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eacommunity@hallym.ac.kr


 

서울의 강남, 서초, 송파구를 통칭하는 소위 ‘강남’이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총선의 격전지로 떠올랐다. 지난 25년간의 선거정치에서 강남은 (송파병을 제외하곤) 보수의 철옹성이었고, 따라서 진보개혁파에 속하는 정당들은 이 지역의 선거엔 아예 무관심하거나 형식적으로만 대해 왔다. 그러나 이번엔 달라 보인다. 예컨대, 민주통합당은 정동영과 천정배 같은 대권주자급의 거물 정치인들을 강남을과 송파을에 전략 공천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승리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는 의미다. 과연 강남 시민들이 진보개혁파 정치인들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대하고 싶고, 기대해볼 만한 일이다. 


기대하고 싶은 건 정동영 후보의 말대로 “강남이 바뀌어야 대한민국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현 시기 한국 사회의 시대적 요청은 복지국가 건설과 그를 위한 경제민주화 달성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이를테면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중산층을 포함한 시민 대다수가 찬동하고 협력해야 비로소 성취 가능한 과제라는 것이다. 이념 성향으로 말하자면, 진보와 중도진보는 물론 최소한 중도보수파 시민들까지도 모두 이 일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 강남은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 혹은 중도보수파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여기서 동의가 나오지 않으면 복지국가 건설은 요원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복지국가를 꿈꾼다면 강남의 민심이 진보하기를 기대함이 마땅하다. 





다행히도, 강남의 진보화는 기대 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 징표는 이미 2011년의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일말이나마 드러났다. 당시 나경원과 박원순 양 후보의 득표율은 강남갑과 서초갑에서만 60%대와 30%대라는 큰 차이를 보였을 뿐, 강남의 나머지 5개 선거구에선 모두 50%대와 40%대를 기록하며 나름대로 접전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보개혁진영의 후보가 강남의 대부분 지역에서 40%대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실로 커다란 변화였다. 강남을과 송파을에서도 박원순 후보에게 간 표는 각기 42.3%와 46.4%였는데, 그것은 2008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얻은 표가 각기 18.7%와 35.6%에 불과했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진보화된’ 결과였다. 복지 확대가 핵심 이슈였던 선거에서의 이 같은 결과는 복지에 대한 강남 시민들의 관심이 상당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강남의 합리적 시민들에게 복지국가 건설은 이제 매력적인 국가목표에 해당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1% 대 99%의 적대적 갈등이 만연한 사회가 아니라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사회경제적 평화와 번영이 지속될 수 있는 안정되고 조화로운 사회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성장이나 자유방임적 개방보다는 지속가능한 성장과 사회통합형 개방정책을 선호한다. 그들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같은 선진 복지국가들을 부러워하는 까닭이다. 그 나라들에서는 경제민주화에 기초한 튼실한 복지체제가 빈곤층 확대나 양극화 심화와 같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최소화시켜줌으로써 최고도로 개방된 시장경제가 사회분열의 위기 없이 최고도의 안정을 유지하며 성장해올 수 있었다. 거기서도 중산층을 포함한 시민계층은 그 복지국가 체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노동계층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강남 시민들이 유럽 중산층의 이 시민의식을 이어받기만 한다면 이번 총선에서 그들의 투표 기준이 무엇일진 명확하다. 그들이 개방지상주의자나 시장만능주의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 그들은 필경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을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자기 지역에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온갖 고민과 최선의 노력을 다해온 신망 있는 정치인 여럿을 총선 후보로 불러들여놓고 있다. 그들의 선택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강남의 진보화는 충분히 기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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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는 취지를 내건 한 모임에서 변호사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젊지만 이미 사회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법조계의 대표적인 정의파이자 진보파였다.
 

시원시원한 성격인지라 첫 대면에서 으레 갖게 되는 어색함을 금방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한참 거듭된 그의 말과 행태를 듣고 보면서, 좀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고 할까? 뭔가 주장은 주장인데 세상의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들에 관해 거침없이 표현한다고 할까?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나 행태에 대한 비난이야 이미 이 동네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니 그렇다 쳐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여러 사회운동단체 나아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의 비판은 강하고 격렬했다.




말의 내용이나 논리에 대해서는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듣고 있는 나를 거슬리게 한 것은 그의 큰 목소리와 공격적인 용어 선택이었다. “에고, 여기 싸움난 줄 알겠네요” 하며 소리를 좀 낮췄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지만 “누구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라며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이었다.
 
멋쩍게 웃고는 그냥 들어줘야겠구나 생각했는데, 그래도 마음은 자꾸 불편해졌다. 그럭저럭 자리를 끝내고 일어설 때가 되었고, 그래도 좋게 헤어져야지 하는 생각에 “세상이 마음 같지가 않아 화가 많이 나시나 봐요”라는 말을 건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는 운동의 힘이잖아요. ‘분노하지 않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하하하.”

