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가 야(野)에 있고 소인이 위(位)에 있으니 백성들이 군주를 버리고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재야(在野)라는 말이 일찍부터 ‘조정이 아닌 민간에 있음’이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정치뿐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재야’의 존재는 소중하다. 현실 권력을 쥐고 있지 않으므로 이해관계를 벗어나 옳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재야사학자’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나서면 정치가요, 물러나면 학자였던 조선시대 사대부와는 달리 정치와 학문이 각기 전문 영역으로 분화된 오늘날, 학문 분야에서 ‘재야’와 ‘재위’의 구분 기준은 무엇일까.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이들을 ‘재야’라고 불러야 할까? 그러나 그런 연구자들도 정작 ‘재야사학자’라고 불리는 어떤 이들의 국수주의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대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긴다. ‘재야’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애초에 ‘역사학’으로 부르기에 결격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으므로 학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발굴 유물이나 현전 사료를 대하기에 앞서 어떤 바람과 의도가 강하게 개입된다면 그것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찬란했어야만 하는’ 우리의 역사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러나 ‘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재구성하여 사실로 믿게 만들고 그러기 위해 기존 학계를 싸잡아 음해한다면, 게다가 거기에 정치적인 힘까지 실리게 된다면, 그 폐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공자는 세련된 표현은 잘 못하지만 속이 꽉 찬 사람을 가리켜서 야(野)하다고 했다. 거칠고 촌스럽지만 사심이 없다는 뜻이다. ‘재야’를 표방하던 이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현실 권력이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게 되면 사이비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제도권의 지독한 폐쇄성과 세뇌된 식민사관의 피해자라도 되는 듯이 행세하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존의 학계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적지 않고, 지식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더욱, 사심과 신념 때문에 토론이 불가능한 유사사학자가 아니라, 학문의 기반을 우직하게 성찰하는 진정한 재야사학자가 필요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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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멀리서 찾는 이들이 몰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 정작 그 근방에 사는 이들은 그런 풍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왜 그럴까? 늘 권력과 이익을 다투는 자리에 갇혀 살다 보니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슴을 쫓아가다 보면 주변의 산은 보이지 않고 황금을 움켜쥐려다 보면 옆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마음이 온통 어딘가에 쏠리면 다른 데에는 눈이 갈 겨를이 없는 법이다. 고려시대 문인 이제현의 설명이다.

아름다움이 지금 여기와는 아주 다르고 먼 어떤 곳에 있다는 생각은, 각박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때로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품고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려 들면서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을 무시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을 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의 일상 따위는 희생시켜도 좋다고 여기는 순간, 아름다움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아름다움 자체도 마음이 쏠리게 만드는 무엇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제현의 지인 가운데 권세와 부를 누릴 만한 지위에 있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외딴 산수 어딘가에 터를 잡고 근사한 누각을 지어 노니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던 시절, 그는 도심 주변 민가 즐비한 연못가에 누각을 지었다. 오가는 사람이 왁자지껄 이어지는 곳이어서, 다들 거기 제법 널찍하고 호젓한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곳을 발견한 그는 주춧돌 없이 기둥을 세우고 기와 대신 띠 풀을 덮고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로 서까래를 삼고, 벽은 도색 없이 그대로 두었다. 못에 핀 연꽃만이 누각을 감싸며 빛을 발한다.

잔잔한 물결 위로 낮게 퍼지는 물안개,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하는 푸른 산봉우리뿐 아니라, 이고 지고 타고 걸으며 오가는 이들, 뛰는 이, 쉬는 이, 부르고 돌아보는 이, 서서 이야기하는 이, 어른에게 달려가 인사하는 이들 역시 풍경의 일부다.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즐기는, 별것 아닌 것들의 아름다움.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을 회복하는 데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마음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돌아보며, 잠시 멈춰 서서 하늘 한 번 바라보며.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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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대토(守株待兎).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바보 이야기를 들어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옛 법을 고수하는 것을 비판하는 성어다.

한비자가 이 이야기를 꺼내며 겨냥한 대상은, 입만 열면 요순시대를 들먹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말만 하는 유가 지식인들이었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국가 간 경쟁이 극단적으로 펼쳐지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옛날 성군의 교화정치를 주장한 맹자는 그 전형 가운데 하나다. 눈앞에서 온갖 불의와 무도함이 자행되는데 그래도 사람의 성품은 누구나 선하다고 외치고, 전쟁에 패해 땅을 빼앗긴 군주에게 정치는 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려 드니, 말이 먹힐 리가 없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이런 맹자를 마냥 비웃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왕 앞에서 한 치도 굽히지 않고 서슬 퍼런 비판의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열정이다.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고 있음을 알면서도 타협은커녕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돌진하는 그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근본 동력은, 굶주림과 전쟁으로 버려지고 나뒹구는, 어디 호소할 데조차 없는 백성들, 눈에 밟히는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다. 적어도 맹자가 보기에 정치란, 그 아픔들에 함께 눈물 흘리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들 하나하나가 감동으로 회자되는 것을 보며 그사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망가져버렸는지, 누군가가 내걸었던 말인 ‘비정상의 정상화’가 실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산적한 문제들이 다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기에는 우리 앞의 현실이 너무나 어렵다. 경제, 외교, 안보, 교육, 복지, 환경 어느 것 하나 쉽게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분야가 없다. 더구나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막론하고 그 다양한 이들의 바람과 훈수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말이지 갈 길이 참 험하고 멀다.

