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주인과 손님들이 격하게 대통령을 비난한다. 이슈도 이유도 다양했다. 나도 동의하는 내용이었지만, 식사가 편치는 않았다. 여성이 대통령이 되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나는 밥맛을 잃고 식당을 나왔다.


비난에서 자유로운 통치자는 없다. 하지만 성별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전직 남성 대통령들은 “쥐XX” “살인X” “돌XXX”라는 말까지 들었어도 덜(?) 거북했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은 외관이 여성이다 보니 정부 비판과 여성 비하가 뒤섞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연신 “~ㄴ”으로 불리니까 ‘같은 여성’으로서 민망했다. 굳이 “~ㄴ”을 사용해야 할까. 대체할 만한 언어는 없나. 나는 전에도 대통령을 ‘쥐’에 비유하는 언설을 비판한 적이 있다(동물 모독). 저잣거리 민심에도 약간의 교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며칠 후 비슷한 상황. 이번에는 해임된 해양수산부 장관이다. 외모, 지능 이야기부터 욕설이 이어졌다. 역시 괴로웠다. 특히, 외모에 대한 조롱은 ‘같은 아줌마로서’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취에 코 막은 윤진숙 해수부 장관(출처: 연합뉴스)


처음부터 자질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지난달 31일 여수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 당시 “GS칼텍스가 1차 피해자”라는 사고방식에는 할 말을 잃었다. ‘해양’과 ‘수산’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장관이었다. 같은 (최)고위 공직자지만 박 대통령과 전 해양수산부 장관에 대한 욕설은 경우가 다르다. 대통령의 실정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단어’로 욕을 먹은 반면, 전임 장관은 스스로 ‘여성답게’ 행동함으로써 비난을 자초했다.


대표적인 행태가 웃음이다. 아무데서나 이유 없이 혼자 웃는 여성. 그녀는 여야 국회의원들의 질문과 질타에 웃음으로 대처하다 ‘웃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분노했다. 이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 ‘여성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정 한복판에서 중대 업무를 처리하는데 수줍게 웃거나 희죽거리는 남성은 없다.


사실 그녀의 웃음은 낯설지 않다. 구조적 현상이다. 남성 상사가 부하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일부 남녀의 태도는 다르다. 대체로 남성은 “잘못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로 간결하게 답하는데, 간혹 여성 직원 중에는 울거나 웃거나 애교를 부리는 등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생부터 직장인까지 공적 공간에서 만나는 여성의 옷차림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일부 젊은 여성의 짧은 하의, 속옷인지 잠옷인지 분간이 안 가는 웃옷, 휘날리는 긴 머리는 공부나 업무에 적합한 드레스 코드가 아니다. 이러한 일부 여성의 외모 관리는 남성 중심 문화의 산물이지만, 기본적으로 이중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노출을 환호하면서도 동시에 얕잡아 본다. 여성스러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때와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그런 차림은 의류의 1차적 기능이 피부 보호임을 잊은 처사다).


위의 사례들은 여성의 ‘자질 부족’처럼 보이지만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사회생활의 행동 기준은 남성 문화가 정한다. 남성 역시 성희롱과 폭력적 언사 등 부적절한 수준을 넘어, 불법 행위를 일상적으로 저지른다. 다만, 남성 중심 사회이므로 남녀가 똑같이 잘못해도 여성의 언행은 더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여성 장관은 극소수다. 그나마 성별, 지역 등에 따른 안배 여론에 밀려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은 인구의 51%로 ‘소수’도 아닌데 할당제의 대표적 수혜자로 여겨진다. 사회적 약자 집단에서 한 사람만 대표로 뽑아 구색을 맞추는 것을 ‘토크니즘(tokenism)’이라고 하고, 해당 인물을 ‘토큰’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 당시 보수 여성 리더십의 롤 모델이 되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다. 백인 남성 정부에서 흑인 여성 한 명의 상징성은 막강했다. 정치적 입장은 군수(軍需) 재벌보다 극우적이었지만 그녀는 부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똑똑했다’.


최악의 경우는 역대 정권이 선호해 온, 지역이나 학벌 안배 몫의 극소수조차 가장 개념 없고 불성실한 사람을 쓰는 것이다. “‘~출신’을 썼더니 이 모양이다. 그들은 차별받는 게 아니라 원래 무능하다.” 윤진숙 전 장관은 이를 증명했다.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라도 여성의 고위직 진출은 여전히 필요하다. 좀 더 진화된 사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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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기사는 사람을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모든 이의 영면이 뉴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고에는 ‘웬만큼’ 사는, 살았던 집안의 상사(喪事)만 실린다. 또한 그런 가족 중에서도 ‘정상’ 구성원만등장한다.


누군가 사망하면 배우자,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전·현직 직장과 직위가 병기된다. 하지만 부모가 사망해도 모든 자녀가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 배우자를 잃었어도 나설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이는 단지 혼외의 삶에 대한 부정을 넘어, 사실상(사실혼) 가족과 동성애자 부부 등 실제로는 가족이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제도적·문화적 배제다.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만 식구이거나 심지어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도 ‘정상 가족’ 규범에 부합하면 가족으로 간주된다. 장례식장에서 심심찮게 목도하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주먹다짐은 그러한 일례일 것이다. 이처럼 부고란은 이성애 제도와 중산층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생산, 유지, 상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만들어 보도한다. 인위적 제도가 자연스러운 인생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삶이 불공평하듯 죽음 역시 그러하다. 애도의 위계는 말할 것도 없다. 애도를 서열화시키는 사회 제도와 문화적 인식은 매우 다양하다. 누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념할 것인가, 죽음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다. 


슬픔의 위계에 대한 가장 가까운 논쟁은 9·11 사건일 것이다. 미국에 사는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이 문제에 대해 용감하고도 신선한 사유 방식을 제기했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미국인에 대한 ‘전 세계적인’ 애도의 물결과 미국 국적이 아닌 사람의 죽음이 다루어지는 차이를 질문한다.


미·이스라엘 동맹에 의해 살해된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 미국 군수산업의 소비 대상으로 내몰린 지구촌 곳곳의 국지전 희생자들, 그리고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 혐오범죄의 주요 타깃인 성 판매 여성,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이민자…. 이들의 죽음은 지구촌 차원의 슬픔도 아니고 죽음과 그 사연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녀는 반미, 미국의 패권 혹은 생명 지상주의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질문한다. 소중한 죽음과 무시해도 되는 죽음. 애도할 만한 인간은 누구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가족과 가족제도는 다르다. 가족의 소중함과 가족이기주의 역시 다르다. 또한 장례가 곧 애도는 아니다. 오늘날 장례 의례는 가족제도의 확장인 입신양명 문화와 관련이 깊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는 말처럼, 장례는 죽은 이를 애도하기보다는 산 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확인한다.


이것이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그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세상에는 좋은 이치도 많고 아름다운 원리도 많다. 다만 ‘갑’이 상주일 때와 ‘갑’ 자신이 사망했을 때, 우리의 대응이 다르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는 있다. 먹고사는 것이 어쩔 수 없다 해도 이해타산이 분명한 행동을 상제(喪祭)의 윤리, 인간의 도리, 전통으로 미화할 것까지는 없다.


일러스트 김상민


부고와 명절이 개인의 인생 성적표처럼 취급될 때, 즉 개인의 삶과 죽음이 가족의 지위로 대변될 때 가족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고 “나는 가족을 벗어나고 싶다”.


24절기가 중시되는 농업사회가 아닌 오늘날 명절은 점차 휴일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인식되어 부고의 정치는 명절에도 노골적으로 반복된다. 일단, 설 선물은 가세의 지표다. 


진학, 취업, 결혼에 대한 인사와 훈수, ‘걱정해주는’ 친지가 고맙기만 할까. 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이번 명절 좋았다”는 사람 얼마나 될까. 체면과 시선의 사회. 우리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1인2역을 수행한다. 


성공을 향한 질주. 명절은 이 시대 인생 목표의 경연장, 아니 ‘면접’ 심사장이다. 명절이고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듣기도 말하기도 민망한 이야기가 만발한다. 설 명절, ‘조용한 가족’이 많아질수록 성숙한 사회가 아닐까.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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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의 분신처럼 종교인의 자살은 순교와 구별하기 어렵다. 탄압받는 정치지도자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살은 열사의 저항으로만 간주된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통념인 나약함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박쥐>의 유명한 대사, 가톨릭 신부인 주인공 상현(송강호)의 기도는 그 경계를 허무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도문에는 개인의 우울과 신앙인의 헌신이 혼재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 것도 움켜쥘 수 없고…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이는 성서의 내용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쓴 작가와 감독의 창작이라고 한다.


1970년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제정하라”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저항이지 자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살은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는 약자의 투쟁 방식이다. 결국 ‘적’의 몸은 그대로이고 저항한 사람은 열사가 되면서 삶에서는 사라진다. ‘못된 강자’는 실익을, ‘선한 약자’는 명예를 추구하는 것. 지배가 작동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다. 통치세력은 망각과 비난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이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하는 단행본 기획이 있었다. 나도 원고를 청탁받았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정치인의 자살과 우울증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주변의 만류에다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결국 포기했다.


덕수궁 돌담길에 한 시민이 가져다놓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사진이 촛불 사이에 놓여 있다.(출처 : 경향DB)


“대통령은 자살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내 아버지 말처럼, 자살에 대한 사회적 금기와 ‘나약한 사람의 도피’라는 통념은 ‘가해세력’이 고인을 공격하는 최대 무기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대통령은 교통사고 당하면 안되나요? 대통령은 암에 걸리면 안되나요? 우울증은 질병일 뿐이고 자살은 그 병에 걸린 사람이 죽는 것, 그냥 병사(病死)예요.” 나는 아버지와 크게 싸웠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아버지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영화 <변호인>을 보지 않았다. 보기 싫었다. 친구들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꽃미남’ 배우가 맡은 역할이 맘에 안 들어서”라고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前)정권에 대한 분노로 또다시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의 죽음은 완벽한 타살이다. 그러나 이 타살의 형식은 복잡하다. 정신과 의사 등 많은 전문가들은 그의 죽음을 사회적 억압으로 인한 우울증, 자살이라고 본다. 그 상황에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사회적이거나 극도의 후안무치가 아니라면, 아프고 통증에 시달리는 것이 정상적인 몸의 반응이다. 진짜 문제는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편견이지 그의 행위가 아니다.


심리학의 상식에서 스트레스 척도는 그 자체의 강도보다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의 내성(耐性)에 의해 좌우된다. 이 논리는 스트레스 주는 사람이 문제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피해자의 선택과 역량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개인이 정치인, 그것도 어떤 가치나 캐릭터를 상징하는 정치지도자일 경우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다. 우울증의 원인과 증세는 다양하지만, 그는 압도적인 힘으로 들이닥친 고도로 지능적인 정치적 의도에 의해 강제로 ‘질병을 주입당했고’ 그의 증상은 ‘미래의 불행에 대한 확신’이었다.


