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믈리에’라는 직업이 한국에서도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협회도 있고 자격증까지 줍니다. 식당에서 와인을 추천하는 이 소믈리에들이 많아진 것은 와인 소비가 늘어난 현실을 반영합니다. 어느덧 ‘포도주’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죠. 화이트와 레드를 구분하는 정도였던 와인에 대한 이해도 아주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호주산인지, 칠레산인지도 따지고 각종 브랜드와 생산연도까지 꿰차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5만원 밑에도 인기 있는 와인이 있지만 10만원을 훌쩍 넘기기도 하죠. 수십만원에서 100만원이 넘는 와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100만원은 고사하고 10만원만 넘어가도 쉽게 손이 가지 않죠. 어쩌다 비싼 와인을 마시게 되면 역시 다르구나 싶습니다. 조심스레 한 모금 넘기면 칭찬과 탄성이 튀어나옵니다.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싶죠. 별 차이를 못 느껴도 내가 잘 모르는 것이겠지 싶어 술자리가 끝난 후 와인스쿨을 검색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와인 전문가들도 막상 눈을 가리면 와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여럿 있습니다. 한 실험에서는 똑같은 와인을 마시고도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고급 상표라고 여겼을 때 평가단은 찬사를 쏟아냈죠. 반대로 싸구려 와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시큰둥한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상표에 대한 편견 때문이죠. 이런 편견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명품 가방이 더 품위 있어 보인다거나 알프스 어디 물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런 예일 테죠.

짧지만 떠들썩했던 선거전을 치른 한국정치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후보라는 상표를 좋아한 사람들은 그의 공약뿐 아니라 언행 하나하나에 열광했습니다. 미소 하나도 듬직하게 보았고 그의 공약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죠. 하지만 상대 후보는 늘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음식을 넘기는 입 모양 하나도 꼴불견처럼 느껴졌고 그의 지지자들마저도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심지어 거의 같은 공약을 두고도 내 후보 것은 혁신적이라고 불렀고 상대방의 것은 엉터리로 믿었습니다.

사실 상표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가방을 다 뜯어보고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 많은 와인을 다 마셔볼 수도 없죠. 모든 후보의 공약집을 다 읽어보고 비교 분석한 후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북 외교, 경제 운용, 노동, 환경 등등 수많은 정책 이슈가 있습니다. 각각의 이슈를 들여다보면 많고 많은 정책이 있죠. 이들은 서로 얽혀있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헷갈립니다.

유권자의 선택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가이드라인에 기대게 됩니다. 여러 정보의 극단적 축약본인 ‘상표’는 이럴 때 요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명 브랜드를 믿고 사듯, 정책은 다 몰라도 정치 이데올로기를 보고, 후보 이름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죠.

복잡한 현대정치에서 이런 선택은 어쩔 수 없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지하는 후보의 정책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부작용을 낳는 것 중 하나죠. 그러니 정책에 대한 논쟁은 쉽지 않습니다. 대신 토론은 외모나 말투에 국한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소통은 고통스러워집니다. 불편한 소통 대신 우리끼리 모여 함성을 지르며 선거를 치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드디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갖게 됐습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옆에 두고, 브랜드를 무시하고 좀 더 차분히 지켜볼 여유가 생겼죠. 문재인 후보가 좋아서 그를 지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좋다고 정부 정책을 감싸기만 해서는 안될 테죠. 한쪽에선 벌써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각오가 들립니다.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됩니다. 조건 없는 지지는 조건 없는 명품 소비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문재인 브랜드를 접어놓고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어야 저쪽도 ○○○ 브랜드를 내려놓고 대통령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나라다운 나라에 우리는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겠죠.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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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지난주 수요일에는 학생들과 최인훈 선생의 소설 <광장>을 읽고 토론을 진행했다. 잘 알다시피 최인훈의 <광장>은 철학과 대학생인 이명준이 남한과 북한을 경험하고 마침내 제3국행을 선택했다가 결국 자살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주제 발표를 맡았던 학생에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상징이 ‘광장’과 ‘밀실’인데 어째서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밀실과 광장’이나 ‘광장과 밀실’로 하지 않고, ‘광장’이라고 했을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랬을까?

최인훈의 <광장>이 이전의 분단소설과 구분되는 점은 근대적 교양을 지닌 개인(이명준)의 출현에 있다. 우리 분단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남과 북이라는 이념의 민감성, 이데올로기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분단 문제에 접근하는 데 비해 이 작품은 이명준이란 이념과 민족을 넘어선 보편적 개인, 자기결정을 통한 개인성의 구현이란 근대적 교양을 지닌 주체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은 단순히 남북한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밀실)’이 ‘전체(광장)’의 일부로서 사회적 통합을 향해 분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이명준은 그 같은 광장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지만, 작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밀실(正)’과 ‘광장(反)’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合)’의 창출이란 변증법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되묻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광장과 밀실’이 아니라 ‘광장’이다.

19대 대선 투표일 전날인 8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펼쳐진 서울 광화문광장에 지지자들이 모여 휴대폰 불빛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다. 권호욱 기자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1년 전 이맘때만 하더라도 우리들 가운데 5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 탄핵부터 5월 대선을 통한 정권교체까지 이 모든 것은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의 치열한 투쟁 덕분이었다. 2016년 10월29일을 시작으로 2017년 4월29일까지 23주 동안 주말마다 수많은 개인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전국에서 160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역사에서 많은 인원이 일시에 거리로 나선 것은 몇 차례 있었지만, 이토록 끈질기게 오래도록 광장에 모인 적은 없었다. 가을에 시작해 혹한의 추위를 참고 견디며 봄이 오기를 갈망했던 시민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것은 우리 시민사회의 성숙과 정치의식의 발전을 상징한다.

그러나 광장이 끝나면 다시 밀실이 열리는 법이다.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선거 앞에서 시민들은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갈라졌다. 민주당 지지자는 물론 당직자까지 나서 심상정 지지는 ‘죽는 표’라며 사표론을 제기했고, 진보정당 지지자를 ‘정치홍대병자’라 비판했다. 반대로 문재인 지지자에게는 ‘문빠’라느니 ‘문슬람’이란 비하가 쏟아졌다. 서로가 서로를 비방했고, 혐오했다. 선거 직후 출구조사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소셜미디어에서는 대구·경북지역, 특히 사드 배치 지역인 성주를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혐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타인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친목도모 행위가 되었다.

마치 “당신 1980년대에 뭐했어?”라는 말처럼 곳곳에서 ‘촛불’이 자신들만의 것인 양 호명되었다. 비록 선거에서 서로 다른 후보와 정당을 지지했더라도, 개인은 다양한 정치적 의지와 정체성을 가지기 마련인데, 지지자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만 호명되었다. 독선과 막말로 상대를 제압하려 드는 가운데 정치가 쓸모없이 낭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번 대선과 촛불광장이 우리 사회 관계성 회복의 희망 또는 징후라 여긴다. 다시 말해 어차피 1년 후면 끝날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물러나라고 외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광장에 나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립된 밀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을 회복하고, 확인하고 싶었기에 모두 광장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최인훈은 <광장>의 서문에서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사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도 빛나는 오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보람을 만들어 나가자.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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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나라,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촛불 시민혁명은 문재인을 국가통치의 수반으로 선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연설문에서 적폐청산과 국민통합,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자유로운 여론과 소통을 강조했다. 촛불에서 탄핵, 탄핵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진 시민혁명의 향후 과제들이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특히 강조했던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라는 통치 철학이 국민의 삶과 통치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기회도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도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도 정의롭지 않았던 문화정책의 대개혁은 문재인 정부 성공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통치자의 세치 혀에서 나온 문화융성이란 국정 철학이 돌연 예술 검열과 블랙리스트로 되돌아오는 황당한 일이 없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언행일치의 혁신적 문화정책이 구현되어야 한다. 문화정책의 대개혁을 위해 문재인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블랙리스트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현장 예술인과의 지속적인 문화 협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통치자의 구상-청와대 참모의 작성과 전달-문체부 관료와 산하기관의 실행이라는 국가에 의한 조직적이고 방대한 예술 검열 행위라는 것이 재판과정에서 밝혀지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은 꼼꼼하고, 사심 없는 조사와 기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블랙리스트의 진상규명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인들에 대한 자율적이고 투명한 국가문화정책을 만들기 위해 예술계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실질적인 문화협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술인들이 작년 겨울부터 142일간 광화문에서 노숙농성을 하며 블랙리스트에 저항한 것도 ‘지원금’ 때문이 아니라 ‘창작의 자율성’ 때문이다.

