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9년 만에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총수가 구속되었다고, ‘삼성 불구속 신화’가 깨졌다고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삼성그룹의 회장은 한 차례 권력에 의해 붙잡힌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 있다. 1961년 5월28일,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지적하고 체포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고 한 박자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갈 줄 알았던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몸담았던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메트로호텔이라는 곳에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어떤 ‘신화’가 이어진다. 박정희는 자신이 경제를 잘 모르므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병철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인들을 석방해달라고 직언한 후, 일본의 일본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를 모델로 삼아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된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설하였으며 국가중심의 경제개발 전략 수립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전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구속된 이후 이틀 연속 소환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적잖은 이들이 박정희 신화, 혹은 한국의 재벌 신화를 윤색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일종의 평화로운 회의처럼, 혹은 이병철의 ‘돌직구’가 한국 경제 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사업 설명회인 양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병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계엄 상황이고, 상대는 바로 그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형무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만났다 해도 실질적으로 구금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박정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박정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만 할 상황이다. 박정희를 오래도록 보좌해온 누군가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후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병철은 모종의 방법으로 귀국하라는 설득을 받았고, 돌아오자마자 서울 모처에 감금됐다. 그러나 재능 있는 사업가이자 설득력 있는 화술의 소유자였던 이병철은 박정희 장군과의 협상 끝에, 그가 지닌 대부분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기업가들이 박정희가 제시하는 경제개발 전략에 따르도록 설득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병철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기업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36쪽)

대한민국의 기업과 정부의 관계란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다. 정권을 손에 쥔 자는 기업의 목에 칼자루를 들이댈 힘을 갖는다. 기업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 대신 정부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주요 사업에 참여할 권리와 더불어 해당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시중 금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출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대출받은 돈 중 일부는 다시 정치인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재용 측에서 최순실 딸 정유라의 말 구입 및 승마 비용을 지불해놓고도 그것이 뇌물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협박을 받아 내놓은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강제로’ 돈을 내놓으면 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하에 행동했을 따름이다. 1961년 이병철이 불법적으로 ‘구속’될 때부터 2017년 이재용이 합법적으로 구속될 때까지 이어져온 게임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삼성 불구속 신화’는 없다. 깨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다. 다만 재벌과 정권의 결탁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제는 가짜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할 때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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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퇴직하고 영국여행을 다녀왔다. 오래된 산업도시의 ‘현재’가 궁금했다.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도시에서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영국의 ‘상업 자본주의’가 어떻게 ‘산업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진화했는지 궁금했다. 그 지역에서는 이제 ‘산업’은 찾을 수 없었다. 한때 조선산업을 제패했던 글래스고의 ‘드라이 도크’에선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텅 빈 지 이미 수십년이라 했다. 맨체스터의 방직공업부터 중공업 부지에는 박물관과 미디어 단지가 들어섰다. 리버풀은 비틀스 관광상품으로 도배된 도시였다. 뉴캐슬 타인강에서는 ‘조선소’가 있었다는 푯말 하나를 찾았다. 영광을 누렸다던 산업도시들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등장했던 노인 연금생활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도시들은 반세기 동안 각각 100만 인구에서 절반이 줄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유별난 축구사랑 뒤에는 별 희망이 없는 북부 잉글랜드의 우울함이 있었다.

산업도시들은 재탄생하는 중이라 했다. 맨체스터는 엔지니어링과 첨단 산업을 육성하는 대학도시로, 리버풀은 문화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런던의 금융업은 뉴욕에 패권을 넘겼지만, 정보·기술(IT) 산업이 유럽의 중심이 되고 있다 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한국의 남동임해공업지역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40년 전 수출보국을 목표로 세운 포항, 울산, 창원, 거제, 여수의 거대한 산업벨트. 조선, 철강, 자동차 산업으로 먹고살았던 도시들은 지속가능할까? 세계 10위 안에 들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STX 고성조선소가 문을 닫거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수요급감 때문이다. ‘희망버스’만으로 고용을 살리기엔 구조적 변화가 크다. 자동차도 기계장치 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은 원가, 생산, 고용은 몰라도 수요는 관리할 수 없다. 대규모 고용으로 부를 창출했던 산업도시의 미래는 밝지 않다.

영국은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제조업을 버렸다. 대처부터 블레어까지 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경쟁력이 떨어진 굴뚝산업 대신 세련된 금융업과 지식산업의 나라를 만들려 했다. 산업구조조정으로 인해 장인으로 불렸던 노동자들은 불안정노동으로 내몰리거나 연금생활자가 됐다. 연대와 우애로 뭉친 노동계급의 건강한 모습은 철 지난 유행가처럼 잊혀졌다. 노동자들의 다음 세대는 일할 의욕 없이 행패만 부리는 ‘차브’(양아치) 취급이나 받는다. 그래도 영국은 문화의 힘과 역사를 통해 쌓은 대학의 역량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다. 노동계급의 역사는 각 도시의 민중사박물관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계급의 분노는 막을 수 없었다. 브렉시트는 그 결과에 가깝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본다. 한국은 당장 제조업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남동임해공업지역의 산업 종사자만 수백만명이다. 그럼 제조업을 그대로 둘 수 있나? 그것도 아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거나 원가를 줄여야 한다. 생산직 숙련도를 최고로 올려 최고급 기술로 먹고살든지, 제품개발과 엔지니어링만 남기고 생산을 인건비가 싼 나라로 외주화시켜야 한다. 이주노동자를 많이 고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기술고도화를 통해 공장 내부의 노동력 구성을 바꿀 수도 있다. 원래 GM의 공장이었던 테슬라 공장은 다시 문을 열 때, 비슷한 인원을 고용했다. 생산직은 줄었지만 고학력 설계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늘었다.

고민이 깊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착실히 생산현장을 지키며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해온 기존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존엄은 지켜질 수 있을까? 인력을 외주화하거나 해고를 해야 하는 것은 기업의 사정이라 하더라도, 지자체와 국가는 당장 준비하고 대비할 게 얼마나 많은가. 뜨거운 정치의 계절, 대선 후보들의 경제와 산업 공약에서는 이런 위기의식이 반영되고는 있을까?

양승훈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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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법학교수와 변호사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16일 동안 법원 앞에 천막을 쳤다. 278명의 법률가들이 마음을 모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두 사건이 떠오른다. 지난 1월 특검이 신청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청구가 법원에서 기각된 것과 얼마 전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이 청와대의 물리적 거부로 불발된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은 법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음을, 청와대 압수수색 불발은 법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특검이 신청한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조의연 판사는 뇌물죄에 대한 특검의 수사가 충분하지 못했고, 구체적 사실관계와 법률적 평가를 둘러싸고 다툼의 여지가 있는 점을 영장기각사유로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의 강요에 의해 최순실 등에게 회사 자금을 지원하였다면 삼성으로선 억울하게 빼앗긴 돈이지, 대가를 바라고 준 뇌물이 아닐 수 있다는 논리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대기업이 억지로 돈을 빼앗겼다는 것도 믿기 어렵거니와, 강요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7조원이 넘는 이 부회장 개인 재산을 두고 회사 자금으로 지원한 것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조직적인 증거인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이 은폐될 위험이 매우 높은 집단범죄의 경우, 의사 결정권을 가진 최고책임자를 조직과 분리할 필요가 있는데도 이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을 공정하게 해석해야 할 법원의 혜량(惠諒)이 유독 기업 총수 같이 힘 있는 사람들에게만 관대하다는 점은 큰 문제다. 수백억 회사자금을 횡령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총수도 ‘기업을 경영해 국가경제에 기여한 사정’을 유리한 양형사유로 인정하지만, 수년간 성실하게 일한 버스노동자가 착오로 2400원을 회사에 적게 입금한 것을 두고 ‘기본적인 신뢰를 저버리는 중대한 위반 사유’라며 해고가 적법하다고 판결한다. 평등과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원이 약자에게 가혹하게 군림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 잘못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법률가들이 농성에 나선 첫 번째 이유다.

