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223건

  1. 2016.03.30 시대적응 불량자
  2. 2016.03.23 봄보로 봄봄
  3. 2016.03.16 팽나무와 바둑이
  4. 2016.03.09 프란치스코와 새
  5. 2016.03.02 맨발의 톨스토이
  6. 2016.02.24 말귀가 통하는 사람
  7. 2016.02.17 지옥에서 벗어날 자유
  8. 2016.02.10 쉽지 않은 이별
  9. 2016.02.03 금토일
  10. 2016.01.27 은하철도의 밤
  11. 2016.01.20 옥의 슬픔
  12. 2016.01.13 야생의 인간
  13. 2016.01.06 동백꽃 절개
  14. 2015.12.30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15. 2015.12.23 세가지 선물
  16. 2015.12.16 자장가를 부르는 집
  17. 2015.12.09 아부지 다스 베이더
  18. 2015.12.02 귀뚜라미 동학
  19. 2015.11.25 초승달과 개들
  20. 2015.11.18 무와 무관심

집에 빈 벽이 보이면 전시하고 남은 유화물감 그림들을 골라 걸어두곤 했는데 얼마 전에 모두 떼어버렸다. 창고에 집어넣으면 내가 죽고 없을 때까지 바람도 못 쐴 거 같아 그리한 일. 이때껏 맘 써줬으면 되었지 뭐. 이젠 창고 방에서 잠이나 푹 자거라 얘들아. 여행하다가 선물가게 들르면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 달린 기념품을 고르곤 했었다. 그도 변덕이 생겨 한주머니 누구를 줘버렸다. 냉장고가 드디어 안도 밖도 깨끗하고 가난해졌어. 텅 빈 벽은 차분하고 고요할 뿐만 아니라 외롭기조차 하여라. 내가 오래도록 바라던 바라 흡족하다. 말이 시인이지 시집 한 권 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떠밀려서 글을 쓴 지 수십년 만에 첫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만 몰래 읽어주고 말까 했는데. 사진을 찍자길래 안 찍으려고 예쁜(?) 수염도 싹 밀어버렸다.


그림 말고 사진 전시도 몇 번 했었지만 내가 액자 속 주인공은 아니었다. 설정하고 찍은 얼굴은 왜 그렇게 어색하고 낯간지러운지. 최근 어떤 생존 선승이라는 분의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온통 자신을 과시하는 초상뿐. 배가 산으로 가다가 급기야 우주로 가버린 듯. 다들 취향과 생각이 다른 것뿐일까. 인터넷 커뮤니티엔 일절 기웃거리지 않고 그 흔한 에스엔에스도 뭣도 않으니 나는 갈수록 인간관계가 협소해지고 있는 거 같다. 존영 미소지자에 시대적응 불량자. 이런 내가 어쩌다가 그래 글은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 사진을 ‘존영’이라 부르고 받드는 나라. 이런 일인숭배 국가에서 나는 적응불량 국제난민 같구나. 북쪽은 삼대에 걸친 김씨 일가 사진을 가가호호 걸어놓고 찬송 때마다 기가 막히지 않던가. 종교도 그렇게는 못할 걸. 남북이 딱~ 같은 취향에 비슷한 정신 수준 같다. 사랑하는 아들의 반명함판 사진이나 한 장 품에 품고 다니는 게 고작인 나는, 비루먹을 민중으로 짓밟히며 감시와 처벌을 달고 사는 우리들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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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타령이 유행이라지. 신박 친박 원박 종박 비박 멀박 겉박 가박 짤박 홀박 죽박 절박에 탈박과 쪽박. 나는 어쩌다가 호박인가. 남다른 호박 사랑. 낮에 애호박찌개 끓여 먹고 든 생각. 올핸 새까만 토종 흑호박을 심어보고 싶은데 호박씨를 어디서 구하나. 호박씨 까는 인간들은 많으나 호박씨를 지키고 싸매놓은 인간은 드물 테니까. 작년엔 산밭 한쪽을 묵정지로 버려두었다. 한 해는 쉬어주어야 지력 땅심이 생기지. 화학비료 농약 없이 생태뒷간에 남은 퇴비로만 밭을 일구는데, 갈수록 손님이 귀찮아 초대들을 안 했더니 똥거름 양이 해마다 줄고 있다. 그렇다고 한 뙈기 밭 건사할 무엇이 없겠는가.

담양장은 그림 같은 오일장. 천연기념물 관방제림 아래 펼쳐지는 오일장. 영산강 실개천이 흐르고, 거기 할멈 영감 손잡고 모이면 바삐 흘러가던 구름도 잠시 쉬었다간다. 날 풀려 첫 장나들이. 팔려나온 순둥이 강아지들과 햇병아리 보길 즐겨해 맨 먼저 그쪽으로 잰걸음. 그러다 모종도 좀 사고 국숫집에서 달걀에 멸치국수 한 그릇, 막걸리도 한 순배 걸치고 나오면 인생이 다 흐뭇해져. 이번 장엔 잘생긴 딸기 모종, 배추 상추 우엉도 한 판 구했다. 봄보로 봄봄, 하며 돌아서려는데 신이 된 사람, 부활한 예수가 거기 떡 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 부활절. “임씨. 얼굴이 피셨성. 봄이라 그러싱가?” “히히. 국수 한 그릇 묵어선갑네요. 묵고 자팠거덩요.” “묵고 싶은 것도 거 많으셔. 나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먹고도 배가 출출하넹. 동네 들어가서 삼겹살에 한잔 워떠신가?” 요거 모종도 심어야 하고 맘이 급한데, 대번 콜~해버렸다.

언젠가 요가 공부할 때 ‘브라마비댜(Brahmavidya)’란 말을 배워 공책에 적어두었지. ‘신을 보는 능력’이라는 뜻. 학위도 돈도 아닌 신비한 능력으로 날마다 신을 본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 날마다 신을 만나 신이 되는 봄. 봄보로 봄봄!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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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 <법구경>엔 이런 구절이 있다. “혼자 앉고 혼자 눕고 혼자 걷고 부지런하여 혼자 자신을 잘 다스린 사람은 복이 있다. 숲에서 행복하리라.”

짝 잃은 외기러기 할매들 숲으로 운동 갈 시간. 숲이 어서 오라 부른다. 봄바람 다스워져 옷차림도 얇아라.

