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문제로 거리의 플래카드가 선거철을 방불케 한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근거 없는 주장은 “우리 아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그런 적 없다)고, 간만에 멋진 말은 “좋은 대통령은 역사를 만들고 나쁜 대통령은 역사책을 바꿉니다”였다. 그렇다. 역사와 역사책은 다르다.

역사책의 내용이 진실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역사는 과거사(事)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해석이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고 현실 정치의 문제가 된다. 진부한 얘기다.

국정교과서는 찬반 이전에 쟁점과 점검 사안이 하나둘이 아니다. 일단 국정(國定)을 국정(國正)으로 오해하기 쉽다. 어차피 국사는 불가능하다. 국사는 국민의 역사는 아니다. 국사는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국가와 국가주의의 산물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를 포함,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 정확히 말해 그들과 동일시하고 싶은 후대 권력자들의 자기 기록이다. 쓰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문서화된 것만이 역사일까. 구술사는 역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일제시대 군 위안부 사건은 없었던 일이 된다. 침략자, 통치자들의 문서 파기가 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고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마치 자료는 객관적이고, 사람의 경험이나 말은 임의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여성과 사회적 약자처럼 문서화된 자료가 없거나 비가시화된 집단은 이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왔다. 작금의 국정교과서 강행은 이러한 논쟁의 역사조차 삭제하는 일이다.

와중에 내가 가장 놀란 사건은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지난 16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중·고등학교 학생한테는 사건과 사실의 정확성만 얘기해주면 되는 거고, 교과서에다가 다양성을 어떻게 집어넣습니까? 그건 안됩니다”라는 발언이었다. 그는 북한 관련 기술에 대해서도 “우리 것도 소화하기 벅찬데 북쪽 것까지 같이 들어오니까 이념 논쟁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 전환 발표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_경향DB


중·고생은 일단 ‘하나’만 배우고 ‘다양한’ 내용은 그 이후에 배워라? 언론용 발언이라치면, 이 한마디로 그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용 자체만 보면 그의 인문학적 상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주장이라도 다르게 말할 수 있는데, ‘국정’ vs ‘다양성’, 둘 중 택일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국사편찬위원장이다.

한 가지 생각과 여러 가지 생각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정론(正論)도 여러 가지 정론의 일부일 뿐이다. 정론이 있고 ‘그 외/나머지/곁가지’ 의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하나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다양성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다양성은 아무 상관없는 것들의 독자적인 나열이 아니다. 다양성은 무지개 ‘빨주노초파남보’ 중의 하나가 아니다. 빨강은 연속선을 거쳐 반대색인 파란색(藍色)에 이르고, 다시 보라색이 되는 순환의 일부다. 다시 말해, 빨강은 무지개의 스펙트럼 속에서만 빨강색이지 혼자서는 빨강색이 될 수 없다. 단일성은 다양성과의 관계 속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비교 대상이 없으면 자신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 육상 선수가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과 연습할 때 기록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페이스(속도)는 주인공과 페이스 ‘메이커’의 합작품이다.

모든 인식의 시작은 다름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앎은 그 과정 자체다. 짧은 글도 교차 확인이 필수적인데, 국사가 대조해서 점검할 다른 지식이 없다면? “국사가 어떻게 다양성이 가능하냐”는 국사학자의 말은 정치인의 제스처라면 모를까, 지식인으로서 놀랄 만한 발언이다. 지식은 가르치는(‘주입’)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경합의 과정이다. 다양성은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다.

차라리 국정(國定)교과서가 국정(國政)이 편하므로 “국민 모두 하나가 되자”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다양성은 골치 아프다”는 발언은 안일하다. 국정교과서는 독재라기보다 인식 행위와 과정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다. ‘그들을 위해 말하건대’, 그들의 목표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은 갈등을 통해서만 생산된다. 이것이 지식 자본만의 특성이다. ‘창조경제’ 이데올로기와 국정교과서는 불가능한 조합이다. 사실 현행 검정(檢定)교과서도 별로 다양하지 않다. 어차피 검정 과정을 거친다. 여성사, 민중사, 일상사의 입장에서 보면 검정교과서도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의 삶과 해석은 얼마나 다양한가. 그래서 유사 이래 가장 흔한 책 제목이, ‘역사란 무엇인가’인 것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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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전 번잡한 거리에서 서명운동이 한창이다. “짐승도 그 짓은 하지 않습니다.” 다른 표현도 있을 텐데. 성소수자 인권단체 회원인 나로서는 내용은 물론 방식도 불쾌했다. 동성애 반대 서명운동이었는데 무조건 볼펜부터 쥐여준다. 가는 길을 막고 강요하길래 “했다”고 말하고 빠져나왔다.

대개 서명운동은 진상 규명이나 피해 보상 등을 주장한다. 그런데 최근 일부 기독교 세력의 동성애 반대는 ‘행위’를 반대한다는 것인지, 동성애자인 ‘사람’을 반대한다는 것인지? 이상한 캠페인이다. 마치 장애를 반대한다, 장애인을 반대한다, 검은색을 반대한다, 흑인을 반대한다는 것처럼 시비를 떠나 문법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특회(在特會·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라는 일본의 극우단체가 있다. 일본 근대사에서 조선인, 오키나와인, 대만인에 대한 노동 착취와 멸시를 여기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은 대만 원주민을 문명화의 대상으로 보고 “물고기” “생번(生蕃·토굴인)”으로 불렀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인과 개(犬)는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인 식당이 있을 정도다. 재일 조선인은 투표권도 없다.

문제는 자이니치(재일교포)가 특권을 누리고 있으며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주로 시위, 건물 난입, 폭행, 혐오 발화를 통해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한다. ‘재특회’는 일본 사회의 최대 약자인 자이니치를 차별하자는 단체가 아니다. 그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으므로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했다.

우리의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도 재특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한국의 여성 혐오 현상은 일베가 주도한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를 뺏어갔다는 잘못된 인식과 분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별 분석은 사실이 아닐뿐더러(여성은 남성의 일자리를 ‘뺏어가지 않는다’) 실제 일베 사용자들이 혐오하는 집단이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성적 소수자, 특정 지역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복지 정책을 요구하는 부모(‘맘충’) 등 ‘루저’나 복지비용이 들어간다고 간주되는 약자에게 더 적대적이다. 다시 말해 ‘수준 높은 국민’이 못되는 비(非)국민을 “솎아내자”는 인종주의가 내재돼 있다. 지난번 일베에서 활약했던 KBS 수습기자 사건에서 보듯이 ‘중상층’ 사용자가 상당하다. 일베가 공격한 집단 중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조직적으로 반발, 대응했기 때문에 여성 혐오만 돋보인 것이다. 재특회와 마찬가지로 일베는 약자를 비하하지 않는다. 여성처럼 약자가 아닌 이들이 누리는 부당한 특권이 부당하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영화 '암살' 출연자의 얼굴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얼굴 사진을 합성한 ‘일베’ 사진_경향DB



재특회나 일베를 KKK단이나 독일의 신(新)나치 같은 서구의 전통적인 혐오 세력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백인우월주의자는 흑인이나 이주노동자가 특권을 누리거나 지위가 높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은 ‘진정한’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화)다. 그들의 증오는 ‘논리적이다’. 유색인종이나 이주노동자는 더럽고 무질서하고 머리가 나쁘고 게으르고 우생학적으로 열등해서, 사회를 퇴보시키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월한 자기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한·일 혐오 세력의 “특권 세력이 더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와 서구의 “저들은 열등한 족속이므로 몰아내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이다. 전자는 약자를 강자로 둔갑시키는 반면, 후자는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활동이다.

일베는 보수 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우익 시민사회의 본격적인 등장이 아닐까. 이들이 꿈꾸는 국가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상생을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계급과 성별 관계는 모순이다. 이들의 이해(利害)는 대립한다. 이 때문에 사회는 계층과 성별에 대해서 “평등”을,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관용과 배려(다양성, 동화)”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물론 웬디 브라운의 유명한 지적대로 장애, 인종, 이성애 제도 역시 정치적 모순이지만 자유주의 국가는 이를 관용으로 탈정치화한다. 권리를 시혜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일베는 그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베는 제국주의로부터 전 지구적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가 글로벌 도시 연대가 된 지금, 충격받은 구한말 양반 세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일베가 시대착오적 집단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원래 시대에 대한 판단은 구성원마다 다르므로 사회 통합을 위해 정부가 나서서 ‘건국 67년’이 되었다고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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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은 내내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였다. 영화가 끝날 무렵 반민특위가 등장하고 해방 후 혼란기가 화면에 ‘제시되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 현대사. 분단, 전쟁, 숙청, 독재…. 갑자기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영화 속 독립운동가를 생각하며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분단선이 그어진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한 휴전선 부근의 국지전은 6·25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확성기 논란처럼 잦은 시비, 갈등이 바람직할 리 없다. 65년 전과 차이가 있다면, 먹고사는 전쟁의 고달픔 때문에 서민들의 전쟁 공포는 사소해졌다.

확성기는 스피커의 북한말이라고 한다. 원래의 소리보다 크게 하는 것이므로 확성기(擴聲器·loudspeaker)가 맞지만 북한에서는 그냥 스피커만으로도 ‘확성’이라고 생각하나보다. 확성기가 물리전이 아니라 심리전이라면 설득과 혼란에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확성기 기능은 짜증과 일상 방해인 듯하다. 2004년, 6·15 남북 공동선언 후속으로 이어진 남북 장관급 회담을 총지휘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북한은 대북 확성기 방송에 대해 공식적으론 체제 비방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최전방 접경지역 학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주민들이 수면을 취하지 못해 고통이 극심하다는 사정을 계속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8월 국방부가 확성기 중단 합의 이후에도 기기 노후와 유지 보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봐서, 완전히 종식된 사안은 아닌 듯하다.

소리는 읽기, 말하기와 달리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중이 동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매우 강력한 ‘소통’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확성기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근대의 상징이다. 기술과 계몽과 선전.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식 자체에 변화가 왔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일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 선택하지 않은 일정 이상의 데시벨은 고역이다. 그 내용이 대북 방송 중 하나인 ‘소녀시대’의 노래든, 선거운동 방송이든, 버스 안에서 목소리 큰 사람의 전화 통화든 반가운 사람은 없다. 다세대 주택의 층간소음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이다. 도시의 소음이 주는 피로감 때문에 서민들은 집을 구할 때 “(비교적 조용하지만) 먼지 많은 곳이 나을까, 시끄러운 곳이 나을까” 고민한다. 소음은 일상의 정치다.

