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박근혜’ 하나로 돌리면서 우리의 정치의식은 또 후퇴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밀양의 송전탑이 박근혜의 작품인가, 또 박근혜 아닌 전임정부들은 정말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김대중은, 노무현은? 그렇다면 농민시위에서 경찰에 맞아죽은 농부는, 태안반도는 어찌 가능했을까?

이명박 정부하에서 우리는 전임 정부와의 연속성에 대해 자각하게 됐다. 괴물정부 하나의 존재에 분노하면서, 그들이 하는 수많은 일들이 전임정부에서 결정되고 후임 이명박 정부에서 집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명박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은 그 이전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정과 반민주성을 비판하는 것과 같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그렇고, 제주 해군기지가 그렇고 정보통신법이 그렇고 자본 통상법이 그렇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그렇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지난해 10월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지난 28일 서울 광화문광장 등 전국에서 이를 기념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컵들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은 계속된다’고 적힌 종이컵을 놓고 있다. 이준헌 기자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유신의 악령이 깃든, 웬 야만과 변종의 지도자 박근혜와 그의 옆에 인의 장벽을 치고 있는 꼴통 소수가 문제였다. 새누리당도 들러리인 양 취급됐다. 그리고 심지어, 자본들- 박근혜의 배후에서 박근혜 정부의 경제와 노동정책을 좌지우지했던 자본은 눈에서 멀어졌다. 노동자 투쟁만이 자본의 그림자를 언뜻언뜻 보여줄 뿐이다. 그런 현실에 대한 쉬운 표현이 바로 ‘적폐’란 단어다. 아이러니는 이 단어를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씨가 처음 쓰고 우리는 그 단어의 사용을 조롱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그 단어가 전부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프레임이 향할 방향은 어디인가? 이명박 시절에 그 전임 김대중·노무현의 자유주의정부의 공과를 깨닫게 됐다면, 박근혜 시절에서는 고작 차라리 전임 이명박이 더 낫다거나(실제로 그런 말도 했었다) 혹은 그러니 박근혜와 그 정치일당이 아니면 다 괜찮다는 앙상한 결론이면 될까?

내가 박근혜 정부하에서 바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전과 14범 이명박 전 대통령 앞에서 처절하게 선거민주주의의 한계를 목도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바로 앞선 자유주의정부의 공과를 함께한다는 점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각성과 절망의 상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어떻게 할 것인가와 누가 주체가 될 것인가는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자유주의정치가 민주주의를 배반했던 30년의 역사를 꿰뚫어보면 희망의 그림자는 더욱 멀어져갔다.

우파와 자유주의 세력이 함께 망친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인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 나갈, 즉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체라는 믿음은 없었다.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말기였다. ‘진보개혁세력의 위기.’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우리는 이제 알 만큼 안다. 우파의 국가통치철학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선거만 민주주의가 얼마나 무늬만 민주주의인지. 민중과 노동과 결합하지 않은 정치엘리트, 선거엘리트, 운동엘리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러니 박근혜 정부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박근혜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유신체제만 벗어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1980년, 혹은 87년을 재탕하지 말길. 좌절과 절망을 모아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잡길. 진정 민중과 노동자와 서민의 이해가 정치적인 힘이 되길.

하지만 촛불이었다. 짱돌도 아니고 스크럼도 아닌 촛불을 들자고 했다. 촛불은 절묘하게 법과 제도와 타협하면서 박근혜를 퇴진시켰다. 그 프레임은 결국 우려한 대로, 박근혜를 모든 ‘적폐’의 화신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제 박근혜가 남긴 적폐를 청산하자고 한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구자유주의세력이 공유하는 적폐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에 대한 모호함, 노동에 대한 모호함, 미국에 대한 모호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촛불은 자유주의정치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그러나 과연 민주주의는 위기에서 구출하였을까? 촛불 1주년을 맞아, 의문은 이 지점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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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85년 영화 <란>은 한 영주 집안의 비극적 몰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늙은 영주가 땅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며 시작합니다. 서로 도우라는 당부가 무색하게 내분과 살육으로 이어지죠. 게다가 그 내분으로 가족과 영토를 잃는데, 영주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와 복수를 꿈꾸던 이의 계책이었다는 스토리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강력한 지도자의 강경한 외교가 힘을 얻는 분위기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공산당 내 입지를 굳히면서 더욱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베 일본 총리도 총선 압승을 통해 기존 우경화 외교를 더 밀어붙일 테죠. 북한 김정은 위원장 또한 경제 회복과 군사력 증강에 탄력을 받아 더 큰 목소리를 낼 듯합니다. 여기에 큰 목소리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방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각종 언행과 스캔들, 독단적인 외교 행보 등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일본 방문에서도 노골적으로 미국 무기 구매 확충과 무역적자 해소를 되풀이했죠. 북핵 위기를 장사 기회로 삼는다는 비판이 커지는 만큼 미국의 국제적 지도력에 대한 불신도 늘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이나 한국처럼 국방을 미국에 기대고 있는 처지에서 속앓이가 깊어질 수밖에요. 미국 안에서도 걱정은 깊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서 자질이 있느냐, 대선에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느냐 등의 논란이 그치질 않고 있죠. 게다가 행정부 자체를 위축시키고 있어서 제도적 문제로 번지고, 또 그 여파마저 오래가리라는 걱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걱정과 혼란은 대선 다음 날 바로 시작됐습니다. 각 정부 부처에서는 정권 이양에 분주했습니다. 당장 다음 날 인수위 맞이에 나섰죠. 주차장, 인터넷, 사무실 등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정작 인수팀은 오질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말이죠. 다들 당황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농무부의 경우 한참이 지나 기껏 나타난 이들이 부서 업무에 문외한들이었습니다. 엉성한 준비는 엉성한 부서 구성으로 이어졌죠. 농무부 최고 관료 직책 중 장관 딱 한자리 빼고는 대부분 국회 인준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무부 책임 과학자에 지구 온난화뿐 아니라 과학 자체에 깊은 회의를 가진 이데올로그이자 극우 라디오 진행자가 임명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습니다. 농업과 자원 관리 업무를 떠나 과학 연구에 주요 역할을 하는 농무부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비판이 거세죠.

비슷한 상황은 국방부를 제외한 전 부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핵무기를 관리하는 에너지부, 외교의 난제를 풀어가는 국무부 등 한국의 입장에서 너무나 중요한 부서도 포함해서 말이죠. 에너지부 장관이 된 릭 페리는 후보자 시절 에너지부를 아예 없애겠다고 공언한 인물입니다. 거대 에너지 회사인 엑손모빌 최고경영자로 국무부 장관이 된 틸러슨은 국무부 축소를 주요 목표로 내세워 국무부 관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덕택에 고위 관리들이 은퇴하거나 물러나면서 전문가가 모자라 허덕이고 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가 아직 공석인 게 우연이 아닙니다.

영화 <란>의 며느리처럼 일부러 정부를 약화시키려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 때문에 연방정부는 큰 혼란을 겪고 주요 업무에서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죠. 그사이에 백인우월주의 목소리, 흑백갈등, 좌우대립 등 정부의 개입이 절실한 문제는 악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냐는 논의는 오래됐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지배력이 지속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죠.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정부의 행보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문제는 미국의 세계 질서에 어떤 나라보다 기대왔고 그래서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대응입니다.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논의는 북핵 문제를 넘어 지역 정세를 큰 틀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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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치! 정치를 진정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한 길이다. 삶의 정치가 뭐길래 그러할까? 평범한 사람의 삶에 기반을 둔 정치, 그리고 삶의 질을 좋게 만드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에게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지향할 수 있는 배움과 일의 기회와 조건을 제공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정치는 거창한 이념의 구현을 내세워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거꾸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념을 사람 사이를 잇는 꿈과 희망의 언어로 사용한다. 또 삶의 정치는 권력을 목적으로 삼아 사람을 적과 동지로 가르지 않는다. 거꾸로 적마저도 친구로 만들기 위해 권력을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와 규칙의 지렛대로 삼는다.

근래에 들어 삶의 정치란 말이 부쩍 강조되어 왔다. 이념과 권력을 좇아 사람과 사람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나누면서 공동체를 해체하고 삶을 위협하는 정치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보통사람을 배제하고 차별하며 소외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 온 것이다.

