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198건

  1. 2015.10.07 마릴린 뭘로
  2. 2015.09.30 날마다 캠핑
  3. 2015.09.23 콜라 사이다병
  4. 2015.09.16 파란색 잉크 하늘
  5. 2015.09.09 원추리에 원추리꽃
  6. 2015.09.02 맨드라미 봉숭아
  7. 2015.08.19 위로 극장, 위로 공단
  8. 2015.08.12 소쇄원 달밤
  9. 2015.08.05 인투 더 와일드
  10. 2015.07.29 옷을 벗은 자유인
  11. 2015.07.22 베를린 천사의 시
  12. 2015.07.15 집밥
  13. 2015.07.08 처녀 귀신의 원한
  14. 2015.07.01 밥 말리와 레게 파마
  15. 2015.06.24 라다크의 별과 전깃불
  16. 2015.06.17 들개
  17. 2015.06.10 이매진, 상상력
  18. 2015.06.03 고독과 은둔
  19. 2015.05.27 임을 위한 행진곡
  20. 2015.05.20 박쥐와 배트맨

아직 여친이 없는 대학생 아이가 외로워 미치겠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훌륭한 여자를 달라고 기도하면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뿅 하고 나타나실 거고 그럼 넌 ‘오 마이 갓’을 외치겠지. 책도 많이 읽고 지적이면서 야시시한 친구를 원한다면 마릴린 먼로가 나타날 거야. 남자에게 ‘뭘로(무얼로)’ 어필할까? 먼로는 그 ‘뭘로’를 아는 여자였지. 평소 엄청 많은 책을 읽었다고 그래. 케네디 대통령과의 스캔들에서도 단지 육감적인 배우로서가 아니라 평화의 기쁨을 전달하는 지적인 대화 상대였다지. 당신이 가을이면 골백번 듣는 소리. 내가 한번 더 한다고 성질 내시진 않겠지. 가을은 독서의 계절! 스마트폰 좀 그만 들여다보시공 제발 책을 가까이. 마릴린 뭘로? 그래 마릴린 책으로….






시인들이여! 찌부러져 쉬려고만 마시고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빨리 글을 쓰시오들. 세상에 정직한 책들이 정방폭포 물줄기처럼 쏟아져야 해. 저들은 정직하지 못한 책들을 내놓겠다고 그러잖아. 부끄러운 사실은 몰래 감추고, 자기 좋을 대로 역사를 미화하고, 허망하고 패배적인 노예의 사상을 퍼트리겠다잖아. 승산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 시인들은 침묵해서는 안 돼!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존재다. 가령 ‘자네는 너무 올곧아 그래가지곤 이길 수 없어’, ‘내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하려면 좀 더 부드러운 말투를 써야 해’라고 조언을 해준다. 고맙긴 하지만 틀린 말이다. 승산과 유효성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니라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존재하는 루쉰에게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이렇게 살겠다’, ‘이것이 진짜 삶이다’라고 무언가를 드러내야만 한다. … 그것이 시인의 소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경식, <시의 힘>-

노랗고 붉고 자주색 별들로 왁작대는 국화 화분. 들국화의 노래 ‘행진’이 눈앞에 펼쳐지는 날. 눈을 갑자기 오래 쳐다보면 젊었을 때는 “나도 사랑해!” 바로 대답이 튀어나오지만 나이가 들면 “나 돈 없어. 왜 그랴” 이렇게 말이 바뀌게 된다, 흐흐. “책 살라궁….” 이래 버리면 진짜 외면할 방도가 없으리. 책방으로 어서 고고, 마릴린의 책방으로 갑시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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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언덕에 청소년수련원이 있는데 장사가 잘 안되나 계곡을 깎고 캠핑장을 개장. 고성방가 시끄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외국에 가보면 텐트는 노숙자가 살림하는 거처. 에베레스트나 가야 수십개 보이는 것. 아파트도 비좁고 답답하거늘 캠핑장 텐트는 옆집이 더 가까워. 순례길에 쓰려고 국방색 2인용 텐트를 하나 마련했었다. 이미 숲속에 살고 있고 집도 나무와 흙벽돌로 지은 터. 요란하게 캠핑을 다닐 이유가 없어 지프차 트렁크 속에서 쿨쿨. 만날 내 손으로 밥해먹고 사는데 버너다 코펠이다 취사도구만 봐도 징그럽다. 고기는 누가 구워줘야 맛나지 내가 뒤집고 판 갈고 해봐야 무슨 맛. 나야 매일매일 날마다가 캠핑 아닌가.


오전에 비바람이 추풍낙엽이란 말을 부려놓고 지나가더라. 사람 몸에 따뜻한 피가 도는 까닭은 이럴 때 서로 끌어안고 추위를 같이 견뎌내라는 뜻. 오리지널 텐트 게르에서 나고 자란 몽골 시인 검필더 뭉흐체첵의 시 ‘아들아’를 읽는다. “물오른 초원이 어떻게 우는지 보여주려고 너의 발을 이슬로 씻어 주었네. 꽃을 꺾지 않는 아이가 되라고 이 어미는 너의 귀에 대고 노래를 불렀네. 딱딱한 네 놀이터를 부드럽게 해주려고 씨름꾼 아버지는 초록 비단 뎁제(풀)가 뭉개지도록 밟았고…”. 그리고 이제 그 푸른 풀조차 모두 사그라지는 시월.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에게 무엇을 더 보여주시려는가.





지금 못난 인간들이 꼭 과거를 주워섬긴다. 개발독재기 새마을운동 추억하기란 한심한 구닥다리 동창회 같다. 장차 일어날 미래의 모습은 창조뿐인가. 앞날을 보여주는 일이 아버지 어머니의 도리. 번영과 성장을 외쳐대지만 평화와 행복은 오리무중. 돈이 있어야 통일도 될 것 같지만 북녘 사람들 자존심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자존심을 건드리면 ‘죽으면 죽었지~’가 되는 그이들…. 또 누가 노동자들을 파업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가. 노숙자들에게 캠핑의 즐거움을 설파하고, 실업자들에게 쉼과 힐링을 얘기하는 한심한 시대를 걷고 있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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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깡촌 위를 날아가던 비행기 조종사가 빈 콜라병을 한 개 던지면서 시작되는 소동극 <부시맨>.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에게 다시 돌려드리기로 작정한 추장 아저씨는 길고 험난한 여행을 시작하지. 부시맨이 슈퍼맨보다 인기가 높던 시절, 우리네 시골에도 부시맨들이 살고 있었다네. 고물상 아저씨는 아이들이 콜라병을 주워 가져오면 호박엿 쌀엿으로 바꿔주고는 그랬지. 그날부터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부시맨이 되었고, 콜라병이라면 눈에 쌍라이트를 밝혔지. 아버지 경운기 부속품을 내다 파는 놈, 저수지 공사장 철근 토막을 훔쳐다가 턱관절에 쥐가 날 만큼 많은 엿을 바꿔 먹은 녀석도 있었어.

