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개선하면 동성애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성(性)적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할 뿐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해서 부당한 차별과 혐오를 통해서라도 그 존재의 발현을 막아야 한다는 빈약한 인권 수준을 보여준다.

69년 전, 우리가 선언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해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지혜로움으로 세계인권선언의 마지막 조항을 끝맺었던 선배들의 통찰을 세계인권의 날을 기념해 곱씹어볼 일이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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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내려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꽤나 어려워했던 것 하나가 말을 알아듣는 일이었다. 아버지 고향이 경상남도여서 어지간한 말은 알아들을 성싶었는데, 이야기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몇 번이나 되묻다가, 약간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알아들은 척을 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십 년이 지났으니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처음 듣는 낱말이 적지 않다.

살림을 꾸리느라 가장 매달리는 일은 여전히 책을 내고 원고를 편집하는 일이다. 일할 때에 늘 곁에 두는 것은 국어사전. 그 가운데에서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다. 두꺼운 사전을 펼쳐서 하나씩 낱말을 찾아보던 것은 오래전 일이고, 이제는 늘 인터넷 검색을 해서 말을 찾는다. 이렇게 사전을 뒤지고 있으면 늘 마음이 어지럽다. 화가 나고,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아마도 편집자로 일을 하거나, 교정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고 믿는다.

사전은 말을 글로 옮기는 데에 기본이 되는 책이다. 글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때에도 마찬가지. 나라에서 펴내는 사전이라고 하면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편집 일을 하고 교정을 볼 때 모든 기준은 국립국어원 사전을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그것을 꼼꼼하게 따르다 보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기 쉽다. 최근에 기억나는 말 하나는 ‘몸뻬’이다. 시골에서 흔히 입는 바지인 ‘몸뻬’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퍼졌다고 하는데, 사전에는 ‘왜바지, 일 바지’로 순화하라고 풀이해 놓았다. 다만, ‘왜바지’라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순화어를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시골에서 듣게 되는 새로운 말들은 대개 ‘방언’이거나 무슨 말의 ‘잘못’인 경우일 때가 많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이 잘 모르거나 잘 쓰지 않았던 ‘다른’ 말들이 숱한 경우에 ‘틀린’ 말이 된다. 국립 기관에서 펴낸 원칙을 세우는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못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긍하기 어려운 것은, 이 사전을 찾아보기에 가장 좋은 인터넷 홈페이지는 네이버라는 것이다. 더 이상 표준국어대사전은 책으로 나오지 않는다. 판올림은 인터넷을 통해서만 하고 있는데, 국립국어원과 네이버 두 곳에서 이 사전을 본다. 물론 네이버를 통해서 찾는 것이 훨씬 편하다. 여러 자료를 함께 보기에도 그렇고, 판올림된 자료를 정확하게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기업에서는 이 사전을 쓸 수 없는 것일까. 국립국어원은 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일개 기업에 떠넘기고 있을까.

처음 출판사에서 일을 배울 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반드시 교과서를 기준으로 했다. 그것은 글을 처음 익히는 아이들이 헷갈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나 제 것이 맞다고 우기기 시작하고, 그래서 서로 다른 질서로 쓰여진 책을 읽게 된다면, 책 읽고 글 쓰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나중에는 으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지. 가장 큰 문제는 국립국어원 혼자서도 앞뒤가 맞지 않고,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는 식으로 일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게 고스란히 사전에 담겨 있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추며 말을 익히는 아이들이라면 이런 것들을 배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과 저기서 말하는 것이 달라도, 남이 눈치채지 못하거나, 누가 크게 문제 삼지 않으면 괜찮다는 것. 지역에서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에게 너는 ‘잘못’이라고 낙인찍고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 자기 일을 스스로 아퀴 짓지 않고 남에게 떠넘긴다고 해서 별 문제는 아니라는 것. 자기가 해 놓은 일이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남을 곤란하게 한다 해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이들이 숙제를 할 때마다 네이버를 통해 국립국어원의 사전을 보고 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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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서는 아무도 이길 가망이 없어 보기만 해도 뒤로 넘어간다. 건드리기만 하여도 사나워져 아무도 맞설 수가 없다. … 지상의 그 누가 그와 겨루랴. … 모든 권력자가 그 앞에서 쩔쩔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 <욥기 41장>’

1588년 잉글랜드 더비셔주 맘스베리에서 토머스 홉스가 태어났다. 당시 잉글랜드는 구교와 신교의 갈등,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 스페인 등 구교국가의 지속적인 위협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이 와중에 홉스는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 평생을 보냈다고 토로하였다. 그의 역작 ‘리바이어던’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나는 스스로 나를 다스리는 권리를 이 사람 혹은 이 합의체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만인이 만인을 향하여 이처럼 선언하는 것이 달성되어 만인이 하나의 인격에 통합되었을 때 그것을 국가(commonwealth)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가공의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한다. <리바이어던 17장 13절>’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야수와 다를 것 없는 자연상태 인간이 초래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서로 보호받기 위해 의탁하는 더 강한 괴물이 국가라는 해석은 절묘하다. 우리의 안녕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잘못 ‘사나워지면’ 가장 불합리하고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1960년 4월19일 이승만 정권의 불의에 항거하여 민중이 일어서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불과 1년이 지난 1961년 5월16일 박정희를 비롯한 일단의 무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말 그대로 괴물인 국가를 만들었다. 그 후 군부독재가 32년간 지속되었다. 차츰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최근에 촛불로 박근혜를 탄핵하면서 우리에게 ‘주권’이 있음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으나 잠시 안도하는 순간 언제 폭주하는 괴물에게 먹힐지 알 수 없다.

2012년 이후 마을이나 공동체에 대한 지원내용을 담아 제정되거나 개정된 자치법규는 150여개나 된다. 빈부의 격차,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갈수록 험해지는 사회, 나날이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 환경파괴나 주거환경 악화로 인한 삶의 질 저하 등에 대해 풀뿌리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자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가 이런 문제 해결에 별로 유능하지 못하니 기업이나 시장에 맡기라는 신자유주의 진영의 주장에 대한 시민사회의 명확한 반대의견이기도 하다. 수세에 몰린 괴물을 둘러싸고 자본과 시민이 한바탕 힘을 겨루는 듯한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홉스 이후 4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시민은 더 이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연상태의 인간이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철학사조와 과학이론과 정치체제의 격변을 경험하여 투쟁이 아니라 협동과 연대가 생존에 더 유효하다는 지혜를 습득하였다. 때때로 괴물을 견제하고 바르게 이끌 만큼 성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을공동체의 활성화는 이런 성장을 더욱 촉진할 것이다.

최근 서울시와 경기도의 일부 기초자치단체에서 마을공동체 중간지원조직이나 민관거버넌스 협의체를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단체들로 바꾸는 사태가 벌어졌다. 예상보다 좋은 마을공동체사업의 성과가 탐이 나 시민사회가 맡아 잘하는 일마저 행정조직에서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움직임도 목격된다. 막대한 자원이라는 강력한 힘을 지닌 공권력이 시민사회를 지원하기는커녕 길들이려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는 다시 피어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내년에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새로운 세상은 대통령 한 명 바꾼다고 열리지 않는다. 우리 바로 옆에서 사나운 괴물이 다시 날뛸지 모르니 민주와 분권과 주민자치를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지방정부가 구성될 수 있도록 현명하고 단호한 주권을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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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가 살기 좋은 선진국이라고 해서 이민을 왔다. 막상 살아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밥벌이의 어려움이나 언어장벽 같은 것이야 미리 예상하고 왔던 터라 새삼 불편해할 바는 아니었다. 통상적인 낯섦과는 별개로 일상생활을 하는 곳곳에 불편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것이 캐나다 사람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일 중 하나가 자동차 운전. 서울 같은 복잡한 도시에서 13년 무사고 운전을 했으니 운전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토론토에는 넓은 길, 좁은 길 가리지 않고 암초가 널려 있었다. ‘멈춤(STOP)’ 표지판이야 눈에라도 잘 띄니 적응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학교 주변에 있는 갖가지 표지판들. 신호등 위나 진입로 모서리에 작게 붙어 있는 표지판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제한속도 40㎞’ 또는 ‘아침저녁 진입금지’ 위반 딱지를 한두 번 떼고 나니까 표지판들이 크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학교 주변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도 스쿨버스가 멈춤 표지판을 올리고 서 있으면 양쪽 차로 차량은 얼어붙은 듯이 정지해야 한다. 무심코 그냥 지나쳤다가는 신호나 속도위반의 몇 배에 해당하는 범칙금과 벌점을 물어야 한다. 재판을 걸고 잘못했다고 아무리 빌어도 이것만은 절대 깎아주지 않는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토론토에서도 대란이 벌어진다. 교통대란이 아니라 ‘학부모 대란’이다. 교육청에서 길 미끄러워 위험하다고 스쿨버스 운행을 전면 금지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 돌봐줄 사람을 찾거나 휴가를 내야 한다. 그 여파는 토론토 전체로 퍼져나간다.

