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직장인들이 하루 동안 만나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얼마나 될까.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나라 파견용역 비정규직이 346만명 정도 된다고 발표했다. 5명 중 1명은 간접고용 노동자라는 것이다. 아마 이 수치도 최소 규모로 봐야 한다.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 간접고용은 더 많을 수 있다. 아침 출근길 아파트 집 앞에서 만나는 경비원은 파견 노동자다. 회사 건물 청소원도 용역 노동자다. 자주 가는 서점의 물류센터 직원도 하청 노동자다. 사무직이라고 해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병원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수납창구 직원도 파견업체 소속이다. 그야말로 사회 전체가 거대한 비정규직의 바다와 같다.

간접고용 비정규직 실태는 충격적이다. 원청 근속기간 90.3개월, 고용업체 변경 횟수 2.4회,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월평균 급여차 90만원. 산재사고 사망률 7배.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용불안과 차별 그리고 위험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차별은 어떨까.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법에나 있는 것이다. 동일 유사업무를 수행하는 정규직 임금을 간접고용 노동자가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비정규직이 차별을 입증하는 것은 녹록지 않다. 심지어 E대형마트는 자사 156개 매장 중 3개를 분리 독립 법인으로 설립하여 법망을 피해가기까지 한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10년 동안 비정규직의 차별 접수는 평균 100건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5분의 1 정도만이 시정되었다. 제도의 실효성이 낮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일터에서의 비가시적인 차별은 헤아릴 수 없다. 부산의 A공장은 회사 셔틀버스 이용 시 협력업체 직원들은 뒷좌석에만 앉도록 공지했다. 경기도 B공장에서는 구내식당과 샤워실은 정규직 다음에나 이용할 수 있다. 심지어 서울의 C통신회사에서는 빌딩 내 카페조차 협력업체 직원들은 이용하지 못한다. 출입증 자체가 해당 층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견업체 소속이라는 이유다.

도대체 정상인 곳이 하나도 없다. 간접고용 노동자로 일하는 순간 차별과 배제가 시작된다. 스웨덴이나 프랑스는 차별이 아닌 균등대우 원칙을 기본권으로 한다. 영국(임금격차 보고서), 독일(임금공개법), 아이슬란드(동일임금인증제) 모두 평등권에 기반한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11조 1항에서도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헌법적 권리조차 침해받고 있다.

사회적 논쟁은 항상 반복된다. 국가가 새로운 정책을 결정할 때는 더욱 그렇다. 지난 20년 사이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거래비용 감소와 유연한 고용을 선호하는 자본의 특성상 간접고용은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게다가 산업구조와 기술변화 과정에서 새로운 직업은 이전과 다른 비표준적인 고용계약을 맺고 있다. 앞으로 간접고용 비정규직 해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은 계속될 것 같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어떻게 줄여 나갈 것인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무엇보다 “누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고, 몇 명인지, 어떤 차별을 받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행 300인 이상 대기업의 ‘고용형태 공시제’를 30인 이상 기업으로 확대해야 한다. 재벌 대기업의 무분별한 간접고용과 남용은 규제해야 한다. 특히 재벌 대기업이 문제다. 우리나라 10대 재벌 기업의 간접고용(29.3%)이 직접고용 비정규직(7.9%)보다 4배나 많다. 재벌 계열 거대기업일수록 사내하청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한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임금 공시제’와 ‘동등-급여 프로그램 의무화’ 도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누구나 일은 필요하다. 일자리를 갖는 것은 그 자체가 권리다. 그래서 일을 하는 사람은 법으로 보호받아야 하고,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일할 때의 권리가 모두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2019년 대한민국에서 간접고용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 기업들이 이야기하는 고용 유연성은 과연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까. 오히려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강조할 때 불법파견이나 위장도급은 막을 수 있나. 이런 물음에 그들은 답을 하지 않고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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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지나칩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걷다가 섰다가 타다가 섰다가 또다시 걷다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좀 더 오래 가는 블루투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 도착해야 하는 삶이 좀 지루하다고 생각하다가, 간판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어떤 간판이 있나 위아래로 두리번거립니다. 귀에서 ‘일상으로의 초대’가 흘러나오면 득템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문득 생각합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누군가를 기다리겠구나.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같은 일을 시작하겠구나.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 간판이 삶이구나.

간판 아래서 울고, 웃고, 서로 격려하고, 무언가를 희망하며 부대껴 온 시간들. 처음 가게를 열며 어떤 이름을 붙일지, 어떤 글씨로 쓸지 고민하던 시간들. 이 모든 것이 일상이면서 일상 아닌 특별한 일처럼 다가왔던 시간들.

삶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난 삶을 위해 뭘 했나, 또 나는 지금 살아가고는 있는 건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또 이러네 하고 피식 웃고는, 그러니까 삶이지, 라고 하면서 스스로 답까지 해 버립니다.

곧이어 서생의 문제의식만 또 꺼내 드는구나, 푸념을 합니다. 내 처지로 치열하고 애달픈 삶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나, 조금이라도 삶이 던지는 현실 의식을 가질 자격이 있나? 또 질문이 이어집니다. 역시 형이상학적입니다. 어릴 적 옆에서 보기만 했던, 그래서 곁눈질로만 인식했던 간접 체험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간판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하셨던 그분.

내려야 할 곳에 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걷다가 또 간판을 봅니다. 이 습관이 얼마나 갈지는 모릅니다. 생긴 지 얼마 안된 습관이기도 하고. 요새 출퇴근하는 거리 주변은 제법 사람이 많고, 빌딩이 많고, 골목도 좀 있고, 월세도 센 곳입니다. 정기적으로 여기저기 근무지를 옮겨 다니는 처지이다 보니 8년이나 이 근처에서 간헐적 근무를 했습니다. 모습은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고, 누군가와 인사하고, 휴대전화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며 걷는 사람들. 부쩍 경비가 삼엄해지고, 거리에 항의성 문구가 늘고, 확성기 소리가 커졌다는 정도의 변화는 눈에 띕니다.

팍팍하다. 이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걷다 보면 느끼게 됩니다. 종종 다니던 식당 네 곳이 사라졌습니다. 한 곳은 작은 식당이었고, 한 곳은 중간 정도, 두 곳은 큰 식당이었습니다. 작은 식당 주인과는 음식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강원도 막된장. 나올 때면 등 뒤로 흐르던 또 오라는 말이 아직도 선한데. 어디서 또 간판을 달았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어릴 적 봤던 모습이나 지금 겪는 현상이 참 비슷하게 와 닿습니다. 건물은 그 자리인데 간판은 올랐다 내렸다 바뀌어 갑니다. 누군가 들여놨던 주방 기기들, 식기들, 식탁들, 의자들이 간판과 함께 명멸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순히 간판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바뀝니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요새처럼 한꺼번에 식당이 문을 닫는 일은 없었습니다.

상인들은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서생의 문제의식으로 상인의 현실을 바라봐서 그런 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문제의식이 시작이겠지만, 해법은 현실에 있고, 결국 답은 몸을 부대끼는 시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꼭 현장을 방문하고, 이해 당사자들과 모여 협의하고, 원만히 협의가 이뤄지도록 공감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지속합니다.

글을 다듬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네요.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주책없이 배가 고프다. 그게 삶이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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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정부 예산이 처리되지 않아서 필수 분야를 제외한 업무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지 3주가 다 됐습니다. 멕시코 국경 장벽이 이 사태의 발단입니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아무 소용도 없지만, 정치적 이유로 이를 세우겠다는 트럼프 대통령과 야당인 민주당 주도의 의회가 충돌한 겁니다. 트럼프가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탓에 이런저런 탈도 많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엉뚱한 질문을 던지곤 하죠.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후 미군 한국 배치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매년 35억달러나 쓰면서 남을 지켜주는 게 장사꾼 트럼프로서 이해가 안 갔던 겁니다. 당황한 참모들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이해시키려 안간힘을 썼죠. 한 경제참모는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항공모함을 더 배치해야 하며 10배가 넘는 돈이 든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정부 협조 덕에 민감한 첩보도 덤으로 얻는다고 했죠.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은 미국 안보를 위해 매년 40억달러를 후원하는 셈이라고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트럼프의 엉뚱한 질문이 주한미군의 가치를 조명해준 셈입니다.

