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비핵화 속도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북·미 비핵화 회담 빠르기가 3단 기어로 놓고 가다 갑자기 1단 저속으로 변경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젊은 독재자가 비핵화 변죽만 울리면서 ‘미 제국주의’ 지도자를 시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눈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

오죽하면 한때 회자됐던 ‘믿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가 아닌 이제는 ‘불신하고,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는 신문 사설까지 나왔을까. 심지어 김정은과 비핵화는 장례식장과 나이트클럽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단어라고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다분히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누가 애초에 비핵화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는지 책임 따위를 묻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선의’가 퇴색한 것은 분명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지난 7일 북한 평양 순안국제공항에서 출국 직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에서 두번째)과 악수를 하고 있다. 평양 _ AP연합뉴스

급기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비핵화 로드맵을 갖고서 지난 6일부터 1박2일간 또다시 평양에 다녀왔다. 세 번째 방북이다. 하지만 폼페이오는 비핵화 시간표 합의는 고사하고 김정은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북한 내 미사일 엔진 실험시설 폐쇄에 대한 실무급 회담을 구성키로 합의한 게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청와대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언급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됐다.

돌이켜보면 6·12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언어는 가난했다. 최고 수뇌부가 최초로 대좌하여 70년 적대관계 종식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성을 감안할 때 A4 두 장 분량의 합의문에 담긴 단어들은 종이의 두께보다 더 빈약했다. 비핵화가 덜 강조되었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양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체제로 나아가자는 역사적 대전환을 알리는 공식문건인 공동성명에 서로에게 남겼던 상처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 그리고 미래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내용을 담은 별도의 비밀 합의사항이 존재한다면(있기를 바란다) 총론으로서의 공동성명은 더욱 그랬어야 옳았다.

이제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 대신에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를 브랜드화하기로 정한 것 같다. FFVD 전에는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PVID)도 있었다. 언어의 유희다. 비핵화가 이렇듯 외교적 수사로만 달성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정은이 더 이상 꾸물대지 않고 약속대로 핵을 포기할 것으로 굳게 믿는다면 트럼프 역시 선제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조기 종전선언 가능성을 슬쩍 내비쳤던 트럼프가 아닌가.

마침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2일 싱가포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27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대로 올해 종전을 선언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면서 종전선언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등을 견인할 정치적 선언으로 규정했다. 다시 끈을 조여매고 잠시 주춤했던 비핵화 속도를 힘차게 견인해 나갈 태세다.

비핵화는 지금까지의 북한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지울 수 있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힘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비핵화의 매듭을 푸는 게 쉽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를 제때에 제대로 풀어야만 경화(硬化)된 북한의 동맥이 풀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핵화 성공 여부가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남·북·미 3국은 이제 달아날 수도, 숨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비핵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말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시설 동결, 신고 및 불능화, 검증 및 폐기 등은 과정이 복잡하고 험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요소가 실질적 이행조치들이다. 비핵화가 붕어빵 찍어내듯 단순한 작업이 아닌 이유다. 미·중 무역전쟁이라는 돌발 악재가 생기기는 했지만 오는 9월 유엔총회를 기회로 역사적인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도록 유관 당사국들이 마지막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게 해야 한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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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다툼이 생겨요.”

전업주부로 살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오십대 중반의 제자가 괴로움을 토로한다. 아이 낳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시부모 봉양하고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죽 살아왔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사회학을 시작했는데 공부할수록 그동안 잘 지내왔던 주변 사람들과 자꾸 부딪힌다. 그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삶은 명확하다. 현모양처. 다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붙인다. 개인의 목소리를 도저히 낼 수가 없다.

한 지방대생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때는 남녀 차별을 잘 모를 정도로 남자애들과 어울려 지냈다. 집에서도 큰 차별을 못 느끼고 자랐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때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윽박지르는 아버지에게 못 이겨 인문계를 포기하고 상고에 진학했다. 가부장이 진짜 가부장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족을 온전히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평생 성실하게 살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 안에서 절대 권위를 휘두른다. 맞서 봐야 좌절감만 느낀다.

상고 진학 이후부터는 가부장제 아래 여자에게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살았다.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하고,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1년 연애 후 스물두 살에 결혼하고, 첫아이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며 전업주부로 지냈다. 하지만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는 돈 벌러 나가야 했다. 현모양처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남편의 경제 능력이 변변찮았다. 회사에 들어가서 내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말단직원에 불과했지만 점점 인정을 받고 나중에는 거의 오너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진짜 오너는 아니었다. 오너와 마찰이 생겨 결국 10년 이상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전도하러 온 사람을 따라 종교를 믿게 됐다. 힘을 얻어 다시 일을 구했다. 그곳에서도 성실하게 일했더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다.

이제 삶을 되돌아보니 큰 후회 없이 모두 다 잘되었다.

“살아가는 거 중에 그냥 하나하나 지나가는 것들이 그냥 우연 같지만 다 필연이라는 거지. 어떤 한 시점에서 이 과정들을 쭉 봤을 때.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

행운의 신정론! 내 의지나 행위와 무관하게 얻은 행운의 비합리성을 합리적 언어로 정당화한다. 과거 힘들 때를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눈물겹도록 행복하다. 그런데 이 행복이 사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얻게 된 행운에 가깝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자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왔더니 결국 인생 중후반에 행운이 깃든 것이다. 지금은 살아온 날들 중 어느 때보다도 좋다.

“이제 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까 그것도 좋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좋아. 하루를 잘 살고 싶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딸들이 격하게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행운의 신정론에 빠져 있는 엄마들은 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부조리하다거나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해하려면 우선 주어진 세계를 넘어 이상적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긍정적 언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 언어를 준거로 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보아야만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현재 사회과학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페미니즘 책들이 수위를 다투고 있다. 그만큼 딸들이 자신들이 받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해 달라는 거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CEO 총장이 장악한 대학에서는 페미니즘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취업이 존재 이유가 된 대학은 기업이 싫어하는 인재를 키울 수 없다며 그나마 있던 페미니즘 강의마저 없앴다. 어느 여대에서는 여성학을 여성지도자 과정으로 슬그머니 바꿔쳤다. 이러는 사이 젠더 분리주의와 남녀혐오라는 부정적 언어가 기승을 부린다. 행운의 신정론에 올라탄 악한 가부장제 습속이 일상을 지배한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긍정적 언어를 제대로 가르쳐 일상의 ‘평범한 악’과 다투게 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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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즈음,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명동성당에서 친구들과 농성 중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더는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란 단체를 만들어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그해 12월 명동성당에 들어갔다. 농성을 준비하며 우리는 어설프게나마 죽음을 각오했었다. 87년 선거에서 그들이 패배한다면, 5월 광주 같은 일이 어디선가 또 일어나게 될 거로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이 승리한다면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계엄령이나 최소한 위수령 같은 사태가 발생하리라 예측했다.

12월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투표 유권자의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시작해 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이 추구했던 민주정부 수립은 결국 전두환과 함께 12·12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투표권도 없던 고등학생으로서 나에겐 평생 씻을 수 없는 좌절과 굴욕으로 남은 역사였다.

87년의 좌절을 경험했기에 2008년의 촛불집회와 2016~2017년 촛불집회에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참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시위만으로 세상이 바뀔까, 저들이 이 목소리를 들을까 싶었다. 광화문 버스 장벽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내내 가슴 답답했다. 그러나 아이와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평화롭게 오가면서도 1987년의 경험이 있었기에 군부가 전면에 나설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바로 그 시각, 기무사에서는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 이에 불복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될 것으로 예측하여 위수령을 발령하고, 위수령 상황에서 군이 폭행을 당하거나 진압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계획했다. 그 뒤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령 상황 아래 군이 정부부처·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제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IT강국을 자부하는, 올림픽과 월드컵은 물론 6월항쟁을 치른 나라에서 ‘군부쿠데타’를 통해 권력 유지와 연장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난 정권들이 내보인 블랙리스트나 여러 정치공작을 보건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리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기무사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상대로 계엄령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한편으로 시대착오적이며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앞세운 시위대가 노동자의 죽음을 조롱하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단체로 회장 찬가를 부르게 하는 경영자가 경영수업 받는 자기 딸은 예쁘게 봐달라며 고개를 조아린다. 또한 난민에게 보내는 우리의 쌀쌀맞은 시선을 생각해보면 민주시민의 자부심은 섣부르다.

