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아직 코끼리를 만나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의 시간은 1년을 조금 넘겼다. 브루킹스연구소 폴 C 라이트의 저서 <대통령의제>에 따르면, 대통령자원은 임기가 지날수록 쇠퇴하는 자원과 성장하는 자원으로 구분된다. 쇠퇴하는 자원은 시간, 파워 등이고, 성장하는 자원은 정보, 전문지식, 학습효과 등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책추진의 영향력은 감소하지만, 효율성은 증가한다. 쇠퇴하는 자원은 그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증가하는 자원은 잘 활용해야 한다. 대통령의제는 대부분 대중의 관심, 즉 국민여론이 만든다는 것이 폴 C 라이트의 주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국민이 부여한 의제는 무엇일까.

대선 직후 지지 이유를 묻는 여론조사(2017·5 이하 갤럽)에서 ‘적폐청산 및 개혁’ ‘정권교체’ ‘개인평가’ ‘타 후보가 싫어서’ ‘신뢰’ 등의 순으로 응답됐다. ‘적폐청산 및 개혁’이 가장 많이 거론됐다. 국민은 오랫동안 쌓인 관행, 부패, 비리 등의 찌꺼기를 거둬내는 일을 대통령의제로 설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2017·6) 후 역대 대통령 첫 직무수행평가 중 가장 높은 84%를 기록했다. ‘국민과의 공감소통’ ‘인사’ ‘전반적으로 잘함’ ‘공약실천’ ‘적폐청산 및 개혁’ ‘추진력 및 결단력’ ‘일자리 및 정규직화’ 등이 주된 이유로 언급됐다. 임기 초반 대통령 개인자원인 파워는 잘 발휘되었지만, 초기 설정된 대통령의제는 순위에서 조금 밀렸다.

최근 여론조사(2018·9)에선 긍정 49%, 부정 42%로 국정수행 평가격차가 크게 줄었다. 긍정평가 이유는 ‘북한관계’ ‘대북안보정책’ ‘열심히 함’ ‘서민 및 복지확대’ ‘외교’ ‘국민과의 공감소통’ ‘적폐청산 및 개혁’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대북관계와 복지 및 외교 등으로 대통령의제가 다변화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초기에 설정된 ‘적폐청산 및 개혁’은 순위에서 좀 더 밀렸지만, 생명력을 가지고 의제로 남아 있다. 부정평가가 급격히 증가한 이유도 확인했는데, 주로 ‘경제민생 해결부족’ ‘친북성향’ ‘최저임금’ ‘부동산’ ‘일자리 부족’ ‘과도한 복지’ 등이었다. 1년 전, 긍정평가 순위에 있던 고용 문제를 포함한 민생, 부동산 등 경제현안이 부정평가 최대의제로 부상했다. 긍정평가에선 대북현안이, 부정평가에선 경제현안이 중심 이슈로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하면 대통령의제를 성공시킬 수 있을까.

첫째, 국민이 설정한 의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의제에 집중해야 한다. 국면전환을 위한 새로운 의제설정 혹은 자의적인 의제전환은 자구적 함정이 될 수 있다. 둘째, 설정된 의제가 장기적인 추세에서 형성되었다면, 즉자적인 대응보다는 국정기조의 틀 안에서 구체적인 과제로 다뤄야 한다. 그래야 유기적 인과관계에 놓여 있는 여타 정책들과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셋째, 임기 내 해결할 수 있는 과제와 그렇지 않은 과제를 구분하여 자원의 불필요한 소모를 막아야 한다. 넷째, 신속하게 성과를 낼 수 있는 것부터 추진해야 한다. 다섯째, 대통령 자원 중 개인파워는 아직 쇠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공감능력과 소통능력을 활용하여, 과제추진의 과정 및 결과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정책캠페인에 소홀해선 안된다. 그렇다면, 대통령의제를 망가뜨릴 수 있는 요인도 있을까.

그 코끼리 이야기다. 세금폭탄, 종북좌파, 아마추어리즘 등 외부에서 쏟아지는 의제왜곡에 주의해야 한다.

내부에선 의제가 흔들리면 지지회복을 위한 중도편향 확대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도는 성격 측면에서 소극진보와 소극보수, 성향 측면에서 공정진보와 경제보수가 비동시적으로 혼재되어 공존한다. 이들은 노선변경이나 편향확대로 소통할 수 있는 계층이 아니다. 때론 진보적이고 때론 보수적인데, 그 이유는 과제해결능력을 중시하는 스윙보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젠가 코끼리를 만나게 되면, 무소의 뿔처럼 의연해야 한다. 대통령의제는 국민이 설정한 대로, 있는 그대로. 주어진 의제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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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라에는 광장이 있다. 천안문광장, 트라팔가광장, 카탈루냐광장, 바츨라프광장 등. 광장은 각자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다. 그리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광장들은 혁명의 유산을 갖고 있다. 1919년 5·4운동과 1989년 6·4항쟁의 중심지였던 천안문광장, 스페인 왕정으로부터 카탈루냐 분리 독립의 시민 함성이 가득했던 카탈루냐광장, ‘프라하의 봄’으로 각인된 체코 민중혁명의 진원지 바츨라프광장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우리에게도 광화문광장이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분노의 촛불을 들고 겨울의 길고 긴 암흑의 시간을 뚫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전진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의 함성에서 2015년 촛불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광화문광장은 시민들의 정치적, 문화적 해방구였다. 그러나 혁명과 문화가 지배한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일상 속 광화문광장은 우리에게 여전히 불편하고 재미없고 권위적이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컵들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은 계속된다’고 적힌 종이컵을 놓고 있다. 이준헌 기자

서울시가 촛불시민혁명의 희망을 담아 새로운 광화문의 시대를 열겠다며, 광장 조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광화문시민위원회가 제시한 밑그림은 광화문 주변을 역사광장으로 조성하고 훼손된 월대, 해치상, 동십자각, 서집자각, 의정부터를 복원하는 것과 세종문화회관 쪽 차도를 없애 시민광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둘러서도 안되고, 너무 느긋해서도 안된다. 정치적 이해타산에 매몰되어서도 안된다. 충분한 소통도 중요하지만, 목적과 가치가 훼손될 정도의 타협도 안된다. 동상과 꽃밭이 지배하지 않는,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광장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청사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리가 중요하다.   

첫째는 역사유산의 원리이다. 주지하듯이 광화문 일대는 조선시대 왕이 살았던 권력의 중심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신을 훼손하기 위한 상징적 파괴의 공간이었다.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훼손된 유산들은 제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다만 복원의 원칙은 문화유산의 원형 복원을 위한 물리적, 조형적 디자인이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가치의 귀환과 동시대 공간과의 조화이다. 복원으로서 광화문광장은 기념물이 아니라 기록물이 되어야 한다. 복원될 것은 권력의 역사적 아이콘이 아니라 역사의 문화유산적 가치이다.

둘째, 시민공간의 원리이다. 광화문광장의 주인은 권력자나 통치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시민들이 광장에 편하게 접근해야 하고, 즐겁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더 좋겠다. 광장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정치적 요구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만 차별과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 장소로 시민의 공간은 용납될 수 없다. 광화문 촛불혁명에서 시민들의 행동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평화롭고, 자율적이며, 호혜적이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공간으로서 광화문은 아고라이면서도 아레나이다. 광화문광장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집결지이며, 자신의 자유로운 표현들의 차이가 서로 인정되는 놀이와 유희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일상문화의 원리이다. 광화문광장 조성의 핵심적인 철학은 비움이다. 광장의 비움은 새로운 채움을 예비한다. 비움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광장의 조성은 최소한의 조경과 시설 보완에 그쳐야 한다. 다만 그 비움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지금 광화문광장은 주말마다 대형 이벤트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거대한 무대를 쌓고 사운드 테스트를 위해 높은 레벨의 음향 출력이 귀를 강하게 자극한다. 광장의 몽골텐트는 주변의 확 트인 경관을 해친다. 대형무대와 거대 음향시설과 몽골텐트는 그냥 일상의 경관이 되어버렸다. 광화문광장이 일상문화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 대형시설이 들어서는 행사를 불허하거나 최소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광장의 피로는 바로 이벤트 때문이다. 대형 이벤트 대신 시민들이 광장을 거닐거나 앉아서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확성하지 않은 노래와 연주와 퍼포먼스가 이곳저곳에서 생겨나 일상의 카니발로 이어질 때, 비로소 광화문광장은 모두의 광장이 될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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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에서 정약용은 자신의 소망을 털어놓는다. “내가 바라는 바는 온 나라를 양반 되게 하여 온 나라에 양반 없게 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정말 온 나라 양반 되기를 바랐는지 학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아리송한 다음 말이 논란을 부추긴다. “천한 자가 있어야 귀한 자가 드러나는 것인데, 만일 다 존귀하다면 이는 곧 존귀한 사람이 따로 없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정약용이 온 나라 양반 되기를 바라긴 했지만 당시 양반답지 않은 자들의 행세를 비판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관작이 없는 자도 스스로 귀족이라 칭하고 군역과 요역을 면하는 바람에 나라가 가난해지는 폐단이 벌어지고 있다며 당대 온 나라 양반 되기를 질타한다.

