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이 무너졌다. 아니 이미 무너져 있었다.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갑질’이라는 표현.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지 않고 절대화된 권력만을 응시한다. 자본의 폭력도 ‘갑질’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흙수저’ ‘금수저’라는 표현. 근대 자본주의가 뒤르켐이 말하는 교육의 평등을 통한 기회의 평등을 주되 경쟁에서의 불평등을 시장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면, 지금은 그 자본이 대대손손 승계되어 자본의 사적 소유가 고도로 개인화되고 집중된다.

미국인 가족 0.1%가 하위 90%와 맞먹는 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최근 통계는 시사적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공평’하자는 주장 혹은 강렬한 염원이다. 어떤 시사만평으로 이를 얘기해보자. 네모난 마당 양쪽에 두 인물이 있는데, 한 사람 쪽으로 현격하게 기울었다. 즉 균형추가 무너져 심하게 불균형한 권력관계의 모습이다.

기운 쪽의 사람은 가장자리로 떠밀려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고 뭔가를 안간힘 쓰며 시도한다. 하지만 이미 균형추가 현저하게 무너졌으므로 그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는 더욱 쓸려 내려간다. 이건 양자관계 말고 삼자, 아니 복수의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 기운 운동장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위쪽 사람의 무게 때문에 바닥으로 결국 추락한다. 하지만 그 위의 사람은 모른다. 자신의 아래를 받치고 있는 그가 떨어지면 그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 이것이 바로 바닥을 향한 경쟁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얘기라지만 이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 아니 계급사회로 일반화할 수 있다.

박근혜 퇴진을 외친 촛불들은 단지 박근혜 한 사람의 교체로 만족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주말집회에서 이런 발언들을 수없이 들었다. 결국 이 말은 사람들이 단지 ‘정권교체’만을 위해서 촛불을 든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근데 느닷없이 정권교체가 시대의 정신인 양 이야기된다.

나는 촛불시민이든 민중이든 노동이든 국민이든 뭐라고 불리던 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박근혜 퇴진을 외치면서 표현한 것은 바로 이 현저하게 무너진, 그리고 불균형한 권력관계에 대한 분노였다고 생각한다. 권력 ‘농단’은 바로 불균형한 권력을 절대화하고 사유화한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박근혜·최순실 일당만이 아니라 정몽구·이재용 등의 재벌총수들이나 이 사회에서 갑질하는 인사들, 금수저들의 ‘농단’도 포함된다. 혹은 공안기관의 몽니와 편파성도 포함된다.

촛불 이후 ‘우리’의 공통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저하게 기울어진 권력관계의 추를 조금이라도 재편하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불균형을 용인하는 제도를 바꾸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몫을 찾아 나설 수 있는 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일하면서 죽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조를 만들고, 부당한 노동행위에 맞서 싸우는 파업권을 갖는 것이다. 노동악법을 철폐하고 노동법을 전면 개정하는 일이다. 둘째, 사회적으로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집회·결사 자유를 농단하는 공권력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상과 이념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것이다. 셋째, 정치적으로 대의제민주주의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정당비례대표제가 꼭 필요하다.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정당을 지지하거나 세울 것이고 그들의 대표성은 제도정치로 반영돼야 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남북 평화협정 체결이다. 이는 국가주권의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것이며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다.

촛불에 제안한다. 누구를 지지하는 것은 한순간이고, 빈약한 민주주의를 채우고 다르게 재편하는 것은 긴 정치적 과정의 결과물로 남을 것이다. 정치인을 믿지 마라, 스스로를 믿자. 나는 위의 4가지 조건이 이 사회 안에 현저히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바꾸고 스스로 싸워나갈 첫 번째 조건, 아니 최소의 정의를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쟁취하자!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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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이라는 결과를 지켜보며 그저 황망해하거나, 미국 정치도 망했군이라는 조롱으로 그쳐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의 당선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면 어떡할까? 포용이 아닌 배제, 조화로움이 아님 분열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정치 문화가 우리 사회에도 주 흐름이 되면 어떡할까. 이를 막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 서랍장을 막 뒤지고 있을 때, 문득 ‘이력서 사진 기재 금지, 어서 빨리 서둘러야 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트럼프 당선 그리고 ‘이력서 사진 기재 금지’. 요 몇 달, 둘 사이의 논리적 비약을 좁히지 못해 갑갑했다. 하지만 이번주 희미하게나마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은 것 같다. 지난 1월27일 이슬람 7개국 국민들에 대해 90일간의 미국 입국 금지와 120일간 난민 수용 금지 등을 골자로 한 행정명령을 내린 트럼프 대통령과, 이에 대해 “우리가 지지하는 정책이 아니다”라며 난민기금 확대, 행정명령 무효화 소송 준비 등으로 반대 행동을 취하고 있는 애플, 구글 등 미국 기업들의 대응을 보면서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자명한 진리가 미국 사회를 지켜내고 있는 제일 크고 중요한 기둥이라면, 이번 행정명령에 대해 ‘구글러는 함께다’라며 시위에 나선 구글 임직원들, 난민 1만명 채용 계획을 밝힌 스타벅스의 모습은 미국 사회 부분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작은 지붕 같았다. 미국 기업들의 외국인 인력 비중이 높은 탓도 있겠지만, 이런 결정을 가능하게 한 기업문화와 이런 기업문화의 가장 끝에 있는 이력서 양식은 우리가 분명 참고할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1967년 ‘고용상 연령차별금지법’ 제정 이후 기업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사진은 물론 성별, 나이, 결혼 여부, 종교 등의 정보를 묻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이 법이 제정되기까지 여러 역사적 배경이 있었겠지만, 그 법의 범위가 이력서 사진 기재란까지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이력서에 기재된 사진 한 장이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는 대전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 덕분 아니었을까. 신원 확인 이외 다른 용도가 없을 것 같은 이력서의 사진이 누군가를 손쉽게 배제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흑인인권운동 등을 겪으며 잘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떨까. 취업 사이트를 뒤져보았다. 많은 기업들이 지원자의 사진은 물론 부모 직업 등의 정보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나마 기쁜 소식은 지난해 겨울,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체중, 출신지역, 부모의 학력, 직업과 재산상황 등을 이력서에 기재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례 및 법이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영계가 “사진 기재를 금지하면 신원 확인이 어려워져 공정한 채용에 걸림돌이 된다”며 반대하고 있어 최종 통과될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이 법을 발의한 국회의원과 정당, 그리고 이런 문제를 늘 예민하게 짚어왔던 언론사들은 어떨까 궁금했다. 홈페이지 등을 통해 확인해보니, 정의당과 녹색당은 당직자 채용 지원서에 사진 기재란이 없었고, 바른정당은 자유형식 이력서를 요구한 반면 더불어민주당, 새누리당, 국민의당과 많은 언론사들은 모두 사진 기재를 요구하고 있었다. 외모로 인한 차별 반대 등의 이유로 이력서 사진 기재 금지를 이야기하던 이들의 말이 정작 자기 앞마당까지 닿지는 못했던 거다.

트럼프 현상 방지와 이력서 사진 기재 금지. 미국 입국이 금지돼 공항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 이민자들과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미국 여러 기업들. 한국 취업 시장에 들어선 다문화가정 청년들과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들이 마주할 이력서 사진 기재란. 이들 사이의 큰 간격을 설명해낼 재간이 나에겐 여전히 없다. 그럼에도 이 주제가 여전히 내 마음을 붙드는 이유는, 이력서 사진 기재 금지, 마음만 먹으면 우리 사업장에서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경미 서울시 주무관 청년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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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잘 지키고 있는가? 황 권한대행은 지난 25일 “올해도 국민생활과 밀접한 생활안전·시설안전·산업안전 등 3대 분야에 역점을 두고 안전대책을 추진하겠다”면서 입만 열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일본산 수산물 방사능 위험 현지 조사 보고서조차 아직 완성하지 않은 상황을 보면 황 권한대행의 국정운영은 박근혜 대통령 체제와 마찬가지로 염려가 앞선다.

벌써 3년 전인 2014년부터, 정부는 세 차례나 공무원과 과학자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산 수산물 방사능 위험 현지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를 국민에게 공개하겠다고 공언했음은 물론이다.

이 조사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국제법적 권리이자 의무였다. 한국이 2013년 9월6일, 일본 8개 지역산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한 조치는 국제법상으로 임시조치였다. 한국은 이 조치를 계속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과학적 검토 절차가 반드시 필요했다. 현지 조사에서 일본이 여전히 방사능 오염수를 통제하지 못하여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고, 후쿠시마 해저토와 심층수의 방사능 오염 정도가 안전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한국은 임시 조치를 지속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를 잘 통제하고 바다가 안전하다면 한국은 임시 조치를 중단해야 한다. 일본 현지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정부는 마땅히 일본산 수산물이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지에 대해 결론을 내고, 그 이유를 소상하게 우리 국민과 일본에 설명해야 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 관계장관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2017년 새해가 되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권한대행의 정부는 여태껏 현지 조사 결과 보고서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일본산 수산물 방사능 검역이 큰 위기에 처했다.

