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갑작스러운 사고는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한 질병은 예방하거나 관리할 수 있고 수명마저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부귀와 빈천이 정해져 있고 출세의 길 역시 하늘에 달렸다고 생각하던 과거와는 다르다. 여전히 한계는 많지만 그래도 평등이 당연한 가치로 여겨지고 개인의 노력에 의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회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지 굳이 운명을 상정해 두고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조선후기 문인 홍석주가 <운명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썼으니, 운명을 부인하려는 것이 요즘의 일만은 아니다. 인과응보와 무관해서 닥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다. 주나라 무왕이 큰 병에 들었다. 나라를 세운 지 4년, 이제 막 기틀을 잡아가야 하는 중차대한 때이다. 하늘의 뜻이 있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마땅한 일 앞에서, 그의 동생 주공은 자신이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어떤 일들은 인간의 노력이나 바람, 혹은 마땅한 이치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고 진행된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면, 거기에 예와 지금의 차이란 있을 수 없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런 운명을 인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 있어야 한다고 홍석주는 말한다.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복을 얻고 화를 피하기 위해 어떤 부끄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운명을 굳이 말할 것 없이 의롭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는 순간, 끝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으려면 운명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없다.

유난히 많은 죽음을 마주하는 여름이다. 운명에 맞닥뜨린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운명이 필요하다. 노력과 바람이 아무 소용없는 일을 두고도 자책하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겨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이르는 순간까지 온몸을 바칠 뿐, 성패의 결과는 제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던진 말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운명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걸어가는 삶이 아름답다. 그런 사람이 그립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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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일선에 등용된다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제자 자로의 질문에 공자는 “그야 당연히 이름부터 바로잡아야지!”라고 답했다. 공자 사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정명(正名)’의 출처다. 정책 하나에 많은 이들의 생사가 오갈 수 있는 것이 정치다. 그 긴박한 현안들을 앞에 두고 기껏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몽상가의 답변이다.

1725년 조덕린이라는 인물이 영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학문 수양, 인재 선발, 백성 보위에 최선을 다하고, 사심이 아닌 공공의 도리를 실현하라는 등의 열 가지 건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상소문으로 인해 조덕린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며, 사후에도 극심한 공격을 당하다가 결국 순조 3년인 1803년에 관작이 추탈되고 말았다. 치열한 정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영조에게 ‘정명’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왕에게 왕다워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정통성을 흔드는 의도로 비칠 여지가 있다. 반대파 인사들이 집요하게 문제 삼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정명’은 유가에서 보편적인 사상이지만 현실 권력을 상대로 했을 때는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이름이 정치권력에 의해 부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의사회 구현’을 표방한 정권이 얼마나 불의한 일을 자행했는지 이제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그 ‘정의’가 실질에 부합하지 않는 이름임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공자의 답변을 들은 자로가 “어이구, 선생님 정말 실정을 모르시네요”라고 답답해하며 내뱉자, 공자는 말했다. “이름을 바르게 해야 진의가 잘 전달되고, 진의가 통해야 정책이 성사되며, 그런 뒤에 교육문화가 융성하고 형벌이 적절하게 시행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공정’거래위원회 간부가 은퇴 후 대기업 자리를 보장받는 나라, 금융 ‘감독’원이 행정부와 이해당사자들에게 휘둘리는 나라, 사법 독립의 수장 ‘대법원장’이 재판을 거래했다는 의혹을 받는 나라다. 실질과 다른 이름들이 대놓고 횡행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런 사회에 필요한 것은 용감한 몽상가다.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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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계(六癸) 부적을 사용하면 한여름 땡볕 아래 두꺼운 가죽옷을 입고 화롯불 열 개를 둘러놓아도 뜨거운 줄 모르고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포박자(抱朴子)>에 실린 더위 피하는 방법이다. 이런 부적을 구할 길은 물론 없다. 그저 상상으로 더위를 달랠 뿐이다. 윤기라는 인물은 열두 살 때 지은 ‘고열(苦熱)’이라는 시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에 올라가 은하수를 기울여 불볕더위를 씻어낼 시원한 비를 뿌리고 싶다고 하였다. 많은 시인들이 폭염을 주제로 시를 지으면서 얼음 담긴 옥병이나 서늘한 바람과 이슬을 꿈꾸곤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상상으로만 더위를 피할 수 없다면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는 풍류를 즐기는 것도 방법이었다. 정약용은 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일을 시로 읊었다. 소나무 그늘 아래 활쏘기, 시원한 바람 맞으며 그네 타기, 왁자지껄 투호 겨루기, 돗자리에 앉아 내기 바둑 두기, 술잔 기울이며 연꽃 즐기기, 새벽 숲속의 매미소리 듣기, 비 오는 날 어려운 운자로 시 짓기, 모두 잠든 달밤에 시냇물에 발 담그기.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며칠째 폭염특보가 발효 중이고, 이 무더위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폭염이지만, 냉장고와 에어컨이 있어 옛사람들이 상상으로만 그렸던 얼음 옥병과 서늘한 바람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각종 레저 활동 역시 더 많은 이들에게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위를 이기기는커녕 여전히 더위에 쩔쩔매고 있다.

