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시장은 파격적이었다. 팬터마임 연기자 수백명을 거리에 풀어 불법 운전자와 무례한 보행자를 놀려주도록 했다. 시민들에게 레드카드를 나눠주고 화가 났을 때 폭력으로 대응하는 대신 레드카드를 뽑아들도록 했다.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총을 자진 반납하도록 하고 그것을 녹여 숟가락을 만들었다. 공공서비스를 늘릴 테니 재산세를 10% 더 내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6만가구가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냈다.

1995년 콜롬비아 보고타시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이다. 지난 세기 후반 보고타는 세계 최악의 도시라는 오명을 얻었다. 수십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800만 시민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1995년 한 해에만 3300여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그해 8만명의 난민이 시 외곽 슬럼가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시장이 바뀌자 도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시장이 바로 안타나스 모쿠스. 학자 출신인 그는 도시를 ‘마음’이라고 보고 시민정신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이 시민의 최고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음 시장이었다. 모쿠스에 이어 당선된 엔리케 페날로사는 도시의 ‘몸’ 만들기에 주력했다. 페날로사 시장은 행복을 재정의했다. “우리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새들이 날아다녀야 하듯, 인간은 걸어다녀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연과 접촉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외당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과 평등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행복의 심리학, 행복의 사회학을 도시 생활에 접목시킨 것이다.

보고타의 행복은 개발(성장) 논리와 거리가 멀었다. 페날로사는 시장 취임식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도시만이 시민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시장은 도시를 새로 디자인하면 부의 많고 적음, 신분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고가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접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혁신하기 시작했다. 빨간 립스틱을 칠한 것 같은 굴절 버스를 중앙차로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전 세계 도시로 확산된 ‘트랜스밀레니오’다.

페날로사는 시내 곳곳에 600개에 달하는 공원을 조성하고 나무 10만그루를 심었으며 도서관을 세웠다. 그에게 공공서비스 확충은 곧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도시의 모든 부분은 인간이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시민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보고타 시민의 4분의 3이 미래를 낙관했다. 세계 최악의 도시가 세계적인 행복도시로 거듭난 것이다.

콜롬비아 보고타의 저녁 (출처 : 경향DB)


이상의 꿈과 같은 드라마는 지난봄에 나온 찰스 몽고메리의 탐사보고서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윤태경 옮김, 미디어윌 펴냄)의 후반부에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안타깝게도 보고타의 신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트랜스밀레니오가 민영화되면서 불편이 가중됐고 시민들의 낙관주의도 감소했다. 하지만 보고타가 보여준 혁신은 행복을 꿈꾸는 전 세계 도시의 희망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 “모든 시민의 경험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디자인하면 모든 시민의 생활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보고타의 실험은 도시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모쿠스와 페날로사의 도전은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코펜하겐, 뉴욕, 파리, 밴쿠버 등 전 세계 주요 도시가 추구하는 행복도시의 핵심 가치는 ‘인간 존중’이다. 자동차보다 보행자를, 도로와 건물보다 공원과 녹지를 우선하는 도시가 행복도시다. 공유재가 많은 도시가 행복도시다. 하지만 정책 못지않은 필수 요건이 있다. 시민의 각성이다. 시민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적극 행사해야 한다. 안전하고 공정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행복도시는 행복하게 살겠다는 시민의 희망에 의해 실현된다.

돌아보자. 우리가 사는 도시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리고 캐묻자. 우리는 도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는가. 우리는 과연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시민이 많아질 때, 도시는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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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이 코앞인 지금도 우리가 국내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할 교수 양성을 해외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국내 교수진에서 미국 등 외국 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것은 한국 대학의 핵심 기능이 정상이 아님을 입증한다. 국내 박사가 찬밥 신세이니 국내 박사과정에 대한 투자는 외면당하고, 배출되는 인력의 수준도 저하되어 차별과 취업난이 심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해결의 실마리는 박사과정 생활장학금이다. 국내 대학원의 난국은 투자 부족과 푸대접 탓이다.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국내 박사과정보다 해외 유학이 더 싸게 먹힌다. 우수한 한국 학생이 가령 미국 대학원에 입학할 때 대개 생활비를 포함한 장학금을 몇 년간 보장받는다. 아니면 1, 2년 후에 강의조교나 연구조교가 되어 학비를 해결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국내 박사과정은 등록금 면제도 어렵고, 예비학자로서 훈련을 겸하는 장점을 지닌 강의조교나 연구조교도 따기 힘들다. 따라서 대다수 학생이 부업으로 생활비를 버느라 학업에 집중하지 못한다. 결국 너나없이 태평양을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빼면 국내 대학원은 껍데기꼴이고, 우리 역사와 현실에 뿌리박은 독자적인 학풍 건설은 꿈에서나 그릴 얘기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대학의 국제경쟁력 강화가 화두가 되어왔다. 하지만 국내 박사의 경쟁력이 해외 박사와 어깨를 견준다고 공인받는 경우는 아직 자연과학, 공학의 일부 대학과 학과에 국한된다. 이들은 정부 지원과 산학협력 덕택에 등록금 면제와 함께 월 생활비까지 주며, 박사 취득 후 교수가 되기까지 몸담을 박사후과정도 모양을 갖추고 있다. 우수한 인재가 국내에서 안정된 조건에서 국제수준의 연구를 해내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도 생활장학금이 한시바삐 생겨나야 동일한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인문학 책이 빼곡히 꽂혀있는 한 도서관 (출처 : 경향DB)


물론 당장 우려가 쏟아질 것이다. 돈을 준다 해도 기성 교수진이 국내 대학원의 질적 도약을 위해 분골쇄신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거의 모든 대학에 있는 해당 분야 대학원에 예산을 나눠줄 객관적 기준도 없고, 잘못하면 가수요와 잠재수요만 자극해 거품을 키우지 않겠는가? 반값등록금 이슈로 부각된 과중한 대학 학비 문제에 비하면 박사 생활장학금은 한가한 주장 아닌가? 모두 타당한 의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생활장학금을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제도 정착을 위해 해결할 과제이다.

투자 부족과 열악한 교수·학생 비율 탓에 우리 학부교육은 그야말로 대강 대강이다. 교양과정의 글쓰기 교육을 보자. 우리말로 조리있게 글을 쓸 자신이 있는 학부 졸업생은 많지 않다. 글쓰기는 단순히 ‘스킬’ 습득으로 향상되지 않으며, 독서와 토론, 사고훈련 등 종합적이고 내실있는 교육이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그토록 강조했건만 사회초년병이나 예비학자로서 필요한 영어 글쓰기 능력을 갖춘 이도 태부족이다. 이 모두가 투자와 더불어 치밀한 학사관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사과정생이 생활장학금을 받는 대가로 훈련을 거쳐 학부 교육에 기여하면, 교육의 질이 개선되는 동시에 예비교원의 수준도 자연히 높아진다. 또 주로 기초교양교육에 투입될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인문사회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미래에 활약할 인재의 기초체력이 강화된다. 학부 교육과 대학원 교육이 선순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부실한 교육과 박사 취업난이 맞물리면서, 졸업생의 자질에 대한 사회적 불만도 계속되는 가운데 좋은 인재는 갈수록 학문과 교육의 길에 등을 돌린다. 기초학문 대학원의 몰락과 열악한 학부 교육은 동전의 양면이다.

재정 확보는 가능하다. 당장 사립대학의 자산과 적립금은 계속 쌓여가고 있고, 정부는 각종 사업성 교육예산을 정비하기만 해도 상당한 재원을 만들 수 있다. 생활장학금(그리고 적절한 박사후과정)으로 교육의 기초를 다지면, 머지않은 장래에 유능한 국내 박사가 외국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는 일이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구 감소를 핑계로 대학교수 자리를 무작정 줄이려드는 대신 우리 사회는 이런 꿈을 가져야 한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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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어느 논문에서 여성의 이빨 개수가 남성보다 적다고 썼다. 이데아에 매달린 플라톤과 대조적으로 감각적 인식을 복권시키면서 서양 과학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그 위대한 철학자가 남녀의 이빨 개수가 다르다고 주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당시에 여성들의 영양 상태나 치아 관리가 부실해서 이빨이 더 많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관성을 중시하는 학자라면 제대로 조사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자신의 추측에 안주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서양에서 그의 견해가 거의 2000년 동안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16세기 중엽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에서 그 오류를 지적하기까지, 직접 이빨을 세어볼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냥 입만 벌려서 확인해보면 곧바로 판명되었을 텐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에 갇혀 있었다.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별들을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고 수평선 너머로 항해를 나서지 못하면서 천동설만 굳게 믿고 있었던 것처럼.

근대 과학은 중세까지 이어져온 무지의 굴레를 거세게 허물어뜨렸다. 지난 2, 3세기 동안 인류는 자신과 만물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획득해왔다. 그 덕분에 생활은 날로 편리해지고 신체적 제약과 물리적 한계는 빠르게 극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멋진 신세계’에서 우리의 의식도 함께 향상되고 있는가. 우리는 충분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현대인들이 소비나 투자 등의 경제행위에서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좇기보다는 마음의 습관이나 집단적 충동에 더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행동경제학이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사람이나 집단들 사이의 대립도 명료한 의견보다는 맹목적인 감정의 충돌인 경우가 많다.

지식의 증가가 인간을 몽매로부터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에 무한한 것은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 두 가지밖에 없다’고 했는데, 첨단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그 통찰은 수정되기 어려울 듯하다. 자신의 선입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확증 편향’은 여전하다. 우리는 실체와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는 이미 갖고 있던 관념이나 이미지를 현실에 덮어씌우려 할 때가 많다. 후쿠시마의 대재앙을 똑똑하게 보면서도 원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명백한 반증 자료가 제시되어도 견해를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투입 대비 산출의 효용이 높으니 경제적이라는 논법은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맞다. 언젠가 치러야 하는 엄청난 폐기물 처리 비용도 감추어두기에 더욱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계속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얼리티는 결국에 피할 수 없는 진리를 드러내고야 만다. 최근 들어 연거푸 터지는 안전사고들도 그 배경을 뜯어보면, 사물의 엄연한 이치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한 혐의가 드러난다. ‘설마…’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위험 요소들에 눈을 감게 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무사(無思), 안일, 무책임, 탐욕, 자기기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아찔한 환풍구의 높이. 안전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곳에 위험이 도사린다. (출처 : 경향DB)


한국인들은 이런저런 사소한 일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면서도 정작 걱정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온갖 것들에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너무 쉽게 만족한다. 그리고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지만, 사회적 관행을 너무 신뢰한다. 비슷한 사고가 되풀이되는데도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생활의 구조나 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관념이나 습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떠도는 정보들을 입맛대로 선택하고 편집하면서 자기(들) 나름의 허구를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 결과 믿음이 지식을 대체한다.

