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질문을 권장한다는 것을 기존의 강연 프로그램과의 차이점으로 강조한 방송에 출연 중이다. 10명의 질문자 중 1인이다. 방송에 나가든 안 나가든 녹화 말미에는 ‘질문상’ 수상 차례가 있는데, 그날의 선생님이 10명 중 가장 인상 깊은 질문을 했던 이를 꼽는 시간이다. 어느 날 녹화 뒤 “서윤씨, 상복 터졌네요. 제일 많이 받은 사람 아니야?”라는 방송작가의 말씀을 들었다. 헤아려 보니, 과연 사실이었다. 녹화장에 앉아 질문을 하라고 섭외가 되었고, 선생님들에게 인상 깊은 질문자로 가장 많이 꼽혔다니, 이쯤 되면 ‘프로질문러’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잠시 우쭐할 뻔했다. 프로의 길은 끝없는 수행을 각오하고 걸어야 하는 것. 프로질문러가 되기 위해 정진할 것을 다짐하며, 등대로 삼을 내용을 이 기회에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나쁜 질문’이 무엇인지 인지해야 할 것이다. 너무 진부한 질문들(나는 그 사람에게 한 번 질문했을 뿐이지만 상대는 살면서 100번 이상 들었던 질문이라 지긋지긋한 것)이 대표적이다. 나는 가끔 심술궂은 상상을 한다. “어느 대학 나왔어요?”라는 질문에 “(상처받은 얼굴로) 초졸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상대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결혼 안 하세요?”라는 질문에 “이미…. (먼 곳을 보며)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지요”라고 말하면 질문자는 당황하며 뱉은 말을 후회할까? 당연히 모든 사람이 대학을 나왔을 것이라는 편견, 남의 결혼여부가 자신과 상관있다는 태도를 전제로 한 질문에 대해, 나는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을 내놓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깊이 고민하지 않고 질문한 이를 반성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

물론 나도 멍청한 질문 많이 하며 살아왔다(인생은 흑역사 갱신의 연속이다). 내뱉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이미 뱉어버렸다면 상대의 기색을 살피는 눈치라도 있어야겠다. 상대가 불쾌해하거나 곤란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재빠르게 사과하고 해명하도록. 어떤 질문은 폭력이 될 수도 있기에.

나의 경우 어떤 프레임에 욱여넣기 위한, 일방적으로 나를 판정하기 위한 정보 수집을 목적에 둔 질문을 받았을 때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질문자가 보이는 태도도 한몫했다. 장난기 없이 진지하고 오만한 태도. 심문관 납셨다. “그게 왜 궁금하세요? 무례하신 것 같아요. 기분 나쁜 질문이에요”라고 그 자리에서 분명히 짚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그런 유의 단호한 말이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문자와 답변자 간에 권력의 차이가 날 때,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예컨대 면접장에서 면접관과 지원자의 위계가 그렇다. 친구의 지인이 모 방송사 기자 최종 면접에서 “우리 회사 기자들 중에 자네보다 못생긴 사람 이름 한 명만 대보게. 자네가 TV에 나올 만한 외모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공분한 적 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그런 질문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 입 놀리는 네 새끼보단 낫습니다”라고 답변하는 배짱이라도 보여주길 바라는 ‘압박’이었을까?

그렇다면 좋은 질문이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나쁜 질문들을 뒤집은 것일 테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전제 위에 던져지는 진부하지 않은 물음. 해당 화두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아보게 하는 길잡이. 교류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주는 매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너무 떠받들지도 얕잡아 보지도 않는, 동등한 눈높이로 담백하게 표시하는 존중. 당신을 더 잘 알고 싶고, 당신의 말을 더욱 오해 없이 깊이 받아들이고 싶다는 진심. 상대에게 눈을 반짝이며 몰입하는 집중력.

그러나 녹화 때 강의에 너무 푹 빠져서 방송에 나가지도 못할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일 수 있다. 너무 질문 많이 하는 인간 때문에 퇴근시간 늦춰졌다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경지까지 올라야 프로질문러가 되는 동시에 프로방송인이 될 수 있는 걸까?

역시 프로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택시, 그 환대와 불편함의 공간  (0) 2017.08.31
나를 살리는 ‘죽이는 글쓰기’  (0) 2017.08.29
프로질문러가 되려면  (0) 2017.08.24
사람의 일 로봇의 일  (0) 2017.08.21
[청춘직설]맹목의 숲  (0) 2017.08.16
불안정 노동과 시간도둑  (0) 2017.08.1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카카오뱅크에 뒤늦게 가입했다. 은행 가서 대기표 뽑고 기다리는 시간 없이 간편하게 계좌가 만들어지니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가 이런 ‘비대면 서비스’를 꽤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문 단계에서 결제까지 가능해 배달원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배달앱, 커피 전문점의 모바일 주문결제 서비스, 채팅만으로 상품을 주문할 수 있는 홈쇼핑의 ‘톡 주문 서비스’까지 다양하다. 고객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초면인 경우 ‘지금 전화 통화 괜찮은지’ 물어보는 것이 예의처럼 느껴질 정도다. 낯선 사람과는 전화 통화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물론이고 목소리조차 섞지 않아도 일상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카카오뱅크 앱 이미지. 카카오뱅크 제공

나 역시 처음에는 거부감이 컸다. ‘전화 한 통 하면 될 일을 앱 깔고 회원 가입하고 귀찮지도 않나’ 싶었고,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게 편했다. 그런데 딱 한 번 써보고 바로 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탔다. 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시간 낭비 안 해도 되고, 정보 전달 과정에서 잘못 알아들을 일도 없다. 편하고 효율적일뿐더러 무엇보다 사람 때문에 불쾌하거나 진을 뺄 일이 없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대면 서비스에서 불쾌했던 경험들도 한몫했다. 초여름에 방문했던 쇤부른 궁전이 특히 그랬다. 오스트리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장소답게 성수기가 아니었는데도 줄 서서 표를 사고, 입장할 때조차 10분 단위로 시간을 끊고 조별로 대기했다 들어가야 했다. 직원들 대부분이 만사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고, 뭘 물어봐도 고개를 가로젓거나 ‘놉(Nope)’이라고 간단하게만 답했다. 하루종일 밀려드는 ‘뜨내기’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비싼 입장료 내고 시간 들여 방문한 관광객으로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로봇이 나온다면 이 직원들은 살아남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로봇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다국어 입력 가능한 키오스크로 입장권을 자동 발매하는 게 훨씬 낫겠다 싶었다.

이미 대체가 시작된 곳도 많다. “무인 결제로 인해 커피 품질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어렵지 않으니 겁먹지 마세요.” 커다랗게 써 붙인 ‘한 잔에 900원’ 커피집은 키오스크로 자동 주문만 받는다. 직원은 음료만 만들고, 손님은 주문과 계산을 끝낸 후 음료만 받아가는 식이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서 이런 자동화가 대세인 것은 아니다. “어서 오십시오, 행복을 드리는 ○○ 백화점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희 ○○ 백화점과 함께 즐거운 쇼핑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백화점 주차장 건너편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차가 들어올 때마다 솔 톤으로 반복되는 멘트를 하루 종일 들어야 했다. 추운 겨울, 스타킹 차림으로 장식용 모자를 쓰고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여성들의 노동은 무용(無用)하게만 느껴졌다. 손님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주차권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안내만 하는데도, 마트와 달리 백화점 손님으로 ‘대접받는’ 느낌을 주기에 반응이 꽤 좋다고 한다. 주차장에도 무인 시스템이 속속 도입되고 있다지만, 한국 백화점의 주차 안내 요원은 좀 더 오래 살아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로봇이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대체가 불가능한 직업군으로 말이다.

“민영화해서 곡예사들을 계약제로 고용했더니 여자 곡예사들의 생리가 줄었어요. 좋은 일이죠. 사회주의였을 때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생리를 했거든요.” 헨미 요의 <먹는 인간>에 나오는 폴란드 서커스단 이야기다. 로봇 곡예사가 나온다면 ‘생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로봇보다는 사람이 하는 서커스가 훨씬 매력적이다. 실제 여러 기관의 예측에서 로봇이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직업군은 행위예술가와 같은 즉흥성과 창의성이 핵심인 예술적 직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이가 예술가로 살 수는 없는 법, 기계의 일자리 대체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늘어놓는 대신 어떻게 변화에 대처하는 안전망을 만들어나갈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모든 직업이 자동화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평생직업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전문가의 조언과 함께.

정지은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살리는 ‘죽이는 글쓰기’  (0) 2017.08.29
프로질문러가 되려면  (0) 2017.08.24
사람의 일 로봇의 일  (0) 2017.08.21
[청춘직설]맹목의 숲  (0) 2017.08.16
불안정 노동과 시간도둑  (0) 2017.08.10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들  (0) 2017.08.0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폭염의 여름, 피서를 한다고 바다로 산으로 다녔지만 오가는 길에 이 여름이 얼마나 지독한지 절감했을 뿐 전혀 더위를 피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정작 잠깐 더위를 잊었던 때는 드라마 <비밀의 숲>을 몰아보았던 지난 며칠이 유일했던 듯하다.

출처: tvN

 

내가 이 드라마에 열광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첫째, 리얼리티이다. <비밀의 숲>은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우리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손쉽게 ‘영웅’을 내세워 정의를 바로잡는, 사이다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불의와 정의가 뒤섞여있고, 범죄자와 의인이 하나이고 살인자가 피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서사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기이한 곡면을 따라 롤러코스터를 탄다.

줄거리는 정계, 재계, 검경 가릴 것 없이 뇌물을 주고 로비했던 사업가가 살해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범죄의 고리를 파헤친다는 것이다. <비밀의 숲>의 성공은 진부할 수도 있는 이 모티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캐릭터 창조에 있다.

