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구조에는 무능력했던 정부가 노동개혁은 왜 이렇게 밀어붙이는 걸까요?” 요즘 노동조합 교육을 다니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이다. 물론 사장님들은 언제나 임금을 깎고 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원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2015년 지금일까?

여기에는 이미 화약고가 되어 있는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이 놓여 있다. 미국, 유럽, 중국 어느 곳도 안심할 수 없는 위기의 연속이다. 한국 경제성장률은 2008년 이후 최저인 2.8%로 전망되는 상황이다. 사내유보금 규모는 매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이윤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이윤율도 하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권이 던진 승부수가 바로 노동개혁이다. 아니,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이윤 보호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쉬운 해고, 임금피크제, 파견 확대 등 노동개혁으로 포장된 정책 모두 100% 사용자들을 위한 내용이 아닌가.

“정부의 노동개혁이 단순히 임금 깎고 해고 쉽게 하는 게 목표일까요?” 이 역시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이다. 물론 이런 질문은 스스로 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임금피크제, 쉬운 해고를 도입하겠다고 분위기 잡으면서 실제로는 노동조합을 때려잡는 게 진짜 목표 아니냐.”

취업규칙 변경을 쉽게 하고, 누구든 저성과자로 포장해 맘대로 해고하는 것! 아무런 규제 없이 비정규직을 몇 년 동안 사용하는 것! 그렇다. 이런 일은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정부와 자본 입장에서 이런 일을 새롭게 도입할 필요가 있다면 그건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 특히 대기업들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대기업 노조들은 중소규모 노조에 비해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대기업 사업장에서 자본의 공격은 취업규칙 변경이나 일반해고로 곧장 직행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현대차·기아차·철도 노조 등에 공통적으로 진행되는 공격은 임금피크제와 성과 차등임금제 등 임금체계를 개악시키는 쪽으로 집중된다.


'노동시장 개혁저지 집중행동 집회'에 참가한 민주노총 조합원들_경향DB



특히 성과 차등임금제를 도입할 수만 있다면, 노동조건 전반에 ‘성과’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성과를 기준으로 상여금을 차등 지급하고, 성과를 기준으로 승진·승급을 하다 보면, 결국 성과를 기준으로 해고를 할 수 있는 일반해고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놈의 ‘성과’라는 건 사장님들이 엿장수 맘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장 맘대로 해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런 해고가 도입되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사장님들은 눈엣가시 같은 노동자들만 골라서 ‘저성과자’로 분류하기 시작하고, 곧바로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 관리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과거 정리해고의 경우 대상이 된 노동자들 중심으로 집단적인 투쟁을 벌였으나 이마저 어려워지는 것이다.

대기업 사업장들의 올해 임단협이 예년과 달리 일정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길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성과 차등임금제의 교두보를 만들어 놓아야만 일반해고의 길을 틔울 수 있고, 이를 근거로 노동조합을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 특히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사장님들에게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하려는 것이 박근혜 정권 노동개혁 정책의 핵심이다. 전체 노동자들을 상대로 해고를 맘대로 하고 임금을 쉽게 깎으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대기업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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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 변절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했고,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에는 여준, 조만식, 염상섭, 김억, 홍명희, 주기용, 함석헌 등의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그저 제 한 몸과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애썼던 평범한 장사꾼이었다. 제대로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홉 살에 고아가 됐으니 당장 먹고사는 게 급했다. 일을 해야 끼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 처지였다. 사환으로 시작해서, 보부상으로 일하며 전국을 누볐다. 보부상으로 번 돈으로 유기공장을 차렸고, 무역과 운수사업까지 일으켰다. 그는 사업가로서 승승장구했지만, 나라의 운명은 기울었다.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길에 접어들자, 갑자기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실의에 찬 나날, 은인자중의 시절이었다.

43세가 되던 1907년, 이승훈은 놀랍게 변한다. 마치 예수가 사생활을 접고 공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단박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계기는 단 하나, 그해 7월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었던 것이다.

한 번의 연설로 이승훈은 모든 걸 바꾼다. 금연, 금주에다 단발을 하고,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에도 가입한다. 곧바로 전 재산을 바쳐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교육, 문화, 출판, 그리고 비밀결사운동에까지 맹렬하게 나선 것이다. 모든 존재를 걸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바꿔 공적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이승훈의 마음을 움직인 안창호는 당시 29세였다.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 문화, 습관을 바꾸고,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곧바로 실행했던 것이다. 남강 이승훈의 극적인 변모는 말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준다. 말은 우리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우리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책 제목처럼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말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기도 하다. 천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 하지만, 요즘처럼 말이 힘을 잃은 시절도 없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접하는 말은 많아졌지만, 말이 사람을 바꾸거나 세상을 바꾸는 일은 흔하지 않다.


오토바이 전국투어' 하고 있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마르코스 부사령관_AP연합뉴스



당장 대통령부터 많은 말을 쏟아내지만, 그 말에 힘을 얻거나 그 말에 기대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청년 일자리 13만개가 만들어진다는 대통령의 말에 희망을 거는 젊은이가 있을까. ‘노동개혁’을 하면 능력으로 인정받으며, 정규직 취직이 쉬워지며,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 없는 일터가 만들어진다는 정부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을까. 그저 각자도생의 삶이 있을 뿐이다.


방송사의 토론은 여전하지만,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만 모아놓고 싱거운 소리만 반복한다. 이성의 힘을 믿고 공론을 펴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저 이기거나 지는 유치한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명예훼손과 모욕죄를 무기로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는 경우도 너무 많다. 표현의 자유는 잔뜩 위축되고, 권력과 자본이 통제하는 언론은 무기력해졌다. 말이 힘을 잃은 것은 그저 정치적 유불리만 셈하며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해대는 능력이 발달한 탓도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어느새 말의 힘을 잊은 탓도 있을 거다. 말 한마디 때문에 설레기도 하고, 말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도 하던 우리가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까.

마침 명절이다. 모처럼 가족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올라온다. 그래서 정치권에선 추석상에 올라갈 만한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했다. 추석 민심을 끌어오기 위한 노력일 게다.

그렇지만 이번엔 정치하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이야기 말고, 우리가 준비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정부가 요구하는 노동개혁의 실과 허에 대해서, ‘청년희망펀드’가 청년 실업사태를 극복할 방도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국회의원 정수 조정 문제나 정치개혁 문제, 내년 총선에 꼭 포함되어야 할 공약이나 우리가 키워줄 만한 좋은 정치인 이야기도 추석상에 올려보자.

정치가 그저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정치인들만의 문제일 때, 우리는 정치에서 점점 소외되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재단되거나 처리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자. 지금껏 내 일처럼 여기지 않았을지 모를 숱한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고 답을 찾아보자. 국민이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민심이 무섭게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핵심에 바로 국민의 말이 있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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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6일, 나는 전날과 다름없이 제 시간에 출근하여 국기 게양대 앞에 섰다. 그런데 게양대 위로 올라가는 깃발은 우리 히노마루가 아니었다. 낯선 깃발이 올라가는 동안 조선인 동료들은 ‘반딧불이’(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을 번안한 일본 동요) 곡조에 맞춰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나도 부동자세로 서서 깃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동안 조선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일본인의 회고)

그는 매일 아침 국기를 바라보고 동방요배를 하며 조회 때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낭송하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그들도 ‘덴노 헤이카’의 적자(赤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남의 국기를 바라보며 경배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에야, 그동안 자기들이 조선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1945년 농사는 풍작이었다. 게다가 공출은 중단되었고,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칠 이유도 없었다. 일본 본토와 전선으로 반출되던 쌀도 고스란히 국내에 남았다. 그럼에도 쌀이 부족했다. 친일 지주들과 유력자들이 속죄하는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쌀이 떡과 술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사죄하는 자와 사죄받는 자 사이, 즉 친일파와 보통사람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했다.

그런데 근래 일제강점기에 산출된 텍스트들을 통해 ‘보통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연구자들 중에는, 텍스트로 표현되지 않은 문제는 ‘없는 문제’인 양 취급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에도 보통사람들은 신문물에 열광하고 경제적 성취에 몰두했을 뿐, 독립운동이니 민족문제니 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본다. 이런 결론은 다시 “민족주의라는 색안경을 쓰고 역사를 본 결과 일제강점기의 민족문제가 실제보다 과도하게 인식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99% 이상의 한국인들은 1%도 안되는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생각, 다른 생활을 하며 ‘정상적’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민족문제’에 대해 말하기 싫었거나 관심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총독정치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바로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억압 상황이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 ‘말할 수 없음’에 익숙해진 것뿐이다. 압제 속에서 표현된 것이 속마음이 아니라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났을 때 표현된 것이 속마음이다.


