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206건

  1. 2015.12.02 귀뚜라미 동학
  2. 2015.11.25 초승달과 개들
  3. 2015.11.18 무와 무관심
  4. 2015.11.11 매매 지지 차차
  5. 2015.11.04 수양이 모자라서
  6. 2015.10.28
  7. 2015.10.21 나뭇잎 시인
  8. 2015.10.14 에코백과 소지품
  9. 2015.10.07 마릴린 뭘로
  10. 2015.09.30 날마다 캠핑
  11. 2015.09.23 콜라 사이다병
  12. 2015.09.16 파란색 잉크 하늘
  13. 2015.09.09 원추리에 원추리꽃
  14. 2015.09.02 맨드라미 봉숭아
  15. 2015.08.19 위로 극장, 위로 공단
  16. 2015.08.12 소쇄원 달밤
  17. 2015.08.05 인투 더 와일드
  18. 2015.07.29 옷을 벗은 자유인
  19. 2015.07.22 베를린 천사의 시
  20. 2015.07.15 집밥

신종 댓글부대에 이어 구종 백골단까지 화려한 휴가 작전. 촌동네엔 새마을 바람도 살랑살랑. 새마을 쪽은 기름진 영토겠구나. 이미 새마을인데 더 광을 낼라치면 해지고 닳아져 찢어질지도 모르는데.

“어뜨게 살다 봉게 시상이 돌고 돌아 지자리요. 괴기밥을 잔(좀) 묵어야 쓴디 시말테기(힘)가 한테기 없응게로 동학군 모냥 밀리고 자빠지재. 궁민들 데모도 원천봉쇄 못하게 하믄 그거시 어뜨게 민주주의 나라랍디여. 거시기 거 농사짓는 어르신 아즉 의식도 없다시등마. 우리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에프티에인가 에프킬란가 그거슬 중공이랑 해부리고.”



눈을 게슴츠레 뜬 누구가 추어탕집에서 유사를 치르다가 일장 연설. 바람이 차갑게 불더니 눈발이 제법 날렸다. 이맘때 앞바다에 섰을 장흥과 해남의 동학군들을 생각했다. 앞바다에서 깐죽대던 왜선을 물리치고 돌아오니 이제 관군이랑 맞서 싸워야 하는 형국. 정치인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고갯길에서 추락, 밭을 갈던 농부가 달려들어 사태 수습. 고인들을 땅에 잘 묻어주었단다. “살아있는 분은 안 계시던가요?” 도착한 기자들이 묻자 “몇은 숨이 달려 계시등만유. 어서 구해달라구유. 근데 그 말을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유.” 농부의 복수극인가. 웃자고 하는 소리니 죽자고 달려들진 마시길.

귀뚜라미는 사람이 보이면 울음을 그친다. 귀뚜리는 자기들끼리만 있을 때 서럽게 울지. 가으내 울던 귀뚜리가 보이지 않자 겨울임을 나는 알았네. 귀뚜라미 대신 귀뚜라미 보일러가 한 집 건너 왱하니 울고 있어라. 사람도 사람들끼리 만나 서럽게 울고 싶은 때가 있다. 단체로 울고 싶을 때 사람들은 광장으로 집결하는 것이다. 귀뚜라미를 닮은 사람들, 서러워 울고 외치는 사람들, 어쩌면 귀뚫라미인지도. 막힌 귀를 뚫고 제 사정을 조근조근 들려주고 싶어하는 이들. 이웃의 눈물콧물 사정을 마음 다해 들어주는 것이 인륜이요, 도리일 것이다. 동학의 땅. 깡깡하게 맘을 다진 사람들. 꽃단풍 흘러가고 매서운 비바람과 눈보라 치는 날, 시래기처럼 시달리고 매달리며 고생뿐이었던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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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에 안거 가있는 스님이 아침부터 첫눈 소식을 알려온다. 에구구 춥겠네. 불알이 얼면 목탁 삼아 때려버리셩 하면서 농을 던졌지. 해마다 서울 친구가 예쁜 성탄 트리를 챙겨 보내주는데 올해는 둥그렇고 깜찍한 리스를 여러 개. 나도 솔방울을 주어다가 보태 달았네. 달고 또 달고 그러니까 내 마음이 맛이 들어 달고 달더라.




올해는 무슬림 친구들과 함께 초승달 성탄절을 대망하련다. 내가 가끔 드나드는 복음교회 한 곳에 그런 뜻을 알렸다. 마침 지역 대학에 유학 온 무슬림 아이가 언니들이 좋은지 찾아오곤 한다고. 전쟁의 소문이 그치질 않는 중동 사막나라. 전폭기로 원수를 갚는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빵을 나누고 병을 고쳐주며 관용으로 구제해야 먼저지. 주간경향 하영식 분쟁전문기자의 특집 ‘IS를 말하다’를 찾아 읽었다. 대강 짐작은 하였으나 충격적. 용병이 갑자기 돌변해 주인을 향하여 총칼을 겨눈 형국이랄까. 뉴욕을 파괴한 빈라덴 일당과 똑같은 스토리였다. 제2, 제3 끝도 없는 이 악순환.

종교, 종파, 가문이 다른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를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될 수 없다. 전도, 선교, 포교…전도왕은 어쩌면 폭력왕이 아닐까. 선행을 베풀 때 감동되어 회심도 하는 것이지 교리나 이념을 강제로 들이대는 짓은 폭력이고 범죄렷다. 빨갱이 사냥도 모자라 무슬림 사냥을 하는 개들을 보라. 달밤에 개 짖는 소리로 귀가 다 따가워라. 도종환 시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신’은 네덜란드에서 행한 고르바초프의 육성 인터뷰를 옮긴 시. “내가 자유의 복구를 시작하였지만 이 이데올로기 공백을 자본의 물결로 덮어버리는 걸 찬성하지 않습니다…… 나는 농부였던 우리 부모가 내게 물려준 상식을 잊지 않았습니다. 상식은 균형과 절제에 대한 감각이기도 합니다. 흙에 대한 애정은 내게 굴하지 않는 정신과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박함과 겸손함, 함께 노동하는 마을공동체를 통해 연대하는 마음과 관용을 잊어버린 적 없습니다.”

첫눈 오는 날. 앗살라 알라이쿰(평화를 빕니다) 인사하는 초승달이 낮게 떴다. 자본의 물결이 아닌 관용의 물결을 윙크해본다.