그 가치는 ‘미국’ 수호입니다. 미군이 미국 이익을 위한다. 이 간단하고 명확한 사실이 유독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군이 한국을 수호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를 것처럼 믿기도 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2017년 4월 이제는 고인이 된 매케인 상원의원과 그레이엄 상원의원을 백악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조언을 구했습니다. 매케인은 “아주 복잡합니다. 북한 재래식 무기 도발로 서울 시민 100만명이 사망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그레이엄은 “100만명이 죽는다면 여기 말고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라고 맞섰죠. 미국 매파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군 주둔은 한국 안보가 그 목적이지만, 한국 안보만을 위하지 않습니다. 애초 주둔 결정도 한국 안보보다는 한국전쟁을 빨리 끝내고 지역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휴전 협정이 마무리되어가자 불안해진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휴전협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미국을 위협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 등 일련의 시위까지 벌이고서 얻어냈습니다. 이 조약은 미군의 남한 주둔 근거가 됐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왔던 미군은 또 그렇게 떠날 겁니다. 영원히 있기야 하겠습니까? 설마 그러랴 하겠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수백년 동아시아를 호령한 청 왕조도 19세기가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졌고, 청일전쟁 패배로 조선에서 군사를 물렸죠.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정권을 지키던 소련군도 무자히딘의 저항에 철수했습니다. 이라크전쟁에서 승리한 미군도 정치적 비용이 커져 철수했죠. 필리핀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1986년 민주혁명으로 탄생한 아키노 정권은 100년간 주둔한 미군에 결별을 선언했죠. 민주체제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민족주의가 정치권을 움직인 덕이었습니다. 미국은 주둔 연장을 사정하며 수억달러를 제시했지만, 필리핀은 거부했습니다. 미군 주둔지 경제, 즉 상권, 임금 등의 손실도 감수하고 말이죠. 자의건 타의건 미군은 한국에서도 떠날 겁니다.

안 가본 길을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곳을 찾고 먼저 가보는 게 지도자의 책무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삐걱대고 있습니다. 9600억원 수준인 한국 분담금을 1.5배, 즉 1조4000억원 정도까지 올리려고 한다죠. 다른 나라에 비해 이미 높은 수준을 부담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당장 한·미동맹을 걱정하는 절규가 터져 나오고 협상은 지지부진합니다. 한국 정부가 이렇게까지 끌려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주한미군을 더 요구하는 게 혹시 미국 아닐까요? 미군이 떠난다고 북한이 쳐내려올까요? 중국이 미사일을 쏠까요? 일본군이 독도를 점령할까요? 미군을 언제,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한·미동맹을 건국신화로, 종교로 숭배하며 반세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고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미국 눈치를 안 볼 수야 없겠죠. 하지만 새로운 사고와 유연한 상상력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2018년 남북 화해는 1953년에 화석처럼 굳어버린 동아시아 정세 전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 변화에 휩쓸리는 대신 변화를 이끄는 정부가 필요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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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10일부터 4일간 프랑스 파리에서 제12차 문화다양성 보호 및 증진 협약 정부간위원회가 열렸다. 24개 대표 위원국을 포함해 참관 회원국 및 민간 전문가, 시민사회 활동가 등 250여명이 참석해 역대 가장 많은 참가자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유엔이 주관하는 국제기구 연례회의라는 것이 통상 사전에 조율된 내용들을 공개하고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 결의문을 채택하는 것이 관례여서 다소 지루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의제별 각국의 발언들이 갖는 함의와 그 행간의 의미를 따져보면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지원을 하는 국가들과 지원을 받는 국가들, 영어권 국가들과 프랑스어권 국가들, 그리고 이 양자에 속하지 않는 제3영역에 속한 국가들 간에 문화다양성을 놓고 벌이는 논의들은 세계문화 현 흐름의 구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회원국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은 편이다. 국가부담금이나 비공식 지원금 규모도 아주 높은 편이고, 본부의 의제들을 국가별로 이행하는 데 있어 솔선수범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과 인도네시아와 함께 대표 위원국이어서 이번 회의에서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이해와 요구를 본부에 잘 전달하고 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이 2011년에 유네스코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전체 예산의 22%를 부담했던 미국이 탈퇴하는 바람에 현재 유네스코 본부의 재정 상태가 악화일로에 있고, 일본 역시 아직 문화다양성 협약 비준을 하지 않은 터라, 프랑스어권 국가를 제외하면 이 협약에 대한 한국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은 2005년 체결 당시 스크린쿼터 문제로 사회적 쟁점이 되었을 뿐, 정작 2010년 국회 비준 이후에는 문화 및 사회정책의 중요한 국제협약으로 간주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은 국회 비준 이후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문화 정책 중심으로 한정해 다뤄지고 있어 아쉽다. 사실 문화다양성 협약 안에 담긴 내용들은 전 지구적 문화다양성을 구성하는 문화적 표현, 언어, 정보, 기술 등등의 세부 영역에 대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번 12차 회의에서 다뤄진 의제들과 쟁점토론만 보아도, 문화다양성의 의제들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도 본 협약의 글로벌 리포트에는 “디지털시대의 문화적 표현에 대한 로드맵 가이드라인 개발” “문화정책 디자인과 모니터링” “예술가 지위에 관한 권고 설문” “문화상품/서비스의 흐름에 대한 지표 개발” “국가개발계획에 문화-창의산업 통합” “성평등 관련 정보 수집 및 프로그램 진행” “예술가 표현의 자유 관련 활동”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4일간 회의 중간중간에 배치된 토크쇼 역시 “인공지능: 크리에이터들에게 새로운 작업환경인가” “디지털 환경에서 문화다양성 증진을 위한 가이드라인 이행 로드맵” “당신의 예술적 자유란 무엇인가?”와 같은 최근 문화정책의 주요 사안들을 다루었다. 문화다양성 협약의 국제 담론은 국내 문화정책에서 간주하고 있는 범위와 영역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문화다양성은 이제 더 이상 다문화 정책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와 올 초 들불같이 일어난 미투 운동의 파고를 딛고 새로운 국가문화정책의 근간을 다시 세우는 ‘문화비전2030 : 사람이 있는 문화’를 최근 만들었다. 민간 전문가 20여명이 주도해서 만든 보고서의 3대 가치는 자율성, 다양성, 창의성이다. 이번 정부간위원회 회의에서 다루었던 많은 내용들, 특히 권리로서 문화다양성,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 젠더평등과 여성예술인의 참여, 창의성 확산을 위한 문화정책의 역할, 협치와 협력을 위한 문화 거버넌스는 ‘문화비전2030’의 9대 의제들과 47개 대표과제의 중요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비전에 담긴 의제들만 잘 실행해도 한국은 문화다양성 협약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동연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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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대구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 요청을 받고 스튜디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PD는 말할 것도 없고 방송작가도 없이 아나운서 혼자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구조조정한다고 인원감축을 해서 그렇단다. 아니 각자 전문 영역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아나운서가 혼자 다 하냐고 다시 물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경영이 어려워서 그럴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지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대구·경북 지역의 암울한 현실이 떠올랐다. 대구·경북 지역의 방송미디어 관련학과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는 졸업생만 해도 수백명이다. 하지만 정작 방송사에서는 어떻게 하면 새로 좋은 사람을 뽑아 양질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대신 있던 일자리마저 아예 없애버리고 있다. 국가는 대학에 취업률을 올리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정작 노동시장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졸업해도 취업할 곳이 없는 지방대생들은 지역을 떠나 서울로 가거나 공무원시험에 몰두한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 사회에는 기업가적 자아를 가지고 끊임없이 혁신하라는 정언명령이 지배했다. 논리는 이랬다. 모두 기업가적 자아를 가지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는 혁신을 수행하라. 그러면 시장에 불안정성과 위험이 증대되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역동적인 불균형 상태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때 종래 방법을 완전히 혁신한 창조적 기업가가 나타나 한국 사회의 성장을 이끌어갈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한동안 벤처붐이 불었다.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기업가로 만들어 창조적 혁신을 계속해나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가 횡행했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초기의 반짝 성공은 있었으나 결국 장기적으로 볼 때는 대개 실패했다. 그러자 기업들이 혁신 대신 손실 회피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속한 외부환경 변화에 섣불리 대응했다가 실패할 수 있다. 이를 기회 삼아 성장할 수도 있지만, 성공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쉽게 이 행로를 선택할 수 없다. 손실을 회피하면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기업들은 기술 혁신을 위해 투자하는 대신 비용을 줄이는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모든 영역이 이러한 생존주의 기업 원리를 따라 운영되고 있다. 핵심 조직에서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핵심 자원을 유지하고 보호할 수 있는 성과주의 연봉제를 실시한다. 반면 주변 조직에서는 유연한 관리를 한다며 비정규직과 계약직을 늘린다. 소수의 핵심 노동력만 빼고 대다수 노동력이 불안정성에 빠진다. 합리화를 기치로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구조조정은 자본에는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비용을 외부로 떠넘김으로써 사회 전체를 비합리적 상태로 빠트린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주변 조직에서 일하는 한시 노동자로 전락했다. 자신의 자아를 아무리 기업가로 설정하고 자기계발해 보아야 성공할 수 없다. 주변 조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은 영원히 반복될 뿐만 아니라 승리해 보아야 잠시 생존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핵심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안정된 것이 아니다. 여럿이 하던 일을 혼자 하니 과로할 수밖에 없고 좋은 품질의 생산물이 나올 수 없다. 경쟁력이 더 떨어지니 또 인원을 줄이고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이러다가 온 나라가 기업가적 혁신은커녕 생존주의 습속에 젖어 살아갈까 두렵다. 생존주의는 기존에 있는 사람을 불태울 뿐만 아니라 새로 오는 사람의 진입을 막기 때문에 결국 한국 사회를 소멸로 이끌 것이다. 고용을 이윤 갉아먹는 단기 비용으로 저주하면서 인력 감축에만 몰두하는 게 무슨 기업가적 혁신인가? 이 나라에 진정 혁신이 활짝 꽃피길 바란다면 새로 오는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수밖에 없다. 새로 오는 사람은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고용에 대한 이런 문화적 관점을 가질 때에만 희망이 보일 것이다. 지금처럼 청년이 비정규직에 시달리다 죽어나가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얼마나 더 많은 젊은이들이 생존주의 나라에서 불타고 소멸되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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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개방의 소용돌이에 둘러싸인 중국의 단면을 묘사한 지아장커의 <플랫폼>이란 영화를 보면 정작 플랫폼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건설이 한창인 소도시를 배회하는 검은 뿔테안경 주인공의 허무, 문화선봉대원 4명이 10여년 동안 겪는 급격한 변화를 담담히 느릿하게 보여준다.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에 덩그러니 놓인 인민의 혼란을 얘기하는 듯한 영화에 왜 ‘플랫폼’이란 제목을 붙였는지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플랫폼에 오르는 사람은 주체다. 목적지가 있을 터이니 그렇다. 목적지 없이, 무작정 플랫폼에 올랐어도 차에 오를 것인지, 아니면 뒤돌아 밖으로 갈 것인지, 플랫폼에서 한동안 미아가 될 것인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결국 플랫폼에 오른다면 주체가 된다. 즉, 플랫폼의 매력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플랫폼의 또 다른 매력은 어떤 장소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면 또 다른 어디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체가 개별적으로 길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깔끔하게 해결해주는 수단이 플랫폼이다. 그래서 플랫폼이 대중교통수단의 핵심요소이다. 따라서 싫든 좋든 플랫폼을 이용하면 군중과 마주하게 된다. 내리는 곳이 다르더라도, 그들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플랫폼은, 인파를 불러오기에, 많은 사람의 이재(理財)를 자극하기도 한다. 한적한 승강장에도 하나 정도의 가판대는 마련되어 있고, 붐비는 역사(驛舍)에는 어김없이 판매시설이 들어선다. 자본만 눈독을 들이는 건 아니다. 무명예술가의 전시공간이나 공연장이 되기도 하고, 서명운동 같은 캠페인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꽤 오래도록 관심을 두고 연구도 하다 보니, 마을공동체도 일종의 플랫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는 다양한 주민들이 있다. 어떤 이는 작은 공방을 소망하다가 메마른 골목에 축제라는 물을 주고 더 나아가 동네 아이들을 마을의 주체로 만들기 위한 마을학교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떨 때는 그 과정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 같은 막막함과 고단함이 어깨를 짓누르지만 돌이켜보면 곁에 많은 이웃이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인식하든, 못하든, 마을살이를 꿈꾸면 수많은 주민으로 붐비는 마을공동체라는 역동적인 플랫폼에 오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우리’의 꿈을 이루게 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거나, 혹은 누군가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하는, 그 위에 오른 다양한 주민들과 부단한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게 된다. 마을공동체 활성화의 종착역으로 주민자치와 직접민주주의를 그려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촛불 이후, 많은 사람이 직접민주주의의 활성화를 꿈꾸었다. 하지만 뜨겁고 강렬했던, 혁명과 같은 기운은 금세 사그라든 것처럼 여겨진다. 여당과 제1야당이 손을 잡고, 복지와 일자리 관련 예산은 줄이고 토건예산은 늘리는 일이 벌어지는 게 현재의 실정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국민이 지켜보던 사립유치원 관련 법안은 무시되었다. 국회에서 민의를 제대로 살피고 있는지 의심스러운데,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의회에 전하는 데 도움이 될 대선거구제, 연동형비례대표제, 지방자치강화 등에 대해 양대 정당은 큰 관심이 없다.

