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빵장수일 뿐이라오. 다른 뭐라고는 말 못하겠소. 예전에, 그러니까 몇십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지금은 그저 빵장수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의 변명이 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이 엄마에게 “댁 아드님에 대해 뭐 잊으신 것 없수?”라며 반복적으로 전화를 걸어 비아냥대면서, 빵집 주인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댁 아드님’은 생일케이크 주문하였던 바로 그날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었다는 것을. 의식을 잃은 어린 아들의 병상을 일주일째 뜬눈으로 지키며 젊은 부부의 몸과 마음은 생선가시 발리듯 뜯겨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결국 아이는 세상을 떠났음을. 그는 그저 자신이 공들여 구워낸 생일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은 예약 손님에게 화가 난 나머지 수화기에 대고 좀 이죽거렸을 따름이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빵집 문을 두드리고서 “그 애는 죽었다구. 이 못된 놈아!”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 엄마와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 쏘아붙이던 아이 아빠를 앞에 두고, 그는 횡설수설 미안함을 전하고, 더듬더듬 위로를 건넨다. 그러다 부부를 안으로 들여 탁자 앞에 앉힌 후 갓 구워낸 빵을 건넨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며, 그들이 접시에 놓인 빵을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다.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으며, 아이 엄마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한다.

이렇듯 빵집 주인은 자신이 무심코 던진 돌로 인해 낯선 부부에게 미안함과 연민을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이 잃은 부모의 아픔을 온전히 보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 짊어지고 살 수는 더더욱 없을 테다. 본인 말대로 그저 한 사람의 빵장수일 따름이니까. 바로 그 빵장수만의 방식으로, 도움이 되고자 무언가 끌러놓는 저 장면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A Small, Good Thing〉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러해 전 어느 늦은 저녁, 필자는 길에서 울고 있었다. 어딘가로 찾아들어 마음을 누이고 싶었고, 떠오르는 장소가 당시에는 성당 정도밖에 없었다. 지나던 택시를 무작정 잡아타고 “명동성당 가주시겠어요?”하였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다시 울었다. 기사분은 뒷좌석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아무 말 않고, 듣고 계시던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그리고 치지직 주파수를 돌렸다. 이내 경건하고 고요한 노래가 들려왔다. 조스캥 데프레가 작곡한 ‘아베 마리아’라고 라디오 진행자가 알려주었다. 뒤이어 그레고리안 풍의 단조로운 노래도 흘러나왔다. KBS 클래식FM이었던 듯한데, 그 시간에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고음악을 특집으로 선곡했던가 보다. 여기저기서 자동차 클랙슨이 울리던 캄캄한 월요일 밤, 퇴계로 부근의 택시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아베 마리아와 살베 레지나와 마니피캇을 함께 들었다. 어느덧 울음은 스르르 잦아들었다.

그날 밤 신에게 무엇을 간절히 빌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힘들었던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성당으로 가달라며 울던 승객을 위해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를 희생하고 그 노래들을 같이 들어주신 택시 아저씨의 마음은 기억한다. 말하자면 당시 위로는 잠자코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택시 아저씨의 손길을 통해 건네졌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읽기’인지 의아해하실지 모르겠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리하게 분석해주실 정치·경제적 현안들과 ‘세상을 바꾸는 방안’에 필자의 서툰 논평을 한 줄 더 얹는 대신, 필자는 그 세상에서 떼어놓는 작은 발걸음들에 시선을 두고자 하였다. 핵문제가 해결되고 적폐청산이 되고 나쁜 자들이 감옥에 가도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될, 제도를 몸통으로 하고 자본을 심장으로 한 체제. 그 안에서 힘겨워할 우리가 서로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찰나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글은 그 첫 시도다.

<이소영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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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달 7~8일 한국을 방문한다. 정상회담을 하고 국회연설도 한다. 트럼프 방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를 예측해 가면서, 방한을 기회로 우리가 그에게 전할 말을 준비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언동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언론이 평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이익을 내기 위해 이악스럽게 계산하고, 상대방이 물건을 사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는 ‘실속형’ 정치인으로 보인다. 그의 말폭탄 뒤에는 고도의 계산과 의도가 숨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헤리티지 재단 대통령 클럽 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트럼프는 지금까지의 말폭탄과는 결이 다른 말을 했다. “지난 25년간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줬지만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 이 말에는 무슨 복선이 깔려 있을까? 우선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미국은 그동안 핵문제 때문에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준 적이 없다.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1994년 10월)에 따라 북핵활동 중단 대가로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중유 50만t을 현물로 준 적은 있다. 1998년 8월 제기된 ‘금창리 지하동굴 핵활동’ 의혹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자 벌금조로 식량 60만t을 북한에 준 적도 있다. 미국이 북한에 준 건 중유 350만t, 식량 60만t뿐이고 그 가격은 도합 5억달러 정도였다. ‘수십억달러’를 줬다는 건 과장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는 말도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2005년 9월19일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합의·발표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 미 재무부가 마카오 BDA은행의 북한계좌 2500만달러를 동결시켰다. 북한은 즉각 미국을 비난했고 핵활동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6년 10월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9·19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깨진 건 사실이지만, 북한의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건 왜곡이다.

그러면 트럼프는 왜 이런 말을 할까? 사실을 좀 과장하고 왜곡해서라도 장차 대북 협상무용론을 밀어붙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향후 협상무용론에 따라 대북 압박·제재가 더 강화되면 한반도 안보위기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는 ‘겁먹은’ 한국을 상대로 안보장사를 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하면서 대비해야 할 점이다. 한편 20일 최선희 북한 북미국장이 모스크바 국제회의에서 ‘북핵무기 협상불가’를 말했다. 트럼프 방한을 의식한 발언 같다.

이것이 대북압박론자들의 주장에 원용될 수도 있겠지만, 최선희 말에도 숨은 뜻이 있다. 조성렬 박사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대화로 시작하자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화용의는 있지만 처음부터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회담은 안 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방한을 앞두고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에 부탁한다. 트럼프의 입만 쳐다보면서 정치공방이나 벌일 정도로 한가한 때가 아니다. 여야 모두가 북·미 대화·협상을 트럼프에게 적극 권고해주기 바란다. 안보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을 생각하면 야당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1993~1994년 북·미 협상으로 북핵 문제 해결 모델을 만들었던 로버트 갈루치 전 동아·태차관보는 16일 연세대 강연에서 어렵지만 북핵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했다. “제재는 해결책이 아니다. ‘조건 없는 협상’을 시작하라. 거기서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되 그 대가는 제공해야 한다. 북핵 포기가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갈루치의 말은 미 진보진영의 목소리이고, 트럼프 정부 내 국무장관, 국방장관도 대화와 협상을 얘기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전쟁 불가’까지는 강하게 얘기했다. 트럼프 방한을 계기로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해서 ‘대화·협상 불가피’를 적극 설득해 나갈 차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이 들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그렇게 발언할 때마다 국민은 절망스럽다. 신바람 나게는 못하더라도 희망의 끈조차 놓게 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황재옥 | 한반도평화포럼 여성·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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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바게뜨 불법파견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 9월 고용노동부는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불법파견을 확인하고 시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한 달도 안되어 물류센터와 배송기사 불법파견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다. 파리바게뜨 문제의 본질은 바로 ‘프랜차이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프랜차이즈는 20세기 중반 이후 각종 서비스업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사업양식으로 발전했다. 프랜차이즈는 1950년 밀크셰이크 판매원 레이 크록(Ray Kroc)이 맥도널드 형제에 의해 운영되던 캘리포니아의 한 레스토랑 권리를 받아 영업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출처:경향신문DB)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자료를 보면 가맹본부의 프랜차이즈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13년 2973개의 브랜드가 2016년 4267개로 2배나 증가했다. 가맹점 수만도 10만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바게뜨를 소유한 SPC그룹은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파스쿠찌, 빚은 등 30여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이 분야 1위 기업이다. 프랜차이즈의 특징은 브랜드 구축과 가맹점 의존 방식에 있다. 프랜차이즈는 기업으로 하여금 강력한 브랜드 혜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용은 절감해주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경쟁적인 시장조건과 이윤 창출 압박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아웃소싱을 선택한다.

프랜차이즈 운영 과정에서 각종 규정을 침해할 위험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전산자료를 조작하여 연장·휴일근로 수당을 주지 않는 소위 ‘임금 꺾기’와 같은 형태가 대표적이다. 파리바게뜨 사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비정규직 휴가비나 수당 등 미지급 금액 110억원의 임금체불 문제는 그 단면이다. 