지난해 서울시 각 구별 확성기 소음 민원 건수_경향DB


나는 이번 기회에 박근혜 정부가 평화와 화해의 정권으로 거듭나서 역사에 길이 남기를 바란다. 소리에 대한 획기적인 국가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일단 확성기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 정부가 북한에 하고 싶은 말을 우리 내부의 ‘공공의 적’에게 하는 것이다. 고액 체납자, ‘갑’ 행동주의자, 불공정 행위를 일삼는 대기업 등 그런 이들은 줄섰다. 이들은 여론의 압력이나 사법 처리 전까지는 남의 말에 귀를 막고 사는 집단이다.

둘째, 강력한 소음(消音)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소음을 환경 공해, 인권 침해로 규정하는 것이다. 축구장의 열광과 콘서트장의 환호, 욕설과 혐오 발화, 심야의 술주정 등은 모두 소리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 이런 소리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고민하고 분류하고 규제하는 것이다. 물론 현행법으로도 가능하지만 그 이상이 필요하다.

남측의 라디오 방송과 전단 및 물품 살포와 북측의 확성기 타격 선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싸움이 아니라 양측 정권의 전쟁이다. 북한에 하고 싶은 말은 고위급 회담이나 민간 교류를 통해서 하고, 진짜 대화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활발해야 한다.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 내용이 좋으면 사람들은 작은 소리라도 찾아 듣는다. 정부와 국민 간의 유체이탈 화법이나 배신 트라우마 드라마, “네 탓이오” 말고,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수준의 대화만이라도 간절하다. 확성(確聲)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소통만 한 치유는 없다. 세월호처럼 국민의 절규는 외면하면서 다른 이(북한)에게 흥겨운 노래를 들려주고 체제를 비방하는 것은 국가안보가 명분이라 해도 좀 이상한 행동 아닌가.

말할 것도 없이 분단 체제가 통치 집단에 영원한 구원인 이유는, 내부 문제를 언제든지 딴 곳으로 돌려서 정권의 위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엉뚱한 곳에서 “불이야!”를 외치는 것은 국민을 준전시 상태 심리로 몰아넣는 것이다. 견제사격(牽制射擊)의 목표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국민이라니. 계속 ‘사격’(방송)을 지속한다? “총알이 아깝다”는 이때 하는 말이 아닐까.


전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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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메르스와 군사주의’를 주제로 모 월간지에 원고지 27장 분량의 글을 썼다. 내용 중에 “인간이 처음 배운 언어가 짐승의 발자국이라면, 몸은 첫 번째 인식 도구였다”는 글귀가 있는데 앞부분은 소설가 정찬의 최근작 <길, 저쪽>에서 따온 것이다(“인간이 본 최초의 언어가 무언지 아나?”, “짐승의 발자국이었어”, 17쪽). 표절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소설가 정찬의 표현에 의하면”이라고 표기했어야 한다.

작가에게 늦은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이 한마디면 끝일까. 법적, 사회적으로 나의 잘못은 어디까지인가. 나는 그 표현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훔쳤고, 내내 괴로웠다. 그런 면에서 논문은 편리한 점이 있다. 남의 글을 대거 옮긴 후 출전만 밝히면 표절이 아니게 된다(이런 글이 ‘짜깁기’다). 학계에는 “한 문장에 똑같은 단어가 몇 개 이상 들어간 경우” 등의 규정이 있다. 일부 학위 논문이나 학회지에 실린 글 중에는, 다른 이의 글에서 전체 골격을 그대로 가져오고 단어만 교체한 글들이 있다. 논문은 새로운 공식을 만드는 예술이다. ‘구조 표절’은 기존의 틀에 대입, 단어만 바꾸어 쓰는 것이다. 요지는, 표절을 같은 단어에 집착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문대성씨처럼, 이런 표절조차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예 다운로드하는 경우도 있다.

문학에서 표절 문제는 훨씬 애매한 이슈이다. 나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보다 글의 구조나 문체의 유사성이 더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의 이름을 가리면 필자 불명인 무색무취의 글은 형식상 표절은 아니지만 똑같은 구절만 아니면 오케이인가. 신경숙씨의 경우도 그가 아주 독특한 문체의 소유자라면 다른 작가의 문장을 갖다 썼다 해도, 표절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신경숙씨의 일부 작품 표절과 문단에서 그들 부부의 권력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나 같은 일반 독자도 10년이 훨씬 넘도록 들어온 이야기다. 특히 그간 ‘남진우 교수, 남진우 편집위원’이 특정 작가를 타기팅, 비난해온 행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표절논란 소설가 신경슥_경향DB



이번 사태에 대해 “여론 재판, 과도한 징벌”(윤지관)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앞뒤가 바뀐 사고방식이다. ‘여론 재판’은 문제가 아니라 결과다. ‘신경숙급’ 인사의 뉴스는 여파가 크다. 현실 진단도 틀렸지만 나는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 재판’이라는 틀에 박힌 분석이 더 싫다. 지성의 반대는 무식이 아니라 상투성이다. 이미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이 없다는 얘기다.

독자는 작가나 출판사보다 성숙하다. 나를 포함, 독자들은 이번 사태로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창비는 ‘절대 권력’만큼이나 ‘절대 역할’을 해왔다. 창비는 대중작가의 작품 수익으로 학계의 비판적인 저널인 ‘안과 밖’(영미문학연구회)이나 ‘여성과 사회’ 등을 지원해왔다. 운영이 어려운 계간지(창작과비평)가 거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원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탄식의 뜻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이 속담은 합리적이다 못해 급진적인 말이 되었다. 외양간을 안 고치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문제는 사고 자체보다(사고는 과거이므로), 이후 대응이다. 대응이 더 큰 사고, 더 큰 문제다. 처음부터 “인정한다” 아니면 최소한 “검토하고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면 ‘여론 재판’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비와 작가회의 일부 책임자의 발언은 분노를 넘어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신경숙 작품이 더 낫다”, “필사를 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이들은 기본적으로 ‘문학과 지성’이 없구나.

가장 압권은 “어떻게 키운 작가인데”, “노벨상 후보에 흠집” 운운하는 논리다. 노벨상 콤플렉스도 창피하지만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못 탄 것은 바로 작가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왜 노벨상이 그 국가의 주류 중의 주류, 대표 중의 대표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할까. 노벨상 정치는 복잡하다.

그러나 최소한 음악으로 치자면 ‘이지 리스닝’ 계열의 작가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노벨상이 한 사회의 문화적 축적이라고 가정하면 그리고 그토록 욕망한다면, 베스트셀러 작가 한 명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에 문제의식을 가진 수백 명의 ‘이응준’(그도 문단 경력 25년의 뛰어난 중견 작가다)이 포진해 있을 때 가능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사건은 시스템과 작가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녀는 결혼제도와 출판권력 등 공사 영역에 걸친 절대적 보호 아래, 자신과 직면할 수 없게 된 거대한 바위가 되었다. 당황한 나머지 변명조차 자기 언어가 없었다. 문단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거대한 바위가 아니라 ‘거대한 뿌리’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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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이번 주 초에 쓰여졌다. 제목도 ‘유승민의 의미’, ‘유승민과 윤리’ 등 여러 차례 바뀌었다. 결국 지금 나는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 ‘유승민’과 함께 “원내대표직 사퇴, 의총 권고 수용” 뉴스를 읽고 다시 쓴다. ‘밤새 몸으로 둑의 붕괴를 막았던 네덜란드 소년’처럼 버티던 유승민 원내대표는 동화와는 달리 ‘마을 사람에 의해 쫓겨났다’.

최근 새누리당 사태와 유 원내대표의 행보는 “이 시대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 그녀는 무조건 충성,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런 태도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불가능한데 새누리당은 이 불가능한 임무를 해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나는 내가 지난 6개월간 직접 겪은 일이다. 트위터 여론조작과 매스컴을 십분 활용, 진보 인사로 불리는 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는 것이 양심과 진보의 증거로 생각했고, ‘셀럽(유명인사)’인 양 떼로 몰려다녔다. 하지만 실상은 타락이라는 말도 부적합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가까운 지인들조차 “돌이킬 수 없는 사악”이라고 묘사했다. 많은 이들이 ‘멘붕’에 빠졌다. 나도 나름의 선의와 약간의 책무감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발언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와중에 관계자들이 “선생님(나)은 겨우 몇 주 부추겼지만, 저희들은 6년 동안 그를 영웅으로 포장해 온 죄인입니다. 집단적으로 자성하고 있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이 말은 위로가 됐지만 시류와 대세, 겉모습에 쉽게 흔들리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다른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멕시코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일화다. <줄리아를 꿈꾸며>(2003)라는 영화를 촬영할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는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찍었고 배우와 스태프 모두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 하비 카이틀(미국 배우)뿐인데 우리는 모두 영어를 사용했다”며 분노했다. 미국 배우가 “영어가 아니면 일하지 않겠다”고 요구한 것도 아닌데, 왜 모두들 자연스럽게 미국인의 조건에 맞춘 것일까.
노동자의 생존 투쟁을 개인의 출세 도구로 주도면밀하게 이용한 운동가와 그의 온갖 비행을 알면서도 은폐하는 진보 진영, 미국인을 알아서 배려해 주는 ‘제3세계’ 사람들 덕분에 맘껏 말의 자유를 누린 영어권 배우. 박 대통령의 경우와 같은 ‘급’에서 비교할 만한 사례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공통점은 “상사가 좋아하는 메뉴로 통일”하는 일상생활부터 국정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때문에 원칙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독재와는 다르다. 독재는 나름 지향이 있고, 이에 따른 대중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개발독재가 대표적인 현상이다. 지금 대통령의 상태를 가장 우아하게 표현한다면, 동물의 왕국에 사는 세금 횡령 공무원이다. 무능, 무책임이라는 말도 진부하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몰라도 국민은 ‘선거의 여왕’이 아니라 ‘대통령’을 뽑았다.


누구나 눈치를 보고 산다. 미국 대통령도 여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불가피하게 약자의 처지에서 눈치를 봐야 한다면, 치열한 고뇌 끝의 선택이어야 한다. 아세(阿世)는 자신의 이해와 “세상 이치” 사이에서 매 순간 협상해야 하는 힘겨운 일이다. 최소한 오버는 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이 필요하다. 알아서 먼저 엎드릴 필요는 없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의 아우라, 동일시 욕망 때문에 안해도 될 ‘짓’까지 하게 된다. 이것은 정치권만의 이슈가 아니다. 권력과의 대면을 피할 수 없는 인생사에서 모든 이들의 고민거리다.

유 원내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래서 중요했다. 그의 소신은 상식이었지만, 지지율 30% 이하의 대통령에게 의회를 갖다 바치는 한국사회에서는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결단이었다. 무조건적 충성?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관계 자체가 조건의 산물이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 이것이 ‘조건의(conditional)’ 의미다. “무조건”은 공포로 정신이 나간, 판단 불능 상태.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심리치료사가 아니다. 어차피 그녀의 ‘트라우마’에는 답이 없다.