비단 아이들과 관련한 문제만이 아니다. 안전에 관한 것이라면 내 일상생활이나 스케줄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문제를 제기하기가 어렵다. 아니, 이곳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하기는커녕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로 여긴다. 토론토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하면 토론토 지하철이 모두 멈춰 선다. 안내 방송이 나온 이후 승객들은 지하철 안에서 기다리든 바깥으로 나가 버스를 타든 각자 알아서 자기 길을 선택한다. 혼잣말로 투덜댈 수는 있겠으나 어디에 항의하거나 하소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공항도 사정은 마찬가지. 몇 년 전 뉴욕 출장을 한 달에 한 번씩 간 적이 있었다. 뉴욕행 비행기가 제 시간에 뜨는 적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다음날 오라고 한 경우도 있었다. 안내 방송은 길지도 않았다. “보안상의 이유.” 항공사 직원에게 문의는 해도 불만을 털어놓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고층빌딩을 새로 짓거나 보수를 하면 그 주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에서라면 몇 개월 만에 뚝딱 끝낼 법한 일인데, 몇 년을 질질 끄는 듯이 보인다. 느려서 답답하기는 해도 안전수칙을 철저하게 지켜가며 공사를 하니까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불편해도 참는다. 아니, 불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른바 선진국 시민들이 세상을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선진국 소리 듣는 곳에 직접 와서 살아보니 이렇게 불편을 감수해야 할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재미나는 것은 이런 불편함은 금세 익숙해진다는 사실. 불편함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 편하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선진국에서 선진 시민으로 살아가자면 이런 대가 혹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안전하게 안심하고 살 수가 있다.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수능시험이 연기되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불편해도 참으시라. 이런 불편함이 생겨난다는 것은 한국이 선진국 되어 간다는 방증이다. 이런 불편함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줄 안다면 당신은 이미 선진 시민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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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가 얼마 전 ‘제3차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안)’을 발표하고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열었다.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에 따라 5년 주기로 마련하는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은 앞으로 정부의 외국인 정책을 종합한 밑그림에 해당하는데, 올해 결정되는 ‘제3차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적용된다. 법무부는 이번 3차 기본계획의 정책 비전을 ‘국민 공감! 인권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선언하고, ‘상생’ ‘통합’ ‘안전’ ‘인권’ ‘협력’을 정책의 핵심가치로 발표했다.

일단 ‘인권과 다양성 존중’을 기본계획의 정책 비전으로 선언하고,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인권’을 강조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국내에 체류하는 이주민의 취약한 인권 상황은 지난 10년 동안 국내 인권단체뿐만 아니라 국제노동기구(ILO),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유엔 자유권위원회 및 유엔 사회권위원회 등 국제적으로도 매번 지적되어온 내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후보시절 외국인 노동자 사업장 변경 불이익 없는 법 개정, 농축산업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 강제노동 철폐를 위한 ILO 핵심협약 비준, 체류자격이 없는 미등록 외국인 인권침해에 대한 점진적 개선을 약속했다. 나아가 과거 어느 정부보다 ‘인권’을 국정의 중심 가치로 강조하고 있어 그동안 지적된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이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에 발표된 ‘제3차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안)’은 이주민의 인권과 노동권을 개선할 수 있는 변화된 정책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많다. 우선 폭넓은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부터 아쉬움이 남는다. 공청회를 마련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이나 단 한 번의 공청회 이후 한 달 만에 기본계획을 통과시킬 계획이라고 하니 공청회를 통해 수렴된 의견이 정책에 반영될지 의문이다. 시민들의 참여를 바라는 온라인 설문 문항을 살펴보면 국가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설문 수준이라기엔 너무 부끄러울 정도로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적인 질문들로 가득하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문제가 지적된 외국인 노동자 운영제도(고용허가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치료해야 할 병의 원인을 그대로 둔 채, 올바른 생활 습관만 강조한다고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앞으로 5년의 미래를 그리는 정부의 ‘기본정책’이라면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이 아니라 사회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노동자의 사업장(직장) 변경을 제한하고, 체류자격을 유지하기 위한 권한을 사업주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직과 퇴사의 자유가 있는 한국 노동자들도 직장에서 사업주에게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 힘이 약한 노동자들이 뭉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직의 자유가 없는 외국인 노동자는 사업주에게 찍히면 퇴사가 아니라 한국을 떠나야 하는 위험에 처한다. 제도의 설계 자체가 노동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의 ‘선의(善意)’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열악한 제도에서조차 밀려나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인권과 노동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해외투자기업연수생, 농축산업노동자, 어업노동자, 선원노동자, 계절노동자등 법 밖의 이주민이 많다는 것이다.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시기를 맞아, 장기적인 정부정책의 바탕이 될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에는 고용허가제 문제뿐만 아니라 사각지대에 있는 수많은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고민도 담겨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주민의 인권과 노동권이 존중되고, 공존을 위한 우리 사회의 지혜가 담긴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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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칼바람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운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배우 김주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이다. 한낮의 도심에서 그가 탄 차량은 앞차와 경미한 충돌 후 인도로 돌진해 아파트 단지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난간이나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출 수도 있었을 텐데, 야속한 네 바퀴는 하필 계단 아래를 향해 굴러갔다. 불운이고 또 비운이다.

동료 연기자와 영화인, 방송인들은 물론이고 스크린과 TV를 통해 그의 모습을 오래 봐왔던 국민들까지 모두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불과 사흘 전 한 시상식에서 “연기 생활 20년 만에 처음 상을 받는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주신 것 같다”며 상기된 얼굴로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감격하던 사람이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죽음은 늘 반걸음 뒤에서 삶을 따라온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배우 김주혁의 연기를 처음 본 것은 영화 <싱글즈>에서였다. 그를 세상에 알린 드라마 <카이스트>를 보지 못한 탓에 그가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이미 나타내던 무렵에야 김주혁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이후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그가 연기한 소심한 남자 ‘광식’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그는 내 이십대의 한 자화상이 되었다. 영화 속 광식이처럼 짝사랑만 하며 연애 한 번 못하던 시절이다.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역할은 <청연>에서의 ‘한지혁’이다. 동경 유학생인 지혁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훗날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조종사가 되는 ‘경원’(장진영 분)과 사랑에 빠진다. 행복의 나날도 잠시, 일본 정부 요인 테러 사건을 주도한 저격범과 친구 사이라는 이유로 지혁은 물론 경원까지 함께 끌려 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지혁은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조선적색단원’이며 경원은 그 일과 무관하다는 허위 자백을 하고 홀로 사형 당한다. 그러나 지혁의 유골을 품에 안고 조선을 향해 비행하던 경원마저 추락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주검이 되면서까지 연인을 지키려 했던 지혁의 처절한 눈빛과 경원이 사라져 간 서쪽 하늘 석양이 지금까지 뇌리에 박혀 있다. 극중에서처럼 두 주연배우 모두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떠났기에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되는 영화다.

김주혁은 진지하고 열정적인 연기자였다. 우리는 그가 연기한 인물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울고, 웃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감격하고, 억울해하고, 두려워하고, 용기 내는 얼굴들을, 소심하고 못난 형을, 희생적인 남편을, 매력적인 연인을, 옆집 아저씨를 보았다. 연기가 아닌 인간 김주혁을 좀 더 볼 수 있던 예능 프로에서는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는 따뜻하면서 유쾌하고 또 진솔했다. 20년간 활동한 배우로서, 또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그는 우리 기억 속에 다양한 ‘얼굴’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치 여러 이웃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것만 같은 슬픔과 황망함이 몰려왔다.

