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203건

  1. 2017.01.19 블랙리스트
  2. 2017.01.12 구둣발차기
  3. 2017.01.05 우주의 기운
  4. 2016.12.29 육식에서 채식으로
  5. 2016.12.22 여우골 성탄절
  6. 2016.12.15 간장 종지
  7. 2016.12.12 담뱃불과 촛불
  8. 2016.12.01 고산병
  9. 2016.11.24 사상누각
  10. 2016.11.17 바지락 반지락
  11. 2016.11.10 마리아치 악단
  12. 2016.11.03 망자와 망초꽃
  13. 2016.10.27 부사령관 아저씨
  14. 2016.10.20 오르골 소리
  15. 2016.10.13 시골 군인의 노래
  16. 2016.10.06 선한 미소
  17. 2016.09.29 단식 인생
  18. 2016.09.22 머리를 식히는 방법
  19. 2016.09.08 마추픽추
  20. 2016.09.01 야경꾼

시꺼먼 키다리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별도 없는 시꺼먼 밤, 공기의 울타리 시꺼먼 산. 시꺼먼 혀를 궁글리는 차우차우 강아지들, 시꺼먼 내 그림자가 사는 집마당. 서로 시꺼먼 눈동자를 주고받는 까무잡잡 까마귀들. 벌겋게 달아오르기 직전의 시꺼먼 철제 난로, 흰눈에 덮이기 앞서 시꺼먼 기와 지붕. 검은 현무암으로 깎은 석등과 검은 돌들. 동네 앞길을 데구루루 굴러가는 리어카 바퀴도 블랙. 굶은 고라니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마을로 내려올 때는 외등도 촉이 나가 숨죽이는 블랙홀. 거무스레 냇물에 잠겨 있는 징검돌을 밟으러 밤중에 나가보면 시냇물조차 먹물처럼 시꺼멓고….

비틀스가 노래한 ‘블랙버드’를 사랑한다. “어둠 속에서 검은 새가 노래하네. 날개가 부러져 파닥거리면서.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네. 침몰한 눈을 껌벅이며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검은 새는 눈을 떴네. 생을 다해 자유를 꿈꾸는 새여.” ‘펄잼’의 보컬인 에디 베더가 이 노랠 기가 막히게 불렀다. 자리한 모든 관중들이 따라서 새소리를 내는데, 볼 때마다 전율케 하는 감동이 있다.

문화융성은 개뿔, 문화충성의 시대를 만들려다 들통이 난 블랙리스트 사건. 이번만은 뿔난 블랙버드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다. 새들은 경계 없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자유혼을 퍼트리는 것이 소임. 낮에는 흰 구름과 흰 새, 밤에는 검은 산과 검은 새. 만약 새들이 휘파람 소리를 더 이상 내지 않는다면 지상은 적막한 동굴 속일 뿐.

전설에 따르면 하늘을 덮을 만큼 크고 영험한 검은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밤새 숯검댕이 같은 어둠을 집어삼켜야 하는 운명이었단다. 마침내 어둠을 다 삼킨 뒤 그걸 뱉어내자 불덩어리가 되었고, 아침 태양이 그렇게 해서 떠올랐다는 얘기. 그간 어둠을 집어삼켰다면 이젠 뱉어내야 할 때. 침몰하는 선상의 아이들아. 가만히 있지 말고 헤엄쳐 나오라. 바다여! 아이들을 어둠 밖으로 빨리 내뱉어다오. 블랙리스트 검은 새들도 주눅들어 주춤하지 않기를. 생을 다해 자유를 노래하는 검은 새들이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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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 가면 대웅전 곁에 가지런히 놓인 털 고무신. 스님 보살님 처사님 차례차례 벗고 올라간 석단. 안에 몇 분이 계신지 신발 켤레를 보면 알 수 있다. 전도사 시절부터 나무마루가 깔린 교회를 다녔었는데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을 잘했다. 상갓집에 가면 누군가 그 일을 맡아서 한다. 눈에 띄지 않는, 보이지 않는 음덕들이 쌓여 신발이라도 찾아 신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털신을 찾다가 신발장에 쌓인 먼지를 보고 청소를 시작했다. 끝 구석엔 어머니 신으시던 구두가 장화 뒤에 숨어 있더라. 꼬맹이 때 아이가 신던 신발도 한 켤레 개켜져 있었다. 버리지 않기로 마음먹고 깨끗이 닦아 야물게 봉해두었다.

쓰촨성 청두 출신 바진의 단편소설 가운데 <아버지가 새 구두를 사오실 때>가 있다. 나라의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거사에 뛰어든 아버지는 아이와 약속한 구두를 사주지 못하고 결국 붙잡혀 처형되고 만다. 아이는 눈뜨자마자 구두부터 찾았으나 아버지조차 어젯밤 집에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훗날 아이는 어머니 상을 치른 뒤에야 아버지 소식을 유품으로 알게 된다.

 

윤흥길 소설 <아홉 결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주인공 권씨, 구두 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지. 광주대단지사건이라고 칠십년대 경기 성남 도시빈민들의 생존투쟁기가 녹아든 소설. 비틀린 인생 권씨에겐 반들반들 잘 닦아놓은 구두란 인생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가차 없이 돌아오는 건 구둣발과 군홧발. 행방불명된 권씨가 시방 결기 넘치는 성남 시장으로 살아 돌아온 걸까?

신발장을 둘러보니 이건 어디서 났고, 어떻게 샀는지 기억이 새록새록. 신발 고르는 취향도 조금씩 변했구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들은 대부분 군화를 몇 해 동안 신게 된다. 군대축구라고, 그거 신고 월드컵 나가면 브라질도 오대빵 십대빵 이길 수 있다. 나도 한 켤레 있었는데 곰팡이가 슬어 그만 버렸지. 박사모나 무슨 연합 어르신들은 어떻게 지금껏 관리를 잘하셨는지 궁금하다. 구둣발차기 하기에도 튼튼하고 좋겠는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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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새파란 귀때기를 두 손으로 감싸고서 밀밭과 까마귀가 있는 동네 어귀를 내달렸다. 여름엔 사이프러스나 올리브나무가 자랄 것같이 따뜻한 남프랑스 어디 같은데 겨울 되면 백팔십도 달라져서 파타고니아, 우수아이아 어디 빙하마을 같아. 거미줄처럼 내리는 차가운 빗물과 밤사이 서릿발. 구름이 새까맣게 얼룩진 날엔 눈보라가 들이치기도 할 것이리라. 김치 치즈 하면서 웃고 서 있는 건 자작나무뿐. ‘갈봄 여름 없이 산에는 꽃이 피네’ 그랬다면 이젠 눈꽃이 피어날 차례.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자 흰 산토끼는 자작나무 말고는 어디 마땅히 숨을 곳을 못 찾은 모양이다. 산길에 허둥대는 토끼를 만났는데 실눈을 뜨고 못 본 척해주었다. 토끼는 씰룩 기운을 모은 뒤에 다시 비탈길을 뛰어 달렸다. 버스를 놓칠까봐 뛰어가는 아이처럼 잽싸고 날래게. 누군가 그토록 원했던 ‘우주의 기운’을 아마도 토끼가 저 혼자 차지해버린 걸까. 조그만 몸에서 무슨 기운이 저렇게 펄펄 나는 거람.

