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한 <백종원의 푸드트럭> 그리고 지난주에 다시 시작한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열심히 보는 중이다. 요식업 사업가이자 요리 전문가인 백종원이 창업하려는 청년이나, 식당을 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방송이다. <푸드트럭>이 소자본으로 창업하려는 청년층을 타깃으로 삼았다면, <골목식당>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쇠락한 서울 이화여대 앞 골목 가게들을 찾는다.

두 가지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먼저 <푸드트럭>에서 ‘안 좋은 의미’에서 화제가 된 청년 출연자의 표정이다. 푸드트럭에서 팔려고 내놓은 메뉴와 그 식재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중언부언하고 변명하다 굳어버린 그의 모습은, 결국 참지 못해 화를 내버리고 마는 백종원의 표정과 함께 공유됐다. 방송 이후 청년의 태도를 향한 비난이 많았다.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비난받기 딱 좋은 모습으로 TV에 출연한 셈이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잘 대응하고,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유재석 같은 태도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악마의 편집’은 그런 모습을 극적으로 집어냈다.

출처: 백종원의 골목식당 홈페이지

두 번째는 지난주 <골목식당>에 등장한 백반집 주인 여성의 표정이다. 그녀는 식당의 메뉴가 백종원의 ‘레시피’를 다 따라한 거라고 너스레를 떨며, 자신이 내놓은 음식을 “주변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라며 손님의 평가에 기대 자랑한다. 백종원이 맛과 위생을 지적하자, 그녀는 자신이 식당을 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거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지.”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남편은 눈물을 훔친다. 사회자와 제작진은 부부를 달래며 가게를 살리려고 한 이야기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위로한다. 방송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찬란했던 90년대 이대 상권’과 함께 블로그 등에 노스탤지어를 건드리는 이야기로 묘사되었다.

<푸드트럭>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패감이 누적되고 위축된 청년들의 표정이 연상됐다. 경직되어 있고 제대로 된 말로 대응하지 못하고, 언제든 터질 것 같은 표정. 자신이 못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하기보다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억지로 둘러대서라도 방어하기 일쑤였다. 칭찬을 듣기보다 혼나고 지적받는 데 익숙해서 그렇다. 달리 말해,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특별히 입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거나 적성과 특기를 고려해서 진로를 잡지 못한 채, 지방대를 다니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겠다고 시도하다 실패만 누적된 많은 청년들이 있다. 10대 어느 순간에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잠을 청했던 숱한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힘듦’을 잘 들어주며 ‘희망’을 설계해줄 ‘어른’을 만나기 어렵다. 대개의 평범한 한국 부모는 그저 “뭐든 하고 싶은 거를 해” 정도의 독려만 해줄 뿐 ‘전략적’으로 어떤 ‘선택지’를 제시하진 않는다.

공부 대신 10대 때부터 다양한 알바를 하며 온갖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한 교사의 말을 존중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다 총력 입시체제에서 뒤처지고,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방침 속에서 그들은 붕 뜨고 20대가 되는 셈이다. 실업계나 전문대를 나와 사무보조, 정규직 생산직으로 대표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로 들어가기 어려워진 시대와 궤를 함께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비숙련노동에 대해 ‘조무사’라고 조롱하거나, 비정규직들에게 정규직 전환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대못을 박는 멸시까지 넘쳐난다.

그런데 <골목식당>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버틴 이유”가 떠올랐다. 백반집을 하는 여성은 경제성장기를 겪은 ‘건강한’ 세대, 평범한 사람들의 익숙한 천연덕스러움을 갖고 있었다. ‘국제시장’의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처신일 것이다.