그러나 새 대통령의 공식적인 첫 행보가 세월호 유가족과의 만남이었다는 데에서 희망을 본다. 스승의날, 단원고 기간제 교사들의 순직 처리를 지시하고 대통령이 직접 그 가족과 통화하여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흐른다. 울분과 원한의 눈물을 공감과 위로의 눈물로 바꾸는 데에서, 정치는 시작된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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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비유적인 표현인데다가 앞뒤 맥락 없이 남아 있어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지만, 대개 군자는 용도가 정해진 기구와는 달리 어떤 자리에서든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특정 기능에 국한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긴 하지만, 전문가가 각광받는 이 시대에 이것저것 두루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권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기(器)를 ‘고정되어 변할 수 없음’의 비유로 이해할 때 이 말의 의미가 좀 더 확장되어 다가온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칼로 두부 써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고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은 아닐 테니, 고정관념을 깨려는 역설적 수사로 봐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부드럽고 약함은 생명의 속성이고 단단하고 강함은 죽음의 속성이라는 그의 말과 조응해 보면 새로운 의미가 열린다. 노화의 특징 중 하나는 ‘굳어감’이고 그 끝은 죽은 육신의 뻣뻣함이다. 반면에 씨앗의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여린 떡잎, 완고한 마음을 녹이는 아기의 웃음처럼, 생명은 늘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살아 있음의 특징은 변화할 수 있음에 있다. 굳지 않은 진흙이라야 새로운 모양을 만들 수 있듯이, 생각도 감정도 말랑말랑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정치든, 더 이상 변화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면 희망이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 없이는 우리는 어느새 딱딱해질 수밖에 없다. 공부하는 사람을 뜻하는 유(儒)는 <설문해자>에 유(柔)로 풀이되어 있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움이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공부의 기본자세다.

옛 주석에서는 군자불기를 “제한된 길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를 감지하고 움직여서 대응하는 것이 군자의 덕이다”라고 설명했다. 기회주의적 임기응변이 아니라, 지향을 분명히 하되 자칫 경직되지 않도록 늘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신영복 선생님 말씀처럼, 바늘 끝이 떨리지 않고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침반이 아니다. 단단하고 강한 것들끼리 부딪쳐 서로 상처만 입히고 있는 이 시대에, 말랑말랑함의 생명력을 떠올리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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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가벼운 형량으로 풀려나자 그를 한 해 넘게 추적하여 찔러 죽이고 자수한 형제가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정조는, 이들을 극찬하고 오히려 숨은 인재로 인정했다. 효성을 권장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충동적인 보복이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하고 오랜 시간 공력을 들여 복수를 완수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집요한 복수 이야기는 동서고금 많은 서사의 뼈대를 이루어 왔다. 자신을 죽도록 때리고 거적에 싸서 측간에 내던져 소변을 맞게 한 위제를 천신만고 끝에 죽여서 그 두개골로 요강을 만들어 썼다는 범저의 섬뜩한 이야기도 있다.