합리성이 결여된 열정의 한계

분노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해 묵인하지 않겠다는 결단일 때가 많다. 인간 사회가 불평등과 부정의를 줄여 갈 수 있는 것은 그런 현실에 대한 누군가의 분노 때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 부모형제의 도움과 희생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우리 사회 엘리트들이, 안락한 삶에 안주하기보다 타인의 고통과 불합리한 사회현실에 분노하고 뭔가 개선을 위해 열정을 갖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은, 분노와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도 많다는 사실이다. 분노와 열정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라 할지라도, 그래도 뭔가 가치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으려면 이성과 합리성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차이와 이견이라면 무례한 비난에 앞서 건설적 대화의 길을 찾는 노력을 충분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견으로부터도 배우고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주는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잘못을 따져야 할 때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 차원 높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일의 오류와 한계를 넘어서는 실력을 같이 쌓아갈 수도 있다.

설령 옳은 일이라 해도 모든 것이 다 따져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구조가 스스로 드러나길 기다렸다가 적절한 시점에 관여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때가 많다.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해야 하고, 누가 더 옳은가를 다투는 일과 공동의 협력적 실천을 통해 성과를 내는 일의 기쁨을 향유하는 것이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조직도 견뎌낼 수가 없다.

‘작은 차이’를 공유하는 지혜를

뭔가 크고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이견과 차이, 갈등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작은 차이 때문에 협력 못하고, 공존하기보다는 대립하고, 그러면서 ‘분노는 나의 힘’을 외쳐대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슨 일을 이룰 수 있을까.

말의 내용은 단단하고 행위의 결단은 견고하더라도, 말의 방법은 부드러워서 차이를 갖는 여러 사람들이 머물 심리적 공간을 넓히고, 그러면서 함께 일을 만들어가는 즐거움과 행복함의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는 실천적 지혜가 우리 동네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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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건종 | 숙명여대 교수·영문학

민주당의 무상복지 시리즈는 중도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으로서 상당히 전격적인 것이었다. 복지를 수식하는 ‘무상’이라는 말은 자극적이었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같은 당의 일부 의원들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무모함이 보수 여당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 논쟁에 개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복지가 우리 사회 담론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집권 여당과 보수세력은 ‘친서민’이나 ‘중도실용론’을 내세울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활기를 띠고 있다. 무상복지가 얼마나 허황되고 비현실적이며, 비효율적인 정치공학적 발상인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것이 이들의 정체성에 훨씬 잘 어울리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민주당은 ‘무상’이라는 명칭의 적절성에서부터 시작해 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까지, 구체적인 내용을 다듬어 가는 데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복지를 둘러싼 논쟁이 진전되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집단 간 근본적인 대립의 지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의 핵심에는 신자유주의 혁명 이후 현 단계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대응하고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이것은 곧 시장이 우리 공동체가 생산한 부와 자원을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관리하고 분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의 질문이다.




시장자유가 분배를 해결할 수 있나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시장이 경제적 자원 증대의 가장 효율적인 기제일 뿐만 아니라 가장 공정하고 윤리적인 분배의 제도라는 신념에 기초해 있는 체제이다. 자유 경쟁의 효율성과 윤리성, 사적 영역의 자율성, 개인의 권리와 책임과 같은 가치들이 시장의 신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공공성, 공동체, 평등과 복지는 이 가치들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소유의 자유의 전도사라고 할 수 있는 하버드대 리처드 파이프스는 복지국가 제도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단언한다. “오늘날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독재나 폭정이 아니라 평등이다. 바로 보상의 평등이다.” 보상의 평등에 대한 불만에는 시장의 분배 기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 그에게 복지란 열심히 일하고 능력을 발휘해서 정당하게 자기 몫을 가져간 사람들이 열등한 경쟁의 낙오자들에게 베푸는 시혜이다. 이 시혜가 국가나 공동체에 의해 강요될 때 소유의 자유는 결정적으로 침해받는다.

소유의 자유가 침해받는 것을 용납 못하는 것은 한국의 보수도 마찬가지다. 복지 포퓰리즘, 복지병, 복지 바이러스는 도덕적 분노의 표현이다.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시장이 완벽한 체계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시장에 의해 주어진 소유의 권리도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시장이 공동체의 부와 자원의 분배를 독자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제도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장의 실패를 보완해서 건강한 사회적 생태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복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세금밖에 없다.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 신봉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또 하나의 팩트가 있다. 모든 노동과 생산은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했다고 해서 이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회의 전체적 자원과 부는 개별적인 경제 행위자들의 독자적인 이윤 추구 행위를 통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서로 의존하면서 연결되어 있는 노동과 생산의 네트워크를 통해 산출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사회적 부의 생산과정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해 주는 공동체적 행위다. 이것을 인정해 주는 공동체는 공정한 사회일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이기도 하다.


개인 기본권과 사회안전 위한 일

‘무상’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수사로도 그리 효과적인 말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복지는 무상이 아니다. 복지는 공짜도 아니고 시혜도 아니다. 복지는 이 땅에 태어나서 일하고 먹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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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5형제의 막내”라는 대답을 자연스럽게 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6형제였다. 맨 위 큰형은 필자가 어렸을 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이니까 필자 나이 일곱 살쯤 되었을까.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어느 날 큰형은 대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고 곧바로 수돗가 앞에 쓰러졌다. 입가에서는 거품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나왔는데, 그렇게 농약 마시고 죽는 것으로 뭔가에 항의하고 싶었겠지만, 어린 나이 때문이었는지 필자는 눈앞에서 목격한 큰형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비극성이나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없다.

