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수명은 언제까지일까. 국가에도 흥망성쇠가 있다기에 그냥 던져본 물음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이 지난 지금, 정부와 국회의 돌아가는 ‘꼴새’를 보며 장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겨 떠오른 질문이다. 참 많이도 망가져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국가 말이다. ‘정치적 질서(state)’로서의 국가말이다.

몇 년 전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고 했을 때, 그리해도 되겠다 싶었다. 식민지배와 분단과 전쟁이라는 상처를 딛고 일어나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한 세계사적으로 드문 국가인지라 그러했다. 건국 50년을 지나면서 극심해진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에 대한 정치권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아 차차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그러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인 지금은 다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이 권위주의로의 회귀나 한국형 파시즘의 도래를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함을 확인하고 있다. 이 땅의 국가는 관료와 재벌과 거대언론 등 특권층에 대한 통제력도, 다수 국민의 동의와 지지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다. 국가를 다시 세워낼 지적, 실천적 역량과 인적 자원도 없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꼭 이루겠다 약속했던 경제민주화를 그리 쉽게 완수했다고 선언할 리 없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고정지지층의 결집에만 의존해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달라고 구걸할 리가 없다. 국가개조를 내걸고서 적폐에 연루된 인물들을 총리후보로 지명할 리도 없다. 국회는 어떠한가. 무능한 정부에 대한 견제는커녕, 원 구성조차 못하고 있다. 세월호 국정조사 역시 전혀 진척이 없다.

개회 선언하는 세월호 국조특위


대통령과 국회의 여야 의원 모두 전체 국민의 일부에게서만 지지를 얻었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만 해도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 4050만7842명 중 1577만3128명에게 표를 얻어 약 39%의 득표율을 기록했을 따름이다. 제1당인 새누리당 역시 2012년 19대 총선에서 정당투표 기준으로 전체 유권자 3779만6035명 중 약 17%에 불과한 642만1727명에게서 표를 얻었을 뿐이다. 현 시기 국가운영의 직접적 책임자인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정부와 여당의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물론 국가의 정당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 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금 대한민국을 긍정할 여지를 찾는다면, 부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여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그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살고 있는 정도가 아니다. 정부와 국회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가족들은 진도와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 교신내용과 해경이 촬영한 구조 동영상에 대해 법원에 증거보전 신청을 했고, 최근 VTS 교신내용을 확보했다. 또 생존 학생들과 구조작업에 나섰던 잠수사, 어민 등에 대한 면담도 진행하고 있다. 억울하게 간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겠다는, 더 이상 대형참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이분들이 ‘살아 있는 국민’이시다. 유가족과 함께 실천하는 분들도 계시다. 이분들에게서 ‘국민 공동체(commonwealth)’로서의 국가는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얻는다. 정치적 질서로서의 국가를 새롭게 만들 힘도 느낄 수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두 달,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누가 진정 좋은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지는 드러나고 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세월호 모멘텀의 중핵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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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사범들이 날로 늘어나 사회 문제가 되어갈 때, 이를 해결할 좋은 수가 없을까? 여기 해법이 하나 있다. 단속 대상인 마약 종류가 너무 많으니까, 이제 필로폰과 코카인·헤로인은 합법화하자. 그럼 자연스럽게 마약 사범도 줄어들 테니 말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해법이 어디 있냐고? 이 나라 정부와 사장들이 가난한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이와 똑같다. 최저임금 심의위에서 최근 사용자 측은 최저임금 동결과 함께 최저임금을 업종별로 차별화하자는 주장을 꺼냈다. 안 그래도 최저임금 못 지키는 사업장이 많은데 계속 인상하면 위반 사업장만 늘어난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몇몇 마약을 합법화해서 마약 사범을 줄이자는 주장과 뭐가 다른가. 이런 해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아주 익숙한 얘기이다. 정부가 파견업종을 늘리자 할 때에도, 이미 불법파견이 성행하니 차라리 양성화해서 관리하자는 논리를 썼다. 비정규직 관련법을 만들 때 역시 이미 비정규직이 넘쳐나니 이를 줄이기보다 조금 더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자고 했다.

근로기준법대로 하면 비정규직·파견직 사용이 어려우니, 노동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 예외를 만들어온 게 이 나라 정부였다. 하지만 이들 법이 보호한 것은 저임금 비정규직이 아니라, 재벌을 비롯한 사장들이었다. 불법파견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고, 사용기간 2년을 넘겨서도 계속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그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불법으로 비정규직·파견직을 늘림으로써 정부로 하여금 법도 바꾸게 만들었는데, 사장들이 바뀐 법을 지킬 이유가 있나? 바뀐 법도 지키지 않고 있으면 정부가 계속 사장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바꿔줄 테니 말이다.

최저임금 인상하라


최저임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저임금을 동결하면 위반 사업장이 줄어들까? 아니다. 오히려 더 늘어난다. “법을 어겨도 정부가 알아서 다 해결해준다”는 인식이 사장들에게 광범하게 퍼지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업종별로 차별화해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런 논리로 법을 바꾸자는 주장 자체가, 법을 집행해야 할 정부가 권한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최저임금 위반을 처벌해야 할 정부는 대체 뭐했기에 위반 사업장이 계속 늘어난단 말인가? 불법파견을 적발해야 할 고용노동부는 뭐하는 집단이기에 파견법 위반 사례가 계속 이어진단 말인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뱉는 이런 논리는, 가난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조차 없애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끝없이 밀어붙이는 규제 완화, 민영화 물결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간 최저임금 위반 단속마저 중소기업 협동중앙회에 자율적으로 맡기자는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노후선박 규제를 완화하고 안전점검을 해운조합에 맡긴 결과가 세월호 참사로 나오지 않았던가. 건설 기계장비에 대한 안전점검을 민간에 맡겨놓으니 타워크레인이 무너진다. 침몰한 세월호도, 무너진 타워크레인도 안전점검 서류에는 모두 ‘이상 없음’이라 적혀 있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결과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 철도와 의료사업에까지 영리행위를 열어주고 규제를 완화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음주운전 규제도 지역별로 차별화하고, 음주 단속도 주류협회에 넘길 판이다. 반대로 노동조합 활동과 집회·시위에 대한 규제, 가난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을 조직하는 것에 대한 규제는 무서우리만치 강화된다. “최저임금을 지속적으로 위반하는 사업주에게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겠다.” 도대체 지킨 공약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청와대에 앉아있는 분이 지난 대선에서 약속한 내용이다. 잊혀지지 말아야 할 것은 세월호 참사만이 아니라, 이 참사를 만들어낸 끔찍한 규제 완화의 실상이다.


오민규 | 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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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20년 사이에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서 ‘사치품’보다 더 빠르게 자취를 감춘 단어도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국어사전이 “분수에 지나치거나 생활의 필요 정도에 넘치는 물품”으로 정의한 이 물건들의 종류나 총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물건들을 지칭하는 이름이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이라는 뜻의 ‘명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10여년 전 ‘신귀족주의’를 표방하고 발행된 잡지를 처음 보았을 때,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 잡지는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와 강남의 부유층만을 독자로 한정한다는 취지를 공공연히 밝혔는데, 발행사가 공언한 대로 이 잡지의 광고면을 장식한 상품들은 싸도 수백만원, 비싸면 수억원에 달하는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평범한 서민이라면 꿈에서도 가져 볼 엄두를 내지 못할 상품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신을 드러내고 자기를 가져 줄 ‘귀족 고객’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어쩔 수 없는 일말의 분노와 일말의 자괴감이 일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잡지와 이런 광고에서 이런 감정을 표출하면 촌스럽다는 조롱을 받는다. 은행이든 카페든 시간을 때워야 하는 장소들에는 어김없이 이런 잡지들이 비치되어 잠시의 ‘무료한 시간’을 파고든다. 광고면 속의 화려하고 정교하며 값비싼 상품들은 그저 심심해서 잡지를 집어 들었을 뿐인 우연한 독자들에게 속삭인다. 나를 가지라고. 이런 것 하나쯤 가져도 괜찮다고. 명품 가방이나 명품 시계 하나 없이 어떻게 사회생활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굳이 유교의 ‘청빈주의’나 프로테스탄트의 ‘절검주의’가 아니더라도, 인류는 이제껏 사치를 죄의 일종으로 분류해 왔다. 남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 무리들 속에서 자신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욕망이 공동체의 통일성과 유대감을 해치는 정도로까지 표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는 개체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고 유지해 온 인간적 가치관이었다. 사치품이 명품으로 이름을 바꾼 최근의 현상은, 이 오래된 가치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의 표현일 뿐이다.

