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사학 동국대가 학내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연임이 유력했던 전임 김희옥 총장이 조계종 종단 고위층의 부당한 압력으로 중도 사퇴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후 이사회는 사찰 문화재 절도 의혹이 제기된 일면 스님을 새 이사장으로 선출한 후 연구부정 행위가 확인된 교수인 보광 스님을 총장으로 뽑는 무리수를 저질렀다. 교수와 동문의 단식 등 반발이 이어졌고,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50일 가까이 대학광장 조명탑 위에서 홀로 농성 중이다.

동국대 총장 보광 스님 (출처 : 경향DB)


사학의 전횡을 볼 때마다 대학의 주인은 과연 누구냐는 물음이 떠오른다. 국공립대학의 주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이며 궁극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이다. 한국 대학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사립대학은 어떠한가? 큰 뜻을 품고 토지와 건물을 기부한 설립자의 소유도 아니요, 총장이나 이사장, 이사회의 재산도 아니다. 초·중·고교이든 대학이든 사학은 사회의 공유자산이며, 역시 국민이 주인이다. 그러므로 사학법인이 해산할 경우 잔여재산을 임의처분할 수 없고 국고에 귀속하는 등 적법한 절차에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학은 흔히 족벌체제의 불투명한 운영과 각종 비리에 물들어 있다. 그 밑바닥에 학교를 공공의 자산이 아니라 배타적 소유권을 누려야 마땅한 물건으로 간주하는 사고가 박혀 있다. 그러나 사학의 ‘소유주’ 행세를 하는 이들이 오로지 자기 힘으로 학교의 자산을 일궈낸 것도 아니고 학교 운영비 일체를 정부 지원 없이 스스로 부담하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육이라는 공공의 사업에 복무하기 때문에 사학은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과 혜택을 받아왔다. 쉬운 예로 초·중등학교 교원의 급여는 공립이든 사립이든 정부가 책임진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독점적 권한을 지닌 사학 소유주로 군림할 명분과 근거는 없다.

사학은 공공성이 보장되는 투명한 운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동국대 정관은 이사 정원 13명 중에 무려 9명을 “대한불교조계종 재적승려”로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뜻있는 동국인들은 이러한 정관 탓에 이사회가 종단의 입김에 좌우되는 것은 물론이고 종단의 정치판에 휘말려 대학이 혼란에 빠질 염려가 높다고 비판한다.

동국대 홈페이지에 공개된 제289차 이사회(2015년 2월23일) 회의록을 보면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조사 결과 보광 스님은 논문 18편의 표절 및 중복게재가 확인돼 중징계를 요청하는 안건이 상정되지만 다음 이사회로 의결이 연기된다. 제290차 이사회(2015년 5월2일) 회의록에 따르면 이사회는 제18대 동국대 총장 선임 안건을 상정해 문제의 보광 스님을 총장으로 뽑는다. 일부 참석자가 지난 회의에서 이월된 징계 안건부터 처리하지 않고 징계 대상자를 총장으로 선임하는 불합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만, 학교 안정을 위해 우선 총장을 뽑고 표절 문제는 나중에 “확실하게 인정하고 정리”(!)하자는 의견에 다수가 동의한 것이다.

새 총장에 대한 징계 안건은 다시 차기 회의로 넘어가지만, 제291차 이사회(2015년 5월26일) 회의록에는 엉뚱하게도 표절 판정의 절차적 정당성을 검증하고 있으며 해당 논문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 중이라는 보고만 나온다. 참으로 학교 망신이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 등 조계종 지도부와 동국대 이사회의 결단이 필요하다.

국공립이든 사립이든 대학은 그 공공성 덕분에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있다. 당장 교수, 학생, 직원이 있고, 동문과 학부모, 지역사회도 발언권을 가져야 마땅하며 국가와 사회가 최종 이해당사자이다. 대학의 ‘주인’은 이렇게 다양하고 많지만, 대학이 행하는 연구와 교육의 질과 성과에 대해 최종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대학 운영의 ‘주역’은 교수이다.

총장은 주역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할 교수진, 그리고 학생과 직원 등 다양한 대학 구성원을 이끄는 막중한 자리이다. 특히 학문의 길, 학자의 길에 대해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깊은 이해를 지녀야 한다. 또 대학의 사회적 책무에 민감한 동시에 권력과 자본의 압력과 유혹 앞에서 대학의 자율성과 학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기업 경영이 주된 이력인 분,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정무직 경력자가 대학총장으로 종종 적격이 아닌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동국대를 비롯한 많은 사학에서 정권의 불통과 독선, 무능에 편승한 총장 선임의 난맥상이 심각하다. 심지어 국공립대학인 한국체육대학, 한국방송통신대, 공주대, 경북대 등에서마저 정해진 학내 절차를 거친 총장 후보를 교육부가 사유도 밝히지 않고 임용 제청을 거부하며 법원 판결마저 무시하고 있다. 대학의 주인인 국민이 짓밟히고 있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몇 달 전 어느 재단이 주최하는 작은 행사가 있었다. 그 재단의 지원금을 받는 민간단체 실무자들이 사업성과를 공유하는 워크숍이었고, 앞부분에 이사장의 인사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행을 맡은 실무자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사장은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30분 정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말씀하시는데 끊을 수도 없고 매번 난감하다고 실토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장은 그 재단이 얼마나 훌륭한지 여러 가지 자료까지 곁들여가며 거의 강의를 하다시피 했다. 다행히(?) 20분 만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자신들을 지원하는 재단인 만큼 지루함을 내색하지 못하고 묵묵히 경청했지만, 실무자는 미안함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장은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실무자는 행사 때마다 그런 곤경에 처하지만, 직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조직이 그러하듯, 이 재단에서도 최고 권력자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부에서 걸러지지 않은 오점은 매번 그렇듯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직언해주는 사람이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권위주의 문화가 짙은 한국의 많은 조직에서는 그렇지 않다. 권력이 막강할수록 언로는 더 막혀 있다. 특히 이번 대통령의 경우, 쓴소리하는 측근들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어떤 총리는 ‘할 말은 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취임했지만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최고 인사권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게 지시 사항을 받아 적기에 바쁘다. 또는 감언(甘言)으로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다.

직언이 실종된 상황과 대조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온갖 폭언들이 넘쳐난다. 인터넷의 악성 댓글,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괴담, 끼리끼리 모여서 부풀리는 험담, 특정 집단에 대한 악담과 혐오 발언, 사소한 갈등에도 곧바로 터져 나오는 욕설, 상황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며 내뱉는 극언, 해괴하고 허황된 논리로 점철된 망언…. 여러 가지 관계에서 여과되지 않은 채 쏘아붙이는 막말들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고 파국을 자초하기도 한다. 보선 참패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의 내홍도 최고위원회의에서 오간 몇 마디 말들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직언과 폭언은 직설화법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핵심을 바로 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미덕으로 장려되고 후자는 악덕으로 지탄받는다. 폭언은 상대방에게 모욕과 상처를 준다. 설령 그 내용이 맞다 해도 발언의 의도가 공격적이기에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반면에 직언은 어떤 잘못을 지적하되 그 궁극적인 목적이 상대방의 변화와 상황의 개선에 있다. 당사자들 사이의 사소한 자존심 싸움을 넘어서 공동체나 공공성의 구현을 바라는 순수함이 거기에 깔려 있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후보로 내정되었을 당시 '대통령에서 쓴소리와 직언하는 총리가 되겠다'라고 선언한 적 있다. (출처 : 경향DB)


직언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필요하다. 가족, 친구, 연인, 스승과 제자 등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잘못을 냉정하게 지적해주어야 할 때가 있다. 어설픈 위로나 상투적인 격려보다 따끔한 직격탄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도움을 주고받기가 실제로는 쉽지가 않다. 나름대로 애정 어린 지적과 충고를 했건만, 상대방에게는 잔소리로만 들리는 경우가 많다. 아끼는 심정으로 훈계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꼰대질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표현 방식과 언어 감각 그리고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경험의 차이가 그러한 간극을 낳는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조언자가 자신의 동기를 짚어 보아야 한다. 문제를 지적하면서 모종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어떤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직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대방의 성장이어야 한다. 그의 삶이 나아지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가.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곁에 서서 같은 눈높이로 길과 비전을 탐색하는가. 멘토가 꼰대와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순수한 의도로 조언을 하는데도 귀담아듣지 않고 방어막을 치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의 모습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현재의 자기를 미완의 존재로 여기면서 끊임없이 완성해간다고 생각하면, 직언이 감사한 선물이 된다. 반면에 취약함을 감추려고만 하면 불손한 참견이나 성가신 지적으로 여겨진다. 권력욕이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또는 자존감이 너무 낮으면 그렇게 반응한다. 과도한 자기애 그리고 허약한 정체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이 관건이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금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가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자 당사자이다. 지리멸렬한 야권은 비판하기조차 민망하다. 언론 또한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의 입맛대로 대립과 싸움을 부추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무력화할 시행령을 내놓은 정부, 권력의 속셈대로 유가족에게 지급될 돈의 액수부터 외워대는 언론, 그리고 인양을 반대하는 이유는 건져낸 배 안에 실종자 시신이 없을 경우의 허망함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어느 여당 의원의 발언은 글로 옮기기조차 불편하다.

불의 앞에 솟구치는 분노는 증오와 엄연히 다르다. 의롭지 못한 자들은 분노와 증오의 구분을 교묘히 흐리면서 분노의 원인을 숨기려 든다. 그러나 분노가 불의를 물리치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분노에 머무는 순간 맹목적인 미움으로 변질되기도 쉽다. 나라를 운영하는 집단이 국민들 사이의 갈등을 무책임하게 부추기는 지금이 그런 위기의 시간이다.

