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직설

따끈한 국 한 사발이 간절한 계절이다. 국자, 탕자 돌림 음식과 한국인의 식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더구나 쌀쌀해지는 데에야. 세상에 자식을 낸 모든 어머니와 세상에 온 모든 아들딸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미역국, 일상생활의 푸근한 벗 콩나물국, 젖산 발효의 미덕을 쥐고 따듯함을 더한 김칫국, 농민과 노동자의 한여름을 위로한 추어탕, 국물 내기의 기본기를 환기하는 곰탕과 설렁탕, 바닷바람과 바다의 날빛을 아우른 북엇국, 해안 주민의 오랜 친구인 김국과 매생이국, 채소와 고기가 손잡은 미각이 한 사발 비우는 내내 상승하는 소고기뭇국과 육개장 등등 국탕 한 그릇과 맞물린 추억 한 조각 없는 한국인은 드물리라. 이쯤만 나열하고도 미안하다. 이루 다 손꼽기 어려운 채소, 나물, 고기, 수산물이 다 국탕으로 변한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갈마듦도 다채롭다.

국탕이 제대로 되려면 국물을 제대로 내야 한다. 그리고 ‘간’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간의 출발은 소금의 짠맛이다. 소금, 한마디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조미료이다. 어떤 재료든 재료가 쥔 원물의 맛을 사람이 충분히 감각하도록 증폭해주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막 뱉은 말이 아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20대에 쓴 산문 <민옹전(閔翁傳)>에서 소금은 맛 자체를 나게 하니, 소금이 없이는 맛도 없고(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소금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이라고 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다시 소금에다 만주 원산의 콩을 더해, 단순한 짠맛을 더 맛난 맛으로 발전시켰다.

한나라 때의 일상 기록인 <풍속통의(風俗通義)>는 이렇게 썼다. “장(醬)은 소금으로 만들지만 그 짜기가 소금보다 더하다(醬成於鹽, 而鹹於鹽)”라고. 속뜻은 장은 소금의 짠맛보다 한층 증폭된 맛난 짠맛을 낸다는 뜻이다. 아득한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고기에 소금을 더해 발효시킨 육장(肉醬)을 가지고 장(醬)을 만들었다. 그 장으로 단순한 짠맛에 동물성 단백질의 풍미를 더해서 한층 만난 짠맛을 얻었다. 

고기뿐인가. 어류를 이용해서도 젓갈을 얻었다.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은 그 원형을 잘 보여주는데, 이런 계통은 ‘해(해)’라고 불렀다. 그러다 콩 또는 콩으로 쑨 메주에 소금을 더한 두장(豆醬)을 담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고기와 생선의 동물성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해(해)’로, 콩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장(醬)’으로 구분하는 데 이른다.

동물의 살코기와 내장과 뼈를, 생선이라면 살 및 대가리와 뼈의 인지질을 뽀얗게 우려낸 ‘곰’은 소금간만 해서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 이와 함께 고기, 생선 등의 동물성 단백질이 내는 감칠맛 또는 채소의 풍미를 ‘소금보다 맛있게 짠’ 간장으로 증폭시키려는 시도는 장을 점점 더 맛나게 담그면서 끝없이 발전했다. 

맑은장국이 그 예다. 장으로 간해 적절히 올라오는 감칠맛은 담백하면서도 개운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빛깔까지 운치를 더한다. 양지, 민어, 토란, 송이, 쑥 등 맑은장국에 어울리는 재료를 떠올리면 오랜 세월 전해진 맛의 설계의 밑절미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소면을 말면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음식의 극치인 국수장국이 된다. 

못잖은 간으로 젓갈간이 있다. 두장 못잖은 맛난 짠맛을 쥔 새우젓간을 한 달걀국, 콩나물국, 젓국갈비 등도 재료의 감칠맛을 두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끌어올린 진미이다. 명란젓으로 맛을 더하는 방식도 있었다. 일본식으로 맑게 끓여내는 ‘지리’에 견주어 새우젓간이나 명란젓간의 개운하면서도 무게 있는 맛의 설계를 다시 생각할 여지가 더욱 자랄 듯하다. 

된장은 된장대로 채소 또는 나물의 풍미와 잘 어울린다. 배추된장국·시금치된장국 등의 예에서 보듯 구수함이 감도는 깊은 맛은 이 자체로 하나의 계통이 될 수 있겠다. 그 풍미와 질감이 앞서 든 예의 간과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꺼낸 말은 수다하지만, 역시 생각하면서, 비교하면서 맛을 보아야 그 차이도 섬세하게 가릴 수 있으리라. 여기 온도를 달리해 냉국이라든지 겨울 동치미까지 계통과 체계를 잡아 보면 어떨까. 국탕. 훌훌 마시기 좋은 데서, 식은 밥 한 덩이 풍덩 빠뜨리기에 좋은 데서 그칠 것만은 아니다. 간장간, 젓갈간, 된장간의 국탕 그리고 냉국 및 동치미 등 저마다 다른 풍미와 질감이 제 개성대로 계통과 체제를 이루자면, ‘따끈한 국 사발이 간절한 계절’을 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리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기획이 있어야 하리라.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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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연애감정에 대한 호소 혹은 미개한 조선 사회에 대한 개탄을 담은 이광수의 <무정>은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요즘 인문학의 트렌드 중 하나는 ‘감정’이다. 이는 근대 계몽이성에 대한 반발이겠으나 희한하게도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서 정동과는 거리가 먼 ‘무심함’을 느끼곤 한다. 감성인문학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무정에 대한 호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분노하라> <미움받을 용기> 같은 감정교육 서적들이 인기를 끄는 것이 어쩌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방증 아닐까.

물론 수많은 SNS 채널을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하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떤 실감이나 육체성을 상실한, 말끔한 플라스틱 자아들의 향연과 같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의 자아들은 그림자를 상실한 동화 속 인물처럼 무언가를 제거하고 만들어진 조형의 얼굴들과 흡사하달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쌍방향이지만 어쩐지 어떤 겯고틀고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방향의 외침같이 들린다. 요컨대 말끔한 아바타들의 만남과 접속에는, 김수영식으로 말하자면 ‘하, 그림자가 없다’. 혐오문화 또한 배제의 기율 속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말끔한 제거술이 아닌가. 수많은 페친과 팔로어들을 지녔다고 자부하지만 각자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희한한 1인 자급자족 시대.

‘소확행’과 ‘워라밸’의 유행에 진입한 젊은 세대들의 감각은 확실히 타인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감정 교류에 있어서 어떤 불편함을 지닌 듯하다. 최근 읽은 소설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손원평의 <서른의 반격>은 ‘보통사람’ 시대에 태어난 1988년생의 이야기이다. 문화아카데미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주인공은 급여에 맞게 최저임금만큼의 최소 노동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인공 직장에서 벌어지는 부당함에도 눈감고 동료와의 점심시간을 피하기 위해 가짜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최소한의 노동은 최소한의 관계와 감정으로 이어지고 그들을 ‘최소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여기에 ‘규옥’이라는 한 문제적 청년이 등장한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주인공과 주변인물에게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자고 설파하고, 이들을 ‘가면, 계란, 공개 항의’와 같은 퍼포먼스로 이끈다. 어찌 보면 이들의 ‘항거’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한 놀이 같지만 작가는 급진적 혁명에 불과한 이러한 반격 말고 무엇이 가능하냐고 묻는 듯하다.

신인작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 등장하는 판교 테크노밸리의 한 청년도 이와 유사하다. 기업 회장의 인스타그램 속 자아를 배려하지 못한 대가로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 젊은 여직원은 회사를 박차고 나가거나 항의하는 대신 그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중고마켓에 되팔아 돈을 만든다.         

<서른의 반격>이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청년들은 반짝이는 거울 빌딩에 다니고 있지만 네모난 하늘을 품고 있는 판교의 한 게임회사 사옥처럼, 다만 자신의 내부에 광활한 하늘을 가두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압도적인 네모에 갇혀서 각자 조용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용이며 새떼, 열기구, 헬리콥터를 상상한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예를 들면 거북이라든지, 거북이 사진이라든지, 거북이 동영상이라든지”라고 고백하는 판교 여직원은 어쩌면 우리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헬조선과 탈조선을 외치던 그들은 그 불가능을 깨닫고 순회하여 이제 소확행에 안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거대한 꿈과 진정성, 치열함의 강조는 어쩌면 ‘꼰대’의 잔소리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의 무정과 무심함의 기원은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 치열하게 살았아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서른의 반격>)라는 항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자유와 정동을 감금한 이 시대의 소확행은 비정한 현실의 랜드마크가 아닐까.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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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기독교가 만나는 곳에 ‘가짜뉴스 공장’이 있었다.”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언론사에 남을 만한 문장이다.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을 선동하는 가짜뉴스의 레토릭이 보수 기독교의 레토릭과 비슷하다는 점은 페미니스트들도 계속 주목해왔던 문제였다. 한겨레가 이 ‘합리적 의심’이 ‘팩트’임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가짜뉴스에는 올해 초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극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퍼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난민에 대한 공포가 갑작스럽게 형성됐고, 그렇게 자라난 반난민 정서는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거짓말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 중에는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여성과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을 떠올리게 한다.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전 총재였던 장마리 르펜의 딸이다. 장마리 르펜은 강고한 남성 가부장의 얼굴을 한 극우였다. 그는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반프랑스 인종학살”이라고 불렀다. 당시 국민전선의 반유대주의와 여성혐오적 성격은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 확장에 방해가 됐다. 아버지 르펜 시절 국민전선에는 남성 지지자가 월등히 많았다.

