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911년 3월25일은 토요일이었다. 오후 4시40분, 퇴근을 20여분 남겨놓은 상태에서 8층의 옷감을 재단하는 기계 밑 자투리 천을 모아놓은 통 근처에서 불꽃이 튀었다. 미국 뉴욕의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은 10층짜리 건물의 가장 높은 층인 10층부터 8층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공장주는 노동자들이 옷가지를 훔쳐 가거나 몰래 숨어서 휴식을 취한다는 이유로 출입문 두 곳 중 하나를 언제나 잠가두었다. 공장 안에는 공업용 재봉틀과 옷감들, 자투리천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공장 안에는 소화 장치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대부분은 미국에 이제 막 도착한 여성 이주노동자로 화재가 일어나기 2년 전이던 1909년 13주간의 파업을 통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지만,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공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화재가 일어나자 공장주는 가장 먼저 열쇠를 들고 탈출해버렸다. 탈출할 수 있는 곳은 옥상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과 화물 엘리베이터뿐이었지만, 화재가 발생하자 화물 엘리베이터는 작동을 멈췄고, 비상계단은 너무 부실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소방 사다리는 6층이 한계였다. 화재를 알리는 경보벨은 울리지 않았고, 뒤늦게 화재가 발생한 것을 깨달은 9층의 노동자들은 불길을 피해 뛰어내리다 추락사하거나 유독성 연기에 질식사하고 말았다.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 화재는 15분 만에 진화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모두 14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 화재는 미국 역사상 9·11 테러 이전까지 단일 사건으로 최대 희생자를 낸 사고로 기억된다.

2013년 4월24일 아침 8시45분, 방글라데시의 의류 공장 라나플라자 8층짜리 건물이 폭삭 주저앉아 노동자 1134명이 죽었다. 이미 전날부터 공장 건물에 금이 가고, 물이 새는 등 위험 징후가 있었지만, 공장주는 작업장에 들어가길 거부하는 노동자들은 두들겨 패서 강제로 작업대에 앉혔다. 세계 패션산업의 하부 구조를 지탱하는 수백대의 재봉틀이 한꺼번에 돌아가자 잠시 후 지붕과 기둥이 거짓말처럼 내려앉았고, 쇠창살로 막힌 창문과 이중 철제문, 좁은 계단과 원단으로 막힌 출구 안에서 누구도 도망칠 수 없었다.

1988년 한국의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900명이 유기용제 중독으로 미쳐서 자살하거나 사지마비로 신음하다 죽어갔다. 1998년 부산의 내동 창고 공사 중 폭발화재 사고로 27명이 숨지고 15명이 크게 다쳤다. 2008년 벽두 경기도 이천 공장의 화재 사고로 40명의 노동자가 화염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2015년 한 해만 하더라도 1월에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에서 3명이 질식사했고, 4월에는 SK하이닉스 이천공장에서 3명이 질식사했고, 7월에는 울산 한화케미칼 폭발사고로 6명이 숨졌다. 2016년에도 1777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최소한의 안전기준만 준수되었더라도 목숨을 잃지 않았을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매일 5명씩 죽어간다. 며칠 전(7월8일)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전자 LCD 공장(현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일한 노동자의 백혈병 피해가 산업재해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LCD 생산직의 백혈병 피해가 산업재해로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선진국에서는 노동자의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 영국의 경우 2007년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을 제정하여 2008년부터 기업 활동 중에 발생하는 사망사고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있다. 개인 간에 살의를 품고 자행하는 살인과 달리 산업재해로 인한 치사에 대해 관대하게 접근해오던 그간의 관행을 깬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 관련성에 대한 증명책임이 산업재해 피해자 측에 있다. 산업재해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 개선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국가의 실패(failure of the state)’로 보아야 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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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일본 사이타마 아레나에서 2만석 규모의 전용 공연장, 서울아레나를 도봉구 창동에 건립한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음악인들에게 창동은 아주 낯선 곳이었다. 왜 굳이 창동에 아레나를? 홍대도 힘들어 죽겠는데, 창동에 과연 뮤지션들이 갈까? 인디음악이 서울 동북권 도시재생 사업에 도구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건 아닌가? 이런저런 의구심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팽배할 즈음에, 서울아레나의 마중물 사업인 플랫폼창동61이 작년 4월29일에 개장했다. 형형색색의 해상용 컨테이너 61개로 만들어진 플랫폼창동61은 클럽형 공연장 레드박스와 입주뮤지션을 위한 스튜디오, 녹음과 합주가 가능한 레코딩 스튜디오와 리허설 스튜디오 등 음악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체계적으로 갖추었다. 홍대 앞 음악신(music scene)과 비교할 때,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창동의 초라한 모습은 플랫폼창동61의 좋은 사운드 시스템과 뮤지션 친화적인 편의시설로 인해 지금은 록, 힙합, 재즈, 국악 등 장르 뮤지션들이 가장 선호하는 공연장이 되었다.

플랫폼창동61은 2016년에 총 23만여명이 방문했고, 총 218회의 각종 문화프로그램, 뮤지션 137개 팀이 참여한 168회의 공연, 공연장 가동률이 90%를 넘어설 정도로 성공적인 첫해를 보냈다. 50여 입주·협력 뮤지션이 참여해서 96회의 공연을 진행했고, 올해도 40여 입주 및 협력 뮤지션들이 좋은 공연들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플랫폼창동61은 ‘원더걸스’, ‘트와이스’, ‘SS301’, ‘크나큰’ 등 아이돌 그룹들의 쇼케이스와 뮤직비디오의 촬영지이자, 각종 음악 관련 방송 프로그램의 녹화장소, CNN, BBC 방송의 취재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창동은 음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는 여전히 황량하고 쓸쓸하다. 플랫폼창동61이 있어 그나마 체면치레를 하고 있지만, 정작 본 사업인 서울아레나는 중앙 정부의 석연치 않은 사업 타당성 심사에 발목이 잡혀 17개월째 표류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 서울 권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창동에 K팝 아레나를 건립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한 바 있어, 조만간 긍정적인 결론이 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뮤직시티 창동을 조성하는 계획은 단지 대형 공연장만을 건립하는 것으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 유럽과 미국의 유서 깊은 음악도시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의 성장과 장구한 음악클럽들의 건재, 그리고 음악 팬들의 오랜 열정으로 만들어졌다. 뮤직시티 창동 역시 앞으로 수많은 뮤지션과 팬들, 그리고 다양한 음악 자산들이 모여 오랜 음악적 유산을 이루고 그것들의 축적을 통해서 성장할 것이다. 단지 도시재생을 위해 음악이 도구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도시의 미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원이 되는 뮤직시티를 상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뮤직시티 창동을 조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플랜이 수립되어야 한다.

다행히 7월6일 박원순 시장 주재로 음악 산업계의 전문가들이 모여 뮤직시티 창동을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들을 개진했다. 서울시가 준비하는 뮤직시티 창동 플랜 안에는 대형 아레나 공연장 이외에 2000석 규모의 라이브공연장, 장르음악 중심의 클럽 공연장 조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음악인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대중음악 명예의전당 건립과 대략 300여개의 음악과 공연 관련 기업 유치 계획도 준비되어 있다. 글로벌 음악비즈니스, 음악 테크놀로지, 차세대 음악 미디어 플랫폼 개발을 위한 대중음악 전문학교 설립과 균형 있는 음악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전문 지원기구 설립 등도 검토하고 있다. 다양한 규모의 공연장, 음악 산업을 견인하는 창의적인 기업들, 다양한 대중음악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과 차세대 음악 산업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창동이라는 장소 안에 집적될 수 있다면, 뮤직시티 창동은 상상의 은유가 아닌, 현실의 공장이 될 것이다. 이 희망 플랜이 내가 창동에 올인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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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외교·안보 관련 학술회의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분야가 남성 편향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발표·토론·사회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르는 전문가 대부분이 남성이다. 어쩌다 여성 전문가가 하나라도 끼면 으레 ‘홍일점’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홍일점’, 이 말은 사실 여성을 꽃으로 비유한다는 점에서 여성 전문가들로서는 듣기 거북할 것이다. 저변에 깔린 우리 사회의 특성이 여성을 ‘꽃’으로 인식하게 하고, 여성의 참여를 제한한다. 국민소득이 증대되고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부모의 아들딸 차별은 없어졌지만, 사회진출을 꿈꾸는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장벽과 마주친다.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성 전문가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또는 여성들의 참여가 저조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변명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참정권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 시발점이었던 프랑스대혁명 이후 일반시민들은 참정권을 부여받았지만, 여성은 자동적으로 제외되었다. 1800년대 후반 이후 여성의 참정권이 여성운동의 중심의제가 되었고, 세계 대부분 여성들이 투표권을 획득한 1960년대부터는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획득이 여성운동의 주요 과제로 대두됐다. 서구에 비해 민주주의 정치발전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는 현재 4당 중 3당의 대표가 여성이다. 서구로부터 이식받은 시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민주주의 정치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일상적으로 느끼는 문제들을 공적 영역에서 제기하고 논의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고 배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남녀동수 내각을 약속하고, 일단 여성 비율을 30%로 시작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리고 1기 내각 구성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남성편향적이고 국가중심적인 외교·안보 사안에 여성을 수장으로 임명했다. 정치권력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허물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강경화 장관은 자력으로 국제외교 무대에서 능력을 키워 남성들만의 성역처럼 여겨져 온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유리천장’을 깨고 솟아올랐다. 여성후학들에게도 롤모델이 될 것이고, 앞으로 제2, 제3의 강경화도 나올 것이다.