그간 SPC그룹은 자사 브랜드에서 일하는 홀서빙이나 조리사는 물론 제빵기사들에게 비인권적 인식을 보여왔었다. “그나마 에어컨 등이 나오는 곳에서 일하게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최저시급 이상을 주고, 식사 때 빵이라도 주잖아!” 등의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프랜차이즈라는 기업 경영은 일자리의 가장 나쁜 모델(bad job)이다. 현재 프랜차이즈 사업은 자본과 기업의 비즈니스 핵심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자사 브랜드 구축과 충성고객 유치에는 과감하게 투자한다. 반면 상품과 서비스 제공을 담당하는 직접적인 고용주 역할은 애써 외면한다. 

바로 ‘고용 털어버리기’(shedding employment) 전략이다. 본사가 아닌 다른 고용주 밑으로 옮겨진 일자리들은 대개 낮은 임금에 복지혜택은 거의 없다. 고용 안정성도 훨씬 떨어진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수지를 흑자로 돌리려면 인건비 하향 압력이 발생, 구조상 규정위반 편향성이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사실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시정명령의 취지는 헌법적 질서에서 만들어진 대법원 판례와 법률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파견법은 1998년 자본과 기업이 고용유연성을 이유로 정부에 요구해 제정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영계 요구로 만들어진 법질서조차 현실을 이유로 수용할 수 없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영미권과 달리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운영하더라도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을 하는 곳은 드물다. 왜 우리나라에서만 기업들은 고용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공동소유, 공동경영이라는 허구적 슬로건에 숨겨진 프랜차이즈 이면을 되짚어 봐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구조와 광범위한 아웃소싱에서 비롯된 경쟁상황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초점은 서비스 시장의 부상, 프랜차이징 영업방식, 총수입에서 과도한 본사 수수료 지불 문제 등이다. 특히 프랜차이즈 기업의 막강한 영향력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 본사의 ‘갑질’에 대한 횡포를 감내하면서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 프랜차이즈는 지속·확대되는 것일까. 아마도 지난 20년 사이 우리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고용 구조조정의 결과일지 모른다.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프랜차이즈 모델이라는 ‘괴물’에 대한 개입과 재규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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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7년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또 일제히 낯익은 노동운동 위기론이 등장하고 있다.

이번엔 노조운동 활동가들, 그리고 진보정치운동에서 시작했다. 왜 정치적인 격변기마다 노동운동 위기 담론이 대두할까? 그리고 이런 담론은 근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꼭 수반한다.

노동운동이 변해야 노동운동이 산다? 하지만 과연 변해야 할 것이 노동운동 혹은 노조인가, 아니면 그 노동운동이 자리 잡고 있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전체인가? 즉 87년체제의 극복, 아니 전환인가?

노동사회학자인 필자는 노동운동의 ‘위기론’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지 않는다. 위기는 한 번도 제대로 확정되지 않았으며 그 자체로 정치적 언설이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시각은 ‘위기’의 문제의식이 아니라 ‘전환’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민주노조운동, 혹은 노동운동은 지난 1987년 이후 30년을 경과하면서 이제 전환의 한 순환을 마쳤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형성과 전환과 맞물리면서 진행된 과정이기도 하다. 그 방증으로 지금 87년체제의 극복이 운위되고 있다.

하지만 극복되어야 할 87년체제는 무엇인가? 그 체제에서 한국의 노동계급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필자는 여러 글들에서 민주주의는 단일하지 않으며 하나의 지점만을 경과하는 이행도 아니므로 ‘전환’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지난 촛불에서 봤듯이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한 ‘민주주의 회복’의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민주화도 있고, 역민주화도 있고, 재민주화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계급은 ‘제1의 전환’ 이후에 어떤 자기 전화를 모색할 것인가? 이것은 87년체제 이후가 불확정적이듯, 똑같이 그리고 동시에 열려있는 질문이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로 ‘열린 공간’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리지 않았다. 사실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예기치 않았던 노동자들의 계급적 진출과 조직화 이행 이후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가의 억압적 전략은 지속되었고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 재야민주화운동과 밀착, 이른바 ‘범민주 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자유주의 야당세력은 국가의 노동탄압에 대해 소극적이었고 노동과의 연대정치를 구사하기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거리를 두었다. 이는 1989년 4월20일 김대중의 한 달간 파업자제 촉구 입장 발표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확히 구별하자면 보수 우익세력은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 ‘탄압’ 세력이었고, 중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세력과 그들이 주도한 민주대연합은 정치적 민주주의로부터 노동을 ‘배제’한 세력이었다.

이제 지난해 10월29일 시작된 촛불이 주도하는 범 박근혜 퇴진운동에 힘입어 자유주의 정당세력은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박근혜 퇴진 운동이 시민들, 중간층들 이전에 조직노동, 그리고 조직노동보다도 그 주변의 비정규직 정리해고자 투쟁을 하던 변방의 노동자들과 민중운동에 의해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것이야말로 촛불 중심의 퇴진운동과 1987년 6월항쟁이 마무리되던 시점인 7월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온 노동자대투쟁의 차이다. 하지만 촛불 이후 다시 1987년 헌법질서로 회귀했다. 헌법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켜졌다. 하지만 이 체제는 또한 노동자대투쟁을 통합하지 못한 노동배제의 민주주의였고, 그 결과 비정규직의 급격한 도입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된 민주주의였다. 그런 ‘민생’의 실패가 10년간의 우익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되었다. 이제 다시 원점이다. 아니 하나의 전환을 끝낼 것인가라는 기로에 서있다.

해서 질문해야 할 것은 동시적이다. 노동운동과 정치적 민주주의 양자의 새로운 전환은 불가능한 것인가?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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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오래전 한 유명 스님의 말씀에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나 싶었죠. 게다가 사람들이 심각하게 논하기까지 하니 이상할 수밖에요. 아직도 심오한 불교 철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산을 산이라, 물을 물이라 부르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됐죠.

미국엔 지금 한창 역사 논란이 뜨겁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탓에 안 그래도 악화되던 인종차별 문제가 더욱 날카로워졌습니다. 인종차별 문제가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를 나누는 잣대와 겹쳐지며 정치 문제 전반에 떠올랐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철거되는 것은 그 여파입니다. 철거 반대자는 트럼프 지지자와 많이 겹칩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둘러싼 전쟁으로 남부 연합군이 패하며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남부의 정치,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흑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부활했죠. 백인우월주의도 당당히 돌아왔습니다. 큐 클럭스 클랜(KKK)이라는 백인 기독교 테러단체가 극성을 부리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들이 남부의 역사를 기린다기보다는 부활하는 백인우월주의를 대표한다고 봐야 하는 이유죠. 자연 흑인과 인권단체들이 철거를 요구해왔고 요즘 들어 지방정부가 이를 수용하는 분위기입니다.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하죠. 노예제는 좋은 일이 아니지만 남부는 노예제가 아니라 주정부 주권을 위해 싸웠다. 게다가 동상을 없애는 시도는 역사를 지우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주정부의 주권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주권이었죠. 게다가 동상을 치운다고 그들이 말하듯 역사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원래 동상은 기억을 넘어 기리고 자랑스러워하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동상을 지키자는 이들은 그 과거를 기리고 내심 그리워하는 셈입니다. 연방군의 승리, 노예제 폐지도 중요하지만, 남부의 전통도 중요하다는, 산은 산이지만 물도 산이라는 억지입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라는 억지도 있습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이 관제 데모에 동원할 목적으로 우파 단체를 지원한 정도가 아니라 직접 만들었던 정황이 파악됐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뿐인가요. 국정원, 군은 댓글부대를 조직해 여론을 조작했고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들은 공작과 음해로 민주체제의 근간을 손수 흔들었습니다. 부실 산업으로 수조원은 우습게 날렸고 블랙리스트로 언론과 개인의 자유마저 짓밟았습니다. 4대강사업을 통해 한반도 생명줄을 끊어놓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해 평화 기반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한 속보에 탄식도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가 고공행진을 하는 이유입니다. 거기에는 적폐청산에의 요구가 있죠.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를 정치보복이라 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개혁을 개악이라고도 했죠. “정치보복의 헌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 굿판”이라며 적폐청산에 대응하기 위해 대책특위까지 만들었습니다. 내 잘못은 잘한 것이고, 그 잘못을 고치려는 게 잘못이라는 파렴치한 억지입니다.