현지 조사를 담당한 전문가위원회가 애초 현지 조사에서 계획했던 후쿠시마 심층수와 해저토 조사를 포기한 사실은 뒤늦게 법정에서 드러났다. 조사를 담당하던 전문가위원회는 2015년 6월5일 13차 회의를 끝으로 활동을 중단해 버렸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여전히 방사능 오염수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이를 체계적으로 모니터하지도 않고 조사하지도 않았다. 작년 6월에도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수 차단 동토벽에 구멍이 생긴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한국의 체계적 조사는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은 현재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일본과 미국의 협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일본은 2015년 8월에 한국을 WTO에 제소했고, 여기에 미국도 제3 당사자로 정식으로 참가했다. 미국은 2016년 7월12일자로 판정부에 낸 서면에서 한국의 조치가 과학적 증거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한국을 협공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부는 이 사건의 선고를 올 6월에 하는 데에 동의했다. 결국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한국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WTO 분쟁에서 후쿠시마 인근 수산물 수입 금지조치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지 알 수 없다. 아니 한국의 조치가 정당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지조차 의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나는 박 대통령과 황 권한대행 체제의 이해할 수 없는 헛걸음질 뒤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걷어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라는 낡은 틀이 있다고 생각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시기에 체결된 TPP 협정문에 의하면 한국이 TPP에 가입하려면 일본의 동의가 필요하다. 나는 일본이 한국의 TPP 가입 조건으로 일본산 수산물 방사능 검역 해제를 요구했다고 본다. 일본의 처지에서 보면, 한국을 굴복시켜 일본산 수산물 방사능 검역을 해제하게 하는 것은 의미가 큰 본보기이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유치에 못지않은 ‘성과’가 될 것이다.

황 권한대행은 결정해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걷어찬 TPP를 거들기 위해 일본에 검역 주권조차 양보할 것인가? 아니면 검역 주권을 행사하여 제대로 일본 현지 조사를 다시 하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공개할 것인가?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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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가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신의 ‘율법’ 대신 근대 이성을 통해 획득한 ‘상식’과 ‘양심’에 의지한다. 시민의 양심을 통제하기 위해 과거라면 ‘교회’가 수행했을 역할을 근대국가는 ‘학교’와 ‘언론’에 위임한다. 이때의 양심이란 비록 ‘개인의 내적 판단력’이지만, 그 판단력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를 훈육 받고 내재화한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교과서’는 개인의 양심을 국가권력이 좀 더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다. 개인이 양심적이라고 해서 누구나 저항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 의한 문화통제가 성공적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의 통치행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이유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의 여러 기구들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한다고 믿을 수 있는 사회라면 개인은 굳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양심을 의심하기 위해 에너지를 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같은 이유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스스로를 의심하는 데 들이는 에너지와 비용을 절약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나를 대신할 대표선수를 찾아 위임하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사상가이자 루쉰 연구자였던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이것을 ‘우등생 문화’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이 군국주의화하여 만주침략과 태평양전쟁의 길로 들어선 까닭을 거기에서 찾는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문화는 우수하다. 우수한 선수들이 구축했으니 우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등생들이 우수하다고 말하니 열등생인 인민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등생들은 우수한 일본문화에도 우수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회의 열등생들이다. 우등생만 있다면 일본 문화는 완전할 텐데 열등생이 있어서 그만큼 불완전해지고, 우등생이 아무리 분발해도 열등생이 수준을 깎아내린다. 우등생이 대표선수가 되어 국제경기에서 승리하면 열등생에게도 명예다. 열등생은 우등생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고 응원해야 한다. 그런데 졌다. 왜 졌지? 그들은 생각한다. 열등한 부분이 우수한 부분을 끌어내려서다. 기필코 승리할 우수한 부분이 열등한 부분의 방해 때문에 졌다. 결코 우리의 우수한 부분이 패배한 것이 아니다. 패전의 책임은 열등생에게 있다. 그래서 선수 교체다. 당연히 교체한 선수도 우등생이다. 우등생이 아니면 선수가 될 수 없다.

정치 무관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한민국 사람들만큼 능력있는 우등생을 열망하는 우등생문화에 젖은 사람들은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누가 집권여당이 되느냐에 따라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계를 위협받을 수도 있을 만큼 정치가 생존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탄핵국면 이후 우리는 대한민국이 배출한 이른바 우등생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핵 이후 찾아오게 될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나를 대신할 우등생을 찾는다. 그렇게 선발된 우등생 대표는 우리 편이고 그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나쁜 사람이다. 품성론(品性論)과 자격론(資格論)의 반복이다. 그간 우리 정치는 나 아니면 안될 구세주 영웅들의 정치였다. 박근혜 대통령조차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최소한 국민의 절반은 그 말을 믿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우수한 문화의 열등한 부분이 아니라 바로 그 우수한 부분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라며 문제인식의 핵심을 반전시킨다. 그간 우리가 우수한 것이라고 믿어왔던 그 문화 자체를 거부하면 어떠냐고 되묻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냉혹한 일상의 현실은 단지 정권 교체 정도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개인이 착하게 살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과 에너지가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왜? 그건 우리가 열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등생이라고 믿었던, 우리 사회의 우수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우리의 상식과 양심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의 전복 없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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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장 악랄하게 가담한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수많은 증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법정 재판을 참관하면서 아렌트가 내린 결론은 ‘악의 평범성’이었다. 유대인을 색출하고, 그들을 열차로 호송하는 일을 맡았던 아이히만의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심문하고 진술하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행위를 ‘악의 평범성’으로 정의했다. 아이히만은 검찰의 살인죄 기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떤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아렌트가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 아이히만과 같은 추악한 악을 지나치게 인간의 보편적 악으로 설명하려 했다고 비판했지만, 정작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말하려는 악의 평범성은 매우 멍청하고 심오한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들, 자신의 잘못을 모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자들의 보편적 속성이다.

국정조사에 출석하여 증언하는 내내, 특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내내 자신은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김기춘에게서 아이히만과 같은 악의 평범성을 느낀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오스트리아에서의 유대인 추방자 명단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신·공안 동맹체들은 예술이란 영토를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1만명에 가까운 예술가들을 추방하려 했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박근혜와 동맹하여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을 주도했다. 박근혜와 김기춘은 마치 유대인 학살의 총책 하이드리히와 그 하수인 아이히만과 같다. 그들은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말로 ‘최종해결책’이란 그들만의 언어규칙을 쓰듯, 김기춘과 유신·공안 동맹체는 예술가들을 추방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라는 언어규칙을 사용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구속영장을 청구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위해 20일 오전 특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블랙리스트는 문화공안정국의 인장이자, 유신의 징표이다.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강탈해서 만든 것이 5·16 장학회인데 이 장학회의 첫 수혜자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검사였던 김기춘은 법무부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유신헌법의 기초를 만든 10명의 실무진 중 하나였다. 김기춘은 나중에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 잔심부름 외에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아이히만이 한 말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는 칠레의 독재정권하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진상조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에스코바르는 진상조사를 총괄하는 인권 변호사이고, 그의 부인 파울리나는 독재정권하에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에스코바르는 어느날 타이어가 펑크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다, 50대의 시골 의사 로베르토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에까지 오게 된다. 그런데 파울리나는 남편을 태워준 그 의사 로베르토가 15년 전에 자신을 성고문한 자임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비록 그녀는 안대를 하고 고문을 당해 로베르토를 본 적은 없지만, 그자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파울리나는 결국 로베르토를 집에서 체포하고 몸을 결박한 후 그에게 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한다. “너를 죽이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의 슈베르트를 들을 수 있도록.”

김기춘은 대한민국의 로베르토이다. 그는 공안검사로서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수많은 양심수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리고 유신의 딸을 보좌하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가들의 명예를 짓밟고, 예술을 검열했다. 검열당한 예술가들은 마치 <죽음과 소녀>에 나오는 파울리나와 같다. 그녀가 로베르토를 향해 총을 겨누듯이 우리는 유신의 역사적 유산인 블랙리스트를 향해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 블랙리스트는 유신 회귀의 악귀이자 역설적으로 그 종말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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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위안부 문제가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설치로 한·일 간 외교갈등 사안으로 재부상했다.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0% 이상이 위안부 합의의 무효화나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고, 주요 대권주자들도 합의에 부정적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를 실행하는 게 나라의 신용 문제’라며 일본의 아베 총리는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차기 정부도 압박하고 있다.

