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199건

  1. 2017.10.19 치유하는 약
  2. 2017.10.12 불바다 불산
  3. 2017.09.28 백조의 호수 빵집
  4. 2017.09.21 재방송
  5. 2017.09.14 분홍 스웨터 구름과 별
  6. 2017.09.07 에코백 천가방
  7. 2017.08.31 흙집에 흙 얼굴
  8. 2017.08.24 오리알
  9. 2017.08.10 냉장고
  10. 2017.08.03 벼락 치는 날
  11. 2017.07.27 낚시꾼
  12. 2017.07.20 런던 시계탑
  13. 2017.07.14 비틀스 팬
  14. 2017.07.06 치맥 피맥
  15. 2017.06.29 구유
  16. 2017.06.22 아라비아의 로렌스
  17. 2017.06.15 평양 순안공항
  18. 2017.06.08 오월광장 회화나무
  19. 2017.06.01 백진강 전설
  20. 2017.05.25 아꼼빠니에또


우다다다 탈곡기 소리에 벌떡 깼다. 평야엔 농부들과 볏섬, 참새 떼가 일찍부터 내려앉았고 달과 별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어라. 그 둥글고 크던 얼굴. “모두가 낮잠을 자는 이유구려. 저 둥근 달.” 언젠가 읽었던 하이쿠 한 소절. 풀벌레 소리에 잠 못 들고 환한 달빛에 잠 설치고 부지런한 농부들 땜시 아침잠도 빼앗겼다. 낮잠으로 보충하면 되지 뭐. 꼭 밤에만 자라는 법도 없다. 수도원 규칙이 암만 엄해도 성덕이 깊은 수도원장은 “사람이 먼저다!” 팁을 살짝 뿌린다. “규칙은 사랑 앞에서 허물어뜨리라고 있는 거라네. 그걸 잊어버리면 자네들은 수도원에 있는 기계밖에 더 되겠어.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그 다음에 규칙이네.” 여행과 사랑과 잠의 세월. 그리고 기나긴 단잠, 사후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옥에 계신 그분이 언젠가 잠이 보약이라고 했다지. 보약 맞다. 하지만 건강한 삶을 산 뒤의 단잠이어야 맞다. 북미 원주민들은 ‘자연 모든 곳에 있다’라는 뜻의 ‘음페손’을 약을 칭하는 낱말로 썼다. 그중에 최고는 ‘에그트지 음페손’. 바깥 땅 위에서 약을 구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혼돈과 불안, 슬픈 억눌림, 옹졸한 생각들을 몰아내야만 진정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거다.

약을 한 봉다리씩 입에 물고 사시는 동네 할머니들. 다리가 풀려 그만 넘어져서 다치신 분들도 간간이 보인다. 하체를 튼튼하게 다지려면 자주 걸어야 한다. 누워 버릇하면 영원히 눕는 수가 있다. 잠은 가장 나중에, 마지막 순서다. 눕기 전에 명약을 구해다 달여 먹고, 세상에 두루 약이 되는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

촛불 시민혁명 1주년. 이모저모 국민들은 마음의 상처, 내상이 크고도 깊다. 적폐 청산이야말로 가장 큰 치유이고 명약이 아니겠는가. 축구대표든 태극기 집회 어르신들이든 태극전사 말고는 다시는 이전의 시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난 길. 우리가 모두 살길. 사람이 먼저인 세상.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위해서는 에그트지 음페손을 어서 손에 쥐어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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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마다 붉은 분칠. 담장 넝쿨도 발개져서 멀리서 보면 마치 집이 불난 듯 보여. 북쪽으로 삼십분쯤 가면 내장산 단풍 숲. 예까지 길게 늘어선 단풍나무들은 집성촌에 모여사는 친척들 같아.

여긴 동물원이 아닌 식물원. 기린처럼 목을 길게 늘이 뺀 나무들. 잎들 떨어지면 나무들은 추워 솜눈 이불을 뒤집어쓰겠지. 첫눈이 나리면 세상은 검거나 희거나 모노톤 흑백의 산천. 불바다 불산이 타고 나면 잿가루 같은 눈이 내릴 테고, 단풍잎들 낙엽이 되어 층층 묻히면 어디라도 무덤산.

산불조심 깃발을 앞세운 국유림 관리소 직원들의 홍보 차량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간다. 개들도 알았다고 컹컹. 야옹이도 알았다고 용용. 건조한 날씨에 바람이라도 거칠면 산불이 번질까 덜컥 겁부터 생긴다. 서울도 평양도 해마다 단풍으로 불바다. 단풍 들면 어디나 불바다.

그런 불바다 말고는 무서운 불소식. 불벼락 전쟁놀음도 한심한 소란 소동. 프랑스 투르 지방의 성자 마틴은 그랬다네.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라네. 그러니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없지.” 전쟁과 불화의 십자군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라네.

정의와 평화가 수놓는 폭죽 가을 잎사귀들. 펑펑 터지는 가을밤 유성우. 오줌으로 따발총을 갈기면서 아이들은 이 강산에서 즐거웁게 자라나야지. 불바다 불산 가을단풍도 한 시절이렷다.

우리 인생 눈 깜짝하면 흰 머리칼. 겨울 되면 펭귄만 좋은 일. 펭귄도 겨울 추위가 좋아 극지방에 모인 게 아니라지. 싸우기 싫어 멀리멀리 도망친 거라지. 천적 원수가 없는 곳. 얼음바다 얼음산.

감나무마다 불처럼 번진 붉은 홍시. 별 폭죽 팡팡 터진 홍시에 불새들과 날벌레가 달라붙어 주린 배를 채운다. 산밭에 단감이 제법 많이 열려 일삼아 따야 하는데, 날마다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 새들과 싸우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나나 저나 욕심부리지 않기 때문이네. 새들은 주머니도 창고도 없지. 나도 태풍 없는 풍작, 과하다 싶은 축복에 데면데면 엉거주춤 그러고 있는 중.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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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에 프랑스 사람 무슈 달로와요는 제 살던 동네에 처음 빵집을 열었는데 이제는 전 세계에 빵집이 생겨났다. 이름값을 할라치면 달로 와요 달로 오시랑께요, 달나라까지 뻗어나갈 기세렷다. 이름이 예쁜 빵집엔 시선이 먼저 모아진다. 아이들처럼 빵을 좋아한다. 요샌 무화과 쨈이 제철이고, 봄여름엔 딸기 쨈. 구운 식빵에 쨈을 발라 커피나 생과일 주스랑 먹으면 허기가 가시고 금세 배가 빵빵 남산이다. 즐겁고 간단한 요기에 이만한 먹거리가 또 없다.