국제정치학이 국가중심적이고 남성편향적이어서 전쟁과 평화 연구에 여성의 경험이 첨가되지 않았다는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비판은 논외로 하더라도, 분단국인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와 역할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은 아쉽다.

‘2017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는 70.7%이고, 7급과 9급 공무원 여성 합격 비율도 41.7%, 57.6%이다. 다만 4급 이상 여성 공무원은 여전히 전체의 10.6%였다. 통일·외교·안보 분야를 연구하는 여성 전문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비켜갈 수 없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 연구와 활동을 했지만, 그에 걸맞은 사회적·국가적 참여와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사회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 최선을 다했는지 되짚어 봐야겠지만 실력과 경력을 갖추고도 기존편견과 고정관념의 유리천장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우리는 탈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탈냉전시대에선 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배리 부잔이 말한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 다양한 사항을 포함한 ‘확대된 안보개념’이 필요하다. 그래서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과 참여가 기대된다. 예를 들면 분단국인 우리의 경우 탈북자의 남한사회 정착 문제와 북한인권 문제가 그런 분야일 것이다. 탈북자의 80%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여성 전문가들이 탈북자의 우리 사회 적응과 정착, 복지정책을 개발하고 일선 업무에도 나선다면 효율적일 것이다. 북한인권 개선 문제도 여성의 시각을 통해 문제를 인식하고 인권개선의 가치를 실현한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여성의 참여와 역할로 통일·외교·안보 현상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길 기대한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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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4일 행정자치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있었다. 김부겸 장관은 기록 관련 질의를 받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기록관리가 발전했다는 기조로 답변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의외의 답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검찰이 이전 정부에서 공명정대하게 검찰권을 행사했다는 답변이 나온다면 큰 사회적 파장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공적 기록관리는 노무현 정부 때 토대가 마련되었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급격히 후퇴했다는 것이 기록 관련 학회와 전문가단체, 시민단체의 중론이다. 2008년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 고발사건, 2012년 대선 당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사건, 2017년 박근혜 대통령기록 무단폐기 및 이관 적법성 논란, 대통령경호실의 문서목록 미작성, 기록 블랙리스트 논란 등은 퇴보를 거듭한 기록관리 분야의 쓸쓸한 단면이다.

기록은 노무현 정부에 와서야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내내 기록혁신을 단행했다. 대통령기록은 2007년에 제도가 마련되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뒤이은 정권은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이관된 대통령기록을 이용해 정치공세를 벌이는 등 제도를 악용하고 훼손했다.

김부겸 장관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대통령기록을 1000만건 넘게 이관했으니 기록의 중요성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게 아니냐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편의적인 해석이다. 1000만건이라는 수치는 문제가 있다. 홈페이지 등 웹 기록이나 사진은 시대적 추세이다. 현재 이관된 기록의 대다수는 이런 기록이다. 대통령기록의 핵심은 대통령보고서, 대통령 회의기록, 외교안보기록, 주요 정책문서 등이다. 지금 이런 기록이 이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주무기관인 국가기록원이 상세한 이관과정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량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앞서 언급했던 대통령기록 무단폐기 및 이관 적법성 논란이 심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은 국가기록원이 문제였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국가기록원은 정부기록을 책임지는 중앙기록물관리기관이다. 공공기록법과 대통령기록법을 운용하고 있으며 대통령기록관을 소속기관으로 두고 있다. 정원은 350명이다. 국민이 국가기록원에 이렇듯 막강한 권한을 주면서 책임을 맡긴 것은 기록이 민주주의 성숙의 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은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갈등을 악화시킨다는 비판이 오히려 거셌다.

국가기록원 개혁이 대한민국 기록 정상화의 시발점이다. 개혁방향은 국가기록원의 독립이다. 현재 국가기록원은 행정자치부 소속기관이다. 국가기록원장은 행자부 국장급이 임명되며 임기는 평균 1년이다. 독립성도 안정성도 없는 이런 상황은 행자부 인사관행이 낳은 기현상일 뿐, 기록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조직의 수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국가기록원장이 바로 서야 국가기록원 독립도 바로설 수 있다. 소신과 전문성,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정신과 역사의식이 투철한 기록전문가가 국가기록원장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가기록원장 직위를 개방직으로 풀어야 한다. 기록의 무게를 감당할 기록전문가가 우리 사회의 기록운명을 이끌어가야 한다.

기록이 발달한 곳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기록공직자가 있다. 이 자리에 오른 기록전문가가 국가기록을 책임진다. 미국은 국립기록관장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국립기록관(NARA)은 1930년대 설립된 이후로 줄곧 총무처 소속기관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에 독립해 연방정부의 기록관리를 전담하는 독립행정기관으로 탈바꿈했다. 수장은 국립기록관장이면서 동시에 ‘미국 아키비스트’라는 상징적 지위까지 부여받는다. 이런 이유로 행정관료가 아닌 기록전문가가 국립기록관장이 된다.

이제 우리에게도 ‘대한민국 아키비스트’가 필요하다. 단지 수량이 아니라 기록의 무게를 감당할 기록전문성과 기록의 중요성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되어야 한다.

이영남 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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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권은 트럼프 스캔들로 요란스럽지만, 정작 미국이 당면한 핵심적 문제는 트럼프에도, 그리고 러시아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미국의 의료보험제(오바마케어)는 현재 상태로는 지속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케어로의 수정도 사실상 상원 통과가 불가능하다. 재정 계획이나 조세 개편안은 아무도 현재 상태로는 통과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의회가 승인해준 미국의 부채 발행 한도는 다 찼기 때문에 재정 고갈로 인한 정부 셧다운 가능성은 커져가는데 정작 트럼프 행정부는 국방예산 증액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6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국무부 등 주요 행정부 핵심 포스트를 아직도 온전히 채우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하원외교위원장이 “현재 국무부는 여러 가지 사안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리고 이는, 심지어는, 공화당이 행정부와 상·하원 모두를 장악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다른 말로 해서 트럼프 행정부는, 그리고 의회는 ‘정상 작동’이 안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언하고 멜라니아 트럼프가 옆에서 박수 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사회학에서는 이처럼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국가기구가 맡겨진 자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를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라는 개념으로 정리하는데 우리네 말로 옮기면, “이게 나라냐”쯤에 해당한다. 엄밀히 말하면, ‘실패한 국가’는 각기 층위가 다른 몇 가지 정의가 혼재된 것이다. 실패한 국가는 부패, 무능력 등으로 국가기구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기능적 비효율성’(dysfuntion)을 보이는 경우도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 정치가 반영해야 하는 사회 내부가 도저히 상호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보다 근본적인 것은 사회 내의 적대적 대립이다. 국가의 기능은 그 효율성과 역량의 정도와 무관하게, 이 같은 사회적 적대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외부로 표출되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8년 이후 미국 정치의 변화 과정은 자못 시사적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 대중들은 기존 체제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변화’를 내세운 오바마와 민주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집권 뒤에 한 일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보수’(repair)와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래서 실망한 대중들은 2010년의 중간 선거에서는 공화당(티파티)에 표를 던졌다. 그러자 ‘민주주의자’인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의 민주적 의사’를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보수파와 더 타협했으며, 결과는 더 강력한 현상 유지였다. 오바마의 정치적 레토릭, 즉 자신은 국민 통합을 위해 노력하는 개혁파라는 이미지는 그의 재선에는 도움을 주었지만, 기득권의 강화에 불과했으며, 그럴수록 대중들의 불만은 더 커져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요인들이 바로 어떤 막말을 해도 지지를 받는 트럼프현상을 불러왔다. 그 결과 미국 대중들은 금융위기 이후 거의 10년이 지나는 동안 기득권인 민주당과 또 다른 기득권인 공화당 사이를 오가면서 결국은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었고, 그사이에 국가기구는 자신들의 조직 이기주의만을 존재 이유로 삼게 되었다.

