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196건

  1. 2016.12.01 고산병
  2. 2016.11.24 사상누각
  3. 2016.11.17 바지락 반지락
  4. 2016.11.10 마리아치 악단
  5. 2016.11.03 망자와 망초꽃
  6. 2016.10.27 부사령관 아저씨
  7. 2016.10.20 오르골 소리
  8. 2016.10.13 시골 군인의 노래
  9. 2016.10.06 선한 미소
  10. 2016.09.29 단식 인생
  11. 2016.09.22 머리를 식히는 방법
  12. 2016.09.08 마추픽추
  13. 2016.09.01 야경꾼
  14. 2016.08.25 태권도 입문기
  15. 2016.08.18 수북면 북방처녀들
  16. 2016.08.11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17. 2016.08.04 천렵놀이
  18. 2016.07.28 풀벌레 캠핑
  19. 2016.07.21 선인장과 프리다 칼로
  20. 2016.07.14 개 돼지 염소

해지난 일인데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종편 프로그램에서 수차례 출연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뭔 소리야 웃고 말았지. 날 몰라도 한참 모르는 방송작가의 장난전화(?)가 그저 깜찍했어. 신문에다 ‘시골편지’를 오랜 날 연재하는 아저씨니 아마 오지에 은둔하여 지내면서 누렁이랑 산나물 뜯으러 댕기는 촌사람으로 짐작한 모양. 다음엔 서울이나 뉴욕에 살면서 도시편지를 연재해야 할랑가 보다. 정관장 홍삼엑기스도 잘 안 빨아먹는데 멧돼지처럼 낙엽 속을 뒤지며 산삼, 더덕, 영지버섯‘씩이나’ 캐러 다니겠는가. 어려서는 땅에 달라붙은 땅꼬마였는데 고딩 때 좀 키가 웃자라 천만다행 중간키는 어떻게 되었다. 대학생 아들놈은 백팔십을 훌쩍 넘었으니 유전이 문제가 아닌 건 분명해. 하지만 인기 좋은 키다리 아저씨도 아닌 건 사실. 키 큰 사람들을 보면 고산병 때문에 고생이 적지 않겠구나 주제에 남 걱정을 하기까지 해. 비아그라를 먹으면 고산병에 효과가 있다는 청와대발 유언비어가 참으로 우습고 재미있다. 왜 고산병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인지. 국민들은 무서워 않으면서 고산병은 무서운갑다.

비우그라 하야하그라 아니 비아그라는 고산병에 시달릴 키다리 아저씨들이 즐겨 드셔야겠다. 높은 데는 공기가 희박할 텐데 큰 키로 얼마나들 숨쉬기 힘드실까. 여자들은 키다리 사내를 무조건하고 좋아하더라. 나는 이처럼 하늘이 지켜주시고 절제를 안겨주신 덕분에 별 탈 없이 중년의 고독과 소소한 애정관계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권세 높고 지체가 높으신 분들이 고산병에 시달리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하나님도 높디높은 천상세계 고산병에 괴로워하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세계에 내려오셨다는 이야기. 성탄을 앞두고 대림절이 시작되었어라. 천상을 떠나 낮고 낮은 민중의 친구가 되었다는 하나님 아들 예수. 고산병 때문에 벌어진 이야기일까. 비아그라로는 소용없다. 고산병은 이렇게 무조건, 긴급히, 하산해야지 새 길이 열리는 법이다. 하산하그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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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소설 가운데 군사쿠데타로 쫓겨난 카리브해 어느 대통령 이야기가 있다. 늙고 병든 일흔세 살의 대통령. 제네바에서 수술을 앞두고 만난, 같은 동포 운전수와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낙이랑 나눈 우정은 마치 영화 <일 포스티노>만큼이나 애잔해.

허세와는 달리 가난한 대통령은 시계와 금줄 넥타이핀 등을 내다팔아 병원비를 충당하며 지냈다. “내 옛 동지들이 속속 대통령이 되었지. 할 줄도 모르는 일들로 영광을 약탈만 했다네. 몇몇은 권력 맛을 즐겼는데 그보다 못한 저질들은 ‘관직’을 나눠 가졌지.” 투병 중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에 매료된 부부는 접시를 빌려다 고향맛 해산물 요리를 차린다. 덕분에 건강을 추스른 대통령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보낸 속달우편엔 “타국의 침대에서 죽음을 맞지 않았다는 작은 영광 말고도 개혁적인 지도자로서 역사에 기억되겠다는 의지”가 곡진히 담겨 있었다. 지팡이를 깜박 놓고 간 기차역 장면과 커피를 다시 배부르도록 마시게 되었다는 편지 속 대통령은 싹싹한 이웃 같았지.

독재와 무법, 마법 마술이 다반사인 어디 후진국도 아니고 지독한 사리사욕과 매관매직. 국민을 깔보고 얕보는 무뢰배들. 이참에 모래 위의 집을 통째 파내어 집무실은 정부청사로, 집터는 민주화 촛불기념공원으로 삼으면 어떨는지.

멕시코 서북단 뾰족구두 반도 ‘바하칼리포르니아 수르’, 맨 아래쪽 로스 카보스 마을로 가는 사막도로엔 호텔 캘리포니아가 있다. 이글스의 대표곡 ‘호텔 캘리포니아’와 얽힌 사연은 재미있다. 진위를 떠나 그냥 그 노래 팬들은 그 호텔에 가보는 게 평생소원. 귀국 직전 나는 호텔 귀퉁이 식당에 앉아 로컬 맥주로 목을 축였다.

이글스의 노래는 거위떼처럼 호텔 로비와 건너편 성당 마당까지 꽉 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사상누각,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닌 노래 위에 지은 집. 간신배들이라고는 하나 없이 벨보이가 전부인 그 자그만 호텔엔 고국에 돌아갈 배편을 물색 중인 대통령도 한 분쯤 묵고 계신 듯 싶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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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어느 잡지에선 이런 상을 주었다는데 질로존상, 팽야오진상, 어찌끄나상…. 질로존상은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닐 것이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질로존상으로 무지무지하게 맛난 물김치 한 사발. 거기다가 서해안 어디 항구들 근처에 가서 바지락죽을 끓여먹고 바지락전을 지져먹으면 비로소 ‘바지락바지락’ 몸이 깨어나는 거 같아. 껍데기 집에 인디언 문양을 저마다 새겨놓고 갯벌에 흔하게 살던 바지락. 동무들이랑 바지락을 캐며 놀기도 했지. 여기서는 바지락이라 않고 ‘반지락’이라 부른다.

