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속에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인 파우스트 교수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기 전 제자 앞에서 고뇌를 털어놓으면서 했던 대사 중 한 대목이다. ‘두 개의 영혼’의 투쟁과 이로 인해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그린 불후의 고전 <파우스트>가 요즘 ‘국정원 해킹의혹’이 불거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탈리아 해킹팀과 수시로 e메일을 주고받으며 감시 프로그램을 구입한 국정원 직원이 사용한 ‘데블앤젤(devilangel)’이라는 닉네임이 바로 두 개의 영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데블앤젤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귀천사’다. 그는 왜 정반대의 영혼을 가진 악마와 천사를 합쳐놓은 닉네임을 사용했을까.

성경에서 ‘마귀’는 악한령들의 우두머리로 항상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마귀를 뜻하는 헬라어 ‘디아블로스’는 ‘고소자’ ‘중상자’로 사람들을 죄로 미혹하여 하나님에게 고자질하는 일을 한다. 반면 ‘천사’는 신의 신하이자 병사이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면서 신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는 존재다. 종교적 의미와 대비해보면 데블앤젤은 자신을 제3자의 내면을 훔쳐 이를 고자질하는 사악한 존재로도, 하나님인 국가를 위해 음지에서 일하는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류 2014년 11월27일 국정원이 나나테크를 통해 이탈리아 해킹팀과 주고받은 계약서에 임 과장의 서명이 들어 있다._경향DB


이유야 어떻든 그가 ‘마귀’도 ‘천사’도 아닌 ‘데블앤젤’을 닉네임으로 사용한 것은 ‘이중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독한 내면의 일단이 보이는 부분이다. 경향신문 취재팀 추적결과 그동안 전혀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데블앤젤’이 지난 18일 숨진 채 발견된 국정원 임모 과장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온갖 진귀한 경험을 하던 주인공은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말과 함께 숨을 거둔다. 반면 임씨는 유서에서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하다”는 자조 속에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정말로 그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말은 그것뿐이었을까.’


강진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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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인왕산 무릎 아래 사무실까지 가는 길의 경우의 수는 많다. 골목 하나 슬쩍 바꾸면 전혀 다른 출근길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토속촌 삼계탕집과 참여연대를 지나 통인시장을 관통했다. 골목마다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시멘트 일색의 담벼락이지만 그 척박한 조건도 자연은 외면하는 법이 없다. 조그마한 틈에도 씨를 던져 풀을 키운다. 북1문을 빠져나온 골목에 특이한 종이팻말이 있다. 돌 틈을 비집고 자라나는 민들레의 가느다란 줄기 곁에 꽂힌 것은 ‘一片丹心(일편단심)’.

누가 저 갸륵한 심정을 저렇게 적어놓았을까. 짚이는 바가 있기에 바로 옥인정육점으로 들어갔다. 한우암소전문점인 가게는 고기 냄새도 가득하지만 묵향이 진득하게 배어 있다. 취미가 서예인 사장님은 칼을 들다가도 틈만 나면 붓을 잡는다. 돈통도 있지만 그 옆에는 항시 먹물통이 대기하고 있다. 짐작이 맞았다. 손님도 아닌 나의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하시는 말씀. “아, 처음엔 그냥 민들레라 써놓았죠. 그런데 그러고 나면 그 다음이 없잖아요!”

땡볕에 지쳐 늘어진 민들레를 부축하며 서 있는 ‘일편단심’의 팻말을 보는데 중국의 공원에 있기도 하다는 환경보호 팻말이 떠올랐다. ‘手下留情 足下有靑(수하유정 족하유청).’ 손 안에 정이 머무르고 발 아래 푸름이 있다는 말로 함부로 가지 꺾지 마세요, 잔디 밟지 마세요라는 속뜻이다.

자칫 딱딱하기 쉬운 명령문을 이렇게 시적인 대구(對句)로 눙치며 처리하는 솜씨가 가히 놀랍다. 당시(唐詩)의 나라인 중국에서 이태백과 두보의 후예답게 웅숭깊음이 철철 흘러넘치지 않는가.

전국의 양지바른 산과 들은 물론 통인시장의 자투리 영역까지 찾아와 자연의 향기를 전하는 민들레. ‘수하유정 족하유청’과 ‘일편단심’은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뜻일 것이다. 붐비는 발길을 피해 울타리해주는 팻말. 어디 조용필의 노래만이랴. 옥인정육점 사장님의 일필휘지가 좁은 골목을 문자향으로 가득 채웠다, 일편단심 민들레.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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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4월13일 실시하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의 지역선거구를 획정할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독립기구로 출범했다. 이와 관련해 여당의 대표가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취지로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의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큰 틀로 보면 국민들을 위한 제도적 결단이고 정치개혁의 구체적 모습이라 생각한다.

정당 간, 국회의원들 간 이해득실에 따른 이전투구로 총선 때만 되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선거구 획정을 제3의 기관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공정성 등 제도의 취지에 기반을 두고 제때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선거가 임박해서야 겨우 선거구를 획정했던 그동안의 비정상적 행태를 정상으로 환원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당원인 국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주는 오픈프라이머리 역시 국민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 후보자를 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런 제도들이 모범적으로 실천된다면 진일보한 정치개혁의 구체적인 한 단면으로 기록되리라 본다.


한국형 오픈프라이머리 제도 도입 역사_경향DB


다만, 제도의 개혁성과 실천의지에도 불구하고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먼저 국회의원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선거구 획정과정에서 통폐합 대상 지역구 내 정당 간 또는 같은 당 소속 현역 국회의원 간의 대결 등의 과정에서 중립적 위치에서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게 확실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감시가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정당 오픈프라이머리의 시행과 관련해 투표권의 취득이 확실시되는 책임당원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사전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사들을 매수해 책임당원으로 가입시키는 등 불법과 편법을 하지 못하도록 정치인들 스스로의 자정노력, 정당의 엄격한 준수 촉구와 실천의지가 담보돼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일부에서는 선거구 획정과 관련해 어느 지역구의 유력 정치인들 간 전쟁이 시작되고, 게리맨더링이 어느 정도 횡행할 것이라는 등의 보도가 나오고 있다. 오픈프라이머리와 관련해 어느 정당의 책임당원 가입서 한 장에 몇 만원이라거나 공직선거법상 기부행위로 처벌될 수 있는 당비 대납 소문도 들린다.

우려스러운 소식들이다. 이러한 보도들이 소문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세월호 참사와 최근의 메르스 사태 등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사실과 혼재된 다양한 시각과 편향적인 의견 대립 등으로 심신이 피로해진 국민들에게 자칫 정치에 대한 새로운 불신과 자괴감을 견인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 크다.

정치권은 부디, 모처럼 올바르게 추진하고 있다고 환영받는 선거구 획정과 국민경선제도의 개혁 방향에 어울리는 올바른 행보를 보여주길 바란다. 정치개혁의 실효성 확보는 오로지 실천하고자 하는 정치권 의지의 문제이며 그에 합당한 모습이 진정성 있게 실행될 때 국민들에게 비로소 의미있는 정치적 진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김재용 | 부산 금정구선관위 지도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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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한번 이상 주사를 맞는다. 모든 일은 반복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지만 주사를 맞는 것만큼은 매번 두려운 마음이 든다. 여러 가지 정신적인 불안 장애 중 주사 공포증이 있을 정도로 주사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런 주사를 매일 평생 맞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당뇨병 환자이다.