강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이것이 그를 살해한 우리 사회 일부 집단이 강조하는 바고, 지금 ‘우리’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나는 그를 강인한 지도자로만 간직하고 싶은 민초들의 강자 지향 심리를 ‘그들’이 십분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열정적인 변호인이었던 그가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개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공모하는 셈이 된다.


보수세력은 그가 나약해서 자살했다고 약자 혐오를 정당화했고, 진보진영은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나약함으로서의 저항’을 주장한다. 그것이, 재임 당시 공과와 별개로, 그가 추구했던 약자에 대한 애정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강인한 지도자라는 사실과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희생자라는 사건이 왜 양립하면 안되는가?


개인적 자살과 정치적 열사(烈死), 영웅과 피해자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고 구별되어서도 안된다. 그 경계를 인식하고 허무는 것이, 정의롭고 치열한 승부사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고통을 안겨준 그를 영원히 기억하는 방식이 아닐까.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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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업무 차원의 식사나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 모임 후 뒤풀이는 공포였다. 당시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술도 담배도 못하는데, ‘엔(n)분의 일’의 계산법이 억울해서였다. 그리고 정식 모임이 끝난 후에 더 치열해지는 향학열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 세미나는 술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왜 술 마시며 공부를 할까.


음식은 혼자 편안하게 아니면 친밀한 사람들과 즐겁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떤 ‘높은 분’이 내게 “일 이야기가 있으니 점심 한번 합시다”라고 제안해서 나는 정중하게 e메일을 썼다. “…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바쁘신 선생님의 시간을 뺏는 것은 원치 않으니….” 내 요지는 “만나지 말고 메일로 말씀하시라”였다. 그런데 무슨 한국말이 그리 어려운지 상대방은 “식사합시다”를, 나는 “메일 주세요”를 거듭하다가 결국 폭탄이 터졌다. 그는 사람 좋은 어조로 “아이고, 정 선생이 밥보다 술을 좋아하는데 서운하셨구나, 저녁으로 합시다!”라고 했다. 나는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한약을 먹고 있다”는 단순한 내용을 길게 써서 보내야 했다.


한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안부는 굶는 이가 줄어든 이 시대에도 “식사하셨습니까”이고, 습관적인 인사는 “언제 한번 밥 먹자”이다. 문제는 강요되는 회식 문화. 두 사람 이상이 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이에게 회식은 친목 도모와 스트레스 해소의 장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업무의 연장이다. 대개 기혼 여성들은 제때 퇴근하기를 바란다. 자기 시간을 갖고 싶은 이들에게 한없이 이어지는 술자리는 이직을 고려할 만한 괴로움이다. 회식은 귀가를 꺼리는 일부, 주로 기혼 남성이 주동하거나 그들끼리 모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일까. 집에 가면 외로워서, 심심해서, 집안일이 하기 싫어서, 바빠 보이고 싶어서, 인맥 확대를 위해서…. 사연은 다양할 것이다.


소주잔을 맞대 건배하고 있는 손 클로즈업(출처: 경향DB)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는 ‘저녁이 있는 삶’이다. 손학규 민주당 고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데 심각하게 읽어야 할, 정치인의 드문 책이다. 우리 사회에는 ‘성공한 사람은 바쁘고’ 집에 있는 남성은 ‘뭔가 안 풀린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업무 후 바로 귀가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남성은 여성과 어린이, 부모보다 동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동성 사회성(同性 社會性, homo social). 남성 연대이자 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의 획일성을 뜻하는 용어다. 그래봤자, “퇴직 전 자녀 결혼” 강박을 보면 이들도 자신들의 우정을 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다.


모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큐클럭스에서 유래한 KKK단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지나치게 창대했다(지금도 존재한다). 처음에는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남부 동맹군으로 참가했던 작은 마을의 마음 맞는 젊은이들의 장난에서 시작됐다. 전쟁이 끝나자 일상이 시시해진 이들은 한밤중의 여가활동으로 몸에 하얀 침대보를 두르고 머리에는 베갯잇을 뒤집어쓴 채 말을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그러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며 결사를 넓혀갔고 순식간에 전국 조직으로 변모했다. 나치의 전신(前身)인 프라이코프스도 평범한 노동자들이 “마누라에게 나도 바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퇴근 후 술집에서 벌이는 ‘시국토론’이 발전한 것이다.


‘일간 베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비생산적인 정치는 출구를 잃은 외로움과 불만의 결사인 경우가 많다. 상상(망상), 피해의식, 자기비하가 사회적 사명감으로 ‘승화된’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노동을 많이 요구받기 때문에 어느 역사에도 ‘여성 KKK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폭력 문화는 남성 실업, 아니 ‘남는 시간’과 관련성이 크다.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다카하라 모토아키)도 실업으로 인한 불안형 내셔널리즘에 있다. 시간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청소를 하고 남을 돕지만 어떤 이들은 ‘애국’을 한다.


물론 모든 회식 문화가 ‘KKK단’으로 연결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비슷한 사람들의 비슷한 시간대의 비슷한 형태의 음주 행위는 “퇴근 후 간단히 한잔”으로 끝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암묵적으로 강제된 문화라면, “건전한 음주” 이전에 그 자체로 인권 침해다.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과 부대꼈다면, 저녁에는 혼자 혹은 편안한 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지 않고 모두가 농부가 되고 시인이 되고 낚시를 하며 오페라를 감상하는 삶”을 스스로 거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하고 소주 마시고 술 깨는 음료 마시고 다시 일하고…. 그렇게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나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일까.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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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말없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명한 정의를 내렸는데, 왠지 환상을 깨는 경고처럼 들린다. “그들은 무식하거나 화젯거리가 없어서 단지 ‘할 말’이 없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유로 말이 없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없는 남성은 과묵함으로, 말없는 여성은 조신함과 교양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우리 문화에서는 말을 잘한다 해도 과묵보다는 호감이 덜한 편이다.


바람직한 문화가 아니다. 토론도 못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양산할 소지가 크다. 특히, 정치인이 말이 없다? 이건 매우 곤란하다. 자질과 관련된 문제다. 정치인은 수시로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등장 초기부터 안철수 의원에게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과묵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 표명이 드물다보니 정체가 뭐냐는 얘기부터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늘 따라다녔다. 정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공유하는 일이다. 소신과 정의감을 담은 발언, 정치인의 존재 이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인격과 지성이 넘치는 민족의 지도자’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여성운동의 지도자’여서 당선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여당에 대한 지지와 무관했다. 나는 후보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매력과 경쟁력을 갖춘 경우였다. 이 전 대통령은 부자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의 씩씩한(‘뻔뻔한’) 캐릭터에 대한 선망, 현직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성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아버지의 딸’이었기 때문에 당선되었다.


[장도리]2013년 7월10일 (출처 :경향DB)


개인으로서 여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딸’로서 부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녀의 통치 전략은 철저히 여성스러움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성별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능력이든 잘못이든 본인 탓만은 아니다. 나는 그녀가 세상물정을 잘 아는 영리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다만, 국민과 공동체를 위한 자질이 아니라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위한 것이어서, 현재도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핵심은 말에 있다. 전직 대통령은 ‘딴소리’로, 현직 대통령은 ‘침묵으로’ 국가 최고위직을 수행하는 듯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매우 효과적이다. 여성(대통령)이 많이 없으니 ‘우아함’이 배가된다. 대통령은 외모, 패션, 외국어 연설 등 중상층 여성의 지체 높은 이미지로 존재하고, ‘더러운 노동’은 70대 중반(연령 관련 비하 의도는 없다)의 노회한 참모와 국정원이 하고 있다. 새누리당도 비판하는 바다.


내 관심사는 여성과 말의 관계다. 수천년 동안 가부장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은 인간 행동에 대한 차별적 평가에 있다. 폭력, 언어, 성(性)에서 두드러진다. 흔히 이중잣대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이 세 가지는 남성에겐 지나치게 관대해 거의 무한대로 허용된 반면 여성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가정폭력 상담을 하다보면 남성은 열 대를 때려야 폭력 남편으로 인식되는데, 여성의 정당방위는 단 한 대도 폭력으로 간주된다. 성의 이중 윤리는 말할 것도 없다. 남성 지식인과 정치인의 다변은 지성 혹은 자연스러운 권력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말 많은 여성은 직업을 불문하고 비호감이다.


원래 동화는 순수와 거리가 먼 잔혹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많다. 최근 동화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화의 역할은 어린이에게 사회의 지배 규범을 전수하는 데 있다. 대부분의 동화에서 여성(공주)은 말이 없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출처 :경향DB)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중에 나를 옥죄는 이야기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고 다른 하나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전자는 피부가 좋아지려고 그랬는지 내내 잠만 자던 공주가 왕자가 키스하자 깨어난다(사람이 된다). 다른 이야기는 어떤 공주가 말만 하면 입에서 오물 덩어리, 징그러운 벌레, 뱀 등이 튀어나와 여성의 말에 대한 혐오를 가르친다.


내 말과 글이 ‘고상’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 이야기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나는 지금도 언어에 대한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의 언어와 지식을 통제한 성공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여성의 박식함, 풍부한 언어는 아직까지도 ‘현숙한 여성’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욕설은 성차가 심하다. 남성의 욕설은 ‘자연스럽다’ 못해, 통쾌한 경우마저 있다. 여성이 욕을 하면 민망하다. 정치는 말의 잔치이고, ‘현실 정치’는 거친 말의 경연장이다. 성별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여성은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세습’은 북한과 달리 엄청난 (선거)비용이 들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잠자는 공주를 뽑은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키스해줄 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말을 하라.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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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도(江戶) 시대, 1690년에 직업의 종류는 530종이었다고 한다. 1920년 일본 국세(國勢) 조사에 신고된 직종은 약 19만종. 그로부터 85년 후인 2005년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직업이 생겨났을까? 놀랍게도, 3만종으로 6분의 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일본 국립역사민족박물관이 펴낸 <생업으로 본 일본사>에서 이 자료를 읽고 내가 얼마나 진부한 인간인지 깨닫는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의 생활양식은 다양해지며…” 이러한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현실은 반대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획일화된다. 집에서 만든 한 벌 옷의 다양성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과 비교가 되겠는가. ‘우리나라’ 개념은 근대 초기 인쇄술 발달의 결과였다. 출판된 표준어 강요는 이질적인 언어와 생활양식을 가진 소수민족들을 국민으로 통합시켰다. “세계는 하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의 TV를 본다. 심지어 성형수술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개성은 소비를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는 개성은 존중하지만 인권은 억압한다.


힘든 시대다. 30대 명퇴, 청년 실업과 취업난, 소매상 도산, ‘88만원 세대’, 양극화, 교실 붕괴…. 얼마 전 모 대기업의 입사 시험에 9만명이 응시했다는 기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을 다 어떻게…. 요즘은 어딜 가나 수백 대 일 경쟁은 기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람으로 오해받지만, 사실 그는 자본주의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한 사상가였다. 그런 그도 말년에는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세상에 진입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본주의의 ‘자가발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출처 :경향DB)


자본주의는 글자 그대로 ‘비약(飛躍)’하고 있다. 굉음과 광속을 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연착륙시킬 것인가. 인간의 각성과 폭력적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는 지구의 종말을 믿는다. 날짜를 못 맞출 뿐이다.


