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직원을 “자식 같아서 때렸다”는 뉴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갑질’에 대한 분노와 ‘어떻게 맞아가면서까지 참고 직장을 다녔냐’는 빈정 섞인 동정론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두 반응은 사실은 동일한 것이다. “때려도 되는” 자와 “맞아도 참아야 하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동등하지 않으며, 이 사회는 불평등하다는 대중의 인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갑질은 지난 정권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갑질 현상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성별, 지역별, 학력별 그리고 연령별 갑질을 통한 억압적 위계는 사회 내에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해왔다. 차라리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일방이 물리력을 행사하던 ‘무식한 갑질’에서 좀 더 제도화된 갑질 혹은 저항을 티 내지 않고 분쇄할 수 있는 권력 기제들이 훨씬 세련되게, 사회의 전 영역에 적용되도록 발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사회 전체에 불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면, ‘을’의 관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맞으면서도 참고 고개를 조아리거나’, 혹은 이제는 아예 저항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로부터의 탈주라는 원치 않는 갈림길에 놓인다.

전자의 길에 서면 사회 시스템에서 최대의 효용을 취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때 사회 구성원들은 체제의 공범이 되며, 갑질의 방관자가 된다. 그리하여 미시적 사회 관계는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야만’의 관계가 된다. 즉 가족, 사회적 유대나 공동체 의식, 그리고 신뢰가 사라진다. 후자의 길에 들어서면 이들은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사회적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거나 스스로 격리하면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길, 즉 개인이 체제로부터 최대의 편익을 취하는 것에 머물거나, 혹은 사회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조건에서는 공히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점점 더 증가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무엇보다도 출산율이 감소하고 자살률이 증가한다). 사회적 생산력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체감(遞減)하며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에 기초하여 유지되는 자본주의 자체에 위협이 된다.

유럽에서는 이미 지난 20세기 중반에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칼 폴라니는 1944년 <거대한 전환>이라는 저작에서 19세기 초반 이후 자본주의 시장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사회 파괴를 경고하며 그 해법으로 ‘사회 방위론’을 제안했다. 이 해법에선 국가(법과 제도)가 ‘중립적 해결자’로 자처한다. 국가는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는 온존시킨 채,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와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권의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구호나 ‘적폐청산’, 갑질청산도 이런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이 정부의 개혁정치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지속적으로 파괴된 ‘사회’를 되살리기 위한 ‘정치적 리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동시에 과거의 발전 모델로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노선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국가의 사회에 대한 개입 증가, 재정조달의 문제에다 근본적으로는 사회 불평등을 온존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을 은폐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사회 방위 국가’는 기존의 ‘블랙리스트 국가’보다는 선진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세련되고 온건하다고 해서, 덜 야만적이거나 덜 불평등한 것은 결코 아니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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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PD, 아나운서, 리포터, 미술음악치료사. 모두 전문 프리랜서 직업들이다. 언론에서 프리랜서는 주로 유명인사들의 사례가 소개된다. 무엇보다 전문성이나 창의성을 다루지만 고소득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영화나 방송에서 프리랜서 직업은 커피 전문점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노트북 컴퓨터로 일하는 모습들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프리랜서의 일은 밝기만 한 것일까. 또한 프리랜서는 좋은 일자리(decent work)의 미래상일까.

프리랜서는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회사 직원이 아니다. 비용은 ‘인건비’가 아니라 ‘제작비’로 나간다. 그러니 퇴직금이나 실업급여, 건강검진도 없다. 당연히 연차휴가도 없다. 프리랜서는 회사나 고용주들이 대신 지급하는 형태로 모든 세금을 내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이 누리는 혜택은 받지 못한다. 소득 예측도 어렵고 변동성도 심하다. 합리적인 계약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일하는 곳에서는 신분증이 아니라 출입증을 받는다. 그래서 프리랜서는 보이지 않는 유령에 불과하다.

국내외 통계에서 프리랜서는 취업자의 약 5% 남짓 된다. 적지 않은 규모다. 문제는 전통적인 임금노동자도 아니고, 자영업자도 아닌 모호한 고용형태다. 프리랜서(Freelancer)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독립계약자’나 자영업자로 불린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주로 ‘자유직업인’으로 지칭된다. 프리랜서는 이미 기존 노동자와는 구분되는 특성을 가진 집단으로 고착화된 지 오래다. 명칭상 ‘프리랜서’라고 불리는 순간,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의 미비는 고용의 왜곡을 초래한다.

최근 ㄱ방송사 프리랜서와 대화를 하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사실 화가 났다. 그녀에게는 1년에 3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유급이 아닌 무급이다. 그런데도 다행이라고 한다. 정말 중요한 일이나, 취업 때 면접이라도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삶 속에 ‘휴가’는 낯선 단어였다. 휴가는 곧 소득의 단절, 경제활동의 단절을 의미한다. 1주일에 6일 출근하면서 고작 주급 40만원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사용하는 휴가지만, 그녀에게는 정말 ‘소중한 3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프리랜서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컸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와의 차별은 마지막 남은 자존감조차 상실케 한다. 야간이나 주말 혹은 명절 근무는 모두 프리랜서의 몫이다. 싫다고 할 수도 없다. 봄·가을 프로그램 개편 때 자칫 실업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랜서의 고용불안정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회사 인력이 아닌자. 한마디로 회사의 편의대로 쓰고 필요 없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일 수도 있다”는 말에 가슴이 막막해졌다.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도 이제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고용’에 관심을 가질 시기다. 지난 4월15일 미국 뉴욕시는 ‘프리랜서보호법’을 제정했다. 주요 내용은 서면계약, 임금 적시 지급, 보복으로부터의 자유,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와 법률 서비스 등이다. 법의 취지는 “신분이나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은 프리랜서에게 건강보험과 퇴직연금 혜택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유럽의 몇몇 협회들은 프리랜서 수익의 일정 금액을 상호부조 성격으로 공제하기도 한다. 프리랜서 재교육 비용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 국내에서도 프리랜서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다. 아직은 소수이나 프리랜서 권익보호를 위한 움직임의 시작이다. 프리랜서에게도 일터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현재 MBC와 KBS에서 공정방송을 위한 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파업이 마무리되면 작가나 리포터 등 내부 구성원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다. 결방으로 급여를 받지 못한 프리랜서에게 최소한의 휴업수당이라도 지급하면 어떨까. 그 정도의 작은 희망을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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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가 없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자, ‘오천만 핵인질’ 사태라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정당은 성찰해야 한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네 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그런데도 근본적 대응없이 ‘통일대박’을 말한 사람들이 누구였나?


하지만 지금이 중요하다. 현실이 엄중하다. 남들의 염치없음을 더 이야기할 여유조차 없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백척간두에 서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심각한 위기이다. 외교안보에서의 정체성 위기이다. 그의 정부는 외교안보에서 박근혜 정부와 달라야 한다. 그리고 성공해야 한다. 


보통의 시민에게 서울 하늘에 핵무기가 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를 함께 운영하는 정치인들이 공포를 부추기거나 이용한다면 매우 무책임하다. 가장 무책임한 사람은 전술핵 배치 가능성을 말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일본과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해서, 자체 방위를 맡기고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방위비를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본과 한국에 전술핵이 배치되면 대만도 핵무장을 할 것이다. 동북아는 핵무기가 없는 나라가 없게 된다. 핵무기 집중지역이 된다. 트럼프의 전술핵 배치는 어떠한 핵무기도 비핵보유국의 직접 또는 간접 관리에 놓이게 이전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 핵확산금지조약 위반이다. 더 큰 모순은 전술핵 배치는 북의 핵무장을 정당화시켜주고 용인한다. 북핵 문제를 북핵 용인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북핵은 안된다. 사드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따라 무기배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주한미군지위협정 2조에 의해 땅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더라도,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과연 사드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이 배치할 수 있는 무기에 포함되는지, 어느 지역의 토지를 제공하는 것이 타당한지, 그리고 그 지역 시민들의 민주주의 권리를 어떻게 절차적으로 보장할지는 한국에 권한이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의 성주 땅 제공 결정은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아직 파국은 아니다. 전쟁 외에 대안은 있다. 한국이 갖는 최소한의 자율성이라도 최대한으로 증폭해야 한다. 북한 핵무기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듯이 사드도 평화의 수단이 아니다. 한국이 전략적 자주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드를 단순히 ‘임시배치’라고 설명해서는 안된다. 그 근거를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소파 협정에 의하면 미국의 동의가 없이는 성주 사드 땅을 반환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배치’라고 설명하려면 한국이 환경영향평가 결과에 따라 사드를 철거할 법적 권한이 지금 있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라도 임시배치라는 설명의 근거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전술핵도 마찬가지다. 일단 들어오더라도 한국이 철거하라고 하면 미국이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이 전략적 자주성이 없다면 운전자로 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국민에게 어떤 경우에도 대화 없이는 그 어떠한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 양보라고 비난받는 것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다. 대화는 언제나 필요하다. 대화 없이는 해결할 수 없음은 상식이다. 상식을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 상식을 국민에게 말하지 않았다. 새 정부는 달라야 한다. 그것이 정권의 정체성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남에게 변화를 요구하려면 자신도 변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유엔의 제재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북의 6차 핵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한국과 미국이 진정 북한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최종적인 행동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북한의 변화를 말했다. 그 변화의 의미는 북한의 절멸인가 아니면 북한의 발전인가? 전자라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후자라면 체제인정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오천만 핵인질’이라는 염치없는 비난을 할 때가 아니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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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6차 핵실험과 예상되는 추가적 도발에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핵·미사일 분야 기술을 더 이상 고도화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며 “실제적이고 강력한 조처”를 다짐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북한과 거래하는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미국과 무역을 중단할 수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죠. 이번 실험을 “고립무원 속에서 김정은의 광기 어린 핵무기 집착”쯤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태를 왜곡해 목청 높이기에만 좋을 뿐 해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해결은 올바른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첫째, 그 동기입니다. 아직도 북한 의도에 의아함을 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북한 핵무기에 불안감을 느낀다면 답을 이미 알고 있다 하겠습니다. 1990년대 초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 때까지 북한은 코앞에서 미군 핵무기를 마주했었고 지금껏 인류 역사상 최강이라는 미군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미군은 태평양 전역을 둘러싸고 있고 실전 배치된 핵탄두만 1400여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의 거의 반을 쓰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북한 핵무기에 우리가 불안하다면 미국 군사력에 북한은 훨씬 불안한 겁니다.

