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253건

  1. 2018.02.01 참새와 까마귀의 마을
  2. 2018.01.25 농민가
  3. 2018.01.18 어촌 겨울풍경
  4. 2018.01.11 눈썰매
  5. 2018.01.04 통일 올림픽
  6. 2017.12.28 솔로 천국
  7. 2017.12.22 동계 캠핑장
  8. 2017.12.07 늑대가 우는 겨울밤
  9. 2017.11.30 시인의 사랑
  10. 2017.11.23 별이야! 눈이야!
  11. 2017.11.16 하나님
  12. 2017.11.09 치통 불통
  13. 2017.11.02 폴라로이드 즉석 사진기
  14. 2017.10.26 삼십육계
  15. 2017.10.19 치유하는 약
  16. 2017.10.12 불바다 불산
  17. 2017.09.28 백조의 호수 빵집
  18. 2017.09.21 재방송
  19. 2017.09.14 분홍 스웨터 구름과 별
  20. 2017.09.07 에코백 천가방

교인들에겐 예배 때 휴대폰을 꺼두라고 주의까지 줬는데 정작 자기 호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린 목사. 설교를 중단하고 강대상에서 전화를 받았다. “하나님! 지금 당신에 관해 한참 설교 중인데, 나중에 전화해요. 그럼 끊습니당. 뚝~” 누가 전화했는지 이거 뭐야 당황했겠다. 아무튼 하나님 개무시. 어설픈 회개와 영악한 간증. 적당히 죄를 사해주면 양심세탁비로 헌금을 받고, 아무나 집사고 장로 직분을 내려주는 하나님 없는 교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짓이기는 수억짜리 오르간과 성가대. 박수를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방언 기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전화해도 들리지 않는, 그저 소음일 따름. 진실이 숨죽이고 소음만 있는 곳엔 하늘의 천사라도 누구 하나 내려앉을 수 없는 법이렷다.

산골엔 요즘 배고픈 참새들이 많이 내려앉는다. 갈대밭에 몸들 비비며 우는 갈대처럼 새들이 무리지어 밥 좀 나눠달라 애원들이다. 묵은쌀이 없나 한 됫박 찾아 바위에 올려놓고, 돌확에다간 물도 한 바가지 떠놨다. 논밭전지에 까마귀떼가 시꺼먼 구름마냥 내려앉기도 한다. 해마다 찾아오는 검은 날개 천사들.

이태준의 소설 <까마귀>는 친구 별장에 잠시 깃든 작가와 뜨락 정자에 가끔 방문하는 여자 이야기다. “여자는 잊어버린 듯 오래도록 햇볕만 쏘이고 있다가 어디선지 산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는 것을 보더니 그제야 사뿐 발을 떼어놓았다.” 정자지기는 그 여자가 폐병에 걸려 요양 중인 환자라고 알려준다. “여기 나와선 까마귀가 내 친굽니다. 내 뒤를 쫓아다니는 무슨 음흉한 사내같이 소름이 끼쳐요. 아마 내가 죽으면 저 새가 덥석 날아와 앞을 설 것만 같이….” 몇차례 다담과 설렘이 오가고, 여자는 슬픈 미소만 남기고 내려갔다. 날이 추워지고 싸락눈이 내린 날, 잡지사에 글을 넘긴 작가는 영구차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다.

새들이 알아차린 진실과 베푸는 위로. 어쩌면 사람보다 나을 때가 있다. 배고픔을 던 새가 들려주는 합창은 바흐나 헨델의 코랄을 능가한다. 까마귀도 하늘을 덮으며 베토벤의 ‘운명’을 들려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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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직업에 농사가 들지 않는 것은 의아하다. 겨울날 일이 끊겨 일절 돈이 나오지 않는 직업.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견디기. 금전 줄이 말라붙어 결국 ‘나가너부러지게’ 되는 직업. 돌아오는 농촌, 귀농도 유행을 타서 효리네 민박처럼 산다면 또 모를 일. 골프나 테니스처럼 공을 잘 때려 상금을 딸 수도 없다. 딸기와 포도, 토마토 ‘공’은 농협 빚만 늘린다.

흘근번쩍거리는 대도시를 지나 어두컴컴한 도끼집들(도끼 하나로 허술하게 지은 집). 해 넘어가는 네다섯시만 되어도 길은 한가롭고 바람조차 썰렁해라. “할머니. 어디 가시나요?” “이런 써글 것이 있나. 젊은 거시 어른 헌티 어디 가시나라고? 그래 나 전라도 가시나다.” ‘헉~ 그런 말씀이 아니라… 어디 가시는지. 날이 추워 태워 드리려고.” “태워가꼬 어떠케 해볼라고? 니가 뒤지고 자프냐?” 뭐 이런 극지방 아재 개그가 생겨난 동네. 경운기도 다니고 탈곡기도 다니던 길. 찬바람만 씽씽 지나다니고 인기척이 드문 밤엔 부엉이들이 길가에서 홀짝홀짝 울어댄다.

시베리아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러시아 농민가’를 우리말로 불렀다지. “가난한 마을에 태어난 형제가 있었네. 험악한 세상을 만나 농부가 되었구나. 가난한 마을에 태어난 농부가 있었네. 악독한 지주를 만나 농노가 되었구나. 가난한 마을에 태어난 농노가 있었네. 악독한 지주랑 싸우다 전사가 되었구나.” 누군가 답가를 불렀다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농민이 되어 괭이 메고 삽질하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그러고 보니 삽질은 엠비 정권 때 농민들보다 곱절로 난리브루스였지. 덕분에 강은 썩어 문드러지고, 이용객이라곤 없는 수변공원 짓는다고 빼앗긴 서민들의 하천부지 좁쌀 논은 잡초만 무성해. 아수라장이 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농사를 지어야지. 이 추위가 끝나면 전라도 경상도 가시나 머시마, 저 들에 씨를 뿌릴 테지. 괭이와 삽을 들고 농민가를 부르면서. “꽃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은… 이 땅의 농민들아. 손잡고 일어서자.”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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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륙이나 러시아만 가도 평생 바다를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감사하게도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고, 마음먹으면 달려서라도 찾아가 바다를 껴안을 수 있다. 갯벌이 짓무른 눈시울 같은 남해와 서해, 망망대해 거치른 동해가 생김이 달라 신기한 지점이다. 나는 남녘 어촌에서 나고 자라 남해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동해는 사철 깊고 사나운데 남해는 폭풍우 말고는 온순한 편이다. 이태준의 단편소설 <바다>는 북쪽 사람들의 어촌 풍경이 담겨 있다. 사투리가 생경하고도 재미지다. “야! 과연” “무스게라능야?” “멀기(함북 방언 물결. 아주 크고 거친 파도)말이오, 멀기. 과연 기차당이.” “무시거?” “멀기 말임둥. 과연 무섭지 앙이오?” 추위가 예사 추위가 아니고 바람도 곱빼기로 으르렁거릴 북녘에선 바다의 사나움이 대단할 것 같기도 하다.

