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만 되면 ‘중도’ 정치가 상종가를 친다. 기존 정치인들은 내년 총선에서 당의 외연을 넓히는 선거 전략상 중도만큼 좋은 이미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각 당은 중도성향의 대중적 인물을 내세우기 위해 벌써부터 영입 전쟁까지 벌이고 있다. 캐스팅보트(Casting vote)로서의 중도층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중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1992년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과 1994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는 ‘제3의 길’을 내세워 20여년간 연전연패하던 당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집권에 성공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에 의해 이론화된 ‘제3의 길’, 중도개혁주의(Radical Centrism 또는 Reform- Minded Centrism)는 지식산업사회에서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떠오르는 신(新)중도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실정치에서 한계를 드러낸 서구 유럽의 구좌파와 기득권만을 보호하려는 신보수주의 등 양극단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됐다.

한국에서 ‘중도개혁주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은 정치학자 황태연이다. 황태연 교수는 공자의 중용사상과 공감의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좌우 극단세력을 제외하고 중도개혁세력을 중심으로 합리적 중도 좌익세력에서 개혁적 중도 보수세력까지 망라한 모든 정치세력들을 하나의 블록으로 묶는 중도 대통합론이 중도개혁주의 정치철학”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안철수 의원은 새정치의 신당은 ‘중도개혁정당’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천정배 의원도 중도개혁정치를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분당 위기에 처한 새정치연합의 인사들도 중도 진보를 다시금 주장하고 있다.


안철수 의원이 탈당 배경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그러나 한국 정치권에서 중도층들은 선거전술 대상으로서만 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선거가 지나면 용도폐기됐다. 중도층을 실제적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화는 제대로 조직화되지도 못했다. 1955년 창당된 민주당과 2000년의 새천년민주당이 중도개혁적 정당 성격을 표방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구현되지 못했고 그 맥락 역시 한국 정치권에서 제대로 이어져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지식·정보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지식근로자, 중소 벤처기업인, 전문직 종사자들을 지칭하는 신중도층은 한국에서도 점점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 전반에서 진취적 개혁세력으로 부상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20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 사회는 정치권에서의 이념 대립과 분열, 그리고 경제 활력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불투명한 환경 속에서 신중도층을 기반으로 하는 ‘제3의 길’이 사회통합 및 경제 성장의 역동적 대안으로 부상되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 역시 지루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념 대립, 분열과 갈등, 사회적 불평등, 불균형 성장, 기회의 차별화, 저성장과 꽉 막힌 경제 현실 등 제반 문제가 겹겹이 쌓이고 있다. 국민들은 대안 없는 정치에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권의 권위주의적 정치 회귀에 불안과 공포감마저 느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모순과 문제점이 해결되기는커녕 악순환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중도’는 막연한 가운데, 중립이 아니다. ‘중도개혁 정치’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그리고 관용과 함께하는 통합의 정치 철학이며, 부유층이든 빈민계층이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사회·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며, 협력과 배려, 합의의 사회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개혁적 정치사상이다.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에도 ‘중도개혁의 정치시대’가 열릴 것인가. 아니면 ‘중도 정치’가 외연 확장을 위해 정략적으로만 이용되고 도용될 것인가. 그것은 미래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갖춘 정치인의 존재와 현실정치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가는 역량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투자할 수 있는 ‘진정한 제3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할 뿐이다.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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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스페인의 최근 선거 결과는 이들 두 나라의 기존 정치 시스템이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흐름은 대조적이다. 한쪽은 퇴행적인 반면 다른 한쪽은 진취적이다. 지난 6일 치러진 프랑스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민족전선(FN)이 득표율 1위를 기록해 프랑스 정치판을 흔들어놓았다. 결선 투표에서 올랑드 대통령의 집권 사회당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이끄는 우파 공화당이 연합전선을 펴 민족전선은 단 한 명의 자치단체장도 내지 못했지만 전통적인 사회당-공화당 양당 체제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게 됐다.

민족전선은 그 색깔을 많이 탈색시키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공화주의 가치에 반하는 인종주의적 주장과 반이민 정책 등 프랑스 사회에서 금기시돼왔던 극우적 가치를 기치로 내걸고 있다. 사회당과 공화당이 각기 1차 투표에서 3위를 한 자당 후보들을 사퇴시키면서까지 민족전선 저지에 나선 까닭이기도 하다.

지난 20일 실시된 스페인 총선에서도 기존의 양당 구조가 무너졌다. 그동안 정권을 주고받았던 집권당인 우파 국민당과 제1야당인 중도 좌파 사회당은 각각 29%와 21%의 저조한 득표율에 그쳤다. 반면 신생 정당 포데모스(21%)와 시우다다노스(14%)가 무시할 수 없는 제3당과 제4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포데모스(우린 할 수 있다)는 이제 2년 된 신생 정당. 갈수록 심해지는 불평등과 금융위기에 따른 긴축재정에 항의하고,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에 반기를 든 거리 시위를 통해 결성된 좌파 정당. 사회당 등 기성의 좌파 정당 또한 기득권 체제에 안주해 체제 밖으로 밀려난 서민 대중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이른바 ‘좌파 포퓰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2006년 결성됐지만 지난해부터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된 시우다다노스(시민들)는 포데모스의 부상에 반응한 우파 버전. 높은 실업률, 복지 축소, 불평등의 심화, 기성 정치권에 대한 극도의 실망과 반발이 이들 신생 정당의 약진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 방향은 다르지만 프랑스 민족전선의 급부상이나 스페인 신생 정당들의 약진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그 바탕에는 경제·사회적 불안과 공포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 금기시됐던 인종주의를 표방하는 극우정당의 득세는 높은 실업률 등에 좌절한 젊은 세대, 빈곤층 등의 동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24세 미만 프랑스 젊은층의 35%, 고졸자와 노동자층 30~40% 정도가 민족전선을 지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프랑스 극우정당 민족전선(FN)의 마린 르펜 대표_경향DB


둘째, 기성 정치권이 이른바 엘리트 위주의 기득권 세력화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프랑스는 좌우를 막론하고 파리정치대학 출신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다시피 하다. 셋째, 지도자들이 젊다. 민족전선은 40대의 마리 르펜이, 스페인의 두 신생 정당은 30대의 청년 정치인이 그 리더다.

넷째, 기존 정치권이 문제 해결에 지극히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점이다. 그 반동이 스페인에서는 기존 좌우파 정당을 대체하려는 새 정치세력의 부상으로, 프랑스에서는 극우정당의 득세로 각각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 시스템도 한계에 달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10년의 짧은 집권을 뒤로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제1야당의 오늘 모습도 그 단적인 예일 터. 다만 그것이 새로운 정치실험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제1야당의 자멸적 분열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질곡에 처한 한국의 정치 흐름은 되레 프랑스 모델에 가깝다.

안철수 의원이나 천정배 의원 등 야권의 신당 추진세력은 새정치민주연합을 ‘낡은 당’ ‘죽은 당’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그것을 대신하겠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나 새로울지, 다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새누리당은 이미 민족전선 이상의 극우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맹목적 국수주의,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앞세운 민주주의 훼손, 불안과 공포 마케팅을 동원한 대중조작, 책임지지 않는 실정, 거짓 공약으로 국민을 우롱하고도 오히려 큰소리치는 기만적 정치 행태는 민족전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프랑스 지방선거에서 평생 사회당을 지지했던 한 시민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민족전선 후보를 떨어트리기 위해 공화당 후보를 찍어야 하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페스트 아니면 콜레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야권의 행태는 그런 ‘끔찍한 선택’의 여지마저 빼앗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백병규 |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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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치매’를 앓고 있다고 했다.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했고, 새벽에 일어나 독서와 글쓰기, 운동을 즐겨했던 분인데, 이젠 아들도 알아보지 못한다. ‘치매환자’ 가족이 되기 전까지 ‘치매’가 단순한 병 이름인 줄로만 알았단다.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게 고약한 인권침해적인 용어라는 걸 깨달았단다. ‘치매( )’라는 병 이름에 쓰는 두 글자는 모두 미치다, 어리석다는 뜻이다. 그러니 ‘치매환자’는 곧 미친 환자, 어리석은 환자가 된다.

‘치매’는 여러 원인에 의해 뇌기능이 손상되어,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병을 일컫는다. 아픈 사람에게 그저 미쳤다거나 어리석은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모욕을 주는 것이다. 환자에게 일부러 모멸감을 주려는 게 아니라면, 당장 병 이름부터 고쳐야 한다.