철저한 복수만이 원수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 길도 있다. 출세한 한신이 옛날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게 만든 동네 무뢰배를 찾아서 등용한 것을 작은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원한이 뿌리 깊고 지속적일 경우, 이는 인지상정을 초월한 종교적 신심이 아니고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질문에 공자는 “그럼 은혜는 무엇으로 갚을 건가? 원수는 ‘직(直)’으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지”라고 답했다. 이를 원수 역시 일반인과 똑같이 공평무사하게 대해야 한다고 풀이한다면, 원한은 마음속으로만 품고 복수는 일절 하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7세기 문인 김창협은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상황에서는 복수하고 부당한 상황에서는 복수하지 않는 길도 있다고 했다. 동한 때 인물인 갑훈은 소정화와 원한이 있었는데, 소정화가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뒤에 소정화가 감사의 인사를 올리려 하자 여전히 원수로 대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정당한 상황이라면 복수하는 것이 옳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직’의 의미라는 것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서운함과 용서하기 힘든 미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복수 이야기들에 우리가 여전히 열광하는 것도, 그것을 통해서나마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정국에서는 피아의 구분이 수시로 뒤바뀌며 숱한 정적(政敵)들을 낳는다. 원수를 은혜로 갚거나 원수 앞에서 공평무사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대의를 위한 자리에서만큼은 사적인 원한을 덮어두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협치가 절실한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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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여전히 관용의 자세다. 관용은 그저 착하기만 해서 자기주장 없이 뭐든지 다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다.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생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관계들이 많다. 나이, 직급, 학벌, 성별, 인종, 지역, 혹은 종교나 정치적 신념 등이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어내고 상대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관용이야말로 사회 곳곳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칼 포퍼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말했듯이,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관용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관용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자신을 냉철하게 성찰하고 상대의 입장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힘겨운 노력을 잠시라도 멈춘다면 누구나 불관용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촛불집회와 친박집회 사이에조차도, 상호 관용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관용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단호하게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 부족한 원인의 하나로 유교 전통의 폐해를 들 수도 있겠으나, 유교의 근본이념 가운데 하나인 ‘충서(忠恕)’는 나의 마음을 다해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관용과 닿아 있다. 관용이 ‘인정하기 힘든 다름을 참아냄’에서 비롯된 데 비해, 충서는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평화적 공존이라는 명분 아래 상호 불간섭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는 관용에 따뜻한 숨결을 더해줄 수 있는 것이 충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아픔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괴물에게 베풀 관용은 없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고 참사의 진상 조사를 악의적으로 방해하며 거짓 뉴스들을 양산해온 이들, 봉하마을까지 몰려가서 고인의 가족을 능멸하는 것도 모자라 유인물 안 받는다는 이유로 손녀 같은 학생의 따귀를 때리는 이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다면, 이 사회에 그나마 존재하는 관용들마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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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군주 환공이 노나라를 쳐서 대승하였다. 노나라 장공이 화친을 요청하여 협정의 자리에 마주 앉았는데, 갑자기 노나라 장수 조말이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며 빼앗은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어쩔 수 없이 승낙하자 조말은 순순히 비수를 내던졌다. 눈앞의 위험이 사라지자 분노한 환공은 땅을 돌려주기는커녕 조말을 당장 죽이려 들었다. 환공을 모시고 있던 관중이 말했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조말을 죽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신의를 저버린다면 천하의 지지를 잃고 말 것입니다.” 환공이 분을 삭이고 약속을 지키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들이 제나라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환공의 입장에서 생명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한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무력을 행사한다 해도 당장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관중은 ‘눈에 보이는 것’과 ‘자신이 가진 능력’만을 결정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뒤의 무엇’을 볼 것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눈앞의 이익보다 더 크고 지속적인 ‘이익’일 수도 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는 ‘가치’일 수도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 메르스 사태 등 근래 우리를 아프게 했던 일련의 일들은,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당장의 경제성만을 이유로 어마어마한 재앙의 가능성을 마냥 덮어두고 있는 원자력(핵)발전소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고, 비용 절감을 위해서라면 아파트 경비원을 언제든 집단 해고해도 된다는 사고방식 역시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이다. 입장의 차이에 따른 논란의 여지는 물론 있다. 그러나 논의의 장 자체가 눈앞의 이익에 의해 원천적으로 묵살되어버리는 것이 이 시대의 대세라는 점이 문제다. 보다 장기적인 이익이나 속 깊은 가치를 논하자는 제안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사치스러운 일에 불과한 것인가.

정작 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가장 큰 소리는 희성(希聲), 즉 들리지 않는 소리라고 했다. 이익에 밝다고 하는 우리의 눈과 귀는 따지고 보면 얼마나 제한적인가. 잠시 멈춰 서서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있는 것, 귀에 들리지 않지만 마음 기울여야 할 것들은 없는지 가만히 되물을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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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마포에는 뱀이 곧잘 출현해서 애를 먹이곤 했다. 거기 살던 어떤 이가, 하인이 큰 뱀 두 마리는 잡았다가 그냥 놓아주고 작은 뱀 두 마리는 잡아서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의아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묻자 하인이 대답했다. “큰 뱀은 영물이라서 죽였다가 앙갚음을 당할 수 있지만, 작은 뱀이야 그럴 염려가 없지 않습니까요.”