압축적 근대화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역사적 시간에 등장하는 요소가 동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각축을 벌이며 사회의 상을 만들어내는 법이지만, 우리는 과거에 해결했어야 할 전근대적 요소들까지 살아남아 근대적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들과 함께 동시에 경합하는 중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적폐의 내용이다. 과거 우리가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들은 언제라도 망령처럼 되살아나 오늘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기무사 문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80년 5월 광주와 87년 6월항쟁, 2017년 대통령 탄핵 같은 극적인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 스며있는 적폐청산이란 과제는 분배구조의 개선, 노동자 지위 향상,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보호 등 민중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정치적으로 담아내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없다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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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 이후 지자체 단체장들이 업무를 시작했다. 언론 기사들을 보니 기존 단체장이 연임한 곳도 있지만, 신임 단체장도 많은 것 같다. 몇몇 지역은 인수위원회를 최소 규모로 꾸렸지만, 어떤 곳은 대규모 조직으로 출범하기도 했다. 각 지자체 인수위원회 명칭에는 ‘새로운’ ‘변화’ ‘혁신’ ‘소통’ ‘참여’ ‘시민’ 등이 담겼다. 아마도 이전과는 다른 지자체 철학과 정책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각 지자체 위원회는 향후 민선 7기 4년 동안 진행될 지자체 비전과 목표 그리고 로드맵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 두 달 동안 조직파악과 공약사항을 정책화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주요 광역과 기초 지자체 공약을 보면 경제, 일자리, 복지만이 아니라 청년과 4차산업과 같은 정책들도 녹아들어 있다. 그만큼 현실 상황을 반영한 것 같다.

최근 몇몇 지자체들은 지역 차원의 노동정책에 관심을 갖고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바로 서울, 광주, 경기, 충남과 성남, 아산, 안산, 부천 등이다. 그동안 지자체 노동정책은 거의 전무했었다. 일자리정책은 경제나 산업정책의 하위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나마 조례 제정, 행정조직 설치, 정책과 사업, 지원센터, 거버넌스 운영 등 노동행정의 기본 골격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은 서울시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서울시 노동행정은 향후 4년 동안 25개 자치구와 거버넌스를 통해 보다 깊고, 넓은 노동정책으로 펼쳐질 것 같다.

촛불항쟁 이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하고 있다. 아마도 분권화 시대에 지방정부의 노동정책 역할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향후 지방정부의 노동정책은 중앙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노동의 사각지대 해소를 목표로 할 것 같다. 지속 가능한 노동정책은 사회적 대화를 통한 공론의 장 형성과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논의구조 속에서 가능하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좋은 일자리 프로젝트’가 시행 중이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생활임금, 기본소득 그리고 프리랜서나 플랫폼 노동의 보호와 같은 의미 있는 정책들도 있다.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에서 실험 중인 정책들이다. 경제가 발전하고, 부는 더욱 증가하고 있는데도 소득 불평등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도시 정부의 새로운 대안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지자체 공무원들은 ‘노동’ 문제를 고용노동부 소관 업무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반면에 서울시는 지역의 노동정책에 관심을 갖고 협치 모델을 추진하고 있다. 2011년 ‘노동존중특별시’를 선언하고, 지난 6년 동안 지역의 ‘노동행정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듯하다. 앞으로 서울시는 분권화 시대의 노동정책으로 ‘유니언시티’(Union City)를 표방하고 있다.

유니언시티는 지방정부에 특화된 노동정책 모델로 ‘노동존중 도시’를 뜻한다. 무엇보다 지방정부도 지역 차원의 보편적 노동기준을 수립하고, 노동자들의 존엄과 행복을 적정 수준에서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지방정부가 보호를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의 이해대변이 가능하도록 노동조합과 사회적 계약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유니언시티는 이제까지 시각지대에 있던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 등 취약 노동자들도 단결권 등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 향유되는 도시를 의미한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리처드 프리먼 교수의 한 논문은 의미심장하다. “노조 가입률이 높은 도시 지역의 저소득층 아이들일수록 더 높은 계층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주요 국가들의 부는 상위 1%가 전체 총소득의 5분의 1을 가져가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부가 증가한 나라에서조차 빈곤 축소는 매우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도시에서 ‘일의 불평등’은 지금까지 다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불평등과 차별 해소를 위한 지역과 도시의 역할로 ‘포용도시’를 제시한 바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9년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의미 있는 내용을 준비한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중앙과 지방이 상호 협력해 분권화 시대의 새로운 지방정부 노동정책을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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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만여개의 주소 목록으로 지리적인 밀집도를 분석해야 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정부에서 권장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의 기재요령은 ‘동대문구 ○○로 100’ ‘마포구 ○○로12번길 120-5’와 같이 적는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자료에서 규칙에 따라 기재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별도의 정리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과거 방식대로 ‘○○동 26-7’처럼 법정동과 지번을 적은 경우로 오류라 보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법정동이 아니라 행정동을 기재하는 사례가 많다. 이렇게 기재된 주소는 행정동에 대응하는 법정동을 찾아서 하나하나 정정해야 한다. 간혹 여러 개의 법정동을 포함하는 행정동이 적혀 있으면 어느 법정동이 해당 주소지인지 확정하지 못하여 난감하다.

도로명을 ‘○○로 14길’처럼 ‘~로’와 ‘~길’을 떼어 적는 경우도 많은데 서로 붙여 써야 한다. 사람은 ‘~로’와 ‘~길’ 중간에 빈칸이 들어있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는 ‘○○로12길’과 ‘○○로 12길’을 서로 다른 정보로 받아들인다.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서로 붙여서 ‘○○로12길100’처럼 적는 경우도 정보처리에 문제를 발생시킨다. 실제 자료에는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주소가 적혀 있다. 규칙에 어긋나서 예측하기 어려운 모든 경우는 정보처리를 곤란하게 만든다.

자연어 처리 알고리즘과 기계학습을 활용하면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겠으나 전문적인 프로그래머를 섭외할 형편이 아니어서 예전에 조금 익혀두었던 비주얼베이직 언어로 직접 분석프로그램을 작성하였다. 주소가 어떤 식으로 기재되었는지 판단하기 위한 수많은 조건문과 해당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수많은 루프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몇 주에 걸쳐서 작성하였다. 한껏 기대를 품고 구동하니 잘 돌다가 갑자기 반응이 없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에 빠진 것이다.

‘루프(loop)’는 순환작업을 의미한다. 1부터 100까지 더한 값을 구한다고 가정해보자. 1부터 100까지 순서대로 숫자를 발생시키면서 이 숫자들을 차곡차곡 더하여 기록한 후 최종값을 출력하도록 하면 되는데 이 과정이 하나의 루프이다. 순서대로 발생시키는 숫자가 100에 이르면 루프를 종료하도록 프로그램을 작성하면 된다. 그런데 순차값이 0보다 작을 때 종료하라고 설정하면 영원히 조건에 맞지 않게 되어 무한루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이 다운되었다’라는 건 이런 상태를 말한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므로 바르게 고쳐야 한다. 유용한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순조롭게 무한루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 자체도 무한루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과정이 쭉 이어진다. 사람마다 조금 혹은 무척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있다. 일상이 무너져도 여러 문제가 생기지만 앞으로 끝도 없이 똑같은 루프를 반복한다 생각하면 그 또한 무간지옥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가끔 일탈을 꿈꾸는 이유이다. 요즘 이목을 끄는 ‘자발적 퇴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쳇바퀴 돌 듯 삶을 반복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에 빠진 듯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잘못된 삶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은데, 조금 귀찮고 번거롭지만 다양한 휴지기와 중단점을 두고 반성하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과 달리 어둡고 건강하지 못한 삶은 자기조절이 안되는 게 다반사다. 이런 부정적인 삶이 개인을 넘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이 적폐일 것이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가 발견되면 일단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제어되지 않는 순환을 감시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적폐가 발견되었다면 해당 시스템을 멈추고 전면적으로 조사하여 잘못된 과정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프로그래머와 사용자를 피곤하게 하는 무한루프는 스스로 고쳐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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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사극 <뿌리 깊은 나무>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석규가 오랜만에 티브이에 출연해서 관심을 끌었죠. 팬으로서 침체기에 있던 배우가 걱정이었지만 이는 한낱 기우였습니다. 드라마는 세종과 밀본이라는 비밀조직의 다툼을 그렸습니다. 양측은 정반대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추구했죠.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밀본은 정도전의 뜻에 따라 왕이 아닌,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습니다.

실제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군주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고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재상은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을” 임무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능력 없는 이도 임금이 될 수 있으니 능력 위주의 관료가 중심에 서야 한다는 지적이죠.

드라마고, 왕조시대 이야기지만 밀본의 걱정은 오늘날 정치와도 무관치 않습니다. 정치 안정을 한 개인에게 기댈 수 없다는, 그래서 다수가, 민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 국가의 통치, 특히 민주주의와 닿는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점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먼저 북핵 문제를 보면 개인의 영향력이 도드라집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평창 올림픽을 거쳐 남북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렸습니다. 내부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관료들을 제쳐놓고 김여정 부부장, 김영철 부위원장 등 소수의 최측근을 통해 거침없이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죠.  더 특이한 것은 미국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특사를 만나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의 초청을 수락했습니다. 북·미 협상도 국무부는 쏙 빼놓은 채 최측근인 폼페이오 당시 중앙정보부 국장과 트위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의 걱정과 반대도 완전히 무시했죠. 개인 치적과 자존심을 앞세운 트럼프에 의해 지난 반세기를 이어온 대북 정책이 뒤집힌 것입니다.

