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을 우려먹은 이번 정부가 한 게 뭐가 있나.” 국회의원 최연혜의 말이다. KT 통신대란을 꼬집은 말이다. “국가기간시설은 전시나 테러의 1순위 대상이고, 특히 북한의 1순위 타격 대상” 같은 말도 덧붙였다. 이렇게 세월호에다 북한 테러까지 들먹이면 그 말을 경청하긴 쉽지 않다. 꼭 언어의 품격을 따지자는 건 아니다. 자유한국당 사람들이 갑자기 교양인이 되어 한 놈만 팬다는 천박한 이야기를 멀리하고, ‘야지·겐세이·뿜빠이’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비판할 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각종 범죄를 주도하거나 방조한 잘못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의 의정활동도 신뢰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여전히 사립유치원을 감싸고, 예산심사에선 ‘비정’하기만 했다.

최연혜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우파 정당에 몸담고 있지만, 시작은 달랐다. 자유한국당의 어법을 빌리면 좌파의 돈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 유학비용을 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은 지난해 이맘때 한국의 촛불시민에게 인권상을 줬던 기관이다. 유학생 처지에서야 비용을 댄다면야 좌우를 가릴 형편이 아니지만, 그 다음 행보도 오락가락의 연속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유학을 마치고 철도대학 교수로 지내던 최연혜를 전격 발탁한 것은 노무현 정권이었다. 대통령 인수위와 열린우리당 정책연구원에도 참여했고, 철도공사 부사장에다 철도대학 총장까지 맡았다. 2012년 19대 총선 때 한나라당 후보로 지역구에 출마한 최연혜는 3위로 낙마했지만, 보란듯이 철도공사 사장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신을 믿어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충성은 대단했다. 철도파업이 일어나자 4356명의 노동자를 한꺼번에 직위해제했다.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전부였다. 철도공사 사장으로 일하면서 KT처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통한 인건비 줄이기에만 골몰했다. 정규직 숫자를 줄이는 만큼 철도 사고는 잦아졌다. 노조에 대한 강력한 대응으로 정권의 신임은 두터워졌고, 2016년 총선에선 비례대표 자리가 주어졌다.

이런 사람의 비판이 집권세력에게 뼈를 깎는 각성의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그냥 흘려버리기 딱 좋은 조건이다. 세월호에 빗댄 대목에선 마음이 상하고, 기회만 되면 반복하는 안보장사엔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문제다. 야당은 따끔한 야단도 치면서 집권세력이 긴장을 풀지 않도록 비판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야당은 비판자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 너무 낡았고 기본적인 애민의식, 애국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너나 잘하란 비판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의 요직 진출은 성황이나, 막상 시민사회는 6월 항쟁 이후 가장 심각한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시민사회를 과잉 대표했던 자들이 근사한 자리를 꿰차는 동안, 정작 그들의 기반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심지어 집권세력에게 섣부른 비판은 삼가라는 충고나 받는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 연일 집권세력의 공격을 받는 민주노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집권세력은 오늘도 편안하다. 20년을 넘어 더 오랜 세월도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윤창호의 죽음이 불과 얼마 전인데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음주운전을 하고, 경호실의 30대 사무관은 술에 취해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행패를 부린다. 곳곳에 낙하산을 내려 보내는 행태는 적폐세력을 꼭 닮았다. 이번엔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사무장까지 챙겼다. 일이야 어차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법이지만,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통신대란으로 서울은 엉망이 되었다. 국가기능이 마비되면서 진짜배기 고통은 약자, 소수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 텔레비전까지 모두 먹통이 된 상황은 예리한 칼처럼 약자를 파고들었다. 고통은 새로운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KT의 고객응대업무는 진작 자회사로 분리되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잘못을 대신 감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집권세력은 평온하기만 했다. 서울시장 박원순은 고향 일정을 다 마치고 사건 발생 12시간이 넘어서야 현장을 한 번 둘러봤다. 대책회의는 다시 12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리곤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중국 총리도 만나고 여러 도시 책임자들과 교류도 해야겠지만 그건 대구, 충남 등 6명의 시·도지사에게 맡겨도 좋을 일이었다. 서울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잠재적 대권주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시민의 곁을 지키는 시장이라는 기본조차 잊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건전한 비판세력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서울시의회만 하더라도 전체 110명 중 민주당이 102명이다. 야당의 목소리는 애써 귀 기울여도 듣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인가. 민주당은 벌써부터 대선 전초전을 치르고 있다. 친문과 비문을 갈라치는 건 예사고, 대선 예비주자들을 놓고 벌이는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집권여당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적폐청산, 개혁입법 통과가 아니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당장의 권력은 물론 미래 권력까지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셈들이다. 신경쓸 만한 비판세력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배부른 집안싸움을 맘껏 벌이는 거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오로지 대통령의 선의와 집권세력의 호시우보에만 기대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여태까지의 정권들이 숱하게 보여주었다. 역대 정권들도 대개 비슷한 경로로 망했다. 철옹성 같은 지지율도 단박에 무너지고,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야유를 보내는 일은 현실정치에선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긴장이 풀어진 정권이 무너지는 건 일도 아니다. 여태껏 누린 지지율, 그 호시절은 어쩌면 적폐세력 때문에 얻은 반사이익일지도 모른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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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단순히 안보와 치안만을 담당하는 시대는 진작 끝났다. 이젠 국민의 삶 구석구석에 국가의 역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헌법도 국가운영의 틀을 제시한다는 차원보다는 국민의 삶의 원리를 규정한다는 의미로 거듭나고 있다. 독재시절에는 그저 대통령을 몇 번이나 할 수 있다거나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는 독재자의 의지만 담긴 것처럼 여겨졌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70조는 다만 하나의 기준을 제시할 뿐이다.

국가는 헌법 전문에서 다짐하는 것처럼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이며 실효성 있는 기구다. 어쩌면 유일한 대안이며 안전장치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가 국가의 역할과 닿아 있다. 아파트 값이 폭등하면 곧바로 국가, 구체적으로는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집권세력에게 비난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일상이 힘들어지면 관련 장관의 무능을 성토하는 것도 당연하다. 개인의 안전, 나아가 행복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하며, 국민을 위한 국가의 역할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국가가 최고의 규범이 정하는 대로, 또는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했던 것은 아니다.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국가는 없었다. 마치 국가기능이 마비된 것처럼 죽음의 행렬을 방치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세월호를 절대 잊을 수 없다며 4년 반이 지나도록 ‘세월호 배지’를 달고 다니며, 이게 국가냐고 묻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싱가포르에서 불쑥 꺼낸 이야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이 요동쳤다. 박 시장이 “여의도와 용산을 통으로 개발하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서울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 서울이 온통 부동산 전쟁터로 변하자, 시민들은 이게 국가냐고 물었다. 정부는 도대체 뭘 하냐는 거다. 여당 소속의 서울시장이 국토교통부 등 정부부처와 논의조차 없이 불쑥 꺼내든 카드로 부동산 값 폭등을 부채질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비판이었다. 박 시장은 부동산 폭등은 예측하지 못했다며 통개발 프로젝트를 7주 만에 철회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서울시장이었던 사람이 내놓은 변명치고는 옹색했다.

세월호든 부동산이나 미세먼지든 쟁점의 핵심은 국가의 역할에 있다. 국가가 역할만 제대로 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고통들이 너무 많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늘 답답한 형국이었지만, 최근 사이판 태풍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대응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만큼 좋았다. 사이판에 들이닥친 태풍으로 공항이 폐쇄되고 여행객들은 발이 묶였다. 사이판을 찾은 사람들은 휴양지에서 끔찍한 공포에 직면해야 했다. 이들을 위해 국가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고도 정확했다. 태풍으로 공항에서의 정상적인 이착륙이 불가능해지자, 군용기를 보내 신속한 이송작전을 벌였다. 군용기로 여러 차례 사람들을 옮기는 과정도 좋았다. 노약자들부터 우선적으로 이송했는데, 국가다운 품격 있는 조치였다. 신속하고 정확하되, 품격까지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처럼 국가다운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수가 아깝지 않은 대목이다. 그런데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정부가 중요한 대목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이판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비단 대한민국 국민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대응은 우리 국민만을 위험지역에서 안전지역으로 옮기는 것에서 멈췄다. 국민들은 세금을 내는 주권자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도 그게 당연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속·정확은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정부는 지금의 한국 정부처럼 신속하게 군용기까지 파견해서 자국민들을 실어 나르곤 할 일 다했다며 사이판을 떠났다면, 그 섬에 남겨진 한국 국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국가의 기본적인 구실도 하지 않는 한국 정부를 원망했겠지만, 자기 나라 국민만 챙긴 그 나라 정부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을 거다. 이런 게 바로 인지상정이다.

자기 국민을 먼저 챙기는 건 그 나라 정부의 당연한 책무겠지만, 여력이 닿는다면 국적을 불문하고 도와줘야 한다. 인도주의의 정신이 바로 그렇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헌법적 다짐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품격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우리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국가의 역할은 오로지 자기 국민을 구하는 데서만 멈췄다.

국가는 다른 국가와의 경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다. 높은 담이나 철책으로 국경을 만드는 까닭도 거기 있다. 한국의 휴전선 철책은 이스라엘의 분리장벽과 더불어 가장 극단적인 경계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몰기 위한 분리장벽과 남침으로 참담한 전쟁을 겪었던 우리의 철책은 물론 질적으로 다르지만, 그 쓸모와 규모는 엇비슷하다.

대한민국이 가끔씩이라도 경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150만명이나 되는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처럼은 못할지언정 구조의 손길이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골고루 내밀면 어떨까. 경계를 단박에 허무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 경계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거다. 이찬수 교수에 따르면, 이건 경계를 실선(實線)이 아니라 점선(點線)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경계가 헐거워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겠고, 우리가 왜 세금을 내냐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지만 경계가 헐거워진 만큼 외부와의 소통도 자유로워지고,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일도 훨씬 쉬워진다. 꽉 닫힌 경계 속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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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해설자 이영표는 아내가 분만할 때 ‘주님이 주신 고통’을 느끼라며 무통주사를 거부했단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 왜 유아적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성서를 잘못 읽은 탓이고, 전형적인 신앙의 왜곡이다. 그래도 이영표는 아내에게 출산의 고통을 강요하지는 않았단다. 폭력이나 위협도 없었고, 다만 권유했을 뿐이고 아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단다. 부부 사이의 일이니 어쩌면 남이 뭐라 할 영역이 아닐 수도 있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진짜 심각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을 조장하고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들이다. 극단적 혐오세력의 뿌리가 보수 개신교에 닿아 있다는 최근 보도들은 충격적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에스더 기도운동’은 그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공허한 구호에 멈추지 않았다. 북한, 이슬람, 동성애라는 구체적인 적을 상정해놓고, 끊임없는 공격을 감행했다. 차별과 혐오를 일삼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공장 역할을 했다. 민주개혁세력에 대한 공격도 빠뜨리지 않았다. 2012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가짜뉴스들을 만들며 박근혜 당선, 문재인 낙선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였다. 정권 창출의 과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박근혜가 당선되자 국가정보원에 우파 활동가를 양성하겠다며 43억원의 예산지원을 요구했다. 이들은 인터넷 기사에 댓글 다는 연습을 시키는 ‘미디어 선교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에게서 예수 정신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예수가 제시하는 황금률, 곧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너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거다. 누구도 혐오 대상이 되길 바라지 않고, 가짜뉴스에 시달리고 싶은 사람도 없다. 기독교의 기틀을 만든 바오로는 코린트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하겠다며, 그리스도인의 첫째 덕목으로 사랑을 꼽고 있다. 신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더라도, 온갖 신비를 꿰뚫어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에스더 기도운동’ 같은 극단적 세력들은 성서 구절 한 글자도 귀히 모신다지만, 이런 황금률에 대해서는 철저한 유체이탈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예배 보고, 자기들끼리 축복과 은혜를 나누던 이들이 갑자기 인터넷 전사가 되고 거리 집회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광장에서 개신교도들이 태극기,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까지 흔들며 통성기도를 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 까닭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바로 불안감이다. 한국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의 종단들이 종교 활동 인구를 삼분하고 있는데, 어느 종단 할 것 없이 위기를 맞고 있다. 기세 좋은 교세 확장은 옛날 일이 되었다. 종교 인구는 전반적으로 감소했고, 특히 40대 이하의 종교 인구는 급감했다. 한마디로 장사가 안되는 상황이다. 장사는 안되지만 목회자들은 여전히 넘쳐난다.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교도소에서 통신 과정만으로 목사가 되었듯, 누구나 약간의 돈만 내면 목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곳도 꽤 많다. 최소한 먹고살 기반은 있어야 하는데, 종교 인구가 줄고, 목사는 늘면서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 되었다. 이럴 때 교회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 누가 봐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까닭을 찾아보니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그랬다면 선교는 저절로 된다. 물론 삶을 온전히 걸어야 하는 일이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선교활동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자기 영역이라도 확고하게 지키고 싶을 게다. 이럴 때 흔히 내세우는 게 ‘적’ 개념이다. 가장 오래된 전략은 반공주의다. 북한괴뢰도당이 언제 남침할지 모른다며 시민들을 윽박지르고 인권침해를 일삼았던 박정희의 모델이다. 무슬림이 들어오면 한국이 모두 이슬람화되고,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폭력에 견딜 수 없게 될 거란 가공의 공포를 심어주고 확산시키는 거다. 이런 전술은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적개심도 마찬가지다. 지금 동성애를 ‘치료’해주지 않으면 모두들 에이즈에 걸려 죽어버릴 것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런데 반공주의는 물론, 일종의 블루오션으로 선택한 반이슬람, 반동성애도 극단적 개신교도들을 더 고립시킬 뿐, 선교는 물론 자기 세력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태극기 들고 반대 시위야 나가겠지만, 남북화해협력시대가 열리면서 북에 대한 극단적 증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반이슬람도 그렇다. 자기 신자들도 무슬림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해외여행도 다닐 테니, 실제로 무슬림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배려도 잘하는지를 보게 될 터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악담도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 또한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 곧 멱살 잡은 손이 부끄러워질 게다.

