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장 애쓰는 일은 밥을 시간을 들여 15분 이상 천천히 먹는 것이다. 꼭꼭 씹어 먹고, 먹으면서 여유 있게 담소도 좀 나누라는 아내의 조언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퍼붓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도 해 주란다. 점점 음식을 빨리 먹는 것의 신체적 한계도 느낀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 선배와 함께 회를 먹었는데, 회가 맛있어서 허겁지겁 집어 씹지도 않고 삼킨 채 ‘소맥’을 퍼부었더니 몇 년 만에 ‘오바이트’를 흥건하게 해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술을 많이 마신 것보다 회를 꼭꼭 씹지 않고 먹어 사달이 났다면서 혼을 낸다. 밥 빨리 먹는 사람에 대한 규탄은 드문 일이 아니다. 친구들과 열어둔 단체 카톡방에는 밥 빨리 먹는 회사 상사들을 보고 있자면 체할 것 같다는 기분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허겁지겁 먹고 허겁지겁 마시는 건 이미 세련되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캐릭터가 됐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성도 있겠지만 자라면서 더 밥을 빨리 먹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빠르게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흡입’은 내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어릴 적 밥상에서 들은 가장 무서운 두 가지 말은 “시조가락 떨지 말고 얼른 밥 먹어라”와 “밥상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였다. 일일연속극에 나오는 단독주택의 식사에서는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지만 나는 밥상의 의논을 경험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기엔 부모님은 늘 바빴다. 밥은 하여간 후딱후딱 먹어야 하는 걸로 느꼈다. 초등학생 시절 도시락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을 지키는 방법은 싸움을 잘하는 녀석들이 뺏어 먹기 전에 빨리 먹어 치우는 거였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천 명의 훈련생들이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따금 지체가 생기면 밥 먹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수저를 직각으로 움직이며 식사를 하는 도중 훈육관은 꾸물댄다면서 식판을 엎기도 했다. 회사 다닐 때 인사팀 선배가 구내식당에서 식사시간을 재어봤더니 평균 7분이 나왔다고 한다. 몇 년 전 본 경제 다큐멘터리에는 그렇게 밥 빨리 먹는 문화가 전형적인 대기업 중 하나의 기업문화로 묘사되기도 한다. 밥을 빨리 먹어야 한다. 얼른 담배도 한 대 피우고 낮잠으로 피로도 풀어야 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까지 ‘흡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사였다. 술을 마실 때 ‘달린다’는 표현도 함께 포개진다. 쉴 새 없이 ‘흡입’하고 ‘달리는’ 것은 쫓김에서 오는 ‘조급함’과 식생활의 결합이다. 의사나 가사 전문가들, ‘웰빙’을 말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밥 먹으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지만 그건 매일 바삐 쫓기는 ‘보통’의 한국사람들에게 심정적으로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물론 밥을 느긋하게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세련되다는 것 정도는 성인이라면 모두가 안다. 한 시간 정도의 점심시간을 가진 도심의 직장인들과 공무원들은 이제 아메리카노 한 잔의 ‘여유’를 알고 ‘점심 맛집’에서 음미하는 법도 익히는 중이다. 성장하면서 빨라진 식사속도는 이쯤에서 브레이크가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인이 되고 나서도 점심시간 한 시간의 여유 없이 한 끼를 ‘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늘어나는 서비스 노동과 불안정 노동은 훨씬 더 사람을 촉박하게 만든다. 예컨대 영업사원과 서비스센터의 출장 수리기사, 택배기사, 대형마트의 캐셔, 제조업체의 사내하청 노동자 등에게 한 시간의 점심시간과 ‘여유’는 그대로 사치다. 안다고 모두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밥을 빨리 먹어야 하는 ‘생존형’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전제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휴식시간과 안정적인 최소한의 밥벌이다. 노동정책의 비전 중 하나로 느긋한 식사시간이 들어간다면 어떨까. 한갓지게 밥 먹으면서 편안하게 주변 풍경을 보며 쉴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으면. 지금까지 끼니를 급히 때우던 사람들이 가족에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며 잔소리를 할 수 있게 됐으면 한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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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얼마나 뜨거운가, 등짝을 뜯어묵을라 카네.” 밭에 매달려 있다가 돌아오는 아주머니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고, 어린 고양이 두 마리가 가만히 지켜본다. 올해 마을에서 보는 새끼 고양이 전부. 여름내 제법 몸이 불어난 녀석들은 볕이 뜨거울 때는 나무 그늘이 지는 돌담에 올라앉아 있거나, 우리집 계단참 밑에 웅크리고 있거나 했다. 여름 내내 집을 나설 때마다 고양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이 몸에 익었다. 막내 아이는 유난히 고양이를 좋아해서 한참 울다가도 고양이 소리만 나면 울음을 그치고 쫓아간다. 혼자 고양이 흉내를 내면서 놀기도 하고, 저녁이 되어서 뜨거운 바람이 조금 식으면 아이 손을 잡고 고양이를 찾아가는 고양이 산책도 한다.

지난 십 년 사이 해마다 마을에는 대여섯 마리, 혹은 예닐곱 마리쯤 되는 새끼 고양이들이 태어났다. 마을에 눌러사는, 사람과 고양이와 개를 헤아리면 고양이가 사람만큼은 살고 있겠다 싶은 정도였다. 사람과는 달리 고양이는 젊은 고양이도, 어린 고양이도, 늙은 고양이도 있어야 할 만큼 적당히 어울려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다들 어디로 가는지 마을에 사는 고양이 숫자는 늘 고만고만했는데, 그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집이 두 집, 앵두나무집과 동사(마을회관) 뒷집. 거기에 동사에 모여서 밥을 해 먹는 할매들 중에도 고양이 밥을 챙기는 분이 있어서, 마을 고양이들은 동사와 그 두 집을 오가며 지냈다. 사람들 일하러 나간 때에는 앵두나무집 마루에도 올라앉아 있고, 돌담 위에서 마을 사람들 지나다니는 것도 쳐다보고, 산나물 해 와서 널어놓으면 빙 둘러갈 줄도 알고, 깻단 세워 놓은 사이를 빙글빙글 돌아다니거나, 경운기 짐칸 밑에 길게 늘어져 있거나.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랬던 것이 지난해, 마을에 몇 집 빈집이 생겼다. 앵두나무집과 동사 뒷집도 고양이들한테는 빈집이나 마찬가지인 집이 되었다. 동사 뒷집 할매는 요양원에 갔고, 앵두나무집도 할배가 떠나시고는 늘 골목길에 세워져 있던 경운기가 치워졌다. 그 집 할매는 오랫동안 병원에 다녀와야 했고. 빈 앵두나무집에는 깜깜해질 때까지 마루청에서 내려오지 않는 고양이들이 있었다. 동사에 모여 밥을 해 먹는 할매들도 몇이 줄었다. 고양이 밥이 따로 놓이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 되었다. 대여섯 마리쯤 돌아다니던 새끼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털은 ‘우시우시’하고, 얼굴은 쪼삣한 채로 여름을 보냈다. 어미들도 돌담 위를 걷다가 우아하고 가볍게 지붕 위를 타넘고 다니던 녀석들이, 몇 걸음 더 돌아가서 처마 끄트머리를 붙잡고서야 지붕 위로 올라가고는 했다. 고양이들은 식구들 여럿이 함께 모여서 가만히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여름을 그렇게 보낸 새끼들은, 가을이 와도 몸집이 작았다. 그래서인지 새끼들이 어미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 새끼들이나 어미들이나 겨우 비쩍 마르지만 않은 정도로 겨울을 맞았다. 좀체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마을 어귀에 내어놓은 쓰레기봉투가 찢어지는 일도 생겼다. 그렇게 지난 한 해 동안, 마을 고양이들은 빈집 살림을 살았다. 한 해를 그렇게 보낸 고양이들은 올해 새끼를 두 마리만 낳았다.

