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에 해당되는 글 181건

  1. 2017.09.19 세잎종덩굴
  2. 2017.09.12 미역취
  3. 2017.09.05 산비장이
  4. 2017.08.29 닻꽃
  5. 2017.08.22 난쟁이바위솔
  6. 2017.08.16 [이굴기의 꽃산 꽃글]나무수국
  7. 2017.08.08 작살나무
  8. 2017.07.25 자작나무
  9. 2017.07.18 실꽃풀
  10. 2017.07.14 부처꽃
  11. 2017.07.04 백리향
  12. 2017.06.27 벌깨풀
  13. 2017.06.20 돌가시나무
  14. 2017.06.14
  15. 2017.06.07 나도제비난
  16. 2017.05.30 매화말발도리
  17. 2017.05.23 빌레나무
  18. 2017.05.16 새우난초
  19. 2017.05.10 야광나무
  20. 2017.05.02 올괴불나무

바닥의 돌이 콧등을 칠 만큼 가파른 길이다. 고개를 숙이고 오르고 오른 끝에 겨우 서북능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조금 한숨을 돌리며 둘러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나무 이름을 불러주었다. 길은 쉬는 법이 없다. 신발끈을 조이고 다시 출발을 한다. 실새풀, 조릿대 등등이 만들어주는 길은 그 어떤 숙연함이 고여 있는 깊숙한 웅덩이 같다. 바람이 몰려가고 나뭇잎의 그림자가 빼곡하게 바닥에 일렁인다. 흑백의 그림인데 그 어떤 총천연색보다도 더 생생하고 환한 세계. 나는 못 보는 나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얼룩처럼 내려앉았겠다.

막걸리라도 한 사발 마신 듯 초록에 취해 나아갈 때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경기민요 ‘창부타령’의 한 급소. “우연히 길을 갈 적에 이상한 새가 울음을 운다. 무슨 새가 울랴마는….” 꼭 이희완 명창의 소리로 들어야 제맛이 나는 이 대목을 읊조리면 정말 내가 이상한 길로 순간이동한 것 같고 무슨 기운에 휩싸이는 것 같다. 흥에 겨워 팔을 가지처럼 뻗으며 한 바퀴 돈다고 갑자기 새가 찾아와서 울 일은 없겠다. 하지만 새벽 3시에라야 건질 수 있는 문장이 있듯 설악산의 높은 길모퉁이에 당도해야만 만날 수 있는 기운이 있어 겨드랑이까지 들어찼다.

정밀한 고독과 정교한 산색이 궁합을 맞추려는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기분을 알아차려 설악이 산새라도 보냈나 싶었는데 인기척이었다. 오른쪽은 대청봉으로 왼편은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산중의 소박한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쉬고 있다. 바로 그 삼거리길의 입구에 세잎종덩굴이 앉아 있다. 종처럼 생긴 짙은 자줏빛의 꽃은 이미 지고 열매가 도드라진다. 머리를 풀어헤친 듯한 열매 모양이 퍼뜩 할미꽃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확인해보니 둘 다 미나리아재비과의 집안들이다. 세잎종덩굴은 이름 그대로 덩굴식물이라 다른 의지처에 기대거나 서로 얽히고설키며 한 무더기로 자라는 나무이다. 열매에서 할미꽃을 보아서 그랬나. 멀어지면서 뒤돌아보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할머니 모습도 얼핏 보이는 듯한 세잎종덩굴. 미나리아재비과의 낙엽 덩굴성 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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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주흘산의 한 옆구리인 부봉(釜峰)은 험한 암벽산이었다. 산세가 엎어놓은 솥을 닮아서 저런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내 젊은 날의 퇴적지인 부산(釜山)에 기대어 왠지 쉬운 산행일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보통 악산이 아니어서 유격을 방불케 하는 각종 몸동작을 요구하였다. 늦은 점심을 위해 찾아든 수안보의 한 식당은 산나물을 잘 차려낸다는 곳이었다.

간판에서부터 구수한 냄새가 폴폴 나는 식당은 특이한 게 하나 있었다. 참나물, 삼지구엽초, 고사리, 취나물, 쐐똥, 어느리…. 정갈하게 담아낸 접시마다 나물의 이름이 일일이 적혀 있지 않겠는가. 많은 식객들의 젓가락이 거쳐 간 접시에 박힌 나물 이름들. 솥을 거쳐 나와 모양을 잃은 나물은 그게 다 그것 같지만 이렇게 이름을 알고 먹는 나물은 더 맛이 있었다. 한 방울의 맛도 새지 않고 고스란히 입안으로 들어와 혓바닥이 장구를 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이런 뜻밖의 맛을 즐길 수 있느니, 이처럼 추가 주문을 고급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여기 미역취 좀 더 주시겠습니까?

생물다양성교육센터에서 이끄는 9월 탐사지는 설악산이었다. 설악의 기운으로 번들거리는 산은 가을 정취가 이미 물씬했다. 성질 급한 어느 나무는 단풍의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돌아드는 바위마다 바위떡풀이 벌떡벌떡 일어나 붙어 있고, 금강초롱꽃도 나의 언어를 벗어난 경지의 색감으로 환히 피어 있다. 그리고 어느 한 모퉁이를 돌았더니 수줍게 맞이하는 노란 꽃, 미역취였다.

밥상에 둘러앉듯 몇 사람이 둥그렇게 서서 미역취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하였다. 참 단아하군요. 청초하기가 이를 데 없어요. 나물을 무치면 미역 냄새가 난다고 합디다. 잎을 삶으면 미역처럼 미끌미끌하다고 해요. 먹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마무리는 깔끔하게 했다. 오늘 아침에 막 피어난 것 같군요. 일행이 떠나고 혼자 남아 사진을 몇 방 더 찍었다. 나로선 미역취 앞에서 미역취 나물 생각이 아니 날 도리가 없었다. 올봄 내가 먹은 미역취의 손녀뻘쯤 되는 설악산의 미역취 앞에서 속되게 입맛을 다시 한번 다시면서. 미역취,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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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눈 쌓인 태백산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청량리에서 출발해 용문, 예미(禮美), 고한을 지나 태백역에 내렸다. 플랫폼의 안내판을 보니 다음역이 문곡(文曲)이었다. 멀어져가는 기차를 보는데 예와 악을 중시한 공자님 생각이 났다. 지난주 정선(旌善)의 여량에서 일박하고 반론산에 올랐다. 정선의 문자적인 뜻은 ‘선행을 드러내어 칭찬함’이고 반론은 ‘半論’이다. 생소하지만 궁리가 깊은 듯한 산 이름을 입에 굴리며 오르는데 논어 생각이 아니 날 수가 없었다.

