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팔레스티나의 유다국에서 보수 수구파와 진보개혁파 간의 갈등이 한창 격렬했던 때다. 당시 개혁파가 부르짖던 주요 의제의 하나가 ‘산당’의 철폐였다. ‘산당’이란 지역에서 신을 모시는 성소들로, 대개가 산에 있다 보니 산당이라고 불렸다.

개혁파가 집권하고 있던 때, 정부는 개혁조치들과 함께 대대적인 문서 편찬 사업을 벌였다. 그 문서들 중에는 오늘날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공히 핵심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제1성서(구약성서)의 원본들도 포함된다. 그 하나인 왕조실록(열왕기)에서 왕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산당들의 철폐 여부였다. 한데 그 문서는 당대의 개혁군주 두 명만이 그렇게 했음을 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산당 철폐는 수구-개혁 논쟁이 한창이던 때 개혁파가 제기한 논점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산당의 무엇이 문제이기에 개혁파가 그토록 철폐를 부르짖고 역사관으로까지 부각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이들 개혁파가 주장한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도 놀랍다. 그들은 부자들이 강탈한 토지를 소농에게 되돌려주려 했고, 노예가 된 이들도 신분을 회복시키려 했다. 소농의 몰락 경로를 파악하여 법과 제도를 통해 그것을 원천봉쇄하려     했으며, 이주민에게도 권리를 부여하는 정책을 취했다. 몰락의 위기에 처한 소농이 회복되고 이주민도 백성이 되면, 백성은 군주에게 더욱 충성할 것이고, 정부 재정도 보다 튼튼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몰락한 이들을 구휼하는 복지체계들도 기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의 정책들을 위한 주요 비용을 부자증세를 통해 충당하려 했다.

한데 개혁파가 집권하고 있을 때도 개혁은 쉽지 않았다. 막강한 자원을 장악하고 있는 수구보수 세력의 저항도 그랬거니와, 무엇보다도 농민들 중 다수가 오히려 그 개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2015 핵심개혁과제 점검회의’를 주재하면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_청와대사진기자단


개혁세력이 파악한 문제의 핵심은 바로 산당에 있었다. 산당은 당시 가장 중요한 매스미디어였다.

대중과 중앙정부를 연결하고 대중과 신(또는 진리)을 연결하는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소통매체인 것이다. 당시 중앙의 개혁세력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소농과 이주민을 위한 개혁안을 포고했다. 이때 그 개혁적 조치들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가장 중요한 소통매체는 산당이었다.

그런데 산당은 오히려 왜곡의 장치였다. 산당이라는 제도가 그랬다. 산당들끼리의 경쟁에서 규모가 클수록 유리했다. 또 사제들은 규모의 경쟁에서 성공할 때 더 높은 사제가 되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그러했다. 더욱이 사회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면 대지주들과 산당의 연계고리는 더욱 견고해졌다. 역설적이게도 개혁파가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은 바로 그런 때에 온다. 하지만 그 개혁적 의지가 산당을 통과하면서 왜곡된다. 산당이 대체로 보수수구파의 소통의 장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개혁파로 하여금 산당의 철폐를 강도 높게 부르짖게 했던 이유다.

시시콜콜 성서 속 사건의 배후가 된 한 역사를 들춰본 것은 ‘그 산당들’에서 바로 우리 시대가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양극화 문제가 너무나 심각해졌다. 복지나 경제민주화 같은 개혁안이 주요 의제로 부상한 것은 바로 이런 현상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이러한 의제에 훌륭하게 편승한 덕이 크다. 한데 오늘의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은 그 공약들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양극화를 더 악화시킬 것이 뻔한 법안들과 명목뿐인 복지와 경제민주화 조치들,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정책들, 서민증세와 부자감세안들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제는 그럼에도 서민의 지지가 놀라울 만큼 탄탄하다는 데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매스미디어 역할을 하는 ‘오늘의 산당들’이 주목되는 이유다. 지상파와 종편 방송, 그리고 신문 등 주류 언론이 내뿜는 정보의 편파적 전달과 해석들은 총선에 임박할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이런 언론 상황 아래서 진정한 서민개혁이 가능할지 우려된다.

“산당들을 폐하라”라고 외쳤던 고대 유다국의 개혁정책은 실패했다. 한데 놀랍게도 이 구호는 그 나라가 몰락한 이후까지도 오래도록 남았다. 아니 더 이상 구호가 아니라 신탁으로 변형되어 유령처럼 그 땅을 떠돌았다. 해서 그 땅에 등장한 새로운 체제들은 이 유령 같은 신탁을 감안하지 않고는 어떤 국가도 만들 수 없었다. 하여 바위에 던지는 달걀에 불과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시대의 산당들을 폐하라는 구호를 멈출 수 없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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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땅만 파먹고 사신 어머니가 대처로 나가 배울 만큼 배웠다는 딸에게 “쌀도 못 되고 보리도 못 되는 글로 말로 먹고산다니 그거 참 우습구나!” 하며 혀를 차시더란다. 옛날 노인이 보시기에 일 같지도 않은 일로 먹고사는 인구가 적잖다. 곰곰 경전의 문자 속을 읽고, 오늘을 위한 뜻으로 풀어서 말해야 하는 종교인도 그 가운데 하나다. 쌀도 보리도 못 되는 말과 글 따위로 사는 게 미안하다면 말 한마디, 글 한 토막이라도 밥이 되고 옷이 되게 해야 마땅하리라.

그렇긴 한데 종교인이라면 되도록 사회적 발언을 삼가는 게 이롭다. 아예 현실과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도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 여름에 수재의연금, 겨울에 연말성금 이렇게 두어 번의 성의만 표시해도 사람 점잖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고로 종교인이라면 그 정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어떤 지당한 말씀이라도 누군가는 서운하게 만든다는 이치를 감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관 않겠다는 오불관언이 상책일지 모른다.

원주 사람 장일순(1928~1994)의 일화다. 시골 아낙이 딸 혼수비용으로 모아둔 거금을 기차에서 몽땅 소매치기당했다며 찾아와 울고불고 매달렸다. 선생은 아낙을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가서 소주를 시켜놓고 노점상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기를 사나흘, 돈 훔친 작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를 달래서 도로 받아냈다. 선생은 그 후로 가끔 역에 가서 그 ‘쓰리꾼’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한 잔 받고 용서하시게나….” 쓴 소주 한 잔을 받고 막대한 영업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 소매치기의 심정이 궁금하다. 그런데 한 번으로 그쳤으니 망정이지 사사건건 그래서는 안되느니라 간섭하고 나섰다면 천하의 장일순이라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타령 자비타령이지 어째서 현실을 외면하느냐는 꾸지람을 흔히 듣는데 종교계라고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1년 3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이 우리나라 전역의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한다며 정부의 야심찬 프로젝트를 반대하고 나선 적이 있다. 당시 불교계도 “우리 땅에 대한 무례이고 모독”이니 “지켜보고만 있다가는 우리 모두 씻을 수 없는 범죄자가 될 것”(법정 스님)이라며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야 할 당연한 말씀이었다.


민주평통 종교인도지원위원회 영담 스님과 성타 스님 등 참석자들이 4대강 사업과 대북 지원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_연합뉴스


하지만 교회 안팎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일간지 1면에 광고를 낼 만큼 재력을 갖춘 신도들은 “성당에 나가기가 무섭다”면서 엄포를 놓았고, 그런 광고를 덥석 문 신문들은 “토목 전문가도 아닌 주교가 무슨 근거로 치명적 자연 손상을 운운하는가” 하면서 한껏 꾸짖고 빈정거렸다.

주교들은 당황했다. 평소 이런 푸대접을 받아본 적도 없거니와 “닥치고 일치”를 강조해온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교회의 분열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추기경이 파괴적 개발은 반대하나 발전적 개발은 찬성한다는 요지로 봉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제 그만 물러나시라는 타박만 듣고 끝났다. 4대강만큼은 아니지만 교회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것 봐라,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분란만 일으키지 않았느냐는 비난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모처럼 세상의 아픔에 공명했던 주교회의는 위축되었다.

이듬해 봄 후쿠시마 원전대폭발 1주년을 맞아 “정부의 핵발전 확대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는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채택해놓고는 아무 결정문도 내지 못한 채 폐막했다. 탈핵선언이 자칫 4대강 반대의 경우처럼 자중지란을 일으킬까봐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서 더욱 그랬다.

말과 글로 연명하는 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 나라는 ‘지옥 조선’이 되고 말았다. 이제 어디에 대고 “보아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구나!”를 외쳐야 할지 모르겠다. 설교자의 직무란 본시 “이러다가는 망하고 말리라!”면서 사회의 안일과 교만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은 망했다고 믿는 젊은이들이 절반에 육박하고 있으니 그럴 일도 별로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주축은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이만하면 너끈히 새 누리라 할 만하다고 믿는 노인들이다. 그 앞에서 내일은 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사나운 승냥이 두 마리가 양쪽에서 으르렁거리는 통에 할 말 못하고 끙끙거리는 형세를 그린 글자가 있다. 바로 감옥 ‘옥(獄)’이다. 말씀이 처한 그런 사회적 형편을 일컬어 ‘지옥(地獄)’이라 한다.