둘째, 노동시간의 단축과 문화시간의 확대로 국민의 문화권리가 삶 속에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멕시코 다음으로 많은 한국에서 문화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했던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실시한 ‘문화가 있는 날’은 어찌 보면 과도한 노동시간을 줄일 생각은 없고, 문화이벤트로 잠시 스트레스를 풀자는 일종의 문화적 ‘모르핀효과’밖에 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문화주권의 실현을 국민의 일상 삶의 여유와 행복에서 찾고자 한다면 과감하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공연관람, 여행과 독서, 다양한 예술교육 참여의 시간을 늘리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미래를 향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창의적 인재 양성이다. 대권후보들이 저마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지만, 모두 기술결정론과 경제결정론에 경도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기술과 경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이다. 10년 후, 20년 후 우리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바뀌고 그러한 삶의 변화를 추동시키는 문화는 어떤 창의적 시장을 형성할지가 관건인 것이다. 기술과 과학이 개인 삶의 형태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서드라이프’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문화와 기술, 예술과 과학이 통섭하는 문화콘텐츠의 창의적 인력양성이 긴요하다. 그래서 대중음악, 게임, 가상현실 엔터테인먼트, 차세대 미디어플랫폼 등 대중예술 분야에 국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 설립이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통합과 분권의 문화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도록 지역문화의 자율성을 높이는 분권형 문화균형 전략과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문화통일 정책에 대한 장기구상이 가동되어야 한다. 국내 차원에서는 심각한 지역문화 격차를 해소하면서도, 지역문화의 특성을 동시에 고려한 문화 분권의 실질적 실현과 한반도 차원에서는 문화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언어, 생활, 창작, 문화유산, 체육, 관광 등의 남북교류 플랜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 네 가지 과제를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준비하고 실현하는 게 ‘문화다운 문화’를 만드는 문재인 정부 문화정책의 대개혁이 아닐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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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5월3~4일, 북한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중국이 ‘조·중관계의 붉은 선’을 넘고 있다면서 “조·중관계가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목숨과도 같은 핵과 바꾸지는 않겠다”고 했다.

북한은 ‘배신’이란 말까지 써가면서 최근 중국의 대북 행동에 반발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대북 압박이 상당히 강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난 4월6~7일 미·중 정상회담 이후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대북 경제제재가 높아지고 있던 4월26일, 미국 틸러슨 국무부 장관, 매티스 국방부 장관, 코츠 국가정보국장이 합동으로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최대의 압박과 개입’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하루 뒤인 29일, CBS 인터뷰에서 김정은을 ‘꽤 영리한 녀석’이라고 평가하면서 ‘상황이 조성되면 그와 영광스럽게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5월4일 미국 하원은 강력한 대북제재법을 통과시켰다. 결국 트럼프의 북핵정책은 중국이 먼저 북한에 압박을 가하면, 이후 미국이 직접 나서서 북한을 대화테이블로 끌어내겠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 후 중·북관계를 보면, 트럼프와 시진핑이 ‘무역불균형 해소 100일 계획’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핵 문제가 협상 칩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해서 김정은의 입장변화를 끌어내면, 이후 미국은 대중 경제압박을 줄여가면서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낸다는 암묵의 양해가 이루어진 것 같다. 오바마는 레버리지도 쓰지 않고 북핵 관련 중국 역할만 주문했기 때문에 중국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중국이 움직이고 있다. 중국의 경제를 걸고 들어오는 트럼프의 사업가적 거래방식이 외교에도 통한 것이다. 그럼 중국이 대북 경제압박을 가해서 트럼프가 김정은을 ‘영광스럽게’ 만날 수 있는 상황 변화가 일어나면 우리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것이 내일 출범하는 새 정부 외교안보팀의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후, 한·미 간 사드 배치가 발빠르게 진행되는 시기에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3월18일 미·중 외교장관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왕이 부장은 “진정한 담판의 진전을 이뤄야 한다”면서 “중·미·북 3자 회담에 이어 6자회담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틸러슨 장관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왕이가 3자회담을 제안한 것도 문제지만 틸러슨이 화답한 것도 우리로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새 정부가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임기 초부터 북핵 문제 관련해서 ‘코리아 패싱’(외교 왕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일 출범할 새 정부로서는 어차피 사드 문제를 놓고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과 사실상의 재협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과의 협의 계획을 명분으로 중국에 사드 보복 중지부터 요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 미·중 외교적 입지를 넓혀가면서 3자회담이 아닌 4자회담을 수정 제안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6자회담 직행을 선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남북관계부터 복원해야 한다. 1990년대 중반 남북관계가 나빴을 때 이미 우리는 ‘통미봉남’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걸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새 정부가 남북관계를 복원하려 하면 보수진영은 ‘북핵 문제 미해결’ ‘유엔제재결의안 위반’ 등의 구실로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새 정부는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고, 자신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트럼프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은과 만나도 되고, 한국은 북핵 문제 해결 전엔 어떤 남북관계도 개선할 수 없다는 건 불공평하다. 금강산 관광비와 개성공단 인건비가 유엔제재안이 금하는 ‘벌크 캐시’에 해당하는가에 대해선 이미 2014년 박근혜 정부도 ‘해당없다’고 해석한 바 있다. 따라서 새 정부는 책임감을 가지고 소신있게 대북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그러면 ‘코리아 패싱’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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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사드 비용 10억달러(1조원 이상) 한국이 내라.”(미국)

“이미 한·미 합의에서 한국은 땅만 주기로 했다.”(한국)

“맥매스터 미 안보보좌관과의 통화에서 기존 합의를 재확인했다.”(한국)

“사드 비용은 재협상하게 될 것.”(미국)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와 관련된 논란 중 일부다. 핵심은 ‘비용’ 문제다. 전형적인 ‘안보 장사’다. 그런데 여기서 저들이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사드 배치를 (한창 선거 국면인) 4월26일 새벽, 비밀 강행한 작태다. 절차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미국이 (한국민 동의) 절차를 무시한 일을 은근슬쩍 숨긴다.

그들이 하지 않는 질문도 있다. 북핵 위기로 사드 배치를 한다는데 그 실효성은 제쳐두고라도, 왜 북한이 핵에 목숨을 거는 것인가이다. 사실 북한은 자기 체제 수호에 목을 맨다. 남한과 미국이 자기 체제에 목숨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호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된다.

물론 북한이건, 남한·미국이건 민주주의와 복지를 높여야 한다. 진정으로 민본·평화 정치를 하면 헛돈 써가며 싸울 필요가 없다.

또 대선이건, 총선이건 선거 때마다 나오는 단골 메뉴가 지역 개발이나 지역 발전이다. 보수 진영은 물론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지역 개발이나 발전이 결국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땅 가진 이들만 부자로 만든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부동산이 없는 이들도 이를 반긴다. 왜 그런지에 대한 토론은 없다. 그 결과는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 농토 소멸인데도 말이다. 부동산을 잡아야 서민 경제, 살림의 경제가 산다는 진실을 저들은 말하지 않는다.

“귀족 노조” 논란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노조 자체를 전혀 인정·존중하지도 않으면서 엉뚱하게 ‘귀족 노조 탓에 경제가 엉망’이라는 근거 없는 비난만 해댄다. 아무 말 않는 이들 역시 노조의 중요성에 침묵한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잘살기 위해서인데, 일을 해도 잘살지 못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가 필요하다는 사실, 바로 이를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귀족’이니 ‘빨갱이’니 욕만 할 뿐. 진짜 귀족들은 우리 눈에 띄지도 않게 고급 승용차나 비행기를 이용, 호화 저택과 호텔, 골프장, 리조트, 고급 음식점만 찾는데도 말이다. 지금도 노동자 6명이 척박한 노동 현실을 바꾸자며 광화문 광고탑에서 단식 농성 중이다.

한편 요즘 사회경제적 위기를 모든 후보들이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 등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이제 세계 경제 자체는 더 이상 고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신성장 동력’이나 ‘4차 산업혁명’만 추진하면 고성장이 가능할 것 같지만 이제는 지구가 포화·고갈 상태이기에 성장보다는 ‘성숙’을 추구할 때다. 과거와 같은 고성장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돈보다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이 된다. 성장보다 23%에 불과한 식량 자급률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나는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며, 모두 가난해지려 하면 누구도 가난해지지 않는다”고 한 피터 모린을 떠올린다. 소박하게 더불어 사는 것이 세계 평화다.

5월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단순히 새 대통령만 뽑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난 50년 이상 지속된 ‘박정희 체제’를 종식시키는 과정이며, 해방 이후 70년 이상 지속된 ‘신식민지 재벌독점 체제’를 종식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120여년 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요구한 ‘사회경제 개혁’을 완성하고 새 시스템을 창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요컨대 권력이나 돈에 중독되어 비정상적으로 작동해온 ‘중독 시스템’을 건강하고 행복한 시스템으로 대수술하는 것이 이번 선거가 가진 큰 의미다. 그 수술의 방향은 이미 나와 있다. 진실과 자유, 정의와 평등, 연대와 소통, 생명과 평화의 가치가 새 시스템의 방향성이다.

이제 남은 것은 참여다. 투표 참여는 기본이고, 부정선거 감시에도 참여해야 한다. 투표 이후 개표 과정이나 투표함 보관 및 운송 과정, 나아가 집계 과정도 한 점 의혹이 없게 지켜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선거 이후 새 정부의 인사나 정책들이 제대로 되는지도 잘 봐야 한다. 특히 ‘헬조선’을 극복하고픈 이웃들이여, ‘가짜뉴스’에 속지 말고 더 성숙해지자.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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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4월 한 달 동안 선거 판세는 극심하게 요동쳤다. 그 결과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선두 다툼을 벌이던 2강 3약의 구도는 문재인 후보가 독주하는 1강 2중 2약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각종 네거티브 공세와 논란이 있었지만, 이런 재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집단은 50대 유권자층이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실제로 이 연령대의 문재인 후보 지지율은 4월 중순까지 29%와 30%를 오가다가 마지막 주에 43%로 뛰어오른 반면, 안철수 후보는 4월 초순에는 51%까지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더니 중순을 넘어서 40%, 22%로 급격히 하락했다.