마을회관 앞의 쓰레기 분리수거함. 대도시 수거함과는 달리 항상 홀쭉하니 배고픈 저 그물망. 가난한 촌로들이 주로 계시는 윗동네는 들어오는 명절선물이 변변찮으니 나가는 쓰레기도 눈곱만큼 작아. 명절에 아무리 배불리 먹는대도 소화제까지 필요 없고 콜라 사이다 한잔이면 배꼽 아래까지 개운. 명절 잔치 뒤끝으로 콜라병이나 몇 개 굴러다닐 뿐인 골목길.




유별난 애국자들은 콜라와 아메리카노 커피조차 멀리한다지. 국산차도 외국에 나가면 그쪽에선 수입차요, 외제차일 터. 실력과 서비스로 승부해야지 세계의 노동자들은 모두 한 형제. 예수님도 부처님도 외국제 ‘수입산’이니 그럼 믿지를 말아야지.

속이 울렁거리고 더부룩할 때 콜라 한잔씩 찾는 저 이들은 국경 초월 럼콕 마니아. 럼주 대신 그럼을 넣어 콜라와 믹서. “그럼 입이 느끼하고 배 속이 부풀헌디 콜라나 한잔?” 검은 물을 꿀컥꿀컥 들이마신 뒤 꺼윽~ 트림까지 발사. 불꽃놀이처럼 쏘아올린 콜라 트림이 공중에 확하고 퍼지면 보름달도 어이없어 싱겁게 웃으려나. 꽃집도 아닌데 이름부터가 화원인 해남군 화원면에 사는 동무가 있다. 이번주 집에 있느냐고 물어 보길래 한동안 잠행 중이라 했는데 생선을 이미 보냈다고. 꽃이나 보내지 웬 물고기. 고양이가 대신 잘 먹겠네. 콜라까지 사줘야겠어. 집 앞에 뒹구는 콜라병은 내가 아니라 고양이가 마신 것으로 아시길.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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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문턱이라 찬바람도 불고.” “찐덕찐덕 하든 날이 가불등만 금시 추와부러라.” “그러게요.” “인자 뚜꾼(두꺼운) 이불을 더퍼야 쓰거씁디다. 죽전(대밭)이나 하늘에 닿으까 저라고 구름이 노푸덴허구만이라. 바람도 선들선들 불어부리고.” 이 동네에서 얼치기 작가인 나만 빼고 다들 일찍 보따리를 싼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 할매는 시를 읊으며 파밭을 매고 나는 병이 들어 누렇게 곯은 고추밭을 갈아엎었다. 풀조차 뽑지 않고 버려둔 야생농사. 고추를 몇 개나 따먹었을까. 매운 맛을 즐기지는 않아서 누구들 따주기나 하고….

집밖에 나가면 갤러리와 찻집, 밤에는 벗들과 둘러앉아 얘기꽃. 돌아와 이곳 산골에선 정원을 돌보는 일이 주업이 된다. 낡고 해진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풀과 나무들이 먼저 알고 일제히 겨드랑이를 들어 올린다. 농사야 내버려두는 무농약 자생농법으로다가 내 밥상에 찬이나 간신히 건져도 되는 것이지만 정원일은 손이 이만저만 가는 일이 아니다. 숲이 우거진 이 집은 내가 집을 짓고 이사 올 때 모두 구해다 심은 나무들이다.




언제는 정원사 겸 작가 재키 베넷의 <작가들의 정원>을 읽었는데, 버나드 쇼와 찰스 디킨스, 애거사 크리스티를 비롯, 동화작가 로알드 달의 정원을 소개하고 있었다, 제라늄 꽃을 너무 사랑해서 아예 제라늄 무대라는 곳을 만들기도 했다는 찰스 디킨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스위스 살레에서 지냈는데, 그곳의 풍경을 적은 글은 이랬다. “내 집은 나무들이 우거져 포위당했고 새들과 나비가 주인이나 진배없이 방문한다. 태양과 그림자는 벗들과 함께 오며 나무는 가지를 뻗어 초록빛깔 손을 먼저 내민다.” 진짜로 파란색 잉크로만 글을 썼다는 찰스 디킨스. 인간애를 일깨운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 그의 책은 내 거실에도 항상 꽂혀 있지. 파란색 하늘의 끝에는 노랗고 빨간 성탄별이 떠있을까. 하늘과 정원을 잃어버린 시대, 푸른 잉크가 풀어진 가을 하늘을 누가 치어다볼까. 하늘과 정원을 잃어버린 세상에 이를 되찾아 안겨주는 일이야말로 작가의 사명인지도 모르겠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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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꺾이고 없는 ‘굴렁쇠’라는 어린이 신문에 글을 몇 해 연재한 일이 있었다. 골리앗 소년땡땡일보를 향해 던진 다윗의 물맷돌 같은 신문이었지. 필진 가운데 이오덕 선생님이 계셨는데, 글을 쓸 때마다 선생님이 지적하실까봐 내심 걱정이 컸다. 다행히 핀잔보다는 칭찬을 주셨어. 그래도 같은 지면에 오를 때마다 말법이 문제가 있지는 않나, 일본말법으로 쓴 건 아닌지 꼼꼼히 살펴보고는 그랬다. 눈치를 보자는 게 아니라 어른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 주의하고 흠모하며 따르는 마음이 어른을 극진히 모시는 태도일 테니까.


동네 길, 어르신들을 마주치면 안부 인사라도 꺼내며 고개를 넙죽 숙인다. 이 땅을 오래 지켜주어 감사한 마음. 여기 살게 된 지도 십년이 넘었으니 원주민 비스무리. 그래도 아직은 당당 멀었어. 명절이 다가오니 울력을 했었나 마을 길 주변이 산뜻해졌더라. 나 없을 때 몇 분이서 예초기를 돌린 모양. 알지도 못했고 거들지 못해 죄송하여 일찍 일어나 미비한 곳들을 찾아 풀을 깎았다. 차 한 대나 간신히 지나가는 비좁은 마을 길. 둘둘이 아니라 셋셋 치킨도 배달을 오지 않는 길. 짜장면 한 그릇 배달되는 마을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라.