정보와 지식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단순한 이미지에 갇히기 쉽다. 네트워크의 발달로 견해들의 유유상종이 쉬워지면서 엉뚱한 믿음을 서로 정당화하기 일쑤다. 이빨 개수의 오류나 천동설은 인류를 불행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기술과 시스템이 삶을 에워싸는 위험사회에서 통념과 믿음은 재난이 될 수 있다. 정말로 그럴까 하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목조목 짚어보는 것은 사회적 신뢰를 쌓아가기 위한 미덕이 될 수 있다. 의문은 진정한 앎의 씨앗이 된다. ‘의심과 믿음을 함께 참작하여, 그 끝에 얻은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一疑一信相參勘 勘極而成知者 其知始眞).’(<채근담>)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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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별로 인터넷 게시판 댓글을 비교 조사한 결과가 있다. 악플 대 선플, 즉 부정적 댓글과 긍정적 댓글의 비율이 나라별로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 한국은 악플 대 선플이 4 대 1인 반면, 이웃 일본은 정반대로 1 대 4였다. 북구의 강소국 네덜란드는 1 대 9에 달했다. 한국의 악성 댓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김찬호 교수가 우리 사회 감정의 생태계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모멸감>(문학과지성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이버 공간이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우리 사회의 적대감은 실로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김찬호 교수는 이어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세계 36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 그리고 2005년 미국 브래들리대에서 전 세계 53개국 1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개인의 자부심’ 비교 연구를 소개한다. 여기서도 한국인의 어두운 자화상이 두드러진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27위에 머물렀고, 자부심은 44위에 그쳤다. 김 교수는 ‘묻지마 범죄’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적의(敵意)가 낮은 행복감, 낮은 자존감과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감정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기우뚱거린다. 과잉과 결핍 사이를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낮은 자존감, 끊임없이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낮은 자존감은 상대적 박탈감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 같은 감정은 열등감과 울화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절망, 좌절, 무기력, 공포, 불안, 우울감 등과 뒤섞여 강력한 인화성 물질로 돌변한다. 자존감의 결핍이 뇌관이다. 낮은 자존감이 건드려지면 폭발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또는 특정한 그 누구를 향해,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압축적 근대화를 뒤덮어버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돈의 논리가 모든 가치 기준을 제압한 결과 개인과 사회가 이토록 왜소해졌을 것이다.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합의를 거쳐 개인의 내면에 뿌리를 내렸다. 1등만이 살아남는 사회, 나머지는 ‘루저’로 낙인찍히는 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중독사회, 자기계발 사회 등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명명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적 '감정의 인문학' (출처 : 경향DB)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감정이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폭발물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가 근대성(모더니티)의 엔진으로 자리 잡은 이래, 감정은 화물(이차적 존재)로 밀려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성이 남성중심주의, 과학기술 패권주의, 경제 지상주의라는 강력한 엔진을 연거푸 장착하는 동안 감정은 거추장스러운 것, 이성에 의해 언제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감정은 관리되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자기 감정의 주인이 아니다.

김찬호 교수는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은 곧 운명이 된다’는 카를 융의 말을 앞세워 한국 사회의 지배적 감정을 해부한 뒤, 모멸감을 해소시켜야 인간의 존엄이 가능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인정하자. 우리의 주인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시대정신의 속살은 ‘시대 감정’일 것이다. 관점(觀點)의 시대에서 감점(感點)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이다. 감점(감성)의 재발견은 경제논리를 생명논리로, 힘의 논리를 상생의 논리로 대체하는 일대 전환이 아닐 수 없다.

범죄심리학만큼 자존감을 중시하는 분야도 드물 것이다. 자존감이 훼손됐을 때, 다시 말해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했을 때 우리는 폭발물로 둔갑한다. 감정은 모욕과 경멸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의 감정은 이성으로부터, 과학기술로부터, 돈의 논리로부터 끊임없이 무시당해왔다. 감정을 구출해야 한다. 이성의 오만으로부터 감정을 되찾아오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 온전한 감정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껍데기가 된 이성, 돈의 포장지가 된 합리주의를 벗겨버리자. 우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니다. 우리는 원래 호모 센티멘털리스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공공성의 비옥한 토양이 되어야 한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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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감정

정당 2.9%, 국회 3.2%, 행정부 8.0%, 사법부 10.1%. 무슨 수치일까? 지난 2007년 10월에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동아일보와 함께 실시한 ‘한국 사회기관 및 단체에 대한 신뢰도’ 조사 결과이다. 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체’들이 두 자릿수를 넘기지 못하는 신뢰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경악할 일이다.

7년이 지난 지금, 좀 나아졌을까?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 어렵다. 신뢰도를 올렸을 만한 일을 했다는 기억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더 나빠졌을 것이라는 추측에 훨씬 더 공감이 간다. 그간 나라의 꼬락서니가 그러하다.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가 만연해 있다. 하지만 정당, 국회, 행정부, 사법부가 갑과 을의 갈등에 뛰어들어 을의 권리를 ‘실제로’ 지켜주었다는 소식을 접한 바가 없다. 경제민주화 입법을 추진했다 하고, 을지로(‘을을 지키는 길’) 위원회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간간이 부당 해고 및 처우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민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아니 팍팍하다는 표현마저 한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2013년 2월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인가출이 2008~2012년 사이 32.5% 증가했다. 가정의학 전문가나 경찰은 그 이유로 ‘불황에 따른 가족해체’를 꼽았다. 자식과 가족을 버리고 떠났기에 무책임한 선택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삶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자살률은 1997년 IMF 경제위기 직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넘어선 이래, 9년째 OECD 1위이다. 올해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하루 평균 39.5명이 자살을 한다. OECD 평균인 12.1명의 3배가 넘는다. 특히 노동생산연령대의 주축인 40~50대 남성 자살률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런 중에 최근에는 경제와 자살이라는 말을 합성해 ‘경제적 자살’, 즉 ‘이코노사이드(econocide)’란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이다.

자식과 가족과 생명의 포기를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은 그저 경제적 동물인 것만은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힘겨움과 고통을 견뎌내려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몸과 마음을 기댈 언덕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인가출과 이코노사이드의 증가에는 믿는 구석도, 기댈 언덕도 없는 서민의 삶의 처지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서민의 삶을 헤아려줄 ‘그 누군가’가 없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되어줘야 하는 이들이 정당이고 국회이고 정부이며 사법부이다. 하지만 이들이 서민에게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한 것이다.

서민들의 삶을 헤아려줄 행정기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04년 서울고등법원의 전경. (출처 : 경향DB)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정당과 국회와 행정부와 사법부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종교단체도 매 한가지다. 앞서 말한 신뢰도 조사결과에 따르면 언론과 시민단체, 종교단체의 신뢰도는 13.3%, 21.6%, 15.5%에 불과하다. 이들 역시 지금은 더욱 더 신뢰도가 떨어졌으리라. ‘기레기’라는 말이 생겨난 것을 볼 때, 중재의 힘을 잃었다는 시민운동가들의 자조 어린 푸념을 들을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이라는 염수정 추기경이 유족도 양보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현실을 볼 때 그러하다.

신뢰집단의 형성이 시급하다. 보수와 진보, 계급과 계층, 세대와 지역, 분야와 영역을 가리지 말고 신뢰집단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기존 권력체의 신뢰회복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신뢰집단의 형성도 필요하다. 정치권과 정부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혁신, 혁신한다. 그 혁신의 목표와 내용을 신뢰집단 형성에 맞춰야 한다. 그래야 쓸데 있는 혁신이 되고, 서민이 삶을 지속할 의지를 가진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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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는 대학의 자율성을 대학 교수진이 학문연구와 교육에서 정치권력이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함을 뜻한다고 이해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학생 스스로 가꾸는 발랄하고 자율적인 문화가 대학의 자율을 위해 결정적인 대목도 많다.

학기 초에 캠퍼스 곳곳에 경영 학술동아리의 회원모집 포스터가 유난히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보니 요즘 이 동아리들의 공격적인 ‘리쿠르팅’에 불편해하는 학생도 많다고 한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 몇몇 대학의 경영 동아리 붐에 대한 기사까지 실릴 정도이니 소위 ‘대세’임이 틀림없다.

이 동아리들은 정식 학술동아리로서 엄연히 학생문화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들이 대학문화의 자율성 차원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동아리는 기업 후원을 받고 있음을 홈페이지에 밝힌다. 사회에 진출한 동아리 선배의 개인적 지원을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기업 등의 후원을 받을 때에는 행여 외부의 이해관계가 학생활동의 자율성과 충돌하지 않도록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 동아리가 신입 회원 경쟁률도 매우 높고 한 학기 3과목 이상에 해당하는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한다니 더더욱 그렇다. 이들은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에 진출한 선배 명단을 기수별로 온라인에 게시한다. 하지만 선배가 다니는 기업이 선호하는 능력에만 관심을 둔다면 학부생이 다져야 할 ‘기초 체력’에 소홀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학술활동보다는 좋은 기업에 다니는 선배와의 인적 유대가 주목적이라는 학생사회의 뒷공론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물론 학교도 경영 학술동아리가 기업이 신규 인력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대학과 학생에게 떠넘기는 도구로 기능할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문화의 자율성은 깨지고 대학교육의 핵심이 흔들릴 수 있다. 회계학을 전체 신입생에게 필수로 한 모 대학은 극단적 사례이지만, 대학의 이념과 원칙은 갈수록 무시되고 있다.