시간은 무심하게 빠르며, 세상은 끝없이 분주하다. 중요한 일들로 넘쳐나는 우리 일상은 금방 슬픔의 자리를 떠났다. 실시간 검색어에서 그의 이름이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또 다른 영화와 배우들에게 환호한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추모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동물원’의 김창기가 김광석 죽음 이후 만든 노래 ‘나에게 남겨진 너의 의미’가 떠오른다. “또 나의 삶은 아주 말끔히 포장되고, 우리의 추억은 멀어지고, 모두 제 갈 길을 떠나고, 아침 출근길에 문득 너의 노래를 들으며 아주 짧은 순간 호흡이 멈춰질 듯하지만, 난 단지 날 가끔 내가 원하던 대로 봐주던 널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인 걸.” 우리가 보길 원하는 다양한 사람의 얼굴을, 울고 웃으며 최선을 다해 보여주던 이를 잃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병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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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시골에 내려와 몇 년 살고 나면, 저마다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몇 가지 생깁니다. 그렇게 흔히 하는 이야기 가운데, “그거 농사짓는 거 보고 있자니까, 아이고 그거 못 먹겠더라. 농약을 얼마나 치는지” “아니 그 돈 받자고 어떻게 농사를 지어요?” 하는 말 따위들입니다. 작물마다 특히 농약을 자주 치는 것이 있습니다. 과일은 대개 약을 많이 치기도 하고, 사방이 탁 트인 넓은 과수원에서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약을 뿌리니까, 더 많이 농약을 치는 것 같지요. 그러면 그 과수원 농약 치는 것 몇 해 지켜보고는, 그 과일 못 먹는다 소리가 나옵니다.

올해 타작이 끝나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을도 금세 끝나 갑니다. 아직도 “가실(가을) 다 했나?”라고 하시는 할매들이 있으니까요. “다 거뒀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둘 나락 벤 도가리가 느는가 싶더니, 금세 들이 다 비었습니다. 벼농사는 그래도 농약 쓰는 것이 더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여기 가까운 지역으로는 논에 우렁이를 넣는 농법이 불과 몇 년 사이에 금세 퍼졌어요. 십년 전, 제가 처음 논에 우렁이를 넣을 때만 해도, 친환경 농법 좋은 줄은 알지만 “그거 그리해 갖고 풀한테 못 이기” 하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어르신 논에도 우렁이가 있었습니다.

지난여름 어느 논이든 선홍빛 우렁이 알이 매달려 있었지요. 몇 가지 손이 조금 더 가기는 해도, 약 치는 것만큼이나 풀도 잘 매고, 돈도 많이 들지 않는 방법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올해 처음 우렁이를 넣은 어르신은 “우렁이, 그기 솔찬이 풀을 먹었어” 하셨지요. 우렁이가 이렇게 빨리 그리고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농사꾼 어르신들이 이제 논에 약 한 번 치는 것도 힘에 부치는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이 무렵에 그랬듯이, 올해 쌀값 이야기가 또 몇 번 여기저기에 오르내립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쌀값 소식도 분위기가 조금 바뀝니다. 얼마 만에 쌀값이 조금이라도 오를 것이라는 뉴스인지 모르겠습니다. 콤바인 옆에 몇 사람 모여서는 해가 바뀔수록 더 나아지겠지 하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농사에만 꼬박 매달려 한 해를 보내신 분들입니다. 초여름 매실 딴 것부터 해서, 토란 껍질 벗겨 말려서 판 것, 나락 난 것, 감 따서 낸 것, 콩 털어 넣어 놓은 것. 그렇게 해서 한 해 얼마치를 했는지 어림합니다.

빠지지 않고 하시는 이야기로 “나락 농사할 때에 우렁이 넣기를 참 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농사꾼한테 농약 치는 일은 피할 수만 있으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잘 안되지요. 물건 사는 사람이 겉모양을 많이 보는 것일수록 그렇습니다. 과일이 그렇고, 채소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벼는, 쌀알 모양은 엇비슷하니까요. 어르신이 우렁이 칭찬을 하면서 조금 웃으셨습니다. 농약 치는 거 보면 그거 못 먹는다는 이야기 뒤에는, 우렁이한테 정말로 고마워하는 할배가 있습니다.

시골에 새로 내려온 사람들이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입에 달고 사는 질문 몇 가지는, 농사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묵은 질문 몇 가지에 닿아 있습니다. “농사꾼이 받는 값과 시장에서 파는 값은 왜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나. 많이 심어서 값이 바닥을 쳤다는 것과 적게 심었다고 금값이 되는 작물은 어째서 해를 건너 꼬박꼬박 되풀이되나. 어쩌자고 도시 사람들은 농약 잔뜩 쳐서 매끈한 것만 찾고, 벌레 조금 먹었다고 하는 것은 받아 주지도 않나”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해묵은 질문들도 새로 들리는 쌀값 소식처럼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들려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실 일을 마치고, 겨울 농사 준비가 시작됩니다. 지난달 심어 두었던 마늘이며, 양파들은 벌써 꼿꼿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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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는 마을공동체 관련 행사들이 많이 열린다.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덧 올해의 마을살이를 정리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라서 그렇기도 하다. 행사들이 겹쳐서 모두 둘러보지 못해 아쉬운데, 올해는 안산의 ‘2017 전국 마을박람회’ 화성의 ‘마을공동체 한마당’에 다녀왔다.

안산의 행사에서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 동안 화랑유원지, 경기도미술관, 단원구청 등에서 다양한 마을정책콘퍼런스와 주민들의 야외포럼이 열렸다. 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곶안: 곶 안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고잔동 문화마을 교과서를 펴낸 디자인 전문팀 ‘강장공장’의 강진영·장재욱 공장장과 마을공간 ‘소금버스 협동조합’의 노승연 대표가 함께한 토크콘서트였다. 안산에서 나고 자랐다는 세 사람이 주민들과 얘기 나누며 풀어낸 글과 주민이 직접 기록한 사진으로 꾸며진 책에는 고잔의 역사, 지리, 사람, 마을 이야기가 예쁘게 정리되어 있다.

이처럼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했다. “좀 걱정스럽긴 했지만, 알아서 하라고 믿고 맡겼어요. 시작할 때 한 번 보고 다 끝났다고 연락 와서 두 번 보니, 예쁜 결과물이 만들어져 있더군요”라는 시청 담당자의 자랑에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줘야 하는 외주작업과 달리 우리가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어서 더 많은 노력을 들일 수 있었고 애착이 가는 책이 나온 거 같아요”라고 화답했다. “네 모든 사소한 행동까지 이제 다 떨려. 네가 너무 빛나서….” 주민들과 그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도 빛이 난다. 그 빛이 드러나도록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면 공공도 같이 빛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축하공연을 온 ‘그루잠’의 ‘좋아서 빛나서’의 가사와 자연스레 포개졌다.

화성의 마을공동체 한마당에서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 ‘마을에서 마을을 배우다’라는 주제의 ‘마을로 찾아가는 작은 콘퍼런스’와 ‘화성, 마을의 미래를 이야기하다’라는 주제의 기획콘퍼런스, 주민들이 준비한 한마당 공연 등이 펼쳐졌다. 기획콘퍼런스에서 다룬 것은 수개월 동안 화성주민들이 모여서 스스로 수립한 ‘화성시 마을공동체 기본계획’의 수립과정과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주민주도 마을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쁜 일상을 보내는 주민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 자체가 참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화성시의 마을공동체 기본계획은 4월13일부터 10월11일까지 총 15회에 걸친 주민모임을 거쳐 수립되었다. 2주에 한 번꼴인데 숨 가쁜 일정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만든 기본계획에는 마을만들기비전, 중점과제, 세부과제, 단계별 추진체계, 주체별 역할, 제도개선방안, 연차별 예산계획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전문기관에 맡겼다면 수억원이 소요되었을 작업이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노력으로 달성된 것이다. 하지만 예산을 절감하였다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결과는 주민들 스스로 낸 의제와 계획이라는 점이다. 외부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수립된 계획과 달리 실제 마을현장의 고민이 담긴 것이기에 단순한 페이퍼플랜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몇몇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소위 ‘높은 분’의 간섭이 적었던 것이 마을계획이 ‘잘’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 같았다. 자율적으로 현장의 주무관과 주민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내용을 채워갈 수 있었고, 그 결과 훌륭한 기본계획과 더불어 “우리 팀장님 멋져요!”라는 공공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최근 여러 지자체에서 거버넌스를 통한 행정혁신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를 잘 풀어나가는 곳도 있지만 민관 갈등이 빚어져 풀기 힘든 과제라고 관계자들이 고개를 젓기도 하는데, ‘주민들이 스스로 빛나도록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방법이 성공적인 거버넌스를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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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골 농군이었던 내 할아버지는 “동네 창피하다” “남부끄럽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이웃의 시선을 다분히 의식한 행동거지에 관한 말씀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 말씀을 캐나다 신문을 보면서 종종 떠올린다. 이곳 경찰과 언론은 흉악한 범죄를 적발하기만 하면 피의자 신상을 바로 공개한다. 법으로 처벌하기에 앞서, 일단 남부끄럽게 하고 동네 창피부터 톡톡히 당하게 한다. 특히 악질 흉악범이나 부정부패 공직자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다. 최근에는 두 여성과의 성관계 동영상을 동의 없이 인터넷에 유포한 남성 티안 추(24),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하고 달아난 뺑소니 여성 운전자 에런 화이트(28) 체포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얼굴 사진은 기사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사회 정서적으로 흉악범들을 단죄하는 것이 신상을 공개하는 첫 번째 목적이라면, 두 번째는 범죄 예방 차원. 크든 작든 공동체 질서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면, 망신살 뻗친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몇 년 전 몰래 빼돌린 고객 복권으로 초대형 ‘로또를 맞은’ 편의점 주인이 적발된 적이 있다. 당시 신문 방송은 사건 당사자는 물론 당첨금을 수령해간 20대 딸의 이름과 얼굴도 공개했었다. 사건은 재산 압류와 벌금형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한동안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하는 가혹한 정서적 징벌이 가해졌다.

