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는 유사 이래 여성이 어떤 일을 담당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후반 환경오염과 전쟁으로 출산율이 급감하자 남성들은 길리어드라는 전제국가를 건립하고 여성들을 잡아다가 네 부류로 나눈다. 아내, 하녀(집안일), 시녀(대리모), 그리고 비여성. 불임의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갖도록 강제된 ‘시녀’는 고위층 부부에게 자궁을 제공한다. 가사일을 담당하는 하녀들은 ‘아주머니’라 불리며 ‘시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출산과 가사,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비여성’들은 콜로니라는 게토에 갇혀 독극물을 처리하는 강제노역에 종사한다. 작년 드라마화되어 인기를 끌었고 또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 여성들이 낙태금지법안에 맞서 붉은 망토를 입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픽션으로 돌려놓으라(Make Margaret Atwood fiction again)”고 외치며 시위를 벌여 더욱 화제가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자궁의 공공화’를 둘러싼 이 기묘한 이야기가 21세기 현실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경악은 단지 미국 여성만이 아니라 ‘전국가임여성지도’를 지닌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여성의 노동은 저 <시녀 이야기>의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19세기 이후 여성은 법적 지위가 향상되는 것에 더불어 공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임금격차나 유리천장 등에서 보듯 현저한 남녀차별을 겪고 있다. 또한 여전히 ‘섹슈얼리티’를 부수적이며 함축적인 노동수단으로 제공해야 하는 이중노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송충이 잡는 일을 하면서 감독에게 몸을 바쳐야 했던 극빈층의 복녀를 그린 김동인의 <감자>에서부터 지주의 성적 유린, 방적공장 감독의 유혹에 시달리는 여성 ‘선비’를 그린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 문학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폭로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위력에 의한 성범죄 등은 이렇듯 ‘(여성)노동’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삭제하지 못한 남성지배구조의 장구한 역사에 대한 뚜렷한 증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에 기초한 성별 분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남성노동으로 가정된 노동의 변화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즉 산업화와 첨단 기술에 의해 남성 육체노동 대부분이 기계화되고 사무직과 서비스직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의 미래’는 기존 성별 분업의 해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가사·육아 분담, 그리고 가사노동의 외주화는 임신과 출산의 기술적 진보, 돌봄로봇, 섹스로봇 등의 확산(‘킹키스 돌스’라는 섹스 인형 대여업소는 작년 토론토에 섹스 인형 성매매 업소 1호점을 열었다고 한다) 등으로 이어져 다양한 대체노동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신의 영역에 진입한 호모사피엔스는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이 완전히 무관해지는” 특이점을 지나게 될 것인가. 이 포스트휴먼의 노동의 미래가 왠지 미심쩍은 것은 기술의 진보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유사 이래 희소성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이 더 강력한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완전정복은 ‘노동 민주화’ 대신 민족, 인종, 성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기술·자본력을 갖지 못한 많은 영세업체들(가구공장 등 위험한 산업현장)이 여전히 육체노동을 이주노동자에게 외주화하고 있듯이 기술에 의한 젠더 해체와 노동혁명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돌봄과 가사 노동의 다양한 아웃소싱(홍콩에서 가사나 육아 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여성)이나 결혼이주여성의 연쇄사슬(베트남 오지의 총각은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여성 대신 캄보디아 등으로부터 ‘아내’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성매매와 대리모로 생계를 부양하는 하층 여성 등을 흔히 본다.

첨단 기술과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젠더노동의 대폭발 지점은 지극히 유토피아적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일부 특권층에게나 허용된 꿈이거나 ‘노동의 종말’ 같은 디스토피아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인간노동’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함께 다다른 우리에게 더욱 시급한 것은 여성 노동의 비전보다 여전히 성적 차별과 계급차별이라는 현실에 갇힌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구원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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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엔 ‘군대 가면 고무신 거꾸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었다면 요즘은 ‘오빠가 아빠 되고 친구가 식구 된다’고 합니다. 몸이 멀어지면 정도 멀어지고 가까이 있어야 사랑도 도타워진다는 것이죠. ‘오빠오빠’ 하다가 아이 아빠로 부르게 되고 친구처럼 지내다보니 어느새 가정 이뤄 한 식구입니다. 가까이 있어도 자주 접해야 정도 깊어진다며 ‘은행나무도 마주 서야 연다’고 속담은 말합니다.

식물에는 벌, 나비 등으로 꽃가루받이를 하는 충매화(蟲媒花)와 새를 통하는 조매화가 있는가 하면, 물이나 바람을 이용해 꽃가루를 운반하는 수매화와 풍매화도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풍매화입니다. 게다가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는 암수딴그루입니다. 최대 2~4㎞까지 꽃가루가 날려간다지만, 당연히 수나무와 암나무가 가까이 섰을수록 수분(受粉)이 잘됩니다. 은행나무 꽃가루는 입자가 무거워 아주 멀리까지 가는 건 많지 않으니 아무래도 가까이 있어야 꽃가루 세례를 더욱 듬뿍 받을 수 있겠죠.

사랑 역시 늘 보아오던 사람들 사이에서 스름스름 싹트는 일이 많습니다. 또한 서로 좋아하면서도 오해하고 탓하며 뜸하다 시부저기 헤어지기도 하지요. 부부 사이에 아무리 다투더라도 각방만큼은 쓰지 말라는 것이 인생 선배들의 충고입니다. ‘살정’ 또한 정(情)이며 같은 공간에 있어야 화해할 거리라도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겠죠. 데면데면한 시간이 길어지면 ‘님’도 남인 양 왠지 서름서름해지기 일쑤니까요.

새로운 사랑은 모퉁이에서 부딪치길 기다리지 않으며, 오랜 사랑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은 이불 속 온기와 같습니다. 나무조차 가까이 붙으려 드는데 사람이 목석이어서 되겠습니까? 좋아한다면 내외로 맴돌지 말고 슬쩍 챙겨주며 바싹 감도세요. 마주하는 그 마음이 그 마음까지 엽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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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채’는 여전히 한국의 유효한 신입사원 채용 방식이다. 언론사도 그렇다. 어떤 부서를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경력과 함께 ‘○○년에 입사한 ○○기’가 나의 정체성으로 줄곧 따라다닌다.

그 ‘공채문화’의 상징과 같은 것이 수습기자 교육이다. 3~6개월 동안 경찰서의 지저분한 기자실에서 하루 2~3시간 ‘쪽잠’을 자면서 밤늦도록 사건 현장과 경찰서를 돌아다니면 육체가 너덜너덜해진다. 하루 종일 ‘1진’이라 불리는 선배에게 보고하면서 빠뜨리고 놓친 부분을 수없이 지적당하면 영혼도 너덜너덜해진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혹독함 때문인지 과거 경향신문 수습기자를 취재하러 왔던 한 방송사의 다큐 프로그램 이름은 <극한직업>이었다.

극한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종종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름의 결론은 다음 2가지였다. 주어진 일을 주어진 시간 안에 어떻게든 마무리해내는 능력과 그 누구에게, 뭐든 물어볼 수 있는 용기를 습관처럼 장착하는 것. 마감을 지키고 막힘없이 취재할 수 있는 것은 기자로서 일해나가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기사를 잘 쓸 수 있는 교육과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연습기사가 시뻘겋게 되도록 ‘빨간펜’을 당했지만 빨간펜의 목적은 대개 기사를 특정한 형식으로 잘 정리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렇게 수습교육을 마치고 나면 모두가 파도에 잘 깎인 몽돌처럼 몇 가지 정형화된 기사에 익숙해졌다.

이건 종이신문을 제작하기 위해 최적화된 방식이기도 했다. 지면을 이리저리 갈라 한정된 분량만큼 기사를 넣어야 하니 기사는 무엇보다 ‘경제적’이어야 한다. 기사의 주제가 뭔지 가장 먼저 알려주고 핵심 팩트만 골라 압축해야 했다. 맥락과 전후 상황에 배려할 공간은 없었다. 기자의 주관은 금기시됐으며 그마저도 모두 발라냈다. 말 그대로 뼈만 남는다.

그런데 이제 독자들은 이런 기사가 불편하고 불친절하다고 말한다. 기자가 일방적으로 팩트의 중요도를 매겨 나열해놓고 맥락이 제대로 담기지 않으니 기사는 물 흐르듯 이해되지 않는다. 기자의 관점도 없으니 건조하기 짝이 없고 정작 사안을 어떻게 봐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접근이 어려운 팩트를 발굴해내는 것은 여전히 기자의 경쟁력이지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팩트를 잘 정리하는 능력은 더 이상 경쟁력이 아니다. 팩트를 잘 정리하고 맥락과 관점까지 제시하는 좋은 글은 기사 말고도 많다.

기사를 선명하게 쓰기 위해 무리하게 주제를 뽑아 단정하는 일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다. 세상일이 그렇게 무 자르듯 재단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재단되지 않는다면 재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사를 써야 한다. 사실 독자들은 신문이 ‘낡아서’ 안 보는 것이 아니라 기사가 ‘낡아서’ 안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임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원 회의에서 파워포인트는 금지’라는 원칙을 강조했다. 회의에서는 파워포인트 대신 모두가 자신의 관점과 완결된 이야기를 담은 6장짜리 메모를 준비해 발표해야 한다. 일목요연한 파워포인트를 아무리 만들어도 회사에는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다.

