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의 최근작 <죽은 자로 하여금>은 사무장이 운영하는 요양병원의 병폐를 다룬다. 9만명 인구의 소도시 이인시의 한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무주’라는 인물이 종합병원의 비리를 밝혀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무주’가 비감 어린 정의감으로 밝혀낸 적폐 당사자는 사실, 거대한 비리의 한 고리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또한 거미줄 같은 비리의 연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사무장병원의 실태는 이런 것들이다. 첫째, ‘의료행위’보다는 환금성을 지향하는 ‘시장’으로서의 병원에서 ‘환자’는 치료대상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이다. 병원의 목표는 ‘환자의 완치가 아니라 병상이 비지 않는 것’이기에 보험급여의 노인들은 산술에 의해 수급되거나 배제된다. 둘째, 기업으로서의 병원은 제약회사는 물론 기타 의료 관련 업체들과 부풀리기식 거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이 종합병원 관계자들은 모두, 의료진도 예외 없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사기와 거짓을 묵인하고, 그리하여 거대한 타락의 씨줄과 날줄로서 부패를 양산하는 데 기여한다.

‘무주’는 혁신위원회에서의 활약으로 병원운영의 실권자이자 환자 ‘삐끼’인 ‘이석’의 비리를 적발하고 사직하게 만들지만, 그 행위가 정녕 ‘정의감과 도덕심’의 발로인지 혹은 사무장의 농락에 의한 대리 행위였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태어날 아이를 위한 정의사회 구현이 그의 내부고발을 정당화시켜주었지만 그마저도 유산되고, 상사의 명령에 의해 체납병원비 관리직을 맡게 되자 무주의 고뇌는 더욱 깊어진다. 병원비를 장기체납한 노인 환자를 번쩍 들어 간이침대에 옮기고 쇼핑백에 환자의 초라한 물건을 담아 던질 때, 무주는 이제 정의로운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아이히만처럼 ‘악의 평범성’을 상징하는 괴물로 변한다. 괴물은 무주만이 아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늙은 아버지를 묻지도 않고 살려놓았다고 악을 쓰는 자식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타락의 ‘용접공’으로 기능하는 직원들로 확장된다. 무서운 것은 ‘우리’는 결코 ‘그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코 모레티는 <공포의 변증법>에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를 부르주아 문명 공포의 두 이름으로 칭했다. 그에 의하면 이 두 괴물은 각각 산업혁명기에 탄생한 노동자와 자본가를 상징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사람의 신체기관을 수집해서 만든 일종의 패치워크 누더기이다. 괴물은 아내를 얻고 인간처럼 살기를 욕망하지만, 그 불가능성을 알고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가족을 살해하고 멀리 달아난다. 프랑코 모레티는 이 “집단적이고 인공적인 피조물”인 괴물에서 마르크스가 묘사한 소외된 노동의 변증법, 즉 ‘더욱더 기형화되고 야만화되고 무력해지고 노예화되는’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을 읽어낸다. 반면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은 이름만 귀족일 뿐, 손수 가사일을 돌보고 사치를 삼가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내면화한 검소한 자본가를 의미한다. 드라큘라는 난폭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으며 다만 한 방울의 피도 허비하지 않고 성실하게 타인의 피를 빨며 자본의 생리를 실행할 뿐이다. 이 인격화된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을 의미한다.

프랑코 모레티가 부르주아 문명 공포의 상징으로 지목한 두 괴물은 편혜영의 소설에 나오는 괴물들과 다르지 않다. 교통사고로 팔과 다리에 철심을 박고 누워있는 ‘이석’의 아들이 그렇듯, 병들고 가난한 환자들은 ‘인간’에서 삭제당한 프랑켄슈타인들이고, 이들의 피로 생명을 유지하는 병원은 흡혈귀이다. 그러나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경계는 모호하다. 편혜영 소설의 평범한 병원 직원들이 헌신적인 노동자와 비리대행자를 오가듯, 두 괴물을 조합한 닮은꼴들이 주위에 즐비하다. 가정과 직장에서, 거리에서 갑을관계를 수없이 바꿔가며 사는 우리들은 프랑켄슈타인인가, 드라큘라인가. 조직의 작은 부속품이 되어 성실하게 굴러가는 우리들은 착취자인가, 피착취자인가. 김수영 시처럼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다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선량하기까지 한’ 적들은 사방에 그리고 우리 내부에도 있다는 것, 김수영 말대로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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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커뮤니티에서 내 저서 &lt;한국, 남자&gt;가 5·18민주화운동을 모독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 근거는 책의 목차 중 ‘남성성의 극한: 80년 광주의 공수부대’라는 부분이다. 놀랍게도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목차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발을 하겠다거나 5·18기념재단에 제보를 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중이다.

나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군이 치른 3번의 ‘전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내전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이다. 두 번째는 희박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박정희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이다. 그리고 세 번째 전쟁이 바로 신군부가 정당성 없는 군부독재를 이어나가기 위해 광주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였던 5·18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 광주의 시민들을 학살했던 계엄군이다. 생각해보면 계엄군의 대부분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일부의 이탈이나 저항이 존재했지만 계엄군은 마지막까지 대오를 유지하며 광주의 시민군을 학살하고 도시를 무덤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징집된 병사들, 즉 군복무가 끝나면 다시 시민이 될 사람들이 이런 잔혹하고 부정의한 일에 항의하지 않고, 그 명령을 수행했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이탈하면 죽인다는 상관들의 협박을 받았고,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병사들을 골라내 때리고 기합을 주는 내부의 폭력에 시달렸으며, 광주의 시민들이 다 간첩이라는 가짜정보를 세뇌당하듯 주입받았다. 또 진압 과정에서 동료 병사가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며 증오심을 키웠고, 산속에서 숙영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였느냐고 묻지 않을 수는 없다. 그로부터 내가 발견한 것은 한국 사회의 권력자들이 만들어 내고자 했던 남성성의 한 극한이다. 이는 18세기 무렵 최초의 근대적 남성성이 등장했을 때부터 모든 권력의 꿈이었다. 의문을 갖지 않는 건장한 육체들,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고, 더럽고 잔인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들. 국가는 이 남자들을 모든 권리를 가진 일등시민으로, 나머지 비남성들을 이등시민으로 만들고 법과 제도에서부터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차별대우했다. 그렇게 일등시민이 된 남자들은 군대와 일터와 사회에서 권위에 복종하고, 대신 이등시민들을 착취하면서 실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상대적 우위를 누렸다. 이들의 충성은 요란한 군복을 입은 늙은 장군들과 비단옷을 입은 부자들에게 바쳐졌고, 이들은 평범한 남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착취하면서 돈과 명예를 독식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는 ‘남성성’이다. 그러니 나로선 대체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기 어렵다. 남성성은 좋은 것인데 그것의 극한이 공수부대라고 했으니 광주를 모독했다고 생각했을까? 광주민주화운동이 한국의 ‘역사’로 편입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두 번의 정부를 거쳐서야 가능했다. 아직도 미처 밝히지 못한 진실들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여전히 일각에서는 광주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날조를 유포하고 있으며, 과거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에 기념행사 때마다 크고 작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단순히 ‘민주화운동’이라는 화석화된 말로는 광주를 알 수도, 지킬 수도 없다.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대체 광주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에 대한 다른 관점과 해석이 광주에 대한 모독이란 말인가? 그저 마음에 안 드는 책에 광주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허수아비와 싸우는 꼴이야말로 광주를 빌미로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심보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아직도 신고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얼마든지 신고하시길. 참고로 5·18기념재단은 기부도 받고 있다. 뭐가 더 생산적일지는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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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지역의 명문여고를 졸업한 아내에게 출신고의 교훈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을 일이 있었다. 그는 졸업한 지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착한 딸’과 ‘어진 어머니’라는 교훈을 기억해 냈다. ‘참된 일꾼’은 내가 찾아서 보여주자 곧 그것이 맞다고 답했다. 그 교훈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는지 물어보니 “아니 별로…”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아내가 졸업한 W여고의 교훈 3가지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고이든 남고이든 굳이 그 교훈에 ‘○○한 딸·아들’같이 특정 성별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착한’이라는 형용사는 권장될 만한 것이지만 그것이 여성을 수식하고 나면 그 뜻이 묘하게 변질되어 버린다. ‘든든한’이라는 형용사가 남성과 어울려 ‘든든한 아들’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면 더욱 한 단어의 훼손이나 오염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 딸은 착해요” “우리 아들은 든든하죠” 등과 같은 익숙한 결합은 단순히 국어사전에 명시된 의미를 넘어서, ‘훈’을 건네는 주체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고 가문(가정)이라는 소집단의 욕망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사회는 착한 딸들에게 많은 순종과 희생을 강요해 왔다. 착함을 강요받은 딸들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받지 못했고 돌봄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났다. 그들은 참된 일꾼이 되어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가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거나 형제의 학비를 보탰다. 1970년대의 이름 없는 어린 여공들은, 자라서 어진 어머니로서 착한 딸과 든든한 아들을 키워내는 역할까지를 도맡았다.

<별들의 고향>(1973)이나 <영자의 전성시대>(1973)의 서사이고, 최근에는 <우리들의 누이>(2018)라는 소설에서도 이 시기의 여성들을 다루었다. 그런 젊은 날의 서사를 가진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들에게 그만한 빚을 지고서도 여전히 염치없이 그 훈을 다음 세대에게까지 전하는 데 열심이다.