북한은 지난 6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6차 핵실험을 축하하는 평양시군민 경축대회를 열었다고 7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행사에는 김영남·황병서·박봉주 등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수소탄 개발자 등이 초청됐다. AFP 연합뉴스

미국은 북한 정권처럼 공격적이지 않다고요?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은 한때 미국 중동 정책 교두보였지만 2003년 미국 침공으로 후세인은 처형당했습니다. 이에 겁먹은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핵무기를 포기하고 서방과의 교류확대에 나섰죠. 하지만 내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공격했습니다. 카다피도 처형당했습니다. 힘과 무력만이 정권 안정에 필수적이라는, 미국이 신봉하기도 하는, 현실주의 이론에 딱 들어맞죠.

북한 김씨 왕조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안 봐도 훤합니다.

둘째, 북핵에 대한 대응입니다. 정권 안정에 사활이 걸린 핵무기를 포기할 리가 없죠. 이런저런 경제 제재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 무용함은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미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북한 대외무역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권 2기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게다가 북한을 흔들어 생길 실이 득보다 훨씬 큼을 알고 있죠. 설사 중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공세적으로 취하더라도 북한 인민만 괴롭히고 말 공산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주도의 경제봉쇄는 탱크에 화염병 던지기로 끝날 겁니다.

무력행사는 득은 작고 불확실하지만 실은 혹독하고 명확합니다. 외과 수술하듯 핵시설만 도려내는 폭격은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습니다. 성공해도 북한이 확전의 길로 갈 공산이 크죠. 폭격이 성공하고 확전이 안돼도 북한 내 혼돈, 중국 개입 등 그 결과는 한반도 일대의 혼란일 겁니다. 이제 북한은 미국과 한국이 어떻게 말하건 핵보유국입니다. 게다가 미국 서부까지 사정권 안에 있죠. 무력행사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기저기서 혼돈과 흥분에 가득 찬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말이라도 하지 못하면 체면이 떨어지니까요. 유권자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곧 미국은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겁니다. 벌써 미국은 주판알 튕기기를 시작했죠. 농산물 관세 철폐를 포함한 자유무역 협상을 재개하고 수십억달러어치 무기를 사라며 한반도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내주고 서울을 살릴 리 없는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을 테고 북한의 요구, 즉 주한미군 철수와 북한 인정을 상당 부분 들어주게 될 겁니다. 싫어도 대안이 없으니까요. 

그 미래는 애써 부정해도 옵니다. 시간문제죠. 이는 한국에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겁니다. 중·미 수교에 완전 제외된 대만이 될 수도 있고, 통일을 주도한 독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장 발 벗고 나서서 정치적 해법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생존, 통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을 설득해 한국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한의 불안도 완화되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이 가능합니다. 싫어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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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되었던 영화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던 19만8000명의 영국군과 14만명에 이르는 프랑스, 벨기에군을 영국의 군관민이 합동으로 구출해내는 기적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록 전쟁의 서막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나 철수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영국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력전(total war)의 시대, 전쟁이 벌어지면 온 국토와 전 국민이 전쟁의 참화로 고통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력을 하나로 단합시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 전쟁 기간 중 조지 6세가 머물던 버킹엄궁은 7차례나 폭격당했지만, 국왕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궁이 폭격당하는 장면과 국왕의 건재함을 홍보영상으로 만들어 국민의 단합과 결집을 호소했다.

영화 <덩케르크> 스틸 이미지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여러 방식으로 프로파간다 작업을 수행했다. 그중 하나가 왕실 마크와 선전 문구를 담은 ‘KEEP CALM’ 시리즈 포스터였다. 첫 번째 포스터는 “Your Courage, Your Cheerfulness, Your Resolution will bring us victory(당신의 용기, 당신의 활기, 당신의 결의가 승리를 불러올 것이다).” 두 번째는 “Freedom is in peril defend it with all your might(위기에 처한 자유를 전력을 다해 사수하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이었다. 마지막 포스터는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공개되지 않다가 2000년 영국의 어느 고서점에서 1장의 포스터가 우연히 발견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권은 민심을 호도하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적 위기를 조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의 민심 흔들기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침착하게 현실에 대처해왔다. 2006년 제1차 핵실험 이후 계속되는 북핵 위기 속에서도 대다수 국민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진짜 가마니가 된다”는 사실 역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이런 사실을 반복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까지 피란 내려간 상황에서도 “안심하라!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를 연신 틀어댔고, 2014년 4월16일, 이미 선체가 침수되어 기울어 가고 있는 세월호 선내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죽음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참담하게 망가져가는 국가를 더는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국민이 나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만히 지켜만 보기엔 이른 듯싶다. 중요한 변화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남북관계 개선이다.

제1차 핵실험 이래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접근 방법은 북한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핵 개발을 포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는 6차 핵실험 소식이다. 대북 제재와 외교적 고립, 그리고 무력시위로는 북한의 선택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여전히 미사일 사정거리 연장과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계획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군사체제의 군사력은 앞으로도 북한을 계속해서 압도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유사시 한반도와 우리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다. 그런 사실은 정부도 이미 알고 있다. ‘절대 안보’는 ‘절대 평화’ 이외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한 어떠한 군사 무기의 도입도 현실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온 국민이 김정은의 북한 핵과 트럼프의 대북 군사옵션이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든 길이겠으나, 문재인 정부는 국민을 믿고, 국민을 위해, 국민과 함께 우리가 주도하는 해법을 만들어 그들을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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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도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우익단체들의 집회와 행진이 열렸다. 그들의 행진과 구호 음악은 지난 탄핵정국에서 보았던 스타일 그대로였다. 군가를 따라 부르며 군복, 군화, 군모에 검은색 ‘라이방’을 쓴 노령의 참가자들이 여전히 대열의 전위에 선다. 이들의 외침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절실했지만, 백주대낮에 군가와 군복을 입은 분들을 아직도 도심에서 봐야 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곱지 않다. 사운드와 비주얼이 이제는 정말 지겹다는 표정들.

지난 8월30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갈 때, 입구에서 군복을 입고 그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노령의 우익단체 회원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우익 어르신의 경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던 원세훈은 국정원법,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법원에서 4년 실형을 선고받고 다시 법정 구속이 되었다. “헐, 범죄자에게 거수경례를?”

우익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새 공포의 대상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냉전 시기 반공교육에 혈안이 되어 빨갱이를 색출하라는 우익단체들은 과거에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포비아를 생산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2000년대 후반 우익 단체의 회원들이 군복 입고 가스통 들고 도심에 나와서 자해 퍼포먼스를 하던 시절만 해도 우익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강화된 우익들의 집단적 행동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 우익들은 공포가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시각적인 불편함이다. 가령 태극기 집회나 동성애 반대 집회에 동원되는 단체 중에서 기독교 우익단체들이 벌이는 퍼포먼스는 이데올로기적 ‘키치’의 극단을 보여준다. 한복을 입고 북춤을 추며 찬송가를 부르다가, 하얀 발레복을 입고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이들의 퍼포먼스는 ‘친미와 반북’ ‘기독교와 반공’이 이상야릇하게 혼합된 시각적 민망함을 보여준다. 빨갱이와 동성애자를 동일한 적대세력으로 묶어서 이들의 악령을 쫓아내려는 예식을 치르는 장면들이 종로에서 시청에서 행해질 때, 사람들은 이 시각적, 청각적 어이없음으로 인해 공포심리보다는 혐오심리를 갖게 된다.