이 계절은 지금 어디를 통과하는 중인가. 어제 들은 매미소리가 오늘은 또 확연히 다르다. 매미는 꼬리를 씰룩이던 힘도 잃은 채 겨우 가슴 근처의 발음기만으로 희미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닳아지는 매미소리를 듣는데 최근 때맞추어 읽은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 기언야선.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고, 사람은 죽음이 가까우면 그 말이 선해진다).

정상 부근에 천연기념물인 철쭉을 키우는 반륜산은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의 산행처였다. 등산로에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이 닿은 흔적이 별로 없었다. 좌우의 껑충한 나무와 풀들이 외려 우리를 구경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희미하게 끊어지기도 하는 길을 오르다가 양지바른 무덤에 읍을 하고 그 앞에 앉았다. 햇살이 기탄없이 찾아오는 무덤가의 식생은 언제나 풍요롭다. 고개를 숙이고 오래 쳐다보면 와글와글한 햇빛 사이로 주로 벼과와 사초과의 풀들이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다. 곧 벌초를 하게 되면 본치가 나게끔 어깨보다 훌쩍 웃자란 풀들. 그중에 무덤을 지키는 수문장인 양 확실하게 꼿꼿한 산비장이가 있다. 기다란 대궁 위에 짙은 보라색 꽃을 둥근 공처럼 얹어두었다. 엉겅퀴와 달리 가시가 하나도 없어 부드러운 느낌이 주르르 흘러넘친다.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매미소리 들으며, 순한 산비장이 바라보며 반론산의 무덤가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가을이라 소리도 순해지는구나, 이순(耳順)이 가까이에 왔구나. 산비장이,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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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 무거운 이불을 걷어차기가 몹시 힘들었다. 철석같은 게으름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를 수십 분, 마침내 떼놓은 한 걸음이 나로서는 거대한 도약이었다. 첫발이 힘들었지만 산 입구에 서니 여기가 오늘의 자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피둥피둥한 몸뚱이를 급한 경사에 현관(懸棺)처럼 비끄러매는 것이 언젠가 저 나무 아래로 가야 하는 예행연습처럼 가끔은 필요한 법. 이내 몸은 초록의 바다와 쉽게 호흡을 맞추었다.

가볍게 산에 한 번 다녀온 것을 두고 말머리가 괜히 구불구불한 능선처럼 복잡해졌다. 오늘은 조금은 특별한 날이다. 멸종위기종인 닻꽃의 식생을 확인하는 조사에 합류했다. 우리나라에 자생지가 몇 안 되는 닻꽃. 생긴 모양이 실제로 닻을 그대로 닮아 그 이름을 얻은 꽃이다. 캄차카나 사할린 등의 추운 지역에 가면 발에 차이듯 많이 볼 수 있지만 남한에서는 몇몇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꽃이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우뚝 솟은 화악산. 이름에서부터 꽃냄새가 물씬한 화악의 능선에는 하늘과 땅의 접면에 닻을 내린 어선처럼 닻꽃이 정박해 있었다. 북쪽에서 따뜻한 곳을 찾아온 내력답게 주로 햇살이 푸짐하게 내리꽂히는 경사면이었다. 꼿꼿한 줄기에 조금은 복잡한 구조이다.

잎은 두 장씩 마주나기로 줄기에 드문드문 달리고, 그 겨드랑에서 꽃줄기가 가냘프게 뻗었다. 그 끝에 두 장의 포엽과 함께 연한 노란색 꽃이 달려 있다.

정상에 도착하니 마음은 더욱 나부낀다. 이 높이에 서고 보면 닻을 거두고 항구를 떠나는 배처럼 거칠 것이 없어진다. 땀을 훔치며 깎여나간 몸을 보충하려고 김밥을 우물거리는 동안 한 동무는 점심도 잊은 채 구름을 배경으로 사진에 열중이다. 이윽고 흐뭇한 웃음과 함께 일어나 멀리 군부대의 철탑을 바라보며 즉석에서 한마디를 읊는다.

“먼 옛날 빙하기 배 한 척 내려와 화악산에 닻을 내렸네. 멀리…… 삿대가 없어 떠나지 못하는구나.” 아쉬워라, 중간 대목은 바람한테 빼앗겼다. 지금 닻꽃은 내 꽃동무의 잠자고 있던 시심(詩心)에 날카로운 닻을 명중시킨 셈인가? 닻꽃, 용담과의 한두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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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으로 자보는 성주읍에서의 하룻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무리는 참외로 했다. 나이가 지긋한 두 아주머니가 끓여내는 시래깃국으로 아침을 때우는데 꽃동무가 가야산 쪽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가 왜 백운동이겠어요?

가야산 백운동탐방센터를 지나 만물상 능선을 향하여 올랐다. 과연 흰구름과 먹구름이 떼지어 몰려 있다. 오후 3시부터 뿌린다는 비도 저 너머에 대기하고 있으려나. 돌아드는 길목마다 툭 튀어나와 반겨주는 꽃며느리밥풀. 가을이 오기까지 내 허전한 눈길을 받아주는 고마운 꽃이다. 어느덧 만물상 능선이다. 시야가 툭 트이자마자 나의 시선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아침 시래깃국에서 물꼬가 트인 어머니 생각도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멀리 내 고향 거창과 잇닿은 저 아래의 해인사, 그 한편에 백련암, 그 뒤의 어느 큰 바위는 어머니와 함께 일군 내 소싯적 추억의 적석총!

눅눅한 날씨에 눌린 탓일까. 오늘따라 산으로 오를수록 자꾸 납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 능선마다 부복하고 있는 나무들도 모두 안개 사이를 서성이는 인물들의 형상이다. 가까운 바위에는 누군가 쌓은 돌담불. 그중의 하나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다. 이 골짜기를 지나가는 바람이 수행자의 모습을 조각하는 중이다. 가야산이기에 가능한 이야기겠다.

