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에 해당되는 글 189건

  1. 2017.01.31 백서향
  2. 2017.01.24 먼나무
  3. 2017.01.17 소사나무
  4. 2017.01.10 나도밤나무
  5. 2017.01.03 만년청
  6. 2016.12.27 으름덩굴
  7. 2016.12.20 사철나무
  8. 2016.12.13 멱쇠채
  9. 2016.12.06 좁은잎덩굴용담
  10. 2016.11.29 무궁화
  11. 2016.11.22 도둑놈의갈고리
  12. 2016.11.15 익모초
  13. 2016.11.08 좀바위솔
  14. 2016.11.01 꽃향유
  15. 2016.10.25 물매화
  16. 2016.10.18 철쭉
  17. 2016.10.11 청미래덩굴
  18. 2016.10.04 병아리풀
  19. 2016.09.27 큰잎쓴풀
  20. 2016.09.20 구절초

밤이 아니라 낮이다. 덕분에 사방이 잘 보였다. 경사가 있었다. 미끄러지면 곧바로 바다로 풍덩, 빠지는 곳이었다. 물은 물렁물렁해서 나비만 한 체중이 아니라면 그냥 그대로 푹 꺼질 것이다. 나무들은 가파른 비탈 따위는 간단히 제압하고 지구의 중심을 향하여 뿌리를 뻗고 있었다. 바다와 면한 곳이지만 나무가 먹는 건 짠물이 아니었다. 여기는 거제도 벼락바위 근처, 우리 국토의 최남단 한 자락이다. 아직은 한창 겨울인가.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지만 그건 달력 속의 사정이다. 남해안 바닷가 언덕에는 정유년의 봄꽃들이 벌써 피어나고 있었다. 뫼제비꽃, 붉은대극, 복수초를 눈으로 만지고 손으로 접촉해 보았다. 신기한 감정이 일어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또 시작이군, 이렇게 밑바닥에서부터.

이곳은 겨울에도 그리 춥지가 않아서 나무가 낙엽을 만들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어도 잎을 바꿀 필요가 없는 상록수들. 그처럼 육중하게 자신만의 한 세계를 이룩한 나무들 사이로 작은 나무가 있다. 다 자란다 해도 겨우 허리춤을 찌르는 정도이다. 짓궂게 장난을 친다면 한달음에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나무도 있다. 키가 작아서 아주 다정하고 몸피가 작아서 아주 다감한 나무. 제주도에도 있지만 뭍에서는 단지 몇 군데에서만 관찰되는 아주 희귀한 나무. 백서향이다.

백서향은 거제도 맨 아래쪽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한두 포기가 아니라 무리지어 띄엄띄엄 사이좋게 산촌(散村)의 인가처럼 흩어져 있다.

다른 나무들이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는 동안 백서향은 깨어 있었다. 꽃이 활짝 핀 것이다. 줄기를 따라 어긋나게 달리는 잎들. 둥근 계단처럼 오른 끝에 십자 모양의 꽃들이 야무지게 다발을 이루고 있다.

올해 처음 만난 나무의 꽃이 백서향이라서 좋았다. 이름에서부터 그윽한 향기를 자랑하더니 실제로 코끝을 접근하자 은은한 향이 풍겨왔다. 향기도 담겠다는 태세로 카메라들 들이대던 한 꽃동무의 속삭임이 나비처럼 날아와 딱딱해진 내 가슴을 벼락처럼 때렸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사랑의 감정이 녹아 솟아나오는 향기로군요! 백서향, 팥꽃나무과의 상록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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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출렁 부산이다. 꼭 티를 내어야 산다고 느끼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고서야 부산을 갔다. 행사장에서 박수치고 밥 먹고 부리나케 부산역을 빠져나오기에 바빴다. 그러니 부산을 가도 부산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었다. 강남 가는 제비처럼 그냥 훅 떠난 부산 여행. 덤으로 꽃이나 볼까 했는데 외려 된통 추위를 만났다. 지난주 부산의 날씨는 보통 추운 게 아니었다. 김이 설설 나는 돼지국밥집으로 뛰어들었더니 주방의 아지매도 이제껏 살면서 이런 추위가 처음이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영도다리 밑 오후 두 시. <날개>의 마지막 장면처럼 뚜우 하고 사이렌이 울렸다. 영도다리가 천천히 공중으로 올라갔다. 섬이 아니라 하늘로 가는 다리가 신기해서 여기저기 기념사진 찍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법 높은 각도로 쩍 벌린 다리를 뒤로하고 뜻밖의 나무를 찾아서 바닷가를 향해 내 다리를 벌렸다.

예전의 부산은 바다가 근처라서 그런지 겹겹이 산도 많았다. 문현동-대연동-광안리의 골짜기 하나하나마다 내 지난 시절이 담겨 있다. 그 앞을 지날라치면 아코디언 주름을 열었다 닫는 것처럼 옛 추억이 연주된다. 이기대 너머로 가는 길. 아스팔트를 들어붓고 널찍한 도로로 조성하기 전에는 이 길도 흙냄새 물씬한 호젓한 길이었겠다. 경사가 아주 급해서 가르랑가르랑 한숨을 쉬며 오르는 택시 안에서 기사가 한 말씀을 한다. “뭐 있능교, 아나고 한 접시로 목에 때 벗기고 노래방 가서 한 곡조 땡기믄 최고라예.” 무심코 내뱉는 아저씨의 저 한 문장에 부산 사람들의 행복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을까.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내 눈을 호리기에 충분한 나무를 만났다. 주로 제주도나 남부지방에 자생하지만 가로수로 널리 심는 나무. 여름에 피는 꽃만큼이나 반짝 아름다운 열매를 겨울 내내 달고 있는 나무. 먼나무였다. 이름의 유래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나무가 있어 멀리 나무 너머를 한번 비켜보기도 하는 것. 먼나무 위로 굶주린 새가 날고 먼나무 밑으로 버스와 행인1이 지나갔다. 몇십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면 바다를 보고 놀라는 승객2 혹은 교련복 입은 행인3으로 나도 등장하였을 풍경이었다. 먼나무. 감탕나무과의 상록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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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수상하니 날씨도 공중에서 갈피를 못 잡는가. 소한 지나고도 봄날같이 따뜻하다. 춘정까지는 아니고 가벼운 흥분을 이기지 못해 강화도 마니산을 찾았다. 함허동천. 입구의 입간판에 유래를 적어놓긴 했으나 그 뜻보다 먼저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혀끝을 툭 때리고 가는 것이 있었다. 마니산은 악산이다. 함허(涵虛)에 걸맞게 바위 주위에 검은 흙들이 이끼처럼 포진해 있다. 그래도 지하는 겨울이다. 서릿발에 꼬집힌 흙들이 주상절리처럼 세로로 꼿꼿하게 무리지어 서 있다.

