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하루하루가 신기록이다. ‘고공농성 408일’, 3년 전 사측으로부터 고용, 단체협약과 노동조합 승계를 약속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다시 더 높은 굴뚝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동료의 기록이 경신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차디찬 굴뚝에서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는 두 노동자는 이제 매일매일 슬픈 역사를 남기고 있다. 그곳은 날아다니는 새들이 둥지를 틀고 쉬어가는 곳이다. 새들에게는 낙원일지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돌아누울 수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풍찬노숙 중이다. 기록적인 폭염을 견뎌내고 칼바람의 혹한과 맞서며 좁디좁은 굴뚝 난간에서 또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누가 이들을 하늘로 오르게 했는가. 이 땅이 노동자를 보듬지 못하고 법과 제도가 자신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자 내몰리듯 높은 곳으로 밀려 오른 것이다. 굴뚝, 타워크레인, 광고 전광판, 이 땅에서 희망을 잃은 노동자들이 오르는 단골 장소다. 2명의 파인텍 노동자들은 3년 전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하늘에 올랐다”는 그의 동료처럼 또 수십미터의 굴뚝으로 올라갔다. 기네스북에 기록을 남겨 영웅이 되려고 75m 상공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노동인권을 살려보려고 올라간 것이다. 그곳에서 소외받고 버려진 약자들이 목숨을 담보로 버티고 있다. 차디찬 겨울을 두 번 맞을 때까지.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약속을 지키라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한뎃잠을 잔 지 400일이 넘자 비로소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치권과 언론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서는 그들을 살려내기 위한 동조 단식으로 연대하는 이들도 있다. 다행히 노사의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진전은 없다. 고용주의 인식이 아직도 3년 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노동자들에게 고용주는 “굴뚝에 올라가면 영웅인가?”라는 야만의 언사도 주저하지 않았다. “농성하는 사람들에게만 인권이 있나. 합법적으로 기업 하는 나도 너무 힘들어서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나라가 법치국가가 맞나”라고 항변도 한다. 이들에게는 욕심 이외의 감정은 없는 모양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뼈만 남은 자신의 옛 직원에게 할 소리인지 매정하기만 하다.  

사측은 3년 전 약속이행으로 책임질 일 없다는 주장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때의 약속이행은 불완전 이행이다. 노사합의는 약속이자 법인데 사측은 이를 이행하는 척만 했다. 현재의 파인텍을 세워 노동자의 일터를 만들어 주었지만 임금협상을 차일피일 미뤘고, 복귀한 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월급만 주고 수당 등을 받을 수 있는 일감은 거의 주지 않았다. 결국 반발한 노조가 파업하자 사측은 공장을 폐쇄하고 새 사업체를 입주시켰다. 책임을 노조 쪽으로 미뤄버린 것이다. 지난 연말께부터 4차례 노사가 마주 앉았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빈손이다. 3년 전 불완전 합의이행을 경험한 노조 측이 기존 합의사항을 지키라며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법적 책임을 진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사측은 요지부동이다.

이게 우리 노동인권의 현주소다. 위험천만한 굴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바람에 자칫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곳만이 아니다. 발전소 석탄 컨베이어벨트에 위태롭게 누워 있기도 하고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여 있기도 하다. 부당해고, 농성과 단식, 자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우리의 노동인권의 현주소다. 생명을 걸어야만 겨우 해결되는 수준이어서 노동자의 생명이 존중되지 못하고 수단화되는 현실이다. 작년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여 기업들이 너도나도 인권경영을 선언하지만 노동인권은 입에서만 맴돈다. 말과 행동이 각각이고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논다.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경영이 인권경영이다. 노동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 노동자와 사용자가 공생하는 것이 바로 기업인권의 핵심이다. 인권 감수성을 가진 기업문화가 정착해야 기업의 경쟁력도 커지고 지속적인 성장도 가능해진다. 기업 활동에서의 인권침해는 기업경영의 리스크다. 파인텍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는 해외 거래처가 많다고 한다. 이들에게 반인권적인 회사 대표의 언행이 알려진다면 기업경영에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작은 것 때문에 더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물론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엊그제 굴뚝 위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는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람을 살리고 보는 노사교섭이 절실하다.

<히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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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

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

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

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

병상에서 행복하다 

-신경림(1935~)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한때 바람을 쐬러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자유롭게 높이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카사블랑카와 바이칼 호수로의 유랑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뤘다. 이국의 큰 호수와 아득한 모래사막과 번화한 거리를 다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옛 마을의 뒷방과 좁은 개울에서 보냈던, 소중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오늘은 눈발이 유리창에 하얗게 치고, 시인은 타국의 막막하게 펼쳐진 사막과 옛 마을의 어귀를 번갈아가며 생각한다. 꿈이 있었던 시간과 방황했던 시간은 행복했다. 그리고 꿈을 이룬 시간도 행복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화관(花冠)을 쓴 것처럼 눈부신 순간들이다. 밤하늘에 뽈록거리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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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어떤 꿈들을 꾸셨는지. 좋은 꿈을 꾸고 나면 복권 당첨보다도 더 근사한 일이 있기를 바라는 분들도 많을 텐데, 가족의 건강, 좋은 사람과의 행복한 시간, 꿈꾸고 있던 것들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망이 그러할 것이다. 물론 큰돈도 생기고, 바라던 소망도 이루어지게 하는 꿈을 꾼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꿈이라는 말이 소망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니 좋은 꿈을 꾼다는 말이 바로 소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꿈이 크다는 말은 미래에 대한 포부를 말하고, 꿈도 크다는 말은 헛되게 품는 몽상을 말한다. 조사 하나에 따라 꿈의 질이 달라진다. 