일제강점기 농촌 어린이의모습_연합뉴스


그럼에도 최근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이자 일본군의 정신적 동지”였다거나 “1%의 독립운동가 때문에 99%의 ‘보통사람’들이 죄인 취급 받는 건 불합리하다”는 등의 발언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그들은 압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통사람’으로 호명(呼名)하고서는, 그들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묶어 두었던 식민통치의 하수인들과 한편으로 묶는다. 그러고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보통사람’의 평온한 삶을 교란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죄인의 자리에 배치한다. 그들의 주장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다면 성폭행이 아니라 화간(和姦)’이라는 주장과 똑같다. 성폭행범이 피해자의 목에 칼을 들이댔든, 피해자가 14~15세의 소녀든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겐 강자가 약자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며, 그 상황에 순응하는 게 ‘보통사람’의 도리이고, 그에 저항하는 것은 ‘죄’이다.

‘민족주의 과잉’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정작 ‘국가주의 과잉’의 노골적 표현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 찬동하는 황당한 아이러니가 연출되는 것도 이 때문일 터이다. 그들의 속마음에 자리 잡은 건 이런 생각이 아닐까?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상황이 ‘정상 상황’이 되고 권력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는 획일적 인간이 ‘보통사람’이 되는 쪽이 자기에게 유리하다는 것.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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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가 도움을 요청한다며 찾아왔다. 중학교에 두 달 동안 연극 강사로 가게 됐는데 뭘 준비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언제부터 시작이냐고 물었더니 당장 다음주부터란다.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처음부터 다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우려했더니 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만 당부했다. 살짝이라도 절대 학생 몸에 손이 닿는 일이 없게 하라고 했다. 꿀밤도 안된다고 했다. 마음이 급할수록 더 조심하라고 했다.

공식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가지만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밤잠을 설치며 준비해야 했다. 당연히 이 준비과정은 노동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학생들이 쉽게 따라와 줄 리도 없었다. 일을 의뢰한 교사는 수업이 효율적이지 않다며 후배를 독려했다. 그분은 학생에 대한 선의로 하는 말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후배에게는 압박이었다. 그는 준비가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더 열심히 노력했다. 맨바닥에서 그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은 자기 ‘노력’뿐이었다. 아니, 요새 청년들이 쓰는 말로 노‘오’력이다.

노력의 한계는 100%다. 100%란 일에서 내야 할 성과의 기준치 같은 것이었다. 그 이하가 미달이고 100%에 도달하면 합격이었다. 그러나 노오력의 시대에 100%는 미달이다. 200%, 300% 해야 한다. 노‘오’력은 노력에서 ‘오’자가 한 자 더 늘어난 것처럼 100%를 초과하라는 명령이다.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돌파하고 자기 힘과 가용되는 자원을 초과해서 살아야 한다. 자기가 받는 돈의 몇 배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만 겨우 일을 진행할 수 있다.


100%를 초과해야 하는 노오력에는 당연히 무리수가 따른다. 그래서 내가 그 후배에게 딱 하나, 꿀밤을 주는 일도 절대 없게 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일개 강사인 그의 ‘신분’과 ‘권한’으로 안되는 일(떠드는 학생을 조용히 하게 하거나, 돌아다니는 학생을 앉아 있게 하거나 등)을 되게 하려다 감당할 수 없는 불상사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지만 그 일에 대해 제도는 전혀 책임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간단하게 그의 책임으로 돌리고 끝내면 그만이다.


세월호 침몰사고 구조작업 중 숨진 민간 잠수사 이광욱씨 빈소 _연합뉴스


이것은 비단 성과를 내려고 발버둥 칠 때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이 제대로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갇힌 덫이다. 당장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세월호 잠수사에게 징역형이 구형된 것이 대표적이다. 많은 잠수사들이 생업을 내려놓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잠수사 한 분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그 책임을 민간 잠수사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분에게 몽땅 지운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수색에 참여했던 한 잠수사는 양심적으로 간 것이 죄라며 다시는 재난 현장에 국민을 부르지 말라고 성토했다.

이처럼 노오력은 노력을 배신한다. 노력이 이루기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이라면 노오력은 삶을 합법과 불법의 경계로 몰아가서 파괴한다. 규칙이 금하는 일을 위태롭게 넘지 않는다면 성과를 내고 일을 되게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기 때문이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대가는 행위자가 치러야 한다. 노오력을 하는 자는 합법의 경계 밖으로, 합법적 ‘노력’을 하며 살 수 있는 삶 바깥으로 ‘이미/잠재적으로’ 밀려나 발가벗겨져 있는 상태다.

노오력이 제시하는 선택은 삶에 대한 기만이고 노력에 대한 배신이다. 노오력을 하면 살아남고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 아니다. 노오력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고 배제된다. 반면 노오력하면 삶은 발가벗겨지고 법 밖으로 추방된다. 생존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배제와 추방이라는 두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오력하는 것도,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건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 선택지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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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이 예기치 않았던 정치실험으로 떠들썩하다. 영국 노동당 새 당수로 선출된 제러미 코빈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단숨에 힐러리 클린턴을 위협하는 유력 주자로 떠오른 버니 샌더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이 미국과 영국 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완강한 좌파의 길을 걸어왔다. 세상은 이미 한참 오른쪽으로 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좌파의 좌표를 놓지 않았다. 영국 노동당 좌파 중에서도 코빈은 ‘괴짜’에 속했다. 그것도 구식의 완강한 좌파 정도로 치부됐다. 하지만 그는 당 대표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득표율 59.5%의 경이적인 승리였다. ‘제3의 길’로 노동당 전성시대를 열었다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1994년 득표율(57%) 기록을 깬 것이었다.

이번 당 대표 경선은 노동당을 다시 더 ‘중도’ 쪽으로 돌려놓을 것으로 예상됐다. ‘진보적 가치’를 내걸고 치른 지난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참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당 당원과 지지자들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무엇 때문에 코빈을 압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일까.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는 변화에 대한 열망이다. 현재의 체제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분명한 의사 표현이다. 1%의 특권층이 부와 소득의 90%를 독차지하는 불평등도, 그런 불평등한 구조를 뜯어고치는 데 역부족인 기존의 정치 체제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선택이다.

샌더스 돌풍 또한 미국 사회 저변의 변화 열망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1%에게 있는 권력을 빼앗아 99%에게 돌려줄 때가 됐다”는 게 그의 선거 운동의 주된 표어다. 열심히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행복할 권리는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 40시간씩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급진적이란 얘기를 들어서도 안된다”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 역시 코빈과 마찬가지로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개선을 가장 우선하는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제러미 코빈이 발표 직후 손을 흔들고 있다._경향DB


코빈과 샌더스 돌풍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신뢰라는 자산이다. 두 사람 다 옆길로 새지 않고 초지일관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켜왔다. 코빈은 검소한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자기 차를 가져본 적이 없다. 자전거를 평생 타왔다. 이라크 전쟁 등에 일관되게 반대해왔다. 직접 시위 현장에 나갔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는 거리에서 보통 사람들과 함께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노동당원과 지지자들이 압도적으로 그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믿을 만하다고,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샌더스는 말 그대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사회주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미국 땅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벌링턴 시장 4선을 거쳐 1991년부터 4번의 하원의원과 2번의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표방한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왔다는 것이다. 벌링턴 시장 때 그는 호텔이 들어서려던 호숫가에 시민공원을 조성하고, 대형 식료품 체인점 대신에 협동조합을 세웠다. 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서민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사업 등으로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의원 시절에도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이번 대선 후보 경선 전까지 무소속으로 남아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정치실험이 과연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알 수 없다. 코빈은 노동당 내부의 사보타주부터 헤쳐나가야 한다. 그가 총리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란 세간의 예단을 돌파하는 게 관건이다. 소액 기부자들의 후원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샌더스 역시 슈퍼팩으로 상징되는 ‘돈의 힘’과 ‘체제의 장벽’을 과연 넘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세계 자본주의 제국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의 정치실험은 그 자체로서 흥미롭다.

60~70대의 꼿꼿한 노정객들이 시대의 최전선에서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에겐 부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백병규 |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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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정치민주연합을 보고 있노라면, 계파 간의 갈등을 없애겠다고 했다가, 오히려 계파 갈등의 덫에 걸린 형국이다.

권력투쟁을 생리로 하고 있는 정치권에서 계파가 존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천권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투쟁은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정치력이다. 공천권을 둘러싼 권력투쟁 과정 속에서 그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 조정하고 합의해서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공통의 룰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점이다.

한국의 야당은 다른 나라에 없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분열되었다가도 다시 뭉쳐 거대 권력과 싸워서 이긴 전력을 갖고 있으며, 그 싸움 과정에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했으며, 정당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1955년 민주당이 창건될 때, 분열되었던 야권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막는다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실은 4·19 민주혁명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김영삼은 신민당을 중심으로, 그리고 김대중은 재야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통해 박정희 정권 몰락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도 김대중, 김영삼 두 정치세력은 민추협을 통해 다시 합쳐 직선제 개헌이라는 민주주의 성과물을 얻어냈다.

한국의 야당이 계파 간의 분열, 그리고 이합집산이라는 역사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공동의 목표가 설정되면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 정립과 소외된 국민들의 이해를 대변한 정체성도 갖고 있다.

새정치연합이 이러한 야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자임한다면, 혁신 트라우마에 걸린 것처럼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다. 부당한 기득권에 맞서 싸워왔던, 그리고 소외받은 지역과 계층을 대변하는 당의 정체성을 회복하면 된다. 7포 세대 젊은층의 고통과 몰락해가는 자영업자들, 그리고 부와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사회경제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서 어떻게 싸울 것이고, 국민행복의 비전을 제시하고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구체적 방도를 내놓을 것인가.