김정은과 트럼프라는 개인이 주도하는 협상이었던 만큼 일 처리가 KTX처럼 빨랐습니다. 하지만 신속했던 만큼 구체적 성과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웃는 얼굴로 악수했지만, 비핵화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 확인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느 하나도 구체적으로 결정난 것이 없죠. 게다가 두 지도자의 추진력이 주요했던 만큼 둘 중 하나라도, 무슨 이유에서든, 마음만 돌아서면 상황은 쉽게 악화할 수 있습니다. 북·미 협상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입니다.

다행히도 한국이라는 중재자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두 지도자와는 달리 정부를 십분 활용하고 민심을 추스르며 남북 문제를 추진하고 있죠. 불안한 북·미 협상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정치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설마설마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월세 내는 날이 또박또박 오듯 예견된 결과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능숙한 외교를 통해 전에 없던 남북 간 평화를 끌어냈고, 70%를 오가는 지지를 받아왔죠. 자연히 민주당은 문재인마케팅에 올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에 기대기는 민주당뿐 아닙니다. 시민도 대통령만 바라보는 형국입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그 한 예죠. 이는 불통의 아이콘이던 박근혜의 추억을 지우기 위한 방책이었을 겁니다. 덕택에 막힌 하수구가 뚫린 듯 청원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종편방송 허가 취소, 용의자 처벌 등 대통령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일마저 요구합니다. 권력은 나누어져 있고 법과 제도가 있지만, 시민은 대통령이 봐주고 처리해주길 바라는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잘해서 인기도 얻고 국정운영도 잘되고 남북 문제도 잘 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 업적도 쉽게 무너질 수 있죠. 그 여파가 국내정치에 그치지 않고 남·북·미관계에 여파가 미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박근혜에게 환호하며 올인했던 보수의 꼴이 보수만의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21세기, 아직도 덕이 많은 군주 덕에 태평성대가 오고, 폭군 때문에 난세가 오는 중세에 사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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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모. 조선의 나무라는 뜻이다. 1995년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에서 일을 시작할 무렵 선배가 지어준 첫 번째 가명이었다. 그때만 해도 학생운동 연대사업을 하려면 가명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명은 필요 없던 시기였다. 내가 맡았던 일은 기존의 전통적인 학생운동 방식과는 좀 달랐다. 부문계열운동. 산별노조운동과 비슷했다. 학과의 전공 분야로 진보적 사회 진출을 준비하고 더 좋은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나에게 가명을 지어주었던 시절, 그 선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선방386. 많은 수의 학생운동 명망가들이 1998년 김대중 정부 탄생 후, 민주당에 들어갔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젊은 피로 수혈된 386에겐 들 깃발도, 함께할 세력도 없었다. 다수의 학생대중이 국민승리21(지금의 정의당)로 갔고, IMF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국가적 난제 앞에 민주주의, 평등과 같은 가치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386은 당내에서 계파를 만들었고, 학생운동으로 묶였던 관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계파해체라는 처방을 내놓으며 국민께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아쉬운 일은 필요한 상황과 시기에 다시 뭉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무 주눅이 들어서였을까. 나는 이들이 긴 세월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앞으로도 민주당의 한 부분을 책임지며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전향386. 또 다른 여의도386이다. 이들은 2004년 한나라당(지금의 자유한국당) 총선 참패 직후, 사상전향을 통해 보수정치권에 입문했다. 보수정당에서 자유주의 철학을 기초로 정치활동을 시작했지만, 기성 정치권의 벽은 높았고 이들은 순진했다. 때론 이용당하고, 때론 성찰의 대가라 여기며 개혁보수보다는 급진보수의 역할을 자임했다. 지금은 보수개혁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보수의 차세대 리더가 많지 않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어 보인다.

#생활386. 나는 이래저래 386언저리에서 혜택을 보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의도386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2016년 11월 초,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두 번째 촛불집회로 기억한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청계광장에서 광화문광장 이순신장군 동상 앞까지 집회공간을 넓혔다. 광화문 촛불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이었다.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며, 광화문광장을 연 사람들은 내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386이었다. 노동조합 소속의 직장인386. 만감이 교차했다. 불의에 분노하고 앞장선 사람들은 다시 386이었다.

#변방386. 2010년부터 기초자치단체장으로 8년간 조용히 동네에서 실력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2020년 총선을 바라보고 있다. 시민과 소통하며 시민과 함께 크고 작은 정책성과를 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이 이념과 진영에 많지 않음을 몸소 체득한 386. 여의도386과 생활386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변방의 386이 이들을 잇는 다리역할을 할 수 있을까. 30대의 나이에 1980년대 사회격변기를 체험한 세대. 6월항쟁을 거리에서 직장과 삶의 현장에서 감당했던 세대. 다수의 방관자 속에서 그룹 내 소수자의 높은 책임감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해 보고 싶다.

진보386은 북한 인권보다 국내 인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반면, 보수386은 국내 인권보다 북한 인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일국을 넘어서는 목표이고 가치라면,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에 대해, 민주적인 절차와 인권지향적인 해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또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도, 참패한 보수정당도 서로 다른 위기에 놓여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있을 당 지도부선거에 참여하여 시대를 대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회와 정당은 촛불민심이 지켜보고 있는 마지막 선출권력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스타시스템보다는 집단지성으로 일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예컨대 ‘386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다. 88만원세대·저출산고령화·균형발전·평화번영 등과 마주하길 바란다. 386, 쫄지 마~ 그리고 처음처럼.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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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벽(窮僻)한 국가에서 온 일행들은 싱가포르의 작은 섬 ‘센토사’에 여장을 채 풀기도 전 회담이 끝나자 흑기사로 나선 중국이 보내준 전세기를 타고 곧장 돌아갔다.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를 뜻하는 센토사에서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은 그렇게 ‘담백하게’ 끝났다. 68년 묵은 적대적 감정은 잠시 뒤로한 채 양쪽 긴 회랑(回廊)을 걸어 나온 두 정상은 서로의 선의(善意)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며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다. ‘늙다리 미치광이’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젊은 독재자의 결기로 읽혔다.

북·미관계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언제 그런 일들이 있었나 싶다. 북·미 정상회담은 마치 흑백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북한을 드론 영상으로 보여주려는 듯했다. 셀카를 찍고,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드는 김 위원장을 보면서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일이 더는 없을 듯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전날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정말로 멋진 방문이었다"며 회담 성과를 높이 자평하는 글을 자신의 SNS에 게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서 "정말로 멋진 방문을 마치고 싱가포르에서 귀국하는 길"이라며 "북한 비핵화에 대해 위대한 진전을 이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억류됐던) 인질들은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의 위대한 영웅의 유해를 가족 품에 돌아가도록 할 것"이라며 "미사일 발사도 없고, (핵·미사일) 연구도 없고, (핵·미사일) 현장은 문을 닫을 것"이라고 강조했다.[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캡처] 연합뉴스

‘강한 힘을 신뢰’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주고받은 언어는 공동성명 이상이었다. 겉으로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그래서 각주(脚註)가 필요한 A4 두 장 분량의 짧은 문서이긴 해도 그것은 보다 복잡한 연관 속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쏟아낸 발언에서 북·미 양국이 앞으로 보여줄 행동 대 행동을 준비하고 있으리라고 능히 짐작되었다. 평양과 워싱턴은 이제 평화와 비핵화 그리고 번영의 구조물을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일까.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을 공동성명 맨 앞에 두었다. 관계 정상화의 시작을 알리는 닻이 올라간 것이다. 당초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는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CD)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하였다”로 둔갑했다. 합의문에 CVID가 없다는 기자 질문에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CD가 곧 CVID’라고 일갈(一喝)했다. 그러면서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져야만 제재 완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뒤늦게 복선을 까는 듯이 언급했다.

북한 역시 노동신문을 통해 미국이 진정한 신뢰구축 조처를 취할 경우 상응하게 추가적인 선의의 조처들을 취해 나갈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양국 지도자가 비핵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단계별, 동시행동원칙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대하여 인식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좋게 보면 타협이고, 나쁘게 보면 야합이다.

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엄청난 비용이 드는 도발적인 전쟁연습’이라고 규정한 뒤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전쟁연습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중단 의사를 밝혔다. 동맹의 지도자가 한·미 군사훈련을 두고 ‘도발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우발적이긴 해도 이런 기조라면 당분간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는 잊고 지내도 될 듯싶다.