어촌마을은 흩어져 지내는 산촌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의 촌장이 마을은 물론이고 폭풍우까지 다스린다. 용왕의 화를 재우고 바치는 쌀이나 목각 음경은 무조건 돈을 바치라는 서양신 신앙보다 관대하고 너그럽다. “무엇하러 당신들은 사제들을 임명하는가? 이미 당신들 가운데 사제들이 있는데.” 장 그르니에의 글을 읽다 밑줄을 친 부분이 맞는 소리렷다. 바람이 불어 횟감이 좋다는 어디로 따라갔는데, 오도독 씹은 회 한 점에 멀리서 오는 봄맛을 느꼈다. 동네의 촌장으로 보이는 횟집 주인은 일행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담뿍담뿍 밑반찬들을 내다 주었다. 일본의 쩨쩨한 구두쇠 영감 ‘겐자히 아끼네’와는 ‘굉장히’ 다른 인심이었다. 아베 총리 또한 하는 말마다 아니꼽살스럽고 짠내가 진동한다. 입맛을 위해 그만 다른 생각을 하기로 하고, “가즈아~”·

갈무리를 하려는데 눈이 퍽퍽 내리기 시작했다. 바다에 갔던 배들이 뒷거둠질도 다 못하고 부두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여복도 많고 어복도 많은 촌장은 ‘멀기’를 뚫고 배를 모는 아들을 기다렸다. 부디 몸집만 한 방어를 잡아다주기를. 여들없는 아비와 달리 번개 같고 싹싹하던 그 아들을 나도 덩달아 기다리고 있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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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여관집 현관에 전시되어 있던 눈썰매를 보고 감탄. 대물림을 할 정도로 짱짱한 물건이었다. 집집마다 이젠 스노 모빌 눈썰매가 있지만 과거엔 모두 아버지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눈썰매를 탔단다. “겨울 나라에서 살려면 기술이 좋아야 해요. 썰매 하나를 만들어도 설렁설렁 대충 이어 붙여서는 곤란합니다. 눈길에 갇히면 얼어 죽죠. 모든 게 목숨과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여관집 아저씨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눈썰매도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만주땅 봉천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내 아버지도 얼음 썰매를 곧잘 만드셨다. 그곳에서 배우신 걸까. 꽁꽁 언 냇가에 나가면 내 썰매가 가장 앞서나갔다. 엊그제부터 남쪽은 폭설이다. 냇물도 두껍게 얼었다. 방문 창으로 쏟아지는 눈보라가 최면을 거는 마술사의 무엇처럼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마을에서 쫓겨난 한센인들은 짓무른 코로 눈발이 들어갈까 가마니 자루를 뒤집어쓰고서 이 서러운 남도 땅을 돌아다녔다. 갑오년 농민들과 동란 때 빨치산들은 또 얼마나 추운 산하를 떠돌며 울었을까.

남녘 목사로 지낼 때였다. 한 해 겨울은 젊은 축에 끼던 부부가 새해를 맞아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목사가 공산당에다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괴소문. 미국의 ‘이슬람 대결 전쟁’을 반대한다고 설교를 한 다음주 일이었다. 시골에선 미국의 뜻에 반대하면 무조건 공산당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는데 집엘 찾아갔다. 이번주부터 읍내 큰 교회에 다니기로 했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시라 문전박대. 그런데 대문 앞 눈길이 얼어 그만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목사님 따라서 살다가는 그라고 재수 없을 거 같아 그만뒀당게라잉.” 내가 잘못 들었나 재차 물었더니 딸깍 문을 닫아걸었다. 나는 접질린 발목을 질질 끌고 도망치듯 그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동구 밖 교회로 돌아오는 눈길은 그날따라 배로 멀었다. 눈썰매를 타고 싱싱 달리고 싶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참으로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사람 말고 또 누가 있어 이 추위에 온기를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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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구멍에 겨울이 가득해. 해솟음달 새해가 반갑다. 근혜신년이었다가 근하신년이 된 것이 불과 한 해 남짓. 국정교과서에 깃발을 함께 들었던 나모씨 교육부 기획관께옵서 개돼지라고 우리 국민들에게 거시기한 별명을 붙여주심도 그 어느 참. 드디어 올해가 개띠. 개자유에 개사이다의 새해렷다. 거기다 올핸 눈 많은 평창군에서 올림픽도 열린다지. 핵미사일 놀이로 한바탕 세계를 들었다 놨다 했던 북쪽 동포들도 겨레의 큰잔치엔 함께하겠다니 반갑고 감사해. 어떻게든 단군할아버지 핏줄의 끈을 놓지 말아야지. 우리는 어쩌다가 잠깐 으르렁거리며 살고 있지만 후손들은 평화롭고 행복한 통일나라에서 살아야지 않겠어. 적개심을 키우고 불화를 조장하는 외세와 남북의 매파들에게 ‘개사이다’ 엿을 먹이는 평화의 잔치를 열어내야 해. 애먼 이들에게 간첩 딱지를 붙이고 육자배기 빨갱이 타령. 지긋지긋해.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아이들의 그림에까지 국가보안법 운운하는 자들의 입술이 부끄럽게. 위기를 잘 관리하고 평화를 가슴마다 꽃피어내야 하리라.

올림픽이 있으면 내림픽도 있겠지. “더 높이. 더 빨리. 더 힘차게.” 올림픽 3대 표어가 있다면 내림픽은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여리게”. 주변을 돌아보고 낮은 사람들과 손잡으며 걸었던 촛불광장은 놀라웠다. 보고만 있어도 온누리가 따뜻해졌지. 정신없이 숨차게 살지 말고 조금씩 발걸음을 늦춰서 느리게 천천히 살아가고 싶어. 주머니에 손 같이 넣고서 골목마다 구경하고 싶어라. 자전거를 타고 극장에도 가고 새 시집이 나왔다는 책방에도 같이 가고파. 힘자랑보다는 여리고 섬세한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남북이, 그리고 세계가 강하고 센 무기보다 안부를 나누는 대화를 귀히 여겼으면. 통일이란 낱말을 내버리지 말기를.

