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10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백인이긴 하나, 북동부에 거주하는 미국의 주류 지배 계급의 와스프는 아니다. 나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핏줄을 타고 난데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만 백인 노동 계층의 자손이다. 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 우리 조상들은 대개 남부의 노예 경제시대에 날품팔이부터 시작하여 소작농과 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다. 미국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 레드넥, 화이트 트레시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고 부른다.”

<힐빌리의 노래>(흐름출판)의 저자인 J D 밴스는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 철강 도시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밴스의 엄마는 전도유망한 고등학생이었지만 열여덟 살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자 친구와 결혼했습니다.

엄마의 두 번째 남편에게서 태어난 밴스가 막 걷기 시작할 즈음에 부모는 이혼을 했습니다. 아빠는 밴스가 여섯 살 때 돈 때문에 친권을 포기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두었습니다.

아빠와 헤어진 지 2년 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엄마에게 이후에도 수많은 아버지 후보자들이 들락거리며 하나같이 공허함과 사람에 대한 불신만 심어주고 떠날 때도 밴스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꾹 참았습니다.

마을에서 서로 욕하고 고함치고 어떤 때는 치고받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는 건 그저 일상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집에서도 폭력이 난무하는 바람에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불면의 밤이 계속됐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도 싫었지만 “하교를 알리는 종이 울릴 시간이 다가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집은 밴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는 장소였습니다. 엄마는 약물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도 가정폭력으로 고통받았던 엄마는 열두 살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폭행하는 바람에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밴스는 ‘할모’(외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할모네 집이 일시적인 피난처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을 심어준 장소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병대에 입대한 손자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쓰는 할모의 애정이 있었기에 밴스는 결국 명문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의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힐빌리의 노래>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남자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뻔한 여자에게서 버림받은 자식”의 인생 유전과 ‘성공의 여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세상은 “정말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가득한 곳”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서 지출을 늘려나간다. 거대한 텔레비전과 아이패드를 산다. 이자가 센 신용카드나 고리대금을 얻어서 자식들에게 좋은 옷을 입힌다. 필요하지도 않은 집을 매매하고 그걸로 재융자를 받아 소비를 더욱 늘리다가 결국 쓰레기로 가득 찬 집을 떠나며 파산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파산한 사람들은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신분 상승이 평생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해버립니다.

그런 그들이 “오바마가 탄광을 폐쇄했기 때문이라느니,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죄다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유”를 댈 뿐 시궁창 같은 삶에서 벗어날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낙오자가 된 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정부의 실패”라고 외치고 모든 잘못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즘 우파 정치인의 득세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극빈가에 거주하는 백인 노동계층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970년에는 백인 어린이의 25%가 빈곤율이 10% 이상인 동네에 거주했다. 2000년에는 그 수치가 40%로 증가했다. 현재의 수치는 이를 훨씬 웃돌 게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은 사회 양극화에 따른 소외 계층의 증가와 가정의 해체가 심각한 지경에 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 정권은 이에 따른 불만을 외부에 전가하려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북핵 공조를 빌미로 ‘한·미 FTA’를 폐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미치광이 전략’으로 우리를 불안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테드 리우 하원의원이 북한과 전쟁을 벌이면 “210만명이 죽고 770만명이 부상당하게 되는데 그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느냐”며 경고했다지만 트럼프에게 이런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최근 58명을 죽이고 527명을 다치게 한 사상 최악의 라스베이거스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부유하고 단조로운 은퇴 생활에 염증이 난 성공한 백인 남성 스티븐 패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트럼프가 ‘경멸’해 마지않는 이슬람국가(IS) 테러조직원이나 이민 노동자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미국은 사회적 차별과 모욕과 억압을 안겨주는 가난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힐빌리들이 ‘외로운 늑대’가 되어 무고한 생명을 살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힐빌리의 노래>는 그런 가능성을 경고하는 슬픈 노래로 들립니다.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를 가감 없이 까발리면서 우리가 처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저자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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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형서점을 들르는 분들 중에서 원하는 책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책을 정말로 좋아하는 분들마저도 전에는 한나절씩 돌아보면서 보고 싶은 책을 고르는 가운데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것이 별로 없어 잠깐만 둘러보고 바로 나오곤 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제 대형서점에서는 신간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대형서점에서 책을 진열하는 매대를 출판사에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출판사가 신간을 진열하려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합하여 광고비를 제대로 들여서 매대를 사야만 책을 일정한 기간 동안 진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과거에도 없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자리’만 팔았으나 지금은 ‘구석 자리’까지 팔아서 신간을 진열할 수 있는 자리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니 독자가 서점에 들러서 다양한 신간들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간 스테디셀러 역시 진열할 공간이 없다는 핑계로 서점에서 대거 사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아동과 청소년용 중에서 좋은 책을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들의 책들은 대형서점에서는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림책은 서점에서 5분 동안 넘겨보고 구입해서 아이들과 오랫동안 보는 책입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그림책을 믿고 구입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상을 해마다 수상하는 한국의 그림책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성 있는 중형서점들에는 이런 책들이 여전히 진열돼 있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대형서점의 매대 판매가 출판시장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판매한 매대에는 어떤 책들이 진열될까요? 주로 베스트셀러를 겨냥한 책들입니다. 매대를 사지 않으면 진열이 되지 않으니 출판사들이 대형서점의 ‘갑질’을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고비가 오르다 보니 이제 매출대비 광고비가 많게는 50%를, 심지어는 초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출판 관계자들의 일부는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지만 대부분은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습니다.

지금은 매대 구입과 온라인서점 광고를 통해 10만부를 팔아도 이익이 나지 않습니다. 한 해에 10만부를 넘는 책이 과연 몇 종이나 될까요? 그러니 이런 구조는 처음부터 망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니 우리 출판은 급격하게 몰락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형서점의 좋은 자리는 사겠다는 출판사가 많아 추첨을 할 정도입니다.

과거에 서점에 들러서 직원들로부터 좋은 책을 추천받아서 행복한 결과를 가진 경험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절대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지금 대형서점 MD들은 좋은 책을 찾아 읽는 것이 아니라 매대를 사줄 출판사를 찾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출판사 마케터의 메일에는 대형서점 관계자들의 광고 독촉 메일이 날마다 쌓이고 있습니다. 어떤 이벤트에 참여하라, 어떤 자리에 광고하라! 심지어 하루에 한 부만 팔려도 잘 팔리는 책이라며 광고하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익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도 서점 관계자들의 요구가 더욱 집요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서점의 화면에도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거의 노출이 되지 않는 형편인데도 비용 부담이 걱정인 출판사 관계자들이 서점에 가는 것을 꺼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서점 관계자들이 추천하는 책들은 매대를 산 출판사의 저질 책이기 십상입니다.

아, 물론 매대를 사서 성공한 출판사가 없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꾸준히 팔리는 다른 출판사가 펴낸 책들을 적당히 가공해서 펴낸 책들입니다. 이 책들은 생산비가 적게 드니 마케팅 비용을 남보다 더 투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례가 한둘 등장하니 이를 따르는 출판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덕분에 대형서점은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런 서점들을 독자가 찾을까요? 찾지 않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형서점들은 매장 안에 문구, 음반, 음료, 음식을 판매하는 공간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제 책은 다른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미끼상품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한 대형서점은 본격적으로 책 중심의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아우를 수 있는 복합문화 상가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책을 매개로 하면 상가가 잘 분양되는 모양입니다. 급기야 책이 지역의 부동산을 띄우는 풍선으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이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다 보니 출판경기는 최악입니다. 일간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소개된 책마저도 초판 비용을 뽑기 어려워진 것은 오래됐습니다. 모두가 팔리는 책이나 저자를 찾다 보니 유망한 신인저자의 책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어느 분야나 팔리는 저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입니다. 이제 출판인들의 가슴에는 체념과 비관이 지나쳐서 냉소만 넘쳐나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상황이 너무 심각해 되돌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출판단체들은 이제야 실태조사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만으로 상황이 개선될까요? 이 같은 대형서점의 ‘갑질’을 막아줄 수 있는 분들은 독자뿐입니다. 여러분의 열렬한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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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언어적 도구로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문헌의 해독력을 높이고 유창하게 라틴어를 구사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라틴어의 단순한 암기를 지양합니다. 사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인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은 지향점이 분명합니다. 그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는 배와 같다”고 말합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배가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 때문입니다.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것은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거품을 바라보면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라틴어를 비롯해 모든 언어는 제대로 잘 사용할 때에 타인과 올바른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외국어로 유창하게 말할 줄 알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유명 인사의 강변보다, 몇 마디 단어로도 소통할 줄 아는 어린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의 수업은 라틴어 동사 활용(변화)표를 달달 외울 필요가 없이 머릿속에 ‘책장’을 마련한 다음 이 책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 있는 수업입니다.