간단히 말해, 현재 자본주의는 혼자 성장해서 인간의 노동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자본과 인간이 경쟁하고 있다. 불과 100여년 전에, 1000원의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1000명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똑똑한 한 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사는 동네 은행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명 정도가 근무했다. 지금은 3명이 앉아 있다. 모두 기계화되고 그나마 한 명은 프라이빗 뱅킹 담당이다.


자본주의 초기, 노동자 양성과 훈육을 담당했던 학교와 군대의 기능은 무기력해진 지 오래다. 99%의 학생들은 자신이 들러리라는 것을 안다. 군사(軍事)는 첨단무기가 보병을 대체하고 있다. 20:80의 양극화 사회라고 전율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른바 세계화. 지금은 99.1%:0.1%의 사회다. 0.1%의 사람들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가시권에서 사라졌다. 투쟁의 대상이 보이지 않자 우리는 힐링이니 자기 계발이니 하며 자신과 싸우고 있다.


원래 잉여(surplus)는 남는 장사, 이익을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잉여가 되었다. 없어도 되는 사람(useless). 전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절박하게 대안을 찾고 있다. 유독 대한민국 정부만 관심도 개념도 대책도 없다. 노동운동은 정규직을 외치고 있다. 나는 두 세력 모두에게 좌절한다.


잉여들을 위한 <월간 잉여> 7월호 표지 (출처: 경향DB)


자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스템은 정규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규직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 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면 정규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4시간 일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100세 시대’에 30대부터 잉여로 살아야 할 판이다. 아니, 이미 그런 시대다. 캥거루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캥거루족’은 그나마 중산층 부모를 둔 잉여들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잉여이거나 잉여 직전인 사회에서, 우리는 잉여의 공포에 떨면서도 먼저 잉여가 된 이들에게 안도감과 경멸을 느낀다. 심지어 오로지 잉여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비극도 있다. 남아시아의 몇몇 부족들은 식량 부족과 인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 전쟁으로 인구를 ‘조절’한다. 이렇게 보면, 저출산은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인구를 국력으로 생각하는 국가주의, 남성 생식력 숭배 문화, 고령자에 대한 편견이 저출산을 문제로 만들었다.


이 지옥을 주도한 사람들은 패닉 룸으로 도망치겠지만, 종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사태는 인간이 원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변화 역시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 새 역사 창조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국민이 잉여가 아닐 때는 선거 때? ‘댓글 정치’를 보면 그마저도 아닌 것 같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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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이 현재 논란 중인 특정 사건의 피해자에게 또 다른 인권 침해가 될까봐 매우 조심스럽다. 불명예로 간주되는 사건의 특성은, 사건 자체보다 회자되는데 ‘가해 세력’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륜이라고 불리는 사랑을 경험하며, 혼외 관계는 일부일처가 제도화된 사회에서 흔한 인생사다. 정확히 말하면, 불륜이 아니라 불법이다. 혹은 비합법? 사랑에 ‘현행법 위반’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을까. 마음이 제도의 틀보다 작아서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마음, 생각, 감정이 어떻게 구조, 그것도 법제의 틀 속에 구겨 넣어지겠는가.


 



사랑은 불법과 합법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범성애(汎性愛). 사랑의 대상은 삼라만상이다. 사랑하는 상대가 동성이든, 나이차가 많든, 원수의 집안이든, 집안 사람이든, 계급과 국적이 다르든 심지어 동물과의 사랑(미녀와 야수! 슈렉!)도 불륜은 아니다.


사랑에는 불법도 변태도 비정상도 없다. 그 기준을 정하는 권력이 있을 뿐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의 혼외 사랑, 특히 남성의 경우 사랑이라기보다 성 구매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불륜 개념은 재고되어야 한다. 불륜(不倫)은 글자 그대로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금품을 갈취하고 함부로 대하고 노동을 강요하거나 헤어질 때 예의 없는 행동이 불륜이다. 이것은 공적 영역을 포함,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된다. 남의 공로를 가로채고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고…. 비윤리적 상황은 우리의 일상이다.


연인 관계에서 갑자기 잠수 타고 불분명한 태도로 희망 고문을 하거나 상대가 더 사랑한다고 해서 권력감에 도취되거나…. 이런 행동이 불륜이다. 인간관계는 윤리와 정치의 잣대이자 경합장이다. 사랑이 식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불륜이 아니다. 다만 최선의 노력으로 당사자들 간의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 한다. 이 과정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동안 사랑하고 사랑받은 대가를 치르는 것, 이것도 사랑의 일부다. 사랑의 시작과 끝 모두 쉽지 않다.


굳이 사랑을 구별하라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혼·중산층·이성애·선남선녀의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 즉 제도가 보호하는 사랑과 그렇지 않은 절대 다수의 나머지 사랑. 동성애, 이성애에서 연상의 여자, 죄수, 못생긴 사람, 중장년, 장애인, 노인, 노숙인의 사랑은 주책과 추태로 보이기 쉽다.


이것은 평생의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인권 침해인데 사회적 낙인이 워낙 세서인지, 성적 소수자인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를 제외하면 저항하는 경우도 드물다. 사실 가장 비윤리적인 행위는 대부분 제도 안에서 발생하고 또 쉽게 합리화된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가 그것이다. 제도권 밖의, 문화적 각본에 없는 사랑을 해 본 이들은 인생과 인간의 진수를 알게 된다. 일부 예술가와 지망생들이 일부러 쓰라린 사랑을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정도로 이는 정치적 문제고 사람들은 가혹하다. 주로 인생이 지루한 사람들이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


사생아(私生兒). 말 그대로 개인적으로 태어난 아이. 영어는 러브 차일드. 제도 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는 함의가 있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결혼 제도의 사랑이 영원하면 좋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도로 그것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행복한 부부’는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성별 분업에 기초한 남녀 불평등이 불화의 조건이다.


가족 내 여성 노동, 양육과 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기본 동력. 저출산으로 국가가 여성에게 호의적인 이유다. 인구, 국력, 노동력의 삼각관계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불륜으로 불리는 사랑을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라 결혼이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산물, 인위적 제도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사생활에 불과한 혼외 자녀의 존재는 뉴스거리가 될 수 없다. 더구나 한 인간의 시민권을 몰수할 만한 협박 권력이 될 수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3년 10월7일 (출처 :경향DB)


통치자는 자기 정책이나 의지가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임면(任免)할 수 있다. 국민이 투표로 부여한 권력이다. 가진 권력으로 법대로 하면 된다. 왜 불필요하게 여러 사람의 인생에 상흔을 새기는가. 물론 서민들은 이해하지 못할 여권 수뇌부의 정당하지 못한 ‘깊은 고뇌’가 있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혼외 자녀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성립할 수 없다. 사회 수준이 사건을 만든다. 증명 공방을 펼칠 가치도 없다. 문제의 본질, 진짜 이유를 뒤로 감추고 편견이 심한 가족 제도를 이용한 불문법(不文法)적 처벌은 비윤리적이다. 이러한 통치 행태가 바로, 불륜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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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종북을 ‘종북’으로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전적으로 국가정보원과 언론의 노고가 아닐 수 없다.

지하철에서 두 청년의 대화가 들린다. “야, 우리 둘이 은행을 털려고 작정했어. 그렇게 마음만 먹어도 죄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라. 은행 터는 거랑 내란이랑 같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서 ‘내란음모 사태’로 뉴스가 바뀌었다. ‘종북세력 존재론’이 난무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여론은 정치권과 국정원 모두 개혁하라는 양비론이 대세다.

유사 이래 국정원이 지금처럼 유능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통일전선 전술로 치자면, 차르와도 연대하라던 레닌도 칭찬할 만하다. 물론 현재 정황은 그들의 능력에 기인했다기보다는 상대방들이 -실책도 아니고- 워낙 무능, 황당한 까닭에 상황이 저절로 전개된 측면이 크다.

 

국정원 개혁하라 (경향DB)

지금 국정원(one)은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세 정치 집단(the others)과 자유자재로 연대를 구사하고 있다. 국정원까지 네 진영 모두 주연이다. 떡고물은커녕 국정원 주최의 ‘잔치’ 근처에도 못 간 집단은, 어떤 말을 해도 욕먹는 야당뿐이다.

첫 번째 파트너는 말할 것도 없이 새누리당을 필두로 우리 사회의 반북 정서로 먹고사는 집단이다. ‘내란’ ‘혁명 조직’ ‘국가안보’라면 만사형통이니 일도 아니다. 사회 정서에 안보라는 당위까지 겹쳤으니, 이보다 편한 “음지의 업무”가 어디 있으랴.

두 번째 상대는 진보 진영이다. “통합진보당이 워낙 이상하니까 국정원이 대신 그들을 정신 차리게 했으면…”이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국정원보다 ‘종북’의 말로에 더 관심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이들은 평소 원칙대로 국정원의 권력 남용과 정권 안보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경우 양비론은 “국정원은 원래 그런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결국은 ‘종북’ 세력만 비난하는 모양새가 된다.

양비론의 실제 효과는 매카시즘 방관이다. ‘종북교(?)의 황당무계한 종교 활동’의 폐해와 별개로 국정원은, 일부 진보 진영과 ‘종북’ 세력의 오랜 반목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 파트너는 공안 정국의 피해자, 통합진보당이다(통합? 기존 정당과 마찬가지로 당명 자체가 패권적이다). 종교집단은 탄압을 받으면 순교자가 된다. 개혁(改革)은 글자 그대로 피부를 벗겨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인데, ‘전통의 강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내부는 공고해지고 개혁은 저절로 양해된다.

이렇게 ‘레드’와 레드 헌트 집단은 비대칭적인 짝을 이루고 있다. 정치권에 패자는 없다. 민주주의만 후퇴했을 뿐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결과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북한. 세계 최빈국, 남한 경제의 33~40분의 1, 세습, 올브라이트 미국 전 국무장관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구걸과 협박을 일삼는 ‘불량국가’, 수용소 이미지, 뼈만 앙상한 어린이들의 사진, 지도자 부부의 건장한 얼굴까지 거슬린다.

성숙한 시민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북한의 모습이 객관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효과다. ‘세계로 웅비하려는 대한민국’에 같은 민족인 북한은 부담스럽다 못해 창피한 존재다. 북한은 남한 사람이면 누구든 언제나 써먹을 수 있는 만만한 혐오 카드, 치사한 핑계거리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해주는 대상이 항상 그리고 영원히 대기한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백인 노동자의 각성과 해방이 불가능한 이유는 흑인의 존재 때문이다. 흑인이 백인을 구성할 때, 백인은 절대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자기 비리를 덮기 위해 ‘종교집단’을 내란 모의로 잡아넣는 국정원의 행위는 공권력 남동(濫動)이다. 굳이, 내란 세력을 지목하라면 어렵지 않다. 말 그대로 “정부(국민)에 반대하여 일정한 규모와 조직을 갖추고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4대강을 ‘녹차 라떼’로 만들고 쌍용차, 용산 사태 등에서 인명을 살상한 이들이 누구인가. 눈앞에서 일어난 국토 훼손과 살인에 증거가 필요한가?

