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206건

  1. 2017.12.07 늑대가 우는 겨울밤
  2. 2017.11.30 시인의 사랑
  3. 2017.11.23 별이야! 눈이야!
  4. 2017.11.16 하나님
  5. 2017.11.09 치통 불통
  6. 2017.11.02 폴라로이드 즉석 사진기
  7. 2017.10.26 삼십육계
  8. 2017.10.19 치유하는 약
  9. 2017.10.12 불바다 불산
  10. 2017.09.28 백조의 호수 빵집
  11. 2017.09.21 재방송
  12. 2017.09.14 분홍 스웨터 구름과 별
  13. 2017.09.07 에코백 천가방
  14. 2017.08.31 흙집에 흙 얼굴
  15. 2017.08.24 오리알
  16. 2017.08.10 냉장고
  17. 2017.08.03 벼락 치는 날
  18. 2017.07.27 낚시꾼
  19. 2017.07.20 런던 시계탑
  20. 2017.07.14 비틀스 팬

총탄이 숭숭 뚫린 몸을 끌고 판문점을 넘은 인민군 청년을 생각한다. 이름은 오청성, 올해 스물다섯. 반대였다면 이쪽에서도 국군 청년의 등을 향해 총을 쏘아댔겠지.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 국경에선 가끔가다 일어나는 일.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전 세계에 방송을 타지는 않을 것이다. “국경은 없어요. 너의 나라 나의 나라….” 이매진 노래는 그래서 제목조차 ‘상상’일 뿐인가.

 

 

유재영의 소설 <하바롭스크의 밤>에도 비슷한 추격전이 나온다. 러시아 벌목공 탈북자 기라는 청년과 율이라는 청년. 벌목공으로 팔려나간 친구들은 하바롭스크의 폭설과 벌목 현장의 위험을 견디며 살아간다. “남한은 안전하오?” 대답 없는 질문. “늑대의 늪을 가로지를 거요. 같이 갑시다.” 감자를 입에 녹여 먹으면서 아무르강 유역을 걸어 탈출한다. 굶주린 검은 털빛의 늑대떼가 뒤를 쫓고… 곰덫이 그만 왼쪽 발목을 덥석 물었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둘은 동굴처럼 생긴 방공호를 발견한다. 벌목공의 집이었는지 어느 실패한 혁명가의 움막이었는지 모르는 그곳. 철철 피가 흐르는 발목을 도끼로 자른 기는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선다. 방공호에는 엽총과 기의 발목이 달랑 남아 있었다. “이제 형벌은 끝났으니 당신의 삶을 사시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소.”

담양의 밤 또한 하바롭스크의 밤처럼 차갑다. 방공호 같은 집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밤바람 소리가 마치 늑대 우는 소리 같다. 외롭게 살다간 이의 혼이 우는 소리일까.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맡았던 냄새. 독특한 바람 냄새. 건너온 자, 건너간 자들이 남긴 몸 냄새 같다.

김장배추를 다듬던 할매가 그랬다. “배추에서 단내가 나요. 인자 겁나 추울랑갑소.” 늑대처럼 사람도 냄새만 맡아도 알아차리는 게 많다. 자유의 냄새를 맡은 우리는 국경을 넘고 체제를 넘어 더 멀리 도망쳐야지. 총을 쏘든가 말든가. 사람은 죽여도 자유는 죽일 수 없다. 자유를 향한 이 갈망. 더는 분단과 총성이 없는 땅. 탈출다운 탈출을 이제 모두 각오할 때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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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나라 시인들은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자주 서 있었다. 몸이 그곳에 없으면 마음이라도 밤새 세워놓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며 거친 대자보를 이어갔다. 여행하고 사랑하는 일조차 미안한 시절이었다. 눈꽃이 피면 눈꽃 보러 지리산에 가야 한다. 억새가 보고 싶으면 제주도 올레길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시인들. 하루는 비행기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제주도에 다녀왔다. 김종해 시인의 ‘섬 하나’란 시를 펄럭거리면서 말이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섬 하나. 슬픔 때문에 안개가 잦은 내 뱃길 위에 어머니가 부려놓은 섬 하나. 오늘은 벼랑 끝에 노란 원추리 꽃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 집 눈썹 밑에 매달려 있다. 서투른 물질 속에 날은 저무는데 어머니가 빌려주신 남빛 바다. 이젠 저 섬으로 내가 가야 할 때다.” 남빛 바다는 내가 없는데도 오래도록 잘 있어주었구나. 어느 날 캄캄한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시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였다. 장소는 제주도. 원추리 꽃과 유채꽃이 노랗게 일렁거리는 남빛 바다가 눈앞에 수두룩했다.

“삶의 아름다움과 비애가 동시에 내재된 시어를 사용했다면 더 깊은 울림이 가능했을 것 같네요.” 곶자왈 시동인 턱주가리 샘의 조언에 끙끙 앓던 시인. 월수 30만원의 방과후 학교 글짓기 교사 현택기 시인.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가난한 동네 청년을 사랑하게 된 시인. “세상에서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뭐가 필요한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건 한 사람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줄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 망가지지 않아.” 위태롭던 감정도 사랑도 파도에 쓸려가듯 떠나가고, 똑같은 일상에 팽개쳐진 시인은 그래도 또박또박 ‘희망’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내려간다. 시인은 결국 시로써 구원을 입는 존재.

제주도 밤바다는 언제보아도 좋더라. 조선에선 북두칠성과 삼태성, 또 문창성. 서양에서는 한 덩어리로 큰곰자리 별하늘. 옛 선비들과 시인들은 급제하려고 문창성을 찾아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단다. 좋은 시가 점지된다면 무슨 일을 못할까. 오래된 떡갈나무가 서 있는 풍경처럼 하늘엔 별들이, 땅에는 시인들이 살아주었으면 바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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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들의 마을엔 벌써 첫눈이 내렸단다. 추운 날 가만 온돌방에 붙어 있으며 소설가 이경자가 쓴 <시인 신경림>을 읽었다. 시인이 함께했던 어린이 잡지 ‘별나라’ 첫 장에 쓰여 있다는 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잘살고, 그 아들딸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 그런 세상이 별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되길 나도 빌었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 사막과 초원까지 가서 찾던 별이 보인다. 종로 을지로 그리고 서울을 온통 뒤덮은 뜨거운 숨결 속에 별이 보인다. (중략) 너무 어두워 서울 하늘에서는 사라진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보인다. 눈비도 아랑곳없이 늦도록 흩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촛불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신경림, 별이 보인다.) 촛불 혁명 내내 도심에 뜬 별들. 하늘은 눈구름으로 캄캄해지고 송이눈이 함지박으로 내리는 날에도 기상관측 사상 최초(?)로 광장에 별이 내려앉은 순간들을 우리는 목격했다. 때가 차면 때가 됐다고, 열일 제치고 말했던 우리들.

