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223건

  1. 2015.01.21 군산 노을
  2. 2015.01.14 강철 새잎
  3. 2015.01.07 꿩이 꿩꿩 우는 날
  4. 2015.01.01 삼시 세끼
  5. 2014.12.24 금은보화의 크리스마스
  6. 2014.12.17 타오르는 불꽃
  7. 2014.12.10 땅콩만 한 별들
  8. 2014.12.03 보리차 끓는 소리
  9. 2014.11.26 튀밥이 내리는 날
  10. 2014.11.19 산타 오빠 산타 언니
  11. 2014.11.12 국화꽃 향기
  12. 2014.11.05 하루만 햇새
  13. 2014.10.29 피카소, 추위와 사랑
  14. 2014.10.22 연탄검댕이
  15. 2014.10.15 풍선과 평화
  16. 2014.10.08 샹송을 듣는 시간
  17. 2014.10.01 이상한 사람
  18. 2014.09.24 석별의 정
  19. 2014.09.17 오브리가도
  20. 2014.09.10 코흘리개

군산과 서울을 오가며 지내기도 했던 때가 엊그제만 같다. 염소가 대갈받이를 하듯 사방사위 치고받고 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학생운동하다 교정에서 쫓겨난 나는 당시 오충일 목사님이 계셨던 군산을 찾아 낡은 건물 한쪽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과 함께 마가복음을 꼼꼼히 독경했다. 이른 저녁엔 서해바다에 걸린 노을을 보러 다녔다.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군산이겠다. 최근엔 의형제 사이인 김두수형이 회현면 산골짜기에 낡은 주택을 고쳐 살고 계신다. 형수는 나를 위해 항상 갓 지은 밥을 차려놓고 기다리신다. 군산은 이래저래 내게 인연이 깊은 곳….

국내 애시드(Acid) 포크의 유일한 생존이랄 수 있는 김두수는 방송엔 거의 나오지 않지만 세계 투어가 잦다. 그런 걸 홍보할 생각도 전혀 없는 분. 지난주 생애 7번째 음반을 펴냈는데 제목은 <곱사무>. 재깍재깍 시계소리처럼 흘러가는 기타 트레몰로와 기이한 노랫소리가 체코의 집시들 반주에 섞여 노을처럼 눈부시다. 마침 노을이라는 노래도 있구나.

“노을빛 붉은, 이 깊은 저녁은 머물고 다시 어디로 가는가. 저 지는 태양이 날 해방하네. 타는 목숨으로 해갈하네. 이제 석양에 헤매이지 않노라. 또다시 깃든, 이 깊은 고요.”


꼽추처럼 등이 굽은 산등성이로 해가 지면 군산상고에서 누가 쳐 넘긴 야구공같이 생긴 태양이 서해안 갯벌로 떨어지누나. 가객의 노래는 <왕오천축국전>의 혜초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처럼 낯설면서 낯익다. 가난한 집들, 궁궁한 마을마다 노을이 지면 여자는 희미하게 코를 골며 자고 세상은 사라지고 없어지겠지. 생애의 마지막 기억도 노을일 뿐이려니.

담양 내 집도 노을이 근사하다. 노을이 병풍산과 삼인산 사이로 걸리면 나는 자동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옹벽에 기대 잠이 든 할매도 서늘한 기운에 놀라 집으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자전거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채 어디로 가고 없다. 모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기를. 가더라도 노을을 한번 치어다보고, 군산 노을처럼 예쁘지는 않아도….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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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캐스터만 짧은 미니 차림일 뿐 아직 세한도 그림 속 까마득한 절벽인데, 연초 날씨가 풀려 양지 쪽 나무들은 새순이 날름 보인다. 이런 풀린 날이 며칠 더 가면 철 잊고 핀 꽃대궁도 더러 보게 되리라. 기미라고 해야 하나? 봄이 올 것 같은 기미. 정치권에선 도무지 찾아보기 힘든 기미….

박노해 시인을 가끔 길에서 뵙고 반갑게 약주 한 잔 나눈 지도 꽤 되었다. 옛날 목사관에 하룻밤 주무시고 가신 일이 있었는데 그날 청했던 시가 바로 강철 새잎이었다.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손 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대충 첫술이라도 외우는 몇 안되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뭔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 손끝에서 귓불에서 발가락에서 팔꿈치에서도 새순이 돋아날 거 같아. 온갖 패배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한 사람’, 그런 새순 같은 친구를 만나고 싶다.


시란 사람을 힘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언젠가 손택수 시인의 글을 읽었는데, 아버지가 시란 쓸모없는 짓이니 그만두라셨단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가 기왕 시작한 일이니 최선을 다해보라셨단다. 시인의 슬픔이고 시인을 버티게 하는 힘은 바로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라는 아버지 말씀이라니 코끝이 찡해질밖에. 시란 아주 작은 목소리이지만 강철 새잎이나 진배없다. 작년이나 올해나 똑같은 누구의 기자회견보다 시인들의 시낭송은 그래서 무시무시한 일갈이요, 일성인 게다.

나는 강철 새잎을 수없이 만나고 산다. 말뿐인 어설픈 친척들보다 피붙이 같은 분들. 겨울에 구워먹는 은행 알처럼 구수한 지혜를 가득가득 알고 계시는…. 재산이 29만1000원인 전직 대통령보다는 더 부자여서 행복했는데, 그 군인 출신 대통령은 생때같은 가족들을 죽였지. 남녘에는 새순이 더러 보인다. 죽은 청춘들의 부활이겠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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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앞면은 솔숲으로 짙푸른데 뒷면은 차갑고 새하얀 눈이 층층이 쌓여 있다. 보일러가 얼어 터질까봐 열선을 사와 친친 감고 헌 이불로 덮고 나서야 맘이 놓인다. 시골에 살면 철물점을 화장실 다음으로 자주 가게 되어 있다. 내가 철물점에 퍼다 나른 돈을 모두 모았더라면 서울에다 빌딩 한 채 샀을 거야, 투덜거려보기도 한다. 며칠 전부터 지붕 물받이 홈통에 구멍이 생겨 눈 녹은 물이 뚝뚝. 신발이 젖고 그래서 방금 전에도 철물점에 다녀왔다. 철물점 아줌마는 나를 아마 공사장 인부쯤으로 아실 거야. 거의 혼자 집을 십년도 넘게 또닥거리며 짓고 또 손보면서 사니깐. 철물점이나 어디 면소재지 일 보러 갈 때와 산길로 산보 나갈 때가 다른가? 본척만척하다가 산에 갈 것을 어찌 알고 개가 꼬리를 치며 반긴다.