읍내나 대도시로 나가야 빵 구경을 할 수가 있다. 면소재지엔 없는 게 많은데, 그중에 빵집도 하나. 유기농 재료로 구워 만든 건강한 빵을 맛보려면 더 멀리 도전해야 한다. 좋은 빵은 은수자나 된 것처럼 숨어 있다. 백조가 사는 호수마다 푸드 트럭, 간이 빵집이 있어 햄버거 핫도그 도넛 여름엔 아이스크림, 그리고 음료를 사먹을 수 있던 곳. 지난여름 영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백조의 호수 빵집들이 부러웠다. 호숫가 의자에 앉아 빵을 나눠 먹는 연인들. 두려움을 잊은 백조는 부스러기라도 뭐 없나 뭍으로 성큼 올라오기도 했다. 은하수 모든 별들도 호수에 같이 살고 있었는데, 배때기가 뚱뚱한 백조가 물북을 치며 뛰어들면 새까만 밑바닥으로 몸들을 숨겼다. 한반도를 수시로 선회비행하며 검은 죽음의 폭탄을 뽐내고 있는 죽음의 백조 폭격기. 미군 폭격기 별명을 ‘죽음의 백조(swan of death)’라 누가 처음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백조들이 노니는 평화로운 호숫가 공원의 풍경을 아는 사람들에겐 정말 치를 떨게 하는 이름이라 싶다. 도대체 어떤 세력들이 부추기고 원하길래 이 푸른 가을 하늘에다 시꺼먼 폭격기를 그려 넣는 걸까. 백조는 다 어디로 가고 저 시꺼먼 악령들이 부리를 쪼으며 설쳐대는 걸까.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보는 일이다. 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극장에 앉아 발레리나의 백조 춤을 감상하는 밤을 꿈꾼다. 백조의 호수 빵집에 앉아 늘 보던 진짜 백조들의 춤. 그와 사뭇 다른 풍경일 게다. 익숙한 음악도 흐를 테고 말이다. 손을 잡고서, 당신과 함께라면 좋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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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으로는 여행프로나 좀 보고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요새 방송사가 파업 중이라 재방송이 많다. 책을 다시 읽으면 별미인 것처럼 파업 때문에 듣는 재방송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방송이 볼 게 없으면 아껴두었던 영화를 한 편 찾아봐도 되고 말이다. 며칠 전엔 영화와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안겨준 선물로 두 눈이 호강했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켄 로치, 나막신의 감독 에르마노 올미 이들 셋이서 쿵닥쿵닥 만든 옴니버스 영화 <티켓>. 1등석 2등석 3등석, 칸마다 다른 군상들. 로마로 가는 짜릿하고 낭만적인 기차 여행. 가슴이 홍시처럼 붉어지고 달콤해졌다. 파업도 종종해야 하겠다. 그때는 이처럼 놓칠 뻔한 영화를 찾아볼 기회가 생길 테니까.

수다스러운 라디오도 잠시 끄고, 듣고 싶었던 노랠 찾아들어도 좋겠다. 총리 아저씨 말씀마따나 보다 공정한 뉴스를 찾아들어도 좋겠다. 윗선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메인 앵커에게 물 좀 아끼라 했다고 수년간 일거리 없는 ‘옆방’에서 지냈다는 선배 기자의 증언. 이도 워터게이트라 하던가. 나이 들고 볼품없는 사람들도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까. 휘황한 햇빛만 믿고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추한 군상들. 세상이 온통 적폐로 몸살을 앓고 있다. ‘파업전야’ 노래가 동네방네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새로움만을 좇는 세상에 재방송을 듣는 즐거움. 개봉영화가 아니라 흘러간 영화를 찾아보는 즐거움. 겁 없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주의하고 조심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힘 빼기의 기술’을 잘 안다. 카피라이터 김하나씨의 에세이 <힘 빼기의 기술>도 참 재미나게 읽었다. 제목부터가 나를 화끈 홀렸다. “주삿바늘 앞에 초연한 엉덩이처럼 힘을 빼면 삶은 더 경쾌하고 유연해진다.” 일본의 유명 극작가인 구도 간쿠로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쁜 와중에 각본을 그리 잘 쓰시는 비결이라도?” 대답인즉슨 “일단 잘 쓰고 싶지 않아요”. 백지 앞에서 부푸는 욕심,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순간 명문장이 찾아드는 것일까. 올해 추석명절은 아주 긴 휴식기로 달콤하겠다. 힘을 빼는 재방송 시간. 기운을 빼고 뒤를 돌아보며 두루두루 살펴보는 귀한 시간들이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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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없다가 오늘은 다시 구름이 꼈다. 낮에는 하얗다가 노을이 스며드는 저녁때면 분홍빛으로 바뀌는 구름. 바라보자니 분홍 스웨터를 입은 윤 초시네 증손녀딸이 생각난다. 갈밭 사잇길을 갈꽃 꺾어 들고 함께 걷던 소년과 소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이야기.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잎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근데 이 양산같이 생긴 노란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소녀는 병상에서 죽으며, 땅에 묻힐 때 분홍 스웨터 그대로 입혀 달라고 했었다지. 스웨터에는 풀냄새 꽃냄새, 소년의 등에 업혔다가 옮은 검붉은 진흙물도 함께.

밤에는 구름 뒤로 수십억광년 먼별이 반짝거린다. 황순원의 다른 소설 <별>은 엄마 생각에 눈물나게 한다. “하늘에 별이 별나게 많은 첫가을 밤이었다. 아이는 전에 땅위의 이슬같이만 느껴지던 별이 오늘 밤엔 그 어느 하나가 꼭 어머니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수많은 별을 뒤지고 있었다.”

