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 여성학 강사


박근혜 후보의 선거 키워드 ‘대통합’은 매우 적절한 전략인 것 같다. 문재인 후보의 ‘일자리’나 안철수 후보의 ‘혁신 경제’는 이미 국민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박 후보에게만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요구가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동안 흔들림 없는 대세론의 주인공이었으며 지지자 숫자가 가장 많은 후보가 ‘많은 사람을 보듬는다(?)’는 통합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는 옛날 옛적, 한반도 남동쪽 일부 고을을 장악한 영주의 딸, 공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 영주의 공덕에 대해서는 지면상 생략하고, 아버지가 측근에 의해 살해된 후 평소 그의 유지(지역 차별)를 지나치게 계승한 아버지 후배들이 다른 고을 사람들을 마구 죽인 후 새 영주가 되었다.


 전직 공주의 지위는 애매해졌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는 듯하다. 33년 만에 권토중래의 기회가 왔다. 아버지는 특정 지역의 영주였고 반대 세력은 온 나라에 퍼져 있으니, 통합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녀로서는 아버지 비판 세력의 주장을 이해할 수도 없는 데다 타 후보들에 비해 비용, 조직 모든 면에서 부족할 것이 없는데, 통합을 호소해야 하니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대선 이명박 후보와 당내 경선 때 잠시 ‘여성 대통령’ 여론이 있었다. 당시는 상대가 이명박 후보여서 상대적으로 그녀가 돋보였다. 최소한 ‘생물학적’ 여성인 그녀는 여야를 막론하고 (성)폭력, 술주정, 욕설을 일삼는 남성 정치인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진짜 여성인가? 


생각에 잠긴 박근혜 (출처: 경향DB)


가부장제, 성(차)별, 남성 중심. 이 용어들은 각각 의미가 다르지만, 편의상 ‘가부장제’로 통일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은 권력, 부, 명예를 겸비한 최상층 남성이 아니다. 실제 이들의 삶은 피로하고 외로우며, 정상적인 사회일 경우 엄청난 노동과 책임감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돈과 달리 명예와 능력은 쉽게 상속되는 것이 아니어서 본인의 노력으로 획득해야 하는 자원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수호자, 피해자, 수혜자, 부역자, 저항자 등 다양하다. 5000년 가부장제는 이 다양성으로 인해 지속될 수 있었다. 이 중 대다수 여성들의 로망은 ‘수혜자’이고 그 최고 형식은 아버지의 딸이다. 물론 모든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권능한 아버지의 딸. 공주! 하지만 이런 아버지는 극소수여서 공주로 태어날 확률은 로또 당첨보다 낮다. 공주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공주병’에 걸리는 것이다.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좋겠지만 이 역시 가능성이 낮은 데다 무엇보다 리스크가 크다. 백마 탄 왕자처럼 보였던 남편은 구타, 외도, 극도의 게으름 등 나중에 ‘이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지만, 아버지는 부성이라는 가족제도의 외피 덕분에 안전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부자 간에는 남성 연대와 동시에 살부(殺父) 욕망까지 있지만, 부녀 간에는 정치적 긴장 대신 친밀감이 있다. 특히 본인의 능력이 뛰어난 아버지일수록 웬만한 아들은 성에 차지 않는다. 못난 아들보다는 똑똑하면서도 순종적인 딸이 훨씬 낫다. 굳이 사례가 필요한가?


공주의 진로는 두 가지다. 아버지가 강대국의 왕이라면 정략결혼을 하거나 힐튼가의 상속녀처럼 현대판 공주로 산다. 약소국일 경우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영화 <뮬란>처럼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거나 구국의 명분으로 복위하거나. 박 후보는 어디에 해당할까.


박근혜 후보는 여성이 아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2’라는 사실 외에는, 여성과 가장 거리가 먼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도 국민도 대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아버지 박정희’를 매개한다. 이런 현상이 바로 “~화신(化身)”이다. 이는 시비, 호오 차원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일 따름이다.


