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명한 책의 서문을 빌려 지금의 대한민국을 나는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세월호라는 유령이.’ 지금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을 흔들고, 광장을 사람들로 메우고, 촛불과 횃불을 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이전에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라는 정식명칭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은 거듭 ‘세월호 7시간’을 추궁하고 있다. 매스컴도 연일 최순실 국정농단과 함께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에 대한 해부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참사로부터 2년 반이 지난 현재, 왜 세월호는 자꾸 돌아오는가.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분석한 어느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햄릿이 우울증과 광기에 시달리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햄릿은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했고, 그는 유령이 되어 거듭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아마도 하야와 탄핵을 외치는 촛불에 세월호 7시간의 민낯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304명의 원혼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국가수반이자 책임자인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진심 어린 애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촌각을 다투는 국가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을 진두지휘하기는커녕,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든가요?”라는 황당무계한 질문을 던졌다. 이어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가 보여준 냉대와 외면은 전 국민의 무의식을 곧장 우울증과 광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로부터 한 시도 그 장면에서 떠날 수 없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세월호는 왜 자꾸 돌아오는가, 그리고 어떻게 돌아오는가. 누군가 좋아한다는 샤머니즘적으로 말하자면 세월호 아이들로 가득 찬 우주의 기운이 태블릿 PC를 찾아내 최순실을 꿇어 앉히고, 광장에 촛불을 밝히고, 셈이나 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꾸짖고, 다시 촛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 있다. 인양되지 못한 선체처럼 전 국민의 저 깊은 곳에 내려앉은 세월호의 영령들이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광장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어떤 끔찍한 사고를 당한 후 그 사건을 자꾸 되새기는 ‘반복강박’은 그 사건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돌려놓고 안전한 것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어적 심리기제이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 주체는 그 사건에 의해 압도되고 사로잡히지만 계속적인 추체험과 반복을 통해 그 괴물스러움은 이해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반복강박의 효과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수백 번, 수천 번의 호명과 되새김은 희생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우리가 미치지 않기 위해 수행하는 일종의 몸부림이다. 이 반복강박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작업, 그리고 집단적 우울과 광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도의 첫걸음은, 정확한 ‘사실의 재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지 않고 있다. 오보·괴담 바로잡기라는 청와대의 ‘이것이 팩트입니다’는 ‘굿판을 벌였다, 성형시술을 했다, 잠을 잤다’ 등등의 의혹에 대해 “아니다”라고 부정만 했을 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팩트라며 밝힌 7시간의 일정표에 대통령의 육성과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국민을 상대로 무슨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것인가. “아니다”라고만 말하는 그 끝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토록 수많은 루머와 의혹에도 끝내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모든 의혹을 뛰어넘는 더 무시무시한 무엇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지난달 26일 광장에 나갔다. 촛불행렬을 따라 줄줄이 걷는 그 길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추모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야가’를 부르고 퇴진을 외치던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나도, 내 앞의 사람도, 내 옆의 사람도, 내 뒤의 사람도, 선뜻 따라 부르지 못했다. 양희은의 ‘상록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전인권의 ‘애국가’보다 더 먹먹한 선율. 감히 떼창도 할 수 없는 그 노래가 광장의 사람들을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과연 그렇다고 나는 말할 수 있는가. 국가수장이 광장에 무릎 꿇고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한 우리가 함께 묻은 그 아이들은 영영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노래는 계속될 것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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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시험에서 수능 비중이 줄어들고 학생부종합전형이 강화되면서 정시보다 수시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진로 탐색이 활성화되고 체험 학습과 교실 수업에 대한 참여도가 높아지는 등 교과, 비교과 활동 모두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일찌감치 진로를 설정하여 자신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입시 전문가들은 이에 편승하여, 중학교 때부터 진로를 준비해야 고등학교에 올라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리 설정된 진로에 따라 자신의 활동 전반을 대학 전공과 미래 직업에 부합하도록 맞추어 가야 ‘일관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고등학교 선택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학교 때부터 적극적으로 진로 탐색을 시작해야 한다. 중학교는 이미 늦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시작해야 한다는 말까지 돈다. 꿈을 꾸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빨리 꾸는 게 지상과제가 됐다.

하지만 이른 진로 탐색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세상에는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꿈꿔왔던 일이어도 실제 손발을 움직여서 해보면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잠시 해보는 것과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공부나 일이어도 그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싫은 부분들로 구성돼 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을 참을 수 없는지까지 아는 것을 말한다. 특정 학과나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그 일의 모든 면이 그렇다기보다 도저히 참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적성에 맞는다는 말 역시 전적으로 만족스럽다기보다 그럭저럭 싫지 않다는 뜻일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모든 면이 자신에게 꼭 맞는 꿈의 학과나 직업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두 번째, 세상에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자신이 지망했던 학과와 기업이 해당 산업 지형의 급속한 변화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조선업 관련 마이스터고에 진학한 학생들이 최근에 처한 현실이 그렇다. 조선 업황의 악화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이들 마이스터고를 졸업한 학생들의 진학 역시 불투명해졌고 관련 학과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조업 기반이 약화되고 산업의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관련 직업이 사라지는 일이 앞으로도 종종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머지않은 미래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세계의 변화를 개인이 예측해 일일이 전략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세 번째, 세상만 변화하는 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우리 자신도 변한다. 호기심, 열정, 체력이 매년 다르고 관심사도 시시때때로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치기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좋아하고 잘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평생 끝나지 않는다. 나이 먹고도 고민이 여전한 건 자기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도 그러한데 하물며 청소년 시기에 진로 고민을 끝내라는 건 과한 주문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분야를 아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직관과 이성이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 넓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진로 탐색은 양면적이다. 여러 길 중 하나를 선택해 빨리 준비하면 그만큼 깊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 외 다른 길들은 조기에 닫혀버린다. 변화가 심한 때일수록 개방적인 자세와 유연한 대응이 더 중요해진다. 인생의 특정 시점에 단 하나의 꿈을 정확히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거나 무모한 일일 수 있다.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것과 다양한 길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하다.

조기 진로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마음껏 기획할 수 있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진로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더 분노하고 있다. 이 나라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비선 실세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는 행복해질 수 있는 무수히 다양한 방법이 있다.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갈 수 있는 소질이 우리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있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을 뿐이다.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며 차별 없는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더는 꿈을 꾸고 이루는 게 소수의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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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정치를 ‘대중문화’로 만들어버린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것에 제일 능했던 이는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배우 출신의 레이건은 자신이 주인공인 영웅담을 대중에게 선전하는 것이 실제 무슨 일이 있었냐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설, 협상, 그리고 정책에 있어서도 할리우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시청하느라 정상회담용 자료를 검토하지 못했던 일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할 테면 해봐. 오늘은 나의 날이야”라는 대사에 감동을 받아 의회의 조세 인상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심지어 ‘미국의 위대함’을 설파하기 위해 인용하곤 했던 일화는 <날개와 기도>(1944)의 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중에게 어필했고, 이후 할리우드 백인 남성 영웅을 지도자로서의 자기 이미지이자 레이건 행정부의 이미지로 전유했다. 영화학자 수잔 제퍼드는 <하드바디>에서 이를 자세히 분석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17일 (출처: 경향신문DB)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알렸던 레이건 이후 36년. 신자유주의가 이제 그 생명을 다해가고 있는 시점에 대중문화가 길러낸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 등장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2000년대 초반. 연이은 부도로 위기에 당면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는 독특한 생존전략을 선택한다. 스스로를 이미지 상품으로 만들어 ‘트럼프 브랜드’의 가격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출연한 것이 <어프렌티스>라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였다. ‘견습생’이라는 뜻의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은 트럼프 눈에 들어 살아남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어프렌티스>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의 재산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의 성공 신화는 미국의 성공 신화로 다시 쓰여졌다. 이 신화에서 인간 군상은 영웅이 되기 위해 비열한 협잡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어떤 모욕도 견뎌낸다. 그것이 ‘생존’의 의미인 것이다. <어프렌티스>를 경유해 자본의 독재와 신민의 무한경쟁은 오락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10여년 후. 그는 미국 대선이라는 새로운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의 주인공으로 대중 앞에 선다. 레이건이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영웅을 자기 이미지로 참고했다면, 트럼프는 미국 대중문화의 가장 저열한 면모인 리얼리티 쇼의 천박한 자본가 이미지를 자원으로 삼았다. 대선 과정에서 전시했던 그의 독설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어프렌티스>의 유행어 “너, 해고야(You’re fired)”와 다르지 않다.

그저 가십일지도 모르는 이런 이야기의 끝에 ‘길라임’을 떠올리게 된다. 드라마 광팬으로 알려진 박근혜 대통령은 일국의 지도자로서 어떤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큰 영애(令愛)’의 이야기는 모든 국민이 알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런 ‘국민 드라마’ 혹은 ‘우파의 신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대통령 후보 박근혜를 믿고 따랐던 유권자들에게는 ‘장사꾼 이명박’과는 다른 ‘진성 정치인으로서의 우아함과 리더십’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고, 그 판타지는 아버지 박정희가 영애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었다. “우리 근혜 불쌍해”와 “우리 근혜는 달라”라는 익숙한 말을 떠올려 보라. 박근혜 스토리의 셀링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가 <태양의 후예>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연히 그의 자기 이미지가 ‘유시진’일 것이라 생각했다. 군국주의의 화신이자 비열한 공무원들과는 질이 다른 고귀한 ‘귀족’으로서, 유시진은 우리를 구원할 아버지의 재림이었다. 그리고 그 영웅적 재림의 실현이 박근혜의 자기 이미지이리라 상상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보기 좋게 어긋났다. 박근혜 게이트의 ‘막장 드라마’로 추론해보자면, 그는 ‘길라임’ 혹은 ‘강모연’으로 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트럼프보다도 한심스럽다. 지도자로서 아무런 자기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길라임과 강모연은 치열한 자기계발로 얻은 재능과 커리어와 ‘미모’를 전부 다 이성애 연애의 완성을 위한 자원으로 소진하는 신자유주의형 공주다. 그리고 이런 공주 이야기의 핵심은 백마 탄 구원자에 대한 판타지다.