그래서 미국의 베트남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은 좋은 생각거리이다. 2012년부터 2025년까지를 50주년 기념기간으로 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선포문을 포함한 사업의 성격은 참전군인들의 용기와 희생에 감사와 경의를 보내는 쪽에 치우쳐 있다. 물론 격렬한 반전운동에 부딪히는 가운데 참전군인들이 이중으로 상처를 입은 과거에 대한 깊은 배려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애국심만 강조하는 가운데 명분 없는 전쟁의 역사적 진실이 손쉽게 가려진다. 300만명이 넘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인명 피해는 까맣게 잊힌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미국 정부의 기념사업은 자기 땅을 지키려 싸운 베트남 민중과 잘못된 전쟁에 반대한 수많은 자국 시민에 대한 무시와 모욕, 증오를 감추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명분 없는 전쟁을 벌여 온 미국의 실상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참전군인의 경험이 그저 헛된 것이었다고 맞받아치면 증오의 정치라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미국의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은 미국 국민이 참전용사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고 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가 싸우게 한 데 대해, 이후의 삶이 후유증으로 망가진 일에 대해, 살아남은 참전용사들을 돌보는 일에 등한했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자세가 먼저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우리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는 1980년 광주에서 경찰관 4명과 계엄군 23명을 잃었다. 계엄군 전사자의 절반은 5월24일 매복 중이던 광주 지역의 군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나타난 특전사 병력을 시민군으로 오인해 대전차포 등으로 기습한 사건에서 나왔다. 이미 특전사 부대는 어린이도 섞인 길가의 주민들에게까지 총격을 가하면서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계엄군 간의 교전으로 수십명이 죽고 다친 참변 직후 아예 제정신을 잃고 인근 마을을 뒤져 죄 없는 청년들을 끌어내 사살했다. 극우 인사의 저서도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고 기록한 일이다. 그 눈먼 증오의 순간이 수십년이 지나도 참혹하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초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어머니의 노래>(MBC)와 <광주는 말한다>(KBS)가 언론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어렵사리 방영되었다. 철저한 언론 검열 탓에 진상을 잘 몰랐던 국민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이 있었다. 두 기록영상물 중 하나는 당시 사망한 군경의 어머니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말씀을 마지막 자막에 담았다. 학살의 참상에 충격받고 분노하던 그 시점에서 아무도 27명의 어머니와 가족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어디에도 호소할 곳 없이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시달렸을 그들을 기억했다. 분노가 자칫 증오로 변질되지 않게 막는 법을 일깨워주었다. 진실의 전모를 규명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미움을 극복하는 화해와 평화의 작은 촛불을 밝혔다.

군사반란에 동원돼 잔혹한 행위를 저질러야 했던 계엄군들의 무너진 삶 또한 위로받아야 한다. 만약 우리 사회의 민주역량이 더 성숙하고 더 강했더라면, 신군부는 감히 그처럼 잔인하고 공격적인 진압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싹을 자르려 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민뿐만 아니라 군경의 희생도 피할 길이 있었던 것이다.

4·16가족협의회가 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 후 가진 세월호 가족 결의 의식에서 단원고 희생자의 어머니가 삭발을 하며 울고 있다. (출처 : 경향DB)


화해와 평화에는 진실이라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언론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이들이 27명의 어머니에게 깊은 위안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는 노력과 성과 덕분이었다. 오늘 이 순간 슬픔과 분노를 딛고 세월호의 어머니와 아버지들도 진실의 길을 열고 있다. 정부의 시행령을 당장 폐기하고 진상조사를 보장해야 마땅하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최근 서울에서 땅꺼짐(싱크홀) 현상이 빈발하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내려앉아 지나가던 준설용 차량이 옆으로 쓰러졌고, 오토바이가 웅덩이에 빠지는가 하면 길을 걷던 남녀가 3m 깊이의 땅속으로 돌연 사라지기도 했다. 상하수관의 손상과 무분별한 굴착공사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노후화와 공동화(空洞化)가 이제 곳곳에서 땅꺼짐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당장 불편한 것이 없으니까 뒷전으로 미뤄놓고 실적이 곧바로 드러나는 정책에만 매달려온 결과다. 몸에 비유하자면, 골다공증과 혈관 파열 증세를 방치하고 피부 미용과 보디빌딩만 해온 꼴이다.

땅만 꺼지는 것이 아닌 듯싶다. 국가의 제반 시스템이 심각한 기능 부전에 빠지고 있다. 비효율과 무책임, 그리고 부정부패로 인해 파행을 거듭한다. 그런데 시스템만 와해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근본적 토대인 ‘사회’의 지반 침하가 진행되는 듯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신뢰가 희박해지고 있다. 인간은 타인과 사회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은 동물인데, 관계가 해체되고 유기적 질서가 흔들리는 것은 삶 그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타인의 곤경에 나몰라라 하는 풍토에서 겪는 뭇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세월호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행로를 더듬어보자. 참사 직후 거의 모든 국민이 망연자실과 비통함과 미안함과 분노에 오롯이 잠겨 있었다. 책임 회피에 급급한 정부와 약속을 저버린 대통령에 대해 규탄의 목소리도 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애도와 진실 규명의 움직임들이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집단행동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냉담한 태도로 돌아섰다.

급기야 일베 회원들이 ‘폭식 투쟁’과 혐오 발언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이후 유가족 및 일부 지지자들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고립되면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왔다. 최근에 정부가 보상금 카드를 들이밀자,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보도에 미혹되어 유가족을 비난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마음들이 홀연히 떠나가버렸을까.

마음은 생각과 감정의 복합체다. 생각하는 힘이 박약해지면 복잡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지 못한다.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두루 살펴보는 지적 역량이 부족하기에 단순한 도식과 흑백 논리에 금방 포섭된다. 단편적인 정보와 피상적인 이미지로 사태를 규정하고 안이한 결론을 도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해버린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말단 공무원의 사소한 부주의에서 거대한 권력과 자본의 부조리까지 광범위하게 얽혀 있다. 드러난 사실들 몇 가지를 대충 엮어 진상의 전모라고 얼버무리면서 파일을 덮으려는 기획에 동조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너무 얄팍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감정의 얄팍함도 맞물려 있다. 뜨거웠던 눈물이 비정한 침묵으로 돌아서버린 것은, 정서적인 잉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순간적 격정을 꾸준한 관심으로 견지하고 일상 속에서 계속 고통에 동참하기에는 감정의 저수지가 메말라 있는 것이다. 저마다의 생존 내지 생활이 흉흉한 탓도 있으리라. 일터, 학교, 가정 그리고 여러 인간관계에서 겪는 감정이 사뭇 껄끄럽다. 억울함, 박탈감, 질투심, 모멸감, 불안 등에 시달리면서 타인의 곤경을 체휼하지 못한다. 그런 탁한 기운은 습관적인 짜증이나 엉뚱한 분노로 표출된다. 또는 말초적인 자극이나 열광적인 이벤트, 사소한 권력 행사와 인정 투쟁, 소유와 소비 등으로 무마된다. 이런 가운데 시민들 사이의 감정 연대가 이뤄지기는 어렵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추론 능력과 공감 능력이다. 그 덕분에 인류는 신체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사회와 문화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문명의 숨가쁜 혁신 속에서 그 능력들이 오히려 쇠퇴하고 있는 듯하다. 정보는 폭주하는데 생각하려 하지 않고, 자극이 넘쳐나는데 감성의 통로는 비좁아진다. 사사로운 욕망과 막연한 두려움에 갇혀 손익의 경계를 뚜렷하게 그어놓고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민주주의국민행동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4160개의 전구촛불로 세월호 형상을 만드는 행사가 17일 밤 서울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주최 측은 이 행사가 성공하면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출처 : 경향DB)


세월호 참사는 국가 시스템의 부실함과 함께 사회 그 자체의 허약함을 드러내주었다. 지하의 상하수도관 보수가 장구한 시간을 요하듯 (전체적으로 30%가 노후 상태라고 한다) 체제를 바로잡고 사회를 복원 내지 재건하는 일에도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저께 저녁 서울광장 등 곳곳에 모여 아픈 기억을 되새기고 행동을 다짐한 시민들은 소중한 씨앗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희망이나 환상, 패배주의와 냉소를 경계하면서 현실을 직면하는 용기다. 고루한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공론과 교감의 장을 넓히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들’로 되풀이되지 않도록.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사유와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언한다’는 것  (0) 2015.05.15
갈등과 증오의 덫을 넘는 길, 진실  (0) 2015.05.01
‘싱크홀’이 된 국가 시스템  (0) 2015.04.17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  (0) 2015.04.10
무능·무책임한 대학 구조조정  (0) 2015.04.03
손의 힘  (0) 2015.03.2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달 하순, 서울시민대학 봄 학기가 시작됐다. 시민대학 캠퍼스는 여러 곳이다. 서울시청 신청사(시민청)와 은평학습장 그리고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등 9개 권역별 연계대학이 있다. 캠퍼스별로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된다. 내가 담당한 강의는 ‘나를 위한 글쓰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수강생도 다양하다. 팔순 할머니에서부터 은퇴자, 직장인, 휴학 중인 대학생, 전업주부 등 30명 남짓. 글을 쓰겠다는 열정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거의 없다.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지만(각자 출석부에 서명을 한다) 나는 일부러 성명을 부른다. 수강생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근 50년 만에 처음으로 출석 체크를 한다며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다. 중년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누구 엄마, 누구 부인으로 불리던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대학 강의실에서 오롯이 본명으로 호명된다. 게다가 스스로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글쓰기 시간 아닌가. 중년의 낯빛에서 설렘과 기대가 우러나온다. 쉬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강의에 대한 집중도가 높다.

처음에는 자기소개 시간을 갖지 않았다. 3~4주 지나면 수강생이 서로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고 자란 곳, 가족 관계, 성장 환경, 성격 등이 저절로 드러난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소개 방식이 천편일률이기 때문이다. 쭈뼛거리며 걸어 나와 이름, 나이, 사는 곳, 직업을 말하고 꾸벅 인사하면 끝이다. 대체로 30초를 넘지 않는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들어가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멋쩍게 웃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자기를 소개하는 데 걸리는 시간, 자기소개에 동원되는 어휘 수, 자기를 소개할 때의 태도에 별 차이가 없다. 삶의 이력이 그렇게 다른데도,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에 대한 의미 부여가 그렇게 다른데도 왜 자기소개는 다르지 않은 것일까. 수년 전 <녹색평론선집 1>을 읽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제리 맨더가 ‘나쁜 요술? 테크놀로지의 실패’라는 주제로 한 대담이 실린 지면인데, 거기에 한 인디언 여성이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맨더에 따르면, 캐나다 인디언 집단에서 온 한 여성이 회의에 앞서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는데 무려 45분이 걸렸다. 인디언 여성은 자기 증조부모로부터 시작해 조상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를 차례차례 설명했다.

어떤 이는 강에서 살던 사람이고 어떤 이는 산에서, 또 다른 어떤 이는 바닷가에서 살았다. 그녀는 그 지역의 다른 조상들에 대해서도 자기가 아는 바를 얘기했다. 그런 다음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부분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도 자기가 모든 조상들의 화합물이라고 말했다.

수강생들의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가 끝나면 맨더가 들려준 인디언 여성의 ‘자기 인식’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고는 서구 문명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인디언 여성과 21세기 디지털문명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우리를 견줄 때 ‘누가 더 큰 인간인가’라고 되묻는다. 증조부모의 삶과 그들의 공동체, 나아가 공동체가 뿌리내린 장소(자연)를 ‘나’에 포함시키는 인디언 앞에서 우리는 작아도 너무나 작은 인간이다. 나이, 직업, 주소가 우리의 전부란 말인가. 여기에 몇 가지가 추가될 것이다. 사는 집의 크기, 굴리는 차의 배기량, 대학 졸업장, 연봉 혹은 통장 잔고 등등.