올림픽에 찾아온 세계 친구들이 우리를 보고 미소 짓는 추억 하나 생기길 바란다. “저녁별과 눈보라와 기나긴 밤 속에, 먼 따뜻한 햇빛 비추는 나라의 추억이 그래서 그의 마음속 믿음을 다시 미소 짓게 하겠지.” D H 로런스의 시 ‘아몬드’를 아삭아삭 씹으며 미소 짓는 정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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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혼술의 끝은 혼절과 혼령이라던가. 혼자 놀다 혼자 죽기를 바란다면 뭔 소리야 하겠지만, 세계대전보다 무서운 부부싸움이나 데이트 전쟁이 생기면 인류 모두의 소망이겠구나 싶어질 게다. 세밑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도 또 혼자가 좋은 때가 못지않게 많다. 잠깐 누가 곁에 없어 어쩔 수 없는 혼밥 말고 정신없이 사느라 혼밥을 먹어야 한다면 서럽겠지.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낸 사람들을 ‘혼크족’이라 한단다. 혼자 생일을 맞으면 혼나. 그러면 친구들에게 진짜 혼나게 되어 있다. 뉴요커는 혼커들이 많다. 혼자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우리도 혼커가 많아졌는데, 혼밥은 이제 시작 기미. 월급쟁이들은 혼밥을 먹어야 지갑이 그나마 줄지 않을 것이다. 고기라면 환장을 하거나 철판이 두꺼운 아재들은 혼자 식당에 앉아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한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처량한 생각이 쬐끔. 같이 먹어주면 계산은 내가 안 해도 되겠지? 고기를 얻어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겠다.

영화 <범죄도시> 말미에 윤계상이 결투를 앞두고 “너 혼자냐” 묻자 엉뚱하게도 “아직 싱글이다” 대답하는 마동석. 실제로 싱글 아니잖아. 비현실 몸매를 자랑 삼은 여배우 애인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깨는 순간’. 웃자니 성질이 조금 나려는 부분이었다. 한 솔로(해리슨 포드)를 죽이고서도 잘될 줄 알았더냐. 너 스타워즈! 한 솔로는 타투인 행성에 잠시 내렸다가 루크 스카이워커를 만나게 된다. 돈벌이로 루크를 자신의 비행선 밀레니엄 팔콘에 실은 게 그만 사달이 나고 만다. 이름은 솔로인데 털북숭이 외계인 조종사 츄바카와 단짝동무. 게다가 레아 공주님과 열애 끝에 애까지 둔다. 배 아파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 감독이 그랬을까. 한 솔로는 어쩌다가 아들에게 칼베임을 당하고 극장에서 영영 쫓겨났을까. 어디 저승길에서 혼자 혼밥을 즐기고 있겠지. 한 솔로가 문득 보고 싶구나. “혼자가 훨 나서. 병들어가꼬 둘이 요때까지 사렀으믄 날마다가 지옥이재.” 일찍 혼자 된 동네 할머니는 그렇게 자족하면서 오늘도 혼밥이다. 나도 이 산중에서 자발적인 혼밥에 혼커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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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가에 길어 놓은 물도 딴딴하게 얼었다. 장작 패고 군불 때는 일이 잦아졌다. 두어 번은 즐겁지만 이게 일상이면 괴롭고 불편한 노릇이다. 그래서 좀 재밌어보려고 난롯불에 고구마도 구워 먹고 밤도 굽고 숯불이 아까우면 물고기를 굽기도 한다. 무언가 구워 먹을 때 원시인이나 된 것처럼 송곳니를 혀끝으로 더듬어본다. 물도 난로에다 끓이면 자글자글 소리조차 경쾌해. 불을 쬐고 있노라면 피곤이 가시고 마음조차 차분해진다. 난로 앞에서 몸이 노곤해질 때까지 책을 읽다 쓰러져 잠든 날도 많다.

밤새 내린 눈에 세상이 왼통 흰색으로 덮인 날. 흰둥이 강아지처럼 마당을 뜀박질하며 설국을 만끽한다. 지붕도 하얗게 덮여 운동회 날 친 커다란 텐트만 같아라. 특별히 동계 캠핑장에 찾아가 텐트를 치고 하룻밤 야영할 필요가 없는 야생의 삶. 나는 이 숲에서 어쩌다보니 날마다가 캠핑이다. 가끔 가래떡을 좀 썰어 넣고 라면을 끓이기도 한다. 일부로 캠핑용 버너와 코펠 식기류를 꺼내서 마당으로 들고나간다. 간단한 장비만을 가지고 야영하는 ‘백 패킹’ 기분을 내보는 것이다. 그동안 줄래줄래 살림들이 너무 늘었다. 꼭 필요한 건 정말 몇 가지뿐인데. 뭔가 많아진 건 성가시고 귀찮기까지 하다. 살림을 한번 엎고 정리할 시점이 다가왔다.

요샌 자연 미인이 참말 귀하더라. 검게 탄 얼굴과 흙물이 든 손톱. 이리나 여우처럼 총기 있는 눈빛. 가장 고독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일 텐데 대부분 유약하고 지질하다. 대부분 단체생활에 절여 있다. 조금만 외로워도 견디질 못해한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투아레그족 베두인들은 ‘이모하’라 불리는데, 자유인이라는 뜻이란다. 이 자유인들은 탐욕, 지배욕, 편협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별이 총총한 사막의 밤길을 걸으며 호젓하게 잠들 줄 안다. 세밑의 활활 타오르는 간판 속으로 부나방들이 달려드는 이때, 고독을 찾아 나선 자유인과 이방인들이 그립다. 그대의 동계 캠핑장은 과연 어디쯤인가. 당신이 누구보다 강해지길 원한다. 우리는 이 노예 같은 삶에서 벗어나 야생미를 지닌 캠퍼로 거듭나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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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이 숭숭 뚫린 몸을 끌고 판문점을 넘은 인민군 청년을 생각한다. 이름은 오청성, 올해 스물다섯. 반대였다면 이쪽에서도 국군 청년의 등을 향해 총을 쏘아댔겠지.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 국경에선 가끔가다 일어나는 일.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전 세계에 방송을 타지는 않을 것이다. “국경은 없어요. 너의 나라 나의 나라….” 이매진 노래는 그래서 제목조차 ‘상상’일 뿐인가.