업무를 시작하고,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등 청와대의 적극적인 대응이 시작됐다. 성실하게 수사를 받겠다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다. 옆에서 구원자들이 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들까지 발본색원해서 그의 판타지를 철저하게 깨는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다. 더 이상 그에게 해피엔딩을 허할 수 없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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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문제집을 풀고 있으면 어른들이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잘되어 가냐?” 그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찔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 안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탕하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잘되고 있지 않으면 걱정과 간섭이 주렁주렁 달릴 게 빤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만은 예외였다. 떡이나 빵, 과일을 건네주며 외할머니는 나직나직이 말씀하셨다. “할 만해?” 이 말이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기 힘든데도, 힘에 부치는데도 갑자기 할 만해지는 것 같았다.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나 자신이 중심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 길을 걷다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할 만해?” 선뜻 답하기 힘들었다.

‘만하다’라는 보조형용사에 대해 생각한다. ‘만하다’는 ‘어떤 대상이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할 타당한 이유를 가질 정도로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름 아닌 발화자의 평가가 들어간다는 얘기다. 가령, 식당에서 나올 때 하는 “먹을 만했다”는 말은 음식을 먹은 이의 만족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한 번이라면 먹을 만하다는 말도 되고 기회가 되면 앞으로도 먹을 것이라는 의지가 반영된 말이 될 수도 있다. 발화자의 말투, 억양, 성격 등이 ‘만함’이 미치는 범위를 결정한다. 믿을 만한 소식, 주목할 만한 작품 같은 표현도 신뢰와 지지를 표명한다는 점에서, 발화자 중심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만하다’는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한다. 외할머니가 내게 건넸던 “할 만해?”라는 질문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의 ‘만하다’는 개인의 주관적 평가보다는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면서 이 두 번째 ‘만하다’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오랜 친구들을 만났을 때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만 해도 그렇다. “살 만해?” “버틸 만해?” 가까운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할 만해?”라고 말을 건넸을 때 자기도 모르게 힘을 얻는 것처럼, 이때의 ‘만함’은 언제든 더 커질 수 있다. 매일매일 우리가 마주하는 숱한 싸움들은 일련의 ‘만함’을 통해 가까스로 이어지기도 한다. 덕분에 스스로와 타자와 사회와,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의 싸움은 계속될 수 있다.

시국이 어수선한 데다 문단 내 성폭행 사건까지 연일 터지면서 글을 쓸 의욕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꼭두각시 정권을 목도하며 어안이 벙벙했다. 정권에서 숨겨왔던 온갖 비리들이 앞다투어 까발려지는 것은 ‘눈 뜨고 볼 만한’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몸집이 점점 비대해졌다. 문단 내 성폭행은 결코 ‘참을 수 있을 만한’ 것이, ‘눈감고 넘어갈 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내가 ‘몰라도 되는 권리’를 누려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부끄러웠다. 사람이 저질렀다고는 믿기 힘든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혼자서는 미약한 목소리가 연대를 통해 힘을 얻고 ‘해볼 만한’ 싸움이 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다. 문학에 다음이 있다면, 다음의 문학이 있다면 아마도 이들이 그것을 이끌 것이다.

“쓸 만해?” 퇴근하고 돌아온 형이 컴퓨터 앞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말이 중의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 말은 ‘능력 있고 부리기 좋은’이란 뜻을 갖는다. ‘쓸 만한 인간’이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낳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문득 씁쓸해졌다. 쓸 만하지 않아서 나는 괴로웠고, 동시에 쓸 만하지 않아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애써도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괴롭지만, 이럴 때 글이 술술 쓰였다면 종래에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쓸 만한 인간’이라 인정받는 것보다 ‘살 만한 인생’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난 주말에 광화문에 갔다. 촛불을 켜고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는 점점 밝아지고 커졌다.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일을 기대해도 좋을 만한’ 광경이었다. 힘을 합치면 세력이 되듯이 ‘만하다’가 자꾸 모이면 충만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졸시 ‘아찔’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철옹성에 금이 가는 것을 보는 일은 경이롭다. 철옹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자꾸 물을 끼얹어야 한다. 사회에 만연한 차별, 위계에 의한 폭력과 부정부패 등 온갖 병폐들을 없애는 데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살 만한’ 세상이 온다. 겨우, 하지만 마침내 온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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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2008년 이후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음모론이 있었다. 최근 곰탕 암호설에서부터 세월호 인신공양설, 천안함, 국정원 댓글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소외에 기생하는 음모론의 생산이 현대사회의 복잡한 시스템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많은 음모론은 2008년 이전에는 한국사회에서 접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런가?

<음모론의 시대>의 저자 전상진에 의하면, 음모론은 일종의 신정론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신정론은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는 문화적 노력이고 음모론은 종교가 퇴색한 이 시대에 그 기능을 대체하는 일종의 세속적 신정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지 않은 채로 두지는 못한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은 신의 뜻이든 무엇이든 반드시 이해가능한 질서 속에서 ‘의미’화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그토록 많은 음모론이 양산되고 회자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이 미스터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현실의 간극에 대해 투명하게 밝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월호 7시간의 사실내용을 말하는 대신 외신기자를 고소하고,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폭로하고, 검찰총장의 자격을 논하고, 문건유출 경로를 따지고,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를 얘기하고, 개헌을 언급한다. 그리고 모두 한목소리로 “모른다”를 외친다. 매스컴 또한 그 “모른다”를 메아리처럼 반복하고, 그리고 침묵한다.

JTBC 손석희 사장

10월24일 JTBC의 충격적인 보도 이후 며칠 동안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종편에서 시시각각 속보를 내보내는 이 난리 시국에 공중파는 정기방송으로 초지일관 태평성대이다. 게다가 뉴스에서는 태블릿PC의 전달자가 사망한 비서관이라는 등의 보도를 흘리고 있었다. 요컨대 공영방송은 이미 공영방송이 아니라 공공성과 공신력은 물론 현장성을 상실해버린 죽은 방송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중파 채널의 추락 이후, 사람들은 오랫동안 TV뉴스를 외면했다. 그리고 신문을 읽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종편과 팟캐스트로 향했다. 몇몇 종편과 팟캐스트는 사실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뛰어넘는 많은 화려한 ‘그림’들을 제공했고, 그 그림들은 의혹을 가진 이들을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대개 확인되지 않은 사실과 추정의 세계이고, 때론 의도성 짙은 음모론의 파편들이기도 했다. 요컨대 공중파가 공정한 사실 보도의 책무를 져버린 이후, 우리 국민들은 이제 텅 빈 공론장의 세계를 뒤로한 채, ‘신념윤리’와 이념으로 사유화된 매체들에 둘러싸여 버린 것이다. ‘현실보다는 신념이 앞서는’ 화려한 말들은 솔깃하지만, 그 극단과 추정은 진실에 대한 국민의 의혹과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TV 보도에 대한 회의와 염증으로 사람들이 등을 돌릴 때, JTBC의 손석희는 사람들을 다시 TV 앞에 앉게 했다. 그리고 한 진보매체가 밝힌 사실들을 단단한 진실의 세계로 이끌어냈다. 그 진실이 보여준 그림은 충격적이었으나, 음모론이 대신했던 설명보다도 훨씬 더 이해타당한 것이었다.

