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송혁기의 책상물림'에 해당되는 글 64건

  1. 2016.05.03 리베로를 위해서
  2. 2016.04.19 우활한 질문
  3. 2016.04.05 역사, 기억, 변화
  4. 2016.03.22 답답한 풍경
  5. 2016.03.08 과거는 바뀔 수 있다
  6. 2016.02.23 청렴의 이로움
  7. 2016.02.02 한류와 한국학
  8. 2016.01.19 봉우리와 바다
  9. 2016.01.05 대승적 이해
  10. 2015.12.22 말을 안다는 것
  11. 2015.12.08 학자의 자리
  12. 2015.11.24 말 위의 정치
  13. 2015.11.10 어려워함의 자세
  14. 2015.10.27 읽고 쓰는 이유
  15. 2015.10.13 들을 줄 아는 총명함
  16. 2015.09.29 미움을 이용하는 지혜
  17. 2015.09.15 뻔뻔한 시대의 염치
  18. 2015.09.01 마땅한 분노
  19. 2015.08.18 최후의 보루
  20. 2015.08.04 어떤 사람이 될까

독일의 축구선수 베켄바워가 한때 세계를 재패했던 것은,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경기의 흐름을 창의적으로 주도했기 때문이다. 수비수이면서 위치에 구애 받지 않고 활약하는 것을 이르는 ‘리베로’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이제 특정 선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수들에게 수시로 위치를 넘나드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현대축구의 추세다.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는 특정한 용도에 국한되는 그릇이 아니라 어느 자리에나 두루 쓰이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는 분야별 전문성을 간과하고 실용 지식을 천시하는 현상을 낳을 여지도 있다. 막스 베버는 바로 이 점을 동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되지 못한 이유의 하나로 들었다. 20세기를 거치며 동양에서도 전문가와 기술자가 각광을 받기는 했지만,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되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이 다시금 강조되는 지금이야말로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총괄적인 식견과 포용의 덕망을 갖춘 인물이 더욱 필요하다.

학문의 분야와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하고, 대학사회의 과감한 자성과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문의 변화가 충분히 진행된 뒤에 그 신중한 반영으로서 시도되어야 할 교육의 변화가, 정부의 재정지원 사업요강을 기준 삼아 졸속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어느 분야는 21만명이 남아돌고 어느 분야는 21만명이 부족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 자체도 신뢰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를 근거로 근 백년에 걸쳐 이루어진 교육과정을 두어 달 만에 뚝딱 바꾼다면 이것이 야기할 결과는 또 누가 예측하고 책임질 수 있겠는가. 당장의 산업수요에 맞춤형으로 신설되는 학과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제한적인 용도 이외에는 무용지물이 되기 쉽고, 숙성되지 못한 채 급조된 융합학과는 통섭이 아니라 접합에 그칠 공산이 클뿐더러 본래 있던 전문성의 장점마저 버리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리베로는 자유인을 뜻한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여는 안목이 필요하다. 기성의 틀이 변화되면 언제 폐기될지 모를 지식만을 전수하며 취업률에 연연하는 교육으로는 이런 인재를 키울 수 없다.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설계하고 사회의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낼 비전을 스스로 찾아가는 자유인을 위해서, 대학은 존재한다. 그래야 한다.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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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활(迂闊)하다’는 말이 있다.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우활하다는 평을 달고 산 이가 맹자다. 각 나라가 부국강병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전국시대,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묻는 위나라 왕에게 맹자는 대뜸 “왕은 어찌 이로움밖에 모른단 말입니까? 오로지 사랑과 정의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위나라 왕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번번이 전쟁으로 땅을 빼앗겼고 그 와중에 맏아들마저 잃고 말았다. 당장 억울함을 되갚고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나라가 필요했다. 그런 왕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여 백성들을 감화시키다보면 국익과 병력은 저절로 딸려오게 마련이라고 답했으니, 우활하다는 평을 듣고도 남을 만하다.

맹자의 해법이 과연 당시 상황에서 적절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옳음과 이로움 사이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무엇을 위해서든 간에,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상태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맹자에게는 있었다. 눈앞의 이로움을 얻기 위해서 원칙과 양심도 무시하고 부끄러움 따위 던져버릴 뿐 아니라 남에게 가해질 위험이나 아픔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고 괴물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물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잘못된 정치로 죽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고는 왕에게, 전쟁과 착취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왕궁의 가축들은 피둥피둥하다면 그건 가축에게 사람을 먹인 거나 다름없다는 직격탄을 날렸다. 과연 누가 천하를 통일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맹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 죽이기를 꺼리는 사람이 통일할 것이다.” 당시의 왕이란 사람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들뿐이므로, 누구 하나라도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왕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우리가 각자도생의 무한경쟁에 내몰려서 혹은 첨예한 이권의 당사자로 혹은 적당하게 묵인하고 외면하는 동조자로 저마다 크고 작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사이에, 꽃다운 생명들을 태운 배가 가라앉았고 여전히 그 차가운 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맹자의 우활한 질문에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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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제나라의 최저는 자신의 후처를 농락한 장공을 시해하는 난을 일으켰다. 이때 제나라 사관으로 있던 태사 백이 사실 그대로 “최저가 그 주군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이를 본 최저는 그를 살해했다. 관례에 따라 그 동생인 태사 중이 사관의 직분을 이어받았는데, 형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똑같이 기록했다. 그러자 최저는 태사 중도 살해했고, 이어서 사관이 된 태사 숙이 형들과 똑같이 기록하자 그 역시 살해했다. 세 형이 죽어나가는 것을 본 태사 계 역시 사관에 오르자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똑같이 기록했다. 최저는 사관들의 필봉을 한탄하면서도 막내마저 죽이지는 못했다.