114계단을 지나 드디어 바위능선에 도착했다. 사방의 툭 트인 호쾌한 풍경에 눈이 좁아지는 것 같다. 벌써 정유년의 세월에 제법 때를 묻힌 듯하지만 음력으로 따지자면 아직 설밑이다. 새해를 즐길 자격이 아직은 충분하다. 김밥과 소주가 사이좋게 어울린 자리.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함허동천이니 맞춤하게 수제천(壽齊天) 한 자락을 불러들였다. 최대치로 높인 음량의 유장한 가락에 실려 몇 가지 궁리가 흘러나왔다.

생명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좀전에 흘린 땀이 저 바다의 소금과 같은 성분이란 것도 한 증거가 되리라. 오늘 나는 한 문장을 더 보태고 싶다. 사람이란 모두 산에서 아래로 추락한 존재들이 아닐까. 그래서 고향을 찾듯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곳으로 오르는 것. 그리하여 이런 시 한 구절에 그만 마음이 공명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백석) 어느덧 참성단에 도착했다. 말굽처럼 쌓은 제단이다. 멀리서 보니 세계수(世界樹)처럼 위용을 자랑하던 나무가 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고결한 자태이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있는 건 소사나무였다. 지그재그로 하늘 끝으로 뻗어가는 가지만 앙상할 뿐 잎도 열매도 없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이 나무 덕분에 강화는 마니산을 앞세우고 바다 바깥으로 불쑥 솟아날 수 있었다. 까마득한 시절에 이곳에서 단군이 하늘을 우르러 제사를 지냈다던가. 이제 또 세상으로 내려가야 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사나무, 자작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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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이란 태어나자마자 은퇴한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들었다.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곡을 찔렀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한편으로 최근에 등장한 금수저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런 말도 있다. 공주는 평생 손잡이를 잡을 일이 없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세상을 칸막이하는 문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손이란 바깥에 그냥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밑천이라고 달랑 고것뿐인 육체가 자신이 담긴 이 세계와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관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세상의 문을 봉쇄당한 채 살아가는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스스로 열어야 할 문이 하도 많은 한 편의 인생에서 이만한 대리인생이 어디 또 있을까.

산으로 가지 않을 때면 우면산 자락의 국립국악원에 가서 토요명품공연을 보기도 한다. 국악 고수들의 소리와 악기로 귀를 흠뻑 씻는 시간이다. 여러 다양한 공연에서 대개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고전무용이다. 숨을 빨아들일 듯 흰옷을 차려입고 도살풀이춤을 출 때 주목하는 건, 공중과 접촉하면서 길게 뻗어나가는 손가락 끝!

나무들에겐 잎을 달았다가 떼는 것이 달력이고, 그 앞을 지나치는 등산객들의 차림새나 얼굴 표정이 곧 시계이리라. 꽃도 없는 요즘 산에 가서 뭘 보느냐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겨울은 겨울대로 보아야 할 게 많다. 그리하여 눈꽃을 헤치고 가서 꽃이나 열매가 아닌 엽흔이나 겨울눈을 관찰해도 충분히 하나의 세계가 보인다. 원숭이 얼굴, 하트 모양은 물론 지하에 계신 외할머니의 옆모습도 발굴할 수 있다. 그렇게 궁금한 표정으로 지리산의 한 자락을 훑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건 나도밤나무의 겨울눈이었다. 6월에 피는 탐스러운 꽃도 꽃이지만 이런 한겨울에 손가락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꼬부리며 가리키는 겨울눈을 외면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물가나 바위틈에서 뿌리를 두고 내 눈높이를 얼추 맞춰주는 나도밤나무의 겨울눈. 그 언젠가 본 무용수의 가지런한 손끝,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조지훈)을 너무나도 빼닮은 나도밤나무의 겨울눈! 나도밤나무, 나도밤나무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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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 오른다. 길을 돌아들 때마다 커다란 바위가 툭툭 튀어나왔다. 그 면면마다 바깥으로 나올 준비를 한 채 숨어 있는 부처님들. 하늘이 재주를 주고 세상이 끌을 손에 쥐여준다면 우리 시대의 표정을 발굴할 수 있겠다는 허무맹랑한 궁리도 해보다 드디어 금오봉 정상에 섰다. 경주 남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무기능선과 도깨비능선을 사이에 두고 멀리 고위봉이 눈썹을 때린다. 이런 곳에 서면 퍽 이상하다. 해발로 따지면 고위봉이 금오봉보다 조금 더 높다. 하지만 금오봉에 내 키를 더한 때문인지 여기가 더 높은 듯하다. 왜 우리는 자기가 있는 자리를 가장 높다고 여길까. 지금 여기가 가장 높다는 이 엄연하고도 즐거운 착각! 지구가 편평하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크게 휘어지는 지평선과 함께 지구가 둥글다는 한 증거로 삼을 수 있으리라.

고위봉을 지나 남산의 산중에 있는 식당을 향해 가는 길. 중간에 백운암에 들러 목을 축이다가 이런 글귀를 만났다. “꽃은 늘 웃고 있어도 시끄럽지 아니하고 새는 늘 울어도 눈물을 보이지 아니하고….” 한참을 걸었더니 천룡사 폐사지에 삼층석탑만이 우뚝하다. 이윽고 말라버린 나무덤불 사이로 화살표가 나타났다. ‘녹원정사식당’. 석탑을 쌓는 시대가 있는가 하면 고작 이런 간판이나 갖다붙이는 시대도 있는가 보다.