그래서 첫 수업은 휴강을 하고 학생들에게 운동장에 나가 봄 기운에 흩날리는 아지랑이를 보기를 권합니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 ‘보잘것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언어 학습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공부할까요? 저자는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저만 잘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에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경향신문 특별팀이 정리한 <부들부들 청년>(후마니타스)에서는 “2015년 8월 기준 임금 근로자로 신규 채용(근속 기간 3개월 미만)된 15~29세 청년의 64%가 비정규직”인 현실, “저소득층 청년 가구가 한 달에 고작 81만원을 벌고”, “계약 기간 1년 이하의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확률이 20%”나 되는 현실에 많은 젊은이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일자리’와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너무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정치인들의 ‘막말’이 젊은이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막말 정치인은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단어를 단순하게 암기만 한 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는 저자의 충고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식은 삶과 결합해 지혜가 되는 법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얘야 밖에 비가 온다”고 말하면 며느리는 그 말을 “빨래 걷어라”로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문장 자체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법조문’이나 관행에 갇혀 있는 정치인들은 이렇게 지식 전체를 잘 버무려서 지혜를 만드는 능력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명문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서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한 정치인이 학교비정규직 및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동네 아줌마들’이라 말하며 ‘미친 ×들’이라고 욕을 해서 논란을 자초했습니다. 그 같은 정치인들부터 <라틴어 수업>을 읽으면서 자신이 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공부를 해야 했는지를 다시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인의 반성과 상관없이 ‘미움 받을 용기’를 배우고, ‘자존감 수업’을 받았던 젊은이들이 이제 이 책을 읽으며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자기배려’ 또는 ‘자기연민’의 지혜부터 습득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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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김용태와 나는 남북 교류가 진전되려면 누군가가 직접 방북해서 북측과 협의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국이 우리의 제의를 허용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저지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로서도 방북의 중요한 목적은 문화 교류의 전령사를 해내겠다는 점에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객관적인 ‘북한방문기’를 써보고 싶다는 의욕이 앞섰다. 국가보안법상의 처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정치인이 아닌 작가의 처벌은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죄목이지만 불고지죄란 국가보안법을 위반할 것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으면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조직이든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항목이었다. 이는 내가 개인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한 민예총과 작가회의가 조직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석영은 자전 <수인>(문학동네)에서 분단된 한반도의 금기를 깨고 방북을 결행한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강고한 분단체제에 충격을 던진 그는 방북 후 4년의 망명을 거쳐 귀국 후에 5년간의 엄혹한 수인생활을 겪어냈습니다. 저는 이 감동적인 자전을 읽으면서 제2, 제3의 황석영은 계속 등장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렇기에 이 자전은 한 개인의 기록으로만 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엄혹한 세월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민족 모두가 분단이라는 체제와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도 때문에 얼마나 핍박된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다시 절감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좌우파 투쟁과 한국전쟁을 통해서 수립된 대한민국은 ‘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하며 출발했다. 우리의 국가는 정치적 상대를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증오와 학살의 정치 속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이런 국가에서 권력은 ‘죽이거나 살게 내버려둠’이라는 이항적 대립을 통해서 작동했다. 사찰하고 조작해서라도 간첩으로 만들어 죽이거나 가두어버리는 권력, 죽이고자 하면 죽일 수 있는 권력, 이것이 분단체제 아래서의 권력의 기본 운용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삶이란 그저 국가권력이 살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된다. 이런 죽이는 권력의 힘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런 죽이는 권력의 가깝고 끔찍한 경험이 바로 1980년 광주가 겪은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였다.”

사회학자 김종엽은 <분단체제와 87년체제>(창비)에서 우리 체제의 한계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또한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었습니다. 김종엽은 “TV로 국가의 부작위 아래 수백명의 사람이 안타깝게 죽어가는 장면이 며칠 동안 중계되었을 때,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은 무너져내렸다”고 말합니다. “공공서비스를 약탈적 수입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리는 전현직 관료의 부패 네트워크 혹은 이들과 자본 사이의 결탁 속에서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 혹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은 “국민을 ‘미생(未生)’의 존재로 내몰고 내부로부터 난민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항의하고 도전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고 탄압”했습니다.

이런 이항대립의 견고한 벽을 깨려고 나선 이들은 1970년대 이래 출판을 포함한 문화계 종사자들이었습니다. 황석영 자전에서는 그런 활약상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는 늘 주류의 견고한 벽을 깨려는 시도를 하게 마련입니다. 수많은 금서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최근에는 그런 노력이 크게 줄어든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오로지 ‘팔리는 책’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대학에서마저 아카데미즘이 실종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이 실종된 촛불혁명은 이항대립을 깨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는 ‘서브컬처 혁명’이었습니다. 가짜 아카데미즘과 사이비 언론이 판치는 사이에 주변부로 내몰리던 사람들이 연대해 이룩한 혁명이 아닌가요?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경유하며 고착된 저성장, 비정규직화와 저임금, 사회경제적 강자들이 저지르는 여러 종류의 ‘갑질’, 그리고 빈곤 문제(노령층에 특히 심각한)가 너무 심해져서 ‘헬조선’이라는 끔찍한 신조어가 생겼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풍자하는 ‘수저계급론’까지 등장”(김종엽)한 현실에 분노한 대중이 이룩해낸 혁명이었습니다.

촛불혁명이 진정한 혁명이 되게 하려면 ‘블랙리스트’로 문화를 핍박하던 기구부터 정비해야 마땅합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독서’에서마저 이념적 족쇄를 채우는 권력의 주구 노릇만 했습니다. 비판적 저자의 강연을 막고, 지극히 상식적인 책마저 이념의 잣대로 읽지 못하게 만드는 데 앞장섰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런 단체의 뒤에 숨어서 ‘닭모이’에 불과한 알량한 예산을 던져주면서 이항대립의 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런 단체를 차라리 없애는 것이 출판문화 증진에 유리할 것이라고 봅니다.

도종환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정농단 및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가 끝나면 백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백서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가 갖는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수인 노릇만 했던 자들부터 하루빨리 물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항대립을 깨는 항구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문화에서만큼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제도 말입니다. 그래야만 타자를 배려하는 다양한 문화가 저절로 진흥될 것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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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이고, 육감은 분석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도 직관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7의 감각은 무엇일까요?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조슈아 쿠퍼 라모, 미래의창)에서는 ‘초연결지능’이라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떤 사물이 연결에 의해 바뀌는 방법을 알아채는 능력”입니다.

“누구나 무엇이나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시대”에서 연결은 “인터넷 연결만이 아니라 현재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규정하는 전체 네트워크”를 말합니다. 금융망, DNA 데이터베이스, 인공지능망, 테러나 마약 네트워크, 통화플랫폼 같은 것들을 포괄합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작은 힘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상품 거래가 시장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 명의 해커가 국가의 방어 시스템을 도어스톱처럼 적극적으로, 전문용어를 쓰자면 ‘벽돌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우리 시대의 가장 가공할 만한 물리적 구조물, 즉 군대, 시장, 정부조차 그것들이 연결된 신경계에 가상의 공격을 받으면 간단하게 마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랜섬웨어’ 때문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제 두려움의 대상도 달라졌습니다. “19세기에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은 폐렴이었습니다. 20세기에는 암이었지요. 우리 시대에 나타날, 특히 21세기 초에 나타날 병은 광기입니다. 어쩌면 정신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보, 휴대폰, 데이터 패킷을 포함해 우리 삶과 연결된 모든 비트의 물결이 소모의 병을 전염시킬 것”이라는 거지요.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에 광신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유력 후보자들은 모두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정책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후보도 자신의 직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고통’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두려움’에 떠는 국민들을 안심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빅데이터, 공유경제, 가상·증강현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메이커운동 등 첨단의 어벤저스급 기술들을 호명하며 불안의 정도만 키웠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기술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나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광적으로 이들 기술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 조사에 따르면 51.8%가 인공지능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정도로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인공지능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30년 넘게 뇌를 연구해온 예일대 신경과학과 이대열 석좌교수는 <지능의 탄생>(바다)에서 지능은 오직 생명체만 가질 수 있기에 인공지능은 지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지능은 생명체의 기능이다. 생명체는 자기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복제 과정이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에 복사본은 가끔 원본과 작은 차이점을 보이게 되고, 그 결과로 원본보다 더욱 능률적으로 자기복제를 할 수 있는 복사본들이 진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지능이란, 이렇게 진화를 통해서 생명체가 획득하게 되는 능력들 중의 하나로서,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복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개발된 인공지능은 인간이 선택한 문제를 인간 대신 해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그치고 말기 때문에 참다운 의미의 지능이라고 할 수 없다.”

이 교수는 지능과 지능지수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지능은 “생명체가 변화하는 환경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의사결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기에 최상의 문제해결방법은 생명체의 필요도와 선호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정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공간 지각 능력이나 언어 기억 능력을 측정하고 수량화”한 지능지수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활동 범위는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인간이 하는 일은 달라질 것입니다. 과거에는 “많은 양의 지식을 저장하고 그중에서 필요한 정보를 기억해내어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의학이나 법처럼 특수한 분야에서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대한 대가로 적지 않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서 수많은 지능검사와 시험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제 인공지능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은 무슨 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텍스트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글을 쓸 줄 아는 능력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하겠지요. 이 교수도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지능’에 주목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언어를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호도와 사고과정을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복잡한 집단에서 사회적으로 원만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이 책에서 사회적 지능을 바탕으로 인간이 자아에 관한 통찰을 하게 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능의 본질을 인공지능과 비교해 분석하니 그 차이가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차이가 바로 상상력이라는 것을 이 책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차이를 이해하니 이제 막연한 불안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저절로 생기는군요. 세계적 석학이 쓴 책을 읽는 진정한 맛인 것 같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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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들은 대학에서의 공부를 취업을 위한 과정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인상이 많이 들고, 그것조차도 이런 식이지요. ‘어떻게 삼성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삼성에 취업하려면 뭘 공부해야 되나요’ 뭐 이런 식. 연봉 높은 직장에 어떻게 취업하는가가 대학에 온 목적인 것처럼 행동하고, 대학 당국도 더 높은 학문적 이상이나 인류적 이상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어 보여요. 그런데 스탠퍼드의 학생들은 직업의 차원에서도 전혀 다른 식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삼성을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제게 질문을 합니다. 혹은 ‘나는 이렇게 하면 삼성을 만들 수 있겠는데 왜 안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삼성 만드는 데 필요한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하고 당당하고 도전적이고 저돌적으로 교수에게 요구를 해요.”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세종서적)에서 문학평론가 함돈균과 대담을 나눈 스탠퍼드대 교육공학자 폴 김은 “너무나도 극단적으로 현실주의적이고 도전 정신 없는 생각과 질문”을 해대는 한국의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2012년 조사에 따르면 스탠퍼드를 다녀간 학생들이 창출해낸 기업적 가치가 2조7000억달러”이며 그들이 만든 회사만 해도 구글을 비롯해 “글로벌 기업만 4만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한국의 대학생들이 “이미 시장에 안착한 연봉 높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대학은 “기존 기업으로의 취직률에 집착”하는 현실에서 과연 희망이 있을까요? 사회적 부의 새로운 원천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미래가 있을까요? 그는 “21세기에는 인문 중심의 대학이 이런 창업가 정신에 특히 더 적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에서 인문학과는 거의 궤멸되고 있는 수준이 아닌가요?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5세 사이에 4만~5만개의 질문을 하는데, 아이가 초·중·고를 지나면서 질문 수가 급격히 하락합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는 질문을 전혀 안 해요. 왜 그렇겠어요? 주입식 교육이 아이를 망쳐놓고, 질문하는 문화가 아닌 데에서 살게 하기 때문이에요. 강하게 표현하면 범죄나 마찬가지예요.”