‘종북’과 국정원의 불법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양비론은 올바르지 않다. 국가가 할 일은 범법행위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조차 늘 조작 논란과 물증 없는 언론 플레이로 끝나지만. 국정원의 목적이 처벌이라기보다 ‘진보=북한’이라는 이미지 공습과 자기들 ‘밥그릇’ 때문임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북한이나 ‘종북’이 없다면 국정원은 직원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사회는 ‘종북세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원한 조직은 없다. 문제가 있으면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든, 더욱 단결하여 더욱 고립되든, 억울함을 규명하여 국민을 설득하든, 스스로 변태(變態)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말대로 “남은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 일어날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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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권익을 내세운 시민단체 대표가 “1억원 후원”을 외치다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단체 운영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가시화된 이유다. 시민단체 대표가 대중에게 직접 운영비 문제를 하소연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이 아주 생소한 사건은 아니다. 나는 사회운동 관련 글을 쓰기 위해 소위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반김(정일)반핵’ ‘성 구매 권리 확보’ ‘한·미동맹 강화’ ‘동성애 금지’ 등 다양했지만,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답게 예의바르고 헌신적이었다. 



게다가 상근비 없이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오로지 옳다는 신념에서’ 자기 돈을 내가며 활동하는 경우도 많아서 인간적인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들 중 몇몇이 이번 사건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저쪽(진보)에 비해 이쪽 사람들(보수적 시민)은 지지는 해도 돈은 잘 안 내요. 그 사람들은 열성적이죠. 돈을 잘 내요. 그게 부러워요.” 내가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으니 “원래 ‘좌빨’들은 지독하잖아요. 우리는 독기가 없어. 독기가”라는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보수와 진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백인과 유색인, 서울과 지방, 비장애인과 장애인, 빈부, 남녀의 관계는 이분화되어 보이지만 대칭적이지 않다. 빈부 문제가 가장 쉬운 예일 것이다. 이들 간의 관계, 즉 차별은 흔히 이야기하듯 ‘시대적 추세’에 따라 역전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변화는 있지만 열거한 문제들은 현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 살기 좋아졌어, 장애인 처우가 나아졌어, 지금 굶는 사람은 없잖아….” 이런 말이 오갈 때 나는 묻는다. “그들한테 직접 물어보셨나요? 본인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처럼 일단 말하는 사람의 위치성이 논쟁거리다. 말의 정당성은 문구 자체보다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당신 말은 옳지만,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차별받는 당사자가 “저의 지위가 매우 상승되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대개 구조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 있으며 타인의 현실을 모른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발언 자격이 없다. 마치 일본이 우리에게 “예전에 비하면 너희에게 잘해주고 있지 않니”라고 말하는 격이다.


일본 경고 (경향DB)


두 번째. ‘나아졌다’는 판단은 어느 시대에 근거한 것일까. 중세에 비하면 누구나 나아졌(을지 모른)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조선시대에 비하면 지금 여자들은…”인데, 나아졌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내 의문은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거지’든, 왜 이들의 처지는 항상 과거와 비교되는가이다. 만일 2013년의 한국을 미국의 1600년대(조선시대)와 비교한다면 기분 좋겠는가.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지, 왜 조선시대 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하는가.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가난한 남성과 비교하는가. 현대 여성의 지위는 현대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조선시대 여성과 비교하는가. 여성(51%)과 장애인(15%)을 합치면 비장애인 남성 인구보다 많다. 다시 말해 여성이나 장애인은 내부 차이가 크기 때문에 특정 집단의 지위 상승 여부는 통계상으로도 쉬운 판단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이 이슈에 관심이 없다. 사람이 아니라 과거와 비교되는 사람들! 이것이 차별 논쟁의 진짜 이슈가 아닐까.


거칠게 요약하면, 현재 여성 ‘지위 상승’의 실제 내용은 극소수 여성의 성취일 뿐이고, 공사 영역 모두에서 여성의 ‘역할’(노동) 증대를 의미한다. 여성의 사회진출만큼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증가하지 않았으므로 여성 ‘지위 상승’은 여성의 이중 노동일 가능성이 크다.


(경향DB)


무엇보다 남성들 간의 계급 차이에 대한 일부 남성의 분노가 ‘커리어우먼’에게 전가된 것이다. 남성 연대를 깨지 않기 위해 계급 이슈가 성별로 둔갑한 경우다. 여성의 지위 상승을 가정해도 그것이 남성의 지위 하락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제로섬 사고방식은 세상이 오로지 성별 제도로만 굴러간다고 생각할 때 가능하다.


이제, 정답(?). 보수단체의 후원금이 적은 이유는 당연하다. 기부금을 내는 이유는 자기 이해를 대변해달라는 절박성, 윤리적 책임감, 사회적 연대 등 다양하다. 내가 여성단체에 회비를 내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단체에 대한 지지는 바로 후원금이 되지 않는다. 남성을 포함해 상식적인 시민들은 ‘차별받아야 할 사람들의 지위가 상승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지갑을 열지 않는다. 내가 만난 보수단체의 헌신적인 활동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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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와 땀이 범벅된 날들.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마다 만원이다. 시험 준비생이 아닌 사람은 앉아 있기 미안하다. 여름 두 달을 쉬면 인생이 부도날까. 다들 안쓰럽다. 중·고생을 ‘1318’로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서른 살 넘어 취업 때까지, 아니 평생 학습으로 고달픈 시대가 됐다.


“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 10대를 옥죄는 최고의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에는 나를 비롯, ‘저렇게’ 된 사람들 천지다. 신자유주의 시대 증폭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국가의 역할 부재. 대비하지 않는 미래는 ‘노숙인 신세’일 것이라는 불안이 일상을 압도한다. 더욱 높은 수준의 예견이 필요해졌다. 생명보험의 승리는 이를 상징한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 (경향DB)


사실, 지금 고생이 미래에 보상받는다는 확신도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우리 사회는 미래에 대한 잘못된 개념, 평생 불행하게 사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근대화, 예전에는 ‘새마을운동’, 지금은 ‘창조 경제’(각자 창조하는 경제?). 유비무환.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라! 불안에 떠는 대중을 통제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공포(fear)는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삶은 200년도 안된 근대 자본주의의 시간관에서 비롯됐다. 지금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대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17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시간관은 낯설고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농업 중심의 생활방식에서 시간 개념은 24절기처럼 태양의 운행과 계절의 순환에 근거했다.


순환적 시간은 반복되는 하루, 사계 등 자연의 원리를 기초로 만들어진 내부가 닫힌 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과거와 현재밖에 없다. 원은 닫힌 것이므로 미래 개념은 근본적으로 차단된다. 그러나 직선적 시간관에서 시간은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려있다. 시간의 최종 목표는 미래다. 시간에 위계가 생긴 것이다.


KBS-1TV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호모아카데미쿠스'의 한장면 (KBS)


오늘날에는 지구상 어디에서나 현재 시각이 몇 시인지 정확히 알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시간을 대충 계산했다. 아침, 점심, 저녁… 이 정도였다. 현대인에게 시간 계산은 가장 중요한 자기 관리다. 나이듦에 대한 혐오는 ‘남은 시간이 없다’는 공포 때문이다. 교육이 미래를 위해 도구화된 것은 당연하다. 교육, 아니 정확히는 학력도 아닌 학벌이 계급 재생산, 취업, 행복,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 됐다.


인생이 끝없는 길, 험한 길, 가지 않는 길 등 길에 비유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예전과 달리 과거, 현실, 미래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단다. 계속 진행되기 때문에 거스를 수 없다는 비가역성(非可逆性)이 우리를 괴롭힌다.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을 아무리 외쳐도 그게 잘 되던가.


미래 개념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상록수형 인간이든, 부귀와 출세를 지향하는 인간이든 모두 시간의 선구자들이다. 미래를 미리 실현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의지와 계획, 시도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우리는 경쟁, 노력, 사명감 속에 살게 됐고 인생은 무의미하게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무의미하니까 끊임없이 사는 의미와 이유를 묻는 것이다.


‘하면 된다’.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미래를 일찍 실현하고 선점하면 성공한 인생, 선진국, 첨단의 영광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미래라는 목표를 향한 달리기 시합이 됐다. 여성, 장애인, 가난한 사람은 이 달리기에서 기회와 조건이 모두 불리하다. 그래서 이들이 성공하면 ‘인간극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未來)는 글자 그대로 ‘오지 않는다’는 뜻. 미래를 기다리는 현재가 미래다. 미래는 불가능한 것이다.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어차피 도달은 없다. 당도의 순간이 곧 현재이고, 도달한 이후에는 또 다른 미래가 대기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낙오자’를 대하거나 자포자기할 때, “쟤는(내겐) 미래가 없어”라고 말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이 말은 직선적 시간관 때문에 생긴 말인데, 모순적이게도 직선적 시간관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미래는 희망을 상징한다. 그것이 있다/없다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실제로는 현재가 바로 미래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고 싶다면, “오늘이 없다”가 맞다.


미래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미래가 없기는 가난한 청춘, 비사회적인 사람, 반사회적인 사람, 부자, 스펙 좋은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다. 장밋빛 미래는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게 아니다. 미래 자체가 실체 없는 관념이다. ‘미래 지향적’인 사람의 달리기는 허공에의 질주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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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그대로라면 호색한(好色漢)은 색깔을 좋아하는 예술가고 색골(色骨)은 컬러 뼈다귀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색(色)만큼 다양한 의미와 비유가 가능한 글자도 드물다. 성(性), 캐릭터, 입장, 종류, 정치학, 특성, 건강 상태까지 표현 가능한 다채로운 언어다. 적자(赤字), 적나라(赤裸裸), 적빈(赤貧·몹시 가난함), 청신호(靑信號), 홍일점(紅一點), 상록수(常綠樹), 회색인(灰色人)…. 색깔은 색깔을 떠나 사회를 설명한다.


뭐니뭐니 해도 정치색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 주지하다시피 검은색은 주로 ‘협박(blackmail)’ ‘속이 시꺼먼 놈’ 등 부정적인 의미다. 반대로 흰색은 ‘깨끗함’, ‘숨김 없음(백서·white paper)’을 과시한다. 일제시대 일경은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자를 색출(索出, ‘色出’)하는 데 과일을 은어로 썼다. 수박과 사과를 구별하는 일이다. 겉은 파란데 속은 빨간 수박은 마르크스주의자, 겉은 붉은색이나 과육은 하얀 사과는 폼만 잡는 모던 보이다. 여기에는 빨강, 파랑, 하양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는 미국에서 백인 행세를 하는 아시아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압권은 ‘빨갱이’다. 지겹지만 영원한 유통기한을 자랑한다. 국정원이 국가 간 정보가 아니라 국민 정보를 캐고 현실 정치에 개입해 인터넷 댓글이나 달고 있다. 지금 이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데, 이와 관련해 지난달 27일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김을동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마누라가 ‘빨갱이’다 보니 다 헝클어졌다”고 말했다.