나 어려서 이야기꾼 장로님이 그러셨지. “반지락은 말여. 원래 뻘구덩이에 안 살고 밭뙈기에 살았재. 그란디 하도 게으른 할마시(할머니)가 물을 안 주니께 쩌런 것도 쥔이라고 기둘리다 기둘리다 망달이 나부렀재. 백일정성으로 기도를 바쳤재. 그랑게 하늘이 감화를 받어가꼬 비가 솔찬이 내렸다등마. 반지락은 저그 앞바다까정 확~ 떠내려 가부렀재. 저실(겨울)이 오니라고 바람 끄터리가 차가운디도 물을 만낭게는 조아서 입을 짝~ 벌렸재. 오매 그란디 이거시 짠물 아닌갑서. 으짜쓰까잉 묵는 대로 내뱉었재. 묵으믄 뱉고 묵으믄 뱉고 안되겄다 싶어징께 봉창문을 딱 닫아걸어부렀재.” “그래서요?” “그걸로 끝이재 뭐여.” “에이 거지깔(거짓말).” “나가 느그들 놔두고 거지깔하긋냐.” “얘기가 싱겁잖아요. 더더 해주세요.” 그제서야 장로님은 씨익 웃으셨다. “싱거우믄 반지락한테 가서 입 좀 벌려보라고 그랴. 짠물이 나올 거시다. 땅금(땅거미)이 진디 질검나게 놀았으믄 날쌉게 집에들 돌아가그라잉.”

문득 바지락이 생각나 하루 먹을 치 사들고,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날쌔게 집으로 돌아왔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 <저지대>에서 읽었지. 과거는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가슴 밑바닥 저지대에 고여 있는 거라고…. 부레옥잠으로 가득한 늪을 건너거나 간이침대나 곡물자루에서 잤던 기억, 그때 먹었던 음식들이 이토록 평생을 끈덕지게 휘감는구나.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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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아과스칼리엔테스에 있는 판화가이자 정치만평가 ‘포사다’ 아저씨 박물관. 전 세계 화가나 저널리스트에겐 성지라 할 만한 곳이겠다.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는 판화, 만화, 책표지 등을 통해 정치풍자로 민주화 투쟁에 뛰어든 화가. 해골을 주인공 삼은 판화를 많이 남겼는데, 멕시코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예쁜 해골미인 카트리나도 그의 창조물이다. 길에서 성당 행사 무리에 낀 마리아치 악단을 덜컥 만났다. 누렁이 강아지들이 졸졸 뒤를 따랐다. 한국에 민주화를 외치는 촛불 행렬이 있다면, 이 땅엔 바나나를 닮은 금빛 트럼펫을 앞세운 팡파르 행렬이 있다.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넓은 챙을 가진 모자 솜브레로를 쓴 유랑 악사들. 흑인 음악이 지배하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인디헤나(인디언의 높임말)들의 음악이 서양음악과 혼합되어 남은 마리아치 음악. 이들의 노래엔 만개한 사랑과 축복, 지울 수 없는 작별의 슬픔까지가 고스란히 버무려져 있다.

내친 발걸음에 마리아치의 고향인 멕시코 과달라하라 북부까지 흘러왔다. 이곳 마리아치 광장에서 맘껏 ‘생음악’을 듣고 싶어서였다. 특히 화가 프리다 칼로의 애창곡이었던 ‘팔로마 네그라’, 검은 비둘기라는 뜻의 노래. 여자 마리아치가 불러야 제맛이지. 무당 굿판을 열지 않았는데도 소원 성취. 나는 내 인생을 그냥 ‘굿(Good)’에 두고 사는 사람. 그러니 무슨 굿판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마리아치 광장에 가득 울려 퍼진 이름 모를 여자 마리아치의 노래는 비둘기처럼 날아갔다. 노래를 마친 악단은 악기들을 골목 길바닥에 부려놓고 쉼을 가졌다. 값비싼 악기들을 사 모아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는 음악인들. 길 위의 악사 마리아치를 만나게 된다면 쥐구멍을 찾게 될 것이다. 새벽까지 마리아치들은 세레나데를 들어줄 연인들을 기다리며 그 광장 어귀에서 서성이겠지. 한 곡에 100페소면 세레나데를 청해 들을 수 있다. 마리아치도 생계는 유지해야 하니까. 다음엔 사랑하는 여인과 손잡고 오리라 마음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돈을 번다면, 모두 다 노래를 청해 듣는 데 써버리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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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면 그 자리에 핀다고 해서 망초꽃. 버려진 땅에 피는 꽃. 지옥에 피는 꽃. 북미가 원산지인 이 꽃은 중미에서도 흔한 꽃이다. 겨누는 권총도 없는데 하얗게 질려 한들거리는 망초꽃은 망자의 얼굴을 닮았기도 하였어라.

멕시코 ‘망자의 날(Day of the Dead)’은 해마다 11월 첫주에 지켜지는데, 그 요란한 해골축제가 눈앞에 펼쳐진다면 당신은 충격과 함께 환호성을 내지르게 될 것이다. 일년에 하루쯤 망자가 모조리 집으로 돌아와 함께 지내면서 기다란 생머리를 출렁거린다는 이야기. 검불처럼 고요한 이 길에서 며칠 상간 망자의 축제에 사로잡혀 지냈다. 선인장 가시가 싱싱하고 빼곡 차 있었는데 거기 기댔다가 나도 죽을 뻔 보았지. 망자가 된다 해도 돌아올 곳이 있으니 안심이지만 말이다.

하나 한국 땅이 아니라 멕시코라면 귀신이 어리둥절하겠구나. 조상 제사를 미신이라 하여 때려 엎고 세워진 서구적 세계관 십자가무덤 위엔 아뿔싸 세습 자본과 세습 권력, 제단이 아닌 ‘재단’이 숭배되고 있어라. 살아서도 불지옥인 숨막히는 경쟁과 낙오는 밑바닥 인생 또한 발바닥에 불이 나게 해. 지옥이 뭐 별게 없다. 세상사에 무관심한 사람들. ‘살았어도 이미 죽은 사람들.’ 의식 없고 생각 없는 무리들이 모여 살면 그게 지옥이다.

