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16.12.27 ‘알 수 없음’이 ‘이상 없음’이 되는 병원에서
  2. 2016.12.20 ‘언론은 쓰레기’라는 칭찬
  3. 2016.12.13 자제된 힘
  4. 2016.12.06 [작은 것이 아름답다]어떤 말들
  5. 2016.11.29 [작은 것이 아름답다]마을 살림과 나랏돈
  6. 2016.11.22 [작은 것이 아름답다]누군가 내 목을 조를 땐 손가락이라도 꺾어야
  7. 2016.11.15 [작은 것이 아름답다]산과 들은 겨울 채비로 바쁘다
  8. 2016.11.08 [작은 것이 아름답다]삶, 어느 모퉁이에 선 너에게
  9. 2016.11.01 [작은 것이 아름답다]재일동포 화가 홍영우의 ‘우리말 도감’
  10. 2016.10.25 [작은 것이 아름답다]글쓰기와 행동
  11. 2016.10.18 [작은 것이 아름답다]들깨와 참새 그리고 가로등
  12. 2016.10.11 [작은 것이 아름답다]‘416기억전시관’에서…
  13. 2016.10.04 [작은 것이 아름답다]마른논에 쏘아대던 물줄기, 그 물줄기에 스러진 농민
  14. 2016.09.27 [작은 것이 아름답다]백남기씨 사망, 이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15. 2016.09.20 [작은 것이 아름답다]‘차례’ 아닌 ‘차레’…내 식으로 지내기
  16. 2016.09.13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통의 시대가 더는 반복되지 않도록
  17. 2016.09.06 [작은 것이 아름답다]지역에서 펴내는 책
  18. 2016.08.30 [작은 것이 아름답다]‘국가보안법’ 참 질기다
  19. 2016.08.23 [작은 것이 아름답다]문호리 장터와 고음실 농장
  20. 2016.08.16 [작은 것이 아름답다]기억교실, 소중했던 네 빈자리

한 주 한 주 주말마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커다란 마음의 파도를 넘고 있다. 내게는 그사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몇 주 동안의 기억이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멀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침대 옆에는 인공호흡기가 있었고, 혈압과 맥박 따위가 나오는 손바닥만 한 모니터가 머리맡에 있었다. 꼼짝하지 못한 채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눈도 뜨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뇌출혈이었다. 아직 예순이 되지 않은 나이였으니, 아무도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지병으로 두통을 달고 지냈다. 최고로 꼽힌다는 병원을 찾아다녔고, 온갖 정밀검사를 했으나 의사는 한결같이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를 통보했다. 극심한 통증으로 몇 달을 입원해야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알 수 없음’이 아니고 ‘이상 없음’. 별다른 이상은 없고, 그저 ‘신경성’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느 병원에서도 뇌혈관질환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적이 없었다. 고통스럽고 건강하지 않은 환자에게, 며칠을 두고 온갖 검사를 한 뒤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료 결과를 내놓는 일은 그리 낯설지 않다. 환자는 결과지를 받아들고, 갑갑한 마음인 채로 입을 닫고 병원을 나선다. 무언가 처치할 수 있는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이상’은 없다. 환자는 건강하지 않은 삶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의사는 드러난 질병을 처리하는 데에 골몰한다. 어째서 아프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의사는 만나기 어렵다.

어머니를 진료했던 의사는 ‘이상 없음’의 환자에게 한 움큼의 약을 처방했다. 이상은 없으나 약은 많이 필요한 상태. 이게 앞뒤가 맞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가장 단순한 과학의 논리에서도 벗어난 것 아닌가. 왜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의사들이 이렇게 많을까. 한 움큼의 약은 부작용도 여럿이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밥 먹는 습관을 엉망으로 뒤틀어 버린 것이었다. 스스로 밥 먹는 것을 조절하기가 어려워졌고, 단것을 자꾸 찾게 되어서 혈당이 높아졌다. 물론 이런 상태에 대해서도 의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게 약해진 몸에 얼마나 무리가 되는지, 특히나 혈관 같은 것에.

수술을 한 담당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환자가 겪게 될 아픔이나,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환자와 보호자의 삶에 관한 것,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최선을 다해, 사진에 나타난 희뿌연 흔적의 부피, 혈액 검사에서 나오는 수치의 변화, 각각의 조직이 정상인 상태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돌이켜보면, 그 의사 또한 환자나 보호자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수술을 해서 머리에 고인 피를 뽑아내고, 검사 결과에 따라 출력된 숫자에 맞춰 약물을 투여하고, 환자를 처치하는 일에는 능숙할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의사는 “내가 더 이상 말할 것은 없다. 이번 혈액 검사에서 어떤 수치가 유의미하게 좋아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말할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삶과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의견을 구하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는 아니었다. 아픈 환자의 몸이 앞으로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에 대해서, 환자와 보호자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금세 접게 되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다른 모든 것들을 잠시 멈추게 하면서 들이닥쳤던 이 일들은, 첫 책 <스스로 몸을 돌보다>를 내면서 그 책에서 분명하게 다뤘던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문제들이었다. 눈앞에 빤히 있었고, 머릿속에는 제 딴에 그려 놓은 답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몸에 10여개에 이르는 수액 주사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혹시나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여기에서 지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뇌어 물었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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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 틀림없어. 평일 아침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허름한 배낭을 멨다. 게다가 버스비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분명 간첩이야. 저걸 어떻게 신고하지? 가다가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야겠다.’

 

1970년대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6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아홉 먹은 멀쩡한(?) 청년, 게다가 버스 운전사였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모는 삼화교통 333번 버스에, 어릴 적 반공 세뇌 교육으로 배운 그런 간첩 행색의 남자가 탔다. 나는 룸미러로 그자를 훔쳐보면서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파출소에 버스를 대고 얼른 뛰어가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이 와서 조사해 보니 간첩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요즘 ‘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박사모)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북한지령 망국촛불’이라고 쓴 팻말을 보면 내가 버스 운전할 때 간첩 신고한 것과 너무 흡사하다.

 

“도대체 대통령이 탄핵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 당시, 집회하는 대학생·시민들을 보고 ‘도대체 왜 집회하는 거야?’라고 궁금해했던 것보다 더 세상을 모르고 있다.

 

사실 박사모 같은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가끔 본다. 얼마 전에 방송대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도 그런 사람을 만났다. 일흔 정도 돼 보이는 방송대 학생이 내 가슴에 달린 백남기 농민 추모 리본을 보더니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난 백남기 그 사람, 살아온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내가 달고 다니는 세월호 배지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다 끝났는데 아직도 달고 다니세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는 지난주에도 있었다. “아니, 대통령 7시간이 왜 그렇게 중요하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박사모들은 어릴 때 나처럼 반공교육에 세뇌된 사람들이다. 나는 다행히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리영희의 <반세기의 신화> 등 다양한 책을 보면서 세상을 배웠다. 그런데 박사모들은 그때 세뇌된 상태로, 주로 텔레비전을 보고 세상을 판단한다. 전엔 박정희, 요즘은 박근혜에게 장악돼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만 보니 그 의식은 변하지 않는다.

 

하긴 TV조선 같은 종편은 더 심하다. 2011년 12월 조선일보 기자 박은주가 TV조선 방송에 나와 박근혜를 향해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했다. 다른 진보언론이나 인문학 책을 보지 않고 그런 방송만 보니 세상이 제대로 보일 리 없고, 꼴통 보수의식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보수언론이 박사모 같은 단체를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건 진보·보수언론의 합작품이었다. 박근혜 불통 정권을 일관되게 비판해온 매체는 경향신문, 한겨레이지만, 2016년 7월26일 ‘청(와대) 안종범 수석, 500억 모금 개입 의혹’ 기사로 K스포츠·미르 재단 의혹을 처음 보도한 매체는 TV조선이었다. 그리고 다시 진보언론이 국정농단한 최순실을 수면 위로 끌어내고, JTBC, 조선일보가 가세하면서 박근혜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끝까지 침묵하던 공영방송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박근혜 게이트를 다뤘다.

 

박사모는 헷갈린다. 박정희, 박근혜를 칭송하던 보수언론이 갑자기 박근혜가 최순실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고, 탄핵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니 헷갈릴 수밖에. 그들은 정말로 대통령이 탄핵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언론은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보수언론이 갑자기 내부자에서 심판자로 바뀐 걸까? 두고 봐야 한다. 보수언론이 이전처럼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고, 전쟁을 조장하고, 진보를 비방한다면 ‘역시 보수언론은 쓰레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박사모한테 “언론은 쓰레기”라는 칭찬을 늘 받을 수 있는 언론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박사모들은 경향신문이나 월간 작은책 같은 진보적인 매체도 좀 읽어보시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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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회,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면서 이 용어에 대해 촛불 현장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문제가 된 단어는 ‘권력’이었다. 권력이 시민의 손에 있다고 하면 괜찮을까. 우리는 둘 다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를 했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등장한 권력이 대중의 원망을 사고 몰락해간 역사는 많다. 이는 ‘선한 권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권력 자체의 속성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지배권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권력을 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면서도 권력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덧없음에 대권행보를 중지하고 물러나는 대권주자는 아직 없다.

권력의 흡인력은 무지막지해 보인다. 이전 권력의 비참한 말로가 뻔히 보이는데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타인에게 미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다.

지난 10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현대국가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겹으로 있다. 그러나 권력은 촘촘한 견제장치와 감시망도 뚫고 확대된다. 덜 나쁜 권력은 있어도 좋은 권력은 없는 걸까.

지난 주말에 청와대 100m 앞까지 갔다. 처음 가보는 통인동과 청운동. 오후 5시쯤 되었을까. 행렬이 마지막 진로에 세워진 차벽 앞에서 멈추고 돌아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도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와글와글하는 소란이 한동안 일더니 점차 “박사모는 물러가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군중 사이로 태극기가 언뜻 보였다.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어느새 극우단체의 전유물처럼 된 지는 오래다. 태극기가 안보와 반공과 반북의 이미지로 굳어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가까이 가봤다. 소음 사이로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태극기를 든 분의 첫마디는 “문재인은 간첩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가 해산되어야 한다고 했다.

촛불들의 선동에 놀아난 국회가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다는 주장은 앞서 오후 2시쯤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 앞에서도 들었다. 우리도 며칠 전에 국회 해산을 놓고 설왕설래했던 터라 그들의 국회 해산 구호는 듣기가 묘했다.