12·28 위안부 합의를 쫓기듯 졸속으로 결정한 지도자의 시대적 의제에 대한 통찰력 부족, 그리고 인간의 존엄 특히 여성의 존엄을 지켜주지 못한 박근혜 정부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 여론도 비판적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성의있는 이행’ 압박에 위안부 문제가 국내 정치 이슈로 재부상한 것이 다른 측면에선 12·28 합의에 대한 재평가와 문제점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어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가 밀실에서, 여론도 무시한 채 졸속으로 ‘얼렁뚱땅’ 끝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도 인정한 반인도적 범죄인 위안부 문제는 반드시 재협상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3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열린 우리겨레하나되기의 ‘윤병세 장관 사퇴 촉구’ 기자회견 참석자가 ‘왜’자가 적힌 종이를 들어 ‘왜교부’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첫째,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들고나온 ‘영사 문제 관련 비엔나협약’ 위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 시기 민족차별 문제고, 여성인권 유린 문제고,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성폭력 문제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정권이 바뀌어도 진정성 있게 사죄하고 보상해야 하는 국가범죄다. 이 문제는 10억엔을 받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면죄부를 일본에 주고 마무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차기 정부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박근혜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해 밝혀야 할 것이다.

둘째, 부산 소녀상 설치에 대해 일본 관방장관이 ‘약속은 지키라’고 큰소리쳤다. 일본 총리와 장관의 고압적인 행동에 한마디 항의도 못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이면합의’ 때문이라면 이 또한 재협상해야 하는 이유다. 분명 정부는 2016년 9월12일 ‘소녀상과 관련해서 이면 합의는 없었다’고 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3월부터 유지해온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의 도덕적 우위가 박근혜 정부 들어 무너졌다.

만약 소녀상 철거를 포함한 이면합의 토대 위에서 위안부 문제가 봉합됐다면 일본은 앞으로 두고두고 물고 늘어질 것이다. 차기 정부는 위안부 문제만은 국민 대다수의 여론을 수렴하여 밀실협상이 아닌 투명한 협상을 통해 일본과 재협상해야 한다.

셋째,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동안 한국 정부가 견지해 왔고 박 대통령 자신도 지켜온 입장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2015년 12월 쫓기듯 합의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국민들은 궁금해한다. 혹시라도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3국의 ‘권유’성 ‘강박’이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위안부 합의는 원천적으로 무효다. 국제법상 ‘강박에 의한 조약의 효력은 무효’이기 때문이다.

효력이 무효화된 합의는 어차피 파기되거나 재협상돼야 한다. 국제정치적 강박을 통해 합의를 해놓고, 비엔나협약을 들먹이면서 약속을 지키라고 일본이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재협상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이 냈다는 ‘거출금’ 10억엔부터 돌려줘야 한다. 외교의 기본원칙이 무너졌는데 ‘외교협상 결과는 존중돼야 한다’느니 ‘국제관계상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외교관들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외교부가 강조하는 국가신용,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신용보다 중요한 것이 인권이고 국민의 자존이다. 조기대선으로 곧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 일본이 힘 잃은 박근혜 정부를 휘둘러 12·28 위안부 합의에 대못을 치려고 하지만, 국민은 받아들일 수 없다. 탄핵소추된 식물대통령의 권한대행과 식물정부의 외교안보팀도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더 큰 재앙을 막는 길이다. 차기 정부는 일본에 10억엔을 돌려주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위안부 문제를 재협상해야 할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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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1980년대 중반 연작 소설 <저문 날의 삽화 1>의 초반부 장면에서 시작해 보자. 주인공인 60대 여성은 외손자와 외손녀가 조립식 장난감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다. 잠시 외할머니 집에 맡겨진 두 꼬마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지친 기색 없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장난감을 만드는 데 열중한다. 박완서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한다.

“계집애는 오빠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접착제 튜브를 아껴가며 조금씩 짜주고 있었고 사내 녀석은 가느다란 나무젓가락 끝에 그걸 묻혀서 로켓의 날개를 붙이고 있었다. 계집애는 선망과 찬탄으로, 사내 녀석은 몰입과 자신감으로 둘 다 발가니 상기해 있었고 숨결이 할딱이고 있었다. 로켓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그때가 조립식 장난감의 전성시대였다.”

화자인 외할머니는 손자 손녀가 장난감을 완성하더니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고 그냥 내팽개치는 걸 보고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딸에게 아이들한테 낭비벽이 생길까 걱정되니 “조립식 장난감 좀 작작 사주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딸로부터 그 장난감이 “가지고 놀라는 장난감”이 아니라 “만들면서 놀라는 장난감”이라는 설명을 듣고선 조립식 장난감의 유별난 용도를 이해하게 된다.

확실히 조립식 장난감은 밤 9시만 되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텔레비전 속 착한 어린이들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 속한 물건이었다. 일단 그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조립 과정에 몰입하게 함으로써 과외 금지로 남아도는 시간을 자발적으로 소비하게끔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장난감의 효용이 거기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립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과 밀착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해 아이들에게 매혹의 대상으로서 독특한 이중구속의 경험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위의 소년이 조금 더 성장해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아카데미과학의 독일군 하노마크 반궤도 장갑차를 조립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소년은 강렬한 인상의 장갑차 모델에 자연스럽게 매료된다.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살상용 강철 기계 장치의 공격적 형상은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얼추 조립한 것 같은 미군의 전투 차량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소년의 애정과 관심이 지나쳐 제2차 세계 대전의 내막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본다면, 하노마크를 만들어낸 나치 독일이 20세기 절대 악의 본류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년은 심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이중구속에 걸려들게 된다.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과시하기 위해 나치의 전쟁 기계가 안겨주는 진기한 시각적 쾌감을 거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죄의식을 감내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를 분명히 표명해야 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결국 소년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나름의 해법을 찾아낸다. 그것은 심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이 각각 다른 차원에 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정의의 사도라고 무조건 멋진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악의 화신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중구속의 상황 자체를 일종의 아이러니로 즐기는 것이다.

종종 이런 태도는 ‘단일한 자아’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도덕적 판단과 심미적 판단의 주체가 반드시 ‘동일한 나’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 각각의 차원에 최적화된 형태로 자아를 쪼개고 새롭게 조형해내는 것이다. 마치 변신합체 로봇이 괴수 로봇의 파상적인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기계 몸을 다섯 마리의 사자 로봇으로 분리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복수의 자아들을 거느리게 된 소년, 이제 그는 이중구속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자아들 중 하나를 작동시켜 거기서 유유히 빠져나온다. 그만큼 삐딱하게 어른들의 세계에 가까워진 것이었다.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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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탄핵 농성 중이고, 세종시의 고위 공무원들은 숨 쉬기를 멈추었다. 그토록 애용하던 ‘안보’와 ‘민생’을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이제 그만 농성을 중단해야 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리고 직업 공무원제의 목적도 국민을 위한 법치행정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이다. 공무원은 대통령이라는 한 개인의 신하가 아니다. 공무원이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국민의 대표자들이 법률에 근거와 절차를 정해 두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종시 고위 공직자들은 법치행정의 원칙조차 지키지 않는 듯하다.

대법원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한 지도 11일째이다. 이 판결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압박에 대한 대응에도 필요하다. 트럼프 당선자는 미국이 아니라 멕시코에 공장을 지을 경우 국경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할 태세이다. 그러나 그의 언행은 FTA의 기본 원칙에도 어긋난다. 미국과 멕시코의 FTA에는 그러한 새로운 조세나 관세 부과가 금지 대상이다.

대법관들의 FTA 협상 문서 공개 판결은 단순 명료하다. 한·미 FTA에는 여러 독소조항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한 조문이 하나 있다. 미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한국 기업에 미국법 이상의 FTA 보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서문에 있다. 이 조항의 협상 문서를 공개하라는 것이 대법원 판결이다.

이 문구는 미국 무역법 조문을 그대로 한·미 FTA에 심어 놓은 것이다. 이 조항은 이런 논리이다. 미국법은 이미 충분히 미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을 보호한다. 이미 FTA를 통해 제공하려는 보호 수준보다 더 높다. 그러니 FTA를 한다고 해서 미국법 이상의 보호를 외국 기업에 제공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은 미국 예외주의요, 미국 일방주의이다. 이미 미국법의 보호 수준이 FTA보다 더 높다면 그냥 미국법의 적용을 그대로 받으면 되지 FTA를 왜 하는가?

피고 산업부 장관은 대법원 판결을 따라야 한다. 대법원 판결은 명확하다. 왜 이렇게 이상한 문장이 FTA에 들어갔는지, 그 효력이 어떻게 되는지 협상 문서를 공개하라는 것이다. 공개를 한사코 거부했던 산업부 장관은 1심에서부터 패소했다. 그런데도 공개하지 않고 항소했다. 항소심에서도 패했다. 그런데도 공개하지 않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도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그런데도 피고 산업부 장관은 공개하지 않는다.