당뇨병 환자라고 무조건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유병 기간이 길어지면 혈당 관리를 위해서 먹는 약에서 주사를 맞는 것으로 치료 방법을 바꾸곤 한다. 본인이 당뇨병 환자거나 혹은 당뇨병 환자 가족이라면 매일 주사를 맞는 것에서 오는 고통을 깊이 공감할 것이다. 다 큰 어른이 주사가 싫다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들의 투정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주삿바늘로 인해 느껴지는 통증이 문제가 아니다. 환자 스스로 매일 본인 몸에 주사를 놓아야 하는 부담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한 예로 한 당뇨병 환자는 외출 중 외부에서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본인 차에서 주사를 놓다가 마약 사범으로 경찰에 신고된 적도 있다. 당뇨병 환자가 맞는 인슐린 주사는 종류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맞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과 스트레스는 너무나 크다.


당뇨병 환자의 주사투여_경향DB


실제로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당뇨환우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제2형 당뇨병 환자 10명 중 7명이 의료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주사요법을 꺼려 치료 시기를 놓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를 중단한 주된 이유는 역시 치료의 불편함 때문이었다. 매일 잦은 투여로 인한 불편함과 스스로 주사를 맞을 때의 부담감과 물리적인 통증 등이 주사 치료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주사 치료의 단점을 보완한 치료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주사 횟수를 줄이면서 효능 및 안전성이 개선된 치료제가 국내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치료제가 실제로 환자들에게 언제 보험 급여가 될 수 있을지는 요원하다. 새로운 치료제가 등장하면 이전에 비해 뛰어난 효과 개선이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보험 급여 여부가 검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치료제의 효과가 얼마나 개선되었는가도 중요하지만, 체중 감소 효과나 주사 횟수를 줄일 수 있는 편의성 등 당뇨병 환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 역시 환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흔히들 당뇨병은 평생 친구처럼 안고 가야 하는 질환이라 한다. 마음이 맞지 않는 친구와 오래 사귈 수 없는 것처럼 당뇨병 치료에 있어 필수적인 주사 치료에 거부감이 생긴다면 병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당뇨병 환자에게 주사 치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는 한편 새로운 치료제의 접근성을 높이는 정책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은 투정으로 보이는 주사 치료에 대한 불편과 부담으로 인해 생명을 담보로 치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환자가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염동식 | 한국당뇨환우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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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외국계 은행에서 나름 승승장구하던 장정윤씨는 외환 관련 업무를 하느라 시차 때문에 밤낮 없이 일하다가 여섯 살의 둘째 아들이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좌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니 아이는 거실 한구석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혼자 자고 있었습니다. TV를 보며 서서 오줌을 싸고, 발음도 불명확했습니다. 소아정신과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초기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의사는 회사와 아이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몇 달의 방황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을 시작하면서 친구의 소개로 독서지도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림책을 공부하면서 집에서 둘째 아이와 실습에 들어갔습니다. 저녁부터 밤까지 매일 아이와 살을 맞대어 안고서 그림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아이가 특히 사랑한 책은 <프레드릭>(레오 리오니, 시공주니어)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감성을 그림책을 통해 키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천석은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에서 <프레드릭>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가 갖고 있는 이 시대 부모의 보편적 신념을 건드리고 있다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들쥐 프레드릭은 베짱이와 판박이다. 다른 들쥐들이 겨울을 대비해 먹을 것을 모으려 밤낮 없이 일할 때 프레드릭은 햇살을 모으고, 색깔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은다. 겨울에 부족한 것이 식량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따뜻한 햇살도 없다. 자연은 무채색의 모습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웅크리고 틀어박혀 있어야 하니 재미난 이야기도 금세 바닥이 나고 만다.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자 들쥐들은 돌담 속 틈새에 숨어 들어가 여름철 내내 모았던 옥수수와 짚을 먹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곡식은 떨어져가고 들쥐들은 힘을 잃고 우울해한다. 역시 겨울에 부족한 것이 식량만은 아니다. 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에게 자신이 여름에 모았던 햇살과 색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지만 모두들 살아 있다는 활기와 따뜻함을 느낀다. 프레드릭이 낭송하는 시를 들으며 들쥐들은 겨울의 추위와 외로움을 이겨낸다.” 장씨와 아이는 <프레드릭>으로 연극도 해보고, 새로운 시도 만들어보면서 수백번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아이는 일곱 살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기를 즐기는 초등학교 교사 정소연씨는 아이들에게 <프레드릭>과 <개미와 베짱이>를 비교하며 읽으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독후 활동시간에 프레드릭을 성토하거나 옹호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베짱이는 놀기만 했지만, 프레드릭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해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었어요.” “어쩌면 베짱이는 가수가 되려고 노래연습을 한 건데, 우리가 노는 걸로 오해한 걸지도 몰라.” 아이들은 이렇게 빵빵 터졌습니다.

두 사람의 경험은 <책으로 다시 살다>(북바이북)에 나옵니다. 서 전문의는 부모가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를 권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보는 경험,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같이 이야기를 만들며 상상을 펼쳐 나가는 놀이, 불을 어둑하게 해놓고 들려주는 옛이야기, 이런 시간이 존재”한다면 꼭 그림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의 부모가 그런 시간을 갖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러니 “그림책이 그나마 부모가 접근하기 편한 도구”인 셈이지요.

서 전문의는 “아이들의 손이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마이너스의 손’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일수록 입으로 가져간다. 그러니 아이가 어리다면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고, 물고 빨아도 망가지지 않는 재료로 된 그림책이 좋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정부가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을 제정해 지난 6월4일부터 시행하면서 13세 미만 아이들이 보는 책 모두에 대해 안전 검사를 하고 반드시 KC마크(안전마크)를 발급받아 부착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출판사가 책 용지에 납이나 카드뮴 함유량과 프탈레이트계 가소제의 함유량이 적절한지를 판단하고 날카로운 모서리 등을 자율적으로 없앤 다음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 같은 위임기관에 KC마크 부착권을 신청해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현장(서점)에서 판매한 자에게도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린다고 하니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 모두가 범죄자로 전락할 판입니다. 비록 1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지만 권당 60만원의 발급비용이 들고 발급받는 데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지체되는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취지를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동일한 제품이라도 만 13세를 초과하는 소비자가 사용할 가능성이 큰 제품은 비대상”이라고 하니 그림책이 어른용이라고 우겨서 법망을 피해가야 할까요? 아이들이 어린이책만을 물고 빠는 것은 아닐 것이니 제지업체에 용지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두면 그만일 것을 백해무익한 이런 법을 만들어 강제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한 출판사들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어 국민을 우민화하기 위한 심사가 아닐까요?

정부가 하루빨리 이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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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독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시대 산업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심사 일정을 하루 연기할 정도로 진통 끝에 나온 협상의 결과였다.

한·일 간의 극적인 타협에 대해 한국 언론의 첫 반응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절묘한 타협이었다는 평가였다. ‘역전 판정승’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정부 관계자조차 일본이 강제노역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라 말했다.