우선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 그는 어릴 적 뇌수술로 감정을 상실하고 오직 이성과 법에 충실한 알파고 같은 인간이다. 법리만을 탑재한 황시목 검사는 타인과의 소통에 서툴고 변변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다. 공조수사나 사람을 믿지 않고 오직 사실과 증거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황시목 검사는 역설적으로 무감동, 무감정과 관계단절로 인해 인맥과 욕망으로 얽히고설킨 비밀의 숲의 무성한 가지들을 냉철하게 헤쳐나간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둘러싼 ‘비밀의 숲’에는 욕망과 비리로 얽힌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있다. 복수에 눈이 먼 영 검사,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재벌 회장, 성접대와 뇌물수수로 오염된 경찰서장과 스폰서 검사, 업계의 비리로 어린 자식을 잃은 수사과장, 그리고 가족에 발목 잡히고 정의감에 눈이 먼 과대망상의 검사장. 이들 인물은 선과 악, 불의와 정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거니와 고정된 자리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이들 인물은 사건 발생과 동시에 황시목과 더불어 혹은 더 신속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전개시킨다.

가령 열등감을 지닌 서동재 검사는 권력과 뇌물로 얼룩진 기회주의자로 등장하지만 이중스파이 역할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신의 비리 사실을 감추기 위해 증거물을 은폐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인을 해치지는 못하는 아슬아슬한 인물로 등장한다. 범죄의 ‘빅피처’를 연출한 이창준 검사장은 정의감에 가득 찬 인물이지만, 한편 재벌회장인 장인과 아내로 인해 부정부패의 수호자가 된 아수라 백작 같은 인물이다. 즉 <비밀의 숲> 인물들은 모두 한마디로 ‘살아있네’라는 탄성을 자아나게 한다.

<비밀의 숲>이 끝까지 흥미진진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인물이 모두 범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범인일 수 있는 이유는 각각 어떤 욕망과 감정의 지점에서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애국이든 사리사욕이든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서 눈이 멀거나 눈을 감는다. 작가는 이 맹목의 숲에 인공지능 같은 황시목 검사를 가만히 풀어놓는다. 그는 ‘욕망이나 감정’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맹목의 숲에서 유일하게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한다.

셋째, <비밀의 숲>은 영웅과 독재를 경계한다.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숱한 부정부패와 문제들을 접하면서 나는 때론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통치자라면 저걸 단칼에 싹!’이라는. 가령 사교육을 없애거나 토지 사유를 금지시키는. 그런 상상 끝에 어떤 독재자나 파시스트가 딸려오는 것을 보고 흠칫할 때가 있다. <비밀의 숲>은 이런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령 이창준 검사는 범죄자이기도 하지만, 한편 권력자들의 비리증거를 확보해서 황시목 검사에게 넘겨주고 자결한 의인이자 내부고발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시목 검사는 그를 ‘괴물’이라 칭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고, 큰 목숨과 작은 목숨이 따로 있다고 믿으며 타인을 단죄한 파시스트.

사실 황시목 검사라는 캐릭터야말로 지독한 판타지일 수 있다. 감정이 없는, 타인과 무관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판타지야말로 우리 현실의 무의식적 소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국정농단뿐 아니라 세월호 등의 거대한 사건에서 우리는 부정으로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을 본다. 그리고 그 숱한 매듭에는 저와 같은 각각의 맹목이 들어차 있다. 받고 주었다는 이유로, 식구라는 이유로 누구 하나 이 사슬에서 발을 빼어 진실을 외치지 못한다. 이 시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와 같은 알파고 검사가 절실한 이유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질문러가 되려면  (0) 2017.08.24
사람의 일 로봇의 일  (0) 2017.08.21
[청춘직설]맹목의 숲  (0) 2017.08.16
불안정 노동과 시간도둑  (0) 2017.08.10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들  (0) 2017.08.08
‘아재’들에게  (0) 2017.08.0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모모의 친구 푸지씨네 이발소로 어느 날 싸늘한 한기를 몰고 회색신사가 찾아온다. 그는 시간저축 은행에서 왔다고 자신을 근사하게 소개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인생을 꿈꾼다면 바로 그 시간을 아껴야 하고 ‘시간은 돈’이라며 푸지씨를 다그친다. 사실 그동안 푸지씨는 귀가 어두운 어머니 곁에서 매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지역 합창단에 나가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였다. 또 매일 30분씩은 사랑하는 다리아양에게 꽃을 들고 찾아가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삶을 살아왔다. 그가 얼마나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살았는지 깨닫게 해준 시간도둑 회색신사가 잿빛차를 타고 부웅 떠나자 푸지씨는 이제부터 빈틈없이 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일할수록 모두 도둑당해 손톱만큼의 시간도 남지 않는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책 <모모> 속 마을 사람들은 곧 모두가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하는 모습은 우리가 언젠가 그려본 그 삶을 얼마나 닮아있을까.

한국의 복지지출 수준은 선진국의 평균치보다 한참 낮다. 어느 정도의 괜찮은 삶을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것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 주거, 교육, 돌봄, 문화생활, 나와 가족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를 위한 보험까지 계속해서 구매해야 한다. 시장에서의 현금교환을 통해서만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시장구매력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장구매력이 노동을 교환한 대가로 얻는 임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을 하고 시장소득을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도 모든 것을 구매해야 어느 정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한 단위의 시장소득을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이 일할 수밖에 없다. 일하는 시간이 정말 돈이고, 그 돈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고용관계가 불안정하거나 임금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비참하다. 고용계약이 불안하여 언제 소득이 끊길지 모를수록 고용주가 원하는 만큼, 또 시간당 임금수준이 낮을수록 오랜 시간을 일해야만 어느 정도의 소득을 벌고 살 수 있다. 현재 임금근로자 세 명 중에 적어도 한 명은 고용관계가 불안정하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국제노동기구 기준으로 저임금 근로자이다. 여기에 영세자영업, 특수고용 등 한국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면 불안정한 노동자의 수는 증가한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가 어느 정도 살아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장시간 노동이다. 고용관계가 불안한 사람일수록 더 쉼 없이 일하고, 저임금노동자일수록 초장시간을 일하고 있다.

작년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의 가방 속에 있던 컵라면은 그가 쉴 틈 없이 위험한 일을 얼마나 바쁘게 해내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외주화가 일반화되고 있는 게임 업계는 하루 노동시간이 13시간에 달하는 과도한 근로시간이 있는데 작년에 청년이 넷이나 사망했다. 올해 사망한 집배원의 수는 벌써 12명이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배원의 연평균 업무 시간은 약 2800시간으로 이미 너무나도 긴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2285시간)보다도 500시간 이상을 더 근무한다.

최근 2018년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나마 반가운 결과이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어 청년들이 열심히 일할 생각을 않고 쉬운 알바만 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한심한 우려다. 또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주 40시간 근로기준 준수, 주 52시간 근로시간 상한제의 법 개정으로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이 실업률 감소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부터 분석해야 한다.

회색신사들은 장시간 노동은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속이지만 좋은 복지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되고 노동의 대가도 충분히 인정되어 장시간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면 일의 의미도, 그리고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시간이 곧 삶 자체인데 시간을 훔치는 것은 삶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의 일 로봇의 일  (0) 2017.08.21
[청춘직설]맹목의 숲  (0) 2017.08.16
불안정 노동과 시간도둑  (0) 2017.08.10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들  (0) 2017.08.08
‘아재’들에게  (0) 2017.08.04
숨구멍  (0) 2017.08.0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최근 시간여행 이야기, 즉 타임슬립(time slip)물이 유행이다. 2012년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와 <옥탑방 왕세자> 등이 화제를 모으고 2013년 <나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간여행자들의 사랑은 팔리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타임슬립의 매혹은 2014년 4월16일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바로잡고자 하는 대중적 욕망과 만났다.

전 국민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생방송으로 304명의 생명이 사그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날 이후, 대중문화는 이 집단적 트라우마에 말을 걸고 문화적으로라도 위로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렇게 드라마 <시그널>(2016)을 비롯해서 영화 <시간이탈자>(2015),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2016)에 이어 <하루>(2017)까지, 시간을 거슬러 살면서 재난이나 사고, 소중한 이의 죽음을 막으려는 이야기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포스트 416’ 타임슬립물에는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언제나 남자고, 과거에 박제되어 반복적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여자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일까?

시간(time)으로부터 미끄러질(slip)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시간을 산다는 것은 자신만의 모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며, 그렇게 성장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성중심적인 서사 관습 안에서 시간은 언제나 남자들의 것이었고, 그렇게 남자들만이 시간 속에서 쌓여온 이야기, 즉 역사의 주체가 되어왔다. 그러므로 역사가 남겨준 지혜와 지식 역시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시간이 아닌 공간에 박제되어 그 자리에 머물면서, 남자들이 벗어나야 하는 과거(트라우마)로 존재하거나 성취해야 하는 미래(트로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서 과거에 고착되어 성장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은 오히려 가부장제의 상상력과 그에 기생하여 연명하고 있는 어떤 남자들인 것 같다.

얼마 전 개봉했던 <하루>는 이런 퇴행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딸의 죽음을 목격하는 준영과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는 민철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하루는 끝도 없이 반복된다. 그야말로 무간지옥이다.

점차 이 타임슬립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밝혀진다. 3년 전 준영과 민철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들을 잃은 강식이 복수극을 펼치면서 세 사람은 시간의 굴레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강식은 복수를 위해 남자들 본인이 아닌 그들의 딸과 아내를 해친다.

