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의 무너진 ‘적산(敵産)가옥’ 위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긴 항해를 거친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더 이상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진사퇴를 불러온 몇몇 인사의 경우, ‘진보 지도층’의 생각지 못한 면모를 보았을 뿐, 완벽한 정부는 없다.

특히 대통령 개인의 인간적 매력과 가치관이 현 정권의 엔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전 사안에 대한 입장은 놀라울 정도다. 세월호, 5·18,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는 그의 위로와 공감 능력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 최고 통치자’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우리는 알고 있고, 잊을 수 없다. 그 역시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경남도민일보’는 문재인 정부의 3중고를 ‘야당, 추미애, 탁현민’으로 꼽았었다(7월11일자, 인터넷판). 국민의당이 대선 당시 제보 조작 사건을 이유미씨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자 추미애 대표가 “머리 자르기”라고 발언, 막말 논란을 겪을 때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문재인 정부의 ‘2중고’가 있다면, ‘적폐(특히 MB세력)’의 효과적 정산(正算)과 열렬한 지지층인 이른바 ‘문빠’로 인한 중간 지지층 이탈이다.

하지만 전자는 조사, 처벌 대상이므로 골칫거리가 아니라 국정 그 자체다. 문제는 후자다. 이들의 집단행동은 ‘홍위병’으로 오해(?)받을 만큼 과격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개혁세력이 이들로 인해 언로가 막히고 자기 검열에 갇힌다면? ‘문고리 3인방’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나부터 ‘문재인 팬덤’ 때문에 두려움과 피로를 느낀다. 되도록 현실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에 대한 청와대 청원 사건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

그간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정현백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탁현민 행정관에 대한 입장을 요구받았고 “그의 여성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경질을 건의하겠다”고 답변했다. 청문회를 주도했던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은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전문가다. 8월22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운영위원회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이 존중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정 장관께서는 (탁 행정관에 대해) 듣는 소리를 충분히 잘 전달해 주셨다”고 발언했다. 28일, 정현백 장관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퇴 의견을 전달했지만, 무력했다”고 말했다.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정 장관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고 자신의 권한인 양 호도하며 (중략) 망동을 거듭하고 있다, 탁 행정관을 흔들지 말라”면서 장관 경질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글은 ‘베스트청원’으로 분류되었다.

일부 언론은 “기이한 청원”(‘허핑턴포스트코리아’), “부적절한 처신이나 책임을 이유로 장관 사퇴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논란의 인물 해임을 건의한다는 이유로 장관을 경질하자는 국민 청원은 드문 일이다. 장관의 ‘충언’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논평했다(서울신문 사설).

두말할 것도 없이, 정현백 장관은 여성가족부 수장으로서 당연한 업무를 수행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물론이고, 한시적이었지만 2005년 출범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 같은 부처는 정부(GO) 내부의 비정부기구(NGO)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본래 임무가 청와대를 포함, 국정 전반의 인권과 성 인지(性 認知) 의식을 감시, 교육하는 것이다. 준(準)정부기관(Semi-GO)으로도 불린다. 이들이 다른 부처와 갈등을 빚는 것은 필연이며, 이는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장관이 국민과 야당의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 해임 사유라니….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이번 청원의 발상이다. 나는 ‘이니 팬덤’과 ‘팩트’, 상식, 원칙을 놓고 논쟁할 능력이 없다. ‘사랑’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연은 다소 복잡하지만 대통령의 외모를 문제 삼은 ‘한겨레21’ 표지 사건,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반찬 부실”에 대한 문자, 트위터 폭탄 등 그동안 온갖 웃지 못할 황망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우리 이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이들에게 인신공격과 “자유한국당 프락치”라는 식의 비난을 퍼붓는다(아무리 ‘돼지발정제’를 모의했던 이가 대표인 정당이라고 해도, 자유한국당은 제1야당이며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있다).

한국 사회에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0년대. 서태지, H.O.T, 젝스키스의 팬들은 스타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도록 함께 불우이웃을 돕는다든가 공연장을 청소했다. 그러나 지금 ‘이니 팬덤’은, 같은 지지자들에게도 욕설을 퍼붓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인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다. 국가 운영에 이처럼 위험한 사태는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국론분열’을 넘어 내전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나를 포함해서 ‘문빠’는 지난 ‘10년 정권’에 절망한 이들이다. 동시에 이 현상은 출구 없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가 두려운,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의 집단 광기다. 현 정부의 지지율에는 이처럼 슬픈 광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지, 자기 불안을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표출하는 ‘~빠’ 문화는 함께 살아갈 방도가 아니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청원 앞에서 분노보다 우리가 많이 초라하다고 느낀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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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면 촛불 꺼진다”던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최근 벌금 2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해 20대 총선 당내 경선 당시, 선거구민 9만2000여명에게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약이행평가 강원도 3위’라는 허위 사실을 문자메시지로 발송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고 국민참여재판이었는데도, 그는 유죄 판결이 문재인 정부의 탓인 양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내 심경은 김진태씨와 정반대다. 세상이 바뀐 것을 빨리 체감했으면 좋겠다. 국회의원에겐 정권 교체의 의미가 크겠지만, 평범한 시민에겐 “새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느낌 외엔 큰 변화가 없다. 이 체감의 다름이 ‘난생처음’ 서러운 사람과 언제나 서러웠던 민초들의 차이가 아닐까.

오랫동안 구조적 약자였던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를 합치면 전체 인구의 과반이다. ‘우리’는 소수가 아니다. ‘정상적인 국민국가’는 이들을 위한 정부여야 한다. 하지만 들려오는 뉴스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이 바뀌려면 멀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과 함께, 박근혜 정부와는 또 다른 성격의 ‘권력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절망감이 든다.

평소 “가슴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에 대한 테러다”라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리버럴 진보’를 자칭, 새 정부 주변에 어른대고 있다. 일반 공무원 채용 시에는 면접을 통해 걸러낼 수 있는데, ‘논공행상’ 인사는 권력자와 가까우면 된다. 대개 이런 이들은 약자에게는 함부로 한다. 성폭력 경력이 파란만장한 교수 출신 고위직 인사는 피해 여성들의 증언이 속출하자(‘품행 민원’) 알아서 물러났다. 앞으로도 ‘사고’가 예상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청와대 부근만이 아니다. 최근 자기 집에서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머리카락에 불을 붙여 머리와 목 부위에 3도 화상을 입힌 남편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살인미수를 집행유예로 판결한 판사는 여성이었다. 다음은, 그 유명한 콘크리트 사건. 며칠 전 받은 어느 독자의 편지다. 

“맨손으로 여자가 죽을 때까지 폭력을 행사하고 시체를 시멘트로 암매장한 것이, 치밀하게 계획한 살인이 아니라면 무엇인가요? 폭행치사죄로 기소한 검사는 대체 누구인가요? 주먹으로 사람을 때려죽인 것이 살인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은 여성을 때려죽인 후에 시멘트로 암매장하고 교도소에서 3년만 살다 나오면 되는 나라입니다. 형사 법정에서 합의가 웬 말입니까?”

물론,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은 인류 역사 내내 있었다. 현 정부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 “우리가 ‘이러려고’ 광장에서 밤을 새웠나”라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법 종사자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은 동성애자 ‘색출’ 함정 수사를 지시하고, 수많은 인파가 보는 앞에서 민간인 기자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제압. 그 장면, 나는 정말 무서웠다. 지난 5월에는 직속 부하인 대위를 성폭행한 대령이 준강간 혐의로 체포되었고, 피해 여성은 자살했다. 해군 당국의 인식이 점입가경이다. “그런 일(강간)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리 교육해도 술 먹고 그러는 걸 어떻게 막나?” 이들은 성폭력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모든 남성은 매 순간 성폭행 범행 의지를 참고 있단 말인가?

피살자가 여성인 경우, 범인의 60% 이상이 남편이나 이성 애인이다. 여성 폭력, 막을 수는 없어도 처벌할 수는 있다. 이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현실은 ‘법보다 주먹’이 아니라 ‘법보다 성차별 의식’이다. 사법 개혁의 첫 번째 과제여야 한다.

탁현민

선거 후 며칠 만에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사회 구조와 사람의 인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는가. 이는 정권 차원의 이슈가 아니라 지난한 민주주의의 과정이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그 여정에 믿음직한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지금 정부는 국민의 절대적 희망이다. 해방 이후 이런 정부는 탄생한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와 달리, DJP연합이나 이인제씨나 정몽준씨의 ‘도움’도 없었고 2위와의 표차도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상대 후보와의 정치적 역학보다 오롯이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다.

그러나 ‘홍준標(표) 돼지흥분제’는 이 정부에도 있다. 최근 문성근씨는 여성단체의 비판을 받은 탁현민씨에 대해 “뇌가 말랑말랑”하다고 칭찬하면서 “그가 흔들리지 않고 활동하도록 응원하자”고 덧붙였다. 남성연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남성성들(masculinities)이 연대하고 있다. ‘반공주의 남성성’ ‘자본가 남성성’ ‘루저 남성성’ ‘지식인 남성성’ ‘조폭 남성성’ ‘진보 남성성’ ‘군사주의 남성성’…. 성격은 다르지만 남성 특권을 유지하는 데는 ‘대동(大同)’ 단결한다.

이 중에서 특히 진보 혹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이중성을 가시화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문제 발생 시 대응도 힘들다. 부디,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망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많은 여성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촛불’은 비폭력을 피하기도, 지속되기도 어려웠다. 꼭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아니어도 좋다. 여성도 ‘국민’이었으면 한다. 여성의 안전과 목숨이 사소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면 한다. 여성이 직장 일과 가사 노동의 이중 노동에 덜 시달리기를 바란다.

모든 권력의 위기는 내부에서 온다. ‘우리 안의 적폐’가 무엇인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청문회 5대 점검 사항 중 왜 인권의식(=여성의식)은 포함되지 않는가. 이것이 가장 기본 아닌가.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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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 말은 강남역 사건을 묘사한 기사 같다. 작년 5월17일, 서울시 서초동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이른바 강남역 사건. 이후 내게 ‘오월’의 이미지는 두 겹이 되었다. 5·18과 강남역.

용의자의 범행 동기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의식은 크게 바뀌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사건 현장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이름도 없이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한 피해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며칠 후 비가 내렸고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포스트잇이 철거되기 직전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1004개의 추모 쪽지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나무연필, 2016).

지난해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강윤중 기자

이 사건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일상인 여성 살해(femicide)다. 매일 밤 가정폭력으로, 성산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돼지 흥분제’ 합병증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는지 통계가 없을 뿐이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용의자 자신이 일관되고 분명한 태도로 범행 이유를 밝혔는데도, 경찰과 여론은 정신질환 경력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는 여섯 명의 남성이 화장실을 사용한 후, 여성이 나타나자 살인을 저질렀다. 용의자는 자신에게 범행 이유를 “물어달라”는 확신범이었지만, 경찰과 사회는 “묻지마 살인”이라고 입을 막았다.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피의자 본인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것은 인권 침해다. 용의자도 피의자도 수감자도 그 위치에서의 인권이 있다(고문당하거나 진술을 부정, 강요당하지 않아야 한다).

여성 살해를 정신질환 환자의 우발적 일탈로 믿고 싶은 심리. 인류의 반이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평생을 공포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구조의 핵심이다. 남성 문화는 성폭력이나 여성 살해를 일부 ‘미친’ 남성의 발작으로 여김으로써 성차별 구조를 은폐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나’는 가만히 앉아서 ‘괜찮은 남자’가 된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단어 사용부터 오류가 있다. 미친 사람, 아픈 사람, 나쁜 사람의 인간관은 각각 다르다. 성폭력 가해자나 여성 연쇄 살인범들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이웃들이 “조용하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어요”라고 증언하는 장면에도 익숙하다.