대학의 이념과 원칙이 다양한 방법으로 무시되고 있는 현실. 위 사진은 한 대학 도서관의 시험기간 풍경. (출처 : 경향DB)


대학의 자율을 위협하는 더 심각한 문제도 많다. 마지막 학기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출근을 요구하는 회사에 취직한 졸업예정자를 놓고 담당교수는 난감한 처지에 빠진다. 어떤 교수는 취업난을 이겨냈다고 격려하면서 기말시험과 논문을 손쉬운 과제로 선선히 대체해주며, 잘나가는 회사에 취직한 학생은 무원칙한 특혜를 당연시한다. 인재를 제대로 길러내도록 엄정한 학사운영을 존중해달라는 요구, 즉 대학과 교수가 기업과 사회를 향해 해야 할 문제제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기업만이 아니다. 정부도 대학의 학사운영을 가벼이 여긴다. 재학 중에 행정고시나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면 졸업 때까지 유예제도가 있다. 그러나 최근 유예조건이 까다로워져서 졸업예정자가 공무원 발령이 난 상태로 남은 학기나 학점을 이수하는 파행이 벌어진다. 심지어 교수가 이런 편법을 거절하면 학생이 다른 학과나 단과대학은 이전부터 다 해주는데 왜 그러느냐고 반응하는 일도 벌어진다. 대학당국은 서울대가 세계 대학 순위 30위권이라고 줄기차게 홍보하지만, 동급의 외국대학에서 이런 일이 쉽게 용납될까?

말머리를 학생동아리 얘기로 삼은 이유는 대학의 자율을 위해 학생 자신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비정상적인 중등교육을 받으며 큰 꿈을 가질 기회가 적었던 젊은이들은 캠퍼스에서 모색과 모험, 파격과 도전의 자유를 만끽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갖가지 힘겨운 과제들을 풀어나갈 역량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대학당국과 교수진은 학생 스스로 자립적 주체가 되도록 돕는 일에 미숙하다. 대학 밖의 사회 역시 학생을 기성체제에 순응할 양질의 인력으로 만드는 일 외에 별로 관심이 없다. 안팎의 이런 조건에서 젊은이는 영악한 현실적 처신을 절대시하거나 거꾸로 맹목적인 현실부정으로 흐를 수 있고,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지기는 더 쉽다. 대학, 기업, 정부가 모두 발상을 바꿔야만 젊은이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창의성을 북돋을 수 있을 것이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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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이는 연료는 침묵이요/ 나의 엔진은 바람이요/ 나의 경적은 휘파람이다/ 나는 아우토반의 욕망을 갖지 않았으므로/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여 목적지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아무것도 목표하지 않는다/ 목표하지 않기에 보다 많은 길들을/ 에둘러 음미한다”(유하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중에서)

걷기는 아주 평범한 일상 행위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걸음마는 매우 중대한 도전이다. 네 발 짐승처럼 기어 다니다가 두 발을 딛고 우뚝 서서 걷기 시작할 때 커다란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아기들은 직립보행을 배우면서 새로운 신체 감각을 갖고, 주변 환경을 전혀 다르게 감지할 수 있다. 한결 높아진 시야로 세상을 드넓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어린 새들이 처음 공중을 날아오를 때 그와 비슷한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자라나면서 걷기는 무심한 습관이 된다. 그러나 이따금 중대한 의미를 담는 경우가 있다. 그 전형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 행진을 들 수 있다. 축제나 기념일에 종종 펼쳐지는 퍼레이드는 가슴 설레게 하는 구경거리다. 군대 행사에서 수백명의 장병들이 반듯한 대열을 유지하며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壯觀)이다. 어떤 규칙에 맞춰 일제히 움직이는 몸짓은 일상의 고루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활력소가 된다. 우리는 그 집단 에너지를 공유하면서 비좁은 마음의 벽을 잠시 뛰어넘는다.

그런데 그러한 율동은 연출과 동원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기계적으로 지어내는 퍼포먼스 앞에서 관람객들은 가만히 서서 바라볼 뿐이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행진은 없을까. 정치적 시위가 그것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행렬이 뿜어내는 위풍당당함은 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비전을 표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오를 이뤄 거리를 장악하고, 그 의연한 발걸음들이 세상을 바꾼 역사적 장면들을 우리는 여럿 기억한다. 거기에서 보행은 어떤 메시지를 발하는 소통이다.

걷기의 의미적 속성은 거창한 집합 행동이 아니더라도 다양하게 발현된다. 산책이라는 일상의 소일거리를 생각해보자.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가. 만일 오로지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면 그냥 운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목적지가 있는가. 그것 역시 순수한 의미의 산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산책을 할 때 육신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이동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우주와 마음이 이어지는 통로다. 몸으로 사유하고 느끼는 일종의 정신 행위가 바로 산책이라고 할 수 있다.

걷기를 통해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프랑스의 청소년 교화 단체 ‘문턱(Seuil)’은 범죄의 길에 빠져든 10대들에게 장거리 도보 여행을 통해 자아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3개월 동안 무려 2000㎞를 외국에서 어느 낯선 어른과 함께 걷는 것이 교도소 수감을 대신하는 과제로 주어진다. 걷기가 뭐길래? 순간의 충동에 익숙한 아이들은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그 긴 여정 속에서 지속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규칙을 지키고 약속을 이행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느끼는 뿌듯함, 고된 발걸음에 기꺼이 함께해주는 동행자의 지지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자세한 내용은 베르나르 올리비에 외 지음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에 실려 있다.)

서적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출처 : 경향DB)


막다른 골목에 처한 청소년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리라. 온 마음을 담아 걸어갈 때 우리는 원대한 존재에 접속된다. 위에 인용한 시인의 말대로 침묵과 바람을 동력으로 삼아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무것도 목표하지 않기에 많은 길을 에둘러 음미할 수 있는 드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파노라마에 가슴을 활짝 열어두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물들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여백의 부피만큼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아우토반의 욕망’으로 내달려온 근대의 질주는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잔혹한 현실을 빚어냈다. 외형적 성과에 대한 맹신은 스피드 숭배로 이어져 삶을 도구화했다. 그 결과 사회와 일상 곳곳에서 ‘싱크홀’이 발견되고, 사람됨의 근본이 무너지고 있다. 과연 나는 제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시간의 흐름이 잔잔해지는 가을의 산책로 위에서 문득 자문해본다. 깊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비추어본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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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을 알면 하나를 아는 것이고 키에르케고르를 알면 둘을 아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 셋은? 그룬트비와 자유학교다. 세계적인 동화작가와 실존주의 철학자, 선진적 낙농업. 이것이 그간 내게 각인되어 있던 덴마크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최근 <삶을 위한 학교>(시미즈 미츠루 지음, 김경인·김형수 옮김, 녹색평론사)를 접하고 덴마크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일천했는지 절감했다. 덴마크는 먼 나라가 아니었고, 그룬트비는 전근대의 교육자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 패망한 북구의 한 작은 나라가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되찾자”는 내발적 발전론을 내걸고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내며 ‘강소국’의 대표적 모델로 떠올랐다. 누구를 뒤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낸 것이다. 그 중심에 그룬트비(1783~1872)라는 실천적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유럽 상류사회를 지배하던 라틴어를 거부하고 지역 언어로 밀려났던 덴마크어를 회복시켰다. 신화와 역사를 시로 엮어내 이를 농민(민중)과 함께 노래했다.

민중이 스스로 각성해야 국가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그룬트비의 신념을 구체화한 것이 덴마크 자유학교, 즉 폴케호이스콜레였다. 폴케호이스콜레는 ‘민중의 대학’이란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자유학교’로 표기한다. 시험이 없으며 졸업장도 없다.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국적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다. 전교생은 수십 명을 넘지 않고, 교사와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독서보다는 대화를 우선하고, 지식보다는 경험을 강조한다.

교과 과정은 덴마크 전통을 현재화하는 전통적 과목, 취미와 실용 과목, 생태-환경과 같은 지구적 이슈를 다루는 현대적 과제 등 크게 세 분야를 자체적으로 조합한다. 150년 전 탄생한 자유학교는 현재 덴마크 전역에 80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종류도 다양하다. 자유초등학고, 자유중학교, 예술·공예학교, 여행하는 자유학교 등이 있는가 하면, 교원양성대학도 있다. 엄연한 사립학교인데도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교육 내용에 관해서는 일절 간섭을 받지 않는다.

대안사회에 대한 창의적, 자율적, 협동적 실천. 이것이 덴마크 자유학교를 지탱하는 정신이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자유학교는 무엇보다도 ‘대화와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그룬트비는 “좋은 귀를 통해서만 정신의 귀가 열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민중이 자각에 이르도록 하는 매개물 중 하나가 역사와 시였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그룬트비에게 문자가 아니고 말로 전승된 문학은 민중에게 생의 신비와 존엄을 일깨우는 빼어난 공유재였다.

자국 역사와 언어를 강조한 그룬트비의 교육관은 자칫 국수적 민족주의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덴마크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도 보편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 치하의 유럽에서 유일하게 유대인을 내치지 않은 나라가 덴마크다. 덴마크의 종교적 관용이 이토록 남다를 수 있던 것은 그룬트비와 자유학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재 덴마크 자유학교가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PC)나 ‘여행하는 자유학교’ 등을 통해 지구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자유학교의 개방성, 보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서적 <풀뿌리 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출처 : 경향DB)


풀뿌리 민주주의의 산실인 자유학교의 어제와 오늘을 따라가다 보니, 감탄이 탄식으로 변했다. 우리의 교육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교사와 학생은 있지만 ‘상호작용’은 없는 학교. 그래서 학교만 있고 교육은 없는 나라, 그래서 제도교육이 민주주의의 성숙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나라, 그래서 ‘세월호 이후’를 상상하기 힘든 나라… 문제의 원인 중 하나를 <삶을 위한 교육>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근대화 모델이 애초에 잘못 설정되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었다.

