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영국. 그나마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자유당이 여당이었고, 자유당의 가장 큰 맞상대는 보수당이었다. 노동당과 아일랜드 자치파 등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와 비슷한 사회적 신분 및 교양 수준을 가진 이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자유당을 지지했다. 수많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처럼 말이다.

자유당은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여성들의 권리를 한없이 유보시켰다. 그럼에도 자유당은 자신들이 ‘차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냐며 비난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른바 ‘잠재적 아군’들의 논리다. 너희들이 지금 뭘 요구하는지 모르지 않지만, 당장 그것보다 시급한 일이 산적해 있다. 그러니 일단 너희들의 요구사항을 접어두고 ‘대의’에 복무하라. 우리 ‘잠재적 아군’들을 적으로 돌리지 말고 ‘조곤조곤’, ‘사근사근’하게 설득하는 태도를 보여라.

이런 주장에 혹하는 사람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여성 자유당원이나 합법적 참정권론자들 역시 이런 현명한 체하는 논의를 펼쳤다. 그들은 정당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충고했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는 콧방귀를 뀌며 자유당을 상대로 한 낙선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진지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자유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후라고 생각된다.”


23일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경찰에 항의하기 위해 SNS를 통해 모인 시민들이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_경향DB


여기서 잠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한반도 역사상 단 한 번도 여성들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사회적 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인터넷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리면서 상스러운 여성혐오적 표현이 전국을 누볐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 약물에 정신을 잃고 나체가 된 사진, 원치 않게 촬영된 성관계 장면 등을 남자들은 돌려보고 시시덕거리며 자기들끼리 품평회를 즐겨왔다.

이 도저한 차별과 폭력과 혐오와 멸시의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몇몇 용감한 여성들이 바로 그 공격적인 언어를 되돌려주는, 이른바 ‘미러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김치녀’라고 10년 넘게 멸시당해오던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마세요’라고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남자들을 향해 ‘김치남’이라고 맞받아친다. 놀랍게도, 그러자 비로소 남자들이 ‘온라인 언어폭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기들도 맞아보고 이제서야 아프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나는 이 시위를 지휘할 것이고, 돌멩이야말로 내가 사용하려는 논쟁 방식입니다. 돌멩이야말로 가장 쉽고 직접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서프라제트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면서 여성 투표권을 외쳤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의 투표권은 바로 그렇게 쟁취된 것이다.

‘미러링’이 불편한가? ‘증오의 총량’이 늘어날까 우려되는가? 20세기 초의 서프라제트와 달리, 21세기 초 대한민국에서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리창 하나도 깬 적 없다. 한없이 온건하게 포스트잇을 붙이고, 슬픔을 나누고, 지금까지 너무도 속 편하게 기득권으로 살아온 ‘한국 남자’들의 행태를 거울에 비춘 듯 되돌려 보여줬을 뿐이다. 혹자는 여성혐오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이 ‘남녀 대결 구도’로 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니다. ‘남녀 대결 구도’가 맞다. 그리고 여자들이 이겨야 옳다. 여성혐오와 맞서는 여성들을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전적으로 지지한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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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조국 근대화”의 목표를 제시한다. 그것은 추상적 구호나 통계 수치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으로 제시된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가족의 삶이었다. “그때 국민 대다수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가족과 더불어 주말을 즐기며, 주부는 편리한 부엌을 갖춘 살기 좋은 주택에서 알뜰한 생활을 꾸밀 것이며, 자녀는 씩씩하게 자라고 슬기롭게 배워 세계에서 으뜸가는 한국인의 자질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이후 정권은 출생-교육-취업-결혼-출산·육아-집 장만-자녀 교육-부모 공양 등 사회 구성원이 수행해야 할 과업을 생애주기별로 배치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두 유형의 집단이 ‘국민’으로서 위의 과업 일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중산층 가족’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유형의 1세대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강남의 아파트 단지에 등장했던 1940년대생 대졸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명문고-명문대라는 학벌을 동력으로 삼아 대기업 관리직이나 전문직으로 성장하면서 현대적인 핵가족 모델을 완성해냈다. 두 번째 유형의 1세대는 대기업 사업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로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였다. 이들은 공고 졸업·직업훈련소 이수-취업·병역특례 등의 경로를 거친 후 동남 공업 지역을 거점으로 성장했고, 87·88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민중주의’와 결합시켜 중산층의 삶을 위한 경제적 여건을 마련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주했던 이 두 유형의 중산층 대다수는 봉건적 가부장제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극단적인 남아선호 현상으로 표출되기도 했던 가부장제의 혈통주의는 도시적 삶의 역동적 면모를 견뎌내기 위한 방패막이면서, 개인의 성취를 가족의 역사로 확장할 수 있는 서사적 장치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식의 중산층-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는 경제 성장의 뒷받침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도성장기가 저물자, 국가가 내건 과업의 목록은 역순으로 체념과 절망의 대상으로 변모했다. 아파트 가격 폭등과 양육비용 증대로 집 장만과 출산을 뒤로 미루거나 단념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저성장 시대의 본격화와 더불어 결혼과 연애와 취업을 차례대로 포기하기 시작했다.

서민.중산층 주거안정 강화방안 주요내용_경향DB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그저 중산층 진입의 불가능성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불가능성은 ‘국민’이라는 정체성의 불가능성과 곧바로 연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국민’이라는 호명을 받아들인 것은 중산층 양성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일정 정도 자기 삶의 비전으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목표의 부분적인 실현조차 국가가 보증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N포 세대”라는 명명법의 등장 직후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출현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헬조선”의 세계에서 비정규직은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젊은 세대는 극심한 취업난에 부표 없이 표류하며,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여성 혐오에 희생양으로 동원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세계에서 가부장제의 권력은 뭇 남성들이 동원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자원들 중 가장 강력하고 친숙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보다 7% 넘게 앞선 시대에 그 권력이 과거의 영광을 반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가부장제의 성역할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반감과 증오가 가시화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맥락들로 인해 젊은 세대의 여성들을 중산층 가족 모델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집단적 주체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사회적으로 확장해 간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국민 이후의 현대적 개인’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모색을 위한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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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눈과 귀가 피로해지는 요즘이다. 밖에 나갈 때 이어폰을 챙기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됐다. 특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멀리 가야 할 때, 이어폰은 필수품이다. 눈을 가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귀는 막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전철 스크린도어에는 무슨 기준으로 골랐는지 알 수 없는 시가 쓰여 있고, 손잡이부터 의자까지 눈 닿는 곳마다 형형색색 요란한 광고판으로 가득하니 어디 한 곳 편하게 눈 둘 곳이 없다.

물론 이어폰을 끼고 있다고 해서 머리 위로 광고 전단지를 쓱 붙이고 사라지는 사람, 사연을 담은 쪽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 사람,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사람들까지 피해가긴 어렵지만 고육지책이다. 지하철에서 내렸다고 끝난 게 아니다. 출구까지 가는 길도 지난하다. “선진국도 우측통행을 한다”, “에스컬레이터는 한 줄로 타라”, “운동할 시간 없으시죠?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대한민국 모든 곳이 운동이 됩니다”. 안내인지 계도인지 알 수 없는 문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하다못해 계단도 말을 한다. “당신을 위한 건강 디딤돌, 저는 계단입니다”, “헌혈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도심을 벗어나면 괜찮을까? 집 앞 공원도, 울창한 산속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손바닥만 한 공원일지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훈수를 피해갈 수는 없다. ‘돗자리를 펴지 마라’부터 시작해 ‘금지’된 것들은 차고 넘친다.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 텐트 설치 금지, 낚시 금지, 야영 및 취사행위 금지…. 금지의 이유가 되는 관련 법률과 어겼을 때의 벌금, 관리 주체까지 빨갛고 커다란 글자로 적힌 현수막들이 곳곳에서 나부낀다.