산업부 장관은 역사적 소임을 다해야 한다. 그는 외교 안보 분야에서 법치주의를 실현한 최초의 장관이 되어야 한다. 일찍이 1967년의 한·일 청구권 협상, 1978년의 한국군 작전권 이양 비밀 조약(이 조약은 조약 조항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2007년의 한·미 FTA 협상,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검역 협상, 최근의 위안부 협상, 사드 협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외교 안보는 법치주의를 위반하여 매우 취약했다. 그 참담한 결과로 아베 일본 총리로부터 일본이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망언을 듣게 되었다. 일본 정치인으로부터 한국은 사기국가라는 오명을 듣게 되었다.

외교 안보도 법치주의 행정을 따라야 한다. 절차적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와 협의하고 토론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분열되지 않고 조롱당하지 않는다.

위안부 협상을 공개하라는 서울행정법원 판결이 말했듯이, 위안부 합의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피해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 정부가 어떠한 이유로 사죄 및 지원을 하는지 및 그 합의 과정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크다.”

그렇다. 트럼프 시대에 국민은 알아야 한다. 한·미 FTA에 왜 이상한 조항이 들어왔는지 알아야 한다. 산업부 장관은 FTA 대법원 판결을 따라야 한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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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스캔들이 돼버렸다. 이런 식의 인물 중심의 스캔들은 분노를 일으키기엔 아주 호재이지만, 분노를 몇몇 인물들로 좁혀버리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장 효율적인 위기관리 통치방식이다. 이를 두고 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리즘’이라고 말했다.

공포와 웃음의 극한에서 표출되는 용기와 그 허무함 말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근대의 숭고미와는 다른 어떤 미적 상태, 즉 1960년대 시작된 박정희 체제와 1979년에 죽은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살려내서 ‘부관참시’해야 하는 이 현실이 어쩌면 카니발리즘이 아닐까?

그래서 한편으로 속 시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그동안 과연 무엇을 했길래,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민주주의는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됐을까? 아니 과연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여기서 자유로운가? 이런 질문이 시종일관 떠나지 않는다. 박근혜와 그 너머 박정희 ‘체제’의 문제로 돌린다면, 과연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는 해소될까?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 민주주의의 결핍, 이념적 협애함은 과연 박정희 체제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지난 30년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아니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박씨 ‘왕조’에 대한 분노의 정념으로 촛불을 한정하려는 프레임은 그래서 어떤 축제의 카니발 같기도 하다.

사실 카니발리즘의 대표적인 예는 서유럽 시민혁명들과 그 혁명들 사이에서 끝없이 터져나온 농민봉기들이다. 마을의 광장에서 벌어졌던 기득권층에 대한 폭로와 단두대 놀이 같은 카니발들. 그것은 근대 민주주의 혁명의 대표주자인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사회를 온통 뒤흔든 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그곳을 습격했을 때 거기에는 달랑 1명의 여자 죄수와 6명의 도둑, 사기꾼 등 잡범들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과연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기나 한 것일까? 아니 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그 많은 대중 소요와 봉기들 중에서 이렇게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을까? 여러 역사사회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제기할 만했다.

여하튼 시민혁명을 일으킨 신흥 부르주아지 혁명가들은 루이 16세의 왕비이자 외국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교만을 그의 여성성과 묘하게 섞어가며 어마어마한 적대의식을 대중적으로 배양했다.

그 도움 덕인지 혁명은 성공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치와 모욕, 그리고 대중의 성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어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려 죽임을 당했다. 대중은 열광했다. 그 당시에는 적어도, 자신들의 손으로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 보냈으니.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쟁취해낸 것은 미미했고, 심지어 지키지도 못했다. 사실 1789년 혁명은 끝이 아니었다. 단지 기나긴 혁명과 반혁명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아니 그 뒤의 과정 때문에 1789년은 ‘혁명’이라 불릴 수 있었다. 그 뒤로 프랑스는 100년의 혁명 과정을 겪어야 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1832년 봉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시사점은? 첫째, 불철저한 단기 혁명의 대가는 긴 시기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지불해야 하며, 특히 민중의 희생과 피를 부르기도 한다. 둘째,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아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반혁명의 피바람을 몰고 올 루이 보나파르트가 등장할 수 있다. 프랑스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없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독한 왕정복고주의자 루이 보나파르트의 반혁명을 겪어야 했다. 셋째, 프랑스혁명이 내세운 자유, 평등, 박애의 민주주의는 러시아 사회주의혁명과 반파시즘 인민전선 투쟁 이후인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100년 뒤에야 정립됐다. 넷째, 그럼에도 그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에서 배제된 식민지 민중들, 이민자들, 내부의 좌파에 대한 이념청소가 대대적으로 실시됐다. “우리는 유럽의 구석구석에 불을 질러야만 했다.”(조르주 뒤보, <1848년 프랑스 2월혁명>)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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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안전성이다. 집값이 오르거나 살기에 편한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하다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큰 변수 중 하나이다. 수년 전 북한의 장사정포 문제로 한참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전에는 서울이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다. 원전과 가장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 이후로는 서울이 가장 안전한 곳은 아니게 됐다. 원전에서 가장 멀고, 장사정포대에서 가장 멀고, 그렇게 거리를 재면 충남의 몇 개 도시가 걸린다. 장기적으로, 한국의 일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안전 요소는 여전히 원전과 북한 문제이다. 서울은 한반도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데 한국의 원전은 공교롭게도 서울과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다. 청와대에서 가장 먼 곳이라고 해도 같은 얘기이고 마찬가지 이유로 국회에서도 가장 멀다.

환경에도 전략이 있다. 제1전략은 분산이고, 제2전략은 집중이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는다. 그런 게 분산 전략이다. 그냥 있으면 너무 농도가 높아지니까 분산시켜서 확산시킨다. 물론 원천적으로 발생시키지 않으면 제일 좋은데 그게 어려울 때 하는 일이 분산이다.

때때로 분산이 어려워질 때가 있다. 이때에는 집중을 선택한다. 폐기물 매립장을 두는 것은 집중 전략이다. 여기저기 쓰레기가 막 버려지면 도저히 관리할 수 없으니까 한곳으로 집중시킨다. 물론 생활 쓰레기 같은 것은 그렇게 집중시킨 다음 나중에 토양 복원을 하고, 발생한 메탄가스를 재활용하기도 한다. 산업 쓰레기를 그렇게 집중시키면 그곳은 ‘환경 포기지역’이 된다. 이 경우는 집중시키면 안된다. 물론 그렇게 하다 보니 몰래 바다에 버리는 해양 투기 같은 게 발생한다.

영화 '판도라' 포스터

박정우 감독의 영화 <판도라>가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환경의 제2전략, 집중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전 사고에 대한 영화 기획이 처음은 아니다.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 때에도 원전 폭발을 다룰 기획이 있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너무 복잡해서 시나리오 형성 과정에서 빠졌다.

쓰나미 버전이든, 지진 버전이든, 원전은 늘상 위험을 안고 운영된다. 한국 원전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집중성이 영화 <판도라>의 출발점이고 그 특이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허술하게 관리되는 것이 사연을 격발시키는 장치이다.

이 과정이 역사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이제 원전을 유치 혹은 허용하는 새로운 지역이 없으니까, 있는 곳에 더 집어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기대한 전략적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집중지역이 생겨났다는 게 맞다. 그렇지만 집중과 함께 더 세밀한 관리와 주민의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전략적 집중지가 아니라 ‘환경 포기지역’으로 전락하게 된다. 영화가 파고들어가는 것은 이 지점이다. 모인 건 모였다 치자. 그래서 국가가 뭘 더 했는데? 여기에 원전에 임시 보관하고 있는 고준위 폐기물은 클라이맥스로 가는 격발 장치가 된다. 위험이 끝나니 진짜 무서운 게 온다. 이런 2중적 위험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원전 밀집지역과 영화 <판도라>는 예방주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볼수록 실제 위험성은 줄어든다. 아무래도 정부든 한국수력원자력이든 뭐라도 더 할 것이다. 하다 못해 부품 빼돌리기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독감 백신 맞았다고 독감에 아예 안 걸리는 것은 아니다. 체질 개선도 필요하다. 오래된 것은 정지시키고 새로운 것은 덜 투입하고 집중이 아닌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영화 <판도라>에서 끝나야지, <판도라 그 이후> 속편이 나오면 안된다. 우리가 지금 이 영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석훈 | 타이거 픽쳐스 자문·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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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미 대선 과정에서 나온 도널드 트럼프의 대외정책 관련 발언의 요지는 ‘오바마의 정책은 안 한다(Anything but Obama)’로 요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중국이 북핵문제를 풀 수 있는데 전혀 안 도와준다’고 북핵문제와 관련해 중국에 고강도 경고 메시지를 발신했다. 향후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 오바마 정부의 ‘중국 역할론’을 답습하지 않을까 불안하다. 트럼프 시대에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를 기대하는 우리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트럼프 정부 초대 내각의 안보라인이 국가안보보좌관 플린, 국무장관 틸러슨, 국방장관 매티스 등 대북 강경파 인사들로 채워짐에 따라 북핵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오바마 때보다 더 강경한 대북, 대중정책이 전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미국 외교협회(CFR)는 북한이 5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하고, 탄두의 소형화·경량화까지 달성한 것을 두고 오바마 정부의 북핵정책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대화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트럼프의 북핵정책이 대화·협상 쪽으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고, 우리는 결국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처지가 될 것이다.