먼별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고작 6000년이 아니라 6억년, 60억년 오랜 세월을 빛의 속도로 부지런히 달려온 것이렷다. 상식 밖의 얼토당토않은 유사과학 창조과학이 아니라 오래 묵은 사랑인 은하의 별들. 수수한 꽃별들의 사랑 얘기. 분홍 스웨터 입은 소녀도 별이 되어 수십억광년 성운 속에서 반짝거린다. 교리나 교조가 아닌 사랑들로 세상엔 노란 마타리꽃이 피어나고, 그 노란 양산과 우산으로 따가운 햇살과 소나기를 피했던 인생. 소녀는 분홍 스웨터 구름이 반짝거리는 서녘에 서서 ‘해로운 신앙’이 아닌 ‘온기 있는 사랑’으로 소년을 기다려주겠지. 사랑하는 사이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다. 그립고 그리운 것들마다 은총 있으라. 만나면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내 사랑. 노란빛 분홍빛 꽃들과 별과 구름으로 벙그러진 대우주. 눈에 보이지 않는 백색왜성, 중성자 별이라도 분홍 스웨터 입은 소녀를 서녘 노을에서 만나듯 결국엔 깜짝이야, 만나게 되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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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마다 잊지 않고 사 모으는 게 있는데 에코백 천가방이다. 도시의 이름이나 어디 서점, 음반점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작가 로렌스의 이름이 새겨진 에코백. 길에서 누군가 메고 가는 에코백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화가, 가수의 이름과 도시가 새겨진 에코백을 만나면 무지 반갑다. 명품 가죽 가방도 하나쯤 뭐 좋겠지만, 거창하게 지구환경까지 말하고 싶진 않고, 에코백이 건강하고 멋져 보인다. 정성을 다해 직접 손바느질로 에코백을 만들어 들고 다니는 부인들도 있다. 따봉 따봉, 엄지손가락 척~.

요새는 해외 고급 백화점과 서점마다 필수로 에코백 판매대를 두고 있다. 일회용 포장, 비닐을 줄여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실용성 말고 패션의 지위로까지 높이 올라가는 분위기다. 젊은 치들이 명품 백을 휘두르는 건 별로 곱게 보이지 않는다. 엄마 걸 들고나온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샹젤리제나 몽마르트역 어디도 아닌데 철심 줄로 친친 감긴 가방을 가슴에 움켜쥐고 다닐 필요까지야. 책 한 권 들어가지 못할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무식을 온 천하에 자랑하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 젊음의 자랑은 돈이 아니라 건강미와 지성미. 누구는 그것이야말로 섹시미, 야하다고 말했던가.

마광수 교수를 뵌 것은 가수 한대수 사진전으로 기억한다. 하얀 천조각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앞자루에 박힌 에코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일행도 수줍은 얼굴이었는데 스치듯 다른 일행들 속에 파묻혔다. 윤동주처럼 창백한 얼굴을 가진 마광수 샘은 학원에서 쫓겨나 감옥이나 외진 식당을 전전하며 지냈다. 그가 들고 다닌 가방 중에 하필 그 에코백의 기억을 내가 지닌 것은 무슨 때문일까. 그 속에 어떤 책과 또 시가 담겨져 있을까 궁금했었다. 다소 커 보이는 상의를 걸친 구부정한 어깨선.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사라를 좋아한다 말했던 눈빛은 누구보다도 솔직했다. 검열을 피해 다급히 적고 또 찢었을 노트에는 같이 ‘콩밥을 먹은 문장들’이 슬픈 나체로 누워 있었겠다. 문학 선생의 에코백을 찢어 콘돔이라도 하나 주운 자들이 내지른 비명들로 세상은 소음천지, 위선의 진풍경이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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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집을 지을 때, 나무로 지을까 벽돌로 지을까 철골로 지을까 고심을 거듭. 결론은 흙으로 짓자! 기둥 골조는 철근과 나무로 단단히 일으켰으나 벽만큼은 흙벽돌을 두르고 고운 흙으로 미장을 하고팠다. 툭툭 터지고 갈라져서 애를 먹다가 전문가를 소개받고서야 야물딱지게 단장을 마칠 수 있었다. 지붕 기와를 얹을 땐 흙을 이겨 깔고 그 위에다 전통 깜장기와를 착착 붙였다. 조선사람 피부 색깔을 닮은, 남녘땅 붉은 흙으로 지은 집. 손바닥처럼 거친 흙으로 지은 집. 나와 집은 쌍둥이처럼 똑 닮았다. 뒤란 담벼락도 흙을 이겨 발랐더니 옛날 토담 비스무리 나왔다. 시방은 그 위로 넝쿨 식물이 우거져서 흙 반 넝쿨 반. 의외로 어르신들은 시멘트를 좋아하신다. 발전상으로 세뇌당하신 듯.

“절므런 양반이 집을 짓는닥해서 보기 조컸구마 기대를 겁나 했는디 금메말시 가난테 가난물이 뚝뚝 떨어져가꼬 실망이 커부렀당게라. 흙이라믄 인자 송신나게 징그랍소.” 헉, 할매집보다 수배 넓은 기와집인데 흙벽을 보고는 그리들 판단. 초가삼간 흙집, 가난했던 옛일들이 떠올랐을까. “흐칸 색(흰색)으로 싹잠(모두) 발라부쇼.” 이건 뭐 마을민원 수준이었다. 흙집은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엔 한결 따숩지. 꽃밭 산밭도 붉은 황토와 마사가 적당히 섞인 흙밭. 양지뜸 뭘 심어도 팔뚝만 하게 잘 자란다. “아따메. 흙이 요라코롬 좋단 말이오. 남정네들 고출 싹 따다가 여그다 심으믄 볼만 허겄재라이. 요라고 실하기라도 해야재 워디. 쯔쯔쯔.” 할매들이 엉큼하게 웃으며 고추를 따담았다. 응달엔 지렁이들이 밤낮으로 일하고, 풀벌레 악단은 밤새 재즈를 연주한다. 흙에서 자란 배추는 김치가 되어 밥상에 빨갛게 올랐다.