이깟 추위쯤이야 좋아하는 시커먼 차우차우 마오쩌순은 집에서 나와 풍욕을 즐기며 활보 중이다. 북방이 고향인 개라서 제 세상 만난 것이다. 멧돼지 무서워 개를 끌고, 아니 개님을 모시고 산길을 걷곤 하는데, 나만 드나드는 비밀스러운 숲길엔 꿩들이 보인다. 꾸엉꾸엉 울기도 하다가 두두두두 활강하기도. 개인지 곰인지 뚱뚱보 우리 쩌순이는 못 잡을 줄 알고 아예 데면데면. 코를 바닥에 붙이고 다니면서 두더지 굴이나 뒤진다. 나는 꿩의 깃털이 하나라도 떨어진 걸 발견하면 볼펜에 묶어설랑 깃털 펜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삐뚤빼뚤하던 글씨가 꿩처럼 한 방향으로 정렬, 글맛은 꿩이 꿩꿩 우는 듯 구성지고. 꿩요리, 꿩고기로 쑨 떡국이나 생각하며 사는 놈 아니야, 나. 흐~.

누가 알려줬다. 민물 쏘가리를 옛사람들은 ‘늘물처럼’이라 불렀대. 늘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민물고기. 황홀할 지경 아닌가? 꿩도 그래. 꿩도 참 예쁜 이름을 가졌어. 수컷은 장끼, 암컷은 까투리. 산중에서 개는 멍멍, 꿩은 꿩꿩, 얼음은 쩡쩡…. 울림마다 황홀하여라. 사람도 하고 싶은 소리를 자유롭게 뱉으며 살 수 있어야 하는 건데…. 꿩은 늘숲처럼, 당신은 처음처럼 소주 병나발, 나는 늘 그날처럼 새해 첫 주, 어젠 미역국 없이 또 생일.


임의진 |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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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렸다. 잠깐이었는데 후다닥 후다닥 누군가가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늦게 잤으니 늦게 일어나야 옳았는데 그 소리에 놀라 일찍 깨나고 말았다. 배 속이 꼬르륵. 간밤 친구들을 만나 포도주로 대취하는 날이 아니면 아침밥 차리기 귀찮아서 가볍게 식빵과 커피로 대신하고는 한다. 오늘은 난데없이 밥을 지어 먹고 싶어졌다. 밥상을 코앞에 차려놓고 이발소에 붙어있던 ‘기도하는 소녀’ 그림처럼, 그렇게 기도한 뒤 밥을 먹고 싶었다. 쌀을 씻어 밥솥에 얹는 일은 지겨운 반복이라 투덜대곤 하는데 배고파서 밥을 지을 때는 그렇지가 않다. 밥솥 전원을 누를 때 여자 목소리로 무어라 종알거리는 기계음조차 반갑다.

한 해가 이렇게 지나고 새해가 밝아온다. 죄를 지어 감옥소에서 콩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자유의 몸으로 흰밥을 지어 먹는 삶의 연장. 천지신명께 감사할 일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어떨 때 행복하냐고. 갑자기 물어서 그런지 대답들이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 꼴깍꼴깍 숨넘어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한 줄로 이하동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게 밥 한 끼 먹고 싶다고.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집의 밥상은 얼마나 슬플까. 슬픈 새해일까. 세월호 이후 밥 먹을 때마다 목에 밥알이 한 번씩 걸린다. 내가 무슨 노란 리본을 옷깃에 차고 다니는 유별난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다. 부디 우리 모두 마음에 난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먹고사는 수준이 제법 높은 한국에선 재물이 있으나 없으나 밥상은 대개 비슷하다. 목사 노릇하면서 나름 있는 집 없는 집 밥을 얻어먹어 보아서 안다. 캐비어인가 캐비넷인가 상어 머시기를 먹어도 그저 한 끼 특별할 뿐 금방 질리는 것이다. 손으로 김치를 찢어 밥을 먹는 즐거움을 아는 농부들은 저 들녘을 떠나지 못한다. 올해도 농부들은 못밥을 나눠먹고 탁주를 즐길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보다 백배나 많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는 멍청이만 있을 뿐.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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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름이 송정 마을인데, 청솔과 명자나무가 바람에 우는 거 말고는 대체로 조용해. 가끔 아랫집들에서 밖으로 뽕짝 테이프나 색소폰을 불지만 않으면, 날벼락 같은 기도원이나 꿀꿀이 축사가 들어오지만 않으면 앞으로도 조용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마구간을 지닌 집이 몇 되었는데, 최근에 들어보니 더 이상 소를 키우는 집도 없게 되었단다. 반대로 소가 주인할망구 밥그릇을 뽀드득 뽀드득 씻어주어야 할 형편들일 테니까.

이스라엘과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까지 성지순례를 다닌 일이 있었는데 유독 기억이 남는 동네가 베들레헴이다. 아기 예수 탄생지. 현지인 뱃살을 보면 베들레헴이 아니라 배 둘레 햄. 햄이 가득 찬 뱃살. 중동의 빈부 차이는 너무나 커서 이라크 같은 북쪽 동네 친구들은 매우 마르고 주린 얼굴들을 하고 있다. 베들레헴은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부자동네다. 서방과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한 뒤부터 베들레헴의 평화는 화해와 용서의 평화가 아닌 공포의 침묵일 뿐.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는 화약 창고다.


지금은 교회가 서 있는 마구간 자리에는 말밥통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상이 놓여 있었다. 여행자나 농부들, 양치기 말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아이. 알았다 한들 엄마부터 저항시 ‘마리아의 찬가’를 읊은 죄목으로 빨갱이 자식 소리밖에 더 들었겠어. 일찍이 마이클 잭슨이 히트시킨 노래 ‘유아 낫 언론’. 당신은 언론이 아닙니다! 외눈박이 언론의 시끄러운 비방과 모략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한국에 안 오시길 참 잘하신 거다. 다음 지구별 방문하실 때까지 ‘not 언론’은 어떻게 해결이 나려는지…. 조용한 크리스마스는 좋은데 공안정국, 유신의 잔영이 깔린 고요한 크리스마스는 허망하고 침울한 현주소다.