손석희는 ‘최순실 게이트’ 보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고 했다. “확인된 사실을 보도한다. 의혹 차원이라도 정당한 근거를 가져야 보도할 수 있다. 그리고 잡다한 주변 이슈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다.” ‘확인된 사실, 그리고 근거 있는 의혹, 본질적인 문제’ 이 세 가지 원칙은 현재 예능화되어가는 매체언론이 가장 빠르게 버리고 있는 것들이다. 하루 몇 시간씩 ‘수다 떨 수 있는 사실’들은 사안의 무게를 잃어버린 잡다한 사실이 될 수 있으며, 지나친 풍자로 전달된 사실 또한 그 권위와 신뢰를 실추시킨다. 손석희의 뉴스룸이 가장 공신력 있는 뉴스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팩트의 세계를 수다와 풍자에서, 신념윤리의 재단으로부터, 감정의 과잉으로부터 보호했을 뿐 아니라, 누구인지도 기억할 수 없는 아나운서의 알파고적 전달에서도 벗어나 진정성 있는 한 사람의 실체로서 사람에게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살아나는 ‘사실’과 공론의 힘, 그것이 우리를 무지와 불신으로부터 건져낸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눈멀고 귀먹게 함으로써 이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했던 그 무지와 불신 말이다. 사람들은 이미 아는 것만을 믿는다. 국민들이 최씨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사실들을 몰랐다면, 그것은 그 ‘사실’을 덮고 날조한 매스컴 환경과 그 환경을 창조한 정권의 책임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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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8월 자신의 트위터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오바마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서 이 글에 대해 “적어도 나는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트럼프에게 일침을 가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작다는 점을 비꼰 동시에,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박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가 박 대통령에게 저 말을 한다면 박 대통령은 오바마처럼 응수할 수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미래의 역사교과서에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과 비선 실세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의혹'과 관련한 대국민사과를 한 뒤 돌아서고 있다. ㅣ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의 한 대목이라기보다는 어느 추리소설의 후반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순실’이라는 퍼즐 조각 하나를 집어넣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꾸며진 소설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데 있다. 국정농단의 장대한 플롯을 접하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지적 흥분이 아니라 크나큰 허탈감과 수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대통령이 알고 보니 주체성이 부족한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최태민 일가가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그려지고 있다. 다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지금 국민이 보는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개인이 아니다. 짜인 각본 안에서 남이 써준 대사를 앵무새처럼 읊는 무기력한 연기자다.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대상(selfobject)’ 개념을 잠시 빌려와 보자. 자기대상은 타인이 온전히 자신의 일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닌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이 고안한 용어다. 자기대상의 발달은 유아기에 시작한다. 유아는 충분히 안정된 자기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여서 성숙하기 전까지 정신구조의 일부 기능을 대신 맡아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어려서는 부모가 이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추고 아이를 적절히 진정시키며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거울처럼 일일이 반영해준다. 이를 통해 아이는 일종의 전능감을 맛보게 된다. 코헛은 이러한 공감 경험이 건강한 자기애의 근간이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까지고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는다. 현실 속에서 단계적으로 적정 수준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유아의 자기대상은 원시적인 형태에서 더 성숙한 형태로 점차 발전해 나간다. 이것이 코헛이 말하는 심리적 성숙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과정을 정상적으로 겪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가령 양육자의 공감이 현저히 부족했거나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심리적 발달이 저해된다. 또는 수족처럼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존재가 계속 곁에 있을 경우에도 유아기적 전능감은 적절히 포기되기 어려울 수 있다. 장기간 고립되어 지내는 것도 자기대상의 원만한 변형과 발전을 어렵게 한다. 부모에서 친구로, 연인에서 배우자로, 스승이나 동료, 때로는 자식에게로 자기대상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과정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최태민과 그의 자녀들, 그중에서도 최순실은 오랜 세월 박 대통령의 자기대상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건강하지 못한 자기대상이었을 공산이 크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모자공생을 연상케 한다. 이런 밀착된 관계에서는 자기 생각과 타인의 생각, 자기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주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언급한 ‘순수한 마음’은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라는 유아기적 욕망에 가깝다. 대통령의 생각이 여전히 ‘순수’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개인의 불행이자 시대의 비극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라도 박 대통령이 국가 통치에 앞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 정치의 전면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용기와 결단력, 사고력이 대통령에게 남아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대는 크지 않다. 심리적 성숙은 그리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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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 이상이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다. 강간은 정치적인 문제이다.”

1971년 미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쓴 <강간반대선언문> 속 문장이다. 여기서 ‘강간’이란 여러 성폭력을 아우르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성폭력이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따라서 집단적인 움직임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16년 10월 대한민국에서, 이 사실을 깨달은 여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SNS에서는 용광로처럼 부글거리는 열기와 에너지로 “#00_내_성폭력” 운동이 펼쳐지는 중이다.

웹툰계와 문단에서 일어난 성폭력에 대한 고발로부터 시작된 이 흐름은 이제 영화계, 미술계, 교육계 등을 넘어 군대 내 성폭력도 논의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다종다양한 성폭력을 폭로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격렬하고 ‘파워풀’하다. 트위터 유저들의 말처럼 이는 “온라인 생존자 말하기 대회”나 마찬가지이다.

생활세계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의 문제에 여성들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누구나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억들은 우리를 움츠리게 하고 우리의 행동을 단속해 왔다.

얼마 전 “몰카가 무서워서 순결을 지키는” 여성 청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결이라는 단어에 ‘도덕’이 아니라 ‘공포’가 들러붙는 세상. 이건 확실히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들 눈에는 기이해 보일 정도로 폭발적인 여성들의 비명은 이런 두려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공포가 용기와 집단행동으로 전화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여자들이 힘을 가지기 시작한 것을 본다.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의 진정한 의미 역시 여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든, 세계를 망쳐버릴 수 있는 힘이든 말이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이 힘의 방향을 어디로 잡고, 무엇에 사용할 것이며, 그리하여 어떻게 더 단단하게 만들어 확장해 나갈 것인가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서 치열한 고민과 뜨거운 논쟁, 그리고 수많은 실험들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은 ‘즉각성과 머뭇거림 사이의 줄타기’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SNS에서는 폭로가 고통의 시간을 찢고 타임라인 위로 터져 나오면 그 내용이 바로 기정사실로 굳어진다. 타임라인은 들끓기 시작하고, 다른 목소리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폭로가 곧바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힘들게 목소리를 낸 이의 ‘무고’를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내’가 누구보다 발 빠르게 판관을 자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다. 피해자의 고통에 감응하고 그를 지지하는 것은 즉각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판단과 대응에는 잠시 머뭇거릴 필요가 있다. 속전속결보다는 오히려 시간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더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폭로와 공감, 집단적인 움직임, 그리고 고발과 불매로 이어지는 속도전이 아직은 최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남기는 상처는 깊다. 잠깐의 머뭇거림은 우리에게 복잡한 맥락을 고려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짤 수 있는 간극을 만들어 준다.

우리는 더 많은 싸움의 기술을 고안하고 계발해야 한다. 힘을 가진 자에게 쉽게 복무하는 법이나 돈을 따라 가볍게 돌아서는 시장 논리에 기대는 것은 물론 효과적이고, 때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만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주목해 볼 만한 ‘사건’들이 있다. 영화 <걷기왕>의 경우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진행하고, 콘티 북에 ‘성희롱 지침’을 실었다. 영화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스태프 중 한 명이었던 남순아씨의 제안 덕분이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그 한 명의 페미니스트는 소중하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성폭력 범죄에 있어 ‘무고수사’를 사건 종결 후로 미루는 법률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거는 무고죄와 명예훼손 고발은 피해자의 발목을 잡는 악질적인 꼼수다. 이를 법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이 개정안에는 피해자의 과거를 증거자료로 채택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성폭력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낙인효과를 막는 데 필수적이다.

이 진통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견인할 또 다른 ‘우리’를 조직해낼 수 있을까? 이제 열쇠는 우리의 손 위에 올라왔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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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둔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에 만난 사람들은 더없이 부러워하면서도 마지막에 이 질문을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엔 뭐 할 건데?”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보려고요. 일단 올해는 좀 쉬고요.” 당차게 대답을 하면 질문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라고 시니컬하게 대응하거나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라며 너스레를 떨고 싶지는 않았다. 나라고 왜 다음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아니, 당사자인 나야말로 ‘다음’에 대해 가장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사람들은 늘 타인의 다음을 궁금해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땐 폭력이 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붙잡고 한참 동안 얘기했다. 왜 좋은 직장을 때려치웠느냐, 요즘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걸 모르느냐, 글 쓰는 일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겠느냐, 전혀 다른 일을 해보기엔 조금 늦은 나이가 아니냐, 나한테만 말해봐라 어디 믿는 구석이 있을 것 아니냐…. 지나친 관심은 오지랖을 넘어 오해를 낳는다. 급기야 “결혼할 사람이 부자인가 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제가 결혼을 해요? 누구랑 한대요? 그 사람이 부자래요?”

사생활이 왜 사생활이겠는가. 내가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 사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나의 다음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이때까지 하던 일과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은 스스로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중이다. 경력의 단절보다 무서운 것은 다음에 대해 꿈꿀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내게 새로운 자극을 줄 일을 찾아보고 싶다. 뭐든 ‘일’이 되면 짐이겠지만, 그리고 그 짐은 필경 나를 무겁게 만들겠지만, 나조차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들고 싶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좀 쉬고 싶다.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아버지를 생각해봐.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하셨잖아.” 또 다른 사람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는 게 아니다.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삶이 있듯 내게는 내 삶이 있을 뿐이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서도, 한 가정을 꾸린 후 생계를 위해 모험을 포기하는 것의 거룩함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단지 나는 아직 혼자여서 심신이 상대적으로 가벼울 때 딴생각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무모하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한 시기가 끝나야 비로소 다음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안 가본 길에 발을 들이고 싶은 것이다. “네가 뭘 하든 나는 네 편이다.” 정작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전폭적인 믿음과 응원을 보내주셨다. 기쁜 마음으로 나의 다음을 기다려주시겠다고 했다.

