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에 해당되는 글 181건

  1. 2015.09.21 물옥잠
  2. 2015.09.14 하늘말나리
  3. 2015.09.07 닭의장풀
  4. 2015.08.31 누리장나무
  5. 2015.08.24 구실바위취
  6. 2015.08.17 꿀풀
  7. 2015.08.10 냉초
  8. 2015.08.03 [이굴기의 꽃산 꽃글]능소화
  9. 2015.07.27 찔레꽃
  10. 2015.07.20 민들레
  11. 2015.07.13 모감주나무
  12. 2015.07.06 말채나무
  13. 2015.06.29 느티나무
  14. 2015.06.22 양버즘나무
  15. 2015.06.15 팥배나무
  16. 2015.06.08 쥐오줌풀
  17. 2015.06.01 앵초
  18. 2015.05.25 살구나무
  19. 2015.05.18 고마리
  20. 2015.05.11 구슬붕이


날씨 참 좋다. 싱그러운 들판을 걸어가면 햇빛 알갱이가 곱게 빻은 쌀눈처럼 하늘에서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 같다. 이 삽상한 기운을 짓기 위해 올 여름이 그렇게 뜨거웠나 보다. 따끈따끈 구들장을 데워놓고 굴뚝을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여름의 열기도 이제 떠나가고 있다.



구월이다. 수생식물을 공부하러 석모도에 갔다. 모래밭으로 들어서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도가 철썩였던 듯 물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습지를 통과하니 민머리해수욕장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길 좌우의 논에는 벼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찰랑대던 물은 모두 사라지고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벼 또한 반듯한 수생식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했다. 멀리서 보니 논 한 귀퉁이가 허전해 보이는 게 아닌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간밤의 태풍에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고 구겨져 있던 누런 황금색의 벼들. 동네 어른들의 땀방울처럼 흩어진 낟알들. 석모도의 논을 그렇게 만든 건 바람이 아니라 논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물옥잠이었다. 아예 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논두렁으로 내려가 자세히 관찰했다. 물옥잠은 여간 예쁜 야생화가 아니다. 강가나 논에서 자라기에 줄기가 곧게 선다. 깨끗한 심장형의 잎을 달고 훤칠하게 서 있는 보랏빛 꽃.

적막했다. 이제 물은 모두 마르고 결실을 기다리는 논 가운데에서 벼의 줄기는 제법 통통했고 알곡이 차곡차곡 여무는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아하, 둔한 나에게도 퍼뜩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논에서는 농약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다. 만약 농약을 뿌렸다면 부작용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런 약을 치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웃자란 피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곳의 농부는 차마 물옥잠에게 농약을 먹일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의젓했다. 논 가운데의 물옥잠은 그런 농심을 알기라도 하는 듯 활짝 피어 있었다. 진동하는 꽃내음을 맡으며 이 논의 벼는 참 향기롭게 여물겠다. 석모도에서 생산하는 물옥잠표 쌀! 추석이면 그만한 햅쌀밥도 달리 없겠다. 물옥잠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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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0편 암송하고 졸업…살아가는 데 힘과 위로 줍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경향신문9월2일자). 17년째 중학생들의 가슴에 마르지 않는 우물을 선물하는 어느 선생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게 실마리가 되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예전 민음사에 근무할 때 ‘세계의문학’ 편집위원들과 김우창 선생님께 신년 세배를 갔었다. 어느 해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오래 안 잊혔다. 미국의 생태주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의 주장인데 아이들한테 동식물 이름 100개를 외우게 하면 심성 공부에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그냥 흘려들을 법도 한데 마음의 공감이 컸던가 보다. 그 말씀을 접수한 이후 인왕산 자락을 어슬렁거리는 동안 소나무 말고 정확하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는 자각이 문득 일어났다. 뻔질나게 산을 들고나지만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호흡하는 기분. 그 난처하고 답답한 사정을 벗어나려다가 결국 꽃산행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의 어느 지리산 등산길.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어둑한 저녁에 치밭목에 도착하니 산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캄캄한 밤중. 오늘 만난 꽃을 중심으로 흐르던 화제가 급기야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는 별, 들에는 꽃, 가슴에는 꿈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떠오르기도 했다. 바람만 피하는 자갈마당에 겨우 자리를 비집고 눕자 하늘의 별이 초롱초롱했다. 꽃이 꽃으로 되려면 꽃만으로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꽃이 딛고 있는 흙이며 바위, 바람, 별에게로 공부가 확장되어야겠구나! 사소하고도 웅장한 결심을 했더랬다. 곤히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에 배긴 돌 하나에 몸이 뻐근했다.

가랑잎초등학교가 있는 유평마을로 가는 길은 여유가 있었다. 하산 도중에 많은 꽃을 만났지만 단연 눈길을 끈 것은 하늘말나리. 나리 종류 중에서 꽃잎이 아래나 옆이 아니라 위를 향하는 꽃이다. 다시 말해 편평하게 돌려난 잎 위로 쭉 뻗어올라 하늘을 향해 환히 벌어진 꽃이다. 별, 꽃, 꿈 그리고 돌로 연결되는 이 거대한 고리에 시(詩)도 끼워 넣으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하늘말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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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빨치산의 수기인 <남부군>이란 책이 있다. 그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저자가 산중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을 나서는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게 남았다. “나는 동상을 입은 발가락이 유난히 쑤시는 것을 의식하면서 총을 잡고 일어섰다. (…) 아침을 짓는 연기가 뿌옇게 개울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인간이 사는 집과 인간의 삶이 거기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통증이 심해진 발을 질질 끌며 산기슭을 내려섰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는 경찰이 아니라 인간의 마을에 먼저 투항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겨우 한 시간 반을 투자해서 인왕산을 갔다 오면서 몇 년간 지리산을 누빈 저자의 심사를 끌어오는 게 좀 낯간지럽긴 하다. 나라는 인물은 무슨 사상이나 신념을 지키고자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눈치 앞에서 어디 한발 마음대로 제겨 디딜 곳이 마땅찮은, 휘청거리는 오후를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래도 어쨌든 김밥으로 산중점심을 때우고 하산할 때 첫 집은 있어 산에서 나오는 나를 항상 반겨주니 거기에서, 거기에 있는, 인간의 집과 인간의 삶을 만나게 된다.