일본 정부는 국민징용령에 근거한 동원이어서 ‘일하게 됐다’는 표기가 맞다며 강제동원을 인정했다는 보도를 즉각 부인했다. 한국 언론은 일본의 ‘잔꾀’에 또 당했다느니, 뒤통수를 맞았다느니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반면 일본 자민당은 한국에 과도하게 양보했다거나,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 외무성을 조사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양국 간 표기의 차이를 둘러싼 기사를 접하자마자 한일기본조약의 핵심 쟁점이 번뜩 생각난 것은 필자만의 경험이었을까. 조약에서 말하는 ‘이미(already)’ 무효라는 시점을 놓고 한·일 양국이 현격한 해석의 차이를 드러내며 오랫동안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측이 역사적 경험을 조금만 더 각성하고 협상에 임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5일 밤 서울 도렴동 외교부청사에서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_경향DB


그럼에도 이번 합의문은 한일협정과 달리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21개국이 참가해 채택한 결정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시대 산업유산을 전체의 역사로 기억되게 하는 과정은 중국과 동남아까지를 포함하는 태평양전쟁 당사국 전체를 시야에 넣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역사 잘라내기’와 ‘감추기’를 감시할 수 있는 다자간 공론 공간을 만들어갈 근거를 확보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문화유산을 매개로 양자 간의 틀을 넘어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틀 속에서도 한·일 간 역사인식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음을 직시해야 한다.

메이지시대 산업유산의 역사 전체를 말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 문화유산 등재 지역에 있었던 26개 전쟁포로수용소의 역사를 반드시 포함시켜 말하는 인식과 태도이다. 전쟁포로의 존재는 자칫 한·일만의 갈등으로 흐르거나 그렇게 비칠 시선을 경계하고, 전쟁 자체를 비판적으로 함께 기억하게 함으로써 공동의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역사유산이다.

전쟁포로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원의 강제성을 역사화하는 문제와도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징용의 강제성을 부정하며 그 문제를 한·일 간의 문제로 좁히려 한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 자체가 합법이었고, 본인의 의사에 반(反)한 동원이었지만 국민징용령이란 법적 근거가 있는 동원이었다고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동원은 ‘신민(臣民)’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행위였으며,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금지하고 있는 ‘강제노동 조약’의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억지 논리에는 피해자로서의 조선인이란 인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문화유산과 연관된 전체의 역사를 기록하는 활동은 일본 정부가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태도와 역사인식을 갖출 때만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다른 역사 문제들과도 연관 지어 기록을 들여다볼 때만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문화유산에 전체의 역사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기에 앞서 먼저 마찰음이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록에 진실을 반영하고, 내용을 검토하는 활동이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진실에 접근하며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며 미래가치를 깊게 공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주백 | 연세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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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를 시작하고 한 학생이 뜬금없이 담임교사에게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고 한다. 교사가 너희들보다는 세 배는 더 살았다고 답하자 학생이 자기는 15년밖에 안 살았는데도 낙이 없고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그 나이까지 사셨느냐고 ‘경의’를 표하더란다.

사토리 세대니, 달관 세대니 하는 말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 학생의 말이야말로 한국 청소년들이 어떻게 ‘득도’했는지를 보여준다. 삶이라는 게 고통이며 본질적으로 공허한 것이라는 걸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며 산전수전 다 겪기도 전에 이미 깨달아버린 것이다. 초등학교만 지나더라도 이미 인생이 고통의 연속이며, 그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다. 더구나 그 고통은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로부터 공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이 나이와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이 깨달음은 아무래도 안쓰럽다. 삶이 고통이며 위로받을 수 없다는 건 그만큼의 충분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저 깨달음은 세상에 대한 ‘충분한’ 경험의 결과이지는 않다. 세상을 충분히 경험할 시간을 허락받지 않는 것이 한국 청소년들의 일상이니 말이다. 오히려 매우 빈곤하게, 그러나 ‘강렬히’ 경험한 결과일 것이다. 깨달음이 충분한 경험이 아닌 빈곤의 결과일 때, 그 깨달음은 공허하다. 그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쳐서 소진되어 갈 뿐이다.

이 사회의 끔찍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만 속성으로 깨닫게 하였지 그로부터 아무런 힘도 길러내지 못하는, 깨달을수록 무기력한 자를 체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청소년뿐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깨달음으로부터 얻어온 것이 체념뿐인 삶 말이다. 그러니 이 학생의 질문에 답할 사람도 별로 없다. 어른들 역시 삶은 고통이 아니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 아니면 무기력하게 체념하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이것은 현재의 체제가 실패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가 겨냥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학생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곧 이 끔찍한 사회에 맞서는 일이 된다. 희망고문도 체념도 아닌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한 학생을 일으키는 일이며 동시에 모두의 삶을 체념으로 몰아가는 체제에 맞서는 일이 된다. 삶은 본질적으로 허무하고 세상은 고해의 바다이지만 살아가는 자를 무기력하게 하는 것은 삶의 본질이 아니라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 둘을 섞어 모든 것이 실존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체제는 통치에 성공한다.




삶의 본질을 깨달아버린 이 학생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삶의 가치를 일러주는 사람이다. 삶이 본질적으로는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때 삶은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삶의 의미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존엄을 빼앗긴 채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목숨에 그치게 된다.

나는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온 삶으로 보여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인권활동가 박래군이다. 그는 동생의 죽음에서부터 에바다, 용산참사, 그리고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고통은 극복되지 않고 끝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슬픔과 연대해왔다.

그가 구속되었다. 막강한 권력 앞에서 대다수가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족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기력해지고 목숨이나 부지하는 권력에 맞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곁을 지키며 살았기에 그의 삶 자체가 통치의 적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 목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허무하고 고통에 찬 인간의 삶이 숭고하고 존엄하다는 걸 증거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도 요구해야 한다. 박래군을 즉각 내놓으라고 말이다.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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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을 앞으로 편 채 오른팔을 45도 들어올리는 나치식 경례는 고대 로마제국 군대의 인사법에서 유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국가 파시스트당이 로마군단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이 경례 방식을 채용했는데, 뒤이어 독일 나치당이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팔을 힘차게 뻗으며 “하일 히틀러(Heil Hitler·히틀러 만세)!”라고 외치는 장면을 영화 등에서 본 사람이면 참으로 파시스트다운 경례법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매우 위압적이고 선동적인, 그야말로 나치를 상징하는 몸짓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치식 경례법은 나치의 상징 문양인 하켄크로이츠와 더불어 유럽 여러 나라가 불법으로 규정하는 국제적 금기행동이다. 축구 선수가 골을 넣고 나치 경례 세리머니를 해서 구설수에 오르는가 하면 선수 자격이 박탈되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소녀 시절 나치식 경례를 하는 영상이 공개돼 왕실이 발끈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의 영상에는 1933~1934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6~7세이던 때 왕실 별궁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가족과 함께 놀면서 어머니를 따라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 이를 공개한 영국 일간지 ‘더 선’ 지난 18일자에는 동생 마거릿 공주와 당시 왕세자인 삼촌 에드워드 8세(윈저공)가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장면도 함께 실렸다. 영국 왕실이 나치의 망령에 시달리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에드워드 8세는 1937년 히틀러를 직접 만나기도 하는 등 나치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로 하여금 왕위까지 포기하게 했던 ‘세기적 사랑’의 주인공 윌리스 심프슨 부인이 나치의 스파이였다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보고서가 2002년 공개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해리 왕자가 나치 제복을 입고 파티에 참가해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다.