이젠 완연한 가을인데 여름꽃 원추리가 뒤늦게 피었더군. 슬로시티에 걸맞은 느림보인가. 풀을 깎다 말고 한참 꽃구경을 했다. 이태리, 헝가리, 시칠리, 빠아리만 있는 게 아니지. 꽃과 사람이 함께 사는 원추리. 땅을 지켜온 어른들이 계시는 마을. 내가 이장이라면 원추리꽃이 남도에서 젤 예쁘게 피는 길을 가꾸고 싶어. 언제부턴가 누가 산골짜기에 찾아와 색소폰을 몇 시간씩 연습하고 간다. 그것도 교회 찬송가로다가. 산새들도 나도 고막이 터질 지경. 최근에 이사 온 집에선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여 문 열어놓고 고성방가. 이런 무례한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길은 등산객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이다. 흑두건을 쓴 자전거족들은 라디오를 크게 틀고서 내리막길을 광속질주. 하늘도 어른들도 두려워 않는 저 마음들이 모여 나라를 이루고 사는 걸까. 애고 마음병 생길라. 원추리꽃이나 한 번 더 보자.


임의진|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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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고된 이들이 오가는 길목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더없이 낮고 쓸쓸한 사람들의 입술을 벙글게 만드는 맨드라미 봉숭아. 가진 것이라곤 성경책 한 권뿐인 에바그리우스라는 사막의 수도사가 있었대. 결국엔 성경책까지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사서 건넸지.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그 말씀마저도 내어준 수도사. 더 이상 성경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사막에 핀 선인장 꽃을 보며 기쁨의 찬미를 바쳤대.



소낙비에 젖지 말라고 고작 한 벌 누비옷이 전부인 맨드라미. 꽃빛이 고와 씨앗을 좀 받고 봉숭아꽃은 어린 조카에게 주려고 호주머니에 담았네. 그런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몇 날 밤. 청바지에 손을 넣어보니 봉숭아꽃이 깜짝이야. 시작도 못해본 사랑처럼 그렇게 네가 거기 있었구나. 미안 미안해.

바닷가에 가면 파도가 내 뒤꿈치를 밟는 것처럼 자꾸만 맨드라미 봉숭아 향기. 꽃에 관한 시를 잘 쓰는 시인보다 꽃밭을 잘 가꾸는 농부가 되고 싶었네. 내 정원은 항상 꽃이 피어 있단다. 서둘러 국화도 옮겨 심고 가을이 쑥쑥 자라고 있어라. 바람이 만지고 온 가을 냄새에 황홀하여 욕망의 덩굴손을 모두 놓아버렸네.

요란스러운 부흥회도 않고 새벽예배도 없고 박수도 안 치고 십일조 헌금조차 없는 교회를 했다. 내 이런 과거의 목회를 나태와 무능에 한심한 기행이라고 태클 거는 분도 가끔 계시다. 스님이나 신부님들과 친하게 지낸 일도 이단이 아니냐며 쪼아봐. 난 그저 맨드라미 봉숭아처럼 같이 비 맞으며 사랑하고 지낸 것뿐인데. 외국산 가시 돋친 장미가 되고 싶지 않았지.

시방 종교집안조차 회사보다 더 고도화된 수법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양상이고, 청춘들은 방송에 등장하는 말재주꾼에 홀려 멘토다 뭐다 호들갑스러운 추종들. 애먼 밖에서 뭔가를 구하느라 맨드라미 봉숭아를 외면하는 장님의 시절이렷다. 오늘도 꽃은 피네. 낮은 땅에 맨드라미 봉숭아. 진실한 사랑은 달달한 말이나 색깔, 기상천외한 수법에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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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렸을 적엔 읍 단위마다 극장이 있었다. 극장에선 영화를 하루 두 편씩 상영했는데, 어른들은 읍내 나갈 일이 없어도 역뿌러(일부러) 극장을 가고는 했다. 오이장아찌, 무장아찌 맛이 다르듯 영화마다 맛이 달라. 연애의 대부분을 극장에서 했다. 영화 보다가 손을 잡은 것이 사랑이었고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은 작별이었다. 지금도 매일 밤마다 영화를 한 편씩 틀어놓고 눕는다. 영화가 좋으면 끝까지 보고, 아니면 중간에 잠이 들지. 꿈에서 나는 많은 스타들을 만난다. 영화는 결국 한 편의 꿈자리며 별자리.




촌에 살다보면 개봉영화 보기가 간단치 않다. 천만이 드는 흥행 영화야 개봉관 수가 많으니 아무 때고 대처 나가서 보면 그만인데, 별종이라서 보고 싶은 영화도 유별나지. 영화를 찾아 아주 먼 길을 나서는 경우도 있다. 엊그제는 <위로 공단>을 정말 어렵사리 보았다. 영화는 뜨겁고 차가웠으며 맵고 짜고 쓰다가 다시 달았다. 처음 경험하는 맛이었다. 영화는 여성 노동자들의 눈을 통해 지난 세월을 바라본다. 어떤 기독교 기업은 여성노동자들의 손바닥만 한 휴게실을 없애고 그곳에 예배실을 차린 뒤 실적 성과를 높이게 해달라며 기도를 바쳤단다. 탐욕, 망상, 미신적 신앙이 빚어낸 웃지 못할 코미디. 강남의 금싸라기땅 대형교회 별관 외벽에 그려져 있던 금발머리 미국사람 예수. 장발의 디캐프리오를 좀 닮은 거 같기도 하던 그 예수라면 그런 장로님 사업주의 기도를 들어줄 것 같기도 해.

공단이 그 난리일 때 농촌은 황폐하게 무너져갔다. 농토는 버려지거나 농약에 중독되고 있었다. 그래도 여성 노동자들, 여성 농민들이 있어 지켜온 이 땅 이 세계. 큰돈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장님이 수도원에 쉬러 왔는데 한숨만 쉬다가 돌아갔다지. 밭 매다 수도원장은 수도사들에게 한마디 변을 남겼다. “마루에서 자는 사람들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린 밭이나 잘 매고 삽시다들….” 나이키 신발 신고 싶다던 그 어린 소녀 노동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시방 위로 극장에서 위로 공단을 감상하고 있을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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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 걸까. 외딴 집을 보면 그런 궁금한 생각이 든다. 산새와 고양이, 동네 개가 한번쯤 안부나 물어줄까. 인기척은 아예 없고 지붕에서 톡하니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집. 벽은 검댕이 슬어 까맣고, 새들이 물어온 나뭇가지로 지붕은 덮이고, 밤마다 듬성듬성 별이 박히면 집도 기운이 다해 혼령이 빠져나가버리겠지.