그럼에도 무조건 아멘을 외칠 수는 없는 일. 목사의 기도와 설교가 울림으로 다가올 때만 아멘을 외쳐야 하듯, 비핵화의 진정성을 느끼고 상응하는 보상이 실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아멘을 외쳐야 옳다. 그렇다면 주고받을 ‘비핵화 레시피’라는 게 재봉틀로 한 번에 박을 것들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야 하는 정치(精緻)한 작업의 결과인 셈이다.

16년 전 6월, 우리는 붉은 전설에 열광했다. 광장으로, 호프집으로 달려가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지금 이 땅에서는 평화의 목소리가 소리 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남북이 어떻게 살든 공동 번영하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비핵화는 이미 시작됐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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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서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2016년 11월6일 검찰 포토라인에 선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기자를 노려보며 쏘아붙인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2017년 3월21일 검찰 포토라인에 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무구한 표정으로 내뱉는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2018년 2월26일 검찰청에 들어서던 안태근 전 검사장이 무심한 표정으로 내던진다.

“성실히 조사를 받겠습니다.” 2018년 5월28일 서울지방경찰청에 출석하던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포토라인에 서서 읊조린다.

한국 사회에 때아닌 ‘성실인’이 넘쳐나고 있다. 성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정성스럽고 참됨’, 한국어기초사전에는 ‘태도나 행동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근데 성실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기가 막힌다. 하나같이 위법, 편법, 탈법, 불법, 초법을 요리조리 저지르며 권력, 금력, 위력을 마구잡이로 휘둘러왔다.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성실을 다짐하고 나서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위기에 처하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줄 보다 근원적인 문화 코드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이들이 활용하는 성실 코드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는 뉴스에 나오는 성실인을 볼 때마다 의문을 품곤 했는데, 지방대생 부모를 연구하다가 불현듯 성실 코드의 ‘한 기원’을 발견했다.

내가 연구한 지방대생 부모는 공교롭게도 차남과 딸이 대부분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가부장의 권위에 짓눌려 살아왔다. 가부장과는 상호 공감을 바탕으로 한 쌍방향적 의사소통을 해보지 못했다. 차남은 형처럼 서울로 보내달라고 떼를 쓰다 된통 혼났고, 딸은 대학 보내달라고 졸랐다가 ‘지지배’가 쓰잘 데 없는 소리 한다며 지청구를 들었다. 울분이 솟구쳤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성실하게 고된 노동을 하는 가부장을 보고 마음을 다스렸다. 게다가 무능한 가부장 탓에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집안 살림을 성실히 꾸려나가는 가모장을 보고 연민을 품었다.

자신이 존중할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 상황에 적당히 관여하며 설렁설렁 살거나, 상황이 요구하는 정해진 규칙만을 따라 성실히 사는 것. 어릴 때는 반항심으로 ‘적당’히 살았지만, 부모에 대한 연민이 생긴 후부터는 ‘성실’히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부모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경제 능력을 키워 진정한 가부장의 길을 가리라. 경제 능력이 있는 가부장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리라. 차남과 딸 모두 가족 밖 세상과 담쌓고 주어진 ‘가족인’의 삶의 행로를 따라 성실하게 살아간다.

온 가족의 성실을 발판 삼아 서울로 진출한 장남. 위법, 편법, 탈법, 불법, 초법을 통해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다. 기고만장 살다 어느 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그제야 떠나온 고향의 성실 코드를 떠올린다. 아예 죽으라는 법은 없지.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 봐봐. 가진 게 변변찮은데도 엄청 성실히 살았잖아. 하나씩 실타래가 풀려 지금은 나름 잘 살잖아. 나도 성실히 조사를 받다보면 살길이 열릴 거야.

현재 한국 사회에는 성실 코드에 기대어 위기를 벗어나려는 ‘예비 성실인’이 가득하다. 실제로 최근 검찰 포토라인에 선 유명 인사들은 하나같이 성실 코드에 의지한다. 그만큼 성실 코드가 지방사회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에서 문화적 호소력이 크다는 거다. ‘성실’이란 무엇인가?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묻지 않고 그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사는 것. 그게 개인에게 ‘자율’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강제하는 조직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방책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모르려는 의지’로 넋 놓고 살다보면 위법, 편법, 탈법, 불법, 초법을 일삼는 조직 사회의 우두머리에게 ‘직싸게’ 당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참사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이제 우리 모두 잠시라도 멈춰 서서, ‘가치론적 질문’으로 자신의 삶을 톺아볼 때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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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에서 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 서울특별시민으로 살았다. 비록 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지만, 거의 27년을 서울에서 교육, 편리한 대중교통, 인접한 문화시설 등등을 누렸다. 평생 살 것이라 생각했던 서울살이를 접은 것은 두 번째 삶을 인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996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인천의 한 시민문화재단에서 계간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22년째 살고 있다. 내 삶의 절반을 인천에서 사는 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나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렇다. 정태옥 전 자유한국당 대변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그는 2010~2013년 인천시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바 있다. 그는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런저런 행사장에서 그를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다. 1986년 행정고시로 공무원이 되었고, 서초구와 서울시를 거쳐 인천에서 일했고, 다시 안전행정부 지역발전정책관, 지방행정정책관을 거쳐 대구광역시 행정부시장을 역임하다가 지난 20대 국회에서 대구 북구갑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공무원 시절 그의 전문성도, 정치적 뿌리도 지역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살고 망하면 인천 산다)’ 발언을 처음 들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인천 시민들은 이런 식의 비하 이외에도 ‘수도 서울의 관문’ 따위의 다양한 비하발언을 접해왔다. 어떤 곳에 사는 사람이 남의 도시로 들어가는 대문이 되고 싶겠는가? 그가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비록 인천에서 공직자 생활은 했지만, 마음속에 인천과 시민에 대한 애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30년째 교사생활을 하는 어떤 분은 얼마 전 서울 목동 소재 사립고등학교 교사에게 “우리 학교가 명문으로 뜨고 있는 건 인천에서 온 애들 때문이에요. 우리 학교에서 SKY 가는 애들은 그 애들이에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인천은 해마다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 가운데 상당수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이주한다. 이른바 인천 토박이 중에도 원도심에 살다가 신도심으로 갔다가 부천 상동으로, 다시 서울 목동으로 가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 결과 목동의 아파트 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수도권은 물론 서울과 먼 타시·도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다만 그들 대부분은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과정에서 ‘인(in) 서울’하게 되는 것에 비해 수도권 인근 지역은 고교 시절부터 ‘인 서울’이 진행된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고, 동원할 자금력이 있는 사람은 부동산으로 재미를 볼 수도 있고, 다른 방식의 재테크도 할 수 있어서 자녀의 학력도 대물림될 것이다. 이를 계급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나 지역 차원에서 보면 지역의 게토화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다.

서울은 주변의 인재와 자원을 빨아들이며 끝없이 팽창하는 블랙홀이다.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고, 폐기물을 지방으로 전가한다. 그 결과 서울을 제외한 주변 지역은 사헬벨트(Sahel belt)처럼 말라 죽는다.

1991년 지방의회,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면서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지 어느덧 30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과 자치는 여전히 머나먼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이기에 표를 달라고 요구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입에서 저와 같은 지역비하 발언이 거침없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돈은 지역에서 벌고 자식은 서울로 보내면서도 끝없이 지역 사랑, 지역 불균형 발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사람들은 부동산계급사회 혜택과 서울중심주의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솎아내는 몫은 물론 주권자인 시민에게 있다.

고향을 떠나 대처에서 서울 시민 행세하다가 특정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연고지랍시고 내려와 “우리가 남이냐”를 외친다. 똥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일이 반복되는 한, 지역은 서울의 식민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공천 준 사람에게만 충성하기 때문이다. 이들만 막아도 지금보다 지역의 삶은 한결 나아질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다. 내가 사는 곳의 주인이 되면 그곳이 어디라도 참된 삶의 터전이 되리라는 의미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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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을 수 없는 노동자, 화장실에서 밥 먹는 노동자. 최근 언론에 기사화된 의자나 휴게실 관련 보도 내용이다. 언뜻 보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 제목은 ‘이번엔 정말 앉을 수 있을까요’, ‘화장실에서 밥 먹지 않아도 되나요?’였다. 우리 주위 쉴 곳 없는 노동자들의 몇몇 단면이 떠오른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대학과 아파트 청소, 경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다. 판매 사원들은 서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경비 노동자들은 비좁고 열악한 곳에서 쉬고 있다.

때마침 지난 4일 정부는 사업장 휴게시설 설치와 운영 관련 대책을 발표했다. 유통 판매직 노동자들의 건강보호 대책이다. 주요 내용에는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한 사업주와 고객 대상 홍보, 건강가이드 보급, 우수사례 공유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반기부터는 백화점·면세점을 중심으로 지도·점검 계획도 밝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노동부 발표 내용을 보면 10년 전 시민사회단체 캠페인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2008년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판매·계산 노동자들의 휴식권 보장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자를’이라는 캠페인이었다. 당시 대형유통업체들은 전국 매장에 의자를 비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일터는 변했을까. 마트 의자는 계산대(POS)와 맞지 않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작업대와 조율되지 않은 의자는 오히려 불편함만 초래했다. 판매사원들은 매장 관리자 눈치 때문에 제대로 의자에 앉지도 못한다.

