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에 해당되는 글 189건

  1. 2015.11.23 보리수나무
  2. 2015.11.16 조도만두나무
  3. 2015.11.09 [이굴기의 꽃산 꽃글] 해국
  4. 2015.11.02 박태기나무
  5. 2015.10.26 마가목
  6. 2015.10.19 이질풀
  7. 2015.10.12 상수리나무
  8. 2015.10.05 천마
  9. 2015.09.21 물옥잠
  10. 2015.09.14 하늘말나리
  11. 2015.09.07 닭의장풀
  12. 2015.08.31 누리장나무
  13. 2015.08.24 구실바위취
  14. 2015.08.17 꿀풀
  15. 2015.08.10 냉초
  16. 2015.08.03 [이굴기의 꽃산 꽃글]능소화
  17. 2015.07.27 찔레꽃
  18. 2015.07.20 민들레
  19. 2015.07.13 모감주나무
  20. 2015.07.06 말채나무

모처럼 감기에 걸렸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몰려오고 가래가 몹시 끓었다. 그 좁은 구멍 안에 웬 그리도 많은 기침이 살고 있었는지 좀체 그칠 줄을 몰랐다. 은행처럼 쓸어 담는다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기침이 몇 가마니는 족히 되었을 성싶었다. 콜록콜록.



많이 사그라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쿨렁쿨렁 잔기침이 묻어나는 몸을 이끌고 해인사를 찾았다. 몸만큼이나 마음이 아픈 이들인가. 쌀쌀한 날씨에도 순례객들이 많았다. 합천은 나의 고향인 거창과 이웃한 곳이다. 해인사하고는 쌓은 추억이 많다. 길바닥에 내려앉은 나무의 그림자를 보자니 고향의 옛사람들이 떠올랐다. 돌아드는 길을 따라 장터가 열렸고 각종 기념품과 먹거리가 쌓여있는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날아가는 글씨로 휘갈긴 두꺼운 마분지가 꽂혀 있었다. ‘기관지, 천식, 편도, 기침, 가래에 특효. 감기, 피로회복에 좋음’.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보리수나무 열매였다. 어린 시절 다래, 정금, 오디와 함께 많이 따먹었던 열매. 우리 동네에서는 ‘뻐리똥’이라고 했었다. 전국 어느 산에나 있고 마을 어귀에서도 볼 수 있는 보리수나무. 인왕산에도 한 그루 있어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나무. 잎 뒷면에 은회색의 잔털이 무성해 멀리서 보면 빛이 번쩍번쩍 후광처럼 빛나는 보리수나무. 나는 뻐리똥을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보리수나무를 보리수나무로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부처가 그 아래서 정등각(正等覺)을 이뤘다는 인도보리수하고는 전혀 다른 나무이지만 그래도 보리수라고 하면 기분이 더 좋다. 공덕이라도 쌓아지는 듯 나무 이름도 한번 더 중얼거린다.

지금 여기는 해인사. 나는 기침을 콜록콜록 해대는 감기 환자이다. 가래 기침에 특효이고 감기에 좋다는 보리수나무 열매, 뻐리똥. 그 몇 알을 입안에 넣었더니 시큼한 맛과 함께 옛날 생각이 일어났다. 이 시큼상큼한 옛 생각이 목구멍에 들러붙은 감기 기운을 데리고 가주면 좋으련만! 5000원어치를 샀더니 쌀밥을 담는 사기그릇에 고봉으로 한 움큼 주었다. 그러고도 한 주먹 더 쥐여주었다. 좌판 앞 할머니는 때마침 터져 나온 나의 기침 소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신 것이었다.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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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닷새가 훌쩍 지났구나. 11월11일. 국적도 없는 고약한 놀이가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노리고 있다. 이른바 빼빼로 데이. 빼빼 마른 몸매에 대한 광적인 집착인가. 많은 젊은이들도 이 개념 없는 시속에 합류하여 쉽게 지갑을 열고 있다.

아라비 숫자 11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 형태에 주목해서 가래떡의 날이라고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1월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1111은 젓가락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내리는 빗줄기를 닮기도 했다. 비는 식물들에겐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양분이고 그걸 바라보는 농부들에겐 새참 같은 국수 가락이 아니겠는가. 시원하게 튕, 튕 튕. 튕기는 빗줄기 !!!!!!!! 이것은 하늘에서 오는 느낌표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11월11일을 빗방울의 날이라고 하면 빼빼로 데이보단 백번 낫겠다.


중앙선도 없는 드넓은 하늘에도 길 하나가 있어 태양은 홀로 터벅터벅 서쪽으로 걸어간다. 우리도 젓가락처럼 다리를 벌리며 각자 하루를 건넌다. 11111111은 11월11일 11시11분. 하루를 일생에 치환해보면 이 시간은 어디쯤에 해당할까. 빼빼로에 눈이 멀어 아차 하는 순간, 오전은 이내 지나가고 다시 청춘은 어렵게 된다.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는 시각인 오후 3시를 지나 이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슬슬 해야 할 시간. 내 나이도 벌써 오후 3시 근방이다.