오래도록 나를 슬프게 한 기억이 있다면, 관을 묻는 것을 함께 지켜보던 셋째형의 긴 울먹임이었다. 그렇게 죽은 큰형은 나머지 5형제와 배가 달랐다. 큰형의 어머니는 한국전쟁 끄트머리에 아들 하나를 낳고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새엄마와 동생들 때문에 큰형의 삶이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구보다도 엄마는 큰형을 감쌌고 동생들도 큰형을 따랐다. 큰형이 죽음을 선택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큰형은, 떡방앗간을 운영하는 일로 가정경제를 책임졌던 엄마를 돕기위해 우리 집 식모로 들어온 한 여성을 좋아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남북 화해 공존 불가역적 흐름

그걸 반대한 것은 할아버지·할머니였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두 분이 가진 낡은 생각 때문이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할아버지가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양반 가문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것, 전통 교육을 받아 한문에 능했다는 것뿐이었다.
무능한 남편을 만난 할머니 역시 양반 가문에 시집왔다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두 분은 자신들의 초라한 삶에 대한 보상을 과거 시대에나 어울리는 위신과 혈통에 매달려 찾으려 했는데, 그것이 가져온 비극은 당시 우리 가족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큰형 몫이 되고 말았다.
결혼을 그렇게 결사반대만 안 했어도 큰형은 물론 다른 사람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큰 형이 떠오를 때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생각이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멀어지는 남북 국방부가 대북심리전 재개를 결정한 가운데 지난 5월 24일 중동부전선 GOP장병들이 확성기를 점검하고 있다(왼쪽). 북에서 추방된 금강산 민간업체 직원들이 4월2일 귀환하고 있다(가운데). 지난 6월 2일 판문각에서 북한 병사가 남측 지역을 경계하고 있다(오른쪽). | 연합뉴스·경향신문자료사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낡은 생각 때문에 상처받고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새로이 진취적인 미래를 개척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에서는 그게 쉽지 않은 일 같다.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제대로 된 보수파라면, 민주화와 탈냉전이 가져온 여러 불가역적인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보수의 미덕은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돌이키려 하면서 치러야 하는 갈등의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보수파 정권 아래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북한이 식량난 해소와 수해 복구를 위해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통일부가 밝히길 꺼려 며칠간 감추고 있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아마도 그것은 남쪽의 식량 지원이 북한군의 군량미를 늘려줄 뿐이라며 모든 문제를 낡은 이념의 틀로 보는 잘못된 신념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평화협력 기여 때 보수 인정받아

그렇지 않고는 윤리적으로 비난받고 현실적으로도 얻을 게 없는 그 어리석은 일을 하는 데 며칠간 고집을 세울 수가 있었을까.
필자는 세계적 차원의 탈냉전과 그에 병행하는 남북한의 화해 공존은, 글로벌한 차원에서 불가역적 흐름이자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위한 기본 과제이며 동시에 우리 안에서도 이미 강력한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했고 어느 정도 사회 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민주적 성취와 대북정책의 성과를 인정하는 위에서도 얼마든지 보수적 길을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 보수파 정권은 사회 평화와 통합에 기여하는 독자적인 업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본다.

보수가 진보를 이기는 방법은 남북한 화해 협력과 평화 공존에 더 유능한 성과를 보일 때이지 다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보수도 인정받고 그것의 좋은 효과로 진보도 건강하게 성장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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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정치 현상을 묘사하는 말에는 민주적 가치와 충돌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이 가끔 있다. ‘독대’라는 용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는 사라질 법도 한데 여전히 자주 접하게 된다. 최근에는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가릴 것 없이 “정 총리, 이 대통령과 독대”라는 표현이 모든 매체의 표제어로 사용되었다.
 
제1야당인 민주당 원내대표도 국회 교섭단체 연설을 통해 “정운찬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을 독대해 청와대 참모진의 인적 쇄신을 건의하려 했지만 청와대 참모진이 총리의 대통령 독대를 막았(다)”며 독대의 허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진보정당들도 다르지 않다. 이들 사이에서도 누군가가 당대표와 따로 만나는 것을 독대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독대란 과거 왕조 시대에 사용되었던 용어로, ‘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을 뜻한다. 왕이 절대 권력자로서 통치하는 시대의 느낌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기는 어렵겠지만, 그만큼 민주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합의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11일 퇴임식을 갖는 정운찬 국무총리를 가볍게 얼싸안고
그동안의 노고를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최고 책임자들로서 대통령과 총리가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협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할 것이다. 또 그 형식에 있어서 배석자나 참모 없는 만남도 잦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총리가 따로 만나 협의하는 것 자체도 드물고 그런 만남 자체가 대대적인 뉴스가 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시대착오적인 느낌의 표현, 독대

그만큼 대통령이 소수의 측근을 제외하고는 협의를 별로 하지 않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실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대통령의 의사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다보니 대통령과 총리가 단둘이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언론을 위해 기획된 연출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독대라는 표현을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즐겨 사용해도 좋은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생각을 만들어 내고 행동의 방향을 안내하는 지표와 같은 것이다. 말의 좋아짐 없이 인간관계나 공동체를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권위주의적이고 전근대적 정치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서 민주적 가치가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말이 지배할 경우 그때의 정치 언어는 풍부한 생각의 그릇이기보다 낡은 관행과 습속을 지속시키는 생각의 감옥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레바논 출신 소설가이자 시인인 칼릴 지브란이 말하듯 그런 말들 속에서 “생각은 항상 절반쯤 살해”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 운동가들의 잘못된 언어 습관을 고치는 일에 말년을 바친 사울 알린스키라는 교육자가 있었다. 그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박순성 박지우 옮김, 아르케) 속에서 인용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읽으면서 참으로 재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적절한 단어와 거의 적절한 단어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와 같다.” 독대는 적절하지도 않거니와 거의 적절한 단어도 아니기에, 독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사용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보다 분명 더 클 것이다.