바로 이 점이 혁신위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당내 권력투쟁을 통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사안은 당내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정당정치의 순리다.



해결 주체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있는데, 객이 와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시시콜콜 다 간섭하면 오히려 싸움을 붙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혁신위는 자신들의 안을 제시하면 그 책임은 다하는 것이다. 그것을 참고로 해서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은 새정치연합의 지도부와 당원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문재인 대표는 당당하지 못했다. 혁신위 뒤에서 숨어 있다가, 혁신위를 앞에 내세워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지 않은지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문 대표가 왜 당내 합의가 되지 않은 혁신위 안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어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천 룰이 합의되지 않으면 당은 분열하고, 심하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이 아닐까. 어떻게 하든지 설득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혁신을 거부하면 안 된다. 또 그것을 거부하면 나는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해행위일 뿐이다.

지금 키는 문 대표가 쥐고 있다. 결과적으로 문 대표가 당의 분당을 재촉하는 정치인이 된다면 그것은 비극으로 종결된다. 문 대표는 차기 대권후보 지지율에서 1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대중 정치인이다. 그런데 자신이 대표로 있을 때, 당이 쪼개지고 내년 총선에서 참패한다면, 그가 또다시 대권후보가 될 수 있겠는가. 리더(leader)의 어원은 영국 내각에서 정당을 이끄는 정치지도자를 일컫는다.

복잡한 정치관계를 조정하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사람만이 내각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을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라고 했다. 문 대표는 과연 이 세 가지 덕목 중에서 자신이 갖추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길 바란다.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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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상황이 아니라 비상 상황, 아니 실제 상황이 되었다. 주말에 ‘대타협’이라 이름 붙은 노사정 야합이 이뤄지자, 정부·여당은 어제 새벽부터 당정협의를 거쳐 온갖 노동악법 밀어붙이기를 시작했다. 주말에 나온 합의문은 정부·여당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수확이었다. 재벌들 입장에서도 즐거운 비명을 지를 만한 ‘대야합’이었다.

“근로계약 체결 및 해지의 기준과 절차를 법과 판례에 따라 명확히 한다.” 애초 정부와 재벌이 추진했던 것은 근로계약 해지의 기준과 절차, 이른바 ‘쉬운 해고’를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그런데 은근슬쩍 ‘근로계약 체결 및 해지’라는 포괄적 개념이 합의문에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근로계약 전반에 관한 제도개선방안 마련”이라는 문구까지 들어 있어, 향후 가이드라인을 넘어 입법을 추진할 근거로 활용될 것임에 틀림없다. 근로계약 전반이라 했기에 해고만이 아니라 채용·승진·징계에도 업적과 성과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길까지 열린 것이다. 가이드라인 관련, “정부는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으며,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고 명시했으나 이 역시 눈 가리고 아웅이다. 노사관계를 다뤄본 사람이라면 ‘합의’와 ‘협의’가 천지차이란 사실을 안다. 전화 몇 통만 주고받아도 ‘충분한 협의’라고 주장하는 게 자본의 속성 아니던가.

반면 기간제법·파견법을 개악시켜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늘리고 수백개 업종에 파견을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실태조사, 전문가 의견수렴 등을 집중적으로 진행하여 대안을 마련하고, 합의사항은 정기국회 법안 의결 시 반영토록 한다”고 하여 정기국회에서 개악안 논의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이 문장에는 ‘협의’가 아니라 ‘합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정부와 재벌이 반대하는 내용은 절대로 반영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즉, 새누리당이 발의한 개악안대로 국회 논의를 강행한다는 뜻이다. 이러니 야합이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노사정 합의로 쉬운 해고와 저임금이 확산될 것이라며 노동개악에 맞서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앞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노사정 전체회의가 열리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삭발식을 했고, 체포영장이 발부 중인 한상균 위원장은 기자회견 장에서 삭발을 했다._김영민 기자


5인 이하 사업장으로 근로기준법 적용을 확대하는 문제는 추가 논의를 거쳐 내년 5월까지 대안을 마련한다고 한다. 내년 5월이면 이미 총선 뒤이므로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시점이다. 노동자의 책임은 수십가지가 구체적으로 적시된 반면, 정부와 재벌의 책임은 모호할 뿐 아니라 빠져나갈 구멍을 수십개씩 만들어 놓았다.

임금피크제로 청년 고용이 늘어난다는 것이 통계적으로도 말이 안된다는 다양한 입증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이번 야합은 임금피크제를 기정사실로 만들고 말았다. 반면 임금피크제로 청년 고용이 늘어나지 않을 경우, 정부와 재벌에 물을 수 있는 책임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노동자들만 고통을 전담할 뿐, 정부와 재벌은 만세를 부를 상황이다. 벌써부터 정부는 “(가이드라인 관련) 정부가 일방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임금피크제로 늘어날 고용이 있다면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뿐이다. ‘비용절감’ 때문에 임금피크제를 시행한다는 재벌들이 정규직 채용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여기에다 기간제법·파견법 개악까지 이뤄지면 이제 2년이 아니라 4년 동안 부려먹고 자유롭게 해고하는 세상이 열린다. 게다가 정부가 확대하려 하는 파견허용업종의 경우 2년, 4년 기간제한도 없이 ‘평생 파견’의 길까지 열어준다.

임금피크제로 장년층 임금을 깎고, 청년에게는 평생 비정규직의 짐을 지우겠다는 것이 박근혜표 노동개혁의 핵심이다. 쉬운 해고가 도입되어 잘리는 부모 세대를, 평생 비정규직 굴레를 짊어진 청년 세대에게 부양하라는 거다. 청년 세대에게 ‘헬 조선’ 입국 티켓을 나눠주는 짓이 도대체 어떻게 노동개혁이란 말인가.

야합을 막지 못한 민주노조운동의 책임있는 간부로서 부끄럽지만 이제 떠나자. 한국이 아니라 헬조선을! 청년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 야합은 부정돼야 한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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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일자리를 위하여 임금피크제를!”이라는 취지의 새누리당 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어 있다. 이러한 주장이 경제적으로 어떠한 논리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치적 수사로서의 효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청년세대와 장년·노년세대라는 사회적 대립 구도를 창출하고자 하는 기획을 담고 있으며, 이 기획이 성공할 경우 향후 몇 십년간 또 하나의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고립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임 금피크제를 시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청년 고용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임금피크제를 놓고 목소리를 높일 만큼 정년을 꼬박 채우는 것이 가능한 사람의 숫자도 많지 않다. 그런데 굳이 그 둘을 엮어 정치적 구호로 내놓는 것은 장기간 고용이 보장된 소수의 사람들을 찍어 장년층의 대표 집단으로 삼아 청년들의 답답한 고용 현실과 극적으로 대비시켜 결국 세대 간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겠다는 정치적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이는 현실화될 가능성도 높다. 청년들은 사회적·경제적으로도 중·장년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지만 문화적·감성적으로도 큰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 관계자들의 임금피크제 반대 기자회견_경향DB


그리고 이러한 혐오와 반목의 잠재적 감정을 자극해 득을 보려는 진보 쪽의 논객이나 정치인들이 반드시 나타나게마련이다. 자칫하면 이 ‘헬조선’의 운명은 젊은이들이 힘을 합쳐 온갖 기득권을 다 움켜쥔 저 ‘개저씨’들을 몰아내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식의 정서로 악화될 수 있다.

함정이다. 1992년 대선·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의 보수 지배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립 구조에 지배당해왔다.


이를 지역 대립 구도라고 표현하지만, 그 본질은 사실상 진보 개혁 세력의 지역적 고립에 있다. 호남과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사실상 보수 지배층의 정치적 텃밭이 되었고, 여기에서 유의미한 진보적·개혁적 정치세력을 일구어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득표수로 직결되는 인구의 수라든가 그 밖의 사회적·경제적 자원이라는 점에서 볼 때도 이러한 대립 구도는 진보 개혁 세력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기상천외한 정치공학을 통해 두 번의 집권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기간에도 여당은 오롯이 여당이 아니었으며 선거 때마다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불안하게 흔들리기만 했다. 이러한 ‘기울어진 운동장’의 틀이 지난 몇 십년간 전혀 변하지 않고 한국 정치를 결정하고 있다. 선거마다 승승장구하는 새누리당의 힘뿐만 아니라 허리 부러진 당나귀마냥 힘을 못 쓰고 시들어가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내분의 구조 또한 모두 이러한 구조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지금 모든 면에서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이 지역 구도 대신 특정 정치세력에게 유리하게 작동할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줄 새로운 대립 구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옛날의 지역 구도와 마찬가지로 이 세대 대립 구도 또한 인구의 숫자와 사회적·경제적 자원의 편중이라는 점에서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청년세대는 이를 꼭 기억해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의 끔찍한 노인빈곤율에서 보듯, 그러한 대립 구도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지금의 한국 현실에서 숨막히는 삶의 고통에 노출된 이들은 어느 세대에나 편재하며 그것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꾸 청년세대를 호명하는 척하면서 그 세대를 그 다수와 갈라놓고 ‘게토화’시키려고 한다면 선택은 분명하다. 청년세대는 스스로를 그 다수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수 전체의 바람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기성 지식인이나 청년 논객 할 것 없이 지금의 청년들을 뭔가 구별지어 특별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각종 형태의 ‘청년 담론’들을 즐비하게 내놓고 있다. 이것들을 조심하라. 답은 ‘다수화 전략’에 있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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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고속도로는 원성의 대상이다. 길이 막혀 저속도로가 된 곳도 많고 상습 정체도 심하다. 노면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휴게소 등 부대시설이 부족한 곳도 너무 많다. 그래도 통행료는 꼬박꼬박 챙긴다. 경인고속도로는 개통된 지 47년이고, 경부고속도로는 45년이 지났다. 그동안 받은 통행료라면 건설비용은 물론 거의 영구적이랄 만큼의 유지·보수 비용까지 다 챙기고도 남을 텐데, 여태껏 통행료를 받고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도로 건설 탓을 하지만, 이미 국토 대비 도로율 세계 1위의 국가가 끝도 없이 도로 건설에 집착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별 필요도 없는 고속도로를 자꾸 만들면서 그 부담은 국민에게 떠넘기는 꼴이다. 이런 평소 불만이 그날 하루만큼은 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느닷없는 선물 같았다.