해골들이 살아 춤추고 망초꽃도 저리 커서 허리춤을 따라 춘다. 울동네 할매들이 구경했더라면 무서워 며칠 드러눕고 말았을 기다란 해골바가지 행렬. 분홍색으로 뺨을 붉힌 복숭아나무에 숨어 꽃상여를 오래 훔쳐보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무릎정강이까지 올라온 꽃들은 바람을 타고 수취인불명의 주소로 날아올랐지. 홍시밭에 발그레한 보름달이 숨으면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듯 하얀 상여꽃이 망자의 날에 피고 지니 낯익은 풍경 같아라.

무엇이 출생이고 무엇이 죽음이런가. 세상사 관심을 가질 것, 정신을 온전히 차릴 것, 제 의지를 갖고 사는 일이 목숨의 시작이겠다. 조상님 망자들이 지금 눈 부릅뜨고 지켜보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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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나는 멕시코 시골마을에 도마뱀처럼 낮게 머물고 있다네. 베라크루스 여기서 가까운 치아파스. 과거엔 인디오 혁명군들, 근래엔 신자유주의와 맞선 전사들이 숨어든 땅.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아저씨. 별 세 개가 박힌 베레모와 손잡이가 긴 파이프 담배가 인상적인 반란군 대장님. 몇 해 전 원주민 출신 장군에게 사령관직을 물려주고 훌훌 뒷전으로 물러났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 도시는 병들었소. 병세가 위급해야 치료를 서두르죠. 수백만 배로 커져가는 이 집단적 고독감. 자신을 발견하고, 무력감의 원인을 찾아야죠. 이 도시는 칙칙한 옷을 벗고 밝은 빛깔로 장식하게 될 거요. 난 먼저 시골에서 오색 리본으로 장식을 시작할 거요.”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부사령관은 날마다 편지를 쓰고 또 썼다. 거울이 이쪽만을 보기 위한 거라면 유리는 저쪽을 보기 위한 것. 게다가 유리는 깨트릴 수도 있다네. 평등 세상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한 이 처절한 싸움. 불굴의 전사는 소총과 탄띠로 무장하고 손에는 e메일로 가득 찬 노트북이 들려 있지. 스키마스크를 쓴 정체 모를 부사령관은 돈키호테와 햄릿을 침대맡에 항상 두고, 시인 옥타비오 파스,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책에 빠져 지낸다네. 암석에 핀 짜디짠 소금꽃을 곁들여 테킬라도 한잔씩 마시면서 말이야.

“승리가 달성되면 혁명은 그 자신을 배반하게 된다.” 푸엔테스의 엄중한 지적. 그래 부사령관은 좀체 승리를 달성할 대대적인 전투엔 관심이 없었다. 이 게으른 반란군은 잔잔한 미풍처럼 지속적인 저항, ‘변질과 부역과 배신’을 예방하고자 오직 ‘야성’만으로 오랜 날을 게릴라로 견뎌왔지. 신원회복 복권된 재야인사들이 줄줄이 권력의 맛에 취해 정신 줄을 놓아버리는 것과는 딴판으로 다른 삶이었다.

반란군 졸개도 아니면서 나는 얼굴이 새까맣게 탈까봐 솜브레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지내고 있어. 내 키보다 큰 선인장 그늘에 앉아 맹물을 꿀꺽 마시면서 눈만 댕글댕글한 마르코스 아저씨가 행여 나타날까봐 두근두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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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엔 오르골. 골골 아프신 할매들과 골골 울어대는 개구리들도 오르골 소리에 위로받기를. 손이 좀 심심하다 싶으면 오르골을 돌리기 시작해. 팝과 클래식 여러 종류 오르골을 모으기 시작하다 포기했는데, 줄기차게 모아볼 걸 그랬다는 아쉬운 생각. 바흐에서부터 비틀스까지 다양한 레퍼토리. 뚱땅거리며 내는 음악소리. 뼈마디 송골송골 땀이 맺히듯 마디 따라 음악이 달려 나온다.

하루 동안 내가 무엇인가 붙잡고 돌리는 건 오르골뿐이야. 뱅뱅 감아 돌려야 켜지는 경운기 시동, 그거 안 해본 지 정말 오래되었지. 전엔 태엽을 감는 손목시계를 하나 차고 다녔어. 거 있잖은가 밥 주는 시계. 아버지가 벗어서 내 손목에 채워주신 손목시계. 용하다는 시계방 할아범이 포기를 선언하셨을 때, 아~ 손목시계까지 세상을 떠났음을 확인하였지. 아버지가 비로소 진짜 안식에 들 수 있겠구나 싶었어.

오르골을 사랑하게 되면 큰 목청보다 작은 소리에 몸이 기울게 된다. 요새는 작고 낮은 풀벌레 소리가 어찌나 갸륵한지 창문을 자주 열어보게 돼. 일할 때 신으려고 나뭇광 위에다가 올려둔 신발이 한 켤레 있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지 뭐야. 쌀쌀하여 난롯불을 처음 때보려고 장작을 꺼내려는데 운동화가 거기 있더군. 속을 들여다보니 딱새가 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 힝힝 난 무좀도 없고 발 냄새도 그닥 안 나는 체질, 감사한 줄 알거라 새들아. 어쩐지 매우 가까이에 아기 새 울음소리가 들리더라니. 오르골 소리처럼 나직한 울음. 귀를 모아볼 걸 그랬어.

목소리를 키우려다 사달이 난 권력의 숨은 실세들. 함부로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다가 온갖 욕바가지를 다 맛보는 중인 재벌가 소식들로 세상은 어지럽고 귀청이 따가울 지경이야. ‘우주의 기운을 모아 혼이 정상이 되려면’ 일단 오르골을 하나 돌려봅시다. 자가 치유 목적으로다가 비틀스의 ‘헤이 주드’. “헤이 주드. 돈트 메이크 잇 배드. 테이크 어 새드 송, 앤드 메이크 잇 베터…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고.”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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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태산 쪽에 포사격장이 있어 가끔가다 대포소리가 쩌렁쩌렁 산천을 울린다. 게다가 예비군 훈련장도 있는데 실탄 사격을 하는 날이면 우리 동네까지 다다다다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해. 어떤 날은 풀이파리를 따다가 위장을 철저히 한 소대 병력이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어린 군인들에게 사이다라도 한잔 먹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져. 소년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총을 들고 서 있으니 염려가 생긴다. 대민지원, 대민봉사라 해서 나락이 쓰러지거나 자연재해가 날 때 군인들이 발 벗고 나서주는데 농촌엔 이만한 젊은 이웃이 없다. 가공할 만한 현대식 첨단 무기가 아니라도 삽과 괭이로 충분히 나라를 지켜내는 우리 시골 군인. 군복 입은 청년들이 자랑스럽고 듬직해 보이는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부러워설까. 아예 군복을 입고 논밭에서 일을 하는 ‘평생 군인, 시골 군인’ 아재들도 보인다. 첨엔 군가도 부르면서 일을 했겠지. 지금은 ‘백세인생’을 부르는데 그 좋던 치아도 진즉에 틀니로 갈아탔다. “칠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농사일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줄어들지 않는 농사일에 맘 편히 죽지도 못해. 진짜인지 뻥인지 모르겠으나 해병대 마크를 시금털털한 트럭이나 봉고차에 탁~ 부착하고 다니면서 빨간 내복을 자랑질 치기도 한다. 밤이면 남녀 연예인들 단기간 입대를 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게 공중파 구경거리다. 나라가 통째 한편의 재미있는 병영소동극 같아라.