영화 내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원칙이 적용되었을 터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시간과 여성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에 무능한 한국 대중문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하루라는 시간이 반복될 동안 여자들은 아무런 지식도,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셀 수 없이 목이 졸리고 차에 치인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아는 자의 자리에 오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의 소유물이 되어 그들 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요리’되는 것. 그렇게 남성이 지켜주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폭력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 이런 상상력이야말로 여성혐오 문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그리고 그런 문화가 여성을 살해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달라지고 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평등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운동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들과 한국 사회 전반은 어떤가? 변화를 갈망하면서 싸움을 시작한 여성들 앞에서 시간은 누구와 함께 흐를 것인가? 남자만이 시간을 여행하는 타임슬립물의 유행은 역사의 주체로서 남성이 아닌, 역사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남성의 퇴행을 보여주는 징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성장하지 않으면서 군림하려는 자들의 서사는 끝날 때가 되었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춘직설]맹목의 숲  (0) 2017.08.16
불안정 노동과 시간도둑  (0) 2017.08.10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들  (0) 2017.08.08
‘아재’들에게  (0) 2017.08.04
숨구멍  (0) 2017.08.01
할 말은 하며 삽시다  (0) 2017.07.2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얼마 전 대리운전 콜을 한 50대 남성 셋은 나에게 “여기 룸살롱 좋은 데 없어?” 하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그들은 아니 뭐 대리기사가 그런 것도 모르나, 하며 웃었다. 하긴 내가 유흥업소에 손님으로 가본 일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직업상 “어디를 많이 찾으시더군요” 하는 조언 정도를 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민망했다. 차에 오른 그들은 한참 골프와 유흥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나의 성실성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리운전까지 하는 젊은이들이 흔치 않다는 것이었다.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다고, 그리고 팁을 좀 주어야겠다고 목소리들을 높여서, 나는 적당히 설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트렁크에서 골프 가방을 챙겼다. 나에게 정해진 비용만을 정확히 지불하고 “잘 가요, 파이팅!” 하고는 멀어져 갔다.

운전하는 나를 대하는 50대 한국 남성들의 태도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거의 예외 없이 (1)나에게 열심히 산다는 칭찬, 혹은 걱정을 가볍게 건네지만, (2)곧 자신은 더 열심히 살았다는 자기 서사를 시작한다. (3)그에 더해, 사실 젊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고 있으며, (4)세상에 공짜밥은 없다고, (5)그러니까 당신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고는, (6)이런 이야기 어디 가서 못 들으니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돈을 받아야겠다는 가벼운 유머·개그를 던지고, (7)내가 이런 이야기 해줘서 좋았지,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나열한 7가지 각 항목을 순서대로 모두 거치는 이들도 있고, 몇 가지는 건너뛰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젊은 타인에 대한 걱정, 질책, 당부와 함께 자신의 서사를 긴 시간 이어 나간다.

나는 운전하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정확히는, 대화라기보다는 답을 정해두고 하는 일방적인 전달과 강요다. 그들 앞에서 나는 노력하지 않는 세대의 대표가 되고, 그들은 스스로 노력한 세대의 대표가 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과 과시, 타인에 대한 걱정과 무시로 이어진다. 나는 그들의 기분이 상할까 걱정되어서, 혹은 어떠한 폭력을 불러올까 두려워서 웃으며 수긍하는 것이 고작이다. “네, 맞습니다” 하는 대답과 동의가 필요하고, 가끔은 “대단하십니다” 하는 찬사까지 보낸다. 애초에 타인의 운전석에서 하는 발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이들일수록 자신의 지갑을 여는 일은 더욱 없다. 정해진 금액만을 건네거나 아니면 비용을 깎으려는 시도를 한다. 나는 “아니 사장님, 그렇게 돈이 많다고 자랑하시더니 대리비 1000원을 왜 깎으려고 하십니까?” 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 된다. 물론 내가 한 노동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우리들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그에 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어느 한편의 자기만족을 위한 발화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나 이해 당사자가 아닌, 특히 노동의 사용자와 이용자로 만난 관계에서는 더욱 상호 예의를 갖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나에게는(타인에게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

우리 일상에서도 대화 상대를 타인의 운전석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이들이 있다. 직위가 높아서, 나이가 많아서, 아니면 남성이어서 그래도 된다고 여긴다.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하는 격언이 있지만, 우리는 반대로 입은 열고 지갑은 닫는다. 내가 아는 50대 K는 대리운전을 이용할 때마다 기사에게 말이 많아진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선생님, 그러시면 안돼요…”라고 하자, 그는 “내릴 때 되면 저도 후회해요. 대신 재미없는 제 말 들어줘서 고맙다고 팁을 좀 드려요” 하며 웃었다. 그는 자기만족을 위한 발화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재미없게 다가가는지를 알고, 지갑을 여는 것으로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됐죠, 뭐” 하고 함께 웃었다. 나는 오늘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재’들을 보며, 그가 많이 외로운가보다,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갑을 열기보다는 자신의 귀를 열기를 더욱 바란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의 처지에서 사유하는 연습을 한다면,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보상이 된다. 굳이 지갑을 열지 않아도 어디에서든 환영받는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안정 노동과 시간도둑  (0) 2017.08.10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들  (0) 2017.08.08
‘아재’들에게  (0) 2017.08.04
숨구멍  (0) 2017.08.01
할 말은 하며 삽시다  (0) 2017.07.27
그래도 감성만은 아날로그  (0) 2017.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8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입원해 있었다. 오른팔의 팔꿈치 관절을 심하게 다쳐 재활치료도 오랫동안 받았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가끔 내가 팔을 다쳤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깨달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탁구를 치거나 택시에서 내리며 거스름돈을 받을 때. 팔을 다 뻗어도 직선이 되지 않아 탁구공이 라켓의 중심에 맞지 않는 일이 잦다. 손목 관절 또한 잘 돌아가지 않아 동전들이 바닥에 쏟아지기 일쑤다.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이 엄습한다. 내 마음이 내 몸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8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 구멍에 몸을 던져도 과거의 건강한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얼마 전, 도수치료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올해 들어 무리를 했는지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목과 어깨가 늘 뻣뻣했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은 오른팔이 종종 아팠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신체 리듬이 무너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료용 침대 위에 누웠다. 선생님이 양손으로 내 온몸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것을 단순히 만진다거나 주무른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바로잡는 몸짓이었다. 도수(徒手)는 맨손이라는 뜻이다. 나는 선생님의 맨손에 의지한 채 한동안 가만있었다. 손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 치료를 받다가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선생님이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늘 오른쪽 팔다리 및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닌 모양이었다. “오른쪽이 완전히 경직되어 있어요. 벽돌처럼 단단하네요.” 평소의 나라면 “근육이라 그래요”라고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테지만, 당시에는 압도적인 아픔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숨을 쉬어요. 숨에 집중해요.” 순간, 예전에 재활치료를 받을 때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호흡에 집중해요. 한결 나을 거예요.” 8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참을 수 없던 아픔이 참을 만하다가 부러 참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까지 다다랐다.

“어때요, 숨구멍이 좀 트이죠?” 선생님이 한층 편안해진 내 얼굴을 보며 말씀하셨다.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도수치료를 받은 다음날, 몸살을 앓았다. 기분 좋은 몸살이었다. 흐트러진 몸의 리듬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호흡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늘 숨을 쉬지만 숨 쉬는 데 집중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 호흡을 하지만, 나도 모르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잊고 사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호흡이 절실한 때는, 호흡이 빛을 발하는 때는 어떤 고비를 맞이했을 때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데 호흡법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이 요동할 때 왜 심호흡을 하는지, 호흡하는 데 집중을 하면 왜 잡념이 사라지는지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호흡에도 길이와 부피, 그리고 깊이가 있다.

졸시 ‘미완’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었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이 무너지지 (…) 마음이 무너지면 덩달아 몸도 무너지지.” 몸과 마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동안 나는 내 몸에 너무 무심했었다. 애면글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숨가쁜 날들이 이어졌다. 숨을 쉬면서도 한 번도 숨을 쉴 때 집중한 적이 없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내 호흡에는 들숨만 있었다. 들이쉬는 데 열중한 나머지, 내쉬는 일에는 소홀했었다. 숨구멍이 트일 겨를이 없었다. 한숨만 늘었다.

한숨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것은 두 번째 뜻으로, “근심이나 설움이 있을 때, 또는 긴장하였다가 안도할 때 길게 몰아서 내쉬는 숨”을 뜻한다. 첫 번째 뜻은 “숨을 한 번 쉴 동안”이란 뜻이다. 

한숨을 소중히 여겨야 역설적으로 한숨을 내쉬는 일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숨구멍이 더 많이, 더 자주 트일 것이다.

오은 | 시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들  (0) 2017.08.08
‘아재’들에게  (0) 2017.08.04
숨구멍  (0) 2017.08.01
할 말은 하며 삽시다  (0) 2017.07.27
그래도 감성만은 아날로그  (0) 2017.07.25
“여우의 웃음소리 뼈 저려 못 듣겠다”  (0) 2017.07.2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살면서 ‘제발 이러지 좀 말아줬으면…’ 하는 순간들을 자주 접한다. 나는 그렇게 느낀 지점을 내 안에 고요히 묻어두지 못한다. 불쾌한 감각을 준 당사자에게 뼈 있는 농담을 하거나, “그건 좀 기분이 나쁜데요”라고 감정을 표현해야 그나마 해소가 된다. 물론 나 역시 타인에게 실수할 수 있음을 안다. 다른 사람도 내게 표현해주면 좋겠다. 재빨리 사과하게.

불쾌한 일이 한국 사회에서 너무 자주 벌어지는 종류의 것이라 느낄 때는 구조적 원인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정책적 상상을 펼치는 글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는 내가 사는 사회가 더 밝고 쾌적하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표현하고 요구하는 인물’을 ‘부정적이고 만족을 모르는 인물’이라 등치시키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편견이 사실이 아님을 내가 반증하는데. 내가 얼마나 사소한 감각적 만족으로 쉽사리 행복해지고, ‘정신승리’를 잘 하며, 해학적 인간인지 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5명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문제제기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날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다. 혼자 조용히 책 읽으며 놀 때가 많았고, 말수도 적었다. 수줍어하며 원하는 바도 또렷이 말하지 못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른들이 내 마음을 후고구려 궁예처럼 관심법이라도 동원해서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내 감정과 상황을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으면 오해 받거나 불이익 받을 때가 많다는 것을 수차례 체감하면서 변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초등학교 때의 것이다. 저학년 때, 전염성 질병을 일주일간 앓으며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학교 방침은 전염성 질병으로 출석하지 못할 때는 학적부에 결석으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기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업시간에 출석하는 책임감 강한 초등학생이었는데, 졸업 시 개근상은 고사하고 정근상도 타지 못했다. 의아해서 살펴봤더니 일주일간 학교에 출석하지 못한 것이 결석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어쩐지 일주일 지나서 학교에 간 바로 그날, 음악시간에 의아한 일이 있었더랬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며 관악기를 불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 앞선 애들이 했던 대로 흉내 내봤지만 엉성했고, 담임선생은 듣다 말고 버럭 화를 내며 나를 망신줬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대사는 떠오르지 않는다. 당혹스럽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것, 그저 말없이 빨간 얼굴을 숙이고 울음을 참았던 것만 떠오른다. 내가 부재한 동안 진도 나간 부분이 분명했다. 그는 내가 일주일간 그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당시 학급에 50명 넘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깜빡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담임’을 이해해야 할까? 혹은 양육자의 탓일까? 이혼한 뒤 자식들과도 연을 끊은, 생물학적 어머니는 그때도 자식에게 ‘헌신적’이었던 편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그 당시 어른들 탓해봤자 돌이킬 수 없다(음악시간에 “저 일주일간 아파서 병결했는데 전혀 몰랐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할 뿐이다). 오직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할 뿐. 그 후에도 내 입장을 대변해줄 사람이 곁에 있는 일은 드물었고 나는 내게 닥친 상황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했다.