그는 질문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로 키우는 교육은 “독재 국가를 유지하는 데에 아주 적절한 교육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교사가 되려면 ‘교습(teaching)’을 하지 말고 “질문을 던지거나 문제를 보여주거나 감동이나 영감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스스로 깨우쳐 탐구하고 싶어 하게 하고, 스스로 호기심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코칭(coaching)’입니다. 교사는 “자기가 아는 걸 쏟아내어 가르치지 않는 대신 스타가 될 학생들 하나하나의 특성이나 자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잘 알아야 하고 잦은 피드백을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자인 김경집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앞으로 10년, 대한민국 골든타임>(들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학생들의 인지·이해 능력은 다양”한데도 전통적인 학교교육이 ‘표준적 기준’을 두고 시행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도태되는 많은 피교육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는 기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오늘날 요구되는 학습의 핵심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는 지식의 획득 그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지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토대로 다양한 질문과 토론을 통해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고 집단지성화하는 성과를 추구해야 한다.”

일본은 2020년부터 사지선다형 지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존의 ‘대학입시센터시험’ 대신에 기술(記述)식 문제로 기억력보다 사고력을 묻는 ‘대학입시희망자능력평가시험’(가칭)’을 도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시카와 이치로는 <2020년부터의 교육문제>에서 바뀌는 것은 대학입시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학교교육은 ‘지식의 습득’을 중심으로 한 종래의 학습에서 ‘지식의 활용’을 지향하는 형태로 대전환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런 개혁의 배경으로 인공지능(AI)의 등장을 듭니다. “2045년에는 AI가 인류의 능력을 넘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인간이 해온 일은 앞으로 점차 AI를 포함한 로봇에게 맡겨질 거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뉴욕시립대학대학원센터 캐시 데이비슨 교수가 “2011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의 65%는 대학졸업 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옥스퍼드대 마이클 오스본 교수가 “앞으로 10년에서 20년 정도면 미국 고용자의 절반 가까이가 하고 있는 일이 자동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 사실을 인용했습니다.

세상이 바뀌면 교육도 바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삼위일체의 교육개혁을 2020년까지 달성해야 할 급선무 과제로 삼고 지금 초·중·고의 교육현장에서도 큰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부성이 제시한 개혁 이후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익혀야 할 3가지 힘은 ‘과제해결을 위해 협력하여 일하는 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힘’ ‘창의적인 사고력’ 등입니다.

무엇보다 경쟁교육을 지양하고 협력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교육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사람이 무조건 당선될 것 같은데도 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이렇다 할 교육개혁정책을 내놓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현실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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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으로 쫓겨난 박근혜 전 대통령은 7시간 이상 검찰조서를 꼼꼼하게 수정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세월호가 침몰해 300명 이상의 목숨이 죽어가는 7시간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을까요? 여성학자 정희진이 <낯선 시선>에서 밝혔듯이 “사이코패스는 뭔가 특이하고 천재적인 나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이코패스는 단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걸맞지 않은 권력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사이코패스”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신체적으로 성장할 뿐 감정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의 주인공 ‘나’(선윤재)는 아몬드를 닮은 편도체의 이상으로 ‘알렉시티미아,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도 불리는 치명적인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이 질환의 가장 큰 특징은 감정, 그중에서도 공포를 느끼는 감각이 둔해져서 웃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웃지도, 겁을 내지도 않는 ‘괴물’일지언정 부모에게는 소중합니다. 엄마는 “사랑도, 두려움도, 감정과 공감이라는 것도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는 감정 불능 상태에 빠진 ‘나’를 위해 삼시 세끼 아몬드를 먹입니다. 희로애락애오욕 7자를 그려서 부적처럼 집안 곳곳에 붙여놓고는 ‘희로애락애오욕’ 게임까지 만들었습니다. 엄마가 상황을 제시하면 ‘나’가 감정을 맞춰야 합니다. “누군가가 맛있는 음식을 준다면 느껴야 할 감정은? 정답은 기쁨과 감사. 누군가가 나를 아프게 했을 때 느껴야 할 것은? 정답은 분노. 이런 식이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지만 ‘나’의 공감 불능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최순실이 고쳐준 글들을 열심히 읽은 박 전 대통령이 국민의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요.

크리스마스이브,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을 나간 날, 한 사내의 ‘묻지마 살인’으로 할멈은 죽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됩니다. 전형적인 소시민이었던 범인은 오로지 웃는 사람을 선택해 저승길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어떤 공포도 느끼지 못합니다. “내 안에는 감정 대신 질문들이 떠다니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사건 이후 ‘괴물’인 ‘나’는 감정의 형식을 암기하는 대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상합니다. 그때 다른 ‘괴물’인 ‘곤’이 나타납니다. 어릴 적 엄마를 잃어버리고 여기저기 입양 다니며 불행한 삶을 살다가 소년원까지 들어갔다 오게 된 ‘곤’이는 한껏 삐뚤어지고 방황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곤’이를 무서워하지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곤이에게 겁도 없이 다가갑니다.

‘나’ 역시 ‘곤’이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상해보려는 노력은 합니다.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또 다른 ‘괴물’인 ‘도라’의 삶 역시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도라가 왜 달리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묻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질문이 이들의 삶을 바꿉니다.

감정이 고장 난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하고 별난 사람은 아닙니다. 공감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마저도 감정의 형식만 알 뿐 공감할 줄 모릅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거의 날마다 등장하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늘 무표정합니다.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할멈과 엄마가 칼을 맞는 날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묻지마 살인’을 아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마저도. 비극적인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감정 표현 불능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보통의 아몬드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아몬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몬드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관심 갖지 않는다면 공감의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내가 없던 시간,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공감의 씨앗입니다. 아몬드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몬드의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몬드 나무의 꽃은 어떻게 피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자 희망입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가진 ‘나’도 아몬드라는 씨앗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감정의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타자를 상기시키고 고통을 표현하며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작가는 서두에서 “그 끝이 비극일지 희극일지를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고 밝힙니다. <아몬드>는 비극이 될지, 희극이 될지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공감 불능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형 영 어덜트로 볼 수 있는 <아몬드>는 아프게 읽힙니다. 단숨에 읽히는 이 소설은 아마도 침체된 한국 문단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여겨집니다. 영미권의 영 어덜트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도피할 수 있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로맨스 판타지가 주류였다가 최근에는 10대의 주인공이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가혹한 선택에 직면하는 이야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몬드는 세계적인 흐름과도 맥이 닿아있습니다. 이 소설이 널리 읽혀 아몬드의 꽃이 피듯, 우리 사회의 비극적인 삶들이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고통 위를 기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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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역상을 수상한 번역가는 10권이 넘는 전집의 번역을 모두 동네 카페에서 했는데 다섯 군데의 카페가 폐업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작년에 10권의 책을 펴낸 한 다독가는 원고를 모두 동네 북카페에서 썼다고 합니다. 하지현 신경정신과 박사는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문학동네)를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썼다는 사실을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집에 작업할 책상이 없지 않은데도 이들은 왜 카페만 찾을까요? 하 박사는 적당한 음악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있지만 시끄러워서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화이트 노이즈’가 있는 “카페의 테이블은 집, 직장, 학교도 아닌 제3의 중립적 공간이며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훨씬 안정감을 느끼고 집중도 더 잘”합니다.

“원룸에서 하루 종일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보다, 커피 한 잔 값을 내고 앉아 있는 것이 다른 이들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과 연대감을 느끼되 서로 섞이지 않고 개인공간을 유지하는 합리적인 타협점”이라는 하 박사는 카페에 앉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것을 ‘평행놀이’로 설명합니다. “상호작용을 하지 않지만 함께 비슷한 놀이를 하는 것 자체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발달단계의 놀이”가 바로 평행놀이입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어쩌다 우리는 카페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상호작용 없이 일을 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을까요? 김정연이 그린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창비)의 주인공인 20대 여성 이시다는 단독 생활을 즐기는 골든 햄스터 ‘쥐윤발’과 좁은 고시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나갑니다. 이시다는 인류는 어쩌면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시다가 혼자 살게 되면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은 “만원이 훌쩍 넘는 백화점 비누 하나를 사서 개봉해서부터 쌀 한톨 크기가 될 때까지, 온전히 혼자서 다 써보는 것”입니다. “뭔가 다들 본능적으로 떠나보내야 할 때를 알고 있는 것”을 눈치챈 이시다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왜 누군가에겐 상처일까요?”

혼밥, 혼술, 원룸, 고립된 삶을 즐기는 것을 마냥 바라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사회적 뇌를 제대로 키울 기회도 없이 어른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하 박사는 혼밥을 즐긴 박근혜 대통령의 예를 듭니다.

“그녀의 외골수 정치와 여론을 읽는 능력의 부족, 만천하에 밝혀진 팩트를 부정하는 고집, 기자회견을 하되 자기 발표만 하고 절대 기자의 질문을 받지 않는 불통 습관”은 “1980년 이후 1997년 정치를 시작하기 전까지 밀폐된 곳에서 혼자 지내온 삶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혼밥 습관과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볼만한 측면이 많다.”