나는 나의 자녀가 (특히 딸이) 3년 동안 ‘착한 딸’, ‘어진 어머니’, ‘참된 일꾼’이라는 훈을 보며 등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새겨진 큰 바위를 보는 일도, 그것이 명시된 교가를 부르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

물론 나는 그가 착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나와는 달리 어진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참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순종하거나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결혼과 출산을 온전히 자신이 선택하기를 더욱 바라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러니까 사회적 개인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른 공립여학교의 교훈이나 교가를 직접 찾아보면서, 나의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실, 순결, 봉사’라든가 ‘겨레의 참된 어머니가 되자’라든가 ‘여성의 착한 꿈은 여기에서 자라고’와 같은 훈들을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그만 미안해지고 말았다. 별로 이상한 교훈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생명을 다한 줄 알았던 언어들은 학교에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런데 W여고는 몇년 전에 교훈을 바꾸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교감으로 재직했던 모 선생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도 ‘착한 딸, 어진 어머니, 참된 일꾼’이라는 교훈이 낡은 것이라 생각해 바꾸고 싶었다. 학생·학부모·교사 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901명이 찬성하고 402명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훈 개정을 위한 공모전을 열기로 했으나 총동문회에서 만장일치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항의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온 졸업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시기 지역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동문회는 “시대가 변해도 교훈은 변치 않는 학교의 전통”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제는 노년이 되었을 W여고의 초기 졸업생들은 착한 딸로서, 어진 어머니로서, 그리고 참된 일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태도를 형성해 왔을 것이다. 그 언어에 익숙해진 몸은, 그것을 쉽게 ‘전통’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 훈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기에 익숙해지고 만다.

나는 주변의 훈을 바꿀 것을 모두에게 제안하고 싶다. 교훈뿐만 아니라 사훈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일상공간의 모든 훈을 바꿀 필요가 있다. 순결, 정숙,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한다, 래미안캐슬아트빌, 교수마을과 같은 기괴한 언어들이 여전히 이 사회를 포위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이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그 언어로 자신의 몸을 형성해 갈 어린 세대들(학생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된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일은 누군가를 구속하고 승리를 선언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우선, 주변의 언어를 전복시켜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그 훈들을 바꾸어야 한다. 그에 더해 당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의 교훈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당신의 아이들이 여전히 그 훈을 노래하고 교정을 거닐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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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울면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다. 울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던 시절도 있었다. 사소한 것에도 떼를 쓰고 투정을 부렸다. 툭하면 울어서 울보, 여차하면 떼를 써서 떼보라는 별명을 얻었다. 울어서 솜사탕을 얻고 떼써서 아이스크림을 얻었다. 녹는 것들이 많았다. 녹아서 흘러내리는 것들이 많았다.

암 투병 중인 아빠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은,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새겨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을 하고 귤을 까먹고 낙엽을 두 장 주워 서로 한 장씩 나눠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성인이 되고 이런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내가 몰랐던 아빠의 새로운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남은 시간이 참으로 귀하다.

얼마 전 허수경 시인의 사십구재가 있었다. 나는 약력 보고를 했는데, 약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긴 글을 적었다. 더 무색한 것은 한 사람의 삶이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능하다면 수경 누나가 했던 말과 썼던 글들을 밤새 들려주고 싶었다. 사십구재를 마치고 아빠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아빠가 응급실로 옮겨졌다.

주치의가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몸과 마음은 한통속이었다. 지지난주까지 나와 근린공원을 산책했던 아빠였다. 20여년 전 얘기를 나누며 그땐 왜 그랬을까 얘기하며 깔깔 웃기도 했다. 얼른 몸을 추슬러 바다를 보러 가자고도 했다. 아빠는 바다를 보면 아득해진다고 했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말,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좀체 떠나지 않았다. 구급차를 타고 아빠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밤,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는 아빠에게 무엇을 얼마나 했을까. 올 한 해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고, 그 무능함을 끝내 외면할 수 없어 슬펐다.

평소에 아빠는 할 것은 다 했느냐고 종종 물으셨다. 채근하거나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할 것에는 할 일뿐만 아니라 할 말, 나아가 할 도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차근차근 할게요, 라고 답하면 아빠는 씩 웃었다. 그래, 나는 네가 내 아들인 게 좋다. 그 말에 얼굴이 벌게져 헛딴데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요즘 들어 애를 그렇게 쓰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말했어야 했다. 저도 당신이 제 아빠인 게 좋아요. 부자지간이라 쉽게 나오지 않던 말이, 실은 부자지간이라 부러 애써서 해야 할 말이었던 것이다.

아빠에 대해 알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사실 또한 나를 슬프게 했다. 긴 시간을 함께해도 몰랐던 것들이, 상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유심함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자책하다가도, 마음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을 아직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손을 잡았다.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 온기를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무리 준비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마음일 것이다. 물질적 준비는 차곡차곡 모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적 준비는 상상을 요하는 것이다. 소중한 대상이 떠나고 난 다음 장면은 쉽사리 그려지지 않는다.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어떤 것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아버지라고 안 쓰고 아빠라고 쓴다. 아버지라고 안 부르고 아빠라고 부른다. 아빠라고만 부르던 시절, 아빠는 뭐든 해낼 수 있었으니까. 말만 하면 뭐든 만들어냈으니까. 배구도 잘하고 바둑도 잘 두고 당구도 잘 치던 아빠였으니까. 한자와 수학에 능했던 아빠였으니까. 시 쓰는 나를 자랑스러워하던 아빠였으니까.

허수경의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개정판 작가의 말을 읽는다.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아빠에게 사랑한다, 라고 말해야겠다. 잘 사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잘 떠나는 일일 것 같다. 남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잘 보내는 일일 거다. 아빠가 한 번이라도 더 웃으실 수 있게 말을 많이 건네야겠다.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야겠다. 꼭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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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문학인들의 모임에 꼽사리꼈다. 신간을 낸 소설가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정작 그날의 주인공은 자리에 없는 래퍼 산이였다. 그가 ‘I am feminist’라는 제목으로 16일에 발표한 음원 때문이다. “산이의 진실된 마음의 소리일 거다” “아니다. 안티 페미니즘을 풍자하기 위해 무식한 이야기의 전형을 긁어모아 전시한 것이다. 예술성 있는 퍼포먼스다” “풍자를 의도했다면 장치가 더 필요했다. 산이가 그동안 써 온 가사들이 그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풍자보다는 평소의 신념을 표출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등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산이의 진심’보다 더 주목하고 우려한 것은 남성 유저가 대다수인 온라인 커뮤니티의 반응이었다. 산이 칭송으로 대동단결된 그 분위기 말이다. “ ‘페미’가 온 나라를 꽉 잡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보면 산이의 용기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비장한 응원부터 “무슨 내용인가요? 너무 빛나서 선글라스 끼고 봐도 안 보이네요”라는 과장 어린 숭배까지 다채로운 칭송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내용의 오류 점검을 포함한, 작품성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에는 너무 일방적인 환경이었다. 평소 다양한 관점과 깊이 있는 분석을 접할 수 있었던 음악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상황이 더 심각하다 느꼈다.

산이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디스곡을 발표해 화제가 된 래퍼 슬릭(왼쪽)과 제리케이. 두 사람은 과거에도 힙합계의 여성혐오적 문화를 비판했다. 김영민 기자

반면 산이를 디스하는 곡을 발표한 래퍼 제리케이와 슬릭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별안간 엄격하고 근엄해졌다. 산이의 가사 “데이트할 땐 돈은 왜 내가 내, 지하철 주차장 자리 다 내줬는데”에 “CEO 고위직 정치인 자리 대신에 지하철 버스 주차장 자리로 내는 생색”이라고 대응한 제리케이의 가사를 반박하는 장문의 글이 특히 인상 깊었다. 고위직에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건 사실이지만 남자라고 다 고위직에 앉을 수 없고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며 결정적으로 운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정서적 맥락을 반영해  요약하면 ‘난 남자이고 고위직 아닌데? 남자로서 이득 본 거 하나도 없는데? 완전 억울한데?’가 되겠다.

내가 어리둥절했던 건, 그런 식의 비판은 산이의 곡에 대해서도 가능해서다. 산이 가사에 대고도 ‘난 차 없는 여자라 주차장 이용 안 하는데? 지하철에서도 양보 받은 적 없는데? 오히려 임산부석에 앉은 아저씨들 볼 때 많았는데?’와 같이 반박할 수 있다. 앞서 벌어진 일반화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같은 논법으로 대응한 것만 엄격하게 따져 묻는다면 명백한 이중잣대요, 기시감이 느껴지는 부조리다.

네 편, 내 편 갈라 차별하는 행태의 산물이라고 본다. 산이는 ‘우리 편’이니 너그럽게 봐주고, 슬릭과 제리케이는 ‘메갈’ ‘페미’ ‘비정상’의 편일 테니 쳐부수자는 대동단결. 하지만 ‘산이 칭송자’들은 곧 ‘아… 우리 편 아니었나 보다…’ 하고 머쓱해졌다. 19일 새벽, 산이가 인스타그램에 ‘I am feminist’의 가사 한 줄 한 줄마다 주석 달아 해명한 글을 올린 것이다. 요약하면 이 곡은 풍자의 의도로 만들어졌고,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 이를 화자로 설정했다는 것. 그 전부터 산이가 쓴 표현에 계속 열받아오고 이번에 결국 임계점을 넘은 이들은 해명에도 가라앉지 않았고,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배신감에 휩싸인 사람들도 갑자기 태세 전환했다. 이제 산이는 사방에서 욕먹는다.