사관들이 연이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려 한 것이 ‘역사는 오로지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원칙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죽고 사건은 지나가도 역사만은 영원히 남으므로, 역사 기록은 그 자체로 명분을 바로세우는 일이며 후세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공자의 □□춘추□□ 이래로 난을 일으키는 신하나 패륜한 자식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라는 맹자의 말처럼, 동아시아에서 역사 서술의 이상은 적극적인 가치 판단이자 심판이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이었다.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시기를 살고 있다.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들 속에서 분노하고 흥기되었다가 이내 시들해지는 사이, 어마어마한 일들이 결말도 없이 지나쳐 갔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집권여당의 비밀문서 공개, 헌재의 정당해산 결정, 책임지는 이 없는 세월호의 진상, 교육부의 전횡이 야기한 국립대 교수의 투신자살, 현역 실세들이 걸린 뇌물 게이트, 역사교과서 국정화….

왕정시대에 역사 기록이 불의를 기억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었다면, 이른바 민주사회의 주인들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투표가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난리통 같은 공천 파문들,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프레임들로 인한 무력감이 정치에 대한 환멸로 이어질 만하다. 그러나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들조차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고 만다면, 다시 어디서 희망을 말할 수 있겠는가. 기억이 변화를 만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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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벗 홍대용이 죽었다. 박지원은 벗의 죽음을 기리는 비문을 “홍대용이 죽은 지 3일 후, 중국으로 사신 가는 문객이 있었다”라는 건조한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 인편에 중국에 있는 홍대용의 벗들에게 부고를 전하는 내용과 홍대용이 중국학자들과 각별한 교분을 맺은 사연들로 비문의 대부분을 채웠다.

비문의 목적은 고인을 칭송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필담 몇 번 만에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교유를 지속했음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어떤 칭송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홍대용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고도의 수사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 전역에 홍대용의 부고를 알리고자 한 것 역시, 조선 한 귀퉁이의 비석에 새기는 글만으로는 홍대용을 기억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문을 읽는 감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지원은 홍대용의 죽음이 웃으며 노래하고 춤출 일이라고 하였다. 이제 그는 물리적 거리나 시대적 관습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노닐며 벗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수학과 음악에 해박한 이론가였고 지구자전설을 주장한 천문학자였지만 당시 조선은 그를 알아주기는커녕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헐뜯기 일쑤여서, 그 기발한 발상과 탁월한 능력을 감추고 세상에 뜻이 없는 양 묻혀 지내야 했다. 천편일률의 협소한 조선이 홍대용을 품을 수 없었기에 외국의 벗들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18세기 조선의 풍경이다.

십대 초반을 체스 챔피언으로, 십대 후반을 게임 제작자로 지내던 소년이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 후 게임회사 사장으로 활약하다가 공부가 필요해서 다시 박사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세간의 화제가 된 알파고 개발자의 이력이다. 물론 천재의 예외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 천재가 우리나라에서 십대를 보냈다면 대학에 들어갈 수나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대학원이 그의 필요를 유연하게 채워줄 수 있었을까? 단일한 길을 정해두고 학생들에게 줄서기를 강요하고, 대학교마저 정부가 주도하는 일방으로 길들이려 하는 사회에서, 인공지능 개발에 갑자기 국가가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70년대 기능올림픽 선수를 키우고 제조업 육성하듯이 뚝딱뚝딱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풍경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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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한 번! 그게 시작인 거예요. 그렇게 야금야금 돈맛 알아가다 보면 당신같이 되겠지.” 드라마 <시그널>에서 권력에 빌붙은 선배 경찰의 회유에 맞서 던진 주인공의 일갈이다. 유괴, 연쇄살인 등 실재했던 장기 미결 사건들을 소재로 숨 가쁘게 진행되어 온 이 드라마는,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종국을 향한다. 10대들의 끔찍한 범죄가 피해자를 나락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축소 은폐, 가해자 및 경찰에 의한 인권 침해가 더해지면서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 뒤에는 돈과 권력, 그리고 이기심들이 힘없는 개인을 처참하게 망가뜨린, 드라마보다 훨씬 더 추악한 현실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한비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둑이 조그만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진다”고 하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 하나하나에 타협하다 보면 결국 못할 짓이 없게 되고, 본인은 물론 많은 이들까지 엄청난 재앙에 빠뜨리기에 이른다. 반면 위나라 재상 백규가 큰 공을 세운 것도 둑의 작은 구멍 하나 막는 일로 가능했다. 하도 보잘것없어서 해 봤자 아무 실효도 없을 것 같은 일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결국은 큰 변화를 이루어낸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아주 쉬운 일로부터 시작된다.” 노자의 말이다. 드라마 속 선배 경찰은 이렇게 말한다. “정의니 사명감이니 그런 거 지킨다고 바뀌는 거 아무것도 없어. 세상 똑같이 돌아간다고. 그러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잡아!” 그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은, 현실이란 도무지 바뀔 수 없다는 체념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조차 외면한 채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좇는다면,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 그 일이 결국 나에게 닥치는 비극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고물 무전기로 과거의 사람과 통화하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냉혹한 현실을 절묘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에서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과거는 바뀔 수 있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보다 부질없는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지금 여기서 평범한 개인이 하는 작은 결정의 순간들이야말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과거로부터 던져지는 이 말에 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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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송나라의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옥을 발견해서 사성 벼슬을 하던 자한에게 바쳤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의 보배이오니 꼭 받아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그 사람에게 자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옥을 보배로 여기고 나는 받지 않음을 보배로 여기니, 내가 이 옥을 받는다면 우리 둘 다 보배를 잃는 셈 아니겠소?” 재물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참된 보배라는 말이다. 훌륭한 사람의 멋진 말이기는 하지만 세태와는 거리가 너무 먼, 그저 옛날 옛적의 이상적인 관료상일 뿐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보통 사람들로서는 다음 이야기가 더 와 닿는다.