박사모 회원 등으로 여겨지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촛불행사를 방해할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낮에 세월호 천막 바로 앞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이렇게 행렬을 따라다니며 반대 구호를 외치는 그들이 놀라웠다.

그런데 내 우려는 문재인이 간첩이라는 황당한 구호 때문이 아니었다. 무모하게도 수천, 수만명의 촛불 행렬 사이로 들어와서 ‘깽판’을 놓고 있는 저분들이 혹시 다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촛불집회에서 폭행사태가 일어나면 안된다는 조바심이라기보다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든 안위가 위협당해서는 안된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서너 명 되는 분들이 어찌나 극성스럽게 군중들과 대거리를 하는지 무슨 난리가 난 줄 알고 헬멧을 쓴 경찰들이 일렬로 군중을 헤치고 들어와서 그들을 에워쌌다. 만약의 불상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데 꼭 그들만을 보호한다기보다 촛불 군중들을 폭력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는 측면도 있으리라. 이쪽저쪽을 따지지 않고 시민의 안위에 대한 보호조치를 할 정도는 되는 경찰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보수단체 회원들은 경찰이 보호막을 쳐주자 더 기세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때도 나는 군중들이 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경찰들의 머리 위로 뭘 집어던지면 저들이 다칠 거라는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소란이 계속되었지만 군중들은 ‘박사모는 물러가라’는 말 외에는 어떤 위력행위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유인물이나 두꺼운 종이팻말을 던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과 같은 보폭으로 걸으면서 ‘물러가라’는 말 외에는 욕지거리도 위협도 안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권력 또는 힘이라는 것은 견제받고 통제되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제할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전희식 | 농부·‘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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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낮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한 낱말을 되뇌었다. 모르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들은 말인 양 계속 중얼거렸다. 머금다, 머금고, 머금으며…. 그러다 그만 턱이 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다. 등에 배낭을 멘 채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두 무릎이 얼얼했다.

2014년 4월16일에 딸을 잃은 엄마로부터 “우리는 머금고 사는데…”라는 말을 듣고 헤어진 뒤였다. 그 말이 그렇게 힘들고 아픈 말일 줄 몰랐다.

그이는 ‘빈자리’도 말했다. 딸과 아들, 부부, 해서 늘 네 자리였다. 집에서 마주앉는 식탁에서도, 외식을 할 때도 네 자리. 그러나 그날 이후 다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생겼다. 빈자리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자리, 딸 자리, 누나 자리, 친구 자리…. 모든 자리가 사라졌다. 딸아이와 의견이 달라 부딪쳐도 먹는 입맛이 비슷해 금방 풀고, 함께 옷을 사러 가는 일도 즐거웠다는데 이젠 그럴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딸에게 “네 꿈을 활짝 펼쳐나가라”며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일이 행복했건만 딸 자리를, 엄마 자리를 빼앗겼다.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청와대에서 100m 떨어진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근처 경찰버스 차벽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희생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진 보자기를 두른 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엄마는 ‘사소한 행복을 꿈꿨던 아이들’이라 말했다. 딸이 단짝과 함께 종이 가득 빽빽하게 적은 버킷리스트를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다고 했다. 사소한 행복을 꿈꾸던 아이들을 으스러뜨린 한국사회와 이 정부 모두에게.

한 아빠는 ‘가장 슬픈 사진’을 말했다. 스마트폰 대기화면에서 딸은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렸다. 차분했다. 당연히 구조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학생들의 모습만 보아도 그때 거기, 구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빠에게는 딸의 사진 가운데 가장 기쁜 사진과 가장 슬픈 사진이 있다 했는데 가장 슬픈 사진을 스마트폰 첫 화면에 담은 건, 어쩌다 잠시라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일까.

어떤 엄마는 자신에게 ‘전부였던 아이’를 말했다. 전부인 아이가 가고 나니 세상을 온통 다 잃은 듯하다 했다. 세상에 대고 아이를 자랑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이 흉볼까 나중에 더 크면 해야지, 미뤄두고 참았건만 그 자랑, 전부를 쏙 앗겼다.

다른 엄마는 ‘생일’을 말했다. 돌아온 딸의 생일, 너무 힘들었다 말하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실컷 울면 좀 나을까 싶지만, 어린 막내가 볼까 맘껏 울 수도 없었다. 한 해 365일 하루하루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이 세상에 왔던 하루하루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전율’이라 말했다. 딸을 잃은 딸은 부모 앞에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가 잠든 추모공원을 찾아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하면서 울었다.” 그러고도 눈물이 차고 넘치는 날이면 딸은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출근했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그리움을 말했다. “17년을 살면서 식구들과 떨어져 지낸 게 길어야 하루 이틀이고, 그럴 때도 집에 오고 싶다고 그랬던 아이인데, 이렇게 오래 가족 곁을 떠나 얼마나 식구들이 보고 싶겠어요, 집에 오고 싶겠어요.” 언제든 왔다 가라고, 잠시라도 쉬었다 가라고 손녀의 방문을 늘 열어둔다. 책상도, 책상 위 컴퓨터도, 책꽂이의 책도, 좋아하던 기타도, 액자 속 사진도, 서랍장 안 즐겨 입던 초록빛 스웨터도 다 그대로다. 주인 없는 빈방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부르며 달려 들어올 듯한 방이다.

어느 엄마는 ‘이름’을 말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불러보고 싶다 했다. 2015년 3월30일 월요일 오후 7시39분,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맞은편 푸르메재단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엄마, 아빠들이 몇 번이고 외쳤다. “내 새끼 보고 싶다!” 마지막 외침 뒤에는 다들 목메어 울었다.

지난주 토요일, 이제까지 가로막혔던 청와대 가는 길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04명을 구하지 않은 책임만으로도, 진실을 규명하라는 이들을 외면한 것만으로도 대통령은 옳지 않다. 6차 촛불집회, 여기저기 광장이 된 곳에서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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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다니고 있는, 면사무소 옆 초등학교에는 딸린 논이 있다.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 두 도가리(배미). 서로 다른 마을에 있다. 학교에서는 제법 떨어져 있어서 어느 쪽이든 아이들 걸음으로 가자면 한 시간은 걸린다. 초등학교 재산 목록에 논이라니. “요즘이야 학교에 보탠다고 하면 장학금이니 지원금이니 돈으로 내지만, 예전에는 좀 여유있게 사는 집에서 땅을 내놓고는 했어요. 그러면 그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해마다 학교 살림을 살았지요.” 그렇게 해서 학교 땅이 된 논밭이 아직 남아 있기도 하다는 것. 이제는 농사지어서 거둘 수 있는 돈이라는 게 아주 형편없거니와, 땅을 빌려준다고 해도 마땅히 부쳐서 농사지을 사람도 없어서 아예 땅을 처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을에서 그런 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사(마을회관)를 지은 땅은 어느 집안에서 내어 놓은 땅이고, 할매들 여름날 더위 피하는 정자는 어느 집 몇 대 어른이 한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온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콩단을 세워 말리고, 오가는 차를 세워 두고 하는 땅은 지지난 이장을 하셨던 분의 땅이다. 마을 소유의 산도 있어서 그것은 해마다 누군가에게 빌려 주고 돈을 받아서 마을 살림에 보탠다.

예전부터 학교 땅이든, 마을 땅이든 다같이 쓰자고 재산을 내어 놓을 때에는 학교와 마을 살림이 짜임새 있게 굴러갈 수 있을 만한 것을 내어 놓았다. 그래야, 결국은 없이 사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곤궁함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전통이 아직 살아 있었던 수십년 전에도, “민정당 시절에 불우이웃 돕는다고 빈 라면박스를 어른 키만큼 쌓아 놓고 사진 찍던 것들” 또한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100년쯤 되었다. 100년을 버텨오던 그 사이에 이런 식으로 살림 밑천을 마련해서 학교를 꾸려왔을 것이다. 누구는 땅을 내어 놓고, 누구는 손공을 보태고 하던 그 방식은 마을 살림을 꾸려왔던 경험 그대로다. 지금도 여전히 마을마다 대동회를 하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물론 돈 얘기다. 마을 재산이 있고, 마을 살림이 있어서, 그것을 한 해 동안 어떻게 꾸려왔는지 하는 것을 더할 수 없이 격렬하게 논의한다. 마을 일에 쓸 것으로 새로 숟가락, 젓가락, 냄비, 그릇 따위를 마련했던 해에는 어느 집 물건이 싸니, 그것보다는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그 건너 집에서 사야 좋은 것을 오래 쓴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한창이었다. 덕분에 읍내 그릇가게들이 어떻게 장사하는지도 알게 되었고. 마을 살림살이를 넣어 둘 새 창고를 지을 때는 그야말로 몇 백만원 하는 돈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서 지을 수 있는 숱한 창고들이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지어졌다 헐리기를 되풀이했다. 마을에 재산을 내놓는 것이야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살림을 사는 일에서는 너나없이 제집 살림처럼 달려든다. 땅이든 돈이든 많이 내어 놓았다고 유세를 떠는 일도 쉽게 보기 어렵다. 어쨌거나 마을 사람 모두가, 어디 허투루 돈 쓰인 데가 없는지 돋보기를 들이대고 내역서를 한 줄 한 줄 짚는 것이다. 그 와중에 무슨 일이든 혹여 어느 집에 손해가 가는 일이 없는지, 혼자 사는 할매, 형편 어려운 살림을 돌보지 않는 일이 없는지 따위를 살피는 것은 누구나 마음을 썼다.

지난 이화여대의 길고도 단호했던 싸움을 시작으로 온 나라가 촛불의 나라가 되었다. 읍내 터미널 앞 로터리에도 촛불을 든 손길이 있다. 거기에는 여러 바람들이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마을 살림을 꾸려가는 것처럼, 나랏돈을 쓰는 살림이 허투루 돌아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부디, 이 모든 것들이 나랏돈을 제 돈처럼 쓰는 것에 익숙한 오래 묵은 모리배와 기업들을 단죄하기를 바라는 이 마음은, 결국에 숟가락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죽어가는 젊은이가 없게 하고, 검은 바다에 빠진 아이들에게 진실을 들려주어 위로하고, 트랙터를 끌고 온 나라를 떠도는 농민들이 제 땅에서 농사짓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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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하야하라.” 서울 도심에서만 100만여명!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월드컵 때도,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도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비폭력으로 평화롭게 진행한 집회였다.