이건 레몽 크노의 시집 <만돌린을 든 개>에 나오는 구절이다. “눈이 올 땐 눈이 온다고, 열일 제치고 말해야 한다.” 별이 눈부시거나 눈이 내리는 순간,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다 같이 “별이야! 눈이야!” 소리친다면 우리 인생이 배나 아름답고 소중해질 거 같다. 여행을 할 때 비행기가 공중에 뜨면 꼬마 친구들은 일제히 박수를 친다. 천진무구 기쁨에 찬 탄성을 잃어버린, 굳고 말라버린 시무룩한 어른들. “돈이야! 내 거야!” 밤낮 없는 아귀다툼 속에 쪼그라들고 비틀어진 인생들.

별처럼 나뭇가지에 높이 떴던 감을 따다가 쟁여놓고 보니 얌전히 홍시가 되고 곶감이 되었구나. 단단하고 떫던 감도 시간이 흐르면 물렁물렁하고 달달해진다. 우리 인생도 세월 따라 물렁하고 달콤해져야지. 돈이야! 내 거야! 소리치고 다니지 말고 별이야! 눈이야! 소리치며 살아야지. 작년엔 모진 추위에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 연말엔 안도하는 탄성을 내지를 수 있길. 촛불 정권은 오로지 국민만 보고 적폐청산 고삐를 세게 당겨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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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두 분. 한 분은 별로 말이 없으신 분. 아무리 뒷방 어르신이어도 아버지는 아버지. 다른 한 분은 대형교회를 세습한 어떤 아들 목사. 자라면서 하나님으로 불렸다니 어째 거시기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으나 도통 세상에선 관심이 없었는데, 제대로 홈런 한 방에다 관심 팍! 주위의 염려하는 목소리에 눈귀를 닫아걸고, 오로지 자기들 무리에서만 아멘 제창이구나.

우리 동네 교회 두어 곳. 목사 자녀에게 물려줄 거라곤 교인들보다 가난했을 기억과 감나무뿐인 작은 교회. 손때 묻은 의자와 기도 냄새가 좋아라. 한번은 젊은 목사가 나를 찾아와 전도를 감행. 장차 믿어보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흙구덩이 촌구석에서 자연에 의지하여 지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과일값이나 하시라고 헌금도 했지. 교회 바깥에 이름 없는 교회와 목사들이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학자 서남동 선생 말씀처럼, 예수는 한국에 와서 ‘만적 임꺽정 박장각 갈처사 장길산 홍경래 전봉준 묘청 사명당 수운 만해 장일담 전태일 윤상원 박종철…’ 혁명적 반항아들의 족보 속에 있으면 있었지 목사들의 족보 따위엔 안 계신다.

수도자 ‘토마스 머턴’은 <명상의 씨>에서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신비 생활(신앙 생활)에서 가장 나쁜 환상은 그대를 그대 마음속에다 가두어 놓고, 순수한 집념과 의지력만으로 밖에서 오는 모든 실재는 봉쇄해 버리고, 그대의 마음을 신념만으로 꽉 채우고, 바깥 세계와 이웃 사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자라목처럼 움츠림으로서 주님을 찾아보려 드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짓을 하려던 사람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목사는 길 위에 있는 순례자다. 목사의 가족조차도 보헤미아 집시들처럼 움직이는 ‘가족 순례단’이다. 장로가 촌장이라면 목사는 잠시 머무는 성경교사. “한 장의 잎사귀처럼 걸어 다니라. 당신이 언제라도 떨어져 내릴 수 있음을 기억하라. 자신의 시간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 순례자 시인 나오미 쉬하브 니예의 고언을 새겨보는 시간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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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불통이라고도 한다. 소통 반대 불통과는 다른 말. 풍선 불통이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풍경. 에베레스트 고산이 있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풍선을 닮은 구름이 떠다니고 아이들이 놓친 풍선도 더불어 날아다닌다. 아기 원숭이는 풍선을 쥐어보려고 보리수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엄마에게 혼이 났다. 바람의 말이라는 뜻의 오색 깃발 ‘룽다’가 펄럭이는 나무. 아기 원숭이는 애먼 룽다를 한 번 손바닥으로 쳐보고는 엄마 품으로 쏘옥. 불통이랑은 다른 치통. 길 떠나는 날부터 잇몸이 욱신욱신 아팠다. 치통약을 한 알 삼키고서 집에 돌아갈 날을 세보았다. 여행하면서 어디 몸 한구석 문제가 생기면 고약해진다. 하늘에 별을 보고 빌었다. 잠깐 사랑니 앓듯 스윽 지나가기를….

다이 시지에가 쓴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라는 소설엔 치통 이야기가 배를 쥐게 만든다. 모주석의 문화대혁명 때 치과의사 아들인 뤄는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상재교육을 받으러 시골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촌장의 교활한 감시를 당하는데, 치통에 시달리는 촌장을 치료하는 대목은 ‘웃프다’. 집에서 보고 배운 게 있을 거라 믿고 아픈 치아를 내맡기는 촌장. 치아를 쪼는 바늘은 재봉틀로 결정했다. 발로 구르는 재봉틀에 촌장을 눕히고 재봉틀 바늘을 이용해 이빨을 쪼아대고 갈아낸다는 해프닝. 그렇게 촌장에게 복수하는 뤄의 야릇한 후기는 이렇다. “촌장은 굵은 밧줄로 침대에 묶였을 뿐 아니라 영화의 고문 장면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로 재봉사의 강철 같은 손에 덜미를 잡혀 꼼짝 못했다. 촌장은 입의 양쪽 아귀로 거품을 뿜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숨을 쉬면서 신음을 토했다.” 아무리 아파도 이 구절 앞에선 치통이 거짓말처럼 싹 걷힌다. 아프단 말조차 꺼내지 말아야지.