일본에서 건너온 말을 별생각 없이 쓰고 있지만, 정작 이 말을 만든 일본에서는 2004년부터 ‘인지증(認知症)’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대만은 ‘실지증(失智症)’, 홍콩은 ‘뇌퇴화증(腦退化症)’으로 불린다. 나병을 한센병으로 부르는 것처럼 ‘치매’도 얼마든지 바꿔 부를 수 있을 텐데, 관련 법 개정 작업은 유야무야되었고 학계나 보건당국의 개선 노력도 없다. 노무현 정권 때의 보건복지부가 ‘치매’를 대체하기 위해 인지장애, 상실증, 인지상실증, 인지쇠약증 등의 명칭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이 고약한 용어는 지금껏 요지부동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치매’도 병이기에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 조기에 발견하면 진행속도를 늦출 수 있고, 원인에 따라서는 완치도 가능하다. 진료를 받으면 증세가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런데 병 이름이 어리석다, 미쳤다는 데서 멈춰있기에, 환자 자신이 ‘치매’ 증세를 밝히기 꺼리거나, 가족이 알더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발병 자체를 숨기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치매’ 용어부터 바꿔야 한다며, 청와대, 보건복지부, 국립치매센터, 서울시 등에 편지를 보내 용어 변경을 요청했다. 하지만, 답변이라도 준 건 병 이름을 바꿀 권한이 없는 서울시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치매’를 앓고 있는 많은 분들이 단지 뇌 인지 장애만으로 어리석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게 이 학생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 준 아버지는 미치지 않았고, 어리석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며, 그냥 아픈 환자일 뿐이라고 했다.


2009 -2013년 치매진료 인원추이_경향DB



그렇다.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건, 그 사물의 본질적 성격을 정하는 중요한 일이다. 공자에 따르면 이름을 제대로 붙이는 게(正名) 정치의 본령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숱한 개념어들이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예전에야 별 여과장치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세월이 훌쩍 흘러 한 세기가 넘었으니, 이제는 달리 변명할 길도 없다.

사람을 폄하하고 모욕을 주는 말들은 아직도 너무 많다. 교도소나 소년원에서는 수용자나 소년범을 대상으로 ‘분류’ 작업을 한다. 각기 다른 개별 처우를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분류’는 사물을 종류에 따라 가르는 일이고, 사물은 일과 물건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사람을 일이나 물건 따위로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시 일본에서 건너온 말을 아무런 고민 없이 사용한 탓이다.

부디 눈 밝은 공직자나 국회의원이 있다면, 이 학생처럼 반인권적이며 모욕적이고 차별적인 용어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치매관리법’부터 개정하면 그만이다.

추운 세밑이다. 역설적이지만, 춥기에 따뜻함을 나누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아파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추위마저 견딜 만할 거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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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이 변화를 강제받고 있다. 더 이상 진리의 상아탑일 수도 없지만, 더 이상 취업을 위한 전초기지일 수도 없다.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 자리에서 내려온 지는 이미 오래다.

19세기 이후 근대 국가의 형성과 자본주의 발전이 본격화하면서 보다 많은 전문적 관리 역량들이 필요해 고등교육을 대중화한 가운데 그리 되었다. 이를 ‘대학의 쇠퇴’라며 부정적인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보통사람들도 대학교육을 받음으로써 경제적 안정과 신분 상승에 필요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대학은 보통사람들이 보다 높은 임금을 받고, 보다 지적인 노동에 복무할 역량을 키우고 기회를 잡을 발판이 되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제는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특히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대학에 ‘올인’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대학은 더 이상 진리의 체득은 물론, 취업마저도 보장하지 않는다. 대학의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왜 그리 되었을까? 대학에서 보편적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특수 지식인들이 채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또 대학 진학률이 80%에 달해 취업에 필요한 변별력 확보가 어려워져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래서 다시 보편적 지식인을 교수로 채용한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과 입학정원을 줄인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우리 사는 세계는 특수 지식인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노동, 주거, 보건, 에너지, 종교, 디자인 문제 등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일수록 더욱 더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한다.

또 보편적 지식은 보통사람들도 알 만큼 아는 세상이 되었다.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보편적 지식인들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한 결과이기도 하고, 과학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기초적인 수준에서의 지식격차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의 성과이기도 하다.

고등교육의 기회는 오히려 더 늘려야 한다. 지금처럼 특정 연령층에 국한할 이유도 없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대학에 들어갈 청년층이 점차 고갈된 탓도 있지만, 이제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지식과 정보의 생애주기가 무척 짧아져 평생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향후 10년간 대학 전공별 인력수급 전망_ 경향DB



그렇다면 다시 묻자. 대학이 진리 탐구와 취업 준비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자기 자신 때문이다. 분과학문으로 구획된 질서에 안주하면서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려다 정부와 기업에 고등교육의 주도권을 내준 대학 말이다. ‘치열한 공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 권위가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대학 평가, 그래서 오로지 정보 유통시장의 장악력과 숫자매김의 편의성에만 기댄 대학 평가에 목매고 있는 대학 말이다. 정치권과 재벌 대기업마저 뛰어넘는 내공으로 혁신을 거부하거나, 혁신이란 말의 의미를 ‘구조조정’으로 한정짓고 있는 대학 말이다.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도, 취업의 전초기지일 수도 없다. 하지만 시대 흐름에 맞춰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에 바탕해 진리와 취업의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대학 혁신의 의미는 이를 위한 이론, 실천적 모색을 재촉하는 것이리라. 요사이 사회적으로 부쩍 강조되고 있는 ‘문제해결 역량의 강화’는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보다 풍부한 관점에서 문제를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진리는 경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시대조응적이며 수평적인 합의에 바탕해 발견되는 것이기에 교수가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그리고 취업은 단지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창출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교수들보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도 선생의 역할을 수행해, 대학을 ‘서로 배움의 관계’를 맺는 장으로 만들 수 있다. 또 돈과 지위에 기대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지려고 하기보다, 사회에 기여한 바에 근거해 자긍심을 갖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사랑코자 할 것이다.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대학의 혁신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혁신의 의지를 가진 리더’와 그를 신뢰하며 따르는 ‘혁신의 결사’에 의해 가능하다. ‘비정하게도’ 대학에서도 혁신은 그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왜 비정하냐고? 변화를 거부하며 낡은 생각을 버리지도 않고, 과도하게 보유한 자원도 나눠 갖지 않으려는 자에게 비정한 것, 그것이 혁신 아니던가. 아니라고? 그럼 혁신도 새로운 개념과 의미로 다시 태어나게 하자. ‘다정다감한 혁신’으로 말이다. 대학마저 ‘신분제 사회’로 만들어 갑과 을을 구별짓는 야만을 멈추고, 모두가 함께 주역을 맡는 혁신 말이다.


김윤철 |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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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원전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서 갑상샘암 발생 비율이 높았다는 보도가 있어 국민들의 우려 섞인 시선을 끌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팀의 연구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소 5㎞ 이내에 거주하는 여성은 원거리 지역주민에 비해 갑상샘암 발생 비율이 2.5배 높았으며 원자력발전소에서 5~30㎞ 사이에 거주하는 여성은 1.8배 높았다는 것이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높게 발생했다는 것이니 원자력발전소 가까이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주장이 신뢰가 간다.

이번 발표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하나 있었다. 이 연구는 서울대 의대 원자력영향역학연구소에서 2011년 이미 발표한 자료를 재분석해 발표한 자료라는 점이다. 원자력영향역학연구소는 1992년부터 2006년까지 원전 주변에 사는 지역주민 총 1만1367명을 검진하고 2011년 2월까지 암 발생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원거리 지역주민에 비해서 다른 암은 차이가 없고 여성에게서 갑상샘암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연구팀은 일단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능이 기준치보다 낮게 관리되고 있고, 다른 암에서도 영향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갑상샘암도 방사능 영향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갑상샘암이 증가한 이유는 훗날 확인해야 할 과제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서울대 보건대학원팀은 재분석을 통해 갑상샘암이 의미 있게 증가했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같은 자료를 놓고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린다면 국민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의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갑상샘암에 대해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들이 있다. 첫째, 갑상샘암은 성인들에게 매우 흔하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갑상샘암과 무관하게 사망한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부검한 결과 성인의 35.6%가 갑상샘암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도 유사한 연구에서 성인의 28.4%에서 갑상샘암이 발견되었다. 한마디로 갑상샘암은 성인의 3분의 1 정도가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진행되지 않는 암이라서 모르고 살다가 죽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나라에서 지난 30년간 갑상샘암이 약 30배나 증가했는데, 그것은 방사능 노출이 증가해서가 아니라, 갑상샘 초음파 검사가 늘어나면서 숨어 있던 갑상샘암을 찾아낸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떤 인구집단이라도 갑상샘 초음파 검사를 많이 하면 그 집단의 갑상샘암은 늘게 되어 있다.

