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에게도 근심이 있습니까?” 자로의 질문에 공자는 답했다. “없다. 군자는 벼슬을 얻기 전에는 뜻을 즐기고, 얻고 나서는 다스림을 즐긴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즐거울 뿐 근심할 날이 없다. 소인은 그렇지 않다. 벼슬을 얻기 전에는 못 얻으면 어쩌나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으면 어쩌나 근심한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근심할 뿐 즐거운 날이 없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말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홍계희는 62세 되던 해 봄, 이조판서의 벼슬을 받았으나 극력 사양하고 여러 번에 걸친 영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영조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해임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홍계희는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기쁨의 시를 지었다. 여러 동료들 역시 축하하며 화답하는 시를 보내와서, 관직에서 해임된 기쁨을 적은 시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홍계희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영조는 그 뒤로도 줄기차게 여러 벼슬을 내렸고, 더 이상은 사직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홍계희는 앞서 지은 시들을 모아 <해관지희첩(解官志喜帖)>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벼슬살이로 인한 근심이 있을 때마다 이 기쁨의 시들로 위안을 삼으려는 뜻이다.

우리의 기쁨은 대개 무언가 바라던 것을 손에 얻었을 때 주어지지만, 문제는 그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얻기 전에는 없어서는 안될 것처럼 노심초사 근심하던 대상임에도, 막상 내 것이 되고 보면 그 기쁨도 잠시뿐, 마치 원래부터 나에게 있던 것처럼 당연시한다. 그러고는 점차 그것이 없는 삶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 근심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즐거워하며 뜻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벼슬의 유무에 따라 기쁨과 근심이 바뀔 일도 없겠지만, 이런 경지에 오르기란 쉽지 않다. 홍계희는 그러나 소인과는 다른 제3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품은 뜻은, 고향에 돌아가 서책과 거문고, 바둑판, 술 한 병을 곁에 두고 늙어가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벼슬살이는 근심이지만, 물러남의 기쁨을 상상하며 그것을 적은 시를 때때로 꺼내볼 수 있음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가진 것의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는 소인으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가지지 못한 것을 즐거워하는 방법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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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있으면 생각나고, 좋은 글을 읽으면 생각나고, 의논할 일이 생기면 생각나고, 네 또래 젊은이를 마주치면 생각나고, 멋진 자연을 만나면 생각나고, 바람 맑고 달 밝으면 생각난다. 이렇게 네 생각이 떠나지 않는데도 나는 배고프면 밥을 찾고 추우면 옷을 찾고 아프면 약을 찾곤 한다. 내가 어쩌면 이리도 무딜 수 있을까?” 조선시대 문인 김창협이 아들을 잃은 지 1년, 상복을 벗어야 하는 날에 지은 제문이다. 망자와의 관계에 따라 정해진 상기(喪期)를 강요하는 유교에 대한 비판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어떤 경우 상기는, 살아남은 자를 위한 제도이기도 하다.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1년이라는 상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상복을 도대체 언제 벗을 수 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날로부터 1315일. 참 먼 길을 돌아 미수습자 장례까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가방에 달고 다니는 조그만 노란 리본을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가족이 모욕당하는 현실에 분노하던 시기는 지나갔고, 어처구니없는 논리와 속임수로 진상을 은폐하려는 이들의 목소리도 잦아들었으며, 촛불시민은 정권을 교체했다. 그러니 이제 상복을 벗듯이 리본을 떼어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걸까.

그런데 과연 변했는가? 안전은 전혀 아랑곳없이 그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고 바다로 나설 수 있도록 조장하고 방관하며 낄낄대던 돈의 논리들은 무력화되었는가? 불행한 사고가 사회적 참사로 이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온갖 비리와 협잡들을 뿌리 뽑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는가? 엄청난 공공의 비용과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재해로부터 안전한 시설을 마련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냈는가? 이제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삼는 나라에 살고 있는가?