한국의 경우 삶의 정치는 한층 더 절실하다. 부와 권력의 독점과 보통사람에 대한 배제와 차별과 소외가 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제윤경 의원이 한국은행의 ‘2016대차대조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불평등지수(피케티 지수=자본/소득비율)는 8.28배로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일본(6.01배), 프랑스(5.75배), 영국(5.22배), 미국(4.10배), 독일(4.12배)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불평등 정도가 훨씬 높은 상태다. 이런 중에도 권력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기득권층의 사익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사유화되어 있었다.

‘촛불혁명’은 삶의 정치를 위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을 파면시키고,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함 그리고 결과의 정의로움을 지향하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 삶의 정치를 본격화하기 위한 주체와 작동 영역과 방책을 확보해야 한다. 이때 주목할 세 개의 키워드가 있다. 여성과 노동과 사회혁신이 바로 그것이다.

삶의 정치를 위해서는 여성을 정치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가장 극심한 배제와 차별과 소외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의 ‘2016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기초해 당장 임금성비만 봐도 여성은 남성의 64.1%에 불과하다. 여성가족부는 의사결정 분야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격차가 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성은 보통사람의 삶의 터전에 가장 넓고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생활인’이다. 삶의 정치의 핵심인 지역공동체와 가계와 교육 문제 등에 가장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새 정부가 ‘여성내각 30%’를 약속하고 지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우선 내년 6월에 치를 지방선거에서 여성 후보를 대거 발탁해야 한다. 특히 촛불혁명 덕에 집권한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야 한다. 민주당은 핵심 지지기반인 광주에서조차 지난 20여년간 단 한 명의 여성단체장도 배출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삶의 정치의 주된 작동 영역으로는 노동에 주목해야 한다. 보통사람의 삶은 기본적으로 노동에 의존한다. 따라서 삶의 정치는 일터에서의 평등과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구현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불합리하고 과도한 임금격차를 비롯해 고용안정은 물론 생산성마저 해치는 권한의 격차도 해소해야 한다. 끝으로 관이 아닌 시민(주민)이 주도해 의제를 설정하고, 해법을 도출하는 ‘사회혁신적’ 방책을 구사해야 한다. 그래야 당리당략이 아닌 삶에 밀착한 의제를 다루고,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

촛불혁명 1주년과 문재인 정부 출범 6개월을 맞이해 의미를 조명하고 성과와 과제를 짚어보는 중이다. 이런 때에 삶의 정치라는 화두와 여성과 노동과 사회혁신이라는 키워드를 불러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적폐청산을 넘어 새로운 대한민국의 설계를 위한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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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공작정치이다. 지난 10월30일 국정원개혁위원회가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국정원은 ‘문예계 내 좌성향 세력 현황 및 고려사항’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15개 문화예술 단체와 249명의 문제 인물들을 작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검찰은 국정원이 박근혜의 문고리 3인방인 이재만, 안봉근에게 매월 현찰로 1억원을 상납했고, 조윤선, 현기환 전 정무수석에게는 500만원을 상납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재만, 안봉근은 상납받은 돈으로 지난 4·13 총선 동향을 파악하는 비공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이 돈이 모두 전직 국정원장의 특수활동비였다.

국정원이 작성한 15개 단체에 속한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이자, 특별관리 대상 249명에 속한 당사자로서 국정원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블랙리스트를 남한 최대의 공작정치로 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국정원은 블랙리스트를 자신의 세력 확장 수단으로 보았으며, 이 일련의 과정에서 청와대에 돈으로 로비를 했으며, 예술가들을 공작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블랙리스트라는 고리로 예술가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영혼을 짓밟았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재생산과 세력 확장을 위해 이용했다. 예술가들이 청와대와 국정원의 공작정치에 놀아난 것이다.

청와대와 국정원의 이해관계는 좌파예술가 색출과 퇴출을 위해 상호협조라는 명분에 기초하지만, 실제로 이 명분은 가설효과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게 나라를 위해 한 것이라는 이들의 공감대는 공작정치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가상의 신념에 기초한다. 그들은 이 신념을 동맹의 원천으로 생각하며 권력의 재생산을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블랙리스트는 그러한 공작정치의 동맹을 작동시키고, 생성케 하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 블랙리스트는 어떤 점에서 그들이 고안해 낸 공작정치의 훌륭한 신상품이며, 정치권력과 정보권력의 동맹을 확인시켜주는 일종의 리트머스 종이와 같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구국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이용하고,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기적 집단들이다. 국정원은 청와대에 돈을 상납하여, 부패한 공작정치에 면죄부를 받고자 했으며, 청와대는 국정원을 이용해 본인들이 해야 하는 정보공작의 임무를 부여했다.

김기춘이 작동시킨 블랙리스트는 유신 공안검사의 습관적 망상증의 결과이며, 이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망상증과 유사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권력의 정점에서 고영주와는 다르게 공작정치의 판을 크게 벌였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가 공작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국정원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들은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예술가 개인을 사찰할 수 있으며, 블랙리스트를 그럴듯한 구국의 미션으로 부풀릴 수 있다. 김기춘은 블랙리스트 작성의 정당성을 국정원의 공작 파일을 통해 얻고자 했고, 국정원은 청와대의 미션을 수행하면서 공작정치의 영역을 넓히는 수단으로 삼았다.

블랙리스트는 원래 인터넷에서 떠돌던 데이터베이스였다. 문재인, 박원순을 지지하고,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명단이었다. 그런데 이 명단이 김기춘, 국정원을 거치면서 블랙리스트가 되었다. 김기춘은 블랙리스트가 정책적 결정일 뿐 검열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국정원이 작성한 블랙리스트는 정치적 성향과 활동을 기준으로 배제와 퇴출을 적시한 명단이라는 점에서 검열이며, 청와대가 요청하고 국정원이 보고했다는 점에서 공작정치이다. 블랙리스트의 전달체계에서 수행 주체로 가담한 문체부의 전직 장차관들, 고위공무원들, 그리고 산하기관 간부들의 부역행위는 이러한 공작정치로서의 블랙리스트의 의미를 충분하게 간파할 때, 그 구조적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총력을 기울여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실체적 진상규명이 필요한 것은 바로 최고의 두 권력기관이 동맹해서 만든 공작정치가 돈과 정보와 권력으로 예술가들을 우롱했기 때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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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기획자란 남들 앞에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직접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 필자, 독자, 출판 관계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를 구현해내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기획자는 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를 지향한다. 아무리 좋은 기획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줄 필자가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될 때가 있다. 얼마 전 편집회의에서 여러 안건을 두고 이야기하다가 너무나 멋진 기획을 만났지만,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하신 말씀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해서 글을 쓸 수 있는 필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지식인 중에는 자기 분야를 벗어나서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연구자들이 정말 드물어요. 또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럴 여력 자체가 없습니다.” 전문가(specialist)의 시대지만,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더욱 희소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1980년 한 해 동안 배출된 국내 박사 학위 소지자는 528명에 불과했지만, 2009년 1만명을 넘어섰고, 2015년에는 1만3077명에 이른다. 올해 태어날 신생아 수가 최초로 40만명 미만이 될 것이라 하니 인구는 줄어도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꾸준히 증가하는 셈이다. 인구 1만명당 박사 학위 취득자도 2명이 넘는다.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7%에 불과하며 고졸자의 대학 진학률은 80%에 육박한다. 수치와 통계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는 지식 선진사회, 바야흐로 대중지식인의 시대다. 그런데도 지식인 사회, 대학의 위기를 넘어 우리 사회가 반지성주의 사회가 되어간다는 우려가 들려온다.