두 후보가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는 동안 홍준표 후보는 반사 이익을 보았다. 4월 초만 해도 10%대 미만의 지지율이었으나 4월 말에는 16%에 도달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지난 2월에 진행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탄핵에 반대하는 50대 유권자가 24%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50대의 이른바 ‘샤이 보수 지지자’ 일부는 4월 전반에 걸쳐 2강 후보 간에 네거티브 전선이 만들어지자, “어차피 정치인들은 다 똑같아”라는 식의 ‘정치 혐오’를 앞세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쪽팔림’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공개적으로 홍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홍 후보가 TV토론에서 거침없이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의 후안무치함을 전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뻔뻔함이야말로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뻔뻔함의 확산이야말로 보수세력 복원을 위한 제일선의 전략이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한편 문재인 후보에 대한 50대의 지지율 증가를 주목해 보면 이와는 다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즉 중도적인 성향을 지닌 50대 일부가 탄핵 이후의 대선 정국에서 안희정, 안철수로 이어지던 제3후보군을 두고 갈등하다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돌아섰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확실히 386세대의 정치인이나 진보 지식인이라면 반가워할 만한 소식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2002년 이후 보수와 개혁 구도의 정치 지형 내에서 입지를 마련한 이후, 자기 진영 내에서 다수파로 행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수파는 보수 진영에 패배하는 다수파였고, 또래 집단이나 출신 지역에서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다수파였다. 그러니 그들 중 일부가 탄핵정국이 시작되자마자 서둘러 ‘박정희 체제의 종언’을 외치고 나섰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박정희 체제란 다수파-소수파의 딜레마 해소를 위해 넘어야 하는 거대 장벽이었으니 말이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그들의 승부수는 성공한 듯 보인다. 일부 지역과 또래 집단에서 다수파로 올라섰고, 선거의 승리도 눈앞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만으로 50대 지지율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간 독특한 투표 행태를 보여준 50대 일부 소수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각종 선거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이 50대 소수파는 2002년 이후 세 차례의 대선에서 각각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으며 두 번의 대선에서는 승패를 좌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들이 개혁과 보수, 양 진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것은 지역주의나 민주-반민주 구도와는 거리를 둔 채, 소득·자산·교육·세제 등과 관련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전략적 투표 행위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경제적 성장 과정과 제도적 토대를 명확히 인식한 결과였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 바로 이 50대 소수파가 혹시 특정 후보의 지지율 증가에 한몫 거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이들이 그 후보를 선택한 이유는 무얼까? 과연 차기 정권은 이들의 기득권에 영합하지 않고 경제 관련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을까? 2000년대 중반, 종합부동산세와 부동산 실거래가의 도입이 이 소수파 상당수에게 계급적 각성의 계기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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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소는 반대하는데 핵무기 반대 구호는 왜 함께 외치지 못할까? 원자력발전소보다 더 무서운 ‘대량살상’의, 아니 절멸의 무기가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 반핵(아니 탈핵?) 운동의 난제다.

사실 전 세계 핵 관련 운동을 보면 ‘반핵’인가 혹은 ‘탈핵’인가 하는, 운동적으로 두 개의 큰 흐름이 있다. 비교하면 유럽은 반핵(Anti-NUKE) 운동이 주였고, 그에 따라 핵무기 반입 저지 및 미군기지 반대투쟁을 했다. 그리고 일부는 녹색당 창당의 밑거름이 됐고, 일부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운동으로 남아 이미 이익집단이 된 ‘조직노동’에 대한 견제세력이 되기도 했다.

반면 미국은 스리마일 원전 사고 등을 계기로 주로 반원전운동 혹은 원전가동 중단운동을 했다. 그리고 그들 반원전운동은 자국의 핵무기를 타국에 배치하는 문제에 미온적이거나 모른 체했다. 그들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군비축소 및 특히 미국산 핵무기의 폐기운동으로는 진행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반원전운동은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중산층 지향의 시민운동이었다.

지금까지 양상을 보면 한국의 핵관련 운동은 미국과 비슷하다. 반핵이 아니라 탈핵운동 일변도이며, 원전가동 중단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핵무기 및 미군기지 문제에 대체로 침묵하며, 외부세력이 아니라 주로 한국 정부와 정치권을 겨냥하고 있다. 일례로 작년 북한의 4차 핵실험 때 미국은 즉각 B-52 핵전폭기를 한반도 상공에 띄웠지만 ‘탈핵’운동단체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사드 무기를 한국에 반입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인근에 핵잠수함을 배치하고 핵무기가 포함된 한·미 군사훈련을 시행했지만 그에 대해서도 탈핵운동은 거의 침묵하고 있다.

경북 성주군에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장비를 전격 배치한 26일 성주골프장의 길목인 초전면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주민들이 사드 반대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결국 탈핵은 하지만 반핵은 못하는 사회. 이는 사회적 분위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지진대의 원전 가동과 방사능 유출에 극도의 공포를 갖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북·미 긴장고조로 현실화될 수 있는 핵폭탄 투하와 가공할 방사능 구름에 대해선 강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북한 핵무기 개발을 비판하지만, 이 모든 긴장의 한 축인 미국에 대해선 현저히 불균형적인 태도 내지 침묵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불균형, 이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검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탈피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면 없이 한반도의 전쟁, 핵전쟁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요원한데 말이다.

4월26일 새벽, 우리 사회의 이런 한계는 고스란히,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의 주민들에게 날벼락으로 떨어졌다. 그날 새벽 한국 경찰이 경비를 선 가운데 미군이 모는 트럭들이 사드 장비를 옮겼다. 70~80대의 연로한 주민들은 그 새벽 자신들의 고요한 마을을 습격한, 점령군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미군들과 그들을 보호한 한국 경찰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외쳤다. “미국 경찰은 물러가라!”

이 구호가 바로 전율이다. 그들은 이 사회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이념적인 편향과 왜곡을 넘어서 곧바로 알아차렸다. 무엇인가 잘못됐다, 이것은 나라가 국민을 향해서 할 짓이 아니다, 이 나라 경찰은 미국 경찰인가.

근데 왜 이 사회는 침묵하는가? 왜 우리는 박근혜의 국정농단에만 분노하고,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농단’에는 침묵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넘어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탈핵뿐 아니라 반핵을 고민해야 하고, 친미와 반미를 다 고민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과연 이 땅의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도 현장의 상황은 너무 절박하고, 고령의 원주민들은 이 모든 현대사와 한국 사회의 못난 모습이 그들에게 전가한 부담을 안은 채 사드 배치를 온몸으로 막고 있다. 평화로워야 할 가정의 달, 과연 당신의 평화를 깨는 세력이 누군가 한번 생각해보고,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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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하고 전화기가 진동했다. 서울시 청년정책과 주무관 전화다. “됐어요. 됐어요. 협의 통과했어요!!!” “아! 정말요? 진짜 축하드려요. 정말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아. 뭐 저희들이 했나요. 청년들이 했지요. 그런데 진짜 기뻐요. 하하하하.” 보건복지부 반대에 부딪혀 지급되지 못하고 있던 청년수당이 잠금 해제되는 소리였다.

대선정국에 묻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다. 서울시가 형편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최대 6개월까지 매월 50만원씩 지급하려던 청년수당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복지부 협의를 얻어냈다는 소식이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작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로를 탐색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작은 버팀목이라도 대어주자며 시작한 청년수당이 드디어 시행 가능하게 되었다. 크게 보면 촛불정국 때문이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이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청년수당을 처음 제안했던 청년들, 이것을 서울시 정책으로 적극 받아안은 박원순 시장, 정책적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었던 전문가들 등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이 17개월을 함께 버텨낸 사람들 중에서도 서울시 청년정책담당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난해 8월14일 서울시가 청년수당에 대한 정부의 직권취소 조치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서울도서관 외벽에 대형 현수막을 걸어 놓고 있다. 정지윤기자

“거버넌스에 대해 요즘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어요.” 청년수당을 놓고 서울시와 복지부 간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청년과 과장이 속내를 꺼내놓았다. “청년수당을 놓고 청년들이랑 협의를 하는데 사실 너무 어렵더라고요. 매번 논의하지만 자꾸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고. 우리가 조금 양보해서라도 이 정책이 하루라도 빨리 진행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청년들은 너무 이상적인 모델만 이야기하는 것 같고. 청년들과 협의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어요. 그런데 문득 우리 논의가 한자리에서 계속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마치 용수철의 나선형처럼요.”