자칭 대표라는 사람들이 할 마음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물론 주민자치에 대한 예산이 전액 삭감되기도 하고, 지방의회에서는 마을공동체 활성화와 주민자치회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며 관련 공무원이나 연구자를 불러서 호통을 치기도 한다. 주민자치가 활성화되어 지방의회의 권력이 약해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속셈일 것이다. 하지만 한 줌의 기득권이 막아서기에는 이미 많은 불씨가 뿌려졌기 때문에, 플랫폼에 올라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작지만 강한 의지들이 천천히 뜨겁게 불타오르리라 기대한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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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인데도 차분한 분위기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국민들은 지금 어떤 이슈에 관심이 많을까. 지난 5년간 12월 중하순에 노출된 100만건의 뉴스데이터를 살펴봤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어휘는 ‘선물’ ‘나눔’ ‘성금’ ‘현금배당’ 등이었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행위를 표현하는 어휘가 다수를 차지했고,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12월은 무언가를 주는 달인가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라고 했으니, 12월은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달이길 바란다. 그런데 누가 주는 걸까. 주는 행위자를 찾았고, 공통분모는 기업이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기업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기업이 실천하고 있는 이해관계자경영에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국내에서 이해관계자경영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지 20년 남짓. 기업은 시장환경의 변화로 인해 투자자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소비자, 노동자, 협력업체, 지역사회, 자연환경 등 이해관계가 있는 다양한 분야에서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기업의 선한 활동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시대가 되었다. 시장영역에서 기업의 역할이 영리추구에 국한되지 않는다면, 공공영역에서 정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정당의 활동이 집권이라는 목표에 매몰되어, 많은 것들을 정당화하거나 단순화시켜선 안될 것이다. 정당도 촛불혁명 이후, 새로운 정치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야스차 뭉크는 자신의 저서 <위험한 민주주의>에서 포퓰리즘(대중영합)이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봤다. 이를 조장하는 3가지 요인으로 소셜미디어와 경제침체 그리고 일국적 폐쇄성을 지적했다. 포퓰리즘은 수많은 사회경제적 현안의 본질을 변방으로 밀어내고 소외시키면서 압축하고 간소화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이 다수의 유권자에게 표를 받아 집권해야 하는 정당에는 외면하기 어려운 정치생태계의 구성요소 중 하나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당도 기업처럼, 국민의 신뢰를 얻고 공공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이해관계자 민주주의’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 정당에 이해관계자란 국회의원과 국민뿐만 아니라 당직자와 보좌진, 당원, 지역주민, 직능 및 사회단체, 타 정당, 국회, 행정부, 공공기관, 지방정부, 언론, 자연환경, 외교국가 등일 것이고, 이들은 정당 운영의 중요한 참여자이고 고객이자, 정치발전과 민주주의를 함께 책임져야 하는 주주들이다. 이해관계자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가 보다 깊이 있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자유민주주의가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가치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국민 전체를 위한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인해, ‘실체 없는 국민을 위한 소득 없는 민주주의’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합리적 대안을 찾아나가는 정당의 조력자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예컨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카카오카풀이 왜 공유가치 창출이 아닌 택시운전자 자살로 이어졌는지, KTX 탈선사고에서 왜 근원적 원인파악보다 기술결함과 사장사퇴가 더 많은 조명을 받는지, 청소년범죄의 강력처벌 여론 뒤에 소년원과 보호감찰의 운영실태는 어떤지, 사립유치원의 무책임경영이 왜 지금에야 문제가 되었는지, 낙태 찬반 이전에 어떤 종류의 낙태이든 그 수술 환경은 어떤지, 난민포용은 저출산고령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숙의하여 대안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포퓰리즘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

정당의 내부운영도 마찬가지이다. 당원은 경선 참여 외에도, 정당의 일상적인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이해관계자의 공동이익을 도모하는 정당민주주의는 잠자고 있는 법안들을 깨우고, 여야정쟁 중에도 사회·정치적으로 이미 합의가 된 쟁점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민주적 기초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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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을 단행해 나갈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를 정열적으로 추구 … 국가사회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하려는 개혁의 의지를 … 모아가야 하겠습니다.”

어제오늘 누군가가 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말들이죠. 앞은 1972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가 유신을 강조한 대목이고 뒤는 전두환의 취임사 한 구절입니다. 2012년 대선후보로, 촛불대통령으로 문재인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개혁은 늘 되풀이되는 화두입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만큼 갈 길이 멀다는 현실의 방증일 테죠. 그 까닭은 개혁결과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의 부재에 있습니다. 정치개혁은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일 수는 없죠.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면 깜깜이 예산 심사를 통해 자기 뱃속을 채우고 공공이익은 가볍게 토스해 버리는 추태가 사라질까요? 치열한 정쟁, 끝없는 거짓말, 부끄럼 없는 부패가 끝날까요? 정치 선진국이라고 생각되는 서구를 봐도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미국 공화당은 총기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총을 보급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등 뻔뻔한 거짓말로 정쟁을 부추깁니다. 영국 보수당은 브렉시트가 쉽고 긍정적 변화를 줄 것이란 사탕발림으로 국민을 속였죠. 인종혐오로 권력을 잡은 정당이 유럽에 한둘이 아닙니다.