올겨울에도 여전히 많은 수습기자들이 경찰서를 헤맬 것이다. 언론사의 수습교육 관행은 많이 달라졌다. 경향신문 수습기자들도 더 이상 경찰서에서 숙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늘 써오던 기사 작성법을 가르치던 교육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미디어의 콘텐츠가 바뀌려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지만 선행돼야 할 것 중 하나가 기자 교육을 바꾸는 일이다. 수습기자들이 배워야 할 것은 팩트를 잘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맥락과 관점을 담을 수 있도록 생각하는 법이다.

<이인숙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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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석에 앉아 노자강독을 듣는다. 오늘은 제50장이다. 대강의 뜻이야 번역된 책을 참조하면 되겠지만 한자의 뿌리까지 더듬자니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산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중간의 대목에 얄팍한 마음이 실린다. 人之生(인지생), 動之死地(동지사지). 사람의 삶은 죽을 곳으로 움직여 가는 것. 그중 세 글자에 눈이 꽂혔다. 지금까지 그 전모를 모른 채 나도 인생이란 말을 여러 번 사용하였다. 어느새 그것의 반 고비를 지난 마당에 가끔 그 어디로 떨어진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그런 마당에 갈 지(之)를 사이에 끼우니 남은 인생이 어디로 급박하게 굴러간다는 촉감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도 같았다. 한 글자 차이로 인생과 인지생은 그 어감이 이렇게 퍽 다르다. 난해한 수업을 마치고 취해서 귀가할 때 이런 노래를 흥얼거렸다. “인지생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침불시(寢不尸)라고 하셨던가. 잘 때도 시체처럼 똑바로 눕지 않고 옆으로 걷는 듯이 잤다. 사나운 꿈을 꾸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밤을 건너고 주말이 오면 또 마음을 일으켜 바깥으로 나가, 몸을 움직여서 가는 곳은 산.

시원하게 앞으로 달린다. 이 도로를 만드는 데, 이 다리를 놓은 데 땀 한 방울 보탠 적 없지만 나를 안 받아준 적은 없다. 그렇게 해서 장보고대교를 건너는데 좌우에서 급한 해류가 흔들리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완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 근처 어느 야트막한 곳. 저기는 바다이고 여기는 산기슭이다. 그 사이에 섬이 형님처럼 앉아 있다. 그 섬에 가고 싶었다. 이젠 달력도 얇아졌다. 두 장이 마지막 잎새처럼 간당간당하다. 풍부했던 햇살도 졸아드는 저녁이다. 모든 것들이 움직이며 그 어디로 넘어가는 중.

올해의 꽃들이 모두 사라졌군, 기대를 접으려는 때 길가에 어엿하게 핀 꽃이 있다. 남녘이라서 아직도 가능한 자주쓴풀이다. 미라처럼 쓸쓸하게 꽃대 위에 저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다. 피뢰침처럼 날카로운 잎 하나를 입에 넣어본다. 혀를 찌르는 쓴맛이 다리를 다시 건널 때까지 입에 감돌았다. 그것의 맛도 이렇게 쓰다! 새삼 깨우쳐주는 자주쓴풀, 용담과의 두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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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가 바뀌는 데 14년이 걸렸다. 대법원이 종교나 신념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드디어 응답한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여 형사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사법의 원초적 보수성 때문에 판례변경이 쉽지 않은 전례에 비추어보면 이제라도 사회 변화를 수용한 사법부의 결단은 박수받을 만하다.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호소하면서 인권의 새로운 지평을 연 판결이다. 이로써 그동안 형벌과 맞바꿔온 수많은 젊은이들이 양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양심에 따르다가 전과자가 된 그들이지만 이제 양심을 지킨 자신을 대견해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다수와 다르다고 배제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다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임을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형사처벌을 해선 안된다는 판결을 내린 후 소송의 당사자인 오승헌씨가 취재진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법원 판결 이후에 논란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판결 비판과 합리성을 잃은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가 그렇다. 군대 간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비아냥거림이 대표적이다. 병역을 거부한 것이 양심이라면 병역의무를 다한 것은 비양심이냐는 비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립구도 조작이다. 병역거부가 양심에 따른 결정이라는 의미인데, 의도적으로 ‘양심적’과 ‘비양심적’을 대칭시킨 것이다. 신성한 국방 의무 앞에 열외가 없고 누구나 평등해야 국가안보가 굳건히 세워질 것이라고 믿는 자들은 남북의 대치상황을 들먹이며 판결을 비난한다. 진영논리로 사법을 재단하기도 한다. 분노와 비판의 목소리를 과대 포장해 판결의 의미를 깎아내려는 언론도 문제다. 있는 그대로를 기사화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이라고 하더라도 대법원의 무죄판결에 비난일색인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와는 거리가 멀다. 국민의 반응이 비논리적이고 반인권적이라면 일침을 가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 아닌가.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도 마찬가지다.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증가할 것이라거나 누가 나라를 지키나 등의 반응을 부각시키거나 양심을 판 병역기피의 불복종 사회가 초래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대체복무에 징벌성을 가하려는 기획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로 보게 되면 양심을 파는 징병대상자를 막기 위해서 현역복무보다 훨씬 더 힘든 대체복무로 만들어야 할 정당성이 생긴다. 그래서 지뢰제거 작업이나 복무기간 2배, 3배가 합당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처벌로 둔갑하는 것이다. 징벌적 대체복무로 형벌이 대체되는 꼴이다. 그야말로 명칭사기다. 대체복무 논의에도 비논리가 끼어들고 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양심을 파는 병역거부자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대체복무의 종류와 기간을 정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병역거부가 정당하다면 현역복무에 상응하는 대체복무를 부과하면 된다. 대체복무의 종류와 기간을 정하는데 정당하지 않은 병역거부를 상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함부로 양심을 파는 비양심적 징병대상자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당한 병역거부자에게는 징벌이 된다. 마치 엄한 형벌을 부과해야 잠재적 범죄자들이 겁을 먹고 범죄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흡사하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형사처벌 여부 논란은 대법원의 사법적 판단으로 종결되었지만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체복무 논의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양심적 신념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의 취지에 맞게 인권의 관점에서 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임무가 있다. 바로 양심의 자유가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하여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하고 결정해주는 나침반인 양심을 지켜주어야 한다. 그들이 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결정은 이제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그들이 이행해야 할 대체복무도 병역의무다. 따라서 징벌성을 띠어서는 안된다. 20대 젊은이들에게는 1~2개월도 황금 같은 시간이다. 할 일 많은 그 시기에 양심을 팔기에는 9개월도 너무 길다. 엄청난 불이익으로 느껴질 것이다. 현역 18개월의 1.5배인 대체복무 27개월도 현역복무를 상쇄하고도 넘친다. 정당한 병역거부자에게 정부안처럼 36개월 징벌적 대체복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현역병이 느낄지도 모를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해 줄 것이 아니라 병영문화 혁신과 군 인권향상이 우선이어야 한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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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자신의 판관이 될 수 없다”는 법언이 있다. 사건의 이해 당사자가 그 사건의 판관이 되었을 때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최근 그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장하의 법원행정처 사법농단 의혹사건을 재판할 특별재판부법을 만드는 일도 이러한 법언을 실천하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특별재판부법안을 발의한 박주민 의원에 의하면,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경우 사법농단 사건의 배당 가능성이 높은 형사합의부의 부패전담부 재판장 7명 가운데 5명이 이 사건과 관련해 수사나 조사의 대상이 됐으며, 서울고등법원의 경우에도 이 사건이 배당될 가능성이 있는 14개 형사합의부의 판사 42명의 40%인 17명이 재판에서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대미문의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재판이 보다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판’으로 진행되게 할 목적으로 탄생한 법안이 바로 특별재판부법안이다. 이 법안은 사법농단 사건 재판을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1개 이상, 서울고등법원에 1개의 특별재판부를 각각 두는 것이 골자다. 그리고 특별재판부의 재판관들을 추천하기 위한 후보추천위원회를 두고 이 위원회는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한 3명, 두 법원의 판사회의에서 추천한 3명, 변호사 자격을 가지지 않은 각계 전문가 3명으로 구성한다. 대법원장은 이 추천위원회가 추천한 2배수의 현직판사 후보자 중에서 특별재판부 재판관을 임명한다. 그런데 이 특별재판부법안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서 위헌이라는 주장들이 들린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첫째, 헌법상의 삼권분립원리에 위반해 법원의 사건 배당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사건 배당권을 법원에 주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의 적지 않은 판사들이 이 사법농단 의혹사건이나 사건 당사자들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는 특수상황이다. 이러한 특수상황에서 사건이나 사건 당사자와 이해관계가 없는 객관적인 현직 법관들을 추천받아 특별재판부를 구성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를 가지는 사법부의 사건 배당권에 대한 일시적 제한일 뿐 권한 침해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국민의 대표인 입법부가 입법권을 통해 사법부의 재판부 구성 등 사법행정권 행사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견제하는 것은 삼권분립원리 위반이 아니라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상으로 삼는 삼권분립원리의 한 제도적 실천이 된다. 현직 법관들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헌법상의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 위반도 아니며, 현재의 법원 내에 특별법원이 아니라 특별재판부를 두면서 대법원이 최종심을 맡게 되기 때문에 심급제도와 충돌하지도 않는다.