“내가 기운 없어 보일 때는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기운을 내지 않는 거라고 나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낼 필요가 있을 때는 무슨 기운이든 기운을 냈다) 듣는 사람은 의아해했으나 정령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호랑이들도 만족스러워했다.” 정현종 시인의 ‘기운’이란 시다. 정말 맞는 말씀이다. 기운은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 세계테마 어쩌고에서 나를 봤다며 동네 부녀회장님이 그랬다. “세계적으로다가 돌아댕기시는 양반입디다잉. 퇴깽이(토끼)보다 겁나게 깔끄막(산고개)도 잘 올라타시등만.” 호랑이도 있고 뭣도 있고 하는데 하필 토끼가 뭐람. 막걸리 포도주에 눈이 빨개 살아가니 그러셨나. 그래 우주의 기운까지는 무리이고 새해 기운이나마 받아 누려야 할 시간. 산토끼가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우리 모두 토끼의 뒷다리처럼 야물딱진 뜀박질로, 기운을 내서 살아가자. 기운은 내야 하는 것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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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과 오리들이 ‘살처분’되고 있다. 이건 정말 대학살극이라 해야 맞겠지. 모두 인간의 육식 습성을 유지하려고 기르던 불쌍한 식용 가축들이렷다.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 이 재앙, 이 죄악을 막을 길은 정녕 없는 걸까. 한없이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다. 다른 나라들도 이러는지 잘 모르겠는데, 가슴이 찌릇찌릇 아프고 참 많이 속상하다.

닭과 오리를 기르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나는 아침이면 달걀보다 배나 큼지막하고 새하얀 오리알을 집어 들고서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곤 했었다. 목사관에 딸린 가축우리엔 닭, 오리, 토끼 말고도 염소까지 길렀지. 뿔 달린 염소는 자꾸 나를 쿡쿡 찌르거나 밀쳤다. ‘참피온’이라 불리던 염소 대장은 뿔 자랑을 시도 때도 없이 해댔다. 첨탑 가까이엔 여러 마리 집비둘기도 길렀어. 비둘기들은 멀리 날아갔다가도 오후면 집에 돌아오고 그랬다. 오리떼를 뒷개울에 풀어놓기도 했는데 그들도 비둘기처럼 저녁마다 귀가를 했다.

닭을 잡거나 오리를 잡는 일은 매우 특별한 날. 아버지의 선후배 목사님들이 오거나 집안 어른들이 찾아올 때. 어른들은 유쾌한 날이었지만 나는 슬픈 이별의 날이었다. 지금껏 고깃살을 그닥 찾아서 배부르게 즐기진 않는다.

나는 콩을 심기도 하고 두부를 좋아해 두부 요리를 즐긴다. 두부김치에 둘러앉으면 몇 순배를 마셨는지 막걸리가 동이 나고 없어져. 담양천변 국수거리에 가면 두부김치가 으뜸 안주. 평소 두부를 잘 먹지 않던 이들도 그 평상에 앉으면 두부김치를 찾게 된다. 두부찌개에단 강진 구강포나 장흥, 완도 뻘구덩에서 건진 바지락을 넣어야 제맛이 난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도 두부 한 모 썰어 넣으면 김치와 두부가 조화를 이루어 군침 넘어가게 만들지.

조류인플루엔자, 구제역이 도는 얼마 동안이라도 집집마다 식단을 바꾸게 될 터. 연중 닭과 오리고기를 탐하고 사는 것도 죄가 되는 일이겠다. 완전히는 어렵더라도 육식 습관에서 조금이나마 놓여나는 계기를 삼았으면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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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성탄절이다. 올해는 탄핵종이 땡땡땡. 서글픈 나랏일 때문인지 덩달아 캐럴도 사라지고 없어라. 여기는 담양이고 건너편 땅은 빛고을 광주. 빛을 담는다 하여 담양인데, 이곳엔 빛깔 좋은 여우들이 굴을 하나씩 차지하고 살았단다. 무등산엔 영험한 호랑이가 살고 있어서 담양 추월산이나 병풍산, 삼인산 자락은 여우들 차지. 호랑이 등쌀에 ‘밀린’ 여우가 나름 방귀를 뿡뿡 뀌며 재미지게 살았겠지. 그러다 한 여우는 백살을 먹고 구미호가 되었는데, 이제부터는 드라마.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 아무튼 구미호가 학정을 일삼던 원님을 내쫓았다는 이야기. 백성들은 독일어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그라제’를 연발하며 의인들과 함께했다. 오랑캐 말고 ‘그랑께’, 비아그라 말고 ‘그라지라’를 입버릇으로 말하고, 불어로는 ‘그래 불어’, 정의에 맞장구를 치면서 참세상 올바른 나라를 꿈꿨다. “뭐시라고?” 포악한 임금이 나타나거나 왜군이 쳐들어온달지 하면 죽창을 깎아들고 별보다 환한 횃불을 높이고서 저 산을 넘기도 했었다.

남녘교회 목사 때는 성탄절마다 아이들과 함께 전나무에 왕방울을 달면서 성탄 장식을 했었다. 북녘 동포, 봉수교회에 성탄엽서도 한 장 써서 달았지. 보내진 못했지만 해마다 그랬었다. 국정원에도 잡히지 않는 꼬리 아흔아홉 개 달린 구미호 편에 보낼걸 그랬어. 누군 대놓고 편지도 보내고 그랬더라만…. 참, 북조선 그리스도교연맹이 올해로 70주년이란다. 축하 축하. 통일되면 북녘 친구들이랑 백두산 소나무에 성탄 장식도 하고 그래야지. 차가운 바람을 뚫고 우리는 따순 봄나라로 갈 거다. “이리 붙어라!” 놀이처럼 통일나라로 갈 사람은 이리 붙어라!