부산울산지역 시민환경단체 회원들이 12일 에너지위원회가 열리는 서울 중구 롯데호텔앞에서 고리1호기 폐쇄 권고안 수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_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원전에서는 2003년부터 직원 배우자(대부분 여성)들을 대상으로 2년 간격으로 갑상샘암 무료 검진을 시행했다고 한다. 원전 직원의 배우자들은 대부분 원전 주변 사택에 거주하고 있어서 이번 연구에서도 원전 주변 주민으로 분류되었다. 그렇다면 원전 주변 주민들의 갑상샘암이 높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된다. 더구나 주목할 것은 1993~2008년 원전 주변 여성 갑상샘암 발생률은 인구 10만명당 61.4명이었는데, 2011년 국가암등록자료를 살펴보면 서울지역의 102.5명에 비해 현저히 낮다. 서로 비교 시점이 다르지만, 갑상샘암만 놓고 본다면 1993~2008년경 원전 주변보다 2011년 서울이 훨씬 위험한 지역으로 간주돼야 마땅하다. 물론 이것은 난센스다. 이 자료는 서울지역 주민들이 최근 들어 과거의 원전 주변 주민들보다 갑상샘 초음파 검사를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고리 원전 주변에 살던 박아무개씨가 갑상샘암에 걸린 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을 대상으로 소송을 냈는데, 2014년 10월17일 부산지방법원은 방사능의 영향으로 갑상샘암이 발병했다고 인정하여, 한국수력원자력에 위자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이 내려진 후, 환경단체에서는 원전 주변에 사는 갑상샘암 환자 2450명을 모집해서 공동소송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갑상샘암이 대한민국에서 왜 늘어나는지 내막까지 잘 알지 못했던 판사의 판결은 그 여파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서홍관 | 국립암센터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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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5일 2차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 무엇보다 경찰의 물대포로 농민 백남기님의 목숨을 위협하고도 한마디 사과가 없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의 수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내 머리 하나라도 보태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복면’을 썼다고 IS에 비교하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테러’에 항의해야만 했다. 나는 그게 공화국 ‘시민됨’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집회에는 다양한 깃발들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쌀값을 21만원으로 올려주겠다고 한 공약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되묻는 농민, 노동자, 빈민,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지역소모임 깃발들도 있었고 중·고등학생들도 나와 있었다. 어떤 이는 얼굴에 마스크팩을 하고 나와 “복면이 아닙니다. 예뻐지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해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고, 어떤 고등학생들은 “국정교과서 때문에 재수도 못하게 생겼다”며 지나갔다.

그러나 언론의 관심사는 오로지 ‘평화’였다. 이날의 시위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할 것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바라는 평화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침묵,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평화다. 한 보수언론이 말한, 평화적이건 아니건 시위에 국민들이 지쳤다는 말로 선수를 친 것의 의미가 그것이다.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않는 모든 것은 평화를 깨는 행위, 즉 ‘소요’다.
 
이들에게 평화의 책임은 전적으로 말하는 자가 지는 것이다. 말을 하기로 결심했으면 가급적 조용히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는 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으면 그것은 평화를 깨는 행위이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그들이 말하는 가장 좋은 평화가 나온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침묵, 즉 죽음이다. 죽음이야말로 이들이 원하는 최상의 평화다. 이들은 산 우리가 죽은 이의 평화를 실천하고 누리기를 바란다.
 

5일 오후 서울 도심에서 2차 민중총궐기가 열리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백남기씨의 쾌유를 기원하는 한편 노동 개혁 입법, 역사 교과서 국정화 등을 반대하며 서울대학교병원 후문 방향으로 행진을 했다. 병원 후문에서 해산집회를 연뒤 참가자들은 자진해산했다._경향DB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평화의 책임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의 몫이다. 말하는 이의 목소리 ‘정도’는 거의 전적으로 듣는 이의 태도에 달려 있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가 경청을 한다면, 그리고 진지하게 대답을 한다면 이미 이 대화는 ‘평화’롭다. 설전이 벌어지더라도 평화롭다. 이것은 한쪽이 가만히 있음으로써 지켜지는 죽음의 평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동적인 평화다. 말하는 것을 듣고, 듣고 난 다음 들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고. 그러면 다시 말한 이의 위치는 ‘듣는 이’가 되어 평화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말한 이에게 넘어간다. 그가 이제 ‘듣는 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화는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듣지 않는 순간 끝난다.
 
나는 지금 한국을 통치하는 세력이 무슨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반면 시민인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혼이 비정상’인 ‘전반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다 들었고 기억했다. 듣고 기억했기 때문에 그들이 한 말을 가지고 다시 되물었던 것이다. 쌀값을 21만원으로 해준다고 한 그들의 말을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한 그 말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진지하게 들었으니 묻는 것, 공화국 ‘시민됨’의 도리가 아닌가.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난번 정권은 그래도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 노래라도 들었다고 했는데 이번엔 그런 말조차 없었다. 아버지대에서는 ‘말 많으면 빨갱이’더니 따님에 이르러서는 ‘말 많으면 테러리스트’라고 위협한다. 우리는 듣는 존재지 되묻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태도가 평화를 깼다. 말만 할 뿐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들이 평화를 깬 것이다. 그래서 이날 집회의 구호는 단마디로 요약된다. ‘국민의 소리를 들어라.’
 
물론 이 말도 안 듣겠지만 듣고 대답할 때까지 줄기차게 떠들 것이다. 진지하게 듣고, 들었으며 되묻고, 되물었으니 대답을 또 들어야 하는 것. 나는 이 공화국 시민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당신들 혼의 전반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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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의 어느 날, 고위 공무원들과 함께 도로 개통식 테이프커팅을 위해 거리에 나온 서울시장의 눈에 자그마한 도로변 공지가 들어왔다. 그는 즉흥적으로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

“저런 데에는 잔디나 뭐 이런 것 좀 심으면 보기 좋지 않나?”

상사의 말이라면 한 마디도 허투루 듣는 법이 없는 성실한 공무원들은 며칠 후 그곳을 잔디밭으로 만들었다. 시장의 말뜻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경관 개선과 토사 유출 방지에 도움이 되는 여러 식물 중 하나를 선택해 심어라’ 정도가 될 터이나, 관제(官製) 해석은 그런 최소한의 ‘창의’도 용납하지 않았다. ‘시장이 언급한 것은 잔디뿐이니, 임의로 다른 식물을 심었다가 만약 시장의 맘에 들지 않으면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공무원다운 해석이었다.

컴퓨터 CPU(Central processing unit·중앙처리장치)가 386에서 486을 살짝 딛고 펜티엄급으로 치닫던 때, 어느 공공기관에서 컴퓨터 100여대를 한꺼번에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계약에서 납품까지 절차를 밟는 동안 486시대가 지나가 버렸다. 업체 담당자는 같은 가격으로 펜티엄급 컴퓨터를 납품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공공기관 담당자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486 컴퓨터는 곧 무용지물이 될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공무원이 명확히 인지한 자기 책임은, 계약서에 쓰인 대로 물품을 비치해 두는 것뿐이었다. 새로 장만한 컴퓨터들이 곧바로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그가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착오 없이 실행하는 미덕은 때로 이런 코미디를 연출한다. 그런데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은 오히려 적다. ‘시키는 대로’ 하는 미덕은 대개 희극보다는 비극을 낳는다. 당장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충실히 따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뿐 아니다. 지금의 교육부 장관도 차관도 국사편찬위원장도 ‘국정 역사교과서는 후진 독재 국가에서나 쓰는 것으로서, 현재의 검인정 체제도 장차는 자유발행제로 바꾸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생각에 무슨 소신이니 지론이니 하는 이름을 붙일 이유는 없다. 이는 현대 세계인의 극히 평범한 상식이자 교양일 뿐이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_경향DB


그런데 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몰상식하고 무교양한 지시를 내리자마자, 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이자 실행자가 되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신념으로 말미암아, 상식과 교양은 몰상식과 무교양 앞에 하릴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최근에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조작사건 재심 재판에서 검찰 지휘부의 지시를 어기고 무죄를 구형한 검사 한 명이 ‘심층 적격심사’를 받고 있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부당함이 정당함을, 파렴치가 염치를 심사하는 꼴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공직사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갑을 관계에서 주로 ‘갑’의 위치에 서는 사람들은 종종 “나도 시키는 일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라며 배부른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늘 남을 부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종종 또는 일상적으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직장에서건 학교에서건 그 밖의 다른 조직에서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은 이미 한국인들의 보편적 도덕률이다.