세습에 대한 세간의 혐오는 북한에만 해당되는 듯하다. 재벌 세습이나 부녀 간 세습에는 관대하거나 심지어 부러워한다. ‘아버지의 딸’은 남녀 모두가 욕망하는 가부장제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부자 간 세습은 아들의 자질과 무관하게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딸은 가문을 재건하고 부패, 추문, 잔학성, 과대망상 같은 아버지의 남근성을 희석시킨다. 플레이보이지(誌) 창업자 휴 헤프너가 딸 크리스티에게 경영권을 맡긴 경우가 대표적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당선되더라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운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의 정체성은 공주이지, 여성도 시민도 아니다. 아무리 과거사 ‘해결책’을 제시해도 진정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녀의 대권 도전 자체가 ‘충과 효의 갈등’이라는 시대착오적 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간 박근혜’의 불가능성. 이것이 그녀의 실존이자 한국현대사다. ‘대통령 박근혜’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성과가 아니라 신분사회의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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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독특한 시선이 있다. 다른 범죄는 처벌하면 그만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상담·치료 등 ‘다양한’ 대책이 제시된다(절도나 폭력 사범에게 ‘심리 상담’을 운운하지는 않는다). 새누리당은 아동 성범죄와 ‘변태’ 성욕에 국한했던 성충동 약물치료, 이른바 ‘화학적 거세’를 강화하는 요지의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7월 관련법 시행 즈음, 효과와 인권 침해 여부를 놓고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다. 2~6%에 불과한 성폭력 신고율, 신고와 기소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는 고통, 낮은 신고율만큼이나 낮은 기소율과 더 낮은 유죄 판결률을 고려할 때, 성범죄를 막기 위한 대책이 ‘주사(注射)요법’이라니, 그다지 설득적이진 않다. 


 어쨌든 성범죄의 규모와 실태가 워낙 심각하기에, 효과라도 확실하다면 극렬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성범죄의 원인이 성별 권력관계의 불균형 때문이지, 남성호르몬 과다로 인한 생리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화학적 거세’는 진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이 경우에는 질 나쁜 맥거핀이다.


‘섹스’는 뇌로 하는 것이지 성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발기는 혈액이 조직을 채우는 것인데, 이는 뇌의 역할이고 그 기능을 가능케 하는 ‘자극’의 내용은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화학적 거세’는 과학적 근거도 실제 효과도 없다.


나는 20여년간 여성에 대한 폭력 관련자들을 상담해왔는데, 가해자들의 가장 절실한 호소는 피해의식과 분노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는 피해의식과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법체계와 신고한 여성, 그리고 ‘여자들이 판치는 세상’에 대한 분노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심리상태의 근거는 ‘성범죄 불가피론’이다. 남성에게 삽입 섹스는 소변과 같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배설행위이므로 성폭력이나 성구매를 불법화하는 것은 ‘오줌을 못 싸게 하는’ 고통과 같다는 것이다.


“남자는 참을 수 없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참는(?) 남성, 혹은 ‘재수 좋아 안 걸린’ 대다수 남성들의 신체는 배뇨 통증으로 폭발 직전일 것이다. 가해자들의 이야기는 나이, 학력, 계층과 관련없이 사전 회의라도 한 듯 똑같다. 이는 이들의 성 인식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의 합창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통념이기도 하고, 성범죄의 원인을 통제할 수 없는 성욕에서 찾는 ‘화학적 거세법’의 현실인식과 동일하다. 성욕이 배설과 같다니? 논의의 가치는 없다. 문제는 이 절대적 무지에 저항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회 전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상식’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려 한다. “갑자기 길 가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길거리에서 그냥 해결할 수도 있고(성폭력을 의미한다), 화장실을 찾을 수도 있고(성 구매), 참으며 집까지 갈 수도 있겠죠(파트너와 성교). 근데, 화장실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싸는 사람이 많겠어요? 참고 집에 가는 사람이 많겠어요? 또 집에 간다고 해서 쌀 수 있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파트너가 없거나 동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베를린에서 열린 ‘슬럿워크’ 시위에서 한 여성 참가자가 수영복을 입고 걸어가고 있다. (경향신문DB)