고정관념의 가장 큰 피해 집단은 건강 약자인 정신질환 환자들이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에 대한 편견과 무지는 뿌리 깊다. 그들은 아픈 곳이 다를 뿐 보통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몸이 불편할 뿐이다.

극명한 방증은 ‘여성’ 정신질환자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나 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반 남성들도 여성 정신질환자로 인해 일상이 불편하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오히려 “미친 여자”라는 낙인은 ‘창녀’와 함께 여성 환자는 물론 전체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남성 권력이다. 이번 선거에서 유승민 후보의 자녀가 ‘잘생긴 남성’이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통령 후보의 아들에게 그런 식의 폭력을 가하는 여성 정신질환자는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유승민 후보는 ‘예쁜 딸로 인해’ “국민장인”으로 불렸지만, ‘훈남’ 아들을 둔 심상정 후보는 “국민 시어머니”라고 불리지 않았다.

군 위안부, 전쟁 시 대량 강간 등 인권 문제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샬럿 번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폭력이 사소하게 취급되는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성차별은 사소한 일이어서 생존 문제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는 인식, 둘째, 여성 학대는 개인적 문제일 뿐 국가가 대처해야 할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는 인식, 셋째, 여성의 권리가 인권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인식, 넷째, 여성 폭력은 너무 만연한 문제라서 불가피하며 어차피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고방식 등이다.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발상부터 패배주의까지 다양하다.

남성 문화는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있는데 없는 문제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는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가장 성차별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성별이 무시된다. 그러니 해결될 리 없다. 아니, 해결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이다.

나는 성매매가 필요악인지 아닌지 따위에 관심이 없다. 질문은 한 가지. 왜 언제나 파는 혹은 팔리는 사람은 여성이고 사는 사람은 남성인가이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취한 가해 남편은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꼭 집에 와서 아내만 구타한다.

25년 전, 1992년 10월26일. 기지촌 성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윤금이씨(당시 26세)가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당시 19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윤금이 이후’ 격렬했던 여성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희생은 멈추지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여성에겐 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나의 바람은 여성 폭력 근절이라기‘보다’ 피해가 드러나는 것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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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절반의 기쁨이었다. 전원일치는 다행이지만 혐의 내용 중 최순실씨 건 외에는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일곱 시간’ 행적 논란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박 전 대통령의 무능과 게으름을 상징한다. 평범한 사람의 불성실도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데,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황당한 본분 망각 행위를 불법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대통령의 불성실은 죄(sin)일까, 범죄(crime)일까.

개념상으로는 죄와 범죄는 차이가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는 시대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사회관계는 밀접해졌고 도미노 현상은 빠르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문제에 대해,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다. 과연, 과녁을 명중한 명제다. 그는 미디어(매체)를 몸의 확장이라고 분석했다. 미디어 폭발 시대인 지금, 인간의 몸은 확대되다 못해 부풀어서 서로 부대끼고 있다. 친하지 않아도, 적대 관계라도 상호 영향력은 커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미디어는 지식을 전달하는 요인(agents)이 아니라 사건을 만드는 주체다. 내용은 형식을 따른다. 맥루언은 TV나 인터넷뿐 아니라 도로, 종이, 자동차, 옷, 돈, 시계, 게임, 주택 등 모든 것이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라고 보았다. 큰 승용차가 작은 차를 무시하는 현상은 차가 인간의 확장, 즉 자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격(車格)이 인격”인 ‘이유’다.

자동차도 이럴진대 당대 미디어의 대표를 자임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상황은 어떨까. 사람마다 SNS에 대한 접근성과 관계의 밀도는 다르므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감각에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것의 비윤리성이다. 장단점 논의와 무관한 문제다. “행사 공지가 빠르다, 내비 기능이 있다”는 식의 발상, 즉 양비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핵심은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 본성과 사회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자본의 법칙이다. 나는 SNS가 현대 자본주의의 만성화된 실업에 대한 ‘보상’, 즉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보내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소설가 김영하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손 안의 인터넷, 스마트폰은 ‘시간 도둑’이다. (중략)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나는 그의 의견에 ‘인간의 타락’을 보태고 싶다. SNS의 익명성과 속도는 ‘팩트’를 점검할 필요가 없다. 따르는 사람(팔로어)이 많은 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사회가 달라진다면?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고 이미 그러하다. 트위터에서의 이전투구로 ‘멘붕’ 상태를 넘어 ‘생사’를 오가는 사용자가 적지 않다. 지금 이곳은 자기도취와 욕망, 무지로 무장한 인간이 판치는 지옥이다(‘헬조선’). ‘6대 종합’ 일간지 중 하나인 모신문사의 트위터 팔로어는 50만명 선인데, 80만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개인이 존재한다. 모 노동조합의 팔로어는 300명인데, 노동조합 소속(?)의 ‘스타 노동자’는 5만명인 경우가 있었다. 그는 노조의 결정 사항을 사리사욕을 위해 번복,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보통’ 사람보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진보 진영, 페미니스트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많다. 나의 요즘 고민 중 하나도 이런 ‘페미’들이다.

페이스북의 ‘페이스(face)’는 흥미롭다. 페이스는 “얼굴, 얼굴 표정, 마주하다, 직면하다, 상황에 처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면하지 않은 곳이다. 이때 페이스는 가상(假想)의 얼굴이다. 가짜 얼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상상케 하는 이미지다.

나는 이 매체가 부정의의 온상이라고 본다. 이곳에서의 자기 포장은 사기 수준이다. ‘실제’ 그·그녀는 후안무치에 능력은 없으면서 출세에 혈안이 된 인물인데 페이스북에서는 그런 인격자, 매력자, 실력자가 없다. 페이스북은 인격 세탁소다. 이들은 오프라인에서 그 이미지를 활용, 이익을 취한다. 억울하면 당신도 페이스북을 사용하라? 그래서 모든 이들이 페이스북에서 자기선전 경쟁을 해야 할까.

내 가정도 틀렸다. 물론 모든 사용자가 인격을 세탁하지는 않지만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다. SNS 사용자는 자본의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위가 되었다. 나더러 19세기 초반 과학의 발전으로 실업위기를 느낀 영국 노동자의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Luddite)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모두가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있으니 러다이트 현상은 없다. 대중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 열매를 사랑한다.

혐오 발언은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사용자의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맞댄다”는 행위는 책임감을 동반한다. SNS에 대한 열광에는 대면 윤리로부터의 도피가 포함되어 있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면, 나는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씨의 대면보고 기피가 더욱 문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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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 시민’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나 역시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여성과 남성은 그 방법이 다른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나체 합성 그림이 포함된 ‘표창원 의원과 함께하는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 연대’ 전시회’, ‘곧, BYE! 展’은 철지난 뉴스가 아니다. 이 사건은 인류 5000년 역사를 요약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반복될 이슈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그림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올랭피아’를 베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20일부터 전시되었다가 논란으로 철거된 상태다. 마네는 웬만한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다.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 여성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이 그림에 대한 내 해석은 ‘흑인 하녀’와 주인공인 ‘창녀’가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이다. 다시 말해, 흑인 하녀는 최순실씨가 아니고 올랭피아의 당당한 눈동자와 박 대통령의 눈빛은 한참 거리가 있다. 패러디는 원작을 충실히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패러디가 아니다. 작가가 가져온 것은 여성의 벗은 몸뿐이다.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2탄 작품 ‘블랙’. 정지윤 기자

작가는 “박 정권에 이 정도 저항도 못하냐”라고 항변했지만 천만의 말씀, 이것은 저항이 아니라 권력 행위이며 본인이 그토록 적대하는 세력에 바친 ‘자살골’이다. 이 그림은 현 정권에 분노하는 ‘시민’의 시각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 재현된 것이다. “표현의 자유”나 “국회의원의 품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작가의 인권 수준만 보여준 꼴이다.

이 그림은 ‘비상시국’ 때마다 등장하는 ‘일상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형이다.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가 대머리라고 해서 ‘대머리 남성’ 전체의 인권이 짓밟혀서는 안되듯이, 혹은 강남역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전직 신학생이라고 해서 모든 신학생이 살인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여성이 내게 좋은 질문을 했다. 그 그림의 작가가 여성이었다면? 마찬가지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그렸는가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그들은 돈을 주고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그림은 표창원 의원이 그린 것도 아니고 그는 작품 선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표 의원의 부인이다. 박사모가 그의 부인을 박 대통령처럼 그려놨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하이라이트’다. 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표 의원이 박 대통령의 누드화를 그렸다 해도, 복수를 하려면 표 의원의 벗은 몸을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의 부인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박사모의 대응이 가장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사모는 남성연대라는 방식으로 그 어려운, ‘여야 대연정’을 실현했다.

상대방이 ‘자기 여자’의 누드화를 제작하고 전시해서 모욕을 느꼈다면, 남성 작가끼리 벗기면 된다. 왜 ‘상대방의 여성’을 벗기는가. 약자의 몸은 강자의 전쟁터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듯이,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듯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전쟁터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남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중학생(효순·미선) 사건의 반복이다. 이 참사는 예견된 것이었다. 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컸기 때문에 탱크 위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은 계속 민원을 제기했으나 묵살당했고 결국 어린 학생이 희생되었다. 축구에 열광했던 시민(남성)들은 갑자기 죄의식에 사로잡혀, 촛불집회를 열었고 ‘Fucking USA(퍼킹 유에스에이)’를 합창했다.

왜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에게 저항하지 않고 미국을 여성화하면서 미국 여성을 강간하자고 외치는 것일까. 결국 남성은 국적을 불문하여 폭력의 주체가 되고 여성은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된다. 한국 남성의 미국 남성에 대한 동일시 욕망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온 문화다. 남정현의 <분지(糞地)>부터 ‘반미 에로’ 영화 <태극기를 꽂으며>까지. 동시에 수천년 동안 반복되어온 전쟁 시 상대편 여성에 대한 성폭력부터 일상의 성매매까지 여성의 몸이 사용되어온 원리다. ‘군 위안부’를 인권 문제로 보지 않고 “우리도 일본 여성을 강간하자”는 논리가 가장 가까운 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입장은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시민보다 남성 정체성이 더 강하다. 어떤 이들은 정권교체를, 어떤 이들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 서두에 썼듯이 나는 이 글을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들이 읽었으면 한다. 범야권은 이번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해야 한다. ‘여성’ 대통령 누드화는 여성과 상식 있는 시민에게 불쾌감을 줄 뿐이다.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국민, 시민, 민중이든 자신을 보편적 인간으로 생각한다. 성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남들이 가장 오해하는 단어가 “저항”이다. 일단, 더러운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이후 깨달음의 고통이 있겠지만 언제까지 ‘한남’으로 살면서 나라를 망칠 것인가. 정권교체를 이루고 최순실 무리를 뿌리 뽑아야 풍자다. ‘태극기집회’ 세력과 여성의 벗은 몸을 공유하여, 야권을 남성과 여성으로 분열시키는 것은 저항은 아니라 ‘이적’ 행위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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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영화 <여교사>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의 ‘탁월한 선택’에 스스로 감격하고 있는데, 누군가 뒷좌석에서 “나라가 미쳐가니 영화도 미쳤구만, 막장….”이라며 투덜댔다.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집으로 오면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관객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 영화는 “미쳐가는 나라”의 풍경이다. 영화가 현실보다 훨씬 덜 ‘미쳤을’ 뿐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거칠게 요약하면, 영화는 정규직 교사와 기간제(계약직) 교사인 두 여성의 갈등을 그린다. “○수저” 표현이 진부하지만, 둘은 각각 금수저와 흙수저를 대표한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금수저의 무지와 운명’에 관심이 갔다.