우익의 주체들은 상식과 이성의 의지를 기각시키고,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우익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이익을 위한 충성경쟁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SBS 방송사 앞에서 김제동을 종북 좌파로 규정하고 퇴출을 요구하며 확성기로 생떼를 쓰는 엄마부대 회원들, 서울도서관을 음식 쓰레기더미로 초토화시켜버리고, 편의점 종업원과 지하철 승객들에게 반말과 욕설을 내뱉는 태극기집회 참가 할아버지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먹으며 폭식투쟁을 하는 일베 회원들은 이제 공포의 주체에서 혐오의 주체로 이행한다. 동원되는 수단과 방법이 ‘이념의 전쟁’에서 수행할 수 있는 수준과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들 내부의 치졸한 권력 싸움들, 돈으로 묶인 동원된 주체들과 의도된 퍼포먼스, 냉전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의 신념과 행동의 표현들은 혐오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킨다.

혐오의 주체로 변해버린 우익은 어떤 점에서 불편한 연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평생을 남을 혐오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동시대에 함께 살아온 국민들을 빨갱이, 전라도놈, 밥하는 여자, 외국인새끼들로 혐오하면서 살았다. 혐오 행위는 생존의 본능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위협의 전략이다.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익의 자화상은 어떤 점에서는 ‘혐오의 거울’이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다. 혐오하는 자의 혐오는 그래서 본질적이며, 역사적 존재의 소멸을 ‘순간을 대하는 히스테리’로 반응한다. 혐오의 행위를 과잉되게 재생산하는 우익의 심리는 역으로 역사적 주체의 소멸에 대한 자기공포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 우익의 소멸의 순간을 위해 ‘소돔과 고모라’ 같은 그들의 혐오를 지켜볼 따름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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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전쟁을 벌일 것 같던 북한과 미국이 8·15를 전후해서 다른 행보를 시작했다. 미 국무·국방장관이 지난 13일 월스트리트저널 공동기고에서 북핵의 외교적 해법을 시사했다. 14일 김정은 위원장은 ‘괌 포위사격 계획’을 보고받고 “미국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편 21일 시작된 금년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은 당초 계획보다 병력을 30%나 줄여서 시작했고 미군 전략자산도 투입하지 않았다.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미국을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발언을 했다.

국제관계에서 행위자들의 움직임을 시계열적으로 연계분석하면 정세의 큰 흐름이나 변화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북·미가 ‘화염과 분노’니 ‘괌 포위사격’ 같은 말폭탄을 쏟아내던 바로 그 시간에 북·미 외교관들이 물밑접촉을 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대전환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북·미는 작년 10월부터 1.5트랙 대화를 제3국에서 해왔고 뉴욕에서도 북·미 유엔대표부 간 비공개 접촉을 계속했다. 8월15일경 북한 유엔대표부 고위관계자가 워싱턴을 방문했다는 소문도 있다. 북·미 간 물밑접촉이 여기까지 진전되었기에 트럼프의 ‘존중론’과 틸러슨의 ‘대화경로 모색’과 같은 발언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돌발사고만 나지 않으면 북·미 간 물밑접촉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북핵 6자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물론 북한은 단거리 발사체 발사와 같은 저강도 무력시위는 전략상 계속할 것이다. 문제는 회담재개의 조건이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여야 6자회담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존입장을 미국이 계속 고수한다면 회담은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은 2015년과 2016년 초, 자신들이 핵개발을 동결할 테니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고 6자회담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중국 왕이 부장이 이걸 쌍중단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후의 첫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쌍중단으로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이 마련된 것이다. 군사훈련 ‘규모 축소’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 유예’를 조건으로 6자회담을 시작하고, 진전 상황을 봐가면서 쌍중단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 비핵화와 평화협정 문제를 투 트랙으로 타결해 가는 쌍궤병행으로 나가야 한다. 사실 쌍궤병행은 2009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3번(2, 7, 11월)이나 언급한 북핵 문제 해법과도 통한다.

8월27일 북한은 노동신문 논평에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헛소리’라고 험담했다. 남한과는 핵 문제 논의할 일이 없을 것이니,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이나 바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아마도 북·미 간 물밑접촉에서 희망이 보이니까 자신감이 넘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북한이 못 보고 있는 중대한 측면이 있다. 한국이 현실적으로 핵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 유연하게 북한과 협상하도록 권고할 수 있는 힘은 물론이고, 6자회담을 성공적으로 진전시키는 데 한국의 역할은 절대 필요하다. 한·미 동맹을 토대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조율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한국 빼고 북핵 6자회담은 성공할 수 없다. 북한은 이걸 알아야 한다.

동북아의 국제정치구조상 한국이 운전석에 앉아야 북한에도 유리하다. 운전석에서 시동을 걸려면 남북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9월 이후 새로운 정세 흐름이 나타나면,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개최를 재촉구하는 것이 좋겠다. 문재인 정부가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려면 북한이 회담 개최 조건으로 내건 ‘김련희와 류경식당 여종업원 송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이산가족 상봉은 물론이고 남북대화의 물꼬도 트기 어려울 수 있다.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한반도 운전석에 앉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대승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황재옥 | 여성통일외교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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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회피하고자, 생활세계를 설계하고 구성하자는 전략과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전복하고 넘어서자는 전략은 애초에 틀거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잘못된’ 자본주의를 새로 고치고 바로잡자는 전략이 운동, 그것도 진보 좌파의 전략으로 대두하고 있다. 그것도 국내와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심히 우려스러운 반자본주의담론 회피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한 경제학자의 기괴한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는 한국의 자본주의를 정말 자본주의답게 만들자고 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일 뿐이다. 자본주의에 왜 규범적인 태도를 취하나? 나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착한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이다. 아니면 자본주의의 문제를 반자본주의가 아닌, 비자본주의적으로 회피해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어떤 ‘생활세계’를 구축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본주의와 이 생활세계는 어떻게 연계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이는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도, 기본소득도, 재벌체제 개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반대와 긍정이 있다. 반자본주의 담론은 요즘 거의 고사상태이므로 후자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좋은 자본주의는 긍정하고 심지어 사회운동은 좋은 자본주의 만들기에 복무하자는 최근의 흐름은 자본주의 앞에서 일종의 사상적·정치적 무장해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상생하고 자본주의를 회피하고 심지어 자신의 ‘대안’이 바로 자본주의 살리기라고 말하는데, 이게 자본주의 앞에 무장해제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삼성 바로잡기”라는 한국 노조운동의 프레임을 예로 보자.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하다. 삼성을 바로 고쳐서 좋은 재벌을 만들자는 것인가? 아니면 기업이 공공재라는 것인가? 기업이 공공재라면 그럼 국유화 아니면 사회화된 것인가? 제 아무리 좋은 기업도 자본주의 사적 소유를 벗어나지 못한다.

즉 아무리 망해가는 기업을 살려놔도 그것은 누군가의 소유로 된다. 혹은 아무리 나쁜 기업을 좋은 기업으로 만들어놔도 그것은 누군가의 것이다.

우리는 이미 IMF 외환위기 때 경험했다. 국가는 수십조원을 들여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인수·합병 매각을 단행하고, 그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세금을 퍼부었다. 그렇게 인공호흡하여 살려낸 기업은 헐값으로 팔려나갔다. 단지 기업을 ‘경영’할, 아니 ‘소유’할 주체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의 0원으로 팔려간 기업도 있었다. 그 기업을 얻은 자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국 자본주의도 더 막강해졌다. 마찬가지다. 삼성을 아무리 바로 고쳐봤자 그 소유의 끝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근데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를 새로운 재벌 반대운동이라고 실천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는 희색이 만면할 것이다. 족벌자본, 1인 소유의 재벌을 바꿔서 체질 개선하고 합리화시키면 그것으로 배당금 더 받고 주가 더 올리고, 그리고 1인 소유의 기업을 탈피해 주주자본주의, 관리자본주의의 이익을 다 함께 누릴 수 있다, 단 공유한 사람들끼리. 일단 이것부터 성취하고서 다음 대안을 말하겠다고? 재벌을, 아니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 대 나쁜 자본주의로 규범적으로, 아니 가치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버리고서 어떻게 반자본주의가 가능할까?

