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에 해당되는 글 185건

  1. 2016.08.16 송장풀
  2. 2016.08.09 좁쌀풀
  3. 2016.07.26 병아리난초
  4. 2016.07.19 솔나리
  5. 2016.07.12 신나무
  6. 2016.07.05 통보리사초
  7. 2016.06.28 용머리
  8. 2016.06.21 갯강활
  9. 2016.06.14 등심붓꽃
  10. 2016.06.07 조름나물
  11. 2016.05.31 물참대
  12. 2016.05.23 덩굴꽃마리
  13. 2016.05.16 귀룽나무
  14. 2016.05.09 금낭화
  15. 2016.05.02 꽃마리
  16. 2016.04.25 [이굴기의 꽃산 꽃글]매미꽃
  17. 2016.04.18 벚나무
  18. 2016.04.11 모데미풀
  19. 2016.04.04 현호색
  20. 2016.03.28 깽깽이풀

헥헥헥거리며 심학산 정상에 다다랐을 무렵 파드득 하는 기척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말벌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매미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이종(異種)간의 결합이니 짝짓기는 분명 아니었다. 아이쿠, 말라 비틀어진 낙엽 사이에서 생사(生死)를 걸고 벌이는 난투극이 아닌가. 벌이 침이라도 놓았는지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뻣뻣해진 사체를 두 토막으로 나누어 챙긴 말벌이 저의 소굴로 휙, 날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자리를 떴다.

며칠 전에는 미국 뉴욕의 보태니컬 가든에서 시체꽃이 80년 만에 피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다. 꽃에서 고기 썩는 냄새가 나서 저런 고약한 이름으로 불리는 시체꽃. 언젠가 죽는다는 운명을 알아차리고 미리 예방주사라도 맞는 기분이었을까. 그 거대한 꽃을 보려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룬다고 하는 뉴스를 보자니 시체꽃에 필적하는 우리나라의 꽃 하나가 떠올랐다.

<메밀꽃 필 무렵>은 지금 읽어도 자연의 향기가 듬뿍 담긴 현대적인 소설이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넘긴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고 할 때의 대화. 강원도 평창의 그 대화 근처에 있는 대원사 계곡을 훑을 때의 일이다. 아득한 저 위쪽에서 복사꽃잎이라도 하나 떠내려 올 것만 같은 청량한 개울의 가장자리마다 물소리에 홀린 귀한 야생화가 드문드문 살고 있었다. 한참을 올랐나. 개울은 어디론가 문득 숨고 암자 옆으로 가파른 고개가 나타났다. 사람의 자취에 닳고 닳은 등산로를 살짝 벗어난 곳에서 그 이름을 좀체 잊을 수 없는 꽃을 만났으니 송장풀이었다.

질컥한 이름에 비해 아름답기 그지없는 야생화다. 줄기 상부의 잎겨드랑이에 층층이 연분홍의 꽃이 피어난다. 한여름 땡볕에 꽃은 절정이고 무언가 고함이라도 치는 듯 꽃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는 송장풀. 잎이나 꽃에 코를 들이대어도 고약하기는커녕 향기로운 냄새뿐이다. 그래도 혹 이름과 관련한 무슨 사연을 품고 있지 않을까. 납작 엎드리면 지하에서 누가 보고서 뭐라고 명명(命名)하고 군침을 흘리실지! 송장풀,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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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응시명월 기생수도매화(前生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십수년 전 중앙일보에 게재된 한 칼럼에서 저 12글자를 만났을 때 한마디로 뻑, 갔다. 틈나는 대로 중얼거리며 필사하였다. 나의 전생은 분명 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을 닦아야 매화가 될꼬. 달-시인-매화로 연결되는 숙연(宿緣)의 한 고리에 나도 끼어들고 싶었다.

그런 사무친 생각의 원력이라도 작용한 것이었을까. 땡볕 속의 인왕산을 한창 오르내릴 때 이런 궁리가 문득 찾아들었다. 여름이 지배하는 계절에 매미 소리는 인왕산을 도배하고 있는 중. 우렁찬 울음이 인왕산을 뒤덮고 있다. 매미는 땅에서 오지만 매미 소리는 땅으로 떨어진다. 자욱한 녹음 사이에서 귀가 먹먹한 가운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혹 매미의 전생(前生)은 눈이 아니었을까. 시방 우는 매미가 환생해서 다시 눈사람으로 태어나는 건 아닐까. 펄펄펄 내리는 겨울의 눈과 맴맴맴 우는 여름의 매미 소리는 그런 인연의 관계가 아닐까. 너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마음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사시(四時)는 명확한 법칙 속에 움직이는 바 어김없이 지금은 또 올해의 여름 땡볕이다. 최근 마음속에 짚이는 바가 있어 새삼 하늘을 발견하고 그곳을 가까이 해야겠다는 감정이 일어났다. 근래 들어 산으로 가는 발걸음을 부쩍 늘린 건 현재로서는 직접 바로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다. 그나마 우회로라도 되는 한 방편이 될까 싶어 산길을 찾는 것.

오늘은 사무실 가까이 있는 심학산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식당을 지나면 배밭이 있다. 이화(梨花) 진 자리마다 배가 몽글몽글 올라오고 그 아래로 발목이 빠질 만큼 수북한 풀들 사이에 눈에 띄는 꽃 하나. 종재기처럼 작은 꽃 안에 매미 소리가 수북하게 담겨 더욱 노랗게 보이는 꽃, 좁쌀풀이다. 지난주 정선과 태백을 잇는 만항재에서도 보았던 꽃이라 더욱 반갑다. 좁쌀풀도 그저 그냥 아무 궁리 없이 서 있지는 않겠지. 쏟아지는 매미 소리를 폭설 오는 광경으로 치환해서 전해주면 저도 알아듣겠다는 듯 반짝 호응해주는 좁쌀풀.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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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애꿎은 돼지가 등장하는 뉴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교육부의 어느 고위공무원이 민중을 개·돼지로 여겨야 한다는 굳건한 소신을 영화 대사를 콕 집어 인용하여 내뱉었다. 미국에서 날아든 돼지 뉴스는 차라리 나았다. 공화당 대선주자인 트럼프의 첫 번째 회고록을 저술한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나는 돼지에게 립스틱을 발랐다”고 쓰라린 후회를 밝힌 것이다. 잊을 만했는데 북한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 민가에까지 출현한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요즘의 신문을 보면 분탕질을 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자들이 힘 있는 곳에 우글거리는 형국이다. 이런 판이라면 우리 사는 세상이 돼지우리와 별반 뭐 그리 다를까. 이런저런 씁쓸한 심사를 짊어지고 횡성군 청일면으로 갔다.

