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된 얼굴의 키가 작은 여자 손님이 카스 두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홍미영 교수님 아니세요? 그녀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어수룩하게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다행히 여자 손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편의점을 나섰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손님이 편의점으로 들어설 때마다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몸의 습관을 갖게 되었다.”

조해진의 소설 <산책자의 행복>에는 구조조정 여파로 대학 강사직을 잃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홍미영이 등장한다. 그녀는 실직 이후 함께 사는 아픈 어머니의 병원비와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서 빈곤층으로 추락한다. 힘들어하던 제자의 손을 잡고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던 다정한 스승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 철학과 강사에서 편의점 알바가 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너무 극단적인 상황 아닌가’ 싶었는데 웬걸, 한국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나쁘다.

얼마 전 인터넷을 달궜던 최영미 시인의 ‘호텔 투숙 편의 요청’이 바로 그렇다. 일전에도 최영미 시인은 “연간소득이 1300만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이며 재산이 적어 빈곤층에게 주는 근로소득장려금 대상이 되었다”는 고백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내게는 편의점에 들르는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전전긍긍하는 소설 속 홍미영 교수보다 자신의 궁핍한 경제적 상황을 솔직하게 알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의 글을 올렸다가 홍역을 치른 ‘(전) 베스트셀러 시인’ 최영미가 훨씬 소설 속 인물처럼 느껴졌다. 시인의 현실이 소설이면 얼마나 좋겠냐만, 김명인 교수의 지적대로 이번 논란의 본질은 “시인이라는 돈 안되는 타이틀을 가진, 의식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50대 중반 빈민 독신여성”의 문제다. 논란 이후 최 시인은 집주인의 월세 계약 연장과 함께 한 호텔에서 투숙 제공 의사까지 전달받은 상태다. 훈훈하게 끝났으니 해프닝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최 시인의 상황이 결코 특수하지 않다는 현실이 문제다. 최근 <반지하 앨리스>라는 시집을 내고 사진전을 연 신현림 시인도 하루에 한 시간만 햇빛이 들어오는 반지하에서 10년간 살았다고 하니 비슷한 처지다.

한국 사회가 돈 없는 사람에게 유독 가혹하다는 현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성, 비혼, 소속 없음’으로 살다 보면 가난 혹은 빈곤이라는 단어와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처참하다. 취업 시장에서 ‘남성이 최고의 스펙’이라는 말은 취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정규직 근로자 중 여성 비율은 38.7%로 남성 62.3%에 한참 못 미치고, 여성 가구주의 절대 빈곤율은 20.1%인 데 비해 남성 가구주의 절대 빈곤율은 5.1%다. 여성 전체 노동자의 약 40%가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 빈곤계층이고, 전문직 내 여성 집중 상위 6개 직업의 월평균 임금조차 214만원에 불과하다.

해외에서는 같은 커피를 팔면서 남성 손님에게 돈을 더 받는 카페까지 등장했다. 호주 멜버른의 ‘핸섬 허(Handsome Her)’ 카페는 같은 일을 해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구조적 격차(Gender Gap)를 가격표에 반영, 남성에게 가격의 18%를 더 내게 한다. 15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한국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36.3%이니, 한국에도 이런 카페가 생긴다면 남성들은 37%쯤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여성의 인생이 동화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결혼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는데, 한국은 결혼하지 않은 가난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답도 갖고 있지 않다. 30~40세 미혼 여성 인구는 10년 새 2배 넘게 급증한 반면 국가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에는 무관심하고 출산하지 않는 여성을 걱정하느라 바쁘다. 소설 속의 홍미영 교수와 현실의 최영미, 신현림 시인은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다는 점에서 꼭 닮았고, 그래서 슬프지만 이렇게라도 가시화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혼자라서 더 괜찮지 않은 여성의 가난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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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섭섭해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논어>를 열자마자 보이는 공자의 한마디다. 나는 군자 발끝에도 못 미쳐 내가 하는 일, 그러니까 음식 문화사 탐구를 잘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삐진다. 가령 “설렁탕은 선농제에서 시작됐다” “한국사상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이다” 하는 사람 앞에서는 순간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한 번은 쏘아붙이게 된다. “낭설 수집을 음식 문화사 공부로 착각하면 그 다음이 없어요.”

부끄럽게도, 내 군자답지 못한 면모를 자주 들키는 계절이다. 추석을 앞두고 차례 상차림을 묻는 전화가 잦다. 대중매체는 여전히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실은 동쪽에 흰 과실은 서쪽에), 조율이시(棗栗梨시:대추·밤·배·감의 차례로 놓기) 같은 진설법을 가르치려 든다. 이 철만 오면 무엇이 차례상에 오를 수 있고, 무엇은 올라서는 안되는가 하는 문제에 정답을 내야만 차례를 지낼 수 있는 것처럼 군다. 다시금 발그레한 얼굴로 단언한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같은 말은 꺼낸 쪽에서 증명하라고. 예서는 이런 규약을 논한 적이 없다. 명절 앞두고 기억할 말은 딱 한마디, “가가례(家家禮)”뿐이다.

추석 열차 승차권 예매가 시작된 8월 29일 오전 서울역 매표소 앞에서 시민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가가례, 집집마다 예가 다르다, 집집마다 저마다의 예를 따른다는 말이다. 추석의 차례와 손님맞이를 두고 남의 집에다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할 것도 없고, 내 조상께 예 갖추고 오랜만에 겨레붙이 모이는 데 남의 집 눈치 볼 것 없다는 뜻이다. 고려시대 이후 예서의 기본으로 자리 잡은 <주자가례(朱子家禮)>, 18세기에 이를 조선화한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느 책도 차례 상차림을 규범화한 적이 없다. 이이는 1577년에 간행한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차례에는 지내는 그때 나는 식료로 음식을 해 올리되 별다른 게 없으면 떡과 과실 두어 가지면 된다고 설명했다.

차례는 원래 축문도 읽지 않고 술도 한 번만 올리는 간소한 의식이었다. 이는 그동안의 민속학 조사가 밝힌 바이고, 오늘날 성균관 전례연구위원회에서 되풀이해 강조하는 바다. 추석 차례는 별 탈 없이 한 해의 수확을 앞두고 있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의식이었다. 추석은 농번기를 앞두고 모두가 쉬어가는 휴일이었다. 차례 음식은 올벼로 빚은 술, 구할 수 있는 과일, 그리고 지역이나 집안의 특색 있는 음식으로 충분했다. 퇴계 이황은 간소한 제사와 차례를 강조했다. 그 뜻을 진성 이씨네는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 파평 윤씨 윤증(尹拯·1629~1714) 고택에 전해오는 차례에 쓰는 상은 가로 99㎝, 세로 68㎝에 지나지 않는다. 후손들은 이 상에 과일 셋, 나물, 밥과 국, 그리고 어포와 육포만으로 제물을 차린다. 차례 상차림은 집안 형편과 사는 곳의 지리적 특성에 따라 다른 게 당연하다. 낙지, 문어, 상어, 홍어, 통북어, 꿩, 부꾸미, 파인애플, 바나나, 카스텔라 등 홍동백서며 조율이시에 들지 않는 제물이 보이는 편이 도리어 자연스럽다. 1970년대 이후 대중매체가 추석 차례에 무슨 대단한 규약이 존재하는 듯 굴었으나 이는 소비와 과시의 시대를 맞아 새로 “만들어낸 전통”일 뿐이다. 감히 동포에게 낯을 붉히랴. 낭설로 쌓은 억지가 불편할 뿐이다. 낭설과 억지가 빚은 가짜 전통은 명절에 깃든 평화와 휴식의 풍경, 공동체의 정다운 마음을 바래게 했다.

이에 더욱 삼삼한 문헌이 정학유(丁學游·1786~1855)의 가사 <농가월령가>이다. 정학유는 산과일이 익어가는 음력 8월을 “뒷동산 밤대추는 아이들 세상”으로 노래했다. 명절 쇠며 쓸 식료는 북어와 젓갈용 조기로 충분했다. “신도주(햅쌀술), 올벼송편, 박나물, 토란국”만으로 차례 지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제물은 이웃집과 나누어 먹었다. 차례를 지내고서 며느리는 “말미”, 곧 휴가를 받아 친정으로 떠났다. 삶은 개고기에 떡고리와 술병을 챙겨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남의 집 따님에게, 시적 자아는 얼굴은 좀 폈는지 묻는다. 그러고는 위로 겸해 당부한다. “중추야 밝은 달에 지기 펴고 놀고 오소.” 보름달 아래서 마음껏 놀다 오란 말이다. 밤과 대추를 차지한 아이들, 이웃과 나누는 소박한 제물, 그리고 가사와 농사에 지친 여성의 휴식, 여기 추석의 본래 뜻 명절의 원래 모습이 깃들어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았으면 해서다. 그 마음으로 굳이 문헌을 불러내 낭설과 억지부터 물리친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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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드라마로 히트를 쳤던 이 제목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니, 이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는 어떻게 다른가. 톨스토이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강변했지만, 내가 보기에 남녀 할 것 없이 사람은 ‘일하며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이 문제적이라면 그것은 일반 ‘사람’과는 다른 어떤 삶의 지형 속에 놓여있음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을 제출해야 했던 과거 여성의 삶은 대체로 ‘남자’ 혹은 ‘사랑’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일과 사랑이 대체로 남자라는 운명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조선희의 <세 여자>를 읽으면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과연 조선 최고의 신여성이자 코뮤니스트였던 단발랑의 이 세 여자가 이전까지 여성에게 강제된 ‘남자라는 단 하나의 운명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살았는가’이다. 이 관점에서 세 명의 이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주세죽. 그녀는 함흥에서 태어나 음악선생이 되기 위해 상해로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박헌영을 만나 결혼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지만, 모스크바에서 박헌영의 단짝인 김단야와 재혼하고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당하는 등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결국 1953년 생을 마친다.