“임씨! 구원은 나중에 받고, 일단 성탄절에 떡국이나 자시게라.” 목사인 줄 모르고 나를 어떻게든 해보려는 전도왕 할매가 슬쩍 미끼를 던지시네. 아! 떡국은 정말 먹고 싶은데, 아기 예수가 아닌 금은보화로 단장한 교회와 목사는 너무 괴롭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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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악양에 사는 시인 형이 택배로 부쳐주시는 대봉감 한 박스. 뒷방 광에 앉혀놓고 꺼내 먹는 재미가 쏠쏠해. 연일 내리는 폭설에 갇혀 홍시를 먹는데 내가 까치인지 까치가 나인지 헷갈려라. 매일 아침 눈뜨면 식어버린 난로에 장작불을 지핀다. 전에 강진 살 때는 아궁이가 밖에 있어 춥고 눈 내리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가 군불을 지피곤 했었지. 게으른 잠이 밀려오는 날, 차라리 냉방에서 웅크리고 견디곤 했는데 그때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아. 담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는 태양열을 쓸까, 심야전기를 연결할까 고심하다가 그래도 장작개비 타는 냄새를 버릴 수 없어 실내에 벽난로 아궁이를 설치했다. 순환모터가 돌아가는 순간부터 기름값 절약. 집 안에 꽉 찬 훈기는 물론이거니와 불꽃을 바라보며 지내노라니 신비롭고 감사해. 홍시 한 알 먹은 힘으로 팬 장작개비를 무쇠로 된 아궁이에 집어던진다. 홍시처럼 붉고 노란 불꽃이 활활 일어난다. 덤으로 흰 가래떡이나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고, 팔팔 끓인 물로는 유자차를 타먹을 수 있어서 좋아.


백무산의 대표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에 실린 ‘장작불’이라는 시를 잊지 못한다.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는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몸을 맞대고, 엉겨 붙어 짱짱하게 단합하면 장작불은 활기를 되찾아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무리 갑이 설쳐대는 세상이라도 을이 작심하고 의기투합하면 모래시계를 뒤엎듯 크게 한번 판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서로들 불꽃이 되어….

한 수도원에 찾아온 나그네가 원장 수도승에게 물었단다. “세상이 왜 이다지도 춥고 어둡답니까?” “아집과 교만을 불태우고 버려야만 세상이 밝아지고 따뜻해지겠지요.” 나그네는 더 궁금해졌다. “나를 불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혼자서는 결코 불탈 수 없지요. 여럿이 함께여야죠. 짐을 풀고 우리랑 같이 지냅시다.” 나그네는 그날로 한식구가 되었단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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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땜에 땅콩이 급 땡겨서리 마트에서 찾아봤는데 죄다 중국산. 건너편 호두는 미국산. 그냥 땅콩이 든 과자 한 봉지 골라 운전하면서 먹었지. 아버지는 목사관 딸린 텃밭에다 땅콩 농사도 지으셨다. 배고픈 들쥐는 목사님에게 감사인사를 넙죽. 우리는 쥐가 큰 맘 쓰고 남겨준 땅콩을 몇 알 주워 먹은 게 고작이었어. 그때가 문득 아슴해졌다.

어디 식당들에선 땅콩을 간장에 졸여 주전부리로 내놓기도 하더라. 또는 번데기를 주기도 하는데 난 번데기 알레르기가 있어. 번데기를 먹으면 목이 퉁퉁 붓고 응급실로 직행. 나로선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게 번데기다. 날 미워하는 여자가 번데기를 갈아서 몰래 줄까봐 여자랑은 같이 못살지. 내 친구 녀석 한 놈은 땅콩을 먹으면 온몸이 근질간질. 겨드랑이에 오톨도톨 뭐가 나기도 한대. 세탁소 주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구기자차’를 먹어도 두드러기가 난다던가. 저마다 그런 게 하나씩 있나보더라. 다행히 나는 땅콩은 괜찮다. 땅콩 껍질을 부술 때 묘한 쾌감을 느낀다. 내 힘으로 부술 수 있는 게 단지 이것뿐이라는 생각에 잠시 슬퍼지기도 해.


순록의 뿔을 나뭇가지인 줄 알고 새들이 잘못 앉고, 아가가 자는 토끼굴인 줄 모르고 불콰한 사냥꾼은 구덩이에 오줌을 누고 간다. 변변한 사람대접 한번 못 받고 혀짜래기 말이나 하다가 진탕 술로 쓰러져가는 이웃들. 사지가 잘려나가 바닥을 기는 뱀처럼 서글픈 서민들. 경기는 바닥을 헤매고 민주주의는 곤두박질. 여행자의 비행기도 어이없는 후진. 먼지 맞으며 갓길에 피었던 사루비아를 본 게 꿈만 같은 시절이어라.

신학교 다닐 때 땅콩만큼 작지만 야무진 여자 전도사를 알았다. 달동네 공부방 책임자였던 그 여자의 처소에서 몇이 맥주를 마셨는데, 맥주병이 찰 만큼 하도 눈물을 쏟는 통에 안주로 내온 땅콩을 씹어 먹기도 뭐하여 혼자 밖으로 나왔지. 마침 하늘에 땅콩만 한 별들이 가득 보였어. 서울에도 별은 뜨는가? 달동네엔 그래도 성탄을 대망하는 별들이 수수수 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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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어투로 노래하던 마왕은 떠나고 없네. 빗자루 탄 마녀들은 밤새 펑퍼짐한 엉덩이를 붙이며 지상의 권력을 탐하고들 있겠지. 비행기 빗자루가 그어놓은 구름은 수천 갈래길. 마음같이 어지러웠는데 엊그제 고대하던 폭설로 그나마 암흑의 평화. 간혹 켜는 라디오에선 캐럴 대신에 조정을 어지럽히는 무뢰배들의 난투극뿐. 검게 마른 산열매라도 찾아 나선 새가 나직이 노래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쓸쓸한 세월이런가. 이 귀양살이 선비는 오늘도 배고픈 새들의 ‘절친’이라네.