정부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8월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서 이날 하루 동안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준 것이다. 민자 사업자의 10개 고속도로 노선도 전부 공짜였다. 정부는 국민의 사기 진작과 내수 활성화를 위한 조치라고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이번 조치의 내수 진작 효과가 1조4000여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날 하루 동안 면제해준 통행료는 141억원이었다.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만으로 내수가 진작된 것도 아니고, 전경련 산하 연구원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수도 없지만, 엄청난 효과인 것만은 사실일 게다.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는 처음 있는 일이다. 호응은 뜨거웠고, 많은 차량이 몰린 것도 당연했다. 하루 518만대, 역대 최고치였던 지난해 추석의 525만대에 이은 두 번째 기록이다. 전국 등록차량 4대 중 1대꼴로 고속도로를 이용한 거다. 그래도 극심한 교통정체는 없었고, 소통은 원활했다. 요금소 부근에서 막히는 병목 현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도 3건뿐이었고, 사망자는 없었다.


귀성 차량이 고속도로에 늘어선 모습_경향DB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는 단박에 결정되었다. 대통령의 의지였는지, 국토교통부 장관이나 한국도로공사 사장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별 준비 없이도 누군가가 결심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래된 고속도로부터라도 통행료 면제를 당장 시행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만약 어렵다면, 설과 추석 등 큰 명절 때만이라도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를 시행하자. 임시공휴일에도 했는데, 민족 최대의 명절에 못할 이유가 없다.

정부가 말하는 ‘사기 진작’과 ‘내수 진작’은 물론, 시민들이 고속도로에서 지체하며 허비하는 시간과 기름값 등의 비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명절에도 쉬지 못하는 요금소 수납 노동자들도 명절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이왕 좋은 선물을 맛보여준 만큼, 진짜 선물을 필요할 때 해주면 좋겠다. 이웃 나라 중국만 해도 큰 명절엔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준다. 1년이면 20일이나 된다. 춘제(설날)와 국경절에는 각각 일주일, 청명과 노동절에는 3일 동안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준다. 대만은 진작부터 명절 때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왔다.

한국에서 국민으로 살면서 정부로부터 대접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내 ‘법질서 확립’을 외치며, 무서운 얼굴로 주눅들게 하는 게 주로 정부의 역할이었지, 웃는 낯으로 선물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팍팍하고 고단한 삶인데, 명절 기간만이라도 고속도로 통행료를 전부 면제함으로써 좋은 선물을 받는 기분을 느껴보게 하자. 한국도로공사와 민자 사업자의 수입은 줄겠지만, 나라 전체로는 훨씬 이익이다. 한국도로공사의 적자가 걱정일 수 있겠지만, 어차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기업이니 얼마간의 손실은 큰 문제가 아니다. 쓸모없는 고속도로 건설만 좀 신중하게 해도 얼마든지 감당하고도 남을 액수다. 좋은 선물을 받고 느끼는 국민들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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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의 ‘삼미신’ 그림을 보면 누구나 여신들의 비만한 모습에 놀란다. 당시 기준으로는 마른 여성보다는 포동포동한 여성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의 기준이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물이 짝짓기할 때 고려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새끼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따라서 암컷은 수컷이 힘이 세어 자녀를 위해 먹을 것을 책임질 수 있기를 바라고, 수컷은 암컷이 새끼를 많이 낳아줄 만큼 건강할 것을 기대한다. 물론 인간의 미의 기준을 동물의 짝짓기로 모두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미의 기준이 건강에 대한 개념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는 점만은 명확하다.

인류는 수백만년간 영양결핍의 시대를 살아왔고, 기근의 시대를 벗어난 건 불과 수십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영양결핍의 시대에는 살이 포동포동한 여성이 건강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과영양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비만은 질병과 사망의 원인이 돼버렸고, 심지어는 게으른 인간으로 매도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날씬한 남성이나 여성이 건강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간주된다.

비만에 관한 세계보건기구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 18세 이상 성인의 39%는 과체중이고, 13%는 비만이었으며 이를 인구로 계산하면 과체중은 19억명, 비만은 6억명에 이른다고 한다. 비만은 당뇨병, 심장질환, 뇌졸중, 유방암과 대장암을 비롯한 몇 종류의 암, 관절염의 원인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비만이 가장 빠르게 증가한 국가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비만의 진단 기준이다. 비만은 불필요한 지방 축적 때문에 고혈압, 당뇨, 동맥경화, 암(유방암과 대장암)을 일으키는 질병인데, 비만의 진단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비만 정도에 따라 이런 질병에 얼마나 잘 걸리는지, 또 비만에 따라 사망률이 얼마나 높은지에 대한 통계가 필요하다.


비만이 생기면 당뇨 발생 위험이 늘어나는데, 간이나 근육, 내장에 축적된 지방의 양이 가장 예민한 예측인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내 지방량은 측정이 어렵고 객관화가 어려워 현재는 허리둘레를 많이 사용한다. 대한비만학회는 배꼽을 기준으로 허리둘레를 재어 남성은 85㎝ 이상, 여성은 80㎝ 이상일 경우 복부비만이라고 기준을 정했다. 그러나 허리둘레는 키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키를 고려한 체질량지수(BMI)가 현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진단 기준이다.


우리나라 성인의 연령별 비만율_경향DB


1993년 세계보건기구는 비만의 진단 기준을 정할 때 체질량지수 25 이상은 과체중, 30 이상은 비만으로 정했다. 당시 사용한 통계자료는 서구인들의 자료를 사용한 것이었다. 2000년에 아시아 인종은 체질량지수가 낮아도 당뇨를 비롯한 질병이 많이 발생한다는 근거자료를 토대로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 지역 비만전문가들이 논의한 결과 아시아 인종은 비만 진단 기준을 대폭 낮춰 체질량지수 23 이상을 과체중, 25 이상을 비만으로 정했다. 논란이 많은 이 진단 기준을 적용한 결과 우리나라의 비만 환자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아시아·태평양 비만 기준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의미심장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114만명의 인구자료를 이용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 국민들을 조사한 결과 체질량지수가 22.6 이상~27.5 미만일 때 사망 위험이 가장 낮았다. 이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그동안 적용했던 체질량지수 25 이상을 비만으로 규정하고 치료하는 것은 과잉진료를 양산하는 셈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비만 정도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미국에서는 비만 기준을 체질량지수 30 이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미국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의하면 성인 남자 35.5%, 여자 33.4%가 비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비만 기준을 25 이상으로 사용하면 성인 남자의 38.7%, 성인 여자의 28.1%가 비만으로 나와, 남성 비만율은 미국보다 높게 된다. 현재 비만 기준은 재검토돼야 한다. 체질량지수 25 이상을 비만으로 규정할 경우 건강한 국민들 일부가 비만 환자가 되어 불필요한 진료, 불필요한 걱정, 불필요한 자기 비하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홍관 | 국립암센터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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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500일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결했는지를 돌아본다. 해결된 것이 없다. 잊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잊었고, 그만 잊고 싶어한다. 아직도 세월호냐며 타박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해결하겠다고 말했지만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외면하고는 다르다. 외면이 모른 척하는 것이라면 이 ‘외면’은 해결의 가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차마 죽인 이들과 떠나보낸 이들을 마주 대하기 힘들어서 고개를 돌리는 것에 가깝다. 이것이 세월호에 대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유일하게 성공한 점일 것이다. 절망감 때문에 서로 만나려 하지도 못하는 것 말이다.