영국 일간 더 선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소녀 때인 1933년 가족과 함께 팔을 들어 나치식 경례를 하는 영상 자료를 찾아 18일 공개했다. _경향DB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소녀 시절 나치식 경례는 왕실 측의 해명대로 “가족이 함께 놀면서 뉴스에서 본 모습을 따라 해본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요란을 떨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의 하켄크로이츠’라는 일본 욱일승천기는 어떤가.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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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건설계획의 전면수정을 발표했다. 2520억엔(2조3000억원)에 이르는 주경기장 건설비용이 과도하다는 비판여론을 수용한 것이다. 물론 이번 수정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골자로 한 안보법안의 강행처리 후 내각 지지율이 37.7%로 추락, 정권에 위기감이 고조되자 민심을 달랠 수 있는 반전 카드로 쓴 것이다.

주 지하다시피 올림픽과 같은 초대형 이벤트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신화는 오래전에 깨졌다. 7월 말 개최지 결정을 앞둔 2022년 동계올림픽의 경우 뮌헨(독일), 오슬로(노르웨이), 스톡홀름(스웨덴) 등이 국민투표 등의 방식을 통해 줄줄이 유치신청을 철회한 것도 그 때문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이런 흐름을 고려, 분산개최 허용을 골자로 한 ‘어젠다 2020’을 내놓은 바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어떨까. 지난해 12월 IOC의 ‘어젠다 2020’ 발표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분산개최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일축했다. 분산개최의 ‘골든타임’마저 흘려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늦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차선책이지만, 비용절감을 위한 대책 마련의 시간은 남아 있다. 이 대목에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아베 총리의 언급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평창에 건립될 예정인 개·폐회식장도 이참에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폐회식, 딱 두 개의 이벤트를 위해 1000억원을 쏟아붓는 게 합리적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강추위 때문에 돔을 올려야 한다면 비용은 더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강릉 같은 곳에서 개·폐회식을 치르는 방안도 고려해봐야 한다. 이미 신설 예정인 아이스하키 경기장의 활용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서울 등 기존 경기장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원천 봉쇄된 탓에 생긴 후유증이다.


'평창동계올림픽분산개최를촉구하는시민모임' 소속 시민단체 회원들이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정부의 분산개최 불가방침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고 있다._경향DB



가 장 많은 고민이 필요한 문제는 역시 올림픽 후의 활용 방안이다. 이 대목에서 2000억원 가까이 절약한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의 예를 되새겨봐야 한다. 이번 주말 평창올림픽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IOC 프로젝트 리뷰가, 이달 말에는 리우데자네이루 IOC 총회가 개최된다. IOC 역시 비용 절감을 최선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충분히 논의할 여지가 있다. 마지막 기회는 남아있다. 아베 총리가 내린 결정을 타산지석으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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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19일 밤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보도자료를 냈다. 해킹 프로그램에 대한 유서를 남기고 숨진 국정원 임모 과장과 관련된 성명이었다. 국정원은 “이 직원은 유서에서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없었다’고 분명히 밝혔다”며 “고인의 죽음으로 증언한 이 유서 내용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언론의 의혹 제기를 “개탄스러운 현상”이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음지에서 일하는’ 게 철칙인 정보기관원들이 공개적으로 집단행동을 하다니, 납득하기 힘든 부적절한 처신이다.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이런 일을 한다는 말인가.

명 내용을 뜯어보면 민주주의 인식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자신들이 ‘사찰이 없다’고 밝혔으니 국민들은 무조건 믿으라는 오만한 태도다. 대공 수사권을 갖고 있는 국정원은 피의자나 피내사자가 혐의를 부인하면 수긍하고 수사·내사를 중단하는가. 둘째, 야당과 언론을 적대·불신의 대상으로 간주해 사실상 협박했다.정원은 “(숨진 임 과장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국가안보의 가치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결과에 대해 책임 또한 따라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의 주인은 세금을 내는 국민이다. 야당과 언론은 국민을 대신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것이다. 지금 국정원은 국민을 상대로 싸우자는 건가. 셋째, 전비(前非)에 대한 자성이 없다. 국정원은 이탈리아 업체 해킹팀으로부터 같은 프로그램을 구입한 35개국 중 자국 정보기관을 매도하기 위해 의혹을 쏟아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35개국 중 상당수가 인권 후진국이라는 점은 논외로 하자. 다만 ‘조용한 나라들’ 정보기관 가운데 대선에 개입하거나 간첩사건 증거를 조작해 기소된 사례가 있는지 묻고 싶다. 해외 언론에서도 ‘한국에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국정원이 과거에도 불법 도청 등의 의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도하는 터다.

국정원 대산 개입 사건 일지_경향DB



국정원은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뚜렷한 조직이다. ‘국정원 직원 일동’의 성명을 자발적 행동으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수뇌부가 ‘지시’했거나 최소한 ‘승인’ 했을 게 분명하다. 앞서 국정원은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전방위적 물타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무단 공개 등을 통해 정치관여를 노골화했다. 이후 국정원장 개인은 교체됐으나 국정원이란 조직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성명서는 국정원 개혁이 왜 절실한지 다시금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익과 조직이기주의를 혼동하는 정보기관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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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방울, 빗방울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고층빌딩이나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간이 오그라들고 다리는 얼어붙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으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이 두려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 한가운데로 던져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빗방울에서 모든 태어나는 것들이 겪는 낙하의 무게와 추락의 두려움을 본다. 정지해 있을 때, 가만히 있을 때 이 무게와 두려움은 그대로 나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움직일 때, 달릴 때, 집중하는 순간에는 사선의 가벼움으로 비껴간다. 낙하의 무게와 추락의 두려움을 가볍고 경쾌하게 비틀기. 수직을 수평으로 어긋나게 하여 일탈을 꿈꾸기. 그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삶과 현실이 바뀌겠는가.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조건, 그 크고 막막한 두려움을 비틀어 놀이로 만들고 노래로 부르면 즐거움이 생기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가볍고 경쾌한 사선을 발견하는 눈썰미가 아름답다. 가뭄이 참 길다. 빗방울, 빗방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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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발표된 박완서 선생의 단편소설 <저문 날의 삽화 4>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경제 호황과 중산층 증가가 맞물린 ‘6월 민주화 항쟁’ 직전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고, 어느 은퇴 부부가 ‘마이카’ 문화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작가 박완서_경향DB



발단은 추석날 성묫길에 만난 조카들이다. 이 은퇴 부부는 어렵게 택시를 잡아타고 선산에 도착했건만, 조카들은 자신들만 쏙 빼놓고선 각각 르망, 스텔라, 프레스토, 맵시를 몰고 먼저 도착해 있었다.


50대 후반의 주부인 주인공은 자가용 하면 으레 ‘사치’를 떠올리는 터라 조카들의 마이카족 행세가 못마땅하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조카의 “차가 곧 자유”라는 말에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민주주의와 연관된 추상적 관념이었던 ‘자유’가 자동차의 쓸모를 설명하는 데 그렇게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유가 그런 손쉬운 지름길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는 승용차 구입만으로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운전면허를 취득해야만 한다. 자동차 운전이 요구하는 신체적 감각을 체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조카의 말에 주인공의 남편도 귀가 번뜩 뜨였는지, 뒤늦게 면허 시험에 도전한다.

