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에 해당되는 글 216건

  1. 2016.06.07 조름나물
  2. 2016.05.31 물참대
  3. 2016.05.23 덩굴꽃마리
  4. 2016.05.16 귀룽나무
  5. 2016.05.09 금낭화
  6. 2016.05.02 꽃마리
  7. 2016.04.25 [이굴기의 꽃산 꽃글]매미꽃
  8. 2016.04.18 벚나무
  9. 2016.04.11 모데미풀
  10. 2016.04.04 현호색
  11. 2016.03.28 깽깽이풀
  12. 2016.03.21 큰개불알풀
  13. 2016.03.14 다정큼나무
  14. 2016.03.07 갯버들
  15. 2016.02.29 감태나무
  16. 2016.02.22 장구밥나무
  17. 2016.02.15 작살나무
  18. 2016.02.01 마삭줄
  19. 2016.01.25 [이굴기의 꽃산 꽃글]노박덩굴
  20. 2016.01.18 무환자나무

미시령 넘어 동해안으로 갔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틉틉한 날씨였다. 해변 도로에서 바다를 등지니 논이 펼쳐졌다.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었다. 논에 물이 가득했다. 이 물은 반은 지하에서 왔고 반은 하늘에서 왔을 것이다. 논두렁이 뱀처럼 구불구불 풀어져 있었다. 참 오랜만에 논두렁을 밟아보았다. 어릴 적엔 아주 익숙했지만 그동안 잊고 지냈던 풍경이었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5천만 마리래!”(정현종)라는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 찰진 흙 아래에는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는 미생물이 우글거리고 있다. 두툼한 등산화 바닥을 뚫고 논두렁의 폭신함, 다시 말해 작은 생명들의 꿈틀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 움큼’이 아니라 ‘한 숟가락’이라는 표현에 기대니 흙이 마치 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생각으로 논을 바라보았더니 이상한 전이가 일어났다. 논이 부글부글 끓는 술독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뱀처럼 풀어진 논두렁을 테두리로 하는 아주 잘 빚은 항아리!


술독은 고요히 끓고 있었다. 고두밥이 익어가는 것처럼 논에서는 흙이 익어가고 있었다. 독에 걸맞은 큰 발효균처럼 올챙이들이 꼬물꼬물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야흐로 순흙 막걸리가 맛좋게 익어가는 신호처럼 여기저기에서 큰 기포들이 뻐끔뻐끔 올라왔다. 멀리 울산바위가 보였다. 강원도의 산들은 작정하고 내려온 술꾼인 듯 항아리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바람도 집어넣으며 걸으니 논두렁 정기가 흠뻑 온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몇 다랑이의 논을 지나자 갈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습지가 나타났다. 그 사이에서 드디어 조름나물을 보았다. 이름으로만 듣던 멸종위기 2급의 아주 귀한 식물이다. 물속에서 어떻게 이런 자세를 취하고 또 유지하는가. 3장의 잎은 정갈한 녹색 그릇이고 그 위에 고봉으로 담은 쌀밥처럼 핀 흰 꽃이 피어났다. 조름나물은 서걱대는 키다리 갈대 사이에서 한 뼘만큼만 드러나 있었다. 물속의 고요함을 흡수한 뒤 저만의 기품으로 소화하여 물 바깥으로 다시 내놓고 있는 듯했다. 외지고 축축한 뒤안에서 자라지만 늘 물낯바닥으로 얼굴을….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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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을 날던 새가 나뭇가지에 잠시 앉듯 산을 오르던 등산객들도 아늑한 공터에서 잠깐 쉰다. 축 처진 엉덩이를 바위에 내려놓으면 누가 그 무게를 얼른 가져간다. 산 아래에서는 왜 이런 모습을 숨기고 살았을까. 배낭에서 물이나 간식을 꺼내면서 모두들 얼굴에서 선한 표정도 함께 꺼내놓는다. 그러다가 누군가 던지는 농담 한마디에 한바탕 웃기도 한다. 제법 오래전이다. 가만 저 새소리 좀 들어보란다. 홀딱벗구,라는 뻐꾸기의 소리라면서. 그 농담 이후 이제 새소리는 홀! 딱! 벗! 구!라는 소리에 끼워맞춰서 들리는 게 아닌가. 참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요 귀다.

오늘도 어디선가 새울음이 들리고 있었다. 소리의 방향을 찾다가 때죽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검은등뻐꾸기를 겨우 붙잡았다. 허공을 나는 새는 비행에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고 한다. 체공시간을 늘리도록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뼈 속을 텅 비웠다. 허공을 날기 위해 몸안 곳곳에 허공을 아로새긴 것!

하늘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는 듯한 정상에 오르면 구름을 만질 것 같더니 어느새 창공은 또 저만큼 달아난다. 괜히 시비 걸어보았자 나의 초라한 키만 확인할 뿐이다. 격이 다른 바람이 몰려오는 태백산 정상. 멀리 굽이치는 산들을 때리고 오는 바람의 맛이 칼칼하다.

몸을 텅 비우고 내려오는 길이다. 반재를 지나 백단사 계곡의 약사암에 이르면 개울물이 활기차게 기운을 얻는 중에 나무 한 그루가 활짝 피어 있다. 물을 참 좋아하는 물참대. 마구 뒤엉킨 가지마다 하얀 꽃이 탐스럽게 달렸다. 누군가 물참대의 시든 가지 하나를 조심스레 꺾었다. 보세요, 물참대의 가지는 텅 빈 구멍이에요!

어쩌자고 물참대는 허공을 제 안에 감추었나. 산에서 듣는 새소리가 저리도 낭랑한 건 뼈의 구조와 전혀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가 털갈이를 하듯 어린가지 껍질이 얇게 벗겨지는 물참대. 글썽이는 눈물처럼 한 아름의 물참대 꽃이 저리도 맑고 흰 것은 가지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닐까, 아닐까. 물참대, 수국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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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여종의 우리나라 식물들 중 지면을 기어가거나 곁에 있는 물체를 휘감고 자라는 덩굴성 식물이 꽤 있다. 다른 것에 의지한다고, 바닥을 긴다고 이들이 비굴하게 살아간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본성에 충실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울릉도에 갔을 때 큰 나무의 줄기마다 덩굴식물이 빽빽하게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섬의 면적이 좁아서 이처럼 현명하게 동거하는 게 아닐까. 덩굴식물이라면 등나무나 담쟁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리기 쉽지만 포도, 딸기 등도 덩굴성 식물 출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박도 그렇다. 태양이 부는 풍선처럼 밋밋한 가지에 달리는 사과도 놀랍기는 하지만 더러 배배 꼬이기도 하는 저 연약한 덩굴줄기에서 보름달처럼 부풀어오르는 수박을 보면 더욱 놀랍지 않은가.