물론 이 같은 신상 공개에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10여년 전 어느 한인교회 목사가, 어학연수생 여러 명을 성폭행 혐의로 고발해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경찰과 언론은 관행대로 한국 남학생들의 이름·나이·얼굴을 시원하게 밝혔으나, 나중에는 목사를 무고죄로 입건하면서 그 죄상과 신상을 더 시원하게 공개해야 했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경찰과 언론은 피의자 공개를 주저하지 않는다. 공개를 통해 얻는 효과가, 그 부작용에 비할 바 없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동네 창피”하게 만드는 캐나다 처벌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한국 매체를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마스크 씌우고 A씨·B씨 하며 악질 흉악범을 가려주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죄 추정 원칙이 지켜지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원칙 때문에 흉악범에 대한 사회 정서적 처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들은 뭇사람의 손가락질을 피할 뿐만 아니라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일도 없다. 인터넷에서 신상 털기가 벌어질는지는 몰라도, 사건이 불거질 당시 공식적으로 동네 창피 당할 일은 없다. 캐나다와 비교하자면 한국 흉악범들은 정서적 처벌의 면죄부를 일단 갖게 되는 셈이다.

얼마 전 한국 정부는 디지털 성 범죄자 처벌 수위를 높이겠다고 천명했다. 그 발표문에서도 범죄자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보복 동영상 유포로 인해 피해자가 생겨나고, 그들은 바로 ‘사생활 공개’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개인의 사생활을 보복이랍시고 공개한 당사자들은, 입건이 되면서도 사생활은커녕 이름과 얼굴조차 공개되지 않는다. 감옥에서 보낸 한 철보다 대중 앞에 신상을 드러내는 한순간이 더 큰 형벌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생활이 인터넷에 공개되는 바람에 사람이 목숨까지 끊는 마당에, 그것을 악용해 떼돈을 벌어들인 음란 사이트 운영자들은 A씨와 B씨로 숨겨주는 것, 법대로 하겠다며 이 같은 부조리를 그대로 두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동네 창피한 일이 아닌가 싶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경향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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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이 다르다고 일하다 다친 상처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이 다르다고 작은 휴대전화 화면 속 가족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그리움이 묻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땀 흘려 일하고 난 뒤 느끼는 바람의 싱그러움을 모르지 않는다. 월급날이면 괜히 마음 한쪽 두둑해져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술이라도 한 잔 사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만나보면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일하려면 피부색이 다르면 아픔을 느끼지 못해야 한다. 지난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다 다칠 확률이 내국인보다 6배 높았다. 문진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이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산재보험에 가입된 내국인 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은 0.18%인 반면 외국인 노동자는 1.16%로 6배 높았다. 또한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2012년 0.59%에서 2016년 0.49%로 낮아졌지만 같은 기간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6.9%에서 7.4%로 오히려 증가했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일터가 안전해지고 있는데, 피부색이 다른 이주민들이 일하는 일터만 오히려 더 위험해지고, 더 쉽게 다치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처리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일하다 다치고도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못한 경우까지 보태어 보면 사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올해 초 대구·경북지역에서 이주노동자 378명을 대상으로 산업재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 중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않고 스스로 치료비를 부담한 경우가 37.9%, 회사에서 치료비를 지급받은 경우가 35%로 조사되었다. 산재보험으로 치료받은 경우는 27.1%로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보호 장비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다치더라도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올해 5월 한 달 동안에 양돈축사에서 분뇨를 치우던 이주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작업하던 양돈장 정화조는 악취뿐만 아니라 몸에 치명적인 황화수소나 암모니아 등 유해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기계가 하거나, 제대로 된 보호 장비가 지급되어야 했지만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월급도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올 추석을 앞두고 고용노동부가 공식 확인한 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액은 515억원을 넘었다. 2012년 240억원이던 임금체불액은 5년 만에 두 배를 넘었다.

얼마 전 1960~1970년대 독일로 이주했던 한국 간호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전시를 관람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또 다른 분단국가 독일, 특히 분단의 도시인 베를린에서 낯선 한국여성으로 삶을 꾸려가고, 독일 사회에 뿌리내린 이주민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중 흥미로웠던 점은 그녀들이 당시 독일 사회에서 여성인권과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새로운 눈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한국의 짙은 가부장제 그늘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기도 했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독일과 한국 모두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오고 있다.

인권 선진국을 자임하는 한국의 모습은 이에 비하면 매우 부끄러운 수준이다. 고향을 떠나 먼 한국땅에서 마주한 열악한 노동환경, 장시간 저임금 노동, 높은 산재 발생률과 만성적인 임금체불은 이주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들 뿐이다. 언제쯤 우리는 이들에게 차별과 고통이 아닌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삶의 경험을 온전히 전해줄 수 있을까?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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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긴 연휴 동안 마을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저녁마다 집집이 마당에 불이 환했다.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도 나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자동차 트렁크에서 집 마당으로 짐을 날랐다. 할매 할배들도 바빴다. 챙길 것이 많고, 볼 것이 많고, 짬짬이 이야기도 풀어놓고.

“추석도 추석이라고는 별로 안 하고, 그냥 팔월이라고 했지, 팔월. 아직 일이 바쁘니까. 먹고 노는 거는 백중이 크고. 백중에는 집집이 풀 거름 마련하고 나서 놀고, 추석은 식구들하고, 친척들하고 지내는 날이고 그랬지. 추석에는 집안 살림 싹 깔끔시럽게 해야지. 여기서는 송편 같은 거는 잘 안 해 묵었어. 송편 말고, 올벼 가져다가 콩고물해서 찰떡하고, 박나물하고, 토란국 끓이고 그랬지.” 추석이 가까워오면 그 바쁜 때에 집안 정리하는 것부터 한다고 했다. 이불 홑청을 다 벗겨서는 삶아 빨아서 가을볕에 말려 너는 것부터. 마당에 희고 너른 광목이 펄럭이는 것으로 명절이 시작인 셈이다. 문짝을 하나씩 떼어다가 종이를 벗기고, 수세미로 문살을 하나씩 다 문질러 닦은 다음 새 종이를 바르기까지 하는 집도 있었고. 새 종이를 발라 문틀에 끼우면 방안으로 맑은 빛이 든다. “밝은 보름밤이면 문살이 더 빛이 나지.” 이곳에 이사를 와서 낡은 집을 고치고, 새 문종이를 발라 잠이 들었던 날에도 달빛이 밝았다. 10년 지난 지금도 종이 바르는 문짝을 쓰고 있으니 할매 하는 소리를 조금은 알아듣는다.

추석맞이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일찌감치 모여 청소를 했다. 도로 공사 때문에 방앗간이 허물어진 첫 번째 추석. 공사판을 앞에 두고 지난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마을 사람들끼리야 백중에 더 놀아. 추석이야 피붙이 보는 날이잖아. 그러니까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노는 날은 백중이지. 동네 사람들끼리 보신하고, 놀고, 그랬어. 아이들도 그날 기다리지. 먹을 게 많으니까. 냇가 좋은 마을은 천렵도 하고.” 설날 가까운 대보름이 그랬던 것처럼, 추석 가까운 백중은 여름 대보름 같은 날이었을 터. 하지만 대보름은 남았어도 백중은 이름만 남았다. 이제는 들에서 일하는 사람 먹으라고 참을 마련하는 일도 없고, 냇가에 모여서 천렵을 하는 일도 보기 어려우니.