그래도 속한 집단의 대세에 편승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이들보다는 산이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적어도 자기 신념을 (비록 구릴지라도) verse로 갈무리해 직접 내뱉었으니까. 반면 깔짝깔짝 ‘상대편’ 흠집내기만 골몰하며 스스로의 논리적 오류에는 귀 막고 입 닫는 저 거대한 덩어리는 도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산이 넘어 ‘산’이다.

힙합 음반 최초로 퓰리처상을 거머쥔 <DAMN.>의 켄드릭 라마는 말했다. 정보를 듣고, 편견 없는 시각을 갖고, 궁금한 것은 혼자 탐구하는 능력이 삶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누구보다 산이에게 가닿을 말이겠지만, 래퍼 아닌 사람들도 적용하면 좋을 삶의 태도로 보인다. 무언가 절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볼 때 나와 다른 편은 아닐까 방어하며 선입견 갖기보다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청하고 스스로의 머리로 고민하는 ‘개인’이 한국 사회 다수를 차지하는 그날을 위해 문학인들과 건배했다.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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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삿포로에 다녀왔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고 싶었지만 머무는 기간 내내 삿포로는 흐리거나 비가 왔다. 그래도 좋았다. 눈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어도 상쾌하고 청량한 공기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비를 맞으면서 미세먼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 만인지! 하지만 이 달콤함도 잠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한국의 하늘은 뿌옇고 노랗고 탁하기까지 하다. 수도권 미세먼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의심받는 ‘영흥 화력발전소’ 위를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일본에서 출발할 때의 하늘과 도착할 때의 하늘 색깔이 너무 다르다는 것에 새삼 놀라고, 내가 마셔야 할 공기가 저 탁한 공기라는 것에 씁쓸해진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날에도 미세먼지가 심해서 안개와 미세먼지가 뒤섞여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돌아오는 날 역시 마찬가지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잠시나마 북해도의 파랗고 쾌청한 공기를 마음껏 누리다 와서 그런지 인천공항에 도착해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무리 자주 겪어도 이 탁한 공기에서 맡아지는 비릿한 쇠냄새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비행기에서 봤던 거대한 먼지 띠가 도시 위를 두르고 있고, 바다 위를 달리는데도 시야가 흐릿하다. 게다가 분명히 ‘미세먼지 나쁨’ 예보가 떴는데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공기 질과 상관없이 마스크를 일상적으로 하고 다니는 일본에서 마스크를 한 사람을 더 많이 마주친 느낌이다.

날씨만큼 사람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게 또 있을까? 나 같은 기분파는 훨씬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기분이 안 좋다가도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우울한 일이 있더라도 금방 괜찮아지지만, 날씨가 이런 상태라면 심란해지기 일쑤다.

허수경 시인의 “태양이 질 무렵 사막에서 일어난 먼지는 태양과 함께 진다”라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독일에 거주하던 시인은 “사막에 대해서라면 조금 아는 바가 있다”고 했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나는 미세먼지에 대해서라면 조금 아는 바가 있다. 아니, 한국에 살다 보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한국은 이달 초부터 열흘 넘게 미세먼지(PM10)와 초미세먼지(PM2.5)가 ‘나쁨’ 수준을 보이고 있을뿐더러 중국발 미세먼지, 디젤차를 독려했던 정부의 실책, 기후 변화라는 3종 세트 탓에 미세먼지는 계절을 막론하고 점점 더 잦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위로 떨어지는 태양은 아름답기라도 하지 온통 뿌옇기만 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노을 생각은 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한국을 벗어나면 괜찮을까? 당장 공기 질이 좋기로 손꼽히는 캘리포니아조차 이번에 발생해 역대 최대 인명 피해를 낸 대형 산불 ‘캠프파이어’의 영향으로 공기 질이 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나빠졌다고 한다. 기후 변화로 가뭄이 심해지면서 이렇게 큰 산불이 났다고 하니, 캘리포니아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북해도 역시 원래 눈이 와야 하는 기간인데, 이상 기후로 눈이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예전처럼 많이 내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미세먼지의 습격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산불이나 폭설 등 다른 형태로 기후 변화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한국을 벗어난다고 해도 또 다른 형태의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중국의 난방과 함께 찾아올 미세먼지의 공습을 생각하면 추운 게 낫다 싶다가도, 지난해 추위를 생각하면 또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던 먼지 뭉치 캐릭터들처럼 미세먼지들이 인간들을 도와주는 먼지로 바뀌는 신기술이라도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생각마저 드는 초겨울이다. 내년 2월부터 미세먼지대책 특별법이 본격 시행되고 범부처 미세먼지 개선기획단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자주 지나다니는 길은 잊어버릴 수 없어. 우리가 잊어버릴 수 없는 이유는 마음속에서 서로 자주 지나다녔기 때문이야.” 허수경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에 나오는 이 대목을 곱씹으며 생각한다. 지금껏 지나다녔고 앞으로도 자주 걷게 될 한국의 길들이, 풍경들이 뿌연 먼지와 탁한 공기로 기억되지 않기를….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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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입동(入冬)이 벌써 지나갔다. 소설(小雪)과 대설(大雪)도 휙 지나갈 테지. 전통사회의 일상 감각에서 입동은 바야흐로 겨울이 바라보이는 때다. 입동이란 ‘겨울에 들어서다’가 아니라 ‘이제 곧[立] 겨울[冬]이다’ 하는 뜻이다. 본격적인 겨울은 소설 즈음에 시작된다고 느꼈고, 대설 즈음에 한겨울을 실감했다. 이윽고 동지(冬至)가 되면 한 해가 이울었다.

눈이 펑펑 내려 쌓이지 않을지라도 찬바람과 언 땅에 겨울이 먼저 깃들었다. 정학유(1786~1855)의 <농가월령가> ‘11월령’의 첫 구는 대설 즈음 당시 사람들이 느낀 계절 감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십일월은 중동[仲冬, 한겨울]이라 대설동지(大雪冬至) 절기로다/바람 불고 서리 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이때는 농민과 서민이 한 해의 결산을 하는 때이기도 했다. 춘궁기에 관청에서 꾼 곡식의 상환, 세금과 소작료 내기, 그리고 일꾼에게 줄 품삯과 빚에 대한 결제는 음력 11월에 반드시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아등바등 한 해 내내 지어 갈무리한 곡식이 어느새 야금야금 이 구멍 저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고물가-저임금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월급은 월급날을 스쳐지날 뿐’이라고 자조하지만 <농가월령가>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엄부렁하던 것이 남저지 바이없다.” “갈무리한 곡식이 처음에는 많아 보였지만 여기저기 갚다 보니 남은 것은 거의 없다”라는 뜻이다. 그래도 “콩나물 우거지로 조반석죽(朝飯夕粥) 다행이다”라고 읊을 여유는 있었다.

정학유와 동시대를 산 김형수(金逈洙)는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에서 음력 11월을 이렇게 읊었다. “누가 알랴 낟알마다 피땀 어린 곡식(誰知粒粒辛苦穀)/꿀벌처럼 모았지만 다른 사람한테나 돌아가지(如蜂釀蜜還屬彼).” 그래도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는 춘궁기는 아니었고, 계절이 강제로 마련한 농한기에 군것질거리는 더욱 간절히 생각났다. “몸은 비록 한가해도 입은 궁금하네(身是雖閒口是累)”라는 한마디에도 그 시절 옛사람들의 또 다른 생활 감각이 드러난다.

이때 김치는 궁금한 입을 달래는 한 가지 호사, 다른 별미로 건너갈 징검다리였다.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메밀 사리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썰어 얹은 냉면은 이때가 제철이었다. 서울에서는 이때 새우젓국을 안치고, 무, 배추, 마늘, 생강, 고추, 청각, 전복, 소라, 굴, 조기 등 다양한 재료를 더해 김장을 했다. 조그만 무로는 동치미를 담갔다. 대설 전 음력 10월의 별미 만두로 멥쌀피만두, 꿩고기만두, 김치만두[菹菜饅頭]가 있었다. 홍석모는 “그 가운데 김치만두가 가장 무던한 이 계절의 음식”이라고 했다. 제주산 감귤도 본격적으로 유통되었다. 청어, 전복, 대구도 때를 만났다. 두부도 돼지고기도 찬바람 덕분에 더욱 맛났다. 19세기 한글 조리서 <주식방문>에 실린 ‘저육양방(猪肉良方)’을 보자. 생돼지고기를 주사위 모양으로 썰어 기름에 볶다가 젓국에 끓인다. 여기다 두부를 썰어 넣고, 두부가 부풀도록 한소끔 끓여 완성한다. 돼지고기의 풍미가 젓국을 만나 강화되고, 표면이 터진 두부가 은근한 구수함을 더한다. 별소리 없어도 여름보다는 겨울 별미로 마침맞다.