꽃이 없는 계절에 꽃 대신 꽃으로 시작하는 문장 하나를 주웠으니 그래도 다행이구나, 하려는데 발길이 멈추었다. 식당 울밑에 관상용으로 심어놓은 만년청이었다. 이 싸늘한 계절에 상록의 잎을 배경으로 꽃만큼이나 매혹적인 열매가 그래도 반가웠다. 야생의 만년청은 제주도나 대마도에서 본 적이 있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골짜기가 용장계곡이다. 그 골짜기에 웅크리고 은거해서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썼다고 한다. 오늘 식당에서 내가 읽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산채정식 6000원, 촌두부 4000원, 도토리묵 4000원, 남산신선주 7000원…. 요금은 선불입니다.” 그나마 마지막은 만년청을 떠올리며 슬쩍 마무리해서 다행일까. 이 대명천지에 등불처럼 열매가 피어나는 만년청,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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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감흥에 아니 젖을 도리가 없게 된다. 3시간 전의 서울시민에서 벗어나 천 년 전의 신라인으로 변신해 보는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두 바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성동시장에 가면 포수에게 잡혀온 잉어가 눈을 껌뻑거리며 한숨을 쉬고 있을 듯. 구름이 낮게 깔린 아리송한 도시. 저 구름은 서라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제는 조금 색다른 풍경에 몸을 담갔다. 무덤이 광장을 지키고 있는 신경주역에 도착하니 오후 3시30분. 나의 일생을 하루에 요약해 볼 때, 지금의 내 나이가 오늘의 이 무렵이 아니겠는가. 그냥 맥없이 허둥대다가 전기문명이 제공하는 어지러운 도심의 불빛에 속절없이 포박되기는 싫었다. 얼른 몸을 날려 칠불암으로 향했다. 몇 개의 무덤과 몇 개의 탑을 지나 찾아드니 동지를 며칠 앞둔 공중은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초행은 아니었기에 무서울 건 없었다. 보름달도 믿었다. 돌부리에 걸려 자빠지면 또 어떠랴. 남산에서 넘어졌으니 남산을 짚고 툴툴 일어나면 될 일이다. 사위질빵이 돌담을 기웃거리고 있는 초입의 농장을 지나니 호젓한 오솔길 좌우로 소나무가 빽빽했다. 활성탄층을 통과하며 꾸정물이 정화되듯 나는 이 훤칠한 숲을 지나가며 마음을 세탁하는 중. 갈비뼈를 훑고 나오는 숨결도 몸속 노폐물을 바깥으로 뱉어내는 중.

드디어 가파른 돌계단이 보이고 울창한 이대가 칠불암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이제 조금 후면 국보 312호 마애석불 앞의 야단법석에서 108배를 올리고, 환장하게 좋아하는 칠불암 툇마루에 시린 엉덩이를 부려놓으며 보름달을 볼 수 있겠다. “크게 한번 후, 하고 숨을 내쉬세요.” 나무에 붙은 안내문 옆에 으름덩굴이 창백한 잎사귀를 아직 달고 있다. 부처님 손바닥 같은 편평한 5~6장의 잎이다. 으름덩굴은 혼자 설 수 없어 생강나무를 타고 올랐다. 땅을 기어야 하는 덩굴성이었지만 곁의 나무를 짚고 공중으로 박차고 뛰어오른 것. 나도 저 으름덩굴처럼 몸을 가볍게 엮고 엮어서 오늘밤엔 토함산 위 보름달로 훌쩍 건너가 볼까나! 으름덩굴, 으름덩굴과의 덩굴성 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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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훤히 바라보이는 우룡산 중턱에 자리한 중학교에 다녔다. “오륙도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오륙도라/ 흐리락 맑으락 하니 몇 섬인 줄 몰라라.” 국어시간에 노산 이은상의 시, 오륙도(五六島)를 배운 어느 날엔 학교 뒷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다 오륙도를 새삼 눈에 힘주어 보았다. 멀리로는 대마도가 희끄무레 보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세월의 산을 여러 개 넘어 도착한 오늘, 부산 용호동의 오륙도 선착장에 섰다.

 

철썩이던 파도 옆 안내판을 보자니 몇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나는 아무래도 이제까지 아무렇게나, 대충, 희끄무레하게 살았던가 보다. 오륙도를 더 자세히 보니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으로 이루어진 섬들의 작은 공화국이었다. 이 중 방패섬과 솔섬의 아랫부분이 붙어 있어 밀물에는 하나, 썰물에는 두 개로 보여 오륙도라는 낭만적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 언젠가 저 섬에 올라 유일한 주민인 식물상을 조사해 보리라는 작은 결심을 하고 갈맷길로 향했다.

 

 