난다긴다 하는 곳의 지저분한 소식에서 한 발짝 비켜난 한갓진 동네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기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쪼그만 개와 날씬한 노루가 골목길을 산책하고 있지 않은가. 장뇌삼을 캐러 개(똘이)와 함께 간 주민이 어미를 잃은 채 아사 직전에 놓인 노루(산돌이)를 데리고 와서 우유로 기르는 중이라 했다. 똘이는 제가 처음 발견했다고 산돌이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상당한 미모의 산돌이에게 이방인이 손이라도 대면 요란하게 짖어댔다.

참 오리무중의 세상이다. 무엇이 이곳에 살고 누가 저곳에 있는가. 말을 못하지만 거짓말도 안 하는 똘이와 산돌이가 아침을 먹으러 2층 계단으로 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근처 운무산으로 떠났다. 항상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고 그 이름을 얻은 산이다. 이름이 제공하는 습기의 덕을 보았나? 운무산에는 귀한 꽃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오늘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위틈에 자라는 병아리난초였다. 바닥에 납작 붙은 넓적한 잎을 딛고 가느다란 줄기가 뻗어올랐다.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 번 쳐다보는 병아리떼처럼 분홍색 꽃들이 횡으로 총총하다. 저 멀리 첩첩산중을 굽어보며 꿈꾸듯 서 있는 운무산의 병아리난초.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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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멀리서 보면 작은 구멍에 불과하지만 그냥 눈감고 통과하기엔 억울하지 않을까. 무언가 수런거리는 예감이 고여 있는 곳이기에.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수렴한 뒤 어마어마한 세계를 확 펼쳐보일 것이라는 기대가 집약된 곳이기에. 그런 몇 개의 터널을 통과해서 강원도로 갔다. 강원도는 왜 강원도일까. 강릉과 원주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지만 그것으로는 미흡하다. 강원, 강의 원천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실제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는 모두 태백에 있지 않은가.

산이 높아 골짜기가 깊고 그래서 도로가 겹겹이 휘모리장단처럼 구부러지고 휘어지며 돌아드는 강원도. 아무래도 이곳 도로는 관절이 허약한가 보다. 이번 장마로 곳곳마다 파여나간 곳을 보수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남해로 가기 위해 경상도를 누비는 낙동강, 황해를 향해 서쪽으로 흘러가는 한강, 그리고 동해의 강릉으로 미끄러지는 오십천. 이 세 강을 뜻하는 삼수령(三水嶺)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느 한 길모퉁이를 돌아들 때 길가에서 눈에 확 띄는 꽃이 있다. 모모한 높은 산에 가서도 보기가 쉽지 않건만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만날 줄이야.

솔나리였다. 오로지 하나의 줄기 끝에 여러 송이의 압도적인 꽃들을 터뜨린다. 씽씽 달리는 차들이 궁금한 듯 길 안으로 눈길을 던지는 솔나리. 오늘 내 앞에 들이닥친 솔나리는 무려 10개가 넘는 꽃을 달고 있는 것도 있다. 백합과의 나리는 얼굴이 닮은 사촌들이 많다. 말나리, 중나리, 하늘나리, 참나리, 땅나리 등등. 그중 솔나리는 솔잎처럼 가느다란 잎이 뿜어져나오는 분수처럼 달려 있는 게 특징이다. 그 잎들이 줄기의 하부에서 꽃들을 힘껏 응원하고 있는 듯해서 더욱 보기에 좋다.

해발 높은 길가에서 만난 솔나리. 같은 물, 같은 햇빛을 섭취했을 텐데도 운명이 다들 다르다. 이미 활짝 핀 것도 있지만 절정을 지난 듯 색감이 희미하게 총기를 잃은 것도 있다. 그중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이미 피어난 꽃들 위에 묵묵히 달려 있는 꽃봉오리였다. 세상을 향한 포부를 가득 담고 있는 꽃봉오리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오늘 내린 비가 밖에서 실컷 두드렸으니 내일이면 더욱 활짝 피어날 솔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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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서울로 외출하여 인왕산을 보는데 매미 생각이 났다. 내 일천한 관찰에 따르면 비가 오면 매미는 울지 않는다. 아무리 울어보았자 빗소리에 제 울음이 잡아먹힌다는 것을 매미는 잘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매미는 비가 그치는 기색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린다. 그래서 비가 그치자마자 그간의 참았던 울음을 시원스레 토해낸다.

여름의 땡볕을 달구었던 그 매미 울음들을 생각한다면 매미의 개체수도 대단할 것이다. 서울에 사는 시민과 서울에 소속된 나무만큼이야 안되겠지만 만만찮은 숫자이다. 죽음에 순서가 있는 건 아니라 해도 시민들은 그래도 차례차례 서울을 떠난다. 한꺼번에 왔다가 왕창 울어 젖히는 매미는 떠날 때도 한꺼번에 그냥 몽땅 떠난다.

인왕산에서 한바탕 논 매미들. 그들의 영혼이 떠난 사체들은 어디로 갔을까. 상식적이라면 내리는 빗물에 저항하지 못하고 물살에 떠밀려 인왕산 둘레의 하수구는 매미의 사체들로 뒤덮여야 할 것이다. 작년 가을엔 그게 궁금해서 인왕산으로 뻣뻣한 매미를 찾으러 일부러 가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매미의 흔적은 없었고 매미 소리의 여운만이 숲을 휘감고 있었다. 인왕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 계단에서 풍장하고 있는 1구를 겨우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인왕산의 주인인 인왕이 매미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숲속에서 잘 수습해 거둔 것이라고 믿기로 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중이다.