지난주 특검은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러나 청와대 직원들이 물리적으로 막아서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직책과 권한이 없는 민간인 최순실, 주사아줌마 등은 보안손님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던 청와대에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가진 특검 수사관은 들어가지 못했다.

압수수색 장소는 청와대 경호실, 의무실, 민정수석비서관실 등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 세월호 7시간, 블랙리스트 등 지금까지 밝혀진 국정농단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시설에 대한 압수수색 제한 규정과 압수수색을 받은 전례가 없다며 막아서는 청와대의 억지에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사실 전례가 없기로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 견줄 것이 없다. 수천만의 주권자가 촛불을 들고 매주 광장에 모여 박근혜 퇴진과 국정농단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이를 위해 특검이 활동을 시작했다. 즉, 특검이 발부받은 압수수색 영장은 진실을 밝히라는 수천만 주권자의 요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궁색한 법 규정을 형식적인 방패막이로 엄중한 주권자의 명령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법을 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방해하기 위해 악용하는 권력자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농성에 나선 또 다른 이유다.

법은 결국 최소한이다. 그동안 법은 공평하지 못했고, 정의와 민주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던 적이 많았다. 지금이라도 주권자의 이름으로 그동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추운 겨울 강단과 법정 대신 법원 앞 노숙농성을 택한 법률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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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는 순조로웠다. 상제들은 마음을 다치지 않았다. 허투루 쓰이는 돈이 적었고, 마음에 없이 예를 차리지도 않았다. 길고도 짧았던 이틀밤 동안 큰소리도 한번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가신 것도, 그리고 그 다음 일도 모든 것이 급작스러웠던 까닭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순조로웠다’라고 적어 둘 수 있을 것이다.

장례 문화를 바꾸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연명치료에 대한 뜻을 미리 밝혀 놓듯이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절차를 미리 적어 두거나, ‘조문보’, ‘엔딩 노트’ 같은 것을 만들거나, 무엇보다 ‘작은 장례’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에 드는 시간과 돈을 줄이려고 하는 것들이다. 서울 서대문구는 지자체가 나서고 있고, 몇몇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가운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 이곳에 장례를 맡겼다.

병원에 딸린 장례식장, 그곳에서 이어지는 장례 절차는 2박3일 동안 거침이 없다. 전국 어디를 가나 별로 다르지 않다. 장례식장 안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흔히 상제들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은 그 모든 절차마다 장사치들의 뻔한 수작질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을 앞에 두고, 그 마음을 휘젓고 긁어서 돈을 뽑아낸다. 앞서 다행이라고 한 것은 장례를 맡긴 조합이 그런 수작질만큼은 하지 않으려는 곳이어서였다. 조합에서 나온 장의사(장례지도사)의 말투는 차분했고, 공손했다. “수의는 평소에 아끼던 옷이 있으시면 그것으로 하셔도 좋습니다.”, “여기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비용에서 저희 조합으로 나중에 리베이트가 오는데요, 그런 것은 모두 돌려 드립니다.” 무엇도 권하는 투로 말하는 것이 없었고, 하나하나 내가 처음 듣고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고 꼼꼼하게 설명을 했다. 납골당에서 장의사는 관리인에게 리베이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아예 할인해서 계산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30만원이 줄어들었는데, 며칠 지나서 장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쪽에서 제 말을 잘못 알아들었나 봐요. 30%라고 했는데, 30만원만 깎고 나머지는 여기로 보냈더라구요. 이 돈은 오늘 보내 드릴게요.”

발인날 새벽, 장의사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왔다. 긴 밤을 보낸 상제들과 친척들이 탁자 사이에 몸을 누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장의사는 제단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한 송이씩 꽃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철끈으로 꽃송이 몇 개씩을 묶어서는 어버이날 가슴에 달 만한 크기로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큰 것도 몇 개 만들고, 아주 큰 것도 하나. 그새 잠에서 깬 우리집 아이들은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는 저들도 하나씩 꽃다발을 묶었다. “납골당에 가셔서 상제분들이 하나씩 놓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꽃이 싱싱하고 좋네요.”

그날의 일을 되짚어 글로 쓰는 동안 절로 고마운 마음이 되살아난다. 거의 모든 일을 장의사에게 맡겨 두었고, 특별히 장례 절차를 치르는 일로 마음고생, 돈고생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장례를 치르는 다른 숱한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사기와 기만을 당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지난해에 마을에서 상을 치르면서 두 번쯤 무덤에 뗏장을 입히는 데에 손을 보탰다. 일을 마치고 어른들과 밥을 먹는 사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둘 오고 갔다. 젊어서 결혼하고 아이들 낳아 살았던 이야기,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 여기서 한마디 하면, 옆에서 한 자락 받아서 덧붙이는 식으로. 흙으로 덮일 만큼 떼를 눌러 주어야 떼가 잘 퍼진다면서, 이제 그만해도 될 성싶은데도 무덤가에 오랫동안 둘러서서는 이야기도 그만치 흘러나왔다. 죽은 이 곁에 산 사람이 둘러앉아 서로 그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장례의 마지막이라는 듯, 이야기가 얼마큼 차올라서야 사람들이 일어섰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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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미(未), 죽을 사(死).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을 담아 은퇴 후 고령층을 국가에서 ‘미사자(未死者)’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는 ‘미사자 과잉 사회, 잉여 인구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식의 여론몰이를 일삼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행정자치부에서는 ‘대한민국 미사자 지도’를 지자체별로 순위를 붙여서 공개한다. 인터넷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늙은이들 잡으러 가자’, ‘우리 도시를 고려장 특화 도시로’ 같은 ‘농담’이 횡행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가정법이다. 하지만 아마도 독자인 당신에게는 강한 불쾌함과 거부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국가 경제’를 앞세워 멀쩡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고령의 시민들을 ‘아직 안 죽은 짐짝’ 취급하는 내용이 한가득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대한민국 출산지도’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공론장에서 발언하는 그 누구도 ‘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장을 부활시키자’ 따위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취급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대신 은퇴 연령 조정이라던가, 연금 정책, 그 외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고령층을 보호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령층은 ‘인구(人口)’이기에 앞서서 ‘인간(人間)’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사회 정책은 용납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출산율 문제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대한민국 출산지도가 공개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인터넷 매체에서는 ‘남자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듯이 여성들도 출산의 의무를 지고 애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칼럼이 버젓이 게재되었다. 인간을 강제로 죽이는 사회 정책이 용납될 수 없듯, 인간을 강제로 낳게 하는 사회 정책 역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나 정책에서 인권의 기준치가 확 낮아진다. 나치 독일에서나 시행했었던 ‘의무 출산’ 정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론되는 그런 나라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2017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은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인구로, 인구를 재생산하는 도구로만 바라보고 있다. ‘가임기 여성’들은 단지 자신들의 숫자를 세서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 게 아니다. 그 숫자, ‘빅데이터’를 취급하는 방식부터가 모욕적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여성을 ‘주체’로, ‘주어’로 존중한다면, 대한민국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도와주는’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가임기 여성들의 숫자를 지자체별로 공개한다면 동시에 육아 시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성별 임금 격차가 어떠한지 등을 함께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가임기 여성들이 어느 곳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지 결정할 때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자료를 공개한 방식은 그와 정반대였다. 지자체별로 ‘순위’를 매겼다. 여성을 ‘목적어’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여성들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를 향해 ‘출산율을 높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 순위 경쟁을 위해 여자들이 아기를 ‘낳게 만들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단순히 통계를 제시했을 뿐이지만 그 숫자가 제시되는 맥락과 방향 속에 너무도 많은 여성혐오와 멸시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은 ‘출산율 대책’이 아니다. 여성을 온전히 주어의 자리에 놓는, 한낱 목적어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여성 정책이 먼저다. 여자들이 볼 때 이 나라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나라라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온갖 여성혐오적 발언을 내뱉는 것이 별문제 아니라는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출산율이 아니라 여성 인권이 문제의 본질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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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들은 얼마 전까지 시민들이 의견을 자유로이 교환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민주주의 마당으로서 온라인 공간, 특히 소셜미디어의 가능성을 말해왔다. ‘아랍의 봄’, 오바마 재선에서 드러났던 시민의 참여, 한국의 촛불시위는 모두 그러한 흐름을 기술적으로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브렉시트, 미국 대선에서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 여론조사에는 응답하지 않는 ‘숨은 보수’ 현상 등은 온라인 공간에 대한 몇 가지 근본적인 의심을 갖게 한다.