짱돌과 최루탄과 쇠몽둥이가 난무하던 1980년대 집회 광경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서울에서 333번 시내버스 운전 일을 하고 있었다. 거리엔 늘 데모대와 경찰이 대치했다.

내가 봤던 경험으로만 보면 데모가 가장 심했던 때는 1987년 6월이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체육관에서 간접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4·13 호헌조치’를 선언한 뒤, 각지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시민과 학생들은 백골단에 몽둥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고 피를 흘려도 항거를 멈추지 않았다.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즉각 퇴진’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쓰인 손팻말과 플래시를 켠 스마트폰, 촛불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정지윤 기자

전국 37개 도시에서 100여만명이 데모한 6월26일이 아니었나 싶다. 버스 운행을 하다 데모 때문에 길이 막혀 서울역 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 안에 있던 손님들이 다 내리고 한 명도 없었다. 서울역 광장에도,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도 데모대가 꽉 차 있었다.

그때였다. 서울역 광장 쪽에서 대학생 한무리가 백골단에 쫓겨 내가 서 있는 버스 쪽으로 도망쳐 오고 있었다. 얼른 차 문을 열었다. 최루탄 냄새를 훅 풍기면서 학생들이 타는데, 이게 웬일인가? 학생들이 주머니에서 회수권(당시의 학생들 버스 요금)을 하나씩 꺼내서 요금통에 넣으면서 올라오는 게 아닌가. “빨리 타! 빨리!” 하고 소리 지르니 학생들은 그때서야 부리나케 버스로 올라온다. 다 탄 뒤 얼른 문을 닫았다. 아슬아슬했다. 뒤이어 백골단 열댓 명이 쫓아왔다. 그중 몇 놈이 문을 두드렸다. 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백골단은 열이 받아 몽둥이로 버스 문과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때 남대문 쪽에서 또 다른 시위대가 내가 탄 버스 주변에 있는 백골단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는 보도블록을 깬 돌을 쥐고 있었다. 결국 백골단은 도망갔다. 버스 문을 열어 줬더니 학생들이 “고맙습니다!” 하면서 우르르 내렸다. 학생들은 길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고 다시 시청 앞으로 행진하면서 소리쳤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6월29일,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철회하고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직선제 개헌을 수락했다. 민중의 힘으로 얻은 값진 승리였다. 비록 그 뒤에 노태우가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그때 쟁취한 직선제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됐다.

2016년. 이젠 시위 현상이 많이 바뀌었다. 쇠몽둥이를 휘두르던 백골단도 해체됐고 최루탄과 짱돌도 사라졌다. 시위대는 청와대 400m 앞 효자동, 폴리스라인과 차벽 앞에서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국정을 운영하면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무슨 폭력? 세월호가 침몰하는데 구조는커녕 진상규명조차 안 하는 것,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로 죽게 하고 책임자 처벌을 안 하는 것, 자본이 노동자들을 비정규직 노예로 만드는 것, 약점이 있는 기업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 최순실에게 갖다 바친 것, 사드 배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맺는 것 등은 모두 당장 내 목숨을 빼앗는 폭력이다.

누군가 내 목을 조르고 있다면 손가락이라도 꺾어야 한다. 1987년 백골단에 쫓겨 내 버스를 타면서, 회수권을 내던 착한 학생들이 짱돌을 던진 행위는 목을 조르는 자의 손가락을 꺾는 행위다. 지금 박근혜·최순실 사태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때보다 결코 가볍지가 않다.

국가 수장으로서 자격을 잃은 박근혜 정권과 부패한 지배층, 그리고 수구 언론은 민중에게 선진국처럼 ‘폴리스라인까지만’ 합법집회, 평화시위를 하라고 ‘애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합법집회, 평화시위’를 하는 선진국은 대체 어느 나라인가? 선진국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져도 폭동이 일어난다. 하물며 나라를 말아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젠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계속 그렇게 민중들의 목을 조르면 손가락이 부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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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만에 돌아온 집과 농장은 참 고요했다. 가을색은 더 깊어져 있어서 곱게 늙어가는 귀인처럼 애잔해 보였다.

서울에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12일 밤 11시쯤 광화문광장 주무대에서 진행된 ‘시민자유발언’ 시간이었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생목소리들에 나는 압도당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성 연극인이 무대에 섰다. 주어진 3분 동안에 쏟아낼 말들은 너무 많았고 쌓인 울분은 산을 이루었다. 작품과 공연이 거부되었던 그 예술인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은 얼굴 전체를 큰 눈물덩어리로 보이게 했다. 예술인들의 자유혼을 짓누르고 고통을 기획한 당사자들을 지목했다. 조윤선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직접 거명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동자가 올랐다.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보였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작년 이맘때 같은 취지로 열린 민중총궐기 행사로 5년 징역을 산다면서, 한상균이 5년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500년도 모자랄 거라고 했다. 그 노동자의 바위 같은 결기와 노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살아야 했다는 중년 아저씨가 농민들 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마대 자루 옷을 뒤집어 입고 올라왔다. 12년 동안 513명이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 만들어져 1987년 처음으로 세상에 폭로된 형제복지원 사망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다 보니 장애인시설 인강원 사건과 노숙인 복지시설인 대구희망원 사건 같은 것이 줄을 잇는다고 규탄했다. 이화여대생은 최근의 이대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했고, 고등학생도 나서서 앳된 목소리로 정국을 규탄했다.

아는 선배 수행자가 쓴 시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는 “우리가 정녕 바꾸어야 하는 것은 이 체제, 이 구조, 우리가 살아오면서 길들여진 그 모든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그렇다. 권력을 규탄하며 스스로가 권력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부정과 비리를 지적하며 자신의 부정과 비리에 면죄부를 주지 않을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

선배의 글은 ‘(혁명은) 지금 여기서 개벽된 그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같이 글을 읽은 곁의 후배는 ‘지금은 분노와 저항을 조직할 때’라고 반발했다.

3일 동안 나는 ‘한살림 30주년 기념 대화마당’에 가서는 행사 주제처럼 ‘성장을 넘어 성숙의 사회로’ 가자면서 죽임의 세상에서 살림운동의 새로운 모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민중총궐기 대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쳤고, 그 주변 공모자들의 동반 퇴진과 처벌을 요구했다. 내 출판기념회에 가서는 ‘유쾌한 소농 이야기’를 했다.

도심 행진과 구호, 부족한 잠 때문에 두 눈은 뻑뻑하고 충혈되어갔다. 거울 속 내 모습도 몇 년 늙어 보였다. 서울의 밤과 낮은 참으로 격동의 연속이었고 내내 소란했다. 도심의 불빛이 소음과 뒤얽힌 기묘한 동거를 목격했다.

먼발치로 은행나무가 부푼 풍선처럼 서 있다. 그 위로 가을 찬비가 내린다. 바람이 살짝이라도 일면 빗방울 머금은 샛노란 은행잎은 한꺼번에 떨어질 판이다. 바람이 아니어도 산골의 정적을 깨고 까마귀 울음이라도 들린다면 우수수 떨어져버릴 듯 아슬아슬하다.

새로운 계절을 맞는 자연의 채비는 엄숙하다. 바람결과 빗방울 하나에도 자신을 하나씩 떨구어낸다. 추위가 몰려오는데도 껴입지 않고 도리어 한 꺼풀씩 벗는다. 엄한 겨울을 견뎌야 할 자연의 겨울채비는 실은 봄채비다. 꽃피울 새봄을 위해 벗고 버리는 것이다. 비상시국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자연의 가르침을 구한다.

전희식 | 농부·‘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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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아침, 늘 다니던 등굣길이 아니라 조금은 낯선 출근길에 마음 바쁠 네게 편지를 쓴다. 어느새 고3이 되었나 싶었는데 벌써 그 시간 끝자락에 섰구나. 얼마 전 네가 전화로 취업 소식을 전했지. 몇 차례 면접을 본 뒤라 전화기 저편 목소리가 밝더구나. 내 휴대전화기에 뜨는 네 이름 뒤에는 ‘○○중3’이 덧붙어 있어. 네가 중3이었을 때 처음 만난 게지. 이제 더는 중학생이 아니니 지워야지 생각하면서도 편집 단추를 누르고 삭제 단추를 누르는 일을 자꾸 미룬다.

지난해 봄, 우연히 너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신 날이 있었지. 식당을 향해 나란히 걷는 길에서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도 너는 내 옆에서, 내 앞에서 뭔가 혼자 계속 망설이더구나. 무척 말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절대 말하기 싫은 마음이 입으로, 눈으로 불쑥불쑥 삐져나왔지. 어떤 말은 밖으로 나오기까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해. 남에게는 심각하지 않아도 단 한 사람 자신에게는 무겁고 아프고 절실한 말.

오래전, 그때 일흔이었던 한 어르신을 만난 일이 있어. 그분한테 돌아가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였어. 이야기가 몇 고개를 넘다 막다른 곳에서 당신이 60여년간 숨겨둔 이야기가 툭 튀어나왔어. 병든 어머니가 혼자 산막에서 돌아가셨대. 이렇게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지? 하지만 열두 살 어린 여자아이는 그 일을 가슴에 콱 묻어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어. 커가면서 알게 된 친구에게도 함께 살림을 꾸린 남편에게도 착하디착한 자식들에게도. 차마 가보지도 못하고 외할머니께 전해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말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많은 해가 지나도 바로 어제 일인 듯 눈물을 쏟으셨어. ‘마음이 아프다’는 게 기분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걸 그날 알았어. 가슴 한복판이 쑤시고 아려 주먹으로 쳐대고 손바닥으로 문지르는데 밤새 가라앉질 않았어. 60년 된 이야기,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

지난해 봄 네가 처음 꺼냈다가 올가을에 이어서 해준 이야기. 네게도 10년이 된 이야기가 있더구나. 어느 일요일 아침, 네가 울린 전화. 만나고 싶다는 네 말에 언제 만날까 달력에서 날짜와 요일을 헤아리다 갑자기 이게 아니지 싶었어. 네가 전화한 건 ‘지금’이 필요해서일 텐데 싶어 당장 그날 만났지. 네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봤어. 그 봄에는 울었는데 이 가을에는 울지 않고 이야기를 했지. 말하고 나니 시원하다며 웃었지. 돌아서면, 혼자 있으면 다시 아플지 몰라도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네 스스로 활짝 폈지.

