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에 해당되는 글 198건

  1. 2016.01.25 [이굴기의 꽃산 꽃글]노박덩굴
  2. 2016.01.18 무환자나무
  3. 2016.01.11 계수나무
  4. 2016.01.04 쪽동백나무
  5. 2015.12.28 붓순나무
  6. 2015.12.21 감나무
  7. 2015.12.14 붉나무
  8. 2015.12.07 물오리나무
  9. 2015.11.30 국수나무
  10. 2015.11.23 보리수나무
  11. 2015.11.16 조도만두나무
  12. 2015.11.09 [이굴기의 꽃산 꽃글] 해국
  13. 2015.11.02 박태기나무
  14. 2015.10.26 마가목
  15. 2015.10.19 이질풀
  16. 2015.10.12 상수리나무
  17. 2015.10.05 천마
  18. 2015.09.21 물옥잠
  19. 2015.09.14 하늘말나리
  20. 2015.09.07 닭의장풀

인왕산 가는 길. 선바위 옆으로 오르면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망루 같은 초소 아래 반반한 바위가 있고, 그 곁에 노란 껍질에 빨간 씨앗의 열매가 한 무더기 있다. 눈이 많이 왔던 작년에는 수북하게 쌓인 눈을 뒤집어쓴 채 추위에 맞서고 있었다. 더러 이슥한 밤이면 경계병들의 오줌 세례라도 받았나. 그 어떤 곳보다도 더욱 튼실하게 잘 자라고 있는 노박덩굴의 열매들이다. 인왕산 한 귀퉁이의 노박덩굴은 볼 때마다 나를 지리산의 한 골짜기로 곧장 데리고 간다.

지리산의 칠선계곡을 오르는 길. 등산로 가운데 바위에 누가 흘린 배설물이 달랑 놓여있었다. 으슥하지도 않은 아주 양지바른 곳이라 인간의 것은 아닌 듯했다. 똥의 규모로 보아 제법 덩치가 나가는 동물의 작품임이 분명해 보였다. 알록달록한 무더기는 내용이 제법 복잡했다. 막대기로 파헤쳐 보니 겨우살이와 노박덩굴의 열매가 들어있지 않겠는가.


그 똥을 눈 동물은 그 열매를 아주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미처 소화도 덜 된 채 그것을 바깥으로 내놓아야 했을까. 까닭이 있다. 그것은 발 없는 식물이 씨앗을 퍼뜨리는 기발한 전략이었다. 발품 하나 팔지 않고 자신의 후손을 멀리멀리 퍼뜨리는 지혜! 말하자면 겨우살이나 노박덩굴은 먹이를 찾는 동물을 씨받이로 활용한 셈이다. 이렇게 동물의 내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씨앗은 발아도 훨씬 잘 된다고 한다. 흐물흐물한 태(胎)처럼 투명한 막을 덮고 있는 그 씨앗들은 보온 효과도 누리면서 겨울을 난 뒤 천천히 흙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날 것이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김남주)라는 절창의 시도 있듯 자연은 이 겨울에도 먹이가 되는 열매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까치보다 조그만 입을 가진 날짐승을 위해서 이렇게 작게, 높은 가지까지 오르지 못하는 길짐승을 위해서 저렇게 낮은 곳에 노박덩굴을 배치하여 둔 것은 아니었을까. 겨우 배를 채웠지만 시원하게 똥 누고 나면 또 허기가 찾아온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이를 찾아 헤맬 동물을 떠올리면서 느긋하게 웃고 있을 노박덩굴의 씨앗들. 노박덩굴, 노박덩굴과의 낙엽 덩굴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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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EBS 세계의 명화는 <잉글리쉬 페이션트>였다. 몇 년 만에 다시 보니 감흥이 새로웠다. 마지막 장면. 파란만장한 일을 겪어낸 알마시는 한나에게 화상으로 뭉그러진 손을 겨우 들어 앰플 통을 쓰러뜨린 뒤 눈짓으로 신호한다. 그렇게 해서 치사량의 모르핀을 자신의 몸 안으로 들이면서 장작처럼 빳빳해진다.

모든 인생을 스크린에 옮길 수는 없겠지만 영화 같지 않은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저녁에 본 모니터의 부음 기사가 눈시울을 때렸다. “시대의 대표적 지성인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별세했다. (…) 20년 넘게 감옥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은 신 교수는 (…) 진통제인 모르핀이 듣지 않을 정도로 병세가 크게 악화되자 스스로 곡기를 열흘 정도 끊었다.”

두 해 전 제주도 식물탐사. 마지막 일정은 한림수목원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어느 나무 앞에서 특징을 살펴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무의 이름을 보자니 은근한 속셈이 생긴 것이었다. 나무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 팻말, 나무를 함께 찍었다. 훤칠하게 자라 아름드리 줄기로 큰 그늘을 이룬 그 나무는 무환자나무. 이름 속의 ‘환자’는 액면 그대로의 환자(患者), 페이션트는 아니나 뜻은 서로 통한다. 살아있는 사람 치고 환자 아닌 이가 어디 있던가. 집에 심으면 우환이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환자(無患子)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무환자나무.

일면식은 없었지만 선생의 책은 더러 읽었고, 선생의 붓글씨로 화제가 된 ‘처음처럼’은 아주 많이 마셨다. 아마 나 같은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 스스로 기공을 닫고 낙엽을 준비한다. 건조시킨 잎을 모조리 떨구어 혹한의 계절을 통과하면서 또 한번 갱신하는 것이다. 이제 선생은 이승을 떠났지만 많은 이들의 가슴에 큰 나무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나무는 ‘나무야 나무야’가 되고 이윽고는 ‘더불어 숲’이 될 것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여운 속에서 우리 시대의 한 스승을 떠올린 밤. 선생의 갱신을 한편으로 부러워하며 더불어 무환자나무도 생각해 본 밤. 무환자나무, 무환자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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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의 일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안산(鞍山) 아래 영천시장. 각종 먹을거리가 즐비한 통로를 지나 시장 끄트머리쯤에 가면 홍어집과 마주해서 헌책방이 있다. 알싸한 홍어맛과 꿉꿉한 문자향이 사이좋게 어울린 그 좁은 골목길에서 세월의 때가 반질반질 묻은 책들을 살피다가 <동의보감>은 꼭 한번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문득 하였다. ‘아프고 안 아프고’의 문제를 떠나서 나를 나로 실존케 하는 몸속 오장육부의 정체라도 최소한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들이 모이고 뭉쳤다가 드디어 나에게 보낸 신호였던 셈이다.