근래 우리 사회를 바꾼 힘이 공동의 슬픔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슬픔에 계속 빠져 있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 낱낱의 기억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바꾸어나가야 할 시기다. 김창협은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손상시키지 말고 이제 그만 생각에서 아이를 놓아버리라는 주위의 권유에, “그렇다고 어떻게 생각까지 안 할 수야 있겠느냐”고 나직이 반문한다. 김창협보다 훨씬 무딘 나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자신이 없다. 여전히 리본을 떼어내지 못하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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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우이(執牛耳), ‘쇠귀를 잡다’라는 말이 있다. 춘추시대 제후들은 맹약을 체결할 때 소를 잡아 그 피를 돌려가며 입술에 바르는 삽혈의식을 거행했다. 맹약을 어길 경우 그 소처럼 피를 흘리며 죽어도 좋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소의 귀를 잘라 피를 받고 쟁반 위에 올려놓으면 맹약을 주도한 이가 가장 먼저 쇠귀가 든 쟁반을 잡는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실권을 장악한 맹주가 되는 것을 두고 쇠귀를 잡는다고 표현해 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런데 왜 하필 귀일까? 소의 상징은 역시 뿔이니, 쇠뿔을 도려내어 피를 흘리는 퍼포먼스가 더 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18세기 문인 홍양호는 이런 의문을 던지고 추정을 이어간다. 단단하게 위를 향해 있어서 힘으로 들이받기를 능사로 삼는 뿔은, 언제고 더 강한 존재를 만나면 꺾이고 만다. 그러나 부드럽게 아래로 드리운 귀는 남의 말 듣기를 본분으로 삼고 힘보다 지혜에 의존하므로 오래 갈 수 있다. 춘추시대의 패자(패者)들 역시 부드러움과 지혜로 장기적인 승리를 도모했기에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뿔이 없다면 귀는 힘을 지닐 수 없다. 춘추시대 패자들은 절치부심 실력을 다져 이미 남을 제압할 만한 뿔을 지닌 이들이었다. 강력한 무위를 갖추었기에 그들의 포용과 관대함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홍양호는 자신이 사는 우이동(牛耳洞)이 삼각산(三角山) 아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험준하게 솟은 쇠뿔 같은 산이 있기에 텅 비어 만물을 품을 수 있는 쇠귀 같은 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홍양호는, 멀리까지 복속시키는 무위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온유함을 겸비한 군자, 그 삶의 지향을 떠올린다.

강한 나라를 위한 염원으로 강한 지도자가 각광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무소불위의 힘을 믿고 여기저기 뿔을 들이미는 이를 상대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외교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힘의 불균형을 감내한 채 북핵과 FTA 등의 현안에서 실리와 명분을 챙기는 접점을 찾기란 실로 지난해 보인다. 시간을 두고 쇠뿔과 쇠귀를 겸비해 가는 일, 미련해 보이지만 다른 길은 없다. 여전히 경청과 설득을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오래가는 지도자의 미덕이다. 강하기만 한 것은 결국 꺾이고 만다. 이 역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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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고전에는 벗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다. <논어>와 <사기> 이래 진정한 벗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와 사례들이 무수히 제시되어 왔으며, 성어로 널리 알려진 것만 해도 적지 않다. 진정한 벗에 대한 가장 오래된 소망 가운데 하나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늘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절망해 온 셈이다. 남들이 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크고 작은 관계들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자신의 금(琴) 연주에 담긴 마음을 유일하게 읽을 줄 알았던 종자기가 죽자 금의 현을 끊어버렸다는 백아의 이야기가 지음(知音), 지기(知己)의 유래로 유명하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라는 관중의 고백은 더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부러움을 주어 왔다. 동업하면서 더 많은 이득을 취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나, 전쟁터에서 패하고 비겁하게 도망갔을 때, 주군과 동료의 죽음에도 혼자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했을 때조차도, 모든 이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끝까지 나를 믿고 변호해 주는 친구. 그런 친구를 가진 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지기지우를 가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19세기 역관 변종운은 <지기설(知己說)>이라는 글에서, 세상에 얼굴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마음이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줄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포숙아나 종자기라 하더라도 특정한 경험과 분야 안에서 관중과 백아를 알아준 것일 뿐,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다 아는 지기지우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너무도 나약하기에,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기지우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상처를 받는 일도 적지 않다. 변종운은 나를 알아줄 이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가 나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대면하고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앎은 얕은 채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곤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나 자신을 바로 알고 그 모습 그대로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 내가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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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호환(虎患)이 끊이지 않던 조선시대에도, 도성에 사는 일반인이 직접 호랑이를 보기란 흔한 일이 아니었다. 1741년 어느 날, 서울 정동의 민가에 호랑이 사체가 운반된다고 해서 구경꾼들이 운집하는 일이 있었다. 이용휴 집안에서 사냥꾼에게 후한 값을 치르고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런데 마당에 눕혀놓은 호랑이를 이리저리 살펴본 이용휴는 적잖이 실망하고 만다. 맹수다운 이빨과 발톱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상상했던 것만큼 괴기스러운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그리던 호랑이가 그렇게나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던 것은, 책이나 그림을 통해 전해진 이미지 때문이었다. 이용휴는 말한다. “책에 실린 그 현명하고 뛰어나다는 인물들 중에도 이 호랑이 같은 경우가 많겠군.”

대단한 이미지로 신화화된 이들도 막상 한 꺼풀 벗겨보면 보통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심각한 허물이 드러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왜곡되거나 일부만 과장된 이미지로 인해 부정적으로 매도된 인물의 경우도 역으로 마찬가지다. 온갖 매체의 발달로 정보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실상과 이미지의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나아가 그 정보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널리 유포된다면, 게다가 거기에 국가권력이 개입할 때,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파괴력을 지닌다.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나서야 판단할 수는 없다. 정치는 물론 사회관계와 경제생활 곳곳에 넘쳐나는 이미지들에 눈을 감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주어진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실과 허는 어디에 있는지 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를 놓아버린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 이미지에 속수무책 속아 넘어가거나 심지어 그로 인한 폭력에 동참하게 될 수도 있다.