정치개혁은 막연히 생각하듯 반듯하고 온전한 정치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염치없고 강도 같은 정치인이 거들먹거리는 꼴은 뉴스에서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정치개혁은 더 멀고 깊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20세기 한국 정치는 배척을 기반으로 했죠. 남과 북은 전쟁을 벌였고 영남 정권은 호남을 배척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짓눌렀고 대기업은 동네가게마저 거덜 냈습니다. 남자는 여자 위에, 이성애자는 동성애자 위에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찍어누르며 달려온 사회는 지옥철, 입시지옥, 헬조선으로 조롱당하는 지옥이 됐죠. 올라선 자는 더는 올라가기 힘들고 깔린 이도 힘들어 무너지는 아비규환 형국입니다. 다 같이 망하지 않으려면 새 길이 필요합니다. 정치개혁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21세기 한국 정치는 포용을 지향해야 합니다. 포용은 통합이 아닙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남자와 여자가 통합될 수 없습니다. 유치원 원장과 학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합이란 말은 애초에 억지 환상일 뿐이죠. 하지만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있습니다. 조금은 참아주고 조금씩 양보할 수는 있죠. 그러나 정치적 포용은 일방적 선의나 영웅에 기대서는 안됩니다. 힘과 권력을 나눠 가졌을 때,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야 가능합니다. 정치개혁은 힘과 권력을 나누어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정치적 포용이 가능케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선거법 개정은 그 시작입니다. 현 제도에서는 선거구에 1등한 후보만 승자가 됩니다. 지난 총선 성동 을구에서 새누리당 후보는 불과 38% 득표율로 2등(36%), 3등(24%)을 물리치고 당선됐습니다. 사실 6할이 넘는 유권자가 반대하는 이가 당선된 겁니다. 6할의 표가 사표가 된 셈이죠. 이런 제도 덕분에 새누리당은 33.5%의 전국 득표율로 40.7%의 의석을, 더불어민주당은 25.5%의 득표율로 41%의 의석을 가져갔습니다. 두 거대정당이 전체 표의 56%로 82%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공정하지도, 민의를 반영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민의를 반영하려면 이 지역구에 다섯 석을 배정해서 새누리당 두 석(전체 의석수의 40%), 민주당도 두 석(40%), 국민의당에 한 석(20%)을 주는 게 맞습니다. 그래야 공정하고, 유권자도 작은 정당에 사표 걱정 없이 표를 던질 수 있습니다. 이런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작은 정당이 생기고 커갈 수 있죠. 그래야 배척당했던 이들이 힘을 키우고 당당하게 포용의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정당이 이미 공감을 표시한 사안입니다. 이마저도 개혁의 걸음을 못 뗀다면 정치지도자로서 내가 뭘 하고 있나 물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궁색한 변명일 뿐임은 본인이 잘 알 테죠.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일갈이 저 멀리 맴도는 차가운 계절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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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김홍중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청년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주의자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생존주의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경쟁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도태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경쟁은 최종 종착지 없이 계속해서 미래로 연장된다. 셋째,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모든 잠재 역량을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 넷째, 경쟁을 통해 얻는 것은 평범한 안정이다. 다섯째,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과 체제에 기능하는 것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생존주의자의 모습을 청년보다는 오히려 대학에서 본다. 성공을 위해 자기경영하라는 정언명령이 온 나라를 휩쓸던 1990년대 대학은 소위 CEO 총장에 의해 하나둘씩 장악되었다. 눈에 보이는 단기성과를 내야만 하는 CEO 총장은 건물 짓기와 같은 외양 성장에 몰두했다. 대학마다 재정 확충을 위해 등록금을 마구 올렸고, 결국 역풍을 맞았다. 반값 등록금 운동과 같은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 지난 10여년간 등록금을 동결당한 것이다.

학부모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선의에서 시작된 등록금 동결은 대학을 국가에 종속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돈줄이 마른 대학은 국가가 제공하는 재정지원 사업을 따내기 위해 무한경쟁에 나섰다. 하지만 어차피 한정된 재원이라 경쟁의 승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작은 거라도 사업을 따내서 당장 도태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어쩌다 운이 좋아 사업을 따온다 해도 기뻐할 새도 없다.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중간평가를 통과하지 못하면 사업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어차피 누군가 중도 탈락하도록 설계된 사업에서 대학들은 폭탄 돌리기 게임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폭탄을 떠안지 않으려고 대학은 잠재역량을 온통 자본으로 바꾸는 노력을 기울인다. 우선 온갖 제재를 통해 교수에게 연구비를 따오라고 압박한다. 구조조정을 통해 인건비를 줄인다. 되도록 신임 교수를 뽑지 않는다. 직원도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학과 행정업무를 장학금 명목으로 대학원생에게 떠넘긴다.

대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시장 경쟁원리를 도입했다는데, 실제 결과는 참혹하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손실을 회피하여 평범한 안정을 누리고자 한다. 무엇보다 사람에 투자하지 않는다. 투자를 하면 이윤이 나와야 하는데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장기적인 교육 투자를 하지 않고 그저 현재 이대로라도 살아남고자 한다.

마침내 대학은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대학의 구성원 모두 생존주의자가 되어 체제에 복무하느라 바쁘다. 학생은 스펙 쌓고 알바하느라 정신이 없다. 교수는 매년 반복되는 평가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연구, 교육, 봉사에 애를 쓴다. 이렇듯 무한경쟁에서 소수의 승자를 찬양하는 온통 긍정적인 세상에서 비판적 사유는 생존을 위협할 뿐이다.

대학이 생존주의자로 추락하는 사이 대학무용론이 온 사회로 번져나가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는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 나와도 취업이 안된다며 볼멘소리한다. 그럴수록 국가는 취업률을 지표 삼아 구조조정하겠다며 대학을 겁박한다. 대학은 취업훈련소를 자처하지만 실상 뚜렷한 성과를 못 내고 있다. 기업이 할 일을 대학이 떠안았으니 애초부터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그런데도 실용적 쓸모가 없다는 질타만 쏟아진다.

그렇다고 대학 본연의 임무인 교육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교육 내용을 창출하려면 연구를 해야 하며, 연구를 하려면 대학원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학원은 학위장사로 여윳돈 만드는 창구로 활용되어 왔다. 이제 늦게나마 국가가 대학원도 평가한다고 하니 부랴부랴 살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 어차피 돈벌이도 제대로 안되는데 낮은 평가 지표를 맞아 곤란한 처지에 몰리기 전에 선제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강좌개설 요건을 강화해서 강좌수를 축소해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그 예다. 묻고 싶다. 정녕, 대학을 이렇게 생존주의자로 방치해도 되는가? 도대체 ‘아직 오지 않은 세대’에 어떤 죗값을 치르려고 이러는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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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주택은 가장 중요한 개인의 재산이라고 인식된다. 하지만 주택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고려할 때 단순히 사적 재산의 하나로 보는 것은 너무 협소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주택은 가정을 담고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가 된다. 가정이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라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자체만으로도 가정의 유지에 필수요소인 주택에 대한 공공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로 가정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주택을 뜻하는 여러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집을 뜻하는 가장 원시적인 단어는 우(宇)와 택(宅)이다. 이 단어들에서 면()은 지붕을 뜻하고 우(于)와 탁()은 서로 엮여있는 풀을 상형한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이 단어들은 초가를 상징한다. 후대에 이르러 우는 그 음을 빌려 ‘와 하고 큰소리를 낼 정도로 큰 집’이라는 의미로 발전하여 현재와 같이 넓은 공간, 즉 우주를 뜻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택은 풀이 엮인 생김새가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더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집을 일컫는 단어인 주택(住宅)을 이루는 문자가 되었다.

가(家)는 동아시아에서 주택을 어떤 의미로 여겼는지를 철학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이다. 단순하게 살펴보면 지붕 아래에 돼지(豕)를 기르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수메르의 설형문자가 가축의 수효 등을 기록하기 위해 고안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처럼 고대에 가축의 의미는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써 지켜야 하는 매우 소중한 것을 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집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곳이라는 의미가 고대부터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집을 잘 관리하는 것이 처신의 제일이라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는 경구가 대학(大學)에 실리기까지 하였다.

집을 관리한다는 것(齊家)은 당연히 가정을 잘 돌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또한 얼마 전까지 성(姓)에 가를 붙여서 강가(姜家)나 김가(金家)처럼 어떤 친족집단에 속하는지를 뜻하기도 하였으니 친족집단 전체를 잘 돌보라는 의미로 넓게 이해할 수도 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가가 유가(儒家), 도가(道家), 불가(佛家)처럼 같은 사상체계를 공유하는 집단을 지칭하기에 이르렀으니 자신의 문파나 당파를 잘 돌봐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고대에는 학문이나 기술에 능하게 되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정이나 속한 집단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폭넓게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어떤 일에 통달한 사람을 전문가(專門家)라고 일컫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거처의 물리적 실체로서의 의미와 함께 사회적 의미와 철학적 사상까지 포괄하던 주택의 의미는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매우 축소된 것처럼 여겨진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사회나 공동체보다 개인의 가치에 더욱 주목하는 시대조류에 따라 집에 포함되어 있던 사회적 의미는 잊히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단순한 상품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에서 삶의 소외와 해체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굳이 과거에 집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이유이다. 파편화된 개인으로 가득 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가 집에 담긴 본래의 의미를 찾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에 맞는 공동체에 대해 고민을 하고, 그런 노력을 통해 한 가정의 힘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주거 문제를 공동체가 같이 풀어보자는 사회주택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집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가 널리 퍼지기를 기대한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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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갑질사건이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해외 언론들은 갑질에 걸맞은 단어가 없어 우리말 발음 그대로 ‘gapjil’로 표현했다. 사실 영어 사전에 한국어 발음 그대로 등재된 단어들은 더러 있다. ‘Hangul(한글)’이나 ‘Chaebol(재벌)’이 대표적이다. 인터넷 구글에 ‘gapjil(갑질)’을 검색하니 약 2만8500개가 확인된다. 아직 신조어에 불과하지만 곧 영어 사전에 등재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다.