어떤 집단에서나 가장 흔한 질책은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라고 그랬냐?”이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 보편적 도덕률인 사회에서는, 상식과 교양과 염치와 도덕이 몰상식과 무교양과 파렴치와 부도덕의 지시를 받는 일이 수시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시키는 대로 충실히 이행하는 능력은 사람보다 기계가 훨씬 뛰어나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은, 사람을 성능이 떨어지는 기계처럼 취급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런 믿음이 그리는 바람직한 사회는, 단 한 사람의 지휘자와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기만 하는 나머지 전체로 구성되는 기계 사회이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실행했을 뿐입니다.”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남긴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말에서 평범성에 깃든 악마성을 발견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이 미덕인 사회가 대량생산하는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내버리고 그 자리에 기계의 마음을 채워 넣은 평범한 악마들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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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복면 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할 것… IS(이슬람국가)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굴을 감추고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후 최대 인파인 13만명이 운집한 11월14일 민중총궐기 집회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쏟아낸 얘기이다. 티끌만큼의 가능성조차 없을 일을 갖고 시위에 참석한 국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훨씬 가능성이 높은 얘기에 대해서는 변명을 해댄다. 이를테면 정부와 새누리당이 내놓은 파견법 개악안에 따르면 고령자는 물론 일정 소득 이상 전문직, 심지어 제조업인 뿌리산업에도 파견을 허용함으로써 무려 50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추가로 파견 대상이 되고 만다. 노동부는 이런 주장에 대해 “500만명 전원이 파견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아니, 그럼 독감 바이러스가 유행해도 전 국민이 다 걸리는 건 아니니까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쉬운 해고’ 제도가 도입돼도 모든 노동자가 해고되는 것은 아니라고, 사장 말 잘 듣는 노동자는 잘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더 큰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IS를 언급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포정치가 몰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12월5일, 5만명이 운집해 노동개악 저지, 밥쌀 수입 반대, 빈민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민중총궐기에 대해 ‘소요죄’ 적용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일 조계사의 협조 운운하며 사실상 총력 압박을 펼치며 한상균 위원장 검거에 혈안이 돼있다. 백남기 농민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실에 대해 한마디 언급이 없다. 도대체 이게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했던 ‘국민행복’이고 ‘국민통합’이란 말인가.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란단체 수괴가 되는 현실이 곧 공포정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정부의 노동개악이 지향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공포정치이다.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이 있어도 맘대로 취업규칙을 변경해 쉬운 해고를 도입하고 기간제·파견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릴 수 있다면 우리네 일터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사용자 눈 밖에 나면 임금삭감 대상이 되고 머지않아 해고 리스트에 오르는 현장, 그것이 바로 공포의 일터 아니겠는가.



정부와 새누리당은 이 모든 것이 ‘청년 일자리’를 위한 것이라는 사기극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가 강요한 임금피크제와 임금삭감을 받아들인 사업장에서 과연 새로운 일자리가 늘어났는가? 이미 해고도 쉽게 하고 취업규칙도 맘대로 하고 있는 무노조 사업장에서 신규 일자리 창출이 되고 있는가?

노동개악이 강행되고 만다면 결과는 정반대가 되고 말 것이다. 노동자들이 끽소리 못하고 죽어라 일만 하는 일터에서, 사장들은 인력을 더 줄이려 할 뿐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기 위해 이에 반대하는 민주노총과 민주노조를 없애려 온갖 탄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민주노총에 대한 공안탄압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민주노조가 사라지고 만다면 더 이상의 일자리 창출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다.

공포정치를 막아내기 위해 이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글을 쓸 수 있는 이는 글로, 잠깐씩 짬을 낼 수 있는 이는 1인 시위와 피케팅으로, SNS를 주로 사용하는 이들은 주변에 적극 전파하는 역할을, 그리고 무엇보다 사업장마다 노조를 결성하는 일에 나서거나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운동을 펼쳐나가자.

지금은 민주노총을 향해 있을 뿐이지만 공포정치를 만들기 위한 탄압은 머지않아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학자와 교수들을 향해, 그리고 종교인과 문화예술인을 향할 것이다. 반대로 노동개악을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공포정치의 부활을 막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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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플 모바일’을 소개한다. 서울 마포 지역의 공동체이익회사 (주)굿바이가 운영하는 온라인 휴대폰 쇼핑몰이 (주)굿바이와 공공운수노조 복지협동사업단이 통신 3사 KT, SKT, LGU+의 휴대폰 판매 대리점을 구축하고, 개통 시 발생하는 10만~30만원의 개통 수수료 중 70%를 굿바이와 협약을 맺은 사회운동 단체들 중 소비자가 원하는 단체에 기부한다. 나머지 30%는 마포의 지역기금과 (주)굿바이의 사업비 등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휴대폰을 바꿀 때가 된 소비자들이 스스로의 힘을 각성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사회운동 기금 100억원’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비전이다.

이 사이트에 가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소비자는 물건의 이윤이 얼마이고 그 이윤이 어떻게 쓰이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굿바이에서는 소비자가 물건에 대한 이윤을 인지하고 그 이윤의 배분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능동적 소비라고 명명했습니다.” ‘피플 모바일’은 그 능동적 소비라는 실험의 첫 단추로 기획된 것이리라.

자본주의 경제는 이윤의 논리로 조직된다. 영리기업의 회계장부에 이윤과 자산 가치가 어떻게 확장되는가를 원칙으로 세상의 만사만물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소비자는 그저 상품을 수취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존재로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이상적인 소비자는 가급적 많은 상품을 꿀꺽꿀꺽 삼켜주고 또 군말 없이 돈을 내어놓는 존재로, ‘호갱님’이라면 제일 좋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생겨난 광고업을 필두로 지난 100년간 현대 자본주의는 이렇게 소비자들을 어르고 협박해 양떼를 치듯 관리하며 그들의 구매력을 쪽 빨아내는 온갖 기법을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 소비자란 사람이 아니라 “돈과 상품이 교차해 통과하는 경로”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 우리 소비자들이 일어서서 이러한 100년의 흐름을 뒤집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물론 한 개별 소비자가 움직일 수 있는 힘은 극히 작아 무시될 만도 하다. 따라서 내 알량한 지갑과 통장을 이용해 내 맘대로 세상을 바꾸고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면 누구나 비웃을 것이다. 바로 그러하다. 자본주의에서 소비자가 ‘호갱님’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 파편화되기 때문이다. 조직이 없는 개별의 생산자와 노동자가 대기업과 고용주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나 한 사람’이라는 개인만의 입장과 이해 득실을 떠나 일정한 생각과 요구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흐름’에 합류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영리기업들만 반기는 프로슈머나 애드슈머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KT가 단독으로 영업을 재개한 27일 고객들이 서울 KT 광화문 올레스퀘어에서 신규 가입 및 기기 변경을 하고 있다._강윤중 기자


또한 단순히 어떤 사안과 관련해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소비자 불매운동에 그칠 이유가 없다. 우리의 소비 행위가 그러한 ‘흐름’을 이룬다면, 세상의 돈과 사물의 흐름을 보다 적극적, 능동적으로 바꾸어낼 수 있고 또 그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를 일구어내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심지어 ‘개인’도 못 된다. 최신 통계기법과 빅데이터로 무장한 자본은 이제 소비자를 하나의 ‘확률적 사실’로 만들어버렸고, 그 욕구와 지출에 대한 지배와 통제는 더욱 완벽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된 우리 소비자들은 함께 모여 황사의 흐름을 만들면 된다. ‘피플 모바일’과 이것이 꾀하는 ‘능동적 소비’의 개념은, 우리가 이미 상당한 힘과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법도 가르쳐 주고 있다. 나는 개통 수수료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 액수가 몇십만원이나 되는 줄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의 향방의 결정에 내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줄도 이번에야 알았다. 물론 설령 알았다고 해봐야 나 개인 차원에서라면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피플 모바일’ 덕에 나 같은 티끌 또한 가능성과 방향을 얻은 셈이다.

사회운동단체들은 막대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도 항상 재정 부족에 손발이 묶이고 그 활동가들은 말할 수 없는 개인적 희생을 감수할 때가 많다. 우리 먼지들이 뭉치기만 하면 이들을 도울 사회기금 100억원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휴대폰 바꾸실 때가 된 분들은 검색창에 ‘피플 모바일’을 치시라. 옆사람에게도 알려 주시라. 능동적 소비의 ‘황사’가 되어 세상을 한 번 덮어보자.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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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9일. 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머리에 맞았다. 스물한 살 청년이었다. 경찰은 최루탄 발사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학생들을 겨냥해 직격탄을 쐈고, 학생들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 최루탄이 이한열을 쓰러트렸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었지만, 검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수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최루탄을 발사한 사람을 특정하기 어려울 거란 말을 언론에 흘렸다. 경찰 책임자에 대해서도 행정상 책임은 몰라도, 직무유기죄를 적용하는 건 힘들 거라 했다. 수사는 검찰의 말처럼 진행되었다. 맞은 사람은 있는데, 쏜 사람은 없었고, 이한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경찰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형사적 책임 대신 행정상 책임을 물었던 것도 아니다. 현장 책임자였던 서대문경찰서장 김수길은 이한열이 사경을 헤매는 동안 어떤 문책도 받지 않았다. 이한열이 목숨을 잃자 직위해제를 당했지만, 직위해제는 징계도 뭣도 아니다. 그저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한 꼼수였을 뿐이다. 그나마 석 달 만에 복직했고, 아무런 문책도 받지 않았다. 그뿐인가, 다음해 6월에는 경무관으로 승진까지 했다.