미국의 사례는 한국에 대해서도 비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대중의 구호가 ‘이게 나라냐’에 머무는 한, 그것은 단지 국가 기능의 강화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일조할 따름이며 그것이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나라’가 아니라 ‘사회’이며,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수십년 동안 똑같은 비정상과 실패를 재생산해내고 있는가이다. 실패한 국가에 질려서, ‘제대로 된 국가’(정상국가·normal state)만 바라고 빌고 있다면, 우리는 10년 뒤에도 여전히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에 매달려 이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진자 운동을 할 뿐,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을 것이고, 트럼프를 훨씬 능가하는 더 화려한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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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33번이나 거론한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연설. 2017년도 추경 예산이 통과되길 바라면서 강조한 말이다. 현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는 일자리고, 그 핵심에 청년이 있다. 엊그제 국가일자리위원회가 첫발을 내디뎠다. 일자리위원회에 대한 기대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많다. 청년정책이 ‘청년구직촉진수당’으로 대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고용, 주거, 문화, 복지 등 여럿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일자리만 강조되는 모양새다.

사실 지난 한 해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사업’(청년수당)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날선 공방을 벌였고, 정치권에서도 쟁점이었다. 청년수당이 중앙정부와의 협의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반대했던 보건복지부도 동의 통보를 했다. 평균 연령 27.7세, 여성 52.5%, 3분의 2 대졸 이상 학력. 바로 2017년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사업 신청 청년들이다. 문제는 미취업 기간이다. 신청자들의 미취업 기간이 20.8개월이나 된다. 전체 청년 구직기간의 두 배로 장기실업 상태가 다수였다.

지금 청년들에게는 당장 버틸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필요하다.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사업 신청자 8329명의 사연에서 하나같이 청년들의 절박하고 아픈 흔적들을 엿볼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주변 사람조차 사라진 지 오래인 청년들. 점점 더 고립되어 가는 청년들. 사회조차 외면했던 청년들의 삶. 아픈 부모를 간병하며 아르바이트하는 청년부터 장애 청년까지. 학교 밖 사회로 나와 취업하지 못한 청년들의 삶은 ‘인간 존엄의 상실’ 그 자체였다. 청년활동지원센터 실무자들은 한 명이라도 더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부족한 서류 때문에 탈락되면 안되니까.

물론 청년활동 신청자들의 활동계획에서는 희망도 확인된다. 그들은 “작년에 단 한번이었지만 그 기회에 꿈을 꿔볼 수 있었다”, “이렇게 계획을 이야기할 기회라도 있어서 고맙다”는 말들을 남겼다. 센터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마음속 작은 이야기라도 꺼낼 수 있는 공동체라도 만들어 보고자 했다. 자신의 마음 한 번 돌아볼 여유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동네에서 그냥 만나는 ‘어슬렁 반상회’를 시작했다. 이 모임은 여섯 명에서 여덟 명 정도로 꾸려진다. 자기 안의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미약하지만 서울시와 같은 사업은 이행기 노동시장에서 필요한 정책이다. 이미 서울시 청년수당을 계기로 경기, 대전, 광주 등 광역지자체 절반에서 검토 중이다. 광주는 ‘청년드림사업’을 시작하고 있다. 드림사업 1기 131명(여성 78명)이 84개 사업장에서 다양한 진로역량을 쌓는 경험을 한다. 청년활동, 사회적경제, 공공기관 등 청년특성과 욕구에 적합한 5개 유형별 사업이다. 1주일 25시간 내외 참여와 활동으로 자기모색과 일 경험을 한다. 이 때문에 청년들은 취업이나 자격증, 교육 등에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다. 게다가 광주는 드림사업 참여자들에게는 지자체 생활임금을 지급한다.

촛불로 시작한 새 정부는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할까. 청년들을 취업에 대한 강요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 2010년부터 국제기구들은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환경에 맞게 새로운 청년정책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2013년 유럽연합은 고용과 실업 해소를 위해 청년보장제도(Youth Guarantee)를 회원국들에 권고한 바 있다. 유럽연합도 몇몇 지역에서 시범사업으로 시작했다. 예산도 중앙과 지역이 일정 비율의 매칭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이제 우리보다 앞선 정책을 시행했던 나라들의 정책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확인할 때이다. 특히 청년정책은 일자리 제공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책과 연결될 때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더 나은 진로를 모색할 시간과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한 청년들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한 정책과 포괄적 지원서비스도 필요하다. 서울이나 광주의 정책들은 청년들이 부딪혔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고민한 결과물이다. 무릇 정부가 어떤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좋은 모델’을 확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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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양재동 서울행정법원에서는 전시작전권 이양 조약 공개 소송 재판이 열렸다. 아다시피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에 근거해서 한국 대통령의 헌법상 전시 국군통수권을 이양받았을까?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0년 7월14일, 맥아더 유엔군 연합군 사령관에게 편지로 작전권을 넘겨준 것은 지금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엔군 연합군 사령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엔군 연합군이라는 법적 실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엔군 연합군은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해산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미국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는가? 비밀조약이다. 국방부는 1978년 7월27일,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비밀약정을 체결했다. 국방부 장관은 2015년 11월13일, 정보공개청구에 답신을 보내면서 이 약정 이름을 ‘관련 약정(한미 비밀문서/’78.7.27)’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국방부 장관은 한국이 같은 해 10월17일, 이 ‘관련 약정’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한·미 외교부 간 한·미 연합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각서를 교환했다”고 답신했다.

지난 13일의 정보공개소송은 이 비밀약정을 공개하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한·미 연합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각서를 공개하라고 소송을 했다.

법정에서 외교부는 이 각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각서가 사법부의 손에 처음으로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정보공개법에 따른 적법한 절차이다. 정보공개법은 재판부가 직접 비공개로 소송 대상 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정했다.

정보공개법에 따른 열람 결과, 이 각서에는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이양한다는 조항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각서 그 어디에도 전시작전권 이양 조항은 없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전시작전권 행사를 하는 법적 근거로서의 조약은 어디에 있는가? 국방부 장관이 답신한 관련 약정(한미 비밀문서/’78.7.27)에 전시작전권 이양 문구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관련 약정이란 것의 법적 실체는 여태 단 한 차례, 국회나 언론 그리고 전문가 집단에 의해 검증된 적이 없다. 위에서 보았듯이 한국 외교부가 따로 미국과 각서를 교환하는 절차를 추가한 것에 비추어 보면, 관련 약정은 아마 국방부와 주한 미군 사이에 실무적 절차로 체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것을 국제법적으로 적법한 조약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전시작전권을 비밀조약으로 미국에 이양한 것은 국민주권 위반이다. 이는 곧 헌법을 부정한 일이다.

이성덕 교수가 ‘미국의 군사작전통제권하에서의 한국군’이라는 논문에서도 지적했듯이 전시작전권 이양은 “실질적 국가 주권의 중요한 부분”을 이양한 것으로, “최소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방부와 외교부는 전시작전권 이양 비밀조약을 공개하지 않는다. 한·미 군사 비밀 문서라는 이유를 내세운다. 심지어 외교부는 정보공개 소송에서 미국이 각서를 공개하지 않는 상황이므로 한국도 공개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넘겨준 한국과 이를 받은 미국의 입장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 이는 헌법이다. 제74조 제1항이다. 중요 조약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는 헌법 제60조 제1항이다.

국방부와 외교부는 이제라도 전시작전권 이양 비밀조약을 공개하고 국회에 보내야 한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정부에 비밀조약을 국회로 보내라고 요구해야 한다.

안보·외교·통상에서 적법절차 원칙을 세워야 한다. 지금 온 나라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은가.

전시작전권 이양 비밀조약은 절차적 정당성 훼손의 뿌리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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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이번 정부 인사청문회도 요란합니다. 비난과 고성이 오가고 사과와 변명이 따릅니다. 지지율이 14%인 제1 야당 대표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위장협치’ ‘독선’을 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죠. 하지만 야당의 고함이 큰 것과는 달리 여론은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가 80% 안팎에 이르고 있죠. 아주 드문 일입니다. 논란이 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임명에 찬성이 62.1%로 반대 의견 30.4%에 두 배가 넘었습니다. 대통령의 임명강행을 주문하는 의견도 과반 이상이죠. 민의가 어디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 민주체제라는 가정을 놓고 보면 야당의 법석 떠는 모습은 이상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이 기이한 풍경이 그렇게 낯설지도 않죠. 민의를 거스르는 자유한국당의 전통은 아주 오래된 탓입니다. 박근혜가 2012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한나라당이었고, 이는 이회창이 1997년 15대 대선을 준비하며 꾸린 정당이었습니다. 그 전신인 신한국당은 1995년 김영삼이 당내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바꾼 이름이었고 그 전에는 민주자유당이었죠. 민자당은 1990년 3당 합당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핵심인 민주정의당은 전두환의 정당으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공화당은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군부 세력이 구 자유당 세력, 일부 시민사회단체를 흡수해 1963년 창당했죠.

굳이 독재와 총칼의 과거를 들추지 않아도 됩니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의 염원을 뿌리치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4대강 사업을 강행했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병적 독단과 저열한 음모로 헌법을 짓밟았습니다. 그의 정치보복은 정치세력을 넘어 문화예술인까지 무자비하게 짓밟았죠. 그 탓에 지지도가 4%까지 내려간 박근혜를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하겠다는 신념 하나”뿐이라며 감싼 이가 바로 자유한국당의 정우택 원내대표입니다.