새로 포장하는 길 아래 차곡차곡 사라진 논 이야기도 나온다. 누구네 집 논이 어쩌고 하다가, 당신들 어릴 적 한두 대목이 올라온다. “그게, 메뚜기가 흔했어. 논둑에 나가 가지고 메뚜기가 후두둑 날 때, 손으로 휙 거므면 몇 마리씩 잡혔다고. 그거 마른 냄비에 넣어서 구워 먹었지.” “도랑에 물 뺄 때, 이제 가서 소쿠리를 댄다고. 그러면 새우가 많이 잡혔어. 속이 다 보여. 자잘해 가지고. 익으면 빨개지는데 것도 맛이 좋았어. 벼 베고 나면 도랑에 흙 치면서 미꾸라지도 잡고, 논고둥도 잡고. 벼 베고 있으면 또 금방 밀, 보리 갈잖아. 그러니 그때는 기다렸다가 얼른 잡아왔지.” “참게가 이제 개울에 살다가 비 많이 오고 물 불고 그러면, 논으로도 막 가고 그런다고. 그러면 그냥 손으로 딱 잡고 그러지. 많았어. 제 딴에는 숨는다고 풀섶에 가 숨어. 그래 봐야 다 보여. 게나 꿩이나 한가지야.” 지금 농사짓는 논에도 약을 치지는 않는다. 10년 가까이 되었으니, 어지간한 벌레들은 바글대는 것 같고, 미꾸라지나 멧밭쥐나 이런 것들도 종종 보이기는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논에 나락 말고 이 많은 것들이 어디서 살았다는 것인지 어른들 말만 들어서는 도무지 알기 어렵다.

온갖 것이 모여 살았던 논도, 젊고 어리고 늙고 하는 사람들 골고루 모여 살았다던 마을도 이야기 몇 대목으로만 적어 둘 수 있을 뿐이다. 통계로 나온 숫자로만 헤아려 보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농사꾼이 농사지어서 얻은 농업소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한다. 물론 농사짓는 데에 써야 하는 돈(농업경영비)은 40%쯤 늘어났고. 아직 연휴는 끝나지 않았지만,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이들도, 젊은 사람들도 없고, 금세 깨 터는 소리, 밤 고르는 소리가 나고, 길가에는 고추며 토란대가 널렸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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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9월25일부터 27일까지 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주최로 ‘지속가능도시주간’ 포럼이 열렸다. 포럼 마지막 날 오전에 마을공동체, 도시재생, 사회적경제 등 주제별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이 중 마을공동체에 대한 주제는 ‘마을르네상스의 융복합 발전과제’였다. 이제는 마을의 부활을 넘어 여러 분야의 ‘융복합’을 이루는 게 마을공동체의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융복합이 이슈가 되는 맥락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관료제로 인해 수많은 부처와 부서로 나뉜 정부나 지자체의 구조와 달리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통합적이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러 분야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른바 ‘칸막이 행정’의 극복이 공동체 활성화의 관건인 셈이다.

둘째, 정부의 주요정책인 도시재생의 등장도 현장에서 융복합을 고민하게 하는 요인이다. 도시재생의 기본방침을 살펴보면 ‘주민역량 강화 및 공동체 활성화’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도시의 전반적인 쇠퇴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들이 직접 도시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이다.

그런데 도시재생은 주무 부처의 특성상 단기간의 개발성과 위주로 흐를 우려가 있다. 성과를 우선하는 정책은 경쟁을 부추기기에 연대와 협동을 기본철학으로 하는 공동체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과 예산에 의존해야 하는 지자체는 큰 예산이 편성되는 도시재생정책에 맞추어 정책과 조직을 조정하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지원센터’를 ‘도시재생센터’에 집어넣는 식의 개편이 이뤄진다. 정부 주도의 경쟁적인 도시재생은 공동체를 깨뜨릴 수 있으니 이런 위협을 막아내면서 공동체 활성화를 이루기 위해 현장의 활동가들은 도시재생과 공동체의 융합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 현장에 이런 고민을 안기는 ‘칸막이 행정’이나 ‘하향식 정책’은 지방자치가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으니 중앙의 칸막이마저 지역공동체까지 이어진다.

전쟁과 독재 아래에서도 꾸준히 유지되며 발전되던 지방자치는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1991년까지 중지되었다. 민주화 이후 지방자치가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1960년대에 비해서도 오히려 퇴보한 수준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1960년 기초의원은 1만6909명이었다. 총인구를 고려하면 기초의원 1명이 1500명 정도를 대표했던 셈이다. 그런데 현재 기초의원은 2898명이다. 기초의원 1인당 1만8000명 정도를 대표하는 셈이다. 공동체의 대표를 뽑는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풀뿌리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체 활성화가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발표한 ‘2016년도 공공기관 청렴도 측정 결과’를 살펴보면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등 중간지원조직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곳에서 종합청렴도가 높게 나타난다. 공동체 활성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지자체의 청렴도가 높은 것이다. 좀 더 연구해 봐야겠으나 활성화된 공동체는 적극적인 주민참여를 바탕으로 지방행정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올바르게 이끄는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어떤 광역지자체에서 공동체 관련 중간지원조직에 대해서 고강도의 감사를 진행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또 다른 광역지자체에서는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조직진단이 한창이라고 한다. 그 지자체의 거버넌스 담당 공무원은 중간지원조직의 활동가를 모아두고는 “당신들은 우리 업무를 대행하는 것에 불과하니 지시에 따르라”는 훈시를 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풀뿌리민주주의 활성화에 대한 공공의 반발이나 견제가 아니기를 바란다.

<강세진 | 박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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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경험한 두 가지 에피소드. 토론토에는 대형 한국식품점이 몇 개 있다. 고객과 직원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고 영어 쓸 일이 없으니 식품점 분위기는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날 물건을 하나 들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섰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새치기하지 마세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조금 전 그 사람은 무엇을 빠뜨렸는지 자기 수레를 내 뒤에 두고 매장 안으로 급히 들어갔었다. 계산대 앞으로 돌아온 그는 내가 자기 앞에 끼어든 걸로 착각했다.

창졸간에 새치기꾼이 되어버린 나는 “새치기 아닌데요?”라고 항변했다. 계산대 직원이 개입해 확인해주었기 망정이지,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소리 높여 싸움을 할 뻔했다.

캐나다 TD은행에는 ‘비즈니스 서비스’라는 창구가 있다. 비즈니스 계좌를 가진 자영업자들을 배려해 따로 만든 창구이다.

언젠가 내 비즈니스 계좌에서 출금을 하려고 그 창구로 갔다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할 뻔했다. 일반 창구 앞에 줄을 섰던 중년 백인이 다가오더니 소리를 질러댔다. 그이도 내가 새치기한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그의 말은 “왜 새치기를 하느냐?”가 아니었다. “왜 새치기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느냐?”였다. 그러니까 지적과 항의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이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비즈니스 창구 직원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내가 당사자이긴 했으나, 항의를 받고 말싸움을 벌인 사람은 은행 직원이지 내가 아니었다.

지난 9월5일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 교육감-주민 토론회’ 소식이 언론과 SNS를 타고 널리 알려졌다. 이 토론회가 주목받은 까닭은 장애학생 학부모와 지역 주민들이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주민들을 향해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지 말아 달라”고 했고, 지역 주민들은 “특수학교 대신 국립한방병원을 짓게 해달라”고 했다. 두 목소리가 충돌하자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었다. 주민들도 따라 꿇었다.

언뜻 보기에 당사자들끼리의 ‘토론’이자 ‘대화’일 수도 있겠으나, 따지고 보면 문제 해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만남이다. 당사자들이 얼굴 맞대고 언성을 높이면 해결은커녕 서로 감정만 상하고 문제는 더 악화하기 십상이다. 가령 식당 옆자리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아파트 위층에서 쿵쿵 소음을 내거나, 기내에서 이어폰 끼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피해 당사자인 내가 다른 당사자에게 직접 지적을 하면, 서로가 불쾌해질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은행의 백인 고객처럼 직원에게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을 요청하는 것이다.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부모와 지역 주민들이 왜 서로를 향해 호소하고 야유까지 해가며 얼굴을 붉히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주민들에게 한방병원 설립이라는, 법적으로 되지도 않는 일을 약속한 사람은 그 지역 국회의원 김성태이다. 특수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주체는 서울시교육청이다. 주민들은 자기네에게 공약한 김성태 의원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학부모들은 서울시교육청에 “예정대로 추진하라”고 요구하면 그만이다. 토론을 하든 싸움을 하든 김성태 의원과 서울시교육청이 붙어서 할 일이다. 그들이 ‘관계 직원’이다. 직원 대신 양 당사자가 맞붙어 갈등하면, 문제는 다른 쪽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은 “당신들끼리 싸워라” 하고 그 사안에서 슬쩍 빠져나갈 수도 있다. 토론회장에서 김성태 의원이 중간에 빠져나갔듯이 말이다.