이미지의 진실성을 알아보는 데에 특별한 안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내 눈을 가리는 무언가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무시무시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세속의 호랑이 그림을 보여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개들이 호랑이의 본모습을 진솔하게 묘사한 낡은 그림을 보고는 벌벌 떨며 도망가더라는 일화를 소개하며, 이용휴는 묻는다. “저 개들도 속일 수 없거늘, 사람이 가짜 이미지에 현혹되어 그저 휩쓸려 떠들어대기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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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면 얻을 수 있고 버려두면 잃게 되는 것들이 있다. 사랑, 정의, 지혜 같은 내면의 가치들이다. 이런 것은 구하면 구할수록 유익하지만 당장 드러나지 않는다고 버려두면 영영 그 길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반면에 구할 때 그것이 정당한지 늘 되물어야 하고 얻는 데에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재력, 지위, 명망처럼 남들이 볼 때 나를 규정하는 외면의 가치들이다. 맹자의 말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8세기 조선의 문인 황경원은 어느 날 아침, 그 전날 시행된 과거시험에 왜 응시하지 않았냐는 지인의 핀잔을 들었다. 

몸이 아파서 그랬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뭔가 숨기는 것 같은 찜찜함에 해명의 편지를 쓴다. 그 이전 시험에는 정말 몸이 아파 응시하지 못했는데, 그 시험을 관장한 대제학 이덕수가 자신을 천거할 생각이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사실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번 시험도 이덕수가 관장하는데 병도 나았으니 좋은 기회라며 응시를 권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황경원이 응시하지 않은 이유였다.

황경원은 이덕수와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는 사이였다. 황경원의 문장을 읽어본 이덕수가 그 재능을 인정하여 높은 자리에 천거할 뜻을 가지게 된 것뿐이다. 황경원이 청탁을 한 것도 아니고 이덕수가 부정하게 천거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경원은, 결정권을 쥔 상대가 자신을 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응시하는 것 자체가 떳떳하지 않다고 여겼다. 과거시험은 내면이 아니라 외면의 가치를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하는 방법이 정당한지를 철저하게 따져야 마땅하다. 천거될 실력이라면 이덕수가 없어도 천거될 것이므로 그의 의도를 알면서 굳이 이번에 구할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때라 해서 청탁과 부정이 자행되지 않는 군자들의 시대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외면의 가치들을 향한 욕망에 휘둘리는 것은, 별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만은 구하고 지키겠다는 최소한의 무엇이라도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황경원은 편지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5대째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가난에 시달리는 저의 집안을 생각해주시는 마음 잘 압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바꿀 수 없는 내면의 소신이 있기에 드리는 말씀이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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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나라는 고대 중국 남방에 있던 나라다. 그래서 적월북원(適越北轅), 즉 월나라로 가면서 수레 방향을 북쪽으로 돌린다는 말은, 목적과 전혀 상반되는 행위를 비유한다. 허균은 잘 알려진 <유재론(遺才論)>에서, 온갖 이유로 길을 막아놓고서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상황을 통렬히 지적하는 말로 이를 사용하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오늘날 사람을 선발할 때 어머니가 천첩이거나 개가한 과부가 아닌지를 따지지는 않으니 허균의 시대보다 더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그보다 훨씬 많은 조건들이 인재 선발의 기준으로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신 지역과 학벌, 정치 성향과 과거 전력 등으로 장벽을 쌓아두고, 이런저런 은원(恩怨) 관계로 얽힌 제한된 인맥 안에서 선발하려다 보면 인재가 없다는 한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새 정부의 인사 검증이 연달아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전 정부의 참으로 편협한 인력풀에 황당했던 기억이 오래지 않은데, 새 정부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이른바 5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깨끗한 인재를 고르다 보니 선발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해명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말 각자의 분야에서 책임 있게 일해 온 능력자들이 우리나라에 이렇게까지 없으리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특히 과학계와 문화계의 인사에는 무지 혹은 의도된 왜곡이 개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다. 다시 내려진 대통령의 인사시스템 개선 지시가 유효하려면, 알게 모르게 형성된 장벽과 인맥은 없는지 냉철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통치자의 가장 큰 덕목은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데에 있다. 시골구석이나 말단 병사, 혹은 항복한 적장이나 도둑 무리, 창고 수리공 등에서 탁월한 인재를 발탁했다는 그 옛날 성군들의 이야기를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이 시대 각 분야의 상식적이고 건강한 인재들이 폭넓게 검토될 수 있는 인사시스템의 구성이 정말 중요하다. 허균의 일갈처럼, 하늘이 준 인재를 버린다면 이는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늘을 거역하고 온전할 수 있는 통치자는 없다. 내달리기에 앞서서 겸허하게 수레의 방향을 점검할 때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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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에 실려 전하는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환하게 빛나는 저 꽃, 언덕과 습지에 피어 있네. 급히 가는 많은 일행, 이르지 못할까 늘 걱정이라네.”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나라를 대신하여 사행을 가면서 혹여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지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담은 시로 해석되어 왔다. 다음 구절에는 이국땅을 달리고 달려서 두루 묻고 알아보리라는 다짐이 이어진다.