둘째, 강경의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인 고명자는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김단야와 사귀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으며 경성에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친일행로를 걷다가 한국전쟁 중 사망한다.

셋째, 허정숙은 고베 유학을 거쳐 상해에서 경성으로, 모스크바와 뉴욕, 타이베이, 남경, 무한, 연안, 태항산, 연안을 거쳐 평양에서 최고 권력을 누리다가 아흔의 나이로 사망한다. 허정숙의 생은 무장항일투쟁 전력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하게 보자면 투철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의 생이지만, 그 면면은 동선만큼이나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가령 ‘조선의 콜론타이’라 불렸던 허정숙의 남편 혹은 파트너가 여러 번 바뀐다든가 일본, 미국, 대만 등지에서 유학하고 연안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등의 엄청난 행보가 그러하다.

얼핏 보면, 이 셋 중에 남자와 별개로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살아낸 것은 유일하게 허정숙이라 할 수 있다. 주세죽은 박헌영과 김단야라는 혁명가를 뒷바라지하거나 의존하는 헌신적 여성상이었다는 점에서, 고명자 또한 김단야의 행보와 함께하다가 이후 전향 등의 나락을 걸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단적으로 이 셋 중에 허정숙만이 누구의 아내나 애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으므로. 그러나 어찌 보면 허정숙의 저 독립적인 행보에는 아버지 허헌이라는 절대적 운명이 어른거리고 있다. 조선 최초의 변호사 중 하나이자 조선 공산주의의 후원자로 또 동아일보 사장과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까지 지냈던 허헌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찬란한 궤도에 놓을 수 있었을까.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두 명과 달리 비극적 역사에 희생되지 않고, 역사라는 호랑이에 올라탈 수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는 특히 평양에서의 허정숙의 삶에 의구심이 든다. 이 작품에서 남로당을 비롯한 소련파, 연안파 등이 숙청당할 때 허정숙의 태도는 회의적이면서도 방관적이다. 첫 번째 남편인 임원근이 형무소에 있을 때 송봉우와 재혼한다든가, 미국 유학을 떠나고 하는 것도 그렇지만 박헌영, 최창익, 임화, 이태준 등이 숙청당하고 김일성 1인숭배체제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과연 어떤 주체였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의구심은 어쩌면 작가가 허정숙의 행보에 무의식적으로 반발하면서 변명의 시선을 얹고 있기 때문에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이 작품에서 그려진 세 여자의 삶이 그다지 주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 명의 내면적 동력이 좀 더 핍진하게 묘사되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떤 누구도 주체일 수 없었던 저 폭군의 역사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우면서 끝내는 참담했던 것은,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그려나갔던 숱한 혁명가들이 속절없이 역사의 격랑에 희생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무력감을 어찌할 것인가. 남성이라는 단 하나의 운명을 열고 나가면 더 폭압적인 역사라는 운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세 여자>를 읽으면서 느낀 새로운 지점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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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가끔 일이 많이 몰려 쉬지 않고 달리다보면 감기 몸살에 심하게 걸릴 때가 있다. 하루 종일 꼼짝없이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서 끙끙 앓다보면 걸렀던 식사부터 전반적인 생활습관까지 떠올리며 아픔을 자초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밀려든다. 반성을 하다가도 아픔이 길어지면 종국에는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찾아올까’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무한한 듯 누리던 내 몸에 대한 사용권은 없어지고 방구석에 웅크려 오로지 내 몸에서 나는 숨소리와 고열만 느껴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보이는 시간과 공간의 유한함. 우리의 존재는 이 유한함 속에서 또한 얼마나 미약하게 잠시나마 깜빡이는 불빛일까. ‘살아있음’을 다만 느끼고 있자면, 일상에 파묻혀 믿게 되었던 시간의 직선적 흐름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 아픔과 회복의 순환이 만들어내는 곡선의 아름다움에 어느덧 숙연해지기도 한다.

언젠가 신은 왜 굳이 사람에게 ‘아픔’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일까 의아해했지만, 아팠던 것이 나으면 같은 세상도 정말 더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픔이라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신호이자 누구나가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면, 우리 사회에서 아프다고 해서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는데, 어떤 사회에서는 왜 아프면 가난이 찾아오게 될까.

세 모녀가 자살한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반지하 방. 28일 찾은 이 집 텔레비전 위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찍은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박은하 기자

몇 해 전 자살한 송파구의 세 모녀 사건은 오랫동안 아파서 일하기 힘든 큰딸과 취업준비하며 아르바이트하던 둘째딸, 그리고 식당에서 열심히 생활비를 벌어온 어머니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삶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넘어져 다치게 되자 본격적으로 가난해졌다. 우연히 넘어진 것 같지만 아픈 몸으로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었다. 세상을 뜬 지 3년이 된 고 최인기님은 두 차례의 큰 수술을 받고 생계가 어려워져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파서 도저히 일할 수 없었던 그에게 2013년부터는 ‘근로능력 있음’으로 판정이 내려졌다. 정부는 그에게 먹고살기 위한 급여를 받으려면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부 수급자’ 자격을 부여했다. 아프다고 호소했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수급권이 박탈되기 때문에 그는 지하주차장 청소부로 일하다가 결국은 세상을 떠났다. 나라마저 그에게 일을 해야만 밥값을 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꼭 이렇게 극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내가 연구를 하면서 만나게 된 아픈 노동자들도 아프기 시작하면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 때문에 일을 계속하다가 더 아프게 되기도, 또는 아예 일자리를 더 이상 구할 수 없으니 소득이 없어 결국에는 수급자가 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동안의 많은 연구들은 아파서 가난해지는 경로보다 가난할수록 사람들이 더 아프게 되는 경로에 집중하였다. 특히 서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한 연구들을 보면 아프면 가난이 찾아온다는 가설은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가설은 아파서 일을 못하면 즉각적으로 소득이 단절되어 가난을 버티다 못해 자살을 선택하거나, 아파도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다가 정말로 죽는 사람이 있는 한국과 같이 슬픈 사회에서나 설득력이 있을 수 있겠다.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또는 노동력을 시장에서 교환해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가난에서 벗어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는,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상품화 지수가 높은 나라이다.

실제로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비교분석해보면 이 상품화 지수가 높다. 반드시 일을 해야만 그나마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건강한 몸뚱이 자체가 가난을 피하기 위한 생존수단이 된다. 그리고 아픈 몸뚱이는 ‘하자 있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 의료보장 사각지대가 넓어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계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꼭 재난적 의료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노동자가 먹고살기 위해 아픈데도 쉴 수 없고, 아파도 참고 일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러다가 정말 일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가파르게 가난의 굴레에 빠지게 되는 사회라면 의료비 이전에 그 사회의 소득보장정책에 구멍이 있는 것이다. 아픔이 자연의 섭리가 아니고 가난으로 향하는 비참한 저주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사회의 어느 부분은 심각하게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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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소설가인 다나는 집에서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휘청,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이어 눈을 뜬 곳은 1815년 메릴랜드주의 숲속이다. 그곳에서 다나는 호수에 빠진 ‘백인 소년’을 구한 뒤 1970년대로 되돌아온다.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대표작 <킨>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로 다나는 소년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1800년대로 끌려간다. 처음에는 몇 분, 그 다음에는 몇 시간, 그 다음에는 며칠,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수어달. 그렇게 1800년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나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흑인 여자’로서의 생존술을 익히게 된다. 즉 점차 노예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의 다나는 자유인이자 ‘엘리트 여성’이지만, 1800년대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건방진, 따라서 다소 위험한 여자 노예일 뿐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다나를 노예제가 가장 혹독했던 1800년대로 보내 그 시대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에서 ‘흑인됨’이란 무엇인지, 그 역사성을 탐구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런 이야기를 쓴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가정부 일을 하셨고, 나는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킨>을 쓴 이유는 이런 기분을 풀기 위해서였다. 결국 나는 그녀가 한 일들 덕분에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가 삶을 빠르게 개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좀 더 맹렬하게 부모에게 화가 나 있었던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노예제 시대로 보내고 싶었다.”

버틀러가 말하는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이란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이 꽃을 피웠던 시기, 민권운동가들이 노예의 삶을 살았던 윗세대에게 쉽게 격분하곤 했던 것을 의미한다. 어떤 민권운동가들은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세대를 진심으로 원망하고 저주했다.

버틀러에게 이런 태도는 맥락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다는 의미에서 순진하고 안일한 것이며, 동시에 자기혐오라는 점에서 무기력한 것이기도 하다. 버틀러의 작품과 수치심의 관계를 탐구했던 프랜 미셸은 ‘수치스럽다’의 또 하나의 표현인 ‘굴욕당한(mortified)’의 어원이 ‘죽음(mort)’임에 주목한다. 수치심을 안고 있는 자기혐오는 변화를 견인하기보다는 자기파괴적이다.

버틀러에게 선조들은 어떤 식으로든 버텨낸 자들이었다. <킨>은 다나가 어떻게 노예가 되어가는가, 그리고 다나가 구했던 ‘다른 백인들과는 조금은 다른 백인 소년’은 어떻게 ‘크게 다르지 않은 백인 노예주’로 성장하는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개인을 구조에 종속시키는 조건 안에서 그렇게 간단하게 발휘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나는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교섭하면서 인간으로서 생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다나가 머무는 집의 다른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노예화된 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안에서 그 시간을 살아냈고 (혹은 결국 죽거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살았고) 그렇게 버텼거나 버티지 못했던 시간들의 중첩 속에서 역사적인 투쟁들은 불타오를 수 있었다.