어려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경험이 있는 신비주의 철학의 대가 맨리 P 홀은 <돌아보고 발견하고 성장한다>(Yoon&Lee)에서 “복합적인 존재”인 인간의 성장은 “신체적, 감정적, 정신적 성장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 가지 유형 중 신체적 성장이 가장 쉽게 관찰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 삶의 전부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신체적 성장은 저절로 일어나지만 감정적, 정신적 성장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세 유형의 성장 중에서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감정적 성장인데 “감정적으로 성장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문제가 일반적으로 제일 고통스럽다. 사람이 유아기의 감정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상으로 자기 절제력의 부재,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무관심, 철저한 자기중심적 성향 등을 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 3년간 우리는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무척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국정농단’의 실태를 알고 나서야 우리는 “정부와 공무원 조직은 비대해졌고, 기업 시스템은 거대해졌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매뉴얼은 없는 빈 깡통”이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동안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조롱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 박사는 조롱이 넘쳤던 이유를 공감능력의 결여에서 찾습니다. 공감이란 “상상력을 발휘해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서보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시각을 이해하며 그 내용을 활용해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 마음의 방법”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자 특성의 하나”인 공감능력이 실종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하 박사는 “선천적으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한 축은 사이코패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상대의 아픔 따위는 가슴에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사이코패스’들의 모습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하 박사는 “우리 사회가 공감능력을 키울 기회를 주지 않고, 차라리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고 귀와 눈과 가슴을 막고 살아가는 것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사이코패스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이런 사태를 목격하고 우울과 분노에 시달리던 많은 이들이 광장으로 달려가 기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습니다. “작은 실천 속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그 결과가 곧 나옵니다. 반드시 우리 사회가 ‘버전업’될 방향의 결과가 나올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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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240년 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내린 경제학의 현대적인 정의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뜻하는 유명한 이 문장은 대학입시에서도 자주 출제되고 있지요.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라는 부제가 붙은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카트리네 마르살, 부키)에서는 이 문장을 색다르게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식탁에 앉았을 때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른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저자가 제시하는 정답은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인 마거릿 더글러스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를 돌본 이는 28세에 홀로 됐지만 재혼하지 않고 오직 아들만을 따라다닌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전기를 쓴 존 레이는 “그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미스 삶의 중심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가 그런 어머니를 망각하는 바람에 “그에게서 시작된 사상의 갈래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생략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오늘날까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 약 2500원 이하로 먹고살”고 있고 “그중 대다수가 여성”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세상일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전업주부로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은 사회의 상류층과 하위 계층에 전적으로 몰려 있”는 현실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왜 나오는지 이해하려면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경제학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애덤 스미스의 저녁이 어떻게 식탁에 올라왔는지, 그것이 경제학적으로 왜 중요한지를 따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국부론> 발간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참다운 지식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세 권의 교양 필독서로 <성서>와 <자본론>, 그리고 <국부론>을 꼽았을 정도이니 경제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애덤 스미스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황준성 숭실대 교수는 <고전 콘서트>(꿈길)에서 세계경제의 50년 주기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880년대 세계경제가 크게 침체에 빠지고 나서 회복된 후, 다시 1930년대 대공황과 198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밀어닥쳤습니다. 이처럼 50년 주기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세계경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초래하면서 후퇴기에 접어들었으며, 2030년경 세계경제는 구조적 침체기 또는 불황의 시기가 될 것으로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변화에 맞춰 애덤 스미스를 읽는 남다른 통찰력이 발휘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경제학 팩션이라는 틀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정리한 조너선 B 와이트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북스토리)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자동차 수리공의 영혼에 빙의해서 나타나 하는 말로 지금에도 그의 생각이 유효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말게. 경제 체계가 자유시장 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기쁘게 생각하니까 말이야. … 아무튼 내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네 같은 경제학자들이 한결같이 모두 놓쳐버렸기 때문이지. 사회 속에 존재하는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의 본질! 내 말, 알아듣겠나?”

유시민도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에서 애덤 스미스가 한국의 현실에서 유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다. 보수적인 정치인이나 경제학자, 기업연구소 박사들이 방송 카메라 앞에서 ‘이것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마음속으로 경배하는 수호성인은 바로 스미스다. 그런데 국가의 역할을 확장하려는 진보 지식인과 정치인들도 ‘공공재’에 대한 스미스의 이론을 적극 활용한다. ‘국가의 공공성’을 주창하면서 되도록 많은 것들을 ‘공공재’라는 집합에 담으려고 한다. 교육, 보육, 의료, 주택 등이 모두 공공재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국가가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둘 모두를 스미스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사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압축한 슬로건인 “안정화하라! 자유화하라! 민영화하라!(Stabilize! Liberate! Privatize!)”는 뜻의 S-L-P에다 ‘J’(Justice)를 앞세우자고 주장합니다. 소설 속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의 토대가 된 <도덕감정론>을 제발 무시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철학자 서동은은 <곡해된 애덤 스미스의 자유경제>(길밖의길)에서 ‘공감’이야말로 “같이 사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혹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인간의 예의”라고 지적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으로 지배권력의 사적 이익 챙기기가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우리는 애덤 스미스를 정말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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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광장의 직접 민주주의 축제는 승리로 귀결될까요?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 여부와 관계없이 시민축제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일깨워줬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법질서 준수와 북핵 위기를 입에 달고 살던 박근혜 대통령이야말로 비선 실세에게 놀아나면서 정작 국민의 안전이나 행복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권력층 또한 국민을 개나 돼지로 여기면서 대통령에게 충언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고 제 주머니만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도요. 그들이 일자리 창출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자질도 없고, 의지도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가상현실 등 테크빅뱅이 만드는 미래는 보다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뉴욕타임스’로부터 ‘위대한 사상가’라는 칭호를 얻은 케빈 켈리는 <인에비터블 미래의 정체>(청림출판)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기계가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적인 매트릭스를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여태껏 접한 적이 없는 가장 복잡하고 가장 경이로운 무언가로 수렴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소유보다 접근, 달리 말하면 공유가 정답이라고 말합니다.

제임스 글릭도 ‘인간과 우주에 담긴 정보의 빅히스토리’를 담은 <인포메이션>(동아시아)에서 정보는 “대부분 구글에 의해 진행되는 검색과, 올바른 사실을 모으고 잘못된 사실을 차단하려는 방대하고 협력적인 필터의 결합이다. 검색과 필터링은 이 세계와 바벨의 도서관 사이를 가르는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글릭은 이어 “두뇌를 만드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다. 심지어 지식의 분배도 아니다. 바로 상호연결성이 두뇌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마케팅4.0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필립 코틀러를 비롯한 마케팅 전문가들도 이제 모두 ‘연결’만이 정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촛불광장의 경험은 우리에게 너무 소중합니다. 모두가 연결해서 한목소리로 외쳤으니까요.

촛불광장의 주역은 고성장 시대를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늘 ‘연결’을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87년 광장의 젊은이들이 NL과 PD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운 세대라면 지금 광장의 젊은이들은 다양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개인(타자)을 서로 존중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알리려는 세대입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 현장을 전전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인생철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삶의 문법’을 갖고 있는 그들이건만 그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했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이 올해에 근원적인 자아찾기에 나설 것이라고 봅니다. 삶과 몸, 치유 등에 대한 생각을 하나로 모아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찾아나서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시어도어 젤딘은 <인생의 발견>(어크로스)에서 “당신은 누구인가?”와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책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남들이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내가 남들을 얼마나 이해하는지가 내가 소유한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 개인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을 믿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소망하는지에 관한 훨씬 더 긴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소심한 시작일 뿐이다.”

‘훨씬 더 긴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스스로 찾아나서야 할 것입니다. “세계 경제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인 데다 여성들에게 인색하게나마 부여되는 역할이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아서 여성들의 실망이 커지고” 있으니까요. 그는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여러 질문들을 던집니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없다면 다른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종교가 서로 다르다면 불화나 의심 이외에 다른 무엇이 가능할까? 자유가 너무 적다면 무엇으로 반란을 대체할까? 흥미로운 직업이 부족하다면 새로 어떤 직업을 창출할 수 있을까? 연애가 실망스럽다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키울 수 있을까? 무너지는 제도 속에서 어떤 지혜를 살려낼 수 있을까? 너무나 많은 것이 예측 불가능할 때는 무엇이 야망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어떤 길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는 “모두가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으려던 과거의 노력이 대체로 만족스럽지 않았을뿐더러 간혹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낳은 역사를 기억할 것”이라며 “실망감을 떨쳐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기회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명심”하라는 충고만 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 길은 험난합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인류의 독창성과 스스로 만든 난장판에서 빠져나오는 능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전례가 없던 길을 가야 하는 그들이 “사람과 자연에서 끊임없이 뜻밖의 경이로움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타고난 자질”을 발휘하더라도 “인류의 뿌리 깊은 잔혹성”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내기가 힘든 이들이 당장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이 아마도 로맨스판타지에 빠져드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미 영화와 책에서는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막 끝난 드라마 <도깨비>도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떤가요? 여러분은 “경력의 사다리를 오르고 내리는 일”이 아닌 “긴 인생을 보내기 위한 즐거운 방법”을 제대로 탐색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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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10회에 걸쳐 1000만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박근혜 하야’를 외쳤습니다.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집회의 주역은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발랄한 상상력과 놀라운 정치의식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촛불집회는 처음부터 청소년이 주도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만들어온 한국 현대사’를 담은 <우리는 현재다>(공현·전누리, 빨간소금)에 따르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기 위해 열린 “2008년 5월2일과 3일, 첫 촛불집회에 참가한 2만여명 중 60~70%가 중·고등학생으로 추정”되었으니까요.

“대한민국을 건국한 계기인 3·1운동에서부터 숱한 독립운동들,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과정 그리고 교육민주화 운동이나 광장에서의 사회운동까지, 청소년들은 정치적인 시민으로 계속 그 역사의 현장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사건별로 정리한 <우리는 현재다>의 저자들은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이 아니라 현재의 주인공”이라고 단언합니다.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 운동사>(공현·둠코, 교육공동체벗)에서는 청소년들이 운동을 하는 이유를 “ ‘청소년이라서 그랬다’는 대답밖에는 할 말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야기를 더 들어볼까요. “오히려 반대로 묻고 싶다. 여러분의 청소년기는 어땠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칠 법하지 않았느냐고. 어차피 몇 년만 참으면 청소년기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청소년운동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없다. 청소년기의 일시성은 사람들의 인내심에 관련된 문제이지, 청소년들이 겪는 부당한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해 주거나 청소년들이 순응해야 할 이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나는 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이지 미래의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여기에서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작년 출판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이들도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제57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교양부문 수상작인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사이행성)의 저자 천주희는 1986년생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학자금 융자로 “청년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고 채무자로 만들고 있”는 현실을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이렇습니다.

“대학교육을 개인의 스펙 쌓기와 성취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식 만들기의 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대학에 가야 하고, 왜 빚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빚을 지고, 무엇을 빚지며 사는지 물어야 한다.”