땅과 농민,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해온 덴마크와 같은 강소국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룬트비의 자유학교는 우리가 척추를 곧추세우고 집중해야 할 ‘오래된 미래’다. 덴마크 자유학교는 시민의 힘으로 교육을 사회적 공통자본으로 정착시킨 보기 드문 모범 사례다. 국가와 (초국적)기업이 손을 잡고 무서운 속도로 사회의 공통재산을 사유화하는 이때, 교육만이라도, 아니 교육부터 공유재로 만들어내야 한다. ‘교육이 미래’라는 데 동의한다면, 교육의 공공성을 확립하는 기획은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시민운동, 사회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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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은 대통령을 국군의 통수권자로 규정한다. 대통령은 군인 아닌 민간인이며, 군에 대한 문민통제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식민지, 분단과 전쟁, 장기간의 군사독재 탓에 우리는 ‘별짜리’와 그 출신이 군에 관한 주요 결정을 사실상 독점하는 심각한 폐해에 대해 여전히 둔감하다.

전쟁에 대비하는 특수조직이니만큼 문민통제가 직업군인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1993년 출범 직후 김영삼 대통령은 육군의 사조직 ‘하나회’ 청산을 단숨에 해치우면서 군 혁신의 장기적인 전망과 계획 수립이라는 후속조치에는 소홀했다.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응당한 조치였지만, 새 시대에 부응할 문민통제의 모범 사례는 아니었던 셈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튼튼한 상비군은 평화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렇게 믿음직한 군대를 위한 문민통제의 절실함은 최근 잇달아 터진 사고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벌어진 사고 자체도 중대하지만, 하나같이 그 실상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려 들었다는 점이 정말 심각하다. 이렇게 불투명한 군대는 무능하고 부패한 지휘관들의 밥줄일 뿐이지 국민과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될 리 없다.

이명박 정부와 현 정부의 ‘역주행’을 7년째 겪으며 우리 사회가 어두운 과거를 확실하게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는 명백해졌다. 그래서 사반세기가 넘은 고 리영희 선생의 옛 칼럼은 여전히 새롭다. “6·25전쟁의 첫 달부터 최전방에서 3년 반, 후방에서 3년 반, 합계 꼬박 7년을 보병장교로 지낸 나는 대한민국 군대의 부패와 부정이라면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무딘 감각인데도 이른바 ‘제5공화국’ 8년 동안에 대한민국 군대에서 군기사고와 안전사고로 자그마치 6393명이 죽었다니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아는 옛 보병 편성으로 3개 연대가 훨씬 넘는 병력이다. 1개 사단의 손실이다. 끔찍한 일이다.”(한겨레신문 1988년 10월9일자)

이 중 자살자 2254명은 당시 민간 동년배 자살률의 20배를 넘는 수치다. 반면, 최근 10년간 군내 자살률은 (약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민간의 동년배 자살률보다도 낮고 절대숫자도 크게 줄었다. 이 대조적인 수치는, 과거보다 우리 군이 나아진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를 거쳐 우리가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더 실감나게 한다. 축소와 은폐를 일삼던 그 시절에 자살자 중 피살자는 몇 명이나 될는지.

윤모 일병 사건 당시 윤 일병의 사인이 구타인 근거를 제기한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출처 : 경향DB)


5공 치하의 군대에서 20대를 보낸 이는 지금 대략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다. 아직 현역이라면 장군이든 부사관이든 30년 안팎을 복무한 핵심 간부들이다. 이들은 과연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얼마나 진심으로 받아들였을까. 역대 정부는 이들이 역사적 변화에 적응할 여건들을 제대로 마련해주었을까. 문민통제하의 깊이있는 조사 연구와 정책보고만이 대답할 수 있다.

문민통제는 직업군인의 명예와 자긍심을 살리는 길이다. 강한 군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군의 인사가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며, 그것은 정책의 일관성을 지닌 원칙있는 문민통제가 직업군인의 소명의식, 경험 및 전문적 식견과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그러나 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이 보여주듯이 (군 출신이 요직을 차지한) 현 정권과 군 지휘부에 문민통제는 남의 얘기다. 이런 현실을 빨리 교정하지 못할 경우 우리 군대는 전쟁이 터지면 제 역할을 다할 수 없다.

문민통제만이 군의 관성과 기득권을 타파하고 시대에 맞게 군을 발전시킬 수 있다. 참된 국방개혁의 출발점은 특히 육군의 저항이 심한 병력 감축이다.

5공 시절 50%선이던 징병 대상자 현역 판정비율이 현재 90%를 넘겼듯이, 군복무가 어려운 젊은이까지 마구 징집함으로써 ‘관심병사’를 양산하는 낡은 체제의 시효는 끝났다. 당연히 간부 규모도 줄이면서 질을 높여야 군을 정예화할 수 있다. 그래야 연줄 있는 고급장교는 전역 후에 군수산업 등 좋은 자리에 취직하지만 부사관 출신 등 다수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소외를 겪는 모순을 피할 수 있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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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옆에는 2차선 도로가 200미터 정도 이어진다. 좁은 길이지만 승용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시내버스 두 개 노선과 마을버스까지 통과하기에 늘 북적인다. 그런데 주말이 되면 인근 주민들의 승용차들이 그 양쪽에 일렬로 가득 주차된다. 단속이 이뤄지지 않는 시간대에 편승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운데 남은 공간으로는 버스 한 대 정도가 겨우 지나갈 수 있다. 노련한 운전사들에게도 난코스다.

차 한 대만이라면 조심스럽게 핸들을 조종해서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다. 문제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정면으로 마주칠 때다. 한 대가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뒤쪽으로 계속 차들이 꼬리를 무는 상황에서 후진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그 결과 양쪽에서 여러 대의 차량이 꼼짝달싹 못 하는 사태가 가끔 벌어진다. 운전자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하라고 배짱을 부리며 기 싸움을 하다가 상황이 점점 더 꼬이는 것이다. 경적을 울려대고, 화를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삿대질하기도 한다. 평온한 휴일 그 소음 때문에 심란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미안해하는 주민은 별로 없는 분위기다. 자신의 불법 주차가 원인인 줄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한다. 내 차 때문만은 아니라며 발뺌하는 마음이리라. 말하자면 집단적 위반 속에서 양심의 가책이 분산되고 희석되는 셈이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익명화가 진행될수록 규범의 사각지대가 늘어난다. 자기의 편익만 쫓다 보니 다수의 불편이 초래되고, 결국에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된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 타인의 곤경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 기풍을 어떻게 배양할 수 있을까. 도덕심이나 윤리적인 의무감에만 호소해야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를 넘어서 더 보편적인 이로움을 도모하려는 의지는 유희적인 즐거움에서도 우러나올 수 있다. 최근 선풍을 일으킨 루게릭병 환자 돕기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한 가지 사례다. 그 대열에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대중적인 관심을 유발한 동기는 재미다.

공공선을 전세계적인 놀이로 이끌어낸 아이스버킷 챌린지 (출처 : 경향DB)


재미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성취감이다. 자신의 행위가 상황에 영향을 주고 현실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이스버킷에서 참가자들은 자기 몸에 얼음물을 뒤집어씀으로써 불치병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가운데 자기 효능감을 자각한다. 재미의 또 한 가지 본질은 유대감이다. 타인들과 의미 있게 연결되고 더 커다란 세계의 일부가 될 때 인간은 충만함을 느낀다. 아이스버킷에서 지명을 받은 사람은 다른 세 사람을 지명하여 릴레이에 동참시킨다. 참가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인류애의 연쇄 고리를 자발적으로 형성하면서 희열을 맛본다.

놀이 충동을 활용하여 삶과 현실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다채롭게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를 줄이기 위한 게임이 있다. 운전자들끼리 온라인 그룹을 만들어서 각자의 차량에 모니터 장치를 부착하여 서로 연결한다. 참가자들의 운전이 실시간으로 평가되는데, 과속, 급회전, 급브레이크 등은 감점 요인이 되고, 속도를 준수하며 부드럽게 움직이면 점수가 올라간다. 그리고 그 각각의 성적이 모두에게 공유되는 가운데 등수가 매겨진다. 참가자들은 순위 다툼을 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차를 몰게 된다. 안전 운행이라는 목표의 달성 정도가 점수와 석차로 피드백되어 선의의 경쟁을 유발하는 시스템이다. 규칙 준수라는 무미건조한 과제를 게임으로 변용시키는 지혜가 돋보인다.

그런 소프트웨어는 일상의 여러 현장에서 창안된다. 가족들끼리 서로 미루기 일쑤인 가사노동을 항목별로 점수화하여 경쟁적으로 수행하게 만드는 ‘허드렛일 전쟁’(Chore Wars)이라는 무료 온라인 게임도 있다. 공공선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실천을 유도하는 기획에서도 참신한 발상이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불법 주차를 줄이는 게임은 나올 수 없을까. 동네를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주민 참여를 유쾌하게 이끌어내는 퍼포먼스는 어떤 모습일까. 소박한 놀이 감각으로 선의(善意)를 발휘하도록 북돋는 일에 다양하고 발랄한 상상력이 모아지길 기대한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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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다. 감히 경상도 사람들의 영혼이 조금 모자란다거나, 혹은 평안도 사람의 영혼이 조금 붉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게다. 이런 식의 공평성은 필경 인간의 문화제도적 성취 중의 일부로, 보편성을 주장하려는 그 모든 제도에 필수적이다. 무릇 보편성을 내세우는 시스템은 제 나름의 공평한 전제를 갖추려고 하지만, 특히 종교나 유사종교적 제도들은 대체로 영혼, 혹은 영혼스러운 것의 균등한 토대에 터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양심이나 영혼 등은 원리상 균등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공부를 제법 많이 한 이들 중의 일부는 ‘영혼’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혹은 니체식의 태도를 본받아 이 말을 가급적 쓰지 않도록 조심한다. 사실 이들의 비판적 입장에는 눈여겨볼 만한 쓸모가 있다. 영혼이라는 무거운 말 속에 이윽고 정착하게 된 인류의 지적·영성적 모색에도 배울 바가 있지만, 이 말을 우회하려는 노력 속에도 참신한 고민의 흔적은 역력하다. 대략 분류하자면, 우리 주변에는 영혼이라는 말을 매우 무겁게 사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재롱부리듯 가볍게 놀리거나 혹은 아예 이 말의 용법에 담을 쌓은 이들도 있다.