이한열의 장례식에 건국 이래 최대 인파가 모였지만, 이한열 죽음의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은 없었다. 겨우 국가의 민사상 책임을 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였을 게다. 이한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최루탄이 사라진 건 12년이나 지난 1999년의 일이다.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_경향DB


농민 백남기는 물대포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 2015년 11월14일, 달포 남짓이면 칠십이 되는 노인이다. 경찰은 이번에도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물대포는 시위 군중 해산을 위한 장비인데도, 그저 한 사람의 개인을 향해 무자비하게 쐈다. 역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다. 군부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수사하는 시늉이라도 냈던 당시 검찰과 달리, ‘검찰공화국’의 위업을 달성한 2015년의 검찰은 시늉조차 내지 않고 있다. 직위해제라는 꼼수라도 보여줬던 경찰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2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에 의한 경찰 폭력의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민을 폭도로 규정하고, 과감한 선제공격을 일삼는 태도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대통령은 시민들을 이슬람국가(IS)에 빗대기도 했다. 온 국민이 범죄를 목격했지만, 범죄를 진압하고 범죄자에게 죄를 묻는 국가작용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87년과 2015년이 다른 점은, 그래도 전두환 시절에는 민심이나 여론 동향을 파악하려는 자세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실종되어 버렸다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28년의 긴 세월을 지내놓고도,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때보다 더 후퇴한 시절을 살고 있는 거다. 모든 면에서 꽉 막혀 버린, 그래서 박근혜 정권은 마침내 전두환 정권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기에 앞서,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동안 도대체 뭘 어떻게 잘못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하는 참담한 자괴감을 느낀다.

이한열과 백남기. 두 사람 모두 경찰 폭력으로 쓰러졌지만, 죄질로만 본다면, 백남기의 경우가 훨씬 나쁘다. 이한열은 단 한 번의 발사로 그렇게 되었지만, 백남기의 경우는 적어도 20초 이상 지속적으로 발사했다. 직사포로 사람을 쓰러트렸음에도 쓰러진 사람을 계속 쐈고, 그를 구호하려는 사람과 심지어 구급차까지 따라붙으며 정확한 조준발사를 했다.

전두환보다 못한 박근혜도 문제지만, 반복되는 악순환에도 불구하고, 더 나빠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 모두 움직이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돌아와야 한다. 충분히 예견되었음에도 ‘독재자의 딸’을 국가지도자로 선택한 우리의 책임이 크고, 지금의 참담한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우리의 책임이 크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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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은 왜 그랬을까? 그 마음속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박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여러 말들이 많지만 그럴 수 있다. 연이은 해외 순방을 앞두고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발인식에 가 고인에 대한 예우는 갖추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명색이 국가장을 치르는 마당에 찬물을 끼얹은 언행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장 기간에 예정에 없던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국민과 국회를 대상으로 험한 말을 쏟아냈다. 지난 14일 10만명이나 모인 광화문 민중총궐기 대회를 대규모 불법 폭력 시위라고 규정하고, 강력 대응을 지시했다. “테러단체들이 합류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라며 이슬람국가(IS)에 빗대 ‘복면시위’를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견지망월이요, 침소봉대다. 1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왜 거리에 나섰는지 그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테러 위협과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만 부각시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 직사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60대 농부의 안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박 대통령의 독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치권, 특히 야당을 겨냥해 할 일은 안 하고 립서비스나 하는 집단, 위선적 집단이라고 맹비난했다. 전직 대통령의 국가장을 치르는 마당에 어찌 이렇게 적대적이고 살벌할 수 있을까.

생전에 원수 같은 사이라 하더라도 장례 때만은 그래도 조의를 표하고, 다투던 일도 잠시 미뤄놓는 게 우리의 오래된 풍속이자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전직 대통령 서거를 맞아 국가적인 추모 분위기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리 광화문 시위 사태가 엄중하다고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나설 이유가 있었을까. 법무장관이 이미 긴급담화까지 발표한 사안이고, 그러잖아도 검경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고 있지 않은가. 과유불급이다.

정치권에 대한 비난과 매도는 더 그렇다. 오죽하면 조·중·동 같은 신문까지도 박 대통령의 ‘격한 표현’, 국회와 야당에 대한 ‘습관적인 비난’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나섰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쌓인 구원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을 수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특히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인사들까지 앞다투어 고인의 정치적 후계자임을 자임하면서 마치 상주 노릇하는 게 박 대통령으로서는 꼴불견일 수 있었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_경향DB

지금이 어느 땐데 국회는 제쳐놓고 상갓집에서 한가하게 ‘자기 정치’나 하고 있느냐는 엄한 질책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예상 밖의 사회적 추모 열기에 탁월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로서 본능적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김영삼 전 대통령만큼 정치적 역정에서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정치인도 없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 독재와 5공 때 모든 것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지만 3당 합당으로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되는 지역주의를 결정적으로 고착시켰다는 평가가 교차하고 있다.

집권 후 1980년 신군부의 5·18 광주 학살과 쿠데타를 단죄하고 금융실명제 등 여러 개혁조치를 과단성 있게 추진했지만 노동법 날치기 통과 등으로 거센 민심의 저항에 직면하고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통령이라는 혹평도 따라붙었다. 많은 국민들에게 그만큼 애증이 교차하는 정치인도 없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사회적 추모 열기는 그런 애증의 스펙트럼을 넘어선 듯하다. 적지 않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주었던 통 큰 리더십, 인간적인 매력이 끌어들이는 자장이 그만큼 셌다. 못 말릴 정도로 솔직하고 활달했던, 한편으론 무척 고집스러웠지만 결코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풍모가 새삼 그리운가 보다.

어찌 보면 이 시절 때문인지도 모른다. 야당과 정치권만 탓하는 대통령, 국민과는 말도 섞으려 하지 않는 대통령, 국민을 혼내고 가르치려는 대통령, 자기만 옳다고 하는 대통령 피로증후군의 반영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박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통해 ‘국민’과 ‘정치권’을 다잡고자 했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사가 그렇듯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모양새다.


백병규 |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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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또 한번의 비보가 날아왔다. ‘행동하는 성소수자연대’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던 한 청년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뉴스였다. 성소수자들에게 죽음은 삶만큼이나 가까이 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해에도 한 명의 청년이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사무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특히 그는 내가 활동하던 천주교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다. 그가 남긴 유물 중에는 묵주가 있었고, 천주교의 활동가로서 그의 죽음에 더 큰 책임감을 느꼈었다. 성소수자들에 대해 싸늘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죽음을 외면하던 종교인지라 죄스러움이 더욱 컸다.

그때 만난 한 친구는 그의 죽음 앞에서 언제 내 순서가 올지 모른다고 말했었다. 누구보다 성소수자의 자긍심에 대한 이야기를 목청 높여 부르짖던 이여서 주변을 더욱 의아하게 했었다. 성소수자가 죄인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던 이였다. 그러나 그 긍정의 그늘은 그런 말을 하는 이의 뒷면으로 길게 늘어졌다. 어느 날 그는 자긍심을 이렇게 강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만큼 자신의 삶이, 자긍심이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긍심을 강조하는 삶보다 아무것도 강조하지 않아도 별일 없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흔히 성소수자들이 ‘일반’이라고 부르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자기 긍정은 매 순간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순간 ‘선물’처럼 주어진다. 삶에서 애써 자기를 긍정하고 자존감을 가져야 할 때는 패배의 ‘순간’들이다. 그런 패배의 순간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려받고 위로받으며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말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때까지 되뇌면 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견딜 수 있다.

반면 소수자들에게 자기 긍정이란 과제처럼 삶의 매 순간에 주어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아니라 삶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며, 고요함이 오히려 예외적 사건이며 바람처럼 지나간다. 삶을 버티기 위해서는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말을 매 순간 주문처럼 되뇌어야 한다. 한 친구는 ‘일반’들에게 사람을 현명함으로 이끈다는 철학적 순간인 실존적 위기는 그들에겐 덤이며 존재론적 위기가 그들에겐 일상이라고 자조했다.


20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후생동 강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서울시민 인권헌장 공청회가 동성애 반대단체들의 실력행사로 무산되자 성소수자들이 단상에 올라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존중"을 주장하고 있다._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그의 죽음이 있던 주간인 11월20일은 세계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었다. 이날을 맞아 한국의 트랜스젠더 인권단체인 ‘조각보’에서 ‘우리는 추모한다. 그리고 존재한다’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한 후배가 전해왔다. 사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자긍에 도달한다는 것은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유독 존재론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수자들에게만 과제처럼 주어져 오히려 더 존재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면 ‘조각보’의 슬로건은 불가능한 ‘진정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불가능한 존재함을 가능하게 했다고 그 후배는 평가했다.

나는 ‘조각보’의 슬로건과 그의 말에서 크게 배웠다. 동료의 죽음과 죽음에 대한 추모를 통해 존재한다고 선언한 ‘조각보’의 말은 세월호에서부터 메르스에 이르기까지 망각을 통해 존재의 위기를 회피하려는 이 시대에 맞서는 시대정신이자 행동강령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 시대에 추모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존재할 수 있으며,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긍’조차 개인화하여 존재론적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이 시대에 그 존재의 부서짐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야말로 죽은 이뿐만 아니라 사는 이들을 구원하는 행위임을 동료의 죽음을 ‘일상적’으로 맞이하던 이분들이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우리는 추모해야 한다. 존재하고 싶다면.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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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파리 자살 테러사건이 화제에 오르면 거의 어김없이 ‘미친놈들’이라는 말이 나오곤 한다. 정신이 온전한 인간이라면 타인을 죽이기 위해 제 목숨을 버릴 리가 없다는 게 보편적 상식이다.