오로지 먹고 노는 계절만도 아니다. 농민과 서민에게 농한기란 곧 공부하는 때이기도 했다. <농가십이월속시>는 이때에 “어린이는 글 읽고 아이는 말 배운다(長兒讀書幼學語)”고 했다. 향촌 사람들은 다듬이 소리, 글 읽는 소리, 갓난아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삶의 기쁨, 일상생활의 보람을 느꼈다. 나와 마을이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이때는 보통 사람들이 한 해 중에 제대로 책을 읽는 계절이기도 했다. 농민은 자신이 선택한 이야기책을 베끼고 또 돌려 읽으면서 겨울밤을 지냈다. 농업 기술서에 파고드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농가십이월속시>가 읊는다. “어느 마을에 훈장님이 있는가(何村冬烘先生在)/어떤 이는 이야기책을 베끼고, 어떤 이는 농서를 읽는다(或抄兎冊看牛經).”

갈무리한 곡식을 세금과 영농비용으로 내보냈지만 사람들은 한 입의 별미로 나와 공동체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내 흥미에 따라, 내 필요에 따라, 책을 베껴 간직하고, 보다 깊은 독서도 했다. 재미난 이야기 베껴쓰기와 돌려읽기는 문학과 문화의 가장 오래된 바탕이다. 일하는 사람이 책에 파고들면서 세상에는 교양이 쌓인다. 아이들은 책 읽는 어른들로부터 말과 글을 배우며 자라났다. 군것질거리가 나는 그저 한철, 그때에도 그저 먹는 게 다가 아니었다. 입맛을 다실 뿐만 아니라 읽고 배우며 겨울이 깊어갔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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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는 유사 이래 여성이 어떤 일을 담당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후반 환경오염과 전쟁으로 출산율이 급감하자 남성들은 길리어드라는 전제국가를 건립하고 여성들을 잡아다가 네 부류로 나눈다. 아내, 하녀(집안일), 시녀(대리모), 그리고 비여성. 불임의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갖도록 강제된 ‘시녀’는 고위층 부부에게 자궁을 제공한다. 가사일을 담당하는 하녀들은 ‘아주머니’라 불리며 ‘시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출산과 가사,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비여성’들은 콜로니라는 게토에 갇혀 독극물을 처리하는 강제노역에 종사한다. 작년 드라마화되어 인기를 끌었고 또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 여성들이 낙태금지법안에 맞서 붉은 망토를 입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픽션으로 돌려놓으라(Make Margaret Atwood fiction again)”고 외치며 시위를 벌여 더욱 화제가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자궁의 공공화’를 둘러싼 이 기묘한 이야기가 21세기 현실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경악은 단지 미국 여성만이 아니라 ‘전국가임여성지도’를 지닌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여성의 노동은 저 <시녀 이야기>의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19세기 이후 여성은 법적 지위가 향상되는 것에 더불어 공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임금격차나 유리천장 등에서 보듯 현저한 남녀차별을 겪고 있다. 또한 여전히 ‘섹슈얼리티’를 부수적이며 함축적인 노동수단으로 제공해야 하는 이중노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송충이 잡는 일을 하면서 감독에게 몸을 바쳐야 했던 극빈층의 복녀를 그린 김동인의 <감자>에서부터 지주의 성적 유린, 방적공장 감독의 유혹에 시달리는 여성 ‘선비’를 그린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 문학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폭로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위력에 의한 성범죄 등은 이렇듯 ‘(여성)노동’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삭제하지 못한 남성지배구조의 장구한 역사에 대한 뚜렷한 증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에 기초한 성별 분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남성노동으로 가정된 노동의 변화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즉 산업화와 첨단 기술에 의해 남성 육체노동 대부분이 기계화되고 사무직과 서비스직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의 미래’는 기존 성별 분업의 해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가사·육아 분담, 그리고 가사노동의 외주화는 임신과 출산의 기술적 진보, 돌봄로봇, 섹스로봇 등의 확산(‘킹키스 돌스’라는 섹스 인형 대여업소는 작년 토론토에 섹스 인형 성매매 업소 1호점을 열었다고 한다) 등으로 이어져 다양한 대체노동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신의 영역에 진입한 호모사피엔스는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이 완전히 무관해지는” 특이점을 지나게 될 것인가. 이 포스트휴먼의 노동의 미래가 왠지 미심쩍은 것은 기술의 진보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유사 이래 희소성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이 더 강력한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완전정복은 ‘노동 민주화’ 대신 민족, 인종, 성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기술·자본력을 갖지 못한 많은 영세업체들(가구공장 등 위험한 산업현장)이 여전히 육체노동을 이주노동자에게 외주화하고 있듯이 기술에 의한 젠더 해체와 노동혁명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돌봄과 가사 노동의 다양한 아웃소싱(홍콩에서 가사나 육아 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여성)이나 결혼이주여성의 연쇄사슬(베트남 오지의 총각은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여성 대신 캄보디아 등으로부터 ‘아내’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성매매와 대리모로 생계를 부양하는 하층 여성 등을 흔히 본다.

첨단 기술과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젠더노동의 대폭발 지점은 지극히 유토피아적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일부 특권층에게나 허용된 꿈이거나 ‘노동의 종말’ 같은 디스토피아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인간노동’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함께 다다른 우리에게 더욱 시급한 것은 여성 노동의 비전보다 여전히 성적 차별과 계급차별이라는 현실에 갇힌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구원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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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26일 한국경제 오형규 논설위원은 ‘청년의 삶을 저당 잡은 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내용은 귀족노조, 직능단체, 시민단체 등이 신규고용창출을 할 수 있는 구조조정과 노동개혁을 막고 있는지라, 청년들의 취업과 삶이 어려워졌다는 그야말로 흔한 사랑노래 같은 것이다.

경제지들이 엄청난 비리가 있는 것처럼 연일 맹공을 퍼부었지만 대다수가 과장이었던 고용세습 문제를 시작으로, 승차공유 서비스에 반대하는 택시기사들과 영리병원에 반대하는 의료계와 ‘좌파 시민단체’ 등이 취업준비생들의 헬조선을 만들어낸 주범들로 지목되었다.

여기까지도 익숙한 논리다. 하지만 이 칼럼의 마지막 문단에서 나는 아연실색했다. “문화연구가 최태섭이 언급했듯 ‘우리편이라는 괴물’에 끌려가선 답이 없다. ‘우리편’도 개혁할 수 있어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것이다”라니? 여기서, 갑자기, 내가, 왜?

내가 ‘우리편이라는 괴물’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쓴 것은 2011년의 일이다. 그리고 내가 괴물이라 지칭한 것은 오 논설위원의 이야기에 오히려 반대되는 이야기다. 반MB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며 진보진영 내의 다른 목소리들을 억압하던 이들, 나꼼수에 대한 비판을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이던 지지자들, 민주노총을 비롯한 ‘구’진보에게 ‘노동’ 같은 낡은 개념으로 재를 뿌리지 말라고 윽박지르던 ‘깨어 있는 시민’과 그들의 ‘단결된 힘’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편이라는 괴물은 그 ‘구’진보가 자신의 가치로 삼았던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는 한편, 그들이 가진 얼마 안되는 자원과 도덕성은 재물로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지금도 트위터의 민주노총 계정으로 가면 비슷한 결의 무례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심지어는 며칠 전 민주노총 계정에 올라온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소속인 21년차 식당조리원의 기고문을 공유했더니, 대뜸 “민주노총 너네들 하는 짓을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 싶지 않다”라는 메시지가 나에게까지 배달되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조합원도 아닌 저에게 그런 말씀 하셔도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이렇게 답변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한편, 오 논설위원은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청년을 주워섬기지만, 선거 때뿐이다. 청년수당으로 입막음할 뿐, 청년 일자리를 위한 구조조정, 노동개혁 등 난제들은 죄다 외면한다”라고 썼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전 정부가 청년을 팔아서 대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했던 대표적인 사례들이 바로 저것이었다. ‘장그래를 위해 노동개혁을 해서 2년 만에 잘리던 비정규직을 4년 만에 잘리게 바꾸겠습니다’ 같은 말장난을 기억한다면 할 수 없을 이야기다.

청년이 빈곤해지는 것이 걱정이면 청년임대주택과 대학생기숙사를 반대하는 건물주들에게 따져볼 일이다. 청년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진 것이 안타깝다면 청년의 정치진입을 막고 있는 기성정치제도에 날을 세워야 한다. 저런 것들이 10% 남짓의 조직률을 가진 노조보다 몇 배는 더 청년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노조는 무조건 선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심지어 민주노조 내부에도 자리 지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성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소수자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이것들에 맞서서 더 정의롭고, 더 포용적이고, 더 서로 돕는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외부의 요구들이 왜 없겠는가?

애초에 세상에 절대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있지 않다. 자신을 돌아보길 거부하고, 약하고 작은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우리편’의 부정의에 눈감으면서, 남의 허물에는 민감한 그 모든 곳에 괴물이 있다.

하지만 그 괴물과 맞서려면 일없이 청년들을 불러다가 노조와 싸움이나 붙이려고 하는 것보다는 더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그게 우리편이라는 괴물에 대한 원작자의 생각이다. 

부디 착오 없으시길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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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3일. 학생의날을 맞이하여 교사들의 교내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해결 및 예방책 마련을 촉구하는 ‘스쿨미투’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고 외쳤다.