올해 매미 소리는 언제쯤 나의 귓전을 두드릴까. 강원도 깊은 숲에서는 지금쯤 매미가 기지개를 켜고 있을 것이다. 아마 영리한 매미들은 도심의 소음을 이기기 위한 내공을 쌓은 뒤 이 야단법석의 세상으로 데뷔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

몇 해 전부터 산으로 들 때 주로 초입에 있으면서 눈에 확 들어오는 나무가 있다. 봄이 가고 여름의 기미가 올 때까지 작년 열매를 그대로 달고 있는 신나무이다. 멀리서 보면 매미들이 줄지어 나무의 가지에서 도움닫기라도 하는 듯한 형국이다. 오호라, 작년의 선공(蟬公)들이 여기에 모여 승천하기 직전이로군! 신나무, 단풍나무과의 낙엽소교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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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뚤귀뚤. 창문 너머에서 귀뚜라미가 운다고 창문 너머에 귀뚜라미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해수욕장에 그저 모래만 가득하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 그곳에도 해풍에 시달리며 키 작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지난달 동해안 어느 해변에 들렀더니 먼저 반기는 건 통보리사초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의연히 포즈를 취하는 녀석들을 보는데 몇 해 전 이들을 처음 보았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비금도 식물조사 동행 제안에 두말 않고 따라나선 건 꽃도 꽃이었지만 바둑기념관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금도는 섬이라는 나의 선입견을 간단히 제압한 뒤 제 높고 낮은 속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첫날 탐사를 마치고 간 숙소의 이름이 독특했다. 빨간집모텔. 천일염과 시금치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프로기사의 이름과 옥호를 작명하는 데에서 보듯 말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동네였다. 이름에 합당하게 간판과 벽을 온통 빨간색으로 치장한 건물의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빨간 소주에 빨간 안주를 먹은 셈이었다. 방으로 올라왔더니 벽지도 빨간색이었다. 빨간 잠을 자고 빨간 꿈을 꾸시라는 주인의 배려인 듯했다.

그렇게 매운 잠을 자고 일어나 둘째날의 탐사를 시작했다. 내심 바라던 대로 차가 초등학교를 개조한 이세돌바둑기념관의 운동장에 멈춰섰다. 행사가 없는 기념관은 바둑돌처럼 쓸쓸한 느낌이었다. 달맞이꽃이 듬성듬성한 뒷문으로 나가니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출렁이는 파도소리를 응원 삼아 자라는 통보리사초를 처음 보았던 것이다.

알파고와 멋진 대국을 펼쳤던 이세돌 기사가 독도에서 기념대국을 하였다는 뉴스를 그제 접했다. 사진을 보니 대국하는 모습 뒤로 독도의 풍광이 보였다. 독도는 비금도하고는 전혀 다른 섬으로 모래밭이 없다. 통보리사초가 자랄 형편이 못되는 것이다. 이세돌 선수가 어디에서 누구하고 붙는다 해도 비금도 해변의 통보리사초는 그를 힘껏 응원하지 않을까. 어깨너머로 배운 동네바둑에 불과한 실력의 소유자로서 그런 다소 엉뚱하고 싱거운 훈수를 두어보았다. 통보리사초, 사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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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한쪽에 화단이 있어 무엇을 심을까 고민이 깊어가던 차였다. 그렇다고 상투적인 식물을 함부로 심기는 싫었다. 당분간 전통적인 방식대로 방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런 처지를 딱하게 여긴 꽃동무가 도움의 손길을 주셨다. 부산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화단 가꾸기에 일가를 이룬 분이었다. 급기야 강원도로 꽃산행을 떠나는 길에 잠깐 방문해 화단을 정리해주셨다. 황무지 같던 시멘트 감옥이 아연 녹색이 철철 흘러넘치는 공간으로 변했다. 하늘매발톱, 왜솜다리, 부산꼬리풀, 은방울꽃, 꿀풀, 해국, 돌단풍, 용머리가 새 주소를 받았다. 목록 중 다 알 만했는데 용머리가 좀 낯설었다.

갑작스레 거주지를 옮긴 어리둥절한 꽃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강원도로 떠났다. 요산요수(樂山樂水)를 한꺼번에 체감하는 동해안 바닷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야릇한 낭만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카메라 들고 발밑의 싱싱한 고독을 캐내는 재미도 쏠쏠하기만 하다. 우리 국토의 등허리인 이곳에는 마치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모종의 힘이 비축되어 있기에 진귀한 꽃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여러 귀한 야생화들을 만났다. 방풍림으로 심은 해송이 우거진 어느 해변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분들이 있었다. 두 모녀가 무덤으로 진출하는 해당화를 제거하고 있었다. 해당화 뿌리가 산소로 들어가면 자손한테 안 좋대요! 내 고향에서도 벌초 때면 아까시나무가 수난을 당하는데 이곳에서는 해당화가 그런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참을 헤매었나. 마침내 꽃동무들이 소리를 질렀다. 용머리다! 드디어 야생의 용머리를 강원도 해변에서 찾았다. 치켜든 꽃대 끝이 정말 용의 머리처럼 꼿꼿했다. 색감 또한 강원도의 하늘빛과 동해의 물빛을 고스란히 포개놓은 듯했다.

최근 궁리출판 사무실 화단에도 용머리가 활짝 피었다. 색감이야 강원도의 그것에는 못 미치지만 꽃대만큼은 야무져서 어디 하나 꿇릴 것 없다. 강원도의 용머리가 모래밭에서 우뚝 돌출해서 무덤을 바라보는 것처럼 파주의 용머리도 화단 곁을 지나치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용머리,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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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의 지리 수업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토끼모양의 한반도 지형과 제주도를 그린 뒤 그 밑에 토끼똥처럼 작은 점을 두 개 찍었다.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인 가파도와 마라도이다. 이 세 섬을 넣어서 짧은 글을 지어보아라.

제주에 몇 번 가보았지만 마라도는 늘상 기억으로만 남았다. 전에는 틀에 박힌 관광코스를 돌아다니기에 바빴고 최근에는 한라산과 곶자왈, 해변을 관찰하기에 일정이 빡빡했다. 이번 제주 꽃산행은 모두 떠난 뒤 혼자 남았다. 마라도를 가보기로 했다. 누가 재작년에 우도에서 뚜껑별꽃을 보았다고 했기에 마라도에서도 혹 그 꽃을 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만약 그걸 발견한다면 그건 나의 꽃 이력에서 하나의 사건이 될 법했다.