“용수철의 나선형요?” “네! 용수철요. 청년수당 반대하던 사람들이 하는 말 있었잖아요. 청년이면 쇠도 씹어먹을 나이인데 왜 돈을 주냐고. 솔직히 말해 저도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청년들이랑 한 달, 두 달, 석 달 그렇게 몇 개월을 계속해서 만나고 토론하다 보니까 청년들이 말하는 ‘인간 존엄이 지켜지는 방식으로의 청년수당’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들의 삶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지난 시간에 나눴던 이야기들이 다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청년들과의 토론 시간은 제자리를 맴돌았던 것이 아닌, 사실은 촘촘하게 용수철이 감겨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요. 단단하고 탄력있게 잘 감겨진 용수철은 멀리 날아가잖아요. 저는 그래서 우리 청년수당 잘될 것 같아요.”

그의 말에 같이 있던 청년과 사람들이 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는 촛불정국도 아니었고, 복지부와의 협의도 잘될지 예측할 수 없었던 때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보자라는 이야기를 그는 그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싶었다.

또 하나의 풍경이 있다. 청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해볼 사회적 대화 프로그램에 대해 회의를 하던 때였다. 회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 1면에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를 하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한 19세 청년 김군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김군, 우리 청년수당 지급 대상자였는데….” 누군가 회의 중 이 말을 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 청년 문제를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 제목으로 ‘너는 나다’가 정해졌다.

그냥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 이야기하겠지만, 옆에서 보지 않았으면 모를 이야기들을 그 누군가는 기록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지면을 통해 남긴다. 이런 정성들이 알알이 배여 있는 서울시 청년수당이 단단하고 탄력있는 용수철처럼 우리 청년들의 삶을 오래오래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것, 매일 아침 옹기종기 모여 인사하던 그 구호로 이 글을 마친다. “청년이 미래다!”

김경미 | 정치발전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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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송민순 회고록의 비밀 내용을 승인하지 않았다. 작년 11월22일에 외교부 장관에게서 직접 받은 공문이다. 그러니까 송 전 장관은 작년 10월 회고록에 남북 접촉 등 안보 관련 비밀을 담아 출판하면서도 소속됐던 기관장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 청와대 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책에서 국가정보원이 북한으로부터 받아 청와대 안보실장에게 보고한 북한 전화통지문의 내용을 4줄에 걸쳐 공개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대통령 선거가 20일도 남지 않은 때, 자신의 책이 진실임을 증명하겠다며, 북한 전화통지문 청와대 문서를 공개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이 21일 서울 종로구 북한대학원대학교로 출근하고 있다. 송 전 장관은 2007년 참여정부의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 기권 과정을 담을 자신의 회고록 내용과 관련, 당시 정부가 사전 확인한 북한의 입장을 담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문건을 21일 공개했다. 연합뉴스

나는 기억한다. 그가 장관으로 있던 외교부는 2007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보고 문서를 공개한 정창수 당시 국회 보좌관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그의 외교부는 FTA 보고 문서를 ‘비밀’로 지정하지도 않았었다. 게다가 문서의 내용도 매우 초보적이었다. 미국과의 FTA 협상에서 미국의 ‘반덤핑’이라는 무역 장벽 해결을 강하게 요구하되, 미국이 끝내 거부하면 다른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삼척동자도 예상하는 내용이었다. 애초 정부가 제시한 FTA의 기본 목적을 허망하게도 포기한 것이었다. 정 보좌관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어, 공익을 위해 언론에 제보했다. 그러나 송 전 장관은 정 보좌관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결국 정 보좌관은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기소되었다. 나는 확신한다. 외교부의 수사의뢰가 없었다면 검찰은 정 보좌관을 기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 전 장관은 북한이 보낸 전화통지 청와대 문서를 통째로 공개했다. 자신의 자서전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전화통지문 문서가 ‘비밀’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취지로 항변한다. 그는 자신이 수사의뢰한 정 보좌관을 잊었을까? 남북 사이에 오간 전화통지문 등은 보호가치가 있는 비밀이다.

나는 묻는다. 그는 어떻게 국정원장이 청와대 안보실장에게 보고한 문서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을까? 그 문서는 사유할 수 없는 공공기록물이다. 송민순 사건은 외교·통상·안보 분야 비밀의 사유화이다. 소수 관료들이 시민이 알아야 할 외교·통상·안보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대신 안보 비밀을 사유화한다. 파당적으로 이용한다.

외교부는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한·일 위안부 공동 발표를 저질러 놓고도 가장 기초적인 강제연행 인정 여부 협의 문서도 한사코 공개하지 않았다. 일본산 수산물 방사능 검역 자료도 공개하지 않는다. 사드 배치를 위해 미국과 이미 진행을 마친 환경영향평가 문서도 공개하지 않는다. 한·미 FTA 협상 문서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국익을 위한 비밀’이라는 나팔을 분다.

그러나 그들은 안보 비밀을 사유화, 파당화한다. 사익과 당파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 안보 비밀을 이용한다. 2012년 대선의 북방한계선(NLL) 사건에서도 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이란 걸 들고나왔다. 정상회담 회의록이라며 대선 유세에서 읽었다. 그들은 안보 비밀을 사유화해서 반북 공세를 강화한다.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를 둘로 갈랐듯이 시민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의 분출을 이념 대결로 편을 가른다.

안보 비밀의 사유화와 파당화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두 방법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공익을 위한 공개 원칙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보호가치 있는 비밀에 대해선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첫째, 정보공개법을 고쳐 시민의 생명, 안전, 평화와 관련이 있는 정보는 최대한 공개해야 한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한 공개 거부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틀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 안보 정보의 사유화와 파당화를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래야 안보가 산다. 이 점에서 송민순 사건에 대한 바른 처리가 중요하다. 관련 기관은 대선 날짜 달력만 쳐다보지 말고, 송 전 장관이 어떤 법적 권한에서 국정원의 청와대 보고 문서를 취득했는지 객관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그것이 안보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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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발 태풍이 한반도에 몰아쳤죠. ‘전략적 인내’가 끝났다며 북한을 압박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을 말하며 한국을 당황케 했습니다. 그 때문에 한반도 안보가 한국의 아킬레스건임을 새삼 곱씹어야 했죠.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운신 폭이 크지 않다는 현실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최선의 정책은 평화의 확장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럴수록 한국의 목소리는 커질 테니까요. 평화의 공간이 줄고 대결이 고조될수록 우리의 목소리는 강대국의 고함 속에 잠기는 법이죠.

안철수 후보는 평화에의 확신이 없어보입니다. ‘국민적 합의’를 강조하며 사드 배치를 반대했던 안 후보는 ‘국가 간 합의’를 외치면서 찬성으로 돌아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개성공단에 대한 입장도 재개에서 유보로 바꿨죠. 전시작전통제권 회수도 시기상조로 돌아섰고 햇볕정책에 대한 입장도 계승에서 침묵으로 바꿨습니다. 하나같이 중요한 외교 사안인데 모두 평화 쪽에서 대결의 방향으로 간다는 점에서 우려스럽습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운데)가 20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유세에 앞서 시민들을 향해 두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김기남 기자

게다가 그 변신에 대한 설명도 충분치 않습니다. 사드 입장 변화에 대해 안철수 후보 본인도, 박지원 대표도 사정이 바뀌었으니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바뀐 사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 정세나 북한 위협 등 사정은 기본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뚜렷이 달라진 것은 보수층 지지를 받기 시작한, 안철수 후보 본인의 사정입니다. 선거를 위해 안보를 가벼이 대하지 않나 싶어 우려스럽습니다.

말하지 않은 그 무슨 심각한 고려가 있었다 치더라도 걱정이 싹 가시지는 않습니다. 국가 간 합의가 자연의 법칙이 아닌 것은 정작 미국 부통령이 한·미 FTA 개정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확인할 수 있었죠. 미국과 중국이 맞붙을 가까운 미래에는 유연한 입장을 통해 청과 명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광해군의 지혜가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안 후보의 인식은 교조적 외교로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인조의 실수를 떠올리게 해 우려됩니다.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겠다던 안 후보의 호기를 기억하기에 더욱 안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새정치연합은 안철수 대표가 2014년 꾸리자마자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소멸했습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으로 그 이름이 이어졌죠. 안 후보가 탈당하며 더불어민주당이 되면서 ‘새정치’라는 수식어도 사라졌습니다. 그만큼 안 후보 하면 ‘새 정치’였습니다. 그 새 정치를 위해 안 후보는 새정치민주연합을 나와 새 정당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승자독식 선거제가 양당제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과감한 결단이었죠.

안 후보의 새 정치는 딱 여기까지였던 듯합니다. 천정배 의원을 공동대표로 내세우며 호남 민심을 노렸고 박지원 의원을 위시한 동교동계를 대거 받아들였죠. 국민의당은 호남당이 됐고 총선에서 호남을, 호남만을 휩쓸었습니다. 이를 안 후보는 ‘녹색바람’이라 불렀죠. 하지만 승자독식 선거제의 양당제 경향을 지역표로 극복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영국의 양당제하에서 스코틀랜드 민족당이 비슷한 예죠. 노동당과 보수당이 대변할 수 없는 특수한 이익, 즉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이들은 제3당의 입지를 넓혔습니다. 바로 국민의당의 전략이었습니다. 즉 안철수표 새 정치, 국민의당은 한국 특유의 지역정치를 잘 이용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손을 맞잡은 순간을 모두들 기억하실 겁니다. 수많은 이들에게 평화의 희망을 주었고 살육과 대결로 이어진 반세기 남북관계를 돌려놓는 감격적 계기였습니다. 그해 8월 개성공단 사업이 첫걸음을 떼었고 금강산 관광사업도 탄력을 받았죠. 당장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던 남북은 화해의 무지개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남북관계에 한국의 목소리가 커졌고 세계는 노벨 평화상으로 박수를 보냈죠. ‘햇볕정책’은 말 그대로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었습니다.

