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에서 내년부터 저소득 미취업 청년층에게 매달 50만원씩 일정 기간 ‘청년 수당’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이 되려 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선심성 정책이라는 등 말들이 많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철딱서니 없는 애들에게 무조건 돈을 퍼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진국 중에는 무조건 청년에게 돈을 지급하며 ‘Gap year’(진학, 취직을 하지 않고 여행이나 봉사활동을 하며 사회에 대한 시선을 넓히는 시간)를 갖도록 독려하는 곳도 있지만, 이번 서울시 청년 정책은 저소득층 청년에 제한된다. 또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기 소득이 없는 미취업자이지만 사회 활동, 즉 구직 의지가 있는 청년 3000명에게 엄정한 심사를 거쳐 교육비와 교통비, 식비 등 최소 수준의 활동 보조 비용을 지급하는 것인데 길어봤자 6개월이다.

포퓰리즘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이것이 무차별적 복지가 아니라 이러한 심사 기준을 따른 ‘선별적 복지’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박원순 시장이 정말로 정치적 전략이나 포퓰리즘을 생각했더라면 저소득층 청년을 위해 정책을 펴는 것은 별로 실속 없는 짓이다. 지금도 그렇듯 노인 인구가 앞으로도 청년 인구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 당연한데 어째서 학생도 취업자도 아닌 ‘사회 밖 청년’에게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는가.

그런 식이면 65세 이상에게 지하철 요금을 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고 무차별 복지에 해당한다. 사회 기여도, 본인의 재산 유무를 모두 떠나 살아남아서 65세를 넘기만 하면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해 이번 서울시 청년 정책은 19~29세의 저소득층 청년 중 공공, 사회활동, 구직 계획서 등을 심사하여 선발한다. 서울 전체 20대 청년이 약 150만명이고 그중 ‘사회 밖 청년’은 34.9%로 대략 50만2000명이라고 한다. 대충 계산하면 167명 중 1명에게 지원하는 셈이다. 만약 지하철 무임승차 자격을 이렇게 선발한다면 어르신들이 연일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사업 예산 중 총 지급액은 90억원으로, 4대강 같은 사업에 22조원이 투입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이러한 저소득층 청년들은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어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급급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이들에게 단 몇 개월간이라도 마음 놓고 구직을 준비할 수 있도록 얼마간의 지원을 해 주는 것은 청년들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요즘 ‘흙수저’라는 말이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이다. 그만큼 사회 계급이 고정되면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느라 바빠 더 좋은 직장을 위해 이력서 꾸밀 틈도 없이 사는 청년들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밥그릇 안에 숟가락을 집어넣을 기회도 없고 입에 넣어 봤자 밥알보다 흙이 더 많은 이런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고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늘 체념과 박탈감 속에서 살아온 이 ‘흙수저’ 청년들에게 당신이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는 일이 될 것이다.

공짜로 지하철 타는 어르신들은 ‘나라가 하는 일이면 믿자’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분이 많은데, 그것은 나라에서 차비라도 지급하는 혜택을 받아 본 분들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라가 도대체 해주는 것이 없어 청년들에게 ‘헬조선’이라는 말이 널리 퍼진 지금, 정책의 수혜를 입은 ‘흙수저’들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준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됨과 동시에 뭔가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 애쓸 것이다. 포퓰리즘이라고 핏대를 세우는 분들은 이 혜택을 받은 청년들이 나라에 감사와 공헌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게까지 청년들을 믿지 않는다니 슬픈 일이다. 한 달 ‘50만원’. 있는 집 자식에게는 ‘그까짓 돈’이지만,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자소서’도 쓰고, 면접에 입고갈 양복도 걱정해야 하는 청년들에게는 ‘희망 자금’이다.



김현진 | 에세이스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해고는 살인이다” “부당해고 철폐”. 이런 말을 사용할 때마다 하루에 70만원을 물어내야 하는 노동자가 있다. 농협중앙회로부터 3차례 해고당한 뒤 5년째 복직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배삼영. 그의 삶을 돌아보면 지난 20년간 한국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지운 고통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우선 그는 농협중앙회 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에 몰아친 구조조정 광풍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실제로는 퇴직을 강요당한 1차 해고였다. 1999년 퇴직과 동시에 농협중앙회에서 다시 비정규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기존에 정규직 시절에 하던 일과 똑같았지만 신분만 비정규직이 된 것이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나름의 준비를 해왔다. 2001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금융권 계약직 노조로는 최초로 농협중앙회와 단체협약도 체결했다. 노조 사무실을 제공받고 위원장에 당선되어 전임자로 활동했다.

9년간 비정규직으로 일해온 그에게 2008년 또다시 해고가 찾아왔다. 2007년에 만들어진 비정규직법(기간제법)이 통과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2년 넘게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돼야 하는데 사용자들은 정규직화 대신 해고라는 칼을 휘두른 것이다. 다시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었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얘기했다. 저 거대한 농협중앙회를 상대로 혼자서 맞붙는다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그는 홀로 농협중앙회 본사 옥상에 매달리는 고공농성을 감행했다. 목숨을 건 싸움 끝에 그는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비정규직 신분으로의 복직이었다. 2008년 복직 후 2년이 지난 2010년, 그에게 다시 3번째 해고가 찾아왔다. 비정규악법 통과 이후만 보면 그의 근속은 2년이 넘었지만, 이 경우를 대비해 정부는 비정규직법 제정 이후 체결한 근로계약부터 2년이 지나야만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경과규정을 달아놓았다.


비정규직 노동자 규모 및 비중 추이_경향DB


2010년 3번째 해고 이후 5년 동안 그는 다시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골리앗 농협중앙회 역시 5년 동안 쉬지 않고 탄압을 자행했다. 형사고발은 물론 각종 가처분신청으로 1인 시위조차 못하게 하려 했다.

온갖 소송비용 청구에 주택 경매 통지, 심지어 같은 농협중앙회에 다니는 부인에게 남편의 시위를 막으라는 압박까지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자 이제 ‘해고는 살인’ ‘부당해고’라는 말조차 못하게 재갈을 물리는 가처분신청을 넣었다. 농협중앙회의 탄압도 도를 넘었지만, 이를 그대로 수용한 사법부는 또 뭐란 말인가. 3번의 해고에 당할 만큼 당했는데 부당해고라는 말조차 하면 안된다니!

여전히 농협중앙회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다. 2년이 경과하면 해고한 뒤에 6개월 또는 1년 동안 쉬었다가 다시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일도 있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늘린다고요? 그럼 정규직으로 뽑아줄 것 같습니까? 2년 마구잡이로 쓰고 버리는데 4년 쓰고는 못 버릴 것 같아요? 4년 지나서 잘리면 어떻게 될지 뻔합니다. 4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다는 이력서 내는데 어디서 정규직으로 뽑아주겠어요. 정부와 새누리당이 말하는 노동개혁은 이렇게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말이나 다름없어요.”

‘해고’라는 말을 못 쓰게 하면 해고가 사라질까? ‘부당해고’란 말을 금지하면 부당해고가 없어지나? 우리말을 못 쓰게 하면 내선일체가 되리라고 믿었던 제국주의자들의 발상에 다름 아니다. 국정교과서를 만들면 진짜 역사를 알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이들, 그런 자들의 망상을 깨기 위해서라도 더 또렷하게 외쳐야 한다. 3번의 해고, 가족까지 괴롭히고 온갖 탄압을 일삼는 이 행위를 두고 말이다. 다시 한번, 해고는 살인이다. 부당해고를 중단하라.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내 딸아 미안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잘살아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50대 가장. 이제 이런 기사는 크게 새로울 게 없다. 그만큼 50대 남성 가장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세대. 임금피크제를 반대하면 젊은이들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세대. 그러나 취직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자식까지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든 교과서로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북한 공산당은 정말 빨갛게 생긴 사람들이라고 믿기도 했다. 군대에서 얻어터지며 국방의 의무도 다했고, 30~40대 때 열심히 일했다. 세금도 꼬박꼬박 냈고, 수많은 선거에도 열심히 투표장에 가서 한 표를 행사했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 요즘, 노후를 생각하면 한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사회는 미래가 안 보이는 세상이 돼버렸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그냥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김빠진 세상이 돼버렸다. 아니 50대는 이제 무력한 세대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 같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핏대를 올리던 정치 이야기는 한물간 하소연이 돼버렸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살 것인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돼버렸다.