여성의 몸을, 남성을 위한 용기(用器)로 취급하는 것은 가부장제 성문화의 핵심이다. 이러한 의식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성범죄의 원인이 인체의 화학에 있다는 전제에서 이를 억제하겠다는 발상은 성범죄 예방이 아니라 부양책이다.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성범죄도 사회적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완전한 근절은 불가능하다. 맞다. 하지만, 그러니까 우선 ‘화학적 거세’라도 하고 보자? 진실은 그 반대다. 해결 방법 중 하나라는 ‘화학적 거세’의 사고방식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원인을 대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의혹은 또 있다. 성범죄자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지나친 도덕적 낙인(변태, 괴물 등)과 ‘참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경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거의 모든 통계조사에서 성범죄자에 대한 강력 처벌을 주장하는 입장은 여성보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남성 문화는 왜 이토록 성범죄가 아니라 성범죄‘자’를 혐오할까. “나는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성범죄의 원인은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인데, 이를 수용하게 되면 모든 남성은 피곤해진다. 남성은 잠재적 피고인이 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여성관, 세계관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 ‘변태’의 문제로 축소하면 성범죄는 남성 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특수화, 엽기화된다. 그럴수록 여성들은 밤거리나 여행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등 스스로를 통제해야 한다. 반대로 국가와 사회를 통치하는 ‘안 걸린’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보호자, 시혜자, 감시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화학적 거세’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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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애국’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마음이 조마조마해 한국이나 북한 선수들의 경기를 못 보겠다. 박태환 선수를 생각하면 감동의 물결 정도가 아니라 감동의 몸살을 앓을 지경이다.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는 내게 그는 현실의 영웅이라기보다 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내는 사람 같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존경과 경탄은 당연하지만 ‘안쓰러운’ 마음 역시 감출 수 없다.


판정 번복 사태 때 매스컴은 그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고 했지만, 그 상황이 천국(기쁨?)과 지옥(절망?)일 것 같지 않다. 감각의 제국은 살아 있음이고 그 반대는 세포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 감각의 마비가 아닐까. 이른바 ‘멘붕’ 말이다.


내가 실격? (경향신문DB)


 엘리트 스포츠의 결정판, 올림픽은 국가주의를 생산했지만 요즘엔 이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시대 개인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정신력, 체력, 기술, 지적 능력 등 인간이라는 종(種)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고 미디어는 이를 보통사람들에게 ‘가르친다’.


1989년 사회주의권의 변화 이후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막을 열었을 때 ‘20 대 80론’이 화두였다. 피라미드 모형도 바람직한 사회 구성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무너지고 인류는 부자 20%와 가난한 사람 80%로 양극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디 그렇게만이라도, 하는 심정이다. 현재 양극화는 0.1 대 99.9의 양상이다. 20 대 80의 사회에서는 ‘20’이 가시화되고 투쟁도 변화의 가능성도 있지만, 0.1%의 인구는 공간적으로 아예 분리되고 그들의 삶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문제는 양극화가 동산과 부동산을 위주로 한 빈부격차만이 아니라 실력, 건강, 매력, 의지, 외모 등 개인을 평가하는 자원의 모든 면에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올림픽에 사연 없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努力)은 노력(勞力)에 가깝다. 자기 훈육, 정신력, 특히 통제력과 집중력은 나 같은 사람에겐 신의 경지처럼 보인다. 신세대 선수들은 ‘헝그리 정신’ 대신 즐기며 한다지만 그러한 관점의 변화조차 자기 노력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여유, 정신력의 힘이다.