일본의 집중호우 피해지역에 다시 39도에 이르는 폭염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주말과 휴일 3일 동안 4만명의 자원봉사자가 복구 활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일면식 없는 이웃을 위해 폭염에 맞서 땀 흘리는 분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옛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역시 부채였다. 부채에 쓰인 청량한 글 역시 더위를 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가운데 “무더위는 혹독한 관리 떠나듯 물러가고, 맑은 바람이 정든 벗 찾아오듯 불어온다(大暑去酷吏, 淸風來故人)”는 두목(杜牧)의 시구가 유명하다. 생활 터전을 잃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에게 자원봉사자들만큼 시원한 바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날이 아무리 무더워도, 우리는 사람으로 인해 살아간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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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還穀)의 출납을 수령이 제멋대로 하는 데에서 온갖 간사한 짓이 나온다. 이는 백성을 위한 제도인데 정작 그로 인해서 가장 곤욕을 받는 이들이 백성이고, 수령들은 오히려 이를 치적으로 삼는다. 그대는 마을을 잠행할 때 먼저 장부의 허위 기재 여부와 입출의 공정성을 세세히 살피고 나서, 출두 이후 창고의 곡물을 낱낱이 대조 확인하여 가감 없이 보고하라.

1787년 정조가 황해도, 평안도에 파견한 암행어사 이곤수에게 내린 봉서(封書)의 일부다. 조선시대에는 사헌부에 감찰(監察)을 두어 관리들의 비위를 살피고 회계 감사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때로는 지방관의 비위를 조사하기 위해 감찰어사를 파견하기도 했는데, 후에 이 임무를 비밀리에 담당하게 된 것이 바로 암행어사다. 감찰 대상은 관리들이었다. 오늘날에도 감찰은 공무원의 위법 행위를 조사하고 징계 처분을 내리거나 수사 기관에 고발하는 역할 혹은 조직을 지칭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감찰하세요! 사찰하지 마시고.” 얼마 전 종영된 한 드라마에서, 과잉 진압으로 문제가 된 동료 순경의 사생활을 캐묻는 감찰반에게 같은 지구대 소속 순경이 던진 말이다. 감찰과 사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감찰은 합법이지만 사찰은 무조건 불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사상적인 동태를 조사하고 처리하는 일을 주로 맡아왔던 점 때문에 부정적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사찰(査察) 역시 경찰의 고유 직분이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 공직자인가 민간인인가, 방식이 적법인가 불법인가에 있다.

어떤 사찰이 직무범위 내에서 정상적이고 필수불가결하게 이루어졌는지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국군 기무사령부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을 조직적으로 사찰하고, 대법원장이 변호사협회 회장의 개인사를 사찰하는 일이 과연 적절했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기소 사유는, 국가정보원을 동원해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 등을 불법 사찰한 혐의다. 당시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우병우 수석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던 중이었다. 특별감찰관제는 대통령 측근의 권력형 비리를 척결하겠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으로 신설되었다. 그 임무에 충실한 감찰관을 사찰하여 옷을 벗기고야 만 것이다. 감찰마저 사찰로 누를 수 있다고 여긴, 농단의 민낯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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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때 이종영이라는 인물이 부령의 도호부사로 발령 받았다. 부령은 함경도 마천령 이북,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있다. 서울에서 2000리나 떨어져 있고 함경도 감사의 관아에서도 1000리나 떨어져 있다. 험준하고 궁벽한 땅이지만 그런 만큼 모든 것을 수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진귀한 산삼과 짐승 가죽을 불법으로 갹출하여 탐욕을 채우고 권세가에게 진상할 수 있으며, 감찰 기관이나 조정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극심한 착취에 시달리지만 하소연할 길조차 없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약용은 이종영의 부친인 이재의와 오랜 벗이었다. 새로운 관직을 받고 먼 길 떠나는 친구 아들을 위해서 정약용은 전송의 글을 써 주었는데, 그 첫머리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두려워해야 할 네 가지를 제시했다. 백성과 감찰기관, 조정, 그리고 하늘이다. 대부분의 관원들은 감찰기관과 조정만 두려워할 뿐, 백성과 하늘을 두려워할 줄은 모른다. 감찰기관과 조정이 먼 곳의 모든 관원들까지 제대로 관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들을 속이기는 쉽다. 그러나 백성과 하늘은 늘 목민관의 가까이에 있으므로 속일 수 없다. 목민관의 잘못된 처사와 태도 하나하나에 백성은 그저 원망할 수밖에 없다. 이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백성의 원망이 바로 하늘의 원망이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냥 우리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는 정도의 두려움이 아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그런 정도의 두려움이다.” 지난 1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때 대통령이 모두에 한 말이다. ‘두려움’을 강조하며 대통령이 보좌관과 내각에 주문한 세 가지는 유능함과 도덕성, 그리고 겸손한 태도였다.

