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대 총선에서 기독정당은 ‘종북좌파 척결’을 소리 높여 외쳤다. 이번 20대 총선에선 ‘동성애 반대’ 구호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항상 누군가를 혐오하라는 구호가 개신교 정치의 핵심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교과서 같은 데 묘사된 입에 발린 종교관은 어느덧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실제로 최근의 선거구호만이 아니라 한국 근대사에서 개신교는 거의 언제나 증오하고 공격하고 배척하는 존재로 우리 사회 속에 각인됐다. 특히 반공은 한국 개신교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뿌리 깊다. 해서 사랑의 종교라는 표어와 극한적으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대개의 사람들은 개신교가 왜 반공을 그토록 소리 높여 외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데 이번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왜 개신교가 동성애를 그토록 혐오하는지. 여기서 개신교가 혐오하는 대상으로 표기한 ‘동성애’라는 말에는 양성애자나 성전환자도 포함된다. 즉 이성애와 다른 모든 성적 취향을 포괄하는 개신교의 혐오적 표현이 바로 ‘동성애’다.

이러한 반동성애론을 펴는 개신교 신자들은 대부분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반대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면 왜 지금까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다가 이제야 호들갑을 떨고 있는가? 또 그들이 애써 찾아낸 성서구절들이 실제로 동성애 혐오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해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빈도수에서나 표현의 적나라함에서 대표적인 혐오의 대상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혐오를 선거구호로 내건 기독정당은 없다. 설사 여성혐오적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말이다.

최근 한국 개신교 극우주의자들, 특히 정당 추진론자들이 반동성애를 부르짖는 진짜 이유는 미국에서 정치세력화를 꾀했던 신복음주의자들을 따라한 데 있다. 반동성애론을 펴는 논거들과 서사 방식까지 그대로 베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최근의 한국 개신교의 반동성애론은 반공주의에 비해 너무 빈약한 혐오주의 담론이며, 한국 개신교 내에서조차 더 많은 동조자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8일 서울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성소수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여 '퀴어 문화 축제'를 열고있고 있는 가운데 한쪽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 동성애를 비난하는 집회를 열고있다._이준헌 기자



그렇지만 반동성애 담론의 종말을 너무 쉽게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면 기독정당을 축으로 동성애 혐오동맹이 형성되어 있고, 그 중심에는 막강한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가진, 극우주의 성향의 대형교회 목사들과 장로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당한 자원 점유 능력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그들은 동성애 혐오동맹을 위해 자신들의 자원을 아낌없이 사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데 그것만이 아니다. 개신교 극우주의 세력을 결속시키는 다른 요소들이 더 있다. 그 요소들은 하나가 아니지만 대체로 ‘위기’라는 말로 수렴될 수 있다. 하여 위기감에 의해 결속될 가능성이 높아진 이들이, 막강한 자원을 가진 개신교 극우주의 엘리트들이 부추기는 혐오주의로 똘똘 뭉치면서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했다. 나는 그것을 ‘혐오동맹’이라고 불렀고, 최근의 혐오동맹의 키워드는 ‘반동성애’다.

여기서 나는 위기의 항목들 중, 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장로들이 신랄하게 체감하는 위기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교회 부채’다. 그 속내가 지난 19대 총선 때에 기독정당에 의해 드러났다. 당시 기독정당 주역들이 내건 주요 공약 중에는 한국교회의 은행 이자를 2%로 인하하겠다는 것이 있다. 이 황당한 공약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 무렵 교회가 금융권에서 대출받은 금액은 무려 4조5000억원을 상회했고, 어떤 연구에 따르면 실제 대출금액은 10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 대출연체율은 대기업 연체율의 2.7배, 가계대출 연체율의 2.2배에 달했다. 그것은 파산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당시 매년 파산한 교회들이 6000개 정도나 됐다. 경매로 넘어간 종교시설의 70~80%가 개신교의 시설들이고, 특히 이제까지는 대마불사의 원리가 통했던, 수백억원대의 감정액이 매겨진 대형교회 시설들이 연이어 경매시장에 나왔다. 그만큼 개신교 교회들은 부채로 인한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고, 19대 총선에선 그런 위기감이 걸러지지 않고 공약의 형식으로 표출되기까지 했다.

나는 개신교가 주도하는 혐오동맹의 중심부에 많은 목사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성장지상주의가 낳은 부작용이 교회 부채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즉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결여된 교회의 퇴행적 표현이 바로 혐오동맹이라는 것이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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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성의껏 할 때의 성심(誠心)과 다르고, 명심보감의 성심(省心)과도 다른 성심(聖心), 그 이름을 나누어 갖는 기관이 여러 곳이다. 가톨릭의 수도회들을 필두로 많은 학교와 병원들이 이 이름을 쓰고 있으며, 이 이름을 빌려 쓴 덕인지는 모르지만 크게 성공한 빵집도 있다.

예수의 마음을 일컫는 이 낯선 말마디가 조선 경향 각지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우리의 타고난 성품과 무관하지 않다. 천주교 박해기와 그 이후 이 땅을 찾아온 서양 신부들은 “이 나라 사람들은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며 탄복하곤 했단다. 죄를 씻는 세례성사가 따로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학생 시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1911년 2월17일부터 6월24일까지 129일간 조선에 머물다간 어느 독일 선교사의 조선 여행기를 읽으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조선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연을 응시하며 몇 시간이고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 산마루에 진달래꽃 불타는 봄이면 지칠 줄 모르고 진달래꽃을 응시할 줄 안다. 잘 자란 어린 모가 연둣빛 고운 비단 천을 펼친 듯 물 위로 고개를 살랑인다. 색이 나날이 짙어졌다. 조선 사람은 먼 산 엷은 초록빛에 눈길을 멈추고 차마 딴 데로 돌리지 못한다. 그들이 길가에 핀 꽃을 주시하면 꽃과 하나가 된다. 조선인은 모든 것 앞에서 다만 고요할 뿐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중에서)

제 나라에서 하인으로 몰락한 처지에도 조선인의 풍채와 용모는 여전히 의젓하였다. “그들은 크고 날씬하며 보무도 당당하다. 어느 모로나 제왕의 풍모다. 발에 딱 맞는 짚신을 신어 걸음걸이가 우아한데, 일본인은 끈 달린 나무 샌들에 엄지발가락을 끼워 넣고 다녀서 질질 끌거나 종종걸음 칠 수밖에 없다.” 여간해서 꽃을 꺾지 않는, 차라리 내일 다시 보고 또 볼지언정 나뭇가지를 꺾어 어두운 방 안에 꽂아두는 법이 없는 조선 사람들을 보며 감탄을 더해가던 검은 옷과 긴 수염의 독일인은 보신각종에 얽힌 옛 서울의 관습을 듣고서는 거의 기절초풍하고 만다.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남자들은 절대 바깥출입을 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서둘러 귀가하여 거리를 비워주면 아녀자들은 방해받지 않고 편안히 외출할 수 있었다.”


20일 서울 청계천 광통교 일대에서 열린 '제10회 육의전 체험축제'에서 전문 연극배우들이 조선시대 저잣거리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_경향DB


경박한 일본 예절에 밀려 조선의 흐뭇하고 지엄했던 관습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 앞에서 이방인 순례자는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 우리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길에서 부녀자와 마주치면 스스로 비켜서서 더 좋은 길을 터 준다거나, 아무리 최하층 신분이라 하더라도 여자에게는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부친상과 똑같이 상복을 입고 삼년상으로 추모하는 그런 마음을 어느 하늘 아래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열하일기>를 방불케 하는 저 꼼꼼하고도 방대한 여행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는 성심의 나라로다. 세상천지에 다시없는 성심의 겨레로다!”를 반복하면서 잊고 지냈던 본디 모습을 어서 되살려내라고 다그친다.

나라가 사위어가는 시절에도 쾌활한 색상과 고요하고 늠름한 자태를 잃지 않던 옛사람들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나 이상하고 초라해졌다. 강남역에서 젊은 여자가 죽고, 열하루 만에 구의역에서 어린 노동자가 죽었다. 다시 나흘 후에는 또 다른 역을 만들던 열넷의 일용노동자가 죽고 다쳤다.

2009년 이래 “승객 여러분이 내릴 다음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라는 소리를 재수 없는 참언으로만 여겼는데 모든 게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사람끼리 다시는 그러지 말자는 비상경보가 탑마다 굴뚝마다 춘하추동 울려댔으나 아이들은 바다에서 죽어갔고, 어머니와 아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안방에서 시들어갔다.

성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총원장 노르베르트 베버, 떠날 때 “대한만세!”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그는 슬픈 나라를 영영 잊을 수 없었는지 십사 년 만에 다시 조선을 찾아왔다. 아예 촬영기사까지 대동하고서. 덕분에 백 년 전 우리네 삶이 한 편의 기록영화로 남아 있다. 사뭇 경탄어린 시선으로 조선을 기록하던 손님은 오늘의 번영 대한민국을 향해 그때 못한 대한만세를 불러줄까.

내년에 우리는 민주화 30년, 후년에는 정부수립 70년, 그다음 해에는 삼일운동과 공화주의 선포 백주년을 맞는다. 성심을 팽개치고 수심으로 가득 찬 수심(獸心)의 나라가 되려고 그렇게 이 악물고 달려왔을까? 모레는 현충일. 자신을 국가라고 믿는 자들은 현충탑 앞에서 엄숙하게 고개를 숙이겠지만, 시민들은 지금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을 들고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나는 또 다른 추모의 탑 앞에서 부르르 떨고 있다.



김인국 ㅣ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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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앞마당에 핀 노란 민들레 꽃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물들이는 오월 어느 날, 한 여인이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공점엽’, 오욕의 역사가 덧씌운 ‘위안부’라는 이름의 굴레에 묶여 고통과 한으로 이어진 96년의 모진 세월을 견디신 할머니, 그 분이 꽃잎이 지듯 이승의 몸을 벗으셨다.

1920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소녀는 16세 되던 해, 돈을 벌게 해 준다는 꾐에 빠져 상해와 하얼빈 등지에서 24세까지 일본군의 성노예로 꽃다운 세월을 치욕과 모멸을 감내하며 살았다. 해방을 맞아 평양을 거쳐 해남에 삶터를 잡았다. 그리고 인연을 만났지만 결혼 8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홀로 슬하의 아들을 키우면서 외롭게 사셨다.

공점엽 할머니의 영전에 염불기도를 하며 자꾸만 목이 잠겼다. 선한 눈매와 조금은 슬픈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절망과 체념, 뼛속까지 사무치는 한과 서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 얼굴 앞에 차마 눈을 바로 하지 못했다. 제국주의 일본과 무능한 조선은 아름답고 꿈 많은 한 소녀의 생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세월호의 아픔이 돋는 사월, 광주민주화운동의 함성이 아직도 쟁쟁한 오월에 공점엽 할머니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국가’라는 기구에 준엄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오늘 우리는 부끄러움과 통증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공점엽 할머니로 상징되는 개개인의 존엄과 행복을 지켜내지 못한 과거의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진심으로 미안해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정녕 위안부 문제를 그리 쉽게 정치적·정략적으로 합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두가 인간의 고통과 연민에 대한 통찰과 공감능력이 부재한 정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이다.