흙으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미술작품이 또 하나 있더군. 며칠 전 꽃다발을 들고 다녀온 화가 임옥상 샘의 전시. 흙을 발라 그린 존 버거와 윌리엄 모리스, 자화상에 쏙 반했다. 조물주 말고 나도 내 얼굴을 흙으로 그려보고 싶더군. 현대인들은 흙과 멀어졌다. 핵무기보다 병이나 자연결핍으로 죽을 확률이 억만배 높다. 존재의 원형질과 멀어진 우리들. 이런 게 바로 큰일이렷다. 잘 구운 흙처럼 건강한 그댈 위해 남녘땅 붉은 흙 한 줌 쥐여드리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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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말이를 엄청 좋아한다. 김을 넣어 쫄깃해진 계란말이 한 조각. 봄소풍과 가을 운동회 때 맛보던 음식. 계란탕도 못지않게 좋아한다. 거기다 하얀 쌀밥 한 숟갈, 깍두기 몇 조각 넣으면 계란 비빔밥. 간호사였던 누나랑 잠깐 자취를 했던 때가 있었는데 석유곤로에 올려서 찐 계란탕. 퀴퀴한 자취방에 맛난 훈기가 올라왔다. 미대를 나와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꺽다리랑 연애를 한참 할 때였는데, 훗날 매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셋이서 종종 밥상에 둘러앉았다. 지금 같았으면 짜장면 값 뜯어내 얼른 밖에 나갔을 텐데(자리를 비켜드렸을 건데) 계란말이 계란탕이 너무 맛있어서 미안 쏘리.

아버지는 넓은 목사관 뒤뜰에다 닭과 오리를 키웠다. 마당엔 지렁이들이 살고 냇물엔 물풀이 가득. 닭은 타조처럼 키가 크고 오리들은 거위만큼 뚱뚱하게 자랐다. 오리들도 닭처럼 알을 낳았다. 그런데 알이 하얗고 굵었다. 삶으면 계란보다 맛나다. 오리알 요리도 종종 맛을 봤는데 입에 넣을 때마다 오리가 꽉꽉 울어서 미안했다. 오리는 애교 많은 친구다. 뒤뚱거리며 걷는 것도 귀엽고 입주댕이도 노란 립스틱을 발라 재미있다. 물장구를 칠 때는 정말 부지런해. 날개는 있으나 마나지만 물갈퀴 발목 하나는 야무져서 물에 빠져 죽을 일은 없다. 땅을 두 발로 걷던 오리가 물에 들어가면 편안하게 앉아 헤엄을 치는 건 참 신기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풍자 산문 <코이너씨 이야기>. 오리를 닮은 코이너씨에 실긋 웃게 된 장면. 코이너씨가 냇물에서 물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물이 들이찼다. 근처에 구조선이 있나 둘러보는 사이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 버렸다. 코이너씨는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냅다 물가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희망을 버려야 산다는 싱겁디싱거운 이야기.

비좁은 철창에 갇힌, 한없이 불쌍한 닭과 오리들 이야기는 마음 아프다. 오리알만 한 눈물이 뚝뚝. 그 옛날 청정한 냇물과 마당은 남아 있지도 않다. 허우적거리다 제 힘으로 헤엄을 치게 된 선각자들도 매우 드물다. 이 총체적 난국의 세계에다 둔 희망을 버릴 때 비로소 모두가 살길이 열리지 않을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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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머니 무릎에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우리. “할마니. 옛날 얘기 하나만 해 주라이. 으응?… 무서운 도깨비 얘기 말고 재밌는 거.” “나는 슬픈 이야기가 젤 좋드라. 꽃이랑 뻐꾹새 이야기….” 임철우의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에 나오는 춘례 누나. 턱을 괴고 할머니를 조르는 말. 부채를 부쳐주며 들려주시던 전설 따라 삼천리. 냉장고에서 막 꺼낸 수박 맛, 구수한 보리 미숫가루 맛 같은 달달하고 시원한 이야기들. 엄마들은 자기는 더워도 땀띠가 난 아이들을 향해 쉬지 않고 부채질을 했다. 부채 바람들이 모이고 모여 가을바람이 되었지.

초등학교, 옛날엔 국민학교. 그때 처음 집에 냉장고가 생겼다. 어머니는 날마다 미숫가루를 풀어 냉동실에 얼리고 그걸 교회 일보는 분들에게 열심히 날랐다. 그러면서 한 알씩 살짝 내게 집어주셨는데 그게 얼마나 달고 맛났는지 몰라. 집집마다 냉장고가 생겨나고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각자들 살림하는 재미가 생겨났다. 이웃끼리 함께 먹고 마시던 일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대나무로 짠 평상에 드러누워 보았던 달구경 별구경도 줄어들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생긴 뒤부터 누구든 한번 집에 들어가면 얼굴보기가 귀했다. 외로운 천국에서 냉방병을 앓고 사는 현대인들은 날로 늘어만 갔다.

영화 <장군의 아들>은 재밌었는데, 요즘 장안의 화제 ‘장군의 집안’ 이야기는 속상하고 끔찍해라. 그분들 개신교 장로와 권사라던가. 대형식당도 아닌 가정집에서 무슨 냉장고를 아홉 대씩이나 굴리며 살아. 음식이 썩어 버려지는데도 나누지 않았단다. 냉장고도 부끄러워 숨고 싶었을 게야. 하필 그런 집에 팔려 들어가 썩어가는 음식물을 바득바득 쟁이면서 속고생 맘고생 했을 생각하면 쯧쯧. 냉장고는 잠깐 신선하게 보관할 때 쓰는 물건이지 썩을 때까지 쟁여두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렷다. 아래마당 팽나무 그늘에서 동네 동무들과 둘러앉아 먹었던 엄마표 수박화채. 가난한 친구 집에 놀러 가도 군납 건빵, 하다못해 심심한 오이라도 나눠 먹으라 내놓는 나눔의 잔치였지. 냉장고에서 노랗고 파란 ‘아이스께끼’를 꺼내 안겨주는 날엔 그 집에 양자로 들어가 살고 싶었을 정도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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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를 들으며 거닐었던 런던을 떠나 지금은 내 집 내 골목. 폭염주의보를 알리는 새벽 문자는 간신히 잠든 새벽잠을 폭망하게 만드네. 낮에는 갑자기 비구름이 달려들어 낙뢰가 치고, 깜박 졸던 나를 깨우던 무서운 물리 선생님. 피뢰침이 있던 교회에 얹혀 살 때는 두꺼비집이 여간해선 내려가지 않았는데, 마을 속 한데 섞여 살게 된 이 집은 약한 벼락에도 걸핏하면 차단기가 내려간다. 집을 비우고 타지에 머물 땐 든든히 장만한 김치와 간고등어를 못 먹고 버리기도 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왜 냉장고가 받는 걸까. 벼락이 치면 개들도 깜짝 놀라 칭얼거린다. 컹컹대고 짖는 하늘을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보위가 쓴 노래 ‘모든 멋진 놈들(All the young Dudes)’이란 노래도 벼락만큼 큰 소리로 세상에 울려 퍼졌다. “형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를 듣고서 집에 왔다네. 하지만 나는 그런 혁명에 빠져들 수는 없었다네. 유들유들하고 거추장스러워. 지루한 것은 딱 질색이야. 깨부숴야 할 이 세상이 콘크리트인지 내 머릿속이 콘크리트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는걸.” 이런 노랠 듣고 자란다면 벼락 따위 무서운 소리도 아니겠다.