 

 

유재영의 소설 <하바롭스크의 밤>에도 비슷한 추격전이 나온다. 러시아 벌목공 탈북자 기라는 청년과 율이라는 청년. 벌목공으로 팔려나간 친구들은 하바롭스크의 폭설과 벌목 현장의 위험을 견디며 살아간다. “남한은 안전하오?” 대답 없는 질문. “늑대의 늪을 가로지를 거요. 같이 갑시다.” 감자를 입에 녹여 먹으면서 아무르강 유역을 걸어 탈출한다. 굶주린 검은 털빛의 늑대떼가 뒤를 쫓고… 곰덫이 그만 왼쪽 발목을 덥석 물었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둘은 동굴처럼 생긴 방공호를 발견한다. 벌목공의 집이었는지 어느 실패한 혁명가의 움막이었는지 모르는 그곳. 철철 피가 흐르는 발목을 도끼로 자른 기는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선다. 방공호에는 엽총과 기의 발목이 달랑 남아 있었다. “이제 형벌은 끝났으니 당신의 삶을 사시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소.”

담양의 밤 또한 하바롭스크의 밤처럼 차갑다. 방공호 같은 집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밤바람 소리가 마치 늑대 우는 소리 같다. 외롭게 살다간 이의 혼이 우는 소리일까.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맡았던 냄새. 독특한 바람 냄새. 건너온 자, 건너간 자들이 남긴 몸 냄새 같다.

김장배추를 다듬던 할매가 그랬다. “배추에서 단내가 나요. 인자 겁나 추울랑갑소.” 늑대처럼 사람도 냄새만 맡아도 알아차리는 게 많다. 자유의 냄새를 맡은 우리는 국경을 넘고 체제를 넘어 더 멀리 도망쳐야지. 총을 쏘든가 말든가. 사람은 죽여도 자유는 죽일 수 없다. 자유를 향한 이 갈망. 더는 분단과 총성이 없는 땅. 탈출다운 탈출을 이제 모두 각오할 때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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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나라 시인들은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자주 서 있었다. 몸이 그곳에 없으면 마음이라도 밤새 세워놓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며 거친 대자보를 이어갔다. 여행하고 사랑하는 일조차 미안한 시절이었다. 눈꽃이 피면 눈꽃 보러 지리산에 가야 한다. 억새가 보고 싶으면 제주도 올레길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시인들. 하루는 비행기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제주도에 다녀왔다. 김종해 시인의 ‘섬 하나’란 시를 펄럭거리면서 말이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섬 하나. 슬픔 때문에 안개가 잦은 내 뱃길 위에 어머니가 부려놓은 섬 하나. 오늘은 벼랑 끝에 노란 원추리 꽃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 집 눈썹 밑에 매달려 있다. 서투른 물질 속에 날은 저무는데 어머니가 빌려주신 남빛 바다. 이젠 저 섬으로 내가 가야 할 때다.” 남빛 바다는 내가 없는데도 오래도록 잘 있어주었구나. 어느 날 캄캄한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시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였다. 장소는 제주도. 원추리 꽃과 유채꽃이 노랗게 일렁거리는 남빛 바다가 눈앞에 수두룩했다.

“삶의 아름다움과 비애가 동시에 내재된 시어를 사용했다면 더 깊은 울림이 가능했을 것 같네요.” 곶자왈 시동인 턱주가리 샘의 조언에 끙끙 앓던 시인. 월수 30만원의 방과후 학교 글짓기 교사 현택기 시인.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가난한 동네 청년을 사랑하게 된 시인. “세상에서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뭐가 필요한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건 한 사람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줄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 망가지지 않아.” 위태롭던 감정도 사랑도 파도에 쓸려가듯 떠나가고, 똑같은 일상에 팽개쳐진 시인은 그래도 또박또박 ‘희망’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내려간다. 시인은 결국 시로써 구원을 입는 존재.

제주도 밤바다는 언제보아도 좋더라. 조선에선 북두칠성과 삼태성, 또 문창성. 서양에서는 한 덩어리로 큰곰자리 별하늘. 옛 선비들과 시인들은 급제하려고 문창성을 찾아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단다. 좋은 시가 점지된다면 무슨 일을 못할까. 오래된 떡갈나무가 서 있는 풍경처럼 하늘엔 별들이, 땅에는 시인들이 살아주었으면 바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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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들의 마을엔 벌써 첫눈이 내렸단다. 추운 날 가만 온돌방에 붙어 있으며 소설가 이경자가 쓴 <시인 신경림>을 읽었다. 시인이 함께했던 어린이 잡지 ‘별나라’ 첫 장에 쓰여 있다는 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잘살고, 그 아들딸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 그런 세상이 별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되길 나도 빌었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 사막과 초원까지 가서 찾던 별이 보인다. 종로 을지로 그리고 서울을 온통 뒤덮은 뜨거운 숨결 속에 별이 보인다. (중략) 너무 어두워 서울 하늘에서는 사라진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보인다. 눈비도 아랑곳없이 늦도록 흩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촛불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신경림, 별이 보인다.) 촛불 혁명 내내 도심에 뜬 별들. 하늘은 눈구름으로 캄캄해지고 송이눈이 함지박으로 내리는 날에도 기상관측 사상 최초(?)로 광장에 별이 내려앉은 순간들을 우리는 목격했다. 때가 차면 때가 됐다고, 열일 제치고 말했던 우리들.

이건 레몽 크노의 시집 <만돌린을 든 개>에 나오는 구절이다. “눈이 올 땐 눈이 온다고, 열일 제치고 말해야 한다.” 별이 눈부시거나 눈이 내리는 순간,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다 같이 “별이야! 눈이야!” 소리친다면 우리 인생이 배나 아름답고 소중해질 거 같다. 여행을 할 때 비행기가 공중에 뜨면 꼬마 친구들은 일제히 박수를 친다. 천진무구 기쁨에 찬 탄성을 잃어버린, 굳고 말라버린 시무룩한 어른들. “돈이야! 내 거야!” 밤낮 없는 아귀다툼 속에 쪼그라들고 비틀어진 인생들.