짐작하건대 그 적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일수록 목청을 높이겠죠. 그러니 쉽게 물러서지도 않을 겁니다. 어디 메모라도 해두고 선거 때 확인해야겠습니다. 항의 전화도 괜찮겠죠. 이번 가을엔 성철 스님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생각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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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0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미국 대선후보였던 트럼프와 클린턴이 첫 TV토론을 하기 전인 작년 8월이었다. 이 지면에 ‘김정은의 핵과 트럼프의 핵’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트럼프의 등장을 경고했다. 그가 작년 3월에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 핵무장을 허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발언했음을 지적했다. 안보의 끈을 한국이 잡아 당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추석 명절 전, 9월에 대통령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총회에서 연설했다. 그 자리에서 미국과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국제법적으로 매우 충격적이며 불법적인 사건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인 유엔에서 유엔 회원국의 대표가 다른 유엔 회원국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유엔 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한 발언이다. 예방적 선제공격은 불법이다. 물론 그의 발언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역시 그가 결정할 것이므로 조건은 별 의미가 없다. 북한에는 2500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트럼프는 이미 한 달 전에 북한이 미국에 대한 위협을 중단하지 않으면 ‘세상이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파멸적 핵무기를 투하하면서 ‘지구상에 없던’ 폐허의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던 미국의 과거가 떠오른다.

트럼프는 놀랍게도 바로 위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이란을 위협했다. 오바마 정부가 이란과 타결한 이란 핵개발 동결 협정을 비난했다. 그는 이란과의 핵 협정을 ‘미국에 낭패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란을 부패한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올 9월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자리에서, 이란 핵 협정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렸고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15일이면 트럼프의 결론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날은 미국이 이란과의 핵 협정 체결의 대가로 이란에 준 경제 제재 유예를 계속할 것인지 결정하는 시한이다.

트럼프가 이란과의 핵 협정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한국에 위험하다. 북한 핵 문제 해결에서 매우 나쁜 영향을 줄 것이다. 북한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란과의 핵 협정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그런 미국을 보면서 북한은 미국과 핵 협상을 할 이유가 없게 된다.

트럼프는 2018 예산안에서 환경보호청과 노동부의 예산을 무려 31%, 21%나 깎으면서, 국방예산은 10%나 늘렸다. 두 자리 숫자로 늘렸다. 그는 유엔이 핵무기금지조약을 출범시켰는데도 미국은 핵무기를 현대화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대규모 군사력을 ‘재구축’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고 하는 가공할 폭탄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했다.

안보의 끈을 한국이 더 세게 잡아 당겨야 한다. 한·미동맹이 한국 안보의 근간임은 현실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상징하듯이 안보를 타국에 의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이는 북한의 핵보유와는 상관없는 내재적 위험이다. 외부 위험이 클수록 안보 의존은 더 위험하다는 본질을 용기있게 인식해야 한다. 북한 핵 보유에 대비하는 일본도 일·미동맹을 한·미동맹처럼 의존적으로 운용하고 있지 않다. 대미 안보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 지체하지 말고 한국군의 일체의 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 나아가 한·미동맹을 법치화해야 한다. 트럼프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동맹이 아니라, 나토와 같은 공동 의사결정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과 그에 대한 정기적 평가도 법제화해야 한다. 끈질기게 국제법을 이용해야 한다. 트럼프를 국제법의 바다로 띄워올려야 한다. 트럼프가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을 한 이틀 후에 유엔의 53개 회원국은 사상 최초로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아시아에서는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서명국에 참여했다. 64년의 정전협정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킬 국제적 평화협정의 체결이 최종적인 트럼프 리스크 해결 방법이다. 트럼프의 임기가 지나가기를 앉아 기다리기에는 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오로지 국민을 믿고, 안보의 끈을 한국이 더 세게 잡아 당겨야 한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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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찐따’란 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비속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 읽었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일본어로 짝짝이를 뜻하는 찐빠(跛)에서 왔다고 추정될 뿐이다. 어린 시절 병을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작가 이철용은 이 때문에 주변에서 찐따란 놀림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주로 장애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대략 ‘한심한 부류’를 지칭하는 비하어로 쓰인다.

지리적 요인이 아니라 계급, 연령, 성별, 종교, 인종 등과 같은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분화된 특정한 사회집단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어휘를 사회방언(social dialect)이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집단에서 흔히 사용되는 사회방언 중에 루저, 잉여, 삐조리, 왕따는 물론 ‘찐따+찌질이+버러지+거지’의 조합인 ‘찐찌버거’ 같은 합성어가 있다. 같은 대상과 개념이라도 표현하는 어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은 그 사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런 말이 넘쳐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흔한 속설 가운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어딜 가든 대충 중간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속설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정상성을 강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경쟁사회 논리와 맞물려 집단이 제시하는 정상성은 강력한 규범이 된다.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진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쉽게 루저, 잉여, 삐조리, 찐따, 찌질이가 되어 비정상으로 내몰린다. 학교나 집단에서 그런 부류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선 패거리를 만들어야 하고, 패거리의 인정이 필요하다. 찐따나 루저가 아니라는 걸 인증받기 위해선 집단 내부의 누군가, 주로 약자를 고발하고 배제시켜야 한다. 이런 방식의 폭력적인 왕따 사냥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흔히 ‘선빵’이라는 예방전쟁(preventive war) 구도로 포섭한다. ‘찐따’가 되기 싫어서라도 ‘일찐’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에 지배당하는 것을 교육현장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사실 그 출발은 가정에서 비롯된다. 친척끼리 모였을 때조차 내가 먼저 당하지 않으려면 ‘선빵’을 날려야 한다. 집안 식구 중 제일 처지는 사람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 잔소리의 과녁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조차 스스로 정상성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은 아닐까, 움츠러들고, 상처받는다. 명절에 친척끼리 모여 가장 즐기는 게임이 이른바 품평게임이다. 아이의 성적은 형제, 자매,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 치르는 대리전쟁이다. 말랐으면 말라서 걱정, 뚱뚱하면 뚱뚱해서 걱정이다. 수학을 잘하면 영어가 걱정이요, 영어를 잘하면 국어를 못해서 걱정이다. 대학 가기 전까지는 입시가 걱정이요, 대학 가면 취업이 걱정이고, 취업하면 결혼이 걱정이고, 결혼하면 출산이 걱정이고, 출산하면 집, 승진 걱정에, 다시 아이들 걱정으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의 무한체계가 반복된다. 가정에서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응축된 분노가 쌓여서 사회 전체가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조금만 싫은 소리를 들어도 폭발해버릴 것 같은 상태가 된다. 길에서 양보해주지 않는 차량을 발견했을 때, 순간 감정이 폭발하는 이유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란 경험을 어려서부터 반복적으로 체득한 결과인 셈이다.

집단이 제시하는 규범, 정상성의 추구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고민을 거세하고, 항상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형식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식의 외주화, 의식의 식민지화인 셈이다. 이번 명절에는 우리 모두 ‘친척’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 되어 만나면 좋겠다. 아이들의 성적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갖기를, 상대의 개성과 인격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와 그를 긍정하기를. 타인에게 정상이길 강요하기에 앞서 자신의 관용도가 충분히 정상적인지 먼저 되묻도록 하자. 가정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우리 모두 찐따와 루저를 벗어나기 위해.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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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지난 7월4일 국토교통부 내 ‘도시재생사업기획단’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출범식에서 소위 ‘따뜻한 도시재생’을 강조했다. ‘따뜻한 재생’이란 아마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재난을 막겠다는 뜻이지 않을까 싶다. 도시재생 사업을 하다보면, 주변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고 자연스럽게 임대료도 상승해 임차인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낡은 도시를 재생하면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기본적으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관계는 상호 모순적이다. 도시재생은 어떤 점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억제하려는 공공 도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도시재생은 불가피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갈 수 없다. 도시재생은 도시의 경관과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거대 개발 정책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재생으로 인한 부동산 가치의 상승과 지역개발 논리를 완전히 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도 공간의 고급화로 부동산 가치를 극대화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도시재생의 공공적 원리에서 벗어나려는 본성을 가진다. 그것은 부동산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문화적 전환을 통해 시각적, 미적인 효과를 전유하고자 애를 쓴다. 처음에는 예술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하다가 나중에 그 장소가 유명해지면 예술인들을 배척하고 쫓아내려는 이중적 태도를 가진다. 홍대 앞, 경리단길, 성수동 수제화거리, 통영 동피랑 마을 등. 이것이 소위 문화 명소가 가지는 맹점이다. 도시재생으로 새롭게 생성된 문화적 공간이나 공공장소에서의 시각적 조형물들은 역설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심화시키는 미적인 토대를 제공해준다.