김인국 |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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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머문 25일 동안 우리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단어는 ‘화쟁(和諍)’이었다. 다툼을 화해한다는 뜻이다. 혹은 평화롭게 다툰다는 의미로도 해석한다. 원효에 의해 제시된 화쟁은 부분에 집착해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다른 차원과 높은 차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조계종 화쟁위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사는 길을 성찰하고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계종의 공적기구이다. “중생의 병은 무지와 탐욕에서 생기고 보살의 병은 연민에서 생긴다”고 <유마경>은 말하고 있다. 다양한 욕구와 가치가 충돌하는 삶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대변하면서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길을 찾는 화쟁은 자비구현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한상균 위원장 문제를 화쟁의 정신과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사태는 공권력의 강제집행을 유보하고 한 위원장이 자진 출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물리적 충돌을 막고 평화적이고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화와 타협의 자리를 마련해주지도 못하고, 암묵적 압력으로 강제 퇴거시켰다고 말한다. 나아가 조계사가 더 이상 이 시대의 ‘소도’가 아니라는 평가도 많다.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극한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안전하게 보호 받으면서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전달해주는 ‘제3지대’가 사라져버린 것은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상균사태 이후 도법 스님의 화쟁에 대한 비판도 일각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그 선한 뜻을 의심하지 않으며, 화쟁의 가치 또한 존중하지만, 화쟁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하고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도법 스님이 모든 생명이 상생하는 화엄세계를 이루기 위해 대안을 일군 지리산 실상사에서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모시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그 진정성과 열정을 누구보다도 믿는다. 그리고 사석에서는 비판적 직설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자기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화쟁의 정신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다듬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쟁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염려는 한결같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화쟁은 정확하게 ‘사실’을 파악할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진실이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주장과 주장이 충돌할 때, 그 양측 모두를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판단해 나름대로 옳지만 모두가 틀렸다고 하는 진단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갈등 하나하나에는 각기 다른 원인과 환경이 존재하고 있다. 어떤 충돌이 생겨 공정하게 사실을 파악해보니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크게 잘못한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런 경우 충돌하는 양자를 나름대로 ‘일리 있는 대결국면’으로 판단하고 화쟁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날 때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양비론과 양시론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판단과 시각은 사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마침내 힘있는 세력들의 부당한 반칙과 폭력을 은폐하고 정당화시켜주는 화쟁이 될 수 있다.

화쟁은 때로 어느 ‘편’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화해와 상생을 추구하며 “다른 것이 틀린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함정을 갖고 있다. 인종, 성별, 종교, 지역에 따라 문화와 규범과 방법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차이가 있다고 해서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 사람들의 생각과 차별적 행위는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름’을 차이와 다양성, 혹은 일리 있는 생각과 행위로 인정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도시 곳곳에서 세입자와 건물주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을 파악해 볼 때 건물주가 세입자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지나치게 세를 올리고 있다면, 그 갈등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럴 때는 어떻게 화쟁해야 하는가. 세입자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함께 살아가자고 건물주를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함께 사는 길을 법으로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고, 웃으면서 손을 잡게 하는 일이 진정한 화쟁의 정신이고 방식일 것이다. 탐욕과 독점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교묘한 옳지 않음이 너무도 많다. 파사현정(破邪顯正)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상생하는 길, 이것이 진정한 화쟁이 아닐까?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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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달랐다. ‘혼밥’이란 단어를 접하고 잠시 혼란스러웠다. 집밥은 집과 밥이 결합된 말이어서 금세 알아차렸는데 혼밥 앞에서는 멈칫했다. ‘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막막했다. 알고 보니 혼밥이란 ‘혼자 먹는 밥’이었다. 집밥이 역설적으로 집과 밥이 분리된 사태를 의미한다면, 혼밥은 집밥에서 한걸음 나아가 1인 가구의 신산스러운 삶을 지시한다. 집을 떠났거나 집에 혼자 남은 400만 1인 가구가 매일 혼자 밥을 먹고 있다.

혼자 밥 먹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늦은 오후 중국집에서 혼자 짜장면을 먹는 중년 사내, 자정 무렵 귀가해 혼자 찬물에 밥을 말아먹는 전문직 여성.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영화나 소설을 통해 한두 번 접해보았을 것이다. 우리 시도 밥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황지우의 ‘거룩한 식사’다. 시의 화자는 분식집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의 “풀어진 뒷머리”를 보며, 또 파고다공원 근처 순댓국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을 보며 눈물겨워 한다.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의 무대 역시 식당이다. 가세가 기울어 서로 헤어져야 하는 모자(母子)가 설렁탕집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어머니는 중이염이 심해 고깃국을 먹지 못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국물이라도 더 먹이려고 식당 주인에게 너무 짜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한다. 주인은 눈치를 챘지만 모른 척하고는 국물에다 깍두기까지 가져다준다. 어머니와 주인의 속내를 읽은 아들은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내며 혼잣말을 한다. “눈물은 왜 짠가.”

늦은 밤 편의점에서 혼자 컵라면을 먹다가 낯선 남자를 배려하는 시도 있다. 이경숙의 ‘겸상’. 시의 화자는 여성인데, 한 남자가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올려놓으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화자는 그 남자와 함께 늦은 저녁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자발적으로 “외간 남자”와 겸상을 하는 여성의 마음 씀씀이는 함민복 시의 설렁탕집 주인보다 격이 높아 보인다. 그녀는 “그가 허겁지겁 먹지 않도록 나란히 서서 오래도록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집밥백선생_경향DB


음식을 주제로 한 시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일제강점기 백석을 필두로 김지하, 천양희, 조정권, 윤제림, 안도현, 문태준, 이규리 등 우리 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밥을 초대했다. 밥을 테마로 한 시를 엮은 시집 <밥>(정끝별 엮음)까지 나왔을 정도로 시인들은 밥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밥은 일찍이 하늘이고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밥에서 공감과 나눔, 배려와 연민을 발견해왔다.

집밥, 혼밥과 함께 먹방, 쿡방이란 신조어가 잇따르고 있다. 셰프나 레시피란 외국어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공중파나 케이블, 인터넷 곳곳에서 음식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연일 화면을 채우고 있다. 독거사회가 어느새 식탐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먹방을 틀어놓고 혼자 밥을 먹거나 식탐을 해소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한 과도한 식탐 현상을 푸드 포르노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먹방의 생산과 소비 구조가 포르노와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다.

식탐사회 앞에서 ‘밥시’를 환기하는 이유가 있다. 밥 앞에서 삶과 사회를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밥시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위에 소개한 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밥시를 좋은 시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입이다. 타인을 자기화(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시의 마음’이 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지금 내 앞에 없는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기. 사람뿐 아니라 다른 생명, 사물, 자연이 되어보기. 이것이 시의 마음일 것이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밥 먹듯이 해온 말이지만) 밥상이 둥근 이유는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먹기 위해서다. 평화(平和)에는 평상에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혼밥이 많은 사회는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사회다. 사회가 없는 사회, 가장 나쁜 사회다. 밥상머리에서 생각해보자. 시의 마음은 상상력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시의 마음은 근원에 대해 질문한다.

혼밥 앞에서 묻되 나는 왜 혼자 먹는가라고 묻지 말자. 그러면 자괴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가정환경을 탓하고 짧은 가방끈과 이력서를 문제 삼게 된다. 원인은 대부분 외부에 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누가 혼자 밥을 먹게 하는가. 무엇이 1인 가구에게 ‘흙수저’를 들게 하는가. 그렇게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나쁜 정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쁜 경제에 휘둘리는 나쁜 정치 말이다.


이문재 |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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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일 아침. 동국대 정각원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3000배 기도를 올리던 중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동국대 학내 문제의 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 50일째를 맞은 부총학생회장 김건중군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기도를 멈추고 단식장을 찾았다. 건중군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학생에게 물어보니 동공이 풀리고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사태는 급박했다. 그날 동국대 이사회에서 학내 문제에 대한 납득할 만한 조처가 없으면 투신하겠다는 한 대학원생의 예고까지 겹쳐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이사진 전원 사퇴가 결정돼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다.

“바라만 보아도 아픈 자식인데….” 자식이 옳은 일을 한다는데 부모라고 해서 말릴 수 없다며, 단식 중인 아들을 설득해 달라는 학교 측의 권유를 거절한 건중군의 어머니도 병원에서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다이어트 좀 했냐”며 의연함을 지킨 아버지도 눈시울을 붉혔다. 부끄러움과 참담함이 가슴을 억눌렀다. 중생의 아픔을 위로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종교인이 지녀야 할 지고의 가치다. 그런데 진리와 자비 구현의 건학 이념을 가진 종립대학에서 젊은 생명을 벼랑 끝에 서게 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동국대의 문제를 넘어 우리나라 대학의 현주소를 깊이 톺아보게 한다. 대학의 존재 이유는 학문 탐구와 진리의 발견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 정의와 사랑을 배양하는 지성의 산실이다. 그러나 대학의 모습은 이런 가치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 안에서 대학은 경쟁과 수치적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는 취업 준비장이 되었다.

동국대 사태 막바지 나흘 동안 교정에 머물면서 필자가 생생하게 체감한 대학과 우리 사회의 위기는 공동체 정신의 실종이었다. 공동체 정신은 관계의 보편적인 바른 정립이다. 학생과 학생이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우정의 관계, 곧 친구가 되는 것이 공동체이다. 선생은 학생에게 사랑과 지혜를 주고 학생은 선생에게 존경과 믿음을 주는 사제관계가 공동체이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정신이고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무관심과 외면이 있었고, 진정성 있는 대화와 설득보다는 이기고 지는 승부의 논리만이 있었다.


동국대 부총학생회장 김건중씨가 총장과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고 있다._경향DB


대학은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바람직한 관계가 일탈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생명 중심의 자리에 돈과 권력을 숭배하는 ‘매머니즘(Mammonism)’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돈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두는 물질만능주의는 인간의 인격마저 물질적 잣대로 가늠하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이어졌다.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 묶여 있는 해악의 사슬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특히 종교계에서 운영하는 교육시설을 돌아보면 수행자로서 부끄럽고 안타깝다. 일제강점기부터 이 땅에는 종교계가 많은 학교와 병원, 복지시설을 세웠다. 교육을 통해 민중은 깨어났으며 민족의 미래를 밝혔다.

그러나 오늘날 각 종단이 운영하는 사학의 모습은 비리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여타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사학법 개정에 무시할 수 없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종교사학의 건학 이념은 각 대학이 추구하는 보편적 이념과 비슷하다. 진리, 평등, 자비를 체득함을 목적으로 한다. 다만 하느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전제만이 다를 뿐이다. 배타적 특별함이 아닌, 보편적 가치 실현이 종교사학의 건학 이념이다. 그럼에도 종교사학에서 본래 자리의 종교다움도, 대학다움도 보기 힘들다. 오히려 종교라는 신성의 권능과 법적·제도적 권한으로 특별한 권력을 학교에 행사하고 있다.

대학이 본연의 가치로 거듭날 때 우리 사회의 정의도 바르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종교사학이 선두에 선다면, 먼저 ‘학교’에 대한 생각을 ‘크게’, 그리고 ‘다르게’ 바꾸어야 한다. 학교는 종단 고위층의 전유물이 아니며, 종교를 강요하는 선교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대학은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의 공공재인 것이다. 재단의 역할은 건학 이념을 실현하도록 지원하되 부당한 간섭은 금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변질되고 뒤틀린 교육 문화에 균열을 내고 울림을 주는 역할이야말로 종교사학의 몫이다.