망망대해에 모가지를 간신히 내놓고 겨우 존재하는 섬, 마라도. 제법 높은 절벽 옆으로 배가 접안하는 동안 마라도의 지형을 살펴보았다. 이렇다 할 식물은 없는 듯했고 따개비처럼 작은 건물들이 악착같이 붙어 있었다. 섬은 조금 넓기만 할 뿐 높이는 없었다. 식물들이 근육을 키울 계곡이나 능선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날카로운 절벽 근처에는 손바닥선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중 어느 한 무더기는 길 떠나는 가족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서귀포에서 잠시 살았던 이중섭의 작품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작은 섬에서 체류한 2시간 동안 특별한 꽃을 만나지 못했다. 큰개미자리, 괭이밥, 땅채송화, 순비기나무, 해국, 애기달맞이꽃 등을 눈에 넣었을 뿐이다. 제주도에서 노름하다 진 빚은 가파도 좋고 마라도 조타! 지리시간에 들었던 그 작문을 떠올리며 마침내 대한민국최남단 표지석에 섰다. 멀리 갯강활이 바다를 향해 전면적으로 서 있었다. 줄기 끝에 흰 꽃이 몽글몽글 모여 있고 나무처럼 단단한 느낌을 주는 식물이다.

내가 두 발로 갈 수 없는 곳에서 몇 발짝 더 남쪽에 서 있는 갯강활. 녀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글쎄, 여기는 최남단이니 남쪽으로 끝이긴 하겠지요. 하지만 그대가 오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디뎠던 그 모오든 곳도 땅끝이 아니었던가요? 갯강활,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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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연휴를 이용하여 제주도에 갔다. 첫 행선지는 당연히 한라산이었다. 숙소에서 영실에 도착할 때까지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시내에선 오던 비가 1100도로에 들어서자 맑았고,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공중의 기미가 아연 달라졌다. 영실에 도착해서 하늘을 살피니 그리 큰비는 아니었지만 바람이 몹시 사나웠다. 영실(靈室)인 이곳이 이러할진대 한라산의 꼭대기는 어떠할까 싶었다. 오름, 곶자왈의 계곡, 해변을 탐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안개에 잠긴 한라산을 우러르면서 고지대에 자란다는 깔끔좁쌀풀을 생각했다. 개화 시기가 많이 이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혹 볼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를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하산하는데 이수익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제주에 가면 꼭 한번 가보라던/ 애월, 그 바닷가 마을은/ 결국 가보질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잘된 일,/ 애월은 이제 ‘다음에…’ 하고 내 가슴 깊이 묻어둘/ 애틋한 그리움의 한 대상이 되었으므로”



산에서 내려와 먼저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시심(詩心)을 알 리 없는 무정한 자동차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이정표를 휙휙 지나쳤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애월이 있는 듯했다. 애월 아래를 지나칠 때마다 “가슴에 품고 싶은/ 작은 기생(妓生) 같은” 애월을 생각하면서 애월, 애월이라고 중얼거렸다. 한라산 꼭대기의 그 깔끔좁쌀풀도 생각하면서.

새별오름은 완만한 구릉이 발달한 큰 무덤 같았다. 이렇다 할 나무도 없이 잔디들만 새털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이번 제주도 탐사에서 또 하나 보아야 할 게 뚜껑별꽃이었다. 깔끔좁쌀풀이 높은 곳에 자란다면 그것은 해변이나 풀밭에서 자란다. 깔끔좁쌀풀과 뚜껑별꽃. 애월이 시인의 마음에 자리한 애틋한 장소이듯 실물을 보기도 전에 이름으로 먼저 심금을 울리는 꽃들이었다.

이날 나는 뚜껑별꽃도 찾지 못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꽃은 모습을 보여주지 아니 했다. 대신 등심붓꽃을 많이 보았다. 비록 손톱만큼 작은 꽃이지만 깎은 듯한 자태로 바라보는 눈을 홀랑 뒤집어놓은 꽃이었다. 북미 원산의 귀화식물로 허전한 내 마음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하나 없었던 등심붓꽃.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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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넘어 동해안으로 갔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틉틉한 날씨였다. 해변 도로에서 바다를 등지니 논이 펼쳐졌다.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었다. 논에 물이 가득했다. 이 물은 반은 지하에서 왔고 반은 하늘에서 왔을 것이다. 논두렁이 뱀처럼 구불구불 풀어져 있었다. 참 오랜만에 논두렁을 밟아보았다. 어릴 적엔 아주 익숙했지만 그동안 잊고 지냈던 풍경이었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5천만 마리래!”(정현종)라는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 찰진 흙 아래에는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는 미생물이 우글거리고 있다. 두툼한 등산화 바닥을 뚫고 논두렁의 폭신함, 다시 말해 작은 생명들의 꿈틀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 움큼’이 아니라 ‘한 숟가락’이라는 표현에 기대니 흙이 마치 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생각으로 논을 바라보았더니 이상한 전이가 일어났다. 논이 부글부글 끓는 술독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뱀처럼 풀어진 논두렁을 테두리로 하는 아주 잘 빚은 항아리!