바다와 마주 보며 서 있는 고층 아파트를 끼고 돌아 나무 계단으로 올라 벼랑이 안내하는 갈맷길로 들어섰다. 각종 이끼가 추상화 같은 무늬를 그리며 바위에 송송하게 붙어 있고 송악 등의 덩굴식물이 바다로 뛰어들려는 바위들을 안간힘을 다해 묶으며 막아서고 있다. 한반도(韓半島)가 이만한 넓이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이런 연약한 덩굴성 줄기들이 서로 어깨동무하고 있는 덕분이 아닐까. 몇 굽이를 지나 바닷가로 움푹 꺼진 농바위 근처를 지날 때였다. 멀리 여객선이 가로지르며 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꽃이 활짝 핀 나무가 있다. 바위에 틈을 내리고 핀 그것은 사철나무였다. 이토록 쌀쌀한 시간의 틈에 뿌리를 내린 건 꽃이 아니라 열매였다. 사실 사철나무는 사철 내내 푸르른 나무이다. 해서 생울타리로 널리 심는 나무라서 주의 깊게 보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 바닷가 끝의 바위틈에서 피어난 자연의 사철나무. 우리 국토의 가장 바깥의 울타리인가 싶어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본 사철나무, 노박덩굴과의 상록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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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이 꿀렁, 하였다. 꽃이 핀 것이다. 햇빛과 비바람, 천둥과 번개가 합심하여 한 송이의 꽃을 공중에 틔워내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라고 하지만 그건 저희들끼리의 내밀한 사생활에 속하는 영역이다. 당장 눈앞에 드러난 사실은 꽃이 이 지상의 한 매듭이라는 것. 꽃이 아니었다면 뉘라서 우리 사는 세상을 이렇게 맵시 있게 마무리할 수 있으랴. 그제는 시간이 꿀렁, 하였다. 역사가 회오리를 친 것이다. 이제까지 쌓이고 쌓인 적폐가 민낯을 드러내고 한 매듭으로 묶였다. 누구는 끝이라고도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세상을 향한 포부를 가득 담은 꽃봉오리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만개(滿開)로 이어지듯 먼 길로 가는 첫걸음을 뗀 것일 뿐이다.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그 어떤 후련한 마음과 함께 부산으로 돌진하는 기차를 탔다. 그것도 새벽 첫 기차이고 보니 앞장서서 어둠을 뚫고 간다는 호쾌한 기분을 덤으로 얻었다. 장산, 황령산, 금정산 등 부산에는 덩치가 큰 산이 많지만 오늘 걷는 길은 오륙도에서 이기대로 이어지는 바닷가 해파랑길. 기암괴석이 즐비한 가운데 옛날 뜨거운 마그마가 흘러 형성된 이곳은 우리 국토의 한 끝자락으로 국가지질공원이기도 하다. 더러 낭떠러지 모퉁이를 돌면서 그 연원을 잴 수 없는 억겁 년의 시간의 얼굴에 내 얼굴을 포갤 때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어났다. 밀려오던 파도가 딱딱한 바위를 깨울 땐 가슴 근처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해국, 갯고들빼기, 감국 등 오늘 본 꽃들의 목록이 초라하다고 여겨질 즈음 아예 이기대의 바닷가로 내려섰다. 건너편으로 해운대가 보이는 곳이었다. 파도에 닳고 닳은 몽돌 가까이에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형태도 색도 덜 자란 민들레처럼 보이더니 가까이 가서 보니 멱쇠채라고 하는 귀한 꽃이다. 본래 4~6월경에 피는 꽃인데 시절을 잘못 알고 바깥으로 나와서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멱쇠채. 계절의 첫차를 타고 일찍 나를 마중하여 주는 꽃이라고 이기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이름이 낯설어서 입에 착 감기지는 않지만 잎은 미역을 닮고 꽃잎은 리본 같다. 그리하여 저 노란 꽃잎에 한 조각 붉은 마음을 적어보고 싶은 꽃, 멱쇠채.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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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기억에 없습니다. 그는 마이크 앞에서 이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자신의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인지 머리를 아래위로 까딱까딱하였다. 현대사의 주요 길목마다 어김없이 등장하여 모종의 역할을 했던 법률가답게 자신이 꾸민 조서에 인감도장이라도 찍는 동작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리 재주도 좋아서 기억을 이렇게 잘 관리하고 있을까. 목구멍 너머 어딘가에 기억을 꼬불쳐놓았다가 필요에 따라서 꺼내어 써먹는 것일까. 하지만 어쩌나. 몸에도 기억이 있는 법이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통으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희극적 광경으로 내 눈에는 비쳤다.

산은 적막하고 꽃은 없다. 병신년도 이제 마지막이다. 한 해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많은 식물들이 내 눈을 통과했다. 올해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좁은잎덩굴용담이다.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검룡소 근처. 단풍도 함성처럼 산하를 물들이고 난 시기. 관광객의 발길을 잠깐 벗어난 곳에서 만난 꽃이었다. 꽃동무의 외침을 듣고 어느 덤불 속으로 허리를 꼬부리고 들어갔지만 한동안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랐다. 한참을 헤맨 끝에 보일 듯 말 듯 쇠뜨기에 의지하고 있는 그 꽃을 겨우 발견했다. 내 눈에 놀라운 건 꽃이 아니었다. 잎도 아니었다. 좁은잎덩굴용담의 실처럼 칭칭 감기는 줄기였다. 보일락 말락한 작은 줄기에서 어쩌면 이리도 어엿한 여러 꽃들이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을까. 몹시도 가는 줄기에서 이따만하게 달려 있는 호박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이었다.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를 노래하며 광화문광장에 모인 우리는 ‘홀로섬에 닻을 내린’ 주권자들이다. 함께 합창하니 입 모양도 같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율이 통하고, 그 어떤 힘이 뻗어나와 어깨와 어깨가 서로 연결되는 순간, 좁은잎덩굴용담이 떠올랐다. 가수 한영애의 이어진 노래는 ‘조율’이었다.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내년에도 변함없이 좁은잎덩굴용담은 더욱 뚜렷한 기억을 되살려 제자리에서 겨드랑이마다 또 꽃을 활짝 피우겠지. 좁은잎덩굴용담, 용담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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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흩날리는 늦은 오후. 옷깃을 여미며 지하철을 탔다. 안국역에서 내렸다. 안국(安國), 나라의 평안. 말의 의미가 새삼스러워졌다. 헌법재판소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내 인왕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애석하다, 희뿌연 안개에 가려 산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오랜만에 우러르는 인왕산이다. 어렴풋한 흔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광화문으로 쇄도하는 발걸음에 한 걸음을 보탰다. 광장임에도 숨바꼭질하듯 걸어야 했다. 많은 궁리가 일어났다. 경복궁역에서 청운동 사무소까지 가는 길. 예전 궁리출판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눈 감아도 훤하다. 옆사람과 어깨를 걸고 나아가며 구호를 외쳤다. 특히 다음 일곱 글자에서 울컥, 했다. “국민이 명령한다!” 행진하는 너는, 나는, 우리는 저 문장의 확고한 주어다. 인왕산 쪽 길가에 가로수가 서 있다. 큼지막한 돌화분에 회양목을 울타리 삼아 심어진 무궁화. 총 68그루였다. 나흘 전이 소설(小雪)이었다. 시절에 맞게 오늘 첫눈이 내렸다. 나무는 꽃과 잎을 모두 버렸다. 벌어진 열매 속으로 하늘의 소식이 들어가고 있었다.

대열을 벗어나 잠깐 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정상에서 기습 고함도 질러볼까. 직접 인왕의 안부도 살피고 싶었다. 아뿔싸, 등산로가 폐쇄되었다. 성난 목소리는 이미 북악산 꼭대기까지 넘실대고 있었다. 둘레길을 걷다가 청와대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섰다. 무무대(無無臺)이다. 돌판에 그 뜻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 왜 아니겠는가. 참여자 150만명에 연행자 0명, 부상자 0명이다. 대통령이 내팽개친 국격을 거리의 국민들이 쌓아올리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저 아름다운 품격을 보라!