민주정치 이상 말의 힘 통해 실현

민주정치의 이상은 강제나 억압보다 설득의 힘, 말의 힘을 통해 실현되는 공동체를 향해 있다. 그런데 정치의 세계를 다루는 말과 언어가 좋지 않다면 그 이상에 다가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절한 말을 쓰는 것은 중요하고, 그래서 좋은 말을 찾고 발견해 사용하는 것이 정치가나 언론인의 좋은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동체를 사람 살 만한 풍요로운 곳으로 만드는 데는 생산의 역할도 중요하고 새로운 기술 개발도 필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좋은 말의 효과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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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가 깊은 악순환의 구조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집권당과 반정부연합 사이, 진보와 보수 사이에 갈등과 적대는 격렬한데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정치세력은 진보파다. 정치가 이성적 기반 없이 무작정 양극화로 치달을 때 힘이 약한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선택의 범위에서 쉽게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악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진보파 역시 기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사태를 보수나 집권세력 탓으로 단순화하고, 즉자적으로 화만 내고 내용 없이 주장만 앞서다보니 비판적 판단을 가진 유권자조차 피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정치운동단체인 ‘진보의 합창’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1.04.02. | 경향신문 DB
 
금년 초 총학생회 선거가 한창인 어느 대학에 갔을 때 “100% 비운동권 후보”라는 홍보 현수막을 보았다. 운동권이 아닌 총학생회장의 출현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듣던 일이었지만, 운동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앞세우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는 상황까지 된 것 같아 생각이 복잡했다. 한 모임에서 만난 대학생들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면서 운동권에 대한 인식이 정말로 그렇게 나쁜지, 나쁘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된 지 꽤 되었으며 대체로 운동권이란 자기 확신이 과도해서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고 소통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정형화된 집단으로 보고 있었다. 

성실함보다 주장 앞세워서야

며칠 전 후배 교수로부터도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친교 모임에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한 사람이 우연히 참석했는데,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단다. 후배는 자신조차도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점점 불편해진다고 말했다. 필자가 보기에 운동권이나 진보 쪽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심리적 결함 가운데 하나는 강한 이념지향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견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차이를 사소하게 다루지 못해 다투고 나서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대 사안에 대한 것일수록 이성적인 대화나 토론은 적다. 그보다는 윤리적 강요나 일방적 진영 논리가 더 압도적이다. 따라서 논란은 주장의 강도가 센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목소리가 낮은 사람들은 참여에서 배제된다. 기록을 남기는 것을 경시하고 잘못된 판단이 가져온 결과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을 힘들어하니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때가 많다. 조직의 체계나 규율은 약하고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과도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생계 때문이라며 사기업에 취직한 뒤에는 자신이 다니는 기업조직의 일사불란함을 격찬하는 경우가 있어 놀랄 때가 있다.

어느 틈엔가 진보 안에서 자조적인 분위기가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는데, 최근 이들로부터 본래 자신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에 가까운 사람이라거나 자기도 운동권 싫어한다는 황당한 말을 자주 듣는다. 아마도 운동권이나 진보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개개인의 무의식적 반응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친근한 인간적 매력 느껴지게

그렇다면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주체적 사고의 기초 위에서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적었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격렬한 갈등이 여전히 담론시장을 압도한다 할 때 그 격렬함이 담고 있는 진실이 뭔지 회의하게 된다. 성실함보다 주장을 앞세우지는 않았는지, 상대를 욕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한 적은 없는지 돌아봤으면 좋겠고, 누구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는 진보가 될 수 있는 길을 넓히는 노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노력 없이 진보가 잘 된다면 그것 역시 진보적인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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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의 필요 때문에 정치가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정치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는 불가피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또 정치 현실을 경험할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지켜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수많은 여론조사의 예측을 크게 벗어난 개표방송 앞에서 필자는, 수천만의 유권자가 분출해낸 정치적 열망을 경이롭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당황하는 한나라당의 모습이든 환호하는 민주당의 반응이든 ‘북풍’이 어떻고 ‘노풍’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해설들 모두 지극히 사소한 일로 보였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과의 불확정성을 최대의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정치제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실감하게 된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6·2 지방선거 전국 228개 기초단체 시장·군수·구청장 당선자, 광역의원 정당별 당선자 수, 기초의원 시·도별 정당 당선자 수

 