김상준 교수는 ‘온 나라 양반 되기’란 논문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양반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를 문화적으로 설명한다. 양반은 관직의 획득과 혼인을 통해 되는데 이는 꼭 사전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현실에서 양반으로 대접받으려면 해당 가문이 유교적 예법 실천과 학문 수련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사회적 평판을 획득해야만 한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양인들이 양반 신분으로 행세하기 위해 양반들이 독점하고 있던 유교적 예법과 학문 수련을 모방하면서 평등화 현상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신분 자체에 대한 냉소, 회의, 부정이 증가하면서 반(反)신분적 평등화가 싹텄다.

이러한 설명을 입증이라도 하듯 일제강점기에도 족보와 문집 발행 등을 통해 양반이 되려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온 나라 양반 되기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이혜령 교수는 ‘양반은 말해질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상놈이 양반 되는 것을 양반들이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양반들은 “상놈의 자식이 글을 배워 알게 되면 양반의 세력이 없어질 터이니 미리 예방”하기 위해 지역에 야학이 개설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향촌사회에 상놈이 양반 되지 못하게 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벌어졌다. 상놈이 학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한때 누구나 대학 가면 계층 상승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사실 학벌의 획득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시도는 근대 한국의 온 나라 양반 되기의 주된 형태였다. 이제 이런 희망은 무참히 꺾이고 있다. 대학 나와도 좋은 직장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령인구가 줄어들자 대학위기론이 힘을 받고 있다. 서울의 몇 개 대학만 학문하는 곳으로 놔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취업훈련소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특히 지방대에는 어차피 학문할 사람도 없으니 아예 취업사관학교로 개편하자고 한다. 이광수가 <흙>에서 “서울 양반”과 “시골 상놈”이라 대비해서 불렀던 양극화 현상이 조만간 광범하게 실현될 태세다.

지금 지방대생은 저임금과 장시간의 탈숙련된 단순 반복 노동, 그것도 비정규직과 파견직으로 가득 찬 지방의 열악한 노동시장에 최적화된 존재로 키워지고 있다. 사회에 온전히 참여하여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상놈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지방대는 취업 교육에 몰두하고 있다. 취업률 지표로 대학의 생존 여부가 결판나는 지금 모두 단기 이윤을 내라는 경영 언어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은 ‘인서울’ 대학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양반이 상놈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김문용 교수는 ‘정약용의 변등론과 유교 사회윤리의 확장 가능성’이란 논문에서 정약용의 진짜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고 말한다. “온 나라가 다 귀해지면 누가 천한 일을 맡아서 할까?” 미국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던 백인들이 하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예가 해방되어 모두 자유인이 되면 그들이 맡아 하던 천한 일을 누가 대신할까? 하지만 온 나라 상놈 되는 상황을 우울히 지켜보고 있는 나는 다른 걱정을 한다. 생존 문제에 몰두하느라 모두 학문에 뜻을 두지 못한다. 이러다가 “온 나라가 다 천해지면 누가 귀한 일을 맡아서 할까?”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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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거주하는 사람 입장에서 뉴스를 보노라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서울만 사람 사는 동네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이번에 태풍 솔릭이 지나갔는데, 하필이면 그날 이사를 하게 되어 태풍 경로에 온 신경이 쏠렸다. 다행히 수도권은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적지 않은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뉴스에서 집중하는 것은 태풍이 수도권을 비껴가서 다행이란 것뿐이다.

2014년 제1회 대회 때부터 인천에서 열리고 있는 인천평화창작가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해오고 있다. 가요제 심사를 맡을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주최 측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 가요제 심사를 맡긴 것은 아마도 지역대표성과 더불어 평화라는 주제가 지닌 무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천평화창작가요제는 서해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싸고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는 등 서해와 인천 지역의 평화와 시민의 안전이 직접적으로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지역의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평화의 노래를 찾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자발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창작가요제이다.

이 가요제 수상자들은 2014년 인천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 폐회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고, 조직위원회에서 음반을 제작해 발표하고 공연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첫 행사는 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법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시 정권이 보수정당으로 바뀌면서 지원이 끊기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한 해를 거르고 현재까지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어렵게 끌어오고 있다. 위로는 대학부터 아래로는 작은 풀뿌리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정부 지원만 바라보고 있는 시대에 스스로의 힘으로 작은 행사나마 정성스럽게 치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천평화창작가요제 조직위원회의 젊은 활동가들은 활동비를 아끼고 줄여가며 상금을 마련하고, 음향시설을 대여해 직접 설치하는 등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전쟁과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노래는 많아도 누구나 공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다양한 주제의 평화 노래는 많지 않은 현실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입소문을 타고 해마다 참가팀이 늘어나 올해는 156개 팀이 참여해 세상에 없었던 평화의 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올해 들려온 소식에 모두가 상심하고 가슴아파했다.

통일부에서 주최하는 2018 유니뮤직레이스가 ‘평화를 노래하다(평화를 염원하는 내용의 대중음악 창작곡)’라는 같은 주제의 창작가요제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인천평화창작가요제 조직위가 만든 참가 신청서나 작성안내 등 관련 서류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현행법에서 행사기획, 문서 등이 명확하게 ‘저작물‘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사안에 따라 따져봐야겠지만, 국가기관인 통일부에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의 내용이나 형식은 물론 문서 양식까지 도용했다는 것은 지역의 문화현실이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노력하고 있는 문화운동가들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대기업의 골목상권 죽이기와 무엇이 다른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기관의 공신력과 파급력을 생각할 때, 일반 시민들은 누가 표절했고, 도용했는지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다.

풀뿌리민주주의나 지방분권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지역이 소외되지 않는 것이다. 지방에 산다고 우습게 보거나 천대받지 않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가 모든 일을 할 수 없기에 시민의 참여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이들을 제대로 지원하고, 대접하지는 못할 판에 공들여 일군 것마저 빼앗아간다면 누가 나서서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지역문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겠는가. 서울에선 흔하고 넘치는 것들도 지역에선 귀하기 이를 데 없을 때가 많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고 한다. 일단 싹이라도 틔워야, 꽃이라도 피워봐야 그것이 큰지 작은지, 예쁜지 못생겼는지 알아볼 거 아닌가.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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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상고·공고라는 명칭이 ‘특성화고’로 변경된 지 10년이다. 구시대적인 어감을 걷어내고 취업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다.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는 전체의 4분의 1로 600여개나 된다. 전국에 30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특성화고 현장실습과 졸업 후 직장생활은 인권침해와 차별만이 존재한다. 2016년 5월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곳, 2017년 1월 전주 대기업 콜센터 전화상담을 받던 곳, 2017년 11월 제주도 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작업을 하던 곳. 바로 특성화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하던 곳들이다.

모두 10대 청소년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조기취업의 굴레에서 일하다 산재 사고가 난 곳이다. 산업안전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은 지켜지지 않았고, 학생들은 안전교육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일터에 내몰렸다. 결국 교육부는 올해 안전한 현장실습 제공이 가능한 ‘현장실습 기업 후보군’ 정보를 학교에 제공하고,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업체를 ‘현장실습 선도기업’으로 선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교육 문제에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현장실습만이 아니다. 바로 특성화고를 졸업한 청년들이 일터에서 비인권적 대우나 차별·침해를 더 많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은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실태 토론회를 개최했다. “넌 커피색 스타킹보다는 검은색 스타킹이 잘 어울려” “난 여자를 볼 때 허벅지랑 엉덩이를 제일 먼저 봐”와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특성화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연장근로수당이나 최저임금 미지급 등 임금체불이 37%나 되었다. 또한 “경력조차 없는 특성화고 졸업생” “너희 특성화고 애들 뽑기 싫다” 같은 발언에서는 차별의 심각성(23%)도 확인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 3항에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못하도록 했다. ‘평등권의 침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성화고 현장실습 공간이나 졸업생의 노동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교육청 취업진로부서는 노동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지자체는 학교 내 교육 문제에는 권한이 없다. 노동청은 청소년 문제는 학교의 몫으로 생각하는 눈치다.