그런 점에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이 교차되는 지점에 문화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문화의 자원은 도시재생의 공간 활성화에 있어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부동산 가치 상승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의 개발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으려는 예술인들의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저항이 그러했고, 공덕동 경의선 공유지 늘장의 저항이 그러하다. 문화적 자원과 예술의 미적 감수성은 오히려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거나 그 확산을 억제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도시를 미적으로 아름답게 만들면서도, 그 문화적 가치가 부동산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길 말이다. 문화적 역량을 가진 주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문화는 도시재생의 대안적 장으로 전환될 수 있다. 문화와 예술은 반드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촉매제 혹은 희생양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문화적 전환은 ‘공간의 고급화’를 위한 자본의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동산 자본의 확장을 막을 수 있는 저항의 가능성도 내장하고 있다. 기획부동산 자본과 상업 시설들이 도시를 지나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예술가들이 도시공간 속에서 버틸 수만 있다면, 문화와 예술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시키는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예술인들이 연대하여 문화적 게토와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문화적 자원을 도시재생 활성화의 수단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문화적 투자는 도시재생으로 인한 투기 과열의 사회적 비용을 사전에 상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선 예술인들의 저항이 번번이 좌절하는 것은 ‘따뜻한 도시재생’을 위한 강력한 부동산 억제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개발이익의 상당부분을 환수한다거나, 임대료 상승의 상한선을 둔다거나, 임차인에게 장기적으로 살 권리를 부여한다거나, 문화예술의 자원들을 일종의 공유지 형태 안으로 수용한다거나 하는 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억제 정책이 수반된다면, 문화는 ‘따뜻한 도시재생’의 대안이 될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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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직원을 “자식 같아서 때렸다”는 뉴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갑질’에 대한 분노와 ‘어떻게 맞아가면서까지 참고 직장을 다녔냐’는 빈정 섞인 동정론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두 반응은 사실은 동일한 것이다. “때려도 되는” 자와 “맞아도 참아야 하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동등하지 않으며, 이 사회는 불평등하다는 대중의 인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갑질은 지난 정권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갑질 현상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성별, 지역별, 학력별 그리고 연령별 갑질을 통한 억압적 위계는 사회 내에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해왔다. 차라리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일방이 물리력을 행사하던 ‘무식한 갑질’에서 좀 더 제도화된 갑질 혹은 저항을 티 내지 않고 분쇄할 수 있는 권력 기제들이 훨씬 세련되게, 사회의 전 영역에 적용되도록 발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사회 전체에 불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면, ‘을’의 관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맞으면서도 참고 고개를 조아리거나’, 혹은 이제는 아예 저항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로부터의 탈주라는 원치 않는 갈림길에 놓인다.

전자의 길에 서면 사회 시스템에서 최대의 효용을 취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때 사회 구성원들은 체제의 공범이 되며, 갑질의 방관자가 된다. 그리하여 미시적 사회 관계는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야만’의 관계가 된다. 즉 가족, 사회적 유대나 공동체 의식, 그리고 신뢰가 사라진다. 후자의 길에 들어서면 이들은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사회적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거나 스스로 격리하면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길, 즉 개인이 체제로부터 최대의 편익을 취하는 것에 머물거나, 혹은 사회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조건에서는 공히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점점 더 증가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무엇보다도 출산율이 감소하고 자살률이 증가한다). 사회적 생산력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체감(遞減)하며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에 기초하여 유지되는 자본주의 자체에 위협이 된다.

유럽에서는 이미 지난 20세기 중반에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칼 폴라니는 1944년 <거대한 전환>이라는 저작에서 19세기 초반 이후 자본주의 시장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사회 파괴를 경고하며 그 해법으로 ‘사회 방위론’을 제안했다. 이 해법에선 국가(법과 제도)가 ‘중립적 해결자’로 자처한다. 국가는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는 온존시킨 채,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와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권의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구호나 ‘적폐청산’, 갑질청산도 이런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이 정부의 개혁정치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지속적으로 파괴된 ‘사회’를 되살리기 위한 ‘정치적 리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동시에 과거의 발전 모델로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노선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국가의 사회에 대한 개입 증가, 재정조달의 문제에다 근본적으로는 사회 불평등을 온존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을 은폐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사회 방위 국가’는 기존의 ‘블랙리스트 국가’보다는 선진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세련되고 온건하다고 해서, 덜 야만적이거나 덜 불평등한 것은 결코 아니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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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PD, 아나운서, 리포터, 미술음악치료사. 모두 전문 프리랜서 직업들이다. 언론에서 프리랜서는 주로 유명인사들의 사례가 소개된다. 무엇보다 전문성이나 창의성을 다루지만 고소득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영화나 방송에서 프리랜서 직업은 커피 전문점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노트북 컴퓨터로 일하는 모습들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프리랜서의 일은 밝기만 한 것일까. 또한 프리랜서는 좋은 일자리(decent work)의 미래상일까.

프리랜서는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회사 직원이 아니다. 비용은 ‘인건비’가 아니라 ‘제작비’로 나간다. 그러니 퇴직금이나 실업급여, 건강검진도 없다. 당연히 연차휴가도 없다. 프리랜서는 회사나 고용주들이 대신 지급하는 형태로 모든 세금을 내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이 누리는 혜택은 받지 못한다. 소득 예측도 어렵고 변동성도 심하다. 합리적인 계약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일하는 곳에서는 신분증이 아니라 출입증을 받는다. 그래서 프리랜서는 보이지 않는 유령에 불과하다.

국내외 통계에서 프리랜서는 취업자의 약 5% 남짓 된다. 적지 않은 규모다. 문제는 전통적인 임금노동자도 아니고, 자영업자도 아닌 모호한 고용형태다. 프리랜서(Freelancer)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독립계약자’나 자영업자로 불린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주로 ‘자유직업인’으로 지칭된다. 프리랜서는 이미 기존 노동자와는 구분되는 특성을 가진 집단으로 고착화된 지 오래다. 명칭상 ‘프리랜서’라고 불리는 순간,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의 미비는 고용의 왜곡을 초래한다.

최근 ㄱ방송사 프리랜서와 대화를 하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사실 화가 났다. 그녀에게는 1년에 3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유급이 아닌 무급이다. 그런데도 다행이라고 한다. 정말 중요한 일이나, 취업 때 면접이라도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삶 속에 ‘휴가’는 낯선 단어였다. 휴가는 곧 소득의 단절, 경제활동의 단절을 의미한다. 1주일에 6일 출근하면서 고작 주급 40만원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사용하는 휴가지만, 그녀에게는 정말 ‘소중한 3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프리랜서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컸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와의 차별은 마지막 남은 자존감조차 상실케 한다. 야간이나 주말 혹은 명절 근무는 모두 프리랜서의 몫이다. 싫다고 할 수도 없다. 봄·가을 프로그램 개편 때 자칫 실업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랜서의 고용불안정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회사 인력이 아닌자. 한마디로 회사의 편의대로 쓰고 필요 없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일 수도 있다”는 말에 가슴이 막막해졌다.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도 이제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고용’에 관심을 가질 시기다. 지난 4월15일 미국 뉴욕시는 ‘프리랜서보호법’을 제정했다. 주요 내용은 서면계약, 임금 적시 지급, 보복으로부터의 자유,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와 법률 서비스 등이다. 법의 취지는 “신분이나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은 프리랜서에게 건강보험과 퇴직연금 혜택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유럽의 몇몇 협회들은 프리랜서 수익의 일정 금액을 상호부조 성격으로 공제하기도 한다. 프리랜서 재교육 비용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 국내에서도 프리랜서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다. 아직은 소수이나 프리랜서 권익보호를 위한 움직임의 시작이다. 프리랜서에게도 일터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현재 MBC와 KBS에서 공정방송을 위한 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파업이 마무리되면 작가나 리포터 등 내부 구성원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다. 결방으로 급여를 받지 못한 프리랜서에게 최소한의 휴업수당이라도 지급하면 어떨까. 그 정도의 작은 희망을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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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가 없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자, ‘오천만 핵인질’ 사태라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정당은 성찰해야 한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네 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그런데도 근본적 대응없이 ‘통일대박’을 말한 사람들이 누구였나?


하지만 지금이 중요하다. 현실이 엄중하다. 남들의 염치없음을 더 이야기할 여유조차 없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백척간두에 서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심각한 위기이다. 외교안보에서의 정체성 위기이다. 그의 정부는 외교안보에서 박근혜 정부와 달라야 한다. 그리고 성공해야 한다. 