얼마 전에 다녀온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기억이 떠오른다. 국립공원 내에 수많은 나무가 있었지만, 어느 나무에서도 인위적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네 뒷산 나무에도 형형색색 산악회들의 리본이 달려 있는 것에 익숙했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5시간 가까이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산불 조심’, ‘흡연 금지’ 등과 같은 현수막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일부러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넓은 공원을 어디에서 관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트레킹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탄 보트도 마찬가지였다. 환경 보존을 위해 전기로 움직인다는 보트는 단순함 그 자체로, 어디까지 간다는 안내 문구판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출발 안내는 없었지만, 보트는 정확하게 안내판에 적힌 시간에 맞춰 사람들을 태웠고, 시간이 되자 출발했다. 햇빛은 따뜻했고, 호수는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들 역시 고요히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인형을 안고 타이타닉을 한 장면을 연출하며 키득거리던 아이들도 사진을 찍고 나자 조용해졌다.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 새 소리, 물결도 일렁이지 않는 호수를 가르는 보트 소리뿐이었다. 호수는 호수 가득 산과 구름과 하늘을 담고 있었고, 보트는 조용히 그 호수의 풍경 속을 흘러갔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고요는 계속되었다.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깨끗했다. 어떠한 안내도, 홍보성 멘트도 필요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평화로웠다.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시민들이 지난 21일 오후 강남역 살인사건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젊은 여성이 살해당했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 혐오 범죄에 희생된 한 젊은 여성을 애도하는 공간이 됐다. 그런데 이 작은 추모의 공간이 불편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바로 그런 불편함의 정서가 정당하고 당연한 추모와 애도에는 ‘유난스럽다’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게 하고, “여성이 무시했다”는 가해자의 말 안 되는 이야기는 분석을 거듭해 이유를 찾게 만드는 원동력일 터다. 어떻게 보면 강남역 10번 출구야말로 거리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계도성 현수막이 정말 필요한 곳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에서 버젓이 폭력을 자행하는 세력들을 방조하는 지금의 상황이 참담한 이유다. 광고가 듣기 싫으면 이어폰이라도 낄 수 있지만, 이 악다구니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걸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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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찾은 외국 스타들의 인터뷰어로 활동한 한희준과 에릭남이 게스트로 나온 TV 토크쇼를 봤다. 에릭남은 15개월 만에 새 앨범이 나와 리포터를 그만두었다고 말했고, 한희준은 인터뷰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해 3개월 만에 하차하게 됐다고 했다. 이후 서로의 인터뷰를 과장되게 재현하고 마무리됐다.

어쨌건 결론은 에릭남. 인터뷰를 몇 개 찾아봤다. 에릭남은 인터뷰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유도해 냈다. 에릭남의 인터뷰에는 “김치 좋아하세요?” 따위의 질문이 없었다. 보는 이가 부끄러워질 바로 그 질문이 안 나오는 인터뷰가 모두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단체 사진 찍을 때 ‘파이팅’ 구호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말처럼 비정상의 정상화가 중요하다.

“김치 좋아하세요? 싸이 아세요? 말춤 춰 볼까요?” 우린 이런 상투적이고, 일방적이며 무례한 질문들과 함께 살아간다. 질문을 바꿔볼까? “애교 부탁해요. 섹시 댄스 보여주세요.” 앞 질문은 국가주의의 극단이고, 뒤의 질문은 남성중심주의 극단이다.

완전히 다른 질문처럼 들리지만 두 질문 모두 내가 속해 있지 않은 타자들을 만나 발화한다. 놀랍게도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 상대방은 어쨌든 한국을 사랑해야 하는 외국인과 가끔은 섹시하기도 한 국민여동생으로 일반화돼 소비된다. 다른 것 같지만 국가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한 몸에서 나온 두 머리를 한 괴물이다. 약해 보이면 물어뜯는다.

발렌타인데이(2월14일)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한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13일 서울 중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돌아보고 있다._강윤중 기자

걸그룹 멤버인 설현과 지민이 이 괴물에게 물렸다. 생방송에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누군지 몰랐다. 잘 걸렸다. 모두 달려서 물어뜯자. 아이돌의 역사의식 부재를 지탄했고,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도 채우라는 훈수도 나왔다. 외적인 것, 그러니까 몸매를 만들고, 칼 군무를 연습하는 일 따위를 말하는 것 같다.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 노력과 고단한 삶은 리얼리티 쇼프로그램에서 훔쳐볼 수 있었다. 무려 국민 프로듀서들에게 선보일 노래를 연습하기 위해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소녀’들이 매번 밤을 새우는 걸 볼 수 있었다. 몇몇은 탈진해서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기계처럼 맞아 돌아가는 칼 군무는 가학적인 수준의 연습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성 연예인들에게 강요되는 비현실적인 몸매 역시 고통을 통해 깎인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외적인 것들을 채우는 노력만큼 내적인 것들도 채우라는 말이다.

내적인 것을 채우라고 요구하기 전에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여주고 누구인지 맞히라고 요구하는 질문이 정당한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한두개의 질문으로 상대방의 사상을 검증할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외적인 것이건, 내적인 것이건 뭔가를 빼거나 채우거나 우리가 참견할 문제도 아니다. 그녀들을 개인으로 존중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유독 만만한 이들에게만 가혹하다.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갖추어야 할 사람들이 어디 설현과 지민뿐일까.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두 여자 아이돌은 국가주의의 이빨 앞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급기야 무대 위로 올라 사과를 한다. “무지야말로 가장 큰 잘못임을 배웠다”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고, 또 불편을 느꼈을 분들에게 마음속 깊이 죄송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건 독립운동가 사진을 구분하지 못한 아이돌이 해야 할 사과가 아니라 세상을 엉망으로 만든 누군가들이 해야 할 사과다.

우리 주변을 배회하는 두 머리의 괴물은 언제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있다. 나와 다른 걸 인정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주체적 개인이 아닌 무언가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때 두 머리의 괴물이 너와 나를, 우리 공동체를 집어삼킨다. “김치 좋아하세요? 싸이 아세요? 말춤 춰 볼까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다면, 다른 일에도 괴물이 되지 말기를 노력하자.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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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모든 피해자들은 유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한국사회에서 피해를 입으면 어떻게 되는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악순환을 발생시킨다. 피해자들을 모욕하면서 그들의 상처를 헤집어놓은 까닭에 피해자들은 이미 겪은 사건의 상처에 더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한다.

아무리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터져 나오는 피해자들의 이상행동을 두고 사회는 그들이 원래부터 이상하고, 사실상 피해를 당할 만했으며, 피해를 빌미 삼아 사회에 기생하려는 파렴치한 존재였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이렇게 피해자를 괴물로 만들어 놓고 사회는 그들에게 발생한 불행이란 결국 그들 자신의 것이었으니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손을 씻는다. 즉 피해자를 모욕하고, 괴물로 만들고, 그들에게 발생한 불행을 사사로운 것으로 만드는 게 오늘날 한국사회가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의 전형이다.

어쩌면 사형제도보다도 훨씬 더 잔혹한 이 과정에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침묵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공갈협박 효과라고 보는 것이 맞다. 불행을 입에 담지 말고, 불행을 피하고, 오로지 안전하게 초원 한가운데를 거니는 양떼의 무리에 끼어 있는 것만이 중요해진다. 종종 피해자 본인보다도 더 비대해진 피해의식을 갖게 된 ‘잠재적 피해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무균실로 만들고 싶어 한다. 불행의 작은 씨앗이라도 달라붙을까 전전긍긍하며, 국가를 상대로 ‘안전’과 ‘더 큰 권력’을 기꺼이 맞바꾸려고 한다.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 회원들이 '해수부 공무원의 세월호 유가족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_경향DB

불행을 피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들은 점점 강박적 조치로, 결벽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합리적 세계를 만들라는 합리적 요구는 점점 증폭되어, ‘무통’한 사회에 대한 요구로 바뀐다. 고통도, 트라우마도, 불행도 없이 오직 평온과 안락만을 제공하는 어떤 세계 말이다. 그러나 어떤 시스템도 모든 불운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되레 점점 늘어나는 위협요인들의 목록을 보며 왜 간편하게 자살을 택하면 안되는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불행을 우리들의 삶으로부터 몰아내려는 모든 호들갑은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그 호들갑의 효과는 뒤따라올 좌절보다도 더 큰 것이다. 우리가 강박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은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세계관은 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설 수 없도록 만든다.

인간을 지금 맞이한 불행과 다가올 불행에 의해 규정된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만남이 아니라 폐절과 고립으로 이끈다. 작은 상처에도 쉽게 굴복하고, 새로운 것과 다른 것을 피하게 한다.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가능성들은 질식한다. 결국 그 어떤 피해자도, 또 예비적 피해자도 구제하지 못한 채 사고사와 폐사만이 유일한 미래로 주어진다.