종교라는 힘을 빌려 일부 성직자가 교육현장에서 ‘누리고’ 있는 권력은, 다수의 선생과 학생의 정당한 목소리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풀 위에 바람이 불 때 풀은 눕는다. 그러나 뉘가 알랴, 바람 속에서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시경>의 한 구절이다. 시끄러운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자꾸 되뇌게 된다.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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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대학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나라가 어느 나라일까. 이 나라 사람들은 늘 쫓기고 불안해한다.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공을 추구하느라 괴로워한다. 이들의 목표는 막연한 물질적 성공이고,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수익을 얻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도덕적 기초가 없는 세계’를 향해 표류하고 있다고 쓴 작가도 있다.

어떤 여행자는 이 나라 사람들이 길거리든, 도로 위에서든, 노천이든 극장이든, 커피숍이든 아니면 가정집이든 어디서든 대화할 때 ‘돈’이라는 단어가 빠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법학자는 모두가 최상층이 되고자 하는 병적인 조바심으로 인해 ‘무서울 정도로 정신착란이 빈발’한다고 언급했다. 한 출판인은 이 나라 젊은이들이 ‘햇빛을 빼앗겼다’라고 표현했다.

어느 나라일까. 나이가 지긋하신 시민대학 수강생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리나라’라고 답했다. 지난 수요일 오후, 교양과목을 듣는 대학생들에게도 위와 같은 내용을 들려주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도 쉽게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 그렇다면 위의 상황이 어느 시기에 발생했다고 보느냐고 되물었다. 대부분 2015년 현재라고 답했다. 중년층이나 이십대 초반 학생 모두 답을 맞히지 못했다. 위에 소개한 나라는 미국이고, 위의 암울한 시기는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180여년 전인 1830년대다.

최근 번역된 모리스 버먼의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김태언·김형수 옮김, 녹색평론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미국사를 전공한 학자가 아니라면, 보통의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일반 상식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버먼에 따르면, 미국의 지식인조차도 미국인의 정체성, 미국 사회의 작동방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눈으로 현실을 보면서도 그 현실을 부정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국 국기_경향DB


문화사가이자 사회비평가인 버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일반 상식을 여지없이 뒤집는다. 그는 건국 이후 미국을 이끌어온 지배 이념은 청교도 정신이나 공화주의가 아니라 허슬링(hustling)이라고 말한다. 허슬(hustle)이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뜻한다. 그러니까 허슬러(hustler)는 한마디로 탐욕스러운 경제적 동물이다. 버먼은 미국인은 허슬러이고, 그들의 삶의 방식은 허슬링 라이프라고 단언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구성하는 야심, 혁신, 근면, 조직, ‘할 수 있다’ 정신이 다 허슬링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불편한 진실’일 때가 많다는 데 동의한다면, 버먼의 논지는 진실로 읽힌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목록은 더 있다. 남북전쟁이 남부의 노예제를 해방하기 위해 발발했다는 우리의 상식도 버먼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남북전쟁의 원인은 자본주의였다. 산업화로 치닫던 북부가 농본사회에 머물러 있던 남부를 복속시키기 위해 노예제를 빌미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후 허슬링 라이프는 기술 숭배와 만나면서 가속도를 낸다. 버먼은 미국인들이 기술을 기독교 내세관과 동일시했다고 지적한다. 미국인들은 일찍이 기술의 진보는 신성한 계시이며 기술이 국가의 진보와 직결된다고 확신해왔다는 것이다.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온몸으로 겪어온 베이비 붐 세대,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성거리는 대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는, 19세기 이후 미국이 달려간 길을 우리가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의 가까운 미래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두 세기 전 미국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경제적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경제적 동물이 되고자 발버둥 친다. ‘나는 허슬러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버먼은 책에서 자기 의견을 지지하는 미국인이 20만명이 채 안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버먼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특이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카터는 미국 역사상 매우 드물게도 ‘내적 풍요와 외적 검약’을 외쳤다. 카터의 ‘비현실적 비전’은 레이건에 의해 사라졌다. 미국은 ‘외적 풍요와 내적 공허’로 즉시 복귀했다. 버먼은 미국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미국인들이 타자(다름)에 대한 공감능력, 사익보다 공공선을 우선하는 온전한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미국과 다른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에게 버먼이 강조한 ‘과거의 미래’, 즉 ‘오래된 미래’는 무엇이었던가.


이문재 |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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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얼마나 가르쳐야 할까? 사람 구실 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배움이 필요하지 않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맞다·틀리다, 깨끗하다·더럽다, 이 정도만 알아도 모자람이 없다.

여태껏 살아보니 삶의 이치는 ‘있다·없다’의 이진법에 달려 있었다. ①좋다와 나쁘다. 어떤 게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인가. 있을 게 있어야 좋다. 없을 게 없어야 좋다. 있어야 할 게 없으면 탈이 난다. 없어야 하는데 있어도 문제다. ②맞다와 틀리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면 참이다. 있는데도 없다 하거나 없는데도 있다고 하면 거짓이다. ③깨끗하다와 더럽다. 깨끗한 것은 무엇이고, 더러운 것은 무엇인가. 없어야 하는 것을 다 치워 없애면 깨끗하다. 치우지 않았거나 치우다 말면 더럽다. 사람답게 사는 비결은 이렇게 단순하다.

있다와 없다를 알고, 있어야 할 것과 없어져야 할 것을 바로 알아 그대로만 처신하면 탈도 없고 걱정도 없다. 다음은 천하태평을 누리는 비결 세 가지.

첫째, 있어야 할 게 있어야 좋고, 없어야 할 게 없어야 좋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져야 할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 빼앗겨도 안되고, 양보해도 안되며, 빌리려고 해서도 안된다. 이와 아울러 없어야 하는 것은 절대로 갖지 말아야 하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은 냉큼 쫓아버려야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역시 내보내는 게 좋다. 약으로 쓸 때가 있겠지 하고 곁에 두다 보면 태산만 한 개똥이 쌓이고 만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들이는 간결한 삶이 좋다. 가질 것을 갖지 못하거나 없어야 할 것을 줄줄 매달고 살면 불쌍하고 초라해진다.


둘째, 있는 것은 있다고, 없는 것은 없다고 짤막하게 말하면 틀림이 없다. 그와 반대로 있는 것을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큰일이 난다. 구차하게시리 “있는 것 같다”거나 “없는 것 같다”고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일도 금물이다. 그게 쿠데타였는지 구국의 결단이었는지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면 헛발 딛는 일이 없고, 꿀리거나 눌릴 일도 없다.

참말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 거짓말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인다. 그런데 된장이라는 것인지 똥이라는 것인지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말도 사람을 망치고 세상을 해치기는 마찬가지다.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가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4시간 비상국회 운영본부' 첫 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전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노령연금 도입 공약 축소·수정에 대해 “박근혜 정권은 화장실 정권”이라고 말했다._박민규기자



셋째, 풍진 세상일수록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오탁악세 가운데서도 청풍명월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있을 것만 있으면 푸를 청(靑), 치울 것을 다 치웠으면 맑을 청(淸)이다. 치우지 않았거나 치우다 말았으면 흐릴 탁(濁)이다. 본래 더러움이란 다 없어야 할 것이 ‘덜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 치우려면 다 치워야지 조금이라도 남기면 덜 없고 더러운 것이 된다. 질척질척해도 안되고 구질구질해도 안된다.

다른 말은 몰라도 ‘더럽다’는 소리만은 듣지 말아야 한다. 짐승이나 다름없다는 치욕스러운 판결이니 말이다. 한편 ‘깨끗하다’는 말에는 ‘깨고 끝냈다’는 뜻도 들어 있다. 깨뜨릴 것을 깨버리고, 끝낼 것을 끝내면 비가 갠 하늘처럼 맑아지고 깨끗해진다.

‘지킬 것 지켜서 가져야 할 것을 가져야만 이룰 것을 이룰 수 있느니라’ 하시던 어느 어른의 지당한 말씀이 문득 떠올라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옛 경전들은 하나같이 사람은 태어날 때 늘 지키고 늘 지녀야 하는 그 ‘하나’를 받아 이 땅에 나왔다고 말한다. 불성이든 성령이든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사람을 참되게 해주는 신성의 불꽃, 생명의 정수이다.

시련의 겨울이 닥쳐도 그것만 간직하고 있으면 기어코 봄을 맞는다. 그것을 잊거나 그래서 잃어버리면 봄이 와도 뿌릴 씨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계절이 수상하다. 며칠 전 시골사람이 모처럼 서울 남산 아래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어찌나 모기들이 물어뜯는지 밤새 괴로웠다.

모레가 소설(小雪)인데 벌써 없어져야 했을 물것들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혔다. 아니나 다를까 죄 없는 농민 한 분을 직사 물대포로 다 죽게 만들어놓고는 그 책임을 시위대에 돌리는 잡소리가 요란하다. 이러다가 “‘탁’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죽더라”는 말이 되돌아올 판이다.

때가 된 모양이다. 치울 것 치우고 없앨 것 없애느라 사람이란 사람마다 거리로 쏟아졌던, 그해 6월로 돌아가자.

11월 단비로 바닥을 드러냈던 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니 우리도 모이자. 될 때까지 모이자.


김인국 | 옥천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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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5학년 아들이 학교에서 머리를 다친 채 집으로 왔다. 부모는 크게 놀랐다. 그런데 흥분한 엄마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차분했다. 아들에게 사정을 묻자, 말다툼 끝에 같은 반 여학생에게 맞았다고 했다. 다툰 이유를 물으니 아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화를 냈다. 당장 때린 아이 집으로 가서 따지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자 남편은 자초지종부터 알아보고 해결하자며 아내를 설득했다. 아이 아버지가 가해 여학생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이 놀라셨지요? 사실 저도 당황스럽고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따님이 우리 애를 때린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제가 따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안 될까요? 이 일로 아이들이 서로 상처 주고 원망하기보다 좋은 사이가 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가해 여학생의 엄마는 안심하고, 딸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양쪽 부모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아들이 여학생의 아픈 단점을 건드리고 조롱했음이 밝혀졌다. 그 다음 아이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공원을 거닐며 말했다.