문제는 비록 일부라지만, 이 극단적 광신도들은 대화나 설득,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거다. 헌법의 원칙을 말하는 것도 무망하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사람을 혐오하고 사람을 파괴하는 범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형사처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이제는 국가형벌권을 꺼내 들어야 한다. 가짜뉴스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유포하는 사람들, 정치적인 결탁을 통해 제 뱃속만 채우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는 없다. 누군가를 해치라는 선동, 의도가 뻔한 거짓말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지만, 신성불가침의 성역은 아니다. 그 자유라는 것도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할 수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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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경북 영천역에서 여성의 치마 속을 불법촬영하던 남성이 붙잡혔다. 현행범이었다. 범인은 육군 대위, 육군 3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다. 한국 육사에다 미국 육사까지 나온 ‘인재’였다. 이런 경우 일벌백계가 답이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평등 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 등을 강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3사관학교는 거꾸로 움직였다. 조직, 더 정확하게는 조직의 책임자인 지휘관의 앞날을 걱정했다. 이들에게 급선무는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피해자와의 합의가 중요했다. 사건을 감추고 파장을 줄이는 게 관심의 전부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일을 도맡은 사람은 범죄자 대위의 직속상관인 대령이었다. 피해자와의 합의가 급한데, 이런 일에는 여성이 나서는 게 제격이라며 소령 계급의 여성 장교에게 이 일을 맡겼다. 가해자의 친누나 행세를 하면서 피해자와 합의하라는 거다.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군대지만, 그건 전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걸 때의 이야기이고, 그 명령이 정당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부당한 지시, 범죄를 은폐하는 모략까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친누나를 사칭해 대신 합의에 나서라는 지시까지 따를 수는 없었다. 그냥 군인도 아닌, 장교를 양성하는 교수들이 이럴 수는 없었다. 3사관학교의 교훈처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올바르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관이라고 사관생도들에게 가르쳤던 교수의 선택은 분명했다. 고심 끝에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 육군 소령 차성복. 육군 3사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의 고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령의 ‘지시’를 거부한 이후, 차성복은 당연한 것처럼 조직적 왕따를 당했다. 대리 합의를 종용하던 대령은 남자 같으면 때렸을 거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때리는 대신 다양한 보복이 뒤따랐다.

상급자의 보복은 가혹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근무평정을 낮게 주는 것이다. 대령은 차성복에게 ‘열등’ 평정을 했다. 이 때문에 현역 복무 부적합 심의까지 받게 되었다. 심의 결과는 복무 적합으로 나왔지만, 심의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강의를 빼앗아 버렸다. 갑자기 차성복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문제제기가 쏟아졌다. 평소 품위가 없고, 언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을 성추행했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부대 회식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성 소령의 허벅지를 만졌다는 거다. 부대 안 회관에서의 회식은 문제의 대령이 주관한 회식이었다. 차성복이 대령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남성 소령을 성추행했다는 거다. 피해자라 자처한 소령은 차성복의 뒤를 이어 학과장이 된 사람이었다. 성추행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자, 남성 소령은 허벅지를 몇 번 툭툭 쳤다고 진술을 바꾸기도 했다. 성추행을 했다든지, 언행이 성차별적이라든지 하는 고발들이 이어졌다. 모두 대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다음의 일이었다.

강제로 전역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학과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강의도 빼앗겼다. 사무실도 아무도 없는 빈방으로, 때론 휴가 간 사병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게 싫으면 나가라는 뜻이다.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절차를 밟아 억울함을 호소했다. 차성복의 호소에 대한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반응은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문제의 대령에게 취한 조치는 ‘서면 경고’가 전부였다. 대리 합의를 지시하면서 폭언이나 협박을 하지 않았고, 합의를 종용한 것도 학교의 위신 추락을 막기 위한 의도로 인정된다는 이유였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대령이 소령에게 뭔가를 지시할 때, 폭언이나 협박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부드러운 말투로 상의하듯 말해도 된다. 가장 분명한 위계 조직에서 ‘부대를 위해 하는 일’에 폭언이나 협박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다. 차성복은 감봉 2개월 징계를 받았다. 마치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차성복이 받은 감봉 2개월 징계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추행이야 혐의를 벗었고, 나머지 징계 사유도 평소 언행에 품위가 없다는 주장뿐이었다. 이건 애초 사건의 발단이었던 불법촬영 범죄자에 대한 처리와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 성범죄자에 대한 군 검찰의 처분은 기소유예였다. 범죄 혐의는 인정되나 정황을 참작해 기소하지 않겠다는 거다. 국민을 지키라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현역 장교가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는 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떤 참작할 만한 정황이 있는지 모르겠다. 군대가 경찰, 검찰, 법원 조직을 따로 운영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기소하지 않았으니, 어떤 형사적 처벌도 없었다. 물론 징계를 받기는 했다. 처분은 감봉 3개월. 차성복과는 딱 한 달 차이다. 이쯤 되면 그냥 대놓고 봐주겠다는 거다. 게다가 범죄자는 3사관학교를 떠나 소속 부대를 옮겼다. 그가 옮겨간 곳은 남들이 그토록 선망한다는 한미연합사령부다. 그 범죄자도 군을 떠나면 보국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가 되고,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힐 것이다.

희한한 것은 성범죄자 대위, 대리 합의를 지시한 대령, 그리고 그 대령의 뒷배가 되었던 장군까지 모두 육사 출신이라는 거다. 우연의 일치일까.

차성복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군대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차성복은 현역군인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실력자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범죄를 무마하는 데 호출되었고,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보복을 당하고 있다.

지난 6일은 마침 여군 창설 제68주년 기념일이었다. 국방부는 ‘여군 역량 발휘를 위한 제반 여건 보장’과 ‘여군의 양적·질적 성장 기반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앞으로는 GOP나 해안 초소 등에 대한 여군 보직 제한 규정도 폐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도를 교육하는 일, 프랑스어학을 강의하는 교수마저 여성이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여군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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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시민참여형 개혁기구는 경찰청이 만든 경찰개혁위원회였다. 새 정부 출범부터 경찰개혁위원회 출범까지 달포밖에 걸리지 않았다. 구성도 남달랐다. 위원들은 모두 외부 인사였다. 경찰관이나 전직 경찰관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 고위직 경찰관들은 갑자기 낯빛을 바꿔 개혁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처구니없고 속은 쓰렸지만, 그것도 촛불의 성과라 여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개혁성과였다. 경찰개혁위원회는 모두 30건의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다행히 어지간한 개혁안은 두루 담아냈다. 2005년 남영동 보안분실(예전의 대공분실) 폐쇄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던 전국 각지의 보안분실들이 모두 폐쇄된다. 서울만 해도 홍제동, 옥인동, 신정동, 장안동, 신촌 등지에 보안분실이 있다. 정권 차원에서 눈여겨보는 시국사범들이 경찰서가 아닌 분위기부터 살벌한 보안분실에서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이상한 일은 앞으론 없게 되었다. 정보분실도 사라진다. 의경들의 노동시간은 최대 주당 45시간을 넘지 않아야 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휴식 기회를 보장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도 가능하게 된다. 영창제도는 이미 사라졌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경찰관들도 더디지만,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기 시작한다. 당장 노동조합을 설립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마땅하나, 일단은 직장협의회부터 시작한다. 남성 위주의 조직인 경찰청에서 적극적인 성평등 정책도 실현한다. 당장 성평등정책관부터 외부 인사를 채용했고, 적극적인 여성 우대 정책을 인사에서부터 펼치고 있다. 여러 경찰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검찰, 군대, 국정원, 감옥 등 인권침해와 관련한 논란이 많은 곳에서도 다양한 개혁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생각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환영할 만하다. 인권분야에서 구체적인 진전이 있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은 없다.

경찰개혁위원회가 낸 개혁방안 중에 ‘시민에 의한 민주적 외부 통제기구 신설’이라는 게 있다. 만약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어 경찰이 실질적으로 수사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훨씬 힘센 경찰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의 부작용과 우려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영국(잉글랜드, 웨일스)의 IPCC(Independent Police Complaint Commission, 독립적 경찰 비리민원조사위원회)를 모델로 시민적·민주적 통제기관을 만들자는 거다. 명칭은 ‘경찰 인권·감찰 옴부즈맨(또는 위원회)’이라고 붙였다.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오로지 경찰만 감시하는 기구다. 경찰관의 법령 준수 여부를 감찰하고, 위법 부당한 행위가 드러나면 경찰청에 징계를 권고하거나 경찰관의 범죄사실을 직접 수사할 수도 있다.

영국의 IPCC는 법률 개정으로 IOPC(Independent Office for Police Conduct)로 바뀌고 위상과 업무도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다. 경찰과 전혀 다른 독립적 조직이 경찰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경찰의 잘못을 시정한다는 게 핵심이다.

문제는 아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기구가 이미 존재한다는 거다.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다. 인권위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별도의 전담 감시기구가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인권위에 대한 기대가 적다는 거다.

인권위의 위상은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지경으로 추락해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 특별보고를 부활시키고, 정부 부처에 인권위 권고 수용률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는데도 인권위 위상이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인권위 설립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국가인권기구 설립이라는 그동안의 염원을 현실화했다. 입법, 사법, 행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인권기구는 김대중의 대선 공약이었고, 그 공약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이행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설립과 동시에 조직의 기반을 닦은 인권위는 노무현 정부 때 여러 가지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등 인권위가 주도한 쟁점이 많았다. 한마디로 시끌벅적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인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명박 정권은 위상을 추락시킬 방도를 고민했다. 법 개정이 여의치 않자, 위원장 등 지도부를 바꿔 위원회 성격을 변화시켜갔다. 정권의 의도대로 인권위의 위상은 추락했고 누구도 인권위를 자신의 인권을 지켜줄 호민관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장 큰 잘못은 2009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6년 동안 인권위원장을 맡은 현병철이 저질렀지만, 지금 위원장인 이성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꼭 현병철과 이성호만의 잘못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 즉 상임위원, 비상임위원 그리고 사무처 직원들도 공범의 혐의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현병철 체제에 저항한 일부가 있었지만, 임기가 다 끝나갈 때쯤 사임한다든가 진정성을 믿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다. 그렇게 인권위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인권위가 바뀌었는지 뭘 어떻게 고쳤다는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지난 정권과 달리 비교적 민감한 인권의제에 대해 의견을 내는 일도 간혹 있지만, 그건 이미 쟁점화된 사안들에 대한 뒷북이었을 뿐이다. 인권위가 의제를 설정하고 논의를 주도하는 일은 없었다. 설립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는 공염불만 외우며 진정사건 처리 때문에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온갖 인권문제가 터져 나오는 지금도 인권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그래서 인권위는 지금 악플조차 별로 없는 무플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관료들에겐 무플이 훨씬 좋을 게다. 월급이야 꼬박꼬박 나오는데, 굳이 논란에 휩싸여 일감을 늘릴 일도 감정을 상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도 인권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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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의 갑질이 시작이었다. 회의 자리에서 유리컵을 던지고 막말을 했단다. 범죄 혐의는 특수폭행이다.

다음은 엄마였다. 딸보다는 혐의가 많았다. 공사현장 작업자, 운전기사 등에게 폭행과 폭언을 했단다.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세 번째로 아빠가 수사 대상이 되었다. ‘가장’의 존재감인지 이번엔 좀 더 죄질이 무거워 보였다. 횡령, 배임, 탈세 등이었다. 첫딸은 땅콩회항을 일으켰고, 아들은 아빠가 주인 노릇하는 대학에 부정 편입학까지 했단다. ‘범죄 가족’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죄질이 얼마나 나쁜지는 살펴봐야겠지만, 가족 모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특히 엄마에게는 폭행 등으로 한 번, 가사도우미 문제로 한 번, 합해서 검찰이 두 번이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모두 네 번의 영장 청구가 있었고, 결론은 모두 기각이었다.

얼핏 보면 조씨 일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당연해 보인다. 그저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부를 갖게 된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 고약했다. 사회적 책무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마저 저버리고 불법행위를 일삼았으니 엄정(嚴正)하고도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무릇 모든 범죄에는 죗값이 따라야 한다. 재벌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게 바로 정의다.