여우골 성탄절. 나는 또 전시 놀이를 시작했어. 오래된 미곡 창고를 개조한 담빛예술창고. 전시와 곁들여 일본인 가수 친구 사토 유키에랑 아시아 평화를 기도하는 음악회도 열고. 평화와 통일, 거창한 구호 같지만 나부터 우리부터 작고 소소하게 시작하면 되는 거다. 평화나 통일은 대박이나 로또가 아니야. 차근차근 작은 하나됨부터 일궈가는 거지. 나부터 우리부터, 여우와 토끼도, 아기 예수도 함께하는 이 걸음마. 이 거룩하고 장엄한 행진에 같이해요!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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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시절 찬물에 간장을 한숟갈 타서 마시곤 했다는 이야길 아시는가. 애들이 들으면 짜장면 시켜먹지 왜 그랬느냐 찡그리겠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배고픈 시절도 아마 없었을 거다. 찬물에 간장을 타 먹어야 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해방이 되고 노동자들은 정말 열심히, 신물이 올라올 만큼 일을 했다. 배고픔과 무식을 깨쳐보려 지문이 닳도록 일을 하고, 야학도 다녔다. 자녀교육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근면한 노동자들 덕택에 나라경제는 쑥쑥 성장해갔다. 하지만 야간 잔업은 들어봤어도 야간 수당은 들어보질 못했어. 닭장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일도 감지덕지. 부정부패가 없고 고른 분배를 깨우쳤다면 북유럽이 뭐야.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선진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멀쩡하던 제 나라를 군홧발로 짓밟은 똥별들이 있었다. 총칼로 무장한 별똥부대는 자본가들과 쿵짝짝이 되어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후로 자자손손 그들만(그들 자녀만) 행복했다. 그들이 세운 정당은 누구처럼 자주 이름을 바꿔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잠시 흙탕물을 튀겨가며 싸우고들 계시지만 금세 재건하여 또 한번의 파국을 몰고 오겠지. 악으로 깡으로, 군인 정신으로 세운 정당이 쉽게 문을 닫겠는가.

세상이 어찌 되든 말든 찢어지게 행복해서, 웃을 때 입매가 상상할 수 없이 넓어지더군. 진실 앞에선 모르쇠로 일관해야 하니까 입을 꾹 다물지만, 평소엔 누구처럼 간장병 한통이 들어갈 만큼 화끈하게 웃을 수 있다. 즐겁고 기쁘니까 웃을 테지. 불행한 일을 당한 이웃들 앞에서 한껏 웃는 건 대체 무슨 취미일까. 철면피 강심장들만 골라서 자리에 앉히는 모양이다. 난롯불에 살짝 구운 김을 싸 먹으려고 간장 종지를 찾았는데 한참 못 찾다가 이제 찾았다. 속히 민주주의를 되찾고 싶다. 눈 오는 밤에는 격문이 아닌 시를 쓰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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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알아보지 못해 툭하면 이를 드러내고 짖어대는 개. 얼마나 멍청한가. 그래서 똥개 소리를 듣는 모양이다. 저문 골목길 똥개들이 별똥별을 집어먹고 별별 소리들로 짖어대다가 턱주가리가 아파선지 끙끙 잠이 들었다. 개가 한 푸닥거리 마친 뒤 이번엔 고양이 차례. 스님처럼 가부좌로 앉아 심야심경인지 반야심경인지를 옹알쫑알 외우는 보살 고양이. 하늘에서 고운 눈가루가 뿌려지자 고양이는 아궁이 불을 찾아 후다닥 뛰어간다. 나무껍질에 기름을 품은 자작나무 한 그루 어디선가 자글자글 불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올겨울 처음 아궁이 가득 불을 지폈다. 굴뚝으로 연기가 푸르릉. 담배처럼 생긴 굴뚝 연통은 연말에 산타 할아범이 청소를 해주시겠지. 밀걸레 대신 흰 수염으로다가 깨끗이.

어떤 집들은 영하 한파에 아랫도리조차 얼어붙겠다. 장가도 한번 못 가보고 늙어버린 사내들이 울면서 술 취하는 밤. 뻣뻣한 어깨를 아스스 떨며 한잔 또 한잔 부어대면 이내 차갑던 방이 찜질방처럼 달궈져. 촛불집회를 하는 것도 아닌데 담배 연기를 뺀다고 켜놓은 촛불은 저 혼자서 타오르며 시국기도 중. 마른 풀잎들 서걱거리는 흙길로 부연 먼지를 뿜으며 떠난 막차는 텅텅 비어 마치 유령선만 같아라. 귀신 유령도 떠나버리고 없는 동네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목사님은 “고요하야 거룩하야” 찬송을 바꿔 불렀다가 권사님한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시무룩. 또 새내기 전도사는 진학반 고딩들이랑 담배를 나눠 태웠다가 들켜 장로님에게 끌려가 단칼에 탄핵을 당한 모양. 마을버스에 승객이 또 한 명 줄게 생겼다.