예전이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텐데 꽃을 알고부터 산과 마을의 접면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그곳은 비닐이나 빈병도 뒹굴지만 야생화 한두 송이는 피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쓰레기를 던져놓아도 그 틈을 비집고 자연은 꽃을 보내주는 것이다. 노란 애기똥풀이 피는가 하더니 어느새 하늘빛 꽃잎에 노란 암술과 수술이 도드라지는 닭의장풀이다.

거기까지인 줄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도 닭의장풀이 흔하게 피어 있지 않겠는가. 산들은 대개 깔딱고개를 두어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산은 제 키를 유지하기 위해서 바위를 머리에 받들고 있다. 힘겹게 한발한발 오르자 드디어 멀리 하늘과 산이 맞닿는 꼭대기가 보인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니 저곳이야말로 다른 세계로 가는 한 입구가 아닐까. 그 접면마다 닭의장풀이 피어나는 까닭은! 닭의장풀, 닭의장풀과의 한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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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 파주로 사무실을 옮기기로 했다. 도올 김용옥은 만년필이 수명을 다하면 조의문을 작성한다고 한다. 그간 생각을 받아 적느라 고생한 물건에 예를 갖추어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하물며 필기구에도 그러한 대접을 해준다는데 그간 내 마음의 의지처들과 그냥 싱겁게 헤어질 수는 없었다. 어언 10년여간 나를 품어준 인왕산과 그 아래 동네들. 효자, 통인, 누하, 그리고 옥인. 이름에서부터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사직분식에서 청국장도 먹고, 신한은행 앞 도로의 우체통 곁에서 난전을 꾸리는 할머니가 깐 도라지도 사고, 형제이발소에서 머리도 깎았다. 이 모든 게 이곳과 작별하는 마무리라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리고 8월의 마지막 금요일. 몇몇 벗들과 달맞이를 하러 인왕산에 올랐다.



가을의 기미가 보인다지만 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는 인왕산. 혹 꽃이 있나 두리번거렸지만 이렇다 할 꽃은 없었다. 이 환절기에 그나마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누리장나무였다. 이미 꽃은 졌고, 꽃 진 자리마다 땡볕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빨간 열매가 단련되는 중이었다.

누리장나무는 꽃공부에 입문했을 때 기억에 남는 나무 중의 하나이다. 나무 앞에 섰더니 누군가 잎을 비벼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쾌쾌하고 고약한 누린내가 나서 누리장나무라고 한다면서. 그러나 나에겐 전혀 그렇지가 않았으니 외려 그 옛날 몹시 탐을 내며 먹었던 원기소의 고소한 냄새가 입천장에 들러붙는 게 아닌가. 그 이후 누리장나무는 나에게 어릴 적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각별한 나무가 되었다.

드디어 정상이다. 단풍이야 일 년에 한 번이지만 이 휘황한 야경은 매일 벌어지는 압도적인 전시이다. 구름에 가려졌던 보름달도 문득 고개를 들자 우리를 확실하게 내려다보았다. 몇 병의 막걸리가 일행을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한 곡조 뽑았다. 송창식의 ‘잊읍시다’. “… 가끔가끔 찾읍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조심조심 아주 조금씩 다시 찾읍시다.” 내 졸렬한 붓끝을 대신하는 노래인 것을 알아차렸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누리장나무. 마편초과의 낙엽 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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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이 산에서 무슨 꽃을 보게 될까. 대개 초입에서는 그리 놀랄 만한 꽃들이 없어 몸을 놀릴 일도 별로 없다. 그저 일행의 꽁무니를 따르면서 식물들이 처한 상태를 보기도 하면서 쫓아가기에 바쁘다. 오늘 따라 날씨는 분명한 태도를 정하지 않았다. 비라도 뿌릴까 망설이는 눈치다. 넓은 임도를 버리고 급경사의 길을 더위잡아 오르자 갑자기 좁아지는 길. 옆구리에 스치는 나무들의 긴장을 느끼면서 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애초 길이라곤 없던 숲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으면서 빽빽하던 숲에 틈이 벌어지더니 저렇게 통통한 길이 만들어졌다. 자연은 직선을 용납하지 않는 법이니 길은 휘어지고 구부러지기 마련이다. 산속으로 길이 만들어진 이래로 아마 바닥이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문명을 운반하는 많은 발길을 받아내면서 바닥의 돌들은 닳고 닳았다. 울퉁불퉁하고 반질반질하다. 이 바닥에 흘린 참을 수 없이 고약한 냄새라도 맡은 것일까. 벌레, 곤충, 나비가 길을 횡단하려면 슬쩍 경계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기어코 비를 한줄기 뿌렸다. 이런 날이면 길이 아연 동굴처럼 변하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나무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그런 풍경이 빚어지는 것이다. 터널같이 컴컴한 어느 모퉁이를 돌았더니 한복판에 바위 하나가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물기로 얼룩진 바위는 더욱 반질반질하고 미끌미끌하다. 물은 바위에게도 요긴한 재료인데 저축할 틈도 주지 않고 아래로 흘러가버린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어엿하게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바위에서 숨쉬며 바위를 부둥켜안고 사는 것.