술독은 고요히 끓고 있었다. 고두밥이 익어가는 것처럼 논에서는 흙이 익어가고 있었다. 독에 걸맞은 큰 발효균처럼 올챙이들이 꼬물꼬물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야흐로 순흙 막걸리가 맛좋게 익어가는 신호처럼 여기저기에서 큰 기포들이 뻐끔뻐끔 올라왔다. 멀리 울산바위가 보였다. 강원도의 산들은 작정하고 내려온 술꾼인 듯 항아리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바람도 집어넣으며 걸으니 논두렁 정기가 흠뻑 온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몇 다랑이의 논을 지나자 갈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습지가 나타났다. 그 사이에서 드디어 조름나물을 보았다. 이름으로만 듣던 멸종위기 2급의 아주 귀한 식물이다. 물속에서 어떻게 이런 자세를 취하고 또 유지하는가. 3장의 잎은 정갈한 녹색 그릇이고 그 위에 고봉으로 담은 쌀밥처럼 핀 흰 꽃이 피어났다. 조름나물은 서걱대는 키다리 갈대 사이에서 한 뼘만큼만 드러나 있었다. 물속의 고요함을 흡수한 뒤 저만의 기품으로 소화하여 물 바깥으로 다시 내놓고 있는 듯했다. 외지고 축축한 뒤안에서 자라지만 늘 물낯바닥으로 얼굴을….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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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을 날던 새가 나뭇가지에 잠시 앉듯 산을 오르던 등산객들도 아늑한 공터에서 잠깐 쉰다. 축 처진 엉덩이를 바위에 내려놓으면 누가 그 무게를 얼른 가져간다. 산 아래에서는 왜 이런 모습을 숨기고 살았을까. 배낭에서 물이나 간식을 꺼내면서 모두들 얼굴에서 선한 표정도 함께 꺼내놓는다. 그러다가 누군가 던지는 농담 한마디에 한바탕 웃기도 한다. 제법 오래전이다. 가만 저 새소리 좀 들어보란다. 홀딱벗구,라는 뻐꾸기의 소리라면서. 그 농담 이후 이제 새소리는 홀! 딱! 벗! 구!라는 소리에 끼워맞춰서 들리는 게 아닌가. 참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요 귀다.

오늘도 어디선가 새울음이 들리고 있었다. 소리의 방향을 찾다가 때죽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검은등뻐꾸기를 겨우 붙잡았다. 허공을 나는 새는 비행에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고 한다. 체공시간을 늘리도록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뼈 속을 텅 비웠다. 허공을 날기 위해 몸안 곳곳에 허공을 아로새긴 것!

하늘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는 듯한 정상에 오르면 구름을 만질 것 같더니 어느새 창공은 또 저만큼 달아난다. 괜히 시비 걸어보았자 나의 초라한 키만 확인할 뿐이다. 격이 다른 바람이 몰려오는 태백산 정상. 멀리 굽이치는 산들을 때리고 오는 바람의 맛이 칼칼하다.

몸을 텅 비우고 내려오는 길이다. 반재를 지나 백단사 계곡의 약사암에 이르면 개울물이 활기차게 기운을 얻는 중에 나무 한 그루가 활짝 피어 있다. 물을 참 좋아하는 물참대. 마구 뒤엉킨 가지마다 하얀 꽃이 탐스럽게 달렸다. 누군가 물참대의 시든 가지 하나를 조심스레 꺾었다. 보세요, 물참대의 가지는 텅 빈 구멍이에요!

어쩌자고 물참대는 허공을 제 안에 감추었나. 산에서 듣는 새소리가 저리도 낭랑한 건 뼈의 구조와 전혀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가 털갈이를 하듯 어린가지 껍질이 얇게 벗겨지는 물참대. 글썽이는 눈물처럼 한 아름의 물참대 꽃이 저리도 맑고 흰 것은 가지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닐까, 아닐까. 물참대, 수국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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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여종의 우리나라 식물들 중 지면을 기어가거나 곁에 있는 물체를 휘감고 자라는 덩굴성 식물이 꽤 있다. 다른 것에 의지한다고, 바닥을 긴다고 이들이 비굴하게 살아간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본성에 충실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울릉도에 갔을 때 큰 나무의 줄기마다 덩굴식물이 빽빽하게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섬의 면적이 좁아서 이처럼 현명하게 동거하는 게 아닐까. 덩굴식물이라면 등나무나 담쟁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리기 쉽지만 포도, 딸기 등도 덩굴성 식물 출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박도 그렇다. 태양이 부는 풍선처럼 밋밋한 가지에 달리는 사과도 놀랍기는 하지만 더러 배배 꼬이기도 하는 저 연약한 덩굴줄기에서 보름달처럼 부풀어오르는 수박을 보면 더욱 놀랍지 않은가.

지난주 소백산을 오르다 비로사 입구의 서늘한 숲그늘을 기어가는 덩굴꽃마리를 만났다. 이름에조차 그 말이 들어있듯 줄기가 길게 덩굴로 자란다. 특히 그 꽃차례의 끝도 덩굴처럼 또그르르 말린다. 어쩌다 터널이 뚫려 이제는 버려진 고개를 갈 때가 있다. 인적 끊긴 차도로 주춤주춤 진출하는 칡을 보면 그 끝은 한결같이 꼬부라져 있다. 마구잡이로 나아가지 않고 이리저리 망설이고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처럼 덩굴성 식물들은 공통의 특징이 있다. 그 끝이 제가 뻗어갈 방향보다는 뻗어온 곳을 자꾸 쳐다본다는 것이다. 이제껏 잘 기어왔는지, 너무 멀리 가는 건 아닌지, 이러다가 되돌아가야 할 곳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지. 그걸 경계한다는 동작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말을 하고 산다.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을 달고 사니 떠드는 것도 한 본성이긴 하겠다. 엎질러진 물처럼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다. 말은 나를 뿌리로 하여 뻗어나간 덩굴의 줄기와도 같은 것일 테다. 아무리 힘껏 당신을 향해 내던져도 그 말의 끝은 정작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아내가 배꼽처럼 꼭지가 마른 수박을 쪼갰다. 고추장처럼 빨간 수박을 한입 베어문 채 올여름의 유난한 더위를 예감하면서 덩굴꽃마리의 꽃대 끝에 나의 그런 생각을 얹어놓았다. 덩굴꽃마리, 지치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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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송파역에서 출발해서 200여㎞를 달려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도착했다. 십승지의 하나인 이곳에서의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서울과는 격과 질이 다른 흡족한 간이술집에서 돼지고기 모둠을 안주로 술병 여러 개를 쓰러뜨렸다. 그 뒤끝을 호되게 치르느라 그랬나. 몇 가지 추억이 고여 있는 비로사, 달밭골을 지나 오르는 데 몹시 힘이 들었다. 그래도 등산로 주변에 포진한 꽃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에 올랐다. 호쾌한 능선과 삽상한 바람이 안구를 씻어주었다.

길섶에 피어난 꽃들과 동무하면서 천동계곡으로 내려오는 길. 이 높은 산의 상부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옹달샘이 있다. “자기 쓰레기는 되가져 갑시다! 생태계 보호를 위하여 과일껍질, 비닐 등을 버리지 맙시다.” 권고문이 적힌 안내판 앞에서 휴식을 취했다. 백두대간을 종주 중이라는 수원의 어느 남녀 고등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지저귀고 있는 중. 차례를 기다렸다가 물 한 모금을 먹는데 활짝 핀 꽃들이 눈썹을 쳤다. 귀룽나무였다.