안주가 떨어지면 김장김치에 숨어 있는 굴, 석화를 골라 빼먹으면 된다. 휘청거리는 사내들은 대부분 이 시간 몰래 김장독을 뒤지고 있겠다. “일하다 죽은 노동자는 개끔(갯값)이나 던져주고 거깃다간 수백억을 갖다 바쳤담서? 트랙터로 싹 밀어부러야 쓸 시상인디 왜 길을 막고 지롤이여잉.” 담뱃값은 올려놓고, 담배 못 끊을 세상을 또 만들어놓고. 집집마다 한숨인지 연기인지 담배와 촛불이 지긋하게 타고 있는 겨울밤이렷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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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난 일인데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종편 프로그램에서 수차례 출연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뭔 소리야 웃고 말았지. 날 몰라도 한참 모르는 방송작가의 장난전화(?)가 그저 깜찍했어. 신문에다 ‘시골편지’를 오랜 날 연재하는 아저씨니 아마 오지에 은둔하여 지내면서 누렁이랑 산나물 뜯으러 댕기는 촌사람으로 짐작한 모양. 다음엔 서울이나 뉴욕에 살면서 도시편지를 연재해야 할랑가 보다. 정관장 홍삼엑기스도 잘 안 빨아먹는데 멧돼지처럼 낙엽 속을 뒤지며 산삼, 더덕, 영지버섯‘씩이나’ 캐러 다니겠는가. 어려서는 땅에 달라붙은 땅꼬마였는데 고딩 때 좀 키가 웃자라 천만다행 중간키는 어떻게 되었다. 대학생 아들놈은 백팔십을 훌쩍 넘었으니 유전이 문제가 아닌 건 분명해. 하지만 인기 좋은 키다리 아저씨도 아닌 건 사실. 키 큰 사람들을 보면 고산병 때문에 고생이 적지 않겠구나 주제에 남 걱정을 하기까지 해. 비아그라를 먹으면 고산병에 효과가 있다는 청와대발 유언비어가 참으로 우습고 재미있다. 왜 고산병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인지. 국민들은 무서워 않으면서 고산병은 무서운갑다.

비우그라 하야하그라 아니 비아그라는 고산병에 시달릴 키다리 아저씨들이 즐겨 드셔야겠다. 높은 데는 공기가 희박할 텐데 큰 키로 얼마나들 숨쉬기 힘드실까. 여자들은 키다리 사내를 무조건하고 좋아하더라. 나는 이처럼 하늘이 지켜주시고 절제를 안겨주신 덕분에 별 탈 없이 중년의 고독과 소소한 애정관계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권세 높고 지체가 높으신 분들이 고산병에 시달리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하나님도 높디높은 천상세계 고산병에 괴로워하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세계에 내려오셨다는 이야기. 성탄을 앞두고 대림절이 시작되었어라. 천상을 떠나 낮고 낮은 민중의 친구가 되었다는 하나님 아들 예수. 고산병 때문에 벌어진 이야기일까. 비아그라로는 소용없다. 고산병은 이렇게 무조건, 긴급히, 하산해야지 새 길이 열리는 법이다. 하산하그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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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소설 가운데 군사쿠데타로 쫓겨난 카리브해 어느 대통령 이야기가 있다. 늙고 병든 일흔세 살의 대통령. 제네바에서 수술을 앞두고 만난, 같은 동포 운전수와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낙이랑 나눈 우정은 마치 영화 <일 포스티노>만큼이나 애잔해.

허세와는 달리 가난한 대통령은 시계와 금줄 넥타이핀 등을 내다팔아 병원비를 충당하며 지냈다. “내 옛 동지들이 속속 대통령이 되었지. 할 줄도 모르는 일들로 영광을 약탈만 했다네. 몇몇은 권력 맛을 즐겼는데 그보다 못한 저질들은 ‘관직’을 나눠 가졌지.” 투병 중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에 매료된 부부는 접시를 빌려다 고향맛 해산물 요리를 차린다. 덕분에 건강을 추스른 대통령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보낸 속달우편엔 “타국의 침대에서 죽음을 맞지 않았다는 작은 영광 말고도 개혁적인 지도자로서 역사에 기억되겠다는 의지”가 곡진히 담겨 있었다. 지팡이를 깜박 놓고 간 기차역 장면과 커피를 다시 배부르도록 마시게 되었다는 편지 속 대통령은 싹싹한 이웃 같았지.

독재와 무법, 마법 마술이 다반사인 어디 후진국도 아니고 지독한 사리사욕과 매관매직. 국민을 깔보고 얕보는 무뢰배들. 이참에 모래 위의 집을 통째 파내어 집무실은 정부청사로, 집터는 민주화 촛불기념공원으로 삼으면 어떨는지.

멕시코 서북단 뾰족구두 반도 ‘바하칼리포르니아 수르’, 맨 아래쪽 로스 카보스 마을로 가는 사막도로엔 호텔 캘리포니아가 있다. 이글스의 대표곡 ‘호텔 캘리포니아’와 얽힌 사연은 재미있다. 진위를 떠나 그냥 그 노래 팬들은 그 호텔에 가보는 게 평생소원. 귀국 직전 나는 호텔 귀퉁이 식당에 앉아 로컬 맥주로 목을 축였다.

이글스의 노래는 거위떼처럼 호텔 로비와 건너편 성당 마당까지 꽉 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사상누각,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닌 노래 위에 지은 집. 간신배들이라고는 하나 없이 벨보이가 전부인 그 자그만 호텔엔 고국에 돌아갈 배편을 물색 중인 대통령도 한 분쯤 묵고 계신 듯 싶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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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어느 잡지에선 이런 상을 주었다는데 질로존상, 팽야오진상, 어찌끄나상…. 질로존상은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닐 것이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질로존상으로 무지무지하게 맛난 물김치 한 사발. 거기다가 서해안 어디 항구들 근처에 가서 바지락죽을 끓여먹고 바지락전을 지져먹으면 비로소 ‘바지락바지락’ 몸이 깨어나는 거 같아. 껍데기 집에 인디언 문양을 저마다 새겨놓고 갯벌에 흔하게 살던 바지락. 동무들이랑 바지락을 캐며 놀기도 했지. 여기서는 바지락이라 않고 ‘반지락’이라 부른다.

나 어려서 이야기꾼 장로님이 그러셨지. “반지락은 말여. 원래 뻘구덩이에 안 살고 밭뙈기에 살았재. 그란디 하도 게으른 할마시(할머니)가 물을 안 주니께 쩌런 것도 쥔이라고 기둘리다 기둘리다 망달이 나부렀재. 백일정성으로 기도를 바쳤재. 그랑게 하늘이 감화를 받어가꼬 비가 솔찬이 내렸다등마. 반지락은 저그 앞바다까정 확~ 떠내려 가부렀재. 저실(겨울)이 오니라고 바람 끄터리가 차가운디도 물을 만낭게는 조아서 입을 짝~ 벌렸재. 오매 그란디 이거시 짠물 아닌갑서. 으짜쓰까잉 묵는 대로 내뱉었재. 묵으믄 뱉고 묵으믄 뱉고 안되겄다 싶어징께 봉창문을 딱 닫아걸어부렀재.” “그래서요?” “그걸로 끝이재 뭐여.” “에이 거지깔(거짓말).” “나가 느그들 놔두고 거지깔하긋냐.” “얘기가 싱겁잖아요. 더더 해주세요.” 그제서야 장로님은 씨익 웃으셨다. “싱거우믄 반지락한테 가서 입 좀 벌려보라고 그랴. 짠물이 나올 거시다. 땅금(땅거미)이 진디 질검나게 놀았으믄 날쌉게 집에들 돌아가그라잉.”