입장하는 백화점 명품 행사날 손님들


대다수 사람들이 생활 물자의 절대적 결핍 상태에서 해방된 국가들에서, 자본은 시장 확대를 위해 대중의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방법들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왔는데, 그 핵심은 개인적 욕망의 실현에 드리워진 죄의 그늘을 걷어내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소비 능력을 마음껏 과시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미덕인 사회를 만드는 데에 힘을 기울였고, 결국 성공했다. 지금은 능력껏 벌어 마음껏 소비하는 데에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는 시대다.

그런데 사회 전체가 개인적 욕망의 실현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달려옴에 따라 공동체를 지탱해 왔던 배려, 공감, 절제 등의 감성, 즉 ‘양심’이 사라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 보니 우리 사회가 기실은 인간과 짐승으로 나뉘어 있더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 참사로 인해 자기들의 기득권이 흔들릴까 두려워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이미 인간의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에서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티끌만한 동정심이나 연대감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대형 교회 목사, 대학 교수, 국회의원 등 ‘성공한’ 사람이자 이 사회의 ‘지도층’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가 다른 시대이길 진정으로 바란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동안 무한정 풀어왔던 ‘욕망에 대한 규제’를 다시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그저 명품으로 제 몸을 감싸고 명품 스펙을 쌓는 데에만 몰두하는 문화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미래의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름 자체가 사치스러운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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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가라앉고 나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겹쳤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책임자에 대해서는 분노가,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그런데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면 날마다 죽은 이들은 모독당하고 산 사람들 역시 조롱당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더 너덜너덜해지고 있다. 이런 큰 사고를 당하고도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회를 보며 사람들은 이곳에서의 삶 자체에 대해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 환멸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삶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이민 갈 것”이라고 말했다. GQ라는 잡지에 실린 ‘문득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라는 글은 글쓴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감을 받고 퍼져나갔다고 한다. 한국은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야 하는 나라니까, 그래도 뭐가 안 보이는 나라니까”라는 글의 서두에 공감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이 사건 이전에 이미 우리는 대부분 지쳐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이 바쁘게 뛰어다녀도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인간은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모든 요소들이 다 발가벗겨진 상태의 ‘인간’이 인간보다 더 오래 산 곳이 아우슈비츠였다는 것이다. 그처럼 소진되기만 할 뿐인 이곳에서의 삶도 삶보다 더 길다. 삶이라는 말이 가진 살과 결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이어지기만 하는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탄식하지 않았던가. “이게 사는 건가”라고 말이다. 그저 ‘길기만 한’ 삶에 대한 환멸은 이미 목구멍까지 차 있었다.

25일 비바람이 몰아치는 진도 팽목항에 세월호 실종자들을 위해 가족이 차려 놓은 과자와 음료수 등 음식물 위에 빗물이 맺혀 있다. /강윤중 기자


세월호는 이런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알면서도 자기를 기만할 수 있었다. 곧 나아질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든가 사태가 이 모양인 것은 사회의 탓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을 덜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으로 ‘기만’이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사고와 그 이후의 수습과정은 이 모든 기만과 위로가 부질없는 것임을 폭로하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이 가망 없는 삶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길거리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끝이 어떻게 허망하게 끝날 것인지가 뻔히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삶이 더 환멸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환멸이 체념과 짝을 이루는 이유가 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모욕적이라고 하더라도 오늘을 열심히 살면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고 사회가 약속할 때 사람은 오늘을 견뎌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이란 개인이 멋대로 가지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 사회가 약속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니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며 외려 소리 치고 조롱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삶이 어찌 환멸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환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내일을 약속하는 사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당연히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철저히 책임을 묻는 것이다. 아직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고 제대로 책임진 사람도 없다. ‘잊지 않겠다’는 맹세는 개인적으로 우리끼리 슬퍼하며 기억하겠다는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끝까지 책임을 물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기억은 사회 속에 새겨져야 한다. 그것이 환멸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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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낯설어지는 나날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를 보면서, 또 그런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하는 정당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희망이라는 말은 마치 외계어 같다. 유가족을 꼬옥 껴안고 함께 눈물 흘리며 아픔을 나누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정치이다.

이번 스승의날, 필자의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그 힘겨움의 한복판에 비관과 회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편지에는 좋은 일만 적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질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끝이 있긴 할지, 이 사회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부분이 과연 존재할지… 언론부터 시작해서 정경유착과 관료제 게다가 종교, 개개인의 도덕성과 책임감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문제인지, 바뀌긴 할지 무섭습니다. 정권퇴진을 외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텐데… 자꾸만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회의만 듭니다.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버리는 이 국가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 옳고 그름 따위는 무시하고 눈앞의 이익과 개인의 안정만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가 유지될 가치가 있는지….”

못다한 말이 많은데 (출처 :경향DB)


그의 비관과 회의는 정치를 훌쩍 넘어 대한민국 전체를 향해 있다. 정권의 퇴진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와 사회의 유지에 대해 ‘이유 없다’고 판결할지 아닐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 속에 대한민국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없었다.

편지를 받고 나흘이 지난 5월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했다. 박 대통령은 대형참사를 막지 못한 과오에 대해 눈물까지 흘리며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해경을 해체하고 안전행정부와 해양수산부를 축소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며 정부조직 개편안을 제시했다. 민관유착의 고리를 끊고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직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고 했다. 업체의 비정상적 사익추구도 엄벌하겠다고 했다.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의 구성도 약속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구조를 위해 달려왔던 어업인들과 민간 잠수사들, 친구와 학생들과 승객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학생들과 선생님들과 선원들을 영웅이라 칭했다. 그들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고 했다.

희망! 대통령이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대한민국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학생이 보낸 편지의 끝자락에도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서로를 격려하고 챙기며 그 안에서 끝까지 믿고 기다린 아이들과 그들을 구하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망치고 싶다가도 다시 희망을 갖게 됩니다”라고. 대통령이 그의 편지를 훔쳐본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사실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희망의 원리’를 단지 기억해낸 것이리라.

그 학생은 어땠을까. 대통령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희망의 원리를 잘 알고 있다며 안도감을 느끼고 국가와 사회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까? 직접 물어보자. “소희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어땠니, 괜찮았니?” “나는 어땠냐고? 선생님은 우선 너도 그렇고 대통령에게도 고마웠어. 희망이란 말을 다시 들려줘서, 그리고 희망의 원리를 상기시켜줘서. 하지만 금세 공허해졌단다. 왜냐고? ‘안전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해놓고선 중동으로 원전 세일즈한다며 후다닥 떠나는 것을 보면서 그랬지. 문제 많다는 원전을 수출까지… 중동은 위험해져도 된다는 건가. 대통령은 희망의 원리를 공허하게 만드는 법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너도 그런 것 같다고?”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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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해저 지진(쓰나미)은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자연재해이지만, 뒤이어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다른 문제였다. 원자력 안전을 책임져야 할 당국자들은 제일 먼저 도망을 쳤고, 정부의 대처는 우왕좌왕 호들갑만 떨었지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도쿄전력은 앞으로 원전 사업을 하지 못할까봐 미국의 기술 지원조차 거부했다. 이윤에 미친 자본과 시스템은 결국 후쿠시마 제1원전 수소 폭발을 방치했다.

마지막까지 원전 현장을 지킨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멜트다운(원전 노심 용해) 상황에서 핵 연료봉 온도를 낮추려 엄청난 방사능 피폭을 감수하며 원전의 중심까지 접근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무능한 정부와 너무도 대비되었다.

지금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것은 이윤에 미친 자본가들의 탐욕 때문이었고, 뒤이어 구조작업에 완전히 무능한 정부를 보고 있다.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인명을 구조하다 스러져간 이들은 승무직 선원 노동자와 단원고 교사 노동자였다.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 무능한 정부와 탐욕스러운 자본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려 했던 언론 노동자들은 데스크에서 진실이 가위질당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이들은 진실 옹호가 아니라 권력만 비호하는 방송사의 행태에 맞서 자신의 직을 걸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서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반성’이었다.

그래서 언론 노동자들 일부는 불량 보도가 아니라 직접 양질의 보도를 생산하고 있다. 뉴스타파와 뉴스K(국민뉴스), 고발뉴스 등은 세월호 참사 보도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되고 있다. “불량 증축만 사고를 부르는 게 아니라 불량 보도도 참사를 일으킵니다.”

스스로의 반성 속에서 부정한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떳떳한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지금 언론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하는 양질의 뉴스들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유튜브 조회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 이들 뉴스를 애청하는 내가 다 뿌듯해진다.