꿈을 꾸고 나서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도 있다. 19세기의 화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케쿨레는 꿈속에서 벤젠의 원자구조를 알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연구를 하던 중 선잠에 빠져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뱀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원의 형태로 결합하는 것을 보았고, 그게 바로 벤젠의 원자구조를 밝히는 열쇠였다는 것이다. 그가 꾼 꿈을 뱀꿈이라고 해야 할지, 원자꿈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그 꿈을 통해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화학적 난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화학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리고 인류는 새로운 선물을 얻었다. 현대화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러시아의 과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도 꿈을 꾸고 난 후 원소의 주기율표를 완성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동안 공백을 메울 수 없던 주기율표가 완전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는 원자와 원소가 등장하는 꿈이 황금돼지꿈보다 더 복된 꿈이었으리라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이 두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그 후 인류의 역사에도 그렇다. 

꿈이 창작의 영감이 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과학자들의 꿈과 관련된 위와 같은 일화들은 그야말로 소설처럼 여겨진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교훈을 남긴다. 꿈은 그냥 바란다고 해서 꿔지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꿈을 꿀 정도로 지독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연구하다 보니 그게 꿈에까지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그토록 정밀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밤에 꾸는 좋은 꿈 역시 그 꿈의 바탕이 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돼지꿈 같은 것은 없는 듯하다. 그렇더라도, 좋은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잠드는 일이 기대에 찰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기는 하겠다. 

꿈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쓴 과학자도 있다.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그 행성들의 운동은 타원형으로 이루어진다는 학설을 최초로 발표해 우리에게 친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우주를 열어준 요하네스 케플러가 그렇다. 그가 1608년에 쓴 <Somnium>이란 소설은 라틴어로 꿈이라는 뜻이다. 지독한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으로 하늘을 관측하는 데 평생을 바쳤던 이 학자는 과학이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 적어도 당시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소설로 채웠다. 이 소설은 우주선을 타고 달을 여행하는 내용이다. 비록 우주선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고, 마술적인 장치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주여행과 달에 관한 어떤 묘사는 실제와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있다. 평생의 연구와 무한한 상상력으로 결합된 이 소설은 역사상 최초의 에스에프 소설로 평가받기도 한다. 케플러는 최초의 초신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2009년에 우주로 발사되었고 지난해에 그 수명을 다한 ‘케플러우주망원경’은 그의 이름을 기린 외계행성 관측용 우주망원경이다. 이 우주망원경은 달보다 더 먼 것들, 태양계보다 더 아득한 것들을 관측했고, 50만개가 넘는 외계항성과 행성들을 발견했다. 

자신만의 꿈이 타인의 악몽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실은 아주 많다. 새해 벽두부터 한 늙은 사람의 흉언을 듣기도 했다. 누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건데, 내가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은 그 이름은 나의, 우리 모두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의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흘린 피와 바친 목숨이 얼마나 많은지. 귀를 씻고, 아예 후벼 파고, 다시 새해를 생각해야겠다.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러면 어떤가. 한달이 지나도 여전히 새해다. 좋은 꿈을 꿀 기회는 아직도 많다. 좋은 꿈을 꾸려고 노력하는 시간과 기회가 부족한 것이, 그 시간과 기회에 내줄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일 수는 있겠다. 아무리 좋은 꿈을 꿔도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더 큰 문제겠다. 노력으로 안되는 사회는 자꾸 꿈만 꾸게 한다. 그리고 헛된 꿈은 나쁜 노력과 나쁜 시도를 낳는다.

그래도 새해다. 새해니 악착같이 좋은 꿈을 꿔야겠다. 오늘은 다만 어제보다는 좋은 꿈을 꾸게 해달라는, 거창하지 못해 부끄럽지만, 아니 혹시 많이 거창한가 싶은, 낯간지러운 나의 새해 꿈이다.

<김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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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하나밖에 없는 응급실이 문을 닫았다. 면사무소 앞에는 새하동병원의 휴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고, 마을마다 새해 첫 아침에 병원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가 방송으로 나왔다. 어? 예전 낡은 건물 옆에다가 으리으리하게 건물 새로 올려서 진료를 시작한 게 작년 8월이지 않았나? 새 건물에서 진료를 시작한 지 다섯 달도 안되었는데 휴업이라니? 