노나라 정승에 오른 공의휴는 생선을 매우 좋아했다. 이를 안 어떤 손님이 생선을 선물했는데 받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자 공의휴는 이렇게 답했다. “생선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받을 수 없소. 나는 이제 정승이 되었으니 생선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소. 그런데 이유 없이 주는 생선을 받아먹다가 이를 빌미로 면직이라도 되고 나면 누가 나한테 생선을 주겠소?”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청렴이야말로 가장 크게 남는 장사다. 그런 까닭에 욕망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게 산다”라는 역설적인 말을 던지고 나서 그 예로 든 일화들이다. 명망을 누리던 자가 재물 욕심으로 패가망신하는 일은 예나 이제나 비일비재하다.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욕심을 채우려 탐관오리가 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더 큰 욕망을 지속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청백리가 된다는 게 다산의 논리다. 좋아하는 것을 더 오래 누리기 위해서 청렴을 택한 공의휴는 물론이거니와, 자한 역시 재물보다 더 큰 것, 즉 명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청렴하게 산 것이다. 욕망을 인정하고 추구하되, 그러기 위해서 청렴의 이로움을 아는 것이 지혜다.

요즘처럼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 청렴을 강조하는 때도 드물다. 그런데 청렴을 이미지로 내세워 당선된 대통령 밑에서 인선 때마다 비리 문제가 불거지더니 급기야 전 총리가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진짜 실세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도 들린다. 청렴은 강조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청렴해야 이롭고 그렇게 사는 삶이 편안한,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에 달려 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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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알려지지 않은 나라.” 1929년 헝가리 학자 버라토시가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 서문에서 쓴 표현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 한류의 열풍으로 이곳 헝가리에도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려는 열기가 뜨겁다. 머나먼 헝가리 땅에서 유럽 각국의 한국학자들을 초청해 학술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한류 덕이다.

헝가리 최초 한국학과의 학과장인 엘테대학교 초머 모세 교수에게서 학과 설립과정을 들었다. 1948년 북한과 외교를 수립한 헝가리는 한국전쟁 때 북한 고아들을 초청해 고아원과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이 고아들에 유학생들이 더해져서 헝가리에는 북한공동체가 형성됐다.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운 쇠베니는 헝가리 최초의 한국학자가 되었으며, 헝가리어·한국어사전인 웽조사전을 편찬했다. 북한의 문학작품들이 번역되고 최승희 무용단이 방문하면서 한국문화가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쇠베니의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한국학과 설립이 무산됐고, 1956년 반소련 혁명으로 북한과의 외교가 단절됨으로써 헝가리의 한국학은 피어나지도 못한 채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북한 유학생들이 귀국하며 모조리 태워버렸다는 웽조사전의 운명처럼. 1989년 남한과의 외교수립 이후 다시 시작된 한국어교육이 한국학과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 2008년이니, 헝가리 한국학의 본격적인 출발은 근 60년이나 늦춰진 셈이다. 이렇듯 정치적 여건은 때로 문화의 부침을 좌우한다.