보통의 시민에게 서울 하늘에 핵무기가 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를 함께 운영하는 정치인들이 공포를 부추기거나 이용한다면 매우 무책임하다. 가장 무책임한 사람은 전술핵 배치 가능성을 말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일본과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해서, 자체 방위를 맡기고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방위비를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본과 한국에 전술핵이 배치되면 대만도 핵무장을 할 것이다. 동북아는 핵무기가 없는 나라가 없게 된다. 핵무기 집중지역이 된다. 트럼프의 전술핵 배치는 어떠한 핵무기도 비핵보유국의 직접 또는 간접 관리에 놓이게 이전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 핵확산금지조약 위반이다. 더 큰 모순은 전술핵 배치는 북의 핵무장을 정당화시켜주고 용인한다. 북핵 문제를 북핵 용인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북핵은 안된다. 사드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따라 무기배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주한미군지위협정 2조에 의해 땅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더라도,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과연 사드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이 배치할 수 있는 무기에 포함되는지, 어느 지역의 토지를 제공하는 것이 타당한지, 그리고 그 지역 시민들의 민주주의 권리를 어떻게 절차적으로 보장할지는 한국에 권한이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의 성주 땅 제공 결정은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아직 파국은 아니다. 전쟁 외에 대안은 있다. 한국이 갖는 최소한의 자율성이라도 최대한으로 증폭해야 한다. 북한 핵무기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듯이 사드도 평화의 수단이 아니다. 한국이 전략적 자주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드를 단순히 ‘임시배치’라고 설명해서는 안된다. 그 근거를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소파 협정에 의하면 미국의 동의가 없이는 성주 사드 땅을 반환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배치’라고 설명하려면 한국이 환경영향평가 결과에 따라 사드를 철거할 법적 권한이 지금 있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라도 임시배치라는 설명의 근거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전술핵도 마찬가지다. 일단 들어오더라도 한국이 철거하라고 하면 미국이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이 전략적 자주성이 없다면 운전자로 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국민에게 어떤 경우에도 대화 없이는 그 어떠한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 양보라고 비난받는 것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다. 대화는 언제나 필요하다. 대화 없이는 해결할 수 없음은 상식이다. 상식을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 상식을 국민에게 말하지 않았다. 새 정부는 달라야 한다. 그것이 정권의 정체성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남에게 변화를 요구하려면 자신도 변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유엔의 제재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북의 6차 핵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한국과 미국이 진정 북한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최종적인 행동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북한의 변화를 말했다. 그 변화의 의미는 북한의 절멸인가 아니면 북한의 발전인가? 전자라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후자라면 체제인정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오천만 핵인질’이라는 염치없는 비난을 할 때가 아니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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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6차 핵실험과 예상되는 추가적 도발에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핵·미사일 분야 기술을 더 이상 고도화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며 “실제적이고 강력한 조처”를 다짐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북한과 거래하는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미국과 무역을 중단할 수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죠. 이번 실험을 “고립무원 속에서 김정은의 광기 어린 핵무기 집착”쯤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태를 왜곡해 목청 높이기에만 좋을 뿐 해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해결은 올바른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첫째, 그 동기입니다. 아직도 북한 의도에 의아함을 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북한 핵무기에 불안감을 느낀다면 답을 이미 알고 있다 하겠습니다. 1990년대 초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 때까지 북한은 코앞에서 미군 핵무기를 마주했었고 지금껏 인류 역사상 최강이라는 미군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미군은 태평양 전역을 둘러싸고 있고 실전 배치된 핵탄두만 1400여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의 거의 반을 쓰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북한 핵무기에 우리가 불안하다면 미국 군사력에 북한은 훨씬 불안한 겁니다.

북한은 지난 6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6차 핵실험을 축하하는 평양시군민 경축대회를 열었다고 7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행사에는 김영남·황병서·박봉주 등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수소탄 개발자 등이 초청됐다. AFP 연합뉴스

미국은 북한 정권처럼 공격적이지 않다고요?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은 한때 미국 중동 정책 교두보였지만 2003년 미국 침공으로 후세인은 처형당했습니다. 이에 겁먹은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핵무기를 포기하고 서방과의 교류확대에 나섰죠. 하지만 내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공격했습니다. 카다피도 처형당했습니다. 힘과 무력만이 정권 안정에 필수적이라는, 미국이 신봉하기도 하는, 현실주의 이론에 딱 들어맞죠.

북한 김씨 왕조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안 봐도 훤합니다.

둘째, 북핵에 대한 대응입니다. 정권 안정에 사활이 걸린 핵무기를 포기할 리가 없죠. 이런저런 경제 제재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 무용함은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미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북한 대외무역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권 2기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게다가 북한을 흔들어 생길 실이 득보다 훨씬 큼을 알고 있죠. 설사 중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공세적으로 취하더라도 북한 인민만 괴롭히고 말 공산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주도의 경제봉쇄는 탱크에 화염병 던지기로 끝날 겁니다.

무력행사는 득은 작고 불확실하지만 실은 혹독하고 명확합니다. 외과 수술하듯 핵시설만 도려내는 폭격은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습니다. 성공해도 북한이 확전의 길로 갈 공산이 크죠. 폭격이 성공하고 확전이 안돼도 북한 내 혼돈, 중국 개입 등 그 결과는 한반도 일대의 혼란일 겁니다. 이제 북한은 미국과 한국이 어떻게 말하건 핵보유국입니다. 게다가 미국 서부까지 사정권 안에 있죠. 무력행사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기저기서 혼돈과 흥분에 가득 찬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말이라도 하지 못하면 체면이 떨어지니까요. 유권자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곧 미국은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겁니다. 벌써 미국은 주판알 튕기기를 시작했죠. 농산물 관세 철폐를 포함한 자유무역 협상을 재개하고 수십억달러어치 무기를 사라며 한반도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내주고 서울을 살릴 리 없는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을 테고 북한의 요구, 즉 주한미군 철수와 북한 인정을 상당 부분 들어주게 될 겁니다. 싫어도 대안이 없으니까요. 

그 미래는 애써 부정해도 옵니다. 시간문제죠. 이는 한국에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겁니다. 중·미 수교에 완전 제외된 대만이 될 수도 있고, 통일을 주도한 독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장 발 벗고 나서서 정치적 해법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생존, 통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을 설득해 한국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한의 불안도 완화되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이 가능합니다. 싫어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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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되었던 영화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던 19만8000명의 영국군과 14만명에 이르는 프랑스, 벨기에군을 영국의 군관민이 합동으로 구출해내는 기적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록 전쟁의 서막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나 철수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영국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력전(total war)의 시대, 전쟁이 벌어지면 온 국토와 전 국민이 전쟁의 참화로 고통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력을 하나로 단합시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 전쟁 기간 중 조지 6세가 머물던 버킹엄궁은 7차례나 폭격당했지만, 국왕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궁이 폭격당하는 장면과 국왕의 건재함을 홍보영상으로 만들어 국민의 단합과 결집을 호소했다.

영화 <덩케르크> 스틸 이미지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여러 방식으로 프로파간다 작업을 수행했다. 그중 하나가 왕실 마크와 선전 문구를 담은 ‘KEEP CALM’ 시리즈 포스터였다. 첫 번째 포스터는 “Your Courage, Your Cheerfulness, Your Resolution will bring us victory(당신의 용기, 당신의 활기, 당신의 결의가 승리를 불러올 것이다).” 두 번째는 “Freedom is in peril defend it with all your might(위기에 처한 자유를 전력을 다해 사수하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이었다. 마지막 포스터는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공개되지 않다가 2000년 영국의 어느 고서점에서 1장의 포스터가 우연히 발견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권은 민심을 호도하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적 위기를 조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의 민심 흔들기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침착하게 현실에 대처해왔다. 2006년 제1차 핵실험 이후 계속되는 북핵 위기 속에서도 대다수 국민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진짜 가마니가 된다”는 사실 역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이런 사실을 반복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까지 피란 내려간 상황에서도 “안심하라!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를 연신 틀어댔고, 2014년 4월16일, 이미 선체가 침수되어 기울어 가고 있는 세월호 선내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죽음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참담하게 망가져가는 국가를 더는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국민이 나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만히 지켜만 보기엔 이른 듯싶다. 중요한 변화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남북관계 개선이다.