작업별 시간제 노동자 현황 (출처 :경향DB)


“의심스러우면 되물어야 한다고, 부당한 지시에는 복종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마찬가지로 전국의 1만5000여 교사 노동자들도 ‘반성’의 목소리를 출발로, 자신의 직을 걸고 탐욕의 시스템에 맞서기 시작했다. 권력이 지시하는 불량교육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 지금까지 노동자들은 진실을 얘기하지 못하고 살았다. 선실 증축과 선박 검사를 맡았던 노동자들 역시 알면서도 지나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실을 눈감지 않으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4월16일을 기점으로, 이제 노동자들이 한국의 역사를 새로 쓰자.

어떤 자동차 공장에서는 휴일마다 특근을 하느라 수많은 일당직 ‘알바’들이 투입된다. 이렇게 조립된 자동차들이 과연 안전할까? 대학병원에서조차 간호조무사들에게 관장 등 의료행위 일부를 떠넘기기도 하고, 한번 쓰고 버려야 할 의료기구들을 살균해 다시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규인력 채용은 하지 않고 기존 인력을 혹사시켜 비용을 줄이려는 탐욕의 시스템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모두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지금,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자. 그동안 그냥 지나쳐왔던 점을 반성하고 탐욕의 시스템에 맞서겠노라고. 부실과 불법에 폭로의 번개를 내리침으로써 대한민국에서 가장 떳떳한 이들로 거듭나자. 감시를 포기한 정권과 이윤만을 탐하는 자본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안전과 생명의 마지막 수호자 아닌가.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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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재난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일까? 헬리콥터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승객들의 몸을 묶어 끌어 올리는 특수 요원들을 상상했다. 여분의 산소통을 메고 뒤집힌 배 안으로 헤엄쳐 들어가 아이들의 입에 호흡기를 대 주는 특수 요원들도 상상했다. 이 나라에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영웅들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TV 화면을 통해 보는 현실은 상상과 너무 달랐다. 선장과 선원들을 먼저 구조하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만 건진 채 물러나는 구조선, 침몰해 가는 배 위를 몇 차례 선회하다 사라지는 헬리콥터, 숱한 재난 영화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던졌던 메시지들, 인류애적 희생과 헌신, 숭고한 도덕성 같은 것들은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차가운 바다, 차가운 정부, 차가운 사람들이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생명에 대한 절실함이 보이지 않았다.

선장과 함께 탈출한 선박직 승무원 중 단 한 사람도, 객실로 뛰어가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해경 구조대원들도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구명동의를 양보하고 다른 친구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정차웅군, 마지막 순간까지 승객들의 탈출을 도왔던 사무장 양대홍씨와 비정규 승무원 박지영씨, 제자들과 운명을 함께한 남윤철·최혜정 교사 등 배 안에서 영웅적 인간애를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국가를 대표했던 사람들은 흡사 위험을 감지하면 움직이지 않는 센서 달린 기계처럼 행동했다.

물론 누구도 남에게 제 목숨 던져 다른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 9·11 테러 때 사람들을 구하러 무너져 가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소방관은 343명이었다. 해경 구조선이 선장을 ‘구조’한 시각은 오전 9시46분, 배 안에 있던 아이들은 오전 10시11분까지도 동영상을 찍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 25분간, 승객들을 구하러 배 안으로 들어간 정부 소속 구조대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는 세계 재난사에 기록될 만하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지난달 30일 진도군청에서 열린 범정부사고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 가족과 국민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있다. _ 연합뉴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익을 사람의 생명보다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일은 아닌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성지인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이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또는 그와 더불어 최근 10여년간 한국인들이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익혀 온 ‘재난 대비 매뉴얼’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실직, 해고 등 ‘사회적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루저’라 부르며 조롱하고, 약자에 대한 연대와 동정을 말하면 ‘종북좌파’라 비난하며,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우러 달려가면 ‘선동꾼’이라 손가락질하는 극우 담론의 공세에 위축되어 스스로를 검열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인간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당장 이번 참사를 두고도 “좌파들이 시체팔이에 나설 것”이라느니, “유가족 중에 선동꾼이 있다”느니 하며 인류애에 기반한 보편적 슬픔을 ‘선동의 소재’로만 인식하는 ‘반(反)인간적’ 언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집권여당 국회의원들의 입에서조차. 이런 말이야말로 인류애와 인간다움에 대한 협박이다. 이 협박에 늘 노출되어 움츠린 사람들이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신념을 갖는 건 오히려 정상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이 참사의 의미를 축소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KBS 보도국장을 문책해 달라고 청와대 앞으로 찾아간 날,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열어 “사회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은 국민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 유족들에게 ‘국민경제를 생각해서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사람을 살리는 게 민생이다. 마지막 순간에 사람을 살리는 건, 사람이지 돈이 아니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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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사고 발생 2주가 지났다. 전국이 통곡하는 상갓집으로 변했다. 대한민국은 거대한 분향소로 무사생환을 바라는 기도의 공간이 돼버렸다. 절대적 구조의 시간인 골든타임은 이미 지났고 ‘에어 포켓’에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있다. 설령 세월호에 에어 포켓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생존 가능성을 좀처럼 예견할 수 없다. 이 비극의 상황 앞에 어떤 말도 위로는커녕 무력하기만 하다. 2014년 4월16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피해는 줄일 수 있었을까. 시간만 되감으면 되는 것일까. 언론은 사고 초기 대형 오보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수준을 끝없이 끌어내렸다. 결국 육지에도 아주 작은 에어 포켓마저 남아 있지 않고 숨 막히는 시간만이 무력하게 지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위기 대응은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를 정치적 사건으로 규정하기에 충분하다. 존재하지 않는 컨트롤 타워를 탓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정도다. 구조의 의지는 물론 생존자를 향한 그 흔한 전시 행정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다.” 2004년 김선일씨 피살 사건 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한 발언이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레토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것이 이번 사고로 확인됐다. 상대를 물어뜯기 위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호출될 뿐 일상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언제나 뒷전이다. 아니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장관들의 아무 생각 없는 행동과 발언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언론을 장식한다. 그 중심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권력 구조로서의 대통령은 이 모든 사건과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구조 작업에 나선 일선 공무원들을 향해 “책임을 묻겠다”는 번지수 틀린 단호함만을 보일 뿐이다. 정작 대통령인 자신의 책임은 말하지 않고 있다. 자본을 위한 규제 완화와 민영화 그리고 비정규직화는 이번 사고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번 사고는 무능과 무책임의 문제를 넘어 그들의 세계관이 빚은 필연적 재앙이다.


재벌 아들이란 자의 ‘미개 국민’ 발언이 튀어나온 것은 실수가 아니다. 평소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다. 집권 여당의 최고위원과 국회의원들의 잇따른 색깔론은 촌각을 다투는 생명보다 정치적 득실이 우선한다는 그들의 신념체계가 작동하고 있는 결과다. 구조의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는 정부의 이 같은 행태는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세월호 침몰 이후 너무 많은 사건이 사건을 덮는다. 가치관의 충돌이며 그들 세계관의 돌출이다. 사건을 되돌린다 하더라도 그들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는 이상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에서 최근 두 달 사이 7명의 노동자들이 숨졌다. 쌍용차에서는 정리해고 소송에서 승소한 노동자가 공장 복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5번째 희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산업재해 사망 부동의 1위 대한민국과 세계 장애인의날에 최루액을 덮어써야 하는 현실은 어떤 개선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로 권력과 자본을 틀어쥔 그들의 세계관을 본다. 진정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의 담보야말로 그들의 세계관이 균열을 보일 때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확신을 강화한다. 정치적 역풍을 우려해 착한 말, 고운 말만을 찾고 있는 무력한 야당이야말로 그들의 세계관을 뒷받침할 뿐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실종자의 무사생환을 위해 그리고 남은 이들의 온전한 삶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세계관에 균열을 내고 그들의 신념체계를 무력화시키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비극만이 무한 반복될 것이다.

그들의 세계관을 부숴버리자!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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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울부짖고 있는 우리가 ‘미개’하다는 그의 말은 맞는 말이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무너졌으니 말이다. 문화는 사람과 짐승을 구분 짓는 경계며 그 문화의 정수가 ‘말’이다. 경계를 유지하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문화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말을 하지 않고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으니 우리가 미개한 인간이라는 그의 ‘말’은 매우 맞는 말이다.