2015년 이후 대중 페미니즘 운동은 대체로 익명의 청년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자 운동의 형태였다.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했을 때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와 2차 가해, 무고죄 고발, 그리고 조리돌림이었으므로 이는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미투에 이르러 여성들은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스쿨미투도 마찬가지다. 교사의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한 이후에 학생들은 진학과 취업 등을 빌미로 2차 가해를 당해왔다. 그들의 싸움은 이런 현실적 위협을 감수하고 있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페미니즘을 그저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기성세대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지금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을 그저 낯선 존재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등이 주최한 ‘스쿨미투’ 집회에 참가한 학생과 시민들이 교육 당국의 책임있는 자세와 대책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역의 한 진보단체에 강의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강의가 끝나고 한 여성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중학생 딸이 최근 혜화역에서 열렸던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딸의 정치적 행동을 존중하는 어머니로서 그 서울행을 막지는 않았지만, 시위 다음날부터 그분이 즐겨듣는 한 뉴스 방송이 혜화역 시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걱정은 심해졌다.

디지털 성범죄 편파수사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집회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그 방송은 3차 시위 직후 3일 연속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에서 혜화역 시위에 대해 언급했다. “문재인 재기해”라는 구호를 비롯하여 진행자 자신이 워마드 사이트에서 관찰한 몇 가지 정황을 바탕으로 극우 단체가 혜화역 시위에 개입되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토로했던 것이다.

깜짝 놀란 그분은 딸에게 방송을 들어보라고 권했지만, 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모녀 사이의 갈등이 심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던 와중에 우연히 페미니즘 강의를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분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강의를 들어보니 딸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갑질 폭력의 최고치를 갱신하면서 연일 충격을 주고 있는 한국미래기술의 양진호 회장은 디지털 성범죄와 전쟁을 벌여온 청년 여성들이 끊임없이 지적했던 웹하드 카르텔의 중심에 있는 자였다. 그는 웹하드 ‘위디스크’와 ‘파일노리’의 실소유주로 ‘몰카 헤비 업로더’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여 돈을 벌었고, 디지털 장의업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물을 올려서 돈을 벌고, 지워주면서 또 돈을 벌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번 돈이 1000억원이다. 갑질을 할 수 있는 위력은 그렇게 번 돈으로부터 나왔다.

지난 7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이 내용을 방송한 후에도 한국사회는 침묵했다. 찍은 사람, 올린 사람, 받아본 사람, 그렇게 번 돈을 나눠 먹은 사람, 모두가 공범이기 때문일 터다. 지금 여당에서도 ‘갑질 폭력’만 언급할 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물로 벌어들인 돈이 도대체 어디까지 흘러들어간 것일까?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단 폭력과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말하는 청년 여성들에 대해 기성세대는 너무 쉽게 겁을 먹는다. 어쩌면 그들이 적폐청산의 핵심을 찌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양진호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성적폐야말로 한국사회 적폐의 설정값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그대로 두면서 갑질만 해결할 수는 없다. 그 갑질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로부터, 그렇게 여성의 존엄을 가볍게 여겨온 문화로부터 가능해지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겁을 먹어야 할 것은 청년 여성들의 날것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들의 성적폐 카르텔을 가려온 그들의 세련된 언어일지도 모르겠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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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평론가보다 창작자를 볼 때 더 멋있다고 느낀다. 물론 각자의 영역이 따로 있고 공생해야 함을 안다. 시장에서 외면받은 작품을 재조명하게 돕고 풍부하게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평론의 역할을 긍정하고, 또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글을 쓰는 평론가들이 많다는 사실도 안다. 다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서 ‘좋은 말씀’ 하시는 평론가보다 자기 존재를 내던지며 모험하는 창작자들을 볼 때 더 마음이 움직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창작자의 고난과 극복의 서사를 밀착된 시선으로 보며 생생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그들이 출연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몰입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다. 특히 평소라면 함께할 일 없는 이들끼리 협업하며 새롭고 멋진 것을 만드는 순간은 짜릿하다. 그러다 나는 Mnet의 노예가 돼버렸고 올해도 <쇼미더머니 777>은 삶의 낙이다. 3회의 그룹대항전은 특히나 흥겨웠다. 이것에 대해 같이 떠들 사람이 필요할 정도로 흥분이 가시지 않는데 함께할 친구가 없어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아 접속하고야 말았다.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 777>은 사상 처음으로 베팅 시스템을 도입했다. 랩 실력을 가상의 상금 ‘파이트 머니’로 평가하고, 참가한 래퍼들은 파이트 머니를 놓고 랩 실력을 겨룬다. Mnet 화면 캡처

‘개념글’을 쭉 훑었다. 못되고 거칠지만 그 덕에 웃음을 만들어 내는 글이 꽤 있었다. 그러나 혐오와 불쾌감을 유발하는 글들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출연자가 조선족이라며 조롱하는 글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한 선택과 행동은 놀릴 수 있지만(물론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만) 태어나며 얻은 정체성, 게다가 그게 약자의 것인데 그것만으로 당사자도 찾아볼 수 있는 공개적인 공간에서 조롱하는 일은 저열하다고 ‘느낀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신체적 조건에 대한 폄하와 조롱도 마찬가지다. 월경에 근거해 여성을 ‘피싸개’라 표현하고,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은어가 모든 부정적인 대상을 욕하는 데 쓰이는 게 그곳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좀 놀랐다. 그건 내게 구시대적 행태였다. 타고난 조건으로 인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욕망의 투사물로 전락하거나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이미 수도 없이 논증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온라인 게시판은 설명과 논증의 장이 아니다. 오직 확고하고 당당한 유희만 있을 뿐이다. 설득하려 들면 게임의 규칙을 깨는 게 된다. 어쩌면 집단적 응징이 따를지도 모른다. 발화자를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는 존재’로 낙인찍은 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타격감 넘치는 언어폭력을 내리꽂는 것. 소크라테스도 여기선 지혜 낳는 산파가 되지 못하고, 못생기고 헐벗은 놈이라 몰매 맞지 않을까?

힙합이라는 장르 특성 때문에 강화된 현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경우, 듣고 있으면 래퍼와 함께 ‘강해지는 느낌’ 때문에 힙합에 매혹됐다. 허리춤에 권총 꽂고 갱스터들과 어깨동무하는 느낌, 체제 저항적인 래퍼들의 거친 언어가 주는 쾌감에 취했다. 비트의 무드에 주목하고, 가사의 내용에 집중하고, 랩의 기술을 분석하는 등 시간이 가며 순차적으로 감상의 중점은 달라졌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멋지다는 느낌이었다.

시간 지나 ‘멋짐’에 대한 인식과 감각도 변했다. 이제 나는 대결에서 싸움을 걸어 끝내 이기는 사람보다 가능하면 다툼을 피하는 사람,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상대를 비웃기보다 스스로의 지식을 갱신하는 사람, 평화를 유지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을 더 멋있다고 느낀다. 우위를 점하고 이를 과시하기보다, 우열을 나누지 않으려 노력하고 다른 이의 고통에 마음 쓰는 게 더 강한 것이라는 느낌도 갖는다. 감탄과 감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가까운 데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고, 그중 일부와는 친구가 됐다.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같은 좋은 말씀 들을 때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흘리기 쉽지만 친구들과 낄낄댈 때는 영혼이 충만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이 느낌 아는 멋진 창작자가 더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힙합뿐만 아니라 웹소설, 게임, 예능, 상업영화 등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영역 전반에서 수용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동시에,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도 멋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서사와 화자가 더 풍부해지기를, 그로써 대중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기를. 창작자의 영향력은 비평가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기에.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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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따끈한 국 한 사발이 간절한 계절이다. 국자, 탕자 돌림 음식과 한국인의 식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더구나 쌀쌀해지는 데에야. 세상에 자식을 낸 모든 어머니와 세상에 온 모든 아들딸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미역국, 일상생활의 푸근한 벗 콩나물국, 젖산 발효의 미덕을 쥐고 따듯함을 더한 김칫국, 농민과 노동자의 한여름을 위로한 추어탕, 국물 내기의 기본기를 환기하는 곰탕과 설렁탕, 바닷바람과 바다의 날빛을 아우른 북엇국, 해안 주민의 오랜 친구인 김국과 매생이국, 채소와 고기가 손잡은 미각이 한 사발 비우는 내내 상승하는 소고기뭇국과 육개장 등등 국탕 한 그릇과 맞물린 추억 한 조각 없는 한국인은 드물리라. 이쯤만 나열하고도 미안하다. 이루 다 손꼽기 어려운 채소, 나물, 고기, 수산물이 다 국탕으로 변한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갈마듦도 다채롭다.

국탕이 제대로 되려면 국물을 제대로 내야 한다. 그리고 ‘간’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간의 출발은 소금의 짠맛이다. 소금, 한마디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조미료이다. 어떤 재료든 재료가 쥔 원물의 맛을 사람이 충분히 감각하도록 증폭해주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막 뱉은 말이 아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20대에 쓴 산문 <민옹전(閔翁傳)>에서 소금은 맛 자체를 나게 하니, 소금이 없이는 맛도 없고(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소금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이라고 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다시 소금에다 만주 원산의 콩을 더해, 단순한 짠맛을 더 맛난 맛으로 발전시켰다.