학술대회에 참석한 유럽 8개국의 한국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해외 한국학 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 실감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국제협력단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해외의 일본학 지원에 일찍부터 공을 들여온 일본이나 공자학원을 중심으로 전폭 지원에 나선 중국에 비하면 태부족이다. 한류의 힘으로 어렵게 피워낸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면 국가 지원의 획기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올해 문화부는 문화융성으로 성장 동력을 확충하겠다는 기치 아래 문화콘텐츠의 생산과 해외 유통에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류를 통해 세계 속의 경제영토를 개척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그 기반을 이루는 해외 한국학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지 않는다면, 한류의 신화는 사상누각이 될지도 모른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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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이렇게 시작하는 김민기님의 ‘봉우리’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등수에 들지 못해 절망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만든 노래라고 알고 있다. 그저 정상의 기쁨만을 바라보며 힘겹게 올랐지만, 막상 오르고 보면 더 높은 봉우리가 이어진다. 높음과 강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이 노래는, 봉우리가 아니라 바다를 말한다.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이 노래를 들으며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리곤 한다. 물은 높은 데로 오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어, 남들이 다 싫어하는 가장 낮은 데로만 흘러간다. 모두를 이롭게 해주면서도 공로를 드러내거나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막히면 돌아가고 빈 곳은 채우며 흐르는 물, 다투지 않고 그저 담긴 그릇의 모양에 순응하는 물을 통해서 노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도를 말하고자 했다. 낮은 데로만 흐르고 흐른 물이 결국 이르는 곳은, 바다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이유는 가장 잘 낮추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유독 좋아하고 그렇게 사셨던 신영복 선생이 이 땅을 떠나셨다. 선생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이유로,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서 약자는 늘 다수라는 점을 드셨다.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에 단단한 것도 뚫을 수 있고, 다수가 가는 곳에 정의의 길이 생긴다고 여기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낮은 곳에서야말로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하셨다. 낮음이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가르침을 새기는 데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다”라는 선생의 말씀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바다처럼 사신 선생이 가신 곳도 바다일 것만 같다. ‘봉우리’의 노랫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우리 인생에는, 또 이 세상에는 여전히 더 깊고 많은 아픔들이 닥칠 것이다. 그 아픔이 유난히 저며 올 때마다 바다를, 그리고 선생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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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大乘)은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데에서 나아가 더 많은 이들을 구제하는 길로 나서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 말에 ‘적(的)’자를 붙여서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어휘를 만든 것은 일본이다. 한자문화권에서 나름의 출처와 전통이 있는 어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사용하는 것은 문화의 두께를 풍성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여서 자주 사용하곤 하는 ‘대승적’이라는 말은 전통적 의미와 맥락이 연결되면서 새롭게 담긴 의미도 참 좋은 말이다. 그것을 어느 나라에서 먼저 사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적절한 사용에 있을 뿐이다.



‘대승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더 약하고 불리한 위치에 있거나 적어도 그들과 함께하는 입장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희생을 감내하고, 남의 눈에 흐르는 눈물까지 끌어안는 대승의 관점이다. 자신은 당사자가 아닌 심판자의 입장에 서서 대승적 관점을 요구한다면 이는 당사자를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인 이들로 못 박는 것이며, 근사한 말로 치장한 또 하나의 폭압이다. 대승은, 더 나아가 모든 종교는, 남들이 다 우르르 몰려가고 난 자리에 끝까지 남아서 버려진 이들, 못 따라가고 주저앉은 이들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 역시 그래야 한다.

새로운 한·일관계의 수립이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일수록 가장 근본적인 지점에서 원칙을 가감 없이 관철시켜야만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철저한 조사와 투명한 공개, 그리고 법적 책임 인정과 명백한 사죄에 달려있다. 한국은 당사자인 할머님들의 입장에서 이를 당당히 요구함이 마땅하고, 일본은 이 ‘불가역’의 범죄를 석고대죄하는 것을 원점으로 새로운 출발을 도모해야 한다.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당사자도 모르게 ‘불가역’의 쐐기를 박아 버리고 빨리 갈 길 가자는 데에 합의하는 ‘외교적 성취’를 이룬 정부가 말한다. “국민 여러분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번 합의를 이해해 주시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2015년의 마지막 날 공지된 청와대 보도 자료의 마지막 문장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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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니는 데 있어서 선생님의 장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자신은 ‘지언(知言)’ 즉 말을 잘 안다고 대답했다. 맹자가 올바르지 못한 말로 든 것은 편견에 치우친 말, 도를 지나쳐 함부로 내뱉는 말, 사악하고 거짓된 말, 두루뭉술 둘러대는 말이다. 치우친 말은 무언가에 가려진 마음에서, 지나친 말은 어딘가에 빠진 마음에서, 사악한 말은 바른 도리에서 떠나있는 마음에서, 둘러대는 말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남의 말을 듣고 그 속에 감춰진 마음을 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치우친 말이 더 절실하게, 지나친 말이 속 시원하게 들릴 수 있다. 사악한 말이 솔직함으로, 둘러대는 말이 사려 깊음으로 위장되기도 한다. 맹자의 지언은 신비한 독심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올바름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천할 때 얻을 수 있는 상식적인 통찰력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지언의 수준이 아니더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말들이 넘친다는 데에 있다. 그런 말들이 유력한 인사들에게서 너무도 자주 나오고, 그에 대한 아무런 사회적 제재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묻히고 잊혀 간다는 건 더 심각하다. 여당 대표가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에게 “니는 연탄 색깔하고 얼굴 색깔이 똑같네”라고 했다면 이것이 인종 편견에 치우친 피사이고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하는 음사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가 불거지자 “즐거운 분위기 속에 봉사하는 현장에서 친근함을 표현한다는 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발언이었습니다”라고 사과했다면 이는 솔직하고 사려 깊은 말일까, 바른 도리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그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둘러대는 말일까? ‘