오래된 습관은 반복된다. 그건 개인과 조직은 물론 사회도 비슷한 것 같다. 그나마 개인과 조직은 변화와 혁신에 민감하기에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는 청소년과 청년노동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나마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 서울노동청은 ‘특성화고 현장실습 안전노동인권협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노동인권보호와 취업지원 그리고 보호대책이다. 공공행정조직 간 상호협력을 도출한 첫출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가운 것은 ‘노동의 가치 인식과 노동인권 존중 사회’가 조례에 명시된 것이다. 모든 학교에서 노동교육이 의무화되기 위한 지역 차원의 첫 시작이다. 또한 당사자인 특성화고 노동조합과 시·교육청이 정례적인 논의를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흐름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현장실습과 졸업 후 직장의 첫 일터의 안전과 교육훈련 여부 등을 꼼꼼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 주요 국가들은 청소년 노동 규정을 법에 명시했다. 우리는 연소근로자 문제가 헌법 32조 5항에 적시되어 있음에도 무시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청소년과 청년을 포괄하는 노동보호법 제정이 논의될 시점이다. 매년 수만명의 특성화고 졸업생이 사회에 진출하지만, 일부 산재 사고만 언론에 드러난 것이다.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초기 노동시장에서 겪는 차별과 성희롱 등은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왜 산재 사고를 유독 많이 겪고 있는지 우리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자본의 이윤창출 밑바탕에 끊임없이 배출되는 공급처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노동의 가치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하고, 차별 없는 일터는 그 시작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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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슈퍼리그. 말레이시아 프로축구리그의 이름입니다. 2017년 통계를 보면 총관중이 87만2108명이었습니다. 경기당 평균 6607명이 관람한 셈이죠. 2014년부터 우승을 휩쓸어온 조호르 다룰 탁짐(JDT)의 수치를 보면 작년 총관중이 18만7557명으로 경기당 1만7051명의 관중을 불러모았습니다. 비슷한 팀이 한국에도 있습니다. FC서울로 총관중 수 31만61명, 경기당 평균 1만6319명이었죠. 흥행이 비슷하다 싶지만 속사정은 너무 다릅니다.

서울 인구는 990만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500만명입니다. JDT의 근거지 조호르바루 인구는 160만명, 조호르주는 300만명 정도입니다. 광역인구를 비교해 보면 서울이 8배 큰 셈이죠. 한국과 말레이시아 축구 열기가 비슷하다면 서울 평균 관중 수가 지금의 8배여야 맞습니다. 즉 13만명이 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단순한 계산이지만 한국 축구 열기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반대로 말레이시아의 축구 열기를 상상해 볼 수 있죠. 한국대표팀이 말레이시아에 진 것이 놀랍지만 예상할 수 있었던 미래가 온 셈이죠. 

사실 텅 빈 축구장과 꽉 찬 골프장을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점입니다. 축구를 하지 않는 나라에서 축구 관중 수가 급감하는 것이 이상할 게 하나 없죠. 오히려 이상한 것은 축구 열기입니다. 월드컵 때만 되면 광장이 들어차고 ‘치맥’이 동이 납니다. 평소에 축구에 전혀 관심 없고, 심지어 규칙도 모르는 이조차 온몸을 빨갛게 물들이고 소리를 지릅니다. 축구에 대한 애정은 이미 식었으니 그 열기의 뿌리는 아마도 축구는 아닐 테죠.

이는 민족주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감,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을 근간으로 하는 민족주의가 그 뿌리입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긍정적 에너지였을지 모르지만 21세기 한국에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민족주의는 우리가 특별하다는 환상을 만들어주는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양궁, 태권도, 한글, 김치, 첨성대, 직지심체요절, 삼성. 세계 최고, 동양 최고라는 자부심에 감격합니다. 사실 세계 어디를 가도 자랑스러운 유물과 전통 없는 나라는 없죠. 다들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무도 최고는 아닌 셈입니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은 중요치 않죠.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인 것만 자랑스러워할 뿐 그 배경인 고려말 불교의 망국적 행태는 논하지 않습니다. 당시 구시대의 유물이었던 직지심체요절과는 반대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유럽 전체의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일으켰죠. 하지만 ‘우리가 더 빨랐다’는 데에만 만족해할 뿐입니다.

민족주의는 남을 비하해서 우월감을 충족시켜주기도 합니다. 똑같은 동포라도 미국에서 오면 교포고, 중국에서 오면 조선족이 됩니다.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인이 아니면 누구라도 낮게 보죠. 심지어 미국인도 흑인은 ‘깜둥이’라고 비하해 부릅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우리는 무자비합니다. 선장은 선원을 바다에 빠뜨리고, 농장주는 노동자 가슴팍에 니킥을 날립니다. 성추행도 다반사고, 다치면 버려집니다. 휴일·휴식도 제때 보장하지 않고 임금체불도 흔하죠. 심지어 출입국관리사무소 등 권력기관에 의한 폭행과 불법감금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가게에서 나가라고 고함치기도 하고, ‘쟤들은 뭐야’라는 빈정거림은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정 집단을 향한 공공연한 증오발언·폭행 등 이른바 혐오범죄를 규제할 법조차 없습니다. 상식과 인권의 차원은 물론 실질적 이유에서도 이래서는 안됩니다. 2013년 기준 외국인 노동자는 25만여명. 매해 2만건이 넘는 국제결혼으로 2017년 전체 혼인 중 다문화 혼인의 비중은 7.7%. 다문화 학생은 2017년 10만명을 돌파해 5년 사이 2배 증가. 이런 수치만 보더라도 한국은 이민자 없이는 지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국민연금 고갈도 마찬가지죠. 인구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근본적 해결책은 젊은 노동력의 증가이고, 여기에 이민 문호 확대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민 확대, 이민자 보호, 전반적 노동권 확대 등 정부가 할 일이 산적합니다. 게다가 민족주의적 반대와 두려움과도 다퉈야 할 겁니다. 정책을 마련하고 사회 인식을 바꾸는 노력에도 공을 들여야 하죠. 비정부기관의 활동도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국민연금 위기 같은 근본적 위기가 폭발할 한국의 미래는 이미 문 앞에 와있으니까요.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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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적인 것에 대해 애써 외면했다. 국회와 청와대 그리고 정당에서 일했던 경력이 잠시 덮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덮어 둔다고 덮어지는 것도 아닐진대, 2016년 ‘공공의창’이라는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를 만들면서 행여, 과거활동이 발목을 잡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국민의 정치 불신이 크다보니, ‘난 아닌 척’ 벗어나려 했다.

최근 국회의원 특수활동비를 없애라는 국민 목소리가 높았고, 국회는 특수활동비를 전액 삭감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근데 그 결정이 최선이었을까. 국회와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마저도 제도적 하자나 사회적 파장이 큰 문제가 발생할 때면, 개선이나 보완보다는 중단이나 폐지로 결론을 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선택은 여론에 순응하고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론에 밀려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예상 밖으로 이러한 결정의 피해자는 대부분 국민이다. 물론 국회는 특수활동비 외에도 전체예산을 지금보다 더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집행해야 한다. 반면 국회는 민의를 대변하는 곳이며, 여느 기관처럼 일을 잘하기 위해선 투자가 필요한 곳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과 고령화지수. 가계부채는 늘고 고용지표는 악화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능력, 행정능력, 정치능력 중 정치능력이 가장 미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다. 정치능력이 미약한 이유는 서구에 비해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겠으나, 우리의 정치시스템이 미약해서다. 낡은 정치시스템으로는 경제시스템과 사회시스템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다. 국회의원 정수의 부족 또는 지역구 일보다 나랏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부족이 낡은 정치시스템 오작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30년간 국민여론이 바라는 정치개혁의 방향은 언제나 슬림화였다. 애초에 작게 만들어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고 여긴 탓이다. 여기엔 언론도 크게 목소리를 보탰다. 정치는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한 만큼의 정상적인 체격을 필요로 한다. 슬림화된 정치가 뒷북을 치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것 역시 국민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한국사정에서 국회는 국회의원이 소속되어 있는 정당이 주도하는데, 현재 다수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요즘 민주당 지도부 선출을 위한 경선이 한창이다. 이번 주말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된다. 그래서 실무적 경험을 토대로 ‘좋은 정치개혁을 위한’ 5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의원총회 투표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빅 마우스에 의한 당론결정을 줄여야 한다. 의원총회 결정이 당론으로서 민주적 권위를 확보하고 당내분란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전자투표기를 활용하고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기록되어야 한다. 둘째, ‘당론심의위원회’가 필요하다. 당론이 다수의견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동시에 당헌이 추구하는 가치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당론심의과정에서 국민, 당원, 전문가,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도 종합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셋째, ‘합의쟁점승인제도’의 시행이다. 다른 당의 정책일지라도 가치와 정책방향이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조건 없이 신속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여야정쟁으로 법안을 처리하지 못해 국민이 손해 보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다. 넷째, ‘중앙당과 원내의 운영을 이원화’하는 방안이다. 국회운영은 국회의원 중심의 원내가 역할을 다하고, 중앙당은 전국의 당원관리 및 선거준비에 매진하되 국회의원이 관여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회활동이 보다 안정되고, 당원은 국회의원을 견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설득위원회’를 제안한다. 단기적으로는 국민이 손해를 보는 결정 같지만, 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결정에 대해 국민과 적극 소통하는 채널을 확보하는 일이다. 국민이 동의하지 않은 정책에 대해 국민을 설득하는 자리인 만큼, 해당 국회의원에겐 무거운 멍에가 될 수 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여론에 대처하는 방법엔 반드시 단기처방과 장기처방이 동반되어야 한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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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0~26일 금강산 지역에서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린다. 판문점선언 1조 ⑤항 “8·15를 계기로 이산가족·친척 상봉을 진행하기로 하였다”에 근거한다. 상봉순서는 1회차 방문단과 2회차 상봉단의 순차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1회차는 우리 측 방문단 89명이 북측 가족 197명을 상봉한다. 북측이 주관한다. 2회차는 북측 방문단 83명이 우리 측 가족 337명을 상봉한다. 우리 측이 주관한다. 1회에 3일 동안 진행되는 행사의 구체적 상봉시간은 남북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남북한 당국은 제21차 상봉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발전적 개선책에 어느 정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제20차 이산가족 상봉의 경우 12시간의 상봉시간을 가졌다. 1일차 단체상봉 2시간·환영만찬 2시간, 2일차 개별상봉 2시간·공동중식 2시간·단체상봉 2시간, 3일차 작별상봉 2시간 등 총 12시간이다. 이번 제21차 상봉행사에 적용되는 개선책의 핵심은 통관절차의 간소화, 개별상봉시간 확대, 상봉동선의 최소화 등으로 보인다. 거동이 불편한 이산가족들은 차량에 탑승한 채 통행검사를 실시한다. 통관절차의 간소화를 의미한다. 2일차 개별상봉 후 공동중식을 가족별 객실에서 도시락으로 실시한다. 공동중식의 이동시간을 절약하면서 개별상봉시간을 확대한다. 3일차 작별상봉 후 동일 장소에서 연이어 공동중식을 한다. 동선의 최소화를 통한 상봉의 편의성을 보여준다.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다. 1985년 남측 35명, 북측 30명 등 총 65명의 방문단이 상봉과 함께 서울과 평양의 고향을 방문했다. 이후 고향 방문은 사라졌다.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20차례의 대면상봉 행사가 있었다. 4120명의 방문단이 1만9771명의 가족과 상봉했다. 7차례 화상상봉 행사도 있었다. 557가족이 3748명의 가족·친척과 화상상봉을 했다. 남북한 각각 300명씩 600명이 서신교환을 했다. 40명의 영상편지도 교환했다. 20차례의 대면상봉·7차례의 화상상봉·2차례의 생사·주소 확인 기회를 통해 5만7410명의 생사가 확인되었다.