우선 시민들의 생각이 데이터 과학 알고리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걸러지고 서로 교류하지 않고 서로 접촉하지 않게 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최근 실리콘밸리 데이터 과학자 사이에서 뜨거웠던 논쟁이 ‘필터 버블’이었다. 필터 버블은 위키백과에 따르면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의 인터넷 정보제공자가 각각의 사용자에 맞추어 개인화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용자가 이미 필터링된 정보만을 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상품이나 콘텐츠는 나와 취향이 비슷한 동료도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도 마찬가지였다. 진보진영 지지자가 페이스북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기사와 팟캐스트 링크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다 보면, 보수진영 지지자들의 포스팅은 못 볼 확률이 높아진다. ‘대통령 선거 후보’를 검색할 경우, 민주당 ‘잠룡’들만 보이는 식이다. 사용자는 구글과 페이스북을 자신에게 ‘길들인다’고 느끼겠지만 은연중에 무의식적으로 편향된 정보만 접하게 된다.

‘예측’이 불발되고 온라인에 떠도는 정보의 신뢰도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경우가 생겼다. 2012년 미국 대선 결과를 주 단위까지 예측했던 데이터 과학자 네이트 실버는 2016년의 예측 불발로 망신을 샀다. 이론적 기반 중 하나인 ‘베이즈 통계학’은 사전 경험과 현재의 증거를 토대로 정확성을 높인다. 하지만 데이터 과학의 금언처럼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 여론조사나 출구조사에서 트럼프 지지자나 무당파들의 목소리가 가려진 채 민주당 지지자들의 목소리로 과장된 ‘빅데이터’가 제공됐다. 예측 역시 편향되었다.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알 수 없는 이상 복잡한 ‘소음’ 속에서 ‘신호’를 잡아낸다는 기획은 맞을 리 없었다.

계층과 세대에 따라 다른 소셜미디어 활용에 따라 ‘분리의 정치’와 ‘혐오’가 강화된다는 것도 큰 위험이다. 한국의 장년층 이상은 정치적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 카카오톡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단체 카톡방’에서는 기초적인 사실부터 의심해봐야 할 다양한 정보가 떠다닌다. 트위터는 읽고 싶은 사람의 축약된 메시지만 보게 하고 자신의 무리와 적대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조리돌림’하기에 최적화된 플랫폼이 됐다. 페이스북은 긴 글을 쓰는 식자층의 게시판이 됐다. ‘우리 편 전문가’의 이야기가 ‘우리끼리’ 회자되어 공유되고 ‘좋아요’로 정체성이 된다. 서로서로 “그런 건 궁금하지 않으니 안 보면 된다”는 인식도 더 강해진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달리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사이트가 여전히 뉴스 소비의 주된 원천이고, 시민 전체의 선호도를 기준으로 뉴스가 배분되는 방식에 가깝다. 촛불시위를 통해 서로 생각이 다른 시민들끼리도 한목소리를 모을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의식적인 필터링이 발생할 수 있는 편향도 소셜미디어 인심과 오프라인 인심의 편차를 확인한 정당과 정치인들이 이해하게 됐다.

그렇다고 온라인 공간과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할 순 없다. 우리는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 토론해 민주적으로 합의하는 것보다 누군가 결정하고 따르는 것에 익숙하다. 취약한 민주주의적 배경에서 다른 생각과 타협하기보다 눈앞에서 ‘치워 버리길’ 원하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경제적 위기는 그러한 혐오가 발산될 판을 깔 수 있다. 세계적인 민주주의 위기는 모두 그렇게 증폭됐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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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이라는 표현으로는 충분치 않은 묵은 해가 지나고 기어코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한 해 우리는 존재한다고 믿었던 상식과 원칙이 모두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아니, 보다 분명하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져 있었지만 그동안 감춰졌던 우리 사회의 적폐(積弊)의 일부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엄청난 권한을 선거에서 주권자에게 약속한 대로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국민에게 약속한 선거 공약은 제대로 지키지 않고,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재벌과 기업은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권력자를 돈으로 매수했고, 부정한 청탁으로 제 잇속을 챙겼다. 직언을 해야 할 참모들은 의식적으로 외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적극적으로 공모했다.

그동안 정부는 분초를 다투는 국가적 재난에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게 대응했고, 결국 절대로 그렇게 보낼 수 없는 보석 같은 아이들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충분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정책이 정부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결정으로 밀어붙여지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정책도 낙제점이다. 가계빚은 지난 3년간 240조원이나 폭증했고, 국가채무도 600조원을 넘어섰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계획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정책들이 많아졌고,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악재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12월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서 거대한 파도를 연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절망의 순간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시민들은 그 절망 속에서도 ‘촛불’이라는 희망을 피워냈다. 12월의 마지막 날까지 모두 열 번에 걸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누적 인원의 숫자는 1000만명을 넘겼다. 숫자의 헤아림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경험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광장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이 당당하게 주권자인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이던 촛불집회의 모습은 새로운 사회의 밑그림이 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한 편의 예술작품이 완성되려면 밑그림 위에 반드시 아름다운 색칠이 더해져야 한다. 광장에서 확인한 민주주의라는 밑그림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력의 색깔이 칠해질 때까지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한 해의 출발점에서, 1000만의 촛불이 그려온 우리 사회의 밑그림에 칠해지길 희망하는 새해 소망을 두서없이 적어본다.

2017년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남녀노소, 국가, 종교, 장애, 빈부가 개인을 설명하는 개성 넘치는 내용일 뿐, 부당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이 국가가 관리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임신과 출산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이주민’이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존과 다양성의 원천이 되길 소망한다. 힘 있는 사람들만 누리던 특권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는 보편적 인권의 기준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안전’ ‘평등’ ‘민주주의’ ‘사랑’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화석화된 문자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살아 숨쉬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는 결코 바라고 소망한다고 해서 자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줄 수도 없다. 1000만 촛불의 바다를 만들어낸 한 부분이자, 제 몫의 어둠을 온전히 지워낸 하나의 촛불이 올 한 해 각자의 삶의 일터에서 제 몫의 빛을 밝혀내어야 한다. 오늘보다 더 아름다울 내일을 위해서.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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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면 못난 구석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무서운 부끄럽고 못된 생각들이 마음속에 한가득이다. 당연하게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저지르지 않기 위해 만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럼에도 가끔씩 삐져나오는 못남을 모두 다 막아낼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내 곁을 떠났고, 누군가는 그 못남까지도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그들의 관대함으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었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못남과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이것이 나만의 사정은 아닐 터다. 어쩌면 고결하다고 칭송받는 이들도 마음속에서는 자신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자기합리화의 유혹은 본능적인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고, 그러니 어찌 그 가련한 존재의 사정을 봐주고 싶지 않겠는가. 작은 게으름에서부터 거대한 실수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 한다. 만약 자기의 명백한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은 동정과 용서의 대상이지 비난과 처벌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 억울함이 더해지면 ‘나’는 순식간에 강철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존재가 된다. 억울함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제1의 정서다. 물론 이유야 많다. 당장 매주 토요일 칼바람을 맞고 길거리에 서있어야 하는 일 자체가 억울하다. 잘못한 이들은 따로 있는데 수습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피해자들이다.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억울함은 위험한 감정이다. 억울함이 나를 사로잡고 나면, 내 허물들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것이 정당화되고, 나의 잘못과 앞으로 저지를 잘못까지도 면죄부가 주어진다. 밝혀지는 모든 진실의 가치는 나의 오류 없음을 증명하는 것에만 쓰이게 된다. 그 억울함이 세상에서 가장 정당한 것일지라도, 그것에 잡아먹히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협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종종 한국사회가 억울함의 경기장처럼 느껴지곤 한다. 모두가 소리 높여 자신의 억울함을 외치고 있다. 정당한 억울함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도움을 바라는 것을 무어라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억울함을 경쟁하는 것이다. 조금만 살펴보면 나보다 더 억울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경쟁은 그런 객관적이고 공정한 경쟁이 아니고, 무질서한 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연대가 아니라,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도 내 억울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빼앗는 약탈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에 비난과 책임을 돌리며, 그중에서도 약자들을 기꺼이 짓밟는 비열함이 우리들의 억울함 속에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다.