한나라 때의 일상 기록인 <풍속통의(風俗通義)>는 이렇게 썼다. “장(醬)은 소금으로 만들지만 그 짜기가 소금보다 더하다(醬成於鹽, 而鹹於鹽)”라고. 속뜻은 장은 소금의 짠맛보다 한층 증폭된 맛난 짠맛을 낸다는 뜻이다. 아득한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고기에 소금을 더해 발효시킨 육장(肉醬)을 가지고 장(醬)을 만들었다. 그 장으로 단순한 짠맛에 동물성 단백질의 풍미를 더해서 한층 만난 짠맛을 얻었다. 

고기뿐인가. 어류를 이용해서도 젓갈을 얻었다.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은 그 원형을 잘 보여주는데, 이런 계통은 ‘해(해)’라고 불렀다. 그러다 콩 또는 콩으로 쑨 메주에 소금을 더한 두장(豆醬)을 담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고기와 생선의 동물성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해(해)’로, 콩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장(醬)’으로 구분하는 데 이른다.

동물의 살코기와 내장과 뼈를, 생선이라면 살 및 대가리와 뼈의 인지질을 뽀얗게 우려낸 ‘곰’은 소금간만 해서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 이와 함께 고기, 생선 등의 동물성 단백질이 내는 감칠맛 또는 채소의 풍미를 ‘소금보다 맛있게 짠’ 간장으로 증폭시키려는 시도는 장을 점점 더 맛나게 담그면서 끝없이 발전했다. 

맑은장국이 그 예다. 장으로 간해 적절히 올라오는 감칠맛은 담백하면서도 개운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빛깔까지 운치를 더한다. 양지, 민어, 토란, 송이, 쑥 등 맑은장국에 어울리는 재료를 떠올리면 오랜 세월 전해진 맛의 설계의 밑절미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소면을 말면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음식의 극치인 국수장국이 된다. 

못잖은 간으로 젓갈간이 있다. 두장 못잖은 맛난 짠맛을 쥔 새우젓간을 한 달걀국, 콩나물국, 젓국갈비 등도 재료의 감칠맛을 두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끌어올린 진미이다. 명란젓으로 맛을 더하는 방식도 있었다. 일본식으로 맑게 끓여내는 ‘지리’에 견주어 새우젓간이나 명란젓간의 개운하면서도 무게 있는 맛의 설계를 다시 생각할 여지가 더욱 자랄 듯하다. 

된장은 된장대로 채소 또는 나물의 풍미와 잘 어울린다. 배추된장국·시금치된장국 등의 예에서 보듯 구수함이 감도는 깊은 맛은 이 자체로 하나의 계통이 될 수 있겠다. 그 풍미와 질감이 앞서 든 예의 간과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꺼낸 말은 수다하지만, 역시 생각하면서, 비교하면서 맛을 보아야 그 차이도 섬세하게 가릴 수 있으리라. 여기 온도를 달리해 냉국이라든지 겨울 동치미까지 계통과 체계를 잡아 보면 어떨까. 국탕. 훌훌 마시기 좋은 데서, 식은 밥 한 덩이 풍덩 빠뜨리기에 좋은 데서 그칠 것만은 아니다. 간장간, 젓갈간, 된장간의 국탕 그리고 냉국 및 동치미 등 저마다 다른 풍미와 질감이 제 개성대로 계통과 체제를 이루자면, ‘따끈한 국 사발이 간절한 계절’을 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리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기획이 있어야 하리라.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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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연애감정에 대한 호소 혹은 미개한 조선 사회에 대한 개탄을 담은 이광수의 <무정>은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요즘 인문학의 트렌드 중 하나는 ‘감정’이다. 이는 근대 계몽이성에 대한 반발이겠으나 희한하게도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서 정동과는 거리가 먼 ‘무심함’을 느끼곤 한다. 감성인문학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무정에 대한 호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분노하라> <미움받을 용기> 같은 감정교육 서적들이 인기를 끄는 것이 어쩌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방증 아닐까.

물론 수많은 SNS 채널을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하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떤 실감이나 육체성을 상실한, 말끔한 플라스틱 자아들의 향연과 같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의 자아들은 그림자를 상실한 동화 속 인물처럼 무언가를 제거하고 만들어진 조형의 얼굴들과 흡사하달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쌍방향이지만 어쩐지 어떤 겯고틀고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방향의 외침같이 들린다. 요컨대 말끔한 아바타들의 만남과 접속에는, 김수영식으로 말하자면 ‘하, 그림자가 없다’. 혐오문화 또한 배제의 기율 속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말끔한 제거술이 아닌가. 수많은 페친과 팔로어들을 지녔다고 자부하지만 각자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희한한 1인 자급자족 시대.

‘소확행’과 ‘워라밸’의 유행에 진입한 젊은 세대들의 감각은 확실히 타인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감정 교류에 있어서 어떤 불편함을 지닌 듯하다. 최근 읽은 소설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손원평의 <서른의 반격>은 ‘보통사람’ 시대에 태어난 1988년생의 이야기이다. 문화아카데미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주인공은 급여에 맞게 최저임금만큼의 최소 노동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인공 직장에서 벌어지는 부당함에도 눈감고 동료와의 점심시간을 피하기 위해 가짜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최소한의 노동은 최소한의 관계와 감정으로 이어지고 그들을 ‘최소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여기에 ‘규옥’이라는 한 문제적 청년이 등장한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주인공과 주변인물에게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자고 설파하고, 이들을 ‘가면, 계란, 공개 항의’와 같은 퍼포먼스로 이끈다. 어찌 보면 이들의 ‘항거’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한 놀이 같지만 작가는 급진적 혁명에 불과한 이러한 반격 말고 무엇이 가능하냐고 묻는 듯하다.

신인작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 등장하는 판교 테크노밸리의 한 청년도 이와 유사하다. 기업 회장의 인스타그램 속 자아를 배려하지 못한 대가로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 젊은 여직원은 회사를 박차고 나가거나 항의하는 대신 그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중고마켓에 되팔아 돈을 만든다.         

<서른의 반격>이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청년들은 반짝이는 거울 빌딩에 다니고 있지만 네모난 하늘을 품고 있는 판교의 한 게임회사 사옥처럼, 다만 자신의 내부에 광활한 하늘을 가두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압도적인 네모에 갇혀서 각자 조용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용이며 새떼, 열기구, 헬리콥터를 상상한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예를 들면 거북이라든지, 거북이 사진이라든지, 거북이 동영상이라든지”라고 고백하는 판교 여직원은 어쩌면 우리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헬조선과 탈조선을 외치던 그들은 그 불가능을 깨닫고 순회하여 이제 소확행에 안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거대한 꿈과 진정성, 치열함의 강조는 어쩌면 ‘꼰대’의 잔소리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의 무정과 무심함의 기원은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 치열하게 살았아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서른의 반격>)라는 항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자유와 정동을 감금한 이 시대의 소확행은 비정한 현실의 랜드마크가 아닐까.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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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기독교가 만나는 곳에 ‘가짜뉴스 공장’이 있었다.”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언론사에 남을 만한 문장이다.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을 선동하는 가짜뉴스의 레토릭이 보수 기독교의 레토릭과 비슷하다는 점은 페미니스트들도 계속 주목해왔던 문제였다. 한겨레가 이 ‘합리적 의심’이 ‘팩트’임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가짜뉴스에는 올해 초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극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퍼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난민에 대한 공포가 갑작스럽게 형성됐고, 그렇게 자라난 반난민 정서는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거짓말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 중에는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여성과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을 떠올리게 한다.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전 총재였던 장마리 르펜의 딸이다. 장마리 르펜은 강고한 남성 가부장의 얼굴을 한 극우였다. 그는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반프랑스 인종학살”이라고 불렀다. 당시 국민전선의 반유대주의와 여성혐오적 성격은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 확장에 방해가 됐다. 아버지 르펜 시절 국민전선에는 남성 지지자가 월등히 많았다.

반전은 마린 르펜이 당권을 잡고 아버지 르펜을 숙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를 축출함으로써 딸 르펜은 반유대주의 극우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국민전선을 현대화시켰다. 그는 오히려 국민전선이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설파하는데, 그때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표방하고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딸 르펜은 확실히 세련되고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국민전선의 약진을 젠더정치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딸 르펜 이후 당의 여성 지지자층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의 포퓰리스트로서의 진가가 드러난다. 포퓰리스트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신념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대중이 겪고 있는 위기를 과장하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 자리에 ‘대중 vs 엘리트’라는 전선이 형성된다. 예컨대 ‘진짜 프랑스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기득권의 정치적 올바름 추구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식이다. (난민 논란 당시 윤서인이 정우성을 비난했던 방식을 복기해보자.) 그렇게 포퓰리스트는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의 분노와 원한의 감정에 어필한다.

기득권과 싸우고 대중에게 말 건다는 이유에서 포퓰리즘을 ‘정치적 가능성’으로 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포퓰리스트는 오직 나만이 국민을 대변할 수 있으며, 오직 나를 지지하는 자들만이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다원주의를 배격하고 혐오와 배제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 정치를 추구한다.