병원이 새로 문을 열고 난 다음,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고열과 몸살이었는데, 읍내에 야간진료하는 의원은 거의 없으니까, 이런 일로도 응급실에 가게 된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좋았다. 환자가 얼마나 와야 이만한 병원이 운영되려나. 예전 건물에서 운영할 때도 응급실 간호사를 제대로 채용하지 못해서, 군 보건소에서 인력을 지원한 전력이 있는 병원이었다. 시골이라 새 건물을 지었으니 한동안은 다른 병원에 다니던 환자들이 한 번씩 와 보겠지만, 뻔한 인구에 환자가 갑자기 늘어날 리도 없고,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건물을 지었나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병원 건물 바깥에 있던 약국이 얼마 안 있어 병원 건물 안으로 옮긴 것이나, 병원을 오랫동안 지켜온 의사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간간이 들려왔었다.

병원이 휴업하게 된 것은 수십억원의 부채와 3개월 밀린 임금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 건물을 짓고 4개월 병원을 운영하는 동안 3개월치 월급이 밀렸다. 그리고 수십억 부채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음 만기일은 꽤나 한참 남았다는 것을 두고도 사람들은 안타까운 소리를 했다. 회사가 어음을 막지 못해서 부도가 난다고 하면, 하루 이틀 코앞까지 어떻게든 어음을 돌려 막으려고 하다가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하고 부도를 ‘맞아 버리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새하동병원이 ‘갚지 못할 것 같은’ 어음은 만기일이 5월30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시골병원이라고는 해도 군에 하나밖에 없는 응급의료기관이고 가장 규모가 큰 병원인데. 하지만 만기일이 다섯 달이나 남은 어음 때문에 병원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병원 문을 닫는 날에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이 현장에 나와 있었다고 했다. 병원 직원들, 보건소 공무원들과 함께 입원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휴업을 위한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봤다고. 직원들은 3개월이나 월급을 못 받았지만, 차분하게  동요 없이 일을 마무리해서 놀라웠다고도 했다. 다행인 것은 아마도 3개월간 밀린 임금은 보증을 통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군 보건소에서는 병원이 이렇게 갑자기 문을 닫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지역 응급의료기관으로 지정을 받고, 지원을 받아 운영을 하는 병원이기는 하지만, 병원의 운영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지자체에서 병원 운영을 두고 관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새하동병원이 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의 운영에 대해 군의회에서도 한참 논의가 있었다. 군 보건소장이 군의원들과 함께 2018년에 병원에 지급되는 지원금이 전년도에 비해서 몇 배나 늘었다는 것이나, 새로 병원을 신축한 이후로 환자 수가 얼마나 변했는지 하는 것까지 짚었다. 응급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고, 보건소장은 그러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병원은 건물을 새로 올린 다음, 한두 달 임금을 지급하고, 석 달 임금을 밀리고, 다섯 달 후에 돌아온다는 어음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이 병원이 문을 닫으면, 하동군에는 응급실이 없다. 감염병 격리 병실도 새하동병원을 쓰도록 되어 있다. 읍내에서는 가까운 도시로 가는 것이 30~40분이면 되지만, 다른 면 지역은 읍내까지 가는 데에만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곳도 수두룩하다. 지금 병원은 ‘채무 탕감 후 계속 병원 경영’을 목적으로 법원에 회생신청을 진행 중이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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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구석에서 찾아냈다. 고수차. 3년 전인가, 친구가 보내준 중국 발효차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보이차나 철관음, 우롱차는 귀에 익은데 고수차라니. 낯설었다. 운남 지역 고산 지대에서 자생하는 오래된 차나무(古樹)에서 채취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친구가 폐와 기관지에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는데도 3년 가까이 손이 가지 않았다.

대만 차 덕분에 고수차를 되찾았다. 지난 연말, 역사학을 전공한 친구가 대만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왔다며 차를 한 통 건넸다. 포장이 단아하고 색깔도 보기 좋아 한 잔 우려냈다. 향은 약간 강하고 맛은 순한 편이었다. 내성적인 차였다. 몇 잔 마시다가 문득 고수차가 생각났다. 해발 1500m 이상 고지대에서 50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차나무에서 딴 것이라니 마시는 법이 남다를 것 같았다.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표현과 마주쳤다. “첫 잔은 차를 깨우는 것입니다.”

중국 발효차는 우리 녹차와 달리 끓는 물에 우려내는데 첫 잔(초탕)은 버린다. 오래 묵은 차일수록 먼지가 많아 씻어내야 한다. 일종의 소독이어서 첫 잔을 우려낼 때마다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차를 깨우는 것’이라니. 바짝 말라 있는 찻잎은 뜨거운 물을 빨아들이며 천천히 원래 형태를 회복한다. 저 순간을 찻잎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인터넷에서 마주친 저 한 문장이 차와 나 사이의 거리를 무화시켰다. 차가 대뜸 의인화를 이뤄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말이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 그 역도 성립한다. 생각과 태도가 바뀌면 이야기가 바뀐다. 찻잎에 쌓인 불순물을 제거한다고 하지 않고 찻잎을 깨운다고 하는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일 것이다. 찾아보면 기왕의 의미를 바꾸거나 키우는 시적 언어가 제법 있다. 그중 하나가 ‘마중물’이다. 마중물은 펌프가 물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할 때 펌프 안으로 집어넣는 소량의 물이다. 지하의 물은 마중물의 도움을 받고 힘차게 지상으로 올라온다. ‘와락’도 있다. 와락은 심리치유 활동과 만나 그 뜻이 번져나갔다. 해고 노동자나 세월호 유가족처럼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분들이 ‘와락치유단’과 만나 다시 일어선 바 있다.