임의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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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이 홰를 치고 꼬꼬댁 울면 누렁이가 못 이겨 흙을 털고 일어나 동네 순찰을 돈다. 새벽별 보고 학교 가야 하는 아이들이 있는 집만 어수선하고 바빠라. 간밤에 바싹 마른 칫솔이 찬물벼락을 맞을 시간. 이부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해 뒹구는 귓속으로다가 레이디스 앤 젠틀맨, 동네 확성기 방송. 시절이 한참 지난 이미자 메들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열아홉 순정 흑산도아가씨 동백아가씨, 아가씨 타령이 지겨우면 기러기 아빠, 김장을 앞둔 배추들도 메들리처럼 일렬종대. 에이오에이 천사 아가씨들은 발붙일 데 없는 구식 동네.



“요로코롬바키 못허겄능가? 조깐 얌전허게 묶어보랑께.” 뽑혀 올라온 무와 무단을 보고 동네 누구씨가 순한 마누라를 족치는 소리. 간밤에 달궈진 불기가 남은 아궁이며 굴뚝, 보일러들이 동시에 쿨럭거리고, 식은 자리에 태양과 숲의 온기가 차츰 쌓이기 시작한다.


김소형 시인의 따끈한 시집 <숲>을 읽었는데 ‘십일월’이란 시가 바로 이때로구나. “나한테 묻지 마. 시간은 결코 좋아지는 법이 없어.” 시간뿐만 아니라 시절도 그러한 모양이 분명해. 누가 물대포에 죽어나가도, 누가 실직하고 서러워도 대답은 일월이나 십일월이나 마찬가지. “묻지 마 바쁘다니깐, 나는 시계처럼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관심으로 가득찬 이 우주에 신은 오늘도 아이를 점지하고 아이를 낳으시고. 저 가련한 집닭의 똥 묻은 달걀까지도 쑹쑹 태어나고 있음이렷다.

남정네 허벅지만 한 무를 뽑아 수확되는 시기. 이 싸늘한 무관심의 세상에 ‘있을 무’가 엄연히 존재하누나. 처녀귀신을 위한 총각김치만이 냉혈한 세상을 구할 유일한 명약인가. 하얀 무들이 뽑혀 누워 있는 밭들. 이처럼 긴 딜레이의 시간. 기다려도 기다려 봐도 오지 않는 첫눈이여. 물 빠진 검은색인 잿빛의 우울에서 구해낼 무와 폭설을 대망한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달아도 될 것처럼 새빨갛고 맛있는 깍두기도 반가워라. 무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다. 봄날의 노란 단무지. 무를 나눠 먹으며 무관심과 싸우다보면 달고 따스운 삼사월이 성큼 오려나.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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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 세끼. 아침엔 감자와 햇차, 점심엔 고구마와 물김치. 저녁엔 뭘 먹을까. 감이 유혹하누나. 감나무에 까치들이 몰려와 실컷 먹고서 판소리 한 대목. 새들이 집을 찾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요즘은 앞마당 건너 동네 밭에 있는 감나무 때문이다. 더 빼앗기기 전에 나도 숟가락을 얹었지. 단감을 몇 개 땄는데 어떤 건 흐물흐물. 지난주만 해도 엄청나게 사각거렸는데. 이가 모두 빠진 늙은이가 되면 홍시나 먹게 될 거니까 젊어서 부지런히 단감을 깎아 먹어야지. 사각사각 입에서 나는 소리가 즐거워 눈을 감고 먹는다네.




58년 개띠 케빈 컨이라는 피아노 치는 사내. 앞을 못 보는 장애인. 그가 까뭇한 세상에서 건져낸 한적하고 느린 곡 ‘정원(Le Jardin)’을 틀어놓고, 환기할 겸 창문을 다 열고, 늦가을 정원에 나가 앉아 있으니 새들도 숨을 죽이고서 귀를 기울인다. 누가 쇼팽콩쿠르 1등을 먹었다지. 축하하지만 너무들 1등에 열광해 젊은 연주자까지 식상하게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돼. 기계적인 달인의 연주보다 이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귀하고 선한 친구의 곡을 듣고 싶어. 인간은 말도 모자라서 악기를 연주하며 사랑과 슬픔을 나누고 교감하지.

얼마 전 신문에서 판다의 말을 알아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매매(사랑해), 즈즈(배고파), 구구(편안해). 어린 판다는 즈즈나 와와라는 말을 자주 한대. 배가 고프거나 엄마가 무거운 체중으로 누르고 있을 땐 빼달라면서 즈즈, 와와. 기분이 업되면 개구진 목소리로 구구. 수컷 판다는 매매매 하면서 사랑을 구하고 암컷 판다는 수줍은 듯 지지 차차 소리를 낸대. 달콤한 사랑의 인사. 대밭이 지천인 담양에 살고 있으니 대나무 잎사귀를 먹고 사는 판다에 관심이 많다. 시선생께옵서 판다 한 쌍을 우리나라에 선물했다는데 대나무 오르간이 있는 담빛예술창고 정원에다 풀어놓고 진종일 같이 놀아주고 싶어라. 죽녹원 댓잎을 먹고 매매 지지 차차, 같이 살고파. 이 세상에 가득한 수많은 말들과 소리들. 정죄와 흉보기, 갈등과 반목의 말이 아닌 사랑과 자비의 말들이 넘치기를. 매매 지지 차차.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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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인 내가 십 년 넘게 정 붙이고 사는 베이스캠프엔 날마다 진한 커피향과 죽로차. 담양 평야 흰쌀로 지은 밥상과 할매들이 퍼준 묵은지. 고기반찬은 누구 제사 때나 한번쯤. 이 집엔 화장실이 두 군데 있다네. 안채에 딸린, 따순 목욕물도 나오는 수세식. 불편해도 즐겨 찾는 바깥 푸세식. 매실밭, 감밭에 거름도 쓸 겸 마련한 푸세식. 잔디밭을 가로질러 개집을 지나 한참 걸어야 푸세식이 나온다. 이름하여 수양각. 수양을 좀 해야겠다 싶어 지은 이름. 앉아 있으면 대숲 바람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오지.

박남준 시인이 모악산 살 때 종종 놀러갔는데 “의진아. 변소에 으쩌다 보면 뱀도 나오니깐 조심해라이. 변태귀신이 똥 누는 거 몰래 보기도 하니깐 잘 살피고오~.” 막돌로 허술하게 쌓은 그 변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튼실하고 야무지게 지은 수양각. 득도할 때까지만 수양각 출입을 하고, 이후엔 하늘나라에서 별똥을 눠야지 생각해. 여기서 봄 여름 가을은 물론 심지어는 폭설을 뚫고 기어들어가 큰일을 본다.


장강명의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미안하지만 수양각에다 놓고 한 달여 만에 독파했지. 재미있는 장면이 끊긴 게 아쉬우면 하루에 똥을 두 번 눴다네.