인제 대암산의 용늪 가는 길. 뚜껑 없는 관처럼 길게 이어진 길을 통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구실바위취였다. 모양을 낸 접시 같은 잎을 배경으로 둥글게 모인 꽃들이 안테나처럼 쭉 뻗어올랐다. 바위에 깃들여 살기에 줄기는 더 꼿꼿하고 대궁은 저렇게 슬쩍 꼬부라지는 여유 끝에 꽃을 받들고 있는 구실바위취. 습기와 이끼가 많은 반그늘에서 주로 자라는 한국 고유종. 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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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닥다닥 붙은 건물에서 요란한 저녁을 뒹굴고 나자 이윽고 정중한 새벽이 왔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세속도시의 일상이다. 그나마 저 신선한 시간이 있기에 번잡한 하루의 나날들을 이렇게나마 수습하고 시작할 수 있다. 아침이다. 출근길에 전개되는 풍경을 보면 울긋불긋한 간판 아래 출입문이 없는 건물은 없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그만큼의 시간의 흔적이 고여 있을 것이다. 모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고유한 세월을 만지고 싶은 궁금증이야 있지만 일일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나중에 내가 저승으로 갔을 때, 자넨 수박 겉핥기식으로 세상을 살다가 여기로 왔군, 해도 묵묵부답일 도리밖에 없겠다. 그러나 비상구처럼 이런 날이 있기도 하다. 오늘 같은 휴일에는 신새벽에 몸을 빼내어 먼 산으로 간다. 흐르는 것들만 흘겨보았기에 비닐처럼 미끌미끌해진 내 눈알이 모처럼 울퉁불퉁해질 수 있는 기회다. 손가락 끝 지문의 골짜기에도 모처럼 본디 제 감각이 찾아드는 순간이다.

지난 몇 년간의 꽃산행. 굳이 깊이를 잴 것도 없는 일천한 식물학 지식으로 감히 말하자면 산에 들 때마다 참 자주 본다는 느낌이 드는 꽃이 있다. 늦봄부터 초가을에 걸쳐 가장 오랜 기간 개화 상태를 유지한다고 여겨지는 꽃이기도 하다. 내 발등에서 한 뼘가량 더 하늘로 힘껏 뛰어오르는 꽃, 꿀풀이다. 너무 흔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그래서 이렇다 할 꽃이 없는 곳에선 내 허전한 시선을 묵묵히 받아주는 꽃이다.

이번 산행은 강원도 인제의 대암산. 정상 부근에는 천혜의 생태습지인 용늪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던 용이 쉬었다가 가는 곳이라고 한다. 그 늪으로 가는 호젓한 길가에서 만난 꿀풀. 유난히 색감이 좋았다. 쉬기도 할 겸 엎드렸다. 꿀풀은 줄기 위 층층의 다락방 같은 구조 속에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다. 그 방마다 입술 같은 꽃잎이 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꿀을 간직하기에 이름조차 꿀풀일까. 실제로 이 꿀풀을 이용하여 만든 꿀은 특별한 대접을 해준다고 한다. 윙윙거리며 달려드는 여러 마리 벌 사이로 꽃잎 하나 조심스럽게 따서 밑동을 핥았다. 밍밍했다. 아뿔싸, 저 녀석들이 벌써! 꿀풀,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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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풀, 제비꽃, 말나리. 높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꽃들과 눈을 맞추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산의 정상이다. 꽃들의 계단이 한 ‘띵띵한’ 등산객을 저의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상승시킨 셈이다.

여기는 사방으로 탁 트인 공간이 길게 이어지는 소백산 능선. 호쾌하게 펼쳐진 전망이 산행 내내 눈을 가득 채운다.

비탈진 등산로를 곧장 오를 때도 그랬지만 능선길에서도 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의외의 꽃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꺾어지는 골목마다 호기심이 고여 있듯 모퉁이마다 색다른 꽃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김밥으로 때운 점심이라 하산을 준비하면서부터 배가 헛헛해지던 중에 꼭 알맞은 이름이 귀에 척 꽂혔다. 우와, 저기 냉초 좀 보소! 산 아래에서 짊어지고 온 식탐은 산중에서도 왕성하게 작동을 해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곧장 ‘냉면에 식초’로 연결이 되었다. 꽃의 영혼이 있어 알아들었다면 어안이 벙벙할 노릇이 아닐 수 없겠다. 그렇게 소백산 능선의 풀밭에서 홀로 떨치고 서 있는 냉초를 처음 만났었다.

성삼재 고개에서 모두들 지리산 주능선을 향해 나아갈 때 슬쩍 방향을 바꾸어 옆으로 빠지면 정령치로 가는 길이다. 지리산의 장엄한 능선을 귀에 걸고 걸을 수 있는 호젓한 등산로이다. 이 더위에 무슨 꽃일까 싶겠지만 하늘말나리, 꽃창포, 꽃며느리밥풀 등이 있어 눈이 포식을 했다. 그 많은 지리의 여름꽃들 중 3년 전 내 끈질긴 식탐을 자극했던 꽃도 있었으니 냉초였다. 소백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르마 같은 능선의 풀밭에 핀 꽃. 오직 한 줄기에서 훌쩍 뻗어 올라 돌올한 자태를 자랑한다. 줄기는 좀체 꼬부라지지 않지만 그 끝에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꽃대는 은근하게 슬쩍 모양을 비튼다. 그것이 마치 도립한 느낌표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우화등선하듯 냉초 위에 냉큼 올라앉은 잠자리 한 마리. 지리의 여러 봉우리들을 휘감고 홀로 적막에 빠져들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이봐, 그대도 식탐을 비롯해 몇 가지 욕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이 연약한 꽃대 위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올라앉을 수 있다네, 나처럼 이렇게! 냉초.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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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처음 듣고 나지막이 불러보았을 때 입안으로 작고 완만한 구릉 하나가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그냥 그 이름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꽃. 능소화를 제대로 본 건 세 해 전, 울릉도 탐사여행에서였다. 식물애호가이기도 한 도동성당 신부님의 안내로 뒷산을 오르기로 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섬개야광나무와 섬댕강나무 군락지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본격 등산에 앞서 마당에서 몸을 푸는데 신부님이 본당으로 연결된 계단을 타고 오르는 꽃을 가리켰다. 능소화 좀 보세요. 꽃도 꽃이지만 꽃줄기가 좌우 대칭으로 올라가는 게 제단(祭壇)의 촛대같지 않나요? 그날 이후 능소화를 볼 때마다 조금은 신성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쩌다 파주 출판도시에서 집 짓는 일에 관여하면서 자유로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나올 때 노을을 배경으로 질주하지만 서울로 진입하면서부터 어김없이 느림보 행진이다. 하루를 마감하고 돌아가는 것들로 부산한 자유로. 하늘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걸어온 해도 서쪽으로 넘어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로 길이 꽉 막혀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느린 속도로 나아가는데 멀리 절두산이 보였다. 머리를 쳐든 누에 모양이라고 해서 잠두봉이었지만 천주교 박해 때 많은 교인들이 처형된 곳이라서 절두(切頭)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성인들의 피 흘린 자리에 성당이 날렵하게 서 있다.