눈 오고 추우니 산골은 인적이 끊겼어. 잉걸불 타오르자 주전자에 물 끓는 소리. 언젠가 러시아에서 백야를 보았는데 그날도 난 어떻게 보리차를 구해 마셨지. 밤이 없어도 나는 보리차를 마시면 그냥 밤인 줄 믿어지더라구. 뜨거운 보리차를 불어마시던 젖은 입술과 찻잔을 든 야윈 손가락을 기억해. 임진강 오리떼들이 소롯이 내려와 물주전자에서 왁자글거리는 듯. 물이 끓는 소리는 목포행 완행열차의 기척도 같아.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아아아 부슬비에 젖어가는 그 밤에도 보리차를 마시면 마음에 위안이 되더라구.


우리 지구행성은 태양 주위 공전 궤도를 무려 시속 16만킬로미터로 돌고 있다네. 이 엄청나게 큰 소리엔 하나도 관심이 없고 보리차 끓는 작은 소리는 왜 마음이 가는 걸까. 예민한 귀로 경청하는 당신이여. 귓불을 스쳐오는 사랑의 속삭임. 젖먹이 아가는 엄마가 윗옷 단추만 하나 풀어도 침이 고여서 입맛을 쩝쩝 다신다네. 나는 당신이 안겨주는 보리차 한 잔에도 이렇게 감격해 ‘땡큐 땡큐’가 연방 터져.

나는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몰라. 불특정 다수와 교제가 쉽지 않아. 그거 없이도 좋은 친구들 충분하고. 전자 화면보다 종이로 글을 나눠야 영혼이 전달되는 거 같아. 마찬가지로 설설 끓어 뜨끈한 보리차 한 잔이면, 그런 소박한 심호흡이면 그제야 살겠구나 싶어지더라.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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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갖고 싶은 아이가 있었어. 침상에 눕기 전 큰 소리로 기도했대. “하느님이 귀가 멀었겠니. 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거야?” “하느님은 들으시겠지만 아빠가 못 들으실까봐서요.” 흐흐, 맹랑한 녀석. 나도 오늘은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잠들어야지. 내일은 제발 함박눈이 내리게 해달라고. 하늘나라 선녀님들은 단체로 클럽에 놀러 가셨나들. 송이송이 눈꽃송이 자꾸자꾸 뿌려줘야지 뭐하신대들.

빌리 조엘의 신나는 방랑 주제곡 ‘The stranger’를 귀에 꽂고 남미 페루를 여행하고 다닐 때였어. “모두들 남쪽으로 길을 떠나지. 낯선 여행자는 비밀을 안고 있다네. 네 속에도 은밀한 이방인이 숨어 있지. 낯선 이방인과 마주치면 너는 대번 흔들리고 말지.”


쿠스코에서 파는 옥수수는 그야말로 떡니, 산토끼 앞니만큼이나 굵었어. 그 옥수수로 뻥튀기를 하는데, 우리나라 뻥튀기 장수랑 똑같은 행색을 한 아저씨가 뻥튀기 기계를 돌리고 있었지. 크나큰 옥수수가 펑펑, 폭죽을 쏘아 올리면 아이들이 몰려왔어. 가끔 쌀을 한 바가지, 튀밥도 펑펑. 고소한 냄새와 함께 튀밥처럼 생긴 눈이 사방으로 흩날렸지.

서로에게 흔들린 여행자들은 튀밥을 나눠 먹더군. 그들 머리 위로 모자를 흔드는 바람, 높은 구릉을 넘어온 눈발이 수수 날리고. 점점이 굵직한 튀밥눈이 내려오면 목마른 아이들은 다투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어. 혀가 젖을 때쯤 하늘은 맑게 갰고 개들은 광장에다 묽은 똥을 누더니 산동네로 사라져갔다.

아픈 무르팍을 끌고 그 길들을 오가면서 먹었던 튀밥을 잊지 못해. 과자가 흔해진 세상. 비싼 초콜릿과 케이크. 느닷없는 빼빼로데이. 이런 세상에 곶감과 튀밥이라니. 물고구마와 희고 긴 가래떡을 화덕에 구워먹길 좋아하는 이방인. 그래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방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네. 튀밥을 먹고 자라지 않은 아이들이 길거리에 흔해. 샌드위치를 든 아이들이 누룽지를 찾는 아저씨를 흘겨봐. 검은 하늘에선 튀밥 대신 방사능 묻은 창조경제 범벅눈이 만들어지고 있다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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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사는 사람을 신선이라고 부른다. 신선 그거 별거 아니다. 도시사람 안 같고 그냥 신선한 사람이 신선이지.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신선은 집과 세상을 오가는데, 이제 제법 겨울 속 같아. 진눈깨비를 한바탕 보기도 했어. 쌓이지도 못할 거면서 어쩌자고 내리는 것인지. 대지를 향한 중력의 사랑이여. 가슴이 뭉클뭉클 했어. 겨울에 신선은 하얀 머리칼이 된다. 눈을 뒤집어쓰면 백발마녀보다 더 푸짐한 백발을 눌러쓰고 휘휘 바람 사이를 걸어 다니지. 대지가 얼음을 껴입는 추운 밤에도 빨간 내복차림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산타 할아범. 자판기 커피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집집마다 돌면서 선물을 돌린다는 산타 할아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겠다며 겁박을 하는 캐럴도 있지만 사실 산타 할아범 그렇게 쩨쩨한 영감탱이 아니야. 선물보따리엔 해바라기씨, 맨드라미씨, 연보라 패랭이꽃씨, 꺼시렁 보리밭을 지나면 보리 미숫가루 한 봉지 챙겨들지. 배고픈 아이들 주면 좋겠군 웃음기 번진 산타 할아범. 산을 타고 넘나드는 산타. 그래서 산타인가. 아이고 허리야 하면서도 잉글리시 아이고 하면서 또 냅다 달려가지. 벌겋게 익은 얼굴, 땀에 전 옷가지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호주머니는 땡그랑 동전뿐. 직장 잃은 아빠 엄마 궁핍한 살림살이. 그럴 땐 몰래 산타, 대리 산타 그런 것도 있단다. 누구긴 누구야. 당신이지. 산타 오빠 산타 언니…. 신선이 별거 아니듯 산타도 별거 아니야. 바로 우리들이 산타지.