생명의 윤리가 부재한 시대에 새삼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린다.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항상 목적으로 삼고 결코 수단으로 삼지 말라.”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늘 가언명령이다. 국가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개개인을 ‘국가의 국민’으로 묶고 종속시켜 존엄한 생명을 이념과 욕망의 수단으로 희생시키고 있다. 또한 개인의 존엄을 무시하는 사상과 논리의 오류는 곳곳에 있다. 현대는 인간 개개인의 독립적 주체성을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무릎 꿇리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인류 역사의 비극은 무지와 허구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엄청난 착각에서 깨어나고 벗어나야 한다. 이른바 전체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그것은 필요악이라는 생각 말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전날 별세한 공점엽, 이수단 할머니의 영정이 놓여 있다._경향DB

우리는 엄중하게 말해야 한다. 세상에 필요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모든 개인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슴에 품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정직하게 말하자. 모든 인간은 존엄한 존재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제자백가의 한 사람인 철학자 양주는 개인의 절대적 존엄성을 이렇게 역설했다. “나는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한 그루 나무가 모두 푸른 생명을 지켜낼 때 건강한 숲을 이룰 수 있다는 이치를 인간사회는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 뜻있는 사람들은 조목 조목 그 허구성을 반박했다. 그 중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정부의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과 시민들이 세운 평화비(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우려가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을 지켜낼 의지도 능력도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일본과 우리 정부는 ‘과거’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일 정부의 진심과 성숙한 ‘현재’의 행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베를린 역사박물관은 1939~1945년 나치 강제집단수용소나 게토에서 나치의 만행에 고통받던 유대인 50명이 그린 작품 100점을 임차해 전시했다. 또 독일 메르켈 총리는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항구적 책임”이고 “역사에는 마침표가 없다”고 했다. 개개인의 생명을 절대적 목적으로 지향하는 철학이 있는 정치다.

국가는 외면했지만, 신기교회 박승규 목사와 이명숙님 등 해남의 착한 벗들은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 나비’를 만들어 할머니의 말년을 외롭지 않게 위로하고 기쁨을 선물했다. 대흥사 꽃길을 함께 걷고, 생신상을 차려 드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전복죽을 올렸다. 사람이 사람의 손을 잡을 때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이제 국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을 회복해야 한다.

공점엽 할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


법인 스님 ㅣ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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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자유당은 비례대표 후보 10명을 발표했고, 당선권을 5번까지로 예상했다. 이 중 3번을 받은 이는 동성애 반대 활동을 주로 하는 단체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교육국장으로 있는 약사다. 기독자유당의 관계자는 동성애 전문 의료인인 3번 후보와 함께 4번의 후보를 이슬람 전문 변호사라고 소개하면서 원내에서 동성애와 이슬람 문제에 대해 맞서 싸울 든든한 일꾼이라고 주장했지만, 4번 후보는 이슬람 전문가가 아니라 해양법 전문가다. 3번 후보가 얼마나 동성애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형상 드러나는 활동과 경력만 보면 그만이 이 정당의 비전을 대변할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기독자유당의 활동에서 반동성애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차대한지를 단적으로 시사한다. 해당 분야의 전문적 활동가나 이론가와 잘 결합된 경우는 오직 반동성애 주제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자유당이 기대한 비례대표 당선 5석의 추정 근거도 이 정당이 적극 참여했던 반동성애 서명운동의 성과와 직결돼 있다. 수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장로 등이 정당에 가담한 동기도 바로 반동성애 이슈와 관련이 있다. 요컨대 현재 개신교 정치세력화를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의제는 반동성애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논점을 함께 얘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왜 개신교는 반동성애 문제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개신교가 최근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동성애에 대한 적대로 치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는 1990년 이전까지 초고속 성장을 구가했지만, 최근에는 마이너스 성장 상황으로 반전됐다. 이와 맞물려 사회적 호감도가 급격히 추락했다. 나아가 가장 적극적인 안티세력을 가진 종교이고, 매스미디어에서 비판 기조의 기사와 가장 많이 얽힌 종교다.

이에 대해 개신교 주류집단이 취하고 있는 대응은 뼈아픈 개혁이 아니라, ‘증오 마케팅’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상투적으로 저질러 왔던 위기 대응책으로, ‘적’을 지목하고 공격함으로써 위기를 은폐하고 망각하게 하는 수법이다. 이때 ‘적’으로 지목된 대표 대상이 빨갱이, 무슬림, 동성애자다. 한데 이 중 현재 개신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증오 마케팅이 ‘반동성애 운동’이다.

개신교 청년들이 27일 레이디가가의 공연이 열린 서울 잠실 주경기장 일대에서 동성애 확산과 음란문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공연을 반대하는 기도회를 열고 있다._강윤중 기자

왜 동성애자가 적으로 지목되었을까? 한국 개신교의 이슈메이커들은 대개 가장 적극적인 미국 맹신자들이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벌인 미국 사회에서의 투쟁을 모방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당면과제를 해석해왔다. 1940~1950년대 이슈메이커들은 미국 교회의 반공주의를 한국화하는 데 몰두했다. 1960~1980년대 이슈메이커들은 미국 교회의 은사주의와 부흥운동을 한국의 성령운동에 덧씌웠다.

1990년대 이후의 개신교 이슈메이커들은 미국 교회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세력화를 모방하며 반동성애와 반이슬람을 특히 강조했다. 이 중 반동성애 이슈는 한국에서 적극적인 동맹자와 지지자를 얻었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적’으로 지목된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의 사도로 스스로를 위치시켰고, 이는 그들로 하여금 뼈아픈 교회개혁 없이 위기를 망각하게 하는 착시효과를 발휘했다.

이제 둘째 논점을 얘기할 차례다. 이러한 개신교 반동성애 운동은 얼마나 성공적일까.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이번 선거에서 기독자유당이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때보다도 많은 목사와 장로, 엘리트교인들이 모였고, 특히 수도권의 대형교회를 이끌고 있는 영향력 있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나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음에도 그들의 교인들 대다수는 이 정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 당이 선택할 만한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의 정보에 가장 빠른 집단인 수도권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조차도 동성애 인권의 중요성이 트렌드임을 알고 있었기에 기독자유당을 시대착오 세력으로 본 것이다.

한데 하나 더 얘기할 것이 있다. 개신교 지도자들이 증오를 퍼뜨림으로써 자신의 위기를 망각하는 것은 퇴행적 종교행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몰락의 위기에 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악에 받쳐 분노할 대상을 찾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때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동성애자 등을 지목하고, 그들을 적대하는 행위를 조직하면서 이른바 ‘알바 데모꾼’을 동원할 때 그 유혹에 취약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알바 데모꾼’이 등장했다. 한데 이들은 단지 ‘알바꾼’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증오의 사도로 주체화되곤 한다. 개신교의 증오 마케팅의 부작용은 이렇게 개신교를 퇴행시킬 뿐 아니라 사회를 위험하게도 한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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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개혁위원회라는 정부기관이 있다. 흡연경고 그림을 담뱃갑 상단에 붙이는 데 제동을 걸었던 곳이다. 왜 그렇게 국민건강 문제를 다뤘을까? 궁금했다. 지난 4월22일자 경고 그림 부착 반대 회의 기록을 정보공개 청구했다. 회의록을 보니 여러 궁금증이 생겼다. 그 하나가 출석위원을 적는 난에 “민간위원장은 회피”라고 쓴 부분이다. 이렇게 중요한 회의를 위원장이 참석하지 않았을까?

위원장이 임명될 때 규개위가 낸 보도자료를 보니 그는 당시 김앤장 상임고문이었다. 그리고 김앤장의 홈페이지에는 그가 여전히 고문으로 올라 있다. 게다가 김앤장은 그를 ‘규제개혁위원회 민간 위원장(2014·7부터 현재)’이라고 알리고 있다. 그가 회의 참석을 회피한 이유는 김앤장이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담배회사의 소송에서 담배회사를 대리하기 때문이라고 보도에 나왔다. 그의 불참은 타당한 결정이다. 그러나 묻는다. 김앤장의 상임고문이 규개위 위원장을 맡아도 되는가?

규개위의 권한은 막강하다. 담배만 문제가 아니다. 시민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생활전반에 직결되는 공공행정과 아주 밀접하다.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하려면 규개위에 심사를 요청해야 한다. 그저 행정부 차원만이 아니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할 법률안조차도 그 심사대상이다. 행정입법이 압도적인 현실에서 사실상 규개위는 법률안에 대한 사전 검토권도 가지고 있다.

규개위가 심사를 해서 규제의 신설 또는 강화를 철회·개선하도록 권고할 수 있다. 그런데 그저 권고에 그치지 않는다. 권고를 받은 장관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이에 따라야 한다고 법에 정했다. 사실상 규개위의 결정에 장관이 따라야 한다.

규제개혁위원회 위원_경향DB

이렇게 강력한 규개위 위원장을 김앤장 상임고문이 맡아도 되는가? 법률회사는 변호사법에 따른 영업을 하는 곳이다. 변호사 업무의 특성은 그의 사적 의뢰인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최대한 지키는 것이다. 김앤장은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주요 기업의 일을 맡아 하거나 할 수 있는 곳이다. 규개위가 심의하는 공공행정 가운데 이번의 담배 한 건에만 김앤장이 관련됐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김앤장이 대리한다는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직결된 정부 역할이 제자리를 잡지 않으면 억울한 시민이 희생자가 된다. 환경부는 1997년 3월15일에 옥시 가습기 살균제 성분(PHMG)을 “유독물에 해당 안됨”이라고 국민이 보는 관보에 고시했다(관보 제13559호 31쪽). 그 결과 이 성분은 산업에 진입했다. 만일 이때 환경부가 유독물이라고 심사했다면, 적어도 이 성분으로 인한 사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부는 2012년 9월5일에야 “유독물에 해당함” “반복 노출되면 폐 손상을 일으킴”이라고 관보에 실었다(관보 제17840호 296쪽). 고작 정부의 역할이 갓난아이와 산모와 환자들의 귀한 생명이 희생된 뒤에야 뒤늦게 관보에 싣는 것이라면 이를 어찌 정부라 할 수 있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나라의 자원을 더 많이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곳에 분배해야 한다.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도록 꼼꼼한 행정법령을 만들어야 한다. 법치행정의 원칙에서는 법령의 꼼꼼한 뒷받침이 가장 중요하다. 돈도 법령이 있어야 좇아간다. 그러나 규개위는 이를 “규제”라고 부르고, 그 “신설”과 “강화”를 제어하는 선발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위원장을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몰리는 김앤장 상임고문이 맡고 있다.