물론 장황한 자기소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기소개가 지나쳤다가는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드러내길 꺼려 하는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우리의 자존감이 현저하게 낮기 때문은 아닐까. 승자독식의 사회가 빚어내는 패배주의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무력감, 그리고 그 무력감 위에서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가진 자들의 뻔뻔함이 ‘나’를 이토록 작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희망버스에 탑승한 한 여성승객이 자기소개 시간을 갖고 있다. (출처 : 경향DB)


‘나를 위한 글쓰기’가 후반부로 접어들면 강의실 분위기가 달라진다. 자신감이 솟아난다. 생애 최고의 순간, 잊을 수 없는 음식, 다시 가고 싶은 장소 등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복원하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우여곡절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면서 “내가 살아온 날들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구나”라고 깨닫는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다시 태어난 ‘나’의 자기소개는 인디언 여성 못지않게 길어진다. 길어질 뿐만 아니라 한없이 깊고 넓어진다. 저마다 자서전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사유와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등과 증오의 덫을 넘는 길, 진실  (0) 2015.05.01
‘싱크홀’이 된 국가 시스템  (0) 2015.04.17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  (0) 2015.04.10
무능·무책임한 대학 구조조정  (0) 2015.04.03
손의 힘  (0) 2015.03.20
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  (0) 2015.03.1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열흘 전 학교 측의 일방적인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안’을 성토하는 중앙대의 긴급 토론회에 토론자로 불려 나갔다. 갑자기 시설 사용허가가 취소되어 오후 4시 행사는 정문 앞 길가에서 열렸다. 해가 곧 기울자 참석자들은 이른 봄의 쌀쌀한 바람에 떨며 자리를 지켜야 했다. 찬 시멘트 바닥에 앉아 두 시간을 꼼짝 않고 귀를 기울이던 진지한 학생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학과 폐지와 단과대학별 신입생 모집이라는 극단적 계획을 학장들에게도 발표 전날에야 알리는 중앙대의 밀실 행정은 요즘 대학에서 흔히 겪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중앙대 사태는 특정 대학이 아니라 전국 대학을 휩쓸고 있는 갈등의 일각이다. 그 뒤에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 정책이 버티고 있다.

토론회 이튿날 교육부, 중앙대 법인, 이명박 정부의 교육문화수석이었던 전임 총장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검찰 수사가 시작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 대학이 너나없이 인구 감소를 명분으로 삼은 구조조정의 거친 압박 아래 부실과 비리에 멍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 정책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확정된 2015년 대학 구조개혁 평가지표에서 신입생 충원율과 취업률 배점을 이전의 공청회 안보다도 높였다. 지방대학 죽이기, 기초학문 몰락을 재촉하여 온 기존의 틀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육연구소가 1단계 평가지표(60점) 중 정량지표(42점)를 활용하여 전국 사립대학 143개교에 대해 실시한 모의평가가 담긴 보고서 ‘대학 구조조정 현황과 전망’ 중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5등급 중 최고인 A등급이 예상되는 13개교 중 전임교원 확보율이 법정 기준(교원 1인당 학생수 인문사회계 25명/이공계와 예체능계 20명)을 충족하는 대학이 전무할 것으로 평가된다. 교육부가 이 평가항목의 정량지표 만점을 법정 기준이 아닌 전국 대학 평균값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공시정보를 온라인에서 제공하는 ‘대학알리미’에 의하면 2014년도 교원 1인당 학생수 전국 평균은 28.7명, 교원 확보율은 74.13%이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밑바닥이다. 이처럼 열악한 평균치에 만점을 주는 평가방식에는 학생 감소에 따른 교원 감축만 앞세우는 사고가 숨어 있고, 연구와 교육 여건 개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둘째, 법인지표(법인전입금 비율 및 법정부담금 부담률)는 평가항목에서 아예 빠져 있다. 말문이 막힌다. 학교 재정을 돕기는커녕 종종 부정한 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학재단들의 성공적인 로비가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작년 9월 1차 공청회에 등장했던 정성평가지표인 ‘학교운영의 투명한 공개와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 고등교육의 질적 발전이라는 국가의 책무는 철저히 외면당하며, 교육부의 책임 방기가 적나라하다.

평가지표 구성이 이 꼴이니 앞의 모의평가에서 1등과 꼴찌 141등의 점수차는 8.3점(최하위 2개 대학 제외)에 불과할 만큼 치열하다. 하위 등급 판정을 받으면 대규모 정원감축 등의 불이익을 당할 절박한 상황에서 0.1점도 아쉬운 대학은 당연히 손쉬운 지표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가령 ‘성적분포의 적절성’(1점), ‘엄정한 성적 부여를 위한 제도 운영의 적절성’(3점) 같은 것이다. 이미 많은 대학이 소규모 강의나 외국어 진행 강의에 한해 시행하던 절대평가마저 큰 문제라도 있었던 양 일괄적으로 상대평가로 바꾸고 있다. 기상천외한 지표 개선책들이 졸속 도입되고 있다.

대학의 학사관리는 엄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핵심인 성적제도를 대학평가 점수 따기 탓에 충분한 검토도 없이 타율적으로 바꾼다면, 학생의 혼란과 불만은 가중되고 대학다운 진지한 공부 대신 학점 따기에 휘둘리는 경쟁만 만연할 것이다.

덕성여대 윤지관 교수가 정부주도 대학 구조조정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많은 대학의 무리한 학사구조 개편은 2단계 평가(40점)의 ‘중장기 발전계획과 학과 및 정원 조정의 연계성’(5점)이라는 모호한 정성평가지표와도 관계가 깊다.

최하위 D, E등급 대학은 2단계 평가를 거쳐야 최종 등급을 받지만, 여기서 상위 10%에 들면 다시 C등급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의 사학 중앙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대학이 무책임한 대학정책 탓에 신음하고 있는데,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할 문제투성이 대학 구조조정 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일단 막아야 옳다. 그래야 국민적 공감을 얻을 구조조정 논의의 길이 열린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손뼉 치고 주먹 쥐고 또다시 펴서 손뼉 치고 두 손을 머리 위에 햇님이 반짝 햇님이 반짝 햇님이 반짝 반짝거려요.’ 오랫동안 애창되어온 이 동요는 율동을 함께했기 때문에 몸으로 기억되는 멜로디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찬송가로도 유명한 이 곡은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작곡했다.) 가사에 나오는 단순한 동작들은 아이들에게 신체의 경쾌한 리듬을 일깨워준다. 한국의 ‘곤지곤지 잼잼’ 같은 전통 육아놀이는 거기에 더해 애착 형성에도 도움을 준다.

손은 작지만 매우 특별한 신체 부위다. 장애를 입을 경우 어느 쪽이 더 불편한가를 생각해보자. 발과 다리를 쓸 수 없게 되면, 목발이나 휠체어로 보완할 수 있다. 설령 걷지 못한다 해도 책상 앞에 앉아서 비장애인과 똑같이 일할 수 있다. 반면 손과 팔을 잃으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제 발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만, 식사·세수·양치질·목욕 등 기본적인 생활에 지장이 많다. 그리고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 앞에서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손의 중요성은 단순히 손동작에만 있지 않다. 인체의 206개 뼈 가운데 4분의 1이 손에 있고, 뇌신경 세포의 30%가 손에 연결돼 있어서, 운동 중추의 발달에 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손동작은 두뇌의 활성화와 긴밀하게 연관된다. 퀼트나 도자기 빚기 등 수공예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노후에 기억력 장애가 훨씬 적다고 한다. 정교한 손놀림이 뇌의 다양한 영역을 골고루 자극하기 때문이다. 심신의 발달 과정에서도 손을 다양하게 움직이고 여러 가지 사물을 다뤄보는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어린아이들이 다양한 물체들을 만지작거리고 주물럭거리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달라진 듯하다. 일선 교사들에 따르면 아이들의 글쓰기, 그림, 공작 실력이 점점 퇴보하고 있다. 손으로 만들거나 오리는 것을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귀찮아 할 때가 많다고 한다. 서울 수송초등학교 위재호 교사는 어느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손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아름다움을 정교하게 빚어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것을 하찮게 여깁니다. 뭔가에 힘을 쏟고 정성을 들이기보다는 잘 만들어지고 편리하고 예쁜 것을 쉽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하죠. 그렇게 소비자로만 머무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자고 하면 짜증내는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해도 대충 끝내려 하고요.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냥 앉아서 멍하니 보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열 살짜리 아이들이 ‘귀찮아’를 입에 달고 삽니다.”

이제는 글씨를 쓰는 대신 자판이나 스마트폰 버튼을 누르는 시대다. 점점 편리해지는 기계와 점점 늘어나는 상품 및 서비스 덕분에 원하는 것들을 즉각 실현하거나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시간을 견디면서 뭔가를 손수 완성해가는 기쁨을 잃어간다. 일상의 작은 경험들을 스스로 창조하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욕망의 부피는 커지고 그럴수록 무기력과 지루함에 빠져든다.

성취감을 통해 자존감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한다. 사물들을 아끼는 마음, 거기에 깃들어 있는 스토리와 기억으로 확인되는 존재감이 필요하다.