별처럼 나뭇가지에 높이 떴던 감을 따다가 쟁여놓고 보니 얌전히 홍시가 되고 곶감이 되었구나. 단단하고 떫던 감도 시간이 흐르면 물렁물렁하고 달달해진다. 우리 인생도 세월 따라 물렁하고 달콤해져야지. 돈이야! 내 거야! 소리치고 다니지 말고 별이야! 눈이야! 소리치며 살아야지. 작년엔 모진 추위에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 연말엔 안도하는 탄성을 내지를 수 있길. 촛불 정권은 오로지 국민만 보고 적폐청산 고삐를 세게 당겨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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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두 분. 한 분은 별로 말이 없으신 분. 아무리 뒷방 어르신이어도 아버지는 아버지. 다른 한 분은 대형교회를 세습한 어떤 아들 목사. 자라면서 하나님으로 불렸다니 어째 거시기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으나 도통 세상에선 관심이 없었는데, 제대로 홈런 한 방에다 관심 팍! 주위의 염려하는 목소리에 눈귀를 닫아걸고, 오로지 자기들 무리에서만 아멘 제창이구나.

우리 동네 교회 두어 곳. 목사 자녀에게 물려줄 거라곤 교인들보다 가난했을 기억과 감나무뿐인 작은 교회. 손때 묻은 의자와 기도 냄새가 좋아라. 한번은 젊은 목사가 나를 찾아와 전도를 감행. 장차 믿어보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흙구덩이 촌구석에서 자연에 의지하여 지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과일값이나 하시라고 헌금도 했지. 교회 바깥에 이름 없는 교회와 목사들이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학자 서남동 선생 말씀처럼, 예수는 한국에 와서 ‘만적 임꺽정 박장각 갈처사 장길산 홍경래 전봉준 묘청 사명당 수운 만해 장일담 전태일 윤상원 박종철…’ 혁명적 반항아들의 족보 속에 있으면 있었지 목사들의 족보 따위엔 안 계신다.

수도자 ‘토마스 머턴’은 <명상의 씨>에서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신비 생활(신앙 생활)에서 가장 나쁜 환상은 그대를 그대 마음속에다 가두어 놓고, 순수한 집념과 의지력만으로 밖에서 오는 모든 실재는 봉쇄해 버리고, 그대의 마음을 신념만으로 꽉 채우고, 바깥 세계와 이웃 사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자라목처럼 움츠림으로서 주님을 찾아보려 드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짓을 하려던 사람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목사는 길 위에 있는 순례자다. 목사의 가족조차도 보헤미아 집시들처럼 움직이는 ‘가족 순례단’이다. 장로가 촌장이라면 목사는 잠시 머무는 성경교사. “한 장의 잎사귀처럼 걸어 다니라. 당신이 언제라도 떨어져 내릴 수 있음을 기억하라. 자신의 시간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 순례자 시인 나오미 쉬하브 니예의 고언을 새겨보는 시간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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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불통이라고도 한다. 소통 반대 불통과는 다른 말. 풍선 불통이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풍경. 에베레스트 고산이 있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풍선을 닮은 구름이 떠다니고 아이들이 놓친 풍선도 더불어 날아다닌다. 아기 원숭이는 풍선을 쥐어보려고 보리수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엄마에게 혼이 났다. 바람의 말이라는 뜻의 오색 깃발 ‘룽다’가 펄럭이는 나무. 아기 원숭이는 애먼 룽다를 한 번 손바닥으로 쳐보고는 엄마 품으로 쏘옥. 불통이랑은 다른 치통. 길 떠나는 날부터 잇몸이 욱신욱신 아팠다. 치통약을 한 알 삼키고서 집에 돌아갈 날을 세보았다. 여행하면서 어디 몸 한구석 문제가 생기면 고약해진다. 하늘에 별을 보고 빌었다. 잠깐 사랑니 앓듯 스윽 지나가기를….

다이 시지에가 쓴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라는 소설엔 치통 이야기가 배를 쥐게 만든다. 모주석의 문화대혁명 때 치과의사 아들인 뤄는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상재교육을 받으러 시골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촌장의 교활한 감시를 당하는데, 치통에 시달리는 촌장을 치료하는 대목은 ‘웃프다’. 집에서 보고 배운 게 있을 거라 믿고 아픈 치아를 내맡기는 촌장. 치아를 쪼는 바늘은 재봉틀로 결정했다. 발로 구르는 재봉틀에 촌장을 눕히고 재봉틀 바늘을 이용해 이빨을 쪼아대고 갈아낸다는 해프닝. 그렇게 촌장에게 복수하는 뤄의 야릇한 후기는 이렇다. “촌장은 굵은 밧줄로 침대에 묶였을 뿐 아니라 영화의 고문 장면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로 재봉사의 강철 같은 손에 덜미를 잡혀 꼼짝 못했다. 촌장은 입의 양쪽 아귀로 거품을 뿜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숨을 쉬면서 신음을 토했다.” 아무리 아파도 이 구절 앞에선 치통이 거짓말처럼 싹 걷힌다. 아프단 말조차 꺼내지 말아야지.

수많은 통증. 분단의 통증, 불평등의 통증. 두통 치통, 때마다 생리통.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풍선 불통을 불며 개운한 세상을 꿈꾼다. 진통으로 태어나서 고통 끝에 죽는 인생. 참고 견디며 꿈을 꾸는 이는 복이 있으리니, 그대! 풍선 불통이 되어 훨훨 새처럼 유성처럼 날아오르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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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수확의 계절. 안나푸르나는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그야말로 진정한 가을산행. 나는 지금 넉넉하고 드높은 설산들 곁에 와 있다. 주먹밥 정신으로 뭉친 광주 의사들이 일군 네팔 진료소가 이곳에 있다. 둘러볼 겸 겸사겸사 찾아온 길.고개만 들면 물고기 꼬리 모양의 마차푸차레, 웅장한 안나푸르나 설산, 강가푸르나, 닐기리, 다울라기리, 최고봉 고산들이 일렬로 쭉 펼쳐진 병풍 모양. 두메산골이지만 온 세계 히피 여행자들로 골목은 또 날마다 축제가 된다. 이곳 산촌 친구들을 위해 폴라로이드 즉석 사진기를 한 대 들고 왔다. 꽃담 밖에만 있던 아이들이 깔까르르 웃으며 다가오는 것은 즉석 사진의 위력. 낯을 가리던 아이들도 사진 한 장 찍어달라며 소매를 잡아끈다. 오로지 자신이 주인공인 사진을 가져본 일이 없던 친구들은 횡재를 했다. 저마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라고 축복해주었다.