제1차 핵실험 이래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접근 방법은 북한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핵 개발을 포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는 6차 핵실험 소식이다. 대북 제재와 외교적 고립, 그리고 무력시위로는 북한의 선택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여전히 미사일 사정거리 연장과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계획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군사체제의 군사력은 앞으로도 북한을 계속해서 압도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유사시 한반도와 우리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다. 그런 사실은 정부도 이미 알고 있다. ‘절대 안보’는 ‘절대 평화’ 이외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한 어떠한 군사 무기의 도입도 현실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온 국민이 김정은의 북한 핵과 트럼프의 대북 군사옵션이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든 길이겠으나, 문재인 정부는 국민을 믿고, 국민을 위해, 국민과 함께 우리가 주도하는 해법을 만들어 그들을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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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도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우익단체들의 집회와 행진이 열렸다. 그들의 행진과 구호 음악은 지난 탄핵정국에서 보았던 스타일 그대로였다. 군가를 따라 부르며 군복, 군화, 군모에 검은색 ‘라이방’을 쓴 노령의 참가자들이 여전히 대열의 전위에 선다. 이들의 외침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절실했지만, 백주대낮에 군가와 군복을 입은 분들을 아직도 도심에서 봐야 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곱지 않다. 사운드와 비주얼이 이제는 정말 지겹다는 표정들.

지난 8월30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갈 때, 입구에서 군복을 입고 그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노령의 우익단체 회원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우익 어르신의 경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던 원세훈은 국정원법,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법원에서 4년 실형을 선고받고 다시 법정 구속이 되었다. “헐, 범죄자에게 거수경례를?”

우익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새 공포의 대상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냉전 시기 반공교육에 혈안이 되어 빨갱이를 색출하라는 우익단체들은 과거에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포비아를 생산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2000년대 후반 우익 단체의 회원들이 군복 입고 가스통 들고 도심에 나와서 자해 퍼포먼스를 하던 시절만 해도 우익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강화된 우익들의 집단적 행동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 우익들은 공포가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시각적인 불편함이다. 가령 태극기 집회나 동성애 반대 집회에 동원되는 단체 중에서 기독교 우익단체들이 벌이는 퍼포먼스는 이데올로기적 ‘키치’의 극단을 보여준다. 한복을 입고 북춤을 추며 찬송가를 부르다가, 하얀 발레복을 입고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이들의 퍼포먼스는 ‘친미와 반북’ ‘기독교와 반공’이 이상야릇하게 혼합된 시각적 민망함을 보여준다. 빨갱이와 동성애자를 동일한 적대세력으로 묶어서 이들의 악령을 쫓아내려는 예식을 치르는 장면들이 종로에서 시청에서 행해질 때, 사람들은 이 시각적, 청각적 어이없음으로 인해 공포심리보다는 혐오심리를 갖게 된다.

우익의 주체들은 상식과 이성의 의지를 기각시키고,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우익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이익을 위한 충성경쟁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SBS 방송사 앞에서 김제동을 종북 좌파로 규정하고 퇴출을 요구하며 확성기로 생떼를 쓰는 엄마부대 회원들, 서울도서관을 음식 쓰레기더미로 초토화시켜버리고, 편의점 종업원과 지하철 승객들에게 반말과 욕설을 내뱉는 태극기집회 참가 할아버지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먹으며 폭식투쟁을 하는 일베 회원들은 이제 공포의 주체에서 혐오의 주체로 이행한다. 동원되는 수단과 방법이 ‘이념의 전쟁’에서 수행할 수 있는 수준과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들 내부의 치졸한 권력 싸움들, 돈으로 묶인 동원된 주체들과 의도된 퍼포먼스, 냉전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의 신념과 행동의 표현들은 혐오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킨다.

혐오의 주체로 변해버린 우익은 어떤 점에서 불편한 연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평생을 남을 혐오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동시대에 함께 살아온 국민들을 빨갱이, 전라도놈, 밥하는 여자, 외국인새끼들로 혐오하면서 살았다. 혐오 행위는 생존의 본능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위협의 전략이다.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익의 자화상은 어떤 점에서는 ‘혐오의 거울’이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다. 혐오하는 자의 혐오는 그래서 본질적이며, 역사적 존재의 소멸을 ‘순간을 대하는 히스테리’로 반응한다. 혐오의 행위를 과잉되게 재생산하는 우익의 심리는 역으로 역사적 주체의 소멸에 대한 자기공포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 우익의 소멸의 순간을 위해 ‘소돔과 고모라’ 같은 그들의 혐오를 지켜볼 따름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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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전쟁을 벌일 것 같던 북한과 미국이 8·15를 전후해서 다른 행보를 시작했다. 미 국무·국방장관이 지난 13일 월스트리트저널 공동기고에서 북핵의 외교적 해법을 시사했다. 14일 김정은 위원장은 ‘괌 포위사격 계획’을 보고받고 “미국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편 21일 시작된 금년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은 당초 계획보다 병력을 30%나 줄여서 시작했고 미군 전략자산도 투입하지 않았다.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미국을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발언을 했다.

국제관계에서 행위자들의 움직임을 시계열적으로 연계분석하면 정세의 큰 흐름이나 변화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북·미가 ‘화염과 분노’니 ‘괌 포위사격’ 같은 말폭탄을 쏟아내던 바로 그 시간에 북·미 외교관들이 물밑접촉을 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대전환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북·미는 작년 10월부터 1.5트랙 대화를 제3국에서 해왔고 뉴욕에서도 북·미 유엔대표부 간 비공개 접촉을 계속했다. 8월15일경 북한 유엔대표부 고위관계자가 워싱턴을 방문했다는 소문도 있다. 북·미 간 물밑접촉이 여기까지 진전되었기에 트럼프의 ‘존중론’과 틸러슨의 ‘대화경로 모색’과 같은 발언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돌발사고만 나지 않으면 북·미 간 물밑접촉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북핵 6자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물론 북한은 단거리 발사체 발사와 같은 저강도 무력시위는 전략상 계속할 것이다. 문제는 회담재개의 조건이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여야 6자회담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존입장을 미국이 계속 고수한다면 회담은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은 2015년과 2016년 초, 자신들이 핵개발을 동결할 테니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고 6자회담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중국 왕이 부장이 이걸 쌍중단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후의 첫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쌍중단으로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이 마련된 것이다. 군사훈련 ‘규모 축소’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 유예’를 조건으로 6자회담을 시작하고, 진전 상황을 봐가면서 쌍중단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 비핵화와 평화협정 문제를 투 트랙으로 타결해 가는 쌍궤병행으로 나가야 한다. 사실 쌍궤병행은 2009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3번(2, 7, 11월)이나 언급한 북핵 문제 해법과도 통한다.

8월27일 북한은 노동신문 논평에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헛소리’라고 험담했다. 남한과는 핵 문제 논의할 일이 없을 것이니,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이나 바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아마도 북·미 간 물밑접촉에서 희망이 보이니까 자신감이 넘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북한이 못 보고 있는 중대한 측면이 있다. 한국이 현실적으로 핵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 유연하게 북한과 협상하도록 권고할 수 있는 힘은 물론이고, 6자회담을 성공적으로 진전시키는 데 한국의 역할은 절대 필요하다. 한·미 동맹을 토대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조율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한국 빼고 북핵 6자회담은 성공할 수 없다. 북한은 이걸 알아야 한다.

동북아의 국제정치구조상 한국이 운전석에 앉아야 북한에도 유리하다. 운전석에서 시동을 걸려면 남북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9월 이후 새로운 정세 흐름이 나타나면,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개최를 재촉구하는 것이 좋겠다. 문재인 정부가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려면 북한이 회담 개최 조건으로 내건 ‘김련희와 류경식당 여종업원 송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이산가족 상봉은 물론이고 남북대화의 물꼬도 트기 어려울 수 있다.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한반도 운전석에 앉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대승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황재옥 | 여성통일외교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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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회피하고자, 생활세계를 설계하고 구성하자는 전략과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전복하고 넘어서자는 전략은 애초에 틀거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잘못된’ 자본주의를 새로 고치고 바로잡자는 전략이 운동, 그것도 진보 좌파의 전략으로 대두하고 있다. 그것도 국내와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심히 우려스러운 반자본주의담론 회피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한 경제학자의 기괴한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는 한국의 자본주의를 정말 자본주의답게 만들자고 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일 뿐이다. 자본주의에 왜 규범적인 태도를 취하나? 나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착한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이다. 아니면 자본주의의 문제를 반자본주의가 아닌, 비자본주의적으로 회피해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어떤 ‘생활세계’를 구축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본주의와 이 생활세계는 어떻게 연계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이는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도, 기본소득도, 재벌체제 개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반대와 긍정이 있다. 반자본주의 담론은 요즘 거의 고사상태이므로 후자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좋은 자본주의는 긍정하고 심지어 사회운동은 좋은 자본주의 만들기에 복무하자는 최근의 흐름은 자본주의 앞에서 일종의 사상적·정치적 무장해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상생하고 자본주의를 회피하고 심지어 자신의 ‘대안’이 바로 자본주의 살리기라고 말하는데, 이게 자본주의 앞에 무장해제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삼성 바로잡기”라는 한국 노조운동의 프레임을 예로 보자.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하다. 삼성을 바로 고쳐서 좋은 재벌을 만들자는 것인가? 아니면 기업이 공공재라는 것인가? 기업이 공공재라면 그럼 국유화 아니면 사회화된 것인가? 제 아무리 좋은 기업도 자본주의 사적 소유를 벗어나지 못한다.