취직을 축하한다 말했지만, 사실 걱정이 앞서. 회사가 근로기준법은 제대로 지킬지, 함께 일할 선임들은 공명정대할지, 성차별에 성희롱·성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은밀하게 벌어지는 건 아닐지.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지, 어엿한 동료 노동자로 인정하며 대우해줄지, 네가 한 사람으로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곳인지. 잘못되고 부당한 것에 기죽지 말고 “안돼!”라는 말을 네 있는 힘껏 소리치기를,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 믿는 수밖에.

그런 모든 걱정을 안고서도 축하해. 네 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첫 발걸음을 무엇으로 축하해줄까 생각하다 선물을 하나 마련했어. 여성의 삶과 노동에 집중해 여러 글을 쓴 작가 안미선씨가 얼마 전에 낸 <모퉁이 책 읽기>(이매진)라는 책이야. 글 마흔 편에 책 마흔한 권을 소개했어. 그런데 읽다 보면 글 안에 새로운 책이 더 많이 나와. 두고두고 읽을 책이 생기는 거지. 어디서 쉽게 구하지 못할 목록이 될 거야. 책 이야기만큼 마음이 가는 게 있는데 바로 사람 이야기야. 삶의 여러 모퉁이에 서 있었던 작가와 작가의 친구들, 작가가 만난 사람들과 세상, 그리고 소개하는 책 안에서 숨 쉬는 여자들을 만날 거야. 네가 아직 겪지 않은 시간, 가보지 않은 길 위에 먼저 섰던 여자들이 네게 친구가 되어줄 거야. 마음결이 섬세한 작가가 세밀하게 펼쳐 놓은 글에서 너는 힘을 얻을 거야. ‘저래서 여자는 안돼’라는 맥락 없는 말이 흉기가 되어 버젓이 판치는 세상에서 네가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시간을 북돋아 줄 거야.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그 뒤를 이어 네 이야기를 써보렴. 책 속 여자들과 책 속의 책 속 여자들이 함께 기뻐할 거야. 곧 만나자.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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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그림 원고 뭉치를 받았다. 두툼한 파일로 몇 개. 10여년 동안 다달이 꼬박꼬박 연재되었던 그림이라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고기, 짐승, 풀과 나무, 살림살이, 마을의 집들, 소리와 맛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그림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작은 그림 하나에 담겨 있었다. 단순하고 아름답고 유쾌했다. 그림 하나하나에는 우리말 이름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에 일본어로 뜻과 우리말 소리가 적혀 있었다.

10월 초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 ‘파주북소리’의 프로그램 가운데 홍영우 화가의 그림책 원화 전시회가 있었다. ‘온 겨레 어린이가 함께 보는 옛이야기’라는 주제로 10년 동안 그린, 20권의 그림책 완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홍영우 선생이 올 수 있었다. 모두들 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는데, 오셨다. 일본에서 조선적으로 살고 있는 선생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다. 2010년에도 인사동에서 선생의 전시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오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에는 별 어려움 없이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일본에서 조선적으로 살고 있는 재일동포 전체가 비슷한 처지다. 선생이 온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고, 지금도 다른 조선적 재일동포의 한국 방문은 어렵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다른 일들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지만, 이렇게 약하고 힘없는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은 잘 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말 도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던 원고 뭉치는 선생이 10년 동안 20권의 옛이야기 그림책을 그리기 전, 10년 동안에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선생의 손주들이 다니는 학교, 그러니까 우리학교(일본의 조선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보이는 그림이었다. 우리학교의 유치원이나 초등 과정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처음 우리말을 배울 때 보는 그림. 쉽게 말한다면 낱말 그림책 같은 것. 이 아이들은 조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일본말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초등 2, 3학년만 되어도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 정도 시간에 외국어 하나를 배우는 셈이다. 바로 그동안에 아이들은 선생의 그림을 늘 옆구리에 끼고 지낸다.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이신 선생은 꼬박 20년 동안, 손주뻘 되는 아이들에게 보일 그림을 그리는 일에 매달린 셈이다. 화가로서 선생의 작품인, ‘쇠장(소시장)’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국가보존작품으로 소장될 만큼 뛰어나다. 재일동포 화가의 대표격으로 국내에서도 따로 전시회가 열릴 만큼 우리나라 화단에도 선생의 그림은 알려져 있다. 그렇게 자기 그림을 줄곧 그려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할아버지가 된 선생이 그린 그림은 낱말책 그림, 옛이야기 그림 이런 것들이었다.

선생은 이 원고를 두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손에 쥐여질 수 있다면, 그것 말고는 바람이 없다고 하셨다. 10년간 매달 연재된 그림은 일본에서 한 권 분량만이 책으로 나왔다. 그 몇 배가 넘는 나머지 그림들은 아직 나오지 못했다. 그 일을 부탁하고 가셨다. 요즘 일본의 우리학교 형편은 좋지 않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자면 아주 적은 돈을 써서 운영하는 학교다. 하지만 작년인가 다음 스토리 펀딩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조선학교 아이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유쾌하게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선생들도,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손주를 학교에 보내놓고 그 아이들을 위해 10년 동안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가 있었겠지. 그저 겉보기로는 그림책 몇 권을 내는 일로 보이는, 그러나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마음이 담기는 일을 맡게 됐다. 이 일만큼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 요량이다. 벌써 어디어디, 누구누구 하는 식으로 머릿속에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 때마다 꺼내 보기 좋도록 손 닿는 자리에 그림들을 꽂아 두었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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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연을 가끔 한다. 사람들은 모두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그 이유와 동기는 참 다양하다. 자기소개서를 잘 써서 취직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책을 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자기 삶을 기록해 놓고 싶다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글을 못 써서 직장 상사에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고 ‘복수’하려고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수강생들은 내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고 했다. 내가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다. 나는 1985년부터 2005년까지 버스 운전을 했다. 그 당시 시내버스 기사들 근무여건은 너무 열악했다. 임금이 너무 적었고 쉴 시간이 없었다. 사업주들의 욕심 때문에 운행시간이 너무 짧아 정해진 시간에 노선을 돌아오려면 난폭운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 인상과 여유 있는 배차시간을 요구하며 1년에 한 번씩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했다.

하지만 그 파업은 사업주와 정부가 짜고 어용노조가 들러리를 서서 했던 위장 파업이었다. 그런데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신문들은 ‘난폭운전을 일삼는 버스 기사들이 웬 파업?’ ‘이런 가뭄에 웬 파업?’ 하면서 비꼬았다. 나는 그런 신문을 보면서 분통이 터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신문사 기자들이 시내버스 속내를 몰라서 그렇게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수구 신문들은 다른 노동현장에서 파업을 해도 그런 식으로 기사를 썼다. 나는 글을 써서 시내버스 현장을 고발하고 싶었다. 결국 글쓰기를 배웠고, ‘한겨레’와 ‘작은책’에 글을 연재해 시내버스 기사들의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시내버스 파업이 위장 파업이라는 걸 고발했다. ‘사업주도 파업하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글이다.

<1984년>과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글을 쓰게 된 동기로 네 가지를 들었다. 그 네 가지는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이다. 조지 오웰이 말하는 정치적 목적이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조지 오웰은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렸고, 스페인 내전에서 스탈린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탄압, 그리고 파시즘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고발했다. 조지 오웰은 본래 자연주의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과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사, 2010)

요즘 한국은 미학적인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파시즘 시대로 돌아가 버렸다. 세월호 참사로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304명이 수장됐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경찰은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을 죽여 놓고 부검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최순실은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을 만들어 재벌들에게 모두 800억~900억원을 뜯어냈다(미르는 ‘용’이라는 뜻이다. 박근혜가 용띠다).

게다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이화여대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학칙에 없었던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경력을 면접에 반영하는 특례를 제공받아 입학하고, 출석하지 않고도, 시험을 보지 않고도, 비속어와 맞춤법도 무시하고, 표절까지 한 리포트에 B학점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

이렇게 권력형 비리 의혹이 백일하에 드러나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실체가 없다”고 뭉개 버린다. 게다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까지…. 탄핵당할 사유만 나열해도 끝이 없겠는데 ‘실체가 없다’고 무시해 버린다. 이런 사회가 파시즘 사회다.

이런 걸 고발하는 글쓰기는 중요하다. 그런데 파시즘 국가에서는 행동도 중요하다. 백남기 농민을 강제 부검하는 폭력엔 당장 행동으로 저항해야 한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경고했다. “권력을 감시하지 않고, 권력이 부패하는 순간 저항하지 않는 대중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전체주의가 출현”한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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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고 해서 들깨 타작을 서두르는 날이었다. 베어 놓은 지 4~5일 지났는지라 잘 말라서 ‘가빠’를 깔고 한 곳으로 모으는데 따가운 햇살이 새삼 고마웠다. 들깨를 벨 때는 이슬이 덜 깬 이른 오전이 좋지만 타작하기에는 햇살 따가운 오후가 좋다.

옮기기 좋게끔 반 아름 정도씩 끌어모으는 때도 그렇고 그걸 양팔에 안고 올 때도 그렇다. 무척 조심스럽다. 깨알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니까 충격이 가지 않도록 걸음도 사뿐히 걷는다. 내려놓을 때는 반대다. 소리 나게 턱 내려놓는다. 한 알이라도 털어지라고.

들깨를 벨 때도 조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낫을 예리하게 갈아서 들깨 밑동에 댄 채로 비스듬히 당겨 올려야 깨알이 떨어지지 않는다. 충격이 가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이보다 더 조심하는 단계가 있다. 들깨 베는 날과 시간을 정하는 때다.

적어도 닷새 정도는 날이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어야 하고 참새 떼 눈치를 봐야 한다. 기민하고 주의 깊게 살펴서 밭에 들어가는 순간을 정해야 한다.

들깨가 익으면 참새 떼가 귀신처럼 알고는 몰려든다. 익지 않은 들깨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들깨 뿌릴 때도 들켰다가는 다시 뿌려야 할 정도로 참새는 들깨를 좋아한다.

애써 농사지어서 참새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속 편한 말로 들짐승이나 날짐승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들깨 밭의 참새는 다르다. 이놈들이 쪼아 먹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데 들깨 밭에 내려앉거나 날아가는 순간에 들깨가 우수수 떨어진다.

