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서가는 그의 일기장과 비슷하다. 책 좀 읽어왔다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하리라. 그의 서가에는 오랜 시간 숨겨온 그만의 자부심 혹은 부끄러움이 켜켜이 꽂혀있다.

책을 도통 읽지 않는 세상이 되어 책 읽기 자체가 소수만이 향유하는 취미처럼 되어버렸지만, 책 읽는 사람들끼리는 남의 서가를 훔쳐보는 일이 내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것처럼 스릴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에 ‘독서인’ 또는 ‘교양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에게는 자기 서가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이 결사 방어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썩 탐탁한 일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격에 관계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번쩍이는 전집류와 세계사상서가 인테리어처럼 말끔하게 꽂혀있는 서가와, 긴 세월에 걸쳐 사들인 책들이 서로를 압사시키며 책들의 재앙을 빚어내고 있는 서가의 차이를 무슨 감별사처럼 가려내곤 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출판인의 서가는 별 볼일이 없다. 겹겹이 꽂힌 수천권 책들로 재난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이곳저곳에서 기증받은 책들, 기획 참고용으로 구입한 책들, 그리고 개인적 관심이나 오래전의 전공과 관련된 책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 특징도 개성도 찾아보기 힘드니 호기심은 삼가 주시기를. 다만 급히 찾아보아야 할 책은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는 장서가들의 흔한 고충이 비슷할 뿐이다. 이런 일에 지친 어떤 독서가는 책들을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으로 구분했지만, 책들의 재난을 겪으면서도 꼭 남겨두어야 할 책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차라리 ‘나만의 책 10권’ 하는 식으로 소중히 여기는 책들을 꼽아보는 게 나을지 모른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각 언론들, 기관들, 서점들은 ‘올해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그해의 주목할 만한 책을 10여권 선정해 발표한다. 한 해에 출간되는 신간이 4만5000여종에 이르니 거기 뽑힌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다. 물론 책이 조금 더 팔리는 것은 당연히 따르는 수확인지라, 출판인들은 자사의 책이 들어가나 싶어 목록을 예의 주시한다. 하지만 출판인에 앞서 한 사람의 독서가로서는 내가 읽지 않은 책이거나 읽을 가능성이 없는 책인 바에야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올해 개인적으로 읽은 책을 10권쯤 꼽아보면 어떨까? 서가를 보여주는 마음으로 내가 올해 읽은 책을 실토하면 이러하다.

가까운 출판인이자 저자인 장인용의 <주나라와 조선>은 꽤 흥미로웠다. 정도전의 조선 설계가 주나라의 예악(禮樂)에서 왔고, 오늘날 한국인의 일상에까지 일정 정도 배어있음을 다시금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서북 기독교에 뿌리를 둔 학병 세대와 양심적 우익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얼개를 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 책이었다. 이현재의 <여성혐오 그 후,―우리가 만난 비체들>에서는 여성이 주체도 객체도 아닌 ‘비체’로 존재한다는 페미니즘의 한 시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기쁨이 있었다.

해리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아주 작은 책자는 10여년 전 미국에서 나왔을 때 각광을 받았던 책인데 뒤늦게 번역된 것이 반가웠다. 우리가 흔히 듣는 정치인이나 전문가들의 말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사실 판단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상황을 조작하기 위한 ‘개소리’라는 것을 맹렬히 폭로하는 책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는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보다 한 걸음 앞서 나온 책인데, 일본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름없이, 반지성주의의 뿌리가 어디에 있고 특징과 현상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보여주는 책이었다. 걸핏하면 나오는 음모론, 특정인에 대한 조리돌림, 페미니즘이나 진보언론에 대한 혐오 등등 우리의 반지성적 경향을 다시금 살펴보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강상중의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도 파시즘을 비롯한 ‘대중의 악’을 여러 측면에서 짚어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가진 책이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SF소설 <킨>은 최고였다. 흑인여성인 주인공이 노예해방 이전으로 타임 슬립하여 겪는 사건들은 그저 정치적 의미만이 아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사색하게 한 명작이었다. 낄낄대며 읽은 <야밤의 공대생 만화>, 파시즘 시대의 일면을 선명하게 그려준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개인적으로 기념하며 읽은 뤼시앵 페브르의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이 기억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애정하는 아도르노의 책 <미니마 모랄리아>는 작년부터 읽었는데 아직도 마치지 못한 난해한 책으로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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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 열기’가 뭐지?”

지난 7일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단어가 각종 포털과 SNS를 뜨겁게 달궜다. ‘옵션 열기’란 포털 네이버의 기사 댓글 작성창에서 자신이 쓴 댓글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닉네임 옆 부분까지 마우스로 잘못 복사할 경우 자동으로 붙는 문구다. 이를 두고 김어준씨가 7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옵션 열기’란 문구가 붙은 댓글들은 여전히 잔존하는 댓글부대가 작성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면서 이슈로 떠올랐다. ‘옵션 열기’는 누군가 조직적으로 댓글을 생산하기 위해 글을 복사하고 붙여넣기를 하다 나온 정황이라는 얘기다.

그의 주장은 실제 누리꾼들이 ‘옵션 열기’란 키워드로 트위터, 포털 댓글 등을 검색해 해당되는 글들을 다수 찾아내며 신빙성을 얻었다. 누리꾼들이 찾아낸 ‘옵션 열기’ 글은 최근부터 2015년까지 광범위했다. 대부분은 특정 정치인을 감싸고 경쟁자를 폄훼하는 내용이었다. ‘아동수당’ 등 특정 정치인이 내건 공약이나 정책을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한 트위터 사용자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옵션 열기’ 글을 꾸준히 올리는 계정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옵션 열기’ 댓글이 김씨의 주장대로 특정 프로그램을 사용한 조직적인 댓글부대의 소행이란 증거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 트위터 이용자(@ea**)는 “단순히 (텍스트를) 복사하고 붙여넣기하는 과정에서 따라붙을 수 있는 문구인데 이를 갖고 댓글부대가 있다고 속단하긴 이르다”고 말했다. 한 트위터 사용자는 ‘뻔한’ 실수에 대해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 이용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렇다고 무조건 댓글부대로 몰긴 어렵다”고 말했다.

‘옵션 열기’를 쳐다보는 눈이 많아지자 해당 문구가 붙은 글들이 갑자기 다수 삭제되기도 했다. 이제는 포털에서 전혀 정치적인 사안과 관련 없는 글 앞머리에 고의로 ‘옵션 열기’란 단어를 붙여넣은 댓글들이 등장하며 하나의 ‘인터넷 놀이’가 되고 있다. 한 트위터 사용자(@a7**)는 “‘옵션 열기’로 엮인 이 조직의 존재 여부와 (…) 허술함은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포인트”라고 말했다.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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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그리고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 주장하는 모든 말은 항상 ‘논란’이나 ‘잡음’으로 취급되어 왔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재가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사회가 아니라는 말, 보편적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배제와 차별을 거론하는 말을 ‘잡음’으로 취급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특정 집단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주간 유례없는 빈도수로 한국 언론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기사에 올려왔는데, 그 결과 예외 없이 페미니즘은 ‘잡음’이 되어가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배우 유아인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상에서 했던 발언이었다. 페미니스트가 연일 검색어 상위권 순위에 올랐고, 상당수의 커뮤니티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공간에서 유아인의 발언과 이에 대한 반론, 변론, 보도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논쟁 소재가 되었다. 그의 발언에 대해 새삼스럽게 갑론을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결국 이 논쟁 이후에, 여성과 소수자가 경험했던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단지 피해의식일 뿐이라고 규정되었고, 창작물에 대해 윤리적 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검열이라는 낙인 속에 지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참담한 결과는 힙합 분야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힙합 분야에서 꾸준히 성차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비하 표현 문제를 제기해 온 레이블 데이즈 얼라이브에 대해 힙합 커뮤니티 수용자들은 이들을 ‘가짜’ 페미니즘을 하는 자들로 규정했다. 레이블 VMC는 이제까지 행해진 한국 힙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검열이고 참견이라면서 이제 힙합은 예술의 자유를 더 누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사실 한국 힙합은 혐오 표현 문제로 자주 비판 대상에 올랐다. 이는 창작의 윤리를 다시 한번 재고해 보자는 요청이었다. 이 요청에 생산자와 수용자가 함께 고민하여 답을 낼 기회가 사라진 것 같다. 이제 힙합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모두 검열이며, 특히 ‘테러리즘’에 불과한 ‘가짜’ 페미니즘의 선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존의 문제제기 자체를 무력화하는 움직임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과거 팟캐스트에서 한 비하, 차별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숙한 바 있는 개그맨 장동민은 코미디를 하려고 해도 무언가를 비하했다는 비판이 심하게 들어와서 코미디를 할 수 없다는 인터뷰를 남겼다. 