대체 누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차별의 해소는 고사하고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여성들에게 욕설과 조롱으로 일관하는 남성들이 그렇다. 누군가의 특권을 소리 높여 성토하지만, 내가 가진 특권과 욕망은 되돌아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다. 자신이 대의를 위한다는 사실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목소리를 분열의 음모라며 의심하는 이들이 그렇다. 내가 받은 작은 피해에 온 힘을 다해 분노하면서,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한없이 무딘 사람들이 그렇다. 이것이 절대로 내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뻔뻔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당신과 내가 바로 그렇다.

민주주의자로서 우리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공동체를 갖게 될 것이다. 공동체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편협한 개자식”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될 때, 싸워야 할 악마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가장 약한 자들의 승리가 나의 승리라는 것을 믿게 될 때 우리들의 억울함은 마침내 해소될 것이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들은 억울함 너머에 있다.

최태섭 |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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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한 장면을 펼쳐보자. 백정인 꺽정이는 양반인 덕순이와 죽이 좀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로 존대와 하대를 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일 임꺽정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대와 하대에 대해 논쟁이 오가던 중, 머리 깎고 병해대사가 된 갖바치 선생이 꺽정이의 성정을 좀 다스려 보려 한다. “우리말에 층하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지만 어른 아이는 고사하고 양반이니 상사람이니 차별이 있는 바에야 말이 자연 그렇게 될 것 아닌가.”

 

계급 차별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꺽정이의 반론에 대해 병해대사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응수한다. “벌써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에 차별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임꺽정이 아니다. “못쓸 차별을 없애려면 영을 내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설령 영을 내린다 한들 그 차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그러자 결국 임꺽정은 본인의 명성에 걸맞은 대답을 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면 될 것 아니오.” 병해대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화는 마무리된다.

 

이 대화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없다. 그게 바로 민주공화국의 본질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모두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차별적 특권 계급의 존재는 용인되지 않고, 모든 이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누리며 동시에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그 법은 국민의 대표 기관인 입법부에서 만들고, 행정부에서 실행에 옮기며, 사법부를 통해 갈등을 법적으로 해결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은 결국 동일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결합된 법치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박근혜 게이트는 왜 문제인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믿음을 뒤흔들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가정을 깨뜨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사건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 박근혜의 뒤에 ‘선출될 생각도 없었던 권력’인 최순실 일당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설령 최순실이 ‘착한 비선 실세’였다고 해도 사안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은 박근혜를 뽑았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순실이 기밀로 취급되는 대통령 연설을 주무르고, 온갖 인사에 개입한 것은, 그 자체가 민주공화국의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법의 지배를 ‘당하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복종’하는 임꺽정 같은 신분사회의 피지배계층이 아니다. 우리는 울화가 터진 꺽정이처럼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는 식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헌법, 법률, 조례, 규칙 등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움직이고, 필요하다면 유권자를 대의하는 기관인 의회에서 법규를 바꾸거나 새로 만든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아니라 ‘비선 실세’의 뜻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그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은 그러므로 혁명이 아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본 원리가 온전히 작동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민란’이나 ‘혁명’보다 급진적인 사건이다. 드디어 우리는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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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이야기’라는 메뉴를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www.jirisan.com)가 있다. 사이트 주인장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밥상 사진을 올린다. 반찬과 식재료에 관한 간단한 코멘트와 음식에 대한 기억이나 소소한 이야기가 함께 올라온다. 식당에서 사 먹는 밥이 아니라 집밥 사진이다. 아침, 점심, 저녁 대중없고 세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밥상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남의 집 밥상 구경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다. 아무리 서먹한 사이라 해도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뭘 먹느냐에 따라 회의석상에서 나올 일 없는 이야기도, 숟가락을 놓고 컵에 물을 따르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풀려나온다. 그 사람과의 새로운 기억이 생긴 만큼 ‘밥이라도 한 번 먹은’ 관계는 이전과 다른 질감을 갖게 된다.

“그녀는 생각난 듯이 앉은뱅이 의자를 밥상 앞에 당겨놓고 벽에 걸린 밀짚모자를 내려 자신이 앉은 맞은편에 내려놓는다. 혼자 밥 먹기 싫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다. 앉은뱅이 의자를 맞은편에 두고 밀짚모자를 내려놓고 있으면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경숙 소설 <바이올렛>에 나오는 구절이다. 예전에 읽었지만 ‘혼밥’이 싫은 주인공의 심정과 의지할 사람 없는 외로운 주인공의 처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 인상에 남아있었다. 이 대목을 호출한 건 바로 대통령의 ‘지극한 혼밥 사랑’이었다.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기까지 쏟아진 수많은 충격적인 기사 중에서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대통령의 혼밥은 화장실에 자주 가지 않기 위해 국물이 없는 돼지불백을 선호하는 택시기사나, 돈도 시간도 부족해 ‘컵밥’이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한 끼를 때우는 취업준비생들의 혼밥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이 밥 먹자고 부르면 그야말로 ‘열 일 제쳐 두고’ 달려올 사람도 많을 텐데 업무 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깨어 있으면 집무 중이시고 주무시면 퇴근한 것”이라는 김기춘 실장의 표현대로라면 대통령의 식사 시간이야말로 엄연한 업무 시간 아닌가? 대통령이 “평소 혼자 TV를 보며 식사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는데, 국민 대신 TV와 함께 업무를 본 셈이다. 이쯤 되면 청와대 관저 TV 시청 내역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관저(집)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고 하니, 그동안 집에서 혼자 TV 보면서 밥 먹는 자유로운 직장 생활을 해온 셈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어도 진작에 직장 생활이 끝났을 일인데,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먹을 것을 나눠먹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위로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속 풍경은 비극적이지만 따뜻하다. 아들을 사고로 잃고 슬퍼하는 부부를 만난 빵집 주인은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며 갓 구워낸 롤빵을 건네고, 부부는 시나몬 롤빵을 나눠먹으며 아침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즉석에서 해결책을 제시해 타인의 슬픔을 위로한 빵집 주인과 달리,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당일에도 평소처럼 혼자 관저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대통령이라면 응당 국민과 아픔을 함께 나눠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지금껏 자식을 잃고 상처받은 국민들을 불러 따뜻한 밥 한 끼 나눈 적 없다. 대통령의 의지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일이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주 일요일 회의를 하러 들어왔다는,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최순실과도 밥은 같이 안 먹은 분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을까?

직무정지된 이후에도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고독하고 익숙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신분만 대통령’인 분께, 지금이라도 함께 먹는 밥을 권하고 싶다. 혼밥을 좋아하는 대통령을 뽑은 국민은 이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대통령은 맡은 책임을 지는 자로서 외로워야지, 식탁에서조차 외로운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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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 짓도 없는데 벌써 한 해가 가버렸다. 이맘때면 늘 매체에서는 ‘20○○년의 인물’을 뽑곤 한다. 그래서 나도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인물을 찾아냈다. 이 코너를 통해 공개적으로 그를 나의 ‘2016년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그에게 알리고 감사의 마음을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아 세상을 떠난 백남기 농민의 큰딸 백도라지, 일명 ‘나물’님이다. 마침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피격되었을 때 나는 늦둥이 트위터 사용자가 되었고, 그의 계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고 이후 그의 삶을 1년간 목격하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모두에게 잔인했던 2016년, 나는 툭하면 혼자 중얼거렸다. ‘나물아 다 죽여.’