군에 간 아이들 탓에 걱정근심이 많은 부모님들 계시다. 더구나 남북 긴장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는 요즘, 대통령은 날마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으니 헬기 한대만 떠도 가슴이 졸아들어.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는 가을밤. 전방 군인들은 춥지나 않은지, 반찬은 잘 나오고 고깃국물에 정말 고기가 많이 담겼는지, 방탄복은 뚫리지 않는 걸로 정직하게 준비했는지, 국민들은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담벼락 위로 대봉감이 달려 있는데 머잖아 입대할 아이 생각에 좋아하는 홍시나 앉혀놓을까 싱숭생숭해지는 가을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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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을 우리말로는 ‘싹쓸바람’이라 부른다. 싹 쓸어가는 바람. 울적하고 답답한 시절도 다 쓸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쌘 바람이 지나가면서 대나무들 넘어지고 추수를 앞둔 논바닥은 심각한 지경이다. 그래도 담장 밑에 국화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의 태양을 반기고 있어라. 올가을 밭에다는 배추 한 포기 심지 않았다. 갖가지 허브가 자라고 있는데 잡풀이 우거져서 머리꽁지도 보이지 않아. 단감이 익었으나 두어 개 따먹고 그대로 두었다. 엄마 아빠 없이 우는 어린 새들 배곯지 않았으면 바랐다. 새들을 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천사들은 날개가 달려 있다는데, 장차 나도 천사처럼 날개를 갖고 싶어. 천사들과 동급인 새들에게 잘 보이면 그렇게 될까. 새소리가 오늘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합창 같다. 오래전 들불을 놓다가 다같이 불렀던 노래.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 그립다.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역사. 삼천리 방방곡곡 농민의 깃발이여. 찬란한 승리의 그날이 오길 춤추며 싸우는 형제 그립다….”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가 한창 힘을 내던 때. 줄여서 가농, 기농 이렇게들 불렀다. 천주교 우리밀 살리기 식구들 청으로 창원 마산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백남기 선생을 처음 뵈었다. 선한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보통 새들에게 지어 보이는 그런 미소. 그날 우리는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해 불렀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농민이 되어 괭이 매고 삽질하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땅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이 땅에 농민들아 손잡고 일어서자.” 황지우 시인이 그랬던가. 새들도 세상을 뜨는 거라고. 선한 미소와 답가들을 뒤로 두고 지상엔 하얀 새털이 가지런히 떨어졌다. 천벌을 받아도 쌀, 저 저주받을 입들조차 농부의 선한 미소를 본받고 싶은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 인생,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길지가 않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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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에 이어 전어가 제철인 데다 서남해안 개펄 낙지는 지독한 유혹이요 미혹이렷다. 날것을 겁 없이 집어먹었더니 탈이 났나봐. 뭘 안 먹어 보려 나도 단식모드에 들어가 있었는데 칭찬해주실 누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당 밥 생각이 나서 그만 포기할 수밖에. 무엇보다 목소리에 힘이 빠져 모기소리가 났다. 언젠가 전인권 아저씨 밥 드시는 모습. 어찌나 맛나게 잘 드시던지. 밥은 그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먹어야 힘이 생기지. 그래 노래할 때 힘이 넘치시나봐. 밥을 맛나게 자시는 분들을 보면 굶어 죽는 쪽보다는 먹고 죽는 쪽으로 싸악 기울게 된다. 탄수화물 밥을 끊고 고단백질 육고기로 배를 채워보자는 분들도 계시던데, 한순간에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 예수님도 사막에서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단식을 오래 하셨는데 허깨비 악마가 세 차례나 나타나 맘고생을 하셨다는 성경 얘기. 무려 사십일을 굶으셨다고. 엄마가 얼마나 속이 상했을꼬. 두번 다시 그러지 마세요. 억울하게 자식들 잃고 곡기를 끊은 부모님들 앞에서 통닭을 시켜 먹으며 조롱하던 젊은이들 사건도 떠오른다. 통닭 값을 대신 내주는가 하면 철딱서니없는 것들 말리는 건 고사하고 같은 편을 들던 인간들도 똑똑히 기억한다. 인간이 참 별나고 가지가지 하는 종자들이 많은 거 같아.