“나보다 일찍 죽어요. 조금만 일찍. 당신이 집으로 오는 길을 혼자 와야 하지 않도록.” 베를린에 사는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다. 먼저 죽은 아저씨는 혼자 사는 외로움을 정녕 모르리라. 내 기도에 감사하시오, 하면서 외기러기 여인들이 혼자 앉고 혼자 눕고 혼자 걷기를 반복한다. 하늘이 부르실 때까지 그리 살 것이다.


처지가 비슷한 동무들 어울려 팽나무가 위풍당당 서있는 숲으로 운동을 매일 나간다. 동네엔 팽나무가 여러 그루. 나란히 같이 있는 건 아니고 저들도 각자도생. 영혼이 맑은 사람들, 그리고 바둑돌처럼 희고 검은 점박이개 바둑이가 동무하면 숲은 반가워서 잎사귀들을 크게 흔든다. 개가 꼬리 치듯 나무도 잎을 흔들어 반기는 것. 팽나무와 아마 사촌지간일 쇼팽은 폴로네즈를 연주하고, 나뭇가지들은 허공에 대고 정성스럽게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바둑이는 게을러서 끝까지 걷진 않아. 팽나무 아래 전세 내고 누워 할매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바둑이가 배를 깔고 누우면 바둑판이 좍 펼쳐지고 청군 백군 나누어진 하늘이 등때기에 대고 바둑을 둔다. 누가 이기건 말건 관심없는 게임.

“째깐 있다가 올팅게 기둘리고 있어라이.” “멍멍” 대답도 간단. 기분 나쁘면 으릉으릉, 뼈다귀라도 보이면 으헤헤헤. 대답은 장기판도 아닌데 멍군이 어쩌고 멍멍. 너는 바둑이란 말야. 바둑돌 닮은 바둑이. 팽나무 아래 있으니 마치 신선이 키우는 개 같다. 맹그롬하니 뭘 쳐다본다냐, 가지 끝 따따부따 시끄러운 멧새 가족이 부러웠던가. 바둑이도 금방 자기 배로 낳은 강아지들 몰고 이 동네를 휘젓고 다닐 것이다. 나만 아는 비밀. 송어회관 앞길에서 낯선 발발이 동족이랑 흘레붙덩만. 연애사업으로 바쁘신 몸이 팽나무 아래 간만에 쉬시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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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체육관 같은 곳에서 조찬기도회를 열어 권력에 아부하며 재롱을 떨지. 그러고도 어떻게, 뻔뻔스럽게,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 있을까. 프란치스코 성인은 변두리를 떠돌며 군중 대신 새들을 상대로 설교하길 즐겼다. 브람스는 바이올린 소나타에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란 악상기호를 붙였단다. 자유롭고 고독했던 사람 프란치스코. 이문재 시인은 동명의 시에서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살자고 적고 있더라.

프란치스코 성인이 포르치운쿨라 수도원에 머물 때였다. 매미들이 나무에 가득 앉아있자 “조물주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부탁하자 매미들이 일제히 노래를 불렀고 “이제 그만 하늘로 날아오르세요!”하니 서편 하늘이 까매졌단다. 제자들과 베바니야 마을을 지나갈 때는 들판에 새들이 가득 내려앉아있자 느닷없이 새들 앞에 서서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를 마칠 때까지 단 한 마리도 날아가지 않고 경청했다니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리 동네 새들은 설교는커녕 한마디도 내 말을 들으려 안 해. 내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들이, 요것들이 전체로 문제야. 순박한 산골사람들 안 닮아 드세고 억세고 성질도 급해설랑 자주 회까닥해. 목소리조차 시끄럽고 사나워라. 거위도 아닌데 꽉꽉 꽥꽥. 까치는 글쎄 개밥 사료를 몰래 훔쳐 먹기도 해. 쥐도 아니고 새들이 왜 이러냐. 새들이 도와줘야 성인도 되는 것이지.

성인의 이야기에 밤하늘 별처럼 떨리던 때가 있었다. 이십대에 목사가 되었을 때는 나도 성인처럼 되리라 결심도 한번쯤 먹었지. 나중엔 세인트 성인은 고사하고 나잇값 하는 성인조차 버겁게 되더라. 인생은 어렵고 괴롭고 꼬이고 흐리멍텅해지고 비굴해지고 부끄러움조차 모르게 되어버려. 이런 후회가 들게 되면 새가 아니라 인생이 진짜 문제구나 싶어진다. 새들아, 먹을 것에 집착 말고 저 푸르고 맑은 하늘로 날아오르렴. 사람아, 우리들 자잘한 욕심부터 거대한 야욕까지 순순히 버릴 줄 알아야 자기도 살고 모두가 살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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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나 남미를 찾을 때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샌들을 챙기는데 추운 지방 러시아나 북유럽을 갈 때는 두꺼운 양말 뭉치와 야물게 기워진 등산화를 꼭 신어야 한다. 차가운 대지를 걷다온 기념으로 선곡음반 <러시아여행>을 펴내기도.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던 라라의 테마곡을 가운데 살짝 집어넣었지. 작년엔 지바고 역의 배우 오마 샤리프가 세상을 떠났는데, 여름에도 눈이 내릴 거 같은 그 곡을 들으면서 추모하였지. 한번은 모스크바 근교 톨스토이 무덤 동네에 기차를 타고 갔다. 문득 화가 일리야 레핀 그림 속 맨발의 톨스토이처럼 맨발이 되고 싶었어.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자작나무숲을 조금 걸었다. 신발 뒤축에 끌려 다니던 문명을 떨쳐버리니 후련하기조차 하더라. 파란 지붕의 생가를 지나 마부의 집엔 밀짚이 얹혀 있고 야트막한 꽃길 끝 소박한 무덤을 보았다. 묘비도 없고 어떤 기념상도 없이 초라하기까지 한 소설가의 무덤.

떤 사람이 구구절절 고달픈 생의 해답을 구하자 수도승은 이렇게 답했단다. “결국 사람은 다 죽어요. 우리는 죽습니다. 그때까지 견뎌야죠.”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원수를 어떻게 처단해야 할지 묻자, “결국 그 원수도 죽어요. 그리고 당신도 죽습니다. 그때까지 참아야죠.”

맨발로 자연 앞에 서서 구더기같이 바글바글한 물욕과 교만을 떨쳐버리라. 밖엔 흰 눈이 발목까지 쌓이고 장작불이 타는 방에 앉아 지난겨울을 났다. 이젠 들에 농부들 보이는 춘삼월 꽃세상이어라.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녀도 하나 시리지 않은 훈훈한 공기야 너 반갑구나. 사람도 철따라 이리 탈바꿈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춘도 순식간, 가파른 산길 만나면 목젖까지 숨이 차올라. 팔구십 산다 한들 톨스토이처럼 깊고 숭고한 영혼이 아니라면 부끄러운 인생일 뿐. 남은 생을 우리 어떻게 살까. 어떤 내일을 꿈꾸며 무엇을 배워 익히고 누구랑 교우하면서 행복해질까. 맨발의 톨스토이에게서 실마리를 찾아보는 날이다.