그리고 몇 번의 낙방 끝에 합격의 기쁨을 맛보고선 아내의 허락도 없이 중고차 중개인으로부터 “새 차처럼 깨끗한 포니2”를 구입한다.

며칠이 지난 후, 남편은 운전에 자신감이 붙자 주인공을 태우고 시내 나들이에 나선다. 남편의 요구로 앞좌석에 앉은 주인공은 “운전석 앞의 너무 많은 각종 계기와 조정 장치”로 인해 불안하다. 무수히 택시나 승용차를 타왔건만, 이전까지 그녀의 관념 속에서 자동차란 그저 차체와 핸들만 있으면 움직이는 기계 장치에 불과했다.

그런데 남편의 운전석 옆자리에서 바라보는 자동차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많은 계기를 두 손밖에 안 가진 운전자가 조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물론 이런 상념은 그녀가 남편의 운전 실력을 의심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남편이 자신 몰래 면허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배우는 건 아무나 배우지만 면허를 아무나 딸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늙은이 주책 정도로 생각했다.

남편은 타고난 기계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레코드를 사와도 오디오를 조작할 줄 몰라서 노래를 듣지 못했고, “오토매틱이니 리모트 컨트롤이니 하는 건 또 질색이어서 세탁기나 텔레비전도 굳이 수동을 고집”했다. 조작 능력의 결핍은 기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더욱 편리해진 기계일수록 더욱 고장이 잘 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바로 그런 남편이 지금 운전을 하고 있으니, 주인공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복 팔차선의 수많은 차량들 사이를 헤쳐 나가는 남편은 확실히 이전의 남편이 아니다.

그는 “손발로는 운전을 하면서 한편 온몸의 감각과 신경을 외부로 발사해 그 무시무시하게 거한 흐름과 유연한 조화를 도모”하고 있다. 운전석의 기계적 인터페이스가 요구하는 대로 신체적 감각의 재배치를 성취한 현대인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상황 변화에 즉각 반응할 정도로 완벽하게 체화된 수준은 아니다. 도로 주행 내내 온몸이 긴장된 상태이고, 눈앞에서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거침없이 욕이 튀어나온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가 ‘운전하는 시선’이라는 도시 경험의 현대적 윈도를 하나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그 윈도 내부에서 공간은 끊임없이 확장될 것이고 장소와 장소는 계속 연결될 것이며 도시의 지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갱신될 것이고 시간관념 역시 달라질 것이다. 조카가 말했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구비된 것이다.

1987년, ‘자가용을 운전하는 시선’은 ‘아파트 실내를 꾸미는 시선’과 더불어 중산층 소비문화의 필수 감각으로 그렇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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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제정된 공예문화산업진흥법(공진법)은 뒤늦게나마 공예문화산업 진흥을 국가적 책무로 명시했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한다. 수천년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왔으며 국립, 공립, 사립 박물관에서 국보, 보물, 유·무형문화재로 보존하면서도 이것을 만들고 전승·전수하는 현장의 장인들 보호·육성은커녕 방치한 듯한 정책을 펴 온 정부로서도 다소나마 체면은 섰다고 본다. 총 22개 법안을 살펴보면 ‘우수공예품의 지정’ ‘공예문화산업의 융합 및 연계’ ‘지역특화공예품의 육성’ ‘공예품의 품질 향상에 관한 사항’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공예문화’를 예술적 차원보다는 산업적 차원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자칫 ‘공예의 공산품화’로 전락될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우수공예품의 경우 정부에서 ‘지정하고 표식을 부착’해 주겠다는데 청자, 백자, 나전칠기, 금속활자 등에 표식을 한다 하여 과연 그 가치가 얼마나 높아질까 싶다. 즉 우리나라 전통공예품에 2002 FIFA 월드컵 마크를 부착한다면 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


박찬숙 의원_경향DB




필자의 노력으로 2007년 국회에서 박찬숙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통공예산업진흥법’이 상정됐을 때 학계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이 법이 제정되면 현대공예가 죽을 수밖에 없다’며 결사반대했다. 필자는 이를 참으로 한심스러운 작태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전통공예산업진흥법에서는 공예품을 ‘전통을 바탕으로 한 공예’로 못박고 있는데 어찌 현대공예를 죽인단 말인가. 작금의 우리네 공예계 현실을 보면 대한민국의 전통이 변질, 단절되어가고 있으며 국적불명의 서구식, 조악한 동남아 국가의 공산품들이 인사동을 비롯해 전국 관광지 매점에 넘쳐나고 있다. 만약 그 당시에 전통공예산업진흥법이 제정됐더라면 오늘날 이 정도의 난국을 맞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번에 공예 관련 법률안이 국회에서 제정됐으니 시행령을 만들 것인데, 제발 업계 상황에 맞도록 수공예 장인, 작가들의 말을 가슴으로 듣고 반영해 주길 바란다.

즉 수공예 장인들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멋있고 아름다운 명품, 명작을 만들어 세계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선 공예품 제작에 필요한 도구, 원·부자재의 원활한 수급과 제대로 된 전승·전수를 위한 장소 마련 등 기반시설을 제공해야 한다. 또 배우는 사람들을 직원, 직공으로 취급해 4대보험 등 각종 세금을 부과하는데 그들을 수제자, 전수자로 인정해 급여는 못 줄망정 4대보험 등 세금이 부담되어 가르치지 못하는 현실을 적극 해소할 수 있었으면 한다. 더불어 문화부 내에 ‘공예과’를 신설해 이곳에 공예전문가를 특채하고 관련 공공기관에도 공예인들을 채용해 현장 장인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시행령을 만들어 주십사 하고 간곡히 당부한다.

요즘 경제는 날로 악화되고 있다. 이번 공진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이 가득 담긴 공예품이 세계 각국의 박물관, 미술 애호가들의 컬렉션화에 편승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즉 공예문화인을 위한 진흥법이 되어야지 공예문화인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조직을 키우는 법률안의 시행령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이칠용 |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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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최근 판결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언뜻 상식에 대한 도전처럼 보인다. 국정원 직원 김씨가 자기가 작성했다고 검찰에서 인정했던 파일(파일명: 시큐리티)에 대해 재판에서는 ‘지금은 모른다’고 번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파일이 증거에서 제외돼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일반인들도 사기사건 같은 경우 자기가 작성한 문서에 대해 모른다고만 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에서 배제될 수 있는가 궁금해할 만하다.