50~60대 내 부모님 세대에게 늘 듣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들은 대개 농촌사회에서 태어났고 다양한 공동체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도시에 살아도 쌀과 간단한 채소라도 부쳐주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보통은 여성이) 희생하여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고향 사람’이라는 다소 옅거나 짙은 관계도 있었다. 번듯한 직장을 갖지 않고 소소한 장사를 하더라도 상부상조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친척이든 동네사람들이든 모아서 계를 활용했고, 은행 융자가 안되는 등 ‘사정’이 어려우면 이야기를 해서 곗돈을 당겨 받을 수도 있었다. 이따금 잘못을 했을 때도 적어도 울타리 안에선 ‘사정’을 이야기하고 ‘선처’를 빌면 용서를 받을 수도 있었다. 배신도 당하지만 은혜도 입고 답례도 하면서 관계들을 유지하거나 키워갔다. ‘사정’을 봐줄 수 있는 ‘관계’ 바깥에서 살 엄두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가 왔어도 사람의 감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이런저런 ‘비빌 언덕’에 서로 의존하며 그 나름대로 ‘버텨온’ 것이다. 근대식 교육을 받아도 사회성 측면에서는 농경사회에서 익힌 관계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안정적인 삶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좀 더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은 ‘별일없이 사는 것’이 어려워진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 국가는 물론 좀 더 넓은 그물을 쳐서 폭넓고 효과적인 직업교육을 유도하고, 노동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정책을 써야 할 게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모두가 탁월해져야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탁월함을 뽐내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한 청년’들도 ‘스스로의 서열’을 매기며 위축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좋은 ‘어른’과 ‘친구’의 중요성을 곱씹게 된다. TV 프로그램을 찾아 조언까지 구해야 하나. 스스럼없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가까이에 있는 어른. 그리고 스스럼없이 의논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답례할 수 있는 친구 사이. 대가족과 마을 대신 핵가족과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사회성과 풍부한 표정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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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있을 때 면담하러 오는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은 진로를 묻기보다, 책벌레 선생에게 책 이야기를 묻고, 연애 상담을 하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가곤 한다. 찾아오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왜 남학생들은 배낭여행을 잘 가지 않을까?” 몇몇은 외국에 간단다.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번 돈과 용돈으로 방학이 끝날 무렵 삼삼오오 일본이나 중국을 갈 거라고 했다. 극소수지만 부모와 함께라면 여행거리는 좀 더 길어진다. 싱가포르나 호주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방학 하기 전까지 줄창 안 가본 나라에 꼭 가보라고 당부했지만, 개강 후 물으면 정작 해외에 나간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여학생들이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잠시 귀국한 선배는 비행기에 탄 한국인은 죄다 노인들이라고 했다.

1990년대 중반 국제화 물결을 타고 여행자유화가 시행되면서 배낭여행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청춘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로 여겨졌다. 특히 유럽 배낭여행이 그랬다. 10여년 전 대학 동기 중 적지 않은 숫자가 1~2학년 때 유럽으로 향하곤 했다. 그들은 로마와 파리, 런던으로 대표되는 로맨틱한 유럽 도시를 거닐며,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을 관람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사진으로 찍어 담아오겠노라고 하면서 항공기표를 자랑하곤 했다. 여행을 마친 친구들과 술자리를 할 때면 ‘로맨틱 유럽’ 이야기는 잠시, 대개 ‘고생담’만 한없이 풀어놓곤 했다. 함께한 친구와 싸워서 유럽 어느 도시에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유스호스텔과 게스트하우스에서 ‘못볼 꼴’을 보고, 동양인이라서 인종차별을 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 등등. 이야기는 “그래도 정말 좋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긴 했다. 스마트폰 없이 종이지도를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붙들고, 길을 물으려니 영어가 잘 안돼 손짓 발짓을 하면서 고생을 했어도 말이다.