올해 뉴욕타임스는 ‘재벌’과 ‘갑질’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소개했다. 대한항공 한 임원이 광고대행사 간부에게 폭언을 하고, 물을 뿌린 행위를 한국인들이 ‘갑질’이라 부르는 행위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했다. 기사에서는 갑질을 “봉건 영주처럼 행동하는 기업 임원이 부하나 하청업자를 학대하는 행위”라고 표현했다. 천박한 자본주의사회에서나 보여주는 어두운 단면이다. 일상에서는 ‘갑’과 ‘을’의 계약관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표현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갑질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비영리단체인 ‘직장갑질 119’라는 단체가 직장문화를 반영한 ‘갑질지수’를 공개했다. 그간 언론을 통해 일부 사례로 드러난 현상들을 객관화한 것인데, 올해의 경우 0점 만점에 35점이었다. 갑질지수가 높을수록 직장갑질이 심하다고 보면 된다. 직장 10곳 중 3곳 내외에서 만연된 갑질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회사들이 법률만 준수하면 될 것도 많았다. 충격적인 사실은 68개 문항에서 20점 이하 점수가 하나도 없었다.

처음으로 공개된 갑질지수는 지난 1년간 제보된 2만2810건의 사례를 모아 만든 것이다. 전문가 자문과 토론을 거쳐 총 10개 영역, 68개 지표를 만들었다. 그간 만연된 갑질의 정도가 수치화된 것이다. 대한민국 갑질 평균(35점)보다 상회하는 결과가 나온 문항도 무려 37개나 되었다. 직장갑질은 유형도 가지각색이었다. 채용정보가 실제와 다르거나, 외모나 학력,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도 확인된다. 원치 않는 회식문화 강요나 체육대회, 단합대회 등 비업무적인 행사 강요도 있었다. 부하 직원을 무시하고 비아냥거리는 말, 본인의 일을 부하 직원에게 반복적으로 전가하거나 강요하는 행태, 퇴근이나 휴일·휴가 기간에 SNS 등으로 업무지시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아파도 불이익 때문에 연차나 병가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목할 점은 중소영세기업보다 민간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 갑질이 더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계 대기업은 50점 이상이 무려 12개나 된다. 주로 신입사원이나 직급이 낮은 직원들에게 회사 행사 때 원치 않는 장기자랑을 시키거나, 부하직원을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이 높았다. 외국계 명품 화장품 회사들은 매년 연말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데 전국의 매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임직원들 앞에서 섹슈얼한 옷차림으로 장기자랑을 한 곳들도 있었다. 아마 올해도 있을 것이다. 자국에서는 하지 않는 행태들을 우리나라에서는 버젓이 하고 있다.

직장갑질 결과는 다양한 시사점을 준다. 저임금이나 장시간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직장갑질이 더 심각했다. 사업장 내 우월적 지위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노동자들이 더 갑질을 당하고 있었다. 사회의 불평등이 기업조직의 불평등으로 투영된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제 더는 늦출 수 없다. 무엇보다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급히 통과되어야 한다. 이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등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런 심각성을 인식하고 최근 국제기준 마련을 위한 결론문까지 채택(2018·6·8)한 바 있다.

‘직장갑질 119’는 갑질지수 측정 프로그램(test-gabjil119.com)도 함께 공개했다. 국민 누구나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한번쯤 우리 회사의 직장갑질은 몇 점인지 확인해보길 권한다. 앞으로 직장갑질 지수가 축적되다 보면 우리 사회의 직장문화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내년에는 대한민국 갑질점수가 한 자릿수 미만으로 발표되기를 소망한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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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고에서 한 달간 발생할 이슈를 예측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예측대로 이슈들이 각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며 상당부분 예측범위 안에 들어왔다. 예컨대 한동안 공개 일정이 없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공개시찰에 나섰고, 제주와 한라산이 북핵과 연관되어 김 위원장 답방 예상 장소로 화제가 되었으며, 해양경찰이 중국어선을 여러 차례 나포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관광객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큰 폭으로 증가했고, 물가상승률은 올해 들어 전월 대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특히 재건축 비리 혐의로 300명이 동시 입건된 사건도 예측범위 안에 들어왔는데, 이는 정부가 8개의 생활적폐로 추린 분야 중 하나다. 이번엔 최근 사회적 자본, 즉 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와 담론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조원씨앤아이가 전국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생활적폐, 사회적 대화와 토론, 한국 사회 공공성 등 3가지 분야로 나누어 조사했다.

첫째, 생활적폐. 가장 심각한 생활적폐가 뭔지 물었다. 불공정·갑질행위, 공적자금 부정수급, 채용비리, 탈세라는 응답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다음으로는 안전사고유발 부패행위, 요양병원 보험금 수급비리, 재개발·재건축비리, 학사비리 순이었다. 생활적폐 해결하기 위한 처방으로는, 적발된 적폐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적폐의 구조적·근본적 개선, 광범위한 적폐행위의 실체 확인, 피해자에 대한 회복적 정의 순으로 언급됐다. 생활적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여론으로 볼 때, 적폐청산에 우선순위를 두거나 분야별로 집중과 선택을 하는 방식은 사회적 공분을 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최근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사유가 10건이나 되고, 갑질폭행 및 엽기행각 등으로 인해 사회분위기에 휩쓸릴 만도 했지만, 경찰이 수사 확대의 방향을 음란물카르텔 청산으로 잡은 것은 적폐의 구조적·근본적 개선을 위한 현명한 판단으로 보인다. 금융권 채용비리도 금융권의 투명성 제고와 경쟁체제 유도를 통해 이자율담합 환경 등이 조성되지 못하도록 생활적폐 청산방향을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사회적 대화와 토론.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사정 대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 결과, 대화내용 투명 공개, 장기적 과제 집중, 경제약자 포함 등의 순으로 응답했다. 누가 자신의 이익을 과도하게 관철시키기 위해 합의를 방해하는지, 아니면 합리적인 논쟁 끝에 합의가 도출되지 않는 것인지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여론으로 보인다. 노사정 대화를 생방송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정부 주요정책 또는 대형 국책사업 시 시민의 숙의와 토론을 제도화하자는 주장과 이러한 공론화를 위해 정부에 성설기구를 설치하자는 주장은 모두 공감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촛불혁명 이후 시민의 사회적 관심과 참여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끝으로, 한국 사회 공공성 문제다. 공공성의 핵심인 공개성과 공익성을 정부, 경제, 시민사회 각 사회주체들의 활동평가 잣대로 물었다. 정부는 국민소통과 약자대변 정도로, 경제는 공정경쟁과 공정분배 정도로, 시민사회는 자율·차별과 언론의 약자대변 정도로 총 6개 문항으로 조사했다. 응답 결과는 참혹했다. 모든 문항의 긍정 응답이 40% 이하를 밑돌았다. 그만큼 한국 사회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긍정평가 응답을 받은 영역은 정부의 약자대변, 정부의 국민소통, 공정경쟁으로 나타났다. 그다음으로는 자율·차별, 공정분배, 언론의 약자대변 순이었는데, 언론이 약자를 대변하고 있다는 긍정 응답은 10%를 넘지 못했다.

내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다.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결단하고 타협할 수 있다면, 2019년은 새로운 문화강국의 원년이자 신뢰사회로 가는 대혁신의 해가 될 것이다.

사회적 자본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 및 담론 여론조사보고서(PDF)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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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막 졸업하고 처음 취직한 광고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거래처 사장과 앞으로의 제작 일정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일정 중 설 명절이 있어서 기한 내 제작의 어려움을 설명하는데 눈앞으로 갑자기 커피 잔이 날아왔다. 내 기억으로 피하지 않았거나 피하지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손목을 꺾었는지 잔은 내 등 뒤로 날아가 산산이 깨졌다. 당황한 나에게 그는 핑계처럼 “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라고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다소 반항적인 인간이었던 탓일까. 어려서부터 누나에게 “너 눈 좀 그렇게 뜨지마”라는 지청구를 듣긴 했었다. 커피 잔이 영화 속 슬로모션으로 내 옆을 스쳐지나간 뒤, 나는 사장을 탓하는 마음에 앞서 ‘내 눈빛이 그렇게 안 좋은가?’란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과연 내 몹쓸 눈빛 탓이었을까, 요즘도 가끔 생각나는 사건이다.