변소는 좀 멀리 있어야 해. 정신적인 환기도 물론이고 산기슭에서 엉덩이를 드러낼 때의 그 차가움이 나를 본래의 야성, 야생으로 이끄는 듯해. 화장지가 떨어질 때 쓰라고 둔 게 아니라 읽으라고 놓아둔 성경책도 있다. 군부대 설교 갔다 얻어온 손바닥 기드온 성경. 일 보다 읽을 게 없으면 성경책을 높이 들어. 커흐, 주님께 쏘리입니다요. 성경이 지루하면 쪼그려 졸기까지. 뒷간에서 사계절이 빙글빙글 돌 듯 예수님 스토리도 사복음서로 복잡 다양.

예수 생애를 기술한 교과서는 각양각색 4종.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예루살렘과 바티칸에서 확정고시한 단일하고 유일한 국정 따위 없다.

국정 화장실 수세식과 달리 비국정 푸세식에서 나는 지대한 수양 중. 나에게 도가 있다면, 이것은 전부 수양각에서 얻은 것. 내게 복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수양각에서 읽은 사복음서 덕분이리라. ‘수양이 모자라서’ 수양각을 매일 찾는다. 당신도 수양각이 한 채쯤 생기기를….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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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동무하고 제주와 여수 어디, 두 곳 섬을 댕겨 왔어. 좀 있다간 섬나라에 볼일도 하나 있다. 섬이 많은 남도에 살다보니 섬엘 자주 드나들게 된다. 섬에도 어김없이 단풍이 들고, 동백섬은 변함없이 짙푸르고, 어부들은 굵고 검은 손으로 물고기들을 바다에서 떼어내고 있었다.




해변을 걷다가 물고기 뼈와 조개껍질을 만났지. “임신을 해서 몸이 무거워지자 우르슬라는 물고기 뼈로 목걸이를 만들어 파는 장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우르슬라는 돼지꼬리를 단 아이를 낳았고 하혈이 멈추질 않아 그날 곧바로 죽었다지.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던 곳도 외딴 섬이었다. 나는 그날 아마도 물고기 뼈를 주우러 다녔을 것이다. 약물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려던 히피들이 있었다. 그들은 열려지고 벗겨진 눈(open nakes eys)을 껌벅대며 우주를 유영하는 물고기 몸을 바랐지. 그게 그런데 쉬운 일이런가. 이른바 흙수저 청년이 30만원 받고 선택한 실험인간 <돌연변이>. 물고기 머리를 한 그 청년을 심야 영화로 봤는데, 웃기기는 개뿔. 한없이 슬프덩만.

섬엘 갈 때는, 좀 오래 있게 될 때는, 장 그르니에의 <섬>이란 책을 싸들고 가곤 한다. 아마 수백번도 넘게 읽었을 것이다. 그 책. 미모사꽃과 등나무꽃과 장미꽃이 흐드러진 보로메 섬. 자라투스트라가 말한 “가장 아득한 곳으로부터의 사랑”을 가르쳐주는 섬을, 그대도 마음에 하나씩은 가지고 있길. 닉 드레이크의 1969년도 음반 <다섯 잎 남았네(Five Leave Left)>를 가을길에 들으면서 <섬>을, 가을 섬을, 잘 여행하다 돌아왔다. 진짜 다섯 잎 남은 나무가 다시 오라며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 주더군. 비바람도 불었으니 지금쯤은 세 잎이나 두 잎 남았겠다.

아등바등 죽어라고 사는데 뭔 시절 좋은 소린가 그러시겠다. 하지만 섬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그 푸른 추억이 없다면 당신만 인생 손해. 바닷새의 노래와 뱃머리의 포말이 부서지는 풍경들을 우리가 가슴에 담아놓지 않는다면 여긴 정말 아비규환 헬조선. 수많은 말들과 혐오로 찌든 육지에서 잠시 떠나 섬의 한쪽이 되어보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당신, 살고 싶지 아니한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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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잎들을 버리고 텅 비어 가네. 우왕 이리 눈부실 수가. 바라보다가는 눈이 시려서라도 눈물이 나지. 은빛 자작나무숲, 건너편은 넓은 잎사귀의 은백양나무숲. 산은 단풍으로 붉고 골짜기는 은빛으로 출렁거리네. 이달 또 다음달 저 숲의 나뭇잎들은 대부분 사라지겠지. 나는 나뭇잎의 소원을 알고 있다네. “아, 나뭇잎이 대지 위에 떨어질 때 사람이 될 것을 소원하며 내 배를 부드럽게 스치고 갔네.” 몽골 다르항이 고향인 유목민의 딸 롭상로르찌 을지터그스의 시. 여자의 배를 스쳐간 나뭇잎들은 사람으로 태어나겠지. 평화롭게 누운 여인의 이마에는 찌푸린 골짜기가 없지. 모든 일을 절망보다는 희망으로 읽어내는 사람에게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가을은 복이 있나니. 아이들이 태어나면 반드시 숲을 찾을 것이네. 아버지인 숲을 찾은 아이들은 생명과 평화의 땅을 약속할 거라네. 나뭇잎인 아이들. 나뭇잎인 시인들.

시인 다니카와 타로의 책 <시를 쓴다는 것>을 아껴 읽었네. “뭔가를 쓰려고 할 때는 가능한 한 제 자신을 텅 비우려고 합니다. 텅 비우면 말이 들어옵니다. 그러지 않고 내 안에 말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판에 박은 표현으로 끌려가 버려요….” 집필을 거부하는 일은 때로 텅 비우는 시기이기도 하겠네. 정의를 위해서, 침묵의 시위로 글쟁이들은 때로 절필을 하기도 해. 예비비 44억원을 고스란히 통장에 넣어준대도 학자가 양심을 판 글을 쓸 수는 없는 법이지. 나뭇잎이 지는 거룩한 일에 동참하는 마음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웠다네.

나도 신간을 내지 않은 지 벌써 십년도 넘었네. 많은 글을 쓰고 또 버렸다네. 글을 버리는 일은 마치 나무가 잎을 버리는 일처럼 장엄한 경험이어서 세월을 그저 가을로 여겼지. 꼭 게을러서만은 아니었어. 봄이 가을로 가듯 문장마다 깊어지고 싶었어. 재기로 넘친 산만하고 난잡한 글. 독자의 환심을 사려는 글. 누군가 비위를 맞추는 글. 거짓으로 꿀을 바른 글. 알량한 고료나 명예를 위한 따위가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날 나뭇잎의 글을 소원했네. 욕망을 비운 진실한 글들은 이 지루한 싸움에서 결국 승리의 월계관을 가져올 것이라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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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긴팔 옷들을 꺼내놨는데 비 온 뒷날 급 추워지자 두툼한 패딩을 찾아 입었어. 집에선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댕겨도 되지만 나들이 땐 곤란하잖아. 삽화 말고 내 큰 그림은 기괴하고 화사한 일색이니 옷도 엄청 화려하게 입을 것 같으나 전혀 아니올시다. 옷장 속 대부분 옷들은 검정이나 바랜 회색, 국방색. 칙칙한 수도사 같아. 하와이에선 달라지겠지. 예쁜 몸매를 지닌 애인이랑 섬나라에 놀러 가면 확 달라질고얌. 메고 다니는 가방은 그래도 화사한 편. 내가 그림을 그려 만든 에코백. 천가방 하나 들고 지구별을 배회하는 순례자.