젊은이들의 배낭여행 현황을 보려고 해외여행 통계를 뽑아봤다. 2006년 출국관광통계와 2016년 국민여행실태조사를 살펴봤다. 일단 40대 이상 해외여행객이 상대적으로 늘었다. 2006년에는 40대 이상의 비율이 48%가량이었는데, 2016년에는 57%로 늘었다. 특히 50~60대 관광객 비율이 증가했다. 고령화 사회와 청년세대의 어려움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런데 데이터를 볼 때 정말 도드라진 특징은 성별 여행 패턴이다. 20~30대가 가장 많이 가는 유럽과 아시아를 살펴봤다. 일단 20대 남성은 점점 해외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유럽 여행의 경우 2006년에는 여행자 중 60%가 여성, 40%가 남성이었는데 2016년에는 80% 대 20%로 격차가 늘어났다. 10년 전 30대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 많이 유럽으로 나갔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유럽을 더 많이 간다. 아시아 관광에서는 65% 대 35%에서 60% 대 40%로 성별 격차가 줄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여행 목적지가 성별에 따라 달랐다. 일본은 성별 상관 없이 많이 찾지만, 남성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를 찾을 때, 여성들은 홍콩이나 대만, 인도를 찾았다. 통계는 10년 사이 아시아를 벗어나지 않는 젊은 남성의 여행 성향과, 글로벌 세계를 누비는 젊은 여성의 여행 성향이 양극화되는 추세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가는 젊은이들의 성별이 확연히 갈린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유부터 따져봐야 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 기대라는 ‘압력’이 달라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들이 입대 전이라 먼 곳 가기를 꺼리고, 제대하면 취업 준비 때문에, 취업하고 나면 결혼 준비 때문에 해외여행을 꺼린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꼭 그런지는 의문이다. 10년 전에 남성에게 주어졌던 경제적 압력이 지금에 비해 더 작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취업경쟁에서 특별히 여성이 훨씬 많이 승리했다는 증거와, 남성의 임금이 여성에 비해 특별히 떨어졌다는 징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외려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취업, 연애, 결혼 등에 대한 ‘압력’을 느낄 때 한국의 젊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게 대응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젊은 여성들이 ‘압력’에서 비켜나, 좀 더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며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알려진 유럽을 다니면서 ‘대안’과 ‘해방감’을 찾는 동안, 남성들은 그 ‘압력’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해석을 그쳐서는 안된다. 젊은 여성들을 ‘무책임’하게 먼 나라 가서 소비나 하는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여성혐오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여행에 대한 성별 가치관 차이가 한국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산업화 시기 경제가 만들어낸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검색을 하다가 유럽 여행 가서 ‘무시’를 당했다는 한국 남성들의 ‘경험담’을 많이 발견했다. 큰맘 먹고 갔는데 ‘대접’받질 못하고 백인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는 식이다. 글의 아래에는 며칠간 동남아 여행을 가는 게 낫다는 댓글이 달린다. 자신이 디뎌본 ‘장소’보다는 자신의 ‘지위’에 대해 더 예민한 것이 한국 남성들이라는 문화연구자들의 연구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젊은 남성들을 백인들이 많은 나라로 더 많이 배낭여행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 안에서 ‘소수자’가 되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세계 속에서 인종과 성별에 따라 어떤 시선들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산 경험이 무엇일까.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인식틀과 세계관이 다양한 경험에서 온다는 것은 상식이다. 스스럼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문화와 경관과 마주해 ‘나’와 ‘남’의 문제를 살피는 젊은 여성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과, 아시아를 잘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고려하는 젊은 남성의 감각은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젊은 남성들의 독서와 문화 향유가 십수년 새 큰 폭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말이다. 어떤 남성과 여성을 한국 사회가 길러내고 요구하고 있는지 ‘여행 감수성’이라는 기준으로 반문해봐야 하지 않나. 물론 그런 차이로 누군가를 규탄한다고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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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닐 때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배경은 뉴욕시,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아 재판에 회부된 소년에 대한 배심원 합의가 진행 중이다. 12명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 합의를 끌어내서 그 결과를 판사에게 알려주면 된다. 배심원들은 유죄냐 아니냐만 결정할 수 있다.

판사는 만약 유죄 합의를 이끌어낼 경우 소년에 대해 사형을 언도하겠다고 귀띔한다. 배심원들은 최종 합의를 이끌어낼 때까지 밀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첫 배심원 투표 결과는 무죄 1 대 유죄 11. 모든 배심원이 유죄를 생각하는 가운데 무죄라고 손을 든 배심원은 끊임없이 사건의 면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것을 주장한다. 어떤 배심원은 야구 보러 빨리 경기장에 가고 싶어 평결을 빨리 끝내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생떼를 쓰고 악만 지른다. 주인공은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 하고 설득을 멈추지 않는다.