지난 추석연휴, 남산한옥마을을 찾은 가족들이 전통 짚공예를 체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최근에 인성교육이 다시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별도의 교과목으로 편성해 가르칠 영역이 아니다. 신체 활동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교섭 등 복합적인 경험을 통해 인격과 품성은 형성된다. 특히 초· 중등학교 수준에서는 실과 교실이 중요하다. 오감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놀이의 즐거움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채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글씨 쓰기, 그림, 종이접기, 뜨개질, 바느질, 악기 연주, 공작, 수리, 농사, 원예, 동물 기르기, 청소 등의 활동이 장려되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손은 시선만큼이나 중요한 통로가 된다. 얼마 전 아버지가 몸살로 심히 괴로워하셨는데, 자식으로서 아무것도 해드릴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방문한 매형이 아버지를 바닥에 눕게 하고 전신 마사지를 해드렸다. 나도 함께 거들었다. 아버지는 그 시간 이후 빠르게 회복되었다. 생리적인 효과와 함께 심정적인 위로도 큰 몫을 했으리라. 맨손의 힘을 새삼 확인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다리를 많이 주물러드렸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신체적인 소통이 가족들 사이에서 사라진 듯하다. 몸은 마음이 오가는 길이다. 등을 다독여주고, 손을 살며시 잡아주고, 뺨을 어루만져주고, 하이파이브로 손바닥을 마주치기도 하면서 숨은 마음을 일깨워보자. 지금 이 순간 함께 살아있음을 느껴보자.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스스로 자(自) 자의 기원이 뭔지 아세요?” 영문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영문학자는 자기 코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코입니다, 바로 이 코.” 믿기지 않았다. 모임의 뒤풀이, 농담이 오가는 자리여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한쪽 귀로 흘리고 말았다. 다음 날 한자의 기원과 관련된 책을 뒤적이다가 간밤의 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맞았다. 자(自)의 갑골문 자형은 사람의 코를 본뜬 것이었다. 중국인은 자신을 가리킬 때 손으로 자기 코를 가리킨다고 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영문학자는 말했다. “얼굴 중에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압권은 그 다음이었다. “문제는 자기 코가 잘 안 보인다는 겁니다.” 전날 밤 그랬듯이 내 두 눈은 내 콧잔등을 보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콧잔등의 윤곽만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것이 이렇게 낯설어지다니. 대단한 메타포였다. 보이되, 잘 보이지 않는 코를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 고대 중국인들의 생각이 놀라웠다.

물론 자기 입과 두 귀도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보이면서도 보인다고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고대 중국인을 고민에 빠뜨린 것은 아니었을까. 3000년 전 갑골문 시대의 자기 인식이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우리를 뒤흔드는 걸 보면, 우리가 자부하는 진화와 진보는 여전히 도구와 기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디지털 기억 장치에 담아놓고 수시로 검색하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아직 지혜의 경지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과 코의 관계는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관계와 대응한다. 눈이 코에 초점을 맞출 수 없듯이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를 장악하지 못한다. 분명 마음속에 있지만, 마음으로 포획할 수 없는 다른 마음들이 있다. 마음 곳곳에 마음의 오지(奧地)가 있다. 마음이 볼 수 없는 마음들. 코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두 눈을 중심으로 얼굴을 이해해왔던 그간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코가 얼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눈과 입, 귀도 다르게 보였다. 얼굴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코가 화두로 떠오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문예지에 발표한 졸시 때문이다. ‘얼굴’이란 제목을 달았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진즉 코의 갑골문 자형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영문학자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시가 달라졌을 것이다. 코가 첫 연의 핵심, 얼굴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뒤늦게 얼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타인이 다시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은 나의 것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타인 지향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외모지상주의, 명품 열풍, 자녀 교육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시 ‘얼굴’에서 부각시키고 싶었던 타인은 그런 타인이 아니다. 타인의 눈에 위축되는 ‘나’는 주체적 인간이 아니다. 소비자일 따름이다. 이때의 타인 역시 소비자다. 다른 소비자들의 눈치를 보는 소비자.

드라마 '왕의 얼굴'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소비자에서 주체적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타인’ 앞에 서야 한다. 나는 타인의 타인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타인이다. 소비자의 눈을 벗어버리면 이방인, 낯선 사람, 나그네, 노약자, 이웃사람이 다시 보인다. 그들이 저마다 사람으로 보인다. 졸시 ‘얼굴’은 큰스님과 한 소년의 대화가 모티브였다. 소년이 큰스님께 여쭙는다. “스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큰스님이 웃으며 답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언제나 깨어있으라는 경전의 번안이었겠지만, 나는 저 짧은 대화에서 타인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보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한 존재, 유일무이한 생명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지인(知人)이다. 이것이 환대의 제1 원칙일 것이다.

도처에 거울과 유리창이 있고 수시로 ‘셀카’를 찍는 세상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얼굴과 마주하는 시대다. 하지만 얼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얼굴은 많아졌지만 타인을 위한 얼굴, 타인을 맞이하는 얼굴은 찾기 힘들다. 우선 두 눈으로 자기 코(自)부터 살펴보자. 그리고 자주 물어보자. 내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TAG 얼굴

서울대학교가 경기 시흥시와 협력해 ‘배곧신도시’에 새 캠퍼스를 건설할 예정이다. 지난해 대규모 아파트 분양 과정에서 이 계획이 신도시의 큰 매력으로 선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 구성원들은 이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대학 운영의 최고 권한을 지닌 이사회도 마찬가지다. 공개된 이사회 의사록에 따르면 논의다운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실한 사업에 대해 서울대 쪽의 책임 소재를 가려야 마땅하다.

서울대는 정부의 종합화 계획에 따라 1975년 현재의 관악캠퍼스를 연 이후 꾸준히 캠퍼스를 통합해왔다. 옛 수원캠퍼스의 농생대와 수의대, 연건캠퍼스의 보건대학원 등이 옮겨왔고, 서울대병원과 함께 있어야 할 특수성을 지닌 의대 등을 뺀 조직이 관악으로 모였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에 이 흐름은 역전되었다. 2009년 수원 영통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융대원)을 세웠고, 지난해 강원 평창의 그린바이오 첨단연구단지에 국제농업기술대학원 인가를 받았다. 이러한 캠퍼스 확산은 장기적 비전에 기초한 일관된 정책에서 나왔다고 보기 어렵고, 의사결정 과정도 허술해 학내에 충분한 공감대가 없었다. 경기도와 협력을 추진하다보니 융대원이 탄생하고, 강원도와 사업을 벌이다보니 첨단연구단지가 생기고 그 김에 대학원을 만드는 식이었다.

자연히 서울대의 공룡화가 심각하다. 서울대와 여타 대학 간의 심한 격차나 지방대학의 위기를 고려할 때 그냥 두고 보기 어렵다. 가령 강원도에도 어엿한 국립대학들이 있는데 왜 서울대가 평창까지 가서 국제농업기술대학원을 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개발도상국의 농업인력 교육을 표방하지만, 그들에게 긴요한 교육훈련과 평창의 첨단연구는 엇박자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라 배곧신도시 한라비발디 캠퍼스 ‘헬로 라운지’ 입구 (출처 : 경향DB)


‘서울대 시흥 국제캠퍼스 및 글로벌 교육·의료 산학클러스터’라는 화려한 이름의 사업은 개별 대학이 알아서 할 일이 결코 아니다. 나라 전체의 대학정책이나 지역균형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로 중앙정부도 책임을 느껴야 할 중대 사안이다. 시흥시의 배곧신도시 홈페이지(www.baegot-newcity.or.kr)의 알림마당에 공지된 ‘서울대 시흥캠퍼스 추진에 관한 설명자료’(2014년 11월19일)는 그간의 경과를 요약하고 있다. 이 자료는 최근 몇 년간 서울대가 서울대인에게 알린 것보다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2011년 12월 서울대 총장과 시흥시장이 체결한 기본협약서를 보면, 서울대가 발주한 국제캠퍼스 마스터플랜의 결과보고서가 그 해 9월28일 시흥시에 제출됐다. 어이없지만 서울대에는 마스터플랜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지난해 여름 취임한 성낙인 총장의 대학본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법적 구속력을 갖는 실시협약 체결을 연기했다.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서울대는 시흥시와 2009년의 첫 양해각서 이래 지금까지 6년 동안 2차 양해각서와 부속합의서, 기본협약서, 기본협약서에 따른 부속합의서를 3차에 걸쳐 맺었다. 서울대 캠퍼스에 끌려 아파트를 청약한, 전 재산을 투자한 것과 다름없을 시민들도 있다. 함부로 계획을 백지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모하게 실행하다간 청약자, 시흥시, 건설사, 서울대가 모두 큰 피해를 입는다.

신도시 홈페이지 참여마당의 ‘자주 묻는 질문’란에 위의 마스터플랜에서 뽑은 예정시설 도표가 나온다. 새 캠퍼스는 총 42만1120㎡라고 하니 한국 최대 캠퍼스인 관악 교정(연면적 110만6968㎡)의 38%가 넘는 터무니없는 규모이다. 서울대의 이름을 팔아 신도시의 시세를 올리는 대가로 지자체는 토지를 무상제공하고 건설사는 개발이익의 일부로 학교 시설을 거저 지어준다는 사업방식은 경기침체와 1100조원에 근접한 가계부채로 신음하는 우리 현실을 외면하고 한물간 부동산 ‘대박’의 환상에 휘말리는 짓이다. 과거 이화여대 파주캠퍼스나 최근 검단신도시 중앙대 캠퍼스 계획이 겪은 진통을 직시해야 하며, 연세대 송도캠퍼스의 득실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서울대는 관련 위원회의 연구, 학내외 의견수렴과 공감대 형성을 통해 실시협약을 맺겠다고 지난해 11월 시흥시에 보낸 공문에서 약속했다. 그렇다면 내실있는 대안을 제시할 공개적 논의를 지체없이 진행해야 한다. 자체 감사나 감사원 감사, 필요하면 그 이상의 조치를 통해 이사회, 평의원회, 학사위원회에 보고조차 부실했던 사업 추진의 실상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일은 그 선결요건이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 나는 왜 어이 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같이 살고 지고’(‘가고파’ 중에서) ‘타향도 정이 들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 (…) /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 향수를 달래려고 술에 취해 하는 말이야 /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더 좋아’(김상진 ‘고향이 좋아’ 중에서)

20세기 유행가 중 고향을 노래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타향살이의 설움과 고달픔을 향수로 달래는 내용이라서 선율이 애틋하거나 목가적이다. 가난하지만 정이 흐르는 가족과 마을, 계절을 따라 다채롭게 변모하는 풍경이 가사에 담겨 있다. 한국인에게 고향은 공동체의 원형, 돌아가고 싶은 삶터로 여겨져 왔다. 김우창 교수는 ‘고향 그리고 사람이 살아 마땅한 곳은, 대지를 느낄 수 있고 하늘이 보이는 자연 속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김우창 ‘돌아가지 못하는 그러나 돌아가야 할 고향’ 경향신문 2015년 1월1일자)

고향을 회상하는 정서가 널리 공감되어 온 배경에는 초고속으로 진행된 도시화가 있다. 해방 당시 100만명이던 서울 인구가 1988년에 1000만명이 되었으니, 4~5년 만에 100만명씩 늘어난 셈이다. 산업화를 견인했던 수도 서울의 시민들은 거의 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었고,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은 심신의 고단함으로 점철되었다. 고도성장의 열매를 어느 정도 누리기는 했지만, 사람다움을 거부당하거나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에 젖어들었으리라.

그런데 우리는 고향을 사랑하는가. 향수는 애향심으로 이어지는가. 명절 때마다 ‘민족 대이동’을 하지만 지방과 농촌은 점점 황량해지고 있다. 토건의 망령이 국토를 휩쓸면서 그나마 보전되어온 토속의 삶은 곳곳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시인은 절규한다.