수평으로 이동하며 살던 사람이 수직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 벼락이 치는 순간 아마도 그런 생각이 번쩍 든 것은 아닐까. 인류는 농사법과 가축, 발효 음식을 얻게 되자 유목 생활을 접게 된다. 문화철학자 토마스 마호는 인간이 근원에 대한 공간적 생각 대신 수직적 사고를 하게 되자 이성의 존재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내가 누구로부터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났는지. 여권이나 각종 증명서에 지금도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하고, 그걸 인간의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간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나 고민하다가 어머니 자궁을 점토로 빚기도 하고, 예수처럼 신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고요는 좋으나 늘 고요하면 나태하고 머무르게만 된다. 나른한 날들을 깨우는 벼락에게 우리 심심한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을까. 무섭게 밀치고 후비다가도 어느덧 단비를 몰고 오는 사랑스러운 밀어. 때론 그 속에 날벼락 같은 슬픈 소식이 살짝 끼어 있기도 해. 정말 그런 일들은 그대 인생에선 멀찌감치 비켜가기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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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 중에 노름꾼, 사기꾼보다 ‘쎈 것’이 낚시꾼이다.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낚싯대를 부여잡고 바다나 강물을 꼬나보는 뙤약볕의 선수들. 좋으니까 그러고 있는 것이겠다. 청록의 시인 박두진은 ‘7월의 편지’에서 “바람, 바다가 밀려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빛 냄새의 절규. 7월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의 조국의 포옹. 7월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그래 바다에 서면 냄새가 다른 것이다. 그것도 특별한 7월의 바다, 소금 냄새는 마치 길고도 진한 축제처럼 쿵쾅거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물고기들 어룽대는 소리, 쿨렁쿨렁 아가미로 숨 쉬는 소리. 도마에 생선과 야채들이 놓인 해변의 집들. 깨지고 부서진 골목 계단과 큰바람에 살짝 넘어간 교회당 십자가에 앉아 똥을 싸는 갈매기들. 세족식을 하듯 짠물에 전 장화를 씻는 어부들. 어둑한 촉수 불빛 아래서 소주를 나눠 마시는 ‘깨복쟁이’ 동무들. 통발에 잡히는 게 물고기들만이 아닌 게다. 오래 묵은 이야기들의 성찬. 텃새처럼 내려앉아 물고기를 낚던 낚시꾼이 보따리를 싸서 일어날 때는 정말 ‘중대 결심’을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다. 무덤조차도 영원히 머물 곳은 이 지상에 없는 법이다.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밑밥 통만 들고 일어서는 어깨도 슬프거나 처지지 않는 것은 낚시꾼에게는 오직 내일이 또 있겠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되겠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또 있으니 낙담하지 말라. 낮고 외롭고 슬픈 이름들이여. 오늘 잡지 못한 물고기는 내일 잡으면 되는 것이다. 서늘한 물살로 올라오는 물고기들은 언제나 내일이라는 깊은 물속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어부가 던져놓은 통그물에 부모를 잃은 어린 물고기들, 밤새껏 울어서 강물도 바닷물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물이 마르지만 않으면 물고기가 산다.

낚시꾼이 지나간 빈자리에 남은 노을 한 조각. 하늘 바다도 보고 싶어라. 문득 동해나 남해, 서해 어디든 훌쩍 다녀오고 싶다. 낚시꾼도 만나보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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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아저씨가 만들었다고 해서 빅벤이라 불린다는 시계탑. 영화 <런던 시계탑 아래서 사랑을 찾을 확률>에선 이 빅벤 시계탑이 연인들의 약속장소로 등장한다. 우연히 기차에서 얻게 된 책 한 권이 빚어낸 좌충우돌 연애소동극. 연애를 하고 싶다면 책부터 손에 쥐라는 조언의 말씀. 그러고 보면 영화 <노팅힐>에도 책방이 등장한다. ‘더 트래블 북’이라는 책방은 영영 없어져 시간여행에서나 방문이 가능하겠다. 누군가 새로 창업해도 될 법한데 종이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 전자책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는 흐름이다. 빅벤 시계탑도 언젠가 전자시계로 바뀌게 되는 건 아닐까. 째깍째깍 돌아가던 시계가 아니라 번쩍하면서 시간만 보여주는 밋밋하고 매력 없는 시계로 말이다.

며칠 전에는 템스강 남쪽 그리니치 마을을 방문했다. 시간과 시계의 성지. 세상의 모든 시계들이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 돌아가고 우리는 그 시간에 따라 인생을 살고 있음이렷다. 인류에게 있어 시간은 ‘깊게 신뢰하는 서로 간의 약속’이다. 약속은 우리를 무질서에서 구해주는 손길이렷다. 약속의 손을 잡을 때만 우리는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무리들을 우리는 지난 시절 내내 목도했었다.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의 물꼬를 뒤로 파놓고 과거의 어둠 속에다 온 국민들을 밀어뜨렸던 자들. 뻔뻔하고 요망스러운 그들을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해야 하리라. 차별과 분리의 복면을 쓴 무리들이 관용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풍경. 테러는 한순간이지만 차별과 분리는 오래오래 다수를 죽음으로 내모는 더 끔찍한 악행이다. 최근 영국은 브렉시트라는 분리와 독단의 먹구름을 유럽 하늘에 드리우고 말았다. 놀이공원의 풍선이 아니라 뇌성벼락을 동반한 진짜 구름이라서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 어떤 가르침, 어떤 책이 우릴 다시 사랑으로 인도할까. 시계탑은 희망의 시간을 가리키고, 우리는 그 아래서 사랑의 입맞춤을 나누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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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는데 섬나라 하와이안. 기본으로 다섯 가지를 잘했다. 항구도시에서 태어났으니 일단 수영 짱. 헤엄뿐만 아니라 파도타기 서핑 실력도 수준급. 나도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기본 수영은 할 줄 알지만 큰 파도는 겁부터 난다. 그는 파도에 뒹굴다 정강이가 부러진 뒤에도 바다를 향해 냉큼 달려간 간덩이 부은 사내였다. 하와이 악기 우쿨렐레를 기본으로 연주할 줄 알았는데 노래는 음치. 우쿨렐레 기타를 들고서 히어 컴즈 더 선, 오브라디 오브라다, 비틀스의 노랠 같이 불렀다. 비틀스 노래는 세상 어디를 가도 먹히고 통하는 법이니까 음치여도 상관없지.