 

(출처: 경향신문DB)

 

‘중국 역할론’은 무엇이 문제였나? 중국 역할론은 ‘북한 선행동론’과 함께 오바마 정부 ‘전략적 인내’ 정책의 양대 축이었다. 오바마 정부도 임기 초에는 ‘9·19 공동성명’에 따라 북핵문제를 협상으로 풀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선비핵화’를 고집하는 바람에 미국은 2010년 가을부터, 북한이 선행동(핵폐기)하도록 중국이 역할을 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겠다는 전략을 추진했다. 협상을 통해서 성취해야 할 결과를 대화 개시의 조건으로 내건 바람에 북핵 6자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문제는 회담이 열리지 않는 동안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경량화·다종화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 역할론은 북한 핵능력을 키워주었다. 중국 역할론이 북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에 트럼프 정부가 다시 북핵문제 해결책으로 이것을 들고나오는 것은 우려할 수밖에 없다. 중국 역할론과 ‘1+1’ 세트로 따라붙는 북한 선행동론도 트럼프 정부의 북핵정책이 되어서는 안된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카드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건 2005년 9월 베이징 6자회담에서 합의·발표된 9·19 공동성명에 명시되어 있다. 북한이 비핵화 대가로 받아내고자 하는 것은 미·북 수교, 일·북 수교, 대북 경제지원,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다. 이를 남북한과 미·중·러·일이 만장일치로 합의했었다. 당시 언론들은 9·19 공동성명을 ‘북핵문제 해결의 로드맵’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외교협상의 말대로 이 합의는 몇 가지 이유로 결국 이행되지 못했다.

 

한 달 후면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다. 미국의 북핵정책은 5개월가량 공백기가 있을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민적 관심이 온통 헌재의 탄핵 결정에 집중되어 있어 외교안보팀이 기존의 북핵정책을 습관적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북한 핵능력 고도화를 막고 싶어도 때를 놓친다. 외교안보팀은 곧 물러날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국가에 의지하는 5000만 국민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으로 북핵문제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야권은 권한대행만 견제할 것이 아니라 외교안보팀도 감시해야 한다.

 

북핵문제는 원리상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가야 해결된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현실적으로 미국에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선행동론이 아니라 미국의 선행동론에 입각해서 실마리를 풀고, 중국 역할론이 아니라 한국 역할론에 입각해서 한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그런 선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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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지난 대통령 선거 이틀 뒤였다. 2012년 12월21일 한진중공업 노조원 최강서가 자살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운남, 한국외대 노조위원장 이호일,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윤주형,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 박정식의 죽음이 이어졌다. 왜 노동자들은 대선 직후 자살했을까? 노동자들 죽음의 행렬을 초래할 만큼 선거가 중요했나?

하지만 다음 선거를, 5년 뒤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지금 당장 조금의 미약한 훈풍이라도, 그 어떤 여지라도 기대했던 노동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정작 그 선거로부터 건질 것이 가장 적었던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선거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거 국면에서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 폐지를 외치며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노동자들의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여전히 배제된 자들인 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정치권의 외면은 결국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난 9일,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최강서를 생각했다. 그의 유서를 생각했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 못하겠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촛불들의 이른바 ‘시민혁명’은 과연 노동과 만날 수 있을까?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됐을 때 조그만 기대조차 무너져 목숨을 버려야 했던 사람들을 기억해줄까?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그 체제의 귀퉁이에서 가장 먼저 절망했던 사람들 말이다.

단지 죽은 자들만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시민들이 다음 선거를 기다리고 있을 동안에도 이 사회의 거리거리에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박 정권하에서 가장 먼저 탄압당했고, 가장 먼저 떨쳐 일어났다. 이천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되어 거리로 나섰고, 구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든 지 한 달 만에 쫓겨나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비슷한 처지의 11개 군소 사업장 노동자들이 모여 ‘노조파괴, 민생학살, 박 정권 퇴진을 위한 노동자 공동투쟁’을 만들었고, 박근혜 퇴진을 가장 먼저 외쳤다.

아마 박근혜 탄핵이 최종 결정되면 정치적 민주주의로 족한 사람들은 거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땅 거리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여기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협소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담아내지 못하는 노동, 민중생존권, 반제국주의의 문제들을 두고 싸워야 하는 이들은 그다음 닥쳐올 질서잡기의 역풍을 고스란히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촛불은 최강서를 기억해줄까? 촛불 안에 있는 다양한 차이들, 특히 여성, 청소년,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도 포용할 수 있을까? 촛불엔 아직 박근혜를 향한 분노 말고는 공통분모가 없다. 시민혁명이라는 거대 담론 뒤안에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 목소리조차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의 긴 그림자가 있다. 이른바 시민혁명의 주체는 여전히 비어 있다. 그리고 시민혁명의 주체는 대문자 ‘시민’이 아니라 이제 다양한 사회적 주체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렇게 시민이 다양화하고 분기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이해를 드러내고 그것의 연합 속에서 조직되어 ‘사회정치적 동맹’을 만들어 나갈 때, 이 사회는 단지 권력의 우두머리 하나를 교체하는 것 이상의 것들, 사회를 재편하고 헌법을 다시 쓰는, 말 그대로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대통령 탄핵을 두고 “로도스가 저기다, 뛰어내려라”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가 가야 할 로도스는 아직 시계 제로다. 그 섬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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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사건은 역사적인 법치주의 학교이다. 부패한 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가짜 법치를 내세워 법으로 민중을 억눌렀다. 하도 당하다 보니 시민들은 법을 지배자의 채찍이며 칼처럼 여기게 되었다. 문정현 신부가 목판에 조각한 ‘법보다 밥입니다’라는 글귀도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 신부의 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은 사람들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군홧발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법의 지배란 권력이 시민을 법으로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권력의 행사는 법에서 정한 절차와 내용을 따라야 한다는 것, 즉 권력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이나 탄핵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최종적 해결은 아니다. 이 땅에 권력자가 법을 지키는 법치를 튼튼하게 세울 때 비로소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법치에 실패하면 제2, 제3의 박근혜가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왜 대한민국의 검사, 고위 관료,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국가 엘리트들은 최순실에게 저항하지 않았을까? 국민적 항쟁을 촉발한 ‘정유라 부정입학 사건’의 경우도 교육부가 이를 막을 법적 권한과 절차가 대학교육법에 있었다. 재벌의 돈을 받아 만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도 비영리재단법인설립법을 지켰다면 불가능했다. 비밀취급인가증이 없는 최순실에게 대통령 일정, 남북관계, 외교관계 등 국가의 중요한 비밀이 유출된 행위는 국가정보원법과 보안업무규정을 지켰으면 막을 수 있었다.