이 파일은 고등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판결에 매우 중요하다. 고등법원은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확정된 2012년 8월20일 이후부터 선거일에 가까워질수록 단순한 ‘정치글’을 넘어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선거글’들을 더 많이 인터넷에 유포했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했다고 봤고, 이 시큐리티 파일에는 고법의 통계적 판단의 토대 대부분을 이루는 트윗글(총 27만7000여건 중 27만5000여건)들의 원트위터계정 269개가 국정원 직원들 22명(트위터 활동만을 전담한 ‘안보5팀’ 전체)의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피고의 인권을 보호해온 전문법칙 조항을 들어 증거능력을 부인했다. 전문법칙은 쉽게 말하면 피고가 대질할 수 없는 증인의 증언은 피고에게 불공평하므로 유죄증거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이다. 특히 그 증인이 문서인 경우에는 대질 자체가 불가능하니 전문법칙의 적용을 피하려면 문서 작성자가 법정에 나와서 그 문서가 자기가 작성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시큐리티 파일은 그런 식으로만 증거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위 시큐리티 파일은 제3자에게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 김씨가 자기만 접근할 수 있다고 한 메일 계정에서 발견됐다. 그렇다면 그런 파일의 발견 자체는 김씨가 파일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9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원 전 국정원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_강윤중 기자


내가 절도피의자라고 하자. 나의 e메일 계정에서 269곳의 최근 절도피해 장소들과 일치하는 주소들을 적은 문서가 나왔고, 나는 작성자임을 부인하며 누구도 작성자임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하자. 법원이 이런 문서가 나의 계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증거에서 배제하려 할까? 내가 다른 이용자의 존재나 해킹의 가능성을 소명하지 않는 한 반드시 증거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천만개의 주소 중에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절도피해 장소 269곳의 주소만을 수집해 놓은 문서가 내 메일 계정에서 발견됐는데 내가 범죄와 무관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증거에 포함됐을 때 문서의 내용이 진실인지를 다투는 대질을 그 작성자와 하지 못한다고 피고에게 불공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 검사는 문서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변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용의 문서가 피고에게서 발견됐다는 사실만을 증거로 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런데 대법원은 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이런 논리로 인정할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개괄적이고 포괄적인 정황 사실의 존재만으로 시큐리티 파일에 기재된 269개의 트위터 계정 모두를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인정한 것에 다름없다”는 이유다. 하지만 어떤 증거로 어떤 사실을 인정할지 즉, 사실심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개입할 권한이 없음은 대법원이 여러 차례 스스로의 판결로 밝힌 바 있다. 물론 대법원은 사실심을 하겠다기보다 그런 식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전문법칙을 부당하게 우회하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 역시 대법원이 법관의 증거취사의 자유를 이례적으로 과도하게 제약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을 인정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가 전문법칙에 의해 막혀있다면 다른 방식을 통해서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자유심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기꾼들이 작성사실을 당연히 부인하는 수많은 문서들이 형사재판에서 유죄증거로 인정되는 상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법원이 여기서 하나의 방식만이 합당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대법원이 스스로 한정한 자신의 권한을 넘는 것이다.


박경신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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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에 한 번씩 동네의원에서 진료를 받던 노인 환자가 있었다. 특별한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실 삼아 동네의원에 들러 신변잡기를 이야기하다가 돌아가는 환자였다. 그런데 이 환자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다시 동네의원을 찾은 환자에게 의사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노인 환자 왈 “그동안 몸이 아파서 오지 못했습니다”. 노인들의 의료서비스 남용을 풍자한 우스갯소리다.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만, 노인의 의료 이용을 바라보는 사회 일반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노인 의료비 증가 우려가 크다. 최악의 건강보험 재정 파탄을 막으려면, 지금부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공감대도 광범위하다. 그동안 정부와 각급 연구기관들은 노인 의료비에 대한 우려가 조만간 현실화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2011년 국책연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은 노인 의료비 증가로 건강보험 적자가 2015년 5조원, 2020년에는 16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해 건강보험공단 산하 건강보장선진화위원회는 건강보험 적자가 2015년 6조원, 2020년 17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2012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노인 의료비 증가로 인한 건강보험 적자가 2015년 7000억원, 2020년 6조원, 2060년 132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계 결과를 발표했다. 노인 의료비 때문에 나라가 거덜이 날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한 수치들이다.

그러나 2015년 현재 건강보험은 적자는커녕 13조원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몇 해 전의 암울한 전망과는 정반대이다. 정부와 각급 연구기관들은 불과 3~4년 후의 상황조차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니, 이들이 내놓는 십년 후, 수십년 후의 전망을 액면대로 믿기는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 노인의료 대선 공약 이행 현황 _경향DB


노인 1인당 의료비 지출액도 노인 의료비 증가를 우려하는 중요한 근거다. 2001년 노인 1인당 의료비 지출액은 비노인 인구의 3배 수준이었다. 그런데 2013년에는 4배로 증가했다. 가파른 노인 인구 증가세를 고려하면, 우려할 만한 수치이다. 그러나 미, 일, 영, 캐나다 등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노인 1인당 의료비 지출액이 비노인 인구의 4~5배 수준이었다. 노인이 비노인 인구보다 4배가량 의료비를 더 쓰는 것은 비정상적이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 오히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노인의 의료 수요가 충족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노인의 의료비 지출액이 끝없이 증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노인 1인당 의료비 지출액은 2008년 이후 비노인 인구의 4배 수준으로 정체돼 있다.

고령화로 인한 노인 의료비 증가는 우리 사회가 경계해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것도 당면 과제다. 그러나 상상하기도 힘든 천문학적 숫자로 공포를 조장하고, 애먼 노인들을 건강보험 재정이나 축내는 몰지각한 집단인 양 힐난할 일은 아니다. 노인 의료비는 다른 선진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문제다. 전체 국가경제에서 보건의료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못 미치고, 국민 1인당 의료비 지출액도 OECD 평균의 60%대 중반에 불과하다.

노인들의 의료서비스 남용 문제는 실제보다 과장돼 있다. 전체 노인의 절반이 빈곤층이다. 돈이 남아서 이들이 병·의원을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다.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서라도 병·의원에 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노인 열 명 중 한두 명꼴로 의료비 부담 때문에 병이 있어도 치료를 포기하고 있다. 저소득층 노인은 자신이 받은 기초연금의 74%를 의료비로 지출하고 있다. 의료비 부담으로 야기된 노인 관련 사건·사고를 다루는 언론기사도 끊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정부는 노인 건강보장 강화에는 소극적이고, 노인 의료비 관리에는 적극적이다. 지금도 너무 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인 건강보장 수준은 다른 나라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위기를 공감하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복지를 확대하면 나라가 부도난다는 식으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변화를 가로막는 수단이 된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제도의 가장 심각한 위기 요인은 고령화가 아니라 부실한 건강보장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도록 문제를 키우고, 제도 자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엄포를 놓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위기를 키우는 주범이다. 노인에게는 죄가 없다.



이진석 | 서울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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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충격이 계속되는 그리스 사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의 근간에 미묘한 그리고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패권 아래에서 재편된 새로운 세계 질서는 대략 두 가지의 조직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이른바 ‘지구적 협치’였다. 이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다자주의와 민주주의의 원리에 입각해 광범위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초국가적 민주주의를 수립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해 유럽과 아시아의 안보공조 체제를 가동해 러시아와 중국을 적절하게 견제하는 군사적인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둘째,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직 원리로서의 이른바 ‘시장 경제’였다. 지구적 금융 및 자본 시장을 중심으로 해 전 세계의 인적·물적 자원의 자유로운 이동과 조직을 최대한 허용함으로써 번영과 발전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이 두 가지의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하나 된 유럽을 건설하자는 유럽인들의 오랜 이상을 실현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지만, 이는 또한 동유럽 국가들을 아우르고 우크라이나 및 터키와의 관계를 강화해 러시아 및 중동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뻗치는 중요한 지정학적 세력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로존이라는 단일 통화 공동체의 설계도는 재정통합 없이 통화만을 통합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통화주의 화폐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갈 때는 이러한 이면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자유와 연대가 실현되는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을 자랑하였고, 졸지에 유로라는 강력한 세계 통화를 가지게 되면서 경제적인 번영도 구가하는 듯보였다.