하지만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없는 자는 다른 자들이다. 특정 여성 커뮤니티에서 활동했고 유아인을 비난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SBS의 한 여성 방송작가가 하차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판을 ‘검열’이라고 규정하면서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동조하는 자를 검열하고 배제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무언가를 비하했다고 비판해온 것이 맞다. 그리고 그 비판은 우리가 그러한 비하와 차별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다시금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가사를 쓰는 힙합 음악이, 다른 방식의 코미디가 가능한 현재와 미래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비판을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검열로 축소하면서 창작의 윤리에 대한 재고 요청 자체를 문제시하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검열의 효과, 즉 표현이나 예술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말할 수 있는 자유이지 비판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비판을 검열과 동일시하게 되면, 그것을 ‘폭도의 어리석은 행위’로 치부하게 되면, 우리는 창작물의 윤리에 대해 토론할 공간을 잃게 된다.

이렇게 비판이 검열로 등치되는 과정에서 언론 보도가 끼친 해악이 크다.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형적인 경마 저널리즘식 보도 양상을 택했다. 관련된 사람들의 모든 발언을 실시간으로 기사화했다. 사안을 유아인 대 한서희, 유아인 대 의사, 유아인 대 평론가 등 경쟁 구도로 부각시켰다. 누가 누구에게 승리했는가? 항복했는가? 누가 참전했는가?와 같은 전쟁 중계와 같은 보도 방식이 결국은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을 보도하는 방식은 뉴스 독자들의 댓글을 모으기 위한 자극에 집중되었다. 어서 댓글 전쟁에 참여하라, 누구를 편들고 다른 편을 욕하라, 싸움을 확산시키고 더 많은 댓글을 달라고 독려하는 방식이었다. 원래 편이 나뉘어 있었다고 해도 언론이 편 가르기를 자극하고 극화하여 그것을 수입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논쟁의 핵심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고 숙의의 장을 마련하는 기사는 적었다. 여전히 페미니즘이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대해서 알기는 어렵다. 그 비판이 검열이라는 누군가의 주장이 중계되었을 뿐이다. 

언론이 공적 책임을 자각하고 있다면, 아직 그런 게 남아있다면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는” 개별 칼럼을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이제까지 진행된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정리하고 설명하여 논의의 장을 열 수 있는 보도해야 했다. 아무리 온라인 공간이 자신의 말만을 되풀이하는 확증편향의 공간이 되었다고 해도, 오히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갈수록, 언론은 창작의 윤리와 표현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목소리들을 만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김수아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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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SNS, 유아인

문재인 대통령이 13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중국을 국빈 방문한다. 12월이 내뿜는 스산한 냉기(冷氣)처럼 한반도 위기 정세를 감안하면 문 대통령의 방중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 정상회담이 양국 관계 개선 흐름을 강화, 발전시켜나가는 데 변곡점이 될지도 불투명하다. 표면적 이유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때문에 준공된 지 25년이 지난 ‘한·중수교 댐’의 안전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중국 환구시보는 지난 한·중 외교장관 회담(11·22)에서 “왕이 외교부장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3불(사드 추가 배치,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 참여, 한·미·일 안보협력의 군사동맹 반대)1한(限)’을 언급했다”며 “1한은 이미 배치된 사드 시스템 사용을 제한해 중국의 전략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도(11·23)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였지만 중국은 분명 오만하고 불손해졌다. 중국의 이렇듯 교묘한 위압은 가까스로 봉합한 사드 실밥이 언제든지 터질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런저런 이유 등으로 중국에 대해 드러내놓고 비판은 하지 않아도 중국의 도가 지나치다는 데는 중국 전문가들도 사석에서는 동의하고 있다. 여하튼 중국이 경제력을 앞세워 한국에 영향력을 더욱 깊게 행사하려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나아가 중국이 경제굴기를 통해 이제는 미국을 밀어내고 지역 패권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다.

중국은 먼저 동북아지역에서 계산을 끝냈다. 시진핑은 고립주의 성향이 강한 트럼프의 등장을 기점으로 70년 이상 미국이 사실상 지배해 온 동북아시아 지역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두기 위해 공세적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중국은 한국을 미국의 자장(磁場) 내에 계속 둔 채 동북아시아를 ‘관할’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 우선 한국만이라도 미국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한다.

이 점에서 사드가 중국이 한국에 수시로 시비를 걸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됐다. “코끼리는 상아(象牙)가 있어 잡혀서 쓰러진다”는 고사처럼 중국이 한국의 사드 상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한국에 ‘패권유지 비용’(미군 주둔 방위비, 무역적자 해소 등) 분담 확대 요구를 중단할 리도 만무하다.

중국 전략가들은 한·미동맹의 약한 고리(균형외교, 전시작전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 자주국방, 반미감정 등)를 파고들어 군사동맹의 와해를 꾀하고 있다. 이들은 한번 구겨진 동맹을 온전하게 펴는 것이 불가능함을 벌써 간파했다. 게다가 트럼프는 한·미동맹이 왜 필요한지를 이해도 못하는 대통령이 아닌가. 그럼에도 한국의 주류인 반공주의자들은 여전히 ‘나무(중국)에 앉은 새(한국)는 가지가 부러질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를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한·미동맹)를 더 믿기 때문이다’라는 사고체계를 굳게 지니고 있다. 정상회담만으로 한반도 위기가 시원하게 해소될 수는 없을 테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전쟁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와 안정으로 가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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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게 잘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부족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날들을 배고픔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각종 일로 온몸 성한 곳이 없는데

이상하다 물만 먹어도 살이 오른다

 

밥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비굴하게 밥을 번 적은 없다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보다 술값을 더 지출한 게 사실이지만

큰맘 먹고 하는 외식도

고작해야 자장면이고 특별히 탕수육을 곁들인 날은

밤새 설사로 고생했다

 

굶은 기억이 살찌게 하나

슬픔이 배부르게 하나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얼마나 허겁지겁 살아냈는지

잊는다는 것이 병을 주었나

 

참는 것이 밥이었고

견디는 일이 국이었고

울며 걷던 길은 반찬으로 보였는데

배 나온 사람들을 보면

부황과 간경화로 먼저 간 식구들이 떠오른다

저, 좁은 땅 다 파먹고 말없이 누워있는

슬픈 무덤 덩어리들

 - 유용주(1960~)

 

밥뿐만 아니라 슬픔도 허기도 가난도 많이 먹으면 배가 나오는구나. 상처도 괴로움도 마음에 자꾸 쌓이면, 밥을 적게 먹어도, 밥 대신 물만 먹어도, 저절로 부어서 불편한 살이 되는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일들을 밥 먹듯이 참고 견디며 안으로 삭였는데도, 먹고 놀기만 해서 살찌고 배가 나왔다는 오해를 견뎌야 하는구나. 살도 배도 입이 없어 말은 못해도 할 말은 참 많을 것이다. 그 말을 생전에 다 하지 못하고 영영 떠난 이들의 무덤은 생전에 나왔던 배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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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세계인권선언 제1조)

지금으로부터 69년 전, 1948년 12월10일 프랑스 파리의 샤이요궁(Palais de Chaillot)에 모인 각 나라의 대표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희생과 전 세계에 만연한 인권침해에 대해 반성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존엄과 권리의 최소한을 선언했다. ‘세계인권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2년 뒤인 1950년에 열린 제5차 유엔총회에서 매년 12월10일을 세계인권선언 선포일로 기념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에서는 이날을 ‘세계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짧은 전문과 30개 조항의 본문으로 이루어진 ‘세계인권선언’은 꼭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41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유엔총회 문서 중에 가장 많이 번역된 문서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도 70년 전이라는 긴 시간이 부끄러울 만큼 2017년 한국에서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

지난 8일 한국에서도 세계인권선언 69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축사에서 “인류 역사는 인권 신장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인권 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개의 사건으로 18세기 시민혁명과 20세기의 세계인권선언을 꼽았다. 특히, 세계인권선언은 강제력을 갖지 못한 선언이지만, “역사에서는 선언 이상의 강력한 기여를 해왔”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인권을 우선하는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서 인권 사각지대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과제들 중 단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나는 보편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은 세계인권선언에서 선언한 ‘존엄한 인간’과 우리 헌법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생활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을 금지·예방하고 불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법이다. 독일의 평등대우에 관한 법률, 캐나다의 인권법, 미국의 민권법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일반적 차별금지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고 고령자에 대해서 고용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체류 외국인의 숫자가 200만을 넘어섰고, 성(性)소수자에 대한 국제적 인권 수준이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영역과 제한된 분야를 넘어서 모든 생활영역에서 인간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보편적 차별금지법 제정의 가장 큰 필요성이다.