가까이 지나면서 잠깐 눈을 돌리자 가파른 기슭에서 눈길을 확 뺏어가는 주황빛의 꽃들, 능소화였다. 왜 하필이면 저곳에 저 능소화일까. 또 한편 생각하면 꼭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는 꽃이 아니겠는가. 불과 150여년 전에 벌어진 일들을 진혼이라도 하겠다는 듯 절두산 절벽에 목을 내밀고 피어난 능소화.

시간은 강물처럼 감쪽같이 흘러가고 7월의 따가운 햇살이 차 지붕에 꽂힌다. 어쩌면 햇빛도 부드러운 칼이 아닐까. 단단한 것들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 내 목덜미에 닿는 이것도 아주 부드러운 칼날인 것 같아서 아슬아슬한 절벽 위를 한 번 더 바라보게 하는 능소화. 능소화과의 낙엽성 덩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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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서의 어린 시절. 산으로 소먹이 하러 갔다. 풀을 뜯어먹는 소 옆에서 우리라고 심심한 입을 그냥 놀릴 수는 없었다. 칡뿌리, 정금, 산딸기 등이 고사리 손을 피해가지 못했다. 자갈이 울퉁불퉁한 등하교 길에도 먹을거리는 있었다. 어느 모퉁이를 돌면 먼지를 뒤집어쓴 찔레꽃. 채 야물지 않은 끝을 따서 껍질을 벗기면 물이 통통히 오른 투명한 가지는 한겨울의 고드름 같았다. 씹으면 맛이 덤덤했다.

시골을 떠나 도회로 전학 간 뒤, 아이스크림 녹듯 찔레꽃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방학 때 시골을 가도 꽃이나 나무를 찾을 겨를은 없었다. 여뀌를 갈아서 물고기를 잡고 곤충채집을 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았다.

5월 마지막 주말. 지리산 둘레길의 한 자락인 상황마을 뒷산 무덤가에서 귀한 난초를 보았다. 고작 한 뼘 높이의 방울새란. 그 작은 난초를 찍으려니 무릎은 꿇고 엉덩이를 치켜들어야 했다. 꽃동무들의 그런 동작을 보자니 무덤에 또 하나의 싱싱한 무덤을 더한 듯한 형국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어스름. 경운기 전용의 시멘트 길을 내려오는데 살림집을 겸한 비닐하우스에 딸린 밭에 농부가 엎드려 고추모종을 심고 있다. 마당 입구에 서 있는 때죽나무에 초인종처럼 조롱조롱 꽃이 달려 있다. 밀려오는 어둠에 맞서는 하얀 꽃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비탈길을 구르듯 내려오자니 흥이 저절로 났다. 무언가 콧노래가 필요해서 하얀 꽃을 보고 ‘하얀 꽃’으로 시작하는 가사를 무심코 입에서 불러내는데, 어라, 바로 왼편 개굴창에 하얀 꽃이 보이고, 가까이 가서 보니 찔레꽃이 아닌가. 다시 보니 저 멀리 지리산 능선 위로 하얀 달이 꽂혀 있지 않겠는가. 내 인생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 그래서 까닭 없이 울먹해지기도 한다. 지금 꽃 앞에서의 이런 순간이라도 내게 없다면 마음속 울혈을 어찌 다 다스릴 수 있겠더냐, 서럽고 슬프고 순박하고 하얀 찔레꽃아! 장미과의 낙엽 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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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인왕산 무릎 아래 사무실까지 가는 길의 경우의 수는 많다. 골목 하나 슬쩍 바꾸면 전혀 다른 출근길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토속촌 삼계탕집과 참여연대를 지나 통인시장을 관통했다. 골목마다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시멘트 일색의 담벼락이지만 그 척박한 조건도 자연은 외면하는 법이 없다. 조그마한 틈에도 씨를 던져 풀을 키운다. 북1문을 빠져나온 골목에 특이한 종이팻말이 있다. 돌 틈을 비집고 자라나는 민들레의 가느다란 줄기 곁에 꽂힌 것은 ‘一片丹心(일편단심)’.

누가 저 갸륵한 심정을 저렇게 적어놓았을까. 짚이는 바가 있기에 바로 옥인정육점으로 들어갔다. 한우암소전문점인 가게는 고기 냄새도 가득하지만 묵향이 진득하게 배어 있다. 취미가 서예인 사장님은 칼을 들다가도 틈만 나면 붓을 잡는다. 돈통도 있지만 그 옆에는 항시 먹물통이 대기하고 있다. 짐작이 맞았다. 손님도 아닌 나의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하시는 말씀. “아, 처음엔 그냥 민들레라 써놓았죠. 그런데 그러고 나면 그 다음이 없잖아요!”

땡볕에 지쳐 늘어진 민들레를 부축하며 서 있는 ‘일편단심’의 팻말을 보는데 중국의 공원에 있기도 하다는 환경보호 팻말이 떠올랐다. ‘手下留情 足下有靑(수하유정 족하유청).’ 손 안에 정이 머무르고 발 아래 푸름이 있다는 말로 함부로 가지 꺾지 마세요, 잔디 밟지 마세요라는 속뜻이다.

자칫 딱딱하기 쉬운 명령문을 이렇게 시적인 대구(對句)로 눙치며 처리하는 솜씨가 가히 놀랍다. 당시(唐詩)의 나라인 중국에서 이태백과 두보의 후예답게 웅숭깊음이 철철 흘러넘치지 않는가.