둘째, 특별재판부 재판관 후보추천위원회 구성에 변호사 단체와 학식 및 덕망 있는 비법조인을 참여시켜 법원 외부에서 재판부 구성에 관여하게 되면 사법부의 법관인사권이 침해되고, 외부 인사들의 추천을 통해 정치적 편향성이 있거나 유죄의 예단을 갖고 있는 법관이 특별재판부에 들어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추천위원회와 특별재판부 자체를 혼동해선 안 된다. 대법관 추천위원회에도 다수의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지만, 이것이 위헌 논란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후보추천위원회에 외부 인사를 참여시키는 것은 특별재판부의 재판관 후보를 추천하는데 법원 내부뿐만 아니라 법원 외부의 객관적 목소리를 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추천위원회가 추천한 2배수의 후보 중에서 최종적으로 재판관을 임명하는 것도 대법원장이다. 사법부의 법관인사권 침해도 아니다. 또한 특별재판부법은 특별재판부의 구성을 통해 사건이나 사건 당사자와 관련이나 연고가 없는 공정한 재판부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정치적 편향성이나 유죄의 예단을 갖고 있는 법관을 뽑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원 재판 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수용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특별재판부가 꼭 필요하다. 기존의 사건 배당 방식대로 배당된 재판부에서 만약 무죄가 선고되면 국민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국민들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90%가 발부되는 압수수색영장이 사법농단 관련자들에게는 90%가 기각됐던 악몽을 금방 떠올릴 것이다. 설령 무죄판결이 나더라도 공정한 재판을 위해 구성된 특별재판부에서 무죄판결이 나야 국민들도 이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국민의 법원 불신이 극심하다는 말이다. 결국 법원 불신과 특별재판부법을 자초한 것은 다름 아닌 법원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특별재판부법은 합헌이다. 오히려 재판거래나 법관사찰 의혹으로 법원 스스로가 허물어뜨린 헌법상의 ‘사법권 독립’을 복원하기 위한 ‘헌법복원법’이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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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이 사망한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고시원 화재 참사에서 살아남은 거주자들 상당수가 인근 다른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고 한다. 종로구청이 서울형 긴급복지 사업에 따라 이들에게 1개월 동안 임시거처 마련 비용을 지원하는데, 이들이 갈 만한 곳은 다른 고시원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 옮긴 고시원이라고 특별히 더 나을 리 없다. 지옥의 화마에서 간신히 벗어난 피해자들이 언제 또 어떤 사고로 죽음으로 내몰릴지 모를 곳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고는 우리 사회의 ‘최후의 거주지’인 고시원으로 몰리는 주거취약계층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부가 실시한 ‘주택 이외의 거처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적으로 1만1000여개에 달하는 고시원에 15만200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취약계층이 급증하면서 최근 7년 새 고시원은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고시원뿐 아니라 쪽방, 숙박업소, 비닐하우스 등 주택으로 분류되지 않는 취약한 주거지에 살고 있는 이들은 37만가구에 달한다. 이들 상당수는 보증금 몇백만원과 월세 몇십만원을 마련할 수 없는 저소득층이다. 실제 관수동 고시원 화재 참사에서 숨진 7명 중 4명이 기초생활수급자였다.

11일 오전 지난 9일 새벽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앞에 시민들의 추모 꽃과 글들이 놓여져 있다. 김기남 기자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취약계층, 고령자 주거지원 방안’에는 주거환경이 열악한 노후 고시원 등을 매입해 양질의 주택으로 개선한 뒤 저소득 가구에 임대주택으로 공급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입주할 수 있는 주거취약계층도 한정돼 있다는 것이 주거 관련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이번 고시원 참사 피해자들도 종로구청이 긴급 주거지원 대상으로 인정하면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주택사업자들이 보유한 인근 미임대 공공임대주택으로 입주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피해자들이 임대주택 보증금과 월세를 낼 여유가 없으면 고시원을 벗어날 수 없다. 공공임대주택에도 들어가기 힘든 주거취약계층이 적지 않은 것이다. 공공임대주택의 문턱을 낮춰 보다 많은 주거취약계층이 입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당장은 현재 수십만명이 살고 있는 고시원이나 여관, 쪽방 등 주거취약계층 거주시설에 대한 화재 안전 점검과 관리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지난 9일 이번 참사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한 시민단체들의 기자회견에서는 ‘지하도는 불이 나면 도망이라도 갈 수 있지만 고시원은 도망갈 곳도 없어 고시원을 나왔다’는 증언이 소개됐다. 차라리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취약 주거시설의 실태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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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0일 여성들은 “당신이 바뀔 때까지 #미투는 멈추지 않는다”고 천명하기 위해 또다시 거리에 섰다. 사회 곳곳에 스며 있는 성차별·성폭력의 구조를 바꾸라는 수많은 여성들의 용기 있는 증언을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국가와 사회에 다시 한 번 변화를 촉구했다. 미투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차별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미투 운동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연초 폭발적인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정부와 국회는 다양한 정책과 법·제도 개선책을 내놨다. 그러나 한 해가 다 간 지금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우리 사회에 성차별·성폭력이 해결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현실만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아는 것만으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없다. 잘못된 법과 제도, 문화를 고치고, 적절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국회에 발의된 미투 관련 법안은 100건이 훨씬 넘는다. 다수의 입법 발의는 국회가 성차별적인 사회를 바꾸는 데 함께할 것이라는 미투에 대한 응답이며 변화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이제 국회의 존재이유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10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의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서 국회 관계자들이 참고인으로 나온 가정폭력 피해자 유가족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우산으로 입장을 도와주고 있다. 권호욱 기자

‘상대방의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범죄로 구성해야 한다는 형법 개정안, 소위 ‘비동의 간음죄’ 신설을 담은 법안만 8건이다. 8건의 법안을 공동발의한 의원 수는 96명이다. 국회의원 전체의 3분의 1에 근접하는 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의원들이 발의한 이 법안은 당황스럽게도 아직도 계류 중이다. 물론 각 법안마다 약간의 차이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전체 의원의 3분의 1 정도가 최협의의 폭행·협박(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폭행·협박)으로 성폭력 범죄를 규정하는 것은 문제라고 개정안까지 발의했다. 상대방의 자유로운 동의 여부를 성범죄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미 보편적 국제규범이다, 지난 3월 발표한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한국 정부에 대한 권고는 이를 다시 확인했다. 이런 상황이면 ‘비동의 간음죄’ 법안은 이미 신설되었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정부는 미투 운동 전부터 ‘실질적 성평등 사회 실현’을 국정과제로 삼고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설치와 여성가족부의 강화’를 약속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은 7월 국무회의에서 ‘미투 운동은 나라다운 나라, 공정한 나라, 차별 없는 나라를 만들라는 요구’이며 ‘사회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은 성차별과 성폭력을 근절하고 성평등한 민주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민에게 응답’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뜻은 정책에도 예산에도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각 부처의 성평등 정책 추진 의지는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의 제동에 힘을 잃었고, 실질적 성평등 실현이라는 대통령 공약도 감감 무소식이다.

미투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이면서 동시에 국가와 사회가 시급히 정책과 제도로 응답하라는 요구다. 말만으로 현실이 변할 수 없다.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 구조를 만들고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며 이를 법·제도로 받쳐야 한다. 여성들이 또다시 거리에 나선 이유다.

국회는 ‘비동의 간음죄’ 신설 등 실질적인 변화를 위한 입법을 조속히 추진하라. 정부도 성평등위원회 공약 이행에 속도를 내 각 부처의 성평등 정책 추진에 힘을 실어야 한다. 여성들의 일상 삶의 변화가 #미투에 대한 진정한 응답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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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자전거 식구. 다섯 식구가 졸졸 자전거를 타고 나락 베는 들판을 달린다. 다섯 살 막내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를 타면서, 시작된 풍경이다. 아이들이 요즘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더 어릴 때는 자전거 앞뒤로 바구니 같은 자전거 의자를 달고, 한 자전거에 셋이서 타고 다니기도 했다. 이제 큰아이가 4학년.

가끔씩 글을 올리는 ‘봄이네 살림’ 블로그에서 지금껏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글은 “시골에서 아이와 함께 살기”라는 글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날마다 적어 두고 싶은 일들이 꽤 많아서, 아이들 이야기를 자주 썼다. 십 년 넘게 시골에서 살다 보니, 여기에서 이렇게 지내는 것이 뭐 특별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인지, 쓰는 것이 확 줄었지만.