‘왜 마을은 사라지고 있는가? / 왜 무당과 신들은 도망치고 있는가? / 왜 비와 바람이 빈집을 때리고 있는가? // 까치나 강아지나 바라보며 / 담배나 빨고 노래나 부르고 / 늙으면 죽어야지 / 농만 진반 너스레 떨며 / 손주 걱정 돼지 걱정으로 소일해야 할 / 할매와 할아범들이 // 왜 쇠사슬에 몸을 묶는가? / 왜 죽기살기로 싸우는가?’(심보선 ‘왜?’ 중에서)

이런 현실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상념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추억과 낭만이라도 간직하고 사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그리워할 고향조차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많은 도시인들이 ‘대지를 느낄 수 있고 하늘이 보이는 자연 속의 공간’을 오로지 여행객으로서만 경험한다.

추석 연휴 나흘째인 9일 서울역 승강장에서 KTX에 올라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배웅 나온 손자에게 손을 흔들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고향(ふるさと) 납세’는 도시인과 고향의 관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발상을 일깨워준다. 납세자가 거주지가 아닌 지자체에 기부금을 보내면 지방세에서 그만큼 공제해주는 제도다. 그 지자체가 구상하는 어떤 정책이나 프로젝트를 응원하고자 기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숲속에 시민을 위한 휴식장소를 만든다거나 외딴 섬에서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세우는 일 등이다. 저마다 독특한 사업과 그 취지를 내세우면서 기부금을 모집하는 포털 사이트가 생겨났고, 전국의 지자체들이 갖가지 아이디어로 홍보에 열을 올린다.

부작용도 나타난다. 기부에 대한 보답으로 지역 특산품을 보내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 답례품을 받으려고 기부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또 ‘명품’을 생산할 수 있는 지자체와 그렇지 못한 지자체 사이에 격차가 발생한다. 그러나 물질적인 욕망에 현혹되지 않고 진정으로 그 지역에서 ‘좋은 삶’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이뤄지는 기부도 적지 않다. 그 비중을 높여가기 위해서 지자체들은 기부자들이 해당 사업의 의미와 거기에 결부된 스토리를 공유하고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참여의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에 이런 제도를 당장 도입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시도가 시사하는 바를 음미할 필요는 있다. 출신지가 아닌 고장에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정책이나 사회운동에 물심양면으로 후원할 수 있다면, 지방의 활성화에 새로운 출구가 열릴 듯하다. 완전히 새로운 ‘지연’(地緣)을 빚어냄으로써 지방과 농어촌에 기운을 생동시킬 수 있다.

많은 관심을 모으는 귀농이나 귀촌도 그러한 에너지의 자장 속에서 보다 원만하게 이행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향은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난 이들만의 배타적인 공간이 아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 조화로운 공동체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땅이 다음 세대를 위한 고향이 아닐까.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느 날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아이가 문 밖에서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아이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학업을 포기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3년간 아이와 사회를 연결하는 끈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1년 동안은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담을 받기도 하고 우울증 약도 먹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발간된 <유유자적 피플>(이충한 지음, 소요프로젝트 펴냄)에 소개된 장면이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낯설기는커녕 대중 매체를 통해, 친지나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는 ‘한국병’ 중 하나다. 일본발 뉴스를 통해 예방주사를 맞은 탓도 있을 것이다. 20여년 전부터 교실 붕괴, 집단따돌림, 은둔형 외톨이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았다. 자기계발, 심리학 관련 서적 붐이 식지 않고, 힐링산업이 번창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저마다 안간힘을 다해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주인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성공이나 행복은 대부분 미래로 가 있다. 그래서 현재는 오직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으로 변질됐다. 미래가 엄청나게 확대된 데 견주어, 과거와 현재는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미래와 과거가 현재를 점령하고 있다. 현재의 위상이 갈수록 왜소해진다. 그래서 ‘지금을 길게, 여기를 넓게 하라’는 인류의 교사들의 가르침은 들을 때마다 새삼스럽다. 끊임없이 유예되는 성공과 행복의 기준에 한정한다면 우리는 획일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획일주의를 추동하는 엔진은 경쟁과 탐욕이다. 하나의 척도만 허용하는 획일주의는 무수한 배제를 낳는다. 승자가 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사회는 영락없는 야만의 사회다. <유유자적 피플>의 저자 이충한씨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무중력 사회’라고 명명한다. 중력이 갈수록 희박해져서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청소년이 바로 그들 중 하나다. 지난 한 해에만 6만8000명에 달하는 청소년이 학교를 떠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력을 회복해 ‘독거 청소년’을 사회의 중심으로 초대할 것인가.

이충한씨는 즐거움·관계·노동이 건강한 개인을 바람직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력의 세 요소라고 꼽는다. 이 세 가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보편적 조건이다. 최인철 교수의 ‘영혼의 3대 영양소’,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의 ‘삶의 위대한 세 영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최 교수는 자유·유능감·관계를 강조했고, 셀리그먼은 사랑·일·놀이에 주목했다. 이들 세 요건은 그 어느 것도 개인이 혼자 충족할 수 없다. 타인, 즉 사회적 호응과 교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유유자적 피플’은 ‘유유자적 살롱’(유자살롱) 출신이다. 외롭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무중력 청소년들을 모아 스스로 중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유자살롱이다.

은둔형 외톨이였던 청소년들이 3개월간 악기를 배우고 함께 공연하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강화하고 사회성을 회복한다. 유자살롱은 비언어적 소통에 큰 비중을 둔다. 토론이나 글쓰기는 이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진입장벽이다. 음악이란 비언어적 매개를 통해 차츰차츰 마음을 열고 서로 손을 내민다. ‘유유자적 피플’의 공식 슬로건은 이렇다.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을 하면서 먹고살자.”

은둔형외톨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유자살롱의 강소희씨 (출처 : 경향DB)


최근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민음사 펴냄)이 나왔다. 희망이 없어서 오히려 행복하다는 ‘사토리(得道) 세대’의 안팎을 탐사한 보고서인데 한국 사회와 공통점이 적지 않다. 결말 부분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제껏 일본은 경제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성장이 멈춰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의 망연자실이 우리의 무중력 상황과 다르지 않다. 무중력 인간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문제다. 특정 세대라기보다 시대의 문제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사회적 중력부터 되찾아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수소문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축구 대표팀이 27년 만에 아시안컵 결승에 진출했다. 축구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도 오늘 저녁 한국팀이 우승컵을 들어 올려 국민들의 시름을 위로해주길 바라는 심정은 똑같을 것이다. 최고령 국가대표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차두리의 시원한 돌파와 끈질긴 수비가 팬들의 화제이고, 연속 무실점 경기의 선봉에 선 수문장 김진현의 선방 장면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대표팀을 향한 환호도 우리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체육이 차지하는 초라한 모습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큰애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시무룩한 표정의 하굣길 아이에게 이유를 물었다. 담임 선생님이 체육시간에 교실에서 자습을 시키면서 너희들이 떠들었기 때문에 벌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전담 체육교사가 없는 현실에서 행정 잡무도 많은 선생님이 아이들과 햇볕 아래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을 사정은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뛰놀아야 할 아이로서는 마음에 멍이 드는 일이었다. 한동안은 학교가 등굣길 아이들에게 운동장을 몇 바퀴 뛰게 한 후에야 교실에 들어가게 한 기억도 난다. 취지는 납득이 가지만, 아이들이 과연 즐거운 마음이었을지 의문이 든다.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가 결국 4대강 사업으로 둔갑할 때, 엉뚱하다면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히 건설산업의 이해를 앞세워야 할 정권이라면 차라리 그 예산의 일부로 전국 초·중·고교마다 실내체육관을 지어주라는 것이었다. 실내체육관이 있으면 학생들은 날씨가 궂어도 체육 시간을 거르지 않을 수 있다. 심신의 균형 잡힌 성장을 위해서 적어도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체육을 매일 한 시간씩 편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설비용이야 이미 연 25조원에 가까운 SOC 예산에서 급할 것도 없는 도로와 교량 건설 예산의 거품만 좀 빼면 언제라도 가능하다.

운동장도 비좁아 교내에 적절한 실내체육관 부지를 마련할 수 없는 초·중·고교가 특히 수도권에 많을 것이다. 비싼 땅값 탓에 어려운 문제지만, 개별 학교의 실정에 맞는 해결책이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경우라도 실내체육관은 실제 교통량이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도로사업보다 생산적이다. 지역 학교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실내 수영장 등도 꼭 주장하고 싶지만, 지방교육재정교부금도 깎으려 드는 정부 앞에서 말 꺼내기도 민망하다.

한국에서 아마추어 스포츠나 사회체육의 저변은 좁고 부실하며 엘리트 체육 일색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쟁만 강조하는 입시 위주의 한국 학교에서 체육활동은 없는 것과 다름없지만, 우리도 선진국처럼 학교마다 실내체육관을 갖추고 농구, 배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방과후 스포츠가 꽃을 피우면 그 긍정적 효과는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 마장중 학생들이 14일 오전 학교 체육관에서 반복뛰기를 하고 있다. 근지구력 등 7가지 체력요소를 측정하는 청소년기 체력측정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국민체력 100’ 사업의 하나로 실시됐다. (출처 : 경향DB)


학교의 각종 클럽팀이 주변 학교들과 리그를 치르면서 자기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는 가운데 혼자만 살아남는 경쟁의식이 아닌 함께 협력하고 즐기는 공동체 의식이 몸에 익을 것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민주화, 지역 자치의 내실화에 밑거름이 된다. 자연히 지역주민의 스포츠 활동도 삶의 질을 높이고 건강한 공론의 장 형성에 더욱 기여하는 방향으로 점차 다변화되고 발전할 것이다. 아직 우리는 등산, 테니스, 배드민턴, 남성만의 조기 축구회 정도에 지역주민 체육 동아리가 국한되어 있다. 그러니 학교에서부터 여자 축구를 포함하여 다양한 스포츠를 북돋울 이유는 많다. 더불어 그저 ‘몸짱’만 내세우는 ‘피트니스 센터’ 간판에 담긴 편협한 가치관에 눈살을 찌푸릴 이유 또한 적지 않다.