찻잎 깨우기, 마중물, 와락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셋이 하나의 체계를 이룰 수 있다. 다름 아닌 교육체계다. 교육(敎育)은 ‘가르치다’와 ‘기르다’의 합성어다. 영어 education의 라틴어 어원은 educare로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다. 페다고지(pedagogy)의 뜻도 다르지 않다. ‘어린이를 이끈다’는 말이다. 오래 잠들어 있던 찻잎을 깨우는 일, 지하에 잠겨 있는 물을 마중하는 일, 그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힘껏 껴안는 일. 이 모두가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가치이자 필수 과정이다.

최근 대학에 불고 있는 새 바람 중 하나를 압축하는 슬로건이 ‘교육에서 학습으로!’이다. 기존의 교육방식이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앞으로는 학생들의 학습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에서 학습으로’의 전환은 서 있는 사람(교수자)과 앉아 있는 사람(학습자)의 역할을 재조정하라고 권고한다. 강의실을 선생과 학생이 ‘함께 서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해나가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산실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찻잎 깨우기, 마중물, 와락도 달라져야 한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1 대 다수에서 다수 대 다수로 - 이처럼 교육에서 학습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고 또 다양하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이 많은) 교수자의 지식과 경험이 미래세대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교수자들이 여전히 고전물리학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다. ‘19세기 학교, 20세기 교수, 21세기 학생.’ 최근 대학의 현주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문구다. 대학, 교수, 학생 사이를 가로막는 현격한 시차를 좁히지 않는 한 학생들의 미래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곧 폐기될지도 모른다. 학교가 19세기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교수자가 20세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21세기 학생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갈수록 작아지는 미래 앞에서 청년들은 위축되고 있다. 며칠 전 신년교례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스웨덴의 한 여학생이 수업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훔쳐가고 있다. 어른들이 돈만 좇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

새해 아침, 북유럽 소녀의 뼈아픈 성토를 듣는 순간 10여년 전 내가 한 문학계간지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 생각났다. ‘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주자.’ 일찍이 북미 원주민들이 말해왔거니와 천지자연은 미래세대에게서 빌려 쓰는 것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개발과 성장 제일주의’라는 중독에 걸려 미래를 너무 많이 훔쳐왔다. 지금 기성세대가 누리는 지나친 풍요와 건강이 다 미래에서 빼앗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또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조심스레 찻잎을 깨우고, 마중물을 붓고, 마침내 청년들을 ‘와락’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미래세대와 머리를 맞대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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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영화 한 편을 찬찬히 보는 올해의 첫날을 보냈다. 나희덕 시인과 오에 겐자부로 소설가와 후시하라 겐시 감독의 울림을 동시에 얻은 날이 의미 깊었다. 내 인생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클라우드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구름의자에 앉아보십시오./ 당신은 비행기 대신 구름을 타고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나일론 섬유로 만들어진 구름은/ 당신을 아주 멀리 데려다줄 것입니다./ 다만, 목적지의 방향과 속력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바람에 달려 있으니까요./ 우리의 운명을 우리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에 수록된 시 ‘미래의 구름’은 “거대한 구름기둥, 저 구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로 끝났다. 플루토늄, 세슘 등 방사성물질을 방출하는 구름 밑에, 혼탁한 하늘을 바라보는 날들이 앞으로 늘어날 것이다. 방사선 수치가 떨어졌다고 해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다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구름 밑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의 가상공간, 클라우드의 세계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불확실하다. 가십거리들과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무한 반복되며 증폭되는 세계, 이 가상공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을까. 나희덕 시인의 서정시는 맑은 위로의 세계가 아니라 위험과 재난의 목소리로 삶을 위협하는 것들을 성찰하게 한다. 시집을 덮을 때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라는 시인의 고백을 목격하게 된다. 삶을 실감하게 하지만 그래서 두려운 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첫 장편소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의 개정판은 새해 독서로 적합했다. 개정판으로 새로이 출간된, 오에가 20대 대학생 시절에 쓴 1958년작을 겨울 초에 구입해놓고 들춰보기만 하던 참이었다. 소년 시절 오에가 쓴 시,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물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를 전해 들었을 때 사물과 세상에 대한 관찰력이 미래의 대작가를 예고하는 느낌이었다. 난해하다는 소문이 도는 오에의 소설들과 사뭇 달리 첫 장편소설은 선명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열다섯 명의 소년이 감금된 상황을 캄캄한 숲 이미지로 묘사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겪는 소년들의 공포와 불안은 마침내 그들을 억압하던 어른들에게서 탈출하는 장면에서 돌연 힘차고 용기 넘쳤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불현듯 바람이 일고, 다가온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를 실어왔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몸을 일으켜 한층 캄캄한 풀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소년이 탈출했으리라 믿게 하는 마지막 문장이다. 그가 뛰어든 건 한층 캄캄한 곳이지만 거기에 새 삶의 기대가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인생은 후르츠”라는 내레이션이 아름다운 운율을 머금은 영화 <인생 후르츠>는 노부부의 슬로라이프에 대한 일본 다큐 영화다. 90세 가까운 건축가 남편 쓰바타 슈이치와 아내 히데코는 일본 아이치현의 고조시 뉴타운에 작은 숲을 꾸미며 살아가고 있다. 숲을 어떻게 꾸리게 되었느냐 하면, 쓰바타가 젊은 시절 참여한 뉴타운 건설 프로젝트가 뜻대로 되지 않자 성냥갑 같은 뉴타운에 활력을 불어넣기로 작정하고 빈 땅에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새 50년 세월이 흘렀다. 젊은 건축가 쓰바타가 설계했던 뉴타운은 자연과 어우러진 집이었으나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규모를 강요했다. 상심한 쓰바타 부부는 도시계획과는 거리를 두고 밀어버린 땅을 다시 작은 숲으로 만들자, 녹색 저장소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마을이 산 일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고 실험했다. 노부부는 천천히 땅을 일구고 숲을 즐기며 생활하지만, 이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말 그대로 정중동의 삶이다. 조금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것이 농사일 아닌가. 채소와 과일, 나무 열매를 얻기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노부부는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마을과 이웃과 더불어 자연이 주는 선물을 나누는 모습으로 ‘오래 살수록 인생은 아름다워진다’라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말을 입증했다.