여기 악양면은 오래전부터 농사가 잘되는 땅이라, 살림이 넉넉한 시골 마을이었다. 농사 잘되는 것을 두고 “각설이패가 들어와서 삼 년을 빌어먹고도 한 집이 남는” 동네라고도 말했다. 지금도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면에 있는 초등학교에는 아이들이 백 명쯤 다니고, 새로 이사 들어오는 젊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여유롭게 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 다른 시골 마을에 견주어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할매 할배들 돌아가시면서 빈집이 늘고, 자기 살림과 마을 살림을 함께 꾸려갈 줄 알았던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은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다. 용케 빈집이 많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앞으로 빈집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저녁이면 빈집들 사이에서 고양이들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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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5일, 최저임금위원회는 정부세종청사에서 11차 전원회의를 열고 2018년 최저임금을 7530원으로 확정했다.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고용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찬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지만, ‘고용감소가 불가피하다.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우려에 많은 국민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언론들이 ‘업주보다 더 많이 벌어가는 알바’라는 선정적인 문구로 국민들의 불안을 파고든다. 최저임금 문제를 이른바 ‘을과 을’의 전쟁으로 몰아가려는 뻔한 수법이다.

자영업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비용 중에 일부일 뿐이다. 설비비, 인테리어비, 전기요금, 관리비, 임대료, 가맹점비, 대출이자 등 많은 비용이 있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비용의 지출은 당연히 여기면서 인건비의 지출에 유독 인색한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의 ‘시장경제’는 계속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경제의 초석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자본의 이익을 최소화하고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경제체제로 ‘시장경제’를 구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교과서를 살펴보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 시장에서 적정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적정한 가격’을 찾아보기 어렵다. 애덤 스미스는 적정하지 않은 가격은 임금이 높아서가 아니라 자본가의 욕심에 따라 이윤이 오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정의롭고 올바른’ 완전경쟁시장으로 발전하면 이윤이 줄어든다는 것, 그러기 위해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 즉, 자본가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걸러내야 한다는 것이 <국부론>의 주요 논점이다.

자본에 대해 이처럼 박한 평가를 한 이유는 국부창출에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이윤’만을 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21세기 자영업 현장에 적용해보면 열심히 일하면서 노동을 하는 자영업자와 알바는 노동자에 해당하고, 건물주, 가맹점본부, 금융기관은 자본가에 해당한다. 최저임금을 올리기 어려운 이유는 공정하지 않은 임대료, 수수료, 이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애덤 스미스가 우려했던 대로 우리 ‘을’들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다.

공정하지 않은 임대료로 논의를 좁혀보면, 스스로 자영업을 영위할 생각이 없으면서 점포를 소유하고 임대료를 자영업자에게 거둬들이는 구조가 자영업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다. 실수요자, 즉 자영업자가 아닌 ‘돈 많은’ 사람들이 점포를 매입하겠다고 뛰어드는 순간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게 되고, 그에 대한 투자비를 회수하겠다고 임대료를 올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런 행태는 낮은 비용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경제를 어지럽히는 매점매석과 동일한 부작용을 낳고 자유주의 이념에도 배치된다.

정리하자면,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구조는 ‘을과 을’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공정한 노동대가에 대한 불로소득의 침해’를 막아내기 위한 사회적 합의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저임금은 불로소득을 줄여 적정한 노동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수단의 하나이다. 따라서 불공정한 갑의 횡포를 막고 자영업용 부동산의 불합리한 소유 및 임대구조를 개선하려는 정책이 병행되어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불로소득을 재테크 따위로 부르면서 장려하거나, 취할 수 있는데 안 하면 바보가 되는, 재력가나 고위공직자의 필수 덕목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부’가 철학적으로 용인되는 근거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대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땀 흘린 대가가 불로소득보다 존중받을 수 있어야 정상적인 사회이며 튼튼한 시장경제가 지속될 수 있다.

강세진 | 박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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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명목으로 독일을 쏘다니는 중이다. 독일에서 여행자로서 곧바로 운전하며 다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운전하던 대로 했더니 졸지에 ‘난폭자’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움직일 기미만 있으면 차들은 멈춰섰고, 자전거가 옆에 지나가면 차들은 속도를 줄였다. 깜빡이를 켜면 옆 차로의 차는 속도를 줄이면서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아우토반에서도 거친 운전자들은 차량이 가진 최고의 역량을 다 해 속도를 냈지만, 위험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속도가 아찔한 운전자들은 자연스럽게 우측 차로로 빠른 차들을 피했고 그때 역시 우측 차로의 차들이 충분한 안전거리를 만들어 줬다. 그들은 ‘안전거리’ 확보를 하나의 규칙으로 숙지하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를 약간이라도 침범하거나 보행하려는 사람들보다 먼저 가려고 할 때 독일 사람들은 한결같이 항의했다. 독일어는 몰라도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차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딱 제자리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항의한다는 점이었다. 슈투트가르트 시내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 중, 카운터의 직원은 한국의 알파벳 철자를 찾지 못해 헤맸다. 성격 급한 나는 “도와드릴까요”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카운터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 직원은 곧바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아, 제발 제자리를 지켜주세요”하고 제지했다. 내 무례함을 곧바로 인지했다. 그건 바로 ‘거리’였다.

한두 달 전쯤 미군이 운영하는 영어회화 클럽에 간 적이 있다. 미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거리’가 주제가 됐다. 20대 초반의 미군 남성은 한국인들이 아무 때나 ‘치고 들어오는’ 혹은 ‘들이대는’ 것 때문에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밝히기 꺼리는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물어본다는 거였다.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 대해서 신랄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던 영국사람들이 기억났다.

한국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숫자를 채웠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에 자란 젊은 세대는 대개 개인주의자로 자랐다. 그러나 상사, 고객사, 주인 등 ‘갑’들에게 무력한 ‘을’들은 ‘거리’를 두고 싶지만 살기 위해 ‘눈치’를 보고 ‘무난한’ 모습을 연출한다. ‘무난한’ 모습은 모두의 탈진에 의존한다. 게다가 ‘탈락’의 공포를 완충해줄 정도로 사회적 보호망은 없다. 그러니 ‘개인적 공간’은커녕 ‘감정’마저 소진해야 하는 사람들이 헛헛한 마음으로 ‘혼밥’을 하고 그게 익숙해지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 관계적 고립이 지속되면 사람이 상한다. 반드시 고립된 개인들을 함께하게 할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독일에서 부러운 것은 ‘개인적 공간’을 잘 지켜주는 것에 대한 부러움보다는 이를 사회적 ‘연대’로 잘 가꿀 수 있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란 책에 따르면 독일의 노동조합과 직장협의회가 경영에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적 공간을 지킬 수 있다. 9시 출근 6시 퇴근을 보장하고 어떤 형태로 일해도 생활에 위협을 느끼지 않기에 뜻이 맞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저녁 있는 삶’을 누릴 시간 여유가 있고,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평일 중에도 노동조합이 확보하기에 ‘연대’의 가치가 더욱더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항의하는 것도 스스로의 존엄을 유지하게끔 제도적 보호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연대가 그나마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이방인도 편안하고 소수자도 편안하다.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탈진하는 사람이 넘치는 지금, 그런 장치들은 더 빠르게 효과적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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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제103조)고 선언하여 법관(판사)의 독립을 사법부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법관이 지켜야 할 윤리기준과 행위규범을 정한 ‘법관윤리강령’에서도 가장 첫 번째로 ‘법관은 모든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 나간다’(제1조)고 하면서 독립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독립성’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독립성은 재판의 공정성이 보장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공정성은 사법절차에서 지켜져야 하는 절대 원칙이다. 공정하지 않은 판결에 대해 당사자에게 승복을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법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성장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다양해지면서 새로운 법리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 기존의 해석이 수정될 필요도 있다. 특히, 사법부가 다수결의 현실에서 외면받기 쉬운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양한 판결이 필수적이다. 자유로운 비판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이다.