새 정치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안 후보가 말한 새 정치의 정체가 궁금한 때이기도 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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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직장에서만 20년 넘게 잡지 편집 일을 하고 있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 복일 수도 있겠지만, 오래도록 일을 하며 나를 거쳐 간 후배 편집자들이 8~9명에 이르는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신입을 뽑아서 2~3년쯤 편집의 기초부터 인쇄 실무까지 출판의 전반적인 것을 익히면 붙잡아볼 새도 없이 서울의 중견출판사로 이직한다. 떠날 때마다 새로 뽑는데 신입 편집자 한 명을 뽑으려 해도 서울이 아니라서 어렵다. 인천이 무슨 지방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인천 사람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서울 사람 보고 인천 한 번 놀러오라고 하면 다들 난감해한다. 그런 탓인지 서울에선 비교적 쉬운 일도 인천에선 좀 더 공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있다.

떠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할 일은 절대 아니다. 문화 분야의 여러 곳을 분탕질했던 최순실·차은택조차 무시할 만큼 출판계가 영세하다는 것, 편집자가 박봉이란 건 어느새 비밀도 아니다. 그렇게 직장을 한두 군데 옮겨야 그나마 월급이 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예전에는 출판사 내부에서 신입 편집자를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인턴 문화와 비정규직 고용이 일상화되면서 이른바 ‘초짜’들은 아예 그런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그런 형편이니 영세출판사가 초보들을 뽑아 가르치고,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보다 나은 조건의 출판사로 옮겨가는 구조가 되었다. 기업 스스로 인력을 키우고 교육하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좀 더 영세한 업장이나 사회로 고스란히 전가하는 인력재생산 구조는 출판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덧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는 이른바 “초왕이 잃어버린 활은 초나라 사람이 줍는다”란 고사가 있다.

춘추오패(春秋五覇) 가운데 하나였던 초(楚)나라 공왕(共王)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아끼던 활을 잃어버리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신하들이 황급히 나서며 저마다 활을 찾아오겠다고 하자, 공왕이 의연하게 말했다. “그만두어라. 초왕이 잃어버린 활은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가지게 될 터이니 굳이 찾을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만류했다. 이 일화는 임금의 너그러운 마음을 칭송하는 말로 오랫동안 전해졌다. 그러나 훗날의 공자(孔子)는 “애석하구나. 도량이 좁은 사람이로다. 사람이 잃은 화살을 사람이 줍는다고 하지 못하고 하필 초나라 사람이라 하다니(人遺之 人得之 何必楚也)”라며 탄식했다.

공자는 어째서 애석하다고 했을까. 잃어버린 활을 찾기 위해 신하와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괜찮은 왕이었겠으나 그의 도량과 포부가 ‘초나라’란 좁은 틀 안에 갇혀 있었기에 ‘천하(天下)’를 볼 수 없어 안타깝게 여긴다는 말이었다.

나는 여기에 공자와 유교의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자(老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람’이란 말조차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평했다. “그저 ‘잃으면 줍는다’라고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을”이라고 했다니, 노자는 인간의 천하를 넘어 만물천지(萬物天地)를 품었던 셈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이 되어가지만, 해마다 제때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해 휴학하는 학생을 한둘은 만나게 된다. 놈 촘스키는 “학창 시절 엄청난 빚을 지게 되는 학생들이 사회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긴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채무 시스템에 가둬 놓으면 생각할 시간마저 가질 여유가 없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등록금 인상은 일종의 훈육 테크닉입니다. 학생들이 졸업할 때쯤 되면 단지 빚에 찌들게 되는 것뿐 아니라 훈육의 문화를 내면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비자 경제의 훌륭한 부속이 되어갑니다”라고 했는데, 오늘날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그 출발부터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사형대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내 자식 네 자식 구분하지 않고 사람 하나 키워낼 수 없는 곳이라면 젊은이에게 자식을 낳아 키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성원 | 황해문화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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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전 세계 게임스타일의 지형을 흔들었던 ‘포켓몬고’의 열풍은 인공지능 시대 새로운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로 읽을 법하다. 포켓몬고는 증강현실 기술과 소위 ‘구글맵’으로 대변되는 위치 추적 장치를 이용해서 최고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의 캐릭터들을 포획하는 게임이다. 포켓몬고라는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충격효과는 게임을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있다. 기존 게임들은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여, 가상공간에서의 특이한 체험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꾀했다. ‘서든어택’ 같은 1인칭 슈팅게임, ‘리니지’ ‘와우’ 같은 온라인 게임 등은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생생한 현장감을 즐기게 하지만, 그 자체가 현실공간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융합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상공간이 실제 현실 안으로 들어와 개인의 감각을 활성화하고, 놀이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포켓몬고는 이러한 현상의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서드라이프(Third Life)’라고 명명하고 싶다. 서드라이프는 말 그대로 제3의 삶의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현실공간에서 물리적인 삶을 사는 단계가 ‘퍼스트라이프’라고 한다면, 가상공간에서 잠시 흥미롭지만, 허구에 불과한 체험을 하는 단계는 ‘세컨드라이프’라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한때 큰 인기를 얻었던 ‘세컨드라이프’라는 게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서드라이프 시대는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판타지 혹은 허구적인 대리만족을 현실공간에서 체험하게 함으로써, 가상현실이 곧 실제 현실이 되는 삶을 가능케 한다. 서드라이프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연계·결합하는 게 가능한 초현대 하이퍼 현실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한다.

2016년 다보스포럼 이후, 한국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혁신과 시민들 일상의 변화에 대해 많은 예측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신경제가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인데, 자본이 아닌 문화의 논리에서 볼 때, 신경제란 과학과 공학의 첨단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윤택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경제, 인간에게 이로운 신홍익인간 산업,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며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신인류산업을 의미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대선후보들이 저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러한 산업적 변화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중요한 것은 산업과 경제, 자본의 재생산에 있는 게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래 사회에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바뀌고, 개인은 어떤 문화를 원하는가에 대한 감성적 간파이다.

서드라이프의 시대에는 유비쿼터스 정보기술과 생명공학 혁명에 따라 개인의 신체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그래서 ‘초감각지능산업’, 이른바 가상현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창의적인 이야기가 가미된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산업이 발전할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개인의 인지적 역량과 일상적 놀이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미래 예측이 필요하다.

서드라이프 시대는 또한 ‘예술과 문화, 기술과 과학’이 통섭하여 새로운 초감각적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섭적 환경이 주는 감각의 새로운 지평들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문화 혁명에 따라 기존의 문화콘텐츠 영역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문화콘텐츠 산업이 어떻게 지배적인 영역으로 부상하고 이들이 이용자들의 기술 감각과 콘텐츠 관여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일지에 대한 전망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개인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서드라이프 시대에는 책, 영화, 음악, 게임, 모바일, 메신저커뮤니티와 같은 미디어콘텐츠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체험이 그 자체로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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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첫 주 강릉과 평양에서 남북이 한데 어울렸다. 5일 강릉에서 열린 세계여자아이스하키선수권 예선에서는 남한팀이 북한팀을 3 대 0으로 이겼고, 7일 평양에서 열린 2018 여자아시안컵축구대회 예선에서는 남북이 1 대 1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번 남북 스포츠 교류는 만남 자체가 소중했다. 작년 2월 개성공단 폐쇄 후 민간차원의 접촉도 일절 불허되고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서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2일 한국 여자축구팀이 인도를 10 대 0으로 이기자 김일성경기장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때 관중석의 북한 주민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극기를 바라보는 장면이 TV로 전달됐다. 3일에는 강릉 경포해변에서 북한 여자선수들이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이 방영됐다. 그리고 5일 평양에선 호텔 측이 남한 선수의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다고 한다. 스포츠는 이렇게 사람들을 풋풋하게 만들고 하나로 묶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작년 이맘때라면 남북을 오가는 스포츠 교류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정부가 국제대회라는 이유로 남북 선수들의 왕래를 승인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남북의 선수들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국제대회가 이렇게 동시에 열리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우연하게 교차원정 경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곧 출범할 차기 정부에 남북관계를 복원하라는 역사의 명령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2017 아이스하키 여자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북한 선수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눈길을 끌고 있다. 훈련할 때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있지만 3일 오후 휴식시간을 맞아 강릉 경포해변을 찾은 북한 선수들이 물에 발을 담그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에 앞서 북한 선수들은 한국-슬로베니아전을 참관할 때 콜라를 마시며 또래 선수들과 다름없이 편안하게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북한은 오는 6일 오후 9시 남북 대결을 벌인다. ㅣ연합뉴스

쿠베르탱 남작의 올림픽 창시 정신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스포츠는 사람 사이의 이해와 교류에 큰 몫을 해왔다. 스포츠는 승리를 목표로 하지만 페어 플레이를 통해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4년마다 열리는 하계·동계 올림픽을 비롯해 수많은 스포츠 행사를 통해 세계인들은 지역과 인종, 종교와 문화를 뛰어넘어 어울리고 화해한다.