반전은 마린 르펜이 당권을 잡고 아버지 르펜을 숙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를 축출함으로써 딸 르펜은 반유대주의 극우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국민전선을 현대화시켰다. 그는 오히려 국민전선이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설파하는데, 그때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표방하고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딸 르펜은 확실히 세련되고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국민전선의 약진을 젠더정치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딸 르펜 이후 당의 여성 지지자층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의 포퓰리스트로서의 진가가 드러난다. 포퓰리스트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신념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대중이 겪고 있는 위기를 과장하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 자리에 ‘대중 vs 엘리트’라는 전선이 형성된다. 예컨대 ‘진짜 프랑스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기득권의 정치적 올바름 추구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식이다. (난민 논란 당시 윤서인이 정우성을 비난했던 방식을 복기해보자.) 그렇게 포퓰리스트는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의 분노와 원한의 감정에 어필한다.

기득권과 싸우고 대중에게 말 건다는 이유에서 포퓰리즘을 ‘정치적 가능성’으로 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포퓰리스트는 오직 나만이 국민을 대변할 수 있으며, 오직 나를 지지하는 자들만이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다원주의를 배격하고 혐오와 배제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 정치를 추구한다.

르펜의 ‘여성 정치’가 어떻게 포퓰리즘으로 휘어지는지 보자. 그는 “나는 프랑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는가? 난민이다”라고 선동한다. 그리하여 르펜에게 페미니즘은 정치학이 아니라 수사학이 되어 버린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여성에 대한 진보적 정책 기조를 유지했을까? 문득 극우 정치인의 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자가 한국 여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포퓰리스트가 페미니즘을 이용할 때만큼이나 곤란한 것은 페미니스트가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되기를 선택할 때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부터 끌어오기로 마음먹기는 쉽고, 그만큼 유혹적이다. 그러나 작가 들개이빨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인간을 혐오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쉬운 건 결코 위대할 리 없지.” 우리의 운동이 좀 더 위대해지기를 바란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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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가 <회색인간>이라는 문제적인 소설집을 출간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원래는 ‘복날은간다’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단편소설을 쓰던 작가였다. 1년 반 동안 무려 300편 넘게 썼다. 그의 독자이자 팬이었던 나는 출판사에 그를 소개했고, 요청을 받아 단행본의 기획에도 참여했다. 그래서 요즘에도 나에게 “김동식 작가 강의 요청 좀 드리려고 하는데, 매니저 맞으시죠?” 하는 연락이 종종 온다. 나름대로 즐거운 오해다. 그는 요즘 중·고등학교에서 초대를 많이 받고 있다. 그의 책을 읽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토론을 하고 “다음 책은 어디 있나요?” 하고 교사와 부모에게 묻는다고 한다.

얼마 전 만난 김동식 작가에게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니까, 그는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꿈이 참 없는데요, 학생들이 꿈을 가질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는 한 사람이, 그저 댓글을 받는 게 좋다는 이유로 소설을 썼고, 그것이 책으로 출간되어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오를 만큼 2018년 상반기 내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3일에 한 편씩 신작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쩌면 모두의 꿈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겠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에 답한 김동식 작가를, 어느 중학생이 올린 인스타그램 동영상에서 본 일이 있다. 영상 속의 그는 학생들을 향해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고 말한다. 잠시 조용해졌던 강당은, 곧 모든 중학생들의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나는 사실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꿈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훈육받아 왔고, 누군가 꿈을 물었을 때 멋진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죄인이 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없다고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무어라도 준비해야 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어느 친구가 “꿈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난 없지만 언젠간 생길 거라고 믿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가 괜찮은 걸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가 정말 용기 있고 멋있는 사람임을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정작 용기가 없는 사람은 나였다.

물론 꿈을 갖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김동식 작가 역시 꿈을 가지는 건 중요하다고 이어 말한다. 그러나 그에 더해, “제가 뭐라고 타인의 꿈에 개입하겠어요, 그건 강요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저는 여러분이 나중이 아니라 지금 즐거우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인다. 나는 같이 간 강연에서 이렇게 답하는 것을 정말로 들었는데, 이 답에 그를 바라보던 교사들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꿈, 열정, 노력. 이러한 단어들은 주로 기성세대로부터 청년세대에게 전달된다.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이제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돌려줄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이 조금은 자신을 덜 아파할 수 있게 이 사회의 문화나 제도를 바꾸는 데 한 줄을 보태고 싶다. 사실 꿈을 가져야 하고 열정이나 노력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 중,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꿈이 있었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대신 꿈을 이룬 사람일수록 타인의 꿈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를 응원하며 지켜보는 일이 더 많다. 내 주변의 존경할 만한 이들이 대개 그렇다.

다섯 살이 된 나의 아이는 벌써부터 온갖 체험을 나간다. 입학을 앞두고 주변의 유치원에서 보내온 커리큘럼을 보면, 숲 체험·농장 체험·소방관 체험 등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도 직업체험 수행평가를 위해 여러 직업군을 찾아 인터뷰나 일일 아르바이트를 한다. 카페를 겸하는 모 문화공간의 대표는 초·중등 학생들이 직업체험을 위해 찾아오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고, 와서 커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데 사실 조금은 번거롭다고 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미래를 상상하고 거기에 힘을 쏟기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는 김동식 작가의 말에 쏟아져 나온 환호성은, 그들이 얼마나 꿈에 짓눌려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미래를 체험할 시간에 차라리 현재에 충실할 수 있으면 한다.

현재를 포기하고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법이다. 현재에 행복할 수 있는 한 인간은 언제든 행복할 수 있고, 미래에만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은 미래에도 행복해질 수 없다. 서른이 넘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모 작가처럼, 모두가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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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농담을 던진다. 무표정한 사람이 웃는 사람이 되는 걸 보고 싶다. 아뿔싸! 농담이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헤어질 때 또다시 인사를 한다. 농담을 수습하다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다음 만남이 있기 전까지는 나는 그에게 객쩍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에 오른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사이좋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을 보며 낄낄거리는 사람도 있고 화면을 잽싸게 두드려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다들 각자의 일과로 바쁘다. 갑자기 전동차 안에 전화벨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린다. 머리를 긁적이며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다. 마치 30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덩달아 내 걸음도 빨라진다. 늦은 것도 아닌데 쫓기듯 걷고 있다. 자신의 리듬을 잊거나 잃고, 사람들이 떠밀리듯 걷는다. 급기야 계단을 오르다 한 사람이 넘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을 피해서 사람들이 계단을 오른다. 제 갈 길을 가는 여느 사람들이다. 그 사람에게 “괜찮아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따뜻한 사람이다. 부축을 받고 일어난 사람이 출구 밖으로 비틀비틀 사라진다.

거리 위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하다. 천천히 걷는 사람, 친구와 손잡고 나란히 걷는 사람, 음악을 들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사람이 있다. 가을볕이 따가운지 손차양을 만드는 사람도 보인다. 짐을 든 손의 아귀에 힘을 집어넣는 사람, 오늘 뜬 구름의 표정을 헤아리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역사 내에서 잃었던 자신의 리듬을 되찾았다. 평온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본다. 살피기 시작한다. 헤아리기 시작한다.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랩톱을 펼치고 열심히 무언가를 기록하는 사람이 보인다. 글을 쓰는 것일까? 무슨 글일까? 무엇이 그를 쓰게 만드는 것일까?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무슨 책일까? 무엇이 그를 읽게 만드는 것일까? 가만히 있는 사람들조차 표정이 풍부하다. 다들 각자의 사연으로 법석인다.