지난주 소백산을 오르다 비로사 입구의 서늘한 숲그늘을 기어가는 덩굴꽃마리를 만났다. 이름에조차 그 말이 들어있듯 줄기가 길게 덩굴로 자란다. 특히 그 꽃차례의 끝도 덩굴처럼 또그르르 말린다. 어쩌다 터널이 뚫려 이제는 버려진 고개를 갈 때가 있다. 인적 끊긴 차도로 주춤주춤 진출하는 칡을 보면 그 끝은 한결같이 꼬부라져 있다. 마구잡이로 나아가지 않고 이리저리 망설이고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처럼 덩굴성 식물들은 공통의 특징이 있다. 그 끝이 제가 뻗어갈 방향보다는 뻗어온 곳을 자꾸 쳐다본다는 것이다. 이제껏 잘 기어왔는지, 너무 멀리 가는 건 아닌지, 이러다가 되돌아가야 할 곳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지. 그걸 경계한다는 동작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말을 하고 산다.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을 달고 사니 떠드는 것도 한 본성이긴 하겠다. 엎질러진 물처럼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다. 말은 나를 뿌리로 하여 뻗어나간 덩굴의 줄기와도 같은 것일 테다. 아무리 힘껏 당신을 향해 내던져도 그 말의 끝은 정작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아내가 배꼽처럼 꼭지가 마른 수박을 쪼갰다. 고추장처럼 빨간 수박을 한입 베어문 채 올여름의 유난한 더위를 예감하면서 덩굴꽃마리의 꽃대 끝에 나의 그런 생각을 얹어놓았다. 덩굴꽃마리, 지치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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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송파역에서 출발해서 200여㎞를 달려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도착했다. 십승지의 하나인 이곳에서의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서울과는 격과 질이 다른 흡족한 간이술집에서 돼지고기 모둠을 안주로 술병 여러 개를 쓰러뜨렸다. 그 뒤끝을 호되게 치르느라 그랬나. 몇 가지 추억이 고여 있는 비로사, 달밭골을 지나 오르는 데 몹시 힘이 들었다. 그래도 등산로 주변에 포진한 꽃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에 올랐다. 호쾌한 능선과 삽상한 바람이 안구를 씻어주었다.

길섶에 피어난 꽃들과 동무하면서 천동계곡으로 내려오는 길. 이 높은 산의 상부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옹달샘이 있다. “자기 쓰레기는 되가져 갑시다! 생태계 보호를 위하여 과일껍질, 비닐 등을 버리지 맙시다.” 권고문이 적힌 안내판 앞에서 휴식을 취했다. 백두대간을 종주 중이라는 수원의 어느 남녀 고등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지저귀고 있는 중. 차례를 기다렸다가 물 한 모금을 먹는데 활짝 핀 꽃들이 눈썹을 쳤다. 귀룽나무였다.

숲 아래로 삿갓나물, 두루미꽃, 양지꽃, 노랑제비꽃 등이 있으나 옹달샘 근처에 꽃이 핀 나무는 귀룽나무가 유일했다. 귀룽나무 그늘 아래에 출신을 알 수 없는 나무로 만든 안내판이 뚱뚱한 팔을 들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리키고 있다. 비로봉 2.0㎞, 초암사 9.6㎞, 천동 4.8㎞. 귀룽나무는 비교적 흔한 나무이다. 여기서 약 250㎞ 떨어진 파주 궁리출판 사무실 앞에도 귀룽나무가 묵묵히 서 있다.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면 깊은 궁리가 저절로 될 것처럼 그윽한 기품을 자랑하는 나무이다. 나무는 꽃대가 아래로 축 처지며 멀리서 보면 물이 방울방울 맺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형상이다.

오늘이 마침 부처님오신날이고 여기는 소백산옹달샘이다. 귀룽나무 옹달샘이라고 새로 작명하면 물맛도 더 나을 것만 같은 곳이다. 그 장소를 살펴볼 때 지하에서 뿌리와 물은 서로 얽혀 있을 것 같았다. 귀룽나무 뿌리를 거쳐 나온 물맛? 그게 궁금하시다면 귀룽나무 꽃 지기 전에 소백산 천동계곡으로 가서 땀을 한 바가지 흘리시도록! 귀룽나무, 장미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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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기미다. 이왕이면 긴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선다. 우중충한 날씨에 하늘이 가깝게 느껴진다. 지팡이처럼 우산을 짚으며 또각또각 걸어가면 호젓한 산속이라도 걷는 기분이다. 실제로 비가 왔다. 비는 하늘에서 오는 물질이다. 빗물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있듯, 비에는 많은 소식이 담겨있다. 5월은 비를 많이 필요로 하는 계절이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다니! 내가 어제 태어났더라면 아침의 이 현상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뜻밖의 비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닳고 닳았다. 한때 또랑또랑했던 눈에도 두꺼운 각질이 쌓였다. 가물가물 저 높은 곳에서 오는 소식을 차단하면서 우산을 펼치면 어깨 근처로 빗물이 떨어진다. 귀에 풍경이라도 달린 듯 머리 둘레에서 토닥토닥 빗소리가 들린다. 마치 우산 속이 절간이라도 된 것 같다.

사흘 가는 장마가 없다고 했는데 기후변화가 막심한 요즘의 도시에는 세 시간을 못 버티는 빗줄기도 많다. 점심 무렵 비가 그쳤다. 인왕산 둘레길을 산책한다. 토함산만큼의 산세는 아니지만 이 산에도 불국사라고 하는 절이 있고 석굴암이라고 하는 암자가 있다. 그 아담한 곳으로 가는 길마다 연등이 달려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무겁게 달고 있는 연꽃들.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때가 오면 생각나는 꽃이 있다. 비단주머니라는 뜻의 금낭화다. 숲에서 군락을 이루며 사는 그 꽃들을 보면 영락없는 연등이다.