만일 김앤장 상임고문을 계속하려면 규개위 위원장에서 사임하는 것이 맞다. 김앤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규개위 폐지법을 만들 때가 됐다. 행정부의 모든 법령은 국회가 만든 법률에 뿌리가 있다. 행정 법령 위에는 국회가 있어야지 규개위가 국회를 대신해서는 안된다. 특정 행정기관에 행정 법령 전반을 통제하도록 하는 것은 위험하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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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인사를 주고받아야 오늘 나신 부처님이 좋아하실까.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술집에서 술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는 한 뿌리요,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삼십 년 전의 석가탄신일 법어였다. 삼라만상에 꽉 들어차 계시는 부처님들이여, 영원에서 영원까지 서로 존경하며 축하하자. 이 간결한 인사에 무슨 말을 더 보태랴. 그런데 이 아침 천지가 한 뿌리요, 만물이 한 몸이라는 말씀을 듣자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악명 높던 군사정권 아래에서도 당당하게 주고받던 인사가 지금은 어째서 낯간지러운 빈말이 되고 말았는가. 그러고 보니 동포(同胞)라는 말을 잊고 산 지도 퍽 오래됐다.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한 형제라는 말을 건네기에는 툭하면 사람을 베고 찌르고 볶아대는 현실이 너무 각박하고 살벌하다.

해마다 부처님의 탄신을 기리고 있다. 면목이 서지 않더라도 그래야 한다. 콧대 높으신 대통령님부터 코흘리개 어린애까지 부처님 앞에 두 손 모으고 눈을 감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루라도 짐승 노릇을 멈추고 내가 누군지 네가 누군지 우리가 누군지 생각할 수 있다. 오늘은 부처님이 얼마나 높고 귀한 분인지 알아드리자는 날이 아니다. 우리 서로 알아주며 기뻐하라는 날이다.

“생일을 맞은 부처님보다 뭇 중생이 더욱 즐겁습니다. 본래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해 사바에 오셨으니 중생이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부처님도 중생으로 와서 부처 되었으니, 오늘은 중생들의 생일입니다. 이는 곧 중생이 부처라는 말이요, 천지일근(天地一根) 만물일체(萬物一體)로서 중생은 평등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불기 2558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봉축 점등식에서 스님과 불자들이 광장을 돌고 있다. 이날 밝힌 등은 현존 최고의 석탑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을 형상화한 것이다._강윤중 기자


유교 전통이 대단했던 집안에서 장남이 출가를 감행하자 “석가모니가 내 원수”라면서 아버지는 하인들을 시켜 집 앞의 강을 가로지르는 그물을 치도록 했다. “내가 살생하는 것이 불살생을 원칙으로 하는 석가모니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하셨단다. 오죽 분하고 답답했으면 그랬겠는가마는 신분과 위계의 차등을 당연한 질서로 여기는 유학자에게 “한량없는 여러분 부처님들아, 서로 위하고 우리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하자”던 아들의 신조는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으리라.

요즘 넙죽넙죽 건성뿐인 경배가 흔해지고 너스레와 허례허식만 요란해진 현실을 보노라니 석가모니가 원수로다 하고 부르르 떨었다는 아버지의 분노가 오히려 경건하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난다 긴다 하는 권세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처님 앞으로 달려갈 텐데 아무리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한낱 쇳물을 부어 만든 형상 앞에서 갑자기 착하고 고분고분해지는 모습이라니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들도 오늘만큼은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하다”는 진리에 동의하는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종일토록 들판에서 흙 파는 농부들, 언제 잘릴지 몰라 식은땀 흘리는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교도소에 들어간 도둑들, 분 바르고 술 따르는 작부들까지 의심할 바 없이 거룩하고 엄숙한 부처님이라지만 꼬물꼬물 꿈틀거리며 불평 없이 살아가던 4대강의 무수한 부처님들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없애버린 사람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꺼내주겠지 철석같이 믿었던 어린 부처님들을 살려주지 않았던 사람들. 올해도 농사지으며 자식들 키우고 싶다던 농부를 직사물대포로 쓰러뜨린 사람들. 이삼백 일 넘도록 고공농성 중인 부처님들을 깔보고 멸시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게 미처 몰라서 저지른 일이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였다면 사과라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저 철딱서니 없는 중생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서라. 오늘은 모자란 사람들 탓하는 날이 아니라 귀감이 될 만한 선지식을 떠올리며 흐뭇해지는 날이니.

“두 부처님이 있습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과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게 참불공입니다. ”

이상 해인총림 초대 방장 성철 스님(1912~1993)의 말씀이었다. 원수 갚는다고 쳐둔 그물을 거두어들인 것은 장장 십오 년이 지나서였으니, 선친은 스님이 이런 철학의 큰 도인으로 거듭난 것을 보고 비로소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너도나도 본래면목 들여다보며 기뻐하는 하루 보내시기를!


김인국 ㅣ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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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 학기는 매주 목요일 저녁이다. 서울시민대학 권역별 캠퍼스 글쓰기교실. 올해로 4년째로 접어든다. 봄가을 두 학기, 한 기수에 30명 내외가 들어온다. 교과명은 ‘나를 위한 글쓰기-자기 성찰과 재탄생’. 그간 250여명이 거쳐갔다. 총 10주로 진행되는데 개강 첫날에는 강의실이 북적대지만, 2~3주 지나면 앉는 자리가 정해지고 수강생 수도 고정된다.

큰 기대를 품고 왔다가 이내 실망하거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한다. 내 쪽에서는 수강생이 30명이 넘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개강 때 일부러 ‘엄포’를 놓는다. 단단히 각오를 하지 않으면 따라오기 힘든 강력한 프로그램이라고, 한 주에 한나절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글쓰기만 생각해야 한다고, 그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래야 첨삭지도가 가능한 20~30명 수준을 유지한다.

제일 먼저 50대 중년 남성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 다음이 직장에 다니는 30대 남성들. 여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대부분 끝까지 간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성, 특히 중년 이상 남성들에게 자기 삶을 글로 풀어내라는 요청은 거의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글쓰는 행위 자체가 낯설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럴 기회가 있다고 해도 마음 놓고 털어놓을 대상이 없다. 성인 남자들에게는 자기 고백이나 대화(여자들의 수다) 혹은 친밀성을 위한 유전자가 거의 없다. 우리 글쓰기의 목표와 구조,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지나온 자기 삶을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관계를 재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수강생들이 ‘자기 삶 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재정의하는 순간을 ‘두 번째 생일’이라고 명명한다. 주민등록번호에 나와 있는 첫 번째 생일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두 번째 생일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두 번째 생일이 진정한 성년의 날이자 마음이 성년식을 치르는 날이다.

시민대학 첫수업 서울 중구 을지로 옛 미문화원에서 1일 문을 연 서울시민대학에서 수강생들이 첫 수업을 받고 있다._남주환기자

어른이 되지 못하고 생물학적 나이만 먹는 ‘어른아이’가 의외로 많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무지막지한 이유 중 하나가 어른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배타적 소유욕, 지나친 공격성, 과도한 열등감, 지속적인 무기력이 다 여기서 비롯된다. 글쓰기 강의실에서 매번 강조하는 말 중 하나가 ‘홀로 서야 더불어 설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과 만나야 한다. 지나온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자기와 대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고백하자면, 시민대학 글쓰기에 선생은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장소, 잊을 수 없는 음식, 잊을 수 없는 선물과 같은 글쓰기 과제를 내주고, 모둠별로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이 전부다. 가르치기는커녕 내가 몰래 배우는 것이 훨씬 많다. 글쓰기를 자청한 저 중년들이 누구인가. 산업화, 도시화,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역전의 전사’들 아닌가. 저분들이 털어놓는 우여곡절과 신산고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는가. 저 유일무이한 의미들이 우리가 공유해야 할 생의 지혜이자 용기가 아니던가.

잊을 수 없는 수강생이 여럿이다. 매년 봄가을마다 몇 분씩 새로 생겨난다. 글쓰기를 집짓기로 바꾸어 시민들에게 자기가 살 집을 설계하도록 하는 젊은 건축가, 잘나가던 출판사를 때려치우고 한과 장사를 시작한 편집자, 장애우들의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준 화가, 오랜 슬럼프를 딛고 일어나 글쓰기 강사로 나선 작가, 어머니와의 불화를 털고 일어나 열혈 시민기자로 거듭난 젊은 여성, 나이 예순이 넘어 다시 한자 공부를 시작한 칠순 할아버지, 지리산 어귀에서 ‘낮에는 국방군, 밤에는 인민군’ 시절을 겪었던 팔순 할머니, 꿈에 그리던 시인이 된 철학과 대학원생, 마침내 식당에서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를 큰소리로 주문하게 된 중년 남성…. 자기 삶 쓰기를 통해 저마다 두 번째 생일을 갖게 된 분들이다.

또 스승의날이 돌아온다. 2년 전 세월호 사태가 나자 스승의날을 자진 반납한 대학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이번 5월에도 그분들은 부끄러워하고 아파할 것이다. 스승이기를 거부한 대학 선생님들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스승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선생님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승 없는 스승의날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스승이 있다. 그분들은 손사래를 치겠지만, 글쓰기를 통해 저마다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분들이 나의 스승이다. 그분들의 이야기가 나의 또 다른 사표(師表)다. 두 번째 생일이 없는 삶처럼 무의미한 삶도 없다. 의미 없는 삶이 최악의 삶이다. 누가 말했던가.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고 ‘의미 없음’이라고.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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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산색(山色)은 투명하고 청신합니다. 숲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은, 숲을 이루는 꽃과 나무가 형형색색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큰 나무는 작은 나무를 내쫓지 않고, 화려한 꽃은 소박한 야생화를 깔보지 않습니다. 함께하지 않으면 그저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지나지 않지만 더불어 살아가니 큰 숲을 이루고 푸른 산이 되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회장님의 갑질 사건’을 보면서, 우리 인간은 산을 바라보고 감상할 줄만 알지, 산처럼 숲처럼 살려 하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특히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이른바 ‘큰 나무’와 같은 사람들일수록 그렇습니다. ‘인간(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합니다. 우리 인간도 나무와 꽃처럼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숲처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은 눈높이를 함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편견과 오만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곁을 보노라면 ‘아! 내 곁에 사람이 있구나’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갑질하는 회장님’에게 산중의 수행자가 보내는 글입니다. 산색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분이라면 충분히 가슴으로 읽으시리라 믿습니다.

회장님! 지금 당신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 불편한 마음을 접고, 당신에게서 폭언을 듣고 폭행을 당한 수행기사와 가족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당신이 저지른 행위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그리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은 인권과 평등이 자리 잡은 민주시대에 마치 전제시대 귀족처럼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당신의 의식세계는 ‘돈’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새로운 계급사회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에게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함께하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그 마음’이 아수라이고 지옥일 테니까요.