수많은 통증. 분단의 통증, 불평등의 통증. 두통 치통, 때마다 생리통.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풍선 불통을 불며 개운한 세상을 꿈꾼다. 진통으로 태어나서 고통 끝에 죽는 인생. 참고 견디며 꿈을 꾸는 이는 복이 있으리니, 그대! 풍선 불통이 되어 훨훨 새처럼 유성처럼 날아오르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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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수확의 계절. 안나푸르나는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그야말로 진정한 가을산행. 나는 지금 넉넉하고 드높은 설산들 곁에 와 있다. 주먹밥 정신으로 뭉친 광주 의사들이 일군 네팔 진료소가 이곳에 있다. 둘러볼 겸 겸사겸사 찾아온 길.고개만 들면 물고기 꼬리 모양의 마차푸차레, 웅장한 안나푸르나 설산, 강가푸르나, 닐기리, 다울라기리, 최고봉 고산들이 일렬로 쭉 펼쳐진 병풍 모양. 두메산골이지만 온 세계 히피 여행자들로 골목은 또 날마다 축제가 된다. 이곳 산촌 친구들을 위해 폴라로이드 즉석 사진기를 한 대 들고 왔다. 꽃담 밖에만 있던 아이들이 깔까르르 웃으며 다가오는 것은 즉석 사진의 위력. 낯을 가리던 아이들도 사진 한 장 찍어달라며 소매를 잡아끈다. 오로지 자신이 주인공인 사진을 가져본 일이 없던 친구들은 횡재를 했다. 저마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라고 축복해주었다.

“사진기 한 번 줘보세요. 아저씨 사진은 내가 찍어 드릴게요.” “아냐. 내 얼굴을 찍은 사진은 엄청 많아. 이건 너희들 찍어주려고 가져온 사진기야.” 사진기를 만져보고 싶어 호시탐탐. 콧물 풍선을 달고 사는 아이 목에다 사진기를 걸어주었더니 모두가 부러워서 입이 벌어진다. 해진 소매 끝엔 땟자국이 거무뎅뎅. 손톱 끝에도 때가 끼어 있지만 한 번 웃을 때면 설산만큼 하얀 이를 드러내는 이곳 아이들이다. 교사이며 작가인 폴 셰퍼드는 이런 말을 남겼지. “말하기 순간부터 사춘기의 출발 지점까지 그 10년은 우리가 노아의 방주에 넣어야 할 모든 것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언제야 서열화된 학교, 사교육과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노아의 방주에 학식만을 집어넣어 가지고는 우리네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아침마다 ‘나마스테’라고 인사한다. 산기슭 벼랑바위에 사는 산양에게도 나마스테, 쥐방울만 한 꼬마들에게도 합장한다. 나마스(경배합니다), 테(당신에게, 당신 안에 사는 신에게) 그래서 나마스테. 즉석 사진기를 들고 만나는 모든 신성한 얼굴들에게 경배하며 인사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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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귀여미’들을 젖 먹여 키우던 엄마 진돗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 인형처럼 생긴 강아지를 한 마리 꼬드겨설랑 툇마루로 가던 차였는데, 엄마개가 나를 뒤에서 악 물었다. 겉으론 새하얀 천사 옷을 걸치고 선량한 표정을 짓던 흰둥이 백구. 개주인 할머니가 이빨자국이 난 발목에다가 된장을 발라주었다. 집에 왔더니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소독용 알코올로 씻어내시곤 “개를 된장 발라야지 너를 된장 발랐구나”그러셨다. 며칠 발목이 퉁퉁 부어 고생하였다. 이후 진돗개라면 삼십육계 도망부터 치게 되었다. ‘전설의 고향’ 전문 출연 귀신처럼 새하얀 소복을 걸친 백구 진돗개. 그때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덥석 안아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법망을 용케 피해 다니는 높으신 양반들의 삼십육계. 무슨 조폭 영화 속의 장면들 같아. “그 인간 아직도 감옥에 안 갔대?” “빵에 들어가도 존 대접 받다가 금방 휠체어 타고 또 나오겄쟁.” 허탈한 표정으로 클클. 고작 나는 개를 피해 도망 다니는 딱하고 못난 신세. 이러려고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났는지 자괴감이 드는구나.

주사가 심한 취객도 개나 마찬가지다. 웃자고 하는 말을 죽자고 덤벼드는 누군가 꼭 술자리에 있다. 하나 마나 한 말씨름 끝에 쌍시옷 욕까지 섞이는 순간은 하루를 망치는 대단원의 막. 두말없이 자리를 피해 도망쳐야 한다. 화장실과 택시는 그대와 나의 구세주. 이제는 나도 삼십육계 나이가 되어 낯설고 험상궂은 얼굴들 죽치고 앉아 있으면 후다닥 내빼고부터 본다. 특히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나선 호위무사들은 가장 드세고 무섭다. 무엇인가를 지켜야지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어리석은 착각이요 맹신이다. 정치도 종교도 사람에 대한 맹신은 적폐의 온상이다. 산천을 두루 돌며 삽십육계를 배우고, 발목이 아닌 모가지를 물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건 비겁함과 사뭇 다른 태도다. 수많은 낙향 선비들, 유배자, 촌장들과 촌뜨기, 여행자들이 삼십육계로 약을 올리며 개들의 힘을 뺀 까닭에 그나마 역사가 굽이굽이 이 자리에까지 고이 흘러왔다. 죽기 살기로 맞대결, 정통일계로만 살다보면 매우 피곤하고 팍팍한 세상에 갇히게끔 되어 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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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다다 탈곡기 소리에 벌떡 깼다. 평야엔 농부들과 볏섬, 참새 떼가 일찍부터 내려앉았고 달과 별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어라. 그 둥글고 크던 얼굴. “모두가 낮잠을 자는 이유구려. 저 둥근 달.” 언젠가 읽었던 하이쿠 한 소절. 풀벌레 소리에 잠 못 들고 환한 달빛에 잠 설치고 부지런한 농부들 땜시 아침잠도 빼앗겼다. 낮잠으로 보충하면 되지 뭐. 꼭 밤에만 자라는 법도 없다. 수도원 규칙이 암만 엄해도 성덕이 깊은 수도원장은 “사람이 먼저다!” 팁을 살짝 뿌린다. “규칙은 사랑 앞에서 허물어뜨리라고 있는 거라네. 그걸 잊어버리면 자네들은 수도원에 있는 기계밖에 더 되겠어.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그 다음에 규칙이네.” 여행과 사랑과 잠의 세월. 그리고 기나긴 단잠, 사후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옥에 계신 그분이 언젠가 잠이 보약이라고 했다지. 보약 맞다. 하지만 건강한 삶을 산 뒤의 단잠이어야 맞다. 북미 원주민들은 ‘자연 모든 곳에 있다’라는 뜻의 ‘음페손’을 약을 칭하는 낱말로 썼다. 그중에 최고는 ‘에그트지 음페손’. 바깥 땅 위에서 약을 구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혼돈과 불안, 슬픈 억눌림, 옹졸한 생각들을 몰아내야만 진정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거다.