계급 고착 사회에서 흙수저가 겪는 차별과 모욕은 말할 것도 없지만, 금수저라고 해서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의 금수저 혹은 준(準)금수저 자녀들을 보면, 다들 골치다. 별별 문제가 다 있다. 최소한의 공부나 노동은 일치감치 굿바이고, 자동차 폭주, 성형, 술….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는 지루한 청춘들에게 소비는 최대의 놀이다. 부모와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난동은 비행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부모들의 호소를 듣고 있노라면,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부모도 부자고 자식도 성숙하면 좋겠지만, 그런 집은 드물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경고다. 정유라씨처럼 근거 없는(?) 기이한 금수저가 아니라면, 즉 ‘정상적’인 금수저도 세상 물정을 알 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금수저처럼 “저는 고생을 안 해서 아무 것도 몰라요”로 일관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흔히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끝’은 원래 끝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모든 욕구를 다 채우며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선(線)을 모를 때 생긴다. 적정선을 인식하려면 자신과 인간관계, 사회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흙수저는 선을 밟거나 넘으면 바로 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에 경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좌절”이다. 아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처지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금수저는 이 정치학에 무지하다. 분간이 없다. 주변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돈, 협박, 거드름으로 대강 안면몰수고 공적인 소란이 생기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놀라고 분노했던 부분은, 타인의 마음을 농락하는 금수저의 일상이다(물론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놀라야만 …한다!). 극중 ‘갑’은 타인에게 더러운 노동을 시킴으로써 ‘을’에게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빼앗는다. 결국 금수저는 처벌 받는다. 이 영화의 금수저는 모든 것을 가졌다. 언니까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언니(실은 하녀)가 자신이 짓밟은 흙수저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이, 선을 넘은 것이다.

그 처벌이 해결은 아니지만, 어차피 인간사에 그리고 자본주의 구조에서 해결이란 없다. 최선의 정의다. 나는 화면 속으로 들어가 김하늘씨(흙수저 역)를 돕고 싶을 정도였다. 서두에서 언급한 관객의 말대로, 나는 미쳤는가? 나는 이 동일시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장난삼아’ 남의 일자리를 뺏을 수는 있다. 그러나 타인의 진심을 이용하고 노리개 삼는 것은 인격 살해다. 이런 일을 당한 피해자는 온전한 삶을 살수 없다.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복수론(論)은, 잘못해놓고 처벌 받지 않으려는 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다. 사법 정의를 소유하고 있는 지배 세력은, 복수 외에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이들이게 “복수는 너의 것? 너의 끝!”이라고 속삭인다. 주변 사람들도 걱정한다. “복수하면 너만 망가진다”, “잊어라.” 저항, 정의, 복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복수는 무조건 나쁘다는 설교는 부정의하다.

영화 <여교사>의 주제는 인간으로서 마지노선을 자각한 흙수저의 승리, 상식적 권선징악이다. 불가능과 좌절을 처절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환경, 그것을 자원 삼아 인구의 절대 다수인 흙수저들은 선(善)으로 전진할 가능성이 있다. 금수저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무지다. 흙수저가 이 사실을 간파한다면, 무지한 그들을 이길 수 있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갈등은 젊은이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금수저는 오히려 위태롭다. 그들은 부모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수저는 부모의 자원이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수저 논쟁은 상층 ‘부모’와 하층 ‘자녀’의 갈등으로 세대와 계급 모습이 복합되어 있다. 부모 세대에서는 결판이 났을지도 모르지만, 자녀 세대에서는 계급도 세습되지만 동시에 앎의 위치성도 승계된다. 흙수저의 유일한 자산은 한계선 자각에서 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고, 금수저의 운명은 무지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황과 전선을 아는 것. 상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의 대결이라면 누구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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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단체의 송년 모임에서 간단한 강의를 했다. 나는 ‘올해 지구촌 뉴스’를 전하면서 “박근혜, 트럼프보다 더한 인물이 다음 우리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중석에서 비명 소리가 나왔다. 박근혜·최순실도 충분히 끔찍한데, 더 나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놀란 모양이다.

‘박·최’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국정파탄, 부정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구토를 부르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노보다는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한계와 절망을 느꼈다. 독점한다는 의미의 ‘농단(壟斷)’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최순실씨 일가가 박태환 선수 협박부터 무기 구입까지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들이 집어 삼킨 것은 좁은 의미의 국가권력(청와대)이 아니라 사회 전체다. 그들은 ‘우리’에게 깊은 자상을 남겼다. 정권이 교체될지 확실치 않지만, 이번 사태가 새누리당 해체나 정권교체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다.

인간관계, 사회성, 민주주의를 해결해주는 과학기술은 왜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기왕 인공지능이 필요하다면 바둑이나 소설 쓰기 실험 대신 인간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도덕성을 조절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해본다. 삶의 꼭대기에 부와 성공, 물질적 욕망이 등극한 지 오래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원은 감정의 연대다. 덜 외로운 상태. 스트레스 덜 받는 일상. 자기가 속한 곳에서 인정받는 것. 나의 경우 미세먼지 없는 세상이다. 한국인들이 인간관계의 고통과 불쾌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쓰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세계 최고의 1인당 주류 소비량, 국민총생산 대비 최대 규모의 성산업, 쇼핑 중독.

<빵과 장미>라는 영화가 있지만, 둘은 다르지 않다. ‘빵’도 ‘장미(인간으로서 존엄)’의 힘이다. 의식주는 유대와 배려 속에서 생산된다. 정의가 힐링이다. 바람직한 사회제도 역시 선의의 인간이 운용할 때만 인프라로서 힘을 가질 수 있다. 박·최 게이트는 어쩌면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증명 같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e메일을 많이 받는다. 이런 사연이 적지 않다. “저의 이번 생은 망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요즘은 특히, 마음 둘 곳이 없는 중에, 하소연합니다. 별반 내용도, 목적도 없는 메모가 되고 말았지만… 죄송합니다.”

광장은 불신의 시대에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나누고, 두고 올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되었다. 광장에 모인 200만이 넘는 사람들의 동기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광장의 축제는 일상의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촛불은 밤의 시위가 아니라 낮의 우울을 밝히는 데 더 긴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촛불이 “바람 앞에 쉽게 꺼진다”고?

마음 둘 곳. 마음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한때 이데올로기에 마음을 두었고, 한때는 사람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지금은 없다. 나의 거처는 나 자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나 역시 있을 곳이 없다. 옆을 기웃거리게 된다. 외로움과 혼자임은 무관하다. 문제는 자기 충족적인 건강한 외로움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립된 느낌이다. 외로운 사람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로워서가 아니다. 외로움 자체는 죄가 없다. 사회가 따뜻하다면, 외로움은 절실한 연대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경험하다시피 현실은 외로운 사람을 이용한다.

살 만한 현실이 중력처럼 나를 붙잡아주면 좋으련만 세상이 썩었으니 그 끈도 위태롭다. 예전에는 종교에 몸을 맡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기복은커녕 위안도 되지 못하나 보다. “종교가 없다”는 한국인이 56%가 넘는다.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다가 방황을 멈춘 이들의 결심, 대한민국의 자살과 우울은 상상 이상이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상황은 몸(존재)을 둘 곳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말의 “몸 둘 바(所)를 모르겠습니다”는 겸양, 민망, 사과 등의 의미다. 내 몸이 차지하고 있는 작은 관짝만 한 공간조차 아깝고 부당하다는 자학의 뜻이다. 그런데 비유적으로 “죄송하다”는 의미 말고, 글자 그대로 실제 몸을 둘 곳이 없는 상태. 이것은 외로움을 넘어 존재의 위기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적합한 사람일까. 타인과 세상에 민폐가 되지 않을까. 진로를 정하지 못한 이들의 스트레스가 이것이다. 자기 몸 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눈총’에 대한 어느 청소년의 표현인데 실감 났다) 한심하게 여긴다.

나를 포함, 마음 둘 곳도 몸 둘 바도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잉여 신세임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있다. 자기계발도, 힐링도 속임수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 투자할 돈도 없다. 다른 쪽 사람들, 고령화사회에서 나이 들어가는 이들의 심정은 또 다른 서러움이다. 세상이 계속 “당신의 존재 자체가 사회문제”라고 하면? 고령화 대책은 좋은데, 그럴 때마다 ‘실제’ 고령인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나는 ‘그들’과 동일시된다.

나의 송년 결론.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 쓸모가 ‘생산과 건설’로 지구를 망치는 일이라면, 쓸모의 의미를 재규정하면 되지 않을까. 내 마음 둘 곳을 찾지 말고, 쉽지 않겠지만 남들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이렇게라도 생각을 묶어두어야 새해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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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서 내가 자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공효진)은, 엄마의 애인인 유부남의 집에 쳐들어간다. 온 가족이 모인 단란한 식사 시간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아저씨! 우리 엄마 진짜로 사랑해요?”라고 묻는다. 아저씨는 자기 부인과 자녀들 앞에서 차분하게 말한다. “그래, 나 너희 엄마를 죽도록 사랑한다.” 거짓말을 기대하고 ‘불륜 아저씨’ 집에 화풀이를 하러 갔던 주인공은 풀이 죽어 돌아선다.

나는 인간의 진정성을 믿지 않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진정성만큼이나 거짓말도 논쟁적이다. 거짓말이 항상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속된 말로 면전에서 ‘생까는’ 거짓말은 누구에게나 상처가 된다. 몇 분이면 탄로 날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을 갑자기 잡아떼는 경우, 오랜 친구의 속임수…. 이런 일을 자주 겪다보면 제정신을 간수하기 힘들다. 타인의 잦은 거짓말은 인간의 판단력을 무너뜨린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세 커플의 ‘안타까운’ 혼외 사랑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 시간, 비용, 지력의 손해가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상담료를 청구할 생각은 없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무 이해관계 없이 고민을 들어주었으나, 지금 나는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살인 사건의 증인처럼 ‘도망 다니는 신세’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내가 ‘오해’하고 있다며,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적도, 그럴 이유도 없다.

시민들이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3차 범국민행동에 참가해 촛불로 글씨를 만들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며칠 전까지 내게 연애 상담을 했던 이들의 필사적인 책임 전가에, 억울하다기보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짐승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지면에 쓸 사연도 아니고 내용도 복잡하다. 그들은 자신의 ‘부정(不貞)’으로 인해 부정(不正)한 일이 생기자 이를 학력주의, 언론탄압 등으로 프레임을 이동시켰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의 성격(결벽증)을 문제 삼아 “이상한 여자의 의심”이라고 떠들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혼외 관계에 관대했다. 한마디로, 그들이 비난받은 이유는 ‘불륜’이 아니라 관계를 이용해서 공정치 못한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논란이 계속되자 이제는 돌변하여 “아무 관계도 아니다”라며 펄쩍 뛰고 있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절친의 배우자와의 사랑, 내연 관계를 이용한 횡령, 애인을 낙하산으로 취직시킨 경우. 결국 사랑보다 비즈니스다. 그들의 필사적인 거짓말은 능력은 없는데 유명세, 돈, 자존심은 유지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가족, 학력, 연줄은 비난받지만 혼외 사랑은 드러나지만 않으면 ‘동아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 여성 모두 여성스러움을 무기로, 남편과 애인의 친구들까지 십분 활용하여 ‘페미니스트 커리어우먼’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들의 거짓말은 e메일이나 통화 기록 등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윤리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들 최순실급 정도만 아니면 눈감아 주자고 한다. 최순실 정국의 최대 수혜자다. 그들은 모두 사회성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이어서 거짓말에도 능숙하다. 거짓말과 비방도 이 시대에는 능력인 셈이다.