그런데 얼마 전, 법원에서 판사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판사들의 자발적인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개선 방향과 관련한 토론회를 마련하자, 법원행정처가 이 토론회를 가능한 한 조용하게 진행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토론회는 다양한 국제 사례를 통해서 법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인사제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로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으로 나타난 상황에서 법관의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법원행정처 소속 고위법관들은 수차례 회의를 거쳐 토론회 발표 내용 중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언론에 배포하지 말라는 등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고, 새삼스럽게 판사들의 학술모임 중복가입을 제한하겠다고 했다. 결국 해당 업무를 담당할 판사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며 사직서를 내자, 법원행정처는 판사의 법원행정처 발령 당일 다시 원래 근무지로 돌려보내는 초유의 인사발령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법원행정처에 비밀번호가 설정된 ‘판사 뒷조사 파일’이라는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의혹도 함께 제기되었다. 법원이 조직적으로 판사들의 자율적인 연구활동을 방해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의적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법원의 대응은 더 큰 충격이었다. 대법원장이 전권을 부여한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법원행정처장이 조사를 거부하여 결국 의혹이 제기된 블랙리스트 파일에 대해서 조사하지 못했다. 대법원장의 권한이 하급자인 법원행정처장에게서 막힌 것이다. 결국 전국 각 법원 판사들이 수차례 판사회의를 열어, 법원별로 대표자를 선출하고 사법부 역사상 최초로 전국법관대표회의도 열렸다. 그리고 대표회의에서 블랙리스트에 대한 추가조사를 대법원장에게 요구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를 거부했다. 재판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판사의 독립성을 고위법관들이 스스로 허물고서 이에 대해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오늘 사법연수원에서는 2차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린다. 대표회의를 앞두고 인천지방법원 최한돈 부장판사는 블랙리스트 재조사를 요청하며 대법원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고,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차성안 판사는 다음 아고라 이슈청원 게시판에 판사 블랙리스트에 대한 10만인 청원을 올리고, 눈물로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법관대표회의 결정에 대한 양 대법원장의 용단을 촉구한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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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세’라니, 세금이라는 건 버는 돈, 쓰는 돈, 가진 돈에 붙는 거 아닌가. 무슨 세금이지? 찾아 보니 고향세는 일본에서 먼저 시행하고 있는 제도라고 한다. 지방정부에 돈이 없으니까,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내는 세금 가운데 일부를 자기가 원하는 지자체에 보내는 제도이다. 일본에서는 제법 자리를 잡아 지방세보다 고향세를 더 많이 거두는 지자체도 있다. 우리나라도 곧 구체적인 방법을 정해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고향세 같은 아이디어를 내야 할 만큼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는 처참하다. 자기 살림을 늘 중앙정부에서 돈을 받아서 꾸려 나가는 입장이다 보니,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자체장의 선거나 지역 국회의원 선거 자료의 핵심은 늘 “내가 중앙정부에서 돈을 이만큼이나 끌어왔다” 혹은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시골로 돈을 보내는 사업 가운데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으로 하는 ‘창조적 마을 만들기’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같은 게 있다. 지역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해마다 전국 각지의 마을들을 선정해서 수십억원을 쓴다. 돈 쓰임새에 대해서는 농식품부에서 일정한 비율로 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자체 형편에 맞춰 필요한 일에 쓸 수 있다. 돈이 내려와서 어떻게 쓰이는지 시골 사람들이 쉽게 체감하는 사업이다. 작은 지자체 살림에 견주면 적지 않은 돈이 내려온다. 한데 이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살펴보면, 정말 돈 없는 곳이 어렵사리 받아다 쓰는 것인지 맞나 싶다. 관광객을 위한 안내판, 편의시설, 공연장 같은 것을 짓거나, 도로를 내거나, 뜬금없는 문화사업 따위를 하거나. 심지어는 할매들 모여서 같이 밥해 먹고 쉬고 하는 마을회관에 값비싼 헬스기구 따위를 줄줄이 들여오기도 한다. 문화, 관광, 생활 시설, 경관 개선 등 여러 가지 명목이되 실제 내용은 한결같이 토목, 건축, 시설 구입 비용이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지역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몇몇 ‘장년층 남성’의 의견만으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진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쓸 수 있는 공동의 농업 재산을 만들거나, 마을 살림의 기반이 될 농림어업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거나, 점점 기력이 없어지는 할매·할배들이 좀 더 수월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등에 돈이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 길을 새로 내더라도, 보행기를 끌고다니는 할매들이 안심하고 편히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트럭과 농기계들이 좀 더 빨리, 편하게 다니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 면에 하나쯤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몇 안되는 아이들이 지내는 것을 돌아보는 일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지방정부는 돈이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다달이 어디에선가 열리고 있는 지역축제들은 행사 수익으로 충당하는 비용이 평균 30% 안팎이라고 한다. 70%의 돈을 해마다 퍼부으면서 빚을 내서까지 지역축제를 하는 것이다. 돈을 더 마련해서, 지방자치를 활성화하는 것은 당연히 밀고나가야 할 일이겠다. 하지만 돈을 더 마련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돈 쓰는 방식에 대해 지방정부가 지역의 시민들과 훨씬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고, 몇몇 사람들만의 의견으로 세금이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어쨌든 고향세는 마음을 움직이는 세금이 될 것이다. 돈을 보내고 있으니, 들리는 소식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귀를 기울이고, 더 발걸음을 하고, 대도시와 지방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더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야말로 지방정부에 대해 보는 눈이 많아지겠지. 다행히 일본에서 10년쯤 이 일을 하면서 우리도 비슷하게 겪을 여러 문제들을 미리 보여주었다. 굵직한 잘못 몇 가지는 피해갈 수 있을 터이다. 중앙정부는 어느 때보다 믿음직스럽게 일을 해 나가고 있다. 지방정부도 살림과 운영을 바꾸기에 지금만큼 좋은 때가 없는 것 같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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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나는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을 비판했다. 그해 11월엔 바이오매스,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칼럼을 썼다. 그러나 2017년 7월의 나는 당시의 나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9년쯤 됐으니 입장이 바뀔 법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다. 첫째, 신재생에너지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기대치가 수정됐다. 둘째,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변하고 있다. 셋째, 환경오염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나씩 짚어보자. 내 입장이 달라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 가령 구글의 판단도 그렇다. 2007년 11월27일 구글은 google.org라는 비영리법인을 통해 ‘석탄보다 저렴한 재생가능에너지’(RE<C) 계획을 발표했다. 지열발전을 개량해 석탄보다 낮은 가격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유가가 하늘로 치솟고 수많은 기술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라는 난제에 덤벼들던 시절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2011년 11월22일, 구글은 RE<C 계획의 실패를 선언했다. 대신 그 외의 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에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기대치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의 주요 수출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가솔린 혹은 디젤이 아니라 전기를 동력원으로 삼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지난 5일, 스웨덴의 자동차 메이커 볼보는 2019년부터 전기차 혹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만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아이폰이 휴대폰 시장을 스마트폰 시장으로 바꿔놓았듯, 테슬라의 국내 진출은 전기차로의 전환에 있어서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전기차는 전기를 연료로 삼는다. 따라서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발전량을 줄이고 냉장고를 없애자는 식의 주장은 너무도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2008년과 달리 미세먼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중이다. 미세먼지의 주요 발생 원인으로는 석탄화력발전과 디젤 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정부는 대신 액화천연가스(LNG)발전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석탄에 비해 비싸고 가격 변동이 심할뿐더러, 정도가 덜하다뿐이지 역시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은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LNG 등 화력발전소가 더 자주 가동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친환경적인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탈핵 선언 철회를 촉구한 환경단체 ‘환경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대표 마이클 쉘렌버거 역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해 입장을 바꾼 경우에 속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동시에 개인과 산업체가 모두 안정적으로 충분한 전기를 공급받으려면 ‘탈핵’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유지하고 늘려나가되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석탄에 비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은 현재까지 원자력뿐이다. 원자로 해체, 사용후 핵연료 처분, 중·저준위 폐기물 관리 비용을 모두 포함해도 그렇다. 원전 사고의 우려는 최대한 안전성을 높이고 운영 과정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대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사회적 위험 요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저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했다고 여겨지는 이 말은,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유작인 <When The Facts Change>의 제목이 되었다. 그렇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경향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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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통계를 보면 중학교 한 학급에는 학생이 평균 30명 있다. 이 중 6~25등은 일반고에 가는 학생들이고, 대학입시에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하지만 대학은 진학하는 수험생들이고, 대기업에는 가지 못해도 중소기업의 대부분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입시 문제는 중학생 때부터 1~5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림잡아 1~2등을 모아놓은 과학고와 외고 등 특수목적고, 3~5등을 모아놓게 될 자립형 사립고가 쟁점이 된다. 특목고와 자사고를 해체하지 않을 경우 일반고는 실업계에 진학하는 나머지를 제외하면 중학교 때 6~25등을 하던 학생들의 학교가 된다. 대학입시에서 ‘성공’할 수 있는 1~5등을 어떻게든 확보해 실적과 학급 분위기를 잡으려는 공립 일반고의 발버둥을 읽어낼 수 있다. “수능 정시냐, 학생부종합전형이냐”라는 대입전형 논쟁도 초점은 1등급과 2등급이 나올 수험생들의 경쟁에서 제기되는 공정성에 대한 이야기다. 3등급 이하 수험생의 이야기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고등학생 중 75%가 대학에 진학하는 시대에, 60%가 넘는 수험생의 사정은 음소거 처리되는 셈이다.