하루는 단골 갤러리 바 트뤼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뮤지카 스콜라’라는 제목. 고전음악 해석학. 유화 물감으로 풀어본 바흐와 베토벤, 리스트와 쇼팽의 생애. 찾아온 벗들과 놀다 이모네 해장국에서 조개해장국 한 그릇. 밤안개가 밀려들기 전 산골로 탈래탈래 귀가.




낙엽이 서걱대는 밤길은 아름다웠다. 김광균 시인이 그러셨다지.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같다고. 폴란드산 ‘쇼팽 보드카’ 한잔과 낙엽의 밤은 얼마나 이국적인가. 밤길에 불빛을 비춰 가장 잘 마른 걸로 주운 낙엽 한 장. 에코백에 비슷한 천을 잘라 포인트를 줘봤다. 바늘로 한 땀 두 땀 기우는데 입에서 동요가 절로.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가을 길은 고운 길… 트랄랄 랄랄라 노래 부르며 산 넘어 물 건너가는, 가을 길은 비단길.” 초딩 4학년 말고 늙다리 4학년들도 이 동요를 좋아한다네. 노랑 빨강 파랑 내 에코백들. 보통 그 속엔 읽다 만 시집, 공책과 필기구, 아이패드, 음반 몇 장. 가끔 길에서 만난 들꽃 한 묶음, 낙엽 한 장이 담겨 있지.

가방을 빼앗겨 소지품 검사를 당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본 적도 있었다. 너무 황당하게도 김남주 시인이 번역한 하이네를 비롯한 시인들의 시집조차 불온서적이었다. 대관절 정부가 공인하지 않는 역사책들은 불온서적 취급을 당하게 생겼다. 길에서 무작위로 소지품 검사를 다시 시작할 날도 머지않은 듯. 석기시대 석탄처럼 새까만 시대 분위기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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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친이 없는 대학생 아이가 외로워 미치겠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훌륭한 여자를 달라고 기도하면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뿅 하고 나타나실 거고 그럼 넌 ‘오 마이 갓’을 외치겠지. 책도 많이 읽고 지적이면서 야시시한 친구를 원한다면 마릴린 먼로가 나타날 거야. 남자에게 ‘뭘로(무얼로)’ 어필할까? 먼로는 그 ‘뭘로’를 아는 여자였지. 평소 엄청 많은 책을 읽었다고 그래. 케네디 대통령과의 스캔들에서도 단지 육감적인 배우로서가 아니라 평화의 기쁨을 전달하는 지적인 대화 상대였다지. 당신이 가을이면 골백번 듣는 소리. 내가 한번 더 한다고 성질 내시진 않겠지. 가을은 독서의 계절! 스마트폰 좀 그만 들여다보시공 제발 책을 가까이. 마릴린 뭘로? 그래 마릴린 책으로….






시인들이여! 찌부러져 쉬려고만 마시고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빨리 글을 쓰시오들. 세상에 정직한 책들이 정방폭포 물줄기처럼 쏟아져야 해. 저들은 정직하지 못한 책들을 내놓겠다고 그러잖아. 부끄러운 사실은 몰래 감추고, 자기 좋을 대로 역사를 미화하고, 허망하고 패배적인 노예의 사상을 퍼트리겠다잖아. 승산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 시인들은 침묵해서는 안 돼!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존재다. 가령 ‘자네는 너무 올곧아 그래가지곤 이길 수 없어’, ‘내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하려면 좀 더 부드러운 말투를 써야 해’라고 조언을 해준다. 고맙긴 하지만 틀린 말이다. 승산과 유효성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니라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존재하는 루쉰에게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이렇게 살겠다’, ‘이것이 진짜 삶이다’라고 무언가를 드러내야만 한다. … 그것이 시인의 소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경식, <시의 힘>-

노랗고 붉고 자주색 별들로 왁작대는 국화 화분. 들국화의 노래 ‘행진’이 눈앞에 펼쳐지는 날. 눈을 갑자기 오래 쳐다보면 젊었을 때는 “나도 사랑해!” 바로 대답이 튀어나오지만 나이가 들면 “나 돈 없어. 왜 그랴” 이렇게 말이 바뀌게 된다, 흐흐. “책 살라궁….” 이래 버리면 진짜 외면할 방도가 없으리. 책방으로 어서 고고, 마릴린의 책방으로 갑시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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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언덕에 청소년수련원이 있는데 장사가 잘 안되나 계곡을 깎고 캠핑장을 개장. 고성방가 시끄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외국에 가보면 텐트는 노숙자가 살림하는 거처. 에베레스트나 가야 수십개 보이는 것. 아파트도 비좁고 답답하거늘 캠핑장 텐트는 옆집이 더 가까워. 순례길에 쓰려고 국방색 2인용 텐트를 하나 마련했었다. 이미 숲속에 살고 있고 집도 나무와 흙벽돌로 지은 터. 요란하게 캠핑을 다닐 이유가 없어 지프차 트렁크 속에서 쿨쿨. 만날 내 손으로 밥해먹고 사는데 버너다 코펠이다 취사도구만 봐도 징그럽다. 고기는 누가 구워줘야 맛나지 내가 뒤집고 판 갈고 해봐야 무슨 맛. 나야 매일매일 날마다가 캠핑 아닌가.


오전에 비바람이 추풍낙엽이란 말을 부려놓고 지나가더라. 사람 몸에 따뜻한 피가 도는 까닭은 이럴 때 서로 끌어안고 추위를 같이 견뎌내라는 뜻. 오리지널 텐트 게르에서 나고 자란 몽골 시인 검필더 뭉흐체첵의 시 ‘아들아’를 읽는다. “물오른 초원이 어떻게 우는지 보여주려고 너의 발을 이슬로 씻어 주었네. 꽃을 꺾지 않는 아이가 되라고 이 어미는 너의 귀에 대고 노래를 불렀네. 딱딱한 네 놀이터를 부드럽게 해주려고 씨름꾼 아버지는 초록 비단 뎁제(풀)가 뭉개지도록 밟았고…”. 그리고 이제 그 푸른 풀조차 모두 사그라지는 시월.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에게 무엇을 더 보여주시려는가.