국제인권기구의 권고도 매년 반복되고 있다. 2014년 방한했던 무투마 루티에레 유엔 인종차별 특별보고관은 개인 간에 발생하는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 등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고, 2017년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도 2009년에 이어 거듭 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지난달 있었던 한국의 국가별인권상황정기검토(UPR) 제3차 심의에서도 미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가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과 감각적 오독(誤讀)이 심각하다. 동성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개선하면 동성애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성(性)적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할 뿐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해서 부당한 차별과 혐오를 통해서라도 그 존재의 발현을 막아야 한다는 빈약한 인권 수준을 보여준다.

69년 전, 우리가 선언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해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지혜로움으로 세계인권선언의 마지막 조항을 끝맺었던 선배들의 통찰을 세계인권의 날을 기념해 곱씹어볼 일이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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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전국의 수험생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2018학년도 수능의 채점결과가 발표된다. 이번 수능은 다행스럽게도 몇 년 만에 출제오류가 없었던 무결점 수능이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개월에 걸친 원장 공백에도 불구하고 부원장을 중심으로 수능 준비를 잘했고, 더군다나 포항지역 지진으로 수능이 일주일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도 큰 사고 없이 수능을 마무리했다. 관련 업계의 한 사람으로 평가원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한다.

고마움을 표함과 동시에 평가원에 몇 가지 어려운 요청을 하고자 한다. 우선 10여년 전 시행했던 수능 가채점을 다시 고려해달라는 것이다. 이른바 ‘평가원 공식 가채점’이다. 그래서 수험생들이 대학별고사를 보러가기 전에 예상 등급컷을 발표해주었으면 한다. 현재는 수능 성적이 발표되기 전 대학별고사가 실시되고 있어 수능 최저 등급의 충족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수험생들은 사교육 기관들이 내놓는 가채점 등급에만 의존하여 대학별고사의 응시여부를 판단하고 있는 상황이다. 평가원이 가채점을 함으로써 이런 불투명한 일을 막자는 것이다. 사교육 기관들은 시험 당일 오전부터 소속 강사들의 난이도 평가를 바탕으로 하여 체감 등급컷을 발표한 후에, 시험 종료 후에는 각 기관의 채점서비스에 점수를 입력한 학생들의 성적 데이터를 가공하여 예상 등급컷을 추정 발표한다. 이것을 보고 수험생들은 자신의 대략적인 전국 위치와 정시모집 지원권, 수능 최저 등급 충족 여부를 판단하여 수시모집 대학별고사의 참가 여부를 결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사교육 기관 등급컷이 기관마다 다르고 정확도도 대략 60%대에 그친다는 것이다. 어느 때는 거의 맞히지만 어느 때는 빗나가기도 한다. 이런 불확실한 데이터를 보고 수험생들이 큰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과거 필자가 속한 연구소에서는 전국 수능모의고사를 시행한 바가 있는데 10만~20만명의 답안지를 수거해 채점하고 성적표를 발송하기까지 대략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니 현재 평가원의 시스템이면 수만명의 표본 채점은 하루, 50여만명의 전수 채점도 3~4일이면 가능하리라고 본다. 하여 평가원이 1차로 채점한 것임을 전제로 발표하고 그것을 토대로 수험생들이 대학별고사에 응시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와 동시에 내년부터라도 대학교육협의회는 대학별고사 시기를 평가원 1차 채점 결과 고지 이후로 미루는 조치도 병행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 목요일 수능 실시, 월요일 가채점 결과 발표, 화요일부터 대학별고사 실시, 이런 시간표가 어떤가. 평가원 발표 때까지 사교육 기관들도 발표를 자제하고 말이다. 물론 대학별고사장 확보 등 대학의 어려운 문제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평가원은 최종 결과와 달랐을 때의 파장, 이를테면 법적인 손배소 문제 등을 걱정하겠지만 전수 채점은 정답이 정정되지 않는 한 실제와 다를 리 없고, 이미 수험생들도 1차 채점임을 알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 2002, 2003년에도 평가원이 서울과 경기지역 3개 시험지구 수험생 4만여명을 대상으로 표본 채점 작업을 벌여 추정치를 발표한 적이 있었고 실제와는 다소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국가기관이 틀린 수치를 발표했다는 논란이 없지 않았기에 지금도 평가원의 의견은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표본 채점과 전수 채점은 다르고, 가채점보다는 1차 채점이라는 표현이 좋을 것이다.

그 외에도 신임 평가원장의 취임으로 약간의 변화가 예상되는 평가원에 더 요청하고 싶은 것이 있다. 수능 시험지를 수험생이 가져가게 해주고, 출제진이 작성한 모범 해설지, 문항별 반응률, 전국 수험생 총점누적분포표 등을 공개하는 것 등이다. 이런 요청에 대해 그간 평가원이 나름대로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국민 중심의 행정을 편다고 하는 현 정부의 취지대로 신임 원장은 용기를 내 실행해주기 바란다.

<이만기 |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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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떠나온 옛 연인을 떠올리듯 카탈루냐를 생각한다. 그곳은 스페인에 속해 있지만, 스페인과 너무도 기질적으로 달랐던, 무엇보다 스페인 제국이 저지른 정복의 역사와 투우라는 잔인한 스포츠를 싫어했던, 뼛속 깊이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각인된, 도로 표지판에 카탈루냐어를 영어나 스페인어보다 먼저 쓸 만큼 자기만의 언어와 문화에 자부심이 컸던, 그 때문에 오랜 세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던 스페인 속의 비(非)스페인이라는 걸 이방인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각별한 여행지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시적이고 낭만적이고 유쾌하게 이방인에게 관대하던지, 또 건축과 공간을 다루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그 감각은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안토니오 가우디와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의 후예들답게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들이 없는 듯 저마다 얼마나 사랑스럽게 예술적이던지(정말이지 카탈루냐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 주어진 하나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남달랐다)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카탈루냐 구석구석 내딛는 내 발소리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나는 그곳에 흠뻑 빠져 있었고 그곳에 속해 있는 나 자신을 좋아했다. 물론 내가 아는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와 그 일부 외곽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서 다른 곳 어디로도 가고 싶지가 않았다. 떠나기가 싫어서 두 달 하고도 하루를 살고 불법체류자로 분류되는 날이 되어서야 배를 타고 바르셀로나를 떠나 로마로 갔을 정도다.

그러다 몰타 여행 중에 만난 스페인 친구 ‘이시’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발렌시아를 거쳐 아라곤 지역으로 갔다. 아라곤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발렌시아의 어느 광장에서 느닷없이 털실과 바늘을 사다가 뜨개질을 시작했는데 그 별거 아닌 시간이 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했던 순간으로 두고두고 떠오르는지 생각했다. 어느 미용실 밖에서 아무 생각 없이 뚱보 여자가 이웃집 여자의 머리를 매만지는 걸 보며 ‘발렌시아의 미용사’로 사는 삶도 괜찮겠구나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무엇보다 험난하고 장엄한 아라곤의 산맥과 카스티야의 텅 빈 들판이 가진 무한한 매력을 스페인을 여행하는 자로서 경험할 수 있는 걸 보기 드문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게 됐다.

그때 알았다. 스페인의 태양이 뜨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다 가볼 만하다는 걸. 가볼 만한 정도가 아니라 어디나 다 저마다 가진 고유의 매력으로 반짝거린다는 걸. 가장 스페인다운 도시라는 세비아, 그라나다, 코르도바, 말라가 같은 안달루시아 지방(세비아에서 작가 수업을 시작한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표현대로 ‘너무 부드럽고 관능적이어서 통속적이기까지’ 한 지역색)은 물론 리스본행 야간 열차를 타기 위해 잠깐 들른 수도 마드리드까지 모두 말이다.

그 때문에 오랜 세월 독립을 열망하며 스페인 중앙정부와 싸우는 카탈루냐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그들의 독립 의지를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카탈루냐가 떨어져 나가면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상당 부분 그에 의지하던 스페인의 다른 지역은 어떻게 될까 동시에 걱정하게 된다.

그 때문일까? 중앙정부의 체포영장을 피해 벨기에로 도망간 바르셀로나 주지사 소식이나 그 이후 한껏 시들해졌다는 ‘카탈루냐의 독립 열기’에 대한 뉴스를 지면으로 접하면 실망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안도하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처럼 역사상 유례 없는 재정위기 속에서 분리 갈등까지 심화된 스페인을 응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에게 인생의 이런저런 짐들을 내려놓고 천국에 가까운 곳에서 그저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몸안의 독소가 빠져나가는 걸 체험하게 되는 ‘느림과 치유의 여행 버라이어티’ tvN의 <윤식당>이 스페인으로 갔다는 소식이다.