특히 국정원은 법에 의해 청와대에 대해 보안측정이나 보안사고 조사를 할 권한이 있다. 보안업무규정은 아예 국정원장에게 청와대의 보안업무가 적절하게 수행되는지 여부를 확인할 권한을 주었다. 그런데도 최순실은 지속적으로, 아무런 견제 없이 국가 비밀을 건네받았다. 나는 국정원이 청와대가 보안업무규정을 위반하여 최순실에게 국가 비밀을 건네준 행위를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국정원이 몰랐다면 국정원장은 광화문광장에서 백배사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 엘리트들이 최순실에게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의 지배동맹이 영속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최순실 공소장에 의하면 청와대의 행정관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국가 비밀문서를 최순실에게 유출했다. 그 행정관은 대통령의 임기가 2018년 2월24일이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그러한 행위를 한 이유는 그들의 지배동맹이 계속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법치는 영속적 한·미동맹, 영속적 남북대립 그리고 취약한 민주정당의 세 가지 장애물에 갇혀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최종적 해결은 이들 세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끈질기게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시작전권을 외부가 갖는 한 국민주권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 민주주의의 문민통제 역사와 전통을 어겨 가며, 별명이 ‘미친개’라는 퇴역 장성을 국방부 장관에게 임명하겠다는 미국 대통령에게 전시작전권을 계속 주어서는 안된다. 북한 문제도 교류와 협력의 목적과 단계를 밝히고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어, 우리 내부의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앞의 두 과제는 미국과 북한이라는 외부 변수가 있다. 그러므로 온전히 우리 내부의 의사 결정으로 가능한 정당 질서에서 역사적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200만 촛불이 광화문에만 머물지 않고 국회에서 365일 국민주권으로 피어나야 한다. 국민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왜곡 또는 과잉되게 하거나 누락하지 않고 국회 의석으로 변환시키는 선거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의 엘리트들은 제2, 제3의 최순실에게 저항할 것이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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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한 힐러리 클린턴의 꿈은 백인 남성들의 이해를 대변한 도널드 트럼프에 의해 좌절됐다. 클린턴은 고별사에서 여성이 ‘유리천장’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한탄하면서 장차 미국 소녀들 중에서 여성 대통령이 꼭 나오기를 바란다는 비원을 전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나오기 힘든 여성 대통령이 4년 전 한국에서 나왔다. 유교의 영향으로 가부장적 색채가 짙고, 남성 중심적인 나라에서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 당시 필자는 여성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대단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근혜는 무슨 힘으로 대통령이 됐을까. 무엇보다 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후광과 영남 지역주의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의 “우리도 한번 기 펴고 살아보자”는 표심도 여성 대통령 만들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18일 청와대 인왕실에서 열린 신임대사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입장하고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런데 박 대통령이 임기를 못 마치고, 그것도 모양새 나쁘게 내려올 것 같다. 비선 측근들이 국정을 농단하도록 방치했고,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공모 혐의까지 받고 있다. 검찰이 현직 대통령을 ‘공범’ ‘피의자’로까지 규정했다. 국정농단과 비리에 대해서는 장차 법적 조치가 따를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대신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과오에 대해 짚으려 한다. 박 대통령이 하루라도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2014년 1월 박 대통령은 ‘통일대박’을 외쳤고, 작년 7월에는 “내년에라도 통일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북한 붕괴를 믿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들인데, 최근 그 발원지가 최순실이라는 비선 측근이었다고 알려졌다. 대통령이 ‘주술적’ 예언에 근거해 외교·안보정책을 펴다니? 이건 국정농단을 넘어 국가안위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금년 들어 숨 가쁘게 전개된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등 일련의 결정들이 북한 붕괴를 앞당기려는 조치였다는 해석이 나왔다. 북핵 문제에 대해 대화·협상 대신 압박·제재로 일관한 것도 북한붕괴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면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밖에 안 나온다.

사드 배치를 전격 발표해서 국론분열과 국익훼손을 자초한 것도 그렇지만, 작년 말 일본에만 유리한 일본군 위안부 합의도 뭔가에 들씌워지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결과였다. 최근 대통령의 리더십이 붕괴된 상황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서두르는 것도 앞으로 국익을 해칠 것이다. 요컨대 임기 동안 박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관련 결단들은 결과적으로 나라를 절단 낼 가능성이 크다. 하루속히 시정돼야 한다. 그중에서도 전시작전권 환수 무기 연기는 최대 최악의 과오다.

요즘 박 대통령은 해외 언론의 만평을 장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을 희화화한 만평들을 보면서 부끄럽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23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통령이 불참했다. 박 대통령 자신이 대외적으로도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됐다는 걸 실토한 것이다. ‘피의자’라서 다음달 한·중·일 정상회의에도 결국 못 갈 것이다. 이쯤 됐으면 대통령은 모양새가 더 나빠지기 전에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자기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지지자들마저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 사람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 운운하면서 버틴단 말인가. 설사 법적으로 버틴다 할지라도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이미 식물 대통령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여성들이 그나마 얼굴이라도 들고 살 수 있도록 깔끔하게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 소녀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고별사에 이런 말을 보태주기 바란다. “소녀들이여, 그대들은 꿈을 갖고 모든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하고 파워풀한 존재다. 나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립적이고 유능한 사람들이 돼라. 그리하여 여러분 중에서 성공한 여성 대통령이 꼭 나와주기 바란다”라고.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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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이것은 ‘딜(협약)에 의한 재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딜에 의한 민주화’는 민주화이행론에서 민주화의 방식들중 하나다.


 1987년 6월항쟁은 대중봉기가 주도했고, 재야를 매개로 느슨하게 이어진 보수 자유주의 세력이 노태우 집권당 대선후보의 ‘6.29선언’에 합의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아니 찍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제도정치권 그들 사이의 ‘민주화 딜’은 이뤄졌다. 다음달 터져나온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다면 그 딜은 온전했거나, 아니 좀 밋밋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도 딜로 끝날 것이다. 헌정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이뤄지는 재민주화. 이명박·박근혜 우파정권이 농단하고 훼손시킨 민주주의의 회복, 헌정질서로의 복귀. 이 목표에 대해서 보수파들, 심지어 일부 극우파까지도 동의한다. 그들은 이전에도 헌법은 ‘사문서’화되고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은 모른 척한다. 노동자의 3권을 보장한 것도 헌법이고,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한 것도 헌법인데, 그렇게 정치적 권리, 시민적 자유들이 훼손될 때 모른 척하다가, 아니 심지어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 헌법적 권리를 봉쇄하다가, 이제 권력 엘리트 내 이너서클의 ‘국정 개입’과 ‘농단’에 대해선 분개해마지 않으면서 헌법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하야도, 퇴진도, ‘헌정의 중단’이 아니라는 신종 헌법 해석들이 지식인들에 의해서 쏟아진다. 대체로 동의한다.

 근데 왜 이것을 이전엔 몰랐을까? 왜 이전엔 헌법에 대한 이런 적극적이고 주권론적인 해석을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질문을 바꿔서 왜 지금은 헌법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할까?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하기 때문이지. 아니면 대통령을 민중의 힘으로, 대중의 힘으로 끌어내리는 불상사는 막아야 하기 때문이지. 주권자가 법 위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지. 주권자가 법 안에서 움직이게 해야 하기 때문이지. 법을 새로 쓸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인 인민주권을 법에 의해서 제한해야하기 때문이지. 그건 결국 기득권세력에게 위협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두번째 정의. 대통령은 내려와야한다. 그러나 질서있게 ‘선제적’으로, ‘예방적’으로. 대중봉기에 대해 선제적으로, 혁명 혹은 혁신적인 기운에 대해 예방적으로. 똑같이 대통령이 끌어내려져도 다음 상황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명예혁명’이다. 일부에서 그렇게 규정하던데, 그것은 맞는 말이다. 단지 한마디 더 붙이면, 이것은 선제적, 예방적 명예혁명이다. 명예혁명의 본산인 영국의 역사를 보면, 당시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봤던 의회와 정당을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유일 민주주의로 만들었던 전환점, 혹은 완성이 바로 명예혁명이었다. 귀족 토지계급과 신흥 브르조아지가 ‘피흘리지 않고’ 권력분점을 교섭한 결과, 프랑스처럼 왕을 단두대로 보내 처단하지 않고 가능했던 민주화 말이다.

 한국에서 이번 박근혜 게이트의 정치적 해법을 두고 ‘명예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기묘하고 흥미로운 비유다. 그리고 참 솔직한 비유다. 대통령은 끌어내리되, 피흘리지 않고, 폭력 쓰지 않고, 헌법을 훼손하지 않고 (즉 그 말은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체제를 훼손하지 않고), 다른 것 보태지 말고, 권력의 정점만 바꾸는 것. 이 민주주의는 그렇게 민주주의 딜을 통한 재민주화, 선제적 예방적 명예혁명, 87년체제의 연장선으로 회귀할 것이다.