유 원내대표를 응원했던 국민은 힘이 빠졌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박’을 비롯, 새누리당 의원들은 ‘제2의 차지철’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통치자의 생떼에 응하지 않는 것. 이는 대통령의 자질 문제를 넘어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기본 윤리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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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인사인데 잦은 부적절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이가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출판사 관계자와 통화 중에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했더니, 남성인 그의 분석이 흥미로웠다. “선생님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우리나라는요, 병역만 아니면 다 컴백해요. 무슨 일을 저질렀어도 병역(비리)만 아니면 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의 ‘큰소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유승준 봐요. 지금 벌써 몇 년째예요? 그 사람이오? 1년 안에 다시 책 냅니다. 두고 보세요.”

그의 요지는 ‘비리의 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사람은 누구나 양과 질의 차이일 뿐(물론 그 차이는 크다) 부정부패, 타인에 대한 차별, 갖가지 비윤리적 행동을 한다. “걸리면 불법, 안 걸리면 관행”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부패 둔감 문화에 비해, 유독 남성들은 병역 문제에 대해서는 치열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하다. 주지하다시피 역대 두 차례 대통령 선거는 모두 병역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이회창씨 집안은 두 아들과 사위까지 모두 군대에 가지 않았다.

최근 가수 겸 배우 스티브 유씨(유승준·39)는 병역 기피로 입국이 금지되었다가 13년 만에 해외에서 국내 인터넷 방송에 출연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그 자신도, 보는 사람도 민망했을 것이다. 그도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가 잘못이 없다는 사람은 없어도 13년이라는 세월에는 놀라는 이가 적지 않다.

그래서 유승준씨 비난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황교안 청문회’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호소는 설득력이 있다. 메르스 정국과 ‘유승준 불가’의 최대 수혜자는 황교안 총리 후보자가 될 판이다. 고위 정치인의 책임과 역할을 생각하면 황교안씨에게 더욱 엄격해야 한다. 유승준씨의 그간의 ‘고난의 시간’에 비하면, 황교안 후보자에 대한 문화적 처벌, 사회적 무관심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승준씨와 황교안씨에 대한 분노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정치인은 아예 포기한 것일까. 연예인과 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다르고, 연예인에 대해서는 비난 접근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차별적인데 일부 연예인의 여성과 약자 혐오 발화에 대해서는 병역 문제만큼 비난하지 않는다. 비판은커녕 “표현의 자유”라는 옹호를 받으며 지금도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특권층의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는 우리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부랴부랴 “국민은 모두 병사”라며 국민개병(皆兵)제도를 실시했다. 이는 국민의 범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남성들은 신분과 빈부 격차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sameness)하다는 환상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사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병역이 공평하게 시행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병역과 관련해서 국민은 3등분 된다. 군대에 안 가는 사람, 가기 싫은데 가야 하는 사람, 못 가는 사람(여성, 장애인…). 특히 ‘못 가는 사람’은 비(非)국민으로서, 배제된 것인데 마치 면제된 것처럼 간주된다. 평등은 이 세 그룹 사이의 관계 분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병역 비리 논란은 언제나 그들만의 리그, 즉 가야 하는 남성과 안 가는 남성들 사이의 문제로 축소된다.

이처럼 군사(軍事) 문제가 남성 간의 ‘평등’에 집중되다보니,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나 개인의 종교적, 사상적 이유로 인한 거부는 사회적 의제로 상정조차 되기 힘들다. 배제, 기피, 특혜, 거부는 모두 다르다. 군대를 안/못 가는 이유는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가수 스티브 유씨가 아프리카TV를 통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분노의 이유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한 사회의 성숙도와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척도다.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가 압도적이고 대상에 따라 선별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혐오 현상이다. 무엇보다 다른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사소화되기 쉽다. 앞서 언급한 지인의 말대로 “군대 문제만 아니면 다 용서되는” 경향은 군대 비리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자숙의 기간’과 별도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두 번째 기회’는 중요하다. 주가조작, 불량 식품 생산, 논문 표절, 배우자 구타 등으로 ‘13년 동안’ 사회 활동, 아니 입국을 막는 경우가 있는가.

똑같은 잘못을 해도 매장당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문제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한번쯤 이와 관련한 억울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황교안씨는 군대에 가지 않고도 승승장구해왔다. 그는 가정폭력 옹호 발언, 공안 검사 경력까지 ‘청문회 비리 종합 세트’에 새로운 목록을 추가했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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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의 저자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오랜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죽음에 대한 많은 연구를 남겼다. 그녀는 죽음 직전의 환자들이 보여준 근사(近死) 체험, 육체의 이탈 현상을 보고했다. 영어 표현도 상황 그대로다.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 상태(Out of Body Experience), 줄여서 ‘OBE’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수술 중에 육체이탈을 경험하며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타인의 말을 알아듣는다.

요즘 회자되는 ‘유체이탈(遺體離脫) 화법’의 유체는, 부모가 물러준 자기 몸을 뜻한다. 유체이탈, 육체이탈, 정신의 체외이탈. 같은 말이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느냐.” 일상에서 많이 쓰고 듣는 말이자 실재하는 과학 현상이다. 주로 극도의 스트레스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 임종을 앞둔 이들의 임사(臨死) 체험을 말한다. 최근에는 심폐 소생술의 발달로 사후 세계를 경험한 이들의 사례가 증가했다고 한다.

육체이탈에 대한 가장 철학적이며 윤리적 질문은 프랑스·캐나다 합작 영화 <마터스(순교자, 2008)>일 것이다. 돈 많은 이들이 죽음의 공포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 방식은 타인을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고 “사후 세계가 어땠냐”고 묻는(것처럼 보인)다. 자신은 참여하지 않는 죽음의 대리 경험. 돈으로 타인의 고통을 사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만큼 자본주의의 인간성 종말을 그린 텍스트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이처럼 육체이탈의 당사자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극심한 고통을 체험한다. 반대로, 박근혜 대통령의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은 자기 고통이 아니다. 대화 중 혼자 맘대로 자리를 떠나 돌아다니다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자기 책임을 남 일처럼 말하고 비판하고 문책한다. “나는 아니니까 당신들 잘못”이라는 논리다. 국민에게 자기 문제를 대리 체험케 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용사 가족 초청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차라리 멱살잡이가 낫다. 이런 대화법처럼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일도 없다. 박 대통령이 대중화(?)시키긴 했으나 그가 처음은 아니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김용철 변호사 사건 때 이건희씨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한다”고 호소했다. 후안(厚顔) 캐릭터의 전형인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자주 사용했다. 사회지도자나 국정 책임자의 이런 발화 방식은 국민의 정신 건강에 치명적이다.

앞서 강조한 대로 ‘유체이탈’과 ‘유체이탈 화법’은 반대 현상이다. 전자는 본인의 고통이지만, 후자는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이들과 공동생활은 한계가 있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나쁜’ 사람에 의해 보통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다. 이 화법은 상대방이 없다. 상호 격투나 논쟁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두 개 이상의 인격을 가진 ‘가해자’는 전혀 손상이 없다. 유체이탈 화법은 유체(幽體) 이탈이다. 유령 인격, 복수(複數)의 인격이 외출하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의 ‘이탈’은 외교의 형식을 띤다. 나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외국에 나간다, 몸살을 앓는다, 선거 전날 ‘연약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뜬금없는 담화를 발표한다. 사람들은 어이없음, 정치 불신, 정신 붕괴에 빠진다. 국민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정치를 포기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스트레스 단계인지 포기 단계인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그마저도 생각이 없는 것일까. 인간관계에서 불성실과 딴청처럼 효과적인 억압은 없다. 상대가 스스로 미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몸은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듯 보인다. 살아 있는 사회적 몸(mindful body)이 아니다. 간혹 얼굴이 굳을 때도 있지만 대개 그의 몸은 식사도 하지 않고 머리 모양 때문에 잠도 자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마네킹? 사이보그? 더미(dummy, 인체 모형)라는 이들도 있다. 대화를 회피, 거부하는 것을 넘어 몸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5년 5월 8일 (출처 : 경향DB)


외국의 여성 지도자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비교가 된다. 마거릿 대처, 힐러리 클린턴, 앙겔라 메르켈, 콘돌리자 라이스, 심지어 이멜다와도 다르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공적인 자아로서 강단과 감수성, 자기주장이 있다. 대중과 혼연(渾然)된, 자연스럽게 사회화된 몸이다.

유체이탈 화법은 소통 무능처럼 보이지만 실제 인식론적 기반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안하무인이다. 유체이탈의 다음 단계는 유령. 최근 출간된 정찬의 장편소설 <길, 저쪽>은 유신 시대의 고문, 특히 여성에 대한 집단폭력을 다룬다. 대중이 독재에 ‘동의한’ 무서운 시대였다. 내가 유신 시절을 제대로 겪지 않아서일까. 나는 ‘아버지’의 정치보다 ‘딸’의 정치 이탈이 더 공포스럽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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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제도 바깥의 성에 대한 규제는 국가가 가족에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다. 최근 ‘간통죄’(이상한 단어다) 위헌 판결은 이 법이 가족을 보호하는 데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을 인정한 것 같다. 국가에 가족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처럼 사회복지 비용을 전적으로 가족 내 여성의 성역할 노동으로 떠넘기는 사회에서, 가족은 가장 안전한 세원(稅源)이다.

우리는 미국과 달리 배우자의 ‘외도’(더 이상한 단어다)가 가정을 파괴하지 ‘않는다’. 가족이 친밀한 공동체라기보다는 자녀양육, 입신양명의 단위로 도구화되었기 때문에 혼외 사랑은 가족 붕괴의 범퍼다. 집 밖에서의 친밀감으로 내부의 갈등과 지겨움을 견뎌내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해서가 아니라 가족 해체에 대한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준 예다.

성적/자기/결정권은 자유에 관한 권리가 아니다. 무엇이 성적인 것인지, 나는 누구인지, 결정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근대 인문학을 총동원해도 규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 단어가 출현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시민권 운동에 이은 1970년대 미국의 성 해방 투쟁에서 등장했다. 이 권리는 그간 성적으로 억압되었던 여성과 동성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성애자 남성은 5000년 동안 ‘해방’되어 왔기 때문에 애초부터 논외였다. 일반 남성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은 권리가 아니라 기득권이다.