하얀 빛깔 아기고양이들이 태어난 봉쇄수도원의 환호성. 절집 공양보살님이 키우는 하얀 진돗개 강아지는 나른한 오수를 즐기네. 세상은 고요하고 사랑은 따뜻해. 어두운 난세에도 별빛은 성성하고 메주 덩어리는 곰팡이꽃을 피워 희망을 키운다. 팔려온 아기 염소는 눈알을 궁굴리며 엄마 꿈을 꾸네. 눈물은 마르고 미소가 번진 아기 염소. 언젠가 아기도 엄마가 되겠지.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주리라. 어서어서 배부르도록. 선물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면 세상이 바뀌겠지. 저마다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면 겨울밤은 절대 춥지 않아.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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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향이 가장 진할 시기다. 마실 길에 맨손으로 뜯어온 국화 몇 단. 큼지막한 머그잔에 담아놓고 지켜보는데 온 집안이 국화향이다. 내 손바닥에도 국화꽃 향기가 맵게 배었다. 이럴 때 얼른 당신이랑 손잡아야 하는데…. 바깥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졌어. 맹물을 팔팔 끓여 홀짝이며 마셨지. 향기 때문인가 꽃차를 마시는 기분이 들더군.

가을비로 말갛게 씻고 향수를 바른 몸, 국화는 깨끗하고 요염하여라. 중세 유럽에선 씻지 않고 악취를 풍기는 것이야말로 수도자의 도력이 높다는 증거로 삼았단다. 성 아몬은 출가 서원한 뒤 한번도 자기 알몸을 본 일이 없었다지. 성 에우프락시아는 130명의 수녀들과 같이 지냈는데 그곳 수녀님들은 평생 발을 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욕이라는 말만 들어도 까무러칠 정도였단다. 그밖에도 많은 수도원들이 일 년에 딱 두 번 목욕을 허용했다. 악취를 풍겨야 수도생활에 정진했다는 증표라니 차라리 악취 향수가 필요했겠어.


세탁기도 자주 돌리고 담배를 태우지도 않는데 친구들이 가끔 향수 선물을 준다. 나이가 들었으니 몸단장, 옷단장하고 다니란 소리겠다. 가끔 국제공항 면세점에서 향수병 샘플을 맡아보기도 해. 꽃향기만은 못해도 왠지 끌리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옷깃에 가볍게 묻혀온 사람을 만나면 배나 친근하고 근사하게 느껴진다.

촌에서 풍겨나는 향기는 주로 흙냄새 불냄새 똥냄새. 소를 키우는 집에선 송아지 냄새가 나고 꽃을 가꾸는 집에선 꽃내가 나겠지. 마음에서 풍기는 향기는 유리병에 담은 향수와 비교할 수 없음이렷다. 어떤 게 소중한 향기인지 모르고 값비싼 향수를 몸에 들이부은들 무엇하리요. “눈 덮인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 냄새가 난다.” 월북시인 오장환의 ‘북방의 길’ 첫 소절이다. 증기열차 석탄 냄새와 송아지 냄새, 백두산 호랑이 오줌 냄새도 난다. 보라 이 사람, 보라 이 꽃! 킁킁거리다가 사람과 꽃에 덩달아 취하고 마는, 어느 꽃핀 날.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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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락거리는 수풀 사이로 새들이 모여 산다. 뒷산은 매 일가족이 살아 매봉이라고 부른다. 한 번씩 공중에 붕 뜨면 온 동네 들쥐들은 쥐구멍을 찾아 비상대피. 그동안 내린 비 족족 마르고 따사한 햇살을 쬐며 매가 날았다. 어린 매가 자랐었나봐 처녀비행도 펼쳐졌다. 엄마를 따라 후계자가 처음 보이자 숲은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헤르만 헤세 말고 하루만 햇새. 내일부터는 햇새가 아니라 이 동네를 지키는 늠름한 텃새가 되겠지. 무사한 비행을 마치고 쏜살같이 숲으로 사라진 매들. 하늘이 이토록 높고 푸를 수 있는 걸까. 정수리를 지나 목덜미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깊은 하늘이었다. 그 하늘로부터 빳빳한 빛줄기가 내리꽂히고, 덤불 속에서 굵은 새알은 눈을 뜨며 깨어났을 테지. 어떻게 이 많은 새들 가운데 매가 존재하고, 매는 매를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꼭 닮은 아기 매를 낳을 수 있었을까.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어라.


가까스로 목선을 몰고 피항하듯 당신은 집을 향해 바쁜 걸음이었다. 햄 소시지와 라면 두어 개, 달걀 한판. 저녁나절 금성마트 앞길에서 만난 당신은 저 멀리 아시아 남쪽에서 날아온 새. 새를 닮은 사람. 어쩌다가 이 동네까지 흘러들어온 걸까. 외국에서 시집온 여성들도 꽤 살고 있고, 공장에 취업 중인 팔목이 굵은 아시안 친구들도 더러 보인다. 작년부터 다문화가족을 위한 송년축제 추진단장이란 감투를 썼다. 그냥 친구들이 알아서 갖다 붙인 일벼슬. 연말이면 반쪽고향이 더욱 그리울 다문화가족.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밥도 먹자며 그렇게 시작한 일이다. 올핸 어떤 인연들로 하루를 즐길까. 자기를 닮은 아이들, 햇새들도 즐겁게 해줘야 할 텐데. 외국인 노동자는 겹겹이 바람이 쟁여진 면사거리에서 집으로 향했다. 쓸쓸히 둥지를 찾아가는 한 마리 매. 고향나라에 두고 온 어린 매는 잘 자라고 있을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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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인연하여 함께했던 여인들, 그러니까 첫사랑 올리비에와 동거녀 에바, 첫번 결혼 상대자였던 무용수 올가, 부나방 같았던 열애의 주인공 마리 테레즈, 서커스단의 곡예사 출신 누쉬 엘뤼아르, 우는 여인 도라 마르와 법대생 프랑수아즈 질로, 말년을 함께한 재클린까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파리의 라파예트 백화점 네거리에서 피카소는 소녀 테레즈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나는 피카소라는 화가요. 그대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소. 우리가 함께한다면 놀라운 작품이 탄생할 거요.” 팔을 붙잡고 다짜고짜 첫마디가 그랬다고 한다.