세 아이와 시골 살림을 하면서 아직까지는 큰돈 들어갈 일이 없었다. 게다가 경남은 일 잘하는 김경수 도지사 덕분에 고등학교 무상교육도 잘 이루어질 테니, 앞으로는 더욱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혹시 생길지 모르는 큰돈 들어갈 일, 이를테면 대학 등록금이나 독립해서 방을 얻는 것 같은 일에 대해서는 부모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틈날 때마다 하고 있다. 몇 해가 지난다 해도 돈을 들여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는 일은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농사도 그렇고, 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일도, 그저 지금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것 말고는, 따로 학원을 다니거나 하지도 않는다. 욕심 같아서는 씨 뿌리고, 모내기하고, 논에 김매고, 나락 베고 하는 큰일 있을 때만이라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같이 일하면 좋겠다 싶지만, 그런 것도 정작 일이 닥쳤을 때는 쉽지 않다.어쨌거나 무언가를 더 가르치지 못해서 불안한 것보다는, 지금까지 늘 아침저녁을 함께 먹는다는 것, 잠자리에 들 때 옆에 있다는 것. 서로에 대해 꽤 잘 아는 식구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얼마 전에 <삼총사>를 읽은 큰아이는 나를 두고 셋 가운데 포르투스를 닮았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내가 말이 많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기 때문이라나? 하…). 가까이에 사는 내 또래 부모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들이 아무리 바빠도 집에서 아이들과 살을 비비고 지내는 시간이 많다.

십 년 전, 배 속에 첫아이가 들어섰다는 걸 알고, 곧바로 시골로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서울에서 아이와 함께 살기가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우리 부부는 오래 이야기하지 않고도 우리한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시골에서 살아 온 살림살이가 요란스럽고, 토닥대고, 우왕좌왕이었던 많은 순간에도 그 결정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큰아이는 서너 살 무렵, 서울에 갔던 어느 날 “길에서 고춧가루 바람이 불어”라고도 하고, 아파트에 가서는 “발밑에 사람이 있어? 천장 위에도?” 하면서 놀라기도 했다. 4학년이 된 이제는 제법 서울과 또 가까운 지방 도시들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구별하는 정도가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시골에서 살겠다 한다.

아이들과 자꾸 자전거를 타려는 것은 나와 아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걸어서 어디를 다니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골이야말로 문 앞에서 문 앞까지 차를 타고 다니는 문화가 되어버렸으니까. 걷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길은 점점 자동차한테만 좋은 꼴로 바뀌고, 아이들은 더 걷기가 어렵다. 아마도 그래서 아이들이 자전거 타는 걸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이겠지. 조금만 익숙해지면, 자기들끼리도 제법 멀리까지 다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조금 더 날이 추워지면, 함께 산에 올라가 잔가지를 주워 모으고, 낙엽 썩은 것을 담아 올 것이다. 그걸로 겨우내 구들방에 불을 넣고, 밭 한쪽에 거름을 넣고. 그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보내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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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었다.

노출되었고 옮기려면 나 혼자는 안되지만 여럿이 달라붙으면 한꺼번에 치울 수 있는

 

그것은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있었다. 가만히 두면 감자에 싹이 나는 물건이 아니라서 뭘 하는지 몰랐지만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

 

그것은

더는 사용할 수 없는 크기로 있었다. 이제 나는 그것이 옆에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옆에 두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임승유(1973~)

꽤 큼직한 것이 한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온 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늘 내 생활의 공간에 있었다. 그것은 너무 가만히 있어서, 자라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각별히 눈길이 가는 일이 드물었지만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이제 그것을 무언가에 맞게 쓸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것이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 때문에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내 옆에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의식하기 시작하자 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하듯이 우리에겐 있는 듯 없는 듯이 함께 살아온, 내 몸과 마음의 그림자처럼 되어버린 물건들이 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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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시한을 넘기고도 며칠 미적거렸다. 책 뒤표지에 들어가는 짧은 추천사를 쓰는 일이었다. 편집자의 주문은 간단명료했다. “두세 문장만 부탁드립니다.” 분량이 길지 않아서 미룬 것은 아니다. 원고를 들춰보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에 내가 칼럼에 소개했던 대학생의 자전 에세이 원고였다. 얼추 아는 이야기여서 굳이 완독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편집자의 독촉 문자가 잦아졌다. 더 이상 미룰 상황이 아니었다. 지난해 이 지면에 실었던 글(‘엄지장갑이 나에게 일깨워 준 것’, 2017년 2월27일 자)을 다시 찾아 읽었다. 칼럼은 한 대학생이 청각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캠페인을 벌인다는 신문 기사를 인용한 다음, ‘차이’를 존중과 배려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주장에 이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황금률을 환기시키며 마무리됐다. 단행본 원고를 다 읽지 않아도 추천사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도리가 아니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글을 써내려갔을 저자, 좋은 책을 만들어 독자와 나누고 싶어 하는 편집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끝까지 다 읽지는 못해도 중요 대목은 훑어보자는 심산으로 원고 파일을 열었다.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아직도 벙어리장갑이라 부르세요?> 자전 에세이의 첫 장면은 ‘현명한 엄마’였다. 저자 원종건씨의 어머니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다 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린 종건에게 엄마는 헬렌 켈러 같은 존재였다.

저자의 어린 시절은 혹독했다. 아버지는 네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청력과 시력을 잃은 엄마와 단둘이서 세상을 헤쳐 나와야 했다. 노숙까지 해야 했던 젊은 엄마는 고심 끝에 어린 아들을 입양시키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냉대와 멸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공장에 취직해 모자(母子)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미혼여성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에서 어린 아들은 종종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엄마는 현명했다. 청소를 도맡아 하고 모두 잠든 사이에 어린 아들을 씻겼다. 그때 어린 아들이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감사와 겸손’이었다.

사회의 변방으로 몰린 장애인이, 삶의 극지에서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장애인 가족이 감사와 겸손을 말하고 있었다. “감사는 모든 순간에 존재하며, 겸손은 최고의 순간에 존재한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20대 후반 젊은이의 깨달음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감사와 겸손의 차이를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하다니. 원고를 끝까지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의 엄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 화가였던 엄마는 현명함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했다.

한 방송사의 도움으로 시력을 되찾던 순간, 엄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건아, 우리도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 좋은 일이 아니고 ‘더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 하기도 쉽지 않은데 더 좋은 일을 하자는 거였다. 시력을 회복하던 그날, 엄마는 ‘더 좋은 일’을 몸소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서약했다. 엄마의 가르침은 계속됐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거나 도움을 베풀 때 “내가 주고 싶은 걸 주지 말고 상대방이 받고 싶은 걸 주자”.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원고 전체가 ‘향기 나는 펜으로 쓴 글’이었다.

지난 주말 시 창작 모임이 있었다. 문예창작학과 출신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시를 합평하는 자리다. 내가 물었다. “엄지장갑이 뭔지 아십니까?”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른 분들이어서 금방 답이 나올 줄 알았다. 이십여 명 중에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언중(言衆)은 보수적이다. 유명인이 나서거나 다양한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신조어가 일상 언어로 뿌리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사회 구조나 위계와 관련된 고정관념을 바로잡는 언어라면 더욱 그렇다. 사회를 지배하는 말과 이야기, 특히 ‘나쁜 이야기’는 매우 완고하다.

원종건씨는 학창 시절부터 ‘설리번’이라는 팀을 만들어 벙어리장갑 대신 엄지장갑이란 단어를 쓰자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벙어리장갑에서 엄지장갑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소수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감사와 겸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상대방의 처지를 우선하지 않는 한 감사하는 마음, 겸손한 태도는 우러나지 않는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감사하고 겸손하자는 것은 아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는 마음이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한다. 진정한 겸손은 오만과 불의에 둔감하지 않다.

원종건씨는 지금 한 기업에서 사회공헌 업무를 맡고 있다. 소방공무원 지원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데 헬렌 켈러, 아니 설리번 같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황금률을 실천한다. ‘더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일일이 현장을 찾아 소방관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과 시스템을 발굴한다. 지역에 따라 소방관이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강원도 소방관은 ‘눈’이, 제주도 소방관은 ‘고사리’가 문제라고 한다. 단숨에 원고를 다 읽고 나서 짧은 추천사를 써서 보냈다. “말을 바꾸면 삶이 바뀌고 이야기를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 ‘벙어리’를 ‘엄지’로 바꾸는 과정이 곧 1인 혁명이고 사회 혁신이다. 우리에겐 바꿔야 할 말과 이야기가 너무 많다. 감사와 겸손의 위력을 증명하는 이 책이….”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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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서울 광화문에 수백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이날 열린 ‘스쿨미투’ 집회에서 아이들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며 학교 성폭력 근절을 촉구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일이 반복되어야 하는가.

학교 현장에서 성희롱·성폭력 피해가 발생하면 관리·감독 주체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초등학교 교사가 교육활동 중에 다수의 학생들을 추행했다. 피해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은 해당 초등학교를 설치·운영하는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도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이 사건에서 법원은 지자체에 사용자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광주지법 순천지원 2008가합2136).