물론 예비할 수 있었거나, 막을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까지 해결하려는 노력을 멈춰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숙명적인 불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불행을 우리 삶과 사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호들갑을 떨거나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의 창문으로도 날아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불행을 맞아들인 이웃을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혹여 나에게도 날아들지 모르는 불행에 맞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최태섭 |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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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버나드 샌더스 상원의원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이길 가능성은 없다. 이번 미국 대선은 힐러리 대 트럼프 구도로 전개될 예정이다.

그런데 미국 대선 경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도널드 트럼프, 혹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비웃거나 비판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동시에 ‘버니’ 샌더스를 열렬히 옹호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트럼프는 극우적인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인기몰이를 하는 포퓰리스트이고, 반대로 샌더스는 진정성 있게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쪽을 비판하고 한쪽을 옹호하는 것이 왜 ‘흥미로운’ 현상일까? 왜냐하면 트럼프와 샌더스는 모두 미국인들의 어떠한 정서를 좌우 양쪽에서 대변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인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문제는 그들이 대변하는 정서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억울함’이다. 1945년 역사학자 이안 브루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0년”부터 최근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인들은 억울해하고 있다. 트럼프 열풍, 샌더스 열풍은 동일한 대중적 에너지가 발현된 두 개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민자와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앞세운다. 샌더스는 무슨 질문을 받더라도 ‘그것은 월스트리트가 부를 독점하고 그 밖의 99%를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전혀 만나는 지점이 없어 보인다.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4일(현지시간) 켄터키주 볼링그린에 있는 지역 선거캠프를 찾아 자원봉사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볼링그린_AP연합뉴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그들이 의존하는 대중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방위력에 무임승차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샌더스는 미국이 일본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체결해 대기업의 배만 불리려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안보건 경제건, 바깥 세계와 담을 쌓자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것을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여긴다. 전 세계의 기업들이 미국 시장 진출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자국 영토 외의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잠자는 거인’이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그 거인은 깨어났고,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됐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와 그 안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 무역 체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방위분담금을 전부 대한민국이 지불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보며 한국인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미국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공산품을 중국이나 그 밖의 저임금 국가가 아닌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샌더스의 말은 어떠한가. 전자만큼이나 후자 역시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열강들은 샌더스의 말처럼 자국 경제 보호를 위해 식민지를 중심으로 ‘블록 경제’를 구축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세계 경제의 파이 자체가 줄어들고 있었기에 열강들 역시 불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고작 한 세기 전의 일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샌더스를 응원하는 것은 마치 ‘미국의 좌파’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들이다. 샌더스가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며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후련한가? 그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억울해하는 미국인들의 고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은 공포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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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생 문학평론가 김현은 1970년대 후반에 발표한 어느 에세이에서 아파트의 평면적 실내 구조와 동질화된 일상 문화를 비평적인 시선으로 응시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아파트는 하나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중산층의 사고 양식”이라는 것. 지방 중소도시의 구중산층 출신으로 결혼 후 서울 연희동의 단독주택과 여의도의 전세 아파트를 거쳐 반포의 32평 아파트에 당도한 신중산층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속한 계층의 행태를 성찰한 결과였다.

그러면 김현과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신중산층과 아파트의 결합 양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1985년의 인구센서스 자료를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서울 강남 거주 20세 이상 인구는 약 45만7000명이었고, 전문대 이상 대졸자는 19만3000명으로 전체의 약 42%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강남 거주자 10명 중 4명이 대졸자였던 셈이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1975년 통계와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당시 강남에 거주하던 20대 이상의 인구 약 16만9400명 중 대졸자는 약 1만9700명으로 전체의 약 12%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10년 동안 무려 17만여명의 대졸자가 강남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령대별 대졸자의 강남 집중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1985년 기준, 30대 거주자 13만5400명 중 대졸자는 6만9100명이었고, 40대 거주자 11만2000명 중 대졸자는 6만1500명이었다. 모두 50%를 넘어선 수치였다. 또한 김현이 속한 서울 거주 1940년대생 대졸자 중 약 27%가 강남에 거주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사무 관리직의 임금 상승과 재형저축제도,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를 활용해 강남에서 ‘내집 마련’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생전 모습._문학과 지성사 제공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1985년의 12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강남구에서 신민당과 민한당의 후보가 승리했고 민정당의 후보는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두 야당은 신흥 부촌으로 급부상하던 압구정동에서조차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반면, 민정당은 내곡동, 세곡동 등 강남에서 비교적 낙후된 지역에서만 겨우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신중산층과 아파트의 관계는 한 단계 더 진척되었다. 3저 호황의 영향으로 시중에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이 돈의 상당 부분은 부동산으로 몰려들었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전국의 땅값은 매년 10%, 27%, 39%씩 올랐다. 그중 가장 가파른 기울기의 가격 상승 그래프를 그린 것은 바로 강남의 아파트였다. 1985년에 9500만원대였던 압구정 현대아파트 48평 시세는 불과 4년 뒤 3억3000만원대로, 그리고 4800만원대였던 반포주공아파트 25평은 1억5000만원대로 각각 세 배 넘게 상승했다. 결국 국민 일부는 지역에 따른 부동산 오름폭의 차이를 응시하며 정부가 주장하던 “선 성장 후 분배론”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도성장의 ‘보너스’가 부동산 시세차익의 형태로 강남과 비강남, 특별시와 광역시, 도시와 시골 등에 따라 차등 배분된다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학력과 아파트가 계층상승의 방정식에서 지대 추구형 변수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점에 정부는 주택난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토지공개념’ 관련 개혁 법안과 수도권 신도시 개발안을 내놓았다. 1970년대 말에 특혜 분양으로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입주했던 경제기획원 출신의 1939년생 고위 관료가 주도한 것이었다. 또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동남 공업지역의 중공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자 임금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를 앞두고 중산층 진입의 게임이 업그레이드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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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을 전공하고 ‘엘포’라는 이름으로 만화를 그리는 잔카를로 아스카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상상의 힘을 믿고, 행복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2012년에 이탈리아에서 출판됐고, 우리나라에는 2015년에 번역됐다. 엘포의 표현을 빌리면 “지상 최대의 식물원 안에는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있고, 동산의 한가운데에는 멋진 오아시스”가 있는 “환경친화적인 장소”인 ‘에덴동산’에서 시작한 이상향에 대한 탐험을 시작한다.

에덴동산이 환경친화적이라면, 12세기 프랑스의 짧은 시에 등장한 ‘코카인 나라’는 파마산 치즈 가루로 되어있는 산이 있고, 와인이 흐르는 강이 있으며, 우유와 꿀로 된 호수가 있고, 보석이 열리는 나무가 있는 곳이다. 결정적으로 일을 하지 않아야 돈을 벌고, 일을 하면 감옥에 간다! 1516년 영국의 대법관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인류의 욕망을 문자로 구체화한다. 유토피아는 재산을 공유하고, 필요한 모든 걸 무상으로 제공받으며, 하나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소유욕을 방지하기 위해 십년에 한 번씩 사는 곳을 바꾼다.

작가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에 나오는 텔렘수도원은 자고 깨는 시간이나 일하거나 먹고 마시는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 게으르고 멋대로인 공동체는 가르강튀아가 제정한 지원금으로 유지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베네수엘라 해안 근처에 표류해 무인도에 들어가 28년을 살게 된다. 다니엘 디포는 <해적들에 대한 이란 역사>라는 책에서 17세기 인도양에 세워진 자유롭고 평등한 국가 리베르탈리아를 그렸다. 여기까지는 모두 가상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상상의 공동체를 구체화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1890년 1월20일 제노바에서 출항한 ‘치타 디 로마’호를 탄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브라질에 도착해 체칠리아라는 공동체를 건설했다. 전염병과 회계담당자의 도주로 4년 만에 공동체가 해체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1693년 스위스에서 야콥 아만에 의해 창설된 단순하고 엄격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아미시는 19세기 초 신대륙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검소하며 겸손한 규율을 지키며 살고 있다.

1928년 건축가 헬만 죄르겔은 지브롤터와 시칠리아, 튀니지를 거대한 제방으로 연결해 새로운 땅을 만들려는 아트란트로파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자신의 국경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상상한 것이다. 히틀러는 평화로운 공간을 꿈꾸는 상상력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1963년 피터 슈만과 밥 에른스탈은 뉴욕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 ‘브레드 앤 퍼펫 시어터’를 창립했다. 이름처럼 그들은 빵을 만들어 나누었고, 인형극을 공연했다.