이 과정에서 더 커진 것이 있다. 유가족들의 고통이다. 고통은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진다. 특히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와 나눌 수 없는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그 고독감만 더 커질 뿐이다. 흐른 시간의 길이만큼 고통이 된다. 시간은 그 고통을 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아직은 존엄하다. 고통이 절대적으로 고독한 만큼 숭고함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간힘을 다해 고통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도 된다. 고통을 말하는 데서 뜬금없이 죄스럽게 숭고함이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절대적 고독성은 나눌 수 없는 고통이기에 오히려 혼자서 짊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고통의 절대성에 몸부림쳐본 사람은 이 지독함의 아이러니를 알 수 있다.


시민들이 세월호 희상자들의 사진을 걸어 만든 '기억의 문' 아래로 지나가고 있다._경향DB



고통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 때문이다. 고통을 혼자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고 할 때 고통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절대적인 고독함으로 인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고통을 당한 사람이 느끼는 일차적인 상태는 ‘소외’다.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언어로도 자신의 고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한편에서는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언어로부터 소외된다. 고통을 당하는 몸과 그 고통을 당하는 언어, 이 양쪽 모두로부터 소외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고통이다.

더구나 고통을 해결하려고 할 때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호소할 수 있는 말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해결하려고 할 때 고통을 당한 이는 ‘타락’해야 한다. 그는 고통을 ‘협상’해야 하고 타인의 언어와 ‘타협’해야 한다. 해결하기 위해 점점 더 진부한 말로, 점점 더 상투적인 말로 고통을 호소해야 한다. 자신의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와 ‘타협’해야 한다. 그렇게 호소할수록 고통은 점점 더 멀어지고 고통받는 이는 고통 자체로부터 소외된다. 고통을 당한 몸, 고통에 대한 언어에 이어 고통 자체로부터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에게 남는 것은 ‘타락’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세월호의 유가족들과 그 곁에 선 이들은 이 고통의 타락을 감수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의 절대적 고독감이라는 ‘미학’에 빠지지 않고 해결을 위해 타락의 고통을 감수하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엄을 버려야지만, 존엄을 버리는 ‘비장함’조차 버려야지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넘어 이제는 이들의 이 마지막 고통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절대화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이 고통의 타락, 타락의 고통을 조롱하며 이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가. 아니면 응답할 것인가.


엄기호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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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초, 부산에 상륙한 미군들이 대오를 정비하는 즉시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처음 미군은 북한군을 얕잡아 보았으나, 전투 양상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낙동강변 고지에는 나무가 없었고 참호를 팔 시간도 없었다. 몸을 숨길 엄폐물을 찾지 못한 채 적과 마주 보면서 총을 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조차 그 공포를 견디지 못했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군인들 상당수가 군의관을 찾아 정신적 불안을 호소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1000명당 249.7명이 정신질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미군과 함께 처음 현대전을 치른 한국군 중에는 그런 판정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물론 한국군의 정신력이 미군보다 월등했기 때문은 아니다. 군의관 중 정신과 의사가 거의 없었던 데다가 그런 상황에서 겪는 공포는 ‘정상’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10월 중순, 평양에 진주한 미군은 한국군의 행동에서도 ‘비정상성’을 발견했다. “한 건물 안에서 적들이 우리에게 총격을 가했다. 우리는 창문을 향해 두 발을 쐈고 여러 명의 북한군이 손을 들고 나왔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날이 추워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옷을 벗겼다. 추운 날씨에 그들이 뭘 어쩔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군 병사가 그들 주위를 돌더니, 갑자기 한 명을 쏘았다. 두 번째 북한군 병사가 총에 맞은 뒤, 우리는 한국군을 쫓아버렸다.”(BATTALION SURGEON, KOREA 1950-1951) 미군이 볼 때 이런 행동은 명백한 제네바 협정 위반이었고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였으나, 한국군 대다수는 이를 전쟁 도발자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표현으로 여겼다. 결국 미군은 한국군에게는 포로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전쟁 중 포로 관리의 전권을 미군이 쥔 이유 중 하나다.

미군은 다른 현장에서도 한국인의 ‘비정상성’을 발견했다. 미군 군의관들은 한국군 동업자들을 ‘절단의 천재’라 불렀는데, 천재라는 단어의 어감과는 달리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조금만 더 정성을 쏟으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팔다리도 한국군 군의관들은 덮어놓고 잘랐다. 미군 군의관에게 이는 의사로서 ‘비정상적인’ 태도였으나, 적절한 재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밀려드는 부상병을 신속히 ‘처리’해야 했던 한국군 군의관에게 이는 극히 ‘정상’이었다.

전쟁은 본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인간성의 바닥을 드러내게 한다. 예의, 염치, 배려, 동정 등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가치들은 완전히 소멸하거나 최저 수준만 남는다. 그런데 같이 전쟁을 치렀건만 미군의 최저 수준과 한국군의 최저 수준은 또 달랐다. 이것이 단지 남의 땅에서 벌어진 전쟁과 자기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차이에서만 기인한 것일까? 어쩌면 한국인들이 그런 전쟁을 처음 겪었기에, ‘전쟁의 규칙’과 ‘전시의 문화’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당대 양국민이 도달한 문명 수준의 격차를 표현한 것이었다.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면 늘 ‘전시의 기억’이 소환되며, 더불어 평시의 ‘정상성’이 후퇴하고 전시의 ‘정상성’이 전면에 나선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던 군사적 대치 상태가 해소된 바로 그날 점심시간, 식당 옆자리에 앉은 노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나는 이번 기회에 정말 불바다 만들기를 바랐어.” “맞아. 사람이 조금 죽더라도 속 시원하게 본때를 보여줘야 했어.” 그들은 수십만이 될지 수백만이 될지 모르는 사망자와 가족 잃은 애통함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조금’이라고 표현했으며, 그 ‘조금’의 희생과 자기의 ‘속 시원함’을 맞바꾸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데 국제 기준에서는 ‘전쟁광’이나 할 말이라고 비난받을 저런 발언이, 지금의 한국에서는 극히 ‘정상’이다.

군사적으로 대치 중인 분단국가에 사는 한 평시의 정상성과 전시의 정상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상성’을 재구성하는 시점을 선택하는 것도 보통사람의 권한 밖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의 기억이 거듭 소환된다고 해도, 인간성의 바닥마저 6·25 당시 수준에 묶어두어서는 안 될 터이다. 그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죄이며, 무엇보다 자기 인간성에 대한 범죄다.


전우용|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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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다. 자칫 여당 대표의 정치생명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무성 대표가 오픈프라이머리 관철에 그의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으니, 그의 도전의식과 모험심을 칭찬해주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일단 김무성 대표가 주장하는 오픈프라이머리는 정치개혁이 아니다. 오히려 정당 민주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동안 주로 야당에서 실시했던 국민참여경선제와 선거인단을 모집해서 실시했던 예비선거는, 저조할 수밖에 없는 참여율 때문에 조직 동원과 금권선거, 선거 불복 등 숱한 잡음을 낳았다. 또한 후보자에 대한 검증은 현역 의원이나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유리할 뿐, 정치적 신념과 개혁의지를 안고 있는 정치신인들을 낙마시키는 기득권 유지의 교묘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는 그 범위를 더욱 넓혀 당원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라도 경선에 참여할 수 있는 오픈프라이머리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일상생활에 쫓기는 국민들, 만연된 정치불신 풍토에서 어느 누가 특정 정당의 예비선거에 참여하겠는가. 결국 한국의 오픈프라이머리는 자기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정당 공천은 해당 정당이 후보자들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절차를 중첩적으로 보강하여 참여와 경쟁, 그리고 대표성에 입각해서 후보 선정을 하는 것이 본질이다. 목전의 선거이미지만을 위해 변형된 후보공천 방식을 채택하는 행위는 정당정치마저도 퇴행시키는 일이다. 외국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정당 기반의 약화로 프라이머리(당원경선제도)를 차용했던 유럽의 일부 정당들 역시, 프라이머리제도가 오히려 정당의 소수 엘리트들만의 권한만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기존 제도를 보강시켰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정당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픈프라이머리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의외성의 결과에 당황한 경험도 있다. 1991년 공화당의 루이지애나 주지사 예비선거에서 당선된 데이비드 듀크는 인종우월주의자의 대변자였으며, KKK단 단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의 주지사 후보가 되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눈을 감은 채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_경향DB


그렇다면 이렇게 혼란을 자초할 오픈프라이머리를 고집하고 있는 김무성 대표의 속내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권욕일 것이다. 오픈프라이머리제에 숨어있는 마법을 이용해 보고자 함이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슬로건은 김 대표를 대단한 민주주의자로 오인하게 만든다. 또 마치 민주적 공천을 한 것처럼 위장시켜 내년 선거에서 승리자로 발돋움하기 위함일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줄타기 정치행보는 세간의 비난을 받아왔다. 박 대통령이 눈빛과 말 한마디에 그의 소신은 사라져 버렸다. 개헌론도 없던 일이 되어버렸고, 의회민주주의를 관철시키려 했던 원내대표도 희생양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오픈프라이머리로 그가 민주주의자가 되는 착시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더 황당한 일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응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오픈프라이머리 제도를 버터제로 협상하겠다고 했지만, 김 대표에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이미 국민참여경선제를 먼저 실시했고, 시행과정에서 숱한 후유증을 경험했기에 더욱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오픈프라이머리는 양당이 합의해야 실시될 수 있다. 그런데 김 대표가 야당의 협상안에 대해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픈프라이머리는 그의 위장된 신념일 뿐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튼 그의 의도대로 오픈프라이머리든, 변형된 그 무엇이든 여당은 혼란과 후유증에 시달리겠지만, 민주주의로 위장된 기득권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야당의 반대와 새누리당 내부의 반발로 오픈프라이머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김 대표는 그냥 민주주의자로 남으려 할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정치적 이중성이 그대로 간직될지 두고 볼 일이다.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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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 해 20조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지만 정규직 고용은 고작 5000여명 늘어났다. 이게 어디 얘기일까. 국내 1위 재벌인 삼성그룹의 18개 상장 계열사들 얘기다. 이들 18개 상장사의 감사보고서, 그리고 고용형태 공시제도에 따라 이들이 공개한 수치를 바탕으로 계산한 것이다. 계약직과 간접고용 등 비정규직은 7000여명 늘어났으니, 비정규직을 합해도 고작 1만2000명의 고용 증가에 불과하다.