지자체는 가해자인 교사에게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등 상당한 주의를 다했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지도·감독의 의무를 지는 주체로서 교원적격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등 성희롱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교사가 혹시 있는지를 사전에 확인해야 했다는 것이다. 1~2시간의 교육만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만일 위험성이 있는 교원이 발견된다면 지자체는 개인상담을 포함한 특별연수, 지속적인 관찰 등 피해 발생을 사전에 방지할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반드시 운영했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모든 관리·감독 주체는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3일 오후 서울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열린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학생회 날 스쿨미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집회는 청소년 페니니즘 모임,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전연대 등 34개 단체가 참여했다. 연합뉴스

다른 판결에서 법원은 13세 미만인 사람에게만 특별히 적용되는 추행죄(의제강제추행)에 관한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 범죄를 처벌하는 목적은 미성년자의 건강한 성장과 성숙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어서, 성인에 대한 추행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의 강제추행죄는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항거할 수 없었거나 또는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를 따진다. 하지만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있어서는 가해자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도덕관념에 반하기만 하면 폭행이나 협박이 없더라도 추행죄가 인정된다(서울중앙지법 2005노2022). 미성년자를 보다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범죄 성립 범위를 훨씬 넓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현행법은 또 다른 보완책을 구비했다. 성인 간의 성희롱은 형사범죄가 아니지만 19세 미만인 사람에 대한 ‘성희롱 등 성적 학대행위’는 형사처벌 대상이다. 올해 4월25일부터 새로 시행된 법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형에까지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성희롱이 성폭력범죄보다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잘못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오해가 있지만, 오히려 성희롱이 더 큰 상흔과 앙금을 남길 수도 있다.

형사절차 아닌 징계절차에서만 사안이 다뤄지더라도 가해자가 쉽게 법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 성 비위에 대해서는 시효를 10년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법원은 피해자가 상당한 기간 동안 문제제기를 주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까지 고려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시간이 조금 경과했더라도, 그리고 분명히 이상한 언행은 있었지만 학대행위에까지 이르는지가 다소 불분명하더라도 처음부터 단념할 필요는 없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경우, 벌금형이든 징역형이든 어떤 형을 받건 유죄가 확정되면 당연퇴직이다. 예외 없는 엄정한 법 적용과 집행이 절실하다.

<박찬성 | 변호사·포항공대 상담센터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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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공평한 가치재일까.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제각각이다. 저임금 노동자에게 주어진 하루는 기초생활비를 얻기 위한 교환재이다. 그들에게 휴식이나 자유시간이란 비대칭적인 가치재다. 공간 또한 시간의 불공평함을 확인시켜주는 존재다. 서울의 1년과 분쟁에 시달리는 중동지역의 365일은 엄연히 다른 시간이다. 

2014년 6월29일.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이슬람국가의 건국을 선포한다. 시리아 동북부와 이라크 북부지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테러의 상징으로 알려진 이슬람국가의 탄생은 시간의 태엽을 반대로 돌려야 맥을 잡을 수 있는 사건이다. 2011년 말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한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2011년 5월 이후 중동국가와의 분쟁을 원치 않았던 오바마 정부의 결단이었다.

2009년 취임한 오바마는 전임 대통령이 남용했던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정치용어를 폐기한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유일한 상원의원이었다. 2007년 1월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유엔의 반대를 무시하고 저지른 이라크전은 미국인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2006년 11월에 치러진 중간선거 전날 사임서를 제출한다. 이라크전으로 인한 퇴역장성들의 비난과 공화당의 하락세가 더해져 부시 정권은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미군은 2003년 12월 과거 미국의 군사적 후원을 받았던 사담 후세인을 체포한다. 후세인 체포작전 이후 이라크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알 카에다의 폭탄테러, 수백만명에 달하는 이라크 난민,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무력충돌 등으로 중동의 화약고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원유국가인 이라크 점령 이후의 계획이 전무했던 미국 정부는 그제야 전쟁의 뼈 아픈 대가를 체감한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은 파격적인 조건을 내놓는다. 사담 후세인의 망명, 미국의 사찰 인정, 미국회사에 석유를 포함한 경제적 이권 제공, 유엔이 인정하는 선거 실시, 아랍 이스라엘 평화협정 협조 등이 그것이다.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부시 정권은 전면전을 시도한다. 걸프전 이후 전쟁능력을 상실한 이라크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패전국의 멍에를 짊어진다.

2003년 2월 세계 각지에서 이라크전 반전시위가 벌어진다. 9·11 테러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라크를 상대로 한 패권국가의 횡포를 반대하는 시위였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전시위에도 불구하고 미군부는 전쟁의 시간을 원한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언론에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이 있다는 거짓정보를 흘린다. 미군부는 두번째 이라크전을 통해서 이란, 시리아 등을 견제하는 전략을 세운다.

1999년 11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아랍계 유학생 4명이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를 방문한다. 그들은 오사마 빈 라덴과 접견한 이후 지하디스트로서 충성을 맹세한다. 함부르크 그룹의 리더 아타는 민족주의자로서 제2의 인생을 택한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자신을 키워준 여유롭고 윤택한 시간이 아닌 중동의 밝은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운명의 시간이었다.

종교분쟁을 제외하면 한반도와 중동은 비슷한 지리적 운명을 지녔다. 두 지역은 열강들의 대리전쟁의 각축장이었다. 미소 냉전시대 격전지였던 아프가니스탄, 악의 축으로 분류한 이란과 이라크, 미국 정계의 큰손으로 자리잡은 이스라엘. 지속적인 외세의 침략과 정치공세로 화약고로 변해버린 중동지역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들에게 안전하고 평화로운 미래는 없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그들에게 시간이란 성전을 위한 소비재에 불과하다. 국가의 시간은 역사와 지형과 종교와 민족에 따라 운명을 달리한다. 이슬람국가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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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대리수업을 맡았다. 이 시간은 우리 주변의 일반상식 중에서 모르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받는 수업으로 대신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손을 든 학생이 “선생님, ‘활강’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칠판에 ‘활강’이라고 썼지만 ‘모르는 게 없는’ 그 선생님도 제대로 답변을 못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학생이 겨울철 스키종목의 하나인 ‘활강 경기(滑降 競技)’를 어디서 읽었거나 들었지 싶다. 1960년대 초,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의 추억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딸네 집으로 가서 ‘또래와는 많이 다른’ 아홉 살 손자를 데리고 단풍이 한창인 동네 산과 수변공원을 거닐었다. 한강으로 흐르는 하천가에는 정성들여 가꾼 국화 화분이 곳곳마다 놓여 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공사 중인 장비에서 나는 엔진 소리가 요란했다. 플래카드와 입간판에는 “○○천 차집관거(우안) 보수공사입니다. 불편하신 사항은 연락바랍니다….” 무슨 공사를 하는지 인부에게 물었다. 하수관 청소를 하는데 ‘우안’은 영 모르는 표정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 국어사전을 찾았다. 차집관거(遮集管渠)는 “하수나 빗물을 모아서 하수처리장으로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관이나 통로”, 우안(右岸)은 “강의 하류를 향하고 볼 때, 오른쪽 강변을 이르는 말”이었다. 괄호 안 한자를 보니 겨우 알 듯 말 듯하다. 하천 오른쪽 땅속에 묻힌 하수관에 공기를 주입시켜 대청소를 하는 공사인 것 같은데 안내문은 이렇듯 난해했다.

몇 달 전 언론 매체와 인터넷에 ‘오량가구’라는 단어가 오르내렸다. 그 무렵 어느 신문의 기사이다. 국무회의 때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있는 ‘침류각(枕流閣)’ 안내판을 찍은 사진을 들고 직접 읽으면서 “이것이 공공 언어의 한 유형인데, ‘세벌대 기단, 굴도리집, 겹처마, 팔작지붕, 오량가구, 불발기를 두고 있고 상하에 띠살, 교살, 딱지소, 굴도리…’ 혹시 도종환 장관은 뜻을 한 번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어 대통령은 “오량가구, 그것이 ‘5개가 있는 구조’라든지 이런 것이 전통가옥 연구자들에게는 관심일지 몰라도 일반 국민에게는 무슨 관심이겠나”라며 “제가 느끼는 궁금증은 ‘이게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을까, 언제, 왜 이게 청와대 안에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등인데 그런 의문에 대해서는 안내판에 한마디도 없다”고 지적했다. 침류각은 1900년대 초 전통가옥으로 서울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고 신문기사는 덧붙였다.

‘공공 언어’는 사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말 그대로 공공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공무원이 작성하는 공문서에서부터 법률, 보도자료, 정책명, 문화재 안내판, 지하철 안내문 등에 쓰인 언어가 모두 공공 언어라 할 수 있다. 공공 언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국립국어원에서는 국어 정책 수립은 물론 국어의 정비, 국어 사용 개선, 국민의 국어 능력 향상 등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국어기본법’에 따라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국어 발전과 보전을 위한 업무를 하도록 ‘국어책임관’을 지정하고 있다. 국민들의 국어 능력을 높이고 국어 관련 상담 등을 수행하기 위해 국어 전문 인력과 시설을 갖춘 ‘국어문화원’이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매년 연수회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도 건축·토목, 의료 분야 등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써 온 용어를 지금도 예사롭게 사용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해마다 ‘국어 순화용어’를 발표, 장려하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외래어, 요상한 신조어나 이모티콘, 억지로 만든 약어 등에 눌려 빛이 바래고 있다. 공공 영역에서 작성되는 글의 가장 큰 특징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무교육을 받은 일반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쉽고, 올바른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글을 이해한 국민과 그러지 못한 국민 사이가 불평등하게 된다. 청소년만이, 군인들만이, 의사만이 이해할 수 있는 끼리끼리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또 다른 차별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공공기관, 언론 등에서 ‘쉽고, 바른 공공 언어’ 사용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이다.