문제는 요즘 나온 이른바 대안 전략들 대다수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해서 이 사회 내 소수 좌파의 분발이 필요하다. 박근혜 퇴진 촛불은 ‘혁명’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회체제도, 정치체제도 건드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혁명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혁명을 선제적으로 방어하는 예방혁명일 수는 있겠다. 물론 그조차 ‘혁명’ 이후 혁명의 시대가 과연 펼쳐질지에 달려 있지만. 하지만 지금은 혁명이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나 ‘반혁명’적, 즉 개량의 시대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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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 네슬레, 구글, IBM. 전 세계 유명 글로벌 기업이다. 서점에 가면 기업 성공 사례 책들도 볼 수 있다. 혹여 영국에 여행 간다고 하면 ‘버버리(Burberry)’ 옷을 사달라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어느덧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브랜드가 되었다. 물론 가격은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그런데 최근 이 회사 직원 임금을 보면서 다른 생각도 들었다. 올해 직원 시급이 9.75파운드(약 1만4294원)라고 한다. 바로 영국 런던의 생활임금재단이 정한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생활임금’은 ‘기본소득’과 함께 주요 정책 의제였다. 반면 우리나라의 생활임금 인지도는 낮다. 아직은 시청이나 구청의 저임금 비정규직에만 적용되다 보니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인터넷 구글에 검색하면 ‘living wage(생활임금)’ 관련 내용이 603만개, ‘최저임금’은 3770만개 정도 나온다. 그만큼 최저임금에 비해 생활임금은 낯설다. 생활임금은 1994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영국은 2005년 런던에서 도입했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는 최저임금 못지않게 생활임금 논의가 무척이나 활발하다. ‘생활임금계산기’라는 사이트를 통해 각 지역별 상황과 수치도 공유한다.

생활임금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수준으로서 임금’ 혹은 ‘기본적인 욕구를 포함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임금’ 정도로 정의된다. 생활임금이 처음 시작된 미국이나 영국을 보면 그 역사적 배경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화 초기 생활임금은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저임금에 매력을 느낀 사용자들이 여성과 아동을 12시간 이상 일을 시켜도 괜찮을 때였다. 그래서 생활임금은 “그 사회에 어떤 임금이 필요한가?”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당시 생활임금은 가격으로서 시장에 맡겨진 임금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 가능한 임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3년부터 생활임금 조례가 만들어져 현재 102곳에 제정돼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임금은 88곳(35.9%)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문제는 자치단체장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도입이 안된 곳이 더 많다는 점이다. 영남지역은 생활임금을 시행하고 있는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그나마 생활임금 적용 대상도 서울을 제외하면 지자체 소속 노동자에 한정된다. 규모도 크지 않다. 생활임금 산정 기준도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대부분 기본급, 식비, 교통비를 산정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명확한 기준도 없다. 적용 범위를 민간위탁이나 공공조달 업체로 확대해야 하는데 규정과 예산 걱정을 먼저 한다. 사실 재정을 걱정하면 할 수 있는 정책은 하나도 없다.

생활임금은 일의 성격이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임금, 그저 최저 시급에 맞추어 일을 시키는 임금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생활임금의 목적은 명확하다.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수준을 향상시켜 빈곤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 즉 안정된 생활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임금은 어느 정도일까. 현재 지자체 생활임금은 평균 7623원(월 158만7000원)이다. 곧 대부분의 지자체가 내년도 생활임금을 결정한다. 2018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되면서 지자체에서 많은 고민이 있다고 한다.

정부가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밝혔기에 이제 생활임금은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지 함께 고민할 시기다. 현재 생활임금을 시행하고 있는 곳은 임금불평등이 심각한 국가들이다. 미국보다 늦게 출발한 영국은 3249개의 기업들이 생활임금 지급에 참여하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1주일 동안 생활임금 주간을 지정하기도 하고 인증제도 시행한다. 영국에서 대학과 병원 그리고 민간기업까지 생활임금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유의미한 시사점을 준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임금제도는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 낮은 최저임금을 견인하기 위한 목적에서, 적용 범위의 ‘확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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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위협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에서 시작한 북핵 위기 25년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북한과 미국은 상황을 더 악화시켜서는 안된다. 한국은 한길밖에 없다. 정파와 정권과 관계없이 북핵 위기 해결의 독자적 개입점을 확보해야 한다. 독자적 개입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한국이 역할을 더 해야 한다. 이것이 출범 100일을 맞는 새 정부의 중요한 과제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8월8일, 북한이 미국에 대한 위협을 중단하지 않으면 ‘세상이 보지 못한’ 불바다와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트루먼 전 대통령이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지구상에 없던’ 폐허의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핵무기 추가 사용을 경고한 것처럼 매우 심각하다. 그리고 충격적이다. 과연 트럼프가 이러한 말을 할 때,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 미리 조율을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새 정부는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하면서도 독자적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슬기롭게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없다.

먼저 북한과의 접점을 확보해야 한다. 북한은 핵우선주의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 미국과의 핵무기 경쟁이라는 방법으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구소련은 매우 뛰어난 핵능력을 보유했지만 붕괴했다. 핵무기가 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체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북한이 미국이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북한에 핵이 없을 때에도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았다. 1953년 휴전 후 그동안 왜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한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일으킨다면 이는 한·미동맹의 해제를 의미한다. 핵무기가 북한 체제를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북한 공격을 막을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그러니 북한은 핵무기 우선주의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

둘째, 한국도 분명한 행동을 해야 한다. 독립 변수로서의 자율적 공간과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한·미 안보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동맹이란 말 그대로 동맹이다. 우리가 독자적인 힘을 갖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관계에서 외교와 군사에서 독자적 변수로서의 능력과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 이 점에서 평시의 연합작전 능력도 독자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시 연합작전 훈련 작전권도 환수해야 한다.

한국은 1994년에 평시 작전지휘권을 환수했다. 그러나 ‘코다(CODA)’라고 약칭하는 다섯 가지의 연합위임권한 사항에 대해서는 평시에도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행사하도록 미국과 합의했다. 여기에는 평시 연합훈련의 계획과 지휘권도 포함되어 있다. 즉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평시에도 연합훈련에 대한 계획과 지휘권을 갖는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본의 자위대는 주일미군과 연합훈련을 하지만, 연합훈련을 계획하고 자위대를 지휘하는 권한은 통합막료장이 가지고 있다. 일본에는 아예 일·미 연합사령부라는 것이 없다. 한국이라고 달라서는 안된다. 한국군이 다른 나라와 연합훈련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권한은 당연히 한국이 행사해야 한다.

그리고 전시 대비 작전 계획권도 환수해서 한국이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전시작전계획(OPLAN)도 ‘코다’에 포함시켜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주어 버렸다. 작전 계획을 최종적으로 심사하고 승인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미국 합동참모의장에게 있다.

한·미 안보를 강화하는 것과 한국이 독자적 안보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일본의 사례도 있다. 독일과 나토의 관계도 같다. 핵전쟁 위협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우리의 독자적 능력과 영향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길이 없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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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안 2371호는 북한 총 수출액의 3분의 1가량 타격을 주리라 예상됩니다. 게다가 이달 중순부터는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연합훈련이 시작되죠. 북한이 추가적 도발을 예고하면서 8월 위기설이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북 제재, 한·미 군사훈련, 북한의 반발, 위기설 증폭 등에도 불구하고 이후 진정국면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한국 시민들은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구 언론에서 연일 뉴스로 다루고 있음에도, 이러한 평온함은 남북이 싸울 수 없는 한반도 현실을 반영한 겁니다.

이와 더불어 반세기 넘게 변하지 않는 현실은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입니다. 사드 배치는 가장 최근의 예입니다.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은 한국 안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정적 요소는 아닙니다. 장사포 등 재래식 무기와 단거리 미사일이 주요 위협이죠. 사드는 이와 상관이 없는 무기체계입니다. 그나마 수도권은 성주 사드 방어권 밖에 있습니다. 사드가 한국 방어용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한국 안보와 사드를 연결하는 알쏭달쏭한 소리만 쏟아냈습니다. “사드 배치는 나날이 고조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국가적 안위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내린 자위적 방어 조처”라거나 “잔여 사드 발사기의 조기 배치” 등을 통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고자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죠. 앞은 박근혜의 2016년 발언이고 뒤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달 발언입니다. 이런 주장이 흐리고 있는 사실은 사드가 미국 방어용이라는 점, 한반도 안보의 정책은 미국 안보와 얽혀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 정부는 마땅히 꺼낼 외교카드도 없어 보입니다. 금강산 관광은 잊힌 지 오래고 개성공단은 어처구니없게 문을 닫았습니다. 지원을 ‘퍼주기’로 매도하는 정치공세도 사납습니다. 외교라는 것이 줄 게 있어야 하는데 한국이 쥔 것이라고는 헛기침뿐이죠.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코리아 패싱’을 걱정합니다. 북한이 대화의 상대로 한국을 무시하고 미국을 지목할 만합니다.