나는 교육정책을 손에 쥔 이들, 국정을 운영하는 엘리트들이 청소년들의 신체건강과 체력의 중요성에 대해 무감각하며 체육 교육의 정상화와 학생 스포츠의 육성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교육부가 작년 10월 영재교육진흥법의 시행령 개정을 입법예고하면서 전인교육과 거리가 먼 영재학교 설립 범위를 초등학교, 중학교, 심지어 유치원까지 확대하려고 한 것도 그런 증상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 축구 대표팀이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약간 밀려도 오늘 우승하리라고 감히 장담한다. 고달프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국민은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일시에 거지떼들을 맞이한 각 지방에서는 상하가 모두 당황했다. 이제 부산지구를 중심한 그날 이후의 피난민의 움직임을 보면, 부산 하면 그래도 우리 정부가 엄연히 자리를 잡고 있으니 가기만 하면 어찌어찌 되겠지, 원주민들도 피난민이라고 하면 많은 동정을 하겠지 하였으나, 원체로 많은 피난민(부산지구만 30만명이었다)이 오고 보니 당국의 손도 못 미치려니와 수용할 집이 없어 야단이 났다. … 이래서 몇 달 지나지 않았건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소중히 가지고 내려왔던 옷가지며 패물, 집기 등을 방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있을 수 없다는 옛 성현의 말씀 그대로 경제적으로 비참한 구렁에 빠지게 된 각 계층은 이렇게 완전히 도덕적으로 타락의 구렁으로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 사람이란 때로 이상스러운 만큼 잔악하고 악착스럽고 가축만도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 … 한번 습성화한 악습은 여간해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지난날의 경제적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끄럽게 굴었던 그들의 행동심리는 아직도 농후하게 그들의 언행에 작용함으로써 물욕을 중심한 상호질시, 자기만을 위하는 극도의 개인주의, 부패성의 자기 합리화 등등 모든 건전치 못한 요소는 아직도 뿌리 깊게 우리들의 마음 그리고 이 사회 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서울신문, 1951년 12월30일자)

전쟁은 인간이 벌이는 일 중에서 가장 반생명적이다. 전쟁은 생명 존중을 중심으로 구축된 인간다움의 가치들을 전복시킨다. 평시에는 강력 범죄인 살인과 방화도 적에 대한 행위일 때에는 훈장감이다. 전쟁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문명의 성과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전쟁은 사람살이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우선적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 할당한다. 총탄과 포탄의 위협 앞에서, 혼란 속의 기근과 질병으로 인해, 생명은 지속성과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젊은 남성들은 전선에서 수시로 죽음과 맞닥뜨리고,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된다. 전시의 사람들은 생존의 목적을 생존 자체로 한정한다. 그럴수록 삶과 죽음이 모두 가벼워지고 물질의 가치만 치솟는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최악의 조건들을 구현해 왔다. 그런 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밑바닥’은 말 그대로 밑바닥이다. 전시의 인간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수시로 ‘가축만도 못한’ 행동을 한다. “현재에만 충실해라”나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전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금언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염치와 양심의 값어치는 한없이 떨어진다. 군인으로든 민간인으로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 대다수는, ‘인간성의 밑바닥’에 도달해봤거나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폐허 상태가 된 물질세계를 재건하는 일일 뿐 아니라, ‘타락의 구렁’에 빠진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6·25 전쟁 유엔 참전국 전사자 명비 (출처 : 경향DB)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 세대에게 헌정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국제시장> 관객이 1000만명을 넘었다.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인간성의 밑바닥’에 도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 사람으로서 할 일 못할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야 했던 사람들을 동정하고, 그들이 선조이기에 감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이 사회 일각에는 그 시절을 지배했던 의식과 태도,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 중에나 전쟁 직후에나, 자식들에게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결심이었다. 한국 경제를 성장시킨 견인차 중의 하나는 이 집단적 결심이었다. 이 결심 안에는, 자식들은 ‘인간성의 밑바닥’에 도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염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물욕을 중심한 상호질시, 자기만을 위하는 극도의 개인주의, 부패성의 자기 합리화 등등 모든 건전치 못한 요소’들로 가득 찼던 전시의 인간성을 되살리자고? 이거야말로 전쟁을 겪은 세대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일생 자체를 모욕하는 짓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느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아주 나빴는데, 본인과 가족들은 모르고 있었다. 일곱 살이 되어서 부모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안경을 맞추어 주었다. 아이가 난생처음으로 안경을 끼었을 때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는 지금까지 세상을 이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

선명하게 다가오는 사물들에 충격과 경이로움을 느낀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대상을 놓고서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이 인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라고 이야기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타인의 몸이 되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처럼 경험하리라고 여기기 쉽다. 그 당연한 전제가 깨지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知覺)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다. 낯선 문화를 접하면서 그런 상황에 종종 직면한다.

물리적인 시각 체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기 나름의 관점을 취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개개인별로 완전히 다르다기보다는 일정한 집단 내에서 공유되는 경우가 많다. 동일한 범주에 소속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비슷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이 결속력과 유대감을 생성한다.

세계관은 곧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리얼리티의 해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념은 개개인의 존립 기반이 된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화하는 데 있다. 자기(들)가 바라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에 사로잡혀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는 행태가 가장 흔한 사례다. 또는 권력이나 부를 토대로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의 공간을 짜버리는 경우도 아주 많다. 오만(傲慢)이 하늘을 찌르면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최근에 연달아 터지는 ‘갑질’의 횡포도 바로 그러한 폐쇄적인 세계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감 중인 대한항공 전 부사장 조현아씨는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언제나 제 뜻대로 일이 돌아가게 할 수 있었고, 성에 차지 않을 때 호통을 치면 모두가 굽실거렸다. 그런데 자신의 힘이 온전히 발휘되는 소우주, 그것은 안온한 거처가 아니라 품성을 왜곡시키는 밀실이었다. 늘 해오던 대로 직원들을 대했는데, 그렇게 해도 그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그 행태가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나자 비난과 지탄이 쏟아졌다. 자신이 군림하던 왕국의 경계를 알지 못하고 철부지처럼 행동한 결과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엄마는 지금까지 세상을 이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라는 깨달음처럼,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해가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이질적이고 불편한 존재를 얼마만큼 수용하는가가 곧 성숙의 지표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12일 조사를 받기 위해 국토교통부 항공안전감독관실로 들어가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국사회의 비극은, 인격의 발달이 유아기에서 멈춘 사람들이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은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비굴한 추종자들만 거느리면서 스스로를 우상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타자에게 자기를 강요하는 것이 끝없이 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무시하고 밀어붙이다가 파국을 맞는다. 이른바 ‘지도층’의 추락은 대개 그런 시나리오를 따라간다.

하지만 착각과 미망은 권세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중에서)는 시구처럼, 시대의 거대한 모순이 생의 진실을 왜곡하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경우도 많다. 몇억원의 재산이 남아 있는데도 주식투자의 실패로 인생이 끝났다고 결론짓고 자살을 결심하여 가족까지 살해한 남자처럼, 성공과 행복에 대한 경직된 도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작은 좌절에도 무너져 버린다.

우리에게는 여러 벌의 안경이 필요하다. 그것을 번갈아 써보면서 다채로운 시선들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타자에 대해서도 단정이나 통념을 벗어놓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대면해야 한다. 타인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오가다 보면, 다른 삶의 가능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뢰할 만한 그 누군가와 온전하게 연결될 때 생각의 틈새가 열린다. 부조리한 세상을 헤치고 나갈 혜안과 기백이 생겨난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사유와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중·고교에 실내체육관 선물하자  (0) 2015.01.30
전시(戰時) 인간성의 대물림  (0) 2015.01.23
관점  (0) 2015.01.1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0) 2015.01.09
임계점 다다른 ‘입시정책’  (0) 2015.01.02
기억  (0) 2014.12.1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인 에피소드보다 통계 숫자가 더 충격적일 때가 있다. 설렁탕 값과 장례비를 봉투에 넣어놓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독거노인에 관한 뉴스도 안타깝지만, 지난해 남성 노인 자살률이 전체 자살률(인구 10만명당 28.9명)의 6배에 달한다는 통계 수치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20여년 전만 해도 먼 나라 얘기였던 자살률이 이혼율, 저출산율에 이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

자랑스럽지 못한 세계 최고는 또 있다. 인류 탄생 이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속도로 다가오는 초고령화 사회다. 그렇잖아도 늙음이나 죽음을 무슨 질병처럼 백안시하는 사회인데, 노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사회 전체가 노인을 외면하거나 무시, 방치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대한민국의 노인은 삼중고에 시달린다. 외롭고 아프고 가난하다. 외롭고 아프고 가난해서 자기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채 무기력과 자괴감에 짓눌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 코맥 맥카시의 소설 제목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세대가 노인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개신교와 이슬람교가 한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장면을 기다리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도 기대할 바가 못 된다. 노인은 기껏해야 복지의 대상이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밀려나 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나 청년에 견주면 노인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잉여이고 루저다.

현재와 같은 시스템, 즉 우리 사회의 집단무의식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 생애의 후반기는 이미 정해져 있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영업에 손을 댔다가 2~3년 사이에 쫄딱 망하고 변두리 양로원을 전전할 것이다. 연금이 나오거나 모아둔 자산이 있다면 문화센터를 기웃거리며 사서삼경 강독을 하거나 게이트볼 교실을 들락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몸에 탈이 나거나 치매기가 비치면 바로 요양원으로 실려갈 것이다.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하는 독거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상상이다? 그렇지 않다. ‘녹색평론’ 최근호 좌담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서울대 학생들한테 부모가 언제 죽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63세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은퇴해서 퇴직금 남겨주고 바로 죽는 게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서강대 교수가 대학생들, 그러니까 베이비부머의 자녀들에게 ‘아버지한테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돈밖에 없다’는 답이 40% 이상 나왔다고 한다. ‘돈 다음에 뭐 있는 거 빼고, 오로지 돈 하나만 원한다’는 학생이 열 명 중 넷이 넘었다고 한다.