그 친구는 항상 해피 투게더, 해피해피 그랬다. 너무 해피해서 내가 다 피해피해 도망다닐 정도.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도 시종 밝고 환한 해바라기 표정이었다. 입만 열면 갈매기처럼 깔깔거렸다. 남 흉보는 거 빼곤 말수가 대체로 적은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없고 재수도 없다. 까불고 떠들고 깔깔대는 사람이 난 좋다. 축 처진 우울한 사람을 만나면 덩달아 늘어지게 된다. 피가 끓는 사람들은 음울할 시간이 없다. 그는 요리를 좋아하고 잘했다. 왜냐고 물으면 딱 한마디. “사랑하니까.” ‘미친, 밥하는 아줌마들’이 누구는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사랑과 존중 없이 우리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와 나는 메일 몇 통 이후 연락 없이 오래 잊고 지냈다. 여기서 다섯째, 우린 각자가 제일 잘하는 순례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난 이 편지를 띄운 뒤 리버풀로 가는 기차를 타러 유스턴 역에 가야 한다. 그 친구가 평생 가보고 싶다던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 보고 있냐? 형아가 먼저 간다. 영국 노동자들의 심장 같은 항구도시. 옛날엔 무시무시한 노예시장. 고향을 떠나 비틀스는 자유와 평화로 세상을 물들이며 멋진 여행을 즐겼다. 먼저 간 존과 조지는 은하수에서 자유형 접형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비틀스를 들으면서 폭염조차 즐겼으면…. 기본은 하는 아이들, 명랑하고 창조적인 친구들이 세상에 많아지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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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에다가 맥주로 날밤을 까던 청춘은 어느덧 중장년. 요새 젊은이들은 피맥, 피자와 맥주 궁합을 즐긴댄다. 그렇다면 할배 할매들은 김맥. 김치전에 맥주도 먹어보면 정이 들게야. “질목(길목)마다 생기는 거시 치킨 집이오. 지름에 튀게만 가꼬 나오는 음석(음식)에 뭔 정성이 있겄으요마는… 정성으로 해디릴라믄 요 찝개벌거지(집게벌레) 같은 걸로 괴기를 건질 때부터 맴가짐을 다르게 쓰야재라. 똥집이라도 하나 더 넣어드릴라고 해야재라. 뭔일이든 손해날 작정을 하고서래도 맴을 쏟아야 쓰는 뱁이재라.” 시골동네 ‘시장 통닭’ 주인장 말씀.

나는 중동 사막을 건너 맥주 천국 유럽땅으로 건너왔다. 이곳 친구들과 치맥이나 피맥 약속들을 잡아두었다. 치킨 피자가 고마운 것은 찢고 뜯어서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뭐든 나눠 먹어야 즐겁고 맛나다.

“다들 묵묵히 잘 먹었다. 어쨌든 엄마의 닭요리는 맛있었으니까. 빈센트 아저씨가 인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앙토냉 삼촌은 참았던 말을 터뜨렸다. ‘형은 저 빈센트란 양반이 남부에서 어디에 살았는지 알아? 미치광이들 소굴에 살았어, 저 화가라는 작자. 미친놈이야. 정신병원에도 있었다고. 조심해야 해.’ 하지만 빈센트 아저씨는 미친 사람이 아니란 건 내가 더 잘 안다.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인 건 맞지만 미친 사람은 아니다.” 오베르의 하숙집 딸 아들린 라부의 7월8일 일기. 소설가 마리 셀리에가 쓴 <고흐와 함께한 마지막 여름>의 한 장면. 친구가 없었던 빈센트 아저씨. 맥주 대신 그래서 압생트 독주에 취했던 모양이다. 맥주 한 잔도 없이 어떻게 닭고기를 먹었나. 불쌍한 빈센트 아저씨.

와인은 가톨릭, 맥주는 개신교, 커피와 물담배는 이슬람. 나는 내 종교자리에 충실한 까닭으로 차가운 맥주를 사랑한다. 젊은 친구들과 치킨이나 피자 한 판 시켜놓고 싶은 날. 그러나 불쌍한 고흐처럼 하숙집에 앉아 시장 통닭을 그리워한다. 이곳도 연일 덥다. 맥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을 것이다. 노천카페마다 얼마나 또 많은 얘기들이 파도치고 있을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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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면 마구간이 있다. 육지 동네엔 외양간이 있고. 그곳엔 통나무를 파서 먹이를 놓는 구유가 있다. 말밥그릇 소밥그릇. 큼지막해서 어린 아기를 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아기의 첫 침상이 되어준 구유. 나사렛 시골뜨기 부부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다가 산기를 느껴 마구간에서 몸을 풀었고, 아기를 말구유에 뉘었다고 한다. 고갯마루 동네 이름은 베들레헴.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땅. 이스라엘군이 지키는 높게 쌓은 장벽을 통과해야 한다. 라마단 기간이라 가게마다 문을 닫고 무슬림 사원만 인산인해. 해가 뜬 낮에는 금식, 해 떨어진 밤에는 폭식. 베들레헴에는 기독교인보다 무슬림이 더 많다. 이곳 촌락에서 며칠 짐을 풀었다.