제조자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려면 닻이고 돛이고 덫인 무엇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힘을 내며 가야 할 삶의 목적지는 종종 나를 고단하게 붙드는 덫 같다. 닻이자 돛이고 덫인 것, 내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새해의 목표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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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투 운동, #불법촬영·편파수사·편파판결 반대 운동, #스쿨미투 운동, #낙태죄 폐지 운동, #탈코르셋 운동 등 새롭고 창의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한국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과 ‘불편한용기’는 각각 여섯 차례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낙태죄 폐지를 위한 1인 시위가 지속되었습니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확장된 탈코르셋 운동은 외신의 주목을 크게 받았고, ‘청소년페미니즘모임’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한 해였지만,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들에게 ‘수치스러움’을 돌려주고, 감추었던 경험을 말하고 지지하고 연대하고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몰카, 야동, 리벤지포르노라 불리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온 남성들의 놀이문화에 제 이름을 찾아 주었고 착취성을 폭로했으며, 불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씨를 품을 밭’이라 여기던 여성의 몸을 주체적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요청했으며, 타인에게 평가받기 위해 가꾸던 행동들을 ‘꾸밈노동’으로 명명하고 ‘외모로 승부해야 하는 존재’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남성중심의 성차별적 사회에서 불법촬영과 사이버 성폭력, 음란물, 성상품화, 성희롱, 성폭력, 성매매는 이음새조차 없이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붉은 분노는 강렬한 경고음을 발신하며 땅을 뒤덮고 하늘을 물들였습니다. 세계가 한국의 페미니즘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은 지난달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페미니즘을 다시 쓴 인권선언 발표' 기자회견에서 페미니즘으로 쓰는 인권선언 추진단 관계자들이 인권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그럼에도 펜스룰로 시작된 반격은 종래 대학 내 총여학생회 폐지로 이어졌고, 차별의 임계점에서 시작된 저항은 과격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과잉반응으로 독해되더니, 페미니즘이 젠더갈등, 남녀갈등, 남성혐오만 키웠다는 언론과 정치권의 호들갑과 학계의 오역도 확산되었습니다. 깨어있지 않은 자를 깨우려 한 행동들은 애써 깨어있지 않은 척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고 폄훼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성 혐오론자들의 오프라인 침투설’과 ‘패륜적 여자 일베 집단 처단론’까지 들먹이며 가열 찬 반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갈등 유발론자, 혹은 혐오주의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지나침’에 대한 경계는 다시 여성들의 입을 막는 명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실패한 것일까요? 이러한 갈등론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호도되고 있는 역사의 경계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의 이면을 이미 봐버린 사람들이 실현시킬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여성들의 분노의 좌표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부정의한 구조 전반임을 깨닫고 변혁에 동참할 20~30대 남성들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억울함의 원인은 여성들이 제공한 게 아니라 기득권이 공고화한 세상임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저를 비롯한 기성세대입니다. 남자가 벼슬이던 시절에 태어나 온갖 특혜를 누리던 사람들은 자기성찰을 넘어 기꺼이 특권을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생 기생해 살면서 성차별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페미니즘을 비난하던 분들은 그 무지를 더 이상 자랑하지 말아 주세요. 젊은 남성들이 대리전을 치르도록 부추기고 뒤에 숨어 관망하거나 조롱하는 일을 그만두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신들이 만들고 누려온 누적된 부조리 때문에 다음 세대가 더 이상 멍들지 않게 해 주세요. 세대, 계층,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가 통약불가능한 상수들이 아니라 불평등한 구조를 직조하는 상호 연결된 변수들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분배적 정의와 비분배적 정의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실현되어야 할 긴급한 과제임을 인지해 주세요. 대의명분과 단일대오를 위해 숨죽였던 차이들이, 민주주의의 수사적 도구로만 동원되던 다양성들이 소리치는 아우성에 마음과 귀를 열어 주세요. 일천한 지식과 천박하고 뻔뻔스러운 언행이 아니라, 부디 품위 있되 단호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주세요.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명심할 점은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개개인이 다 정의로운 것도, 정의 그 자체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사라 아메드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며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닿으려는 지향점에서 분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수많은 시작의 순간들을 정성스럽게 모으고, 희망의 지향점들을 하나하나 책임감 있게 쌓아 올려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정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보다 공정·평등한 사회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투쟁의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정체감과 연대감으로 모두 버티고 성장하고 행복하게 살아남아 주세요. 언젠가 도래할 오늘을 위해.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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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인터넷 사업자는 국내법상 존재하는 각종 규제를 준수해야 하지만 해외 사업자는 동일한 법 적용을 받지 않고 있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 이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외국업자에게 똑같은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 이 같은 주장이 방송통신위원회와 관련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나와 인기를 얻고 있다.