문득 바지락이 생각나 하루 먹을 치 사들고,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날쌔게 집으로 돌아왔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 <저지대>에서 읽었지. 과거는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가슴 밑바닥 저지대에 고여 있는 거라고…. 부레옥잠으로 가득한 늪을 건너거나 간이침대나 곡물자루에서 잤던 기억, 그때 먹었던 음식들이 이토록 평생을 끈덕지게 휘감는구나.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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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아과스칼리엔테스에 있는 판화가이자 정치만평가 ‘포사다’ 아저씨 박물관. 전 세계 화가나 저널리스트에겐 성지라 할 만한 곳이겠다.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는 판화, 만화, 책표지 등을 통해 정치풍자로 민주화 투쟁에 뛰어든 화가. 해골을 주인공 삼은 판화를 많이 남겼는데, 멕시코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예쁜 해골미인 카트리나도 그의 창조물이다. 길에서 성당 행사 무리에 낀 마리아치 악단을 덜컥 만났다. 누렁이 강아지들이 졸졸 뒤를 따랐다. 한국에 민주화를 외치는 촛불 행렬이 있다면, 이 땅엔 바나나를 닮은 금빛 트럼펫을 앞세운 팡파르 행렬이 있다.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넓은 챙을 가진 모자 솜브레로를 쓴 유랑 악사들. 흑인 음악이 지배하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인디헤나(인디언의 높임말)들의 음악이 서양음악과 혼합되어 남은 마리아치 음악. 이들의 노래엔 만개한 사랑과 축복, 지울 수 없는 작별의 슬픔까지가 고스란히 버무려져 있다.

내친 발걸음에 마리아치의 고향인 멕시코 과달라하라 북부까지 흘러왔다. 이곳 마리아치 광장에서 맘껏 ‘생음악’을 듣고 싶어서였다. 특히 화가 프리다 칼로의 애창곡이었던 ‘팔로마 네그라’, 검은 비둘기라는 뜻의 노래. 여자 마리아치가 불러야 제맛이지. 무당 굿판을 열지 않았는데도 소원 성취. 나는 내 인생을 그냥 ‘굿(Good)’에 두고 사는 사람. 그러니 무슨 굿판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마리아치 광장에 가득 울려 퍼진 이름 모를 여자 마리아치의 노래는 비둘기처럼 날아갔다. 노래를 마친 악단은 악기들을 골목 길바닥에 부려놓고 쉼을 가졌다. 값비싼 악기들을 사 모아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는 음악인들. 길 위의 악사 마리아치를 만나게 된다면 쥐구멍을 찾게 될 것이다. 새벽까지 마리아치들은 세레나데를 들어줄 연인들을 기다리며 그 광장 어귀에서 서성이겠지. 한 곡에 100페소면 세레나데를 청해 들을 수 있다. 마리아치도 생계는 유지해야 하니까. 다음엔 사랑하는 여인과 손잡고 오리라 마음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돈을 번다면, 모두 다 노래를 청해 듣는 데 써버리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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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면 그 자리에 핀다고 해서 망초꽃. 버려진 땅에 피는 꽃. 지옥에 피는 꽃. 북미가 원산지인 이 꽃은 중미에서도 흔한 꽃이다. 겨누는 권총도 없는데 하얗게 질려 한들거리는 망초꽃은 망자의 얼굴을 닮았기도 하였어라.

멕시코 ‘망자의 날(Day of the Dead)’은 해마다 11월 첫주에 지켜지는데, 그 요란한 해골축제가 눈앞에 펼쳐진다면 당신은 충격과 함께 환호성을 내지르게 될 것이다. 일년에 하루쯤 망자가 모조리 집으로 돌아와 함께 지내면서 기다란 생머리를 출렁거린다는 이야기. 검불처럼 고요한 이 길에서 며칠 상간 망자의 축제에 사로잡혀 지냈다. 선인장 가시가 싱싱하고 빼곡 차 있었는데 거기 기댔다가 나도 죽을 뻔 보았지. 망자가 된다 해도 돌아올 곳이 있으니 안심이지만 말이다.

하나 한국 땅이 아니라 멕시코라면 귀신이 어리둥절하겠구나. 조상 제사를 미신이라 하여 때려 엎고 세워진 서구적 세계관 십자가무덤 위엔 아뿔싸 세습 자본과 세습 권력, 제단이 아닌 ‘재단’이 숭배되고 있어라. 살아서도 불지옥인 숨막히는 경쟁과 낙오는 밑바닥 인생 또한 발바닥에 불이 나게 해. 지옥이 뭐 별게 없다. 세상사에 무관심한 사람들. ‘살았어도 이미 죽은 사람들.’ 의식 없고 생각 없는 무리들이 모여 살면 그게 지옥이다.

해골들이 살아 춤추고 망초꽃도 저리 커서 허리춤을 따라 춘다. 울동네 할매들이 구경했더라면 무서워 며칠 드러눕고 말았을 기다란 해골바가지 행렬. 분홍색으로 뺨을 붉힌 복숭아나무에 숨어 꽃상여를 오래 훔쳐보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무릎정강이까지 올라온 꽃들은 바람을 타고 수취인불명의 주소로 날아올랐지. 홍시밭에 발그레한 보름달이 숨으면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듯 하얀 상여꽃이 망자의 날에 피고 지니 낯익은 풍경 같아라.