김을동 의원 (경향DB)


이는 김 의원의 발언 목적과는 다르게, ‘빨갱이’의 개념이 무엇이고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와 무관하다.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현상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빨간 렌즈를 썼으니 상대가 빨갛게 보이는 것이다. 흑백 논리와 레드 콤플렉스 대신, 자기 색깔이 있으면서도 다른 색깔과 친구하는 무지개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것은 ‘빨갱이’ 담론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해 대선 때 동네에 새빨간 단체복을 아래위로 맞춰 입은 수십명의 선거운동원들이 떼로 몰려다녀 시각적 피로와 두려움을 느꼈다. 유니폼을 입은 집단은 위화감을 조성하기 쉬운데, 그것이 빨간색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야당이나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감히 빨간옷을 입지 못한다. 새누리당은 색깔 선택의 자유가 무궁하나 야당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분홍색이나 주황색도 곤란할 것이다.


율동하는 박근혜 후보 (경향DB)


색깔 선택의 자유는 색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내가 입으면 열정, 네가 입으면 빨갱이”인 문제가 아니다. 자기는 색깔이 없는 중립이어서 아무 색이나 어울리지만(?), 다른 사람은 자기가 지정한 색을 입어야 하고 이를 법적·문화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몇 년 전 캐나다에서 여성주의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접수대의 백인 여성이 나더러 “유색 인종(color of people)은 당신 혼자”라고 말했다. 내 나라에서는 빨간색, 남의 나라에서는 피부색이 문제였다. 그녀의 태도나 어감은 환영한다는 의미였지만, 나는 흥분했다. “흰색은 색깔이 아니니? 내가 유색이면 너도 유색이야. 무슨 근거로 흰색이 기준이야? 백인 말고는 다 유색이야? 그리고 흰색이 나쁜 의미인 거 몰라? 1차 대전 때 동유럽 지주들 백색동맹 몰라? 우익 테러를 백색 테러라고 하는 거 몰라?” 나의 서툰 영어에다 급작스러운 인식론적 공격에 세계사까지 운운한 때문인지,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나 혼자 씩씩거렸다.


색깔론은 영원할 것이다. 비유의 전제인 색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색깔론의 영향을 덜 받는 시민의 각성과 ‘빨강-보수’ ‘녹색-북한’식으로 기호 체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사회도 있다. 드루즈(Druze)는 이슬람교의 한 분파인데 상징물 중 하나인 별은 5가지 색깔(녹·적·황·청·백)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개념과 다르다. 녹색은 정신, 적색은 영혼, 노란색은 말씀, 청색은 의지, 백색은 의지의 실현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색인은 없다. 누구나 성깔이든 정치적 입장이든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기호이지(“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타인이 내가 좋아하거나 지향하는 색을 규정할 수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원권,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다. ‘빨갱이’라는 손짓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


(경향DB)


한편, 흥미롭게도 색은 실제로는 배타적이지 않다. 연속적, 상호의존적이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빨주노초파남보가 같은 색의 엷은 변화이기 때문이다(레인보 깃발은 동성애 문화의 상징). 빨강에서 시작하지만 파랑으로 끝나면서 보라색으로 다시 만난다. 마치 낮과 밤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을 거쳐 계속 순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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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남매 집안의 큰딸이다. 우리 셋은 우애는 없는데 자주 만난다. 결국 주로 싸우고 헤어진다. 며칠 전 여동생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왜 이렇게 화가 많을까….” 남동생은 평소 말하고 싶었던 주제였는지 즉각 반응했다. “그러게 말야! 누나들은 왜 그렇게 맨날 분노가 많아. 나를 봐, 화내는 거 봤어?” 그러자 여동생이 발끈, “야! 너, 말 잘했다. 맞아, 너는 화를 안 내. 근데 남을 화나게 하는데 아주 선수야!”


화내는 사람, 화나게 하는 사람. 누가 더 문제일까. 인간의 감정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개인의 반응이 결정한다. 스트레스가 좋은 예인데 다양한 척도가 있지만(1위 가까운 이의 죽음, 2위 결혼, 3위 이사 등), 고통은 개인의 스트레스 내성(耐性)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즉 화나는 일이 있어도 화를 안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일부 심리학의 입장이고, 한편으로 분노는 정의감이자 힘이기도 하다. 정당하게 분노할 일이 있어도 우아하고 차분하고 세련되게 대응해야 한다는 통념은 가해자의 이중 메시지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르다. 자기도취의 특징은 안하무인. 나쁜 뜻이 아니라 주변에 타인이 없다는 착오에서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덜하다. 나르시시즘은 자기방어에서 시작되었다. 취약한 자아가 오만이라는 방식으로 수치심을 잊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를 망각하고 홀로 궁궐에 산다. 주지하다시피 ‘공주병’ ‘왕자병’이 초기 증세다. 


그러나 최근 나는 위에 적은 심리학적 상식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느낀다. 이해, 분석, 설명이 불가능한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사건 하나. 승객이 적은 지하철 차량 안에서 10여분간(긴 시간이었다)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 고역인 채 얼굴만 쳐다볼 뿐 방관했다. 한 승객이 “조용히 말하라”고 했다. 그의 반응은? 더 큰 목소리로 “니가 다른 자리로 가!”라고 했다. 홀로 용기를 냈던 그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5.18과 관련해 연희동 자택 옆 골목에서 대국민성명을 읽는 전두환 (경향DB)


1995년 수하들을 앞세우고 ‘골목 성명’을 냈던 ‘전두환형(型)’에서 시작, 뻔뻔스러움은 이명박 정권 시절에 절정을 이루었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관계 원리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이는 특정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일종의 캐릭터다. 어떤 사람들은 강함, 자신감, 당당함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전두환씨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더 무섭다. 뻔뻔스러움은 강한 나르시시즘에 가깝지만 이 시대의 뻔뻔함은 단순한 자기도취가 아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간성이다. 


본격적으로 뻔뻔함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MB 정권 초기 장관 인사청문회였다. 적반하장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소통불가 상태. 모 장관 후보자는 자녀의 의료보험료 미납이 문제가 되자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서 애국할 애를 격려하지는 못할망정…”이라며 눈물을 보였고, 땅 투기 의혹을 받은 후보자는 “땅을 사랑할 뿐”이라고, 수십건의 건물을 소유한 후보자는 “남편의 사랑의 선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박은경 “땅을 사랑할 뿐” (경향DB)


뻔뻔함은 자기 보호를 위한 위악(僞惡)이 아니다. 진정성 넘치는 자기확신이다. 또한 이들은 약간의 조증(躁症) 상태로 자신감 넘치는 즐거운 생활을 한다. 상대가 강자와 약자냐에 따라 얼굴 표정이 급변하는 ‘재능’도 있다. 이들은 정신병자가 아니다. 건강하다. 정신병은 뻔뻔한 사람에게 피해 입은 착한 이들이 걸린다. 자신의 지나친 자신감을 불편해하는 이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으며 성공에 강한 집념을 보인다. 사과나 양보를 굴복으로 생각한다. 양심과 윤리, 부끄러움은 자신의 질주를 방해하는 도로의 불필요한 표지 같은 것이다.


한편 보통 사람들은 이들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들의 고통받지 않는 상태, ‘강함’을 욕망한다. 나는 뻔뻔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에 대한 분노, 억울함, 정신 분열이 힐링 열풍의 근원지라고 생각한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일베’도 뻔뻔함을 자기 비하와 약자 혐오 놀이로 ‘승화’시킨 현상일지 모른다. 


사회 구조는 인성을 창조한다. 르네상스적 인간, 근대적 인간, 자본주의형 인간이란 말이 있는 이유다. 정부는 사회구성원의 공존을 위한 인프라를 민영화 논리로 파괴하고, 기업은 승자독식의 모범을 보여준다. 생존은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겨졌다. 돈과 성공이 최고가치고 미모, 행복, 마음의 평화까지 갖춰야 하는 사회다. 이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일단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들은 맹렬히 추구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억울한 일이 있으면 바로잡으면 되지, 출세까지 해야 되나.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고뇌가 아니라 결단인 시대가 되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자기 계발에 매진하거나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다른 세상을 살거나. 이 역시 양극화. 나처럼 뻔뻔할 능력도 없고 그에 맞서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사람은 세상을 피한다. 뻔뻔하거나 우울하거나 도피하거나.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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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업은 워낙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경찰은 과중한 단속 업무와 비난에 동시에 시달린다. 성매매가 제대로 적발되지 않는 이유는 수십가지겠지만 흥미로운 사정이 있다. 최근 읽은 책에서 경찰의 하소연에 공감했다. “선진국은 야간에 할 일이 없다. 야간 취객이 적다. 우리처럼 취객에게 시달리지 않으니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생긴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 아닌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시위 진압에 경찰 병력이 집중되면서 연쇄 살인 성폭행 용의자를 눈앞에서 놓치는 장면의 기시감. 두 가지 사례는 남성 문제 혹은 남성들 사이의 문제 때문에, 국가 권력(남성)이 남성을 관리하기에 바빠 국민(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많은 한국 남성에게 술은 일상의 동반자다. 게다가 음주문화에 지나치게 너그럽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무례나 사회적 물의, 범죄 행위에도 관대하다. 술은 모든 상황의 알리바이다. 술만 마시면 아내를 구타하든, 성폭력을 하든, 공공장소에서 용변을 보든 모든 상황이 참작(參酌), 감안된다. 정상참작(情狀參酌). 이 단어 자체에 술을 붓는다는 ‘작(酌)’이 포함되어 있으니, 술은 인간 행위를 판단하는 필수적 고려요소인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경찰은 전국적으로 상습 만취 상태의 폭력, 줄여서 주폭(酒暴) 사범 검거와 캠페인에 주력하고 있다. 술주정을 넘어 지역사회와 주거지역, 가족에게 술로 ‘인한’ 폭력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은 왜 그토록 술을 많이 마실까. 폭탄주 강요 등 음주문화는 왜 그리 폭력적일까.


그런데도 다른 사회에 비해 알코올 중독자가 많다는 논의는 별로 없다. 나는 실제로도 ‘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코올 중독은 혼자 주기적으로 마시는 경우를 말한다. 한국 남성은 사회생활과 업무의 연장에서 집단적으로 마시기 때문에, 더 마신다 해도 병리 용어인 ‘중독’ 개념 사용을 기피하는 심리가 있다. 


술과 성매매는 두 가지 직접적 관련이 있다. 경찰의 억울한 호소대로 “야간 취객 때문에 단속 인력이 모자란다”는 것과 룸살롱 등지에서 주류 판매와 성매매가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일부(?) 남성은 술만 ‘여자를 끼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노래방, 호프집, 업무상 출장, 골프장, 이발소, 목욕탕, 아예 성 구매를 목적으로 하는 관광…. 움직일 때마다 여성의 ‘위안’이 필요한 것일까.


(경향DB)


음주 상태에서 인간 행동의 변화 양상은 자연과학의 의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술로 ‘필름이 끊긴’ 사람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술을 마셔도 남녀가 성별을 바꿔 행동하지는 않으며, 모르는 외국어를 갑자기 구사하지도 않는다. 술을 마셔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대개는 ‘집에 와서, 가족’을 구타한다. “술을 마셔서 때리는”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다”가 더 정확하다.