대학생활도 1~5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거점 국립대학 학생들의 공부와 대학원 진학, 취업이 주된 이슈가 된다.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로 대표 되는 영어점수, 각종 자격증, 인턴십, 교환학생, 해외 연수 등 자기계발에만 열중한다는 말도 1~5등 이야기다. 취업 준비에 대한 제대로 된 목표조차 정하기 어려운 지방대생들은 언급의 대상에서 빠지게 된다. 취업난도 1~5등 이야기다. 연초 대기업 집단의 경영계획이 발표되면 신규 채용 인원이 나온다. 언론은 대기업 공채, 공기업, 공사, 공무원 채용 인원을 통해 청년 취업문제에 대한 기사를 쓴다. 지레 겁먹고 9급 공무원 도전도 저어하고 중소기업에 가겠다고 말하는 지방대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채용부터 ‘제도’와 ‘프로세스’가 미비한 중소기업의 실정은 예외일 따름이다. 그만두는 날까지 ‘부당함’에 대해 다른 감각을 갖고 살게 될 이들의 이야기는 ‘노동이슈’로만 등장한다.

대학교육이 취업으로 인해 본연의 가치가 사라졌다는 말이 10년이 넘게 반복 중이다. 한국사회학회에 발표된 최종렬의 ‘복학왕의 사회학’이라는 논문은 그 말이 얼마나 현실감이 없는지 드러낸다. 중·고등학교부터 교육은 그들에게 적절한 목표를 준 적이 없고 부족한 점을 채워준 적이 없다. ‘대학생이면 으레 기대되는’ 목표와 자신들의 삶이 유리되어 있음을 간파한 6~25등은 전공공부와 치열한 자기계발, 적극적인 구직 모두 동참할 생각이 없다. ‘복학왕’에 등장하는 행태만 떠돌 뿐 맥락은 묻히고 마는 게 문제다. 다른 한 편, 중소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가지 않는다는 한탄이 줄을 잇는다. 그런 서사 속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1~5등이다. 성실함으로 회사를 떠받치고 있는 6~25등들은 자신들의 현장에 대한 이야기에서조차 주눅이 든다.

나는 6~25등의 관점에서 사회를 읽어보는 게 지금까지 다뤄보지 않은 한국 사회의 혁신이고 진보의 출발점이라 본다. 이들이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에서 배움의 재미를 포기하지 않고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면 교육이 혁신한다. 이들의 직무역량이 올라가면 중소기업이 혁신된다. 이들이 직장에서 제 대접을 받으면 한국의 노동인권이 진보한다. 이들이 다니는 직장에서 여성들이 경력단절에서 밀려나지 않으면 한국의 유리천장에 큰 균열이 간다. 정권이 바뀌고, 수월성 교육에 대한 반성과 공교육 정상화에 대한 이야기가 늘었다. 교육과 노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지금 시급히 바꿔야 하는 것은 초점을 맞출 대상이다. 6~25등이 교육과 노동의 목표에서 유리되지 말아야 한다. 1~5등에 대한 투자는 이미 수확체감의 포화상태다. 6~25등에 대한 투자가 미래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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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다문화가정 학부모와 상담하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초등학생 자녀들은 방과후 동네에 있는 공부방(지역아동센터)에 다녔다. 대부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이용하는 시설인데, 아이들이 오랫동안 공부방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해온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는 것이다.

공부방 교사는 아이들에게 학습지를 풀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숙제를 다  못하거나 풀어온 문제가 틀린 경우 그 개수만큼 플라스틱 자와 장구채, 노트 등으로 때렸다. 아이들은 수십 대에서 많은 경우에 100대 넘게 맞기도 했다. 머리가 길다고 다른 아이들 앞에서 가위로 머리카락 일부를 자르기도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폭언이나 욕설로 공포심을 주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피해를 당한 아이들은 자해, 등교거부, 부모와 대화 단절 등 이상행동 증상을 보였고, 우울증 진단까지 받은 아이도 있다. 이는 명백한 아동학대다.

부적절한 회계운영이 의심되는 정황도 있다. 학부모들은 센터의 요청에 따라 센터 운영기관의 후원계좌 또는 시설 대표자 개인계좌로 매월 5만~10만원씩 돈을 보냈다. 지역아동센터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보조금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무료이용이 원칙이다. 보건복지부 지침에서는 교재비, 야외현장체험비 등의 실비를 받는 경우에도 그 대상을 중위소득 85%를 초과하는 가정(4인 가구 기준 월수입 379만7000원 이상)으로 하되 최대 5만원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설의 이용 아동 및 아동의 보호자로부터 센터 후원금을 받는 것은 지양하고, 지급된 후원금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부금 영수증 발급 및 사용결과 보고를 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과태료 300만원이 부과된다. 그러나 한국어가 능숙하지 못하고 한국 생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다문화가정 학부모들은 센터가 납부하라는 대로 매달 돈을 낼 수밖에 없었고, 이후 어떠한 기부금 영수증이나 사용내역도 받지 못했다.

지역아동센터는 아동복지법에 규정된 아동복지시설이다. 방과후 돌봄 서비스가 필요한 18세 미만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보호·교육, 놀이와 오락의 제공, 보호자와 지역사회의 연계 등 아동의 건전 육성을 위하여 필요한 아동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과거 민간에서 공부방이라는 이름으로 소규모 자생적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4년경 아동복지법에 따른 복지시설로 법제화되고 보조금이 지원되면서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작년 기준 전국적으로 4100여개의 지역아동센터를 평균 10만명 이상의 아이들이 이용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매우 소중한 공간이다. 가정을 넘어 사회의 세심한 보호가 필요한 한부모·조손·다문화 가정이나, 부모가 모두 일하는 맞벌이 가정의 자녀들이 방과후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꼭 필요한 사회적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장이다. 소규모 가정 형태의 이용시설로 충분하지 않은 정부 지원과 박봉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아동학대 사례가 지역아동센터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관리감독이 세심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복지부 지침에 따르면 지역아동센터는 신규 시설의 경우 1회 진입평가를 받고, 이후 3년에 한 번 심화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평가 방법이 해당 시설이 자체적으로 평가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전문가 2인이 1조가 되어 해당 시설을 방문해 관련 서류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시설의 회계부정이나 아동학대를 방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시설 이용 아동의 학부모가 평가에 직접 참여하거나, 시설 이용 아이들에 대한 아동보호 전문기관의 정기적인 심리상담 프로그램 등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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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섬진강에 나섰다. 다행히 4대강 축에 끼지 못했던 섬진강에는 모래사장이 남아 있다. 발목쯤 잠기는 자리, 물속 모래를 헤치면 재첩이 있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모래를 휘저으면서 걷는다. 발가락에 단단한 껍질이 걸린다. 하나씩 재첩을 집어 올린다. 둘이 같이할 때는 한 사람은 모래를 헤집으면서 걷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드러난 재첩을 줍는다. 이렇게만 해도 식구들이 두고두고 먹을 만치 재첩을 잡을 수 있다. 봄에 산나물하듯, 때맞춰 하는 살림살이. 아이들도 저마다 한 움큼 재첩을 잡았다.

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으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 아이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먼저 귀가 쏠린다. 그렇게 듣는 이야기가 노골적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부모가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친구 같은 아빠’다. 아이들이 친구와 노는 것이 그만큼 어려우니까 아빠한테 친구 노릇까지 떠맡기는 것이겠지. 친구 노릇에는 젬병인 나는, 내 속 편하자고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친구처럼 같이 노는 일은 아무래도 능력 밖의 일이니까, 재첩을 잡으러 갈 때에 섬진강에 함께 가고, 논두렁을 바를 때는 봇도랑에서 놀라 하고, 겨울에는 함께 산에 가서 갈잎과 잔가지를 주워 모은다. 때맞춰 일하러 나가는 길에 아이들이 가서 놀 만하다 싶으면, 아이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속으로는 놀면서 봐 두었다가 어여 너희들이 이 일을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심산인데,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따라나선 길에 스스로 잘 논다는 것. 아마도 세 아이가 함께 있어서일 것이다. 저들끼리만도 친구처럼 놀 수 있으니까.