지금 못난 인간들이 꼭 과거를 주워섬긴다. 개발독재기 새마을운동 추억하기란 한심한 구닥다리 동창회 같다. 장차 일어날 미래의 모습은 창조뿐인가. 앞날을 보여주는 일이 아버지 어머니의 도리. 번영과 성장을 외쳐대지만 평화와 행복은 오리무중. 돈이 있어야 통일도 될 것 같지만 북녘 사람들 자존심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자존심을 건드리면 ‘죽으면 죽었지~’가 되는 그이들…. 또 누가 노동자들을 파업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가. 노숙자들에게 캠핑의 즐거움을 설파하고, 실업자들에게 쉼과 힐링을 얘기하는 한심한 시대를 걷고 있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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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깡촌 위를 날아가던 비행기 조종사가 빈 콜라병을 한 개 던지면서 시작되는 소동극 <부시맨>.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에게 다시 돌려드리기로 작정한 추장 아저씨는 길고 험난한 여행을 시작하지. 부시맨이 슈퍼맨보다 인기가 높던 시절, 우리네 시골에도 부시맨들이 살고 있었다네. 고물상 아저씨는 아이들이 콜라병을 주워 가져오면 호박엿 쌀엿으로 바꿔주고는 그랬지. 그날부터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부시맨이 되었고, 콜라병이라면 눈에 쌍라이트를 밝혔지. 아버지 경운기 부속품을 내다 파는 놈, 저수지 공사장 철근 토막을 훔쳐다가 턱관절에 쥐가 날 만큼 많은 엿을 바꿔 먹은 녀석도 있었어.

마을회관 앞의 쓰레기 분리수거함. 대도시 수거함과는 달리 항상 홀쭉하니 배고픈 저 그물망. 가난한 촌로들이 주로 계시는 윗동네는 들어오는 명절선물이 변변찮으니 나가는 쓰레기도 눈곱만큼 작아. 명절에 아무리 배불리 먹는대도 소화제까지 필요 없고 콜라 사이다 한잔이면 배꼽 아래까지 개운. 명절 잔치 뒤끝으로 콜라병이나 몇 개 굴러다닐 뿐인 골목길.




유별난 애국자들은 콜라와 아메리카노 커피조차 멀리한다지. 국산차도 외국에 나가면 그쪽에선 수입차요, 외제차일 터. 실력과 서비스로 승부해야지 세계의 노동자들은 모두 한 형제. 예수님도 부처님도 외국제 ‘수입산’이니 그럼 믿지를 말아야지.

속이 울렁거리고 더부룩할 때 콜라 한잔씩 찾는 저 이들은 국경 초월 럼콕 마니아. 럼주 대신 그럼을 넣어 콜라와 믹서. “그럼 입이 느끼하고 배 속이 부풀헌디 콜라나 한잔?” 검은 물을 꿀컥꿀컥 들이마신 뒤 꺼윽~ 트림까지 발사. 불꽃놀이처럼 쏘아올린 콜라 트림이 공중에 확하고 퍼지면 보름달도 어이없어 싱겁게 웃으려나. 꽃집도 아닌데 이름부터가 화원인 해남군 화원면에 사는 동무가 있다. 이번주 집에 있느냐고 물어 보길래 한동안 잠행 중이라 했는데 생선을 이미 보냈다고. 꽃이나 보내지 웬 물고기. 고양이가 대신 잘 먹겠네. 콜라까지 사줘야겠어. 집 앞에 뒹구는 콜라병은 내가 아니라 고양이가 마신 것으로 아시길.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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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문턱이라 찬바람도 불고.” “찐덕찐덕 하든 날이 가불등만 금시 추와부러라.” “그러게요.” “인자 뚜꾼(두꺼운) 이불을 더퍼야 쓰거씁디다. 죽전(대밭)이나 하늘에 닿으까 저라고 구름이 노푸덴허구만이라. 바람도 선들선들 불어부리고.” 이 동네에서 얼치기 작가인 나만 빼고 다들 일찍 보따리를 싼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 할매는 시를 읊으며 파밭을 매고 나는 병이 들어 누렇게 곯은 고추밭을 갈아엎었다. 풀조차 뽑지 않고 버려둔 야생농사. 고추를 몇 개나 따먹었을까. 매운 맛을 즐기지는 않아서 누구들 따주기나 하고….

집밖에 나가면 갤러리와 찻집, 밤에는 벗들과 둘러앉아 얘기꽃. 돌아와 이곳 산골에선 정원을 돌보는 일이 주업이 된다. 낡고 해진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풀과 나무들이 먼저 알고 일제히 겨드랑이를 들어 올린다. 농사야 내버려두는 무농약 자생농법으로다가 내 밥상에 찬이나 간신히 건져도 되는 것이지만 정원일은 손이 이만저만 가는 일이 아니다. 숲이 우거진 이 집은 내가 집을 짓고 이사 올 때 모두 구해다 심은 나무들이다.




언제는 정원사 겸 작가 재키 베넷의 <작가들의 정원>을 읽었는데, 버나드 쇼와 찰스 디킨스, 애거사 크리스티를 비롯, 동화작가 로알드 달의 정원을 소개하고 있었다, 제라늄 꽃을 너무 사랑해서 아예 제라늄 무대라는 곳을 만들기도 했다는 찰스 디킨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스위스 살레에서 지냈는데, 그곳의 풍경을 적은 글은 이랬다. “내 집은 나무들이 우거져 포위당했고 새들과 나비가 주인이나 진배없이 방문한다. 태양과 그림자는 벗들과 함께 오며 나무는 가지를 뻗어 초록빛깔 손을 먼저 내민다.” 진짜로 파란색 잉크로만 글을 썼다는 찰스 디킨스. 인간애를 일깨운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 그의 책은 내 거실에도 항상 꽂혀 있지. 파란색 하늘의 끝에는 노랗고 빨간 성탄별이 떠있을까. 하늘과 정원을 잃어버린 시대, 푸른 잉크가 풀어진 가을 하늘을 누가 치어다볼까. 하늘과 정원을 잃어버린 세상에 이를 되찾아 안겨주는 일이야말로 작가의 사명인지도 모르겠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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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꺾이고 없는 ‘굴렁쇠’라는 어린이 신문에 글을 몇 해 연재한 일이 있었다. 골리앗 소년땡땡일보를 향해 던진 다윗의 물맷돌 같은 신문이었지. 필진 가운데 이오덕 선생님이 계셨는데, 글을 쓸 때마다 선생님이 지적하실까봐 내심 걱정이 컸다. 다행히 핀잔보다는 칭찬을 주셨어. 그래도 같은 지면에 오를 때마다 말법이 문제가 있지는 않나, 일본말법으로 쓴 건 아닌지 꼼꼼히 살펴보고는 그랬다. 눈치를 보자는 게 아니라 어른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 주의하고 흠모하며 따르는 마음이 어른을 극진히 모시는 태도일 테니까.