문득 어렸을 때 많이 듣던 질문이 떠오른다.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설레곤 했다. 탐정이 되고 싶었다가 탁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가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어느 날엔 화가가 되는 상상을, 또 어느 날엔 작가가 되는 상상을 했다. 막연했지만 먼 훗날의 일이어서 가능할 수 있었던 대답이었다. 감히 품을 수 있는 꿈이었다. 아무도 나의 다음에 딴죽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개중 어떤 꿈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다음’이 ‘지금’이 된 것들을 떠올리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다음이 있었기에 더없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 10대에는 공부를 하느라, 20대에는 스펙을 쌓느라, 30대에는 취업을 하고 경력을 쌓느라, 40대에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머릿속으로 다음을 그려보지 못한다. 꿈꾸는 여유가 있을 턱이 없다. 하나의 탑을 쌓는 데 주력하느라 탑 사이사이에 틈을 내고 다른 탑은 어떻게 지어지고 있는지 관찰할 마음을 갖기 힘들다. 지금을 채우기 바빠 선뜻 다음을 가늠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다음에 커서”라는 희망적인 말은 하루하루를 버티고 견디느라 점점 희미해지고 만다. 자신이 놓쳐버린 ‘다음’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기성세대는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엔 뭐 할 건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아무런 연습도, 훈련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지만 나는 다음이 두렵지 않다. 두렵지만, 그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다음이 있다는 믿음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과 살아온 경험을 나는 믿는다. 두 번은 없다. 그러나 다음이 있다. 다음은 있다. 그리고 분명, 다음에만 할 수 있는 것들, 다음이라 비로소 가능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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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영란법 시행 이후 곳곳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학생이 교수에게 캔커피를 줘도 되는가, 공무원직의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줘도 되는가 등등. 전북도의 신고센터만 해도 하루에 40~50건의 관련 문의가 쇄도한다고 하니, 과연 우리 일상과 삶의 풍속은 한동안 이 법을 놓고 시끄러울 듯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김영란법의 제정과 시행에 대해 찬성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부정청탁과 금품수수에 의한 부패와 불공정이 만연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시시콜콜한 시행규칙과 가이드라인에 대한 요구, ‘신경질’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떤 비애를 느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규제와 절차에 대한 맹목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면적 관료주의’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관료주의란 쉽게 말해, 그리고 부정적으로 규정하자면 그 어원인 ‘책상보(bureau)’에서 알 수 있듯 실제 삶과 유리된 ‘서류’들의 세계, 행정만능의 세계이다. 그것의 출발이 개인의 잘못된 판단, 부패를 불허하는 ‘공적 투명성’, ‘법치주의’를 겨냥했다고 해도, 현재 관료주의의 만연은 이미 긍정성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가령, 최근 나는 정부 지원의 어떤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집행 이전에 계획서, 지원서 등의 숱한 서류를 작성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을 뿐 아니라, ‘예산항목’에서 규정상 ‘이것은 되고 안되고’를 놓고 오랜 시간을 논의하고 고치고, 해당부서에 문의하고, 고치고 하는 등의 정말 ‘허튼 시간’을 보내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들었던 통합보험이 실비보험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안(보험약관은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설명도 복잡해서 여간해서는 다 기억해두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실비보험은 직접 신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몇 개월 전의 입원비를 신청하기 위해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다. 안내에 따라 진단서와 내역서를 발급받으려고 병원을 방문했다. 대기표를 뽑아 ‘이쪽’ 창구에 갔더니, ‘저쪽’ 창구로 가라고 해서 다시 대기표를 뽑고, 간신히 접촉된 그 직원의 지시에 따라 내과에 갔더니, 주치의가 진료를 보지 않는 날이기 때문에 다음날 오라고 한다. 또 피부과 진단은 또 별도의 신청과 절차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최종 필요서류를 얻는 데까지 일주일이 소요되었다.

몇 년 전, <개그콘서트>에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인기 코너가 있었다. 설정은 똑같다. 범인이 건물에 인질을 몰아넣고 10분 안에 요구한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상황을 놓고 경찰 고위간부들이 회의를 한다. 거기에서 책임자급 경찰이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안돼’이다. “안돼, 10분 안에 그걸 어떻게 해? 일단 상부에 보고해야지. 청장님한테 가면, 청장님이 그래요. 그러면 인질을 대피시키는 것이 먼저야, 아니면 폭탄 제거반 투입이 먼저야? 네 생각은 어때? 인질을 대피시키는 것이 우선인 듯합니다. 안돼, 듣지도 않을 거면서 물어요. 폭탄 제거를 하려면 인력투입요청 서류를 만들고…” 등등.

너무 웃기는 코미디라고 생각했는데, 이 풍자가 실제로 ‘세월호’ 당시 우리가 겪은 실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전면화된 관료제’의 사회란 ‘안돼’의 세계이다. 그것은 어떤 한 개인이 품은 의지와 행동력을 무수히 검문하고 차단시키는 수많은 ‘문’을 의미한다. 그 문들은 합리성, 공정성, 효율성으로 이루어진 ‘규제와 절차’를 의미하지만, 그 문을 열어젖히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사회정의와 공정성을 위해 법과 규정은 만들어져야 하고,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오류와 부정의 가능성을 잡아내어서 성문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나는 그 해결책이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수한 규정이 필요 없는 ‘시민의식’의 형성. 그것은 대학을 기업화하고, 학생들에게 무수한 자격증 취득을 권하는 직업학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법으로, 잔소리로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할 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이다. 어른이란 선택에 따른 권리와 함께 책임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안돼’를 말하는 대신, ‘된다’고 해야 한다. ‘실용성과 경쟁력 있는 스펙, 효용성’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두려움을 잔뜩 짊어지우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해도 되고, 쓸데없어도 되고, 해봐도 된다고 자꾸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인간과 삶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삶과 타인,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류투성이일지라도 그들이 가진 창의력과 비판력이라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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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서는 대개 어린 자녀를 둔 엄마를 대상으로 한다. 부모가 같이 읽는 경우도 늘어나고는 있지만, 육아서는 대체로 엄마의 마음을 겨냥한다. 책 제목에도 ‘엄마’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엄마의 말 공부>, <엄마와 아이 사이 아들러식 대화법>, 심지어는 <무심한 엄마가 왕따 아이를 만든다>는 제목의 책까지 있다. 아이는 부모가 같이 키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흔히 아이와 엄마 사이의 애착이 불안정해서 그렇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여전히 아이에게 세심하게 공감하며 정서를 보듬는 일은 주로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바, 여자가 남자보다 생물학적으로 공감 능력이 우수하다는 증거는 없다. 공감 정확도에 관한 연구결과를 종합해 보면, 공감을 평가하고 있다는 상황적 단서를 줬을 경우에만 여자가 남자보다 공감을 더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 않은 경우 남녀의 공감 능력의 차이는 없었다. 자신이 공감과 관련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여자들은 더 잘해야 한다는 일종의 성 역할 기대를 갖는다. 이에 따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열심히 평가에 임하게 되고 그 결과 더 나은 공감도를 보이는 것이다. 한편 외적 보상이 주어지거나 공감을 잘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남자도 여자와 같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보인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남자들도 회사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그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발휘한다. 공감 능력은 권력과도 연관이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한 명은 상사 역할을 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부하 역할을 줘서 ‘상사-부하 역할놀이’를 하고 나면, 부하 역할을 한 사람이 상사 역할을 한 사람보다 공감 능력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권력감의 차등이 공감력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권력은 상대적이다. 가부장제 아래서 남성이 권력의 우위를 점하는 것과 공감을 여성의 역할로 치부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공감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 애써 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안 하다 보면 잘 못하게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아빠는 육아 휴직 중>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다. 아빠가 1년간 육아 휴직을 받아 육아를 전담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엮어낸 책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아빠가 주 양육자로 아이들을 돌보는 상황이 되고 보니 퇴근해서 돌아온 엄마를 향해 아빠가 먼저 말을 건다. 엄마는 피곤해하며 대화를 피한다. 아빠는 공감을 바라지만 엄마는 대화에 응해주지 않는다. 역할만 바뀌었지 익숙한 장면이다. 자신은 전업주부로 지내고 아내가 직장 일을 하는 구조가 되자 남편은 깨닫게 된다. 전업주부가 수다쟁이가 되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집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가 어떤 일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그날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할 때 상대가 거기에 맞장구치고 공감해주지 않으면 서운해진다. 역할을 바꿔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다.

모성, 부성은 수시로 전도될 수 있다. 아빠가 주로 아이를 돌보고 엄마가 경제력을 담당하면 아빠는 모성애를 계발하고 엄마는 부성애를 발휘하게 된다. 한부모 가정에서 아빠와 딸이 같이 지내는 상황에서라면 아빠는 대개 엄마 역할을 하고 모성을 발휘하게 된다. 오랫동안 한부모 가정으로 지낸 경험이 있는 일본의 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집에서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재우는 것은 엄마가 하는 일이라서 아빠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가 되면 발성법에서 몸짓까지 다 바뀝니다. 그러면 ‘역시, 젠더 롤(gender role)이란 성 역할 연기구나, 이것은 연기하는 거야’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모성애라는 것은 내재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역할 연기입니다.” 그의 말처럼 모성은 환상이며 부모는 역할이다. 모성이 역할 연기라면, 이 역할은 남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상대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의 느낌을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자동적이기보다 의식적인 작업이다. 여기에는 남녀가 따로 없고 부모가 따로 없다. 공감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는 계속 확대될 것이다. 남녀 임금 격차가 줄어들고, 부모 모두의 육아 휴직 사용이 활발해지며, 우리 각자가 자신을 둘러싼 이분법적 성 역할 기대에서 벗어날 때 부모도 행복하고 아이들도 더 유연하게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나은 역할 모델이 필요하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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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농민이 영면하셨다. 그는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가 캡사이신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경고방송이나 예비 분사도 없이, 규정을 훨씬 웃도는 10기압 이상의 물대포가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러나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사과 한마디 없었다. 이와 같은 무대응은 이 정권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다.

물론 기민하게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적절한 수사는 진척되지 않되, 은폐 움직임은 기가 막히게 빠르다. 백남기 농민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찰 3개 중대 250여 명이 병원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에서는 이유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지만, 백남기 대책위 측에서는 ‘부검 시도’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다. 부검은 ‘명명백백한 진실=과잉진압이 국민을 죽였다’를 가리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야말로 국가에 의한 국민 살해가 진행되는 와중에 대통령은 장차관들에게 “내수 진작을 위해 골프를 치라”고 주문했다고 전해지고, 여당 당수는 국회의장을 끌어내리겠다며 단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느낄 그 허기야말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허기다. 국민을 대의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왜 민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가? 사드 배치, 지진의 공포, 그리고 계속되는 국민의 죽음 속에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의 집권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가습기 살균제 살인 사건이 진행 중이며, 수많은 하청 노동자들이 안전하지 않은 노동조건 때문에 사고사를 당했다. 그리고 이 정권이 결정한 노후 원전 가동 연장 및 추가 원전 건설 계획은 대형 재난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중 어떤 문제에도 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제는 매일 40명에 달하는 국민이 자살을 선택한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말한다. “자살률을 낮출 수 있는 방법 찾기는 국가와 정책입안자의 몫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약 이들이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살 방조죄로 기소되어야 하며, 또한 그들을 기소하지 않는 사회는 범인 은닉죄로 고발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일찍이 ‘테러 근절’을 선포했으나, 그가 염려했던 그 어떤 테러보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정부의 폭력과 무능, 살인 방조 속에서 생명을 잃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테러인가, 아니면 이 정권의 의도적인 오작동과 비열함인가.