역사학자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1963년에 펴낸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현대 지성사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그는 미국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복음주의’가 매카시즘이라는 ‘극우-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지식인, 특히 공적 지식인들을 어떻게 몰락시켰는지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복음주의, 극우-반공주의와 더불어 실용주의를 반지성주의의 핵심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지적 능력(intelligence)’과 ‘지성(intellect)’의 핵심적 차이는 실용성이 아니라 비판 능력에 있다. 지적 능력이 어떤 사안을 파악하고 처리하는 능력이라면, 지성은 의문을 품고, 이를 비판하고 이론화한다. 지적 능력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높은 자질로 평가되지만, 지성은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에 대해 호프스태터는 “지식인이란 해답을 질문으로 바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지식인은 사회적 통념과 상식에 의문을 던지는 불편한 존재란 뜻이다.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 사회는 대중의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은 국가권력의 정상화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를 달성한 결과이지만, 이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외면하고, 분단이라는 지속적인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 없이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우리는 스스로 정직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한가롭게 ‘선비질’이나 하는 존재로 비치기에 십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염려하게 된 이유의 상당 부분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살아오면서 권력과 야합하고, 금력에 굴복했던 지식인 자신에게 있다. 대통령 탄핵으로 귀결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뚜껑을 연 것이 이화여대의 미래라이프 사태와 정유라의 부정입학 사건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 사회가 처한 위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지식인이 없다면 적폐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과 싸울 때보다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스스로 더욱 외로운 소수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들의 비판과 의문이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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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불안과 공포의 시대다. 일회용 생리대와 계란, 용혈성요독증후군(HUS·햄버거병) 의혹을 받고 있는 맥도날드의 안전성 문제는 국정감사에서도 이슈가 되었다. 소비자 수난의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제품의 안전 불감증 문제는 최근에 나타난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이 부여하는 HACCP 인증은 제품의 안전을 보장하므로 소비자들은 좀 더 비싸더라도 HACCP 인증 제품을 구매한다. 하지만 최근 국회에서 HACCP 인증 업체 중 식품위생법을 어겨 적발된 업체가 계속 증가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1년 4월부터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 및 사망 사건은 제품안전 불감증의 대표적이며 가장 심각한 사례이다. 제품안전은 소비자가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아무리 음모론이 들끓어도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회적 권리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살충제 계란 파장이 전국으로 확산되며 출하되는 계란에 대한 전수 조사가 진행중인 8월 16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는 판매중지 안내문을 게시하고 다른 제품으로 계란 매대를 채워놨다. 김기남 기자

소비자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시민단체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에 의해 주창되었다. 1962년 3월15일 케네디 대통령은 소비자 이익 보호를 위한 특별보고서에서 네 가지 소비자 기본권리를 제시했다. ‘안전보호 권리’,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알 권리’,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 간에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권리’, 소비자의 이익이 정부정책에 충분히 고려되고 행정법원에서 공정하고 신속히 처리되도록 하는 ‘의결을 반영시킬 권리’가 네 가지 권리이다. 이 네 가지 권리는 유엔의 소비자 보호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이후에 보상, 교육, 건강한 환경과 생필품에 대한 권리들이 추가되었다. 이 권리들은 소비자를 시민으로 규정한 ‘소비자 시민주의(consumer citizenship)’에서 소비자가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사실 소비자 시민주의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강조해왔다. 시민으로서 소비자는 윤리적, 사회적, 환경적, 경제적 고려를 한 소비를 해야 하며, 소비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지구환경을 보호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향하는 소비가 의무로 강조되는 추세이다. 그런데 갑질 논란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시민으로서 소비자의 의무는 갑질과 무관한가?

마트에서는 반 이상을 먹다 남은 고기를 가져와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반품해달라는 진상 소비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TV홈쇼핑 업계에서는 빈 박스나 다른 제품, 심지어 쓰레기를 넣어 반품한 뒤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매월 수천건에 이른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들은 ‘블랙컨슈머’이다. 블랙컨슈머들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악의적인 입소문을 내거나 부정적인 글을 온라인에 유포하겠다고 협박하기 때문에 기업이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블랙컨슈머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일반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요즘 소비자는 호갱이라고 일컬어지는 호구고객과 진상고객인 블랙컨슈머로 양분되는 것 같다. 많은 소비자는 호갱이 되어버렸고 소수의 블랙컨슈머는 소비자들을 갑질쟁이로 손가락질 받게 했다. 건강한 시장을 만들기 위해 소비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같은 법적·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일회용 생리대와 계란의 안전성 문제는 소비자의 안전보장 권리가 핵심이다. 하지만 일회용품 사용이 신체와 환경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며 살충제 계란의 원인은 공장식 가축사육방식에서 비롯됐다고 볼 때, 미래의 일회용 생리대와 계란의 안전성은 단순한 안전 관리 감독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결국 생산과 소비의 과정이 환경에 한 갑질 때문에 우리의 건강에 해를 받는 역습을 당한 꼴이다.

우리 모두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황금주 | 중앙대 교수·경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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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빵장수일 뿐이라오. 다른 뭐라고는 말 못하겠소. 예전에, 그러니까 몇십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지금은 그저 빵장수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의 변명이 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이 엄마에게 “댁 아드님에 대해 뭐 잊으신 것 없수?”라며 반복적으로 전화를 걸어 비아냥대면서, 빵집 주인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댁 아드님’은 생일케이크 주문하였던 바로 그날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었다는 것을. 의식을 잃은 어린 아들의 병상을 일주일째 뜬눈으로 지키며 젊은 부부의 몸과 마음은 생선가시 발리듯 뜯겨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결국 아이는 세상을 떠났음을. 그는 그저 자신이 공들여 구워낸 생일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은 예약 손님에게 화가 난 나머지 수화기에 대고 좀 이죽거렸을 따름이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빵집 문을 두드리고서 “그 애는 죽었다구. 이 못된 놈아!”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 엄마와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 쏘아붙이던 아이 아빠를 앞에 두고, 그는 횡설수설 미안함을 전하고, 더듬더듬 위로를 건넨다. 그러다 부부를 안으로 들여 탁자 앞에 앉힌 후 갓 구워낸 빵을 건넨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며, 그들이 접시에 놓인 빵을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다.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으며, 아이 엄마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한다.

이렇듯 빵집 주인은 자신이 무심코 던진 돌로 인해 낯선 부부에게 미안함과 연민을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이 잃은 부모의 아픔을 온전히 보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 짊어지고 살 수는 더더욱 없을 테다. 본인 말대로 그저 한 사람의 빵장수일 따름이니까. 바로 그 빵장수만의 방식으로, 도움이 되고자 무언가 끌러놓는 저 장면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A Small, Good Thing〉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러해 전 어느 늦은 저녁, 필자는 길에서 울고 있었다. 어딘가로 찾아들어 마음을 누이고 싶었고, 떠오르는 장소가 당시에는 성당 정도밖에 없었다. 지나던 택시를 무작정 잡아타고 “명동성당 가주시겠어요?”하였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다시 울었다. 기사분은 뒷좌석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아무 말 않고, 듣고 계시던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그리고 치지직 주파수를 돌렸다. 이내 경건하고 고요한 노래가 들려왔다. 조스캥 데프레가 작곡한 ‘아베 마리아’라고 라디오 진행자가 알려주었다. 뒤이어 그레고리안 풍의 단조로운 노래도 흘러나왔다. KBS 클래식FM이었던 듯한데, 그 시간에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고음악을 특집으로 선곡했던가 보다. 여기저기서 자동차 클랙슨이 울리던 캄캄한 월요일 밤, 퇴계로 부근의 택시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아베 마리아와 살베 레지나와 마니피캇을 함께 들었다. 어느덧 울음은 스르르 잦아들었다.

그날 밤 신에게 무엇을 간절히 빌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힘들었던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성당으로 가달라며 울던 승객을 위해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를 희생하고 그 노래들을 같이 들어주신 택시 아저씨의 마음은 기억한다. 말하자면 당시 위로는 잠자코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택시 아저씨의 손길을 통해 건네졌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읽기’인지 의아해하실지 모르겠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리하게 분석해주실 정치·경제적 현안들과 ‘세상을 바꾸는 방안’에 필자의 서툰 논평을 한 줄 더 얹는 대신, 필자는 그 세상에서 떼어놓는 작은 발걸음들에 시선을 두고자 하였다. 핵문제가 해결되고 적폐청산이 되고 나쁜 자들이 감옥에 가도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될, 제도를 몸통으로 하고 자본을 심장으로 한 체제. 그 안에서 힘겨워할 우리가 서로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찰나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글은 그 첫 시도다.

<이소영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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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달 7~8일 한국을 방문한다. 정상회담을 하고 국회연설도 한다. 트럼프 방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를 예측해 가면서, 방한을 기회로 우리가 그에게 전할 말을 준비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언동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언론이 평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이익을 내기 위해 이악스럽게 계산하고, 상대방이 물건을 사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는 ‘실속형’ 정치인으로 보인다. 그의 말폭탄 뒤에는 고도의 계산과 의도가 숨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헤리티지 재단 대통령 클럽 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트럼프는 지금까지의 말폭탄과는 결이 다른 말을 했다. “지난 25년간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줬지만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 이 말에는 무슨 복선이 깔려 있을까? 우선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미국은 그동안 핵문제 때문에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준 적이 없다.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1994년 10월)에 따라 북핵활동 중단 대가로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중유 50만t을 현물로 준 적은 있다. 1998년 8월 제기된 ‘금창리 지하동굴 핵활동’ 의혹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자 벌금조로 식량 60만t을 북한에 준 적도 있다. 미국이 북한에 준 건 중유 350만t, 식량 60만t뿐이고 그 가격은 도합 5억달러 정도였다. ‘수십억달러’를 줬다는 건 과장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는 말도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2005년 9월19일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합의·발표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 미 재무부가 마카오 BDA은행의 북한계좌 2500만달러를 동결시켰다. 북한은 즉각 미국을 비난했고 핵활동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6년 10월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9·19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깨진 건 사실이지만, 북한의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건 왜곡이다.