행위를 의롭게 함으로써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을 자신도 두려워하는 것이 두려움의 출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친다면 상황과 기준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정약용이 권고한 두려움은, 마음을 올곧게 함으로써 남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까지도 자신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진정한 유능함과 도덕성, 겸손함은 그런 본질이 없이는 나올 수 없다. 대통령이 엄중하게 언급한 두려움의 무게가 얼마나 제대로 구현될지, 유권자 모두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볼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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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넘쳐나고 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선출될 자리가 4000여개. 등록한 후보는 9300여명에 이른다. 이 모든 후보들이 내거는 공약과 포스터, 현수막의 문구들, 연일 이어지는 거리 유세와 방송 토론 등에서 수많은 말들이 쏟아진다. 그들이 자신 있게 던지는 희망의 말들만 하나하나 듣노라면 우리 지역의 앞에 펼쳐진 꽃길의 향기에 취해 아찔할 정도다. 그러나 함께 터져 나오는 서로를 향한 부정과 비방의 말들이 다시금 귓전을 어지럽히며 우리를 흔든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말만으로 정치인을 판단할 수는 없다. 각종 정보와 이력, 공약의 실현 가능성, 윤리의식 등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의 말은 여전히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판단 근거이다. 아무리 세련된 홍보팀을 거느리고 있다 해도, 부각하고자 하는 초점과 무심코 내뱉는 언사에서 그 사람의 가치관과 식견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말을 판단할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먼 옛날 순자(荀子)가 제시한 기준을 소박하게 떠올려 본다. 훌륭한 이의 말은 포괄적으로 언급하면서도 디테일에 충실하다. 겸손하게 제시하는데 조리가 정연하다. 다듬지 않고 말하는데 듣다보면 가지런히 정리된다. 실질에 부합하는 올바른 명칭과 핵심을 드러내는 타당한 표현으로 비전을 밝히는 데에만 힘쓸 뿐, 구차하게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반면 어리석은 이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말하는데 그마저도 허술하다. 핏대를 세워 거칠게 따지고 들지만 조리는 없다. 끊임없이 말을 해대는데 도무지 정리가 안된다. 거창한 명칭으로 이목을 끌고 현란한 표현을 일삼곤 하지만, 정작 깊이 있는 비전은 없다. 바닥을 드러내는 데도 핵심은 보이지 않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과욕을 부려 보지만 아무런 실효도 명성도 얻지 못한다. 훌륭한 말은 쉽고 명료하며 안정감이 있지만, 어리석은 말은 그와 반대다.

내일모레면 등록 없이도 사전투표소 어디서나 투표가 가능하다. 투표하지 못할 핑계를 대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일곱 장 이상의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우왕좌왕하지 않으려면, 지역의 후보자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미리 찬찬히 살필 일이다. 정치는 말에서 드러나고, 삶은 정치로 좌우된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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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은 천하를 삼분하자는 항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때 휘하에 있던 괴철은 한신의 마음을 돌리고자 여러 차례 건의한 끝에 탄식한다. “공을 이루기는 어렵지만 무너지기는 쉬우며, 때를 얻기는 어렵지만 잃기는 쉽습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괴철이 요구한 것은 당시 초와 한의 정세, 이미 유방 밑에 있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한신의 공과 힘 등을 종합적으로 ‘숙려(熟慮)’하라는 것이었지만, 한신은 짧은 생각에 갇혀서 끝내 괴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교육부가 학교생활기록부의 신뢰도 제고 방안을 ‘정책숙려제’에 부친다고 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국가교육회의에서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역과 성, 연령 등을 안배하여 선정하는 시민참여단 400여명의 의견을 중심으로 개편 권고안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비전문가들에게 무작정 의견을 물어서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고, 공공성과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모형과 자료를 마련하고 여러 검증 과정을 거칠 예정이라고 한다.