술과 여자. 나는 남성들이 이 둘(?)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남성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무능력, ‘인생고’의 상징이자 단기 해소책일 뿐이다. 술은 물건이고 여성은 사람인데 언제나 동격으로 취급된다. 남성에게 술과 여자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매매는 남성 연대의 대표적 관행이다. ‘에이전트’(포주)의 성별과 관계없이 판매자 혹은 ‘판매 상품’과 구매자는 절대적으로 성별화되어 있다. 여성을 상품으로 상정하고 남성 사이에서 여성을 교환하는 것이 성매매의 기본 구조다. 


‘성접대’ ‘성상납’이 가장 직접적인 사례다. 상납(上納). 글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윗사람에게 바친다는 것인데 대개는 상품권이나 돈, 과일, 술을 주지 않나? 성상납은 성(性)을 바친다는 것이다. 여자 상납인데, ‘여’를 생략하고 ‘성’만 사용하는 것은 여성=성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드문 경우겠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뇌물을 바쳐야 할 상황이라면, 보석을 주지 남자의 몸을 가지라고 할까? 한편, 남성의 성이 상납되지 않는 것은 동성애 금기 때문이다. 


성매매가 가능하려면 여성의 인격은 물화(物化)되어야 한다. 여성의 몸은 남성 세계에서 ‘윤활유’ ‘범퍼’ 역할을 위해 판매, 대여, 유통된다. 남성들 사이의 갈등을 여성의 몸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보면 성매매에서, 여성은 이용 대상일 뿐 여성과 무관한 남성의 문제다. 취객과 주폭 현상은 성매매 단속을 방해함으로써 자신의 처지-상납의 연쇄에 끼지 못한 약한 고리(루저)-에 대한 ‘작은’ 분풀이가 아닐까.


세상은 남성들끼리 싸우고 화해하고 연대하고 복수하는 그들만의 세상이다. 문제는 나머지 시민들은 남자들 사이의 ‘전쟁과 평화’ 때문에 평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서부 영화의 고전인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the ugly)>은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weird)>으로 진화했지만, 실은 ‘놈놈놈’이라는 축어처럼 언제나 그들은 같은 진영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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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 달 동안 북한과 미국은 한반도 주변을 무대로 거침없는 전쟁 협박 정치를 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한국 사회는 뉴스의 순서를 달리했다. 김정은 체제의 리더십 연습과 미국의 무기 실험에, 왜 한국 사람들이 전쟁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새삼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6일 뉴욕타임스는 한국 사회의 전쟁 불감증을 보도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위기감이 없어 보이는 한국인의 일상이 이상했나 보다. 하지만 전쟁 불감증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는 전쟁에 대비하지 않는다는 안보 불감증과 다르다. 사실 현대전, 특히 한반도처럼 좁은 지형에서는 전쟁의 공포에 떨 필요가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레이더나 자외선으로 목표물을 감지해서 정확히 타격하는 유도(guided) 미사일과 핵이 날아다니는 첨단무기전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총알이 사람의 체온을 쫓아오는 시대. 피란을 가도 소용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식수나 라면 사재기는 전쟁 대비가 아니라 멍청한 혼란일 뿐이다. 


전쟁 불감증은 개탄할 일도 신기한 일도 아니다. 의미 없는 단어다. ‘불감증(不感症)’은 뭔가 느껴야 한다는 당위를 전제한다. 예를 들어 흔히 인간의 3대 욕구를 식욕, 수면욕, 성욕이라고 하지만 이는 일부 남성의 ‘소견(小見)’일 뿐이다. 프로이트는 섹스를 인간의 본질적 행위로 파악했기 때문에 “유일한 변태는 섹스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수면과 음식물 섭취와 달리 섹스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지 않다(성 불감증, 섹스리스 부부 모두 정상이다).


전쟁 불감증은 문제가 아니지만 불감증 담론은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현상이다. 전쟁 불감증 원인은 역사적·문화적으로 다양할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견은 ‘양치기 소년’론이 아닐까. 이제 국민들은 어느 정도 남북한 정부의 ‘정치쇼’에 면역되어 있다. 특히 오랜 세월 동안 남한 기득권 세력의 색깔론, 전쟁 위기론, 간첩 사건 조작을 통한 공포정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다. 서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보물 칼도 녹슬기 마련이다. 


약 15년 전 영화 <간첩 리철진>(1999)에는 남한에서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간첩이 자수하자 경찰이 “네가 간첩이면 나는 김정일이다”라며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영화 <의형제>(2010)에서는 국가가 임명한 대남 활동가(간첩)와 탈북자가 남한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현재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33배다).


전쟁보다 생계가 두려운 사람. 이들뿐일까. 전쟁 불감증의 가장 큰 원인은 “먹고사는 게 전쟁”이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이 전투,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삶이다. 전쟁이 없어도 입시, 실업, 질병, 경쟁, 외로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목숨을 ‘빼앗기고’ 있다. 구타, 모욕, 불편, 고통이 일상인 여성과 장애인,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에겐 ‘지금, 여기’가 바로 전쟁터다. 사회적 약자의 일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이에겐 “북핵보다 엔화 약세가 더 심각”하고 “전쟁보다 빚이 더 무섭다”. 



여성주의는 지속적으로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에 도전해왔다. 기존의 전쟁 개념은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정치다. 교과서는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전쟁 전후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은, 기민(饑民)이 다수 국민이라면 전쟁과 평화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를테면 노예의 입장에서는 노예제도가 존속되는 한 외세의 침략이든 혁명이든 주인이 바뀌는 것일 뿐 삶에는 변화가 없다. 


쟁점은 전쟁 불감증 여부가 아니다. 불감이든 민감이든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위기의식과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안과 ‘가벼운’ 사안이 있다면 그것을 누가 정하는가이다. 당사자는 평생 불안과 공포에 떨지만, 사회 통념상 사소하게 취급되거나 드러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사회는 성폭력이나 성희롱 등 성과 관련한 폭력의 원인이 남성 중심 문화가 아니라 여성의 ‘예민함’과 ‘피해의식’이라고 간주한다.


국민들이 절실하게 느끼는 현안에 대한 집권세력의 무감각. 이것이 진짜 전쟁, 즉 내부의 전쟁을 만들어낸다. 무감한 정도가 아니라 국민들의 절박함과 두려움을 부정하고 공권력을 행사할 때 전쟁이 시작된다. 한국은 고위공직자 비리에 대해 둔감한 정도가 아니라 너그러운 사회다. 표절, 병역비리,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학력 위조 등이 ‘종합세트’가 아니라 한두 건만 해당하면 “청렴한 편”이라는 여론이 나온다.


국가 간 전쟁 연습, 군사적 긴장 고조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내부 통치전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전쟁 불감증이 당연한 이유는 두 가지다. 승부도 출구도 없는 공멸의 현대전, 그리고 당장 일상의 삶이 ‘더’ 다급하기 때문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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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일주일을 남긴 지난 2월18일, 라디오 연설에서 “5년간 행복하게 일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저가 있는 서울 강남구의 신연희 구청장은 “이 대통령은 5년이란 찰나의 순간에 경제대국, 수출대국, 문화대국, 체육대국, 관광대국이란 위업을 달성했다. 최고 반열의 평가를 받을 거라 확신한다”고 말을 보탰다.


“행복했다.” 정말 행복했다는 소회인지 의례적인 수사인지 모르겠지만 내겐 생소했다. 솔직히 말하면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집권 초기부터 이 전 대통령은 본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의외의 단어를 구사했다. 애초에 국민이 그에게 기대한 것은 민주주의나 부패척결이 아니었다. 그의 당선은 그의 재산형성 과정에서 보여준 ‘능력’을 보고, “우리도 당신처럼 잘살게 해 달라”는 서민들의 욕망에 기인한 바 크다. ‘우리’는 그와 함께 모두가 부자 되는 세상을 공모했다.


이대통령 퇴임인사 (경향신문DB)


이런 상황이었기에 ‘녹색성장’이나 ‘공정한 사회’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서사의 하이라이트는 정권 막판에 “역사상 가장 깨끗한 완벽한 정권” “국격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 “나는 행복합니다”이다. 그가 도덕성처럼 ‘고상한’ 가치까지 전유하기보다 ‘소박하게’ 원래 약속했던 경제지상주의에 부합하는 치적(예를 들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을 내세웠더라면 그나마 위로가 됐을 것이다.


나는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의 ‘망탈리테’, 즉 무의식적 정신상태가 궁금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에 대한 추구뿐만 아니라 행복, 건강, 마음의 평화까지 갖춰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아픔, 고통, 슬픔과 같은 단조(短調)의 정서는 회피하고 심지어 실패와 낙오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전 대통령이 일개 시민이라면 그의 언어들은 발랄한 조증(躁症)이거나 다행증(多幸症), 허언공상(虛言空想), 과대망상으로 치부할 수 있다. 행복감이 지나친 사람이나 허풍이 심한 사람은 타인에게 웃음을 주거나 웃음거리가 된다. 하지만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느끼는 행복감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은 행복했지만 국민은 불행했다면, 권력자의 행복감은 자기도취를 넘는 ‘가해자’의 두꺼운 얼굴이다. 후안(厚顔)이 지나치면 본래 얼굴(정체)을 알 수 없다. 생각을 파악할 수 없는 권력자, 두려운 법이다.


나는 이 글에서 취임 직후 6개월간의 촛불시위, 용산참사, 4대강의 녹조, 빈부 양극화, 쌍용차사태, 강정마을 상황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당, 세대, 계층을 막론하고 지금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빈발하는 자살은 살인적인 경쟁, 승자 독식, 약자에 대한 모욕으로 인한 사회적 타살에 가깝다. 나더러 이명박 정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출범 초기 어느 시위대의 구호를 들겠다. “경제는 나중에 살리시고 우선 사람부터 살려 주세요!”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죽인 살인범은 아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주님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십니까? 남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제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행복한 가해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피해자에게 회개를 설교하는 상황. ‘기(氣)가 막힘’을 넘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발생하는 ‘악’의 새로운 경지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처럼 독을 뿜는 존재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말하는 자기에 대한 인식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무 말이나 한다.


행복은 세상에 널리고 널린 ‘타령’이지만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가치는 아니다. 행복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조율되고 감각되는 생각이지 혼자 선언할 수 없다. 하물며 그 관계가 통치자와 국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은 타인과 엮여 있어서 개인의 행복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대개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상생의 원리와 반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뺏고 빼앗기는 제로섬(zero sum) 논리가 질주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일수록 정치는 절실하다. ‘경제 대통령’과 대통령은 상반되는 말이다. 대통령은 불행하기 쉬운 사람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공무원이지 개인이 행복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당당함, 자신감, 행복감은 대외관계(특히 미국)에서 필요한 것이다. 국민과의 관계에서 리더의 염려와 자책은 아무리 넘쳐도 부족한 미덕이다.