‘즐거운 분위기’와 ‘친근함’을 강조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간파’라는 말을 쓰기조차 아깝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실수인지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어 왔는지를 살피면 그 말 속에 담긴 마음이 자명해질 것이다. 맹자가 지언을 강조한 이유는, 올바르지 못한 말들은 개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정치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 이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적 비중이 큰 사람에게 더 크게 적용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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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대학이 주최하는 야오종이(饒宗신) 선생 기념 국제학술대회(12월4~7일)에 참가했다. 학술대회의 규모와 내용도 성대했지만, 선생의 100세 생신을 축하하는 수연(壽宴)은 여러 모로 인상 깊은 자리였다. 야오 선생은 한국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화권과 일본, 유럽 등지에서는 살아있는 최고의 석학 가운데 한 분으로 추존되고 있다. 이 노학자의 생신 잔치에 홍콩 정치의 수반인 행정장관을 비롯해서 각계 인사 1000여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야오 선생의 연구 분야는 문자학, 고고학, 역사, 문학, 서화, 음악 등에 걸쳐 있다. 광범위한 학문 이력이지만, 요컨대 실용과는 거리가 있는 인문학이다. 실리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진 홍콩에서, 평생을 책 속에 파묻혀 읽고 쓰고 강의한 인문학자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막대한 기금이 마련되고 학계는 물론 정계와 문화계를 망라한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조선시대에 학자로서 이름이 나면 지역사회를 넘어 조정에서도 높이 존중받았다. 원로 학자에 대한 추대와 초빙이 이어졌고, 현실 정치에 나선 적 없이 평생 학문만을 추구한 인물이 학문적 명성만으로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의 주인공이 된 사례도 많다. 붕당정치의 폐해로 이어진 면이 없지 않으나,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큰 학자들이 시대마다 있었고 그들을 위한 자리를 늘 마련해 두었다.

축하행사 내내 야오 선생에 대한 헌사로 ‘걸출한 화인(華人)’이라는 수사가 반복되었다. 오늘 우리 대학은 산업 연계 교육의 활성화를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단기성과만을 종용하는 추세가 인문학의 지형마저 바꿔놓은 지 오래다. 인문학 진흥이 많이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걸출한 인문학자가 나오기는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 젊은 학자들은 숨 가쁜 논문 생산 경쟁에 내몰려 전공에 매몰된 채 허덕이고, 식견과 혜안을 갖춘 원로 학자들은 정년과 함께 사회적 시선의 바깥으로 싸늘하게 퇴장하고 만다.

예나 지금이나 민생을 책임지는 국가 경영은 무엇보다 실용과 공리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거기에 매이지 않은 자리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선 굵은 제언을 던질 수 있는 학자들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사회에서 창조적인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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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해서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많이 알려진 것처럼 한나라 신하 육고(陸賈)가 고조 유방에게 한 말이다. 육고는 고조에게 말할 때마다 번번이 <시경> <서경> 등 성현의 고전을 인용하곤 했다. 인문학적 베이스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던 고조로서는 말끝마다 성현을 들먹이는 육고의 태도가 같잖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 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시경> <서경>을 어디에 쓰겠느냐”며 면박을 주었다. 성현의 글 따위가 자신이 맨몸으로 헤쳐온 그 치열한 산전수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은, 고조로서는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였다. 그러기에 이렇게 자신에 찬 어투로 육고를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육고는 위의 대답을 시작으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고조의 화를 돋울 만한 말을 쏟아낸다. 요컨대 무력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회적 신뢰를 바로 세우는 문치를 겸해야 국가가 오래 보존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고는 진시황이 통일 후에 문치를 시행했더라면 고조 당신이 천하를 얻는 일이 가능하기나 했겠느냐는 반문으로 말을 맺음으로써 고조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고조는 매우 불쾌해 하면서도 국가 존망의 이치에 대해 글을 지어보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육고는 열두 편의 글을 차례로 지어 올렸고, 고조는 그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조라는 인물은 모순적이리만치 여러 가지 면을 지니고 있으나, 이런 장면은 그가 왜 항우를 이길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의 장점을 이용할 줄 아는 국량이 그것이다.

우리의 순진한 바람과는 무관하게 선거는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쟁터다. 이슈 가로채기와 프레임 조작, 적의 분열을 위한 비방과 이간질, 지지표를 굳히기 위한 감정에의 호소 등 온갖 전략을 구사한다. 이를 마냥 비난만 하고 말 수 없는 이유는, 선거는 승리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그 장점을 취하며 나아가기는커녕 철저히 무시하고 적대하여 이기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다면, 이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이다. 정치는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삶을 희망으로 이끌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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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요순시대 이야기다. 황하의 범람을 다스렸다고 전하는 우(禹)가 어느 날 순(舜) 임금을 모시고 있다가 이런 말을 한다. “임금이 임금 노릇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하는 것을 어려워해야 바른 정치가 시행되어 백성들이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려워함’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고 지금 하는 일이 완벽할 수 없음을 마음 깊이 알아서 늘 살얼음판을 걷듯이 전전긍긍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는 자세를 말한다.