임의진 |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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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귀를 스스로 닫아걸고 멀쩡한 눈을 감고 살아도 살긴 살아지는가보다. 섬세한 듯싶으나 어찌 보면 인간이 참 단순하고 뭉툭하며 모질기도 해. 이해관계가 엇나가고 감정이 싸늘해질 때는 동장군은 저리가라 할 만큼 차가운 게 또 인간지화. 물이 변하듯 사람도 수시로 변하고, 어떤 경우 조변석개라 할 만큼 일관성이 결여된 자들도 있다. 변심으로 가득한 세상이라 믿는 구석은 가족뿐인가.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에 과도하게 기대는 것도 그 때문. 학벌을 내세우며 가진 자의 편에 서면서도 말랑말랑한 글과 말로써 서민들의 지갑을 챙기는 종교인들도 더러 있는가 보다. 재주가 좋은 것이라 해야 할까. 사람이 성품 자체가 차갑고 과묵한 이도 있다. 매사가 분명하고 칼끝처럼 냉랭하며 매몰찬 사람. 그런데도 돈과 권력을 쥐고 있을 땐 거기 사람들이 달라붙고 아첨들을 해대는 걸 보면 세상은 요지경 속이 분명하구나 싶어진다. 처녀 총각이 돈가스 집에서 데이트. 평소 알던 클래식 곡이 울리자 총각이 아는 체를 좀 해보려고 “이 곡이 무슨 곡인지 아세요?” 아가씨 대답, “돼지고기죠. 사람 무시하지 마세요.” 에어컨도 켜지 않았는데 돈가스 집은 찬바람이 씽씽.

“분명히 산으로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당신은 강으로 걸어가시더군요. 그래서 나는 다시 시냇물 따라 강으로 달려갔었죠. 당신은 빗물이 되어 산으로 오르시대요. 우리는 자꾸 엇갈리고 빗나가기만 해요. 은청색 물고기들은 산란을 하러 오르고, 저기 흑곰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세요. 곰들도 배 속에 아기를 키우고 있죠. 나뭇가지가 뚝하니 부러지는 소리, 찬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만으로 미련 곰탱이도 겨울잠을 채비하지요. 말귀를 알아먹고 살아가는 거 보세요.” 아랫골 아주매들은 팔자 좋게시리 꽃순 돋은 산고라당을 싸목싸목 산보하시고, 나는 마당 구석 샘터를 옮겨보려고 땅을 파대끼며 진종일 흙투성이. 주어진 하루를 이리 다르게 사는구나. 말귀가 통하는 사람, 드센 강성들 비뚤이들 속에서 순하고 성결한 당신이랑 나도 봄나들이 걷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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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드는가 싶더니 작두샘이 얼고 뾰족한 고드름은 순한 땅에 곤두박질 박혔다. 저것도 그러니까 미사일인가 봐. 눈구름 뒤편에서 발사한 물봉 미사일. 이 고드름 미사일만은 햇볕이면 싹 녹아버린다. 핵구름 아니라 대지에 꽃망울 터지게 만들지. 북녘 사람들, 핵무기를 오래전 가진 듯싶은데 이쯤 되면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포기를 하게 할라치면 휴전협정이 아닌 평화협정으로 가야겠지. 우린 돈 많은 형이 아니라 믿고 의지할 만한 형이 되어야겠고. 압도적인 힘이란 첨단무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화운동뿐. 민주주의만이 어떤 독재자도 전쟁도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지.

빗나간 애국심은 본디 광기 어린 파시스트들의 민낯. 고단한 국민 살림은 아랑곳없이 눈앞의 사리사욕에만 눈먼 정치권력. 입춘을 지나고서도 마음마다 살얼음이 낀 한반도는 시방 냉골이구나. 사랑을 속삭이며 아리땁던 푸른 눈망울들 어쩌다가 적개심에 불타는 혈안으로 바뀌었을까. 젊은이들 철책선에서 돌아오면 다시 평화롭게 어울려 살 수 있을까.

스무 살까지 쓸 글을 다 쓴 뒤 절필하여 방탕과 유랑으로 인생을 몰다간 시인 랭보. 차라리 행복하게 잘 살다 죽은 건지도 모르겠어. 국자가 국물 맛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시인의 속을 어찌 다 알겠어.

엿볼 수 있는 짧은 생의 달콤함이라곤 몇 번의 사랑. 시인 폴 베를렌과 세기의 염문, 커피 맛을 아는 혀가 되어 무역까지 손대고. 한때는 곡마단에 들어가 서커스를 돕기도 했다가 느닷없이 무기 상인이 되기도 했대. 누구들처럼 미인계 로비스트를 만나지 못해 쪽박을 차고 말았지만.

랭보는 노래했네. “굶주림아. 가난한 자가 내던진 조약돌, 교회의 오래된 반석돌, 홍수의 아들인 자갈들을, 잿빛 골짜기 누워있는 빵을 뜯어먹어라.” 지금 무기 상인들은 서울 어디 호텔에서 묵으며 생큐를 연발하고 있을까. 그들은 서민대중과 가난한 집안 아이들, 변두리 시골 촌로들, 취업에 애끓는 청년들에게 가야 할 국민 세금을 통째로 뜯어먹을 태세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끝도 없는 물욕.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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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라고 마당에서 찰칵찰칵 가족사진들 찍는 소리. “가까이 붙어가꼬 우리도 잔 웃고 찍은 사진 한 장 냉깁시다야. 다 찡그래가꼬 뭔노므 조폭마누라 집구석 가턴 사진들 뿐이당게라.” 할멈 영감 자식들 간만에 껌딱지로 달라붙어 김~치. “으짤라고 이라고 가차이(가깝게) 앙그시오. 저짝으로 잔 가시란 말이오” 했던, 두려웠던 신혼 초야가 있었을 것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 장남이랑 술을 자신 영감탱이는 말이 없이 퍼허 미소 대응. “느그들 봉게로 어쯔나 으지렁스럽고 옹굴진지(믿음직스럽고 든든한지) 읍던 심(힘)도 쑥하니 생긴다야.” 늙으신 엄니는 장성한 손주들 손을 놓을 줄 모르신다.