현단계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2603명 가운데 생존자가 5만7059명이다. 연간 4000명 정도가 고령으로 이산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난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보여준다. 연간 100명씩 대면상봉을 한다면 570년이 걸린다. 상봉의 확대가 필요한 대목이다. 80세 이상이 63%를 차지한다. 부부·부모·자녀 관계가 44%이고 형제·자매 관계가 41%이다. 고령화된 어르신과 부부·부모·자녀·형제 관계의 이산가족에게 상봉의 가중치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전산화가 미비해서 사람 찾기가 쉽지 않고, 찾은 사람도 상봉을 기피하기 때문에 규모 확대에 난색을 표한다. 얼굴·옷·신체조건에서 남측 가족들과 비교가 되고, 그런 비교에서 상봉자들이 남측을 동경하게 되는 것을 우려해 규모와 횟수를 제한한다는 분석도 있다. 관심 부족, 행정전산화의 미비, 월남자에 대한 배신감, 양부의 성을 따르는 가족제도의 차이 등이 소극적 태도의 근원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국제사회로부터 정상국가의 정상적인 지도자상이 각인되기를 원한다. 이산가족에 대한 정치적 접근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접근을 한다면 원하는 것의 달성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생사·주소 확인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남북한은 생사확인 의뢰서를 교환하고, 생사와 주소가 확인되는 대로 그 결과를 조속히 회보해야 한다. 주소가 확인되고 이미 상봉을 경험한 사람을 대상으로 매월 서신과 영상편지 교환을 실시해야 한다. 금강산면회소의 정상화를 통해 상봉의 정례화도 이루어져야 한다. 추석과 설 등 민족 명절을 계기로 고향 방문과 성묘가 추진되어야 한다. 이산가족들의 편의도 고려해서 개성·파주 지역의 출퇴근 상봉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북측이 인도주의적 접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측은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대화와 교류를 지속하면서 신뢰를 쌓고, 비핵화가 진전되면 최우선적으로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의 의미는 적지 않다. 개인 차원에서는 아픈 상처를 달래면서 혈육의 정을 찾는 의미이다. 민족 차원에서는 동질성 회복과 민족화합의 의미를 지닌다. 평화통일 차원에서는 작은 통일이 하나씩 이루어져 가는 의미가 담겨있다. 9월 중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세 번째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올해의 가을맞이 또는 내년의 설맞이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예상된다. 상봉인원을 남북이 각각 200명으로 확대하고, 2차 후보자의 생사확인 인원도 3배수로 증대시키고, 자유상봉을 포함한 상봉시간을 확대함에 있어 북측을 설득하는 적십자사의 충분한 준비가 요구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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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문화연구자들이 2년마다 모여 동시대 문화의 주요 이슈들을 토론하는 ‘크로스로드 콘퍼런스’가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다. 기조연설에서 런던 소아스대학의 가이 스탠딩 교수는 ‘약탈자본주의하에서 프레카리아트: 왜 기본소득이 필수적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이 시대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노동자들이 처한 곤란을 말하면서 임시직 노동 양산에 따른 소득 불안정으로 인해 삶의 기본 토대가 무너진 전 지구적 착취의 상황을 기본소득의 구현을 통해 극복하자고 주장했다.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기본소득의 재원은 임시직 하층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축적한 불로소득을 환수함으로써 충분히 가능하다. 노동의 정의, 분배의 정당성, 삶의 가치를 위한 기본소득 운동은 새로운 시대의 진보와 그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문화연구자들에게도 필수적인 논쟁거리다. 

기조연설이 끝난 직후 ‘예술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발표해야 하는 나에게 가이 스탠딩 교수의 기조연설은 프레카리아트 예술인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예술과 젠트리피케이션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예술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촉매자이자 희생양이 되는 역설이다. 이런 현상들은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일반적인 폐해 중의 하나이다. 쇠락한 도시의 한 지역에 예술인들이 모이는 것은 대체로 그곳이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다. 가난한 예술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벌인 소박한 작품 활동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카페가 생기면 가난한 예술인들은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그곳을 더 이상 사수하기가 어렵게 된다. 예술인은 도시공간 고급화의 촉매자이자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의 젠트리피케이션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인이 고급화와 양극화의 해당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예술 젠트리피케이션은 예술인의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문화자본은 예술의 미적 취향을 고급화시켜 예술시장 자체를 양극화시켜버린다. 돈이 되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 돈이 되는 예술은 소수의 예술인들에게 집중한다. 뮤지컬에서 주인공과 단역 무명 배우들의 출연료 차이는 작게는 수십배, 많게는 수백배가 난다. 출연진 100명 중 주연급 3~4명의 총 출연료는 나머지 배우들의 출연료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다.

한국에는 가난한 예술인이 많다. 2016년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서울형 예술인 희망플랜’ 보고서를 보면, 청년예술인 1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가 있다. 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총수입이 50만원 미만이 경우가 무려 86%이다. 예술인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오히려 그들은 창작을 위해 이러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면도 있다. 어떤 청년예술인은 자신의 삶과 활동에 대한 깊은 고민 끝에 안정적인 직장과 고소득의 레슨을 포기하고 창작, 제작, 기획 같은 일들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의 통장 잔액은 늘 마이너스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프레카리아트 예술인들에게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본 생계 조건만 국가가 보장해준다면, 한국에서 예술하기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최근 정부와 서울시는 프레카리아트 예술인들을 위한 사회보장 제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예술인을 고용보험에 의무가입시키기로 했다. 서울시는 예술인의 주거를 안정되게 만드는 공공임대주택을 확대 보급할 예정이다. 창작지원 이전에 생계지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자유와 삶의 행복을 위한 기본소득의 실현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적인 소득의 확보는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존재를 높이는 창작의 권리이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 :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ario, 불안정한)’와 독일어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 노동자 계급)’를 합성한 신조어.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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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도 한때는 고통의 신정론을 말했었다. 한민족이 겪은 모든 고난이 사실은 한민족을 단련시키기 위한 신의 섭리라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암울한 일제강점기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연재한 조선역사가 대표적인 예다. 조선역사는 굴욕과 좌절,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 맡겼던 사명을 망각하자 고난을 주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해 민족에 재생의 기회가 온 것이니 고난을 일종의 시험으로 받아들이자.

이제 이러한 고통의 신정론을 말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다. 오히려 복을 베풀기 위해 고난을 내려주었다는 것으로 변질되어 나타난다.

국무총리 후보에 올랐다가 낙마한 문창극이 2011년 온누리교회에서 행한 연설은 한국 사회에 주류로 자리 잡은 기독교 집단의 뒤틀린 고통의 신정론을 민낯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내가 불쌍해서 독립을 시켜줬지만 아직도 너희들은 더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어. 아직도 너희는 게으른 죄 깨끗하게 안된 거야. 분단을 시킨 거예요. 분단을 시킨 것이 지금 와서 우리한테,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이 이 정도 살게 되는 거예요. 만일 그때 공산주의가 됐으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함석헌의 고통의 신정론이 신이 부여한 소명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문창극의 고통의 신정론은 현재 누리고 있는 행운을 극단적으로 극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믿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으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다. 가난에 허덕거리는 북한 인민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운인가! 고통의 신정론이 행운의 신정론으로 재빠르게 변신한다.