내 제안은 이 둘에다 또 하나의 길을 덧붙이는 것이다. (이후의 글은, 기고문은 짧고 생각은 길어 다소 독단적으로 쓸 테니 그리 아시기 바란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뚫으려는 길은, 영혼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없지도 않다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영혼이 없다는 말은 전통적인 종교신학적, 혹은 민간신앙적 통념에서 조금 비껴 서보자는 뜻이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그 일상에서 완벽히 동떨어진 채 공짜로 주어져 ‘있는’ 그런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청 광장에서 펄럭이는 노란 리본 (출처 : 경향DB)


내게 있어 영혼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쉼없이 생성된다는 뜻이며, 설명의 요점은 그 생성의 여러 방식과 그 창의적 실천에 있다. 내가 체험(!)하는 그 첫 방식은 우선 ‘감사’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나 감사를 한 사람은 그걸로 끝이고, 감사를 제대로 받은 사람도 제 몫을 챙겼으니 영혼에 관한 한 별 볼 일 없다. 영혼은 늘 감사받지 못한 데서 생기는데, 그 부족(不足)을 아무도 모르게 삼켜버린 것이 그 알속이다. 욕망을 삼켜버린 데서 무의식이 자리 잡듯이, 그 감사의 빈곤을 넉넉히 삼켜서 만들어낸 것, 그것이 바로 영혼의 젖줄이다.

그런가 하면 특히 이 자본제적 세속 속의 영혼은 ‘변명’의 행위와 관련된다. 왜냐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권력체제 일반은 꼭 변명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변명은 해명도 설명도 공명(共鳴)도, 그리고 사람의 숙명도 아니다. 흔한 말처럼 불안이 아니라 변명이 영혼을 갉아먹는다. 해명도 설명도 하지 못하는 체제, 공명을 얻지 못하는 체제, 그리고 그 모든 변명을 숙명으로 강요하는 체제는 죄다 영혼이 없는 사물이다. (그러나 정성은 ‘사물’에게도 영혼의 기색을 보탠다!) 자기 변명을 삼켜버리는 아득한 실존의 빈곳, 빈곳에서 영혼의 지하수가 방울방울 솟는다. 이른바 ‘사회적 영혼’이란, 바로 이 방울방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억울함으로 목놓아 우는 이들은 밖을 향해 소리를 높이는 한편, 자신의 속이 변해가는 기미를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 울어도 풀리지 않음, 그리고 위로받아도 당치 않음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또 다른 영혼의 씨앗을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으로 말해야 하고, 울어도 풀리지 않음으로 울어야 하고, 위로받아도 당치 않는 무연(憮然)함 속에서 바로 그 위로의 너머에서 생성되고 있는 다른 영혼의 자화상을 응연히 살펴야 한다.

주어진 영혼이 아니라 생성되는 영혼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조형하려는 길은 꾀바른 우회로가 아니다. 치유 허무주의(therapeutic nihilism)가 아니다. 각박한 현실을 봉쇄하는 낙도주의(樂道主義)의 현대판도 아니다. 명상, 고백, 도도한 자기성찰만이 영혼에 기여하는 게 아니다. 외려 그같이 오연한 자기를 깎는 속에서야 어렵사리 영혼은 생긴다.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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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예닐곱으로 보이는 딸과 서너 살로 보이는 아들. 식사 자리가 불편해질 것 같았다. 아이들의 소란 때문에 패밀리 레스토랑은 꺼리는 편인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찾고 말았다. 신도시 외곽에 새로 생긴 대형 쇼핑몰 3층. 제철 식재료, 친환경 작물, 홈 메이드 등을 차별화 요소로 내세운 샐러드 뷔페였다. 휴일 한낮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가족 단위 손님이었다.

그런데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뛰어다니거나 소리 지르는 아이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웬일이지? 다름 아닌 스마트폰 덕분이었다. 아이들이 먹는 것보다 ‘보고 만지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음식을 가지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가져다 떠먹여야 했다. 옆자리 딸내미는 스마트폰을 연신 좌우로 기울이며 게임에 열중했고, 아들내미도 작은 화면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젊은 아버지는 최신형 태블릿을 만지작거렸고, 젊은 어머니도 빨간색 케이스의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뒷자리에도 한 가족이 들어와 앉았다. 부모를 따라온 10대 중반의 두 아들은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둘러보니 거의 모든 식탁 위에 사람 수만큼의 스마트폰 혹은 태블릿이 올려져 있었다. 음식을 가지러 갈 때도 스마트폰을 챙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우리 가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딸도 수시로 문자메시지를 확인했고, 아들 녀석은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사진 찍기 바빴다. 약간 과장하자면, 일요일 오후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봉쇄수도원 식당 못지않게 고요했다.

가히 스마트폰 시대다. 국내 스마트폰 이용자가 조만간 400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전체 인구 5000만명 가운데 사회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디지털 단말기를 자기 몸에 장착하고 있다. 잠잘 때, 목욕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디지털 단말기와 함께한다. 반지만은 못하지만 안경 못지않은 ‘새로운 신체’다. 하루가 스마트폰과 함께 시작되고 스마트폰과 함께 하루가 마무리된다. 디지털 기기가 없는 일상적 삶은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스마트폰 중독률 통계치(2013) (출처 : 경향DB)


디지털 문명의 폐해를 열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감수성이 떨어진다, 집중력이 낮아진다, 기억력이 나빠진다, 사고방식이 비선형으로 바뀐다, 관계 형성(교감) 능력을 잃는다 등등 인터넷 기반의 디지털 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역기능은 이제 일반상식 수준이다.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스마트폰 중독을 제어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사용자의 자율적 절제는 기대하기 어렵고 사회적 ‘단(斷) 중독’ 프로그램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중매체에서 연일 쏟아지는 이동통신 관련 광고에 견주면, 개인과 사회의 대처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나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윌리엄 파워스 교수처럼 집 안에 ‘나만의 월든 존’, 즉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깊이의 세계’에 머물라는 철학적 제안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넋 놓고 당할 수만은 없어서 겨우 고안해낸 것이 있다. ‘머리맡 챙기기’. 기성세대는 정도가 덜하겠지만, 젊은층으로 내려갈수록 머리맡에 디지털 단말기가 있다. 잠들기 전 문자메시지와 알람을 확인하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바로 디지털 기기부터 집어든다.

머리맡 챙기기는 간단하다. 잠들기 전에 디지털 기기를 손닿지 않는 곳에 갖다 두고, 대신 메모지와 펜을 갖다 놓으면 된다. 널리 알려졌듯이, 잠들기 직전과 잠에서 깬 직후가 알파파가 활발한 시간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이디어가 샘솟는 시간이다. 나는 이 창의성의 시간을 ‘신이 선물을 내려주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잠자리가 자기를 성찰하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는 최후의 장소다. 그런데 이 최후의 시간과 장소를 디지털 기기에 빼앗겼다. 아니 자진 반납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부한다. 머리맡, 머리맡을 챙기자. 낮에는 디지털 기기를 얼마든지 이용하자. 다만 잠들기 직전과 잠에서 깬 직후, 하루 10분만 디지털 기기를 손에서 멀리하자. 우리가 하루에 두 차례 신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잠들기 전, 플러그를 멀리하자. 머리맡을 되찾아오자.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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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투항에 가까운 세월호특별법 여야 합의는 국민 여론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여당은 재협상에 응할 의사가 당분간 없어 진상규명 노력은 다시 표류하게 되었다. 실망스러운 야당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집권당도 이번 연휴를 넘기고 나면 만만찮은 여론 압박에 직면할 것이다. 일반 국민이 수긍할 정치적 타협을 어떻게든 이끌어내야만 김무성 체제는 원만한 정국 운영을 꾀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어렵다.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가 압축된 의문투성이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멀리 내다보고 차분하게 대처할 사안이다. 하지만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 해경 123정의 구조활동이 단적으로 드러낸 해경의 실상을 떠올리는 순간 유가족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참지 못할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수백명 승객과 동료 승무원들마저 내팽개치고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의 행동은 비난하기 이전에 이해조차 쉽지 않다. 자신들만 살아난 후 벌어질 일에 그토록 생각이 못 미쳤을까. 더 밝혀야 할 진실이 많다.

해체가 결정된 해경은 유병언 일가와 더불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해경 해체와 소방방재청 조직 개편, 국가안전처 신설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또한 국회에서 장기간 표류 중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정치적 합의의 실패 탓이지만, 문제의 핵심에서 빗나간 해경 해체라는 발상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해경 해체가 옳다면 최근 연이어 사고가 터진 육군 22사단과 28사단 등 대한민국 국군도 해체할 건가.

123정은 순찰과 단속이 주된 업무이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등 긴급 구조도 당연히 해왔고, 당시 해경 10명과 의경 3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엊그제 재판에서 지휘자들은 여객선 침몰에 대비한 선내 진입 훈련을 받은 적이 없고 필요한 장비도 없다고 증언했다. 그런 여건에서 50도 이상 크게 기운 대형 여객선을 평생 처음 본 순간, 해경 경력이 30년 넘은 정장도 무척 당황하고 공포마저 느꼈을 것이다. 당장 뒤집힐 듯한 사고 선박에 경비정을 붙여 구조에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은 공개된 동영상에도 확연하다.

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마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물론 조사가 더 필요한 어이없고 치명적인 실책들이 많다. 우선 정장은 상황실과 협조하며 출동 과정에서 선장과 적극적으로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정장과 선장이 교신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공유하고 승객들이 갑판으로 올라오도록 결정했더라면. 이와 관련해 123정이 선원들만 구하면서 선원인 줄도 몰랐고 선장의 소재를 찾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기가 막힌다. 엔진 과열로 불이 나 어부들이 물에 뛰어든 통통배도 이렇게 엉성하게 구하지는 않는다.