출처:경향신문DB

조현민이 광고사 직원에게 이른바 ‘물컵 갑질’을 했지만,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 사건에 관한 세 가지 혐의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 단순폭행, 둘째 업무방해, 셋째 특수폭행이다. 단순폭행은 피해자랑 합의하면 끝, 업무방해는 그것이 당사자의 업무였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업무를 방해했으니 끝, 남은 것은 특수폭행 하나뿐이지만, 결국 이것도 무혐의가 되었다. 보통 일반인이 유리컵을 던지면 빼도 박도 못하게 특수폭행(특수협박)이 된다고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손목을 꺾었는지 이조차 무혐의로 풀려났다. 사건이 일어난 뒤 이걸 가지고 칼럼을 쓸 수 있을까 궁금했다. 사건이 사건을 덮는 ‘다이내믹 코리아’니까, 이마저도 시일이 조금 지나면 잊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소셜미디어를 통해 또 다른 ‘갑질폭력’ 사건이 알려졌다. 놀랍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에선 이런 사건이 해마다, 달마다, 매일 어디선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건 당사자가 단순히 ‘갑질폭력’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일의 웹하드 업체 소유자이며, 웹하드 플랫폼을 통해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을 유포하여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는 업체란 사실이다. 2015년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의 웹하드 서비스 음란물 이용현황에 따르면 웹하드 업계 전체 매출액은 약 2000억원, 그중 70~80%를 상위 5개 업체가 차지한다. 수십개의 웹하드 업체가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소유주는 몇 명 되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른 사람도 그중 하나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 따르면 웹하드에서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은 저작권료 없는 콘텐츠로 매우 수익성 높은 상품이다.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은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웹하드 업체가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은 유포가해자인 헤비업로더들을 회사 차원에서 관리하고, 경찰 수사에서 보호하는 등 범죄행위에 동참해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부 업체에서는 이와 같은 피해촬영물을 기술적으로 걸러주는 필터링업체와 인터넷에서 삭제해주는 대행업무로 수익을 올리는 디지털장의사 업체까지 직접 소유하거나 관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해촬영물을 유포하여 수익을 얻고, 이를 유포하는 범죄자들을 관리하고 보호해왔으며, 피해자들에게는 돈을 받고 피해촬영물을 삭제해주는 방식으로 다시 수익을 얻는 구조란 것이다.

웹하드 커넥션은 단지 필터링업체, 디지털장의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십수년 동안 사이버성폭력 피해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동안 이들이 쌓아온 돈(자본)의 힘은 어느새 정치권, 언론, 법률시장, 모바일결제시장, 통신사 등등 웹하드와 연계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곳들과 연계되어 왔다. 그동안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 유통 근절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던 까닭은 기술이 부족하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권력과 수익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법이 명백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결코 진심이 아니며 진실일 수도 없다. 그것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을 정도로, 처벌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권력차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말로 바꿔 읽어야 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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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청년들이 단기 성공 대신 장기 생존을 추구하고 있다. 사회적 삶이 서바이벌 게임처럼 변모한 지금, 오래 살아남은 자가 승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러시안룰렛이나 폭탄 떠넘기기와 같이 매번 탈락자를 솎아낸다. 이렇게 되면 게임에 임하는 근본 태도가 달라진다. 이번만 피하고 보자. 남에게 위험을 전가하자. 하지만 마냥 운이 따라줄 수만은 없다. 어차피 승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는 잔혹한 게임에서 패배는 시간문제다. 경쟁에서 이길 때 잠시 기쁨을 누리지만, 패배자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괴롭고 처연하다.

짧은 주기를 가지고 거의 무한 반복되는 서바이벌 게임은 비극을 연상시킨다. 비극이란 무엇인가? 비극에서 주인공은 악한 사회의 도덕법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파멸에 이른다. 관객은 이 싸움이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끝날 것임을 예감하기에 비장감을 느낀다. 주인공이 선한 덕성을 지닐수록 이는 더욱 증폭된다. 마침내 주인공을 좌절시키는 사회의 도덕법칙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비극은 악한 사회를 위협한다.

지금 사방에서 청년들이 악한 사회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기성세대 관객은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SBS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여기에서는 ‘소박한 일’을 무한 반복하면서 그 분야에 달인이 된 사람이 등장한다. 프로그램 소개다. “수십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며 부단한 열정과 노력으로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 사람들을 소개하는 삶의 스토리와 리얼리티가 담겨 있는 프로그램.” 2005년 4월에 처음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2018년 10월 말 현재까지 총 643회나 방영되었다. 워낙 장기 생존에 뛰어난 달인들만 찾아다니다보니 프로그램 자체도 장기 생존의 달인이 되었다.

달인사회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살아남은 자의 영예’로 뒤바뀐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말한다. 모든 패배는 너희들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사회가 악하다고 탓하지도 말고 패배를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작은 일이라도 성실하고 줄기차게 하다보면 언젠가 너희들도 우리 기성세대처럼 생존의 달인이 될 수 있다. 청년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주어진 일을 죽어라 열심히 하다가도 때론 갸우뚱 묻게 된다.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영예가 고작 생존이라면 이걸 굳이 ‘죽어라’ 할 필요가 있나? 이러한 회의는 청년들로 하여금 부당한 경쟁 게임 밖으로 나가도록 부추긴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대충 살자’ 놀이가 한 예다.

이를 보는 나의 심경은 복잡하다. 지방대생들이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로 살아가고 있다는 연구를 얼마 전 발표한 터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지방대생은 모든 상황에 적당하게 관여하는 것을 서로의 의무로 받아들인다. 이제 이러한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이 모든 청년들로 확산되고 있는 것인가? 본격적인 경험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나는 여기서 어떤 차이를 본다. 지방대생의 적당주의가 유사가족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적당주의는 모든 사회관계 밖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한 전자가 상황에 적당하게 관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예 상황 밖으로 나가 관여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달인이 되라고 강요하는 사이 청년들이 적당주의로 응수하고 있는 셈이다. 생활의 달인 흉내를 내다가는 일찍 ‘불타 없어져’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대충 살아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좋은 사회다. 죽어라 노력해야 생존할 수 있는 전장 같은 사회는 분명 악하다. 그래서 청년들의 적당주의는 달인사회에 대한 나름의 저항일 수 있다.

하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우선 장기 생존하기 위하여 대충 살아가는 삶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더 나아가 청년들이 상황에 아예 관여하지 않게 되면 우리 사회에 더 좋은 삶을 만들 희망이 고갈된다. 악한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일에는 몰입하고 헌신해야 한다. 무엇이 가치가 있는 일인지 청년들이 서로서로 계속 물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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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택’이라고 또렷하게 이름을 붙인 정책이 논의되고 그 성과로 조금씩 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2015년 1월에 ‘서울특별시 사회주택 활성화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된 이후라 할 수 있다. 서울시의 경우 2018년 2월까지 약 500가구의 사회주택이 공급된 것으로 집계된다. 조례가 제정된 지 아직 5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매년 정책의 결과를 평가받는 행정기관의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실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택의 활성화를 위한 여러 방안이 도입되고 있다. 하지만 주로 주택사업자를 지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택이란 부담 가능한 비용으로 거주기간에 제한 없이 또는 장기간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을 아울러 이르는 용어이다. 부담 가능한 비용과 장기임대가 실현되려면 비영리 운영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대한 비용을 낮추고 불로소득 발생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좁게는 입주자, 넓게는 지역공동체 당사자가 사회주택의 공급주체 일원으로 참여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다. 구체적으로는 수요자나 당사자들이 자금조달, 사업기획 및 시행, 주택운영관리, 융자금상환, 신규입주자 안내 및 교육 등을 분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주택협동조합이 사회주택사업자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공급된 사회주택의 경우 공급의 주체인 사업자가 별도로 존재하고 입주자는 단순히 세입자나 소비자의 입장에 머물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전체 사업비용이 늘어나거나 운영주체의 부담이 커지게 되어 기대만큼의 성과를 올리기 어려울 수 있다. 사회주택이 활성화되려면 사업자를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회주택과 관련된 지역공동체 당사자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행정안전부의 사회혁신추진단에서는 2018년 과제로 ‘지역의 공동체를 활용한 사회적 약자 삶의 질 향상 지원사업’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사회혁신 리빙랩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이 사업의 주제 중 하나가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택 활성화이다. 주민자치 및 거버넌스를 통하여 사회주택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데 사회주택 수요자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정책모델을 실험하는 것이 주요 목표이다.

리빙랩은 사회주택 수요자 및 지역공동체 구성원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방안을 실험하는 것과 사회주택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적 협의체계를 검토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 전자의 경우 기존 사회주택 입주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 공동학습, 신규 수요자 및 지역공동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집담회나 토론회 등을 실시하여 기존 사업체를 비영리 사회주택공급조직으로 전환하거나 수요자 기반의 사회주택주체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을 실험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지자체 담당부서, 지방공기업, 사회적경제주체 등 사회주택과 관련되어 있는 공공 및 민간 주체와의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사회주택 관련 지원정책을 개선하고 지역공동체 인내자본과 같은 연대체계를 형성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3개월 정도의 짧은 사업기간이지만 수요자 참여형으로 10가구가 거주할 사회주택의 공급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통해 지역공동체의 수요자가 주택설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입주자 공모방식을 개선할 수 있었다. 또한 리빙랩에 참여한 사회주택사업자 중 하나는 입주자 등 전체 조합원의 총의를 모아 비영리 사회주택공급조직으로 전환하기에 앞서 사회적기업 인증을 추진 중이다.