우리는 종교인이라면 마땅히 초월적 이상에 비추어 현세를 비판하고 변화시키려 노력할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행운의 신정론에 빠진 기독교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현세를 살아가는 것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한 주류 기독교 집단은 자신들이 누리는 행운이 왜 마땅한 것인지 정당화하는 데 온정신이 팔려 있다. 세상이 부조리하거나 악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복을 누리려고만 할 뿐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요만큼도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다.

현세의 삶의 질서와 모순되는 고차원적인 규범적 질서가 없으면 현세를 사악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현세를 넘어서는 더 좋은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현세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모순을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는 일이 벌어진다. 청문회 때마다 노상 나타나는 단골 인물군.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자임하고 말끝마다 법치를 외치면서도 현세에서 온갖 편법을 통해 출세하는 자들. 그러면서도 아무런 모순과 분열을 느끼지 못하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행보.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소멸.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종교 관념과 실제의 삶 사이에 체계적이고 일관된 관계맺음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상 한국 개신교에는 거의 아무런 터부가 없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신탁을 상징이 아닌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거나 상가에 가서 영정에 절하지 않는 등의 소극(笑劇)만 빼면.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에게는 주술이 아닌 종교 윤리에 의해서만 행위를 조절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아무것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진화할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의 현시(顯示)인 현세의 성공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그 어떤 터부도 다 깨트릴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셈이다.

세계 최대 장로교회인 명성교회에서 부자 세습이 버젓이 합법화되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라 신앙 고백하기에 바쁜 주류 기독교 집단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기독교는 한때 세습질서의 질곡을 깨트리는 복음이었으나 지금 온 나라에 유사 세습질서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가득한데도 복된 소리를 전혀 전하지 못한다. 고통의 신정론을 되살리는 진정한 복음이 필요한 때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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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 59주기 추모제에 다녀왔다. 해마다 7월31일, 당신이 사형당한 시각인 11시에 맞춰 추모제가 열린다. 그 시각 서울광장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이자 동지였던 고(故) 박정기 선생의 노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7월은 유난히 기억해야 할 죽음이 많다. 여운형 선생이 7월19일, 작가 최인훈 선생과 노회찬 의원이 7월23일, 박정기 선생이 7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죽산 선생 추모제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 10년이 훨씬 넘다 보니, 이제는 조금씩 일도 거드는 사이가 되었다. 어떤 행사에 꾸준히 나가다 보면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신경림 선생이 죽산의 장례 풍경을 묘사한 작품 ‘그날’에서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던 젊은 여자는 생전의 죽산을 닮은 따님 조호정 여사였다. 해마다 나오셨지만, 이제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몇 해 전부터는 뵐 수가 없다. 그사이 돌아가신 분들도 꽤 된다.

내가 노회찬 의원과 처음 대면한 곳도 2012년 죽산 추모제 자리에서였다. 조봉암 선생은 이 땅의 민중과 진보정치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진보정치인 중에 당신의 추모제에 직접 찾아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투쟁했던 까닭에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분이었기에 엄혹한 시절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2011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억울한 누명이 풀리고 무죄가 확정되면서 추모 화환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문재인 대통령의 화환이 왔지만, 죽산의 서훈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가로 고초를 겪고, 건국과정에서 제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토지개혁을 한 죽산이지만,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1941년 12월23일자 단신 기사를 문제 삼아 서훈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인천 서경정(지금의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죽산의 주소가 부평이었다는 기록, 그런 거금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과 이만한 인물이 단신 처리되었겠냐는 의문이 있음에도 국가보훈처는 유가족에게 자료를 보완해 제출하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얼마 전 EBS에서 정부의 서훈제도를 집중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건국 이래 우리 정부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수여한 훈장은 총 222명 440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친일파 경찰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고,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의 비호 아래 반공투사로 변신하여 반민특위 주요 인사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으며, 약산 김원봉 선생을 잔인하게 고문한 노덕술도 세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가를 학살하고, 해방 후에는 국군으로 변신하여 일본도로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지른 김종원에게 우리 정부가 수여한 훈장은 무려 10여개에 달한다.

역대 대통령의 셀프 서훈도 문제지만, 일개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수여하는 청룡봉사상 수상자에게 1계급 특진을 주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이 상의 충(忠) 부문 수상자 중 상당수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았던 이들이며, 그 가운데에는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포함되어 있다. 고문조작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뒤에도 조선일보는 수상을 취소하기는커녕 이후 수상자에 대해 보안상 이유를 들어 익명으로 시상하고 있다. 조봉암 묘소 앞 비석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가 훈장 받자고 독립운동을 하고, 독재와 싸우고, 평화통일을 외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나는 지금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 누구를 위한 나라인지 알고 싶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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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언론 기사들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심각성을 언급하고, 방송은 영세자영업자 생존과 존폐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사 모두 최저임금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경영계는 최저임금위원회 회의에 불참하고, 10.9% 인상이 부당하다며 정부에 이의제기까지 했다. 노동계 또한 정기상여금과 복리후생비가 포함되자 ‘사회적 대화’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이렇듯 최저임금 논의 과정은 저신뢰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 학자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사실 협력이란 타인과 함께 상호 이득이 되는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저임금 논의는 노사 간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대립된다. 이 때문에 국가는 공동의 과제일수록 이해당사자가 참여한 거버넌스를 통해 결정해왔다. 특히 노·사·정 3자가 논의하는 사회적 대화기구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공간이 된다. 이 때문에 논의 의제로는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정책들이 다루어진다.

사회적 대화기구는 최선의 대안적 사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재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최적의 규칙을 만들 수는 있다. 독일은 2002년 사회적 대화에서 직업훈련을 받지 않은 청년실업자, 초과노동의 축소,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제한, 신기술과 혁신지원을 위한 사회투자 등을 논의했다. 우리도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출범한 것이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노사정위원회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 대표가 사회적 협약을 체결(1998·2·6)했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사회 불평등과 양극화가 더 심각해졌다. 무엇보다 산업구조조정과 비정규직 고용 등 노동시장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당시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뚜렷한 해법을 갖고 있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은 많다. 물론 출산휴가 확대나 교원과 공무원의 단결권 보장과 같은 노동기본권이 한 단계 신장된 시점이기도 하다. 그나마 의미 있는 논의는 주5일제 시행과 같은 노동시간 단축 합의였다. 시간이 흘러 올해 7월 조직 명칭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바뀌었다.

언제부터인가 기업 내 권고사직과 희망퇴직은 일상화되었다. 일터에서 쫓겨난 자들은 치킨, 피자, 편의점 등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가족과 개인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때문에 회사의 ‘갑질’과 같은 비인권적 억압에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협력적 이타주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운지도 모른다.

과거 보수정부 시기에는 정부와 기업이 한편이 되어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조건을 형성하는 데 사회적 대화기구를 활용했었다. 그래서 사회적 대화 공안은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노사 모두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충격적인 사실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인력이 파견 공무원(11명)을 제외하면 전문인력 12명과 지원인력 9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년 예산도 41억원(사업비 33억원) 남짓이라고 한다. 이런 조건에서 미래 노동 의제들까지 논의된다고 하니 그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이타적 협력을 지속시키는 사회적 대화 모델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무엇보다 정부가 지속 가능한 게임의 룰을 만들고, 이해당사자들에게 참여 동기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중앙과 지역의 협력적 노사정 대화 틀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방법이다. 때론 분권적·사회적 대화가 강한 제도적 상호의존성을 발현시킬지도 모른다. 아마도 취약노동자의 사회적 보호 접근성을 높이는 것, 노동시장에서 빈곤과 불안정의 덫 그리고 불편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을 논의 의제로 시작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도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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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신러닝을 활용하면 요즘 몰두하고 있는 연구과제의 단순한 작업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웹 검색을 하다가 깔끔한 설명을 해놓은 블로그를 발견하였다. 블로거는 머신러닝이 무수한 첨단기술로 범벅이 된 무슨 도깨비방망이 같은 게 아니라 데이터에서 어떤 패턴을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자신을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라고 밝힌 그는 머신러닝이 수학과 통계학을 기초로 하는 ‘학문’ 영역이지 세간의 오해처럼 절묘한 어떤 ‘기술’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으니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나, 시장에서는 기술로 오해하여 단기간에 노하우를 알려 달라고 조르는 어처구니없는 요구가 많고, 그래서 ‘수학과 통계를 몰라도 4주 만에 익히는 머신러닝’이라는 사기와 같은 강좌들이 쏟아진다고 비판한다. 수학이나 통계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누군가가 만들고 증명한 공식으로 열심히 계산만 하는 공학도들이 이런 상황에 일조하고 있다는 촌철살인에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냉소적인 비판에 놀라서 블로거가 어떤 내공을 쌓아왔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국내외 대학원에서 통계학, 시뮬레이션, 머신러닝에 이르는 긴 학문적 여정을 거쳐 수학과 통계학에 녹아날 정도로 고생고생하며 데이터를 다루는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과 그렇게 훈련받고 제대로 성장한 인재가 어떤 잠재력을 지니는지 알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살짝 불편함이 남는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하여 도달한 경제학의 계량분석은 현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을까.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다. 최소한, 개발주의로는 오염되지 않는 시정을 펼쳐주리라 믿고 지지했던 지자체장이 서울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을 재개발하여 한국의 맨해튼으로 만들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여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고, 여론전에 밀린 탓인지, 아니면 정책이 유효하지 않다고 검증된 탓인지 정부는 최저임금 정책을 슬그머니 후퇴시켰다. 경제학은 대체로 개발주의를 옹호하고 소득주도성장이나 복지정책에 대해 배타적인데 결국 이를 넘지 못한 것처럼 여겨져 씁쓸하다.