선장 등과 교신해 세월호의 상태를 미리 정확하게 파악했더라면 123정의 행동은 좀 달랐을 것이다. 확성기 방송으로 아이들을 움직이게 했을 것이고, 망치 한두 개로도 창문 여럿을 깨고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과 30여분의 ‘골든타임’이었지만 위험을 무릅쓴다면 선내 진입도 가능했다.

도착 직후 승객들에게 퇴선 지시 방송을 반복했다는 정장의 거짓말과 일지 조작 등은 명백히 과실이 아닌 범죄에 해당한다. 유가족과 국민은 해경의 무능과 태만 못지않게 거짓과 은폐에 분노한다. 그러나 해경에 대한 문책은 123정의 하급자들을 비롯해 해경에 투신한 숱한 젊은이들이 느끼고 있는 죄책감과 수치심, 정신적 고통에 대한 성찰과 함께 가야 한다. 문제 해결의 길은 해경 해체가 아니라 혁신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 여름휴가 중 백사장에 ‘저도의 추억’을 쓰는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의 바다에는 아름다운 저도를 비롯해 3000개가 넘는 섬과 굴곡 많은 해안과 갯벌이 펼쳐져 있다. 이 자연은 그 자체로 기쁨이요, 많은 이들의 삶의 터전이자 이웃나라와의 경쟁과 갈등의 장이다. 이런 바다를 지키기 위해 유능하고 독립적인 해양경찰은 필수적이다. 국정 책임자는 개인의 추억을 국가 경영의 비전과 실행력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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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세월호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스함을(…)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 먼 곳의 불빛은 /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나희덕 ‘산속에서’ 중에서)

낯선 곳을 방문하면 길을 잃기 일쑤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목적지를 찾지 못해 초조해하기도 한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어둠이 내린 후의 방황은 두렵기까지 하다. 시인은 막막한 가운데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렇듯 경이로운 순간을 종종 만나게 된다.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된 시대에 그런 길 찾기는 점점 희소해지고 있다. 인터넷의 도움으로 언제 어디서든 현재 지점과 이동 경로를 간편하게 검색할 수 있다. 기계의 안내만 따라가면 낯선 곳에서도 편리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 젊은이들은 그러한 정보 환경에서 성장해왔다.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그들을 가리켜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했다. 그들은 디지털 기기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면 좌절하고 문제를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 그 안에 숨어 있는 위험을 회피하는 가운데 인생을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힘이 점점 박약해진다.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세대’는 다른 말로 하자면 ‘스마트폰이나 패드 없이 낯선 곳에 가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길을 가본 적이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만이 아니다. 정치적 불안, 빈곤의 확대, 인간관계의 해체 그리고 만성화되는 각종 재난들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생존은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다. 사회 자체의 앞길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저마다 안개 자욱한 미로를 탐색해야 한다. 때로는 없는 길도 뚫어야 한다.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지난 달 16일 노란 우산을 쓰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출처 : 경향DB)


지난달 안산의 단원고 2학년생 30여명이 국회의사당까지 1박2일 동안 행진했다. 죽은 친구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길을 나섰고, 어느 구간에서는 시민들이 깔아준 노란 꽃잎들을 지르밟고 가기도 했다. 햇볕이 뜨거워 많이 힘들었지만, 행인들이 보내준 갈채에 힘입어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500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걸었다.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 장동원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의도에 도착한 뒤에도 행렬은 끝이 안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뒤돌아보라’고 했지요. 그걸 보고 우는 애들도 있었고요. 정말 이 아이들의 한 발걸음이 큰 발걸음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 ‘우리 사회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아이들이 직접 본 것이죠. 매일 기사에 달린 댓글만 보다가 끝이 없는 행렬을 목격한 것이죠.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7월19일자)

정보 공간의 무한 확장 속에서 ‘현실’의 정체가 애매해지고 있다. ‘리얼리티 쇼’라는 장르가 유행하듯, 점점 더 많은 ‘실재’가 미디어 이벤트로 대체된다. 삶이 고단할수록 가상의 세계에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만연하고,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도 그런 욕구를 반영한다. 친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고 공부 스트레스에 짓눌리다가 자살한 주인공이 마법세계에 환생하여 전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거나 절대자로 변신해 복수한다는 등의 스토리가 그것이다. (‘학교폭력 성적…고통을 환상으로 풀려는 고교생’ 경향신문 8월5일자 게재)

세월호의 참사는 우리에게 고통을 직면하는 힘을 요청하고 있다. 입시 공부와 인터넷 그리고 비좁은 또래 집단에 갇혀 지내던 아이들이 자신의 아픔에 온몸으로 함께 해주는 행렬을 목격하면서 감동했다. 그 순간의 위대한 연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와 함께 길을 찾아 나설 것인가. 지친 발걸음을 격려하는 ‘먼 곳의 불빛’은 어디에 있는가.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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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학교 시절에 나는 수년간 핸드볼 선수 생활을 하였는데, 여느 경우처럼 나 역시 다만 키가 크다는 이유로 거의 붙잡혀 들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실력이 늘면서 절감하게 된 사실이지만 ‘이중점프슛’ 같은 고난도의 기술에는 정작 손아귀의 넓이가 관건이었다. 손이 작아 한 손만으로 공을 능숙하게 부릴 수 없다는 것, 어린 내게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산책은 내게 매우 소중한 취미 활동으로, 그 가치는 이 짧은 지면에 다 읊을 수 없을 만치 짜장 형이상학적으로도(!) 분잡하고 심오하다. 근자에 내가 독애하는 산책로의 한쪽에는 운동장만 한 연못이 있는데, 자갈밭이 물가를 넓게 끼고 있어 물수제비를 뜨기 알맞은 곳이다. 기량이란 기량은 모짝 그렇지만, 물수제비를 뜨는 데에도 몇 가지 조건을 살펴야 한다. 당연히 돌을 후리는 팔이 물과 수평을 이루도록 몸을 낮추는 게 좋다. 그리고 돌멩이를 내던질 때에는 그 돌과 수면이 대체로 15~25도 정도의 기울기를 이루도록 해서, 물과 부딪치며 뜨는(skipping) 힘이 길게 지속되도록 배려한다. 이 경우 직구(直球)처럼 던지지 말고 돌이 회전력을 얻도록 검지를 잘 놀리는 게 중요한데, 그래야만 자이로스코프의 효과를 얻어 부양력(浮揚力)이 높아지는 법이다. 이렇게 솜씨가 향상되면 돌이 커브를 이루면서 원하는 곳으로 제법 멀리 내달려가게 된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이 모든 매뉴얼을 단숨에 능가하는 조건은 바로 그 돌멩이의 생김새다. 제아무리 좋은 솜씨를 갖추고 있어도 돌멩이의 ‘몸’이 뭉툭하거나 뾰족하거나 혹은 적당한 (몸)무게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 솜씨는 빛이 바랜. 어떤 몸의 돌멩이를 줍는가 하는 것은 우연이지만, 바로 그 몸이라는 우연이 물수제비의 운명이 된다.

강가에 나와 물수제비 놀이 중인 사람들 _ 연합뉴스


행복한 부부나 커플이 의외로 적다는 사실은 이미 갖은 통계가 알리고 있다. 내 일가붙이나 주변만을 둘러보아도 사태는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러니 여러 만남, 특히 혼인을 그처럼 축하해온 인류의 역사는 일종의 반어(反語)가 아닌가 하는 짐작이 설 법도 하다. 인간은 오직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이니, 그 관계의 알짬을 이루는 종류들이 고장이 잦고 속으로 썩어간다는 사실 속에는 어쩌면 묵시론적 조짐이 웅성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행위나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처럼, 관계의 형식과 성분을 도덕적-실존적으로 바꾸려는 것은 대체로 부질없는 짓이다. 내 작은 손이나 어떤 돌멩이의 모양처럼, 인간은, 인간의 몸은, 혹은 인간의 몸속에 새겨진 버릇과 고집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물론 박지성은 평발로 잘 뛰었고, 김두한은 작은 주먹으로도 잘 싸웠다. 그러나 범례(範例)로써 현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역시, 어떤 몸을 지닌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것은 우연이지만, 바로 그 우연이 관계의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재미삼아 오랫동안 말과 입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왔다. 주로 입의 크기와 그 사람의 화법·말버릇 사이의 관계를 유추해보는 일이다. 나로선 남의 외모를 언급하는 일을 거의 터부시하기에 속생각으로 일관하였지만, 여기에도 그 나름의 이치가 있으니, 그 골자는 역시 몸이 제 운명을 스스로 이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라도의 소리, 경상도의 글’이라는 대조법도 필경은 입의 모양과 얼마간 관련된다. 이것도 논의가 길어 다만 아쉬운 한마디만 짚자면, 사람의 일이 다 그런 것처럼 예외들이 사방에 어지럽긴 하지만, 입이라는 몸이 말이라는 관념의 운명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몸을 갖추고 태어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우연처럼 비친다. 그리고 그 우연에 얹힌 몸이 그의 운명을 예비하기도 한다. 가령 이소룡(李小龍)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피면 그는 대단한 몸의 디자이너로 드러난다. 비록 극중이긴 하지만 그가 상대한 무술 고수들의 동작은 기이하게 허술해 보이는데, 이는 다만 연출의 결과가 아니라 몸의 차이가 구조적으로 드러내는 차별성인 것이다. 이소룡이 민망한 화제라면 김연아를 떠올려도 좋다. 김연아의 실력이 그의 운명이 아니다. 그녀의 실력이 남다르게 얹히게 만든 그 남다른 몸, 외려 그 몸이 그녀의 운명인 것이다.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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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는 바로 답사로 이어졌다.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 주립 사범대에서 ‘언어, 문화, 문학’을 주제로 5개국 학자와 문인들이 토론을 벌이고 나서, 스무시간 가까이 횡단열차를 타고 백야를 달려온 직후였다. 긴장은 풀렸지만 여독이 찌뿌드드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다섯시간. 지난 7월6일 오후, 우리 일행은 시베리아의 보석, 바이칼호의 발치에 섰다.