겨울이 저만치 있고 저녁이 저만큼 도사리고 있는 무렵, 더구나 오늘처럼 비라도 뿌릴 때면 생각나는 나무가 있다. 몇 해 전 전남 진도의 식생을 조사하러 갔다가 만난 귀한 나무. 그 이름도 참 독특한 조도만두나무이다. 진도 부근의 조도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그 열매가 꼭 만두를 닮았다고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이 나무는 사는 곳이 참 기특하다. 키 큰 나무이지만 산속을 피해 밭둑이거나 풀밭 및 산의 가장자리에서만 자란다. 진도의 어느 비탈진 밭에서 일을 하던 할머니가 모처럼 허리를 펼 때 조도만두나무는 잠깐 그 고단한 할머니의 허기를 달래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조도만두나무, 전남 진도를 비롯한 몇몇 섬에서만 사는 한국특산종. 대극과의 낙엽 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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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한 분이 오시어 주꾸미 볶음밥을 먹고 차를 마시러 사무실 근처의 길담서원에 갔다. 훅 트인 공간에 좌우 벽면으로 책들이 빼곡하다. 감잎차와 커피를 주문한 뒤 농담 삼아 말했다. “여기 있는 책을 몽땅 다 읽으면 몸이 뭔가 달라질까요?” “……?” “해리 포터가 벽을 뚫고 마법의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이 세상을 얼른 뜨는 길이 저 벽 사이에 숨어 있지 않을까요?” 수돗물을 틀어놓은 채 분주한 실장님이 응대해 주신다. “원장님께서 서원을 열고 한 3년 공부했더니 겨우 세상이 좀 보이는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 “그건 빗자루를 타고 세상을 날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요. 그와 비슷한 얘기네요.” 겨드랑이에서 날개는 돋아나지 않고 입에서 웃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빗자루가 아니라 쾌속선을 타고 울릉도에 들어갔다. 바닷가에서 늦게까지 핀 해국을 찍었다. 바닷가에 사는 국화라는 뜻이다. 사나운 바람을 이겨내느라 줄기에는 부드러운 털이 많다. 잎도 날카롭지 않아 두루두루 원만하고 넓적하다. 배경이 좋았는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파도소리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카메라 셔터 소리. 찰칵찰칵, ㅂㅈㅂㅈ, ㅊㅋㅊㅋ. 얼핏 들으면 소리는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카메라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카메라는 이 셔터 소리가 매우 중요해서 신제품을 개발할 때 음향에 엄청 신경을 쓴다고 한다. 소리가 꽝이면 카메라의 성능이 제 아무리 우수해도 그냥 꽝이다. 묘한 중독성이 있는 셔터 소리. 이 소리에 홀려 사진의 세계로 뛰어든 이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ㅂㅈㅂㅈ, ㅊㅋㅊㅋ. 난무하는 소리들을 딛고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는데 이런 생각도 슬며시 따라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한 발 삐끗하면 낭떠러지. 죽음이 저 바다보다도 더 가까이 몇 센티미터 앞에도 있는 셈이다. 이 고급 카메라들도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고, 이 카메라가 내는 소리에 홀렸던 이들도 언젠가는 생(生)에 홀리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때를 미리 예고하자는 뜻으로 이런 소리를 내는 카메라 하나 만들 순 없을까. 꼴까닥꼴까닥! 혹은 ㅊㅎㅊㅎ! 해국. 바닷가 바위틈에 꼭 붙어사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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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삼형제가 살았다. 어느 날 분가하기로 결정하고 마당의 나무도 나누기로 했다. 하지만 땅을 파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원래 한 그루였던 게 나누려고 하자 죽는구나. 인간이라는 우리가 이 나무보다 못하구나.” 크게 깨달은 삼형제는 계획을 접었다. 그러자 나무도 다시 싱싱하게 활기를 되찾아 잎이 무성해졌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까닭에 형제간의 우애와 가정 화목을 상징하는 나무로 마을에 많이 심었다. 인왕산 둘레길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나무는 봄에 진한 자주색의 꽃을 가지에 다닥다닥 밀집해서 피운다. 가을이면 열매가 꼬투리로 달리는데 그 안에 씨앗이 피붙이들처럼 오종종하게 들어 있다. 박태기나무이다.



10월 중순. 신문은 금강산에서 벌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뉴스를 전한다. 설움과 기쁨이 뒤엉킨 상봉장 모습의 사진. 기사를 읽자니 아주 애틋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전쟁이 갈라놓은 생이별 40년. 신혼 초에 남북으로 헤어져 회갑을 넘긴 초로의 부부가 17일 밤 8시50분 도쿄 팔레스호텔에서 재회했다. 평양의 손영종씨(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실장)와 김선순씨(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195-4)의 극적인 재회가 이뤄지기 직전 노부부는 20대의 옛 모습을 서로 확인하면서 안면 근육을 떨었다.”(세계일보, 1990년 3월18일자)


이 재회에는 후일담이 있다. 이윽고 작별의 순간이 왔다. 변호사로 성장한 아들은 할머니가 생전에 “교복 한 벌 제대로 못해 입혔다”고 안쓰러워하던 것을 기억해서, 처음 만난 아버지에게 양복감을 드렸다고 한다.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아버지는 즉석에서 허리띠를 풀어 아들과 바꿔 맸다고 한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동안 나의 허리띠로 너를 늘 부둥켜안으마. 너의 허리띠로 항상 나를 부둥켜안아다오. 아버지의 선물에는 그런 뜻도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머릿속 깊숙이 짠하게 박힌 것이다.

“백발이 된 새색시는 눈물 대신 얼굴을 붉혔다.” 상봉 장면을 전하는 헤드라인이다. 아직도 우리가 이런 세월을 견디며 살고 있구나. 설악산의 첫눈과 금강산의 상봉에 관한 소식이 어우러져 눈물 여러 방울을 긁어내는 아침이다. 박태기나무, 콩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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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지러지는 단풍을 본다. 목석 같던 나의 몸도 놀라는 재주는 가지고 있구나. 자연의 화장술에 탄복하다 보면 어느 새 정상이다. 시선을 앞으로 당기면 단풍만큼 붉은 열매가 보인다. 웬만한 산의 정상이라면 빠지지 않는 마가목 열매다. 그 나무는 나를 곧장 울릉도로 데리고 간다.

사연이 있다. 4년 전 여름. 꽃공부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간 울릉도, 나리분지에서 하룻밤을 자고 추산 마을로 내려와 등대가 있는 태하까지 우산(于山)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에는 할머니 몇 분이 타고 있었다. 우산 속처럼 고요하던 버스가 우리 일행이 타자 금방 왁자지껄한 만원버스가 되어버렸다. 기사는 친절했고 승객들은 따뜻했다. 무거운 배낭을 덥석 받아주신 할머니가 우리의 정체를 알고 던지는 말씀. “저 가로수가 다 마가목인데 열매가 관절에 그리 좋아요.” 나의 무릎은 몹시 부실하다. 등산할 때는 그런 대로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에는 애를 먹는다. 그래서 그랬나. 잘 외워지지 않던 나무의 이름들인데 마가목은 단박에 쏙 들어왔다.