그러나 50대는 한때 우리 역사를 만들어 낸 혈기왕성한 세대였다. 비록 ‘유신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배웠지만, 거리에서는 독재타도를 외쳤고,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스크럼을 짜고 거짓과 싸웠으며, 노동조합을 결성해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겠다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알았다.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이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는 것을. 1987년 6월, 직장에서 넥타이 맨 채 뛰어나와 영원히 권력을 누릴 것처럼 위세를 부리던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 평생직장이라고 여기며 밥 먹듯이 야근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옥죄어오는 강도가 너무 심하다. 해도 너무한다. 암살당한 ‘박정희의 부활’을 목격해야 하고, 조선시대 임금도 못 건드리던 역사를 위정자가 자기 잣대로 다시 쓰겠다고 한다. 진보 아니면 보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웬만하면 다 좌파다. 학자들의 ‘전국역사학 대회’에 난입한 사건을 ‘충돌’이라고 쓴 언론 기사를 봐야 한다.

경제민주화, 분배라는 용어는 선거 때만 반짝였을 뿐, 이제는 내놓고 재벌 밀어주기 정책만 편다. 내가 맞으니 국민들은 잠자코 따라오라고 한다. 복종하지 않는 국민에게는 북한의 적화통일을 운운한다. 비정상이 정상이 돼버렸으며, 몰상식이 상식을 지배하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저들의 역사교과서로 절대 배울 수 없다고 항변한다. 지난 주말 비가 쏟아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피켓시위를 하던 한 소녀에게 지나가던 중년 남자가 우산을 받쳐주던 사진기사를 보았다. 어린 청소년들이 치를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세우기보다 지키기가 더 힘들다’라는 말. 무력한 야당 탓만 하며 언제까지 굴욕을 견뎌야 하는가.

이야기해야 한다. 부당한 권력행사는 그만하라고. 바뀌도록 우리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또 보여주어야 한다.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왔음을. 역사를 바꾸려는 저들에게 역사를 두려워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무력한 50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헬조선’이라 부르는 젊은이들에게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다. 누구든지 최선을 다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3분의 2를 넘겨 개헌하겠다고 한다. 내각제가 좋은지 대통령 중임제가 좋은지 그때 상황을 보아서 판단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만든 역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최소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서울시가 ‘2020 청년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가장 앞세운 정책은 ‘청년활동 지원사업’이다. 대학생은 아니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취업관련 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흔히 ‘니트족’이라 불리는 구직 포기 청년들에 대한 맞춤대책이라고 했다. 이들 중에서 의지를 보이는 청년들을 심사해 최대 여섯 달까지 월 평균 50만원을 지원한다. 최소한의 교육비, 교통비, 식비를 지원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는 거다. 당장 내년부터 3000명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한다.

성남시는 내년부터 ‘청년배당’을 시행한다. 성남시에 3년 이상 거주한 청년에게 분기마다 25만원씩 연 100만원을 수당으로 지급한다는 거다. 일단은 19세에서 24세까지의 모든 청년을 대상으로 시작하고, 점진적으로 연령을 늘려갈 계획이다. 청년들에게 일종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거다.

서울시는 선별 복지, 성남시는 보편 복지를 내세웠지만, 발상은 비슷하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거다. 새로운 정책이 발표되자, 찬반이 엇갈렸다. 환영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정도 재정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집권 새누리당의 평가는 박정했다. 김무성 대표는 “주민의 세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행위”라고 매도했다.

물론 서울시나 성남시가 달랑 이 대책만 내놓은 것은 아니다. 서울시의 청년대책은 20개의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고, 성남시도 ‘성남청년뉴딜’ 등의 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서울시의 대책은 박원순 시장의 지시로 급조된 것도 아니다. 청년유니온 등 청년 당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다듬어 온 대책이다. 이재명 성남시장도 청년대책이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주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진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헌법적 원리에 충실하겠다는 취지다. 게다가 양쪽 모두 내년부터 시범사업을 하겠다니, 이제 막 새로운 걸음을 떼는 수준이다.


2020 서울형 청년보장제도_경향DB


청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다들 인정하고 있다. 청년들의 고통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부터 ‘헬조선’까지 다양하게 지적되어 왔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금세 알 수 있다. 당장 대학이 그렇다. 사람 많은 곳 특유의 활기나 약간 들뜬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활기는커녕 분위기가 칙칙하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지옥 같다는 건 잘 알지만,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박차고 나서라는 이야기에 솔깃할 만큼 현실이 녹록하지도 않다. 일단은 ‘노오력’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미래도 불안하지만, 지금 당장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고약하다. 청년들도 시민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자지만, 주권자로서의 대접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국가든 기성세대든 재벌대기업이든 그런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서울시와 성남시의 대책은 새로운 시도가 될 수 있다. 몇 푼 안되는 돈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존중받는다는 느낌,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중요한 전환도, 새로운 시작도 가능할 수 있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조차 없으면서 돈부터 걷고 보자는 ‘청년희망펀드’처럼 황당한 대책만 아니라면, 뭐든 좋다. 청년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한 대책이라면 뭐든 추진해야 한다. 이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장 떠맡아야 할 책무다. 가만있는 게 제일 나쁘다.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만큼 상황은 절박하고, 대책은 시급하다. 어떤 정책이든 찬반이 있을 수 있다. 허점이 있다면 토론을 거쳐 보완하면 된다. 중요한 건 지금 청년들의 삶이 정치적 유불리나 셈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거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말 궁금해서 여쭈어 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지요? 면접 시험장에서 지원자에게 “국정교과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지요. 그 지원자는 솔직하게 의견을 말해도 되느냐고 먼저 물은 뒤, 국정화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나서 하지만 그래도 정부가 책임있게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고 답했다고 하죠. 그랬더니 이렇게 다시 캐물으셨다지요. 그래서 국정화 지지냐, 반대냐고요.

잘 아시겠지만 면접이라는 건 질문자들이 일종의 게임과 같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장입니다. 최근에는 이게 또 문제가 되어서 그 전략적 행동의 요구사항 중에 “진지하고 솔직해 보여야 한다”는 사양이 또 들어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면접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았으며, 면접을 자신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온 세상에 선언하는 장으로 삼는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민한 정치적 사안을 물어보면서 무슨 답을 기대하신 걸까요? 이 게임을 잘 아는 그리고 꼭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지원자라면,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건 겉으로는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인 그래서 기업인들의 가치관에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질 답을 지어낼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진심에서 나온 소리인지, 입에 발린 소리인지 그 자리에서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실 터인데 이런 질문을 애초에 무슨 목적에서 꺼내셨는지요?

그런데 그 지원자가 사뭇 비판적인 관점에서 답하면서 예상이 어그러졌던 것일까요? 그래서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분명히 하라고 다그치셨던 걸까요? 이런 저의 궁금함은 정치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한국 기업 특유의 조직문화 그리고 노동생산성과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에 대해 암울한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의 조직 원리는 군대 용어인 ‘밤송이를 까라면 까’였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복창’이라고도 하죠. 몽둥이를 든 자가 휘두르면 그게 얼마나 아프든 심지어 때리지도 않았다고 해도 아이고 죽겠네라는 시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서 긴다’는 다른 숙어를 낳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생각이 타당한지 아닌지 또 그걸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득력있게 전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윗선의 생각과 판단이 무엇인지를 눈치코치로 파악하고 그에 맞게 처신하고 말하고 심지어 생각하며 느끼는 게 조직원의 도리라는 게 전통이었습니다.

혹시 그걸 확인하고 관철하려고 다시 캐물으셨던 것인지요?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만이 훌륭한 조직원이며 ‘인재’라는 판단 기준을 두셨던 것인지요?

이렇게 나름 짐작을 하면서도 이렇게 여쭙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21세기의 경제 환경에서 통용되는 ‘인재’의 기준일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업 조직들은 매뉴얼에 나와 있지 않은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공구리’를 치는 생산 현장과 거래선 뚫으러 다니는 영업활동이 전부였던 옛날의 기업 활동에서는 요긴하게 쓰였던 ‘인재’라고 해도, 이렇게 정신없는 속도로 끝없이 변화하는 사업 환경에서 새로운 활로와 방안을 찾아내려는 조직에 필요한 ‘인재’일 수는 없습니다. 아마존이나 구글에서는 회의 시간에 아무 말도 않는 이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죠. 가만히 숨죽이고 엎드려서 눈치 보아 알아서 기는 인물을 그것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이러한 21세기의 경제 환경에서는 실로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에 현실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비웃으실 수 있겠습니다. 한국 기업 문화와 경제 현실을 전혀 모르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소리를 읊어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더욱 궁금해지는 질문이 또 있습니다.