지난 봄날 강물 위로 노을이 눈물짓던 강변마을, 금방 쓰러질 듯 가련한 슬레이트 지붕을 보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거 같아 기웃거려 보았는데 중년의 한 사내가 폐병 걸린 듯 퀭한 눈을 하고선 방문을 열었다. 깜짝 놀라 돌아섰지. 잠깐 엿본 방은 캄캄했고 마당에 홀로 핀 하얀 앵두꽃은 가난의 정도와 시름을 짐작하게 했다. 깊은 산골은 한 집 건너 그런 집들이 늘고 있으나 대도시 주변은 대궐 별장이 날로 생겨나고 있어.




여행에서 돌아와 집밥을 해먹고 친구들과 골짝물에 발 담그며 복숭아와 옥수수, 수박을 맛나게 먹었다. 건넛마을엔 소쇄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친구들이 내려와 하루는 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강진 살 때는 손님 오시면 다산초당을 하루에 두세 차례 가기도 했지. 외지 손님들 덕분에 휴가철엔 더욱 그랬다. 의미 깊은 곳이라 고달픔보다는 감사로 삼았지. 담양에선 소쇄원을 자주 가게 된다.

대숲을 돌아 소쇄원이 보이자 누가 그랬다. “저게 소쇄원이야? 아무도 안 살아?” 과연 아무도 살지 않는 걸까. 선비는 여태 대청마루에서 시를 짓고 밤에는 달님이 불을 밝혀주고…. 낙향선비 양산보가 시를 짓던 마루에 동네 할머니는 빨간 고추를 널기도 한다. 한동안은 상사화가 어찌나 붉던지 대낮에 길을 잃을 뻔도 했어. 옛사람은 죽었으나 선비의 정신이 여태 살아있는 곳. 소쇄원에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정신이 죽고 없다면 집도 같이 명을 다할 것이리라. 조선 중기 잘 지었을 대갓집은 모두 사라졌으나 이 유배자의 정원은 남아있구나. 과연 지금 짓는 저 많은 주택들은 얼마나 오래갈까. 후세에 누가 그를 기리며 집을 찾아줄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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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와일드  (0) 2015.08.05
옷을 벗은 자유인  (0) 2015.07.29
베를린 천사의 시  (0) 201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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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서 배운 알량한 독일어로는 그저 인사말이나 나눌 뿐. 책을 볼 정도가 못되는데도 잡지를 워낙 좋아해 서점에서 죽치고 있다. 어제부턴 프랑크푸르트에 숙소를 정하고 눌러앉았는데, 어김없이 동네 서점행. 월든(Walden) 1호라 적힌 신생 잡지를 발견, 쭈욱 훑어보다가 그림들이 워낙 예뻐 한 권 집어들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쪼갠 주머니책 부록도 쏠쏠해. 국내에도 이런 무겁지 않은 내용의 생태 잡지들이 생겨났으면 싶었다.


여행 오기 전, 방학이라 뵐까 하고 같은 동네 사는 나희덕 시인과 연락을 나눴는데 소로의 월든 호숫가에 찾아가 계신다고. 하 그래요, 하고선 잠깐 서재에서 월든을 들추어본 날이 있었다. 그러다가 필 받아 밤에는 침대에 누워 팔을 괴고 영화 <인투 더 와일드>도 한 번 더 보았지. 에모리대학을 나온 준수한 청년 매캔들리스. 알래스카에 버려진 낡은 버스에서 죽어간 그 청년을 기리는 영화. 소로와 매캔들리스의 공통점이라면 야생의 삶을 사랑한 것이겠다. 돈으로 산 잔인한 사냥감과 야생 체험코스 따위가 아니라 그것은 대자연을 향한 인간 본연의 진실하고 겸손한 귀의였다. “사랑이나 돈, 명성보다 진실을 내게 주오. 기름진 음식이나 와인으로 차려진 극진한 대접 따위 원치 않아. 거기에 진실이 없다면 배가 고파도 불친절한 식탁을 떠날 수밖에.” 소로의 글 가운데 일부분, 매캔들리스는 진실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긋고 굵은 펜으로 여백에다가 큼지막하게 써 담기도 했다 한다.

낼 모레면 산골짜기 내 오두막으로 돌아갈 시간. 진실을 이런 대도시에서 찾는다는 게 바보만 같다. 매캔들리스는 또 톨스토이의 <행복> 가운데 이 구절에도 밑줄을 그었다지. “우리 인생에서 단 하나 진실한 행복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삶에서 얻는 보람이겠다. 변두리에서 호젓하게 살며 무기력한 이웃을 돕는 선행. 쉼과 자연, 독서와 음악, 남을 사랑하는 일. 이러한 삶이 행복이다.” 우리도 오늘 여기에 밑줄을 긋고, 닫아건 창문을 환히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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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열차 산천에서 누가 흘리고 간 신문을 훔쳐 읽었지. 오늘의 운세가 눈에 들어오더군. “일이 꼬여 옷을 벗게 되니 주의하라.” 나는 잘릴 직장도 뭣도 없어. 숫제 헛소리구만, 덮고 말았지.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자가 딱. 용돈벌이 일이 엎어졌다는 소식. 공사판인 동네길, 부주의로 애마가 망가져 며칠 출타도 못하고 자가 유배. 되는 일이라곤 없어 옷을 벗고 여행이나 떠나버리자 결심하기에 이르렀지. 오늘의 운세를 읽지 말았어야 했어.

베를린은 공원마다 윗옷을 벗어던진 젊은이들로 넘쳐나네. 옷을 벗은 선탠족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오늘은 로자 룩셈부르크역에 가서 발랄한 친구들의 예술작당을 구경해볼 계획이었어. 그런데 거리로 나오자 몸이 자동적으로 공원을 향하게 되더군.