마침내 상아덤~서성재를 지나 정상에 도착했다. 어깨를 겨루며 서 있는 칠불봉과 상왕봉 사이의 꽃길은 그야말로 공중정원이다. 자주꿩의다리, 네잎쓴풀, 가야산잔대, 산오이풀 등이 구름의 딸이고 아들인 듯 사이좋게 어우러졌다. 손바닥만 한 것에서부터 정강이 높이의 야생화를 보느라 꽃동무들은 칠불암 주위에 여덟 번째 바위처럼 흩어졌다. 나도 따라 쪼그리고 엎드리는데 특히 눈을 호리는 건 바위에 따개비처럼 철석같이 붙어 있는 난쟁이바위솔이었다. 이슬보다 더 부드러운 안개를 먹고 자란다는 풀이다. 통통한 다육질의 잎과 줄기 위에 손톱처럼 얹혀 있는 꽃들. 오래 바라보면 손끝은 물론 눈알까지 간지러워지는 난쟁이바위솔. 바라볼수록 어쩐지 나를 더욱 납작하게 만드는 난쟁이바위솔, 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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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에서 이끄는 사할린 및 쿠릴 열도 식물 탐사에 참가하였다. 지도에서 한반도와 한 손바닥에 덮이는 곳이긴 해도 좀체 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어깨를 찌르는 조릿대 숲을 헤치며 가는 동안 처음 보는 식물도 많았지만 꿀풀, 금방망이, 해당화 등의 익숙한 것들도 만났다. 헛꽃이 발달한 나무수국은 특히나 반가웠다. 곰이 출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인 나무들의 날씬한 자세를 보는데 이런저런 궁리가 일어났다.

예전 산에 막 다니던 시절, 정상에 서면 조금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산해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걸었던 길을 우러르면 괜히 어깨가 들썩거렸다. 거기까지만 했더라도 마음은 흔감했을 터이다. 산은 사람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같다. 산에는 우리가 산이라고 명명한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의 몸에 학력과 이력을 비롯해 게으름, 시기, 질투, 불안이 들끓고 있듯 산에는 많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뒹굴고 있었다. 낙엽과 열매, 벌레와 곤충, 바위와 흙. 그중에서 나무가 꽃과 함께 나를 문득 찾아왔다.

나무 이름 하나 아는 게 대수인가. 이름은 나무의 겉을 대표할 뿐 정작 거룩한 세계는 나무 안에 있다. 거죽을 찢고 나오는 꽃, 그 꽃 안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수술과 암술, 바람에 흩날리는 미세한 꽃가루들, 쟁반 같은 꽃잎과 접시 같은 꽃받침, 동물들의 가죽이나 사타구니에 은밀하게 자라는 것과 흡사한 털과 가시. 예전에는 오밀조밀한 식물의 기관을 보고서도 심드렁했는데 식물을 가까이 하면서 그것들이 그것들로 한 세계를 우아하게 이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꼭대기가 세상의 넓이를 가졌다면 한 그루의 나무에는 세계의 깊이가 응축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귀국하고 출근하면서 꽃들의 근황이 궁금해서 화단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활짝 핀 나무수국이 새삼 눈을 찔러왔다. 이 지구는 물의 행성이니 섬뿐만 아니라 실은 대륙도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겠다. 사할린에서 자생하는 나무수국과 내 화단에서 자라는 원예종의 나무수국. 이러니 나는 지금 식물의 품 안을 헤엄치는 중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나무수국, 수국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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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녹색의 터널 같은 임도를 걸었다. 억수같이 오는 비가 아니라면 산에서 맞는 이 정도의 비는 차라리 달콤하다. 함께 가는 꽃동무들과 식물 공부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나무 이름 하나 안다고 그 나무를 다 아는 건 아닐 테지만 나무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이름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름을 불러주어야 겨우 나무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것.

길이 오두막 지붕처럼 완만하게 꼬부라지는 곳에서였다. 영험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숲속으로부터 안개를 퍼나르는 쇠스랑 같은 가지가 길게 뻗은 나무 앞에 섰다. 이 나무는요? 자주 본 것 같은데, 나는 또 이 고유명사 앞에서 그만 콱 막히고 말았다.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머리가 도와주질 아니했다. 꽃동무가 슬며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자고 했다. 은근히 힘을 주면서 이 나무를 모르면 작살납니다, 하는 농담을 던졌다. 그제야 나의 입에서 아, 작살나무! 하는 답을 조립해 낼 수 있었다.

작살나무는 비교적 흔한 나무이다. 줄기는 정확하게 대칭이고, 잎은 정교하게 마주난다. 꽃보다는 열매가 퍽 인상적이다.

장난감 총알 같은 보랏빛 열매가 다닥다닥 맺힌다. 잔물결이 이는 잎사귀, 꽃잎보다 긴 수술의 작살나무를 힘껏 기억하며 오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오래전 조삼모사(朝三募四)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작성했었다.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마, 하니/원숭이들이 부당하다며 항의하기에/그러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는 세 개를 주마, 하자/원숭이들이 좋다고 난리 끝에 손뼉까지 동원한다/그걸 본 그 말 방금 끝낸 사람은 돌아서서/등신 같은 놈들이라며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가락질한다/어쨌거나 나는/손가락질보다는/손뼉 치는 일에/내 손을 사용하고 싶다.”

항상 나를 대표해서 세상과 접촉하는 손이다. 이것이 다섯 가락으로 나뉘지 않았더라면 내 어찌 세상의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그리고 쓴맛을 만끽할 수 있으리오. 좌우대칭의 가지에서 뻗어나간 손바닥 같은 잎사귀에 그런 내 궁리를 얹어두었다. 작살나무, 마편초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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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경향신문의 한 지면에서 세 장의 사진을 보았다. 한 면을 통째로 구성한 ‘류샤오보의 동지’인 후자의 인터뷰. 그중의 하나는 인터뷰이가 사진을 들고 있고 이런 캡션이 있다. “사하로프상 수상자인 중국의 인권운동가 후자가 류샤오보 생전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속에서 류샤오보와 그의 아내 류샤는 웃고는 있지만 어쩐지 웃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빡빡머리의 부부 모습과 함께 이런 메시지가 있다. 니지도타문마(知道他們). 당신은 이들을 아시나요?