들깨 잎을 따서 반찬을 만들 때도 시퍼런 잎보다는 들깨가 익어가면서 깻잎이 노르스름해질 때가 좋지만 이때는 함부로 밭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곁을 돌면서 잎을 딴다. 하물며 사람조차 조심하는 이런 때에 참새는 거침이 없다.

참새들의 활동은 이른 아침부터 낮 동안 계속된다. 그래서 먼저 참새 떼가 밭에 날아 와 있는지를 보고 없으면 일을 시작하지만 참새 떼가 있으면 날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베기 시작해야 한다. 불쑥 다가갔다가는 놀란 참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면서 들깨 손실이 크다.

올해는 맑은 날이 많아서 농사가 풍년이다. 들깨 알도 굵다. 자근자근 첫 번 털기에서 깨가 와르르 쏟아진다. 초벌 털기가 끝나면 다시 소리 나게 내리치는 두벌 털기를 한다. 들깨 더미를 옮겨 쌓으며 깨알은 자루에 담는다.

비 소식만 없다면 그냥 덮어 뒀다가 다음날 바람에 드리우겠지만 일단 자루에 담아 집으로 옮긴다. 들깨 자루는 가볍다. 물에도 뜨는 식물성 기름이 가득 차 있어서다. 쌀 20㎏짜리 마대에 가득 담아도 12~13㎏이 될까 말까다.

가을 해는 짧다. 어둑발이 내리는가 싶더니 가로등이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안되는 가로등이다. 조금 남은 일거리는 불빛 없이도 얼마든지 마칠 수 있다. 지난여름에 가로등을 꺼 달라고 군청에 전화해서 겨우 꺼 놨는데 왜 가로등이 또 들어올까. 가로등은 해당 주민이 손댈 수 없게 되어 있다. 안전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농작물 피해로 가로등을 꺼야 할 때도 담당 관청에 연락해서 꺼 달라고 해야 한다.

인적조차 없는 시골길에 밤 내내 환한 가로등은 빛 공해다. 더구나 무와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데 가로등은 치명적이다. 쉬어야 하는 밤에 약한 빛이라도 있으면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하려고 시도한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쉬지 않고 일을 하면 스트레스 물질이 체내에 쌓인다.

가로등 불빛이 있는 쪽 콩이랑 들깨는 익어 갈 생각도 않고 만년 청년으로 살겠다는 듯 자라지도 않고 잎만 무성하기에 가로등에 적힌 대로 전화를 했더니 받지를 않았다.

평일 낮 시간만 통화가 된다는 걸 통화가 된 며칠 뒤에 알게 되었다. 이날도 늦었다. 어차피 다음날 전화해서 가로등을 꺼 달라고 해야 할 상황이다. 이렇게 가을날 하루가 저물었다.

전희식 | 농부· ‘소농은 혁명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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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페루에서 국가폭력, 학살이 담긴 사진을 보았다. ‘아야쿠초’라는 마을 이름이 보였다. 리마에서 꽤 떨어졌고 더 가면 마추픽추다. 민박 주인이 왜 마추픽추에 안 가냐 했다. 이미 알아버린 이름, 아야쿠초 때문이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나섰다.

버스가 밤새 달려 아침 무렵 아야쿠초에 다다랐다. 한 건물 바깥벽 그림이 눈에 띄었다. ‘기억박물관’이다.

3층 전시실에는 희생자 생전 사진, 마지막에 입은 옷, 학살 현장 사진, 그림, 조형물, 한 여성이 “왜 내 아들을 죽였는가?”라고 쓴 팻말을 든 사진, 부모나 형제자매를 잃은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 진실을 밝히려 20여년 투쟁한 여성들의 사진, 지나온 과정 기록이 있었다. 담당자한테 설명을 듣다 왈칵 울었다. 여자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시간과 공간이 아무리 떨어져도 사람은 이어졌다.

십년 뒤, 한국·안산·고잔동에서 ‘416기억저장소’와 ‘416기억전시관’을 본다. 부서진 304명의 꿈이 생명을 존중하는 세상으로 피어나게 ‘기록하고 기억하며 행동’ 하자 한다. 지난주 금요일, 상가건물 3층 416기억전시관 전시실에서 단원고 2학년 2반 김수정 아빠가 시를 읽었다.

“수정아, 보고 있니?/ 아빠가 네 얼굴을…” 1연 2행 한가운데서 소리가 뚝 멈춘다. 앞에 선 아빠도, 바닥에 앉아 듣던 사람들도 모두 침묵에 갇힌다. 긴 침묵을 함께 견딘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들었을까. “아빠가 네 얼굴을 십자수로 떴어./ 하루에 9시간씩 11개월이나…” 가까스로 이은 시가 다음 행에서 다시 끊긴다. “…십자수 바늘을 붙들고 있었어.” 남은 행과 연을 아빠는 포기하지 않고 다 읽었다.

기억시 낭송문화제 ‘금요일엔 함께하렴’은 지난 9월23일에 시작해 내년 4월14일까지 금요일마다 오후 7시에 열린다. 2주나 3주에 걸쳐 한 반씩 아이들을 시로 읽고 만난다. 교사 모임 ‘교육문예창작회’ 작가 35인이 단원고 학생과 교사의 삶을 시로 썼다.

“3년 가까이 되는데 진실이 밝혀진 게 없다. ‘이제 그만 하지’라는 말을 들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딸 하고 약속한 게 있다. ‘네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겠다.’ …딸과 한 약속을 지켜서 이 나라가 반듯하고 안전한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 번째 금요일에 1반 유미지 아빠가 한 말이다. 유가족 이야기, 진상규명·세월호 인양 이야기, 안산 주민 이야기, 가수의 노래 순서도 있다. 다른 이의 말과 시, 노래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난다. 8반 이재욱 엄마는 “기억시 낭송이 하나의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화가 홍성담 그림 전시회 ‘들숨ː날숨’도 함께한다. 참사 1000일인 2017년 1월9일까지 전시한다. 유가족이 안내원, 도슨트로 시민과 만난다. 단체로 관람을 올 때는 미리 연락을 주면 좋다. 1반 한고운 엄마가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20분’이라는 그림을 말한다. 세월호가 110도 기운 시각, 그림 속 아이들은 흰 눈물을 흘리며 가라앉는 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저 아이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저 아이의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 사랑했던 엄마 아빠, 모든 것들과 이별하는 얼굴입니다. 그날, 해경들은 구조를 위해 달려왔지만 저희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 채 제일 먼저 선원들만 구조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바다 속에 잠겨서 하나둘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7반 허재강 엄마가 목단 가득 핀 그림 ‘내 몸의 바다2’ 옆에서 화가가 한 말을 전한다. “그 마지막 물고문 학살의 고통스러운 순간에 직면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유가족이 먼저 용기를 갖고 직면을 하게 된다면 국민들도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을 대면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생명의 귀중함을 알게 되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만이 제2의 세월호 학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엄마들이 눈물을 삼키며 그림을 설명하는 이유다.

세월호, 안산, 고잔, 단원고…, 이미 당신이 알아버린 이름. 사진과 영상은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길을 나서보자. 416기억전시관에서, 그림과 시와 말 사이에서 곰곰 오늘을 만나자. 안내하는 이의 설명을 듣다 왈칵 울어도 된다. 발걸음이 이어지면 진실규명에 힘내자, 함께하자는 응원이 되리라.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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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전샌. 작년에 쌀값이 1할 빠지더니, 올해는 거기서 1할이 더 빠졌네. 그것도 농협에 낼 수나 있으면 다행이라고. 이제야 타작하는 게 시작인데. 어찌될지 몰라. 내가 전샌 앞에 두고 돈 치르는 얘기 말고 할 게 없네.”

괭이질해서 논두럭 올려붙이는 것, 논에 물길 내서 물 대고 빼는 것, 풀 맬 때 손 놀리는 것, 거름 장만해서 논에 넣는 것. 어느 것이든 하는 모양새가 엉성하다 싶으면 손수 해 보이시고, 일러 주시던 어르신이 경운기에 나락을 싣고 농협에 다녀와서는 기운이 없다.

수매를 마치고 온 이웃 어른이 한마디 덧붙였다.

지난 1일 오후 ‘백남기 농민 추모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백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서울 종로구청 인근에 모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 쌀이 남는다고. 농사짓는 땅을 버려. 쌀 남는 게 농사가 많아선가. 남의 양식 돈 내고 사다 먹는 일이 하, 언제까지고 그러겠나. 배 곯으면 양식 앞에 댈 게 없네. 지금이야 어디 농사 있는 집, 없는 집 할 것 없이 정지(부엌)에 외국산 잔뜩 재놓고 먹고 있지 않나. 그 사람들이 농사 망하믄 돈 주고도 못 사와. 여기 땅에서도 생전 안 난다던 지진이 나는데, 흉년 드는 거야 조석 드는 것처럼 오고 간다고.”

지난달, 이웃 지역 관청 앞에는 나락이 쏟아졌다. 짐칸 가득 나락을 싣고 온 트럭이 줄줄이 관청 마당에 들어섰다. 가마니를 째고 맨바닥에 나락을 쏟았다. 하루이틀 전 베어진 나락이 타고난 운명이란 것은 곳간 천장 닿을 듯이 쌓여서, 두고두고 한 해 먹을 양식이 되어야 했을 텐데. 흙바닥도 아닌 시멘트 위, 한데로 내동댕이쳐지듯 땅바닥에 쏟아졌다. 지나던 노인 안쓰럽게 보다가 저절로 손이 간다. “거, 참 나락 실하네.”

맨바닥에 나락이 쏟아진 다음, 봉홧불 이어가듯 들판 여기저기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이삭마다 알알이 누런 벼, 손바닥에 놓고 슬슬 비비기만 해도 구수한 나락 냄새 나고 쌀알이 벗겨지는 벼들이 선 논에 트랙터가 들어섰다. 한 해 지낸 것을 고스란히 알곡에 담아 나올 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질척한 논바닥에 벼 이삭이 고개를 처박았다. 논 주인이 트랙터에 올라 앉아 논바닥을 뒤집는 동안, 마을 어른들 논둑에 쭈그리고 앉아 말이 없다.

작년, 가뭄이 심했던 어느 모내기철에 물이 말라 쩍쩍 갈라진 논을 TV에서 보여준 적이 있다. 어린 모가 서 있는 꼴이 어디서 물만 끌어 올 수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두레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여릿한 어린 모에 물을 댄다더니, 대통령이 한낮 땡볕 아래에서 소방차 호스를 붙들고는 앞뒤 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논바닥에 냅다 뚫어져라 물줄기를 쏘아대던 일이 있었다.