나는 서너 해 전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양육자’를 상해사건으로 잃었다. 그전에도 다복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내 주변은 한국적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가득했고,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를 거의 윽박질렀다. 충격이 가시지 않아 떠밀리듯 형식적인 법적 절차와 장례 절차를 밟고 나서 한동안 영혼이 얼얼했다. 비정상이 된 혼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대책 없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마음이 즐거우려고 하거나,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좋은 일 같은 것을 했다간 죽은 이에게 하염없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잘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떠난 이가 더할 나위 없이 바랄 것임을 알면서도, 더 망가지는 것만이 나의 슬픔을 진정으로 증명하는 방법인 것만 같았다. 아니, 잘 지내면 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즐거워하면 절대로 안되는 것 같았다. 몇 년째 그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나물님’을 알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질환의 치료 첫 단계로 일상의 루틴, 그러니까 일어나서 밥 먹고 운동하고 직장 가고 퇴근하고 친구 만나고 하는 식의 사소한 과정을 지켜나가라고 말한다. 내가 가장 먼저 잃은 것도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물님의 놀라운 점도 그것이었다.

그는 결코 단 한순간도 인생을 놓지 않았다. 망가짐으로써 슬픔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고 순결한 피해자의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그는 누워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고 가정 내에서 매일 생기는 사소한 일상들을 해결했고 직장에 출근하고 돈을 벌었다. 휴일이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고 언론을 상대했으며 경찰을 상대로 법적 절차를 밟았다. 가끔 예쁜 것을 사고 맛있는 것도 먹었으며 책을 읽고 운동도 부지런히 했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각종 소수자들의 크고 작은 문제에 끊임없이 연대하고 발언했다. 그는 종종 썼다. ‘나물이는 다 죽입니다.’ 그런 다부진 모습에 어떤 이들은 진정 슬퍼하는 것이 맞냐며 비난을 종종 퍼부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백남기씨의 장남이었다면, 그의 태도는 독함이 아니라 강인함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 비극에 직면했을 때, 슬픔 속에 비참하게 매몰되지 않고 예쁜 조약돌을 줍듯 일상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싸우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는 우리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영웅이다. 피해를 당한 사람이 한껏 비참하게 일그러져서 슬픔의 ‘진정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나는 머리채라도 풀어서 향유로 그의 발이라도 닦고 싶은 심정이지만, 나는 그가 나를 일으켜 향유를 다른 이들과 나눠 바를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가장 지키기 어려운 일상이라는 것을 지켜 나가면서 싸우는 그의 하루하루 모습은 얼핏 소소한 듯 존엄했다. 오히려 그를 보는 사람들이 도리어 위로받는 일이 허다했다.

나의 영웅은 앞으로도 일상의 품위를 잃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싸워나갈 것이며, 나는 할 수 있는 한 무엇이든 도울 것이다. 나물아 다 죽여. You go, girl.

김현진 |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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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동료시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어떤 추악함을 품고 있는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4%라는 기록적인 대통령 지지율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사람들이 청와대를 에워싸고도, 광화문과 종로거리에 여전히 엄청난 인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거리는 여전히 깨끗했고, 불타거나 깨지는 것 하나 없이 질서정연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광장의 질서가 어떤 두려움들을 깔고 있다고 느낍니다. 폭력과 희생자는 없을수록 좋고, 누구에게나 안전한 광장이 되자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일까요? 이미 권위를 상실한 대통령일까요? 차벽 뒤의 경찰일까요? 아니면 선진국의 언론일까요? 지지율 4%라는 놀라운 결과를 두고 여전히 버티고 있는 대통령도 굉장하지만, 이 압도적인 여론을 등에 업은 우리들의 조심스러움도 놀랍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광장의 주인인가요? 아니면 법원의 허락과 경찰의 선처를 바라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인가요? 저는 최근 일고 있는 ‘폭력 대 비폭력’의 논쟁에 허망함을 느낍니다. 지금의 비폭력은 오직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연행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경찰이 차벽에 평화시위를 해달라며 걸어놓은 현수막은 저에겐 모욕처럼 느껴졌습니다. 트랙터를 몰고 열흘을 달려온 농민들은 서울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고속도로에서 경찰에게 봉쇄당했습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는다고 폭력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새벽에,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우리의 약한 고리들을 경찰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주권자로서 우리는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빌미를 제공해선 안 된다’, ‘너는 프락치가 아니냐’와 같은 내면화된 강박과 굴종이 아니라요. 보수언론과 기회주의자들이 우리를 평범한 시민이라 부르고, 시민의식이 돋보이는 평화시위를 찬양하는 것은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불순세력과 폭력시위로 우리를 매도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정작 광장에 나온 동료시민들에게 충분한 배려와 예우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광장에서 대통령의 여성성을 조롱하면 마음이 상하는 것은 그걸 듣는 다른 여성 동료시민들입니다. 생각 없이 내뱉는 대부분의 욕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 시국이 더 중요하다고요? 그런 말은 이 모든 시국이 끝난 뒤에도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광장을 좁게 만드는 것은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동료시민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지워가는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정권을 수백 번 바꿔낸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요? 그렇게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가 어느 날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동료시민 여러분, 우리는 이 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뿌리박혀 있는 불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대신해줄 그 어떤 책임 있는 세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의 시간과 자본의 시간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만의 호흡으로 새로운 시간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단지 차벽 너머에 있는 하나의 권력이 아니라, 우리를 고통에 빠트린 모든 억압과 불의, 그리고 그것에 끌려다니던 지난날의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인정도 바라지 말고 스스로 떳떳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법을 만들고, 또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혁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최태섭 |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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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받아가세요!”

혼잡한 광화문역을 겨우 빠져나오자마자 들린 첫 음성이었다. 엄마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 준비했다며 사람들에게 초코파이를 하나씩 나눠준다. 나도 받아들었다. 초코파이는 달콤하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넘친다. 차가 사라진 거리는 이미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많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실제 인파를 확인한 사람들 사이에 묘한 동질감이 흐른다. 줄줄이 서 있던 통신사들의 중계기가 무색하게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은 터지지 않고 전화도 끊기기 일쑤였지만 불편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인파를 헤치며, 아니 떠밀리듯 이동했다. 집에 가는 지하철 막차 안보다 사람이 더 많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에서 사람에 밀려다니는 경험은 또 처음이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아무도 짜증내거나 화내는 사람이 없다. 묵묵히 사람들이 움직이는 큰 방향을 따라 이동할 뿐.

“많아지면 달라진다”고 했던가. 21세기 들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지난 토요일의 광화문은 여러모로 진풍경이었다. 촛불 없이 팻말만 들고 있던 내게 누군가 불붙인 초를 건네주고, 옆자리 아주머니는 사탕을 한 움큼 꺼내 내 손에 쥐여줬다.

가수 이승환씨가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3차 집회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마스크와 모자에 붙인 스티커, 손에 들린 팻말까지 “박근혜는 하야하라”가 선명하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혼자 나온 사람들도 즐겁게 웃으며 인증샷을 찍는 풍경도 자주 보인다. 인기 만점 JTBC 중계차 주위에서는 “힘내세요! 사랑해요!”라는 응원이 들린다. 여기저기서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외침이 터져나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통로는 빠르게 채워져 빈곳을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다양한 깃발 사이에서 “아~ 쫌!”이라 써있는 깃발도 눈에 띈다. 외국인에게 일부러 다가가 “위 아 소 앵그리(We are so angry)”라고 설명해주고 가는 사람도 있다.