그러나 범죄자에게 묻는 죗값은 딱 죄를 진 만큼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경찰과 검찰은 법정이 열리기도 전에 사실상 여론 재판을 해버렸다. 단지 범죄 혐의를 의심하는 단계였는데도 범죄 사실은 물론, 범죄와 별 관련 없는 일까지 언론에 알렸다. 조씨 일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게 마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인 양 굴었다. 애먼 사람들이 누명을 쓴 건 아니었지만, 벌주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다 망신 주고 과잉형벌을 남발했던 옛날의 인민재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구속영장 청구다. 세 사람에게 네 번의 영장 청구. 어쩌면 네 번으로 영장 청구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씨 일가에게 반복적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검찰은 마치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가 속의 특전사와 닮았다. 법률전문가로서의 양식이나 법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속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형사소송법 제70조)가 있고,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거나,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에 할 수 있다. 구속할 때는 범죄의 중대성과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도 고려해야 한다.

구속은 형사사법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피의자, 피고인이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애면 죄를 물을 수도, 죗값을 치르게 할 수도 없기에 마련한 부득이한 절차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형사사건에서의 핵심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에 달려 있다. 구속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속은 남발하면 안되는, 사실은 이례적으로 적용해야 할 절차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제198조)고 천명하고 있다. 이 원칙은 ‘준수사항’으로 따로 정해두고 있다. 불구속이 원칙이니 그 원칙을 따르고 좇으며 지키라는 것이 법의 명령이다.

그가 누구든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도록 하고, 감옥에 보내는 일은 재판을 해 본 다음에, 법원의 판결에 따른 형벌이어야 한다는 거다. 이게 원칙이지만,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앨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속하라는 거다.

조씨 일가의 범죄들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불구속 수사 원칙을 깨뜨릴 만한 것이었는지, 그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예외 없이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재벌 일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검찰은 악질 재벌을 단죄하는 정의의 수호신쯤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시민들의 박수를 받을 수도 있고, 재벌 일가를 구속해서 정의를 확립하라는 시민적 요구와 짝하기에 부담도 없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하는 법원은 치도곤을 당한다. 영장 전담 판사의 이름이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고 신상이 털리기도 한다. 검찰 입장에서는 이런 게 바로 꽃놀이패다. 영장청구권은 검찰에만 있지만, 그 권한을 아무렇게나 써도 검찰 입장에서는 잃을 게 없다. 모처럼 다수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을 게다.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그가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국민 모두가 갖는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재벌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홈스가 옹호하려 했던 사상의 자유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보편적 인권은 그가 누구인지를 따로 묻지 않아야 한다. 갑질이나 일삼는 재벌 피붙이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해야만 법이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조씨 일가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만큼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은 검찰의 마구잡이 영장 청구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재벌가 사람들조차 저런 대접을 받는데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여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비싼 변호사를 살 수도 없는 시민들은 크든 작든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당장 감옥에 갇힌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원칙은 언제나 어떤 경우나 꼭 지켜야 한다. 불구속 수사 원칙도 마찬가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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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의 투표율은 ‘역대급’이었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을 심판하자는 민심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 한국당 등의 참패로 이어졌다. 한국당 입장에서는 그래도 대구·경북은 지켰다고 자위할지 모르나 대구·경북 지역의 균열도 만만치 않다. 이대로라면, 어디서든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이 민심을 통해 정확히 드러났다.

그동안 한국당, 바른미래당 등의 야당들은 그야말로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역사적인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폄훼하고, 국민이 요구하는 개혁마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민심을 거스르며 자기들만의 성에 갇혀 살았던 셈인데, 그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지방선거 결과가 알려주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당 같은 민심의 무풍지대가 한둘이 아니다. 제 밥그릇만은 절대 내놓지 못하겠다며 저항하는 검찰이 그렇고, 요즘엔 법원의 모습이 꼭 그렇다.

발단은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라는 자기들만의 숙원사업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어떻게 내통했는지 조금씩 밝혀지면서부터였다. 박근혜 정권에 조금이라도 부담되는 사건들이 있다면 대법원이 앞장서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거다. 재판 결과에 명운을 걸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처지나, ‘법의 지배’와 같은 철칙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KTX 여승무원, 전교조 조합원, 제주 강정마을 주민과 경남 밀양 주민 등은 정교한 국가시스템에 의해 함부로 내쳐졌다. 피해자는 차고 넘칠 만큼 많다.

문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법원행정처장이 조사단장을 맡은 셀프 조사로도 이 정도이니, 좀 더 객관적인 곳에서 들여다봤다면, 아마 더 흉측한 결과와 직면했을 거다.

이를테면 사건관계자에게 골프와 룸살롱 접대를 받은 판사에 대한 처리를 보면, 그동안 법원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다. 양승태 시절의 법원행정처는 사건관계자에게 골프와 룸살롱 접대를 수십차례 받은 현직 부장판사의 비위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해당 판사는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고 멀쩡하게 법원을 떠나 변호사로 개업해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 제 식구 감싸기도 이 정도면 ‘역대급’이다.

법원은 삼권분립의 한 축이지만, 선출직인 대통령이 지휘하는 행정부나 구성원 전원이 선출직인 국회와는 차원이 다른 조직이다. 민주적 정당성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법원은 뭔가 다를 거라는 믿음, 법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때로 판결에 승복할 수 없어도 시민들은 참아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보듯, 사람 목숨마저 쉽게 앗아버리는 사법살인을 저질러도, 그 막연한 믿음 때문에 법원을 존중하기도 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최종 가해자는 법원이었지만, 그 비난은 온통 박정희와 그의 비밀정보조직에만 쏟아졌다. 법원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이번에 산산이 깨져버렸다.

엄청난 일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법원의 행태는 완전히 딴 세상 사람들의 것이다. 명백한 범죄가 양승태 대법원에서 자행되었고, 그 증거가 숱하게 쌓여있는데도, 판사들의 대응은 딴판이었다.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판사들은 연일 회의를 반복했다. 수석부장회의, 전국법원장회의, 대법관 간담회, 법관대표회의에다 외부 인사로 구성된 사법발전위원회까지 잇따라 열었다. 해법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형사고발이 필요하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형사고발은 곤란하되, “형사절차를 포함하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단다. 뿐만 아니다. 고위급 판사들은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와 문제 판사에 대한 탄핵이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양승태 본인과 양승태 시절의 법원행정처장들이 이미 법원을 떠나 탄핵할 수 없는데도 탄핵 운운하고 있다.

이런저런 회의만 열면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말을 아끼고 있다.

도대체 어떤 범죄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고, 그 범죄를 단죄하는 일이 여러 번의 서로 다른 회의를 거쳐야 하는 일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동안 판사들은 시민들을 향해 준엄한 심판을 내려왔다. 사람에게 죄를 묻는 일에 과감했던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속한 조직의 범죄에 대해서는 시간을 끌면서 시민들의 분노를 달래보려는 꼼수만 부리고 있다.

어쩌면 대법원장은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지방선거의 살벌한 결과를 보니, 더 이상 버티다간 더 큰 조직적 위기를 자초할 거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결론을 내리든 법원은 이미 틀렸다. 양승태가 틀린 것은 물론이고, 김명수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연일 회의를 거듭했던 것은 마치 법원은 남다른 조직인 것처럼 여기는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론을 달래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꼼수를 모를 사람은 없다.

법원의 사활적 관건은 신뢰다. 판결을 믿지 못하면 결코 승복할 수 없다. 갈등이 심각한 사회에서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교과서에서나 봤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 될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이야 법이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약자, 소수자, 아니 대부분의 시민들은 법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다. 법원에 대한 불신은 그래서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거다. 공동체가 붕괴되는데, 법원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니 지금의 사태가 법원에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각종 인연으로 끈끈하게 엮인 법원이라지만, 그런 소소한 인연 따위에 조직의 명운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심각한 사태를 두고도 연일 회의만 거듭하는 법원이 안쓰럽다.

잘못이 있다면 어떤 잘못이 있는지 빠짐없이 밝혀내면 되고,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 된다.

단순한 잘못이 아닌 범죄라면, 죄에 맞는 죗값을 치르면 그만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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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한 과정. 문무일 검찰총장은 일선 수사진에 대한 질책을 민주주의라 했다. 검사동일체 원칙이 법률에서 사라진 건 맞지만, 검찰의 동일성은 남다르다. 상명하복, 일사불란은 더하면 더했지, 군대보다 못할 바가 아니다. 상명하복의 정점엔 검찰총장이 있다. 검찰총장은 단순한 조직의 대표가 아니다. 인사권과 징계권을 바탕으로 조직 말단까지 틀어쥔 막강한 자리다.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단이 권성동 의원을 소환하려고 하자, 검찰총장은 직접 수사책임자인 춘천지검장을 불러 호되게 질책했단다. 명백한 수사개입이며, 노골적으로 봐주기 수사를 주문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총장은 “검찰권이 바르고 공정하게 행사되도록 관리·감독하는 것은 총장의 직무”라고 밝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검찰총장은 수사진을 질책한 것이 “이견을 조화롭게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 했지만, 검찰총장이 질책, 곧 잘못을 꾸짖어 나무라는 것은 그저 무조건 복종을 전제로 한 명령과 지시에 다름 아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검찰이 권성동 의원을 소환하기는 했다. 그러나 비공개였고, 소환한 날도 모두의 관심이 판문점에 쏠려있던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에 맞췄다. 같은 사건으로 불려간 같은 당의 염동열 의원은 물론 현직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전병헌 전 의원이 공개 소환으로 포토라인에 섰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특혜였다. 검사 출신에 대한 전관예우에다 검찰 관련 업무 전반을 다루는 국회 법사위 위원장이라는 점을 빼곤 설명할 수 없는 특혜다.

어떤 권리를 몇몇 특별한 사람들만 누린다면 특권,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다면 인권이다. 특권은 헌정질서에 반하는 폐습이지만, 엄연히 우리 사회 곳곳에 살아 있다. 심각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의 특권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거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검사들은 그 특권의 정점에 있다.

구속된 피의자도 수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공범관계도 캐야 하고, 여죄도 추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전혀 다르다. 경찰은 구치소를 방문해 접견조사를 하지만, 검찰은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부른다. 구치소 수용자를 검찰청에 보내려면, 매우 번거로운 일을 겪어야 한다. 일단 수용자에게 수갑을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포승까지 채운다. 여럿을 한꺼번에 옮기는 경우라면, 연승이라고 해서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묶는 포승을 채운다. 버스에 태운 다음에는 교도관 여럿이 계호를 하며 검찰청까지 가야 한다.

아직 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람들인데도 이렇듯 굴비 두름 엮이듯, 묶인 채로 검찰청에 끌려 다니는 것은 피의자 입장에서는 모욕적이고, 교정당국 입장에서는 실무인력을 잔뜩 투입해야 하는 번잡한 일이지만, 매일처럼 반복된다. 그래서 얻는 이익이라곤 그저 바쁜 검사들의 편의를 봐주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바쁘기로 친다면, 구치소 수용자를 검찰청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하는 교도관들도 마찬가지고, 수사접견을 위해 구치소를 찾는 경찰관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라면 다르다. 검찰청과 법원은 격도 다르지만, 공개재판을 받아야 하니, 수고스럽더라도 구치소 피의자가 움직이는 게 맞다. 검찰청을 법원처럼 오가게 하는 것은 검사만을 위한 특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검사의 특권을 위해 쓸데없이 인력과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이웃나라인 일본만 하더라도 조사가 필요하면 검사가 구치소를 찾아간다.

검찰이 이런 특권을 누리는 것은 사법기관도 아니면서, 자기들이 법원과 엇비슷한 ‘준사법기관’이라는 인식, 게다가 검찰이 누리는 막강한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42명의 검사장들이 차관급 예우를 받으며 기사 딸린 승용차까지 제공받았던 것은 아무런 법률적 근거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만든 내부 보직 규정만으로 국가 예산을 맘껏 썼던 거다. 그런 폐습을 없앤다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중요한 쟁점은 따로 있다.

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 대검찰청으로 되어 있는 조직구조만 해도 그렇다. 법원을 본떠 만든 것인데, 법원이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의 조직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재판을 3번하기 때문이다. 지방법원은 1심 재판을, 고등법원은 2심, 대법원은 3심을 각각 나눠 맡는 구조다. 사람의 목숨이나 운명, 재산이나 명예가 걸린 재판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는 취지다. 마치 비슷한 일을 하는 듯, 지방법원 옆엔 지방검찰청이, 고등법원 옆엔 고등검찰청이, 그리고 대법원 옆엔 대검찰청이 있지만, 검찰은 법원과는 위상은 물론 기능도 완전히 다르다. 행정부의 부처 중 하나인 법무부의 외청에 불과한 검찰이 3권 분립을 보장받는 법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도 우습지만, 3번의 재판을 하는 법원과 달리 수사도 한 번, 기소도 한 번만 하는 검찰이 고등검찰청과 대검찰청을 두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등검찰청과 대검찰청을 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건 일종의 망상의 산물이다. 검사도 판사처럼 똑같은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했으니, 판사들처럼 대접받고 싶다는 욕구가 이런 일탈을 만들었다. 당장 고등검찰청이나 대검찰청을 없애도 시민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손해나 불편은 없다. 그저 고위직 검사들 자리만 잔뜩 만들어내는 이상한 구조를 계속 용납할 까닭이 없다. 국민의 혈세에 기댄 특권을 그냥 둘 이유는 없다.