“아빠·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든 너를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네가 잘못한 것까지 옳다고 편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엄마와 아빠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란다.”

아들은 울먹이며 그동안의 일을 털어놓았다. 아들이 잘못한 게 맞았다. 여학생의 감정을 건드려 분노를 유발시켰으니 결국 폭력의 원인은 아들이 제공한 셈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다음날 아이는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여학생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 뒤 두 아이와 부모는 친하게 지내며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느 교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이 아버지의 합리적인 교육법이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새삼 지혜와 사랑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사회는 늘 갈등과 다툼이 존재한다. 한 제자가 부처님에게 인간은 왜 싸우느냐고 물었다. 종교인은 견해 차이로, 세간 사람은 재물과 권력 때문에 싸운다고 답했다. 여기에는 부처님이 제시한 갈등 해결 매뉴얼도 빠지지 않는다. <아함경>에는 정확한 사실 확인, 갈등 당사자들의 진술과 경청, 그리고 대화와 중재를 통한 해결법을 제시한다. 특히 대화하고 토론할 때 진실하고 부드럽게 말할 것을 강조한다.





부처님의 갈등 해결 매뉴얼과 비교해 보면 앞서 이야기한 아버지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어떻게 미움과 원망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피해 학생의 아버지는 결과에 흥분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사실’을 규명했다. 그리고 사태 판단에서 그 어떤 선입견, 그러니까 ‘내 아이’라는 입장을 내려놓았다. 끝으로 서로가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했다.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결말이 아니라, 서로 화해와 성숙한 관계를 다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합리적인 다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갈래와 층위의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피로사회, 탈감정사회, 잉여사회, 팔꿈치사회 등 현대사회를 진단하는 부정적인 개념은 곧 우리 사회가 갈등과 다툼의 현장임을 시사한다. 혹자는 인간이 왜 서로 사랑하지 않고 다투느냐고 항변하지만, 이는 참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살아온 환경과 추구하는 가치, 사물을 보는 견해가 다른데 어찌 획일적인 ‘일치’가 가능하겠는가? 그러한 일치는 조화와 창의력 넘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6월, ‘함께하는 경청’ 포럼이 창립했다. 창립선언문에는 ‘화쟁(和諍), 다툼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다투면서 보다 차원이 다른, 차원이 높은 성숙과 상생을 이루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평화롭게 다투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다. 몸을 낮게 기울여 서로의 소리를 들어야만 함께, 끝까지 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계층과 세대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노사정위원회가 성숙한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여 수렴해야 할 정부가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모두가 내 편이 무조건 옳고 다른 편을 배제하고 혐오하고 탈락시키려는 어리석은 신념과 승자 독식이라는 욕망의 질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귀를 막고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올바른’ 정치는 다양한 것을 보고 듣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장미꽃은 들에 핀 작은 야생화를 깔보지 않는다. 가을 산중에 서늘하고 맑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데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 누구인가? 오직 열린 귀만 들으리라.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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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30촉이 되지 않았을 백열전구 하나가 집 안을 밝혔는데, 환하다는 느낌보다는 낯설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낮에도 잘 보이지 않던 천장 한구석의 거미줄까지 보였다. 적나라한 것의 불편함을 그때 알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전구가 자주 나가는 것이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를 흔들면 끊어진 은색 필라멘트가 파르르 떨곤 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의 <저항안내서>(원성철 옮김, 오롯 펴냄)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미국의 작은 도시 리버모어의 한 소방서에서 매년 한 전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전구의 생일? 그 전구는 1901년 소켓에 끼워진 이래 지금까지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1970년대 시골집 전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달포 전에도 아이들 방 형광등을 갈아 끼웠다. 그런데 백년 넘게 장수하는 전구가 있다니.

전구의 수명은 반영구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이유는 기업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924년 전구 생산업체들이 전구 수명을 1천 시간으로 제한하기로 담합했다는 것이다. 반영구적 전구는 수요를 발생시키지 않고 결국 기업이 문을 닫게 만든다. 소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이윤이 발생하지 않으면 생산이 불가능한 체제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전구 생산업체만 제품 수명을 조절해온 것일까.

며칠 전, 안경점에 들렀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20년 넘은 안경테에 렌즈를 갈아 끼우고, 안경을 새로 하나 맞추려는 참이었다. 주머니에서 오래된 안경테를 꺼내 놓았더니 안경점 주인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일본의 안경 장인이 손으로 직접 만든 명품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인 찬사가 아니었다. “안경테를 이렇게 튼튼하게 만들면 우리는 망합니다.” 엄살이 아니었다. 한창 잘나가던 국산 안경 브랜드가 시장에서 물러난 적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안경테를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 구매자들이 안경을 새로 교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후화 기술’이 있다. 지난 세기 초반, 미국 전구 생산업체처럼 제품의 수명을 일부러 단축시키는 기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고장이 나도록 해, 새 제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시장 논리의 입장에서 보면 노후화 기술은 전문기술이자 첨단기술이 아닐 수 없다. 어디 전구와 안경뿐이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제품에 노후화 기술이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오래 써서 못 쓰는 제품은 많지 않다. 닳고 닳을 때까지 사용하는 소비자도 별로 없다. 여전히 소비는 미덕이고 소비 능력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

광고 또한 탁월한 노후화 전략이다. 광고에 현혹된 소비자는 멀쩡한 제품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한 소비자가 동일한 광고 영상(CF)에 일곱 번 이상 노출되면 그 광고를 신뢰하게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교육, 의료, 관광, 문화예술 분야에도 상품 수명을 단축하는 전략과 기술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의 ‘새것 콤플렉스’가 지식과 정보를 포함한 상품의 소비를 부추기는 원동력일 것이다. 최신 노후화 프로그램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형국이다.

만일 지구 자원이 무한하다면 노후화 기술은 환영받아 마땅한 신기술이다.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구 자원이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데 있다. 화석 연료를 비롯한 모든 자원이 유한하다. 반드시 고갈된다. 전구 수명을 짧게 하면 단기적으로는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자멸, 공멸하는 것이다. 제품 수명의 단축은 소비 증가로 이어지고, 소비 증가는 자원 고갈과 폐기물의 증가로 이어진다. 소비량이 늘어나는 만큼 공멸의 시기가 빨리 다가온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를 엔진으로 하는 시장 전체주의가 지구 자원, 인류의 미래를 앗아가고 있다.

길은 있다. 필라멘트가 반영구적이듯 우리의 꿈도 무한하다. 시장 전체주의가 미래에 대한 ‘생각의 수명’을 제한했을 뿐이다. 시장의 근시안적 소비 전략 너머에 지금과 다른 세상이 있다. 스스로 질문하기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출발점이다. 스님들이 공양을 할 때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오셨는가’라고 묻듯이, 우리도 자문하고 자답하자. 이 스마트폰은 어디서 왔는가. 이 커피, 이 치킨, 이 자동차는 어디서, 어떻게 왔는가. 질문은 더 있다. 내가 버린 제품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이 같은 문답이 모여 지금과 다른 세상을 기획하고 실천할 것이다.


이문재 |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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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열아홉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만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개 패듯 패고 다녔다. 망치라는 별명은 장터와 뒷골목을 휩쓸던 주먹의 우악스러움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랬던 그가 훗날 나환자들의 정다운 아버지가 되었다. 어찌 된 일일까? “형은 사람 패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어린 동생이 툭 던진 이 한마디에 마음을 돌이켰다고 한다. 행실은 모질었어도 가슴 깊은 곳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무엇이 살아 있었나 보다.

억센 손이라도 가만히 만져보면 따뜻하다. 밖에서는 몰라도 집에서는 틀림없이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살가운 손이다. 통합진보당 해산부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까지 무엇이나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주먹에도 분명코 붉은 피는 돌 테다. 이 모든 게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충정이니 놀라지 말고 의심도 걱정도 말라 한다.

하지만 불안하고 무섭다. 노사정이 합의한 노동개혁안이라고 했다. 정부와 여당은 옥동자의 탄생처럼 반겼다. 이로써 막혔던 취업시장에 숨통이 트였고 경기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며 나팔을 불었다. 놀랍게도 시중의 반응은 담담했다. 해고는 멋대로, 임금은 맘대로, 비정규직은 고무줄처럼 쭉쭉 늘리겠다는 데도 잠잠했다.

노동계의 반대도 들끓다 말았다. 민란이라도 일어나야 할 판인데 대한민국이 어째 이상하다. 주먹의 위선에 질리고 주먹의 위력에 기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너희들 하는 짓이 오죽하겠느냐, 일단 갈 데까지 가봐라, 계산은 잠시 미루자는 심정일까. 그렇다면 덫인가? 대중의 묵묵부답에 불안해졌는지 집권자는 아예 전쟁을 선포해버렸다. 어디 대들 테면 대들어 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단 하나의 역사가 필요하다. 어서 아이들의 교과서에서 악마의 발톱을 뽑아내자고 안달을 부린다만 그게 미래 세대의 눈동자에 바늘 하나를 찔러 넣는 무서운 짓임을 누가 모르랴. 공장이 조용해지는 주말에도 교육부 시계는 째깍째깍 부지런히 돈다. 국정화의 숙원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내후년에는 이상한 한국사가 불쑥 얼굴을 내밀 것이다.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양반들은 좋기도 하겠다.

그런데 그러고 사는 게 정말 좋을까? 하지만 세상의 맛이라는 것이 지나고 보면 그때뿐이다. 더군다나 대통령 일인의 하명으로 개시된 영업인데 지금의 문전성시가 가면 얼마나 가랴. 서리 한 번 내리고 나면 우수수 지고 만다. 오늘이 마침 상강이다. 반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난 돌들의 외침은 삭풍이 분다고 사그라지는 법이 없으니 다 이긴 싸움이라도 부디 조심할지어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아주 작다. 맹자의 말이다. “새나 짐승과 다른 점은 아주 작다. (아주 작은 것을) 여느 사람들은 버렸는데 참사람은 간직한다(人之所以異於禽獸者 幾希 庶民去之 君子存之).”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이 금수보다 못한 짐승이다. 오죽했으면 개만도 못하다고 하겠는가. 사람의 사람됨은 어디에다 힘을 쓰느냐에 달렸다. 힘을 표현하는 아주 오래된 말이 있다. 바로 정(精)이다. 쌀(米)을 먹어서 얻는 푸른(靑) 기운이 정이다. 성경에 귀한 임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뜻을 다해야 한다고 나온다. 이 세 가지가 바로 값지게 써야 할 ‘정’의 대표들이다.