사람들을 만난다. 종종 만나는 사람들이다. 지난주에 만났던 사람도 있고 어제 연락했던 사람도 있다. 머리 잘랐구나,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얼마 전에 착수했다는 작업은 잘되어가니, 낯빛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는 것 아니지?…. 서로에게 마음을 쓴다. 서로를 향해 관심을 기울인다. 다들 각자의 마음 씀씀이로 바쁘다. 마음은 닳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나누면서 점점 부풀어 오른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라 사람을 돕고 사람이라 사람을 외면한다. 사람이라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이라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것을 갚기 위해 골몰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라 사람에게 다정하다. 사람이라 사람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진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절망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도, 지푸라기나 동아줄로 군불을 지피는 것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것도 사람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위기에 처한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도 사람이다. 하루 안에 위로와 축하를 둘 다 전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자신만의 사연을 어떻게든 기록하려는 것도 사람이다. 그 사연을 통해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 그때 함께 있었던 사람을, 지금 함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을 사람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한다. 이제야 겨우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어렵다고,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사람이 좋다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있다. 사람은, 사람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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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품격>을 썼지만 행복한 사람이군요?” 스태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패널로 출연 중인 한 방송사 프로그램의 그날 주제는 ‘행복’이었다. 사전에 패널들의 행복지수를 알아봤고 내 점수는 꽤 높은 편이었는데, 그게 뜻밖이었나 보다. ‘불만’이라는 단어가 행복과 거리 먼 말맛을 가졌음을 새삼 곱씹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 역시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면 숱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여물어 바구니 같은 것에 소복이 쌓여있는 모양을 상상하게 된다. 그 ‘추억방울’들이 아름다운 색채이길 바라며 이를 위해 힘쓴다. 노을 지는 풍경, 향기로운 바람, 부드러운 촉감, 신선한 재료로 만든 식감 좋은 음식 등 좋은 기분을 갖게 해주는 것과 접촉하고, 안전하게 외부와 분리된 감각을 주며 먹고 씻고 잘 수 있는 ‘나만의 방’을 확보하고, 반복적 스트레스와 고통의 요인은 치워버리려 노력한다.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고, 때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지인과 친구의 존재도 소중하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행복을 지키기 어렵다. 사회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직 생존경쟁만이 있는 곳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논리와 이성,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여유, 윤리적 성찰 따위는 사치로 느껴지고, 오직 살아남는 데 온 정신과 역량이 집중되기에 서로에게 잔인하게, 또는 무신경하게 상처 입히는 순간이 잦다. 어떻게든 피하고자 노력해봤자 도처에 널렸기에 지뢰 밟듯 폭탄을 터뜨리거나 그 파편에 상처입기 십상이다. 너무나 사회에 불만이 없고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경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자.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학습한 규범이나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추석을 비롯한 명절은 전국적으로 이런 일이 창궐하는 때다. 주로 결혼, 출산, 육아와 관련해 “그 나이에는 당연히 뭐뭐 해야 하지 않냐”는 압력들이다. 나이뿐 아니라 성별, 학력,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과 억압도 횡행한다. 각자 성장환경과 삶의 조건이 다르고 형성된 정체성과 지향성도 다른데, 자기답게 사는 게 제일 속 편하고 좋을 텐데 왜 하나의 사회규범을 들이대는 걸까?

하나의 기준만 있다 생각하고, 모두가 그 기준을 따라야 한다 믿으며 스스로와 타인을 그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 대화의 뒷맛을 쓰게 한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속성이었다. 나란 존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묻는 게 아닌, 규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음을 열심히 답해준 뒤에야 알게 될 때가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로 줄 세워 급 따지며 차별하고, 몇 가지 단어로 사람을 납작하게 규정해 떠들어대는 이들에게 많은 정보를 줬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꺼림칙한 느낌을 남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준 것은 아닐지 돌아보게 했다.

서열 매기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 중 몇몇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기본 권리가 주어지는 일에 내심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보편적 복지를 한사코 거부하는 정책 입안자나 행정가들도 혹시 그럴까봐 걱정이다.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이탈한 이들은 불안감과 모멸감을 견디는 일상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까봐.

그렇게나 서열을 좋아하시니 그와 같은 결로 말해보자. 한국 정도 경제규모의 ‘선진국’에서 개인이 연거푸 불운을 겪으면 홈리스가 되기 쉽다는 것, 가정 내 중증 환자가 있으면 풍비박산을 불러오는 경제적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부끄러울 일이다. 자원이 불합리하게 나뉘고 있는 지금 현실은 분명 개선될 여지가 있다.

올해도 추석연휴가 끝나자 ‘시달린 자’들의 증언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화, 정책, 일상의 정치까지 아우르는 사회적 불만이다. 이런 불만들이 사회를 개선하는 자료가 되기를, 변화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일상을 불안 없이 지킬 수 있기를.

또한 불만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혹시라도 있었다면 이제 거둬주시길 바란다. 사회에 불만을 제기하는 실천과 개인의 행복을 챙기는 일상은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다.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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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읽고 댓글을 하나 달았다.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현실 정체성은 직장인인 한 사람의 고민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진심이 담긴 열린 제안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한번 해봅시다”로 시작한 일은 100명이 넘는 규모의 콘퍼런스라는 큰 판으로 커졌다.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비슷한 고민을 키워오던 개인들이 ‘작당’해 만들어낸 프로젝트였기에 중단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협업하게 된 11명의 개인들은 구체적인 ‘개인의 시대’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9명의 연사를 초대했다. 딴짓으로 창업한 남의집프로젝트 문지기 김성용, 외신기자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변신한 최정윤, 자칭 ‘사이드프로젝트 중독자’라는 마케터 고재형, 벤처캐피털을 다니면서 맥주 편집숍을 운영 중인 김경민, 자기 강점을 찾고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낸 장영학, 하루 3줄 일기로 인생을 바꾼 <스몰 스텝>의 저자 박요철, 과거와 미래의 나에게 고마워하며 현재의 나에 충실히 살고 있는 전 대기업 직장인 이인규, 9번 회사를 옮긴 ‘프로 이직러’ 김대우, 기자를 그만두고 과학과 연결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이진주까지…. 일단 시작했으며, 나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다르게 움직여도 괜찮은, 그러면서 “딴짓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개인들이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지난 14일 열린 ‘평생직장 개뿔, 개인의 시대’ 콘퍼런스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금요일 오후 반차를 사용해야만 함께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도 100명 넘는 사람들이 함께했다. 날씨 좋은 불금의 오후 1시, 꽤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놀라우면서도 뿌듯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 ‘이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얻기 위해 여기에 왔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2018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과 ‘직장’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결로 전개 중이다. 공무원처럼 확실한 안정성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퇴사 학교’가 만들어질 정도로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요즘 직장인들은 조직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인싸(인싸이더)’ 대신 자발적인 ‘아싸(아웃싸이더)’를 택하면서까지 조직보다 자신의 성장을 원한다. ‘직장’에 다닌다고 자동으로 ‘직업’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날 콘퍼런스에서 “좋아하는 일로 꼭 밥을 벌어먹어야 하나요?”라는 질문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상반된 질문이 함께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연사들은 생존형 사이드 프로젝트 성공 노하우부터 딴짓을 잘한 짓이 되게 만드는 법까지 ‘꿀팁’을 아낌없이 풀어냈다. “한번에 3만개의 알을 낳는다는 개복치처럼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계속하라”는 주문과 함께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라며 백수를 강력 추천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영화’ 혹은 ‘내 인생을 바꾼 책’이 사라진 불확실한 저성장의 시대, 반나절의 콘퍼런스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신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영감 혹은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던 한 연사의 말처럼, 앞서 시도한 개인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가 다른 생각의 여지를 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잠재적 자영업자’인 직장인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을 잔뜩 하는 것이 인생”이며 “인생의 의미 없는 딴짓이라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이끄는 힘을 찾아내는 것, 직장이라는 울타리와 상관없이 나 자신이 어떻게 일할 때 가장 행복한지 찾아내는 것이다. 콘퍼런스는 끝났지만 더 많은 질문이 남았다. 나 역시 “어떻게 하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을까?”란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분투해볼 계획이다. 평생직장 ‘개뿔’인 ‘개인의 시대’를 조금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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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독재라는 거대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각계각층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란함을 걷어내고 보면 사람들은 삶을 되찾기 위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2000년대, 여전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위기는 설득으로부터 왔다. 거악이 희미해지고, 삶들이 분절되고, 격차는 커져갔지만 그 모든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왜 아직도 세상을 바꿔야 하고, 왜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 동원되었던 방식은 문제들을 개인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당신은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당신의 친구나 가족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이고 차별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당신과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다. 이 설명에 숨어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이는 근대 이후의 사회과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자, 동시에 사회적 연대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의 다른 버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설명은 원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작용을 낳았다. 문제들은 내 문제와 네 문제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네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정형화되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거기에 고통이 있으면 돕는다는 느슨한 인식 대신에,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의 몫으로 맡겨둔다는 ‘논리적인’ 무관심이 증가했다.

그런가 하면 내 문제에 매몰되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내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권리와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이 문제는 내 문제이므로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내 문제 속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왕이 되고자 했다. 심지어 어떤 문제들은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내 문제를 위해서는 네 문제가 지워져야 한다는 주장도 점점 커져갔다.

출처:경향신문DB

이 두 가지 태도는 사회문제가 내 것 혹은 네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사회문제와 파편화된 개인을 연결지어 보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오히려 사회문제 자체가 파편화된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시도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파편화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남들 상관없이 너만 잘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환영과 패배자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사람들을 자기만의 사회로 몰아붙인 탓이다. 동지도 깃발도 사라진 곳에서, 각자도생과 사적 구제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힘을 잃었다.

오늘 사람들이 각자의 지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가장 먼저 되살려야 하는 것은 잊혀진 교훈이다. 즉 세상에 온전한 ‘네 문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회적 상상력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세상에는 온전한 ‘내 문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처럼 보여도 사회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 문제인 이상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문제들이 여론이나 국가, 법에 의해 좌우되고 굴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우리에겐 어떤 이유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이어야 한다. 서로의 관심과 이해를 돕고, 연대를 구하고, 역행할 수 없는 저지선들을 점점 끌어올리면서 말이다.