자주 듣는 이야기로, 아이가 셋이나 되니 얼마나 힘들겠냐고 한다. 하지만 세 아이가 모여서 늘 우당탕거리는 집구석에 살게 된 이후로, 우당탕의 힘겨움이야 뼈저린 것이 되었을지언정, 하루 종일을 아이 한 명과 단둘이 지내야 하는 엄마, 혹은 아빠의 괴로움은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되었다. 한 아이와 지내는 부모일수록 ‘친구 같은’의 압박에 더 시달리는 것 같다. 그래 보인다. 일단 아이가 둘이면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니까,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아이들도 쉽게 알아채지만, 아이가 혼자면 그것도 어렵다. 어쨌거나 세 아이와 함께 살면서,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으면, (내가 듣기로는) 아이가 바라는 것도 결국은 ‘친구 같은 아빠’보다야 그냥 친구이다. 아빠는 아빠고, 친구는 친구. 좀 더 다정하다거나,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눌 수 있다거나, 아이 생활에 관심이 많다거나 하는, 아이가 그런 아빠를 바랄 수는 있겠지만.

아이는 여러 식구와 이웃,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자라게끔 되어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자면 아빠가 친구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부모 말고 다른 관계들이 파탄나면서, 그리고 그야말로 아이와 사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당장에 그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맡던 역할들이 거의 부모한테로 넘겨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뾰족한 수가 없는 부모들은, (특히 육아를 전담하는 한쪽은) 그렇게 부여받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차서는, 수시로 내 잘못이라고 되뇌고, 아이한테는 미안하다는 소리를 한다.

주위에서 누군가 아이를 낳고, 필요한 물건이 뭐냐 하고 물으면, 우선 두 가지를 먼저 얘기해 준다. 하나는 아기를 오래 업어도 불편하지 않을 아기띠(이것은 포대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아무래도 이 물건을 만든 것은 아이를 업고도 다른 일을 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게 아닐까 싶다), 또 하나는 무릎의자(닐링체어).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잠든 아기를 업은 채로 책상머리에 앉아 꽤 오랜 시간 뭔가를 할 수 있다. 청소든 빨래든 집안 꼴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잠시라도 짬이 나면, 나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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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에 대한 청와대의 태도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 대체 왜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일까? 어차피 미국은 사드를 못 뺀다는 전제하에 벌이는 벼랑 끝 전술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판단은 미국과 한·미동맹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다. 하나씩 따져보자.

‘한반도는 미국에 이른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먼저 파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럴 리가.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가 결코 아니다. 미국에 전략적 요충지란 석유가 나오는 중동, 유럽을 향해 띄운 ‘항공모함’ 영국,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한 최대 거점인 일본 등이다. 과거에 그어졌던 ‘애치슨 라인’이 보여주었다시피 한반도는 그에 포함되지 않는다. 2002~2004년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한국통’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책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보자.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 전까지 한국은 미국에 전략적 중요성이 없었으며 아시아 본토에 미국의 병력이 존재할 경우 미국에 과도한 리스크만 안길 뿐이라는 것이 워싱턴 정가의 일치된 견해였다. (중략)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4만2000명에 이르는 미국 시민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이 때문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는 남한을 ‘잃어버려서’, 그런 희생을 헛된 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했다.”(50쪽) 미국에 한반도는 ‘중요하기 때문에 지키는’ 땅이 아니다. ‘지켰기 때문에 중요해진’ 곳에 가깝다. 한국 정부가 미국을 어떻게 대하건 미군이 남아 있으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한미군이 철수한다 해도 북한은 한국을 선제공격할 수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게 진짜 문제다.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을 폭격해도 미군이 직접 반격을 당할 위험이 거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 병력의 손실 없이 폭격이 가능할 경우 결코 폭탄을 아끼지 않는 나라다. 주한미군은 북한보다 오히려 미국의 군사 행동을 제약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안전핀이라는 뜻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북한의 반격은 주일미군을 향할까, 한국을 겨냥할까? 진보 진영 자주파들은 ‘북한의 주적은 미국이지 한국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북한은 미국이 아무 공격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연평도를 포격하고 천안함에 어뢰를 쏜 바 있다. 북한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그릇된 종교적 믿음을 안보의 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일 경우 발생하게 될 경제적 혼란을 미국이 원치 않으므로 북한 선제타격은 있을 수 없다?’ 과연 그럴까? 물론 미국은 혼란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사정이 다르다.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폭로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임기를 다 채워나간다고 가정해 보자. 형사 피의자 신세로 전락하기 싫다면 무조건 재선에 성공해야 한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쇼’를 벌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지난 4월13일, 별다른 전략적 실익 없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가(IS) 지하기지에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지닌 GBU-43/B를 투하했다. 핵무기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폭탄이다. 그리고 언론 앞에서 우쭐거렸다. 트럼프가 재선용 카드로 북핵 문제를 ‘날려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고? 불과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트럼프의 당선 자체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자주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과 세계에 대한 관념은 1970년대의 리영희가 1960년대 일본 좌파들의 그것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2017년 현재, 반세기 전의 세계관에 입각해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 정책이 짜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의 정직한 입장 표명과 대국민 토론이 필요하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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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5시30분. 서울역이나 삼성역, 또는 종합운동장역 근처에 가면 수십명 또는 100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젊은 남자들은 주말에 한 소개팅 이야기 또는 애인 이야기를 하고 40대가 넘어 뵈는 남자들은 애들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창원, 울산, 거제, 여수 등 산업도시 일터로 돌아가는 회사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이다. 1990년대 중후반엔 주로 40~50대 ‘기러기 아빠’들이 셔틀버스에 탑승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부터는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아빠들은 전세 등을 얻어 아내와 아이를 서울로 보냈다.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세주고 아빠는 사택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셔틀버스의 구성원은 훨씬 젊어졌다. 20~30대 남성들이 늘었다. 주말에는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소개팅을 하고, 주중에는 산업도시에서 근무하는 남자들이다.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한 주말부부는 남성 가장 한 명이 식구를 먹여살리는 ‘남성 생계부양자’ 시대의 산물이었다. 고소득과 장기근속의 힘이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2017년 젊은 부부에게 맞벌이는 시대정신에 가깝다. 높아지는 주거비 등 생활비,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혼자 벌어 먹이는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은 더 이상 재생산이 가능하지 않다고 그들은 판단한다. 떨어져 있더라도 둘 다 벌어야 한다. 

산업도시 지방정부에 셔틀버스는 예민한 문제다. 주말 셔틀버스야 막을 수 없지만, 근처 대도시로 매일 통근하는 버스 운용에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직원들이 스스로 버스를 임차해 이동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지방정부의 행태는 인구감소를 막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직원들의 관점에서는 그저 복지를 막는 몽니일 뿐이다. 재생산에 대한 낡은 관점이 문제다. ‘든든한 남편 직장’이 있으면 여전히 여성들이 ‘전업 주부’로 남편을 따라올 거라는 가정 말이다. 회사의 시니어들은 후배들에게 젊은 때는 부부가 같이 사는 게 좋지 않냐고 설득한다. 젊은 남성 직원들에게는 이 말은 수도권에 간신히 일자리를 잡아 일하는 아내의 ‘경력 단절’로 다가올 뿐이다. 아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도 어렵다. 어느 지역이든 원할 때마다 옮겨가면서 일할 수 없는 직군이라면 당연히 그렇다. 현실적으로 지방의 산업도시를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은 남초 집단인 중공업 현장에 여성 엔지니어를 충분히 채용하는 것이다. 2016년 산업기술인력 수급 실태조사의 결과를 보면 조선·석유화학·자동차·기계 등의 산업을 보유한 경남, 울산, 전남의 여성 인력 채용은 10%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미래’를 보여주는 20대 여성 고용 또한 모두 7% 이내에 그친다. 공대 신입생의 4분의 1가량이 여학생이고, 자연계는 절반이 넘었지만 기업의 시선은 ‘제조업은 남자’라는 편견으로 가득하다. ‘남성 공대생’의 안전한 전공 선택지로 간주되는 ‘전화기’(전기·전자, 화공, 기계)를 선택한 여학생들은 동기 남학생보다 더 높은 취업 경쟁 앞에 망연자실한다. 지방근무를 여성들이 기피한다고만 말할 수 없다. 지방근무를 ‘회사가 막고’ 있는 상황도 적지 않다.