베이비붐 세대 등 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2012 베이비부머 일자리 박람회가 12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려 많은 구직자들이 취업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출처 : 경향DB)


베이비부머가 800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터 밖으로, 집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낙향을 하거나 귀농, 귀촌을 하는 이들은 극소수다. 새로 월급을 받는 이도 많지 않다. 연금이 나온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대부분은 알량한 퇴직금, 혹은 전 재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치킨집이나 삼겹살집을 차렸다가 바로 문을 닫기 일쑤다. 이들이 가족이나 이웃, 사회로부터 인정받는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생을 한 편의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경험과 지혜를 사회와 공유할 수 있다면 노인 자신은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 사회 전체, 모든 세대가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노인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탈리아 자율주의자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가 쓴 <미래 이후>를 읽다가 두 눈이 환해지는 구절을 만났다. ‘유럽의 노인 세대는 서구 사회가 부와 자원의 재분배에 관한 오래 지속될 합의에 이르도록 준비시키는 문화혁명의 주체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베이비부머를 포함한 노년 세대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은퇴자와 노인들이 건강하고 품위 있는, 그래서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세상의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 공감하는 노인, 분노하고 연대하는 노인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노인을 위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인을 위한 나라가 곧 모든 세대를 위한 좋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사유와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시(戰時) 인간성의 대물림  (0) 2015.01.23
관점  (0) 2015.01.1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0) 2015.01.09
임계점 다다른 ‘입시정책’  (0) 2015.01.02
기억  (0) 2014.12.19
예술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0) 2014.12.1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해가 아무리 힘겨웠어도 새해 첫날에 잠시라도 시름을 접고 희망에 들뜨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올해는 신년 분위기를 누릴 마음의 여유마저 빼앗긴 국민들이 많다. 그만큼 지난 2014년은 큰 사건과 사고가 이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는 새해맞이가 우울한 젊은이들이 유난히 많다. 취업난에 고통받는 20대 외에도, 지난달의 수시 결과가 나빠서 정시에 기대를 걸고 기다리는 수험생들도 그러하다. 수시에 합격한 학생은 입시 굴레를 홀가분하게 벗어났지만, 정시 발표를 기다리는 학생과 학부모는 불안에 휩싸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적지 않은 이들이 벌써 재수를 결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새해를 전망하며 많은 분들이 한목소리로 말한다. 정치개혁이나 제도개선도 중요하지만, 우리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뀌어 한층 책임 있는 사회구성원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이런 목소리가 책임 소재를 엄정히 가리려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무책임한 양비론으로 흐른다면 물론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이가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된다는 차원의 문화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바뀌는 일은 곧 사람을 제대로 교육하는 일과 통한다. 그만큼 교육 문제는 우리 사회가 위기를 극복할 역량을 키우느냐를 가름할 중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지난해의 수능 논란에 이어 나온 정부 대책은 적어도 영어에 관한 한 실망스러울 뿐이다.

교육당국은 수능 영어를 2018년부터 절대평가로 바꾼다고 공언했지만, 세간의 반응은 차가울뿐더러 심지어 이 약속을 믿지 않는 분위기도 퍼져 있다. 현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그 명칭에 어울리게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과 자격을 검증하는 절대평가체제가 아니라, 남을 제치고 더 좋은 대학을 가려는 격심한 경쟁을 반영한 상대평가체제이다. 그런데 상대평가체제라는 큰 틀을 그대로 둔 채 영어만 절대평가로 바꾼다면 부작용만 터져 나올 것이 뻔하다. 아직 수능 개선에 관한 논의를 지켜볼 여지는 있다지만, 이미 근본적인 문제는 까맣게 망각된 느낌이다. 정책 결정권자들이 일선교사, 영어교육 전문가를 포함한 관련 당사자의 중지를 모으려는 생각이 과연 있는지 궁금하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2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14 전문대학 진학상담회'에서 입시 전문가로부터 입시전략 설명을 듣고 있다. (출처 : 경향DB)


입시정책의 불투명성은 지난 정권부터 추진된 국가공인영어시험(NEAT) 개발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가공인영어시험은 올해 예산 편성에서 아예 빠짐으로써 수능을 대신할 2, 3급은 물론이고 토익, 토플을 대체할 1급도 사라지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수백억원의 국가예산을 낭비하고 만 것이다. 특히 수능을 대체하려던 구상은 애초부터 실패가 불보듯 했다는 점에서 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은 물론이요, 이를 뒷받침한 전문가들의 잘못 또한 밝혀야 한다.

국가공인영어시험은 1년에 24회(회당 5만명) 시험을 실시하여 60만명에 달하는 수험생에게 연 2회의 응시 기회를 주어 수능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고3이라는 동일집단을 대상으로 무려 연 24회의 시험을 동등한 난이도로 맞춰낼 수 있는 평가기관은 지구상 어느 구석에도 없다. 더구나 단 1점에도 민감한 한국의 대학입시를 두고 이런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기막히다. 흥청망청 예산을 쓰기 전에 미리 전국의 영어교사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거나 관련 단체들에 공개적인 의견 조회만 했어도 문제는 분명하게 부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큰 밑그림 없이는 어떠한 땜질 처방도 통하지 않을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중등교육의 무능과 파행을 극복하고 미래 세대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키울 입시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은 부분적인 개혁으로는 불가능하다. 너무 급격한 변화의 위험성을 마땅히 경계하되, 문제의 급소를 찌르는 정직함과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구조를 만들어 탄탄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묘책을 쉽게 내놓기 힘든 현실에서, 교육관료와 그에 동조하는 ‘전문가’들이 독점하는 의사결정구조로는 어떤 변화든 부작용밖에는 건질 것이 없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사유와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점  (0) 2015.01.1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0) 2015.01.09
임계점 다다른 ‘입시정책’  (0) 2015.01.02
기억  (0) 2014.12.19
예술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0) 2014.12.12
교육체제의 큰 틀을 바꿔야 한다  (0) 2014.11.2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TAG 입시

스무 살이 넘은 작은딸이 얼마 전에 문득 물었다. “나 어렸을 때, 아빠는 왜 그렇게 늘 우울한 표정이었어?” 생뚱맞은 질문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일곱 살 때, 나는 6개월 정도 무척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몇가지 일들이 연거푸 실패하면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불면증과 식욕 감퇴 속에 생활이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그 반년의 시간이 아이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진 모양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대부분이 그런 분위기로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얼굴에 그늘이 잔뜩 낀 아빠의 눈치를 살피느라 위축된 감정이 짙은 자국으로 남아 실제보다 훨씬 긴 시간으로 저장된 것이리라.

그보다 훨씬 어이없는 기억의 오류도 있다. 어느 삼십대 남성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 했던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자기의 발을 들어 거꾸로 세운 다음 물통 속에 집어넣었다가, 울면서 발버둥 치니까 다시 들어 올렸던 일이다. 그 충격을 가슴에 묻어둔 채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혼을 했고, 이제는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싶어 어느 날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때 왜 저를 죽이려고 하셨어요? 그 질문에 아버지는 머리가 하얘져 버렸다. 사실은 그 남자가 놀다가 발을 헛디뎌 물통에 빠졌고 아버지가 재빨리 꺼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부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손에 발을 붙잡혀 들어 올려진 순간만 뚜렷하게 남게 되었다. 엉뚱한 트라우마를 가슴에 품고 삼십년을 살아온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동창들끼리 학창 시절을 추억하다 보면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입력하고 있음을 종종 발견한다. 한지붕 아래 살아온 식구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장남과 차남, 형제와 자매가 서술하는 가족사는 판이하기 일쑤다. 위에서 언급한 두 사례에서처럼 정서적인 괴로움이나 충격적인 사건은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그리고 저마다의 폐쇄적인 의식 회로 속에서 기억을 한 방향으로 굳혀 간다. 그런 응어리에 발목이 잡혀 삶이 일그러지기도 한다.

만일 과거가 현재를 짓누르는 듯 느껴진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경험들의 객관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 시간을 함께했던 타인과의 기억을 면밀하게 대조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상황을 접수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당사자들이 터놓고 대화하다 보면 각자가 고정관념과 증오심 속에 타인의 상(像)을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편파성은 집단의 역동 속에서 더욱 강화되는 경우도 많다. 자기가 소속해 있거나 그렇다고 믿고 싶은 어떤 범주 안에 실재를 가둬두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대로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약국 또는 실험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용한다. 가정환경, 학교 교육, 또래 집단, 매스미디어, 이데올로기 등을 통해 경험이 일정한 방식으로 편집되고 강화된다. 거기에 감정이라는 접착제가 가미되면서 더욱 견고해진다. 과도한 피해의식에 이끌려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습관적인 강박에 치우쳐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비좁은 굴레를 벗어나 보편적인 인식의 지평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서울 합동분향소에 새겨진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출처 : 경향DB)


‘망년’이라는 말이 멋쩍은 연말이다. 수개월 전 거대한 참사 앞에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듭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억을 날 것 그대로 간직하기엔 아직도 너무 아프다. 나날의 일상조차 버겁기에 적당히 망각의 저편에 묻어두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악몽은 두려움 또는 죄의식과 함께 우리의 무의식을 붙잡을 것이다. 외면하면 할수록 그 상처의 뿌리는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직면할 수 있을까. 애도의 물결에서 드러난 격정적 유대감을 냉철한 사회적 기억으로 변환하여 지속시켜야 한다. 집단 트라우마의 질곡을 새로운 존재에 대한 열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진상 규명이라는 험난한 과제도 그 기력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빚어내는 마음의 상자는 세상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바다에 다 와가는 한강을 따라가던 자유로는 파주 출판도시를 지나 왼쪽 어깨에다 오두산 전망대를 얹어놓고 오른쪽으로 크게 커브를 그린다. 이때부터 자유로는 임진강 남쪽 기슭을 거슬러 오른다. 가족과 함께 자주 오가는 길. 하지만 매번 강 건너편으로 눈길을 주기가 불편하다. 헤이리마을에서 기름진 저녁을 먹고 나오다 성동IC 부근에서 어두운 북녘 땅과 마주칠 때면 더 심란해진다.

지난 11월29일 아침, 관광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서울 합정역에서 전시기획자, 작가, 시인, 미술 분야 인사 등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판문점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긴장감이 덜했다. 임진강이 낯설지 않은 것보다는 북녘 땅을 몇 번 밟아본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 남북 관계가 ‘호시절’이던 2005~2006년 남북작가회의에 참가하느라 평양, 개성,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다.

통일대교를 지날 때까지 판문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도끼만행 사건과 몇몇 인사의 귀환과 송환, 망원경을 들고 있는 북한군, 소떼 방북, 그리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몇 장면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개인적 기억이 아니고 그것도 매체를 통한 이미지의 중첩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태어나 ‘반공방첩’과 함께 성장한 우리 세대에게 판문점은 이념과 관련된 집단무의식의 가장 깊은 거처 중 하나다.