억압과 의전에 익숙해져 온 사람들에게 민의는 다만 어르고 다스려야 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르죠. 민의를 듣고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듯합니다. 그러니 협치는 언감생심 꿈도 꾼 적이 없을 테죠. 여의도로 입성하는 첫날 한강 중간쯤에서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1961년 한강 다리를 건넜을 때, 또는 1950년 인도교 폭파 때 이미 버렸을지도 모르죠.

2009년 이상적이고 젊은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게다가 첫 흑인 대통령이었으니 여러 소외계층의 기대가 컸죠.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 또한 정권 초기 협치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의료보험 개혁에 상당한 공을 들였죠. 야당이 된 공화당과 재계를 상대로 설득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공화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이어갔고 결국 개혁안에 한 표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공화당은 오바마의 제안을 무조건 반대하는 정당으로 변모했고 오바마 정부도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죠. 애초에 그런 기대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현실을 직시했더라면 오바마 정권의 성과가 더욱 빛났을 겁니다.

자유한국당 또한 반대를 위한 반대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홍준표의 억지가 사그라지던 당의 불씨를 되살렸고, 청문회 분탕질에 보수층 지지가 모이는 것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20% 안팎의 지역표가 있는 이상 독단의 유전자는 활개칠 것이 분명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협치의 기억이 없어 협치할 의지도 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 한가한 때가 아닙니다. 그 손길은 대신 그간 소외됐던 이들을 향해야 하죠. 노동자, 실업자, 성소수자, 이민자, 여성, 양심수 등의 손을 잡고 당당히 나가야 합니다. 길이 험하고 멀겠지만 도도한 민의의 물결에 몸을 싣고 가다 보면 이를 거슬러온 자의 쪽배와는 다른 내일을 맞이할 겁니다. 이는 얼마전 박근혜가 직접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죠. 그런 세상을 온전히 만드는 것이 문재인 정권의 사명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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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역사란 참으로 잔인해서 우리가 1987년 이후 여기까지 오는 데 30년이 걸렸다.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직접 가르치고, 대화를 나눠 보기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젊다고 여겼는데, 그들을 만나고 보니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란 서늘한 깨달음을 얻는다.

저 나이 무렵의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만나는 젊은 친구들은 30년 전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 세대에게 4·19가 너무나 먼 과거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저들에게 5·18과 6·10은 어떤 의미에선 조선왕조 500년보다 낯설고 먼 과거의 이야기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선박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을 ‘좌표’라고 하는데, 육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원양에서 선박을 안전하게 운항하기 위해 과거의 인류는 천문학에 의존했다. 우리가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를 ‘항해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직접 원양 항해에 나섰기 때문이 아니라 원양 항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확한 태양의 적위표(赤緯表)를 얻기 위해 천문대를 건설했고, 항해학교를 설치해 전문적인 선원들을 양성했다. 그로부터 대양의 시대가 열렸고, 원양 항해를 위한 ‘시진의(chronometer)’를 만들 수 있는 과학기술이 축적되었다.

현대에는 위성의 전파를 수신해 좌표를 확인한다. 그 덕분에 인류는 원양 항해의 위험과 한계를 극복했지만, 연안의 복잡한 수로를 통과해 항구에 안전하게 배를 대기 위해서는 여전히 ‘도선사’라는 보다 뛰어나고, 경험 많은 전문가의 조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역사 읽기에 비유하면 가까운 근세사일수록 세밀하게 읽고 해석해야 할 자료와 사건의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사건 중에서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인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중요한 사건마다 부표를 설치하고, 그 사건의 의미가 다른 방향으로 오도되지 않도록 의미를 구성(앵커링)하는 것이 오늘의 역사가들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근현대사는 일국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복잡한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고, 전 세계를 역사적 시공간으로 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의 힘으로 그 시대를 연구하여 역사를 정리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지나친 오만일 것이다. 우리가 해방 전후사를 자신의 힘으로 연구하여 우리 시각으로 살피기 시작한 것이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이다. 그동안 뜻있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많은 사료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은 상황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시선을 아시아와 세계로 넓혀 나가야 할 때이지만,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역사는 그 의미와 해석을 두고 이웃한 중국, 일본 등과의 치열한 논증과 점검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학만큼 논리와 과학적 학문의 태도가 아니라 감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분야도 없을 것이다.

과거 몇 차례에 걸쳐 국가가 주도하여 역사를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구호가 아니라 확실한 통치철학과 역사 인식을 가진 정부라면 이를 환영하지 않을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국가권력의 관심이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비롯한 꾸준하고 지속적인 지원과 장려가 아니라 이벤트나 정책의 나열에 그친다면 미숙한 선장이 직접 배를 몰아 항구에 들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역사는 계속해서 흐르고 시대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외면당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축적하고 정리해 나가면 그로부터 역사의 진실은 자연히 규명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수와 진보, 민족주의라는 일국적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역사 인식 속에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과거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폭압적인 현실과 투쟁하면서도 민족의 독립과 함께 인류공영과 세계평화를 꿈꿨다. 좌우의 날개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겹눈의 시선으로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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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한 달도 채 안되었지만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통일부가 5월 말과 6월 초 10개 민간단체들의 대북접촉을 승인했다. 대북접촉이 방북과 남북왕래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6·15를 전후해 많은 사람들이 방북할 것 같다. 그런데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더니 얼마 전까지는 꿈도 못 꾸던 대북접촉이 승인되고 민간차원의 방북도 이루어지니,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민간 접촉·교류에 그칠 것이 아니라 남북 당국대화의 문호도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북관계 개선뿐 아니라 북핵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서도 남북대화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북한의 손을 한쪽이라도 잡고 있으면, 북한이 나머지 손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1970년대 초 남북대화에 회의적이던 보수층에 남북대화의 전략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1981·1~1989·1)도 “소련은 악마의 제국이다. 그러나 악마의 제국이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악마의 제국과의 대화’는 결국 미·소 핵무기 감축까지 도달했다.

미국은 작년 10월부터 미·북 1.5트랙 대화를 시작했다. 북한에선 당국자, 미국에선 대북 협상 경험이 있는 전직 관리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1.5트랙이라 부른다. 작년 10월 쿠알라룸푸르, 11월 제네바에 이어 금년 5월 오슬로에서 대화를 이어왔다. 작년에는 금년 1월 출범할 새 정부의 대북정책 자료수집 차원에서 대화를 했을 것이고, 지난 5월에는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 설정을 위해 만났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초 ‘대북 선제타격론’과 ‘김정은 정권교체론’을 들고나왔다가, 4월 ‘최대의 압박과 관여’로 조정하더니, 5월25일 “강력한 제재로 북한을 압박하되 최종적으로는 대화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대북정책 최종안에 서명했다. 결국 ‘대화’에 방점이 찍힌 셈인데, 이 같은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는 작년 10월 이후 진행되어 온 1.5트랙 대화의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개성공단 조업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공약했다. 그런데 북한은 문 대통령 취임 후에도 미사일을 4번이나 발사했다. 남북관계를 잘 발전시켜 나가려는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취임 나흘 만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문 대통령은 직접, 즉각적인 대응을 했다. “북한의 군사행동에는 강력하게 대처하고 제재도 불사하겠다. 그러나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 문호는 열어두겠다”고 했다. 그렇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대화의 단초를 어떻게 여느냐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도 북한은 1주일 간격으로 미사일을 4번 발사했고,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1월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벌써 9차례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그런데 북한은 앞으로도 미사일 발사를 계속할 것이다. 미국의 대북 압박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북한은 미국이 직접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벼랑 끝 전술’ 차원의 도발을 계속할 것이다.

이런 시점에 문재인 정부가 남북 당국대화를 시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정책과 핵정책은 계속 세밀하게 탐색해 나가야 한다. 쓸 수 있는 방법이 미국이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는 1.5트랙 대화이다. 대북 협상 경험이 있는 전직 관리들이 국가를 위한 봉사 차원에서 남북 1.5트랙 대화에 나서준다면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 없을 것이고, 남북관계 개선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당국대화 시동을 걸기 전에 1.5트랙 대화를 공식 지원할 수 없지만 승인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이런 접근을 굳이 마다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여당 정책연구원이 정부와 무관하게 지원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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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16>에 따르면, 1970~1974년생들은 2002년 이후 각종 선거에서 꾸준히 진보적인 투표 성향을 보여왔다. 베이비붐 세대가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빠르게 보수화된 것과는 분명히 대조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1970년대 초반생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인가? 사실 이 세대는 1990년대 초반에 이미 ‘신세대론’이나 ‘X세대론’을 통해 ‘세대론’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바 있다. 1970년대 초반생을 ‘신세대’로 호명하던 이들은 이전 세대의 광고 전문가나 문화비평가들이었다.