기업 활동 및 경제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정치적·이념적·사상적 질문들이 어째서 그토록 많이 나오는 것일까요? 큰 탈 일으키지 않고 부려먹기에 좋은 ‘마름’형 인물들을 가려내기에 그런 질문들이 효과적이기 때문인가요? 그런데 그러면서 또 왜 한국 기업들은 모든 직원들에게 혁신이니 창의성이니 하는 말들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퍼부어대는 걸까요? “창의적, 혁신적이면서도 윗선의 뜻을 알아서 잘 받드는” 인재를 찾는 것인가요? 그런 사람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할까요?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반대 여론이 다수라고 한다. 50대 이상에서도 반대 여론이 더 커지고 있고 특히 학부모들에게서는 반대 여론이 더 높다고 한다. ‘수능’을 미끼로 학부모들을 겁박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측의 반응도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

보수단체들이 역사학 대회장을 난입하고 서울대 폐지론까지 주장했다. 이런 찬성파 중에서 유독 당혹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도 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했는데 느닷없이 지금 국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국정화를 최선두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김정배 위원장이 그렇다. 역사교과서의 검인정화가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이 부정적인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말했던 분도 국정화 지지 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독재 시절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이들의 ‘변신’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뒷이야기까지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만큼 당혹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면 한국의 일부 ‘자유주의’ 세력이 현 정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지금의 교과서가 너무 편향적이라서 국정화라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정화가 아니라 검인정이 좋다는 소신은 변하지 않았지만 과도기적으로라도 이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국정교과서를 ‘한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교과서가 너무 편향적이라서 ‘예외적’인 조치가 필요한 ‘비상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이 예외적인 비상 상태라는 이들의 말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민주주의’의 실체를 드러내는 말이다. 예외야말로 정상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이 지금 상황을 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믿어줄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이 역사학계의 90%가 좌파라고 말하는 게 그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역사학을 비롯한 다수의 학계에서는 그들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들이 보기에 비상 상황이며 예외적 조치가 필요하다. 이들이 국정화라는 예외적 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소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자신들이 다수이고 도전하는 몇몇 소수 의견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소수 의견은 그들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장식에 그쳐야 한다. 그들이 아닌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귀족정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들은 자신이 다수가 아닐 때 언제든 비상 상태를 선포할 수 있고 예외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예외적 시공간에서 권리는 정지되고 시민은 발가벗겨진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와 토론은 금지된다. 입을 떼는 순간 비국민으로 발가벗겨진다. 이미 저들은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민주주의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그들이 항구적인 다수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영원히 징징거리는 소수로만 남으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다수가 아닐 때 예외를 항구화하여 지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다수’가 되지 않는 이상, 이 비상 상태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발가벗겨진 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것에 저항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싸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엄기호 | 문화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정부 노동개악이 강행되면 노조가 없던 3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우리가 그 시절 겪어봤잖아. 노조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규직이었다고. 이 직장에서 잘려도 다른 곳에 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비정규직이 엄청난 규모로 늘었잖아. 이런 상태에서 노동개악이 강행되면 30년 전보다 더 후퇴하는 거라고.”

가끔 노동조합 교육을 하다 보면 환갑이 넘은 조합원들이 참여해 이런 얘기를 해주시곤 한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은 역사를 30년 이상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요즘 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그렇고, 대통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 한다.

게다가 정부와 재벌은 비열하게도 조직력이 취약한 비정규직 사업장부터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를테면 정부는 지방공기업에까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되 “급여 수준이 매우 낮은 경우(최저임금의 150% 수준 이하)에는 제외 가능”이라고 명시한 바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최저임금의 150%, 그러니까 월 175만원만 받아도 모조리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라는 얘기이다. 이에 따라 오랜 근속을 거쳐 간신히 무기계약직이 된 지방공기업 비정규직 다수에게 임금피크제가 실시될 전망이다. 쥐꼬리만큼 월급을 주면서 꼬리마저 떼겠다는 거다.

‘쉬운 해고’로 알려져 있는 저성과자 해고제도 역시 비정규직 사업장부터 밀어붙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지난 9월에 공개한 ‘서비스센터 운영 개선 토의(안)’라는 문건에 따르면, LG유플러스 서비스센터 연합회가 저성과자 관리 및 해고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명시하고 있다. 이 문서는 LG유플러스 하청업체로 구성된 서비스센터연합회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월간 정량평가를 기준으로 노동자들을 A~D등급으로 분류한 뒤 D등급 직원에 대해서는 개선계획서 제출→교육시행→업무일지 작성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분기평가 3회 이상 D등급을 받은 직원은 해고하도록 적시하고 있다.



최근 일부 교육청에서 취업규칙 변경을 통해 저성과자 해고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내용이 닮았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연 2회(2월, 8월) 근무성적 평가를 하도록 하고, 5개 등급으로 분류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근무성적 평가결과 3회 연속 최하위등급을 받은 경우 해고할 수 있도록 한다니, 위 사례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가!

민간과 공공 부문에서 이토록 동일한 사례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정부와 재벌이 이미 물 밑에서 ‘쉬운 해고’ 가이드라인을 깊숙이 논의해왔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쉬운 해고를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저성과자 해고제도가 취업규칙에 명시되어야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과 함께 쉬운 해고 가이드라인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재벌이 비정규직 사업장부터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조직력이 강한 대기업 정규직에게 곧바로 밀어붙이긴 어려우니 만만해 보이는 곳부터 시행한 뒤, 마지막으로 대기업 정규직을 고립시켜 밀어붙이는 시간차 공격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노조들은 오는 14일로 예정된 민중총궐기에 비정규직 5만 조합원을 상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화답할 차례이다. 비정규직 사업장에 쏟아지는 노동개악 공세가 바로 대기업 정규직을 향한 공격의 신호탄임을 자각하고 나서야 한다.

비정규직 5만과 정규직 5만이 손을 잡고 함께 총궐기에 나설 때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을 막아낼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나설 때, 박근혜 정부의 역사 되돌리기를 막아낼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기 위해 앞장서온 것은 언제나 자각한 노동계급 아니었던가.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금 청년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권력의 자리’이다. 권력의 자리라니?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눈을 부릅뜨고 필자에게 삿대질해댈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리할 것이다. 교육, 기업, 나랏일 하는 높은 분들이 그리할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누구인가?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로 볼 것이다. 독립성과 자율적인 존재라고 하기엔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한 가정과 나라의 살림을 책임질 수 없는 무능한 사람들이라 여길 것이다. 전적으로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2010~2011년 조사에 따르면, 대졸자 절반 이상이 부모와 같이 살거나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는 ‘캥거루족’이다.

또 한국경제연구원의 2015년 1~8월 조사에 따르면 대졸 남성 청년층의 체감 실업률은 정부 공식통계치의 3배인 28%에 달한다. 하지만 이 숫자들에 기대어 지금의 청년들을 그저 어린 혹은 무능한 사람들로만 간주하는 어른이 있다면, 그는 한참 ‘모자란’ 사람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지금의 어른들,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의 수혜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지금의 청년들은 지금 어른들의 ‘선배’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리고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라, ‘앞서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규 채용계획이 있는 기업 비중 추이_경향DB


지금의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곤궁한 누군가가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스펙과 더 좋은 직장을 위해 온갖 부지런을 떨면 떨수록, 이미 부유한 다른 누군가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세계이다. 그렇게라도 들어가 얻은 대학의 졸업장과 자격증이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한 세계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특히 그러하다. 특출한 재능과 연줄과 빽이 없다면 대부분이 미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어찌 어찌해서 더 좋은 직장이라고 꼽히는 기업에 정규직으로 들어갔다 해도 10년 남짓 다니면 끝인 세계이다. 그나마 그런 기업들마저도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세계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 세계를 가리켜 ‘헬조선’ 혹은 ‘망한민국’이라 부른다.

저개발국가와 독재국가라는 이름의 세계와 비교해 보면 어떠한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목표를 갖고 가슴 한쪽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그런 세계와 마찬가지의 세계라 생각하는가? 아니다.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 어떤 목표도,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세계이고, 그래서 ‘헬’조선이고 ‘망한’민국이라고 칭해지는 세계인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헬조선과 망한민국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의 어른들은 ‘청년 일자리 창출’로 그리할 수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진위가 의심스러운 답이다. 왜냐고? 자신들이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빠져나갈 길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당사자인 청년들과 직접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며 지혜를 구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설사 알 수 있다손 쳐도 청년일자리 창출이 해답일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지금의 청년들을 ‘경제동물’로 가정한 채, 헬조선과 망한민국의 부조리함을 그저 ‘저소득과 내수침체’의 관점에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정과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청년들은 헬조선과 망한민국을 대체할 새로운 세계의 ‘전위’가 아니라, 기껏해야 헬조선과 망한민국의 노동자 혹은 소비자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혹은 소비자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헬조선과 망한민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세계로의 나아감? 어불성설이다. 벗어남과 새로움은 자유와 용기와 열정을 필요로 한다. 돈과 상품의 사슬에 묶여 있는 노동자와 소비자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덕목이다. 권력의 자리이다. 자유와 용기와 열정을 낳는 자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 지금의 청년들이 헬조선과 망한민국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권력의 자리를 내줘야 한다.