우의 이야기를 들은 순 임금은 진심으로 동의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어렵게 여길 줄 안다면, 훌륭한 건의가 묵살되는 일도, 현명한 인재가 묻혀버리는 일도 없게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매사에 어려워할 줄 아는 윗사람이라면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물어서 그 의견을 따를 것이고 하소연할 데도 없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괴롭히거나 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윗자리에 있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신념과 경험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 자리에 오르도록 들인 노력과 쌓인 지식을 생각하면 아랫사람들은 그저 답답해 보일 뿐이어서 걸핏하면 가르치려고만 들게 된다. 높은 자리에 있는 덕분에 주어지는 넓은 시야와 정보 장악력이 본디 자신의 능력인 양 착각하고, 본 것은 적더라도 나름의 진심을 담아서 올린 새로운 의견들을 한마디로 묵살해버리기 십상이다. 세상에는 능력 없고 노력도 안 하는 무지렁이들 천지이니 그들을 애써 구제하려 할 것도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갑질’이란 지극히 정당한 일이다. 본디 군자가 가져야 할 자세로 제시된 전전긍긍의 가르침은 어느새 힘없는 아랫사람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자기 자리가 허락하는 선에서 그저 당장 문제 안될 선택만 하며 그야말로 ‘어렵게’ 묻혀서 살아간다. 이런 삶에 선함과 바름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먼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순 임금은 우의 말이 훌륭하지만 자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고 오직 앞선 요(堯) 임금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어려워함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까마득한 요순시대 이야기다.


송혁기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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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의 학자 심대윤이 어느 날 아이 종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나라에 공납으로 바치는 말의 행렬을 만났다. 수많은 말들이 내달리는 것을 보고 구경 나온 아이들도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남들이 다 달리는 것을 본 아이 종이 영문도 모른 채 자기도 달려야 하는 줄 알고 냅다 달려가는 것이었다. 심대윤은 인파 속에 아이 종을 잃어버릴까 싶어 일단 뒤를 쫓아 달려갔다. 그 상황에서는 불러 봤자 들리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달려가다가 아이 종이 힘이 다해 지칠 때가 되어서야 불러서 멈춰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이 일을 기록하고 이렇게 썼다. “안타깝도다! 세상 사람들이 앞다투어 허상을 좇아 달려가는 것이 이 아이 종과 어찌 그리 똑같단 말인가. 그들의 달리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내가 아이 종에게 했던 것처럼 일단 함께 달려가다가 때를 보아 불러 세워 멈추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심대윤은 증조부가 당쟁의 화를 겪은 탓에 출세의 길이 막혀 있었다. 평생 학문을 하고 글을 썼지만 그것으로 먹고살 길이 없어서, 당시 양반으로서는 수치로 여기던 장사와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 체계를 구축하였고 엄청난 분량의 저작을 남겼다. 주경야독을 실천한 인문학자였던 셈이다.

그는 “평생 글 읽은 덕택으로 막걸리 한 잔 얻어먹어 본 적 없지만 나무 반상 만드는 일을 하고부터는 굶주리지 않게 되었으니, 하찮은 기술이 글공부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읽고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좋은 처방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염병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기만 할 뿐 치료하려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죄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간의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책무이니 그 어지러움이 심할수록 일을 해볼 만한 기회를 만난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푯대를 높이 세우고 나를 따르라고 소리치거나 깃발을 휘두르며 앞장서서 나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심대윤 사상의 특징은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되 어디까지나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가는 데에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류를 따라 내달리는 사람들 속에서, 때로는 눈높이를 맞춰 함께 뛰어가면서, 때로는 소리 질러 불러 세우면서 끊임없이 설득하는 것. 심대윤이 평생 글을 쓴 이유였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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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총명하다는 말을 주로 어린아이에게 사용한다. 심지어 기억력 향상과 두뇌 활성화에 좋다고 하는 총명탕이 수능시험을 앞두고 많이 팔리기도 한다. 국어사전에도 “썩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재주가 있다”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총명(聰明)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 이 어휘의 첫 출전인 <주역> 정(鼎) 괘에서의 뜻은 귀와 눈이 밝은 것을 뜻하며, <맹자>에 나오는 사광(師曠)의 총과 이루(離婁)의 명은 각각 세상에서 가장 청력과 시력이 좋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청력을 개선시키는 것으로 의사소통뿐 아니라 학습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고, 한의학에서 건망증이나 치매를 치료하는 처방들은 시력과 청력을 강화하는 약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경향신문 2013년 7월10일 한동하, ‘웰빙의 역설’). 그러고 보면 글자 그대로의 총명함이 오늘 쓰이는 영리함의 뜻과 그리 멀지 않은 셈이긴 하다. 잘 듣고 잘 보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아는 것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서경>에서 총명은 군주의 덕을 가리킬 때 주로 쓰였다. “모든 이들에게는 욕망이 있어서 군주가 없으면 혼란하게 되니, 하늘이 총명한 이를 내어서 다스리게 하였다”고 했고, “오직 하늘만이 총명한데 성스러운 군주가 이를 본받는다”고 했다. <주역>에서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사람이라야 백성과 근심을 함께할 수 있다”고 한 것이나 <중용>에서 “성인이라야 총명과 예지로 백성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고 한 것도 모두, 군주의 덕목으로 총명함을 든 예들이다. 본디 훌륭한 군주를 뜻하는 성인(聖人)이라는 말 역시, 애초에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태어난 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잘 듣고 잘 보아서 지혜로운 사람을 뜻한다.