카나리아제도의 테네리페섬이라고 한다. 최근 한 인스타그램 블로거에 의해 공개된 뉴스에 의하면 나영석 사단의 <윤식당2>의 팀은 지금 한창 그곳에서 촬영 중이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을 상상해 본다. ‘테네리페섬 바닷가에 있는 매력적인 작은 도시’.

상상해 보건대 <윤식당>의 멤버들은 지속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폐기된 스페인의 오래된 낮잠(시에스타) 문화를 부활시켜 발리에서보다 더 여유를 부리고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저녁 있는 삶은 기본이고 하루 다섯 번의 끼니를 즐기던 이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곳은 음악과 춤, 미식, 격의 없는 대화를 사랑하는 멋진 낭만주의자들의 땅이다.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지 않는 적당한 노동과 여유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삶은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화산 폭발을 걱정해야 하는 발리는 물론 이래저래 심란하기 짝이 없는 나라 스페인 안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윤식당>은 이번에도 유유자적 행복하게 보여줄 것이다. 게다가 당신들에게는 아무리 봐도 결코 싫증 나지 않게 우리를 품어 주는 위대한 자연과 문화유산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스페인이여, 카탈란이여! 힘내라!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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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윤식당

최근에 영국 공영방송 BBC는 한국이 인공지능산업에 가장 최적의 문화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곰이 인간이 되고 자연물 등에서도 초인간적인 능력이 있다는 전통 무속신앙이 이를 지원하는 기초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비아냥거림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국이 좀 더 인공지능에 친화적인 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다만 최근 한 세미나의 인공지능에 관한 발제에서 너무 윤리적인 문제를 집중부각한 사례를 보고 그 방향성에 대하여 간단하게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인공지능 등에 있어서 윤리적인 문제가 자주 화두가 되는 것은 불가피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논의의 중심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 문제를 너무 추상화하거나 이론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이 문제도 인공지능의 산업진흥과 지원측면에서, 좀 더 실질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보행자나 차내 승객 중 어느 쪽이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정하여 이런 경우에 어떠한 행동을 하여야 할 것인지가 통상적으로 자주 나오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인간에게도 어려운 문제이고 실제 사건화되었을 경우에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나라마다 그리고 담당 판사마다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해답이 결코 명쾌하지 않은 사안을 가지고 이에 대한 답을 인공지능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려운 질문에 다소 현학적인 토의를 즐기는 분위기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물론 중요한 문제임은 틀림이 없고 이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에서의 최적의 해결방안은 일반화하기가 어려운 부분이고 또한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한 답을 인공지능에게 지금단계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고 그 실효성도 없다고 본다. 그리고 해당 사정하에서의 결정 및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심사는 사법부의 사후 판단사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단계에서 기댈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키워드는 합리성일 것이다. 물론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개별해답은 불가능하고 또한 의미가 없다. 따라서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최적의 합리성을 추구하도록 그 방향성을 제시하면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철학적인 연구는 인간과 인공지능 모두에게 필요한 부분이지 결코 인공지능에 한정된 윤리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양산화됨으로써 그간 숨어 있던 철학적 및 인본적인 근본 의문이 표면화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도 당장 급한 사항은 이런 경우에 인공지능에 대하여 어떠한 조건하에서 인공지능의 행동에 면제부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해답을 찾는 방향에서 이 논의가 실질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 현학적인 논의에 머무른다면 이러한 논의 자체가 잘못하면 인공지능산업발전 자체에 불필요한 직간접적인 장애로 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를 해결하도록 노력할 시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인공지능산업의 육성에 최우선을 두고 이에 방해되거나 걸림돌이 되는 각종 법제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하여 좀 더 애정을 가지고 긍정적이고 친화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재산관련법에 있어서도 일본과 같이 인공지능의 창작물도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게 하고, 인공지능의 특성상 자료의 수집, 분석 및 활용단계에서의 저작권법 위반의 소지가 있는 사항에 대하여도 한정된 범위 내에서 특칙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 관련 법제도와 관련 사회인프라가 촉진되어 한국이 명실상부한 인공지능분야의 국제적인 허브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를 최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범국가적인 역량이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김승열 변호사·카이스트 겸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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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국회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투표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도 11월 말 논의를 시작했죠. 일정이 빠듯하지만, 개헌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커녕 특위 내 논의마저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개헌의 주요 주제인 정부 형태는 정치 전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기본적 이해조차 부족하죠. 어떤 형태가 있는지, 그 효과는 어떤지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 국민투표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과 5년 단임으로 요약할 수 있는 현 체제의 수명이 다했다는 공감은 있습니다. 재선 걱정이 없는 대통령이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도 막기 힘들다는 것을 박근혜가 몸소 보여줬죠. 문제는 대안입니다. 지난 대선 전 문재인 후보는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제시했고 안철수 후보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했습니다. 홍준표 후보는 이 둘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주장했죠. 문재인 대통령의 복안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권형 대통령제의 면모를 포함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분권형 대통령제가 개헌 후 정부 형태의 큰 뼈대가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원집정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 제도의 핵심은 국민이 직접 선거하는 대통령의 존재,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의회에 책임을 지는 총리와 정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정부 권력을 대통령과 총리가 나누고 동시에 의회의 행정부 견제를 강화할 길을 열어 놓았죠. 흔히 대통령은 국가원수직과 외교·안보·국방 정책 등을 담당하며, 총리는 내정을 맡는 형태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온전히 맞지도 않습니다.

우선 분권이라는 말이 문제입니다. 이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를 보면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배분은 정치적 배분이지 헌법적 강제력은 거의 없으니까요. 정치적 사정에 따라 분권이 일어나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죠. 여당이 총선에서 패하면 분권이 가능합니다. 우선 대통령의 총리 지명이 야당 주도의 의회에서 통과가 안됩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의회를 장악한 야당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요. 복잡한 정치적 타협이 이어지고 이에 따라 행정부 권한도 나눠집니다. 하지만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대통령이 되고 그 여당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는 경우, 대통령은 자기 수하를 총리로 지명하고 의회는 이를 수용합니다. 그러면 대통령은 행정부를 오롯이 지휘하고 의회마저 휘두를 수 있습니다. 분권은커녕 거의 독재에 가까운 대통령이 나올 수 있죠. 오늘날 러시아는 좋은 예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총리를 압도하는, 제왕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즉 분권형 대통령제는 분권을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 반대죠. 그러므로 대통령 권력을 축소한다는 오늘날 한국의 시대 요구와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은 오늘날과 비슷한 정부 형태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되고 있습니다(67조 1항). 정부를 주도하는 총리 또한 존재합니다. 그리고 총리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점도 명시돼 있습니다(86조). 국회가 총리 해임을 할 수는 없지만 건의할 수는 있습니다(63조). 즉 최소한 제도적으로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우리는 이미 갖고 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현 제도로도 정치적 조건만 맞으면 분권은 가능합니다. 실제로 김종필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의 대주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후보 시절부터 ‘책임총리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죠.

결론적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은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데 맞지 않고 굳이 필요치도 않습니다. 이를 대단한 개혁인 양 말하는 것이 의아할 수밖에요. 의아함과 의심을 해소할 활발한 개헌 논의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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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산맥의 케이블카, 아마존강의 배, 그리고 북극의 눈썰매에서도 구글카메라는 동선을 포착하고 있다. 사막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낙타의 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지도를 작성하기 위해서 전 세계 오지에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지도를 만들고 있다. “무슨 생각해?” 구글의 텅 빈 첫화면의 빈 사각 입력창을 마주하면 우리는 한없이 솔직해진다. 어떤 친구에게도 내놓을 수 없는 문제를 털어놓기도 한다. 은밀하고 궁금한 고민과 고백을 검색창에 입력한다. 구글은 이 모든 검색어를 데이터베이스에 빠짐없이 저장하고 있다. 세계인의 집단 자아저장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구글은 믿어도 되는 친구일까.

 

 

구글이 한번 움직이면 전 세계가 진동할 정도로 구글은 미래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체제가 되어가고 있다. 어떤 텍스트가 읽힐지 결정하기도 하고, 얼마나 빨리 검색될지도 그들이 결정한다. 기업의 생존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그들은 검색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등 모든 산업을 주도해나가고 있다. 현재 구글만큼 돈과 기술, 권력 정보가 집중된 기업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구글이 돈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 정보까지 수집하는 정보거머리가 되어가는 것은 실망감을 넘어 충격적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구글에 대한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배신감마저 느끼게 한다.