도무지 답이 없다고들 하는 교육의 문제를 위해 모두가 나서서 신중하게 ‘숙려’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려’가 매우 ‘우려’되는 것은, 이런 물음들이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정작 그동안 교육정책을 세우고 수행해 온 전문가와 교사들의 경험과 의견이 묵살됨으로써 교육의 일관성이 훼손될 소지가 크지 않을까? 의제 선정과 제시 자료 작성 등의 과정을 전문가와 함께할 ‘이해관계자’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따라서 ‘숙려’의 방향성이 상당 부분 좌우될 텐데, 이에 대한 원칙 수립이 가능할까? 무작위 추출하여 참여 의사를 묻는 방식으로 시민참여단을 선정하는 방식이 올바른 공론을 끌어내는 데에 적절할까? 겨우 두 달 정도의 시간에 다양한 이견들을 수렴해서 개편 권고안에 넣을 만한 ‘공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숙려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한신은 결국 유방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허무한 최후를 맞는다. 숙려하지 않아서 놓친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문제는 숙려의 방식이다. 한신이 유방으로부터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무작위 추출한 군사들의 의견을 물었다면 온전한 숙려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교육의 문제다.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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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내린 너른 물에 황금 빛깔 넘실대고 바람 치는 봉우리엔 푸른 옥이 흩뿌리네. 서호를 서시에 견줄 만하구나. 강산이 끄는 흥취를 어이하리오.” 서거정이 양화나루에 배 띄우고 지은 시이다. 햇살에 빛나는 강물과 빗방울 날리는 봉우리가 펼쳐진 풍경을 멋지게 묘사했다. 서호를 춘추시대 미녀 서시(西施)에 견준 이는 소동파다. 서호의 경치를 즐기며 종일 술자리를 이어가는데, 그렇게 맑던 날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며 비가 쏟아진다. 좌중의 흥취가 깨지려는 때 소동파는 시를 읊는다. “맑은 날엔 물빛 넘실거려 아름답고, 비 오는 산의 뿌연 어둠도 장관이네. 서호를 서시에 견주어 보자면, 옅은 화장 짙은 화장 어느 때고 좋도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모처럼의 연휴, 제주도에 다녀왔다. 첫날 맑디맑은 하늘 아래 본 제주의 풍광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그러나 둘째 날은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창밖을 보며 실망과 걱정에 싸여 있을 때, 일행 중 한 분이 “오늘 같은 날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소동파의 이 시를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찾아간 큰엉 해안. 세찬 폭우를 맞으며 바라본 바다는 화장 전혀 안 한 서시의 성난 얼굴 같았지만, 그 역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어느 때고 좋도다”로 번역한 소동파 시의 마지막 구절 “총상의(總相宜)”는 특정한 조건에만 적절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그것대로 적절하다는 뜻이다. 늘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다. 좋은 날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궂은 날 거기에 맞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만들기란 쉽지 않다. 넉넉한 마음과 매인 데 없는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머리에 인용한 서거정의 시는 음풍농월에 그치지 않는다. 1476년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로서 정사 기순(祁順)의 시에 화운한 작품이다. 자연을 읊기는 했지만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긴장 속에 지은 것이다. 변화가 시작된 남북관계에 맑은 날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태롭더라도 가야만 하는 길, 살얼음을 밟듯 외줄을 타듯 조심스럽게 균형 잡으며 우선 가능한 분야의 교류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 할 것이다. 고착화된 관념과 제도들을 내려놓고 사안마다 거기에 맞는 적절함을 찾아가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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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임금의 대명사인 순(舜)은 큰 지혜를 지닌 인물로 일컬어진다. <중용>에서는 순의 큰 지혜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좋아하고 하찮은 말 하나도 신중히 살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사랑한 제자 안연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에게까지 질문하고, 많이 알면서도 조금밖에 모르는 이에게까지 질문한 인물로 기억된다. 공자 자신도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고 무시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묻고 배우는 일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선 시대 학자 김창협은 숙종을 모시고 경서를 강독하는 자리에서,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 왕을 경계하기 위해 순과 안연을 거론했다. 절실하게 사색하고 빠짐없이 따져보다 보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잘 알아서가 아니라 의문이 생기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이렇게 매일 강독을 이어가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엄중히 질책하였다. 김창협의 이 말로 인해 숙종은 비로소 전날 강독한 부분에 대해 연달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우리나라 교실에 질문이 별로 없다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의미 있는 개선의 시도들이 적잖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우수한 학생들이 질문에는 유독 미숙한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워낙 잘 만들어진 인터넷 강의를 골라듣는 데에 익숙해진 학생들이어서, 대학 강의가 취향과 필요에 따라 스킵이 되지 않아 불편을 느낀다는 말도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진지하게 경청하고 창의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 심각한 것은, 질문 없음이 단지 교육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질문은 학습효과를 높이고 소통능력을 기르는 수단을 넘어서,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과 부속품을 가르는 지점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때 생기는 것이 질문이고,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문학이다. 다가오는 세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리가 배운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은 세상일 것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배우는가보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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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 까불던 친구가 반장이 되더니 의젓해진다든가, 수줍음 많던 사람이 리더가 되어 남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말하게 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하곤 한다. 책임감이 마음가짐의 변화로 이어져 자리에 걸맞은 실력과 행동거지를 갖추려 노력하다 보면 숨어있던 능력이 계발되고 발휘될 수 있다. 여기에, 자리가 부여하는 좀 더 넓은 시야와 정보, 다양한 가용 자원 등을 잘 활용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반면에 “자리가 사람을 망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렇지 않던 사람이 어느 순간 도무지 소통을 모르고 독선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공공을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출발했다가 점차 사적인 권력의 화신이 되는 과정에, ‘자리’가 존재한다. 떠받드는 사람들에 둘러싸이게 되면 그들의 대접이 ‘나의 훌륭함’ 때문인지 ‘나의 자리’ 때문인지를 점점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대접받는 것만큼 쉽게 익숙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무명 시절의 항우와 유방이 각각 진시황의 성대한 행차를 구경했다. 기운 세기로 유명한 22세의 거구 항우와 가진 것 없이 유쾌하기만 한 시정잡배 유방이 보인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 나도 저 자리쯤은 한번 해봐야 할 텐데.” 그러나 결말은 매우 달랐다. 장수로서 최고의 능력과 과단성을 지닌 항우는 승승장구하여 패왕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결국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반면 그다지 장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유방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오히려 진화한다. 사람 많이 꼬이고 사람 좋아하는 천성이,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자 적절한 용인술로 빛을 발한 것이다.

권력에 취하면 뇌와 호르몬이 변화되어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실험 보고들이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동일한 조건에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자리는 사람을 만들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다. 관건은 성찰에 있다. 엄청난 자리를 만들고 지켜낸 유방보다 우리는 공자를 더 높게 기억한다. 내세울 만한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자신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았기에 공자는 만세의 사표로 살아 있다. 소왕(素王)이라는 자리가 그에게 어울리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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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벌써 30여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종교를 넘어서 감동을 주는 시이다. 생후 일주일 만에 뇌성마비가 발생하여 평생을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송명희 시인이 스무 살 무렵에 지었고, 이후 찬양으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작품 ‘나’의 일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8세기를 살다 간 조귀명이라는 문인이 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13세에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10세 전후 심각한 병을 앓기 시작한 이래, 평생 이런저런 질병에 심하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병과 함께 태어나 병과 함께 자랐다고 말하곤 했던 조귀명은, 남들은 활기차게 세상에 진출하는 23세 때 작은 서재에서 지내며 ‘병해(病解)’라는 글을 썼다.