그나마 늘어난 고용의 대부분은 삼성전자에서 발생할 뿐, 나머지 기업들의 성적표는 형편없다. 3조원대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한 삼성생명보험은 정규직 1125명, 비정규직 543명이 줄었다. 오히려 구조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합병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역시 각각 3000억~40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지만, 정규직 고용에는 큰 변화가 없는 반면 비정규직은 4000~6000명씩 늘어났다.

2위 재벌 현대차그룹 사정은 좀 나을까. 현대차(5조원), 기아차(2조4000억원), 현대모비스(2조원)를 합하면 10조원 가까운 당기순이익을 기록했지만, 정규직 고용은 2322명 늘어났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현대차는 정규직이 1546명 늘고 비정규직이 382명 줄어 외형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을 뜯어보면 다르다. 불법파견 판결이 줄을 이어도 정규직 전환을 거부하고 있는 현대차는 사내하청 중에서만 정규직을 선발하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한다. 이는 당연히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에게 은근한 탈퇴 압력으로 작용한다.

사내하청 중에서 1500여명이 정규직으로 선발되었으면 그만큼 비정규직 숫자가 줄어야 마땅한데 고작 382명만 줄었다는 건 뭘 의미할까. 사내하청을 정규직으로 선발한 뒤 그 자리를 다시 비정규직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1, 2위 재벌인 삼성과 현대차의 상장 계열사 29개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을 합하면 31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정규직 고용은 모두 합해 8688명이 늘었을 뿐이다. 비정규직 고용 증가도 7621명에 그쳤으니 지난해 삼성과 현대차에서 직간접적으로 늘어난 총고용은 고작 1만6000여명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부터 법인세를 인하하고 각종 세제 혜택을 부여한 결과, 재벌 기업들은 투자와 고용을 오히려 줄였다. 투자와 고용을 줄이니 이윤은 넘쳐나는데 나가는 돈이 없어 사내유보금만 그득그득 쌓여간다. 3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만 700조원이 넘는다 하니, 한국 정부의 2년 예산과 맞먹는 수준 아닌가!

박근혜 정부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정년을 앞둔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대 재벌 사내유보금 중 10%인 70조원만 있어도 수십만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데, 쉬운 길을 놓아두고 엉뚱한 길을 고집한다.

그래놓고 내놓은 비정규직 대책이 뭔가. 하반기에 법을 바꿔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자고 한다. 부모세대 정년연장을 빌미로 임금 깎아서 청년세대 비정규직 고통을 연장하자는 것 아닌가!

부모세대와 청년세대를 갈라놓지 않을 수 있는 쉬운 해법이 있다. 이들 모두에게서 엄청난 이윤을 뽑아가는 재벌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길이다. 그동안 깎아준 법인세를 원상회복하고, 재벌 대기업에는 강력한 누진세를 적용하고, 이를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대폭 인상하는 길이다.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면 잔업·특근으로 부족한 임금을 벌충하는 일이 줄어들어 노동시간도 단축된다. 노동시간 단축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 청년 고용절벽 해소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첫걸음! 재벌에게 책임을 묻는 것부터 출발하자.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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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없는 아베 정권이 딱하다. 스스로 발목 잡는 짓을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독일이 일본에 비해 과거청산에 적극적인 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전후 20여년 동안 독일에서는 이렇다 할 과거청산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만도 못했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유럽의 68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진행된 새로운 사태가 독일을 변화시킨 거다. 독일은 고립에서 벗어나야 했다. 때맞춰 사민당도 집권에 성공한다.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된 것이다. 동아시아엔 이에 견줄 만한 사태가 없었다. 동아시아가 함께 도약할 만한 민중의 승리는 없었다. 일본 자민당은 여전히 공고하고, 일본 야당의 집권 가능성은 별로 없다. 과거에 대해 짐짓 모르쇠로 일관했던 독일의 변화는 제대로 된 역사는 안팎의 노력만큼 성취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본이 침략전쟁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명백한 과거를 두고도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가 있다. 여러 공직자들은 쿠데타를 두고도 머뭇거린다. 아마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기 위해서일 거다.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역사적·법률적 판단도 못하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겠다니 답답할 뿐이다.

이건 단순히 도덕적 불감증이나, 도덕적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국가에는 엄연히 공통의 기준이 있다. 바로 헌법이다. 헌법은 시민과 국가의 관계, 국가의 운영 원리, 곧 국가의 기준을 정해둔 최고위 규범이다. 헌법이 있는 한, 최소한 5·16과 12·12 등 두 차례의 헌정질서 파괴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일 뿐이다.

직접 쿠데타에 가담하거나 국민을 탄압했던 가해자도 아닌 사람들이 이 지경이니, 가해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구 하나 반성하지 않고 있다. 진심이 담겼을지 모를, 다만 말뿐이라도 과거에 대해 고백하고 반성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베 일본 총리가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연설을 마치고 자리를 뜨고 있다._경향DB



냉전시대 영국 국방장관 존 프러퓨모.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이었다. 그렇지만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소속 장교의 애인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가 알려져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성추문의 하나였다. 사건 직후 프러퓨모는 런던의 복지기관 토인비 홀을 찾아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1963년부터 40년 동안, 그는 묵묵히 자원봉사만 했다. 그저 자신의 몸을 움직여 부지런히 봉사활동에만 매달렸다. 뼈저린 반성, 철저한 속죄의 삶이었다. 당장 프러퓨모보다 더한 이 땅의 악당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개중에 진정 어린 속죄를 한 사람은 없었다.

러퓨모 식의 개인적 결단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래 좋은 사람이었거나, 가족이나 좋은 친구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20여년 전 성공한 쿠데타의 주범들을 단죄하던 것과 같은 국가 차원의 노력이나, 프러퓨모 식의 개인적 결단 모두 찾아볼 수 없는 오늘의 상황은 반성 없는 아베 정권의 일본과 꼭 닮아 있다. 그래도 40~50대 지식인들이 ‘반헌법 행위자 열전’을 펴내겠다고 나서니 위안이 된다. 이 사업을 주도하는 한홍구 교수는 반헌법 행위자들을 현실의 법정에는 세우지 못했지만, 적어도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 국가도 당사자도 꿈쩍하지 않을 때, 우리 시민들이라도 나서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헌법의 원칙을 확인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는 공소시효도 없다.

기억은 모든 생각의 뿌리이며, 때론 무기가 된다. 유엔조차 가장 실효성 있는 무기로 ‘거명하고 창피 주기(Naming & Shaming)’를 꼽고 있다. 반헌법 행위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이름 석 자를 분명히 기록하고 기억하자. 그게 ‘헬 조선’으로 전락한 이 나라에서 그나마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길이다.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며 나라를 살리는 시작이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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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거에서 ‘북유럽형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가 뉴햄프셔주 여론 조사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7%포인트 앞지르는 이변을 낳았다. 또 영국 노동당이 치르고 있는 당수 선출 과정에서 전통적인 강경 좌파 제러미 코빈이 2위를 멀찍이 따돌린 압도적 1위로 승리를 굳혀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곧바로 영국 및 미국 정치의 좌선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샌더스 후보의 승리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또 코빈이 실제로 당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노동당의 각료들 및 온건파 의원들의 반발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명무실의 당수가 될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시간의 지평선을 좀 더 늘려서 현 상황을 본다면, 당면한 선거의 승패보다 더 의미심장한 흐름 하나가 보인다. 30년 가까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떠받쳤던 영·미 등 서구의 ‘중도 정치 합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구조 변화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에 나타난 수정 자본주의 체제가 극좌 극우를 배제한 중도좌파 및 우파의 정치적 합의 위에 성립하였듯이, 신자유주의적 질서 또한 1990년대 이후의 중도좌파 및 우파의 정치적 합의를 기둥으로 삼아 작동할 수 있었다. 그 가장 중요한 계기는 중도좌파 진영의 패권이 시장주의와 지구화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세력에게 넘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노동조합과 공공 부문에 주로 의존하는 전통적 좌파와 깨끗이 단절하고, 시장 개혁과 지구화의 효율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면적 사회개혁을 약속하였다. 이를 통해 시장주의와 지구화는 좌우를 아우르는 제도 정치의 합의가 되었고, 이를 부인하고 반대하는 세력이나 담론은 극좌 극우로 몰려 비주류의 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좌파 정당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우파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합의를 (혹은 합의의 외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이가 바로 ‘신노동당’을 창건했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였고, 비슷한 시기 미국 민주당 정권을 이끌었던 클린턴 전 대통령의 노선도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해야 한다.