물론 정부의 사업장 휴게시설 설치·운영 가이드라인에는 나름 구체성도 담겨 있다. 특히 사업장 휴게시설 참고 설치기준은 인상적이다. 휴게시설 설치 위치·규모, 공기·조명·소음 기준, 비품관리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 문제는 이런 가이드라인이 강제성을 갖지 못하는 권고라는 점이다. 구속력이 담보되지 않는 가이드라인은 의미가 없다.

아직도 건물 청소 노동자 휴게공간을 화장실 바로 옆에 둔 곳도 있다. 일부 병원이나 극장이 위치한 건물에 가보면 대걸레를 빨 수 있는 개수대가 설치된 곳에 휴게실이 있다. 건물 사무실 공간도 부족한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 여성화장실 안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을 만들어 언론에 뭇매를 맞은 공공기관이 대표적이다. 주위 아파트 경비노동자 휴게공간도 다르지 않다. 일부 입주민들이 리모델링을 하거나 냉난방 비품을 비치해주는 곳도 있지만 일부 사례다. 강남 주공아파트 한 곳을 가보니 경비 사무실이 3.3㎡(1평)도 되지 않았다. 20년도 넘게 일한 경비 노동자 사무실조차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판잣집’ 형태였다.

언제나 그렇듯 일회성 이벤트는 언론을 하려하게 장식했다. 그사이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국회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앉을 권리’와 ‘쉴 권리’를 논의하는 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마다 정부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고 기업들은 그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다. 정부 발표 내용은 10년 전 그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현수막을 걸고, 우수 사례를 발굴하고, 가이드를 보급하겠다고 한다. 어디에서 많이 보았던 단골 메뉴들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과 규칙에는 휴게시설이나 의자 비치 관련 조항이 있다. 하지만 실효성이 없다보니 노동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나 유럽연합 산업안전보건청(OSHA)에서는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 인간중심적으로 배치되어야 함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 특히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휴게시설은 작업공간과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의자는 ‘권력’(chairman)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잠시나마 여유를 갖는 안식처다. 권력이 아닌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의자와 휴게실은 최소한의 노동조건이다. 쉴 곳 없는 일터의 불평등 해소는 배려가 아닌 제도개선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 의사결정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의자에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서’ 있습니까?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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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총선을 앞둔 2012년 2월2일, 한나라당은 당의 명칭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이명박 정부 내내 그치지 않았던 여러 무리수와 부정부패 의혹, 이른바 ‘미디어법’ 날치기와 같은 퇴행적 국회 운영이나 ‘디도스(DDoS) 사건’과 같은 부정선거 의혹에 따른 여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방편이었다. ‘한나라당=차떼기당’이라는 오래된 비아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미지 쇄신 과정에 참여한 유명 카피라이터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붉은악마와 같은 젊은 세대 선호와 기호를 반영했다”고 새누리당의 상징색을 빨간색으로 정한 이유를 밝혔다. 때만 되면 줄기차게 ‘빨갱이’ 시비를 걸던 당이 그리 나오니 잠시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제1당을 유지하였고, 그 여세가 이어져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빨강은 가시광선을 구성하는 색 중에서 파장이 가장 길어 다른 색보다 눈에 잘 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기 있는 색이었지만 붉은 염료가 귀하여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족이 사용하는 색이었다. 그래서 동서를 막론하고 고귀함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색이 같은 피의 상징이기도 하며, 그에 따라 생명, 정열, 사랑을 상징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박애, 진보, 혁명을 상징한다. 자본보다 사람을 우선시하고, 기득권에 저항하며, 과거의 폐습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빨강의 이미지이다.

빨강은 식욕을 돋우는 색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스트푸드점 간판은 빨강 일색이다. 이래저래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빨강이다.

동양철학에서 빨강은 오방색의 하나인데 남쪽을 상징한다. 즉 밝음과 따뜻함을 뜻하며 그래서 태극의 양이 붉은색인 것이다. 태극에서 음은 파란색인데 서양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가 빨강,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가 파랑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과도 묘하게 일치한다.

물론 파랑이 보수의 상징이 된 것에는 좀 더 다양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시민혁명의 상징색인 파랑, 하양, 빨강 중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 파랑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상징이 파랑이 되었는데, ‘자본의 자유’를 강조하는 현재의 보수주의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보수의 색이 파랑이 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미국의 양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상징색을 내세우지 않지만, 언론에서는 공화당은 파랑, 민주당은 빨강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2000년 대선에서는 각 언론사가 서로 맞춘 듯이 공화당은 빨강, 민주당은 파랑으로 표기하였다. 결국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다. 만약 민주당의 고어에게 빨강의 이미지를 부여하였다면 좀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강을 빼앗긴 전통적 진보정당들이 모두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다가오는 제7회 지방선거에서는 기존 정당이 터부시하는 여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녹색당이 가장 진보적으로 보이는데, ‘녹색’은 왠지 강렬한 진보주의를 가리기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초록색은 수용, 인정, 안식, 안정, 평화를 상징하기에 빨강과 정반대의 의미를 상징한다.

&lt;맛의 배신&gt;이라는 책에 보면, 현대의 맛은 ‘가상현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질이 떨어지는 식재료에 이것저것 착색료와 착향료를 첨가하여 가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과 코와 혀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을 속일 수는 없기에 가짜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채울 수 없고, 그래서 과식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빨강을 차지하고 여전히 놓지 않는 모 정당을 보면 유권자를 가짜 맛으로 속이려 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한다고 여겨진다. 순진한 생각이지만, 진짜 맛이 맞붙는 정치를 맛보고 싶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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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이 몸에 나쁘지야 않겠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 밥상만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바쁜 아침, 아이들 깨우고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시리얼 먹으란 말을 하게 됩니다. 부모 노릇을 하면서 이렇게 타협하는 일이 흔합니다. 우는 애에게 TV를 틀어주고 심심해하는 아이에게 전화를 쥐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집안에서는 현실과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즉 당위의 마찰이 일상적으로 벌어지죠.

늘 현실에만 눌러앉아 있지는 않습니다. 시리얼 준 다음날이면 괜히 미안해 시간을 내 달걀이라도 부치죠. 당위를 향하는 마음은 사랑과 부모의 의무감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개인 노력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파트너의 질책이나 주변의 눈초리도 도움이 되죠. 현실과 당위의 마찰이 너무 심해지면 국가가 간섭하기도 합니다. 아동복지법은 한 예입니다.집안 현실과 당위의 마찰은 쉽지 않지만 사회의 그것에 비하면 소소해 보입니다. 특히 법질서의 현실과 그 당위의 괴리는 너무 크고 심각해 보입니다. 나쁜 짓을 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재산과 권력의 유무를 떠나 똑같이 처벌받아야 하죠. 그 당위는 법 집행의 핵심입니다. 법 집행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순간, 사람들은 경찰·검찰·법원 등 법 집행 기관과 법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처벌받는 게 아니고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자연히 돈과 힘에서 정의를 찾을 수밖에 없고 결국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겁니다.

지금 한국이 그런 정글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정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재벌 총수에 대한 처벌은 한없이 관대합니다. 형을 선고받아도 실형을 살지도 않고 집행유예로 끝나기 일쑤죠. 사면 복권도 공식처럼 따라다닙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면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돈 백만원, 천만원으로도 감옥에 가지만 이들은 수십억원의 비자금, 수백억원의 배임·횡령 등에도 끄떡없습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감옥에서 걸어나왔습니다.