아무리 올바른 지적이라 해도 당하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감정싸움을 할 것인가. 싸움이 목적이라면 매너 따위는 필요 없고.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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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원도 홍천에 있는 초등학교에 법교육 강의를 다녀왔다. 서울에서 차로 꼬박 두 시간, 고속도로를 벗어나 굽이굽이 산과 물이 어우러진 시골길을 제법 달려 마주한 산촌마을, 전교생이 서른여섯 명인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 5학년과 6학년인 13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한 교실에 모여 앉았다. 선생님보다 더 능숙하게 사회를 보던 6학년 친구의 진행으로 법과 관련한 짧은 강의와 질문과 답변 형식의 토크콘서트 시간을 가졌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다는 아이들의 질문 수준이 상당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 사람을 한국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야 할까?”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던 내용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분위기를 한번 몰아가봤다. “외국에서 돈 벌러 온 사람들은 일하다가 언젠가 자기 나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잖아, 그리고 요즘 우리나라 경제도 어려운데 한국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주면 우리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닐까? 어디 손 한번 들어볼까?”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든 아이도 있었고, 고민 끝에 살며시 손을 올린 아이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13명의 아이들 모두 외국인을 우리나라 사람과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 들뜬 감정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왜 그렇게 생각해? 외국에서 온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에 이런저런 문제도 생기잖아”라고 묻자, 맨 앞자리에서 조용하게 앉아 있던 한 아이가 대답했다. “그런 걸(차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을 되뇌었다. 차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난 13일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바른정당 홍철호 의원(경기 김포을)은 ‘우리나라 청년들 대학까지 나와서 외국인 근로자와 같은 대우받기를 싫어한다. 막장인생 된 것으로 느낀다’고 하면서 ‘산업연수생제도를 도입하면 200만원 주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100만원만 줘도 된다. 그 100만원을 가져다가 청년들에게 300만원 주면 우리 청년들에게 자긍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경제·노동정책의 기본적인 이해도 부족하지만, 인권 선진국을 자임하는 나라의 국회의원의 공식 발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혐오와 차별에 대한 맹목, 법과 국제인권규약에 대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반인권적 인종차별 발언이다.

게다가 산업연수생제도는 완벽히 실패한 제도다. 똑같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일 배우는 연수생’으로 이름표만 바꿔달고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 한 달에 수백 시간 일을 시키면서 월급은 50만~60만원에 그쳤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일하다 다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외국인들이 사업장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신분증을 빼앗는 경우가 허다했는데도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사업장을 이탈하는 비율이 80%를 넘기도 했다.

2004년 고용허가제로 전환되면서 대부분 없어졌지만, 아직도 일부 남은 해외투자기업 산업연수생들의 경우 최근까지도 한 달에 평균 300시간 일하면서 겨우 85만원을 받고, 일하다 다쳐도 치료는커녕 회사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2007년 헌법재판소가 산업연수생제도는 외국인 근로자를 부당하게 차별하는 제도로 ‘위헌’이라는 뒤늦은 사망선고를 내렸을까. 홍 의원의 주장은 현대판 노예제도를 되살려 외국인들의 임금을 빼앗아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자긍심이란 결코 다른 사람의 월급을 빼앗아 내가 돈을 더 받는다고 생기는 천박한 감정이 아니다. 자긍심은 무릇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생겨난다. 부정한 권력의 특권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흘린 땀방울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받는 것이 그 출발이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언제나 어린이는 옹졸하고 부족한 어른들의 아버지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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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에 ‘아무말 대잔치’라는 제목의 코너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던 몇몇 이들은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며 짜증섞인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생겨난 단어, 개념, 유행이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에 차용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점심시간에 SNS에서 있었던 논란이 저녁 즈음이면 기사화되고, 예능프로에서는 속보 경쟁이라도 하듯 신조어를 받아들여 남발한다. 이쯤 되니 개그콘서트는 차라리 느긋한 편에 속할 지경이다.

어쨌거나 ‘아무말 대잔치’는 그 제목 만으로 이미 시대의 핵심을 선취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지난 일주일간 들어야 했던 ‘아무말’만 떠올려 봐도, 대잔치를 넘어 프로리그를 출범해도 손색이 없다. 상임위의 인사청문회에서 지구의 나이가 6000살이라고 믿고 있다는 장관 후보며, 동학농민혁명이 “비폭력 평화 정권교체”의 기원이라는 야당의 대표에다, 대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장에서 “성소수자 인정하면 근친상간·수간으로 비화”한다고 말하는 국회의원 등등. 여기에다 SNS를 타고 넘어오는 유명인과 일반인들의 아무말까지 더하면 내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저주로 느껴질 정도다.

물론 공사를 막론하고 언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무너짐은 맞춤법을 “파.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언어가 말 그대로 무의미해진다는 것에 가깝다. 명연설가로 이름난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좌파 신자유주의”같은 기묘한 조어로 이 혼란의 서막을 열었고, MB정부는 기존의 민주화와 사회운동의 가치를 멋대로 도용하여 본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로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침묵만도 못한 말들을 드문드문 내뱉다가 촛불의 심판을 받았다. 오죽하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이 제대로 말을 한다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놀라운 일로 여겨졌을 정도다.

그러나 여전히 공적인 영역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말들의 폐허는 점점 커져간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내뱉고, 가짜뉴스와 비이성적인 색깔론을 도배하는 정치인들은 그 행동에 대해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언론은 경영난을 탓하며 부채질에 열중하고, 정치인들은 그런 언론에 자기 이름 한 줄을 내보내기 위해 기꺼이 저열함에 타협한다. 책임 있는 이들도 이렇게 행동하는데, 책임도 권한도 없는 이들이 품위를 지킬 이유는 딱히 없다. 논리들이 경합하고 당위가 맞서는 대신에, 모두가 소리 높여 자신의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방언대결이 펼쳐진다. 비판과 분석이 무색해지는 동안, 일침과 사이다라는 이름의 뻔한 얘기가 시끄러운 소음을 더한다.

이 아무말 대잔치를 끝내기 위해서는 국립국어원이 아니라 정치의 책임이 막중하다. 지킬 수 있는 말을 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실천이 반복되어야 한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면 면피나 책임 미루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원인을 분석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국민들이 마땅히 들어야 하는 말을 건네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악의적인 말과 행동에는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힘 있는 이들일수록 그 책임은 더 커야 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예측 가능한 뻔한 것들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파격’은 이 뻔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돌려줄 수 있다면,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외침과 울부짖음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말들도 의사소통을 위한 말들로 다듬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정치는 아무 걱정 말고 본업에만 충실해주길 바란다. 예능정치의 조기종영을 손 모아 기원한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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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나무판자를 잇대어 만든 작은 문을 열고 새로 온 병아리들을 한 마리씩 살펴본다. 하루 이틀 지나면 병아리들이 닭장에서 나와서 널찍하게 쳐진 울타리 안을 돌아다닐 것이다. 세 아이 모두 밭에 오면 닭장부터 들렀다. 새 병아리를 들이면 더 자주 와서는 병아리를 보고, 낯을 익히고, 그렇게 몇 번 지나서 아이들은 병아리마다 별명 비슷한 것을 붙였다. 시골에 내려와 밭을 마련한 다음, 곧바로 한 것이 밭 한쪽에 닭장을 짠 일이었다. 닭장을 짜고는 얼마쯤 자란 병아리를 구해다가 닭장에 풀어놓았다. 봄에 넣은 병아리가 중닭이 되고, 제법 자라면 어느 때부터 달걀을 하나씩 낳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닭이 방금 낳은 따뜻한 달걀을 쥐어 보기도 했다. 며칠 달걀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식구 수만큼 차면 아침 밥상에 달걀 하나씩을 올린다. 그렇게 닭을 키웠다가 올해는 닭장이 비었다. 봄에 들개들이 닭장을 헤집어 놓았기 때문. 다시 병아리를 구하려고 했지만, 올해 봄에는 조류독감과 구제역 같은 이유로 작은 병아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 해 꼬박 빈 닭장. 그렇게 닭장은 비었는데, 한 해 내내 닭과 달걀 소식이 오르내렸다.

DDT가 달걀과 닭에서 검출된 경북 영천시 도동의 양계농가. 케이지에서 밀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흙목욕을 할 수 있도록 양호한 시설을 갖춘 농가이지만 DDT가 검출되어 토양오염이 의심되는 상황. 우철훈 기자

달걀을 얻으려고 기르는 많은 닭들은 대규모 농장의 좁은 닭장(케이지) 안에 산다. 토막내어 잘려진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가 얼기설기 놓여 있는 종이 상자. 그거 서너 개쯤 쌓아 놓은 부피 안에, 온전한 모습을 한 닭이 서 있다. 아마도 뒤돌아 서기 어려운 작은 샤워 박스 같은 것보다 더 좁은 느낌일 것이다. 하루를 꼬박 그 안에서 보낸다. 사료를 먹고, 똥을 누고, 세상을 둘러보고, 주위의 소리를 듣고, 잠을 잔다. 닭은 날마다 같은 날을 보내고, 달걀을 낳는다.