적반하장이다. 국내 인터넷 기업을 ‘차별’하는 것은 정부와 국회가 우리나라에서만 유일하게 만들어 적용하고 있는 갈라파고스적 규제들이다. 게시물이 불법이 아니라도 요청만 있으면 30일간 게시물을 차단해야 하는 임시조치제도, 게시물이 불법이 아니라도 ‘건전한 통신윤리 함양을 위해 필요’하다면 삭제차단하겠다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시정요구제도, 우리 국민이 접속하는 웹사이트로서 자본금 1억원 이상이면 무조건 신고해야 하는 부가통신사업자신고제도가 그렇다. 또 불법물을 사전차단하지 않으면 형사처벌까지 당할 수 있는 ‘기술적 조치’ 의무조항들, 청소년유해물도 아닌 인터넷게임을 하려는 성인들도 실명 확인을 하라는 인터넷게임실명제, 이들 실명제를 위한 온라인상의 본인 확인 방식도 이동통신사의 배만 불리는 고비용의 휴대폰 본인 확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강요하는 본인확인기관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PC방을 포함한 모든 스타트업들의 전용회선료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이고 있는 발신자부담 종량제 상호접속고시, 모든 온라인 결제와 행정민원 서명에 공인인증서를 요구하는 공인인증서제도, 자정부터 새벽 6시 사이에 청소년은 잠을 자야 한다는 폭력적인 전제로 만들어진 게임셧다운제, 진실이나 감정 표현도 불법물로 분류하는 명예훼손 법규가 국내 기업들을 괴롭혀 왔다.

이 법들이 공익적으로 좋은지 안 좋은지를 지금 다투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이 규제들이 OECD 국가들 중 우리나라에만 존재하고 있으면서 우리나라 인터넷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역외적용론’은 마치 미국에서 1950년대에 법률로 유색인종들은 기차와 버스의 앞에 못 타게 했는데 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백인들도 기차와 버스의 앞에 못 타게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느 나라가 자국 규제 때문에 기업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두고 ‘역차별’이라고 부르면서 외국기업에 부담을 돌리려 하는가? 갈라파고스제도로 사고를 쳐놓고 갈라파고스적인 해법을 내놓는 형국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에서 말한 법들 모두 애시당초 국내에서 활동하는 해외 인터넷 기업에 적용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정보통신망법, 전기통신사업법, 개인정보보호법 등 어느 법도 그 적용이 국내에 사업장을 두고 있는 기업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2009년 구글이 유튜브의 한국세팅에서 게시기능을 떼어냈던 이유는 당시 정보통신망법상 인터넷실명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당연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또 해외 인터넷 기업들은 국내망을 통하지 않으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는 망사업자에 대한 권한을 통해 불법적인 콘텐츠를 제공하거나 불법영업을 하는 외국 웹사이트를 차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구글 본사가 부가통신사업자 신고를 안 한다고? 전기통신사업법상 징역 2년에 처해지는 범죄이고 유튜브 사이트는 이를 ‘교사 방조하는 정보’이므로 방통심의위의 심의를 거쳐 차단하면 된다.

법도 있고 집행력도 있는데 외국업체에 대해 집행하지 않는 이유는 규제당국 자체가 규제가 너무 갈라파고스적임을 알고 있어 집행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역차별’에 대한 해답은 자명하다. 부가통신사업자신고제도, 임시조치제도 등 갈라파고스적 제도들을 없애서 규제환경을 국제수준과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관련 토론회에서 국내 인터넷 기업을 대표한 이상적인 발언이 나왔다. “규제가 규제를 낳고 있는 형국이다. 역차별 논의 반대한다.” 역차별론으로 더 이상 국민을 가두지 말라.