헬조선과 망한민국의 처참함을 겪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러나 곧 그 세계에 가닿을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다. 청년들에게 권력의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저기 있는 낡아빠진 문갑은 뭐야?” “응, 저거 어머니 유품이야. 내가 사 드렸던 건데, 생전에 무척 아끼시던 물건이라 어머니 생각날 때마다 만져 보려고.” “집구석도 좁은데 구질구질하게 저런 걸 왜 여태 끌어안고 있어? 당장 내다 버려.”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해? 당신 어머니 유품이라면 그럴 수 있어?”

이 심상한 대화가 결국 한 쌍의 젊은 부부를 파경으로 몰아갔다. 듣기로는, 이와 비슷한 문제로 다투는 부부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함께 사는 부부라 해도, 같은 사물에서 얻는 감성의 깊이가 같을 수는 없다. 한쪽에게는 자기 삶의 중요한 순간과 중요한 사람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이지만, 다른 쪽에게는 그저 구질구질할 뿐인 물건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제3자가 이런 상황에 개입할 수 있다면, ‘올바르고 균형 잡힌’ 판단은 무엇일까? 경제적 합리성만 따지는 사람이라면 버리라고 할 테지만, ‘인정상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지금 똑같은 일이 단원고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250여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의 수다와 웃음과 말썽과 한숨이 깃든 교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 한다. 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곧 졸업할 테고, 그러면 그 부모들도 더 이상 ‘단원고 학부모’가 아닐 터이다. 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그들도 대학생 학부모가 되었다가 직장인 부모가 되었다가 다시 시아버지나 장모가 되었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계는 2014년 4월16일에서 멈췄고, 그들의 남은 평생도 ‘단원고 학부모’라는 이름에 속박되어버렸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착하게 잘 들었던 아이들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부모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쓰던 물건들 속에 아련한 이미지로만 남았다. 그 아이들이 매일 앉아 있던 교실은, 그 부모들에게는 남은 평생 아이들의 영혼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영매(靈媒)다. 죽은 아이가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 아이가 쓰던 교실로 달려가, 아이가 쓰던 책상을 부둥켜안고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게 그 부모들의 바람이다.




그런데 1, 2학년 학부모들 일부와 학교 운영위원회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희생자 학부모들을 이미 학교와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로 본다. 그들은 또 학교는 살아 있는 아이들의 오롯한 공간이 되어야지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지금 단원고에 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다닐 아이들을 위한 교실도 넉넉지 않은데, 희생자들이 쓰던 교실을 그대로 보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실이 보존되면 아이들 공부에 방해될 것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단원고를 다른 이름의 학교로 바꾸고 싶을 것이다.

죽은 아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빈 교실들을 옆에 두고 공부할 자식들을 세심하게 염려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희생자 부모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 박정함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는, 죽은 단원고 아이들과 그 부모들만이 아니다. 사람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보는 냉혹하고 천박한 자본, 우왕좌왕하다 300여명이 산 채로 수장되는 꼴을 온 국민이 지켜보게 하고서도 책임은 개별 기업에 몽땅 떠넘긴 무능하고 비겁한 정부,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학생들끼리의 경쟁만 가르쳐 온 일방적 교육. 세월호 참사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 내재한 이 모든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그렇기에, 참사 직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했던 것이다.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의 교실 안에 그들의 체취를 보존하는 것은, 그 결의의 기억을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두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의 미래와 연관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안에 개입할 자격이 있는 경기도교육청은 당사자들끼리 합의하라며 수수방관하고 있다. 내년 2월 단원고 졸업식이 끝나면, 희생자 학부모들은 당사자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렇게 죽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올바르고 균형 잡힌’ 처사일까? 역사교과서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다 지워버려야 ‘올바르고 균형 잡힌’ 역사책이 된다고 주장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반문명적 행위를 자행한 정부를 지탱하는 것은, 자기 주변에서 아픔과 슬픔, 괴로움 등 모든 부정적인 기억의 요소들을 지워버리려는 평범한 욕망들이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왜 아팠는지를 잊으면 또 아프게 된다는 것을.


전우용 | 역사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조선일보는 가끔씩 진보로 분류되는 인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한완상, 최장집, 그리고 이름 없는 교사에 불과했던 김형근까지 조선일보가 휘두른 칼에 상처를 입었다. 김형근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번엔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를 노렸다. 마침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정부와 여당이 전쟁을 선포한 직후였다. 기회를 잘 맞췄다. 게다가 한홍구는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을 주도하는 사람이다.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었을 게다.

핵심은 “한홍구가 ‘박정희, 더 일찍 죽였어야’라고 했다”는 강의 동영상을 고등학교 교실에서 틀었다는 거다. 박정희는 심복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 사변이 훨씬 앞당겨져야 했다는 저주를 퍼부었다는 거다. 조선일보와 TV조선은 특집 보도물을 쏟아내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근거로 삼았다. 정부·여당에서는 조선 매체들의 보도를 받아 격한 소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문제의 강의 동영상을 확인하는 기초 작업도 없었다. 한홍구가 발표한 입장문에서 밝힌 것처럼, 학교에서 동영상을 본 고등학생은 그렇게 오해했다 치더라도 기자라면 마땅히 동영상을 보고, 실제 발언내용을 확인했어야 했다. 국군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였던 박정희가 숙청되었다면, 우리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는 내용을 “박정희 죽였어야”로 둔갑시킨 거다. 게다가 강의에서 “김일성이 얼마나 훌륭한 독립운동가인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도 했다. 김일성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는데 시뻘건 색깔을 덧씌웠다.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한홍구 교수, 신인령 전 총장, 작가 서해성씨_경향DB


조선일보는 한홍구의 가계도까지 털어냈다. “‘박정희 죽어야’ 한홍구는 ‘금수저 좌파’?”라는 기사를 통해 부친이 출판계의 거두였고, 외할아버지는 헌법 초안을 만든 유진오, 할아버지는 “동아일보 창업 멤버 중의 한 명인 한기악씨”라고 소개했다. 게다가 출판계 관계자의 말이라며, “한 교수의 급진적이고, 튀는 사상 때문에 집안 다른 형제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는 편으로 알고 있다”고 적었다. 좋은 집안 출신으로 혜택은 다 받았지만, 비뚤어진 인격파탄자로 만들어버린 거다. 이런 접근도 치졸하지만, 더 웃긴 건 한홍구의 조부 한기악을 대하는 태도다. 한기악은 22세에 동아일보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4년 동안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근무했던 경력이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다. 일제시대 조선일보의 최장수 편집국장이었는데도 22세 때의 동아일보 관련 경력만 적어 놓은 것은 교묘한 조작이다. 게다가, 한홍구가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자, 인터넷판 기사에서 한기악 부분은 아예 삭제해버렸다. 한홍구가 조선일보 황금기를 이끌었던 한기악의 손자라는 사실을 피하고 싶었던 게다.

형제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출판관계자의 증언이 실제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지난해 한홍구의 부친 한만년의 10주기를 맞아 한홍구와 그의 모친, 세 명의 형과 한 명의 여동생은 한만년의 뜻을 기리는 책에 대한 강좌를 성공회대에 10년간 개설하기로 했고, 강좌 운영비 1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한만년의 다섯 자녀 중 세 명은 서울대 교수, 한 명은 연세대 교수인데도 굳이 “교류가 거의 없는” 한홍구가 재직하는 성공회대에 부친의 뜻을 기리는 기부를 한 까닭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시시콜콜한 사실을 따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식으로 조선일보가 칼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때론 교묘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빨갱이 사냥’은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조선일보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한홍구는 예전의 상대들과는 많이 다르다. 조선일보 보도 직후, 자신의 이름으로 입장문을 내고, 하지도 않은 말로 인격살인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왜곡보도에 대한 사과와 정정을 촉구했다. 또한 악의적 왜곡보도에 대해 법적 대응도 하겠단다. 아무래도 이번엔 조선일보가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 같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말 그대로 거침없이 하이킥이다. 막무가내의 밀어붙이기다. 못할 일이 없다. 자신들이 정한 교육과정도, 자신들이 검정한 교과서도 이제 와서는 모두 잘못됐다고 우긴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있다고,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 여론을 호도한다. 다양하고 균형 잡힌 역사적 시각이 필요하다며 국가가 정한 하나의 교과서로만 가르쳐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다.