약을 한 봉다리씩 입에 물고 사시는 동네 할머니들. 다리가 풀려 그만 넘어져서 다치신 분들도 간간이 보인다. 하체를 튼튼하게 다지려면 자주 걸어야 한다. 누워 버릇하면 영원히 눕는 수가 있다. 잠은 가장 나중에, 마지막 순서다. 눕기 전에 명약을 구해다 달여 먹고, 세상에 두루 약이 되는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

촛불 시민혁명 1주년. 이모저모 국민들은 마음의 상처, 내상이 크고도 깊다. 적폐 청산이야말로 가장 큰 치유이고 명약이 아니겠는가. 축구대표든 태극기 집회 어르신들이든 태극전사 말고는 다시는 이전의 시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난 길. 우리가 모두 살길. 사람이 먼저인 세상.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위해서는 에그트지 음페손을 어서 손에 쥐어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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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마다 붉은 분칠. 담장 넝쿨도 발개져서 멀리서 보면 마치 집이 불난 듯 보여. 북쪽으로 삼십분쯤 가면 내장산 단풍 숲. 예까지 길게 늘어선 단풍나무들은 집성촌에 모여사는 친척들 같아.

여긴 동물원이 아닌 식물원. 기린처럼 목을 길게 늘이 뺀 나무들. 잎들 떨어지면 나무들은 추워 솜눈 이불을 뒤집어쓰겠지. 첫눈이 나리면 세상은 검거나 희거나 모노톤 흑백의 산천. 불바다 불산이 타고 나면 잿가루 같은 눈이 내릴 테고, 단풍잎들 낙엽이 되어 층층 묻히면 어디라도 무덤산.

산불조심 깃발을 앞세운 국유림 관리소 직원들의 홍보 차량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간다. 개들도 알았다고 컹컹. 야옹이도 알았다고 용용. 건조한 날씨에 바람이라도 거칠면 산불이 번질까 덜컥 겁부터 생긴다. 서울도 평양도 해마다 단풍으로 불바다. 단풍 들면 어디나 불바다.

그런 불바다 말고는 무서운 불소식. 불벼락 전쟁놀음도 한심한 소란 소동. 프랑스 투르 지방의 성자 마틴은 그랬다네.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라네. 그러니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없지.” 전쟁과 불화의 십자군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라네.

정의와 평화가 수놓는 폭죽 가을 잎사귀들. 펑펑 터지는 가을밤 유성우. 오줌으로 따발총을 갈기면서 아이들은 이 강산에서 즐거웁게 자라나야지. 불바다 불산 가을단풍도 한 시절이렷다.

우리 인생 눈 깜짝하면 흰 머리칼. 겨울 되면 펭귄만 좋은 일. 펭귄도 겨울 추위가 좋아 극지방에 모인 게 아니라지. 싸우기 싫어 멀리멀리 도망친 거라지. 천적 원수가 없는 곳. 얼음바다 얼음산.

감나무마다 불처럼 번진 붉은 홍시. 별 폭죽 팡팡 터진 홍시에 불새들과 날벌레가 달라붙어 주린 배를 채운다. 산밭에 단감이 제법 많이 열려 일삼아 따야 하는데, 날마다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 새들과 싸우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나나 저나 욕심부리지 않기 때문이네. 새들은 주머니도 창고도 없지. 나도 태풍 없는 풍작, 과하다 싶은 축복에 데면데면 엉거주춤 그러고 있는 중.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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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에 프랑스 사람 무슈 달로와요는 제 살던 동네에 처음 빵집을 열었는데 이제는 전 세계에 빵집이 생겨났다. 이름값을 할라치면 달로 와요 달로 오시랑께요, 달나라까지 뻗어나갈 기세렷다. 이름이 예쁜 빵집엔 시선이 먼저 모아진다. 아이들처럼 빵을 좋아한다. 요샌 무화과 쨈이 제철이고, 봄여름엔 딸기 쨈. 구운 식빵에 쨈을 발라 커피나 생과일 주스랑 먹으면 허기가 가시고 금세 배가 빵빵 남산이다. 즐겁고 간단한 요기에 이만한 먹거리가 또 없다.

읍내나 대도시로 나가야 빵 구경을 할 수가 있다. 면소재지엔 없는 게 많은데, 그중에 빵집도 하나. 유기농 재료로 구워 만든 건강한 빵을 맛보려면 더 멀리 도전해야 한다. 좋은 빵은 은수자나 된 것처럼 숨어 있다. 백조가 사는 호수마다 푸드 트럭, 간이 빵집이 있어 햄버거 핫도그 도넛 여름엔 아이스크림, 그리고 음료를 사먹을 수 있던 곳. 지난여름 영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백조의 호수 빵집들이 부러웠다. 호숫가 의자에 앉아 빵을 나눠 먹는 연인들. 두려움을 잊은 백조는 부스러기라도 뭐 없나 뭍으로 성큼 올라오기도 했다. 은하수 모든 별들도 호수에 같이 살고 있었는데, 배때기가 뚱뚱한 백조가 물북을 치며 뛰어들면 새까만 밑바닥으로 몸들을 숨겼다. 한반도를 수시로 선회비행하며 검은 죽음의 폭탄을 뽐내고 있는 죽음의 백조 폭격기. 미군 폭격기 별명을 ‘죽음의 백조(swan of death)’라 누가 처음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백조들이 노니는 평화로운 호숫가 공원의 풍경을 아는 사람들에겐 정말 치를 떨게 하는 이름이라 싶다. 도대체 어떤 세력들이 부추기고 원하길래 이 푸른 가을 하늘에다 시꺼먼 폭격기를 그려 넣는 걸까. 백조는 다 어디로 가고 저 시꺼먼 악령들이 부리를 쪼으며 설쳐대는 걸까.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보는 일이다. 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극장에 앉아 발레리나의 백조 춤을 감상하는 밤을 꿈꾼다. 백조의 호수 빵집에 앉아 늘 보던 진짜 백조들의 춤. 그와 사뭇 다른 풍경일 게다. 익숙한 음악도 흐를 테고 말이다. 손을 잡고서, 당신과 함께라면 좋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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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으로는 여행프로나 좀 보고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요새 방송사가 파업 중이라 재방송이 많다. 책을 다시 읽으면 별미인 것처럼 파업 때문에 듣는 재방송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방송이 볼 게 없으면 아껴두었던 영화를 한 편 찾아봐도 되고 말이다. 며칠 전엔 영화와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안겨준 선물로 두 눈이 호강했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켄 로치, 나막신의 감독 에르마노 올미 이들 셋이서 쿵닥쿵닥 만든 옴니버스 영화 <티켓>. 1등석 2등석 3등석, 칸마다 다른 군상들. 로마로 가는 짜릿하고 낭만적인 기차 여행. 가슴이 홍시처럼 붉어지고 달콤해졌다. 파업도 종종해야 하겠다. 그때는 이처럼 놓칠 뻔한 영화를 찾아볼 기회가 생길 테니까.