동네 길, 어르신들을 마주치면 안부 인사라도 꺼내며 고개를 넙죽 숙인다. 이 땅을 오래 지켜주어 감사한 마음. 여기 살게 된 지도 십년이 넘었으니 원주민 비스무리. 그래도 아직은 당당 멀었어. 명절이 다가오니 울력을 했었나 마을 길 주변이 산뜻해졌더라. 나 없을 때 몇 분이서 예초기를 돌린 모양. 알지도 못했고 거들지 못해 죄송하여 일찍 일어나 미비한 곳들을 찾아 풀을 깎았다. 차 한 대나 간신히 지나가는 비좁은 마을 길. 둘둘이 아니라 셋셋 치킨도 배달을 오지 않는 길. 짜장면 한 그릇 배달되는 마을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라.

이젠 완연한 가을인데 여름꽃 원추리가 뒤늦게 피었더군. 슬로시티에 걸맞은 느림보인가. 풀을 깎다 말고 한참 꽃구경을 했다. 이태리, 헝가리, 시칠리, 빠아리만 있는 게 아니지. 꽃과 사람이 함께 사는 원추리. 땅을 지켜온 어른들이 계시는 마을. 내가 이장이라면 원추리꽃이 남도에서 젤 예쁘게 피는 길을 가꾸고 싶어. 언제부턴가 누가 산골짜기에 찾아와 색소폰을 몇 시간씩 연습하고 간다. 그것도 교회 찬송가로다가. 산새들도 나도 고막이 터질 지경. 최근에 이사 온 집에선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여 문 열어놓고 고성방가. 이런 무례한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길은 등산객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이다. 흑두건을 쓴 자전거족들은 라디오를 크게 틀고서 내리막길을 광속질주. 하늘도 어른들도 두려워 않는 저 마음들이 모여 나라를 이루고 사는 걸까. 애고 마음병 생길라. 원추리꽃이나 한 번 더 보자.


임의진|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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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고된 이들이 오가는 길목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더없이 낮고 쓸쓸한 사람들의 입술을 벙글게 만드는 맨드라미 봉숭아. 가진 것이라곤 성경책 한 권뿐인 에바그리우스라는 사막의 수도사가 있었대. 결국엔 성경책까지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사서 건넸지.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그 말씀마저도 내어준 수도사. 더 이상 성경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사막에 핀 선인장 꽃을 보며 기쁨의 찬미를 바쳤대.



소낙비에 젖지 말라고 고작 한 벌 누비옷이 전부인 맨드라미. 꽃빛이 고와 씨앗을 좀 받고 봉숭아꽃은 어린 조카에게 주려고 호주머니에 담았네. 그런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몇 날 밤. 청바지에 손을 넣어보니 봉숭아꽃이 깜짝이야. 시작도 못해본 사랑처럼 그렇게 네가 거기 있었구나. 미안 미안해.

바닷가에 가면 파도가 내 뒤꿈치를 밟는 것처럼 자꾸만 맨드라미 봉숭아 향기. 꽃에 관한 시를 잘 쓰는 시인보다 꽃밭을 잘 가꾸는 농부가 되고 싶었네. 내 정원은 항상 꽃이 피어 있단다. 서둘러 국화도 옮겨 심고 가을이 쑥쑥 자라고 있어라. 바람이 만지고 온 가을 냄새에 황홀하여 욕망의 덩굴손을 모두 놓아버렸네.

요란스러운 부흥회도 않고 새벽예배도 없고 박수도 안 치고 십일조 헌금조차 없는 교회를 했다. 내 이런 과거의 목회를 나태와 무능에 한심한 기행이라고 태클 거는 분도 가끔 계시다. 스님이나 신부님들과 친하게 지낸 일도 이단이 아니냐며 쪼아봐. 난 그저 맨드라미 봉숭아처럼 같이 비 맞으며 사랑하고 지낸 것뿐인데. 외국산 가시 돋친 장미가 되고 싶지 않았지.

시방 종교집안조차 회사보다 더 고도화된 수법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양상이고, 청춘들은 방송에 등장하는 말재주꾼에 홀려 멘토다 뭐다 호들갑스러운 추종들. 애먼 밖에서 뭔가를 구하느라 맨드라미 봉숭아를 외면하는 장님의 시절이렷다. 오늘도 꽃은 피네. 낮은 땅에 맨드라미 봉숭아. 진실한 사랑은 달달한 말이나 색깔, 기상천외한 수법에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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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렸을 적엔 읍 단위마다 극장이 있었다. 극장에선 영화를 하루 두 편씩 상영했는데, 어른들은 읍내 나갈 일이 없어도 역뿌러(일부러) 극장을 가고는 했다. 오이장아찌, 무장아찌 맛이 다르듯 영화마다 맛이 달라. 연애의 대부분을 극장에서 했다. 영화 보다가 손을 잡은 것이 사랑이었고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은 작별이었다. 지금도 매일 밤마다 영화를 한 편씩 틀어놓고 눕는다. 영화가 좋으면 끝까지 보고, 아니면 중간에 잠이 들지. 꿈에서 나는 많은 스타들을 만난다. 영화는 결국 한 편의 꿈자리며 별자리.




촌에 살다보면 개봉영화 보기가 간단치 않다. 천만이 드는 흥행 영화야 개봉관 수가 많으니 아무 때고 대처 나가서 보면 그만인데, 별종이라서 보고 싶은 영화도 유별나지. 영화를 찾아 아주 먼 길을 나서는 경우도 있다. 엊그제는 <위로 공단>을 정말 어렵사리 보았다. 영화는 뜨겁고 차가웠으며 맵고 짜고 쓰다가 다시 달았다. 처음 경험하는 맛이었다. 영화는 여성 노동자들의 눈을 통해 지난 세월을 바라본다. 어떤 기독교 기업은 여성노동자들의 손바닥만 한 휴게실을 없애고 그곳에 예배실을 차린 뒤 실적 성과를 높이게 해달라며 기도를 바쳤단다. 탐욕, 망상, 미신적 신앙이 빚어낸 웃지 못할 코미디. 강남의 금싸라기땅 대형교회 별관 외벽에 그려져 있던 금발머리 미국사람 예수. 장발의 디캐프리오를 좀 닮은 거 같기도 하던 그 예수라면 그런 장로님 사업주의 기도를 들어줄 것 같기도 해.