또 다른 사진을 본다. 남편은 떠나고 아내만 남았다. “타계 이틀 만에 화장…참담한 이별. 중국의 인권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류샤오보의 유골을 담은 단지가 지난 15일 랴오닝성 다롄 앞바다의 바닷속에 내려지는 모습을 아내 류샤가 지켜보고 있다.” 류샤오보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길림성 장춘에서 태어나 선양에서 죽어 다롄에 묻히다. 세계지도에서 보면 모두 백두산의 인근 지역들이다.

나머지 한 장의 사진이다. 류샤오보와 류샤가 행복했던 한때의 모습이다. 활짝 웃는 두 사람 뒤로 배경이 되어주는 울창한 나무들. 얼핏 보기에 자작나무 같다. 류샤오보의 고향은 길림성이다. 백두산 갈 때 길림성의 한 자락을 통과한 적이 있다. 북방계의 자욱한 삼림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류샤오보 부부를 흐뭇하게 호위하고 있는 나무들. 그들이 고향을 방문해서 만난 나무일까. 이 나무를 보고서 고향을 떠올리며 찍은 사진일까.

우리나라에는 자생하는 건 없지만 식재한 자작나무는 제법 많다. 우리 동네의 손바닥만 한 정원에도 하얀 붕대를 감은 듯한 자작나무 세 그루가 기품 있게 자라고 있다.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든 인터뷰의 제목은 “그가 남긴 민주화 열망, 중국인 일깨워 세계와 함께할 것”이다. 중국은 큰 나라라고 하지만 마냥 큰 나라는 아닌 것 같다. “중국의 근본적 인권을 위한 그의 오랜 비폭력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는 노벨상 선정 이유도 곱씹어본다. 산책하며 자작나무를 볼 때면 니지도타문마를 상기해야겠다. 자작나무, 자작나무과의 낙엽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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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나무수국  (0) 2017.08.16
작살나무  (0) 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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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꽃풀  (0) 2017.07.18
부처꽃  (0) 2017.07.14
백리향  (0) 20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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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따라 떠올랐다가 빗방울과 함께 떨어지고 보니 제주도였다. 공항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직접 몸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높은 곳에 올라 구름의 근처를 기웃거리고 하늘의 근황을 곁눈질한 셈이었다.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여기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저기에서는 햇빛이 말짱하다.

나는 비가 늘 좋다. 하늘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물질이 아닌가. 공중과 제대로 사귀자면 비를 피하는 게 능사만이 아닐 것이다. 도착하고 이튿날, 한라산 둘레길을 쏘다니는 동안에도 하늘엔 비를 짊어진 구름이 낮게 깔렸다. 산에서 맞는 비는 충분히 색다르다. 제대로 맡은 적이야 없지만 어쩐지,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비, 백석)라고 할 때의 그 냄새가 바로 이 냄새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느 너덜겅에 이르니 한라산 특유의 돌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때 뜨겁게 들끓던 용암이 차분해지다가 오늘은 또 오늘의 빗물에 식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얼크러진 모습을 보자니 엎드리고 있다가 졸지에 화석이 된 생명들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아주 늙은 물개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면서 어이쿠, 자네 이제사 오는가, 인간의 말을 구사하며 악수를 청할 듯한 분위기.

야생화는 늘 피어 있는 게 아니다. 꽃도 나처럼 제게 허락된 시간만큼을 겨우 잘라먹을 수밖에 없을 터이다. 7월의 제주에서 염두에 둔 몇몇 꽃은 함부로 기회를 주지 않았다. 꼭 그 꽃을 보자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 꽃은 무시로 눈으로 들어왔다. 실꽃풀이다. 심심한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묘한 느낌을 풍기는 꽃이다. 있을 듯 없을 듯한 물큰한 느낌이 이름에서부터 전해졌다. 지상에 떨어진 뒤 세상구경 떠나는 빗방울처럼 똘방똘방한 사연을 간직하는 꽃이 아닐까, 어림짐작하면서 실물을 보았다. 과연 하늘에서 떨어진 비의 마지막 한 토막인 듯 줄기가 바위틈에 꼿꼿하게 박혀 있고 꽃은 가지런히 꽃밥을 층층이 쌓으며 공중으로 올라간다. 빗물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있고 비에는 많은 사연이 들어 있는 법이다. 비와 어우러져 실, 꽃, 풀이라니! 실꽃풀,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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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볼 때, 철부지 어린 심보에 애꿎게 당한 게 있다. 매미와 잠자리이다. 영문 모르고 나온 세상. 매미는 감나무에, 잠자리는 빨랫줄에 앉았다가 내 손에 심심찮게 걸려들었다. 시골을 떠나고 더 이상 곤충을 잡을 일은 없었다. 그만큼 곤충과 접촉할 일이 없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몇 줄의 식견이나마 보충한 덕분도 있겠다. 금강경을 귀동냥하고 우편엽서에 반야심경을 적어 띄우기도 한 원력이 작용한 때문이려나.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나도 좀 순해졌다. 이젠 취미도 바뀌어간다. 잡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모처럼 제주도에 들러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한라수목원에 갔다. 지금은 꽃은 거의 없는 계절이다. 산수국이 저 혼자 화려하게 피었을 뿐, 대부분의 나무들이 열매를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중이었다. 멀리 꼿꼿한 꽃대 끝에 붉게 어우러진 무리가 있어 심심한 내 눈길을 일거에 빼앗아갔다.

너무 작아서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손바닥만 한 인공의 호수. 그래도 물이 가득하고 부들, 연꽃을 비롯한 여러 수중 식물의 생태계가 볼만하게 어우러졌다. 태풍 소식으로 어지러운 날씨에 내 눈을 호린 건 붉은 부처꽃이었다. 오늘 처음 보는 건 아니로되 이름과 더불어 진흙 같은 내 마음의 저 바닥을 두드리는 꽃이 아닐 수 없었다.