내년이면 30주년이다. 1987년의 뜨거운 광장이 제도적 민주주의를 이 사회에 가져다준 그 시간으로부터 우리는 30년을 걸어왔다. 그렇게 열린 87년 체제는 명백한 한계를 담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퀴어 액티비즘, 장애인권운동 등 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역시 87년 민주 항쟁의 수혜 속에서 꽃필 수 있었다. 제도적 민주화와 시장 자유화가 모든 것의 답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민주주의 앞에 울퉁불퉁한 길을 닦아준 것만은 사실이다.

지난 10년은 1987년 대한민국 국민이 목숨을 걸고 쟁취했던 그 ‘한 줌’의 민주주의마저 퇴행시키는 시간이었다. 87년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적대로 하는 싸움이기 이전에, 이 땅에서 정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둘러싼 싸움이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부도덕하고 무능하게 국정을 운영해도 또 집권할 수 있더라”라는 메시지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맹목적인 목표로서 정권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지난 10년의 정권이 특히 흉포했을 뿐, 국가가 국민의 목숨을 우습게 여긴 것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특정한 정권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열한 정치의 결과로서 획득하는 정권교체다. 징벌적 차원에서의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나름의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대선을 우리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한 단위에서 사회의 형질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한 손에는 투표권을, 다른 한 손에는 선결과제 요구와 정책 제안을 들고, 그렇게 우리는 정치세력화해야 한다.

87년 민주항쟁 30주년을,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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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 어디 가?” “고향 가야죠.” 회사 휴게실에 모여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추석 얘기가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명절에 대한 부담과 걱정이 쏟아져 나왔다. 교통체증 때문에 받을 스트레스는 소소한 근심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결혼부터 노부모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부담과 걱정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연휴라는 말은 설레지만 명절이라는 말은 무섭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회사라는 공간의 특성상,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다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다가올 명절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한가위인데,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행복해야 마땅한데 마음이 겨울을 향해 벌써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것 같았다. “저는 이번에 여행 가려고요, 태국으로.” 그의 말 덕분에 싸늘한 분위기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모두들 선망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리만족이라도 해야 오늘을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명절 기간에 맞춰 해외출장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친구에게 들었다. 한바탕 크게 웃었지만, 웃음의 끝은 처량했다. 어릴 때는 멋모르고 즐겁기만 한 것이 명절이었는데, 어쩌다 우린 명절을 이렇게까지 기피하게 됐을까. 나의 경우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가 사춘기라 예민해서 친가에 가기 싫어한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 무렵, 날카로운 질문과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가 무방비 상태의 내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공부는 잘하니, 작은집의 누구는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금상을 타 왔는데…, 전주에서 암만 잘해봐야 서울에선 명함도 못 내밀어,꿈이 뭐니, 꿈을 더 크게 가져야 해, 사촌동생들의 귀감이 되어야 해, 문과에 갈 거니 이과에 갈 거니, 우리 집안에도 법조인이 한 명쯤 있어야 하지 않겠니…. 애정 어린 간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겐 저 상황이 상당히 폭력적이었다. 방어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에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좀 잦아드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군대, 취업, 결혼이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들은 일종의 규격이었다. 그 나이 때에는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관행과도 같은 것이었다. 규격을 언급할 때는 으레 “남들 다 하는”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남들 다 하는 공부를 왜 안 하니”나 “남들 다 하는 연애를 왜 못하니”처럼 안 한 것과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 이어졌다. 어른들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갔어야 했고 남들 다 하는 취직을 했어야 했다. 그것이 ‘번듯한’ 것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남들 다 하는 내집 마련을 해야 하고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결혼과 취직을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출산과 승진이라는 과업 또한 달성해야 한다. 규격은 생각지도 못한 짐이 되어 사람들을 내리누른다. 남들과 같아지라는 주문 때문에 공교롭게도 남이 되는 기분을 갖게 만든다.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고 보통이라는 규격에 들어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말하는 ‘남들’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지난 설에는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남들 누구요? 남들이 ‘다’ 하는 건 아닌데요?” 일순 정적이 흘렀다.

비단 명절 때뿐만이 아니다.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규격은 시시로 폭력을 행사한다. 삶은 단 한 번뿐인데, “남들 다 하는” 것을 해야만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강요받기 일쑤다. 남부럽지 않게 살기 위해,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지워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셈이다. 육아를 위해 일을 포기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위해 꿈을 접어야 한다. 보통이라는 규격이 지니는 위험성이 바로 그것이다. “남들 다 하는” 것들을 똑같이 할 때, 남들과 달라질 권리는 없어진다. 보통이라는 규격에 맞춰 사는 바람에 정작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을 놓칠 수도 있다.

보통이라는 규격은 지금껏 무수한 ‘다움’을 만들어냈다. 남자다움, 여자다움, 아이다움, 어른다움…. 죽을 때까지 다움은 그치지 않는다. 졸시 ‘다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다움 안에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살 때, 나 자신은 점점 희미해지고 나를 둘러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유년 시절의 염원은 결국 보통 사람이 되는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으므로, 다음을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남부럽지 않은 인생일지라도 다음이 없는 삶, 내일이 없는 삶, 나 자신이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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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 대해 생각할 때가 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자는 인간으로, 여자는 그 인간에 대한 결핍이자 타자로 여겨왔다. 이제 우리는 ‘보편 인간’으로 상상된 남자가 아니라, 성별을 가진 존재, 성화된 존재로서의 남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인 폭력과 차별은 남자만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다뤄온 사유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 한계야말로 남자인 당신을 옥죄고 있는 굴레다.

남자만을 인간으로 생각한다니, 무슨 말일까? 리우 올림픽 중계 ‘막말 대잔치’를 떠올려보자. “여성 선수가 저렇게 쇠로 된 장비를 다루는 걸 보니 인상적”(펜싱), “살결이 야들야들하다”(유도), “○○○ 선수 착하고 활도 잘 쏘니까 일등 신붓감”(양궁). 이런 리스트는 끝도 없다. 여성은 운동선수로서의 자질보다는 그의 성별이나 외모, 사회적 관계 안에서 평가받고 묘사된다. 남자 경기에서 이런 예는 드물다. 이는 남자 선수는 ‘선수’에, 여자 선수는 ‘여자’에 방점을 찍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드러낸다. 남자는 ‘보편’이 되고, 여자는 ‘여자’가 된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그런데 남성이 인간으로서 대표성을 띠는 순간, 남성 내부의 차이는 지워져 버린다. 예컨대 남성들 사이의 계급차는 ‘인간 내부의 차이’가 되지 ‘남성 내부의 차이’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차별당하듯 남성은 남성으로서 차별받는다.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은 같은 지위를 누리지 않으며, 따라서 같은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은 ‘인간으로서 동등하다’라는 환상에 빠져 근본적인 모순과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여성 교환’을 통해 획득된다.

근대 초창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는 기존에 이미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가부장제에 올라타면서 그 힘을 더욱 견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부르주아 남성은 노동자 남성에게 ‘여자와 결혼할 법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동등한 (남성) 인간’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여성과 가족 구성권을 선물하면서 노동자를 길들인 것이다. 한국 여성혐오의 한 근간으로 지적되는 ‘식민지 남성성’이 작동하는 방식도 유사했다. 일본제국은 ‘내선일체’의 감각을 주기 위해 일본 여성과 조선 남성의 결혼을 과도하게 홍보했다.

여성의 교환을 통해 만들어진 남성 간 ‘평등’이란 허구다. 내가 여성을 소유하고 사회적 소수자 위에 군림한다고 해서 세계에 군림하는 ‘어떤 남자’들과 동등한 관계가 될 리 만무하다. ‘이건희’와 미래가 불안한 남성 청년은 같지 않다. 다만 ‘같을 수 있다’고 상상될 뿐이다. 이때 여자는 일종의 트로피로 ‘이건희’와 ‘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와 연애하지 않는 여자, 결혼하지 않는 여자는 ‘김치녀’가 된다. 하지만 불평등을 만드는 건 ‘헬조선’이라는 계급사회이지 당신과 연애하지 않는 ‘그 여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을 더 열악한 지위에 있는 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진정한 싸움을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노예의 삶이다.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무슨 소용인가? 대답은 명백하다. 바로 당신의 해방을 위해 페미니즘은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 및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벨 훅스)이다. 우리가 남성을 성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나면 남성 간의 차이가 드러나고, 그 차이로부터 성차별을 당해 온 남성 역사가 발견된다. 역차별이 아니다. 당신은 기득권 남성들로부터 이미 성차별을 당해왔다.