<박경신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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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10일부터 4일간 프랑스 파리에서 제12차 문화다양성 보호 및 증진 협약 정부간위원회가 열렸다. 24개 대표 위원국을 포함해 참관 회원국 및 민간 전문가, 시민사회 활동가 등 250여명이 참석해 역대 가장 많은 참가자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유엔이 주관하는 국제기구 연례회의라는 것이 통상 사전에 조율된 내용들을 공개하고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 결의문을 채택하는 것이 관례여서 다소 지루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의제별 각국의 발언들이 갖는 함의와 그 행간의 의미를 따져보면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지원을 하는 국가들과 지원을 받는 국가들, 영어권 국가들과 프랑스어권 국가들, 그리고 이 양자에 속하지 않는 제3영역에 속한 국가들 간에 문화다양성을 놓고 벌이는 논의들은 세계문화 현 흐름의 구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회원국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은 편이다. 국가부담금이나 비공식 지원금 규모도 아주 높은 편이고, 본부의 의제들을 국가별로 이행하는 데 있어 솔선수범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과 인도네시아와 함께 대표 위원국이어서 이번 회의에서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이해와 요구를 본부에 잘 전달하고 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이 2011년에 유네스코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전체 예산의 22%를 부담했던 미국이 탈퇴하는 바람에 현재 유네스코 본부의 재정 상태가 악화일로에 있고, 일본 역시 아직 문화다양성 협약 비준을 하지 않은 터라, 프랑스어권 국가를 제외하면 이 협약에 대한 한국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은 2005년 체결 당시 스크린쿼터 문제로 사회적 쟁점이 되었을 뿐, 정작 2010년 국회 비준 이후에는 문화 및 사회정책의 중요한 국제협약으로 간주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은 국회 비준 이후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문화 정책 중심으로 한정해 다뤄지고 있어 아쉽다. 사실 문화다양성 협약 안에 담긴 내용들은 전 지구적 문화다양성을 구성하는 문화적 표현, 언어, 정보, 기술 등등의 세부 영역에 대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번 12차 회의에서 다뤄진 의제들과 쟁점토론만 보아도, 문화다양성의 의제들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도 본 협약의 글로벌 리포트에는 “디지털시대의 문화적 표현에 대한 로드맵 가이드라인 개발” “문화정책 디자인과 모니터링” “예술가 지위에 관한 권고 설문” “문화상품/서비스의 흐름에 대한 지표 개발” “국가개발계획에 문화-창의산업 통합” “성평등 관련 정보 수집 및 프로그램 진행” “예술가 표현의 자유 관련 활동”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4일간 회의 중간중간에 배치된 토크쇼 역시 “인공지능: 크리에이터들에게 새로운 작업환경인가” “디지털 환경에서 문화다양성 증진을 위한 가이드라인 이행 로드맵” “당신의 예술적 자유란 무엇인가?”와 같은 최근 문화정책의 주요 사안들을 다루었다. 문화다양성 협약의 국제 담론은 국내 문화정책에서 간주하고 있는 범위와 영역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문화다양성은 이제 더 이상 다문화 정책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와 올 초 들불같이 일어난 미투 운동의 파고를 딛고 새로운 국가문화정책의 근간을 다시 세우는 ‘문화비전2030 : 사람이 있는 문화’를 최근 만들었다. 민간 전문가 20여명이 주도해서 만든 보고서의 3대 가치는 자율성, 다양성, 창의성이다. 이번 정부간위원회 회의에서 다루었던 많은 내용들, 특히 권리로서 문화다양성,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 젠더평등과 여성예술인의 참여, 창의성 확산을 위한 문화정책의 역할, 협치와 협력을 위한 문화 거버넌스는 ‘문화비전2030’의 9대 의제들과 47개 대표과제의 중요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비전에 담긴 의제들만 잘 실행해도 한국은 문화다양성 협약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동연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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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기 유럽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전후였다고 한다. 반대로 새롭게 세상의 주인이 된 자본가, 즉 부르주아들은 결혼에 앞서 양가의 가계도를 펼쳐놓고 장애인이나 병자가 없는지를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들의 ‘선천적’ 우월성을 증명해줄 계급의 육체와 건강을 만드느라 애썼다. 죽음 앞의 평등이라는 이야기가 무색해지는 것은,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이 평등한 시간이란 심장이 멎는 찰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마저도 못 견디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맞서려고 노력한다. 해프닝이 일어나고, 어느 굴지의 대기업 회장은 의식 없이 의료기기들에 의존해 ‘안정적으로 생존’해 있는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차명계좌와 탈세 혐의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도 모두 결국에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24세 하청 노동자가 맞이한 죽음이나, 안전설비 없는 낡은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 또는 환불을 해주지 않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당한 성매매 여성의 죽음 같은 것과 비교해 평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위험과 죽음의 분배는 돈과 권력이 그렇듯 불평등하다. 어떤 이들은 부자들이 위험을 감수했기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 투자를 할지 고르는 위험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작업환경이 주는 위험 사이에는 엄청난 사회적 거리가 놓여 있다. 그 어떤 호전적인 투자자도 자신의 최후를 발전소의 하청노동자로서 랜턴도 없이 위험천만한 안전점검 업무를 하다가 맞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며 기업의 비용절감과 더 많은 배당에 기꺼이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더 많은 구조조정과 아웃소싱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불만에 차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물론 위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의 운명론적인 성격을 이야기하기에는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한 것들이 여전히 많다. 이것은 단순히 안전규정과 장비의 유무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위험이다. 그곳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비용보다, ‘위험수당’을 얹어주고,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해 누군가 다치고 죽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비용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처럼 가장 위험한 업무도 가장 적은 권한만을 갖고 있는 불안정한 하청노동자에게 떠맡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보다도 ‘경제적’이고자 하는 자본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단지 산업재해 문제만이 아니다. 고급 거주구역에 설치된 방범시설과 CCTV는 범죄를 낙후된 지역으로 밀어낸다. 대도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기를 위한 설비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져 그곳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위험과 죽음은 결국 가장 힘없는 이들에게로 향한다. 김낙년 교수의 <한국의 학력별 사망률 격차, 1985~2015>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사망률이 낮아지는 가운데 그 효과는 학력에 따라 차등화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특히 60세 이상에서 격차가 크게 벌어졌는데,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세월을 맞은 이들에게로 죽음이 몰려간 탓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사람의 가격’은 돈으로도, 사회적 가치로서도 너무 저렴하다. 만약 안전사고가 났을 때 기업에 철저한 징벌이 내려졌다면, 자본가들은 안정규칙을 귀찮아하는 노동자들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수많은 연구자금을 안전을 위한 대책마련에 쏟아부었을 터다. 그러나 현실은 누더기로 통과된 산안법에 대해 기업의 부담을 준다며 발악하는 보수언론과 재계의 목소리다.