19세기 말의 문장가 이건창은 23세 젊은 나이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 사행을 가게 된 이가 전송의 글을 부탁하자 그는 대뜸 부끄러움을 떠올린다. 나름대로 외교 응대에 필요한 학식과 문장력이 남다르다는 자부심과 포부를 가지고 자청하여 갔던 사행이었지만, 정작 사행 길에 겪고 행한 일들은 부끄러운 탄식의 연속이었다. 전송의 글에는 대개 권면을 담게 마련인데 자신이 써줄 수 있는 것은 부끄러움뿐이고, 어찌 보면 부끄러움이야말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권면이라고 하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건창의 부끄러움은 자신이 뜻만 높았지 실무에는 능하지 못함을 뼈저리게 실감한 데서 온 것이었다. 사행을 지원하는 일행의 기강이 너무도 해이하고 문란했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으며, 말몰이꾼과 역관에 의존해서 얻을 수 있는 견문이란 지극히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들뿐이었다. 타국 지식인들과의 교류 역시 짧은 기간에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상식적인 비전으로 출발해서 백일을 맞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인선 및 정책 추진 과정에서 기대가 우려로 바뀔 조짐이 보인다. 대다수 국민의 지지가 만들어준 장막 속에서 집권세력 내부의 도를 넘은 영향력 행세가 있지는 않은지, 제한된 인력풀로 인해서 치우친 정보들이 독선적인 확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없는지, 길게 보고 초석을 놓아야 할 사안들에서 조급하게 성과를 내려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사행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르던 날,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이건창은 혼자 멍하니 ‘황황자화’의 시구를 떠올린다. 남들이 모두 이만하면 됐다며 분위기에 휩쓸려 기뻐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완전치 못함을 걱정하고 그로 인해 부끄러워하는 자세. 이것을 잃는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생길지 모른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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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상(弱喪)’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 나이에 타지에 나와 살다 보니 고향을 잃어버려서 돌아갈 길도 모르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디 장자(莊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려고 이 말을 했지만, 자신의 참모습을 잊고 헤매듯이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길 잃은 아이’의 막막함이 ‘귀향’의 아늑함과 대비되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표현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조선 문인 이식(李植)은 억지로 굽혀서 신기한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소나무를 보며 약상을 떠올린다. 외모를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처신을 약삭빠르게 하면서 남의 시선을 끌고 인기를 누리는 데에만 급급한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며 아등바등하는 일들 가운데 정작 ‘자신’은 없다는 사실이다. 위로 자라는 본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인위적인 조작에 길들다 보니 어느덧 아래로 향하고 옆으로 퍼지는 것이 자신의 본래 모습이기나 한 듯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소나무처럼, 남에게 잘 보이려는 데에만 신경을 쏟다가 정작 자신의 본래 모습은 까맣게 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아이가 사랑받는다. 그렇게 칭찬만 들으며 잘 자란 아이들이 학교가 요구하는 점수를 잘 받고 공적 기관과 사기업의 수요에 적합한 인재로 만들어진다. 유순하게 말 잘 듣는 가지들만으로 보기 좋게 모양을 내기 위해서는, 뻣뻣해서 길들여지지 않는 가지를 초장에 베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거세되고 손상되면서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진 소나무를 애지중지하던 사람들도, 숲속에서 자기 본성대로 우뚝하게 자라난 소나무를 보면 우러러보며 공경한다. 남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사람에 대해서는 평소 예뻐하다가도 어느 순간 업신여기는 일이 있지만, 남의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 사람을 보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고 공경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위인(爲人)이 아니라 위기(爲己)의 공부가 중요한 이유다. 애완의 대상이 될 것인가, 공경의 대상이 될 것인가.