정우현 회장_경향DB

회장님! 당신은 언론과 대중들의 질타가 쏟아지자 자사 홈페이지에 사과의 글을 올렸습니다. 사과문을 읽고 또 한번 화가 났습니다. 사과문은 매우 잘 다듬어졌지만 진심과 진실한 성찰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젊은 혈기에 자제력이 부족하고 미숙했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다. 자제력 부족과 미숙한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저는 그동안 직원들을 존엄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밥줄이라는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행위의 미숙이 아닌 인격의 미숙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수행기사들에게 모멸감을 준 원인부터 진단해야 했습니다. 당신은 수행기사들에 대한 잘못된 행위를 사과했지만, 그것을 넘어 당신이 살아온 삶과 생각을 성찰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찰이 이루어졌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이 정직하다면, 수행기사와 그 가족들이 느꼈을 모멸감과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기사는 가족에게는 아버지이자 남편입니다. 회장님 회사의 수백 수천억 재산과 절대 바꿀 수 없는 귀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당신은 가족들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다시 해야 합니다.

회장님! 당신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사과문을 발표한 뒤 피해자에 대한 개별적인 사과와 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참(理懺)’과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정직한 고백을 하고 보상을 해주는 ‘사참(事懺)’이라는 참회의 방식이 있습니다. 사참이 없는 참회는 이참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왜 지금 진정한 사참을 하지 않습니까? 피해자에 대한 보상, 진정한 사참이 없기에 사과문은 단지 회사의 면피용 입장문에 불과합니다.

회장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가 높은 스님이 허름한 옷을 입고 왕궁에서 마련한 공양 초대에 갔습니다. 그런데 수문장이 가로막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비싼 옷을 입고 가자 그제야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왕궁에 들어간 스님은 음식을 먹지 않고 옷 속에 자꾸 넣었습니다. 스님이 왜 이런 파격을 보여주었을까요? 당신이 직원들을 ‘돈’으로 본다면 직원들도 당신을 ‘돈’으로 보지 않을까요? 슬픈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지 않고 돈과 돈이 손을 잡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슬픕니다.

회장님! 바쁜 회사 일을 접고 잠시라도 자연의 품에서 홀로 머물며 많은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말씀 전합니다. “전쟁터에서 백만인을 이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승리자이다.” <법구경> 한 구절입니다.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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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관제데모 중 단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왔던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참가자에게 일당을 주는 ‘알바데모’를 벌여왔다는 게 밝혀졌다. 많은 이들이 추측해왔던 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그들에게 용역을 준 곳들이 전국경제인연합회, 재향경우회, 심지어 국가정보원, 청와대 등이었다는 의혹도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단체는 평균 한 해의 절반가량을 거리데모로 채웠으니, ‘동종업계’ 최고의 ‘수주 능력’을 자랑하는 단체였던 듯하다. 실제로 다양한 이슈들을 소화해내는 능력도 놀라웠고, 비교적 저렴한 일당임에도 알바 동원력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 왔다. 심지어 좌파 단체들의 시위공간을 선점해서 벌이는 이른바 ‘알박기 데모’라는, 데모의 신상품을 활용해내는 창의력과 정보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데 여기서 나의 관심이 꽂힌 것은 이 단체가 아니라 이 단체에 고용된 ‘알바 참가자’다. 알려진 바로는 그들 중 상당수는 탈북자들이다. 비교적 저렴한 일당으로 고용할 수 있고 반공적 편향이 매우 강한 이들이니 대한민국어버이연합에 고용되기에 안성맞춤의 대상이겠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일년에 거의 절반을 이 단체가 주도한 데모에 참가해서 일당을 받아왔다면 그들의 직업을 ‘거리의 데모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1946년 말에 결성되고 그 이듬해에 가공할 족적을 남긴 서북청년단은 해방정국에서 활동한 가장 강력한 극우적 관제데모 단체였다. 이 단체가 주도한 데모의 참가자들 거의 대부분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남한으로 월남한 서북(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했고,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다. 또한 그들 대다수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의 근본주의 신앙의 본거지였던 평안도와 황해도의 장로교도였다. 근본주의적 신앙은 편집증적인 신념으로 무장한 행동주의자를 만들어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종교적 성향이다. 하여 그들은 제주 등지에서 거의 살인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로 둔갑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잔혹한 살인마는 아니었다. 물론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월남을 선택한 자들이지만, 그렇다고 그 증오심이 그들의 잔혹한 살인마적 행동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남한에서 처음 직면한 감정은 증오라기보다는 ‘막막함’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어느 하나도 갖지 못한 채 무인도로 떠밀려온 난파선 선원처럼 낯선 곳에 내던져진 유민에 다름 아니었다.

22일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청와대 집회 지시와 전경련 뒷돈 수수 등 각종 의혹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_경향DB

그들이 하나둘씩 ‘월남자교회’로 찾아가고 서북청년단 같은 월남자 청년단체에 가담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임시거처가 생겼고 일당받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극우 관제데모였다. 이들을 고용한 자들은 미 군정에 소속된 경찰책임자인 조병옥과 장택상, 반공적 우익 지도자인 이승만, 그리고 친일경력의 기업가들 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제데모에 참가한 직업으로서의 데모자들은 얼마 안 가 증오의 사도로 주체화되어 갔고, 멸공주의 신념으로 무장한 잔혹한 극우 행동주의자가 되어갔다.

오늘의 탈북자들도 북한을 떠난 뒤 ‘막막한 유민’의 현실에 직면했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근본주의 성향의 개신교계 선교단체에 찾아가게 되면서 막막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특정 경로로 초대된다. 그 경로에는 반북한, 반공주의적인 격한 언행을 드러냄으로써 일당을 받는 이른바 이념형 알바의 피고용자가 된 것도 포함된다. 또 그중에는 증오와 공격성이 가미되면 더 좋을 만한 일거리, 가령 반공적 거리데모 같은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런 증오와 공격성을 드러내는 강성 이념적 연기는 무수히 반복되면서 신념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많다. 하여 일용직 알바의 피고용자들이 벌이는 관제데모는 조금씩 그들을 오늘의 서북청년단으로 변신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행한 체제의 이탈자들을 초대한 남한 사회는 1940년대나 오늘이나 이렇게 그들을 사회 속에 잘 정착한 행복한 존재가 되게 하기보다 사회의 위험분자로 살게 하고 또 사회를 위험하게 하는 자로 만들어 가고 있다.

최근 시민사회에는 탈북자들에 대해 편견과 배척의 담론들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낼 ‘괴물들’을 우리가 미워하고 배척하는 담론이다. 1940, 5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우리는 그 괴물의 인큐베이터가 바로 우리 사회 자체임을 성찰하지 않는 담론이 번져나가는 것이다. 그런 괴물들은 탈북자들 사이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무성찰을 자양분 삼아 사회 도처에서 다양한 얼굴로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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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천당 가자!”는 것도, “사는 동안 복 받자!”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만, 경(經)자가 붙은 책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 당장 살아야 하는 천국이어야 하고, 복이란 것도 저만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하는 동고동락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천당이니 복이니 하는 말은 되도록 가려서 하는 게 좋다. 만일 죽은 아이들은 천당 갔으니 됐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넉넉하게 보상받았으니 됐잖은가 하는 따위의 실없는 말을 쏟았다면 크게 뉘우쳐야 한다. 벌 받을 소리다. 그만 잊자, 하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억하라, 그리고 행동하라!”(루카복음 22:19)고 명령했다. 자신의 죽음을 잊지도, 가만히 있지도 말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씀이 불씨가 되어 제자들은 줄곧 뜨거웠고 거듭 시대와 충돌했다. 법정에 불려가고 형무소에 갇히고 얻어터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엉뚱한 소리로 시끄럽게 하지 말고, 쓸데없는 짓으로 심란하게도 하지 말라! 이것이 말문 막고 손발 묶으려는 권력자들의 습성이다. 반면 우리가 지지리 못났어도 잊을 수는 없다. 등신처럼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은 민중의 근성이다.

억압하려 드는 습성과 억눌리지 않으려는 근성이 맞잡이를 벌이는 게 성경의 역사다. 신약성경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여러분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느님은 살리셨소.”(사도행전 4:10) 예수를 죽인 너희는 틀렸고, 하느님이 살려낸 예수가 옳았다는 거센 항변이다. 그러자 살인자들이 움찔해서 말했다.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서 어쩌려는 것이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이제 그만 잊읍시다. 하지만 제자들은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지 사람의 말을 들어야 되겠소?”(사도행전 4:19)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살을 찢고 뼈를 분질러버리며 망각과 부동자세를 명했지만 그들은 천하태평이었다. “하느님께 복종해야지 사람에게 복종해서야 쓰겠는가?”(사도행전 5:30)라면서 눙쳤던 것이다. 이렇게 담력으로 폭력을 확 무너뜨리는 일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세월호 참사 31일째인 16일 노란 종이배가 놓여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바람이 불고 있다._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허균의 호민론을 떠올려보자.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오직 백성뿐.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 더 무서운 게 백성인데 어째서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함부로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어도 아무 탈이 없는가. 세 부류의 백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 제 눈앞의 이익에만 마음을 쓸 뿐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 항민(恒民)이라 하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은 무력한 자들이다.

둘째, 살이 벗겨지다시피 빼앗기고 뼛골이 부서지도록 얻어맞는 현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원민(怨民)이라 부르는데 역사를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다.

셋째, 몸을 낮추고 마음을 감추면서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때가 닥치면 자기 꿈을 펼치고자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호민(豪民)이라 한다. 무릇 호민이야말로 반드시 두려워해야 할 자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호민은 무엇으로 호민이 되는가. 두말할 것 없이 기억과 행동이다. 그래서 예수의 최종유훈도 그와 같았던 게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2주기. 자식 잃고 통곡하는 부모들이 732일째 ‘4월16일’을 맞이하고 있다. 날마다 찢어지고 무너지는 그 마음을 누가 알까.

“강촌에 밤이 들어 물결이 적막한데… 딸의 비석을 찾아가서 울음 운다. ‘아이고 내 딸 심청아, 인간 부모 잘못 만나 생죽음을 당했구나. 네 애비를 생각하거든 나를 어서 데려가거라. 살기도 나는 귀찮고 눈 뜨기도 나는 싫다.’ 가슴을 두드리며 머리도 지끈, 발을 굴러 미친 듯 취한 듯, 실성 발광하며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구나.”(심청가)

심학규, 그래도 그는 행복한 아버지였다. 날마다 추락하는 끔찍한 세월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내가 이리 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부친에 대한 정이 부족함이라!”면서 몸을 던졌던 딸을 만나 어루만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날’이 다시 왔지만 소리 내서 엉엉 울지도 못할 분들께도 그런 날이 온다면 오죽 좋을까. 그렇다고 통곡의 절벽 앞에 서 있는 부모들을 안타깝게만 여기지 마시라. 그들은 아직 자식을 찾기도 전에 세상에 눈을 뜬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행동이라는 이성의 과업에 이토록 성실하고 용감했던 사람들은 일찍이 드물었다. <심청전>은 심 봉사 눈 뜨는 소리에 전국의 모든 맹인이 동시에 눈 떴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사흘 뒤는 호민들이 탄생하던 천지개벽의 그날, 4·19혁명일이다. 축하드린다! 이 봄날, 우리가 눈을 뜨게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심청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그분들 덕이라고 믿는다.