농사꾼이라면 누구든, 쓰러지고 뽑히는 모 한 포기 한 포기 때문에 더 쳐다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호스를 들고 있는 사람의 아무 표정도 없고, 걱정도 없어 보였던 얼굴 또한 쳐다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마 백남기 선생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선생은 그 물줄기에 내동댕이쳐졌다.

백남기 어른이 쓰러졌던 날은 선생이 밭에 밀을 갈고 이틀 후였다. 겨울 농사를 차근차근 챙겨 놓은 농사꾼 백남기는 더 이상 쌀, 값이 고꾸라져서는 안된다며 휘황한 도시 한복판, 젖은 길 위에 서 있었다. 선생의 말은 한 해가 지나 ‘거기서 1할이 더 빠진’ 쌀값 소식을 답으로 들어야 했다. 심지어 올해에는 다 익은 벼가 논바닥에 처박혔다는 이야기도 병실 안을 떠돌았을 것이다. 벼가 묻히고, 닷새가 지나 선생이 돌아가셨다.

시인 박형진이 농사 연장에 대해 책을 쓴 것이 있다. 낫을 두고는 “새벽 이슬에 젖은 연한 풀을 베는 낫은 짐승을 살리고, 땅을 기름지게 하고 …스르륵스르륵 벼를 베는 농부의 손에 들린 낫은 평화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연장이 제 쓰임대로 쓰이지 못하고, 낫을 든 농사꾼이 논밭에 있지 못했던 것처럼 농민이, 나라가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도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써 놓았다. 제 논을 꾹꾹 다 다져 밟은 트랙터는 아스팔트 길 위에 논흙을 떨구고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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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작은책’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백남기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백남기씨는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은 뒤 중태에 빠져 316일 동안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오고 있었다. 경찰이 서울대병원의 모든 출구를 봉쇄했다는 소식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검찰이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강제로 침탈할지도 모른다는 소식도 올라왔다.

시신을 부검하려는 이유는 뻔하다. 물대포를 맞아서 죽은 게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거다. 수술할 때 이미 담당 의사들이 외부 충격에 의한 출혈이라고 진술했는데 뭘 부검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 공무원U신문

아니 수많은 시민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을 보지 않았는가.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그렇게 직사했는데 어떤 사람이 버텨내겠는가. 무엇보다 살인한 자들이 살해당한 사람을 부검하겠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할 가능성도 있다. 1991년 안양에서 경찰이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가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자살로 결정내리고 화장을 해버린 적도 있다. 또 2005년에는 경찰폭력으로 희생된 전용철, 홍덕표 농민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올 때까지 ‘두 농민의 사인이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 평소에 앓던 지병 탓’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수백명의 사복형사들을 군사작전 하듯 장례식장에 투입”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조문’하겠다는 사람을 설마 경찰이 막을까 하는 마음으로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우리의 경찰’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세상에 병원 문을 이렇게 틀어막은 정권은 유례가 없었다. 장례식장 앞에도 경찰이 5중, 6중으로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어제 병원으로 들어온 시민들이 안쪽에서 못 나오고 있고, 이쪽에서는 장례식장으로 못 들어가고 있었다. 경찰 너머로 노회찬, 박주민, 표창원 의원이 보인다. 지인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지난 24일 오후 9시쯤부터 장례식장 앞에 사복경찰 100여명이 들어왔고, 병원 내부에도 사복경찰 10여명이 들어왔다고 한다.

“조문하겠다는데 왜 막는 거야?” “경찰 물러나라!” 시민들이 항의하면서 경찰과 몸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민이 한 명 다치고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가량 몸싸움을 하는데 경찰이 방송을 한다. “경찰 병력을 철수시킬 테니 조문하세요.” 시민들이 소리 질렀다. “니들이 뭔데 조문을 허락하냐?” 경찰이 막고 있던 문에서 물러났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길게 줄이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조문을 했다. 백남기씨는 나하고는 한번도 만나본 분도 아니고 어떠한 인연도 없다.

그런데 푸근한 인상으로 싱긋이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보니 울컥했다. 사실 백남기씨는 평범한 농민이 아니었다. 박정희 때부터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이다. 1980년 서울의봄 때도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을 살기도 했다. 그 뒤 고향으로 돌아가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도 역임했고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광주 전남본부의 창립을 주도하며, 1994년에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두환 때도 치열하게 싸우면서 살았던 분인데, 어떻게 이 정권의 물대포에 허망하게 가실 수가 있단 말인가. 참담했다.

조문을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가 봤다(장례식장은 돈화문 쪽 길에서 보면 3층이다). 학생들, 시민들이 드문드문 복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입구에는 200여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다. 주차장과 길 앞에 있는 정문 앞뒤로는 경찰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게 몇 겹으로 막고 있다.

장례식장에 참석한 세월호 유가족인 유경근씨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추모만 하러 온 것이면 안된다. 추모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 언제까지 미안하다고만 할 것인가. … 그건 사람이 사는 방식이 아니다. 이제 떳떳하게 살자. 이 자리에 몇 시간 있다 간 걸로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말자.”

뜨끔했다. 나한테 하는 소리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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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에는 우리 식구만 셋이 모이게 되어서 진짜 제대로 된 차레상을 차리고 싶었다. 그동안 명절 때마다 겪었던 의미 없는 의례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식들 때문에 명절 자체에 흥미를 잃어왔던 터라 내 소신과 내 정성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나는 미리 알아본 바가 있는지라 그 도움말대로 하나씩 준비했다. 내가 알아본 것은 두 방향이었다.

하나는 차례가 아니고 차레라는 것이다. 차례(茶禮)는 한자말의 훈에 있듯이 차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는 것으로 물이 탁해서 늘 차를 달여 마셨던 중국얘기이고 앞 뒷산에 약수가 철철 흐르는 우리나라는 차례가 아니라 차레를 했다는 것이다. 차레는 채우고 비운다는 뜻이다. 모든 제례는 결국 채우고 비우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워내고 나서 채우는 게 아니라 맑고 밝은 사랑과 용서와 포용으로 채워나가면 탁하고 어리석고 욕심스러운 것들이 그냥 비워진다는 얘기다. 참 의미심장하다.

다른 하나는 간소하면서도 정성스러움이다. 이것은 동학연구가인 김용휘 교수의 도움말에 전적으로 따른 것으로, 내가 동학의 가르침대로 ‘청수일기’(허례허식을 버리고 맑은 물 한 그릇으로 장독대 비손하는 마음)와 ‘향아설위’(죽은 귀신이나 벽을 향해 상차림을 하는 게 아니라 한울로서의 나 자신을 향해 상을 차리는 것), 그리고 ‘천지부모’(하늘, 땅, 세상 만물이 한 부모) 정신으로 상을 차리고 싶다고 기준을 제시했었는데 김 교수는 딱 한마디로 대답을 해줬었다. ‘간소하고 정성껏’이라고.

이런 두 방향에서 차레를 구체화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차레상 뒤쪽에 하얀 종이를 3면으로 접어 세우고는 각 면에 ‘조상님’, ‘큰 스승님’, ‘만물만상’이라고 썼다.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고조부까지만 모시려니 허전했었다. 우리 직계 조상님뿐 아니라 세상의 큰 스승들의 가르침으로 나를 채우고 싶어서다. 여기에 후손 없는 귀신이나 사람의 형상을 하지 못한 생물, 미생물도 다 모시고 싶은 마음도 담았다.

새 물과 새 차를 넣어 뜨겁게 우려낸 보이차 세 잔을 세 위패 앞에 놓았다. 보이차를 올릴 때는 한 사람이 한 잔씩 찻상에서부터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신부걸음으로 조심조심 걸어서 왔다. 보이차 앞쪽에는 새로 출간된 내 책 한 권, 유기농 사과 한 알을 놓았다. 이게 차레상의 전부였다.

그 다음 진행순서도 식구들이 즉석에서 정했다. 한 사람씩 차레상 앞에 나가서 서원을 올리기로 했다.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었고 어떤 사람은 가부좌를 했다. 식구와 이웃, 사회와 세상에 대한 서원을 올린 사람도 있었고, 조상과 스승들의 큰 가르침에 감사와 고마움을 구구절절 표한 사람도 있었다.

절은 안 했다. 음식과 위패에 절을 하는 것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공개서원을 끝내고 삼각점에 마주 서서 맞절을 했다. 1배만 할까 아니면 3배를 할까 물으니 다들 3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한 동작 한 동작을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 서로에게 3배를 올렸다. 그러고는 서로를 깊이 포옹하면서 덕담을 나눴다.

차레상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은 우리는 덕담을 이어나갔다. 아들이 대행 스님의 <한마음 요전>에서 읽은 예화를 소개했다. 포수가 사냥을 나서서 들오리 한 마리를 쏘았는데 어떤 한 마리가 도망을 가지 않고 피 흘리는 오리를 얼싸안고 울더라는 것이다. 죽은 오리의 짝꿍이었다. 이를 보고 포수가 총을 버리고 사냥을 그만두었다는 일화였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실천한 짝꿍오리 덕분에 숲에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런 유의 덕담을 나도 하나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 무덤 앞에서 가져간 음식에 따가운 볕을 발라가며 안 남기고 다 먹었다. 중학교 때 도시락에다 딱 밥알 하나를 남겨왔다가 어머니에게 부지깽이로 혼이 났던 기억을 되새기며.

전희식 | 농부, ‘소농은 혁명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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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교동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을 몇 번 꺾어 들면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이 나온다. 그곳 지하 1층 국제회의실에서 지난 9월1~2일에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제3차 청문회가 열렸다. 큰 주제는 ‘4·16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의 조치와 책임’이었다.