엊그제 갈릴리 호숫가에 머물 때도 그랬지만 낡고 헤진 침대. 어느 가난한 여행자가 묵었을 방에 나도 몸을 뉘었다. 속옷을 빨아 햇살에 말리고 쓰디쓴 커피로 역한 냄새를 내몰았다. 건너편 이층집, 아랫니와 윗니로 검정 핀을 벌려 여자아이의 머리를 땋아주는 엄마. 또래로 보이는 소녀를 예수탄생성당 안뜰에서 만났다.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더니 손에 한가득 꽃을 내밀었다. 목동들이 누워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을 성당 뜰에는 양떼 목장도 아닌데 풀꽃들이 가득했다. “몇 살이니? 이름이 뭐니?”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들 중 여섯이 별나라로 사라졌네. 눈앞에서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구타당했네. 그들에게 피는 메달이고 학살은 영웅적 행동이지. 신이시여! 이곳이 정녕 당신이 만든 세상 맞나요.” 칠레의 전설적인 가수 빅토르 하라의 노래 ‘칠레 경기장.’ 베들레헴의 아이들도 숱하게 학살당했다. 이 경기장, 저 사원, 집단학살의 총탄 자국이 가득하다. 예수 때부터 지금껏. 아이들은 구유에서 태어나 낡은 침대에 버려졌을 것이다. 망아지와 송아지와 강아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의 아이들. 넉넉히 밥을 먹고 편안한 잠자리를 누려야 할 아이들. 가난한 시골집 구유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해진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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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중독. 또다시 사막에 와 있다. “광야 사막에서부터 레바논까지, 유프라테스 강줄기와 서해까지.” 성서 구절에 기록된 요르단 사막. 세례요한의 목이 떨어지고 예수가 유랑하다가 세례를 받은 땅.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보았던 광대한 사막. 

오늘은 수도 암만의 외곽, 모래바람이 들이닥친 한적한 골목에 우두커니 서 있다. 코란을 독경하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 들려온다. 잠깐 눈을 감으며 그들의 신앙에도 예를 갖춘다. 보이는 곳마다 사막. 음식마다 가는 모래가 씹히고 양떼는 초원을 찾아 분주히 이동 중이다. 

짐을 가득 실은 베두인의 차가 사막을 건너기도 한다. 행여 모래 웅덩이에 빠지면 자동차 바퀴의 공기를 빼야 한다. 사막에선 아집, 교만을 버려야 살 수 있다. 허장성세, 외형을 부풀리는 일에 열중하는 현대인들. 한 움큼씩 바람을 빼라는 사막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골마을에서 낙타를 한 마리 빌렸다. 힘센 수낙타는 나를 태우고 모래둔덕을 가뿐히 넘어갔다. 사람에게 어깃장 부리고 소홀히 다루는 낙타에겐 엄청난 무게의 짐짝을 싣게 만든단다. 유순하고 순종적인 낙타에게만 사람을 태울 안장을 씌운다. 아무 낙타나 사람과 호흡하며 사막을 건너는 게 아니다. 사람도 물론이다. 자기 생각만 앞세우고 후회도 뭣도 없는, 드세고 사나운 이들과는 인생을 같이할 수 없음이렷다.

사막 여행자는 낙타 젖을 짜서 먹고 낙타 똥을 그러모아 불을 피운다. 길을 잃고 헤맬 때면 낙타를 잡아먹기도 하고 낙타 털가죽으로 추위를 피한다. 낙타는 사막 여행자의 모든 준비물이다. 낙타와 나는 사막을 돌다가 오아시스 마을로 돌아왔다. 샘이 있는 오아시스 시골마을엔 새들과 도마뱀, 단봉낙타와 쌍봉낙타, 사륜구동 자동차, 목마른 여행자들도 다 같이 머무른다.

로렌스처럼 베두인 복장을 해보고 유목민의 빵 쿱즈와 까흐와(커피)를 마신다. 슈크란, 슈크란(고마워요). 수없이 슈크란을 입에 달며 모랫길을 걷는 날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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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대도시. 어디에나 공항이 있다. 내가 사는 담양에도 승용차로 삼십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광주공항이 있다. 오지 가운데 오지인 남미 아마존을 갈 때도 공항이 밀림 숲속에 뎅그러니 놓여 있더군. 때마침 공항 앞마당에서 연주하는 악사가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 오보에’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순간 정지화면이 되고 말았다.

피아노 소리가 구슬픈 영화 <러브레터>의 홋카이도를 가는 길, 눈보라를 뚫고 비행기가 간신히 착륙했다. 그쪽으로 가지 않아도 눈이 펑펑 쏟아질 우리네 북녘 땅이 많이 보고팠었다.

농사를 지어놓고 열매는 친구들에게 따먹으라 하고 나선 순례길. 삽은 안타깝게도 여행에는 쓸모가 그다지 없다. 삽 대신 책을 손에 들고 나선 길엔 봄꽃들 지고 여름꽃이 만발이구나. 어느덧 반팔 차림에 샌들 신발은 가뿐해라. 진달래는 모두 지고 민주와 통일을 외치는 시민들 손에 든 촛불만이 근근하다. 까맣게 저물거나 꺼트리지 말아야 할 꽃이렷다.

전쟁으로 끊긴 북쪽으로 난 하늘길 땅길. 이렇게 좋은 봄날 왜 우리는 동포의 가슴에다 총구를 겨눴을까. 아직껏 오도가도 못한 채 금지선을 긋고 살아가는 걸까. 세상의 모든 공항은 마음조차 가까운데 유독 평양 순안공항은 멀기만 하다. 노예 사슬을 어서 끊고 덥석 만나야 한다.

먼저 곳간을 활짝 열어 일자리를 북쪽 노동자들에게도 안겨주어야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에도 같이 손잡고 입장해야지 않겠는가. 농번기 끝낸 우리 농부들, 삽을 놓고 육로나 비행기로 금강산 관광, 개성 관광, 내친김에 평양 관광, 즐길 날도 빨리 와야 하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게 바로 죄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이 맞아주지 않았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예언자 에스겔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낱낱이 그간의 죄목을 까발렸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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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남도청 앞, 오월광장엔 150살 먹은 회화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연노랑 나비를 닮은 꽃을 피운다. 오월 그날 시민군은 그 나무 아래 참호를 파고 무자비한 공수부대와 맞섰다. 귀신을 몰아낸다는 나무. 군부독재 귀신을 몰아내려고 그랬던가. 나무는 총을 대신 맞으면서 시민들을 보호했다. 광주가 절대공동체였던 그 순간, 나무까지도 한 덩어리 한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매정한 세월이 흐르고 시민들은 회화나무를 잠시 잊었다. 문화전당을 짓는다며 뿌리를 건드리고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씌워 괴로움을 안겼다. 세찬 돌풍이 불던 날 나무는 그만 쓰러져 최후를 맞고 말았다. 회화나무가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제야 시민들은 가슴을 치며 위령제를 모시면서 슬퍼하였다. 적당한 후계목을 하나 구해 곁에다 심어주자는 의견들이 돌았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승합차량 운전으로 밥벌이를 하던 한 시민이 있었다. 가끔 오월광장 앞에다 차를 대고 손님을 기다리곤 했는데, 회화나무 곁에 솟아난 손가락만 한 후계묘목을 보고는 한번 길러보고 싶었다. 한 뼘도 안되는 그걸 집에 가져다가 정성을 다해 돌봤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엄마 나무가 죽고 후계목을 찾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시민은 주저하지 않고 “여기 아기 나무가 살아 있습니다!” 손을 들었다. 엄마 나무랑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백 프로 일치했다. 아기 회화나무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엄마 무덤 곁으로 돌아왔다.