9일 CBS방송의 정치인터뷰 프로그램 ‘페이스 더 네이션Face the Nation’에 출연한 버니 샌더스 버몬트주 상원의원_경향DB



그런데 지금 미국과 영국의 진보 정당 내에서 샌더스와 코빈이 대표하고 있는 변화의 흐름은 바로 그러한 ‘좌파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염증과 피로의 폭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흐름이 타깃으로 삼은 것도 블레어의 자손들이라고 할 세 명의 온건파 후보들, 그리고 성과 이름만 다른 또 다른 클린턴 후보이다. 물론 이러한 염증과 피로는 그 동안에도 항상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며, 이러한 좌익 반대파는 항상 ‘낡은 구닥다리 좌파들’이라고 치부되어 소수파의 위치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게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샌더스나 코빈이나 옛날 좌파들의 낡은 구호를 내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현실은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의 경제침체 속에서 오히려 더욱 심각해진 불평등이며, 이들의 주된 메시지는 시장주의와 지구화의 수사학 속에서 행해져온 부자감세 및 복지 삭감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기에 좀 더 평등한 사회·경제 질서 수립을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좌파 신자유주의 노선’이 지난 30년간 축적해온 바로 2015년 지금의 병폐와 모순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나이가 든 옛날 좌파들이 아닌 각계각층의 젊은 세대에게서 더욱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이나 이념의 문제에 대해 큰 선입견이나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은 청년실업, 학자금대출, 주거 및 생활안정 등 2008년 이후의 암울한 경제 현실에서 자신들이 얻은 경험을 근거로 그러한 호응을 보이고 있다.

제비 몇 마리가 봄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 담론이 지구적으로 확산되던 과정과 또 하나의 닮은 점을 본다. 1970년대에도 신자유주의 실험의 시작은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었고 그것이 이후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으로 이어졌었다. 얼마 전에는 그리스에서 시장주의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시리자 정권이 들어섰다. 이제 그 흐름이 영국과 미국의 진보 및 중도 좌파 정당으로 옮겨가는 것일까. 시장주의와 지구화라는 중도정치의 합의가 이제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일까. 두 나라에서 진행 중인 선거를 숨죽이고 지켜볼 뿐이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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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초기 경전인 빠알리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계실 때 브라만인 악꼬사까가 자기 가문의 한 브라만이 부처에게 출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그 욕을 듣고 부처는 악꼬사까에게 당신의 집에 친구나 동료들이 방문하러 오는지를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하자 부처는 그들에게 다과나 음식을 대접하는지를 물었다. 어떤 때는 대접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그 음식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냐고 또 물었다. 그가 자기가 대접한 이들이 음식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부처는 악꼬사까에게 당신이 준 욕을 내가 받지 않았으니 그 욕은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처의 이야기는 사람들 간의 유대가 만들어지는 두 가지의 길을 보여준다. 하나는 음식이나 다과와 같은 선물이다. 모스의 증여론에 따르면 선물과 증여는 세 가지 계기가 있다. 선물을 주는 것, 받는 것, 그리고 돌려주는 것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선물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는 그 선물을 준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 선물을 주고받고 돌려주는 것을 통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시간의 길이만큼 ‘유대’가 발생한다. 그 시간의 길이가 신뢰다.

그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꼭 두 사람일 필요는 없다.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고리도 신뢰에 따라 결정된다. 서로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신뢰감이 있다. 선물이 돌고 돌아 언젠가는 나에게 올 수 있다는 믿음이 관건이다. 이런 선물을 주고받는 신뢰감을 가진 고리가 상호부조의 연결망이 된다. 이것이 ‘사회’라는 걸 만드는 단초가 된다.

부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회를 만드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요소를 발견한다. 욕이다. 주고받고 돌려줘야 하는 선물의 반대편에 욕, 즉 모욕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언젠가는 이 모욕을 돌려줘야 한다. 모욕을 청산하기 전까지 그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 선물의 역할을 모욕이 대신하는 것이다. 이 연결고리를 지속시키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원한’이다. 선물을 통해 유대감을 가진 신뢰의 연결망이 만들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모욕을 통해서는 원한의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목아박물관의 부처상 _경향DB



모욕 또한 선물처럼 반드시 두 명 사이에서 주고받고 돌려줄 필요는 없다. 차이는 있다. 신뢰의 연결망이 돌고 돌아 나에게 오는 원형의 구조라면 모욕은 나보다 더 권력이 없는 약자에게 향한다. 직장 상사에게 당한 모욕을 직장 상사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부하에게 돌려주고 그 부하는 하청직원이나 커피숍에서 일하는 알바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이 모욕은 자신도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한국 사회는 선물을 주고받고 돌려주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신뢰의 연결망으로서의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늘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살면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려줄 기회만을 바라는 원한의 피라미드다. 그래서 모욕을 가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적당한 대의명분은 붙이기 나름이다. 도덕의 이름으로 가장 반윤리적인 일이 벌어지지만 이것은 모두 내가 상처받았고 그걸 돌려줘야 한다는 걸로 정당화된다. 이건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긴 하지만 반사회로서의 사회다.

이 반사회에서 탈출할 방법은 뭘까. 모욕을 주지 않거나 받지 않을 수 있거나 돌려주지 않으면 된다. 부처는 받지 않았다. 단 우리 모두가 부처가 아니기에 모욕을 거부하는 것은 부처와 같은 ‘현명함’이나 ‘용기’가 아닌 ‘권리’여야 한다는 점이다. 힘없는 사람 누구나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 때 비로소 모욕은 받지 않아도 되고 강제로 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인내심과 용기를 요구하지 말자. 대신 권리를 주자. 차별금지법과 같은 법말이다. 지옥이 된 반사회를 넘어서려면 말이다.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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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생에 잊지 못할 고통이 되던 것은 만세운동 당시지요. 하루에 많은 날은 백여명씩 쑥쑥 들어 밀리는데 그들은 감옥 안에서도 자꾸 만세를 불러 온 옥 안이 만세소리로 떠나갈 듯했습니다. 상관들은 감시가 불충분하다고 자꾸 책망하고 우리는 그들을 선생님으로 깍듯이 모시던 터라 함부로 제재도 할 수 없고 참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70~80명 되는 조선인 간수들끼리 의논이 돌아 당장 그만두자는 말까지 났습니다마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1926년, 현직 간수 박성완이 검열에 걸릴 줄 알면서도 실명을 공개하고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일제 당국의 반복적이고 체계적인 교육도 그의 마음에서 ‘동포애’를 지우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투기적 이익을 노리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 기업에서 근무하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는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낼까? ‘충군(忠君)’ 뒤에 붙는 형태로나마 ‘애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그 전의 국가권력은 신민에게 충(忠)과 의(義)를 요구했을 뿐 애국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충군애국’이라는 말 자체가 군주와 국가의 분리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의 탄생은 그 자체로 ‘국민국가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 때나 1910년 강제병합 때 자결한 사람들과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 대다수는 오히려 ‘애국’이라는 새 개념을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한민족운동단체연합 인사들이 17일 국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 100주년을 맞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독립유공자들의 캐리커처를 든 채 일본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_경향DB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애국’은 두 개의 상반된 의미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군주와 분리된 동포애, 민족애였다. 나라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 마음을 ‘애국심’이라 부르기는 어려웠으나, 그래도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애국심이란 말로 표현하곤 했다. 물론 이런 마음을 배양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은 불가능했다. 또 하나는 일본 군주와 결합된 애국심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이 종류의 ‘애국자’로 만들기 위해 훈련과 교육을 체계화하고 숱한 상징들을 동원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황국신민의 서사 낭송, 신사참배, 동방요배 등 애국심 함양을 위한 의례와 행사들에 ‘자발적’으로 동참했고, 일부는 자기 제자들에게 ‘천황폐하를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애국자의 자세’라고 외쳤던 이 수많은 ‘애국자들’ 중 일본이 패전했을 때 자결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해방 이후 나라 잃은 설움에 대한 기억, 순국선열이 보인 모범,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에 대한 회한과 분노, 여전히 국가 단위로 경쟁이 이루어지는 세계에 대한 인식 등은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가장 고결한 삶’이라는 애국주의 담론을 뒷받침했다.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그를 바꾸려는 사람들도 다 자기들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믿었다. 국가는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자기 국가를 더 나은 국가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90년대 말에 공개적으로 표출된 ‘영어 공용화’ 주장이 이런 태도의 균열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라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국경이 없다’고 말했으나, 실제로 사람들의 의식 안에서 국경을 허물거나 모호하게 만든 것은 자본이었다.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의식만 특정 공간에 묶어둘 수는 없다.