이튿날. 와달리 옛길을 빠져나와 내수전 전망대에 서니 울릉도의 한쪽 면과 그 앞바다가 일거에 들어왔다. 도동항과 저동항이 보이고 관음도, 죽도, 성인봉이 바다에 혹은 하늘에 시퍼렇게 떠 있었다. 이것은 내 눈이 좋아하는 멀리 있는 풍경이다. 시큰한 내 무릎이 찾는 경치는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전망대 근처에서 몹시 심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 휘청휘청 부러질 듯 흔들리고 있는 건 마가목이 아니겠는가. 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어제 버스 속 할머니가 그냥 함부로 하셨던 말씀이 아니란 것을. 낭창낭창 마구 흔들리는 마가목 나무가 전신을 동원하여 지금 관절에 좋을 수밖에 없는 성분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버스 속의 할머니는 헤어질 때 이런 말씀을 주셨더랬다. “마가목 열매 따러 또 와!” 어김없이 가을은 오고 열매는 익었건만 때를 맞추어 울릉도에 가진 못했다.

마가목 나무는 지팡이용으로도 좋다고 했다. 그것에 의지하기 전에 거리마저 붉게 물든 가을 울릉도에 가서 마가목 열매 기운을 흠뻑 쬘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가목. 장미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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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간다고 걷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먹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으니 웬만하면 그냥 꿀맛이다. 오늘은 주먹잡곡밥 그리고 쌈장에 고추와 오이를 찍어 먹는다. 쑥떡도 한입 넣었더니 산 아래에서의 웬만한 메뉴 부럽지 않다. 창문조차 없는 바깥 전망에 어느 고급식당이라고 감히 까불겠나.

고맙게도 늘 점심을 준비해 오시는 분이 있다. 나는 그저 짐꾼에 불과하지만 위장은 튼튼하고 왕성한 식욕의 집행기관인 입을 달고 있는 족속이다. 커피를 홀짝이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과일을 택했다. 이런 한 대목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후식으로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사랑은 방울토마토와 같아서 입을 다문 채 깨물지 않으면 액즙이 튀어나가 버린다. 입안에서 굴리다 깨물면, 목구멍 가득 고이는 액즙의 향내”(손철주).


거기까지만 해도 흔감할 터인데 오늘은 더 있다. 마지막으로 포도를 꺼내놓는다. 씨알이 굵은 포도는 방울토마토와는 달라서 입안에서 굴릴 정도의 긴장감은 없다. 씨까지 빠그작빠그작 깨물어 먹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러기엔 먹을 게 너무 많다. 떠나가는 진한 액즙이 아쉽기는 하지만 껍질과 함께 씨를 뱉어냈다. 굵은 씨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았다. 어라, 포도씨는 언젠가 잃어버린 내 사랑니를 많이도 닮았군. 그런 농담 같은 한마디도 던지면서 오후 관찰에 돌입했다.

이젠 올해의 꽃들이 거의 저물어간다. 단풍이 완연하고, 여기저기 열매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손대면 톡 터지는 물봉선을 찍고 일행을 쫓아가는데 또 무슨 기발한 식물이 있는지 카메라 소리가 요란하다. 이질풀이다. 한창인 꽃과 벌써 맺히는 열매, 아예 씨앗을 멀리 튕겨보내고 촛대처럼 말린 것이 동거하고 있다. 같은 줄기에서도 이처럼 운명이 서로 다르다. 씨앗을 한창 갈무리하는 이질풀의 열매. 씨방이 세 개 더 있긴 하지만 그것은 꼭 그것 같았다. 농담을 기억했던 이가 새로운 농담을 산중에서 보탰다. 포도씨가 사랑니라면 이질풀 열매는 영락없이 그것이로군요! 이질풀. 쥐손이풀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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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출판도시로 어렵사리 사무실을 옮겼다. 인왕산에서 심학산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교대한 셈이다. 공기가 다르고 구름이 바뀐 것도 좋지만 무언가 툭 떨어지는 기척이 퇴근시간을 알려준다는 점이 좋다. 심산유곡의 골짜기만이 그런 소리를 독점하는 건 아닌 듯 사무실 바깥 가로수인 상수리나무가 제 익은 열매를 아스팔트로 툭 던지는 것이다.

곯았던 짐을 정리하고 겨우 정신을 수습하면서 다람쥐 대신 도토리를 노리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옛날 시골에서 감꽃을 주우러 새벽부터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랬던 것처럼 아침 일찍 거리를 돌아다니는 분들도 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어떤 이들은 나무를 흔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발로 뻥뻥 차기도 한다. 가지가 붙들고 있는 도토리를 억지로라도 기어코 빼앗겠다는 심보였다.



알맹이를 잃고 껍질만 나뒹구는 스산한 풍경을 보는데 곧장 지리산 아래 한 계곡으로 나의 생각이 달려갔다. 이태 전의 일이다. 해동하기 전의 겨울산으로 나무공부를 하러 갔었다. 높은 곳을 피해 골짜기를 중심으로 인적 드문 고개를 훑었다.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꽃이나 잎이 아닌 나무의 특징을 공부하는 기회였다. 식물 분류의 기본인 생식기관 말고 엽흔이나 겨울눈을 관찰해 보면 그게 또 한 세계라는 것을 알고 탄복하기도 한다.

어릴 적 눈에 익은 닥나무, 뽕나무도 새삼스레 만났지만 그보다도 더 살가운 건 밤나무였다. 밤나무 아래 주위에 작년의 열매인 밤송이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밤송이는 모두 발랑발랑 뒤집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못해 알맹이가 고스란히 털린 것. 어쩌다 드물게 고슴도치처럼 등을 엎드린 밤송이가 있었다. 그것은 다행히 썩어가는 밤이었다. 개미나 벌레가 뒤집기에는 너무 큰 밤송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건 모두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혹 아닐까. 밤송이는 떨어질 때 알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수리 쪽으로 엎드려 낙하하는 것! 모성애나 부성애가 어디 동물 세계에서만의 일이랴. 지금 막 떨어져 구르는 도토리 하나를 주우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상수리나무, 참나무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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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그 어디로 넘어가는 기운이 확 느껴지는 달이다. 성삼재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버리고 남원 쪽으로 빠지니 정령치로 가는 외곽길이다.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눈썹에 맞추며 걸어가는 길. 드디어 정상인 만복대에 도착했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의 바위 표지석. 가슴에는 한글로 새긴 만복대라는 이름을 품고 있다.