르펜의 ‘여성 정치’가 어떻게 포퓰리즘으로 휘어지는지 보자. 그는 “나는 프랑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는가? 난민이다”라고 선동한다. 그리하여 르펜에게 페미니즘은 정치학이 아니라 수사학이 되어 버린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여성에 대한 진보적 정책 기조를 유지했을까? 문득 극우 정치인의 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자가 한국 여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포퓰리스트가 페미니즘을 이용할 때만큼이나 곤란한 것은 페미니스트가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되기를 선택할 때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부터 끌어오기로 마음먹기는 쉽고, 그만큼 유혹적이다. 그러나 작가 들개이빨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인간을 혐오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쉬운 건 결코 위대할 리 없지.” 우리의 운동이 좀 더 위대해지기를 바란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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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가 <회색인간>이라는 문제적인 소설집을 출간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원래는 ‘복날은간다’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단편소설을 쓰던 작가였다. 1년 반 동안 무려 300편 넘게 썼다. 그의 독자이자 팬이었던 나는 출판사에 그를 소개했고, 요청을 받아 단행본의 기획에도 참여했다. 그래서 요즘에도 나에게 “김동식 작가 강의 요청 좀 드리려고 하는데, 매니저 맞으시죠?” 하는 연락이 종종 온다. 나름대로 즐거운 오해다. 그는 요즘 중·고등학교에서 초대를 많이 받고 있다. 그의 책을 읽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토론을 하고 “다음 책은 어디 있나요?” 하고 교사와 부모에게 묻는다고 한다.

얼마 전 만난 김동식 작가에게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니까, 그는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꿈이 참 없는데요, 학생들이 꿈을 가질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는 한 사람이, 그저 댓글을 받는 게 좋다는 이유로 소설을 썼고, 그것이 책으로 출간되어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오를 만큼 2018년 상반기 내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3일에 한 편씩 신작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쩌면 모두의 꿈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겠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에 답한 김동식 작가를, 어느 중학생이 올린 인스타그램 동영상에서 본 일이 있다. 영상 속의 그는 학생들을 향해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고 말한다. 잠시 조용해졌던 강당은, 곧 모든 중학생들의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나는 사실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꿈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훈육받아 왔고, 누군가 꿈을 물었을 때 멋진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죄인이 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없다고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무어라도 준비해야 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어느 친구가 “꿈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난 없지만 언젠간 생길 거라고 믿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가 괜찮은 걸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가 정말 용기 있고 멋있는 사람임을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정작 용기가 없는 사람은 나였다.

물론 꿈을 갖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김동식 작가 역시 꿈을 가지는 건 중요하다고 이어 말한다. 그러나 그에 더해, “제가 뭐라고 타인의 꿈에 개입하겠어요, 그건 강요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저는 여러분이 나중이 아니라 지금 즐거우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인다. 나는 같이 간 강연에서 이렇게 답하는 것을 정말로 들었는데, 이 답에 그를 바라보던 교사들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꿈, 열정, 노력. 이러한 단어들은 주로 기성세대로부터 청년세대에게 전달된다.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이제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돌려줄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이 조금은 자신을 덜 아파할 수 있게 이 사회의 문화나 제도를 바꾸는 데 한 줄을 보태고 싶다. 사실 꿈을 가져야 하고 열정이나 노력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 중,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꿈이 있었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대신 꿈을 이룬 사람일수록 타인의 꿈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를 응원하며 지켜보는 일이 더 많다. 내 주변의 존경할 만한 이들이 대개 그렇다.

다섯 살이 된 나의 아이는 벌써부터 온갖 체험을 나간다. 입학을 앞두고 주변의 유치원에서 보내온 커리큘럼을 보면, 숲 체험·농장 체험·소방관 체험 등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도 직업체험 수행평가를 위해 여러 직업군을 찾아 인터뷰나 일일 아르바이트를 한다. 카페를 겸하는 모 문화공간의 대표는 초·중등 학생들이 직업체험을 위해 찾아오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고, 와서 커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데 사실 조금은 번거롭다고 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미래를 상상하고 거기에 힘을 쏟기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는 김동식 작가의 말에 쏟아져 나온 환호성은, 그들이 얼마나 꿈에 짓눌려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미래를 체험할 시간에 차라리 현재에 충실할 수 있으면 한다.

현재를 포기하고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법이다. 현재에 행복할 수 있는 한 인간은 언제든 행복할 수 있고, 미래에만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은 미래에도 행복해질 수 없다. 서른이 넘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모 작가처럼, 모두가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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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농담을 던진다. 무표정한 사람이 웃는 사람이 되는 걸 보고 싶다. 아뿔싸! 농담이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헤어질 때 또다시 인사를 한다. 농담을 수습하다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다음 만남이 있기 전까지는 나는 그에게 객쩍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에 오른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사이좋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을 보며 낄낄거리는 사람도 있고 화면을 잽싸게 두드려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다들 각자의 일과로 바쁘다. 갑자기 전동차 안에 전화벨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린다. 머리를 긁적이며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다. 마치 30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덩달아 내 걸음도 빨라진다. 늦은 것도 아닌데 쫓기듯 걷고 있다. 자신의 리듬을 잊거나 잃고, 사람들이 떠밀리듯 걷는다. 급기야 계단을 오르다 한 사람이 넘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을 피해서 사람들이 계단을 오른다. 제 갈 길을 가는 여느 사람들이다. 그 사람에게 “괜찮아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따뜻한 사람이다. 부축을 받고 일어난 사람이 출구 밖으로 비틀비틀 사라진다.

거리 위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하다. 천천히 걷는 사람, 친구와 손잡고 나란히 걷는 사람, 음악을 들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사람이 있다. 가을볕이 따가운지 손차양을 만드는 사람도 보인다. 짐을 든 손의 아귀에 힘을 집어넣는 사람, 오늘 뜬 구름의 표정을 헤아리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역사 내에서 잃었던 자신의 리듬을 되찾았다. 평온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본다. 살피기 시작한다. 헤아리기 시작한다.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랩톱을 펼치고 열심히 무언가를 기록하는 사람이 보인다. 글을 쓰는 것일까? 무슨 글일까? 무엇이 그를 쓰게 만드는 것일까?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무슨 책일까? 무엇이 그를 읽게 만드는 것일까? 가만히 있는 사람들조차 표정이 풍부하다. 다들 각자의 사연으로 법석인다.

사람들을 만난다. 종종 만나는 사람들이다. 지난주에 만났던 사람도 있고 어제 연락했던 사람도 있다. 머리 잘랐구나,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얼마 전에 착수했다는 작업은 잘되어가니, 낯빛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는 것 아니지?…. 서로에게 마음을 쓴다. 서로를 향해 관심을 기울인다. 다들 각자의 마음 씀씀이로 바쁘다. 마음은 닳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나누면서 점점 부풀어 오른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라 사람을 돕고 사람이라 사람을 외면한다. 사람이라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이라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것을 갚기 위해 골몰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라 사람에게 다정하다. 사람이라 사람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진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절망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도, 지푸라기나 동아줄로 군불을 지피는 것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것도 사람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위기에 처한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도 사람이다. 하루 안에 위로와 축하를 둘 다 전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자신만의 사연을 어떻게든 기록하려는 것도 사람이다. 그 사연을 통해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 그때 함께 있었던 사람을, 지금 함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을 사람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한다. 이제야 겨우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어렵다고,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사람이 좋다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있다. 사람은, 사람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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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품격>을 썼지만 행복한 사람이군요?” 스태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패널로 출연 중인 한 방송사 프로그램의 그날 주제는 ‘행복’이었다. 사전에 패널들의 행복지수를 알아봤고 내 점수는 꽤 높은 편이었는데, 그게 뜻밖이었나 보다. ‘불만’이라는 단어가 행복과 거리 먼 말맛을 가졌음을 새삼 곱씹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 역시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면 숱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여물어 바구니 같은 것에 소복이 쌓여있는 모양을 상상하게 된다. 그 ‘추억방울’들이 아름다운 색채이길 바라며 이를 위해 힘쓴다. 노을 지는 풍경, 향기로운 바람, 부드러운 촉감, 신선한 재료로 만든 식감 좋은 음식 등 좋은 기분을 갖게 해주는 것과 접촉하고, 안전하게 외부와 분리된 감각을 주며 먹고 씻고 잘 수 있는 ‘나만의 방’을 확보하고, 반복적 스트레스와 고통의 요인은 치워버리려 노력한다.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고, 때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지인과 친구의 존재도 소중하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행복을 지키기 어렵다. 사회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직 생존경쟁만이 있는 곳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논리와 이성,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여유, 윤리적 성찰 따위는 사치로 느껴지고, 오직 살아남는 데 온 정신과 역량이 집중되기에 서로에게 잔인하게, 또는 무신경하게 상처 입히는 순간이 잦다. 어떻게든 피하고자 노력해봤자 도처에 널렸기에 지뢰 밟듯 폭탄을 터뜨리거나 그 파편에 상처입기 십상이다. 너무나 사회에 불만이 없고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경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자.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학습한 규범이나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추석을 비롯한 명절은 전국적으로 이런 일이 창궐하는 때다. 주로 결혼, 출산, 육아와 관련해 “그 나이에는 당연히 뭐뭐 해야 하지 않냐”는 압력들이다. 나이뿐 아니라 성별, 학력,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과 억압도 횡행한다. 각자 성장환경과 삶의 조건이 다르고 형성된 정체성과 지향성도 다른데, 자기답게 사는 게 제일 속 편하고 좋을 텐데 왜 하나의 사회규범을 들이대는 걸까?

하나의 기준만 있다 생각하고, 모두가 그 기준을 따라야 한다 믿으며 스스로와 타인을 그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 대화의 뒷맛을 쓰게 한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속성이었다. 나란 존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묻는 게 아닌, 규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음을 열심히 답해준 뒤에야 알게 될 때가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로 줄 세워 급 따지며 차별하고, 몇 가지 단어로 사람을 납작하게 규정해 떠들어대는 이들에게 많은 정보를 줬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꺼림칙한 느낌을 남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준 것은 아닐지 돌아보게 했다.