1989년에 5000달러를 돌파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향해 가파르게 상승하던 시점이었으니, 그들에게 급선무의 과제는 ‘소비 사회’로의 변화를 주도할 새로운 인간형을 발견해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68혁명 이후 유럽의 문화적 전환이나 1980년대 일본의 신인류론을 참고 삼아 새로운 ‘세대론’의 얼개를 짜나갔고, 30% 초반대의 대학진학률을 기록하며 이제 막 캠퍼스에 진입한 1970년대 초반생 일부, 특히 도시 중산층의 자녀들을 주목했다. 그리고 집단에 귀속감을 느끼기보다는 ‘나’를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 정치적 대의보다는 일상의 삶과 취향을 소중히 여기는 ‘라이프스타일’ 지향적 태도, 다양한 매체 경험을 통해 축적된 시청각적 문해력 등 표면적으로 이전 세대와 질적으로 차별화된 문화적 특성이 ‘신세대’의 속성으로 나열되곤 했다.

그런데 이 집단의 속성은 이렇게 ‘문화적’으로 나열되고 끝나는 것이었을까? 1970년대 초반생이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유소년기를 보낸 첫 세대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실제로 이 연령대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 매년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10번 넘게 목격했고, 바로 그 시기에 이들의 부모 세대인 1940년대생은 30~40대의 나이로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지역 불균등 발전이 만들어내는 계층 형성과 분화의 소용돌이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을 전후로, 서울에서는 1940년대생 대졸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중산층 문화가 강남의 아파트 단지를 전략적 근거지로 삼아 완성 단계에 돌입하고 있었던 반면, 지방에서는 불균등 발전의 결과로서 지역에 따라 1차 산업 기반의 전근대적 계층 질서가 여전히 유지되거나 중화학공업 단지라는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계층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 동남권과 기타 지역 등 각각의 지역에서 성장한 1970년대 초반생에게 고도 성장기는 계층과 지역에 따라 차별적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71년생 소설가 백민석이 자신이 경험한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의 가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가난이었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차별적 경험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해진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이들이 30대에 진입하던 그 시점에 한국 사회의 계층 이동 가능성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졸 엘리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90년대의 신화가 고도성장기의 거품이 만들어낸 집단적 백일몽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그 백일몽의 마지막 등장인물이었던 1970년대 초반생은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계층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로 고도성장기의 닫히는 문과 저성장 시대의 열리는 문을 양손으로 붙잡고 버티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저출산 1세대의 부모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30대에 진입한 이후 뚜렷하게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며 기성세대의 중산층이 주도하던 사회 전반의 보수화를 막아내는 인간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면, 그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해봐야 할 대목은 2010년대 중반 이후 그들의 자녀들이 명확히 구분된 계층 세습의 이동 경로를 따라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를 경험한 가족 3대의 역사가 그렇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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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를 가장 가까이서 줄곧 지켜본 사람이다. 분명히 그 경험은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그 자신도 그 실패의 경험을 교훈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실패’의 자산목록에 노동은 없는 것일까? 그는 과연 노무현 정부의 노동에 대한 실패에 어떤 입장일까?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매우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업무지시가 비정규직 관련이었고, 비정규직 비율(곧 정규직 전환 비율로 해석될)을 적은 전광판을 집무실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공부문 중심으로 일자리를 수십만개 만들기 위해 무려 10조원 규모의 추경예산을 편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근데 여기에 노동은 없다. 연일 일자리와 비정규직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대통령이 나서지만 여기에 노동은 없다. 노동 문제를 ‘일자리’의 문제로 치환한 것이 문재인의 노동정책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이름을 바꾸려고 시도한 것이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이었다. 당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대립적 노사관계가 안정적 노사관계로 바뀌면서 노동행정도 일자리 창출이 중요해지고 있어 명칭도 바꾼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부는 ‘좋은 일자리’ 창출 방안들을 쏟아냈고, 비정규직 비율 축소를 말하더니, 갑자기 ‘노사관계 선진화법’을 들고나와 비정규직보호입법이라는 이름의 비정규직 확대 법률을 통과시켰다.

24일 오전 문재인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열린 일자리상황판 설치와 가동 일정에 참석해 이용섭 일자리위원회(부위원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그때 노사관계는 전혀 안정적이지 않았다. 2003년 취임 첫해 노동자들은 ‘노동인권변호사 노무현’을 믿고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가 분신의 행렬로 바뀌는 데는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비정규노동자 이용석이 분신했고, 세원테크 지회장 이해남과 이현중 등이 자결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왜 그들이 죽어야만 했을까를 묻기보다, “죽음을 투쟁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고 잔인하게 일갈했다.

과연 문재인 대통령은 이 실패, 아니 참극으로부터 교훈을 얻을까? 또다시 노동을 우회하는, 노동을 통제하는 방식이 아닐까? 새 정부의 ‘일자리’ 정책 진용을 봐도 이 우려는 재워지지 않는다. 새 정부의 일자리 수석비서관은 안현효 전 지식경제부 차관, 일자리기획비서관은 이호승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이 내정됐고,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이용섭 부위원장도 관료 출신이다. 장하성 정책실장을 빼고 온통 경제부처 관료 출신인 셈이다. 그리고 장하성 실장도 사실 노동 전문가가 아니라 ‘주주’자본주의와 기업구조 전문가이다. 결국 노동정책을 산업정책 우위로 바라본다.

나는 한국의 노동 문제를 한 정권이 풀 수 있는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적 민주주의의가 아니라 현실 자본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로 여기 이 지점에서 출발하자. 이 냉정한 현실을 적당히 넘어가지 말고 적어도 인정하자. 적어도 노무현 대통령처럼 “모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 말이 얼마나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지 생각해보란 말이다. 적어도 국가의 집행자인 정부가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최소한의 균형자 노릇을 하란 말이다. 편을 들어 달라는 말이 아니라 편을 들지 말라는 말이다. 노동의 편은 아니겠지만, 자본의 편도 들지 말라는 말이다. 법도 재판도 다 노동자들이 이겨도, 자본은 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이럴 때 법의 집행관으로서 나서라는 말이다. 적어도 자본과 결탁한 친자본적인 정권이 되진 말라는 말이다. 소위 국가·자본의 동맹을 해체하라는 말이다. 노동자들을 ‘비국민’ 취급하지 말라는 말이다. 일자리를 늘려주기 이전에 일자리를 자본이 없애는 데 가담하지 말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당연시하지 말라는 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가장 미개하고 후진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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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외교 전환기이다. 유엔이 이달에 그 수정을 요구한 데에서 드러났듯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전시 성노예 위안부 공동 발표문은 기초부터 꺼졌다. 기습적으로 반입한 사드 장비도 미국마저 절차적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법원은 개성공단 폐쇄 책임이 입주 기업에 없다고 판결했다. 국가에 폐쇄의 책임이 있다는 의미이다.

박근혜 외교는 안팎에서 모순이 드러났다. 박근혜 외교 적폐를 원칙있게 청산해야 한다. 거대한 탁류를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검은 강물은 아직 거침없이 도도하다. 개성 공단은 폐쇄 중이다. 5조원대의 론스타 국제 중재 사건도 판결이 임박했다. 2012년에 시작한 이 사건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비밀로 일관한다. 오죽했으면 서울고등법원이 지난 18일, 론스타가 청구하는 5조원이 어떻게 계산된 것인지를 국민에게 공개하라고 판결했을까!

탁류는 도처에서 거세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제소당한 뒤의 박근혜 정부의 행태는 적폐의 상징이다. 일본 현지 조사 결과조차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일본의 방사능 관리 실태 조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밝히라고 아무리 외쳐도 변함이 없다. 심지어 일본이 제소했다는 이유로 현지 조사 결과 보고서 작성을 중단해 버렸다.

쌀 시장이 무너지는데도 밥쌀용 외국쌀을 함부로 수입하는 행태도 그대로이다. 해마다 무려 40만t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지만, 그중 밥쌀용을 얼마나 수입해야 할지는 한국의 재량권이다. 아주 상징적인 밥쌀만 수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박근혜 외교 적폐를 법치주의와 적법절차를 적용해서 청산해야 한다. 박근혜 외교 적폐의 뿌리는 법치의 빈곤이다. 외교·국방·통상이 특수하다는 구실로 적법절차를 걷어차는 낡은 틀을 청산해야 한다. 외교도, 국방도, 통상도 법치 행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는 북핵 해결은커녕 한국을 더 심각한 전쟁위기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에 내어준 남북교류협력사업 허가를 법에서 정한 취소 절차를 지키지 않고 모조리 없애 버렸다.

법치의 파괴는 전시 성노예 ‘위안부’ 한·일 협의 사건에서 더욱 심각하다. 서울행정법원이 지적했듯이, 일본이 일본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 사실을 협의 과정에서 인정했는지는 중대한 인권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 본질적 협의 내용만은 공개해야 한다. 이것이 법치주의이다. 외교 관계라는 구실로 함부로 ‘불가역적’ 합의를 해서, 헌법이 정한 기본권 보호 의무를 어기는 불법을 청산해야 한다. 국민의 인권과 직결되는 핵심적 내용은 국민에게 알리고 적법 절차를 지켜야 한다.