경쟁사회에서 구성원들의 행복이 충돌하지 않고 비켜가기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행복 개념이 필요하다. 죄책감, 후회, 회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행복만큼이나 소중한 가치다. 이는 특히 지도자에게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까. 특정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회한에 잠겨 성찰하는 인간을 실패한 리더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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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설 연휴에 문자로 “새해 복 많이…”라는 인사를 받고 복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각종 업체, 정치인, 사회단체가 집단 발송한 이 편지들의 운명은, 삭제. 그리고 이 노동에 동반되는 감정은 불쾌감이다(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소통되지 못하는 언어는 소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자는 쓰레기(스팸)로 전락한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하는 만주어는 중국에서도 동북부 오지의 노인 10여명만이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경향신문 인터넷판 2011년 9월6일자). 어떤 언어는 ‘풍성’하지만 의사 전달에 도움이 안되고 어떤 언어는 극소수가 사용해 사라질 운명이지만 소중하다. 


글쓰기가 생계수단이라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위 사례들은 내 직업병과 관련이 있다. 나는 여성이지만 소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를 설명할 지면은 없고 결론만 말하자면, 소수자는 ‘아니지만’ 생각과 언어는 최대한 ‘중심’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사적으로 주변성을 지향한다. 소수자의 관점은 사회적 자원이다. ‘주류’와 다른 시각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이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과 국가경쟁력이 절실히 찾는 것이기도 하다.

(경향신문DB)


좋은 글은 가독성이 뛰어난 글이다. 그러나 ‘쉽게 읽힌다’는 말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 쉬운 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표현으로 쓰여져 아무 노동(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익숙함은 사고를 고정시킨다. 쉬운 글은 실제로 쉬워서가 아니라 익숙하기 때문에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진부한 주장, 논리로 위장한 통념, 지당하신 말씀, 제목만 봐도 읽을 마음이 사라지는 글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진정 쉬운 글은 내용(콘텐츠)과 주장(정치학)이 있으면서도 문장이 좋아서 읽기 편한 글을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글은 매우 드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쉬운 글은 없다. 소용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있을 뿐이다.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글은 없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 개념어의 남발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쓴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이 있을 뿐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언어에서 시작한다. 아래 사례를 보자. 맘대로 해고를 ‘노동시장 유연성’이라고 한다. 제주는 육지의 시각에서 보면 ‘변방’이지만, 태평양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관문’이다. 해남 주민들은 해남을 ‘땅끝 마을’이 아니라 땅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장보기 같은 가사노동은 노동인가, 소비인가? 서구인이 말하는 지리상의 발견은 발견‘당한’ 현지인에겐 대량학살이었다. 강자의 언설은 보편성으로 인식되지만 약자의 주장은 ‘불평불만’으로 간주된다. 언어의 세계에 중립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사회는 ‘만주어’가 소멸되지 않는, 다양한 시각의 언어가 검열없이 들리는 세상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드러나기가 쉽지 않아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폭력으로 가정이 깨져서 문제가 아니라 웬만한 폭력으로도 가정이 안 깨지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이렇게 반문하면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기존의 사고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어렵게 들리는 것이다.


나는 주식이나 자동차 분야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글을 읽을 때 무지한 내가 문제지 ‘어렵게’ 쓴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여성(학)의 글일 경우 사람들은 모르면서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거리낌 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라”고 요구한다. 이는 품성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같은 이야기인데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대접을 받는다. 어떤 이의 생각은 ‘독창적’이라고 평가받고, 어떤 사람의 생각은 ‘편협하다’고 비판받는다.


‘근친강간(가족 내 성폭력)’이라고 써서 원고를 보내면 편집자가 오타인 줄 알고 ‘근친상간’으로 바꾸어, 나도 모르게 활자화되는 경우를 수없이 겪었다. 내가 장애인의 ‘상대어’를 비장애인이라고 쓰면 ‘정상인’이나 ‘일반인’으로 고친 후, “이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한다. 성 판매 여성 혹은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가리켜 불가피하게 ‘창녀’라고 표현할 때가 있는데, 작은따옴표를 삭제해 버린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 논의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행위다. 여성과 성에 대한 기존의 의미가 고수되는 것이다.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다. 쉬운 글은 지구를 망가뜨리고(종이 낭비), 약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새로운 사유의 등장을 가로막아 사이비 지식을 양산한다. 쉬운 글이 두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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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붙은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나름 문제의식을 느낀 나는 위원회와 인권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평등은 지향이고,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갈등하고 경합하는 가치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이 희미한 평등 개념조차 우아하게 배반한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조적 가해자(강자)가 피해자(약자)를 배려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노약자석의 경우 장애인, 임산부, 노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상대방이 선심을 베푼다고 주장하며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불쾌감을 넘어 억울한 일이다. 배려나 관용은 ‘잘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배려는 동등한 적대자(適對者 혹은 敵對者)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윤리다.


경향신문DB


대통령 선거 후일담은 끝이 없지만, 내게 인상적인 사건 중 하나는 서울 마포구청 도시경관과의 불법 행위와 ‘구민 혐오’다. 마포구에 사는 성적 소수자(LGBT,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모임인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는 구청에 현수막 게시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소연 무소속 대선 후보는 당초 현수막을 걸 계획이 없었지만 연대 차원에서 “지지와 성원에 노동자 계급 정당 건설로 함께하겠습니다”라는 낙선 사례와 함께 “LGBT, 우리가 여기 살고 있다” “이곳을 지나는 열 명 중 한 명은 성 소수자입니다”라고 적힌 이 단체의 현수막을 동반 게시했다.


그러나 구청 측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현수막을 철거했다. “청소년들이 유해 내용을 접할 수 있다” “과장 문구는 불법이다. 직설적 표현에 유해성이 있다” “문구가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해당 부서의 주장은 선동에 가깝다. 이는 담당 공무원의 개인적 편견을 공무로 집행한 사적인 행위다.


대통령 선거 관련 현수막 게시는 선거법에 보장되어 있다. 철거가 불법임은 물론 현수막 내용을 ‘일개 구청’이 검열한 초유의 사태다(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현수막을 구청이 검열, 철거할 수 있을까?).


통계적으로 어느 사회나 전체 인구의 51%는 여성, 10~15%는 동성애자, 10%는 장애인, 9%는 왼손잡이다. 이들이 정치적 약자일지는 몰라도 적은 인구라는 의미의 소수자는 아니다. 모든 동네에 이들이, 즉 ‘우리’가 살고 있다. 특정한 주장을 펼친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친 것도 아닌데, 단지 “나, 여기 있어요”라는 알림(?)이 ‘유해, 혐오, 직설, 불법’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공중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이다.


일부지만, 이들이 21세기 세계적인(?)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공무원이라니! 동시에 나는 이들이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포구청 해당 부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나는 소수자로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사건이 왜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내 궁금증, 이 글의 요지는 이것이다. 만일, 현수막 내용이 “여기 우리가 살고 있다”가 아니라 “성 소수자(외국인 노동자, 성 판매 여성, 장애인…)도 인간입니다. 그들을 배려합시다”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억압받는 당사자의 목소리보다 지위가 높은 명망가가 명분상 그들을 대의(代議)하는 방식을 좋아하고, 대중은 명망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면, 배려는 우산을 독점하고 선별해서 우산을 나눠주려는 권력의 만행을 도덕으로 포장한 행위다.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원래 보장된 남의 권리를 시혜로 둔갑시키지 말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타고난 타인의 권리에 대해 자신이 판관 노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식, 분별력, 주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경쟁자를 배려한다면, 전쟁 중에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지치고 외로운 자신을 배려한다면 그게 마음의 평화요, 인류의 평화다. 배려는 이때만.


모든 차이는 임의적, 허구적인 것이다. 차이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차치하고라도, 다름의 공존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 누가 생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기준에 따라 모두 소수자다. 단적으로, 나이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소수자 배려” 운운 말고 자신의 소수자성을 발견하고 드러내 다른 소수자와 연락하며 살아야 한다(이 글은 권김현영 외 <성의 정치 성의 권리>에서 도움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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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는 여자 주인공의 스타킹이 찢어져 ‘뚱뚱한’ 엉덩이가 노출되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 동료들 앞에서 민망한 사고를 당한 ‘노처녀’는 창피해서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현장이 녹화된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고 또 본다. 나름 끔찍했던 사건에 대한 그녀의 치유 방식이다.


회피와 직면 사이에서 대개 사람들은 회피를 선택한다. 공포의 근원은 현실 직면의 두려움에 있기 때문이다. 부인, 합리화, 망각…. 수많은 자기 방어가 생존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회피는 결국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나친 경우 자아 경계가 흐트러지는 ‘사이코’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발화(發話)를 통해 형성되는 존재여서 방어만 하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모르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작년에 ‘웰빙’이었다면 올해 그에 견줄 만한 단어는 ‘힐링’일 것이다. 원래 웰빙(well-being)은 복지, 번영의 뜻이라 ‘건강한 심신’을 의미한다면 웰니스(wellness)가 맞다는 지적이 있었다. 힐링(치유)도 치료(treatment)가 더 적합하다. 마음의 상처에는 치유고, 몸의 상처에는 치료인가? 중요한 것은 구체성이다. ‘약 바르고 붕대를 감고 주사를 맞는’ 치료 행위가 연상시키는 구체성.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많이 들으면 진력이 나는 일반론에서도 그렇고, 원래 힐링은 ‘사기성’을 띠기 쉬워서 나는 이 말을 경계하는 편이다. 치유의 어감은 영적인 통찰과 성장에서부터 일시적인 위안, 혹세무민까지 다양하다.


나 자신이 치유가 시급한 사람이라 시중의 힐링 관련 책들을 탐독하는 편인데, 저자와 독자 사이의 ‘마음의 양극화’를 여러 번 느꼈다. 읽는 사람은 사는 게 괴로워 죽을 맛인데, 책 내용은 ‘한가할’ 때 느끼는 좌절감!(물론 심각한 사람은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한다). 주변에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의외로 많아 그게 오히려 힐링이 되었다. 비슷한 경험이란, 책을 읽다가 “열불 나서” 던져버렸다는….


힐링 책은 위약(僞藥) 효과부터 생명 구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약효가 짧아서 그렇지 위약 작용만 해도 소기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이조차 약효가 변변치 않다. ‘성공한 멘토’의 훈계에서부터 심지어 지은이의 세속적 스펙에 대한 동경까지, 지당하신 말씀에서부터 종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말까지. 헨리 나우엔의 <상처받은 치유자> 패러다임은 기대하기 어렵다.


웰빙과 달리 힐링은 시장화를 추구할수록 힐링과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이 다양하듯 고통 역시 그렇기 때문에, 힐링 상품의 마케팅이 ‘라면’이나 ‘토플책’과 같을 순 없기 때문이다. 상품이든 담론이든 대량 생산체제에서는 불량품이 나오기 마련인데, 특히 지식이나 마음 관련 제품(?)의 상품화는 ‘하향 평준화’를 피하기 어렵다. 