그는 “소 팔아서 대학 보내던 시대에서 대출 받아서 대학 가는 시대로의 이행”은 “IMF 금융위기 이후 가족경제의 변화, 신자유주의적 복지체제의 도입, 대학교육의 금융화 과정” 등 세 가지 축의 변화에서 구축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축의 변화는 ‘학자금 대출’ 시장에서 만나고, 부채의 증식이라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채권·채무 관계와 가족 공동체 등의 변화를 초래한 이 변화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고등교육 비용의 원천이 가족부채에서 금융부채로 이행했다는 것 이상으로, 오늘날 이 사회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빚지는 주체’가 되기를 요청하고 거대한 채무자 집단을 양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 빚지는 대학생은 새로운 사회적 요구이자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는 대학교육을 “개인의 ‘투자’에 의한 학력 자본으로 인식”해온 기존의 생각을 바꿔 대학교육의 ‘상품화’를 포기하고 ‘공공화’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가 말하는 ‘공공화’란 “대학 교육비용을 사적 영역이 아닌 국가나 공적 영역에서 부담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는 “사교육비 17조원, 학자금 대출 12조원이나 드는 나라에서 대학무상교육은 불가능한 일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일자리 창출’만을 공언(空言)해온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이제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작년 말에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는 상처만 주는 대화에 지쳐버린 여성들을 위한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실전 대응 매뉴얼”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이민경이 이어서 출간한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이상 봄알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역사상 여아 낙태가 가장 심했던 1990~1994년 무렵에 태어났습니다. 1994년에 태어난 셋째 아이의 남녀성비는 190.6이었습니다.

그가 이 책들을 쓰게 된 것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때문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한국에서 여성 살해가 최고치에 다다랐을 때 태어난 나는 강남역 살인 사건이 발생한 2016년 5월17일에야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많은 이가 의아해하듯 유사한 사건이 여태까지 숱하게 있었고 그때마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한 데에 여성이라는 이유밖에 없었음은 이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이 내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있음을 피부로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략) 여성이 태아일 때부터 겪는 이 선택적인 죽음의 실체가 또렷이 드러났다. 박탈감이 밀려왔다. 이것은 이해이기보다는 직감이었다. 내 또래의 많은 여성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고 그것을 표현했다.”

천주희와 이민경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고단한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청소년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촛불광장에서도 청소년의 상상력은 넘쳐났습니다. 그들이 있기에 정유년 새해에도 밝은 희망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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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소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의 한 미술교사는 인문학 열풍이 불 때 문학,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인문학 강연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에 책을 멀리하는 중학생 딸과 제자들도 걱정됐습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강의에서 예술도 인문학이라는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전공인 미술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그는 학생 개인전을 위한 갤러리도 만들고, 아이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한 벽화 그리기 작업도 하고, 자연미술 함께하기를 일상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미술실을 활용한 갤러리에는 격언들이 걸렸습니다. “미술은 다름이 중요하지 누가 더 나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로와 피카소는 서로 다른 것이지 누가 더 잘하는 게 아니지요. 다른 것을 맛보는 것이 예술이지 1등을 매기는 것이 예술이 아닙니다.”(백남준) “당신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입니다.”(파블로 피카소) “모든 사람이 예술가입니다.”(요제프 보이스) 밤에 아르바이트를 뛰는 아이들은 음식 미니어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세에는 음악도 인문학이었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이성보다 감성이 중요시되는 세상입니다. 감성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예술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어쩌면 앞으로 생활에 기반을 둔 모든 일이 인문학적 사유가 될 것입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지금은 과학기술 혁명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과학 또한 인문학인 게 당연합니다. 과학의 중요성을 정말 제대로 일깨워준 것은 올해 3월에 이세돌이 ‘알파고’와 바둑을 둔 이벤트일 것입니다. 이벤트 이후 모든 매체가 인간의 경쟁자가 기계(슈퍼컴퓨터)라는 것을 수없이 떠들었습니다.

‘알파고’의 충격 이후,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 제4차 산업혁명, 빅 히스토리 등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고 물리적인 벽을 뛰어넘는 시공간의 혁명입니다. 교양과학자인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의 인기가 높았던 것이 빅 히스토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상욱의 과학공부>(동아시아)에서는 “역사를 보는 신선한 틀을 제공”하는 ‘빅 히스토리’라는 새로운 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모든 것은 빅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별과 원소의 탄생, 태양계와 지구의 탄생, 생명과 인류의 탄생, 세계의 연결, 변화의 가속, 그리고 미래이다. 여기에 민족이나 국가는 없다. 우리 모두는 빅뱅에서 이어져오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인류라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21세기의 역사관이라 생각한다.”

이정모 관장은 또 “진화를 대표로 했던 교양과학서적 시장에 물리학이 돌풍”을 일으킨 것은 “‘나를 작동시키는 시스템’과 ‘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시스템’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부조리를 교정하고 싶어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올해 <김상욱의 과학공부>, 김범준의 <세상물정의 물리학>, <이종필의 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안상현의 <뉴턴의 프린키피아> 등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은 물리학자의 책들이 대중의 높은 반응을 얻어냈습니다.

결국 과학적 사유란 본질적인 ‘나’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빅 히스토리와 물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대중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안목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상욱의 과학공부>는 “2015년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단행했다.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나치도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책을 불태웠고 제국주의 일본도 올바른 동아시아 건설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중략) 역사에서 ‘올바른’ 것이란 원래부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책은 이어 “과학에서는 올바른 답은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으로부터 얻어진다. 여기에는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아인슈타인의 미친 생각까지도 포함된다. 만약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정부가 결정하는 거라면, 우리는 지금도 천동설을 믿고 있을지 모른다”면서 국정교과서를 도입하려는 정부를 통렬하게 공격했습니다.

과학과 예술은 모두 “장벽을 뛰어넘게 만드는 힘”인 상상력을 필요로 합니다. 김상욱 교수의 지적처럼 과학적 상상력은 “보편적이고 재현가능한 실험적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예술적 상상력은 정말 백지수표의 상상”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사람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약속을 잡고 광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노래와 예술적 퍼포먼스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뭉쳤습니다. 그들은 소셜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무슨 일이든 ‘함께’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모든 기술을 이용해 과학적 사유와 공감 능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기계에 완전히 종속되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을 거꾸로 가는 사고를 하는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는 절대 종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올해 출판시장과 박근혜 국정농단으로 인한 촛불시위는 그 가능성을 한껏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의 출판계 키워드를 ‘네트워크형 인간의 과학적 사유’로 정했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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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계급사회일까요? 문화학자 엄기호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창비)에서 “위와 아래가 아니라 안과 바깥이라는 신분제적인 위계가 다시 등장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가장 실체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입니다. “노동력이 남아도는 시대에 사람을 안과 바깥으로 나누고, 바깥의 존재에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미끼로 (던지고 그들을) 아무런 보호 조치 없이 일회용품처럼 써먹다가 버릴 수” 있는 사회이니 계급사회가 맞습니다.

엄기호는 구의역에서 혼자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죽은 노동자야말로 철저한 바깥의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하철공사 하청기업의 외주노동자였습니다. 그야말로 “바깥의 바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안’에 대한 약속은 강력한 유혹이었으며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게 하는 동인이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고, 조금만 더 하면 지하철공사의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은 그에게 그 어떤 위험도 기꺼이 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엄기호는 이런 점에서 “한국의 자본주의는 조폭을 꼭 닮았다”고 말합니다. 보통 조폭들이 칼부림을 할 때 맨 앞에 세우는 사람은 중학생입니다. 그 조직의 가장 하부, 아니 그 조직의 경계에 있는 존재에 불과한 중학생은 조직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목숨을 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위와 아래가 아닌 안과 바깥으로 시민을 분할하여 통치하는 새로운 계급사회, 아니 신분제적 사회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으로 행정과 강의의 최전선이 지탱되는 대학이 아닐까요? <대리사회>(와이즈베리)의 저자 김민섭은 원래 한 ‘지방대학의 시간강사’(지방시)였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한 달에 60시간씩 노동을 한 맥도날드에서는 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권리를 모두 보장받았지만, 연봉 1000만원 남짓한 시간강사로 일하면서는 4대 보험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정규직 교수의 꿈을 안고 대학에서 조교와 시간강사를 하며 그렇게 8년을 버텼지만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더 위하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는 선언이 담긴 <나는 지방대학 시간강사다>(은행나무)를 펴낸 다음 반강제적으로 대학 바깥으로 쫓겨나왔습니다. 그는 1년3개월 일한 맥도날드에서는 퇴직금을 받았지만 8년을 일한 대학에서는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김민섭은 “온전한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을 위해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했습니다. <나는 지방대학 시간강사다>의 어느 장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든 육체노동을 반드시 하겠다”고 썼던 그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처음으로 선택한 것은 대리운전이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운전석에서 모든 ‘행위’와 ‘말’과 ‘사유’가 통제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박이를 켜는 간단한 조작 외에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손님(차 주인)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한 개인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검열하고 통제”하는 타인의 운전석에서 신체뿐만 아니라 언어와 사유까지도 빼앗기는 경험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모든 개인은 주체와 피주체의 자리를 오가면서 주체가 되기를 욕망하고, 타인에게 순응을 강요한다. 그런데 그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보내는 욕망과 그대로 일치한다. 특히 국가는 순응하는 몸을 가진 국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비합리와 비상식과 마주하더라도 그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국민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는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노동의 현장이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업은 늘 다양한 방법으로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합니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최순실이 지시하면 마리오네트처럼 따르며 국민을 일회용품처럼 이용하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날로 치솟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나오는 거짓말을 질타한 이들은 엄기호의 지적처럼 “스스로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동료 시민’들이었습니다. “시대와 사회가 구제불능”이라며 “깡그리 망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리셋)하자”던 사람들이 평등한 민주주의를 구현하자고 함께 소리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욕망을 최전선에서 ‘대리’하는 대학”에서 쫓겨난 김민섭은 ‘대리인간’으로 사는 고단함을 길거리에서 체험했습니다. 한발 물러서서 자신의 공간을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그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 사회에 균열을 내는 ‘송곳’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야만 우리 사회의 불안과 절망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요즘 초등학생들마저 “그네가 움직이려면 바람이 순실순실 불어야 한다”고 노래한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도 대리인간으로 살면서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름도 모르는 온갖 약에까지 의지하셨을까요? 이제 힘에 부치는 무거운 짐을 하루빨리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제발 <대리사회>부터 읽고 주체인 ‘나’로 거듭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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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인간이 일을 하려면 반드시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작은 방이라도 있어야 했습니다. 페이스 팝콘은 <클릭 미래 속으로>(21세기북스)에서 모든 개인은 ‘코쿤(참호)’ 속으로 숨어든다고 했습니다. 개인은 반 평에 불과한 자신의 방일지라도 그곳에서 네트워크에 접속하기만 하면 시장과 도서관과 사교클럽을 모두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없습니다. 그것을 ‘지구방’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이 없어도 누구나 스마트폰만 들면 전 세계로 연결됩니다. 인지신경과학자인 콜린 엘러드는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더퀘스트)에서 “수천년 동안 전통적인 벽은 건축 설계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벽은 사람들의 이동을 막고 시야를 가린다. 벽은 사생활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했지만 “지금은 건축공간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 목수가 세운 벽은 여러 중요한 측면에서 구시대 유물로 간주된다”고 했습니다.