그런 와중에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데, 대통령이 나보다 더 멍한 표정으로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거짓말, 연기조차 할 수 없는 사람? 아니, 그저 자신의 기본 업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정파탄도 파탄이지만 촛불정국 전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저런 수준인지 몰랐다”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전문 분야는 무엇인가? 학부 전공인 전자공학일 리는 없고 뭐라도 아는 분야가 한 가지라도 있는가? 국정 관심사는 무엇인가. 테니스? 앞서 말한 무고한 타인을 짓밟는 후안무치한 인간들은 세상을 파멸시키고 있고, 이를 통제해야 하는 사람은 지구를 떠나 우주의 기를 독점하고 있으니 완벽한 조합이다.

박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거짓말 각본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력’ ‘통치력’이 전무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현실감각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거짓말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의 전제인 자기 파악이 안돼 있다.

지금 232만명이 거리에 나온 이 시국에 대통령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놀라운 점은 대통령이라는 자의 ‘백치성’이다. 누구처럼 학살자도 아니고, 박식한 사람도 아니고, 바로 전직이었던 이처럼 축재한 사람도 아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성형(설), 피부 관리, 공주놀이(해외순방)를 하려고 청와대에 들어갔는가. 단지, 간신에게 휘둘린 것인가. 부모가 빙의되는 과정에서 ‘에러’가 난 것인가.

그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자, 혹시 향후에 정 많은 한국인들이 그의 백치성을 불쌍히 여겨 용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끔찍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나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국가 지도자가 이런 유형인 경우 국민은 의미 없는 고민에 빠지고, 공동체는 분노와 의구심으로 소진된다. 박 대통령의 능력은 단 하나, 유신의 유령이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고, 내가 민주주의보다 상식을 원하는 이유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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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문화계 성폭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트럼프 당선으로 최순실씨 뉴스가 가려진다는 우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 규모나 처벌받을 사람들은 다르지만, 2016년 우주의 ‘나쁜 기운’임엔 틀림없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처럼 결과가 의외이거나 경악스러울 때,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난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런 부류다. 트럼프는 당대를 대변하는 인간형이다. 대중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대의제가 무너진 지 오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대변할 사람보다는 자신이 욕망하거나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안철수 ‘현상’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직업 정치인의 기업인화, 연예인화, 이것은 정치 자체의 붕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8일 (출처: 경향신문DB)

문제는 또 있다. 내가 욕망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그냥 부자인지, 자수성가 타입인지, 인격자인지, 똑똑한 사람인지…. 미국의 선거 전문가와 언론은 트럼프의 음담패설 시리즈 이후 클린턴의 낙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식 사회의 논리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상한’ 분들이 지도자인 세상이다.

트럼프의 여성, 인종 관련 발언은 단순한 음란, 패륜이 아니다. 폭력이고 혐오 범죄다. 나는 그가 음담패설을 하면 할수록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보았다. 주요 지지층인 백인 남성들, 즉 평소 트럼프처럼 말하고 싶은 이들에게 그의 말은 ‘사이다’였을 것이다. 그 해방감과 쾌감. 여성 비하, 이민자 혐오가 전 지구촌에 울려퍼졌다. 트럼프의 승리는 선거 전략인, 막말의 승리다.

트럼프로 인한 나의 좌절감은 단순한 국제 문제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이다. 문화평론가 서동진 교수의 저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광풍에 대응하는 개인의 자기계발 현상을 분석한 빼어난 작품이다. 이 책의 후속편이 나와야 한다. 지금은 자기계발을 넘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다. 자기계발이 개인의 성실성(‘노~오력’)으로 구조를 극복하려는 소박하지만 처절한 대응이라면, 각자도생은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에서 생존 여부를 목전에 둔 인간의 지옥도다.

각자도생은 말 그대로, 혼자의 힘으로 생존을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도(試圖)’다. 시도는 성공이 아니므로 ‘성공할 때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는 개인의 세상을 향한 전면전이다. 물론 그 방식은 최씨 사태에서 보듯이 규모의 한계도 염치의 한계도 없다.

한국 사회의 오래된 현상, 힐링 열풍과 더불어 자살과 우울증의 ‘범람’은 각자도생의 결과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그래도 나은 사람이다. 더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는 가까이에 있다. 바로 인간관계에서 상처와 배신이다. 여기서 가해자는 사회 적응자로, 피해자는 루저가 된다. 옳고 그름이 승패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살아온 이력 때문인지 내 주변에는 대개 진보 진영이나 여성주의자가 많다. 흔히 도덕적일 것이라고 기대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내 경험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폐쇄성이 겹쳐서 그런지, 이 ‘판’도 만만치 않다. 규모가 작을 뿐 ‘우리 안의 최순실, 트럼프’가 한둘이 아니다. 성폭력은 기본이고, 사기, 표절, 계급주의, 학벌주의, 소비주의, 연줄 문화, 약자에 대한 모욕과 막말, 이중성…. 내가 페이스북 근처에 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사람들이 그곳에서 캐릭터 변신을 하고 자신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겪었고 보았다. 진보 혹은 페미니스트라고 자처라는 이들이 사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것을. ‘상록수’는 극소수다.

최근 나는 오래된 친구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일을 겪었다.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트럼프 당선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내 대통령은 아니다” “내가 몰랐던 미국…”),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니,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우울과 자살이 전 사회적 현상이 된다. 정의로운 사회나 전쟁 때처럼 시비가 뚜렷한 상황에는 자살이 적다. 의문이 사라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은 막무가내 캐릭터다. 트럼프는 한때 자신이 불리해지자 “선거를 취소하고, 내가 이긴 걸로 하자”는 ‘명언’을 남겼다. 이것이 세계 최고(?)의 법치국가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한 말이다. ‘인(간)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평가적인 표현이 되기 쉬우니 캐릭터(성격)라고 하자. 뻔뻔함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세 캐릭터다. 돈과 힘을 숭배하고 약자를 짓밟아야만 쾌감을 느끼며 후안무치가 주는 강력한 자아의 느낌을 즐기는 사람들. 미국의 저소득, 저학력 백인 남성들은 이것을 욕망했다.

피의자 우병우씨가 검찰 조사실에서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혈압이 터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누가 더 두꺼운 얼굴을 가졌는가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세상. 이것은 앎과 모름의 싸움이다. 뻔뻔함은 ‘악’을 모르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의 법칙이다. 그들은 죄의식과 불편 없이 전진한다. 반면,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사람은 뻔뻔해질 수도 없고, 뻔뻔한 세상을 감당할 수도 없다.

이제 인간의 ‘본질’이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냐,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인간)냐,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냐를 논할 시기는 지난 듯하다. ‘호모 쉐임리스(뻔뻔한 인간)’의 시대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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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목 통증 치료사, 안과 의사, 인문학 강사. 장담컨대 이 직종들은 앞으로 최소 5년 안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망한 직업으로, 인력 부족을 겪는 분야가 될 것이다. 인문학 강사의 경우, 대학에서 인문학은 사양길 정도가 아니라 이미 ‘사망’한 지 오래지만(전공자가 대학에 취업하는 것은 어렵지만) 어느 사회나 ‘교양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직업은 스마트폰과 관련한 건강 전문가들이다. 인터넷 인프라 세계 최고, 2013년 현재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1위, 2015년 3월 가입자 기준으로 성인 83%의 보급률. 우리 주변을 보자.

길거리, 집안, 사무실, 강의실, 버스, 전철 안은 기본이다. 심지어 횡단보도, 불 꺼진 극장, 데이트 중에도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쥔 채 머리를 숙이고 있다. 시력과 경추 부위 이상은 필연적이다. 지금도 많지만 뒷목, 어깨, 윗등 근육통, 두통을 동반하는 거북목증후군 환자가 폭증할 것이다.

본질적인 이슈, 그러나 거의 논의되지 않는 문제는 스마트폰이 인간의 존재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둔하고 싶거나 혹은 실종자로 처리되고 싶다면, 스마트폰만 꺼 두면 된다. 휴대전화 번호가 시민권을 대체한 지 오래다. 어디를 가든 전화번호를 입력하라고 한다. 전자우편 비밀번호 변경, 기차표 예약, 은행 계좌 개설까지. 사회는 누구나 스마트폰이 있다는 가정에서 돌아가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질문에 왜 사람이 아니라 전화기가 답해야 하는가? 주민등록증 없이는 살아도 휴대전화 번호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세상이다.

통신사가 막대한 비용을 챙기며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소비주의, 자본주의 원리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소박하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자발적인 전체주의 사회가 있었던가.

공중전화 같은 공공 서비스는 사라져가고, 맥루한의 지적대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자기 몸을 확장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기계류를 좋아하는 일부 남성들은 자신이 소유한 기계의 성능이나 가격이 자아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의 새 기종이 나오면 달려가는 얼리 어답터(early adapters). 나는 이들이 핵, 원자력, 전쟁보다 ‘더’ 두렵다. 인문학의 실종 때문일까. 이 기기들이 양산하는 산업 폐기물의 재앙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다. 가입자 인증을 위한 핵심 부품인 유심(USIM) 칩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이를 구성하는 금속 성분이 다른 물질과 합성될 경우를 대비한 지식은 접하기 힘들다.

한국은 보수, 진보, 페미니스트 할 것 없이 성장주의, 발전주의자들의 사회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전 국민적 스마트폰 사용을 비판하거나 문제제기하는 논의를 들은 적이 없다. 모두가 구입과 사용을 당연시한다.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7 폭발 사건’으로 인한 리콜 비용이 1조5000억원에서 2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회사 측의 폭발 위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 중 환불을 요구한 이들은 10명 중 1명도 안 된다. 아직 100만개가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다. 생존보다 소비가 먼저인 사회다.

100만원을 전후한 ‘갤럭시노트7’이 출시되자 ‘5’는 22만원대로 떨어졌다. 나는 얼마 전 아버지를 위해 ‘노인폰’이라는 2G 폴더폰을 15만원에 구입했다. 스마트폰은 어디까지 진화해야 하는가. 아니, 이것이 진화의 문제일까. ‘7’과 ‘5’의 차이(약 80만원)와 ‘5’와 ‘2G’(7만원)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이는 진화라기보다는 이익을 위한 유행 창출이라는 기업 정신일 뿐이다.

20여 년 전 일이긴 하지만 1997년 어느 대통령 후보는 대선을 치르기 위해 “천억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언저리라는 뜻일 것이다. 2조원. 0자리 숫자가 6개(100만원)만 넘어가면 뇌가 멈추는 나 같은 사람에겐 상상할 수 없는 액수다. 그 정도의 돈이 ‘갤럭시7’의 수익 비용도 아니고(!), 리콜이라는 생산 비용의 일부다.

2조원을 다른 곳에 쓴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친환경 급식, 농가 부채 탕감, 가난한 암환자를 위한 치료비, 아르바이트 시급 1만원 책정, 시간강사 월급제, 택시기사 사납금제 폐지, 가정폭력 피해여성 쉼터,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한 의료 복지, 장애아동을 혼자 감당하는 엄마를 위한 사업…. 잠시 ‘로또’를 꿈꾼다.

물론 그 돈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돈이고, 5와 7의 차이는 ‘클 것이다’. 하지만, 2조원. 이것은 과학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향후 자본주의 사회의 방향을 가늠하는 사건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기술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내가 가장 궁금한) 도대체 인류는 누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누가 인간을 우러러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과학기술 발달의 목표는 편리함인가? 대안적 편리 개념은 없을까. 어디까지 발전해야 성이 찰까. 오래된 질문조차 멈춘 시대다.