<내부자들>이라는 영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남성연대’는 ‘이미 충분히 가진 내부자들’의 것이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어떤 남자들은 채팅방에서 여자 동기들의 외모를 품평하며 낄낄거리거나, 온라인으로 몰카를 공유하면서 ‘남성연대’라는 안전망을 가졌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왜곡된 연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아무런 실질적인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싸워야 할 대상은 떨어지지도 않을 ‘콩고물’에 대한 판타지를 주입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축적해가는 기득권 남성들이자 그 남성들에게 힘을 주는 가부장제라는 구조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하다. 아니, 그건 이 망가진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체성이다. 벨 훅스의 말을 당신에게 전한다. “더 가까이 오라. 페미니즘이 당신의 삶과 우리 모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지켜보라. 더 가까이 오라. 와서 페미니즘 운동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직접 살펴보라. 더 가까이 오라. 그러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임을.”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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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옛날 기억들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나누며 배꼽을 쥐고 웃기도 했다. 오래된 일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는 사실에 애틋해졌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서로 조금씩 달라서 더 재미있었다. 그때와 그 시절이 있었기에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에피소드는 끝이 없었다. 슬프게도, 우리는 과거를 향해 있을 때에만 행복했다. 이미 지나가버려 손쓸 수 없는 시간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다.

“요새 하는 일은 잘되고 있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직장을 다니다 최근에 큰맘 먹고 사진관을 연 친구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냥 그렇지 뭐.” 그 친구가 되물었다. “너는 좀 어때?” “그냥 그래.” 둘 사이에 앉아 있던 친구가 잔을 높이 치들며 외쳤다. “다 그렇지 뭐. 그냥 술이나 마시자!” 우리는 힘차게 잔을 부딪쳤지만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나눌 때의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이미 깨진 뒤였다. 과거는 견뎌내서 아름다운 시간이었지만 현재는 우리가 관통해야 할 무시무시한 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무수한 ‘그냥’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걸 그냥 줬단 말이야?” “주말에는 그냥 잠만 자고 싶다.” “배고픈데 그냥 아무거나 시켜.” “그냥 좀 놔둬.” “근데 왜 넌 결혼 안 하냐? 사는 거 별거 없어. 그냥 사는 거지.” ‘그냥’의 홍수에서 벗어나고자 잠시 밖으로 나왔다. “왜 나와 있어?” 뒤늦게 도착한 친구가 먼발치에서 나를 보고 알은체하며 물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냥’을 내뱉고 말았다. 그냥이 싫어서 나왔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그냥”이라고 답해버린 것이다.

친구가 내 옆에 와서 섰다. “그냥이 어디 있어.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어?”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우리 모두가 ‘그냥’의 늪에 빠진 것 같아서.” 나 또한 그냥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다는 씁쓸한 말도 덧붙였다. “그냥”이라는 말은 대화를 이어나가는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을 지나올 때마다 늘 가슴에 무거운 돌이 하나씩 쌓이는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속내를 감추고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함구하면서, 그냥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말았다.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취향이 뚜렷했던 우리는 이제 적당한 것,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을 가늠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맞추려 노력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내일 오전까지 짤막한 원고를 하나 써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달력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나온 게 화근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친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좀 더 있다 가. 긴 원고 아니라며. 대충 하면 되잖아. 우리 정말 오랜만이잖아.” “그래, 대충 써. 어차피 지금 가도 늦었어.” “대충 해. 대충 써도 어차피 잘 쓸 거잖아.”  ‘그냥’의 홍수를 벗어나자 ‘대충’의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삼십분 정도 더 앉아 있다가 몰래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감할 원고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짧은 원고라 할지라도 대충 쓸 수는 없었다.

밖에 나오니 아주머니 한 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냥이 아닌 필시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다. 편의점으로 새벽에 팔 물건들을 나르는 청년도 있었다. 액체가 든 용기가 엎어질지 몰라 조심스레 운반하고 있었다. 결코 대충이 아니었다. 그냥으로 나를 감추고 대충으로 남의 눈을 속이던 요즘의 나 자신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취향과 감정은 하루아침에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좋은 문장은 절대로 대충 쓰이지 않는다. 하는 일이 아무리 익숙해져도 결코 그냥 하지는 않아야겠다고, 결코 대충 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대서사시 <모두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질서와 침묵에 익숙해진 이들,/ 돌이 그러하듯.” 질서에 익숙해져 아무 생각 없이 대충을 받아들이고 차마 침묵할 수 없어 그냥을 불러들이면 우리는 언젠가 “돌”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정작 해야 할 말이 있을 때 몸이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돌 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걸었다. 그냥 살 수는 없으니까, 대충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오늘부터 저 단어들과 애써 멀어지려고 한다. 돌이 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힘써 구를 것이다. 어쩌면 이는 일상적으로는 순간의 의미를, 궁극적으로는 생의 이유를 찾아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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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생각하기도 못하게 만드는, 지독한 더위다. 하루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폭력적인 더위에 일종의 피서이다. 왜냐하면 많이 알려져 있듯 그의 소설은 지극히 ‘쿨’하기 때문이다. 선풍기 앞에 누워 몇 권의 하루키 소설을 훑어보면서 나는 그 쿨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령 이런 것이 아닐까.

첫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에 이른 남자는 파국의 원인을 따지지 않고 혹은 바람난 아내에게도 ‘그녀의 일’이라고 덮어버린다. 또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러운 절교를 당했는데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고 16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을 찾아나선다. 합리와 논리, 진실이 아닌 비합리와 모순투성이의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 몸을 차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의 다음과 같은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제공

또 하루키 인물의 욕망은 끈적거리지 않는다. 가령 <4월 어느 햇빛 좋은 날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소설이 100%의 여자를 만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소설은 4월 어느 햇빛 좋은 날에 우연히 100%의 여자를 알아보고 잠시 행복해하다가 보내는 일이 전부이다. 어떤 뜨거운 열정도 스토킹도 없다. 하루키의 인물에게 욕망의 대상은 풍경으로 머물기 쉽다. 와타나베의 금언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국면이다. 그래서 하루키의 남자들은 대체로 젠틀하고 우아하다. 욕망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쉽사리 증오나 혐오, 그리고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뿐 아니라 돈, 명예 같은 것에도 해당된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고립과 단절을 추구하고 ‘개인’이 되는 것의 필연적 운명과 장점에 대해 설파한다. 그들은 대개 홀로 책과 음악을 탐닉하고, 타인과의 교류를 싫어하며 온전히 ‘자신’이 되고자 한다. 무리가 아닌 개인이 되었을 때, 인간은 순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 그의 소설에 의하면 세상은 ‘사막’ 같은 곳이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한 연애소설에서 하루키의 남자들은 대개 실연과 이별, 죽음을 겪고 허무와 상실감을 겪는다. 그 상처를 견디는 방법은 “어떤 진보도 또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깨닫고 ‘신이 나서 무(無)를 향해 가려는 인간들’을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 쿨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넷째,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가령 또 다른 달을 품고 있는 세계라든가 세계의 끝에서 만나는 무의식의 세계, 고양이와 얘기를 나누는 환상의 세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하루키의 소설을 판타지 문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판타지 소설은 본능적 욕망을 실현하고 해소하는 대중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하루키의 비현실은 초월적 현실 같은 곳이고, 오히려 현실적 욕망과 법칙이 승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 세상’과 유사한 곳이다.

다섯째, 초월적 세계를 품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에는 대체로 일체의 집착과 마음을 놓아버린 금욕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얼음 사나이>의 주인공 얼음사나이는 그 극단의 메타포라 할 수 있는데, ‘빙산같이 고독한’ 이 남자는 모든 과거를 얼음 속에 동결시켜 봉인한 채 단지 응시할 뿐 풀어헤치지 않으며 부단히 현재를 과거화시키는 인물이다. 그 동결 속에 마음과 온기는 물론, 일체의 비극적 역사도 망각된다.

여섯째, 하루키 소설은 읽고 나면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오가는 어떤 희미한 기미들과 여러 개의 플롯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잊어버리는’ 해체적 독법에 적합하다. 또한 강렬한 주제의식이나 박진감 넘치는 드라마가 없기 때문에 읽기에 덜 피로하고 의미규명에 대한 강박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뉴스에 나오는 세상사가 구질구질하고 한심해 보인다. 정치꾼들에 대한 환멸은 더 깊어지고 토론과 정쟁도 쓸데없는 일처럼 생각된다. 국가와 민족 운운하는 것에도 냉소적이 되며, 심지어 사드(THAAD)니 올림픽 메달 획득이니 하는 난리에도 심드렁해진다. 그러니 폭염에 하루키를 읽는 것만 한 피서는 없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하루키 소설이 왠지 현대판 종교서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음, 그런데 지금 하루키 문학을 비판하는 거냐고? 글쎄, 그것도 가을이 되면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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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끝에 올림픽에 참가한 박태환 선수는 아쉽게도 자유형 200m, 400m 경기에서 모두 예선 통과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 선수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몸도 괜찮았고 기록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아쉬운 결과가 나왔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여론의 평가는 박했다. ‘예고된 참사’라며 비난하기에 급급했다.

박태환이 7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아쿠아틱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유형 200m 경기 후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M

돌아보면 박태환(1989년생)과 비슷한 연령대 엘리트 선수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박 선수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 우승을 시작으로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비슷한 또래인 모태범(1989년생), 이상화(1990년생), 이승훈(1988년생), 김연아(1990년생) 등이 빙속, 빙상 종목에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로 태어난 이들은 동양인에게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종목들을 차례로 석권하며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언론은 이들을 한 데 모아 ‘G(Global)세대’로 호명하며, 자신감과 한국사회에 대한 신뢰를 새로운 세대의 특징으로 꼽았다. 강대국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고, 우리 현대사의 성취를 부정하지 않는 등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췄다는 의미였다. 한 신문사는 사교육·영어열풍·조기유학 등을 통해 단군 이래 최고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세대가 탄생했다며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런 G세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1988~1991년생으로 좁혀 잡으면 263만명, 1986~1991년생으로 넓혀 잡으면 389만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이 또래의 상당수는 취업이 되지 않아 고생하고 있거나 취업에 성공했더라도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감을 곱씹으며 분투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5~29세의 체감 실업률은 27.6%로 그 수는 78만명으로 나타났다(2015년 8월 기준). G세대의 3분의 1은 체감적으로 실업 상태라는 의미다. 글로벌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던 바로 그 G세대가 이제 ‘노답’ ‘헬조선’을 외치고 있다.