건조한 분석가들은 자기계발서나 힐링서의 범람이 그 자체로 경쟁사회의 재앙이자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절망한 개인의 무력한 대응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힐링서들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고통(grief)의 다섯 단계인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중 어느 상황에도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관념적인 ‘마음의 안정’을 권하는 책들이 많은데, 힐링은 마음의 평화를 의미하지도 않고 그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아니, 마음의 평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가장 확실한 마음의 평화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은, 고통을 피하는 고통이라고 한다. 브리짓 존스처럼 망신에 직면, 고통에 박치기하는 것이 최고의 힐링이라는 얘기다. 


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사연 없는 죽음이 어디 있으랴. 나는 1년을 누워 지냈다.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온갖 초자연적 증상을 겪으며 병원을 들락거린 끝에, 내게 빛처럼 등장한 치유는 ‘시묘(侍墓)’였다. 부모의 상중에 3년간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사는 시묘살이. 예전에는 그저 유교적 관혼상제,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더 과학적 치유가 없는 것이다! 시묘는 피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상실의 생활화다. 상실 곁에 내내 쪼그리고 앉아서 닿기만 해도 눈물이 터지는 쓰라린, 그러나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이물질을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도피하는 한, 도피하면 할수록 고통은 품어지기보다 우리를 점령할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최선인 세상에서는 현실을 으스러지게 껴안으면 조금 덜 아플지도 모른다. 그 현실이 오늘 아침 신문에서 느낀 것, 북한과 달리 자발적 투표로 국민의 권리로서 ‘민주적’ 절차로 부녀 세습을 구현한 대한민국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경향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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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김성주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공동위원장의 정체성(?), ‘재벌 좌파’는 인상적인 자기 소개였다. 애초 그녀의 문제의식은 김용철 변호사와 비슷했던 것 같다. 김 변호사의 지적대로, 대선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난센스다. 기업이 세금 내고 법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지 그게 무슨 민주화, 심지어 선거 공약이란 말인가? 이 나라는 자본주의도 이상(理想)이 된 이상한 사회다.


‘인삼 쿠키’도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한 그녀 나름의 상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영계’만큼이나 부정적이었다. 이 땅의 아이 엄마들은 재벌가 출신의 전문 경영인이자 유력 후보의 선거 ‘대책’위원장으로부터 게으름, 창의력 없음, 수동적이라는 요지의 훈계를 들었다.


 한편, 적지 않은 남성들은 우리 사회가 여성 상위를 넘어 여성 특혜 공화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여성은 군대도 안 가고, 별 노력 없이 얼굴만 예쁘면 쉽게 돈 벌고, 남자만 잘 만나면 쇼핑으로 시간을 보내며, 남편 월급은 아내 통장으로 들어간다.


최근의 여성 혐오 세태를 비판한 영화감독 이송희일의 글은 보다 구체적이다. “이들이 보기에 현대 여성들은 스타벅스를 즐기는 된장녀들이며, 운전대 잘못 놀려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도로 위의 김 여사들이며, 죠리퐁 여성가족부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보호하는 특별한 지위의 보슬아치 종족이다….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기형적인 분배 시스템에서 낙오된 삼포세대(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가 자신의 처지를 여성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천년간 외모로 핍박당하는 일은 여성 전담이었는데, 이제는 남성도 키 작고 머리숱 없으면 루저 취급이니 그 심정, 어떻겠는가. 


피상적으로 보면 이들의 현실 인식에 공감이 간다. 나는 양쪽이 반대 입장에 있으면서도 같은 결론인 점이 흥미롭다. 즉 여성을 위한다는 김성주 위원장은 “여성들이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여성이 미운 일부 남성들은 “열심히 살지 않는데도 잘 먹고 잘산다”고 분노한다. 


공사 영역에 걸쳐 대한민국 여성의 노동량은 2위를 한참 따돌리는 세계 1위다. 통계청 통계에 의하면 2012년 3월 현재, 남녀의 평균 임금 격차는 100만원 대 61만3000원.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취업 여부에 상관없이 남성의 6배이고, 노동시장 진출의 질은 104위권 밖이다. 일상의 (성)폭력 위협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이런 수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원래 성별 문제는 계량화하기 힘든 사회 제도다. 통계로는 파악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노동이 더 심각하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사회 인프라, 특히 사회복지는 여성의 성역할 노동에 거의 전적으로 무임승차하고 있다. 누가 게으르단 말인가? ‘피해자 여성’은 이 글의 주제도 개인적 관심사도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여자들은 논다”는 이 황당한 인식은 분석이 필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의 삶에 대한 무지, 여성에 의해 제공되는 유·무형의 보살핌 노동이 당연하다는 특권의식, 그리고 남성의 경우 자기가 게으르니 남도 그럴 것이라는 투사가 저변에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이 나라 2500만 여성의 처지가 모두 다른데 극소수 여성을 과잉 재현, 이들만 여성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여성정책발표 (출처:경향DB)


물론 이런 여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갓난아기를 키우면서 글로벌 쿠키를 팔 수 있는 여성,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품 매장과 카페를 전전하는 젊은 여성’이 가능한 현실이겠는가. 혐오와 증오의 차이는 대상의 존재 여부다. 혐오는 대상이 없고 증오는 구체적 대상이 있다. 혐오는 대상이 없으므로 상대의 실제 문제와도 무관하다.


‘된장녀’와 ‘청담동 며느리’의 다른 이름은 세련된 미시족인데, 이들이 남성사회가 생각하는 진짜 여성이다. 나머지는 ‘아줌마’ ‘창녀’ ‘호박’ ‘민중’ 등으로 분류된다. 절대다수 여성의 현실은 여성이 아니라 비정규직, 빈민, 10대 등 다른 범주로 분석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부르주아 여성을 여성 대표로 상정하기 때문에 ‘여성 상위’라는 착시가 가능한 것이다. 


중산층 여성 이미지는 상층 남성이 계층 간 충돌을 막기 위해 장착한 범퍼다. 낮은 계층의 남성은 권력층 남성에게 대항하기보다 ‘적의 여자’인 중산층 여성을 욕망하면서 동시에 계급적 적대감을 ‘부르주아 남성’이 아니라 ‘부르주아 여성’에게 퍼붓는다. 이 구조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김기덕 감독의 초기 작품들이 그토록 논쟁적인 이유다.


여성인 김성주 위원장의 계급 차별주의와 좌절한 일부 남성의 성차별 피해(?)의식의 결합. 이것이 우리 사회 일상의 정치학, 여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함부로 발언할 수 있는 토대다. 남성은 스타벅스 커피 안 마시나? 욕설, 침,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지는 남성 운전자도 ‘김 여사’만큼 비난받는가? 남성 실업자에게도 “일 없다고 놀지 말고 기저귀 빨래하면서 쿠키를 팔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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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여성학 강사

노동 개념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있어 영화 <회사원>을 봤다. 영화평론가 듀나의 지적대로, 주인공의 직업은 현실에서는 드물지만 영화에서는 빈번히 등장하는 킬러다. ‘살인청부회사 영업2과장’(이런 직종은 회사보다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살인주식회사’까지는 몰라도 청부 폭력은 일반인에게도 아주 생소한 분야가 아니다.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영화에서 반복되는 대사, “이건 일일 뿐이야”였다. 미국 범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도 합법, 불법, 비합법적인 업무에 상관없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똑같이 말한다. “내가 할 일(job)을 했을 뿐” 혹은 “가족 때문에”. 언제부터 노동이 이렇게 신성해졌을까. 비꼬는 말이 아니다. 다 먹고살기 위함이니, 일의 귀천도 잘잘못도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긴, 요즘 세상에 자기 직업에 보람과 흥미를 느끼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영화 <회사원> (출처: 경향DB)



 인류 최초의 직업인 ‘포주’의 일은 어떨까. 성매매의 형태는 결혼제도부터 인신매매까지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워낙 복잡한 구조여서 찬반 차원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나는 “성 판매와 그 알선도 노동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너무 지당한 말이어서 이상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일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이미, 당연히, 노동자다. <회사원>과 미드의 인물들에게도 똑같은 심정이다. 그들의 일은 노동이다. 그것도 중노동이다. 일이란 무엇인가. 지금 시대에 일(labor)을 “공적 영역에서의 임금 노동”이나 “의식적으로 대상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한정하는 사람은 없다. 3차산업이 비대해지고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노동 개념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문제는 일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필요한 질문은 “일인데, 이 일이 일이어야 하는가” “일인데, 어떤 일인가” “일로 인정받으면 좋아할 사람은 누구인가”이다. 다시 말해, ‘일이다’와 ‘일이어야 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생계로서 일’ 개념에 동의한다고 해서, “누군가(여성)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거나 “(성 판매는) 일이어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성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어서일까,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 때문일까? 


살인 청부가, 조직폭력 집단의 업무가, 더 나아가 전쟁이 “일일 뿐”이라면 힘없는 사람들은 이들의 ‘신성한 노동’으로 죽어갈 것이다. 이는 노동이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 한 권력층의 소비 활동이다.


직업군이 간소하고 게으름이 죄악시되던 시대, 직업이 종교적 소명(calling)에 가까웠던 시대, 즉 ‘산업의 혁명’을 위해 노동력이 필요한 시절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언설이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은 생계 수단이 수천 가지인 데다 인류 대다수가 이용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고용의 종말 시대다. 노동관, 직업관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고 이는 개개인의 세계관 붕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직업의 귀천, 아니 인간의 귀천은 돈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유기농 농사’는 괜찮은가. 인간의 노동은 자연 파괴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신성할 수 없다(일단, 인구 과잉이 문제다). 농부든 <회사원>의 일이든, 모든 직업은 그 자체로는 신성하지 않다. 의미 추구와 관련 있을 뿐이다. 절도가 직업이어서는 곤란하지만 의적은 다를 것이다. 인권변호사도 있지만 미국에는 이런 농담도 있다. “모기와 변호사의 공통점은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피의 양이다.” 물론 살인청부, 비리 변호사, 성 산업 등 이 글의 사례 업무가 사회에 ‘이롭지 않다’고 해서, 똑같은 수준에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요지가 늦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어떤 일이든 해야 할 각오를 요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 유연하다는 말이 공포의 언어가 되었다. 일은 비참해지고 돈은 우아해졌다. 자본은 고용 대신 금융 게임에 골몰한다. 경제 성장이 고용을 창출하기는커녕 반대로 고용을 감축시키고, 이후 성장 역시 바로 그 고용 감축에서 시작된다. 파이가 커질수록 일자리는 줄어든다. 이제 일자리는 기업 이미지 광고에서 보듯 자본의 자선에 달려 있다.


소통은 차치하자. 우리는 얼마나 현실을 공유하고 있는가. 여론은 대선 후보들에게 일자리 창출을 요구하지만 사실 이는 그들에 대한 이중 메시지거나 현실 파악이 안된 자세다. 약속하는 쪽도 마찬가지다. 공약(空約)이어도 문제, 무지의 소산이어도 문제다.


현재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우리가 투덜대는 ‘치사한’ 일자리조차 이미 바닥났거나 그나마 ‘스티브 잡스 비슷한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우리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사회적기업’과 같은 덜 괴로운 일자리도 생산해야 하고, 일이되 일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의 확산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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