대답을 들은 주인은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크게 악한 자는 힘을 장악하고 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작게 악한 자만 큰 벌을 받는다. 크게 선한 자는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 버리는 반면 조그만 선행을 베푼 자는 알려져서 큰 상을 받는다. 잔인무도한 살인을 일삼은 도척은 멀쩡히 천수를 누리는데 좀도둑은 담을 넘다가 잡혀서 찢겨 죽으며, 공자 같은 이도 제대로 등용되지 못해 천하를 떠돌아다녔는데 그저 그런 선비들은 부귀공명을 누린다. 과연 누구를 상주고 누구를 벌해야 하는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8세기 후반의 작가 심익운이 지은 <크고 작음에 대하여>라는 짧은 글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문명을 떨쳤으나 당쟁에 연루되어 제주도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이 글을 옛날의 한 불우한 인물이 던진 삐딱한 불평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게 오늘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작은 악은 가차 없이 처벌되는데 정작 큰 악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처벌을 피해가는 기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하다. 선과 악의 가치만이 아니라 힘의 강하고 약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일갈은 지극히 약한 이를 위해 던졌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반인이었다면 진즉에 처벌되었을 명명백백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여전히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연일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강해서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을 것 같던 거대한 악이, 작고 약하지만 선량한 많은 이들의 연대로 만들어낸 힘에 의해서 그 흉측한 민낯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장면 역시 우리 눈앞에 있다. 이 땅에 냉혹하게 작동하는 힘의 원리에 굴복하여 이번에마저도 이 큰 악을 제대로 도려내지 못한다면, 앙갚음이 두려워 큰 뱀을 놓아준 하인처럼 뱀이 불쑥 나타날까봐 늘 노심초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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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은 늘 남의 것이었다. 젊은 싯다르타 왕자는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노인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라고 외쳤다지만, 평범한 젊은이들의 눈에 노인은 본디부터 노인이었을 것만 같고 나와는 도무지 무관한 존재로 보이기 마련이다. 젊었을 때 그렇게 늙어 보였던 사람들의 나이가 오늘 나의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늙어감은 이미 시작되어 버렸고, 앞으로도 진행만 있을 뿐 돌이킬 수는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늙어감 앞에서 옛사람들은 자위와 해학이 담긴 시를 짓곤 했다. 소세양은 머리가 벗겨지니 복건을 쓰기 편해 좋다며 호기를 부렸고, 이만백은 이가 빠졌으니 씹지 않고도 넘길 수 있는 술을 즐길 이유가 더해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앞니 하나가 갑자기 빠진 김창흡은 그 당혹감과 슬픔을 솔직하게 토로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얼굴이 망가져서 만남을 꺼리게 되니 차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발음이 부정확하니 침묵을 지킬 수 있으며, 기름진 음식을 잘 씹지 못하니 식생활이 담백해지고, 글 읽는 소리가 유창하지 못하니 마음으로 깊이 볼 수 있게 된다.” 이가 빠져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신체 기능이 옛날 같지 않은 노인을 배려하고 그분들이 감내해온 과거의 수고를 치하해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늙음이 안하무인의 방종을 누리는 특권이 될 수 없음 역시 마땅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인에게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말했다. 

신체의 기능이 저하된다고 해서 욕망이 반드시 줄어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욕망이 줄어든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과 깨달음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왜곡된 욕망과 편협한 정보 속에 갇힌 늙음은, 자기 성찰 없는 분노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박지원은 쇠락해가는 자신의 신체를 보며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하고, 세상에 영원히 내 소유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늙어감은 그로 인해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노년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런 순간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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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책무가 연구와 교육이라는 ‘당연한’ 인식은 사실 역사적 산물이다. 중세 대학의 역할은 사람으로서의 품성과 문화적 소양을 익히는 교양교육이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학이 ‘유용한’ 지식을 창출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커졌으며, 전문가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교양교육에 의한 인간 형성이라는 이상은 점차 약화되었다. 연구는 물론 교육마저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오늘, 대학의 위상은 급전직하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도 빌 게이츠도 중도에 그만두고 만 대학이 지금 시대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대학의 운명이 기로에 놓인 것은 학령인구 급감에 직면한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나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더욱, 대학의 존립은 교양교육, 특히 고전 교육에 달려 있다. “우리의 목적은 어떤 직업에 필요한 특정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의 바탕이 되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를 떠올리게 하는 이 문장의 출처는, 대학이 산업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난에 맞서서 1828년에 제출된 ‘예일 보고서(Yale Report)’다. 그들이 강조한 토대란 비판적 사고력을 말한다. 이를 기르기 위한 가장 멀어 보이지만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 길이, 바로 고전을 깊이 읽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성공은 더 이상 대학의 연구와 직업교육만이 유일한, 혹은 최선의 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학이 지닌 보편적 교양교육의 기능이 시장 논리에 의해 허물어졌을 때, 극소수의 혁신적 자산가와 그에 종속되는 대다수의 무지한 노동자/소비자만이 남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성찰도 비판도 없이 허락된 욕망을 누리며 시장의 부속품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이들로 가득한 사회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고전이 지닌 힘은 그 어깨에 올라탔을 때 확보되는 전망에 있다. 중요한 것은, 고전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고 해석의 방법과 공간을 넉넉히 확보해 주는 데에 있다. 인성이니 리더십이니 하는 방향을 정해두고 몰아가는 교육이 아니라, 자유롭게 비판하고 성찰하며 고전을 딛고 오늘을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이다. 그것이 대학의 교양교육이 지닌 가치다. 이것을 포기한다면 대학은 정말이지 존립할 이유가 없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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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사용된 만큼 한자 가운데에는 꽤나 기구한 운명을 지닌 글자들도 있다. ‘비(匪)’는 원래 ‘대나무 상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니다’라는 부정의 의미를 지닌 글자가 없어서 음이 비슷한 ‘비(匪)’를 빌려 쓰다 보니 원래 뜻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기 위해서 비(竹+匪)가 따로 만들어졌다. 자기 뜻을 잃어버린 비(匪)는 ‘비(非)’에 밀려서 부정사로도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게 됐고, 주로 ‘토비(土匪)’ ‘비적(匪賊)’ 등 악당을 가리키는 말로 전락했다. 급기야 ‘무장공비(武裝共匪)’처럼 섬뜩함을 주기 위한 어휘에나 쓰이게 되고 말았다.