반대의 목소리가 아무리 거세도 자신들의 뜻대로 교과서를 다시 쓰겠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4대강을 그랬던 것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의 자연스러움과 그 다채로운 생태를 포클레인으로 파내고 둑으로 막아 무미건조한 죽음의 강으로 정비해 버린 것처럼. 복잡다단한 역사의 물줄기를 국가의 이름으로 재단하고 정비하면 어떤 역사책이 나올까. 그 결과는 너무 뻔하다. 이른바 뉴라이트 교과서,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의 재판이 되리라는 것은 예정돼 있는 수순이다.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정부·여당의 자가당착이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국정화를 발표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의 시정과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에 따른 사회적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제껏 자신들이 만들고 적용해온 교육과정과 검정 심사가 잘못됐다는 자인이다. 이런 ‘실패한 국가’가 직접 교과서를 만들겠다니 자신들의 실수와 실패를 감추기 위해 아예 검정 심사 기준을 없애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더 큰 실수와 실패가 예견되는 까닭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계획을 발표하는 황우여 장관_연합뉴스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이 2013년 내놓은 ‘한국사 교과서 관련 정책리포트’는 국정교과서가 결코 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리포트는 “국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권위주의 내지 독재국가”라고 못박았다. “우리나라도 검정제로 발행한 고교의 ‘한국근현대’ 교과서가 내용이나 제작 기술 면에서 국정제로 만든 ‘국사’보다 질적 수준이 제고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까지 했다.


이 리포트는 “국어나 사회(역사 포함), 도덕(윤리) 교과목처럼 가치관과 이념의 문제, 사회적 합의가 매우 중요한 과목은 국정제로 운영할 수도 있으나 소수의 제한적인 집필자 참여로 교과서의 다양성이나 수준이 매우 낮다”는 점을 지적하고 하나의 관점만을 강요할 가능성, 국가주의적 편향, 지나친 이념 홍보, 특정 정권의 치적 미화 등의 폐해를 열거했다. 그 단적인 사례로 “유신시대의 정치경제, 사회문화 교과서를 보면 유신 아니면 살 수 없다고 독재정권을 옹호하였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예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회적 논쟁을 불식시킬 수 있나. 이미 더 큰 분란과 갈등만 낳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이 이 무리한 국정화를 강행하는 이유는 국정화의 최종 종결자가 박근혜 대통령이란 것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박 대통령이 역사교과서에 그토록 집착하고 있는 것은 그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 또한 분명해지고 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대화의 주체다. 온전히 그 대화는 역사가의 몫이다. 물론 그것이 역사가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삶을 사는 데 있어, 또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데 있어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며,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역사가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역사가적 자질이다.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또 역사적 사실에서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는 방향과 교훈을 찾고자 하는 ‘직시와 성찰의 미덕’이다. 그것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의 치열한 대화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일 터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오로지 자신의 부친과의 대화에만 몰입해 있는 듯하다. 독재자 박정희라는 역사적 사실과 평가를 지우고 싶은 욕망이 국가의 이름으로 교과서를 다시 쓰겠다는 만용으로 치닫고 있다. 국민과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다.

성공할까. 불행히도 국정교과서 하나로 대적하기에는 불살라야 할 역사책들이 넘쳐나고, 묻어야 할 역사학자와 역사교사들 또한 너무 많지 않은가.

국정, 다시 해보라. 그것은 곧 다시 쓰여질 운명임을 그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어쨌든 고통스럽지만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오늘이다.


백병규 | 시사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저, 뇌 사진 한번 찍어보고 싶은데요.” 다짜고짜 진료실에 들어와 뇌 사진 찍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 50~60대로 최근 들어 사람 이름을 자꾸 까먹어서 대화 중 당황한 경험들이 있고,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몰라 한참을 찾아야 하고, 약속을 잊었다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암이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다. 1960~70년대에는 <스잔나>, <러브스토리>, <라스트 콘서트> 등의 영화에서 말기암 환자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면서 죽어가는 ‘시한부 인생’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암환자의 5년 생존율이 68.1%로 높아지면서 이제 암은 흔한 질병이면서 완치 가능한 질병으로 변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암보다 치매가 무섭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일까, 치매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심심찮게 보인다. 아내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으로 떠나가는 <어웨이 프롬 허>라든지, 세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존경 받는 교수로서 열심히 살아가던 앨리스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이를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스틸 앨리스>라는 영화도 있고, 사랑했던 기억들까지 다 잃어가는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남편을 그린 <노트북>이라는 영화도 있다.

다행인지 나에게 찾아 온 사람들은 모두 치매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도 가끔 사람 이름을 까먹어요”하고 웃음을 던지면 그분들도 같이 웃는다. 건망증은 스스로 기억력의 저하를 호소하지만 판단력은 정상이어서 일상적인 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 잊어버렸던 내용을 어느 순간 기억해 내기도 하고, 힌트를 들으면 이름을 떠올리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는 정신 집중도가 떨어져 일시적으로 건망증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도 참고해야 한다.


이와 달리 치매는 기억력 감퇴가 심해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물건의 이름도 금방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고, 그동안 사용하던 세탁기나 전기밥솥의 사용이 서툴러지고, 익숙하게 하던 요리의 순서가 헷갈려 요리를 망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거스름돈과 같은 잔돈을 주고받는데 실수가 잦고, 잘 다니던 길에서 헤매고 심해지면 자기 집을 못 찾는 일도 생긴다. 성격 변화나 감정의 변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 과거에 매우 꼼꼼하던 사람이 대충대충 일을 처리한다거나 전에는 의욕적이던 사람이 매사에 관심이 없어지기도 한다.


정상 두뇌, 경도인지장애 두뇌, 알츠하이머 두뇌의 단층촬영_경향DB


2012년 국내 치매 유병률 조사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18%로 치매 환자수는 54만1000명으로 추정되었다. 치매는 고령일수록 많이 걸리는데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70대의 4.97%, 80대의 24.19%, 90세 이상의 37.36%가 치매에 걸려 있었다. 우리나라도 고령화 현상이 지속되기 때문에 치매 환자는 늘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한 마디로 치매에 안 걸리고 싶다는 것이다. 치매를 원인별로 분류해 보면, 알츠하이머는 71.3%, 혈관성치매는 16.9%, 기타 치매는 11.8%이다. 치매의 가장 흔한 형태인 알츠하이머는 초기에는 뇌의 해마에 손상이 생겨 최근 기억이 상실되고, 진행되면 대뇌피질까지도 침범하는, 원인 모르는 질병이다. 아직까지 확실한 예방법은 없지만, 학력이 높을수록 잘 안 걸린다고 알려져 있으며, 뇌기능을 많이 쓰는 활동 즉,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언어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이 예방에 도움이 된다.

두 번째로 흔한 혈관성치매는 뇌혈관 질환으로 인해 뇌조직 손상이 초래되어 나타나는 치매를 가리킨다. 뇌혈관 질환의 위험인자는 흡연,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비만 등이기 때문에 금연하고,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와 비만을 열심히 치료해야 한다. 운동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이 대목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치매를 의심할 때 조기진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뇌 MRI 같은 사진보다도, 의사와의 면담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일단 조기 진단을 하게 되면 치매를 치료하진 못하더라도 안전 문제와 같은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 조기 진단은 중요하다. 또한 치매의 진행을 막진 못해도 약물복용을 통해 진행을 늦출 수 있는데, 만약 2~3년 만 늦춘다 하더라도 본인과 가족에게 결코 작은 혜택이 아닐 것이다.


서홍관 | 국립암센터 교수·시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정부가 기어코 밀어붙였다. 국정교과서 말이다. 많은 사람이 설마 했다. 어느 반대 대자보에 나오는 말처럼 21세기에 진짜로 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걸 강행했다. 한 지인은 너무 화가 나는 일인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억장이 무너지고 말문이 막혀서 무력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그 지인 말고도 여러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말이다. 나 또한 그렇다.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유신시대로의 회귀라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명백한 ‘국정’ 교과서를 ‘통합’ 교과서라고 말한다. 쓸데없는 내분만 잔뜩 일으키고는 그걸 통합이라고 말한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사람들이 말문이 막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이 말 같지 않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저들은 말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것은 이제 저들의 통치전략이 되다시피 했다.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문재인 새정치연합대표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자다. 엄밀하게 학문적 의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의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 공산주의자라는 말은 최대한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말이 이 지경에 이르면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움베르토 에코가 <해석의 한계>에서 말하는 말이 지향해야 하는 ‘공통적인 개념의 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에코는 이 책에서 “모든 텍스트는 무한한 독서를 야기하면서도 엉뚱한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말이 전달하는 의미가 일대일로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열려 있기는 하지만 결코 엿장수 마음대로 막 갖다 붙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는 다시 “한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지를 밝히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그릇된 해석을 식별하기는 쉽다”고 말한다.