2500만년 전에 생겨났다는 세계 최대의 담수호는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약간 흐린 날씨. 하늘에는 뭉게구름, 수면은 수은처럼 고요하게 빛났다. 카페리를 타고 20여분, 알혼섬에 닿자마자 섬에서 제일 큰 마을 우지르를 향해 달렸다. 일행 중에는 12년 전 알혼섬을 방문했던 작가 서넛이 있었다. 그들은 연신 “너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알혼섬에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의 전설이 서린 바이칼호 알혼 섬의 부르한 바위 (출처 : 경향DB)

우지르 마을 입구에 새로 생긴 호텔에 짐을 풀었다. 바이칼 뷰 호텔. 컨테이너를 한 줄로 이어놓은 듯한 방갈로형 호텔이었다. 멀리서 보면 군대 막사 같았다. 그러니까 3년 전만 해도 송전탑이 없었을 것이고, 그때까지만 해도 휴대전화 서비스를 위한 기지국이나 와이파이 존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원주민 브리야트족의 급격한 문명화 과정이나 바이칼호의 심각한 오염 문제를 환기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류의 성소(聖所)에서 신성에 대한 감수성을 재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이칼에서 내가 새삼 재확인한 것은 ‘신인류’였다. 알혼섬 곳곳에서 ‘관광하는 인간’과 마주친 것이다. 내게는 관광객이 최후의 인간으로 보였다. 바이칼에서 영혼의 가장 높은 고도를 경험하고 싶은 나의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샤먼바위를 에돌아나가는 유람선을 바라보는데 졸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류가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여행자에서 다시 관광객으로 변모해온 것 아니냐는 다소 거친 메시지를 서간문 형식으로 풀어쓴 ‘순례’라는 시였다.

시베리아와 바이칼 곳곳에서 ‘관광하는 인류’를 보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루루 몰려가 저마다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인종과 연령, 성별이 구분되지 않았다. 차 안에서도 찍고, 내리자마자 찍고, 타기 직전에도 찍고, 여럿이 찍고, 혼자서도 찍고, 먹으면서도 찍고, 자기 전에도 찍고…. 그리고 찍자마자 여기저기 보내고…. 관광은 촬영의 연속이었다. 자동차에 이어 카메라, 아니 스마트폰에 의해 여행은 관광으로부터 완전 분리됐다.

여행이 온몸으로 하는 것이면 관광은 두 눈으로 한다. 여행자가 현지인에게 반가운 손님이라면, 관광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소비자일 따름이다. 여행이 타자와 만나면서 자기 삶을 성찰하는 계기라면, 관광은 스펙터클(스토리텔링)을 소비하며 욕망을 재생산하는 자극제다. 그래서 관광객의 두 눈은 관찰, 응시, 교감과 거리가 멀다. 졸시에 썼듯이 관광객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것만 보고, 보여주는 것만 보는, 보이지 않는 것은 절대 보지 않고, 꼭 봐야만 하는 것도 시간이 없다며 보지 않는, 신기하고 화려하고 대단한 볼거리만” 선호한다. 관광객은 시각적 주체이고, 그래서 지독한 소비 중독자다.

고속도로가 막히고 국제공항이 붐비는 휴가철이다. 짐을 챙기면서 한번 자문해볼 일이다. 나는 여행자인가, 관광객인가.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 떠나는가, 아니면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떠나는 것인가.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저 높은 곳의 절대자를 떠올리는 순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질 무렵 들어선 낯선 마을에서 환대를 받는 여행자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돈에 뿌리박은’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여행자로 거듭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수는 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낯선 사람 앞에서 겸손해질 수는 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사람으로, 생명 앞에서 생명으로 설 수 있다면 달라질 수 있다. 그때 거기서 공감과 연대가 발생할 것이다. 거듭거듭 돌아보자. 우리는 두 눈 인간, 소비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가 고작 관광객은 아니었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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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칼럼에서 공무원, 법조인, 언론인, 직업군인, 교수와 교사 등 전문성과 기득권을 가진 집단은 개혁 주체이자 대상이라는 모순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중에도 서울대 교수의 위상은 기득권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아직 대단하다. 바로 그 탓에 다음 주에 취임하는 26대 서울대 총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을 일부 언론은 밥그릇 싸움, 이권 운동으로 쉽게 왜곡했다. 그러나 서울대 법인화 이후 총장을 처음 뽑는 이 과정은 대학의 자율성과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2011년 12월 국립대학법인 서울대가 출범, 2년 반이 흘렀다. 그러나 대학의 자율성 확보라는 애초의 명분은 퇴색하고 있다. 학내외의 공론화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법인화법의 문제는 국회의 날치기 통과 때부터 명백했다. 법인화를 위한 온갖 치장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교수진을 포함한 학내 구성원을 대학 운영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최고 의결기구에 합당한 대표성이 부족한 이사회가 법인화와 함께 들어섰고, 평의원회는 심의기구로 격하되고 총학장 직선제는 사라졌다. 교수들은 대학의 주역이나 주체가 아닌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다.

정권과 교육당국은 모든 국공립대학의 법인화까지는 해내지 못하고 서울대만 법인화했다. 하지만 국공립대학들에 대해 각종 지원 중단을 무기로 총장 직선제 폐지를 강요하고, 부패비리의 온상이었던 구세력이 속속 사립대학의 이사회를 다시 장악하게 도왔다. 대학 구성원의 정당한 목소리와 역할을 부정함으로써 정권의 입맛대로 대학을 좌지우지하며 일방적인 대학구조조정을 해낼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법인화의 책임은 물론 정부와 여당, 서울대 총장과 집행부에게 있다. 그러나 서울대 교수진의 책임도 부정하기 어렵다. 2011년 5월에 서울대 교수들은 법인화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는 서명작업을 했지만, 서명자는 전체 교수진의 10%에 못 미치는 151명에 그쳤다. 이 숫자로는 여야 정치권을 움직일 길이 없었다.

같은 달 말 서울대 학생들은 아크로폴리스에 2000명 이상이 모여 학생회칙에 따른 정족수를 채운 비상총회를 열었다. 그들은 여기서 몇 시간에 걸친 공개토론과 표결 끝에 대학본부 점거농성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처럼 비상한 상황에서 선생들은 문제 해결에 나서지 못했다. 일부 교수들은 교수협의회 임시총회 소집을 위해 필요한 회원 100명의 서명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교협 회장은 총회 소집을 위한 서명 작업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e메일을 전체 교수진에게 발송하여 뜻있는 이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임시총회 소집은 무산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장시간 토론을 거쳐 행동했지만, 교수진은 자신의 공론장인 총회도 열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 꼴이었다.

28일간의 긴 농성을 교수들은 수수방관했으며, 고립된 학생들은 큰 소득 없이 물러나야 했다. 학생들이 농성기간에 보여준 진지하고 발랄한 토론과 놀이 문화, 이름난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하여 대중적 관심마저 얻은 ‘총장실 프리덤’을 비롯한 온라인 작품이나 벽보들에 넘쳐나던 비판과 풍자 정신에 비할 때 스승들의 몰골은 초라했다.

당시 법인화 시행에 반대하던 학생들의 농성 모습 _ 연합뉴스


점거농성 후 3년이 흐른 지난 6월 서울대 이사회는 총장추천위원회가 올린 총장 후보자 3인에 대해 면접을 진행한 후 다음 주에 다시 모여 개별 이사들의 입장 표명이나 토론 없이 곧바로 무기명 비밀 투표를 했다. 총추위가 올린 1순위 후보자가 아닌 공동 2순위 후보자 중 하나가 총장으로 결정되었다는 발표가 아무런 이유 설명 없이 뒤따랐다. 어이없는 의사진행이 비난에 직면하자 토론이 없어야 외부 입김을 막는다는 궤변이 나왔다. 총추위도 활동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이 없어 문제였는데, 총추위가 토론이 없었으니 이사회의 토론 없는 결정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낯뜨거운 발언마저 나왔다.

서울대 교수진의 공론장은 정녕 무너진 것일까? 온 국민은 그들이 대학의 주역다운 책임있는 역할을 해낼지 지켜봐야 한다. 서울대 문제는 한국 대학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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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에 수반되는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가 교통사고다. 보행 중 피해를 입는 것이 주를 이루지만, 운전하면서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꾸준히 증가한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전체 교통사고는 거의 변화가 없는데 노인 운전자들이 일으키는 사고가 매년 13% 정도 늘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아직은 노인들이 운전을 많이 하지는 않는 편이다. 마이카 시대를 살아온 베이비부머가 노인이 되는 2020년대가 되면 상황은 훨씬 심각해질 것이다.

노화는 신체의 제반 기능을 퇴화시킨다. 우선 시각의 문제가 생긴다. 밤눈이 어두워져 야간 운전이 위험하다. 그리고 유효시야가 좁아진다. 정면을 바라볼 때 젊은이들은 90도 정도의 범위를 인지하는데, 65세가 넘으면 60도로 줄어든다고 한다. 가까이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도 조금 옆으로 벗어나 있으면 못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체의 둔화는 반응 동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여러 대상을 한꺼번에 보면서 판단해야 할 때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래서 교차로에서 더욱 위험하다.

사고를 많이 내는 노인 운전자들의 뇌를 촬영하면 ‘백질변성(白質變性)’이라는 증세가 나타나는데, 뇌의 혈류 가운데 일부가 나빠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 증세가 심해지면 치매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정보 전달 시스템에 오류가 생기기 쉽다고 한다. 시각신호들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제어 동작에서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보행자가 갑자기 나타나거나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바람에 대형 사고를 빚기도 한다.