며칠 전의 일이다. 경향신문을 보다가 어느 책광고에서 눈길이 툭 멈추었다. 책은 책이되 소위 베스트셀러를 겨냥한 책은 아닌 듯했다. 농민신문사에서 펴낸 <양돈>이라는 책. 표지를 보는데 이제껏 숱하게 먹었던 고기가 떠오르고 돼지에 대한 각별한 생각이 문득 일어났다. 그건 돼지고기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이제껏 불판에서 노릇노릇 익었다가 어떤 구멍으로 속속 사ㅁ라지기만 했던 돼지에 대해서 새로운 환기가 일어난 셈이었다. 책광고에서 돼지를 새삼 생각해 봄과 헌책방에서 <동의보감>을 문득 떠올림은 궤를 같이하는 것이리라.



심학산 아래 헤르만하우스 옆으로 그 옛날 승천을 꿈꾸던 용(龍)이 대기하였을지도 모르는 실개천이 흐른다. 상투적으로 꽂혀있는 나무들 중에서 특이한 게 있으니 계수나무다. 작년 여름 공사판의 점심시간이면 고단한 인부들의 쪽잠을 달콤하게 품어주었던 나무. 동그란 하트 모양으로 그 가장자리마다 붉은색이 감도는 잎이 특징이다.

이제 용이 다시 올 리는 만무하겠지만 꽃과 잎은 봄이면 다시 무성하게 찾아오는 곳. 그 앞을 지나며 생각해 본다.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은 내가 속한 세계의 표면이 아닌 게 없다. 몸이나 돼지, 책이나 나무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근년에 나는 꽃의 세계로 입장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한다. 봄이면 피어날 꽃들. 그게 다만 땅의 표면에 단순히 달리는 것에 불과할까. 사나운 계절을 통과하면서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계수나무 아래에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계수나무, 계수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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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3일짜리 작심을 하거나 그냥 천장 아래에서 빈둥빈둥하게 보낸 뒤끝의 허망함을 알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방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병신년 둘째 날 오후 3시 무렵 인왕산 정상에 도착했다. 작년에 인왕산 아래를 떠나 파주로 옮긴 터라 새로운 감회가 일어났다. 시절을 잘못 알고 나타난 뜻밖의 야생화라도 있을까 두리번거렸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나무 하나가 떠올랐다.


인왕산 아래에서 부대끼며 살 때 특히 정이 가는 나무가 있었다. 깔딱고개 조금 못 미쳐 아주 경사가 심한 곳에 자라던 어린 나무였다. 무릎과 발목이 부실해서 자주 미끄러지느라 비탈에 선 나무 덕을 톡톡히 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 나무를 내 나무로 정했다. 오르내릴 때 악수하는 기분으로 꼭 나무 앞에 서서 한 번씩 쓰다듬었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악수할 땐 장갑을 벗고 했다. 그게 나무에 대한 예의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늙어가는 만큼 너는 어서 자라고 커라. 식구들한테도 나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나무한테 수목장이야 하겠냐만 나중에 나중에 내 생각 나거든 그 나무한테 가거라. 내 손때가 제법 묻었고 눈을 가장 많이 맞춘 나무란다. 그런 말도 무심결에 했었다.

어느 날 버릇대로 그 코스로 올라 나무를 찾았더니 나무의 절반이 톡 꺾여 있었다. 하얀 피가 흥건했다. 누군가가 길을 방해한다고 저지른 소행이라 짐작이 되었다. 나는 그때 고약한 형용사를 몇 개 얹고서 아주 심한 욕을 그놈한테 했었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응급처치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가서 소생시키려 했지만 회복불능이었다. 나는 축 늘어진 작은 나무를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아야 했지만 뜻밖의 봉변으로 나보다 먼저 죽어서 내 책상을 지키는 나무의 무덤.

이사 와중에도 나무는 파주로 잘 따라왔다. 나무는 줄기로만 꼿꼿하게 남아서 저의 고향 쪽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잘 견디고 있다. 그 나무는 쪽동백나무이다. 잎은 둥글고 넓적하고 흰 꽃을 무성하게 피운다. 무엇보다도 겨울이면 가지에서 껍질이 벗겨지며 환골탈태하는 나무, 쪽동백나무. 때죽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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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무들과의 송년회를 부산에서 했다. 서울, 대구, 경주로 그냥 뿔뿔이 흩어지기가 서운해서 유엔기념공원 옆 수목전시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자리한 유엔기념공원은 한국전쟁에 희생된 유엔군 전사자가 잠든 곳이다. 나는 이 근처 우룡산 기슭에 자리한 대연중학교를 졸업했다. 흡사 나무뿌리를 떠올리는 8개의 독특한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는 구조의 정문을 통과하자니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사생대회에 참가하러 묘지를 찾았던 기억도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대연수목전시원에서 만난 많은 나무들. 낙엽성 나무들은 대부분 꽃은 물론 열매도 잃은 채 내년을 궁리하고 있다. 상록성 나무들 가운데 한 나무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곁에서 나무의 특징을 설명하는 문장이 뜻밖의 꽃만큼이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이라고 해서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특별한 신심 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나는 신앙을 가지진 못했지만 불민한 나의 영혼은 아내의 뜻에 조금 감염되었는가 보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 이르게 되면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가다듬기도 한다. 오는 것보다는 가는 것에 대해 더욱 생각도 쏠린다. 이제 그 어디로 넘어가는 느낌이 물씬한 12월의 중순. 을미년이 가고 병신년이 온다. 지금 이 순간만을 겨우 산다지만 나를 둘러싼 그 나날들이 어디 달력 속에 흩어진 하루 만의 일이겠는가. 때가 때이니만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 탓도 있겠다.