“사진기 한 번 줘보세요. 아저씨 사진은 내가 찍어 드릴게요.” “아냐. 내 얼굴을 찍은 사진은 엄청 많아. 이건 너희들 찍어주려고 가져온 사진기야.” 사진기를 만져보고 싶어 호시탐탐. 콧물 풍선을 달고 사는 아이 목에다 사진기를 걸어주었더니 모두가 부러워서 입이 벌어진다. 해진 소매 끝엔 땟자국이 거무뎅뎅. 손톱 끝에도 때가 끼어 있지만 한 번 웃을 때면 설산만큼 하얀 이를 드러내는 이곳 아이들이다. 교사이며 작가인 폴 셰퍼드는 이런 말을 남겼지. “말하기 순간부터 사춘기의 출발 지점까지 그 10년은 우리가 노아의 방주에 넣어야 할 모든 것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언제야 서열화된 학교, 사교육과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노아의 방주에 학식만을 집어넣어 가지고는 우리네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아침마다 ‘나마스테’라고 인사한다. 산기슭 벼랑바위에 사는 산양에게도 나마스테, 쥐방울만 한 꼬마들에게도 합장한다. 나마스(경배합니다), 테(당신에게, 당신 안에 사는 신에게) 그래서 나마스테. 즉석 사진기를 들고 만나는 모든 신성한 얼굴들에게 경배하며 인사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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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귀여미’들을 젖 먹여 키우던 엄마 진돗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 인형처럼 생긴 강아지를 한 마리 꼬드겨설랑 툇마루로 가던 차였는데, 엄마개가 나를 뒤에서 악 물었다. 겉으론 새하얀 천사 옷을 걸치고 선량한 표정을 짓던 흰둥이 백구. 개주인 할머니가 이빨자국이 난 발목에다가 된장을 발라주었다. 집에 왔더니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소독용 알코올로 씻어내시곤 “개를 된장 발라야지 너를 된장 발랐구나”그러셨다. 며칠 발목이 퉁퉁 부어 고생하였다. 이후 진돗개라면 삼십육계 도망부터 치게 되었다. ‘전설의 고향’ 전문 출연 귀신처럼 새하얀 소복을 걸친 백구 진돗개. 그때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덥석 안아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법망을 용케 피해 다니는 높으신 양반들의 삼십육계. 무슨 조폭 영화 속의 장면들 같아. “그 인간 아직도 감옥에 안 갔대?” “빵에 들어가도 존 대접 받다가 금방 휠체어 타고 또 나오겄쟁.” 허탈한 표정으로 클클. 고작 나는 개를 피해 도망 다니는 딱하고 못난 신세. 이러려고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났는지 자괴감이 드는구나.

주사가 심한 취객도 개나 마찬가지다. 웃자고 하는 말을 죽자고 덤벼드는 누군가 꼭 술자리에 있다. 하나 마나 한 말씨름 끝에 쌍시옷 욕까지 섞이는 순간은 하루를 망치는 대단원의 막. 두말없이 자리를 피해 도망쳐야 한다. 화장실과 택시는 그대와 나의 구세주. 이제는 나도 삼십육계 나이가 되어 낯설고 험상궂은 얼굴들 죽치고 앉아 있으면 후다닥 내빼고부터 본다. 특히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나선 호위무사들은 가장 드세고 무섭다. 무엇인가를 지켜야지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어리석은 착각이요 맹신이다. 정치도 종교도 사람에 대한 맹신은 적폐의 온상이다. 산천을 두루 돌며 삽십육계를 배우고, 발목이 아닌 모가지를 물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건 비겁함과 사뭇 다른 태도다. 수많은 낙향 선비들, 유배자, 촌장들과 촌뜨기, 여행자들이 삼십육계로 약을 올리며 개들의 힘을 뺀 까닭에 그나마 역사가 굽이굽이 이 자리에까지 고이 흘러왔다. 죽기 살기로 맞대결, 정통일계로만 살다보면 매우 피곤하고 팍팍한 세상에 갇히게끔 되어 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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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다다 탈곡기 소리에 벌떡 깼다. 평야엔 농부들과 볏섬, 참새 떼가 일찍부터 내려앉았고 달과 별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어라. 그 둥글고 크던 얼굴. “모두가 낮잠을 자는 이유구려. 저 둥근 달.” 언젠가 읽었던 하이쿠 한 소절. 풀벌레 소리에 잠 못 들고 환한 달빛에 잠 설치고 부지런한 농부들 땜시 아침잠도 빼앗겼다. 낮잠으로 보충하면 되지 뭐. 꼭 밤에만 자라는 법도 없다. 수도원 규칙이 암만 엄해도 성덕이 깊은 수도원장은 “사람이 먼저다!” 팁을 살짝 뿌린다. “규칙은 사랑 앞에서 허물어뜨리라고 있는 거라네. 그걸 잊어버리면 자네들은 수도원에 있는 기계밖에 더 되겠어.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그 다음에 규칙이네.” 여행과 사랑과 잠의 세월. 그리고 기나긴 단잠, 사후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옥에 계신 그분이 언젠가 잠이 보약이라고 했다지. 보약 맞다. 하지만 건강한 삶을 산 뒤의 단잠이어야 맞다. 북미 원주민들은 ‘자연 모든 곳에 있다’라는 뜻의 ‘음페손’을 약을 칭하는 낱말로 썼다. 그중에 최고는 ‘에그트지 음페손’. 바깥 땅 위에서 약을 구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혼돈과 불안, 슬픈 억눌림, 옹졸한 생각들을 몰아내야만 진정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거다.

약을 한 봉다리씩 입에 물고 사시는 동네 할머니들. 다리가 풀려 그만 넘어져서 다치신 분들도 간간이 보인다. 하체를 튼튼하게 다지려면 자주 걸어야 한다. 누워 버릇하면 영원히 눕는 수가 있다. 잠은 가장 나중에, 마지막 순서다. 눕기 전에 명약을 구해다 달여 먹고, 세상에 두루 약이 되는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

촛불 시민혁명 1주년. 이모저모 국민들은 마음의 상처, 내상이 크고도 깊다. 적폐 청산이야말로 가장 큰 치유이고 명약이 아니겠는가. 축구대표든 태극기 집회 어르신들이든 태극전사 말고는 다시는 이전의 시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난 길. 우리가 모두 살길. 사람이 먼저인 세상.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위해서는 에그트지 음페손을 어서 손에 쥐어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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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마다 붉은 분칠. 담장 넝쿨도 발개져서 멀리서 보면 마치 집이 불난 듯 보여. 북쪽으로 삼십분쯤 가면 내장산 단풍 숲. 예까지 길게 늘어선 단풍나무들은 집성촌에 모여사는 친척들 같아.