무엇이 출생이고 무엇이 죽음이런가. 세상사 관심을 가질 것, 정신을 온전히 차릴 것, 제 의지를 갖고 사는 일이 목숨의 시작이겠다. 조상님 망자들이 지금 눈 부릅뜨고 지켜보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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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나는 멕시코 시골마을에 도마뱀처럼 낮게 머물고 있다네. 베라크루스 여기서 가까운 치아파스. 과거엔 인디오 혁명군들, 근래엔 신자유주의와 맞선 전사들이 숨어든 땅.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아저씨. 별 세 개가 박힌 베레모와 손잡이가 긴 파이프 담배가 인상적인 반란군 대장님. 몇 해 전 원주민 출신 장군에게 사령관직을 물려주고 훌훌 뒷전으로 물러났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 도시는 병들었소. 병세가 위급해야 치료를 서두르죠. 수백만 배로 커져가는 이 집단적 고독감. 자신을 발견하고, 무력감의 원인을 찾아야죠. 이 도시는 칙칙한 옷을 벗고 밝은 빛깔로 장식하게 될 거요. 난 먼저 시골에서 오색 리본으로 장식을 시작할 거요.”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부사령관은 날마다 편지를 쓰고 또 썼다. 거울이 이쪽만을 보기 위한 거라면 유리는 저쪽을 보기 위한 것. 게다가 유리는 깨트릴 수도 있다네. 평등 세상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한 이 처절한 싸움. 불굴의 전사는 소총과 탄띠로 무장하고 손에는 e메일로 가득 찬 노트북이 들려 있지. 스키마스크를 쓴 정체 모를 부사령관은 돈키호테와 햄릿을 침대맡에 항상 두고, 시인 옥타비오 파스,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책에 빠져 지낸다네. 암석에 핀 짜디짠 소금꽃을 곁들여 테킬라도 한잔씩 마시면서 말이야.

“승리가 달성되면 혁명은 그 자신을 배반하게 된다.” 푸엔테스의 엄중한 지적. 그래 부사령관은 좀체 승리를 달성할 대대적인 전투엔 관심이 없었다. 이 게으른 반란군은 잔잔한 미풍처럼 지속적인 저항, ‘변질과 부역과 배신’을 예방하고자 오직 ‘야성’만으로 오랜 날을 게릴라로 견뎌왔지. 신원회복 복권된 재야인사들이 줄줄이 권력의 맛에 취해 정신 줄을 놓아버리는 것과는 딴판으로 다른 삶이었다.

반란군 졸개도 아니면서 나는 얼굴이 새까맣게 탈까봐 솜브레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지내고 있어. 내 키보다 큰 선인장 그늘에 앉아 맹물을 꿀꺽 마시면서 눈만 댕글댕글한 마르코스 아저씨가 행여 나타날까봐 두근두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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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엔 오르골. 골골 아프신 할매들과 골골 울어대는 개구리들도 오르골 소리에 위로받기를. 손이 좀 심심하다 싶으면 오르골을 돌리기 시작해. 팝과 클래식 여러 종류 오르골을 모으기 시작하다 포기했는데, 줄기차게 모아볼 걸 그랬다는 아쉬운 생각. 바흐에서부터 비틀스까지 다양한 레퍼토리. 뚱땅거리며 내는 음악소리. 뼈마디 송골송골 땀이 맺히듯 마디 따라 음악이 달려 나온다.

하루 동안 내가 무엇인가 붙잡고 돌리는 건 오르골뿐이야. 뱅뱅 감아 돌려야 켜지는 경운기 시동, 그거 안 해본 지 정말 오래되었지. 전엔 태엽을 감는 손목시계를 하나 차고 다녔어. 거 있잖은가 밥 주는 시계. 아버지가 벗어서 내 손목에 채워주신 손목시계. 용하다는 시계방 할아범이 포기를 선언하셨을 때, 아~ 손목시계까지 세상을 떠났음을 확인하였지. 아버지가 비로소 진짜 안식에 들 수 있겠구나 싶었어.

오르골을 사랑하게 되면 큰 목청보다 작은 소리에 몸이 기울게 된다. 요새는 작고 낮은 풀벌레 소리가 어찌나 갸륵한지 창문을 자주 열어보게 돼. 일할 때 신으려고 나뭇광 위에다가 올려둔 신발이 한 켤레 있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지 뭐야. 쌀쌀하여 난롯불을 처음 때보려고 장작을 꺼내려는데 운동화가 거기 있더군. 속을 들여다보니 딱새가 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 힝힝 난 무좀도 없고 발 냄새도 그닥 안 나는 체질, 감사한 줄 알거라 새들아. 어쩐지 매우 가까이에 아기 새 울음소리가 들리더라니. 오르골 소리처럼 나직한 울음. 귀를 모아볼 걸 그랬어.

목소리를 키우려다 사달이 난 권력의 숨은 실세들. 함부로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다가 온갖 욕바가지를 다 맛보는 중인 재벌가 소식들로 세상은 어지럽고 귀청이 따가울 지경이야. ‘우주의 기운을 모아 혼이 정상이 되려면’ 일단 오르골을 하나 돌려봅시다. 자가 치유 목적으로다가 비틀스의 ‘헤이 주드’. “헤이 주드. 돈트 메이크 잇 배드. 테이크 어 새드 송, 앤드 메이크 잇 베터…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고.”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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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태산 쪽에 포사격장이 있어 가끔가다 대포소리가 쩌렁쩌렁 산천을 울린다. 게다가 예비군 훈련장도 있는데 실탄 사격을 하는 날이면 우리 동네까지 다다다다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해. 어떤 날은 풀이파리를 따다가 위장을 철저히 한 소대 병력이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어린 군인들에게 사이다라도 한잔 먹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져. 소년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총을 들고 서 있으니 염려가 생긴다. 대민지원, 대민봉사라 해서 나락이 쓰러지거나 자연재해가 날 때 군인들이 발 벗고 나서주는데 농촌엔 이만한 젊은 이웃이 없다. 가공할 만한 현대식 첨단 무기가 아니라도 삽과 괭이로 충분히 나라를 지켜내는 우리 시골 군인. 군복 입은 청년들이 자랑스럽고 듬직해 보이는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부러워설까. 아예 군복을 입고 논밭에서 일을 하는 ‘평생 군인, 시골 군인’ 아재들도 보인다. 첨엔 군가도 부르면서 일을 했겠지. 지금은 ‘백세인생’을 부르는데 그 좋던 치아도 진즉에 틀니로 갈아탔다. “칠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농사일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줄어들지 않는 농사일에 맘 편히 죽지도 못해. 진짜인지 뻥인지 모르겠으나 해병대 마크를 시금털털한 트럭이나 봉고차에 탁~ 부착하고 다니면서 빨간 내복을 자랑질 치기도 한다. 밤이면 남녀 연예인들 단기간 입대를 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게 공중파 구경거리다. 나라가 통째 한편의 재미있는 병영소동극 같아라.