국내외 여러 사례를 보면 도시개발이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흔한 주장과 달리 대규모 개발은 경제침체의 원인일 수 있다. 개발사업은 인플레이션을 불러오지만, 지속적 소득증가를 가져오지 않는다. 자칫 부동산으로 막대한 소득이 몰리면서 중장기적으로 가계소비의 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 대공황, 일본의 버블붕괴, 최근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는 부동산 과잉투자이다. 한편 소득주도성장은 일반 대중에게 재화를 소비할 여력이 있어야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개발주의의 위험이나 소득주도성장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복지정책이 수학으로 단련된 경제학자들에 의해 번번이 부정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수 없이 많은 천재와 수재들이 수많은 증명을 하면서 여러 진보적인 도전과 맞서 싸우며 키워 온 세계일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경제학이 지니는 수많은 약점과 그에 대한 도전을 보완하고 흡수하면서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답이 나오게 진화한 자가증식체계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경제학자가 된 사람들은 가치를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순수하게 객관적 자료만으로 분석하였으니 경제학이 내놓는 답이 정답에 가깝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무한경쟁과 자본의 효율이 진리라면 이보다 더 암담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끔 경제학이 쌓은 현란한 분석방법에 기가 눌리지만, 내놓는 답들이 하나같이 자본에 유리한 게 많고, 그래서 경제학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가 추구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부유해지기 위한 철학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무식한 공돌이란 비판을 받더라도 계속 도전을 이어가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어 보인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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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정당성은 “사리에 맞아 옳고 정의로운 성질”을 뜻합니다. 한 집단의 정당성은 사회에서 주어진 몫을 다함으로써 얻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잘 가르칠 때, 의사는 환자를 돌볼 때 우리는 그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죠. 학생 성 학대, 의료사고가 불거질 때마다 정당성이 약화함은 당연합니다.

군대의 정당성은 특별합니다. 그들이 가진 폭력의 독점 때문이죠. 외적의 위협을 막는 대신 가공할 살인 무기를 지니고 거대한 조직을 유지할 정당성을 가집니다. 그 정당성이 흔들리는 순간 군은 소임을 하기 힘들어질 뿐 아니라 사회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존재 이유마저 의심받을 수밖에 없죠.

이석구 기무사령관(오른쪽)이 20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 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한 후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권호욱 기자

1950년 여름 한국군은 치욕적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서울을 적군에 내주었고, 한강 다리를 끊어 수많은 피란민을 죽였습니다. 미군 덕에 낙동강 전선을 겨우 지켰고,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간신히 전세를 역전했죠. 작전권을 다 내준 군은 그렇게 오욕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외국군에 기댄 초라한 초상화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국방비의 여러 배를 … 한두 해도 아니고 근 20년간 이런 차이가 있는 국방비”를 쓰고 있는데도 국방력이 약하다고 징징거리며 “미국한테 매달려서, 미국 뒤에 숨어서” 있는 군, 2006년 당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증언한 모습이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외적’을 막는, 가장 중요한 사명을 온전히 못하는 군대입니다.

기본적 사명이 뒷전이니 심심한 걸까요. 수십억원대의 방산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왔죠. 음료수 하나라도 건네지 않고서는 일이 되지 않는 일상적 부패도 군을 뼛속까지 오염시켰습니다. 고질적 병영 내 폭력은 또 어떤가요. 보도되지 않는 폭력과 인권 유린이 얼마나 흔한지 다 압니다. 이런 군대니 사고가 잦은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가장 최근 해병 헬기 ‘마린온’은 회전날개가 빠지는 어이없는 사고를 내며 5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마린온의 모델인 ‘수리온’ 헬기도 이미 몇 년 전에 기체 및 엔진 등의 결함으로 안전사고가 잇따랐고 조사 후 검찰에 수사 의뢰하는 등 조처가 내려진 기종이었습니다.

이런 군대지만 유독 시민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제주 항쟁에서 약 3만명의 시민이 군경의 손에 학살을 당했습니다. 4월의 혁명은 박정희 소장의 탱크로 좌절됐고 1980년의 봄은 전두환의 헬기로 쓰러졌죠. 이런 삐뚤어진 전통은 민주화로도 꺾을 수가 없나 봅니다. 이들이 또다시 국민을 짓밟으려 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기각을 전제로 군은 서울 광화문·여의도에 장갑차를 배치하고 국회와 언론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정부조직을 장악하고 평화적 시위를 진압할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죠.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계엄사를 편성하고 3사관학교 출신인 이순진 합참의장을 배제한 흔적도 보입니다. 계엄이라기보다는 친위 쿠데타에 가까운 사태가 날 뻔했지만 이를 보고받은 현 국방부 장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죠.

누구의 변명대로 비상사태를 대비한 계획일 뿐이었다고 해도 사태는 심각합니다. 당시 서울 시내는 시민의 성숙한 시위로 평화롭기만 했죠. 협박은 박근혜 지지층에서 나왔고, 위험은 박근혜와 그 측근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군이 나서서 처리할 어떠한 위협도 없었죠. 그러니 당시 군의 근심은 국민의 안위가 아닌 박근혜의 안녕이었던 겁니다.

부패와 각종 문제로 곪을 대로 곪은 군은 외부의 위협을 처리할 능력도 의사도 없어 보입니다. 오직 정권을 위해서만 총칼을 휘둘러 왔죠. 시민은 군의 보호 대신 협박과 폭력에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런 군대에서 “사리에 맞아 옳고 정의로운 성질”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진 듯합니다. 오늘 기무사 계엄 문건 사태는 이런 현실의 작은 예일 뿐입니다. 그러니 기무사 ‘개혁’을 떠드는 소리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요. 그 개혁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지만, 설사 개혁이 이루어저도 충분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죠.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군이 정말 필요할까요. 2년씩 청춘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대답을 기다려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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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덥다. 상당수 국민은 온종일 밖에서 일하거나, 전기료 무서워 에어컨도 제대로 켜지 못하고 있을 거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날씨는 임금님 성정과 통치의 결과물이었다. 수해든 풍년이든 마찬가지. 이런 세태는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많이 줄었다. 그 이유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성적 판단을 통한 합리적인 선택이 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합리적 선택이 필요해 이성적 판단이 동원됐을 수도 있다. 국민 입장에서 국가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 결정하는 능력과 결정된 일을 집행하는 능력이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 둘 다 중요하지만, 단연 결정능력이다.

아침 최저기온이 111년 만에 최고를 기록한 23일 서울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지역본부의 전력수급 현황 모니터에 전력 공급예비율이 9.9%로 표시돼 있다. 올해 들어 전력 예비율이 10% 밑으로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연합뉴스

이번 국회 전반기. 의원발의 법률안은 1만3000여건. 그중 처리 건수는 3500여건이다. 역대 국회 중 발의 및 처리 건수가 최고치라고 한다. 이에 비례해 행정부 법률안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물론이고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등 크고 작은 의사결정이 수없이 많다. 의사결정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양도 문제지만, 결정의 질은 어떨까. 대의제와 전문성만을 중시하기엔, 다양하고 복잡하게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어떻게 하면 많은 양의 질 높은 의사결정이 가능할까. 국가의 의사결정시스템이 임계점을 맞이하기 전에, 국민 참여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슈가 국민의 삶과 직결된 만큼, 직접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때 최적화된 의사결정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공론조사 창시자인 피시킨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일반시민에게도 공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꼭 공론조사가 아니더라도, 여러 형태의 숙의와 토론이 가능한 의사결정 방식이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이슈에 대한 국민반응을 소개하고자 한다. 판단의 권위나 전문성보다 더 중요한 관점, 즉 어떤 각도에서 이슈를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녹아있다. 예컨대 논의가 지속되고 있는 낙태 문제는 요건 완화 찬반여부가 관건이다. 태아의 생명권, 임신부 및 부모의 자기결정권, 태아와 임신부의 건강권 등이 첨예하게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의 이면엔 찬반을 넘어 매우 시급하고 개선해야 할 세부 문제가 도사린다. 수술환경이다. 합법적 낙태든, 불법적 낙태든 정상적인 수술환경에서 임신부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 제주 예멘난민 수용여부로 촉발된 난민이슈도 난민의 국내범죄율이 내국인범죄율보다 낮다는 사실 외에, 제주도의 5대 강력범죄 발생건수가 매우 높다는 현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당위론적 입장이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할 수 있어야 반대편에 서 있는 시민들도 비인도주의자로 낙인찍지 않고 함께할 수 있다.