구글이 사용자가 위치 서비스를 의식적으로 끈 이후에도 비밀리에 위치 데이터를 전송했다는 사실이 IT 매체 쿼츠에 의해 폭로됐다. 구글의 운영체제 안드로이드 폰에서 사용자가 위치 서비스를 끄고 SIM 카드를 빼놓았지만 사용자의 위치 데이터가 그대로 전송되었다는 것이다. 구글은 메시지 전송 속도와 성능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밝혔지만 잠재적 보안 위험을 유발하는 기능을 의도적으로 설치한 명백한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는 소비자의 등에 칼을 꼽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또 아이폰 웹브라우저에 불법으로 쿠키를 심어 540만명 이상의 개인정보 등을 무단 수집했다는 이유로 영국의 소비자단체와 송사 중이다. 2011년 한국에서도 ‘스트리트뷰’를 만들며 시민 수십만명의 통신정보를 무단 수집해놓고 발뺌하기도 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보급률, 스마트폰 보급률을 자랑하고 있다.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은 한국 스마트폰 시장의 80%를 차지한다. 구글에 한국은 요리하기 쉬운 황금시장이다. 지난해에는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한국에서 개최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고 구글은 천문학적인 경제효과를 얻었다. 구글은 한국을 생태계 확장의 테스트 베드로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혜택도 보지 못하고 있다. 말로 떠드는 구글의 한국으로의 생태계 확장은 실제로 우리에게 공수표를 던져준 듯한 느낌마저 든다. 국내 스타트업에 그다지 큰 도움을 준 것도 없고 투자는 전무한 상태다. 구글은 지난해 국토지리원이 10여년간 만든 수조원의 가치를 지닌 5000분의 1 지도를 반출해가려 했다. 모바일 환경에서 위치 기반 시스템(GPS)과 지도가 결합한 데이터는 일종의 금맥이다. 구글은 오히려 반출되지 않을 경우 한국이 글로벌화는 물론 여러 측면에서 불리하게 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구글의 치졸의 극치는 한국에서의 세금 문제다. 아이지에이웍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구글이 올해 국내에서 구글플레이를 통해 지난 10월까지 올린 매출만 3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수수료를 30%라고 할 경우 수익만 1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세금은 한국에 한 푼도 내지 않는다. 한국에서 발생한 구글 앱 마켓 수수료는 싱가포르의 구글아시아퍼시픽으로 매출이 잡히도록 해놓았다. 구글의 이런 행동을 보면 범죄자들의 조세회피 방법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한국에서 수익을 올리면서 한국 법망을 피해가려는 건 도리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에 대한 권리나 한국 법을 무시한 채 세계를 바꾸겠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발상에서 비롯됐을까. 우리는 구글의 행동들을 목도하면서 구글에 대한 신뢰를 적지 않게 잃었다. 구글이 지금 이 순간 어디서 또 다른 일을 벌이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에서 구글 사이트에서 그리고 구글 위치추적 서비스에서 그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구글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이제 구글은 흔히 하는 말로 구글신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고, 계속되는 세계 각국 법원들의 벌금 처분을 받아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다. 어쨌든 구글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시스템들을 계속 추구해나가고 있고, 우리에게 새로운 신화를 선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마술 같은 힘으로 지구 전체를 가르며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구글이 드리운 그림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해지고 있다. 구글은 우리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게도 어두운 그림자도 짙어간다. 지금이라도 구글은 기술과 알고리즘과 데이터들이 상식과 진실을 향한 쪽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키를 돌려보지 않겠는가.

<최희원 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해커묵시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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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새로 생긴 작은 책방에서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네 작은 책방들이 많아지면 그중에 내 단골 책방도 생길 텐데, 그러면 책 고르는 일이 훨씬 즐겁고 편해질 것 같다고. 말하자면, 내 취향의 옷들을 파는 작은 옷가게처럼. 언제 들러도 내가 좋아하는 옷이 한두 벌쯤은 있어서 지갑 형편상 사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구경만으로도 행복한. 동네 책방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책방에 들르면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중에 무얼 골라도 크게 실망할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책방에 대한 믿음, 주인에 대한 믿음, 선택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그러나 거창하지 않게 놓여있는. 대형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무얼 골라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을 때,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르긴 골랐으나 읽어보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나만의 그런 작은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집에 티브이를 두지 않게 된 이후로 모든 방송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게 되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뉴스든. 그냥 틀어놓으면 수동적으로 보게 되는 티브이 시청과는 달리 이건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 전제된다. 무얼 볼지 결정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도 온전히 내 몫이 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래서 고객의 선호도를 분석해준다. 넷플릭스는 그 분석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자체 제작하기도 한다. 고객은 접속과 동시에 자신에게 추천되는 프로그램의 목록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아할지, 그 확률을 숫자로까지 표시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 99프로 일치. 내가 전에 보았던 것과 유사한 다큐멘터리, 90프로 일치. 전체고객의 상위 5프로가 최근에 가장 좋아한 영화. 뭐, 이런 식이다. 숫자의 유혹이 놀랍다. 내가 9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라니, 이건 반드시 봐야 한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왕이면 8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것보다는 이걸 먼저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시청 후에 드는 생각.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하나? 나의 99프로가 이걸 좋아하나? 그러나, 때때로, 아니 실은 아주 자주 나의 1프로는 말한다. 이런, 나는 이걸 안 좋아하는 걸.

집에 티브이가 없고, 게다가 종이 신문을 정기 구독하지 않는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것 역시 매우 적극적인 행위가 된다. 알려고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자신이 좋아하는 뉴스매체를 인터넷에서 선택해서 그중에 관심이 가는 뉴스를 다시 선택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매체의 뉴스들을 비교해서 봐야 한다. 수고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포털에 기대게 된다. 포털은 넷플릭스처럼 ‘당신이 좋아할 만한’, 혹은 ‘당신에게 중요한’ 몇 프로의 가능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판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100프로 중요한 것이 된다. 99프로도 아니고 100프로다. 지나치게 사소해서 티브이 뉴스를 틀어놓았다면 귓전으로 그냥 흘려들었을 뉴스까지도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된다. 책이 소개되면 가장 핫한 책이 되고, 옷이 소개되면 그즈음의 패션이 된다. 그 중요한 뉴스가 어떤 매체의 것으로 소개되었는지에 따라 느닷없이 보수적인 의견을 따라가게 되기도 하고, 전혀 반대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하게 되는 생각. 이런,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걸?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네이버뿐이라는. 최근에 1994년의 신문을 볼 일이 있었다. 그해 1월1일의 어느 신문 특집 기사는 향후 IT산업의 발전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키게 될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재밌다. 앞으로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든가, 누구나 ‘휴대용화면전화기’를 소유하게 되어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든가. 농담처럼 이런 우려도 덧붙여 있다. 회사원들은 근무시간에 주식시세를 검색하다가 상사에게 들키는 불상사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그 모든 예측들은 다 사실이 되었다. 신년에 보는 토정비결도 아니고, 자료를 통한 과학적 예측이니 그게 사실이 되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미래는 늘 현재가 품고 있는 씨앗을 통해 발아하는 법이니. 좋은 미래든, 나쁜 미래든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불행히도 앞으로의 미래는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고 예측되어지는 어떤 조건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포털 뉴스의 불공정한 배치가 문제가 되면서 앞으로는 뉴스 배치를 알고리즘화하는 쪽으로 개선한다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개인의 취향,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뉴스를 자동으로 배치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내가 좋아하는 뉴스와 당신이 좋아하는 뉴스가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게 중요한 뉴스와 당신에게 중요한 뉴스도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넷플릭스에서는 이런 과정을 ‘큐레이션’ ‘레시피’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고객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숨어 있는 취향을 찾아주는 서비스라고까지 했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주는 서비스라니. 마찬가지로 내가 중요한지도 모르는 중요한 뉴스가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기도 한다는 뜻일 텐데, 그 반대를 생각하면 또 놀랍다. 이런,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터이고, 뉴스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순간도 올 것이다. 길이 복잡해지고, 그 길이 엉망이 되기 전 단단한 지표를 먼저 세우는 게 필요할 터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거나, 단 한 건의 뉴스가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법이니.

동네 작은 책방 얘기를 했었다. 단골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차 한잔, 혹은 맥주 한잔과 책 한 권, 그 책의 어느 한 페이지에 손을 얹어놓고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그곳에는 나라고 추정되어지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나 자신인 내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세상은 결코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단순해지지도 않겠지만, 그럴수록 더욱 확실한 지표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단순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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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말라.” 2011년 동일본 지역이 지진에 이은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언론은 아네요시 마을의 돌판에 새겨진 오래된 경고문에 주목했다. 쓰나미를 겪은 선조들이 남긴 경고를 잊지 않은 덕에 많은 사람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비슷한 경고를 하는 돌판은 많이 있었지만, 후손들은 현대 기술을 믿은 나머지 그 경고에 무감각해졌거나 지역개발을 위해 경고를 무시했다. 망각에 걸리는 시간은 불과 백 년에서 수백 년 정도였다.