민주노총의 트위터 담당자는 인천퀴어축제에서 벌어진 혐오세력의 폭력에 왜 민주노총이 관심을 갖느냐는 비난에 이렇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하신 ‘오지랖’을 우리는 ‘연대’라고 합니다.” 정말로 그렇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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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안희정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상호 간에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은 인정되지만, 성적행위에 있어서는 위력이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없고,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데도 명시적으로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결국 피해자의 증언은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판사라는 직책은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권력의 최종심급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위력이라는 게 스위치가 달려서 맘대로 켜고 끄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고용인인 중년 남성을, 거의 매일같이 수행하고 얼굴을 맞대야 하는 여성 비서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을 리는 없다. 심지어 피해자는 가해자를 신뢰하고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권력관계와 개인적인 신뢰, 존경심이 더해진 관계에서 위력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걷어내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사법부가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판단력을 거의 인공지능 수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복잡하고 일상에 조밀하게 침투해 있는 권력관계가 오직 성적 접근 앞에서는 명확해지고 냉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재판은 그 과정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가해행위였다. 물론 기소와 재판의 근거가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에 대한 음해, 억측, 일상생활이 재판과정에서 줄줄이 끌려나왔고, 언론도 가세해 신나게 받아쓰기를 했다. 차기 대선후보이자 도지사이자 가정이 있는 중년 남성이 자신의 부하직원에 대해 성적으로 부적절한 접근을 시도하고 간음한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오로지 피해자의 행실이 피해자로서 적합했는지가 문제였다. 가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추잡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피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피해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을 받는다. 이런 식의 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절대로 피해자가 되지 말 것.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이니, 결론적으로는 피해자가 되거든 구제를 받으려 하지 말고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말도 뭣도 아니다.

기억하겠지만 안 전 지사는 피해자의 폭로가 있은 후에 자신과 피해자의 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과문을 올리고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또 증거로 채택된 휴대폰도 제출을 거부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무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의 수많은 곳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허가를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자들에게는 묻지 않는 것을 약자들에게만 묻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짐으로 지우려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법에 근거한 것인들 공정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미 여성들은 사회가 여성을 보호하기는커녕 못살게 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최종심급이라 할 수 있는 법마저 피해 여성들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있어 이 나라의 존재가치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다. 이미 미투 운동은 사회가 성폭력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운동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식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는 이 억울함들이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최악의 신호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개개인이 겪는 시련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사법부가 나서서 사회 붕괴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는 하루속히 관련 입법들을 진행하라! 사법부는 판검사들의 성인지적 관점에 대한 대대적인 재교육과 개혁을 실시하라! 행정부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해 성폭력에 엄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은 이 나라가 될 것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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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유수의 종합병원이라 그런지 크고 복잡했다. 주차장에 차가 많아서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차에서 내려 해당 건물에 들어서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차가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말도 된다. 아픈 사람들과 아픈 사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원 안팎에 있었다. 초조함을 이기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수술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푹 수그린 채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진료실 앞에서 호명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접수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번호표에 적힌 숫자를 통해 이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병원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0분쯤 지났을까, 순서가 되어 데스크에 갔더니 처음 내원하는 경우에는 옆에 있는 다른 건물에 가서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두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예약 진료 시간보다 여유 있게 와서 천만다행이었다. 옆 건물에 가서 다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역시 20분쯤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등록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처음에 갔던 건물로 돌아가서 해당 진료과로 이동했다. 스크린에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의사 이름 아래에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예약 진료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버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 하나가 사라지면 목록에 있는 이름들이 한 칸씩 위로 올라갔다. 더디게 바뀔 것임을 잘 알면서도, 하릴없이 스크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은 모두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가끔 누군가가 의자에서 일어나면 부러운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병원에서의 일은 참는 일, 기다리는 일, 묵묵해지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중하다가 만에 하나 제 순서를 놓쳐버리기라도 하면 다시 처음부터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지가 절박한 사람 옆에 사연이 절박한 사람이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가 눕고 싶다는 말을 하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났다. 마음의 움직임이 몸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몸의 움직임이 마음의 움직임을 다시 이끌었다. 절박함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유대였다.

의사와 5분을 면담하기 위해 세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진료가 끝나고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기다리는 일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임을 몸소 깨달았다. 기다림이 다음 주로 한 주 유예되었다. 앞으로 기다릴 일은 더 많을 것이다. 기다리기 위해서, 기다림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몸은 더 바빠질 것이다.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들도 있을 것이다. 기다림을 위한 앞선 기다림이 있을 것이다.

지금껏 무수히 많은 기다림이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연락을 기다리며, 연락이 끊긴 소중한 사람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기다리며, 수학여행을 기다리고 체육대회를 기다리며 나는 마냥 설레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어떤 기다림은 기약 없어서 허무했고 인내를 시험하는 기다림도 있었다. 만나기 위해서 기다려야 했고 쓰기 위해서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많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기다림은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다리다’라는 단어는 동사지만, 왠지 형용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한 동작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가슴 속에서 무수히 많은 마음들이 움직였을 것이다.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 여기서 저기로 나아갔을 것이다. 개중 어떤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왔을 것이다.

조용미 시인의 ‘유적’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희망을 잃지 않는 한, 기다림은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은 계속해서 법석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기다리다’는 동사가 맞는 것 같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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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시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처음 만난 자리였다. “읽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인데, 꼭이라는 단어까지 붙으니 의무처럼 느껴지네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내내 뭔가가 머리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소재가 등장해서 대화는 이어졌지만,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어제 구입한 시집을 펼쳤다. 김현 시인의 &lt;입술을 열면&gt;이었다. ‘강령회’라는 시의 한 대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영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몸이 느껴질 뿐입니다.” 시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움직이는 것은 몸이지만, 그 안에서 법석이며 몸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영혼이다.

아까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를 읽을 때, 나는 스스로를 발견해요. 나는 이런 단어에 끌리는구나, 이런 소재에 반응하는구나, 이런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는구나….” 심신을 두드리는 시를 읽고 나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깨달음이 나를 향한 찬찬한 응시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저 단어가 있었어요. 저 단어가 내 인생에 단단한 매듭을 만들어주었지요.”

시를 읽음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배양되기도 한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 시를 대학수학능력시험 때 처음 접했다.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난생처음 외로움을 직면하는 시다. 모르는 작품이 나오면 으레 당황하게 되는데, 저 시는 읽는 순간 내 몸을 파고들었다. 파고든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시적 상황에 깊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입장이 되어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를 읽는 일은 시적 화자가 되어봄으로써 누군가를, 누군가의 인생을 헤아려보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일상의 새로운 면, 언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2002년에 김혜순 시인의 시집 &lt;불쌍한 사랑 기계&gt;를 읽었다. ‘코끼리 부인의 답장’이라는 시를 읽을 때였다. “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야/ 앙다문 입술 밖으로 불현듯/ 불멸의 상아가 치솟게 되는지”라는 구절이 가슴에 빗금을 긋고 지나갔다. 시집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불현듯’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불현듯의 어원이 ‘불 켠 듯’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릎을 탁 쳤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저 단어가 있었다. 무수한 ‘불현듯’들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여기 올 수 있었다.

‘다르게 보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내가 시를 읽는 이유다. 진은영의 ‘가족’을 읽었을 때는 둔중한 것에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을 응시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광경을 다르게 보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려고 힘쓰지 않았다면 저런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좋은 시는 이처럼 편견을 뒤흔든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와 달라져 있다. 어제까지는 없었던 벽보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매일같이 듣던 새소리에서 새로운 기척을 느끼기도 한다. 발견하려는 태도와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일상에 생기를 가져다준다. 익숙함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낯섦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외연뿐만 아니라 삶을 감싸는 사고의 외연도 넓혀준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발견, 타인의 발견, 일상과 언어의 발견, 그리고 다르게 보기의 발견은 단숨에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은 가깝게는 취향에서 멀게는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나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극이 된다. 질문을 던지고 일상에서 끊임없이 답을 구하며, 나는 진짜 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시를 읽기 전의 나와 시를 읽고 난 후의 나는 확연히 달라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 안다. 자기 자신은 안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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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두루 잘 통하는 연인의 정사보다 맛있는 음식 한 입이 낫다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다. 마크 쿨란스키의 작업을 참고하니 이런 표현과 상상력은 이미 기원전 5세기 이래 이어진 모양이다. 네 생각에는 어떠냐, 주위에 물으면 둘 중 하나가 망설임 없이 ‘맞다!’를 외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조선 문인 허균(許筠·1569~1618)이 남긴 문자먹방 &lt;도문대작(屠門大嚼)&gt; 서문의 첫 문장이 이렇다. “식욕과 색욕은 본성이다(食色性也).”