이 쉽지 않은 결정과 실천 앞에서 만나는 공자의 말은 준엄하다. “자신의 참모습을 잃고도 살아 있다면 그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한 상태일 뿐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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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 전 일이다. 장교 교육을 받는 중에 부사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막 부임한 소위가 터줏대감 중사에게 휘둘려서 부대원 통솔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들을 듣던 터라, 부사관과는 거리를 두고 계급 서열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부사관의 경험을 인정해 주고 호감과 신뢰를 쌓으면 잘 협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은, 물정 모르는 이상론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는 이들에게 주는 조언에도 아전을 엄하게 단속하고 향반에게 정사를 맡기지 말라는 내용이 많았다. 지역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향반을 도적처럼, 아전을 원수처럼 여겨서 경계를 늦추지 말고 사소한 허물도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전과 향반도 자신의 마음과 같으리라고 믿으며 유순하게 다스리다가는, 결국 그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수령은 비난을 받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믿음과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은, 역시 물정 모르는 이상론에 불과한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18세기 초의 문인 조귀명은 이렇게 진단했다. 뜻이 아무리 좋고, 누가 뭐라 하든 그 뜻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속시킬 식견이 없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실패했다고 해서 뜻이 잘못되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이룰 만한 식견이 있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향반의 사람됨을 판단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식견, 아전의 사정과 필요를 파악하여 조치해줄 수 있는 식견이 있어야 그들을 향한 인간적인 신뢰가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저속한 데로 치닫기만 하고 좀처럼 진작되지 못하는 까닭은, 저마다 남들도 잘할 수 있는 무난한 것에만 힘쓸 뿐 비난 받을 여지가 있는 일은 피하기 때문이다. 비난을 무릅쓰고 나아가려면 자신의 뜻이 확고하고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뜻이 아무리 좋아도 구체적인 식견이 부족하면 그 길이 막힐 뿐 아니라 확신도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 시대, 어지럽게 뒤엉킨 여러 문제들을 선한 의도만으로 풀어갈 수는 없다. 비둘기의 순결함에 부디 뱀의 지혜가 더해지기를, 그럴 수 있는 분들이 중용되기를 소망한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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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근심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들의 평판 때문인 경우가 많다. 특히 각종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개인의 사적 영역까지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기 쉽게 된 오늘날, 평판은 사람을 쉽게 띄우기도 하고 급전직하로 내몰기도 한다. 평판을 관리하는 전략이 아무리 발전된다 해도 남들의 마음을 나의 기대에 맞게 끌어오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공자가 <논어>의 첫머리에서 군자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음’이겠는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고려시대 문인 이달충은 평판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잠언인 <애오잠(愛惡箴)>을 썼다. 그 서문에 등장하는 무시옹(無是翁)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 해도 나는 기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해도 나는 근심스럽지 않소.”

평판에 초탈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에 대해 평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쁨과 근심의 기준은 평가의 내용이 아니라 그 평가를 하는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자격은 인자(仁者)에게만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평을 받는다면 기쁜 일이지만, 나머지 경우들이 문제다. 분명히 좋은 사람인데 그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봄이 마땅하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평판을 받고도 상대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반면 좋지 않은 사람이 나를 좋지 않게 평하는 경우에는 개의치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오히려 기쁜 일이다. 아무에게도 욕을 듣지 않으면서 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정당당함과 자기합리화 사이의 긴장은 스스로 감당할 몫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하는 경우다. 좋은 평판 앞에서 한없이 무너져 내리기 쉬운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훌륭하다고 평한다고 해서 내가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고, 남이 나를 형편없다고 평한다고 해서 내가 형편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평판으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식상한 말 역시,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평판은 외부에서 주어지지만, 결국 문제의 원인과 해결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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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낳는 말, 꼬리 달린 개구리, 등에 삼 척 길이의 털이 난 거북이가 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예는 아무리 무수히 들어도 부족한 반면, 그런 예는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런데 그런 예가 있다. 이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버젓이 논의되고 있는 곳이 조선의 조정이고, 그곳을 한 발짝도 나서지 않으면서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기는 이가 바로 조선의 왕이다. <어우야담>의 저자로 알려진 유몽인이 중국으로 사신 가는 이에게 써준 글에 나오는 말이다.

유몽인이 보기에 조선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였다. 국론이 사흘도 못 가는데 왕통이 200년 동안 존속되고 있으며, 작은 법마저 무시하고 지키는 이 없는데 어딜 가나 삼강오륜의 교화로 가득하다. 기본적인 경제정책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데 어떻게든 먹고는 살며, 방위 체계도 변변치 않은데 국경은 늘 그대로다. 귀신의 술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안일하고 느슨하게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신랄한 풍자를 통해서 유몽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먹고사는 걱정을 넘어서 여유롭게 즐기는 삶과 아침저녁으로 입에 풀칠할 근심에 신음하며 연명하는 삶이 같을 수는 없다는 상식이다. 이빨 있고 발톱 있다고 살쾡이가 호랑이와 같은 것이 아니며, 비늘 있고 지느러미 있다고 미꾸라지나 용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이 그럴듯하게 유지된다고 해서 아무런 개선의 노력도 없이 그저 통상 하던 대로 잇속이나 챙기고 의리나 따지며 나라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하는 통치 행태에 대한 준열한 일갈이다.