시절을 잘못 알고 피어난 꽃을 만나 짧게 머물렀다. 냄새도 맡고, 봉오리도 쓰다듬었다. 사진도 실컷 찍었다. 그리고 아래를 보니 이런 팻말이 땅에 꽂혀 있지 않은가. “붓순나무. 꽃은 4월에 피고 종자는 타원형이고 독이 있다. 이 나무를 산소 옆에 심으면 귀신이 침범하지 못한다는 전설 때문에 관속에 넣기도 한다.” 고향은 아니지만 무려 40여년 만에 찾은 대연중학교 근처 공원. 내 눈앞에 달린 한겨울의 꽃송이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저만 지금 이렇게 가지 끝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것일까요? 붓순나무의 어느 한 뿌리는 발밑에서 꼬부라져 내 등산화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 붓순나무, 붓순나무과의 상록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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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름 모를 꽃이 어딨노. 명색이 작가라면 나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고 대접해야지!” 이렇게 말하는 소설가가 있다.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낙동강 파수꾼으로 민족문학의 한 봉우리를 이룩한 요산 김정한(1908~1996)이다. 산에 가니 낯선 새가 지저귀고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더라. 이렇게 쓴 이가 요산을 만났다면 꼼짝없이 저런 불호령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사하촌’으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요산은 일제의 발악이 극도에 달하자 붓을 꺾는다. 그러다가 쉰여덟의 나이에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한다. 이때 붓을 다시 드는 소회를 밝힌 글은 지금 읽어도 뭉클하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지겹도록 오래 꾹 참아 왔었지만, 독재 권력에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되, 마치 남의 땅 이야기나 옛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따라지들의 억울한 사연들에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높고 승한 이름과 세를 가졌어도 모든 고장은 원래 산이었다. 그래서 아예 이름에 그러한 출신임을 박아놓기도 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았던 부산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요산은 치열한 소설만 남긴 게 아니다. 손수 식물도감도 작성했다고 한다. 이젠 식물들의 뿌리 곁으로 거처를 옮기신 터라 직접 뵐 기회는 없겠지만 그 공책이 꼭 보고 싶었다. 범어사 근처 남산동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에 요산문학관은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선생의 말씀을 벽에 새긴 문학관 2층에 그 식물도감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레나물, 고추나물, 제비꽃을 직접 그리고 소개한 선생의 육필!

‘요산연거(樂山燕居)’란 현판이 붙은 생가의 나무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선생이 떠난 훌빈한 마당에는 회화나무 2그루, 은행나무 3그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쇠락해가는 뒤란의 나무 한 그루. 생전 선생의 눈길을 참 많이도 받아주었을 감나무가 아직도 붉은 홍시를 달고 묵묵히 서 있었다. 감나무, 감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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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금륜산 어느 계곡.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물이 내려와 점차 발달하여 제법 통통한 물줄기를 형성하더니 가장자리마다 귀한 야생화를 거두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계곡 입구에서 하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를 만났다. 맛을 보면 소금처럼 짠맛이다. 전국 어디나 흔한 붉나무였다. 익은 열매를 보는데 재미있는 사연 하나가 떠올랐다.

몇 해 전의 여름이다. 서울 꼭대기의 하늘에 오려는 시늉만 있었고 정작 며칠째 비는 내리지 않았다. 화장실 가면서 얼핏 하늘을 살피니 남산을 중심으로 먹구름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비를 마중하는 기분으로 점심 무렵 산에 올랐다. 사무실에서 인왕산 해골바위까지는 어림잡아 40분 정도 걸린다.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 중에서 진양조 완판 연주 시간이 45분 정도이다. 중간중간 좀 꾸물거린다 해도 이 한바탕 듣고 나면 얼추 정상에 설 수 있다. 깔딱고개 중간에서 물을 한 모금 먹고 계속 올라가는데, 아차, 싶었다. 뒤늦게 소금 생각이 났던 것이다.



오늘은 산중 점심으로 인절미 세 개, 살구 세 개, 삶은 달걀 두 개를 준비한 참이었다. 바위산인 인왕한테 혹 암염(巖鹽)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정보는 들은 적이 없고 소금 가지러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쩨쩨한 일이었다. 목이 멘 채로 퍽퍽한 계란을 그냥 먹어야 하나. 거문고 연주가 끝날 무렵 정상에 도착했다. 꺾어질 듯 휘어지고 휘어질 듯 꺾어지는 진양조장단처럼 흐르면 좋으련만 훔치훔치 땀 흘리며 둔한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도착했다. 늘 하던 대로 해골바위 둘레를 세 번 돌고 어진 소나무 밑에 앉았다.

점심때를 조금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목구멍 저 너머에서 허기가 아우성을 쳤다. 소금 걱정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달걀부터 까서 반을 입에 넣으니, 어라, 짭조름한 게 간이 맞지 않는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내 사소한 고민을 안 인왕이 껍질을 까는 손가락에 소금기를 잔뜩 발라놓았다는 것을. 그날 나는 내려오면서 인왕산에서도 붉나무를 만났다. 나무는 여름이라 열매는 없고 잎줄기에 날개가 무성히 발달해 있었다. 혹 산에서 소금이 필요하시다면 때를 잘 맞추어 붉나무한테 물어보시도록! 붉나무, 옻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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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맵싸하게 추웠지만 청량한 기운이다. 부산에서 꽃동무들이 사무실을 방문해서 함께 심학산에 갔다. 먼 산 대신 휴일의 뒤풀이를 가볍게 하기로 한 것이다. 차를 타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갔더라면 주문진횟집, 돼지갈비집, 주꾸미볶음집, 콩당보리밥집 등등의 간판이었을 것이다. 인공의 길이었지만 전혀 느낌이 다른 숲속을 걸었더니 상수리나무, 개암나무, 층층나무, 청미래덩굴, 노린재나무, 생강나무가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여름에 공중으로 무성히 뻗어나간 나뭇잎들을 보면 가지들이 뒤엉켜 제 소속을 선뜻 구별하기가 힘들다. 겨울의 떨어진 낙엽들은 어느 나무 출신인지 제 고향을 알기가 더더욱 힘들다. 그 짧은 낙하거리에서도 심술궂은 바람의 개입으로 얼마든지 골짜기 하나는 뛰어넘기도 하는 것이다. 물기를 잃고 비틀어지고 흙으로 녹아들 때면 거의 비슷한 모습들이다. 그래도 꽃동무들은 궁금한 나무 앞에서는 낙엽 더미를 헤치고 잎을 찾거나 가지를 당겨 겨울눈을 확인하면서 나무를 동정(同定)한다.