고향에 부모님, 일가친척, 조상님 산소를 두고 작별하는 시간. 발길이 떨어지질 않겠다. 마을 주차장 말고 도로까지 빼곡하던 차들이 어제오늘 모두 빠져나갔다. 휑한 이 산골에는 산새들과 별들과 구름, 머잖아 봄꽃들이 빈자리를 메우게 될 것이다.



1910년 프랑스는 기차역에서의 키스를 금지했다. 연인들의 진한 키스로 기차는 늦게 출발하거나 연착하기 일쑤였단다. 영국에서도 최근 그런 뉴스가 있었다. 워링톤역은 차량 안에서 키스를 금하는 표지판을 세워 화제가 되었다. 환송하는 차 안에서 너무 오랜 작별 키스를 나누는 바람에 도로가 혼잡해져 도리가 없었단다. 기사에 따르면 “주차장에 주차비를 내고 들어가 맘껏 키스를 해라.” 아무튼 얼마나 키스를 오래들 했으면 그랬을까.

“만나는 일도 헤어지는 일만큼이나 아프고 가슴 졸였으면 좋겠다. 너무 쉽게 우리들은 만나고 냄비라던가 금세 식어버리는 인연들. 당신은 진한 키스의 기억을 가졌는가. 입술을 떨며 나눈 약속을 믿고, 그 약속 말고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를 마시라 입맞춤을 건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하나쯤 오래도록 가슴에 품어보고만 싶다”(오랜 입맞춤)

쉽지 않은 이별. 건강하시라 평안하시라 약속을 하나씩 부여안고 어렵사리 헤어진 우리들. 명절은 짧고 작별은 길다. 인생은 짧고 사랑은 길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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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들이랑 같이 최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뽀짝 옆에 대안적인 도서관, ‘이매진 도서관’을 열었다. 오월 광주정신을 받든 시민중심의 자생 자립 도서관. 대부분 신간도서로 3000권을 구비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내셨던 평전 작가 김삼웅 선생을 모시고 도서관에서 이야기 마당. <김남주 평전>이 출간되어 겸사겸사 모신 자리. 형무소에서 우윳곽에 못으로 시를 썼던 김남주 시인. 어머니는 한쪽 눈이 먼 장애인. 아버지는 손이 부르튼 소작농. 브레히트와 하이네를 사랑했던 시인. 노동 해방을 위해 금토일 3일은 쉬자면서 외아들 이름을 김토일로 지었던 시인. 우리는 밤새껏 시인이 남긴 까치밥을 나눠 먹었다.

살아생전 시인의 형형한 눈을 잊을 수 없어라. “금메. 그라고 생각하믄 그라고 분명허게 살아야 씁니다. 행동으로 전진하는 거시 중요한 거십니다.” 말이 없던 시인이 꺼내든 외마디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


토요일 회사 쉬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우린 쉼 없이 노동을 했지. 그런데 암만 일해도 부자는 되지 못했다.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증권시장에 미쳐야 부자가 되었다. 돈이 또 돈을 벌고 그랬던 것이지 직장으로는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 정규직을 귀족노동자로 매도하고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려는 자본가들과 현 정부의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 노동자 모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원 없이 부려먹고 내치고, 금토일에도 알바로 써먹으려는 속셈을 누가 모를까. 부자들이 사회책임을 가지고 더 나누면서 정규직을 늘리고 일자리를 만들어야지,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슨 노동개혁인가.

힐링은 부자들이나 하시고 지금은 김남주 시인의 분노를 기억해야 할 때. 경제민주화는 분노가 첫 단추다. “갑오 농민에게 소중했던 것 그것은 한술의 밥이었던가, 아니다. 구차한 목숨이었던가, 아니다. 우리 농민에게 소중했던 것 그것은 돌이었다 낫이었다 창이었다.” 쌀값 21만원 대선공약 지키라고 외친 우리 농민, 누가 물대포를 쏘았는가. 백남기 선생의 쾌차를 빈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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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책방을 찾아가고 <독신자 아파트>로 유명한 만화가 후쿠타니 다카시의 미망인 마리짱이 운영하는 아사가야의 작은 카페 ‘잼브잼브’에서 신년잔치. 날이 차가워 밥 딜런의 노래 ‘커피 한잔 더’를 다같이 불렀다. 마리짱 오래오래 건강하길, 거기 늘 있어주길. 일본인 내 친구들은 영혼 없는 댓글놀이보다 대안 공간, 대안 문화를 일구는 일에 더 바쁘시다. 동지들과 함께 ‘거점’을 만들어내는 일은 귀한 ‘승전보’. 자기 잇속,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속물들은 죽었다 깨도 거점의 중차대한 의미를 모를 것이다. 짧은 도쿄 순례에서 돌아와 보니 폭격 맞은 눈 세상. 다박솔 가지가 찢길 정도의 대설. 보일러는 다행히 터지지 않았고 씻을 물도 졸졸 나온다. 샘물 모터가 얼지 않게 열선을 친친 감고 옷가지들 덮어놓은 덕분.

눈이 다 녹으려면 며칠은 걸리겠다. 아랫동네 애들이 만든 눈사람은 한낮 녹기 시작해 대머리가 삐죽 보였다. 쥐똥나무 가지를 뜯어다가 머리에 씌워주었더니 고맙다며 윙크를 한다.


밤이 되니 산도 하얗고 마당도 하얗고 하늘도 맑아 은하수 흰 띠가 어떤 날보다 선명해라. 은하세계에 빠져든 느낌이랄까. 대문 닫으려고 마당에 나갔다가 집을 바라보니 노란 불빛이 마치 은하철도 실내등 같았다. “저 하늘의 하얀 띠는 모두가 별이래 별”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 주인공 조반니처럼 별자리 여행 노래를 부르며 탄성을 내지른다. 인생은 구간구간 짧은 철도여행. 다음 정차역은 어디일까. 헤어지지 말고 우리 같은 역에서 내립시다 꼭!