여성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BJ)에 대한 살해 협박이 공공연하게 인터넷 방송을 타고,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볼거리로 만드는 영화가 제작된다.

탁현민 경질을 말했다고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경질 청원이 올라온다. 만만하지 않은 강도로 진행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을 보면서 버틀러의 교훈을 되새긴다.

여전히 우리는 각자의 맥락에서 각자의 ‘노예의 조건’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발버둥이 아무리 하찮아 보일 때에도 제자리걸음 중인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함께 버텨야 한다. 버텨서 더 많은 목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밀어낸 어떤 한계가 세상을 또 조금 바꾸어놓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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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청춘직설란에 쓴 ‘아재들에게’가 SNS에서 꽤나 관심을 받은 모양이다. 대리운전을 하며 바라본 50대 남성들의 모습을 담은, 타인에게는 당신의 자기서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우선은 50대 남성들로부터 “아재들 건드리지 마라, 우리도 힘들다”하는 직간접적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 요약하면, 선배들의 경험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나도 그것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다만 귀를 열어 후배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경험은 몸으로 실천하는 방식을 선택한다면, 조금 더 환영받는 아재가 되지 않을까 한다. 곧 생물학적 아재가 될 나에게 하는 제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재들의 아우성보다도 더욱 눈길이 갔던 부분은 20대와 30대, 특히 젊은 여성들이 ‘아재들에게’라는 글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많은 이들이 “글쓴이는 그래도 노동을 하는 쪽이잖아. 나는 손님이 되어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기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하고 반응했다. 자신이 비용을 지불하는 사용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눈치를 보아야 하고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택시기사들의 몇 가지 유형을 들어 보자면 1) 연애는 하고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사적 정보에 대해 묻거나, 2)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 하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며 걱정하거나, 3) 자기 자녀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듣는 이의 처지와 비교하며 자랑하거나, 4) 택시 운전을 시작하게 된 자신의 인생사를 계속 들려주거나, 하는 것이다. 3번과 4번 항목은 나도 자주 경험하는데, 그들의 발화는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이 많다. 나보다 젊은 여성 손님이라면 나이와 성별이라는 특성에 따라 조금 더 ‘경험을 들려주고 싶은 대상’이 될 것이다. 반면, 대리기사들은 같은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처럼 손님에게 자신의 서사를 들려주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 조용한 택시기사도 있고 말이 많은 대리기사도 물론 있겠지만, 대체로는 그렇다. 두 집단의 차이는 그들이 운전하고 있는 공간에서 온다. 택시기사들에게 택시는 온전히 자신의 공간이다. 특히 개인택시기사들은 차량이 자신의 소유이고 그 면허의 값만 해도 상당하다. 보조석 앞 공간에 붙은 기사등록증에는 이름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마치 집의 주인처럼, 그 공간에서 온전한 자기의 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리기사들은 타인의 운전석에 앉는다. 운전하고는 있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 잠시 그 자리를 점유할 뿐이다. 그러면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할 수 없게 되고, 대개는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말 정도나 하게 된다.

우리는 타인을 초대하고 나면 그를 환대할 준비를 한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공통의 화제를 고민하고, 선물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가 나의 공간에 머무는 동안 함께 행복하기를 바란다. 택시기사들 역시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타인이 그러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한 존재로서 먼저 인사하고, 무언가 화젯거리를 찾아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그 공간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고 나면 문제가 된다. 자기 주도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부터 무조건 자기 의견에 동의해야 한다는 데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해야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순간 타인과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타인을 향한 환대는 그를 향한 배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준비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꺼낸 화제가 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가 조금 더 내밀한 초대에 응하기를 원치 않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공간의 주인은 언제나 상대방의 처지를 살피고 그의 입장에서 사유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명확히 해 주면서 초대받은 이들을 즐겁게 해 줄 것이다. 가장 소중하고 명확한 자신의 공간에서 타인에게 실수하기가 더 쉽다. 자기만족을 위한 과한 친절을 베풀거나, 공유해야 할 무언가를 점유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과시하게 된다. 운전석과 조수석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일상의 공간 어디에서든 그렇다. 계속해서 초대받고, 또 타인을 초대해야 할 우리는 자신의 공간에서부터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한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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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부터 ‘죽이는 글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참여자가 일주일에 세 차례 글을 올리면 해당 글에 댓글로 조언하는 방식이다. 프로젝트를 위해 마련된 비공개 카페를 틈나는 대로 방문해서 글을 읽는 게 어느덧 일과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세 편의 글을 한 번에 몰아서 올리는 분들도 있고 하나의 이야기를 연재 형식으로 나눠서 게시하는 분들도 있다. 어쨌든 참여자들 모두 틈나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 일과의 한 부분이 오롯이 ‘쓰는’ 시간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 글을 다름 아닌 내가 가장 먼저 보게 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참여자들이 올리는 글의 형식 또한 다양하다. 보통은 에세이 형태를 띤 글들이 많지만, 르포 형식의 글도 간간이 눈에 띄고 팩션(faction) 느낌이 물씬 나는 글도 있다. 내가 시인이라 그런지 시를 올려주시는 분들도 있다. 글쓰기 코치로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코칭을 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참여자가 올린 글의 부족한 부분이 아니라 내가 미처 잡아채지 못한 일상의 반짝임이었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자기만의 화법으로 전달하려는 간절한 몸짓이었다. 그 몸짓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화답하는 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글을 읽으며 일상의 반짝임은 기쁨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슬픔이나 상실감에서 비롯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는다.

그들은 모두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공공연하게 떠들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지나치는 풍경에 불과할지라도 내 가슴에 다가와 단박에 얼어붙어버린 순간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든 지우고 싶지만 발설하지 않으면 끝끝내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나를 향한 이야기, 나로부터 발아해서 나에게 가까스로 도달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다.

각자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댓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어떤 글은 첨삭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누군가의 삶에 함부로 무언가를 보태거나 뺄 수는 없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바로 꾸준함이다. 꾸준함은 성실함과 직결되는 것으로, 다른 어떤 기술보다 더 체득하기 힘든 재능이다. 보통 재능이라고 말하면 타고난 능력을 생각하지만, 재능은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꾸준히 어떤 일을 하려면 해당 일을 하고 싶은 마음과 그 일을 실제로 수행하는 추진력이 결합되어야만 한다. 일주일에 세 편의 글을 쓰는 것은 얼핏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일주일에 세 번 운동을 하거나 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게다가 글쓰기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근육이 붙거나 지구력이 생기는 것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몸으로 느끼기 어렵다.

영어 선생님이 영어를 잘하는 이유는 매일 일정 정도의 시간을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내서 정기적으로 쓰면 나도 모르는 사이, 글쓰기 능력이 향상된다. 기술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다. 백지를 마주하는 데서 오는 공포는 줄어들고 어떤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용기는 커진다. 한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들이는 근사한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덤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생동감을 잃은 글을 죽은 글이라고 일컫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글에서는 ‘죽이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죽이다’ 혹은 ‘죽여주다’는 말은 “몹시 만족스럽거나 흡족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죽이는 글쓰기는 해당 글을 읽는 사람에게 만족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더욱 흡족한 것은 쓰는 사람이다. 쓰는 일은 나를 되돌아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단어를 많이 쓰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나를 쓰게 만드는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글을 읽으며 죽이는 글쓰기가 역설적으로 나를 살리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글이 가장 빛나는 것도 그때일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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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질문을 권장한다는 것을 기존의 강연 프로그램과의 차이점으로 강조한 방송에 출연 중이다. 10명의 질문자 중 1인이다. 방송에 나가든 안 나가든 녹화 말미에는 ‘질문상’ 수상 차례가 있는데, 그날의 선생님이 10명 중 가장 인상 깊은 질문을 했던 이를 꼽는 시간이다. 어느 날 녹화 뒤 “서윤씨, 상복 터졌네요. 제일 많이 받은 사람 아니야?”라는 방송작가의 말씀을 들었다. 헤아려 보니, 과연 사실이었다. 녹화장에 앉아 질문을 하라고 섭외가 되었고, 선생님들에게 인상 깊은 질문자로 가장 많이 꼽혔다니, 이쯤 되면 ‘프로질문러’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잠시 우쭐할 뻔했다. 프로의 길은 끝없는 수행을 각오하고 걸어야 하는 것. 프로질문러가 되기 위해 정진할 것을 다짐하며, 등대로 삼을 내용을 이 기회에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나쁜 질문’이 무엇인지 인지해야 할 것이다. 너무 진부한 질문들(나는 그 사람에게 한 번 질문했을 뿐이지만 상대는 살면서 100번 이상 들었던 질문이라 지긋지긋한 것)이 대표적이다. 나는 가끔 심술궂은 상상을 한다. “어느 대학 나왔어요?”라는 질문에 “(상처받은 얼굴로) 초졸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상대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결혼 안 하세요?”라는 질문에 “이미…. (먼 곳을 보며)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지요”라고 말하면 질문자는 당황하며 뱉은 말을 후회할까? 당연히 모든 사람이 대학을 나왔을 것이라는 편견, 남의 결혼여부가 자신과 상관있다는 태도를 전제로 한 질문에 대해, 나는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을 내놓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깊이 고민하지 않고 질문한 이를 반성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

물론 나도 멍청한 질문 많이 하며 살아왔다(인생은 흑역사 갱신의 연속이다). 내뱉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이미 뱉어버렸다면 상대의 기색을 살피는 눈치라도 있어야겠다. 상대가 불쾌해하거나 곤란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재빠르게 사과하고 해명하도록. 어떤 질문은 폭력이 될 수도 있기에.