검사들은 현직에서 누리는 특권 말고도 권성동 전 검사의 경우처럼 퇴직한 다음에도 특권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수사권과 기소권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검찰을 기소전담 기관으로 환골탈태시키는 것이겠지만, 검찰이란 조직과 검사란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 그것도 퇴직한 다음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특권을 없애는 것도 중요한 관건이다. 어떤 것이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검찰개혁에 관한 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쉬운 대목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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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임명한 금융감독원장이 단박에 날아갔다. 임기 3년은커녕, 역대 최단기 재임기록을 남겼다. 피감기관의 돈이나 정치자금으로 부적절한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자신이 책임 맡은 연구소에 5000만원을 ‘셀프 후원’했다는 시비 때문이다. 잠깐 금융감독원장이었던 김기식은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의정활동도 남달랐다. 그런 평가를 받는 사람의 행보치고는 실망스러운 대목이 한둘 아니다. 피감기관의 돈에 기대 해외여행을 꼭 갔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그게 국회의 관행이라면 그런 관행을 깨트리는 데 시민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의 역할이 있었을 거다. 시민들이 모아 준 정치자금을 국회의원 임기 말에 무슨 땡처리하듯 급하게 써야 했던 까닭도 모르겠다. 그 돈을 왜 자기가 일하는 연구소에 기부했는지 등 아쉬운 대목이 많다. 아무튼 김기식은 국회의원 시절의 돈 문제 때문에 물러났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금융개혁의 적임자가 안타깝게 낙마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맞지 않는 감투를 쓰려다 실패한 일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도 좋다. 그래도 이런 사달을 겪었으면 뭔가는 남겨야 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 공직자의 자질에 검증조차 모호한 업무능력이나 전문성 따위를 넘어 국민 평균의 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도덕성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장 인사를 둘러싼 논란에서 개운치 않은 대목은 다시 짚어야 한다.

자체 검증은 물론, 야당과 언론의 의혹 제기 이후의 재검증까지 거친 청와대가 끝까지 문제없다는 태도로 일관한 까닭이 뭔지 모르겠다. 검증 시스템이 허술한 탓인지, 아니면 논란이 된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검증에 실패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청와대는 재검증까지 거쳤다면서 정작 판단은 선관위에 맡겼다. 이상한 일이다. 선출직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가 선관위에 비해 자격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청와대와 달리 선관위에 아주 특별하고도 남다른 전문성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장 쏟아지는 야당의 공세를 넘어서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선관위가 위법이라고 판단하는 사안을 청와대에서 놓쳤다면, 청와대의 검증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위법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당장 청와대 개편부터 해야 할 큰일이다. 그게 아니라, 선관위의 권위에 기대려 했다면 그건 촛불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들에 대한 모독이다. 뭐든 개운치 않다. 금융감독원장의 진퇴는 끝까지 청와대의 책임으로 풀었어야 했다.

선관위의 판단도 이상하다. 선거도 이미 끝났고 출마조차 하지 않은 사람에게 선거법을 적용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김기식은 이미 2년 전에 같은 사안으로 선관위에 신고를 했단다. 여태껏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다가 청와대의 요청에는 재빨리 답했다. 법은 그대로인데, 2년 전에는 합법이었다가, 지금에 와서 위법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엔 업무가 많아서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했다지만, 그렇게 업무가 많은 기관이 청와대의 요청에는 그토록 신속하게 답변을 내놓은 건 또 뭔가. 선관위의 직무유기가 일을 키웠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교훈은 남겨야 한다. 한판 푸닥거리에도 교훈마저 남기지 못한다면, 그건 당장의 인사 실패를 넘어 훨씬 더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가장 먼저 청와대부터 변해야 한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안주하면 안된다. 역대 대통령 모두 한때는 높은 지지율을 자랑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인사문제 검증은 철저해야 하고, 다른 사정을 두지 않아야 한다. 검증 자체가 허술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식구들에 대해서는 유난히 허술하거나 전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의 인사 실패가 반복되면, 문재인 정부의 개혁동력은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공직자의 해외여행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김기식의 낙마 덕에 새로운 기준을 얻었다. 국회의원 같은 공직자들이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안된다는 거다. 선관위의 판단과 달리, 관광 일정으로 허송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관광은 휴가를 얻어 자기 돈으로 다녀오는 게 떳떳하다. 보다 철저한 해외여행 규정을 만들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부터 철저하게 지키도록 해야 한다.

언젠가 한국을 찾은 베트남 공무원들을 만난 적이 있다. 한국을 방문한 공무원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과 한결같이 젊은 분들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한국처럼 가부장적 문화가 강한 곳이라 여성 공무원들이 해외출장이라도 가야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배려란다. 그리고 남의 나라까지 가서 뭔가를 배운다면, 앞으로 베트남을 이끌고 나갈 젊은이들의 몫이어야 한다는 거다. 한국과 같은 접대성, 공로성 해외출장은 없단다. 적어도 해외출장에 관한 한 베트남은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우리가 배울 게 많다.

높은 분을 접대하기 위한 해외여행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해외여행이라면, 지금 당장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적어도 김기식이 속했던 19대와 지금 20대 국회의원들의 해외여행에 대한 전수조사가 바로 그것이다. 누가 어느 나라에 어떤 일정으로 얼마 동안 다녀왔는지, 여행 목적은 무엇이고, 그 경비는 어디서 지불했고, 수행은 누가 했는지도 모두 공개해야 한다. 김기식의 경우처럼 모두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공정사회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거다.

우리가 주권자라면 그런 것쯤은 알아야 한다. 아는 것부터 시작하자. 알아야 판단할 근거도 생기고, 그래야 시민을 위한 정부와 의회도 제대로 구성할 수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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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은 격동의 시절이었다. 박종철에서 직선제 대통령 선거까지, 세상은 빠르게 변했지만 시대의 요구는 명확했다. 이젠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보자, 앞으로 나가자는 거였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고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5년 단임제 개헌은 1노 3김의 셈법이 맞아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한 번씩은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안전장치라고들 했다. 결국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순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87년 헌법을 그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세상이 너무 뜨거웠다. 제6공화국 헌법은 그 뜨거운 열기를 담고 세상에 나왔다. 기본권 조항은 훨씬 더 탄탄해졌고, 헌법재판소 설립으로 헌법 수호 기능은 강화되었다. 잘 만든 헌법이었지만, 헌법 개정 과정에서 주권자의 몫은 없었다. 주권자의 역할은 단지 국민투표에서 그쳤다. 과정은 없고, 결과만 민주주의였던 셈이다.

(출처:경향신문DB)

많은 사람들은 헌법을 그저 권력구조에 대한 기준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처럼 헌정질서를 망가뜨린 독재자들의 추악한 권력욕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일 게다. 하지만 헌법은 그 나라 국민들의 삶의 원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다. 해서 헌법은 함부로 고칠 수 없고,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개정할 수 있다. 어떤 헌법을 선택할지는 주권자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모를 통해 사흘 연속 발표한 헌법 개정안은 지난 31년의 역사적 성과와 국민적 염원을 잘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시대상황도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인권을 보장받을 주체를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규정한다든지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고, 공무원에게도 노동3권을 보장하도록 했다는 대목은 반가웠다. 우리나라도 이젠 다른 나라 부럽지 않은 인권선진국이 될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대통령 개정안은 생명권과 안전할 권리를 분명히 밝히고, 토지공개념 원칙을 제시하는 등, 현행 헌법의 부족한 면을 잘 보충하고 있다. 확실한 진전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아쉽다. 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유명한 명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란 측면에서도 그렇다. 개헌안은 ‘국민을 위한’ 것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국민의’ ‘국민에 의한’이란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지금 벌어지는 헌법 개정을 둘러싼 온갖 논란 속에 국민의 자리는 별로 없다.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는 국회 논의야 그렇다 쳐도, 대통령은 좀 달랐어야 한다.

대통령이 구성한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지난달 13일 출범했다. 이 위원회가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 자문안을 보고한 것은 지난 13일. 꼭 한 달 만의 일이다. 위원회는 지난 한 달 동안 분과위 차원에서 2박3일 합숙토론도 했고, 1박2일로 끝장토론도 했단다. 분과회의는 합해서 17번을 했고, 전체회의는 4번, 여러 차례의 간담회도 했단다.

그러나 ‘내 삶을 바꾸는 헌법’을 위해서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숙의 토론회를 했고, 청소년, 청년들과도 숙의 토론을 했다지만, 모두 일회적 행사였다. 어쩌면 위원들이 지닌 전문성 덕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계승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선택치고는 너무 졸속이었다.

70년 전 유엔이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과정은 그래서 참고할 만하다. 유엔은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가 만든 초안을 두고 2년 동안 치열하게 논의했다. 모두 85번의 공식회의를 거쳐 수정을 거듭했다. 유엔 인권위원회가 만든 최종안은 유엔총회의 사회·인도 및 문화적 사안에 관한 제3위원회로 넘겨져 넉 달 동안에만 모두 100차례가 넘는 회의를 거쳐 검토했다. 이 기간에만 모두 1233회의 투표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산고에 비견할 만한 과정이었다. 그랬기에 세계인권선언은 스테판 에셀이 &lt;분노하라&gt;에서 그토록 강조한 것처럼 인권의 야전교범이 될 수 있었다. 세계인권선언의 역할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야당의 발목잡기 때문에 일종의 비상사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헌법 개정의 방향이나 내용도 모두 좋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국민이 그저 좋은 선물에 마냥 흡족해하는 피동적 존재라 여기는 게 아니라면, 헌법 개정 논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개헌의 적기가 언제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언제 개헌을 하든 개헌 논의 과정에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일종의 헌법 학습장이 되기도 할 거다. 국민 참여가 그저 이런 것도 넣어주세요, 이건 꼭 포함되어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건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아니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듯, 치열한 논의를 꾸준하게 해보자는 거다.

“국가는 진보적 규범에 입각하여 일체의 차별 없이, 모든 개인의 인권이 포기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으로 향유되고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모든 공권력 기관은 헌법과 공화국이 서명하고 승인한 인권조약과 관련 법률들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베네수엘라 헌법 제19조)

인권교과서에 그대로 옮겨도 좋을 만큼, 완벽한 조문이다. 1999년 우고 차베스가 이끈 베네수엘라의 헌법 개정은 확실히 돋보였다. 350개조(한국은 130개조)의 헌법은 분량만이 아니라, 내용도 세계적이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 헌법전을 들고 시위를 벌이던 그 나라 국민들에게는 확실히 좋은 선물이었다. 그 좋은 선물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가 죽고 난 다음, 완전히 딴 나라가 되었다. 희망을 찾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 되었다. 좋은 지도자에게 기댄 헌법이 얼마나 무력한지 베네수엘라가 잘 알려주고 있다. 반면교사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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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암에 걸렸지만 왜 아픈지 알 수 없었다. 고통은 심했고 몸무게는 40㎏이나 빠졌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아파서 견딜 수 없었기에 소년원 의무과를 서른한 번이나 찾았다. 갈 때마다 고통을 호소했지만 의무과에선 으레 하는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다. 처방이라곤 변비약이 전부였다. 항문에서 피가 나온다고 호소하면 항문이 찢어져서 그런 거라는 말뿐이었다. 소년원은 병을 키우는 곳이었다. 병은 악화되었고 소년원을 나올 때까지 그렇게 아픈 까닭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원 당국자들은 꾀병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소년원생들이 거짓말을 잘하고, 꾀병도 심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마음이 굳게 닫혀도 그렇지, 청소년을 이런 식으로 죽음으로 내몰면 안 된다. 설령 꾀병이라도, 서른한 번이나 찾아간 성의를 봐서라도 아프다는 호소에 한번만이라도 귀 기울였어야 했다. 춘천소년원은 그러지 않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춘천소년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주소년원에서도 같은 이유로 청소년이 실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년원 당국은 외부 진료 요청을 번번이 묵살했다.

문제는 심각하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에 따라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잘못이나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거다. 대장암 걸린 청소년을 방치했다는 언론보도에도 꿈쩍하지 않던 법무부는 실명 사태까지 불거지고, 여론의 질타가 쏟아진 다음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늦은 대응이었다.

법무부 대응의 핵심은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불시’에 소년원을 방문해 실태를 점검하고, 개선책을 지시했다는 거였다. 장관의 소년원 방문 자체가 이례적이라 그 자체로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불시’는 거짓말이었다. 장관의 방문은 오후였는데, 법무부는 오전에 보도자료를 내고 ‘불시’를 강조했다. 장관의 소년원 방문 모습은 텔레비전 뉴스에 방영되기도 했다.