양력 해오름달이 저물고 곧 음력설. 인생은 이처럼 짧은데 우정은 어찌 될까. 무뢰배들은 변덕스러움으로 등만 돌렸다하면 다른 마음 딴 궁리. 야권의 그간 연전연패도 올인이 아니라 비협조와 꿍꿍이 잇속차림 때문이었지. 구시대 낡고 식상한 철새 무리들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흉흉한 구경거리다. 침도 안 마른 사랑과 언약은 빈말에 휴지조각. 그래서 인생은 외로운 여행인가. 수십억광년의 고독 속을 달리는 은하철도.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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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교회 살 때 현판 글씨가 필요해서 우이(쇠귀) 선생님께 부탁드렸는데 며칠 만에 써주셨다. 간판집에 부탁해 예배당 입구에 걸었는데 할매 교인들이 글씨가 왜 삐툴빼툴 하냐고 배래부렀소 그 양반헌티 다시 써달라 그라시쑈 막걸리 자시고 쓰셨는갑소, 땡깡을 놓는 것이었다. 주동자 할매한테 염빙하시네 해부렀지. 예배가 끝나면 조용히 살다가 죽어 천국에나 가자는 찬송가 말고 김민기와 한대수 금지곡들을 주로 틀었는데 그 노래들이 찰지게 귀청을 울리고는 하였다. 옥이라는 끝자를 가진 그 할매 뒤통수에 대고 한대수는 ‘옥의 슬픔’을 불러줬는데 귀엽고 쓸쓸했던 그 할매, 궁둥이를 삐짝빼짝하면서 늙은 바둑이랑 동무하며 소리길 따라 멀리 사라지고는 하였다.

“바람찬 바닷가로 옥이는 나서서 밀려오는 파도에 넋을 잃은 채 인생의 실망 속에 자신 찾을 수 없이 꽃잎도 파도 위로 수평선을 따라서 저 초원도 가고요 저 눈물도 썰물로 아아 슬픈 옥이여”. 해창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자전거 타고 심방을 가면은 파도가 무너지고 없는 갯벌의 시간, 거기 옥이 할매가 바지락을 파고 주저앉아 계셨다. 남녘사람들은 그렇게 갯일도 하고 논밭일도 하면서 대처 나간 자식들을 고생스레 갈쳤다. 찬바람에 시린 눈물이 썰물과 함께 사라졌기를. 남녘 현판의 주인공 쇠귀 선생님도 감옥 없고 국가보안법 없는 좋은 세상 가셨기를.

나는 옥자가 붙은 이름을 들으면 엄마 같단 생각에 살가워진다. 내게도 옥이라는 끝자를 지닌 이름의 큰누님이 있는데, 누나는 지금도 돌아가신 엄마 자리를 꿰차고 계신다. 고등학생 시절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갈 곳 없어진 내게 방 한 칸 내어주셨지. 슬펐던 가난은 그러나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심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요 며칠 눈이 어마무시하게 내렸다. 나는 여행보따리를 싸고 그 눈길을 뚫고서 기어 마을을 빠져나왔다. “권태에 못 이겨서 집을 떠났다.” 옥의 슬픔 노랫말처럼 그리되는 중이렷다. 우쿨렐레와 하모니카도 둘러멨으니 당분간은 유랑악사다. 옥의 슬픔을 불러보리라. 슬픔이 우리 곁에서 멀리 사라지는 그날까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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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로는 네돈으로도 빚갚으리오, 자기나라에서는 네오나르도 디카프리오(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빚쟁이처럼 생겨먹었으나 소름이 돋을 만큼 연기파 배우. 갈색 수염에 긴 머리칼, 목성만큼 큼지막한 별의 눈. 휘파람을 불며 나타나곤 하는 야생의 사나이. 인디언과 불곰과 은빛나무숲을 배경으로 찍은, 그가 주인공인 신작 영화 한 편 구경했다. 야생 속에서 거니는 거친 삶의 장면들이 아름다웠다.

어제부터 바람이 차더니 밤사이 결국 흰눈이 쌓였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장작불을 모아야 해. 작년에 참나무 장작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더니 마음조차 넉넉해라. 아침나절 눈뜨자부터 불을 때기 시작하여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난로에 신경을 쓴다. 고구마도 두어 개 구워 먹고 은행알도 스무개쯤 먹었을 것이다. 장날에 은행을 턴 강도 할망구에게 산 은행알 두어 되. 먹을 때마다 할리우드 갱이 된 기분이 든다.


엊그제는 내 흙집을 경유하여 우리 동네 놀러 오신 화가 박불똥 샘이랑 벗님들이랑 모여서들 모닥불 아래 박수치며 놀았다. 모닥불 안에 불똥들이 보여 같이들 웃고. 동네 형님이 공사장 폐목을 뜯어 장만한 조그만 나무광을 우리 도적떼가 그 밤 다 털어버렸을 것이다. 즐거웠으나 죄송한 일. 시골 사람들은 방에 모였다하면 천천히 밖으로 하나둘 새어나간다. 시골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건조하고 답답한 방구석을 힘들어한다. 밖에 맹물이라도 끓일 가마솥 하나 올리고 모닥불을 지피면 두런두런 모여서들 방 안에서 못다한 얘기를 나누게 된다. 불 앞에 서면 대개들 진실해지고 진솔해지는 법.

게리 스나이더의 <야생의 실천>을 읽고 있다. 끄트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라는 멸망해도 산과 강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지금은 산과 강은 없어져도 나라는 살아남는다.” 서글픈 현실이다. 자연을 파괴해가면서 야생의 삶을 벗어던진 현대인들의 최후는 회색 빌딩숲과 거짓된 녹지공원, 궁색한 놀이동산뿐이다. 마음의 히말라야를 버리고 마천루나 짓다보면 인간은 연민이나 예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야생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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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박싸박은 눈길을 걷는 소리. 그런데 눈이 드문 이런 겨울도 처음이구나. 어서 싸박싸박 걷고 싶은데 낮에는 봄만 같다. 볕이 따스워 동백이 서둘러 피었다. 동백의 전설을 그대 아시는가. 옛날 중국에 욕심 많은 왕이 살고 있었대. 시골 작은 성주인 동생이 평판이 좋자 혹시 역모하지 않을까 의심이 깊었지. 동생은 얼른 눈치를 채고 어린 아들을 피신시킨 뒤 양자를 들였어. 왕은 양자를 모함하여 죽이고 시골에 숨어살던 아이까지 잡아들였어. 동생은 친자식을 살려보려고 그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라고 우겼지. 왕은 칼을 동생에게 쥐여주면서 말했다. 친자식이 아니라면 네가 죽여라. 왕의 동생은 피눈물을 흘리며 친아들의 목을 벴어. 그러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왕의 동생은 동백나무가 되어 붉은 피 같은 꽃을 피웠고 아버지 손에 죽은 아들은 포르릉 날아올라 새가 되었는데 그게 동박새란다. 동백나무숲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또 우는 새.