김인국 |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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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어때요?” 지난 주말, 시 쓰는 후배 차를 얻어 타고 북악 스카이웨이에 올랐다. 서울의 북쪽 능선은 봄을 맞이하느라 숨이 가빴다. 아직 덜 늙은 후배는 꽃놀이 타령을 늘어놓았다. 내친김에 섬진강이나 강릉 쪽으로 내빼자는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에도 일정이 빠듯했던 나는 어깨가 처지고 볼살이 늘어지는 사태에 대한 넋두리로 서울 바깥으로 나가자는 후배를 가로막았다. 스카이웨이에서 바라보는 서울 상공은 흐려 있었다. 꽃과 새순을 밀어올리느라 헉헉대는 숲 사이로 봄날 저녁이 빈틈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박명(薄明)이라고 발음해보았다. 박명. 헤어지기가 서러워 옷소매를 부여잡는다는 몌별(袂別)이란 말도 떠올랐다. 칼국수? 입맛이 칼칼하던 차였다. 좋지. 그래, 혜화동으로 내려가자. 성북동 비탈로 접어드는 사이, 잠깐 백석의 애인과 그녀가 스님께 물려준 큰 음식점이 생각났다. 그 음식점은 사찰로 다시 태어났다. 길상사. 기둥과 벽에 밴 고기냄새를 없애느라 몇 년 고생했다는 후일담을 들은 적이 있다. 길상사 어귀에도 땅거미가 배어들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든 후배가 칼국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나와 20년 넘게 차이가 나니 신세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찾는 그 칼국수집이 자기도 단골이라는 것이었다. 칼국수에 대한 취향이 나이와 무슨 상관이랴만, 흐린 봄날 저녁, 시에 대한 긴장감을 잃어가는 것을 나이 드는 것으로 발뺌하는 선배의 허한 심사를 읽어내는 후배의 마음 씀씀이 덕분에 아랫배 단전 부근이 조금 더워졌다.

예상 밖이었다. 휴일 저녁이라고 하지만 손님이 너무 많았다. 더 놀라운 것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후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년 전만 해도 젊은이, 특히 어린이는 찾아보기 힘든 집이었다. 면발이 흐물흐물한 데다 국물이 진한 편이어서 중년층 이상, 그것도 아는 사람들만 찾는 집이었다. 이십여년 전, 회사가 광화문에 있을 때, 이런 봄날이면 선후배와 뭉쳐 이 집에서 한나절을 죽이곤 했다. 매실주에 문어를 놓고 권커니 자커니 하며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곤 했다. 그때는 우리가 가장 젊은 손님 축에 들었다.

혹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얼마 전 공중파 ‘먹방’에 소개됐다는 것이다. 그 이후 손님이 바글바글해졌다는 것이다. 칼국수며 무채와 함께 버무린 부추김치 맛은 그대로였지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왜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지 곰곰 따져봤다. 어린아이들이, 젊은 연인들이, 가족들이 수십년째 옛 맛을 고수하는 칼국수집을 찾는 것이 문제일 리 만무했다. 그러기는커녕 반갑다고 손뼉을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창경궁 쪽으로 차를 몰던 후배가 먹방의 폐해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맛있는 녀석들’은 개념 먹방 프로그램_경향DB

후배의 날카로운 대중문화 비평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그래, 모험이 사라졌지’라며 끼어들었다. 휴대전화가 인터넷과 만나면서, 인터넷이 소셜미디어(SNS)를 일상화하면서 모험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른바 맛집은 물론이고 여행을 포함한 모든 쇼핑이 인터넷을 매개로 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 이전의 여행이 설렘으로 가득했다면, 그 설렘의 대부분은 예측 불가능성에 바탕을 뒀다. 가서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잘 것인지는 현지에서 해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예약한다. 볼거리, 먹을거리까지 떠나기 전에 다 결정된다.

지친 몸으로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가 겨우 찾은 낡은 여관방, 택시기사나 공무원에게 수소문해 찾아간 그 지역 사람들만 찾는 음식점,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삶의 고수’들, 지갑을 잃어버려 낙심하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내밀던 노인…. 이런 장면은 이제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 대학 입시를 위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본 경험이 있는 청년들, 돈에 대한 관념이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젊은이들에게 무작정 떠나는 여행은 거의 외계여행에 가까운 비현실일 것이다.

우연, 돌발상황, 낯섦, 불편함, 무료함, 망설임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여행에 관한 한 예측 불가능성은 배제됐다. 아니 여행이라고 쓰지 말아야 한다. 여행이 아니고 관광이다. 아니, 관광 상품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고 오직 눈으로 관광 상품을 소비한다. 아니, 떠나기 전에 스마트폰 액정화면에서 미리 관광한다. 인간이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인간을 소비한다는 한 사회학자의 지적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러 선택지를 놓고 주저하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 스마트폰이 우리 대신 판단한다. 혹시 ‘알파고’가 오랜만에 단골 음식점을 찾아가던 봄날 저녁의 상념이나 망상까지 대신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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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마을의 봄은 형형색색 꽃들이 피면서 시작한다. 지난겨울 펄펄 내리는 백설 위에 선연한 자태를 드러낸 붉은 동백에 이어, 3월 내내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내뿜었다. 지금은 온갖 새들의 노래와 함께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이고 있다. 이토록 눈과 귀가 즐겁다니! 지금 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청복(淸福)을 누리고 있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임을 실감한다.

올해는 큰맘 먹고 암자 곳곳에 산수유와 수국, 수선화, 작약을 심었다. 나도 좋으려니와 암자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꽃 공양을 올리고 싶어서이다.

사계절 내내 숲에서 살다 보면 꽃은 그저 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타는 듯한 가뭄을 만나고 한겨울 모진 추위도 견뎌내야 한다. 병해충에도 맞서야 한다. 인생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천둥과 무서리, 비바람과 땡볕을 이겨낸 뒤에야 꽃은 비로소 맑은 향기와 고결한 자태로 피어나는 것이다. ‘한 송이 꽃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경전 구절 앞에 새삼 뜰 앞의 청매화가 눈물겹고 고맙기만 하다.

매화를 비롯해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는 선비의 품격을 상징한다. 사군자는 본래 문인화의 소재가 되기 전 중국 전국시대 사람인 맹상군, 평원군, 춘신군, 신능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꽃의 성품과 사람의 인품이 어우러진 것이다. 조선시대 신흠은 예찬했다.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사람과 꽃이 지닌 맑고 높은 품격, 그것은 바로 ‘지조’라 할 수 있다.

재물과 부귀권세 앞에서 올곧은 신념을 바꾸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는 매화와 대나무의 꽃말을 헌정한다. 그러고 보니 지조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온다. 지조와 함께 시대가 밀어낸 말들을 생각한다. 인품, 의로움, 신념, 청렴, 명분, 어짊과 예의 등. 이런 덕망 높은 말들은 오늘날 출세와 득세 앞에 잊히고 박제화되었다. 말(言)의 교체는 가치의 전도이고 삶의 혼돈이다.

해남 땅끝 마을 입구에서 전망대까지 운행하는 땅끝 모노레일_경향DB

꽃이 만발하는 봄날,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를 보며 불현듯 떠오르는 글이 있다. 일제강점기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다.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수의와 함께 보냈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는 어느 선사의 오도송보다 더 큰 울림과 깨우침을 준다.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일신의 안위와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 변절을 서슴지 않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모성과 인정을 밀어내고 꿋꿋하게 지조와 절개를 지켜낸 안 의사의 어머니야말로 청청하고 곧은 대나무이며, 긴 세월을 지나 오늘까지 전해지는 매화 향기다. 사적인 이익 앞에 대의와 명분을 가볍게 버리는 오늘 우리의 자화상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4·13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떠오르는 또 하나의 죽비는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이다. 이 글은 1960년 ‘새벽’지에 실린 글이다. 혼란스러운 자유당 시절에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내린 준엄한 직설이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렇게 지조를 정의하면서,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해 신념을 버리고 권모술수에 능한 이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또 공인의 무절제와 변절 앞에 절망하는 국민을 염려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의 구절을 들어, 지도자와 정치인은 지켜보는 국민이 있음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해 좀 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당부를 한다.

50여년 전 글이지만 오늘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또 일제강점기처럼 생명과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오늘날에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쉽게 말과 처신을 바꾸는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와 조지훈 선생의 지조에 대한 일침은 우리 모두 새겨들어야 할 몫이다.

다가오는 4·13 총선에서 우리는 정략과 사적 이익을 따라 변절하는 후보를 잘 가려내야 한다. 꽃 본 듯이 반가운 세상을 만나기 위해 지금 지조와 의로움의 말들을 다시 불러내야만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봄날, 꽃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법인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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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비정한 부모’에 대해 경찰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부작위 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해서 검찰에 송치했다. 그리고 검찰은 전담반을 만들어 이 혐의의 공소유지에 총력을 다할 것을 밝혔다. 누가 보아도 살인임이 명백한데, 그것도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너무나 악질적인 살인행위인데, 경찰과 검찰의 이런 모습이 좀 의아하다. 무려 3개월간 화장실에 가둔 채 1ℓ짜리 락스를 두 병이나 몸에 뿌리는 등 가혹한 학대행위를 해왔고, 사망 전날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에 옷을 다 벗기고 찬물을 끼얹은 채 방치하여 죽게 했으며, 죽은 시신을 야산에 유기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웬만한 모의살인보다 더 악질적인데 미필적 고의 살인은 뭐고, 전담반을 만든다거나 총력을 다한다거나 하는 말들은 뭔가.

그런데 실은 그럴 만했다. 지금까지 자녀학대가 사망으로 이어진 사건들 중 살인죄가 적용된 사례는 불과 15%에 불과했다.

학대로 인한 사망 사건들 그 어느 것도 원영이 사건에 비해 악질적 양상이 덜 하지 않은데, 실제로 적용된 양형은 터무니없이 ‘관대’했다.

해서 원영이 사건을 비롯해 최근 연이어 터져나오는 자녀학대와 그로 인한 사망 사건들에 대해서 한국여성변호사회는 국가적 차원의 안전시스템 미비가 원인임을 지적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정치권이 너나없이 공천에만 몰두하고 있는 와중에 나온 이 성명에는 정치권이 외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대안들도 적시되어 있다. 아동학대 행위에 대한 엄정한 양형기준 마련, 아동학대 예방교육 상시화, 아동학대 피해자 지원제도 개선 등이다.