그러면 트럼프는 왜 이런 말을 할까? 사실을 좀 과장하고 왜곡해서라도 장차 대북 협상무용론을 밀어붙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향후 협상무용론에 따라 대북 압박·제재가 더 강화되면 한반도 안보위기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는 ‘겁먹은’ 한국을 상대로 안보장사를 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하면서 대비해야 할 점이다. 한편 20일 최선희 북한 북미국장이 모스크바 국제회의에서 ‘북핵무기 협상불가’를 말했다. 트럼프 방한을 의식한 발언 같다.

이것이 대북압박론자들의 주장에 원용될 수도 있겠지만, 최선희 말에도 숨은 뜻이 있다. 조성렬 박사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대화로 시작하자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화용의는 있지만 처음부터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회담은 안 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방한을 앞두고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에 부탁한다. 트럼프의 입만 쳐다보면서 정치공방이나 벌일 정도로 한가한 때가 아니다. 여야 모두가 북·미 대화·협상을 트럼프에게 적극 권고해주기 바란다. 안보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을 생각하면 야당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1993~1994년 북·미 협상으로 북핵 문제 해결 모델을 만들었던 로버트 갈루치 전 동아·태차관보는 16일 연세대 강연에서 어렵지만 북핵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했다. “제재는 해결책이 아니다. ‘조건 없는 협상’을 시작하라. 거기서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되 그 대가는 제공해야 한다. 북핵 포기가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갈루치의 말은 미 진보진영의 목소리이고, 트럼프 정부 내 국무장관, 국방장관도 대화와 협상을 얘기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전쟁 불가’까지는 강하게 얘기했다. 트럼프 방한을 계기로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해서 ‘대화·협상 불가피’를 적극 설득해 나갈 차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이 들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그렇게 발언할 때마다 국민은 절망스럽다. 신바람 나게는 못하더라도 희망의 끈조차 놓게 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황재옥 | 한반도평화포럼 여성·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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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바게뜨 불법파견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 9월 고용노동부는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불법파견을 확인하고 시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한 달도 안되어 물류센터와 배송기사 불법파견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다. 파리바게뜨 문제의 본질은 바로 ‘프랜차이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프랜차이즈는 20세기 중반 이후 각종 서비스업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사업양식으로 발전했다. 프랜차이즈는 1950년 밀크셰이크 판매원 레이 크록(Ray Kroc)이 맥도널드 형제에 의해 운영되던 캘리포니아의 한 레스토랑 권리를 받아 영업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출처:경향신문DB)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자료를 보면 가맹본부의 프랜차이즈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13년 2973개의 브랜드가 2016년 4267개로 2배나 증가했다. 가맹점 수만도 10만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바게뜨를 소유한 SPC그룹은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파스쿠찌, 빚은 등 30여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이 분야 1위 기업이다. 프랜차이즈의 특징은 브랜드 구축과 가맹점 의존 방식에 있다. 프랜차이즈는 기업으로 하여금 강력한 브랜드 혜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용은 절감해주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경쟁적인 시장조건과 이윤 창출 압박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아웃소싱을 선택한다.

프랜차이즈 운영 과정에서 각종 규정을 침해할 위험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전산자료를 조작하여 연장·휴일근로 수당을 주지 않는 소위 ‘임금 꺾기’와 같은 형태가 대표적이다. 파리바게뜨 사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비정규직 휴가비나 수당 등 미지급 금액 110억원의 임금체불 문제는 그 단면이다. 

그간 SPC그룹은 자사 브랜드에서 일하는 홀서빙이나 조리사는 물론 제빵기사들에게 비인권적 인식을 보여왔었다. “그나마 에어컨 등이 나오는 곳에서 일하게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최저시급 이상을 주고, 식사 때 빵이라도 주잖아!” 등의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프랜차이즈라는 기업 경영은 일자리의 가장 나쁜 모델(bad job)이다. 현재 프랜차이즈 사업은 자본과 기업의 비즈니스 핵심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자사 브랜드 구축과 충성고객 유치에는 과감하게 투자한다. 반면 상품과 서비스 제공을 담당하는 직접적인 고용주 역할은 애써 외면한다. 

바로 ‘고용 털어버리기’(shedding employment) 전략이다. 본사가 아닌 다른 고용주 밑으로 옮겨진 일자리들은 대개 낮은 임금에 복지혜택은 거의 없다. 고용 안정성도 훨씬 떨어진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수지를 흑자로 돌리려면 인건비 하향 압력이 발생, 구조상 규정위반 편향성이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사실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시정명령의 취지는 헌법적 질서에서 만들어진 대법원 판례와 법률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파견법은 1998년 자본과 기업이 고용유연성을 이유로 정부에 요구해 제정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영계 요구로 만들어진 법질서조차 현실을 이유로 수용할 수 없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영미권과 달리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운영하더라도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을 하는 곳은 드물다. 왜 우리나라에서만 기업들은 고용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공동소유, 공동경영이라는 허구적 슬로건에 숨겨진 프랜차이즈 이면을 되짚어 봐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구조와 광범위한 아웃소싱에서 비롯된 경쟁상황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초점은 서비스 시장의 부상, 프랜차이징 영업방식, 총수입에서 과도한 본사 수수료 지불 문제 등이다. 특히 프랜차이즈 기업의 막강한 영향력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 본사의 ‘갑질’에 대한 횡포를 감내하면서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 프랜차이즈는 지속·확대되는 것일까. 아마도 지난 20년 사이 우리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고용 구조조정의 결과일지 모른다.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프랜차이즈 모델이라는 ‘괴물’에 대한 개입과 재규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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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7년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또 일제히 낯익은 노동운동 위기론이 등장하고 있다.

이번엔 노조운동 활동가들, 그리고 진보정치운동에서 시작했다. 왜 정치적인 격변기마다 노동운동 위기 담론이 대두할까? 그리고 이런 담론은 근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꼭 수반한다.

노동운동이 변해야 노동운동이 산다? 하지만 과연 변해야 할 것이 노동운동 혹은 노조인가, 아니면 그 노동운동이 자리 잡고 있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전체인가? 즉 87년체제의 극복, 아니 전환인가?

노동사회학자인 필자는 노동운동의 ‘위기론’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지 않는다. 위기는 한 번도 제대로 확정되지 않았으며 그 자체로 정치적 언설이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시각은 ‘위기’의 문제의식이 아니라 ‘전환’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민주노조운동, 혹은 노동운동은 지난 1987년 이후 30년을 경과하면서 이제 전환의 한 순환을 마쳤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형성과 전환과 맞물리면서 진행된 과정이기도 하다. 그 방증으로 지금 87년체제의 극복이 운위되고 있다.

하지만 극복되어야 할 87년체제는 무엇인가? 그 체제에서 한국의 노동계급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필자는 여러 글들에서 민주주의는 단일하지 않으며 하나의 지점만을 경과하는 이행도 아니므로 ‘전환’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지난 촛불에서 봤듯이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한 ‘민주주의 회복’의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민주화도 있고, 역민주화도 있고, 재민주화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계급은 ‘제1의 전환’ 이후에 어떤 자기 전화를 모색할 것인가? 이것은 87년체제 이후가 불확정적이듯, 똑같이 그리고 동시에 열려있는 질문이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로 ‘열린 공간’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리지 않았다. 사실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예기치 않았던 노동자들의 계급적 진출과 조직화 이행 이후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가의 억압적 전략은 지속되었고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 재야민주화운동과 밀착, 이른바 ‘범민주 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자유주의 야당세력은 국가의 노동탄압에 대해 소극적이었고 노동과의 연대정치를 구사하기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거리를 두었다. 이는 1989년 4월20일 김대중의 한 달간 파업자제 촉구 입장 발표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확히 구별하자면 보수 우익세력은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 ‘탄압’ 세력이었고, 중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세력과 그들이 주도한 민주대연합은 정치적 민주주의로부터 노동을 ‘배제’한 세력이었다.