이번 ‘위기’가 일상적이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줄 ‘선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국과의 평화죠. 북한은 크고 작은 도발로 한반도의 평화를 깨뜨릴 수도, 이를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 무대는 주로 한반도에 국한됐었죠. 이제 미국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굉장히 작은 가능성이지만 그 결과가 끔찍하기에 무시할 수 없죠. 거꾸로 평화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핵과 미사일이 발전될수록 북한과 미국은 테이블에 앉을 공산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오랫동안 원했던 것은 북·미관계 정상화와 미군의 철수입니다. 미국이 이를 당장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죠. 북핵이 현실적 위협이 되는 수준에 오르면 미국은 한국을 지킬 의지가 약해질 겁니다. 북·미 대립이 미국 본토로의 핵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을 지킬까요? 그러지 않을 공산이 있습니다. 북·미 간 타협으로 미군 감소나 철수도 가능합니다. 여기에 커져만 가는 중국 입김이 실리면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지죠.

설마 싶지만 1979년 중국과 국교 정상화가 되면서 하루아침에 대만을 버린 전력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50년 맥아더 장군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부른 대만의 가치도 1979년 상황에서는 급락했듯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언제 폭락할지 알 수 없죠. 

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요? 미군이 없는 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만의 국방정책, 자주적 대북외교 프로그램, 지역안보를 넓게 보는 독자적 프레임을 짜야 합니다. 준비할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끊이지 않는 군내 인권유린, 만성화된 방산비리, 성조기를 휘두르는 극우. 그 미래를 준비하기는커녕 논의를 시작하기에도 벅차보이는 한국의 모습을 보며 드는 질문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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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중심 경제를 내세운 새 정부가 들어선 덕분일까, 누구나 뻔히 알고 있던 갑질이 마치 전혀 새로운 일인 양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소란 한복판에 문화사회학자인 나에게는 오히려 ‘졸질’이 눈에 들어온다. 졸질이란 서로가 서로를 졸로 보고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갑질이 전통사회 양반이 상놈을 부려먹는 작태가 왜곡된 방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라면, 졸질은 상놈끼리 하대하는 습속이 이어진 것이다. 상놈끼리는 상대방이 이룬 성취가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본다. 문제는 상대방이 외부집단의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성원이라는 점이다. 같은 집단 성원을 졸로 대함으로써 결국 자신도 졸이 된다. 집단 전체가 졸이 됨은 물론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과 학문 세계를 보자. 한때 지성의 장으로 추앙받던 대학은 시장이 단기적으로 요구하는 인재를 맞춤 생산하는 위탁 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여기에는 교육당국이 큰 몫을 했다. 학령인구가 급감한다며 대학 정원 줄이기에 나섰다. 그냥 줄이라고 밀어붙이기에는 뭐하니까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라며 모든 학과를 시장친화형으로 특성화하라고 들볶는다. 대학은 이러한 요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뻔히 안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이 내려보내는 사업비를 따내기 위해 열을 올린다. 어차피 등록금이 수년째 동결되어 재정 지원에 목마른 터다. 지표가 제일 중요하다. 그중 취업률은 모든 지표의 알파요 오메가다. 취업률이 낮은 학과는 통폐합 대상이다.

대학은 교육당국의 요구를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비웃는다. 시장의 요구가 얼마나 빨리 변하는데. 대학의 학과가 기업의 태스크포스인가? 태스크가 바뀔 때마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임시부서란 말인가? 학과 자체가 특성화된 것인데, 뭘 또 특성화하라는 건가? 학과 특성에 맞게 잘 가르치면 될 일 아닌가? 융합, 융합 하는데 융합도 전공을 깊이 배워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융합이 무슨 조각난 쇠붙이 용접인가? 얇고 넓은 지식 백날 배운다고 융합이 어찌 가능할까? 교육당국도 이런 속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은 요구하고 대학은 따른다. 짝짜꿍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졸로 본다.

학문 세계는 또 어떤가? 학자들은 교육당국이 정한 지표에 따라 연구 능력을 평가받기 위해 피 말리는 단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 전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매년 평가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어로 써서 외국 학술지에 내면 논문 한 편당 두세 편 쳐준다는 것이다. 공공성을 추구하는 국가기관이 국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자기가 개발한 지표는 100으로 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외국 사기업이 만든 남의 지표를 200이나 300으로 한다. 한국어로 쓴 논문을 졸로 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우스꽝스러운 현실에 한국어로 글을 쓸 때마다 자괴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한국어로 쓴 글을 우습게 알고 한글 논문은 인용하지 않고 영어 논문만 참고문헌에 잔뜩 나열한다. 영어 논문 번역해주는 업체들만 신났다. 더 좋은 한국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창의적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는 대신에 외국 학술지에 논문 싣는 방법에 몰두한다. 그런 연구자를 우수학자라며 교수로 임용하고 연구비를 지원하고 상을 주는 웃기는 사회. 국내박사, 특히 지방대 국내박사는 전혀 설 자리가 없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학문공동체가 형성될 리 없고, 더더욱 재생산될 까닭이 없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교육당국, 사실상 학문공동체 양성을 포기했다.

대학원은 졸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추락하였다. 최근 석사 논문을 없앨 것인지 결정해서 알려달라는 공문을 받고 모든 학과가 난리 났다. 석사 논문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일정 학점만 채우면 자동 석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러면 지도교수도 필요 없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표절과 짜깁기로 아무도 읽지 않는 학위 논문을 찍어내도록 할 바에야. 그것도, 한국어로. 하지만 이런 형국에 누가 진정 학문을 위해 대학원에 오겠는가? 석사 논문 하나 쓸 능력도 키워주지 못하는 대학원에. 지방대생은 학위 세탁하기 위해 서울대학원(서울 소재 대학원)에 가고, 서울대생(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석사 마치고 언어 세탁하기 위해 유학 간다. 미국에 가서 영어로 학위 논문을 써야 졸로 취급받지 않는다. 영어 논문 쓰는 방법을 배워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실어야 그나마 취업문이 열린다. 국내 대학원이 텅텅 비어간다. 어쩌다 박사 학위자가 나온다 해도 지도교수는 제대로 지도하지 않은 학위를 볼품없다 무시하고 학생은 자기가 쓴 학위 논문을 남 앞에 내놓기가 부끄럽다. 졸질 사회가 따로 없다.

최종렬 |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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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1심에서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무죄, 위증 유죄라며 석방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삼성의 뇌물 공여 혐의가 드러나면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에 대한 특검의 구속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변호인단은 경영권 승계자인 이재용만 모르게 이건희 회장과 삼성 미래전략실 차원에서 경영 승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블랙리스트 재판에 조윤선이 없고,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이재용이 없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아니라 주인공 없는 법정이 이들의 목표로 보인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유럽 역사를 살펴보면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가문 등 몇몇 주요 가문이 여러 국가를 분봉하여 통치했다. 당시 사람들은 왕족과 귀족은 평민과 달리 ‘푸른 피(Blue Blood)’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세습에 의한 ‘혈연 엘리트(Blood Elite)’의 통치는 근대 시민혁명 이전까지 당연한 일이었고, 수천년간 의심받지 않았다. 특별한 피를 이어받아야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주권)가 있다는 왕권신수설을 넘어, 평범한 시민이 공화국의 주인이 되기까지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투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사진)과 박영수 특별검사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김기남기자 kknphoto@kyunghyang.com·연합뉴스

우리 역시 19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2017 촛불혁명에 이르는 힘든 과정을 통해 비로소 민주공화국 시민의 정체성과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비판이나 성찰 없이 꾸준하게 최고의 권력을 누려온 것이 바로 기업 권력이다. 아니,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국가권력과 언론권력을 길들이며 불가침의 성역이 되었다.

국가권력과 부당하게 야합하여 결과적으로 외환위기를 자초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비판지성의 생산지가 되어야 할 서울의 일류대학들은 앞다퉈 재벌 기업 총수들을 불러들여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기업 총수들은 보답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기업명을 딴 신축 건물을 지어주었다. 기업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언론 역시 재벌이 쥐여주는 광고의 단물에 취해 감시를 소홀히 하고 기업의 나팔수가 되었다.

특히 삼성은 ‘삼성이 하면 뭔가 다르다’는 대중의 인식과 자본에 길들여진 언론의 비호 속에서 그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에 비해 과도한 지위를 누려왔다. “삼성이 국가 성장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을 주도한다”는 삼성이데올로기는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들이 경영권을 대물림하면서 국가공동체의 가치 실현을 위한 어떤 책임 있는 태도를 지녀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불러온 삶의 위기 속에서 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삶의 척박함, 생존의 어려움은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이 분노는 연대를 통한 극복이 아닌 자기계발과 계층상승을 통한 각자도생으로 향했다. 기업지배사회가 된 대한민국은 이후 어떤 윤리적 규범이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부’의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가 되었다. CEO의 영웅화가 초래한 참혹한 실상은 ‘갑질공화국’으로 나타났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동안 언론에 등장한 기업 CEO들의 대표적인 갑질만 언급해도 지면을 다 채울 지경이다.