들을 줄 모르는 통치자를 만나는 것만큼 큰 재앙은 없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혼자만의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귀가 얇아 좌고우면하는 것과 귀를 열고 널리 듣는 것은 다르다. 여러 이견과 갈등이 있는 사안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역사교과서의 국정 단일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나 적법한 절차를 거쳐 추대된 국립대 총장들을 임용해달라는 목소리마저 불순한 목적을 지닌 것이라 여겨 아예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다. 더구나 지금은 군주의 시대가 아니라 민주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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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조 유방이 대업을 이룬 직후의 일이다. 여러 장수들이 숙덕거리는 것을 본 고조가 그 이유를 묻자 장량이 말했다. “폐하가 평민에서 천자에 오르셨는데, 오랜 친지들에게만 상을 주고 사적으로 원한이 있는 이들은 벌하고 죽이셨습니다. 그러니 불만과 두려움에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해하며 대책을 묻는 고조에게 장량은, 고조가 가장 미워한다고 모두에게 알려진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 바로 그 사람을 서둘러 책봉해 주라고 하였다. 고조는 즉각 옹치를 십방후로 책봉하였고, 이를 보고 다들 기뻐하며 말했다. “옹치도 책봉되었으니 우리는 걱정할 게 없겠군.” 미워하는 사람을 요직에 앉힌다는 ‘옹치봉후(雍齒封侯)’ 성어의 유래다.



옹치는 고조와 같은 고을 출신으로서, 별 볼 일 없던 시절의 모습까지 알아서인지 영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요충지 풍읍을 맡겼는데 배신하고 다른 나라에 귀순해 버린 전력까지 있다. 다시 휘하에 들어와서 공을 많이 세우는 바람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었을 뿐, 고조가 그를 그토록 미워한 것도 이해가 갈 정도다. 그야말로 성군(聖君)이 아니고는, 여러 차례 자신을 모욕하고 배신까지 자행한 이에게 포용을 베풀라고 요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옹치봉후는 감동적인 용서와 대화합의 이야기가 아니다. 안정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장량에게 주목해본다. 장량은 고조의 심복인데 모반 논의를 알고서도 왜 물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을까? 사실 그는 목숨 걸고 직언을 아뢰는 유가적 충신과는 거리가 있는, 명철보신의 처세에 능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를 두고 사마광은 참으로 간언을 잘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고조는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이익을 버릴 줄은 알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스스로 위기임을 느끼지 않고서는 자기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니다. 장량은 고조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고 적절한 시기에 지혜롭게 간언한 것이다. 노출된 미움마저 안정을 이루어내는 도구로 삼은 그의 처방은 주효했다.

권력을 쥔 자들이 사적인 호오에 사로잡힐 때, 그 집단을 지탱하는 기반인 공정성과 신뢰는 한없이 허물어져 보복과 담합이 만연하고, 미래의 지평은 좁아지게 된다. 불만과 두려움이 더 깊어지기 전에, 각 분야마다 합의 가능한 최소한의 공적 기준을 인정하고 서로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권모술수의 지혜라도 발휘해야 할, 위기의 시대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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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해서 사용 빈도가 낮아진 어휘들이 있다. ‘얌체’라는 말도 그중 하나다. 친구 사이에서 “얌체 같다”는 말은 치명적인 욕이었다. 뭘 모르거나 어딘가 모자라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빤히 알면서 얄밉게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얌체는 본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의 염치(廉恥)에서 왔는데 그 반대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얌체라는 지적이 줄어들게 된 것이, 체면과 명분을 강조하던 시대와 달리 대놓고 자기 이익을 추구해도 큰 흠이 되지 않는 세태의 반영인지도 모르겠다.

<소수의견>은 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공권력의 잘못 및 그 은폐 시도와 싸우는 법정 영화다. 제작 완료 2년 만에야 성사된 상영을 앞두고 김성제 감독은 “법이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물음을 던지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결국 염치에 관한 영화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국가라는 실체도 없는 적과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검사를 향해 주인공은 “해부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실험용 개구리처럼 겁을 잔뜩 집어먹고 서둘러 검사님께 지원 요청을 한 사람은 누굽니까? 정말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이 영화에서 피고 대한민국에 요구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염치였다.



사람도 아닌 국가에 염치를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염치는 애초 국가에 요구된 덕목이었다. <관자(管子)>의 첫 편 ‘목민(牧民)’에서 국정의 강령인 ‘사유(四維)’로 제시된 것이 예의 염치다. 염치를 ‘잘못을 은폐하지 않고 그릇된 길을 따르지 않음’이라고 풀이하고, 국가가 떳떳함을 잃고 잘못을 덮기에만 급급하다면 결국 회복 불능의 상태로 멸망하게 된다고 하였다.

일말의 염치라도 있다면 진즉 물러났어야 할 이들이 버젓이 지도층을 채우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너나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염치 따위는 안중에 없다. “간곡한 사양으로써 상의 공정함과 위엄을 지키고, 제 작은 염치도 보전하는 노릇을 삼고자 합니다.” 선정 과정에 간접적으로나마 간여했다는 이유로 만해문학상 수상을 고사하며 던진 김사인 시인의 겸손하지만 단호한 말 한마디가 이토록 빛을 발하는 것은, 이 시대의 지독한 뻔뻔함 때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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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신문기사나 사회관계망에 오른 글들에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들이 댓글로 달리곤 한다. 영화 <베테랑>이 단숨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데에도 ‘분노의 공감’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현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분노 게이지’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온라인게임에서는 분노 게이지가 전투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분노 게이지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욕해달라고 주문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장면을 보며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은, 이 사회의 분노 수위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는 진단 때문이다.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말이 있다. 솔개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물에서 헤엄치며 뛰노는 모습으로 ‘천지자연의 모든 것들이 도에 합당한 자기 자리를 얻은 상태’를 형상화한 말이다. 자신이 뭘 잘하는지 발견해 가고 평생 마음 나눌 친구들을 얻는 학교가 학생이 날아올라야 할 하늘이고, 약자를 위한 법 집행이 이루어지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사회가 시민이 노닐어야 할 물이다.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는 데에서 분노는 시작된다. 아이의 멋진 상상력이 물에 빠진 솔개의 날개 취급을 받고 청년의 당찬 도전이 물 밖에 던져진 물고기의 몸부림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답답함은 분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마땅한 것을 누리는 데에 과도한 경쟁이 요구되고 그 경쟁마저 공정하지 않다는 의식이 팽배하니 분노는 극단적으로 쌓여간다. 누구에게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모른 채 증폭되는 분노는 온갖 의혹과 과도한 억측으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정작 분노의 대상은 숨어버리고,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처럼 날선 비방만 난무한다.