부유한 집 아이는 좋은 음식을 주어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듯이,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기뻐할 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가 좋은 음식에 감동하는 것처럼, 병든 사람은 잠시나마 고통이 잦아들고 손발이 편안해지는 때가 되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져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이런 날, 바람 잔 저녁 혹은 새벽비 갠 아침에 지팡이 짚고 천천히 거닐면서 길 가에 핀 꽃이며 서쪽 뜨락에 뜬 달을 바라보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신선이 될 것만 같다. 글을 맺으며 조귀명 역시 이런 말로 자신을 위로한다. “나는 남들에게 없는 고통을 가졌지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 또한 가졌다.”

신앙에 의지해서든, 정신력을 발휘해서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어떻게든 견뎌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불행을 잠시 잊게 하는 마취제 같은 것이라면, 깨어났을 때 더 큰 고통이 엄습해 올지 모른다. 관건은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남이 가지지 못한 즐거움에 대한 자신만의 깨달음이 얼마나 진실하게 지속되는가에 달려 있다.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는 꽃과 달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누구나 불행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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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서지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중간만 가라”는 조언을 많이 듣곤 한다. 약자로 살아가기 위한 보신 전략으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때로 이것이 중용(中庸)의 지혜인 양 설파되는 것이 문제다. “적당히 해라. 사람이 중용을 알아야지.” 남들은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지는 이를 향해 던지는 이 한마디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용의 중은 가운데를 뜻하지만, 그 가운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가운데를 찾아가는 것이 중용이다. 잔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채우는 게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맥주잔이라면 가득 채워야 중용이지만, 소주잔을 가득 채우면 과하다고 할 것이다. 늘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사심 없이 말랑말랑한 유동성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용의 핵심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해야 한다.” 까마득한 옛날, 순 임금이 음악을 통한 교육을 명하면서 했다는 말이다. 이를 실현한 인물로 거론되는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정하고, 공손하면서도 평안하다”는 평을 들었다. “직이온(直而溫)”에서 “공이안(恭而安)”까지, 모두 ‘이(而)’를 사이에 두고 서로 모순되기 쉬운 덕목을 나열하였다. 두 덕목의 중간을 취하라고 하지 않았다. 둘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동시에 가지기 어려운 것을 동시에 요구하였으니,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이 버릴 수 없는 이상에 중용의 본질이 있다. 공자는 순 임금을 두고 “양 극단 가운데 어느 하나도 놓지 않고 동시에 고려하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칭송했다. 바로 중용의 정치이다.

극단의 논리가 횡행하는 세태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노사분규의 현장에서든, 미투 운동의 전선에서든, 안일하게 중도를 말하는 것은 상황을 호도하거나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상황마다 얽혀 있는 사정을 쉽사리 재단할 수는 없지만, 때로 무게 차이가 심한 경우에는 한쪽에 치우친 곳을 잡아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일시적인 쏠림이 판 자체의 평형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중심을 잡으려는 지속적 움직임을 멈춘 채 고정된 기준을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순간, 누구든 ‘꼰대’가 될 수 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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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자유는 동료인 자장을 두고 “어려운 일을 잘해내지만 아직 인(仁)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평했다. 자장은 재주가 뛰어나고 포부도 커서 남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어떻게든 해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높은 행실에 비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성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주희는 이를 성실하고 측달한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측달(惻달)은 한문에 자주 쓰이지만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어휘 가운데 하나다. 글자로는 매우 슬프다는 뜻이고, 오랜 출전인 &lt;예기&gt;에서도 어버이의 상을 당한 자식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어휘가 사용되어온 맥락을 알수록 슬픔으로만 번역하고 말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측달은 그저 슬픈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측달자애(惻달慈愛), 지성측달(至誠惻달) 등으로 확장되어 자신을 넘어 타인의 아픔에 대한 깊은 공감이 간절한 바람과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지점, 바로 인(仁)의 한 측면을 담은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仁)이란 부드럽다는 뜻이니, ‘불인(不仁)’은 부드럽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아픔과 가려움,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못하거나 뜸을 뜨고 침을 놓아도 감각이 없는 상태를 불인이라고 한다.” ‘불인’의 의미를 설명한 <동의보감>의 한 대목이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인(仁)을 ‘마음이 아픔에 마비되지 않음’으로 설명하곤 했다. ‘불인’의 반대편에 측달이 놓인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아픔을 지극하게 공감하는 데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마음이 시작된다.