1968년 5월1일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이 아드리아해의 바다에 기둥을 세워 20m×20m의 공간을 만든 뒤 독립국 ‘장미섬 에스페란토 공화국’을 세웠다. 냉전시기 동과 서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신생 공화국은 1969년 2월11일 이탈리아가 설치한 폭탄과 26일 불어닥친 폭풍우에 결국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973년 히피족 젊은이에서 히피족 부모들이 됐다. 리즈 크리스티와 그린 게릴라 그룹은 뉴욕의 버려진 공간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었다. 엘포는 “그들은 도시의 부패에 투쟁하기 위해 괭이와 갈퀴를 무기로 휘두르는 것에 반대하는 학생, 주부, 전문직 종사자, 은퇴한 사람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한다.

건국대와 국민대의게릴라 가드닝 동아리 회원들이 식재한 꽃에 물을 주고 있다. _경향DB

게릴라 가드닝은 런던, 코펜하겐, 밀라노까지 확산됐다. 상상의 힘은 시대에 맞게 변주되지만 모두 함께 적당히 일하고, 즐겁게 휴식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아! 이 책 제목은 <엘포의 유토피아 기행>이다.

“그래, 그래, 우리로 인한 승리! 우리는 사회적 권리를 찬양한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우리의 이상은 승리를 거둘 것이다.”(체칠리아 공동체의 노래)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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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이 청주 흥덕구 선거구에서 제2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19대에서는 비례대표로 의정 활동을 했던 도종환 시인은 이번 20대에서는 지역구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셈이다. 어쨌든 이로써 도종환 시인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문화예술계를 의원 한 명이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는 여야 모두 비례대표 후보 당선권에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다. 게다가 공약집에도 그와 관련된 공약 한 줄 제대로 된 것이 없으니, 작금의 정치가 문화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배제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시인이 정치를 한다? 허무맹랑한 말만은 아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위해 ‘시인 추방론’을 논했다. 그는 시인(화가)은 모방을 통해 세계를 재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본질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불필요한 집단이라고 규정했다. 한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그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집단은 엄밀히 말해 ‘시인’이 아니라 ‘수사학자’였다. 당대 헬라의 청년들은 수사학을 통한 교육법에 매료돼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재현을 통해 진리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사학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 있었던 것이지, ‘시인 그 자체’를 부정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러니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과 <정치학>을 통해 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을 시사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이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당대 청년들은 시(예술)를 사랑했기 때문에 플라톤은 끝끝내 시인을 추방할 수가 없었다. 그때가 아니라 지금의 관점에서 이 논의들을 이해해보면 어떨까. ‘시인(예술가)들이 살 수 없는 국가는 야만’이라는 것! 더 나아가 예술의 윤리적 관점을 이해하고 있는 시인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인이 정치를 해야 한다? 이 말이 위험한가?

도종환 의원이 2015년 10월16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들고 질의하고 있다._경향DB

그럼 동양에서는 어땠을까. 송나라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9년(958년)에 유입돼 비로소 조선 건국 공신들이었던 사대부들에 의해 정착됐다. 이때의 과거제도는 창작된 시문을 통해 국가의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봉건 질서와 현재 풍토를 그대로 비교해서 논해볼 수는 없겠으나, 세습이 가능했던 음서제도에 반발하는 측면에서 과거제도를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즉 양인 신분 이상의 응시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보장한다는 제도적 장치라는 것. 게다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정치를 해도 좋다는 생각이 과거제 내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용사(用事)의 활용이나 그 유교적 의미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당대 시문은 글쓴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었다. 다시 말해 선발된 인재의 ‘청렴도’나 ‘학문적 성취’, ‘삶에 대한 태도’를 시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고 당대에는 믿었다.

이것이 지금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정치인에 대해 의혹이나 혐의를 제기할 때, 여기 나열한 부분들이 거의 전부가 되고 있지 않은가. 측근비리, 본인이나 자식의 병역특례, 범죄이력, 납득이 되지 않는 재산 정도, 당선 전후로 달라지는 태도 등은, 어떨 때는 그간의 정치적 행보와 공약 수행 능력보다도 인물을 평가할 때 더 예리한 잣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정치인에 대해 능력과 정치관만큼이나 그들이 가진 윤리성을 여전히 평가하고 싶어 한다. 윤리적인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여소야대 정국이다. 겉으로는 야당의 승리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4월16일. 여야 지도부는 당 차원의 세월호 추모제 참석에 관해서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선거철에는 하루 스무 곳도 넘는 지역구를 돌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했던 이들이 말이다. 정쟁이나 득실을 논하기 전에, 정치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가운데 가능한 일이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이렇게 또 속으면서 지켜보기로 한다. 사람의 꽃이 필 때까지.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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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일정을 미루고 집에 일찍 들어왔다. 주말은 ‘위데이’, 바로 <위장자:감춰진 신분>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종영한 <태양의 후예>를 방영하는 수·목요일이 ‘태후 데이’였다던데, 내게는 ‘위데이’가 있다. 방영 시간을 챙겨가며 중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중국 드라마는 <포청천>과 <황제의 딸> 외에 본 것이 없었고, 편견도 심했다. 촌스럽고, 재미없고, 유치하고, 과장된 액션까지…. 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보게 된 <랑야방: 권력의 기록>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리모컨을 돌리다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정주행을 하고도, 54화가 끝나는 순간 다시 1화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랑야방에서 정왕 역을 맡은 배우 ‘왕개(왕카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원래 드라마나 영화가 좋으면 반복해서 즐기긴 해도, 며칠 그러다가 넘어가는 편인데 이번엔 달랐다. 어쩌다 본 중국 드라마에서 이렇게 ‘덕통사고(덕후+교통사고의 합성어로 덕후가 된 계기를 뜻함)’를 당할 줄이야! 이 나이에 연예인을 좋아하게 되다니, 그것도 외국배우를!

배우 한 명이 좋아졌을 뿐인데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일단 중국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다. 전혀 모를뿐더러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공부한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가끔 알아듣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어찌나 기쁜지! 중국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중국의 근대사에도 관심이 생기고 있다.

배우 송중기, 송혜교가 출연하는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 OST 앨범 표지

드라마가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중국의 항일운동을 다루고 있고, 주인공이 친일파와 국민당, 중공지하당을 넘나드는 3중 첩자로 설정된 덕에 뜻밖에 역사 공부까지 하고 있는 참이다. 그뿐인가?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도 가입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배우가 바쁘면 팬들도 덩달아 바빠지기 마련. 드라마 외에도 볼 게 많다. 매일 사진과 각종 영상이 업데이트되고, 체크할 사이트는 늘어만 간다. 2차 창작에 팬아트, 사고 싶은 굿즈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세상은 넓고 능력자는 많다는 말이 실감 난다.

친구가 김연아 선수의 마지막 경기라며 소치 올림픽에 다녀오는 걸 보면서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경기 한 번 보겠다고 러시아까지 가다니’…. 내 친구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왕카이가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영상을 처음 본 날, 하루종일 너무 기분이 좋았다.

퇴근하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영상을 틀어놓고,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받아적고, 뜻을 찾느라 끙끙대는 모습을 본 동생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민망하긴 하지만 좋은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좋아하는 배우가 10년 무명의 세월을 견딘 힘으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응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겁다.

요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중드’ 영업은 물론이고, “이 배우에 빠져 산다”는 자랑을 잊지 않고 있다. 심드렁한 사람도 많지만, 의외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나이를 먹을수록 모든 게 심드렁하고 너무 좋아서 설레는 감정도 느껴본 지 오래됐는데, 기쁨을 마음껏 드러내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나? 나 역시 누군가를 목적 없이 좋아하는 내 에너지가 다른 사람에게 닿는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선배 덕후의 책 <어쩌다 어른>에는 “좋아하는 것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 나만 아는 기쁨을 점점 늘려가는 삶. 그것만으로 썩 괜찮아 보인다”는 구절이 나온다. 맞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초보 팬의 무(無)해한 덕질은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된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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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 정당의 고집불통 지지자였다. 진보 정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총선에서 자신이 속한 지역구에 진보 정당의 후보가 없으면 민주당 계열에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대선은 중요한 무대니까 잠시 내 정치적 의지를 접어두고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 역시 흔한 패턴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 내가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 정당, 후보에게만 표를 주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백지 투표를 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는 그러한 신념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새삼 ‘전략적 유연성’을 추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진보 정당들이 보여주는 ‘이념’ 중 그 무엇에도 전적인 동의를 표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순서에 따라 기호 4번 정의당부터 짚어보자. 지난 7일, 경찰은 네덜란드와의 국제 공조수사를 통해 ‘소라넷’의 핵심 해외 서버를 폐쇄했다고 발표했다. 소라넷은 몰래카메라, 도촬, 사적인 모습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공개하는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가 올라오는 성인 사이트다. 속칭 ‘골뱅이’라는, 심신상실 상태에 빠진 여성에 대한 강간 모의와 실행 ‘인증’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랑 사귈 때에 너는 저런 체위 한 적 없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내 꼬추가 더 크다”고, 정의당과 총선 홍보 영상 및 공식 테마송 협약을 맺은 ‘중식이 밴드’는 노래했다. ‘야동을 보다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노래는, 위에서 우리가 말한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를 보던 남자가 자신의 옛 여자친구를 발견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내용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의당은 여성위원회를 앞세워 사과의 말을 전했으나 어떤 후속 조치도 없다. 공개된 당원게시판에서 당원들이 목청 높여 반여성주의적, 심지어 성폭력에 가까운 언사를 내뱉는데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고 있다. 정의당의 공식 홍보 밴드는 ‘소라넷 보는 남자’의 입장에서 쓰인 노래를 부른다. 소라넷에 대한, 여성 인권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무엇인가?