모든 존재는 자기 자리가 있게 마련이라는 말은, 입 다물고 자기 본분에나 충실하라는 가르침으로 통용돼 온 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존재가 자기 자리를 얻을 수 있게 해주어야 진정한 정치라는 당위와, 그렇지 못할 때 끝까지 비판하고 나설 수 있게 한 명분 역시 여기서 나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구난방으로 솟구쳤다 이내 소멸되며 더 큰 체념으로 이어지는 분노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가 어디이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마땅한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 위에서 일어나는 ‘마땅한 분노’이며, 이 분노를 생산적인 힘으로 만들어갈 지혜다. 이 시대에 인문학이 필요하다면 이런 이유에서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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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문장가 유종원은 유주사마 맹공을 위한 묘지명에서, “공은 조주를 정벌하는 임무를 수행할 때 보루를 견고하게 세우고 전장에서 죽기를 각오하였다”라고 하였다.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구축물을 뜻하는 보루(堡壘)라는 어휘의 출전이다.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어도, 마지막 보루를 지켜내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보루라는 말 앞에 ‘최후의’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고, ‘죽음’도 불사한다는 말이 이어지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송나라가 원나라에 의해 패망되던 때, 육수부(陸秀夫)라는 충신은 송나라의 재건을 위해 복주에서 다시 위왕(衛王)을 세우고 보좌하였다. 당시 최후의 보루는 광주만과 남쪽 바다가 만나는 애산(厓山)이었다. 마침내 원나라 군대가 이 보루마저 격파하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음을 안 육수부는 처자를 먼저 바다에 빠뜨리고 자신도 위왕을 등에 업고 애산 앞바다에 빠져 죽었다. 1279년, 송나라 최후의 장면이다.





지켜야 할 것이 ‘최후의 보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이르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공존 불가능한 적군과의 전쟁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닌데도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잔인할 뿐 아니라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더구나 지키고자 하는 것이 눈앞의 이익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어이 힘으로 누르고 몰아간다면, 결국 다양한 취향과 감성들, 자유로운 사유들과 저 창조적 상상력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라고 적고 그 보루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의 몫을 감당해낸 분의 소식을 들었다. 지금 필요한 일은, 투신만이 가능한 선택이었는지, 그것이 정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었는지 따지는 것이 아니다. 무뎌지고 포기하며 한발 한발 뒷걸음치다가 어느덧 우리가 딛고 선 곳이 더 물러설 수 없는 땅끝의 보루, 애산인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대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무엇에 휘둘려 내몰리고 있는지, 정말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지금 다시 묻지 않는다면, 이 희생마저 우리는 또 바다에 침몰시켜버리고 말 것이다.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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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국 문인 원매(袁枚)는 유(柔)와 약(弱), 강(剛)과 폭(暴), 검(儉)과 색(嗇), 후(厚)와 혼(昏), 명(明)과 각(刻), 자중(自重)과 자대(自大), 자겸(自謙)과 자천(自賤)을 구분할 줄 알아야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온유함과 나약함, 강직함과 포악함, 절제력과 인색함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넉넉하고 남을 편하게 해주는 성격이 좋아 보였는데 막상 함께 일을 하고 보면 너무도 사리 판단에 어두워서 안타까운 사람을 우리는 간혹 본다. 참 똑 부러지고 분명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될 일에까지 지나치게 각박해서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존감과 교만함, 겸손함과 열등감이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자존감이 있어야 겸손할 수 있고 교만함은 열등감과 한통속임을 우리는 안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며 그 차이가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예들을 간명하게 짚어낸 구절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동아시아의 사상과 역사 서술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녀 왔다. 학문의 근간이 나는 어떤 사람인지 성찰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남에게 나의 실력을 입증해서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강조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에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그리도 많은 것이나, 사마천이 왕대의 서술과는 별개로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의 인물 열전을 쓰고 그 말미마다 논평을 덧붙인 것 역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기준을 찾고자 했던 오랜 열망의 반영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인지가 결국 일의 성패를 결정한다.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이 있고, 불의에는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짓누르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절제하되 남에게 인색하지 않고, 후덕하되 사리에 어둡지 않으며, 일처리는 분명하되 인정이 넘치는 사람,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사람인 양 과시하는 법이 없고, 남 앞에서 늘 자신을 낮추지만 내면이 충실해서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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