꽃과 나무들이 일루 와, 손짓이었어. 김수영의 시 ‘절망’에서, 바람은 딴 데서 불어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고 했던가. 공원에 머물면 바람의 잔소리조차 행복하여라. 한철 푸르다만 미나리꽝 같은 몸뚱아리라도 나무 그늘 아래 널어두니 상쾌하고 흐뭇해. 멀리 뾰쪽 탑에도 젊은 사내의 나신이 보이네. 성부와 성자, 성령이 삼자대면하는 삼위교회. 인간이 된 성자가 십자가 위에서 전라 상태로 윙크. 오늘의 운세엔 진짜 옷을 벗게 될 거라 쓰여 있었던 걸까. 무당벌레가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 듯 나도 이곳에 옷을 벗은 자유인으로 날아와 있네. 칠포세대라지. 인간관계, 꿈, 희망 직종, 연애, 결혼, 출산, 주택 마련…. 다행인 건 ‘자유’만은 포기 안 했다는 거!

반얀나무 아래 살다 간 신비로운 요기, 나체의 힌두 성자 스리 토타푸리. 그가 살던 성스러운 나르마다 강가에 가본 일이 있었지. 40년 동안 수행하다 우주의 절대존재와 자신이 한 몸임을 알아 참자유를 얻게 되었다지. 옷을 벗으면 누구나 자유인. 베를린엔 수많은 토타푸리들이 공원에 누워 책을 읽거나 입술을 더듬는 키스족들이야. 전라도식 독일어로 “멋지당케! 그란당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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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턴 청춘의 우상 본 회퍼 목사, 음악가 윤이상,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골목을 차근차근 걷고 있다. 아주 오래전 뜻하지 않게 베를린 동물원역 근처에서 잠시 지냈는데 이십여년 만에 다시 이곳 베를린을 찾은 거다. 유럽의 수도. 분단을 극복한 이 거리는 어디로 가나 확 트인 통행길. 왕래하던 길을 끊고 형제간에 편지조차 없이 잔인한 철조망을 친 내 조국은 비극의 땅이다. 동서독의 장벽을 허물고 나서 통일 독일은 왈패라 할 만큼 다시 강인해졌다. 다행히 이 나라 양심적 지식인들은 시퍼런 눈으로 살아 있고, 파리나 런던을 제치고 가장 핫한 예술가들의 안방이 되어 있다.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잊을 수 없는 영화 가운데 하나. 다니엘이 천사로 살던 장면은 흑백인데 서커스 곡예사 소녀 마리온을 사랑하고 인간이 되었을 때 영화는 순간 컬러로 바뀐다. 총천연색 인생, 살아 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사람으로 산다는 것, 참으로 큰 축복임을 그대도 알아야 한다. 공중곡예와 같은 이 진기하고 놀라운 삶.


해남 살 때 처음 서커스를 구경했다. 온 동네를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며 서커스가 들어오면 교회당보다 서커스 극단 천막이 더 성황이었다. 아버지 목사님은 교인들과 같이 서커스 구경을 갔다. 나도 아버지 손을 잡고 그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피에로 아저씨는 굵은 눈물방울을 얼굴에 그려놓고도 배꼽이 빠지게 웃도록 만들었다. 공중곡예사 소녀는 베를린 천사처럼 하늘을 날았다. 세상은 많은 천사가 산다. 하지만 천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 왜냐면 사람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사람의 몸을 입어야만 사랑을 할 수 있지. 달콤한 사랑의 입맞춤이여.

공중곡예를 마치고 지상에 내려온 소녀를 향해 손바닥이 아플 만큼 박수를 쳤다. 당신의 삶도 박수를 받을 만큼 아름다워. 사람으로 살며 사랑하고 살자. ‘스톱 더 워(Stop the War).’ 광복 70주년, 휴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사람은 평화일 때 사람인 게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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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사람도 개고생, 개야 원래 개고생. 알랭 드 보통 아저씨의 르포 <일의 기쁨과 슬픔>을 보면, 식사시간에 현지인들은 각자 집으로 사라져 생선과 코코넛, 양파를 맛나게 튀겨 먹는단다. 집 떠나 외지에 근무하는 현장일꾼들은 가게에서 산 것들이 고작. 초콜릿이나 비스킷, 케첩을 발라먹는 게 전부. 이건 한마디로 ‘일의 슬픔’이겠다. 집 떠나면 너도나도 집밥이 그리운 것이다.

귀가가 늦은 식구들을 위해 아랫목에 뜨신 밥 한 그릇 파묻고 솜이불로 다뿍 덮고, 별빛동무삼아 동구 밖에서 마중하시던 어머니. 별똥별처럼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지게 되는 어머니 마음. 그런 뜨신 밥을 수도 없이 먹었는데 어머닌 시방 별이 되고. 명왕성 너머 별빛이 되어 저 하늘에 계시는 지금, 나 당신을 잊지 못해 뜨신 밥을 아랫목에 묻고는 한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밥과 된장국, 철따라 달라지는 반찬들. 노릿하게 구운 생선과 내가 농사지은 풋고추 서너 개. 어디 나돌다가 집에 돌아오면 이런 집밥이 행복하다. 자취가 수십년, 나름 셰프요, 한식요리사. 말장난이 아니라 요리조리 잘 해서 먹으니 요리사요, 조리사다. 동네분들이 가져다주신 묵은 김치. 면소재지 부식가게에서 산 두부 한 모. 가끔 눈먼 돈이 생기면 살집이 통통한 생선이나 비계가 절반인 고기 한 토막에 군침이 간다.

매미소리 쨍쨍거리는 여름날 마당에서 밥을 먹기도 하는데 개들이 저도 달라고 컹컹 짖어대. 야생고양이가 이제 막 젖 뗀 아가들을 데리고 찾아오기도 한다. 공깃돌 굴리듯 조심히 던져준 고깃덩어리를 아가들이 먼저 핥는다. 엄마는 조심조심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배가 고픈 만큼 겁도 없지. 이 산골집에서 인간인 나 혼자 먹을 수 있는 건 포도주와 커피뿐이다. 인간이기 위해서 오늘도 집밥을 달게 먹고 하와이에서 누가 사온 귀한 커피콩을 잘게 갈았다. 하루가 정말 후딱 가. 금세 해가 저물고 어둑해졌어. 해는 살구만 해지고 달은 자두만 해진 어느 배부른 여름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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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의 밤은 어둡고 습하고 이따금 신발장수 지네가 사르락사르락 기어 다녀. 서까래에 비가 샐 만큼 벼락비까지 쏟아지네. 눅눅한 장마가 시작되었구나. 할매의 집엔 벽마다 귀신 퇴치 부적이 붙어 있다. 시비구설, 송사, 손재, 상패를 막는 붉은 딱지 부적. 오뉴월 서리가 내린다는 잡귀 중에 가장 무서운 처녀 귀신. 우환질고에서 건져줄 한 가닥 지푸라기 부적. 밀양엔 밀양부사 외동딸 처녀 귀신 아랑이 있고, 여기 담양엔 영산강에 빠져죽은 처녀 귀신 달님이가 살고 있어. 비가 오는 밤이면 불타서 오그라든 뼈를 세우고 피범벅이 된 채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달님이가 흐느껴 운다네. “오매 무성그” 할매는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또 놀라.