한편, ‘정’은 순전히 남에게 빚져서 얻은 것이다. 스스로 달리는 기관차가 없듯이 ‘정’은 그 누군가를 태워야만 구할 수 있는 기운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정’은 누구에게 바칠 ‘정’인가? 신과 합일하여 신에게 드려야 한다. 그래야 정신(精神)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 예수의 임이나 석가의 임이 아니라도 좋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궁극적인 뿌리라고 알아들으면 족하다.

내 ‘정’을 바칠 ‘신’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인류의 경전들은 공통적으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하늘과 동일시하고 있다. 추원보본 그리고 남에게 되돌려준다는 자세로 쓰기만 하면 ‘정’은 언제나 정신으로 승화된다. 물론 저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쏟으면 부질없는 정력(精力)으로 변질되고 만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상을 받았다. 몸 지탱하자면 어쩔 수 없다지만 남의 생명을 불러다 치르는 번제이니 죄스럽고 황송하다. 덧없는 정을 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 차리기 위한 약으로 삼겠노라며 수저를 든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뿌려서 내가 거둔 알곡이라도 입에 넣을 명분이 없다.

철없을 때는 사람 패던 주먹이었다가 어린 동생이 내려치는 죽비 한 대에 번쩍 정신이 들고 나서부터 평생 남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손이 된 사람. 그는 광주 사람,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다.


김인국 | 옥천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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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글날, 사흘간의 연휴를 맞아 아들과 아버지가 암자를 찾아왔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온 부자는, 이번 여행의 콘셉트가 느릿느릿 시간의 여유를 느끼며 감성을 충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길로 가볍게 산행을 다녀온 부자는 손수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끓여 도토리묵과 갓김치로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친 뒤에는 장작불을 지핀 따듯한 방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책을 펴들었다. 나란히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는 부자의 모습을 나는 밤이 깊도록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몇 년 전 어느 정당의 대선 경선 후보가 내세운 구호가 생각난다. 아마 ‘저녁이 있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 말을 듣고 크게 감탄했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그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구호에서 나는 성장과 소비의 악순환이 만들어내는,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만드는 시대의 그물망을 읽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 가족이 모여 앉은 저녁식탁의 풍경이 떠올랐다. 우리가 잊고 있던 소박한 행복을.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 많이 벌고 호화로운 집을 소유하고 명품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으로 느껴야 진짜 행복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행복은 일생에 몇 개 안되는 큰 사건과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작은 일에서 느끼는 기쁨들이 행복지수를 높인다. 식구들이 아프지 않고 화목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것, 책을 읽고 사색하고 성찰하는 것, 아이와 함께 꽃을 가꾸고 운동하는 것, 허물없는 친구들과 사소한 화제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 가끔은 심심해하며 게으름을 즐기는 것…. 이런 소소한 일들을 온전히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만 내면 얻을 수 있는 이런 행복들이 침범당하고 있다. 사회 조직과 시스템 안에서 성장과 성과를 내기 위해 속도를 올리고, 권력과 돈을 목적으로 한 인간관계의 끈을 잇기 위해 ‘저녁이 있는 삶’을 빼앗기고 있다. 남보다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하는 ‘속도’, 자본과 권력의 끈을 맺기 위한 ‘접대’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밤과 주말이라는 시간에 이뤄진다는 것이다.


시간을 빼앗기면 공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개인과 가족의 삶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은 웃음과 대화가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 아니라 각자 피곤한 몸을 눕히고 출퇴근하는 숙소로 바뀐다. 물질의 총량을 멈출 줄 모르는 사회구조가 개인 시간의 절대 빈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들 개개인이 쓸 수 있는, 써야만 하는 저녁과 주말의 ‘시간’은 소중한 사유재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재산을 허락 없이 무단으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빼앗는 행위는 탈법과 반칙이다.

개인의 시간을 앗아가는 일을 산중에서도 간간이 보게 된다. 서울의 높으신 분들이 휴가차 산사나 근처 민박집에 머물면 공무원이나 기업 지사의 직원들이 업무시간에 찾아와 인사하고 접대하느라 바쁘다. 높으신 분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제 할 일을 못하고, 개인적으로 누려야 할 시간마저 무단 침범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밤 늦게까지 회식과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 공적 지위를 이용한 무언의 위압, 실적을 위한 경쟁, 관계 맺기와 줄을 대기 위한 술자리로 소시민들의 간과 위가 시달리고 있다. 우리 시대의 슬픈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인간의 시간을 사들이는 회색신사가 등장한다. 회색신사는 매사 불만에 가득 찬 이발사 푸지씨를 찾아가 이렇게 유혹한다.


“선생님 시간을 아끼세요. 예컨대 일을 더 빨리 하시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세요. 지금까지 손님 한 사람당 30분이 걸렸다면 이제 15분으로 줄이세요. 나이 드신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시간도 단축할 수 있어요. 값싼 양로원으로 보내면 되지요.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앵무새는 내다버리세요. 무엇보다도 노래하고, 책을 읽고, 소위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과연 우리 시대의 회색신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묻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는 그것들을 쓸모 있게 쓸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시간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삶의 시선과 발길을 두어야 하는가. 개개인 삶의 새판을 짜기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첫 매듭을 시간의 회복, 소소한 행복에 두면 어떨까.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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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왔다고 떡을 돌리는 풍습이 급격하게 사라져 간다. 떡은커녕 앞집의 문을 두드리고 ‘신고’를 하는 일도 별로 없다. 아파트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옆이나 위아래로 붙어 사는 집인데도 어쩌다가 마주쳤을 때 싸늘하게 외면하기 일쑤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나는 이웃과 우연히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네곤 한다. 이에 반갑게 화답하는 분도 있지만, 마지못해 최소한의 답례만 하는 분이 더 많다.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만 반응하고 곧바로 눈길을 돌려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간관계가 희박해지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욱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세태가 일상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장면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쉽게 말문이 트이는 것을 본다. 공원이나 산책길에서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는 행인들이 많은데, 강아지들 사이에 갑작스러운 상호작용이 흔히 일어난다. 동물적인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기에, 주인들은 별로 제재하지 않는다. 대개 잠깐 멈춰 서서 그들의 어울림을 지켜본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된다. 상대방의 강아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외모와 행동에 대한 품평도 곁들인다. 그 분위기는 사뭇 화기애애하다.

가까이 사는 이웃도 아닌데 그렇듯 스스럼없이 소통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누군가가 아기를 데리고 있으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맞추고 방긋 웃어주면서 그 보호자에게 나이를 묻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강아지와 아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연약하다는 것 그리고 순수하다는 것이리라. 여리고 티 없는 생명체를 매개로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 에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자기도 모르게 어린아이가 되어 대상에 온전히 몰입하고, 타인에 대한 경계 태세도 해제해버린다.


관심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늘 그렇게 이음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물이나 명품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예쁜 목걸이를 차고 있거나 비싸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는 이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아, 멋지네요. 얼마짜리예요?”라고 물어본다면 기겁하면서 자리를 피할 것이다. 고급 등산복이나 승용차 등도 마찬가지다.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위세 경쟁에 은근히 신경을 쓸지언정 타인들끼리 공통의 화제로 삼지는 않는 것이다. 소유물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그것으로 서로를 구별 짓기 하는 상황에서는 부질없는 긴장에 갇혀버리게 된다.




강아지나 아기도 자신의 지위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데리고 다닌다면 그런 굴레에 얽매일 것이다. 대개는 그렇지 않기에, 그 존재들을 응시하며 아집의 속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허세를 부리거나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스스로를 무심하게 드러내게 되는 계기는 그 외에도 많다. 2002년 월드컵 축제 같은 이벤트도 그중 하나다. 모두의 기쁨이 되는 결정적 장면에 가슴을 터뜨리면서 일순간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술 공연도 마찬가지다. 고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탁월한 경지에 다 함께 초대되어 심미적 감동으로 녹아들 때, 나와 너 사이의 분별이 사라진다.

그런가 하면 ‘결핍’이 의외의 연결고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여럿이 함께 지내는 병실에서 환자나 보호자들은 옆 사람들과 금방 말문을 튼다. 서로의 어려움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쉽게 공감하고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다. 건강의 부족이 관계를 맺어주는 공통분모가 되는 것이다. 큰 재난을 당하여 생겨나는 아픔과 상처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새삼스럽게 연결해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감추고 싶은 그늘을 넌지시 내보일 때, 각별한 신뢰와 친밀감이 생긴다. 헝가리의 속담 하나를 인용하자면 ‘누구도 자기의 그늘 속에 들어가서 쉴 수는 없다. 내 그늘에는 다른 사람만이 와서 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통로는 바로 자연이다. 담장이나 대문에 걸어놓은 꽃바구니가 골목의 표정을 바꿔주고, 한 평 공원이나 텃밭을 함께 가꾸면서 주민들이 새로운 얼굴로 만난다. 봄꽃의 절경이나 단풍의 장관에 경탄하면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타인들 곁에 서게 된다. 비좁은 자기를 넘어서는 위대한 그 무엇을 만날 때, 반사적인 경계(警戒)와 관습적인 경계(境界)를 풀어헤친다.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한 구절은 그 정곡을 찌른다.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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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15세 이하 학생들은 시험시간에 동일한 시험지를 받지 않는다. 학생들이 풀어야 할 문제가 각기 다르다. 왜 그럴까. 한 학급은 물론이고 전국의 같은 학년이 똑같은 시험문제를 받아드는 우리 실정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제도가 저 나라에서는 어떻게 ‘아무런 문제 없이’ 시행되고 있는 것일까? 엊그제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들은 잠깐 생각하더니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번에는 질문의 강도를 높였다. 미국 스탠퍼드대에는 시험감독이 없다. 학생들이 입학할 때 명예서약을 하고, 시험을 치를 때마다 답안지에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또 서명을 한다. 그럼에도 간혹 커닝을 하는 학생이 나온다. 이럴 경우 대학에서 어떤 처벌을 내릴까? 우리 학생들이 내놓은 답은 이런 식이었다. 퇴학 혹은 정학을 시킨다, 리포트를 따로 제출하라고 한다, 신상을 공개한다 등등. 학생들에게 저 대학에서는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처벌을 한다며 ‘자유롭게 상상해보라’고 주문했다. 학생들은 더 이상 답하지 못했다.