닭은 온 세계로 보아도 사람이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과 가금 가운데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다. 마릿수로 보면, 나머지 모든 잡아먹는 새와 짐승의 숫자를 합친 것보다 예닐곱 배쯤 되는 닭을 잡는다는 통계도 있다. 온 세계 사람 숫자에 견주면 한 해에 한 사람이 일여덟 마리 닭을 잡아먹는다. 양념치킨, 혹은 치맥이야말로 한국의 음식이니까, 우리나라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고. 이어서 들리는 소식은 상자를 조금 더 키운다고도 하고, 닭장 안을 더 깨끗이 한다고도 한다. 약을 뿌리는 방법을 다시 교육시킨다고도 한다.

어디에선가는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DDT) 성분이 나왔다고도 했다. 시골에서는 아직도 이것을 마법의 흰 가루로 여기는 할매들도 있다. “무 심궈 먹을 적에는 DDT 좀 뿌려야 해.” 십 년 전 처음 무밭을 가꿨을 때, 서툴기 짝이 없는 젊은이가 안쓰러워서 마을 누군가는 주인 몰래 DDT를 뿌려주기도 했다. 결국 그것은 갈아엎고, 그 자리에는 작은 뒷간이 들어섰다. 그래도 DDT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DDT가 뿌려지지 않은 밭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닭들은 여느 닭하고는 다르게 맨땅을 밟고, 하늘을 보고, 흙에 날개를 비비며 살았다고 했다. 물통 가장자리에 늘어서서 물 한 모금을 먹고, 하늘 한 번 보고, 물 먹고 하늘 보고 그랬을 것이다. 농부는 그렇게 닭과 함께 살았다. 아마도 건강했을 것이다. 닭도 농부도. 

박선미의 책 <달걀 한 개>에는 마당을 헤집으며 장독을 깨기도 하고, 세이레 동안 꼼짝 않고 알을 품기도 하며 살아가는 닭의 이야기가 있다. 어렵사리 달걀 한 개를 얻은 아이가 강 건너 할머니에게 이것을 가져다줄까 하는 대목도 있다. 이제 그런 풍경은 수십 년 전 이야기가 되어서 도무지 이곳에 있었던 일로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다. 우리나라 시장에서는 심지어 흰 달걀마저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으니까. 다만 이제는 꼼짝 못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닭과 충분히 더 무해한 화학약품 따위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달걀 한 개, 두 개가 아니라 달걀 몇 줄, 몇 판 하는 식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달걀을 재어 두고 사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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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이 옆 사무실에 출판사를 차렸다. 이름을 ‘바틀비’로 지으려 한단 얘기를 들으니 ‘필경사’에 대한 예전의 궁금증이 떠올랐다. 필경(筆耕)이란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는 필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속 등장인물인 바틀비의 직업이 필경사였다.

작중 그의 행동이 특이함에도 작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풀어가는 경우도 있고, 작중인물들을 분석하여 사무직이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병증’에 대해 고찰하는 경우도 있다. 주거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당시 뉴욕의 월세는 소득에 비해 얼마나 비쌌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게 한다. 바틀비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홈리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하던 변호사 사무소에서는 필경사들에게 100단어당 4센트를 지불하였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5초에 1단어를 쓸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필사 6시간 정도를 가정하여 하루에 2달러 정도 벌었을 것이다. 한 달 꼬박 일하면 50달러 정도 벌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나는 그 일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어”라면서 창밖의 벽을 보며 백일몽에 빠져드는 것이 일상이었으므로 훨씬 수입이 적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뉴욕에서 제일 저렴한 하숙비는 한 달에 15달러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필경사로 쉬지 않고 일해서 벌 수 있는 소득의 30%에 해당한다.

소득대비임대료(RIR·Rent to Income Ratio)가 25%를 넘어가면 주거비 부담이 무겁다고 본다. 필경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장 질이 낮은 하숙방도 어렵게 구해야 하는 처지였던 셈이다. 그가 사무실을 거처로 삼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집이 아닌 사무실, 공장 구석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고시원이나 찜질방 신세를 지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찜질방도 이용하기 어려우면 결국 노숙을 하게 된다. 이런 사례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소득에 비해 주거비용이 높기 때문이다. 80만원 남짓 벌어 40만원짜리 고시원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다. 사회보장제도나 주거복지라는 개념도 없었던 19세기 뉴욕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상황이 씁쓸하기만 하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여러 지자체에서 주목하고 있는 대안이 사회주택이다. 당사자들이 힘을 모아 스스로 주택을 마련해보자는 움직임이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주거문제 해결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자구책이다. 여러 주택협동조합이 결성되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만의 힘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 지자체에서 ‘사회주택조례’를 만들어 지원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좀 더 효과적으로 다듬어 나갈 필요가 있다.

현재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공사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사회주택모델을 만들기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공공임대 사업에 사회주택 개념을 연계하여 공동체와 수요자가 직접 건설에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주택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건설되고 관리되는 사회주택이 실현되면 현장의 여건과 주민의 목소리를 반영한 도시재생을 이루는 주요 수단이 될 수 있다.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걸 알게 된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긴다. 거처를 잃고 부랑자가 된 바틀비는 교도소에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한다. 만약 사회주택에서 서로 소통하고 아옹다옹하기도 하며 생활하였다면 그도 태도를 바꾸고 삶을 이어가지 않았을까? 쉽지 않지만 사회주택을 포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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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애쓰는 일은 밥을 시간을 들여 15분 이상 천천히 먹는 것이다. 꼭꼭 씹어 먹고, 먹으면서 여유 있게 담소도 좀 나누라는 아내의 조언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퍼붓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도 해 주란다. 점점 음식을 빨리 먹는 것의 신체적 한계도 느낀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 선배와 함께 회를 먹었는데, 회가 맛있어서 허겁지겁 집어 씹지도 않고 삼킨 채 ‘소맥’을 퍼부었더니 몇 년 만에 ‘오바이트’를 흥건하게 해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술을 많이 마신 것보다 회를 꼭꼭 씹지 않고 먹어 사달이 났다면서 혼을 낸다. 밥 빨리 먹는 사람에 대한 규탄은 드문 일이 아니다. 친구들과 열어둔 단체 카톡방에는 밥 빨리 먹는 회사 상사들을 보고 있자면 체할 것 같다는 기분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허겁지겁 먹고 허겁지겁 마시는 건 이미 세련되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캐릭터가 됐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성도 있겠지만 자라면서 더 밥을 빨리 먹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빠르게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흡입’은 내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어릴 적 밥상에서 들은 가장 무서운 두 가지 말은 “시조가락 떨지 말고 얼른 밥 먹어라”와 “밥상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였다. 일일연속극에 나오는 단독주택의 식사에서는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지만 나는 밥상의 의논을 경험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기엔 부모님은 늘 바빴다. 밥은 하여간 후딱후딱 먹어야 하는 걸로 느꼈다. 초등학생 시절 도시락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을 지키는 방법은 싸움을 잘하는 녀석들이 뺏어 먹기 전에 빨리 먹어 치우는 거였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천 명의 훈련생들이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따금 지체가 생기면 밥 먹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수저를 직각으로 움직이며 식사를 하는 도중 훈육관은 꾸물댄다면서 식판을 엎기도 했다. 회사 다닐 때 인사팀 선배가 구내식당에서 식사시간을 재어봤더니 평균 7분이 나왔다고 한다. 몇 년 전 본 경제 다큐멘터리에는 그렇게 밥 빨리 먹는 문화가 전형적인 대기업 중 하나의 기업문화로 묘사되기도 한다. 밥을 빨리 먹어야 한다. 얼른 담배도 한 대 피우고 낮잠으로 피로도 풀어야 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까지 ‘흡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사였다. 술을 마실 때 ‘달린다’는 표현도 함께 포개진다. 쉴 새 없이 ‘흡입’하고 ‘달리는’ 것은 쫓김에서 오는 ‘조급함’과 식생활의 결합이다. 의사나 가사 전문가들, ‘웰빙’을 말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밥 먹으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지만 그건 매일 바삐 쫓기는 ‘보통’의 한국사람들에게 심정적으로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물론 밥을 느긋하게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세련되다는 것 정도는 성인이라면 모두가 안다. 한 시간 정도의 점심시간을 가진 도심의 직장인들과 공무원들은 이제 아메리카노 한 잔의 ‘여유’를 알고 ‘점심 맛집’에서 음미하는 법도 익히는 중이다. 성장하면서 빨라진 식사속도는 이쯤에서 브레이크가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인이 되고 나서도 점심시간 한 시간의 여유 없이 한 끼를 ‘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늘어나는 서비스 노동과 불안정 노동은 훨씬 더 사람을 촉박하게 만든다. 예컨대 영업사원과 서비스센터의 출장 수리기사, 택배기사, 대형마트의 캐셔, 제조업체의 사내하청 노동자 등에게 한 시간의 점심시간과 ‘여유’는 그대로 사치다. 안다고 모두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밥을 빨리 먹어야 하는 ‘생존형’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전제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휴식시간과 안정적인 최소한의 밥벌이다. 노동정책의 비전 중 하나로 느긋한 식사시간이 들어간다면 어떨까. 한갓지게 밥 먹으면서 편안하게 주변 풍경을 보며 쉴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으면. 지금까지 끼니를 급히 때우던 사람들이 가족에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며 잔소리를 할 수 있게 됐으면 한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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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얼마나 뜨거운가, 등짝을 뜯어묵을라 카네.” 밭에 매달려 있다가 돌아오는 아주머니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고, 어린 고양이 두 마리가 가만히 지켜본다. 올해 마을에서 보는 새끼 고양이 전부. 여름내 제법 몸이 불어난 녀석들은 볕이 뜨거울 때는 나무 그늘이 지는 돌담에 올라앉아 있거나, 우리집 계단참 밑에 웅크리고 있거나 했다. 여름 내내 집을 나설 때마다 고양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이 몸에 익었다. 막내 아이는 유난히 고양이를 좋아해서 한참 울다가도 고양이 소리만 나면 울음을 그치고 쫓아간다. 혼자 고양이 흉내를 내면서 놀기도 하고, 저녁이 되어서 뜨거운 바람이 조금 식으면 아이 손을 잡고 고양이를 찾아가는 고양이 산책도 한다.