들에는 꽃, 하늘에는 별이라지만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곳의 공중을 점령한 건 잠자리였다. 무슨 서러움을 저리도 실어나르는 것일까. 만복대 정상을 선회하는 작은 헬리콥터들. 이렇게 힘껏 날갯짓을 하면 그 어떤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 조금이나마 유예되기라도 하는 듯 잠자리떼의 광경이 부산했다. 공중에서 눈을 아래로 낮추니 키 작은 나무들의 겨드랑이마다 열매들이 맺히고 있었다. 길쭉한 호리병같이 생기는 결실. 병꽃나무였다. 나무는 꽃의 시절을 떨치고 나더니 이제는 열매의 시대도 마감하고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중인가 보다.



하산길은 언제나 좋다. 하산하기 위해서 등산하는 것 아닌가. Be it ever so humble, there is no place like home. 비록 누추하다 해도 내 집만 한 곳 세상에 또 없으리. 그러한 곳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길가에서 보기 힘든 야생화를 만났다. 천마였다. 발길이 붐비는 길가에 자리했는데 용케 사람들의 손길을 피했다. 꽃은 바스라질 듯 말랐고 열매가 여물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잎이 전혀 없고 홀로 가느다랗게 뻗어오른 대궁 끝에 꽃들이 모여 달린다. 천마는 감자맛이 나는 땅속의 덩이줄기가 귀한 약재이다. 오늘 나에겐 그것보다도 바싹 마른 꽃들이 압권이었다. 그 어떤 절정을 이루었다가 허물어지는 듯한, 그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춘 듯한 서러운 표정을 천마의 얼굴에서 읽은 것이다.

만복대에서 정령치로 내려가는 동안 여러 궁리를 곰곰 해보았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 형상의 바위가 우두커니 서 있는 만복대. 이름을 뜻하는 만복이인 줄 알았더니 만복은 그저 만 가지 복을 뜻한다는 ‘萬福’이었다. 만복이와 천마를 내세워 그럴듯한 전설이라도 엮어나볼까. 천마,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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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참 좋다. 싱그러운 들판을 걸어가면 햇빛 알갱이가 곱게 빻은 쌀눈처럼 하늘에서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 같다. 이 삽상한 기운을 짓기 위해 올 여름이 그렇게 뜨거웠나 보다. 따끈따끈 구들장을 데워놓고 굴뚝을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여름의 열기도 이제 떠나가고 있다.



구월이다. 수생식물을 공부하러 석모도에 갔다. 모래밭으로 들어서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도가 철썩였던 듯 물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습지를 통과하니 민머리해수욕장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길 좌우의 논에는 벼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찰랑대던 물은 모두 사라지고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벼 또한 반듯한 수생식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했다. 멀리서 보니 논 한 귀퉁이가 허전해 보이는 게 아닌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간밤의 태풍에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고 구겨져 있던 누런 황금색의 벼들. 동네 어른들의 땀방울처럼 흩어진 낟알들. 석모도의 논을 그렇게 만든 건 바람이 아니라 논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물옥잠이었다. 아예 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논두렁으로 내려가 자세히 관찰했다. 물옥잠은 여간 예쁜 야생화가 아니다. 강가나 논에서 자라기에 줄기가 곧게 선다. 깨끗한 심장형의 잎을 달고 훤칠하게 서 있는 보랏빛 꽃.

적막했다. 이제 물은 모두 마르고 결실을 기다리는 논 가운데에서 벼의 줄기는 제법 통통했고 알곡이 차곡차곡 여무는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아하, 둔한 나에게도 퍼뜩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논에서는 농약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다. 만약 농약을 뿌렸다면 부작용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런 약을 치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웃자란 피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곳의 농부는 차마 물옥잠에게 농약을 먹일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의젓했다. 논 가운데의 물옥잠은 그런 농심을 알기라도 하는 듯 활짝 피어 있었다. 진동하는 꽃내음을 맡으며 이 논의 벼는 참 향기롭게 여물겠다. 석모도에서 생산하는 물옥잠표 쌀! 추석이면 그만한 햅쌀밥도 달리 없겠다. 물옥잠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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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0편 암송하고 졸업…살아가는 데 힘과 위로 줍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경향신문9월2일자). 17년째 중학생들의 가슴에 마르지 않는 우물을 선물하는 어느 선생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게 실마리가 되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예전 민음사에 근무할 때 ‘세계의문학’ 편집위원들과 김우창 선생님께 신년 세배를 갔었다. 어느 해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오래 안 잊혔다. 미국의 생태주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의 주장인데 아이들한테 동식물 이름 100개를 외우게 하면 심성 공부에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그냥 흘려들을 법도 한데 마음의 공감이 컸던가 보다. 그 말씀을 접수한 이후 인왕산 자락을 어슬렁거리는 동안 소나무 말고 정확하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는 자각이 문득 일어났다. 뻔질나게 산을 들고나지만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호흡하는 기분. 그 난처하고 답답한 사정을 벗어나려다가 결국 꽃산행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의 어느 지리산 등산길.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어둑한 저녁에 치밭목에 도착하니 산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캄캄한 밤중. 오늘 만난 꽃을 중심으로 흐르던 화제가 급기야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는 별, 들에는 꽃, 가슴에는 꿈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떠오르기도 했다. 바람만 피하는 자갈마당에 겨우 자리를 비집고 눕자 하늘의 별이 초롱초롱했다. 꽃이 꽃으로 되려면 꽃만으로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꽃이 딛고 있는 흙이며 바위, 바람, 별에게로 공부가 확장되어야겠구나! 사소하고도 웅장한 결심을 했더랬다. 곤히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에 배긴 돌 하나에 몸이 뻐근했다.