지난 목요일 밤, 시민대학 수강생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핀란드의 평가방식에 대한 답은 학생들과 같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반응 역시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묵묵부답. 스탠퍼드는 학생이 부정행위를 했을 경우, 학생을 처벌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학생이나 시민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재차 물었다. 그럼 누구를 처벌하겠는가? 예상한 대로 침묵이 길어져 답을 들려줬다. 저 대학에서는 학생이 부정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해당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문책한다. 커닝이 가능한 문제를 낸 당신이 잘못한 것이다, 앞으로는 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를 내시라. 강의실이 한동안 고요했다.

핀란드와 미국 대학 사례는 지난 22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전·현직 대학 총장 좌담에서 들었다. 유엔 세계평화의 날 34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특별좌담에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조인원 경희대 총장이 자리를 같이해 대학과 정치의 미래를 주제로 논의를 이어갔다. 나에게는 세 분 총장의 현실 인식과 대안 제시도 유의미했지만, 이 시기에 대학 총장들이 고등교육 문제를 공론장에 상정했다는 것 자체 또한 각별해 보였다. 총장들은 좌담에서 지금 우리 대학은 어디에 있는가, 대학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 화두를 제시했다.


22일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제34회 세계 평화의날’을 맞아 이시대의 대학과 사회를 고민하는 특별좌담이 진행됐다. 왼쪽부터 권기붕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조인원 경희대 총장 ‘_경향DB



대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제출되고 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 유럽에서도 대학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분석과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원인을 적시하기는 어렵지 않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경제(기업)논리의 유입, 교육 당국의 지나친 개입과 획일적 대학평가제도에 따른 교육·연구 기능의 붕괴. 이것이 대학이 대학 본연의 역할과 책무를 외면한 채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배경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지적에 동의하다 보면 대학은 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좌담에서 정운찬 전 총장은 “총장들이 사회적 경고음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저 경고음이 사회를 향하는 동시에 대학 내부를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기업의 과도한 간섭도 걸림돌이지만, 외부 압력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대학 또한 대학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총장들이 강조했듯이 대학이 과연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무엇을 왜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취업에 목매다는 학생들의 ‘절규’를 듣고 있는지, 대학이 공공성을 추구하고 있는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학생과 시민들에게 핀란드와 스탠퍼드 사례를 들려주며 우리 대학과 사회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인식론적 자물쇠’를 새삼 확인했다. 다름 아닌 경제적 공포였다. <문명의 붕괴>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경고음이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생존 위기가 닥쳤을 때 예전에 효과를 거뒀던 생존 전략에 집착하면 그 문명은 붕괴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문자 그대로 문명사적 전환기다. 인류의 지속가능성이 불확실해지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상상력이 절실한 시기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생존 전략에 집착하고 있는가. 경제적 공포를 경제 논리로 극복하려고 물불 가리지 않고 있다.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원인 제공자 중 하나가 대학이다. ‘영혼 없는 전문가’를 길러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부터 달라져야 한다. 대학이 대학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 대학을 옥죄어온 생각의 자물쇠를 풀어나갈 때 사회적 경고음도 더 크고 분명해질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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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끼리 사람에 대한 기대를 주고받는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이러이러 저러저러하리라는 대략의 믿음 말이다. 잘된 사람을 보면 흐뭇하고 다된 사람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도, 덜된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못된 사람을 보면 화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서투름과 미련을 통탄하고 남의 성숙과 완덕에 대해 경탄하다니 좀 이상하다. 그가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만일 그 누군가에 대해 속상해하거나 화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실망, 그로 인해 입는 피해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땅한 품위와 긍지를 드러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확인하며 아프게 탄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절로 숙연해지거나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다된, 잘된 사람을 통해 인간이란 과연 우리가 아는 인간 그 이상의 신비로운 존재라는 점을 새삼 실감하며 감사하는 반응인 것이다.

상점에 가보면 진열대의 상품 앞에 하나하나 품질의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가격도 제각각으로 표시해두고 있다. 요즘 같아서는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동차마다 붙어 있는 에너지효율 소비등급처럼 이 사람이 얼마나 먹고, 얼마나 일을 해내는지 그런 딱지만이라도 이마든 뺨이든 어디라도 붙여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대대로 무위도식하면서도 거저 살아가는 은혜에 고마워하기는커녕 날로 떵떵거리는 세도가 가소로워 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품질과 가격을 표시하자니 좀 그렇지만 이미 인품, 인격이라는 말이 있다. 인품은 인간의 품질, 인격은 인물의 가격이라는 뜻이 아니던가. 제멋대로 사람을 귀하게 혹은 천하게 대하고, 함부로 사람을 높게 혹은 낮게, 무겁게 혹은 가볍게 구분 짓던데 좋다. 기왕 사람을 차별하고 싶으면 인품이든 인격이든 따져보자. 틀림없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리라.

어째 세상 돌아가는 꼴이 이렇게 한심하냐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하지만 함께 살아서 인간이고, 함께 살아야 하는 인생이니 싱겁고 모자란 놈들 탓만 할 수 없다. 때로는 혼을 내주기도 하고, 때로는 얼차려라도 시키면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해야 한다. 혼내기와 얼차려는 화풀이나 앙갚음이 아니다. 혼내는 일은 나의 뜨거운 혼을 덜어서 내어주는 신성한 봉헌이다. 욕망만 이글거릴 뿐 차갑고 어두워진 영혼의 등잔에 내 기름을 보태주면서 꺾인 심지를 바로 세워주는 일, 그것이 혼내주는 일이다.

얼차려도 마찬가지다. 금고는 그득하다만 얼은 텅 비어 있는 비루한 자들에게 나의 맑고 시원한 얼을 아낌없이 덜어내서 한 상 푸짐하게 차려주는 일, 그것이 얼차려다. 얼이 썩어 어리석은 가련한 처지를 외면하지 못하고 손 내미는 일이 얼차려란 말이다.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지만 덜되고 못된, 그래서 불쌍한 놈들을 혼내는 일은 멈출 수 없다. 가만두면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질 테니 말이다. 기운을 내자. 자고로 혼내주는 일은 호의호식, 희희낙락하는 자들이 아니라 밤낮 궂은일을 도맡는 밑바닥 성자들의 사명이었다.


천막농성장 지켜는 쌍용차 김득중 부지부장_경향DB



덜떨어진 자들의 줄기찬 패악에 경악하고 망연자실하다 보면 투지는 사라지고 무기력해지기 마련이다. 좋아질 세상이 아니라고 슬그머니 물러나 앉은 이들을 알고 있다. 좋아졌으면 벌써 좋아졌지 하는 소리도 사실 억지는 아니다. 다 좋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서고 나면 여전히 들끓는 기운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사랑 말고 또 어디에다 우리의 사랑을 쏟겠다는 말인가. 아무리 잘라내도 또 다른 머리를 들고 나타나는 독재가 지겹기도 할 것이다. 번번이 당하면서도 배신을 안기는 민심이 야속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적이 없으면 진보가 없어요. 오죽 못생겼으면 대적이 없습니까?”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상대가 큰 적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크기 때문이라는 이 격려는 다된 사람, 잘된 사람의 표상 다석 류영모 선생의 말씀이다. 이런 말도 남겼다. “우리가 있는 동안에 몸을 가졌으면 서로 도와야 해요. 몸이란 순전히 남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생긴 것이니까요.” 순국으로 의를 일으킨 4·19혁명의 희생자들을 두고 한 말이었는데 이게 어디 어제만의 이야기이랴.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 있느냐며 혼을 내주느라 쌍용차 김득중이 오늘 단식 20일째를 맞는다.

의를 도탑게 하는 돈의(敦義)의 계절, 가을이다. 사람 때문에 상처입고 세상에 절망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자.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야 변치 않으셨으리라. 그러면 잠시 쉬어가도 좋다. 모든 사물로부터 해방되는 주말, 부디 평안하시기를!


김인국 | 옥천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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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하철은 낯선 사람들이 함께 이동하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는 사소한 행동 하나가 타인에게 불편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이따금 도마에 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여성들의 화장이다. 좌석에서 얼굴을 단장하는데, 간단하게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칠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아예 작은 화장대를 펼쳐놓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기도 하고 심지어 헤어그루프로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여성들 나름의 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야근이 잦은 데다가 출퇴근 시간마저 길어서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직장 여성들은 부득이하게 지하철에서 짬을 내어 화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대부분의 직장에서 여성이 맨 얼굴로 출근한다는 것은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것만큼이나 부적절한 태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공공장소에서 요란한 화장을 거리낌없이 하는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쩍벌남’이나 길거리에서 가래침을 탁탁 뱉는 아저씨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왜 그럴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것을 둘러싼 맥락과 상황에 결부되어 의미가 발생한다. 그래서 가령 해수욕장에서는 수영복이 자연스럽지만 그 옷차림으로 거기에서 약간 벗어난 구역을 거닐면 문제시된다.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나 행동은 불쾌함이나 민망함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그러한 어울림의 감각은 일정한 경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 가운데 사적 영역의 경계가 매우 중요하다. 집에서만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일들을 집 바깥에서 하면 곤란한 경우가 많다.

또한 집 안이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달라진다. 가족들끼리는 몸가짐을 대충 해도 괜찮지만, 손님이 오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말하자면 ‘자연적 신체’를 감추고 ‘사회적 신체’로 자기를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타인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우리는 안면이 있는 사람 앞에서는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지만, 생면부지의 관계에서는 무시할 때가 많다. 지하철에서의 화장이 당황스러운 것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무심함 때문이다. 빽빽한 인파 속에서 연인들의 적나라한 애정표현을 접할 때 그러하듯,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여겨지고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다.

공공장소에서는 저마다 점유하고 있는 일정한 영역을 서로 지켜주어야 하면서도 (전철에서 다른 사람을 뻔히 쳐다보거나 옆 사람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 그 개인적 영역 안에서의 행위는 일정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그러한 긴장이 적절하게 유지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점점 분절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온라인 세계에 몰입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오프라인상의 고립은 깊어진다.