당사자들도 자기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그들은 반대로 이슬람국가(IS)에 대한 불타는 애국심으로 정신을 가득 채워 목숨까지 내던지는 자기야말로 누구보다도 ‘올바른’ 영혼의 소유자라 믿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살 테러를 지시한 자들은 또 다른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영웅적 행위를 본받으라며 선동하고 있을 테고.

자살 폭탄공격의 원조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운용한 가미카제 특공대다. 대원 모집은 형식상 자원이었다. 가미카제 대원들은 왜 반생명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자원해서 저질렀을까? 일본 군부는 “덴노헤이카와 대일본제국을 위해 하늘에서 산화하는 것은 일본 청년의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고 선동했다. 하지만 이런 선동에 감동해서 곧바로 제 목숨을 던지겠다고 자원할 바보는 없다. 오히려 선동하는 자들을 ‘미친놈’ 취급하는 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자원자들이 나왔다. 이 선동은 젊은이들이 짧은 평생에 걸쳐 받아온 ‘정신교육’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와 관변 지식인들은 각지 다이묘(大名)들의 신민(臣民)으로 살아온 일본인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 덴노(天皇) 중심의 역사관을 만들었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덴노가 다스리는 전 세계 유일의 신성한 국가이며, 이 덴노의 적자(赤子)들인 일본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정의로운 민족’이라는 것이 그 요체였다.

이 황국사관(皇國史觀)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국정(國定) 역사관이 되었다. 학생들은 ‘덴노는 언제나’ 올바른 ‘결정을 하는 무오류의 현인신(現人神)으로서 그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일본 국민의 신성한 의무’라는 신념을 가져야 했다. 그것이 ‘올바른’ 역사관이자 국가관이었다. 그들은 덴노가 결정한 전쟁을 성전(聖戰)이라 불렀고, 적국민을 귀축(鬼畜·귀신과 축생)으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귀신과 축생을 죽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올바른’ 일이었다.

물론 일본 군부는 가미카제 대원들을 영웅화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무렵 ‘가미카제’는 일본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앞 순위에 있었다. 패전 뒤에야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정말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들은 현인신인 덴노가 지휘하는 일본 정부의 결정은 무조건 ‘올바르다’고 믿어 “아니요”라고 답하지 못한 자기들이 참혹한 비극을 낳은 주범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했다. 그리고 인류는 이 반성에 기초하여 ‘새 시대=현대의 삶’을 시작했다.


중정부장 관저에서 본관으로 향하는 언덕에 설치된 세계인권선언문. 하지만 이곳이 과거 중앙정보부 자리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_경향DB


1948년 12월10일 제3차 유엔총회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입장이나 여타의 견해, 국적이나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이나 여타의 신분과 같은 모든 유형의 차별로부터 벗어나서,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제2조). 이 선언에 담긴 근본정신은 ‘차이’를 인정하고 그를 ‘차별’로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명명한 것은, 이 선언에 담긴 정신에 전면적으로 배치된다. 세계관이든 국가관이든 역사관이든 ‘올바름’이란 사회적 토론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국가권력이 일방적으로 지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국가권력이 ‘올바름’을 지정하는 순간, 그와 다른 모든 견해는 ‘그릇됨’과 ‘틀림’의 영역으로 이동해 국가권력에 의한 박멸의 대상이 된다. 이런 곳에서는 ‘모든 그릇되고 틀린 것들을 박멸하는 것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자들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라는 테러리스트의 ‘혼’이 활개치게 마련이다.

자기가 배운 것만이, 자기가 아는 것만이, 자기 지도자가 지시한 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르다는 확신이 바로 근본주의이며, 그의 다른 이름이 극단주의다. IS 자살 테러리스트의 ‘혼’도 분명 이런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신념은 구시대적이기에 야만적이며 반인간적이기에 야만적이다.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단색의 순결한 영혼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야만적이고 흉악한 영혼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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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에서 내년부터 저소득 미취업 청년층에게 매달 50만원씩 일정 기간 ‘청년 수당’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이 되려 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선심성 정책이라는 등 말들이 많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철딱서니 없는 애들에게 무조건 돈을 퍼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진국 중에는 무조건 청년에게 돈을 지급하며 ‘Gap year’(진학, 취직을 하지 않고 여행이나 봉사활동을 하며 사회에 대한 시선을 넓히는 시간)를 갖도록 독려하는 곳도 있지만, 이번 서울시 청년 정책은 저소득층 청년에 제한된다. 또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기 소득이 없는 미취업자이지만 사회 활동, 즉 구직 의지가 있는 청년 3000명에게 엄정한 심사를 거쳐 교육비와 교통비, 식비 등 최소 수준의 활동 보조 비용을 지급하는 것인데 길어봤자 6개월이다.

포퓰리즘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이것이 무차별적 복지가 아니라 이러한 심사 기준을 따른 ‘선별적 복지’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박원순 시장이 정말로 정치적 전략이나 포퓰리즘을 생각했더라면 저소득층 청년을 위해 정책을 펴는 것은 별로 실속 없는 짓이다. 지금도 그렇듯 노인 인구가 앞으로도 청년 인구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 당연한데 어째서 학생도 취업자도 아닌 ‘사회 밖 청년’에게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는가.

그런 식이면 65세 이상에게 지하철 요금을 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고 무차별 복지에 해당한다. 사회 기여도, 본인의 재산 유무를 모두 떠나 살아남아서 65세를 넘기만 하면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해 이번 서울시 청년 정책은 19~29세의 저소득층 청년 중 공공, 사회활동, 구직 계획서 등을 심사하여 선발한다. 서울 전체 20대 청년이 약 150만명이고 그중 ‘사회 밖 청년’은 34.9%로 대략 50만2000명이라고 한다. 대충 계산하면 167명 중 1명에게 지원하는 셈이다. 만약 지하철 무임승차 자격을 이렇게 선발한다면 어르신들이 연일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사업 예산 중 총 지급액은 90억원으로, 4대강 같은 사업에 22조원이 투입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이러한 저소득층 청년들은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어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급급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이들에게 단 몇 개월간이라도 마음 놓고 구직을 준비할 수 있도록 얼마간의 지원을 해 주는 것은 청년들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요즘 ‘흙수저’라는 말이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이다. 그만큼 사회 계급이 고정되면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느라 바빠 더 좋은 직장을 위해 이력서 꾸밀 틈도 없이 사는 청년들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밥그릇 안에 숟가락을 집어넣을 기회도 없고 입에 넣어 봤자 밥알보다 흙이 더 많은 이런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고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늘 체념과 박탈감 속에서 살아온 이 ‘흙수저’ 청년들에게 당신이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는 일이 될 것이다.

공짜로 지하철 타는 어르신들은 ‘나라가 하는 일이면 믿자’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분이 많은데, 그것은 나라에서 차비라도 지급하는 혜택을 받아 본 분들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라가 도대체 해주는 것이 없어 청년들에게 ‘헬조선’이라는 말이 널리 퍼진 지금, 정책의 수혜를 입은 ‘흙수저’들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준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됨과 동시에 뭔가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 애쓸 것이다. 포퓰리즘이라고 핏대를 세우는 분들은 이 혜택을 받은 청년들이 나라에 감사와 공헌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게까지 청년들을 믿지 않는다니 슬픈 일이다. 한 달 ‘50만원’. 있는 집 자식에게는 ‘그까짓 돈’이지만,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자소서’도 쓰고, 면접에 입고갈 양복도 걱정해야 하는 청년들에게는 ‘희망 자금’이다.



김현진 |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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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살인이다” “부당해고 철폐”. 이런 말을 사용할 때마다 하루에 70만원을 물어내야 하는 노동자가 있다. 농협중앙회로부터 3차례 해고당한 뒤 5년째 복직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배삼영. 그의 삶을 돌아보면 지난 20년간 한국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지운 고통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우선 그는 농협중앙회 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에 몰아친 구조조정 광풍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실제로는 퇴직을 강요당한 1차 해고였다. 1999년 퇴직과 동시에 농협중앙회에서 다시 비정규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기존에 정규직 시절에 하던 일과 똑같았지만 신분만 비정규직이 된 것이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나름의 준비를 해왔다. 2001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금융권 계약직 노조로는 최초로 농협중앙회와 단체협약도 체결했다. 노조 사무실을 제공받고 위원장에 당선되어 전임자로 활동했다.

9년간 비정규직으로 일해온 그에게 2008년 또다시 해고가 찾아왔다. 2007년에 만들어진 비정규직법(기간제법)이 통과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2년 넘게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돼야 하는데 사용자들은 정규직화 대신 해고라는 칼을 휘두른 것이다. 다시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었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얘기했다. 저 거대한 농협중앙회를 상대로 혼자서 맞붙는다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그는 홀로 농협중앙회 본사 옥상에 매달리는 고공농성을 감행했다. 목숨을 건 싸움 끝에 그는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비정규직 신분으로의 복직이었다. 2008년 복직 후 2년이 지난 2010년, 그에게 다시 3번째 해고가 찾아왔다. 비정규악법 통과 이후만 보면 그의 근속은 2년이 넘었지만, 이 경우를 대비해 정부는 비정규직법 제정 이후 체결한 근로계약부터 2년이 지나야만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경과규정을 달아놓았다.