부처꽃. 저 돌올한 꽃대 끝에 잠자리 한 마리가 앉으면 풍경을 그럴싸하게 완성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공중에는 오락가락하는 빗방울뿐이다. 좀 더 가까이 찍고 싶어서 뾰족한 돌을 딛고 호수 아래로 내려서는데, 어라, 서너 뼘 앞에 큰 개구리가 장좌불와를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웅크리고 있지 않겠는가. 개구리는 수행에 관한 한 일가를 이룬 자세였다. 나 따위의 이물질이 갑자기 뛰어들어도 미동조차 아니했다. 좁은 연못에서도 시선은 무한대를 향하고 있었다. 오래 지켜보았지만 눈조차 깜빡이지 아니하는 개구리 앞에서 나의 동작들이 무의미해지려는 순간이었다. 글쎄, 움직이는 것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 앞에서 수행을? 발은 진흙에 꽂아두고 바람에 흔들리는 부처꽃, 부처꽃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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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띄엄띄엄 산다. 코끝에 걸리는 가파른 비탈길을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오를 때 작년 겨울 눈밭에 찍혔던 내 발자국을 떠올리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억에도 없는 어느 때부터 하여간 숨을 팔딱팔딱 쉬면서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단 한순간의 정지도 분명 없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형식은 저 발자국처럼 그렇게 띄엄띄엄 살아가는 것. 지도에 있는 곳을 다 못 가보고, 사전에 있는 단어를 다 못 써본다. 놓치고 가는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갈림길에선 나머지 길을 버리고 나아가는 중이다. 다시 한번 궁리해 본다. 태중에서 무덤까지 연속적인 흐름으로 살고 있지만 이 순간은 띄엄띄엄 살아가는 것. 그렇다면 모든 물질이 파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입자의 성질을 가진다는 이중성은 바로 나의 몸에서도 이렇게 체현되고 있는 게 아닐까. 고매한 물리학자들에겐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보일 그런 상상도 해 보다가 어느 큰 바위 앞에 이르렀다.

마음을 놓을 데가 있어 둘러보니 삼척의 석병산 정상이었다. 곳곳마다 면벽한 수행승처럼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바위틈에 핀 백리향을 찍는 중이다. 멀리서 보면 바위는 단순한 물체가 아니다. 사람인 내 눈엔 주로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당장 눈앞에 어렴풋이 짐작되는 건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백리향의 꽃을 물고 빙그레 웃고 있는 부처님의 상호!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그 이름을 얻은 백리향은 높은 산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가볍고 단출하게 무리지어 있기에 그저 잘 번지는 풀의 한 종류이겠거니 했는데 엄연한 나무였다. 향기는 꽃에서만 나는 게 아니라 나무 전체에서 난다. 그 향기를 전하려고 그런가. 작지만 가지는 많이 갈라지고 최선을 다해 옆으로 기는 나무들. 이름이 백리라고 어디 백리만 가랴. 코끝에 대면 진한 향기가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바람을 따라가는 향기의 입자는 바람이 그치는 곳까지 퍼지겠지만, 머리로 들어와 나의 기억 속에서 향긋하게 진동하는 백리향은 어디까지 갈까. 백리향, 꿀풀과의 낙엽소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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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뒷산만 다니다가 먼 산을 다니기 시작한 게 마흔 무렵부터이다. 그 이후 산이라고 제법 오르고 내리기를 되풀이하였지만 아직도 입구에 서면 부담이 먼저 이마를 때린다. 언제 저 꼭대기를 다녀오나. 산에 오르는 것에도 요령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산에만 들면 펄펄 나는 동무가 있어 작심을 하고 산행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그이는 지팡이를 짧게 잡고 어깨를 모은 채 무게 중심을 앞으로 던지듯 허리를 한껏 구부린 채 걷는 게 아닌가. 가히 꼬부랑 할머니와 어금버금한 걸음걸이였다. 이제껏 나는 산의 경사에서 가급적 멀찍이 떨어지려는 듯 작대기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려는 동작을 취해왔었다. 그날 쉼터에서 간신히 따라잡았더니, 나라고 어디 사람이 아닌가요, 힘들지만 견디며 오를 수밖에요, 한마디 던지고는 급한 비탈을 와락 껴안으며 다람쥐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름 터득한 비결을 응용할 기회가 왔다. 삼척 환선굴을 허리에 품고 있는 지각산으로 오르는 길. 컴컴한 굴 안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관광이지만 빛들이 빚어낸 바깥의 꽃들이 내겐 더 환상적이다. 엎어지는 게 아니라 숙이기만 해도 코가 닿을 듯한 급경사 길에서 동무로부터 간취한 회심의 동작을 따라해 보았다. 오르막을 받아들이며 쏟아질 듯 몸을 앞으로 앞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어쩌면 그건 그 언젠가 들어갈 땅으로 몸을 휙휙 내던지는 형국인 것도 같았다.

그렇게 비교적 수월하게 오른 정상에는 나보다 더 뚱뚱한 바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위는 날카로웠다. 아차, 하는 한발 끝에 “(…)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유치환)가 되는 지름길도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위는 제 심중의 일단을 이런 꽃을 통해 드러내 보이는가. 바위에 몸을 풀고 있는 야생화를 만났다. 오르기는 힘들지만 이런 석회암의 고산 바위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벌깨풀이다. 단애와 협곡이 떠받치는 이 지역의 하늘빛을 고르고 골라 농축시킨 듯 환장할 만한 꽃, 꽃, 꽃. 벌깨풀.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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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하고 연애하듯 찰떡같이 착 달라붙은 해안길을 달리다가 아담한 마을로 내려서니 어느 건물 옥상에 물건중학교라는 간판이 보였다. 물건항을 목적지로 해서 찾아왔으니 묻지 않아도 여기는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임이 틀림없겠다. 물건리라서 물건중학교이겠지만 특이한 이름이기에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불러보았다. 물건중학교. 처음 부임해 온 선생님이, 너희들 나중에 세상의 물건이 되어야 한데이, 농담도 해보겠지만 실은 물건은 지세가 물(勿)자 혹은 건(巾)자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아무리 파도가 몸살을 하지만 물건항에도 늦은 오후는 찾아오는 법이다. ‘2006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물건방조어부림’에는 풍채 좋은 나무들이 어울려 산다. 몽돌 해안을 지나 바위들의 동네로 나아갔다. 바다에서는 한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고, 가까운 해변에서는 따가운 햇살을 피하느라 수건으로 온통 얼굴을 가린 아주머니가 우럭조개를 캐고 있었다.