숲 아래로 삿갓나물, 두루미꽃, 양지꽃, 노랑제비꽃 등이 있으나 옹달샘 근처에 꽃이 핀 나무는 귀룽나무가 유일했다. 귀룽나무 그늘 아래에 출신을 알 수 없는 나무로 만든 안내판이 뚱뚱한 팔을 들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리키고 있다. 비로봉 2.0㎞, 초암사 9.6㎞, 천동 4.8㎞. 귀룽나무는 비교적 흔한 나무이다. 여기서 약 250㎞ 떨어진 파주 궁리출판 사무실 앞에도 귀룽나무가 묵묵히 서 있다.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면 깊은 궁리가 저절로 될 것처럼 그윽한 기품을 자랑하는 나무이다. 나무는 꽃대가 아래로 축 처지며 멀리서 보면 물이 방울방울 맺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형상이다.

오늘이 마침 부처님오신날이고 여기는 소백산옹달샘이다. 귀룽나무 옹달샘이라고 새로 작명하면 물맛도 더 나을 것만 같은 곳이다. 그 장소를 살펴볼 때 지하에서 뿌리와 물은 서로 얽혀 있을 것 같았다. 귀룽나무 뿌리를 거쳐 나온 물맛? 그게 궁금하시다면 귀룽나무 꽃 지기 전에 소백산 천동계곡으로 가서 땀을 한 바가지 흘리시도록! 귀룽나무, 장미과의 낙엽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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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기미다. 이왕이면 긴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선다. 우중충한 날씨에 하늘이 가깝게 느껴진다. 지팡이처럼 우산을 짚으며 또각또각 걸어가면 호젓한 산속이라도 걷는 기분이다. 실제로 비가 왔다. 비는 하늘에서 오는 물질이다. 빗물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있듯, 비에는 많은 소식이 담겨있다. 5월은 비를 많이 필요로 하는 계절이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다니! 내가 어제 태어났더라면 아침의 이 현상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뜻밖의 비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닳고 닳았다. 한때 또랑또랑했던 눈에도 두꺼운 각질이 쌓였다. 가물가물 저 높은 곳에서 오는 소식을 차단하면서 우산을 펼치면 어깨 근처로 빗물이 떨어진다. 귀에 풍경이라도 달린 듯 머리 둘레에서 토닥토닥 빗소리가 들린다. 마치 우산 속이 절간이라도 된 것 같다.

사흘 가는 장마가 없다고 했는데 기후변화가 막심한 요즘의 도시에는 세 시간을 못 버티는 빗줄기도 많다. 점심 무렵 비가 그쳤다. 인왕산 둘레길을 산책한다. 토함산만큼의 산세는 아니지만 이 산에도 불국사라고 하는 절이 있고 석굴암이라고 하는 암자가 있다. 그 아담한 곳으로 가는 길마다 연등이 달려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무겁게 달고 있는 연꽃들.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때가 오면 생각나는 꽃이 있다. 비단주머니라는 뜻의 금낭화다. 숲에서 군락을 이루며 사는 그 꽃들을 보면 영락없는 연등이다.

지난주 뜻밖에 맞이한 나흘간의 연휴. 가평 명지산에서 본 금낭화는 색깔과 자태가 아주 고왔다. 같은 줄기 속에서도 꽃들의 운명이 달랐다. 활짝 핀 꽃이 있는가 하면 벌써 열매를 맺은 것도 있었다. 제대로 성숙한 꽃 하나를 관찰해 본다. 조각난 하트 모양이 있는가 하면 갈래머리를 땋은 여고생의 모습도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 온 꽃동무의 해석이 압권이다. 고개를 조금 돌려 옆을 보면 용궁을 찾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과연 활처럼 휘어진 줄기에 매달려 모가지를 쑥 내밀고 힘껏 허공을 헤엄치는 자라 같은 금낭화!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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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부처님의 공덕이 아니었을까. 서울에 사는 주제에 두 달에 걸쳐 연속으로 금정산 범어사에 왔다. 요산 김정한 선생의 문학비를 지나 수령 오백 년의 은행나무 곁 주차장에 내리니 저절로 마음이 수굿해졌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금낭화 같은 연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오늘은 사초과의 전문가와 함께 금정산 식물상 조사 산행이다. 키 큰 나무의 근처보다 외려 그냥 지나쳤던 발등 높이에 보물이 더 수두룩하다.

아무리 생활의 등허리를 긁어도 끝내 풀리지 않는 답답함 때문일까. 분홍스웨터를 걸친 할머니가 나무지팡이에 의지해 돌탑 앞에서 합장하며 절을 하고, 잡았던 손을 풀며 언성을 높이는 중년의 부부가 각자 엇걸음을 놓는다. 부모를 따라왔다가 투덜대는 소년은 화장실로 달아나고. 이 땅의 웬만한 야생화는 다 나물이다. 맹독성의 몇몇을 빼고는 어린 순을 먹는다. 오늘 아침에도 낯선 식당에서 쇠젓가락으로 나물반찬을 집어먹었다. 그 힘으로 낮달을 보고 그 기운으로 별자리도 생각해본다. 지금 이렇게 범어사를 지나 금정산으로 오르는 것도 그 덕분이다. 아마 지금 길 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로를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두리번두리번 걸어가다가 묵밭 둔덕에서 꽃마리를 보았다.

이른 시기에 일찍 피지만 봄의 향도라도 되는 양 봄이 다할 때까지 눈에 띄는 아주 작은 꽃이다. 꽃차례 끝이 또그르르 말렸다가 펼쳐지면서 피어난다고 저 재미난 이름을 얻었다. 아무리 작아도 꽃받침이 다섯 개로 갈라져 멋을 부리고 암술과 수술도 어엿하게 갖추었다. 오늘은 하나가 더 있다. 꽃만 해도 손톱 속의 반달보다 작아서 손가락이 간지러울 판인데 작은 개미가 꽃을 더듬고 있지 않겠는가. 휘둥그레진 내 눈알보다 엄청 작은 개미는 바람이 운반하는 티끌인 듯!