서울 지하철 열차 내에 마련된 임산부 배려석의 디자인이 눈에 잘 띄도록 개선된다. 좌석과 등받이, 바닥까지 임산부 배려석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분홍색으로 꾸민 서울 지하철 2호선이 23일 오후 시범운행 되고 있다._경향DB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일수록, 무한의 네트워크로 뻗어 있는 개별적 소우주들로 파편화되기 쉽다. 익명의 장소에서 그런 밀실들은 무수히 병렬된다. 그 비가시적인 칸막이에 익숙해지다 보면, 관심이 미치는 범위가 좁아지고 주변 상황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외의 장면에서 타인과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어느 청각장애인이 휴대폰의 화상 통화를 열어놓고 수화로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손으로만 신호를 보내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자 옆 사람에게 전화기를 잠시 들고 있어 달라고 스스럼없이 부탁했고 그 승객은 기꺼이 응했다. 청각장애인은 이제 두 손으로 자유롭게 수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옆 사람은 전화기를 들어주면서 물끄러미 화면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도시의 품격은 낯선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느냐로 가늠될 수 있다. 타인의 시선과 느낌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몸가짐에 주의를 기울이고, 타인의 어떤 행동이 다소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너그러운 무관심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뜻밖의 계기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즐거운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 도시적 삶의 묘미다. 사소한 차이들로 인한 부질없는 혐오와 적대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시민 문화의 매력을 함께 만들어가는 감수성이 자라나야 한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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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산중이 고요하다. 산중 암자가 본시 한적할 터인데 왜 새삼 고요하다고 하는가. 지난 한 달 넘게 휴가철을 맞아 각지의 지인들이 사나흘씩 머물다 갔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넘게 암자를 찾아온 세간의 벗들에게 차를 대접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내년 초봄까지 마셔야 할 대흥사 녹아차가 바닥을 보였겠는가.

여름 내내 ‘산중 마담’ 하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마음은 더없이 흐뭇했다. 벗들과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런저런 대화로 몸과 마음이 청신해지니 참 좋은 인연이구나 싶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의 만남이 모여 삶을 이어가고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순간도 소홀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올여름은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누렸다. 호기심 많고 파릇파릇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산에 온 소감을 넌지시 물었다. 아이들은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지만 그냥 좋다고 했다. 파란 하늘, 흰 구름, 새소리, 물소리에 몸을 맡기니 근심, 걱정이 절로 사라졌을 것이다. 잡념이 깨끗이 사라진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를 아이들은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인터넷을 사랑한다는 한 아이는 모니터로 보는 자연과 실제 눈으로 보는 자연의 차이를 알겠다고 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이어 물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무엇 덕분에 기분이 좋고 행복할까?” 나무와 꽃과 시원한 바람이 있어 행복하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우리 곁에 없거나 아프면 어떻게 될까?” 그러자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인 듯했다. 낱낱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은 만물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만 살려고 다른 것들을 따돌리고 함부로 하면 사람도 결코 건강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무수히 듣고 배웠을 테지만 아이들은 숲에서 생생하게 ‘더불어 생명’을 실감했다. 내친김에 개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말을 들려주었다. 윌슨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사고를 이렇게 뒤집었다.

“인류는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종들 사이에서 진화한 하나의 종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 세계와 분리된 채로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생물 다양성의 모든 구성원들을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자산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이나 품종들도 멸종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진화 역사로 보면 개미나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가치와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누각 아래 연못에 사는 물고기, 활짝 핀 수련, 물 위에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도 ‘생명’이라는 가치에서 볼 때 똑같은 존재라고 하자, 연못을 바라보는 아이들 눈빛이 한층 깊어진 듯했다.


전남 해남 두륜산 자락 중턱에 자리한 일지암 -경향DB



그러자 한 아이가 말했다. 대흥사로 오면서 아름다운 십리 숲 터널에 가득한 쓰레기를 보고 놀랐다며, 나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대학 교육까지 받는데 왜 그렇게 행동할까?” 그러자 답이 줄줄이 나왔다. 도덕과 교양이 없어서다, 준법정신이 결여되어서다, 숲을 찾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없어서다…. 귀찮아서 그랬을 거라는 답도 있었다. 그 가운데 ‘생각 없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말에서 우리 아이들이야말로 바르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기계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생각하며 말한다. 대화와 토론을 이어가던 나는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은 훈장 기질이 발동되어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사자성어를 들려주었다. 일수사견이란, 하나의 물을 네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천상에서는 유리 궁전으로, 인간은 마시는 물로, 아귀는 피고름으로, 물고기는 자유로이 헤엄치는 공간으로 본다는 것이다. 동일한 사물을 각자의 욕구와 의도로 바라보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첨단 문명의 시대에 유정, 무정의 만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제는 자연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고마운 존재라는 단순한 인식을 넘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은 자칫 실용적이고 도구적으로 자연을 대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삼라만상은 ‘그 자체’로 ‘존엄’한 것 아니겠는가. 존엄한 그에게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옛 스님은 이렇게 노래했다.

“깊은 산속 불법은 바위가 그것/ 큰 바위 작은 바위 저마다 둥글다/ 거짓 부처님을 만든다고/ 공연히 벼랑 깨어 부처님 몸 상했네.”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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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면서 순천 효산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안준철 교사는 독특하게 수업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바닥에 피어난 풀꽃을 휴대폰으로 세 번을 촬영했다. 멀리서, 가까이서, 더 가까이서. 그것을 다시 컴퓨터로 옮겨서 수업자료를 만들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질문 하나를 던진다. 이 세 장의 사진은 내가 어떤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오늘 아침에 찍은 것인데, 그 단어는 무엇일까?

힌트를 주자면, A자로 시작하고 여덟 개의 철자로 되어 있다. 정답은 ‘approach’이다. (안준철, <한 단어를 위해 출근길에 찍은 세 장의 사진>, ‘시사IN’ 7월25일자)

길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초에 새삼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려는 교사의 정성이 돋보인다. 평소에 시선을 거의 주지 않는 미물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오묘한 세계가 담겨 있음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고 교사는 말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나태주의 ‘풀꽃’)는 시구(詩句)처럼,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관찰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은 것이다. 오로지 점수를 따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주입하던 단어를 생활의 문맥 속에서 끌어들이면, 파편화된 지식들은 경험으로 연결되고 구체적인 의미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그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앞으로 ‘approach’라는 단어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풀꽃을 떠올리지 않을까.

‘approach’는 대개 ‘접근하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수업에서 보여준 사진 세 장을 놓고서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다가가다’가 적합할 듯하다. ‘접근하다’와 ‘다가가다’ 사이에는 어감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내게 접근했다’와 ‘그가 내게 다가왔다’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전자에서는 그가 나를 대상화하는 느낌이다.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의도로 접촉하고 이용하려는 태도 말이다.


반면에 후자에서는 내가 인격적인 주체로 존중되는 분위기다. 관계와 대화의 동등한 상대로 자리매김되고, 마음의 중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접근하고, 누구에게 다가가는가. 내게 다가오는 이는 누구인가.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접근한 것임이 밝혀지는 경우, 어떤 심경이 되는가.

만사를 효용의 관점에서만 처리하고 타인을 수단화하는 일이 빈번해지는 세상이다. 그런 가운데, 어쩌다가 소통과 관계 자체가 목적으로 경험될 때 우리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 서로를 의미 있는 타자로 만나게 될 때, 삶의 고결함을 문득 깨닫게 된다. 철학자 마틴 부버의 개념을 빌리자면 ‘나-그것’이 아니라 ‘나-너’의 구도로 연결되는 것이다.



강원도 정선 만항재에 핀 둥근이질풀꽃_경향DB


다가가야 할 상대는 사람만이 아니다. 출근길에 풀꽃 한 송이를 클로즈업한 교사처럼, 크고 작은 생명들에게 무심하게 다가가볼 일이다. 목숨이 없는 사물에게도 이따금 각별한 눈길을 주면 어떨까.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 그 자체로 기쁨이 되는 순간을 만끽해보고 싶다. 일상화된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 덕분에 우리는 수시로 영상을 촬영해 온라인에 올리고 전송하는데, 단 한 장을 찍더라도 대상에게 깊이 머물러 그 속살을 담아보자. 아니,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그냥 허허롭게 바라보자. 그렇게 다가갈 때, 저쪽에서도 불현듯 다가오는 무엇이 있다.

그러한 마주침은 피상적 인식의 장막을 거두어주기도 한다. 허형만 시인은 ‘겨울 들판을 거닐며’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 (…)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 들판처럼 황량해 보이는 세상, 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낯설어지는 삶, 체념과 냉소에 익숙해지는 마음….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출구는 있는가. 멀리서 관망하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새로운 존재를 키워내려는 몸짓들에 돋보기를 들이댈 때, 변화의 동력은 더불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에 손을 내밀고 말을 걸면서, 가능성의 씨앗을 만져보고 싶다. 살아 있음의 존귀함을 일깨워주는 풀꽃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싶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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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여쭈었다. “제 안에 늑대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 마리는 착한데 다른 한 마리는 포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택하거라.” 제자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한 마리를 택할 수 있습니까?” 스승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 며칠 뒤, 스승이 제자를 불러 물었다. “방법을 알아냈느냐?” 제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을 못하자 스승이 말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어떤 늑대냐?”

북미 인디언 사회에서 노인이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우화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일반화한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저 인디언의 지혜는 우리 내면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 안에는 두 마리 이상의 늑대가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늑대 무리를 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편애한다. 한 마리에게만 먹이를 주는 것이다. 피둥피둥 살이 오른 한 마리 늑대가 바로 우리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늑대를 키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나운 늑대는 밖에서 침입했거나,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먹이를 준다고 여긴다. 개인의 내면에만 늑대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물론 조직, 단체, 기관에도 늑대가 있다. 대학 안팎에도 늑대가 있다.