전국의 양지바른 산과 들은 물론 통인시장의 자투리 영역까지 찾아와 자연의 향기를 전하는 민들레. ‘수하유정 족하유청’과 ‘일편단심’은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뜻일 것이다. 붐비는 발길을 피해 울타리해주는 팻말. 어디 조용필의 노래만이랴. 옥인정육점 사장님의 일필휘지가 좁은 골목을 문자향으로 가득 채웠다, 일편단심 민들레.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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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 완도의 식생조사에 몇 번 참여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상황봉을 필두로 섬 구석구석을 훑었다. 한 해를 결산하면서 마지막으로 간 곳은 완도 대문리의 모감주나무 군락이었다. 찰랑찰랑 물결이 이는 바닷가 바로 옆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백여 그루의 나무가 도열해 있었다. 방파제에서 어구를 손질하고 배를 수리하는 어부들과 어울린 풍광이 장관이라서 섬을 떠나면서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높은 산에 가서 보고 온 식물을 가까운 곳에서 다시 만나면 고향사람을 광화문에서 뜻밖에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점심으로 먹은 감자탕의 여운을 즐기며 인왕산 허리에서 홀로 활개를 치는데 멀리서 눈에 익은 나무가 나타났다. 그간 그냥 무심코 지나쳤는데 얼마 전 완도 바닷가에서 본 모감주나무가 아닌가. 아주 귀한 나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나무도 아니다. 얼른 달려가 잎부터 확인했다. 열매도 열매지만 나에겐 모감주나무의 잎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좌우대칭으로 달리는 잎은 그 자체가 다시 잘게 갈라진다. 원래 하나였던 대륙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로 분화하여 이동하는 것처럼!

시간의 모퉁이를 몇 번 꺾어 돌았더니 여름의 기미가 왔다. 올해 첫 매미울음은 언제쯤 내 귓전을 두드릴까. 그늘을 골라 디디며 인왕산을 걷는데 멀리서 활짝 핀 꽃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지고 없는 꽃 사이에서 피어난 노란 꽃 무더기라 더욱 눈길이 돌아갔다. 작년의 열매와 올해의 꽃을 함께 달고 있는 모감주나무.

모감주나무는 꽈리 같은 열매 속에 3개의 까만 씨를 맺는다. 씨는 아주 단단해서 절에서 염주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한다. 어디 사람의 손으로 이동해서 한 줄에 꿰인 염주만일까. 까맣게 익어 벌어진 열매 속에 더욱 까만 씨앗이 달려 있다. 나무가 운치 있게 바깥에 달아놓은 풍경(風磬)! 바람 불면 혹 달그락거리는 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귀 기울이게 하는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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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레벌떡 출근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동차 행렬에 짜증이 나면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핸들에 잠깐 머리를 박았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광화문에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다. 사람의 형상이라곤 찔려도 피 한 방울 내놓지 못하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동상밖에 없다면! 짜증이 공포로 변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꾸역꾸역 퇴근길. 밋밋한 행인의 뒤통수를 보고 걷다가 일천한 상상력을 한 번 더 쥐어짜본다. 횡단보도 앞 빨간 신호등에 걸려 하늘의 낮달을 보다가 시선을 내리니 길가의 가로수가 모조리 베어지고 서 있는 건 눈알 굴리며 고개 숙인 간신 같은 가로등뿐. 뿐만 아니라 멀리 남산, 북한산이 온통 벌거숭이로 변했다면! 밋밋함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 찰나로도 족할 것이다.

엽기적인 일들의 와중에서 제정신 갖고 살기가 참 어려운지라 이런 궁리라도 하면서 땡볕여름을 다스리는 중. 지난주 이 자리에서 매차나무를 언급한 이후 내내 그 나무가 눈에 밟혔다. 소양강의 말라버린 바닥을 짚고 나타난 매차나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앞날에 대한 모종의 징후인 것만 같아서 자꾸 그 풍경이 떠오른 것이다. 매차나무는 정확히 무슨 나무였을까. 매자, 매화, 차나무도 일견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들은 모두 관목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 부산의 꽃동무가 믿을 만한 정보를 주었다. 인터넷을 뒤졌더니 매차나무가 말채나무의 이명(異名)이며 빼빼목이라고도 한다는 게 아닌가. 매차와 말채. 끊겼던 물길이 이어지듯 희미하게 말의 길이 연결되는 것도 같았다.

가지가 낭창낭창해 말의 궁둥이를 때리는 채찍으로 안성맞춤이라서 그 이름을 얻은 말채나무. 전국의 산에 흔하지만 경복궁에도 여러 그루가 있다. 우리 사는 곳에서 나무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무 없는 세상이란 창문 없는 건물, 항문 없는 육체, 죽음 없는 인생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누구나 해봄 직한 이런 시시한 문장도 조립하면서, 미라처럼 비쩍 마른 소양강의 매차나무를 떠올리면서 나는 지금 말채나무를 만나기 위해 궁궐의 문지방을 넘는다. 말채나무, 층층나무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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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뭄이다. 그 와중에 날씨를 진압하듯 퍼포먼스는 진행되었다. 논에 물을 대지 않고 공중에 물을 쏘았다. 뿌리가 아니라 어린 잎과 줄기에 직접 물을 뿌린 것이다. 벼에게는 입이 없는 줄을 몰랐다는 것일까. 이런 희한한 일들이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경향신문’의 뉴스. “극심한 가뭄으로 소양강댐의 수위가 역대 최저치에 근접하면서 42년간 물에 잠겨 있던 강원 양구군 수몰지역의 성황당 매차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양구군 자치행정과장은 ‘가뭄으로 드러난 강바닥 곳곳에서 수몰 전 마을을 지켜주던 성황당 나무의 앙상한 모습이 목격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사진 속의 나무는 나무라는 형태만 간직했을 뿐 동정(同定)할 만한 단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물속으로 이사한 지 42년 만에 다시 나타난 매차나무. 이름이 생소해서 도감을 뒤적였지만 그런 나무는 없었다.