정의당 심상정 대표와 '중식이밴드' 멤버들이 총선 테마송 협약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_경향DB

투표용지를 한참 훑어내려가면 기호 14번 노동당이 나온다.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여성 인권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마포을 선거구에 출마한 하윤정 후보의 경우 대단히 적극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선거구는 마포을이 아니다. 정당으로서의 노동당을 평가하기 위해 선거 공보물을 펼쳐든다. 한숨이 나온다.

노동당은 “재벌증세 기본소득”을 핵심 구호로 내세우고 있다. 증세는 복지 확대를 위해 필수적이므로 원론적으로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본질적으로 ‘작은 정부 옹호론’이다. 진보 진영에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절대악으로 상정하던 ‘신자유주의’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국가 기구를 축소하고 보다 효율적인 시장을 통해 복지를 실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판을 하면 기존의 복지는 그대로 두고 재벌에만 세금을 거둬서 나눠주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재벌증세 기본소득’이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5000만 국민에게 월 3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연간 180조원이 필요하다. 2015년에 정부가 고용, 보건, 복지에 지급한 총예산이 115조7000억원이다. 나는 노동당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이런 공약을 내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기호 15번 녹색당도 마찬가지다. 녹색당은 ‘탈핵’과 ‘탈성장’을 정책의 근간으로 삼는다. 원론 차원에서 재생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탈성장’이다. 안타깝게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다. 녹색당은 실업률을 끌어내리고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20대 총선의 풍경이다. 진보 정당들이 여성 인권 문제를 회피하고, 구체성 없는 ‘대안’을 주워섬기며, 대중적 분위기만 좇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의 문제를 올바로 파악, 구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진보 정치 운동을 희망한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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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 되면 기분이 묘해진다. 언론, 정당, 국가가 갑자기 나를 다섯 살짜리 취급하기 때문이다. 선거법도 그렇다. 선거법 안에서 유권자는 판단력을 갖춘 시민이 아니라 미풍에 흔들리는 갈대다. 선거법은 유권자와 후보자가 최대한 만날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이 선거에 대해서 최대한 의견을 표명할 수 없도록 막는다.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선거를 치르던 시절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는 하지만 부자연스럽고, 제한적이다.

그뿐인가, 이번의 1여다야 구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우리의 선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맹점이다. 한 정당이 40%의 득표를 했다면 그 정당은 40%의 의석을 가져가야 하지만, 현실은 40%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과반을 넘어 개헌선을 바라보는 실정이다. 선거제도가 유권자들의 소신투표를 방해하고 실질적인 선택 압력을 넣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구도 안에서 국민은 제도정치와 정치인들을 믿지 않고, 그들 역시 국민을 믿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여 자극과 반응, 더하기와 빼기로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정치공학이다. 이는 다분히 현재의 선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기만적 요소들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선택을 가장 비정치적이고 기계적인 중립적 방식을 통해 해야 한다는 모순이 현 제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구도는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자원과 정보를 가진 대규모의 집단이 명백히 유리하다. 거대 양당이 선거법 개악에 합의하기로 한 것도 결국 빤히 보이는 계산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그간 현실을 압도하는 수많은 고통들에 대해 해법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하나의 단순한 주장이나 요구도 제도정치의 블랙박스를 거치고 나면 정반대의 주장이 되곤 한다. 청년을 위한 비정규직 확산, 테러를 막기 위해 자국민을 무제한으로 감청하는 테러방지법 같은 것들처럼 말이다. 정치공학이 막고 있는 것은 결론으로 나가기 위한 치열한 과정, 즉 정치 그 자체다.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인간도 보이는 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그런 인간들이 모인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공학은 사회의 단면도를 보고 이야기하지만, 그 단면도는 하루하루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여론조사처럼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기 어렵다.

총선을 사흘 앞두고 각 당이 총력 유세를 펼친 10일 서울 홍익대 앞에서 시민들이 한 후보의 유세를 지켜보고 있다._강윤중 기자

우리의 정치제도가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끌어안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품 안에 있다. 지금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스스로의 현재와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결정할 권한을 가진 이들이다. 물론 우리의 필요와 요구가 알아서 제도정치에 반영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상당부분을 포함해 우리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손에 있는 것은 투표권만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국가를 중지시킬 수도 있고, 경제구도를 뒤바꿀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 별다른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민주공화국의 시민이기만 하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기로 결심한다면 결국에는 해낼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거나, 안주하거나, 때를 기다려야만 할 이유가 없으며 언제든지 박차고 나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죄를 지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그 고통을 너무 쉽게 용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궁극의 권한에 대해 까맣게 잊곤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미래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태섭 |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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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권 이후 야권의 선거전략은 ‘정권 심판론’을 기본 골격으로 야권 후보 단일화와 2030세대 투표율 높이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보인다. 적어도 평범한 유권자의 시선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과연 그런 바람몰이식 전략이 유효한 것일까? 선거철마다 패배의 경험을 반복하다보니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2012년으로 돌아가 보자. 많은 이들이 야권의 승리를 점쳤던 19대 총선에서 집권여당은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눈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었지만, 조심스럽게 승리의 가능성을 점치는 희망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논리는 ‘덧셈’이었다. 그러니까 비례대표의 득표 결과를 계산해보면,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의 득표율 합계가 46.03%인 반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득표율 합계는 46.75%라는 것, 즉 초박빙의 승부가 예측된다는 것이었다.

8개월 뒤 대선이 치러졌다.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안철수 후보의 사퇴로 야권 후보는 단일화되었고, 2030세대들은 이번만큼은 젊은이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투표장으로 향했다. 당일 오후 5시, 전국 투표율이 2002년 대선의 투표율이었던 70%를 넘어서자 야권 지지자들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적어도 지상파 3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 말이다.

개표를 마친 다음날 새벽 1시경,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시종일관 앞서던 집권여당 후보는 출구조사의 예측치보다 더 큰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108만표 차였다. 68.5%와 70.0%의 20대와 30대 투표율, 92.0%와 89.3%의 광주와 전남 지지율, 39.9%와 36.3%의 부산과 경남 지지율이라는 성과를 얻었음에도 야권 후보는 패배했다. 그러니까 전략대로 선거를 치르고 역대 최다 득표를 기록했음에도 승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4·13 총선 야권 후보 단일화 진행상황(29일)_경향DB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50대 유권자의 급격한 보수화를 지목했다. 실제 출구조사 결과로 계산해보면, 82.0%의 투표율을 기록한 50대 중 약 399만명이 여당 후보를, 약 239만명이 야권 후보를 지지했다. 약 160만표 차였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10년 전의 대선에서는 40대의 나이로 보수와 개혁 사이에서 힘의 균형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76.3%의 투표율을 기록했던 40대 중 약 288만명이 노무현 후보를, 그리고 약 286만명이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그렇다면 이들 중 일부는 왜 10년이 지난 후 정치적 입장을 바꾼 것일까? 단순히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는 연령 효과 때문일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가파르고 그 규모 역시 지나치게 크지 않은가?