즉 아무리 망해가는 기업을 살려놔도 그것은 누군가의 소유로 된다. 혹은 아무리 나쁜 기업을 좋은 기업으로 만들어놔도 그것은 누군가의 것이다.

우리는 이미 IMF 외환위기 때 경험했다. 국가는 수십조원을 들여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인수·합병 매각을 단행하고, 그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세금을 퍼부었다. 그렇게 인공호흡하여 살려낸 기업은 헐값으로 팔려나갔다. 단지 기업을 ‘경영’할, 아니 ‘소유’할 주체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의 0원으로 팔려간 기업도 있었다. 그 기업을 얻은 자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국 자본주의도 더 막강해졌다. 마찬가지다. 삼성을 아무리 바로 고쳐봤자 그 소유의 끝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근데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를 새로운 재벌 반대운동이라고 실천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는 희색이 만면할 것이다. 족벌자본, 1인 소유의 재벌을 바꿔서 체질 개선하고 합리화시키면 그것으로 배당금 더 받고 주가 더 올리고, 그리고 1인 소유의 기업을 탈피해 주주자본주의, 관리자본주의의 이익을 다 함께 누릴 수 있다, 단 공유한 사람들끼리. 일단 이것부터 성취하고서 다음 대안을 말하겠다고? 재벌을, 아니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 대 나쁜 자본주의로 규범적으로, 아니 가치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버리고서 어떻게 반자본주의가 가능할까?

문제는 요즘 나온 이른바 대안 전략들 대다수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해서 이 사회 내 소수 좌파의 분발이 필요하다. 박근혜 퇴진 촛불은 ‘혁명’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회체제도, 정치체제도 건드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혁명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혁명을 선제적으로 방어하는 예방혁명일 수는 있겠다. 물론 그조차 ‘혁명’ 이후 혁명의 시대가 과연 펼쳐질지에 달려 있지만. 하지만 지금은 혁명이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나 ‘반혁명’적, 즉 개량의 시대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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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 네슬레, 구글, IBM. 전 세계 유명 글로벌 기업이다. 서점에 가면 기업 성공 사례 책들도 볼 수 있다. 혹여 영국에 여행 간다고 하면 ‘버버리(Burberry)’ 옷을 사달라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어느덧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브랜드가 되었다. 물론 가격은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그런데 최근 이 회사 직원 임금을 보면서 다른 생각도 들었다. 올해 직원 시급이 9.75파운드(약 1만4294원)라고 한다. 바로 영국 런던의 생활임금재단이 정한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생활임금’은 ‘기본소득’과 함께 주요 정책 의제였다. 반면 우리나라의 생활임금 인지도는 낮다. 아직은 시청이나 구청의 저임금 비정규직에만 적용되다 보니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인터넷 구글에 검색하면 ‘living wage(생활임금)’ 관련 내용이 603만개, ‘최저임금’은 3770만개 정도 나온다. 그만큼 최저임금에 비해 생활임금은 낯설다. 생활임금은 1994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영국은 2005년 런던에서 도입했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는 최저임금 못지않게 생활임금 논의가 무척이나 활발하다. ‘생활임금계산기’라는 사이트를 통해 각 지역별 상황과 수치도 공유한다.

생활임금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수준으로서 임금’ 혹은 ‘기본적인 욕구를 포함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임금’ 정도로 정의된다. 생활임금이 처음 시작된 미국이나 영국을 보면 그 역사적 배경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화 초기 생활임금은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저임금에 매력을 느낀 사용자들이 여성과 아동을 12시간 이상 일을 시켜도 괜찮을 때였다. 그래서 생활임금은 “그 사회에 어떤 임금이 필요한가?”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당시 생활임금은 가격으로서 시장에 맡겨진 임금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 가능한 임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3년부터 생활임금 조례가 만들어져 현재 102곳에 제정돼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임금은 88곳(35.9%)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문제는 자치단체장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도입이 안된 곳이 더 많다는 점이다. 영남지역은 생활임금을 시행하고 있는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그나마 생활임금 적용 대상도 서울을 제외하면 지자체 소속 노동자에 한정된다. 규모도 크지 않다. 생활임금 산정 기준도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대부분 기본급, 식비, 교통비를 산정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명확한 기준도 없다. 적용 범위를 민간위탁이나 공공조달 업체로 확대해야 하는데 규정과 예산 걱정을 먼저 한다. 사실 재정을 걱정하면 할 수 있는 정책은 하나도 없다.

생활임금은 일의 성격이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임금, 그저 최저 시급에 맞추어 일을 시키는 임금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생활임금의 목적은 명확하다.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수준을 향상시켜 빈곤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 즉 안정된 생활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임금은 어느 정도일까. 현재 지자체 생활임금은 평균 7623원(월 158만7000원)이다. 곧 대부분의 지자체가 내년도 생활임금을 결정한다. 2018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되면서 지자체에서 많은 고민이 있다고 한다.

정부가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밝혔기에 이제 생활임금은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지 함께 고민할 시기다. 현재 생활임금을 시행하고 있는 곳은 임금불평등이 심각한 국가들이다. 미국보다 늦게 출발한 영국은 3249개의 기업들이 생활임금 지급에 참여하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1주일 동안 생활임금 주간을 지정하기도 하고 인증제도 시행한다. 영국에서 대학과 병원 그리고 민간기업까지 생활임금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유의미한 시사점을 준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임금제도는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 낮은 최저임금을 견인하기 위한 목적에서, 적용 범위의 ‘확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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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위협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에서 시작한 북핵 위기 25년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북한과 미국은 상황을 더 악화시켜서는 안된다. 한국은 한길밖에 없다. 정파와 정권과 관계없이 북핵 위기 해결의 독자적 개입점을 확보해야 한다. 독자적 개입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한국이 역할을 더 해야 한다. 이것이 출범 100일을 맞는 새 정부의 중요한 과제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8월8일, 북한이 미국에 대한 위협을 중단하지 않으면 ‘세상이 보지 못한’ 불바다와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트루먼 전 대통령이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지구상에 없던’ 폐허의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핵무기 추가 사용을 경고한 것처럼 매우 심각하다. 그리고 충격적이다. 과연 트럼프가 이러한 말을 할 때,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 미리 조율을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새 정부는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하면서도 독자적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슬기롭게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없다.

먼저 북한과의 접점을 확보해야 한다. 북한은 핵우선주의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 미국과의 핵무기 경쟁이라는 방법으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구소련은 매우 뛰어난 핵능력을 보유했지만 붕괴했다. 핵무기가 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체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북한이 미국이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북한에 핵이 없을 때에도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았다. 1953년 휴전 후 그동안 왜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한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일으킨다면 이는 한·미동맹의 해제를 의미한다. 핵무기가 북한 체제를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북한 공격을 막을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그러니 북한은 핵무기 우선주의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

둘째, 한국도 분명한 행동을 해야 한다. 독립 변수로서의 자율적 공간과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한·미 안보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동맹이란 말 그대로 동맹이다. 우리가 독자적인 힘을 갖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관계에서 외교와 군사에서 독자적 변수로서의 능력과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 이 점에서 평시의 연합작전 능력도 독자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시 연합작전 훈련 작전권도 환수해야 한다.

한국은 1994년에 평시 작전지휘권을 환수했다. 그러나 ‘코다(CODA)’라고 약칭하는 다섯 가지의 연합위임권한 사항에 대해서는 평시에도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행사하도록 미국과 합의했다. 여기에는 평시 연합훈련의 계획과 지휘권도 포함되어 있다. 즉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평시에도 연합훈련에 대한 계획과 지휘권을 갖는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본의 자위대는 주일미군과 연합훈련을 하지만, 연합훈련을 계획하고 자위대를 지휘하는 권한은 통합막료장이 가지고 있다. 일본에는 아예 일·미 연합사령부라는 것이 없다. 한국이라고 달라서는 안된다. 한국군이 다른 나라와 연합훈련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권한은 당연히 한국이 행사해야 한다.

그리고 전시 대비 작전 계획권도 환수해서 한국이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전시작전계획(OPLAN)도 ‘코다’에 포함시켜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주어 버렸다. 작전 계획을 최종적으로 심사하고 승인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미국 합동참모의장에게 있다.