인기척을 듣고 뿔뿔이 달아나는 바닷게, 잔돌에 철석같이 들러붙은 굴과 따개비를 보면서 어느 바위에 이르렀다. 햇빛에 몸을 달군 바위의 등허리가 군불 땐 아랫목처럼 따뜻했다. 바위마다 어김없이 헤매는 개미 한 마리. 개미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길 없는 바위를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갈매기 조나단처럼 멀리 가는 개미에게 내 마음의 일단을 실어 보내려는데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짭조름한 소금기가 자욱한 이곳에서 정갈한 티를 간직한 나무, 거센 바람의 눈치를 보느라 슬기롭게 납작 엎드린 나무. 돌가시나무였다.

흥건해진 마음으로 물건리에서 돌아와 물건들에 둘러싸인 일상의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KBS 스페셜 <자연의 타임캡슐>을 보다가 제주의 어느 해녀가 숨비소리와 함께 내뱉는 말이 나의 귓전에 닿았다. “물건은 용왕이 주는 것. 저승에서 벌어다가 이승에서 쓴다.” 늦은 밤 컴컴한 밤중의 방에서 홀로 저 문장을 들었을 때, 비몽사몽간에 바다와 육지의 접면에서 그 어떤 경계를 꿰매는 바느질 자국처럼 가시가 발달한 물건항의 돌가시나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돌가시나무, 장미과의 반상록성 소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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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남해 금산에 올랐다가 시간이 남아 바닷가 식물 조사를 했다. 항구의 이름이 재미있다. 물건항(勿巾港). 여느 해안처럼 멀리 바다가 있고 설레는 물은 출렁이고 있었다. 수평과 수직이 이 자연에 굳이 따로 있겠느냐만, 부분을 떼서 카메라에 담으려니 그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의 자세에 따라 기울어지기도 하는 수평선. 하지만 어디로 물이 왈칵 쏟아질 일은 없기에 바다는 바다이다. <중용(中庸)>에서 자연을 예찬한 심오한 메타포 한 대목이 생각났다. 도올 김용옥으로 하여금 눈물을 줄줄 흘리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구절이다. 載華岳而不重 振河海而不洩(재화악이부중 진하해이불설). 화악산을 업고도 대지는 무거운 줄을 모르고, 큰 강과 바다를 품에 안고 있어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그런 바다를 바위에 앉아 오래 바라보았다. 바다 그리고 바위. 서로 무슨 인연이 있을까. 겉만 볼 줄 아는 나의 눈으로 바다와 바위의 관계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지금 여기에 서로 함께 존재하는 것을 넘어 그 어떤 관계가 있을 것도 같다. 그러다가 나의 생각은 옆길로 빠져들었다. 바위에는 이 든든한 물체를 의지처로 삼아 살아가는 식물도 있다. 어디에서나 흔한 칡넝쿨이 길게길게 바위를 짚고 넘어왔다. 칡넝쿨의 끝은 부드러웠고 야들야들했다. 억세고 질긴 줄기와는 퍽 달랐다. 산에서 내려와 이곳에 오기까지 몇 개의 바위를 지나왔는가. 까끌까끌한 표면은 미끄러운 바위를 잡는 데 유용할 것 같았다. 뿌리가 사타구니를 파고들더니 무릎 위로 기어나왔다…는 말은 과장이고 내가 잠깐 그렇게 연출을 해 본 것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명상에 몰두한다면 더욱 매진하라고 꽁꽁 묶기라도 할 태세인가, 칡은?

칡넝쿨의 끝을 잡고 가만 바라본다. 미세한 털이 마치 짐승의 부드러운 가죽 같다. 그 끝에 발톱이라도 달려 있을 것만 같다. 넝쿨은 또 분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시퍼런 껍질은 멍이라도 든 피부 같다. 칡넝쿨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거대한 땅을 가뿐하게 짊어지고, 저 광활한 바다를 안온하게 부둥켜안고 있는 그 어떤 존재의 꼬리를 붙들고 있는 듯한 이 기분, 이 느낌! 칡, 콩과의 낙엽 덩굴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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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여고동창생들인가. 조용하던 산중이 울긋불긋한 일군의 등산객들로 아연 시끌벅적해졌다. 늦은 만큼 마지막 뽐을 내는 철쭉의 꽃사태를 만났다. 화려한 외출이 아니라 건장하게 차려입은 여심들도 꽃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러면 꽃이 될 수 있으려나. 잎을 당기고, 꽃잎을 건드리더니 아예 꽃더미 속으로 들어가 가지와 팔, 줄기와 다리를 섞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하하호호후후흐흐히히.

‘세석대피소 0.5㎞/의신마을 8.6㎞/청학동 9.5㎞/거림 5.5㎞’의 이정표가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여기는 지리산 주능선에 거의 잇닿은 산중 삼거리인 1400고지 갈림길. 거림계곡을 출발하여 오전을 꼬박 투자해서 도착한 곳이다.

가까운 세석산장에서 분주하게 놀리는 젓가락소리가 들리는가. 등산객들은 평탄한 길에서 모두 한숨을 돌리며 여유를 찾는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불룩한 배낭 속의 음식으로 마음에 점을 찍을 수 있다. 모처럼의 허기가 배달해준 높이에서 기다리던 한 끼의 거룩한 점심을 먹는 것.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 이곳에 도착했으니 누구나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다.