수다스러운 라디오도 잠시 끄고, 듣고 싶었던 노랠 찾아들어도 좋겠다. 총리 아저씨 말씀마따나 보다 공정한 뉴스를 찾아들어도 좋겠다. 윗선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메인 앵커에게 물 좀 아끼라 했다고 수년간 일거리 없는 ‘옆방’에서 지냈다는 선배 기자의 증언. 이도 워터게이트라 하던가. 나이 들고 볼품없는 사람들도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까. 휘황한 햇빛만 믿고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추한 군상들. 세상이 온통 적폐로 몸살을 앓고 있다. ‘파업전야’ 노래가 동네방네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새로움만을 좇는 세상에 재방송을 듣는 즐거움. 개봉영화가 아니라 흘러간 영화를 찾아보는 즐거움. 겁 없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주의하고 조심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힘 빼기의 기술’을 잘 안다. 카피라이터 김하나씨의 에세이 <힘 빼기의 기술>도 참 재미나게 읽었다. 제목부터가 나를 화끈 홀렸다. “주삿바늘 앞에 초연한 엉덩이처럼 힘을 빼면 삶은 더 경쾌하고 유연해진다.” 일본의 유명 극작가인 구도 간쿠로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쁜 와중에 각본을 그리 잘 쓰시는 비결이라도?” 대답인즉슨 “일단 잘 쓰고 싶지 않아요”. 백지 앞에서 부푸는 욕심,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순간 명문장이 찾아드는 것일까. 올해 추석명절은 아주 긴 휴식기로 달콤하겠다. 힘을 빼는 재방송 시간. 기운을 빼고 뒤를 돌아보며 두루두루 살펴보는 귀한 시간들이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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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없다가 오늘은 다시 구름이 꼈다. 낮에는 하얗다가 노을이 스며드는 저녁때면 분홍빛으로 바뀌는 구름. 바라보자니 분홍 스웨터를 입은 윤 초시네 증손녀딸이 생각난다. 갈밭 사잇길을 갈꽃 꺾어 들고 함께 걷던 소년과 소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이야기.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잎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근데 이 양산같이 생긴 노란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소녀는 병상에서 죽으며, 땅에 묻힐 때 분홍 스웨터 그대로 입혀 달라고 했었다지. 스웨터에는 풀냄새 꽃냄새, 소년의 등에 업혔다가 옮은 검붉은 진흙물도 함께.

밤에는 구름 뒤로 수십억광년 먼별이 반짝거린다. 황순원의 다른 소설 <별>은 엄마 생각에 눈물나게 한다. “하늘에 별이 별나게 많은 첫가을 밤이었다. 아이는 전에 땅위의 이슬같이만 느껴지던 별이 오늘 밤엔 그 어느 하나가 꼭 어머니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수많은 별을 뒤지고 있었다.”

먼별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고작 6000년이 아니라 6억년, 60억년 오랜 세월을 빛의 속도로 부지런히 달려온 것이렷다. 상식 밖의 얼토당토않은 유사과학 창조과학이 아니라 오래 묵은 사랑인 은하의 별들. 수수한 꽃별들의 사랑 얘기. 분홍 스웨터 입은 소녀도 별이 되어 수십억광년 성운 속에서 반짝거린다. 교리나 교조가 아닌 사랑들로 세상엔 노란 마타리꽃이 피어나고, 그 노란 양산과 우산으로 따가운 햇살과 소나기를 피했던 인생. 소녀는 분홍 스웨터 구름이 반짝거리는 서녘에 서서 ‘해로운 신앙’이 아닌 ‘온기 있는 사랑’으로 소년을 기다려주겠지. 사랑하는 사이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다. 그립고 그리운 것들마다 은총 있으라. 만나면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내 사랑. 노란빛 분홍빛 꽃들과 별과 구름으로 벙그러진 대우주. 눈에 보이지 않는 백색왜성, 중성자 별이라도 분홍 스웨터 입은 소녀를 서녘 노을에서 만나듯 결국엔 깜짝이야, 만나게 되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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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마다 잊지 않고 사 모으는 게 있는데 에코백 천가방이다. 도시의 이름이나 어디 서점, 음반점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작가 로렌스의 이름이 새겨진 에코백. 길에서 누군가 메고 가는 에코백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화가, 가수의 이름과 도시가 새겨진 에코백을 만나면 무지 반갑다. 명품 가죽 가방도 하나쯤 뭐 좋겠지만, 거창하게 지구환경까지 말하고 싶진 않고, 에코백이 건강하고 멋져 보인다. 정성을 다해 직접 손바느질로 에코백을 만들어 들고 다니는 부인들도 있다. 따봉 따봉, 엄지손가락 척~.

요새는 해외 고급 백화점과 서점마다 필수로 에코백 판매대를 두고 있다. 일회용 포장, 비닐을 줄여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실용성 말고 패션의 지위로까지 높이 올라가는 분위기다. 젊은 치들이 명품 백을 휘두르는 건 별로 곱게 보이지 않는다. 엄마 걸 들고나온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샹젤리제나 몽마르트역 어디도 아닌데 철심 줄로 친친 감긴 가방을 가슴에 움켜쥐고 다닐 필요까지야. 책 한 권 들어가지 못할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무식을 온 천하에 자랑하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 젊음의 자랑은 돈이 아니라 건강미와 지성미. 누구는 그것이야말로 섹시미, 야하다고 말했던가.