크고 우람하다고 능사는 아니다. 저마다 하나씩의 사연을 길바닥에 흘리며 가는 떠들썩한 등산로. 금정산이야 예전에 놀던 뒷동산이고 범어사 대들보는 아껴둔 먹잇감이지요. 줄기를 타고 노는 은단 같은 개미 한 마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런 개미를 불러 겨드랑이를 시원하게 긁는 꽃마리도 보았다. 꽃마리, 지치과의 두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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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서 하루를 빼내어 진도로 가는 길. 톡 쏘는 김치가 되지 못한 채 웃자란 갓의 노란 꽃이 가로수 사이로 즐비하게 피었다. 늘 한 박자 늦는구나. 2주기에서 사흘이나 지난 후에 분향소로 들어가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늘한 공기가 팽팽하게 지배하는 팽목항.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펄럭이는 깃발을 통해 무슨 말을 전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년 전 이맘때의 꽃산행. 강원도 인제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 근처에 갔더니 물푸레나무 가지에 노란 꽃이 길쭉하게 피었다. 물푸레에서 웬 노란 꽃일까? 했더니 잘못 본 것이었다. 눈에 잠깐 마음이 속았다. 이 지역 어느 중학교의 학부모 동아리에서 매단 노란 리본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잊지 않겠습니다…미안해…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얼마나 큰 참사가 이 나라에 밀어닥쳤기에,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기에 고요한 산중에까지 이런 리본이 내걸렸을까. 헝겊에 번진 검은 잉크의 손글씨가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세월호 2주기였던 지난 토요일에는 순천의 선암사 주위를 헤매었다. 남쪽에만 사는 희귀한 나무를 찾아나선 길이었다. 아무 일 없는 듯하지만 산중은 질서를 찾아가는 행렬로 분주하였다. 노란 생강나무가 물러나고 붉은 진달래가 일어났다. 이어서 철쭉이 들어설 것이다. 꽃들은 제자리를 알고 골짜기의 기억을 일깨우며 교대로 피고 지고 있었다. 나무도 나무였지만 한 사면 가득 핀 풀에 눈이 꽂혔다. 나무에 달린 꽃들도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발등 높이의 작은 야생화들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흙에서 바로 육박해 쳐들어오는 꽃들. 그 노오란 꽃들이 지하에서 무슨 소식을 전달해주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꽃의 이름은 매미꽃. 독성이 있으며 꽃대가 땅에서 바로 올라온다. 줄기나 잎을 자르면 피 같은 즙이 빨갛게 맺힌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매미꽃이 철수하면 이윽고 매미가 나와 울어댈 것이다. 매미 소리 들으며 마시는 한잔의 검은 커피 끝에도 슬픔의 맛이 딸려나오겠지. 기억은 꼬리가 길다.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한…! 매미꽃, 양귀비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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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포 문무왕릉 근처 암자에서 불경 번역과 수행에 매진하던 춘명 스님이 초봄에 입적하셨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많은 의지가 되었던 스님. 살구나무 뿌리로 만든 목탁도 선물해 주셨던 스님. 딱딱하던 가지마다 꽃이 피고 잎이 돋아나더니 어느덧 사십구재날이다. 경주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거리마다 벚나무가 절정이었다. 길가 쉼터에 차를 세우고 사월의 벚나무 아래에 섰다. 어느 해 스님 곁에서 며칠을 머물다 귀가하면서 썼던 글이 떠올랐다.

“소슬한 감은사 3층 석탑에서 출발해 골굴사와 기림사 지나 보문단지로 들지 않고 왼편으로 꺾어지니 토함산 오르는 길이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내려와 시내로 들어와 분황사, 팔우정, 계림, 첨성대, 대릉원을 짚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을 때까지 가로수 벚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벚나무 아래 혼곤히 낮잠 한방 때리는 건 고작 한나절의 일감도 안되리라. 살아서 세상과 잠시 작별하는 것이니 한 시간 어름이면 족하리라. 그 벚나무 가지가지마다 꽃잎 몇 장 달고 있나. 무성한 꽃잎들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헤아려보는 건 하루의 일거리는 되고도 남으리라. 무수한 꽃잎 벌어져 벚나무를 낳고 경주 거리마다 즐비하니 그 나무들 하나하나 눈 맞추며 살펴본다면 남은 생애 지루할 겨를이 없을 듯도 해라. 허나 나무보다 마른 성격의 나는 그처럼은 살 자신이 없어 고작 사흘 만에 서라벌을 떠난다. 서라벌, 그 이름을 빌려간 서울로 무턱대고 등신같이 간다. 달구벌 지나 추풍령 넘고 한밭 지난다. 한강 건너 남산 지나 인왕산 아래로 부릉부릉 목석같이 눈감고 간다.”(졸저, 신인왕제색도에서 인용함)

잎이 가지에 달렸다지만 나무에게만 속하는 일일까. 꽃이 생식기관이라지만 어디 그뿐만의 것일까. 창(窓)처럼 나무에 달려 크기를 조절하면서 피는 꽃들. 나무에서 떨어져 문(門)처럼 자유자재로 위치를 정하면서 지는 꽃들. 막 떨어져 내린 한 꽃잎을 쫓아가서 쪼그리고 앉아보면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도, 먼저 가신 이들의 근황도 어른거리는 듯! 벚나무, 장미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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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이국적 이름의 그 꽃을 본 건 소백산에서였다. 천동계곡에서 올라 비로봉에 거의 다다를 무렵 등산로 가까이에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지명을 따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바람에 나부끼며 해맑게 웃는 꽃들을 보는데 생뚱맞게도 무궁화 꽃잎을 본떠 디자인했다는 국회의원 배지가 생각났다. 톱니처럼 잘게 갈라져 전체적으로 펜타곤 모양인 포엽을 배경으로 5장의 흰 꽃받침잎이 있다. 그 안에 수술과 암술, 노오란 작은 꽃잎이 모여 오밀조밀한 문양을 만들고 있는 꽃, 모데미풀이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마다 국회의원 선거 열기로 뜨겁다. 골목을 메우는 요란한 선거구호와 거리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뒤로하고 강원도의 어느 산을 오른다. 지난 몇 년간의 적폐처럼 쌓인 낙엽들. 나무가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는 건 까닭이 있다. 힘든 겨울에도 생존하려고 수분 손실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몸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생각하면 이는 나무가 행사하는 고귀한 한 표이기도 하다. 나무들은 이 투표행위를 통해 산을, 다시 말해 저들의 세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스산한 가을을 갈아치우고 청신한 겨울을 맞이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봄을 세웠다. 바야흐로 산에는 새로운 세상이 무르익었다. 새는 지저귀고 꽃은 핀다. 이 모두 산을 바꾸겠다는 나무의 의지가 모이고 쌓여서 이룬 결과임이 자명하다.