일선 학교에서 교육의 이념과 과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노동 현장에서 노동기본권이 당연한 듯이 묵살되어도 아무튼 잘 굴러가는 나라가 있다. 법을 집행하는 조직에서 초법적 행태가 자행되고, 편의를 위해 절차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는 의식이 팽배한데도 큰 탈 없이 그럭저럭 유지되는 나라가 있다. 정치권력이 교체되었으니 엄청난 변화가 자연히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기며 이루어지는 부조리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깊이 성찰하고 함께 바꾸어갈 일이다. 있을 수 없는 나라는, 결국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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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야(野)에 있고 소인이 위(位)에 있으니 백성들이 군주를 버리고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재야(在野)라는 말이 일찍부터 ‘조정이 아닌 민간에 있음’이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정치뿐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재야’의 존재는 소중하다. 현실 권력을 쥐고 있지 않으므로 이해관계를 벗어나 옳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재야사학자’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나서면 정치가요, 물러나면 학자였던 조선시대 사대부와는 달리 정치와 학문이 각기 전문 영역으로 분화된 오늘날, 학문 분야에서 ‘재야’와 ‘재위’의 구분 기준은 무엇일까.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이들을 ‘재야’라고 불러야 할까? 그러나 그런 연구자들도 정작 ‘재야사학자’라고 불리는 어떤 이들의 국수주의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대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긴다. ‘재야’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애초에 ‘역사학’으로 부르기에 결격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으므로 학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발굴 유물이나 현전 사료를 대하기에 앞서 어떤 바람과 의도가 강하게 개입된다면 그것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찬란했어야만 하는’ 우리의 역사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러나 ‘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재구성하여 사실로 믿게 만들고 그러기 위해 기존 학계를 싸잡아 음해한다면, 게다가 거기에 정치적인 힘까지 실리게 된다면, 그 폐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공자는 세련된 표현은 잘 못하지만 속이 꽉 찬 사람을 가리켜서 야(野)하다고 했다. 거칠고 촌스럽지만 사심이 없다는 뜻이다. ‘재야’를 표방하던 이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현실 권력이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게 되면 사이비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제도권의 지독한 폐쇄성과 세뇌된 식민사관의 피해자라도 되는 듯이 행세하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존의 학계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적지 않고, 지식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더욱, 사심과 신념 때문에 토론이 불가능한 유사사학자가 아니라, 학문의 기반을 우직하게 성찰하는 진정한 재야사학자가 필요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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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멀리서 찾는 이들이 몰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 정작 그 근방에 사는 이들은 그런 풍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왜 그럴까? 늘 권력과 이익을 다투는 자리에 갇혀 살다 보니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슴을 쫓아가다 보면 주변의 산은 보이지 않고 황금을 움켜쥐려다 보면 옆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마음이 온통 어딘가에 쏠리면 다른 데에는 눈이 갈 겨를이 없는 법이다. 고려시대 문인 이제현의 설명이다.

아름다움이 지금 여기와는 아주 다르고 먼 어떤 곳에 있다는 생각은, 각박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때로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품고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려 들면서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을 무시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을 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의 일상 따위는 희생시켜도 좋다고 여기는 순간, 아름다움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아름다움 자체도 마음이 쏠리게 만드는 무엇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제현의 지인 가운데 권세와 부를 누릴 만한 지위에 있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외딴 산수 어딘가에 터를 잡고 근사한 누각을 지어 노니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던 시절, 그는 도심 주변 민가 즐비한 연못가에 누각을 지었다. 오가는 사람이 왁자지껄 이어지는 곳이어서, 다들 거기 제법 널찍하고 호젓한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곳을 발견한 그는 주춧돌 없이 기둥을 세우고 기와 대신 띠 풀을 덮고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로 서까래를 삼고, 벽은 도색 없이 그대로 두었다. 못에 핀 연꽃만이 누각을 감싸며 빛을 발한다.

잔잔한 물결 위로 낮게 퍼지는 물안개,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하는 푸른 산봉우리뿐 아니라, 이고 지고 타고 걸으며 오가는 이들, 뛰는 이, 쉬는 이, 부르고 돌아보는 이, 서서 이야기하는 이, 어른에게 달려가 인사하는 이들 역시 풍경의 일부다.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즐기는, 별것 아닌 것들의 아름다움.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을 회복하는 데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마음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돌아보며, 잠시 멈춰 서서 하늘 한 번 바라보며.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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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대토(守株待兎).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바보 이야기를 들어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옛 법을 고수하는 것을 비판하는 성어다.

한비자가 이 이야기를 꺼내며 겨냥한 대상은, 입만 열면 요순시대를 들먹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말만 하는 유가 지식인들이었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국가 간 경쟁이 극단적으로 펼쳐지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옛날 성군의 교화정치를 주장한 맹자는 그 전형 가운데 하나다. 눈앞에서 온갖 불의와 무도함이 자행되는데 그래도 사람의 성품은 누구나 선하다고 외치고, 전쟁에 패해 땅을 빼앗긴 군주에게 정치는 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려 드니, 말이 먹힐 리가 없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이런 맹자를 마냥 비웃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왕 앞에서 한 치도 굽히지 않고 서슬 퍼런 비판의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열정이다.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고 있음을 알면서도 타협은커녕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돌진하는 그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근본 동력은, 굶주림과 전쟁으로 버려지고 나뒹구는, 어디 호소할 데조차 없는 백성들, 눈에 밟히는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다. 적어도 맹자가 보기에 정치란, 그 아픔들에 함께 눈물 흘리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들 하나하나가 감동으로 회자되는 것을 보며 그사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망가져버렸는지, 누군가가 내걸었던 말인 ‘비정상의 정상화’가 실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산적한 문제들이 다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기에는 우리 앞의 현실이 너무나 어렵다. 경제, 외교, 안보, 교육, 복지, 환경 어느 것 하나 쉽게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분야가 없다. 더구나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막론하고 그 다양한 이들의 바람과 훈수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말이지 갈 길이 참 험하고 멀다.