게다가 불시에 방문했다는 곳은 탈이 난 춘천이나 전주가 아닌, 안양소년원이었다. 장관님 오가시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법무부 정부과천청사에서 가까운 곳을 골랐던 것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장관은 소년원을 방문해 의료시스템 현황을 보고받고, 생활관, 진료실, 관제시스템 등 시설을 ‘세심하게’ 점검했단다. 소년원생들을 만나서는 “중한 질병이 의심되는 때는 참거나 숨기지 말고, 담당교사, 의무과장 등에게 즉시 알려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단다. 의무과에만 서른한 번이나 찾아갔던 소년원생들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치 중한 질병에 걸렸는데도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 병을 키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은 소년원 관계자들에게는 “수용 중인 학생 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려, 학생들이 소년원에서 병을 키우는 일이 없도록 다각적인 의료시스템 개선 방안을 신속히 마련하라”고 했단다. 아울러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법무부 장관이 소년보호기관들을 직접 방문하여, 의료서비스 전반을 점검하고 전문 의료인들의 자원봉사를 통해 의료시스템을 보완하는 등 종합적인 개선 방안을 수립·실행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계획을 어떻게 수립할지 모르지만, 법무부가 제시한 대안은 단 하나, 의료인들의 자원봉사로 시스템을 보완하겠다는 거다. 피해당사자는 물론, 시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장관을 비롯해 여러 주요 보직을 탈검찰화하고, 인권 주무부서로 거듭나겠다는 법무부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를 통해 적폐청산과 개혁을 다짐하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하긴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여태껏 검찰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것도 제대로 된 검찰개혁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검사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수준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이다. 법무부가 책임지는 출입국, 범죄예방, 소년보호, 인권 등은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위원회 이름을 그냥 ‘검찰개혁위원회’라고 붙였어야 했다. 아 참, 같은 이름의 위원회는 대검찰청이 따로 운영하고 있다. 희한한 일이다. 법무부와 검찰이 한 몸인데, 검찰개혁을 다루는 위원회는 두 개나 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더니, 두 위원회 모두 막상막하다.

소년원의 가장 큰 존재이유는 소년 보호에 있다. 범죄 청소년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기능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재범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하는 거다.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청소년들에게만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어떤 환경에 놓였나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미성년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청소년 범죄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어야 한다. 아이는 마을이 함께 키우기에 아이의 잘못은 마을 전체의 책임이어야 한다. 그래서 처벌이 능사는 아니고, 법률이 정해 둔 것처럼 보호가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의 소년원에서 구금 이상의 기능은 찾아보기 힘들다. 간판은 무슨 학교라고 근사하게 붙여놓았지만, 번듯한 건 이름뿐이다. 옛날 군대식 내무반처럼 수십 명이 한꺼번에 부대껴야 하는 좁은 곳에서 교육활동이라고 제대로 할 리 없다. 그저 가둬놓고 혼내주며 질서를 잡는 게 전부다. 언젠가 소년원을 찾았을 때, 열흘 전 내린 눈에도 운동장엔 발자국 하나 없는 걸 보았다.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달려가 농구라도 한판 뛰어야 하는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을 운동장조차 밟지 못하게 통제한 까닭이다. 생활실이라 부르는 좁은 감방에 가둬놓는 게 일상이다. 적절한 진료도 해주지 않고 외부 진료도 보내주지 않아서 대장암을 키우고, 실명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호일 뿐이다. 몸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소년원이 총체적으로 인생을 망가트리는 곳이어선 곤란하다. 소년원에 다녀왔다는 게 비행을 일삼는 청소년들에겐 훈장이 되고, 착실하게 살려는 경우엔 낙인이 되는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된다. 무거운 책임이 법무부에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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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9일자 지면기사-

견제와 균형. 청와대가 발표한 권력기관 개혁의 핵심이란다. 옳은 방향이다.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가고 영화 <1987>로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시민적 요구도 높은 때이니, 이쯤에서 청와대가 청사진을 밝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막상 공개한 내용만으로는 뭘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건 없다. 청와대 발표대로라면 권력기관 개혁이 가능하다고 진짜로 믿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식이라면 권력기관 사이에 견제와 균형을 잡는 개혁은 불가능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이 모두 개혁 대상이며, 범죄나 과오로 친다면 막상막하겠지만, 그 위세나 영향력으로 보면, 역시 핵심은 검찰개혁이다. 검찰은 ‘검찰공화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단연 독보적이다. 수사권과 경찰 등에 대한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그리고 형집행권 등 형사사법과 관련한 모든 권한은 검찰이 틀어쥐고 있다. 이런 권한에 비하면 훨씬 작지만, 법무부를 장악하고 여러 부처 파견을 통해 국정 전반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검찰개혁의 핵심은 검찰이 지닌 막강한 권한을 쪼개는 데 있다. 그게 민주주의 원칙에 맞고, 시민들의 인권보장을 위해서도 그리해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 발표에는 검찰 권한을 민주적으로 나누는 방안이 전혀 없다. 겨우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과 법무부 탈검찰화밖에 없다.

공수처 설립은 법무부와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갈등에서 보듯, 어떤 공수처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이미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원안이 훼손된 상태인 데다, 뒤가 구린 탓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야당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이기에 또 어찌 될지 모르겠다.

공수처를 통해 검사들의 개인 비리는 단속할 수 있겠지만, 검사들이 범죄를 일삼는 사람들은 아닐 테니, 검찰이 막강한 권한을 바탕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시민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악순환을 막을 방도는 아니다. 법무부 탈검찰화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시도했던 일이다. 인권국장, 출입국관리국장 등 여러 요직에 검사가 아닌 사람들을 임명했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교정본부장을 제외한 모든 자리는 다시 검사들 차지가 되었다. 불가역적 개혁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때보다 다만 몇 걸음 더 나아간다고 개혁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핵심은 검찰 권한을 쪼개는 데 있다.

청와대는 수사권 조정마저 검찰이 ‘특수수사 등’은 계속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수사는 경찰이 맡는 방안을 제시했다. 검찰이 계속 맡아야 한다는 특수수사는 개념부터 모호하다. 대충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지만, 법률 용어도 아니고, 특수수사와 그렇지 않은 수사를 나누는 경계조차 없다. 검찰이 특수수사라고 규정하면 특수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원래 권력 중에 가장 센 권력이 바로 ‘정의(定義)하는 권력’이다. 게다가 청와대는 특수수사에다 ‘등’까지 붙여줬으니, 검찰로서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경찰이 전체 수사의 98%를 담당하고, 검찰은 선택적으로 ‘특수수사 등’만 골라서 직접 수사를 하고 있다.

경찰 수사에 대한 수사지휘권도, 영장청구권이나 기소독점권도 그대로다. 형집행권도 여전히 검찰의 권한이다. 청와대 발표대로라면 검찰개혁은 단박에 물 건너간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넘겨받는 수사권도 없고, 검찰의 지휘도 여전하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갖는 건 아니지만, 경찰도 엄연한 개혁대상이다. 하지만 경찰개혁 방안도 별 게 없다.

자치경찰제를 시행한다지만, 지금의 국가경찰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제주도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단다. 경찰의 힘을 분산하는 데 아무 도움도 못된다. 광역단체장은 수천명 규모의 자치경찰을 부릴 수 있어서 좋겠지만, 시민에겐 어떤 새로운 이익이 있을지 모르겠다. 범칙금 부과 건수야 확실히 늘겠지만, 민생치안이 얼마나 좋아질지 모르겠다. 제주도민들이 자치경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치안서비스를 받는다면 좋겠지만,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제주는 범죄 분야에서 3년 연속 가장 낮은 5등급에 머물러 있는 유일한 광역시·도다. 정부 공인 ‘범죄도시’에만 자치경찰이 있는 거다.

경찰을 통제할 좋은 방안은 이미 제시되었다. 경찰개혁위원회가 경찰청에 권고했고, 경찰청도 수용하겠다는 경찰 전담 감시기구 신설이다.

영국의 ‘독립적 경찰비리민원 조사위원회’가 모델인데, 수백명의 인원으로 밤낮없이 경찰을 감시하는 별도의 수사기관이다. 감시만 제대로 한다면, 경찰은 시민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발표에서 왜 이런 핵심이 빠졌는지 모르겠다.

행정경찰과 수사경찰의 분리도 내치와 외치를 분리한다는 것처럼 공허한 이야기다. 교과서에선 가능할지 모르지만, 조직을 완전히 떼어내지 않는 한 불가능한 공상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국가수사본부가 경찰청 소속 경찰관으로 구성되는 한, 인사권과 감찰권을 지닌 경찰청장, 나아가 대통령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런 정도의 개혁안으로 권력기관이 바뀌는 일도, 이 기관들이 오로지 시민들만을 위해 거듭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청와대의 이런 태도가 권력을 잡고 난 다음에 생기는 일종의 안도감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권력기관을 이용해 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을 테고,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모두 정권 차원에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적당한 선에서 개혁을 마무리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그런 막연한 생각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고, 지난 10년 동안의 적폐를 불러왔다. 개혁은 원칙대로, 불가역적으로 해야 하고 청와대가 아니라, 불과 1년 전 야당이었을 때의 심정으로 해야 한다.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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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가 3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사람들은 민감하다. 상대가 조두순이어서 그렇고, 피해자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짐승의 탈을 쓰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어서 모두들 공감하고 또 공분했다. 대법원까지 형이 확정된 다음에 피고인에게 벌을 더 주자는 재심은 불가능하다거나, 이미 결정된 처분 말고 다른 처분을 부과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일사부재리 원칙은 초등학생이면 모두 아는 상식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청와대 청원에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마음을 모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분노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두순이란 악당을 향한 분노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악당들에 대한 안전장치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중요하다.

시민들의 뜻을 좇으려 청와대가 나서서 입장을 밝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잠깐 놓치는 것이 있다. 그건 조두순이 바로 교도소에 있다는 거다. 조두순은 12년형을 선고받았고, 9년째 수감되어 있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의 조두순과 지금의 조두순은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일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그만큼 늙었을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교도소의 목적이 범죄자에 대한 교정·교화를 통해 범죄자의 재사회화를 촉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교정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조두순은 과거 범행 당시의 조두순과는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교도소는 기본적으로 범죄자가 죗값을 치르는 곳이다. 핵심은 신체의 자유 제한. 이로써 인간은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죄다 놓치게 된다. 집에 있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지낼 수도,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다. 여행을 다닐 수 없는 건 물론, 아주 기본적인 종교생활을 제외하곤 일체의 문화생활, 취미생활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받는다. 사형을 빼고는 징역이나 금고 등 자유형을 가장 무섭고 무거운 형벌로 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은 교도소가 단순히 범죄자를 혼내주는 곳만은 아니라는 거다. 단순히 혼을 내준다고 얻을 건 별로 없다. 핵심은 그 범죄자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는 거다. 그래서 교도소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범죄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거다. 다시는 이웃에게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 자체를 바꿔버리는 데 그 설립 목적이 있는 거다. 물론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변화를 위한 노력조차 포기할 수는 없다. 교도소에서 지내면 누구나 고통을 받는다. 어차피 고통을 받는 건 일상이니, 교도소의 목적의식적 활동은 능동적으로 교정교화를 촉진하는 데 있다. 그게 현대 교정의 이념이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위한 필수적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교도소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다. 이 추운 겨울, 교도소 52곳 중에서 10곳의 교도소는 난방이 전혀 안된다. 법무부는 ‘복도 간접식 난방’이라 부르지만, 교도관이 활동하는 복도에만 라디에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생활실(감방)에는 아무런 온기조차 없다. 교도소의 역할은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서 멈춰야지, 이 엄동설한에 추위에 떨게 하는 불필요한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은 지 50년이 넘은 안양교도소 같은 곳은 난방이 전혀 안되는 것은 물론, 건물 자체가 위험하다. 그래도 이전 계획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난방이 안되는 한심한 건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두순 같은 범죄자들에게 잘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악당들에게 국민의 혈세로 잘해 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지금 걱정하는 것처럼 조두순 같은 악당도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온다는 거다. 저 악당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우리의 품격이 달려 있다는 멋진 말이 사회적 공감대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은 잘 안다. 사연을 따져보면 정말 딱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것보다 우리가 곧잘 잊는 것, 교도소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모두 우리의 이웃으로 돌아온다는 거다.

몸이 아픈 것이 개인적 질병역학 탓만이 아니라, 사회역학의 탓도 있는 것처럼, 범죄도 오로지 개인의 일탈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같은 범죄여도 전과가 있느냐에 따라, 또 그가 놓인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 구금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가혹한 벌을 받는 사람도 많다.

거듭 강조하건대,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은 사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다. 범죄자를 영원히 가둘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사회로 돌아온 다음에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돕는 것이 국가의 몫이다. 범죄자를 검거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동원하고, 엄청난 예산을 쓰는 것보다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의 요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저렴하며 효과도 확실하다.

법무보호공단을 거쳐 간 출소자들의 재범률이 현저하게 낮은 것처럼,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 어떤 대접을 받는가에 따라 다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교도소는 학교여야 한다. 뭔가 배우는 게 있고, 그 배움이 수용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방영하는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의미 있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이 비록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부터 마약, 사기 등 각종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에게도 각자 나름의 이유는 있다. 범죄에 이르게 되는 과정 같은 게 있다. 그런 걸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저 범죄자만 탓할 수 없다.