“힘이 있다고 믿는 곳에 힘이 머무는 법입니다. 힘은 벽의 그림자 같은 것이죠. 그 그림자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작은 남자도 아주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법이죠.”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온 대사다. 지금 청와대에 힘이 있다고 믿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2주 연속 5% 지지율이라는 객관적 숫자만으로도 이미 청와대는 힘을 잃었다.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낼 만큼 거대한 권력인 줄 알았던 청와대와 대통령이 사실 누군가의 줄에 조종당하던 작은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제 모두 알아버렸다. 국민은 청와대가 더 이상 힘이 있다고 믿지도 않고, 있다고 믿었던 힘을 계속 줄 생각도 없다. 아무런 자격도 없던 비선 실세가 만들어낸 커다란 그림자는 빛에 노출되면서 걷혔고, 그 그림자에 기대던 권력은 힘을 잃었다. 벽의 그림자가 사라진 거리에서 국민들은 마음껏 떠들며 각자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써가는 중이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다음주와 다다음주에 더 뜨겁게 다시 모이자”는 주최 측의 발언에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빨리 하야하면 그때는 모여서 놀면 되겠네?” 그 재치있는 대답에 예능프로그램에서 김건모가 혼자 술 마시다가 심심해서 아이폰의 인공지능 ‘시리(siri)’에게 말을 걸던 장면이 생각났다. 뭘 물어도 척척 대답하는 ‘시리’에게 말문이 막힌 쉰 살 김건모가 “너 몇 살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리는 명랑하게 받아친다. “먹을 만큼 먹었어요.”

지난 12일, 이승환이 100만 군중 앞에서 부른 “야발라바 하야하라 박근혜” 노래 가사를 들려주면 ‘시리’는 뭐라고 답할까. 미리 테스트해본 결과 내 아이폰의 ‘시리’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했지만 적어도 그날 거리에서 마음으로, 몸으로 함께했던 사람들은 그 답을 분명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리’ 역시 그 답이 뭔지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될 것 같다. 요즘은 인공지능도 그 정도쯤이야 금방 배우는 시대니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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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이 유명한 슬로건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나왔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쟁취했던 사회참여의 권리,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참정권 등이 주어졌음에도 왜 여성은 해방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시발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여성도 얼마든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사회가 사적영역으로 몰아넣은 부분들에서 상존하는 성별위계, 성차별, 성별분업구조가 여성들을 여전히 종속적 위치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마르크시스트도 파시스트도 집에서 설거지를 안 하는 것은 똑같다’는 결론. 그래서 단순히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증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게 강제하는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공사 구분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급진주의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슬로건이 다소 극단적인 형태로 실천된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이 그 어떤 검증도 거치지 않은 사인에게 국정 운영에 대한 중요한 결정들을 맡겨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도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국방이나 외교 같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안들도 모두 ‘최순실’이라는 사람에게 보고되었고, 그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다.

이쯤 되면 앞서 문제가 되었던 ‘서별관회의’는 차라리 권위가 철철 넘쳐흐르는 회의체라고 생각될 판이다. 하다 못해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명백히 ‘공인’들이었으니 말이다. 공사 구분에 실패한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다. 가령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각계를 불문하고 터져 나오고 있는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폭로를 생각해보자. 남성중심사회가 성폭력을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은폐하며, 방조한 결과 이제 한국사회는 성폭력과 그에 대한 묵인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선언이 맞서 싸우고자 했던 것 중의 핵심이 바로 성폭력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선언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이중으로 씁쓸하게 느껴진다.

권력자들의 사적인 이해·관심과 네트워크들이 온 나라의 공적질서를 교란시켰고, 공적으로 해결되었어야 하는 성폭력은 바로 그 공적 해결 가능성에 대한 뼈저린 학습효과 때문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의 폭로라는 거친 형식으로 터져 나왔다.

공과 사의 구분이 완벽한 반전상을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부모를 여의고 불쌍하게 살았으니 대통령이 되라고 투표를 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았다고 피해자를 매도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세상인 것이다.

공과 사에 대한 왜곡된 기준을 바로잡는 일은 오늘날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공사 구분법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각 사회가 가진 공과 사에 대한 관념은 그 사회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고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이들이 밀리면, 국가와 사회는 몇몇 권력자들의 주머니 속으로 흩어져 사사화(私事化)된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어떤 체계도 모든 것을 보장해줄 순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하고, 투쟁하고, 합의하며, 기준을 세우고, 변화시키고, 지켜야 한다. 이 웅성거림과 소란스러움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공공의 이익을 저해하는 이들을 향해 다시 외쳐야 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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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최순실(최서원)을 둘러싼 설왕설래로 들썩인다. 여러 가지 의혹이 쏟아지고 있지만, 가장 흥미롭게 지켜봤던 부분은 바로 재단 설립 인허가 과정이다. 재단법인 설립이 허가되기까지 평균 21.6일이 걸린다는데, 미르재단은 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과정 또한 드라마틱하고 비현실적이다. 실무자가 세종시에서 서울까지 출장 가서 서류를 받고, 저녁 8시7분에 기안을 올린다. 8시10분에 사무관이, 8시27분에 과장이 원격 결재를 한다. 실시간 결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속도인데, 결국 윗사람이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체부 고위공무원의 저녁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누군가의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권력의 힘이다. 사람들이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타인의 시간을 사거나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회사에 매인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니까.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11일 출처: 경향신문DB

회사를 다니고 월급을 받는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내 시간의 대가다.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이혁진의 소설 <누운 배>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제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글이라 그런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최근 읽은 소리꾼 이자람의 인터뷰가 겹쳐 떠올랐다.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러닝 타임 동안의 여행, 이것이 공연자로서 제 삶의 전부일 것 같은데요. 제 삶은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들로 쌓여가는 것 같습니다.” 읽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정하고 그 길에서 매진하고 있는 사람 특유의 겸손하지만, 단호한 느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연자 자신조차 오롯이 무대 위의 시간을 위해 쓰겠다고 작정하고 준비해 만드는 예술가의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시간들은 얼마나 촘촘하고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을까?

직장을 다니다가 전업 작가로 돌아선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전에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선택을 감행한 그들의 용기가 부럽고, 한 번도 결단하지 못한 채 조직에 머물러 있는 내가 비겁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것을 위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고 말하는 그들이 부럽지만 어쩌겠는가. 선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고 결국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선택과 그 결과는 본인의 책임이다.

물론 개인의 시간이 개인 한 사람만의 책임만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할 책임은 분명하다. 후속 세대가 누리고 영위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 일상의 시간과 사회의 공기를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민주정부 10년 시기에 20대를 통과한 나와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에 20대를 보낸 후배들만 비교해 봐도 차이가 확연하다. 비상식이 상식처럼 버젓이 통용되고, ‘블랙리스트’가 돌아다니는 시대 분위기에서 과연 자기 검열에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고 듣고 느끼며 공기처럼 흡수한 동시대 시간의 영향력이 놀라운 이유다. ‘나는 비로소 내가 될 테지만 그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을까.’ 소설 <누운 배> 속 구절을 다시 읽으며 내게 묻는다.

나는 내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고 있는가? 그 시간으로 이뤄진 나는 누구일까? 내가 듣고 보고 읽고 만나고 호흡하는 이 시대를 위해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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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죽음도 함께 있었다. 죽음은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 콧대 높은 인류가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영역이다. 어쩌면 이 정해진 운명에 대해서 필멸자로서의 인류가 쳐왔던 발버둥의 흔적이 이름하여 ‘문명’일 터다. 무리를 짓고, 종교를 만들고, 자신의 육신이 다한 이후에도 기억되기 위하여 무언가를 위해 노력한 흔적들의 총체가 그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산물 중 하나가 다름 아닌 국가다. 국가의 기원과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을지라도, 그 핵심기능이 국가에 속한 구성원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 익숙해져서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국가의 말에 따르기로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나를 보호해준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이다. 이 약속을 깨트린 국가를 국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 그 국가가 살인을 저질렀다. 모든 사람들이 고 백남기 농민을 향하는 물대포를 보았다. 이 사건에 미스터리는 없다.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농민이 쓰러졌고, 그 이후로 의식불명 상태에서 10개월여를 힘겹게 투병하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증거와 목격자가 넘쳐나고, 미심쩍은 부분도 없다.