그러나 새 대통령의 공식적인 첫 행보가 세월호 유가족과의 만남이었다는 데에서 희망을 본다. 스승의날, 단원고 기간제 교사들의 순직 처리를 지시하고 대통령이 직접 그 가족과 통화하여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흐른다. 울분과 원한의 눈물을 공감과 위로의 눈물로 바꾸는 데에서, 정치는 시작된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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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비유적인 표현인데다가 앞뒤 맥락 없이 남아 있어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지만, 대개 군자는 용도가 정해진 기구와는 달리 어떤 자리에서든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특정 기능에 국한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긴 하지만, 전문가가 각광받는 이 시대에 이것저것 두루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권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기(器)를 ‘고정되어 변할 수 없음’의 비유로 이해할 때 이 말의 의미가 좀 더 확장되어 다가온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칼로 두부 써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고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은 아닐 테니, 고정관념을 깨려는 역설적 수사로 봐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부드럽고 약함은 생명의 속성이고 단단하고 강함은 죽음의 속성이라는 그의 말과 조응해 보면 새로운 의미가 열린다. 노화의 특징 중 하나는 ‘굳어감’이고 그 끝은 죽은 육신의 뻣뻣함이다. 반면에 씨앗의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여린 떡잎, 완고한 마음을 녹이는 아기의 웃음처럼, 생명은 늘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살아 있음의 특징은 변화할 수 있음에 있다. 굳지 않은 진흙이라야 새로운 모양을 만들 수 있듯이, 생각도 감정도 말랑말랑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정치든, 더 이상 변화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면 희망이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 없이는 우리는 어느새 딱딱해질 수밖에 없다. 공부하는 사람을 뜻하는 유(儒)는 <설문해자>에 유(柔)로 풀이되어 있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움이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공부의 기본자세다.

옛 주석에서는 군자불기를 “제한된 길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를 감지하고 움직여서 대응하는 것이 군자의 덕이다”라고 설명했다. 기회주의적 임기응변이 아니라, 지향을 분명히 하되 자칫 경직되지 않도록 늘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신영복 선생님 말씀처럼, 바늘 끝이 떨리지 않고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침반이 아니다. 단단하고 강한 것들끼리 부딪쳐 서로 상처만 입히고 있는 이 시대에, 말랑말랑함의 생명력을 떠올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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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가벼운 형량으로 풀려나자 그를 한 해 넘게 추적하여 찔러 죽이고 자수한 형제가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정조는, 이들을 극찬하고 오히려 숨은 인재로 인정했다. 효성을 권장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충동적인 보복이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하고 오랜 시간 공력을 들여 복수를 완수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집요한 복수 이야기는 동서고금 많은 서사의 뼈대를 이루어 왔다. 자신을 죽도록 때리고 거적에 싸서 측간에 내던져 소변을 맞게 한 위제를 천신만고 끝에 죽여서 그 두개골로 요강을 만들어 썼다는 범저의 섬뜩한 이야기도 있다.