양구군청에 전화를 했더니 자신들도 정확한 나무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중학생일 때 마을을 떠난 분이 자신의 할아버지한테 분명히 매차나무라고 그 이름을 들은 바가 있다고만 했다. 성황당나무나 정자나무는 특정한 나무가 아니다. 마을을 수호하고 쉼터가 되는 곳에 우람히 자리하는 나무를 통칭하는 것이다. 매차나무는 아마도 그런 용도로 심은 나무의 한 종류를 양구지역에서 칭하는 이름인 것 같았다.

내게도 그런 나무가 있다. 내 고향인 경남 거창군 주상면 오무마을의 한복판을 지키는 큰 나무. 원래 마을 어귀에 있던 소나무가 까닭 모르게 죽은 뒤 동네 가운데에 새로 심은 뒤 자연스럽게 마을의 의지처로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느 해 고향 가서 나무 이름을 물었더니 재종형님이 귀목나무 아이가, 하셨다. 괴목요? 했더니 손바닥에다가 기, 목,이라고 또박또박 적어주셨더랬다. 내 고향에서의 귀목은 서울에 오면 느티가 된다. 가뭄은 하늘에서 기인하는 바이니 거창과 양구의 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공화국의 어떤 시대를 통과하는 중일까. 곧 고향에 가서 귀목나무 아래에서 하늘 한번 우러러보아야겠다. 느티나무, 느릅나무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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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라도 주위를 둘러보면 나무 한 그루 없는 살풍경은 없는 법이다. 내가 제일이라고 믿고 까불며 돌아다녀도 그저 그늘이나 그림자만 밟을 뿐. 나무보다 낮은 곳의 공기로 숨을 쉬어야 한다. 김씨, 이씨, 박씨. 사람들 중 많은 순서로 적어본 성(姓)이다. 은행, 양버즘, 느티, 왕벚, 이팝. 가로수들 중 많은 순서로 적어본 나무의 이름이다. 나무가 많을까, 시민이 많을까. 서울이라는 동네에서 그걸 비교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언젠가 사람들은 그 누구도 예외없이 나무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요즘 나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건강을 부쩍 챙겨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수상한 시절도 한몫을 했다. 눈뜨자마자 산책을 나가면서 만나는 건 시멘트에 가로막혀 한쪽으로만 기형적으로 자란 메타세쿼이아. 잘 조성된 아파트 단지 둘레길에는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가 울창했다. 출근길은 지하철을 이용했다. 한강을 건널 땐 물도 나무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이지만 마음이 없기에 그것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겠다. 이윽고 점심시간. 청국장 식당에서 새삼스레 눈길이 갔다. 출입문 옆 아름드리 나무는 껍질이 레고처럼 벗겨지는 플라타너스가 아닌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간다. 그 길에는 지각이 없다. 느긋하게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종로를 통과했다. 이 거리에 사과나무를 심자는 유행가도 있었지만 유실수는 보이지 않고 플라타너스가 좁은 간격으로 도열해 있다. 차가 붕, 정거장을 떠날 때 얼굴을 가리고도 남을 만한 잎사귀 하나가 낙하했다. 흔들리는 낙엽을 근두운처럼 타고 내 마음이 곧장 날아간 곳은 시골의 초등학교였다. 이제 아이들은 사라지고 개망초, 엉겅퀴 등이 심심하게 뒤엉켜 자라나는 폐교. 그 운동장에서는 우람한 플라타너스가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손오공이 아무리 용을 써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 나 또한 시골을 떠나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고향에서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이주해도 결국 플라타너스 잎사귀 안이로구나! 종로5가 보령약국 지나 동대문을 돌아들 때 벼락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버즘나무, 버즘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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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으로 호가 난 사직분식에서 점심을 때웠다. 그릇을 싹싹 비우고 불국사를 지나 내처 석굴암까지 직접 걸어서 갔다. 축지법이라도 써서 경주를 다녀온 것은 아니었다. 수저를 재바르게 놀려 배를 채우는 것이야 늘 하는 일이지만 땅을 접고 펴는 재주를 나는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토함산이 아니라 인왕산에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밝히는 연등이 금낭화처럼 달려 있는 깔딱계단을 올랐다. 석굴암 앞마당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법당 앞에 외로이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팥배나무였다. 꽃은 지고 팥알만 한 열매가 땀방울처럼 몽글몽글 맺히고 있다. 이태 전의 일이다. 숨을 몰아쉬며 마당에 들어서는데 손톱만 한 흰 꽃들이 모여 접시를 엎어놓은 듯 가지 끝에 둥글고 도톰하게 달려 있었다. 우와, 팥배나무네, 라고 했더니 마침 곁에 있던 주지 스님이 “팥배나무를 아는 거 보이 나무에 해박하시네!”라고 하면서 커피 한 잔을 주었더랬다.

인왕산에서 팥배는 흔한 나무이다. 최근 서울성곽사업을 하면서 둘레길을 정비했는데 팥배나무는 제거 대상으로 지목되어 벌목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인왕산에서 팥배나무를 알아보는 게 과일가게에서 딸기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인지라 그리 우쭐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후 나는 이 나무에게 돈독한 정을 느낀다. 머리털 난 이후 나무로서는 처음으로 나에게 칭찬과 커피를 매개해준 팥배인 것이다.