동백이 가장 눈부신 곳 땅끝 동네에서 오래 살았다. 백련사 동백을 보면서 자처한 유배의 비감을 달래고는 하였지. 산골로 이사를 오며 동백 두 그루 가져와 옮겨 심었는데 잘 자라주었다. 덕분에 해마다 반가운 꽃숭어리 가깝게 만진다. 공중에 별이 높고 정원에 동백꽃 핀 밤이면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스며드는 빛줄기에 희망을 얻게 된다.

겨울밤은 차가워서 별빛이 배나 형형해라. 창문을 열고 오래도록 별구경을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으니 화목보일러로 지내는데 넓은 거실은 포기하고 방에만 불기를 조금 넣어 지낸다. 영화 <그랜토리노>에서 한국전 참전용사 코왈스키 아저씨가 맥주를 얻어 마시려고 베트남 몽족 주민들과 친해지는 것처럼 나도 머잖아 뜨시다는 경로당에 궁둥이를 밀어 넣어볼까. 나랏돈으로 활활 달군 장판에 들러붙어 따스운 겨울밤을 나고 싶기도 해. 아서라 말아라. 위안을 삼는 건 동백뿐. 꽃이나 보며 시리고 추운 마음을 달래보리라. 하얀 배신과 검은 협잡이 판을 치는 세상. 빨간 동백을 보면서 뜨거운 절개와 심판을 다짐해본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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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향내가 진했던 정원. 노란 열매가 아직 그날의 기억처럼 매달려 있다. 먹지도 못할 치자 열매를 산고양이가 핥고 가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보기도 해. 음식물 찌꺼기를 쌓아놓은 대숲 언저리는 고양이의 영토. 선탠을 좀 하다가, 잠도 자다가 먹을 게 없으면 마을을 습격하러 내려가기도. 잔디밭 뿌리다 남은 모래둔덕이 있는데 그곳에서 똥을 누기도 한다. 여기가 사람의 집인지, 고양이 집인지. 춥고 배고픈 겨울, 야생 고양이들에겐 생사 위기. 그렇다고 난로에 장작불 지펴진 거실로 들어오라 할 수도 없지. 나와 산고양이들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가며 이곳에 동거하고 있다. 그러나 귀염둥이 아가들을 낳아서 몰고 나타나면 우유와 비린 생선을 꺼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항상 지고 사누나.



한번은 이스라엘에 가던 길, 레바논을 방문했다. 내 영혼의 멘토 칼릴 지브란의 흔적을 만나러. 국기에 새겨진 삼나무 백향목이 반겨주던 곳. 베이루트는 쿠바의 아바나처럼 높은 파도를 코앞에서 만날 수 있는 방파제로 유명하다. 이름은 코르니시. 집시들이 모여 파도와 지중해 갈매기의 노래를 즐긴다. 마침 길고양이 한 마리 산보를 나왔다가 나와 마주쳤다. 작열하는 햇빛에 목이 말랐다. 고양이를 뒤따라갔는데 물담배도 팔고, 맥주도 파는 집에 당도. 광대뼈가 나오고 눈썹이 짙은 주인장은 사랑하는 이가 죽어 며칠 문을 닫았다가 오늘 다시 여는 거라며 장황한 설명. 사람이 죽으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늑대별이 뜨는 밤하늘을 꼬박 새우는 이들. 길을 안내해준 고양이는 낯선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왔고 라벤더 향기가 곱던 그 골목에서 둘째 날 저녁을 맞았다. 사랑이 떠난 빈자리를 다시 메우는 것도 사랑. 이별했던 만큼 예쁜 새 인연들이 생겨나기를 빌어드렸다.

우리는 이 별의 여행자요, 순례자. 여행지에서 만사 끝장을 볼 기세로 덤벼드는 건 바보나 하는 짓. 허리띠가 남아도는 여유와 관조가 필요하다. 사람은 물론이고 고양이가 이끄는 길도 한번 가보자. 짐을 줄여야 비행기도 뜰 수 있다. 살림을 늘릴 게 아니라 줄여야 할 시점이다. 채웠던 것들을 비우며, 가난해질 때 백배 천배 행복해지는 비밀을 그대 아시는가.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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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동자 스님이 사는 절집에도 산타가 굴뚝을 타고 넘어가 선물을 놓고 간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만 선물을 안 주시는 것이지 종교 집안을 따져 묻지 않아. 예수님도 부처님도 선지자 마호메트님도 옹졸하기 짝이 없는 진실한 사람 타령, 제 식구 감싸기 그런 거 일체 모르신다.



새누리당 당원용 잠바를 얻어 입으셨나? 아니면 적기가 새겨진 조선노동당 당원용 잠바인가. 산타 할아버지는 어떤 소속인지 모르겠지만 빨강색 유니폼을 입으시고 휴전선을 제집 드나들 듯 넘나드셔. 종북인가 종친인가 빠알간 코를 밝힌 루돌프 사슴을 몰고 밤하늘을 이랴자랴. 특별하게 생겨먹어 다른 모든 사슴들 놀려대고 웃었지만 루돌프는 산타의 썰매를 끄는 몸이시다. 천대받고 멸시받는 이들의 머리 위에 하늘의 축복이 임하길.

산타의 원조 동방박사는 세 가지 선물을 아기 예수 머리맡에 놓고 갔다지. 황금은 왕좌를 상징하고 유황은 신성한 생명을, 몰약은 시신의 방부 처리제인데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아기 예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세 가지 선물을 받았다는 얘기다. 당신은 왕만큼 귀한 이 나라의 주인이며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할 신성한 목숨. 또 당신의 죽음을 우리는 헛되이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의 아이들아. 메리 크리스마스 아니 ‘쏘리 크리스마스’.

친구들에게 가끔 선물을 받는다. 포도주스가 아니라 포도주를 좋아하다보니 병나발을 불기도 해.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무자식 상팔자, 치과의사는 이 없으면 잇몸으로, 한의사는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란다. 목사는 그럼 무슨 말이 듣기 싫을까. 나는 ‘목사님은 술 안 드시죠?’ 이 따위 말. 한국의 보수교회는 해괴한 전통이 있어 한 잔의 술조차 끔찍이 싫어하면서 대신 돈을 엄청 탐하고 좋아해. 난 세 가지 선물이 몽땅 와인이면 좋겠어. 잠시 전쟁을 멈추고, 정쟁도 멈추고 휴전! 건배사를 나누며 평화와 공생을 기원하자. 목마른 아이들에게 우물을 파주고, 외식이 일상인 거지들에겐 집밥도 좀 드시게 하자.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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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태어나면 유독 빛나는 별이 있다. 그걸 에스키모 인디언들은 수호자별, 수호천사별이라 불렀어. 새하얀 눈 세상 얼음집 이글루에 알몸으로 태어나 앙앙 울어대는 아기. 썰매 개들도 새로 태어난 아기 주인님을 반기며 밤새껏 하울링을 했다. 하늘에 별들이 저렇게 많은 건 그만큼 수호천사들이 많다는 뜻. 당신의 수호자별은 어디에 떠 있는가. 엄마는 별이 되어 나를 지켜준다. 엄마 없는 별에서 엄마별을 그린다. “울지 마라 아가야! 엄마 없는 별에서. 새하얀 저녁골목에 짤랑대는 눈썰매. 가여운 어린 젖먹이 울지 말고 자거라. 울지 마라 아가야! 엄마 없는 별에서 변두리 외딴 마을에 성탄종이 울린다. 함박눈 쌓인 밤길에 쏟아지는 별빛들. 울지 마라 아가야! 조랑말과 당나귀 흰 토끼 검은 염소와 마구간의 어린 양. 잘 자라 아가 새근새근 잘 자라.”