백 년이 아니라 만 년 후의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 인류의 모든 호기심과 오해와 욕심을 누를 만큼 강한 공포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면? 지진에도 쓰나미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돌판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초 미국 에너지부는 물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언어학자, 미래학자, SF 작가, 예술가, 건축가들을 모아놓고 바로 이런 요청을 했다. 미래로 보내야 할 메시지는 “이 땅을 파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땅에는 방사성폐기물이 묻힐 예정이었다. 방사성폐기물격리시범시설이 일만 년 동안 견뎌야 하는 위협은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여기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침입이다. 일만 년 동안 사라지지 않을 경고 표지는 어떤 재질과 형태여야 할까? 일만 년 후에도 오해의 여지 없이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표지는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

과학사학자 피터 갤리슨과 영화감독 롭 모스가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컨테인먼트>(Containment·봉쇄)는 미국 에너지부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방사성폐기물이 제기하는 기술적이고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딜레마를 추적한다. 다큐멘터리는 방사성폐기물 위험 표지라는 간단명료한 장치 하나가 어떻게 인류 문명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로 이어져야 하는가를 담담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30년, 100년이 아닌 10,000년짜리 미래예측 과제를 떠맡은 셈이었다. 이것은 최고 난도의 미래학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일만 년 후의 인간이 어떤 존재일지, 만약 그때도 사회란 것이 있다면 그들이 어떤 사회에 살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가 일만 년 후에도 남아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가 위험과 공포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기호가 일만 년 후에도 같은 의미를 가질까? 알 수 없다. 저장시설이 자리잡은 지역은 일만 년 후에도 지금처럼 인적이 뜸한 곳일까? 역시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은 온갖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미래의 인간들이 이 부지를 파헤치게 되는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2991년쯤에는 인류 전체가 문맹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문자 표지판은 소용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지하 터널을 뚫어서 기차가 다니는 시나리오도 만들었다. 터널을 파다가 저장시설에 구멍을 낼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11991년에는 우주로 나갔던 인간 전사들이 로켓을 타고 지구로 돌아오다가 이곳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상상도 했다. 더 간단하게는 20세기 인류가 이집트 피라미드에 도굴하러 들어갔듯이 폐기물 저장소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느낀 미래의 인간들이 삽을 들고 땅을 팔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로봇이 근처에서 작업을 하다가 바이러스에 걸려 더 이상 인간의 명령을 듣지 않고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존재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대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컨테인먼트>는 방사성폐기물 경고 표지를 디자인하는 전문가들이 맞닥뜨린 과제가 외계지적생명체 탐사에 나선 과학자들이 했던 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77년 보이저호에 실어 우주로 보낸 레코드에는 인간과 지구의 사진, 지구의 소리, 인간의 음악이 담겨 있었다. 에너지부가 의뢰한 전문가들도 이처럼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에게 보내는 강렬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내야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둘 모두 인간의 존재를 확장하는 대단한 일이었다. 경고 표지 디자인에 참여한 한 건축가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보이저호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 인류는 머나먼 공간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방사성폐기물 경고표지를 통해 인류는 머나먼 시간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일만 년 후의 미래 세대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여기 우리에게 끔찍한 것이 있는데, 오랫동안 끔찍한 채로 있을 것이다. 당신들이 그걸 알았으면 한다.” 2002년에 사망한 그 건축가는 인터뷰 영상에서 비장하게 덧붙였다.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바로 당신이다. 일만 년 떨어져 있는 당신.”

<컨테인먼트는>는 이런 감동적인 교훈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계지적생명체 탐사와 방사성폐기물격리시범시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외계의 생명체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인류는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으려 했다. 반면 방사성폐기물 경고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인류가 가장 감추고 싶고, 감추어야 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근시안, 우리의 행동의 결과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는 무능함”이 그 경고판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지식과 전문가를 동원하여 미래세대에게 가장 절실하게 남겨야 하는 메시지가 방사성폐기물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 인류의 실수와 오해로부터 방사성폐기물을 지키는 일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앞으로 적어도 일만 년 동안 인류가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다. 지성과 지혜와 성의를 모아야 하는 미래에 대한 의무다.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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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이 숭숭 뚫린 몸을 끌고 판문점을 넘은 인민군 청년을 생각한다. 이름은 오청성, 올해 스물다섯. 반대였다면 이쪽에서도 국군 청년의 등을 향해 총을 쏘아댔겠지.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 국경에선 가끔가다 일어나는 일.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전 세계에 방송을 타지는 않을 것이다. “국경은 없어요. 너의 나라 나의 나라….” 이매진 노래는 그래서 제목조차 ‘상상’일 뿐인가.

 

 

유재영의 소설 <하바롭스크의 밤>에도 비슷한 추격전이 나온다. 러시아 벌목공 탈북자 기라는 청년과 율이라는 청년. 벌목공으로 팔려나간 친구들은 하바롭스크의 폭설과 벌목 현장의 위험을 견디며 살아간다. “남한은 안전하오?” 대답 없는 질문. “늑대의 늪을 가로지를 거요. 같이 갑시다.” 감자를 입에 녹여 먹으면서 아무르강 유역을 걸어 탈출한다. 굶주린 검은 털빛의 늑대떼가 뒤를 쫓고… 곰덫이 그만 왼쪽 발목을 덥석 물었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둘은 동굴처럼 생긴 방공호를 발견한다. 벌목공의 집이었는지 어느 실패한 혁명가의 움막이었는지 모르는 그곳. 철철 피가 흐르는 발목을 도끼로 자른 기는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선다. 방공호에는 엽총과 기의 발목이 달랑 남아 있었다. “이제 형벌은 끝났으니 당신의 삶을 사시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소.”

담양의 밤 또한 하바롭스크의 밤처럼 차갑다. 방공호 같은 집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밤바람 소리가 마치 늑대 우는 소리 같다. 외롭게 살다간 이의 혼이 우는 소리일까.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맡았던 냄새. 독특한 바람 냄새. 건너온 자, 건너간 자들이 남긴 몸 냄새 같다.

김장배추를 다듬던 할매가 그랬다. “배추에서 단내가 나요. 인자 겁나 추울랑갑소.” 늑대처럼 사람도 냄새만 맡아도 알아차리는 게 많다. 자유의 냄새를 맡은 우리는 국경을 넘고 체제를 넘어 더 멀리 도망쳐야지. 총을 쏘든가 말든가. 사람은 죽여도 자유는 죽일 수 없다. 자유를 향한 이 갈망. 더는 분단과 총성이 없는 땅. 탈출다운 탈출을 이제 모두 각오할 때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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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을 거쳐 후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몹시 내렸다. 베트남 어느 도시나 그렇듯 오토바이는 개미떼처럼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걷기 힘든 곳 투성이였다. 날씨까지 안 좋았으니 첫인상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 지역의 명승지는 가지 않는 편이다. 런던에 갔을 때 비교적 오랜 시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빅벤이나 버킹엄 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도쿄, 오사카, 방콕, 뉴욕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유산은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하다는 게 지론이기 때문이다. 대신 동시대의 문화를 느끼러 가곤 한다. 클럽을 다니고 레코드 스토어를 들른다. 그런데 후에라니? 여행, 하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지인이 후에가 미식의 도시라는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먹어댔다.

이태원을 연상케 하는 여행자 거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화려한 곳을 쏘다니며 배를 불렸다.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 할 요량이었다. 어느 도시에나 음악 술집은 있기 마련. 앱을 켜서 찾아보니 음악을 주요 해시태그로 내세운 바가 있었다. 여행자 거리 외각의 어두운 골목 한쪽, 라이브 음악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10여석이 채 안되는 작은 바였다. 그 바의 한구석에서 무대조차 없이 현지의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었다. 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어디서 왔냐는 직원의 말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래하던 20대 초반 여성이 또렷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하는 거 아닌가. 그러더니 “한국 노래 하나 불러드릴까요?”라며 “잘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밴드 뷰렛이라고…” 하면서 뷰렛의 ‘거짓말’을 불렀다. 연주력, 사운드 같은 걸 따질 계제는 아니었지만 보컬의 한국어 노래 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단순히 가사를 외워서 부르는 걸 넘어서 어미 처리라든가, 감정 표현이라든가 하는 게 완전히 한국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물어보니 현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란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어디서나 한국 아이돌의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밴드 음악은, 그것도 라이브로는 처음이었다. 예전 미국에서 양희은과 송창식을 알고 있는 백인 청년을 만났을 때만큼 신기했다.