종합부동산세 개편도 비슷하다. 국민 다수는 공평과세를 원했다. 진짜 공평과세. 공시가격 현실화 없는, 공정가액제의 폐지 없는 공평과세가 어떤 의미인지 되묻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이 이슈야말로 다양하고 복잡한 국가대표급 이슈다. 누군가에겐 불평등 완화를,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는 조치다. 현장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통계와 데이터만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왜 최저임금 인상에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줄어드는지 말이다.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또 다른 누군가의 고용원은 아니었는지, 인건비 부담의 부당한 전가가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자영업자 고용보험가입률이 1% 내외인 상황에서 안전망 없이 내몰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사전에 살피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도 이전보다 최저임금 인상이 큰 폭으로 진행된다면, 자영업자 고용보험가입의 단계적 의무화 및 그에 따른 높은 수준의 정부 부담률이 필요할 수 있다. 국민은 많은 이슈들 속에서 살고 있다. ‘국민은 바빠서’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촛불로 확인됐지만, 국민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럼 국가는? 국가능력은 국민소통에 달렸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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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비핵화 속도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북·미 비핵화 회담 빠르기가 3단 기어로 놓고 가다 갑자기 1단 저속으로 변경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젊은 독재자가 비핵화 변죽만 울리면서 ‘미 제국주의’ 지도자를 시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눈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

오죽하면 한때 회자됐던 ‘믿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가 아닌 이제는 ‘불신하고,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는 신문 사설까지 나왔을까. 심지어 김정은과 비핵화는 장례식장과 나이트클럽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단어라고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다분히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누가 애초에 비핵화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는지 책임 따위를 묻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선의’가 퇴색한 것은 분명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지난 7일 북한 평양 순안국제공항에서 출국 직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에서 두번째)과 악수를 하고 있다. 평양 _ AP연합뉴스

급기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비핵화 로드맵을 갖고서 지난 6일부터 1박2일간 또다시 평양에 다녀왔다. 세 번째 방북이다. 하지만 폼페이오는 비핵화 시간표 합의는 고사하고 김정은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북한 내 미사일 엔진 실험시설 폐쇄에 대한 실무급 회담을 구성키로 합의한 게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청와대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언급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됐다.

돌이켜보면 6·12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언어는 가난했다. 최고 수뇌부가 최초로 대좌하여 70년 적대관계 종식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성을 감안할 때 A4 두 장 분량의 합의문에 담긴 단어들은 종이의 두께보다 더 빈약했다. 비핵화가 덜 강조되었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양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체제로 나아가자는 역사적 대전환을 알리는 공식문건인 공동성명에 서로에게 남겼던 상처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 그리고 미래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내용을 담은 별도의 비밀 합의사항이 존재한다면(있기를 바란다) 총론으로서의 공동성명은 더욱 그랬어야 옳았다.

이제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 대신에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를 브랜드화하기로 정한 것 같다. FFVD 전에는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PVID)도 있었다. 언어의 유희다. 비핵화가 이렇듯 외교적 수사로만 달성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정은이 더 이상 꾸물대지 않고 약속대로 핵을 포기할 것으로 굳게 믿는다면 트럼프 역시 선제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조기 종전선언 가능성을 슬쩍 내비쳤던 트럼프가 아닌가.

마침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2일 싱가포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27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대로 올해 종전을 선언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면서 종전선언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등을 견인할 정치적 선언으로 규정했다. 다시 끈을 조여매고 잠시 주춤했던 비핵화 속도를 힘차게 견인해 나갈 태세다.

비핵화는 지금까지의 북한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지울 수 있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힘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비핵화의 매듭을 푸는 게 쉽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를 제때에 제대로 풀어야만 경화(硬化)된 북한의 동맥이 풀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핵화 성공 여부가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남·북·미 3국은 이제 달아날 수도, 숨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비핵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말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시설 동결, 신고 및 불능화, 검증 및 폐기 등은 과정이 복잡하고 험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요소가 실질적 이행조치들이다. 비핵화가 붕어빵 찍어내듯 단순한 작업이 아닌 이유다. 미·중 무역전쟁이라는 돌발 악재가 생기기는 했지만 오는 9월 유엔총회를 기회로 역사적인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도록 유관 당사국들이 마지막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게 해야 한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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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다툼이 생겨요.”

전업주부로 살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오십대 중반의 제자가 괴로움을 토로한다. 아이 낳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시부모 봉양하고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죽 살아왔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사회학을 시작했는데 공부할수록 그동안 잘 지내왔던 주변 사람들과 자꾸 부딪힌다. 그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삶은 명확하다. 현모양처. 다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붙인다. 개인의 목소리를 도저히 낼 수가 없다.

한 지방대생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때는 남녀 차별을 잘 모를 정도로 남자애들과 어울려 지냈다. 집에서도 큰 차별을 못 느끼고 자랐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때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윽박지르는 아버지에게 못 이겨 인문계를 포기하고 상고에 진학했다. 가부장이 진짜 가부장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족을 온전히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평생 성실하게 살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 안에서 절대 권위를 휘두른다. 맞서 봐야 좌절감만 느낀다.

상고 진학 이후부터는 가부장제 아래 여자에게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살았다.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하고,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1년 연애 후 스물두 살에 결혼하고, 첫아이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며 전업주부로 지냈다. 하지만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는 돈 벌러 나가야 했다. 현모양처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남편의 경제 능력이 변변찮았다. 회사에 들어가서 내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말단직원에 불과했지만 점점 인정을 받고 나중에는 거의 오너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진짜 오너는 아니었다. 오너와 마찰이 생겨 결국 10년 이상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전도하러 온 사람을 따라 종교를 믿게 됐다. 힘을 얻어 다시 일을 구했다. 그곳에서도 성실하게 일했더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다.

이제 삶을 되돌아보니 큰 후회 없이 모두 다 잘되었다.

“살아가는 거 중에 그냥 하나하나 지나가는 것들이 그냥 우연 같지만 다 필연이라는 거지. 어떤 한 시점에서 이 과정들을 쭉 봤을 때.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

행운의 신정론! 내 의지나 행위와 무관하게 얻은 행운의 비합리성을 합리적 언어로 정당화한다. 과거 힘들 때를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눈물겹도록 행복하다. 그런데 이 행복이 사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얻게 된 행운에 가깝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자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왔더니 결국 인생 중후반에 행운이 깃든 것이다. 지금은 살아온 날들 중 어느 때보다도 좋다.

“이제 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까 그것도 좋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좋아. 하루를 잘 살고 싶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딸들이 격하게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행운의 신정론에 빠져 있는 엄마들은 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부조리하다거나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해하려면 우선 주어진 세계를 넘어 이상적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긍정적 언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 언어를 준거로 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보아야만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현재 사회과학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페미니즘 책들이 수위를 다투고 있다. 그만큼 딸들이 자신들이 받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해 달라는 거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CEO 총장이 장악한 대학에서는 페미니즘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취업이 존재 이유가 된 대학은 기업이 싫어하는 인재를 키울 수 없다며 그나마 있던 페미니즘 강의마저 없앴다. 어느 여대에서는 여성학을 여성지도자 과정으로 슬그머니 바꿔쳤다. 이러는 사이 젠더 분리주의와 남녀혐오라는 부정적 언어가 기승을 부린다. 행운의 신정론에 올라탄 악한 가부장제 습속이 일상을 지배한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긍정적 언어를 제대로 가르쳐 일상의 ‘평범한 악’과 다투게 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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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즈음,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명동성당에서 친구들과 농성 중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더는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란 단체를 만들어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그해 12월 명동성당에 들어갔다. 농성을 준비하며 우리는 어설프게나마 죽음을 각오했었다. 87년 선거에서 그들이 패배한다면, 5월 광주 같은 일이 어디선가 또 일어나게 될 거로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이 승리한다면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계엄령이나 최소한 위수령 같은 사태가 발생하리라 예측했다.

12월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투표 유권자의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시작해 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이 추구했던 민주정부 수립은 결국 전두환과 함께 12·12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투표권도 없던 고등학생으로서 나에겐 평생 씻을 수 없는 좌절과 굴욕으로 남은 역사였다.