갤러리 한 층을 늘리며 어린이도서관을 만들고 있다. 한쪽에 그물침대 ‘해먹’을 걸 자리도 마련하고. 브라질 원주민들은 하모카스라 부르던데, 검은 땟국물을 뒤집어쓴 아이들이 거기 누워 슬렁슬렁 책을 보거나 나무늘보를 안고서 놀았다. 그게 참 보기 좋더군.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이 많아지면 좋겠어. 선한 부자가 나타난다면야 좋겠지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끼리 마음을 나누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 십시일반의 힘은 커서 세상을 바꾼다. 해먹에 누워 잠을 청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자장가를 불러주길.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 청년들과 젊은 부부를 위해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면 세상이 이보다 한 뼘은 훈기로 다스워질 것이다. 노동자들의 숨통을 끊는 저임금과 냉혈한 해고. 뒤따라 저출산으로 자장가가 끊긴 세상엔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다.

성모의 집에 자장가 캐럴이 울려 퍼진다. 폭격으로 선잠을 깨고 단전 단수로 추위에 떠는 친구들. 누구 하나 단잠을 잘 수 없는 세상엔 당신도 나도 책임이 무겁다. 캐럴을 부르고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며 행복하자는 건 위선이요, 기만이다. 자장가를 부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성탄절의 참뜻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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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 소리 들리는 대숲도 모자라 대밭까지 있는 고장. 부러진 대나무를 다듬어 산행할 때 들고 다니면 딱 좋아. 죽림칠현 가운데 한분 같아 보이겠다. 키가 큰 녀석은 바지랑대로 빨랫줄에 기대 세워두거나 지붕으로 나 있는 연통을 닦을 때 끝부분에 걸레를 감아 사용하면 좋지. 대나무는 쓸모가 참 많아. 옛날 아이들은 대를 구부려 주몽의 활을 만들어 놀고 계백 장군의 시퍼런 칼을 만들어 놀기도 하고 그랬어. 어떤 애는 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했지. 귀신 나오겠다고 다들 말렸지만 말이야. 왕대를 켜선 썰매를 만들어 언 강에 오줌을 누어보고 얼음 상태를 살핀 뒤 타고 놀았지. 요새 아이들이야 휴대폰 가지고 전자오락이나 하면서 노는 게 전부이지만 예전엔 장난감의 대부분을 대나무가 해결해 주었어.



<스타워즈>가 처음 개봉되자 아이들은 대나무로 제다이 광선검을 만들어 허공에 휘둘렀지. 알투처럼 생긴 하얀 발발이는 눈마당에서 뛰놀다가 발라당 넘어지고. “내가 네 아버지다”의 다스 베이더는 복면마왕. 윗분이 가장 싫어할 것 같은 복면을 하고 다스 베이더는 오늘도 내가 니 아부지당케 독일어, 내가 니 아부지여부러 불어 실력을 뽐낸다. 천하의 악당 캐릭터인데 오히려 최불암 아저씨처럼 친근한 인기를 누리는 다스 베이더. 말끝마다 파하~를 연발하면서….

하얀 겨울나라에 검은 다스 베이더는 눈에 대번 띄지. 겨울에 어디 나갈 때는 검정 트렌치코트를 즐겨 입는데 다스 베이더의 망토 같아. 내가 네 아버지다, 하면서 입고 다니는 망토.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한 피로 연결되어 있지. 아이를 낳지 않았어도 서로에게 혈육이 아닌 사람은 없는 법이지. 새가 알을 품듯 망토 안에 아이들을 품으며 아버지들은 밖으로 험상궂은 얼굴이어야만 했어. 생활 전선, 말 그대로 부모에게 세상은 전쟁터나 마찬가지. 날이 조금만 차가워도 시골사람들은 눈만 빼꼼 보이게 목도리로 친친 감고 외출들을 한다. 검은색 목도리를 감고 안경까지 눌러쓰면 다스 베이더랑 구분하기 힘들어. <스타워즈>의 주인공이 되어 눈길을 사박사박 걷는다. 어느 외계 행성을 처음 걷듯 숫눈길을 걷는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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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댓글부대에 이어 구종 백골단까지 화려한 휴가 작전. 촌동네엔 새마을 바람도 살랑살랑. 새마을 쪽은 기름진 영토겠구나. 이미 새마을인데 더 광을 낼라치면 해지고 닳아져 찢어질지도 모르는데.

“어뜨게 살다 봉게 시상이 돌고 돌아 지자리요. 괴기밥을 잔(좀) 묵어야 쓴디 시말테기(힘)가 한테기 없응게로 동학군 모냥 밀리고 자빠지재. 궁민들 데모도 원천봉쇄 못하게 하믄 그거시 어뜨게 민주주의 나라랍디여. 거시기 거 농사짓는 어르신 아즉 의식도 없다시등마. 우리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에프티에인가 에프킬란가 그거슬 중공이랑 해부리고.”



눈을 게슴츠레 뜬 누구가 추어탕집에서 유사를 치르다가 일장 연설. 바람이 차갑게 불더니 눈발이 제법 날렸다. 이맘때 앞바다에 섰을 장흥과 해남의 동학군들을 생각했다. 앞바다에서 깐죽대던 왜선을 물리치고 돌아오니 이제 관군이랑 맞서 싸워야 하는 형국. 정치인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고갯길에서 추락, 밭을 갈던 농부가 달려들어 사태 수습. 고인들을 땅에 잘 묻어주었단다. “살아있는 분은 안 계시던가요?” 도착한 기자들이 묻자 “몇은 숨이 달려 계시등만유. 어서 구해달라구유. 근데 그 말을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유.” 농부의 복수극인가. 웃자고 하는 소리니 죽자고 달려들진 마시길.