한데 이 성명에도 언급되지 않은 다른 하나가 내겐 걸린다.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은 ‘계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사건 직전인 지난 2월에 밝혀진 부천 여중생 사망 사건에서도 딸을 죽게 한 직접적 가해자로 밝혀진 신학자인 이모 목사와 함께 그의 부인인 백모씨도 학대 가해자였는데, 그녀가 ‘계모’임이 강조된 바 있다. 또 그 무렵 다섯 살 된 아이가 시끄럽게 군다고 밀쳐 죽게 한 비정한 아버지에 관한 사건이 보도된 바 있는데, 이때도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남자가 죽은 아이의 계부임을 강조했다.

13일 오후 경기 평택시 청북면 평택시립추모공원에서 계모에게 학대를 받다 숨진 신원영군의 친모(오른쪽)가 아들의 유골함을 안고 걸어가고 있다._연합뉴스

이렇게 자녀학대와 사망 사건에서 계모, 계부 등이 언급되면 사람들은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자세히 알기 전에 미리 답을 예단하는 경향이 있다. 콩쥐, 심청이, 장화와 홍련, 신데렐라 등 가장 대중적인 고전 이야기들의 주인공도 계모에 의한 학대의 피해자들이다. 이것은 동서양을 아우르고,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대중의 일반적 생각 중 하나로 자녀학대를 계부모, 특히 계모의 학대로 동일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원영이를 죽게 한 가장 의심스러운 부모의 성향은 ‘온라인 게임 중독’이다. 원영이가 사망하던 무렵 8개월 동안 무려 6000만원을 온라인 게임에 지출했으며 거의 모든 대인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는 정황은 그녀가 온라인 게임 중독자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게임 중독이 자녀 살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은 최근에 적지 않았다. 그 사건들 대부분은 계모, 계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많은 전문가들은 온라인 게임이 충동조절장애를 야기하고 이것이 자녀 살해로 이어질 가능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게다가 최근 일어난 자녀학대 사건 중 80%가 친부모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계모, 계부와 자녀학대가 당연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나는 최근 연이어 터진 자녀학대와 사망 사건들에서 ‘계’모, ‘계’부 등의 무의미한 표현이 마치 의미있는 것인 양 소비되는 것에서 우리 사회 안전시스템의 중대한 문제 하나가 드러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령 자녀학대와 사망 사건 중 분노조절장애가 직접적인 이유인 것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분노조절장애는 그이가 겪었던 특정한 사건(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범죄가 최근 급증하고 있다. 수많은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살인 사건들의 가해자들은 어린 시절 겪은 피학대 경험, 게임이나 약물 중독, 경제적 위기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연이어 불거져나온 자녀학대 및 사망 사건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서 이 사건들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며, 그것에 대한 사회적 진단과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계부니 계모니 하는, 언어 습관의 일부가 되어 버린 ‘혈연주의적 깔때기’는 이런 진단과 대안 모색의 중대한 장애물이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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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연전연패하던 저녁, 하필 그날 회갑을 맞이한 남자는 사람이 어째 사람도 아닌 것에 질 수 있느냐면서 꺼이꺼이 길게도 울었다. 하마터면 같이 울 뻔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 같지도 않은 물건들에 당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라야지.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 국내외로 민주세력을 키우고 규합해 착실하게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일인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은 채 총파국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지금 우리는 독재정치의 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사법부는 사실상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으며 의회 또한 허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국가안보라는 구실 아래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돼 가고 언론의 자유는 압살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 국제사회에서 초라한 고아 신세나 다름없다. 경제는 붕괴 직전이다. 농촌을 잿더미로 만들고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쉬운 해고를 바탕으로 산업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애초부터 망상이었다. 어찌해야 하겠는가? 대통령이 책임지고 물러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요 며칠 사이에 나온 어느 사설처럼 보였는지 모르지만 1976년 3월1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발표했던 ‘민주구국선언문’의 일부다. 두어 곳만 살짝 바꿔보았다. 당시 문공부 장관은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비합법적 활동”이라 했고, 검찰은 “정부를 전복하려는 선동사건”이라면서 긴급조치 제9호의 칼을 빼들었다. 지금 같아서는 너무나 지당하고 점잖은 충고 몇 마디였을 뿐인데 그토록 쉽게 자지러지는 독재자였다니 싱겁고 한심하다. 그런 세월이 그 잘난 유신체제였다. 그래도 꼼짝 못하는 괴상한 시절이었다. “박정희도 이 시점에서 물러선다면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이 한 줄의 설교에 신도들이 사색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난 3·1절 민주구국선언 40돌을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날처럼 겨레의 자주독립과 민주회복을 위한 미사를 드렸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들이 함께 기도를 바쳤다. 사건의 주역이었던 몇 분이 힘들게 와주셨지만 그 자리에는 더 이상 박정희도 없었고, 함석헌도 문익환도 김대중도 없었다. 모질게 때리던 자도 죽었고, 웃으며 얻어맞던 이들도 계시지 않다니 홀가분하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났을까? 미안하다고 했을까? 지난 일이니 용서해주마 했을까? 알 수 없다. 나중에 뵈면 여쭤봐야지 하면서 궁금증을 접었다. 그런데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는 게 인생이라지만 어째서 제각각 다르게 살다 가는지…. 다르게 살았으면 가는 곳도 다르겠지 하는 생각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새롭게 타오르는 3.1민주구국선언" 출전 기념회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 내외_경향DB


성경은 인생을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 일에 비유하며 죽어서 크게 산다는 역설을 가르쳐주고 있다. 저를 지키려고 끝끝내 버티면 고약하게 썩어서 아무것도 거둘 게 없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고운 흙에 자기를 보태주면 움트고 싹터서 백배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이다. 막상 현실을 접하고 나면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나는 기어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한사코 져주며 살겠다는 인생이라서 그렇다. 어느 누가 지는 걸 좋아하겠는가? 때려도 안되겠지만 맞는 걸 좋아할 이는 없다.

그런데 역사에는 남을 애먹이다 망해간 자들 말고도 웃는 얼굴로 고난의 짐을 짊어져주다 가신 분들이 적지 않다. 인생이 복잡해 보여도 마지막에 가보면 죽임을 당하고 마는 자와 스스로 죽으러 가는 자, 이렇게 둘로 나뉠 것이다. 영영세세 떵떵거리고 살 줄 알았는데 어이없이 시들고 마는 시시한 물건들이야 흔해빠졌다. 반면 올 때야 남이 보내서 왔지만 갈 때는 나 스스로 죽으러 가야겠다며 시원스레 길을 나서는 이도 있다. 그는 누구인가? 져줄 수 있는 사람이다. 져주고 져주다 짊어져주는 사람이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철없는 아이와 욕심 많은 소인은 할 수 없다. 져주는 일은 어른만이 하는 일이요, 짊어져주는 일은 힘센 사람, 큰 사람만이 능히 이룰 일이다.

모처럼 명동성당에 모인 사람들은 독재를 거슬러 민주를, 압제를 거슬러 자주를 외치며 평생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선배들을 영광스럽게 기억했고, 고난과 쾌거에 감사를 드렸다. 헤어질 때는 천하최강 알파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져주다 짊어져주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죽으러 가는 사명을 나누어 가졌다. “나는 죽음을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이 땅 위에서 한 일의 몇 천 배, 몇 만 배 되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파스칼) 아름답다. 이 또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김인국 |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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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과 사판, 전통적으로 절집에서 대중의 소임을 구분하는 방식이다. 세간에서 쓰는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판은 참선하고 경전을 연구하고 염불 수행에 전념한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재정을 관리하며 건물을 보수하는 일은 사판의 몫이다. 주어진 일의 특성상 이판승에 비해 사판승은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접촉이 많다. 몇 해 전, 어느 사찰에서 사판 소임을 맡았을 때였다. 읍에 사는 신도들이 일종의 민원 비슷한 사항을 가지고 찾아왔다. 절에서 건물을 신축하고 보수하는 데 이왕이면 불자가 운영하는 사업체를 이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다소 굳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다른 종교인들은 서로의 가게를 이용하면서 단합이 잘 되는데 불교는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왜 우리 절은 교회 다니는 사람의 가게에 일을 주느냐고 했다. 이럴 때는 맑은 차를 건네며 시 한 수 보시하는 것이 감정의 결을 다스리는 데 더없이 좋다.

‘매화가 핀다고/ 연꽃이 곱다고/ 산국처럼 물들고 싶다고/ 눈꽃이 못내 그리웁다고/ 솔숲 맑은 바람 다관에 우려내면/ 찻잔에 어느새/ 푸른 하늘 담기네’(박남준 ‘차 한 잔’)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읊조리는 시 낭송에 신도들은 긴장을 풀고 웃었다. 그 틈을 타 이런저런 말을 보탰는데 내용은 이랬다. “만약 불자들이 운영하는 업체가 공사를 부실하게 한다면 그래도 불자라는 이유만으로 이용해야 할까요? 우리 사회가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는 지금, 진실과 사랑으로 화목하게 지내야 할 종교마저 집단이기주의로 편을 갈라야 할까요? 무엇보다 일하는 데에 굳이 종교를 따져야 할까요?” 고맙게도 그분들은 나의 간곡한 뜻을 이해하고 돌아갔다. 순전히 맑은 차와 시, 덕분이다.

그날의 일은 이기적 욕망이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까지 스며 있음을 실감케 했다. 지연과 학연, 혈연의 고질적인 병폐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더욱 퇴행시키고 있다. 지연, 학연과 함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집단적 단합과 배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분야가 바로 ‘종교연’이다. 누구보다 공정하고 평등해야 할 종교인들마저 집단적 이기주의를 드러내며 우리 사회의 갈등과 반목을 조성하고 있지만, 신성의 영역이라는 이유로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종교의 집단적 담합에는 ‘적용의 오류’가 내재한다. 모든 영역에서 종교의 잣대로 가치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 손안식 상임위원장_경향DB

예를 들어 보자. 불교계에 종교평화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종교 편향을 방지하고 이웃 종교들이 공동선을 구현하자는 취지로 만든 기구다. 이곳에 숱한 종교 편향 사례가 접수되고 있다. 특히 초·중등 교육현장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학생에게 교사가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교사가 식사 때마다 자신이 믿는 종교적 기도를 강요하고, 불교도인 학생을 은근히 따돌리고 망신을 주기도 한다. 이를 알게 된 부모들이 학교에 항의하지만 종교가 달라서 일어나는 작은 갈등쯤으로 치부해버린다. 견디다 못한 부모들은 전학을 위해 이사하기도 한다. 편향된 종교적 신심과 영역 적용의 오류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자신의 종교를 학생에게 강요한 교사는 종교적 갈등을 유발하기 전에, 교육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공정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인종과 성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신념을 침해받지 않아야 할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다. 식사 때 특정 종교의 기도를 강요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아동교육법에 규정되어 있다. 정서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또 불자 연예인들은 불교 신자임을 표방하면 방송출연에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소연한다. 군대 진급에서도 암묵적 단합이 있어 진급을 위해 개종하기도 한다. 또 일부 지자체장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내세워 지역을 성역화하겠다거나, 정치인들이 특정 종교의 표를 사기 위해 이런저런 거래가 오간다. 불교계의 경우 각 정당이 대선을 앞두고 10대 공약 같은 것을 건네받는데, 다른 종교도 이면에서 비슷한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 대가로 성직자는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발언을 한다. 모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이기적 욕망의 담합이며 영역 적용의 무지이고 오류다.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판단의 잣대를 잘못 적용하는 오류가 넘쳐나고 있다. 적용의 오류가 일어나는 원인은 종교로 모든 것을 환원하려는 무지와 더불어 권력과 물질의 확장에 있다. <화엄경>에 ‘이사무애(理事無碍)’라는 말이 있다. 상식과 진리에 기초해야 삶의 현장이 바로 선다는 뜻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라는 말도 있다. 저마다의 영역을 지키고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협력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경지를 말한다. 간절히 원하건대 종교, 교육, 정치의 모든 영역이 사사무애하면 참 좋겠다.