사랑은 구름처럼 떠도는 유령이어서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감정. 책임과 약속의 울타리가 아니라면 화가의 사랑은 범람하기 일쑤렷다. 피카소는 추운 밤을 못 견뎌 했다지. 아마도 스페인의 항구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난 때문이리라. 말라가는 캘리포니아처럼 다습고 밝은 땅. 게다가 피카소는 밤을 혼자 새우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난로에 장작불을 피우면 될 일을 기어이 뜨거운 사람의 체온을 찾기 바빴다. 그럼에도 용맹정진, 수만 점에 이르는 그림을 그려냈다. 공산당에 가입하고 숱한 염문을 뿌려 난리굿판 인생이었지만 결코 창작에 게으르지 않았다.

갈색 나뭇잎은 다투어 떨어지고 밤이슬도 차가운 때. 외양간과 풀냄새, 찬 공기도 좋긴 하지만 더운 바닷가가 다시 그리워라.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노래엔 따뜻한 캘리포니아 꽃들과 선인장,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난 교회당에 들어섰죠.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목사님은 보통 추위를 즐기죠. 그분은 내가 이 추위 속에서 캘리포니아 꿈을 꾸는 걸 알고 있겠죠. 나무 잎사귀가 모두 갈색이네요. 하늘은 잿빛이고요. 산책을 나갔죠. 어느 겨울날… 나는 따뜻한 캘리포니아로 가는 꿈을 꿔요.” ‘캘리포니아 드리밍’이라는 노래 가사다. 피카소가 해변에서 파라솔을 높이 들고 연인이랑 웃으며 노니는 사진을 앞에 놓고, 밤바람이 차가워 외투를 둘러쓰고서 시방 이 글을 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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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에선 빨리빨리를 ‘싸게싸게’라고 부른다. 천천히 하라는 말은 ‘싸목싸목’이라 하고. 싸게싸게와 싸목싸목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외지인이 아니지. 싸게싸게 난로 곁으로 장작개비를 옮기던 중, 새끼발가락이 문턱 사이에 끼여 뼈에 금이 가는 줄 알았다. 기와지붕이 날아갈 만큼 오매! 비명을 질렀지. 다행히 목숨 대신 단풍잎 하나가 눈앞에 떨어지더군. 눈을 드니 온 산에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어라. “오매! 단풍 들겄네….”

집 주변은 재미없고 멀리 단풍놀이를 가야 하는데, 나도 단풍놀이 갈 줄 아는데…. 누가 주말에 해남에서 보자고, 일지암 법인 스님이랑 산보나 하자고. 예전엔 툭하면 만났던 인연들. 지금은 일년에 한 번도 못 보고 산다. 대개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흐르고 있다. “오래된 인연들을 버리지 마라. 새로 사귄 친구는 옛 친구만 못하다. 새 친구도 오래되어야 제 맛이 우러난다.”(구약외경 집회서) 남자들은 무조건 새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농이 아니라 우리는 시방 너무들 새로운 시대에 취해 오래된 미래를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거 같아.


“칠습 평상 살믄서 낭구 안 꼬실리고(태우고) 살게 된 거이 얼마 안됐재. 낭구(나무) 할라믄 가을이 겁나 바빴재. 시상이 채(훨씬) 좋아져 부렀재. 부삭(부엌)에 광이 딸려 있었는디 아조 망하태(안 좋아).” “불이 날까봐서요?” “큼매 그란단말요. 초가집에 불이 많이도 났재.” “후다닥 끄믄 되재라우.” “요새가치 물 호스가 집집마다 어디 있었간디? 살림을 홀라당 태워묵고도 잘 살었재. 가진 게 없으니께. 흐흐.” 나도 겨울채비로 불쏘시개 나무를 좀 더 해둬야 하는데, 날이 추워지기 전에 부지런을 떨어야 해. 아니면 연탄이나 태양광으로 바꾸던가. 낮에 뵌 할매는 기름 때시다가 무서워 연탄보일러로 바꾸시고 내게도 적극 추천. 보수적인 교인들이 나를 빨갱이 사탄이라고 그런다던데 그렇다면 연탄이 아니라 사탄보일러가 필요해. 연탄검댕이가 묻었나 검고 순한 눈빛들. 추위가 겁나지 않아. 연탄사람들 곁이라 마음만은 활활 연탄불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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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미니 납작 만화책이 별책부록으로 들어있는 풍선껌이 있었다. 학교 앞 점방에서 주로 놓고 파는 물건이었는데 인기가 짱이었다. 잘근잘근 씹으면 단물이 나고 이어서 풍선을 이따만 하게 불었다. 풍선껌이 눈앞에서 팍 터지면 껌은 콧등에 달라붙었다. 그걸 또 걷어다가 입에 넣었지. 눈으로는 만화를 날렵하게 넘겨 읽고. 6·25 반공만화가 제법 많았는데 교회 주일학교에서 더 잔인한 살인과 전쟁 이야기를 숱하게 들은 통에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난 풍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였다. 용돈이 생기면 과자보다 먼저 풍선을 샀다. 달이나 태양도 풍선일 거라고, 풍선이 아니고서는 저 멀고 높은 곳에 떠다닐 수 없는 거라고 굳게 믿었다. 동물원에 처음 놀러갔을 땐 빨간 풍선을 하나 샀는데, 풍선을 실에 매달고 다니면서 홍학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실이 끊어져 도망가 버린 풍선은 늙은 당나귀가 가지고 놀다가 터트려버렸다.


풍선은 거미가 줄을 매달고 노니는 것처럼 실로 매달고 있어야 풍선이지 손에서 한번 떠나면 가시에 찔려 터지거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물건이렷다. 애지중지 풍선을 꽉 쥔 손바닥에선 땀이 송송 맺혔다. 내 작은 손엔 늘 풍선실이 감겨있었고, 달아날까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으려니 손바닥은 소금땀 염전이었다. “가장 즐거운 것은 천진하게 마음속에서 이쪽을 신뢰하며 내미는 어린이의 손이다. 이것은 마치 동물의 앞발과 같아 전적으로 친애의 표시기 때문이다.”(<무서록>·이태준) 풍선을 만지던 내 손은 하늘에 닿아있었고, 그것은 정말 친애의 표시였다.