나의 경우 어떤 프레임에 욱여넣기 위한, 일방적으로 나를 판정하기 위한 정보 수집을 목적에 둔 질문을 받았을 때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질문자가 보이는 태도도 한몫했다. 장난기 없이 진지하고 오만한 태도. 심문관 납셨다. “그게 왜 궁금하세요? 무례하신 것 같아요. 기분 나쁜 질문이에요”라고 그 자리에서 분명히 짚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그런 유의 단호한 말이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문자와 답변자 간에 권력의 차이가 날 때,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예컨대 면접장에서 면접관과 지원자의 위계가 그렇다. 친구의 지인이 모 방송사 기자 최종 면접에서 “우리 회사 기자들 중에 자네보다 못생긴 사람 이름 한 명만 대보게. 자네가 TV에 나올 만한 외모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공분한 적 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그런 질문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 입 놀리는 네 새끼보단 낫습니다”라고 답변하는 배짱이라도 보여주길 바라는 ‘압박’이었을까?

그렇다면 좋은 질문이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나쁜 질문들을 뒤집은 것일 테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전제 위에 던져지는 진부하지 않은 물음. 해당 화두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아보게 하는 길잡이. 교류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주는 매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너무 떠받들지도 얕잡아 보지도 않는, 동등한 눈높이로 담백하게 표시하는 존중. 당신을 더 잘 알고 싶고, 당신의 말을 더욱 오해 없이 깊이 받아들이고 싶다는 진심. 상대에게 눈을 반짝이며 몰입하는 집중력.

그러나 녹화 때 강의에 너무 푹 빠져서 방송에 나가지도 못할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일 수 있다. 너무 질문 많이 하는 인간 때문에 퇴근시간 늦춰졌다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경지까지 올라야 프로질문러가 되는 동시에 프로방송인이 될 수 있는 걸까?

역시 프로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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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뱅크에 뒤늦게 가입했다. 은행 가서 대기표 뽑고 기다리는 시간 없이 간편하게 계좌가 만들어지니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가 이런 ‘비대면 서비스’를 꽤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문 단계에서 결제까지 가능해 배달원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배달앱, 커피 전문점의 모바일 주문결제 서비스, 채팅만으로 상품을 주문할 수 있는 홈쇼핑의 ‘톡 주문 서비스’까지 다양하다. 고객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초면인 경우 ‘지금 전화 통화 괜찮은지’ 물어보는 것이 예의처럼 느껴질 정도다. 낯선 사람과는 전화 통화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물론이고 목소리조차 섞지 않아도 일상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카카오뱅크 앱 이미지. 카카오뱅크 제공

나 역시 처음에는 거부감이 컸다. ‘전화 한 통 하면 될 일을 앱 깔고 회원 가입하고 귀찮지도 않나’ 싶었고,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게 편했다. 그런데 딱 한 번 써보고 바로 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탔다. 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시간 낭비 안 해도 되고, 정보 전달 과정에서 잘못 알아들을 일도 없다. 편하고 효율적일뿐더러 무엇보다 사람 때문에 불쾌하거나 진을 뺄 일이 없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대면 서비스에서 불쾌했던 경험들도 한몫했다. 초여름에 방문했던 쇤부른 궁전이 특히 그랬다. 오스트리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장소답게 성수기가 아니었는데도 줄 서서 표를 사고, 입장할 때조차 10분 단위로 시간을 끊고 조별로 대기했다 들어가야 했다. 직원들 대부분이 만사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고, 뭘 물어봐도 고개를 가로젓거나 ‘놉(Nope)’이라고 간단하게만 답했다. 하루종일 밀려드는 ‘뜨내기’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비싼 입장료 내고 시간 들여 방문한 관광객으로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로봇이 나온다면 이 직원들은 살아남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로봇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다국어 입력 가능한 키오스크로 입장권을 자동 발매하는 게 훨씬 낫겠다 싶었다.

이미 대체가 시작된 곳도 많다. “무인 결제로 인해 커피 품질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어렵지 않으니 겁먹지 마세요.” 커다랗게 써 붙인 ‘한 잔에 900원’ 커피집은 키오스크로 자동 주문만 받는다. 직원은 음료만 만들고, 손님은 주문과 계산을 끝낸 후 음료만 받아가는 식이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서 이런 자동화가 대세인 것은 아니다. “어서 오십시오, 행복을 드리는 ○○ 백화점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희 ○○ 백화점과 함께 즐거운 쇼핑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백화점 주차장 건너편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차가 들어올 때마다 솔 톤으로 반복되는 멘트를 하루 종일 들어야 했다. 추운 겨울, 스타킹 차림으로 장식용 모자를 쓰고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여성들의 노동은 무용(無用)하게만 느껴졌다. 손님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주차권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안내만 하는데도, 마트와 달리 백화점 손님으로 ‘대접받는’ 느낌을 주기에 반응이 꽤 좋다고 한다. 주차장에도 무인 시스템이 속속 도입되고 있다지만, 한국 백화점의 주차 안내 요원은 좀 더 오래 살아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로봇이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대체가 불가능한 직업군으로 말이다.

“민영화해서 곡예사들을 계약제로 고용했더니 여자 곡예사들의 생리가 줄었어요. 좋은 일이죠. 사회주의였을 때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생리를 했거든요.” 헨미 요의 <먹는 인간>에 나오는 폴란드 서커스단 이야기다. 로봇 곡예사가 나온다면 ‘생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로봇보다는 사람이 하는 서커스가 훨씬 매력적이다. 실제 여러 기관의 예측에서 로봇이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직업군은 행위예술가와 같은 즉흥성과 창의성이 핵심인 예술적 직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이가 예술가로 살 수는 없는 법, 기계의 일자리 대체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늘어놓는 대신 어떻게 변화에 대처하는 안전망을 만들어나갈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모든 직업이 자동화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평생직업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전문가의 조언과 함께.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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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의 여름, 피서를 한다고 바다로 산으로 다녔지만 오가는 길에 이 여름이 얼마나 지독한지 절감했을 뿐 전혀 더위를 피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정작 잠깐 더위를 잊었던 때는 드라마 <비밀의 숲>을 몰아보았던 지난 며칠이 유일했던 듯하다.

출처: tvN

 

내가 이 드라마에 열광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첫째, 리얼리티이다. <비밀의 숲>은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우리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손쉽게 ‘영웅’을 내세워 정의를 바로잡는, 사이다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불의와 정의가 뒤섞여있고, 범죄자와 의인이 하나이고 살인자가 피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서사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기이한 곡면을 따라 롤러코스터를 탄다.

줄거리는 정계, 재계, 검경 가릴 것 없이 뇌물을 주고 로비했던 사업가가 살해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범죄의 고리를 파헤친다는 것이다. <비밀의 숲>의 성공은 진부할 수도 있는 이 모티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캐릭터 창조에 있다.

우선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 그는 어릴 적 뇌수술로 감정을 상실하고 오직 이성과 법에 충실한 알파고 같은 인간이다. 법리만을 탑재한 황시목 검사는 타인과의 소통에 서툴고 변변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다. 공조수사나 사람을 믿지 않고 오직 사실과 증거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황시목 검사는 역설적으로 무감동, 무감정과 관계단절로 인해 인맥과 욕망으로 얽히고설킨 비밀의 숲의 무성한 가지들을 냉철하게 헤쳐나간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둘러싼 ‘비밀의 숲’에는 욕망과 비리로 얽힌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있다. 복수에 눈이 먼 영 검사,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재벌 회장, 성접대와 뇌물수수로 오염된 경찰서장과 스폰서 검사, 업계의 비리로 어린 자식을 잃은 수사과장, 그리고 가족에 발목 잡히고 정의감에 눈이 먼 과대망상의 검사장. 이들 인물은 선과 악, 불의와 정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거니와 고정된 자리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이들 인물은 사건 발생과 동시에 황시목과 더불어 혹은 더 신속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전개시킨다.

가령 열등감을 지닌 서동재 검사는 권력과 뇌물로 얼룩진 기회주의자로 등장하지만 이중스파이 역할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신의 비리 사실을 감추기 위해 증거물을 은폐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인을 해치지는 못하는 아슬아슬한 인물로 등장한다. 범죄의 ‘빅피처’를 연출한 이창준 검사장은 정의감에 가득 찬 인물이지만, 한편 재벌회장인 장인과 아내로 인해 부정부패의 수호자가 된 아수라 백작 같은 인물이다. 즉 <비밀의 숲> 인물들은 모두 한마디로 ‘살아있네’라는 탄성을 자아나게 한다.

<비밀의 숲>이 끝까지 흥미진진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인물이 모두 범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범인일 수 있는 이유는 각각 어떤 욕망과 감정의 지점에서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애국이든 사리사욕이든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서 눈이 멀거나 눈을 감는다. 작가는 이 맹목의 숲에 인공지능 같은 황시목 검사를 가만히 풀어놓는다. 그는 ‘욕망이나 감정’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맹목의 숲에서 유일하게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한다.

셋째, <비밀의 숲>은 영웅과 독재를 경계한다.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숱한 부정부패와 문제들을 접하면서 나는 때론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통치자라면 저걸 단칼에 싹!’이라는. 가령 사교육을 없애거나 토지 사유를 금지시키는. 그런 상상 끝에 어떤 독재자나 파시스트가 딸려오는 것을 보고 흠칫할 때가 있다. <비밀의 숲>은 이런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령 이창준 검사는 범죄자이기도 하지만, 한편 권력자들의 비리증거를 확보해서 황시목 검사에게 넘겨주고 자결한 의인이자 내부고발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시목 검사는 그를 ‘괴물’이라 칭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고, 큰 목숨과 작은 목숨이 따로 있다고 믿으며 타인을 단죄한 파시스트.