진보의 가치를 정치의 방법으로 실천해보고자 했던 이른바 진보정당들의입장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가 흔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선호의 표출을 어렵게 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 이번엔 ‘반MB’ ‘민주대연합’으로 표현되었지만 매번 작은 정당들에 희생을 요구하는 보수양당제의 부정적 효과 등 이들로서는 항변하고 싶은 억울함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진보정당 후보들이 사퇴해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 역시 이들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연합과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소수파의 권리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배려하는 자세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획일주의를 교정하는 데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진보정당 희생 요구 선거제도

물론 한국 정치의 이 모든 불합리에 억울함을 느낀다 해도 결국 문제의 해결자는 진보정당 스스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선거의 경험을 정치적으로 더 지혜로워지는 학습의 기회로 삼는 과제 역시 그럴 것이다. 따라서 심상정 후보의 사퇴를 둘러싸고 진보정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이 정치적 냉소주의로 귀결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전기로 작용할지는 주목할 만한 일로 여겨진다.

필자는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는 아주 ‘좁은 길’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길을 개척해가는 일에 성과가 있으려면 정치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창조적으로 적응해야 한다고 본다. 

진보의 가치를 앞세우는 것만으로 정치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진보의 가치, 조직으로서의 정당,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조차 정치를 구성하는 부분에 불과하며 정치는 그보다 훨씬 넓고 풍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다루는 문제의 범위만큼 크고 강력한 것은 없다. 참여자의 규모에 있어서 현대 대중 정치에 비견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 때문에 정치는 인간 사회의 다른 어떤 영역보다 큰 ‘가능의 공간’인 동시에 매우 위험한 분야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권력’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는 데 기인한다. 정치에 있어서 권력은 전체 공동체의 질서와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면서 타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강제성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정치란 운명적으로 권력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 하는 ‘적극성’의 문제와 권력을 다투는 사람들에게 책임성을 어떻게 부과할 것인가의 ‘제한성’의 문제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나 정치학자도 이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뿐이며,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은 결국 정치를 소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좋은 정당을 만드는 문제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키우고 지키는 일 중요

정당론의 마지막 패러다임’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안젤로 파네비안코라는 이탈리아 정치학자가 있다. 그는 왜 어떤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왜 어떤 정당은 그렇지 못했나를 탐구했다. 그는 성공한 진보정당은 정치가와 지도자의 역할을 유연하게 허용하는 당내 결정구조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결론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는 없지만, 늘 협소한 조직논리를 우선시한 우리 사회 진보정당들은 생각해봐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정치가를 키우고 지키는 일의 중요성은 진보에 더 절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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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을 다닌 필자는 학부 4년을 공부 외의 일로 소진한 뒤 사실상 대학원에 가서야 제대로 수업을 들었다. 정치사상사 과목 첫 시간의 주제는 정치학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동서양의 역사와 고전을 소재로 해서 다양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학문의 출발을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 찾는 소크라테스의 테마가 오랫동안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런데 그 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일이란 단순히 학문의 출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력과 깊이를 보여주는 척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또 그런 채로 죽는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철학자라도 그럴 수밖에 없고, 그 어떤 위대한 이론도 인간 사회의 일부분만을 설명하며,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이론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므로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하며, 그래서 내 생각을 조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묵인과 타협, 포기 등도 감수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신의 세계보다 더 풍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과 배움

또한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에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갖는다. 정직하려 하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것으로 인간 사회의 평화와 안녕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현실이 아닐 것이다. 권력과 통치 없이 질서를 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의 조직 원리는 근본적으로 악마적 요소를 포괄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간적 충동과 열정의 표출은 늘 절제와 책임감, 고민을 동반하게 되며 그런 것들이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가끔 필자는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해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비교적 단순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라면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조금만 확장하면 쉽지 않다는 게 곧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정당은 어떻게 해야 좋아질 수 있을까, 선거제도는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은가,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모여 하는 선거연합의 시도는 어떻게 봐야할까 등등 이른바 내 전공 영역에 대한 판단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늘 유보적이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과 사회는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해질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는 질문에 이르면 판단은 더욱 어려워지고 사실상 거의 좌절할 때가 많다. 물론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고 해서 괴로워할 일은 아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의미가 있고 그런 질문에 대한 끝없는 탐색과 고민이 사고를 더 넓고 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너무나 강한 자기 확신과 절제 없는 주장을 대면하게 되면 몹시 불편해진다. 최근 한 일간신문에서 민주대연합을 강조하는 유명 지식인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분은 진보개혁세력의 연합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연합이 성사되면 선거 승리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고”, 연합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야당은 “역사 앞에서 죄인이 된다”고 말했다.