지금은 내가 순간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언어로 정리하고 표현하게 됐다.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다. 조별과제 할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해 놓고 나중에 뒤에서 욕하는 이, 원하는 바를 똑바로 말 안 하며 알아서 눈치 보기를 바랐던 고용주(초등학생 때나 할 법한 짓을 50세 넘어서도 하다니!) 등. 그러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집단주의 문화,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한국의 문화를 상기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기 할 말 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드물 수밖에 없음을. 지금의 문화는 문제를 발견하고 발언하는 이를 좀 더 존중하고 이야기를 경청하는 ‘어른들’의 실천에서부터 변화할 것임을.

물론 나는 앞으로도 누가 ‘별일도 아닌데 예민하게 지랄하네’라며 흘겨보거나 말거나 문제를 제기하고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하는 삶을 살겠지만.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요즘 나에게는 ‘전속 DJ’가 하나 생겼다. DJ의 이름은 애플 뮤직의 ‘For you’. 매일 ‘월요일의 재생 목록’이나 ‘수요일의 앨범’처럼 각각 다른 재생 목록과 앨범을 새롭게 제공하는 것은 물론 최근 재생한 음악과 즐겨 듣는 음악, 내가 들었던 음악과 비슷한 음악까지 추천해주는 똑똑한 DJ다. 2주쯤 지나자 나만을 위한 새로운 음악 믹스를 만들어 추천해주기 시작하는데 ‘취저’(취향 저격) 그 자체다. 임의 재생 한 번만 눌러놓으면 알아서 이것저것 틀어주니 편하기까지 하다. 

언제부턴가 익숙한 음악만 듣던 나에게 애플 뮤직은 나조차 모르겠던 내 취향을 파악해 새로운 음악들을 선물하는 중이다. 끝말잇기 하자고 말을 걸면 “좋아요, 제가 먼저 시작할게요” 한 후 냉큼 “해질 녘” 혹은 “꽃무늬”를 해버려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는 시리(Siri)만큼이나 영리하다고나 할까. 그동안 빅데이터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용을 꺼려 왔지만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음악을 골라 대령하는 이 DJ의 실력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좋아하던 음악도 듣고 싶고 새로운 음악도 탐색해보고 싶은 내 욕심을 채워주는 데 그만이다. 요즘은 LP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발견한 터, 똑같은 음악이라도 기기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언제부터인가 종이책과 전자책을 번갈아 읽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책을 읽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나 종종 골탕을 먹는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바로 확인 가능한 데다 내용 검색마저 가능하니 자료 찾기도 편하고, 여행을 떠났을 때도 짐 무게 걱정할 필요 없으니 편리함 그 자체다. 사실 효율성만 따지면 종이책이나 음반은 옳은 선택이 아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짐을 늘리는 데에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뭔가를 사들이고 쟁여놓는 행위 자체가 부담인 것은 맞다. 하지만 “책은 사서 바로 읽는 게 아니라, 사놓은 책을 언젠가 읽게 되는 것”이라는 작가 강창래의 말대로 손 가는 데, 보이는 데에 책이 있어야 읽기 마련이다. 전자책으로는 누릴 수 없는 우연의 즐거움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애플 뮤직의 DJ가 아무리 똑똑해도 라이브 공연의 현장감을 능가하기란 어렵다. 며칠 전 재즈 클럽 버텀라인에서 신촌블루스 엄인호의 공연을 봤다. 작은 공간을 꽉 채운 관객들의 기대감만으로도 후끈했는데, 관객을 휘어잡는 거장의 무대에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공연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사람들은 음악과 알코올에 취해 떼창을 해댔고, 관객의 열기와 흥분을 고스란히 받은 뮤지션들의 화답으로 여름밤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두 곡의 앙코르를 마지막으로 두 시간여의 공연이 끝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 많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버린 것이다. 의자 하나가 간절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어 있는 의자들만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오히려 엄인호 선생님이 자리를 뜨지 않고 관객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연 중간에 “공연을 즐기기 위해 가장 좋은 건 술을 주문하는 것입니다”라는 인상적인 코멘트를 남긴 뒤였다. 술이라도 한 잔 더 팔아주는 것이 이런 무대를 만들어준 공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지속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거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썰물처럼 클럽을 빠져나가던 관객들이 더 아쉬웠다. 입장료를 냈으니 그것으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공연 보러 와서 잘 놀고 앙코르곡도 들었고, 공연이 끝났으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왠지 헛헛했다고나 할까. 백발 성성한 노장의 라이브 공연이라는 ‘아날로그’를 ‘디지털’적 방식으로 끝내버린 그날의 마무리가 아쉬움으로 남은 이유다.

음악 감상이든 독서든 시대에 맞춰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아날로그 특유의 감성만큼은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좀 촌스럽고 비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아날로그의 반격>이란 제목의 책을 전자책으로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한 아이러니는 어찌해야 할까? 당분간 나는 음악이든 책이든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 갈지(之)자 행보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린이를 위한 민담은 없다. 어른들은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원초적인 폭력과 성을 할 수 있는 한 순치한 뒤 듣기와 말하기 교육에, 또는 즐거운 놀이용으로 활용할 뿐이다.

어린이를 위한 우화도 없다. 인간 사회를 동물에 빗대 꼬집은 이야기가 우화다. 인간 사회와 세상의 인심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가는 어린이가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른이라면 이야기의 너머를 보아야 할 터이다. 민담의 끔찍함을 많이 지닌 우화로 <토끼전>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용왕의 발병이다. 용왕은 성적인 향락과 술에 빠져 몇날 며칠을 내리 놀다가 덜컥 죽을병에 걸린다. 용왕이 평소 굽신대던 고위 관리들에게 자신을 살릴 방법을 물었지만 이런 소리나 할 뿐이다. “어쩌나?” “어쩐담!” “좋은 수 있나?” “별수가 있나!” 그리고 다른 얘기는 다 아는 얘기 너머에 있다.

“별수가 있나”가 전부인 한림학사 깔따구, 간의대부 모치는 각각 이부상서 농어, 병부상서의 자식이다. 무능한 자들이 아비 덕분에 그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는 용궁이다. 아무 의견이 없으므로 적이 없는 쏘가리가 용왕의 자문역이었다. 대대로 6품 벼슬을 넘지 못한 자라는 미치도록 출세하고 싶었다. 고래도 벌떡게도 메기도 도미도 못 오를 길에 기어코 자라가 나선 데에는 이번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간절해서 뭍에 오른 자라는 토끼의 자취를 쫓다가 범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산속의 회의를 엿보게 된다.

산속 회의는 용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와 닮은 데가 많았다. 회의는 노루, 너구리, 멧돼지의 나이 다툼으로 처음부터 엉망이었다.

사람이 농토를 넓히느라 개간이 이어져 산속이 잠식되니 살 곳이 없다고, 나날이 사냥이 극성이니 살길을 찾자고 회의가 열렸는데, 그 개시가 연장자 다툼이었다. 간신히 진정하고 나서 사냥꾼도 사냥꾼이지만 사냥개부터 해치우자는 보잘것없는 짐승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산속의 왕 범은 꼬리를 내렸다. “사냥개 뒤에는 일등 포수가 있다. 잘못 건드렸다가 포수의 총에서 번쩍 불꽃이 튀는 순간 내 신세가 어찌 되겠는가?” 그러고도 간식은 필요했다. 범이 허기질 무렵 여우가 다람쥐가 모아 놓은 밤과 도토리를 들추었다.

다람쥐는 여우한테 대들 완력도 용기도 없었다. 다람쥐는 분풀이로 저보다 못한 쥐를 잡았다. 쥐가 모아 둔 양식을 털어 바쳤다. 그러나 범은 고기가 먹고 싶었다. 다시 여우가 나섰다. “멧돼지 새끼 큰놈이 사람 시장에 나가면 열 냥짜리입니다. 멧돼지 새끼 팔아 열 냥어치 맛난 거 사 드십시오.”

농장을 지배하는 동물이 힘없는 동포 동물을 인간에게 팔아먹는 장면이 나오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방불하다. 멧돼지가 땅바닥에 박힌 사금파리를 입에 넣고 으득으득 씹으며 어쩔 줄을 모르는데 기어코 여우가 한마디 덧붙인다. “나처럼 세상 살면 아무 걱정 없지. 어디를 가도 제일 힘센 놈 비위만 맞추면 일평생 편치. 남한테 거저 묻어가지.”

금수저 깔따구, 모치 대신에 가 본 적도 없는 뭍에서 본 적도 없는 토끼를 쫓는 것은 신분의 원한을 품은 자라였다. 아비한테 물려받은 흙수저를 입에 문 자라였다. 엉망인 산속에서 다람쥐는 저만 못한 쥐에게 제 억울함을 넘겨씌웠다. 산중의 임금이라지만 사냥꾼 무서워 사냥개를 못 쫓는 범에게, 멧돼지는 자식을 빼앗기고도 대들지 않거나 대들지 못했다. 제게 엄니가 있음을 잊고 사는 모양이다. 이 모습을 비웃으며 악마적인 쾌감을 느끼는 하수인이 존재한다. 누구보다 얄밉고, 누구보다 밉살맞다.