요즘 부쩍 학생 질문에 답변 못한 대리 수업을 맡았던 그 선생님이 생각난다.

<노청한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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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안 버리기 잘했다. 비좁은 옷장 안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선택받지 못한 채 ‘애물단지’인 양 홀대받던 옷들이 요즘 다시금 ‘새롭게 주목받는 복고’란 의미의 ‘뉴트로’ 혹은 ‘힙트로’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촌스러울 정도로 로고가 크게 박힌 맨투맨 티셔츠며 빈티지 체크 스커트, 본의 아니게 바닥 청소하기 좋을 만큼 품이 넉넉한 ‘배기 팬츠’ 같은 아이템들.

한때 C 브랜드의 프레스 세일 중에 샀던 과장된 어깨선의 오버사이즈 모직 코트는 좀 아깝게 됐다. 아무리 유행이 돌아와도 다시 입을 것 같지 않은 그 육중한 무게감에 질려서 어느 유난히 추운 겨울에 우리 개들 이부자리로 내주었다.

‘복고상권’을 이끌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 골목길.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해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던 H&M의 글로벌 캠페인 슬로건 “패션엔 규칙이 없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버려진 옷을 재활용하라”를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실천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심지어 디테일에 내 나름의 ‘악마’를 담아 다음과 같이 슬로건으로 변화시킨 셈이다. “재활용하라. 그 밖의 패션 규칙 따위는 개나 주고!”

버리지 않아서 다행인 건 유행 지난 옷뿐만이 아니다. LP라 불리는 비닐 레코드의 귀환 시대를 지켜보면서도 카세트테이프도 언젠가 재조명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지만 지금처럼 구찌 브랜드가 러브콜을 보내는 카세트테이프 전문숍이 생기고 LP도 모자라 카세트테이프로 신곡을 발표하는 뮤지션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설사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그건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그냥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작은 아이거나 소년 소녀였을 때 좋아했던 음악들이 아스라이 거주하는 집이지 않은가? 예컨대 한때 우리의 심장을 건드린 음악들의 부서지기 쉬운 작은 오두막 같은 곳. 하지만 아직 부서지지 않은 사랑스러운 것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그것들을 버리기는커녕 되레 기회 있을 때마다 중고시장에 나와 있는 것들을 하나둘 사 모았고 그 덕분에 우리의 공간은 조금 더 사랑스러워졌다.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돌아온 복고 열풍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른바 ‘복고상권’을 리드하고 있는 동네 익선동에 가보면 안다. 단순히 옛 시절의 소품 몇 점을 가져다 놓는 정도가 아니라 1920년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낡은 한옥 동네 전체가 인테리어는 물론 그 메뉴와 정서까지 젊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 복고 콘셉트의 핫 플레이스로 진화한 것 같다.

뭐랄까? “거리는 산책자를 아주 먼 옛날에 사라져버린 시간으로 데려간다”고 했던 발터 베냐민의 문장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네 같다. ‘테트리스’나 ‘보글보글’ 같은 추억 어린 옛날 전자오락기 몇 대 들여놓고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양 ‘최신 게임 없음’이라고 써 놓은 오락실부터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여하튼 만화와 더불어 모던하게 개조된 한옥 건넌방 같은 공간에서 잠시 쉬어 가기 좋은 ‘만홧가게’도 있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만두를 소쿠리에 담아 꽃 그림이 새겨진 하얀 양철상 위에 놓아주는 분식점도 있다. 정말이지 낡고 익숙한 것에 새로운 감성을 입힌 ‘뉴트로’를 체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지각색의 상점들이 골목마다 가득했다. 그중 우리 커플은 앙버터 식빵과 인절미 티라미수, 단호박 식혜 등을 파는 카페 ‘서울커피’가 궁금했다. 하지만 길고 긴 대기 줄에 질려 이내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지만 그것도 좋았다. 이탈리안 소스와 함께 매우 고급스럽게 플레이팅해서 내어주는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를 경양식집 콘셉트의 레스토랑에서 점심 먹고 민화 작가가 운영하는 예술적인 카페나 비디오방 콘셉트의 기이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까.

너무도 환영할 만한 일은 복고 트렌드 덕분에 생기 없이 죽어가던 골목 상권이 살아났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쓸모를 잃고 버려지거나 잊혔던 물건들이 느닷없이 ‘핫’한 것으로 되살아났다. 구박받으며 자리만 차지하던 엄마의 자개장이 가장 핫한 인테리어 소품이 되어 카페 음료 카운터나 병풍으로 변신하는가 하면 어린 시절 그리도 흔히 재사용되던 델몬트 주스병이 로얄코펜하겐 주전자 못지않게 환영받는 요즘이다. 심지어 오란씨, 서울우유, 크라운 등 추억의 상표가 찍힌 공짜 로고컵이 이렇게 비싸게 거래되는 날이 올 줄이야. “취향의 시대는 죽은 것도 살려낸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살기 힘들어서, 지금보다 걱정 없이 살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심리의 발로로 레트로가 유행한다는 식의 분석 기사를 읽으면 살짝 코웃음이 난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무한히 반복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얘기일 뿐이다. 혹시라도 대중을 매혹하는 도시의 자영업자가 되고 싶다면 발터 베냐민이나 보들레르가 파리의 산책자로서 명상하듯 걸으면서 쓴 글들을 읽어 보자. 대중을 선도하는 가장 최신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 이미 존재했던 것, 가장 친숙한 것에서 나오는 역설에 대해 알게 하는 글들. 아니다. 글보다는 산책을 더 권한다. “비바람에 풍화된 문지방 냄새를 맡고 오래된 기와를 만져보는 것에 더 행복해”할 수 있는 베냐민 같은 산책자가 되어 익선동이나 을지로, 문래동을 쏘다녀 보길 바란다. 그 안에 뭔가 있다. 오래된 추억과 최신의 감각 속을 함께 걸으면 경험하는 일종의 행복감, 혹은 기분 좋게 도취되는 도시의 감각.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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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초보운전 신세다. 길눈도 어둡고 겁도 많아 안 할 핑계를 찾다 보니 실력이 제자리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로드킬의 당사자가 될까봐서다. 시골길에서 새끼 고라니를 마주친 적이 있다. 워낙 저속운전이어서 다행히 고라니 앞에서 멈췄다. 내 차 앞에서 잔뜩 겁을 먹고 오도가도 못하는 새끼 고라니에게 차 안에서 세차게 손사래를 치면서 빌었다. ‘제발, 얼른 지나가 줘.’ 다행히 새끼 고라니는 산속으로 도망쳤다. 겨울이었으니 배가 고파서 내려왔을까, 엄마를 잃고 헤매고 있었을까. 그날 이후 자동차를 주차장에서 빼지 않았다.

그러다 주말마다 기숙사로 복귀하는 아이를 데려다 주느라 또 운전을 시작했다. 농촌의 지방도를 타면 로드킬 현장을 종종 마주한다. 겨울이 오기 전, 먹이활동을 하러 내려오는지 근래엔 너무 자주 로드킬을 보았다.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눈을 감는 순간 내 새끼가 위험해진다. 어떤 어미가 더 독한지를 겨루듯 선연한 핏자국들을 밟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끔은 동물의 사체를 짓이기면서 지나가기도 한다. 그때마다 외마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미안해! 제발, 내 차에만 부딪히지 말아줘!’

죽음은 연습이 없어서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차에 치여 죽은 동물들이 왜 이리 많을까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결론이 내려진다. 산과 들에 도로가 뚫려서다.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떡하니 도로가 놓이고 생존 공간이 단절되어 동물들은 접도구역까지 내려왔다 자동차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시골에 이런 도로가 생겨서 내 새끼는 편하게 데려다 줄 수 있지만, 산속에서 새끼를 잃고 가슴을 뜯고 있을 어미가 어딘가 있을 것 같아 눈물이 난다. 하지만 새끼 잃은 어미 짐승에게 인간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일 뿐.

육계기업으로 유명한 하림그룹의 도축장 건립 논란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 8월, 안성시 양성면에 하루에 돼지 4000마리, 소 400마리를 도축할 수 있는 축산물종합처리장 및 도축장(LPC)과 육가공 설비, 체험관광시설 등을 갖춘 ‘축산식품산업단지’를 건립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림그룹은 2007년 양돈기업인 (주)선진을 인수하면서 도축장 건립을 계속 시도해왔다. 2010년에도 안성시에서 도축장 건립을 추진했으나 주민들과 축산업 관계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구체적인 승인단계까지 갔다. 민간사업이어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이유다. 현재 안성시의회가 제동을 걸어놓은 상태이지만 조건만 갖춰진다면 대형 도축장 건립은 또 추진될 것이다. 축산농가의 반대 입장은 양돈과 한우도 육계처럼 기업형 수직계열화의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주민들은 무엇보다 환경오염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다. 또한 도축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도축장들의 경쟁이 더 심화되어 기존의 도축장 운영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도 있다. 찬성하는 측은 대기업이 진출하니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란 점을 든다.  