공단이 그 난리일 때 농촌은 황폐하게 무너져갔다. 농토는 버려지거나 농약에 중독되고 있었다. 그래도 여성 노동자들, 여성 농민들이 있어 지켜온 이 땅 이 세계. 큰돈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장님이 수도원에 쉬러 왔는데 한숨만 쉬다가 돌아갔다지. 밭 매다 수도원장은 수도사들에게 한마디 변을 남겼다. “마루에서 자는 사람들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린 밭이나 잘 매고 삽시다들….” 나이키 신발 신고 싶다던 그 어린 소녀 노동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시방 위로 극장에서 위로 공단을 감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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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 걸까. 외딴 집을 보면 그런 궁금한 생각이 든다. 산새와 고양이, 동네 개가 한번쯤 안부나 물어줄까. 인기척은 아예 없고 지붕에서 톡하니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집. 벽은 검댕이 슬어 까맣고, 새들이 물어온 나뭇가지로 지붕은 덮이고, 밤마다 듬성듬성 별이 박히면 집도 기운이 다해 혼령이 빠져나가버리겠지.

지난 봄날 강물 위로 노을이 눈물짓던 강변마을, 금방 쓰러질 듯 가련한 슬레이트 지붕을 보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거 같아 기웃거려 보았는데 중년의 한 사내가 폐병 걸린 듯 퀭한 눈을 하고선 방문을 열었다. 깜짝 놀라 돌아섰지. 잠깐 엿본 방은 캄캄했고 마당에 홀로 핀 하얀 앵두꽃은 가난의 정도와 시름을 짐작하게 했다. 깊은 산골은 한 집 건너 그런 집들이 늘고 있으나 대도시 주변은 대궐 별장이 날로 생겨나고 있어.




여행에서 돌아와 집밥을 해먹고 친구들과 골짝물에 발 담그며 복숭아와 옥수수, 수박을 맛나게 먹었다. 건넛마을엔 소쇄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친구들이 내려와 하루는 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강진 살 때는 손님 오시면 다산초당을 하루에 두세 차례 가기도 했지. 외지 손님들 덕분에 휴가철엔 더욱 그랬다. 의미 깊은 곳이라 고달픔보다는 감사로 삼았지. 담양에선 소쇄원을 자주 가게 된다.

대숲을 돌아 소쇄원이 보이자 누가 그랬다. “저게 소쇄원이야? 아무도 안 살아?” 과연 아무도 살지 않는 걸까. 선비는 여태 대청마루에서 시를 짓고 밤에는 달님이 불을 밝혀주고…. 낙향선비 양산보가 시를 짓던 마루에 동네 할머니는 빨간 고추를 널기도 한다. 한동안은 상사화가 어찌나 붉던지 대낮에 길을 잃을 뻔도 했어. 옛사람은 죽었으나 선비의 정신이 여태 살아있는 곳. 소쇄원에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정신이 죽고 없다면 집도 같이 명을 다할 것이리라. 조선 중기 잘 지었을 대갓집은 모두 사라졌으나 이 유배자의 정원은 남아있구나. 과연 지금 짓는 저 많은 주택들은 얼마나 오래갈까. 후세에 누가 그를 기리며 집을 찾아줄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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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서 배운 알량한 독일어로는 그저 인사말이나 나눌 뿐. 책을 볼 정도가 못되는데도 잡지를 워낙 좋아해 서점에서 죽치고 있다. 어제부턴 프랑크푸르트에 숙소를 정하고 눌러앉았는데, 어김없이 동네 서점행. 월든(Walden) 1호라 적힌 신생 잡지를 발견, 쭈욱 훑어보다가 그림들이 워낙 예뻐 한 권 집어들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쪼갠 주머니책 부록도 쏠쏠해. 국내에도 이런 무겁지 않은 내용의 생태 잡지들이 생겨났으면 싶었다.


여행 오기 전, 방학이라 뵐까 하고 같은 동네 사는 나희덕 시인과 연락을 나눴는데 소로의 월든 호숫가에 찾아가 계신다고. 하 그래요, 하고선 잠깐 서재에서 월든을 들추어본 날이 있었다. 그러다가 필 받아 밤에는 침대에 누워 팔을 괴고 영화 <인투 더 와일드>도 한 번 더 보았지. 에모리대학을 나온 준수한 청년 매캔들리스. 알래스카에 버려진 낡은 버스에서 죽어간 그 청년을 기리는 영화. 소로와 매캔들리스의 공통점이라면 야생의 삶을 사랑한 것이겠다. 돈으로 산 잔인한 사냥감과 야생 체험코스 따위가 아니라 그것은 대자연을 향한 인간 본연의 진실하고 겸손한 귀의였다. “사랑이나 돈, 명성보다 진실을 내게 주오. 기름진 음식이나 와인으로 차려진 극진한 대접 따위 원치 않아. 거기에 진실이 없다면 배가 고파도 불친절한 식탁을 떠날 수밖에.” 소로의 글 가운데 일부분, 매캔들리스는 진실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긋고 굵은 펜으로 여백에다가 큼지막하게 써 담기도 했다 한다.

낼 모레면 산골짜기 내 오두막으로 돌아갈 시간. 진실을 이런 대도시에서 찾는다는 게 바보만 같다. 매캔들리스는 또 톨스토이의 <행복> 가운데 이 구절에도 밑줄을 그었다지. “우리 인생에서 단 하나 진실한 행복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삶에서 얻는 보람이겠다. 변두리에서 호젓하게 살며 무기력한 이웃을 돕는 선행. 쉼과 자연, 독서와 음악, 남을 사랑하는 일. 이러한 삶이 행복이다.” 우리도 오늘 여기에 밑줄을 긋고, 닫아건 창문을 환히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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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열차 산천에서 누가 흘리고 간 신문을 훔쳐 읽었지. 오늘의 운세가 눈에 들어오더군. “일이 꼬여 옷을 벗게 되니 주의하라.” 나는 잘릴 직장도 뭣도 없어. 숫제 헛소리구만, 덮고 말았지.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자가 딱. 용돈벌이 일이 엎어졌다는 소식. 공사판인 동네길, 부주의로 애마가 망가져 며칠 출타도 못하고 자가 유배. 되는 일이라곤 없어 옷을 벗고 여행이나 떠나버리자 결심하기에 이르렀지. 오늘의 운세를 읽지 말았어야 했어.