이후 1990년대 초 한국 사회. 법정에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를 외친 어린이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여성의 성을 순결 차원으로 보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특별법 이전에도 처벌법(소위 정조에 관한 법)이 있었지만, 이때 성폭력은 여성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순결을 빼앗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의 성은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어 남성들 사이에서 ‘뺏고 빼앗기는’ 대상, 즉 남편, 가족, 국가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이다.

이처럼 성적 자기 결정권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모든 자유가 그렇듯 타인의 권리와 충돌한다. 이 때문에 다른 인권 개념처럼 약자의 권리일 때만 의미 있는, 상황에 따른 권리다. 간통죄, 성매매 모두 성적 자기 결정권과 무관하다.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2004년에도 논란은 대단했다. 여성의 몸을 구매하는 것을 인권(행복 추구권)이라고 주장한 남성들, 생존권 차원에서 합법화를 요구한 일부 여성들, 성산업의 심각성과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을 지적한 여성들이 있었다. 문제는 대화가 불가능한 현실이다. 남성은 생계 차원에서 성 판매를 하지 않는다.

남성들 간의 차이는 보편적인 ‘계급 문제’로 인식되지만, 여성들 간의 차이는 ‘여성 문제’로 치부된다. 남성 간의 계급투쟁은 당연시되지만 여성에게는 ‘자매애’가 강요된다. 성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여성이 관련 발언을 하면 내용과 상관없이 남녀, 여성주의자, 종사자 모두에게 비난받는다. 언제나 당당한 집단은 구매 남성들이다.

10여년 전 여성부나 현재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성매매 반대 입장의 주요 내용은, 당시 여성부의 표어대로 “성을 사고파는 것은 범죄입니다”다. 나는 이 문구에 늘 당황한다. 성매매가 범죄인 것은 성을 매매해서가 아니다. 성매매는 성별, 성차별 제도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정권이 아니라 여성 인권 문제다. 성(몸) 매매가 왜 불법인가? 누구나 노동과 임금을 교환해서 먹고산다. 남녀가 같은 일에 종사해도, 여성이 ‘더 파는 것’처럼 보이는 성차별이 있을 뿐이다. 손발, 머리 등 몸의 어느 부분을 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이들은 ‘지식인’이고, 어떤 이들은 ‘노가다’로 분류된다. 거듭 강조하는 바, 성매매는 매매가 아니라 성별이 문제다.

전국 성매매 종사자 단체인 한터전국연합 회원들이 9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매매 특별법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너무 비대하고 괴이해서 국제사회에서도 특이한 사례인 한국의 성산업 규모까지 문제 삼을 능력은 없다. 다만 찬반 주장 이전에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구매자와 판매자가 압도적으로 남녀로 나뉜 직업이 성매매 말고 또 있는가. ‘창녀’와 ‘창남’은 같은 지위의 단어인가. 같은 인구수와 역사를 갖고 있는가. 성매매 제도는 여성 전반을 성적 낙인 속에 가둘 수 있는 여성 혐오의 시작이다. 왜 이 직종은 자영업이 힘든가. 왜 인신매매가 흔한가. 왜 기술이나 지식, 근무 연수가 아니라 나이가 소득을 좌우하는가.

성매매는 자기 결정권과 무관하다. 남녀의 성에 대한 이중 잣대에서 출발하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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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페미니스트’가 이틀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 터키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김 아무개군(18세)이 “이 시대는 남성이 성차별을 받는 시대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증오한다. 그래서 ISIS(이슬람국가의 전신)를 좋아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기자 누리꾼들이 페미니스트가 무슨 뜻인지 찾아본 것 같다.

한국은 남성이 성차별을 받고 이슬람사회는 그렇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것이 그가 진정 한국을 떠난 이유일까. 나는 그의 ‘탈출’이 성차별에 대한 고민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20대 남성의 사망률 1위는 자살이다. 청년실업과 연동된 ‘5포 현상(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 마련 포기)’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사실 그가 말하는 “남성이 당한다”는 성차별은 여성이 빼앗은 ‘파이’ 때문이 아니라 남성들 간의 계급 갈등의 결과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소위 ‘알파 걸’로 불리는 여성의 가시화 현상 역시 계층 문제다. 모든 여성이 알파 걸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우리 사회에는 여성의 노동과 역할의 증대를 ‘여성 상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쨌든 위와 같은 상황은 한국사회에 팽배한 이분(二分) 논리를 상징하는 것 같다. 무관한 이슈들이 맥락 없이 아무렇게나 연결되는 것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 시위대에 “그렇게 남한이 싫으면 북한 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사과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그럼, 배를 재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냐?”는 식의 대화다.

이의 국제정치 버전이 글로벌 미디어에서 ‘여성’과 ‘이슬람’이 묘사되는 방식이다. 여성이나 이슬람은 큰 인구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내부에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여성은 불쌍한 피해자 아니면 ‘된장녀’ 둘 중 하나이고, 이슬람사회는 미개하고 비상식적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고정관념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이슬람 = 여성 억압”이라는 ‘진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문명과 거리가 멀다. 이슬람은 세계 인구의 4분의 1, 57개국에서 12억명 이상이 믿는 종교다. 이슬람, 이슬람국가, 이슬람사회는 모두 다른 뜻이다. 대개는 이슬람 = 아랍, 중동으로 알고 있지만 세계 최대의 이슬람 지역은 인구 4위의 인도네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다. 이들 지역의 주민 90%가 무슬림이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 동일 인물이다. 같은 신을 두고 싸우는 것이다. 차도르, 히잡, 부르카, 니캅 등 이슬람 여성의 복장에 대한 논쟁도 간단하지 않다. 여성의 몸을 보호한다,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문화가 서구의 다이어트나 성형 시술보다 더/덜 차별적이라는 논의까지 이슬람 여성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남성이 성차별당하고 있다는 불만은 역사적으로 김군이 처음도 혼자도 아니다. 1989년 12월6일,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공과대학에서 한 남성이 “왜 여자가 공학을 공부하느냐”며 반자동 소총을 난사해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던 14명의 여학생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남성이 주도하는 남성폭력 근절 운동인 ‘하얀 리본’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북미의 경우 배우자 폭행의 90%, 성폭력의 98%가 남성에 의해 발생한다. 한국의 가정폭력이나 여아 낙태도 외부에서 보면 ‘이슬람사회만큼이나’ 끔찍하게 보일 것이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빈발하는 가부장제 현상이다.

요지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합의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 여성 노동자들은 대다수 비정규직에 남성 임금의 60%를 받고 있으며, 노동 시장 진출의 질은 세계 100위권 밖이다. 그러나 한국 여성의 학력 수준은 세계 1~2위권이다. 미국 50개 주(州) 중 여성의 교육, 경제적 지위가 가장 낮은 주와 가장 높은 주의 가정폭력 발생 비율은 똑같다. 여성은 공적 영역의 지위와 사적 영역의 지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군 사건은 여성과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국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은폐시키고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를 작동시키는 요소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리아 북부 코바니에서 국경을 넘어 터키로 도망쳐 나온 여성이 터키 국경마을 수루치의 난민촌에서 아이를 안고 서 있다. _ AP연합


여성과 이슬람을 균질적 집단으로 단일화, 대상화시켜 자신을 인류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서구 강대국의 국제정치 전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대표적이다. 당시 명분은 탈레반으로부터 여성을 구한다는 것이었고 미국의 우익 여성운동은 전쟁을 지지했다. 김군은 이러한 국제정치 현실이 낳은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닐까.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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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비유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은 맞는 말이다. 이 표현은 이중 잣대나 위선적인 뜻으로 사용되지만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대변한다.

이중적? 말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권력을 행사해서 그렇지, 모든 말은 이중, 삼중,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의 뜻과 의사소통의 내용은 사전(text)이 아니라 상황(context)에 의해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전의 약속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이다. 사전은 사회를 반영한다. 많이 쓰면 등재된다.

단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공론장이 필요한 이유다.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의 의견은 어떤 입장에서 출발했나요? 그 입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요? 의미는 사회적 논의 과정, 화자(말하는 사람)와 청자(듣는 사람) 사이의 힘의 관계에 의한 일시적인 개념이다. 누가 하는 말인가에 따라 성희롱일 수도, 유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다.

대개 ‘아름답고 고상한 단어’는 관념적이어서 타락, 오용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 평화, 인권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도 되도록 피한다. 자유, 평화, 인권은 약자에게만 보장되어야 할 가치이지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일 때 권리들 사이의 충돌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강자(주류, 서구, 남성, 서울…)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테러이며 테러라고 불리는 저항(폭력)을 초래한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누가 약자인가,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부터가 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계급, 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 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은 성희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에 문제제기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사람들은 목소리 큰 여성들, 이동권을 주장하며 거리를 점거한 장애인, ‘일반인’과 다른 몸 상태의 노숙인 등 마이너리티들이지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갑’들의 권리는 제도로 보장되어 있어서 가시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샤를리 엡도’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사건이 발생한 건물 앞 광장에 모여 있다. _ AP연합


프랑스의 주간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한 나의 질문은 한국인들이 주로 보는 방송은 시엔엔(CNN)인가, 알 자지라(Al Jazeera)인가였다.

나는 다른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아랍어를 공부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이슬람 조롱도 나쁘고, 테러는 더 나쁘다”는 양비론은 양가적이지 않다.

이분법은 하나가 정립된 후, 그 외 나머지 것을 말한다. A와 A가 아닌 것, 이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와 테러라는 야만이다. 누가 옳게 보이는가? ‘양비’는 기울어진 저울을 균형 있게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다. 표현의 자유라는 성격 규정과 이에 따른 논쟁 구조 자체가 프랑스의 시각을 대변한다.

한국 사회가 이 사건에 개입하는 방식은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땅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세력은 민간 정부 10년을 “잃어버린 세월”로 규정하고 계몽의 사명에 사로잡힌 “할 말은 하는 신문”들이다. 서민과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매체들은 약자의 이해와 객관이라는 이중 메시지에 스스로 갇혀서, 할 말이 없다. 언어가 없으니 지당하신 말씀만 늘어놓는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네 주장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프랑스의 사회운동가 스테판 에셀이 말한 대로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는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기존의 언어를 독점한 이들이 더 크게 떠들기 위한 구실이 아니라면, 근본적인 문제는 표현의 자유 보장이 아니다.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 이것이 표현의 자유의 전제다.