한·미 안보를 강화하는 것과 한국이 독자적 안보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일본의 사례도 있다. 독일과 나토의 관계도 같다. 핵전쟁 위협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우리의 독자적 능력과 영향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길이 없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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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안 2371호는 북한 총 수출액의 3분의 1가량 타격을 주리라 예상됩니다. 게다가 이달 중순부터는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연합훈련이 시작되죠. 북한이 추가적 도발을 예고하면서 8월 위기설이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북 제재, 한·미 군사훈련, 북한의 반발, 위기설 증폭 등에도 불구하고 이후 진정국면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한국 시민들은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구 언론에서 연일 뉴스로 다루고 있음에도, 이러한 평온함은 남북이 싸울 수 없는 한반도 현실을 반영한 겁니다.

이와 더불어 반세기 넘게 변하지 않는 현실은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입니다. 사드 배치는 가장 최근의 예입니다.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은 한국 안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정적 요소는 아닙니다. 장사포 등 재래식 무기와 단거리 미사일이 주요 위협이죠. 사드는 이와 상관이 없는 무기체계입니다. 그나마 수도권은 성주 사드 방어권 밖에 있습니다. 사드가 한국 방어용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한국 안보와 사드를 연결하는 알쏭달쏭한 소리만 쏟아냈습니다. “사드 배치는 나날이 고조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국가적 안위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내린 자위적 방어 조처”라거나 “잔여 사드 발사기의 조기 배치” 등을 통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고자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죠. 앞은 박근혜의 2016년 발언이고 뒤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달 발언입니다. 이런 주장이 흐리고 있는 사실은 사드가 미국 방어용이라는 점, 한반도 안보의 정책은 미국 안보와 얽혀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 정부는 마땅히 꺼낼 외교카드도 없어 보입니다. 금강산 관광은 잊힌 지 오래고 개성공단은 어처구니없게 문을 닫았습니다. 지원을 ‘퍼주기’로 매도하는 정치공세도 사납습니다. 외교라는 것이 줄 게 있어야 하는데 한국이 쥔 것이라고는 헛기침뿐이죠.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코리아 패싱’을 걱정합니다. 북한이 대화의 상대로 한국을 무시하고 미국을 지목할 만합니다.

이번 ‘위기’가 일상적이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줄 ‘선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국과의 평화죠. 북한은 크고 작은 도발로 한반도의 평화를 깨뜨릴 수도, 이를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 무대는 주로 한반도에 국한됐었죠. 이제 미국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굉장히 작은 가능성이지만 그 결과가 끔찍하기에 무시할 수 없죠. 거꾸로 평화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핵과 미사일이 발전될수록 북한과 미국은 테이블에 앉을 공산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오랫동안 원했던 것은 북·미관계 정상화와 미군의 철수입니다. 미국이 이를 당장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죠. 북핵이 현실적 위협이 되는 수준에 오르면 미국은 한국을 지킬 의지가 약해질 겁니다. 북·미 대립이 미국 본토로의 핵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을 지킬까요? 그러지 않을 공산이 있습니다. 북·미 간 타협으로 미군 감소나 철수도 가능합니다. 여기에 커져만 가는 중국 입김이 실리면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지죠.

설마 싶지만 1979년 중국과 국교 정상화가 되면서 하루아침에 대만을 버린 전력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50년 맥아더 장군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부른 대만의 가치도 1979년 상황에서는 급락했듯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언제 폭락할지 알 수 없죠. 

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요? 미군이 없는 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만의 국방정책, 자주적 대북외교 프로그램, 지역안보를 넓게 보는 독자적 프레임을 짜야 합니다. 준비할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끊이지 않는 군내 인권유린, 만성화된 방산비리, 성조기를 휘두르는 극우. 그 미래를 준비하기는커녕 논의를 시작하기에도 벅차보이는 한국의 모습을 보며 드는 질문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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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중심 경제를 내세운 새 정부가 들어선 덕분일까, 누구나 뻔히 알고 있던 갑질이 마치 전혀 새로운 일인 양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소란 한복판에 문화사회학자인 나에게는 오히려 ‘졸질’이 눈에 들어온다. 졸질이란 서로가 서로를 졸로 보고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갑질이 전통사회 양반이 상놈을 부려먹는 작태가 왜곡된 방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라면, 졸질은 상놈끼리 하대하는 습속이 이어진 것이다. 상놈끼리는 상대방이 이룬 성취가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본다. 문제는 상대방이 외부집단의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성원이라는 점이다. 같은 집단 성원을 졸로 대함으로써 결국 자신도 졸이 된다. 집단 전체가 졸이 됨은 물론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과 학문 세계를 보자. 한때 지성의 장으로 추앙받던 대학은 시장이 단기적으로 요구하는 인재를 맞춤 생산하는 위탁 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여기에는 교육당국이 큰 몫을 했다. 학령인구가 급감한다며 대학 정원 줄이기에 나섰다. 그냥 줄이라고 밀어붙이기에는 뭐하니까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라며 모든 학과를 시장친화형으로 특성화하라고 들볶는다. 대학은 이러한 요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뻔히 안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이 내려보내는 사업비를 따내기 위해 열을 올린다. 어차피 등록금이 수년째 동결되어 재정 지원에 목마른 터다. 지표가 제일 중요하다. 그중 취업률은 모든 지표의 알파요 오메가다. 취업률이 낮은 학과는 통폐합 대상이다.

대학은 교육당국의 요구를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비웃는다. 시장의 요구가 얼마나 빨리 변하는데. 대학의 학과가 기업의 태스크포스인가? 태스크가 바뀔 때마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임시부서란 말인가? 학과 자체가 특성화된 것인데, 뭘 또 특성화하라는 건가? 학과 특성에 맞게 잘 가르치면 될 일 아닌가? 융합, 융합 하는데 융합도 전공을 깊이 배워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융합이 무슨 조각난 쇠붙이 용접인가? 얇고 넓은 지식 백날 배운다고 융합이 어찌 가능할까? 교육당국도 이런 속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은 요구하고 대학은 따른다. 짝짜꿍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졸로 본다.

학문 세계는 또 어떤가? 학자들은 교육당국이 정한 지표에 따라 연구 능력을 평가받기 위해 피 말리는 단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 전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매년 평가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어로 써서 외국 학술지에 내면 논문 한 편당 두세 편 쳐준다는 것이다. 공공성을 추구하는 국가기관이 국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자기가 개발한 지표는 100으로 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외국 사기업이 만든 남의 지표를 200이나 300으로 한다. 한국어로 쓴 논문을 졸로 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우스꽝스러운 현실에 한국어로 글을 쓸 때마다 자괴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한국어로 쓴 글을 우습게 알고 한글 논문은 인용하지 않고 영어 논문만 참고문헌에 잔뜩 나열한다. 영어 논문 번역해주는 업체들만 신났다. 더 좋은 한국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창의적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는 대신에 외국 학술지에 논문 싣는 방법에 몰두한다. 그런 연구자를 우수학자라며 교수로 임용하고 연구비를 지원하고 상을 주는 웃기는 사회. 국내박사, 특히 지방대 국내박사는 전혀 설 자리가 없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학문공동체가 형성될 리 없고, 더더욱 재생산될 까닭이 없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교육당국, 사실상 학문공동체 양성을 포기했다.

대학원은 졸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추락하였다. 최근 석사 논문을 없앨 것인지 결정해서 알려달라는 공문을 받고 모든 학과가 난리 났다. 석사 논문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일정 학점만 채우면 자동 석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러면 지도교수도 필요 없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표절과 짜깁기로 아무도 읽지 않는 학위 논문을 찍어내도록 할 바에야. 그것도, 한국어로. 하지만 이런 형국에 누가 진정 학문을 위해 대학원에 오겠는가? 석사 논문 하나 쓸 능력도 키워주지 못하는 대학원에. 지방대생은 학위 세탁하기 위해 서울대학원(서울 소재 대학원)에 가고, 서울대생(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석사 마치고 언어 세탁하기 위해 유학 간다. 미국에 가서 영어로 학위 논문을 써야 졸로 취급받지 않는다. 영어 논문 쓰는 방법을 배워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실어야 그나마 취업문이 열린다. 국내 대학원이 텅텅 비어간다. 어쩌다 박사 학위자가 나온다 해도 지도교수는 제대로 지도하지 않은 학위를 볼품없다 무시하고 학생은 자기가 쓴 학위 논문을 남 앞에 내놓기가 부끄럽다. 졸질 사회가 따로 없다.

최종렬 |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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