하지만 찬반 입장을 다 떠나 대형 도축장이 새로 지어지면 그만큼 도축되는 동물들이 많아질 것이다. 거대한 도축공장의 본전을 뽑으려면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한다. 그만큼 가축들은 더 많이 길러져야 하고 더 많이 죽게 될 것이다. 도로가 만들어져 무구한 동물들이 죽어나가는 로드킬처럼 말이다. 이미 인간은 동물을 너무 많이 죽이고 많이 먹고 있다. 멈출 수 없다면 적어도 더 이상 늘리지는 말아야 한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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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보건복지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연금 개혁 일정의 연기가 불가피해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일 박능후 복지부 장관으로부터 국민연금 개혁안을 보고받은 뒤 “국민이 생각하는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며 개혁안을 반려했다. 당초 복지부는 자체 마련한 개혁안을 오는 15일 공청회에서 여론을 수렴한 뒤 이달 말까지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개혁안을 공개하기도 전에 대통령으로부터 퇴짜를 맞으면서 국민연금 개편 작업이 상당 기간 늦춰지게 됐다.

문 대통령이 국민연금 개혁안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배경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보험료율 인상이 제일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점에 비춰볼 때 개혁안에 담긴 보험료율 인상이 과도하다고 판단한 것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경기 침체로 생활 물가가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보험료율을 두 자릿수로 올리는 복지부의 안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내년도 건강보험료 3.49% 인상으로 악화된 여론을 의식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공청회를 눈앞에 두고 연금 개편 작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은 1988년 출범 당시 저부담·고급여 체제로 설계됐다. 처음 70%였던 소득대체율은 1998년과 2007년 두 차례 조정으로 40%로 인하됐다. 3%로 시작한 보험료율은 1998년 9%로 인상된 이후 20년째 변동이 없다. 그러나 소득대체율이 지나치게 낮아 노후소득을 보장하기 어렵고, 납부 보험료도 적어 연금재정의 안정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현행 제도에 변화가 없다면, 국민연금 적립기금은 2057년에 소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복지부는 연금재정 안정 및 노후소득 보장 방안으로 소득대체율 45~50% 상향 조정, 보험료율 12~15% 인상안을 이번 개혁안에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취임 이후에는 노후소득 보장 확대를 누누이 강조했고, 국민연금 국가지급보장도 명문화하기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연금재정의 안정이다. 노후소득 보장과 연금재정 안정을 위해서는 보험료율 인상 외에 다른 묘수가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현실에서 보험료 인상을 말하기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물러설 수는 없다. 저출산·고령화 심화로 연금 개혁이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 연금제도 개혁을 시도하다가 여론 악화를 우려해 손을 턴 무책임한 보수정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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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26일 한국경제 오형규 논설위원은 ‘청년의 삶을 저당 잡은 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내용은 귀족노조, 직능단체, 시민단체 등이 신규고용창출을 할 수 있는 구조조정과 노동개혁을 막고 있는지라, 청년들의 취업과 삶이 어려워졌다는 그야말로 흔한 사랑노래 같은 것이다.

경제지들이 엄청난 비리가 있는 것처럼 연일 맹공을 퍼부었지만 대다수가 과장이었던 고용세습 문제를 시작으로, 승차공유 서비스에 반대하는 택시기사들과 영리병원에 반대하는 의료계와 ‘좌파 시민단체’ 등이 취업준비생들의 헬조선을 만들어낸 주범들로 지목되었다.

여기까지도 익숙한 논리다. 하지만 이 칼럼의 마지막 문단에서 나는 아연실색했다. “문화연구가 최태섭이 언급했듯 ‘우리편이라는 괴물’에 끌려가선 답이 없다. ‘우리편’도 개혁할 수 있어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것이다”라니? 여기서, 갑자기, 내가, 왜?

내가 ‘우리편이라는 괴물’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쓴 것은 2011년의 일이다. 그리고 내가 괴물이라 지칭한 것은 오 논설위원의 이야기에 오히려 반대되는 이야기다. 반MB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며 진보진영 내의 다른 목소리들을 억압하던 이들, 나꼼수에 대한 비판을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이던 지지자들, 민주노총을 비롯한 ‘구’진보에게 ‘노동’ 같은 낡은 개념으로 재를 뿌리지 말라고 윽박지르던 ‘깨어 있는 시민’과 그들의 ‘단결된 힘’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편이라는 괴물은 그 ‘구’진보가 자신의 가치로 삼았던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는 한편, 그들이 가진 얼마 안되는 자원과 도덕성은 재물로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지금도 트위터의 민주노총 계정으로 가면 비슷한 결의 무례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심지어는 며칠 전 민주노총 계정에 올라온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소속인 21년차 식당조리원의 기고문을 공유했더니, 대뜸 “민주노총 너네들 하는 짓을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 싶지 않다”라는 메시지가 나에게까지 배달되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조합원도 아닌 저에게 그런 말씀 하셔도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이렇게 답변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한편, 오 논설위원은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청년을 주워섬기지만, 선거 때뿐이다. 청년수당으로 입막음할 뿐, 청년 일자리를 위한 구조조정, 노동개혁 등 난제들은 죄다 외면한다”라고 썼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전 정부가 청년을 팔아서 대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했던 대표적인 사례들이 바로 저것이었다. ‘장그래를 위해 노동개혁을 해서 2년 만에 잘리던 비정규직을 4년 만에 잘리게 바꾸겠습니다’ 같은 말장난을 기억한다면 할 수 없을 이야기다.

청년이 빈곤해지는 것이 걱정이면 청년임대주택과 대학생기숙사를 반대하는 건물주들에게 따져볼 일이다. 청년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진 것이 안타깝다면 청년의 정치진입을 막고 있는 기성정치제도에 날을 세워야 한다. 저런 것들이 10% 남짓의 조직률을 가진 노조보다 몇 배는 더 청년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노조는 무조건 선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심지어 민주노조 내부에도 자리 지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성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소수자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이것들에 맞서서 더 정의롭고, 더 포용적이고, 더 서로 돕는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외부의 요구들이 왜 없겠는가?

애초에 세상에 절대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있지 않다. 자신을 돌아보길 거부하고, 약하고 작은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우리편’의 부정의에 눈감으면서, 남의 허물에는 민감한 그 모든 곳에 괴물이 있다.

하지만 그 괴물과 맞서려면 일없이 청년들을 불러다가 노조와 싸움이나 붙이려고 하는 것보다는 더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그게 우리편이라는 괴물에 대한 원작자의 생각이다. 

부디 착오 없으시길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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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나 SF를 많이 다루는 매체 ‘기즈모도’의 카슈미르 힐과 수리야 마투 기자는 최근 미국언론재단에서 주는 ‘저널리즘 속 테크놀로지’ 분야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들이 올해 2월에 쓴 ‘스마트홈’에 대한 기사가 취재와 보도에 테크놀로지를 창의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선발된 것이다.

힐과 마투가 취재한 ‘스마트홈’은 상상 속 미래가 아니라 지금 실현 가능한 현재의 공간이었다. 이들이 체험한 ‘스마트홈’은 그다지 멋지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힐과 마투는 힐이 사는 샌프란시스코 아파트를 ‘스마트홈’으로 만들기로 했다. 텔레비전, 진공청소기, 인공지능 스피커 등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커피메이커, 장난감, 칫솔, 침대까지 최대한 많은 물건을 인터넷에 연결하고 이 기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도록 한 것이다. 힐이 스마트하게 변한 자기 집에서 사는 동안 마투는 직접 설치한 라우터를 통해 힐의 ‘스마트홈’이 작동하는 상황을 관찰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래된 집을 ‘스마트홈’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1970년대에 지은 힐의 아파트에는 준비한 스마트 기기를 모두 연결할 만큼 전기 콘센트가 많지 않았다. 한 콘센트에 플러그 여러 개를 꽂을 수 있도록 연결 장치를 여기저기 달고서야 겨우 스마트 기기들을 모두 설치할 수 있었다. 힐은 이러다가 집에 불이 나는 게 아닐까 걱정할 정도로 많은 플러그를 꽂았다.

스마트 기기는 종류도 제조사도 모두 달랐다. 인터넷으로 정보만 주고받으면 할 일을 끝내는 기기도 있지만, 집안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기기도 있고, 사람 몸에 닿아서 작동해야 하는 기기도 있었다. 이 기기들을 관리하기 위해 힐은 스마트폰에 앱 14개를 내려받고 각각에 접속하기 위한 계정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연결이 끝난 다음에는 인공지능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로 ‘스마트홈’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기기들은 마치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채 우연히 만난 사람들처럼 소통에 어려움을 겪곤 했다.