 좋다. 그게 ‘질서’를 선호하는 대중이 원하는 바라고 해두자. 박정희의 환상을 끝장내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미련은 남는다. 그래서 바뀌는 것은 무엇일까? 헌법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킬 것이다. 근데 그것은 곧 지난 30년간 경험해왔던 그 민주주의일 것이다. 비선실세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던 검찰기구는 지금 칼자루를 쥐고, 주인을 바꾸면서 정작 자신의 권력은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과연 누가 진짜 권력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폭력적 경찰기구는 굳건히 자리잡아 다음 정권이 누가 되더라도 그 폭력성을 유지할 것이고 어쩌다 우리는 백남기 노인 같은 선량하고 정의로운 이의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미르재단과 K재단에는 수백억원 돈다발을 보험삼아 보내면서, 자신의 공장에서 픽픽 쓰러져간 노동자들은 모르쇠한 재벌, 비정규직을 정규직처럼 부려먹은 재벌, 그러면서 이제와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자본권력도 의연할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발을 빼고 이 모든 게이트를 폭로하고 나선, 그러나 이전엔 권력에 부역했던, 민주주의의 파괴에 침묵했던 언론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권력의 머리만 치고, 체제의 부역자들 아니 공범은 살아남아 이 체제의 견고함을 증명해줄 것이다. 우리는 다시 87년 헌법질서로 돌아간다. 그 체제는 노동배제의 민주주의였고,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였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정보기관과 검찰과 경찰기구가 인권과 시민권을 밟는 폭력국가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근혜와 최순실을 만들어낸 정치적 질서다. 여기에는 하나의 최순실이 아니라 수많은 최순실들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앙샹 레짐’(구체제)인가? 마리 앙투아네트만 단두대로 보내면 다인가?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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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사건’은 ‘무책임 국가’의 민낯이다. YTN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다음날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게 ‘체육 개혁’을 확실히 하라고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최순실 가족을 위한 개혁 말이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국가의 원수인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에 집중하지 않고 일파의 안위를 챙긴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나라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지배자에게 국민을 우습게 보는 습성이 뼛속 깊이 배었다. 어느 관료가 국민을 ‘개·돼지’에 비유했는데 그만의 일이 아니다. 전두환 일파의 지시로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을 찌르고 때리고 죽였던 것도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자는 왜 이렇게 국민을 업신여길까? 그들에게 더 중요한 힘이 오랫동안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만일 헌법의 국민주권이 실제로 살아 있어, 국민의 힘이 온전하게 지배자를 지배했다면 전두환조차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무섭게 알았을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힘을 모아, 이를 바탕으로 나라를 유지했다면 박 대통령은 최순실의 최자를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배자에게 오랫동안 국민보다 더 중요했던 힘이 무엇일까? 삼성과 같은 재벌일까? 물론 삼성의 힘은 세다. 혈당을 측정하는 기능을 가진 휴대전화가 의료기기 규제를 받지 않도록 법령이 바뀐 데에는 삼성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갤럭시7’ 단종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삼성은 금전적 이익을 내지 못하면 존속하지 못할 위험을 늘 안고 있다. 삼성이 지배자들을 오랫동안 포획할 정도로 무한정한 자원을 제공할 수는 없다. 콘크리트 지지율이라는 것도 최근의 5% 지지율에서 알 수 있듯이 바람과 같이 가볍다.

대한민국이 무책임 국가가 된 가장 큰 원인은 국민의 힘으로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구조에 있다. 방산비리는 왜 그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까?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는 군대라면 무기도입 비리는 곧 군인들의 죽음과 전쟁 패배로 직결된다.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군대에 방산비리는 별것 아니게 된다. 어차피 승패는 다른 데에서 결정되는데 이까짓 무기 비리쯤이야!

어느 짓을 하더라도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지켜 주는 체제에서 지배자는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북한 핵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조차 제대로 없으면서 ‘북한의 핵사용 의심 시 평양을 지도상에서 없애 버릴 것’이라고 허세를 늘어놓는다. 국민의 안전을 제 힘으로 지키지 못하는 무책임이야말로 모든 무책임의 뿌리다. 세월호 참사 다음날 일파의 안위를 챙긴 무책임도 여기에서 시작했다. 국민의 안위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한, 책임국가가 될 수 없다.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과 일본, 호주 등 그 어느 나라도 한국과 같이 극단적으로 전시 작전권을 이양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시작전권 이양 비밀조약 공개가 중요하다. 한국은 1978년 7월27일 미국과 작전통제권 관련 약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17일 ‘한·미 연합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각서’를 교환했다. 그런데 이 두 조약은 비밀조약이다. 전시작전권이라는 주권이 이양되었는데도 지배자는 조약을 비밀에 부치고 국회의 동의도 받지 않았다. 위헌이다. 누가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는 법적 주체인지조차 알 수 없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그저 누가 물러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는 제2, 제3의 박근혜가 다시 나타날 것이다. 국민을 가장 무섭게 여기는 책임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첫째 조건이 자신의 힘으로 안보를 해결하는 국가이다. 전시작전권을 이양한 비밀조약을 공개하는 것이 책임국가로 가는 출발이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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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콤플렉스’ 탓이었을까? 박근혜는 임기 초반에 대일 강경 기조로 일관했었다. 진보 진영에서도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2014년부터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해 연말에는 한·미·일 군사정보공유약정을 체결했다. 미사일방어체제(MD)를 고리로 하는 3자 동맹의 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5년 12월에는 위안부 문제에 합의했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에는 ‘면죄부’를 주고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엔 ‘소금’을 뿌렸다. 그런데 이 역시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걸림돌을 치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올해 말에 또 사고를 치려고 한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 대변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외교·안보 사안을 챙겨가겠다”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그 첫 조치가 군사정보보호협정을 협의하기 위해 국방부 실무단을 일본에 파견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한민구 국방장관은 “우리의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논의를 재개하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고도화되는 만큼 안보 실용주의 차원에서 일본과의 군사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되는 걸까?

정보보호협정은 한·미·일 3자 MD 구축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3자 MD는 한국 방어에 실효성이 없다. 2013년 6월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발간한 보고서에도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북한과 너무 가까워 미사일이 저고도로 수분 내에 날아와 3국 MD 공조에서 이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나와 있다.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종심이 짧은 ‘지리적 운명’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신세’에 처해 있다. 그래서 사드든, 3자 MD든, 심지어 ‘온 우주가 도와줘도’ 우리에게 ‘신의 방패’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북핵은 요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못 쏘게 억제하고, 관계개선으로 관리하며 협상으로 줄여나가면서 궁극적으로 폐기해야 할 대상이다. 적어도 우리에겐 이렇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인 얘기조차 이명박근혜 정부는 철저하게 외면했다. 왜 그랬을까? 두 정부를 관통하는 게 바로 ‘흡수통일’이었기 때문이다. 갈피를 못 잡던 이명박의 대북정책은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질환으로 쓰러지면서 흡수통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곤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미국은 통일을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 협조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밀실 협상이 들통나자 약삭빠른 이명박은 독도를 방문해 친일 혐의를 무마하려고 했다.

박근혜는 어떤가? 그가 자백한 최순실의 ‘도움’은 통일·외교·안보 분야에도 깊숙이 뻗쳐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최순실은 “2년 내에 통일이 된다”는 말을 측근들에게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첨삭 지도하고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 듯했던 최순실의 ‘주술적 통일관’이 박근혜의 혼을 지배해온 것은 아닐까? 북한을 때려잡고 통일을 할 수 있다면, ‘흑묘’든, ‘백묘’든 관계없다고 여기면서 일본과도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 보수 진영에선 ‘내치는 책임총리가, 외치는 대통령이’라는 말이 퍼지고 있다. 하지만 정통성을 상실한 박근혜에게 국가의 대표성을 맡겨두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 위험천만한 일이다. 유일한 길은 질서 있는 박근혜의 하야이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설에 있다. 이래야만 새롭게 들어설 미국 정부, 1인 지배력을 강화하는 중국의 시진핑, 장기 집권에 들어서고 있는 일본의 아베 신조 그리고 자신감이 커지고 있는 김정은을 상대할 수 있는 정치 리더십을 창출할 수 있다.

정욱식 | 평화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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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에 ‘여우와 신 포도’ 얘기가 있다. 어느 날 굶주린 여우가 포도가 먹고 싶어 포도밭으로 숨어들었다. 맛있어 보이는 포도송이가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여우는 어떻게든 거기에 닿아보려고 했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지친 여우는 포도밭을 떠나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나 딸 테면 따라지, 따봤자 저건 신 포도야.” 자기의 실패나 착오를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구차하게 변명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빗대 쓰는 얘기다.

지난 21~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북·미가 ‘1.5트랙’ 접촉을 가졌다. 비슷한 시기인 20일까지 워싱턴에서는 ‘한·미 2+2(외교+국방장관) 회담’과 ‘한·미 안보협의회의(SCM)’가 연달아 열렸다. 워싱턴에서는 주로 대북 압박과 제재 문제가 논의됐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에서 북·미 간에는 무슨 얘기가 오갈까 관심이 쏠렸다. 우리 언론의 관심이 쏠리자 외교부는 “민간 차원의 접촉이라서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다소 평가절하하는 설명을 내놓았다. “북한 관리들이 미국 민간인들을 만난 걸 보면 북한이 그만큼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는 증거”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과연 그럴까? 외교부의 설명이 혹시라도 여우가 따먹지 못한 포도를 ‘신 포도’라고 딱지 붙인 것과 같은 심리의 발로는 아닐까?

그동안의 보도나 기록을 보면, 북·미 간에는 반관반민을 뜻하는 1.5트랙 접촉이나 회담이 열린 적이 제법 있었다. 학술회의로 시작해서 학술회의로 끝난 경우도 있고 1회성 접촉으로 끝난 경우도 있다. 그러나 1.5트랙 접촉이 본격적인 북·미 당국회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가 이번 쿠알라룸푸르 북·미 접촉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이유다. 지난 9월9일 북한이 5차 핵실험까지 성공하자 미국 내 싱크탱크들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같은 유수 언론들은 버락 오바마 정부의 북핵정책이 북핵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북핵능력의 고도화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결국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 내에서 선제타격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북한의 5차 핵실험 후 대화와 협상론이 주류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 대외정책에 영향력이 큰 미 외교협회(CFR)가 9월18일 회의에서 대화와 협상을 권고한 뒤인 9월23일,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북핵 동결을 전제로 한 대화’를 언급한 것은 이런 흐름의 반영이다.