지난주 뜻밖에 맞이한 나흘간의 연휴. 가평 명지산에서 본 금낭화는 색깔과 자태가 아주 고왔다. 같은 줄기 속에서도 꽃들의 운명이 달랐다. 활짝 핀 꽃이 있는가 하면 벌써 열매를 맺은 것도 있었다. 제대로 성숙한 꽃 하나를 관찰해 본다. 조각난 하트 모양이 있는가 하면 갈래머리를 땋은 여고생의 모습도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 온 꽃동무의 해석이 압권이다. 고개를 조금 돌려 옆을 보면 용궁을 찾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과연 활처럼 휘어진 줄기에 매달려 모가지를 쑥 내밀고 힘껏 허공을 헤엄치는 자라 같은 금낭화!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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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부처님의 공덕이 아니었을까. 서울에 사는 주제에 두 달에 걸쳐 연속으로 금정산 범어사에 왔다. 요산 김정한 선생의 문학비를 지나 수령 오백 년의 은행나무 곁 주차장에 내리니 저절로 마음이 수굿해졌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금낭화 같은 연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오늘은 사초과의 전문가와 함께 금정산 식물상 조사 산행이다. 키 큰 나무의 근처보다 외려 그냥 지나쳤던 발등 높이에 보물이 더 수두룩하다.

아무리 생활의 등허리를 긁어도 끝내 풀리지 않는 답답함 때문일까. 분홍스웨터를 걸친 할머니가 나무지팡이에 의지해 돌탑 앞에서 합장하며 절을 하고, 잡았던 손을 풀며 언성을 높이는 중년의 부부가 각자 엇걸음을 놓는다. 부모를 따라왔다가 투덜대는 소년은 화장실로 달아나고. 이 땅의 웬만한 야생화는 다 나물이다. 맹독성의 몇몇을 빼고는 어린 순을 먹는다. 오늘 아침에도 낯선 식당에서 쇠젓가락으로 나물반찬을 집어먹었다. 그 힘으로 낮달을 보고 그 기운으로 별자리도 생각해본다. 지금 이렇게 범어사를 지나 금정산으로 오르는 것도 그 덕분이다. 아마 지금 길 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로를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두리번두리번 걸어가다가 묵밭 둔덕에서 꽃마리를 보았다.

이른 시기에 일찍 피지만 봄의 향도라도 되는 양 봄이 다할 때까지 눈에 띄는 아주 작은 꽃이다. 꽃차례 끝이 또그르르 말렸다가 펼쳐지면서 피어난다고 저 재미난 이름을 얻었다. 아무리 작아도 꽃받침이 다섯 개로 갈라져 멋을 부리고 암술과 수술도 어엿하게 갖추었다. 오늘은 하나가 더 있다. 꽃만 해도 손톱 속의 반달보다 작아서 손가락이 간지러울 판인데 작은 개미가 꽃을 더듬고 있지 않겠는가. 휘둥그레진 내 눈알보다 엄청 작은 개미는 바람이 운반하는 티끌인 듯!

크고 우람하다고 능사는 아니다. 저마다 하나씩의 사연을 길바닥에 흘리며 가는 떠들썩한 등산로. 금정산이야 예전에 놀던 뒷동산이고 범어사 대들보는 아껴둔 먹잇감이지요. 줄기를 타고 노는 은단 같은 개미 한 마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런 개미를 불러 겨드랑이를 시원하게 긁는 꽃마리도 보았다. 꽃마리, 지치과의 두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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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서 하루를 빼내어 진도로 가는 길. 톡 쏘는 김치가 되지 못한 채 웃자란 갓의 노란 꽃이 가로수 사이로 즐비하게 피었다. 늘 한 박자 늦는구나. 2주기에서 사흘이나 지난 후에 분향소로 들어가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늘한 공기가 팽팽하게 지배하는 팽목항.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펄럭이는 깃발을 통해 무슨 말을 전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년 전 이맘때의 꽃산행. 강원도 인제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 근처에 갔더니 물푸레나무 가지에 노란 꽃이 길쭉하게 피었다. 물푸레에서 웬 노란 꽃일까? 했더니 잘못 본 것이었다. 눈에 잠깐 마음이 속았다. 이 지역 어느 중학교의 학부모 동아리에서 매단 노란 리본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잊지 않겠습니다…미안해…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얼마나 큰 참사가 이 나라에 밀어닥쳤기에,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기에 고요한 산중에까지 이런 리본이 내걸렸을까. 헝겊에 번진 검은 잉크의 손글씨가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세월호 2주기였던 지난 토요일에는 순천의 선암사 주위를 헤매었다. 남쪽에만 사는 희귀한 나무를 찾아나선 길이었다. 아무 일 없는 듯하지만 산중은 질서를 찾아가는 행렬로 분주하였다. 노란 생강나무가 물러나고 붉은 진달래가 일어났다. 이어서 철쭉이 들어설 것이다. 꽃들은 제자리를 알고 골짜기의 기억을 일깨우며 교대로 피고 지고 있었다. 나무도 나무였지만 한 사면 가득 핀 풀에 눈이 꽂혔다. 나무에 달린 꽃들도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발등 높이의 작은 야생화들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흙에서 바로 육박해 쳐들어오는 꽃들. 그 노오란 꽃들이 지하에서 무슨 소식을 전달해주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꽃의 이름은 매미꽃. 독성이 있으며 꽃대가 땅에서 바로 올라온다. 줄기나 잎을 자르면 피 같은 즙이 빨갛게 맺힌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매미꽃이 철수하면 이윽고 매미가 나와 울어댈 것이다. 매미 소리 들으며 마시는 한잔의 검은 커피 끝에도 슬픔의 맛이 딸려나오겠지. 기억은 꼬리가 길다.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한…! 매미꽃, 양귀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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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포 문무왕릉 근처 암자에서 불경 번역과 수행에 매진하던 춘명 스님이 초봄에 입적하셨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많은 의지가 되었던 스님. 살구나무 뿌리로 만든 목탁도 선물해 주셨던 스님. 딱딱하던 가지마다 꽃이 피고 잎이 돋아나더니 어느덧 사십구재날이다. 경주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거리마다 벚나무가 절정이었다. 길가 쉼터에 차를 세우고 사월의 벚나무 아래에 섰다. 어느 해 스님 곁에서 며칠을 머물다 귀가하면서 썼던 글이 떠올랐다.