이제 지난해 10월29일 시작된 촛불이 주도하는 범 박근혜 퇴진운동에 힘입어 자유주의 정당세력은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박근혜 퇴진 운동이 시민들, 중간층들 이전에 조직노동, 그리고 조직노동보다도 그 주변의 비정규직 정리해고자 투쟁을 하던 변방의 노동자들과 민중운동에 의해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것이야말로 촛불 중심의 퇴진운동과 1987년 6월항쟁이 마무리되던 시점인 7월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온 노동자대투쟁의 차이다. 하지만 촛불 이후 다시 1987년 헌법질서로 회귀했다. 헌법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켜졌다. 하지만 이 체제는 또한 노동자대투쟁을 통합하지 못한 노동배제의 민주주의였고, 그 결과 비정규직의 급격한 도입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된 민주주의였다. 그런 ‘민생’의 실패가 10년간의 우익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되었다. 이제 다시 원점이다. 아니 하나의 전환을 끝낼 것인가라는 기로에 서있다.

해서 질문해야 할 것은 동시적이다. 노동운동과 정치적 민주주의 양자의 새로운 전환은 불가능한 것인가?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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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오래전 한 유명 스님의 말씀에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나 싶었죠. 게다가 사람들이 심각하게 논하기까지 하니 이상할 수밖에요. 아직도 심오한 불교 철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산을 산이라, 물을 물이라 부르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됐죠.

미국엔 지금 한창 역사 논란이 뜨겁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탓에 안 그래도 악화되던 인종차별 문제가 더욱 날카로워졌습니다. 인종차별 문제가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를 나누는 잣대와 겹쳐지며 정치 문제 전반에 떠올랐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철거되는 것은 그 여파입니다. 철거 반대자는 트럼프 지지자와 많이 겹칩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둘러싼 전쟁으로 남부 연합군이 패하며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남부의 정치,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흑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부활했죠. 백인우월주의도 당당히 돌아왔습니다. 큐 클럭스 클랜(KKK)이라는 백인 기독교 테러단체가 극성을 부리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들이 남부의 역사를 기린다기보다는 부활하는 백인우월주의를 대표한다고 봐야 하는 이유죠. 자연 흑인과 인권단체들이 철거를 요구해왔고 요즘 들어 지방정부가 이를 수용하는 분위기입니다.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하죠. 노예제는 좋은 일이 아니지만 남부는 노예제가 아니라 주정부 주권을 위해 싸웠다. 게다가 동상을 없애는 시도는 역사를 지우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주정부의 주권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주권이었죠. 게다가 동상을 치운다고 그들이 말하듯 역사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원래 동상은 기억을 넘어 기리고 자랑스러워하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동상을 지키자는 이들은 그 과거를 기리고 내심 그리워하는 셈입니다. 연방군의 승리, 노예제 폐지도 중요하지만, 남부의 전통도 중요하다는, 산은 산이지만 물도 산이라는 억지입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라는 억지도 있습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이 관제 데모에 동원할 목적으로 우파 단체를 지원한 정도가 아니라 직접 만들었던 정황이 파악됐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뿐인가요. 국정원, 군은 댓글부대를 조직해 여론을 조작했고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들은 공작과 음해로 민주체제의 근간을 손수 흔들었습니다. 부실 산업으로 수조원은 우습게 날렸고 블랙리스트로 언론과 개인의 자유마저 짓밟았습니다. 4대강사업을 통해 한반도 생명줄을 끊어놓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해 평화 기반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한 속보에 탄식도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가 고공행진을 하는 이유입니다. 거기에는 적폐청산에의 요구가 있죠.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를 정치보복이라 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개혁을 개악이라고도 했죠. “정치보복의 헌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 굿판”이라며 적폐청산에 대응하기 위해 대책특위까지 만들었습니다. 내 잘못은 잘한 것이고, 그 잘못을 고치려는 게 잘못이라는 파렴치한 억지입니다.

짐작하건대 그 적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일수록 목청을 높이겠죠. 그러니 쉽게 물러서지도 않을 겁니다. 어디 메모라도 해두고 선거 때 확인해야겠습니다. 항의 전화도 괜찮겠죠. 이번 가을엔 성철 스님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생각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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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0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미국 대선후보였던 트럼프와 클린턴이 첫 TV토론을 하기 전인 작년 8월이었다. 이 지면에 ‘김정은의 핵과 트럼프의 핵’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트럼프의 등장을 경고했다. 그가 작년 3월에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 핵무장을 허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발언했음을 지적했다. 안보의 끈을 한국이 잡아 당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추석 명절 전, 9월에 대통령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총회에서 연설했다. 그 자리에서 미국과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국제법적으로 매우 충격적이며 불법적인 사건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인 유엔에서 유엔 회원국의 대표가 다른 유엔 회원국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유엔 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한 발언이다. 예방적 선제공격은 불법이다. 물론 그의 발언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역시 그가 결정할 것이므로 조건은 별 의미가 없다. 북한에는 2500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트럼프는 이미 한 달 전에 북한이 미국에 대한 위협을 중단하지 않으면 ‘세상이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파멸적 핵무기를 투하하면서 ‘지구상에 없던’ 폐허의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던 미국의 과거가 떠오른다.

트럼프는 놀랍게도 바로 위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이란을 위협했다. 오바마 정부가 이란과 타결한 이란 핵개발 동결 협정을 비난했다. 그는 이란과의 핵 협정을 ‘미국에 낭패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란을 부패한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올 9월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자리에서, 이란 핵 협정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렸고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15일이면 트럼프의 결론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날은 미국이 이란과의 핵 협정 체결의 대가로 이란에 준 경제 제재 유예를 계속할 것인지 결정하는 시한이다.

트럼프가 이란과의 핵 협정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한국에 위험하다. 북한 핵 문제 해결에서 매우 나쁜 영향을 줄 것이다. 북한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란과의 핵 협정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그런 미국을 보면서 북한은 미국과 핵 협상을 할 이유가 없게 된다.

트럼프는 2018 예산안에서 환경보호청과 노동부의 예산을 무려 31%, 21%나 깎으면서, 국방예산은 10%나 늘렸다. 두 자리 숫자로 늘렸다. 그는 유엔이 핵무기금지조약을 출범시켰는데도 미국은 핵무기를 현대화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대규모 군사력을 ‘재구축’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고 하는 가공할 폭탄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했다.

안보의 끈을 한국이 더 세게 잡아 당겨야 한다. 한·미동맹이 한국 안보의 근간임은 현실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상징하듯이 안보를 타국에 의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이는 북한의 핵보유와는 상관없는 내재적 위험이다. 외부 위험이 클수록 안보 의존은 더 위험하다는 본질을 용기있게 인식해야 한다. 북한 핵 보유에 대비하는 일본도 일·미동맹을 한·미동맹처럼 의존적으로 운용하고 있지 않다. 대미 안보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 지체하지 말고 한국군의 일체의 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 나아가 한·미동맹을 법치화해야 한다. 트럼프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동맹이 아니라, 나토와 같은 공동 의사결정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과 그에 대한 정기적 평가도 법제화해야 한다. 끈질기게 국제법을 이용해야 한다. 트럼프를 국제법의 바다로 띄워올려야 한다. 트럼프가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을 한 이틀 후에 유엔의 53개 회원국은 사상 최초로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아시아에서는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서명국에 참여했다. 64년의 정전협정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킬 국제적 평화협정의 체결이 최종적인 트럼프 리스크 해결 방법이다. 트럼프의 임기가 지나가기를 앉아 기다리기에는 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오로지 국민을 믿고, 안보의 끈을 한국이 더 세게 잡아 당겨야 한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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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찐따’란 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비속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 읽었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일본어로 짝짝이를 뜻하는 찐빠(跛)에서 왔다고 추정될 뿐이다. 어린 시절 병을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작가 이철용은 이 때문에 주변에서 찐따란 놀림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주로 장애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대략 ‘한심한 부류’를 지칭하는 비하어로 쓰인다.