정의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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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발생한 ‘백화점 모녀 사건’은 최근 폭발하는 ‘갑’ 관련 뉴스 중 하나가 아니다. 나는 매일 진화하는 이 사건에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았다. 아직 시비가 가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저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처음 나는 자신을 ‘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갑이라는 정체성(?)도 웃기지만 VIP라고 주장하는 모녀처럼 물건을 많이 사면 ‘갑’이 되는가. 그리고 ‘갑’은 아무나 무릎 꿇리는 이들인가. 마치 망국 직전의 조선 말기를 연상케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갑이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당시 인구 구성은 세금을 안 내는 양반이 70%, 세금을 내는 평민이 30%였다. 양반 족보가 매매되는 등 신분제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흥미’로웠던 점은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트위터로 인한 후폭풍이다. 그는 “백화점 알바생 3명이나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며 “하루 일당 못 받을 각오로 당당히 부당함에 맞설 패기도 없는 젊음. 가난할수록 비굴하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는 의견을 올렸다. 물론 그의 선의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제까지는 ‘갑질’에 대한 비난만 있었지, 피해자의 대응에 대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겨레는 “저항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책임이며 당시 상황을 기록, 고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며 ‘패기 없음’을 지적하기보다 함께 있었는지 돌아볼 일”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의견 모두, 당사자(피해 아르바이트생)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다. 비슷한 사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몇 년 전 이사 중에 ‘가보’ 같은 책상을 잃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시간이 없다며 책상을 해체하지 않고 옮기다가 2층에서 떨어뜨려 박살을 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변상할 테니, 절대로 회사에 알리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회사는 보험에 가입했다고 선전했지만 그들은 “모르시는 말씀”이라며 돈을 내겠다고 우겼다. 변상하면 하루 종일 헛수고를 하는 셈이다. 나는 차마 그들의 일당을 ‘뺏을 수 없어’ 포기했다. 이 경우 이삿짐 회사 직원들은 누구에게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 과실이므로 저항할 자격조차 없는가.

다시 반전. 며칠 전 우연히 공공도서관 휴게실에서 이 사건에 대한 젊은이들의 의견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조기숙 교수와 한겨레를 모두 비판했다. 그들은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요지는 1)알바들이 저항 잘한 거 아냐? 저항이 뭔데? 저항했다가 회사에 찍히는 거? 그게 저항이냐? 손해지! 2)참은 걔들이 잘한 거지. 당하는 장면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게 저항이지. 합의금이라도 받아야지. 3)저항한답시고 여자들에게 뭐라고 해봐라. 피해자가 가해자 된다니까. 4)지들은 금 수저 물고 태어나서, 없는 사람한테 “저항하라”는 인간들이 갑보다 더 재수 없어.


저항이란 무엇일까. 이기는 것인가. 인간다운 것인가. 정의인가? 단도직입적으로 약자가 저항하면 이익을 보는가. 아니면 약자는 도덕적이어야 하므로 이익보다 대의를 추구해야 하는가. 윤리적, 사법적, 문화적 차원에서 저항의 개념은 모두 다르다. 이 불일치 때문에 피해자들은 저항하면 할수록 2차, 3차 피해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약자들이 저항할 줄 몰라서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저항하면 더 큰 피해가 있기 때문이다.

저항해서 자존감이 회복되거나 실질적 보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저항 과정의 사소한 문제가 가해의 본질보다 더 문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갑질’은 하지 않지만 ‘있는 자’들은 이 억울함을 모른다. 없는 이들의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된다. 사회불안 조장세력이 되거나 허수아비 취급을 받으면서 누가 시켰느냐며 배후를 조사받는다.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사라지고 양비론에 사생활까지 파헤쳐진다. 나는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상담하면서 이런 경우를 무수히 보았다. 저항해도, 저항하지 않아도 비난 받는다. 부정의는 끝이 없다. 유명 진보 인사나 ‘강남 좌파’가 저항하면 명예든 실질적 힘이든 얻을 확률이 있지만, 민초가 저항하면 박수보다 뭉개진 억장(臆腸, 가슴과 창자)에 다시 억장(億丈)이 덮친다. “저항하지 않았다”는 누구의 시각인가? 그들은 저항했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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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회항 사건에서 계속 생각나는 것은 승무원들의 스트레스다. 출발에서 도착까지 14시간가량, 그들의 몸과 마음은 어떤 지경이었을까. 이후 기내 상황은 알 수 없지만 큰 사고 없이 업무를 수행했으니 다행이다. 극심한 감정노동 수행 중에 ‘라면 상무’ 같은 승객이 탑승했다면? 만일 조현아씨로 인한 승무원의 스트레스 때문에 사고가 났다면, 안전사고인가. 승무원과 승객, 국민의 안전 불감증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사고가 났다면 명칭은 ‘조현아씨 사고’다.

나는 세월호 역시 안전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인식이 사건의 본질을 은폐한다. 재난, 재해가 모두 안전사고는 아니다. 발단에 따라 다르다. 세월호가 안전사고라는 인식 때문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 통념이 전 국민을 혼내고 있다. 세월호를 안전사고로 본 관료들이 처음 제시한 정책(?)은 “수학여행 전면 금지”였다. 그리고 결론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데다 관료 수는 많고 재난 구조 인력은 적은 옥상옥 조직, 국민안전처의 출범이었다.

안전 강조 담론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처럼 사회 구성원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다. 안전 불감증 때문이라면 누가 불감증인가. 학생 승객들이? 세월호 승무원이? 해경이? 세월호 선주라는 故(???) 유병언씨가? 아니면 구원파가 무서운 사람들이? 이처럼 안전 불감증 담론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똑같이 잘못했다고 본다. 우리가 “내 탓이오”를 강요당할 때 정권은 가해 구조에서 모습을 감춘다.

세월호가 진짜 안전사고였다면 국가와 대통령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그랬던가? 대통령은 유가족 앞에서 불쾌한 듯 몸이 굳어 외국 언론의 분석 대상이 되었다. 청와대와 일부 언론, ‘여론 지도층’은 유가족에게 상식 위에 군림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는 유가족을 보호했나? 유가족은 위로받기는커녕 “불순한 유가족”을 외치는 일부 정치인과 시민들로 인해 끊임없는 의심에 시달리고 있다.

안전 문제에는 시비가 있는 법이다. 특히 세월호 사건은 누구나 알다시피 잘못한 사람, 무고한 피해자가 명백하다. 안전 의식은 평소에 필요한 것일 뿐, 세월호와 무관하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 안전 불감증을 반성하는 태도는 성찰이 아니라 문제를 왜곡하는 부정의다.

세월호 진실규명과 안전사회를 위해 행동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6일 국회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을 보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물론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사고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사고가 안 난다면 오히려 이상한 시스템이 있다. 하지만 나는 세월호를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의미의 구조적인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낡은 선박, 훈련되지 않은 승무원, 과적도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위와 같은 상황은 이미 관련자들의 ‘선택’이었다. 무의식적 의도다. 왜? 남들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불성실하고 능력 없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큰소리치는 세상이다. ‘조현아 기시감.’ 주변을 보면 어느 조직이나 “저런 사람이 어떻게 저 자리까지 갔을까” 싶은 이들이 있다. 드라마 <미생>의 마부장 같은 사람이다. 무능에 불성실, 탐욕, 인간성 종말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들.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 여성주의자 중에도 상당히 많다. 좌우, 계급, 성별을 막론한, 시대를 표상하는 인간성의 출현이다.

이들은 중심과 최고에 대한 열망, 약자 멸시, 출세 만능 이데올로기, 유명인사 증후군에 사로잡혀 있다. 조현아씨 같은 이들을 부러워하고 그와 마인드를 공유하고 있다. 당연히 업무는 대강이고 일은 ‘관계’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조씨처럼 강자(이 사건의 경우, 여론)의 움직임에 따라 태도가 표변하고 약자에게 함부로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움직이면 사고를 치는 걸어다니는 재앙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매스컴에 노출되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 재벌가가 홍보에 막대한 비용을 쓰는 이유다.

대형 참사의 원인이 개인의 문제라는 얘기가 아니다. 요지는 당대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특정한 타입의 인성(캐릭터)이 형성되었고,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들이 ‘잘나가면’, 사람들은 비난하면서도 그들을 선망하게 된다. 이들이 뿜어내는 나쁜 기운과 라이프스타일은 주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체를 집단 우울증 상태로 만든다. 뻔뻔한 이들 중 일부는 세월호 참화를 만들었고, 일부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대응을 보여주었고, 일부는 지방선거에서 이들을 당선시켰다. 조현아씨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세월호 대책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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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민들에게 투하된 세금 폭탄의 발신지가 전 정권의 ‘자원외교’와 4대강 사업비로 인한 세수 부족 때문이라고 한다.

택시기사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통 범칙금 부과가 예전 같지 않다고 호소한다. 무인 카메라 대신 경찰이 사진을 찍고 있다. 회사 택시의 경우 사납금 15만원에 신호 위반 7만원 벌금을 내는 날이면 하루 종일 일하고 22만원을 내야 한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지인들은 “정부가 자동차로 돈을 걷는 것 같다. 서(署)별 할당이 있는지 경찰도 악착같다”고 한다. 담뱃값 인상 이유가 “국민 건강 걱정”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조세 불복종이 폭주, 세무사 세무실은 북적댄다.

무슨 동학혁명 시대도 아니고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절로 떠오른다. 마침내 점입가경, 얼마 전 보건복지부는 저출산 대책으로 싱글세를 도입하겠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자 “농담”이라고 수습했다. 이에 ‘농담세’를 신설하자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정부가 나랏일을 그르치는 것도 어느 정도 급수와 종류가 있다. 벌이는 시원찮은데 세금이 많으면 ‘학정(虐政)’이 피부에 와 닿는다. 전시 군 작전권 연기 소식을 듣고 군사주권 문제 이전에, 세금 걱정부터 든다. 정권이 교체되든 안되든 이 문제로 인한 비용을 다음 정권에서는 무슨 명목으로 메울까.

미국은 199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전시작전권을 “가져가라”고 종용해왔다. 그러나 최근 자국 의회에서 국방 예산이 대폭 삭감되자, 군수산업 불황으로 골치 아프던 차에 마지못한 척 계속 맡아주겠다고 한다. 물론 전제는 미국산 무기 도입이다. “점령군이다, 보호자다” 식의 반미-사대주의 논란을 떠나, 한·미동맹이 유례없는 고비용 아웃소싱, 미국의 ‘관리 국방’ 체제라는 사실은 국제정치학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돈 대는 사람이 ‘을’인 이상한 아웃소싱이다.

대통령에게 왜 대선 공약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보다 비용부터 따지는 게 낫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무기 도입 사업이다. 김종대 ‘디펜스 21플러스’ 편집장은 향후 30년간 운용 비용은 제외하고 도입 비용만 13조7000억원에 실제 사업 진행 과정에서 대략 20조원까지 증액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무기 구매는 국회에서도 사업 변경이 쉽지 않은 사안이다. 서민들에게 10조원, 20조원은 감이 없는 숫자다.

게다가 국방 문제는 굉장히 전문 분야처럼 ‘여겨져서’ 부패와 불합리가 극에 달해도 국민적 저항이 어렵다.