골목을 뒤지던 귀신은 늙은 괭이 울음소리를 하고 나타나 문지방을 넘는다.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가슴을 보아 처녀 귀신이 분명하네. 달님이는 자기를 강물에 밀어뜨린 그 남자를 찾아다니지. 외로운 나는 귀신이라도 좋아. 온몸에 싸인 밤그늘이 슬퍼 보여. 귀신이라도 안아줘야지. 쌓인 원한을 풀어줘야지. 이승과 살뜰한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몸을 떠난 마음이여. 봄날 눈처럼 녹고 실타래처럼 풀어지길. 자유를 얻어 저 세상에서 부디 행복하길.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야. 아도 죽은 것 같은 싸늘한 하얀 얼굴의 처녀 귀신들이 있다. 인상부터 무섭고 사나워. 먹구름처럼 찡그린 얼굴로 줄창 화가 나 있어. 오매불망 사랑한다면서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무슨 원한을 졌길래 이토록 싸늘하고 차가운지.

처녀 귀신 달님이는 기도와 어둠과 통곡의 밤을 지나 마음을 풀고 하늘로 승천한다네. 그래야지. 원한을 풀어야지. 슬프고 억울한 일이 있었대도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귀신도 친구가 있어야 해. 동굴 같은 흉가에서 나와 친구들과 사랑해야지. 처녀 귀신의 밤. 장맛비는 자정까지 내리고…. 12시 종이 울리면 초록물뱀처럼 스윽 얼굴을 내미는 처녀 귀신이 내 손을 더듬네. 차갑고 따뜻한 두 사람의 손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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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람들은 도대체가 밥을 안 먹는다. 그러니까 밥심이 있을 수가 없지. 검은 물 커피와 설탕 바른 빵조각으로 어떻게 연명들을 하는지 원. 빼빼 마르고 야윈 여성이 절세 미인이란다. 저른 궁둥이로 애를 어뜨케 낳겄소잉, 할매들은 며늘아기들을 보고 혀를 찰 따름. 이런 세태를 꾸짖기 위함이라도 나는 밥 말리, 밥 딜런, 밥으로 한번 나가보는 것이다. 레게의 전설 밥 말리의 온 러브. 나도 말리처럼 레게 파마를 하고 머리를 흔들어대며 온 러브에 맞춰 춤을 추고 싶어라. 예전에 전주 모악산 살던 형이랑 같이 머리를 새하얗게 염색한 적이 있었는데, 독주를 즐기는 통에 늙어죽지는 못할 것 같아 그런 객기를 부려보았던 게지. 그런데 지금은 염색을 하지 않아도 수염과 머리가 벌써 자작나무 껍질만큼 하얘. 레게 파마를 하자니 머리숱도 별로 없어. 대머리 총각이 아닌 것만 해도 불행 중 다행.

동네 할망구들은 레게 파마만큼 촘촘한 파마를 하고 댕기신다. 파마 값을 아끼고자 함이리라. 보글보글 파마를 하고 도라지 밭에 앉아 풀을 매고 계시는 뒷밭 할매는 뵐 때마다 인사말이 한결같다. “밥은 해자시오?” 먹고는 사냐는 말씀.




나는 밥 말리만 들어도 배가 둥시럿. 말리처럼 흥겹게 축구공을 차면서 노래하고, 레게 파마를 찰랑거리는 목사. 이 아니 멋질손가. 저 단정한 차림의 근엄한 양복쟁이들은 돈을 세고 셈을 할 때나 날렵하고 얍삽하지.

배신이란 말이 유행인가 보다. 배신 배반. 밥의 배신인 이 빵의 남쪽나라에서 밥 한 술 뜨고 파마를 매만지며 사장나무 그늘을 찾아 손부채를 부치는 주민들. 표를 구걸할 때와는 딴판으로 배신 배반을 당한 어르신들은 고등어 한 마리도 못 드신 표정들. 그나마 밥심으로 간신히 목숨만 유지. 알량하게 밥심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외지인이 한 명이라도 그 앞을 지나가면 정자에 있던 모든 주민들의 눈알이 슝슝.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본다. 사람이 그립고 축제가 그리운 것이다. 꽹과리나 한판 쳐드릴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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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북인도 마날리를 거쳐 라다크에 찾아갔다. 한강 주변 캠퍼들은 상상도 못할 험난한 산악 오프로드. 지프를 빌려 타고 히말라야 산길을 따라 몇날 며칠을 떠돌았지. 함께한 화가 형이 내게 그랬어. “동상. 별이 오지게 떴구마. 화폭에 오랜 날을 별을 그려왔더니만 원도 한도 없이 보라고 뜬 선물 보따리구만.” 신경림 시인의 시 ‘별을 찾아서’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숨은 별들을 찾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다 돼버린 별들을 찾아서, 내 돌아가는 길에 동무 될 노래를 듣기 위해서, 히말라야 라다크로 별을 보러 간다.”

평양 순안비행장만큼 조그맣고 순한 비행장을 놔두고 거친 산길을 따라 별을 보러 찾아간 길.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했는데 그 밤에 미루나무 사이로 뜬 별구경은 황홀경. 목동자리 별에서 갑자기 별똥별이 툭. 사별했을 가난한 목동을 생각했다.


이승에 등을 돌리고 길을 나선 영혼은 얼마나 강인한가.