발전주의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모색할 때다. 발전지상주의는 경제 강국이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이다. 생산과 소비를 무한정 늘리고, 시장 교환 체제를 확대하고, 자연을 얼마나 더 뒤지고 파헤칠 것인가. 스마트폰은 스마트하지 않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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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출판계와 일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작은 가십이 돌았다. 모 일간지 남자 기자가 자기 애인(여성)을 필진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내 별명이 라스트 원(맨 마지막에 소문을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웬만한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는 얘기다. 반응은 성별에 따라 달랐다. 여성은 익숙한 이야기인 듯 “(가부장제 사회의) 인생사지, 뭐, 새삼스러워?”라며 자조했고, 남성은 “여자들 실력이야 어차피 비슷한데, 뭐가 문제야? 남녀상열지사지”라고 당연시했다(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여자들 실력은 비슷하다”는 심각한 성차별 발상이다).

알다시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는 조선 건국 초기 성리학 세력이 고려시대 노래를 비하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이 단어는 이미 정치적 산물이었다. 고려 가요 가사에는 남녀 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많아 조선의 국시(國是)에 거스른다 하여 비난하는 뜻으로 쓰였지만, 오늘날에는 이성애(異性愛)를 통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좋아하는 것,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는 제도이고 규범이고 권력관계지, 자연스럽거나 자명하지 않다. 사랑은 모든 정치의 시작이자, 정치 중의 정치다. 하지만 이 말처럼 탈정치적이고 비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물다.

만일 위 사건이 연인이 아니라 합법적 부부이거나 서영교 의원의 경우처럼 부모 자식 관계였다면, 혹은 지금 검사들의 집단 비리처럼 남성 간의 관계였다면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비가시화된 혼외 관계일 경우, 권력관계가 아니라 스캔들 혹은 가족 제도 밖의 ‘순수한 사랑’으로 보호받는 것이다.

이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유행하는 ‘여자사람친구’ 혹은 ‘남자사람친구’라는 말이 생겼다.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생각게 하는 심오한 조어다. 문법적으로 ‘여자사람친구’는 틀린 말이다. 가장 넓은 범위는 ‘사람’이므로 ‘여자’와 ‘친구’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여성과 인권’이 틀린 표현인 이치와 비슷하다. 이 조합에는 이미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남자 친구) 있니?”라고 물었을 때, 여친은 애인을 뜻한다. 중간에 ‘사람’이 들어가는 경우는 여친이나 남친이 문화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기혼 남녀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다시 말해, ‘여사친’과 ‘남사친’이 탄생한 배경은 다음과 같은 원리가 작용한다. 이성애 제도에서 남성과 여성은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친구가 되려면 성별을 따지지 말아야 되고, 일부일처를 규범으로 하는 결혼 제도에서 이성 친구는 곧 불륜으로 의심받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람’이, 단어 중간에 들어가야 안전해진다.

부모 자식 관계를 포함, 모든 인간관계는 교환이다. 사랑은 더욱 그렇다. 교환은 상업적인 의미에서 상호 작용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운동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사랑의 교환 법칙과 성산업에서 매매의 법칙이 연속선에 있다는 현실을 설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자는 낭만화와 정상성을, 후자는 낙인과 혐오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는 여성이 성을 기준으로 창녀와 성녀로 이분화되는 과정이다. 남성의 존재는 성을 기준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성역할-이성애-결혼-성매매의 연속선 개념은 “신성한 결혼과 매춘을 동일시하다니”라는 분란을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이 연속선이 차별인 이유는 교환 법칙의 공통점 때문이다. 어느 관계에서나 남성의 자원은 돈, 지식, 지위 등 사회적인 것에 반해 여성의 자원은 여전히 외모와 성, 성역할 행동(애교, ‘여우짓’, 연애화된 인간관계…)이다. 매력과 자원의 성별화. 남녀의 자원에 대한 사회적 평가, ‘유통기한’, 교환 원리는 정반대다. 이것이 차별이다. 남성은 이성, 여성은 몸으로 간주되는 가부장제 문화질서다. 자신보다 ‘나이 많고 뚱뚱한’ 여성을 사귀는 남성은 드물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근원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다. 불평등 교환이기 때문이다. 이 불평등 교환을 잘 이용하는 소수의 여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그럴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원 있는 남성 역시 소수이기 때문이다. 위 사건은 규모가 다를 뿐, 우병우씨 사건과 같은 권력형 비리다.

예전 기혼 남녀의 사랑은 성매매와 사랑이 주요 양상이었다면, 요즘은 사랑과 비즈니스가 결합한 경우가 많다. 문제가 될 경우 “진정한 사랑” 주장파와 “비즈니스/술친구” 주장파로 갈리지만, 사랑과 비즈니스가 분리된 사랑이나 인간관계는 없다. 중년 기혼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고 치자. 남성은 자원이 있고 여성은 없거나, 없는데 욕망만 크다. 남성은 여성의 스폰서가 된다.

이것은 “어떤 인간관계에서나 발생하는 일”인데, 사람들은 나더러 왜 정치적 이슈냐고 묻는다. 거듭 말하지만, 요점은 다른 인간관계와 달리 남녀 관계에서만 작동하는 교환의 전형성과 차별성이다.

한국은 연줄이든 네트워크든, 관계사회이다. 그 관계는 주로 남성연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여성은 여성성 혹은 섹스로 그 연줄에 동승하기 시작했고 점차 당당해지고 있다. 신○○씨 사건이 ‘일반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여성이나 진보 진영에서도 드물지 않다. 여성은 계급, 나이 등 서로 다른 상황에 있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해(利害)를 실현한다. 여성주의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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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원으로 참여하는 단체에서 대중강좌를 기획하는 회의가 있었다. 주제를 ‘양심의 자유’로 정하고 전문가 A박사를 섭외하기로 했는데, 회원 두 명이 이견을 냈다. 한 사람은 요즘 수강생들이 양심의 자유에 관심이 있겠느냐며 강의 주제에 회의적이었고, 다른 사람은 A씨를 개인적으로 아는데 “양심이 없는 분”이라며 반대했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이 에피소드가 지금 한국 사회의 중요한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양심의 자유(freedom of conscience)는 개인이 추구하는 신념이나 가치관에 대해 외부 세력(주로 국가)의 억압이나 강요가 없어야 한다는 대표적인 인권 사상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사상의 자유”라고 표현하지만 서구에서는 근대 초기 르네상스 때 종교의 자유에 대한 사회운동으로 출발했기에 신앙의 자유의 의미가 강하다.

그간 우리 현대사를 지배해온 일제와 미국에 기댄 군사독재 세력은 사상의 자유를 철저히 탄압해왔고 수많은 정치범과 양심수(良心囚)를 양산해왔다. 대한민국은 한 인간을 45년 동안(1951~1996) 감금한 기록을 갖고 있는 국가다.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만델라도 27년이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양심의 자유는 주로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 국가(정권)는 위기에 몰리면 엉뚱한 ‘종북몰이’를 할망정,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애초부터 “단일한 국가의 이익”은 이데올로기일 뿐 실제로는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어쨌든 요즘은 국가의 이익에 반대하는 사상을 깊이 연마하고 주장하는 개인도 별로 없다.

요약하면, 예전에는 양심의 자유가 공적영역에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주장됐다면 지금은 ‘양심의 자유’보다 개인들 간의 ‘양심의 의무’가 절실한 시대다.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던 시대조차 한참 지났고, 양화는 어딘가에 숨어 분통과 우울 속에서 지내는 것 같다. 우리는 양심은커녕 상식도 공유되지 않는 시대를 견뎌내고 있다. ‘양심 없는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기(詐欺)와 횡령(橫領)이다. 이 말은 법률 용어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타인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모든 행동을 의미한다. 

근래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형식의 양심 종말(?)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장단점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장단점은 결국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는 관념론이다(“악용하지 말자!”). 그보다는 SNS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의 진보, 보수는 너나없이 발전주의자들이다. 이들 모두 IT나 스마트폰의 진화에 열광한다. 성장주의와 민주주의는 상극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SNS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SNS는 날마다 갖가지 기록을 경신하는 극단의 자본주의 체제에 범퍼(안전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 보내기, 현실도피, 자기만의 세계를 충족시키는 장난감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둘째, SNS는 기존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온라인은 가상세계고 오프라인은 현실이 아니라 모두가 현실이다. 진짜 현실도 SNS도 다양한 현실들의 하나다. 이 때문에 SNS의 헤비 유저들은 현실세계의 ‘루저’가 아니라 다른 현실의 국민이요, 주체다. 이들은 여러 개의 아이디(시민권)와 익명성, 연결망으로 다른 현실의 ‘주류’를 공격한다. 이들 중 일부는 키보드 노동으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혐오 산업을 생산한다. 유명 인사를 괴롭힘으로써 자아를 고양한다(‘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같은 사이트가 대표적일 것이다). 키보드만으로 자아실현이 가능한 시대다. 

가장 큰 문제는 SNS의 자아가 또 하나의 자아가 아니라 아예 ‘동명이인’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사람과 페이스북에 재현되는 사람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사기가 발생한다. 온라인상의 욕설이나 여성에 대한 혐오도 문제지만, 이는 새삼스럽지 않다. ‘일베’는 새로운 미디어가 곧 권력이라는 것, 즉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임을 잘 보여준다. 오프라인에서는 그런 언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자기 홍보는 규제가 없다. 페이스북에는 ‘헌신적인 사회운동가’ ‘올바른 페미니스트’ ‘억압받는 소수자 대표’ ‘미모의 개념녀’가 넘쳐난다. 개인의 일상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자기도취와 관음증, 노출증을 전제한다. SNS에 자기소개를 나쁘게 하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는 국가가 여론을 조작했지만, 지금은 개인이 방송국을 운영하고 여론을 만든다. SNS를 통해 개인의 능력과 이미지를 과잉 재현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다. SNS의 ‘이미지’로만 사회적 영향력을 갖거나 거짓 모금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팔로어 숫자에 의해 좌우되고 그들의 환심을 얻으려면 일상을 접고 온라인상에서 세력 확보에 사력을 다해야 한다. 실제 삶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양심의 자유는 부정의한 권력에 저항할 때 필요한 권리이고, 양심의 의무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필요한 윤리다. 후자에 기반을 둔 전자의 실천은 도인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매체의 발달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기술의 한계보다 양심의 한계가 더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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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한한 <제이슨 본> 시리즈의 배우 맷 데이먼은 JTBC 손석희 앵커가 “<007> 시리즈(제임스 본드)와의 차별점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007은 여성 비하적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물 부족 해결을 위한 환경운동가이자 20대에 친구 벤 애플렉과 함께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매력적인 배우에게 ‘겨우’ <007>과 <본 시리즈>를 비교해달라는 요청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사심을 담아 말한다면, 한마디로 ‘체급’이 다른 영화다. <007>은 영국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가 본드로 교체되기 전까지는 냉전 이데올로기 범벅에 약자를 ‘악의 축’으로 그린 미국산 순수 오락이었다.