첨단 무기는 특수한 상품이다. 천문학적 비용은 차치하고 철저히 맞춤형으로 주문 구입해야 한다. 우리가 매일 쓰는 단어 ‘스펙(specification)’이 그것이다. 스펙은 원래 군사 업무에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무기류를 구매할 때 구매자가 원하는 기계류의 치수, 무게 등의 성능과 특성을 나타내는 수적(數的) 지표를 말한다.

스펙, 즉 제작 제원(諸元)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나 상품이나 조건이 좋다는 것이지 그 자체로 완성품은 아니다.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므로 구매국 주변의 시기별 정세 변화에 따라 유동적이고 복잡한 업무다.

‘스펙(specify)’은 구체, 자세, 명확, 특유, 독특 등 개별성을 강조하는 용어다. 무기 구매를 하려면 사는 쪽의 자기 파악이 가장 중요한 사안임을 말해주는 단어다.

국가의 주요 위협 세력이 누구인지, 상대방의 무기 수준, 상호 지형 지물, 국제 정세 변화에 관한 끊임없는 연구와 판단이 필요하다. 스펙은 그 나라만의 특수성이 핵심이라는 얘기다. 간단한 예로,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사막에서 쓰는 아파치 헬기가 필요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4년 11월 4일 (출처 : 경향DB)


그런데 우리는 스펙을 요구할 스펙이 없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주식을 살 줄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60년 넘게 남의 나라에 국방을 맡겼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정을 모른다. 미국에서 무기를 수입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 기술 이전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가 ‘튼튼한 안보 태세’에 반대하겠는가. 문제는 무기를 주문할 능력이 있는가다. 작전권 환수는 그런 능력을 갖추기 위한 것이다.

전 정권이 국토를 망가뜨리고 쓴 돈이 국가 발전을 ‘잘못 인식’한 결과라면, 지금 정권이 작전권을 포기하고 쓰려는 돈은 자기 ‘인식을 포기’한 행위다. 정부는 미국 군수업체에 우리 스펙을 대신 써 달라고 부탁하는 데 성공했다. 그 비용은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뒤집고 뒤집어서 충당할 것이다. 최고 통치자가 최고 세리(稅吏)가 된 예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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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을 핑계 삼아 평생 하루 세 갑 담배를 피우셨다. 늘 어머니와 싸우셨지만 같은 말로 대응하셨다. 공초 선생은 폐암으로 죽어가면서도 담배를 즐기며 죽음에 의연했다는 것이다. (시시한 삶을 초월한) “죽음에 의연”, 이 표현을 특히 강조하셨다.

나를 포함해 과자, 술, 담배처럼 건강에 좋지 않은 기호 식품을 즐기는(중독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얼마나 사는 인생이라고, 이 맛있는 것을 참아서까지….” 내 친구는 식사 대신 케이크와 도넛, 캐러멜 마키아토 커피를 달고 산다. 당연히 비만이다. 먹을 때마다 죄의식과 자기혐오를 호소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내 스트레스 알지? 나를 위로하는 것은 얘들뿐”이라고 한다. 중독자의 심정, 비슷할 것이다. 나 역시 먹을거리에 대한 집착이 있고, 비슷한 논리로 개선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외롭고 지루한 노동의 연속, 취미도 이동도 친밀감도 없는 일상에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자극적인 먹을거리에 대한 기대 외에는 시간을 견딜 방법이 없다.

소설가 정찬의 ‘은빛 동전’이라는 단편이 있다. 1960년대 가난한 시절. 주인공의 어머니는 열 식구의 생활을 꾸리느라 집안일에다 삯바느질과 찹쌀떡 장사까지 한다. 가난의 고통과 더불어 고부 갈등, 아니 시어머니로부터 이유 없는 학대까지 당하고 있다. 현모양처 규범에 충실했던 어머니로서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죽으면 그만인데 이래 살면 뭐하겠노”라며 일탈을 감행한다. 한 푼이 절실한 시절, 아들만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을 시킨 것이다. 그날은 어머니 인생의 첫 번째 일탈. 두 번째는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자 자신을 괴롭혔던 시어머니에게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인다. 어쨌든 그날 어머니에게 탕수육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져본 최대의 유혹이었고 그 유혹을 감행한 일탈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자기연민에 울었다. 감히 그리고 맥락도 없는 비교지만, 나의 경우는 “이렇게 살면 뭐할까, 어차피 죽을 건데”라며 시작한 일탈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소설로 치면, 없는 살림에 매일 탕수육을 먹고 있는 셈이다.

중독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단히 영광스럽거나 의미로 충만한 인생은 드물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자기 계발에 매진하는 인간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기호 식품으로 일상을 버틴다. 먹는 게 건강에 나쁜가, 참는 스트레스가 더 나쁜가 갈등하지만 대개는 후자의 판정승. 특히 금연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친구들의 금연 결심, 금단현상 호소, 실패, 흡연을 반복하는 ‘간증’에 이력이 났다. 다이어트와 금연 중 무엇이 더 힘드냐고 물으면 다들, “둘 다”란다.

행위에 대한 중독이든, 특정 성분 중독이든 갱생은 쉽지 않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일시적이어서 그렇지 ‘약효’가 있기 때문이다. 몸은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더 좋아한다. 익숙함은 인간사의 대표적 부정의다. 적응(중독)된 몸은 삶의 방식이자 양식(糧食)이다.

이처럼 중독은 무조건적인 악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의미를 추구하는 삶의 여정에서 만난 엉뚱한(물론 때론 폭탄 같은) 친구다. 누구나 대하소설을 쓰거나 마더 테레사처럼 살다 갈 수는 없다. 몰입할, 헌신할, 절절히 사랑할 대상을 찾는 데 실패하면, 사회가 권하는 손쉬운 대상이 공허를 메워준다.

정부서울청사 20층에 마련된 옥상 휴게소를 찾은 공무원들이 담배를 피우며 휴식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 글의 요지. 나는 비흡연자지만 담뱃값 인상과 그 논리에 반대한다. 흡연자 입장에서는 경제적 부담도 문제겠지만, 나는 이 정책의 발상과 인간관이 더 심각한 사안이라고 본다. 기호품 중독자의 몸을 볼모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의지가 인간의 품격이자 ‘수준’을 가늠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지박약을 매일 인정하고 자책하는 국민이 많다면, 이 역시 공중 보건에 좋지 않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중독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의 문제다. 금연 여부는 본인의 판단에 달려 있고 그래야 성공한다.

그러나 ‘의지박약의 흡연자’를 낙인 삼아 세계적 추세의 금연에 대처하는 방식은 안이하다. 박근혜 정부가 담배가 주는 만큼의 위안을 줄 자신이 없다면, 담배 가격을 그대로 두기를 바란다. 익숙함이라는 인간 본성을 이용한 가격 올리기, 비열하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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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에 우울과 폭력이 만연해 있다는 데 이견이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우울과 폭력은 겉보기엔 상반되지만 원인은 비슷하다.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되고 타인에게 전가되면 폭력으로 나타난다. 상황마다 다르긴 하겠으나 분노의 시작은 억울함. 옳고 그름을 둘러싼 정의의 문제다. 억울함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에서 ‘패배’한 사람의 심정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억울함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곳곳에서 누가 잘못했나를 놓고 원인, 책임 소재, 사과의 진정성을 다툰다. 아는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해당 사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역사가 있어서 서로 “내가 너를 아는데 말야!”라며 사건과 무관한 상대방의 과거 잘못과 약점을 들추고 싸움은 확대된다.

하지만 지진이나 홍수, 쓰나미 같은 재난이나 느닷없는 국가폭력은 당사자 간에 시비가 드물다. 그게 정상적인 사회다. 피해 원인이 자연재해든 대응을 잘못한 당국이든 가해자는 명백하지만 피해자는 가만히 있다가 당한 것이므로 서로 모르는 사이다.

세월호가 ‘정상적인 사고’였다면? 애초에 기본적인 대응과 조사, 처벌이 이루어졌다면 잊을 수 없는 초대형 참사였을지언정 지금쯤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재해의 책임자와 피해 집단은 위로를 전할 일 외엔 만날 일이 없다. 영화에서처럼 쿨하게 “제 변호사에게 연락하세요”라고 명함을 건네고 보험 회사와 변호사가 대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세월호는 정국(政局)이 되었다. 책임 세력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유가족을 모욕하고 피해자와 그들을 비웃는 세력이 같이 거리에 나와 있다. 단식하는 사람 앞에서 폭식을 하겠다는 발상과 ‘투쟁’이 가능한 사례가 다른 사회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당국과 ‘네티즌 수사대’가 피해자 뒷조사를 하고 유가족의 과거를 신문에 보도한다. 순수한 유가족과 불순한 유가족, 권위적인 유가족과 겸손한 유가족으로 나눈다. 소위 진보 언론의 역할은 그런 소문을 해명해주는 것이 되어버렸다.

유가족의 문제나 사생활은 사실이든 아니든 사건과는 무관하다. 그날 세월호에 탔다면 누구나 당했을 사고를 두고 피해자의 개인사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가족이 화목하지 않듯이 유가족도 그러하다. 당신이나 내가 순수한 인간이 아니듯 그들도 그렇다. 성숙한 인격으로 뭉친 사랑의 가족은 드물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사고를 당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15일 국회 본청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66일째 농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이 농성장 주변을 청소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은 인간의 오랜 정치적 행동이다. 피해자 비난의 핵심은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이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경우인데, 이는 불평등한 성(性)인식이 원인이기 때문에 힘겹지만 어느 정도 예상과 대응이 가능하다.

세월호는 피해 학생을 비롯해 일반 사망자, 유족의 과실이 없다. 사고 발생 당시 대부분 집이나 직장에 있었을 유가족에게 무슨 책임이 있는가. 자식을 빨리 꺼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 것? 적당히 슬퍼하지 않고 지나치게 슬퍼한 것? 당국에 항의한 것? 기사 폭행 같은 잘못이 있다 해도 사건 발생과 무관한, 사고 이후의 일이다. 진상규명이 미뤄질수록 이런 일은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사회 일부가 좋아하는 말이 또 있다. 배후. 피해자는 순수한데 그들 뒤에 불순한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유가족과 배후는 다른 집단이고, 유가족은 배후의 조종을 받는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에서 괴뢰(傀儡)의 어감은 극히 좋지 않지만 원래 뜻은 그렇지 않다. 꼭두각시 놀이, 인형극을 말한다. 영어 표현(puppet)은 귀엽기까지 하다. 유가족은 인형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배후가 있는 순수하지 않은 유가족.” 이 언설의 목적은 분명하다. ‘불순한 가족’이라는 발상은, 사고 원인과 원인을 제공한 진짜 배후를 잘 아는 이들의 생각일 수밖에 없다. 객관적 피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순한 이들이 사소한 피해를 크게 만들고 있다는 선전을 위해서다.