절제없는 주장과 대면하면 불편

종교적 죄를 심판하는 대심문관이든 역사의 죄를 따져 묻는 지식인이든 어떤 인간도 윤리적 판단을 독점할 수 없다고 믿는 필자로서는, 왜 그리 세상 이치를 다 아는 듯 말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진보하고 개혁하자는데, 표현이 뭐 문제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한다고 말하고 싶다. 민주대연합은 하나의 의견일 뿐, 그 이상으로 강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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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지방선거를 관찰하러 온 외국인 정치학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주요 선거 이슈는 무엇인가?” 세종시, 4대강, 반정부 선거연합 등을 열거했다. 논리적으로는 사회 전체를 찬성과 반대로 양분하는 ‘최대 동원의 정치’를 불러올 만한 이슈들이다. 격렬한 갈등이 이어지고 그에 따라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투표 참여 의지 역시 고조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투표율이 얼마나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서울 마포구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DB

평등한 투표의 권리가 정치공동체 전체의 정당한 결정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선거의 민주성’을 말할 수 있는 최소조건이라고 할 때, 일정 정도 이상의 투표율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동안 “서유럽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기 동안 서유럽 국가들이 평균적으로 80% 가까운 투표율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떨까? 민주화 이후 최초 선거였던 1987년 대선과 88년 총선에서 한국의 투표율은 각각 89.2%와 75.8%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는 63%와 46.1%로 떨어졌다. 정확히 20년 만에 26.2%와 29.7%의 유권자가 투표시장을 떠났고, 비율로 보면 각각 29.4%와 39.2%가 감소했다.

투표율 20년새 급격한 하락

내가 아는 한 이보다 빨리 투표율이 떨어진 나라의 사례는 없다. 전쟁이나 혁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20세기 초 미국처럼 유권자 자신이 나서 등록해야만 하는 제도를 도입해 하층의 투표를 어렵게 한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어찌됐든 한국 정치에서 명실상부한 제1당은 무당파가 되었다. 누가, 왜 투표하지 않을까?

정당이론의 패러다임 하나를 개척한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상당수의 투표 불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체제에서 해소되지 않은 역사적 긴장의 본질에 대해 통찰력을 갖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투표 불참자의 수는 결국 그들이 “기대하는 대안이 억압된 크기”를 말해준다고 보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경쟁하는 정치조직 가운데 하나를 보통의 시민이 선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유권자에게 표를 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먼저 우리 사회가 해소해야 할 “역사적 긴장들” - 남북관계와 평화체제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압축적 경제성장의 부정적 효과를 개선하는 문제일 수도 있고, 급격히 심화되어 온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 에 대해 선택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충실히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대다수 보통의 시민 유권자들에게 정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 없이, 또 그런 기준에서 볼 때 우리 정치가 결핍한 것들에 대한 비판적 반성 없이, 나아가 왜 다수 유권자들이 현재의 정당들을 선택의 대안으로 느끼지 못하는지 하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함 없이, 투표를 해야 할 유권자의 의무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위촉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으로는 지금과 같은 나쁜 상황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정치 힘은 ‘목소리’ 주는 것

지난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사명을 “목소리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치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하층의 유색인종들이 투표를 통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번 의료보험 개혁안을 통해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무보험자 3200만명에게 목소리를 줄 가능성을 열었다. 
 
민주정치가 갖는 민중적 힘은 적어도 미국 정치에서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누가 목소리 없는 다수 유권자들에게 목소리를 갖게 할 수 있을까? 이번 선거도 그렇고 아마도 한동안 한국 정치의 중심 문제는 바로 이 질문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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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필자에게 왜 민주주의라는 가치 내지 이념을 좋아하는지를 묻는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등의 원리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권능에 공동체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정치 체계’라고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해내는’ 민주적 성취에 경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는 데 있어서 재산, 교육, 태생, 신념 등과 같은 자격조건을 따지지 않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유일하며, 공적 이슈를 둘러싼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일정 연령 이상의 구성원 모두 평등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상상은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경향신문DB> 

그러나 필자의 이런 생각이 그리 넓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에서는 더하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최대 약점을 평등에서 찾는 이론이나 주장이 훨씬 더 많다.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평등한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갖게 된 보통의 시민들은 쉽게 어리석은 우중으로 변질된다고 보았고, 그래서 그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계도되는 정치를 바랐다. 

평등의 원리, 민주주의 가치 핵심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관찰자로 알려진 토크빌 역시 평등해지고 유사해진 보통의 사람들은 사사로운 욕망과 즐거움의 추구에 의해 압도되는 경향이 있는 바, “결국은 정부라는 목자 아래 소심하고 부지런한 한 떼의 가축과 같은 국민이 된다”고 보았다. 평등화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약화시킨다거나, 자유와 평등을 서로 대립적인 가치로 당연시하는 주장이 근거 없이 통용되는 곳도 정치학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유사한 논리가 만연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진보를 앞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원인을 “대중의 보수화” 내지 뉴타운 개발과 같은 “대중의 욕망”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한 사례라면, 한나라당이 압승했던 2008년 총선 결과를 서민 대중들의 “계급배반 투표” 때문으로 보았던 설명은 또 다른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각성된 의식의 “깨어있는 시민”과 같은 자격 조건을 필요로 한다거나, 일반시민들이 “조·중·동 프레임에 포획”되어 있어서 문제라는 주장도 다르지 않다. 나아가 젊은 세대를 향해 유리한 취업 조건에만 신경 쓰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없으니 “세상이 이 모양”으로 되었다고 질타하거나, 서민들이 먹고 사는 데만 급급하고 공적 문제에 참여하지 않아 이명박 정부가 전횡을 일삼게 되었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면 이들의 생각이 정말 민주적인가에 깊은 회의가 들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 사회 서민들과 젊은 세대들은 시민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했다. 표를 던졌고 재정적 후원도 했으며 촛불도 들었다. 그런 그들의 자유 의지를 위축시킨 것은 불평등이 급격히 심화된 때문이지 시민됨의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런 그들이 현실의 불평등에 힘들어하고 민주주의와 진보를 주장했던 세력들에게 실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해 민주주의의 종말이 오고 있는데 헛된 욕망이나 추구한다며 화를 내고 깨어나라며 훈계하고 야단칠 수 있는 특권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 