지난 십 년 사이 해마다 마을에는 대여섯 마리, 혹은 예닐곱 마리쯤 되는 새끼 고양이들이 태어났다. 마을에 눌러사는, 사람과 고양이와 개를 헤아리면 고양이가 사람만큼은 살고 있겠다 싶은 정도였다. 사람과는 달리 고양이는 젊은 고양이도, 어린 고양이도, 늙은 고양이도 있어야 할 만큼 적당히 어울려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다들 어디로 가는지 마을에 사는 고양이 숫자는 늘 고만고만했는데, 그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집이 두 집, 앵두나무집과 동사(마을회관) 뒷집. 거기에 동사에 모여서 밥을 해 먹는 할매들 중에도 고양이 밥을 챙기는 분이 있어서, 마을 고양이들은 동사와 그 두 집을 오가며 지냈다. 사람들 일하러 나간 때에는 앵두나무집 마루에도 올라앉아 있고, 돌담 위에서 마을 사람들 지나다니는 것도 쳐다보고, 산나물 해 와서 널어놓으면 빙 둘러갈 줄도 알고, 깻단 세워 놓은 사이를 빙글빙글 돌아다니거나, 경운기 짐칸 밑에 길게 늘어져 있거나.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랬던 것이 지난해, 마을에 몇 집 빈집이 생겼다. 앵두나무집과 동사 뒷집도 고양이들한테는 빈집이나 마찬가지인 집이 되었다. 동사 뒷집 할매는 요양원에 갔고, 앵두나무집도 할배가 떠나시고는 늘 골목길에 세워져 있던 경운기가 치워졌다. 그 집 할매는 오랫동안 병원에 다녀와야 했고. 빈 앵두나무집에는 깜깜해질 때까지 마루청에서 내려오지 않는 고양이들이 있었다. 동사에 모여 밥을 해 먹는 할매들도 몇이 줄었다. 고양이 밥이 따로 놓이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 되었다. 대여섯 마리쯤 돌아다니던 새끼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털은 ‘우시우시’하고, 얼굴은 쪼삣한 채로 여름을 보냈다. 어미들도 돌담 위를 걷다가 우아하고 가볍게 지붕 위를 타넘고 다니던 녀석들이, 몇 걸음 더 돌아가서 처마 끄트머리를 붙잡고서야 지붕 위로 올라가고는 했다. 고양이들은 식구들 여럿이 함께 모여서 가만히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여름을 그렇게 보낸 새끼들은, 가을이 와도 몸집이 작았다. 그래서인지 새끼들이 어미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 새끼들이나 어미들이나 겨우 비쩍 마르지만 않은 정도로 겨울을 맞았다. 좀체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마을 어귀에 내어놓은 쓰레기봉투가 찢어지는 일도 생겼다. 그렇게 지난 한 해 동안, 마을 고양이들은 빈집 살림을 살았다. 한 해를 그렇게 보낸 고양이들은 올해 새끼를 두 마리만 낳았다.

여기 악양면은 오래전부터 농사가 잘되는 땅이라, 살림이 넉넉한 시골 마을이었다. 농사 잘되는 것을 두고 “각설이패가 들어와서 삼 년을 빌어먹고도 한 집이 남는” 동네라고도 말했다. 지금도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면에 있는 초등학교에는 아이들이 백 명쯤 다니고, 새로 이사 들어오는 젊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여유롭게 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 다른 시골 마을에 견주어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할매 할배들 돌아가시면서 빈집이 늘고, 자기 살림과 마을 살림을 함께 꾸려갈 줄 알았던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은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다. 용케 빈집이 많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앞으로 빈집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저녁이면 빈집들 사이에서 고양이들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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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5일, 최저임금위원회는 정부세종청사에서 11차 전원회의를 열고 2018년 최저임금을 7530원으로 확정했다.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고용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찬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지만, ‘고용감소가 불가피하다.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우려에 많은 국민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언론들이 ‘업주보다 더 많이 벌어가는 알바’라는 선정적인 문구로 국민들의 불안을 파고든다. 최저임금 문제를 이른바 ‘을과 을’의 전쟁으로 몰아가려는 뻔한 수법이다.

자영업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비용 중에 일부일 뿐이다. 설비비, 인테리어비, 전기요금, 관리비, 임대료, 가맹점비, 대출이자 등 많은 비용이 있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비용의 지출은 당연히 여기면서 인건비의 지출에 유독 인색한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의 ‘시장경제’는 계속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경제의 초석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자본의 이익을 최소화하고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경제체제로 ‘시장경제’를 구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교과서를 살펴보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 시장에서 적정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적정한 가격’을 찾아보기 어렵다. 애덤 스미스는 적정하지 않은 가격은 임금이 높아서가 아니라 자본가의 욕심에 따라 이윤이 오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정의롭고 올바른’ 완전경쟁시장으로 발전하면 이윤이 줄어든다는 것, 그러기 위해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 즉, 자본가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걸러내야 한다는 것이 <국부론>의 주요 논점이다.

자본에 대해 이처럼 박한 평가를 한 이유는 국부창출에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이윤’만을 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21세기 자영업 현장에 적용해보면 열심히 일하면서 노동을 하는 자영업자와 알바는 노동자에 해당하고, 건물주, 가맹점본부, 금융기관은 자본가에 해당한다. 최저임금을 올리기 어려운 이유는 공정하지 않은 임대료, 수수료, 이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애덤 스미스가 우려했던 대로 우리 ‘을’들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다.

공정하지 않은 임대료로 논의를 좁혀보면, 스스로 자영업을 영위할 생각이 없으면서 점포를 소유하고 임대료를 자영업자에게 거둬들이는 구조가 자영업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다. 실수요자, 즉 자영업자가 아닌 ‘돈 많은’ 사람들이 점포를 매입하겠다고 뛰어드는 순간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게 되고, 그에 대한 투자비를 회수하겠다고 임대료를 올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런 행태는 낮은 비용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경제를 어지럽히는 매점매석과 동일한 부작용을 낳고 자유주의 이념에도 배치된다.

정리하자면,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구조는 ‘을과 을’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공정한 노동대가에 대한 불로소득의 침해’를 막아내기 위한 사회적 합의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저임금은 불로소득을 줄여 적정한 노동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수단의 하나이다. 따라서 불공정한 갑의 횡포를 막고 자영업용 부동산의 불합리한 소유 및 임대구조를 개선하려는 정책이 병행되어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불로소득을 재테크 따위로 부르면서 장려하거나, 취할 수 있는데 안 하면 바보가 되는, 재력가나 고위공직자의 필수 덕목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부’가 철학적으로 용인되는 근거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대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땀 흘린 대가가 불로소득보다 존중받을 수 있어야 정상적인 사회이며 튼튼한 시장경제가 지속될 수 있다.

강세진 | 박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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