꽃을 사이에 두고 한바탕 명랑한 수작을 부리던 이들이 빠져나가고 텅 빈 적막. 넘실대는 초록의 잎사귀를 건드리고 땅으로 떨어지는 햇살이 찰랑거린다. 흥겨운 떨림에 몸이 단 새의 울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여기는 어디인가. 좌표가 있지만 그건 얼기설기한 공간을 잠시 가리키는 숫자에 불과하다. 웅크린 돌, 짙은 응달, 흩어지는 구름도 궁금하기는 하지만 내일의 일이다. 오늘은 철쭉 너머 작은 ‘또랑’ 곁에서 반짝이는 꽃 하나에 시선이 꽂힌다. 손바닥만 한 한 장의 잎, 손가락처럼 꼿꼿한 꽃줄기, 두 갈래의 꽃잎. 그것으로 한 세계를 우아하게 이룩한 나도제비난. 식물의 나라에도 여고동창회가 있다면 혹 이런 모습들일까. 주근깨를 잔뜩 달고 옹기종기 모여서 세상 낮은 곳의 소식에 귀를 쫑긋 하고 있는 나도제비난.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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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가 우렁차서 그 이름을 얻었다는 수성동(水聲洞) 계곡을 지나 인왕산을 오른다. 아파트를 허물고 옛 모습을 복원했다지만 조야한 현대식 공원이 내는 소리는 귓전에 닿기도 전에 사그라든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는 동네에서 신비는 사라진다. 모든 걸 과학의 잣대로 재단하고 여지를 없애버린다. 청계천 발원지라는 작은 웅덩이를 호령하던 가재나 새우는 어디로 갔을까. 지리산에 반달곰을 방사하듯 인왕산에 호랑이를 풀어놓으면 어떨까. 그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발등으로 내려보내기도 하면서 인왕산 중턱 석굴암에서 맨손체조를 했다.

팥배나무 그늘에서 나무의 근황을 살피다가 하산하는 길이었다. 깔딱고개를 내려오니 약수터 의자에서 할머니로 기우는 듯한 나이의 아주머니가 혼잣말을 했다. “아이고, 웬만하면 가겠는데, 이젠 더는 못 올라가겠네.” 내가 자리를 뜨려는 눈치를 보이자 물끄러미 옆 계곡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작년보다 더 덥고 어제보다 더 덥네. 내일은 또 어째.” 투정하듯 계곡으로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조금 전 산에 오를 때 나는 저 계곡에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나를 세탁하고 난 계곡은 또 혼자 저 아래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계곡은 텅 비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은은한 공간 속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생명의 기운을 잉태시킬 수 있”(<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는 상태가 된 것이리라.

새삼 계곡을 다시 바라보았다. 호젓한 공간에 땀과 괴로움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과 달리 계곡에는 꽃이 풍성하게 피어 있다. 굳이 바위틈에 뿌리내리기를 좋아하는 견고한 나무, 매화말발도리이다. 흘러가는 물은 물론 지나가는 비도 바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 불리한 조건을 이용하기에 그만큼의 기품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무는 작년의 가지 끝에 올해의 가지를 두세 마디 달아놓았다. 꽃은 오로지 묵은 가지의 겨드랑이에서만 피어난다. 이 또한 신비라면 신비가 아닐까. 계곡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바위와 함께 이 세상의 한 아래를 묵묵히 담당하고 있는 매화말발도리, 수국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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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를 할까 하다가 뒤로 미루고 제주도 고유의 원시림인 곶자왈에 들어가 귀한 나무를 만났다. 2003년 최초로 발견된, 오로지 제주에서만 사는 빌레나무였다. 이 나무하고는 얽힌 사연이 있다.

2012년 겨울 투표를 하고 친구집에 모였다. 오후 6시, 출구조사가 발표되었다. 화성에서 한 투표, 금성에서 본 개표. 이제껏 겨우겨우 견뎌왔는데 또 5년이라니, 그 어떤 너덜겅에 패대기쳐지는 기분이었다. 졸지에 흥이 파하고 뿔뿔이 흩어져 귀가하는데 새로운 사실이 떠올라 기분을 더욱 잡치게 했다. 당선인의 임기가 끝날 때면 어느덧 나도 환갑이겠구나. 이른바 지천명(知天命)의 시기를 삽질과 불통으로 얼룩지게 할 형편이 아닌가. 그래서 더욱 바깥으로 돌아다녔던가 보다. 소태 같은 심사를 달래려 대마도 식물 탐사에까지 따라나섰다가 이런 산행기를 작성하였다. “(…) 빌레나무는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부엽층 형성이 양호한 곶자왈 내 함몰된 지형에서 무리지어 자란다(김진석·김태영). 나는 아직 우리나라의 빌레나무를 본 적은 없다. 언젠가 곶자왈에 가서 간신히 제주도에 한 발을 걸친 기특한 빌레나무를 오래 바라보겠다.”

화산 폭발이 만든 요철 지형의 신비한 곶자왈. 이곳에 오면 나 따위란 그저 하나의 떨림, 지나가는 미풍, 있으나 마나 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숲에 앉아 덤불 속의 빌레나무를 바라본다. 다소 꺼칠한 잎을 들추면 겨드랑이마다 꿀단지 같은 하얀 꽃들이 송송송 달려 있다. 이 작은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생태계가 얼마나 허전했을꼬. 빌레나무와의 관계를 곰곰 짚어보자니 지금 이곳은 내 개인적 소망이 실현되는 순간의 현장이 아닌가!

태블릿PC-촛불-장미로 상징되는 일련의 흐름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다. 혹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지게 하는 것과 동일한 힘이 기획한 건 아니었을까. 전혀 다른 기분으로 환갑을 맞이하게 되어 다행이다. 나의 지난 시절을 요약하면 ‘20-시, 30-책, 40-산, 50-꽃’이다. 이순(耳順)에는 어떤 한 글자가 찾아올까. 조금은 건방진 궁리도 해보게 되는 새 공화국 치하에서의 즐거운 하루. 빌레나무, 자금우과의 상록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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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풍광의 제주. 이런 풍경에 어울리게 특이한 이름도 많다. 우리 국토가 한반도에서 내처 제주도로 훌쩍 뛰었기에 우리 어휘도 그만큼 풍성해졌다. 제주를 대표하는 오름의 이름 몇 개를 중얼거려 본다. 입안이 복잡해진다.         

한라산이 키운 흑돼지 오겹살과는 또 다른 차원의 쫄깃한 맛이다. 성산읍의 한 오름은 허리 부분이 활 모양의 띠가 둘러져 있기에 궁대악(弓帶岳)이다. 궁대악, 궁대악, 궁대악. 과녁에 꽂힌 화살처럼 말맛이 입술을 때리고 지나갔다.

초파일 뒤였다. 날이 날이니만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며 궁대악 오름에 올랐다. 인적 드문 오름의 비탈에는 몇 년 치의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고 아주아주 건조했다. 바짝 마른 오름은 그간의 적폐를 털어내듯 낙엽을 밟을 때마다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눈은 눈대로, 발은 발대로 포식을 하면서 정상의 호젓한 오솔길에 도착했다.