요즘 누군가들이 북녘땅으로 대형 풍선을 날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풍선에 매달아 보내는 대북 전단엔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 걸까. 총격전까지 벌어진 모양이니 짐작하여 알 수 있는 부분이겠다. 풍선에 매달아 동포들에게 닿게 해야 할 소식이 꼭 자존심을 짓밟는 조롱과 험담이어야 할까. 풍선은 풍선으로 족하고, ‘삐라’는 그만두기를. 남북 간 존중과 대화, 이산가족들의 자유로운 편지왕래가 속히 이뤄졌으면 좋겠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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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올랑드 정권이 탄생하던 투표 날 귀국했으니까, 파리 외곽 시골 마을 도몽(Domont)에서 딱 한 달을 슬렁슬렁 지냈다. 지인의 소개로 무턱대고 찾아간 동네. 이방인에게 방을 한 칸 내준 할배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꽃길을 달렸지. 빵을 잘 굽는 집을 수소문하거나 낡은 성당에 앉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완행열차를 타면 코앞인 고흐의 무덤 마을도 자주 갔다. 그림 속 별들이 대낮인데도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것 같았다.

서낭당 나무 속에 굴을 파고 사는 부엉이처럼 조용조용히 지내다가 가끔 파리 번화가에 나가곤 했다. 음반가게 프낙이나 버진에 들러 샹송 음반을 골랐다. 당신도 좋아하는 에디트 피아프나 이브 몽탕, 수염을 더부룩 기른 음유시인 조르주 무스타키가 부르는 ‘나의 자유’나 ‘나의 고독’은 반드시 들어야 할 노래. 샹송이란 ‘민중의 노래’라는 뜻. 우리네 인생살이 희로애락이 가감 없이 스며든 주제가들. 가을엔 무조건 샹송이다. 마로니에 가로수길, 낙엽이 구르는 파리 시내. 그 길로 흐르는 잔잔한 노래들. 스펀지나 솜뭉치가 풀어져 궁둥이가 움푹 파인 소파에 앉아 샹송을 들어보라. 망가진 소파에서 망가지고 지친 인생도 잠시 기대어 위로를 얻는 순간.


선돌 위에 흙 묻은 신발을 가지런히 올려두고 방에서 시름시름 앓던 날이 있었다. 마당 구석 약탕기에서 끓던 한약재 냄새. 낙엽으로 밑불을 지피고 그렇게 방에 들어오면 왠지 샹송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바다에 물이 저렇게 많건만 한 움큼도 마실 수 없는 것처럼 무수한 세월도 짜디짠 회한뿐. 낙엽이 떨어져 흩어지듯 사람 목숨도 천년만년 머물지 못한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초승달이 기우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샹송을 들으면 맘이 편안해진다. 이중 국적자처럼 갈팡질팡 인생, 한창 푸르던 미나리꽝 인생도 언젠가는 꽝꽝 언 얼음 땅이 되고야 말리라. 그날이 오기 전 친구와 다정히 샹송과 와인 한잔, 작은 내 소망이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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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샤인! 가을볕은 눈이 다 시릴 지경이야. 들소처럼 일하다 발갛게 그을린 농부들. 나도 남국에서 시커먼스가 되어 돌아왔지. 멧돼지가 칡뿌리를 찾듯 밭고랑부터 냉큼 갈아엎었다. 겨울에 배곯지 않으려면 부랴부랴 푸성귀라도 뭘 좀 심어야겠다. 가만히 살지 이상한 짓거리를 한다고 할매들이 또 뭐라시겠다.

김경미 시인의 시집 <밤의 입국 심사>에서처럼, “나만 이상한가?”라고 되묻고 또 의심하는 날들. 나만 이상한 거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외로운 기분. “나만 이상한가. 당신들은 늘 양말 두 쪽을 가지런히 신고, 단추는 남녀 화장실처럼 왼쪽이나 오른쪽 구별해서 꿰고, 일생에 다섯 명 이상의 친구가 꼭 있어야 하고….” 뻔할 뻔자로 살지 못하는 운명의 시인들.


어쩌다 목사가 되었는지 몰라라. 목사님들이랑 어울리기처럼 어렵고 불편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확신에 가득 찬, ‘댑다’ 큰 목소리. 성공과 번영이라는 코드로 목회를 하는 분들이 대다수다. 장사를 하지 왜 목사를 하는 건지. 시쳇말로 싸가지 없는 진보는 더더욱 상종하기 괴로운 무엇이다. 거리의 투사들 가운데는 벗들에게까지 말과 행동이 거칠어 만나기가 주저되는 이가 있다. 그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듯 욕을 해대면, 나는 벌써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당신이 염치없는 세상에 염치를 알고, 불편해하며 나대지 않고 숨으려 하는…, 이상한 행동거지가 마음에 든다. 혼자 잘난 체 일장연설을 늘어놓기보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소중히 여기고, 때론 어색해서 자리를 피하기도 하는 당신. 평범하고 일반적인, 별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세계, 이 체제를 의심하고 번민하는 이상한 당신. 당신의 그 불편함 때문에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거겠지. 범상치 않은, 다른 생각과 다른 공기를 좋아하는 당신이여. 가죽이 들뜬 신발도 아닌데 발가락에 바람이 숭숭 드나든다. 가을 공기를 까칠한 당신과 나누고 싶은, 이상한 계절의 이상한 사람의 이상한 생각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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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딜리에서 보트를 빌려 타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아따우로 섬에 다녀왔다. 동쪽 끝 악어가 출몰하는 자코 섬과 더불어 동티모르에서 가장 수려한 경관을 지닌 섬. 기이한 산호초와 만화영화로 잘 알려진 물고기 니모를 보기 위해 스노클링을 하기도 했다. 이 작은 유인도엔 어부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다. 바람 빠진 공을 차는 아이들의 앵무새 같은 웃음소리. 야생에서 자라는 돼지들이 꿀꾸르르 노래하는 골짝, 우쿨렐레를 가지고 다니는 악사라서 이런저런 바다 노래를 친구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몇 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 현대인들은 만남이 흔하기 때문인가. 이별, 작별, 석별에 무감한 심정들이다. 공항이나 버스터미널, 항구, 기차역에서 헤어지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전화가 발달하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따우로 섬을 떠날 때 아주 오래도록 손을 흔들던 그곳 주민 닐스를 기억한다. 내가 탄 배가 선창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팔이 아플 텐데도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돌고래가 춤추는 바다를 지나면서 나는 조용히 입안에 사탕을 굴리듯 노래를 굴렸다.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임과 함께 마지막 정을 나누노라면 기쁨보다 슬픔이 앞서. 떠나갈사 이별이라 야속하기 짝이 없고 기다릴사 적막함이라 애닯기가 한이 없네. 일년사시가 변하여도 동서남북이 바뀌어도 우리 굳게 맺은 언약은 영원토록 변함없으리.” 이제는 정말 아무도 부르지 않는 ‘석별의 정’이라는 노래다.