아침에 눈을 떠 침대에 누운 채로 인공지능 스피커를 향해 “커피 내려 줘”라고 말하면 종종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공지능 스피커와 커피메이커는 제조사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결은 매끄럽지 못했다. 여러 차례의 명령 혹은 부탁이 실패하고 나면 결국은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커피메이커의 버튼을 직접 눌러야 했다. 잘 소통하지 않는 스마트 기기들을 다루어야 하는 ‘스마트홈’ 관리자는 매우 부지런하거나 인내심이 깊어야 했다.

힐의 ‘스마트홈’에서 밖으로 내보내는 모든 통신을 들여다본 마투는 ‘스마트홈’이 매우 수다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마트홈’의 모든 기기는 수집한 정보를 집 밖에 있는 서버로 쉬지 않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마투는 힐 부부의 생활에 대해 놀랄 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정보의 수집, 그것이 바로 ‘스마트홈’의 본질이었다.

마투는 스마트TV가 내보내는 정보를 통해 힐 가족이 2017년 마지막 날 밤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새해를 맞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음악 스트리밍 앱 작동 정보로부터 힐 부부가 아침 몇 시쯤 잠에서 깨는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스마트 칫솔은 힐이 언제 양치질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마투는 스마트 칫솔로 양치질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보험료를 깎아주는 방식의 새로운 보험 상품이 나올 수 있겠다고 예상했다. 마투는 힐 가족이 언제 집을 비웠는지도 알 수 있었다. 주인이 없는 집에서 스마트 기기의 데이터 사용량은 대폭 줄어들더라도 바깥 서버와 연결하는 통신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 집에는 지금 사람이 없어요”라는 신호를 내보내는 셈이다.

‘스마트홈’에서 프라이버시의 개념은 이상하게 뒤엉킨다. 힐의 집에 잠시 놀러 온 친구는 거기서 자신이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정보가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아기방에 설치해 놓은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잠시나마 영상을 저장해 둔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다. ‘스마트홈’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정보 제공 동의를 받는다고 다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스마트 침대는 수면 정보 수집에 대한 동의를 받을 수 있도록 힐에게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람의 e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동의 절차를 거치려면 힐은 자기가 누구와 같이 누워 있는지 스마트 침대에 알려주어야만 한다.

‘스마트홈’은 ‘관찰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온종일 카메라가 따라다니면서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먹는지 공개하는 관찰 예능 속 연예인처럼, ‘스마트홈’에 사는 사람의 일상은 정기적으로 서비스 공급자와 마케팅 회사로 보고된다. 방송 제작자의 편리를 위해 전화를 걸고 받을 때 스피커폰 기능을 사용하기로 동의한 관찰 예능 속 연예인처럼, ‘스마트홈’ 주인은 자신이 어떤 스마트 생활을 하는지 널리 알리는 데에 동의한 사람이다. 일상을 공개한 대가로 인기를 얻는 연예인처럼 ‘스마트홈’ 주인은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편리를 얻고자 한다.

힐과 마투의 기사가 보여주는 것은 그 편리를 온전히 즐기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수준에서 구현 가능한 ‘스마트홈’을 강렬하게 체험해 본 그들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프라이버시 문제보다 더 구체적인 ‘짜증’의 문제를 강조했다. 스마트 기기가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나는 짜증도 있지만, 열심히 일할 때 나는 짜증도 만만치 않다. 스마트 기기들은 자기들끼리 얌전하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집주인을 호출하고 닦달한다. 집주인의 스마트폰에는 로봇 청소기가 장애물에 걸렸으니 빼달라는 메시지, 일을 잘 마쳤다는 메시지, 혹은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는 메시지가 속속 도착한다. 집주인은 스마트 기기의 부름에 부지런히 응답해야 한다. 스마트 기기의 시중을 들다가 짜증이 난 집주인은 ‘스마트홈’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스마트홈’의 주인은 누구인가.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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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폭염에 어쩔 줄을 모르던 기억이 지워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겨울의 초입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아직도 해를 즐기기 좋고, 단풍과 은행잎도 아름답고, 떨어진 낙엽도 괜히 밟아볼 만하다. 그러나 밤은 춥고, 새벽은 많이 시리다. 겨울 오기 전부터 망설이던 이불 장만을 마침내 하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되었다. 털이 뽑힌 거위의 사진인데, 거위 털이 산 채로 채집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거니와, 산 채로 털이 뽑히면 어떤 지경일지 짐작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뉴스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고, 사진이 보이면 얼른 외면해버리는 식이다. 보고 나면 내 마음도 다칠 터인데, 그 다친 마음을 어찌해보자면 결심도 하고 뭔가 행동도 해야 할 터인데, 그 모든 게 자신이 없어서이다.

거위털뿐이겠나. 모피도 그렇고, 가죽도 그렇고, 고기를 먹는 일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뉴스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책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치사하게도 안 보고 싶어서이다. 안 보면 내 마음이라도 안 다칠 터이니.

또, 뭐 동물뿐이겠나. <나쁜 초콜릿>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캐럴 오프는 초콜릿이 만들어지기 위해 행해지는 카카오 농장의 어린이 노예노동을 고발했다. 같은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한 어린 카카오 농장 노동자가 “사람들이 초콜릿을 먹는 건 제 살을 먹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방송되었다고도 한다. 초콜릿을 ‘어린이의 눈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이다. 초콜릿뿐만 아니라 청바지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다. 그 이외의 많은 것들이 그럴 것이다. 추위를 많이 타고, 고기를 좋아하고, 초콜릿과 커피도 엄청 좋아하는 나로서는 눈을 가리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홀로 내 마음도 다쳤다고 엄살을 떨거나 아무튼 고작 그뿐이다. 거위털 이불은 그렇잖아도 비싸서 못 살 것 같았는데 안 살 이유가 생겨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몇개 있지도 않은 가죽 제품은 굳이 이미 있는 걸 안 입고 안 써야 하나 생각해보기도 하고, 공정무역 초콜릿은 편의점에서 살 수가 없으니 포기하고, 살충제 파문 후 먹기 시작했던 복지란은 이거 좀 비싼 게 아닌가 슬슬 궁리하기 시작하는 식이다.

그렇더라도 착한 소비나 윤리적인 소비 같은 기사가 보이면 눈여겨보게는 된다. 동물의 잔인한 희생을 통해 생산되는 물건을 거부하는 방식인 윤리적인 소비는 동물보호를 넘어 환경의 유해 여부까지 따지는 적극적인 소비 영역으로까지 넓어진다. 채식을 포함해 비거니즘이라 불리는 삶의 방식에 대한 소개도 있다.

착한 소비가 착한 현실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콜릿 노예농장의 현실이 고발된 후,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한 농장산업이 어려워지자 정작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이 가장 먼저 굶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적인 압박에 직면한 다국적 회사들이 아동노동 감시기구를 설치하고, 어린이 노예노동에 대한 각종 방지책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카오 최대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여전히 어린이 210만여명이 비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그렇더라도 노동력 착취와 인권침해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두된 공정무역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되었고, 그런 제품들을 구입함으로써 다소나마 그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산 채로 동물의 털이나 가죽을 채집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된 나라들도 많아졌고, 윤리적인 채집을 통해 생산되는 제품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평창 동계올림픽 롱패딩에 붙었던 RDS(responsible down standard)는 그런 거위털 제품에 대한 인증마크이다. 물론 단순 구입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이다.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윤리적인 소비를 위해 몇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것이 보통사람들에게 과연 보통 소비이고 또 착한 소비일 수 있겠나 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비싸지 않은 인공대체물을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환경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착한 소비를 넘어 착한 경제로까지 이야기가 넓어져야 할 텐데, 나로서는 쉽게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한 소비를 꿈꿔볼 뿐이다.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윤리적인 소비, 크게 수고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착한 소비. 부끄럽지 않고도 따듯하고, 미안하지 않고도 달콤한 맛. 말하자면 따듯하고 마음 편안한 삶. 좋은 제도가, 합리적인 규범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포근한 이불을 덮고 매일 밤 곤히 잠들 듯, 모두가 편안하고 따듯해지기를 바라게 되는 계절이다. 나만 따듯한 게 아니라 두루두루 따듯하고 잠깐잠깐 달콤하기를. 다 같이 따듯해야 더 많이 따듯하니까. 안타깝게도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추워지게 만드는 뉴스는 끊이지 않는다. 자신의 살로 남의 달콤함을 채우며 고통받는 게 먼나라 소년소녀뿐만은 아니다. 또 거위뿐이겠나.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란 청춘들이, 교육도 잘 받았을 인재들이, 자신의 미래를 이루기 위해 선택한 직장에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게 모욕과 학대인 경우도 있다. 그게 끔찍할 정도로 엽기적인 폭력인 경우까지 있다. 고령의 경비원들은 이유도 없이 폭행을 당한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도대체, 왜.

가만히 있어도 툭하면 추운 계절인데 기를 쓰고 춥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방치하는 이도 있고, 조력하는 이도 있고, 그런 제도가 문제없이 굴러가는 사회도 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혼자 미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히 그들의 온기가 누군가에게는 솜이불 같은 따듯함이 되기도 할 터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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