정부·여당이 원하는 바람직한 상황은 ‘조용한 가족’일 것이다. 나를 비롯, 온 국민의 심정이 그럴 것이다. 유가족이 슬픔에만 집중하기를 바란다. 나라가 알아서 제대로 처리하면 유가족이 거리에 나올 일이 없다. 세월호는 물론 ‘불순한 유가족’이야말로 당국의 책임이다. 정부가 유가족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역사에 ‘세월호 정권’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다면 정부가 앞장서서 ‘불순한 유가족’ 언설을 차단해야 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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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유가족

태초에 말씀이 있는 이유가 있다. 진실은 말이 있어야 존재한다. 신문에 활자화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어떤 언어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적과 동지, 이익과 손해, 정의와 부정의가 달라진다. ‘신자유주의 좌파’ 정부에서부터일까. 나는 국어 해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녹색 성장’을 표방했던 이명박 정권이 절정일 줄 알았는데, 이제 더 이상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 아닌 것 같다.

대필과 표절은 사법적, 윤리적 범죄행위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캔들’이라고 한다. 성폭력은 현행법상 명백한 범죄인데 ‘실수’라고 말한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우선인데, 왜 다들 대책위원회를 만드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고위직 인사청문회에서 주로 문제되는 사안들(투기, 탈세, 병역 비리, 학력 위조)도 범죄라는 인식이 없다. “남들 다 하는데 재수 없어 걸렸다”고 생각한다. 이런 풍조에서 “이 정도면 통과”, “털어서 나는 먼지”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범죄는 사실 유무로 결정하는 것인데, ‘이 정도’는 어디서 나온 잣대인가.

학위 논문 베끼기, 서류 조작, 폭력 사건 은폐, 뇌물 수수, 피해자 협박 등 날만 새면 전과를 쌓는 이가 있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주변에서 하도 비난하는 사람이 많아 잘 아는 사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상한 일은 그의 존재가 아니라 지인들의 대응이다. 사람들은 그를 성토하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악착같이 살다보니… 언젠가 정신 차리겠지”로 ‘중지(衆智)’를 모은다. 경찰과 해당 대학에 법규에 맞는 절차를 밟도록 하면 그만인데, 신고는 하지 않고 욕만 해댄다.

우리는 도덕 불감증이 아니라 도덕의 개념 자체가 바뀐 시대에 살고 있다. 후안무치가 도덕인 시대다. 세월호는 ‘도덕의 재구성’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사건 발생, 이후 대응방식, 막말 정국까지 쇼크의 연속이지만 최근 ‘세월호특별법’에 이르러 나는 결국 인식 불능 상태에 빠졌다.

대통령이 특별법에 ‘신경’ 쓰는 것이 삼권분립 위반, 권력 남용이라는 주장은 말인지 소리인지 어이가 없다. 그것이 권력 남용이라면 부디 행사했으면 한다. 발언자의 의도된 무지이기를 바랄 뿐이다. 원래 삼권분립은 분권보다는 협치(協治)에 가까운 개념이다. 어쨌든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새로운 언어는 여야가 혹은 정부·여당이 유가족과 세월호특별법을 “협상한다”는 말이었다.

우리나라는 의무교육 과정에서 배상과 보상의 구별을 가르친다. 국가폭력, 범죄, 천재지변 발생 시에는 피해자에게 배상이나 보상을 해야 한다.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피해는 이미 발생한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 시점에서 피해를 최대한 구제(救濟)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법질서의 기본이다. 세월호 탑승자들과 그 가족의 피해는 공동체의 책임이고 이는 무조건적 당위다. 그런데, 협상이라니!

유가족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과 협상은 다르다. 협상은 동급 행위자 간의 일이지, 가해자와 피해자 그것도 일방적 피해자에게 선심 베풀 듯 제안할 일도, 피해자가 쟁취할 사안도 아니다. 유가족은 아무런 의무가 없다. 타협과 협상은 힘의 균형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바람직한 정치지만, 지금 정국에서 ‘협상’은 피해자가 무슨 요구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정부와 여당은 앞장서서 피해자를 위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을 제정하면 된다.

새누리, 일반인 희생자 유족 면담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오른쪽) 등 원내지도부와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대책위원회 대표단(왼쪽)이 28일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묵념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협상’은 이 문제에 대한 정부·여당과 지지 세력의 세월호를 대하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염수정 추기경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세월호 아픔 이용돼… 유가족도 양보할 수 있어야”라고 말했다.

나는 세월호의 고통이 이용될 만큼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공유되었는지부터 묻고 싶다. 누가 누구를 이용했는가? 같이 아파한 사람은 야당에 투표하고 그로 인한 여당의 아픔(?)이 안타까운 이들은 여당에 투표했다. 덕분에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유가족의 고통을 십분 이용한 세력은 바로 현 정권이다. 이용한 정도가 아니라 무시하고 모욕했다.

유가족이 양보해야?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가족의 죽음. 그 이후의 삶, 우주,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더 양보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더 ‘받아내야’ 저잣거리 표현으로, 속이 후련하겠는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양보하는 것이 균형인가. ‘우리’는, 사회는, 국가는 그들에게 무엇을 양보했는가.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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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사고 원인이 제대로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국회의 의지와 성실성이 가장 관건이지만, 이 사건의 면면이 워낙 두껍고 깊은 뿌리이기 때문이다. 헛된 희망일지라도 유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이 글에서 ‘구조적 문제’는 “선장이 비정규직이었다, 과적했다” 등 돈만 좇는 신자유주의라든가 만연한 도덕 불감증, 해경과 안전행정부의 관료주의와 무책임, ‘해수부 마피아’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일부 진보 진영의 상투적 진단, “국가안보보다 시민안전이 문제다”라는 논의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위에 적은 사항들은 ‘세월호’뿐 아니라 모든 사고와 민생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관련 첫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이동 중인 이준석 선장 (출처 : 경향DB)

개인적으로 세월호 사건의 원인은 “부정의한 구조를 만들어가는 특정 캐릭터(인성)의 범람”이라고 생각한다. 원인 규명을 넘어 이 사건은 독일사회의 홀로코스트 논쟁처럼 우리의 일상적 의제가 되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접근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

‘세월호’는 안전사고지만 안전 이슈라고 보는 것은 안이한 시각이다. 안전은 사건화 과정의 명명일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중의 피해를 가져온다. 사건 초기 수학여행 전면 금지가 좋은 예다. 민방위 훈련 강화 논란은 더욱 기가 막히다.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국가안전 보장 그리고 이를 정권안보의 도구로 삼는 것. 한국현대사를 옥죄어 온 지배 관행이다. 거듭 말하지만, 세월호를 안전 문제로 보는 것은 국민에게 유리하지 않다. 세월호는 통치(governance)의 결과다.

최근 우리사회의 독특한 문화 현상인 ‘의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나(만)를 지켜준다는 기존 안전 개념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의리에 환호하고 있다. 의리 이미지가 뚜렷한 남자 배우에게 CF 제안이 수십건씩 쏟아지고 있다. 인물 창조가 직업인 배우에게 의리가 이미지냐, 진정성이냐는 논란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의리의 유행이 세월호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의리는 조직폭력배, 군인, 경찰, 남자의 우정 등 남성들 사이의 관계에서 주로 사용되어 왔다. 부정적으로는 켕기는 일을 얼버무릴 때 “우리가 남이가?”식의 집성촌(集姓村)적 배타성, 패거리 문화를 의미한다. 영화평론가 최보은은 의리의 조건으로 ‘떡고물’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의리는 뭔가 나눠 먹을 것이 있을 때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의리고 뭐고 없고 보복이 횡행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의리와 정의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정의감이라는 말은 있지만 ‘의리감’은 없다. 의리는 보편적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는 양심의 소리지만 의리는 힘센 자의 기호를 따른다. 정의는 모든 이에게 적용될 것을 전제하고 추구하는 일반 규범, 도리다. 정의(正義)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고뇌에서 시작되지만 의리는 ‘정(情)’에서 출발했다가 길을 잃는 심리 구조다.

“우리가 남이가” 이런 말을 다반사로 하는 이들조차 자신을 정의의 화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의리는 강자의 힘이 낭만화된 언어다. 있는 자들의 카르텔, 이것이 의리다. 더 많이 가지려는 집단들이 힘을 합쳐 약자의 밥상을 걷어차는 폭력의 담합, 즉 강자의 의리는 약자의 정의를 짓밟기 위한 것이다.

공동선 차원에서 약자의 이해와 안전을 보호하는 것, 인류가 전 역사를 통해 기다려온 선하고 강한 리더가 지금 어떤 남자 배우에게 투사되고 있는 의리다. 의리가 당대 한국사회에 맞게 번역된 것이다. 사람들이 세월호 선장에게 기대한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책임감이지 정의도 의리도 아니다.

지금처럼 리더에게 의리를 갈구하는 것은 황당할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의리는 본래 선별적으로 작동한다. ‘하나회’, 학벌, 지역주의가 그것이다. 퇴행적 현상이지만 역설적으로 세월호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직업상 업무 수행을 의리라고 부르는 사회가 정상일까.

정의에는 냉소를 보이는 반면 의리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삶에 대한 두려움이 엉뚱한 의리를 낳았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왜 범람했겠는가. 정의는 논쟁적이지만 의리는 사적인 인연이기 때문에 조건만 맞는다면 무조건적인 안도감을 준다. 그러므로 평소 의리를 다져놔야 한다. 있는 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뇌물과 눈웃음), 일상적으로는 인맥 관리라고 불리는 사회생활. 나는 이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 ‘세월호’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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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6일, 지역 생활협동조합 모임에 참석했다. 사회자가 “오늘이 세월호 사건 두 달째”라며 묵념을 제안했다. 묵념 후엔 노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70명의 참석자들은 “선거, 월드컵…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럴수록 더욱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요즘 흔히 듣는 얘기다.


12년 전의 기시감. 2002년 한·일월드컵과 미군 장갑차, 브라질월드컵과 세월호가 함께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폴란드전 승리 후 온 나라가 흥분해 있을 때 경기 양주시에서 미 2사단의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갓길을 걸어가던 중학교 2학년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몸을 깔고 지나갔다. 세월호만큼이나 이 참사도 예고된 것이었다. 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컸기 때문이다. 도로보다 큰 장갑차에서 보행자가 보일 리 없다. 지역 주민들은 사고 이전부터 안전대책을 수차례 당국에 건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이후 월드컵의 열광 속에서 어린 학생의 어이없는 죽음은 전 국민적 죄책감을 불러일으켰고 촛불시위를 당겼다. 