군에 간 아이들 탓에 걱정근심이 많은 부모님들 계시다. 더구나 남북 긴장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는 요즘, 대통령은 날마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으니 헬기 한대만 떠도 가슴이 졸아들어.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는 가을밤. 전방 군인들은 춥지나 않은지, 반찬은 잘 나오고 고깃국물에 정말 고기가 많이 담겼는지, 방탄복은 뚫리지 않는 걸로 정직하게 준비했는지, 국민들은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담벼락 위로 대봉감이 달려 있는데 머잖아 입대할 아이 생각에 좋아하는 홍시나 앉혀놓을까 싱숭생숭해지는 가을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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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을 우리말로는 ‘싹쓸바람’이라 부른다. 싹 쓸어가는 바람. 울적하고 답답한 시절도 다 쓸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쌘 바람이 지나가면서 대나무들 넘어지고 추수를 앞둔 논바닥은 심각한 지경이다. 그래도 담장 밑에 국화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의 태양을 반기고 있어라. 올가을 밭에다는 배추 한 포기 심지 않았다. 갖가지 허브가 자라고 있는데 잡풀이 우거져서 머리꽁지도 보이지 않아. 단감이 익었으나 두어 개 따먹고 그대로 두었다. 엄마 아빠 없이 우는 어린 새들 배곯지 않았으면 바랐다. 새들을 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천사들은 날개가 달려 있다는데, 장차 나도 천사처럼 날개를 갖고 싶어. 천사들과 동급인 새들에게 잘 보이면 그렇게 될까. 새소리가 오늘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합창 같다. 오래전 들불을 놓다가 다같이 불렀던 노래.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 그립다.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역사. 삼천리 방방곡곡 농민의 깃발이여. 찬란한 승리의 그날이 오길 춤추며 싸우는 형제 그립다….”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가 한창 힘을 내던 때. 줄여서 가농, 기농 이렇게들 불렀다. 천주교 우리밀 살리기 식구들 청으로 창원 마산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백남기 선생을 처음 뵈었다. 선한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보통 새들에게 지어 보이는 그런 미소. 그날 우리는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해 불렀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농민이 되어 괭이 매고 삽질하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땅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이 땅에 농민들아 손잡고 일어서자.” 황지우 시인이 그랬던가. 새들도 세상을 뜨는 거라고. 선한 미소와 답가들을 뒤로 두고 지상엔 하얀 새털이 가지런히 떨어졌다. 천벌을 받아도 쌀, 저 저주받을 입들조차 농부의 선한 미소를 본받고 싶은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 인생,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길지가 않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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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에 이어 전어가 제철인 데다 서남해안 개펄 낙지는 지독한 유혹이요 미혹이렷다. 날것을 겁 없이 집어먹었더니 탈이 났나봐. 뭘 안 먹어 보려 나도 단식모드에 들어가 있었는데 칭찬해주실 누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당 밥 생각이 나서 그만 포기할 수밖에. 무엇보다 목소리에 힘이 빠져 모기소리가 났다. 언젠가 전인권 아저씨 밥 드시는 모습. 어찌나 맛나게 잘 드시던지. 밥은 그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먹어야 힘이 생기지. 그래 노래할 때 힘이 넘치시나봐. 밥을 맛나게 자시는 분들을 보면 굶어 죽는 쪽보다는 먹고 죽는 쪽으로 싸악 기울게 된다. 탄수화물 밥을 끊고 고단백질 육고기로 배를 채워보자는 분들도 계시던데, 한순간에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 예수님도 사막에서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단식을 오래 하셨는데 허깨비 악마가 세 차례나 나타나 맘고생을 하셨다는 성경 얘기. 무려 사십일을 굶으셨다고. 엄마가 얼마나 속이 상했을꼬. 두번 다시 그러지 마세요. 억울하게 자식들 잃고 곡기를 끊은 부모님들 앞에서 통닭을 시켜 먹으며 조롱하던 젊은이들 사건도 떠오른다. 통닭 값을 대신 내주는가 하면 철딱서니없는 것들 말리는 건 고사하고 같은 편을 들던 인간들도 똑똑히 기억한다. 인간이 참 별나고 가지가지 하는 종자들이 많은 거 같아.

신학교 댕길 때 두어주 밥숟가락 놓고 기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 어지럼증으로 상당기간 고생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무리들엔 될 수 있으면 끼지 않으려 했으나 이른바 운동권으로 분류되면서 인생이 원대로 되질 않았지. 요새는 밥을 두 끼 차려 먹고 아침은 간단한 미숫가루. 밖에서 먹으면 탈이 나는 경우가 잦아 번거로워도 집밥을 지어 먹는다. 배탈이 나거나 정신없이 바빠 끼니를 놓치면 거창하게 이 나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단식투쟁이라 생각하고 혀를 살짝 깨물지. 시큼한 위액이 올라오면 ‘하나님 아부지~’ 하고 애교를 부리면서. 나도 은행잔액 걱정이 되어 살짝 비굴한 기도가 나오기도 하는데 하늘은 진짜 싸늘하다 못해 이런 시베리아. 단식으로 뭘 해본다면 스코트 니어링처럼 죽음 앞에서가 좋을 거 같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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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짱이신 로빈슨 크루소. 내 키만큼 생긴 카약이 있는데 이름을 로빈슨이라 지었다. 요트는 돈이 꽤 들지만 카약은 노를 저을 알통 근육만 있으면 된다. 뙤약볕이 물러났으니 다시 이 친구를 꺼내 강물을 저어갔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브래드 피트가 형이랑 둘이 나무배를 끌고 폭포수로 뛰어들던 위험천만한 장면. 카약에 확 끌렸다. 태풍이 몰고 온 폭우로 호수마다 물이 찰랑찰랑하고 강 상류는 용맹하게 흐르더라. “숫염소처럼 생긴 고독한 카약에 올라타 강물을 저어 흘러가면 한달음 마도로스가 된다. 입술을 나누고서 느린 곡조의 이별 노래를 부르기 전에 북극성 주위를 맴도는 떠돌이별처럼 카약은 멀리 가지 않고 앵두꽃이 지는 저물 무렵 집에 돌아오고는 하였다. 가족사진에 없어도 로빈슨은 내 가족. 강물의 릭샤꾼인 바람이 건들 불고 주술의 길이 열리자 나는 객사 앞에서 로빈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약에 잠시 앉아 머리를 식히고 돌아왔지. 식힌다는 것. 그러려면 찬물이 필요해. 찬물에 쏙~ 뛰어드니 정신이 번쩍 났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 가운데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고 있다.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미술 전시회 도록에 서문을 쓰는 방법,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과부를 경계하는 방법,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까지…. 낄낄 웃으며 배울 만한 내용이 많다. 머리를 식히는 방법 가운데 진짜 찬물로 뛰어든 인간의 글을 지금 그대는 읽고 계시는 거다. 정답은 어쩌면 쉽고 단순한 것이 아닐까. 가기 싫은 곳엔 안 가면 되는 것이고, 꼴 보기 싫으면 안 보면 후련해진다. 스님이 절 싫으면 떠나는 것이 장땡이다. 정치권력이 문제일 때 당장 끌어내리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참고 견디고 어쩌고 하다간 울화증만 깊어져. 시원하게 흘러가는 물을 보고 만지고 했더니 속이 뻥 뚫리더라. “시골 유모차엔 아기 대신에 무나 배추 몇 포기가 타는 것처럼 내 카약에는 시와 별과 구름과 음표가 탔고 나는 이를 윽물고서 노를 저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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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끝집 사시는 분들은 단체여행팀으로 불려도 될 만큼 그 어떤 정권보다 많은 해외순방을 하고서도 마추픽추를 못 가보시다니.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 우리 국민들은 스페인 군대 같은 일당들이 몰고 오는 사드도 두렵고, 오기와 깡다구로 똘똘 뭉친 이북 사람들도 혈압에 나가떨어질까 걱정스럽다. 땅 아랫마을에선 더는 살기 괴로워 공중누각을 짓고 마추픽추에 올라가 숨어 살아볼까나. 마추픽추엔 지금쯤 안개비가 자욱한 아침과 돌담이 눈부신 한낮과 하늘이 껌껌해지는 개기일식이 빈번한 저녁의 반복이겠다. 소설가 장강명의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보니 ‘여기 와보라카이’ 그런다는 보라카이 풍경이 ‘저렴하다’는 자주 표현되는 말에 섞여설랑 흥미진진했다. 일박이일이 기본인 비행기와 도둑놈같이 비싼 고산열차를 비롯하여 보라카이만큼 저렴한 여행은 아니지만 마추픽추는 평생 한번은 꿈꿔볼 만한 여행지다.