지리적 요인이 아니라 계급, 연령, 성별, 종교, 인종 등과 같은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분화된 특정한 사회집단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어휘를 사회방언(social dialect)이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집단에서 흔히 사용되는 사회방언 중에 루저, 잉여, 삐조리, 왕따는 물론 ‘찐따+찌질이+버러지+거지’의 조합인 ‘찐찌버거’ 같은 합성어가 있다. 같은 대상과 개념이라도 표현하는 어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은 그 사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런 말이 넘쳐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흔한 속설 가운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어딜 가든 대충 중간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속설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정상성을 강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경쟁사회 논리와 맞물려 집단이 제시하는 정상성은 강력한 규범이 된다.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진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쉽게 루저, 잉여, 삐조리, 찐따, 찌질이가 되어 비정상으로 내몰린다. 학교나 집단에서 그런 부류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선 패거리를 만들어야 하고, 패거리의 인정이 필요하다. 찐따나 루저가 아니라는 걸 인증받기 위해선 집단 내부의 누군가, 주로 약자를 고발하고 배제시켜야 한다. 이런 방식의 폭력적인 왕따 사냥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흔히 ‘선빵’이라는 예방전쟁(preventive war) 구도로 포섭한다. ‘찐따’가 되기 싫어서라도 ‘일찐’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에 지배당하는 것을 교육현장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사실 그 출발은 가정에서 비롯된다. 친척끼리 모였을 때조차 내가 먼저 당하지 않으려면 ‘선빵’을 날려야 한다. 집안 식구 중 제일 처지는 사람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 잔소리의 과녁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조차 스스로 정상성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은 아닐까, 움츠러들고, 상처받는다. 명절에 친척끼리 모여 가장 즐기는 게임이 이른바 품평게임이다. 아이의 성적은 형제, 자매,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 치르는 대리전쟁이다. 말랐으면 말라서 걱정, 뚱뚱하면 뚱뚱해서 걱정이다. 수학을 잘하면 영어가 걱정이요, 영어를 잘하면 국어를 못해서 걱정이다. 대학 가기 전까지는 입시가 걱정이요, 대학 가면 취업이 걱정이고, 취업하면 결혼이 걱정이고, 결혼하면 출산이 걱정이고, 출산하면 집, 승진 걱정에, 다시 아이들 걱정으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의 무한체계가 반복된다. 가정에서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응축된 분노가 쌓여서 사회 전체가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조금만 싫은 소리를 들어도 폭발해버릴 것 같은 상태가 된다. 길에서 양보해주지 않는 차량을 발견했을 때, 순간 감정이 폭발하는 이유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란 경험을 어려서부터 반복적으로 체득한 결과인 셈이다.

집단이 제시하는 규범, 정상성의 추구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고민을 거세하고, 항상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형식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식의 외주화, 의식의 식민지화인 셈이다. 이번 명절에는 우리 모두 ‘친척’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 되어 만나면 좋겠다. 아이들의 성적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갖기를, 상대의 개성과 인격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와 그를 긍정하기를. 타인에게 정상이길 강요하기에 앞서 자신의 관용도가 충분히 정상적인지 먼저 되묻도록 하자. 가정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우리 모두 찐따와 루저를 벗어나기 위해.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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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지난 7월4일 국토교통부 내 ‘도시재생사업기획단’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출범식에서 소위 ‘따뜻한 도시재생’을 강조했다. ‘따뜻한 재생’이란 아마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재난을 막겠다는 뜻이지 않을까 싶다. 도시재생 사업을 하다보면, 주변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고 자연스럽게 임대료도 상승해 임차인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낡은 도시를 재생하면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기본적으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관계는 상호 모순적이다. 도시재생은 어떤 점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억제하려는 공공 도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도시재생은 불가피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갈 수 없다. 도시재생은 도시의 경관과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거대 개발 정책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재생으로 인한 부동산 가치의 상승과 지역개발 논리를 완전히 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도 공간의 고급화로 부동산 가치를 극대화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도시재생의 공공적 원리에서 벗어나려는 본성을 가진다. 그것은 부동산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문화적 전환을 통해 시각적, 미적인 효과를 전유하고자 애를 쓴다. 처음에는 예술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하다가 나중에 그 장소가 유명해지면 예술인들을 배척하고 쫓아내려는 이중적 태도를 가진다. 홍대 앞, 경리단길, 성수동 수제화거리, 통영 동피랑 마을 등. 이것이 소위 문화 명소가 가지는 맹점이다. 도시재생으로 새롭게 생성된 문화적 공간이나 공공장소에서의 시각적 조형물들은 역설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심화시키는 미적인 토대를 제공해준다.

그런 점에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이 교차되는 지점에 문화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문화의 자원은 도시재생의 공간 활성화에 있어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부동산 가치 상승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의 개발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으려는 예술인들의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저항이 그러했고, 공덕동 경의선 공유지 늘장의 저항이 그러하다. 문화적 자원과 예술의 미적 감수성은 오히려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거나 그 확산을 억제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도시를 미적으로 아름답게 만들면서도, 그 문화적 가치가 부동산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길 말이다. 문화적 역량을 가진 주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문화는 도시재생의 대안적 장으로 전환될 수 있다. 문화와 예술은 반드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촉매제 혹은 희생양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문화적 전환은 ‘공간의 고급화’를 위한 자본의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동산 자본의 확장을 막을 수 있는 저항의 가능성도 내장하고 있다. 기획부동산 자본과 상업 시설들이 도시를 지나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예술가들이 도시공간 속에서 버틸 수만 있다면, 문화와 예술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시키는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예술인들이 연대하여 문화적 게토와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문화적 자원을 도시재생 활성화의 수단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문화적 투자는 도시재생으로 인한 투기 과열의 사회적 비용을 사전에 상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선 예술인들의 저항이 번번이 좌절하는 것은 ‘따뜻한 도시재생’을 위한 강력한 부동산 억제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개발이익의 상당부분을 환수한다거나, 임대료 상승의 상한선을 둔다거나, 임차인에게 장기적으로 살 권리를 부여한다거나, 문화예술의 자원들을 일종의 공유지 형태 안으로 수용한다거나 하는 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억제 정책이 수반된다면, 문화는 ‘따뜻한 도시재생’의 대안이 될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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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직원을 “자식 같아서 때렸다”는 뉴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갑질’에 대한 분노와 ‘어떻게 맞아가면서까지 참고 직장을 다녔냐’는 빈정 섞인 동정론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두 반응은 사실은 동일한 것이다. “때려도 되는” 자와 “맞아도 참아야 하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동등하지 않으며, 이 사회는 불평등하다는 대중의 인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갑질은 지난 정권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갑질 현상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성별, 지역별, 학력별 그리고 연령별 갑질을 통한 억압적 위계는 사회 내에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해왔다. 차라리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일방이 물리력을 행사하던 ‘무식한 갑질’에서 좀 더 제도화된 갑질 혹은 저항을 티 내지 않고 분쇄할 수 있는 권력 기제들이 훨씬 세련되게, 사회의 전 영역에 적용되도록 발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사회 전체에 불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면, ‘을’의 관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맞으면서도 참고 고개를 조아리거나’, 혹은 이제는 아예 저항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로부터의 탈주라는 원치 않는 갈림길에 놓인다.

전자의 길에 서면 사회 시스템에서 최대의 효용을 취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때 사회 구성원들은 체제의 공범이 되며, 갑질의 방관자가 된다. 그리하여 미시적 사회 관계는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야만’의 관계가 된다. 즉 가족, 사회적 유대나 공동체 의식, 그리고 신뢰가 사라진다. 후자의 길에 들어서면 이들은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사회적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거나 스스로 격리하면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길, 즉 개인이 체제로부터 최대의 편익을 취하는 것에 머물거나, 혹은 사회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조건에서는 공히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점점 더 증가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무엇보다도 출산율이 감소하고 자살률이 증가한다). 사회적 생산력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체감(遞減)하며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에 기초하여 유지되는 자본주의 자체에 위협이 된다.

유럽에서는 이미 지난 20세기 중반에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칼 폴라니는 1944년 <거대한 전환>이라는 저작에서 19세기 초반 이후 자본주의 시장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사회 파괴를 경고하며 그 해법으로 ‘사회 방위론’을 제안했다. 이 해법에선 국가(법과 제도)가 ‘중립적 해결자’로 자처한다. 국가는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는 온존시킨 채,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와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권의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구호나 ‘적폐청산’, 갑질청산도 이런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이 정부의 개혁정치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지속적으로 파괴된 ‘사회’를 되살리기 위한 ‘정치적 리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동시에 과거의 발전 모델로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노선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국가의 사회에 대한 개입 증가, 재정조달의 문제에다 근본적으로는 사회 불평등을 온존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을 은폐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사회 방위 국가’는 기존의 ‘블랙리스트 국가’보다는 선진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세련되고 온건하다고 해서, 덜 야만적이거나 덜 불평등한 것은 결코 아니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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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PD, 아나운서, 리포터, 미술음악치료사. 모두 전문 프리랜서 직업들이다. 언론에서 프리랜서는 주로 유명인사들의 사례가 소개된다. 무엇보다 전문성이나 창의성을 다루지만 고소득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영화나 방송에서 프리랜서 직업은 커피 전문점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노트북 컴퓨터로 일하는 모습들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프리랜서의 일은 밝기만 한 것일까. 또한 프리랜서는 좋은 일자리(decent work)의 미래상일까.