배심원들은 처음의 대세를 뒤집고 무죄 12명으로 합의를 해낸다. 개개인들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의견을 내지만, 누군가는 대세가 기울기 때문에 편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듣고, 의견을 내고 ‘합리적 의심’을 통해 합의를 해낸다. 영화는 우리의 통념들에 대해서 반문한다. “딱 보면 뻔하다”는 말 대신 미묘하게 어그러진 사실의 맥락과 조각들을 끊임없이 맞추려는 시도가 억울한 사형집행을 막아낸 것이다.

최근 특정인에 대한 ‘폭로’와 폭로에 뒤따르는 SNS상의 ‘공론화’, 공론화에 이은 ‘인신공격’이 유행병이 됐다. 지난달 건대입구역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에서 엄마와 같이 탑승했던 7살 어린이가 엄마 없이 먼저 내리고 버스가 떠나가버렸다. 엄마는 300m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기사는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승객을 내릴 수 없었다는 원칙을 지켰다. 사건 직후 누리꾼 한 명이 본인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사건을 폭로한다. ‘공감한’ 누리꾼들은 사건을 SNS를 통해 ‘공론화’했고, 사실관계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의 ‘단죄’가 버스기사에게 쏟아졌다. “중년 남성 기사가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했다”는 호소가 진실을 덮었다. 적지 않은 미디어가 SNS와 폭로자들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 이른바 ‘팝콘 튀기기’를 했다.

사실관계가 파악된 직후 SNS와 언론 등에서 태세전환이 벌어졌다. 버스기사를 비난하던 분위기는 뒤바뀌어 아이 엄마를 ‘맘충’이라며 비난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처음 폭로를 한 누리꾼은 사과를 약속했지만 곧 조용히 사라졌다. 버스기사와 아이 엄마의 가슴에만 멍이 들었다. 모두의 확신은 근거가 부족했지만 단정은 무차별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영화 <김광석> 개봉 후에 벌어지는 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화가 가해자로 의심하는 서해순이 법의학자들의 판단처럼 무죄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책임을 묻고 사건을 정리할까?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편견을 갖고 있고, 온전한 정보도 갖고 있기 어렵다. 영화 속 배심원들이 효율적인 다수결 투표가 아닌 지루한 만장일치 합의를 하는 것은,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꺼내 토론하면서 불완전한 개인의 한계를 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답답한 것은 어떤 이슈가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실력이다. 시민들이 납득하는 공론을 만드는 기제가 미흡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함께 모여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합의해 해결해본 적이 별로 없다. 초등학교부터 ‘모둠 수업’은 합의하기보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말한 대로 흘러간다.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무임승차’만을 비난할 뿐이다. 교육학자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모습을 “개성 있지만 무난한” 사람이라고 정리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싸우면 시시비비를 가려주기보다는 “형(언니)이니까 양보하라”며 혹은 “동생은 형(언니) 말 듣는 거야” 하고 혼을 낸다. 직장의 회의에서도 결론이 정해지면 맞춰 따르는 데에 익숙하다. ‘송곳’ 같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대지 말라”는 경고를 듣거나, 경고를 무시하면 왕따를 당한다. 조정과 협상의 경험이 부족하고 절차는 겉돈다.