국가가 혐의를 받고 있는 다른 죽음들은 하다못해 사고였노라고 주장할 여지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으로 사람을 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이 사실이 왜곡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개입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국가는 자꾸 이 사건의 장르를 미스터리 추리극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왜 죽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부검을 해봐야 한다고 우겼고 결국 영장이 발부되고야 말았다.

고작 정권 차원의 면피를 위해, 말조차도 아닌 모호하고 구역질 나는 무언가를 공식적으로 토해내기 위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고인의 시신을 파헤치려 한다.

아무도 해치지 않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그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같은 광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한 심판은 끔찍하게도 더디다. 그 와중에 음모론자들과, 폴리스라인을 밟았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얼치기 법치주의자들이 더해졌다.

이들의 목적은 진실을 빌미 삼아 진실에 먹칠을 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바보가 되라며 협박하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가 어떤 공식입장을 발표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전달될 메시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 국가는 구성원을 보호할 의지가 없고, 죽음조차도 존중할 생각이 없다.

이 국가는 아무것도 보장할 생각이 없고, 오로지 통치자들의 안위만이 중요하다. 망루에 불이 나고, 배가 침몰하고, 굶어 죽고, 공중화장실에서 살해당하고,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도 이 국가는 관심이 없다.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있다가 죽으라는 것이 이 국가가 사람들의 목숨을 대하는 태도이다. 자살하지 말고 애나 많이 낳으면서 필요한 만큼의 인구로서만 존재하라는 것이다.

국가가 사람들을 영원히 살도록 해줄 수는 없지만, 막을 수 있는 죽음을 예방하고 어쩔 수 없는 죽음들에 대하여 예를 갖춰 애도하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그 최소한의 책임을 방기하고 제멋에 겨운 통치놀이에 열중하게 된 결과, 그 죽음들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것은 오롯이 사람들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에는 ‘나였을지도 모르는’ 죽음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국가는 이 최소한의 책임을 방기할 것이라면 하루빨리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혀주길 바란다. 그래야 우리들도 하루빨리 이것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라는 선언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최태섭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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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내작은말학교’에서 말과 함께 일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전처럼 마음 편하게 영화 같은 걸 즐기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얼마 전 <황야의 7인>을 리메이크했다고 하는 <매그니피센트 7>을 보러 갔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가 뻥 터져서 말들이 내팽개쳐지는 장면이나 말 우리를 가운데 두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아니 말! 말 어떡해!” 하며 피 흘리는 미남 배우의 안위보다 넘어져 네 다리를 버둥거리는 말의 생사만 확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 사상 가장 멋진 기병전으로 꼽히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 중 ‘로한’ 기마대 돌격전 같은 장면도 전처럼 편하게 볼 수 없다. 창에 꿰뚫리고 화살의 비를 맞아 쓰러지는 말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말 산업은 현재 경마에 대부분 편중돼 있다. 그래서 ‘말 산업’ 같은 기사를 보면 혈통이 어떠어떠한 잘생긴 말의 얼굴을 떡하니 올려놓고 “XXX 드디어 씨수말 데뷔! 데뷔 기념으로 목장당 1회씩 무료 교배!” 이런 커다란 글씨에 느낌표를 아끼지 않는 광고 천지라 “아이고 말의 세계는 좀 노골적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보니 노골적인 것은 사람이지 말이 아니다.

나는 경마의 매력을 잘 모르지만, 그 짜릿함을 알고 말을 빨리 달리게 하고 싶은 것도 결국 사람의 욕심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말은 참 신기한 동물이다. 세상천지에 어느 동물이 등에 누굴 태우고 걷거나 달리고 싶을까. 그런데 순순히 안장을 올리고 복대를 차고 사람이 가자는 대로 가는 걸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다.

몽골 설화에 따르면 사슴이 말이 먹을 풀을 몰래 먹어치워 말이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사람이 말에게 다가와 안장과 굴레를 채우게 해 준다면, 사슴을 잡아 복수를 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말은 그만 그걸 받아들여 그때부터 말은 사슴 사냥을 하고, 사람을 태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홋카이도의 농사말처럼 몸무게가 1t이나 나가는 힘센 짐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작은말학교의 말들은 고작해야 염소만 한 조그만 말들이다 보니 위압감보다는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50㎏ 정도 나가는 조그만 막내말 ‘제니’가 갑자기 마장을 마구 달리기 시작하자 한가롭게 마장을 노닐던 다른 말들도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 말똥을 치우느라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내 앞을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휙휙 무섭게 달려 나갔다. 조그만 ‘고셔’가 내 발을 밟아 엄지발톱이 그대로 빠진 다음이라 덜컥 무서웠다. 부딪혀서 짓밟혔다간 갈비뼈 서너 대 나가는 건 금방일 거 같았다. 일단 말똥이 잔뜩 든 쓰레받기를 꼭 붙잡고 벽에 바짝 붙었다.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네 다리로 땅을 박차고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달리는 말들의 모습이 문득 무척 아름다워 보여서, 나는 숨을 죽였다. 사람에게 잘 보이건 말건 전혀 상관하지 않는 존재들이 간혹 내뿜는 아름다움은 그렇게 압도적이다. 이럴 때면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라는 릴케의 글귀를 떠올린다.

인간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존재하는 게 너무나 마땅한 듯이 지금껏 살아와서, 다른 동물들에게는 잘 보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달리는 말들의 그 자체로 당당한 아름다움을 보면, 마치 그것이 우리를 멸시하는 듯 느끼게도 된다.

일상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러한 아름다움을 볼 때, 인간으로 태어난 비루함과, 인간으로 태어난 고마움이 동시에 찾아온다. 우리는 더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등에 태워 주고, 무시무시한 창을 향해 함께 내달리고, 안겨 주고, 쓰다듬게 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심지어 털가죽을 내주고 잡아먹혀 주는 그 모든 인간 아닌 것들에게.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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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는 신기한 직업이 있다. 바로 가스등의 불을 켜고 끄는 일이다. 자그레브 구시가지(Upper city) 내 건물에 달려있고, 번호가 부여돼 있는 이 가스등들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불을 붙이고 꺼야 하는 옛날 가로등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전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200여개에 달하는 구시가지 내 가스등 전부의 불을 밝히고, 끄러 다니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게 직업이라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공무원이란다.

오래된 도시를 구석구석 돌면서, 긴 막대기로 가스등의 불을 하나하나 직접 밝히고, 끄는 직업이라니! 2인 1조로 다닌다는 그분들은 번호만 말해도 그 가스등이 어느 건물에 붙어있는지 알 테고, 매일매일 도시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샅샅이 파악하고 있을 테다. 자동으로 켜졌다 꺼지는 현대식 가로등보다 비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비 오는 날 구식 가스등이 만들어내는 빛이 어우러지는 오래된 도시의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이 옛날 가스등은 관광이 중요한 수입원인 크로아티아에서 제공하는 볼거리면서, 중세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구시가지만의 매력을 한층 더하는 아이템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만약 자그레브 구시가지의 가로등이 최신식이라면, 어디에도 없는 번호 붙은 구식 가스등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풍경과 하나뿐인 직업의 이야기도 사라질 테다.

한국에 이런 직업이 생긴다면 어떨까. 친척들이 “취직은 했니?”라고 물으면 “가로등을 켜고 끄는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답하는 대신 “공무원 됐어요”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삼성 다녀요”, “선생님입니다”처럼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한 직업이 아니면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뭐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면 일단 불합격이다. “그거 해서 먹고살겠나”와 ‘알 만한 기업’을 다니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 사람이 행복한지, 삶에 만족하는지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그림 그리고 글씨도 쓰고 이것저것 합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늘 “뭐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만 듣는다며 괴로워하던 친구 하나는 전략을 바꾸더니 얼굴이 폈다. “먹고살 만합니다”라고 대답하면 만사 오케이라나.