이들이 베이비붐 세대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1953~1962년생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이들 대부분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청소년기를 보낸 뒤 산업화의 흐름을 따라 대거 도시로 이동했으며, 1987년에는 20·30대의 나이로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한복판을 통과했다. 계층적 분화를 본격화한 시점이기는 했지만 당시 이 세대가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고 ‘87년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한 축을 담당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의 급격한 보수화는 1987년 이후 ‘민주화’라는 대의 아래 결집되었던 다양한 이해관계의 담지자들이 대오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은 아닐까? 이 대오의 또 다른 주축이었던 호남 유권자들마저 이번 총선에서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어쩌면 제1야당이 ‘87년 체제’의 설계자이자 지난 대선의 여당 참모를 비대위 수장으로 임명한 것도 이전의 정치 논리로는 세력 이탈을 막기 어렵다는 위기의식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거일이 다가오자 “단일화만이 살길”이라는 익숙한 구호가 또다시 반복 재생되고 있다. ‘87년 체제’의 전선을 구축했던 개인과 집단들이 양극화와 저성장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각자의 이해관계를 표명하고 나섰는데, 그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제1야당은 “우리는 ‘여전히’ 하나”라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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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1일 월요일 오후 5시23분 곽정숙 전 국회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1960년 봄이면 배꽃이 넘실거리는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5살 때 결핵성 척추염에 걸렸다. 의료보험 제도가 없던 시절이어서 재산을 다 처분해 수술했지만, 결국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책가방도 제대로 들기 어려웠지만, 초등학교에서 ‘겁나게 공부를 잘하는 애’였다. 너무 힘들어 중학교 1년을 휴학하고, 겨우 졸업한 후 전남여고 부설 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공부를 잘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에서 과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5공화국의 과외금지 조치로 그만두어야 했다. 라디오를 듣다 알게 된 여성회관에 나가 자수를 배웠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인 선교회와 연결되어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여성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자수를 지도하던 교사가 퇴직하며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광주지역장애인단체 연합회 일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 장애인들의 일상에서 겪는 (남성 장애인과 비교해도 더욱 심각한) 차별과 마주하게 된다. 여성 장애인들을 대변할 조직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광주여성장애인연합을 만들어 대표를 역임하고, 1999년 4월17일 출범한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의 중심에 서게 된다.(2002년에서 2007년까지 2, 3대 공동대표 역임) 그리고 2008년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된다.

당선자 신분으로 국회 기자회견실에서 발언하려고 단상에 섰는데, 단상의 크기가 곽 의원의 키와 비슷했다. 곽 의원은 척추가 굽어 키가 130㎝에 불과하다. 이후 의회에서 신상 발언을 신청하고 이를 지적했다. 얼핏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지만, 장애인들이 집, 학교, 시장 등 어디에서도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보편적 인권과 복지의 첫 삽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국회의원 임기 동안 2009년과 2010년 국회입법정책개발 최우수 의원, 2011년 입법정책 우수의원으로 선정되었다.

장애여성인권운동가 곽정숙 전 국회의원_경향DB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의정활동을 펼친 의원에게 시상하는 ‘공동선 의정활동상’(사회정의시민행동)의 첫 번째 수상자이기도 하며, ‘대한민국 반부패청렴대상’(반부패정책학회), ‘거짓말 안하는 정치인’(신라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81개 법안을 대표발의했고, 이 중 25개가 통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대에 통과시키지 못했던 ‘장애여성지원법’에 대해 아쉬워했다고 한다. 고 곽정숙 의원과 함께 4년을 보냈던 박선민 보좌관의 글을 인용한다. “돌아가시기 전날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는 20대 총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장애계가 점점 배제되는 상황을 걱정했었지요. 정치가 나빠질수록 약자의 시민권은 보장되기 어렵다는 걸 여실히 느끼게 하는 총선입니다. 장애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없을 것 같은 20대 국회에서 장애인의 보편적 권리 보장을 위한 법 제도 개선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비단 장애영역만이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모든 정책이 마찬가지입니다.”

20대 총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양대 정당의 비례대표 명단을 보면 1번은커녕 당선안정권에 장애인을 대표할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정치가 나빠질수록 약자에 대한 배려는 사라진다. 어디 장애인들뿐일까. 이 땅의 수많은 소수자들, 가난에 내몰린 이들,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이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의도적으로 그들의 시민권을 뺏고, 게토로 몰아낸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정치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세상의 방증이다. 그녀, 곽정숙은 여성장애인 의원으로 병을 얻을 정도로 의정활동을 했다. 우리 사회가 조금씩 좋아졌다면, 더 많은 곽정숙이 국회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녀, 곽정숙은 세상을 떠났다. 다가올 총선으로 떠들썩하지만 어디를 봐도 약자를 대표할 이름을 찾기 어렵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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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란 단어가 이토록 온기가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부턴가 ‘관심병’, ‘관심종자’라는 말이 회자되면서 ‘관심’을 둘러싼 의미역이 기이하게 굴절된 것 같다. 특히 웹상에서 보여주기 군중심리가 반영되면서 ‘관심’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의미는 때때로 소거된다. ‘상식 밖의 주목을 끄는 행위를 하는 것’이 관심이 되고, 그 관심을 소비하는 주체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관심병’을 앓는 이들이 그 소비를 충족해줄 수 있는 생산 주체가 되면서, ‘왜곡된 관심’의 사이클은 현재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중이다.


소위 ‘관심병’은 소셜네트워크상에서는 ‘페북스타’ 되기로 탈바꿈하는데, “저는 페북스타를 꿈꾸고 있습니다. 팔로우, 좋아요 부탁드립니다”라는 식으로 ‘좋아요’를 구걸하는 형태의 글로 나타나곤 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구걸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구걸이 아니다. 좋아요 몇 개면, “음식물 쓰레기를 먹겠습니다” “자동차 바퀴에 깔려 보겠습니다” “불똥으로 세수를 하겠습니다” 등등 불특정 다수에게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자해나 엽기, 혹은 범죄 행각까지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인터넷방송에서는 그 강도가 더 배가된다. ‘좋아요’와 다름없는 ‘별풍선’(토큰)은 실시간 시청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방송 시간 내에 받은 토큰 개수가 BJ에게는 수익을 의미한다.

그러니 방송으로 고수익을 올리기 위해 BJ들은 자극 수위를 점차 높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선정적 인터넷방송을 통해 토큰을 구걸하는 별창남, 별창녀라는 신조 비속어가 생긴 것도 다 이러한 사태 때문이다. 이쯤 되면, 관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본과 결합해서, 기이한 어떤 직업군까지 만들어 놓은 셈이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그들을 지칭해서 혐오하는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의 자극을 필요로 하는, 이런 기형적인 막장 상태가 지속된 지 오래됐다.

비단 삐뚤어진 관심유발의 문제는 웹상에서만의 일일까. 소위 특권계층이 가지고 있는 특권의식이 투사된 행동들은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굳이 이런 자극이라면 딱히 원하지 않는 데도 말이다

서울역 플랫폼으로 직행한 황교안 총리 승용차_한겨레신문 제공

KTX 서울역사에 진입한 국무총리의 의전수행 차량 정도라면 어떨까. 007작전을 방불케 하며, 역사 플랫폼에 진입한 에쿠스 차량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더 해볼 수 있을까. 이게 요즘 말하는 ‘관심병’이 아니라면, 상식선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재작년 말에 일어난 땅콩회항 사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주주로 있는 회사의 항공기라면 자기 마음대로 회항해도 된다는, 그렇게 법 위에 군림해도 괜찮다는 특권의식이 세계적인 관심을 유발하는 데 크게 성공했던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곧 선거 인쇄물들이 집으로 배달되어 오면, 우선 인상을 찌푸릴 각오를 하고 그것들을 펼쳐봐야 한다. ‘지역구를 위해 이런,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겠습니다’ 하는 홍보 섹션만큼, 거물이라 하는 정치인들과 손을 잡은 사진이나 동행 시찰을 하거나 걸어가는 사진 등등이 한두 섹션쯤 꼭 등장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합성까지 하면서, 자신이 힘 있는 정치인이라는 모습을 줄곧 드러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게 과연 웹상에서의 관심유발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모를 지경이다. 한데 무서운 점은 일꾼의 됨됨이보다 그런 모습에 더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풍토이다. 투표는 별풍선 주기나 좋아요 누르기가 아닌 데도 말이다.