특권을 몸에 달고 태어난 이들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언행을 보였습니다. 경주장 셔터를 내리고 4억원이 넘는 고성능 차를 혼자 모는가 하면, 깡패처럼 보복 폭행을 하기도 합니다. 열 받는다고 비행기를 돌리는가 하면,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건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국회의원들도 몸에 특권이 문신처럼 그려져 있는 듯합니다. 자유한국당은 6월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죠. 강원랜드 취업청탁 의혹을 받는 권성동 의원의 체포를 막기 위한 ‘방탄국회’일 가능성이 큽니다. 국회 안에서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특권을 주고받는데 여야가 따로 있을 리가요. 바로 얼마 전 뇌물수수·배임 등 혐의를 받는 홍문종 의원과 강원랜드 채용비리에 연루된 염동열 의원 체포 동의안도 여당 의원들 이탈에 부결됐었죠. 이런 뉴스를 삼시 세끼 챙기듯 보는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믿었습니다. 현실은 어려워도, 가끔 실수해도, 가끔 잘못해도, 정의의 여신은 당위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요. 그 칼날이 무뎌지고, 저울이 기울어지고, 눈가리개가 헐렁해 보여도 우리는 믿었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알게 됐죠. 그 여신은 일상을 다투며 살아가는 부모보다 못하다는 것을요. 당위를 위해 애쓰다 실수하고 가끔 현실에 타협하는 범부만도 못하다는 것을요. 놀랍게도 당위가 아닌 사익을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뒷거래하고, 아첨하며, 겁박하는 여신을 보았습니다. 그의 뒷발질에 정의는 땅에 떨어지고 힘없는 이들은 절규했습니다. 그 여신의 칼질에 직장을 잃고 목숨마저 잃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그들은 또 법복을 입고 근엄한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울 겁니다. 우리는 압니다. 다행히 조사가 이루어지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더라도 당위가 아득하게 보이는 정글 언저리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을요. 재벌 총수는 수십억원을 횡령하고 초울트라슈퍼 갑질을 계속하고, 권력가들은 방탄국회 노래를 흥얼거릴 것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들어대야 할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 명단이 늘기만 해 마음이 바빠지는 초여름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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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살아있는 생물인 이유는 정치를 주도하는 여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여론은 태어나고 자라며 활동하다 생을 마친다. 그 과정에서 여론은 다른 여론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여론의 활동은 분자구름의 활동과 유사하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간다. 여론의 밀도가 높아지면, 전혀 다른 여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때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며 여정을 마치기도 한다. 이처럼 여론은 조금씩 모양과 내용을 달리하며 돌고 돈다. 일련의 순환이 장기적인 패턴으로 나타날 때, 여론은 민심 혹은 시대정신으로 해석된다.

정치지도자에게 여론이란 무엇일까. 미국 민주당의 소장파였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86년 ‘민주지도자회의’를 결성하고, 당의 정책노선을 새로운 세대에 맞게 확장함으로써 변화에 성공한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도 1997년, 기회의 확대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영국 노동당의 정강정책으로 채택하면서 민심에 화답했다. 만모한 싱 전 인도 총리는 19개 정당의 연합으로 세운 연립정부의 수장으로 복잡한 정치여론 속에서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유능한 지도자는 민심의 바다에서 시대를 읽고, 여론이 당장 원하는 것을 국가전략 안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지지자를 설득하고, 때론 싸우기도 했다.

반대로 무능한 지도자는 여론의 특징을 악용하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라 손가락을 본다. 히틀러 전 독일 총통은 여론의 가치중립성을 악용했다. 독일은 1929년 대공황을 겪었다.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위기감이 고조되던 독일. 1930년 총선에서 경제 문제 해결에 단호한 의지를 표명한 나치가 승리한다. 다수의석을 확보한 히틀러는 대공황 극복과 패전국의 짐을 벗기 바라던 독일 국민의 여론을 악용하여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 후안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여론의 탈규범성에 무지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1946년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수출을 통해 무역흑자를 냈다. 다수 국민들은 축적된 부가 분배되길 원했으며,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된 페론 대통령은 무역흑자의 대부분을 그대로 분배하였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유럽 경제가 회복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여론의 가변성을 간과했다. 2003년 3월 CNN조사에서 미국인의 74%가 이라크 공격에 찬성했지만, 2006년 8월 조사에선 61%가 전쟁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정보에 의한 여론변화였다. 국민의 강력한 지지로 시작했던 전쟁에서 약 3000명의 미군전사자가 발생하면서, 이라크전쟁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인식과 분리됐다. 또 대량살상 무기를 발견하지 못한 것도 이유로 작용했다.

민심은 사회적 공의와 보편적 윤리로 압축되는 반면, 여론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로 분출된다. 성공한 시민의 힘으로 실패한 정부를 인수한 문재인 대통령. 민심과 여론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다. 첫째, 좌담회(집단 심층면접)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참관할 것을 권한다. 여론은 대통령 얼굴을 보면 숨어버린다. 모니터룸은 좌담회 참석자와 분리되어 있고, 생생한 국민 삶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둘째, 광화문 시민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참여할 것을 권한다.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국정을 기획하고 평가하기 위해 토론하는 모습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는 대통령 공약이다. 마지막으로 TV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다. 최근 북·미관계와 한반도평화 및 경제정책이 여론의 주요 관심사다. 외교도 국내 여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민에게 전달되는 투명한 정보는 국론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관이 직접 나와 정부정책을 설명하고 경제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자리가 필요하다. 불필요한 논쟁에서 벗어난 대통령은 정치조력자·행정집행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여론을 보고서로 접하는 것은 영화를 대본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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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한 유지영 감독의 독립영화 <수성못>. 이 영화는 서울공화국 아래 지방에서 살아가는 ‘편입 딸’의 곤궁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0대 초반 딸은 대구에서 유원지로 유명한 수성못에서 알바를 하며 서울 소재 대학에 편입 준비를 하고 있다. 대구에는 청년이 할 만한 일이 없어 뭐라도 선택할 수 있는 서울에 가고 싶다.

엄마는 딸이 멀쩡히 잘 다니던 지방대를 때려치우고 되지도 않는 서울타령을 하고 있어 속이 잔뜩 상해 있다. 이왕 공부하려면 공무원 준비나 할 것이지, 철딱서니 없는 딸은 허파에 바람이 들어 서울로 내뺄 생각만 한다. 뭐라고 하고 싶지만 80만원 받으며 고달프게 일하는 딸이 안타까워 차마 입도 못 뗀다. 먹고사느라 ‘근로’하기 바빠 딸을 관리경영하기는커녕 변변히 돌봐주지도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것 같아 미안하다.

딸은 사실 알바 대신 편입 공부에만 몰두하고 싶다. 집에 손을 벌려야 하는데, 차마 못한다. 평생 가족밖에 모르고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자신을 뒷받침할 능력이 안되는 부모가 측은해서다. 이대로 지방에서 살아가다가는 부모 꼴 난다. 어서 집을 떠나 서울로 가자. 우선 편입 시험에 붙어야 한다. 알바하는 틈틈이 짬을 내 ‘딸딸딸’ 영어 단어를 외우지만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적당히 치열하게’ 공부하기에 실패할 것이 뻔해 보인다.

식탁에 둘러앉은 딸과 엄마는 여간해서 대화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연민한다. 이 연민의 공동체는 곪아터지기 직전의 종기처럼 잔뜩 부풀어 올라 척 봐도 위태위태하다. 뾰족한 말 한마디만 주고받아도 서로 깊은 내상을 입는다.

어느 날 집에 들어왔다 자기 방을 치우고 있는 엄마를 발견한 딸.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와 개인 물품을 함부로 만지냐며 소리소리 지른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니가 지금 하는 게 우리 집 형편에 맞나, 엉? 남들은 졸업해가 다들 취직하는데, 뭔데 그래, 다 늦게 학교 간다고 이 난리고?”

‘나만의 방’을 침범당해 잔뜩 화가 난 딸은 뜬금없는 편입 얘기에 켜켜이 쌓인 불만을 토해낸다.

“내가 엄마한테 뭐 도와달라고 그랬나? 뭐 해준 것도 없으면서 왜 참견인데?”

자신도 내팽개치고 가족 돌봄 노동에만 매달려온 엄마는 기가 차다.

“와, 니는 부모가 해준 것도 없으면 부모노릇도 하지 마라 이건가? 오냐, 그래. 니는 돈 없는 부모가 우습다 이거지? 엉? 천박한 년!”

“뭐? 천박? 와, 어이없다, 씨.”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욕질을 해대는 지방사회. 엄마가 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물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어디서 맨날 공부타령이야, 이 미친년이. 집이 하숙집인 줄 아나? 나가!”

딸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없는 집구석에 태어나서 쌔빠지게 일하면서 공부해도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하는 주제에 부모는 무슨 부모. 있으라케도 나간다, 알겠나?”

딸은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어디 갈 데는 있는가? 영화는 서울에 편입 시험 보러 간 딸이 지하철역에서 낯선 남자에게 뺨 맞고 지갑 뺏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방 청년이 서울로 올라가 ‘특별’시민에게 갑질당하는 현장을 은유적으로 그린 셈이다.