어느덧 3세, 4세에 이르게 된 경영권 승계자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지금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일까? 과연 기업은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 경제시스템, 서민과 중소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과 무관하게 오로지 그들의 노력과 혁신으로 성공한 것일까? 신자유주의 이후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기업을 위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기업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 민주화 없는 국가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며, 주권을 능가하는 경영권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와 시민의 감독이 필요하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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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의 마지막 회에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타임머신이 가능한가’라는 시청자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분명 정재승을 향한 것이었다. 유시민은 정재승의 설명을 듣기에 앞서 자신은 타임머신이 가능해도 타고 가지는 않을 거라고 선수를 친다. 그때 정재승은 이렇게 그에게 질문한다. 만일 타임머신이 있어 그걸 타고 내가 꼭 만나고 싶은 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토론의 화두를 전환한 것이다. 유시민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재승은 아인슈타인, 유시민은 세종대왕, 김영하는 태조를 거명했다. 그때 나 역시 그 질문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머릿속으로 유재하를 떠올렸다. 1987년 11월1일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25살에 생을 마감한 천재 싱어송라이터인 그에게 당신은 조금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죽음은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때 유희열이 유재하를 말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출연진 중의 한 명이. 그가 죽었기에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유재하가요제 대상 출신 유희열의 반전의 상상은 서로 대화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알쓸신잡>은 서로 다른 직업과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여행 중 벌이는 잡다한 지식 수다를 통해 서로 다름과 같음을 이해하는 아재들의 자기발견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을 두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잘나가는 아재들의 지적 나르시시즘의 향연 같다” “젠더 감수성이 결여된 꼰대들의 탁상공론이다” “먹방 프로그램인지, 여행 프로그램인지, 인문학 프로그램인지 애매하다”라는 지적들 말이다.

이런 비판적 지적들에 아랑곳없이 <알쓸신잡>은 시작부터 대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첫 회 시청률 5.4%로 시작해 7회차 춘천여행편은 7.2%나 나왔다. 요즘 지상파 방송의 주말드라마도 시청률 7%를 넘기기 힘든데, 아재들의 지식 수다가 전부인 <알쓸신잡>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인기를 끈 것은 분명 하나의 미디어 현상으로 볼만하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이들이 여행 간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고, 종방에 소개된 책들이 곧바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현상은 마치 <무한도전>의 미디어 효과를 보는 듯하다.

이런 프로그램이 왜 인기를 얻게 된 걸까? 혹자는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나영석 PD 사단의 뛰어난 연출 역량을 꼽는다. 어떤 사람은 현존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너무 공공연하게 자극적이고 표피적이어서 시청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5명의 출연진을 등장시킨 캐스팅의 승리라고 말한다.

이런 지적들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 방송을 보면서 느낀 <알쓸신잡>의 미덕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 같음과 다름의 감각을 발견하는 데 있다. 동일한 사물과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드러내는 태도, 그러다가도 특정한 상황이 오면 서로 공감하는 순간의 발견, 이런 것들이 <알쓸신잡>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 최종회 방송 마지막에 황교익이 김영하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숨은 감성을 발견하여 좋았고, 그의 머릿속 감성이 내 머릿속으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이 말에 정재승은 곧바로 김영하의 머리가 커서 그의 뇌가 황교익의 뇌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평한다. ‘남성적’ ‘꼰대 같은’ ‘잘난 척’ ‘위험한 미디어 효과’라는 <알쓸신잡>에 대한 비판적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아재들의 수많은 지적 수다 속에서 발견된 ‘같음과 다름’의 미덕은 칭찬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지식 수다 그 자체가 아니라 지적 대화를 통한 자기발견과 타자에 대한 이해이다. 유시민이 말미에 모두 다 각자 자신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힌 것도 타인을 통해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한 그만의 통찰이 아닐까 싶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알쓸신잡>은 수컷 아재들이 타자와의 ‘대화적 상상력’을 통해 풋풋한 자기애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매우 쓸데 있는 지식 수다 이벤트였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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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7월28일 미국 본토 중부까지 도달할 수 있는 1만㎞짜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7월4일 미 서부까지 도달할 수 있는 8000㎞ ICBM을 발사하더니, 24일 만에 사거리가 2000㎞나 늘어난 ICBM을 발사했다. 북한 미사일 기술이 이런 속도로 진행된다면, 올 하반기에는 미 동부까지 도달할 수 있는 1만2000㎞ 이상 ICBM 개발도 가능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벽 1시에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고, 사드발사대 4기의 추가 배치와 미사일 대응능력 강화를 명령했고, 우리 단독으로도 북한이 절감할 수 있는 압박 수단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취임 초 문 대통령은 북한의 핵·미사일 정책으로 ‘제재와 대화’ 병행을 천명했다. 따라서 문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원칙에 맞고 시의적절했다. 앞으로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비난하는 말 폭탄을 쏟아내면서 유엔 대북 제재를 주도할 것이다. 그러나 7월4일 미사일 발사 제재에 대해서 반대했던 중·러가 이번 미사일 발사 제재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는 입장이다. 미국 주도 대북제재결의안이 안보리를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설사 중·러가 동참한들 유엔 제재가 앞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막을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다. 지금까지 유엔 대북제재결의안이 5개 이상 시행되었고 미·일의 단독제재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시간에 비례하여 고도화되었다. 북한을 강력하게 다룰 것이라고 호언하던 트럼프 정부 출범 후 북한은 보란 듯이 13회나 미사일을 발사했다. 압박과 제재를 가해도 북한의 도발행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바늘과 실’ 같은 관계다. 작년에 북한은 핵실험을 두 번이나 하더니, 금년에는 월평균 1.5회 이상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고 있다. 5차에 걸친 핵실험으로 탄두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를 이룬 후 북한은 미사일 사거리 늘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핵·미사일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그동안 이 문제 해결을 주도해온 미국이라면 북한이 미사일 사거리를 미 본토까지 늘리기 전에 손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 와서 유엔 제재니, 독자 제재니, 중·러도 협조하라느니 하는 건 ‘사후약방문’식 대응이 아닐 수 없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못 막게 되는 어리석음이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북핵·미사일 정책의 프레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오바마-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의 ‘압박과 제재’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대북정책으로 천명했고, 문 대통령도 ‘제재와 대화’를 대북정책 기조로 천명했다. 더 이상의 북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막기 위해서는 ‘관여(미국)’와 ‘대화(한국)’의 물꼬를 트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 프레임은 이미 북핵·미사일 문제를 다뤄 본 미·중의 전략가들이 내놓았다. 중국의 왕이 부장이 제의한 ‘쌍중단(雙中斷)-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중단’, 미국의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차관보가 제안한 ‘동결 대 동결(suspension for suspension)-북핵 동결 대 한·미 군사훈련 동결’이 그것이다. 북한도 2015년과 지난해 초 핵개발 중단과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북핵회담 재개를 제의했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그 제안을 거부했고, 북핵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 시간 동안 북핵·미사일의 고삐가 풀린 것이다. 

문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한 조치는 해 나가야 한다.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우리 정부가 ‘동결 대 동결’ ‘쌍중단’ 같은 북핵·미사일 문제 해결의 입구로 들어가는 정책프레임 전환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압박과 제재 일변도의 대북정책, 이것도 박근혜 정부 적폐의 하나로서 청산대상이다. 문재인 정부는 소신과 책임감을 갖고 그 방향으로 한·미 간 협의를 시작해야 한다. 북핵·미사일 문제 해결의 프로세스를 가동시켜야 하는 책임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황재옥 | 여성통일외교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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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남쪽 지방의 시골 읍내에 거주하는 1971년생 J는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을 꼭 챙겨본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허락해 주말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어린 나이에 “존 포드의 기병대물, 히치콕의 스릴러물, 알랭 들롱 주연의 갱스터물” 등을 섭렵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보며 우리말을 깨우쳤다고 믿는 그의 소원은 “정규방송 종료를 알리는 시그널이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1985년, 사당역 인근에 거주하는 1972년생 P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의 중학교에 배정받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한다. 그녀에게 나이키 테니스화와 조다쉬 청바지와 함께 “열 장짜리 버스 회수권”은 “80년대식 청소년”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로 이어지는 “시험의 향연들”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속한 8학군이 또 다른 조건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밀 불법 과외가 그것이다.