짐승과 사람의 경계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도 도처에서 무너졌다. 살아 돌아온 분들도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단원고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한 의사는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지만 삶의 세계에도 죽음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도와 팽목항에 계신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찌 이분들에 비길 수 있겠느냐마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대다수 ‘미개인’들도 그렇다. 한 지인은 교복만 봐도 목구멍이 울컥한다고 한다. 삶을 보는 순간 죽음이 떠오르는 것이다. 도대체 여기가 산 자들의 이승인지 죽은 자들의 저승인지 분간할 수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지금 이승도 저승도 아닌 시공간에 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이 상태, 인간은 이 상태를 다루는 몇 가지의 방법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발전시켜왔다. 하나는 울부짖고 있는 우리를 ‘미개하다’고 말한 사람처럼 폭력적으로 쫓아내고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다. 월경하는 여성들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위험한 존재로 인식해 삶의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추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월경을 멈추고 ‘산 사람’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공동체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거의 없다. 살아 돌아오는가, 죽는가는 전적으로 쫓겨난 자의 몫이다.

삼성전자는 이윤보다 생명을 중시하라 (출처 :경향DB)


다른 방법은 이 식별불가능한 시공간에 특별한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대다수의 ‘문화’는 삶과 죽음이 두부모 자르듯이 딱 잘라지지 않고 ‘통과’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 시공간은 당사자에게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연루된 사람들이 함께 겪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그를 통해 한 인류학자의 언어를 빌리면 ‘삶과 죽음이 경쟁하는 시간’을 ‘생명이 재생하는 시간’으로 전환한다.

우리는 지금 이 기로에 서 있다. ‘미개한 자’들을 추방하여 삶과 죽음을 그들의 몫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있음을 인식하고 이 시간을 생명이 재생하는 시간으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기로 말이다. 그것은 ‘홀로’ 슬퍼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홀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겪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공통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함께 ‘겪는 것’보다 사람을 더 단단하게 묶어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유대는 또한 그저 생기지 않는다. 이 시간은 또 함께 겪는 것처럼 보이는 저 존재들이 구분되지 않는 식별불가능한 때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말하는 어스름의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저기 저 어스름에서 울부짖고 있는 저 존재는 나의 친구인 개인가 아니면 나를 공격할 늑대인가? 섣불리 곁을 내줬다가는 물릴지도 모른다. 또 지금은 같이 울부짖지만 언제 늑대처럼 덤벼들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이 어스름이 걷히고 나서야 알 수 있다. 누가 친구였는지, 누가 늑대였는지 말이다. 그러니 울부짖는 소리는 많되, 함께 겪기는 드물다. 참으로 모질고 모진 시간이다.

이 ‘식별 불가능함’까지 함께 겪고 나면 비로소 ‘말’이 부활할 것이다. 말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은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미개인처럼 울부짖지만 나중에 이 겪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돌아봐야 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와 함께 이것을 겪고 있는지를 돌보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이 겪음을 함께 말하며 후대에 이야기로 전승해줄 수 있는 ‘미개한’ 우리가 될 것이다.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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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소위, 근로시간 주 52시간 단축 공감대” “당정, 주당 근로시간 68→52시간 처리키로”. 이런 기사들을 읽고 있으면 분노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니, 도대체 한국이 언제부터 주 68시간 노동제였단 말인가? 그리고 조만간 주 52시간제로 간다니? 정부와 여야 모두 똑같은 말로 사기를 치니 오히려 진실이 묻혀버렸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은 한국이 주 40시간 노동제를 채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1주당 12시간의 연장근로가 가능한데, 그것 역시 ‘당사자 간 합의가 있을 때’에만 그러하다. 그런데 1주일은 7일이라는 상식을 깨고, 유독 고용노동부만 1주일은 월~금요일까지 5일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노동부의 알량한 행정해석 하나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근무는 연장근로에서 빠져왔던 것이다.

주 40시간 노동제에 연장근로 최대치가 주당 12시간, 여기에 토·일 각 8시간 노동을 더해야만 68시간이 된다. 이걸 ‘주당 근로시간 68시간’이라 표현하는 몰상식을 상식처럼 주장한다. 이제야 휴일근무를 포함해 연장근로는 주 12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즉 1주일은 7일이라는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 ‘주 68시간에서 주 52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이라 포장되고 있다.

이제 상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국회가 논의중인 법안은 ‘노동시간 단축 지연 법안’이다. 이미 법원은 휴일근무가 연장근로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노동부가 잘못된 행정해석 하나만 고치면 굳이 국회를 통하지 않고서도 당장 연장근로를 제한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국회에서 하는 일이 뭔가? 가만히 있으면 당장 시행될 수 있는 이 제도를, 빨라야 2016년부터 시행되도록 최대한 늦춰주는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2016년 전까지는 자본가들이 지금처럼 1주일에 68시간의 장시간 노동착취를 자유롭게 해도 된다는 법안이 ‘노동시간 단축 법안’으로 둔갑한 것이다.


1주일은 7일이라는 간명한 상식에 대한 극렬한 반대 세력은 당연히 자본가들이다. 주 40시간에 하루 2시간씩 잔업은 기본이고, 휴일까지 일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다. 이해가 안된다. 비용 절감에 눈이 벌건 자본가들이, 임금 할증이 붙는 휴일근무에 왜 이리 목을 맨단 말인가.

사실 비용면으로만 보면 휴일근무를 없애고 신규 고용을 늘리는 길이 자본에 최선의 선택이다. 휴일에 근속연수가 높은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할증임금보다 신규 채용된 젊은 노동자들에게 줄 초임이 훨씬 저렴하다.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더라도 휴일근무를 없애면 초과수당 부담이 사라진다. 노동시간을 단축해 고용을 늘리면 정부로부터 고용창출 지원금도 듬뿍 받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은 자신이 직접 고용한 노동자 수 증가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투쟁력, 의식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 특히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서야 한다. 수명만 단축시키고 일자리 창출에 저해되는 휴일근무를 중단하는 것이다. 임금 보전을 위해서라면 휴일특근이 아니라 최저임금과 기본급 인상에서 대안을 찾자. 최저임금이 오르면 그만큼 조직노동자 임금도 오르지 않던가. 신규채용이 늘면 청년실업과 현장 고령화도 해결되고, 노동조합도 젊어지는 1석 2조 아닌가.

정부와 정치권도 거짓 주장을 중단해야 한다. 계속 거짓을 떠들려면 당신들의 얘기를 해외 언론에도 한번 얘기해 보시라. 그 나라에선 해외 토픽 감이다. “한국은 아직도 주 68시간 노동제야? 그런 후진국이 어떻게 OECD에 가입했지?” 세월호 침몰사고가 폭로한 후진성과 함께 이런 것까지 후세에 물려줄 건가.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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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맨 먼저 구조선에 오른 선장과 11명의 선원들은 안전행정부 구조자 명단에 ‘일반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거짓말을 했거나 최소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위장 탈출한 것이다. 항해 중 선박에서 선장은 최종적 결정권과 명령권을 가진 전형적인 통치권자에 해당한다. 일찍이 플라톤이 위기 시 모든 구성원이 그 명령에 따라야 할 정당한 전제자로 묘사한 역할이 난파선 선장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선장은 1년 기간의 계약직으로 밝혀져 목숨 걸고 책임을 다하기엔 억울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수백명을 태우는 배의 선장을 그렇게 임명한 선사가 이 문제에도 큰 책임이 있다. 선사는 또 보통 20년으로 제한해 온 배의 운항연한을 고려하지 않은 채 18년 된 세월호를 사들여 7년간 더 연장했다. 조타 키가 평소보다 턱없이 많이 돌아갔다는 조타수의 증언 등이 노후 선박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 배경에는 돈벌이만 중시하는 기업의 윤리부재를 방조한 정책당국이 도사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 문제였다.

그런가 하면 한 자칭 민간인 잠수사는 해양경찰 측이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가라”고 했다고 종편방송과 인터뷰한 후 잠적했다가 경찰에 자진출두했다. 경찰이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수사 중이다. 방송 제작진이 출연자의 인적 사항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그 발언을 내보낸 책임이 크다. 선정주의 방송의 폐해가 이번에도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신문들도 인명구조에 집중해야 할 사고 다음날부터 피해유족이 받을 보상액을 다루어 빈축을 샀다.

상당한 게이트 키핑 장치를 갖춘 기성 언론들이 그럴진대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경우 개인 의사가 여과 없이 공론장에 표출되는 것은 대책 부재다. 그렇다고 해서 SNS를 문제시하고 억압하려 한다면 우리의 디지털 문화는 더욱 후퇴한다. 부작용이 있다는 이유로 본질을 훼손하는 교각살우의 오류를 범해선 안된다.