마광수 교수를 뵌 것은 가수 한대수 사진전으로 기억한다. 하얀 천조각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앞자루에 박힌 에코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일행도 수줍은 얼굴이었는데 스치듯 다른 일행들 속에 파묻혔다. 윤동주처럼 창백한 얼굴을 가진 마광수 샘은 학원에서 쫓겨나 감옥이나 외진 식당을 전전하며 지냈다. 그가 들고 다닌 가방 중에 하필 그 에코백의 기억을 내가 지닌 것은 무슨 때문일까. 그 속에 어떤 책과 또 시가 담겨져 있을까 궁금했었다. 다소 커 보이는 상의를 걸친 구부정한 어깨선.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사라를 좋아한다 말했던 눈빛은 누구보다도 솔직했다. 검열을 피해 다급히 적고 또 찢었을 노트에는 같이 ‘콩밥을 먹은 문장들’이 슬픈 나체로 누워 있었겠다. 문학 선생의 에코백을 찢어 콘돔이라도 하나 주운 자들이 내지른 비명들로 세상은 소음천지, 위선의 진풍경이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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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집을 지을 때, 나무로 지을까 벽돌로 지을까 철골로 지을까 고심을 거듭. 결론은 흙으로 짓자! 기둥 골조는 철근과 나무로 단단히 일으켰으나 벽만큼은 흙벽돌을 두르고 고운 흙으로 미장을 하고팠다. 툭툭 터지고 갈라져서 애를 먹다가 전문가를 소개받고서야 야물딱지게 단장을 마칠 수 있었다. 지붕 기와를 얹을 땐 흙을 이겨 깔고 그 위에다 전통 깜장기와를 착착 붙였다. 조선사람 피부 색깔을 닮은, 남녘땅 붉은 흙으로 지은 집. 손바닥처럼 거친 흙으로 지은 집. 나와 집은 쌍둥이처럼 똑 닮았다. 뒤란 담벼락도 흙을 이겨 발랐더니 옛날 토담 비스무리 나왔다. 시방은 그 위로 넝쿨 식물이 우거져서 흙 반 넝쿨 반. 의외로 어르신들은 시멘트를 좋아하신다. 발전상으로 세뇌당하신 듯.

“절므런 양반이 집을 짓는닥해서 보기 조컸구마 기대를 겁나 했는디 금메말시 가난테 가난물이 뚝뚝 떨어져가꼬 실망이 커부렀당게라. 흙이라믄 인자 송신나게 징그랍소.” 헉, 할매집보다 수배 넓은 기와집인데 흙벽을 보고는 그리들 판단. 초가삼간 흙집, 가난했던 옛일들이 떠올랐을까. “흐칸 색(흰색)으로 싹잠(모두) 발라부쇼.” 이건 뭐 마을민원 수준이었다. 흙집은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엔 한결 따숩지. 꽃밭 산밭도 붉은 황토와 마사가 적당히 섞인 흙밭. 양지뜸 뭘 심어도 팔뚝만 하게 잘 자란다. “아따메. 흙이 요라코롬 좋단 말이오. 남정네들 고출 싹 따다가 여그다 심으믄 볼만 허겄재라이. 요라고 실하기라도 해야재 워디. 쯔쯔쯔.” 할매들이 엉큼하게 웃으며 고추를 따담았다. 응달엔 지렁이들이 밤낮으로 일하고, 풀벌레 악단은 밤새 재즈를 연주한다. 흙에서 자란 배추는 김치가 되어 밥상에 빨갛게 올랐다.

흙으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미술작품이 또 하나 있더군. 며칠 전 꽃다발을 들고 다녀온 화가 임옥상 샘의 전시. 흙을 발라 그린 존 버거와 윌리엄 모리스, 자화상에 쏙 반했다. 조물주 말고 나도 내 얼굴을 흙으로 그려보고 싶더군. 현대인들은 흙과 멀어졌다. 핵무기보다 병이나 자연결핍으로 죽을 확률이 억만배 높다. 존재의 원형질과 멀어진 우리들. 이런 게 바로 큰일이렷다. 잘 구운 흙처럼 건강한 그댈 위해 남녘땅 붉은 흙 한 줌 쥐여드리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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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말이를 엄청 좋아한다. 김을 넣어 쫄깃해진 계란말이 한 조각. 봄소풍과 가을 운동회 때 맛보던 음식. 계란탕도 못지않게 좋아한다. 거기다 하얀 쌀밥 한 숟갈, 깍두기 몇 조각 넣으면 계란 비빔밥. 간호사였던 누나랑 잠깐 자취를 했던 때가 있었는데 석유곤로에 올려서 찐 계란탕. 퀴퀴한 자취방에 맛난 훈기가 올라왔다. 미대를 나와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꺽다리랑 연애를 한참 할 때였는데, 훗날 매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셋이서 종종 밥상에 둘러앉았다. 지금 같았으면 짜장면 값 뜯어내 얼른 밖에 나갔을 텐데(자리를 비켜드렸을 건데) 계란말이 계란탕이 너무 맛있어서 미안 쏘리.

아버지는 넓은 목사관 뒤뜰에다 닭과 오리를 키웠다. 마당엔 지렁이들이 살고 냇물엔 물풀이 가득. 닭은 타조처럼 키가 크고 오리들은 거위만큼 뚱뚱하게 자랐다. 오리들도 닭처럼 알을 낳았다. 그런데 알이 하얗고 굵었다. 삶으면 계란보다 맛나다. 오리알 요리도 종종 맛을 봤는데 입에 넣을 때마다 오리가 꽉꽉 울어서 미안했다. 오리는 애교 많은 친구다. 뒤뚱거리며 걷는 것도 귀엽고 입주댕이도 노란 립스틱을 발라 재미있다. 물장구를 칠 때는 정말 부지런해. 날개는 있으나 마나지만 물갈퀴 발목 하나는 야무져서 물에 빠져 죽을 일은 없다. 땅을 두 발로 걷던 오리가 물에 들어가면 편안하게 앉아 헤엄을 치는 건 참 신기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풍자 산문 <코이너씨 이야기>. 오리를 닮은 코이너씨에 실긋 웃게 된 장면. 코이너씨가 냇물에서 물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물이 들이찼다. 근처에 구조선이 있나 둘러보는 사이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 버렸다. 코이너씨는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냅다 물가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희망을 버려야 산다는 싱겁디싱거운 이야기.