신학교 댕길 때 두어주 밥숟가락 놓고 기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 어지럼증으로 상당기간 고생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무리들엔 될 수 있으면 끼지 않으려 했으나 이른바 운동권으로 분류되면서 인생이 원대로 되질 않았지. 요새는 밥을 두 끼 차려 먹고 아침은 간단한 미숫가루. 밖에서 먹으면 탈이 나는 경우가 잦아 번거로워도 집밥을 지어 먹는다. 배탈이 나거나 정신없이 바빠 끼니를 놓치면 거창하게 이 나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단식투쟁이라 생각하고 혀를 살짝 깨물지. 시큼한 위액이 올라오면 ‘하나님 아부지~’ 하고 애교를 부리면서. 나도 은행잔액 걱정이 되어 살짝 비굴한 기도가 나오기도 하는데 하늘은 진짜 싸늘하다 못해 이런 시베리아. 단식으로 뭘 해본다면 스코트 니어링처럼 죽음 앞에서가 좋을 거 같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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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짱이신 로빈슨 크루소. 내 키만큼 생긴 카약이 있는데 이름을 로빈슨이라 지었다. 요트는 돈이 꽤 들지만 카약은 노를 저을 알통 근육만 있으면 된다. 뙤약볕이 물러났으니 다시 이 친구를 꺼내 강물을 저어갔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브래드 피트가 형이랑 둘이 나무배를 끌고 폭포수로 뛰어들던 위험천만한 장면. 카약에 확 끌렸다. 태풍이 몰고 온 폭우로 호수마다 물이 찰랑찰랑하고 강 상류는 용맹하게 흐르더라. “숫염소처럼 생긴 고독한 카약에 올라타 강물을 저어 흘러가면 한달음 마도로스가 된다. 입술을 나누고서 느린 곡조의 이별 노래를 부르기 전에 북극성 주위를 맴도는 떠돌이별처럼 카약은 멀리 가지 않고 앵두꽃이 지는 저물 무렵 집에 돌아오고는 하였다. 가족사진에 없어도 로빈슨은 내 가족. 강물의 릭샤꾼인 바람이 건들 불고 주술의 길이 열리자 나는 객사 앞에서 로빈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약에 잠시 앉아 머리를 식히고 돌아왔지. 식힌다는 것. 그러려면 찬물이 필요해. 찬물에 쏙~ 뛰어드니 정신이 번쩍 났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 가운데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고 있다.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미술 전시회 도록에 서문을 쓰는 방법,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과부를 경계하는 방법,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까지…. 낄낄 웃으며 배울 만한 내용이 많다. 머리를 식히는 방법 가운데 진짜 찬물로 뛰어든 인간의 글을 지금 그대는 읽고 계시는 거다. 정답은 어쩌면 쉽고 단순한 것이 아닐까. 가기 싫은 곳엔 안 가면 되는 것이고, 꼴 보기 싫으면 안 보면 후련해진다. 스님이 절 싫으면 떠나는 것이 장땡이다. 정치권력이 문제일 때 당장 끌어내리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참고 견디고 어쩌고 하다간 울화증만 깊어져. 시원하게 흘러가는 물을 보고 만지고 했더니 속이 뻥 뚫리더라. “시골 유모차엔 아기 대신에 무나 배추 몇 포기가 타는 것처럼 내 카약에는 시와 별과 구름과 음표가 탔고 나는 이를 윽물고서 노를 저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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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끝집 사시는 분들은 단체여행팀으로 불려도 될 만큼 그 어떤 정권보다 많은 해외순방을 하고서도 마추픽추를 못 가보시다니.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 우리 국민들은 스페인 군대 같은 일당들이 몰고 오는 사드도 두렵고, 오기와 깡다구로 똘똘 뭉친 이북 사람들도 혈압에 나가떨어질까 걱정스럽다. 땅 아랫마을에선 더는 살기 괴로워 공중누각을 짓고 마추픽추에 올라가 숨어 살아볼까나. 마추픽추엔 지금쯤 안개비가 자욱한 아침과 돌담이 눈부신 한낮과 하늘이 껌껌해지는 개기일식이 빈번한 저녁의 반복이겠다. 소설가 장강명의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보니 ‘여기 와보라카이’ 그런다는 보라카이 풍경이 ‘저렴하다’는 자주 표현되는 말에 섞여설랑 흥미진진했다. 일박이일이 기본인 비행기와 도둑놈같이 비싼 고산열차를 비롯하여 보라카이만큼 저렴한 여행은 아니지만 마추픽추는 평생 한번은 꿈꿔볼 만한 여행지다.

신기한, 정체 모를, 웅장한 공중도시에서 며칠 묵으며 지은 노래가 있다. “처음 우리는 돌이었다지. 하늘이 낳은 돌멩이들. 산 아래로 굴러 들로 강으로. 사냥을 피해 바위 올라간 표범과 갈기 늑대는 돌단을 높이 쌓아 기도 올렸네. 개간한 밭에 인디오들 따루이를 거두는가. 산허리 어린 알파카여! 동무도 없는지 안개 밀려든 마추픽추에 신께 바쳤다는 아이들의 혼령. 바람이 내게 노래하였네. 바람이 우후 들려주었네. 심뽀니아, 케나, 잉카의 악기들. 돌들이 내게 노래하였네. 돌들이 우후 노래 불렀네. 머나먼 그곳 한없이 그리워.”

거대한 돌을 깎아 붙인 실력은 오늘날도 재현이 어렵다고 한다. 안개와 구름에 휩싸이면 마추픽추는 마치 천상의 도시처럼 신비감이 배가된다. 우리 아랫동네도 돌담길이 참 예쁘다. 마추픽추를 봐버려서 좀 시시하기는 하여도. 재작년 주차장 구석에 돌담을 쌓는 도전을 해보았는데 할머니 한분이 솜씨가 좋다며 칭찬해 주었다. 어깨가 으쓱거렸다. 분잡한 일들로 살아가다가 내 몸속 잉카의 피를 잊을 뻔하였다. 우리처럼 생긴 인디오들이 색동옷을 입고 기다리던 곳. 머잖아 뒷산에 색동 단풍이 들면 내가 사는 이곳도 마추픽추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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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만 하더라도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면서 ‘사네 못 사네’ 투덜댔었는데 이젠 춥기까지 하다. 털실로 짠 옷을 꺼내 입는가 하면 이불을 안고서도 냉기가 느껴질 지경이다. 길거리엔 갈꽃 코스모스가 우주여행을 떠나자며 무장하게 피어나는 중. 담배건조장은 마른풀들이 몸을 뒤척이는데 그도 언젠가 연기가 되어 밤하늘 높다란 데까지 승천할 것이리라.

탱자나무 울타리는 푸르스름한 아기별들이 다다귀다다귀 떠 있다. 나는 야경꾼이 되어 세상의 여러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녔었는데 한번은 늑대 무리가 달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탱자나 유자, 감귤이 은하수에 동동 떠가는 모습도 구경했었다.