애초에 G세대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보기술에 친숙하고 어학에 능통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세대’라는 것은 청년층 전체를 놓고 보면 허황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계급, 젠더, 지역 등의 차이를 무시하고 뭉뚱그려 하나의 집단인 것처럼 취급하면 실체는 사라지고 기성세대가 억지로 부풀린 바람만 남는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 양궁 대표팀을 가리켜 ‘쾌활 세대’로 호명한 신문이 등장했다.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그의 저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역사적으로 청년들에게 덧입혀지는 자의적인 이미지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편리한 협력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질적인 타자’다. 청년들이 ‘편리한 협력자’로 거론될 때는 대체로 나라의 형편이 어려울 때다. 전시에는 장병으로, 노동력 수출이 필요할 때는 산업역군으로, 불황에는 1인 기업가로 나라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전에 없던 이름을 붙여가며 청년들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표현하고 칭찬을 남발한 다음, 어김없이 청년들의 삶이 더 힘들어진 건 역설적인 사실이다.

젊은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협력자로 호출된 것처럼, 타자로 전락하는 일 역시 한순간 임의로 벌어진다.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찾으려 할 때 어김없이 배제의 논리가 성립하면서 청년이 ‘이질적인 타자’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청년들은 근거가 희박한 혐의를 쓰고 논란의 중심에 서서 여론의 포화를 맞곤 한다. 언론 역시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는 사안을 단순한 사태로 축소시키거나 악의적인 프레임을 짜 청년들을 구석으로 내몰기 일쑤다.

‘편리한 협력자’든 ‘이질적인 타자’든 청년을 특정 이미지에 가두는 건 현실에 맞지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알파벳 모든 글자를 동원해 세대 이름을 갖다붙여도 특정 연령대라는 이유만으로 청년을 그 중 어느 하나에 묶는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 청년들의 삶에 다가서려면 이미지를 내버리고, 계층적 다양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한국 여자배구의 간판 김연경(1988년생)도 이른바 G세대다. 며칠 전 열린 한·일전 도중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김 선수가 욕설을 내뱉는 모습이 우연히 화면에 잡혔다. 한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블로그와 소셜미디어에서는 그 장면만을 편집한 동영상이 돌기 시작했다. 같은 장면을 놓고 불쾌함을 느낀 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대체로 통쾌하다는 반응이었다. 앞뒤가 꽉 막힌 현실에서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이 G세대의 정직한 일면인지도 모른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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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31일, 대학 내에 경찰병력 1600명이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학교의 독단적인 행정처리에 반대하면서 학교 측과 대치하고 있던 이화여대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교수는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4년 있다 졸업하는데?”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요즘 대학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스펙의 전당’에서 더 이상 학생들은 주체가 아니다. 그저 스펙을 구매하는 소비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잊은 대학이 학생을 일개 소비자로 취급한다 하더라도 학생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고 있는 ‘미래라이프’ 사업은 교육부가 진행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의 일환이다. 이화여대는 사업에 선정돼 정부로부터 35억원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름만 아름다운 이 사업은 지난 20여년간 지속된 대학 신자유주의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정부의 대학정책은 고등교육이 공공재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리하여 ‘자유화’란 이름으로 대학은 기업화되었고, ‘자율화’란 명분으로 무한경쟁의 방법론이 도입됐다. 그 최전선에 정부에 의한 ‘대학 평가’와 ‘구조개혁’이 놓여 있다. 인구감소로 고등교육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자 정부는 정원감축 및 지원금을 빌미로 대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이에 발맞춰 학교 구성원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파행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는 학문과 고등교육의 의미 자체를 시장주의로 재구성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학 측의 소통단절은 필수요소가 된다. 지금 이화여대가 겪고 있는 진통 역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최경희 총장의 불통과 독단으로부터 기인했다는 평가다. 이 흐름을 이끌었던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은 “취업이 학문보다 우선하며, 취업을 중심으로 대학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밝힌 바 있다. 정부에 의한 대학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대학의 등장은 한편으로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전락시켰다. 학부제와 상대평가는 학생자치를 무너뜨리는 기반이 되었고, ‘산학협동’이라는 이름 아래 지식과 사유는 시장의 부속물로 통합되었다. 비정규직 강사뿐 아니라 정규직 교수들의 ‘노동조건’ 역시 열악해졌으며, 이제 학위는 자격증에 불과하다.

‘미래라이프’ 단과대학에는 ‘뉴미디어 산업’과 ‘웰니스 산업’ 등의 전공이 신설될 예정이라는데, 이런 분야가 학위를 요하는 학제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은 대학 사회 내에 팽배한 ‘시장정서’ 안에서야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다”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작이 어찌되었건 간에 학생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대학의 구조 자체에 저항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학생들의 싸움을 ‘학벌 이기주의’라고 낙인찍는 대학 측과 언론의 프레임은 교묘하다.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인 불편함에 즉각적으로 호소하고, ‘여학생들의 속물근성’을 돋보이게 하며, 진보진영으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지 역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에 출연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한 학생은 말한다.

“직장인이나 고졸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다만 특별한 단과대를 신설해 학위를 수여하는 것에 의문이 있을 뿐이다. 그보다 본교에 이미 있는 평생교육원의 질을 높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사업은 4년제 졸업장이 있어야만 경력을 이어갈 수 있고 승진할 수 있는 사회의 비합리적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고 학벌주의를 조장할 뿐이다.”

물론 학생들의 싸움이 ‘학벌 이기주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추동력을 얻는 것일 수 있다. 사회의 꼴이 이러한데, 학생들에게만 급진성을 요구할 순 없다. 그러나 이화여대의 싸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하는 운동은 일종의 ‘사건’이다. 저항은 질문이고,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며, 꿈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학생들은 ‘중심 없는 다중’으로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통하고 모든 사안을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새로운 운동주체로서 이미 자신들의 투쟁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 중에 ‘투쟁가’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떼창’한 것은 그래서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야말로 그들은 세계를 다시 만나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나는 세계는 이전과 같은 세계일 수 없다. 그 싸움이 어디로 가든, 존경의 마음을 담아 지지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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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잘 살고 있니?” 이 말이 너무나 애절하고 먹먹해서 바로 답장을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다소 장황하게 문자를 보냈다. 그제야 내가 바로 답장을 하지 못한 게 애절함과 먹먹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지극히 예사로운 저 질문이 내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날카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잘 산다는 게 과연 뭘까. 잘 사는 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지금 잘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친구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잘 살고 싶다.” 몹시 부끄러웠다.

올해는 고등학교에 두 번 다녀왔다. 예술 고등학교에 가면 으레 시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단어를 찾을 수 있는지,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는지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게 된다. 시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은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가 하는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운다. 실없는 농담까지도 진담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그들은 진지하고 절박하다. 강의가 끝나면 아이들은 박수를 치고 나는 온몸이 기진맥진해진다. 시 이야기를 하며 내 열성을 다 쏟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의 눈빛에는 아직 열정이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올해 찾아간 고등학교는 둘 다 일반 고등학교였다. 두 시간 동안 시 쓰는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할 것 같아 나는 시를 읽는 법에 대해 강연했다. 시를 읽으려면 세 가지의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되어보는 일, 들여다보는 일, 새겨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되어보는 일을 통해 상대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성별, 국적, 나이 등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들여다보는 일을 통해 ‘왜’에 한 발짝 다가설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마음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하니 말이다. 새겨보는 일을 통해 그 상황이 나에게 닥쳤을 때를 가늠할 수 있다고도 했다. 시와 내가 한몸이 된 것 같은 근사한 순간에 대해서도 말했다.

강연이 끝나자 한 아이가 물었다. “근데 시 써서 먹고살 수 있어요?”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어려운 질문이어서가 아니었다. 아이의 질문이 당돌해서도 아니었다. 먹고살 수 있다고 선선히 대답할 수 없어서였다. 이어지는 질문들도 내 진땀을 뺐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선 어떤 일을 하세요?” “왜 하필 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이들은 확실히 시보다는 삶에 관심이 있었다.

삶은 생활이라기보다는 생계나 생존에 가까운 듯이 보였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아무도 기꺼이 ‘보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와 가까워지기 위해 마련된 자리는 순식간에 진로 특강으로 변모했다. 구석에 있던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시를 쓰는 이유가 뭐예요?”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잘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잘 살고 싶어서요.”

‘잘살다’는 “부유하게 살다”라는 뜻이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잘사는 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하지만 잘산다고 해서 무조건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제적인 윤택함이 그 사람의 영혼까지 살찌워줄까? 적어도 내게는 잘 사는 것이 잘사는 것과 거리가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잘살아야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물질적 여유는 정신적 여유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책도 선뜻 사지 못하고 커피 한 잔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면서 잘 산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살기 위해서 앞으로만 질주하는 삶에는 이런 소소한 여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아예 없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는 값이 매겨지고 이것이 행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로 작용한다.

잘사는 것이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잘 사는 것은 정신에 상당 부분 기대어 있다.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미소를 짓는 것, 문득 떠오른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것, 신문으로 접한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자기 전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육안으로 보이는 별의 개수를 세어보는 것 등 잘 사는 것에는 삶의 결을 헤아리는, 하루하루의 의미를 찾으려는 능동적 태도가 수반된다. 또한 잘 사는 것은 주변에 마음을 쓸 것,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행해지는 피땀 어린 움직임들을 헤아릴 것, 어떤 경우에도 비겁해지지 않을 것 등 삶의 목표나 의지와 연결되기도 한다.