거듭 원하건대, 4월 총선에서 모든 국민이 지연과 학연, 종교연을 떠나 오직 민주와 인권, 자유와 복지라는 가치에서 투표하기를!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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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에 한 번꼴로 찾아뵙는 선생님이 있다. 회의 비슷한 모임인데 특별한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꼴사납게 돌아가는 세상사에 ‘맵고 짠 양념’을 치면서 딴 세상을 꿈꾸는 자리다. 선생님께서 칠순에 가까워지면서 화제가 조금 바뀌었다. 몸 여기저기에서 고장 신호가 난다는 말씀을 자주 꺼내신다.

평생을 영문학자로 사셨고, 그 절반 이상을 잡지 편집에 바치셨다. 나는 진작부터 선생님을 ‘세계적인 1인 미디어’라고 불러왔다. 멀리서 보면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문학자이지만, 속내는 젊은 시인 못지않게 여리시다. 약자나 소수자는 물론 생명 없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연민과 연대가 한없이 넓고 깊으시다. 시 씁네 하는 내가 부끄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번 인사동 밥집에서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어.” 처음에는 무슨 선문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계단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구체적 호소였다. 그러고는 젊은이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을 탓하셨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것 위주로 설치하는 걸 보면, 횡단보도 신호를 짧게 하는 걸 보면, 노인을 위한 사회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책장을 훑어보다가 전에 보이지 않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지난해 5월에 나온 책인데 몇 번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던 책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서문을 읽다가 빨려들고 말았다.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는 선생님의 한마디가 책에 강한 자력(磁力)을 부여했던 것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여러 차례 탄식과 탄성이 반복됐다.

1990년대 미국 요양원 실태를 접할 때는 한숨이 나왔고, 그런 요양원을 혁신하는 젊은 의사의 도전을 따라갈 때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책의 저자 아툴 가완디(하버드 의과대 교수)는 요양원에 3대 역병이 돈다고 말한다. 무기력, 외로움, 무료함. 저 역병을 퍼뜨리는 병원균은 다름 아닌 서양의학이었다. 노인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환자로 여기는 관념. 서양의학은 늙어감에서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약과 주사로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뉴욕 북부의 소도시 뉴 베를린에 자리 잡은 요양원 체이스 메모리얼. 1991년 어느 날, 응급실에 오래 근무했던 젊은 의사 빌 토머스가 부임한다. 그는 여느 의사와 달랐다. 아내와 다섯 아이들과 함께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 도시농부였다. 자신의 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생명력 넘치는 삶을 영위하는 그에게 비친 요양원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노인들 옆에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오래전부터 “좋은 삶이란 독립성을 극대화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온 토머스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토머스는 요양원에 생명을 들여놓았다. 풀과 나무, 개와 고양이, 새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노인들 곁에 두기로 한 것이다. 예상대로 진입장벽이 높았다. 특히 의료진의 반대가 심했다. 개나 고양이를 한 마리씩만 허용한다는 뉴욕주 규정도 넘어서야 했다. 토머스는 문화가 갖고 있는 관성의 힘이 혁신의 싹을 잘라버린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점진적 방법도 거부했다. 한꺼번에 개 두 마리, 고양이 네 마리, 잉꼬 백 마리를 들여왔다. 충격요법이었다.

변화는 예상보다 빨랐다. 실어증에 걸린 노인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고 극도로 내성적인 데다 걷지도 못했던 노인이 개를 산책시키겠다고 나섰다. 노인들이 저마다 새장을 가져갔고 잉꼬에 이름까지 붙여줬다. 이어 토끼와 암탉은 물론 수백 개의 화분이 실내로 들어갔으며 잔디밭은 채소밭과 꽃밭으로 변했다. 그러자 복용하는 약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사망률도 15% 감소했다. 가완디 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노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노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나라일 것이다. 고은의 시 ‘그 꽃’이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노인들이 생의 저녁나절에 자기 삶을 돌아보고 그것을 이야기로 재구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려갈 때 발견하는 꽃일 것이다.

우리의 요양원과 병원, 아니 도시 곳곳에 빌 토머스와 같은 ‘괴짜 의사’가 많아져야 한다. 노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꽃을 피우게 해야 한다. 노년이 꽃을 피운다면 그 꽃이 어찌 노인만을 위한 꽃이랴. 그 꽃은 가족과 친지를 넘어 인류 전체를 위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문재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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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놀랍지도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 세계를 향해 힘주어 발표한 드레스덴 선언도 그냥 거창한 농담이었다. 2014년 1월6일, 신년 기자회견 때 박 대통령은 불쑥 ‘통일대박론’을 꺼냈다. 그해 3월28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일명 ‘드레스덴 선언’이라고 하는 ‘한반도 평화통일 구상’을 발표함으로써 통일대박론이 일회적 립서비스가 아닌,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것임이 명백한 듯했다. ‘통일대박’이라는 말에서 시사되듯 여기에는 한반도의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비전이 깔려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드레스덴 선언의 ‘남북한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구축’이라는 제안과도 맞물린다.

하지만 이 제안 이면에는 그 이상의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전해인 2013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장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을 잇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건설함으로써 미래 한국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신선했고 극적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극적이라는 말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처음 명시된 때가 2013년 10월8일, 제주에서 열린 ‘유라시아 공간정보인프라 국제콘퍼런스’의 기조연설이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20여일 전인 9월16일에 개성공단이 재개되었기 때문이다. 그해 4월9일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 무려 160여일 만에 재가동된 것이다. 개성공단 폐쇄는 그해 2월에 북한이 제3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에 대한 제재조치의 일환이었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황당한 대북정책인 ‘비핵개방 3000’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두 정부를 잇는 대북정책은 ‘선핵폐기론’이었다. 다만 MB 정부가 북한이 먼저 핵을 폐기하면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돕겠다는 ‘당근형 선핵폐기론’을 제시한 것이라면, 박근혜 정부는 핵을 폐기하지 않으면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해 제재를 가하겠다는 ‘채찍형 선핵폐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근이든 채찍이든 효과는 없었다. 박근혜의 채찍은, 유시민씨의 비유처럼 채찍 길이보다 먼 곳의 상대를 향해 휘두른 격이었다. 더욱이 그 채찍이 개성공단 폐쇄였다면 그것에 맞아 깊은 상처를 입는 이는, 그녀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살피겠다던 이들, 바로 그녀가 대통령인 나라의 국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국빈방문 마지막 날인 28일(현지시간) 구 동독 지역에 있는 작센주 드레스덴 공대에서 연설을 통해 대북 3대 제안을 담은 ‘한반도 평화 통일 구상’을 밝히고 있다. 드레스덴_연합뉴스


그런 점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선핵폐기론의 ‘폐기’를 의미했고, 드레스덴 선언문에 묘사된 것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유라시아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한 미래경제 기획은 DJ 정부가 처음 제시한 것이었고, 남북한 상생의 교류협력안은 DJ 정부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 복제품이었다. 하지만 극우정권이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후 남북한 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드레스덴 선언 이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적극적인 행보를 별로 취하지 않았다. 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보다는 당장의 보수 결집에 이니셔티브를 두는 방향으로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올해 1월6일 북한의 제4차 핵실험이 있었고, 2월10일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마도 2013년처럼 재개되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2005년 시작된 개성공단의 꿈은 11년 만에 수포가 된 셈이다. 이제 124개 개성공단 입주업체는 아마도 거의 모두 도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종업원 수가 1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들 모두가 실직자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협력업체가 5300개인데, 이 기업들도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이다. 이로 인한 국제신용도의 실추는 말할 것도 없다.

그뿐만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엉뚱하게도 이것을 미국 사드(THAAD)의 국내 배치와 연관시켰다. 북한 핵실험과 사드 배치라는 두 개의 무관한 사항이 박근혜 정부에 의해 하나로 엮였다. 알려져 있다시피 사드 배치는 한반도를 새로운 위험에 노출시킬 것이다. 동북아의 냉전질서를 격화시킬 것이고, 그 핵이 되어버린 한반도를 모두의 표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런 현실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치러질 것이고, 그것을 둘러싼 국론분열도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필요로 할 것이다. 또 무기구매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드가 배치되면 그 전자파로 인한 민간인과 자연생태계의 막대한 피해도 예상된다. 물론 대중국 무역도 커다란 타격을 받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의당 나와야 할 질문인데 이젠 놀랍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다만 다시는 ‘선거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의 통치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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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부처를 임으로 모시는 이들도 많고, 예수를 임으로 모시는 이들도 적지 않다. 부처, 예수가 아니더라도 높이 우러르고 싶은 대상을 우리는 임이라 부른다. 임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는데 물동이나 함지 따위를 머리에 이고 간다고 할 때의 ‘이다’라는 뜻도 들어있다. 사모하는 정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언제나 이고 다니고픈 ‘임’이라 했을까!

그러므로 아무나 임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함부로 임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도 안된다. 한 번이라도 임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면 그 무거운 이름값에 걸맞은 신중한 처신으로 보답해야 하고, 그럴 맘이 없으면 아예 ‘임’자를 떼고 불러달라고 해야 도리에 맞는다.

생각만 해도 절로 서럽고 눈물겨워지는 당신의 임은 누구인지 묻고 싶다. 그 임은 지금 안녕하실까? 부처님은 여든의 천수를 누리신 다음 복되고 평화롭게 열반에 드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겨우 서른셋에 국사범으로 몰려 십자가 위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으셨다. 불자들에게 부처님은 고이 보내드린 임이지만, 기독자들에게 예수님은 원통하게 빼앗긴 임이다.