“사람은 잠들 수 없을 때 비로소 밤이 얼마나 긴지 알게 된다.” 중국 속담은 지독한 밤의 재앙인 불면증에 소름끼쳐 하고 있구나. 그렇다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누군들 피해갈쏘냐. 밤은 잠의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낮을 늘리기 위해 시간을 빌려오기도 해야 한다. “우리가 낮을 늘리는 최고의 방법은 밤에서 몇 시간을 훔쳐오는 것이다.”(크리스토퍼 듀드니, <밤으로의 여행>에서)

인공 불빛 속에 어둠을 잃어버린 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시골살이겠다. 나는 방해받지 않으면서 고스란히 어둠을 만끽하고 사는 러키 보이다. 작은 스탠드로 독서를 하고, 과도를 꺼내 조심조심 복숭아를 깎아 먹기도 한다. 운문사 주지를 살고 계신 친구 스님이 명물 청도 복숭아를 한 짝 보내주시어 잘 먹었는데, 복숭아는 예로부터 밤에 먹어야 그 맛이 일품이렷다. 그러나 무엇보다 술이든 과일이든 친구가 사주는 것이라면 다 맛있는 법이겠다.

요사이 밤에 약속들이 많았다. 꿀물을 타서 마셨더니 더 속이 데리고 아리는 것 같다. 밤에 밖으로 사람 구경 다니기보다는 식탁보를 내 집안에 펼치자꾸나. 전어회, 전어구이가 아무리 유혹을 해싸도 집에다 거미줄을 치고 매달려서 손님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올가을 첫 번째 손님은 달빛이었다. 창문을 여니 달빛이 무릎께까지 다가와 뭉그작거린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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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에 둥둥 뜬 오리들. 발바닥을 쫙 편 채 낮잠을 자고 있다. 저래야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겠지. 오리 선생에게 수영이나 배워볼까? 타잔만큼 자유형 헤엄을 잘 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배영, 접영까지 흉내는 낼 줄 안다. 그러나 수영장에 가려면 도심까지 멀리 나가야 한다. 남세스럽게 대낮에 아낙네들이랑 옷을 홀라당 벗고서 뱃살 훔쳐보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라. 게다가 우리 동네 개울보다 깨끗하지도 않을 것이다. 독한 락스 약품들을 풀어 청소를 한다던가. 

건강을 고려하여 운동을 하나 하긴 해야 할 나이다. 또래 친구들은 대개 골프에 빠져 있더라. 마당 잔디밭은 골프장 수준으로 단정하게 유지하고 산다. 구멍만 하나 파두면 여기가 바로 골프장. 골프는 호주나 아일랜드 초원에서 태어났더라면 벌써 프로급이 되어 있을 터. 천당에 가면 골프장이 많다더군. 예수님은 양떼들 노니는 푸른 초장에서 주로 골프를 치시는데 회원권을 사려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니 나나 당신은 그냥 포기하고 다른 운동을 찾자. 


출처: 경향신문 DB

오랫동안, 매우 꾸준히 요가를 해왔다. 요가원을 직접 차리기까지 한 친구 덕분에 인도 요가 성지인 우타라칸드 지방의 도시 리시케시에 다녀오기도 했다. 며칠 수료했다고 종이딱지도 주긴 하더라만 어디 뒀는지조차 모르겠다. 요가는 속성 라이선스로 해결될 무엇이 아닌 무구하고 심오한 세계렷다. 

칼잡이 검도를 배워볼까도 했는데 목검을 들어 누굴 찌르는 건 흉내조차 내기 싫더라. 장고 끝에 태권도장을 찾아갔다. 한국 사람이 태권도 고려, 금강, 태백 품새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않겠어. 

꾸무럭꾸무럭 일어나 눈곱이나 간신히 떼고 살다가는 인생이 너무 허망하게 흘러가 버릴 것 같아 더 늦기 전에 월사금을 내고 등록까지 마쳤다. 형편이 어려워 도장을 그만둔 아이들이 생겼다고, 도생이 줄어 사범은 기운이 쪽 빠진 얼굴이었는데 나를 보자 생기가 돈 눈치였다. 아이들이랑 동무삼아 오리주둥이처럼 샛노란 학원차를 타고 다닐까 흐흐….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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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끼고 까물까물하면 오만 곳의 삭신이 쏙쏙 쏙쏙쏙 쑤신다는 할매들. 날이 이렇게 화창한데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당최 모르겠는 그놈의 삭신. 깻잎 자라는 둔덕 고랑을 예초기로 드르르륵 좀 쳐드렸다. “벨라도 올해는 심도 없고 뻗치요야. 눈까풀이 가마니때기 맹크롬 뚜꾸와진 거 같고 인자 눈감을 날이 가차운갑소.” 잠깐 내려와 지내던 큰아들네가 도로 올라간 뒤, 밭고랑은 풀고랑이 되어버렸다.

“젊어서도 그라고 아프셨소?” “아따, 애랬을 때는 안 그랬재.” 옛이야기들은 항상 다음 말문을 닫아걸게 만든다.

한참의 정적으로 저녁 어스름이 찾아왔다. 이곳 수북면은 북자가 붙어 당연히 북방처녀들이 살지. 멀리 툰드라 처녀들만 북방처녀가 아니올시다.

“혹시 바람이 거세게 부는 국경 근처를 여행하다 노스컨트리 축제에 들르게 되면 거기 사는 이에게 내 말을 전해주실래요. 그녀는 한때 내가 정말 사랑했던 소녀라고. 혹시 사납게 눈발이 날리고 있거나 여름이 끝나고 강물이 얼 때쯤 가게 되신다면 그녀가 거센 바람을 막아줄 따뜻한 코트나 입고 사는지 봐주실래요. 긴 머리를 여태 땋고 있는지도 내 대신 봐줘요. 머리칼이 가슴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모습. 그녀의 긴 머리칼은 내가 오래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네요. 그녀는 날 기억할지 모르겠어요. 수도 없이 나는 기도했어요. 밤의 어둠 속에서, 또 낮의 밝음 속에서.” 애청곡이자 애창곡인 가수 밥 딜런의 노래 ‘노스컨트리 출신 소녀(Girl From The North Country)’.

세월에 떠밀려온 하모니카 소리 같은 오래 묵은 노래가 이 골목과 마을을 휩싸고 있다. 며칠 전에 이곳에도 유성우가 뿌려졌다. 아타카마 사막의 천문대 말고도 별의 곳곳에서 긴 머리칼을 휘날리고 달려가는 별똥별 처녀들을 보았다. 나도 잠을 안 자고 창문 밖을 내다봤지.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노래를 켜두고서. 소식이 끊긴 이북 땅과 시베리아 고려인 북방처녀들까지 들리도록 크게 더 크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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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밀물과 썰물이 사이좋게 들어오고 나가는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냇물보다는 짠물에서 멱을 감는 일이 훨씬 잦았다. 주민들은 모두 구릿빛 피부를 가졌고 웃을 때만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흑백 테레비가 칼라 테레비로 일제히 바뀌자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까무잡잡한 구릿빛만이 아니라는 걸. 아버지처럼 나도 그 바닷가에 머물며 십년도 넘게 짠 내 풍기는 어부, 구릿빛 농부들의 종지기 목사로 살았다. 뽕짝 디제이 이장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잔칫날이면 보사노바나 삼바 음악을 몰래 틀었다. 언젠가 ‘나오미 앤 고로’라는 일본인 보사노바 밴드의 음반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남미 음악 불모지에 사명감으로 한 일이었다. 대중의 싸늘한 외면으로 멋쩍어 뒤통수만 긁었던 기억.