사회적경제 활성화에 관심이 많은 신용협동조합, 사회주택사업자, 수요자 집단의 연대와 인내자본 형성도 시도되고 있다. 짧은 기간에 여러 당사자와 의견을 나누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이번 사업을 계기로 사회주택 활성화를 위한 지역공동체 차원의 논의를 시작해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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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IT·게임 업계에서 잇따른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있다. 처음에는 인터넷 검색 포털 서비스 기업 ‘네이버(NAVER)’였다. 이때만 해도 그저 찻잔 속의 태풍으로 여겼다. 그 위력이 약해서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 기업의 특수한 상황으로 치부했다. 과연 그럴까. 불과 6개월 사이에 넥슨, 스마일게이트, 안랩, 그리고 가장 최근엔 다음카카오에서도 노동조합이 생겼다. 이 정도면 IT나 게임 업계의 노동조합 설립은 이례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유 있는 태풍이다.

네이버를 비롯하여 이들 기업 모두 포털, 게임 등 정보통신 분야 선도 기업이다. 그런데 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을까.

하나둘 살펴보니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직장일 것 같은 이미지가 잘 구축되어 있다. 임금이나 복지가 좋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유로운 직장 분위기, 유연한 근무, 능력에 따른 보상, 다양한 복지제도 등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비교되는 국내 기업들이다. 대부분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직장으로도 꼽힌다. 그런데 IT 업계 이직이 많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없다. 왜 그럴까.

정보기술(IT) 업계 노동자들이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에도 사무실 불을 끄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 IT 업계 프리랜서 10명 중 6명이 과도한 업무와 임금체불 등으로 중도하차한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무엇보다 IT·게임 업계의 과도한 장시간 노동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 조사 결과 10명 중 6명이 1주일 평균 60시간 이상 일하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살인적인 노동조건이다. 이 때문일까. 몇몇 게임업체에서는 직원들의 자살이나 돌연사도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IT나 게임 업계의 ‘크런치 모드’라는 것이 원인이다. 크런치모드(crunch mode)는 게임이나 프로그램 등 제품 출시를 맞추기 위해 야근과 특근을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3개월 이상의 고강도 노동을 하다 보니 일상의 피폐함이 심각하다. 그간 연장·야간·휴일수당 등은 거의 지급되지 않았고, 임금체불은 추정조차 힘들다. 벤처정신, 열정이라는 이름하에 노동인권의 사각지대가 바로 IT와 게임 업체였다.

한 게임업체는 지난 수년간 엄청난 수익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인센티브도 받지 못했다.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직원들의 성과평가나 보상기준도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항상적인 구조조정과 고용불안이다. 사실 IT·게임 업체 개발 프로젝트는 성공 확률이 10%도 안된다. 중간에 프로젝트가 중단될 때도 많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프로젝트 폭파’라는 표현도 쓴다. 그러다 보니 조직개편도 잦고, 조직 내 의사결정도 폐쇄적이다. 특히 프로젝트가 끝나면 대기발령, 전환배치, 권고사직 등을 강요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럴 때마다 “또 당했네!”라는 자조 섞인 말이 위안이라고 한다.

네이버는 40여개 계열사에 약 1만명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IT 업계 특성상 2030세대 젊은층과 여성도 많다. 그러나 최근까지 네이버는 직원 건강검진이나 조회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이런 상황들이 스스로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았던 곳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된 계기다. 그러나 네이버의 노사관계 인식과 태도는 매우 실망스럽다. 회사는 지난 4월 노조 설립 초기부터 노조 활동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을 위한 사내 메일도, 게시판 요구도, 강당 사용도 불허했다고 한다. 홍보물 배포와 같은 정당한 활동조차 제약한 것은 사실상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을 막은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지난 6개월 동안 교섭에 소극적이다가, 뜬금없이 비조합원이 참여한 TF를 제안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노동법 81조의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할 만큼 위법한 행위로 보인다. 회사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사람을 내보내는 회사, 평소 사내에서 직원 간 인사조차 하지 않는 조직문화, 실패의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회사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IT·게임 업계의 바람이라고 한다. 바로 회사는 이런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문득 엔씨소프트 노동자들은 안녕한지 궁금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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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고되고 긴 더위 탓일까. 쾌청한 가을의 끝이 아쉽다. 곧 겨울이 오겠지. 찬 공기 가득 실은 매서운 바람도 데려오겠지. 오늘은 24절기 중 상강이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커지고 서리가 내리는 시기다. 농경사회였다면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추수와 겨울맞이에 집중했을 시기.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붉게 물든 단풍과 활짝 핀 국화꽃 나들이의 여유를 만끽한다.

이러한 호사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계절의 변화 속에서 패턴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생각의 탄생> 저자인 생리학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의 말처럼 “패턴을 알아낸다는 것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는 일”이다. 패턴 인식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변화에 보다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패턴을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은 인류문명이 유지되고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4차 산업의 핵심기술인 인공지능도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패턴 인식능력이 늘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패턴에 적응하고 대처하기 위한 생활안내표 역할을 하지만, 인간이 지정해 둔 기념일을 제외하면 수백년 전과 비교하여 별다른 정보가 추가되지 못했다. &lt;마인드세트&gt;의 저자인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미래를 덮고 있는 커튼을 걷어내는 데 필요한 지식의 가장 커다란 원천은 바로 신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도해 봤다. 앞으로 한 달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매해 10월21일부터 11월20일까지 한 달간, 국내 포털에 노출된 언론사 뉴스 약 150만건 중 반복출현 및 신규출현 어휘를 추출하고 그 패턴을 분석했다. 뉴스 빅데이터 분석결과를 경제이슈, 생활이슈, 사회사건, 정치외교 등 크게 4가지 패턴으로 분류했다. 첫째, 경제이슈에선 코스닥·관광객·개발·소비자·스타트업 등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특히 ‘관광객’은 중국·의료·사드·유치 등의 연관어휘와 짝을 맺었고, ‘개발’은 사물인터넷·정보통신·자동차 등의 신기술 발표가 많았다. ‘소비자’는 물가와, ‘스타트업’은 지원과 짝을 이뤘다. 둘째, 생활이슈에선 청약·취약계층·겨울 등이 다수 언급됐다. ‘청약’은 아파트·통장·서울·자격·경쟁 등과 짝을 이루어 부동산시장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취약계층’은 지원과, ‘겨울’은 추위·준비·조류독감 등과 상관성을 보였다. 셋째, 사회사건에서는 재건축·나포·환경부·파업·집회·나눔·봉사 등이 주로 언급되었다. 이 중 ‘재건축’은 압수수색·이사비용·건설 등과 함께 언급되었고, ‘나포’는 중국·어선·북한·서해 등과, ‘환경부’는 국감·물발자국·제품·부평·다이옥신 등과 높은 상관성을 갖고 있었다. 끝으로 정치외교에선 유엔·시찰·제주 등이 거론되었다. ‘유엔’은 인권·추모·난민 등과, ‘시찰’은 김정은·자동차·투자 등과, ‘제주’는 한라산·북핵·6자회담·한미관계 등과 2차관계로 연결되어 나타났다. 칼럼을 다시 쓰는 한 달 후쯤엔, 위의 패턴분석을 통한 예측이 얼마나 적중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같은 별을 보더라도 관심사에 따라 서로 다른 상상을 하듯, 예측결과에 대한 해석과 반응도 제각각일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 인생도 예측할 수 있을까. 만약 과거에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실수들을 단지 예외적인 사건의 연속이라는 마음속 변명으로 늘어놓는다면, 패턴분석도 소용없는 일일지도. <호모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데이터에는 인간의 경험 자체에 대한 가치가 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인생을 예측하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은 패턴분석보다는 자기성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선조들은 수세기 동안의 관찰결과를 후손에게 DNA와 기록에 실어, 하늘의 변화를 달력으로, 별들의 변화를 생존을 위한 쪽지로 변환해서 물려주었다. 우리 인생에서 하늘과 별은 무엇일까. 우리는 후손에게 무엇을 물려주려고 하는 걸까. 궁금하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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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당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직접 관여를 했습니다. 보잉사 F-15SE로 거의 기울었던 결정을 뒤엎었죠. 경쟁 기종보다 기술 이전, 가격 면에서 모두 뒤진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는 “정무적 결정”이라며 록히드 마틴사의 F-35A를 밀어붙였습니다. 7조원이나 쓸 사업을 이렇게 가볍게 처리해도 되나 싶었죠. 그 의문은 올해 조금 풀렸습니다. 김관진이 록히드마틴사와 연관된 로비업체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났죠. 무기 사업은 역시 복마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복마전의 정말 큰손은 미국입니다. 유럽 전투기는 유독 한국 시장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습니다. 미국 주요 동맹국인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독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유럽산 전투기와 미국 제품을 동시에 사용하죠. 우린 사실상 100% 미국에 의존합니다. 게다가 한국의 미국 무기 쏠림은 전투기뿐 아닙니다. 액수로만 따지면 90%를 미국에서 사들이고 있죠. 기술 이전은 미미하고 품질 시비도 심심하면 터져 나와도 말입니다.