1987년, 지방 소도시에 거주하는 1971년생 K는 부모님이 경영하는 ‘80년대식 빵집’이 전성기를 마감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손님들이 “바게트, 피자빵, 야채빵 등 서울에서 전해온 새로운 종류의 빵”을 구비한 최신식 인테리어의 제과점으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조리법을 배워 새로운 빵들을 만들어내지만, 바게트만은 끝내 진열대 위에 올려놓지 못한다. 조리법대로 만들어도 특유의 식감이 살아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다.

거의 유사한 시점, 서울 변두리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던 1971년생 H는 부모 없고 가난한 집의 아이에게 쏟아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헤비메탈을 탈출구로 선택한다. 독일 밴드 악셉트의 ‘메탈 하트’를 처음 들은 이후, 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고, 실제로 헤비메탈 음악에 미쳐버렸다”. 그리고 오랜 벗이었던 ‘마이클 잭슨’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위의 J, P, K, H는 1970년대 초반생 소설가의 단편 소설, 즉 김경욱의 <미림아트시네마>, 정이현의 <비밀과외>, 김연수의 <뉴욕제과점>, 백민석의 <이 친구를 보라>의 주인공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이렇게 상이한 지리적·경제적 배경하에 성장한 이 인물들이 상위 10% 이상의 성적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1989년의 독일 통일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1970년대 초반생 일부는 그에 휩쓸렸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3저 호황을 거치며 부모의 소득·자산 증대를 곁에서 지켜본 중산층 출신의 신입생들에게 한국 자본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선배들은 그리 미더운 존재가 아니었다. 바야흐로 ‘압구정동 오렌지족’과 ‘신세대 문화’에 대한 풍문이 끊임없이 떠돌던 시절이 아니던가.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선배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 그러면 위의 J, P, K, H들은 각각 어떤 모습으로 21세기를 통과하고 있을까? 통계 지표를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두 편의 소설을 참고해보면 어떨까? 신경숙의 1995년 작 <외딴 방>에서 1963년에 태어난 서른둘의 소설가에게 그녀의 1930년대생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넌, 우리들 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더라.” 한편 김애란의 2011년 작 <서른>에선 학원 강사 출신의 1980년대 초반생 주인공이 학원가를 오가는 학생들을 보며 혼자서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자식이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세상’과 ‘젊은 세대의 미래가 바로 앞 세대의 과거와 별 다를 바 없는 세상’. 어쩌면 J, P, K, H는 21세기 내내 후자의 세상을 뒤로한 채 전자의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해 제각각 고군분투하며, 이미 그 세상에 안착한 선배들의 인생 궤적을 뒤따라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작년 겨울, 이들 모두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겠지만 말이다.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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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시그널>이 있었다. 시간대가 다른, 그러나 같은 대한민국 공간에서, 과거의 사람이 미래의 사람에게 절박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처럼 접속한다. 그리고 그들은 공감하고 함께 힘들어 하고 함께 피흘리고 함께 문제에 직면하고 함께 굴복하지 않으며 함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한다.

시그널은 그런 의미였다. 접속 그리고 연대. 내게 시그널은 접속하라! 그리고 연대하라!는 의미다.

촛불은 다양한 시그널이었다. 이질적인 시그널들이 서로 교차하고 접속하고 단속됐다. 그것은 9년간 우파 정권하에 외로이 싸워온 노동자, 농민, 빈민, 철거민들의 투쟁에 침묵해오던 도시 중산층 시민들이 정권퇴진이라는 공통분모로 모이는 과정이었다. 딱 거기까지 우리의 시그널들은 모였다. 그리고 시그널은 역설적으로, 문재인이라는 대통령을 뽑아 성공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 새 정부가 만드는 드라마 <시그널>이 펼쳐지고 있다. 모두 그 시그널을 해석 중이다.

tvN 드라마 시그널

그러나 지금까지를 보면, 문재인 정부는 너무 많이, 좋지 않은 시그널도 쏘고 있다.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무수한 시그널들을 차단한다. 접속은 제한적이고 연대는 전면적이지 않다. 취임 초 대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감동적인 일일극을 펼친 정부로선 이 공감력마저 확장 배양하지 않았다면 어이했을꼬 싶다. 누구는 이 감동의 시그널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권이 사회를 향해 쏘는 시그널은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너무 좋지 않은 시그널을 사회로 보내는 첫 번째는 갑을오토텍 사주 측을 변호한 박모 변호사를 민정수석실에 둔 것이다. 그리고 이 노조의 파괴 등에 이름이 등장하는, 로펌 김앤장 출신 신모 변호사에게 국정원의 중책을 맡긴 것이다. 그런데 우파 언론은 이 정부를 ‘친노동’ 정부라고 상찬한다! 그 노조 파괴 때문에 결국 자살에 이른 젊은 노동자 고 김종중의 장례식이 지난 22일 치러졌는데 말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폭력적인 대상화에 대한 뒷담화를 버젓이 출판물로 내고 이것이 ‘남자’ 일반인 양 묘사하면서 여성도 남성도 불쾌하게 만든 사람을 의전행정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정권의 실세들이 이를 비호한다, 젊어서 한때의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그들의 변호론은 수많은 성폭행의 가해자들이, 혹은 판결이, 혹은 이 사회가 읊조리는 것과 유사하다. 거의 상식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강간공화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습기 살인’의 기업들을 변호한 변호사가 또 청와대에 들어갔다. 국가와 제도가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방조하며 피해를 키웠고, 그 기업범죄를 옹호하고 법으로 보호한 변호사들이 있었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죄없는 아이들과 부모들, 소비자들이 안았다. 그렇다면 이 기업범죄에 무심한 사회에 대해, 청와대가 지금 더욱 나쁜 시그널을 보내는 것은 아닌지? 앞으로도 이런 사태를 방조·악화시키지 않을지? 나쁜 시그널이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감동의 자리를 만들고 감동적인 연설을 했지만, 동시에 5·18 광주를 짓밟은 군부세력의 주모자 전두환을 “영도자”라고 기사를 쓴 기자 출신을 총리로 임명했다. 아무리 시대가 그러한들. 아니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이길래. 신호들이 마구 서로 충돌하고 어색하고 나아가 도착적이다.

꼭 이런 시그널로 답했어야 하나? 과거로부터 오는 절박한 시그널에 이렇게밖에 감응하지 못하나? 결국 문재인 정부의 시그널은 보편적이지도, 철저히 인본주의적이지도 않은, 반쪽의 미완성 시그널, 아니 편향적인 시그널이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나는 단지 이 땅의 사람들이 잘못하는 대통령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조금은 사라지길 바란다.

진정성을 갖추라. 그 진정성, 과거와 현재의 아픔과 고통, 외로움들이 함께 접속하고 연대했던 그 시그널이 어떤 TV 드라마를 꽤 잘 만든 드라마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니 사회로 쏘아올리는 나쁜 시그널부터 걷어라!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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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된 지 10년이다. 아직도 기억이 선하다. 2007년 7월 법 시행을 둘러싸고 노사정은 물론 사회적 논란이 컸다. 법의 필요성 못지않게 우려의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다. 제도의 미흡함 때문이었다. 사실 비정규직보호법 도입 취지는 고용불안과 차별해소 목적이 명확했다. 직장에서 2년 된 계약직의 정규직 전환과 불합리한 차별의 방지였다. 그렇다면 과연 지난 10년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일부 정책 효과도 확인된다. 비정규직의 사회보험이나 퇴직금 적용 비율이 다소 증가했다. 그나마 노동시장 개선을 위한 사회적 노력의 성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보수정부 시기 고용의 질 악화가 문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은 16.8%에 불과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는 줄지 않고 있다. 정규직이 100일 때 비정규직은 48.7의 임금을 받고 있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은 근로기준법에나 있는 것이다.

정부는 20일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를 열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추진계획'을 심의해 의결했다. 전국 852개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기간제 근로자와 파견·용역 근로자 등 비정규직 31만명 가운데 향후 2년 이상 일할 인력은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이날 오후 정부세종청사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비정규직 일터는 더 가혹하다. 폭언이나 성희롱 등 비인권적인 문제는 잘 알려지지도 않는다. 협력업체 소속이기에 보호해 줄 곳은 없다. 입사 후 단 한 번도 사장 얼굴을 볼 수 없던 그들은 2년에 한 번씩 바뀌는 작업복과 출입증을 받을 때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계약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명절 때마다 관리소장의 호출은 부담스럽다. 연말 재계약을 앞두고 어떤 선물을 해야 하나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소장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괴롭혀 사표를 쓰게 하기도 한다. 제도적 사각지대가 실질적 사각지대를 만든 것이다. 제도시행 초기 2년을 제외하면 비정규직 차별시정 신청은 1년에 고작 44건이다. 불이익을 감내하면서 차별시정을 신청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정부 정책이 개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10년이 됐지만 좀처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는 지난 5년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9098명의 정규직 전환은 의미가 크다. 특히 정규직 전환자 중 7602명은 청소, 경비, 시설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우리 사회의 빈곤과 불안정의 덫을 제거하는 첫 작업이었다. 여름휴가, 상여금, 교육, 건강검진, 본사 직원 연락망, 정년 퇴임식 등 변화된 일터의 모습이다.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올해부터는 온전한 정규직 전환과 차별 해소를 위한 실천 과제들도 밝혔다. 정규직과의 임금격차(25%) 축소나 직군 간 통합 및 인사승진 체계였다. 불합리한 차별을 해소하자는 구성원 간 공감대가 형성되자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고 한다. 임금격차는 주로 기관 내 잔여 인건비를 활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어떤 기관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추가 부담 없이 해결방안을 찾았다. 현장 직원의 인사승진도 시작되고 있다. 내년부터는 서울시 민간위탁기관 등 소규모 사업장의 침해나 차별 등을 맡는 ‘노동조사관’을 신설한다고 한다.