자유로운 사이버 공간에서 민심의 한 모습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초등학생이 보냈다는 “배 안에 우리가 살아 있으니 빨리 구조해 달라”는 SNS는 구조작업을 신속하게 하라는 국민적 요구에 영향받았을 것이다. 거짓말과 장난질로는 불행한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할 인터넷윤리 교육의 문제다.

다만 정치적 저의를 품은 왜곡과 공동체윤리 파괴행위로 사회 갈등을 극단화시키는 집단은 디지털 영역에서 철저히 차단하고 해체시켜야 한다. 세월호 피해가족들을 ‘유족충’이라는 저급하고 야만적인 어투로 지칭하는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집단은 과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인가. 그들이 공격하는 이유는 피해유족들이 정부의 무능대처에 대해 비판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정부를 편들어준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일베의 사실왜곡은 ‘선장과 선사가 전라도인이며 전라도 회사’라면서 특정지역을 비하하는 데서 극에 이르렀다. 선장은 부산 출신이었고 선사는 인천에 소재했다. 일제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방화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학살 등 야만적 행위를 자행했던 일본인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우리의 디지털정책은 지나치게 산업기술 성장과 행정편의주의 일변도로 줄달음쳐 왔다. 마치 경제개발 연대에 성장만을 목표로 분배와 복지를 도외시했던 것과 비슷하다. 사이버공간의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서 성찰해야 할 공공정책의 철학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난번 신용카드사들의 개인정보 유출사태도 그것이 누적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로 불운하게도 슬픔을 겪는 피해가족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한국 누리꾼들의 무분별한 SNS 활동에 대해 세계의 언론이 지켜보고 있다. ‘이상한 인터넷강국’이라는 오명을 더 이상 뒤집어써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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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방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내 아이가 어두운 바닷속에 가라앉은 ‘난파선’이 아닌 자신의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이내 죄스러운 마음이 엄습한다. 여객선 세월호에 갇혀 있는 학생들이 나의 아이들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혹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자식을 안은 부모의 마음을 무슨 말로 표현할까. 매일, 매순간 보고 있을 때에도 부모의 마음은 애달프고 간절하다. 애써 아닌 척해도 그러하다. 때때로 엄하게 꾸짖고 나서는 속이 상해 몇 날 며칠 밤을 뒤척인다. 한참 지난 후에도 혼냈을 때 풀 죽은 자식의 모습이 떠오르면 남몰래 눈물 흘리며 아파하기도 한다.

자식은 언젠가 자신의 꿈을 향해 부모의 품을 떠날 독립된 존재이다. 때가 되었는데도 떠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자식이다. 그런데도 자식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면,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 부모이다. 세월호의 침몰은 정확히 그런 부모의 마음 한가운데 시커먼 대못을 박은 것이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할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배의 앞머리만 드러내놓고 있다 끝내 가라앉은 세월호 사고를 보며 무슨 사색과 말을 하겠는가. 영혼과 정신이 빠져나가 스르르 무너져내린 거죽이 된 느낌에 사로잡혀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침몰한 지 하루가 지난 어느 순간부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잠든 내 아이를 보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조차 죄스럽게 만드는 이 땅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그 삶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힘에 대하여.

도대체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이 땅에 세월호 침몰과 같이 부모의 마음에 대못질을 해댄 참사는 처음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만 봐도 그렇다. 1994년에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있었다. 등굣길의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안산 화랑유원지,촛불 든 시민들(출처 :경향DB)


이 사고로 딸을 잃은 한 아버지는 몇 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학여행과 수련회로 한정해도 참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99년 어린 유치원생들의 생명을 앗아간 씨랜드 화재 사고가 있었다. 전직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였던 한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한 후 대한민국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국민 안전을 강조하며 안전행정부로 부처 이름까지 바꾼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사고는 이어졌다.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지난해 7월의 안면도 해병대 사설캠프 사고와 올 2월의 경주 마우나 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가 그것이다. 어찌 생겨먹은 힘이길래 이리도 질기게 반복해서 자식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부모들이 자식의 뒤를 따르거나 조국을 등지게 한단 말인가.

세월호의 침몰을 보며 확인하였다. 그 힘은 ‘선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무능’이라는 것을. 선장임에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영 젬병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세월호의 침몰은 선장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각종 재난재해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기 위한 어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조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먼저 배를 버리고 탈출한 세월호의 선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에는 ‘더 높은 선장들’이 있다. 중앙대책본부만 해도 많은 선장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대책본부는 구조 및 승선 인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더욱 더 높은 선장, ‘법조인 출신’ 정홍원 국무총리가 직접 지휘하는 범정부 대책본부를 구성했다.

어떤 직업과 직종이었든지 정홍원 총리가 잘해 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묻자. 대한민국에 재난재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선장은 없단 말인가. 또다시 훈련받지 못한 선장의 무능을 보고, 또 한 번 부모들의 마음을 부서뜨릴까 우려가 되어 던지는 물음이다. 부모들이 바라는 선장은 더 높은 지위의 선장이 아닌, 더 유능한 선장이라 생각되어 던진 물음이다.

정말로 대한민국에 ‘진짜 선장’은 없는가.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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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 서울 사람은 물론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아는 노래, ‘서울의 찬가’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이다. 패티김이 이 노래를 발표한 1969년의 서울은 종이 울리고 꽃이 피며 새가 우는 목가적인 도시가 아니라 망치 소리가 울리고 나무들이 뿌리 뽑히며 새들이 떠나는 개발의 도시였지만, 그래도 이 노래는 이후 오랫동안 ‘서울살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보편적 욕망을 표상하는 노래로 널리 애창되었다.

6·25 전쟁의 포성이 멎었을 때, 서울 인구는 100만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런데 ‘서울의 찬가’가 나왔을 때 서울 인구는 이미 500만명에 육박했고, 그 3년 뒤인 1972년에는 다시 600만명을 넘어섰다. 서울의 인구 팽창은 그 뒤로도 20년 가까이 지속되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1000만명에 도달했다. 한 세대가 조금 넘는 기간에 한 도시의 인구가 10배 가까이 증가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희유한 사례다. 이 엄청난 속도의 인구 증가는 당연히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이주한 결과다. 노랫말처럼 서울이 ‘아름답고 살기 좋아’ 이주했든, 아니면 그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주했든 이 이주민들이 ‘개발시대’ 서울시민의 주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고향을 따로 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내려가서는 ‘서울 사람 다 되었음’을 자랑하면서도 서울에 올라와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중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해마다 명절이면 하행선 고속도로를 가득 메우는 자동차 행렬과 기차역 매표소 앞에 장사진을 치는 사람들은 서울시민 다수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이 이중 정체성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진짜 정을 붙인 땅은 어디일까?

서울의 찬가 노래비 제막(1995년) (출처 :경향DB)


“타향도 정이 들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 그것은 거짓말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는 말이야.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1972년 김상진이 발표한 노래 ‘고향이 좋아’의 가사 일부다. 이 시대 서울시민들은 ‘서울에서 살렵니다’와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사이에서 전혀 이율배반을 느끼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서울에 관해 강연을 할 때면, 청중에게 종종 “서울에서 돌아가시고 싶습니까?”라고 짓궂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럴 때 돌아오는 반응은 주로 씁쓸한 웃음이다. 오랫동안 평범한 서울 사람들의 소박한 꿈은, 일할 수 있는 나이까지는 서울에서 살며 돈을 번 뒤 고향이나 교외에 그림 같은 전원주택 한 채 지어 평온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서울은 살고 싶기는 하되 죽고 싶지는 않은, 그런 도시였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대다수 서울시민에게 서울은 ‘한탕 하고 튀는’ 도시였다. 서울이 아무리 망가져도, 그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었다.

거리를 지나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경축, 안전진단 통과’라 쓴 현수막이 나붙은 걸 볼 때가 있다. 물론 여기서 ‘안전진단 통과’는 안전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은 걸 말한다. 자기 집이 곧 무너지게 생겼다는데 그게 좋다고 경축 현수막을 내거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이게 정상적인 세상인가? 몇 년 만에 찾은 고향 마을 정자나무가 사라진 걸 보곤 마음 아파하면서, 정작 자기 사는 동네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이 있으면 그까짓 나무가 뭐 중요하기에 건축물 고도 규제를 받아야 하느냐고 펄펄 뛰는 사람도 많다.