신기한, 정체 모를, 웅장한 공중도시에서 며칠 묵으며 지은 노래가 있다. “처음 우리는 돌이었다지. 하늘이 낳은 돌멩이들. 산 아래로 굴러 들로 강으로. 사냥을 피해 바위 올라간 표범과 갈기 늑대는 돌단을 높이 쌓아 기도 올렸네. 개간한 밭에 인디오들 따루이를 거두는가. 산허리 어린 알파카여! 동무도 없는지 안개 밀려든 마추픽추에 신께 바쳤다는 아이들의 혼령. 바람이 내게 노래하였네. 바람이 우후 들려주었네. 심뽀니아, 케나, 잉카의 악기들. 돌들이 내게 노래하였네. 돌들이 우후 노래 불렀네. 머나먼 그곳 한없이 그리워.”

거대한 돌을 깎아 붙인 실력은 오늘날도 재현이 어렵다고 한다. 안개와 구름에 휩싸이면 마추픽추는 마치 천상의 도시처럼 신비감이 배가된다. 우리 아랫동네도 돌담길이 참 예쁘다. 마추픽추를 봐버려서 좀 시시하기는 하여도. 재작년 주차장 구석에 돌담을 쌓는 도전을 해보았는데 할머니 한분이 솜씨가 좋다며 칭찬해 주었다. 어깨가 으쓱거렸다. 분잡한 일들로 살아가다가 내 몸속 잉카의 피를 잊을 뻔하였다. 우리처럼 생긴 인디오들이 색동옷을 입고 기다리던 곳. 머잖아 뒷산에 색동 단풍이 들면 내가 사는 이곳도 마추픽추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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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만 하더라도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면서 ‘사네 못 사네’ 투덜댔었는데 이젠 춥기까지 하다. 털실로 짠 옷을 꺼내 입는가 하면 이불을 안고서도 냉기가 느껴질 지경이다. 길거리엔 갈꽃 코스모스가 우주여행을 떠나자며 무장하게 피어나는 중. 담배건조장은 마른풀들이 몸을 뒤척이는데 그도 언젠가 연기가 되어 밤하늘 높다란 데까지 승천할 것이리라.

탱자나무 울타리는 푸르스름한 아기별들이 다다귀다다귀 떠 있다. 나는 야경꾼이 되어 세상의 여러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녔었는데 한번은 늑대 무리가 달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탱자나 유자, 감귤이 은하수에 동동 떠가는 모습도 구경했었다.

“사람은 잠들 수 없을 때 비로소 밤이 얼마나 긴지 알게 된다.” 중국 속담은 지독한 밤의 재앙인 불면증에 소름끼쳐 하고 있구나. 그렇다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누군들 피해갈쏘냐. 밤은 잠의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낮을 늘리기 위해 시간을 빌려오기도 해야 한다. “우리가 낮을 늘리는 최고의 방법은 밤에서 몇 시간을 훔쳐오는 것이다.”(크리스토퍼 듀드니, <밤으로의 여행>에서)

인공 불빛 속에 어둠을 잃어버린 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시골살이겠다. 나는 방해받지 않으면서 고스란히 어둠을 만끽하고 사는 러키 보이다. 작은 스탠드로 독서를 하고, 과도를 꺼내 조심조심 복숭아를 깎아 먹기도 한다. 운문사 주지를 살고 계신 친구 스님이 명물 청도 복숭아를 한 짝 보내주시어 잘 먹었는데, 복숭아는 예로부터 밤에 먹어야 그 맛이 일품이렷다. 그러나 무엇보다 술이든 과일이든 친구가 사주는 것이라면 다 맛있는 법이겠다.

요사이 밤에 약속들이 많았다. 꿀물을 타서 마셨더니 더 속이 데리고 아리는 것 같다. 밤에 밖으로 사람 구경 다니기보다는 식탁보를 내 집안에 펼치자꾸나. 전어회, 전어구이가 아무리 유혹을 해싸도 집에다 거미줄을 치고 매달려서 손님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올가을 첫 번째 손님은 달빛이었다. 창문을 여니 달빛이 무릎께까지 다가와 뭉그작거린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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