잘사는 사람이 잘 살지 못할 수도 있고, 적게 가지고도 잘 살 수 있다. 서른다섯 명의 부고를 모은 최윤필의 책 <가만한 당신>(마음산책, 2016)을 펼치면 이런 문장이 가장 먼저 나온다.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 나도 그렇다. “잘 살고 있니?”라는 질문에 “응, 잘 살고 있어”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삶, 나는 오늘도 이런 삶을 꿈꾼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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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 중에 리버풀에 들렀다. 과연 비틀스의 도시였다. 비틀스 거리와 존 레넌 길, 초창기 비틀스가 공연했던 캐번 펍과 곳곳의 비틀스숍, 비틀스 투어가 따로 있을 만큼 리버풀은 비틀스의 화려한 스토리텔링과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리버풀에 비틀스와 리버풀FC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생소한 ‘국제노예박물관’이 있다. 비틀스의 현란한 리듬에 어지간히 취해 있던 감각을, 강풍처럼 단숨에 후려치는 공간이다.

한 입시업체 주최로 7월 10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2017학년도 수능 대비 설명회’에서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여름방학 학습법에 대한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강윤중 기자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금지법을 공포한 지 200년을 맞아 2007년에 건립한 박물관이라고 한다. 15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아메리카, 서아프리카가 어떻게 삼각형의 무역루트를 개발해 흑인을 노예로 ‘포획’하고 운반해서 팔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자랑스럽지 않은, 애써 발굴하거나 전시하고 싶지 않은 수치의 역사인 만큼 전시실은 화려한 대영박물관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고 초라했지만 비틀스의 흥취와 달리 관광객을 숙연케 하는 박물관이었다.

첫 번째로 마주한 벽의 “나는 평화로운 노예보다 위험한 자유를 원한다”는 문구는 다소 심상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흑인들이 몇 개월의 항해 동안 배 선창 아래 물건처럼 묶여 그대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던 모습,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아 손발이 잘린 노예의 사진, 주인 가족들의 주위에 서 있는 흑인 노예들이 자신의 검은 배에 ‘1925 Merry Christmas’를 한 글자씩 달고 트리처럼 서 있는 전시자료를 보고나면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노예’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비참함을 뜻하는지 알게 되고 그러면 저 심상한 문구를 다시 읽게 된다.

‘노예’란, 단순한 노역과 궁핍이 아니라 ‘모욕과 수치’의 경험이자 인간 존엄이 박탈되는 경험, 즉 한낱 크리스마스 장신구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노예무역으로 작은 항구도시였던 리버풀은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 되었고, 이후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의 다른 벽면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노예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다양화된 형태로.” 노예란 것이 단순히 소유관계의 제도가 아닌, ‘육체적·정신적인 강제와 노역, 모욕’과 관련된 것이라면 현대에도 여전히 그것은, 그리고 신분제 또한 잔존한다고 볼 수 있다. 숱한 갑을관계 속에, 구의역 사고와 같은 소외된 노동 속에, “99%의 민중은 개·돼지” 또는 “종놈”이라는 의식 속에. 그 속에서 어떤 이는 돈을 받고 짐승처럼 맞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신분의 세습 또한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통치자, 재벌과 고위공직자들의 음서제는 말할 것도 없고 대를 이은 숱한 연예인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민주주의 실현 이후 만인평등 이념에 기반해 기회균등을 누리는 듯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20년 동안 더욱 확대된 지방과 수도권의 차이, 강남과 강북의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그리고 양극화 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신분 이동의 길목에는 ‘교육’이라는 바늘귀만 한 구멍이 놓여 있다.

소설가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을 보면 ‘강남’으로 상징되는 상류층에 편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대치동 학원가에서 새벽 라이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어떤 ‘노예’적 인격체로 훈련받는지를 알 수 있다.얼마 전 중학생 조카의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다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수학 문제가 쓸데없이 어렵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문제가 어려워야 하느냐고 지인에게 물었더니, 그래야 강남 학원 교육을 받은 자와 안 받은 자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야 학원비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 학원비를 통해 특목고, 인서울이 보장되고, 그래야 아이들의 이후 계급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바늘귀만 한 입시전쟁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파문을 보면 왜 우리 교육이 신분제를 공고화하는 데 일조해왔는지, 어떤 정책 기반과 인식이 작동해왔는지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입시 지옥 속에 아이들을 이상한 노예로 만드는 파행적 교육을 중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물어볼 것도 없이 손쉬운 해결방법은 현대적 신분제를 해체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신분제를 생각할 것도 없이 1:99라는 부의 분배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자 상·하위 10%의 임금격차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보다 심한 나라는 미국, 이스라엘뿐이다. 이러한 소득불평등을 줄이는 것, 최저임금을 최고임금과 더불어 생각하는 것, 그것이 1:99의 세계를 바꾸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 되지 않을까. 또한 1:99를 지배와 피지배의 분할이 아니라 99를 대변하는 1로 바꾸는 실천이지 않을까.

정은경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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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내가 일하는 병원은 10층짜리 상가 건물에 입주해 있다. 1, 2층에 병원, 식당 몇 곳이 있을 뿐, 3층부터 10층까지는 온통 학원이다. 영어, 수학, 국어등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학원은 물론이고 ‘브레인 컨설팅’을 한다는 영재교육센터도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어, 레고, 로봇, 프로그래밍을 교육하는 학원까지 들어섰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는 오후 2~3시경부터 건물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7시경 근처 식당에 가면 엄마와 아이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얼른 다시 학원에 들여보내기 전 잠깐 저녁을 먹이는 것이다. 건물 근처가 가장 번잡한 시간대는 밤 10시다. 그 시간이면 건물 앞뒤로 차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아이들을 집으로 실어나르는 셔틀버스와 부모의 차량들로 건물 근처에 일대 혼잡이 일어나는 것이다. 주차장이 있는 건물 뒷길로는 차량 진입이 거의 어려운 지경이 된다. 매일 밤 이런 일이 벌어진다.

ⓒ 경향신문DB

직장인들이 저녁 식사 후 ‘야근’이라는 이름의 잔업을 수행하듯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이어간다. 아이들에게 학업은 이미 ‘유사직업’이나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노동의 결과로 월급을 받지만 학생들은 고된 학업의 결과를 점수로 받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좋은 성적표가 좋은 학력으로 이어지고, 학벌은 직업 시장에서 높은 급여와 연관이 있다고 배운다. 배움과 성장은 온데간데없고 어딜 가나 입시와 취업에만 초점을 맞춘다.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직업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학생이라는 나쁜 직업을 꾸역꾸역 감당하며 산다. 이게 현실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중·고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직장생활에 지쳐 있는 어른들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새는 새벽 2시쯤 자요. 할 게 너무 많아요. 피곤하고 머리가 너무 안 돌아가요. 인생이 맨날 똑같으니까 지겨워요. 평소엔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가도 시험기간만 다가오면 오히려 딴짓, 딴생각을 하게 돼요. 꿈은 사치 같아요. 있긴 하지만 감정이입이 안돼요. 주위에서 기대하는 만큼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죠. 도망가고 싶어요.”

독일의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인 미하엘 슐테-마르크보르트는 <번아웃 키즈>에서 번아웃 증후군이 어른 세계에서 아이 세계로 전이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슐테-마르크보르트 박사는 부모의 피로와 불행이 아이들에게 전염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들은 행복한 부모를 원한다. 그래서 적어도 마음속으로,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부담을 떼어내어 자기 어깨에 짊어진다. 아이들은 함께 나르기를, 함께 돕기를 원하며, 그러면서 종종 과로의 감정까지 넘겨받는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건 번아웃이 빈번한 라이프스타일과 이에 따른 부정적인 생활감정이다. 행복하려고 일하지만 일로 행복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일들을 아이들은 숱하게 보고 자라는 것이다.

부모 세대가 노동을 강압적인 것으로 인식하듯 아이들 역시 공부를 강제적인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노동 윤리와 학습 윤리는 맞닿아 있다. 공부를 고역으로 생각하는 아이는 일도 고역으로 생각하는 아이로 자란다. 직장인들은 스스로를 사축(社畜)이라 자조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학축(學畜)이 있다.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학업을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2016년 현재 우리나라의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22개 국가 중 꼴찌다. 학력과 계층을 대물림하는 데 전전긍긍한 나머지 아이들에게 삶의 만족을 전달하는 데는 명백히 실패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계하려면, 무턱대고 공부를 강요하기에 앞서 부모 먼저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고 직장과 사회가 이를 지지해야 한다. 노동의 적은 게으름, 나약함만 있는 게 아니다. 진짜 적은 지나친 성과주의, 불안, 과로에 있다. 충분한 존중과 보상 없이 일하고 비인간적인 수준으로 몸을 혹사하는 데서 오는 ‘번아웃’이 최대의 적이다. 이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건강한 삶과 행복한 생활감정을 유지하는 데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소진되지 않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나머지는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게 자신을 지키고 아이도 보호하는 길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이 아니라 행동의 뒤를 좇는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이들은 섬세한 눈으로 가족과 사회 안에서 역할모델을 포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간다.

아이에게 대대로 지친 삶을 물려줄 것인가. 우리에게 대안이 없으면 아이도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고 가는 건 결국 시간이고 기억이고 삶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삶의 흔적을 물려주고 떠난다. 삶의 전 영역에서 성장하고 휴식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부모로서 해줄 건 그것밖에 없다.

김성찬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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