‘비(匪)’가 악당의 의미로 비하되는 과정에 <주역> ‘비(否)’괘의 괘사인 ‘비인(匪人)’이 놓인다. 비인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행위가 부정한 사람’ 등으로 풀이된다. 천지만물이 꽉 막혀서 소통하지 못하니 군자는 불이익을 당하고 소인이 득세한다. 외유내강이 아니라 내유외강의 시대다. 삿된 이익으로 가득 찬 이들이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힘을 과시하는 세상을 뜻하는 말이 비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자신의 운명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를 만나는가도 중요하다. ‘법(法)’은 많이 알려진 대로, 신령스러운 짐승에게 악인을 들이받게 해서 제거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글자다. 늘 수평을 유지하는 물처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집행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법’이 추락할 대로 추락한 ‘비’를 만나서 ‘법비(法匪)’라는 치욕스러운 어휘가 됐다.

일반적인 비류(匪類)보다 더 괘씸한 것이 법을 앞세운 법비다. 불법을 자행하는 비류는 법에 호소하여 벌할 수 있지만 법의 이름으로 남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하는 법비는 법으로도 어찌해보기 어렵다.

공비는 무장이 필요하지만 법비는 무장도 필요 없다. 이미 어떤 상식도 양심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법으로 전신을 무장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상식적인 증거를 들이밀어도 법적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사실관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법적 효력이 일부 드러나면 다시 피해가며 새로운 논리를 구축해내는 이들이 법비다. 그러고 보면 ‘비’로서도 ‘법’을 만난 것이 치욕스럽기는 마찬가지겠다. 아직도 더 추락할 곳이 남아 있었음을 발견하게 해준 셈이니.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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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자신의 장점이 남의 말을 잘 아는 것이라고 했다. 말은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말이 그대로 그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안다. 말을 아는 것 자체보다,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아는 것이 관건이다. 맹자가 경계한 네 가지의 말은, 편견에 치우쳐서 객관성을 잃은 말, 무언가에 지나치게 빠져들어서 절제하지 못하는 말, 못된 마음을 품어서 도리에 어긋나는 말,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본질을 회피하려는 말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옳음과 틀림, 진정과 거짓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맞으면 저건 틀리고, 어떤 말에 진정성이 있으면 거짓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것과 저것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진정성만 있으면 맞고 틀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현상이 팽배해지고 있다. 이런 추세를 가장 잘 이용하는 이들이 정치인들이다. 민생, 복지, 경제 민주화. 참 좋은 말들이다. 그런데 지향에 맞는 정책인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자체 정합성마저 의심되는 말들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호소된다. 겨냥했던 실체가 수시로 모양을 바꾸는 가운데, 이전의 기준과 방식으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점차 무력해진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철학자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짧지만 묵직한 통찰을 던지는 글이다. ‘개소리’는 터무니없는 허튼소리 정도의 의미다. 의도적인 거짓말의 경우 거짓임을 증명할 방법이 있고 책임도 요구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신념에 가까운 ‘진정성’을 내건 개소리는 객관적인 분석으로 거짓을 입증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애초에 ‘아님 말고’ 식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상대하기 더 난감하다. 치밀하게 꿰맞춘 거짓말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의도를 감추고 떠벌리는 개소리다.