사실 황시목 검사라는 캐릭터야말로 지독한 판타지일 수 있다. 감정이 없는, 타인과 무관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판타지야말로 우리 현실의 무의식적 소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국정농단뿐 아니라 세월호 등의 거대한 사건에서 우리는 부정으로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을 본다. 그리고 그 숱한 매듭에는 저와 같은 각각의 맹목이 들어차 있다. 받고 주었다는 이유로, 식구라는 이유로 누구 하나 이 사슬에서 발을 빼어 진실을 외치지 못한다. 이 시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와 같은 알파고 검사가 절실한 이유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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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의 친구 푸지씨네 이발소로 어느 날 싸늘한 한기를 몰고 회색신사가 찾아온다. 그는 시간저축 은행에서 왔다고 자신을 근사하게 소개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인생을 꿈꾼다면 바로 그 시간을 아껴야 하고 ‘시간은 돈’이라며 푸지씨를 다그친다. 사실 그동안 푸지씨는 귀가 어두운 어머니 곁에서 매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지역 합창단에 나가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였다. 또 매일 30분씩은 사랑하는 다리아양에게 꽃을 들고 찾아가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삶을 살아왔다. 그가 얼마나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살았는지 깨닫게 해준 시간도둑 회색신사가 잿빛차를 타고 부웅 떠나자 푸지씨는 이제부터 빈틈없이 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일할수록 모두 도둑당해 손톱만큼의 시간도 남지 않는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책 <모모> 속 마을 사람들은 곧 모두가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하는 모습은 우리가 언젠가 그려본 그 삶을 얼마나 닮아있을까.

한국의 복지지출 수준은 선진국의 평균치보다 한참 낮다. 어느 정도의 괜찮은 삶을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것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 주거, 교육, 돌봄, 문화생활, 나와 가족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를 위한 보험까지 계속해서 구매해야 한다. 시장에서의 현금교환을 통해서만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시장구매력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장구매력이 노동을 교환한 대가로 얻는 임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을 하고 시장소득을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도 모든 것을 구매해야 어느 정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한 단위의 시장소득을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이 일할 수밖에 없다. 일하는 시간이 정말 돈이고, 그 돈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고용관계가 불안정하거나 임금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비참하다. 고용계약이 불안하여 언제 소득이 끊길지 모를수록 고용주가 원하는 만큼, 또 시간당 임금수준이 낮을수록 오랜 시간을 일해야만 어느 정도의 소득을 벌고 살 수 있다. 현재 임금근로자 세 명 중에 적어도 한 명은 고용관계가 불안정하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국제노동기구 기준으로 저임금 근로자이다. 여기에 영세자영업, 특수고용 등 한국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면 불안정한 노동자의 수는 증가한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가 어느 정도 살아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장시간 노동이다. 고용관계가 불안한 사람일수록 더 쉼 없이 일하고, 저임금노동자일수록 초장시간을 일하고 있다.

작년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의 가방 속에 있던 컵라면은 그가 쉴 틈 없이 위험한 일을 얼마나 바쁘게 해내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외주화가 일반화되고 있는 게임 업계는 하루 노동시간이 13시간에 달하는 과도한 근로시간이 있는데 작년에 청년이 넷이나 사망했다. 올해 사망한 집배원의 수는 벌써 12명이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배원의 연평균 업무 시간은 약 2800시간으로 이미 너무나도 긴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2285시간)보다도 500시간 이상을 더 근무한다.

최근 2018년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나마 반가운 결과이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어 청년들이 열심히 일할 생각을 않고 쉬운 알바만 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한심한 우려다. 또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주 40시간 근로기준 준수, 주 52시간 근로시간 상한제의 법 개정으로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이 실업률 감소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부터 분석해야 한다.

회색신사들은 장시간 노동은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속이지만 좋은 복지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되고 노동의 대가도 충분히 인정되어 장시간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면 일의 의미도, 그리고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시간이 곧 삶 자체인데 시간을 훔치는 것은 삶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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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간여행 이야기, 즉 타임슬립(time slip)물이 유행이다. 2012년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와 <옥탑방 왕세자> 등이 화제를 모으고 2013년 <나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간여행자들의 사랑은 팔리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타임슬립의 매혹은 2014년 4월16일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바로잡고자 하는 대중적 욕망과 만났다.

전 국민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생방송으로 304명의 생명이 사그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날 이후, 대중문화는 이 집단적 트라우마에 말을 걸고 문화적으로라도 위로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렇게 드라마 <시그널>(2016)을 비롯해서 영화 <시간이탈자>(2015),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2016)에 이어 <하루>(2017)까지, 시간을 거슬러 살면서 재난이나 사고, 소중한 이의 죽음을 막으려는 이야기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포스트 416’ 타임슬립물에는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언제나 남자고, 과거에 박제되어 반복적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여자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일까?

시간(time)으로부터 미끄러질(slip)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시간을 산다는 것은 자신만의 모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며, 그렇게 성장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성중심적인 서사 관습 안에서 시간은 언제나 남자들의 것이었고, 그렇게 남자들만이 시간 속에서 쌓여온 이야기, 즉 역사의 주체가 되어왔다. 그러므로 역사가 남겨준 지혜와 지식 역시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시간이 아닌 공간에 박제되어 그 자리에 머물면서, 남자들이 벗어나야 하는 과거(트라우마)로 존재하거나 성취해야 하는 미래(트로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서 과거에 고착되어 성장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은 오히려 가부장제의 상상력과 그에 기생하여 연명하고 있는 어떤 남자들인 것 같다.

얼마 전 개봉했던 <하루>는 이런 퇴행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딸의 죽음을 목격하는 준영과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는 민철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하루는 끝도 없이 반복된다. 그야말로 무간지옥이다.

점차 이 타임슬립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밝혀진다. 3년 전 준영과 민철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들을 잃은 강식이 복수극을 펼치면서 세 사람은 시간의 굴레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강식은 복수를 위해 남자들 본인이 아닌 그들의 딸과 아내를 해친다.

영화 내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원칙이 적용되었을 터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시간과 여성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에 무능한 한국 대중문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하루라는 시간이 반복될 동안 여자들은 아무런 지식도,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셀 수 없이 목이 졸리고 차에 치인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아는 자의 자리에 오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의 소유물이 되어 그들 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요리’되는 것. 그렇게 남성이 지켜주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폭력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 이런 상상력이야말로 여성혐오 문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그리고 그런 문화가 여성을 살해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달라지고 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평등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운동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들과 한국 사회 전반은 어떤가? 변화를 갈망하면서 싸움을 시작한 여성들 앞에서 시간은 누구와 함께 흐를 것인가? 남자만이 시간을 여행하는 타임슬립물의 유행은 역사의 주체로서 남성이 아닌, 역사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남성의 퇴행을 보여주는 징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성장하지 않으면서 군림하려는 자들의 서사는 끝날 때가 되었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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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리운전 콜을 한 50대 남성 셋은 나에게 “여기 룸살롱 좋은 데 없어?” 하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그들은 아니 뭐 대리기사가 그런 것도 모르나, 하며 웃었다. 하긴 내가 유흥업소에 손님으로 가본 일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직업상 “어디를 많이 찾으시더군요” 하는 조언 정도를 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민망했다. 차에 오른 그들은 한참 골프와 유흥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나의 성실성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리운전까지 하는 젊은이들이 흔치 않다는 것이었다.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다고, 그리고 팁을 좀 주어야겠다고 목소리들을 높여서, 나는 적당히 설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트렁크에서 골프 가방을 챙겼다. 나에게 정해진 비용만을 정확히 지불하고 “잘 가요, 파이팅!” 하고는 멀어져 갔다.

운전하는 나를 대하는 50대 한국 남성들의 태도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거의 예외 없이 (1)나에게 열심히 산다는 칭찬, 혹은 걱정을 가볍게 건네지만, (2)곧 자신은 더 열심히 살았다는 자기 서사를 시작한다. (3)그에 더해, 사실 젊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고 있으며, (4)세상에 공짜밥은 없다고, (5)그러니까 당신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고는, (6)이런 이야기 어디 가서 못 들으니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돈을 받아야겠다는 가벼운 유머·개그를 던지고, (7)내가 이런 이야기 해줘서 좋았지,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나열한 7가지 각 항목을 순서대로 모두 거치는 이들도 있고, 몇 가지는 건너뛰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젊은 타인에 대한 걱정, 질책, 당부와 함께 자신의 서사를 긴 시간 이어 나간다.