낮엔 당신의 집에 주소만 가지고도 찾아갈 수 있지만 취한 밤에는 습관성 방문이 아니고서는 마을조차 발견할 수 없을 어둠의 땅. 오래된 미래 라다크는 정전이 잦고 가로등이 드물었으나 밤별들이 대낮처럼 밝아설랑 누구 하나 길을 잃지 않았다. 전봇대가 나무보다 많다고 세상이 환해지는 건 아냐. 가로등이 저토록 많지만 별빛만큼 달빛만큼 환하지 않다. 인간은 전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도 많아. 예를 들자면 침묵, 대화, 자연. 그리고 진정한 빛과 어두움, 풀벌레 우는 소리, 나무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장난꾸러기 바람, 부지런한 발걸음, 무엇보다 전기가 앗아가버린 가장 큰 건 바로 사랑이다.

전기는 사랑의 은밀함과 풋풋함을 폭로하고 감전사시켜 버렸다. 게다가 악인들은 사상범을 만들어 전기 고문을 행하기도 하지. 전기를 얻기 위해 괴물딱지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감당할 수 없는 파국에 직면하고서도 이 문명은 반성조차 없다. 전깃불이 귀한 라다크에서 나는 무탈하게 잘 살다 왔어.

별을 그렇게 많이 보게 될 줄이야. 진짜 ‘깜놀’이었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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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둘에 세상을 뜬 이태리 토리노의 시인 체사레 파베새. ‘고향 떠난 사람들’이라는 시에서 “지겨운 바다. 우리는 바다를 충분히 보았다”고 말했지. 어떻게 하면 충분히 바다를 볼 수 있는 걸까. 충분히 바다를 보았다는 시인이야 세상을 일찍 떠나도 후회가 없겠다 싶다. 바다와 사막은 아마도 정반대 장소일 것이다. 바다에 가면 모래사장이 해변에 카펫처럼 깔려있는데 그게 마치 사막 같아. 또 사막에 가면 손바닥만 한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는데 갈증에 목이 탄 여행자는 마치 큰 호수나 바다를 만난 양 오아시스를 흠숭하게 된다. 간절함은 서로의 몸을, 살을 조금씩 내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손을, 손가락을 먼저 내어주듯. 바다에선 사막을 보고 사막에서는 바다를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지겨운 사막, 모래 폭풍의 사막을 충분히 보고 싶어’ 남미 사막으로 떠난 게 작년 이맘때.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달의 계곡 투어를 했다. 암스트롱처럼 달에 가지 않아도 대충 이런 곳이라는 짐작을 얻을 수 있는 달의 계곡. 밤에는 소읍의 외곽으로 남극성 별을 보는 투어에 참가했는데 어찌나 추웠던지 얼어 죽을 뻔. 두어 시간 동안 이국의 연인들은 몸을 열나게 비벼대고 나는 추워설랑 몸을 배배 꼬고. 중도에 포기하고 숙소로 걸어가 볼까 했다. 가이드가 너무 멀기도 하고 야생동물 때문에 불가하단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마을의 개들은 거의 들개 수준이라 사람과 사료를 구별하지 못하고 덤벼든단다. 그러고 보니 개들이 하울링 하는 소리가 마치 늑대가 우는 소리 같아. 오지 여행을 하다보면 굶주린 개들을 만나게 된다. 개는 개이니만큼 일단 말이 안 통해. 똥이라도 누어서 주고 와야지 물어 뜯기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 사막마을에서 들개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밤늦게 대절버스로 숙소에 귀환. 어둠이 깊으면 어김없이 개들이 날뛰기 마련이렷다. 요즘 세상도 칠흑의 밤이 되다 보니 들개의 세상만 같아라. ‘어따 대고’ 어금니를 드러낸다니… 포악한 개들.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들이 너무 흔해졌다. 들개가 행인보다 더 많은 길이라면 짐승의 세상이지 어디 사람 세상이라 하겠는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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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에 작가회의 살림꾼인 김성규 시인을 만났는데 엊그제 시집 한 권이 날아왔다. 메모와 함께. 메모의 시작은 이랬다. “선생님. 난세에서의 이 만남이…”. 난세에서란 말에 피식 미소가 돌았다. 세상 걱정이 많은 시인. 누구보다도 시국을 염려하고 자유를 추구하며 연민으로 가슴이 꽉 차올라야 진짜 시인이지.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라는 그의 시집엔 동명의 시가 놓여있었는데 “깡통 속에서 서로를 밀치는 동전 소리, 장님은 복도를 걸어가며 노래하네…”. 뉴욕 다코타 아파트 근처에서 장님이 존 레넌의 ‘이매진’을 노래하는 걸 멈추어 귀하게 들었던 기억. 템스강 선착장에서 이매진을 불러주던 아이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고추밭 토마토밭에 머물 때면 농요, 노동요를 배우지 못해 이매진을 대충 부른다. 이매진을 들은 토마토가 벌써 알을 덩실하니 맺었더라.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 <방랑기>를 읽고 난 다음날 존 레넌의 출생지를 가기로 마음먹었지. “나는 숙명적인 방랑자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 소설의 첫 구절부터 뿅~ 갔었어. 국경도 종교도 없고, 차별도 분쟁도 없는 세상. 과연 이매진을 모두 노래하면 그런 세상을 맛볼 수 있는 걸까.

외국 친구들은 내 이름을 부를 때 이매진이라 부른다. 임의진이나 이매진이나…. 여행을 떠날 때 명함도 그리 파서 지니고 다닌다. 음악과 모든 장르의 예술로부터 자유를 꿈꿨던 그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이 난세에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 국경(삼팔선)도 없고, 종교(십자군)도 없는 세상. 우리나라엔 국가보안법 말고도 종교보안법이 있는 거 같아. 같은 예수를 믿는데 한쪽은 왜 그렇게 드세고 시끄러우며 탐욕스러운가. 십자군의 재림 같다. 오라는 예수는 아니 오시고 십자군이 이렇게들 재림하시어 무찌르자 공산당 무찌르자 이교도. 지겹지도 않은가봐. 카페에 앉아 감상용으로 듣는 노래가 아니라 거리에서 가슴으로 불러야 할 노래가 이매진인데. 이 난세에 꿈꿔야 마땅할 사람됨의 상상력.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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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죽죽 죽순을 밀어 올려 대밭이 수배나 늘었다. 죽순과 싸울 일이 아니라 대밭의 미풍을 즐기기로 결심해야겠다. 이른 폭염과 흉흉한 전염병 소식으로 바람조차 싱숭생숭. 코끼리 얼굴을 가진 뒷산의 너럭바위는 마치 인도의 가네샤 신상을 모신 듯. 긴 코를 내밀어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가네샤는 인도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신상.