출처: 경향신문DB

조빔의 저 살가운 보사노바곡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브라질 리우의 해변 말고 우리네 땅 바닷가에서도 듣기 좋은 노래. “둠둠둠 둠둠둠 그녀를 보라! 신이 내린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우아하게 해변을 걷고 있는 걸음걸이. 이파네마 해변의 태양이 축복을 내린 구릿빛 피부의 아가씨. 마치 외로운 시인처럼 걷고 있어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의 선물이여. 그런데 왜 나는 혼자란 말인가. 이다지 슬픈 것일까. 눈앞에 보이는 저 눈부신 아가씨가 꼭 내 님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해변을 걷고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얼마나 눈부시고 사랑스러운 곳인지….”

한번은 리우에서 꿈같이 짧은 며칠 밤을 보냈다. 숙소에 짐을 풀기가 바쁘게 택시를 잡아타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코파카바나 해변과 이파네마 해변. 노랫말처럼 보사와 삼바의 청춘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고 내 귀엔 보사노바, 가슴에 오래 새겨둔 소녀의 노래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새로운 감각, 새로운 경향,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보사노바. 세상의 모든 외롭고 슬픈 청춘들이 그 바닷가에서 행복해하며 물장구치고 놀았으면 싶었다. 해변을 걷는 청춘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이미 눈부시고 사랑스러운 천국인 것을….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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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강변 치렁치렁한 머리를 땋은 버드나무가 헤드뱅잉. 물고기는 귀가 없으니 강바람 록음악을 듣지 못한다. 바보같이 바늘을 숨긴 지렁이를 탐하다가 강태공에게 붙잡히면 자글자글 매운탕 되어 때늦은 불꽃 춤. 판화가 오윤의 저 유명한 작품 ‘천렵’엔 족대를 들고 냇물을 뒤지는 아재들, 주먹만 한 돌을 모아 솥단지를 얹고 불을 지피는 이의 뒤통수가 재미지고 오지게 표현되었다. 마을마다 흔했던 여름나기 풍경. 시방 그 많던 이웃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토종 물고기는 씨가 말랐단다. 어딜 가나 파헤쳐진 강물엔 쿰쿰한 녹조가 떠다니고, 넓어진 신작로마다 너도나도 차를 장만하여 거대한 주차장이다. 냇물은 물 반 고기 반이 아니라 닭뼈와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작은 동네에 머물며 천렵을 즐기고, 재물이나 권세가 아니라 사람을 우선하고 인정과 자연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한번은 페루와 볼리비아를 끼고 있는 티티카카 호수를 찾아갔다. 버스에서 내려 배로 갈아타자마자 거대한 산정 호수. 거기 코파카바나라는 강변마을이 있었다. 잉카 어부들이 물고기를 놓고 흥정을 하던 곳. 꼭 우리 맛 닮은 매운탕을 끓여 먹거나 ‘세비체’라는 레몬에 절인 생선회를 내놓기도 했다. ‘꾸이’라는 쥐목과 동물을 잡아다가 불에 굽거나 튀긴 요리도 즐기는데 쥐 이빨이 떡하니 놓여 있어 비명을 지를 뻔도 하였다.

건너편엔 먼 옛날 우리처럼 색동저고리를 입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동쪽은 독수리 콘도르가 지키고 서쪽은 산신령 퓨마, 남쪽은 늑대개 자칼, 북쪽은 용왕님 물뱀이 지킨다는 호수. 여기 원주민들은 한번씩 천렵을 즐기기도 하는데 정분이 깊이 들어 마을은 벌꿀보다 끈끈하였다. 여행자를 위해 마련한 상은 푸짐하였고, 이웃들을 모두 불러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눴다. 새까만 아이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골목에서 뛰놀았다. 유치원 버스 같은 거 태우지 않아도 아이들은 옥수수처럼 잘 자란다. 대한민국 ‘TK 가카’의 지엄하신 땅이 아니라 지구 반대쪽 동네 ‘티티카카’ 얘기다. 옹졸하지 않은 대범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영혼들. 세상은 그런 맑고 순수한 영혼들이 어느 정도 살고 있어주어야 영속할 수 있는 곳이라고 나는 믿는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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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반찬도 없고 하여 면소재지 함바집에 들러 백반을 사먹었다. 혼자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먹으니 아짐이 째려보며 빨리 먹고 나가라 눈치가 사나웠다. 참견쟁이들 걸핏하면 하는 소리 “아따메 날도 더운디 씨염 조깐 자르쇼잉” 하지 않음만도 고마웠다. 암튼 급체할 뻔했다. 나간 김에 마트에 들러 수박도 한 통. 좋은 상품은 도시민들에게 죄다 가버리는지 번번이 사먹은 수박마다 맛이 밍밍하고 싱거웠다. 이 살인더위에 수박 한 통 사려고 대처까지 나갈 기력이 이젠 없다. 날마다 열대씩 곤장을 맞는다는 열대야. 오늘도 곤장 열대야. 단물 빠진 수박이나 씹으며 산골에 눌러앉아 궁둥이 쓰라린 설움이나 달래련다.

대자리에 누워 매미소리가 좔좔 자장가다. 청대를 잘라 엮은 대자리는 나만의 차가운 북극 얼음침대. 재미삼아 잔디마당에 텐트를 치고 대자리도 옮겨 놓았다. 마당에 밥상을 차리고 앉아 밥을 먹자니 방에서는 느끼지 못한 산바람이 별스럽더라. 풀냄새 향긋하고 풀벌레소리도 우렁차. 밤사이 소낙비가 내린다면 좋겠어. 싱 잉 인 더 레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풀벌레 캠핑.