사랑은 이별을 동반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면서 아름답다. 지루하고 지난한 관계는 밍밍한 물이나 다름없겠지. 순례자는 이별을 통해 사랑을 키운다. 남겨진 이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겠지. 그리고 점차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질 때쯤 순례자는 우연 반 필연 반 턱하니 코앞에 나타나곤 하리라. 몸은 떠나지만 언약은 남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간대도 언약은 영원토록 변함없으리.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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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초의 선사는 동백꽃을 가리켜 산다화라 불렀다지. 엄동 추위에 매화가 필 때, 매화 옆에서 빨간 동백꽃도 곁들어 피느니… 산에 피는 차꽃. 매화 편에서 산다화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이겠나. 힘들고 어려울 때, 아프고 쓰라릴 때 팔짱을 끼고 같이 가주고, 배려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같이 밥 먹고 차 마시며 속엣말을 나누는 사람. 그래서 매화는 친구 덕분에 마침내 겨울을 뚫어내고 산천을 매화향으로 뒤덮을 수 있음이겠다.

고마운 사람아. 변심과 배신이 만연하여 정 붙일 곳 하나 없는 이 쓸쓸한 별에서 당신은 홀로 깊고 뜨거우며 진실하여라. 도시의 바깥을 지키는 외딴 집들, 외딴 불빛들 속에 당신이 머물고 있음은 내겐 그 무엇보다 큰 위로이며 안심이어라. 물에 잘 풀리는 창호지처럼 당신 앞에선 자존심 따위 세워봐야 민망해. 존재 자체로 선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귀한 사람. 당신과 함께 있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도 역경도 고맙고 감사해라. 기진맥진 쓰러진 나에게 슬픔 두려움 낙심, 이런 인생의 난제들을 헤쳐 나가도록 용기를 부어주고 기도해준 사람.


여기는 멀리 남태평양 동티모르. 내 입에서 “오브리가도(고맙습니다)”가 거의 남발 수준으로 튀어나온다. 산자락을 타고 어스름이 내려오는 시간. 소박한 저녁밥상 앞에서 오브리가도를 크게 외친다. 보고 싶은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되고, 한 밥상에 둘러앉아 있음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사트바’를 우리는 보살이라 부른다.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마음 ‘보디치타’에서 나온 말이란다. 내 마음속 은인을 알고 모시는 마음. 고마운 존재.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는 이들. 나는 당신의 보살이고 당신은 나의 보살이 될 수 있기를. 오브리가도, 새끼손가락 하날 붙잡고서 수줍은 목소리로 뇌어보는 말. 잦은 서운함 때문에 미처 몰랐던 그 고마움이 왈칵 눈물로 쏟아지는 날.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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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몸살이 나 구들더께처럼 드러누워 며칠 앓았다. 고향을 떠나 객지로 옮겨 다니면서부터 몸살이 나기 시작했다. 납작 엎드려 중력의 지배를 받는 행성임을 밝히겠다는 듯 몇날 며칠 물만 마시고서 드러누웠어. 그래도 회복되지 않으면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그래도 성가시면 날개 달린 천사나 검은 갓을 쓴 저승사자 손을 잡고 요단강을 건너야겠지.

오래전 공동묘지에 가보면 아기 무덤이 거푸 보였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아기 무덤을 보면 들꽃이라도 하나 꺾어 묏등에 놓아주고 싶어진다.


우리 겨레의 신화이기도 한 바이칼 신화엔 ‘아바이 게세르’가 등장한다. 게세르의 다른 이름은 누르가이였다. 부리야트 부족의 말인데 코흘리개라는 뜻이다. 어렸을 때는 개똥이 소똥이 이렇게 더럽고 천한 이름을 지어 불러야 악한 영들이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는다고 믿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나 십대가 되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이름을 찾아 지어주었다. 이는 만주벌판을 거쳐 한반도, 멀리 툰드라까지 이어지는 똑같은 풍습. 얼굴에 주근깨 범벅인 늙은이 만잔(점박이) 구르메(할멈)…. 구르메 할멈은 게세르, 아니 코흘리개 누르가이의 어머니인 나란 고혼의 삼년 묵은 기침병을 고쳐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젖먹이 누르가이가 태어나자 보모 역할도 너끈히 맡아주었다. 코흘리개는 텡그리(하느님)의 맏아들 부르한 바위 위에서 씩씩하게 뛰어놀았다. 마법의 까치가 깃털을 고르는 바이칼 호수 마을, 이맘때쯤부터 추위가 싹트기 시작하여 시월이면 하얀 눈이 꾸덕꾸덕 내리고 얼음도 뼘만큼 얼기 시작했다. 나도 당신도 어려서 개똥이 소똥이 코흘리개로 불리며 어느 동리를 주름잡고 자랐겠지.

물 넘치던 샘, 약손으로 배를 문질러주시던 구르메 할멈, 서먹하니 나무그늘에 앉아 있다가 손을 더듬어 잡은 어린 연인들의 동네. 당신이 나의 잔주름을 어루만져줄 때 나는 벌써 개똥이 소똥이 이름을 버리고 난 뒤였지. 우리는 아름답고 늠름하고 영특한 이름으로 오늘도 살아있음이렷다. 부디 이름값을 하면서 보석처럼 빛나야 해.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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