이 친구의 순서가 끝난 후에는 그 또래 청년이 나와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했다. 자세히 보니 이쪽에 드문드문 손님들이 있는 데 비해 무대(?) 옆쪽으로는 현지 젊은이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맨손으로 드럼 연습을 하고 누군가는 악보를 보고 있다. 보아하니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음악 술집이라기보다는 후에 음악 애호가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은 청년 하위 문화다. 기성세대의 인정, 주류 유행과는 상관없이 확고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1970년대의 무교동, 80년대의 신촌과 이태원, 그리고 90년대의 홍대 앞 문화가 모두 그런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바일과 SNS가 완전히 자리 잡은 지금, 즉 문화적 경계와 시차가 의미 없어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풍경일 것이다. ‘작은 세계’에서 문화적 역량이 축적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을 좇는 이들은 그 작은 세계를 과잉 소비한다. 순식간에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가 덮친다. 일상화된 구조다.

록과 한국 밴드 음악, 그리고 케니지까지 장르도 스타일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후에의 청년들을 위해 작은 액수나마 팁을 자리에 놓고 나왔다. 덥고 조금은 습한 밤거리 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배웅해준 건 역시 그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베트남 음악이었다. 홍대 앞에서 버스킹이란 이름의 소음을 유발하는 이들보다는 실력이 좋았고, 실용음악 시스템에서 학점에 길들여진 이들보다는 표현력이 좋았다. 후에의 이름 모를 젊은이들에게서 청년문화의 추억을 떠올렸던 이유일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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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15일 포항 북구 흥해에서 진도 5.4 지진이 발생했다. 세상사 ‘절대’라는 건 없다지만 설마설마했다. 낯익은 고향 도로, 밤낮으로 내달렸던 골목길이 산산이 부서졌다. 고향집은 진앙 반대쪽이라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늙은 부모는 “야야, 내 평생 여서(여기서) 이런 난리는 처음 본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어떻게든 고향 안부라도 듣기 위해 행정안전부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았다. 두툼한 외투 한 벌만 급히 챙겨 포항행 KTX를 탄 선배나 속만 타들어가는 나나 얼마를 더 뒤척여야 낯선 공포에서 헤어날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좀 수습됐나요, 이재민들은 괜찮나요. 미안한 질문과 지친 답변이 꽤 오래 이어졌다. 이재민 대피, 수능 연기, 자원봉사자 배정, 특별재난구역 선포….

겨우 진정 국면에 들어섰지만 선배는 ‘외로운 싸움’이라고 했다. “땅속만 갈라진 게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 단층대도 갈라졌다”면서. 실제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온갖 비난과 억측이 떠돌았다. ‘포항 지진’이 아닌 ‘흥해 지진’이라 불러야 한다, 잘사는 도시니 알아서들 하겠지, 심지어 ‘그’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이라는 말도 들린다. 하나같이 포항 지진을 ‘그들만의 재난’으로 가둔 이유가 되고 있었다. ‘이념 재해’까지 감당해야 하는 포항은 지금 너무나 아프다.

대통령 출신지? 포항이 그 시절 특혜를 받았었나. 포스코 인수·합병, 자원외교는 포항엔 차라리 재앙이었다. ‘형님 예산’도 포항 시민 몫이 아니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 영일만 신항을 혜택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민주정부가 구상한 사업이다. 그렇다고 ‘그’ 대통령과 포항이 끈끈하기라도 했나. ‘그’ 대통령은 성금 500만원을 냈다고 한다. 딱 500만원어치 애정이다. ‘그’ 대통령이 자란 흥해 덕실마을 기념관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때가 손에 꼽을 정도다.

좌익세력 때문? 일부에서 이념 문제를 들고나온다. 이런 분위기에 용기라도 얻었는지 보수정당은 이재민 대피소 부근에 ‘내년 정부예산은 복지 퍼주기’라는 플래카드를 버젓이 걸어놨다. 박정희 시대, 3당 합당,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는 동안 포항은 정경유착과 콘크리트 보수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포항 시민들은 새로운 도시의 주체로 스스로를 호명했다. 19대 대선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는 포항에서 과반에 실패했다.

잘사는 지역? 경제산업메카니 알아서 복구하라는 말이다. 포스코가 포항의 든든한 방패인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에 휘둘리며 휘청이는 사이 철강경기까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000명도 넘는 공단 노동자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나야 했다. IMF 구제금융 때도 불황을 모르던 오거리 중앙상가엔 빈 가게마다 임대 플래카드만 나부낀다. 재난의 상처를 한 지역의 문제로 고립시킬 때 어떤 고통을 겪는지 쌍용차, 용산, 밀양, 강정마을에서 이미 보지 않았나.

지진과 정치의 ‘이상결합’을 토로하다 선배는 다시 포항행 KTX에 올랐다. 이번엔 형산강을 가봐야겠다고 했다.

1500도가 넘는 용광로 쇳물을 펄펄 끓으며 받아내던 강, 3교대 자전거로 오가는 출선공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던 강. 죽도시장 비린내와 만날 때면 반짝이는 생선 비늘로 돌아오던 그 강. 이맘때면 고향집에선 ㎏당 2만원쯤 하는 삶은 문어 2~3마리를 택배로 보냈다. 올해는 “우짜노 딸, 올해는 작년 절반(크기)도 안되는 게 ㎏에 4만~5만원 하네. 지진 땜에 죽도시장에 제대로 된 게 없다”고 미안해하며 엄마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문어 다리 하나씩 잘라 냉동실에 넣어야하는데 상자 안 얼음이 녹을 때까지 가위를 들지 못했다. 엄마는 형산강 로터리를 건너오며 얼마나 긴 한숨을 내쉬었을까.

이제 동강 난 포항의 아픈 시절까지 감싸안고 흘러야 할 강. 그 강 한 줄기를 빌려 오랜 고향 안부를 묻는다. 형산강은 잘 있나요.

<정치부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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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고용률은 그 나라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과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서로의 땀방울을 존중하며 연대의 환희를 나눌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은, 그 나라의 이주자, 장애인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혐오와 폭력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서로가 자유롭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국민총생산은, 노인과 젊은이가,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그리고 서로가 평등한 여성과 남성이 한데 어울려 얼마나 신비롭고 장대한 직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결코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부의 수준은, 무엇보다 그 나라의 산과 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푸르며, 어린이들은 그 위를 얼마나 마음껏 뛰놀 수 있는지 하나도 말해주지 못한다.

 

 

한국은 경제수준을 세계 10위 안으로 끌어올렸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서 치명적인 적신호가 켜졌다. 무엇보다 분배구조가 심각한 수준으로 망가져 있다. 자산과 임금 수준이, 협상력과 의사결정권이, 문화를 향유하며 건강하고 사람답게 삶을 영위할 개인들의 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꿈의 크기조차 점점 더 한쪽으로만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지 않아도 상식적인 수준의 분배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오감을 통해 느끼고 있다. 다만, 매일 경험하며 하루하루 무뎌지고 있을 뿐이다. 가난한 노인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폐휴지를 주워야 하고, 많은 노인들이 삶의 끝을 자살로 택하도록 내몰린다. 한국 청년들은, 이미 다 잡아가 버려 좋은 물고기가 없는 바다에서 계속해서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야만 살 수 있다고 주입받는다. 권리에 대한 기억은 이들에게서 서서히 퇴색했고, 젊은 영혼들은 음료공장 현장실습 과정에서 기계에 가슴이 눌려 목숨을 잃기도, 콜센터에서 실습교육 대신 실적 압박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나마 일이 있는 어른들은 긴 근로시간을 버텨내야 한다. 날마다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부부는 아이와 놀아줄 시간도 없다. 출산은 아득하고, 한번쯤 꿈꿔봤던 “행복한 집”에 대한 바람도 완전히 소멸되었다. 부모가 바깥 세계에서 몰고 들어온 불안감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반문 없이 달린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행복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낮고, 청소년의 자살률은 가장 높다.