87년의 좌절을 경험했기에 2008년의 촛불집회와 2016~2017년 촛불집회에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참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시위만으로 세상이 바뀔까, 저들이 이 목소리를 들을까 싶었다. 광화문 버스 장벽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내내 가슴 답답했다. 그러나 아이와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평화롭게 오가면서도 1987년의 경험이 있었기에 군부가 전면에 나설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바로 그 시각, 기무사에서는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 이에 불복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될 것으로 예측하여 위수령을 발령하고, 위수령 상황에서 군이 폭행을 당하거나 진압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계획했다. 그 뒤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령 상황 아래 군이 정부부처·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제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IT강국을 자부하는, 올림픽과 월드컵은 물론 6월항쟁을 치른 나라에서 ‘군부쿠데타’를 통해 권력 유지와 연장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난 정권들이 내보인 블랙리스트나 여러 정치공작을 보건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리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기무사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상대로 계엄령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한편으로 시대착오적이며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앞세운 시위대가 노동자의 죽음을 조롱하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단체로 회장 찬가를 부르게 하는 경영자가 경영수업 받는 자기 딸은 예쁘게 봐달라며 고개를 조아린다. 또한 난민에게 보내는 우리의 쌀쌀맞은 시선을 생각해보면 민주시민의 자부심은 섣부르다.

압축적 근대화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역사적 시간에 등장하는 요소가 동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각축을 벌이며 사회의 상을 만들어내는 법이지만, 우리는 과거에 해결했어야 할 전근대적 요소들까지 살아남아 근대적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들과 함께 동시에 경합하는 중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적폐의 내용이다. 과거 우리가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들은 언제라도 망령처럼 되살아나 오늘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기무사 문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80년 5월 광주와 87년 6월항쟁, 2017년 대통령 탄핵 같은 극적인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 스며있는 적폐청산이란 과제는 분배구조의 개선, 노동자 지위 향상,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보호 등 민중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정치적으로 담아내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없다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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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 이후 지자체 단체장들이 업무를 시작했다. 언론 기사들을 보니 기존 단체장이 연임한 곳도 있지만, 신임 단체장도 많은 것 같다. 몇몇 지역은 인수위원회를 최소 규모로 꾸렸지만, 어떤 곳은 대규모 조직으로 출범하기도 했다. 각 지자체 인수위원회 명칭에는 ‘새로운’ ‘변화’ ‘혁신’ ‘소통’ ‘참여’ ‘시민’ 등이 담겼다. 아마도 이전과는 다른 지자체 철학과 정책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각 지자체 위원회는 향후 민선 7기 4년 동안 진행될 지자체 비전과 목표 그리고 로드맵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 두 달 동안 조직파악과 공약사항을 정책화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주요 광역과 기초 지자체 공약을 보면 경제, 일자리, 복지만이 아니라 청년과 4차산업과 같은 정책들도 녹아들어 있다. 그만큼 현실 상황을 반영한 것 같다.

최근 몇몇 지자체들은 지역 차원의 노동정책에 관심을 갖고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바로 서울, 광주, 경기, 충남과 성남, 아산, 안산, 부천 등이다. 그동안 지자체 노동정책은 거의 전무했었다. 일자리정책은 경제나 산업정책의 하위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나마 조례 제정, 행정조직 설치, 정책과 사업, 지원센터, 거버넌스 운영 등 노동행정의 기본 골격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은 서울시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서울시 노동행정은 향후 4년 동안 25개 자치구와 거버넌스를 통해 보다 깊고, 넓은 노동정책으로 펼쳐질 것 같다.

촛불항쟁 이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하고 있다. 아마도 분권화 시대에 지방정부의 노동정책 역할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향후 지방정부의 노동정책은 중앙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노동의 사각지대 해소를 목표로 할 것 같다. 지속 가능한 노동정책은 사회적 대화를 통한 공론의 장 형성과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논의구조 속에서 가능하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좋은 일자리 프로젝트’가 시행 중이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생활임금, 기본소득 그리고 프리랜서나 플랫폼 노동의 보호와 같은 의미 있는 정책들도 있다.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에서 실험 중인 정책들이다. 경제가 발전하고, 부는 더욱 증가하고 있는데도 소득 불평등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도시 정부의 새로운 대안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지자체 공무원들은 ‘노동’ 문제를 고용노동부 소관 업무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반면에 서울시는 지역의 노동정책에 관심을 갖고 협치 모델을 추진하고 있다. 2011년 ‘노동존중특별시’를 선언하고, 지난 6년 동안 지역의 ‘노동행정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듯하다. 앞으로 서울시는 분권화 시대의 노동정책으로 ‘유니언시티’(Union City)를 표방하고 있다.

유니언시티는 지방정부에 특화된 노동정책 모델로 ‘노동존중 도시’를 뜻한다. 무엇보다 지방정부도 지역 차원의 보편적 노동기준을 수립하고, 노동자들의 존엄과 행복을 적정 수준에서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지방정부가 보호를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의 이해대변이 가능하도록 노동조합과 사회적 계약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유니언시티는 이제까지 시각지대에 있던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 등 취약 노동자들도 단결권 등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 향유되는 도시를 의미한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리처드 프리먼 교수의 한 논문은 의미심장하다. “노조 가입률이 높은 도시 지역의 저소득층 아이들일수록 더 높은 계층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주요 국가들의 부는 상위 1%가 전체 총소득의 5분의 1을 가져가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부가 증가한 나라에서조차 빈곤 축소는 매우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도시에서 ‘일의 불평등’은 지금까지 다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불평등과 차별 해소를 위한 지역과 도시의 역할로 ‘포용도시’를 제시한 바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9년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의미 있는 내용을 준비한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중앙과 지방이 상호 협력해 분권화 시대의 새로운 지방정부 노동정책을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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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만여개의 주소 목록으로 지리적인 밀집도를 분석해야 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정부에서 권장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의 기재요령은 ‘동대문구 ○○로 100’ ‘마포구 ○○로12번길 120-5’와 같이 적는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자료에서 규칙에 따라 기재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별도의 정리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과거 방식대로 ‘○○동 26-7’처럼 법정동과 지번을 적은 경우로 오류라 보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법정동이 아니라 행정동을 기재하는 사례가 많다. 이렇게 기재된 주소는 행정동에 대응하는 법정동을 찾아서 하나하나 정정해야 한다. 간혹 여러 개의 법정동을 포함하는 행정동이 적혀 있으면 어느 법정동이 해당 주소지인지 확정하지 못하여 난감하다.

도로명을 ‘○○로 14길’처럼 ‘~로’와 ‘~길’을 떼어 적는 경우도 많은데 서로 붙여 써야 한다. 사람은 ‘~로’와 ‘~길’ 중간에 빈칸이 들어있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는 ‘○○로12길’과 ‘○○로 12길’을 서로 다른 정보로 받아들인다.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서로 붙여서 ‘○○로12길100’처럼 적는 경우도 정보처리에 문제를 발생시킨다. 실제 자료에는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주소가 적혀 있다. 규칙에 어긋나서 예측하기 어려운 모든 경우는 정보처리를 곤란하게 만든다.

자연어 처리 알고리즘과 기계학습을 활용하면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겠으나 전문적인 프로그래머를 섭외할 형편이 아니어서 예전에 조금 익혀두었던 비주얼베이직 언어로 직접 분석프로그램을 작성하였다. 주소가 어떤 식으로 기재되었는지 판단하기 위한 수많은 조건문과 해당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수많은 루프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몇 주에 걸쳐서 작성하였다. 한껏 기대를 품고 구동하니 잘 돌다가 갑자기 반응이 없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에 빠진 것이다.

‘루프(loop)’는 순환작업을 의미한다. 1부터 100까지 더한 값을 구한다고 가정해보자. 1부터 100까지 순서대로 숫자를 발생시키면서 이 숫자들을 차곡차곡 더하여 기록한 후 최종값을 출력하도록 하면 되는데 이 과정이 하나의 루프이다. 순서대로 발생시키는 숫자가 100에 이르면 루프를 종료하도록 프로그램을 작성하면 된다. 그런데 순차값이 0보다 작을 때 종료하라고 설정하면 영원히 조건에 맞지 않게 되어 무한루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이 다운되었다’라는 건 이런 상태를 말한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므로 바르게 고쳐야 한다. 유용한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순조롭게 무한루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 자체도 무한루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과정이 쭉 이어진다. 사람마다 조금 혹은 무척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있다. 일상이 무너져도 여러 문제가 생기지만 앞으로 끝도 없이 똑같은 루프를 반복한다 생각하면 그 또한 무간지옥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가끔 일탈을 꿈꾸는 이유이다. 요즘 이목을 끄는 ‘자발적 퇴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쳇바퀴 돌 듯 삶을 반복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에 빠진 듯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잘못된 삶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은데, 조금 귀찮고 번거롭지만 다양한 휴지기와 중단점을 두고 반성하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과 달리 어둡고 건강하지 못한 삶은 자기조절이 안되는 게 다반사다. 이런 부정적인 삶이 개인을 넘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이 적폐일 것이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가 발견되면 일단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제어되지 않는 순환을 감시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적폐가 발견되었다면 해당 시스템을 멈추고 전면적으로 조사하여 잘못된 과정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프로그래머와 사용자를 피곤하게 하는 무한루프는 스스로 고쳐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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