산에 갔다 온 사이 밤은 깊어졌고 국민들은 늘어났다. 도로에 송곳 하나 세우지 못할 만큼 빽빽했다. 경찰차에는 꽃 스티커도 많이 붙어 있다. 그 사이 무궁화는 여전하다. 이 함성, 이 물결, 이 느낌. 공중을 가득 채운 파동을 무궁화도 흠뻑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년 봄에 얼마나 본때 있게 피어날까, 골똘한 생각에 잠긴 무궁화. 우리나라의 꽃, 무궁화. 아욱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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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피치 못할 사정이 겹쳐 최근 산으로 가지를 못했다. 권력의 단물에 취한 이들이 거짓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에 어안이 벙벙해지기를 여러 날. 일손도 잘 잡히지 않았다. 이번 주 이 코너의 글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대선 때 이런 말이 있었다. 굳이 바닷물을 다 둘러 마셔야 바다가 짜다는 걸 알겠느냐. 한 방울만 맛보아도 충분하다. 우리 시대의 안목을 생각하며 머리를 빙빙 굴려보지만 쓰디쓴 입맛만 다셔야 했다. 그러다가 밤늦게 <다큐멘터리 3일>을 보게 되었다. 이번 주는 ‘어느 멋진 날’이라는 제목으로 최고의 단풍을 자랑한다는 내장산의 72시간을 다룬 것이었다. 과연 내장산의 단풍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넘어선 곳에 있었다. 저런 고운 단풍이 있어 한 해를 마무리하는 허허로움을 의지하는가 싶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저토록 울긋불긋하게 타올라 산하를 물들이는 단풍은 주말이면 전국 곳곳에서 타오르는 촛불과 어금버금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멋진 날에 어울리는 단풍만큼이나 아름다운 건 그래도 사람들이었다. 내장산에서 단풍구경하는 분들은 다들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절에 들러 비는 소원도 그저 가족의 건강과 안녕, 막내의 대학 진학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다. 어느 할머니는 백양사 사천왕문을 지나면서 이런 말씀을 남기시기도 했다. 그저 죄짓지 말고 살아야지!

어지러운 심사로 텔레비전 속의 단풍을 보는데 몇 년 전 내장산으로 희귀식물 조사 갔던 생각이 떠올랐다. 목적했던 말나리, 진노랑상사화, 백양꽃, 은꿩의다리를 관찰하고 내려오다가 금선계곡 길섶에서 인상적인 꽃을 만났다. 가늘고 긴 가지마다 세 장의 잎이 어긋나게 달리고 작은 나비 모양의 꽃이 다닥다닥한 야생화. 생긴 모습보다는 그 이름으로 먼저 기억되는 도둑놈의갈고리였다. 선글라스를 꼭 닮은 열매에 잔털이 많아 다른 물체에 잘 들러붙는다 하여 이런 애꿎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최근 ‘식물대통령’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식물들이 들으면 퍽 섭섭하겠다. 그처럼 도둑놈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도둑놈의갈고리, 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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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김기림의 시 한 구절도 떠올리며 시냇가를 훑었다. 여기는 정선의 덕산기 계곡. 야생화 생태계가 다종다양해서 올봄에도 왔었다. 물에 반쯤 잠긴 바위에 올라앉아 일거에 눈길을 사로잡던 진달래. 풍경이 풍경을 복사하여 더욱 풍성한 풍경을 만들어내던 시간이 엊그제 같았다. 봄, 여름, 가을이 차례차례 다녀가고 이제 겨울이 와서 ‘차렷!’ 하는 계절이다. 꽃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갔다. 지금은 꽃산행이라기보다는 꽃관찰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 꽃을 탐하던 시선에서 벗어났더니 돌멩이 하나, 물 한 방울도 다 꽃으로 보인다. 그리 넓지 않은 계곡. 또랑또랑한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동요도 부르면서 이렇게 꼬부라져 돌아가는 시냇가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옛 생각이 난다.

예전의 나는 물속에 있었다. 여뀌를 풀어 물고기를 잡았다. 제법 큼지막한 돌을 뒤집으면 곤히 쉬다가 놀란 물고기가 족대에 걸려들었다. 잡은 물고기를 고무신에 담아놓으면 죽어가는 그것들이 뱉어놓은 허연 거품. 더러 어떤 돌에는 쏘가리가 슬어놓은 알이 붙어 있기도 했다. 아, 그게 별미라고 혓바닥을 내밀어 핥아먹기도 했던 미련한 시절. 물속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과 물 바깥에서 꽃을 찾는 것 사이에 지나간 삶이 축약되어 있다. 물속에서 물 바깥으로 난 길의 몇 발짝에 보잘것없는 한 인생이 퇴적되어 있는 것.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일어나듯 골짜기 사이로 끊임없이 물이 흘러갔다. 이런저런 시절을 통과하여 고무신에서 등산화로 바꿔 신고 걸어가는 오늘. 멀리 냇가의 조약돌 사이로 우뚝한 익모초가 보인다. 겨드랑이마다 촘촘하던 꽃잎은 다 떨어지고 싱싱한 색감도 시나브로 사라졌지만 훤칠한 대궁이 쌀쌀한 날씨를 배경으로 더욱 날씬하게 보이는 익모초. 머지않아 잎도 떨어지고 줄기와 열매만이 남아 미라처럼 보이겠지만 그 자세와 기품은 그대로! 이로울 익(益), 어미 모(母). 익모초, 그 이름으로 많은 것을 말하는 꽃. 꿀풀과의 두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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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발갛게 달아오른 단풍이다. 무언가 모종의 조짐이 일어날 듯 울긋불긋한 색깔이다. 그동안 공중에 숨어 있었던 날카로운 바람들이 찬 기운 몰고 서울로 몰려갔다.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결판을 내겠다는 기세인 듯했다. 오래전 약속에 따라 꽃동무들과 그 바람을 거슬러 간 곳은 경기도 연천의 보개산이었다.

몇 해 전에 본 연천 은대리의 물거미는 지금도 안녕하신가.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집을 짓고 새끼를 낳고 살아가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거미다. 물속에서 물 바깥을 보면 어떤 모습일까. 오늘처럼 이리도 세상의 상식이 물구나무선 적이 또 있을까. 물거미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빠끔빠끔 올라오는 기포를 통해 거미의 근황을 미루어 짐작만 했다.