프리랜서는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회사 직원이 아니다. 비용은 ‘인건비’가 아니라 ‘제작비’로 나간다. 그러니 퇴직금이나 실업급여, 건강검진도 없다. 당연히 연차휴가도 없다. 프리랜서는 회사나 고용주들이 대신 지급하는 형태로 모든 세금을 내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이 누리는 혜택은 받지 못한다. 소득 예측도 어렵고 변동성도 심하다. 합리적인 계약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일하는 곳에서는 신분증이 아니라 출입증을 받는다. 그래서 프리랜서는 보이지 않는 유령에 불과하다.

국내외 통계에서 프리랜서는 취업자의 약 5% 남짓 된다. 적지 않은 규모다. 문제는 전통적인 임금노동자도 아니고, 자영업자도 아닌 모호한 고용형태다. 프리랜서(Freelancer)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독립계약자’나 자영업자로 불린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주로 ‘자유직업인’으로 지칭된다. 프리랜서는 이미 기존 노동자와는 구분되는 특성을 가진 집단으로 고착화된 지 오래다. 명칭상 ‘프리랜서’라고 불리는 순간,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의 미비는 고용의 왜곡을 초래한다.

최근 ㄱ방송사 프리랜서와 대화를 하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사실 화가 났다. 그녀에게는 1년에 3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유급이 아닌 무급이다. 그런데도 다행이라고 한다. 정말 중요한 일이나, 취업 때 면접이라도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삶 속에 ‘휴가’는 낯선 단어였다. 휴가는 곧 소득의 단절, 경제활동의 단절을 의미한다. 1주일에 6일 출근하면서 고작 주급 40만원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사용하는 휴가지만, 그녀에게는 정말 ‘소중한 3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프리랜서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컸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와의 차별은 마지막 남은 자존감조차 상실케 한다. 야간이나 주말 혹은 명절 근무는 모두 프리랜서의 몫이다. 싫다고 할 수도 없다. 봄·가을 프로그램 개편 때 자칫 실업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랜서의 고용불안정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회사 인력이 아닌자. 한마디로 회사의 편의대로 쓰고 필요 없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일 수도 있다”는 말에 가슴이 막막해졌다.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도 이제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고용’에 관심을 가질 시기다. 지난 4월15일 미국 뉴욕시는 ‘프리랜서보호법’을 제정했다. 주요 내용은 서면계약, 임금 적시 지급, 보복으로부터의 자유,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와 법률 서비스 등이다. 법의 취지는 “신분이나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은 프리랜서에게 건강보험과 퇴직연금 혜택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유럽의 몇몇 협회들은 프리랜서 수익의 일정 금액을 상호부조 성격으로 공제하기도 한다. 프리랜서 재교육 비용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 국내에서도 프리랜서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다. 아직은 소수이나 프리랜서 권익보호를 위한 움직임의 시작이다. 프리랜서에게도 일터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현재 MBC와 KBS에서 공정방송을 위한 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파업이 마무리되면 작가나 리포터 등 내부 구성원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다. 결방으로 급여를 받지 못한 프리랜서에게 최소한의 휴업수당이라도 지급하면 어떨까. 그 정도의 작은 희망을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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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가 없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자, ‘오천만 핵인질’ 사태라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정당은 성찰해야 한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네 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그런데도 근본적 대응없이 ‘통일대박’을 말한 사람들이 누구였나?


하지만 지금이 중요하다. 현실이 엄중하다. 남들의 염치없음을 더 이야기할 여유조차 없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백척간두에 서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심각한 위기이다. 외교안보에서의 정체성 위기이다. 그의 정부는 외교안보에서 박근혜 정부와 달라야 한다. 그리고 성공해야 한다. 


보통의 시민에게 서울 하늘에 핵무기가 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를 함께 운영하는 정치인들이 공포를 부추기거나 이용한다면 매우 무책임하다. 가장 무책임한 사람은 전술핵 배치 가능성을 말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일본과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해서, 자체 방위를 맡기고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방위비를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본과 한국에 전술핵이 배치되면 대만도 핵무장을 할 것이다. 동북아는 핵무기가 없는 나라가 없게 된다. 핵무기 집중지역이 된다. 트럼프의 전술핵 배치는 어떠한 핵무기도 비핵보유국의 직접 또는 간접 관리에 놓이게 이전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 핵확산금지조약 위반이다. 더 큰 모순은 전술핵 배치는 북의 핵무장을 정당화시켜주고 용인한다. 북핵 문제를 북핵 용인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북핵은 안된다. 사드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따라 무기배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주한미군지위협정 2조에 의해 땅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더라도,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과연 사드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이 배치할 수 있는 무기에 포함되는지, 어느 지역의 토지를 제공하는 것이 타당한지, 그리고 그 지역 시민들의 민주주의 권리를 어떻게 절차적으로 보장할지는 한국에 권한이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의 성주 땅 제공 결정은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아직 파국은 아니다. 전쟁 외에 대안은 있다. 한국이 갖는 최소한의 자율성이라도 최대한으로 증폭해야 한다. 북한 핵무기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듯이 사드도 평화의 수단이 아니다. 한국이 전략적 자주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드를 단순히 ‘임시배치’라고 설명해서는 안된다. 그 근거를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소파 협정에 의하면 미국의 동의가 없이는 성주 사드 땅을 반환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배치’라고 설명하려면 한국이 환경영향평가 결과에 따라 사드를 철거할 법적 권한이 지금 있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라도 임시배치라는 설명의 근거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전술핵도 마찬가지다. 일단 들어오더라도 한국이 철거하라고 하면 미국이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이 전략적 자주성이 없다면 운전자로 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국민에게 어떤 경우에도 대화 없이는 그 어떠한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 양보라고 비난받는 것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다. 대화는 언제나 필요하다. 대화 없이는 해결할 수 없음은 상식이다. 상식을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 상식을 국민에게 말하지 않았다. 새 정부는 달라야 한다. 그것이 정권의 정체성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남에게 변화를 요구하려면 자신도 변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유엔의 제재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북의 6차 핵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한국과 미국이 진정 북한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최종적인 행동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북한의 변화를 말했다. 그 변화의 의미는 북한의 절멸인가 아니면 북한의 발전인가? 전자라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후자라면 체제인정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오천만 핵인질’이라는 염치없는 비난을 할 때가 아니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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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6차 핵실험과 예상되는 추가적 도발에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핵·미사일 분야 기술을 더 이상 고도화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며 “실제적이고 강력한 조처”를 다짐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북한과 거래하는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미국과 무역을 중단할 수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죠. 이번 실험을 “고립무원 속에서 김정은의 광기 어린 핵무기 집착”쯤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태를 왜곡해 목청 높이기에만 좋을 뿐 해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해결은 올바른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첫째, 그 동기입니다. 아직도 북한 의도에 의아함을 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북한 핵무기에 불안감을 느낀다면 답을 이미 알고 있다 하겠습니다. 1990년대 초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 때까지 북한은 코앞에서 미군 핵무기를 마주했었고 지금껏 인류 역사상 최강이라는 미군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미군은 태평양 전역을 둘러싸고 있고 실전 배치된 핵탄두만 1400여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의 거의 반을 쓰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북한 핵무기에 우리가 불안하다면 미국 군사력에 북한은 훨씬 불안한 겁니다.

북한은 지난 6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6차 핵실험을 축하하는 평양시군민 경축대회를 열었다고 7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행사에는 김영남·황병서·박봉주 등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수소탄 개발자 등이 초청됐다. AFP 연합뉴스

미국은 북한 정권처럼 공격적이지 않다고요?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은 한때 미국 중동 정책 교두보였지만 2003년 미국 침공으로 후세인은 처형당했습니다. 이에 겁먹은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핵무기를 포기하고 서방과의 교류확대에 나섰죠. 하지만 내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공격했습니다. 카다피도 처형당했습니다. 힘과 무력만이 정권 안정에 필수적이라는, 미국이 신봉하기도 하는, 현실주의 이론에 딱 들어맞죠.