비좁은 철창에 갇힌, 한없이 불쌍한 닭과 오리들 이야기는 마음 아프다. 오리알만 한 눈물이 뚝뚝. 그 옛날 청정한 냇물과 마당은 남아 있지도 않다. 허우적거리다 제 힘으로 헤엄을 치게 된 선각자들도 매우 드물다. 이 총체적 난국의 세계에다 둔 희망을 버릴 때 비로소 모두가 살길이 열리지 않을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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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머니 무릎에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우리. “할마니. 옛날 얘기 하나만 해 주라이. 으응?… 무서운 도깨비 얘기 말고 재밌는 거.” “나는 슬픈 이야기가 젤 좋드라. 꽃이랑 뻐꾹새 이야기….” 임철우의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에 나오는 춘례 누나. 턱을 괴고 할머니를 조르는 말. 부채를 부쳐주며 들려주시던 전설 따라 삼천리. 냉장고에서 막 꺼낸 수박 맛, 구수한 보리 미숫가루 맛 같은 달달하고 시원한 이야기들. 엄마들은 자기는 더워도 땀띠가 난 아이들을 향해 쉬지 않고 부채질을 했다. 부채 바람들이 모이고 모여 가을바람이 되었지.

초등학교, 옛날엔 국민학교. 그때 처음 집에 냉장고가 생겼다. 어머니는 날마다 미숫가루를 풀어 냉동실에 얼리고 그걸 교회 일보는 분들에게 열심히 날랐다. 그러면서 한 알씩 살짝 내게 집어주셨는데 그게 얼마나 달고 맛났는지 몰라. 집집마다 냉장고가 생겨나고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각자들 살림하는 재미가 생겨났다. 이웃끼리 함께 먹고 마시던 일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대나무로 짠 평상에 드러누워 보았던 달구경 별구경도 줄어들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생긴 뒤부터 누구든 한번 집에 들어가면 얼굴보기가 귀했다. 외로운 천국에서 냉방병을 앓고 사는 현대인들은 날로 늘어만 갔다.

영화 <장군의 아들>은 재밌었는데, 요즘 장안의 화제 ‘장군의 집안’ 이야기는 속상하고 끔찍해라. 그분들 개신교 장로와 권사라던가. 대형식당도 아닌 가정집에서 무슨 냉장고를 아홉 대씩이나 굴리며 살아. 음식이 썩어 버려지는데도 나누지 않았단다. 냉장고도 부끄러워 숨고 싶었을 게야. 하필 그런 집에 팔려 들어가 썩어가는 음식물을 바득바득 쟁이면서 속고생 맘고생 했을 생각하면 쯧쯧. 냉장고는 잠깐 신선하게 보관할 때 쓰는 물건이지 썩을 때까지 쟁여두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렷다. 아래마당 팽나무 그늘에서 동네 동무들과 둘러앉아 먹었던 엄마표 수박화채. 가난한 친구 집에 놀러 가도 군납 건빵, 하다못해 심심한 오이라도 나눠 먹으라 내놓는 나눔의 잔치였지. 냉장고에서 노랗고 파란 ‘아이스께끼’를 꺼내 안겨주는 날엔 그 집에 양자로 들어가 살고 싶었을 정도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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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를 들으며 거닐었던 런던을 떠나 지금은 내 집 내 골목. 폭염주의보를 알리는 새벽 문자는 간신히 잠든 새벽잠을 폭망하게 만드네. 낮에는 갑자기 비구름이 달려들어 낙뢰가 치고, 깜박 졸던 나를 깨우던 무서운 물리 선생님. 피뢰침이 있던 교회에 얹혀 살 때는 두꺼비집이 여간해선 내려가지 않았는데, 마을 속 한데 섞여 살게 된 이 집은 약한 벼락에도 걸핏하면 차단기가 내려간다. 집을 비우고 타지에 머물 땐 든든히 장만한 김치와 간고등어를 못 먹고 버리기도 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왜 냉장고가 받는 걸까. 벼락이 치면 개들도 깜짝 놀라 칭얼거린다. 컹컹대고 짖는 하늘을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보위가 쓴 노래 ‘모든 멋진 놈들(All the young Dudes)’이란 노래도 벼락만큼 큰 소리로 세상에 울려 퍼졌다. “형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를 듣고서 집에 왔다네. 하지만 나는 그런 혁명에 빠져들 수는 없었다네. 유들유들하고 거추장스러워. 지루한 것은 딱 질색이야. 깨부숴야 할 이 세상이 콘크리트인지 내 머릿속이 콘크리트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는걸.” 이런 노랠 듣고 자란다면 벼락 따위 무서운 소리도 아니겠다.

수평으로 이동하며 살던 사람이 수직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 벼락이 치는 순간 아마도 그런 생각이 번쩍 든 것은 아닐까. 인류는 농사법과 가축, 발효 음식을 얻게 되자 유목 생활을 접게 된다. 문화철학자 토마스 마호는 인간이 근원에 대한 공간적 생각 대신 수직적 사고를 하게 되자 이성의 존재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내가 누구로부터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났는지. 여권이나 각종 증명서에 지금도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하고, 그걸 인간의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간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나 고민하다가 어머니 자궁을 점토로 빚기도 하고, 예수처럼 신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고요는 좋으나 늘 고요하면 나태하고 머무르게만 된다. 나른한 날들을 깨우는 벼락에게 우리 심심한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을까. 무섭게 밀치고 후비다가도 어느덧 단비를 몰고 오는 사랑스러운 밀어. 때론 그 속에 날벼락 같은 슬픈 소식이 살짝 끼어 있기도 해. 정말 그런 일들은 그대 인생에선 멀찌감치 비켜가기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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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 중에 노름꾼, 사기꾼보다 ‘쎈 것’이 낚시꾼이다.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낚싯대를 부여잡고 바다나 강물을 꼬나보는 뙤약볕의 선수들. 좋으니까 그러고 있는 것이겠다. 청록의 시인 박두진은 ‘7월의 편지’에서 “바람, 바다가 밀려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빛 냄새의 절규. 7월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의 조국의 포옹. 7월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그래 바다에 서면 냄새가 다른 것이다. 그것도 특별한 7월의 바다, 소금 냄새는 마치 길고도 진한 축제처럼 쿵쾅거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물고기들 어룽대는 소리, 쿨렁쿨렁 아가미로 숨 쉬는 소리. 도마에 생선과 야채들이 놓인 해변의 집들. 깨지고 부서진 골목 계단과 큰바람에 살짝 넘어간 교회당 십자가에 앉아 똥을 싸는 갈매기들. 세족식을 하듯 짠물에 전 장화를 씻는 어부들. 어둑한 촉수 불빛 아래서 소주를 나눠 마시는 ‘깨복쟁이’ 동무들. 통발에 잡히는 게 물고기들만이 아닌 게다. 오래 묵은 이야기들의 성찬. 텃새처럼 내려앉아 물고기를 낚던 낚시꾼이 보따리를 싸서 일어날 때는 정말 ‘중대 결심’을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다. 무덤조차도 영원히 머물 곳은 이 지상에 없는 법이다.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밑밥 통만 들고 일어서는 어깨도 슬프거나 처지지 않는 것은 낚시꾼에게는 오직 내일이 또 있겠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되겠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또 있으니 낙담하지 말라. 낮고 외롭고 슬픈 이름들이여. 오늘 잡지 못한 물고기는 내일 잡으면 되는 것이다. 서늘한 물살로 올라오는 물고기들은 언제나 내일이라는 깊은 물속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어부가 던져놓은 통그물에 부모를 잃은 어린 물고기들, 밤새껏 울어서 강물도 바닷물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물이 마르지만 않으면 물고기가 산다.