불인의 끝은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죽음이다. 그러나 측달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병아리 솜털처럼 부드러운 생명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 봄이다. 동지가 지난 지 꽤 되었지만, 계절의 변화를 부쩍 느끼는 요즘 주역의 복괘(復卦)를 다시 떠올린다. 온 세상이 음일 때 양 하나가 땅 밑에서 서서히 그러나 뚜렷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얼어붙은 땅에서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려면 많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뜻한 도움이 없으면 꽃샘추위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 당위만 내세운 섣부른 행위는 오래가기 어렵다. 깊은 공감이야말로 의무를 자발로 만드는 힘이다. 측달과 사랑의 작은 실마리들이 곳곳에서 움터 오르는 봄을 소망한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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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한 500명의 대학생이 한 학기에 한 권의 고전을 함께 읽는다. 이번 학기의 고전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특강, 전문가 해설과 함께하는 영화 상영이 기획되고, 자발적 세미나와 원문 강독 모임에 전문 인력과 진행 경비가 지원된다. 아우슈비츠는 물론, 캄보디아와 베트남, 제주도와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위안부’ 역사관 등을 찾아서, ‘악의 평범성’이 역사가 되어 버린 현장을 발과 눈으로 확인한다. 책의 내용과 현장 경험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소감문을 시상하고 공유한다. 정규 수업으로 개설하기 힘든 산스크리트, 라틴어 등의 도구언어 학습반과 연 50여 종의 동서양 고전 강독반이 진행된다. 소수라도 원하는 학생이 있으면 전문가를 붙여주는 방식이다. 교수와 대학원생, 학부생이 함께하는 랩을 만들고 학업지원금을 지급하며 차근차근 인문학 후속세대를 키워간다. 글로벌 지역문화 이해와 다양한 융합전공의 기반으로서 인문학이 지닌 가능성을 배가하기 위해 교육과정 개편과 해외 연수, 전문가 특강, 인턴십 등이 다채롭게 진행된다. 인문학 교수들이 교도소와 병원, 지역 문화원과 기업체로 찾아가고 중·고등학생과 지역주민을 대학교로 초청해서, 품격 있는 인문학 강연을 진행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의 일환으로 한 대학교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의 일부다. 전국 19개 대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과 대중화 사업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창의적이다. 당초 약속대로 이 사업이 10년 동안 정상적으로 지속되면 인문학의 육성은 물론, 인문적 상상력을 지닌 융합인재와 글로벌 지역전문가의 배출, 나아가 국가의 미래 경쟁력 확보에 가시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대학재정 지원 사업 개편에 의해 이 사업은 3년차로 중단된다. 지역학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한 학과들은 파행을 막을 길이 막막하다. 인문기반 융합전공에서 진로를 모색하던 학생들은 모처럼의 동력을 잃게 되었다. 미래의 인문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학생들이 학교와 국가를 상대로 가지게 될 허망한 배신감을 생각하면, 처참할 뿐이다. 약속의 파기는 개인 간에도 심각한 문제다. 백년대계를 두고 국가가 한 약속은 더욱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후속 사업이 절실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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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23일 오후, 자신에 대한 사형 선고문이 십여 분에 걸쳐 낭독되는 것을 다 듣고 난 뒤에 전봉준은 천천히 말한다. “정부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아까울 것 없다. 다만 나는 바른길을 걷고 죽는 자인데 역적의 죄를 적용한다니 그것이 천고에 유감이다.” 바로 이튿날 서둘러 교수형이 진행되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때가 이름에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함에 영웅도 어찌할 수 없구나. 백성 아끼고 정의 세움에 나 잘못 없건만, 나라 위한 붉은 마음 알아줄 이 그 누구랴.”

모진 고문으로 인해 혼자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로 끌려나온 전봉준이 의연함을 잃지 않고 또렷한 정신으로 최후진술에 임하는 모습은 참관했던 일본 기자들마저 경탄하게 만들었다. 이 당당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추호의 사심도 없이 정의로운 길을 걸어왔다는 내적 성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걸어온 삶이 법에 저촉된다면 죽음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 죽음 역시 부끄러움 없이 당당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지난 29일 자신에 대한 검찰의 구형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행한 최후진술에서도, ‘당당함’을 본다. 정치 입장이나 개인 성향은 차치하고, 그의 이 당당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청와대 관행에 따라 합법적인 방법으로 수행했다. 법조인으로 일했던 제가 불법을 동원할 이유는 없었다”는 진술에 드러나듯, 온갖 의혹과 혐의들이 제기되어도 법적으로 문제없음을 입증할 수만 있으면 그는 당당할 것이다. 마지막에 판사에게 당부한 “법치주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바란다”는 말 역시, 무섭게 다가온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읽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와 부끄러움이 전제되지 않는 당당함이라는 것, 그 무게가 얼마나 될까.

전봉준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릴 일이지, 어찌 이리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이느냐”라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은 123년 만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올해 봄 종로1가 거리에 녹두장군의 동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제 그 당당함의 무게를 겸허한 마음으로 만나볼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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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해가 다가왔다. 십이지에 속하는 가축 가운데 소나 돼지, 닭 등은 도시인의 일상에서 보기 어렵지만, 개는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있다. 주로 평생을 함께하는 부부 사이를 뜻하던 반려(伴侶)라는 말이 요즘은 개에게 더 많이 사용되는 듯하다. 오늘날 개는 이처럼 접촉과 교감의 대상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주거문화가 바뀌기 전까지 개의 역할은 주로 마당에서 집을 지키는 일이었다. 다른 동물과 달리 개는 낯선 이를 보면 짖어대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중국 고대의 철학자 양주에게 양포라는 동생이 있었다. 하루는 양포가 하얀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가 비에 흠뻑 젖는 바람에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 집 개가 주인을 몰라보고 짖어대는 것이었다. 양포가 화가 나서 개를 때리자 양주가 말했다. “때리지 마라. 너 같아도 흰 개가 검은 개가 되어 돌아오면 낯설어서 몰라볼 수 있지 않겠니?” 겉모습이 바뀐다고 속까지 바뀐 줄 아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만큼 일찍부터 개는 낯선 것을 보면 어김없이 짖어대는 동물로 알려졌다.