들을 청, 들을 문. 청문회는 증언을 듣는 자리다. 당연히 말해야 할 이들이 있어야 한다. 말하는 이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만을 말하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먼저 다짐해야 한다. 특별조사위원회가 ‘국가의 조치와 책임’에 대해 따지려 참사 당시 해경·해군·해수부·경찰청·청와대 관계자에게 증인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한 명도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와 시민사회·종교계 원로들이 6일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 농성장 앞에서 세월호특별법 개정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을 요구하는 비상시국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방청인 발언에 나선 김성묵씨는 오지 않은 증인을 향해 말했다. “그 진실이 얼마나 무섭길래 나오지도 못하고, 외면하고, 가리려고 덮으려고 합니까?” 김성묵씨는 세월호에서 소방호스로 학생들을 끌어올려 구했던 이다. “아이들이 저한테 ‘아저씨 어떻게 해요’라고 물었을 때 방법을 몰랐습니다. 뭘 해야 될지 몰랐고, 무슨 말을 해줘야 될지 몰랐습니다. 제가 부모님한테 정말 죄송하다 느끼고 죄스러워서 지금까지 871일, 그사이에 부모님들 눈을 쳐다보지 못했던 게 어쩌면 그 아이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 아이 질문에 답변을 못했던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게를 잴 수 없는 말, 지금까지 그가 혼자 지고 온 짐을 앞으로도 계속 혼자 져야 할까. 앞서 그가 한 물음은 오지 않은 증인한테만 해당하는 게 아니겠다.

참고인으로 나온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로막히고 감춰진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전 국민이 “총력을 다해 구조에 나섰다”는 뉴스 앞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 실상 현장은 그렇지 않았다. 민간 어선을 구해 사고 해역으로 향한 가족도 배 안에서 그 뉴스를 보았다. “현장에 가니 아무것도 않고 있는데 너무 놀라웠다. 기자들한테 구조하지 않는 현실만 그대로 보도해 달라 했는데 돌아와서 방송하지 않았다.”

‘피해자 처지’에서 ‘피해자가 바라는 바’를 살펴야 할 경찰은 참사 첫날부터 피해자를 ‘감시’하고 ‘동향을 관찰’하고 ‘성향을 분석’했다. 피해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고 ‘무시’하고 ‘고립’시켰다. 고립을 벗어나려는, 진실을 찾아나서는 움직임은 ‘가로막고 틀어막았다’. “난민들이 겪는 아픔, 보호받지 못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는데 지금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오지 않은 증인들을 빼고도 청문회에서는 알아야 할 일이 많이 나왔다. 인터넷으로 다시 볼 수 있다.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 말은 꼭 보고 듣고 읽었으면 싶다. 그이들 말 바탕에는 ‘생명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자리한다. 그중 하나, 여기 새겨둔다. 단원고 2학년5반 박성호의 큰누나 박보나씨가 한 말이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의 형제자매는 230여명이 있습니다. … 우리는 왜 아직도 내 형제들을 죽게 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미안하다고 모두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던 어른들은 지난 2년간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 희생된 학생들의 형제자매이고 친구인 우리, 우리 세월호 세대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히 보았고 기억합니다. 우리의 연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고통의 시대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참사로 형제자매를 잃고 다짐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할 줄 모르고, 자신의 일에 책임지지 않고 도망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그런 어른은 되지 않기로, 그리고 공감하지 못하는 괴물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특조위도 인양도 모든 게 침몰하고 나면 우리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티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시민분들, 제발 이번 청문회가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이 함께 만들어주신 특별법과 특조위가 그대로 침몰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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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는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가 있다. 지금껏 15년쯤 이어진 잡지. 대전에는 ‘토마토’, 수원에는 ‘사이다’라는 잡지가 있다. 지난주에 이 잡지를 펴내는 사람들, 그리고 또 다른 지역에서 책을 내는 잡지사와 출판사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전국에서 알음알음으로 책 낸다는 집은 얼추 모였다고는 하지만, 도나 광역시마다 고작해야 한둘. 한국의 출판사와 잡지사는 거의 다 수도권에 있다. 수도권과 그 나머지, 이런 구분만이 실감이 있다. 출판사의 숫자를 헤아려봐도 마찬가지다. 지방엔 손으로 꼽을 만큼이다. 그래서 상추쌈출판사는 경남 하동 촌구석에 있지만, 출판사를 운영하는 조건은 부산이나 광주 같은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요즘 서울이든 지방이든 어디에서나 작고 새로운 책방들이 생겨나듯, 지방에서 책을 내는 출판사도 늘어나고 있다. 하나같이 작은 출판사들이다. 새로 생긴 책방들이 저마다 주인장 성격이 드러나게끔 고르고 고른 책을 늘어놓는 것처럼, 지역에 있는 출판사들도 그렇게 책을 펴낸다. 요즘엔 책을 찍는 인쇄소나 제본소에 직접 가지 않아도 일이 굴러가니까, 지역에 있는 것이 책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전국 어디든 다니기가 편해지고,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하면서, 가까워지는 만큼 자연스레 경계가 사라진다. 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가는 길, 어느 길로 가든, ‘이제 서울 언저리네’ 하는 마음이 든다.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이제 지방의 작은 도시든 시골 촌구석이든, 실시간으로 서울의 눈높이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 있는 지역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군가에게 자기 동네를 말할 때에도 ‘서울에서 몇 시간 거리’ 하는 설명이 필수로 붙는다. 하지만, 지방에서 살고 있으면, 외국 나간 만큼은 아니어도 슬슬 눈길 가 닿는 데가 달라지고, 생활패턴도 천천히 그 동네 방식에 맞춰진다. 같은 저자와 일하고, 같은 주제로 책을 고민해도, 시골에 내려온 뒤로는 짚고 넘어가는 대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지역에서 살아가는 출판사가 되어서,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지역 잡지사들끼리 오랫동안 모임을 하다가, 이참에 출판사들까지 불러서 모임을 꾸리고, 새로운 일을 작당했다. 각 도에 한둘 있는 출판사들이니 얼마나 모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임 시작부터 지르기를 내년 5월 제주에서 ‘한국지역도서전’을 열기로 했다. 전시회만 여는 게 아니다. 출판상도 주기로 했다. 지금껏 해 온 전통 있는 도서전도 해마다 사람들 발길이 줄어든다는데, 게다가 서울도 아니고, 제주에서 하겠다니. 슬그머니 발을 뺄 타이밍을 용의주도하게 계산하는 사이, 모든 것이 후딱 결정되었다. 이야기 중간에 지역출판상 어쩌고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귀에 쏙 박혀서는 때를 놓쳤던 것이다. 행사를 치르는 돈은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마련하더라도, 출판상만큼은 어디서 기금을 받거나 주최 측에서만 마련하는 게 아니라 이 일을 널리 알려 1000명한테서 1만원씩 모으자, 그래서 그 1000명 마음까지 보태서 상을 주자는 것이었다. 출판상을 뽑는 투표는 아무나 할 수 있게 하고, 1만원 보탠 사람은 투표를 세 번쯤 하게 하자는 이야기도 들리고, 출판상 후보가 될 책을 널리 모으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들렸다. 평소에 책쟁이로 조용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재밌어 하는 순간이었다. 지역에서 책을 내고, 이야기를 담는 일에 기운을 북돋기에는 꽤나 재미있는 상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출판사 또한 저마다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수도권에서 벗어나는 삶은 어쨌거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가능성은 확 줄어들고, 그것 말고 다른 즐거움을 누릴 가능성이 많이 열린다. 당장 임차료만 계산해 봐도 알 수 있다. <보리 국어사전>을 펴낸 윤구병 선생은 사전을 펴낼 때 사전에 싣는 말을 덜어내는 것이 더 어렵다고도 했다. 이를테면 ‘플로피 디스켓’ 같은 말은 이제 손가락 사이로 흩어진 말이 되었다는 것. 서울과 같은 공간 한복판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덜어내는 일이, 아무래도 여기에서 더 잘 보이는 게 있다. 그렇게 살게 되고. 게다가 제주에는 재미난 서점도 작은 출판사도, 알맹이가 꽉꽉 들어찬 책쟁이가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일 만큼이었으니까, 일찌감치 내년 5월 일정을 비워 놓으시는 것도 괜찮겠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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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있는 책을 정리했다. 얼추 세어 보니 3500권 정도 된다. 책 욕심이 많아 좋은 책이 나오면 일단 사고 본다. 절판된 책이 있으면 동네 헌책방을 뒤지거나 인터넷 헌책방에 검색해서 사들이고 만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책을 읽지 않아 바보처럼 세상을 살았던 게 한이 맺혔기 때문이다. 내가 2006년에 낸 책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서문에 그런 내용을 썼다.

“책이 제 삶을 바꿨습니다. <쿠바와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을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세상 사는 게 왜 이렇게 답답하고 힘들까. 내가 못나서 그럴 거야. 못 배운 게 죄지.’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며 살다가 그 만화책을 한 권 보니 깜깜한 굴속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태백산맥>을 보고,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 <찢겨진 산하>, <거꾸로 읽는 세계사>, <노동의 새벽>,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같은 책들을 골라서 읽었습니다. 그 책들을 읽고 저는 학교와 사회에서 멸공 극우 사상과, 어처구니없는 독재 사상만 배웠다는 걸 알았습니다.”

<쿠바와 카스트로>는 내가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병장으로 제대한 뒤, 버스운전사로 일할 때 읽었다.

만일에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도 일베나 어버이연합에 가입해 활동하는 등 이른바 ‘가스통할배’로 살았을지 모른다. 이명박이 저지른 4대강 사업을 가뭄을 해소하는 친환경사업인 줄 알았을 거고, 박근혜가 미국에 빌붙어 밀어붙이는 사드 배치를 이북의 도발에 맞서 ‘화려한 금수강산’을 지키는 무기인 줄 알았을 게다.

책은 나를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예처럼 일만 하는 ‘근로자’에서 당당히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노동자’로 태어나게 했다. 책은 이렇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다. 한국의 민주화와 변혁운동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고,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7월 14일 서울 중구 봉래동 서울역에서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성과연봉제와 퇴출제 반대 선전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얼마 전 기가 막히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28일 서울경찰청 보안수사4대 소속 보안수사팀이 철도노동자 이진영씨 집을 압수수색하고 이씨가 소장한 책 107권, 컴퓨터 하드디스크 4개, USB, 스마트폰 등에 소장된 전자파일 3400여개와 스캐너를 임의 압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압수한 물품 가운데 <제국주의론> <무엇을 할 것인가> <러시아혁명사> <자본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등 공공도서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서적이 다수 포함됐다고 한다. 서울경찰청은 그 책들을 ‘이적표현물’이라며 압수하고 이씨를 국가보안법(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한다. 그런 책들은 나도 대부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나도 이적표현물 소지로 보안법 위반인가?