어느새 약천사 뒷골짜기에 이르렀다. 멀리 황금색의 엄청나게 큰 부처님이 연꽃 좌대에 앉아계시고 그 앞에서 불공을 드리며 절을 하는 분이 여럿이다. 팥배나무의 붉은 열매, 작살나무의 보랏빛 열매가 겨우 달려 있을 뿐 허전한 가지들 끝에 달려 있는 것이라곤 없다. 겨울이 에누리 없이 장악한 심학산 골짜기. 상록수인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잣나무가 훤칠하게 드문드문 서 있는 가운데 약천사에서 울려나오는 예불소리를 두루 휘감으며 서 있는 나무가 있다. 어느 산에 가도 한두 번은 꼭 만나는 나무이다. 물오리나무였다.

물오리나무의 수피에는 참으로 대단한 특징이 있다. 수피에 박힌 커다란 문양이 어쩌면 무릎의 문양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소의 눈시울 같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 약천사 뒷산 중턱에서 약사여래대불(藥師如來大佛)을 지척에 두고 만난 회색빛의 물오리나무 껍질에 박힌 것은 반쯤 뜨고 반쯤 감은 듯한 부처님의 눈! 생과 사를 관통하고 무한의 저 너머까지를 두루 꿰뚫는 시선을 느끼기에 충분했던 물오리나무. 자작나무과의 낙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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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풍수학자인 최창조 선생의 지론에 따르면 좋은 땅이란 없다. 굳이 찾는다면 자신에게 알맞은 땅이 있을 뿐이다. 음택에 기대어 발복한다는 일부 풍수학에 대해 고약한 평가를 내리는 분위기가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바람과 궁합을 맞추고 물길을 고려하여 입지해야 한다는 건 과학 이전의 상식이라 할 것이다. 엽록소를 구비하지 못해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햇빛의 각도까지를 고려하여 집을 앉히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내 생활의 의지처가 서울의 인왕산에서 파주의 심학산으로 바뀌었다. 새로 이사를 하면 동네 한 바퀴부터 도는 게 마땅한 인사이겠지만 고작 사무실 근처만 산책하다가 꽃동무들의 방문을 받고서야 심학산을 찾았다. 사무실에서 몇 발짝만 옮기면 풀섶으로 난 오솔길이 있다. 몇 마지기 논배미도 있다.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가는 논두렁에서 가을 햇살이 가득 찬 논물을 보았다. 개구리는 동면에 들고 우산이끼가 파릇했다.


사하촌처럼 음식점이 즐비한 곳을 지나 산으로 들어갔다. 자료에 따르면 심학산은 낮되 야생화의 식생이 퍽 다양하다. 이런 느낌을 벌써 체득했는지 꽃이라면 특별한 감각을 보유한 꽃동무가 풍수적인 해석을 한다. 저 계곡을 보면 그리 깊지는 않지만 햇빛이 좌르르 모여서 흘러내리지 않을까요?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수분을 잔뜩 실어나르면 이 계곡마다 꽃들이 다투어 이사 오지 않겠어요?


앞으로 할 일이 많겠군. 내심 내년을 기약하며 초록이 지쳐 든 단풍이 이제 저도 지쳐서 낙엽으로 내려앉는 광경을 보았다. 나무들 밑으로 수북이 쌓인 단풍낙엽들은 흙의 색깔도 바꾸어 놓았다. 그 속에서 꽃동무가 나무 하나를 찾아낸다. 전국 어디에서나 산으로 들면 개울가 초입에 있는 나무. 오늘 이렇다 할 나무나 꽃이 없는 풍경에서 내년에 보자며 악수를 청하는 나무, 국수나무였다. 축축 늘어지는 가지의 골속이 국수 같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은 나무. 그동안 많이 보았지만 가지만 앙상하고 이렇게 몇 잎 단풍든 것은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삶은 국수 가락에 갖은 양념의 고명을 흩뿌려놓은 나무라고나 할까. 국수나무, 장미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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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감기에 걸렸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몰려오고 가래가 몹시 끓었다. 그 좁은 구멍 안에 웬 그리도 많은 기침이 살고 있었는지 좀체 그칠 줄을 몰랐다. 은행처럼 쓸어 담는다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기침이 몇 가마니는 족히 되었을 성싶었다. 콜록콜록.



많이 사그라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쿨렁쿨렁 잔기침이 묻어나는 몸을 이끌고 해인사를 찾았다. 몸만큼이나 마음이 아픈 이들인가. 쌀쌀한 날씨에도 순례객들이 많았다. 합천은 나의 고향인 거창과 이웃한 곳이다. 해인사하고는 쌓은 추억이 많다. 길바닥에 내려앉은 나무의 그림자를 보자니 고향의 옛사람들이 떠올랐다. 돌아드는 길을 따라 장터가 열렸고 각종 기념품과 먹거리가 쌓여있는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날아가는 글씨로 휘갈긴 두꺼운 마분지가 꽂혀 있었다. ‘기관지, 천식, 편도, 기침, 가래에 특효. 감기, 피로회복에 좋음’.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보리수나무 열매였다. 어린 시절 다래, 정금, 오디와 함께 많이 따먹었던 열매. 우리 동네에서는 ‘뻐리똥’이라고 했었다. 전국 어느 산에나 있고 마을 어귀에서도 볼 수 있는 보리수나무. 인왕산에도 한 그루 있어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나무. 잎 뒷면에 은회색의 잔털이 무성해 멀리서 보면 빛이 번쩍번쩍 후광처럼 빛나는 보리수나무. 나는 뻐리똥을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보리수나무를 보리수나무로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부처가 그 아래서 정등각(正等覺)을 이뤘다는 인도보리수하고는 전혀 다른 나무이지만 그래도 보리수라고 하면 기분이 더 좋다. 공덕이라도 쌓아지는 듯 나무 이름도 한번 더 중얼거린다.