최근 대학의 한 보직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농담을 들었다. 우리나라 대학에는 총장이 둘이 있는데, 둘 다 대학 밖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국가와 기업이 실질적 총장이라는 것이었다. 국가와 기업이 대학에 요구하는 사항이 매번 옳거나, 또 매번 그른 것은 아니다. 옳을 때도 있고 그를 때도 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대학이 대학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데 있다. 대학이, 대학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지 않는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최근 한 권의 보고서 <미래대학리포트 2015>를 발간했다. 재학생들에게 개인의 가치관에서부터 한국 사회와 인류문명, 고등교육의 현재와 50년 뒤 미래에 관해 물었다. 전체 재학생의 절반이 넘는 1만4000여명이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일부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학생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오늘도 ‘행복’, 내일도 ‘행복’이었다. 부의 양극화에 대한 우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미래 전망도 대부분 어두웠다. 폭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인류 평화도 요원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2012 OECD 국가들의 어린이·청소년 주관적 행복지수_경향DB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는 강대국의 입김이 여전할 것이라고 답했다. 평생직장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어떤 교수를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인격 형성에 도움을 주는 교수’라고 답했고, 미래 대학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는 자아성찰과 진리 탐구를 꼽았다. 설문조사와 심층토론 결과를 분석하는 자리는 숙연했다. 교양 교육을 담당하는 한 교수가 “이것은 학생들의 절규”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교수는 “학생들의 요구에 대학이 답해야 할 차례”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요청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됐다. 전공과 교양 교육의 조화, 융복합 분야 활성화, 인격 형성에 도움을 주는 정신적 스승상 정립, 종합적인 사회진출 프로그램 개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 보고서에 들어갈 원고를 작성하는 동안 ‘두 마리 늑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대학은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어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과연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줄 것인가.

대학의 위기를 지적하는 담론의 핵심에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자리 잡고 있다. 대학의 기업화, 대학의 서열화를 부추긴 ‘한 마리 늑대’가 바로 저 차가운 경제 논리다. 교육과 연구의 본질 목적이 시장의 요구에 의해 왜곡되는 가운데, 대학의 또 다른 정체성인 공공성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학이 ‘영혼 없는 지식’ ‘똑똑한 양떼’를 양산하는 취업 준비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기후변화, 에너지 고갈, 인구 폭발, 부의 양극화, 인간의 왜소화로 대표되는 지구적 난제 앞에서 대학은 적절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문명을 위한 새로운 보편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미래대학리포트>는 한 사립대학의 중장기 발전전략을 위한 기초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일회성 과제도 아니다. 그랬다면 굳이 이 지면에 소개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보고서 기획위원회는 ‘대학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라는 공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대학이 달라져야 미래가 달라진다’는 보고서의 결론이 국경을 초월한 대학 혁신 운동의 ‘불씨’가 되었으면 한다. 국내외 학계와 시민사회가 공공성을 중심으로 구축하는 새로운 ‘세계 대학 평가지표’가 그 불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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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 현장을 취재한 어느 일본인 기자의 말이 생각난다. 사고 직후 많은 사람들이 부러진 다리의 양쪽 난간까지 몰려와 아래쪽의 수습 작업을 구경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아찔했다고 한다. 교량 전체가 위험한 상태고 그 난간은 방금 무너진 구조물의 일부이기에 더욱 불안했다. 또한 자칫 거기에서 추락할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그리고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안전 불감증은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지적된다. 한국인은 여러 가지 일에 과민하고 불안해하지만, 위험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둔감하고 안심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흔히 취하지만, 안전에 관해서는 무모한 낙관주의를 드러낼 때가 많다. 그동안 별일 없었으니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사고가 터지면 불안과 분노의 격정에 사로잡히고 패닉에 빠지기도 한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책임자들도 번번이 안이함을 드러낸다. 메르스 바이러스가 예상 밖으로 퍼져나가게 된 일차적 원인은 보건당국의 미숙한 초동 대응이었다. 사태를 너무 가볍게 파악하고 허술하게 대처한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치밀하게 움직이는 ‘보수적인 안보의식’이 요구되는데 국정 책임자와 관료들은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정보를 감추고 실체를 축소하는 보신주의만 발휘돼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위험사회를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줄리 K 노럼 교수의 저서 <걱정 많은 사람들이 잘되는 이유>(원제는 ‘부정적 사고의 긍정적 힘’)에 ‘방어적 비관주의’라는 개념이 나온다. 낙관주의만을 신봉하고 비관주의를 무조건 배척하는 통념을 저자는 문제 삼는다. ‘긍정의 배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때로 전략적으로 비관주의를 채택할 필요가 있다. 일이 잘못될 수 있는 상황을 다각도로 상상하면서(이를 그 책에서는 ‘정신적 리허설’이라고 한다) 막연한 불안에서 벗어나 부정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은 인간을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특히 근대사회에서는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를 책임져야 하기에 실존적인 불안이 가중된다. 후기 근대에 접어들면서 끊임없이 위험을 발생시키는 문명과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국가 체제로 인해 불안은 한결 증폭된다. 물론 그 감정은 경계심과 주의력을 높여주기 때문에 생존의 중요한 기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이 지나치면 삶이 위축되고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다. 감정을 적절하게 제어하면서, 그 신호가 암시하는 징후를 냉정하게 읽어내야 한다.

근대의 과학과 각종 시스템으로 순조롭게 길들여지는 듯했던 자연은 여전히 불가해한 정체로 꿈틀거리고 있다. 문명의 무분별한 확장이 신종 바이러스를 생성하고 지하의 대수층 고갈 같은 생존 기반의 붕괴로 이어진다. 인간의 작위(作爲)가 재난을 또 다른 블랙박스로 변형시켜가는 것이다. 생존의 터전은 이해 불가능, 예측 불가능,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탈바꿈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사회의 역량은 오히려 퇴화되어 가는 듯하다. 게다가 이런 사고가 터질 때마다 드러나는 거짓 행각들로 상황은 더욱 흉흉한 난맥상으로 꼬인다.

메르스 여파로 6월 KTX를 포함한 열차이용객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가량 줄어든 가운데 21일 서울역사 내에 열감지기가 설치되어있다. (출처 : 경향DB)


재난은 우리의 삶과 세계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안간힘을 다해 일으켜 세우려던 경제가 바이러스의 침투 한 방에 맥없이 주저앉고 있다. 정부가 제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할 때, 공포감이 연쇄반응하면서 시장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다. 사회적 영역에서도 불신이 증폭되면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경계 태세에 들어가고 심리적 ‘자가 격리’가 이뤄진다. 부(富)가 지속가능하게 창출되려면, 근원적으로는 생태계가 건전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그 위에 국가 시스템과 사회적 신뢰가 탄탄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메르스는 결국 정복되겠지만, 그 다음으로 어떤 재난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호언장담과 임기응변으로 얼버무릴수록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위기의 조짐들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집단 맹신을 경계하면서, 미지의 일들을 예견하고 비상사태에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가는 집단 지성을 키워야 한다. 이 험난한 시기를 통해 삶과 사회를 어떻게 리모델링할 것인가. 공공영역의 파산을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 막연한 기대와 상투적인 희망을 거두고 우리의 자화상과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출구는 열리지 않을 듯하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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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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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거울이자 렌즈다. 비춰볼 수도 있고 들여다볼 수도 있다. 생겨나자마자 급격하게 확산되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말(飛沫), 상기도, 슈퍼 전파자, 밀접 접촉, 능동 감시, 국민안심병원 같은 용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의학사전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새로운 말이 있다. ‘○○번 환자’와 ‘자가(자택) 격리’. 발음하기가 편치 않은 두 새로운 용어를 한참 들여다본다.

6년 전 신종플루 때 감염된 환자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번호를 붙이지는 않은 것 같다. 기사를 검색해보았더니 2009년 5월 국내 첫 신종플루 확진 환자는 51세 수녀였다. ‘1번’이 아니고 첫 번째였다. 2003년 사스 첫 추정 환자 역시 ‘1번’이 아니고 40대 남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자를 가리킬 때 주로 번호를 사용한다. 내 눈에는 ‘14번 환자’와 ‘35세 남성’은 달라 보인다.

환자에게 번호를 매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염 시간, 감염 경로를 강조하기 위한 고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반대로 행정 편의주의의 발로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환자 대신 ‘15번째 환자 박모씨’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까. 내게는 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15번 환자에게서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15번 환자는 인간이기 이전에 격리시켜야 할 감염자일 뿐이다. 후자에서 번호(서수)는 환자 박모씨를 가리키는 한정사 역할에 그친다. 박이라는 성씨는 그가 우리와 같은 엄연한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번호를 붙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씨를 붙인다고 해서 환자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번호 붙이기를 통해 환자를 비인간화하는 행태에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 환자라고 명명되는 순간, 그는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그 순간 사회는 환자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몇 번 환자는 이기적이고 몰상식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힌다. 비감염자와 감염자 사이의 경계가 확고해지는 동시에 비감염자들 사이에서도 적대감이 형성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의가 활성화된다.

메르스 예방책 중 첫손으로 꼽히는 손씻기도 마찬가지다. 귀가하자마자 세면대에서 강박적으로 씻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흔적이다. 손을 씻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리는 불특정 다수는 누구인가.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접촉하지 말아야 할 감염 경로일 따름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타인이 거대해지고 또 구체화된다. 타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손씻기는 타인을 격리시키는 동시에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행위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염병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확인시켜준다.

환자를 번호로 부르는 (무)의식은 자가 격리에 견주면 사소해보일지 모른다. 자발적으로 외출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강제적으로 ‘감금’되었을 것이다. 저 민주화 시절, 가택 연금에 이어 조선시대의 위리안치가 생각난다. 만일 내가 당사자라면, 그것도 정부 당국이 해당 병원을 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어떠했을까. 게다가 가족까지 함께 두문불출해야 한다면. 자가 격리 지침에 따르면 생활 용품을 따로 써야 하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가족 또는 동거인과 대화도 할 수 없다. 밥도 따로 먹어야 한다. 상상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10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182차 정기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메르스 여파로 마스크를 쓴 채 참석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출처 : 경향DB)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인구 1000명당 병상 수 9.46개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일본 다음이다. 하지만 1000명당 공공병상 수는 1.19개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시설이 충분하다면, 아니 설령 공공 의료기관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국가가 보다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자가 격리는 아예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가 격리라니. 전쟁이 일어났는데, 국가가 각 가정을 진지로 만들어 각자 전투에 임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환자 이름 대신 일련번호를 매기는 ‘국가의 마음’과 자가 격리를 대책이라고 내놓는 ‘국가의 마음’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메르스 사태를 지난해 세월호 사태와 동일시한다. 이 같은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선박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최근 메르스 진원지 중 하나인 삼성서울병원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이 나왔다. “우리 병원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다.” 그럴 것이다. 국민의 생명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어딘가가 뚫렸을 것이다.


이문재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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