복자기나무가 유난히 빨간 계곡 입구에 그리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사찰은 최근에 지은 티가 역력했지만 절의 내력이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다. “보개산 심원사는 옛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로 석대암, 남암, 지장암, 성주암 등 여러 암자를 관할하던 지장도량의 본산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에 창건되어….” 금강산 유점사라는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흥건해졌다. 환갑을 목전에 둔 내가 생전에 그곳으로 뜻깊은 꽃산행을 할 수 있을까, 무망한 소망을 떠올려보는데 개울 건너편에서 꽃동무가 번쩍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 큰 소식을 담은 호외를 뿌리는 소년의 목소리 같았다. 좀바위솔이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저 아득한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공손하게 지나가는 바위 곁에 이끼도 아니고 고사리도 아닌, 일반적인 식물의 형태와 뚜렷이 구분되는 야생화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그곳에 그것이 없다면 그 자리는 필시 텅 빈 구멍이었을 것이다! 흙 한줌 없는 곳일지라도 꽃과 바위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자연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하도 대견하고 엄숙하고 고마워서 바투 코를 대고 킁킁거려 보지만 아무런 냄새나 향기조차 없다. 여보게, 이 바위에서 연원하는 이 깊은 침묵의 뿌리를 한번 즐겨보시게. 따끔하게 충고하는 듯한  좀바위솔. 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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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의 갑장산으로 가는 꽃산행. 상주보를 지나며 콘크리트로 성형수술한 낙동강을 보려니 쓴맛이 저절로 나왔다. 이윽고 갑장산으로 좁은 길을 올라가는데 좌우로 야생화들이 쌀쌀한 날씨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단풍이 드는 계절이었다. 꽃보다 잎이 더 예쁘네, 하려다가 말을 거두었다. 꽃은 꽃대로 잎은 잎대로 아름다울 뿐이다. 믿지 못할 눈을, 그것도 두 개나 가졌다지만 안목이 없다면 사기꾼이나 무당도 하늘같이 보이겠지.

산으로 들면 미련스럽게 꽃을 찾아 연신 눈을 두리번거린다. 그런 나에게 마지막까지 미끼를 던져두듯 핀 꽃들이 있다. 햇빛이 풍부하지 않고, 비가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겨울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그리 뛰어난 꽃은 아니겠지만 전국 어디에서나 가을이 깊도록 보랏빛 색감을 뽐내며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꽃, 꽃향유!

진동하는 꽃내음을 입안에 넣고 중얼거리며 갑장산 정상에 올랐더니 이런 표지석이 있다. “갑장산(甲長山). 일명 연악으로 불리는 상주의 안산(案山)이다. 정상은 상주 사람의 순후한 인심을 대변하듯 뾰족하면서도 모나지 않고 둥글다.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고, 부정한 매장을 하면 가뭄이 들었다는 영산(靈山)이요 상주 문학(文學)의 요람이다.”

상주 시내를 통과할 땐 곶감을 생각했는데 정상에 서서 이런 문장을 보자니 우리 시대에 시, 소설, 평론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 지역 출신의 몇몇 문인이 떠올랐다. 멀리 문필봉 아래로 굽어보는 상주 들판이 원고지처럼 촘촘했다. 과연 상주로다. 높은 산의 정상 표지석에까지 이런 글을 새겨놓다니! 곶감으로 일군 상주의 달달한 문장은 이렇게 길고 멀리 높게 퍼져 흐르는가 보다. 이런 것이야말로 문학의 힘이겠다.

오늘은 원점회귀 산행이었다. 내려갈 때 보았다, 올라갈 때 봤던 그 꽃향유. 이 야생화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모양새가 조금 특이하다. 우리의 얼굴이 밋밋한 뒤통수를 배경으로 이목구비가 한쪽으로 모여 있듯 꽃이 한쪽으로만 달려 있다. 한갓지고 무심한 곳에서 저물어가는 한해를 이윽히 바라보고 있는 꽃향유. 꿀풀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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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을 연속적으로 꾸려가는 동안 내 의지처가 되어준 산들이 있다. 납작한 나를 굽어보던 그 산의 능선을 죽 이으면 요약된 삶의 궤적을 그릴 수도 있으리라. 하루살이에게도 대체불가능한 저만의 일생이 있을진대 비록 초라하다 해도 나에겐 유일하고 엄숙한 지금까지의 삶이었다. 그러니 그 산의 정상을 밟았다는 말은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그 표현은 스스로 내 흔적을 훼손하는 일일지도 모를 테니깐.

늘 그곳에 있으면서 내 정신을 고양시킨 산들은 다음과 같다. 삼봉산, 우룡산, 장산, 관악산, 일자산, 고봉산, 인왕산, 그리고 심학산. 열거한 산들 중에서 딱 하나 못 가본 곳이 있었으니 부산의 동래에 있는 장산이다. 공부밖에 모르도록 내몰렸던 시절. 청마 유치환이 작사한 교가에도 등장하는 산이었다. “우람히 굽이쳐 온 아세아의 거창한 얼이 여기 장산 기름진 벌 끝 그 염원을 이루었나니….”

아마 졸업식도 교가 제창으로 끝났겠지. 지난주 고등학교를 떠난 지 40년 만에 장산에 오르자니 단순한 꽃산행의 흥취를 뛰어넘는 그 어떤 감정이 일어났다. 그저 학교 뒷산인 줄로 알았던 장산이 이리도 큰 산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단순히 높고 넓기만 한 산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 물을 공급하는지 정상 부근에 큰 습지가 있었다. 그리고 빽빽하게 우거진 억새와 진퍼리새 사이에서 탐스러운 야생화가 나를 불렀다. 물매화였다.

물매화는 이미 여러 번 본 꽃이다. 내 이제껏 이 꽃을 호명하지 않았던 건 장산의 물매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 뿌리는 가늠할 수 없는 저 흙 속에 있고, 가는 줄기가 홀로 우뚝하게 솟았다. 공중으로 그냥 오르기에는 심심한 듯 심장 같은 잎 하나를 중간에 두고 쭉 뻗어 올랐다. 꽃에서 잎까지의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인 듯한 야생화!