지금 여기는 해인사. 나는 기침을 콜록콜록 해대는 감기 환자이다. 가래 기침에 특효이고 감기에 좋다는 보리수나무 열매, 뻐리똥. 그 몇 알을 입안에 넣었더니 시큼한 맛과 함께 옛날 생각이 일어났다. 이 시큼상큼한 옛 생각이 목구멍에 들러붙은 감기 기운을 데리고 가주면 좋으련만! 5000원어치를 샀더니 쌀밥을 담는 사기그릇에 고봉으로 한 움큼 주었다. 그러고도 한 주먹 더 쥐여주었다. 좌판 앞 할머니는 때마침 터져 나온 나의 기침 소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신 것이었다.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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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닷새가 훌쩍 지났구나. 11월11일. 국적도 없는 고약한 놀이가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노리고 있다. 이른바 빼빼로 데이. 빼빼 마른 몸매에 대한 광적인 집착인가. 많은 젊은이들도 이 개념 없는 시속에 합류하여 쉽게 지갑을 열고 있다.

아라비 숫자 11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 형태에 주목해서 가래떡의 날이라고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1월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1111은 젓가락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내리는 빗줄기를 닮기도 했다. 비는 식물들에겐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양분이고 그걸 바라보는 농부들에겐 새참 같은 국수 가락이 아니겠는가. 시원하게 튕, 튕 튕. 튕기는 빗줄기 !!!!!!!! 이것은 하늘에서 오는 느낌표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11월11일을 빗방울의 날이라고 하면 빼빼로 데이보단 백번 낫겠다.


중앙선도 없는 드넓은 하늘에도 길 하나가 있어 태양은 홀로 터벅터벅 서쪽으로 걸어간다. 우리도 젓가락처럼 다리를 벌리며 각자 하루를 건넌다. 11111111은 11월11일 11시11분. 하루를 일생에 치환해보면 이 시간은 어디쯤에 해당할까. 빼빼로에 눈이 멀어 아차 하는 순간, 오전은 이내 지나가고 다시 청춘은 어렵게 된다.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는 시각인 오후 3시를 지나 이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슬슬 해야 할 시간. 내 나이도 벌써 오후 3시 근방이다.

겨울이 저만치 있고 저녁이 저만큼 도사리고 있는 무렵, 더구나 오늘처럼 비라도 뿌릴 때면 생각나는 나무가 있다. 몇 해 전 전남 진도의 식생을 조사하러 갔다가 만난 귀한 나무. 그 이름도 참 독특한 조도만두나무이다. 진도 부근의 조도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그 열매가 꼭 만두를 닮았다고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이 나무는 사는 곳이 참 기특하다. 키 큰 나무이지만 산속을 피해 밭둑이거나 풀밭 및 산의 가장자리에서만 자란다. 진도의 어느 비탈진 밭에서 일을 하던 할머니가 모처럼 허리를 펼 때 조도만두나무는 잠깐 그 고단한 할머니의 허기를 달래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조도만두나무, 전남 진도를 비롯한 몇몇 섬에서만 사는 한국특산종. 대극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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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한 분이 오시어 주꾸미 볶음밥을 먹고 차를 마시러 사무실 근처의 길담서원에 갔다. 훅 트인 공간에 좌우 벽면으로 책들이 빼곡하다. 감잎차와 커피를 주문한 뒤 농담 삼아 말했다. “여기 있는 책을 몽땅 다 읽으면 몸이 뭔가 달라질까요?” “……?” “해리 포터가 벽을 뚫고 마법의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이 세상을 얼른 뜨는 길이 저 벽 사이에 숨어 있지 않을까요?” 수돗물을 틀어놓은 채 분주한 실장님이 응대해 주신다. “원장님께서 서원을 열고 한 3년 공부했더니 겨우 세상이 좀 보이는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 “그건 빗자루를 타고 세상을 날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요. 그와 비슷한 얘기네요.” 겨드랑이에서 날개는 돋아나지 않고 입에서 웃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빗자루가 아니라 쾌속선을 타고 울릉도에 들어갔다. 바닷가에서 늦게까지 핀 해국을 찍었다. 바닷가에 사는 국화라는 뜻이다. 사나운 바람을 이겨내느라 줄기에는 부드러운 털이 많다. 잎도 날카롭지 않아 두루두루 원만하고 넓적하다. 배경이 좋았는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파도소리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카메라 셔터 소리. 찰칵찰칵, ㅂㅈㅂㅈ, ㅊㅋㅊㅋ. 얼핏 들으면 소리는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카메라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카메라는 이 셔터 소리가 매우 중요해서 신제품을 개발할 때 음향에 엄청 신경을 쓴다고 한다. 소리가 꽝이면 카메라의 성능이 제 아무리 우수해도 그냥 꽝이다. 묘한 중독성이 있는 셔터 소리. 이 소리에 홀려 사진의 세계로 뛰어든 이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ㅂㅈㅂㅈ, ㅊㅋㅊㅋ. 난무하는 소리들을 딛고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는데 이런 생각도 슬며시 따라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한 발 삐끗하면 낭떠러지. 죽음이 저 바다보다도 더 가까이 몇 센티미터 앞에도 있는 셈이다. 이 고급 카메라들도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고, 이 카메라가 내는 소리에 홀렸던 이들도 언젠가는 생(生)에 홀리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때를 미리 예고하자는 뜻으로 이런 소리를 내는 카메라 하나 만들 순 없을까. 꼴까닥꼴까닥! 혹은 ㅊㅎㅊㅎ! 해국. 바닷가 바위틈에 꼭 붙어사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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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삼형제가 살았다. 어느 날 분가하기로 결정하고 마당의 나무도 나누기로 했다. 하지만 땅을 파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원래 한 그루였던 게 나누려고 하자 죽는구나. 인간이라는 우리가 이 나무보다 못하구나.” 크게 깨달은 삼형제는 계획을 접었다. 그러자 나무도 다시 싱싱하게 활기를 되찾아 잎이 무성해졌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까닭에 형제간의 우애와 가정 화목을 상징하는 나무로 마을에 많이 심었다. 인왕산 둘레길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나무는 봄에 진한 자주색의 꽃을 가지에 다닥다닥 밀집해서 피운다. 가을이면 열매가 꼬투리로 달리는데 그 안에 씨앗이 피붙이들처럼 오종종하게 들어 있다. 박태기나무이다.