북한 김씨 왕조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안 봐도 훤합니다.

둘째, 북핵에 대한 대응입니다. 정권 안정에 사활이 걸린 핵무기를 포기할 리가 없죠. 이런저런 경제 제재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 무용함은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미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북한 대외무역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권 2기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게다가 북한을 흔들어 생길 실이 득보다 훨씬 큼을 알고 있죠. 설사 중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공세적으로 취하더라도 북한 인민만 괴롭히고 말 공산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주도의 경제봉쇄는 탱크에 화염병 던지기로 끝날 겁니다.

무력행사는 득은 작고 불확실하지만 실은 혹독하고 명확합니다. 외과 수술하듯 핵시설만 도려내는 폭격은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습니다. 성공해도 북한이 확전의 길로 갈 공산이 크죠. 폭격이 성공하고 확전이 안돼도 북한 내 혼돈, 중국 개입 등 그 결과는 한반도 일대의 혼란일 겁니다. 이제 북한은 미국과 한국이 어떻게 말하건 핵보유국입니다. 게다가 미국 서부까지 사정권 안에 있죠. 무력행사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기저기서 혼돈과 흥분에 가득 찬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말이라도 하지 못하면 체면이 떨어지니까요. 유권자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곧 미국은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겁니다. 벌써 미국은 주판알 튕기기를 시작했죠. 농산물 관세 철폐를 포함한 자유무역 협상을 재개하고 수십억달러어치 무기를 사라며 한반도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내주고 서울을 살릴 리 없는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을 테고 북한의 요구, 즉 주한미군 철수와 북한 인정을 상당 부분 들어주게 될 겁니다. 싫어도 대안이 없으니까요. 

그 미래는 애써 부정해도 옵니다. 시간문제죠. 이는 한국에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겁니다. 중·미 수교에 완전 제외된 대만이 될 수도 있고, 통일을 주도한 독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장 발 벗고 나서서 정치적 해법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생존, 통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을 설득해 한국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한의 불안도 완화되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이 가능합니다. 싫어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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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되었던 영화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던 19만8000명의 영국군과 14만명에 이르는 프랑스, 벨기에군을 영국의 군관민이 합동으로 구출해내는 기적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록 전쟁의 서막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나 철수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영국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력전(total war)의 시대, 전쟁이 벌어지면 온 국토와 전 국민이 전쟁의 참화로 고통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력을 하나로 단합시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 전쟁 기간 중 조지 6세가 머물던 버킹엄궁은 7차례나 폭격당했지만, 국왕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궁이 폭격당하는 장면과 국왕의 건재함을 홍보영상으로 만들어 국민의 단합과 결집을 호소했다.

영화 <덩케르크> 스틸 이미지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여러 방식으로 프로파간다 작업을 수행했다. 그중 하나가 왕실 마크와 선전 문구를 담은 ‘KEEP CALM’ 시리즈 포스터였다. 첫 번째 포스터는 “Your Courage, Your Cheerfulness, Your Resolution will bring us victory(당신의 용기, 당신의 활기, 당신의 결의가 승리를 불러올 것이다).” 두 번째는 “Freedom is in peril defend it with all your might(위기에 처한 자유를 전력을 다해 사수하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이었다. 마지막 포스터는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공개되지 않다가 2000년 영국의 어느 고서점에서 1장의 포스터가 우연히 발견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권은 민심을 호도하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적 위기를 조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의 민심 흔들기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침착하게 현실에 대처해왔다. 2006년 제1차 핵실험 이후 계속되는 북핵 위기 속에서도 대다수 국민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진짜 가마니가 된다”는 사실 역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이런 사실을 반복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까지 피란 내려간 상황에서도 “안심하라!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를 연신 틀어댔고, 2014년 4월16일, 이미 선체가 침수되어 기울어 가고 있는 세월호 선내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죽음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참담하게 망가져가는 국가를 더는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국민이 나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만히 지켜만 보기엔 이른 듯싶다. 중요한 변화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남북관계 개선이다.

제1차 핵실험 이래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접근 방법은 북한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핵 개발을 포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는 6차 핵실험 소식이다. 대북 제재와 외교적 고립, 그리고 무력시위로는 북한의 선택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여전히 미사일 사정거리 연장과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계획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군사체제의 군사력은 앞으로도 북한을 계속해서 압도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유사시 한반도와 우리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다. 그런 사실은 정부도 이미 알고 있다. ‘절대 안보’는 ‘절대 평화’ 이외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한 어떠한 군사 무기의 도입도 현실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온 국민이 김정은의 북한 핵과 트럼프의 대북 군사옵션이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든 길이겠으나, 문재인 정부는 국민을 믿고, 국민을 위해, 국민과 함께 우리가 주도하는 해법을 만들어 그들을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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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도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우익단체들의 집회와 행진이 열렸다. 그들의 행진과 구호 음악은 지난 탄핵정국에서 보았던 스타일 그대로였다. 군가를 따라 부르며 군복, 군화, 군모에 검은색 ‘라이방’을 쓴 노령의 참가자들이 여전히 대열의 전위에 선다. 이들의 외침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절실했지만, 백주대낮에 군가와 군복을 입은 분들을 아직도 도심에서 봐야 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곱지 않다. 사운드와 비주얼이 이제는 정말 지겹다는 표정들.

지난 8월30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갈 때, 입구에서 군복을 입고 그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노령의 우익단체 회원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우익 어르신의 경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던 원세훈은 국정원법,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법원에서 4년 실형을 선고받고 다시 법정 구속이 되었다. “헐, 범죄자에게 거수경례를?”

우익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새 공포의 대상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냉전 시기 반공교육에 혈안이 되어 빨갱이를 색출하라는 우익단체들은 과거에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포비아를 생산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2000년대 후반 우익 단체의 회원들이 군복 입고 가스통 들고 도심에 나와서 자해 퍼포먼스를 하던 시절만 해도 우익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강화된 우익들의 집단적 행동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 우익들은 공포가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시각적인 불편함이다. 가령 태극기 집회나 동성애 반대 집회에 동원되는 단체 중에서 기독교 우익단체들이 벌이는 퍼포먼스는 이데올로기적 ‘키치’의 극단을 보여준다. 한복을 입고 북춤을 추며 찬송가를 부르다가, 하얀 발레복을 입고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이들의 퍼포먼스는 ‘친미와 반북’ ‘기독교와 반공’이 이상야릇하게 혼합된 시각적 민망함을 보여준다. 빨갱이와 동성애자를 동일한 적대세력으로 묶어서 이들의 악령을 쫓아내려는 예식을 치르는 장면들이 종로에서 시청에서 행해질 때, 사람들은 이 시각적, 청각적 어이없음으로 인해 공포심리보다는 혐오심리를 갖게 된다.

우익의 주체들은 상식과 이성의 의지를 기각시키고,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우익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이익을 위한 충성경쟁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SBS 방송사 앞에서 김제동을 종북 좌파로 규정하고 퇴출을 요구하며 확성기로 생떼를 쓰는 엄마부대 회원들, 서울도서관을 음식 쓰레기더미로 초토화시켜버리고, 편의점 종업원과 지하철 승객들에게 반말과 욕설을 내뱉는 태극기집회 참가 할아버지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먹으며 폭식투쟁을 하는 일베 회원들은 이제 공포의 주체에서 혐오의 주체로 이행한다. 동원되는 수단과 방법이 ‘이념의 전쟁’에서 수행할 수 있는 수준과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들 내부의 치졸한 권력 싸움들, 돈으로 묶인 동원된 주체들과 의도된 퍼포먼스, 냉전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의 신념과 행동의 표현들은 혐오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킨다.

혐오의 주체로 변해버린 우익은 어떤 점에서 불편한 연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평생을 남을 혐오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동시대에 함께 살아온 국민들을 빨갱이, 전라도놈, 밥하는 여자, 외국인새끼들로 혐오하면서 살았다. 혐오 행위는 생존의 본능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위협의 전략이다.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익의 자화상은 어떤 점에서는 ‘혐오의 거울’이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다. 혐오하는 자의 혐오는 그래서 본질적이며, 역사적 존재의 소멸을 ‘순간을 대하는 히스테리’로 반응한다. 혐오의 행위를 과잉되게 재생산하는 우익의 심리는 역으로 역사적 주체의 소멸에 대한 자기공포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 우익의 소멸의 순간을 위해 ‘소돔과 고모라’ 같은 그들의 혐오를 지켜볼 따름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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