뱅 돌아 오늘이다. 뱅 돌아 우리 앞이다.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의 “밥하는 아줌마” 망언을 옹호하는 단체의 기자회견이 같은 당 장정숙 의원의 주선으로 열렸단다. 용왕이나 범을 염두에 둔 기자회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 낀 분 가운데 인간세계에서 깔따구나 모치 같은 복을 누리고 사는 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아줌마가 어때서”가 울려 퍼진 모양이다. 여우는 아주 분명히 보인다. 산속 회의는 곰의 한마디로 닫혔다. 곰은 이렇게 외쳤다. “여우 놈의 웃음소리 뼈 저려 못 듣겠다. 그만 집어치우자.”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천이두 선생님을 글로만 뵈었다. 소설가 손창섭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였는데, 그의 평문을 읽고서는 예리한 비평 안목과 해박한 서구문학이론을 한국적 문맥에서 풀어놓는 솜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변변한 번역물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 막스 셸러며 도스토옙스키, 앙리 바리뷔스 같은 서구 사상가나 작가들을 섭렵하셨을까. 물론 일본판본이었을 테지만, 우리 시대 지평보다 더 넓은 세계문학사적 지평에서 한국문학을 논하는 선생님의 글이 문학청년에게 중요한 자극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남도에 내려와 선생님이 머물렀던 캠퍼스를 오가며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선생님의 면모였다. 그는 당대 문학작품을 부지런히 읽고 논하는 실천적인 문학평론가일 뿐 아니라, 그가 발 딛고 있는 토착성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탐구한 국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고유한 미의식을 연구한 <한의 구조 연구>의 저자이자 판소리의 전설인 <판소리 명창 임방울>을 저술하신 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이들 저서에서 ‘한’이 단순히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의 소산이 ‘한’(르상티망)이 아니라 ‘삭임’이라는 내적 수련과 ‘원’(願)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판소리의 ‘시김새’ ‘이면’ ‘그늘’ ‘소극적 수동성’과 함께 있는 중요한 미학적, 윤리적 가치임을 강조한 바 있다. ‘한’에 대한 의식과 강조는 그가 ‘정읍사’ 이후 한국 서정시와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에서 ‘한’의 가락과 풀이를 읽어낼 때 독보적으로 빛을 발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고 천이두 선생을 민족주의자로 볼 수도 있으나 글을 읽다보면 그의 ‘한’에 대한 천착과 후속 작업이 거창한 이념의 소산이 아니라 투철한 토착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안의 이매창과 가람 이병기, 서정주의 글에 깃든 ‘호남의 사무치게 구성진 가락’을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춘향가’와 ‘흥보가’에 깃든 전라도의 맛과 멋을 미학적으로 설파해낸 것도 이러한 토착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지난 11일 그의 영결식에 미처 가보지 못한 나는 다음날 연구실에서 색 바랜 그의 평론집을 꺼내들었다. 그의 비평 궤적을 더듬다가 문득 그의 등단작인 <인간 속성과 모럴>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도서관으로 향했고, 내친김에 혼자 하는 추도식이라는 요량으로, 어두컴컴한 지하서고에 들어가 당시 발표지면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마땅히 실려 있어야 할 <현대문학> 1958년 11월호에 그의 글만 정확히 찢겨져 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재하는 ‘인간속성과 모럴’이라니. 그날 종일 나는 이 부재하는 지면을 상상하는 것으로 보냈다. 아마도 자기본위적인 인간의 본성은 모럴이라는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요지쯤으로 정리해둘 수도 있겠으나, 이 당위는 너무 단순하다. 더군다나 ‘보편적 가치판단의 기준을 간직하되 완전한 도그마에 떨어지지 않으며, 투철한 지도이념을 제시하되 인습적인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이 떨어지지 않는 비평가’이기를 주문하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한 꿈임을, 그 각각의 요소들이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기보다는 숙명적으로 상호배반의 관계’에 있음을 성찰하고 있던 분이 아니었던가.

또한 서구근대문학에 한국문학을 비춰보다가도 누구보다도 이 땅의 굴곡진 미학에 신명나 하셨던 분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인간속성과 모럴’은 굳어진 도식이라기보다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항구적으로 변하는 인간속성과 모럴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이 변전의 지점과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사유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는 화두쯤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느 독일작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화해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잊을 수는 없다.’ 문학과 비평은 인간의 저러한 삶의 밑자리를 살피는 일이고 이 간극에 깃든 수많은 결들을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당위로서 주어진 모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구체적 영토가 있다. 그 대지 위에 서면 위 글은 때론 뒤집어지기도 한다. “인간은 용서할 수 없지만 화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있고, 잊을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불합리와 이면, 오류들은 한편 놀라운 기적이기도 하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의 밑자리에서 그늘과 삭임을 보는 것, 그것은 고 천이두 선생님이 곱게 닦아놓으신 ‘한’의 현재성일 것이다. 큰 자취를 남기고 먼 길 떠나신 천이두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달 30일 아침밥을 먹으며 그날 학교급식은 나오는지, 선생님이 특별히 말씀해주신 것은 없는지 딸아이에게 물었다. 딸 말이 선생님이 따로 설명해주신 것은 없대서 나는 전학 오기 전 친했던 친구에게 연락해 거기는 오늘 급식이 나오는지 한번 물어보라 했다. “엄마, 수박이가 오늘 급식 대신 소보로빵이랑 요구르트 먹는대. 오늘 무슨 날이야”라는 딸의 물음에 나는 “힘들게 너희 밥해주시는 분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그 목소리를 좀 들어달라고 파업하는 날이야”라고 설명해줬다. 고개를 끄덕하더니 딸은 이내 신나게 이전에 다니던 학교급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얘기하면서 우리 동네 최고였다고 자랑하듯 회상했다.

지난달 29~30일은 민주노총 사회적 총파업의 일환으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파업했다. 급식조리사, 보조교사 등 학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정규직과의 차별 해소를 요구했다. 현재 학교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교직원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확대되었고, 그 규모는 한국 공공부문 내에서도 가장 크다. 이들 중 상당수는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환경, 학교 내 차별과 배제 등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거 생기기 시작한 배경에는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 유연화 물결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면서 집에서 이루어지던 ‘밥하기’와 ‘돌보기’의 사회화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다. 김대중 정부 시기 초·중학교에 급식이 도입되면서 조리종사원이 늘어났고, 교무보조원뿐만 아니라 특별활동 강사 등 학교 비정규직은 지속적으로 늘어왔다. 2010년 이후에는 초등 돌봄교실이 확대되면서 많은 돌봄교사들이 시간제로 일하게 됐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의 밥을 지어주고 돌봐주는 사람들 대부분은 불안정하게 일하는 학교 비정규직이다.

이번 파업과 관련해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 이언주 의원은 본인 또한 아이를 둔 엄마로서 파업이 아이들의 밥 먹을 권리를 해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인건비가 올라가면 결과적으로 급식의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급식 조리종사원을 두고 ‘간호조무사보다도 못한’ ‘요양사 수준의 그냥 밥하는 아줌마’라고 하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나쁜 사람들, 미친×’라고 말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그의 발언들은 여러 결에서 매우 참담하다. 그가 개인적으로 노동3권의 보장을 얼마나 진지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어떠한 서열체계를 가지고 특정 업종을 폄하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관심 가지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그가 아이를 둔 엄마이자 일하는 여성으로서 본인의 아이를 돌봐주고 밥을 지어주는 노동자들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밥하는 아줌마’는 곧 미숙련이라는 한국 사회의 남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는 것이 참담하다. 그도 한국 사회에 아이를 둔 수많은 부모와 수많은 일하는 여성(그리고 남성) 중 한 명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누군가의 삶이 불안정해질지라도 내 아이의 밥 먹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아줌마의 노동은 무시해도 되는 쉬운 일이라는 ‘이언주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사와 돌봄의 노동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해내는 행위로 여겨져 오랫동안 ‘비노동’으로 치부돼 왔다. 남성주의 이데올로기는 돌보기, 밥하기 등을 ‘아줌마 노동’으로 간주하고 그 숙련 정도를 구체적인 검증 과정도 없이 평가절하했다.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담당해온 일들이 공적 영역으로 이전되었지만 뿌리 깊은 남성주의 이데올로기가 줄기는커녕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여러 개의 색실이 엮여서 한 사회의 풍경이 그려지듯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서로가 연결돼 있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 누군가의 삶을 빼앗은 덕분이라면 그 밥은 맛있으면 안된다. 아이들을 키우는 학부모들과 우리의 아이들은 불편함을 계기로 공존의 방안을 같이 고민해야 한다. 용기 내어 파업에 참여하고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해준 ‘밥하는 아줌마’들에게 감사하다.

이승윤 |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19대 대선 기간 중 있었던 일이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물었다. “군 동성애는 국방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문 후보는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홍 후보는 “그래서 동성애에 반대하십니까?”라고 재차 물었고, 문 후보는 “반대하지요”라고 확답했다.

당시는 대한민국 국군이 위헌 요소가 다분한 군형법 92조 6항에 따라 그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A대위를 구속 수감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군대 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은 국가에 의한 부당한 억압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국민에 대한 차별 및 국가폭력을 승인하는 것이었다. 대선 이후 A대위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군대 위문 공연에는 소위 ‘2부’라는 것이 있다. 이성애자 남성들을 위한 성적 코드와 장치로 가득 찬 시간이다. 그리고 이는 군인의 사기진작을 위한 필수요소라고들 한다. 여기에는 남성은 무조건 이성애자이며, 그 성욕은 본능이자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이성애자들의 성욕은 그렇게도 중요해서 국가가 나서서 여성의 ‘헐벗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반면 동성애는 형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왜일까?