스포츠가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 간 화해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미·중 ‘핑퐁 외교’다. 1971년 4월 미·중이 핑퐁 외교를 시작하더니, 1972년 2월 닉슨 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고 ‘미·중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미·중관계가 꾸준히 발전하면서, 1979년 1월1일 미·중은 드디어 수교했다. 한·중 수교에도 스포츠가 역할을 했다. 1984년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만난 한국의 안재형과 중국의 자오즈민은 국경과 이념을 넘어 ‘핑퐁 사랑’을 키웠고, 결혼을 했다. 핑퐁 사랑은 1992년 8월 한·중수교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동서독 간에도 스포츠 교류가 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56년 동계 올림픽 때 단일팀 성사 후 동서독은 총 6회에 걸쳐 단일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1964년 10월 도쿄 올림픽 때는 파견 선수단이 총 376명으로 일본, 미국, 소련에 이어 4번째로 규모가 컸다. 1972년 동서독은 기본조약 체결 후 1973년 6월에 스포츠 교류 확대를 위한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1989년에는 7개 조항에 걸친 스포츠 교류 의정서도 합의했다. 1990년 10월 동서독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됐는데, 스포츠 교류가 경제 교류·협력 못지않게 통일의 인프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달 출범할 차기 정부는 남북관계를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처럼 끌고 가지는 않을 것 같다.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조치들이 나오겠지만, 대뜸 당국 간 회담부터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화합과 소통의 기능을 갖고 있는 스포츠 교류를 먼저 띄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동안 서울시는 1929년에 시작된 경평 축구의 전통을 살리고자 서울·평양 축구 경기를 치르고자 노력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불허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준비는 많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 정부 출범 후 상징성이 큰 서울·평양 축구 경기를 제안하고, 정부는 그걸 승인하는 식으로 남북관계 복원의 첫 단추를 끼우는 것도 모양이 좋을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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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국을 지나면서 ‘우리’는 박근혜 세력은 단죄하면서,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작동방식에 대한 질문은 혹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 혹은 촛불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이런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다. 8 대 0. 그러나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통합진보당의 해산에 대해서 동의했던 법관들이다.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헌재가 박근혜 탄핵 하나로 헌법질서의 수호자로 등극했다. 이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또 결정 주문은 8개의 탄핵사유 중에서 단 한가지, 즉 재벌을 압박하여 뇌물을 받아 자신의 이익을 취했다는 점만을 전적으로 인정했다. 뇌물을 준 재벌들은 졸지에 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으로부터 탄압받는 피해자로 둔갑했고, 심지어 기업 경영활동의 자유 훼손이 탄핵인용의 주요 사유다. 이 ‘기업의 경영활동의 자유’가 헌법상의 또 다른 권리인 노동권을 짓밟고 기업의 부당노동행위를 폭넓게 인정해주는 무기로 작동하는 것은 헌재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헌법해석조차도 균형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다.

제주 다랑쉬굴은 4·3 사건 당시 주민 11명이 집단희생을 당한 곳이지만 현재 안내판만 있을 뿐 입구는 수풀에 가려 흔적도 찾기 힘들다. 박미라 기자

화북동에 있는 곤을동도 군인들에 의해 마을 주민이 사살되고 집이 불타 집터와 돌담만 남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박미라 기자

촛불 속에서도 한국의 국가는 건재하다. 아니 더 튼튼해졌고 정당성을 새로 부여받았다. 바로 촛불들로부터. 법원은 갑자기 집회·시위의 보호자로 나섰고, 경찰은 갑자기 온순해졌으며, 검찰은 특검을 통해서 다시 살아났고, 법원은 헌법재판소를 통해 민주헌정질서의 최종적인 수호자로 재정의된다.

그러나 지난날에 비춰보면 이렇게도 된다.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지탱해온 정부는 황교안 체제를 통해서 전승되고 있다. 정치체제에 대해 권위주의, 군사독재 할 것 없이 합법성을 부여하는 입법들을 줄창 해오며 유지해온 입법권력도 힘을 받고 있다. 국가에 의한 양민학살마저 정당화하고, 스스로 사법살인을 자행하며 죄 없는 이들을 형장으로 보냈고, 제주 4·3항쟁에서 피를 묻혔던 사법권력도 그대로 온존하고 있다.

이 지점에 제주 4·3항쟁이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성격, 아니 나아가 그 탄생은 제주 4·3항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제주 4·3항쟁은 식민지 해방 이후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대한민국의 수립과정에서 맞물린 숙명 같은 사건이었다. 동시에 대한민국 존재의 정당성에 심각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군정 3년의 시공간에서 포스트 식민지 해방국가의 성격을 둘러싼 좌우의 투쟁과 민중적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당시 국가 탄생의 주요세력이 자행했던 극악무도한 탄압에 맞서 제주 민중들이 맞선 최후의 저항이기도 했다. 즉 제주 4·3항쟁은 체제를 둘러싼 저항이었고, 국가의 탄생을 두고 벌어졌던 전투이기도 했다.

제주학살은 바로 1947년 5·10 선거, 즉 미군정의 관리감독하에 남한만의 단독국가 구성을 위해 진행된 선거에 대한 반대시위에서 경찰총격으로 촉발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빨갱이 사냥’은 5·10 선거 후 1948년 수립된 ‘신생’ 대한민국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자행됐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는 2000년 발족한 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된 수만 1만4028명이고, 1950년 김용하 제주도지사 시절 도청 집계로 2만7719명이었다. 또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 180명, 경찰 140명,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단체원 등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수가 639명이었다.

결국 제주 4·3항쟁의 기억투쟁, 그리고 현재 제주 4·3항쟁이 이 나라에서 기억되는 방식은 이 나라의 정통성이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친미우익과 반공을 국시로 한 반공병영국가, 민주주의도 넘지 못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건국’ 정신. 주권자를 억압하고 군림해온 권위주의국가. 제주 4·3항쟁에서 드러난 한계는 한국 국가의 ‘초기조건’이 돼버렸고,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공고화됐다.

이제 4·3은 촛불에게도 묻는다. 너의 국가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다라고, 그렇게 국가는 탄생했고 그 역사는 단지 기억이 아니라 현재 국가의 작동방식이라고. 이제 “국가는 없었다”가 아니라 우리의 “국가는 무엇인가”를 질문하자. 촛불 이후 질문이 이렇게 될 때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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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 8년 전의 일이다. 연말에 업무상 일하던 사람들과 송년회 겸해서 회식을 했다. 한 해 수고했다며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고 있던 참에 연세도 많고, 지위도 높던 한 사람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바나나를 집어들면서, “이 바나나 어떻게 먹는지 알아요?”라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뭐지? 이 사람?’ 그 사람이 이전에도 회식 자리에서 이상한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기에 올 것이 왔다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그는 점점 농담의 수위를 높여갔다. 속에서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내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을 버티다, 그의 말을 끊어주길 기대했던 남자 동료들이 농익은 농담으로 화답하는 순간,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어허허험” 헛기침을 크게 하며 그의 말을 끊고, 거의 고함치듯 “그만하시죠!”라고 외쳤다. 나의 얼굴은 당혹스러움과 화로 벌개져 있었다. 당황한 그는 “겨…경미씨. 무슨 뜻인지 이해해요?”라고 되물었다. “중·고등학생들도 다 알죠. 지금 하신 말”이라고 대답했다. 일순간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내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 사람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고, 그의 농담에 화답했던 다른 사람들은 부끄러움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억지로 몇 마디를 나눈 후, 그는 먼저 일어나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급이 높은 사람인지라 다들 예의를 갖추기 위해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를 하자 문을 나서던 그가 뒤돌아서, “저…. 김 국장. 내가 음담패설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그냥 재밌자고 한 말입니다”라고 변명을 했다. “네”라고 웃으며 답했지만 눈으론 ‘당신, 음담패설 한 것 맞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이런저런 연구모임과 회의에서 그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날을 복기하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친한 사람들도 아닌 공적으로 만난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음담패설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테다. 그런데 그는 ‘너무 쉽게’ 음담패설을 시작했다.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몇 번을 생각한 끝에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제지당한 적이 없었구나.’ 그제야 자신의 농익은 농담을 이해하고 있느냐고 놀라 되묻던 그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일부러 화를 낼 때가 있다. 눈으로 ‘당신 지금 (인격이) 벌거벗은 상태예요’라고 말해줄 때가 있다. 그렇게 화를 낼 때마다 속이 후들거린다. 까칠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까, 조직에 적응 못하는 사람으로 찍히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며칠씩 잠을 잘 못 이룬다. 내가 화를 입었는데, 되레 화를 당할까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에 속이 상한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을 다시 떠올린다. 그 사람의 벌거벗은 인격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용기를 낸다. “그만하시죠”라고 당당히 그의 말을 끊어내도 괜찮다는 걸, 동료들에게 알게 해주고 싶어 힘을 낸다. ‘당신 나에게 고마워해야 돼요. 그렇지 않음 벌거벗은 채 온 동네를 돌아다녔을 텐데, 지금이라도 옷을 차려입게 되었으니 말이에요’라고 생각한다.