한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일본에서는 ‘자발적 루저’, 공부와 취업 모두를 거부하는 니트(NEET)족, 노동과 놀이는 물론 연애에 이르기까지 힘 드는 일은 일절 하지 않으면서 최소한만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탈력(힘을 뺌, 脫力)’ 집단이 등장해 일본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니트족만 85만명이라는데, 이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수치를 믿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10배 이상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도 드러나지 않을 뿐 상당히 존재한다고 본다(일본도 오랜 잠수기를 거쳐 논의가 시작됐다). 예를 들어 평화주의나 종교적 신념의 ‘양심적 병역 거부’와 달리, 지금은 ‘순수 기피’가 늘고 있다. 어차피 취직이 안될 텐데 군대 다녀와서 뭐하냐는 것이다. 197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병역은 남성 시민권 등록의 필수 코스였지만 지금 이들은 국민 되기에 관심이 없다. 투자한 희생이나 의무만큼 국민이 된다고 해도 얻는 이익이 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야마다 마사히로가 말한 ‘희망 격차사회’와 이로 인한 정신력의 양극화. 올림픽 선수들처럼 영광의 가능성이 있기에 혹은 지원하되 억압하지 않는 좋은 부모를 만나서 혹은 노력과 성과가 일치하지 않는 체제 모순을 깨닫지 못해, 열심히 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인생 목표인, 숨만 쉬는 집단이 있다.


이 시대는 승부의 이분법 사회가 아니다. ‘경쟁사회 내부의 승자와 패자’와 ‘경쟁사회의 트랙 밖에서 적극적으로 낙오를 선택한 사람’이 대립(?)하고 있다.


‘자발적 낙오자’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기 선택이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으며 열등감도 없다. ‘무식’이나 ‘가난’을 창피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쉽게 부자가 된 이들을 제외하곤,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하류지향>의 저자 우치다 다쓰루는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고, 비판한다. 사회가 ‘자발적 루저’들을 먹여살려야 하므로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며 이들을 ‘기생충’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당연한 반응이지만, 이들을 경쟁사회의 도피자로만 인식하고 계도해야 한다는 사고는 안이하다. 이들의 존재는 시스템의 부작용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문제이다. 절망적이게도 중간지대는 몰락했다. 사회가 그 공간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우울증은 전 지구적 ‘바이러스’다. 증상도 원인도 다양해서 일반화할 순 없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경쟁의 갈등을 자기 탓으로만 여기는 ‘착한’ 사람들의 병이 아닐까.


정신력의 양극화, 양끝에 있는 이들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열심’은 곧 행복이며 바람직한 삶일까. 힘을 빼고 편히 살겠다,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낙오자의 변명에 불과한가. 미래는 자발적 낙오에 대한 재해석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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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국전쟁 후 소설가 김동리는 ‘젊은 美國의 기빨’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중략)

이번에 韓國을 도와준 偉大한 恩人들

맥아더 릿쥬웨이 트르맨 아이젠하워 等

수많은 이름을 내 맘은 기리 잊지 못할 것입니다.

드러나 당신처럼 내 맘에 고동을 주고

 내목에 흐느낌을 일으킨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어느 義人이 또한 나의 首都를 당신같이

아끼며 사랑하며 지켜주었겠습니까

일찌기 韓國의 어느 港口에 들어왔던 外人의 船舶에서도

당신의 아드님을 비롯한 많은 部下들이

이 고장에 뿌려주신 鮮血에 比하여 더 高貴한

빠이블과 十字架를 우리는 그 속에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원문 그대로 표기)  




지면상 더 생략하려 했으나 손댈 곳이 없다. 순수문학의 대가답게 ‘순수의 결정(結晶)’을 보여준다. 마음이 아프다. 비꼬는 것이 아니다. 구한말 양이(서양 오랑캐)론부터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반미운동까지, 다른 사회현상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의 대미관은 계속 변화해 왔지만 미국을 구세주로 보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구한말 가장 중요한 외교문서로 평가받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남하하는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을 조선의 바람직한 대외정책으로 제시했다. 당시 연미론에 반대한 유생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미국은 5만~6만리나 떨어져 있어 우리가 급할 때 당장 와주지 못한다”와 “미국과 힘을 합쳐 러시아를 막는다 해도 또 다른 외적(미국)을 불러들이는 결과”라는 것이다.