따가운 햇살을 받아 소나무가 그림자로 내려앉고 그 사이로 내 그림자도 나란히 누웠다. 문득 이 고요한 숲에서 그림자들끼리는 뭔가 내통하지 않을까, 하는 궁리가 일어났다. 이 세상의 배후는 어딜까, 하는 궁금증도 솟아났다. 층층의 낙엽 사이를 휘저으며 부지런히 오가는 수행자들이 있다. 포행이라도 하는가. 탁발이라도 나가는가. 검은 가사장삼을 걸친 날씬한 개미들!

특이한 지형과 특이한 이름에 걸맞게 궁대악 사면 곳곳에 새우난초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주름진 타원형의 잎 사이로 훤칠하게 뻗어오른 꽃줄기마다 오밀조밀한 꽃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 두꺼운 흙을 뚫고 어찌 이리도 곱게 올라왔는가. 땅속의 뿌리줄기가 구부린 새우등을 닮아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새우난초. 너무나 풍성해서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코끝을 대보지만 이렇다 할 향기는 풍기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살갗을 건들고, 햇살이 찾아와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새소리가 둥지처럼 귓구멍을 찾아드는 것. 이는 살아 있기에 누리는 잠시 잠깐의 복락인가. 어느 울적한 야단법석(野壇法席)에 그 누가 꾸며놓은 새우난초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새우난초,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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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4월의 끝자락에 강원도 홍천 도사곡리의 깊은 골짜기 끝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흩어진 인가 서너 채와 조그만 밭뙈기. 그 한 귀퉁이에 하얀 꽃을 무겁도록 달고 있는 건 야광나무였다. 밭에 딸린 나무 한 그루, 야광나무를 뒤따라 참 좋아하는 시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건 제목 덕분이기도 했다.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김중식) 식물학과 졸업하고 33년이나 지나 뒤늦게 꽃에 빠지니 눈에 보이는 게 다 식물이다. 이 뒤늦은 후회를 어찌하나. 오늘처럼 그 휘황한 야광나무를 가슴에 담고 오는 날이면 정류장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도 모두 나무로 보일 때가 있다. 파라택소노미스트(준분류학자)의 어설픈 지식으로 이렇게 동정(同定)해 보기도 한다.

암수딴몸. 두 개의 가지가 겨드랑이에서 대칭으로 나온다. 가지 끝은 다섯 갈래로 찢어진다. 짧은 모가지 위의 이목구비는 한 면에 모두 쏠려 있다. 열매 같은 얼굴의 정수리 부근에 잔뿌리가 울창하다. 처음에는 검었다가 차츰 하얗게 변하며 드물게 몽땅 빠지기도 한다. 가슴 근처가 조금 복잡하다. 가슴 아래에는 그보다 더 복잡한 사타구니가 있다. 여기로부터 몽당한 뿌리가 둘 뻗어나가지만 신발로 차단된다. 그것들은 돌아다니는 데 능숙하다. 그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아직도 헤매는 중일까? 산 아래쪽이나 물가에 높은 집을 짓고 모여서 겨우 지낸다. 잎자루처럼 발목은 잘록하다. 내부에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손바닥, 발바닥을 제외한 전신에 솜털이 빽빽하다. 무슨 소리가 웅얼웅얼 나오는 입구인 입술에도 털이 없다. 수십 년 직립하여 살다가 그 어디로 떠난다. 동물계 영장목 사람과의 포유류.

밤늦게 귀가하니 울긋불긋 단풍잎 같은 벽보가 요란하다. 어둑해질 때까지 혹 밭에 계신 할머니를 위해 꽃을 켜고 있는 야광나무를 떠올리며 몇 마디 덧붙인다. 해마다 낙엽을 만들어 산을 갱신하는 나무와 달리 5년에 한 번 생각을 떨구어 투표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야광나무, 장미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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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에 한 문장이다. 네모의 빌딩과 네모난 유리창, 비슷한 메뉴에 비슷한 얼굴들, 전망이 온통 광고뿐인 도시에서야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랴. 하지만 산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나무에서 나무로, 그 나무들 아래에서 전혀 다른 꽃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각은 휘발유 같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재빠르게 도망가 버린다. 지금 눈앞에 핀 꽃들은 작년에 떠나간 내 생각들이 아닐까.

가평 명지산 한 골짜기를 훑고 내려가는 길. 달아나는 생각이 그물에라도 걸린 것처럼 가뭇한 공중에 싱싱한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촘촘하다. 지난겨울에 흩날린 진눈깨비 몇 점 아직도 남았는가, 했더니 사위질빵의 씨앗들이다. 북실북실한 털이 햇살에 반사되어 하얀 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4월이라고 눈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이 깊은 산골에는 계절도 느리게 가고 오는 법이다. 짙은 응달의 어느 구석에서는 최후의 얼음이 패잔병처럼 남아 있기도 하다. 공중을 비집고 나오는 찬 기운에 마음이 속았나 보다. 이번에는 정말로 펄펄펄 내리는 흰 눈인가 했더니 올괴불나무의 꽃들이다. 향기가 진동하여 나그네의 빌길을 막아섰다는 길마가지나무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아취를 풍기는 꽃, 올괴불나무.

산길을 더욱 천천히 내려가는데 노란 꽃이 펄럭거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꽃이 아니라 리본이었다. 등산팀들이 흔히 갈림길에 달아놓는 꼬리표였다. ‘산에 사네.’ 무심코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입안에 자꾸 맴돌았다. 생강나무의 꽃에 일부러 색상을 맞춘 듯 노란 천에 쓴 글씨. ‘산에 사네.’ 산이라는 명사와 산다라는 동사가 이렇게 딱 어울리는 조합일 줄이야 예전에 미처 몰랐었네. 물소리가 졸졸졸 흐르는 것을 보면서 돌은 자음, 물은 모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서로 착 호응하는 문장이 아닐 수 없겠다. 빨랫줄에 천사들의 속눈썹이 떨어져 걸린 듯한 올괴불나무 앞을 지나치며 자꾸자꾸 중얼거려 보았다. 산에 사네, 산에 사네, 산에 사네. 올괴불나무, 인동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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