이렇게 서울시 노동정책은 진화하고 있다. 생활임금이나 노동이사제뿐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감정노동자 보호사업도 의미있는 정책이다. 서울시 노동정책은 지방정부라는 한계 속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정책의 연속이다.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소속감, 처음으로 직장에서 행복이라는 생각을 해봤다”는 한 청소 노동자의 말에서 어떤 노동정책이 필요한가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이제 국가는 어떤 정책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시켜 주어야 할 시기다.

김종진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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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밑바닥에서 도도히 흐르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있다. 장마당 시대에서 자유롭게 돈을 벌며 살게 해 달라는 요구이다. 이는 사람살이의 보편적 요구이다. 나는 이를 법치의 요구라고 부르고 싶다. 북한은 법치의 문턱 바로 앞에 서 있다. 이 요구에 응하여 협력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에 매우 중요하다. 당면한 과제가 개성공단 재개와 나선경제특구의 국제화이다.

북한에 법치가 가능하냐고 반문할 것이다. 북한의 법치는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 북한을 떠나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전하는 말은 북한 사람들이 더 이상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등을 배급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 연구자들은 종합시장인 장마당을 비롯해 골목시장, 야시장 등 시장이 북한 사람들의 생활 수요의 80% 이상을 해결한다고 분석한다. 어떤 연구자는 90% 이상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2010년에 제정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업소법’에 의하면 기업소, 즉 회사를 만들 수 있는 곳은 행정기관이나 인민위원회 등이다. 개인은 기업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회사 조직을 만들어 생활 필수품을 만들고 판매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 경제를 해결한다.

이와 같이 장마당 경제와 북한 실정법이 서로 어긋나는 현실은 계속될 수 없다. 북한의 장마당 경제가 커지면 커질수록 북한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 소유권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는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상업 발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신체의 자유는 또 어떠한가? 상업이 발달할수록 신체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열심히 영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잡히고 갇힌다면 상업이 발달할 수 없다. 법률에 처벌할 수 있는 죄목을 미리 정해 놓고, 이를 어기지 않는 한 국가로부터 처벌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를 ‘죄형법정주의’라고 한다.

북한의 법치는 가능하다. 법치의 바다를 건널 것이다. 북한은 경제발전을 위한 법제 변화를 가장 먼저 선택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개성공단을 포함한 나선경제특구 등을 통해 북한에 경제 발전을 위한 법제도 도입의 선택 폭을 넓혀줄 필요가 있다. 북한의 선택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쪽으로 되도록 협력하는 것이 지금의 남북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 북한법제발전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햇볕정책의 의의를 인식하면서도 이제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햇볕정책의 결과가 핵무기 개발이냐는 일부의 반문은 무지의 소산이다.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이 이곳에서 플루토늄을 생산해서 숨겼다는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사찰을 북한에 요구한 때는 1992년이었다. 햇볕정책은 북한 핵개발의 원인이 아니다.

햇볕정책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북한과의 경제교류협력이 늘어난다고 하여 저절로 북한의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햇볕정책은 남북경제협력이 북한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 매개하는 중간고리인 법치 발전 부문의 중요성을 소홀히 했다.

법치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 북한은 경제발전을 위한 법제 변화를 가장 먼저 선택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개성공단과 나선경제특구 등에서 북한에 경제 발전을 위한 법제도 도입 선택 폭을 넓혀줄 필요가 있다. 북한의 선택이 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쪽으로 되도록 협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햇볕정책의 한계를 넘어 북한과의 경제 협력 교류에서 북한 법치 변화에 대한 계획성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북한 내부의 법치 요구에 터 잡아 북한의 단계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에 협력하는 체계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당면 과제는 개성공단을 다시 여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유엔 제재 속에서도 가능하다. 우리의 의지 문제이다. 그리고 나선경제특구의 국제화이다. 북·중·러 주도에 머물지 않고 미국과 일본도 참여하도록 한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 신냉전을 허무는 법치와 평화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5년 기준 북한의 휴대전화 가입자는 324만명에 이르렀다. 아직 휴대전화가 없는 약 2000만명의 북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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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를 쉬쉬하던 시대에 자라난 저는 우연히 눈에 띈 ‘금서’를 보고 광주의 1980년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 충격적 상흔이 광주시민 가슴에 아직도 절절히 박혀있음을 알게 되기까지 또 많은 시간이 흘렀죠.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이번 여름,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전남도청을 찾았습니다.

약간은 더운 평일 아침이었습니다. 텅 빈 광장이었지만 혼자는 아닌 듯했습니다.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는 상투적 표현 말고는 달리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죠. 그 함성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 그래서 편안히 살아버린 저의 부채의식만큼이나 크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도청은 깔끔한 ‘아시아문화전당’이 돼 있었습니다. 1980년의 기억을 찾는 저에게 직원은 옆에 있는 기념관으로 가보라고 친절하게 알려줬죠. 그제야 도청을 둘러싼 논란이 기억났습니다. 2008년 시작한 문화전당 공사 탓에 항쟁의 흔적이 훼손되거나 사라져 반발이 심했고 논쟁은 아직 진행형이라는….

광장 앞에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둘러진 테이블과 몇몇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끝에 계신 한 분에게 도청에 관해 여쭤보고 탄원서에 서명했습니다. 계엄군을 상대로 승산은 없지만, 마지막 저항을 벌인 바로 그곳에서 고작 이름과 주소를 적어놓고 뒤돌아서려니 새삼 죄송스럽더군요. 인사를 드린 뒤 멀어져가는 저를 그분이 따라오셨습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손을 내미셨죠. 자그마한 핀과 5·18민주화운동 안내 책자를 건네며 멀리서 온 사람에게 줄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삼일빌딩 앞에서 총을 맞았다며 총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며 멋쩍어하셨죠. 미안하다는 말에, 또 그 멋쩍어하는 얼굴에 터지는 울음을 참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의 비극은 1980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과 그 부하들은 오랫동안 굴종과 망각을 강제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헐뜯으며 그 장단에 춤을 추었죠. 전라도 출신이어서 승진에 밀리고, 결혼도 못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북한이 사주했다는 악담도 서슴지 않죠. 민주주의를 피와 몸으로 외친 광주 시민들로서는 어처구니없을 수밖에요.

한국 민주주의는 박근혜 정권을 끝내며 재도약할 채비를 하고 있지만 이를 가능케 한 전남도청은 제 모습을 찾지 못한 채 남겨져 있습니다. 다행히도 문재인 대통령이 복원을 약속했지만, 복원의 정도와 비용, 기존 시설 이전 등 문제와 도전 과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약속, 광주 유가족의 염원으로는 부족한 게 현실이죠. 전 국민의 성원이 필요합니다.

전 국민의 성원과 관심은 뉴욕 9·11 박물관을 가능케 했습니다. 정부와 유족, 전문가 사이에 오랜 대화 끝에 들어선 박물관은 참담했던 비극만큼이나 인상적이죠. 부서진 무역센터가 있던 그 자리에 들어선 박물관에는 휘어진 철근, 부서진 계단, 불타버린 소방차 등 건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습니다. 뉴스, 소방관 교신, 희생자에 대한 추억 등도 잘 전시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저리게 합니다. 꼼꼼히 보지 않아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면 그날 느꼈던 충격과 슬픔이 온전히 떠오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 투쟁을 광주는 1980년에 외롭게, 피를 흘리며 해냈습니다. 그 의로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가족과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전문가와 광주 시민의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처절한 기억이 생생히 보존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광주를 지나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은 무엇인가. 광주처럼 지켜야 할 아픔은 무엇인가. 광주처럼 잊고 있는 것은 없는가. 저는 세월호가 그 시작이길 소망합니다. 선체와 유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늘, 기억과 슬픔이 아직 생생한 오늘, 우리는 세월호가 어디서 어떻게 기억돼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수습과 조사가 끝나는 대로 그 기억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우리 손자, 손녀에게 이 아픔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남태현 |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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