“소슬한 감은사 3층 석탑에서 출발해 골굴사와 기림사 지나 보문단지로 들지 않고 왼편으로 꺾어지니 토함산 오르는 길이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내려와 시내로 들어와 분황사, 팔우정, 계림, 첨성대, 대릉원을 짚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을 때까지 가로수 벚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벚나무 아래 혼곤히 낮잠 한방 때리는 건 고작 한나절의 일감도 안되리라. 살아서 세상과 잠시 작별하는 것이니 한 시간 어름이면 족하리라. 그 벚나무 가지가지마다 꽃잎 몇 장 달고 있나. 무성한 꽃잎들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헤아려보는 건 하루의 일거리는 되고도 남으리라. 무수한 꽃잎 벌어져 벚나무를 낳고 경주 거리마다 즐비하니 그 나무들 하나하나 눈 맞추며 살펴본다면 남은 생애 지루할 겨를이 없을 듯도 해라. 허나 나무보다 마른 성격의 나는 그처럼은 살 자신이 없어 고작 사흘 만에 서라벌을 떠난다. 서라벌, 그 이름을 빌려간 서울로 무턱대고 등신같이 간다. 달구벌 지나 추풍령 넘고 한밭 지난다. 한강 건너 남산 지나 인왕산 아래로 부릉부릉 목석같이 눈감고 간다.”(졸저, 신인왕제색도에서 인용함)

잎이 가지에 달렸다지만 나무에게만 속하는 일일까. 꽃이 생식기관이라지만 어디 그뿐만의 것일까. 창(窓)처럼 나무에 달려 크기를 조절하면서 피는 꽃들. 나무에서 떨어져 문(門)처럼 자유자재로 위치를 정하면서 지는 꽃들. 막 떨어져 내린 한 꽃잎을 쫓아가서 쪼그리고 앉아보면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도, 먼저 가신 이들의 근황도 어른거리는 듯! 벚나무, 장미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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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이국적 이름의 그 꽃을 본 건 소백산에서였다. 천동계곡에서 올라 비로봉에 거의 다다를 무렵 등산로 가까이에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지명을 따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바람에 나부끼며 해맑게 웃는 꽃들을 보는데 생뚱맞게도 무궁화 꽃잎을 본떠 디자인했다는 국회의원 배지가 생각났다. 톱니처럼 잘게 갈라져 전체적으로 펜타곤 모양인 포엽을 배경으로 5장의 흰 꽃받침잎이 있다. 그 안에 수술과 암술, 노오란 작은 꽃잎이 모여 오밀조밀한 문양을 만들고 있는 꽃, 모데미풀이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마다 국회의원 선거 열기로 뜨겁다. 골목을 메우는 요란한 선거구호와 거리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뒤로하고 강원도의 어느 산을 오른다. 지난 몇 년간의 적폐처럼 쌓인 낙엽들. 나무가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는 건 까닭이 있다. 힘든 겨울에도 생존하려고 수분 손실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몸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생각하면 이는 나무가 행사하는 고귀한 한 표이기도 하다. 나무들은 이 투표행위를 통해 산을, 다시 말해 저들의 세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스산한 가을을 갈아치우고 청신한 겨울을 맞이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봄을 세웠다. 바야흐로 산에는 새로운 세상이 무르익었다. 새는 지저귀고 꽃은 핀다. 이 모두 산을 바꾸겠다는 나무의 의지가 모이고 쌓여서 이룬 결과임이 자명하다.



지금 각자의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들 한다. ‘정자정야(政者正也)’라 했다. 정치란 바른 것이라는 뜻이다. 다섯 획으로 이루어진 ‘正(정)’은 뒤집어 거꾸로 보아도 글자가 거의 같다. 바르다는 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항상 바르다는 것을 함의하는 게 아닐까.

지난 시절 잎들이 일제히 몸을 던져 물꼬를 튼 세상의 변화가 도래했다. 봄이 온 것이다. 흙에서 나왔지만 티끌 하나 묻히지 않은 깨끗한 꽃들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내일이면 사람들의 선거. 우리 또한 그렇게 나무들처럼 우리들 세상을 홀랑 뒤집어놓기를! 모데미풀 앞에서 그런 궁리를 해보았다.


한국특산식물.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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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의 삼성산. 대구에서 능금이나 설탕을 취급하는 상회(商會)로 출발하여 이제는 반도체, 휴대폰 등으로 큰 부를 일군 어느 기업(企業)에서 따온 이름이 아니다. 그런 유와는 격을 달리하느니 원효, 설총, 일연의 세 성인의 혼을 기린다 하여 삼성산이다. 삼성(三聖)의 청신한 기운이 작용한 까닭일까.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는 봄내음이 여느 곳들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옹기종기 모인 기와집들의 뒤안에는 하늘과 내통하는 굴뚝. 그 옆으로 살구꽃이 피었고 대문 밖에는 박태기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시멘트 포장길을 버리고 복숭아밭 옆 도랑으로 들어갔다. 물 오른 쑥과 갓, 광대나물, 큰개불알풀이 제 세상을 만났다. 어느 하나가 문어발식으로 독점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잘 어울린 생태계. 작은 야생화가 심심하다 싶으면 남산제비꽃이 있고, 조금 높은 곳에는 개암나무가 올해의 꽃들을 내민 채 두리번거린다. 발아래 야생화들에게 햇빛을 주기 위해 장대 같은 나무들은 해마다 한 번씩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낮게 깔린 풀들 사이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현호색이었다. 쇠스랑 같은 잎을 단 가느다란 줄기 끝에 감탄스러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다. 이륙 직전의 비행기라고 할까. 줄지어 날아오르는 오리가족이라고 할까. 그때였다. 꽃에 취해 사진을 찍는데 벌 한 마리가 날아드는 게 아닌가. 주둥이처럼 벌린 꽃의 입구에 벌이 앉자 줄기가 낙엽에 닿을 만큼 휘청거렸다. 벌은 가느다란 줄기를 지렛대 삼아 꽃 안으로 파고들었다가 그 탄력을 이용하여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휙 다음 꽃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는 광경!