귀뚜라미는 사람이 보이면 울음을 그친다. 귀뚜리는 자기들끼리만 있을 때 서럽게 울지. 가으내 울던 귀뚜리가 보이지 않자 겨울임을 나는 알았네. 귀뚜라미 대신 귀뚜라미 보일러가 한 집 건너 왱하니 울고 있어라. 사람도 사람들끼리 만나 서럽게 울고 싶은 때가 있다. 단체로 울고 싶을 때 사람들은 광장으로 집결하는 것이다. 귀뚜라미를 닮은 사람들, 서러워 울고 외치는 사람들, 어쩌면 귀뚫라미인지도. 막힌 귀를 뚫고 제 사정을 조근조근 들려주고 싶어하는 이들. 이웃의 눈물콧물 사정을 마음 다해 들어주는 것이 인륜이요, 도리일 것이다. 동학의 땅. 깡깡하게 맘을 다진 사람들. 꽃단풍 흘러가고 매서운 비바람과 눈보라 치는 날, 시래기처럼 시달리고 매달리며 고생뿐이었던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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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에 안거 가있는 스님이 아침부터 첫눈 소식을 알려온다. 에구구 춥겠네. 불알이 얼면 목탁 삼아 때려버리셩 하면서 농을 던졌지. 해마다 서울 친구가 예쁜 성탄 트리를 챙겨 보내주는데 올해는 둥그렇고 깜찍한 리스를 여러 개. 나도 솔방울을 주어다가 보태 달았네. 달고 또 달고 그러니까 내 마음이 맛이 들어 달고 달더라.




올해는 무슬림 친구들과 함께 초승달 성탄절을 대망하련다. 내가 가끔 드나드는 복음교회 한 곳에 그런 뜻을 알렸다. 마침 지역 대학에 유학 온 무슬림 아이가 언니들이 좋은지 찾아오곤 한다고. 전쟁의 소문이 그치질 않는 중동 사막나라. 전폭기로 원수를 갚는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빵을 나누고 병을 고쳐주며 관용으로 구제해야 먼저지. 주간경향 하영식 분쟁전문기자의 특집 ‘IS를 말하다’를 찾아 읽었다. 대강 짐작은 하였으나 충격적. 용병이 갑자기 돌변해 주인을 향하여 총칼을 겨눈 형국이랄까. 뉴욕을 파괴한 빈라덴 일당과 똑같은 스토리였다. 제2, 제3 끝도 없는 이 악순환.

종교, 종파, 가문이 다른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를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될 수 없다. 전도, 선교, 포교…전도왕은 어쩌면 폭력왕이 아닐까. 선행을 베풀 때 감동되어 회심도 하는 것이지 교리나 이념을 강제로 들이대는 짓은 폭력이고 범죄렷다. 빨갱이 사냥도 모자라 무슬림 사냥을 하는 개들을 보라. 달밤에 개 짖는 소리로 귀가 다 따가워라. 도종환 시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신’은 네덜란드에서 행한 고르바초프의 육성 인터뷰를 옮긴 시. “내가 자유의 복구를 시작하였지만 이 이데올로기 공백을 자본의 물결로 덮어버리는 걸 찬성하지 않습니다…… 나는 농부였던 우리 부모가 내게 물려준 상식을 잊지 않았습니다. 상식은 균형과 절제에 대한 감각이기도 합니다. 흙에 대한 애정은 내게 굴하지 않는 정신과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박함과 겸손함, 함께 노동하는 마을공동체를 통해 연대하는 마음과 관용을 잊어버린 적 없습니다.”

첫눈 오는 날. 앗살라 알라이쿰(평화를 빕니다) 인사하는 초승달이 낮게 떴다. 자본의 물결이 아닌 관용의 물결을 윙크해본다.



임의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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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이 홰를 치고 꼬꼬댁 울면 누렁이가 못 이겨 흙을 털고 일어나 동네 순찰을 돈다. 새벽별 보고 학교 가야 하는 아이들이 있는 집만 어수선하고 바빠라. 간밤에 바싹 마른 칫솔이 찬물벼락을 맞을 시간. 이부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해 뒹구는 귓속으로다가 레이디스 앤 젠틀맨, 동네 확성기 방송. 시절이 한참 지난 이미자 메들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열아홉 순정 흑산도아가씨 동백아가씨, 아가씨 타령이 지겨우면 기러기 아빠, 김장을 앞둔 배추들도 메들리처럼 일렬종대. 에이오에이 천사 아가씨들은 발붙일 데 없는 구식 동네.



“요로코롬바키 못허겄능가? 조깐 얌전허게 묶어보랑께.” 뽑혀 올라온 무와 무단을 보고 동네 누구씨가 순한 마누라를 족치는 소리. 간밤에 달궈진 불기가 남은 아궁이며 굴뚝, 보일러들이 동시에 쿨럭거리고, 식은 자리에 태양과 숲의 온기가 차츰 쌓이기 시작한다.


김소형 시인의 따끈한 시집 <숲>을 읽었는데 ‘십일월’이란 시가 바로 이때로구나. “나한테 묻지 마. 시간은 결코 좋아지는 법이 없어.” 시간뿐만 아니라 시절도 그러한 모양이 분명해. 누가 물대포에 죽어나가도, 누가 실직하고 서러워도 대답은 일월이나 십일월이나 마찬가지. “묻지 마 바쁘다니깐, 나는 시계처럼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관심으로 가득찬 이 우주에 신은 오늘도 아이를 점지하고 아이를 낳으시고. 저 가련한 집닭의 똥 묻은 달걀까지도 쑹쑹 태어나고 있음이렷다.

남정네 허벅지만 한 무를 뽑아 수확되는 시기. 이 싸늘한 무관심의 세상에 ‘있을 무’가 엄연히 존재하누나. 처녀귀신을 위한 총각김치만이 냉혈한 세상을 구할 유일한 명약인가. 하얀 무들이 뽑혀 누워 있는 밭들. 이처럼 긴 딜레이의 시간. 기다려도 기다려 봐도 오지 않는 첫눈이여. 물 빠진 검은색인 잿빛의 우울에서 구해낼 무와 폭설을 대망한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달아도 될 것처럼 새빨갛고 맛있는 깍두기도 반가워라. 무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다. 봄날의 노란 단무지. 무를 나눠 먹으며 무관심과 싸우다보면 달고 따스운 삼사월이 성큼 오려나.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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