도시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창조적 인재가 몰려야 기업과 도시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했다. 다양성 수용과 기술적 인프라가 그 핵심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통한 성평등, 산업도시의 재생산을 통한 균형발전, 산업의 진화를 통한 경쟁력 향상. 여성 엔지니어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채용하려는 산업도시의 제조기업이 출발점이다. 여성 엔지니어가 산업도시의 기둥이 되도록 도시 인프라와 돌봄환경을 정비하고 기업의 채용을 확장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일.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등 이미 지방 이전이 완료됐거나 이전이 진행 중인 공기업도 같은 궤에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국토의 균형발전과 산업진화뿐 아니라, 수많은 젊은 주말 엔지니어 커플의 생이별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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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면 서랍 속 여권을 종종 꺼내본다. 올여름 몽골을 방문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 머무는 이주 외국인들의 법률지원 활동을 주로 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올여름 그동안 이 단체에서 도움을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이주민들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오래간만의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들을 그들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은 팍팍한 일상의 작은 활력소가 된다.

빳빳한 여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첫 장 중앙에 커다랗게 찍힌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국적란의 ‘REPUBLIC OF KOREA’라는 영문자도 낯설지 않았다. 두 단어는 낯설어 보이는 증명사진 속 나의 모습보다 더 익숙했다. 여권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출신지뿐만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작지만 강력한 기호이다.

그러나 세상엔 이 작은 여권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만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와 관련 없는,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 그곳에 지금은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선’ 국적자로 분류된 동포들이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나라,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기 전 하나인 한반도를 영토로 삼았던 나라의 국민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집하는 사람들, 바로 ‘자이니치’로 불리는 재일(在日)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이나 징병이 되거나, 또는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과 그 후손들 가운데 해방 이후 일본국적으로 귀화하지 않은 동포들을 말한다.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일본 내 조선인들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분류됐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외국인으로 분류하면서 편의상 ‘조선적’(조선국적자)으로 표시하여 등록했다. 이것이 재일조선인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한반도에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분단된 두 개의 나라가 생겨났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남한이나 북한 국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들은 남한과 북한 중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여전히 조선적을 고집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남북의 한쪽 국민이라는 ‘국적’이 이들에겐 하나의 민족을 두 개로 단절시킨 ‘분단 국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전히 하나로 통일된 나라를 꿈꾸고 있다. 2015년 12월 기준으로 조선적 재일동포는 약 3만4000명에 이른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에 살면서 수많은 차별과 적대를 경험한다. 우리나라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재외동포가 아닌 무국적자로 분류하고, 외국인보다 엄격한 입국심사를 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임시여권인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여행증명서 발급률이 급감했다. 주일 한국영사관은 한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재일조선인들에게 한국국적 선택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재일조선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여행증명서 발급이 거절되었다. 통일된 조국을 소망하며 차별과 적대를 인내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우리 정부는 인내와 포용이 아닌 선별적 포섭과 배제로 답했다.

우리 헌법은 통일의 지향을 선언하고, 대통령에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차별과 배제의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삶으로 통일된 조국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재일조선인의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하는 것이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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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열하루가 지났다. 혹여 놓치는 뉴스가 없는가 짬짬이 챙겨 보고 있으면, 날마다 선물처럼 소식들이 쌓인다. 경남하고도 시골 마을인 이곳에서, 다른 대선후보를 찍었음에 틀림없었을 사람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세상 바뀌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 열하루가 지난 사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한결 가뿐해졌다. 풀 베는 낫은 더 잘 드는 것 같고, 집 고치느라 뚝딱거리는 나무는 아귀가 잘 맞아떨어진다. 저녁 밥상에 앉은 식구들이 더 웃게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믿게 되었다.

일본의 이름난 대목장으로 니시오카 쓰네카즈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로 치면 경복궁이나 종묘 같은 건물을 짓거나 새로 고치는 일의 우두머리 목수. 그는 작은 몸놀림 하나, 말 한마디, 허투루 뱉는 법이 없었고, 원칙을 지키는 데에는 물러서는 법이 없어서 ‘자를 든 사제’라고 불렸다.

평생을 그렇게 살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고, 돌보았다. 10년 전, 시골 살림을 시작하고, 아이를 낳고 모든 것이 어설프고 우왕좌왕일 때 밤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지난 열흘 동안 니시오카 쓰네카즈가 말한 일을 한다는 것,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 정치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백 점을 맞으면 훌륭하다고 박수를 치는 학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일은. 백 점을 맞아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는 대대로 대목장에게 내려오는 구전을 몇 가지 사람들에게 소개했는데, 그 가운데 스스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으로 “백 가지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기량이 없는 자는 조심스럽게 대목장 자리에서 떠나라”라는 말을 꼽았다.

대목장의 자리는 목수가 맡게 되는데, 건물을 지으려면 목수도 여럿이 있어야 하지만, 기와장이, 미장이, 석수장이, 칠장이 같은 여러 사람이 모여야 일이 된다. 건물을 지을 때마다 늘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해야 하고, 저마다 자기 성깔이 뚜렷한 사람들인데도, 그 사람들의 성깔을 잘 살려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런 사람들을 이끌고 건물을 짓는 일이 잘되지 않으면 그것이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것을 늘 가슴에 두고 일했다고 한다. 새 정부의 사람들이 하나씩 이름 불릴 때마다, 저마다 성깔을 살려, 일이 되게끔 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환히 드러난다.

또한 니시오카 쓰네카즈는 대목장으로서 완벽에 가까운 솜씨와 여러 일꾼들의 우두머리로 일을 제대로 완성해 나갔던 삶의 모습과는 다르게, 식구들에게는 그리 좋은 가장이 아니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날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만큼은 함께 곁에 누워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일에도 사람에게도 온 마음을 쏟았다. 5월18일에 태어난 광주의 한 사람을 껴안는 대통령의 모습도 그랬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로하고 돌보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일들이 꾸려지고, 정책이 마련되고,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의 지난 열하루(마치 백 일, 혹은 열 달과도 같았던)를 돌아본다. 하나씩 되짚는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지난 정부들도 그러했으니까. 니시오카 쓰네카즈가 말했다.

“우리는 편백나무를 써서 탑을 지을 때 적어도 삼백 년 후의 모습을 생각해 가며 짓습니다. 삼백 년 뒤에는 설계도 같은 모습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까래와 들보를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정성껏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온 정성을 다해 한다, 이것뿐입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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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을 바란다. 동시에 그가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를 기원한다. 위 두 문장은 모순이 아니다. 향후 5년의 성패는 그가 얼마나 국민, 특히 자신의 지지층을 효과적으로 실망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은 국민들의 절망을 딛고 큰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진실을 전하고 이해를 구하는 대신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바로 그 지점부터 문제적이다.

문재인은 자신의 공약을 전부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주변인들 역시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대다수의 심기를 거슬러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난 4월28일, 문재인 캠프 선대위 윤호중 공동정책본부장은 “어떤 국민도 자신이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공약 실현을 위한 세율 인상의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문재인과 그의 대선 캠프는 선거 과정에서부터 국민들의 ‘기분’을 고려하여 복지 공약에 수반하는 증세 논의를 회피해왔다. 사드 배치를 철회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외교안보적 비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안으로는 경기침체, 밖으로는 북핵 위기와 싸워야 하는 지금, ‘불편한 진실’을 입에 담지 않으려던 대통령 후보와 캠프가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대통령은 권력자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며,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서 또 괴롭힐” 것이므로 ‘진보 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유시민 작가는 그 우려를 배가한다. 얀 베르너 뮐러의 책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펼쳐보자. 유시민의 발언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집권한 포퓰리스트는 집권 기간의 실패를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기존 엘리트가 뒤에서 훼방을 놓은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결국 “일종의 종말론적 대립 상태를 꾸며내 국민을 계속 분열하고 동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문재인이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아니다. 문재인이 내세운 온갖 ‘사이다’ 공약들은 현실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수많은 이해당사자의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어우러지는 민주주의의 본성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대통령이 그와 같은 현실적 한계를 수긍하고 국민들에게 설명하여 합의점을 찾는 대신, ‘수구 기득권’ 같은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모든 비난을 떠넘긴다면, 비로소 그때 문재인은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란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지닌 집단과 개인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 공존하는 과정이다. 어떤 정책이 구현된다면 누군가는 절대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반대자의 입을 억지로 다물게 하는 대신, 그들의 불만을 끌어안고 함께 가야만 한다.