베를린은 공원마다 윗옷을 벗어던진 젊은이들로 넘쳐나네. 옷을 벗은 선탠족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오늘은 로자 룩셈부르크역에 가서 발랄한 친구들의 예술작당을 구경해볼 계획이었어. 그런데 거리로 나오자 몸이 자동적으로 공원을 향하게 되더군.



꽃과 나무들이 일루 와, 손짓이었어. 김수영의 시 ‘절망’에서, 바람은 딴 데서 불어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고 했던가. 공원에 머물면 바람의 잔소리조차 행복하여라. 한철 푸르다만 미나리꽝 같은 몸뚱아리라도 나무 그늘 아래 널어두니 상쾌하고 흐뭇해. 멀리 뾰쪽 탑에도 젊은 사내의 나신이 보이네. 성부와 성자, 성령이 삼자대면하는 삼위교회. 인간이 된 성자가 십자가 위에서 전라 상태로 윙크. 오늘의 운세엔 진짜 옷을 벗게 될 거라 쓰여 있었던 걸까. 무당벌레가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 듯 나도 이곳에 옷을 벗은 자유인으로 날아와 있네. 칠포세대라지. 인간관계, 꿈, 희망 직종, 연애, 결혼, 출산, 주택 마련…. 다행인 건 ‘자유’만은 포기 안 했다는 거!

반얀나무 아래 살다 간 신비로운 요기, 나체의 힌두 성자 스리 토타푸리. 그가 살던 성스러운 나르마다 강가에 가본 일이 있었지. 40년 동안 수행하다 우주의 절대존재와 자신이 한 몸임을 알아 참자유를 얻게 되었다지. 옷을 벗으면 누구나 자유인. 베를린엔 수많은 토타푸리들이 공원에 누워 책을 읽거나 입술을 더듬는 키스족들이야. 전라도식 독일어로 “멋지당케! 그란당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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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턴 청춘의 우상 본 회퍼 목사, 음악가 윤이상,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골목을 차근차근 걷고 있다. 아주 오래전 뜻하지 않게 베를린 동물원역 근처에서 잠시 지냈는데 이십여년 만에 다시 이곳 베를린을 찾은 거다. 유럽의 수도. 분단을 극복한 이 거리는 어디로 가나 확 트인 통행길. 왕래하던 길을 끊고 형제간에 편지조차 없이 잔인한 철조망을 친 내 조국은 비극의 땅이다. 동서독의 장벽을 허물고 나서 통일 독일은 왈패라 할 만큼 다시 강인해졌다. 다행히 이 나라 양심적 지식인들은 시퍼런 눈으로 살아 있고, 파리나 런던을 제치고 가장 핫한 예술가들의 안방이 되어 있다.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잊을 수 없는 영화 가운데 하나. 다니엘이 천사로 살던 장면은 흑백인데 서커스 곡예사 소녀 마리온을 사랑하고 인간이 되었을 때 영화는 순간 컬러로 바뀐다. 총천연색 인생, 살아 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사람으로 산다는 것, 참으로 큰 축복임을 그대도 알아야 한다. 공중곡예와 같은 이 진기하고 놀라운 삶.


해남 살 때 처음 서커스를 구경했다. 온 동네를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며 서커스가 들어오면 교회당보다 서커스 극단 천막이 더 성황이었다. 아버지 목사님은 교인들과 같이 서커스 구경을 갔다. 나도 아버지 손을 잡고 그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피에로 아저씨는 굵은 눈물방울을 얼굴에 그려놓고도 배꼽이 빠지게 웃도록 만들었다. 공중곡예사 소녀는 베를린 천사처럼 하늘을 날았다. 세상은 많은 천사가 산다. 하지만 천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 왜냐면 사람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사람의 몸을 입어야만 사랑을 할 수 있지. 달콤한 사랑의 입맞춤이여.

공중곡예를 마치고 지상에 내려온 소녀를 향해 손바닥이 아플 만큼 박수를 쳤다. 당신의 삶도 박수를 받을 만큼 아름다워. 사람으로 살며 사랑하고 살자. ‘스톱 더 워(Stop the War).’ 광복 70주년, 휴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사람은 평화일 때 사람인 게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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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사람도 개고생, 개야 원래 개고생. 알랭 드 보통 아저씨의 르포 <일의 기쁨과 슬픔>을 보면, 식사시간에 현지인들은 각자 집으로 사라져 생선과 코코넛, 양파를 맛나게 튀겨 먹는단다. 집 떠나 외지에 근무하는 현장일꾼들은 가게에서 산 것들이 고작. 초콜릿이나 비스킷, 케첩을 발라먹는 게 전부. 이건 한마디로 ‘일의 슬픔’이겠다. 집 떠나면 너도나도 집밥이 그리운 것이다.

귀가가 늦은 식구들을 위해 아랫목에 뜨신 밥 한 그릇 파묻고 솜이불로 다뿍 덮고, 별빛동무삼아 동구 밖에서 마중하시던 어머니. 별똥별처럼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지게 되는 어머니 마음. 그런 뜨신 밥을 수도 없이 먹었는데 어머닌 시방 별이 되고. 명왕성 너머 별빛이 되어 저 하늘에 계시는 지금, 나 당신을 잊지 못해 뜨신 밥을 아랫목에 묻고는 한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밥과 된장국, 철따라 달라지는 반찬들. 노릿하게 구운 생선과 내가 농사지은 풋고추 서너 개. 어디 나돌다가 집에 돌아오면 이런 집밥이 행복하다. 자취가 수십년, 나름 셰프요, 한식요리사. 말장난이 아니라 요리조리 잘 해서 먹으니 요리사요, 조리사다. 동네분들이 가져다주신 묵은 김치. 면소재지 부식가게에서 산 두부 한 모. 가끔 눈먼 돈이 생기면 살집이 통통한 생선이나 비계가 절반인 고기 한 토막에 군침이 간다.

매미소리 쨍쨍거리는 여름날 마당에서 밥을 먹기도 하는데 개들이 저도 달라고 컹컹 짖어대. 야생고양이가 이제 막 젖 뗀 아가들을 데리고 찾아오기도 한다. 공깃돌 굴리듯 조심히 던져준 고깃덩어리를 아가들이 먼저 핥는다. 엄마는 조심조심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배가 고픈 만큼 겁도 없지. 이 산골집에서 인간인 나 혼자 먹을 수 있는 건 포도주와 커피뿐이다. 인간이기 위해서 오늘도 집밥을 달게 먹고 하와이에서 누가 사온 귀한 커피콩을 잘게 갈았다. 하루가 정말 후딱 가. 금세 해가 저물고 어둑해졌어. 해는 살구만 해지고 달은 자두만 해진 어느 배부른 여름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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