그 이면에는 동성애 혐오만큼이나 여성혐오가 놓여있다. “군력을 약화시킨다”는 말은 남성 간의 성관계가 남성을 ‘여성화시킨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향한 성욕은 남성성의 상징이고, 남성을 향한 성욕은 범죄가 되는 상황. 이는 이성애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착종이 아니고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태도야말로 여군에 대한 남군의 성폭력이 솜방망이 처벌로 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사문화되었던 군형법 92조 6항이 갑자기 법적 효력을 발동하게 된 맥락 역시 살펴봐야 한다. 이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성보수화 역시 진행되었던 것과 그 궤를 함께한다.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는 와중에 기독교 우파를 중심으로 본격화된 동성애에 대한 공격은 성보수화를 견인했다.

우경화와 성적 보수화가 함께 가는 이유는 명백하다. 대한민국에서 성(聖)스러운 존재인 ‘국민’이란 기실 성(性)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성(性)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국가’를 오염시키는 ‘불온하고 더러운 것’은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기득권의 성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이성애자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성(聖)스러운 국민이, 동성애자 군인은 군력을 위협하는 성(性)스러운 범죄자가 된다. (올해 출간된 <‘성’스러운 국민>이라는 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렇게 홍준표 후보 역시 문재인 후보에게 구닥다리 ‘빨갱이’ 프레임을 덧씌우고자 할 때 “동성애 찬성 여부”로 사상검증을 시도할 수 있었다. 2년 전 한 공영방송 이사가 입 밖으로 냈던 “동성애는 더러운 좌파”라는 말은 홍 후보의 질문과 공명한다.

성적 영역 이외의 부분에서 진행되었던 ‘우클릭’은 이제 박근혜 정권 퇴진과 함께 잠시 주춤해졌다. 그리고 일종의 상징적인 보루로 성(性)적/성(聖)적인 영역을 둘러싼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싸움에서 결국 누가 이길지는 자명하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시민권을 얻고 평등을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2017년 7월15일. 서울광장에서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제18회 퀴어 문화축제가 열린다. 보수 기독교는 이미 ‘음란과 타락’을 내세우며 이에 대한 마타도어를 시작했다. ‘음란함’이란 누가 규정하고, 언제 꺼내들며, 어떻게 사용하는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견고한 구습을 타파하고 평등과 자유를 불러오는 것이 음란함이라면, 이번 주말, 광장에서 마음껏 음란하라. 그것은 타락이 아니라 진보임을, 닥쳐온 지옥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임을 만끽하실 수 있을 것이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를 비롯한 대리운전기사들이 손님에게 바라는 몇 가지 ‘매너’가 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기사가 전화를 하면 받아달라는 것, 차의 비상등을 켜고 기다려달라는 것 정도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의 원활한 이행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만 언급하자면 그렇다.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뿐 아니라 노동을 관리하고 제공받는 사용자도 어떤 ‘의무’를 지는 것이다.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순간부터는 평범한 우리들 역시 일종의 사용자가 되고, 곁에 앉은 노동자에게 지켜야 할 당연한 예의가 생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어느 손님은 나에게 “기사님, 뛰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괜찮습니다 :)” 하는 문자를 먼저 보내왔다. 나는 그때 그를 만나기 위해 1㎞ 남짓 떨어진 수서역 주차장으로 뛰어가다 덕분에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감사하다’는 답신을 하자 “저는 지하주차장 2층 출구 근처에 있고 비상등을 켜놓았어요” 하는 문자가 곧 다시 왔다. 그에게 가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했다. 그의 위치를 찾느라 넓은 주차장을 헤매지 않아도 될 것이고, 늦게 왔다는 질책과 마주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가 나의 노동(콜)을 취소하지 않을까 가슴 졸일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서역 지하주차장 2층에는 과연 비상등을 켜둔 차가 한 대 있었다. 30대 여성으로 보이는 손님은 웃으며 나를 맞이했고, 주차장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달라더니 커피를 두 캔 사와서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시는 손님은 처음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대리기사님들께 모두가 이렇게 하지 않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출발지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빨리 오지 않으면 콜을 취소하겠다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도착하고도 어디 숨어 있는지 한참을 찾아 헤매게 만드는 이들이 많다. 특히 여러 업체에 전화하고는 먼저 오는 기사와 함께 떠나기도 한다. 수서역의 그는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호의를 베푼 것이다. 그가 종종 떠오를 때마다, 그가 가진 노동과 노동자를 대하는 삶의 태도에 감사와 존경을 함께 보낸다.

그 이후, 그와 같은 손님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손님이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 하는 순간이 많았다. 타인의 운전석, 을의 자리에서 보는 한 인간의 행동에는 무수한 균열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며 상처받고 가끔은 그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대리운전을 이용할 일이 생겼다. <대리사회>의 저자로 사내 독서 동아리 모임에 초대 받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회사 근처에서 맥주 한잔을 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대리운전 콜을 하고는 주차장에서 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나를 배웅하겠다는 몇몇과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 10분이 지나고, 기사가 도착했다. 그는 나에게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와야 하는지 걱정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3통의 부재중 전화가 선명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자 기사는 나에게 “차는 어디에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차의 비상등도 켜놓지 않고 주차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순간, 부끄러움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몰려왔다.

대리운전기사에서 손님의 입장이 되자마자, ‘내가 저 입장이라면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상상하던 것들이 모두 거짓말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을의 자리에서는 선명하게 보이던 타인의 균열들이, 잠시 갑의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고 어디에 있다는 표시도 하지 않는 동안, 내게 오는 노동자는 불안하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마주한 그는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내가 손님들 앞에서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도 어색하게 한 번 웃고는 타인의 운전석에 앉았다. 거기에 어제의 내가 있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갑과 을의 자리를 넘나드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갑질에 쉽게 분노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자리만 벗어나면 쉽게 갑질의 가해자가 되고 만다. 당장 일상의 자리에서 잠시 이탈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된다. 그렇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본 타인의 균열을 있는 그대로 오래 기억해야 한다. 달라진 자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정확히는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을 상상할 때,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의 운전석들이 조금은 ‘타인’이라는 단어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저녁을 해결하러 패스트푸드 음식점에 들어갔다. 햄버거를 먹으며 귀에 리시버를 꽂고 음악을 들으려는 찰나, 옆 테이블에서 생경한 단어가 들려왔다. “걔는 진짜 낄끼빠빠 못하지 않냐?”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낄끼빠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끼리끼리”도 아니었고 “뛰뛰빵빵”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옆 테이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메모장에 “낄끼빠빠?”라고 적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테이블에서는 ‘헬조선’처럼 친숙한 단어부터 ‘번달번줌’이나 ‘어덕행덕’처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통 뜻을 짐작할 수조차 없는 신조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조어가 온라인상에서만 쓰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육성으로 들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 낄끼빠빠와 번달번줌, 그리고 어덕행덕이 무슨 뜻인지 찾아보았다. 낄끼빠빠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의 줄임말이었다. 자신의 사생활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동시에 과도한 개입을 ‘나대는 것’으로 바라보는 현세대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단어인 셈이다. 번달번줌은 “번호 달라고 하면 번호 줌?”이라는 뜻이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무턱대고 다가가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도 걸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복잡한 심경이 저 신조어에 담겨 있었다. ‘적극적인 소심함’ 같은 형용모순 말이다. 어덕행덕은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하자”는 뜻이었다. 덕질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하는 것을 일컫는 신조어다. 어덕행덕은 신조어가 또 다른 신조어로 변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덕질에 대한 시선이 ‘외골수’에서 ‘개인의 분명한 기호나 취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친김에 온라인상에서 ‘신조어 능력 평가’라는 것을 해보았다. 총 스무 개의 신조어가 제시되었는데 내가 아는 거라곤 고작 여섯 개뿐이었다. 개중 어떤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뜻풀이를 보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있었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도 여러 개였다.

별걸 다 줄여 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기성세대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마음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대개 신조어들은 신문이나 뉴스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주로 학교나 학원에서, 카페나 길거리에서 사용된다. 주변에 귀를 기울이고 살지 않으면 도통 알 수 없는 말들,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감히 예상할 수 없는 말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노트를 펴고 그 말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어들을 적다가 이를 단순히 새롭게 나타났다가 곧 사라질 말이나 은어로 취급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조어의 대부분은 줄임말이다. 이를 언어의 간편한 유통 차원으로 축소 해석해서는 안된다. 신조어를 즐겨 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 그러니까 기성세대와의 분리를 꿈꾸는 것이다. 개저씨들은 스스로가 개저씨인 것을 모른다. 높은 청년 실업률로 인해 희망도 의욕도 없이 무기력해진 청년들을 빗댄 ‘달관세대’라는 말을 기성세대는 앞날 걱정은 하지 않고 흥청망청하는 세대라는 말로 해석할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 생겨난 말들은 확실히 사회상의 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신조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재미있어서 낄낄거리고 재치 있어서 무릎을 탁 치게 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뜨끔하다. 왜 이런 조어가 생겨났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신조어의 뜻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이유다.

신조어를 정리하는 내내 유독 가슴팍을 두드리는 것도 금턴, 재포자, 청년실신 같은 단어들이었다. “금(金)처럼 소중한 인턴”을 뜻하는 ‘금턴’이라는 신조어는 정규직 전환 여부를 떠나 일자리를 얻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내준다. “직장을 그만둔 뒤 재취업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재포자’와 “졸업 후 실업자 또는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뜻의 ‘청년실신’은 희망을 잃어버린 세대가 지르는 비명 같았다.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를 줄여서 만든 “복세편살”이라는 단어는 자조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신조어는 새로 만든 말이라는 뜻이다. 새 정부의 청년 일자리 정책이 새로운 직업을 많이 만들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은 | 시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엘리베이터 없는 다세대주택 최상층으로 이사했다! 평화롭다. 옆집 개새끼만 짖지 않아준다면….” 내 인스타그램 계정에 사진과 함께 글을 남겼다. 여러 댓글이 달렸고 그중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가장 불쾌했던 것은 모르는 사람이 툭 하고 남긴 것. “개도 하나의 생명체인데… 새끼라니… 휴.”