‘탈지방민’은 설사 서울 편입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해도 우선 주거비와 생활비, 등록금에 허리가 휜다. 게다가 지방대 출신이라고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현재 지방자치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지방자치는 단순히 중앙 자원을 지방에 분산시키는 행정 절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에토스다. ‘편입 딸의 적당주의’와 ‘공무원 엄마의 성실주의’가 뒤범벅된 연민의 공동체가 지방의 에토스를 지배하는 한, 결단코 희망이 없다. 연민을 후벼 파면 바로 증오가 폭발할까 두려워 서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처참한 현실. 영화는 섣불리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우선 고발한다. 침묵의 카르텔이 똬리를 튼 사이 쾌적한 유원지 수성못이 아래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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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한 마리 날아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지만, 지난해 한반도를 엄습했던 전쟁의 공포를 생각해보면 불과 일 년 만에 천지개벽할 소식이 줄을 잇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야당이 선거 전략을 비롯해 당의 정체성까지 고심하게 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런데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당 대표라는 중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 연일 구설에 오르고 있다. 지난 5월2일 창원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지방선거 필승결의대회에서 홍준표 대표는 손팻말 시위를 하던 이들을 보고 “창원에는 원래 빨갱이가 많다”고 발언해서 또다시 막말이 화제에 올랐다. 홍 대표의 창원 빨갱이 발언을 접하자 예전에 읽었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1958년 9월15일자 경향신문 1면에는 ‘왜 국민을 억지로 공산당으로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사설이 게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설이 게재되었던 이유는 당시 삼천포 전 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극우 인사 사백삼십팔명이 자유당 중앙당부와 대법원에 “삼천포 오만여 시민 중에 그 팔할(八割)에 해당하는 사만여명이 적색분자”이고, “민의원 이재현씨는 현재 자유당에 입당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진보당원”이며 “삼천포는 불원간 ‘제2의 모스크바’가 될 듯하니 이들을 조치하여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사천시의 일부가 되었지만, 삼천포는 고려 성종 때 조세미를 수송하는 조세창(漕稅倉)이 설치되면서 항구로 발전했다. 1931년 사천군 삼천포읍이 되었지만, 인근의 사천군, 고성군, 남해군보다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시 승격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56년 당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정갑주(鄭甲柱)는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삼천포를 어렵게 시로 승격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2년 후인 1958년 5월2일에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이재현 당시 무소속 후보에게 밀려 5827표를 얻는 데 그쳐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당시 경향신문은 “도대체 삼천포는 대한민국이 아니란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 아래 있는 한 도시 시민의 팔할이 공산당이라고 하면 그 도시를 다스리고 있는 행정기관은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이런 사건이 발생한 이유가 사실은 “삼천포 시민들이 자유당의 공천자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에서 보수정치세력이 정권 안보를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한마디가 바로 ‘빨갱이’라는 호명이었다. 이것이 중세의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는 까닭은 고발하기는 쉽고 변호하기는 어려워서 부당한 권력이 사회를 통제하는 데 언제나 유용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은 한편으로 남한의 우월성과 체제경쟁 승리를 자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이 이념적으로 취약하다며 위기의식을 부풀려왔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는 모호한 존재들을 색출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낸 세월이 70년이다. “창원에는 원래 빨갱이가 많다”란 발언이 단순한 말실수가 아닌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제 선거에서 패배라도 하면 다른 정당을 지지한 국민들은 죄다 빨갱이가 될 판이다. 오늘날 홍준표 대표로 상징되는 한국 보수진영의 자화상은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퇴행을 거듭하여 큰 틀에서나마 생존하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어느덧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조차 진부하게 들리는 시대다. 지난 세기말 베를린 장벽에서 시작한 냉전 해체의 바람이 거의 30년의 세월이 걸려 이제야 극동(極東)의 판문점에 이르고 있다.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은 물론 한반도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시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보수의 참모습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그런 보수가 필요할 때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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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국회에서 감정노동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 감정노동 논의 10년 만의 결실이다. 법안 내용은 만족스럽지 못하나 그나마 촛불혁명 덕분에 가능한 결과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요구를 받아 감정노동을 국정과제에 포함했다. 때마침 작년 5월1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국회와 노동부에 감정노동 개념을 공식화하고 감정노동자 보호조치를 마련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감정노동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2007년 감정노동 해결을 위한 국가인권위원회 첫 간담회 자리가 기억에 선하다. 당시 한 관계부처 공무원의 “이 세상에 스트레스 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라는 발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주무 부처 공무원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정책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취업자 가운데 약 740만명이 감정노동자로 분류된다. 그들에게 제조업 중심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실효성이 없었다.

감정노동이란 용어는 1983년 앨리 러셀 혹실드의 <관리된 마음>이라는 책에서 제기된 이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책에서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소비자들이 우호적이고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외모와 표정을 유지하고, 자신의 실제 감정을 억압하거나 실제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등 감정을 관리하는 노동”을 일컫는다. 개별 기업과 조직에서는 고객에게 표출하는 감정적 서비스의 양과 질이 ‘매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매출이 인격’이라는 조직문화나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일부 기업은 고객에게 눈맞춤은 기본이고 무릎을 꿇고 서비스를 제공하게끔 한다. 그 순간 고객과 노동자들은 동등한 인간일 수 없다. 아무리 서비스라는 단어의 어원이 라틴어 ‘노예’(servus)에서 출발했더라도 강요된 서비스는 비인간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서비스 노동자의 길을 선택하는 순간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노동 문제는 감정노동 그 자체보다 감정부조화가 핵심이다. 감정부조화는 실제 감정과 겉으로 표출하는 감정 사이의 격차인데, 외적 현상으로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과 같은 건강장해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예방과 사후관리 필요성이 제기된 지 오래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11곳의 지자체에서는 감정노동자 보호 조례가 제정되었다. 과거와 달리 노동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서울시는 감정노동 조례와 정책 이후 감정노동 가이드라인과 지침을 만들었다.

감정노동 교육 의무화나 시민홍보 등 각 영역별 보호조치를 구체화했다. 대표적으로 폭언이나 성희롱 같은 위험이 발생할 경우 일터에서 벗어날 권리와 같은 업무중지권을 명시한 것은 의미가 있다. 또 심리적인 휴식이 필요할 때 적정휴식을 제공하도록 규정했다. 상품화된 노동이 아니라 인간중심적 노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공감의 정책이다. 무엇보다 조직 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감정노동자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노동조사관’ 신설은 의미가 있다.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과 등을 지시함으로써 노동자에게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나 유럽연합(EU)은 노동자와 고객 간의 업무 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중대한 업무상 재해로 구분한다. 독일은 노사정 세 주체가 “노동세계에서의 심리적 건강을 위한 공동 선언”을 한 바 있다.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상시적인 상담 창구를 열어 놓고, 해마다 전국적인 토론회를 개최하고 감시자 역할과 정책제안도 한다. 인간의 감정까지 상품화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유물이자 반사회적 노동형태인 과도한 감정노동은 없애야 한다는 취지다. 앞으로 감정노동자들의 일이 ‘욕먹고, 낭비적인 일’이 아니라,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도 노사정이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 위한 사회적 대화와 전략을 갖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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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어떤 당의 후보만 되면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들린다. 이런 지지도는 그 정당이 잘해서라기보다 상대당의 급격한 몰락과 10여년 만에 멀쩡한 대통령이 국정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제발 좀 잘해달라는 애절한 염원이 지지도로 이어진 것이기에 안타깝기도 하고, 때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피땀 어린 희생과 노력으로 얻은 권력을 낭비해버리지는 않을지 불안하다.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대통령이 탄핵되니 마니 하는 얘기들이 오고 갈 무렵 그 당시 제1야당의 당직자를 사석에서 만날 일이 있었다. 대화 중에 현직 광역단체장에 대한 거취 문제가 나왔다. 그의 기반은 시민사회였기에 당내 세력은 약했지만,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경선을 이겨내고 연임에 성공하였다. 그를 두고 “다시 지방선거에 나온다면 염치가 없는 거지. 그 자리를 A도 노리고 B도 노린다는 얘기가 있는데”라는 얘기를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방선출직은 당내인사가 돌아가면서 차지하는 자리, 좀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 거쳐 가는 자리에 불과하다는 저급한 인식에 씁쓸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난 4월1일부터 이틀간, 서울의 한 기초지자체의 지역언론에서 그 당의 예비후보 중 누가 그 지자체의 후보로 적당한지에 대해 여론조사를 하였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결과를 살펴보면, 상위 3인의 지지율은 C 19.1%, D 9.0%, E 8.6%였다. 아직 지지자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이 가는 사람을 질문한 결과는 C 21.7%, D 5.6%, E 3.0%였다. 후보가 여섯 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C에 대한 지지도가 결코 작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C는 컷오프에서 탈락하여 경선에조차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경선은 D와 E가 치른다.

여론조사가 절대적 기준일 수도 없고, 컷오프 과정에서 C에 대한 문제점이 발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심사과정이 비공개여서 어떤 이유로 C가 탈락하였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만약 당의 지지율이 아직도 지지부진했다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지역에서 여론조사 결과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던 C를 경선기회도 주지 않고 쉽게 탈락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재심을 청구한 C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정당에 대한 충성도와 기여도가 문제가 된 듯하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활동을 하는 구성원들의 정당, 구성원의 충성도를 저울질하여 자리를 내주는 정당, 그래서 공당으로 보기 어려운 당이 가장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셈이기 때문이다.