한국에서 억울한 사람들의 선택지는 개인적 보복이 아닌 이상 두 가지다. 단체행동으로 몰아치거나, “법대로” 해결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소비자운동 등은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단체협상을 통해 엇갈리는 의견을 검토하며 문제를 푸는 과정을 가졌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흐름은 검증과 합의의 단계, 협상의 언어를 생략한다. 혹여 폭로 대상인 개인이 코너에 몰려 실언이라도 하면 실언은 ‘팩트’가 되어 온라인 공격의 빌미가 된다. 상황의 맥락, 당사자의 처지 등 현실의 미묘함은 해석 대상에서 제외된다. 개인들은 온라인 공론장에서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명예훼손과 무고죄 등의 법적 구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익명성에 기댄 공격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교실에서 왕따 주동자를 찾아 처벌하는 것처럼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공론화’라는 단어는 공론을 모아내는 것보다 온라인 부족들이 특정 목표물을 폭격하자는 신호이기 일쑤다. 무리의 확증편향이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론화의 대의가 옳다 한들 이는 문제해결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판단을 정지한 채, 영화 속 배심원들처럼 적절한 절차를 통해 충분히 의견을 교류하고 합의해야 ‘공론’이 안착한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토론회처럼 이해당사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교류해야 합의를 만들어낼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 내용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이런 판국에 지식인까지 나서 온라인의 ‘단죄’라는 광란의 ‘도가니’에 단편적인 판단으로 기름을 끼얹으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시민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공론을 모으는 합의의 경험이 누적된 게 민주주의 사회의 실력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라는 말을 하는 의인들의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고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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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인간을 닮아가고 있다. 고작 가진 언어가 켜짐(1)과 꺼짐(0)만 있었던 컴퓨터가 인공지능(AI)을 탑재하고 사람을 닮아간다. 초창기 컴퓨터의 유일한 장기는 사칙연산밖에 없었다. 빠른 연산 실력으로 숫자를 통해 하는 모든 일들을 해냈다. 계산기는 진화해 컴퓨터에 깔려 있는 엑셀이 됐고 직장인들은 엑셀이 없으면 복잡한 계산 자체를 못하게 됐다. 통계학이 발전하고, 컴퓨터가 다루는 정보처리 용량이 늘고 속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일을 예측하는 중이다. 비가 올 확률을 예측하고, 공장에서는 불량이 날 확률을 예측한다.

그럼에도 컴퓨터가 인간을 닮아간다는 게 체감된 순간은 바로 음성인식과 안면인식부터였다. 터치 패드로 스마트폰을 켤 때만 해도 마냥 편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스마트 스피커가 목소리를 알아듣고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이 올려놓은 사진을 통해 주변 친구들 모두의 얼굴을 읽어 이름을 맞혀 보겠다고 제안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를 넘어 섬뜩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컴퓨터가 인간을 닮아가는 건 수많은 잡동사니 데이터를 수집해 컴퓨터의 일처리 방법인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하고, 내부적으로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가장 적합한 것’을 통계적으로 찾아내는 과정(기계학습)이다. 끊임없는 시뮬레이션과 시행착오를 통해 근사치에 가까운 99.99999999%에 도전하게 된다. 많은 엔지니어들은 이를 위해 컴퓨터의 정보처리 시스템을 인간의 신경망과 뇌처럼 만들려고 알파고로 유명해진 ‘딥러닝’ 기술이 차용하는 인공신경망 등 다양한 방법을 찾아 정착시킨다. 컴퓨터가 사람을 흉내 내는 속도는 무어의 법칙을 따라 점점 빨라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공지능과 데이터과학을 발전시키는 정보기술(IT) 엔지니어들의 일하는 방식이다.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은 오픈소스라는 공개적인 작업 방법으로 수행할 때 더욱 더 빠르고 강력해지는 경향이 있다.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의 기본 코드 소스를 공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그래머들이 자신이 노력해 제작한 프로그래밍 코드를 공개하는 것은, 초창기에는 유료 프로그램들이 갖고 있는 지식재산권을 반대했기 때문이지만 점차 온라인에 있는 ‘엔지니어 고수’들의 코멘트를 통해 자신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나 데이터 분석 방식을 검증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한 활동이 됐다. 개인이 구상을 해서 아무리 탁월한 프로그램을 만들더라도 다른 사람 눈에는 부족한 점이나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사소한 진리 때문이다.