나는 운전하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정확히는, 대화라기보다는 답을 정해두고 하는 일방적인 전달과 강요다. 그들 앞에서 나는 노력하지 않는 세대의 대표가 되고, 그들은 스스로 노력한 세대의 대표가 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과 과시, 타인에 대한 걱정과 무시로 이어진다. 나는 그들의 기분이 상할까 걱정되어서, 혹은 어떠한 폭력을 불러올까 두려워서 웃으며 수긍하는 것이 고작이다. “네, 맞습니다” 하는 대답과 동의가 필요하고, 가끔은 “대단하십니다” 하는 찬사까지 보낸다. 애초에 타인의 운전석에서 하는 발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이들일수록 자신의 지갑을 여는 일은 더욱 없다. 정해진 금액만을 건네거나 아니면 비용을 깎으려는 시도를 한다. 나는 “아니 사장님, 그렇게 돈이 많다고 자랑하시더니 대리비 1000원을 왜 깎으려고 하십니까?” 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 된다. 물론 내가 한 노동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우리들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그에 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어느 한편의 자기만족을 위한 발화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나 이해 당사자가 아닌, 특히 노동의 사용자와 이용자로 만난 관계에서는 더욱 상호 예의를 갖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나에게는(타인에게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

우리 일상에서도 대화 상대를 타인의 운전석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이들이 있다. 직위가 높아서, 나이가 많아서, 아니면 남성이어서 그래도 된다고 여긴다.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하는 격언이 있지만, 우리는 반대로 입은 열고 지갑은 닫는다. 내가 아는 50대 K는 대리운전을 이용할 때마다 기사에게 말이 많아진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선생님, 그러시면 안돼요…”라고 하자, 그는 “내릴 때 되면 저도 후회해요. 대신 재미없는 제 말 들어줘서 고맙다고 팁을 좀 드려요” 하며 웃었다. 그는 자기만족을 위한 발화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재미없게 다가가는지를 알고, 지갑을 여는 것으로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됐죠, 뭐” 하고 함께 웃었다. 나는 오늘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재’들을 보며, 그가 많이 외로운가보다,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갑을 열기보다는 자신의 귀를 열기를 더욱 바란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의 처지에서 사유하는 연습을 한다면,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보상이 된다. 굳이 지갑을 열지 않아도 어디에서든 환영받는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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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입원해 있었다. 오른팔의 팔꿈치 관절을 심하게 다쳐 재활치료도 오랫동안 받았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가끔 내가 팔을 다쳤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깨달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탁구를 치거나 택시에서 내리며 거스름돈을 받을 때. 팔을 다 뻗어도 직선이 되지 않아 탁구공이 라켓의 중심에 맞지 않는 일이 잦다. 손목 관절 또한 잘 돌아가지 않아 동전들이 바닥에 쏟아지기 일쑤다.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이 엄습한다. 내 마음이 내 몸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8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 구멍에 몸을 던져도 과거의 건강한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얼마 전, 도수치료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올해 들어 무리를 했는지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목과 어깨가 늘 뻣뻣했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은 오른팔이 종종 아팠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신체 리듬이 무너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료용 침대 위에 누웠다. 선생님이 양손으로 내 온몸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것을 단순히 만진다거나 주무른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바로잡는 몸짓이었다. 도수(徒手)는 맨손이라는 뜻이다. 나는 선생님의 맨손에 의지한 채 한동안 가만있었다. 손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 치료를 받다가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선생님이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늘 오른쪽 팔다리 및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닌 모양이었다. “오른쪽이 완전히 경직되어 있어요. 벽돌처럼 단단하네요.” 평소의 나라면 “근육이라 그래요”라고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테지만, 당시에는 압도적인 아픔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숨을 쉬어요. 숨에 집중해요.” 순간, 예전에 재활치료를 받을 때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호흡에 집중해요. 한결 나을 거예요.” 8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참을 수 없던 아픔이 참을 만하다가 부러 참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까지 다다랐다.

“어때요, 숨구멍이 좀 트이죠?” 선생님이 한층 편안해진 내 얼굴을 보며 말씀하셨다.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도수치료를 받은 다음날, 몸살을 앓았다. 기분 좋은 몸살이었다. 흐트러진 몸의 리듬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호흡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늘 숨을 쉬지만 숨 쉬는 데 집중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 호흡을 하지만, 나도 모르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잊고 사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호흡이 절실한 때는, 호흡이 빛을 발하는 때는 어떤 고비를 맞이했을 때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데 호흡법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이 요동할 때 왜 심호흡을 하는지, 호흡하는 데 집중을 하면 왜 잡념이 사라지는지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호흡에도 길이와 부피, 그리고 깊이가 있다.

졸시 ‘미완’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었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이 무너지지 (…) 마음이 무너지면 덩달아 몸도 무너지지.” 몸과 마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동안 나는 내 몸에 너무 무심했었다. 애면글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숨가쁜 날들이 이어졌다. 숨을 쉬면서도 한 번도 숨을 쉴 때 집중한 적이 없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내 호흡에는 들숨만 있었다. 들이쉬는 데 열중한 나머지, 내쉬는 일에는 소홀했었다. 숨구멍이 트일 겨를이 없었다. 한숨만 늘었다.

한숨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것은 두 번째 뜻으로, “근심이나 설움이 있을 때, 또는 긴장하였다가 안도할 때 길게 몰아서 내쉬는 숨”을 뜻한다. 첫 번째 뜻은 “숨을 한 번 쉴 동안”이란 뜻이다. 

한숨을 소중히 여겨야 역설적으로 한숨을 내쉬는 일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숨구멍이 더 많이, 더 자주 트일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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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제발 이러지 좀 말아줬으면…’ 하는 순간들을 자주 접한다. 나는 그렇게 느낀 지점을 내 안에 고요히 묻어두지 못한다. 불쾌한 감각을 준 당사자에게 뼈 있는 농담을 하거나, “그건 좀 기분이 나쁜데요”라고 감정을 표현해야 그나마 해소가 된다. 물론 나 역시 타인에게 실수할 수 있음을 안다. 다른 사람도 내게 표현해주면 좋겠다. 재빨리 사과하게.

불쾌한 일이 한국 사회에서 너무 자주 벌어지는 종류의 것이라 느낄 때는 구조적 원인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정책적 상상을 펼치는 글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는 내가 사는 사회가 더 밝고 쾌적하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표현하고 요구하는 인물’을 ‘부정적이고 만족을 모르는 인물’이라 등치시키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편견이 사실이 아님을 내가 반증하는데. 내가 얼마나 사소한 감각적 만족으로 쉽사리 행복해지고, ‘정신승리’를 잘 하며, 해학적 인간인지 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5명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문제제기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날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다. 혼자 조용히 책 읽으며 놀 때가 많았고, 말수도 적었다. 수줍어하며 원하는 바도 또렷이 말하지 못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른들이 내 마음을 후고구려 궁예처럼 관심법이라도 동원해서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내 감정과 상황을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으면 오해 받거나 불이익 받을 때가 많다는 것을 수차례 체감하면서 변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초등학교 때의 것이다. 저학년 때, 전염성 질병을 일주일간 앓으며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학교 방침은 전염성 질병으로 출석하지 못할 때는 학적부에 결석으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기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업시간에 출석하는 책임감 강한 초등학생이었는데, 졸업 시 개근상은 고사하고 정근상도 타지 못했다. 의아해서 살펴봤더니 일주일간 학교에 출석하지 못한 것이 결석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어쩐지 일주일 지나서 학교에 간 바로 그날, 음악시간에 의아한 일이 있었더랬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며 관악기를 불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 앞선 애들이 했던 대로 흉내 내봤지만 엉성했고, 담임선생은 듣다 말고 버럭 화를 내며 나를 망신줬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대사는 떠오르지 않는다. 당혹스럽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것, 그저 말없이 빨간 얼굴을 숙이고 울음을 참았던 것만 떠오른다. 내가 부재한 동안 진도 나간 부분이 분명했다. 그는 내가 일주일간 그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당시 학급에 50명 넘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깜빡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담임’을 이해해야 할까? 혹은 양육자의 탓일까? 이혼한 뒤 자식들과도 연을 끊은, 생물학적 어머니는 그때도 자식에게 ‘헌신적’이었던 편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그 당시 어른들 탓해봤자 돌이킬 수 없다(음악시간에 “저 일주일간 아파서 병결했는데 전혀 몰랐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할 뿐이다). 오직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할 뿐. 그 후에도 내 입장을 대변해줄 사람이 곁에 있는 일은 드물었고 나는 내게 닥친 상황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했다.

지금은 내가 순간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언어로 정리하고 표현하게 됐다.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다. 조별과제 할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해 놓고 나중에 뒤에서 욕하는 이, 원하는 바를 똑바로 말 안 하며 알아서 눈치 보기를 바랐던 고용주(초등학생 때나 할 법한 짓을 50세 넘어서도 하다니!) 등. 그러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집단주의 문화,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한국의 문화를 상기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기 할 말 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드물 수밖에 없음을. 지금의 문화는 문제를 발견하고 발언하는 이를 좀 더 존중하고 이야기를 경청하는 ‘어른들’의 실천에서부터 변화할 것임을.

물론 나는 앞으로도 누가 ‘별일도 아닌데 예민하게 지랄하네’라며 흘겨보거나 말거나 문제를 제기하고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하는 삶을 살겠지만.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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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는 ‘전속 DJ’가 하나 생겼다. DJ의 이름은 애플 뮤직의 ‘For you’. 매일 ‘월요일의 재생 목록’이나 ‘수요일의 앨범’처럼 각각 다른 재생 목록과 앨범을 새롭게 제공하는 것은 물론 최근 재생한 음악과 즐겨 듣는 음악, 내가 들었던 음악과 비슷한 음악까지 추천해주는 똑똑한 DJ다. 2주쯤 지나자 나만을 위한 새로운 음악 믹스를 만들어 추천해주기 시작하는데 ‘취저’(취향 저격) 그 자체다. 임의 재생 한 번만 눌러놓으면 알아서 이것저것 틀어주니 편하기까지 하다. 