3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정상회의가 끝난 뒤 회의장을 빠져나오고 있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왼쪽)와 기자회견에 나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 _경향DB


이미 지난 몇 년간 그리스를 필두로 터져 나온 유럽의 재정 위기는 우선 그러한 통화주의 화폐 이론과 유로화의 설계도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환상이었는가를 낱낱이 보여준 바 있다. 지난 며칠간 숨 가쁘게 진행된 그리스 사태에서 나타난바, 이제 유로존이란 독일의 일방적인 경제적 패권과 그 경제적 요구가 거의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틀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것은, 같은 회원국에 불과한 독일의 재무장관이 노골적으로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축출할 것을 공언했던 점, 그리고 이를 통해 관철시킨 굴욕적인 협상안이 사실상 그리스의 경제적 주권을 박탈해버리는 극단적인 것이라는 점이었다. 유럽인의 연대와 민주적 공동체라는 유럽 프로젝트 본래의 이상은 간데없고, 즉물적인 금융의 논리와 일국 이기주의의 논리, 그리고 어느새 강대국의 위치를 회복해버린 유럽 내 독일의 패권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미래가 대단히 어두워졌고 사실상 끝나버린 게 아니냐는 극단적인 비관론을 피력하고 있다.

그 다음의 반전은 바로 국제통화기금(IMF)이다. 독일과 유럽 측이 스스로의 손실을 감수하고 그리스에 대해 상당한 양의 채무 탕감을 해주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지속될 수 없는 채무’에 돈을 꾸어줄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미국 정부의 입장이 간접적으로 전달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미 1947년에 있었던 미국의 마셜 플랜에서 보듯 그리스는 유라시아 서부 지역의 지정학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거점이며, 나아가 유럽 통합의 흐름이 와해되거나 힘을 잃게 될 때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실로 중차대한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미국은 이러한 독일 주도의 폭력적인 행태에 제동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47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스스로 돈을 내는 대신 유럽의 은행들에 ‘게임값’을 물렸다는 것뿐.

그리스는 작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를 둘러싼 사태의 전개는 이렇게 지난 사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세계 질서의 구성 원리가 근간에서부터 미묘하게 균열과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누가 우리를 막을 것인가’라며 승승장구하던 1990년대식의 신자유주의 담론은 분명히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큰 혼란과 갈등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이 힘든 시련의 한복판에 서게 된 그리스인들이 지혜롭게 스스로의 길을 뚫어나갈 것을 응원하고 염원한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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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는 다행히 그 기세가 누그러들고 있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달 초에는 한화케미칼 울산공장 폐수처리 저장조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현장에서 작업하던 하청업체 직원 6명이 숨지는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의 세월호 사고, 메르스 사태, 공장 폭발사고는 그 성격이 상이하고 또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비교적 자명하게 두 가지 사실을 웅변해준다. 그것은 부재하는 컨트롤타워, 제 역할을 못하는 정치와 리더십이 이처럼 비극적 사건들의 원인이자 근인이면서, 더 나아가 국가의 공공성과 정치적 역량을 능가하는 자본의 힘, 그리고 이러한 삶의 양식이 일상화된 기업사회가 야기하는 병리적 징후들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메르스 사태의 가장 큰 진원지가 되고 있는 삼성서울병원에서 드러나듯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는 위험의 외주화이다. 한 예로 청소, 주차, 시설관리에서 시작해 환자 급식, 이송뿐 아니라 간호 업무에 이르기까지 병원 업무의 상당 부분을 간접고용에 의존하거나 무분별하게 외주화한 대형병원들이 증가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그중에서도 늘 선두를 달리고 있고, 실제로 많은 병원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14일 오전 국회 중동호흡기증후군 대책 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삼성서울병원 송재훈(오른쪽 두번째) 원장이 의원들의 질문 도중 윤순봉 삼성생명공익재단 대표이사와 환자와 유가족들에게 사죄의 인사를 하고 있다_경향DB



오늘날 도처에 존재하는 위험은 이미 일상화되어 큰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가령 행인이 갑자기 싱크 홀 현상과 함께 땅 밑으로 사라지는 사고나 선박의 전복, 비행기 추락, 노후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 등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현존하는 객관적 위험과 이러한 위험에 대한 불안과 감수성의 증대는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라 진단했듯 현대사회의 위험은 도처에 편재한다. 동시에 상당히 많은 사건·사고들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미연에 방지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천재라기보다 인재에 가까운 측면을 지닌다. 세월호와 메르스 역시 과정에서의 대처는 물론 행정적, 정책적, 제도적 차원에서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인재라 볼 수 있다. 이는 세계화된 독점적 자본의 이윤논리, 혹은 기업사회의 민영화 담론이 가져온 위험의 외주화와 관련이 깊다.

지난해부터 울산 현대중공업 공장, 파주 LG디스플레이 공장, 이천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에서 하청업체나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연이어 숨지는 사고나, 메르스 사태를 단순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 탓으로 돌리기엔 그 빈도가 높고 피해도 크다. 또는 개별 기업이나 행위자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 대한 책임을 묻고 윤리의식의 복원 등 개인화한 해법만으로 그 해결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원인을 알면서도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 가령 대기업의 효율성, 글로벌 경쟁력, 혁신, 낙수효과, 지속가능한 성장 등의 그럴듯한 담론들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자본과 국가의 공모관계와 이러한 영향력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된 기업사회의 문제와 문화적 모순을 외면한다면, 그 원인에 대한 합리적 진단은 물론, 유효적절한 대안을 모색하기란 지난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해법이나 정파적 담론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 또한 아닌 듯 보인다. 가령 공익을 위한 정부의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거나, 교육, 복지, 의료, 공항, 철도, 미디어와 같은 공공분야에 공공성을 강화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그러한 제도적 장치의 확충과 실행이 요긴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리 사회의 공론 장에서 이러한 위험에 대한 개방적인 논의, 궁극적으로 더 좋은 사회를 향한 사회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노력과 이러한 문화가 제도와 더불어 확보될 때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좋은 정치와 리더십, 지도자의 태도와 소통 방식, 기업의 존재 근거와 사회적 책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감수성의 확장과도 연결돼 있다.


류웅재 |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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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과 짚신을 파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비가 안 오면 우산 장수 아들을 걱정하고,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을 걱정하던 어머니….

가뭄을 해소해 줄 비를 기다리면서도 집중호우를 염려하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태풍 ‘찬홈’, ‘낭카’ 영향으로 전국의 가뭄 해갈을 기대했다. 특히 중부지방 일부와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마른장마가 계속될 경우 가뭄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해갈이 될 정도만 비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올해는 44년 만에 가장 많은 태풍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됐다. 엘니뇨로 인한 높은 해수면 온도와 강한 바람, 활발한 대기 발산 현상이 태풍 발생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태풍과 국지성 집중호우로 인해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집중호우로 저지대, 농경지는 물론 도심 도로까지 침수되거나, 저수지가 무너지고 지반이 약해진 경사지, 공사장, 노후 건축물들이 빗물을 견디지 못해 붕괴되는 피해가 해마다 발생하고 있다.