사드도 마찬가지다. 안보 분야는 특수하다. 그러나 그 특수성도 법치주의 기본 원칙을 파괴할 만큼 거대한 전체가 아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 있다. 미군에 사드 기지 땅으로 얼마를 제공했는지 면적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서 성주 사람들이 환경영향평가법이 보장한 절차 참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방부가 정식 문서로 공개한 것은 아니지만, 주한미군에 공여한 사드 기지 면적이 32만8779㎡라는 말이 있다. 옛 골프장 면적이 148만㎡인데 이 중에서 왜 위 면적일까? 사드 부지 면적이 33만㎡ 이상이면 환경영향평가법과 국방군사시설사업법에서 정한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한다. 결국 이 절차를 피하기 위해 정한 면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외교안보에서의 적법 절차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필요한 핵심적 정보를 제공하고, 법에서 정한 절차를 준수하는 것이다. 일본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했는지를 국민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성주 군민에게 법이 정한 절차적 참여권을 보장해야 한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에 법이 정한 대로 허가권 취소 사유가 무엇인지 소명하고 참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도대체 론스타의 5조원이 어떻게 계산된 것인지 국민이 알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 외교 적폐를 원칙있게 청산해야 한다. 검게 흐르는 탁류를 막아 멈추게 해야 한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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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믈리에’라는 직업이 한국에서도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협회도 있고 자격증까지 줍니다. 식당에서 와인을 추천하는 이 소믈리에들이 많아진 것은 와인 소비가 늘어난 현실을 반영합니다. 어느덧 ‘포도주’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죠. 화이트와 레드를 구분하는 정도였던 와인에 대한 이해도 아주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호주산인지, 칠레산인지도 따지고 각종 브랜드와 생산연도까지 꿰차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5만원 밑에도 인기 있는 와인이 있지만 10만원을 훌쩍 넘기기도 하죠. 수십만원에서 100만원이 넘는 와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100만원은 고사하고 10만원만 넘어가도 쉽게 손이 가지 않죠. 어쩌다 비싼 와인을 마시게 되면 역시 다르구나 싶습니다. 조심스레 한 모금 넘기면 칭찬과 탄성이 튀어나옵니다.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싶죠. 별 차이를 못 느껴도 내가 잘 모르는 것이겠지 싶어 술자리가 끝난 후 와인스쿨을 검색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와인 전문가들도 막상 눈을 가리면 와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여럿 있습니다. 한 실험에서는 똑같은 와인을 마시고도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고급 상표라고 여겼을 때 평가단은 찬사를 쏟아냈죠. 반대로 싸구려 와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시큰둥한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상표에 대한 편견 때문이죠. 이런 편견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명품 가방이 더 품위 있어 보인다거나 알프스 어디 물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런 예일 테죠.

짧지만 떠들썩했던 선거전을 치른 한국정치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후보라는 상표를 좋아한 사람들은 그의 공약뿐 아니라 언행 하나하나에 열광했습니다. 미소 하나도 듬직하게 보았고 그의 공약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죠. 하지만 상대 후보는 늘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음식을 넘기는 입 모양 하나도 꼴불견처럼 느껴졌고 그의 지지자들마저도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심지어 거의 같은 공약을 두고도 내 후보 것은 혁신적이라고 불렀고 상대방의 것은 엉터리로 믿었습니다.

사실 상표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가방을 다 뜯어보고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 많은 와인을 다 마셔볼 수도 없죠. 모든 후보의 공약집을 다 읽어보고 비교 분석한 후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북 외교, 경제 운용, 노동, 환경 등등 수많은 정책 이슈가 있습니다. 각각의 이슈를 들여다보면 많고 많은 정책이 있죠. 이들은 서로 얽혀있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헷갈립니다.

유권자의 선택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가이드라인에 기대게 됩니다. 여러 정보의 극단적 축약본인 ‘상표’는 이럴 때 요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명 브랜드를 믿고 사듯, 정책은 다 몰라도 정치 이데올로기를 보고, 후보 이름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죠.

복잡한 현대정치에서 이런 선택은 어쩔 수 없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지하는 후보의 정책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부작용을 낳는 것 중 하나죠. 그러니 정책에 대한 논쟁은 쉽지 않습니다. 대신 토론은 외모나 말투에 국한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소통은 고통스러워집니다. 불편한 소통 대신 우리끼리 모여 함성을 지르며 선거를 치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드디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갖게 됐습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옆에 두고, 브랜드를 무시하고 좀 더 차분히 지켜볼 여유가 생겼죠. 문재인 후보가 좋아서 그를 지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좋다고 정부 정책을 감싸기만 해서는 안될 테죠. 한쪽에선 벌써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각오가 들립니다.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됩니다. 조건 없는 지지는 조건 없는 명품 소비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문재인 브랜드를 접어놓고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어야 저쪽도 ○○○ 브랜드를 내려놓고 대통령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나라다운 나라에 우리는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겠죠.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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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지난주 수요일에는 학생들과 최인훈 선생의 소설 <광장>을 읽고 토론을 진행했다. 잘 알다시피 최인훈의 <광장>은 철학과 대학생인 이명준이 남한과 북한을 경험하고 마침내 제3국행을 선택했다가 결국 자살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주제 발표를 맡았던 학생에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상징이 ‘광장’과 ‘밀실’인데 어째서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밀실과 광장’이나 ‘광장과 밀실’로 하지 않고, ‘광장’이라고 했을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랬을까?

최인훈의 <광장>이 이전의 분단소설과 구분되는 점은 근대적 교양을 지닌 개인(이명준)의 출현에 있다. 우리 분단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남과 북이라는 이념의 민감성, 이데올로기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분단 문제에 접근하는 데 비해 이 작품은 이명준이란 이념과 민족을 넘어선 보편적 개인, 자기결정을 통한 개인성의 구현이란 근대적 교양을 지닌 주체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은 단순히 남북한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밀실)’이 ‘전체(광장)’의 일부로서 사회적 통합을 향해 분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이명준은 그 같은 광장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지만, 작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밀실(正)’과 ‘광장(反)’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合)’의 창출이란 변증법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되묻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광장과 밀실’이 아니라 ‘광장’이다.

19대 대선 투표일 전날인 8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펼쳐진 서울 광화문광장에 지지자들이 모여 휴대폰 불빛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다. 권호욱 기자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1년 전 이맘때만 하더라도 우리들 가운데 5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 탄핵부터 5월 대선을 통한 정권교체까지 이 모든 것은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의 치열한 투쟁 덕분이었다. 2016년 10월29일을 시작으로 2017년 4월29일까지 23주 동안 주말마다 수많은 개인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전국에서 160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역사에서 많은 인원이 일시에 거리로 나선 것은 몇 차례 있었지만, 이토록 끈질기게 오래도록 광장에 모인 적은 없었다. 가을에 시작해 혹한의 추위를 참고 견디며 봄이 오기를 갈망했던 시민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것은 우리 시민사회의 성숙과 정치의식의 발전을 상징한다.

그러나 광장이 끝나면 다시 밀실이 열리는 법이다.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선거 앞에서 시민들은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갈라졌다. 민주당 지지자는 물론 당직자까지 나서 심상정 지지는 ‘죽는 표’라며 사표론을 제기했고, 진보정당 지지자를 ‘정치홍대병자’라 비판했다. 반대로 문재인 지지자에게는 ‘문빠’라느니 ‘문슬람’이란 비하가 쏟아졌다. 서로가 서로를 비방했고, 혐오했다. 선거 직후 출구조사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소셜미디어에서는 대구·경북지역, 특히 사드 배치 지역인 성주를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혐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타인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친목도모 행위가 되었다.

마치 “당신 1980년대에 뭐했어?”라는 말처럼 곳곳에서 ‘촛불’이 자신들만의 것인 양 호명되었다. 비록 선거에서 서로 다른 후보와 정당을 지지했더라도, 개인은 다양한 정치적 의지와 정체성을 가지기 마련인데, 지지자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만 호명되었다. 독선과 막말로 상대를 제압하려 드는 가운데 정치가 쓸모없이 낭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번 대선과 촛불광장이 우리 사회 관계성 회복의 희망 또는 징후라 여긴다. 다시 말해 어차피 1년 후면 끝날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물러나라고 외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광장에 나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립된 밀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을 회복하고, 확인하고 싶었기에 모두 광장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최인훈은 <광장>의 서문에서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사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도 빛나는 오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보람을 만들어 나가자.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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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나라,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촛불 시민혁명은 문재인을 국가통치의 수반으로 선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연설문에서 적폐청산과 국민통합,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자유로운 여론과 소통을 강조했다. 촛불에서 탄핵, 탄핵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진 시민혁명의 향후 과제들이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특히 강조했던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라는 통치 철학이 국민의 삶과 통치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기회도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도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도 정의롭지 않았던 문화정책의 대개혁은 문재인 정부 성공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통치자의 세치 혀에서 나온 문화융성이란 국정 철학이 돌연 예술 검열과 블랙리스트로 되돌아오는 황당한 일이 없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언행일치의 혁신적 문화정책이 구현되어야 한다. 문화정책의 대개혁을 위해 문재인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블랙리스트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현장 예술인과의 지속적인 문화 협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통치자의 구상-청와대 참모의 작성과 전달-문체부 관료와 산하기관의 실행이라는 국가에 의한 조직적이고 방대한 예술 검열 행위라는 것이 재판과정에서 밝혀지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은 꼼꼼하고, 사심 없는 조사와 기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블랙리스트의 진상규명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인들에 대한 자율적이고 투명한 국가문화정책을 만들기 위해 예술계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실질적인 문화협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술인들이 작년 겨울부터 142일간 광화문에서 노숙농성을 하며 블랙리스트에 저항한 것도 ‘지원금’ 때문이 아니라 ‘창작의 자율성’ 때문이다.