철저한 복수만이 원수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 길도 있다. 출세한 한신이 옛날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게 만든 동네 무뢰배를 찾아서 등용한 것을 작은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원한이 뿌리 깊고 지속적일 경우, 이는 인지상정을 초월한 종교적 신심이 아니고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질문에 공자는 “그럼 은혜는 무엇으로 갚을 건가? 원수는 ‘직(直)’으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지”라고 답했다. 이를 원수 역시 일반인과 똑같이 공평무사하게 대해야 한다고 풀이한다면, 원한은 마음속으로만 품고 복수는 일절 하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7세기 문인 김창협은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상황에서는 복수하고 부당한 상황에서는 복수하지 않는 길도 있다고 했다. 동한 때 인물인 갑훈은 소정화와 원한이 있었는데, 소정화가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뒤에 소정화가 감사의 인사를 올리려 하자 여전히 원수로 대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정당한 상황이라면 복수하는 것이 옳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직’의 의미라는 것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서운함과 용서하기 힘든 미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복수 이야기들에 우리가 여전히 열광하는 것도, 그것을 통해서나마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정국에서는 피아의 구분이 수시로 뒤바뀌며 숱한 정적(政敵)들을 낳는다. 원수를 은혜로 갚거나 원수 앞에서 공평무사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대의를 위한 자리에서만큼은 사적인 원한을 덮어두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협치가 절실한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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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여전히 관용의 자세다. 관용은 그저 착하기만 해서 자기주장 없이 뭐든지 다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다.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생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관계들이 많다. 나이, 직급, 학벌, 성별, 인종, 지역, 혹은 종교나 정치적 신념 등이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어내고 상대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관용이야말로 사회 곳곳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칼 포퍼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말했듯이,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관용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관용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자신을 냉철하게 성찰하고 상대의 입장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힘겨운 노력을 잠시라도 멈춘다면 누구나 불관용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촛불집회와 친박집회 사이에조차도, 상호 관용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관용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단호하게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 부족한 원인의 하나로 유교 전통의 폐해를 들 수도 있겠으나, 유교의 근본이념 가운데 하나인 ‘충서(忠恕)’는 나의 마음을 다해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관용과 닿아 있다. 관용이 ‘인정하기 힘든 다름을 참아냄’에서 비롯된 데 비해, 충서는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평화적 공존이라는 명분 아래 상호 불간섭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는 관용에 따뜻한 숨결을 더해줄 수 있는 것이 충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아픔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괴물에게 베풀 관용은 없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고 참사의 진상 조사를 악의적으로 방해하며 거짓 뉴스들을 양산해온 이들, 봉하마을까지 몰려가서 고인의 가족을 능멸하는 것도 모자라 유인물 안 받는다는 이유로 손녀 같은 학생의 따귀를 때리는 이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다면, 이 사회에 그나마 존재하는 관용들마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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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군주 환공이 노나라를 쳐서 대승하였다. 노나라 장공이 화친을 요청하여 협정의 자리에 마주 앉았는데, 갑자기 노나라 장수 조말이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며 빼앗은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어쩔 수 없이 승낙하자 조말은 순순히 비수를 내던졌다. 눈앞의 위험이 사라지자 분노한 환공은 땅을 돌려주기는커녕 조말을 당장 죽이려 들었다. 환공을 모시고 있던 관중이 말했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조말을 죽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신의를 저버린다면 천하의 지지를 잃고 말 것입니다.” 환공이 분을 삭이고 약속을 지키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들이 제나라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환공의 입장에서 생명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한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무력을 행사한다 해도 당장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관중은 ‘눈에 보이는 것’과 ‘자신이 가진 능력’만을 결정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뒤의 무엇’을 볼 것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눈앞의 이익보다 더 크고 지속적인 ‘이익’일 수도 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는 ‘가치’일 수도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 메르스 사태 등 근래 우리를 아프게 했던 일련의 일들은,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당장의 경제성만을 이유로 어마어마한 재앙의 가능성을 마냥 덮어두고 있는 원자력(핵)발전소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고, 비용 절감을 위해서라면 아파트 경비원을 언제든 집단 해고해도 된다는 사고방식 역시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이다. 입장의 차이에 따른 논란의 여지는 물론 있다. 그러나 논의의 장 자체가 눈앞의 이익에 의해 원천적으로 묵살되어버리는 것이 이 시대의 대세라는 점이 문제다. 보다 장기적인 이익이나 속 깊은 가치를 논하자는 제안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사치스러운 일에 불과한 것인가.

정작 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가장 큰 소리는 희성(希聲), 즉 들리지 않는 소리라고 했다. 이익에 밝다고 하는 우리의 눈과 귀는 따지고 보면 얼마나 제한적인가. 잠시 멈춰 서서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있는 것, 귀에 들리지 않지만 마음 기울여야 할 것들은 없는지 가만히 되물을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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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마포에는 뱀이 곧잘 출현해서 애를 먹이곤 했다. 거기 살던 어떤 이가, 하인이 큰 뱀 두 마리는 잡았다가 그냥 놓아주고 작은 뱀 두 마리는 잡아서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의아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묻자 하인이 대답했다. “큰 뱀은 영물이라서 죽였다가 앙갚음을 당할 수 있지만, 작은 뱀이야 그럴 염려가 없지 않습니까요.”

대답을 들은 주인은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크게 악한 자는 힘을 장악하고 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작게 악한 자만 큰 벌을 받는다. 크게 선한 자는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 버리는 반면 조그만 선행을 베푼 자는 알려져서 큰 상을 받는다. 잔인무도한 살인을 일삼은 도척은 멀쩡히 천수를 누리는데 좀도둑은 담을 넘다가 잡혀서 찢겨 죽으며, 공자 같은 이도 제대로 등용되지 못해 천하를 떠돌아다녔는데 그저 그런 선비들은 부귀공명을 누린다. 과연 누구를 상주고 누구를 벌해야 하는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8세기 후반의 작가 심익운이 지은 <크고 작음에 대하여>라는 짧은 글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문명을 떨쳤으나 당쟁에 연루되어 제주도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이 글을 옛날의 한 불우한 인물이 던진 삐딱한 불평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게 오늘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작은 악은 가차 없이 처벌되는데 정작 큰 악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처벌을 피해가는 기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하다. 선과 악의 가치만이 아니라 힘의 강하고 약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일갈은 지극히 약한 이를 위해 던졌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반인이었다면 진즉에 처벌되었을 명명백백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여전히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연일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강해서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을 것 같던 거대한 악이, 작고 약하지만 선량한 많은 이들의 연대로 만들어낸 힘에 의해서 그 흉측한 민낯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장면 역시 우리 눈앞에 있다. 이 땅에 냉혹하게 작동하는 힘의 원리에 굴복하여 이번에마저도 이 큰 악을 제대로 도려내지 못한다면, 앙갚음이 두려워 큰 뱀을 놓아준 하인처럼 뱀이 불쑥 나타날까봐 늘 노심초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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