10월 중순. 신문은 금강산에서 벌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뉴스를 전한다. 설움과 기쁨이 뒤엉킨 상봉장 모습의 사진. 기사를 읽자니 아주 애틋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전쟁이 갈라놓은 생이별 40년. 신혼 초에 남북으로 헤어져 회갑을 넘긴 초로의 부부가 17일 밤 8시50분 도쿄 팔레스호텔에서 재회했다. 평양의 손영종씨(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실장)와 김선순씨(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195-4)의 극적인 재회가 이뤄지기 직전 노부부는 20대의 옛 모습을 서로 확인하면서 안면 근육을 떨었다.”(세계일보, 1990년 3월18일자)


이 재회에는 후일담이 있다. 이윽고 작별의 순간이 왔다. 변호사로 성장한 아들은 할머니가 생전에 “교복 한 벌 제대로 못해 입혔다”고 안쓰러워하던 것을 기억해서, 처음 만난 아버지에게 양복감을 드렸다고 한다.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아버지는 즉석에서 허리띠를 풀어 아들과 바꿔 맸다고 한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동안 나의 허리띠로 너를 늘 부둥켜안으마. 너의 허리띠로 항상 나를 부둥켜안아다오. 아버지의 선물에는 그런 뜻도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머릿속 깊숙이 짠하게 박힌 것이다.

“백발이 된 새색시는 눈물 대신 얼굴을 붉혔다.” 상봉 장면을 전하는 헤드라인이다. 아직도 우리가 이런 세월을 견디며 살고 있구나. 설악산의 첫눈과 금강산의 상봉에 관한 소식이 어우러져 눈물 여러 방울을 긁어내는 아침이다. 박태기나무, 콩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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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지러지는 단풍을 본다. 목석 같던 나의 몸도 놀라는 재주는 가지고 있구나. 자연의 화장술에 탄복하다 보면 어느 새 정상이다. 시선을 앞으로 당기면 단풍만큼 붉은 열매가 보인다. 웬만한 산의 정상이라면 빠지지 않는 마가목 열매다. 그 나무는 나를 곧장 울릉도로 데리고 간다.

사연이 있다. 4년 전 여름. 꽃공부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간 울릉도, 나리분지에서 하룻밤을 자고 추산 마을로 내려와 등대가 있는 태하까지 우산(于山)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에는 할머니 몇 분이 타고 있었다. 우산 속처럼 고요하던 버스가 우리 일행이 타자 금방 왁자지껄한 만원버스가 되어버렸다. 기사는 친절했고 승객들은 따뜻했다. 무거운 배낭을 덥석 받아주신 할머니가 우리의 정체를 알고 던지는 말씀. “저 가로수가 다 마가목인데 열매가 관절에 그리 좋아요.” 나의 무릎은 몹시 부실하다. 등산할 때는 그런 대로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에는 애를 먹는다. 그래서 그랬나. 잘 외워지지 않던 나무의 이름들인데 마가목은 단박에 쏙 들어왔다.


이튿날. 와달리 옛길을 빠져나와 내수전 전망대에 서니 울릉도의 한쪽 면과 그 앞바다가 일거에 들어왔다. 도동항과 저동항이 보이고 관음도, 죽도, 성인봉이 바다에 혹은 하늘에 시퍼렇게 떠 있었다. 이것은 내 눈이 좋아하는 멀리 있는 풍경이다. 시큰한 내 무릎이 찾는 경치는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전망대 근처에서 몹시 심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 휘청휘청 부러질 듯 흔들리고 있는 건 마가목이 아니겠는가. 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어제 버스 속 할머니가 그냥 함부로 하셨던 말씀이 아니란 것을. 낭창낭창 마구 흔들리는 마가목 나무가 전신을 동원하여 지금 관절에 좋을 수밖에 없는 성분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버스 속의 할머니는 헤어질 때 이런 말씀을 주셨더랬다. “마가목 열매 따러 또 와!” 어김없이 가을은 오고 열매는 익었건만 때를 맞추어 울릉도에 가진 못했다.

마가목 나무는 지팡이용으로도 좋다고 했다. 그것에 의지하기 전에 거리마저 붉게 물든 가을 울릉도에 가서 마가목 열매 기운을 흠뻑 쬘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가목. 장미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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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간다고 걷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먹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으니 웬만하면 그냥 꿀맛이다. 오늘은 주먹잡곡밥 그리고 쌈장에 고추와 오이를 찍어 먹는다. 쑥떡도 한입 넣었더니 산 아래에서의 웬만한 메뉴 부럽지 않다. 창문조차 없는 바깥 전망에 어느 고급식당이라고 감히 까불겠나.

고맙게도 늘 점심을 준비해 오시는 분이 있다. 나는 그저 짐꾼에 불과하지만 위장은 튼튼하고 왕성한 식욕의 집행기관인 입을 달고 있는 족속이다. 커피를 홀짝이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과일을 택했다. 이런 한 대목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후식으로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사랑은 방울토마토와 같아서 입을 다문 채 깨물지 않으면 액즙이 튀어나가 버린다. 입안에서 굴리다 깨물면, 목구멍 가득 고이는 액즙의 향내”(손철주).


거기까지만 해도 흔감할 터인데 오늘은 더 있다. 마지막으로 포도를 꺼내놓는다. 씨알이 굵은 포도는 방울토마토와는 달라서 입안에서 굴릴 정도의 긴장감은 없다. 씨까지 빠그작빠그작 깨물어 먹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러기엔 먹을 게 너무 많다. 떠나가는 진한 액즙이 아쉽기는 하지만 껍질과 함께 씨를 뱉어냈다. 굵은 씨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았다. 어라, 포도씨는 언젠가 잃어버린 내 사랑니를 많이도 닮았군. 그런 농담 같은 한마디도 던지면서 오후 관찰에 돌입했다.