월드컵이라고 해서 안온한 일상은 아니다. 카타르에서는 월드컵 경기장 건설 도중 1200명이 넘는 이주 노동자가 사망했다. 2022년 완공 때까지 4000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한다. 브라질 사람들은 모두 축구에 열광할까. 이 완고한 편견은 브라질 사람들의 일상을 앗아갔다. 브라질에서도 12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짓다 1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막대한 개최비용, 물가폭등, 공공요금 인상으로 연일 월드컵 반대시위가 한창이다. “국민의 적 FIFA는 돌아가라”는 시위대에 관광객까지 가세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경찰이 실탄을 발포했다.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누구의 입장일까. 이날 묵념은 내게 작은 상처가 됐다. 그들의 선의와 정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이 두 달이 된지도 몰랐다. “잊지 말자”고 다짐한 적도 없다. 아직 찾지 못한 시신만 생각했다. 개인적 사연과 겹쳐 내겐 ‘세월호’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컴컴한 바닷속 세월호의 연속. 이 시간을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잊지 말자”는 말은 이상하다. 삶이 ‘세월호’인데,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다짐이 필요한가. 잊을 수 없는 이들을 잃었는데 누구를 잊지 말자는 것인가.


‘원전 피해’ 언설 역시 비슷한 경우다. 물론 원전의 재앙은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공유돼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피폭(被爆) 노동자의 존재를 비가시화한다. 그들은 이미 피해자다. ‘잊지 말자’는 다짐은 역설적으로 계속 피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시킨다. 


전남 진도 팽목항 등대 길에 노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출처: 연합뉴스)


여성주의 국제정치학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다. ‘전쟁과 평화’는 국가 간 갈등이 기준이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국내에서는 매일매일이 “사는 게 전쟁” 혹은 실제 전시상태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쓸모없는 사람(잉여)’으로 모욕과 궁핍 속에 사는 이들도 숱하다. 일상이 곧 정치적 사건인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의 삶은 전쟁과 평화의 구분을 근본적으로 질문한다. 아내에 대한 폭력, 인신매매, 혐오 범죄 등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전쟁 전후가 있을 뿐이다.


‘전쟁과 평화’는 남을 위협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극소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미리 확보하는 안전보장(안보). 하지만 전쟁과 평화는 사람마다 의미가 다른 것이지 반대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평화, 똑같이 전쟁인 상태는 없다. 미국의 군수산업 노동자는 미국 밖에서 전쟁이 계속돼야 고용안정이라는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들의 평화는 분쟁지역 민중들에게는 학살이다. 


“잊지 말자”는 배제의 언설이다. 시간이 갈수록 망각은 필연이라는 생각, 그로 인한 죄의식. 그러나 계속 고통스러운 뉴스를 들으며 살 수 없다는 갈등. “잊지 말자”는 잊을 수 있는 사람과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사실 지금 세월호 유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잊지 말자”가 아니라 오히려 “잊어야지, 살아야지”라는 눈물 속의 다짐일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다름을 인정할 때 ‘진정한’ 위로가 가능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시혜가 아니다.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잊지 말자”는 말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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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가 경선 승리 후 흘린 눈물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평소라면 누구나 후보가 되기까지 이런저런 사연이 많은 법이니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평소’가 없는 매일매일이 사건 사고인 사회가 아닌가. 그는 아들과 아내의 세월호 관련 발언으로 곤혹을 치렀다. 그 파장을 이겨내고 후보가 되었으니 감격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의 눈물이 “선거를 겨냥한 계산된 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대통령의 상태에 가깝고, 그는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인터넷 여론 중 하나가 흥미롭다. 가장의 출마를 원하지 않은 가족들이 일부러 막말을 했다는 분석이다. “집에서 왕따당하는 아버지의 눈물.” 정 의원의 눈물은 경선에서 승리해서가 아니라 가족들이 자기를 싫어하니 서러움과 외로움이 북받친 가장의 눈물이라는 것이다. 아들의 소신(“미개한 국민”)과 아내의 부적절한 발언이 선거에 유리할 리 없다. 도움 안되는 가족이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처음엔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서글픔이 몰려왔다. 가족 왕따설은 정몽준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가냘픈 기대가 아닐까. 믿고 싶지 않지만 일어난 현실은 세월호 사건만이 아니다. 희생자 가족의 고통을 “미개하다”고 개탄하는 이들이 통치 세력인 현실, 이 역시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교양이 있고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겠지, 이념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말을….” 기가 막히는 심정을 넘어, 두려움에서 나온 발상이다. 왕따설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 보호, 스스로를 위로하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설마… 아니죠?” 그런 심정 말이다. ‘인간으로서 국민’을 존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공식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면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사회는 약육강식의 분위기가 지배할 것이다.

정 후보 가족만이 아니라 유가족에 대한 비난언설은 사회적 규범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다. 무고한 타인의 죽음에 대한 상스러운 언사도 문제지만 공적(公的) 영역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미개하다”고 보는 행태는 ‘선진 문명국’에서도 드문 일이다.

캐럴 길리건, 낸시 폴브레 등 서구 철학자들은 보살핌, 돌봄과 같은 가치가 공적 영역의 규범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쟁도, 돈도, 보살핌도 모두 삶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기존 규범은 지나치게 편향적이다. 보살핌의 윤리(care ethics)가 더 우월하다든가 삶의 전부라는 논리가 아니다. 보살핌이나 슬픔은 개인적 차원에서 가정과 비공식 영역에서만 표출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문제다.

눈물 닦는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


지금 공적 영역에서 통용되는 주요 규범은 경쟁과 승부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성장, 부국, 생산력을 숭배하는 발전주의 지향 사회다. 이를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요구되는 정신 상태는 자신감, 활달함 같은 가벼운 흥분 상태 경조증(輕躁症)이다. 도전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자세를 찬양한다. 예전 상어형 리더십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타인(부하)의 고통에 무감한 것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리더는 생산력을 독려하기 힘들다. ‘불도저’는 여기서 나왔다. 사람의 상태가 어떻든 그냥 무시하고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문제는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명랑할 수는 없다. 이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은 세월호의 바다처럼 인재든 천재든 고해(苦海)다. 사람들은 타인 앞에서 우아하고 쿨하고 이성적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것이 강자, 승자 혹은 교양인의 모습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우울하고 초라한 모습은 극복되어야 할 상태로 간주된다.

고통을 이길 수 없는 이들의 눈물과 분노, 넋 나간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개하다는 발상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은 물론 당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기준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감수성은 창의력의 기본 요건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 마비, 심리학에서는 사이코로 정의한다.

상처를 느끼지 못한 사람 중에는 흉터를 보고 놀라는 이가 있고 놀리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심각한 문제다. ‘상처가 없다’와 ‘느끼지 못한다’는 다르다. 전자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회피하는 것이다. 미개(未開)는 마음도 머리도 닫혀있어서 인지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미개함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비웃는 상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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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기분과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다르다. 우울증은 자살의 주요 원인이 되는 심각한 질환이지만, 우울증처럼 가볍게 취급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병도 드물다. 마음이라는 몸의 부위는 없다.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아픈 병이다.

우울증은 기분, 인식, 판단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 아픈 병이다. 질병이 신체 내부의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면, 우울증의 열쇠는 세로토닌(serotonin)이라는 화학물질이 쥐고 있다. 그래서 세로토닌은 분자인데도 ‘행복 호르몬’으로 불린다.

최근 경제적 어려움이나 경쟁 사회의 압박으로 인한 자살이 사회적 타살로 인식되면서 유례없는 공감을 얻고 있다. 자살한 이를 비난하기보다 대책이 마련되고 낙인이 개선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세 모녀의 동반 자살’이 아니라 먹고살 만한 개인이 ‘사소한’ 이유로 자살한 경우에도 이만큼 이해받을 수 있을까? 특히 예전의 가족 동반 자살은 생명경시론에다 자녀를 소유물로 여긴다는 비난이 엄청났다. 그런데 요즘은 혼자 자살하는 것보다 더 이해받는 듯하다. 최근 여론만 보면 자살 담론은 개인적 문제에서 사회적 문제로 이동했다.

나는 ‘사회적 타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나친 공감’이 다소 염려스럽다. 개인과 구조, 자살과 타살을 지극히 배타적 범주로 놓고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을 구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로 구분한 것뿐이다.

자살 탐구는 원인과 결과, 몸과 마음, 자유와 강제, 개인과 구조 등 근대철학의 모든 이분법에 대한 도전이다. 사회적 타살론은 위에 언급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대립쌍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지 않는 한, 현재의 자살 ‘담론 소동’은 일시적 유행이거나 삐딱하게 말하면 살아 ‘남을 수’ 있는 자들의 ‘안도’와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한 동정 혹은 박근혜 정권의 실정의 사례로만 취급될 것이다.

‘세 모녀 자살’ 사건이 사회구조의 결과임은 명백하지만 그들의 ‘선택’, 정확히는 대처 방식이 반영되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개인적 사연처럼 보이는 자살도 주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구별하기보다 구조에 대한 개인의 대응을 사회가 돕는 방식을 중심으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번만더생각해봐' (출처:경향DB)



인생의 고난이 정신적 면역력을 압도할 때 인간은 자살한다.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를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살은 질병사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의 원인은 같다.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에 대한 구별과 위계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생명보험 등 경제적 문제와도 직결된다. 전문의들은 우울증 환자를 세상에서 가장 이해받기 어려운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힘든 세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 투쟁, 포기, 갈팡질팡 등 - 이 세로토닌 생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조와 개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우울증을 만들어낸다면 그 비율은 1 대 99, 51 대 49, 37 대 63 등 천차만별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구조가 몇 %이고, 개인의 특성·면역력·조건이 몇 %인지 계량할 수 없다. 몸(뇌)의 건강은 정치적, 생리적, 개인적 조건의 영향을 받으며, 이 모든 것들의 계속적인 운동과 복합성이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가 아닐까.

자살의 이유가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의 구분은 자살에 대한 몰이해의 첫 단추다. 자살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고통에 대한 몸의 면역력이지, 개인의 나약함이나 사회적 억압 자체가 아니다. 사회와 생물은 상호 작용(cultured nature)한다. 생물학은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적응과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아닌가. 지구상에 독자적 영역은 없다.

모든 인생사는 수용과 이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 좋은 인간관계(사회 구조)에 따라 개인의 기운과 용기는 달라진다. 자연의 법칙은 “자살은 비정상이다” 혹은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의미한다. 이 의지는 건강 약자든 사회적 약자든 죽을 만큼 아픈 사람의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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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