졸리면 자면 그만이다. 그런데 식(食)과 성(性)은 ‘그만’에 이르기까지가 복잡하다. 과정은 구경거리(스펙터클)가 될 만한 자질로 충만하다. 남에게 민망한 구석 들키지 않는 한 내 취향으로 소품(팬시)을 지을 만한 요소로 가득하다. 이 가운데 ‘눈과 귀로만 먹는 음식’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려 있다. 계급도 계층도 없다. 포르노는 몰래 보지만 음식 포르노는 벌건 대낮에 지하철을 타고 갈 길 가면서도 볼 수 있다. 온 가족이 화면 앞에 앉아, 그 연출에 대한 비평과 완성도에 관한 품평을 나누면서도 볼 수도 있다. 그 앞에서 침을 흘리기란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다. 가장 만만한 오락이다. 그러니 헌 매체, 새 미디어 할 것 없이 여기에 환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온갖 매체에서, SNS에서 먹는 이야기가 폭발한다. 푸드 포르노에 잘만 기대면 명사, 준연예인 행세도 가능하다. 사진과 영상을 곁들이고 꾸준하기만 하면, 누구든 먹는 이야기 하나로 로마의 황제나 허균 같은 문인쯤은 쉬이 압도할 만한다. 그렇다고 신문마저 여기 압도된다면 무척 섭섭할 듯하다. 아니 이미 압도되었나, 아닌 게 아니라 불안이 솟는 요즘이다.

언론마다 여행과 주말과 토요일을 앞세운 특별판, 또 지역 골목길을 고리로 한 특집을 내면서 음식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때 차지한 면이 크면 연예인화한 요리사와 사진을 찍고, 굳이 비싸서 이국적인(‘비싸고’가 아니다) 맛집을 나열한다. 차지한 면이 작으면 작은 대로 기자가 힙스터로 분해 숨어 있는 ‘힙’한 곳을 시시콜콜 소개한다.

거기 자리한 정보도 이 세상에 필요하다. 신문이 기획할 만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될 듯한 징후가 보이기에 불안하다. 푸드 포르노가 그저 반짝거리고 무해한 귀여움 쪽으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막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북아프리카 사람 입에 겉절이를 욱여넣으며 ‘두유노김치’ 장면을 연출하는 한국적인 음식 폭력이 보다 증폭되곤 한다. 비싼 음식이 곧 좋은 음식으로 포장되는 동안 일상 식생활의 감각은 자꾸 지워진다. 한 끼를 먹기 위한 보통 사람의 분투를 허름하고 초라하다고 여기는 심성이 조장된다. 어쩌면 이야말로 푸드 포르노의 벌거벗은 속성이자 방향일 테다. 그러니 더욱, 신문-기자-칼럼니스트는 음식을 감각하고 음식 이야기를 쓸 때, 그저 푸드 포르노를 중개-중계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는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할 줄로 안다. 음식 이야기만 해서는 음식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할 줄로 안다.

푸드 포르노와 일상의 음식 사이에서 엇갈리는 보통 사람들의 감각은 복잡하다. 벌거벗은 먹방 앞에서 군침도 흘리지만, 그렇다고 내가 신뢰할 만한 음식 담론을 아예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신문은, 기자는, 진짜 칼럼니스트는 푸드 포르노 너머에서 보다 정직하고 분별 있는 말과 상상력을 짓고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전통적인 신문의 기사 링크에 커서를 가져다 댄다. 그러다 누구나 하는 푸드 포르노가 오른 지면을 확인한 순간, 실망해 기어코 댓글을 단다. “입소문 홍보 결국 사기,” “애드버토리얼, 바이럴이 뭐냐면 결국 댓글알바.”

먹방, 먹는 이야기가 웃자라면서 나타난 직업군이 있다. 지난 시대의 파워 블로거, 요즘의 자칭 푸드 칼럼니스트 말이다. 이들은 푸드 포르노 속에 애드버토리얼, 바이럴 등을 심으며 담론의 장을 외로 꼬아버린 점까지 있다. 그러므로 더욱 엄중하다. 푸드 포르노 흉내뿐이었다가는 신문이 찌라시가 되는 수 있고, 기자가 기레기가 되는 수가 있다. 오늘 음식 꼭지를 기획 중인 신문과 기자에게 당부한다. 그래도 신문을 믿는 독자가 있다. 신문이라서 신뢰를 보내는 독자가 있다.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말, 찌라시며 기레기 같은 말을, 더구나 음식 꼭지 앞에서는 쓰지 않게 해주십사!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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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바로 개설된 채팅방 수만 1만개가 넘는다는 ‘고독한 ○○○’ 시리즈 채팅방이다. 워낙 유행이라 그런지 ‘안 고독한 ○○○’ 방들도 여럿 보인다. 궁금해져서 몇 개의 고독한 채팅방에 들어가봤다. 누구나 익명으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오픈채팅방답게 내 신원을 공개하지 않고, 카카오톡 프렌즈로 프로필 사진을 정하고, 아이디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상대방도, 나도 서로에 대해 알 수 없을 뿐더러 알 필요도 없는 구조다. 스타, 다이어트, 뜨개질, 스키, 마인크래프트, 동네 맛집, 여행, TV 프로그램 등 취미생활이나 게임까지 없는 게 없다. 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친목 금지’와 ‘고독’이 콘셉트이기 때문에 대화는 NO, 사진만 OK라는 규칙을 갖고 있는 방들이 많다.

이 고독한 방들은 일본 인기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패러디한 방에서 시작해 고양이 사진을 공유하는 ‘고독한 고양이’ 방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연예인 방이 많아지면서 팬들이 만든 ‘고독한 ○○○’ 방에 해당 연예인이 직접 들어와 인증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들어간 ‘고독한 김생민’ 방의 대화를 살펴보다가 <김생민의 영수증> 프로그램에 소개됐던 “동방신기 덕질하며 내 집 마련하고 싶어요”란 사연이 떠올랐다. ‘덕알못(덕질을 알지 못하는 준말)’인 김생민이 이 방을 알았다면 ‘고독한 동방신기 방’에 참여하라고 해답을 제시했을지도 모르겠다. 돈 한 푼 들이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잔뜩 감상하고 소장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스타와 직접 인사를 나눌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채팅방이 덕질에만 유용한 건 아니다. ‘고독한 김생민’ 방에서는 김생민 뺨치는 절약 팁과 조언이 공유된다. “전동칫솔 사도 됩니까?”란 질문에 “이를 닦을 때마다 몸을 흔들 것”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각자 읽고 있는 책의 표지나 인용문을 올리는 ‘실속형’ 채팅방도 많다.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거나 목적을 달성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셈이다.

신기한 방이 많아 몇 개의 방에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해 봤는데 살짝 귀찮은 것 외에 부담은 없다. 일반 그룹 채팅방에 초대되면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해 머리 아픈 경우가 많은데, 오픈 채팅방은 그런 피로감에서 자유롭다. 사진만 올라오니 누군가의 이야기에 답을 할 필요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큰 장점이다.

오픈채팅방은 의도치 않게 타인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되거나 사소한 것까지 알게 되는 경우에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으니 그만하라는 뜻으로 요즘 많이 쓰이는 ‘TMI(너무 많은 정보/Too Much Information)’와는 좀 다른 맥락이다. 어쩌면 이 ‘고독한’ 방들은 ‘김무성 의원 탄생화는 로즈메리’ ‘푸틴은 용인대 명예박사’처럼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들이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 딱 맞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타인과의 불필요한 감정소모 없이 서로의 목적에 맞게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고, 내가 갖고 있는 자료를 나누는 한편 필요한 자료를 다 받으면 미련 없이 나갈 수 있는 편리함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카카오톡, 텔레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밴드, 인스타그램, 블로그, 카페까지 많은 SNS를 이용하면서 온라인 관계조차 신경써야 하는 요즘, 가장 마음이 편한 수단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맞겠다.

‘고독한’ 방들의 유행은 20대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쓸모없는 선물 교환’과도 닮았다. 주차금지 표시판, 구멍난 고무장갑, 보도블록, 짚신처럼 최대한 ‘쓸데없는 것’을 찾아 서로에게 선물하고 노는 놀이 말이다. 비용이나 시간 걱정 없이 다른 사람이 키우는 반려동물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랜선 집사’ 놀이와 비슷한 기분으로 심각하지 않으면서도 불특정 다수와 부담없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상품을 권유하지 않는 ‘무언(無言) 접객 서비스’가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와도 비슷할 테다.

원하든 원치 않든 너무 많은 정보와 연결점에 지쳐있는 요즘, 나는 당분간 고립되지 않으면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고독한’ 오픈채팅방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하고, 대답하고 싶을 때만 대답해도 아무 부담 없는, ‘고독’하게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 다닐 수 있는 이 채팅방에서 말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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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탐욕’이라는 것이 말이 될까 싶은데, 이 기이한 자질을 자본주의 시대 우아한 덕목으로 등극시킨 것은 막스 베버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신의 삶에 유용한 자산 이상의 것을 근면하게 추구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적인 직업 윤리이자 신의 축복의 증좌임을 이야기했던 막스 베버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성실한 탐욕’을 윤리적으로 승격시킨 베버의 면죄부에 대해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편이다. 거짓과 술수에 기반을 두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겨우, 자식에게 승계하는 것으로 끝내는 몇몇 자본가를 볼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런 걸 보면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하게 임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보다 비대한 이윤들을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제거한다면?