이젠 올해의 꽃들이 거의 저물어간다. 단풍이 완연하고, 여기저기 열매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손대면 톡 터지는 물봉선을 찍고 일행을 쫓아가는데 또 무슨 기발한 식물이 있는지 카메라 소리가 요란하다. 이질풀이다. 한창인 꽃과 벌써 맺히는 열매, 아예 씨앗을 멀리 튕겨보내고 촛대처럼 말린 것이 동거하고 있다. 같은 줄기에서도 이처럼 운명이 서로 다르다. 씨앗을 한창 갈무리하는 이질풀의 열매. 씨방이 세 개 더 있긴 하지만 그것은 꼭 그것 같았다. 농담을 기억했던 이가 새로운 농담을 산중에서 보탰다. 포도씨가 사랑니라면 이질풀 열매는 영락없이 그것이로군요! 이질풀. 쥐손이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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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출판도시로 어렵사리 사무실을 옮겼다. 인왕산에서 심학산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교대한 셈이다. 공기가 다르고 구름이 바뀐 것도 좋지만 무언가 툭 떨어지는 기척이 퇴근시간을 알려준다는 점이 좋다. 심산유곡의 골짜기만이 그런 소리를 독점하는 건 아닌 듯 사무실 바깥 가로수인 상수리나무가 제 익은 열매를 아스팔트로 툭 던지는 것이다.

곯았던 짐을 정리하고 겨우 정신을 수습하면서 다람쥐 대신 도토리를 노리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옛날 시골에서 감꽃을 주우러 새벽부터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랬던 것처럼 아침 일찍 거리를 돌아다니는 분들도 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어떤 이들은 나무를 흔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발로 뻥뻥 차기도 한다. 가지가 붙들고 있는 도토리를 억지로라도 기어코 빼앗겠다는 심보였다.



알맹이를 잃고 껍질만 나뒹구는 스산한 풍경을 보는데 곧장 지리산 아래 한 계곡으로 나의 생각이 달려갔다. 이태 전의 일이다. 해동하기 전의 겨울산으로 나무공부를 하러 갔었다. 높은 곳을 피해 골짜기를 중심으로 인적 드문 고개를 훑었다.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꽃이나 잎이 아닌 나무의 특징을 공부하는 기회였다. 식물 분류의 기본인 생식기관 말고 엽흔이나 겨울눈을 관찰해 보면 그게 또 한 세계라는 것을 알고 탄복하기도 한다.

어릴 적 눈에 익은 닥나무, 뽕나무도 새삼스레 만났지만 그보다도 더 살가운 건 밤나무였다. 밤나무 아래 주위에 작년의 열매인 밤송이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밤송이는 모두 발랑발랑 뒤집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못해 알맹이가 고스란히 털린 것. 어쩌다 드물게 고슴도치처럼 등을 엎드린 밤송이가 있었다. 그것은 다행히 썩어가는 밤이었다. 개미나 벌레가 뒤집기에는 너무 큰 밤송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건 모두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혹 아닐까. 밤송이는 떨어질 때 알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수리 쪽으로 엎드려 낙하하는 것! 모성애나 부성애가 어디 동물 세계에서만의 일이랴. 지금 막 떨어져 구르는 도토리 하나를 주우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상수리나무, 참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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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그 어디로 넘어가는 기운이 확 느껴지는 달이다. 성삼재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버리고 남원 쪽으로 빠지니 정령치로 가는 외곽길이다.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눈썹에 맞추며 걸어가는 길. 드디어 정상인 만복대에 도착했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의 바위 표지석. 가슴에는 한글로 새긴 만복대라는 이름을 품고 있다.

들에는 꽃, 하늘에는 별이라지만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곳의 공중을 점령한 건 잠자리였다. 무슨 서러움을 저리도 실어나르는 것일까. 만복대 정상을 선회하는 작은 헬리콥터들. 이렇게 힘껏 날갯짓을 하면 그 어떤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 조금이나마 유예되기라도 하는 듯 잠자리떼의 광경이 부산했다. 공중에서 눈을 아래로 낮추니 키 작은 나무들의 겨드랑이마다 열매들이 맺히고 있었다. 길쭉한 호리병같이 생기는 결실. 병꽃나무였다. 나무는 꽃의 시절을 떨치고 나더니 이제는 열매의 시대도 마감하고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중인가 보다.



하산길은 언제나 좋다. 하산하기 위해서 등산하는 것 아닌가. Be it ever so humble, there is no place like home. 비록 누추하다 해도 내 집만 한 곳 세상에 또 없으리. 그러한 곳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길가에서 보기 힘든 야생화를 만났다. 천마였다. 발길이 붐비는 길가에 자리했는데 용케 사람들의 손길을 피했다. 꽃은 바스라질 듯 말랐고 열매가 여물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잎이 전혀 없고 홀로 가느다랗게 뻗어오른 대궁 끝에 꽃들이 모여 달린다. 천마는 감자맛이 나는 땅속의 덩이줄기가 귀한 약재이다. 오늘 나에겐 그것보다도 바싹 마른 꽃들이 압권이었다. 그 어떤 절정을 이루었다가 허물어지는 듯한, 그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춘 듯한 서러운 표정을 천마의 얼굴에서 읽은 것이다.

만복대에서 정령치로 내려가는 동안 여러 궁리를 곰곰 해보았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 형상의 바위가 우두커니 서 있는 만복대. 이름을 뜻하는 만복이인 줄 알았더니 만복은 그저 만 가지 복을 뜻한다는 ‘萬福’이었다. 만복이와 천마를 내세워 그럴듯한 전설이라도 엮어나볼까. 천마,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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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참 좋다. 싱그러운 들판을 걸어가면 햇빛 알갱이가 곱게 빻은 쌀눈처럼 하늘에서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 같다. 이 삽상한 기운을 짓기 위해 올 여름이 그렇게 뜨거웠나 보다. 따끈따끈 구들장을 데워놓고 굴뚝을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여름의 열기도 이제 떠나가고 있다.