해고에 대한 불안으로, 좀처럼 오르지 않는 임금에 대한 불만조차 꺼내보지 못하는 노동자가 3명 중 1명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 자원에 대한 통제력과 협상력은 낮아지고 있고, 개별 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은 확대되고 있다. 작아지는 밥그릇 자체에 대한 의문은 없이, 어느새 싸움은 노동 대 자본이 아니라, 불안정 노동자와 ‘좀 더’ 불안정한 노동자 간의 싸움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에서 부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전체 부의 반은 토지, 빌딩과 같은 자산이다. 그리고 자산에서 얻어지는 소득은 노동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난다. 상위 10%가 우리나라 전체 부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는데, 부의 불평등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이다. 한국 아이들의 꿈은 빌딩주인이고, 가장 ‘좋은’ 부모나 배우자가 되려면 자산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망가진 채 성장에 대한 맹목적 허기로 우리는 언제까지 달리기만 할 것인가. 한국의 경제성장은 상식적인 수준의 분배조차 가져오지 못했다. 일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에는 그토록 엄격하면서, 자산으로 인한 불로소득에 어떻게 이토록 관대할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복지정책을 내세웠던 정부도 대대적 조세개혁 대신 핀셋 조세정책만으로 생색내고 있다. 아이들의 보편적 권리로 약속되었던 아동수당마저 결국 선별적 급여로 추락될 조짐이다. 보편적인 복지서비스의 확대는 작은 예산의 일자리 정책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 상상력이다. 이것은 일과 소득의 새로운 관계, 공유자산에 대한 새로운 규칙, 성장과 분배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에게는 영웅적 수장이 아니라,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봄날 걷잡을 수 없이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새싹같이, 깨어있는 시민들 한명 한명의 급진적 상상력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를 압도시킬 만큼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자.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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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에게도 근심이 있습니까?” 자로의 질문에 공자는 답했다. “없다. 군자는 벼슬을 얻기 전에는 뜻을 즐기고, 얻고 나서는 다스림을 즐긴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즐거울 뿐 근심할 날이 없다. 소인은 그렇지 않다. 벼슬을 얻기 전에는 못 얻으면 어쩌나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으면 어쩌나 근심한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근심할 뿐 즐거운 날이 없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말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홍계희는 62세 되던 해 봄, 이조판서의 벼슬을 받았으나 극력 사양하고 여러 번에 걸친 영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영조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해임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홍계희는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기쁨의 시를 지었다. 여러 동료들 역시 축하하며 화답하는 시를 보내와서, 관직에서 해임된 기쁨을 적은 시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홍계희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영조는 그 뒤로도 줄기차게 여러 벼슬을 내렸고, 더 이상은 사직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홍계희는 앞서 지은 시들을 모아 <해관지희첩(解官志喜帖)>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벼슬살이로 인한 근심이 있을 때마다 이 기쁨의 시들로 위안을 삼으려는 뜻이다.

우리의 기쁨은 대개 무언가 바라던 것을 손에 얻었을 때 주어지지만, 문제는 그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얻기 전에는 없어서는 안될 것처럼 노심초사 근심하던 대상임에도, 막상 내 것이 되고 보면 그 기쁨도 잠시뿐, 마치 원래부터 나에게 있던 것처럼 당연시한다. 그러고는 점차 그것이 없는 삶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 근심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즐거워하며 뜻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벼슬의 유무에 따라 기쁨과 근심이 바뀔 일도 없겠지만, 이런 경지에 오르기란 쉽지 않다. 홍계희는 그러나 소인과는 다른 제3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품은 뜻은, 고향에 돌아가 서책과 거문고, 바둑판, 술 한 병을 곁에 두고 늙어가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벼슬살이는 근심이지만, 물러남의 기쁨을 상상하며 그것을 적은 시를 때때로 꺼내볼 수 있음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가진 것의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는 소인으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가지지 못한 것을 즐거워하는 방법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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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폭염과 열대야가 지속된 지난해 8월 부산교도소에서 두 명의 수형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망자 중 한 사람은 평소 당뇨, 고혈압 등의 지병이 있는 거구의 비만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뇌전증, 당뇨 등 지병을 가진 3급 장애인으로, 두 사람 모두 소란 등 징벌사유 혐의가 있는 수형자를 조사기간 동안 수용하는 장소인 조사거실에 수용 중 사망하였다. 국과수는 전자의 사인은 열사병, 후자의 사인은 열사병 또는 할리페리돌 복용과 관련된 신경이완제 악성증후군(이 증후군도 무더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으로 추정하였다.

조사거실은 다른 수용실보다 더 덥고 선풍기도 없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으며 3명이 함께 수용되어 1인당 수용면적이 1.72㎡에 불과하여 수용시설기준에 훨씬 미달하고 일반 수용실보다 좁은 과밀수용이어서 수용환경이 몹시 열악한 상태였다. 이에 유족들은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교도소 측은 수형자의 건강관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고 열사병으로 인한 사망을 전혀 예견할 수 없었다며 책임을 부정하였다. 법무부 자체 조사결과 역시 교도소 측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교도소 측의 인권침해 사실을 확인하고 교도소장에 대한 징계, 조사거실 환경 개선, 지병이 있는 수용자의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의료조치 마련 등을 권고하였지만 전혀 듣지 않았고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법원은 조사거실 현장검증, 조사거실을 촬영한 CCTV 검증, 교도관, 의무관, 동료 수형자들에 대한 증인신문 등 심리를 거쳐 지난달 23일 원고들에 대한 일부승소판결을 선고하였다. 법원은 수형자의 기본권 제한은 수형자가 인간으로서 가지는 존엄과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한 후 교도소 측이 환자인 망인들을 환경이 열악한 조사거실에 수용하기 전에 대면진단 등 신중을 기하지 않은 점, 망인들이 수용된 기간 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현기증을 일으키는 등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직접 또는 CCTV를 통해 관찰하였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조사거실의 환경을 당장 개선할 수 없다 하더라도 혹서기 수용을 피하거나 연기하는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등의 과실을 인정하였다. 실제 교도관, 의무관 등 공무원들은 증인신문 시 ‘여름에 덥고 힘들어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느냐’ ‘법령이나 지침대로 했다’ ‘우리가 달리 뭘 할 수 있겠느냐’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망인들에 대해 특별히 악의가 있다거나 그들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관행에 젖은 무감각, 무관심, 무지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다행히 법원은 국가의 변명을 배척하고 수형자 처우에 대한 국가의 엄중한 책임을 인정하였다. 다만 사망에 대한 위자료로 망인들 본인 5000만원, 모친 500만원, 형제 200만원밖에 인정되지 않았는데, 재판실무상 특별히 낮게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법원의 위자료 인정기준이 지나치게 낮은 점은 너무 아쉽고 개선이 요구된다.

그리고 국가는 이번 판결에 대하여 항소할 것이 아니라 열악한 수형시설의 환경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 수형자의 인권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수용해 놓고 더위로 죽게 만든다면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 말대로 국가가 매번 항소하면 세상이 언제 바뀌겠는가!

<류제성 | 변호사·법무법인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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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에서 철암으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 기차 건널목을 건너 이어진 길에는 간간이 짐을 실은 큰 트럭만 경적을 울리면서 내달렸다. 철암으로 들어가는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오래전에 시간이 멈춰 있었다.

한때 그러니까 탄광촌 개들은 입에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석탄 산업이 번성했던 시절에 철암은 태백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지만, 그 명성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철암역 맞은편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시장은 높은 건물이 제법 늘어서 있었는데, 철암천에 세운 기둥에 지탱하고 있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허술했다. 그곳이 밤마다 대낮처럼 환히 불을 밝힌 번화가였으며, 식당이고 술집이고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철암 미로마을에서 내려다본 탄광역사촌. 박민규 기자

텅 비어있는 시장과 달리 철암역은 아직 건재했다. 태백선의 시작이면서 끝인 그곳은 매끈한 긴 선로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그 선로 위로 화물 기차가 밤낮없이 드나들면서 전국에 석탄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기억 속에 탄광촌은 사북 사태와 갱도가 무너져 광부가 매몰되었다는 속보가 전해지는 어둡고 무거운 곳이다.

“사람들이 탄광촌에 살았다고 하면 다들 힘들게 살았구나 하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태백에서 자란 그는 겨울에 눈이 어른 키만큼 쌓인 날이면 오빠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굴을 파면서 놀았다고 했다.

“눈이 오면 우리 동네 애들이 모두 다라를 들고나와서 그걸 썰매처럼 타고 다녔어요. 얼마나 재미났는지 몰라요.”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탄광촌은 시커먼 석탄 가루나 흩날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를 통해 들은 그곳의 봄꽃은 아름다웠으며, 여름은 낮잠 자기 좋을 만큼 서늘하고, 일찍 찾아오는 겨울은 더없이 즐거웠다. 모든 삶이 그렇듯이 그곳의 삶도 비극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그는 언젠가 어린 시절 뛰놀았던 탄광촌의 모습을 담은 그림책을 펴낼 거라고 했다.

내가 본 쓸쓸한 철암이, 탄광촌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찬 신나는 곳으로 되살아나길 기다린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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