기초단체장은 떡 주듯이 아무에게나 베풀 수 있는 하찮은 자리가 아니다. 주민의 생활개선을 위해서는 대통령보다도 중요한 자리일 수 있다. 그간 사리사욕만 채우는 선출직이 적지 않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이 감당해야만 했다. 어떤 기초지자체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공공매입임대주택이 공급되지 않기도 하였다. 공공매입임대주택의 배정을 요청하고 입주자를 선정하는 권한이 기초단체장에게 있는데, 못사는 사람들이 자기 관할구역에 들어오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은 풀뿌리민주주의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주민자치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C는 중간지원조직에서 마을공동체 활성화와 주민자치의 확대를 위한 활동을 오랜 기간 지속하여 왔다. 하지만 기초지자체의 협조가 없으면 주민자치의 확대가 어렵다는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초단체장에 도전하기로 다짐했다는 얘기를 2년 전에 들었을 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를 했었다. 우리 사회의 정치구조를 고려할 때 당내 기반이 없는 C가 경선을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경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니 안타깝기도 하고, 다시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단체장을 꿈꿔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막막할 뿐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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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5월 7일자 지면기사 -

핀란드가 지난 2년간 진행해 온 ‘기본소득 실험’을 중지하기로 했다. 이를 놓고 보수 매체들에서는 “공짜 돈을 나누어주는 복지과잉의 처절한 실패”라는 이념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을 중지하기로 한 것은 그것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거기에서 나오는 각종 데이터의 본격적인 수합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고 그 최종적인 평가와 판단도 아직 전혀 나온 바가 없다. 이 실험은 본래 끝나기로 한 시점에서 그냥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이것이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치적 부담 때문이라는 진단은 있다) 정상적으로 종료되는 것뿐, ‘실패’ 때문에 중지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이 핀란드의 실험은 사실 ‘기본소득 실험’이 아니었다. 단지 기존의 실업수당이 만들어내는 ‘복지 함정’ 혹은 ‘실업 함정’을 극복하고 취업률을 올릴 수 있는 대안적인 방식에 대한 실험이었을 뿐이다. 이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며, 대부분의 산업 국가에서는 직장을 잃은 이에게 혹은 극빈 상태에 처한 이들에게 일정한 수당을 지급하게 되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실업자·극빈자에게만 지급된다는 조건이 붙어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 수급자가 취직하여 소득이 생기면 지급이 중지되도록 되어 있는 게 종래의 제도였다.

얼핏 보면 너무나 상식적이고 온당한 이런 제도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몇 십년간 노동시장에서 벌어진 근본적인 변화 때문이었다.

1970년대 이전의 고전적인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시장의 ‘완전 고용’ 상태가 하나의 규범적인 정상적 상태로 상정되었고, 실업자가 직장을 얻는다면 이는 곧 쉬운 말로 ‘정규직’ 노동자가 된다는 것으로 여겨졌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어 자기 힘으로 번듯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국가에서 수당을 타먹는 삶을 더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 취직하여 수급 자격을 잃는다는 것이 두려울 이유도, 아쉬울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요즘의 노동시장은 다르다. 일자리가 생겨봐야 월급 150만원짜리 그것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일자리만 잔뜩 생겨나고 있다. 이런 일자리라도 받아들이는 게 좋은 선택일까? 그러면 지금 받고 있는 실업수당 등의 각종 복지 혜택 수급 자격이 사라지게 되는데? 총액으로 따져 볼 때 소득이 얼마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더 나은 경력으로 발전되기는커녕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일자리인데? 또 잘리고 나서 다시 복지 수당 신청하면 걸리는 시간과 비용과 그사이에 감수해야 할 위험은 또 얼마인가?

그러니 아주 확실하고 좋은 일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웬만한 일자리로는 일을 하려고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요지부동의 상태에 빠지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선진국에서 큰 문제가 되어왔다. 특히 노키아 파산 이후로 높은 실업률로 골머리를 앓던 핀란드의 신임 보수정권이 사람들이 그러한 적은 보수의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받아들이도록 하여 실업률을 낮추는 방법으로 실험한 것이 이번에 ‘기본소득 실험’으로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실험은 원래 보편적 성격을 생명으로 하는 기본소득과는 달리 오로지 실업자들만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새로이 무슨 돈을 지급했던 것도 아니다. 단지 선발된 이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설령 취직하여 추가적인 소득이 생긴다고 해도 기존에 지급하던 실업수당을 끊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뿐이다. 이러한 약속이 주어졌을 때 과연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노동시장에 참여하여 불안정한 작은 보수의 일자리라도 받아들이려 하는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 실험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실험은 예정대로 올해로 종료된다. 우리가 정작 생각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이들은 불안정하고 적은 보수의 일자리만 양산되는 것이 최근 노동시장의 현실임을 인정하고 여기에서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고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는 방법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알아서 경쟁력을 키우든가, 정규직이 되든가 하라는 각자 도생만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노력과 실험을 하고 있는가? 핀란드의 실험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번의 여러 오보는 우리의 무지몽매와 한국 자본주의의 야수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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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군인이다. 늘 용감하고, 잠들지 않으며, 적을 놓치지 않는다.” 로봇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인 지뢰를 평한 말이죠. 이렇게 효과적인 무기가 또 저렴하기까지 합니다. 지뢰 하나를 생산, 설치하는 데 싸게는 3달러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적은 다리를 잃고 목숨마저 잃을 수 있습니다. 인기가 있을 수밖에요. 196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 1억개가 넘는 지뢰가 설치되어왔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뢰의 공포는 전쟁이 끝나도 쉬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죠. 숨겨진 지뢰 제거에는 하나에 300달러에서 1000달러나 듭니다. 비용이 많이 드니 뒷전으로 밀리기 쉽고, 이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커집니다. 밭을 일구다, 공을 차다 지뢰를 밟는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개인과 가정의 비극임은 물론 경제 개발에 큰 걸림돌이기도 하죠. 지뢰 제거는 그래서 인권의 문제이자 사회 발전의 당면 과제이기도 합니다.

한번 심어 놓으면 제거하기 힘든 것은 지뢰뿐 아닙니다. 비 올 때마다 한 뼘씩 솟아나는 대나무도 있고, 날마다 뿜어져 나오는 공장 굴뚝의 검은 연기도 있죠. 공포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 공포의 근원에는 좌우 대립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친일 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몰락의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군정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빨갱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부활하죠. 그 공포는 신앙이고 복음이었습니다. 사활이 달린 문제였으니 필사적으로 전파했죠. 한국전쟁으로 정권을 거의 잃을 뻔했던 이들은 자신도 공포를 마음 깊이 심었습니다. 그 공포가 깊어질수록 미국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갔죠.

그래서 이들은 공화당, 민정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바꿨지만, 친미, 반공 말고는 별 사상적 기반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죠. 그 공포만 지키면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공포 장사는 또 얼마나 쉬웠던가요. 북한은 간간이 도발을 해주었고 필요하면 간첩사건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몸서리 치며 입을 닫고 눈을 감았습니다. 유럽에서도 북한 식당 들어가기 겁이 났고, 온라인에서도 종북이란 딱지가 붙을까 눈치를 봤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K팝이 전 세계를 흔들어도 공포는 그렇게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해방부터 이제껏 공포로 연명해온 자유한국당 대표의 최근 발언들은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위장평화쇼” “주사파들이 남북관계를 보는 눈”이라는 독설을 이어갔죠. ‘비핵화 논의’가 안되면 무의미하다며 투정부리다 논의가 되자 ‘북핵 폐기’가 아니라 소용없다며 생떼도 썼습니다. 극우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의 정치쇼일 수도 있고 민심을 못 읽는 무능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웃을 수만은 없죠. 우리 모두의 공포를 대변하는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그 공포를 걷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촛불집회에서, 미투 운동을 통해서 공포를 극복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용기와 연대가 당장 해결책은 아니지만, 괴물에 대한 공포만큼은 이기게 해준다는 경험을 말이죠. 공포가 없어지면 괴물도 허수아비일 뿐임도 수의를 입은 전직 대통령을 통해 보았습니다.

남북 문제의 절반은 우리 마음속의 공포입니다. 그러니 용기와 남북 연대만 되살릴 수 있다면 문제는 뜻밖에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이 더더욱 성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 용기를, 그리고 연대에의 희망을 주었으니까요. 갈 길은 멀고 험합니다. 실패와 실망에도 대비해야죠. 하지만 ‘빨갱이에 대한 공포’를 걷어낸 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그 질기고 오래된 공포를 없애는 참에 지뢰도 제거해야겠죠. 한반도에는 100만개도 넘는 지뢰가 묻혀있다고 알려졌습니다. 휴전선 지뢰 제거는 꼭 필요한 일이고 남북 간의 연대가 필수적입니다. 남과 북이 더 가까워지고 휴전선 일대가 진정한 평화의 영토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죠. 공포와 지뢰가 없어진 그 땅 너머로 우리의 아이들이 농구공을 주고받고 웃음을 이어갈 미래가 기다려집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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