여긴 동물원이 아닌 식물원. 기린처럼 목을 길게 늘이 뺀 나무들. 잎들 떨어지면 나무들은 추워 솜눈 이불을 뒤집어쓰겠지. 첫눈이 나리면 세상은 검거나 희거나 모노톤 흑백의 산천. 불바다 불산이 타고 나면 잿가루 같은 눈이 내릴 테고, 단풍잎들 낙엽이 되어 층층 묻히면 어디라도 무덤산.

산불조심 깃발을 앞세운 국유림 관리소 직원들의 홍보 차량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간다. 개들도 알았다고 컹컹. 야옹이도 알았다고 용용. 건조한 날씨에 바람이라도 거칠면 산불이 번질까 덜컥 겁부터 생긴다. 서울도 평양도 해마다 단풍으로 불바다. 단풍 들면 어디나 불바다.

그런 불바다 말고는 무서운 불소식. 불벼락 전쟁놀음도 한심한 소란 소동. 프랑스 투르 지방의 성자 마틴은 그랬다네.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라네. 그러니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없지.” 전쟁과 불화의 십자군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라네.

정의와 평화가 수놓는 폭죽 가을 잎사귀들. 펑펑 터지는 가을밤 유성우. 오줌으로 따발총을 갈기면서 아이들은 이 강산에서 즐거웁게 자라나야지. 불바다 불산 가을단풍도 한 시절이렷다.

우리 인생 눈 깜짝하면 흰 머리칼. 겨울 되면 펭귄만 좋은 일. 펭귄도 겨울 추위가 좋아 극지방에 모인 게 아니라지. 싸우기 싫어 멀리멀리 도망친 거라지. 천적 원수가 없는 곳. 얼음바다 얼음산.

감나무마다 불처럼 번진 붉은 홍시. 별 폭죽 팡팡 터진 홍시에 불새들과 날벌레가 달라붙어 주린 배를 채운다. 산밭에 단감이 제법 많이 열려 일삼아 따야 하는데, 날마다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 새들과 싸우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나나 저나 욕심부리지 않기 때문이네. 새들은 주머니도 창고도 없지. 나도 태풍 없는 풍작, 과하다 싶은 축복에 데면데면 엉거주춤 그러고 있는 중.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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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에 프랑스 사람 무슈 달로와요는 제 살던 동네에 처음 빵집을 열었는데 이제는 전 세계에 빵집이 생겨났다. 이름값을 할라치면 달로 와요 달로 오시랑께요, 달나라까지 뻗어나갈 기세렷다. 이름이 예쁜 빵집엔 시선이 먼저 모아진다. 아이들처럼 빵을 좋아한다. 요샌 무화과 쨈이 제철이고, 봄여름엔 딸기 쨈. 구운 식빵에 쨈을 발라 커피나 생과일 주스랑 먹으면 허기가 가시고 금세 배가 빵빵 남산이다. 즐겁고 간단한 요기에 이만한 먹거리가 또 없다.

읍내나 대도시로 나가야 빵 구경을 할 수가 있다. 면소재지엔 없는 게 많은데, 그중에 빵집도 하나. 유기농 재료로 구워 만든 건강한 빵을 맛보려면 더 멀리 도전해야 한다. 좋은 빵은 은수자나 된 것처럼 숨어 있다. 백조가 사는 호수마다 푸드 트럭, 간이 빵집이 있어 햄버거 핫도그 도넛 여름엔 아이스크림, 그리고 음료를 사먹을 수 있던 곳. 지난여름 영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백조의 호수 빵집들이 부러웠다. 호숫가 의자에 앉아 빵을 나눠 먹는 연인들. 두려움을 잊은 백조는 부스러기라도 뭐 없나 뭍으로 성큼 올라오기도 했다. 은하수 모든 별들도 호수에 같이 살고 있었는데, 배때기가 뚱뚱한 백조가 물북을 치며 뛰어들면 새까만 밑바닥으로 몸들을 숨겼다. 한반도를 수시로 선회비행하며 검은 죽음의 폭탄을 뽐내고 있는 죽음의 백조 폭격기. 미군 폭격기 별명을 ‘죽음의 백조(swan of death)’라 누가 처음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백조들이 노니는 평화로운 호숫가 공원의 풍경을 아는 사람들에겐 정말 치를 떨게 하는 이름이라 싶다. 도대체 어떤 세력들이 부추기고 원하길래 이 푸른 가을 하늘에다 시꺼먼 폭격기를 그려 넣는 걸까. 백조는 다 어디로 가고 저 시꺼먼 악령들이 부리를 쪼으며 설쳐대는 걸까.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보는 일이다. 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극장에 앉아 발레리나의 백조 춤을 감상하는 밤을 꿈꾼다. 백조의 호수 빵집에 앉아 늘 보던 진짜 백조들의 춤. 그와 사뭇 다른 풍경일 게다. 익숙한 음악도 흐를 테고 말이다. 손을 잡고서, 당신과 함께라면 좋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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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으로는 여행프로나 좀 보고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요새 방송사가 파업 중이라 재방송이 많다. 책을 다시 읽으면 별미인 것처럼 파업 때문에 듣는 재방송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방송이 볼 게 없으면 아껴두었던 영화를 한 편 찾아봐도 되고 말이다. 며칠 전엔 영화와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안겨준 선물로 두 눈이 호강했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켄 로치, 나막신의 감독 에르마노 올미 이들 셋이서 쿵닥쿵닥 만든 옴니버스 영화 <티켓>. 1등석 2등석 3등석, 칸마다 다른 군상들. 로마로 가는 짜릿하고 낭만적인 기차 여행. 가슴이 홍시처럼 붉어지고 달콤해졌다. 파업도 종종해야 하겠다. 그때는 이처럼 놓칠 뻔한 영화를 찾아볼 기회가 생길 테니까.