이런 상상은 나만 한 것이 아니었나보다. 최근 읽은 김동식 소설집에도 이와 유사한 판타지가 등장한다. <재산이 많은 것을 숨길 수 없는 세상>이라는 글에는 재산만큼 몸집이 거대해지는 지구인 이야기가 나온다. 외계인의 마법에 의해 부자들은 아파트처럼 거대해지고 일상에서 소외되자 그들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게 되고, 모두 삶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자산만을 지니게 되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윤리는 이렇게 바뀐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관계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사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드는 비용이 그만큼이나 크다고 생각합시다. 재산이라는 것도 무인도가 아닌 사회 속에서나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0년간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서 글쓰기를 했다는 노동자 소설가 김동식의 글은 과연, 기존의 문학관습과는 먼 것이었다.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나 복잡한 사회현실 같은 것과 무관하게 마구 뻗어가는 주물 노동자의 상상력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소설보다는 철학콩트가 어울릴 법하다. 그의 짧은 단상들은 대체로 ‘인간, 요괴, 악마’와 같은 존재들을 통해 인간을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연 주물공장에서 액세서리, 지퍼 등을 만들어낸다는 작가 김동식은 글에서도 ‘조물딱조물딱’거리면서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하다.

가령, 모두 인조인간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해져 ‘인조인간’임을 아웃팅하게 되는 세상이 된다든가 혹은 늙은 부모를 디지털 공간에 모셔 가상의 삶을 살게하는 판타지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한편 허무개그 같기도 하고, 더러 기발한 해법 속에서 촌철살인의 풍자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미만한 차별과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 김동식은 이런 해법을 내놓는다. 정부는 인류 인공진화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손가락이 여섯 개인 신인류의 출산을 장려한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가 거짓임이 밝혀지고 여섯 손가락의 아이들을 집집마다 갖게 된 부모들은 일체의 차별을 금지시킨다. 또 다른 예. 저승의 인구가 줄어들자 저승의 대표는 이승으로 건너와 한 사람이 죽으면 임의의 영혼의 짝을 같이 데려간다는 ‘사망 공동체’를 공표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무작위한 죽음 연대에 맞서 본인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고, ‘사회안전망’은 물론 사회의 폭력 근절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죽음의 연대를 통해 “돈 한 푼 없는 노숙인이나 수백억 부자”의 목숨값은 평등해지게 된다.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나일 수 있어’라는 무지의 베일의 정의가 실현되는 장면이다.

김동식의 콩트는 인간, 요괴, 악마 같은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사회적인 것’에 대해 심오한 통찰을 보여준다. <무인도의 부자노인>이라는 단편에서 “통조림 몇 개 때문에 한 노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저희는 짐승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을 살려주고 나니, 그제야 저희는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이 되어 있더군요”라고 할 때, 또는 아무런 보람 없이 노동만 하는 회색인간들 속에서 노래 부르고 타인의 삶을 기억하는 예술가의 존재를 이채롭게 그려낼 때, 김동식은 짐승으로 추락하는 인간을 아슬아슬하게 구출해낸다. 인간이란 젊음과 재산에 눈먼 괴물 같은 존재일지라도 ‘타인’과의 관계들 속에서 인간은 기계나 인조인간이 아닌 겨우, 인간으로 오롯할 수 있다는 것, 작가 김동식이 일상의 노동에서 길어올린 값진 통찰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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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안경점’은 망원우체국 사거리에 있는 적당한 규모의 안경점이다. 1991년부터 자리를 잡은 그곳에서 나뿐 아니라 성산동과 망원동의 아이들이 대부분 첫 안경을 맞췄다. 주인인 30대 남자는 언제나 친절했다. 시력검사를 하고, 테와 렌즈를 고르고, 시간이 걸려 안경이 완성되고 나면 그는 “자, 한 번 볼까” 하면서 손수 안경을 씌워주었다. 그때 볼의 약간 윗부분에 그의 손이 닿았다. 참 따뜻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스무 살이 되어 나는 망원동(성산동)을 떠났다. 그러고는 학교 때문에, 군대 때문에, 직장 때문에, 그 무엇 때문에 계속 멀어져 있었다. 한동안 안경점에 갈 일도 별로 없었다. 이전처럼 안경을 자주 부러뜨리지도 않았고 시력이 크게 변할 일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직장 근처에는 ‘안경나라’나 ‘다비치’ 같은, 점원을 몇 명씩 두고 영업하는 대형 안경점들이 있어서, 주로 거기로 갔다.

얼마 전 “스마트안경 딸입니다”라고 시작하는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안경점 주인의 딸이라고 밝힌 그는, 얼마 전 출간한 나의 <아무튼, 망원동>이라는 책을 잘 읽었다면서 “작가님이 저희 부모님의 사업체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계신 것 같아서, 반갑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 시간이 괜찮으시면 12월 중순쯤에 한번 가게에 방문해주시겠어요?” 하고 제안했다. ‘도시를 자신의 고향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아무튼, 망원동>을 내고서, 아무튼,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답장을 보내고 곧 만날 약속을 잡았다.

가는 길에, 동네 책방인 한강문고에서 나의 책을 한 권 샀다. 별로 많이 팔린 책이 아닌데도 베스트셀러 매대에 작은 메모까지 더해서, 왼쪽에는 유시민 작가가 오른쪽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있는 그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동네 작가의 책을 굳이 잘 보이는 매대에 놓아준 동네 책방의 후의에 깊이 감격했다. 한강문고부터 스마트안경점까지 약 3분쯤 걸리는 그 거리를, 어느덧 아홉 살에서 서른다섯 살로 훌쩍 자란 나는 나의 책을 들고 걸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 내외가 나를 보고는 아, 왔네, 하고는 “아니 그때 얼굴이 남아 있네, 기억이 나요” 하고 몇 번이고 말했고, 나 역시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목소리도 그대로세요” 하고 인사드렸다. 아홉 살과 삼십대 후반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준비해 둔 책 다섯 권을 여기에 사인을 좀 해 줘요, 하고 꺼내 놓고는, 나의 안경을 벗겨서 이리저리 매만졌다. 나는 민망해서 “아이하고 놀다 보니까 안경 코가 계속 휘어요” 하고 변명하듯 말하고, 책 다섯 권에 나의 이름을 적어 나갔다. 과연, 책에는 ‘한강문고’의 도장이 선명해서 괜히 다시 울컥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나는 시력검사 기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도수를 낮추는 게 더 잘 보이겠고, 난시도 조금 조정이 필요하겠고, 어디 이걸 한 번 써 보자” 하고는 새로운 렌즈를 내 눈 앞에 가져다 댔다. 갑자기 세상이 너무 밝아져서 나도 모르게 앗, 하고 반응하자, 그는 “됐네, 우리 밥 먹고 오자” 하고 나를 이끌었다.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한 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할 법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안경점에 돌아와서 그는 완성된 안경의 렌즈를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내가 “사장님, 괜찮아요…” 하고 말하자 그는 “나는 여기에서 안경 팔아서 벌 만큼 벌었어, 이 안경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과 완전히 같은 모델이야, 렌즈도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좋을 만한 것을 골랐어, 정말 좋은 안경이지, 그러니까 계속 글 잘 써요” 하고 답하면서, 나에게 안경을 씌워주었다. 25년 전 볼에 닿던, 그 따뜻한 감각 그대로였다.

어느 동네에나, 그 자리를 오래 지켜온 가게들이 있다. 그곳의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노동을 해 온 이들이 있다. 스마트안경점에서 내가 맞추어 온 것은 단순한 안경이 아니라 추억이었다. 그래서 그 사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괜히, “아, 우리 동네는 여전히 ‘잘’ 있구나” 하는 마음이, 정말로 드는 것이다. 한강문고 역시 동네의 서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동네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여전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몸이 나이 들고 부수어지는 만큼 건물과 가게 역시 그런 부침을 겪겠지만, 그래도 그 사라짐이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추억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조금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일어나기를 바란다. 새로움과 여전함이 공존하고 그 안에서 자란 모두가 안녕한 공간, 도시의 고향이 가져야 할 모습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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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의 <까칠남녀>에 출연 중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젠더토크쇼를 표방하는 <까칠남녀>는 지난 37회 동안 피임, 졸혼, 맘충, 군대, 데이트폭력, 낙태죄, 10대 성적 자기결정권, 성희롱, 꽃뱀, 냉동난자, 페미니스트 교사 등 다양하고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루어 왔다.

덕분에 프로그램 자체는 심심찮게 폐쇄 요청에 시달렸고, 심지어 홈페이지가 해킹당해 ‘노알라(고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과 코알라의 얼굴을 합성한 일베발(發) 이미지)’로 홍보 사진이 변경된 적도 있었다. 물론 출연진에 대한 공격과 신상털기는 일상에 가까워서, 한 출연자의 경우에는 직장에까지 항의와 민원이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회보다도 38회(12월25일 방송)와 39회(내년 1월1일 방송)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성소수자 특집이기 때문이다. 초대 게스트는 201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하며 87%의 지지를 받은 김보미씨,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인 강명진씨,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씨, 국내 최초 커밍아웃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씨다. 이들은 각자 LGBT, 즉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출연했다.