1988년 1000만명을 넘은 서울 인구는 그 이후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정체 상태에 있다. 지금 서울에 사는 젊은이들 대다수의 고향은 서울이다. 그들에게는 서울 말고 달리 마음 붙일 고향이 없다. 게다가 지금의 서울은 저개발도시가 아니라 과잉개발도시다. 그런데도 선거 때만 되면 이런저런 개발 공약을 내세우는 후보에게 눈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제는 자기 아이들에게 서울을 고향답게 만들어 물려줄 생각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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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쿨을 하던 아이가 올해 3월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이 둘만의 홈스쿨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인데, 홈스쿨에서 아빠의 역할이 없다시피 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학교에 보내지 않고 아이를 키워보고자 했던 지난 5년의 시도는 잠시 유보되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다시 시도하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학교에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학교에 가게 되면서 준비할 게 많았다. 가방을 새로 샀고 연필도 종류별로 준비했다. 노트와 알림장 또한 준비해야 해서 아이 손을 잡고 문방구에 오랜만에 가기도 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각종 캐릭터 상품이 종류별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앙증맞은 캐릭터 상품들이 아이의 작은 호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이것저것 고르는 거리낌 없는 손길이 이어졌다. 아이는 내가 추천하는 물건보다 제 눈과 마음에 드는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아이들 입장에선 품질이나 기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주 보고 익숙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이는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노트도 종류별로 구분하고 알림장엔 자기 이름을 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트위터를 보는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문방구에서 샀다는 노트 한 권이었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스프링철을 한 노트였다. 가끔 고3 수험생 교실에 급훈으로 붙어 있다고 들었던 저 글귀. 상품으로 변한 채 우리 아이들 곁으로 돌아온 노트를 근 20년 만에 봤다.

궁금한 나머지 노트 제작 회사를 검색해 봤다. ‘성적 떨어졌을 땐 이빨 보이지 않습니다’ ‘니 얼굴이면 공부 레알 열심히 해야 해’라고 쓰여 있는 비슷한 제품이 많았다. 더구나 이런 제품들이 인기 상품 목록에 떡하니 이름이 올라 있었다.

재미로 넘기기엔 종류가 너무 많았고 패러디로 취급하기에도 수요자를 생각하지 않은 저급한 물건으로 보였다. 스프링 노트를 찍고 철하고 비닐을 씌웠을 노동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저 글귀들은 단순한 재미일까 혹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일까.

철도민영화에 맞서 파업을 벌이던 철도노조 조합원 자녀에게 코레일 측에서 문자를 보낸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까지 문자가 전달됐다. ‘불법파업을 중단하고 회사에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문자를 본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코레일은 해명했지만 아이 마음에 남긴 멍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물색없는 어른들의 이 같은 행위는 코레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쌍용차 파업이 끝나자 평택 어느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 아버지의 파업 참가 여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쌍용차 조합원의 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해 손을 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행이다. 우리 반엔 빨갱이가 없어서”란 말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으면 한다는 것인가. 노동 관련 교육이 전혀 없는 한국 사회에서 반노동 교육은 다양하게 진행된다. 얼핏 설핏 지나가는 이야기로 일하는 노동자에 대한 비하가 끊이지 않는다. 이제는 노트 한 권까지 대놓고 노동자를 깎아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철도노조 전 간부 두 명이 수색역 내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출처: 경향DB)


오늘도 아이는 노트를 가방에 넣고 등굣길에 나선다. 알림장에 쓴 숙제는 다 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곤 한다. 아직 학교가 낯설고 줄을 서서 먹는 급식도 어색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차츰차츰 적응하는 것을 보며 안심하는 나를 본다.

아이가 적응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 편하자고 아이 등을 떠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 모순과 구조를 바꿔보겠다고 5년째 해고 싸움을 벌이면서도 아이가 무방비의 구조 속으로 매일 등교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학교 교육의 현실을 핑계로 또 하나의 현실을 아이에게 종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다. 이 아이가 보게 되는 현실과 전해 듣는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걱정도 앞선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노동자가 이 시대의 주인이라는 것과 얼마나 당당한 직업인지를 알려주는 교육이 시급해 보인다. 젊음의 노트에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쓰고 있을까.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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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평화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래전부터 후배가 하는 활동과 관련해 인터뷰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던 터였다. 후배는 4월에는 자기가 ‘감옥’에 가야 할지 모르니 조만간 인터뷰를 끝내자고 말했다.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해군기지 반대 활동을 하고 있는 강정마을에 3억원 넘는 벌금이 나와 노역을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 엄청난 벌금에 자기도 일조했기 때문에 몸으로 보태기로 했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강정을 다녀왔다. 공사장은 철통같이 봉쇄되어 있었고 상당히 공사가 진행되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해 활동가 등은 매일 오전 11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한다. 미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공사장 입구에 손을 잡고 늘어서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올레길이 있는 곳인지라 지나가는 관광객들 중에는 시끄럽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한 중년의 남성은 불쑥 내게 얼굴을 디밀고는 “돈 받고 하십니까”라고 비웃으며 지나가기도 했다. 내가 황당해하자 지킴이들이 별의별 사람들이 많다면서 외려 맑게 웃으며 위로해줬다. 평화가 무엇인지, 평화의 힘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 평화의 얼굴은 저런 수많은 모욕과 멸시, 그리고 탄압을 이기며 만들어진 단단한 것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강정을 지키려다 감옥에 간 분들의 이름과 강정과 함께 싸우다 기소되고 처벌된 사람들의 이름이 길게 적혀 있다. 지난 26일 출범한 강정법률지원모금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7년간 강정마을에서 체포·연행된 사람은 663명, 누적 구속자 38명, 재판 결과 형이 확정된 사람 230명, 벌금 액수는 3억원이 넘는다’. 활동가들은 이 중에서 가장 악랄한 것이 벌금이라고 말한다. 이제 데모를 하려 해도 돈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게 되었다며 허탈해하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 반대 주민들 기자회견 (출처 :연합뉴스)


강정뿐만이 아니다. 권력의 부당함에 항의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벌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가장 잔인한 수단은 최루탄과 강제진압이 아니라 손배소와 민사소송, 벌금이다. 쌍용자동차 파업으로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손해배상금이 47억원이었다. 다른 사회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는 사회운동일수록 벌금과 같은 경제적 탄압은 그 효과가 엄청나다. 경제적 능력을 완전히 박탈해 현재의 삶도 박살내고 미래도 꿈꾸지 못하게 하는 악마와 같은 탄압 수단이다. 돈 없고 힘 없기 때문에 몸으로 권력과 부딪치는 것인데 그 몸에 벌금을 부과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

활동가들이 이에 항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역을 살러 들어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9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공동대표가 200만원 벌금을 ‘몸빵’하기 위해 스스로 구치소에 들어갔다. 그는 구치소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벌금 때문에 가뜩이나 가난한 장애활동가들의 호주머니를 털지 말아달라 했다고 한다. 누구는 일당 5억원이지만 그가 받는 일당은 ‘엄정하게도’ 5만원이기 때문에 200만원을 때우려면 40일을 갇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활동가들이 긴 줄을 서고 있다.

그러나 노역을 살러 가는 이들은 단지 돈이 없어 권력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순순히 노역장에 들어감으로써 권력과 맞섰던 자신들의 몸은 벌금 따위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한다. 벌금으로 대체되기를 거부하는 것을 통해 돈과 권력을 넘어서는 몸, 나는 그들의 노역에서 그 불가능이 현실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 같은 이 치욕의 시대에 기적과 같은 선물을 ‘거저’ 받은 우리가 이제 응답해야 한다. 우선, 강정에서는 법률 지원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다.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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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치를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의 논란과 비판의 대상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된다. 새 정치를 참으로 갈망하고 구현코자 한다면 그러하다. 우리네 삶에서 논란과 비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국민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세력과 세력이 경쟁하는 정치의 장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의도했든 아니든 논란과 비판을 앞세우다 보면 대부분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그리 되면 먹고사는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원하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들어가는 안철수 의원의 최근 행보는 실망스럽다. ‘안철수 새 정치’의 성공과 실패를 서둘러 재단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실패를 예측하거나 선언해버리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는 상황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안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정강정책에서 4·19 혁명, 5·18 항쟁, 6·15 남북공동선언, 10·4 남북정상선언의 정신 계승을 언급한 부분을 삭제하자고 했다. 당연히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은 물론 진보정치세력을 포함한 야권 전체의 역사성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란의 정치’. 안 의원이 새 정치라 이름 붙이고 해 온 정치는 논란을 일으키는 정치다. 이번의 정강정책 논란 이전에도 그러했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 기초 단위 공천제 폐지를 갖고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통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했다. 지금은 정부·여당의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연계안의 한시적 수용을 제안하고 나서 또 논란 중이다. 논란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논란할 것과 논란하지 않을 것, 그리고 논란할 때와 논란하지 않을 때를 제대로 구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뭔가 제안할 때마다 논란을 일으키는지라 도대체 언제 민생을 챙기고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정세적 계기를 만들고 힘을 키울까 싶다.