가랑잎초등학교가 있는 유평마을로 가는 길은 여유가 있었다. 하산 도중에 많은 꽃을 만났지만 단연 눈길을 끈 것은 하늘말나리. 나리 종류 중에서 꽃잎이 아래나 옆이 아니라 위를 향하는 꽃이다. 다시 말해 편평하게 돌려난 잎 위로 쭉 뻗어올라 하늘을 향해 환히 벌어진 꽃이다. 별, 꽃, 꿈 그리고 돌로 연결되는 이 거대한 고리에 시(詩)도 끼워 넣으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하늘말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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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빨치산의 수기인 <남부군>이란 책이 있다. 그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저자가 산중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을 나서는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게 남았다. “나는 동상을 입은 발가락이 유난히 쑤시는 것을 의식하면서 총을 잡고 일어섰다. (…) 아침을 짓는 연기가 뿌옇게 개울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인간이 사는 집과 인간의 삶이 거기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통증이 심해진 발을 질질 끌며 산기슭을 내려섰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는 경찰이 아니라 인간의 마을에 먼저 투항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겨우 한 시간 반을 투자해서 인왕산을 갔다 오면서 몇 년간 지리산을 누빈 저자의 심사를 끌어오는 게 좀 낯간지럽긴 하다. 나라는 인물은 무슨 사상이나 신념을 지키고자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눈치 앞에서 어디 한발 마음대로 제겨 디딜 곳이 마땅찮은, 휘청거리는 오후를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래도 어쨌든 김밥으로 산중점심을 때우고 하산할 때 첫 집은 있어 산에서 나오는 나를 항상 반겨주니 거기에서, 거기에 있는, 인간의 집과 인간의 삶을 만나게 된다.


예전이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텐데 꽃을 알고부터 산과 마을의 접면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그곳은 비닐이나 빈병도 뒹굴지만 야생화 한두 송이는 피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쓰레기를 던져놓아도 그 틈을 비집고 자연은 꽃을 보내주는 것이다. 노란 애기똥풀이 피는가 하더니 어느새 하늘빛 꽃잎에 노란 암술과 수술이 도드라지는 닭의장풀이다.

거기까지인 줄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도 닭의장풀이 흔하게 피어 있지 않겠는가. 산들은 대개 깔딱고개를 두어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산은 제 키를 유지하기 위해서 바위를 머리에 받들고 있다. 힘겹게 한발한발 오르자 드디어 멀리 하늘과 산이 맞닿는 꼭대기가 보인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니 저곳이야말로 다른 세계로 가는 한 입구가 아닐까. 그 접면마다 닭의장풀이 피어나는 까닭은! 닭의장풀, 닭의장풀과의 한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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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 파주로 사무실을 옮기기로 했다. 도올 김용옥은 만년필이 수명을 다하면 조의문을 작성한다고 한다. 그간 생각을 받아 적느라 고생한 물건에 예를 갖추어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하물며 필기구에도 그러한 대접을 해준다는데 그간 내 마음의 의지처들과 그냥 싱겁게 헤어질 수는 없었다. 어언 10년여간 나를 품어준 인왕산과 그 아래 동네들. 효자, 통인, 누하, 그리고 옥인. 이름에서부터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사직분식에서 청국장도 먹고, 신한은행 앞 도로의 우체통 곁에서 난전을 꾸리는 할머니가 깐 도라지도 사고, 형제이발소에서 머리도 깎았다. 이 모든 게 이곳과 작별하는 마무리라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리고 8월의 마지막 금요일. 몇몇 벗들과 달맞이를 하러 인왕산에 올랐다.



가을의 기미가 보인다지만 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는 인왕산. 혹 꽃이 있나 두리번거렸지만 이렇다 할 꽃은 없었다. 이 환절기에 그나마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누리장나무였다. 이미 꽃은 졌고, 꽃 진 자리마다 땡볕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빨간 열매가 단련되는 중이었다.

누리장나무는 꽃공부에 입문했을 때 기억에 남는 나무 중의 하나이다. 나무 앞에 섰더니 누군가 잎을 비벼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쾌쾌하고 고약한 누린내가 나서 누리장나무라고 한다면서. 그러나 나에겐 전혀 그렇지가 않았으니 외려 그 옛날 몹시 탐을 내며 먹었던 원기소의 고소한 냄새가 입천장에 들러붙는 게 아닌가. 그 이후 누리장나무는 나에게 어릴 적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각별한 나무가 되었다.

드디어 정상이다. 단풍이야 일 년에 한 번이지만 이 휘황한 야경은 매일 벌어지는 압도적인 전시이다. 구름에 가려졌던 보름달도 문득 고개를 들자 우리를 확실하게 내려다보았다. 몇 병의 막걸리가 일행을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한 곡조 뽑았다. 송창식의 ‘잊읍시다’. “… 가끔가끔 찾읍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조심조심 아주 조금씩 다시 찾읍시다.” 내 졸렬한 붓끝을 대신하는 노래인 것을 알아차렸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누리장나무. 마편초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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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이 산에서 무슨 꽃을 보게 될까. 대개 초입에서는 그리 놀랄 만한 꽃들이 없어 몸을 놀릴 일도 별로 없다. 그저 일행의 꽁무니를 따르면서 식물들이 처한 상태를 보기도 하면서 쫓아가기에 바쁘다. 오늘 따라 날씨는 분명한 태도를 정하지 않았다. 비라도 뿌릴까 망설이는 눈치다. 넓은 임도를 버리고 급경사의 길을 더위잡아 오르자 갑자기 좁아지는 길. 옆구리에 스치는 나무들의 긴장을 느끼면서 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애초 길이라곤 없던 숲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으면서 빽빽하던 숲에 틈이 벌어지더니 저렇게 통통한 길이 만들어졌다. 자연은 직선을 용납하지 않는 법이니 길은 휘어지고 구부러지기 마련이다. 산속으로 길이 만들어진 이래로 아마 바닥이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문명을 운반하는 많은 발길을 받아내면서 바닥의 돌들은 닳고 닳았다. 울퉁불퉁하고 반질반질하다. 이 바닥에 흘린 참을 수 없이 고약한 냄새라도 맡은 것일까. 벌레, 곤충, 나비가 길을 횡단하려면 슬쩍 경계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기어코 비를 한줄기 뿌렸다. 이런 날이면 길이 아연 동굴처럼 변하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나무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그런 풍경이 빚어지는 것이다. 터널같이 컴컴한 어느 모퉁이를 돌았더니 한복판에 바위 하나가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물기로 얼룩진 바위는 더욱 반질반질하고 미끌미끌하다. 물은 바위에게도 요긴한 재료인데 저축할 틈도 주지 않고 아래로 흘러가버린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어엿하게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바위에서 숨쉬며 바위를 부둥켜안고 사는 것.