이미 보수 기독교 쪽에서는 방영을 막기 위해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신자들 사이에는 “<까칠남녀>가 음란한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성소수자 특집에 하나님의 거룩에 대적하는 음란의 영으로 충만한 최고 제사장급들 4인방이 출연합니다. EBS에 항의 전화 부탁드립니다” 등의 내용을 담은 단체 메시지가 공유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염려와 달리 이번 특집은 아주 ‘건전하고 유익’했다. 방송은 JTBC <아는 형님>을 패러디하여 ‘모르는 형님’ 콘셉트로 기획되었는데, 새로운 친구들인 LGBT가 ‘까칠학교’에 전학을 와서 재학생들의 편견과 궁금증에 응답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성소수자에 대해서 무지한가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함께 출연 중인 황현희씨는 현실에서 LGBT를 처음 보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때로 “성소수자가 도대체 무슨 차별을 당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성소수자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성소수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비가시화되고, 그토록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이미지로 정형화되어 사회적 편견 아래 놓이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편견은 차별을 정당화한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성소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라.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그 어떤 것을 떠올려도 그것이 모든 LGBT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편견은 LGBT를 문화적으로 배제하고, 법적으로 차별하며, 때때로 물리적 폭력에 노출시킨다.

<까칠남녀>는 우리가 보여주는 LGBT의 이미지가 또 다른 편견을 만들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이 방송을 기획했다. 출연자들 역시 그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김보미’는 레즈비언을, ‘강명진’은 게이를, ‘은하선’은 바이섹슈얼을, ‘박한희’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들이 LGBT의 ‘표준’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더 많은 목소리를 위해서는 더 많은 재현, 더 많은 가시성의 확보가 필요하다.

조심스러움 속에서, 그리고 공중파에 얼굴이 공개된 이후 받게 될 수많은 공격을 감수하고서, 이 네 명의 ‘제사장’들이 용기를 낸 것은 이 세계의 굳은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더 다채롭게 칠하기 위해서다.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게스트들을 만나주시기 부탁드린다. 판단은 시청 후로 미뤄도 늦지 않다.

보수 기독교 쪽에서 돌렸다는 단체 메시지의 내용을 보다가 또 다른 깊은 한숨이 나왔다. 얼마 전 그들의 요구에 떠밀려 여성가족부에서 ‘성평등’과 ‘양성평등’을 혼용하겠다고 밝힌 것이 떠올라서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 “음란의 영” 운운하는 자들의 강압 때문에 정부 부처의 정책운영 철학이 흔들린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부가 무능할 때, 개인이 하드캐리하게 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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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연말이면 이 같은 질문에 성실한 답변을 작성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진다. 개인적으로는 작년보다 나은 한 해였다. (이 또한 오래가지 않겠지만) 생애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한철을 보냈고, 금융자본주의에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상대적) 주거안정성을 확보했으며, 사랑에 빠졌다…가 얼른 빠져나왔다. 수도승처럼 애욕, 집착, 번뇌에서 거리를 두고 살자고 다짐했다. 수도승 생활은 2년을 채우지 못했다. 일전의 연인들과 다른 환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타났고, 금세 매료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좁은 세계에 침잠하며 끝없는 우물을 판 끝에 비대한 자의식의 글이나 영화를 선보이는 예술가형 인물과 만난 적이 많았고, 창작의 과정 동안 주변인을 감정적으로 학대하는 일을 보고 겪으며 환멸을 느꼈는데, 그는 달라 보였다. 개인의 욕망보다 사회적 변화를 위해 투신하는 모습이 강인하고 멋져 보였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의 눈으로 세상을, 스스로를 응시했고, 언젠가부터 죄책감을 느끼게 됐다. 나의 사사로운 ‘소시민적’ 욕망들이 새삼스러워진 것이다. 나는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일상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긴다. 무례해서 불쾌함을 느끼게 만드는 인간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 애쓰고, 맛있는 것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는 감각적 충족감을 중시하고, 흥미로운 서사창작물을 탐닉한다. 이것은 내가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타인에게 마음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믿음과도 이어져 있다. 그렇게 확보된 마음의 공간 덕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다가오는 고통의 사연들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어 나의 소셜미디어 뉴스피드에는 고용 보장 및 단체협약 보장을 외치며 이토록 추운 날씨에 굴뚝 위에 올라 버티고 있는 사람들, 권력의 눈치를 보며 진단서를 작성한 바 있는 병원장의 퇴진과 의료공공성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서울대학병원 노동자들, 법의 허점을 적극 이용한 폭력적인 강제철거에 저항하다 손가락이 잘리고 생살이 찢긴 궁중족발 사장 등 동시대 사람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줄을 잇는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 기업 입장에 이입하여 노동조합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건물주 입장에 빙의하여 세입자가 ‘을질’한다고 비난하는 일은 너무 쉽기에 의식적으로 경계한다. 당사자의 절박한 투쟁에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억울함과 서글픔을 헤아려보며 어떻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응원의 마음으로 추이를 지켜보는 정도마저 ‘노력’해야 할 수 있는 것은, 대다수가 고통을 겪으며 생존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팍팍한 한국사회의 현실 때문일 테다.

그나마도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소식에 ‘좋아요’나 ‘슬퍼요’, ‘화나요’를 클릭하며 멀찍이서 걱정하는 데에 그칠 때가 많다. 실체 없는 걱정의 ‘마음’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고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들썩이다 일회성 소액 후원을 하거나 관련 굿즈를 구매하거나 관련 문화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스스로의 일상을 지키고 난 뒤 여유가 남을 때의 일이다. 그렇기에 ‘일상’이라는 것이 오로지 투쟁하고 외로운 이들의 곁을 지키는 일인 사람을 사랑하며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사람이어서 끌렸지만 정확히 그 이유로 견디지 못하게 되어버렸고, 나는 지금도 소시민적 일상을 산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비겁하게 살아남고 더 섬세하고 뜨겁게 시대와 불화하는 사람들은 이르게 세상을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는 이야기를 지면에 쓰고 나니, 너무 감성이란 것이 터져버렸나 싶지만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연말이지 않습니까?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끝’이라는 감각이 주는 비일상성에 휘말리니까. 또 지금 우리는 실제로도 많은 이별과 상실을 경험하고 있으니까.

우리 모두가 더 이상의 슬픔도 고통도 외로움도 없이 남은 한 해를 맺기를. 부질없는 소망이겠지만 전해본다.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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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디아스포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자 양반, 근데 아리랑이 뭔 뜻인가요? 엊저녁부터 저 말이 머릿속에 딱 붙어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피식) 뭐요, 확실치 않다고요? 그럼 내 처지랑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피식) 그냥 밥이나 먹으렵니다 허, 싱겁네.” 이 시를 쓴 지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7년, 나는 아리랑 컨템퍼러리 시리즈 ‘아리랑X5’에 참여하게 되었다. 명창 이춘희, 현대무용가 안은미, 피아니스트 양방언,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앞선 네 차례 공연의 메가폰을 잡았다. 제목처럼 다섯 가지 새로운 아리랑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기자간담회를 할 때까지는 긴장이 되는 정도였는데, 네 차례 공연을 보고 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각자의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분들도 아리랑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깝다고 느끼는 대상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고 등잔 밑은 늘 어두운 법이다. 

그런데 그분들은 아리랑 고개를 또 한 차례 넘었다. 아리랑 고개의 이편에 있는 나는 이미 저편에 가 계신 그분들이 부러웠다. 게다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관하는 행사이니만큼 부담감도 엄청났다.

10년 전에 쓴 시를 떠올렸다. 당시 아리랑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아리랑의 기원들 중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었다. 나는 흩어진 사람들이자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인 디아스포라와 아리랑을 연결해서 시를 썼었다. 

아리랑의 기원이 분명치 않다고 해서 아리랑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아리랑은 폭넓고 다양하며, 시공간에 따라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마음처럼 말이다.

고심 끝에 공연의 제목을 ‘아리랑의 마음들’로 정했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리랑의 정서를 단순히 ‘슬픔’이나 ‘아픔’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고개를 넘어가는 자의 아리랑과 고개를 넘어가는 자를 바라보는 사람의 아리랑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 

한동안 나는 아리랑에 사로잡혔다. 열여덟 명의 시인들에게 지금―여기의 아리랑에 대해 시를 써달라는 부탁도 드렸다. 먼 데 있는 아리랑을, 아니 우리가 망각해서 멀어진 아리랑을 21세기로 소환하고 싶었다.

열여덟 명의 아리랑이 모두 달랐다. 그것은 아리랑에 대한 열여덟 편의 시들이 아니라, 차라리 열여덟 개의 감정이었다. 마음이었다.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리랑의 무늬와 색깔, 냄새와 질감은 각기 다르다. 아리랑은 거대한 추상이지만, 그것을 파고들면 개개의 간절한 사연이 담긴 ‘나의 아리랑’이 된다. 아리랑이 지닌 힘은 뿜어내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동시에 이뤄지는 데서 나온다. 혼자서 품고 있을 때 마음은 간절하다. 그리고 주고받을 때, 비로소 마음은 ‘해소’될 기회를 얻는다. 음악처럼, 춤처럼, 그리고 시처럼.