‘관심’이란 단어의 긍정적 복귀가 언제쯤 가능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꼭 ‘다르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스테판 에셀이 <참여하라>에서도 시사했듯이, 우리가 처한 이 사회에서 참정하는 일만큼 우리에게 잠재된 위험을 타진해나갈 더 좋은 방법은 없는 셈이다. 4월13일 총선 투표와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날짜가 있다. 오는 4월16일은 세월호 참사 2주기이다. 특히 이날은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끝끝내 잊을 수가 없는 날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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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톱! 스톱!”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던지 목이 다 아프다. 또 그 꿈이다. 작은 방송사고를 경험하고 난 후부터 시작된, 생방송 중에 내가 큰 방송사고를 내는 악몽.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악몽의 버전은 다양하다. 버튼을 잘못 눌러 앵커 얼굴 대신 새까만 화면이 나가거나, 시간에 맞춰 자료화면이 오지 않거나, 편성표를 착각해 프로그램 시간을 틀리거나, 자막이 순서에 맞지 않거나….

상황은 달라도 매 순간 너무 생생해서 가슴이 철렁하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건 꿈에서도 마찬가지다. 집 전화가 울리면 자다 말고 방에서 뛰어나와 “네, 편집부입니다” 회사에서처럼 전화를 받아 가족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에게 방송국은 재미있는 직장이었지만, 그만큼 업무 강도가 높고 스트레스가 많은 곳이기도 했다. 방송사를 그만두고 나자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악몽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직장 사람들이 꿈에 등장하는 횟수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기억나는 꿈의 상당 부분은 직장, 혹은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관련돼 있고,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그 상황이 며칠 안에 어김없이 꿈에서 나타나곤 한다. 이미 나는 ‘하루 종일 아무 할 일이 없다가도 작은 낌새라도 보이면 내 존재를 온통 바쳐야만 하는 국경선의 보초병’ 같은 직장인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스스로 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는’ 일상을 원한다면, 주말 이틀을 위해 평일 5일을 바쳐야 하는 직장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선택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있는데, 평생 일하지 않으면 ‘노후 파산’을 걱정해야 할 만큼 살기 어려운 ‘장수의 악몽시대’가 아닌가? 각종 수치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입사원 절반이 1년 안에 회사를 그만두며(국회 입법조사처 신입사원 이직 현황), 지난해 20~30대 가구의 소득 증가율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통계청 가계동향)했다는 통계,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파견 노동을 하던 20대들이 메틸알코올 중독으로 실명 위기에 빠졌다는 뉴스 등은 악몽 운운하는 내 고민이 사치스러울 수 있다는 걸 새삼 일깨운다. 그렇다고 해서 나 같은 사람의 고민이 아예 가치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꿈을 가지고 직장에 들어오지만 막상 직장생활과 현실이 너무 달라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가상의 사직서를 써보면서 자신의 직장생활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은 사직서를 쓰는 모습을 연출해 찍었다._경향DB


최근 몇 년간 일과 직장에 대한 책들이 유독 많이 출간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초일류 사원 삼성을 떠나다> <소니 침몰> <사표의 이유> <사표사용설명서> <월간 사표> <두 번째 퇴사>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 <사축일기>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일개미자서전> 등까지 다양하다. 이 일련의 책들은 부품처럼, 노예처럼 사는 대신 ‘나’를 찾겠다고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과 실컷 쓰이다 버려지는 소모품이라도 좋으니 ‘회사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취직시켜달라는 사람들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갈팡질팡하는 어른들보다 청소년들의 판단은 훨씬 명확하다. ‘흙수저인 자신에게 오직 재능과 노력으로 금수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이, 정규직이 되기 위한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든, 다니지 않든 한국인들은 이미 세계 최고의 음주량과 최고의 노동시간, 최저의 수면시간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다. 서로의 노동력을 ‘갈아 넣으며’ 유지되는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사회에 누적된 피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와 쉼표가 절실하다. “잘 먹고 잘살려고 돈 버는 건데, 난 지금 충분히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스펙이 되지 않는 경험을 시도할 수 있고, 뭔가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이 늘어나고, ‘조금은 다르게’ 사는 삶의 모델이 많아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숨통은 트일 것이다. 매일 밤 꿈에서조차 회사에서 일하는 중인 많은 사람들의 잠자리도 좀 편해지지 않을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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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인공지능 알파고와 박근혜 대통령이 바둑 대결을 한다면? 당연히 알파고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세돌 9단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는 알파고인 만큼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판을 키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 전체를 무대로 삼아보는 것이다. 박근혜 대신 알파고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릇을 한다면 과연 누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나갈 것인가.

알파고가 화제라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이세돌 9단이 첫 고배를 마셨던 그 날부터 인터넷을 후끈 달군 주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이제 컴퓨터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인가?

여기서 잠시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논문의 해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알파고는 기존의 게임용 AI와 마찬가지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에 의존한다. 혁신적인 자기학습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의 바둑 기보를 연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례를 놓고 볼 때 좋은 수’를 추려낸다. 그리고 남은 선택지를 두고 계산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은 게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창의와 직관이 어떠한 종류의 계산 과정이다. 다만 사람은 그 계산을 “승부수, 감, 두터움” 같은 식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그에 대해 서봉수 9단은 이렇게 말한다. “수 자체를 모르니까 그냥 감각에 의존해서 이런 정도면 무난하지 않으냐, 이런 식의 표현을 하죠.”

<세기의 대국> 이세돌 9단과 알고리즘_연합뉴스

이번 대국에서 확인된 것은 바둑 역시 하나의 게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 포커, 화투, 체커, 체스, 오델로, 지뢰 찾기까지, 모든 게임은 규칙을 지닌 계산 과정에 의해 진행되므로,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룰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컴퓨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년층과 ‘여론 주도 세력’인 중장년층의 반응이 갈라진다. 컴퓨터가 인간의 고유 영역인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었다고 주류 언론은 연일 호들갑이다. ‘알파고 쇼크’에 우울증에 빠졌다는 시민의 목소리,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우려 등이 이어진다.

반면 청년들은 비교적 덤덤하다. 바둑은 게임이고, 언젠가는 컴퓨터가 최고의 프로 기사를 이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호들갑스러운 우려에 대해서도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천연지능’보다는 우리를 합리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우리 사장도 알파고로 바뀌면 좋겠는데?

자, 그러므로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박근혜 대 알파고. 과연 누가 더 대한민국을 잘 다스릴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확인한바, 알파고는 기존의 선례를 충실히 검토하고, 그중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던 사례를 따른다. 그 속에서 최선의 미시적 판단을 내린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훌륭한 의사결정권자의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합리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사람이 ‘인간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무서운가? 만약 당신이 의사결정권자에 가깝다면 인공지능이 두려울 것이다. 반대로 남의 의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계’가 나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시간과 데이터가 제공된다면, 알파고가 박근혜보다 더 나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심각하다며 기업들이 신입사원 초임을 삭감하도록 한다거나, ‘증세 없는 복지’를 운운하는 것 등은, 알파고의 눈으로 볼 때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난센스다.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국정 운영을 기대한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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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다른 개인이나 집단, 혹은 사회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다. 피해자는 그런 일을 겪을 이유가 없었음에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고,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무고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억울해할 권리가 있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잘못된 상황들을 바로잡아달라고 청원할 권리도 있다.

피해자의 대척점에는 가해자가 있다. 가해자는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존재, 혹은 그것의 원인을 제공한 존재이다. 따지고 보면 피해자보다 더 모호한 것이 가해자다. 피해는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명확한 사실임에 반해, 가해는 개인, 집단, 심지어는 제도나 법 같은 추상적인 것에서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악의나 자의가 아니더라도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고, 그래서 가해와 피해 사이의 정치는 복잡해진다. 거의 모든 종류의 분쟁에서 주체들은 피해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쓴다. 결국 누가 피해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진실의 영역인 동시에 정치적인 영역이다.

소비자는 값을 치르고 무언가에 대한 권리를 구매한 사람이다. 값을 치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온전히 소비자의 몫이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물건과 돈을 교환하는 것이지만, 물건이 아닌 서비스나 경험 같은 것도 구매의 대상이 된다. 더 복잡하게는 정책이나 이념 같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정치적 지지, 표, 심지어는 목숨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소비자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판매자다. 가장 일반적인 판매자는 기업이라는 형태로 존재하지만, 각종 사회단체, 정부와 같은 것들도 때때로 판매자가 된다. 그 정도에 차이는 있으나 판매자는 소비자에 대해 권리를 보장해줄 책임을 갖는다. 다만 판매자의 규모가 크고 권한이 많을수록 이 관계는 지배에 가까운 상태로 역전되기도 한다.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 추이_경향DB


어쨌거나 피해자와 소비자는 각각의 방식으로 권리를 획득했다. 이들은 오늘날 권력이 없는 자들이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정당한 경로이자 정치적 존재양식이다. 이들에게 마땅한 몫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에 이견을 갖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들을 취급하는 방식을 떠올려보면, 이들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이견을 갖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 주체들에게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동적인 방식으로만, 또 어떤 자격을 획득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 속에 갇혀 있는 유순하고 순진무구한 희생양으로서의 위치를 거부할 때,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자로서의 기능과 능력을 상실할 때 이들의 권리는 박탈된다.