전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미사일이 대륙을 오가는 시대이므로, 또 아예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해결’됐다고 치자. 후자는 한·미 수교 1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한 논란거리다. 김동리의 격정적 미국 사랑과 달리, 당시 유생들은 국제정치의 기본인 실용주의, 현실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현 정부 출범 초기 외교 전문가는 물론 일반 여론까지 MB의 대미 편중 외교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구한말 유생의 식견보다 한참 후퇴한 것이다. ‘G2’로 부상한 중국의 위상을 고려치 않고 무조건 미국하고만 잘 지내면 된다는 생각과 이를 맹신하는 인사들로 외교팀이 꾸려졌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일부 세력은 아직도 미국을 유일한 외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정보보호협정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최근 밀실처리 논란이 된 한·일 정보협정이 미국의 중국 봉쇄 전략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국가기밀’이다. 한·미·일 동맹은 명목상으로는 북한을 겨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견제하고 일본의 군사대국화 계획에 한국이 ‘총알받이’로 동원된 형국이다. “한국은 중국을 억제하려는 미·일을 돕지 말라”는 중국 정부의 비난은 우리에 대한 ‘걱정’에 가까울 지경이다.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미국과 일본이 피해를 보겠는가? 청일전쟁이 청나라나 일본이 아닌 이 땅에서 벌어졌듯 우리는 그들의 싸움터가 될 공산이 크다.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은 심각한 문제다.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시민으로서’ 나는 이를 재고할 수 있는 대선 후보가 당선되기를 절실히 바란다. 


무엇이 이토록 미국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일까? 나는 이 현상을 사대주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도 이들은 용미(用美)를 표방한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친해짐으로써, 또 그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심지어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것은 강대국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예로부터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관계 원리인 “작은 것은 큰 것을 섬기고, 큰 것은 작은 것을 예뻐한다”는 사대자소(事大字小) 심리인가? 아니면, 지금은 힘이 없으니까 일단은 미국을 활용하자는 자발적 종속 논리인가?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전 세계는 물론 우주까지 상대하느라 바쁘다. 미국에 우리는 그들이 활용당해 줄 만큼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겠는가, 그 반대가 많겠는가.


만에 하나,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약자는 지피지기 상태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전략과 지혜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한·미·일 관계에서 약소국인 데다 북한이라는 ‘아킬레스건’까지 있는 우리의 유일한 생존 방식은 유연한 사고를 기반으로 협상의 고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국제협상에서 보았듯이 한국 외교 지도자들의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무능력과 주눅 든 태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상대는커녕 자신조차 모른다. 우리가 강대국을 이용한다는 자신감은 부풀려진 자아, 망상적 자기애, 도취에 가까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관은 강자를 이용하려는 약자의 자세가 아니라 강자에 대한 동일시 욕망, 허세와 착각에서 나온다. 분명한 점은, 강자는 이러한 약자의 자기분열을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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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1995년 쓰레기종량제가 실시되었을 때 종량제가 친숙한 용어였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종량((從量). 쓰레기 배출량에 따라 요금을 차등 부과하고 수수료의 기준은 양에 따른다(從)는 것이다. 무게나 크기가 아니라 양이 기준이다. 이를 측정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부피이며, 봉투는 ℓ 단위로 판매되고 있다. 부피가 유일한 척도이기에 사회적 합의가 쉽다. 쓰레기의 용도와 수분 함유량이라는 변수를 보완하기 위해 음식 쓰레기봉투는 따로 판다. 이처럼 종량제에서 ‘따를 종’의 의미는 분명하다.