문재인 대표가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에서부터 역사교과서가 종북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저들의 해석은 ‘무한한 독서’가 아닌 ‘엉뚱한 독서’이며 밝히기 힘든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식별하기 쉬운 ‘그릇된 해석’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시 에코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목적에 쓸 만한 형태를 얻어낼 때까지 텍스트를 마구 주무르고 파헤치고” 있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말로 이루어지는 공통의 세계의 파괴다. 근대 민주주의란 쉽게 말해서 주먹으로 하지 말고 말로 하자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올바른 해석’을 밝혀내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엉뚱한 독서’, ‘그릇된 해석’을 가려내는 공론장을 통해 통치한다. 물론 이것이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언제나 주먹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은 아예 말로 취급되지 못하고 공론장에서 폭력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런 점에서 근대 정치에서 말의 역할은 주먹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로 위장한 폭력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말은 중요하다. 폭력을 가리고 통치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기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만당하는 것도 의미가 전달되는 공통의 세계에 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의 통치 권력의 말은 주먹을 대체하거나 은폐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말에 폭력을 가하는 파괴하는 주먹에 가깝다. 아예 말을 파괴함으로써 말문이 막혀 무엇을 하겠다는 의사를 포기하게 만든다. 말을 방귀 소리보다 더 못하고 구린 것으로 만들었다.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할 말을 잊게 만드는 것, 이것이 저들의 통치방법이다. 우리는 이 말의 무력화에 맞서야 한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말을 하고 들을 줄 아는 자는 모두 이 공통의 세계의 파괴에 맞서야 한다. 말이 무너지면 세계도 무너진다. 그러니 억장이 무너지더라도 이제야말로 끈질기게 떠들어야 한다.


엄기호 | 문화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미국과 영국의 진보 정치에서 버니 샌더스와 제러미 코빈이 힘을 몰아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에서 특히 착목해야 할 지점은 정당정치의 구조 변동, 즉 ‘카르텔 정당’의 위기 혹은 몰락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중도의 좌우 정당은 신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 개혁의 의제들에 합의하면서 사회·경제 정책에 있어 서로 비슷하게 수렴하는 길을 밟아나간다. 그러한 정책들 때문에 서민 대중들의 삶의 질이 악화돼 그에 반대하는 여론과 행동이 아래로부터 터져나왔다. 하지만 중도 좌파 정당이 이를 의제로 받지 않고 기존 합의된 의제들만을 고수하는 바람에 별 소용이 없었다.

본래 노동운동 등에 기초해 생겨난 중도 좌파 정당이 어떻게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요지부동일 수 있을까. 이는 ‘카르텔 정당’으로의 변화 때문이다. 정당의 의사결정구조와 정책 생산 과정은 형해화되거나 크게 왜곡되고, 정당의 주요한 의사결정 과정은 물론 여러 권력 자원도 당권을 장악한 소수와 그 주변 세력에게 집중돼 버린다.

최근 치러진 영국 노동당의 당 대표 선거는 이러한 지난 몇 십년간의 흐름에 근본적 구조적 변화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영국의 ‘신노동당’은 노동조합 등 전통적 대중 기반과 거리를 멀리 두면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시장주의 정치경제를 지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치 노선이라고 믿는 정부 각료들이 지배하는 정당으로 변해갔다. 여기에 대해 각종 비판이 터져나오면 노동조합이나 구좌파 등과 같은 낡은 세력의 구시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선동이라고 무시해 버리곤 했다.

이번 선거에서 중심 쟁점이었던 내핍(austerity) 정책의 문제가 이러한 카르텔 정당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국 보수파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영국 경제의 살길은 오로지 엄혹한 경제 긴축 정책뿐이라고 주장했지만, 폴 크루그먼이 여러 번 역설했듯이 이는 억지에 가까운 논리였다.

그럼에도 블레어의 후예들이 이끄는 노동당은 이러한 정책 기조를 진리인 양 받아들였고, 당내 좌파라고 여겨졌던 ‘붉은 에드’ 전 대표도 기껏해야 그 정책으로 인한 서민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자는 정도의 주장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리하여 내핍 정책은 영국 정치의 ‘전 국민적’ 합의가 되어 버렸고, 내핍 정책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목소리는 비합리적인 극단주의로 몰려 정치적 의제에서 배제됐다.




하지만 이는 다수 서민들의 생각과 큰 차이가 있었다. 제러미 코빈 후보의 돌풍 속에서 노동당의 당권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했을 사실 하나는, 코빈이 내핍 정책 자체를 분명히 반대하면서 내건 정책 각론들이 여론조사로 밝혀지는 영국 국민들의 민심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내핍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는 비합리적인 극단주의가 아니라, 기실 영국의 진보 정치 진영에서 가장 중심으로 삼았어야 할 의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의제를 지금까지 효과적으로 배제해 왔던 ‘카르텔 정당’의 메커니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노동당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해 코빈을 지지하겠다는 이들이 무더기로 입당한 것이다. 이 상황을 보는 당권파들의 심정을 ‘인디펜던트’의 한 논평가는 “큰일이다! 정열과 비전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떼지어 우리 당으로 몰려오고 있다! 우리 당은 이제 망했다!”고 익살스럽게 표현하기도 했다.그 결과 블레어의 자식들이라고 할 후보들은 모두 창피할 정도의 득표율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또한 앞으로 민주당이 예전과 똑같을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은 복마전같이 복잡하고 불투명한 내부구조로 악명이 높지만, 그 터줏대감이라 할 클린턴 집안은 이미 7년 전에도 풋내기 오바마에게 고배를 마신 바 있다. 미국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크게 동떨어진 양당 구조의 낡은 정치 의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리자는 사람들의 흐름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 흐름이 듣도보도 못하던 노인 정치가 버니 샌더스에게 몰리고 있다. 높은 지지율뿐만 아니라 힐러리에 못지않게 2600만달러를 모금한 그는 이제 금방 사라질 반짝 현상을 넘어 유력한 후보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가 설령 패배한다고 해도,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사회·경제적 평등 강화를 주장한 목소리는 결코 정치적 의제에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공화 양당 간의 타협, 정당 엘리트들 및 그 주변 세력이 대중적 열망을 도외시한 채 정치적 의제를 마음대로 정하는 ‘카르텔 정당’ 또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우리의 정당들이 깊이 생각해 볼 지점이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세월호 구조에는 무능력했던 정부가 노동개혁은 왜 이렇게 밀어붙이는 걸까요?” 요즘 노동조합 교육을 다니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이다. 물론 사장님들은 언제나 임금을 깎고 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원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2015년 지금일까?

여기에는 이미 화약고가 되어 있는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이 놓여 있다. 미국, 유럽, 중국 어느 곳도 안심할 수 없는 위기의 연속이다. 한국 경제성장률은 2008년 이후 최저인 2.8%로 전망되는 상황이다. 사내유보금 규모는 매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이윤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이윤율도 하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권이 던진 승부수가 바로 노동개혁이다. 아니,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이윤 보호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쉬운 해고, 임금피크제, 파견 확대 등 노동개혁으로 포장된 정책 모두 100% 사용자들을 위한 내용이 아닌가.

“정부의 노동개혁이 단순히 임금 깎고 해고 쉽게 하는 게 목표일까요?” 이 역시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이다. 물론 이런 질문은 스스로 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임금피크제, 쉬운 해고를 도입하겠다고 분위기 잡으면서 실제로는 노동조합을 때려잡는 게 진짜 목표 아니냐.”

취업규칙 변경을 쉽게 하고, 누구든 저성과자로 포장해 맘대로 해고하는 것! 아무런 규제 없이 비정규직을 몇 년 동안 사용하는 것! 그렇다. 이런 일은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정부와 자본 입장에서 이런 일을 새롭게 도입할 필요가 있다면 그건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 특히 대기업들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대기업 노조들은 중소규모 노조에 비해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대기업 사업장에서 자본의 공격은 취업규칙 변경이나 일반해고로 곧장 직행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현대차·기아차·철도 노조 등에 공통적으로 진행되는 공격은 임금피크제와 성과 차등임금제 등 임금체계를 개악시키는 쪽으로 집중된다.


'노동시장 개혁저지 집중행동 집회'에 참가한 민주노총 조합원들_경향DB



특히 성과 차등임금제를 도입할 수만 있다면, 노동조건 전반에 ‘성과’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성과를 기준으로 상여금을 차등 지급하고, 성과를 기준으로 승진·승급을 하다 보면, 결국 성과를 기준으로 해고를 할 수 있는 일반해고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놈의 ‘성과’라는 건 사장님들이 엿장수 맘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장 맘대로 해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런 해고가 도입되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사장님들은 눈엣가시 같은 노동자들만 골라서 ‘저성과자’로 분류하기 시작하고, 곧바로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 관리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과거 정리해고의 경우 대상이 된 노동자들 중심으로 집단적인 투쟁을 벌였으나 이마저 어려워지는 것이다.