이렇게 변화가 예고되는 시점에 1.5트랙일망정 북·미 접촉이 성사됐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북한은 원래 민간영역이 없고 모든 걸 당국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국가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미국 측 대표들의 경력이나 위상이다. 로버트 갈루치는 1994년 10월21일, 미국 측 수석대표로서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를 성사시킨 사람이다. 조지프 디트라니는 북핵 6자회담 차석대표로서 2005년 9·19공동성명을 성사시킨 사람이다. 아마도 북한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내다보고 미국 새 정부에 자기들의 메시지를 미리 전달해놓기 위해서 자기들과 인연도 있는 미국 내 북한통들을 불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클린턴이 그들에게 비공식 특사 역할을 위임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대북통들의 조언이나 권고가 미국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신 포도’론으로 버티지 말고 미 신정부의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과 그 방향에 미리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번 워싱턴 한·미 회담에서처럼 대북 압박과 제재 타령만 하다가 내년 하반기부터는 본격화될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 선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내년에는 우리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기지만, 북핵문제 같은 중차대한 안보문제는 정권을 초월해 대처해나가야 한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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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심이 바닥난 지 오래다.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망한민국이라고 부를 때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충성심의 고갈! 이는 나랏일을 주도하는 사람과 집단과 세력, 특히 정치가 보통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할 의지도, 역량도 없다고 느낄 때 시작된다. 배후인지 실세인지 기생인지 분명치 않지만, 주변의 농단이 계속 드러나면서 고갈의 정도는 심해진다.

“뭐 하나 잘한 게 없는 것들이 ‘지들끼리’ 해 처먹고 있었네…”라는 마음 확정의 계기를 포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병우-진경준 게이트나 최순실-미르-K재단 의혹 같은 사태를 보며 그리되는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정치의 핵인 대통령이 나서서 ‘헬조선’과 ‘망한민국’과 같은 말은 자기 비하에 불과하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도 소용이 없다. 자기 비하를 즐기는 자는 내부의 적이라고 낙인을 찍어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권위도, 정당성도 다 허물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보통사람은 특정한 국가 정책의 오류나 실패, 몇몇 특정 정치인의 전횡이나 비리만을 보고 충성심을 버리지 않는다. 충성심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며, 이 땅에서 살아가며 갖는 자긍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익하고 해로우며, 무의미하고 부끄럽다 판단되는 곳에서는 결코 즐겁게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즐겁게 살아갈 이유와 긍지,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하고, 또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것을 스스로 찾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결코 쉽게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항의! 그렇다. 충성심을 복원하기 위해 그릇된 것을 시정해 달라는 요청의 이름인 항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묵살될 때 사람은 충성심을 놓아 버린다. 자신이 권력을 위임한 자로부터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에 대해 그저 실망하고 화가 나서 항의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과 소용이 없다 여겨지는 것이 고쳐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항의하는 것이다. 존중감은 바로 그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충족했을 때 생겨난다. 이런 의미를 갖는 항의를 외면하고 억압했다면, 존중감은 물론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충성심을 유지할 도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항의의 무시. 박근혜 정권 들어 유독 심해진 현상이다. 특히 정권 후반기에 들어 더욱 그러하다. 왜 그런지 분석할 필요조차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지속적이고 일관되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및 지진 사태,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등 문제가 생겨났을 때마다 그러했다. 민주정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항의의 무시는 민주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사회적 목소리에 대한 반응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내걸었던 정책을 추진할 때조차 그렇게 했다. 노동과 공공부문 개혁 등을 두고 경쟁자들의 수정, 보완 요구를 수용해 추진했으면 성과를 낼 수도 있었다. 당장은 자신의 의도를 온전히 관철시키지는 못한다 해도 종국에 가서 취지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정부의 역할이고 민주정치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책 실현이 목적이 아니라, 정책 실패의 책임 떠넘기기가 목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늘 새누리당 내부의 비박과 야당과 시민사회의 비판자 탓만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탈주! 항의가 차단되었을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탈주이다. 항의를 관철시켜 바로 잡아줄 세력이 없다 여겨질 때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탈주를 모색한다. 그러니까 야당과 사회운동 세력에게도 기대할 게 없다 여겨질 때이다. 여론조사기관인 엠브레인이 지난 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9~59세 성인남녀 1000명 중 76.4%가 ‘이민을 생각해본 적 있다’고 답했다. 인구 1만명당 국적포기자도 2000년대 초반 급증 후 감소 추세를 보이다 2010년 전후로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2013년 기준 국적포기자가 하루 55명, 한 해 2만명에 달해 해외 이민율이 아시아 최고를 차지했다.

최근 외교부의 ‘해외이주신고’ 자료에 따르면 다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진짜 문제가 제기된다. 항의가 수용되고 충성심을 회복해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탈주의 비용이 없어 그리된 것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나날이 심해지는 불평등의 정도를 감안할 때 그렇다. 특히 상위 10%가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포함한 전체 부의 66.4%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가 달랑 2%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보통사람 다수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탈주마저 봉쇄된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의 앞날은 무엇일까? 지진 없는 나라도, 총격사건 없는 나라도 더 이상 아니어서 탈주의 유인은 높아졌으나 철저히 봉쇄되어 있는 지금 이후, 보통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창조적일지 아닐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파괴’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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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대 국회에서 참 많은 국회의원을 만났다. 내 생에 만났던 국회의원 숫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청년 문제에 대해서 우호적이지도 않고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여당 의원은 물론이고, 야당 의원도 그랬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해가 아주 안 되는 일은 아니다.

비유를 들자면, 국회의원은 이종 격투기 선수와 비슷하다. 어떤 분야이든지, 자기가 있던 곳에서 나름대로 최고의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기반으로 국회에 들어온 것이다. 원래 자기가 하던 일, 자기가 관심 있는 일이 있다. 그리고 3선, 4선, 그렇게 성공한 정치인들,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에 걸쳐 성과를 내었기에 그 자리를 유지한 것이고, 그렇게 성공을 만들어준 분야나 사업들이 있다.

청년 문제는 자신들이 성공한 과정으로 보면, 번외의 일이다. 그리고 사업이나 예산의 우선순위에서, 경쟁적이다. 인권 전문, 부동산 전문, 민주화 전문, 의료 전문, 외교 전문, 국방 전문, 하여간 다양한 전문 분야가 있고, 청년은 그러한 주요한 의제에 비하면 한참 후순위이다.

청년에 대한 얘기로 유명해진 의원을 만나봤는데, 자신은 이제 다른 주제에 집중할 것이라서 청년을 더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정도면 양반이다. 각종 대중 강연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의 속마음은 청년이 게으른 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19대 국회에서, 진짜로 청년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딱 두 명 만났다. 한 명은 논리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사람이고, 한 명은 가슴으로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다. 실제로 취업을 못해서 계속 입사 원서를 쓰는 자녀를 보면서 청년 문제가 진짜로 심각하다고 느끼게 된 사람, 그가 정세균이다. 국회의원 아버지의 힘을 자녀의 취업에 쓰지 않고, 그걸 사회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가슴의 힘’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 취준생 아버지가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장이 되었다. 20대 국회에는 젊은 사람들이 19대보다 더 없고, 청년 대표는 실종되다시피 했다. 누가 국회에서 청년을 대변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우리가 서게 되었다. 국회의장 대표발의로 준비되는 청년세 법안이 청년을 대변하는 정치인 정세균의 연장선에 있다. 국회의장이 되기까지, 정치인으로서 그가 했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청년이다, 이런 선언과 같다.

그렇다면 청년세가 청년 문제의 만병통치약인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용 형태, 청년 수당, 최저 임금, 지역별 주거권, 많은 정책들이 있을 수 있다. 그중의 하나이다. 기업이 돈 내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10년 정도 기간을 정해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목적세, 시행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간에 문제가 해소되거나 완화되면, 원래 법의 취지대로 사라지는 목적세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다면? 좀 더 근본적인 다른 대책들을 추가적으로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청년이 힘들다고 모두들 말한다. 그러나 정말로 청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많은 국민들의 정서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공기업이 청년 고용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작년의 여론조사에서 80% 이상의 찬성률이 나온 적도 있다.  

청년들을 위한 세금을 신설할 것인가 아닌가, 이 논쟁이 내년도 사업을 위해서 지금 바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왜 하는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누군가 판단을 해달라고 맡겨놓은 것 아닌가? 눈앞의 정치만큼 미래의 경제도 중요하다. 청년 세법 논쟁, 여당 대표의 단식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석훈 | 타이거 픽쳐스 자문·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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