인제 대암산의 용늪 가는 길. 뚜껑 없는 관처럼 길게 이어진 길을 통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구실바위취였다. 모양을 낸 접시 같은 잎을 배경으로 둥글게 모인 꽃들이 안테나처럼 쭉 뻗어올랐다. 바위에 깃들여 살기에 줄기는 더 꼿꼿하고 대궁은 저렇게 슬쩍 꼬부라지는 여유 끝에 꽃을 받들고 있는 구실바위취. 습기와 이끼가 많은 반그늘에서 주로 자라는 한국 고유종. 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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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닥다닥 붙은 건물에서 요란한 저녁을 뒹굴고 나자 이윽고 정중한 새벽이 왔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세속도시의 일상이다. 그나마 저 신선한 시간이 있기에 번잡한 하루의 나날들을 이렇게나마 수습하고 시작할 수 있다. 아침이다. 출근길에 전개되는 풍경을 보면 울긋불긋한 간판 아래 출입문이 없는 건물은 없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그만큼의 시간의 흔적이 고여 있을 것이다. 모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고유한 세월을 만지고 싶은 궁금증이야 있지만 일일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나중에 내가 저승으로 갔을 때, 자넨 수박 겉핥기식으로 세상을 살다가 여기로 왔군, 해도 묵묵부답일 도리밖에 없겠다. 그러나 비상구처럼 이런 날이 있기도 하다. 오늘 같은 휴일에는 신새벽에 몸을 빼내어 먼 산으로 간다. 흐르는 것들만 흘겨보았기에 비닐처럼 미끌미끌해진 내 눈알이 모처럼 울퉁불퉁해질 수 있는 기회다. 손가락 끝 지문의 골짜기에도 모처럼 본디 제 감각이 찾아드는 순간이다.

지난 몇 년간의 꽃산행. 굳이 깊이를 잴 것도 없는 일천한 식물학 지식으로 감히 말하자면 산에 들 때마다 참 자주 본다는 느낌이 드는 꽃이 있다. 늦봄부터 초가을에 걸쳐 가장 오랜 기간 개화 상태를 유지한다고 여겨지는 꽃이기도 하다. 내 발등에서 한 뼘가량 더 하늘로 힘껏 뛰어오르는 꽃, 꿀풀이다. 너무 흔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그래서 이렇다 할 꽃이 없는 곳에선 내 허전한 시선을 묵묵히 받아주는 꽃이다.

이번 산행은 강원도 인제의 대암산. 정상 부근에는 천혜의 생태습지인 용늪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던 용이 쉬었다가 가는 곳이라고 한다. 그 늪으로 가는 호젓한 길가에서 만난 꿀풀. 유난히 색감이 좋았다. 쉬기도 할 겸 엎드렸다. 꿀풀은 줄기 위 층층의 다락방 같은 구조 속에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다. 그 방마다 입술 같은 꽃잎이 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꿀을 간직하기에 이름조차 꿀풀일까. 실제로 이 꿀풀을 이용하여 만든 꿀은 특별한 대접을 해준다고 한다. 윙윙거리며 달려드는 여러 마리 벌 사이로 꽃잎 하나 조심스럽게 따서 밑동을 핥았다. 밍밍했다. 아뿔싸, 저 녀석들이 벌써! 꿀풀,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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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풀, 제비꽃, 말나리. 높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꽃들과 눈을 맞추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산의 정상이다. 꽃들의 계단이 한 ‘띵띵한’ 등산객을 저의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상승시킨 셈이다.

여기는 사방으로 탁 트인 공간이 길게 이어지는 소백산 능선. 호쾌하게 펼쳐진 전망이 산행 내내 눈을 가득 채운다.

비탈진 등산로를 곧장 오를 때도 그랬지만 능선길에서도 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의외의 꽃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꺾어지는 골목마다 호기심이 고여 있듯 모퉁이마다 색다른 꽃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김밥으로 때운 점심이라 하산을 준비하면서부터 배가 헛헛해지던 중에 꼭 알맞은 이름이 귀에 척 꽂혔다. 우와, 저기 냉초 좀 보소! 산 아래에서 짊어지고 온 식탐은 산중에서도 왕성하게 작동을 해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곧장 ‘냉면에 식초’로 연결이 되었다. 꽃의 영혼이 있어 알아들었다면 어안이 벙벙할 노릇이 아닐 수 없겠다. 그렇게 소백산 능선의 풀밭에서 홀로 떨치고 서 있는 냉초를 처음 만났었다.