출처: 경향신문DB

앞으로 어떤 벽이 필요할까요? 완전한 개인 맞춤형으로 만들 수 있는 전자 벽입니다. 콜린 엘러드는 “당신과 내가 같은 물리적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 전혀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각자의 성격과 기호, 그리고 씁쓸하게도 구매 이력에 따라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바일 데이터 수집, 생체 인식을 위한 내장 센서 네트워크,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비롯한 기술이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뒤바꿔놓고 있습니다.

<공간의 세계사>(다산초당)의 저자 미야자키 마사카쓰는 5000년 인류사에 여섯 번의 공간혁명이 농업혁명, 도시혁명, 대항해 시대, 산업혁명, 정보혁명 등의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었다고 정리합니다. 이런 공간혁명에 공헌한 것은 강, 말, 항해, 자본, 전자 등이었습니다. 특히 “전자공간을 이용한 사회변혁은 ‘대항해 시대’에 필적하는 지구 규모의 가상 공간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를 전자기호로 바꾸어 교환하는 디지털 문명이, 편리함과 유용성을 바탕으로 기존 문명을 대규모로 재편”하면서 “막대한 정보가 오가는 전자공간은 세계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사람의 수를 일거에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를 무대로 하는 거대한 물류, 정보·문화의 교류, 이민 등에 의한 인구 이동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변화는 “지역, 국가, 계층 간의 격차를 확대하고 부의 편재와 기아의 확대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실업 문제입니다. “컴퓨터와 하이테크 기술은 노동력을 대규모로 절약하게 하는데, 이 문제로 인한 고용 감소와 그에 따라 가파르게 증가하는 실업률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정점에 서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인공지능 시스템이 도입됐을 때 일자리를 잃게 될 위험이 가장 높은 직업으로 콜센터 직원들을 꼽습니다. 지금 미국의 대기업들은 주문전화나 애프터서비스를 접수하는 콜센터 업무는 인도나 필리핀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업무를 처리해 바로 본사로 전송합니다. 그로 인해 미국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대거 사라졌습니다. 미국에서 인구의 셋 중 하나가 빈곤층으로 전락한 것은 2011년 무렵이었습니다. 그해 9월 20대 실업자들의 주도로 상위 1%가 자본을 독식하는 부조리함과 금융가의 부도덕함에 반발해 “우리는 99%다”라고 외친 월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미국인들을 사로잡은 것이 ‘예외주의(exceptionalism)’였습니다. 예외주의란, 세계는 미국과 미국 아닌 나라로 나뉘는데 미국이 세계 리더로서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들을 원조하고 계몽해 나가야 한다는 사고입니다. 1830년대 미국을 면밀히 관찰한 프랑스 사회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공화당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신봉하며 대외 정책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선거 초기에 공화당의 선두 주자였던 뉴트 깅리치는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나라(A Nation Like No Other)>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와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면서, 정치·외교·비즈니스 분야에서 앞으로도 압도적인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즈음 미국에서는 건국과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을 다룬 전기와 영화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잘나가던 그는 두 번째 부인이 ‘깅리치가 오픈매리지, 상대방의 혼외 관계를 인정하자’면서 사생활을 폭로하지 않았다면 아마 오바마의 재선을 막았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45대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으로 ‘아메리카니즘’(미국우선주의)을 펼쳤습니다. 불법 이민자 추방, 강력한 보호무역, 미국과 동맹의 관계 재조정 등 신고립주의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게 바로 예외주의가 나쁘게 진화한 것입니다. 그는 한국이 방위비를 제대로 분담하고 있지 않다는 안보 무임승차론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미국 내 일자리를 죽이는 재앙이라는 주장도 펼쳤습니다.

트럼프 당선은 마치 2007년 한국 대선에서 이명박의 당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트럼프가 자신이 내놓은 공약을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습니다.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복지 확대 등의 공약을 내걸고 집권한 박근혜 정부가 공약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최순실이라는 개인과 그 일가의 이익만을 채워주다가 망신당하는 꼴을 트럼프가 답습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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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든 미디어는 하이콘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에 서로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청률을 의식하는 텔레비전이 이런 흐름을 주도합니다. 그들은 시청자가 ‘유혹의 그물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이콘텍스트 방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시청자가 그물 속에 걸려들면 내용에 관계없이 빠져나오기 힘들게 만듭니다.

내용(스토리)을 파는 드라마는 강력한 캐릭터를 지닌 다수의 인물들을 등장시킵니다. 도원결의를 할 정도로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이 주도하는 <삼국지> 같은 드라마보다는 개성이 천차만별인 캐릭터들이 등장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수호지> 같은 드라마여야 합니다. 형식을 파는 토크쇼 역시 개성이 다른 인물들이 ‘떼거리’로 등장해 자신만의 강점을 보여주며 경쟁합니다. 심지어 복면을 쓰고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세계의 모든 문제를 ‘중계’하는 뉴스에서는 날마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니 ‘하이라이트’ 화면만 모아놓아도 잘 돌아갑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미디어에 빠져들수록 삶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큰 문제를 잘게 토막내 침소봉대하여 한두 가지만 화제로 삼으면서 전체를 덮어버리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과 원칙을 늘 무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법질서’를 입에 달고 살면서 남의 탓만 하고, 경제를 망친 여당은 ‘송민순 회고록’을 왜곡해 주장하고, 무능한 야당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서만 떠듭니다. 그 어느 누구도 통합적인 전망을 내놓지 않습니다.

하이콘텍스트의 힘을 키운 것은 소셜미디어입니다. 그곳은 모든 문제들의 집합소입니다. 매우 다양하게 얽혀서 문제를 키우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남이 적은 이야기에 대한 무책임한 수용만 존재합니다.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비평과는 거리가 있는 행위가 넘치지만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안목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이 거의 완전히 실종됐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일찍이 <속물과 잉여>(지식공작소)에서 ‘속물’과 ‘잉여’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속물’은 “체제 내에 포섭되어 축적하고 소비하는 주체”입니다. 그들은 재산과 지위를 축적하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주체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생존력이 매우 질기고 거짓말도 잘합니다. 모방과 추종에 능하고 저속 취향인 데다 개성은 실종되어 있습니다. 계산에 매우 치밀하고 자기 소유와 관련된 사안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을 보입니다.

‘잉여’는 “속물 대열에 가담하여 속물 지위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한 자들 가운데 속물되기를 유예하고 있는 자들”로 “체제 안에 살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체제에 포섭된 몸의 비듬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은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오갑니다. ‘병신짓’이라고 스스로를 폄하하고 비하하다가 느닷없이 상대를 욕하거나 폭언을 일삼기도 합니다. 주로 “인터넷에서 패거리를 즐기지만 심하게 인정 경쟁에 빠져들면 현실로 걸어 나와 엽기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합니다.

백 교수는 “애비는 벌써 속물이 되었고, 속물들의 자식들이 자기 계발에 열중하여 차세대 속물되기를 준비하는 동안 속물에도 끼지 못한 애비들의 자식들은 잉여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넘치는 잉여들이 벌이는 ‘잉여짓’이 정보자본주의의 밑거름이 된다는 주장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간이동을 이용해 이익을 창출하는 ‘상업자본’이나 기술력의 차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산업자본’은 글로벌 경쟁으로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공황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자본주의 시스템은 판을 갈아엎어서라도 체제를 유지하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 방안 중 하나가 아마 전쟁일 것입니다. 위기에 봉착한 세력이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하는 목소리들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 ‘속물’이 될 수 있는 길은 거의 차단되었습니다. ‘속물’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인 ‘사법시험’마저 폐지되자 이제 개인이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미 ‘속물’이 된 자들은 잉여가 된 제 자식을 챙기는 데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우병우의 아들은 ‘코너링’이라는 간단한 기술만으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쌓아도 만만한 일자리 하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과 안정에 대한 강박증적 요구로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해왔지만 3월에 벌어진 ‘알파고’ 이벤트 이후 모든 직업에 대한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넋을 놓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는 ‘공감의 장치’이고 하이콘텍스트의 생명도 ‘공감’입니다. 둘은 찰떡궁합처럼 잘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하이콘텍스트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공감’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저 누구를 비판하면 내가 뜬다거나 특정한 속물과의 친소관계만 자랑하는 날라리 감수성의 양아치만 넘치고 있습니다.

‘불평등’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원인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아젠다를 제시해야 마땅한 언론이나 대학마저도 어렵다는 이유로 권력이 던져주는 ‘닭모이’나 ‘새우깡’을 주워 먹기에 급급해 입을 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집단적 악몽’ 상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때 열렬했던 푸른 하늘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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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는 한반도에 지진마저 발생해 불안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대체로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미래>(조영태, 북스톤)에서는 미래를 예측하는 ‘인구’라는 상수(常數)가 있기에 ‘사회적 미래’는 갈 길이 이미 정해졌다고 말합니다. 다만 개인의 미래는 스스로 개척해내야겠지요.

인구학적 관점으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세대는 1, 2차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베이비붐 1세대는 1955~1964년생이고, 2세대는 1965~1974년생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한마디로 ‘58년 개띠’와 ‘70년 개띠’ 간의 대결이라네요. 두 세대는 인구 크기가 얼추 비슷하고, 연이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중 1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했습니다. 55세에서 60세로 정년연장이 되었다지만 태반은 50대 초반에 짐을 싸고 있습니다. 직장인의 끝은 ‘치킨창업→적자폐업’이라는 우스개도 있는 마당이니 이들 은퇴자가 우리 사회를 뒤흔들 것으로 보입니다.

<피파세대: 소비심리를 읽는 힘>(라의눈)의 저자인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020년 베이비부머의 맏형(1955년생)부터 65세(정년연장의 연령시한)로 접어들면 이후 대략 10년에 걸쳐 1000만 인구가 시니어마켓의 잠재고객으로 합류한다. 이런 거대시장을 방치할 이유는 없다. 되레 선제·미시적인 접근전략이 서둘러 필요할 때다. 주지하듯 시니어마켓은 초기 시장”이라고 말합니다.