이 묘한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여럿이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주술은 한·미동맹입니다. 미군과 전략적 공조를 이루어야 하니 미국 무기를 쓰는 게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다른 미 동맹국은 그렇지 않은데 왜 한국만 그럴까.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말이 동맹이지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기대고 질질 끌려다니는 게 현실입니다. 군사를 부리는 권한은 한 국가의 고유 권한이자 국가라는 개념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전권은 이미 1950년 미국으로 넘겼고 전쟁이 끝나도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1994년, 겨우 반만 돌려받았죠. 하지만 전쟁이 나면 한국군은 아직도 미군 지휘를 받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논란에도 미국 무기를 묵묵히 사대고, 범죄를 저지른 미군을 조용히 내보내는 게 오히려 당연하죠. 온전한 국가는 아닌 셈입니다.

그래서 트럼프의 승인 논란이 더욱 씁쓸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조치’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우리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거푸 강조했습니다. 트럼프의 평소 태도를 보면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리가 났죠. 그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한편에서는 미국 심기를 건드렸다며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승인 발언은 외교적 결례지만, 정부가 자초한 측면도 크다”며 화살을 미국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로 돌렸죠. 한국당 의원들은 비슷한 성토를 토해냈습니다. 보수당이라면 한 나라의 전통과 민족주의를 중요시하는 게 보통이죠. 그런 정당이라면 성조기를 흔드는 대신 트럼프 발언에 분노를 표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당은 그 정체성이 극우와 종미 사이를 오가니 그런 반응이 무리였다고 할까요. 

더불어민주당 쪽에서는 승인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데 초점을 모았습니다. “부적절했다”(심재권 의원), “적절치 않다”(송영길 의원). 정의당 대표 이정미 의원은 “국민에 대한 모욕” “외교적 갑질”이라며 비판의 수위를 최고조로 올렸죠. 하지만 이들도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아무도 미국이 한국 외교, 군사, 안보에 비정상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에 대한 모욕은 트럼프가 어떤 단어를 써서가 아니라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현실임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그 현실을 바꾸려 시도조차 않는 자신들 행태가 더 큰 모독임을 감히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문제든 해결의 시작은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한국의 꼬인 외교를 푸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주권국가라면 할 수 있는 게 우리에겐 너무 모자란, 차가운 현실이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사태를 바닥으로 몰고 간 것도, 그것 말고는 별로 할 게 없어서인 측면이 크죠. 사태를 호전시킬 방도가 마땅치 않으니 호통치고 겁박할 수밖에요. 그만큼 문재인 정부의 노력은 한국시리즈 7차전 9회 말 전력투구입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다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그 노력에 행운이 곁들여져 결실이 하루빨리 나길 고대합니다. 그래서 정상 국가로 한 걸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길 희망합니다. 그 걸음에 딴지를 거는 목소리가 한국 안에서만큼은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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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꿈같다. 그 겨울에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광화문광장에 처음 나갈 때만 하더라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과 북이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 같았는데, 그 사이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났고, 13년간 직접고용을 외치며 투쟁하던 KTX 승무원들, 9년간 복직을 외치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직장으로 돌아간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국민에게 상처를 주었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거나 재판 중에 있다.

이 모든 일이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지경이지만, ‘그래서 세상이 변했니?’라고 묻게 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자주 듣게 되는 ‘소확행(小確幸)’이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작지만 일상에서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또는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성을 이른다. 이것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에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 자신이 느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감정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인생은 한 번뿐(You Only Live Once)’이란 말을 줄여서 ‘욜로’라고도 한다.

이런 사회적 경향은 애초부터 출발선이 다른 사람,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만큼 격차가 확연히 벌어진, 불평등이 고착된 사회의 반증이기도 하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의 삶이 확정되는 이들에게 멋진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먼 미래를 위해 살아가라는 성장시대의 동기를 부여한들 더 이상 속을 사람도 없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실현하기 어려운 소망을 품고 살면서 괴로워하는 대신, 오늘이나 내일쯤 당장 실현가능한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자기위안과 행복을 탓할 수 없다. 도리어 노동중독사회에서 게으를 권리까지 권하지는 못하더라도 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며 권할 만한 인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미투(Me too)’를 경험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느끼게 된 깨달음이 하나 있다.

그중 하나는 고발당한 사람들만 고발된 것이 아니라 나도 누군가 타인에게는 살아있는 권력이고, 잠재적인 위협이며 공포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촛불혁명’ 직후 시작된 ‘미투혁명’은 잘못된 최고 권력자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일상의 민주주의가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함께 촛불을 들고, 더불어 진보를 말하고, 소셜미디어 프로필 이미지에 세월호 추모 이미지를 달고 있는 우리들 역시 일상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또는 지속적으로 1차 가해자가 되고, 2차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소소하게는 직장에서 누군가 잘되게는 할 수 없어도 못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자동차 운전대를 잡으면 길 앞의 여성운전자에게 시시때때로 욕설과 비난을 가할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한순간의 분노와 실수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공연한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큰 권력을 비판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잘못된 큰 권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저절로 정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협하는 우리 일상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행’을 외면하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의’를 방치하고도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우리 모두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만, 행복해지기 어려운 까닭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테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테제다. 세상과 일상의 변화라는 두 가지 테제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한다면 ‘틸틸’과 ‘미틸’이 그토록 열심히 찾아 헤맸던 파랑새는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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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회에서 새로운 강사법이 통과될 예정이다. 이 법에 따르면 강사당 학기별 최대 6시간,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9시간 수업을 맡겨야 한다. 1년 단위로 계약해서 최대 3년을 보장해야 하고, 방학 중 급여를 지급해야 하며, 퇴직금도 마련해야 하고, 보험에도 가입해주어야 한다. 학문 후속세대에 최소한이나마 안정적인 교육과 연구 환경을 마련해주어 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벌써 엉뚱한 효과가 나타날 조짐이 보인다. 대학이 인건비 상승이 예상되자 이를 사전에 막고자 온갖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우선 교원확보율에 해당되지 않는 강사는 현 계약기간이 끝나면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대신 전임교원이 담당하는 강의를 늘린다. 이를 위해 강사 비율이 높은 학과에 불이익을 준다. 또한 개설 강좌 수를 대폭 줄이기 위해 졸업에 필요한 필수 학점 수도 낮춘다.

이러한 소문이 실제로 실행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추가 예산지출이 없기에 당장 대학 생존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학문의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많은 강사들은 생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학문할 수 있는 여건을 잃는다. 대부분 본교 출신의 강사들은 자신을 키워낸 대학에서조차 설 땅이 없다. 이를 바라보는 후배들은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할 뜻을 접는다. 대학원 나와 봐야 교수가 되기는커녕 당장 활동 공간도 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이 텅텅 비어간다. 학문을 논할 제자가 없으니 교수도 공부를 게을리한다.

전임교원은 엄청난 강의 부담에 시달린다. 1주일에 5과목, 6과목, 7과목 거의 무제한으로 강의를 해야 한다. 강의 시수와 수강학생 수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 과중한 강의 시간 탓에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리 없다. 게다가 개설 강좌가 줄어들어 모든 강의가 도떼기시장처럼 벅적거린다. 강의하느라 연구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외국 학자들이 해놓은 연구를 요약해서 ‘얕고 넓은 지식’을 전달하는 지식소매상으로 추락한다.

이렇듯 대학이 생존주의자로 전락하는 사이 학문 후속세대의 재생산은 완전히 물 건너간다. 실제로 인건비를 줄여 생존하려는 노력은 신임 교수를 뽑지 않는 사태로 나타나고 있다. 정년퇴임을 해도 새로 교수를 충원하지 않는다. 취업에 별 도움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학과가 말라죽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새로 오는 자는 새로운 희망을 가져온다. 새로운 교수가 와야 대학도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예 그 싹을 짓밟는다.

이제 대학의 목적은 생존이다. 많은 사람들은 저출산과 학령인구의 감소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마냥 이러한 사회구조의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도대체 누가 대학을 생존주의자로 몰아가는가? 손에 손을 맞잡고 취업 문제를 대학에 떠넘긴 국가와 기업이다. 국가는 국가보조금을 한 손에 쥐고 또 다른 손에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면서 대학을 겁박하고 있다. 정원을 줄이고 취업훈련소가 되라고. 기업 역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산업인재를 키워내라며 대학을 압박한다.

기업은 사실 부모가 20~30년간 자녀에게 쏟아부은 인적 자본의 최후의 수혜자다. 별다른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열매를 마구 따먹는다. 사회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에게 투자하지 않고, 써먹지도 않을 온갖 스펙을 요구해서 대학교육을 황무지로 만든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학이 학문의 탁월성을 추구할 수 없다. 단기성과를 내라는 경영 언어에 휘둘려 눈앞의 생존에 매달린다. 하지만 묻자. 진정,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서 우러나온 문제를 붙잡고 ‘우리의 언어’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남의 삶’에서 나온 ‘남의 이야기’를 주워섬기며 ‘제 이야기’인 양 우쭐대는 허깨비가 수두룩하다. 이런 비판을 하면 제 밥그릇 챙기기 급급하다며 ‘교레기’ 취급이나 받겠지. 나는 또다시 우울한 상념에 사로잡힌다. 이러다가 온 대학이 다 천해지면 누가 귀한 일을 맡아서 할까?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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