입시지옥, 취업지옥, 생계지옥을 겪는 젊은 세대가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떠나려 한다. 이는 방탕하고 포악한 남편이라도 자기 운명이라 여기고 일방적으로 헌신하던 사람이 사라진 것과 같은 현상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동포니 겨레니 하는 단어들의 현실감을 무너뜨렸다. 전근대적 운명론보다 자본주의적 계약에 훨씬 익숙한 젊은 세대가 국가를 기업처럼 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더 싼값에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좋은 기업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젊은이들이 양산되는 이유를 고작 ‘애국심 교육’ 부족에서 찾는다. 공무원 시험에서 애국가 4절을 외라고 시키는가 하면, 정부 관리들은 옷깃에 태극기 배지를 달기 시작했다. ‘국민의식’과 관련된 교과목은 국정교과서로 되돌리려고까지 한다. 이런 교육과 훈련, 선전과 계몽의 효과는 과거에도 의심스러웠는데,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한 지금에랴. 국경이 모호해진 세계에서 자아실현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주는 국가를 ‘선택’할 준비가 된 사람들의 마음을 애국심 교육으로 붙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는 길은, 그들이 원하는 기회를 제공해주거나 최소한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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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이의 어느 날, 대학가 허름한 선술집에서였다.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전태일이 살아서 지금 한국의 노동현실을 보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천국’이라고 할 거야.”

천국? 그리 짐작할 수 있는 현실의 변화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분명 있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을 불살랐던 20년 전에 비하면 말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라는 어엿한 조직 재화를 보유하게 됐다.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1989년에 들어서는 노조 조직률이 지금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20%에 육박했다. 1988년 11월13일에는 ‘전태일을 계승하자’며 그의 분신 이후 최초로 노동자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라 대학생과 시민들도 대회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이 다시 극심해지기도 했다. 1988~1991년 시기 노동관계법과 집회 및 시위법 등에 의해 구속된 노동자가 2000명을 넘은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는 전두환 군사독재 시기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1989년 인천의 남동공단에 위치한 어느 사업장에서는 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구사대’가 염산을 뿌려대기까지 했다.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 때는 식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런 끝에 1987~1989년 사이 1000여건에서 3000여건에 달했던 노동쟁의 발생 건수가 1990~1991년 사이에 200~300여건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국가와 자본의 노골적인 폭력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필자의 선배가 천국 운운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염원과 열망을 전태일처럼 좁다란 골목에서 홀로 외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2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전태일이 ‘산화’한 지는 45년이 되었다. 전태일이 살아서 지금 한국의 노동현실을 보면 뭐라고 할까? 천국에 더 가까워졌다고 할까? 민주노총이라는 전국 조직이 있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표방하는 진보정당이 국회 의석을 갖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아니, 그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옥’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2005년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전태일 동상은 일어서려는 모습으로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_경향DB




한국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163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393시간이 많아 꼴찌에서 두 번째를 기록하고 있다.

임금격차도 심각하다. ‘OECD 고용 전망 2015’에 따르면, 한국은 2012년 기준으로 국내 임금소득 상위 10%의 임금이 하위 10% 임금의 5.83배나 된다. 격차가 조사대상국 중 가장 크다. 최저임금 또는 그 이하 소득을 버는 노동자 비율 역시 14.7%로 조사대상국 중 가장 높다. OECD 평균은 5.5%다. 노동 내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조원과 비노조원, 대규모 사업장과 중소 사업장, 남성과 여성 등에 따라 나뉘어 있다. 임금격차는 정확히 그 경계를 따라 벌어져 있다. 그 경계를 따라 인간적 차별이 가해지기도 한다. 통근버스와 식당과 쉼터와 휴가 등의 사용에서조차 차별을 두는 곳이 있을 정도라 한다.

광복 70주년이 얼마 안 남은 요즘, ‘노동개혁’이 대한민국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적극 추진하겠다면서 그리 되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은 정부와 여당에 대해 비판적이다. 정부와 기업이 져야 할 책임을 정규직 노동자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지루한 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 야당과 노동계 모두 공방을 넘어설 ‘해법’을 찾기 위해 크게 고심할 것이다.

전태일! 노동개혁의 이유와 목표를 이러저러한 경제적 수치에서 찾기보다 ‘노동에 대한 인간적 존중’에서 찾으면 된다. 차이를 드러내고 서로를 탓하기에 앞서 노동개혁을 위한 ‘공통의 에스프리’를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선거운동 첫 공식 일정으로 전태일동상에 꽃을 바쳤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위해 희생한 노동자들, 특히 전태일과 같은 노동 약자들을 동등한 ‘국민의 이름’으로 존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 의지를 실제로 발동시켜야 한다. 혼자 그럴 것이 아니라 함께, 그래야 한다. 그래서 광복 70주년, ‘지금의 전태일들’에게 광복을 약속해야 한다. 대통령은 물론, 그에게 비판적인 야당과 노동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가 ‘지금의 전태일들’을 낳고, 방관하고, 이용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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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해킹 전문업체 ‘해킹팀’이 해킹당한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시사적이다. 먼저 각 나라 국가기관이 공공연하게 해킹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 국가안보국(NSA)이 전 세계적인 규모의 해킹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다른 나라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국은 물론 세계를 무대로 해킹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두 번째로는 각 나라의 국가기관을 고객으로 해킹이 산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국의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을 상대로 하는 해킹산업 규모는 연간 500억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350개 정도의 기업이 성업 중이다. 그 대표적인 기업인 미국의 해리스 코퍼레이션은 직원 수만 1만3000명이라고 한다. 연간 매출만 50억달러 규모. 영국의 이지스, 프랑스의 벨루 등이 그 뒤를 잇는다고 한다. 이들 기업에 비하면 해킹팀은 직원 50명 규모의 중소기업인 셈이다. 해킹팀은 거대한 해킹산업체의 한 조각일 뿐이다.

또 하나 시사적인 점은 해킹을 전문으로 하는 해킹업체 또한 해킹에 속수무책일 수 있다는 것. 해킹과 보안은 창과 방패의 관계다. 해킹업체라면 당연히 보안도 튼튼해야 한다. 보안이 뚫리는 해킹업체는 생각하기 어렵다. 국정원 해킹팀이 해킹 사실이 노출될 것을 우려한 데 대해 해킹팀은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시켰지만, 헛말로 끝나고 말았다.

이탈리아 해킹업체 ‘해킹팀’의 설립자 다비드 빈센체티_경향DB




문제는 국내에서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것처럼 국정원의 불법적인 해킹 행태가 드러난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해킹팀뿐만 아니라 해킹팀의 고객들, 그러니까 국정원을 비롯해 해킹프로그램(RCS)을 사용한 각국 정보기관도 해킹당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외 언론의 보도를 보면 해외의 컴퓨터 보안 전문가들은 해킹팀이 RCS에 ‘뒷문(백도어)’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해커가 이를 통해 해킹팀 고객들을 해킹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해킹팀이 평소 고객들의 데이터를 훔쳐보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해킹팀은 뒷문을 만든 적도 없으며, 고객들의 시스템은 안전하다고 강조하고 있다지만 그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유출된 소스코드를 분석한 결과 해킹팀이 원격으로 고객들의 RCS 작동을 중단시킬 수 있는 ‘비밀통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데이터 유출 등에 대비한 ‘비상용’이라지만 결과적으로는 고객 몰래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뒷문’이나 다를 게 없다. 이 RCS를 활용했던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자신들의 해킹 데이터가 고스란히 해커 손에 넘어간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해킹팀은 그동안 ‘국경없는 기자회’ 등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인터넷의 적’으로 지탄받아왔다. 여러 나라에서 인권탄압과 시민감시에 그 프로그램이 악용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해킹팀은 그럴 때마다 어디까지나 국제적 규범을 따르고 있으며 불법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고 강변해왔다. 인권 탄압국과는 거래하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오히려 테러나 범죄와의 최전선에서 유용한 도구를 제공하고 있다고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에티오피아, 수단,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 인권탄압국과 거래한 것은 물론 언론인과 인권활동가 등을 겨냥한 해킹에 활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들 국가와 거래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한 정황도 발견됐다. 이는 비단 해킹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회사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강력한 해킹 툴을 제공하고 있는 거대 해킹업체들이 제공하는 해킹 도구가 악용될 수 있는 소지를 고려한다면 정보기관 등의 필요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테러나 범죄 대응이라는 ‘합법의 탈’을 쓴 이들 해킹업체와 RSC 사용에 대한 국제적인 규제의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 최소한의 요건으로서 국가기관의 해킹에 대한 법원 인가 등 적법절차와 국제규범의 준수 여부가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정부 여당과 국정원이 아무런 법적 절차도 밟지 않고 RCS를 사용한 것을 대북·대테러용이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우기고 넘어가려는 것은 국제적인 웃음거리다. 국정원이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 해킹했는가가 쟁점이지만, 국정원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났다는 게 핵심이다. 불법인 도청을 범죄 수사 등 공익적 필요에 따라 합법화한 것이 감청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세계적 비난여론에 직면해야 했던 NSA의 무차별적인 해킹도 법적 절차는 밟은 것이었다.

백병규 |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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