서열 매기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 중 몇몇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기본 권리가 주어지는 일에 내심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보편적 복지를 한사코 거부하는 정책 입안자나 행정가들도 혹시 그럴까봐 걱정이다.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이탈한 이들은 불안감과 모멸감을 견디는 일상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까봐.

그렇게나 서열을 좋아하시니 그와 같은 결로 말해보자. 한국 정도 경제규모의 ‘선진국’에서 개인이 연거푸 불운을 겪으면 홈리스가 되기 쉽다는 것, 가정 내 중증 환자가 있으면 풍비박산을 불러오는 경제적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부끄러울 일이다. 자원이 불합리하게 나뉘고 있는 지금 현실은 분명 개선될 여지가 있다.

올해도 추석연휴가 끝나자 ‘시달린 자’들의 증언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화, 정책, 일상의 정치까지 아우르는 사회적 불만이다. 이런 불만들이 사회를 개선하는 자료가 되기를, 변화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일상을 불안 없이 지킬 수 있기를.

또한 불만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혹시라도 있었다면 이제 거둬주시길 바란다. 사회에 불만을 제기하는 실천과 개인의 행복을 챙기는 일상은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다.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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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읽고 댓글을 하나 달았다.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현실 정체성은 직장인인 한 사람의 고민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진심이 담긴 열린 제안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한번 해봅시다”로 시작한 일은 100명이 넘는 규모의 콘퍼런스라는 큰 판으로 커졌다.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비슷한 고민을 키워오던 개인들이 ‘작당’해 만들어낸 프로젝트였기에 중단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협업하게 된 11명의 개인들은 구체적인 ‘개인의 시대’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9명의 연사를 초대했다. 딴짓으로 창업한 남의집프로젝트 문지기 김성용, 외신기자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변신한 최정윤, 자칭 ‘사이드프로젝트 중독자’라는 마케터 고재형, 벤처캐피털을 다니면서 맥주 편집숍을 운영 중인 김경민, 자기 강점을 찾고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낸 장영학, 하루 3줄 일기로 인생을 바꾼 <스몰 스텝>의 저자 박요철, 과거와 미래의 나에게 고마워하며 현재의 나에 충실히 살고 있는 전 대기업 직장인 이인규, 9번 회사를 옮긴 ‘프로 이직러’ 김대우, 기자를 그만두고 과학과 연결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이진주까지…. 일단 시작했으며, 나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다르게 움직여도 괜찮은, 그러면서 “딴짓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개인들이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지난 14일 열린 ‘평생직장 개뿔, 개인의 시대’ 콘퍼런스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금요일 오후 반차를 사용해야만 함께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도 100명 넘는 사람들이 함께했다. 날씨 좋은 불금의 오후 1시, 꽤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놀라우면서도 뿌듯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 ‘이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얻기 위해 여기에 왔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2018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과 ‘직장’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결로 전개 중이다. 공무원처럼 확실한 안정성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퇴사 학교’가 만들어질 정도로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요즘 직장인들은 조직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인싸(인싸이더)’ 대신 자발적인 ‘아싸(아웃싸이더)’를 택하면서까지 조직보다 자신의 성장을 원한다. ‘직장’에 다닌다고 자동으로 ‘직업’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날 콘퍼런스에서 “좋아하는 일로 꼭 밥을 벌어먹어야 하나요?”라는 질문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상반된 질문이 함께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연사들은 생존형 사이드 프로젝트 성공 노하우부터 딴짓을 잘한 짓이 되게 만드는 법까지 ‘꿀팁’을 아낌없이 풀어냈다. “한번에 3만개의 알을 낳는다는 개복치처럼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계속하라”는 주문과 함께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라며 백수를 강력 추천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영화’ 혹은 ‘내 인생을 바꾼 책’이 사라진 불확실한 저성장의 시대, 반나절의 콘퍼런스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신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영감 혹은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던 한 연사의 말처럼, 앞서 시도한 개인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가 다른 생각의 여지를 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잠재적 자영업자’인 직장인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을 잔뜩 하는 것이 인생”이며 “인생의 의미 없는 딴짓이라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이끄는 힘을 찾아내는 것, 직장이라는 울타리와 상관없이 나 자신이 어떻게 일할 때 가장 행복한지 찾아내는 것이다. 콘퍼런스는 끝났지만 더 많은 질문이 남았다. 나 역시 “어떻게 하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을까?”란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분투해볼 계획이다. 평생직장 ‘개뿔’인 ‘개인의 시대’를 조금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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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독재라는 거대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각계각층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란함을 걷어내고 보면 사람들은 삶을 되찾기 위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2000년대, 여전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위기는 설득으로부터 왔다. 거악이 희미해지고, 삶들이 분절되고, 격차는 커져갔지만 그 모든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왜 아직도 세상을 바꿔야 하고, 왜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 동원되었던 방식은 문제들을 개인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당신은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당신의 친구나 가족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이고 차별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당신과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다. 이 설명에 숨어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이는 근대 이후의 사회과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자, 동시에 사회적 연대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의 다른 버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설명은 원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작용을 낳았다. 문제들은 내 문제와 네 문제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네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정형화되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거기에 고통이 있으면 돕는다는 느슨한 인식 대신에,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의 몫으로 맡겨둔다는 ‘논리적인’ 무관심이 증가했다.

그런가 하면 내 문제에 매몰되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내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권리와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이 문제는 내 문제이므로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내 문제 속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왕이 되고자 했다. 심지어 어떤 문제들은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내 문제를 위해서는 네 문제가 지워져야 한다는 주장도 점점 커져갔다.

출처:경향신문DB

이 두 가지 태도는 사회문제가 내 것 혹은 네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사회문제와 파편화된 개인을 연결지어 보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오히려 사회문제 자체가 파편화된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시도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파편화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남들 상관없이 너만 잘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환영과 패배자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사람들을 자기만의 사회로 몰아붙인 탓이다. 동지도 깃발도 사라진 곳에서, 각자도생과 사적 구제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힘을 잃었다.

오늘 사람들이 각자의 지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가장 먼저 되살려야 하는 것은 잊혀진 교훈이다. 즉 세상에 온전한 ‘네 문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회적 상상력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세상에는 온전한 ‘내 문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처럼 보여도 사회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 문제인 이상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문제들이 여론이나 국가, 법에 의해 좌우되고 굴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우리에겐 어떤 이유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이어야 한다. 서로의 관심과 이해를 돕고, 연대를 구하고, 역행할 수 없는 저지선들을 점점 끌어올리면서 말이다.

민주노총의 트위터 담당자는 인천퀴어축제에서 벌어진 혐오세력의 폭력에 왜 민주노총이 관심을 갖느냐는 비난에 이렇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하신 ‘오지랖’을 우리는 ‘연대’라고 합니다.” 정말로 그렇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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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안희정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상호 간에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은 인정되지만, 성적행위에 있어서는 위력이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없고,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데도 명시적으로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결국 피해자의 증언은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판사라는 직책은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권력의 최종심급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위력이라는 게 스위치가 달려서 맘대로 켜고 끄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고용인인 중년 남성을, 거의 매일같이 수행하고 얼굴을 맞대야 하는 여성 비서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을 리는 없다. 심지어 피해자는 가해자를 신뢰하고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권력관계와 개인적인 신뢰, 존경심이 더해진 관계에서 위력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걷어내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사법부가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판단력을 거의 인공지능 수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복잡하고 일상에 조밀하게 침투해 있는 권력관계가 오직 성적 접근 앞에서는 명확해지고 냉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재판은 그 과정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가해행위였다. 물론 기소와 재판의 근거가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에 대한 음해, 억측, 일상생활이 재판과정에서 줄줄이 끌려나왔고, 언론도 가세해 신나게 받아쓰기를 했다. 차기 대선후보이자 도지사이자 가정이 있는 중년 남성이 자신의 부하직원에 대해 성적으로 부적절한 접근을 시도하고 간음한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오로지 피해자의 행실이 피해자로서 적합했는지가 문제였다. 가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추잡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피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피해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을 받는다. 이런 식의 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절대로 피해자가 되지 말 것.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이니, 결론적으로는 피해자가 되거든 구제를 받으려 하지 말고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말도 뭣도 아니다.

기억하겠지만 안 전 지사는 피해자의 폭로가 있은 후에 자신과 피해자의 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과문을 올리고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또 증거로 채택된 휴대폰도 제출을 거부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무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의 수많은 곳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허가를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자들에게는 묻지 않는 것을 약자들에게만 묻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짐으로 지우려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법에 근거한 것인들 공정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미 여성들은 사회가 여성을 보호하기는커녕 못살게 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최종심급이라 할 수 있는 법마저 피해 여성들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있어 이 나라의 존재가치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다. 이미 미투 운동은 사회가 성폭력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운동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식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는 이 억울함들이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최악의 신호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개개인이 겪는 시련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사법부가 나서서 사회 붕괴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는 하루속히 관련 입법들을 진행하라! 사법부는 판검사들의 성인지적 관점에 대한 대대적인 재교육과 개혁을 실시하라! 행정부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해 성폭력에 엄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은 이 나라가 될 것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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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