대기업에 들어간다고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27.7%라는 통계를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제주 이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제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덕후 투어’만 기획하는 여행사, 지리산 자락에 식당을 차린 청춘들, 한 달에 한 도시씩 24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도 있다. ‘직장’을 다닌다고 ‘직업’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일찍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아직 대세는 아니다. 대학 나와서 백수가 되느니 일찍부터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고딩), ‘공딩족’이 등장할 정도로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하다. 하지만 살펴보면 ‘남들 다 가는 길’은 정답이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전화번호를 ‘오리구이’와 소리가 비슷하게 ‘5292’를 많이 쓸 정도로 유행했다는 오리구이집을 비롯해 찜닭 전문점, 조개구이집, 닭강정집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어느새 없어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절대 과제라고 한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인 지금, 안정적인 일자리는 창출하기도 어렵고, 그 일자리가 언제까지 안정적일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정규직으로 살지 않아도 기본적인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만들고, 다양한 직업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다. 크로아티아의 ‘가로등 켜고 끄는 공무원’처럼, 매력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틈새들이 한국 사회에는 더 많이 필요하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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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가 봉급생활자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2008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처음 주어진 것은 1999년의 일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닥쳤지만, 다행히도 ㄱ씨는 그 격변의 흐름에서 한발짝 비켜나 있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ㄱ씨는 한숨을 돌린 뒤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바이 코리아’ 열풍이 한창일 때였다. 아파트 대출금을 갚은 뒤 고금리 적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목돈을 주식에 투자했고, 그 돈은 몇 번에 걸쳐 상승의 흐름을 타면서 빠르게 몸집을 불려갔다. ㄱ씨는 이 돈의 투자처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ㄱ씨가 ㄴ일보의 부동산 칼럼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늦은 퇴근길에 들른 음식점에서였다. 그 칼럼은 1999년의 주가 상승이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2000년의 주택 공급 물량 부족이 부동산 시장의 가격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꽤나 설득력있는 주장있었다. 그날 이후 ㄱ씨는 매일 그 신문의 부동산면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기사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정말로 2000년 3월부터 부동산 시장은 밀레니엄의 들뜬 분위기와 함께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외환위기 직후 530만원대까지 폭락했던 서울 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600만원대에 재진입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동산 시장으로의 이동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문제는 시기였다. ㄱ씨는 재건축 대상으로 회자되던 강남 저밀도 아파트의 동향을 투자 시기를 가늠하는 지표로 주목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수그러지는 듯했던 재건축의 소문은 1999년부터 다시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2000년 2월 중반, ㄴ일보의 부동산 칼럼은 강남의 일부 부유층이 자녀에게 증여하기 위해 개포동 주공아파트를 매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양도세나 증여세의 기준이 되는 국세청의 기준시가가 일반 아파트의 경우 시세의 80% 수준인 반면, 이 아파트는 시세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이 주목하는 이유였다. 상대적으로 세금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다. ‘강남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1930~1940년대생 중상류층은 재건축 아파트를 통해 편법 증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ㄱ씨는 적당한 매물을 찾기 위해 주말마다 강남 일대의 부동산중개업소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음에 쏙 드는 아파트를 발견했다. 반포의 저밀도 아파트 단지였다. 중개업자에 따르면 25평 아파트의 시세는 2억8000만~3억5000만원 선, 전세가는 25평이 9000만~1억원 선이었다. ㄱ씨는 강남의 역사를 다룬 손정목 선생의 글을 챙겨 읽었던 터라, 이 아파트 단지가 1970년대 중반부터 예비 중산층에게 내집 마련의 기회이자 강남으로의 진입로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세워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재건축 아파트는 일단 강남으로의 진입로를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건설사와 조합원의 이익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터라 중대형 아파트 위주로 높은 분양가가 책정될 것이고, 그 분양가는 다시 주변 아파트의 시세를 끌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쇄반응은 강남 아파트의 가격을 상향조정하면서 진입장벽을 이전보다 훨씬 높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다면 한강변을 따라 반포에서 잠실까지 이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은 일종의 폐쇄형 주거지역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상황 전개는 강남의 미래에 대한 청신호나 다름없었다. ㄱ씨는 주저 없이 반포의 아파트를 매입했다.

ㄱ씨의 바람대로 타워형의 재건축 아파트들이 완공된 것은 2008년 가을의 일이었다. 평당 분양가는 3000만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에 ㄱ씨가 다음 투자처로 강북 번화가의 상업용 부동산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그리 익숙지 않은 시점이었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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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여자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알몸을 찍었다는 보도가 나와도,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남성 위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인 여자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누구일지 추측하며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훨씬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대한민국은 ‘몰카’의 왕국이다.

이토록 ‘몰카 범죄’가 만연한 것은 기술적 이유 때문인가? 다시 말해, 스마트폰과 초소형 녹화 장비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탓에 벌어지고 있는 불가피한 현상인가? 자동차가 보급되면 교통사고가 늘어나듯,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CCTV부터 뿔테 안경까지 온갖 일상적 사물로 위장한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몰카’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경찰이 몰카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지하철역 계단에서 몰카 근절 캠페인을 벌인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하철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와 함께 가산디지털단지·광화문·공덕역에 '몰카 아웃 계단'을 3주 동안 운영한다고 18일 밝혔다. 사진은 이날 오후 공덕역에 설치된 몰카 아웃 계단. 연합뉴스

인터넷이라는 것이 이 땅에 도입된 후,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유포한 성관계 영상은 언제나 어딘가의 하드디스크 속에 존재해왔다. 모 연예인의 성관계 장면이 담긴 ‘O양 비디오’부터,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청소년들의 성행위가 찍힌 ‘빨간 마후라’ 등, 한국의 네티즌남(男)들은 ‘몰카’ 혹은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겨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적잖은 남자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카메라와 인터넷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주요 국가들 가운데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할 때 소리가 나도록 규제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하지만 공공장소, 특히 대중교통에서 ‘몰카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 역시 한국과 일본이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특히 남자들의 문제다. ‘몰카를 찍는 것은 비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그걸 본다면 그 죄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는 도덕적 기준이 작동하지 않는 일종의 아노미 현상인 것이다.

그 남자들은 타인의 알몸, 성기, 항문, 성행위 장면, 심지어 배설 장면 등을 몰래 찍고 돌려보면서도 자신의 존엄성이 깎여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남의 치부를 훔쳐봄으로써 상대방을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쾌감을 느낀다. 성적 쾌감 이전에 모욕하는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몰카 범죄’의 본질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몰카’를 문제로 인식하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가령 <내부자들>은 결국 ‘몰카로 정의구현’하는 영화인데, 대략 1000만명가량의 관객이 그 작품을 봤지만, 문제의식은커녕 대다수가 후련함과 통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최근 <뉴스타파>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성매매 현장이 담긴 ‘몰카’를 입수해 공개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기업이 회삿돈을 ‘오너’의 성매매 비용으로 썼다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몰카’ 공개가 과연 독립언론의 품격에 어울리는 일인지, 그 영상을 편집해서 공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지, 그런 도덕적 차원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성판매자가 아니라 성구매자를 처벌해야 성매매의 해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요억제론자다. 이건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를 옹호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쓰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하나인 그가 피해자가 됐는데도 ‘몰카’에 대해 이토록 무덤덤하다는 사실이 소름 끼칠 뿐이다. 이건희가 당해도 다들 시시덕거릴 뿐이라면, 그 많은 ‘몰카’와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인가.

‘몰카’는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들의 인간적 품위와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엄정한 수사와 처벌이 요구되는 것은 그래서다. 도덕적 기준이 삐뚤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당위를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몰카’에는 우리 사회의 곯아버린 내면이 찍혀 있는 것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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