 종북(從北), 종미(從美). 요즘 뉴스를 뒤덮는 이 언설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 사회는 후퇴했다. 친미, 반미, 반북…. 예전에는 언어가 양순했다. “친근감을 느끼거나 반대함”에서 “최고의 가치로서 맹목적으로 따름”으로 변한 것이다. 이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인식론적 전환이다. 추종은 ‘하느님’ ‘부처님’ 생명, 자연처럼 아무리 진선미한 대상이라도 배타성을 전제하므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경향신문DB)


종북의 정체, 실재, 그들의 태도와 행동이 미치는 악영향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비교 자체에 역정을 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특정 국가나 ‘반국가단체’를 맹목적으로 숭상하는 집단 외에도 종교, 패션, 외모, 학벌, 돈에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모든 판단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종북, 종미가 이들보다 특별히 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독단적인 신념, 열정과 헌신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인생을 살맛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문명은 가벼운 조증(躁症)에서 발전하기 마련이다. 누군들 약간은 슬프고 외로운, 그래서 사유가 요구되는 울(鬱)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겠는가. 사랑, 집착, 숭배, 열광, 확신….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인지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히틀러는 이러한 인간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정치가였다.


성적 소수자나 장애인, 여성운동가 중에서도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열정 과잉인 사람들이 있다. 나도 어떤 이들에게는 ‘꼴통 페미’로 불린다(민망한 사족이지만 내가 그 정도로 치열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진정한 ‘종(宗)’을 두고 싸우는 경우가 있다. 오죽하면 ‘에코 파시즘’이라는 말이 있을까. “불신지옥”을 강요하는 모 종교의 역(逆)선교 방식이나 밀교를 방불케 하는 물건 판매조직의 폐단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들의 맹목성은 종북이나 종미만큼 혐오, 비난의 도마에 오르지 않을까? 그리스어의 “생각하다”에서 유래한 도그마(dogma)가 오늘날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하게 된 것은 역설이 아니다. 생각함이나 생각하지 않음이나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이 문제는 독단 대 이성의 사안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의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종북과 종미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전 지구가 사정권인 미사일로 무장한 유일 초강대국을 추종하는 사람과 지구상 최빈국을 맹종하는 사람의 정신상태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무의식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종북과 종미는 그들 나름의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다. 나는 추종의 진위가 아니라 그 불가능성과 언어 자체의 위험성이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쓰레기종량제처럼 따를 대상이 유일하고 뚜렷한 경우의 복종(?) 행위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종북이나 종미는 대상이 없다.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반세계화, 반미활동가로도 유명한데, 그녀는 반미주의자라는 지적에 이렇게 말했다. “반미란 무엇인가요? 저는 미국의 재즈,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나무, 미국의 인권운동가를 사랑합니다. 저는 친미도 반미도 아닙니다.” 그녀의 문맥에서 반미의 대상은 부시 행정부 정도일 것이다.


로이의 말을 종북에 적용해 보자. 종북 세력은 북한의 무엇을 맹종한다는 말인가. 금강산의 풍광? 선군(先軍)정치? 백두산 천지? 기아 상태의 인민들? 온면? 냉면? 주체사상? 만일 주체사상이라면 가장 심각하다. 사상은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비판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북한도 미국도 각기 균질적인 하나일 수 없다. 국가는 지칭을 위한 재현, 즉 표상이지 실체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북한인권과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권력층과 고통받는 인민을 구별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권 지원이 반북, 친북 정치로 이용당하지 않는 ‘순수한’ 인권운동이 될 수 있고 절실한 필요에 부응할 수 있다. 이 구별을 왜 종북 담론에는 적용하지 않는가? ‘종북’ ‘종미’ 사용은 북한이든 미국이든 공동체의 주적(主敵), 혐오하는 타자, 왕따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어쩌면 이들의 존재 자체보다 이러한 지시 행위가 더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종파적 행동이다. “너, 그거지?” 누구든 언제든 타인을 심문할 수 있는 권력. 혹시 우리는 모두 양비론을 가장한 채 이러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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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내가 자주 들르는 여성주의와 관련한 인터넷 카페가 있다. 모임의 성격상 구성원 거의가 여성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 내 주변에는 고양이와 반려하는 독신 여성이 많은데 이 카페도 그렇다. 얼마 전 카페의 메인 페이지에 고양이 사진이 등장했다. 그러자 익명 게시판에 ‘저기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저는 고양이가 무섭습니다. 첫 화면에 고양이가 나오니 위축되네요. 죄송하지만 다른 화면으로 바꿔주세요.” 운영자와 성원들의 답글이 이어졌다.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로 교체하겠습니다” “익명 게시판에 쓰신 것이 조금 걸리네요, 우리 카페가 이런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인가요? 그렇다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고양이 때문에 카페 접근권이 제한된다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등의 의견이었다.