비정규직 노동자 규모 및 비중 추이_경향DB


2010년 3번째 해고 이후 5년 동안 그는 다시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골리앗 농협중앙회 역시 5년 동안 쉬지 않고 탄압을 자행했다. 형사고발은 물론 각종 가처분신청으로 1인 시위조차 못하게 하려 했다.

온갖 소송비용 청구에 주택 경매 통지, 심지어 같은 농협중앙회에 다니는 부인에게 남편의 시위를 막으라는 압박까지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자 이제 ‘해고는 살인’ ‘부당해고’라는 말조차 못하게 재갈을 물리는 가처분신청을 넣었다. 농협중앙회의 탄압도 도를 넘었지만, 이를 그대로 수용한 사법부는 또 뭐란 말인가. 3번의 해고에 당할 만큼 당했는데 부당해고라는 말조차 하면 안된다니!

여전히 농협중앙회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다. 2년이 경과하면 해고한 뒤에 6개월 또는 1년 동안 쉬었다가 다시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일도 있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늘린다고요? 그럼 정규직으로 뽑아줄 것 같습니까? 2년 마구잡이로 쓰고 버리는데 4년 쓰고는 못 버릴 것 같아요? 4년 지나서 잘리면 어떻게 될지 뻔합니다. 4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다는 이력서 내는데 어디서 정규직으로 뽑아주겠어요. 정부와 새누리당이 말하는 노동개혁은 이렇게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말이나 다름없어요.”

‘해고’라는 말을 못 쓰게 하면 해고가 사라질까? ‘부당해고’란 말을 금지하면 부당해고가 없어지나? 우리말을 못 쓰게 하면 내선일체가 되리라고 믿었던 제국주의자들의 발상에 다름 아니다. 국정교과서를 만들면 진짜 역사를 알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이들, 그런 자들의 망상을 깨기 위해서라도 더 또렷하게 외쳐야 한다. 3번의 해고, 가족까지 괴롭히고 온갖 탄압을 일삼는 이 행위를 두고 말이다. 다시 한번, 해고는 살인이다. 부당해고를 중단하라.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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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아 미안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잘살아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50대 가장. 이제 이런 기사는 크게 새로울 게 없다. 그만큼 50대 남성 가장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세대. 임금피크제를 반대하면 젊은이들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세대. 그러나 취직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자식까지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든 교과서로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북한 공산당은 정말 빨갛게 생긴 사람들이라고 믿기도 했다. 군대에서 얻어터지며 국방의 의무도 다했고, 30~40대 때 열심히 일했다. 세금도 꼬박꼬박 냈고, 수많은 선거에도 열심히 투표장에 가서 한 표를 행사했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 요즘, 노후를 생각하면 한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사회는 미래가 안 보이는 세상이 돼버렸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그냥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김빠진 세상이 돼버렸다. 아니 50대는 이제 무력한 세대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 같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핏대를 올리던 정치 이야기는 한물간 하소연이 돼버렸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살 것인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돼버렸다.

그러나 50대는 한때 우리 역사를 만들어 낸 혈기왕성한 세대였다. 비록 ‘유신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배웠지만, 거리에서는 독재타도를 외쳤고,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스크럼을 짜고 거짓과 싸웠으며, 노동조합을 결성해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겠다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알았다.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이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는 것을. 1987년 6월, 직장에서 넥타이 맨 채 뛰어나와 영원히 권력을 누릴 것처럼 위세를 부리던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 평생직장이라고 여기며 밥 먹듯이 야근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옥죄어오는 강도가 너무 심하다. 해도 너무한다. 암살당한 ‘박정희의 부활’을 목격해야 하고, 조선시대 임금도 못 건드리던 역사를 위정자가 자기 잣대로 다시 쓰겠다고 한다. 진보 아니면 보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웬만하면 다 좌파다. 학자들의 ‘전국역사학 대회’에 난입한 사건을 ‘충돌’이라고 쓴 언론 기사를 봐야 한다.

경제민주화, 분배라는 용어는 선거 때만 반짝였을 뿐, 이제는 내놓고 재벌 밀어주기 정책만 편다. 내가 맞으니 국민들은 잠자코 따라오라고 한다. 복종하지 않는 국민에게는 북한의 적화통일을 운운한다. 비정상이 정상이 돼버렸으며, 몰상식이 상식을 지배하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저들의 역사교과서로 절대 배울 수 없다고 항변한다. 지난 주말 비가 쏟아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피켓시위를 하던 한 소녀에게 지나가던 중년 남자가 우산을 받쳐주던 사진기사를 보았다. 어린 청소년들이 치를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세우기보다 지키기가 더 힘들다’라는 말. 무력한 야당 탓만 하며 언제까지 굴욕을 견뎌야 하는가.

이야기해야 한다. 부당한 권력행사는 그만하라고. 바뀌도록 우리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또 보여주어야 한다.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왔음을. 역사를 바꾸려는 저들에게 역사를 두려워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무력한 50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헬조선’이라 부르는 젊은이들에게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다. 누구든지 최선을 다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3분의 2를 넘겨 개헌하겠다고 한다. 내각제가 좋은지 대통령 중임제가 좋은지 그때 상황을 보아서 판단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만든 역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최소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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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2020 청년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가장 앞세운 정책은 ‘청년활동 지원사업’이다. 대학생은 아니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취업관련 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흔히 ‘니트족’이라 불리는 구직 포기 청년들에 대한 맞춤대책이라고 했다. 이들 중에서 의지를 보이는 청년들을 심사해 최대 여섯 달까지 월 평균 50만원을 지원한다. 최소한의 교육비, 교통비, 식비를 지원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는 거다. 당장 내년부터 3000명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한다.

성남시는 내년부터 ‘청년배당’을 시행한다. 성남시에 3년 이상 거주한 청년에게 분기마다 25만원씩 연 100만원을 수당으로 지급한다는 거다. 일단은 19세에서 24세까지의 모든 청년을 대상으로 시작하고, 점진적으로 연령을 늘려갈 계획이다. 청년들에게 일종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거다.

서울시는 선별 복지, 성남시는 보편 복지를 내세웠지만, 발상은 비슷하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거다. 새로운 정책이 발표되자, 찬반이 엇갈렸다. 환영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정도 재정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집권 새누리당의 평가는 박정했다. 김무성 대표는 “주민의 세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행위”라고 매도했다.

물론 서울시나 성남시가 달랑 이 대책만 내놓은 것은 아니다. 서울시의 청년대책은 20개의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고, 성남시도 ‘성남청년뉴딜’ 등의 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서울시의 대책은 박원순 시장의 지시로 급조된 것도 아니다. 청년유니온 등 청년 당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다듬어 온 대책이다. 이재명 성남시장도 청년대책이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주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진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헌법적 원리에 충실하겠다는 취지다. 게다가 양쪽 모두 내년부터 시범사업을 하겠다니, 이제 막 새로운 걸음을 떼는 수준이다.


2020 서울형 청년보장제도_경향DB


청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다들 인정하고 있다. 청년들의 고통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부터 ‘헬조선’까지 다양하게 지적되어 왔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금세 알 수 있다. 당장 대학이 그렇다. 사람 많은 곳 특유의 활기나 약간 들뜬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활기는커녕 분위기가 칙칙하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지옥 같다는 건 잘 알지만,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박차고 나서라는 이야기에 솔깃할 만큼 현실이 녹록하지도 않다. 일단은 ‘노오력’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미래도 불안하지만, 지금 당장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고약하다. 청년들도 시민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자지만, 주권자로서의 대접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국가든 기성세대든 재벌대기업이든 그런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서울시와 성남시의 대책은 새로운 시도가 될 수 있다. 몇 푼 안되는 돈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존중받는다는 느낌,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중요한 전환도, 새로운 시작도 가능할 수 있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조차 없으면서 돈부터 걷고 보자는 ‘청년희망펀드’처럼 황당한 대책만 아니라면, 뭐든 좋다. 청년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한 대책이라면 뭐든 추진해야 한다. 이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장 떠맡아야 할 책무다. 가만있는 게 제일 나쁘다.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만큼 상황은 절박하고, 대책은 시급하다. 어떤 정책이든 찬반이 있을 수 있다. 허점이 있다면 토론을 거쳐 보완하면 된다. 중요한 건 지금 청년들의 삶이 정치적 유불리나 셈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거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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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말 궁금해서 여쭈어 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지요? 면접 시험장에서 지원자에게 “국정교과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지요. 그 지원자는 솔직하게 의견을 말해도 되느냐고 먼저 물은 뒤, 국정화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나서 하지만 그래도 정부가 책임있게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고 답했다고 하죠. 그랬더니 이렇게 다시 캐물으셨다지요. 그래서 국정화 지지냐, 반대냐고요.