지금 각자의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들 한다. ‘정자정야(政者正也)’라 했다. 정치란 바른 것이라는 뜻이다. 다섯 획으로 이루어진 ‘正(정)’은 뒤집어 거꾸로 보아도 글자가 거의 같다. 바르다는 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항상 바르다는 것을 함의하는 게 아닐까.

지난 시절 잎들이 일제히 몸을 던져 물꼬를 튼 세상의 변화가 도래했다. 봄이 온 것이다. 흙에서 나왔지만 티끌 하나 묻히지 않은 깨끗한 꽃들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내일이면 사람들의 선거. 우리 또한 그렇게 나무들처럼 우리들 세상을 홀랑 뒤집어놓기를! 모데미풀 앞에서 그런 궁리를 해보았다.


한국특산식물.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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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의 삼성산. 대구에서 능금이나 설탕을 취급하는 상회(商會)로 출발하여 이제는 반도체, 휴대폰 등으로 큰 부를 일군 어느 기업(企業)에서 따온 이름이 아니다. 그런 유와는 격을 달리하느니 원효, 설총, 일연의 세 성인의 혼을 기린다 하여 삼성산이다. 삼성(三聖)의 청신한 기운이 작용한 까닭일까.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는 봄내음이 여느 곳들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옹기종기 모인 기와집들의 뒤안에는 하늘과 내통하는 굴뚝. 그 옆으로 살구꽃이 피었고 대문 밖에는 박태기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시멘트 포장길을 버리고 복숭아밭 옆 도랑으로 들어갔다. 물 오른 쑥과 갓, 광대나물, 큰개불알풀이 제 세상을 만났다. 어느 하나가 문어발식으로 독점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잘 어울린 생태계. 작은 야생화가 심심하다 싶으면 남산제비꽃이 있고, 조금 높은 곳에는 개암나무가 올해의 꽃들을 내민 채 두리번거린다. 발아래 야생화들에게 햇빛을 주기 위해 장대 같은 나무들은 해마다 한 번씩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낮게 깔린 풀들 사이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현호색이었다. 쇠스랑 같은 잎을 단 가느다란 줄기 끝에 감탄스러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다. 이륙 직전의 비행기라고 할까. 줄지어 날아오르는 오리가족이라고 할까. 그때였다. 꽃에 취해 사진을 찍는데 벌 한 마리가 날아드는 게 아닌가. 주둥이처럼 벌린 꽃의 입구에 벌이 앉자 줄기가 낙엽에 닿을 만큼 휘청거렸다. 벌은 가느다란 줄기를 지렛대 삼아 꽃 안으로 파고들었다가 그 탄력을 이용하여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휙 다음 꽃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는 광경!

꽃산행을 마치고 온 밤, EBS <세계의 명화>에서 <21그램>을 보았다.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사람이 죽는 순간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예외는 없다. 21그램, 그것은 영혼의 무게일까? 5센트짜리 동전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의 무게….” 벌새는 벌만 한 몸으로 공중에서 정지하여 꿀을 빨아먹는 새라고 한다. 예외는 없다 했으니 벌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는 같은 것인가. 바람 앞에서 만날 때마다 내 영혼의 무게를 생각나게 할 현호색.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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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깡패가 되었다고 치자. 으슥한 골목에서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아이를 불렀다. 코 묻은 돈을 좀 뜯자고 한 것이다. 아뿔싸, 붙잡고 보니 같이 재수하는 친구의 동생이 아닌가. 내 비록 지질하게 살지라도 그간의 안면을 무시하고 녀석을 무섭게 으를 수는 없다. 얼른 표정을 바꾸고 덕담이라도 건네야 한다. 안다는 것이 엉뚱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등산할 때 나뭇가지를 똑똑 분지르며 가는 이가 있다. 나무의 낭창한 탄력을 제압하는 데 실없는 재미라도 들린 듯하다. 설령 앞을 조금 가로막는다 치자. 그렇더라도 그럴 때 쓰라고 손가락 끝에 물결무늬가 있고 어깨의 관절은 360도를 회전할 수 있다. 그런 성능의 소유자가 왜 이런 무작스러운 행위를 할까. 그건 필시 그가 나무와 안면을 익히지 못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는 것이 완력을 쓰는 때이다. 동네깡패가 그랬던 것처럼 그이가 나무들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차마 그리하지는 못했으리라. 이름을 뻔히 아는 생강나무를 보고 어떻게 그 팔을 부러뜨리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양지꽃의 양양한 얼굴을 어떻게 발로 짓밟으랴.

제법 깡으로 통과한 고등학교 시절. 입시공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하루만의 위안이랍시고 간 마지막 소풍은 동래산성이 위치한 범어사 뒤 금정산이었다. 그로부터 사십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금정산을 오르고 있다. 어느 코스였는지 정확한 기억이야 없지만 그때 그 금정산의 한 자락이겠거니 하는 생각만으로도 사무치는 감정이 일어났다. 한 골짜기에 이르니 꽃샘추위 속에서 꽃대를 밀어올리는 얼레지가 밭을 이루었다. 시무룩하게 터벅터벅 걸었던 이 길이 꽃길인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천지삐까리’로 쌓인 낙엽을 뚫고 일어나는 깽깽이풀을 만났다. 붉은색이 감도는 보라색의 꽃잎이 접시안테나처럼 펼쳐진 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에 그만큼 훼손이 심해서 한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기도 했던 귀한 야생화. 입김만 닿아도 꽃잎이 쉽게 흩어질 것만 같아서 깡패 같은 마음을 버리고 멀찍이서 오래 바라본 꽃, 깽깽이풀. 매자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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