교도소를 본격적으로 바꿔보자. 너무 춥거나 덥지 않아야 하고,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사는 현실도 바꿔야 한다. 먹고 자는 문제, 아프면 진료받는 문제를 해결하고, 제대로 된 교육활동을 진행하는 학교로 바꾸자. 너무 춥지만, 그런 꿈은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연말연시가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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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엄마였다. 두 아이의 엄마, 아이들은 아직 어렸고 엄마의 손길이 절실했다. 열 살과 일곱 살. 그래도 엄마는 모진 결심을 했다.

그는 여성 경찰관이었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은 아니었고, 임신, 출산, 육아와 직장 생활을 함께하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잘 버텼다. 이제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으니, 둘째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나마 숨 돌릴 여유도 생길 판이었다. 그래도 그는 모진 결심을 단행했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무언가 맹렬한 기세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집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한 건 열 살 먹은 아이였다. 이런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말을 놓게 된다. 끔찍한 비극이다.

시작은 익명의 투서였다. 근무에 게으르고 동료에게 ‘갑질’을 했고, 해외연수도 독차지했다는 거다. 원래 이런 익명의 투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행정적으로는 각하 처분 대상인 거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가 소속된 충북 충주경찰서는 근거 없는 음해라 판단해 각하 처리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상급관청인 충북지방경찰청은 달랐다. 뭔가 건수가 될 거라 판단했거나, 또는 건수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감찰이 시작되었다.

투서 내용은 너무 쉽게 판명 났다. 경찰에서 세 번째로 낮은 경사 계급이 누군가에게 갑질을 한다는 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음해였다. 게다가 갑질이 가능한 보직도 아니었다. 해외연수도 특혜는 없었고 그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는 근무 태만이지만, 이건 어떤 상황에든 끼워 맞출 수 있는 요술방망이가 될 수도 있다.

충북경찰청 감찰팀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미행을 했고, 몰래 촬영을 했다. 주로 출퇴근 상황을 점검했다. 상당한 인력이 그의 뒤를 쫓으며 혹시 지각은 하지 않는지, 퇴근 시간 이전에 사무실을 나서지는 않는지 따위를 챙겼다.

그런 식으로 일상을 감시한 끝에 드디어 잡아낸 건수가 시간외 수당 부당청구 의혹이었다. 아침 7시30분에 출근을 해서 업무를 보다가, 잠깐 집에 들러 아이들 등교를 챙겨주는 장면을 포착한 거다. 그래봤자, 다시 경찰서로 돌아온 시간은 정상 출근 시간인 9시 이전이었다. 일하는 엄마가 출근 시간 이전에 분주하게 움직였으니, 출산율 꼴찌 국가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고마워해야 할 장면이었지만, 감찰은 거기서도 뭔가 끄집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다. 7시30분에 출근하면서 출근부를 찍었는데, 아이들 데려다 주는 시간 동안에는 근무를 하지 않았으니 부당하게 시간외 수당을 챙기려 했다는 거다. 아이 키우는 엄마지만, 업무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는 비난을 듣고 싶진 않았고, 그래서 좀 더 일찍 출근해 업무를 보다가 아이들 등교를 챙겨주려 잠시 나갔다 들어온 게 문제라는 거다.

감찰은 동료 경찰관의 고군분투에서 작은 꼬투리를 잡아놓고는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19일의 일이다. 하나를 보면 둘을 안다며 압박했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세 번 정도 지각했다고 인정하면 모르지만, 그러지 않으면 경찰서 폐쇄회로(CC)TV를 다 끄집어내겠다고 했다. 당신 때문에 전 직원이 출퇴근 상황을 점검당하는 사태가 생길 텐데 그래도 견딜 수 있겠느냐는 압박이었다. 실제 지각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감찰은 집요했다.

엿새 뒤엔 감찰이 수사관까지 데리고 들이닥쳤다. 수사관이 왔다는 건, 당신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신호였다. 이번엔 없어진 주민등록발급신청서 498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라고 했다. 만 17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민등록발급신청서를 작성한다. 이건 동네 주민센터 일이지만, 열 손가락 지문이 찍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청서는 경찰이 보관하고 있다.

범죄자도 아닌 국민 모두에게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을 강요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단지 지문이 찍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등록발급신청서를 경찰이 보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없어졌다는 신청서들은 2014년 1월에 작성된 거다. 거의 4년이 다 되어서야 민감한 개인정보가 잔뜩 담긴 중요 서류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거다.

500명 가까운 시민들의 개인정보가 없어진 것도 모르는 경찰이 다른 서류들은 잘 보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없어진 게 이것뿐인지도 의문이다.

그 중요한 잘못을 힘없는 여성 경찰관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것이다. 근무태만 운운하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버린 거다. 어떻게든 자기들 성과를 내려고 수사관까지 데리고 갔던 거다.

천만다행으로 그에게는 등기우편 영수증 등 신청서를 제대로 처리했다는 근거가 남아 있었다. 혐의는 벗을 수 있었지만, 감찰은 막무가내였다. 3시간의 조사를 받고 나와서는 신청서 분실 책임을 자신에게 물으려 한다며 동료들 앞에서 분통을 터뜨렸단다. 그러곤 다음날 아침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지난해 동두천경찰서 최혜성 순경도 그랬다. 음주측정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는 처벌기준 0.0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한 방울이라도 술을 마신 것 아니냐며 윽박지르는 감찰을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비극은 되풀이되고 있다.

감찰은 건강한 조직을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이다. 하지만, 경찰의 감찰은 고위직의 힘 있는 사람들, 갑질은 기본이고, 아예 사무실에 침대까지 갖춰놓고 마음껏 낮잠을 즐기는 기관장들의 비위는 애써 모른 척하고, 최혜성 순경, 표정목 경장, 그리고 이번엔 경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낮은 계급의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쏠렸다. 힘 있는 사람에겐 굽실거리고, 힘없는 사람에겐 군림하는 악질적인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경찰의 감찰 조사를 받다가 사람이 죽어나가는 비극을 막아야 한다. 지금의 감찰은 해산시키고, 감찰권 자체를 행정안전부 등 외부에 넘기는 등의 개혁을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수사절차에 준해서 감찰 당하는 사람들의 방어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목숨이 달린 일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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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경 수사권 조정은 국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경찰의날 기념식에서 했던 말이지만, 대선공약도 그리 발표한 터이니 단순한 덕담은 아닐 게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그동안 수사권 조정은 검찰과 경찰 사이의 권한 다툼으로만 여겨졌지만, 대통령은 인권보호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오금을 박았다. 그렇다. 뭔가 조정이 필요하다면, 그건 오로지 시민의 인권보호를 위해서여야 한다.

백남기 선생을 죽였고, 어금니 아빠 사건에서 보듯, 꽃 같은 중학생의 생명을 지키는 데 한없이 무능하고 무성의했던 경찰에 새로운 권한을 줘야 한다는 걸 뜨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수사권 조정이 필요한 까닭은 경찰이 아니라, 검찰에서 찾아야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 검찰의 권한은 막강하다. 수사권과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기소와 공소유지권에다 형집행권까지 갖고 있다. 수사의 시작부터 끝, 기소와 재판, 그리고 재판 결과에 대한 집행까지, 형사사법에 대한 권한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 권한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부패와 비리, 권한 남용으로 이어진다. 이런 게 쌓인 게 바로 ‘적폐’다.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면서도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다. 

얼핏 보면 법원의 통제를 받는 것 같지만, 형사사법의 주도권은 법원이 아니라 검찰이 쥐고 있다. 죄 없는 사람도 법정에 세울 수 있고, 죄 많은 사람도 짐짓 모른 척할 수 있다. 형사재판을 하는 중이라도 기소 내용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 공소를 취소하면 재판은 그냥 막을 내리게 된다. 법원이 아무리 무거운 형을 선고해도, 검찰이 형집행정지 등을 통해 풀어주면 그만이다. 그러니 형사사법은 그냥 검찰사법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런 막강한 권한을 바탕으로 검찰이 그동안 저질렀던 범죄목록은 차고 넘친다.

권한이 한곳에 집중되면, 그래서 어떤 기관이 독주하거나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게 되면, 반드시 일탈이 따르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검찰 문제는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권한이 집중된 데서 오는 문제다. 그러니 해결책은 집중된 권한을 쪼개는 것밖에는 없다. 민주주의 일반 원리도 그렇다. 민주주의 원리는 대충 이렇다. 모든 권한은 시민이 위임해 준 것이기에 오로지 시민만을 위해서 쓰여야 한다. 이를 위한 핵심적 관건은 각 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이를 담보할 분권이다.

검찰이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으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검사들을 수사하며 일탈을 경계하고, 검찰이 지닌 수사권은 경찰에 넘겨주는 거다. 수사권을 넘겨받은 경찰이 비대해질 게 걱정되면, 경찰관에 대한 수사는 검찰이 맡는 식으로 서로 물고 물리도록 하자는 거다. 경찰 수사에 대한 우려는 검찰이 가진 기소권과 보완수사권으로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 이렇게 견제와 균형을 잡아보자는 게 수사권 조정의 핵심이다.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검찰개혁은 매번 시대적 과제요 시민적 요구였지만, 검찰은 그 막강한 힘으로 번번이 개혁을 좌초시켰다. 이번엔 다를까? 검찰 입장에서 보면, 적폐청산 국면은 그동안 악화되었던 여론을 반전시키며 검찰의 힘을 다시금 비축할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꼭 해야 할 수사를 하면서도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생색을 내며 기득권을 지키려 애쓸 것이 뻔하다. 검찰이 가장 깨끗하다는 오만, 고졸 출신 대통령에게 부러 학번을 묻는 흉악한 오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수사권 조정 등 검찰개혁을 수용할 리가 없다.

그래서 수사권 조정을 두고 검찰과 경찰의 자율적인 합의를 도모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가능하다면 그러면 좋겠다는 수사일 게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둘 다 중요한 국가기관인데, 한쪽 편만 들거나 한쪽을 몰아붙여서는 안될 거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권한을 놓고 이해당사자들끼리 논의할 때의 결론은 너무도 뻔하다. 접점조차 없다. 대통령이 요구하면 시늉은 내겠지만, 자율적인 합의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니 핵심은 “중립적인 기구를 통해 결론을 내겠다”는 데 있을 거다. 하지만, 이도 쉽지 않다. 노무현 정부 때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각계 인사들로 검경 수사권 조정 자문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이 위원회는 검찰이 절반, 경찰이 절반을 위촉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대립만 일삼다 끝나버렸다. 

위원장을 뽑는 것조차 어려웠다. 가나다순으로 하자면 이쪽이 반발하고, 연장자로 하려면 저쪽이 반발하는 식이어서 사회통념에 기댈 수도 없었다. 결국 동전을 던져 위원장을 정했다. 그만큼 합리적인 대안을 찾지 못했던 거다. 이런 실패를 반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통령이 구상하는 중립적인 기구가 사뭇 궁금하다. 신고리 5·6호기 문제처럼 시민참여단을 구성해 집단지성을 좇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자칫하면 그저 브리핑을 잘하는 쪽이 높은 점수를 받는 식으로 결론이 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문제가 어려울수록 원칙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 그건 문 대통령의 공약에서 출발하는 거다. 당연히 공약은 지켜야 한다. 선거 과정에서 후보가 시민의 선택을 받겠다며 공적으로 했던 약속이니, 천지개벽처럼 불가항력적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공약을 지켜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공적 책임을 부여받은 공직자에게는 그게 최소한의 책무다. 

그러니 대통령이 직접 수사권 조정방안을 마련하고, 그걸 국회에 제출하여 심의하도록 하는 게 제일 좋다. 굳이 중립적인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면, 그 기구는 대통령의 공약, 곧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것을 전제로, 그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는 기구여야 한다. 자칫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 때를 놓칠까 두렵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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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박정희는 조급했다. 정권 연장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 부모의 조국을 찾아온 재일동포 유학생쯤은 얼마든지 간첩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그건 쉬운 일이었다. 그 쉬운 일 때문에 서준식은 형 서승과 함께 17년을 갇혀 있었다.

형벌의 목적은 고통이다. 청년은 17년 내내 매일처럼, 매 순간 고통을 겪었고 장년이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면, 다시는 그 고통을 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이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서준식은 달랐다. 출소한 다음에도 맹렬히 뛰었다. 그 대가는 다시 구금의 고통을 겪는 일로 이어졌다. 1991년엔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다, 1996년엔 인권영화제에서 제주 4·3항쟁을 다룬 영화를 틀었다고 또 갇혔다. 당시 서준식은 인권운동사랑방의 대표였다. 서준식은 교도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부지런히 찾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라 유무죄에 대한 판단도 받지 않은 미결수들이 왜 수의를 입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미결수 수의 착용은 서준식의 문제제기로 위헌 결정이 났다.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예전 같으면 국사범으로 불릴 만한 국정농단의 주범들도 이제는 조사나 재판을 받을 때 평상복을 입을 수 있다. 창피도 덜하고, 범죄자라 낙인찍히는 일도 덜해졌다.