<본 시리즈>와 <007>은 정반대의 정치학을 추구한다. <007>이 국가를 상징하는 스파이를 내세운 대리전으로 국민국가 개념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였다면, <본 시리즈>는 후기 국민국가 시대의 텍스트다.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고안된 정상적인 국가는 국민-주권-영토가 있어야 하며, 국가는 국민과 국어를 만들어내고 국민은 국가에 등록되기 위해 노력했다. 서구에서 시작된 모델이지만 국가와 국민 간의 상호 정체성 확립 과정은 국가와 국가의 모임인 ‘국제(inter-national)’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가가 먼저, 국제가 나중”이 아니다. 국가나 국제나 가상의 개념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는 국가와 국민의 연결 고리를 문제시한다. 주인공은 그간 조국이 저질러왔던 일을 악몽으로나마 기억하고, 그 최전선에서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CIA 요원)을 부정하는 영화다. 한마디로, 그는 국민으로부터 탈퇴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증오하고 자신의 양심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를 응원하면서 국민-국가(nation-state)의 연결이 부정되는 장면을 지지하게 된다. 그 과정의 핵심에 사과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2편 <본 슈프리머시>의 도입부다. 주인공은 춥고 바람 부는 한겨울, 어두운 모스크바 밤거리를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구르고 쫓기며 어느 작은 집에 도착한다. 그의 얼굴은 피로와 추위로 반쯤 넋이 나가 있다. 눈은 충혈되고 숨소리는 겨우 이어진다. 소녀가 들어온다. 그가 도둑이나 성폭력범이라고 생각한 소녀는 잔뜩 겁먹은 채 “저희 집에는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녀를 안심시키며 본은 말한다.

“너희 부모님(러시아 하원의원 부부로 누명을 쓰고 죽음)은 애국자셨다. 나는 미국인이고 어쩔 수 없이 너의 부모님을 죽였고 너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너무 부족하지만 이 말을 하기 위해 왔다. 부모님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사과를 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살해한 적국의 가족에게 사과할 목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유럽 전역을 도망 다닌 것이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과. 사죄. 용서를 구하는 것. 타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자세. 이 영화에서 부모를 잃은 소녀는 주인공의 잘못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깊은 죄의식에 젖은 채 소녀가 부모를 좋게 기억할 수 있도록 사과한다. 바로 옆 사람에게 하는 사과가 아니다. 그는 목숨을 걸었다.

한·일 관계에서 사과는 이 글의 분량을 넘어서는 주제고, 일단 우리 사회에서 사과의 의미는 타락 일로다. 나 같은 시민은 알아듣기도 힘든 부패 뉴스(예를 들면, 검사의 주식 대박)의 주인공이 여론에 몰리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억지 멘트가 사과다. 대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데 어이가 없다. 국민들은 그들을 걱정한 적이 없다. 분노할 뿐이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바뀐 경우는 더 억울하다. 피해자나 약자가 사과할 것을 강요받는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과는 정의나 시비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문제가 되었다. 사과는 ‘을’이 ‘갑’의 자기 합리화와 마음의 평화를 위해 혹은 숨겨진 죄의식을 덜어주기 위한 제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우리는 자본과 각종 ‘갑’들이 통치하는 사회이면서,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도덕적 기준이 매우 낮은 뻔뻔한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과는 희귀한 일이 되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했다가는 상처받고 분노만 쌓일 뿐이다. “아예 기대하지 말라”가 위로가 되는 사회다.

우리는 흔히 ‘사이코패스’는 뭔가 특이하고 천재적인 나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단순한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걸맞지 않은 권력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무능하고 불성실하지만 양심의 기준이 매우 낮은 사람이 사이코패스다. 즉 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나쁜 일을 쉽게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사이코패스다. 이런 사람이 주류인 사회에서 상식적인 사람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처럼 사과하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도, 그럴 만한 일도 없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의미를 알고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이 세상에 절망을 느끼지 않도록 고통과 복수심에 시달리지 않도록 헤아리는 마음을 보여주기만 해도 사과의 반은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글을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진짜 문제는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사회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맞아, 그렇지…. 나는 우울해졌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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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학부모 대상의 강의를 갔는데,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 유명 영화감독과 여배우의 혼외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질문한 수강생을 실망시키기는 싫었지만, 관심 없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간통죄 존폐 논란 때부터 내 의견은 없거나 유보적이었다. 우선 ‘간통(姦通)’ ‘외도(外道)’ ‘바람’ 등은 뜻과 어감 모두 적절한 표현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혼외 성애(섹스, 관계, 사랑)’라고 하겠다. 통념과 달리 한국 남성의 혼외 섹스는 사랑보다 성 구매의 성격이 강하다. 일부일처제는 근대 중산층 핵가족의 규범일 뿐,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실현된 적은 없다. 남성이 자원을 독점한 사회에서 복지제도로서 일부다처제든 혼외 성애든 성산업이든, 남성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보완하는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왔다.

영화감독 홍상수와 배우 김민희

혼외 성애는 찬반, 시비, 대책 마련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성차별 위에 구축된 가족 제도에서, 혼외 관계의 원인과 결과는 성별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유부남의 혼외 성애는 두 여성의 사랑을 받지만, 유부녀는 두 남성에게 노동하는 경우가 많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과 사랑은 남성에게는 프라이버시지만 여성에게는 생존, 자아 개념, 시민권의 문제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있어도 젠더와 계급을 넘는 사랑은 없다. 이처럼 사랑의 자유와 사랑의 조건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혼외 성애를 “사랑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낭만화된 무지다. 모성을 비롯해 그 어떤 사랑도 무조건적이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다. 사랑만 한 정치경제학도 없다. 지난 50여년 동안 여성주의는 성과 사랑을 정치적, 공적 의제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왔다.

성별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남성이 전업 주부로서 평생 아내에게 헌신한다. 덕분에 아내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했다. 치매에 걸린 장모도 간호했다. 아내는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아들뻘의 남자 배우와 ‘행복하고 싶다’며 떠난다. 이 사연은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등극한다. 온 국민이 이 전업 주부 남성의 고통과 모욕을 알게 된다.” 이런 경우가 있는가?

50대 유부남과 30대 미혼 여성의 사랑. 이 전형적인 낡은 뉴스에 대해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남자감독은 아내의 ‘작품’이고, 여자배우는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무임승차자다. 여기서 개인의 잘잘못은 없다. 문제는, 여성들은 항상 여성의 노동으로 자원과 매력을 갖게 된 남성에 의해 분할 통치된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바닥인데 성과 사랑에서만 평등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때 여성은 성별화된 자원(젊음과 외모)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성역할-이성애-결혼제도-성매매의 연속선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한국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말만큼이나 유언비어도 없다. 여성 노동의 증가를 지위 향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남녀 임금 격차(gender wage gap)를 발표한 200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지켜왔다. 2014년도 역시 압도적 1위다.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7% 덜 받는다(2위 에스토니아는 26.6%). 지난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29개 조사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성차별 지수 역시 145개국 중 115위다.

한국 여성의 교육 수준은 세계 1~2위인데, 노동시장 지위는 최하위권이다. 국가, 사회, 남성, 가족 제도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의 대책은 개인적 차원의 모색일 수밖에 없다. 고용 차별과 가사노동까지 이중노동을 하거나 가능성 있는 남자를 만나 ‘누구의 아내’로 살거나 비혼(非婚), 이렇게 세 가지다.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어떤 여자도 딱히 갈 곳이 없다. 아낌없이 투자(내조)할 만한 ‘잘난’ 남자를 만나기도 힘들지만, 강제든 자발이든 노동시장 진입을 포기한 고학력 여성은 사회 대신 가족 제도를 통해 자아실현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세상 그 어떤 보험으로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이 있다(남편의 ‘새로운 사랑’).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라 도박이다.

이처럼 혼외 성애의 근본 원인은 성차별이다.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한 이들은 사랑이 식은 뒤에도 한 사람과 계속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없다. 하지만 “불같은 사랑”이라고 해서 책임과 윤리가 면제되는 건 아니다. 사랑은 가장 치열한 권력 투쟁의 영역이지만, 당사자들은 탈정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불성실한 삶이다.

나는 모든 사랑에 찬성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사랑은 없다. 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매력은 철저히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그/그녀만의 매력 따위는 없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열애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상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쉽지 않은 것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 이 노래의 의미를 깨닫고 죽는 사람, 많지 않다.

아내의 헌신으로 출세한 유부남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 문제를 보편적인 고통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기를 제안한다. ‘누가 가장 잘못했는가’보다 ‘누가 가장 고통 받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하자. 더불어 그녀의 고통이 노동시장의 성차별, 가족 제도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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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5일에 출판영업자들이 주최한 ‘한국출판유통 대토론회’에서 한 발표자는 출판사들의 ‘광고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의 매출이 올랐다는 것은 광고가 늘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회의실에 꽉 들어찬 사람들이 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광고는 무엇일까요? 신문과 방송이나 잡지 등의 대중매체에 집행하는 광고가 아니라 대형서점의 판매대를 구입하는 비용과 대형 온라인서점에 책을 초기 화면에 노출하는 비용을 말합니다.


마케터들은 대형 오프라인서점에서 같은 책이 네 줄 이상 진열되어 있는 경우는 십중팔구 출판사가 판매대를 사서 책을 진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리려면 서점의 판매대부터 구입해서 책을 진열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서점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온라인서점의 초기 화면에 책을 노출하려면 공급률부터 낮춰줘야 하고, 광고도 하고, 사은품도 제작해 제공해야 합니다. 심지어 초기 화면에 노출한 책은 무조건 매출이 올라야 한다는 서점 담당자들의 요구에 사재기를 통해서라도 매출을 늘리는 출판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비용이 만만찮아 이익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모처럼 기대되는 신간을 펴내 판매대라도 사서 진열하려면 자리가 없어 추첨까지 해야 할 정도랍니다. 이 바람에 의외의 신간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사전 기획된 책들만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바람에 출판시장은 물이 고여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저수지나 다름없습니다.

아, 예외가 있었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을 수상하는 바람에 그의 소설들과 때마침 출간된 2010년대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행나무)이 베스트셀러 상단을 일제히 차지한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올해 상반기에는 모처럼 서점 매출이 작년보다 올랐다지요.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이런 의외성이 사라진 지 정말 오래됐습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의 후광에 힘입어 잠시 반짝하는 소설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이 본원적 상품이 아니라 다른 문화상품에 영향을 받는 파생상품으로 전락했다는 자조만이 넘쳐났지만요.

이렇게 된 근원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50년 역사를 가진 민음사의 대표 상품 중 하나는 ‘민음세계문학’ 시리즈입니다. ‘민음세계문학’이 독주하던 시장에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시공사의 ‘시공 문학의 숲’,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창비의 ‘창비세계문학’,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책세상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열린책들의 ‘열린책들세계문학’ 등의 후발 주자들이 가세해 다양한 고전문학 작품을 개발하려는 경쟁체제가 구축돼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출판사가 번역판과 영문판을 묶은 세계문학 시리즈를 내놓고 영어학습용 실용서라 우기며 50% 할인해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실용서는 무한 할인이 허용됐습니다. 개인이 아닌 단체가 역자로 등장한 이 시리즈는 번역의 질도 의심받았습니다. 그러나 대형서점에 집중 진열되어 있는 이 시리즈를 독자들은 오로지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선호했습니다. 아, 윤문을 해서 쉽게 읽히는 장점도 있었다지요. 덕분에 이 시리즈를 펴낸 출판사는 사옥을 마련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 출판사의 ‘성공’에 고무된 출판업자들이 이런 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작년 이맘때쯤에는 한 신생 출판사가 문학동네와 민음사의 판본을 절충해 짜깁기한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묶은 세트 도서가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바람에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해당 출판사들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문제의 세트 도서는 번역 표절이 인정되어 서점에서 사라졌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문학시장에서 공정경쟁이 사라지는 바람에 세계문학시장마저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수익구조가 악화된 문학 출판사들은 장기투자가 필요한 한국문학을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소설을 한 달에 한 권씩이라도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는 한 손으로 꼽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소설만 써서 먹고사는 작가 역시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자조가 넘쳐났습니다.