성삼재 고개에서 모두들 지리산 주능선을 향해 나아갈 때 슬쩍 방향을 바꾸어 옆으로 빠지면 정령치로 가는 길이다. 지리산의 장엄한 능선을 귀에 걸고 걸을 수 있는 호젓한 등산로이다. 이 더위에 무슨 꽃일까 싶겠지만 하늘말나리, 꽃창포, 꽃며느리밥풀 등이 있어 눈이 포식을 했다. 그 많은 지리의 여름꽃들 중 3년 전 내 끈질긴 식탐을 자극했던 꽃도 있었으니 냉초였다. 소백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르마 같은 능선의 풀밭에 핀 꽃. 오직 한 줄기에서 훌쩍 뻗어 올라 돌올한 자태를 자랑한다. 줄기는 좀체 꼬부라지지 않지만 그 끝에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꽃대는 은근하게 슬쩍 모양을 비튼다. 그것이 마치 도립한 느낌표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우화등선하듯 냉초 위에 냉큼 올라앉은 잠자리 한 마리. 지리의 여러 봉우리들을 휘감고 홀로 적막에 빠져들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이봐, 그대도 식탐을 비롯해 몇 가지 욕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이 연약한 꽃대 위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올라앉을 수 있다네, 나처럼 이렇게! 냉초.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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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처음 듣고 나지막이 불러보았을 때 입안으로 작고 완만한 구릉 하나가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그냥 그 이름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꽃. 능소화를 제대로 본 건 세 해 전, 울릉도 탐사여행에서였다. 식물애호가이기도 한 도동성당 신부님의 안내로 뒷산을 오르기로 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섬개야광나무와 섬댕강나무 군락지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본격 등산에 앞서 마당에서 몸을 푸는데 신부님이 본당으로 연결된 계단을 타고 오르는 꽃을 가리켰다. 능소화 좀 보세요. 꽃도 꽃이지만 꽃줄기가 좌우 대칭으로 올라가는 게 제단(祭壇)의 촛대같지 않나요? 그날 이후 능소화를 볼 때마다 조금은 신성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쩌다 파주 출판도시에서 집 짓는 일에 관여하면서 자유로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나올 때 노을을 배경으로 질주하지만 서울로 진입하면서부터 어김없이 느림보 행진이다. 하루를 마감하고 돌아가는 것들로 부산한 자유로. 하늘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걸어온 해도 서쪽으로 넘어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로 길이 꽉 막혀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느린 속도로 나아가는데 멀리 절두산이 보였다. 머리를 쳐든 누에 모양이라고 해서 잠두봉이었지만 천주교 박해 때 많은 교인들이 처형된 곳이라서 절두(切頭)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성인들의 피 흘린 자리에 성당이 날렵하게 서 있다.

가까이 지나면서 잠깐 눈을 돌리자 가파른 기슭에서 눈길을 확 뺏어가는 주황빛의 꽃들, 능소화였다. 왜 하필이면 저곳에 저 능소화일까. 또 한편 생각하면 꼭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는 꽃이 아니겠는가. 불과 150여년 전에 벌어진 일들을 진혼이라도 하겠다는 듯 절두산 절벽에 목을 내밀고 피어난 능소화.

시간은 강물처럼 감쪽같이 흘러가고 7월의 따가운 햇살이 차 지붕에 꽂힌다. 어쩌면 햇빛도 부드러운 칼이 아닐까. 단단한 것들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 내 목덜미에 닿는 이것도 아주 부드러운 칼날인 것 같아서 아슬아슬한 절벽 위를 한 번 더 바라보게 하는 능소화. 능소화과의 낙엽성 덩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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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감주나무  (0)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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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서의 어린 시절. 산으로 소먹이 하러 갔다. 풀을 뜯어먹는 소 옆에서 우리라고 심심한 입을 그냥 놀릴 수는 없었다. 칡뿌리, 정금, 산딸기 등이 고사리 손을 피해가지 못했다. 자갈이 울퉁불퉁한 등하교 길에도 먹을거리는 있었다. 어느 모퉁이를 돌면 먼지를 뒤집어쓴 찔레꽃. 채 야물지 않은 끝을 따서 껍질을 벗기면 물이 통통히 오른 투명한 가지는 한겨울의 고드름 같았다. 씹으면 맛이 덤덤했다.

시골을 떠나 도회로 전학 간 뒤, 아이스크림 녹듯 찔레꽃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방학 때 시골을 가도 꽃이나 나무를 찾을 겨를은 없었다. 여뀌를 갈아서 물고기를 잡고 곤충채집을 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았다.

5월 마지막 주말. 지리산 둘레길의 한 자락인 상황마을 뒷산 무덤가에서 귀한 난초를 보았다. 고작 한 뼘 높이의 방울새란. 그 작은 난초를 찍으려니 무릎은 꿇고 엉덩이를 치켜들어야 했다. 꽃동무들의 그런 동작을 보자니 무덤에 또 하나의 싱싱한 무덤을 더한 듯한 형국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어스름. 경운기 전용의 시멘트 길을 내려오는데 살림집을 겸한 비닐하우스에 딸린 밭에 농부가 엎드려 고추모종을 심고 있다. 마당 입구에 서 있는 때죽나무에 초인종처럼 조롱조롱 꽃이 달려 있다. 밀려오는 어둠에 맞서는 하얀 꽃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비탈길을 구르듯 내려오자니 흥이 저절로 났다. 무언가 콧노래가 필요해서 하얀 꽃을 보고 ‘하얀 꽃’으로 시작하는 가사를 무심코 입에서 불러내는데, 어라, 바로 왼편 개굴창에 하얀 꽃이 보이고, 가까이 가서 보니 찔레꽃이 아닌가. 다시 보니 저 멀리 지리산 능선 위로 하얀 달이 꽂혀 있지 않겠는가. 내 인생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 그래서 까닭 없이 울먹해지기도 한다. 지금 꽃 앞에서의 이런 순간이라도 내게 없다면 마음속 울혈을 어찌 다 다스릴 수 있겠더냐, 서럽고 슬프고 순박하고 하얀 찔레꽃아! 장미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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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인왕산 무릎 아래 사무실까지 가는 길의 경우의 수는 많다. 골목 하나 슬쩍 바꾸면 전혀 다른 출근길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토속촌 삼계탕집과 참여연대를 지나 통인시장을 관통했다. 골목마다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시멘트 일색의 담벼락이지만 그 척박한 조건도 자연은 외면하는 법이 없다. 조그마한 틈에도 씨를 던져 풀을 키운다. 북1문을 빠져나온 골목에 특이한 종이팻말이 있다. 돌 틈을 비집고 자라나는 민들레의 가느다란 줄기 곁에 꽂힌 것은 ‘一片丹心(일편단심)’.