그래서 기독자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임이 종생하신 그날을 무심히 맞이할 수가 없어 장장 40일간 애통절통해하며 끙끙 앓는다. 이때를 사십일의 수행절기라고 해서 사순절이라 한다. 설 연휴의 끄트머리였던 엊그제 수요일이 사순절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외람되게도 특정 종교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부디 그리스도인들이 건성으로 사순절을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라서이지만, 그보다는 목숨 내놓고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와 자산들을 맥없이 강탈당하는 오늘의 현실이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기왕 결례를 무릅썼으니 조금 더 말씀드리련다. 격랑의 때를 맞았으니 우리 모두 비상한 각오로 나라 안팎의 형편을 내다보자. 일상을 멈춰 세우고 크고 깊은 눈으로 전체를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해졌다. 사순절을 지내시는 그리스도인들께서는 뜨거운 신앙열정에 가려 평소 주목하지 못하던 임의 사망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개신교의 4대강 사업 반대활동 범연대기구인 ‘생명의 강 지키기 기독교행동’(기독교행동)이 북한강변에서 ‘생명의 강 살리기 사순절 금식기도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최근 기도소를 찾은 목회자·신도들이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_ 기독교행동


예수의 불쌍한 죽음은 권력자들이 인류공동체를 상대로 저질러온 추악한 범죄의 전형이다. 그러므로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예수를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갔던 자들의 음모를 오늘의 눈으로 분석하면서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세상의 혼군과 간신들의 악행을 미워하고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는 그리스도인이 있으면 한번 붙들고 물어보라. 당신의 임은 왜 그리도 불쌍하게 죽은 거요? 시원한 대답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죄 사함을 위한 대속이니, 구원을 위한 보혈이니 하는 복잡한 해석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제 동포의 하얀 손목을 그어버린 끔찍한 범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앙인들부터 십자가란 도무지 이기심과 탐욕을 포기할 줄 모르는 자들이 빚어낸 비극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다보니, 그럭저럭 예수의 죽음은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된 어떤 신의 눈물겨운 사랑으로 변주되고 말았다. 그새 범죄는 미화되고, 악의 장본인들은 어둠 속에 정체를 숨겼으니 누구의 간계일까?

자고로 사순절은 빼앗긴 자들은 어째서 빼앗겼으며, 빼앗은 자들은 어떻게 빼앗았는지에 대해 뼈아프게 묻고 답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빼앗겼던 자들은 지금도 뺏기고 있으며, 빼앗던 자들은 오늘도 빼앗고 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태연히 벌어지는 이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어찌할 텐가. 뾰족한 수가 없거든 끙끙 앓기라도 해야 한다. 원통하니 앓고, 분통하니 앓고, 절통하고 애통하니 앓아눕자. 그렇게 앓고 앓다보면 불현듯 알아지는 소식이 없지 않으리라. 앓지도 못하는 자에게는 털끝만한 앎도 허락되지 않는다.

시인은 “빈 대지에 불현듯 꽃눈이 터질 때/ 작은 것에도 감동할 시간을 위해/ 2월은 심심하고 고요한 달”(박노해)이라고 했지만 지금 형편은 심심하지도 고요하지도 못하다.

사순절이 시작되던 그날 오후 다섯 시,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북으로 가는 돈줄을 끊어야겠다면서 통일의 동맥을 절단해버린 것이다. 대체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우리는 시시각각 탈탈 털리고 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머리에 재를 얹기도 한다. 이제 나는 없다. 나는 죽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참담한 선언이다.

번번이 지켜드리지 못하는 임을 생각하면 차마 산목숨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살고 싶으냐? 성경은 말한다.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요엘 2,13) 아니다. 지금은 옷도 찢고 마음도 찢을 때다.


김인국 |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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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지인의 어머니가 이생의 인연이 다하여 소천하셨다. 지인과는 평소 생각이 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사이였기에 그의 슬픔이 오롯이 전해졌다. 지인의 가족은 천주교 신자였지만, 생전에 종교를 경계에 두지 않고 널리 베풀었던 어머님의 뜻을 헤아려 여러 종교인이 장례의식을 집전하기로 했다. 불교,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순으로 고인의 하늘나라 가는 길을 축원했다. 아마도 국가장 말고 가족장을 4대 종교 성직자들이 한자리에서 치른 것은 처음이지 싶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또 가족들은 조의금 전액을 사회 곳곳에 기부했다. 뒤에 전해 들은 기부 내역을 보니, 세심한 배려가 스며있었다. 소아암을 앓는 어린이들을 치유하는 곳, 부모 없는 청소년들이 모여 생활하는 그룹홈을 운영하는 곳, 청년들의 정신성장을 위해 마음공부학교를 운영하는 곳, 고 김수환 추기경의 뜻을 잇는 곳, 가난한 이웃의 행복한 임종을 위하여 호스피스 병원을 운영하는 곳 등이었다. 한눈에도 4대 종교인들이 운영하는 단체가 고르게 배려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 구호에 참여한 잠수사들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일에도 기부되었다.

좋은 뜻으로 쓰이는 돈도 때로는 염려와 위험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깊은 생각과 따듯한 마음이 담긴 돈은 받는 이에게 정말 고마운 손님이 된다. 같은 물을 독사가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마시면 젖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불교 경전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의도가 순수하고 청정해야 참다운 나눔이 된다’고 쓰여 있다. 지인은 무엇보다도 예수와 부처의 뜻이 지상의 아픈 사람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승자 독식으로 갈등과 탐욕이 가득한 사회에서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품고 미소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곳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힘든 이들과 나누며 사는 선한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측은지심,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나눔이 차이의 경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 되고 있다. 사람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은 오직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꽃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사랑이 지혜를 낳는 것이지 결코 지혜가 사랑을 낳는 것이 아님을, 삶의 현장에서 가슴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알 수 있다.

크고 작은 구호단체가 활동하고, 복지시설이 다양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나눔’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왜 나누어야 하고 무엇을 나누고 어떻게 나누어야 할 것인가? 나눔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내리는 특혜가 아니다. 우리는 차별과 억압으로 불안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고자 나눔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근원에서 발원하는 연민과 사랑의 실천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형을 이루는 일이다.


자원봉사단체 '나눔'의 외국인 회원들이 21일 서울 종로 충신동에서 독거노인들에게 직접 만든 명절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_김영민 기자


그래서 나눔은 개체적 ‘자연’이고 사회적 ‘자연’이다. 또 ‘나눔’에는 대개 돈과 물질적 후원을 떠올린다. 물론 돈이 절실한 사람에게 돈은 바로 구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돈으로만 살 수 없다. ‘돈’ 속에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주고받는 마음, 가슴으로 느껴지는 진실한 마음이 모두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자존감이 온전할 때 비로소 건강한 사회, 건강한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타자의 삶을 부러워하며 사회의 시선에 주눅 드는 모멸감을 만드는 환경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모멸감을 해소하고 자존감 넘치는 사람 사이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멸감을 만드는 사회적 틀을 해체하는 일이 답이다. 그러나 해체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도 상생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대안을 모색하며 새로운 틀을 수립하는 노력을 부단히 해야 한다. 약자와 소외자에 대한 연민과 나눔이 사회적 시선과 확장을 확보할 때 나눔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구현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다. 개개인이 쉽게 할 수 있는 나눔에 주목해보자. 불교에서 말하는 무재칠시(無財七施)는 온화한 얼굴과 눈으로 마주 대하고, 이웃의 처지를 내 일처럼 생각하며, 위로하는 힘이 돼 주는 말을 건네고, 정성 어린 손길과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아픔을 덜어내고 기쁨을 주는 나눔을 말한다. 한마디로 물질 없이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나눔이다.

지난 1월, 청소년 8명과 보름 동안 일지암 암자에서 인문고전학당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폭설에도 해남 북평중학교의 이병채 선생은 무거운 북을 진 채 눈보라를 헤치고 험한 산길을 올라왔다.

오로지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한 선생과 스승의 그 마음을 가슴으로 느낀 아이들은 실로 값진 수업을 했다. 나눔은 서로의 가슴을 흔드는 조용한 울림이다..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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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도시는 자주 사막에 비유된다. 도시의 이미지가 삭막한 탓이다. 도시가 사막이라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래알이다. 도시라는 사막에는 모래와 모래를 이어주는 접착제가 없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늘 비어 있다. 서구 인문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도시는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다. 그래서일까. 사막을 주제로 한 시는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우리 자신, 즉 모래알들의 자화상인 경우가 많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프랑스 파리 지하철공사가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 오르텅스 블루의 시 ‘사막’ 전문이다. 매우 짧은 시인데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를 빚어내도록 한다. 독자에게 시를 이어 쓰도록 권유한다.

위 시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 사막”의 “그”다. 다른 지면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 사막”은 일반적 사막이 아니고 특정 사막이라는 표시다. 도시로 치면 도시 일반이 아니고 서울이나 부산처럼 실재하는 도시다. 물론 도시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일 수도 있고, 누구와의 만남이나 여럿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시 속의 그는 혼자 사막을 걷고 있다. 외롭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손을 내밀 타인이 없다. 기댈 데라곤 오직 자기뿐이다.

시 속의 그는 멀리 지평선을 향하지도 않고, 밤하늘의 북극성을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오아시스나 낙타를 찾지도 않는다. 대신 뒷걸음질로 걸으면서 자기 앞에 찍히는 자신의 발자국을 본다. 뒤를 돌아보면서, 과거를 돌이키면서 실제로는 앞으로, 미래로 나아간다. 블루의 시는 우리에게 ‘뒤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채근한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삶이 얼마나 삭막한지, 또 그런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살펴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도시에서 우리는 수시로 외로워진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멈춰 서야 한다. 스스로 멈춰 서서 뒤뿐만 아니라 양옆, 위와 아래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앞을 주시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보는 앞은 이전과는 다른 앞일 것이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직 자기 자신만을 떠올렸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생각났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과 다시 만났을 것이다. 가족, 친지,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 선후배, 선생님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준 이름 모를 사람도 떠올랐을 것이다. 상처를 준 사람의 얼굴도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관계의 산물이자 관계의 과정이다. 그런데도 진리에 가까운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위 시의 그는 사막을 무사히, 그리고 힘차게 건넜을 것이다.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수많은 관계의 의미를 재발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에서 새로운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순간을 제2의 탄생, 혹은 ‘두 번째 생일’이라고 부르곤 한다. ‘나는 혼자’라며 괴로워하는 사람은 설령 중년이 넘었다고 해도 아직 온전한 어른이 아니다. 온전한 삶은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런 삶이 자기 앞의 생을 다시 본다.

사회심리학은 우리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이 사회적 결속의 크기와 질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아내와 잘 지내는 남성은 동갑내기 홀아비보다 다섯 살이나 젊어 보인다. 하지만 이혼이나 별거 중에는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이 네 배나 높다. 반경 2㎞ 이내에 사는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확률이 25% 늘어난다는 연구도 있다. 로랑 베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에 나오는 내용이다. 로랑 베그는 “타자야말로 인간 도덕성의 근원이자 목적”이라고 단언한다.

‘검색에서 사색으로’라는 슬로건이 있다. 이를 사회적 맥락에서 번역하면 ‘접속에서 결속으로’가 될 것이다. 사색과 결속은, 검색과 접속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개인적, 사회적 능력이다. 때로 뒷걸음질로 걷거나 멈춰 서는 것이 자발적 사색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색과 더불어 타인의 처지에 공감할 때 사회적 결속이 생겨난다.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모래의 공동체는 그때 첫걸음을 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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