전 교수는 이들 세대를 ‘피파(PIPA)세대’라고 부릅니다. 가난하고(Poor), 고립됐으며(Isolated), 아픈(Painful), 세대(Aged)라는 것이지요. “저성장·인구병·재정난이 전대미문의 거시환경적인 불안기운이라면, 빈곤·질병·고독의 트릴레마는 역시 한국 사회가 최초로 경험하는 미증유의 개별차원적인 생활악재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앞으로 ‘핏줄봉양’이라도 받으며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매우 적으니 그야말로 노후가 공포인 셈이지요.

오쿠다 히데오 장편소설 <나오미와 가나코>(예담)에서 나오미는 백화점의 외판부 사원입니다. 나오미가 다루는 개인 고객은 물쓰듯 돈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치매를 앓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돈을 써도 돈이 마르지 않는 노인도 등장합니다. 나오미는 처음에는 “슈퍼마켓에서 달걀 사듯 보석을 구입하는 손님들에게 깜짝 놀랐지만” 점차 그 일이 익숙해집니다. 그런 부유층에게 의지하는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일본의 백화점은 이미 젊은층을 포기하고 은퇴하는 시니어층에 주력하고 있지만요.

일본은 고령화를 가장 먼저 겪는 나라입니다. <2020 시니어 트렌드>(사카모토 세쓰오, 한스미디어)에서는 시니어, 노인, 실버 등의 단어가 아닌 ‘엘더’(연장자), ‘새로운 어른’ 또는 ‘50+세대’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일본에서 2020년이면 성인 1억395만명 중 50+인구는 약 6000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10명 중 6명이 50+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40+로 범위를 넓히면 약 7800만명으로 어른 10명 중 8명은 40+세대가 되어 버립니다. 사회 전체가 어른이 되는 사회가 됩니다.

피터 드러커는 생전에 “일본의 단카이 세대가 경험과 지혜를 살려 은퇴 후에 사회적 활동에 종사한다면 일본은 세계 경제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2020 시니어 트렌드>에서는 일본이 잠재력과 폭발력이 높은 ‘새로운 어른 시장’을 어떻게 키워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기존의 고령자를 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황혼 중노년·성숙 중노년’에서 ‘젊고 센스 있는 어른’으로, ‘여생을 보낸다’에서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다’로, ‘시들어가는 노후’에서 ‘인생 최고의 시기’로 크게 전환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50+세대의 2대 자본으로 ‘건강’과 ‘경제’를 제시합니다. 이것들은 사실 불안요소이기도 하지만 자본이기도 합니다. 무병인 것보다 하나의 병이라도 껴안고 살아가는 일병식재(一病息災)이거나 개호(간병)를 받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노력을 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위기가 곧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제3의 자본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특히 손자 세대까지 품은 3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 3대 네트워크 가족’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합니다.

개성이 강한 3대 핵가족들이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따로 살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소통한다는 것이지요. 피라미드 구조의 봉건적인 가족 관계가 아닌 수평적이고 서로를 속박하지 않는 ‘네트워크 가족’으로 바꿔가는 모습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령 3대가 함께하는 ‘야산 탐험 여행’은 조부모의 유년기 체험을 손자·손녀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투구벌레를 백화점에서 사서 기른 부모가 아닌 야산에서 투구벌레를 잡았던 조부모가 야산 탐험을 하면서 그 경험을 손자·손녀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소셜미디어의 확산은 “아날로그적인 대면의 장소와 디지털적인 인터넷의 융합”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대가 갈등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도 일본의 사례에서 고령화 문제 해결의 단초를 반드시 얻어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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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의 위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 상품 생산자들은 자신이 만든 상품(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심(어텐션)을 얻으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어텐션 이코노미’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책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스토리텔링이 뛰어난 책이라 할지라도 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책은 곧 독자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마련입니다. 즉 콘텍스트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소셜미디어는 ‘공감의 장치’입니다. 가슴이 통하는 이들이 함께 활동하는 소셜미디어 공간 속의 커뮤니티를 통해 콘텐츠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확실한 콘텍스트를 만들어내면 소비자(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올해 콘텍스트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것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을 수상한 <채식주의자>(한강)의 인기와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페미니즘 도서의 판매가 급증한 사례일 것입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특히 ‘강남역 살인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담론이 다시 득세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살인사건이 ‘여성혐오’인가 아닌가에 대해 논란을 벌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성우가 여성주의 커뮤니티인 메갈리아에서 구입한 2만원짜리 티셔츠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습니다. 한 평론가는 방송에 출연해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만개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메갈리아는 여성억압적인 한국 사회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해 ‘미러링’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남성들의 일상적인 여성혐오 표현을 그대로 패러디해 거울처럼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남성 일반에 대한 미러링으로 출발한 메갈리아는 점차 장애인, 성소수자, 아동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일부 행위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세를 얻어가는 가운데 ‘강남역 살인사건’이 불을 붙이는 바람에 페미니즘 담론이 크게 폭발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창비)는 영국 지상파 채널인 ITV의 <디스 모닝>에 출연해 18개월 동안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를 당당히 뽐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페미니스트 에머 오툴이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미러링’하면서 “생물학적 성에 적합한 성역할 바깥에서 행동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낭만적 사랑과 성적 욕망”에 대해 가상토론을 벌이기도 하는 저자는 남장, 삭발, 제모 거부, 동성애, 남녀공통의 일상언어 쓰기 등 ‘여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유쾌하고 도발적인 실험을 감행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루는 여성스러운 외양으로 다음날은 남성스러운 외양으로 출근하면서, 나는 젠더가 의상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남성적이든 여성적이든 똑같이 대우해달라고 요구한다. 털이 난 다리를 내보임으로써 나는 여성의 체모만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성차별적이라고 말한다. 삭발한 머리로써 나는 이것이 어째서 여자가 아닌 남자만의 헤어스타일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월요일에 화장을 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내 얼굴을 꾸미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입는 의상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하며, 그것이 해석되는 방식까지는 통제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전하고자 하는 젠더와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시도한다.”

결혼에 대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일 뿐이라는 정의를 제시하는 알랭 드 보통의 장편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행나무)은 원제가 ‘The Course of Love’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궁극적인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캐묻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그러니 키스와 섹스, 결혼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물건을 사러 처음으로 함께 갔다가 다툰 이후 두 사람은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귀가 깔려 있어 사실상 그는 적어도 열두 번은 이혼과 재혼을 겪”다가 결혼한 지 16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완벽함을 포기했고,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고,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했고, 아내가 까다로운 것이 아님을 이해했고,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고, 항상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했고,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했고, 대부분의 러브스토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작가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려면 열정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이런 가족이 과연 필요할까요?

지금 방영되고 있는 tvN의 다큐멘터리 <판타스틱 패밀리>(4부작)에서는 로봇도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2편 ‘신상가족’에서는 1인가구, 부부이면서 따로 사는 LAT(Living Apart Together) 가족, 90대의 스승과 60대의 제자가 모녀처럼 사는 가족,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 등을 제시했습니다. 어쩌면 가족과 사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이제 인간 정체성 자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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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급격하게 은퇴하고 있는 1차 베이비붐 세대(1세대)는 어려서 가난을 경험했지만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을 몸소 체득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그저 열심히 일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나름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아쉬워했던 것이 배움의 부족이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스펙을 갖추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높은 교육열로 말미암아 이제 40대에 이른 그들의 자식들(2세대)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출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대부분 비정규직 일자리였습니다.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은 무서웠습니다. 정보기술이 발달할수록 일자리가 줄어드는 ‘테크놀로지 실업’의 시대가 되다보니 소프트웨어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일자리가 한꺼번에 날아가기 시작하면서 중산층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출처: 경향신문 DB


아직 부모세대의 재력에 힘입어 억지로 버티고 있는 2세대는 멋모르고 낳아놓은 10대 이하의 자식(3세대)에게는 충고해줄 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 경험조차 없는 데다 미래마저 예측할 수 없으니 심리적인 안정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점차 부모들의 밑천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니 부모들의 노후부터가 걱정입니다. 그야말로 3세대 모두 동반 몰락할 위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옥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구의역 참사, ‘우병우 블랙홀’ 등이 연이어 터져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철학자 허경 박사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길밖의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일련의) 사건에서 실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전 국민적이고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늘 일어났던” 이런 일들은 “이전에는 결코 이슈가 되지 않은 채 ‘피해자만 억울한 일’로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하나만으로도 페미니즘 서적의 득세를 이루게 만들었습니다. “중동의 이슬람이나 아프리카의 정말 지지리도 못사는 후진국이 아닌 한국 정도의 교육과 경제 수준을 가진 나라, 이른바 OECD 국가 중에 한국 사회 같은 성차별 국가가 있는가?”란 질문이 나올 정도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메르스 사태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부산행>이 1100만 관객을 넘겼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 <터널>은 벌써 500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입을 모아 ‘헬조선’과 ‘금(흙)수저’를 노래 불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산업화와 민주화 양자에 성공한 거의 유일한 나라”인 부강한 대한민국이 ‘헬조선’으로 불리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헬조선’ 담론을 정면 겨냥해 이것은 “잘못된 풍조”이자 심지어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비하하는 신조어”로 규정하셨겠지요.

허 박사는 말합니다. “대한민국이 헬조선이라는 말이 상당수의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그들이 바보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현실이 어떤 논리와 수사로도 정당화되기 어려운 불합리한 불평등구조를 실제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청와대에서 송로버섯과 샥스핀으로 만찬을 즐기는 분들도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유사한 경제적 수준에 도달한 국가들 중 분배의 불평등과 복지의 미비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최악의 기록을 세우며 홀로 나아가고” 있으니 ‘헬조선’이라 불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허 박사는 대한민국이 ‘헤이븐조선’이 아니라 ‘헬조선’이 된 이유는 대한민국이 이견의 여지없이 산업화와 민주화 양자 모두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산업화’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많은 불행한 나라들처럼 그냥 ‘헬’이지 ‘헬조선’이란 말이 따로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2016년의 대한민국은 못사는 나라가 결코 아니며, 폭압적인 독재국가도 아닙니다. 나라는 잘살고 민주주의는 나름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범한 시민인 나의 삶은 너무 힘들고 너무도 억울한 일투성이며 오히려 전보다 못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윗세대는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라, 눈을 낮춰라’라고 말합니다. 사회 전 분야는 나름의 방식으로 고루 발전했지만 정치만 유일하게 후진적입니다. 이 때문에 “나의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이 ‘헬조선’ 같은 말로 언론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까지 장악했습니다.