경찰은 왜 이진영씨를 보안법으로 기소하려는 걸까? 이씨는 철도노조 조합대의원과 지부대의원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의 책’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노동자의 책’은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노동운동 등 사회변혁을 다룬, 절판된 서적을 소장하고 이를 전자도서(PDF)로 전환해 회원들과 공유하는 사이트다). 그리고 철도노조는 다가오는 9월27일에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을 예고했다. 이씨는 그 두 가지가 경찰이 자신을 기소하려는 목적이라고 보고 있다. 첫째는 ‘공안기관이 사회과학을 학습하려고 하는 일반인과 노동자들에게 현재 구하기 어려운 서적을 공급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것’, 둘째는 ‘9월27일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에 앞서 철도노조 조합원인 이씨를 문제 삼아 노동투쟁을 억누르려는 것’이다.

경찰이 이씨에게서 압수한 물품에 철도노조와 민주노총이 발행한 문서도 포함되어 있고, 이씨가 전면파업을 촉구한 사실을 문제 삼는 걸 보면, 이씨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까지 통제하고, 비판적인 지식인과 노동자를 고문하고 죽이고, 입을 틀어막았던 수구세력들의 무기, 국가보안법. 국가는 여전히 보안법으로 ‘좋은 책’조차 못 읽게 하면서 인간을 ‘개·돼지’로 만들려고 한다. 잊을 만하면 들이대는 국가보안법. 참 질기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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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여행기에서 똑같이 말하는 것은 낯선 풍경과 처음 보는 사람들,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나 실수, 장엄한 자연 앞에서 압도되던 기억이나 이색적인 문화체험, 때로는 함께 간 일행들과의 소소한 불화 때문에 겪은 마음고생까지 즐거운 추억이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하룻밤 이틀을 함께했던 스물두 명의 사람들이 크게 만족했던 이번 여행은 좀 달랐던 편이다.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폭염이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아 무척 더웠는데 우리는 에어컨이 없는 방에서 잤다. 방이 두 개 있는 마을회관에서 잤는데 방은 두 개지만 여자들이 자려 했던 방이 너무 작아서 일부는 큰 방에서 남자들과 같이 자야 했고 샤워도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밥은 음식점에서 사 먹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직접 했고 국도 끓이고 반찬도 조리했다. 주방은 당연히 날씨보다 더 더웠다. 

밥을 안 사 먹는 것은 물론 페트병 생수를 단 한 병도 사지 않았으며 물컵과 수저, 개인용 접시까지 다 각자 챙겨 가기로 했던 것은 우리가 조금만 사려 깊게 살펴보면 주변 천지가 일회용품들로 환경오염이요, 유기화학 화합물이요, 수입 농산물이요, GMO 가공식품이요, 생활 화학재들이어서다. 폭염과 옥시 사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생수 페트병은 여행 갈 때는 물론 토론회 등의 행사에 별 생각 없이 개인별로 나눠 주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데 반쯤 먹다 남은 비싼 생수가 빈병과 함께 한순간에 다 쓰레기로 둔갑하는 현실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다.

마을회관에 이불이 없으니 각자 이불을 하나씩 가져오라는 알림을 듣고 겉으로 드러낸 사람은 없었지만 불평이 나올 만도 했다. 차라리 회비를 더 걷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숙박 여행을 가서 술 한 방울 못 먹는 경우는 60평생 처음이라며 미리 주최 측에서 술을 안 준다고 했으면 사 왔을 것이라고 불만 섞인 농담을 했다. 자기가 먹고 마실 것을 가져오라 했지만 여행을 주관하는 단체에서 설마 술을 준비하지 않기야 하겠느냐는 상식적인 믿음이 깨졌던 것이다. 

참석자들이 가져 온 농사지은 여주차와 사과즙, 연잎차가 있었지만 여행지에서 술 한잔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 분들조차 술이 없어서 다음날 아침이 너무도 상쾌했다고 했다. 다들 일찍 일어났고 ‘고음실 마을’의 농촌 길을 산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부족함과 불편함을 새로운 경지와 접촉하는 발판으로 삼았고 단지 내 맘에 안 들 뿐, 상대는 늘 최선을 다한다는 그 믿음을 유지하는 여행을 계속했다.

‘문호리 리버마켓’ 장터에서는 땡볕을 얇은 천막 하나로 가리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예정대로 긴 시간 동안 장터 운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또 농부들이 직접 만드는 자율적인 장터를 염두에 두고 토론했다. 문호리 리버마켓은 요즘 유행하는 협동조합을 훨씬 뛰어넘는 체제로 보였다. 좌계 김영래 선생이 오래전부터 연구해 온 동아시아 고대 장터인 ‘호혜시장과 신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필요 이상의 축적을 금하며 잉여를 공동체로 환원하는 시장. 개인의 자유와 자율이 사회집단과 조화를 이루는 ‘배달화백’ 체제 말이다.

‘고음실 마을’에서도 최성현 선생의 자연재배농장에서 강의보다는 대화를 했다. 마을회관에서 강의라 할 만한 것이 있긴 했지만 통상적인 강의가 아니라 참석자들 중 아홉 분이 나서서 생각이나 주장보다는 ‘삶’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미리 신청을 받아 진행한 ‘10분 발표’였다. 처음에는 ‘10분 토크’라고 했다가 토크라는 남의 나라 말을 ‘발표’로 바꾸었다.

여행은 ‘습관화된 나’를 벗어나 새로움을 찾는 것이리라. 새로움은 외부 환경과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잠재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리라. ‘농민 생활인문학-닦음과 행함’에서 한 여행이었다.


전희식 | 농부, ‘소농은 혁명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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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2일 오후 2시50분, 조용한 복도에 벨이 울린다. 단원고 2층, 2학년9반 교실 복도 쪽 유리창과 벽에 붙었던, 간절한 기도를 적은 무수한 쪽지가 일주일 새 다 떼어졌다.

유리창에서 딱 하나 떼지 못한 건, ‘경미’. 초록 면테이프로 글자를 만든 이름이다. 양쪽 창 가운데 벽에 걸린 그림이 새삼스럽다. 화가 뭉크가 그린 ‘절규’다.

“못 들어가겠어.”

11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및 봉사자들이 책상 위 유품들을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실 뒷문 앞에서 돌아서는 엄마. 그러기를 몇 차례, 숨을 크게 쉬고는 복도에 놓인 갈색 종이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교실로 들어간다. 상자 앞면과 뚜껑에 노란 리본과 딸의 이름 ‘오경미’가 새겨진 종이가 붙었다.

경미 생일인 지난 8월6일에도 엄마는 이 교실에 왔다. 교실 이전을 앞두고 천주교, 기독교, 불교 성직자가 참회하는 기도를 올렸다. 얼마 안 있으면 치워지는 이 교실 이 자리. 엄마는 창가 1분단 맨 뒤 왼쪽 경미 자리에 앉아 사진을 보았다. 경미가 짧은 머리 위에 벚꽃 몇 송이 꽂고 살짝 웃었다. 그날은 교실로 쉽게 들어섰는데, 라고 쓰려고 보니, 이리 생각하는 내게 의구심이 든다.

억울하게 딸을 빼앗긴 뒤 딸이 지낸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서, 아이가 걷던 비탈길을 오르면서, 경미의 눈길이 닿았을 곳을 애써 헤아리면서… 엄마는 어땠을까.

제대로 된 교육, 참교육을 바로 여기서 시작하자는 ‘기억 교실’을 두고 비수 같은 말이 쏟아지던 시간들 사이로 경미의 숨결이 남은 교실을 찾을 때, 그 마음은 대체 어떠 했을까.

3시 정각 다시 벨이 울린다. 2시50분 벨은 수업 끝, 이번은 시작 벨이겠다. 쉬는 시간, 3층 3반 교실 친구 책상에 검은 펜으로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 다시 이 교실로 들어오던 아이도 있었다.

교실 군데군데 정리를 마친 유품 상자가 낯선 모습으로 있었다. 흰 국화 한 송이씩과 함께. 마지막으로 경미와 김혜선, 이보미, 이수진, 조은정, 진윤희 그리고 최혜정 선생님의 유품을 엄마들과 아빠가 쌌다. 스무 명 학생과 선생님의 책상 위로 유품 상자가 모두 놓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책상에 아이들 사진과 화분, 친구들이 챙겨 준 음료수와 과자, 공책과 편지가 있을 때와는 교실 모습이 사뭇 달랐다. 이야기하던 아이들 입을, 숨을 틀어막은 듯했다. 다시, 무섭고 두렵지 않을까. 유품 상자가 마치 관처럼 보였다.

“도저히 못 보겠어.”

경미 엄마가 울면서 교실 밖으로 나왔다. 맞다. 도저히 못 볼 장면이다. 이 교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교복을 입은 채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 스무 명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2년4개월여 진실 규명을 외치는 유가족에게 진실을 찾을 통로를 죄다 막아대는 대한민국도, 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인 학생과 고창석·양승진 두 선생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학교를 떠나라고 등을 떼미는 상황도 도저히 못 볼 장면이다.

교실에서 내려온 오후 4시, 국기 게양대 위 태극기가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흔들린다. 틀림없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주었을 거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고. 저 말에 천 개 만 개, 물음표를 던져야겠다.

오후 6시, 엄마들이 마음을 부여잡고 금요일마다 하는 ‘아이들이 돌아온다는 약속!-전국 금요 피케팅’에 나섰다. 상록수역 앞에서 두 시간 가까이 세월호특별법 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았다.

엄마들과 헤어져 돌아온 밤, 노래를 틀었다. 되돌려 듣기를 얼마나 했을까. 더 많은 당신이 함께 들어주면 좋겠다. 프라머나드가 부른 ‘4월의 편지’.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든 이는 단원고 2학년 10반 권지혜의 언니 다혜씨다.

“오늘도 널 그리며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여전히 난 눈물이 흘러/ 소중했던 네 빈자리 아직 있는 것 같아/ 아름답던 추억들 붙잡고 싶어// 다시 돌아와 줘/ 보고 싶은 날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후렴)// 밤하늘 저 별들이 혹시 니가 아닐까/ 지친 내 하루 너에게 말하고 싶어// 내가 있는 이곳 아직 차가운 바다/ 니가 있는 그곳 따뜻한 봄이었으면/ 우리 함께했었던 추억 모두 다/ 난 잊지 못할 거야 그 시간들.”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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