석방된 다음엔 교도소 실태조사를 했다. 출소자들을 붙잡고 실태조사를 했다.

감방에는 몇 명이 살았는지, 생활은 어떤지, 아프면 진료는 제대로 받을 수 있었는지 등을 꼼꼼하게 물었고, 그 결과를 <한국 감옥의 현실>이란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 군대를 개혁하기 위해, 또 군대의 부조리를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 숱한 유력 인사들이 드나들었고, 많은 운동가들이 고통을 겪었는데도 우리의 교정시설이 고만고만한 까닭도 마찬가지다. 나오면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교정시설이다. 그래도 서준식은 달랐다.

또 한 사람, 백태웅.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 대가는 구속과 구금이었다. 석방된 다음에는 훨씬 더 본격적으로 운동을 했다. 박노해 시인과 함께 ‘남한사회주의자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하고, 비합법 노동운동, 혁명운동을 벌였다. 그와 동료들의 투쟁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마치 <공산당선언>이란 팸플릿이 유럽 전역을 뒤흔든 것처럼, 그들도 조직 이름에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려고 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박노해, 백태웅, 은수미, 현정덕 등은 모두 긴 세월 구금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백태웅은 6년4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

서준식과 다른 점은 시대였다. 그래도 문민정부가 출범한 다음이었으니 서준식처럼은 아니지만, 청년에게 6년 넘는 구금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을 만큼 긴 세월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다음엔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이력으로 어디든 한걸음 정도 걸쳐 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선택한 것은 공부였다.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오랫동안 수감된 사람이 이런 성취를 보여주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백태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강제 실종 실무그룹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대표하는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짬이 나는 대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유엔의 위원 자격으로 백태웅이 주로 다니는 곳이 바로 각종 구금시설이다. 최근엔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비밀감옥을 밝혀냈고, 21명의 정치범을 석방시키는 성과도 있었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곳일 텐데, 백태웅은 서준식처럼 사뭇 달랐다.

누구든 감옥이 그 나라 문명의 척도라는 말은 쉽게 한다. 그렇지만 법무부 교정본부가 관할하는 한국의 감옥은 여전히 사각지대다. 오래된 시설이 많은데도 교도소 신축은 온통 막혀 있다.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결사반대 때문이다. 하긴 특수학교마저 아파트값을 떨어뜨린다는 괴담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새로운 교정시설을 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마침 다음주에 서울동부구치소가 새로 문을 연다. 예전의 성동구치소가 문정동으로 자리를 옮긴 거다. 새로 옮긴 시설은 교도관들은 물론, 수용자들도 좋아할 만큼 쾌적하다. 시설이 좋으니, 여기선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교도소는 두말할 것도 없는 기피시설이다. 누구도 자기 동네에 교도소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교도소처럼 안전한 곳도 없는데 범죄자들을 수용하고 있기에 생긴 편견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뭔가 새로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동부구치소는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 교도소만이 아니라 바로 옆에 준법감시센터와 검찰청, 법원이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도소는 싫지만, 검찰청이나 법원은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화답한 거다.

중요한 국가시설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가 교정시설을 방문하는 경우는 없다. 국가적 관심이 별로 없으니, 교정에 대한 지원도 형편없다. 인력도 예산도, 다른 무엇도 모두 부족하기만 해서 교정교화라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오로지 구금에만 급급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기에 누구보다도 교도소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대통령으로서 챙겨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겠지만, 딱 한번이라도 교도소를 방문했으면 한다. 10월 교정의 날에 맞춰도 좋고, 일정이 어렵다면 오가는 길에 교도소를 한번 들러도 좋겠다. 그래서 교도소가 더 많이 발전하고, 인권친화적으로 변모해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점을 말없이 웅변해주면 좋겠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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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사인은 질식사였다. 폭발이 있었지만 한동안 숨을 쉴 수 있었다. 안전장구만 제대로 갖췄거나 안전요원이 배치되어 피할 곳을 찾을 수 있었다면 노동자들은 그렇게 어이없게 죽지 않았을 게다. 지난 일요일, 경남 창원 진해의 STX조선해양에서 건조 중인 화물운반선에서 도장 작업을 하던 하청업체 비정규 노동자 네 명의 죽음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인명은 재천이란다. 가끔 허망한 죽음을 보면 그리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 목숨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은 반쯤만 맞는 말이다. 요즘 평균 수명은 남성 79세, 여성 85세지만, 1980년 평균 수명은 남성 62세, 여성 70세였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하늘이 아닌 사람의 몫이었다. 의학의 발전, 양질의 영양공급, 결국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하는 데 쓸 수 있는 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이 평균 수명의 증가로 이어졌다. 목숨은 그저 하늘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의 참사는 원통하다. 꽉 막힌 실내 공간에서 도장 작업을 한다는 건 애초부터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하청업체는 작업 전에 ‘위험작업신청서’를 작성했고, STX 안전요원의 허가를 받은 다음에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작업을 진행할 때, STX 안전요원과 하청업체 현장책임자는 모두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이어선지, 원래 그리 하는지는 모르겠다. 밀폐 된 공간이니 환기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환기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유독가스를 배출하는 관에는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고, 심지어 끊어져 있기도 했다. 산소 부족에 따른 질식 우려가 큰데도 마스크 자체에 공기가 주입되는 송기마스크는 지급조차 하지 않았다. 폭발 위험을 막는 정전기 방지 의류나 신발도 지급하지 않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미리 폭발사고를 막는 게 최선이겠지만, 폭발사고가 났더라도 안전장구만 갖췄다면 사람들이 질식해서 죽는 일은 없었다. 전형적인 인재이며, 보태고 뺄 것도 없는 STX의 책임이다. STX가 하청, 재하청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숨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뻔한 위험 속에 노동자들이 방치된 건, 그들이 하청노동자였기 때문일 거다. 말은 번듯해서 ‘협력’이라 부르지만, 단가를 후려치고 위험부담까지 떠넘기는 건 대기업의 악질적 관행이다.       

일요일에도 위험한 작업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원청업체가 저렴한 입찰가만 보고 하청업체를 정하기 때문이다. 가격을 줄이고 공사기간을 맞추는 게 급선무니 안전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이번 참사는 일요일, 지난 5월 삼성중공업 참사는 노동절, 지난해 구의역 사망사건은 토요일 저녁에 일어났다.

원청과 달리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근로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개 미조직 노동자들이고 언제 일감이 끊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처지이니 원칙대로 안전을 챙기는 건 쉽지 않다. 원청업체 입장에서는 뭔가를 요구하는 하청업체나 하청업체 노동자들과는 더 이상 ‘협력’하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목숨이 달려 있으니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마저, 비용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곧잘 무시되고 있다. 천박한 자본의 탐욕과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치 않겠다는 파렴치가 노동자 네 명을 죽였다. 남들은 다 쉬는 날, 그냥 서 있기도 힘든 폭염에 밀폐 된 공간에서 페인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겪을 고초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탐욕이 부른 참사다.          

조선업 현장에서 산재로 숨진 노동자의 열에 아홉이 하청 노동자이고, 건설업은 거의 전부가 하청 노동자다.

산업은행 등의 공적 관리를 받는 기업도 이 정도니, 자율적으로 경영하는 사영기업에 노동자들의 안전을 제대로 챙겨 달라는 요청은 어쩌면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영기업의 탐욕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사고 직후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현장을 방문하고, 이런 사고가 나면 원청의 책임을 묻겠다고 못 박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결국 한 푼이라도 더 줄이고, 한 푼이라도 더 벌자는 사영기업을 단속할 방법은 제대로 책임을 묻는 것밖에는 없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오히려 돈을 버는 일이라는 걸 체감시키는 방법밖엔 없다. 대기업이라도 이런 식의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산업재해가 적은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채택하는 가장 일반적인 정책이기도 하다. 산업재해는 정부가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문제는 말이 아니라 실행에 있다. 문재인 정부가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를 통해 ‘중대 산업재해 예방대책’을 발표한 게 지난 17일, 이번 참사는 예방대책 발표 사흘 만에 일어났다. 이에 앞서 지난달 3일 열린 ‘산업안전보건의 날’에 보낸 영상메시지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의 최우선 가치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으로, 그 어떤 것도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 될 수 없다”면서 산업현장의 위험을 유발하는 원청과 발주자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현장은 대통령이나 장관의 말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대통령이 직접 확인한 것처럼, 국가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무거운 책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거다. 군대나 경찰, 또는 소방처럼 당장의 성과만 보면 얼핏 낭비적 요소가 많아 보이는 기관을 운영하는 까닭도, 아니, 그 이전에 국가라는 체제를 만든 까닭도 우리의 목숨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에 민감한 정부여야 한다. 산업재해 사망자 숫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살률도 교통사고 사망률도 낮춰야 한다. 그 무거운 책무가 바로 대통령과 정부에 있다. 말은 충분하다. 이젠 구체적인 실행을 보여 달라.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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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노무현 정권 때의 경찰혁신위원회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엔 경찰개혁 작업을 꼭 이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아무리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쳤다 해도, 그래도 십여 년이 지났으니 경찰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을 줄 알았다. 막연한 기대와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경찰개혁위원회 발족식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발족식에는 경찰청장을 비롯해 40여명의 경찰관들이 참석했는데, 전부 남성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경찰의 별’이라는 경무관 이상은 물론, 실무자들 중에도 여성은 없었다. 그래도 여성 경찰관 숫자가 꾸준히 늘어서 전체 경찰관의 10%가 되었다지만, 경찰청의 주요 행사에선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장관도 30% 이상은 여성이 맡는 세상인데, 경찰청은 요지부동이었다. 경찰은 여전히 남성만의 조직이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개혁적 경찰관들의 의견 그룹 ‘폴네티앙’과의 간담회 때는 더 충격적인 현실과 만날 수 있었다. 간담회에 참석한 딱 한 명의 여성 경찰관. 13년차 경찰관인 그는 생리휴가를 한 번밖에 쓰지 못했다고 했다. 상급자와 동료들 눈치 보느라 쓸 수 없었단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는 여성 근로자가 청구하면 월 1일의 생리휴가를 주어야 한다”(73조)고 규정하고 있다. 생리휴가를 주지 않는 건 형사처벌을 해야 하는 범죄다. 

그래서일까, 아예 여성 경찰관들이 생리휴가를 청구하지 못하게 분위기를 조성한단다. 몸이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생리휴가를 청구하면, 정 쉬고 싶으면 생리휴가 말고 병가를 내라고 한단다. 어떻든 생리휴가로 쉬는 일은 막겠다는 거다.

여성 경찰관들이 생리휴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생리휴가가 당연시될 텐데 그게 싫다는 거다.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이기에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법조문으로만 멈추지 않고 진짜로 당연한 권리가 되는 건 싫다는 거다. 여성 경찰관들은 물론, 경찰 조직 안에서 홀대받는 일반직 공무원이나 무기계약직까지 생리휴가를 쓰는 게 싫다는 거다.

그는 자기 신세가 남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 처지와 비슷하다고 했다. 지구대, 파출소의 화장실이 온통 남성 위주로만 되어 있는 것도 힘들지만, 온갖 차별을 감내해야 하고 일상적으로 들어야 할 핀잔도 보통 이상이라고 했다.

간담회가 있던 날 저녁, 마침 CBS <정관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경찰개혁 과제를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했다. 생리휴가조차 쓰지 못하는 경찰관이, 곧 자신의 기본적 인권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시민의 인권을 지켜주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가 기사로 나가자 금세 숱한 댓글이 달렸다. 내용으로 짐작건대 남성 경찰관들이 쓴 글이 많았는데, 놀랍게도 일베 수준의 막말이 넘쳐났다.

아예 여경을 뽑지 말자, 남자의 영역이 따로 있는데 왜 여자들이 경찰에 들어와서는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법률이 보장하는 구체적 권리를 요구하는 게 엉뚱한 소리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지만, 이건 그래도 점잖은 편이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자기 이름까지 밝히며, “여경들, 개혁이 필요해. 불친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범인 하나 제대로 제압도 못하고, 그렇다고 용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직업 중의 하나임.” 여성은 그저 남성이 원하는 제한된 성 역할만 하면 그만이라는 거다. 경찰은 범인 검거 등 신체적 능력이 필요한 일이니 여성이 할 일이 아니란 거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생리휴가, 출산휴가, 육아휴가, 월차휴가, 연차휴가…. 도대체 언제 일할래?”라고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너무 힘든 출산율 꼴찌 국가는 하루아침에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여성이 생리휴가를 보장받는 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대통령을 뽑는 일이든, 스스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는 일이든, 경찰관이나 다른 어떤 직업을 갖는 일이든 대개의 일들은 여성에게는 금지된 영역이었다. 남성은 일정한 나이만 되면 참정권을 보장받았지만, 여성이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미국의 경우 50년, 프랑스의 경우 10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지난달 타계한 서윤복 선생 덕분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보스턴 마라톤도 그랬다. 겉으로는 아무런 차별적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마라톤은 여성에겐 금지된 영역이었다. 여성이 800m 이상 뛰면 자궁이 떨어진다는 해괴한 소리까지 해대며 여성 출전을 막았다.