신뢰 못 얻는 정치세력에 책임

지난 정부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운동권 인사들의 시국토론회에 갔다 온 내 친구는 어땠느냐고 묻는 나에게 “보수적 기득 엘리트와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기득 세력의 출현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말해 깜짝 놀랐는데, 그렇다고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문제는 시민이 아니라 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치세력에 있다는 생각의 전환은 왜 어려운 것일까. 그런 전환을 억압하면서 시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알리바이 담론은 언제쯤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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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쯤 어느 저녁식사 모임에서 정부 산하단체 기관장을 만났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대표적인 운동권 인사였는데, 이명박 정부하에서 해임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같이 자리한 사람들에게 이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을 알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의 자리는 국가적으로 너무 중요하고 자신이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므로 로비를 좀 해서라도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특별히 추천하는 사람이 없자 그때부터 그는 이 정부의 반민주성과 무도함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면서 진보니 개혁이니 할 것 없이 모두가 연대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안 그러면 자기 같은 사람들은 다 쫓겨난다는 것이다. 같이 있던 한 국립대 교수는 이 정부를 파시스트 정부라고 규정하면서, 더 심하게 당해봐야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던 사람들도 뉘우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앞의 두 정부에서 자문교수 역할을 했던 그는, 이 정부의 지나침에서 일종의 심리적 보상을 얻는 것 같았다. 그 두 사람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기관장과 교수를 하고 있다.

입으로만 ‘민주연합’ 외치는 그들

가까이 지내는 한 사람이 있다. 1981년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했다. 햇수로 19년 동안 그렇게 했다. 민주노총 대변인을 끝으로 현장을 떠난 그는, 못다 한 공부의 끈을 다시 잇고자 했고 내가 있는 출판사에서만 두 권의 책을 냈다. 

경향신문 DB

 
작년 그의 생일날, 그의 처는 남편 몰래 깜짝 생일잔치를 준비했는데 나도 초대를 받았다. 거기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다. 조합원 2만5000명을 이끄는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었다. 80년대 중반 노동운동을 하다 만난 그 두 친구의 뗄 수 없는 인연과 재밌는 일화를 들으며, 언제까지나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노조위원장 친구는 이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에 맞서다 구속되었다. 지난주 친구를 면회하러 가는 그를 따라 나도 서울구치소에 갔다.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면회실에 들어서자 113번을 단 그의 친구가 들어왔고, 투명 칸막이 너머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마이크를 통해 짧은 대화를 나눴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마라”며 자기 방 사람들은 먹을 것을 포함해 뭐든 같이 나누는 “서울구치소에서 가장 민주적인 방”임을 자랑했다. 

가족들 안부를 서로 묻고 각자의 근황을 말할 때, 둘은 너무 쾌활했다. “대학원 박사과정은 합격했나?” “와! 축하한다.” “박사 친구 두게 생겼네, 공부 열심히 해라.” 구속된 현실을 어떤 말로 안타까워하고 위로해야 할까를 걱정하며 면회실에 들어섰던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는 깊은 연대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꾸 나는 마흔아홉 동갑내기 두 남자에게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쓸쓸함을 느꼈다. 노동운동 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부모와 처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오면, 흙집 지어야지?” “꼭 그럴 거다. 같이 짓자.” “난 손재주가 좋다.” “난 끈기가 있다.” 
그리고 서로 빙그레 웃는다. “몸은 어때? 약은 챙겨 먹지?” “빼놓지 않고 먹는다. 걱정마라. 주전부리 일절 안하고 나오는 밥 먹고 운동 열심히 한다.” “그래, 꼭 그렇게 해야 한다.”

노동현장을 믿는 건강한 운동가

오순도순 살아갈 그들의 미래, 그 흙집을 그들은 짓게 될 것인가. 인덕원역 긴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가 묻자, “집 짓는 데만 3억원이나 든다는데”라며 웃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서글픈 이야기일 수 있지만, ‘민주대연합’의 이름을 걸고 자기 자리를 위하여 만인의 투쟁을 희생시키려는 사람이나, 더 당해봐야 한다며 삐뚤어진 심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날 때보다 수천, 수만 배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현장은 건강하다”며 자신의 조합원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정부의 가혹한 정치에 진짜로 반대하고 진짜로 싸우는 사람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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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고 지금은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우리 사회 진보파의 언어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때로는 폭력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말을 했다. 그러다보니 진보적 매체나 논의의 장에 더 이상 참여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되더란다. 