맹자가 경계한 네 가지 말 역시 의도적인 거짓말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진정성이 있든 없든 간에, 그런 말을 내뱉는 이들이 정치에 참여해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릴 때 많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해로움을 끼치기 때문에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권력을 쥔 이들의 진정성을 문제 삼고 거짓말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연일 양산하고 있는 개소리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새로운 지혜와 전략이 절실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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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즉위한 이래 23년 동안 우근(憂勤)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따를 방법을 강구해 왔지만 어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1799년 12월, 겨울 같지 않은 날씨에 천둥 번개가 계속되자 날이 밝기도 전에 신하들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정조가 건넨 고백이다. 정조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며 어떤 질책과 건의든 달게 받을 테니 천재지변을 해소시킬 방법을 내놓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무슨 말이든 해달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은 중직을 맡고 있는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을 범한 이들이라며 당장 내치고 벌해달라고 하였다. “경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돌릴 필요 없다. 모두 나 한 사람의 책임이다.” 자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건넨 정조의 답변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오늘 우리는 천재지변이 통치자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국민들을 보호하고 힘을 다해 돕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위가 높고 권한이 강할수록 책임도 커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식만큼은 200여년 전이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 가슴 무너지는 국가적 재난들이 연이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내 책임입니다”라는 통회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것이 연일 광화문을 채우고 있는 분노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20년 전, 즉위 3년차의 정조는 영릉 행차길에 남한산성에 묵은 적이 있다. 자신의 행차길에 가득 찬 남녀노소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정조는 말했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번에 배를 타고 백성들에게 오면서 이 경계가 더 절실해졌다.” 물은 그저 낮은 곳으로만 흘러들어 늘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물이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음을 정조는 알았고, 20여년 동안 마음에 새겼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자신이 어디에 떠 있는지 모르기에 무엇을 책임져야 하고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통치자에게 물은 더 이상 인지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역동하는 실체적인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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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가 ‘양극화’다. 양극화는 ‘서로 점점 더 달라지고 멀어짐’이라고 풀이된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라면 누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애써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조장하여 거기서 이득을 보려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양극화가 불가피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채 재벌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이는 더욱 가중되어서,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출발선이 아예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분노한다.

양극화가 경제적인 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이 시대의 진정한 아픔이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눌 수 없는 슬픔과 분노로 이 사회 구석구석을 다른 눈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 이들과, 교통사고 가지고 뭐 그리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리는 이들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서로 점점 더 달라지고 멀어짐’이 존재한다. 100만 촛불을 두고 험한 말들을 해대는 분들을 이해한다는 건,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우리와 비슷해야 할 존재가 너무도 달라지고 멀어졌을 때 그들을 우리는 ‘괴물’이라고 부른다. 연일 뉴스에서 만나야 하는 그 괴물들에게는 아무런 죄책감도 자기 성찰도 없다. 이미 엄청난 재산을 손에 쥐고 있지만 이권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법망을 피해 아무렇지도 않게 뒷돈을 찔러줄 수 있는 이들이다. 그 돈이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씻어주고도 남을 만큼의 액수라는 데에 분노하는 이들과, 법적으로 빠져나갈 수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사이에는, 너무도 머나먼 거리가 존재한다.

‘면이무치(免而無恥)’라는 말이 있다. 도덕과 예의가 아니라 행정과 형벌로만 단속하면 백성들이 법망만 피해갈 뿐 부끄러움이 없어지게 된다는 공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범법행위 자체보다도 바로 그 부끄러움 없는 표정과 답변 때문에 누군가는 치가 떨리는데, 평생 법으로 먹고살아온 그들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말만 안 하고 그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까지고 피해갈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사법이 엉성하지는 않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 도덕과 예의에는 자비와 긍휼이 있지만 법에는 없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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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천재지변을 만났을 때 전하께서 통치의 잘못은 없었는지 반성하고 바로잡기를 그 당시 애절하게 내리셨던 말씀만큼만 하셨더라도 오늘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실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으니, 일이 있을 때마다 내리신 말씀들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만, 신은 ‘하늘이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사람 역시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래 들어서는 전하께서 조언을 구하셔도 신하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호응하지 않습니다. 전하의 말씀에 애초부터 진정성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얼마 전에 사헌부의 지적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사실과 다르게 전달된 것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만, 사헌부의 보고가 맞았음이 요사이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신은 전하의 진실하지 못함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실상을 열어 보여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면 되는 일이었는데도 끝내 남을 속이고 자신도 속이셨습니다. 그러니 어디든 밝히 보는 하늘이 어찌 전하를 돕겠습니까?

궁궐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밖에서 알 수도 없고 알 일도 아닙니다만, 총애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하께서 감추시면서 이 사실을 지적한 신하를 다른 죄에 얽어서 처벌하셨다고들 합니다. 전하께서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무슨 문제가 되겠으며, 무엇하러 그것을 숨기시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억측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습니다. 새어나온 사실들만도 이러한데, 저희의 이목이 닿지 않는 궁궐 깊숙한 곳의 일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전하의 교만과 사치, 음란과 방탕, 원한과 승부욕이 극에 달하여 저 망국의 군주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김창협이 1686년 숙종에게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한문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에는 많은 품이 든다. 시대가 다르고 문화와 통념에 거리가 있어서 말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330년이 지난 상소문을 소개하면서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지 않음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슬픈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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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연일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절로 나오는 의문이다.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던 일들 하나하나가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엄청난 아픔이고 절망이다.