행사 당일, 이현승 시인은 아리랑의 마음을 가리켜 배고픔이라고 했다. 안현미 시인은 할머니의 은비녀라고 했다. 시인들이 아리랑을 재해석한 시를 읽고 “제가 생각하는 아리랑의 마음은 ○○○입니다”라고 말할 때 사람들의 가슴에 불씨가 생겼으리라. 고비를 한 고개 한 고개 넘어가기 때문에 마침내 아리랑은 완성될 수 있다는 안은미 선생님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무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아리랑의 마음은 안간힘입니다.” 혼자의 마음이 함께의 마음들이 되기 위해 애쓰는 힘, 혹은 그 반대.

‘아리랑의 마음들’ 공연의 전날과 당일에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겨우겨우 아리랑 고개를 넘어왔는데 뭐 놓고 온 것은 없는지 초조한 마음 때문이었다. 어칠비칠하며 나는 아리랑을 넘었다. 2017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올 한 해 내 앞에 있는 아리랑 고개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돌이켜보니 매해 나는 아리랑을 살고 있었다. 기쁜 날도 있었지만 슬픈 날, 아픈 날이 더욱 생생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웃음은 휘발되지만 울음은 축적된다. 2018년이 온다. 아리랑의 새 마음이 오고 있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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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거요? 죄송한데 못 갈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벌써 세 명째다. 미안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해맑은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취소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제 놀랍지도 않다. 당장 다음주에 강의가 시작하니 새로 신청받기도 어려운 상황, 40명이 넘는 신청자에 기분이 좋아 ‘강의실이 너무 좁으면 어쩌지’ 걱정한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리스트에는 신청자들이 적어놓은 강의 신청 이유들이 다양하게 적혀 있다. ‘좋은 강의 꼭 듣고 싶습니다’ ‘너무 기대됩니다’ ‘다른 강의도 너무 듣고 싶어요’ 등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는데, 막상 통화를 해보니 아예 자신이 신청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사실 통화하기 전에 문자도 보냈다. 개강 날짜와 시간을 자세히 안내하면서 “혹시 일정이 변경되어 수강이 어려우신 분은 연락을 꼭 부탁드린다”고까지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당황스럽다. 안내 문자를 받고 취소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앞서 개강한 강의에서는 문자로 참석 확인을 부탁했는데, 막상 개강날이 되니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일부러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고 결과는 예상대로 처참한 수준이다. 한두 명 정도야 사정이 생기거나 일정이 바뀌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프로그램마다 이런 사태가 반복되고 있으니 문제다.

일단 강사 선생님께 고백부터 했다. 신청은 40명이 했는데, 확인해보니 20명이 됐다고. 심지어 강의 당일에 전화해서 취소한 사람이 4명이나 된다. 40명을 예상하고 대관해 세팅해놓은 강의실은 여유로울 정도로 자리가 남았다. 선생님은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료 강의는 원래 좀 그래요. 못 온다고 미리 연락하는 분은 그나마 양반이에요. 돈을 낸 게 아니라 절실함도 없고, 꼭 와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없고,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아서 저도 기대치가 낮은 편이에요.” 선생님 말처럼 무료 강의는 일단 신청해놓고, 막상 시작할 때가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오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예 신청 인원의 반만 온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작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못 오고, 프로그램 규모조차 예측하기 어려울뿐더러 수업 진행 방식에도 차질이 생긴다. 공공 영역의 특성상 비용을 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이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무료 프로그램 운영에 대해 고민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뭔가를 배우겠다고 마음과 시간을 내어 신청한 강의조차 이런 상황일진대, 돈을 내고 이용하는 서비스 업종은 더 심각하다. 사실 ‘노쇼(No-Show·예약부도)’ 근절 캠페인이 진행될 때만 해도 레스토랑 같은 일부 업종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쇼’가 꼭 식당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식당과 병원, 미용실, 공연, 고속버스 등의 업체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노쇼’가 초래하는 사회적 손실은 직접 비용만 4조5000억원, 간접 비용까지 포함하면 8조원이 넘는 수준이다. 지난 추석 연휴에 예매된 기차 승차권 역시 40%에 가까운 표가 반환됐고, 5% 가까운 좌석이 빈 채로 남았다고 한다. 광화문광장은 장기간 사용 신청을 내놓고 행사일에 닥쳐서야 취소하는 ‘노쇼’로 골머리를 앓다가, 동일한 행사로 7일 이상은 대관할 수 없게 규칙을 변경했다. 일부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선량하게 이용하는 대다수 사람들마저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노쇼’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정이 생기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의식 그 자체다. 누군가 그 시간에 쓰려던 사람이 자신의 ‘노쇼’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연말이다. 이런저런 모임이나 약속이 많을 수밖에 없고, 당연히 예약도 많은 시기다. 당연한 얘기지만 ‘예약은 약속’이다. 예약이 변경된다면 사전에 연락해 양해를 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당신이 갈지 말지 몰라서 잡아둔 그 자리가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자리였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도 언젠가는 당신도 모르게 ‘노쇼’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못 가면 못 가게 됐다고 미리 연락하는 것, 어렵지 않다.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시간에 전화 한 통, 클릭 한 번으로 기본을 지키는 것. 올 한 해를 보내며 할 수 있는 작지만 꼭 필요한 기본이 아닐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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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고용률은 그 나라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과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서로의 땀방울을 존중하며 연대의 환희를 나눌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은, 그 나라의 이주자, 장애인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혐오와 폭력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서로가 자유롭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국민총생산은, 노인과 젊은이가,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그리고 서로가 평등한 여성과 남성이 한데 어울려 얼마나 신비롭고 장대한 직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결코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부의 수준은, 무엇보다 그 나라의 산과 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푸르며, 어린이들은 그 위를 얼마나 마음껏 뛰놀 수 있는지 하나도 말해주지 못한다.

 

 

한국은 경제수준을 세계 10위 안으로 끌어올렸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서 치명적인 적신호가 켜졌다. 무엇보다 분배구조가 심각한 수준으로 망가져 있다. 자산과 임금 수준이, 협상력과 의사결정권이, 문화를 향유하며 건강하고 사람답게 삶을 영위할 개인들의 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꿈의 크기조차 점점 더 한쪽으로만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지 않아도 상식적인 수준의 분배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오감을 통해 느끼고 있다. 다만, 매일 경험하며 하루하루 무뎌지고 있을 뿐이다. 가난한 노인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폐휴지를 주워야 하고, 많은 노인들이 삶의 끝을 자살로 택하도록 내몰린다. 한국 청년들은, 이미 다 잡아가 버려 좋은 물고기가 없는 바다에서 계속해서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야만 살 수 있다고 주입받는다. 권리에 대한 기억은 이들에게서 서서히 퇴색했고, 젊은 영혼들은 음료공장 현장실습 과정에서 기계에 가슴이 눌려 목숨을 잃기도, 콜센터에서 실습교육 대신 실적 압박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나마 일이 있는 어른들은 긴 근로시간을 버텨내야 한다. 날마다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부부는 아이와 놀아줄 시간도 없다. 출산은 아득하고, 한번쯤 꿈꿔봤던 “행복한 집”에 대한 바람도 완전히 소멸되었다. 부모가 바깥 세계에서 몰고 들어온 불안감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반문 없이 달린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행복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낮고, 청소년의 자살률은 가장 높다.

해고에 대한 불안으로, 좀처럼 오르지 않는 임금에 대한 불만조차 꺼내보지 못하는 노동자가 3명 중 1명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 자원에 대한 통제력과 협상력은 낮아지고 있고, 개별 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은 확대되고 있다. 작아지는 밥그릇 자체에 대한 의문은 없이, 어느새 싸움은 노동 대 자본이 아니라, 불안정 노동자와 ‘좀 더’ 불안정한 노동자 간의 싸움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에서 부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전체 부의 반은 토지, 빌딩과 같은 자산이다. 그리고 자산에서 얻어지는 소득은 노동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난다. 상위 10%가 우리나라 전체 부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는데, 부의 불평등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이다. 한국 아이들의 꿈은 빌딩주인이고, 가장 ‘좋은’ 부모나 배우자가 되려면 자산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망가진 채 성장에 대한 맹목적 허기로 우리는 언제까지 달리기만 할 것인가. 한국의 경제성장은 상식적인 수준의 분배조차 가져오지 못했다. 일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에는 그토록 엄격하면서, 자산으로 인한 불로소득에 어떻게 이토록 관대할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복지정책을 내세웠던 정부도 대대적 조세개혁 대신 핀셋 조세정책만으로 생색내고 있다. 아이들의 보편적 권리로 약속되었던 아동수당마저 결국 선별적 급여로 추락될 조짐이다. 보편적인 복지서비스의 확대는 작은 예산의 일자리 정책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 상상력이다. 이것은 일과 소득의 새로운 관계, 공유자산에 대한 새로운 규칙, 성장과 분배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에게는 영웅적 수장이 아니라,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봄날 걷잡을 수 없이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새싹같이, 깨어있는 시민들 한명 한명의 급진적 상상력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를 압도시킬 만큼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자.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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