때문에 피해자와 소비자는 확장과 연대의 주체라기보다는 제한과 고립의 주체다. 피해자는 순수성을 끊임없이 의심받는 가운데, 피해를 입은 개인의 존재 안으로 쪼그라들고, 소비자는 구매한 권리가 잘 작동한다면 만족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두 존재양식을 빌려 구현하려는 정치성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일견 강력해 보이지만 한 발짝도 밖으로 뻗어갈 수 없는 외침들은, 어긋난 전선과 거짓된 만족, 그리고 가해자들과 판매자들이 기획한 자중지란 속에서 허약하게 허물어진다.

피해자와 소비자를 비난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자신의 자격에 대한 자기검열이나 겸양 같은 것을 좀 내려놓고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슐러 K 르귄은 <빼앗긴 자들>에서 “존재가 정당성이며, 필요가 권리이다. … 죄책감은 착취자들에게 남겨두었다”고 썼다. 사실 나는 이 문장을 수식하기 위해 이 많은 말들을 했다.


최태섭 |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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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가 개봉 2주차에 접어들었다. 과도한 광고 전략이나 여타 상업영화들처럼 깡패 스크린 수를 가지고 밀어붙이기식 선택 강요를 하고 있지 않은데도, <동주>의 스크린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의 호평 덕분이겠지만 저예산 흑백영화에 있어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또 억압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윤동주의 실존이 현재 젊은층의 삶과 어느 정도 오버랩되거나 위로가 되고 있는 점도 분명 있다. 특히나 흑백 영상 속에 덧입혀진, 강하늘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윤동주의 시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큰 울림을 준다. 물론 그런 서정성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좀 더 적극적으로 <동주>를 느껴보자는 것이다. 청년 동주가 겪고 있는 억압의 현실이나 시대정신, 나약함, 인간애와 같은 것들이 그의 시어 ‘부끄러움’과 교차하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문해보자는 것이다.

한데 다른 경우도 있다. 이달 들어 베스트셀러 종합 10위권 내에 꾸준히 진입해 있는 복각본 시집은 또 어떨까. 세로쓰기와 옛서체, 옛글, 한자 표기까지 그대로 살린 복각본을 읽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20·30대 독자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판매부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영화 <동주>와 더불어 광화문 교보에는 윤동주 코너가 생기기도 했고, 복각본 중에서도 윤동주 시집이 가장 판매가 많이 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이 시편들을 잘 읽어내고 있을까. 타임라인에 노출된 조각난 구절들을 따지겠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읽히는 시’가 아니라 ‘보는 시’에 방점을 찍고 있는 이 출판사의 ‘빈티지풍’ 판매 전략은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초판이 출간됐을 때의 온전한 아우라를 복제품으로라도 느껴보고 싶은 독자들의 심리를 투영하면서, 시집에 대한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동주

나약하고 소소하고 그런 생활이 전부인 청춘들에게 영화 <동주>도 그렇고, 복각본 시집들도 그렇고,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위로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같은 ‘동주 현상’에 대해 조금의 불편을 말하자면, 생활을 잠시 정지시키고 위로하게끔 하는 ‘위약 효과’가 아니라 온몸으로 느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가령 복각본 시집을 주문하면, 경성우편국 속달인 봉투에 담아 대한제국 시절 우표와 혼마치 풍경이 담긴 엽서에 “제 시는 사랑받고 있나요, 그때쯤은 독립을 했을는지요” 하고, 세로쓰기를 한 엽서가 함께 배달된다. 윤동주 시집의 경우는 육필 원고철과 판결 서류 같은 것들이 보내진다. 향수도 좋고 판매도 좋지만, 온몸을 다해 ‘대문자 시인’이 되려고 애쓴 청년 동주를 생각해보면, 조금 끔찍하지 않은가.

안부를 물어오는 소월의 육성인 듯한 글귀도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월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가 사랑받고 있나요? 하고 물어볼 인물이 아니다. 각설하고, 소월이 가진 사랑론은 만남의 열렬함이 아니라 헤어질 수밖에 없음에 있다. 너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나의 지금을 끝끝내 봉인하면서, 그럼에도 갈 수밖에 없는 정동을 노래한 시들이 다수다. 이제 판권이 소멸된, 소월 또한 이런 현상을 알게 된다면 아무리 제 책이 많이 팔려도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 세대가 겪고 있는 정신적 내상과 그에 따른 탈출 심리를 발판 삼아 다른 욕심이 작용하고 있다면, 문화라는 거짓 이름표로 우리는 또다시 어딘가에 갇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이쯤되면 이건 위로도, 응원도 아니다. 아무것도 개선이 될 수가 없다. 어쩌면 위로나 응원이란 ‘김광진 힘내라’ 실시간 검색어 1위, 뭐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곳을 더 나빠지지 않도록 저항하는 방식으로라도 말이다. 더 힘내시라! 김광진, 문병호, 은수미, 박원석, 유승희, 최민희, 김제남, 신경민, 강기정, 김경협, 서기호, 김용익, 김현, 배재정, 전순옥, 추미애, 정청래, 진선미….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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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선비’라는 말은 일종의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주로 인터넷 사용이 많은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용례가 확립되었다. 그냥 ‘선비’만 쓰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단어 앞에 쌍시옷으로 시작하며 성행위를 의미하는 욕설형 접두사가 붙거나, ‘용두질’ ‘요분질’처럼 비하의 뜻을 담는 접미사 ‘-질’이 붙는다. 그리하여 ‘선비질’이다.

‘선비질’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웃자고 하는 소리’에 정색하는 것이다. 인터넷 혹은 SNS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김치녀’, ‘오크녀’, ‘성괴(성형괴물)’ 등의 비하 발언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보자. 어렵지 않게 ‘선비질 하지 마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 호남 비하 발언, 외국인 노동자 혐오 발언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하는 순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뉘에 뉘에 선비님 잘 알겠습니다아’라고 비아냥거리며 그러한 지적을 ‘선비질’로 몰아가는 것이다.

한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여성도 아니고, 호남 사람도 아닌 한국인들에게 저러한 경향성은 그저 남의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국가정보원이 일베를 거점으로 삼아 2012년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저 혐오발언들이 야권 혹은 진보진영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를 타깃으로 삼는, 자신들의 문제를 지적하면 되레 ‘선비질’을 운운하는, 그 잘못된 ‘하위문화’가 뿌리를 내렸고 오늘에 이르렀다.


_경향DB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새삼스럽게 생겨났다기보다는, 사회의 면면에 흐르던 차별이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문제는 2016년 현재,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선비질’로 전락해버린 이 세상에서 말이다.

현실은 매우 비관적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펼쳐보자.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 인간과 사회라는 보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기존의 진리와 이 기존의 진리 위에 성립된 행위 전체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빌려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지식인은 존재 자체가 형해화되어가는 중이다.

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지식인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인터넷 때문이다, 일베를 필두로 하는 반지성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탓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게으른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크고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다시 한 번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지식인을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라고 해보자. 보편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보편적 인간’의 범주에서 추방당하고 그 존재와 권리를 부정당하는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특수성으로 ‘내몰리는’ 집단은 여성, 호남, 외국인처럼, 일베가 ‘웃자고 하는 소리’의 타깃으로 삼는 이들과 정확히 포개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진짜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한국의 지식인들은 ‘지식인’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자신이 속하지도 않은 정당을 옹호하기 위해 호남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면, 과연 그는 지식인인가? SNS에서 확산되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을 비웃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을 들먹인다면, 그는 여성을 ‘보편적 인간’으로부터 추방하는 일베와 어떤 면에서 궤를 함께하는 것이 아닌가?

지식인이 어떤 정당이나 정파의 편을 화끈하게 들어주고 지지를 받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식인의 본령은 ‘논객질’이 아니라 ‘선비질’이다. 중년의 논객들이 도덕과 윤리를 내버리고 ‘논객질’을 일삼는 사이, 일베에 모인 청년들은 온갖 혐오를 현실 속에서 ‘인증’하기 시작했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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