담소나누는 안철수-윤여준-윤장현 (출처 :경향DB)


안 의원의 새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 특히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논란의 회로에 갇혀 있다. 안 의원의 이런저런 제안에 대해 ‘그게 새 정치냐’ 반문하고선, ‘아니다’ ‘틀렸다’는 비판에 기대어 논란을 키워 왔다. 안 의원을 마치 시험 보는 학생 취급하면서,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정답을 갖고 점수를 매기려는 싸늘한 채점관들 같다.

이들의 정답은 ‘4·19, 5·18, 6·15, 10·4 정신 계승은 새 통합야당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꼭 명기해야 한다’ ‘국회의원의 정수는 국가 규모를 감안했을 때 오히려 늘려야 한다’ ‘정당정치가 뿌리내리기 위해선 기초 단위 공천제를 유지해야 한다’ ‘기초연금은 국민연금과 성격이 다른 별도의 것이기에 연계해선 안된다’ 등등이다. 이것이 정말 고정불변의 정답일까? 설사 정답이라고 해도, 안 의원의 새 정치가 과연 그 정답을 따르지 않아 실패하는 것일까? 혹은 그 정답을 따르면 새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들은 안 의원의 리더십 스타일을 지적하기도 한다. 홀로 - 혹은 소수 최측근과만 의논해 - 결정하는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이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안 의원의 리더십 스타일을 탓한다고 달라질 게 도대체 무엇인가? 갑자기 안 의원이 다른 사람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안 의원이 다른 사람이 된다면 새 정치의 실패를 막고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새 정치를 ‘책임정치’의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 에릭 프롬에 따르면, 책임은 배려와 관심 속에 타인의 요구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새 정치에 관계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행여 자신들이 중시하는 문구와 제도와 규칙만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자칫하다간 새 정치가 낡은 정치의 다른 이름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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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업들의 보편적인 임금체계는 연공급(호봉제) 형태의 기본급과 제 수당, 그리고 기본급과 연계되어 지급되는 상여금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기승급과 노사 간의 교섭으로 임금이 조정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저게 도대체 어느 나라 얘기냐고 묻는다. 지난 19일, 대한민국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 내용인데 말이다. 하긴, 노조 조직률 10%도 안되는 나라에서 ‘노사 간의 교섭’으로 임금이 조정된다니? 매뉴얼은 초입부터 사기성 기질이 농후하다.

어디 그뿐인가. 툭하면 해고되고 자주 일자리를 옮기다보니 항상 신입사원 신세다. 매년 상여금을 깎아서 최저임금 인상분을 채워주니, 이제는 받을 상여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보편적인 임금체계’가 듣도 보도 못한 연공급, 호봉제, 상여금, 정기승급 중심이라니?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건 완전히 딴 나라 얘기다.


간접고용 철회하라 (출처 :경향DB)


노동부의 매뉴얼은 현재의 임금체계를 △기본급 중심으로 임금 구성항목을 단순화하고 △기본급에서 연공성을 줄이고 △상여금은 성과와 연동돼야 한다고 말한다. 10~20년 일한 노동자나 신입사원이나 임금이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연공성은 아예 없다. 정부와 국회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지난해 12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근속수당 2만원을 신설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사장에게 예쁘게 보이면 좀 더 받고, 밉보이면 덜 받기도 하니 ‘성과(!) 상여금’도 익숙하다. 최저임금이 곧 기본급이고, 그 이외 수당이 거의 없으니 기본급 중심의 단순한 임금체계, 글자 그대로 ‘벌거벗은 임금’이다. 노동부 매뉴얼은 간단히 말해 이 나라 10%에 불과한 정규직 조직노동자 연공급 임금체계를 깨고, 90%에 달하는 미조직 비정규직의 ‘벌거벗은 임금’ 체계로 가자는 얘기다.

지난해 통상임금 논란을 시작한 박근혜 정권이 내놓은 종착역이 바로 이것이다. 마치 모든 노동자들이 상여금과 수당을 받는 것처럼 속여 수십조원의 비용이 발생한다는 억지를 사실로 포장했다. 대법관들은 민법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신의칙’을 노동법에 적용하는 창조(!) 법리로 사장님들 빚을 일거에 탕감해주었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이제 그나마 10% 남은 임금체계마저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90%는 이미 벌거벗었기에 연대의식을 느끼지 못하니, 10%만 고립시켜 마저 벌거벗기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0%가 자기 것만 지키겠다고 싸워봐야 본전도 못 찾고 패퇴할 것이 뻔하다. 10%가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머지 90%와 연대해 전선을 확장하는 것뿐이다.

“일자리 빼앗는 규제는 죄악이다.” 노동부 매뉴얼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20일), 박근혜 대통령이 끝장토론에서 밝힌 얘기다. 아하, 전경련·경총·대한상의 등 사용자단체들이 입만 열면 이놈의 규제 때문에 기업 못해먹겠다고 말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최저임금’ 아니던가!

그렇다면 조직된 10%가 해야 할 일은 통상임금 소송 준비가 아니다. 자신이 벌거벗겨지지 않으려면, ‘벌거벗은 임금’에게 옷을 입혀야 한다. 즉 최저임금을 높이는 투쟁에 자신들이 가진 힘을 최대한 쏟는 것이다. 투쟁기금을 모금하고,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평조합원 선언운동을 조직할 때다. 지방선거가 코앞이니, 이런 운동이 활발히 벌어진다면 후보들도 외면하지 못할 대세가 될 것이다.

가장 밑바닥의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면, 그 혜택은 맨 위의 10% 조직노동자들에게도 돌아간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고립을 탈피할 기회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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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면을 넘기다 처음 보는 단어를 발견하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공간복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의원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는 복지 담론의 궁극을 향하고 있을뿐더러, 오늘날 서울이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로 읽혔다. 하지만 제목뿐이었다. 혹시 내가 잘못 이해했나 싶어 해당 기사를 거듭 읽었지만, ‘공간복지’라는 단어에서 느꼈던 기대감 이상의 깊은 실망감만 얻었을 뿐이다.


한 사회의 계층관계와 권력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그림으로는 필지(筆地)가 표시된 지도만 한 것이 없다. 도로에 면한 거대 필지의 소유자와 작은 골목 사이사이에 숨은 작은 필지의 소유자 사이에는 명백한 권력적 위계가 있다. 도시 안에 땅 한 평이라도 가졌다면 그래도 힘이 있는 축에 속한다. 도시 주민의 태반은, 도시 공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길 권리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도시는 본질상 주식회사와 비슷하다. 소수의 대주주가 회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처럼, 자본주의 도시는 거대 필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이 도시의 변화 과정을 좌우한다. 대지주들은 거대 필지에 초고층 건물을 지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으나, 같은 도시 주민이라도 땅 한 평 갖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자기 삶의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아무런 표시도 할 수 없다.

한강 아라뱃길 방문한 정몽준의원 (출처: 경향DB)

자본주의 이전부터 수백년간 도시로 존속해온 서울과 같은 역사도시들에서 역사란, 각 필지의 크기와 위치로 표현되는 계층관계와 권력관계의 변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도시에서 개발이란 빈 땅에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라 이미 다른 건물이 있던 땅에 새 건물을 짓는 행위이다. 지난 반세기 넘게 우리가 겪어온 바와 같이, 서울의 도시 재개발 과정은 정확히 사회의 양극화 과정과 궤를 같이했다. 지도에서 작은 필지들을 지우고 그들을 묶어 하나의 큰 필지로 만들어서는 큰 빌딩을 지어 올리는 것이 도시 재개발의 일반적 방식이었다.

현 대 서울 도심부 대로변은 모두 대기업과 은행이 소유한 거대 필지들로 가득 차 있다. 누구 땅인지도 알 수 없는 소형 필지들은 거의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채 잔명(殘命)만 유지하는 정도다. 변두리 주택가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수백개의 작은 필지들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통합한 뒤에 그를 다시 그 필지들과는 본래 아무런 연고도 없던 수백, 수천 가구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 필지로 묶어서는 대단위 아파트를 짓는 것이 재개발이고 뉴타운사업이었다. 물론 이런 필지 통합, 대자본의 공간 지배가 평화롭고 순조로운 과정일 수는 없었다. 6·25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는 바로 도시 재개발 현장들이었다. 1960~1970년대 판자촌 철거 현장에서, 1980년대 사당동 등지의 합동재개발 현장에서, 최근의 용산참사 현장에서까지 숱한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자기 삶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퇴각하곤 했다.