둘째, 노동시간의 단축과 문화시간의 확대로 국민의 문화권리가 삶 속에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멕시코 다음으로 많은 한국에서 문화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했던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실시한 ‘문화가 있는 날’은 어찌 보면 과도한 노동시간을 줄일 생각은 없고, 문화이벤트로 잠시 스트레스를 풀자는 일종의 문화적 ‘모르핀효과’밖에 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문화주권의 실현을 국민의 일상 삶의 여유와 행복에서 찾고자 한다면 과감하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공연관람, 여행과 독서, 다양한 예술교육 참여의 시간을 늘리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미래를 향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창의적 인재 양성이다. 대권후보들이 저마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지만, 모두 기술결정론과 경제결정론에 경도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기술과 경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이다. 10년 후, 20년 후 우리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바뀌고 그러한 삶의 변화를 추동시키는 문화는 어떤 창의적 시장을 형성할지가 관건인 것이다. 기술과 과학이 개인 삶의 형태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서드라이프’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문화와 기술, 예술과 과학이 통섭하는 문화콘텐츠의 창의적 인력양성이 긴요하다. 그래서 대중음악, 게임, 가상현실 엔터테인먼트, 차세대 미디어플랫폼 등 대중예술 분야에 국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 설립이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통합과 분권의 문화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도록 지역문화의 자율성을 높이는 분권형 문화균형 전략과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문화통일 정책에 대한 장기구상이 가동되어야 한다. 국내 차원에서는 심각한 지역문화 격차를 해소하면서도, 지역문화의 특성을 동시에 고려한 문화 분권의 실질적 실현과 한반도 차원에서는 문화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언어, 생활, 창작, 문화유산, 체육, 관광 등의 남북교류 플랜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 네 가지 과제를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준비하고 실현하는 게 ‘문화다운 문화’를 만드는 문재인 정부 문화정책의 대개혁이 아닐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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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5월3~4일, 북한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중국이 ‘조·중관계의 붉은 선’을 넘고 있다면서 “조·중관계가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목숨과도 같은 핵과 바꾸지는 않겠다”고 했다.

북한은 ‘배신’이란 말까지 써가면서 최근 중국의 대북 행동에 반발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대북 압박이 상당히 강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난 4월6~7일 미·중 정상회담 이후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대북 경제제재가 높아지고 있던 4월26일, 미국 틸러슨 국무부 장관, 매티스 국방부 장관, 코츠 국가정보국장이 합동으로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최대의 압박과 개입’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하루 뒤인 29일, CBS 인터뷰에서 김정은을 ‘꽤 영리한 녀석’이라고 평가하면서 ‘상황이 조성되면 그와 영광스럽게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5월4일 미국 하원은 강력한 대북제재법을 통과시켰다. 결국 트럼프의 북핵정책은 중국이 먼저 북한에 압박을 가하면, 이후 미국이 직접 나서서 북한을 대화테이블로 끌어내겠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 후 중·북관계를 보면, 트럼프와 시진핑이 ‘무역불균형 해소 100일 계획’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핵 문제가 협상 칩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해서 김정은의 입장변화를 끌어내면, 이후 미국은 대중 경제압박을 줄여가면서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낸다는 암묵의 양해가 이루어진 것 같다. 오바마는 레버리지도 쓰지 않고 북핵 관련 중국 역할만 주문했기 때문에 중국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중국이 움직이고 있다. 중국의 경제를 걸고 들어오는 트럼프의 사업가적 거래방식이 외교에도 통한 것이다. 그럼 중국이 대북 경제압박을 가해서 트럼프가 김정은을 ‘영광스럽게’ 만날 수 있는 상황 변화가 일어나면 우리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것이 내일 출범하는 새 정부 외교안보팀의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후, 한·미 간 사드 배치가 발빠르게 진행되는 시기에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3월18일 미·중 외교장관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왕이 부장은 “진정한 담판의 진전을 이뤄야 한다”면서 “중·미·북 3자 회담에 이어 6자회담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틸러슨 장관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왕이가 3자회담을 제안한 것도 문제지만 틸러슨이 화답한 것도 우리로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새 정부가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임기 초부터 북핵 문제 관련해서 ‘코리아 패싱’(외교 왕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일 출범할 새 정부로서는 어차피 사드 문제를 놓고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과 사실상의 재협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과의 협의 계획을 명분으로 중국에 사드 보복 중지부터 요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 미·중 외교적 입지를 넓혀가면서 3자회담이 아닌 4자회담을 수정 제안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6자회담 직행을 선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남북관계부터 복원해야 한다. 1990년대 중반 남북관계가 나빴을 때 이미 우리는 ‘통미봉남’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걸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새 정부가 남북관계를 복원하려 하면 보수진영은 ‘북핵 문제 미해결’ ‘유엔제재결의안 위반’ 등의 구실로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새 정부는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고, 자신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트럼프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은과 만나도 되고, 한국은 북핵 문제 해결 전엔 어떤 남북관계도 개선할 수 없다는 건 불공평하다. 금강산 관광비와 개성공단 인건비가 유엔제재안이 금하는 ‘벌크 캐시’에 해당하는가에 대해선 이미 2014년 박근혜 정부도 ‘해당없다’고 해석한 바 있다. 따라서 새 정부는 책임감을 가지고 소신있게 대북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그러면 ‘코리아 패싱’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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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사드 비용 10억달러(1조원 이상) 한국이 내라.”(미국)

“이미 한·미 합의에서 한국은 땅만 주기로 했다.”(한국)

“맥매스터 미 안보보좌관과의 통화에서 기존 합의를 재확인했다.”(한국)

“사드 비용은 재협상하게 될 것.”(미국)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와 관련된 논란 중 일부다. 핵심은 ‘비용’ 문제다. 전형적인 ‘안보 장사’다. 그런데 여기서 저들이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사드 배치를 (한창 선거 국면인) 4월26일 새벽, 비밀 강행한 작태다. 절차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미국이 (한국민 동의) 절차를 무시한 일을 은근슬쩍 숨긴다.

그들이 하지 않는 질문도 있다. 북핵 위기로 사드 배치를 한다는데 그 실효성은 제쳐두고라도, 왜 북한이 핵에 목숨을 거는 것인가이다. 사실 북한은 자기 체제 수호에 목을 맨다. 남한과 미국이 자기 체제에 목숨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호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된다.

물론 북한이건, 남한·미국이건 민주주의와 복지를 높여야 한다. 진정으로 민본·평화 정치를 하면 헛돈 써가며 싸울 필요가 없다.

또 대선이건, 총선이건 선거 때마다 나오는 단골 메뉴가 지역 개발이나 지역 발전이다. 보수 진영은 물론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지역 개발이나 발전이 결국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땅 가진 이들만 부자로 만든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부동산이 없는 이들도 이를 반긴다. 왜 그런지에 대한 토론은 없다. 그 결과는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 농토 소멸인데도 말이다. 부동산을 잡아야 서민 경제, 살림의 경제가 산다는 진실을 저들은 말하지 않는다.

“귀족 노조” 논란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노조 자체를 전혀 인정·존중하지도 않으면서 엉뚱하게 ‘귀족 노조 탓에 경제가 엉망’이라는 근거 없는 비난만 해댄다. 아무 말 않는 이들 역시 노조의 중요성에 침묵한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잘살기 위해서인데, 일을 해도 잘살지 못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가 필요하다는 사실, 바로 이를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귀족’이니 ‘빨갱이’니 욕만 할 뿐. 진짜 귀족들은 우리 눈에 띄지도 않게 고급 승용차나 비행기를 이용, 호화 저택과 호텔, 골프장, 리조트, 고급 음식점만 찾는데도 말이다. 지금도 노동자 6명이 척박한 노동 현실을 바꾸자며 광화문 광고탑에서 단식 농성 중이다.