미국 진보파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주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울 알린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930년대 시카고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진보적 활동가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가 교육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말의 공격성 혹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돼지’나 ‘파시스트’라고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활동 방식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운동권이 원래 그렇지”라는 식으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게 해 사회운동의 고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일반 대중의 경험세계 속에서 자신의 말이 어떻게 공명될 것인지를 중시해야 하고, 또 “상대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진보의 언어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진보파의 언어 때론 폭력적

최근 인터넷 글쓰기의 영향이 커지면서 진보파들의 언어습관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보여 주목되고 있다. 집권세력과 그 수장을 ‘MB’ 내지 ‘2MB’로 표현하고 거기에 ‘명박이’ ‘쥐박이’ ‘생쥐’ ‘바퀴벌레’ 등의 모욕적 이미지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진보파들의 말과 글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통치의 가혹함에 대한 강렬한 항의의 소산이겠지만,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한번은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콘서트에 갔는데, 시작에 앞서 사회자가 그 취지를 설명했고 해직교사 한 분을 무대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해직교사가 자신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현 정부를 “이명박 정부”라고 지칭하자 사회자는 “MB 정부를 좋아하시나 보네요”라고 물었다. 이명박 정부와 MB 정부 사이의 언어 선택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사회자에게는 예민하게 포착되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객석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용했는데, 사회자가 농담이라고 말한 다음에도 여전히 조용했다. 진보파들과 그렇지 않은 일반 시민 사이에 언어습관의 괴리가 커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말이 갖는 공격성 내지 폭력성은 주로 보수적 정향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폭도나 빨갱이, 친북좌파라고 공격하는 일이 허다했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비이성적 논리가 강요되기도 했고, 빨갱이들은 개조가 안 되고 대화로 풀어보려 했다가는 자칫 말려들기나 한다며 “때려잡자”거나 “북한에 보내자”는 무서운 주장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억압적인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진보파들 사이에서도 말이 자꾸만 나빠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 불편한 일이다. 

인간적 따뜻함 뒷받침될때 힘

흑인이라는 정체성 속의 이중적 억압성을 날카롭게 문제 삼는 작품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은, “문학은 정치적인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면, 분명 이 말과 글은 파당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성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자로서 진보파가 갖는 사회적 가치 또한 파당적이 됨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파당성은 공정한 태도와 인간적인 따뜻함 그리고 말의 부드러움에 의해 뒷받침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진보적인 것의 가치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인간적인 것의 가치가 더 넓고 풍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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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우리 사회 진보파 가운데는 개인 삶을 돌보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진보를 위해서는 개인 삶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사적 영역 자체를 부정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돈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경향신문DB>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한 민주노동당은 소속 국회의원과 보좌관, 중앙당 및 지역조직 상근자 등, 이른바 진보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된 사람들에게 평균 127만3000여원의 월급을 줬다. 국가 예산으로 지급된 국회의원과 보좌관 급여는 당이 환수했다. 이 모든 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받는다”는 논리로 이루어졌는데, 그 후 약간의 증액은 있었지만 그 원칙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지켜지고 있다.


결과는 어땠을까? 가족을 건사하고 자녀를 교육하는 등 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요구나 불만조차 잘 표출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자칫 돈을 밝히는 사람이거나 진보의 대의에 헌신하려는 자세가 안돼 있는 사람으로 비난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균임금 받는 국회의원

그렇다고 진보에 대한 도덕적 헌신은 강해졌을까? 그것도 아니다. 개인 삶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열정은 식고 현실의 압박은 커졌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진보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되니, 조직의 인적 역량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그렇다고 이들을 교체할 수도 없었다. 저임금 구조에서 고용 안정마저 위협되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유능한 인력이 충원되고 순환되기보다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저임금 구조로 통합·유지하는 조직, 공식적으로는 급여를 올리기 어렵다보니 편법을 통한 소득 보전을 강구해야 하는 진보 아닌 진보정당이 되고 말았다.

공직에 대한 보상을 노동자의 평균 임금으로 한다는 생각은 파리코뮌의 원칙이었다. 달리 말해 혁명 내지 혁명정부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혁명의 원칙으로 실천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에게 기반을 두는 정치체제이고, 진보정당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평범한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수용되고 실천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개인 삶을 희생하는 진보는 혁명의 원칙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원리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차티스트 운동을 단순히 노동자 참정권 주장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때 제기된 요구 가운데 하나는 대표들에게 세비를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개인 삶을 희생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공직에 돈을 요구하는 것은 천박하다며 반대한 사람들은 돈 걱정이 없는 귀족들이었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주기 시작했는데, 그래야 정치 참여와 개인 삶이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지켜지는 개인 삶이 튼튼할 때 민주주의가 사회 속에 뿌리내릴 수 있듯이, 진보의 이름으로도 개인 삶이 안정될 수 있어야 자기 삶을 걸고 진보를 지키려는 의지가 커질 수 있고 또 오래갈 수 있다. 돈이 진보정치를 타락시킬까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 저임금을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다.


민주주의 원리와 양립 어려워

돈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데 꼭 필요한 존재이다. 돈을 잘못 다뤄서 인간이 타락하는 것이지 돈 그 자체 때문에 문제인 것은 아니다. 돈에 무심하다거나 돈 욕심이 없다는 것을 진보인 양 자랑하거나 돈이 가치를 잃어야 인간성이 되살아난다는 진보의 통념은, 자칫 온정적 엘리트주의나 변형된 귀족주의이거나 현실의 고용·피고용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나타날 때가 많다. 진보를 이유로 개인 삶이 희생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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