부처님오신날 이후의 고요가 머물러 있는 석굴암 앞마당. 풍광이 좋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가문 날의 햇볕이 작대기처럼 꼿꼿했다. 마당 한쪽의 벤치에 그릇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얼핏 보니 막 공양을 끝낸 듯한 분위기였다. 설거지는 아니하고 어디들 가셨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릇의 안쪽을 햇볕에 소독하고 있는 중이었다. 숲에서 새가 울었다. 소리는 석굴암 마당에 내려앉으면 조금 더 커지는 것 같다. 뜨겁게 달궈진 빈 그릇에 공명하기 때문에. 땡글땡글 여물어가는 팥배 열매에 반사되기 때문에. 팥배나무, 장미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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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 입구의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그야말로 평탄한 길을 오르면 특이한 이정표가 있다. 길바닥에 있기에 지하로 드는 길안내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너구리 발바닥을 그려놓고 노고단까지 2.5㎞가 남았다고 가르쳐준다. 다시 몇 걸음 가면 왼편에 이런 안내판이 있다.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공부를 겸해서 가까이 가서 보니 국수나무와 미역줄나무에 대한 짤막한 소개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탐방로와 숲의 경계에 서서 울타리 역할을 하는 나무들의 정보와 함께. 여름이 성큼 도래한 길옆에는 조릿대가 꽃을 활짝 피우고 서 있었다. 사면을 점령하는 조릿대는 뿌리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벼와 먼 친척의 식물이라서 그런 것일까. 흡사 이삭이 달린 듯 땀방울을 맺고 있는 듯한 꽃 모양이다. 울타리와 울타리 안쪽의 여러 식물들을 관찰하면서 두 시간가량 걸었을까. 깊은 산중의 장터처럼 사람들로 붐비는 노고단 대피소가 나왔다.

나무 이름 안다고 나무를 다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에 조그맣게 달린 손잡이가 문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문을 여는 것처럼, 나무의 세계로 입장하려면 우선 그 이름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그저 터벅터벅 걷는다면 맹목의 길이되 그래도 주워들은 이름들이 있기에 그 나무를 만나면 자연의 빈 구멍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신기하다면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같은 산에서도 높이에 따라 식물의 분포는 확 달라진다. 조릿대는 드물어지고 줄기가 껑충하게 올라오는 식물이 자주 출몰했다. 전국 어디에서나 흔한 쥐오줌풀이었다. 뿌리줄기에서 쥐의 오줌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름에 비해 너무 아름다운 꽃. 코를 대보았다. 지린내일까. 그게 그 냄새일지 확인할 방도는 없으나 코를 전기로 지지는 듯 강렬한 냄새가 훅 들어왔다. 이름을 알았기에 나의 선입견이 스스로 취한 반응일 수도 있겠다. 쥐오줌풀을 쥐오줌풀이라고 알 리 없는 벌 두 마리는 제대로 익지도 않은 쥐오줌풀의 꽃대궁에 매달려 정신없이 꿀을 따고 있느니! 쥐오줌풀, 마타리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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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도사곡리 계곡은 울퉁불퉁 자갈길이었다. 휘어지고 경사진 길을 나아갈 때마다 용수철 같은 탄력이 전해져 몸 안의 먼지를 털어내주었다. 좌우로 휘황하고 선연한 나무들이 많았다. 찰랑대는 잎마다 햇빛이 반사되어 흰 꽃잎처럼 눈이 부셨다. 역시 강원도! 내심 탄복하면서 천천히 전진하다가 옴방한 끝지점에 차를 대고 관찰을 시작했다.

골짜기가 좁아 하늘의 해가 얼른 건너갈 것 같은 산촌. 인가 몇 채가 따뜻했다. 밭두렁 정기를 받아 태어난 아들은 도회로 떠났나. 멀리 비탈진 곳에서 노인 두 분이 부지런히 일을 하고 계신다. 작은 도랑을 건너자 나타나는 반달 같은 논빼미. 모내기를 하려고 채운 물이 거울처럼 고요했다. 산과 구름이 자맥질한 논바닥에서는 기포가 뻐끔뻐끔 올라왔다. 영양 많은 흙이 발효라도 하는 듯 슬슬 몸을 푸는 중인가 보다. 물길 끊긴 수로에서는 열심히 짝짓기를 하고 있는 여러 쌍의 개구리들.

논도 논이었지만 나의 시선을 붙드는 건 논두렁이었다. 흩어진 짚단 옆으로 앵초가 한 무더기 자라고 있지 않겠는가. 양지바른 곳이라면 어디서나 잘 자라는 앵초. 그리 귀한 야생화는 아니지만 기품 있는 꽃이다. 푸릇한 푸성귀 같은 잎들을 배경으로 대궁이 홀로 떨치듯 뻗어 올라 공중을 장악한다. 꽃의 색깔도 선명해서 만나면 기분까지 좋아지는 앵초. 이름이 제법 매워서 중얼거리면 입안이 홧홧해지는 앵초. 그래서 앵초, 라고 한번 더 부르고 싶어지는 앵초.

식물도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면 더 잘 자란다고 한다. 앵초에 둘러싸여 자라는 벼라면 좀 특별하지 않을까. 앵초와 이웃하여 자란 벼의 알곡에는 꽃의 빛깔과 향기가 훈습되지 않을까. 이 논에서 수확한 것으로 지은 기름기 좌르르 흐르는 앵초쌀밥 한 숟가락. 그 생각에까지 이르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강원도의 힘이란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겠다. 논두렁에조차 앵초를 구비한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저 강력하고 우아한 강원도의 힘! 앵초,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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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종기 궁색한 살림살이다. 물 한 컵을 뜨려고 탕비실로 가는 길에 창밖을 보다가 녹색의 열매에 눈이 꽂혔다. 한심하고 놀라워라, 이 사무실에서 근 10년을 삐댔는데 이제사 나무가 눈에 들어오는구나! 믿기 어렵겠지만 아무런 과장이 없는 사실이다. 열매를 토실하게 키우고 있는 저 나무는 살구나무.

어느 자리에서 나고 어떤 곡절을 겪어 내든 한 인생이 견디는 동안 그 소리 한번 안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굳이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오며 가며 나의 귀에도 여러 번 그 소리는 걸려들었다. 다행히 싫지는 않았고 귀에 착 감겨드는 그 소리는 목탁 소리.