대기업 사업장들의 올해 임단협이 예년과 달리 일정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길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성과 차등임금제의 교두보를 만들어 놓아야만 일반해고의 길을 틔울 수 있고, 이를 근거로 노동조합을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 특히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사장님들에게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하려는 것이 박근혜 정권 노동개혁 정책의 핵심이다. 전체 노동자들을 상대로 해고를 맘대로 하고 임금을 쉽게 깎으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대기업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남강 이승훈. 변절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했고,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에는 여준, 조만식, 염상섭, 김억, 홍명희, 주기용, 함석헌 등의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그저 제 한 몸과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애썼던 평범한 장사꾼이었다. 제대로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홉 살에 고아가 됐으니 당장 먹고사는 게 급했다. 일을 해야 끼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 처지였다. 사환으로 시작해서, 보부상으로 일하며 전국을 누볐다. 보부상으로 번 돈으로 유기공장을 차렸고, 무역과 운수사업까지 일으켰다. 그는 사업가로서 승승장구했지만, 나라의 운명은 기울었다.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길에 접어들자, 갑자기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실의에 찬 나날, 은인자중의 시절이었다.

43세가 되던 1907년, 이승훈은 놀랍게 변한다. 마치 예수가 사생활을 접고 공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단박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계기는 단 하나, 그해 7월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었던 것이다.

한 번의 연설로 이승훈은 모든 걸 바꾼다. 금연, 금주에다 단발을 하고,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에도 가입한다. 곧바로 전 재산을 바쳐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교육, 문화, 출판, 그리고 비밀결사운동에까지 맹렬하게 나선 것이다. 모든 존재를 걸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바꿔 공적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이승훈의 마음을 움직인 안창호는 당시 29세였다.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 문화, 습관을 바꾸고,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곧바로 실행했던 것이다. 남강 이승훈의 극적인 변모는 말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준다. 말은 우리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우리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책 제목처럼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말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기도 하다. 천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 하지만, 요즘처럼 말이 힘을 잃은 시절도 없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접하는 말은 많아졌지만, 말이 사람을 바꾸거나 세상을 바꾸는 일은 흔하지 않다.


오토바이 전국투어' 하고 있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마르코스 부사령관_AP연합뉴스



당장 대통령부터 많은 말을 쏟아내지만, 그 말에 힘을 얻거나 그 말에 기대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청년 일자리 13만개가 만들어진다는 대통령의 말에 희망을 거는 젊은이가 있을까. ‘노동개혁’을 하면 능력으로 인정받으며, 정규직 취직이 쉬워지며,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 없는 일터가 만들어진다는 정부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을까. 그저 각자도생의 삶이 있을 뿐이다.


방송사의 토론은 여전하지만,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만 모아놓고 싱거운 소리만 반복한다. 이성의 힘을 믿고 공론을 펴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저 이기거나 지는 유치한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명예훼손과 모욕죄를 무기로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는 경우도 너무 많다. 표현의 자유는 잔뜩 위축되고, 권력과 자본이 통제하는 언론은 무기력해졌다. 말이 힘을 잃은 것은 그저 정치적 유불리만 셈하며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해대는 능력이 발달한 탓도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어느새 말의 힘을 잊은 탓도 있을 거다. 말 한마디 때문에 설레기도 하고, 말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도 하던 우리가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까.

마침 명절이다. 모처럼 가족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올라온다. 그래서 정치권에선 추석상에 올라갈 만한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했다. 추석 민심을 끌어오기 위한 노력일 게다.

그렇지만 이번엔 정치하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이야기 말고, 우리가 준비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정부가 요구하는 노동개혁의 실과 허에 대해서, ‘청년희망펀드’가 청년 실업사태를 극복할 방도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국회의원 정수 조정 문제나 정치개혁 문제, 내년 총선에 꼭 포함되어야 할 공약이나 우리가 키워줄 만한 좋은 정치인 이야기도 추석상에 올려보자.

정치가 그저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정치인들만의 문제일 때, 우리는 정치에서 점점 소외되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재단되거나 처리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자. 지금껏 내 일처럼 여기지 않았을지 모를 숱한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고 답을 찾아보자. 국민이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민심이 무섭게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핵심에 바로 국민의 말이 있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945년 8월16일, 나는 전날과 다름없이 제 시간에 출근하여 국기 게양대 앞에 섰다. 그런데 게양대 위로 올라가는 깃발은 우리 히노마루가 아니었다. 낯선 깃발이 올라가는 동안 조선인 동료들은 ‘반딧불이’(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을 번안한 일본 동요) 곡조에 맞춰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나도 부동자세로 서서 깃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동안 조선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일본인의 회고)

그는 매일 아침 국기를 바라보고 동방요배를 하며 조회 때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낭송하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그들도 ‘덴노 헤이카’의 적자(赤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남의 국기를 바라보며 경배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에야, 그동안 자기들이 조선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1945년 농사는 풍작이었다. 게다가 공출은 중단되었고,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칠 이유도 없었다. 일본 본토와 전선으로 반출되던 쌀도 고스란히 국내에 남았다. 그럼에도 쌀이 부족했다. 친일 지주들과 유력자들이 속죄하는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쌀이 떡과 술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사죄하는 자와 사죄받는 자 사이, 즉 친일파와 보통사람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했다.

그런데 근래 일제강점기에 산출된 텍스트들을 통해 ‘보통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연구자들 중에는, 텍스트로 표현되지 않은 문제는 ‘없는 문제’인 양 취급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에도 보통사람들은 신문물에 열광하고 경제적 성취에 몰두했을 뿐, 독립운동이니 민족문제니 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본다. 이런 결론은 다시 “민족주의라는 색안경을 쓰고 역사를 본 결과 일제강점기의 민족문제가 실제보다 과도하게 인식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99% 이상의 한국인들은 1%도 안되는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생각, 다른 생활을 하며 ‘정상적’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민족문제’에 대해 말하기 싫었거나 관심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총독정치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바로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억압 상황이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 ‘말할 수 없음’에 익숙해진 것뿐이다. 압제 속에서 표현된 것이 속마음이 아니라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났을 때 표현된 것이 속마음이다.


일제강점기 농촌 어린이의모습_연합뉴스


그럼에도 최근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이자 일본군의 정신적 동지”였다거나 “1%의 독립운동가 때문에 99%의 ‘보통사람’들이 죄인 취급 받는 건 불합리하다”는 등의 발언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그들은 압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통사람’으로 호명(呼名)하고서는, 그들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묶어 두었던 식민통치의 하수인들과 한편으로 묶는다. 그러고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보통사람’의 평온한 삶을 교란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죄인의 자리에 배치한다. 그들의 주장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다면 성폭행이 아니라 화간(和姦)’이라는 주장과 똑같다. 성폭행범이 피해자의 목에 칼을 들이댔든, 피해자가 14~15세의 소녀든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겐 강자가 약자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며, 그 상황에 순응하는 게 ‘보통사람’의 도리이고, 그에 저항하는 것은 ‘죄’이다.

‘민족주의 과잉’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정작 ‘국가주의 과잉’의 노골적 표현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 찬동하는 황당한 아이러니가 연출되는 것도 이 때문일 터이다. 그들의 속마음에 자리 잡은 건 이런 생각이 아닐까?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상황이 ‘정상 상황’이 되고 권력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는 획일적 인간이 ‘보통사람’이 되는 쪽이 자기에게 유리하다는 것.


전우용 | 역사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 후배가 도움을 요청한다며 찾아왔다. 중학교에 두 달 동안 연극 강사로 가게 됐는데 뭘 준비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언제부터 시작이냐고 물었더니 당장 다음주부터란다.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처음부터 다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우려했더니 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만 당부했다. 살짝이라도 절대 학생 몸에 손이 닿는 일이 없게 하라고 했다. 꿀밤도 안된다고 했다. 마음이 급할수록 더 조심하라고 했다.

공식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가지만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밤잠을 설치며 준비해야 했다. 당연히 이 준비과정은 노동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학생들이 쉽게 따라와 줄 리도 없었다. 일을 의뢰한 교사는 수업이 효율적이지 않다며 후배를 독려했다. 그분은 학생에 대한 선의로 하는 말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후배에게는 압박이었다. 그는 준비가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더 열심히 노력했다. 맨바닥에서 그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은 자기 ‘노력’뿐이었다. 아니, 요새 청년들이 쓰는 말로 노‘오’력이다.

노력의 한계는 100%다. 100%란 일에서 내야 할 성과의 기준치 같은 것이었다. 그 이하가 미달이고 100%에 도달하면 합격이었다. 그러나 노오력의 시대에 100%는 미달이다. 200%, 300% 해야 한다. 노‘오’력은 노력에서 ‘오’자가 한 자 더 늘어난 것처럼 100%를 초과하라는 명령이다.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돌파하고 자기 힘과 가용되는 자원을 초과해서 살아야 한다. 자기가 받는 돈의 몇 배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만 겨우 일을 진행할 수 있다.