 이번에는 반대 상황이다. 며칠 전 ‘진짜’ 카페에 커피 원두를 사러갔는데 고양이 달력이 있었다. 원두를 분쇄하는 동안 12장의 예쁜 고양이 사진과 매달 적힌 고양이 애호가들의 문구를 읽다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다음 생에 쥐로 태어날 것이다”라는 글귀와 마주쳤다. 순간 섬뜩했다. 자신이 고양이를 좋아하면 그만이지 싫어하는 사람을 적대해, 고양이 먹이로 간주하는 이 저주에 가까운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고양이 사랑을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을 할까? 


타인의 취향에 대한 상반된 태도, 두 가지 고양이 관련 경험은 다른 사건을 연상시켰다. 최근 이른바 ‘나꼼수 비키니’ 사건에서 <나꼼수> 측이 사과하지 않다가, 그들의 행동 관행이 총선에서 태풍급 이슈로 발전했다. ‘막말’ 파동이 그것이다. 나는 일반적인 분석처럼 <나꼼수>가 “야당 15석을 날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 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스캔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는 그들보다 표현상, 인식론상으로 더 심한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책임이 있다면 야권의 대응능력이지 <나꼼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평소에 이런 문제에 <나꼼수>가 약간의 감수성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턱없이 보수 여론의 볼모로 ‘희생’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꼼수 지지자 “비키니 시위' 지지 MBC 이보경 부장의 인증샷 (경향신문DB)



물론 여성의 비키니와 고양이 사진은 의미가 다르다. 여성은 술, 담배, 개와 동격이 아니다. 인간의 몸을 소비, ‘눈요기’하는 것을 반려동물, 기호식품과 같은 수준으로 다루는 상황 자체가 여성 모욕적이다. 고양이를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개인 취향일 수 있지만 ‘나는 담배를 좋아하듯이 여성의 벗은 몸을 좋아한다’는 정치적 편견, 사회적 투쟁 대상이다. 이는 취향으로 옹호, 양해, 묵인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과와 교정, 때로는 법적 처벌이 필요한 인권 침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비슷한 사건에서 많은 경우 남성들의 태도는 이렇다. “난 그런 사진이 좋은데 넌 왜 내 권리를 침해하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는 네가 틀렸다” “내가 싫으면 네가 나가라”….


삶에서 취향의 영역은 생각보다 좁다. 나를 포함해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행위가 개인의 취향에 따른 선택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모든 행위가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이를 계속 문제제기하는 집단이 있다면 삶은 불편하고 피로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 취향과 올바름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정치 구조적 문제를 취향으로 포장할 자원이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들조차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고 타인의 취향이 자신에게 인권 침해로 돌아올 수 있다. 기호와 윤리의 기준이 모호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성원들에게 서로 다른 위치성(position)을 부여한다. 그 위치가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입장과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여성은 대머리나 키 작은 남성에 대한 비호감을 취향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남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문화)에게 인권 의식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모욕당한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단순한 기호라고 주장하기 전에 5분은 생각해야 한다.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해서. 여성의 몸은 남성 사회가 주장하는 취향의 가장 약한 고리다. 그만큼 ‘계몽’이 멀었다는 이야기다. 이로 인해 손해, 망신, 경우에 따라 사법처리 대상이 되는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임을 알아야 한다. 


비키니 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항의는 여성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꼼수>와 우리 사회를 위한 ‘큰 정치’였다. 문제제기의 기본 취지는 타인을 위한 조언이다. 그러나 <나꼼수> 측은 “사소한 일로 (정권교체 같은) 큰일 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는 식으로 약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짜증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나꼼수>의 “닥치고 정권교체”를 지지하는 시민들 중에는 ‘비키니’ ‘막말’이 대선 때 터지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큰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큰일을 망치지 않을까 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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