“세월호는 이미 그 자체로 헬조선의 축약도”였습니다. “아무 대책도 없이 가라앉는 헬조선, 자기들은 빠져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해대는 헬조선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학습”했습니다. 

허 박사는 대한민국의 지배담론이 통치자 담론에서 피통치자 중심 담론으로, 가해자 담론에서 피해자 혹은 사회적 약자 중심 담론으로 변화했다고 말합니다. 주체로 거듭난 피해자들은 이제 “어떻게 더 이상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를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민심이자 천심입니다. 그러니 제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신상에서 어떻게든 결점을 찾아내 악의에 찬 인신공격을 해대는 ‘물타기’부터 멈추시기 바랍니다. 

추악한 부하 한 사람을 지키려고 국민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헬조선’에서 허덕이는 99.9%의 국민을 위해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을 돌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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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헌법재판소의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합헌 결정 때문에 소셜미디어(SNS)가 시끄럽습니다. 밥은 3만원 미만짜리밖에 먹지 못하게 하고 선물을 5만원 미만으로 한정하면 내수경제가 무너진다고 언론이 아우성치니 누리꾼들이 조롱을 하고 나선 게지요. 비싼 술집에서 폭탄주 돌리던 일이 사라지니 집에 일찍 들어가 책도 볼 수 있어 좋을 것 같은데 세상사가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출처: 경향신문DB

어찌됐든 이번 법을 입안함으로써 많은 사회적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김영란 전 대법관은 한국 최초로 여성으로서 대법관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우리나라의 부패를 근절하려면 법을 통하는 방법밖에 없겠다고 생각해서 ‘김영란법’을 입안한 분입니다.

그는 최근에 출간된 <책 읽기의 쓸모>(창비)에서 여행 도중에 가지고 간 책을 다 읽어버리면 금단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책 중독, 활자 중독에 시달렸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행갈 때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못 읽었던 가장 어려운 책을 골라 읽습니다. 반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내기 힘든 평소에, 일을 하던 도중에는 비교적 가벼운 책을 읽습니다. 저는 대가족으로 살아온 기간이 긴 탓에 가사노동을 제법 해온 편이어서 차분히 앉아서 책을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생긴 버릇이 책을 여기저기 놓아두고 읽는 것이었지요. 부엌에도 책이 있고 화장실에도 책이 있고 방에도 책이 있습니다. 서재가 따로 없지요. 서재에 들어박혀 있을 여유가 없이 늘 개방된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주부의 특징 때문이지요.”

그는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온 것이 ‘쓸모없는 책 읽기’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왜 책을 읽었을까요?

“생각해보면 슬픈 일이 있어도 책을 읽으면 다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이 되는 적이 많았습니다. 제게는 독서가 일종의 카타르시스, 즉 현실을 잊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지요. 책을 읽으면서 힘든 일을 잊어버린다는 것만 해도 굉장한 쓸모이긴 합니다. 또 최근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쓸모없는 책들을 제가 법률에 관한 책을 쓰는 데 써먹었더군요.”

책이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해온 저에게 이만한 실제 증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요? 어려서는 동화책을 많이 읽었지만 사춘기 시절부터는 문학서적으로 말을 갈아탔습니다. 이때 카프카, 도스토옙스키, 토마스 만, 톨스토이 등을 읽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현실에서 구현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책들을 특별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미셸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등입니다. 대부분 ‘이분법 놀이’를 통해 복잡다단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는 법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이 제시한 ‘공평한 관찰자’란 개념에 꽂힌 것 같습니다.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질적인 것으로부터 양적인 것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 세계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마치 개미나 기계 부품의 움직임이나 동작같이 개관적인 외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의 삶에 다층적 의미를 부여하듯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가 누스바움이 정리한 소설의 특징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누스바움이 말하는 ‘공평한 관찰자’는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관찰자의 능력을 지닌 재판관”, 즉 ‘문학적 재판관’입니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 집들이지만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고,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정념에 관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가령 누가 사람을 죽였다고 할 때, 같은 살인이라 해도 그 배경을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아버지를 죽인 아들도 있을 수 있고,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마구 때리고 몇날 며칠을 방치해두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모도 있지요. 그렇게 개별적인 이야기가 다 다릅니다. 재판관은 그런 개별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소설을 많이 읽어서 ‘공감’이라는 훈련을 한 그가 우리 사회를 혁신하기 위해 ‘김영란법’을 입안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상상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이 없으면 ‘이미 있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익히는 일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만 하기도 바쁜 세상이지만, 그러기만 해서는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무언가 더 나은 것에 대한 상상, 다음에 나아갈 행보에 대한 상상, 그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책, 특히 소설을 많이 읽읍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모든 책은 하나하나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같은 책을 읽더라도 각자가 듣는 이야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한한 세상 속을 여행하는 일”이자 “나 자신을 찾는 일”이면서 “나에 대해 기록한 단 하나의 책을 찾는” 행위이자 “세상을 통해서 나 자신을 찾는 공부”이니까요.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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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한 지방의 8층짜리 대형 회센터에서 저녁을 먹고 자리를 옮기려는데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약 2㎞를 걷는데 폐허가 된 도시처럼 보였습니다. 몇몇 관공서가 보이긴 했지만 사람이 산 흔적이 없는 건물이 즐비했습니다. 일행인 한 역사학자가 “모든 도시가 ‘강남 개발붐’을 그대로 닮은 복제품”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남을 최초로 다룬 연구서를 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인물과사상사)에서 “강남은 한국의 얼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독특한 아파트 문화의 선구자이자 리더는 단연 강남이다. 강남의 아파트 거주율은 80%에 육박한다. 강남은 욕망의 용광로다. 구별짓기의 아성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왜 아파트가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으려 했듯이 강남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왜 강남의 진실을 피하려는 걸까? 진실은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강남을 제대로 천착한 연구서가 왜 나오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가 부제인 강남만을 다룬 최초의 역사서 <강남의 탄생>(한종수·계용준·강희용, 미지북스)에서 저자들은 “강남은 한국 현대사의 얼굴”이며, “강남을 안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강남’을 의외로 잘 모른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 소위 ‘강남 3구’를 ‘강남’으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원래 “강남은 과수원과 채소밭 천지”였습니다. “1968년까지만 해도 강남은 일반 가정에 전화기는커녕 지역 전체에 공중전화 한 대도 없는 ‘벙어리 동네’”였습니다.

그랬던 곳이 “압구정, 반포, 서초, 잠원, 신사, 논현, 역삼, 개포, 삼성 등 오늘날 쟁쟁한 부촌이 된 셈인데, 지난 ‘강남 개발의 시대’는 실로 ‘뽕나무밭’이 ‘강남’이 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강 교수도 “강남은 한국의 초고속 성장을 온몸으로 드라마틱하게 웅변하는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이 보릿고개에서 ‘세계 10대 경제국’으로 달려왔듯이 강남은 ‘말죽거리’에서 ‘타워팰리스’까지 달려왔다. 전자의 달리기는 피땀으로 이룬 반면 후자의 달리기는 일확천금의 투기 광풍이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나 욕망의 대질주라고 하는 본질에 있어선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강남의 탄생>은 바로 그런 ‘욕망의 대질주’를 세세하게 정리한 역사서입니다. 저자들은 1969년 12월25일 준공된 제3한강교가 ‘강북’으로부터 ‘강남’이라는 지역을 잉태하는 탯줄이 되었는데, 이 다리는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보다 먼저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와도 이어져 그 출발점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검찰청, 국정원, 한국은행 전산본부 등 주요 기관과 경기고, 서울고, 숙명여고 등 강북 명문고의 강남 이전, 지하철 2호선을 강남을 관통하는 순환선으로 바꾼 일 등이 작용해 강남은 명실상부한 서울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의도는 ‘강남의 원조’이며, 노원은 ‘실패한 강남’이고, 목동은 ‘성공한 강남’이라고 말하는 저자들은 “강남의 성공은 우리나라 도시사(史)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고 말합니다. 한때 서울을 강타한 뉴타운 광풍은 “강남을 닮고 싶어 하는 강북 시민들의 ‘욕망’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고 보기도 합니다.

‘강남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광역시는 물론이고 인구 10만명도 안되는 소도시도 모두 마치 비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신도심을 개발해 시청, 법원, 방송국, 터미널 등 알짜 시설을 옮겨 놓”는 바람에 “구도심에는 옮길 수 없는 기차역과 전통시장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도 경주와, 성곽이 있는 전주나 공주, 진주, 호수를 끼고 있는 춘천, 몇몇 항구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방 도시들은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붕어빵 도시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느 도시 할 것 없이 ‘구도심 활성화’가 단체장 선거의 단골 공약이 되기에 이르렀지만 “구도심이 활성화되었다는 도시가 있다는 소식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둘 수는 없겠지요. 앞으로 투기나 욕망에 의한 도시 개발은 지양하고 도시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이승훈 외)은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를 중심으로 마을의 청소년들이 ‘시작된 변화’ 프로젝트에 참가해 마을을 바꾼 지난 5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버려지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땅에 꽃과 잔디를 심고, 놀이터에 적힌 낙서를 지우고,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굴다리에 벽화를 그려 넣고, 얼굴을 모르는 아파트 주민에게 인사하기 캠페인을 벌이고, 동네의 자전거도로를 조사해 구청에 민원을 넣는 아이들의 노력 덕분에 “잠만 자는 곳”이자 “아이들에게는 얼른 벗어나고 싶은 변두리 동네”에 불과했던 공릉동이 이제 좋은 삶과 좋은 교육을 가꾸는 터전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마을은 작은 세계이며, 가장 큰 학교”라고 말하는 저자들은 “경험이 최고의 학습이고, 최고의 경험은 마을 안에서,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최고의 학습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인 마을 속에서 쌓이는 풍부한 경험은 역량을 키우기 마련인데 그것이 ‘마을 교육력’이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마을에 도서관과 청소년센터가 결합된 공간부터 만들어놓고 폐허가 된 도시를 살 만한 도시로 바꿔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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