잘 아시겠지만 면접이라는 건 질문자들이 일종의 게임과 같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장입니다. 최근에는 이게 또 문제가 되어서 그 전략적 행동의 요구사항 중에 “진지하고 솔직해 보여야 한다”는 사양이 또 들어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면접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았으며, 면접을 자신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온 세상에 선언하는 장으로 삼는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민한 정치적 사안을 물어보면서 무슨 답을 기대하신 걸까요? 이 게임을 잘 아는 그리고 꼭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지원자라면,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건 겉으로는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인 그래서 기업인들의 가치관에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질 답을 지어낼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진심에서 나온 소리인지, 입에 발린 소리인지 그 자리에서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실 터인데 이런 질문을 애초에 무슨 목적에서 꺼내셨는지요?

그런데 그 지원자가 사뭇 비판적인 관점에서 답하면서 예상이 어그러졌던 것일까요? 그래서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분명히 하라고 다그치셨던 걸까요? 이런 저의 궁금함은 정치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한국 기업 특유의 조직문화 그리고 노동생산성과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에 대해 암울한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의 조직 원리는 군대 용어인 ‘밤송이를 까라면 까’였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복창’이라고도 하죠. 몽둥이를 든 자가 휘두르면 그게 얼마나 아프든 심지어 때리지도 않았다고 해도 아이고 죽겠네라는 시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서 긴다’는 다른 숙어를 낳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생각이 타당한지 아닌지 또 그걸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득력있게 전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윗선의 생각과 판단이 무엇인지를 눈치코치로 파악하고 그에 맞게 처신하고 말하고 심지어 생각하며 느끼는 게 조직원의 도리라는 게 전통이었습니다.

혹시 그걸 확인하고 관철하려고 다시 캐물으셨던 것인지요?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만이 훌륭한 조직원이며 ‘인재’라는 판단 기준을 두셨던 것인지요?

이렇게 나름 짐작을 하면서도 이렇게 여쭙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21세기의 경제 환경에서 통용되는 ‘인재’의 기준일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업 조직들은 매뉴얼에 나와 있지 않은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공구리’를 치는 생산 현장과 거래선 뚫으러 다니는 영업활동이 전부였던 옛날의 기업 활동에서는 요긴하게 쓰였던 ‘인재’라고 해도, 이렇게 정신없는 속도로 끝없이 변화하는 사업 환경에서 새로운 활로와 방안을 찾아내려는 조직에 필요한 ‘인재’일 수는 없습니다. 아마존이나 구글에서는 회의 시간에 아무 말도 않는 이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죠. 가만히 숨죽이고 엎드려서 눈치 보아 알아서 기는 인물을 그것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이러한 21세기의 경제 환경에서는 실로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에 현실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비웃으실 수 있겠습니다. 한국 기업 문화와 경제 현실을 전혀 모르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소리를 읊어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더욱 궁금해지는 질문이 또 있습니다.

기업 활동 및 경제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정치적·이념적·사상적 질문들이 어째서 그토록 많이 나오는 것일까요? 큰 탈 일으키지 않고 부려먹기에 좋은 ‘마름’형 인물들을 가려내기에 그런 질문들이 효과적이기 때문인가요? 그런데 그러면서 또 왜 한국 기업들은 모든 직원들에게 혁신이니 창의성이니 하는 말들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퍼부어대는 걸까요? “창의적, 혁신적이면서도 윗선의 뜻을 알아서 잘 받드는” 인재를 찾는 것인가요? 그런 사람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할까요?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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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반대 여론이 다수라고 한다. 50대 이상에서도 반대 여론이 더 커지고 있고 특히 학부모들에게서는 반대 여론이 더 높다고 한다. ‘수능’을 미끼로 학부모들을 겁박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측의 반응도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

보수단체들이 역사학 대회장을 난입하고 서울대 폐지론까지 주장했다. 이런 찬성파 중에서 유독 당혹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도 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했는데 느닷없이 지금 국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국정화를 최선두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김정배 위원장이 그렇다. 역사교과서의 검인정화가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이 부정적인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말했던 분도 국정화 지지 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독재 시절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이들의 ‘변신’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뒷이야기까지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만큼 당혹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면 한국의 일부 ‘자유주의’ 세력이 현 정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지금의 교과서가 너무 편향적이라서 국정화라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정화가 아니라 검인정이 좋다는 소신은 변하지 않았지만 과도기적으로라도 이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국정교과서를 ‘한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교과서가 너무 편향적이라서 ‘예외적’인 조치가 필요한 ‘비상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이 예외적인 비상 상태라는 이들의 말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민주주의’의 실체를 드러내는 말이다. 예외야말로 정상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이 지금 상황을 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믿어줄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이 역사학계의 90%가 좌파라고 말하는 게 그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역사학을 비롯한 다수의 학계에서는 그들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들이 보기에 비상 상황이며 예외적 조치가 필요하다. 이들이 국정화라는 예외적 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소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자신들이 다수이고 도전하는 몇몇 소수 의견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소수 의견은 그들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장식에 그쳐야 한다. 그들이 아닌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귀족정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들은 자신이 다수가 아닐 때 언제든 비상 상태를 선포할 수 있고 예외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예외적 시공간에서 권리는 정지되고 시민은 발가벗겨진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와 토론은 금지된다. 입을 떼는 순간 비국민으로 발가벗겨진다. 이미 저들은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민주주의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그들이 항구적인 다수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영원히 징징거리는 소수로만 남으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다수가 아닐 때 예외를 항구화하여 지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다수’가 되지 않는 이상, 이 비상 상태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발가벗겨진 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것에 저항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싸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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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노동개악이 강행되면 노조가 없던 3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우리가 그 시절 겪어봤잖아. 노조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규직이었다고. 이 직장에서 잘려도 다른 곳에 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비정규직이 엄청난 규모로 늘었잖아. 이런 상태에서 노동개악이 강행되면 30년 전보다 더 후퇴하는 거라고.”

가끔 노동조합 교육을 하다 보면 환갑이 넘은 조합원들이 참여해 이런 얘기를 해주시곤 한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은 역사를 30년 이상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요즘 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그렇고, 대통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 한다.

게다가 정부와 재벌은 비열하게도 조직력이 취약한 비정규직 사업장부터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를테면 정부는 지방공기업에까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되 “급여 수준이 매우 낮은 경우(최저임금의 150% 수준 이하)에는 제외 가능”이라고 명시한 바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최저임금의 150%, 그러니까 월 175만원만 받아도 모조리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라는 얘기이다. 이에 따라 오랜 근속을 거쳐 간신히 무기계약직이 된 지방공기업 비정규직 다수에게 임금피크제가 실시될 전망이다. 쥐꼬리만큼 월급을 주면서 꼬리마저 떼겠다는 거다.

‘쉬운 해고’로 알려져 있는 저성과자 해고제도 역시 비정규직 사업장부터 밀어붙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지난 9월에 공개한 ‘서비스센터 운영 개선 토의(안)’라는 문건에 따르면, LG유플러스 서비스센터 연합회가 저성과자 관리 및 해고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명시하고 있다. 이 문서는 LG유플러스 하청업체로 구성된 서비스센터연합회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월간 정량평가를 기준으로 노동자들을 A~D등급으로 분류한 뒤 D등급 직원에 대해서는 개선계획서 제출→교육시행→업무일지 작성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분기평가 3회 이상 D등급을 받은 직원은 해고하도록 적시하고 있다.



최근 일부 교육청에서 취업규칙 변경을 통해 저성과자 해고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내용이 닮았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연 2회(2월, 8월) 근무성적 평가를 하도록 하고, 5개 등급으로 분류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근무성적 평가결과 3회 연속 최하위등급을 받은 경우 해고할 수 있도록 한다니, 위 사례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가!

민간과 공공 부문에서 이토록 동일한 사례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정부와 재벌이 이미 물 밑에서 ‘쉬운 해고’ 가이드라인을 깊숙이 논의해왔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쉬운 해고를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저성과자 해고제도가 취업규칙에 명시되어야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과 함께 쉬운 해고 가이드라인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재벌이 비정규직 사업장부터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조직력이 강한 대기업 정규직에게 곧바로 밀어붙이긴 어려우니 만만해 보이는 곳부터 시행한 뒤, 마지막으로 대기업 정규직을 고립시켜 밀어붙이는 시간차 공격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노조들은 오는 14일로 예정된 민중총궐기에 비정규직 5만 조합원을 상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화답할 차례이다. 비정규직 사업장에 쏟아지는 노동개악 공세가 바로 대기업 정규직을 향한 공격의 신호탄임을 자각하고 나서야 한다.

비정규직 5만과 정규직 5만이 손을 잡고 함께 총궐기에 나설 때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을 막아낼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나설 때, 박근혜 정부의 역사 되돌리기를 막아낼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기 위해 앞장서온 것은 언제나 자각한 노동계급 아니었던가.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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