물류유통이 생산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유통 시스템이 잘못 작동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악순환의 구조가 지속되어 전반적인 질적 하락을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 출판시장은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는 문학시장에서만 국한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림책의 질은 세계가 인정하는 수준에 올라섰지만 국내시장에서 1만부가 보장되는 작가는 한 손가락조차 꼽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어린이문학 도서를 읽고 좋은 책을 골라서 서평을 해주는 일을 하는 이들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떨어져 추천할 책이 별로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이 흥해야 출판시장도 활성화됩니다. 문학적 상상력이 넘치는 나라여야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 몸의 비타민과 같은 것입니다. 소량이나마 갖추고 있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법입니다. 그러니 좋은 소설들이 제대로 유통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게 과도한 할인경쟁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책의 질보다 마케팅 비용을 받은 책만을 노출해주는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 운영자와 이들에 놀아나는 출판인들부터 각성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들이 제발 가격경쟁이 아니라 가치경쟁을 벌여주기를 간곡히 빕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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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은 생각보다는 덜 무서웠다. 다음날 ‘서울환경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스톱(Stop)>을 보았는데 정말 무서웠다.

<스톱>은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 당시 지역 주민인 젊은 부부의 임신과 이를 둘러싼 갈등을 다룬다. <곡성>이 단순한 귀신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공포(귀신)보다 인간 자신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의 원인은 언제나 우리 내부에 있다.

여성의 출산과 자기 결정권, 사고 지역의 고립, 에너지 소비의 계급성(전기로 돈을 버는 사람과 그로 인해 삶이 파괴되는 사람), 어린 피해자를 향한 또래들의 이지메, ‘기형아’에 대한 공포, 일본 정부의 태도, 감독 특유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묘사…. 이 모든 이슈에 관심 있는 나로서는 매순간이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사고 지역에 몰래 들어가 돼지고기를 도축하여 도쿄 중심가 음식점에 내다파는 청년의 이야기가 좋았다. 남자 주인공이 청년에게 “미친 놈, 범죄자”라며 고발하겠다고 소리치자, 그는 “온 국민이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알고 먹을 사람은 없으므로 자기가 몰래 ‘먹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했다. 감독은 타인의 고통을 ‘마음’으로 공감하는 윤리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피해를 ‘행동’으로 공유시키는 윤리를 제안한다. “전기는 도쿄에서 쓰는데 피해는 왜 우리가 봐야 해!” 이는 “다 같이 망하자”는 논리가 아니다. 원전 자체를 없애야 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므로 일시적인 ‘해결’은 피해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행하는 사람(주체)과 당하는 사람(대상)의 구분을 없애고 타자(他者)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실험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국외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전체의 동등한 일부,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불행은 남의 일이다. 나에게 일어날 리 없다. 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희망이 없다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손쉬운 발상인 저항이나 진실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의 위치를 질문한다.

김기덕 감독_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문제는 ‘도쿄’와 ‘서울’이, 특정 지역(후쿠시마, 밀양, 강정…)에 위험 시설을 건설하여 끊임없이 내부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한국사회는 문제가 생기면 은폐(그것도 대충), 책임자의 거짓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림, 여론이 조용해질 때까지 방관, 소 잃고 외양간 안 고치기, 피해자 고립을 대책으로 삼는 나라다. 진상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를 고사시키고 문제를 떠넘긴다. 통치 세력은 이 문제에 관한한 대단히 발전된 메커니즘과 언어를 갖고 있다.

희생양을 생산하는 방식은 타인과 완전한 단절을 추구하면서 교집합을 제거하는 것이다. 타인을 나의 외부, 부정(否定)으로 설정한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인간사가 작동하지 않는 시대다. 타인의 기쁨은 시기와 스트레스이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짜증을 낸다. 슬픔은 소비의 적이다. 권력은 희로애락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 시민만을 보호한다. 이처럼 기쁨과 슬픔을 자율적으로 나눌 수 없게 될 때,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피해를 특정인의 몫으로 치부하지 않고 “바로 당신의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필요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뜻하는 용어, ‘필요악’. 인식과 문법 면에서 모두 틀린 표현인데, 사회는 이 말을 좋아한다. 불의와 불평등을 손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성매매, 누가 군대에 갈 것인가 등의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일상에서 가장 만연한 필요악 논리는 아마 성매매일 것이다. 성매매는 필요악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필요하고, 누구의 입장에서 악이란 말인가. 필요도 악도 모두 남성의 시각이다. 악은 악일 뿐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제도화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필요한 악’은 없다.

군사주의를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들 중 일부는 징병제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군대를 없앨 수는 없으므로 지원병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도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사람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로 신분 질서가 정해진 판에 지원병제가 되면 어떤 계층이 군대에 가겠는가? 군대는 더욱 계급화, 게토(ghetto)화될 것이다.

방사능 생선을 먹어도 된다고 TV에 나와 시식하는 일본 총리의 모습은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문제가 없다면 증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 정부는 이런 속임수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가 슬퍼하느니 “산 사람이라도 살자”고 주장한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생각이 문제의 근인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 가기 싫은 군대, 환경 오염된 미군기지…, 해결할 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한다. 그래야 개선된다. 자기 집에 물난리가 날 때, 기름이 유출될 때, 자식이 군대에서 자살할 때, 세월호에 탔을 때‘만’ 권력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불행하지만 이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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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당시 유색 인종에 대한 보복 폭력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어느 미국 시민이 이렇게 말했다. 70대 여성인 그녀는 “미국은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너무 많이 먹고 많이 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풍요가 두렵습니다. 이번 사건은 나누라는 경고입니다”. ‘피해 국가’ 국민의 입장에서 그녀의 성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경제 영토 확장”을 부르짖는 한국사회의 아류 제국주의 심리를 분석한다. 얼마나 더 잘살아야 부자일까. 우리도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먹고 많이 버리고 산다. 부는 국부(國富)로 셈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미국인보다 부자인 한국인도 있고 그 반대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국민 개개인의 삶이다. 경제가 성장해도 굶는 사람이 있다. 경제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구성원의 삶의 질로 산정되어야 한다.

지난 4월10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 지면 ‘별별시선’ 코너에 실린 “이념대로 찍으려니…”라는 글을 읽고 놀라웠다. 특정 지면의 특정 필자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은 이미 장흥배 노동당 정책실장이 반박한 바 있지만 나는 그 글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목소리를 보탤 필요성을 느꼈다.

그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가장 올바른 선택을 하는 유권자로서 ‘비판적 지지’나 ‘전략적 유연성’을 선택할 바에야, 백지 투표를 하는 고집불통 진보정당 지지자다. 그런데 이번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의 상황을 보니 하나같이 문제가 많다…녹색당은 ‘탈핵’과 ‘탈성장’이 주요 정책이다. 문제는 ‘탈성장’이다. 안타깝게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다.”

“성장=행복”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지금 한국사회를 망치고 있는 가장 문제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번 선거에서 시민들은 이런 통념에 제동을 걸었다.

내가 우려하는 점은 두 가지다. 가장 올바른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탈성장에 대한 오해. 전자는 남성성을 대표하며 후자는 “일단 파이부터 키워야 한다”는 1970년대부터 지겹게 들어온 성장지상주의다. 가장 옳은 것만 선택한다는 자부심은 오만과 독선이 아니라 현실과 이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의 변화, 그마저도 투명하지 않은 구조, 한국경제가 글로벌 자본주의로 편입된 상황의 초국적 상층 계급 연대, 과학기술의 발달 등으로 경제성장이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현실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집권 여당과 대기업은 경제성장 혹은 노동개혁의 이름으로 양극화 논의를 입막음하고 있다.

지금 경제발전은 실업과 빈부 격차라는 악순환의 동력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시위 구호였던 “1%를 위한 경제를 바로잡자” “경제 살리기 전에 사람부터 살려 주세요”라는 외침이 생각난다.

녹색당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녹색당은 ‘그들만의 경제발전’으로 인해 집터와 일터를 잃게 된 이들의 절실한 목숨 연대지(밀양 송전탑 투쟁을 보라), ‘반(反)경제’ 정당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의 정당 득표율은 0.76%. 미국에서 진행하는 TV창업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5% 경제성장을 도모하자는 기독자유당의 득표율, 2.63%를 상기해보자.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곶자왈_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제주에는 “제주의 허파”라고 불리는 ‘곶자왈’이라는 지형이 있다. 낮에도 수풀이 우거져 어둡고 휴대전화도 잘 안된다. 열대 북방 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 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희귀한 숲이다.

암석, 자연림과 가시덩굴이 혼재하는 제주 생태계의 생명선으로 한라산에서 해안선까지 동식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완충 역할을 한다. 제주산 양치식물, 미기록종, 환경부가 지정한 각종 야생식물이 서식한다. 2009년에는 제주도 전체 면적의 10%였지만 지금은 5~6.1%로 추정된다.

이 중 사유지가 약 60%로, 해를 거듭할수록 엄청난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사유지 매수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2년 동안 각각 6250만원, 1억2500만원에 불과하다. 아무리 생색 정책이라 해도 민망한 액수다.

산방산 근처의 안덕 곶자왈에 가면 소떼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이 지나가기를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음료수병, 사탕 포장지가 떨어져 있을까봐 비닐봉지를 준비한다. 그곳에 가면 누구나 쓰레기를 줍게 된다. 이런 곶자왈에 골프장과 리조트를 짓고 돈을 벌면 경제성장인가.

탈(脫)성장주의는 탈(奪)성장, 성장을 탈취(奪取)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과일의 종자까지 먹지는 말자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지속가능한 경제를 의미한다. 서민들이 부자 증세를 반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이유는, 있는 자들의 탈(奪)성장 공포를 ‘잘사는 나라’의 국민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불경기와 탈(脫)성장은 다르다. 곶자왈 보존을 원하는 유권자 수와 곶자왈 면적이 상승 비례하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 경제가 망하지는 않는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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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나는 알파고가 바둑 챔피언에 도전하는 서양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 생각해보니, 사람이라고 해도 맞는 이야기다. 원래 인공은 사람 몸의 확장, 일종의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혈액과 세포가 없어도 안경, 철심, 컴퓨터 등 기계는 몸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이는 내 생각이 아니라 “미디어는 메시지다”로 유명한 철학자 맥클루언이 1960년대 주장했던 바다. 사이보그나 로봇 역시 ‘인간적’ 성질과 기능(직관, 추리, 자율성…)을 갖추고 있다. 과학 기술 담론은 그 범위가 확대될수록 “인류의 진화”, “SF소설이 현실이 되었다”며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SF,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적으로’ 말하면 모순이다. 공상을 현실에 실현하는 과정이 과학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상 자체는 과학이 아니다. 통념과는 달리 대부분의 SF 장르 특히 영화는 가장 진부한 장르다. SF 영화는 상상력과 과학의 이야기라기보다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학이다. 은유도 아니다. 대놓고 말한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외계인의 공습이 있고 지구의 수호자를 자처한 미국이 나서서 그들을 물리치는 스펙터클한 화면. 이것이 대개의 SF 영화다. 이를 통해 미국은 자국의 과학 기술을 자랑하고 인류의 지도자로서 등극을 반복한다. 유럽의 SF 영화가 드문 이유다. ‘북한’이나 ‘소말리아’가 지구를 구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만일 남한이 외계인을 발견했다면 미국에 신고할 것이다. 이처럼 SF는 할리우드의 지역 특산품에 불과하다.