꽃산행을 마치고 온 밤, EBS <세계의 명화>에서 <21그램>을 보았다.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사람이 죽는 순간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예외는 없다. 21그램, 그것은 영혼의 무게일까? 5센트짜리 동전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의 무게….” 벌새는 벌만 한 몸으로 공중에서 정지하여 꿀을 빨아먹는 새라고 한다. 예외는 없다 했으니 벌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는 같은 것인가. 바람 앞에서 만날 때마다 내 영혼의 무게를 생각나게 할 현호색.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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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깡패가 되었다고 치자. 으슥한 골목에서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아이를 불렀다. 코 묻은 돈을 좀 뜯자고 한 것이다. 아뿔싸, 붙잡고 보니 같이 재수하는 친구의 동생이 아닌가. 내 비록 지질하게 살지라도 그간의 안면을 무시하고 녀석을 무섭게 으를 수는 없다. 얼른 표정을 바꾸고 덕담이라도 건네야 한다. 안다는 것이 엉뚱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등산할 때 나뭇가지를 똑똑 분지르며 가는 이가 있다. 나무의 낭창한 탄력을 제압하는 데 실없는 재미라도 들린 듯하다. 설령 앞을 조금 가로막는다 치자. 그렇더라도 그럴 때 쓰라고 손가락 끝에 물결무늬가 있고 어깨의 관절은 360도를 회전할 수 있다. 그런 성능의 소유자가 왜 이런 무작스러운 행위를 할까. 그건 필시 그가 나무와 안면을 익히지 못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는 것이 완력을 쓰는 때이다. 동네깡패가 그랬던 것처럼 그이가 나무들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차마 그리하지는 못했으리라. 이름을 뻔히 아는 생강나무를 보고 어떻게 그 팔을 부러뜨리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양지꽃의 양양한 얼굴을 어떻게 발로 짓밟으랴.

제법 깡으로 통과한 고등학교 시절. 입시공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하루만의 위안이랍시고 간 마지막 소풍은 동래산성이 위치한 범어사 뒤 금정산이었다. 그로부터 사십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금정산을 오르고 있다. 어느 코스였는지 정확한 기억이야 없지만 그때 그 금정산의 한 자락이겠거니 하는 생각만으로도 사무치는 감정이 일어났다. 한 골짜기에 이르니 꽃샘추위 속에서 꽃대를 밀어올리는 얼레지가 밭을 이루었다. 시무룩하게 터벅터벅 걸었던 이 길이 꽃길인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천지삐까리’로 쌓인 낙엽을 뚫고 일어나는 깽깽이풀을 만났다. 붉은색이 감도는 보라색의 꽃잎이 접시안테나처럼 펼쳐진 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에 그만큼 훼손이 심해서 한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기도 했던 귀한 야생화. 입김만 닿아도 꽃잎이 쉽게 흩어질 것만 같아서 깡패 같은 마음을 버리고 멀찍이서 오래 바라본 꽃, 깽깽이풀. 매자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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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 첫 지리산 꽃산행. 지리(智異)는 너무 큰 몸집이라서 제가 품고 있는 꽃을 활짝, 다종다양하게, 오래 피우기는 하지만 빨리 영접하기에는 둔한가 보다. 절반의 신선을 뜻한다는 ‘반선’교에서 구름도 누워서 쉬고 간다는 ‘와운’마을까지를 걸었다. 뱀이 죽었다는 ‘뱀사’골은 요룡대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산불방지 입산통제 중이다. 동안거 수행은 잘하셨는가. 막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계곡의 안부도 물을 겸 궁금한 눈길을 멀리멀리 던졌다. 저 굽이굽이 뱀사골을 일으켜 세워 사다리처럼 타고 올라 구름의 궁둥이를 꼬집어볼까, 궁리도 해보면서.

와운마을로 접어드니 천년송이 굽어살피는 언덕 아래로 옹기종기 집들. 따사로운 햇볕이 지붕을 말리고 있다.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분께 물었더니 답이 우렁차다. 아따, 여기가 워낙 깊고 높아서 추위가 아직도 개골창마다 쏙쏙 들어 있어요. 어차피 필 꽃이기에 큰 기대는 거두었지만 계속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겨우 하나가 눈에 띄었다. 허름한 밭뙈기나 시궁창 근처에 주로 출몰하는 큰개불알풀. 사람 사는 곳치고 시궁창 없는 곳 없으니 인적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꽃이다.

지리산 자락의 큰개불알풀을 보면서 몇 해 전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인왕산 아래 옥인아파트를 허물고 수성동 계곡을 복원하는 자리. 모두들 떠난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 꽃이 옹기종기 피었다. 광대나물, 서양민들레, 남산제비꽃, 쇠별꽃 그리고 큰개불알풀.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처럼 꽃들도 그렇게 무리지어 있었다.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 ‘나’라는 인물도 인간으로 서 있었다. 이들은 전국 어디에나 있는 흔하디흔한 야생화. 그래도 먼 산 갔다가 이름을 익힌 뒤 일하는 곳 근처에서 다시 만나면 각별한 애정이 솟아난다.

땅속의 사정을 잘은 모른다. 아마 뿌리는 서로 얽혀 있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자들도 서로 진득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사진을 찍으려 무릎을 꿇었다. 내 검은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꽃 그림자들한테 엎어졌다. 큰개불알풀 그림자하고도 포개졌다. 이름이 조금 짓궂긴 해도 오늘은 무척 귀하고 고마운 큰개불알풀. 현삼과의 두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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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후회와 아쉬움으로 얼룩진 날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부산에서 보냈다. 무슨 일에 사로잡혔던가. 하늘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살았던 것 같다. 부산에서 청춘을 보냈다지만 자갈치시장께나 가보았을 뿐 송도 너머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 집안일로 긴 그림자 앞장세우고 부산을 가지만 부산을 실감할까 싶으면 벌써 서울역이다. 겨울을 이겨낸 꽃을 찾아 암남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비로소 부산의 한 귀퉁이나마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부산시내에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여행 시기는 공룡시대인 중생대 말 백악기, 느린 걸음이라면 1분에 42만년씩 1시간 동안 2500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구경할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공원 들머리 주차장까지 약 2㎞ 길이의 지질탐방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심에 위치한 ‘타임머신’이다”(한겨레신문). 며칠 전에 읽었던 기사를 염두에 두고 바다와 접한 길을 걸었다. 과연 감탄할 만한 풍광 속으로 시루떡 같은 지층들. 우리 국토의 한 매듭이 이렇게 그 속살을 드러내는 중이다. 붉은 퇴적층 위로 현무암, 이암, 사암 등 층층이 쌓인 절벽을 나아가면 계단도 끊어지고 안전판도 없이 휘돌아지는 바위길이 나선다. 한발 삐끗하면 그대로 물고기밥이다. 그 아슬아슬한 곳에 전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나무가 있으니 다정큼나무였다.