첫째로 난 저 댓글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아마도 큰 고민 없이 남겼을 댓글의 의중을 헤아리며 내 시간과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상황이 불쾌했다. 둘째, 그는 생명체에게 ‘새끼’라고 말하면 안된다는 명제를 전제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의할 수 없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조부모가 오랜만에 보는 손주에게 “아이고 내 새끼”라고 말하는 것은 가족의 정과 환대의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클리셰다. 또한 (이참에 살짝 홍보하자면) 내가 청년 당사자로서 참여한, 청년 이슈를 다루는 시선에 대해 문제제기한 책의 제목은 <미운청년새끼>다. 인간도 생명체인데 새끼라는 말을 잘도 붙여왔다. 셋째, 어떤 표현을 최대한 악의적으로 해석하며, 그것이 나오게 된 맥락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말을 보태는 것 역시 폭력이다.

옆집 개가 내가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짖어대는 소리는 총성을 떠올리게 한다. 옆집 개가 현관에 바짝 붙어 나를 향해 적대적으로 짖어대는 일의 반복은 집 밖에 나가기 전 나를 번번이 머뭇거리게 만든다.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어느 날, 옆집 개의 맹렬한 짖음에 심장에 무리가 왔고, 나도 사족보행하며 똑같이 짖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울부짖다시피 옆집 문을 두드리며 호소했다. “개 좀 안 짖게 해주세요! 집 나갈 때, 들어올 때 매번 깜짝깜짝 놀라고 스트레스 받습니다!” 옆집 현관문 안에서 “죄송합니다…”라고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누그러지고 미안함마저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날 개는 또 짖었고 나는 또 격분했다.

옆집 개는 가수가 되고 싶은 걸까? 어느 날 새벽에는 인근 건물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개와 고양이와 함께 웅장한 삼중창을 수시간 들려주었다. 귀마개 착용도 소용없었다. 불쾌한 시각자극은 쉽게 차단할 수 있고(눈 감고 고개 돌리면 그만), 후각 자극에는 금방 둔감해지는 반면, 청각 자극은 방어하기 쉽지 않고 쉽사리 둔감해지지도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런 환경에서 개를 키우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이른다. 내가 사는 집은 5.4평이다. 호별로 평형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건물 전체 크기와 가구 수를 고려할 때 옆집이 아무리 넓다 해도 10평은 되지 않을 것이다. 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 적 없는 것으로 보아 좀처럼 산책도 시키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개라는 종의 특성상 많이 갑갑할 것이다. 동물을 가족으로 등록하기 위해 일정 이상의 거주 공간 크기가 담보돼야 하고, 인간들은 필수적으로 교육을 이수한 뒤 자격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독일의 사례를 떠올려 본다. 한국도 도입이 시급하다.

개소리로 고통 받아도 취할 수 있는 공적 조치가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 녹음으로 증거자료를 확보해 민원 어플로 문제 제기를 해도 권고 조치에 그칠 때가 많고, 그것마저 같은 건물에 살 때만 유효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원룸촌에서 바로 앞 건물 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뭘 할 수가 없다는 무력감. 민사 소송의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걸까.

계속 고민하다 보니 좁은 평형 주택을 부실한 방음 마감으로 지은 시공업체, 건물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허용한 공권력, 한 평의 땅을 독점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서울의 미친 부동산 가격에까지 문제의식이 미친다. 그 점을 고려하면 옆집 세입자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끼지만, 그래도 그 개는 너무 날뛴다. 동물을 도시에서, 좁은 공간에서 키운다는 것은 동물에 대한 책임감에 더해, 이웃에 대한 책임감까지 요구하는 일이 아닐까. 당신이 개의 체온을 느끼고 위로 받으며 사랑스러운 얼굴을 쓰다듬는 동안 당신 이웃은 미쳐가고 있다고요!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5월, 나는 한 철거공사 현장 앞에 서 있었다. 1912년 일본인이 설립한 최초의 비누공장인 애경사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포클레인의 삽질은 거세게 항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우렁차게 계속됐다. 공사명은 동화마을 공영주차장 조성공사. 바로 전날 이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주차장을 짓는다는 소식에 지역사회의 반발이 이어졌고, 중구청과 협의해 공사를 멈춘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막상 현장에 와보니 철거는 진행 중이었고, 포클레인의 삽날이 지나갈 때마다 와르르 벽이 무너져나갔다.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건물 외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잔해만 남았다. 허무한 마음으로 관광버스들이 점령한 도로를 건너자 분위기가 딴판이다. 평일 오후인데도 송월동 동화마을은 색색의 머리핀을 꽂은 채로 군것질 거리를 하나씩 입에 물고 셀카봉 사진 삼매경에 빠진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 사람들 편하게 주차할 수 있게 만든다고 저 건물을 부쉈단 말이지….’ 폭삭 무너진 오래된 건물에서 뽀얗게 피어오르던 먼지와 알록달록한 동화마을의 풍경이 겹쳐지면서 괜히 관광객들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6월, 모차르트의 나라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갔다. 첫날부터 국립 오페라극장 앞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상영 중인 오페라가 우리를 맞았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이렇게 야외에서 무료로 실황 중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역시 음악의 도시는 달라.” 감탄하던 우리에게도 며칠이 지나자 그 풍경은 일상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번화가 중의 번화가, 빈을 찾은 사람이라면 지나가지 않을 수 없는 곳에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으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표를 사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 오페라를 관람했다. 그랬다, 오스트리아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몇 번이든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공연장 접근성도 좋았다. 공연장 앞 정류장에 내리면 광장을 가로지르거나 높은 계단을 올라갈 필요 없이 건물 입구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국과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자동차였다. 주차 안내가 중요한 홈페이지 메뉴인 한국 공연장과 달리 오스트리아 공연장에는 주차장이 아예 없었다. 도심의 가장 번화가에 위치한 오페라극장이 보행자전용거리와 연결되어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사실 극장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주차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온 관객 중에 차를 갖고 온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차를 갖고 오지 않는 공연장의 풍경은 신선했다. 주차 공간이나 요금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가져갈 차가 없는 사람들은 30분에 가까운 인터미션 동안 와인과 맥주, 샴페인을 마음껏 즐겼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공연을 보면서 현지인과 관광객용 공연을 두루 섭렵했는데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사실 오스트리아의 관광지는 모차르트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낙 많은 모차르트 공연이 열리고 있어서 고르는 것도 일이다. 물론 공연의 질은 들쭉날쭉하다. 빈에서 관람한 관광객용 모차르트 콘서트는 제대로 된 피드백이 있을 리 만무한 관광객을 상대하는 이들의 공연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에서 관람한 오후 3시 공연은 누가 봐도 학생이 아르바이트 삼아 연주하는 것이 명백했다. 좀 얄밉긴 했지만 여기가 아니면 내가 또 언제 이렇게 오래된 건물에서 라이브로 하프시코드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들을 만했다. 모차르트라는 콘텐츠와 그의 고향이라는 장소의 힘이 부실한 연주조차도 참을 수 있게 만든 셈이다. 게다가 마이크조차 필요없는 오래된 건물이 내뿜는 아우라는 별것 아닌 공연들조차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 관광객에게 필요한 것은 주차장이 아니라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콘텐츠다. 콘텐츠가 매력있다면 주차는 사소한 문제다. 인천 중구청이 애경사 건물을 부숴버리는 대신 120년 된 비누 공장이라는 역사를 살려냈다면, 흔하디 흔한 ‘비누 만들기 체험’조차 송월동에서만 할 수 있는 특색 상품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건 모차르트 덕분이지 잘 갖춰진 주차장 때문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밤은 짧은데 말이 길면 듣기가 너무 지루하다(夜短語長, 聽之太遲).” 정말 할 말이 있는 사람은, 할 말이 분명한 사람은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상대의 중언부언을 참지 못한다. 허생은 할 말이 분명했다. 야심해서 찾아온 나라의 신임을 받는 신하 이완에게 천하를 뒤집어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을 세 가지 방도를 설파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박지원이 남긴 <허생전>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초야의 인물을 찾아왔다는 이완은 인재를 발탁하고, 특권 세력을 누르고, 해외에서 새 길을 찾자는 허생의 말에 “어렵다(難矣)”는 말만 되풀이한다. 허생은 참지 못하고 칼을 뽑는다. “신임받는다는 신하가 정말 이렇다고? 너 같은 놈은 목을 베어야 해!(信臣固如是乎, 是可斬也)”

여름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이런 장면이 자주 펼쳐진다. 요리사, 제과사들의 퇴근길 술자리는 강렬하고 함축적이다. 내일 제대로 된 식료를 구입하려면 전철 첫차를 타고 시장에 나가야 한다는 걱정은 잠깐이다. 직업 예의상 하게 마련인 걱정을 마치자마자 요리사는 단번에 막소주 한 잔을 해치운다. 그러고는 허생으로 빙의해 분을 터뜨린다. “솁솁거리지 좀 마라, 천하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동네 요리사 겸 주방장의 대답이 단호하다. “직업으로 요리사가 있지. 그럴 필요가 있는 주방에서 업무를 총괄하는 직위로 주방장이 있지! 언제부터 솁솁이야.”

셰프, 영어로 치프(Chief). 장보기와 맛내기에서 결정권이 있는 요리사, 제과사다. 본격적으로 빙과를 다루는 업장에서 아무나 온도계에 손 못 댄다. 냉동고와 쇼케이스 온도의 미세조정이 또한 제과사의 몫이다. 이쯤 되는 제과사가 셰프다. 서민대중의 한 끼를 감당하고 있는 백반집, 찌갯집에서 장보기와 맛내기는 단연 찬모가 도맡는다. 우리가 어제도 봤고, 오늘도 만날 셰프는, 실은 백반집, 찌갯집, 고깃집 찬모다.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면, 탁자에서 넘겨본 주방 안, 막 찬통 콩나물, 오뎅에 파와 마늘과 깨소금을 듬뿍듬뿍 끼얹는 그분들이야말로 정말 셰프다.