미국이나 백인 남성처럼 인간을 표상하는 그룹이 외부와 접촉하면 우리는 이를 대결(match)이라 부른다. 그러나 ‘비(非) 인간(유색인종, 여성…)’과 외계의 접촉은 오염이나 오염 여부를 실험하는 장이 된다. 전자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후자는 혐오감을 준다. 영화 <디스트릭트 9>은 외계인과 싸우는 내용이 아니라 그들을 감시, 격리하는 얘기다. 이런 일에는 미국이 나서지 않는다. 이런 텍스트는 SF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예술 영화’, ‘정치 영화’가 된다(남아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SF로 풀어냈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 “누가 더 우수한가” 식의 사고는 위험하다. 누구도 인간을 대표할 수 없으며 사회는 균질적이지 않다. 이러한 언설의 효과는 차별을 비가시화하고,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단결시킨다. 우리는 이번에 알파고를 통해 가장 뛰어난 인간 이세돌, 가장 발전한 인간의 기술(구글)과 동시에 동일시되어 열광했다. 소재가 바둑이어서 다행이다. 군사력이라면 어떻겠는가. 과학의 발달은 차별과 지배 없이는 불가능하다. 연구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평등을 전제한 사고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개인의 현실은 천차만별이고 과학의 필요성 수준도 인구수만큼이나 다르다. “일자리가 없어진다”, “인간성 상실”은 인공 지능 상용화의 결과가 아니라 출발이다. 과학 발전을 주도하는 세력이 “어떻게”보다 “왜”를 먼저 고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불행히도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대다수 인류인 장애인, 환자, 가난한 이를 위한 사례는 역사상 ‘없었다’. 과학의 발달이 지구와 인간 구성원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의인화된 과학의 자기도취처럼 역겨운 것도 없다.

반면 ‘킹콩’, ‘슈렉’, ‘미녀와 야수’를 생각해보자. 인간이 동물 등 반(半)인간과 접촉할 때(사랑과 섹스) 인간의 대표가 남성인 경우는 없다. 반드시 여성이다. 남성이 반인간과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은 죽는다(인어공주). 이때 여성의 몸은 새로운 종(種)의 출현을 위한 실험 도구가 된다. 인간과 기계, 동물과의 섹스는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만 신화, 동화나 영화에는 수없이 재현된 익숙한 이야기다. 여기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남성)이 만든 인공물이다. 여성과 킹콩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도 킹콩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 발전이 곧 인간의 진화라고 믿는 발전주의자들과 논쟁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공지능 개발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을 인류의 정보 격차, 아니 당장 물 부족과 에이즈를 해결하는 데 조금만 분산 투자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능력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데 <프랑켄슈타인>만 한 소설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괴물’이 자신을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죽이는 이유는 “피조물에 의한 인간 지배”가 아니다. “나도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여자 피조물)을 만들어 달라”는 괴물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친밀감, 사랑, 감정은 유기체만의 특성이자 가장 강력한 능력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능력을 결정하는 것은 유형화된 사고가 아니라 감정(mood)이라는 에너지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국은 이세돌 9단의 완벽한 승리다. 물론 구글이 가장 많은 돈(효과)을 벌었지만 돈이 곧 승리는 아니니까.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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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2011년 이른바 안철수 열풍 때 썼다면, ‘선망과 정치와 절망의 정치’가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인으로서 두 사람은 이력이나 캐릭터, 세대(1941년생, 1962년생) 등에서 공통점이 거의 없어 보인다. 안 의원을 야권의 대안으로 보는 이들은 MB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새누리당과 안 의원의 지지층은 겹쳐 있었다. 이번에도 ‘안철수의 독립’으로 새누리당 지지표가 10%가량 떨어졌다.

MB와 안철수는 당대 대한민국 대중의 워너비,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선망의 대상이다. 이들은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스타이며 이를 발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물론 성취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안 의원은 개인의 노력과 성실성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젊은이들의 희망이었다.

이에 반해 MB는 ‘기업인 출신=경제전문가’라는 이미지를 백분 활용했다. 긴 이야기지만, 사실 현대건설 사장 시절 그가 실제 한 일은 ‘경영’이 아니었다. 어쨌든 유권자는 그와 공모했다. “당신처럼 부자가 되고 싶다.” 더 나아가 갖은 세파와 ‘갑질’에 지친 대중은 그처럼 ‘강한(뻔뻔한) 인간’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정치는 자원의 분배를 결정하는 책임이고 선거는 그 대리인을 뽑는 첫 과정이다. 우리는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대표자가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 즉 자신이 욕망하는 인물에게 표를 준다. 이는 유권자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최악의 정치다. 권리를 반납하고 지배자와 동일시하는 이른바 ‘대중 독재’다.

대중의 선망을 받는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독재자보다 더 잔인한 면이 있다. 부도덕하고 무능한데도, 단지 유명하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랑받는다면? 그런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잘해줄 이유가 있을까. 선망(羨望)은 ‘양(羊)의 고기를 보고 침을 흘리다’라는 뜻이다. 자기가 부러워 침을 흘리는 사람을 누가 존중하겠는가. 이때 통치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MB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듯이, 그는 ‘신선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라는 서민의 소박한 요구조차 조롱한 인물이다.


안철수 의원이 22일 대전 동구 시장 상인회 건물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열고 창당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_연합뉴스



대의는 어려운 기술(art)이다. 모든 국민이 국정을 논할 수는 없다. 정치는 훈련된 직업 정치인이 해야 한다. 그들이 대변을 넘어 대의(大義)를 지향하고 약자를 옹호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일단 원칙은 그렇다. 그러나 정치인이 국민을 대리하기는커녕 ‘그들만의 나라’를 추구하자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최근 우익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NGOs의 가치 지향은 분열되었고, 시민을 대변하는 기능은 약화되었다. 대중은 깨달았다. 이제 아무도 자신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떤 세력도 자기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원래부터 불가능했는지 모르지만 대의민주주의는 사라졌다. 직접민주주의, 즉 시위가 의회를 대신하기 시작했고 촛불시위는 그 신호탄이었다. MB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그에게 투표했던 이들이 쏟아져 나와 6개월 이상 거리에서 자신을 직접 대표했다. 다시 요약하면, 대한민국의 대의제는 의회→시민사회→직접민주주의→선망의 정치로까지 타락했다.

대표자(representative)는 우리의 재현(representation)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 선거 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그야말로 “일꾼”이다. 선망의 대상이 일꾼이 된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되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되면 된다. 가장 정치인이 되지 말아야 할 타입이 MB와 안철수 같은 인기인이다. 물론 누구나 직업 정치인이 될 수 있다. 안 의원은 이직(移職)했으므로 새로운 직장(정치인)에 충실하면 된다. 쉽지 않겠지만 그가 ‘부러운 사람’에서 말 그대로 국민의 몸을 ‘대신(代身)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간철수’나 ‘강(强)철수’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는 안 의원이 토크콘서트 등에서 소통과 힐링을 강조할 때 이상했다. 가족 사이에도 소통이 안되는 마당에 국민과 대리인 사이에 소통이 뭐 그리 중요한가. 정치인은 메시아가 아니다. 상호 계약만 정확히 인지하면 된다. 소통이라는 ‘따뜻한’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공정한 대리인이 아니라, 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호감 가는 사람을 원한다는 뜻이다. 모두들 외롭기 때문일까.

나 역시 그런가 보다. 현·전직 대통령들 중에서 왠지 MB가 가장 명랑해 보인다. 아니, 행복해 보인다. 우울한 연말, 나는 그를 부러워하고 있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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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일 때 ‘우리나라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나이 오십을 앞둔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은 그의 딸이다. 내 생각엔 그녀가 아버지의 ‘치적을 능가’할 듯하다. 이제까지도 레임덕이 없는 데다 그녀가 마음먹은 일은 국정교과서든, ‘창조 국방’이든, ‘배신자 응징’이든 거의 성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랑받기 때문이다.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녀를 정치인이나 대통령으로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비판이나 요구가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와 ‘대통령 박근혜’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두려움과 사랑. 군주가 백성에게서 둘 중 하나를 쟁취해야 한다면, 당연히 두려움을 얻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영원한 이론’이, “조국 근대화를 이룬 아버지”의 딸에겐 적용이 안되는 것이다. 폭력 경찰이나 국민을 쏴 죽일 수 있다는 국회의원은 두렵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다. 사랑은 ‘박심(朴心) 투표’로 연결되고 여기서 자유로운 정치인은 없으며, 선거는 그녀의 거의 유일한 정치적 능력이다.

대통령이나 유명인이 여성일 때 곤혹스러운 문제가 있다. 물론 이는 여성의 잘못이 아니다. 신경숙씨 표절 논란이 있을 때, 나는 표절 이후 우리 사회의 대응에 대한 비판 글을 쓴 적이 있다. 나의 대학원 생활 경험상, 학계의 표절과 문학이나 예술 분야의 표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학술 논문과 달리, 예술의 표절 기준이 모호하고 따라서 관대한 편이다. 나 역시, 신경숙씨의 오랜 독자이며 그 애매함을 이해한다. 이 때문에 나는 당시 내 글이 그리 ‘센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같은 여자로서 신경숙의 성공에 대해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남자보다 더 심한 비판을 할 수 있느냐, 여성의 시기심이 더 강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소설가 신경숙씨_경향DB



내가 감히 신경숙씨의 경쟁자도 아닐뿐더러, 여기서 나와 신경숙씨는 여성이 아니다. 나는 그때 여성으로서 여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독자’로서 ‘작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우연히 성별이 일치했을 뿐이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데, 여성의 행동은 성별만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신경숙씨든 누구든,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지지하고 기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내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성별, 계층, 지역 등 사회적 약자집단의 힘이 커지는 것은 내게도 중요한 일이다. 약자에게 배당된 파이가 커져야 그 집단에 속한 나도 ‘얻어먹을 게’ 생긴다. 직원 10명을 뽑는데, 여성을 1명 뽑을 때와 4명을 채용할 때 어느 쪽이 여성에게 유리하겠는가. 나는 ‘4명 뽑는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난 29일 박 대통령은 이화여대를 방문했다. 이를 저지하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대통령은 무사히 행사장에 입장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행사에 참석한 여성 인사들과의 모임은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이를 보도한 종합 편성 채널의 남성 앵커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여대생이 여성 대통령을 반대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여성이 여성을 배척하는 이런 분위기, 어떻게 보십니까?” 이 사건 역시 여성이 여성의 방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이 ‘대통령’에게 항의한 경우다. 학생들이 여성 혐오가 있어서 여성 대통령 입장을 막은 것이 아니다. 행사장의 ‘좋은’ 분위기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가 아니라 보수와 보수의 정체성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일상에 무수하다. 남성과 남성이 갈등하면 대리와 과장의 싸움이 되지만, 여성 상사와 여성 부하의 갈등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남자의 적도 남자다. 남성들의 투쟁은 여성의 그것보다 더 격렬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노사 갈등’이거나 ‘국제 정치’지, 같은 성별 간의 질투로 비하되지 않는다. 남성 대통령이 남녀공학 대학을 방문했을 때, “남성들은 남성의 성공을 시기하는군요”. 이런 멘트가 가능할까. 탁월한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가장 방해되는 구조는 여성 간의 갈등을 ‘시기심’으로 명명하는 사회라고 분석한 바 있다.

성차별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여성의 존재를 시민, 노동자, 지식인, 공무원 등 그들이 직접 수행하고 있는 다양한 역할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의 성역할’로만 제한하는 규범과 제도이다. 그래서 작가에 대한 독자의 언급은 시기심으로, 대학생들의 국정 비판은 여성 대통령 개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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