100%를 초과해야 하는 노오력에는 당연히 무리수가 따른다. 그래서 내가 그 후배에게 딱 하나, 꿀밤을 주는 일도 절대 없게 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일개 강사인 그의 ‘신분’과 ‘권한’으로 안되는 일(떠드는 학생을 조용히 하게 하거나, 돌아다니는 학생을 앉아 있게 하거나 등)을 되게 하려다 감당할 수 없는 불상사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지만 그 일에 대해 제도는 전혀 책임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간단하게 그의 책임으로 돌리고 끝내면 그만이다.


세월호 침몰사고 구조작업 중 숨진 민간 잠수사 이광욱씨 빈소 _연합뉴스


이것은 비단 성과를 내려고 발버둥 칠 때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이 제대로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갇힌 덫이다. 당장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세월호 잠수사에게 징역형이 구형된 것이 대표적이다. 많은 잠수사들이 생업을 내려놓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잠수사 한 분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그 책임을 민간 잠수사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분에게 몽땅 지운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수색에 참여했던 한 잠수사는 양심적으로 간 것이 죄라며 다시는 재난 현장에 국민을 부르지 말라고 성토했다.

이처럼 노오력은 노력을 배신한다. 노력이 이루기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이라면 노오력은 삶을 합법과 불법의 경계로 몰아가서 파괴한다. 규칙이 금하는 일을 위태롭게 넘지 않는다면 성과를 내고 일을 되게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기 때문이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대가는 행위자가 치러야 한다. 노오력을 하는 자는 합법의 경계 밖으로, 합법적 ‘노력’을 하며 살 수 있는 삶 바깥으로 ‘이미/잠재적으로’ 밀려나 발가벗겨져 있는 상태다.

노오력이 제시하는 선택은 삶에 대한 기만이고 노력에 대한 배신이다. 노오력을 하면 살아남고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 아니다. 노오력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고 배제된다. 반면 노오력하면 삶은 발가벗겨지고 법 밖으로 추방된다. 생존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배제와 추방이라는 두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오력하는 것도,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건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 선택지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 문화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미국과 영국이 예기치 않았던 정치실험으로 떠들썩하다. 영국 노동당 새 당수로 선출된 제러미 코빈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단숨에 힐러리 클린턴을 위협하는 유력 주자로 떠오른 버니 샌더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이 미국과 영국 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완강한 좌파의 길을 걸어왔다. 세상은 이미 한참 오른쪽으로 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좌파의 좌표를 놓지 않았다. 영국 노동당 좌파 중에서도 코빈은 ‘괴짜’에 속했다. 그것도 구식의 완강한 좌파 정도로 치부됐다. 하지만 그는 당 대표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득표율 59.5%의 경이적인 승리였다. ‘제3의 길’로 노동당 전성시대를 열었다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1994년 득표율(57%) 기록을 깬 것이었다.

이번 당 대표 경선은 노동당을 다시 더 ‘중도’ 쪽으로 돌려놓을 것으로 예상됐다. ‘진보적 가치’를 내걸고 치른 지난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참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당 당원과 지지자들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무엇 때문에 코빈을 압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일까.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는 변화에 대한 열망이다. 현재의 체제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분명한 의사 표현이다. 1%의 특권층이 부와 소득의 90%를 독차지하는 불평등도, 그런 불평등한 구조를 뜯어고치는 데 역부족인 기존의 정치 체제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선택이다.

샌더스 돌풍 또한 미국 사회 저변의 변화 열망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1%에게 있는 권력을 빼앗아 99%에게 돌려줄 때가 됐다”는 게 그의 선거 운동의 주된 표어다. 열심히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행복할 권리는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 40시간씩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급진적이란 얘기를 들어서도 안된다”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 역시 코빈과 마찬가지로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개선을 가장 우선하는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제러미 코빈이 발표 직후 손을 흔들고 있다._경향DB


코빈과 샌더스 돌풍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신뢰라는 자산이다. 두 사람 다 옆길로 새지 않고 초지일관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켜왔다. 코빈은 검소한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자기 차를 가져본 적이 없다. 자전거를 평생 타왔다. 이라크 전쟁 등에 일관되게 반대해왔다. 직접 시위 현장에 나갔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는 거리에서 보통 사람들과 함께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노동당원과 지지자들이 압도적으로 그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믿을 만하다고,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샌더스는 말 그대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사회주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미국 땅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벌링턴 시장 4선을 거쳐 1991년부터 4번의 하원의원과 2번의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표방한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왔다는 것이다. 벌링턴 시장 때 그는 호텔이 들어서려던 호숫가에 시민공원을 조성하고, 대형 식료품 체인점 대신에 협동조합을 세웠다. 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서민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사업 등으로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의원 시절에도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이번 대선 후보 경선 전까지 무소속으로 남아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정치실험이 과연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알 수 없다. 코빈은 노동당 내부의 사보타주부터 헤쳐나가야 한다. 그가 총리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란 세간의 예단을 돌파하는 게 관건이다. 소액 기부자들의 후원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샌더스 역시 슈퍼팩으로 상징되는 ‘돈의 힘’과 ‘체제의 장벽’을 과연 넘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세계 자본주의 제국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의 정치실험은 그 자체로서 흥미롭다.

60~70대의 꼿꼿한 노정객들이 시대의 최전선에서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에겐 부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백병규 | 시사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요즘 새정치민주연합을 보고 있노라면, 계파 간의 갈등을 없애겠다고 했다가, 오히려 계파 갈등의 덫에 걸린 형국이다.

권력투쟁을 생리로 하고 있는 정치권에서 계파가 존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천권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투쟁은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정치력이다. 공천권을 둘러싼 권력투쟁 과정 속에서 그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 조정하고 합의해서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공통의 룰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점이다.

한국의 야당은 다른 나라에 없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분열되었다가도 다시 뭉쳐 거대 권력과 싸워서 이긴 전력을 갖고 있으며, 그 싸움 과정에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했으며, 정당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1955년 민주당이 창건될 때, 분열되었던 야권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막는다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실은 4·19 민주혁명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김영삼은 신민당을 중심으로, 그리고 김대중은 재야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통해 박정희 정권 몰락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도 김대중, 김영삼 두 정치세력은 민추협을 통해 다시 합쳐 직선제 개헌이라는 민주주의 성과물을 얻어냈다.

한국의 야당이 계파 간의 분열, 그리고 이합집산이라는 역사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공동의 목표가 설정되면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 정립과 소외된 국민들의 이해를 대변한 정체성도 갖고 있다.

새정치연합이 이러한 야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자임한다면, 혁신 트라우마에 걸린 것처럼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다. 부당한 기득권에 맞서 싸워왔던, 그리고 소외받은 지역과 계층을 대변하는 당의 정체성을 회복하면 된다. 7포 세대 젊은층의 고통과 몰락해가는 자영업자들, 그리고 부와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사회경제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서 어떻게 싸울 것이고, 국민행복의 비전을 제시하고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구체적 방도를 내놓을 것인가.


바로 이 점이 혁신위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당내 권력투쟁을 통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사안은 당내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정당정치의 순리다.



해결 주체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있는데, 객이 와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시시콜콜 다 간섭하면 오히려 싸움을 붙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혁신위는 자신들의 안을 제시하면 그 책임은 다하는 것이다. 그것을 참고로 해서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은 새정치연합의 지도부와 당원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문재인 대표는 당당하지 못했다. 혁신위 뒤에서 숨어 있다가, 혁신위를 앞에 내세워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지 않은지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문 대표가 왜 당내 합의가 되지 않은 혁신위 안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어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천 룰이 합의되지 않으면 당은 분열하고, 심하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이 아닐까. 어떻게 하든지 설득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혁신을 거부하면 안 된다. 또 그것을 거부하면 나는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해행위일 뿐이다.

지금 키는 문 대표가 쥐고 있다. 결과적으로 문 대표가 당의 분당을 재촉하는 정치인이 된다면 그것은 비극으로 종결된다. 문 대표는 차기 대권후보 지지율에서 1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대중 정치인이다. 그런데 자신이 대표로 있을 때, 당이 쪼개지고 내년 총선에서 참패한다면, 그가 또다시 대권후보가 될 수 있겠는가. 리더(leader)의 어원은 영국 내각에서 정당을 이끄는 정치지도자를 일컫는다.

복잡한 정치관계를 조정하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사람만이 내각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을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라고 했다. 문 대표는 과연 이 세 가지 덕목 중에서 자신이 갖추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길 바란다.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