구월이다. 수생식물을 공부하러 석모도에 갔다. 모래밭으로 들어서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도가 철썩였던 듯 물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습지를 통과하니 민머리해수욕장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길 좌우의 논에는 벼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찰랑대던 물은 모두 사라지고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벼 또한 반듯한 수생식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했다. 멀리서 보니 논 한 귀퉁이가 허전해 보이는 게 아닌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간밤의 태풍에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고 구겨져 있던 누런 황금색의 벼들. 동네 어른들의 땀방울처럼 흩어진 낟알들. 석모도의 논을 그렇게 만든 건 바람이 아니라 논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물옥잠이었다. 아예 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논두렁으로 내려가 자세히 관찰했다. 물옥잠은 여간 예쁜 야생화가 아니다. 강가나 논에서 자라기에 줄기가 곧게 선다. 깨끗한 심장형의 잎을 달고 훤칠하게 서 있는 보랏빛 꽃.

적막했다. 이제 물은 모두 마르고 결실을 기다리는 논 가운데에서 벼의 줄기는 제법 통통했고 알곡이 차곡차곡 여무는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아하, 둔한 나에게도 퍼뜩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논에서는 농약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다. 만약 농약을 뿌렸다면 부작용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런 약을 치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웃자란 피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곳의 농부는 차마 물옥잠에게 농약을 먹일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의젓했다. 논 가운데의 물옥잠은 그런 농심을 알기라도 하는 듯 활짝 피어 있었다. 진동하는 꽃내음을 맡으며 이 논의 벼는 참 향기롭게 여물겠다. 석모도에서 생산하는 물옥잠표 쌀! 추석이면 그만한 햅쌀밥도 달리 없겠다. 물옥잠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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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0편 암송하고 졸업…살아가는 데 힘과 위로 줍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경향신문9월2일자). 17년째 중학생들의 가슴에 마르지 않는 우물을 선물하는 어느 선생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게 실마리가 되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예전 민음사에 근무할 때 ‘세계의문학’ 편집위원들과 김우창 선생님께 신년 세배를 갔었다. 어느 해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오래 안 잊혔다. 미국의 생태주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의 주장인데 아이들한테 동식물 이름 100개를 외우게 하면 심성 공부에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그냥 흘려들을 법도 한데 마음의 공감이 컸던가 보다. 그 말씀을 접수한 이후 인왕산 자락을 어슬렁거리는 동안 소나무 말고 정확하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는 자각이 문득 일어났다. 뻔질나게 산을 들고나지만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호흡하는 기분. 그 난처하고 답답한 사정을 벗어나려다가 결국 꽃산행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의 어느 지리산 등산길.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어둑한 저녁에 치밭목에 도착하니 산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캄캄한 밤중. 오늘 만난 꽃을 중심으로 흐르던 화제가 급기야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는 별, 들에는 꽃, 가슴에는 꿈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떠오르기도 했다. 바람만 피하는 자갈마당에 겨우 자리를 비집고 눕자 하늘의 별이 초롱초롱했다. 꽃이 꽃으로 되려면 꽃만으로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꽃이 딛고 있는 흙이며 바위, 바람, 별에게로 공부가 확장되어야겠구나! 사소하고도 웅장한 결심을 했더랬다. 곤히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에 배긴 돌 하나에 몸이 뻐근했다.

가랑잎초등학교가 있는 유평마을로 가는 길은 여유가 있었다. 하산 도중에 많은 꽃을 만났지만 단연 눈길을 끈 것은 하늘말나리. 나리 종류 중에서 꽃잎이 아래나 옆이 아니라 위를 향하는 꽃이다. 다시 말해 편평하게 돌려난 잎 위로 쭉 뻗어올라 하늘을 향해 환히 벌어진 꽃이다. 별, 꽃, 꿈 그리고 돌로 연결되는 이 거대한 고리에 시(詩)도 끼워 넣으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하늘말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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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빨치산의 수기인 <남부군>이란 책이 있다. 그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저자가 산중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을 나서는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게 남았다. “나는 동상을 입은 발가락이 유난히 쑤시는 것을 의식하면서 총을 잡고 일어섰다. (…) 아침을 짓는 연기가 뿌옇게 개울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인간이 사는 집과 인간의 삶이 거기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통증이 심해진 발을 질질 끌며 산기슭을 내려섰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는 경찰이 아니라 인간의 마을에 먼저 투항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겨우 한 시간 반을 투자해서 인왕산을 갔다 오면서 몇 년간 지리산을 누빈 저자의 심사를 끌어오는 게 좀 낯간지럽긴 하다. 나라는 인물은 무슨 사상이나 신념을 지키고자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눈치 앞에서 어디 한발 마음대로 제겨 디딜 곳이 마땅찮은, 휘청거리는 오후를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래도 어쨌든 김밥으로 산중점심을 때우고 하산할 때 첫 집은 있어 산에서 나오는 나를 항상 반겨주니 거기에서, 거기에 있는, 인간의 집과 인간의 삶을 만나게 된다.


예전이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텐데 꽃을 알고부터 산과 마을의 접면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그곳은 비닐이나 빈병도 뒹굴지만 야생화 한두 송이는 피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쓰레기를 던져놓아도 그 틈을 비집고 자연은 꽃을 보내주는 것이다. 노란 애기똥풀이 피는가 하더니 어느새 하늘빛 꽃잎에 노란 암술과 수술이 도드라지는 닭의장풀이다.

거기까지인 줄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도 닭의장풀이 흔하게 피어 있지 않겠는가. 산들은 대개 깔딱고개를 두어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산은 제 키를 유지하기 위해서 바위를 머리에 받들고 있다. 힘겹게 한발한발 오르자 드디어 멀리 하늘과 산이 맞닿는 꼭대기가 보인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니 저곳이야말로 다른 세계로 가는 한 입구가 아닐까. 그 접면마다 닭의장풀이 피어나는 까닭은! 닭의장풀, 닭의장풀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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