바닷바람이 몹시 사나운 곳. 그런 압력이 안으로 뭉쳤나보다. 키는 작았지만 야무진 인상이다. 멀리 배경이 되는 것은 영도의 동삼동. 신석기시대의 패총이 발견된 곳이다. 지금 보이는 건 바닷가 오막살이 터를 지우고 우뚝 솟은 아파트. 저곳엔 느긋하게 휴일을 즐기는 단란한 가족들이 있으리라. 위험했지만 안 엎드릴 수가 없었다. 가까이서 보면 잎마다 멍처럼 검푸른 얼룩이 있다. 작년에 익은 까만 열매도 아직 달려 있다. 사진 찍고 일어나니 내 투신을 막아내느라 힘을 썼던 모래알갱이가 애꿎게 바다로 뛰어든다. 잎과도 헤어지지 않고 열매도 다정하게 모여 달린다기에 그 이름을 얻었나, 다정큼나무. 장미과의 상록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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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라 서라벌, 마음의 구조가 저절로 바뀌는 곳이다. 서라벌, 천년 도시의 공간이다. 경주, 초등학교 시절에 수학여행을 갔던 장소이다. 그런 내력이 뭉쳐서 주는 감흥 때문에 그런가 보다. 오십을 넘고부터 이 도시는 신라의 영광과 코흘리개 꼬마의 추억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봄이 오면 으레 꽃잔치로 나를 유혹하는 곳이 되었다. 올해도 경주 안강의 어느 골짜기에서 천지사방의 완연한 봄소식들과 제대로 접촉했다.

과연 변산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등이 추운 계절을 밀어내고 어리둥절하게 피어났다. 무덤 앞에서 엎드려 꽃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모습은 갓 피어난 꽃을 두고 사(死)와 생(生)이 팽팽히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꽃도 꽃이지만 무덤을 가로질러 좁은 개울로 갔다. 찬란히 틔워오는 햇살 속으로 찬찬히 들리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오락 프로그램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게 있었으니 김영운과 고춘자의 만담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한 대목. 추위 내기 시합이 열렸다. 오줌을 누자마자 무지개처럼 얼었다는 건 약과다. 어느 동네엔 불꽃이 언단다. 봄이 되면 여기저기 불 끄기에 바쁘단다. 장원인가 싶었는데 아니다. 시베리아 어느 동네엔 하도 추워서 말이 언단다. 그래서 날이 풀리면 사방에서 얼었던 말이 살아나서 귀가 얼얼하다나뭐라나.

물이 얼면 소리도 얼음 속에 갇히는 법. 이제 골짜기의 물소리도 활짝 해방이다. 개울 가운데 반반한 돌에 앉았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꽃, 이라고 써보지만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린다. 천년 전의 물은 아니겠지만 천년 전에도 물은 이런 형식으로 흘렀겠지. 물은 내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겨냥해서 오더니 좌우로 갈라져 엉덩이를 휘감고 돌아 아래로 내려갔다. 졸졸졸졸졸. 물소리가 더욱 커지는 곳에 나무 하나가 가지를 쫑긋하게 개울가로 열어두고 있다. 갯버들이다. 암수딴그루로 봄이면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나무. 물가에 서서 버들버들 물소리를 쟁여놓았나. 부드럽기가 한량없다. 가볍게 쥐어보면 바둥거리는 물고기처럼 전해오는 생명의 탄력! 갯버들, 버드나무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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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신문의 해외 토픽 난에서 읽었던 이야기다. 이 세상을 때리고 간 빛은 우주 저편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기 마련이다. 켜켜이 쌓인 그 빛을 다시 가져오면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세상에서 벌어진 사건까지도 고스란히 다시 볼 수 있단다. 요즘과는 달리 그땐 신문에 난 것은 무조건 다 믿는 시절이었다. 인간이란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상상하지도 않는다는 말에 기댄다면 그 물리학자의 주장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시대가 가고 그다음 세대도 가고 난 뒤에 어느 영웅이 나타나서 우주 저쪽의 빛더미에서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그때 그 기사를 읽고 수십년이 지난 오늘 나는 산을 오른다. 걷고 있는 나도 우주의 한 구성성분이고 내 발길 닿는 여기도 우주의 한 구석임은 엄연한 사실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이동하느라 몹시 분주한 곳에서 영하의 날씨를 견디기 위해 알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 그 덕분에 숲은 바닥까지 햇볕 구경을 한다. 말하자면 겨울이 되어서야 숲은 소독도 하고 대청소도 하는 것이다. 슬픈 듯 슬프지도 않는 듯한 이즈음의 겨울산에 가면 꼭 유념해서 보는 나무가 있다.

그리 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흔하지도 않은 나무. 같은 나무라도 클수록 우람할수록 눈길이 가기 마련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나무. 그저 어느 호젓한 오솔길 휘돌아가는 곳에 날렵하게 서 있기만 해도 좋은 나무. 상록수가 아닌데도 떨켜층이 없어 작년 잎을 달고 있는 감태나무이다. 그런 감태나무들을 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다. 이 사나운 계절을 통과하도록 작년의 잎을 달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혹 이런 게 아닐까. 지난 계절에 벌어진 일들을 모두 녹화하기 위해 감태나무의 잎들은 차마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그래서 무슨 말 좀 해보라고 요란하게 흔들어보지만 그저 나무는 스산하게 웃기만 할 뿐!