오전 10시, 판문점은 짙은 안개에 싸여 고요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날 판문점을 찾게 된 것은 지난 10월3일부터 11월30일까지 판문점, 도라산역, 파주 출판도시에서 개최된 전시회 ‘파주평화발전소: 끝과 시작’ 덕분이었다. 올해 첫선을 보인 파주평화발전소 기획전(전시감독 이승현)은 여러 의미를 갖는데, 국내외 유명 작가가 참여한 것보다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에 미술작품을 걸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자유의 집 출입문 유리에 전시회 포스터가 선명한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김혜련 작가의 ‘마지막 철조망-하늘사다리’가 맞이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작가라면 판문점이 60년 넘게 품어온, 아니 지금도 뿜어내고 있는 이 엄청난 장소성(역사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나는 자유의 집 안에서 오직 선과 색으로 철조망 너머 평화를 꿈꾸게 하는 작품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전협정기념일을 앞두고 찾아본 판문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남과 북의 경계병들이 콘크리트로 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며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군사정전위 회의실을 돌아보고 자유의 집 3층 전시실에서 판문점 역사에 관한 자료와 사진을 관람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나는 착잡해지고 말았다. 잔상효과였을 것이다. 불과 몇 십 분 전에 보았던 미술작품이 너무 작아 보였다. 현실의 막강함이 작품을 압도했다. 판문점 전시가 ‘총구에 꽂는 첫 번째 꽃’일 수 있다고 속으로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라산역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난 뒤 도라산 전망대에 올랐을 때였다. 외국인 관광객이 바글바글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판문점 일대는 손꼽히는 명소라고 한다. 하기야 지구상에 한반도 비무장지대와 같은 비극적 스펙터클이 또 어디 있으랴. 두세 겹으로 전망대 망원경에 달라붙어 있는 외국인들을 지켜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들이 한국 관광을 선택할 때, 강력한 동기 중 하나가 한류였을 텐데 K팝과 한국 드라마, 한국 영화에 매료되어 한국을 찾았을 외국인들이 군사분계선에서 과연 무엇을 느낄 것인가. 나는 분단 현장과 관광상품 사이를 연결하기가 어려웠다.

이승현 전시감독이 물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지요?” 이 감독이 파주 일대를 평화의 송신소로 전환시키려는 이유 중 하나다. 한반도를 넘어 지구적 차원의 평화를 추구하는 한국 예술을 진정한 한류로 승화시키자는 것이다. 귀경길에 최근 내가 다지고 있는 각오가 떠올랐다.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예술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두 질문은 엇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질문이다.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뭔가 할 수 있다. 지금 여기가 분단 현실의 맨 앞, 아니 평화의 맨 앞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사유와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계점 다다른 ‘입시정책’  (0) 2015.01.02
기억  (0) 2014.12.19
예술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0) 2014.12.12
교육체제의 큰 틀을 바꿔야 한다  (0) 2014.11.28
파워포인트, 칠판, 눈빛  (0) 2014.11.21
도시는 누가 만드는가  (0) 2014.11.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수능 논란에 대해 언론에 나온 해결책은 대부분 무책임하다. 예를 들어 수능 복수 시행에 관한 제안이 그렇다. 단 1점 차이에도 민감하기 마련인 우리의 입시 현실에서 복수로 시행하는 수능시험들의 난이도를 동등하게 맞출 길이 있을까? 이제 정말 큰 틀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 까닭은 우선 근본적인 원인이 교육이 아니라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악화일로의 사회적 양극화 앞에서,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합격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다들 생각한다. 대학입시라는 줄세우기 싸움에서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유전자처럼 박혀 있다. 게다가 관련 당사자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도 크게 엇갈려 사회적 합의도 어렵다.

이 같은 난국을 뚫고 나가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하다. 우선 교육현장에서 밑으로부터 불고 있는 새 바람, 진보교육감의 괄목할 만한 진출로 입증된 새 기운을 잘 북돋워야 한다. 각 지역에서 고교 평준화를 다지고 확대하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축적해야 한다. 개별 학교와 일선 교사의 열정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혁신을 확대함으로써 대학, 기업, 사회가 기존의 타성을 버리고 변화를 받아들일 여지를 넓혀야 한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움직임만으로는 부족하고, 위로부터의 적절한 호응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학 서열구조를 허무는 대학 개혁이며, ‘국립대학 연합체제’ 방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계획의 골자는 서울대를 포함한 국립대학들의 적절한 통합 운영을 통해 대학에서도 판을 치는 학점과 스펙 경쟁을 배제하고 공부다운 공부가 이루어지는 고등교육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지방 국립대학을 내실화하고 특성화함으로써 정부의 시장주의적 대학 구조조정의 부작용을 피하고, 지역경제를 살림으로써 수도권 편중의 국가운영이 지닌 폐해를 넘어설 수 있다.

장기적으로 서울대 수준의 종합대학 10여개를 전국에 골고루 만들어낼 수 있다. 5000만명의 인구에 세계 10위권 경제를 가진 나라가 이것을 해내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미술대학 실기전형을 한 달여 앞둔 30일 오후 서울 홍익대 인근 미술학원에서 한 수험생이 실기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난 대선에서 야당이 유사한 안을 검토하자 일부 언론은 이를 ‘서울대 폐지론’의 프레임에 걸어 좌초시켰다. 그러나 이 길은 서울대도 살리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서울대에서 점수 따기의 귀재는 인기 전공만 찾거나 고시에 몰두하고, 대학다운 공부를 열망하는 잠재력 있는 학생은 방향을 잃은 학부교육 탓에 좌절하고 방황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이 양적, 질적으로 줄어들어 서울대의 연구 기능은 이미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만 들자. 교육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10여년 만에 대학들은 학부제 모집에서 학과별 모집으로 회귀하고 있다. 연구·교육 단위로서 학부가 정착된 극소수 사례를 제외하고 사실상 학부제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실의 새로운 도전에 맞서야 할 때에 젊은이들을 학과별로 묶는 것은 과거의 갖가지 한계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만약 연합체제에 참여한 대학 교수진의 깊은 논의를 통해 준비된 분야부터 적정한 규모의 공동선발을 하고 해당 분야에서 대학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게 만든다면, 학생의 숨은 잠재력이 발휘되어 몇 년 안에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다. 대학 내에 소모적인 학점 경쟁이 아닌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경쟁이 자리 잡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국립대학 연합체제’ 안은 결코 무모한 ‘평준화론’이 아니다. 또 대학에 학생 선발의 완전한 자율권을 달라는 말로 포장된 사회 일각의 ‘본고사 부활론’, 즉 1%의 성공을 위해 99%를 더 큰 고통과 희생에 빠뜨리는 길과도 질적으로 다르다.

장애물은 많다. 자칫하면 예산 낭비와 혼란 속에 교육관료의 권한만 커지는 최악의 결과도 예상할 수 있다. 한국 교수집단의 자발적인 열정과 헌신을 이끌어낼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우리 교수들을 믿을 수 없다고? 맞다. 현재는 같은 교수인 나도 확신이 부족하다. 그러나 실제로 일을 해내야 할 사람은 이들이다. 무엇보다 이들도 학부모임을 기억하자.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진정으로 승리를 원하는 정치집단은 지금부터 범사회적 논의를 주도할 채비를 해야 한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TAG 대학, 입시

대학 안팎에서 25년 동안 해온 일이지만, 강의는 아직도 어렵게 느껴진다. 그 정도의 연륜이면 베테랑이 되었을 법도 한데, 좌절감으로 끝나는 강의가 종종 있다. 문제는 사전에 그것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해 자신만만하게 임했는데 도중에 갈피를 잡지 못해 미로를 헤매는가 하면, 백지 상태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놀라운 작품이 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는 것이 워낙 생물 같은 것이어서, 당사자들이 그 순간에 주고받는 기운의 어우러짐에 그 성패가 좌우된다. 거기에 연루되는 변수들을 파악해서 사전에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실패한 강의들을 돌아보면,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사용한 경우가 의외로 많다. 물론 시각 자료를 다채롭게 섞어 강의를 진행하면 청중이 덜 지루해한다. 그리고 내용을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고, 동영상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그렇게 풍부한 자료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선, 미리 설정해놓은 페이지들을 기계적으로 따라가기 때문에 흐름이 경직될 수 있다. 전체적인 얼개가 정밀하게 짜여 있고 결론까지 예정돼 있어서 도중에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비약할 수 있는 여지가 적은 것이다.

발표를 하는 것이라면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준비해 오차 없이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강의에서는 메시지의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수강자들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예상치 않게 떠오른 질문 하나로 인해 예정된 각본과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갈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이 강의의 절묘한 맛이다. 그런데 파워포인트(PPT) 영상을 띄워놓으면, 그러한 반응과 참여가 봉쇄되기 쉽다. 청중은 일제히 구경꾼 모드로 들어가 버린다. 정밀하게 편집된 지식의 ‘디스플레이’ 앞에서 수동적인 태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부터 가능하면 PPT를 사용하지 않거나, 꼭 필요한 부분으로 최소화하려고 한다. 강의의 많은 부분을 칠판이라는 올드 미디어로 진행한다. 키워드 몇 개를 중심으로 또는 어떤 설명의 도식을 그려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칠판의 매력은 그 여백이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있다. 거기에 어떤 단어나 그림이 들어갈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오로지 그 시간 그 강의실에서 역동적으로 생성될 생각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창발(創發)의 피드백은 강사와 수강자 모두를 유쾌한 긴장으로 이끌어간다. 칠판 앞에서는 말과 글자만이 오간다. 영상이 배제되기에 따분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오히려 몰입도가 높고 수강자들의 반응도 더 좋다. 그것은 어떤 문학작품을 영화로 보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의 차이에 비유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나 어떤 장면이 연출된 이미지에 갇혀 버리지만, 책에서는 독자의 상상력이 얼마든지 허용된다. 언어는 그 추상성 덕분에 수많은 현상들을 압축할 수 있다. 멋진 풍광을 담은 사진들보다 그것을 시적으로 묘사한 글이 더 깊은 울림과 여운을 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한 대학 수업에서 PPT를 활용한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 시대 우리의 일상에는 이미지가 폭증한다. 스마트폰은 신체의 일부가 되어간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눈빛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데 점점 서툴러진다. 몇 해 전에 어느 외국의 영화감독이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기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노트북에 받아 적기만 하는 것에 불만을 터뜨린 바 있다. 지난달에는 어느 저명한 미래학자의 강연회가 있었는데, 강의가 시작되자 30여명의 청중이 몰려나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소란을 피워 그를 화나게 했다. 그들 가운데는 강연이 시작되자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미디어는 배움을 탁월하게 촉매할 수도 있지만,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 경우도 많다. 초등학교에서 ‘아이스크림’이라는 소프트웨어로 수업을 때우는 교사들이 있다. 교과서의 모든 내용을 수업 진행용으로 가지런히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그냥 차례대로 보여주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수업을 간편하게 ‘때울’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연구해 창안한 수업 내용이 아니기에 생동감이 있을 수 없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그것을 다루는 능력이다. 학생들은 배움의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독서나 사유를 통해서 홀로 깨우치는 공부와 함께, 타인과 대화하면서 생각을 넓혀가는 집단 지성을 맛보아야 한다. 21세기에도 학교가 존립해야 한다면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그러한 만남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학교 바깥의 다양한 공간에서 실험되는 학습 생태계가 교육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