두려운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배운 민주주의 원리에 대해 떠올린다. 그와 나 사이 놓여 있는 직급의 차이는 사람의 높고 낮음이 아닌 주어진 역할의 차이일 뿐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민주시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덕목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마음을 다치지 않고 문제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로서가 아닌, 그에게 ‘동료 시민으로서 예의’를 갖춰주길 정중히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러 화를 낸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럼에도 화를 내야 할 일이 있으면 나는 또 화를 낼 것이다. 이상한 농담에 불편했던 나와, 원치 않음에도 그 농담에 화답해야 했던 동료들과,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르던 그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참, 그날 이후 그 사람은 옷을 차려입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김경미 정치발전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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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누구나 한번은 하는 경험이지 않을까 싶네요. 새로 오신 선생님을, 이웃 학교 학생을, 이름 모를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성장기에 필요한 경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짝사랑은 비극입니다.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으로 끙끙 앓다가 결국 저 사람은 내게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 각성은 충격적입니다.

미국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이 동아시아를 지나가며 남긴 여파가 꼭 초특급 태풍 같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말이죠. 여기저기에서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틸러슨 장관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만찬을 했지만 유독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틸러슨은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불렀지만,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로 지칭했습니다. 오바마 정부 때는 ‘핵심축’으로 불렸는데 말이죠. 결국 한국이 강등된 것은 아닌가, 트럼프 정부는 한·미동맹을 미·일동맹보다 더 낮게 보고 있지는 않나 걱정을 하고 있죠.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미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까, 관심이 적어지지 않을까 걱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15년 리퍼트 미국 대사 테러공격 이후 대응은 좋은 예입니다. 기괴한 부채춤 공연에서부터 엄마부대의 꽃바구니 시위 등 도가 지나친 반응이 이어졌죠. 정치인들의 병문안이 과도해 병원에서 이를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걱정을 넘어 버려짐에 대한 공포의 표출이었죠. 2017년 군가가 울려 퍼지는 태극기집회에서 엉뚱하게 등장한 성조기 또한 비슷한 원인에서 생긴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걱정은 온당한 것일까요? 트럼프 정부는 한국을 버리거나 최소한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닐까요?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북한을 “큰 걱정거리”로 보며 “새로운 제재 등 중대한 추가 조치들”을 강조한 것은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죠. 중국과 한국에서 큰 논란이 되는 사드도 오바마 정부 주도로 시작했습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한국을 ‘핵심축’으로 보았을 수 있지만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구상을 떠받드는 축이었죠. 중국의 전략적 위협을 견제하는 첨병으로 한국의 가치는 늘 비슷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른 것은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1994년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려 한 것은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기본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미국의 마음은 애초에 변한 것이 없으니 우리의 걱정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 걱정이 온당치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앞날이죠. 미국이 우리의 앞날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을 가져도, 애원해도, 무기를 사줘도 말이죠. 사실 미국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싸이가 잊혀 가면서 한국은 그냥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나라, 삼성과 현대의 나라 정도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북한 포대에 인질로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미국이 위협적인 발언만 해도 정국이 흔들린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격변하는 세계 정세에서 한반도의 안전을 모색하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죠.

놀라운 것은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한국 내 목소리입니다. 아무리 제한적 군사행동도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큰 나라의 외교부 장관인 윤병세는 “군사적 억제방안”까지 언급했습니다. 미국의 시각이 한국 지도자들에게 투영돼 있음을 알 수 있죠. 문제는 이런 정치 지도자가 윤병세 장관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선주자들의 입을 지켜봐야겠습니다.

짝사랑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을 따라 해보기도 합니다. 비슷한 옷도 입어보고 그 사람 단골집도 가봅니다.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진 듯하고 그만큼 흐뭇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짝사랑은 여전히 짝사랑으로 남습니다. 게다가 그런 노력과 공을 많이 들일수록 짝사랑의 결말은 더욱 비참하죠. 하지만 이런 짝사랑의 진실을 마주하기 힘든 것은 청소년뿐만은 아닌 듯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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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평범한 직장 생활자들도 일이 예상대로 처리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수립하는데,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이 탄핵심판이란 국가중대사를 앞두고 탄핵이 인용될 경우와 기각될 경우에 대비해 아무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탄핵 인용 이후 드러난 여러 정황과 보도를 살펴보면 대통령 참모진은 처음부터 탄핵 인용 가능성에 대해 보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책 없는 전 대통령과 참모진의 일사불란(一絲不亂)이 일으킨 분란(紛亂)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에 숨겨진 이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1년 6월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손꼽히는 소련 첩보원 조르게는 침공 9일 전에 이미 “독일이 6월22일 새벽에 9개 군 150개 사단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처칠과 루스벨트 역시 국경에 독일군이 집결 중이란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에 철저하게 패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 컸기에 어떤 경고나 정보도 믿지 않았다. 두 번째는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해 유능한 지휘관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 자리에 충성스럽지만 무능한 충견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선이 무너지고, 지상에 주기돼 있던 1200여대의 공군기가 파괴당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것은 전쟁이 터지고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히틀러 역시 암살 음모와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으로 군부의 병력 이동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1944년 6월6일 새벽, 15만6000여명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독일의 일선 사령관들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기갑사단의 이동이 필요했지만, 하필 그 시간에 히틀러는 관저에서 자고 있었다.

그의 잠을 깨우는 것이 두려웠던 참모진과 보좌관들은 그날 오전 11시까지 히틀러를 깨우지 못했다. 평소 자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깨우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쳤다. 히틀러가 잠에서 깨어나 보고를 받았을 때는 연합군이 이미 교두보를 확보한 뒤였다.

권위주의 체제의 문제는 단지 정치권력 집중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국민 개개인의 심리구조에 심대한 정신 병리현상을 초래하는 것이다. 권위주의 체제의 해악은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힘이 내부가 아니라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작은 배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랜 세월 이런 체제에 길들여진 사회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강자의 힘에 의해 지배되고 조율되는 마이크로 파시즘적인 일상을 조성한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권위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보다 약한 타인을 짓누르고 큰소리칠 때만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개인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만족하는 감정을 보람이라고 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보람이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외재적 가치,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권력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요동친다.

자신의 양심과 내면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야만 체제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선 자신의 주체성을 내려놓고 외부의 권력 변화에 성공적으로 편승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듯 보이지만 권위주의 체제란 외부에서 몰아치는 격랑으로부터 권력 자신을 보호하려는 보호본능이 그 본질일 수밖에 없기에 어떤 분란도, 실패의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지만, 이를 대화와 타협으로 수용하여 타당한 절차와 투명한 정책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제야말로 권위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존엄과 권위가 바로 서는 민주사회로 나아가야 할 때다.

전성원 | 황해문화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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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주문은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정문을 읽어 내려가는 이정미 권한대행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최고 통치자의 권력보다 헌법 수호의 가치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최종 확인했다. 그리고 그 주문의 반대편에 헌법을 위배하고, 수호할 의지도 없으며, 국민의 신임을 배신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침묵이 있다.

탄핵이 이루어지고 이틀 만에 박근혜는 헌재의 판결에 승복한다는 공식 입장 없이,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박근혜 지지자 중 3명이 헌재 앞에서 과격한 시위를 하다 목숨을 잃었고, 박사모 회원들은 헌재 재판관들을 향해 피의 보복을 선언했다. 지난 일요일 밤,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에 도착한 박근혜는 예상과 달리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민경욱 전 청와대 대변인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박근혜의 헌재 불복 의사를 대신 전했다. 삼성동 자택으로 간 다음 날, 소송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박근혜 탄핵의 일등공신(?) 김평우 변호사는 문전박대를 당했고, 대신 청와대에서 올림머리를 해주었던 미용실 아주머니가 자택으로 들어갔다. 아, 이 와중에도 올림머리를 해주어야 하는구나!

헤어 롤과 올림머리. 그것은 이정미와 박근혜의 현 상태를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이다. 판결 당일 날, 밤을 꼬박 새우고 머리 손질도 제대로 못한 채 그녀의 머리에 그대로 말린 채 있던 두 개의 분홍색 헤어 롤은 치장보다는 자기 일에 성실한 한 여성 재판관의 인간미의 징표가 되었다. 반면 세월호 재난의 7시간을 진상규명할 때, 세간의 입방아에 오른 박근혜의 올림머리는 재난의 시간도 어찌할 수 없는 컬트적 여왕 숭배의 징표가 되었다. 볼품없는 이정미의 헤어 롤은 헌법재판관이라는 권위 뒤에 감추어진 소소한 일상의 오브제였다. 반면 손질에 대략 50분이 걸린다는 박근혜의 올림머리는 평생 자기 어머니를 대리한 이미지 정치의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안 심리의 편집증의 표상이다. 헤어 롤과 올림머리라는 상반된 두 여성을 표상하는 헤어스타일에서 우리는 주권의 심판과 권력의 퇴행, 헌법의 가치와 통치의 무능이 마치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우화를 상상하게 된다.