낚시꾼이 지나간 빈자리에 남은 노을 한 조각. 하늘 바다도 보고 싶어라. 문득 동해나 남해, 서해 어디든 훌쩍 다녀오고 싶다. 낚시꾼도 만나보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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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아저씨가 만들었다고 해서 빅벤이라 불린다는 시계탑. 영화 <런던 시계탑 아래서 사랑을 찾을 확률>에선 이 빅벤 시계탑이 연인들의 약속장소로 등장한다. 우연히 기차에서 얻게 된 책 한 권이 빚어낸 좌충우돌 연애소동극. 연애를 하고 싶다면 책부터 손에 쥐라는 조언의 말씀. 그러고 보면 영화 <노팅힐>에도 책방이 등장한다. ‘더 트래블 북’이라는 책방은 영영 없어져 시간여행에서나 방문이 가능하겠다. 누군가 새로 창업해도 될 법한데 종이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 전자책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는 흐름이다. 빅벤 시계탑도 언젠가 전자시계로 바뀌게 되는 건 아닐까. 째깍째깍 돌아가던 시계가 아니라 번쩍하면서 시간만 보여주는 밋밋하고 매력 없는 시계로 말이다.

며칠 전에는 템스강 남쪽 그리니치 마을을 방문했다. 시간과 시계의 성지. 세상의 모든 시계들이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 돌아가고 우리는 그 시간에 따라 인생을 살고 있음이렷다. 인류에게 있어 시간은 ‘깊게 신뢰하는 서로 간의 약속’이다. 약속은 우리를 무질서에서 구해주는 손길이렷다. 약속의 손을 잡을 때만 우리는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무리들을 우리는 지난 시절 내내 목도했었다.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의 물꼬를 뒤로 파놓고 과거의 어둠 속에다 온 국민들을 밀어뜨렸던 자들. 뻔뻔하고 요망스러운 그들을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해야 하리라. 차별과 분리의 복면을 쓴 무리들이 관용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풍경. 테러는 한순간이지만 차별과 분리는 오래오래 다수를 죽음으로 내모는 더 끔찍한 악행이다. 최근 영국은 브렉시트라는 분리와 독단의 먹구름을 유럽 하늘에 드리우고 말았다. 놀이공원의 풍선이 아니라 뇌성벼락을 동반한 진짜 구름이라서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 어떤 가르침, 어떤 책이 우릴 다시 사랑으로 인도할까. 시계탑은 희망의 시간을 가리키고, 우리는 그 아래서 사랑의 입맞춤을 나누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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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는데 섬나라 하와이안. 기본으로 다섯 가지를 잘했다. 항구도시에서 태어났으니 일단 수영 짱. 헤엄뿐만 아니라 파도타기 서핑 실력도 수준급. 나도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기본 수영은 할 줄 알지만 큰 파도는 겁부터 난다. 그는 파도에 뒹굴다 정강이가 부러진 뒤에도 바다를 향해 냉큼 달려간 간덩이 부은 사내였다. 하와이 악기 우쿨렐레를 기본으로 연주할 줄 알았는데 노래는 음치. 우쿨렐레 기타를 들고서 히어 컴즈 더 선, 오브라디 오브라다, 비틀스의 노랠 같이 불렀다. 비틀스 노래는 세상 어디를 가도 먹히고 통하는 법이니까 음치여도 상관없지.

그 친구는 항상 해피 투게더, 해피해피 그랬다. 너무 해피해서 내가 다 피해피해 도망다닐 정도.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도 시종 밝고 환한 해바라기 표정이었다. 입만 열면 갈매기처럼 깔깔거렸다. 남 흉보는 거 빼곤 말수가 대체로 적은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없고 재수도 없다. 까불고 떠들고 깔깔대는 사람이 난 좋다. 축 처진 우울한 사람을 만나면 덩달아 늘어지게 된다. 피가 끓는 사람들은 음울할 시간이 없다. 그는 요리를 좋아하고 잘했다. 왜냐고 물으면 딱 한마디. “사랑하니까.” ‘미친, 밥하는 아줌마들’이 누구는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사랑과 존중 없이 우리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와 나는 메일 몇 통 이후 연락 없이 오래 잊고 지냈다. 여기서 다섯째, 우린 각자가 제일 잘하는 순례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난 이 편지를 띄운 뒤 리버풀로 가는 기차를 타러 유스턴 역에 가야 한다. 그 친구가 평생 가보고 싶다던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 보고 있냐? 형아가 먼저 간다. 영국 노동자들의 심장 같은 항구도시. 옛날엔 무시무시한 노예시장. 고향을 떠나 비틀스는 자유와 평화로 세상을 물들이며 멋진 여행을 즐겼다. 먼저 간 존과 조지는 은하수에서 자유형 접형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비틀스를 들으면서 폭염조차 즐겼으면…. 기본은 하는 아이들, 명랑하고 창조적인 친구들이 세상에 많아지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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