만약 문재인이 합리적 목표 설정과 달성을 위해 국민을 실망시키고 그로 인해 비판받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용 지식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럴듯한 이상만을 내세운 채 소위 ‘기득권’의 피해자 행세를 한다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그 권력 행사의 방법과 목적을 국민에게 납득시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은 성공하기 위해 국민을 실망시켜야 한다. 자신들의 세상이 펼쳐진 양 의기양양한 지지자들을 진정시키고, 현실 속에서 가능한 일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국민을 설득해나가야 한다. 그와 같이 성숙한 민주적 정치 행보를 보일 때, 더불어민주당 정권은 참여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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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대기업 근무할 때, 주중 저녁 8시쯤이면 부모님과 통화할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곤 했다. “얼른 쉬어라. 피곤하겠다.” 퇴근해 저녁 먹고 운동 마치고 나면 보통 그 시간이었다. 잠들기 아쉬운 시간이었다. 책을 읽거나 자격증 또는 영어 공부를 했다. 12시쯤에 자야 보람차게 보낸 느낌이었다. 주말이 되면 카페나 도서관을 가거나, 다양한 분야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는 자리에 갔다.

주5일제가 2005년 즈음 공공기관부터 시작돼 대기업까지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대기업 중 많은 경우도 주말근무와 야근이 당연했지만 어쨌거나 “토요일은 쉬는 날”이라는 생각이 금방 자리잡혔다. 많은 사람들은 ‘저녁이 있는 삶’과 ‘주말이 있는 삶’을 강조했고, 쉬지 못하는 박탈감은 공분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휴일’과 ‘휴식’의 의미는 점차 변화하고 있고 전통적인 휴식에 대한 감각은 해체되는 중이다. 베이비부머와 60년대생들에게까지 휴식은 취미 활동을 하거나 TV를 보거나, 가족·연인·친구들과 어딘가를 ‘놀러가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멍 때리면서” 쉰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늘어가고 있다. 구직자에게 휴일은 그저 달력에 달려 있는 날 중 하나다. 정년이 없어졌다는 것을 구직과정부터 간파하고 있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 휴일은 ‘뭔가를 배워야 하는’ 시간이 됐다.

단순히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라고만 봐야 할까? 짧게는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배움의 양상이 ‘재생산’의 측면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복적으로 단순노동을 하던 시기에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체력의 비축이었다. 하지만 산업이 고도화되고 사회의 문맥이 복잡해지고 수리통계적인 기술이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요구되는 상황에서 재생산에는 ‘배움’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자기충전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중등교육 수준의 ‘기술교육’을 강조하고 앞으로 ‘덜 배워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사회를 언급하는 정치인들에 대해서 불신의 눈초리를 갖게 된다. 솔직하지 못하다. ‘장인’이 될 정도로 기술을 단련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장인’은 이제 작업장을 넘어 분야 전체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4차산업혁명’을 앞세워 창의성을 강조하는 흐름에도 경계심이 든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물리학의 법칙을 세우게 한 ‘창의성’은 치밀한 이론적 고찰과 공부의 누적이 만들어낸 직관에 가깝다. 재미있는 것만 하라는 게 아니라, 재미있는 것을 단단하게 써먹을 수 있게 단련할 수 있게끔 해 줄 준비가 교육의 목표여야 한다.

끊임없이 개인들이 ‘함께 배우는’ 환경을 통해 집단지성을 구축할 수 있는 플랫폼과 문화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배움의 공동체’를 어떻게 일터와 삶터 모두에 구축할지도 질문이 된다. 공공도서관과 다양한 평생교육 콘텐츠를 제대로 자리잡게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청년들이 고시와 공무원 시험으로 몰리는 ‘골방’의 비용을 풀어내는 것도 숙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일만 잘해 평생 정년까지 먹고살 수 있는 세계는 자본주의 황금기의 일시적 현상이었다. 선진국일수록 대규모로 안정적으로 정규직을 수십년간 고용하기는 어려워졌다. 공공부문의 신규 고용도 중요하지만, 뭇사람이 다양한 직업을 오가는 사이 연애, 결혼, 가족부양 등 안정적인 생활을 영유하며 배울 수 있는 게 소득을 보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 됐다. 탈진해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 재충전을 위한 기본소득을 주는 것도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급격히 변해버린 일과 배움의 문제에 대한 비전을 세우는 일. 이제 정치의 몫이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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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나는 올해 초까지 10년 남짓 일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다. 명목상 쉬는 날은 있었지만 실제로 쉬는 날은 아니었다. 출입처에 작은 일만 생겨도 먹던 밥을 내려놓고 달려가 기사를 썼다. 문화부에 있던 지난해에는 기무라 다쿠야가 속한 아이돌그룹 ‘스마프’의 해체 소식에 부리나케 소속사 사무실로 뛰기도 했다.

게다가 주로 서울에서 일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신문사에는 전근이 많다. 나도 입사한 뒤로 나라, 도야마, 오사카, 도쿄를 돌며 일했다. 회사 선후배들을 보면 배우자가 전업주부가 아닌 이상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오사카에서 결혼한 직후 도쿄로 발령 나면서, 오사카 지방 공무원인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지난 1월 신문사를 그만두고 곧바로 서울로 한국영화 유학을 왔지만, 도쿄에서 일할 때보다 지금 더 자주 오사카 집에 간다. 신칸센으로 도쿄-오사카를 다니는 것과 비행기를 타고 서울-오사카를 오가는 것이 교통비나 시간에서 차이가 없다. 오히려 지금은 일 때문에 느닷없이 호출되는 일이 없어 남편과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남편이 대단하다”는 뜬금없는 얘기를 한다. 어떤 남성들은 “나 같으면 (아내의 유학을) 허락하지 않겠다”고도 한다. 10년 남짓 뼈빠지게 일해 마련한 돈으로 온 유학이고, 내 미래에 대한 투자다. 일본에서 잘 살고 있는 다 큰 어른이 대단할 것도 없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내 유학을 허락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어린애들을 외국으로 보내고는 홀로 떨어져 사는 한국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런 남편들을 가리키는 ‘기러기 아빠’라는 말까지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싱글라이더>를 보면서다. 영화는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된 주인공과 그 가족의 해체에 관한 이야기다.

‘기러기 아빠’라는 말은 일본어에 없다. 단어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애들을 외국에 보내는 일 자체가 없다. 일본인에게 외국에서 유학하는 것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고 더러 고등학생이 있다 해도 엄마가 따라가지 않는다.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사회에서, 서른이 넘은 나와 남편을 대단하다고 말할 일은 아니다. 교육 아니 출세에 대한 한국인의 욕심은 나 같은 외국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초등학생들이 학원을 전전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에 들어간다는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쏟아붓는 교육비가 한국과 일본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2배에 가깝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참 놀고 싶은 나이에 학원에만 다니는 아이도, 아이를 위해 밤새도록 돈을 버는 부모들도 내 눈에는 정상이 아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사람을 ‘회사 인간’이라고 하고, 일본 사회를 ‘과로사회’라고 부르지만 다 옛날 얘기다. 일본은 변하고 있다. 신문사 입사 설명회를 찾아오는 대학생들도 “결혼은 할 수 있냐”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냐”고 먼저 묻는다. 나는 “결혼은 해도 같이 살기 힘들 수 있다” “육아는 남편이나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다”고 솔직히 답했다. 사양산업으로 지목받는 신문사가 변하지도 않으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할 수 없다. 발행부수 1000만부 안팎으로 세계 1~5위를 석권하던 일본 신문사들도 하락세는 부인할 수 없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신문사들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요즘 입사하는 후배기자들은 사생활을 지켜가면서 일한다.

<싱글라이더>의 주연배우 이병헌이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으니 조만간 이 영화도 일본극장에 걸릴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한국에는 ‘기러기 아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일본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것이다.

나리카와 아야 동국대 대학원생 전 아사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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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보 위에 딱새가 둥지를 틀었다. 지난해와 같은 자리를 찾는다. 봄날이 금세 더워졌다. 처마 아래 새가 둥지를 트는 것도, 마당에 도마뱀이 돌아다니는 것도, 뒤안 감나무 잎 쪼삣(뾰족)하던 것이 피는 것도 후다닥이다. 집은 금세 들이닥칠 여름맞이가 한창이다.