원령공주의 섬에 다녀온 뒤부터 깨달은 바가 있어 정말 부지런히 꽃밭에 물을 준다. 언제 비가 내릴 것을 믿고 모른 체 내버려 둘 것인가. 샘에 물이 있을 때 꽃들과 사슴, 어린 강아지들과 나누어 마셔야 한다. 어린이와 동물을 사랑했던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우리 셋이서 풀벌레 캠핑을 한다면 내 친구의 집은 바로 이 마당에 친 텐트일 게다.

마당 한쪽에다 찜용 코펠을 설치하고 장작불을 모아 옥수수와 감자를 쪘다. 개들이랑 먹으려고 어묵도 한 솥 끓였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살림들이 장난이 아니게 늘어만 갔다. 냄새를 맡은 야옹이들이 귀신 울음소리를 내면서 몰려들고, 모기떼는 종아리를 인정사정없이 빨아댔다. 캠핑은 딱 하루만 신나다가 심심하고 괴로워졌다. 다음 캠핑은 멀리 계곡물에 몸 담그며 할리우드 아니 홀라당우드 애인들이랑 찐하게 해야 쓰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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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선인장이다. 산더미만큼 크다는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을 한번쯤 보고 싶다. 애리조나 광야엔 언제 가보나. 선인장 하면 단연 멕시코겠다. 한번은 화가 프리다 칼로의 행적을 따라 출생지 코요아칸과 ‘꽃피는 땅’이라는 뜻을 지닌 소치밀코를 순례했다. 도심 외곽은 야생선인장들이 끝도 없는 숲을 이루었다. 날카로운 가시 끝엔 울긋불긋 꽃들. 배고플 때 새들과 도마뱀이 따먹기도 한다더라. 프리다 칼로는 나 같은 조무래기쯤 만나주지도 않겠지. 내세에 소원이 있다면 선인장 나무 아래 설탕차를 마시면서 프리다와 딱 한번이라도 티타임을 나눠봤으면. 그녀의 푸른 집을 다시 방문해 벽에다 등을 기대고 앉아 한참 쉬다오고 싶어라.

라틴 미술 전시기획자인 안진옥 샘이 옮긴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를 읽고 있다. 프리다의 마음을 통째 가져간 디에고 아저씨가 부러울 따름. “디에고! 진실은 너무 거대해서, 나는 말하기도, 잠들기도, 듣기도, 좋아하기도 싫어져요… 마법의 힘 없이 나는 당신의 두려움, 불안, 심장 소리 안에 갇히고 싶어요…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하지만 적합한 색깔이 없네요. 당신은 너무 다양한 색깔을 가진 사람… 당신은 매 순간 나의 아이. 날 때부터 내 아이. 매 순간, 매일 나의 것.”

디에고처럼 키가 크고 뚱뚱한 선인장들. 겨울 추위만 없다면 꽃밭에 그런 커다란 선인장을 몇 그루 심고 싶어라. 외부세력 내부세력 꽃들은 그런 거 모른다. 모두가 조화롭게 연대하고 이슬 한 모금이라도 나눠마시며 장엄한 꽃송이들을 피워낸다. 요즘 귀촌하여 집 짓는 사람들 보면 꽃밭은 만들지 않고 돼지고기 굽는 불판과 고기 싸먹을 상추 배추밭에만 집착한다. 정성을 들여 정원을 가꿀 생각도 여유도 없으면서 왜들 저렇게 숲을 허물고 집들을 짓는 걸까.

앵무새와 비둘기, 원숭이, 백합꽃과 선인장, 달과 태양과 솜브레로 모자를 눌러쓴 농부들. 이국적인 정원이 기억 속에 생생해. 아삭아삭 씹히는 참외와 해바라기 꽃밭을 갈아엎고 그 자리에 전쟁무기를 들여놓자는 사람들을 본다. 무슨 선인장 독가시처럼 생겨먹은 귀신에 홀린 자들일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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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팡지게 생긴 아기 돼지들이 꿀꿀이죽을 나눠 먹고 뛰놀던 집. 거무뎅뎅한 피부에다 머리엔 쇠딱지가 달라붙은 아이들이 그 집에서 또래처럼 같이 자라났다. 요마마한 강아지들은 얼마나 또 귀엽고 재미나던가. 시들방귀나 뀌던 할아버지. 숨을 고르며 초록풀이 무장한 데다 염소를 메고 돌아오면 묵은 김치에 강피밥이라도 온 식구 둘러앉아 감사기도를 바쳤던 집. 얼빠진 치룽구니들은 모를 것이다. 다복했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억과 소망을. 먹고살기 위해서만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인도의 큰 스승 라마 크리슈나의 제자 중에 공부를 많이 한 비베카난다가 있었다. 그에겐 갠지스강의 돌을 주워 신전을 꾸민 깔루라는 도반이 있었는데 이게 늘 못마땅했다. 신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돌 따위에 있지 않다고 깔루의 어리석음을 쏘아댔다. 아랑곳하지 않고 깔루는 사원에다 부지런히 돌단을 쌓고, 쓰러질 것 같은 초막에단 돼지와 염소를 길렀다. 깔루를 따르던 개와 원숭이들은 깔루를 볼 때마다 졸졸 뒤를 따랐다. 성난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스승 크리슈나는 머리와 재기만 발달해서 항상 날이 서 있는 비베카난다를 꾸짖었다. “그대의 열쇠는 앞으로 내가 가지고 있겠네. 그대는 아이 같은 순수함이 없으니 위험한 인물이야.” 비베카난다는 요가와 명상으로 정진했으나 스승이 가져간 깨달음의 열쇠를 돌려받지 못했다. 죽기 사흘 전에야 비로소 무릎을 쳤다. “머리로 살지 않고 마음으로 사는 법. 겸손하고 순수한 삶을 사는 일이야말로 신에게 이르는 최선의 길임을 내 이제야 알았노라.”

집집마다 돼지 한 마리씩은 키울 것이다. 돼지저금통. 나도 한 마리 있지. 오백원짜리 백원짜리 어쩔 땐 지폐도 몇 장. 해마다 성탄절엔 이걸 쪼개서 나눈다. 돼지가 멀리 아프리카에 가는 해도 있고 북한 빵공장에 가기도 하고 세월호 팽목항으로…. 시방 통의동 한옥집에선 백기완 어르신과 문 신부님 전시가 있다. 작품은 가난뱅이라 못 사지만 연말에 돼지저금통이라도 보태련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이 꼭 이 땅에 세워지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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