언제부턴가 익숙한 음악만 듣던 나에게 애플 뮤직은 나조차 모르겠던 내 취향을 파악해 새로운 음악들을 선물하는 중이다. 끝말잇기 하자고 말을 걸면 “좋아요, 제가 먼저 시작할게요” 한 후 냉큼 “해질 녘” 혹은 “꽃무늬”를 해버려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는 시리(Siri)만큼이나 영리하다고나 할까. 그동안 빅데이터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용을 꺼려 왔지만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음악을 골라 대령하는 이 DJ의 실력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좋아하던 음악도 듣고 싶고 새로운 음악도 탐색해보고 싶은 내 욕심을 채워주는 데 그만이다. 요즘은 LP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발견한 터, 똑같은 음악이라도 기기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언제부터인가 종이책과 전자책을 번갈아 읽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책을 읽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나 종종 골탕을 먹는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바로 확인 가능한 데다 내용 검색마저 가능하니 자료 찾기도 편하고, 여행을 떠났을 때도 짐 무게 걱정할 필요 없으니 편리함 그 자체다. 사실 효율성만 따지면 종이책이나 음반은 옳은 선택이 아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짐을 늘리는 데에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뭔가를 사들이고 쟁여놓는 행위 자체가 부담인 것은 맞다. 하지만 “책은 사서 바로 읽는 게 아니라, 사놓은 책을 언젠가 읽게 되는 것”이라는 작가 강창래의 말대로 손 가는 데, 보이는 데에 책이 있어야 읽기 마련이다. 전자책으로는 누릴 수 없는 우연의 즐거움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애플 뮤직의 DJ가 아무리 똑똑해도 라이브 공연의 현장감을 능가하기란 어렵다. 며칠 전 재즈 클럽 버텀라인에서 신촌블루스 엄인호의 공연을 봤다. 작은 공간을 꽉 채운 관객들의 기대감만으로도 후끈했는데, 관객을 휘어잡는 거장의 무대에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공연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사람들은 음악과 알코올에 취해 떼창을 해댔고, 관객의 열기와 흥분을 고스란히 받은 뮤지션들의 화답으로 여름밤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두 곡의 앙코르를 마지막으로 두 시간여의 공연이 끝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 많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버린 것이다. 의자 하나가 간절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어 있는 의자들만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오히려 엄인호 선생님이 자리를 뜨지 않고 관객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연 중간에 “공연을 즐기기 위해 가장 좋은 건 술을 주문하는 것입니다”라는 인상적인 코멘트를 남긴 뒤였다. 술이라도 한 잔 더 팔아주는 것이 이런 무대를 만들어준 공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지속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거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썰물처럼 클럽을 빠져나가던 관객들이 더 아쉬웠다. 입장료를 냈으니 그것으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공연 보러 와서 잘 놀고 앙코르곡도 들었고, 공연이 끝났으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왠지 헛헛했다고나 할까. 백발 성성한 노장의 라이브 공연이라는 ‘아날로그’를 ‘디지털’적 방식으로 끝내버린 그날의 마무리가 아쉬움으로 남은 이유다.

음악 감상이든 독서든 시대에 맞춰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아날로그 특유의 감성만큼은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좀 촌스럽고 비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아날로그의 반격>이란 제목의 책을 전자책으로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한 아이러니는 어찌해야 할까? 당분간 나는 음악이든 책이든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 갈지(之)자 행보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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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민담은 없다. 어른들은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원초적인 폭력과 성을 할 수 있는 한 순치한 뒤 듣기와 말하기 교육에, 또는 즐거운 놀이용으로 활용할 뿐이다.

어린이를 위한 우화도 없다. 인간 사회를 동물에 빗대 꼬집은 이야기가 우화다. 인간 사회와 세상의 인심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가는 어린이가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른이라면 이야기의 너머를 보아야 할 터이다. 민담의 끔찍함을 많이 지닌 우화로 <토끼전>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용왕의 발병이다. 용왕은 성적인 향락과 술에 빠져 몇날 며칠을 내리 놀다가 덜컥 죽을병에 걸린다. 용왕이 평소 굽신대던 고위 관리들에게 자신을 살릴 방법을 물었지만 이런 소리나 할 뿐이다. “어쩌나?” “어쩐담!” “좋은 수 있나?” “별수가 있나!” 그리고 다른 얘기는 다 아는 얘기 너머에 있다.

“별수가 있나”가 전부인 한림학사 깔따구, 간의대부 모치는 각각 이부상서 농어, 병부상서의 자식이다. 무능한 자들이 아비 덕분에 그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는 용궁이다. 아무 의견이 없으므로 적이 없는 쏘가리가 용왕의 자문역이었다. 대대로 6품 벼슬을 넘지 못한 자라는 미치도록 출세하고 싶었다. 고래도 벌떡게도 메기도 도미도 못 오를 길에 기어코 자라가 나선 데에는 이번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간절해서 뭍에 오른 자라는 토끼의 자취를 쫓다가 범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산속의 회의를 엿보게 된다.

산속 회의는 용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와 닮은 데가 많았다. 회의는 노루, 너구리, 멧돼지의 나이 다툼으로 처음부터 엉망이었다.

사람이 농토를 넓히느라 개간이 이어져 산속이 잠식되니 살 곳이 없다고, 나날이 사냥이 극성이니 살길을 찾자고 회의가 열렸는데, 그 개시가 연장자 다툼이었다. 간신히 진정하고 나서 사냥꾼도 사냥꾼이지만 사냥개부터 해치우자는 보잘것없는 짐승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산속의 왕 범은 꼬리를 내렸다. “사냥개 뒤에는 일등 포수가 있다. 잘못 건드렸다가 포수의 총에서 번쩍 불꽃이 튀는 순간 내 신세가 어찌 되겠는가?” 그러고도 간식은 필요했다. 범이 허기질 무렵 여우가 다람쥐가 모아 놓은 밤과 도토리를 들추었다.

다람쥐는 여우한테 대들 완력도 용기도 없었다. 다람쥐는 분풀이로 저보다 못한 쥐를 잡았다. 쥐가 모아 둔 양식을 털어 바쳤다. 그러나 범은 고기가 먹고 싶었다. 다시 여우가 나섰다. “멧돼지 새끼 큰놈이 사람 시장에 나가면 열 냥짜리입니다. 멧돼지 새끼 팔아 열 냥어치 맛난 거 사 드십시오.”

농장을 지배하는 동물이 힘없는 동포 동물을 인간에게 팔아먹는 장면이 나오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방불하다. 멧돼지가 땅바닥에 박힌 사금파리를 입에 넣고 으득으득 씹으며 어쩔 줄을 모르는데 기어코 여우가 한마디 덧붙인다. “나처럼 세상 살면 아무 걱정 없지. 어디를 가도 제일 힘센 놈 비위만 맞추면 일평생 편치. 남한테 거저 묻어가지.”

금수저 깔따구, 모치 대신에 가 본 적도 없는 뭍에서 본 적도 없는 토끼를 쫓는 것은 신분의 원한을 품은 자라였다. 아비한테 물려받은 흙수저를 입에 문 자라였다. 엉망인 산속에서 다람쥐는 저만 못한 쥐에게 제 억울함을 넘겨씌웠다. 산중의 임금이라지만 사냥꾼 무서워 사냥개를 못 쫓는 범에게, 멧돼지는 자식을 빼앗기고도 대들지 않거나 대들지 못했다. 제게 엄니가 있음을 잊고 사는 모양이다. 이 모습을 비웃으며 악마적인 쾌감을 느끼는 하수인이 존재한다. 누구보다 얄밉고, 누구보다 밉살맞다.

뱅 돌아 오늘이다. 뱅 돌아 우리 앞이다.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의 “밥하는 아줌마” 망언을 옹호하는 단체의 기자회견이 같은 당 장정숙 의원의 주선으로 열렸단다. 용왕이나 범을 염두에 둔 기자회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 낀 분 가운데 인간세계에서 깔따구나 모치 같은 복을 누리고 사는 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아줌마가 어때서”가 울려 퍼진 모양이다. 여우는 아주 분명히 보인다. 산속 회의는 곰의 한마디로 닫혔다. 곰은 이렇게 외쳤다. “여우 놈의 웃음소리 뼈 저려 못 듣겠다. 그만 집어치우자.”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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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천이두 선생님을 글로만 뵈었다. 소설가 손창섭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였는데, 그의 평문을 읽고서는 예리한 비평 안목과 해박한 서구문학이론을 한국적 문맥에서 풀어놓는 솜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변변한 번역물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 막스 셸러며 도스토옙스키, 앙리 바리뷔스 같은 서구 사상가나 작가들을 섭렵하셨을까. 물론 일본판본이었을 테지만, 우리 시대 지평보다 더 넓은 세계문학사적 지평에서 한국문학을 논하는 선생님의 글이 문학청년에게 중요한 자극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남도에 내려와 선생님이 머물렀던 캠퍼스를 오가며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선생님의 면모였다. 그는 당대 문학작품을 부지런히 읽고 논하는 실천적인 문학평론가일 뿐 아니라, 그가 발 딛고 있는 토착성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탐구한 국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고유한 미의식을 연구한 <한의 구조 연구>의 저자이자 판소리의 전설인 <판소리 명창 임방울>을 저술하신 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이들 저서에서 ‘한’이 단순히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의 소산이 ‘한’(르상티망)이 아니라 ‘삭임’이라는 내적 수련과 ‘원’(願)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판소리의 ‘시김새’ ‘이면’ ‘그늘’ ‘소극적 수동성’과 함께 있는 중요한 미학적, 윤리적 가치임을 강조한 바 있다. ‘한’에 대한 의식과 강조는 그가 ‘정읍사’ 이후 한국 서정시와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에서 ‘한’의 가락과 풀이를 읽어낼 때 독보적으로 빛을 발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고 천이두 선생을 민족주의자로 볼 수도 있으나 글을 읽다보면 그의 ‘한’에 대한 천착과 후속 작업이 거창한 이념의 소산이 아니라 투철한 토착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안의 이매창과 가람 이병기, 서정주의 글에 깃든 ‘호남의 사무치게 구성진 가락’을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춘향가’와 ‘흥보가’에 깃든 전라도의 맛과 멋을 미학적으로 설파해낸 것도 이러한 토착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지난 11일 그의 영결식에 미처 가보지 못한 나는 다음날 연구실에서 색 바랜 그의 평론집을 꺼내들었다. 그의 비평 궤적을 더듬다가 문득 그의 등단작인 <인간 속성과 모럴>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도서관으로 향했고, 내친김에 혼자 하는 추도식이라는 요량으로, 어두컴컴한 지하서고에 들어가 당시 발표지면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마땅히 실려 있어야 할 <현대문학> 1958년 11월호에 그의 글만 정확히 찢겨져 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재하는 ‘인간속성과 모럴’이라니. 그날 종일 나는 이 부재하는 지면을 상상하는 것으로 보냈다. 아마도 자기본위적인 인간의 본성은 모럴이라는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요지쯤으로 정리해둘 수도 있겠으나, 이 당위는 너무 단순하다. 더군다나 ‘보편적 가치판단의 기준을 간직하되 완전한 도그마에 떨어지지 않으며, 투철한 지도이념을 제시하되 인습적인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이 떨어지지 않는 비평가’이기를 주문하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한 꿈임을, 그 각각의 요소들이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기보다는 숙명적으로 상호배반의 관계’에 있음을 성찰하고 있던 분이 아니었던가.