이정미는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나온 그 다음 날 퇴임식을 가졌다. 헌법의 이름으로 박근혜를 유일하게 제압했던 이 여성의 퇴임식은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방을 뺀 그 다음 날 이루어져 더 극적이다. 이번에는 헤어 롤을 한 채 나타나지 않았다. 이정미는 퇴임사에서 한비자의 말을 빌려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정미는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어 여성으로는 최연소로 두 번째 헌재 재판관에 올랐다. 당시 그녀는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1979년 10·26사태를 보고, 수학교사에서 법률가로 꿈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숙명적으로 박정희의 딸이자, 유신정치의 최후 통치자 박근혜를 파면시키는 결정문을 낭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헤어 롤과 올림머리의 숙명은 법과 권력, 시민 주권과 유신 독재의 숙명을 대리한다. 헤어 롤은 혼자서 말 수 있다. 올림머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다. 헤어 롤과 올림머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일에 치여 차 안에서 말 수밖에 없었던 이정미의 헤어 롤과 스프레이와 핀으로 고정해 머리를 수직으로 올려 어머니와의 빙의를 기도하는 박근혜의 올림머리는 ‘소박한 워킹맘’과 ‘우울한 퀸’의 형상을 대비한다. 국민적 환호를 받으며 퇴임한 최연소 여성 재판관 이정미와 파면당하고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소환을 눈앞에 둔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피할 수 없었던 숙명. 그 숙명의 파노라마에서 ‘헤어 롤과 올림머리’는 탄핵이라는 위대한 대하 드라마에 가장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싶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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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탄핵심판이 막바지 단계로 접어든 지난 6일, 사드 발사대 등 일부 장비가 전격적으로 오산 미군기지에 들어왔다. 2월27일 롯데가 성주골프장을 사드 배치 부지로 국방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한 이후 사드 배치는 속도를 내었다. 그러자 탄핵 인용 당일인 10일,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과거 정부의 그릇된 외교안보 정책을 즉각 동결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한·미가 계획한 대로 가급적 2개월 안에 사드 배치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당초 금년 말로 예정되어 있던 사드 배치를 대선 예정일인 5월9일 이전에 끝내겠다는 뜻이다.

도대체 정부는 왜 사드 배치를 서두르는 것일까? 이렇게 서둘러 사드를 배치하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최소한 북핵을 방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은 ‘둘 다 아니다’이다. 무기체계로서 사드의 성능 자체가 신통치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북핵 문제 발생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않는 한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 북한의 6차 핵실험 징후가 포착되고 있지 않은가. 사드 배치는 남북 간 군비경쟁을 불러올 뿐이다. 더구나 사드 배치는 “북한은 핵보유국”이라는 김정은의 주장(2016년 5월 7차 노동당대회)에 손을 들어주는 결과가 된다. 탄핵당한 박근혜 정부가 화풀이하듯 사드 배치를 강행하고 떠나면 우리는 앞으로 더 이상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8일 경기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에 지난 6일 사드 발사대 2기와 일부 장비를 싣고 온 것으로 알려진 C-17 수송기(왼쪽)가 활주로에 서 있다. 이상훈 기자

임기가 두 달도 채 안 남은 현 정부가 이렇게 졸속으로 사드 배치를 서두르면 안된다. 차기 정부가 사드 문제를 합리적이고 원만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떠나야 그나마 후일 역사적 비난을 덜 받을 것이다. 그럼 정부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사드 문제를 두 달 후에 출범할 차기 정부로 넘긴다면 해법은 있는가? 이와 관련해 우리는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이 지난 2월7일의 세미나와 3월9일의 라디오 방송에서 제기한 사드 문제 해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월7일, 송 전 장관은 “사드와 북한의 핵·미사일을 묶어 해결하는 협상의 과정을 한국이 먼저 고안해야 한다”면서 “일차적으로는 중국이 북한으로부터 핵·미사일 실험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등 북핵 문제의 진전에 더 큰 역할과 책임을 지게 하고, 미국과는 사드 배치 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3월6일 밤 사드 발사대 일부 장비가 전격적으로 들어온 뒤인 9일, 송 전 장관은 “중국이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X밴드 레이더가 아직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점에 한국이 미·중에 명분을 주면서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런 계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미국도 중국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미·중에 명분을 주면서 사드 배치의 원인이 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앞장서서 풀어나가야 한다.

사드 문제에 대한 대선주자들의 입장은 제각각이다. 전면 반대하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수용하는 후보도 있다. 사드 문제를 차기 정부로 넘기라는 후보도 있다. 그런데 차기 정부로 넘기라는 후보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지는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장차 누가 사드 문제 해결책임을 맡게 될지는 모르지만, ‘핵-미사일-사드’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서 6자회담을 열도록 선도하면 사드 배치 문제 때문에 중국이 우리에게 가하는 경제보복부터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한·미동맹도 유지하면서 북핵 문제도 해결하는 1석3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사드 문제를 차기 정부로 넘겨 국민동의 절차도 밟고, 밖으로는 미·중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핵-미사일-사드 일괄 협상’을 하는 6자회담 개최를 선도해 나가면 북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이 방안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협상 병행’을 제안한 ‘왕이(王毅) 이니셔티브’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중국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보복도 중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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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민주주의란 것이 민의를 표현하기 전에 먼저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수준을 끝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더구나 과연 이것이 민주적인가? 민의와 상관없이 그 민의를 대표할 대리인들이 선정되는 것이. 무엇이 저들을 대선후보라고 정했는가? 여론조사? 지지율? 과연 그것이 민의를 얼마나 반영할까? 한국의 정치인 지지율 조사가 얼마나 그릇되고 조작되고 바람몰이용인지는 이미 지난 18대 대선에서 충분히 폭로된 바 있다.

결국 대의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선출된 자들(the elected) 가운데 고르기 게임이다. 즉 ‘자격 갖춘 자들’(the elite) 중에서 고르는 정치게임. 1987년 헌법으로 재개된 대통령 직선제도 마찬가지다. 내 주권은 선거일과 선거일을 앞둔 얼마 동안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나는 내가 원하는 후보감이 없는 것도 참아내야 하고,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도 잊어야 한다. 지금도 이른바 주권자들은, 어느새 촛불 든 자발적이고 다양하며 역동적인 시민들에서 촛불 든 방청객이 되고 있다. 주말마다 촛불 들고 광화문 콘서트에 모이는 관중들. 일부에서 제도권과 촛불권력, 혹은 의회권력과 시민권력의 관계를 두고 ‘이중권력’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국회와 사법권력, 그리고 촛불권력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시너지효과를 내야 한다는 규범적인 언명에 불과하다. 왜 규범적이냐면? 현실의 정치사를 보면,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정치, 아니면 의회권력과 ‘민중권력’, 지금은 또 이름을 바꿔 의회권력과 ‘시민권력’이라는 양대 정치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를 맺거나, 양자가 유지 존속하면서 상호 성장한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양자는 대립 혹은 경쟁적인 동원의 관계다. 이것은 사회운동론이 주로 규명해온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1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참가자가 노란 리본이 깃봉에 달린 태극기를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리고 이 점이 더 중요한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바로 양자 동원체제의 효과나 작동기제 탓이 아니라 그들이 터를 두고 있는 민주주의의 성격 탓이라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를 거세하면서 의회민주주의라는, 한때는 반민주적 장치로 불렸던 정당정치에 기초한 대의제를 유일한 민주주의로 만들어낸 정치체제다. 그렇게 자유주의를 민주주의가 안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지금 의회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 광장권력과 제도정치의 시너지와 이중권력 상태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테제이며, 혹은 광장권력을 통해 의회권력을 장악하거나 의회권력으로 진출하려는 욕망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다. 그래야 대중은 스스로 주권자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동원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동원은 선거로 이어주는 동력이고, 선거는 대중의 주권을 제도적 대리자들의 대의정치로 전화시키고, 대중은 다시 장외로 퇴출되거나 아니면 제도화된다. 벌써부터 정권교체 이후 ‘대중’의 동원이 불러올 혼란과 환멸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그렇다면 촛불 이후에 올 것들은 무엇일까? 여러 얘기가 가능하겠지만 미국의 오큐파이운동에 대한 지젝의 인용으로 마무리하련다.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길로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유쾌한 순간을 맞고 있지만, 축제를 여는 데는 그렇게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중요한 건 축제가 열린 그 다음날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언가 변화돼 있을까요?”

지금 특검의 마지막 브리핑에 귀를 쫑긋하고, 다음주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여부로 세상을 행과 불행으로 나누고자 한다면 당신은 많이 불행하고 자괴감에 빠질 것이다. 환멸과 희망은 한 끗 차이다. 어느 쪽으로 풀썩 넘어지는가, 아니 풀썩 넘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버틸 것인가? 촛불이 촛농으로 흘러내려 지저분한 얼룩이 되지 않으려면 촛불은 버텨야 한다. 투표함이 아니라 이 광장에서. 그리고 나아가야 한다. 99%가 사는 길은 법관의 판결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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