정권 말기에 권력자 주변의 전횡이 밝혀지곤 하는 것은 언제부턴가 익숙해진 풍경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렇게 분노를 넘어서 아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나름대로 이루어왔다고 생각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근간이 속속들이 무너져 내려 있는 암울한 현실을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농단(壟斷)은 본디 시장 주변에 높이 솟은 언덕을 뜻한다. 다들 소박해서 그저 남에게 팔 만한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과 맞바꾸던 시절에 어떤 장사꾼이 농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이리저리 다니며 모든 이익을 독차지한 데서 비롯하여, 이익이나 권력을 무단히 독점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맹자는 이 일이 시장에서 세금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달리 보자면, 소수의 농단에 의해 다수가 피해를 입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규제와 제도가 발생한 셈이다. 국가가 필요한 이유 역시 남보다 유리한 조건을 소수가 독차지하지 않도록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바로 그 국가가 오히려 농단을 조장하고 주도했으며, 그것이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여기저기서 자행되어왔다는 증거들에 직면해 있다.

이 유례없는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는 출발점이 철저한 진상 규명과 성역 없는 처벌에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 도처에 솟아 있는 농단들이다. 권력만 등에 업으면 언제든 올라갈 수 있는 농단들을 그대로 둔다면, 대다수 국민들은 아랑곳없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그 위에 올라가 설쳐대는 정치인과 관료, 언론, 검경, 문화계 인사, 그리고 재벌들을 우리는 계속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대한민국의 악취 나는 몸뚱이를 직시하고, 암 덩어리를 베어내듯이 곳곳에 솟아 있는 농단들을 제거하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더 이상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불가능한 민주공화국을 다시 만들어 가는 것만이, 이 부끄러운 역사를 되돌릴 수 있는 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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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줄 끊어지자 진면목이 드러나고 도깨비들 햇빛 비치자 소굴 찾아 숨는구나.” 조선 경종 때 목호룡이 이희지의 작품이라며 고변한 시의 일부다. 진위와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 시는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고변한 측의 풀이는 이렇다. 경종이 모든 처분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두 명의 내시에게 의지했는데 그 내시들이 처벌되자 결국 본색을 숨기지 못하게 되었고, 주변의 음흉한 무리들도 다 숨을 곳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가 당나라 한유가 영정(永貞) 연간의 상황을 그린 <영정행>의 모티프를 차용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영정행>은 무능한 임금과 그에 빌붙어서 잇속만 챙기는 이들을 비판한 작품이다. 당시 순종은 중풍을 앓아서 벙어리가 되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궁궐 깊은 곳 휘장 속에만 들어앉아 있었다. 모든 정사는 내시 이충언과 궁녀 우씨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들 주변에는 뇌물과 비리, 협잡이 가득했다. 한유는 그 상황을 여우와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 둘 달린 뱀이 출현하는 을씨년스러운 광경으로 묘사했다. 이희지의 작품으로 지목된 <속영정행>에서도 옛적 영정 때의 일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다면서 제 세상 만난 듯 날뛰는 소인배들을 여우와 올빼미에 비유하였다.

무능한 왕도 문제고 그 왕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한 내시도 문제지만,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적절히 이용하면서 자기 권세를 누린 영악한 대신들이야말로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왕이 아무리 괴승 신돈에게 놀아났다고 해도, 고려가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이 신돈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권력을 휘둘러온 이들에게 책임도 묻는 것이 마땅하지만, 역사는 대개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내시를 쳐내고 왕을 바꾸고도 여전히 다른 모양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음침한 여우 울음소리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다. 죄 없는 이들에게 부끄러움마저 안기는 이 시대에, 그 원인을 만든 이들이 또다시 새로운 권력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이합집산하도록 둬서는 안된다. “어느 집 여자 무당이 새 귀신에게 기도하는지, 봄날 밤 거리에 나앉아 질장구 두드리며 노래하네.” <속영정행>의 구절이 다른 의미로 심장하게 다가온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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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식(耳食)이라는 말이 있다. 소동파가 견양 지방의 돼지고기 맛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사오게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서 끌고 오던 돼지를 잃어버리고는 동네 돼지를 사다가 바쳤다. 그 사실을 모른 손님들은 요리를 맛보고서 역시 견양 돼지는 다르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처럼 평판에 가려서 실질을 보지 못하는 것을 두고 귀로 먹는다고 한다.