폐지를 모은 수레를 끌고 걸어가는 노인 (출처 : 경향 DB)


어떻게 해야 할까. 일본에서는 노인 운전자들에게 인지 지각 검사를 통해 자신의 운전 습관 가운데 취약한 점을 자각하고 유념하도록 한다. 또 어느 지역에서는 65세가 넘으면 운전면허증을 자발적으로 반납하도록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동참하는 노인들에게는 택시요금이나 일부 상품의 가격을 할인해주거나 슈퍼나 편의점에서 산 물건을 무료로 배달해주는 등의 특전을 제공한다. 장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납률은 아주 낮은 실정이다. 

한국에서도 면허 반납이 제안되었지만 노인들의 반발로 추진하지 못했다. 이동권의 제약이고 나이에 따른 차별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자동차는 신체의 노쇠를 보완하면서 자립을 도와주는 훌륭한 도구다. 권태와 무기력에 빠지기 쉬운 일상에서 자유로운 드라이브는 심신의 활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거동이 불편해지는데 운전까지 제한하면 생활이 위축되고 자존감이 훼손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행과 달리 운전은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가 따르는 행위다. 걷다가 넘어지면 본인만 다치지만, 운전 중 실수는 막대한 피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노인 운전자 사고가 지금처럼 계속 늘어간다면, 면허증의 시한을 설정하는 방안에 대해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강제로 회수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자발적으로 반납하도록 유도하거나 적성 검사의 주기를 단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 될 듯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 상태를 냉정하게 인식하고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전근대 사회에서 노인은 생애의 경륜과 지혜를 가지고 노동과 제반 일상사에서 신중함과 능란함을 발휘했다. 반면 변화가 빠르고 복잡한 사물과 정보들을 다루는 현대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오히려 미숙하고 뒤처지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그런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노인들의 정서다. 하지만 기분만 따르면서 신체를 과신하는 것은 개인적·사회적 불행의 씨앗이 된다. 운전대를 놓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생활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대중교통의 이용에 따르는 불편과 위험을 줄여야 한다. 시내버스의 경우 노인이 타고 내리기 쉽도록 운전이 부드러워야 한다. 그리고 먼 곳까지 나가지 않아도 근린지역에서 생활의 제반 필요가 충족될 수 있도록 지역의 얼개가 짜여야 한다. 노인친화적인 일상세계의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맹목적인 스피드 숭배에 제동을 거는 일이다. 느림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생명이 안전할 수 있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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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寂), 즉 고요함은 시속과 유행에 얹혀 서두르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삶을 조형하는 태도를 말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하듯이, 그것은 자연과 정복하면서 시간을 거슬러 이룩한 기술과 제도의 방대한 체계마저 인간의 내면 풍경을 다 채울 수 없다는 체감에 터한다. 인간의 실존조차 쉼 없이 바뀌긴 하지만, 그 알짬은 ‘그것들’만으로는 결코 다 채울 수 없다는 그리움이며 또 시간의 와류 속에 부식되어가는 아쉬움이다. 좋은 사회에 대한 적(寂)의 조건으로 내가 앞세우는 것은, 바로 이것, 무엇보다도 그 그리움과 아쉬움을 그 사회의 문화적 바탕에 깔아놓는 일이다. 적(寂)의 사회는 분요와 민속(敏速)의 문명적 먼지들을 자정(自淨)할 수 있는 장소이며, 적(寂)의 개인들은 삶의 요란스러운 잔칫상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의 병풍을 이미 체인(體認)하고 있는 존재다.

좋은 사회의 또 한 가지 표지는 청(淸)인데,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이는 그저 ‘청소(淸掃)’를 가리킨다. 이로써 세계 최고의 청소황국(掃地皇國) 일본이나 정리정돈의 법국(法國) 독일이 내장한 파시스트적 불길함을 모른 체하려는 게 아니다. 적(寂)의 문화가 속을 비우는 삶의 양식에 기초한다면, 청(淸)의 문화는 바깥을 치우면서 빈터를 얻어가려는 노력을 말한다. 청소라는 게 비와 걸레 등을 활용하는 일체의 구체적이며 지속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처럼, 빈터라는 것도 별 신통한 게 아니라 실제로 각자의 삶의 공간 속에서 몸으로 체감하는 여백과 공터를 가리킬 뿐이다. 공원(公園)이 아닌 공원(空園)이라거나 장식물들을 적극적으로 생략한 벽면이라거나 그저 깨끗할 뿐인 손톱 같은 것들, 말이다. 옛사람들이 청소를 일러 도(道)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철저하게 실천 속에서만 발아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적(寂)이 한 사회가 채택할 수 있는 시간의 철학이라면, 청(淸)이란 장소의 철학이 된다.

일러스트 _ 김상민(출처: 경향DB)


내가 상상해온 좋은 사회의 표상 중 또 한 가지는 화(和), 즉 어울림의 협업 속에서 생겨난다. 시간과 장소를 종횡으로 누비며 인간들은 어울려, 혹은 버성기며 살아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란 어울림의 지혜에 의해서 조금씩 나아진다. 적(寂)과 청(淸)은 태도나 양식의 일관됨을 말할 뿐(하지만 이 시대의 유일한 미덕이라면 일관성이 아니고 무엇이랴!)이지만, 화(和)란 임기응변의 역동적인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드는 세속사회의 알속을 구성한다. 무릇 인문학 공부라는 게 바로 이 어울림의 지혜를 지향한다는 점은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다. 아니, 지혜라는 것 자체가 어울림의 산물이며, 어울림을 위한 것이고, 또 어울림에 의해 나날이 조율, 개선되는 것이다. 그 흔한 표어인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경우, 이는 관용과 평화의 기반이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삶의 지혜를 낳는 밑절미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산중이나 골방이 아니라 잡다한 어울림에 터한 지혜는 관용처럼 안이하지 않고 평화처럼 안돈스럽지 않다. 차라리 지혜는 오해받는 일이며, 박해받는 일이고, 내내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좋은 사회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꿈은 경(敬)이다. 경이란 앞서 말한 적, 청, 화에다가 무엇인가 낯설고 명백한 무엇을 더하는 게 아니다. 속을 비우고 겉을 치우면서, 내남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로써 삶의 길을 밝히면 자연스레 솟아나는 것, 피어오르는 것, 어느새 떠올라 있는 것, 그리고 아침이슬처럼 맺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삶의 역사가 있을 때에만 은근하게 드러나는 어떤 얼굴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예를 들어 밤 10시를 넘겨서야 겨우 해가 떨어지는 지중해 연안의 과일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햇빛-표정처럼 경(敬)은 한 사회가 담고 있는 긴 세월의 표정인 것이다.

적청화경이라는 것은 당연히 사회철학에 이르지 못한다. 논의의 초점을 잃은 채 개인들의 수행과 성숙에 방점을 찍은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양보하지 않는 일은 사회와 공동체를 착각하고 공적 틀거리를 사적으로 희석하려는 짓이 아니다. 가능한 모든 것이 타락하였을 때에는 불가능한 것을 고집하는 게 삶의 변명이기 때문이다.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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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난리였다. 드드륵, 드르륵. 전기 드릴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망치질이 이어졌다. 바로 위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 경비실로 향하려는데 아파트 출입문 앞 계단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3층에 누가 새로 이사를 온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오늘 하루만 참으면 되겠구나. 나는 아파트 경비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 아침에도 드릴과 망치소리가 났다. 어린아이가 콩콩 뛰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층간소음 수준을 넘었다.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한나절만 공사를 해도 양해를 구하는 것이 도리고 관례인데, 이틀째 이웃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아무런 통지가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파트 출입구 유리문에 A4 용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우리 집 위층 공사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앞으로 20일가량 인테리어 공사를 하게 되었으니 이해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안내문의 명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새로 이사오는 집주인이 아니고 인테리어 회사가 써서 붙인 것이었다. 집주인 명의였다고 해도 공지 시기와 방식 때문에 언짢았을 텐데, 인테리어 회사가 나서 이웃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도망다니는 선박회사 주인과 선박 운항을 지휘한 비정규직 선장을 떠올리며 씁쓸해하던 차에, 몇 년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가 생각났다.

친구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탔다가 가벼운 추돌사고를 당했다. 교차로에서 파란 신호를 기다리며 정지해 있었는데, 뒤에서 승용차가 들이받은 것이었다. 나는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도 목덜미가 뻐근했다. 내려서 확인해보니 추돌한 차량 앞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어디선가 견인차가 달려왔고 가해자 쪽에서 보험회사를 불렀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 아침 보험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가까운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닷새 동안 입원했다. 당시 나는 병실에 노트북을 갖다놓고 업무를 처리해야 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가해자는 찾아오기는커녕,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사실 가해자가 찾아오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대신 30대 초반의 보험회사 직원이 찾아와 모든 일을 처리했다. 말쑥한 차림에 너무 친절하게 굴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때 새삼 깨달았다. 교통사고에 관한 한, 가해자와 피해자는 만날 일도, 연락할 일도 없었다. 매우 편리해 보였다.

입원해 있는 동안, 내가 자전거에 부딪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곤 했다. 자동차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와 자전거에 부딪혀 전치 2주 정도의 찰과상을 입었을 경우는 크게 다를 것이었다. 자전거 사고에는 보험회사가 개입할 수 없으므로, 가해자와 합의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일이 파출소와 병원을 찾아다녀야 하고, 상대방이 어린이나 청소년이라면 그 부모와 신경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떠올리며 위층으로 이사오는 사람이 어느 날 찾아와 사과를 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안내문을 써 붙인 인테리어 회사 직원에게도 하소연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항의를 한다고 해서 소음이 줄어들 리도 만무하고 그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집 안을 새로 단장하는 것이 범법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나도 이사할 때마다 이웃들에게 며칠씩 불편을 끼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이 영 개운치 않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해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가 과연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을까. 피해의 규모를 오직 돈으로만 환산하는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하는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권력을 가진 자가 가해자로 돌변할 때, 그러고 나서 제3자 뒤로 숨을 때, 피해자의 범위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기업과 시장에서는 그렇다 쳐도, 정치만큼은, 아니 정치부터 가해자가 피해자를 찾아가 얼굴을 맞대야 한다. 그래야 저 무지막지한 돈의 논리를 인간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교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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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