한편 요즘 사회경제적 위기를 모든 후보들이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 등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이제 세계 경제 자체는 더 이상 고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신성장 동력’이나 ‘4차 산업혁명’만 추진하면 고성장이 가능할 것 같지만 이제는 지구가 포화·고갈 상태이기에 성장보다는 ‘성숙’을 추구할 때다. 과거와 같은 고성장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돈보다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이 된다. 성장보다 23%에 불과한 식량 자급률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나는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며, 모두 가난해지려 하면 누구도 가난해지지 않는다”고 한 피터 모린을 떠올린다. 소박하게 더불어 사는 것이 세계 평화다.

5월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단순히 새 대통령만 뽑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난 50년 이상 지속된 ‘박정희 체제’를 종식시키는 과정이며, 해방 이후 70년 이상 지속된 ‘신식민지 재벌독점 체제’를 종식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120여년 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요구한 ‘사회경제 개혁’을 완성하고 새 시스템을 창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요컨대 권력이나 돈에 중독되어 비정상적으로 작동해온 ‘중독 시스템’을 건강하고 행복한 시스템으로 대수술하는 것이 이번 선거가 가진 큰 의미다. 그 수술의 방향은 이미 나와 있다. 진실과 자유, 정의와 평등, 연대와 소통, 생명과 평화의 가치가 새 시스템의 방향성이다.

이제 남은 것은 참여다. 투표 참여는 기본이고, 부정선거 감시에도 참여해야 한다. 투표 이후 개표 과정이나 투표함 보관 및 운송 과정, 나아가 집계 과정도 한 점 의혹이 없게 지켜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선거 이후 새 정부의 인사나 정책들이 제대로 되는지도 잘 봐야 한다. 특히 ‘헬조선’을 극복하고픈 이웃들이여, ‘가짜뉴스’에 속지 말고 더 성숙해지자.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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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4월 한 달 동안 선거 판세는 극심하게 요동쳤다. 그 결과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선두 다툼을 벌이던 2강 3약의 구도는 문재인 후보가 독주하는 1강 2중 2약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각종 네거티브 공세와 논란이 있었지만, 이런 재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집단은 50대 유권자층이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실제로 이 연령대의 문재인 후보 지지율은 4월 중순까지 29%와 30%를 오가다가 마지막 주에 43%로 뛰어오른 반면, 안철수 후보는 4월 초순에는 51%까지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더니 중순을 넘어서 40%, 22%로 급격히 하락했다.

두 후보가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는 동안 홍준표 후보는 반사 이익을 보았다. 4월 초만 해도 10%대 미만의 지지율이었으나 4월 말에는 16%에 도달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지난 2월에 진행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탄핵에 반대하는 50대 유권자가 24%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50대의 이른바 ‘샤이 보수 지지자’ 일부는 4월 전반에 걸쳐 2강 후보 간에 네거티브 전선이 만들어지자, “어차피 정치인들은 다 똑같아”라는 식의 ‘정치 혐오’를 앞세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쪽팔림’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공개적으로 홍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홍 후보가 TV토론에서 거침없이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의 후안무치함을 전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뻔뻔함이야말로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뻔뻔함의 확산이야말로 보수세력 복원을 위한 제일선의 전략이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한편 문재인 후보에 대한 50대의 지지율 증가를 주목해 보면 이와는 다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즉 중도적인 성향을 지닌 50대 일부가 탄핵 이후의 대선 정국에서 안희정, 안철수로 이어지던 제3후보군을 두고 갈등하다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돌아섰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확실히 386세대의 정치인이나 진보 지식인이라면 반가워할 만한 소식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2002년 이후 보수와 개혁 구도의 정치 지형 내에서 입지를 마련한 이후, 자기 진영 내에서 다수파로 행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수파는 보수 진영에 패배하는 다수파였고, 또래 집단이나 출신 지역에서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다수파였다. 그러니 그들 중 일부가 탄핵정국이 시작되자마자 서둘러 ‘박정희 체제의 종언’을 외치고 나섰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박정희 체제란 다수파-소수파의 딜레마 해소를 위해 넘어야 하는 거대 장벽이었으니 말이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그들의 승부수는 성공한 듯 보인다. 일부 지역과 또래 집단에서 다수파로 올라섰고, 선거의 승리도 눈앞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만으로 50대 지지율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간 독특한 투표 행태를 보여준 50대 일부 소수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각종 선거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이 50대 소수파는 2002년 이후 세 차례의 대선에서 각각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으며 두 번의 대선에서는 승패를 좌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들이 개혁과 보수, 양 진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것은 지역주의나 민주-반민주 구도와는 거리를 둔 채, 소득·자산·교육·세제 등과 관련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전략적 투표 행위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경제적 성장 과정과 제도적 토대를 명확히 인식한 결과였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 바로 이 50대 소수파가 혹시 특정 후보의 지지율 증가에 한몫 거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이들이 그 후보를 선택한 이유는 무얼까? 과연 차기 정권은 이들의 기득권에 영합하지 않고 경제 관련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을까? 2000년대 중반, 종합부동산세와 부동산 실거래가의 도입이 이 소수파 상당수에게 계급적 각성의 계기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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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소는 반대하는데 핵무기 반대 구호는 왜 함께 외치지 못할까? 원자력발전소보다 더 무서운 ‘대량살상’의, 아니 절멸의 무기가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 반핵(아니 탈핵?) 운동의 난제다.

사실 전 세계 핵 관련 운동을 보면 ‘반핵’인가 혹은 ‘탈핵’인가 하는, 운동적으로 두 개의 큰 흐름이 있다. 비교하면 유럽은 반핵(Anti-NUKE) 운동이 주였고, 그에 따라 핵무기 반입 저지 및 미군기지 반대투쟁을 했다. 그리고 일부는 녹색당 창당의 밑거름이 됐고, 일부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운동으로 남아 이미 이익집단이 된 ‘조직노동’에 대한 견제세력이 되기도 했다.

반면 미국은 스리마일 원전 사고 등을 계기로 주로 반원전운동 혹은 원전가동 중단운동을 했다. 그리고 그들 반원전운동은 자국의 핵무기를 타국에 배치하는 문제에 미온적이거나 모른 체했다. 그들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군비축소 및 특히 미국산 핵무기의 폐기운동으로는 진행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반원전운동은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중산층 지향의 시민운동이었다.

지금까지 양상을 보면 한국의 핵관련 운동은 미국과 비슷하다. 반핵이 아니라 탈핵운동 일변도이며, 원전가동 중단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핵무기 및 미군기지 문제에 대체로 침묵하며, 외부세력이 아니라 주로 한국 정부와 정치권을 겨냥하고 있다. 일례로 작년 북한의 4차 핵실험 때 미국은 즉각 B-52 핵전폭기를 한반도 상공에 띄웠지만 ‘탈핵’운동단체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사드 무기를 한국에 반입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인근에 핵잠수함을 배치하고 핵무기가 포함된 한·미 군사훈련을 시행했지만 그에 대해서도 탈핵운동은 거의 침묵하고 있다.

경북 성주군에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장비를 전격 배치한 26일 성주골프장의 길목인 초전면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주민들이 사드 반대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결국 탈핵은 하지만 반핵은 못하는 사회. 이는 사회적 분위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지진대의 원전 가동과 방사능 유출에 극도의 공포를 갖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북·미 긴장고조로 현실화될 수 있는 핵폭탄 투하와 가공할 방사능 구름에 대해선 강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북한 핵무기 개발을 비판하지만, 이 모든 긴장의 한 축인 미국에 대해선 현저히 불균형적인 태도 내지 침묵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불균형, 이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검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탈피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면 없이 한반도의 전쟁, 핵전쟁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요원한데 말이다.

4월26일 새벽, 우리 사회의 이런 한계는 고스란히,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의 주민들에게 날벼락으로 떨어졌다. 그날 새벽 한국 경찰이 경비를 선 가운데 미군이 모는 트럭들이 사드 장비를 옮겼다. 70~80대의 연로한 주민들은 그 새벽 자신들의 고요한 마을을 습격한, 점령군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미군들과 그들을 보호한 한국 경찰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외쳤다. “미국 경찰은 물러가라!”

이 구호가 바로 전율이다. 그들은 이 사회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이념적인 편향과 왜곡을 넘어서 곧바로 알아차렸다. 무엇인가 잘못됐다, 이것은 나라가 국민을 향해서 할 짓이 아니다, 이 나라 경찰은 미국 경찰인가.

근데 왜 이 사회는 침묵하는가? 왜 우리는 박근혜의 국정농단에만 분노하고,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농단’에는 침묵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넘어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탈핵뿐 아니라 반핵을 고민해야 하고, 친미와 반미를 다 고민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과연 이 땅의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도 현장의 상황은 너무 절박하고, 고령의 원주민들은 이 모든 현대사와 한국 사회의 못난 모습이 그들에게 전가한 부담을 안은 채 사드 배치를 온몸으로 막고 있다. 평화로워야 할 가정의 달, 과연 당신의 평화를 깨는 세력이 누군가 한번 생각해보고,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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