조선시대 하징이라는 사람이 땅딸막하고 절룩거리는 말 한 마리를 헐값에 샀다. 절룩거리던 다리는 어느새 치유되었고 그 짧은 다리로 잘도 걸어서 하루에 수백 리를 갈 정도였다. 하도 볼품없고 특이하게 생겨서 지나는 이들이 가리키며 구경하기에, 하징은 장난삼아 일본에서 들여온 ‘왜당나귀’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들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큰 값을 치르고 사겠다며 몰려들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사실대로 말해주니 아무도 돌아보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두 이야기에서 헛된 이름에 현혹되지 말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소중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이 없다는 데에 있다. 하징의 이야기를 기록한 조구명은 이렇게 반문한다. ‘왜당나귀’라는 이름이 거짓이라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그 이름이 거짓이라고 해서 하루에 수백 리를 갈 수 있는 능력마저 돌아보지 않는 자들이 어리석은 것 아닌가? 능력만 있다면 ‘왜당나귀’가 아니라 ‘오추마’ ‘적토마’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는가? 가짜 견양 돼지처럼 실질이 없이 이름만 있다면 사기지만, ‘왜당나귀’처럼 실질을 갖추고 있다면 이름은 빌려오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직함 하나 바뀌면 대우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브랜드 가치가 얼마나 큰 자산인지 실감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스토리가 곁들여질 때 음식의 맛도 살아나는 게 사실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하루 종일 지배하는 온갖 형태의 광고들이야말로 ‘귀로 먹게 만드는 산업’이다. 이름의 과잉시대를 살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름에 값하는 실질이다. 듣도 보도 못한 재단 이름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거론되더니 그 뒤로 생소한 이름들이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 실질이 있다면야 이름이 낯설다는 게 무슨 문제겠는가. 그러나 실질 없는 이름에 무소불위의 권력이 더해진다면 그건 사기다. 그것도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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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늙은 말이 소금수레를 끌고 태항산을 오르는데, 아무리 안간힘을 써 봐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그때 지나가던 어떤 이가 이 모습을 보고는 다가가서 그 말을 어루만지며 통곡하고 옷을 벗어 걸쳐 주었다. 그러자 늙은 말이 머리를 치켜들고 하늘을 찌를 듯이 슬프게 울부짖었다. 이 말은 본디 천리마인데,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평생 소금수레만 끌며 늙어간 것이다. 형편없는 몰골을 한 이 말이 천리마인 줄을 알아보고 통곡한 사람은 말을 잘 감별하고 조련하기로 유명했던 백락이었다. 인재는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인재를 알아볼 백락이 없는 것이 불행이라며 인재 발굴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거론되곤 하는 이야기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장자(莊子)는 이 이야기를 다르게 비튼다.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들판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것이 말의 본성이다. 그런데 백락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좋은 말을 가려내어 명마로 키운다면서 편자를 박고 굴레를 씌워 먹이와 채찍으로 길들이는 바람에 그 본성이 망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정한 기준을 정해두고 인위적으로 맞추려 함으로써 불행이 야기됨을 경계하는 맥락이다. 다들 천리마에만 눈이 가 있을 때 장자가 본 것은 재능이나 의사와 무관하게 천리마로 길러지다가 죽고 버려지는 대부분의 말들이다.

개선하려는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과 사회는 여전히 편협한 기준에 의한 줄서기를 요구하고 있다. 재능과 관심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들은 일찌감치 차단되어 버린 채 이른바 ‘주요 과목’의 비중만 오히려 더 커졌으며, ‘서열 높은’ 대학, ‘인기 있는’ 학과와 ‘안정적인’ 직장의 관문은 점차 더 좁아져 간다. 백락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천리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에 내몰리기 때문에 불행하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이 21세기라는 데에 있다. 어제의 손익계산서가 금세 휴지 조각이 될 정도로 급변하는 이때에, 그다지 창의적일 필요도 없고 그저 당장 안정적인 것처럼 보일 뿐인 진로로 우수한 인재들이 몰린다면 이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청년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게 하고 그 기회비용을 국가사회가 파격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백락 없이도 저마다 천리마가 되어 내달릴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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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중화의 문명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피 흘리는 전쟁을 멈추게 하였으니 그 누구보다도 인(仁)한 사람이다.” 공자가 이토록 높이 평가한 사람은 바로 관중이다. 주나라 왕의 힘은 약해지고 제후들이 저마다 세력을 키워서 분열과 혼란이 극심해지던 춘추시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제후국들의 질서를 잡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 제후들을 패자(覇者)라고 부른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을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로 만든 인물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창고가 가득 차면 예절을 지키게 되고,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면 영예와 치욕을 가려서 행동하게 된다”는 자신의 말처럼, 제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관중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백성들이 먹고살 생업과 거처를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공자나 맹자 역시 민생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의 출발이라고 말했지만, 관중처럼 현장과 실용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공자는 관중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릇이 작고 예를 모른다고 비판했는데, 관중이 전승되던 가치보다 현실적인 효용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것이 “보통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보통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관중의 원칙이다. 맹자도 “백성과 함께 즐겨야 함”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베풀어지는 은덕이자 교화의 결과이다. 그러나 관중이 강조한 것은 민간에서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이루어줄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보통사람들의 바람과 동떨어졌거나 이해시키기 어려운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절차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쥔 이들이, 정작 그들을 뽑아준 보통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애초에 알 수조차 없는 이들이라면, 이는 왕정시대보다 더 큰 불행이다. 물러섬 없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는 자세가 미덕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민의를 대변하며 그 바람을 실현시켜가야 할 정치인이 보통사람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신념의 권좌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설혹 그 신념이 옳다 하더라도, 때로는 내주는 것이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보배다. 역시 관중의 말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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