셰프.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온갖 매체에서 먹방과 맛집 사냥이 넘치고,  솁솁거리기가 울려 퍼지면서 너도나도 이 말에 감염되었다. 셰프란 말은 한순간에 요리사 또는 제과사, 찬모, 주방장이란 말을 지워버렸다. 동시에 새벽 첫차를 타고 장 보러 가기부터 실제로 하루 12시간은 업장을 지켜야 하는 고된 일의 세계를 가렸다. 주방은 늘 불이 활활 피어 있고, 늘 유증기가 가득하며, 늘 날서고 뾰족하고 달아오를 대로 달아 있는 도구가 가득한 위험한 공간이라는 점을 지우며 대중을 감염시켰다. 그러면서 청소년들 사이엔 어느새 셰프만이 끝내주고 멋있고 ‘힙’한 직업으로까지 떠올랐다. 매체에서 보기만 한 셰프만 남았다. 일은 모른다.

“계란찜은 서비스고 수플레는 만원이냐!” 동네 요리사의 두 번째 분이 터진다. 누구나 자주 먹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는 음식이 계란찜이다. 수플레는 계란찜의 프랑스판, 오븐 요리판쯤으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계란찜이든 수플레든 중간은 없다. 서구 요리판의 우스개로, 한 음식점 망하게 하려면 수플레를 주문한 다음 악평을 달면 된다는 소리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재료에 가장 기본적인 조미 방식만의 승부다. 최상의 상태로 내놓은 수플레를, 대중은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뒤집어서, 계란찜도 그런 음식이다. 그가 정말 ‘셰프’라면 눈에서 실핏줄 터질 듯한 집중력으로 계란과 온기와 수분을 상대로 승부를 낸다. 그러나 익숙한 계란찜은 손님들에게 서비스일 뿐이다. 수플레 한 쪽에는 1만원을 붙여도 불평 없는 손님일수록 계란찜은 서비스다.

“음식을 안다는 손님이 정말 이렇다고?” 요리사는, 제과사는, 찬모는, 또는 주방장은 여기까지 분통을 터뜨릴 뿐이다. 이 세계의 칼은 주방 밖에서 뽑는 게 아니다. 칼은 칼판 위에서만 쓸 수 있다. 짧고 강렬하고 박력 있는 순간은 퇴근길에 소주 한잔하는 그때뿐이다.

한 직업의 세계를 단박에 이해하기가 만만찮은 노릇임은 또한 어쩔 수 없다고 하겠다. 그야말로 어렵다! 알면서, 다 알면서 굳이 요리사의 한마디를 2017년 한국어 일간지 지면에 남긴다. 100년 뒤에 음식문헌으로 떠오를 것만 같다. “계란찜은 서비스고 수플레는 만원이냐?”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아도니스를 닮은 청년 도리언이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그의 초상화가 늙고 추악해진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육체와 죄 많은 영혼의 분리, 이 상상적 소망은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이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같은 작품을 통해 거듭되었던 인간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는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어떤 실제들이 아닐까. 가령 우리들이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다양한 아바타나 이모티콘, 아이디, 별칭 같은 것들 말이다.

육아, 영화, 커피, 애완동물 카페 그리고 페북과 단톡방들. 그곳에서 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페미니스트였다가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맘충이 될 수도 있고 인권 옹호자였다가 외국인 혐오자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의 인격은 페르소나(persona·가면)라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 현실에서도 다양한 가면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엄마, 선생, 친구, 딸 등의 인격체들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체성의 변전은 가상공간만큼 가변적일 수 없다.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의 자아’는 실제로 내가 수행하는 실제적 자아의 연장이 아니라, 억압되거나 잠재된 충동이 실현된 판타지로 비약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상에서 실현된 가상은 억압된 ‘하이드’라는 어두운 충동이기 쉽고, 따라서 무법천지의 폭력이 자행되기 쉽다.

2017년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도선우의 <저스티스맨>은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폭력성을 자못 신랄하게 다룬다. 평범한 한 남자가 어느 날 밤 대취하여 길거리에 설사와 구토를 하는 장면을 누군가 찍어 인터넷상에 올리고 신분이 노출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되자 문제의 ‘설사남’이 복수극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무법천지의 디지털 세계에 ‘저스티스맨’을 자처하는 그는 ‘여고생의 첫 경험’을 동영상으로 유포하여 자살로 몰고 간 이들, 사이버 카페의 권력자, 무지한 누리꾼들을 응징하며 활약을 펼친다. 소설은 저스티스맨의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나지만 이러한 봉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저스티스맨’을 응원하거나 두려워하는 누리꾼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이모티콘의 현란한 제스처와 미소, 그리고 괴물의 언어, 그 가상의 소통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려지는 우리의 진짜 얼굴들이 문제인 것이다. 인터넷과 디지털 혁명으로 우리는 유사 이래 가장 민주적이고 다양한 네트워크와 채널들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우리를 진실과 바람직한 사회적 합의체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조립이 가능한 각자의 채널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사실로 만들고 그 사실의 판타지 속에서 각각 단절된 믿음의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공론장이 깨져버린 각자의 채널 속에서 파편적 사실을 소비하는 인터넷 문화와 사이버 범죄를 두고 도선우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과정과 결과라는 게 공존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흔히 결과만을 두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하기 쉬우며 그러한 집단오류가 또 다른 이차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얘기”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현대인의 소통을 벤야민은 ‘체험(Erlebnis)’이라고 했는데, 이는 집합적 과거와 기억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Erfahrung)’과는 다른 기계적 쇼크라고 지적했다.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는 이러한 불가해와 익명성과 관련이 깊다. 미스터리 서사장르는 현대 대중문화의 주류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도시가 지닌 익명성 때문이다. 과거 전통 사회의 마을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사건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지낼 수 있다. 매일 엄지족이 되어 끊임없이 이모티콘과 문자를 날리지만, 실상은 만난 적도 없고, 만났어도 실제의 그와는 무관한 이들, 또 실제의 나와는 분리된 캐릭터들의 소란에 불과할 수 있다. 인천 여아 살해사건을 심층 취재한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전문가의 말대로, 사이버상의 폭력과 잔혹성을 실재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나와 그것’의 환각을, ‘나와 너’의 실체로 돌려놓아야 한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6월10일 밤에 딸아이와 함께 나는 30년 전 6월 민주항쟁을 기록한 동영상을 찾아서 봤다. 영상 속 서울 한복판에는 사람들이 장마철의 한강처럼 가득했고 문익환 목사의 외침은 그 물결에 부딪히며 흘러나갔다. “전태일 열사여!”로 시작하여 호명되는 앳된 청년의 이름들이 그 강 위에서 봄날의 꽃잎처럼 참 슬프게도 흩날렸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은 당시 고작 22살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공포 속에서도 민주화를 꿈꾸다 사망한 박종철·이한열도 20대 초반 꽃다운 청년이었다. 꽃잎 하나 떨어지면 이어서 수백개의 꽃잎이 떨어지듯 1970년 11월에 전태일이 사망하고 사흘째 되던 날, 서울대 법과대학 학생 100명은 ‘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이어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 수백명이 추도식과 집회를 열었고 이는 계속해서 전국 각지의 학생과 청년들의 집회로 확산되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도, 1987년 6월의 민주화운동도 그 중심에는 청춘들의 영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1968년께 중부시장에서 일할 때 찍은 사진(왼쪽이 전태일).

수십명의 군경들에 맨몸으로 맞서 독재 타도를 외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다보면 그 광장에서 그들이 느꼈을 무서움, 슬픔 그리고 분노에 대해 가만히 상상해보게 된다. 나도 저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우리도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해 저토록 저항해낼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언제부터 침묵하는 것에 이토록 길들여지게 되었나.

지금 당장 한국 청년과 관련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산적해 있다. 헬조선, 흙수저 같은 자조 섞인 신조어, 알부자족(아르바이트해서 부족한 학자금을 모으는 청년들), 인구론(인문계의 90%가 논다), 니트족, 히키코모리 등 모두 불안정한 청년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청년세대의 절망적인 상황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청년 실업률은 1999년 공식 통계 집계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높은데 여기에 취준생(취업준비자), 구직단념자 등을 포함하여 실질 실업률을 따져보면 청년 3명 중 1명이 실업자이다. 모두가 어렵다지만, 유독 청년층의 고용률만 감소하고 있다. 어렵게 취업되었다고 해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청년층에서만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있고 저임금 노동자 비중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소득 변화를 살펴보면, 오직 20~30대 청년가구의 소득만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에 더해 청년들의 학자금 대출 규모는 지난 10년간 약 24배 증가했으며, 대출받는 학생의 수는 약 10배 증가했다. 상황이 이러니 좀 더 안정되고 높은 보수의 일자리로 가기 위해 학업이나 취업을 연기하는 것이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주거 상황도 나쁘다. 서울시의 경우 1인 가구 청년들의 5명 중 2명은 주거 빈곤 상태에 놓여 있는데 이들은 주로 고시원, 지하방, 옥탑방 등 열악한 주거 공간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 청년들은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 타 연령층에 비해서도 열악한 지위를 가지고 새로운 빈곤집단으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질성을 가진 개인들은 비슷한 의제가 있으면 연대하기 마련인데 한국 청년들의 정치참여나 사회참여도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낮다. 청년문제에 청년들이 뛰어들기에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도 버겁다. 또한 독재정권처럼 아주 선명한 적폐가 있으면 모를까 지금의 헬조선은 누구의 잘못인지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알 수 없이 다만 자욱한 안개 속에서 ‘실패하는 것은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는 네온사인만 어렴풋이 깜빡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이렇게 방치해도 될까. 당장 이번 달의 최저임금 협상 결과는 청년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새 정부의 일자리 정책, 주거 정책, 소득보장 정책에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비판적 사고로 부당한 관행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을 제기해야 한다. 지난 시간 속의 청년들, 지금의 우리, 그리고 미래의 청년들이 흐르는 역사의 강에서 만나 공유할 것이 있다. 우리가 아파서 청춘이 아니다. 청년의 정신은 저항이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청춘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란찜은 서비스고 수플레는 만원이냐?  (0) 2017.06.22
네 진짜 얼굴을 보여줘  (0) 2017.06.20
응답하라 한국 청년  (0) 2017.06.15
자라지 않는 남자들의 연대  (0) 2017.06.14
당신의 노동을 취소합니다  (0) 2017.06.08
10년  (0) 2017.06.0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