누가 저 갸륵한 심정을 저렇게 적어놓았을까. 짚이는 바가 있기에 바로 옥인정육점으로 들어갔다. 한우암소전문점인 가게는 고기 냄새도 가득하지만 묵향이 진득하게 배어 있다. 취미가 서예인 사장님은 칼을 들다가도 틈만 나면 붓을 잡는다. 돈통도 있지만 그 옆에는 항시 먹물통이 대기하고 있다. 짐작이 맞았다. 손님도 아닌 나의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하시는 말씀. “아, 처음엔 그냥 민들레라 써놓았죠. 그런데 그러고 나면 그 다음이 없잖아요!”

땡볕에 지쳐 늘어진 민들레를 부축하며 서 있는 ‘일편단심’의 팻말을 보는데 중국의 공원에 있기도 하다는 환경보호 팻말이 떠올랐다. ‘手下留情 足下有靑(수하유정 족하유청).’ 손 안에 정이 머무르고 발 아래 푸름이 있다는 말로 함부로 가지 꺾지 마세요, 잔디 밟지 마세요라는 속뜻이다.

자칫 딱딱하기 쉬운 명령문을 이렇게 시적인 대구(對句)로 눙치며 처리하는 솜씨가 가히 놀랍다. 당시(唐詩)의 나라인 중국에서 이태백과 두보의 후예답게 웅숭깊음이 철철 흘러넘치지 않는가.

전국의 양지바른 산과 들은 물론 통인시장의 자투리 영역까지 찾아와 자연의 향기를 전하는 민들레. ‘수하유정 족하유청’과 ‘일편단심’은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뜻일 것이다. 붐비는 발길을 피해 울타리해주는 팻말. 어디 조용필의 노래만이랴. 옥인정육점 사장님의 일필휘지가 좁은 골목을 문자향으로 가득 채웠다, 일편단심 민들레.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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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 완도의 식생조사에 몇 번 참여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상황봉을 필두로 섬 구석구석을 훑었다. 한 해를 결산하면서 마지막으로 간 곳은 완도 대문리의 모감주나무 군락이었다. 찰랑찰랑 물결이 이는 바닷가 바로 옆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백여 그루의 나무가 도열해 있었다. 방파제에서 어구를 손질하고 배를 수리하는 어부들과 어울린 풍광이 장관이라서 섬을 떠나면서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높은 산에 가서 보고 온 식물을 가까운 곳에서 다시 만나면 고향사람을 광화문에서 뜻밖에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점심으로 먹은 감자탕의 여운을 즐기며 인왕산 허리에서 홀로 활개를 치는데 멀리서 눈에 익은 나무가 나타났다. 그간 그냥 무심코 지나쳤는데 얼마 전 완도 바닷가에서 본 모감주나무가 아닌가. 아주 귀한 나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나무도 아니다. 얼른 달려가 잎부터 확인했다. 열매도 열매지만 나에겐 모감주나무의 잎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좌우대칭으로 달리는 잎은 그 자체가 다시 잘게 갈라진다. 원래 하나였던 대륙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로 분화하여 이동하는 것처럼!

시간의 모퉁이를 몇 번 꺾어 돌았더니 여름의 기미가 왔다. 올해 첫 매미울음은 언제쯤 내 귓전을 두드릴까. 그늘을 골라 디디며 인왕산을 걷는데 멀리서 활짝 핀 꽃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지고 없는 꽃 사이에서 피어난 노란 꽃 무더기라 더욱 눈길이 돌아갔다. 작년의 열매와 올해의 꽃을 함께 달고 있는 모감주나무.

모감주나무는 꽈리 같은 열매 속에 3개의 까만 씨를 맺는다. 씨는 아주 단단해서 절에서 염주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한다. 어디 사람의 손으로 이동해서 한 줄에 꿰인 염주만일까. 까맣게 익어 벌어진 열매 속에 더욱 까만 씨앗이 달려 있다. 나무가 운치 있게 바깥에 달아놓은 풍경(風磬)! 바람 불면 혹 달그락거리는 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귀 기울이게 하는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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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레벌떡 출근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동차 행렬에 짜증이 나면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핸들에 잠깐 머리를 박았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광화문에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다. 사람의 형상이라곤 찔려도 피 한 방울 내놓지 못하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동상밖에 없다면! 짜증이 공포로 변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꾸역꾸역 퇴근길. 밋밋한 행인의 뒤통수를 보고 걷다가 일천한 상상력을 한 번 더 쥐어짜본다. 횡단보도 앞 빨간 신호등에 걸려 하늘의 낮달을 보다가 시선을 내리니 길가의 가로수가 모조리 베어지고 서 있는 건 눈알 굴리며 고개 숙인 간신 같은 가로등뿐. 뿐만 아니라 멀리 남산, 북한산이 온통 벌거숭이로 변했다면! 밋밋함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 찰나로도 족할 것이다.

엽기적인 일들의 와중에서 제정신 갖고 살기가 참 어려운지라 이런 궁리라도 하면서 땡볕여름을 다스리는 중. 지난주 이 자리에서 매차나무를 언급한 이후 내내 그 나무가 눈에 밟혔다. 소양강의 말라버린 바닥을 짚고 나타난 매차나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앞날에 대한 모종의 징후인 것만 같아서 자꾸 그 풍경이 떠오른 것이다. 매차나무는 정확히 무슨 나무였을까. 매자, 매화, 차나무도 일견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들은 모두 관목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 부산의 꽃동무가 믿을 만한 정보를 주었다. 인터넷을 뒤졌더니 매차나무가 말채나무의 이명(異名)이며 빼빼목이라고도 한다는 게 아닌가. 매차와 말채. 끊겼던 물길이 이어지듯 희미하게 말의 길이 연결되는 것도 같았다.

가지가 낭창낭창해 말의 궁둥이를 때리는 채찍으로 안성맞춤이라서 그 이름을 얻은 말채나무. 전국의 산에 흔하지만 경복궁에도 여러 그루가 있다. 우리 사는 곳에서 나무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무 없는 세상이란 창문 없는 건물, 항문 없는 육체, 죽음 없는 인생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누구나 해봄 직한 이런 시시한 문장도 조립하면서, 미라처럼 비쩍 마른 소양강의 매차나무를 떠올리면서 나는 지금 말채나무를 만나기 위해 궁궐의 문지방을 넘는다. 말채나무, 층층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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