날이 하루하루 더워지는 사이에, 구들장을 새로 놓았다. 이사왔을 때에 놓은 구들을 들어낸 것이니까, 십 년 만. 처음 시골 살림을 시작할 때는 불 때는 구들방에 대한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 있어서 집을 고칠 때 구들부터 새로 놓았다. 1960년대에 지어진 작은 세 칸 집인데, 구들장 위에 보일러가 깔려 있었다. 그래 방 두 칸 가운데 한 칸은 보일러를 뜯고, 구들을 다시 놓아서 잠자는 방으로 쓰자 했던 것. 그러나 그때에는 구들을 새로 놓는 것하고, 보일러 새로 바꾸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를 잘 몰랐다. 보일러 스위치만 누르고 살았으니, 구들방이라는 것도 나무막대기 몇 개 아궁이에 집어넣으면 될 줄 알았다. 그 장작을 해마다 어찌 마련해다가, 집 안에 들여 젖지 않게 재어서는, 저녁마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잘 피우지도 못하는 불을 붙인다고 매캐한 연기를 맡아가며, 온 집에 그을음을 묻히고 검댕을 날리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끼니로 치자면 밥 사 먹을 식당도 없고, 즉석식품 같은 것도 없이, 오로지 밥때마다 쌀을 씻어 안치고 푸성귀를 조물거려야,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처음에는 얼마쯤 구들방에 불을 넣다가, 슬그머니 보일러 방으로 옮기는 날이 많아졌다. 구들방이라는 게 한번 식은 것을 다시 데우려면 몇 배는 더 애를 써야 하니 점점 악순환. 구들방은 냉골일 때가 더 많아졌는데, 그랬던 것을 집을 새로 고치면서 아예 잠자는 방 두 개 모두에 구들을 놓기로 했다. 불 좀 때고 살았다는 주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아니, 나무꾼도 아니고 그것을 이제 와서 왜?”라거나, “나무할 산은 있나?”라거나 했다. 아마도 나 또한 누군가 구들방을 놓겠다고 하면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여하튼 결심이 서고 일을 벌여서, 있는 구들장을 들어냈는데, 두 평 될까 한 작은 방에 구들돌이며 그 위에 깔아 놓은 흙이 하염없이 두꺼웠다. 구들장을 놓은 옆마을 목수 아저씨가 젊은 사람이 이사왔다고 아주 공을 들여서 일을 해 놓았던 것. 아침 저녁으로 아궁이에서 밥을 하고 소죽을 끓이고 그러는 삶이라면, 늘 불이 있어서 한번 데운 방바닥이 식지 않고 따뜻했을 테고, 저녁에 불 넣는 것도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처럼 불이라고는 잠자리나 데우는 군불만 넣는 집에서는 나무만 많이 잡아먹는 구들이 되어버린 꼴이었다. 사는 꼴에 맞지 않는 집 꼴.

도시 사람들이 시골 내려와서 처음에 힘들어 하는 것 하나가, 마을 사람들이 집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제는 나도 그렇게 되었다. 마음 쓰이는 사람이 있으면 집은 어떤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마을에서는 지나다니기만 해도, 그 집 꼴이 보인다. 먹고 자고 놀고 일하는 것이 다 한 자리니까, 집을 보면 무슨 농사를 짓는지,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성품이 어떤지, 그런 것이 고스란하다. 아파트하고는 다르다. 사람이 궁금하니 자연스레 집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우리 집도 새로 구들을 놓는 것에 견주면 단열을 좋게 하려는 것은 영 건성이다. 다섯 식구 모두 여름에는 마루가 시원하고, 겨울에는 방바닥이 뜨끈한 집에 길이 들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시골에 왔을 때, 누군가 “십 년은 되어야 살림이 정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십 년이 되어 가니까 들었던 말을 주워섬겨서는 새로 이사온 사람한테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뭣 좀 안다는 투로 한마디씩 흘리듯 하는 것이다. 구들을 새로 놓고, 집을 손봤지만 처음 지은 집 모양새를 바꾸는 일은 줄이려고 애썼다. 장맛비 같은 봄비가 쏟아진 저녁에 처음으로 구들에 나무를 넣었다. 불이 잘 든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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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한 이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국가정보원의 레이더 무기부터,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나라의 잠수함까지, 수많은 ‘아니면 말고’가 밑도 끝도 없이 던져졌다. 선박 및 교통안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검증하느라 귀중한 논의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난 후 속된 말로 가장 ‘멘붕’에 빠진 쪽도 다름 아닌 일부 진보 세력이었다. 그들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잠수함과의 충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굉장한 음모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부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듯이 분위기를 조성하던 사람들. 세월호가 떠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계속 음모론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닻을 던져서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던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월호 인양 후에도 ‘고의침몰설’을 고수하더니, 지난 14일에는 18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더 플랜>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더 플랜>에서 인터뷰한 UC 버클리대 통계학과 교수 필립 스타크의 말을 통해 <더 플랜>의 기본적 오류를 반박해보자. “옵티컬(광학)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이 기록지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록지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전자투표는 오류를 확인하거나 수정이나 복원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한국의 선거는 정확히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투표가 아니다. 투표지분류기는 이름 그대로 투표지를 ‘분류’만 해줄 뿐이고, 실제 개표는 사람이 한다. 애초부터 한국의 선거는 수개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수개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계를 동원해 표를 ‘분류’할 뿐이다. 미분류표에 박근혜 표가 많았건 문재인 표가 많았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최종적으로 사람이 손으로 넘겨보고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표소에는 각 후보 및 정당에서 추천한 참관인들이 있다. 18대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도록 부정개표가 이루어졌다면 민주통합당에서 추천한 참관인 중에 매수 혹은 협박당한 사람, 혹은 그런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어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이 시점에서 음모론을 하나 던져보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18대 대선 개표부정설을 퍼뜨린다니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패배할 경우 불복 운동을 벌이려는 냄새가 나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동쪽에는 트럼프, 서쪽에는 시진핑, 북쪽에는 김정은이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음모론 따위에 낭비할 여력은 없다. 진보의 고질병인 음모론, 적폐세력인 음모론자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자.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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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모두에게 소중하다. 몸이 유일한 재산인 노동자들에게 집은 특히 소중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므로 소모된 노동력은 오로지 충분한 휴식을 통해 재충전할 수밖에 없다. 만약 제대로 된 휴식이 불가능한 숙소에서 머물게 하면서 계속 일을 시킨다면 이는 사실상 강제노동이다.

1970년대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청년 전태일도 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맨 먼저 요구한 것이 일터 다락방에 마련된 노동자 숙소를 폐지하고 정식 기숙사를 설치하라는 것이었다. 일터 다락방에 얼기설기 만든 숙소는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농업 이주노동자 중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에 살고 있다고 응답한 노동자가 85%를 넘었다.

비닐하우스는 농작물을 재배하는 시설이지 사람을 위한 주거시설이 아니다. 추위와 더위를 제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이나 욕실 등 기본적인 설비도 열악하다. 직원은 30명이 넘는데 화장실이 1개뿐이거나, 한겨울에도 찬물만 나오는 야외 수도꼭지가 욕실이 된다. 좁은 컨테이너에 10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몰아넣거나, 내부에 얇은 합판으로 공간을 쪼개 남녀의 공동숙소로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인권과 노동권의 심각한 침해다.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어서 이주한 노동자들은 일터 이외에 다른 생활터전이 없고, 지출을 최대한 줄여 돈을 모아야 하므로 열악한 주거환경을 견뎌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한 사용자의 숙소제공을 의무화하고, 안정적인 휴식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숙소의 면적, 안전, 위생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 미국의 경우, 최소한 1인당 9.29㎡ 이상의 수면 공간, 21.1도 이상을 유지할 수 있는 난방시설, 목욕과 세탁을 위한 온수 설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전에 숙소를 점검해서 기준에 미달하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도록 했다.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을’의 지위에 있으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없는 일자리가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오히려 정반대로 가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얼마 전 발표한 ‘외국인 근로자 숙식정보 제공 및 비용징수 관련 업무지침’에 따르면, 사용자가 비닐하우스와 같은 임시시설을 노동자의 숙소로 제공하더라도 월 급여의 최대 13%까지 숙식비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간단한 동의서만 받으면 숙식비를 월급에서 미리 떼고 지급할 수도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이는 현실을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숙소 사용료를 사용자가 월급에서 먼저 떼어가도록 한 것이다.

이번 지침은 근로기준법에서 선언한 임금의 전액지급 원칙에 위배된다. 무엇보다 앞으로 비닐하우스와 같은 열악한 주거 시설을 계속 늘어나게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노동권을 보장해야 하는 고용노동부가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휴식과 노동력의 재충전에는 관심이 없고, 사용자들이 보다 쉽게 숙소 사용료를 챙기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금이라도 고용노동부는 관련 지침을 개정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기숙사의 기준을 마련하고, 잘 지켜질 수 있도록 점검하는 것이 고용노동부가 해야 할 일이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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