숲이 겨울을 겪어내듯 우리 사는 세상도 동토의 한 시절을 통과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낸 시절은 어떤 모습일지 공중에 다 기록된다. 그 사실을 일깨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묵은 잎을 움켜쥐고 묵묵히 겨울을 감당하는 감태나무. 녹나뭇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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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그 후끈했던 열기를 비축하는 건 뭍이 아니라 물이다. 날씨가 공중에서 유래하지만 그래서 봄은 남녘 바다에서부터 오는가 보다. 여수 돌산도의 죽포에서 향일암까지 걷는 길이다. 더 이상은 견디지를 못하고 올해 들어 처음 떠난 꽃동무들과의 원거리 꽃산행.

섬이라고 만만히 볼 건 아니었다. 힘차게 달음박질하던 여수반도는 더 이상 내달릴 수 없는 곳에서 보란 듯이 훌쩍 솟구친다. 돌산을 세상에 흔한 ‘돌멩이산’쯤으로 짐작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땅은 크게 한번 지조있게 돌출했다가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격이다. 여수의 여(麗)는 돌산의 돌(突)과 호응해서 천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완성하는 셈이었다.

‘지심매기’에 한창인 들길을 지나 봉황산-율림치에 이르니 관광버스 옆으로 춘심을 이기지 못한 등산객들의 왁자한 놀이소리가 낭자했다. 내처 금오산으로 오르니 그만큼 바다에 가까워진 듯 봄기운이 훅 끼쳐왔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뛰어나온 병신년산(産) 노루귀, 변산바람꽃, 산자고를 육안으로 만지는 호사를 누렸다.

드디어 금오산 정상이다. 멀리 산들이 거리에 따라 음영을 달리하듯 발아래 바다의 낯빛이 조금씩 다르다. 해를 향한 암자인 향일암으로 내려가는데 좀 전에 만난 장구밥나무가 떠올랐다. 나무는 앙상한 줄기들이 마구 뒤엉킨 채 어느 무덤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때 풍성했던 열매는 모두 떨어지고 마지막 미련처럼 몇 개만이 달려 있었다. 가운데가 잘록한 열매가 장구처럼 보인다고 해서 장구밥나무. 하지만 오늘의 나에겐 해를 뜻하는 ‘일(日)’자처럼 여겨졌다. 더구나 무채색의 산중에서 해돋이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빨간빛!

이른 아침에 나는 죽포에서, 하늘의 해는 향일암 앞 먼 바다에서 동시에 출발했다. 나는 동쪽으로, 해는 서쪽으로. 우리가 어디쯤에서 엇갈렸는지 그건 모를 일이다. 문득 이제껏 힘겹게 뒤를 떠받치던 그림자가 어느새 키보다 훨씬 길게 자라 나를 이끌고 있었다. 향일암으로 떨어지는 수직의 절벽 계단에서 졸아드는 햇살, 얼마 남지 않은 오후 그리고 장구밥나무를 문득문득 생각했다. 장구밥나무, 피나무과의 낙엽 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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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엊그제였다. 24절기 중에 입하, 입추, 입동도 있지만 입춘은 어쩐지 그들과 격을 달리하는 것 같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것보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변화는 체감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입춘을 入春이겠거니 했다가 立春임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봄이 있어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겼던 얄팍한 생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표기, 立春이었다. 이 말은 자연의 중심이 인간이 아니라 우주 만물 모두가 주인이라는 생각도 은근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굳이 먹 갈고 붓 들어 화선지에 써서 문지방에 붙이지 않고 절기명을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입춘축(立春祝)이었다. 입춘, 입춘, 입춘, 입춘. 입안에 몇 번 중얼거리자 얼었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그 어떤 따뜻한 기운이 발끝까지 쭉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지방으로 쏘다니는 꽃동무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남녘엔 벌써 복수초, 변산바람꽃 등등 봄을 알리는 올해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눈을 뚫고 솟아오르는 꽃들을 직접 찍은 사진으로 보는데 기분이 저절로 훈훈해졌다. 파주에서 혹독한 추위와 씨름하느라 소소한 일들에 붙들려 마음을 내지 못했다.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심학산으로 갔다.

내가 상승하는 기운을 느끼며 정상으로 오르듯, 두꺼운 솜이불처럼 깔린 낙엽 아래에서는 저마다의 사연들이 지표면을 뚫고 올라오는 듯 왁자지껄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야흐로 이 골짜기에도 미구에 마구마구 흐드러지게 피어날 꽃들이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

심학산 정상에 오르면 마지막 깔딱 숨을 내뱉는 곳에 똑부러지게 작살나무가 서 있다. 겨울이 깊도록 보랏빛 열매를 오종종하게 달고 있는 나무다. 한겨울 동안 내 심심한 눈빛을 받아주고 새들의 먹이가 되어 주기도 했던 작살나무의 열매들. 이제 곧 꽃이나 잎에게 자리를 내주려는 듯 그 순결했던 보랏빛 열매도 모두 졌다. 우수를 며칠 앞둔 오늘. 나와 나란히 독립(獨立)한 작살나무 앞에서 숨을 고르면 희미하게 새잎 움트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봄은 봄, 작살나무는 작살나무. 마편초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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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대해 손톱만 한 관심도 없었더라면 그냥 여러 동네 중의 하나로 목포는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木浦’라는 지명에서 나무를 발견하고 보니 그 배경이 새삼 궁금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옛날 이 지역에 목화밭이 많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목포는 항구보다 나무가 먼저였다.

더러 호랑이 혹은 토끼의 모습을 닮기도 했다지만 그런 상투적인 것을 벗어나 한반도 지형을 이렇게 추상화할 수도 있겠다. 조금 희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욕망이 첨예하게 들끓는 서울은 어디에 해당한다고 굳이 말하지 않겠다. 나 태어난 부산은 왼쪽 새끼발가락, 낭만이 흐르는 목포는 오른쪽 새끼발가락. 두 발을 나란히 모으면 해안선이 들쭉날쭉 예쁘게 발달한 남해안!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이다. 손톱이나 발톱, 시쁘게 보여도 함부로 대우할 게 아니다. 아무리 몸 안에 힘이 끓어 넘쳐나도 손톱, 그게 없다면 주먹을 쥐어도 힘이 힘으로 모아지지가 않는다. 발톱, 그게 없다면 몸은 걸어다닐 수 없을 것이다. 연체동물처럼 땅에 들러붙어 흐느적거려야 할 판이다.