산행을 마치고 자갈치로 갔다. 어깨동무하고 교가를 우렁차게 합창했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맑은 소주와 붉은 회. 이제는 거룩해진 옛시절을 끄집어내며 단풍잎 같은 얼굴로 잔을 부딪칠 때마다 추억의 기슭에서 피어난 물매화가 얼비쳤다. 물매화, 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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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의 늦은 휴가. 경주에서 1박 하고 동해안의 해파랑길을 따라 북상하기로 했다. 강구항에서 물회로 점심을 때우고 삼척 부근을 지나는데 바닷가에 맞붙어 우뚝한 엘리베이터가 있고 큰 조형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수로부인에게 견우노인이 꽃을 꺾어 바친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꾸민 ‘수로부인헌화공원’이었다. 공원 한 귀퉁이의 안내판. 삼국유사의 원문에서 꽃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고천장 상유척촉화성개(절벽 높이가 천 길이요, 그 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척촉화는 철쭉이다. 척촉의 훈을 새기면 머뭇거릴 척, 머뭇거릴 촉이다. 마음을 홀랑 뺏어가는 너무나 아름다운 꽃이었으니 그 앞을 좀체 떠나지 못하고 머뭇, 머뭇거린다 하여 척촉, 철쭉이라고 한 것이겠다.

7경주에서 삼척까지 오는 동안 즐비한 횟집과 모텔 사이로 이런 간판도 간혹 눈에 띄었다. ‘○○요양병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앞둔 어르신들이 모여서 머무르는 곳이다. 시간의 절벽에 매달린 한 송이 철쭉꽃처럼.

제철도 아닌 시기에 철쭉을 불러내는 건 까닭이 있다. 시절이 하수상해서 그런가. 지난 주말 상주의 황금산에서 개나리를 보았다. 겨울의 입구에서 만난 뜻밖의 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활공장이 있는 정상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낮은 자세로 활짝 피어 있는 건 철쭉이 아닌가. 급격한 기후변화의 와중에서 시절을 잘못 알고 어리둥절 서 있는 철쭉.

수상한 건 산중만이 아니다. 최근에 읽은 한 뉴스는 이런 절규를 담은 것이었다. 물대포에 맞아 돌아가시고도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한 주검 앞에서 모욕당한 유족은 이런 글을 토하며 피울음을 삼킨다.

“저희들은 이미 충분히 아프고 슬프다. 부디 사람의 길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 까마득한 신라 시대. 물의 길, 수로(水路)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생각해본다. 지나칠 수 있건만 외면하지 않고 절벽으로 오른 노인도 헤아려본다. 그런 머뭇거리는 마음들이 끈적끈적하게 묻어 있는 척촉화도 떠올려본다. 철쭉, 진달래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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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식물탐사대의 올해 마지막 산행지는 경북 상주의 황금산이었다. 며칠 전 내린 비의 밧줄을 타고 공중의 먼지들이 모두 내려앉았나. 고개 들어 전방을 오래 바라보면 모두가 걸어가야 하는 쓸쓸한 그 길이 희미하게 보일 듯 깨끗한 하늘!

가을이 저물고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산으로 가는데 오늘 기대하는 꽃보다 어느 해 보았던 열매의 근황이 먼저 내 머리를 두드렸다. 이곳은 어디인가. 바로 몇 해 전, 정상 부근에서 산딸기를 따서 어머니께 갖다드렸던 곳이 아닌가. 그사이 계절은 순서를 맞춰 다녀갔고 우리는 어김없이 그만큼 늙었다. 그땐 훅훅 볶아대는 땡볕이었는데 오늘은 찬 기운이 시작된다는 한로(寒露) 다음날. 변화는 또 있었다. 그때 황금산에서 딴 산딸기를 잡수시고 멀리 고향 하늘을 날았던 어머니는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 몹시 아프시다.

황금산을 헤매는 동안 병석에 계신 어머니와 산딸기 생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인 황금들판을 지나 본격 산으로 들어가는데 빨간 열매가 있다. 산딸기인가 했더니 찔레꽃 열매였다. 포도 같은 열매가 있어 또 속고 보니 댕댕이덩굴이었다. 멀리서 꼭 딸기만 한 크기에 빨간 열매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진짜 산딸기인가.

그것은 청미래덩굴이었다. 이 나무는 사실 흔해서 어느 산에 가더라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가을도 기울어 꽃과 열매가 사라져도 혼자 빨갛게 남아 허전한 이들의 타는 시선을 받아주는 나무. 윤기가 반질반질한 잎은 향기도 좋아서 망개떡을 싸는 데 쓰이기도 하는 나무. 임도를 따라 오르는데 산딸기를 대신해서 그 열매가 계속 따라왔다.

몇 굽이를 돌아 정상에 올랐다. 어머니께서 잡수신 산딸기는 아마 이 근처에서 딴 딸기였을 것이다. 알알이 뭉쳐 있는 청미래덩굴의 열매 하나를 따서 입에 넣었다. 물기가 빠져나간 퍼석한 느낌. 처음엔 밍밍하더니 나중엔 쓴맛이 입안을 찔러왔다. 어머니는 지금 어느 창천에 마음을 얹어놓고 계실까. 네 개의 씨앗을 사리처럼 손바닥에 뱉어내면서 쓴맛, 인생살이의 그 씁쓸한 맛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청미래덩굴, 청미래덩굴과의 낙엽성 덩굴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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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납작하게 산다. 그림자 위에서 폴짝 뛰어보아도 결국 제자리로 떨어진다. 고래등 같은 푸른 기와집에 살아도, 깎아지른 벼랑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납작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환갑을 목전에 둔 현재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기일(忌日)을 지나서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 생일에서 기일까지만 사는 것, 자리에 임기가 있는 것, 목숨에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있는 것. 이 또한 모두 납작하게 사는 것의 한 증좌라 할 수 있겠다.

서울에서 옆으로 납작하게 뻗은 길을 달려 강원도로 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간다. 등이 가벼우면 저항할 게 없어서 허전하다. 그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닐까. 한때는 높이 솟은 고갯길이었지만 새로 터널이 뚫렸다. 이제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 칡넝쿨이 도로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인적 끊긴 고갯마루에는 무슨 전설(傳說)이 살고 있을까.