1967년 스무살 대학생 카트린 스위처는 말도 안 되는 벽을 깨기 위해 보스턴 마라톤에 나섰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경기감독관이 그를 덮쳤다. 당장 꺼지라며 등에 붙인 번호를 내놓으라고 소리 질렀다. 주변 도움으로 겨우 그 자리를 피하고서는 4시간20분의 기록으로 마라톤을 완주했다. 그렇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실격 처리되었다. 지난 4월17일, 이제 70세가 된 스위처가 50년 전과 똑같은 등번호 261번을 달고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했다. 4시간44분의 기록으로 이번에도 완주했고, 실격 처리 같은 일은 없었다. 보스턴 마라톤 측은 스위처의 번호 261번을 영구결번하기로 했다. 스위처의 도전이 있었기에 여성 마라톤은 1984년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올해 보스턴 마라톤의 참가 선수 중 여성은 46%였다.

여성에겐 마라톤처럼 경찰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50년 전의 카트린 스위처처럼 여성들은 여전히 금지된 것을 깨기 위해 뛰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법률로 정해둔 일이 사영기업도 아닌, 법집행을 하는 국가기관에서까지 외면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찰청의 이런 반모성적 태도가 바로 개혁대상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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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폭염이다. 유월 내내 더웠다. 아직 석 달이나 남은 여름을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다. 주로 실내 공간에 머무는데도 힘든데, 이 폭염에 쉼 없이 뛰어다녀야 하는 택배노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다. 먹고살기 위해서라지만 위태로워 보인다. 두렵다.

택배노동자들의 하루는 길다. 아침 7시부터 분류작업을 시작한다. 분류는 택배회사가 해야 하지만, 당신들이 배송할 화물은 직접 골라가라는 거다. 분류에만 보통 대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대가 없는 공짜 노동이다. 분류작업을 하는 터미널은 허허벌판인 경우가 많아 더위나 추위를 피할 수 없다. 냉방 또는 난방 장치는 전혀 없고, 휴게실은 물론 화장실마저 없는 곳도 많다. 점심 무렵 분류작업이 끝나면 배송을 나가야 하는데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려 점심을 거르기 일쑤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도시 지역은 어디든 주차가 만만치 않다. 택배노동자를 위해 주차장을 비워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겨우 주차를 마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매일처럼 보는 익숙한 풍경이다. 차를 세우자마자 몇 개씩 화물을 들고 뛰어야 한다. 이 폭염에도 날듯 뛰어야 하니, 두세 군데만 돌아도 땀에 흠뻑 젖는다.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그나마 잠깐 숨이라도 돌리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화물을 들고 계단을 뛰어 오르내려야 한다. 차를 세우고 짐을 들고 뛰는 일은 내내 반복된다. 폭염에도 뛰어야 하는 건 시간 때문이다. 얼른 배송을 마치고, 배달할 물건을 수거하는 작업을 오후 5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만 5시 이전에 배송이 끝나는 일은 별로 없다. 아침 7시부터 분류작업, 낮 12시부터 배송작업, 오후 5시에는 수거작업, 저녁 7시쯤부터는 미처 마치지 못한 배송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겨우 밤 9시, 10시가 되어야 일을 마칠 수 있다. 밤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면, 종일 주렸던 배를 채우기 위해 폭식을 하곤, 그대로 쓰러지듯 자야 한다.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택배화물 배송비는 대개 3000원쯤이다. 이 중 택배노동자가 가져가는 배송 수수료는 건당 800원 정도, 2200원은 택배회사 몫이다. 날듯 뛰면서, 때론 쿠팡의 광고처럼 로켓을 타고 다니면 하루에 250개쯤의 화물을 배송할 수 있다. 점심과 저녁을 거르고 15시간을 꼬박 일해야 감당할 수 있는 물량이다. 그러면 하루에 20만원쯤 벌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오래 할 일은 아니지만 젊은 몸 하나 믿고 뛰어들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건당 수수료가 800원이라고 그게 전부 택배노동자의 몫은 아니다. 여기서 부가세 10%와 대리점 수수료 10%씩을 떼어 낸다. 800원은 간단하게 640원으로 줄어든다. 이게 끝이 아니다. 차량 구입비와 기름값, 자동차보험료, 정비 등 유지비는 모두 택배노동자 부담이다.

택배회사 로고가 찍힌 유니폼도 자기 돈으로 사야 한다. 강매다. 차량도 회사 요구대로 전면 도색을 해야 하는데, 이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언제까지 그 회사와 일할지 모를 일인데, 원하는 대로 차량을 도색하지 않으면 일감조차 구할 수 없다. 전면 도색을 하면 중고차로 내다팔 때도 손해를 보지만, 그런 불이익도 모두 택배노동자가 감당해야 한다. 개인 소유 차량에 기업의 광고 문구를 넣는다면 도색 비용은 물론, 광고비까지 기업이 내야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택배산업은 매년 10%씩 급성장할 정도로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CJ와 대한통운이 합병했으며, 롯데는 현대를 인수하는 등 재벌 대기업들이 속속 택배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화물 수수료는 점점 내려가고 있다. 가격경쟁력만 강조하며 회사의 부담을 약자인 택배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킨 까닭이다.

택배노동자들은 CJ, 롯데, 한진 같은 대기업의 화물을 그 대기업의 로고가 찍힌 화물차로 운송하고, 대기업의 지침에 따라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동시에 수행하지만, 그 대기업의 노동자는 아니다.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실질적으로는 고용·피고용 관계이지만, 편법적으로 고용에서의 부담을 피하려 각자의 사업체가 계약을 맺는 거다. 노동자가 아니어서 겪는 어려움은 너무 많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어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

위험한 노동만이 아니다. 화물을 배송하다 파손이 생겨도 택배노동자가 책임져야 한다. 드물지 않게 만나는 심술궂은 고객을 응대하는 일도, 택배노동자의 몫이다. 담당구역을 넘어 엉뚱한 곳으로 화물을 가져 오라는 고객은 너무 흔하고, 욕설을 퍼붓는 고객도 자주 만나야 한다. 배송해준 컴퓨터나 선풍기, 심지어 세탁기 등을 설치해놓고 가라는 고객도 가끔 만나야 한다. 숱한 고초를 겪고 고역을 반복하지만, 택배회사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별도의 비용도 쓰지 않고 그저 길목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엄청난 수익을 얻는다.

택배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올해 초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택배노동자들이 기댈 언덕이 이제야 마련된 거다. 그렇지만, CJ대한통운은 노조에 가입하거나 창립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보복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에겐 일감을 주지 말라고 대리점을 압박하는 거다.

당연히 택배노동자도 사람이고 노동자다. 부당한 착취를 당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장시간 고된 노동에 시달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자기 노동에 대해서는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누구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고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다. 눈 밝은 공직자가 있다면, 오늘 오후라도 잠깐 걸음을 멈추고 택배노동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길 바란다. 택배노동자가 뛰어다니는 그 속도만큼 대한민국은 망가져 있고, 그만큼 우리는 아귀지옥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우리가 사는 곳이 공동체가 되려면, 택배노동자들의 달리기부터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럴 법률적 권한과 능력이 공직자들에게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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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문재인 후보의 공공 부문 일자리 81만개 공약은 대선 내내 시빗거리였다. 몇몇 후보는 세금으로 일자리 만드는 건 누가 못하냐고 힐난하기도 했다. 선의로 해석한다면, 공공 부문보다는 민간 부문 일자리가 훨씬 많으니 일자리에 관한 한 국가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일 게다. 그렇다고 쳐도, 국가의 역할이 시장에 그냥 넘겨도 좋을 만큼 작은 것은 결코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 공공 부문 일자리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복지국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고,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쉬운 일이라 트집을 잡았지만, 실제로 ‘세금으로 만든 일자리’는 별로 없었다.

일자리는 아주 시급한 인권이다. 왕조시대 정책담당자들조차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以食爲天)”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정치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그래서 추가경정예산에 공무원 1만2000명 신규 채용 예산이 포함되어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늘어나는 1만2000명은 소방직,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 경찰관, 군무원·부사관 등 각각 1500명씩 6000명에다, 교사 3000명, 근로감독관 등 일반 행정직 3000명이라고 한다. 소방이야 법정 기준만으로도 1만9000명 가까운 인력이 부족하니 말할 것도 없고, 격무에 시달리는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 증원도 꼭 필요하다.

그런데 경찰관 증원은 좀체 이해되지 않는다. 인력이 당장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무경찰 폐지에 따른 증원 필요분을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앞으로 필요할지 모르니 미리 대비한다는 취지인 것 같다. 하지만, 의무경찰 폐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폐지를 위한 기본 계획도 마련되지 않았다. 정원 자체가 동결되거나, 소방의 경우처럼 법정 정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력 때문에 다른 분야의 공무원들이 격무에 시달릴 때, 경찰은 유례없는 파격적인 인력 증원 혜택을 받았다. 박근혜 정권 4년 동안에만 경찰관 1만2000명이 증원되었다. 민선 21년 동안 전국의 지방정부 공무원 증원은 2만6000명에 불과했다. 지난 정권 때 잔뜩 늘어났는데, 문재인 정부마저 경찰 인력 증원을 서두를 일은 전혀 없다.

지금 경찰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인력이 아니라, 인력을 재배치하는 일이다. 지난해 11월 나온 ‘2015년 경찰 통계연보’에 따르면, 경찰이 해야 할 일은 대체로 줄어들었다. 특히 시민의 안전과 직결된 살인, 강도, 절도, 폭력 등의 범죄는 발생 자체가 부쩍 줄었다.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도 엄청 줄었다. 일은 줄었는데 인력은 늘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경찰은 인력 운용과 관련해서는 최소한의 합리성도 갖추지 못한 이상한 조직이다.

경찰에는 시민의 안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인력이 잔뜩 배치되어 있다. 이를테면 경무, 정보, 보안, 경비 등의 분야가 그렇다. 경무는 경찰에 필요한 일을 하는 부서라기보다는 경찰청장, 지방청장, 서장 등 총경 이상 고위직 607명을 보좌하는 일을 맡고 있다. 이런 일에 배치된 인력이 3235명이나 된다.

3463명이 배치된 정보도 한심하다. 경찰의 정보부서는 ‘범죄 정보’는 아예 다루지도 않는다. 하는 일은 오로지 민심 동향 파악이 전부다. 권위주의 시대처럼 대통령 1인만을 위한 민심 동향 파악이 여태 계속되고 있는 거다. 대통령은 경찰의 정보보고 없이도, 언론과 인터넷, 정부 부처와 비서진의 보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민심 동향을 파악할 수 있고, 국정의 나아갈 바도 가늠할 수 있다. 원래 그렇게 해왔으니, 새삼 경찰의 정보보고에 기댈 일은 없다. 대통령이 가끔 볼까 말까 한 보고서 작성을 위해 3000명이 넘는 정보 경찰을 운용할 까닭이 없다.

2059명이 배치된 보안 분야는 시대착오적이다. 하는 일이 너무 없어서 탈북자 지원을 자임하며 새로운 출구를 찾는 수준이다. 진짜로 탈북자를 도와야 한다면, 그건 경찰 보안부서가 아니라, 통일부나 지방정부의 몫이어야 한다. 경찰서 보안과장은 정년퇴임 직전의 간부들이 맡는다. 할 일이 없으니 퇴임할 때까지 푹 쉬라는 배려다. 군대식 편제로 짜인 경비 경찰(1만775명)도 마찬가지다.

경찰 인력 중에서 지구대, 파출소 등의 지역경찰 인력이 4만6533명으로 가장 많은 것은 반가운 일이나, 일선 지역 경찰관들은 여전히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지구대장과 지구대 부장 등 관리 인력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실제로 일할 사람이 적은 탓도 있고, 경찰이 발표하는 인력 현황을 그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종 지원이나 출장 등의 방식으로 지구대, 파출소 소속의 경찰관들을 경찰서 등에 데려다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경무, 정보, 보안 분야의 인력은 통계보다 훨씬 많고, 지구대 인력은 훨씬 적을 거다. 한쪽에선 인력을 빼가고, 여러 가지 꼼수로 인력을 부풀리기도 한다. 질병이나 육아 등의 이유로 휴직하면, 해당 경찰관을 지구대, 파출소로 발령을 내는 경우가 많다. 실제 근무는 하지 않지만, 일선 경찰 인력을 조금이라도 많게 보이려는 거다. 시민들에겐 지구대 등 일선 지역경찰 활동 인력이 중요하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보안과장의 경우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는 고위직도 너무 많다.

그러니,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판을 다시 짜야 한다. 인력이 부족해 격무에 시달린다느니, 경찰관 1인당 담당 인구가 몇 명이라는 등의 엄살에 속지 말고, 전면적인 인력 재배치부터 해야 한다. 통계와 다른 실태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고, 이를 바탕으로 경찰 고위직만을 위한 인력구조가 아닌, 시민을 위한, 또한 일선 경찰관들을 위한 인력구조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경무, 정보, 보안, 경비 분야, 그리고 내근 인력만 합리적으로 조정해도 꽤 많은 경찰관을 새로 뽑는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건 물론 경찰에 맡길 일은 아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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