모든 산은 어렵게 이룩한 높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상에는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또한 뚜껑과 같은 것이니 동일한 이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바다와 접촉하는 해안선에도 무슨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면서 목포의 유달산과 자생식물원을 둘러봤다. 이곳은 남쪽이기도 했지만 바닷가라서 그런지 상록수가 많다는 점에 유념했다. 그리고 목포 앞바다에 있는 압해도 송공산. 잔잔한 바다가 코 끝에 걸리는 능선을 걸을 때 송악, 줄사철나무, 자금우, 마삭줄 등 덩굴성 나무들이 눈에 자꾸 들어오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늘 철썩이는 파도에 시달리는 이곳에서 바다로 뛰어들려는 것들을 막기 위한 울타리인 듯!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마삭줄이었다. 전국 어디에서나 바위나 나무를 칭칭 감고 오르고 집안에서 화분으로도 흔히 키우는 마삭줄. 내 엉뚱한 상상력의 증거라도 되는 듯해서 장하고 기특하게만 보이는 목포 바닷가의 마삭줄. 협죽도과의 상록 덩굴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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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가는 길. 선바위 옆으로 오르면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망루 같은 초소 아래 반반한 바위가 있고, 그 곁에 노란 껍질에 빨간 씨앗의 열매가 한 무더기 있다. 눈이 많이 왔던 작년에는 수북하게 쌓인 눈을 뒤집어쓴 채 추위에 맞서고 있었다. 더러 이슥한 밤이면 경계병들의 오줌 세례라도 받았나. 그 어떤 곳보다도 더욱 튼실하게 잘 자라고 있는 노박덩굴의 열매들이다. 인왕산 한 귀퉁이의 노박덩굴은 볼 때마다 나를 지리산의 한 골짜기로 곧장 데리고 간다.

지리산의 칠선계곡을 오르는 길. 등산로 가운데 바위에 누가 흘린 배설물이 달랑 놓여있었다. 으슥하지도 않은 아주 양지바른 곳이라 인간의 것은 아닌 듯했다. 똥의 규모로 보아 제법 덩치가 나가는 동물의 작품임이 분명해 보였다. 알록달록한 무더기는 내용이 제법 복잡했다. 막대기로 파헤쳐 보니 겨우살이와 노박덩굴의 열매가 들어있지 않겠는가.


그 똥을 눈 동물은 그 열매를 아주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미처 소화도 덜 된 채 그것을 바깥으로 내놓아야 했을까. 까닭이 있다. 그것은 발 없는 식물이 씨앗을 퍼뜨리는 기발한 전략이었다. 발품 하나 팔지 않고 자신의 후손을 멀리멀리 퍼뜨리는 지혜! 말하자면 겨우살이나 노박덩굴은 먹이를 찾는 동물을 씨받이로 활용한 셈이다. 이렇게 동물의 내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씨앗은 발아도 훨씬 잘 된다고 한다. 흐물흐물한 태(胎)처럼 투명한 막을 덮고 있는 그 씨앗들은 보온 효과도 누리면서 겨울을 난 뒤 천천히 흙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날 것이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김남주)라는 절창의 시도 있듯 자연은 이 겨울에도 먹이가 되는 열매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까치보다 조그만 입을 가진 날짐승을 위해서 이렇게 작게, 높은 가지까지 오르지 못하는 길짐승을 위해서 저렇게 낮은 곳에 노박덩굴을 배치하여 둔 것은 아니었을까. 겨우 배를 채웠지만 시원하게 똥 누고 나면 또 허기가 찾아온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이를 찾아 헤맬 동물을 떠올리면서 느긋하게 웃고 있을 노박덩굴의 씨앗들. 노박덩굴, 노박덩굴과의 낙엽 덩굴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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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EBS 세계의 명화는 <잉글리쉬 페이션트>였다. 몇 년 만에 다시 보니 감흥이 새로웠다. 마지막 장면. 파란만장한 일을 겪어낸 알마시는 한나에게 화상으로 뭉그러진 손을 겨우 들어 앰플 통을 쓰러뜨린 뒤 눈짓으로 신호한다. 그렇게 해서 치사량의 모르핀을 자신의 몸 안으로 들이면서 장작처럼 빳빳해진다.

모든 인생을 스크린에 옮길 수는 없겠지만 영화 같지 않은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저녁에 본 모니터의 부음 기사가 눈시울을 때렸다. “시대의 대표적 지성인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별세했다. (…) 20년 넘게 감옥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은 신 교수는 (…) 진통제인 모르핀이 듣지 않을 정도로 병세가 크게 악화되자 스스로 곡기를 열흘 정도 끊었다.”

두 해 전 제주도 식물탐사. 마지막 일정은 한림수목원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어느 나무 앞에서 특징을 살펴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무의 이름을 보자니 은근한 속셈이 생긴 것이었다. 나무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 팻말, 나무를 함께 찍었다. 훤칠하게 자라 아름드리 줄기로 큰 그늘을 이룬 그 나무는 무환자나무. 이름 속의 ‘환자’는 액면 그대로의 환자(患者), 페이션트는 아니나 뜻은 서로 통한다. 살아있는 사람 치고 환자 아닌 이가 어디 있던가. 집에 심으면 우환이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환자(無患子)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무환자나무.

일면식은 없었지만 선생의 책은 더러 읽었고, 선생의 붓글씨로 화제가 된 ‘처음처럼’은 아주 많이 마셨다. 아마 나 같은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 스스로 기공을 닫고 낙엽을 준비한다. 건조시킨 잎을 모조리 떨구어 혹한의 계절을 통과하면서 또 한번 갱신하는 것이다. 이제 선생은 이승을 떠났지만 많은 이들의 가슴에 큰 나무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나무는 ‘나무야 나무야’가 되고 이윽고는 ‘더불어 숲’이 될 것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여운 속에서 우리 시대의 한 스승을 떠올린 밤. 선생의 갱신을 한편으로 부러워하며 더불어 무환자나무도 생각해 본 밤. 무환자나무, 무환자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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