꽃 하나를 찾아 휘어진 모퉁이를 돌 때, 인기척에 놀라 풀섶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나는 또 그만큼 움푹 꺼졌다. 난데없는 즉석 추락을 당한 셈이다. 새삼 납작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동글동글한 해도 많이 짧아졌다. 낮과 밤이 어둑어둑 교차하는 시간. 내 눈에 편집된 강원도의 하늘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어느 옴방하게 파인 공간에 작은 꽃들이 일가를 이루며 빼곡하게 들어찼다. 병아리풀이다.

이 풍경에서 실핏줄처럼 서 있는, 작아도 너무 작은 야생화. 작지만 그래도 갖출 건 모두 다 갖추었다. 한쪽 방향으로 꽃과 열매가 달렸다. 병아리라 그런가. 꽃 껍질 안으로 노른자 같은 꽃들이 똘방똘방하다. 병아리풀이 손가락만 한 높이라서 땅바닥에 엎드리니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우리가 아무리 까불며 뱅뱅 돌아다녀도 결국은 식물들의 품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쩍였”(이상)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그렇지만 꽃마저 납작한 건 아니었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가장 무거운 하늘을 안간힘을 다해 들어 올리고 있는 저 병아리풀을 보라! 병아리풀, 원지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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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하게 울어 젖힌 매미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난 이후, 숲의 적막을 헤치고 나아가다 개미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개미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는 몇 개 있다. 곤충들 중에서 가장 사회성이 발달하였다는 개미. 사람보다 먼저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 개미. 인류가 멸망하고 나면 지구의 새 주인이 될 확률이 가장 높다는 개미.

최근에는 이런 경험을 보탰다. EBS 다큐영화제에서 인상적으로 본 <존 버거의 사계>의 장면 하나. 아이들이 공을 차다가 교실 유리창을 깼다. 쨍그랑. 창문 박살나는 소리에 모든 아이들이 놀라 얼굴을 서로 쳐다본다. 유리창의 파편이 흩어진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한 건 선생님이 아니라 개미였다. 누가 내 구역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나, 하는 투로 운동장을 둘러보는 게 아닌가.


지금은 내 발밑에서 꼼지락거리지만 실은 개미가 제 발밑으로 내가 오기를 항상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을 때, 강원도 망상 근처의 한 야트막한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멀리 벙어리 파도가 철썩이고 흰 구름이 한가로이 떠 있는 풍경이었다.

멀리 그 야생화가 보였다. 지체없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오늘 목표로 한 꽃, 큰잎쓴풀이었다. 이 꽃은 아주 귀하다. 아무데서나 함부로 볼 수 있는 꽃이 아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에 와서 햇빛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꽃이다. 일조량에 아주 민감해서 햇볕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꽃잎을 닫아버린다. 저를 보겠다고 이리도 먼 길을 달려온 사정을 꽃이 봐 줄 리가 없는 것. 해질녘에 도착했더니 꽃이 입을 다물기 시작하는 판이었다. 집중해서 사진을 찍는데 어라, 개미 한 마리가 꽃잎 안으로 들어와 꿀샘을 빨아대지 않는가.

고독한 사냥꾼처럼 개미가 큰잎쓴풀의 꽃을 빠져나와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았다. 개미가 제 소굴을 찾아가듯 나도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 개미가 떠나고 왜 쓴풀일까를 생각하면서 잎사귀 하나를 조심스레 따서 입에 넣었다. 소태처럼 쓴맛이 혀를 찔렀다. 개미에게는 꿀을, 나에게는 쓴맛을 준 큰잎쓴풀. 용담과의 두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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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 흩어진 형제들을 새삼 한번 떠올려보라 함일까. 이 계절의 하늘은 높고, 높아서 더욱 잘 보인다. 사무실 근처 가로수인 상수리나무의 가지 끝에 둥지가 있다. 하늘은 한꺼번에 보는 게 아니었다. 무궁한 하늘을 바라볼 때면 먼저 내 허전한 시선을 받아주는 까치의 둥지. 새들도 잠시 깊은 산 가까이로 나들이를 한 것일까. 나무보다 키가 낮아 둥지 안을 볼 순 없지만 어쩐지 텅 빈 기운이 묻어나온다. 긴 추석 연휴를 보내는 동안 심학산 오르다 말고 새의 둥지를 징검다리처럼 짚고 나아간 곳은 며칠 전 가본 가평의 화악산이었다.

경기도의 최고봉 화악산. 그 꼭대기에 오르니 정상인 신선봉은 군부대의 차지이고 ‘화악산 1463M’의 표지석은 근처 봉우리로 쓸쓸히 밀려나 있었다. 촬영금지, 접근금지라는 위압적인 팻말이 붙어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계마다 꽃들이 피어 있다. 철조망을 따라 길도 아닌 길을 한 바퀴 걸으니 몸의 균형이 기우뚱해졌다. 안 쓰던 근육들도 합심해서 겨우 긴 덤불을 빠져나와 넓은 임도의 갈림길에 이르니 멀리 발아래 인가가 보이고 구름이 눈썹을 쳤다.

먼저 간 일행이 점심 도시락을 펼치는 가운데 돌더미 사이로 듬성듬성 피어난 건 구절초. 껑충한 대궁, 고아한 색감, 맑게 씻은 얼굴 등등 가을의 정기를 다 그러모은 듯 기품이 흘러넘친다. 음력 구월 구일에 대궁을 잘라 약으로 쓴다 하여 구절초. 지금은 음력 8월 보름인 추석 어름을 지나는 중이다. 그런 명절과 어우러져 생각나는 건 왕유의 시, 구월구일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였다. “홀로 타향에서 나그네 되니/ 명절 때마다 고향 생각 더욱 간절하다/ 멀리서도 알겠지, 높은 곳에 오른 형제들/ 산수유 꽂으며 놀다가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런 시심에 흥건해진 채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한 무더기씩의 구절초가 툭툭 튀어나온다. 구절초 아홉 송이를 찍다가 돌아보면 또 벼랑 위에 소복하게 피어 있는 구절초. 이러니 구절초 앞에선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 예쁜 게 따로 없는 구절초, 그저 다 황홀한 구절초. 이심전심인가. 저도 그렇다는 듯 구절초 향기를 잔뜩 묻히고 팔랑거리며 지나가는 청띠신선나비! 구절초,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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