촉견폐일(蜀犬吠日)이라는 말이 있다. 촉 지역은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워낙 많아서 이곳의 개들은 어쩌다 날이 개면 해를 보고 마구 짖어댄다고 한다. 구름에 가린 것일 뿐 하늘 아래 해가 없는 곳은 없는데, 해를 보고 짖어대다니 참으로 멍청한 개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인식 역시 늘 경험하는 익숙한 것들에 길들어 있다. 자신이 본 것이 다인 줄 알고 낯선 것을 보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심지어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부터 하는 일도 적지 않다. 문제는 소인은 많지만 군자는 드물며, 부조리가 일상인 세상에서 개혁은 낯설고 불편한 일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만세의 사표 공자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비방과 곤욕을 당한 것도 그 때문이다.

천하의 악당 도척이 키우는 개는 훌륭한 요임금을 보면 짖어댈 수밖에 없다. 주인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낯선 이를 보고 짖는 것이 책무인 개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미덕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만 갇혀서 가치 분별을 하지 못한 채 비방을 일삼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낯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성찰과 독서를 할 줄 아는 인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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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편하게 말해 보라고 했다. 여러 제자들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 내내 옆에서 비파만 퉁기던 증점이 마지못해 말했다. “늦봄 무렵에 봄옷이 마련되면 어른 대여섯,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다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저마다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자리에서 멋쩍게 밝힌 다소 뜬금없는 소망에 공자는 크게 감탄하며,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고 하였다. 세상을 구제하려 노심초사 애쓰던 공자가 왜 이렇게 한가로운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을까? 진정한 정치란 모든 존재가 자기 자리에서 아무런 얽매임 없이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공자가 그린 아름다움이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여말선초의 문인 이행은 소를 타는 즐거움으로 이런 자유로움을 누렸다. 그는 달 밝은 밤이면 술 한 병 옆에 차고 소 등에 걸터앉아 느릿느릿 울진의 산수를 거닐었다. 소보다는 말이 빠르지만 모든 것은 천천히 보아야 그 진가를 볼 수 있는 법. 그가 소를 타는 이유는 바람 쐬고 휘파람 불며 밝은 달빛에 비친 아름다운 자연을 찬찬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바삐 사는 현대인들에게 ‘느림’을 권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언제부턴가 올레길, 느림보길 등이 곳곳에 생겼고, 자신의 고장을 슬로시티로 지정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려는 지방자치단체도 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말하는 어떤 이들은 로봇세를 신설하여 많은 이들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장밋빛 미래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참 힘들게 달려온 우리들에게 가쁜 숨 고르고 찬찬히 거닐어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속도를 줄이거나 잠시 멈춰 서는 일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러나 그저 자신을 그런 환경에 잠시 가져다 놓았다 돌려놓는 데에 그친다면, ‘느림’을 콘셉트로 만든 또 하나의 상품을 소비하는 데 불과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일들에 얽매이지 않고 작은 가치들을 따뜻하게 돌아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 그리고 가만히 그 자리에 늘 있어온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밝은 눈이 필요하다. 그런 시선을 가지기 위해 소를 타고 다닐 수 없다면, 느릿느릿 인문고전을 읽는 즐거움을 맛볼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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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에게도 근심이 있습니까?” 자로의 질문에 공자는 답했다. “없다. 군자는 벼슬을 얻기 전에는 뜻을 즐기고, 얻고 나서는 다스림을 즐긴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즐거울 뿐 근심할 날이 없다. 소인은 그렇지 않다. 벼슬을 얻기 전에는 못 얻으면 어쩌나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으면 어쩌나 근심한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근심할 뿐 즐거운 날이 없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말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홍계희는 62세 되던 해 봄, 이조판서의 벼슬을 받았으나 극력 사양하고 여러 번에 걸친 영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영조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해임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홍계희는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기쁨의 시를 지었다. 여러 동료들 역시 축하하며 화답하는 시를 보내와서, 관직에서 해임된 기쁨을 적은 시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홍계희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영조는 그 뒤로도 줄기차게 여러 벼슬을 내렸고, 더 이상은 사직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홍계희는 앞서 지은 시들을 모아 <해관지희첩(解官志喜帖)>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벼슬살이로 인한 근심이 있을 때마다 이 기쁨의 시들로 위안을 삼으려는 뜻이다.