나의 고향인 거창이 목탁의 생산지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 살던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북면의 개금 마을에서 목탁 장인이 3대에 걸쳐 활약하고 있다고 했다. 손으로 직접 깎아서 만든 목탁에는 사자 울음처럼 포효하는 소리가 들어 있다고 한다. 그 목탁 제작법은 다음과 같다. 100년 이상 된 살구나무 뿌리를 진흙 속에 5~7년 동안 묻어 두었다가 건조시킨다. 다시 3개월을 응달에서 말린 후 가마솥에 소금을 넣어 찌고 말리기를 수십 번, 그런 후 칼을 댄다. 그 과정에서 원래 피처럼 붉은색이 진이 모두 빠지면서 흰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두드려서 소리가 청아하지 않으면 바로 불구덩이로 가고, 제대로 소리가 나는 것만을 골라 들기름을 일곱 번 바른다. 고독한 수행과도 같은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목탁이 탄생하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개금 마을의 목탁을 손에 넣었다. 거창한 목탁은 흔한 자주색이 아니라 회색빛이 감돌고 있었다. 목탁에는 불로 지진 장인의 낙관이 있다. 성공(成空). 생전의 성철 스님께 받은 장인의 법명이다. 부처님오신날 모처럼 꺼내 두드려 보았다. 소리는 낭랑하고 맑았다. 바람을 타고 십리를 간다는 목탁 소리. 들기름 때문인가. 죽은 살구나무의 공(孔)이 만들어 내는 고소한 소리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살구나무, 장미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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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거나 배를 땅에 깔기도 하면서 야생화를 보자면 여러 궁리가 찾아온다. 자연의 빈자리를 알아차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더 뿌듯한 건 어린 시절부터 그저 흔하게 보기만 해왔던 풀들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잎과 줄기를 갈아서 만든 즙으로 물고기를 잡기도 했던 여뀌는 진즉에 알았지만 뚝새풀, 쇠뜨기, 며느리밑씻개, 고마리 등의 이름을 단단히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사전에 잡초라는 말은 없다.

며칠 전 뻔한 얼굴들이 우글거리는 뉴스를 피해 채널을 돌리다 EBS의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의 강>을 보았다. 누군가는 강에 몹쓸 짓을 했지만 또 누군가는 이런 대단한 기록을 남긴다. 빠져들 듯 탁월한 영상을 보는데 그중 한 장면이 이 글을 쓰게 하는 실마리를 주었다.

물총새는 사냥할 때의 동작이 총알같이 빠르다고 해서 물총새라고 한단다. 새는 갈겨니, 피라미 등의 물고기를 잡은 뒤 낭창낭창한 나뭇가지에 날렵하게 앉았다. 새는 머리부터 먼저 먹었다. 그래야 목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에는 물고기의 꼬리 쪽을 문 물총새. 부리로 물고기를 바위에 치며 기절시키고 비늘을 털어낸다. 가엾은 물고기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들바들 떨며 암컷 입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흔쾌해진 암컷은 아름다운 소리로 수컷을 불러 짝짓기를 허락하였다. 이 일련의 행위가 이루어진 곳은 개울가의 반들반들한 돌이었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이 풍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배경이 되는 풀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고마리였다.

고마리는 물을 특히 좋아해서 습지에 흔하고 가을이면 가지 끝에 예쁜 꽃을 피운다. 어린 시절의 시골. 잔치에 쓰일 돼지를 점찍은 뒤 도랑에 풀어놓기도 했다. 곧 들이닥칠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돼지는 우리를 벗어나서도 무거운 고개 때문에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하고 물가의 고마리를 뜯어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슬쩍 드러난 돼지 혓바닥은 고마리의 독특한 잎 모양과 너무도 닮았다. 그때와 이제의 기억이 있기에 앞으로 볼 때마다 돼지와 물총새가 떠오를 것 같은 고마리.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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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생태계에 관심이 많다. 키 작은 야생화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존의 조건을 제공한다. 무덤은 양지바른 곳일뿐더러 후손들이 초가을쯤이면 찾아와서 무성한 풀들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영월의 장릉과 선돌 주위를 둘러보고 그 유명한 한반도 지형으로 가는 길이다. 서강(西江)의 물길이 크게 휘돌아가면서 우리 국토를 닮은 모습을 빚어내는 곳. 주차장과 맞닿은 오솔길의 한쪽에 무덤이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겨우 한 발짝 떨어져 고요히 앉아 있는 무덤. 여느 무덤과 다를 바 없는데 노란 꽃들이 눈길을 끌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무덤의 나라에 입국해서 관찰을 했다. 할미꽃, 졸방제비꽃, 개별꽃, 솜나물, 냉이, 양지꽃, 각시붓꽃, 솜방망이.

조금은 지친 몸이었다. 관절에도 시큰한 느낌이 와서 무덤에서 물러나 뾰족한 돌에 걸터앉았다. 물로 목을 축이고 바나나를 우물우물 씹어먹었다. 때깔 좋은 꽃에 꽂혀 아직도 무덤 주위를 서성거리는 나의 꽃동무들. 이들이 지금 밀착해서 보고 있는 건 아마도 구슬붕이일 것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풀숲에 보물처럼 슬쩍슬쩍 숨어 있는 큰구슬붕이를 만나기도 한다. 오늘 이 무덤가에서 보는 건 그것보다 조금 작고 앙증맞은 그냥 구슬붕이였다. 작은 꽃이라서 그만큼 상대적으로 희귀한 꽃.

구슬붕이의 연보랏빛 꽃은 가운데가 작은 구멍처럼 보인다. 허공의 밑바닥을 꿰뚫는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지금 눈앞의 모든 것들이 다 충만한 허공일 것이다. 하나 퉁퉁한 살집에 박혀 있는 육안으로 그러한 경지를 획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따라 그러한 어찌할 수 없는 이승의 조건을 유독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뜻일까. 저렇게 무덤가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한 눈을 감고, 풀을 젖히고, 무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몸을 바투 밀착해서, 저 무덤으로 통하는 길 하나를 찾기 위해 통통한 꽃 가운데의 통로를 밝히려 초점을 맞추는 것은! 구슬붕이. 용담과의 두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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