‘공간복지’라는 말을 쓰려면, 먼저 이 현실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았을까? 공동체 구성원 누구에게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복지’라면, ‘공간복지’란 이 도시에 사는 시민들 누구에게나, 땅을 가진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자기 삶의 터전에 대한 최


소한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토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공간 이용권’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것, 그들을 ‘강제 철거’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간복지’여야 하지 않을까? 말로는 ‘공간복지’를 내세우면서도 공간에 대한 약자의 권리를 도외시하고 추진되었던 용산 재개발 사업을 재추진하겠다는 것은, 4대강 사업에 ‘녹색성장’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였던 과거의 행태와 너무 똑같지 않은가?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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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에서 20여년 전 날짜가 적힌 책 두 권을 꺼낸다. 먼저, 극작가 마샤 노먼이 쓴 희곡 <잘 자요, 엄마>. 극 초반에 엄마에게 자살할 거라고 말한 딸은 극 마지막에 문을 걸어 잠근 방 안에서 권총으로 목숨을 끊는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엄마는 딸을 달래고 설득하고 화를 내고 협박하며 어떻게든 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함께 살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딸의 처지에서가 아니라 엄마 위치에서 생각한 말과 행동은 딸의 가슴에 가닿지 않았다. 극에 등장하지 않는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해마다 슬리퍼를 선물했는데 그것은 동생에게 필요하지도, 크기가 맞지도 않았다. 그이들은 의식하지 못했다. 섬세하지 못했다. 상대에게 무엇이 어떻게 필요한지 귀 기울이거나 마음 쓰지 않았다. 딸을 위해서였다지만 자신을 위한 말과 행동은 진실마저 감추었다. 딸을 자신들에게 불편하고 불안한 존재로 만들었다.

두 번째 책에는 극작가 존 프레스리가 쓴 <에바 스미스의 죽음>이 들어있다. 의문의 수사관이 어느 집을 방문해 한 여성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집의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하는데 몇 해 전, 임금인상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열심히 일한 여성 노동자를 해고했다. 딸은 옷을 사러 갔다가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아무 잘못이 없는 백화점 판매직 여성 노동자를 모함해 해고당하게 했다. 자선부인회 간부였던 부인은 혼자 아이를 낳아야 할 처지에 놓인 여자가 찾아왔을 때 매몰차게 내쫓았다. “가장 절박할 때, 가장 인간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했다. 아들과 곧 사위가 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에바 스미스를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연루된 죽음이었다. 수사관이 떠난 뒤, 수사관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속은 건 아닌지 의심하면서 누구나 다 그러고 살지 않느냐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려 든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앞의 책을 소리 내어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픈 죽음을 들었다. 희곡 속 주인공은 마지막 장에서는 죽지만 다시 앞장을 펼치면 살아있다. 방향을 조금 바꿔 원작을 각색해 공연한다면 죽지 않는 것으로 결말을 낼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 죽음은 만약이라는 가정도, 되돌림도 불가능하다.

60대 여성노동자가 두 딸과 함께 죽음 말고도 다른 살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작은 숨구멍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다면, 여태껏 고단했을 삶이 앞으로 더 고단해지더라도 부여잡을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이들이 죽음으로 말해버린 것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나는 잠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두 희곡 속 등장인물들과 나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여성노동자 노동처우 개선 촉구 (출처: 경향DB)


지난 토요일, 서울 청계광장과 보신각 앞에서 3·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한 행사가 열렸다. 그 거리에 서니 세상을 떠난 저이들이 떠올랐다. 광장에 모여 다른 여성들과 씨줄과 날줄로 엮여보지 못하고 가버린 여성들.

이제 책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먼저 간 세 여성과 각기 비슷할 나이대의 여성들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전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단시간 노동 계약을 강요하는 대형 유통할인매장, 눈을 쓸다 다치면 용역업체 소장한테서 “그만둬야지, 어디서 산재처리를 얘기하느냐”는 말을 들어야 하는 대학 청소노동자, 6개월마다 평가를 통해 재계약을 해 1년9개월을 일했는데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는 2년을 3개월 앞두고 비정규직보호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비정규직 간호사를 해고하고 다시 그 자리에 비정규직을 들이는 병원, ‘민간위탁 직접고용’을 요구하니 일군의 상담사들을 해고하려 드는 콜센터, 여성 조합원들이 일하는 곳과 탈의실로도 쓰는 휴게실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는 제조업 현장, 이에 특별근로감독을 나와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청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더라는 노동청…. 여성, 노동자,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이 무딘 사회에서 더는 누구도 삶을 빼앗기지 않기를….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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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몇 달 앞둔 2012년 10월15일에 벌어진 일이다. 하루 평균 수십 명에 불과하던 트위터 팔로어 수가 단 2시간 만에 400명 가까이 늘었다. 트위터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었는데 조금 뒤 안철수 후보가 개인 트위터를 개설했다는 뉴스가 떴다. 안 후보가 35명을 팔로잉했고 내가 35번째였다. 안 후보가 이틀 동안 친구 신청을 35명에서 더 늘리지 않아 그 뒤에도 수백 명의 팔로어가 더 늘어 있었다. 이를 본 몇몇 매체는 ‘반(反)대기업 정서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안 후보의 트위터 친구 신청 명단에 친(親)노동, 반기업적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다는 것이다.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일면식은 물론 소위 노동과 관련한 어떤 행보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트위터 친구 신청으로 대번에 친노동으로 분류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위 쌍용차 해고노동자에게 친구 신청한 것이 정치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0일 뒤 안 후보는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를 전격 방문했다. 방명록엔 ‘남아 있는 분들께 희망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적었다. 그러나 대선에서 쌍용차 국정조사가 여야 대선 공약으로 다뤄졌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참 나쁜 정치였다.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는 공권력에 의해 짓밟혔고 거리에서 농성하는 이들의 고통의 눈물은 아무도 닦아주지 않았다.


엊그제 일요일 아침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합당 소식이 모든 매체를 덮었다. 합당 기자회견에서 안철수 의원은 약속의 정치를 반복했고 거짓말 정치와 대결하겠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겨냥한 발언이기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그 약속의 정치가 공허하게 들리는 건 나뿐일까. 참 나쁜 정치란 정치적 수사가 집권 여당에만 해당되는 말이어야 할까. 기초공천 폐지가 새 정치의 금과옥조로 여겨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대선 공약을 파기한 집권 여당의 뻔뻔함을 질타하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당연히 공약 이행을 주문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대선 공약이었던 쌍용차 문제는 늘 왜 뒷전인가. 2012년 쌍용차 국회 청문회 당시 안철수 후보는 대선 후보 기자회견을 준비 중이었다. 청문회와 기자회견이 겹칠 경우 4년을 기다리고 준비한 우리로서는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었다. 그래서 캠프에 전화를 했고 날짜를 고려해달라고 주문했다. 다행스럽게도 기자회견과 청문회는 겹치지 않았다. 딱 그만큼이었다. 쌍용차 문제로 대표되는 노동의 절박함은 정치인들의 일정이 겹치지 않는 그 정도에서 안도와 다행을 표할 뿐이었다.

지난 2월7일 서울고법은 ‘쌍용차 정리해고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인내의 시간이 더는 길지 않길 바란다는 재판부의 당부도 뒤따랐다. 법적으로만 해결하기엔 쌍용차를 둘러싼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변화와 해결책 없이 한 달이 지나고 있다. 회사는 회계조작에 대해 뻔뻔한 거짓말을 되풀이한다. 정치권 누구 하나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다. 정치인들의 약속이 모두 선일 순 없다. 당장 4대강을 하겠다던 이명박의 공약이 그렇다. 따라서 누구를 위한 약속이었는지 어떤 약속이었는지가 중요하다. 노동과 민생의 문제는 정치인들이 하는 약속의 본령이 아닌가. 새 정치란 것이 거짓말 정치와 구별되고 구태정치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보고 싶다. 쌍용차 문제 해결이 노동과 민생 문제의 모든 것으로 이해될 순 없다. 그러나 이미 법적으로 판결이 났고 사회적 심판도 끝난 사안인 쌍용차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텐가. 야속한 정치 한가운데서 약속의 정치 속삭임에 귀 기울일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쌍용차는 참혹한 죽음과 고통의 로도스 섬이다. 야속한 정치여 약속의 정치여, 여기서 뛰어보라.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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