가네샤는 대밭을 왜 나에게 골칫거리로 안겨준 것일까. 게다가 잡초들, 끈질기게 살아나는 민들레. 민들레가 괴롭히면 민들레를 사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포기할 때 자유는 더 큰 사랑이 된다. 포기는 얼마나 멋진 출구인가. 원망이나 갈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 내 산골집은 나무마다 평상 크기 면적의 행복한 그늘을 가지고 있고, 두 마리 개들은 낮잠과 밤잠에다 뼈다귀 선물까지 주면 집까지 지켜준다.


“여름이 푸른 저녁…. 무슨 말도 무슨 생각도 말아야지. 끝없는 사랑 내 맘에서 피어나느니 여행자처럼 아주 멀리 떠나가리라. 사랑하는 이 함께 가듯 행복한 걸음으로, 자연 속으로….” 랭보의 시를 영혼의 양식 삼아 소리 내어 읽어간다. 행복은 이런 데 있다. 새가 바람을 거슬러 날아도 다치지 않고,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도 몸이 상하지 않는 건 끊고 맺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리라.

묶고 자르는 것을 잘해야 산다. 번잡한 세상에서 침묵과 명상을 찾고, 벅적거리는 인연에서 고독과 은둔을 찾는 사람은 그래서 복되다. “우리가 모든 슬픔을 나무못에 걸고 가장 마음에 드는 슬픔을 선택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은 좀 전에 걸어둔 자신의 슬픔을 도로 찾아갈 것이다. 왜냐면 남의 슬픔은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마르틴 부버)

오늘 거울 앞의 제 꼴에 만족할 줄 알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알아 그 흐름에 순응하며 내맡기고 산다면, 어깃장 부리지 않고 산다면, 불편함도 두려움도 덜어지지 않을까. 애갈만이 사랑이 아니다. 포기와 미지로의 여행도 큰 사랑이다. 나는 고독과 은둔을 사랑한다. 창궐하는 전염병은 이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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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샘이랑 라디오 명절 특집을 할 일이 있었는데, 나도 그분 오랜 팬이고 그분도 내 월드뮤직 일들을 누구보다 아껴주신다. 죽이 맞아 두어 시간 방송을 뚝딱했었지. 노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노래가 태어난 시절의 사회 풍광까지도 모조리 짚어내 주셨다. 최근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주공화국 국가로 가장 적합한 노래라는 강헌 샘 주장에 나도 적극 공감.

일본 괴뢰정권 만주국 찬송을 지어 바친 대표적 친일작곡가의 곡을 애국가로 삼아 부르고 있는 건 통탄스러운 현실. 민주공화국이라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오월의 노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애국가로도 손색이 없다. 관에서 인정해주건 말건, 무슨 관제 행사에서 부르거나 말거나 국민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입술마다 영영토록 불릴지니…. 자나 깨나 오늘도 우리가 기억하고 불러야 할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통일노래 ‘직녀에게’의 시인 문병란 선생과 함께 콘서트에 초대되어 어느 소극장엘 찾아갔다. 윤상원 열사 기념사업회의 초대였다. 하모니카를 독학도 하고 스승을 찾기도 하여 이젠 제법 노래하면서 부르곤 한다.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지. 위대한 악사가 될 수는 없어도, 내 호흡으로 내 마음 가는 대로 연주하고 노래한다. 그게 귀한 것이지. 행진곡을 내 식대로 해석하여 들려드렸다. 덧붙여 몇 마디. 오월에도 유월에도 불릴 노래. 독재와 친일의 면면들은 입을 굳게 닫고 미워하는 노래. 그래서 더 아끼고 사랑하며 부르게 되는 노래에 축복을.

시골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우리도 알 것은 알아. 미희들이 속옷 바람으로 부르는 섹시 댄스곡이나 좋아하는 이들은 알까. 노래방에서 일본 엔카를 줄줄 외워 부르는 노익장들은 정녕 모를 거다.

임을 위한 행진곡, 이 노래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겨레의 노래인지. 꿈을 꾸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통일조국 아이들의 행진곡.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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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겅질겅 껌을 씹다 뱉으면 뱉어맨. 나는 그러니까 뱉어맨! 검은 망토를 걸치고서 밤길을 지켜주는 배트맨 아저씨는 어디 계신가. 캄캄한데 짱박혀설랑 밤시간을 기다리는 진짜 배트맨 박쥐. 기와지붕 더께 속에 박쥐들이 몇 쌍 살고 있어. 노을이 질 때쯤 뭔가 후다닥 날아가는 걸 봤는데 그건 박쥐였어. 집박쥐들은 기와지붕이나 창고 그늘진 곳에 구멍을 내서 살기도 해.

더듬거리며 어둠 속을 나는 배트맨. 옛사람들이 풀잎과 나무껍질에다 글을 새기듯 박쥐는 달빛에다가 선명하게 엠자와 더블유자를 남겨놓곤 하지. 남자와 여자. 인류의 영원한 화두. 배트맨과 배트걸도 엠자와 더블유자를 그리며 심야 데이트 중. 심야택시 미터기보다도 높이 공중에 올라간 박쥐들은 경찰차 사이렌소리 요란한 고담시를 순찰 중이시겠지.

중풍 고혈압을 앓는 할매는 고욤나무 아래서 꽃을 반긴다. 고욤 열매가 병에 특효라는 걸 할매는 기억하고 있어.


나는 박쥐를 보고서 대번 바나나를 생각했다. 복숭아 아보카도 망고와 바나나 열매를 맺게 해주는 박쥐. 콧구멍을 벌룽거리며 날아다니다가 꽃향기에 끌려 얼굴을 들이밀면 그날로 나무들은 아기를 갖지. 남국의 중매쟁이 박쥐. 벌만큼 작은 그 박쥐는 바나나의 중매쟁이라지.

우리나라 박쥐들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은둔처사. 물구나무 요가 자세로 동굴 속 어둠을 빌려 살아가는 스승 요가난다. 모르지. 우리 잠들면 고담시의 수호신 배트맨으로 변신하여 깜짝쇼를 하는지도.

배트맨 박쥐와 같은 동네에, 게다가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무도 내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 이 나라에서 배트맨이랑 동거하니 요게 얼마야. “가난한 사람들의 모든 기억은 마을들에 떼지어 몰려있을까?” 네루다가 쓴 <질문의 책>. 배트맨은 알고 있으리라. 박쥐는…. 밤마다 성 같은 대저택을 버리고 마을로 찾아오는 그 친구는.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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