우리의 기쁨은 대개 무언가 바라던 것을 손에 얻었을 때 주어지지만, 문제는 그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얻기 전에는 없어서는 안될 것처럼 노심초사 근심하던 대상임에도, 막상 내 것이 되고 보면 그 기쁨도 잠시뿐, 마치 원래부터 나에게 있던 것처럼 당연시한다. 그러고는 점차 그것이 없는 삶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 근심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즐거워하며 뜻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벼슬의 유무에 따라 기쁨과 근심이 바뀔 일도 없겠지만, 이런 경지에 오르기란 쉽지 않다. 홍계희는 그러나 소인과는 다른 제3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품은 뜻은, 고향에 돌아가 서책과 거문고, 바둑판, 술 한 병을 곁에 두고 늙어가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벼슬살이는 근심이지만, 물러남의 기쁨을 상상하며 그것을 적은 시를 때때로 꺼내볼 수 있음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가진 것의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는 소인으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가지지 못한 것을 즐거워하는 방법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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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있으면 생각나고, 좋은 글을 읽으면 생각나고, 의논할 일이 생기면 생각나고, 네 또래 젊은이를 마주치면 생각나고, 멋진 자연을 만나면 생각나고, 바람 맑고 달 밝으면 생각난다. 이렇게 네 생각이 떠나지 않는데도 나는 배고프면 밥을 찾고 추우면 옷을 찾고 아프면 약을 찾곤 한다. 내가 어쩌면 이리도 무딜 수 있을까?” 조선시대 문인 김창협이 아들을 잃은 지 1년, 상복을 벗어야 하는 날에 지은 제문이다. 망자와의 관계에 따라 정해진 상기(喪期)를 강요하는 유교에 대한 비판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어떤 경우 상기는, 살아남은 자를 위한 제도이기도 하다.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1년이라는 상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상복을 도대체 언제 벗을 수 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날로부터 1315일. 참 먼 길을 돌아 미수습자 장례까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가방에 달고 다니는 조그만 노란 리본을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가족이 모욕당하는 현실에 분노하던 시기는 지나갔고, 어처구니없는 논리와 속임수로 진상을 은폐하려는 이들의 목소리도 잦아들었으며, 촛불시민은 정권을 교체했다. 그러니 이제 상복을 벗듯이 리본을 떼어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걸까.

그런데 과연 변했는가? 안전은 전혀 아랑곳없이 그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고 바다로 나설 수 있도록 조장하고 방관하며 낄낄대던 돈의 논리들은 무력화되었는가? 불행한 사고가 사회적 참사로 이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온갖 비리와 협잡들을 뿌리 뽑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는가? 엄청난 공공의 비용과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재해로부터 안전한 시설을 마련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냈는가? 이제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삼는 나라에 살고 있는가?

근래 우리 사회를 바꾼 힘이 공동의 슬픔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슬픔에 계속 빠져 있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 낱낱의 기억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바꾸어나가야 할 시기다. 김창협은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손상시키지 말고 이제 그만 생각에서 아이를 놓아버리라는 주위의 권유에, “그렇다고 어떻게 생각까지 안 할 수야 있겠느냐”고 나직이 반문한다. 김창협보다 훨씬 무딘 나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자신이 없다. 여전히 리본을 떼어내지 못하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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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우이(執牛耳), ‘쇠귀를 잡다’라는 말이 있다. 춘추시대 제후들은 맹약을 체결할 때 소를 잡아 그 피를 돌려가며 입술에 바르는 삽혈의식을 거행했다. 맹약을 어길 경우 그 소처럼 피를 흘리며 죽어도 좋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소의 귀를 잘라 피를 받고 쟁반 위에 올려놓으면 맹약을 주도한 이가 가장 먼저 쇠귀가 든 쟁반을 잡는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실권을 장악한 맹주가 되는 것을 두고 쇠귀를 잡는다고 표현해 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런데 왜 하필 귀일까? 소의 상징은 역시 뿔이니, 쇠뿔을 도려내어 피를 흘리는 퍼포먼스가 더 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18세기 문인 홍양호는 이런 의문을 던지고 추정을 이어간다. 단단하게 위를 향해 있어서 힘으로 들이받기를 능사로 삼는 뿔은, 언제고 더 강한 존재를 만나면 꺾이고 만다. 그러나 부드럽게 아래로 드리운 귀는 남의 말 듣기를 본분으로 삼고 힘보다 지혜에 의존하므로 오래 갈 수 있다. 춘추시대의 패자(패者)들 역시 부드러움과 지혜로 장기적인 승리를 도모했기에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뿔이 없다면 귀는 힘을 지닐 수 없다. 춘추시대 패자들은 절치부심 실력을 다져 이미 남을 제압할 만한 뿔을 지닌 이들이었다. 강력한 무위를 갖추었기에 그들의 포용과 관대함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홍양호는 자신이 사는 우이동(牛耳洞)이 삼각산(三角山) 아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험준하게 솟은 쇠뿔 같은 산이 있기에 텅 비어 만물을 품을 수 있는 쇠귀 같은 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홍양호는, 멀리까지 복속시키는 무위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온유함을 겸비한 군자, 그 삶의 지향을 떠올린다.

강한 나라를 위한 염원으로 강한 지도자가 각광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무소불위의 힘을 믿고 여기저기 뿔을 들이미는 이를 상대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외교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힘의 불균형을 감내한 채 북핵과 FTA 등의 현안에서 실리와 명분을 챙기는 접점을 찾기란 실로 지난해 보인다. 시간을 두고 쇠뿔과 쇠귀를 겸비해 가는 일, 미련해 보이지만 다른 길은 없다. 여전히 경청과 설득을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오래가는 지도자의 미덕이다. 강하기만 한 것은 결국 꺾이고 만다. 이 역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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