아기 나무는 엄마를 대신해 오월광장을 지키고자 마음을 굳게 먹었다. 빗물도 잘 받아먹고 햇볕도 잘 쬐고, 민주시민들의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바로 옆구리 건물에 내가 관장으로 있는 대안공간 메이홀과 2관 이매진이 있다. 광주 나가는 길이면 한 번씩 회화나무 곁을 일부러라도 찾아가고는 한다. 매연과 소음에 시달려 기운이 없어 보이면 손을 꼭 쥐고 기도를 해주기도 한다. 아기 나무가 다 자라서 너른 그늘을 드리우는 날, 연노랑 나비들이 훨훨 하늘을 날게 될 터이다. 고운 영혼들이 그렇게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올 것을 나는 믿고 기다린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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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는 임진강, 남에는 백진강이 있었다. 영산강을 옛 담양 사람들은 ‘백진강’이라 불렀단다. 달밤에 보면 하얀 용이 흘러가는 형상이라 하여 백진강. 지금은 조그만 천변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제법 강폭이 넓고 큰 바위들이 부려 있으니 겉으로 보아서도 웅장한 강줄기였을 것이다. 강은 자주 범람했고 홍수피해가 막대했다. 원님은 팽나무, 음나무, 은단풍나무, 푸조나무 등을 강둑길에 가득 심게 했다. 이걸 관에서 주도했다하여 ‘관방제림’이라 하였다. 관이 마땅히 해야 할 일, 나라가 할 일을 제대로 할 때 두고두고 그 공적은 빛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둑길을 따라 올라가면 용이 승천했다는 ‘가마골’이 나온다. 용소 주변 바위들이 쩍쩍 갈라져 있는데 용이 승천하면서 낸 자국들이란다. 영산강은 이곳이 시원지이고 굽이굽이 흘러가서 남해바다에 이르게 된다. 4대강 개발로 숨이 탁 막혔던 영산강. 다만 흉내, 시늉이라도 원상회복의 길을 텄다니 불행 중 다행이다.

백진강에는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고 오랜 날을 이무기로 살았던 구렁이 복녀 전설이 남아 있다. 백진강 북천에 살던 구렁이 두 마리는 부부였는데 남편은 용이 되어 승천하고 뒤따르던 아내는 부정을 타서 그만 이무기가 되고 말았다. 다시 용이 되려면 인간으로 둔갑해 사내와 정을 나누어야 했다. 이무기는 봉물장수로 변장하여 동정자마을 효자 바우에게 찾아갔다. 자신이 남장을 한 복녀라고 밝히고, 둘은 신방을 차렸다. 바우와 복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겨울과 봄을 같이 살았다. 바우가 물난리 걱정을 하자 복녀는 금은보화를 쥐여주며 나중에 원님에게 바쳐 북천에 큰 둑을 세우고 나무도 많이 심으라 하였다. 이무기는 착한 바우의 혼을 결국 훔치지 못하고 차가운 강물로 돌아갔다. 바우는 복녀가 보고 싶어 같이 덮던 하얀 이불을 들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소설가 설재록은 <백진강 전설>에서 감동적인 마무리를 들려준다. “바우는 잡고 있던 이불을 물줄기 위에 펼쳐 놓았다. 이불이 너울거리며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불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며 꿈틀거렸다. 바우의 눈에는 그 이불이 하얀 용처럼 보였다. 비로소 바우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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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김 없는 명품 원피스와 손톱마다 아기자기한 네일아트가 멋들어진 여인들. 자극적인 향수와 너풀거리는 넥타이의 젊은 신사들로 넘쳐나는 세상 같지만 그건 대개 드라마 속 풍경이렷다.

“지금 대한민국에 그 정도 경제력을 갖춘 30대는 극히 일부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식당과 카페에서 음식을 나르고, 남의 손톱을 정리하고, 마트와 백화점에서 물건을 파는 엄마들이 더 많다. 딸이 태어난 후 김지영씨는 또래의 일하는 여성들과 마주칠 때면 아이가 있을까, 몇 살일까, 누구에게 맡겼을까 궁금해졌다. 경기 불황, 높은 물가, 열악한 노동현장….” 소설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드라마, 소설 속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오늘도 우리는 점심시간 잠깐 들르는 커피 가게에서,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각종 알바로 분주하게 일하는 지영씨와 스치며 마주하게 된다.

가끔 길에서 군입거리 사러 가시는 촌로들을 뵙곤 하는데 그분들 사는 처지라고 별다르지 않다. 이런 외지에서 자녀들이 잘되면 또 얼마나 잘되어 풍풍 용돈을 쥐여드리겠는가. 어찌 지내시느냐 여쭈면 백이면 백 “안죽응께 살재 어쭈 살긴 살겄소잉. 포로시 밥숟가락이나 떠묵고 살재.” 포로시를 이곳에서도 포도시, 포돕시로 달리 쓰기도 하는데 ‘빠듯하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빠듯이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불행하고 서글픈 시간 속의 나라.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능력 가운데 일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병세를 평가하는 것은 환자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의사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아이티 섬마을에 병원을 차린 의사 폴 파머의 말. 가장 시급한 환부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다. 아이티에선 ‘동반자’를 가리켜 ‘아꼼빠니에또(accompagnatuer)’라고 부른다. 환자가 그만두라 할 때까지 의료진은 동반자가 되어 함께 걸어가야지. 포로시 빠듯이 살아가게 만드는 ‘경기 불황, 높은 물가, 열악한 노동현장’. 솔선해서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아꼼빠니에또가 많아져야 우리네 일자리 살림살이에도 꽃이 피겠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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