또한 서구근대문학에 한국문학을 비춰보다가도 누구보다도 이 땅의 굴곡진 미학에 신명나 하셨던 분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인간속성과 모럴’은 굳어진 도식이라기보다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항구적으로 변하는 인간속성과 모럴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이 변전의 지점과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사유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는 화두쯤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느 독일작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화해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잊을 수는 없다.’ 문학과 비평은 인간의 저러한 삶의 밑자리를 살피는 일이고 이 간극에 깃든 수많은 결들을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당위로서 주어진 모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구체적 영토가 있다. 그 대지 위에 서면 위 글은 때론 뒤집어지기도 한다. “인간은 용서할 수 없지만 화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있고, 잊을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불합리와 이면, 오류들은 한편 놀라운 기적이기도 하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의 밑자리에서 그늘과 삭임을 보는 것, 그것은 고 천이두 선생님이 곱게 닦아놓으신 ‘한’의 현재성일 것이다. 큰 자취를 남기고 먼 길 떠나신 천이두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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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달 30일 아침밥을 먹으며 그날 학교급식은 나오는지, 선생님이 특별히 말씀해주신 것은 없는지 딸아이에게 물었다. 딸 말이 선생님이 따로 설명해주신 것은 없대서 나는 전학 오기 전 친했던 친구에게 연락해 거기는 오늘 급식이 나오는지 한번 물어보라 했다. “엄마, 수박이가 오늘 급식 대신 소보로빵이랑 요구르트 먹는대. 오늘 무슨 날이야”라는 딸의 물음에 나는 “힘들게 너희 밥해주시는 분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그 목소리를 좀 들어달라고 파업하는 날이야”라고 설명해줬다. 고개를 끄덕하더니 딸은 이내 신나게 이전에 다니던 학교급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얘기하면서 우리 동네 최고였다고 자랑하듯 회상했다.

지난달 29~30일은 민주노총 사회적 총파업의 일환으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파업했다. 급식조리사, 보조교사 등 학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정규직과의 차별 해소를 요구했다. 현재 학교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교직원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확대되었고, 그 규모는 한국 공공부문 내에서도 가장 크다. 이들 중 상당수는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환경, 학교 내 차별과 배제 등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거 생기기 시작한 배경에는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 유연화 물결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면서 집에서 이루어지던 ‘밥하기’와 ‘돌보기’의 사회화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다. 김대중 정부 시기 초·중학교에 급식이 도입되면서 조리종사원이 늘어났고, 교무보조원뿐만 아니라 특별활동 강사 등 학교 비정규직은 지속적으로 늘어왔다. 2010년 이후에는 초등 돌봄교실이 확대되면서 많은 돌봄교사들이 시간제로 일하게 됐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의 밥을 지어주고 돌봐주는 사람들 대부분은 불안정하게 일하는 학교 비정규직이다.

이번 파업과 관련해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 이언주 의원은 본인 또한 아이를 둔 엄마로서 파업이 아이들의 밥 먹을 권리를 해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인건비가 올라가면 결과적으로 급식의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급식 조리종사원을 두고 ‘간호조무사보다도 못한’ ‘요양사 수준의 그냥 밥하는 아줌마’라고 하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나쁜 사람들, 미친×’라고 말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그의 발언들은 여러 결에서 매우 참담하다. 그가 개인적으로 노동3권의 보장을 얼마나 진지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어떠한 서열체계를 가지고 특정 업종을 폄하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관심 가지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그가 아이를 둔 엄마이자 일하는 여성으로서 본인의 아이를 돌봐주고 밥을 지어주는 노동자들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밥하는 아줌마’는 곧 미숙련이라는 한국 사회의 남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는 것이 참담하다. 그도 한국 사회에 아이를 둔 수많은 부모와 수많은 일하는 여성(그리고 남성) 중 한 명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누군가의 삶이 불안정해질지라도 내 아이의 밥 먹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아줌마의 노동은 무시해도 되는 쉬운 일이라는 ‘이언주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사와 돌봄의 노동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해내는 행위로 여겨져 오랫동안 ‘비노동’으로 치부돼 왔다. 남성주의 이데올로기는 돌보기, 밥하기 등을 ‘아줌마 노동’으로 간주하고 그 숙련 정도를 구체적인 검증 과정도 없이 평가절하했다.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담당해온 일들이 공적 영역으로 이전되었지만 뿌리 깊은 남성주의 이데올로기가 줄기는커녕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여러 개의 색실이 엮여서 한 사회의 풍경이 그려지듯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서로가 연결돼 있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 누군가의 삶을 빼앗은 덕분이라면 그 밥은 맛있으면 안된다. 아이들을 키우는 학부모들과 우리의 아이들은 불편함을 계기로 공존의 방안을 같이 고민해야 한다. 용기 내어 파업에 참여하고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해준 ‘밥하는 아줌마’들에게 감사하다.

이승윤 |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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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19대 대선 기간 중 있었던 일이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물었다. “군 동성애는 국방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문 후보는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홍 후보는 “그래서 동성애에 반대하십니까?”라고 재차 물었고, 문 후보는 “반대하지요”라고 확답했다.

당시는 대한민국 국군이 위헌 요소가 다분한 군형법 92조 6항에 따라 그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A대위를 구속 수감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군대 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은 국가에 의한 부당한 억압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국민에 대한 차별 및 국가폭력을 승인하는 것이었다. 대선 이후 A대위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군대 위문 공연에는 소위 ‘2부’라는 것이 있다. 이성애자 남성들을 위한 성적 코드와 장치로 가득 찬 시간이다. 그리고 이는 군인의 사기진작을 위한 필수요소라고들 한다. 여기에는 남성은 무조건 이성애자이며, 그 성욕은 본능이자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이성애자들의 성욕은 그렇게도 중요해서 국가가 나서서 여성의 ‘헐벗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반면 동성애는 형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왜일까?

그 이면에는 동성애 혐오만큼이나 여성혐오가 놓여있다. “군력을 약화시킨다”는 말은 남성 간의 성관계가 남성을 ‘여성화시킨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향한 성욕은 남성성의 상징이고, 남성을 향한 성욕은 범죄가 되는 상황. 이는 이성애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착종이 아니고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태도야말로 여군에 대한 남군의 성폭력이 솜방망이 처벌로 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사문화되었던 군형법 92조 6항이 갑자기 법적 효력을 발동하게 된 맥락 역시 살펴봐야 한다. 이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성보수화 역시 진행되었던 것과 그 궤를 함께한다.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는 와중에 기독교 우파를 중심으로 본격화된 동성애에 대한 공격은 성보수화를 견인했다.

우경화와 성적 보수화가 함께 가는 이유는 명백하다. 대한민국에서 성(聖)스러운 존재인 ‘국민’이란 기실 성(性)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성(性)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국가’를 오염시키는 ‘불온하고 더러운 것’은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기득권의 성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이성애자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성(聖)스러운 국민이, 동성애자 군인은 군력을 위협하는 성(性)스러운 범죄자가 된다. (올해 출간된 <‘성’스러운 국민>이라는 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렇게 홍준표 후보 역시 문재인 후보에게 구닥다리 ‘빨갱이’ 프레임을 덧씌우고자 할 때 “동성애 찬성 여부”로 사상검증을 시도할 수 있었다. 2년 전 한 공영방송 이사가 입 밖으로 냈던 “동성애는 더러운 좌파”라는 말은 홍 후보의 질문과 공명한다.

성적 영역 이외의 부분에서 진행되었던 ‘우클릭’은 이제 박근혜 정권 퇴진과 함께 잠시 주춤해졌다. 그리고 일종의 상징적인 보루로 성(性)적/성(聖)적인 영역을 둘러싼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싸움에서 결국 누가 이길지는 자명하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시민권을 얻고 평등을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2017년 7월15일. 서울광장에서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제18회 퀴어 문화축제가 열린다. 보수 기독교는 이미 ‘음란과 타락’을 내세우며 이에 대한 마타도어를 시작했다. ‘음란함’이란 누가 규정하고, 언제 꺼내들며, 어떻게 사용하는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견고한 구습을 타파하고 평등과 자유를 불러오는 것이 음란함이라면, 이번 주말, 광장에서 마음껏 음란하라. 그것은 타락이 아니라 진보임을, 닥쳐온 지옥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임을 만끽하실 수 있을 것이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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