오픈소스에 기반을 둔 데이터과학 커뮤니티인 캐글(Kaggle)에서는 초심자부터 고수까지 다양한 데이터 엔지니어들과 사회과학도들이 실력을 뽐내면서 더 효율이 좋은 분석 기법을 공짜로 풀어놓는다. 지구상의 모든 인터넷을 장악한 구글은 이 커뮤니티를 높은 가격에 인수했다. 집단지성을 통해 좀 더 실현 가능한 알고리즘을 만드는 캐글의 가능성을 높이 산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작업한 코드를 저장하고 구직을 할 때 여러 명이 동시에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플랫폼인 깃허브(Github)를 활용한다. 자신의 활동이 얼마나 많은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기여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다. 인공지능이 성장하면서 엔지니어들의 일하는 방식 역시 성장한 셈이다. 그런데 컴퓨터가 기계학습을 통해 사람을 닮아가고, 우수한 엔지니어들이 공동작업과 집단지성을 통해 학습과 일을 결합하는 혁신의 과정을 보면서 맘이 편치 않다.

당장 지방대의 인문대생들에게 사회학과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고민이 많아진다. 데이터과학의 쓸모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캐글에서 활약하던 사회학을 배운 데이터 분석가들은 샌프란시스코시 범죄가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통해 실제 정책에 도움을 줬다. 선거를 예측하기도 하고, 대학들은 캐글에 지속적으로 공공정책 데이터를 제공하기도 한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수리적 판단력과 통계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학습자들에게는 분명 이러한 오픈소스 기반의 글로벌 학습망과 캐글 같은 오픈소스 커뮤니티가 구직과 이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미국의 MOOC(대규모 공개 온라인 강좌)들은 능동적으로 학생의 참여를 유도하는 컴퓨터공학, 경제학, 경영학, 수학 수업을 개설했다. 공짜로 청강할 수 있되, 수업료를 내고 과정을 이수하면 학위증을 수여하고 이 중 몇몇은 구직을 보장하기도 한다.

영어만 잘한다면 수학 실력은 평생교육 관점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다. 실리콘밸리의 교육 회사 칸 아카데미는 유치원 수준부터 대학 수준까지 이어지는 수학교육의 로드맵을 구축해뒀다. 펜과 종이가 있고 영어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으면 직접 손으로 풀면서 부족한 수학 실력을 높일 수 있다. 글로벌한 데이터과학 학습의 문턱은 낮아진 셈이다. 문제는 영어다. ‘수포자’(수학 포기자)만큼이나 많은 ‘영포자’(영어 포기자)들이 있다. 많은 지방대 학생들은 영어 동영상 수업을 따라가기 어렵다. 수업시간마다 캐글도 알려주고 깃허브도 알려주지만 영어 때문에 학생들은 늘 망설인다. 물론 정부 사업으로 개설된 KOCW나 KMOOC 같은 공개강좌가 있지만, 대부분 대학 수업을 녹화했을 뿐 아직 개별 학생이 필요로 하는 ‘수준별 학습’에는 미치지 못한다.

취업난과 인구절벽 앞에서 진행되는 대학 구조조정의 복판, 한국 대학교육과 노동의 양상도 더욱 계층화될 것이다. 더불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일·학습의 병행 체제는 학생과 일하는 사람들의 경계를 흔들 예정이다.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갱신하라는 압박은 점차 심해진다. 그런데 여전히 전공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학생과, 취업에 도움 되는 쪽으로 하라는 학교 사이에서 수업을 새로 짜야 하나 하는 딜레마부터 풀기가 어렵다. 인간의 감각마저 닮아가고 있는 기계문명의 사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대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취업과는 어느 정도는 동떨어진 전공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일까, 데이터과학과 MOOC 같은 새로운 방식의 학습 모델일까,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공무원 시험 문제집일까, 다른 방향의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대안적인 일자리들일까? 대학생들에게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한다는 국가는 어떤 미래사회 직업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나? 당장 문과생 채용문 자체가 바늘귀가 된 지금, 학생들에게 어떤 직업 전망을 보여줘야 할지부터 쉽지 않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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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