수다스러운 라디오도 잠시 끄고, 듣고 싶었던 노랠 찾아들어도 좋겠다. 총리 아저씨 말씀마따나 보다 공정한 뉴스를 찾아들어도 좋겠다. 윗선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메인 앵커에게 물 좀 아끼라 했다고 수년간 일거리 없는 ‘옆방’에서 지냈다는 선배 기자의 증언. 이도 워터게이트라 하던가. 나이 들고 볼품없는 사람들도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까. 휘황한 햇빛만 믿고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추한 군상들. 세상이 온통 적폐로 몸살을 앓고 있다. ‘파업전야’ 노래가 동네방네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새로움만을 좇는 세상에 재방송을 듣는 즐거움. 개봉영화가 아니라 흘러간 영화를 찾아보는 즐거움. 겁 없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주의하고 조심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힘 빼기의 기술’을 잘 안다. 카피라이터 김하나씨의 에세이 <힘 빼기의 기술>도 참 재미나게 읽었다. 제목부터가 나를 화끈 홀렸다. “주삿바늘 앞에 초연한 엉덩이처럼 힘을 빼면 삶은 더 경쾌하고 유연해진다.” 일본의 유명 극작가인 구도 간쿠로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쁜 와중에 각본을 그리 잘 쓰시는 비결이라도?” 대답인즉슨 “일단 잘 쓰고 싶지 않아요”. 백지 앞에서 부푸는 욕심,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순간 명문장이 찾아드는 것일까. 올해 추석명절은 아주 긴 휴식기로 달콤하겠다. 힘을 빼는 재방송 시간. 기운을 빼고 뒤를 돌아보며 두루두루 살펴보는 귀한 시간들이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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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없다가 오늘은 다시 구름이 꼈다. 낮에는 하얗다가 노을이 스며드는 저녁때면 분홍빛으로 바뀌는 구름. 바라보자니 분홍 스웨터를 입은 윤 초시네 증손녀딸이 생각난다. 갈밭 사잇길을 갈꽃 꺾어 들고 함께 걷던 소년과 소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이야기.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잎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근데 이 양산같이 생긴 노란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소녀는 병상에서 죽으며, 땅에 묻힐 때 분홍 스웨터 그대로 입혀 달라고 했었다지. 스웨터에는 풀냄새 꽃냄새, 소년의 등에 업혔다가 옮은 검붉은 진흙물도 함께.

밤에는 구름 뒤로 수십억광년 먼별이 반짝거린다. 황순원의 다른 소설 <별>은 엄마 생각에 눈물나게 한다. “하늘에 별이 별나게 많은 첫가을 밤이었다. 아이는 전에 땅위의 이슬같이만 느껴지던 별이 오늘 밤엔 그 어느 하나가 꼭 어머니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수많은 별을 뒤지고 있었다.”

먼별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고작 6000년이 아니라 6억년, 60억년 오랜 세월을 빛의 속도로 부지런히 달려온 것이렷다. 상식 밖의 얼토당토않은 유사과학 창조과학이 아니라 오래 묵은 사랑인 은하의 별들. 수수한 꽃별들의 사랑 얘기. 분홍 스웨터 입은 소녀도 별이 되어 수십억광년 성운 속에서 반짝거린다. 교리나 교조가 아닌 사랑들로 세상엔 노란 마타리꽃이 피어나고, 그 노란 양산과 우산으로 따가운 햇살과 소나기를 피했던 인생. 소녀는 분홍 스웨터 구름이 반짝거리는 서녘에 서서 ‘해로운 신앙’이 아닌 ‘온기 있는 사랑’으로 소년을 기다려주겠지. 사랑하는 사이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다. 그립고 그리운 것들마다 은총 있으라. 만나면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내 사랑. 노란빛 분홍빛 꽃들과 별과 구름으로 벙그러진 대우주. 눈에 보이지 않는 백색왜성, 중성자 별이라도 분홍 스웨터 입은 소녀를 서녘 노을에서 만나듯 결국엔 깜짝이야, 만나게 되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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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마다 잊지 않고 사 모으는 게 있는데 에코백 천가방이다. 도시의 이름이나 어디 서점, 음반점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작가 로렌스의 이름이 새겨진 에코백. 길에서 누군가 메고 가는 에코백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화가, 가수의 이름과 도시가 새겨진 에코백을 만나면 무지 반갑다. 명품 가죽 가방도 하나쯤 뭐 좋겠지만, 거창하게 지구환경까지 말하고 싶진 않고, 에코백이 건강하고 멋져 보인다. 정성을 다해 직접 손바느질로 에코백을 만들어 들고 다니는 부인들도 있다. 따봉 따봉, 엄지손가락 척~.

요새는 해외 고급 백화점과 서점마다 필수로 에코백 판매대를 두고 있다. 일회용 포장, 비닐을 줄여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실용성 말고 패션의 지위로까지 높이 올라가는 분위기다. 젊은 치들이 명품 백을 휘두르는 건 별로 곱게 보이지 않는다. 엄마 걸 들고나온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샹젤리제나 몽마르트역 어디도 아닌데 철심 줄로 친친 감긴 가방을 가슴에 움켜쥐고 다닐 필요까지야. 책 한 권 들어가지 못할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무식을 온 천하에 자랑하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 젊음의 자랑은 돈이 아니라 건강미와 지성미. 누구는 그것이야말로 섹시미, 야하다고 말했던가.

마광수 교수를 뵌 것은 가수 한대수 사진전으로 기억한다. 하얀 천조각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앞자루에 박힌 에코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일행도 수줍은 얼굴이었는데 스치듯 다른 일행들 속에 파묻혔다. 윤동주처럼 창백한 얼굴을 가진 마광수 샘은 학원에서 쫓겨나 감옥이나 외진 식당을 전전하며 지냈다. 그가 들고 다닌 가방 중에 하필 그 에코백의 기억을 내가 지닌 것은 무슨 때문일까. 그 속에 어떤 책과 또 시가 담겨져 있을까 궁금했었다. 다소 커 보이는 상의를 걸친 구부정한 어깨선.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사라를 좋아한다 말했던 눈빛은 누구보다도 솔직했다. 검열을 피해 다급히 적고 또 찢었을 노트에는 같이 ‘콩밥을 먹은 문장들’이 슬픈 나체로 누워 있었겠다. 문학 선생의 에코백을 찢어 콘돔이라도 하나 주운 자들이 내지른 비명들로 세상은 소음천지, 위선의 진풍경이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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