풍수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각오로 정부와 지자체는 합심해 예방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반지하주택 침수방지시설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현재까지 17만여 세대의 반지하주택 중 약 40%인 6만9000여 세대에 방수판과 자동펌프와 같은 침수방지시설을 설치했다. 아직까지 설치하지 못한 곳에는 모래주머니와 양수기를 현장에 배치해 만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사전점검을 통해 붕괴될 위험이 있는 시설물이나 빗물이 빠져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정리해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준비했다. 상습침수 도로나 지하철역사는 미리 시설물을 보강하고 관리자를 정해 집중관리하고 피해가 예상될 경우 바로 통제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


불가피하게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더 이상의 피해가 없도록 조치하고, 국민들이 빨리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신속히 추진할 것이다. 우선, 재난지원금 지급기간을 30일에서 7일로 단축해 즉시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재해구호물자와 하천, 산사태 복구를 위한 방재물자를 미리 확보하고 많은 기관들이 피해복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비, 자재, 인력에 대한 협력체계를 마련해 두었다.

무엇보다도 돌발 인명피해 우력지역, 산사태, 급경사지 등 붕괴 우려지역은 특보 발표와 동시 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재난안전선을 설치할 것이다.

호우 피해 예방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참여도 절실하다. 침수피해가 예상되는 지역의 자동차, 가축, 농기계 등은 미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집중호우 시 논의 물꼬를 보러 갔다 소중한 생명을 잃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므로 농작물은 사전에 보호조치를 하고, 호우 중에는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안전하다.

또한 집 주변 배수로를 잘 정비하고, 호우로 무너질 수 있거나 안전을 위협하는 시설물이 있다면 안전신문고 앱이나 홈페이지로 신고를 하여 미리 안전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주길 부탁드린다.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여름철 풍수해 대비 국민행동요령을 온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때 미리 알아보고 체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책 없는 걱정이나 설마가 아니라 선제적이고 꼼꼼하게 대비를 해나간다면 집중호우와 같은 자연현상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박인용 | 국민안전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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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인·허가를 조건으로 뇌물을 받고 위법을 눈감아준 공무원들이 서울시내 25개 구청 중 무려 19개 구청에 걸쳐 있고, 그 인원이 30명이나 된다고 한다. 게다가 서울 모구청의 한 공무원은 10년이 넘는 기간에 1억원이 넘는 돈을 야금야금 챙겨와 빨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사표를 내고 도망다니다 공소시효가 끝나자 바로 자수했다. 그래서 처벌 가능 금액이 580여만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참으로 그 교활함 앞에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적지 않은 지자체들은 공무원들의 공금 횡령, 권한 남용, 알선·청탁, 계약 비리, 금품·향응 수수, 비리 은폐 강요, 공익침해 행위 등을 막기 위해 자체적으로 공무원 행동강령, 청렴강령 등을 제정하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추방 의식 함양, 청렴도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이번에 알려진 공무원 비리 내용을 보면 이 같은 구호가 무색할 지경이다. 비리 공무원들이 서울에 30여명에 불과할 것이라 믿을 수도 없다. 내부에서 이 같은 비리 사실이 감춰지거나 은폐되고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세무비리사건 부천시민대책회의 준비위원회 회원들이 시청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_경향DB



지자체에 감사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지만, 이번 사건에서 보듯 사전 부패 차단은 있으나마나였다. 주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이런 공무원들이 존재하는 한, 공직 사회는 절대 깨끗해지지 않는다. 구호만 거창하고 형식적이고 모호한 반부패 교육이 아니라 공직사회 내부고발 활성화 등 구체적인 방향과 의지가 담긴 청렴교육을 확대하고, 비리 행위의 처벌 수위를 한층 높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반부패 전문 시민단체 등과 협조해 공직기관의 비리를 차단할 수 있는 조례나 규칙을 강화하는 데 실질적인 노력을 강구해야 한다.

주민의 고충보다는 상사의 지시에 손을 비비며 복지부동하거나 공무원 조직의 비리를 외면하고 은폐하는 데 동조하는 자들도 뿌리 뽑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공무원은 국민을 섬기는 자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들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다. 그러나 공무원들 중에는 아직도 자신들을 국민의 상전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이 같은 부패한 일부 공무원들 때문에 성실하게 일하는 공무원까지 싸잡아 욕 먹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이영일 |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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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사람도 개고생, 개야 원래 개고생. 알랭 드 보통 아저씨의 르포 <일의 기쁨과 슬픔>을 보면, 식사시간에 현지인들은 각자 집으로 사라져 생선과 코코넛, 양파를 맛나게 튀겨 먹는단다. 집 떠나 외지에 근무하는 현장일꾼들은 가게에서 산 것들이 고작. 초콜릿이나 비스킷, 케첩을 발라먹는 게 전부. 이건 한마디로 ‘일의 슬픔’이겠다. 집 떠나면 너도나도 집밥이 그리운 것이다.

귀가가 늦은 식구들을 위해 아랫목에 뜨신 밥 한 그릇 파묻고 솜이불로 다뿍 덮고, 별빛동무삼아 동구 밖에서 마중하시던 어머니. 별똥별처럼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지게 되는 어머니 마음. 그런 뜨신 밥을 수도 없이 먹었는데 어머닌 시방 별이 되고. 명왕성 너머 별빛이 되어 저 하늘에 계시는 지금, 나 당신을 잊지 못해 뜨신 밥을 아랫목에 묻고는 한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밥과 된장국, 철따라 달라지는 반찬들. 노릿하게 구운 생선과 내가 농사지은 풋고추 서너 개. 어디 나돌다가 집에 돌아오면 이런 집밥이 행복하다. 자취가 수십년, 나름 셰프요, 한식요리사. 말장난이 아니라 요리조리 잘 해서 먹으니 요리사요, 조리사다. 동네분들이 가져다주신 묵은 김치. 면소재지 부식가게에서 산 두부 한 모. 가끔 눈먼 돈이 생기면 살집이 통통한 생선이나 비계가 절반인 고기 한 토막에 군침이 간다.

매미소리 쨍쨍거리는 여름날 마당에서 밥을 먹기도 하는데 개들이 저도 달라고 컹컹 짖어대. 야생고양이가 이제 막 젖 뗀 아가들을 데리고 찾아오기도 한다. 공깃돌 굴리듯 조심히 던져준 고깃덩어리를 아가들이 먼저 핥는다. 엄마는 조심조심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배가 고픈 만큼 겁도 없지. 이 산골집에서 인간인 나 혼자 먹을 수 있는 건 포도주와 커피뿐이다. 인간이기 위해서 오늘도 집밥을 달게 먹고 하와이에서 누가 사온 귀한 커피콩을 잘게 갈았다. 하루가 정말 후딱 가. 금세 해가 저물고 어둑해졌어. 해는 살구만 해지고 달은 자두만 해진 어느 배부른 여름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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