위험과 죽음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비하고, 책임을 분담함으로써 그것에 맞설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사회’라고 부른다.

<최태섭 | 문화비평가·<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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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새해가 밝았다. 모든 것은 처음이 있다. ‘옆집물리학’은 오늘이 처음이고, 우주는 138억년 전에 처음 시작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나아간다. 비가역성이 있어, 되짚어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누군가의 모든 처음은 다시 올 수 없는 우주적 사건이다.

올해의 처음이 꼭 사흘 전이어야 할 물리학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달이 기준인 음력으로는 새해까지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다. 지구는 365일을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돌아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사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이나 추분, 낮이 가장 긴 하지, 밤이 가장 긴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삼는 것이 누가 봐도 결과가 같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적절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월1일 올해의 첫날, 주변의 자연을 아무리 봐도 전날과 다른 것은 딱히 없다. 하지만 춘분날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 시계를 보며 해의 위치를 잘 살피면, 아, 오늘이 춘분이구나, 누구나 알 수 있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인 낮의 길이가 하루의 딱 절반인 12시간이다. 춘분이 지나면서 낮이 밤보다 길어지니, 빛이 어둠을 이기기 시작한다는 비유도 가능하다. 기독교의 부활절이 지금도 춘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이유다. 성탄절이 12월25일로 정해진 것도 빛이 어둠을 이기기 시작하는 춘분날이 마리아의 예수 잉태일로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달력의 재밌는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정모의 책 &lt;달력과 권력&gt;을 추천한다). 수태 기간인 40주를 춘분날에 더하면 12월25일 무렵이 된다. 이처럼 특별하다 보니, 여러 문명에서 춘분을 새해의 첫날로 삼았다.

우리가 지금 이용하는 달력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9월, 10월, 11월, 12월은 영어로는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인데 이는 라틴어 숫자 7, 8, 9, 10에 해당한다. 즉 지금의 12월은 과거에 10월이었고, 마찬가지로 춘분이 들어있는 지금의 3월이 먼 과거에는 한 해의 첫 달이었다. 현재의 달력에서 2월이 다른 달보다 유달리 짧고 하필이면 2월에 윤년의 하루를 넣는 것도 마찬가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65일을 열두 달에 30일, 31일로 적절히 나눠 넣고는 세부적인 날짜의 조정을 마지막 달이던 2월에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용하는 달력에는 과거 흔적이 화석으로 남아있다.

시간(時間)은 말 그대로 때(時)의 사이(間)다. ‘사이’를 재려면 먼저 한 점을 찍어야 그곳을 기준으로 다음 점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화살 위 어디에 점을 찍어 한 해의 처음으로 정할지는, 결국 우리 앞에 살았던 사람들의 약속에 불과하다. 한 해의 처음 날짜가 임의적이라 해서 처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에서도 그렇다. 돌멩이를 손에 들고 있다가 가만히 놓으면 땅에 떨어진다. 땅에 닿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쉽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돌멩이를 처음에 아래로 던지면 더 빨리 땅에 닿고, 돌멩이를 놓은 처음 높이가 달라지면 땅에 닿는 시간은 또 달라진다.

이처럼, 땅이라는 목표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은 돌멩이의 처음 높이뿐 아니라 돌멩이의 처음 속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물리학에서는 물체의 처음 위치와 처음 속도를 합해 초기 조건 혹은 처음 조건이라 부른다. 같은 물체가 같은 물리법칙을 따라 움직여도, 나중에 어디 있을지는 처음 조건이 결정한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상의 절대지성을, 처음 이를 상상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라플라스의 악마라도, 처음 조건을 모르면 평범한 우리와 마찬가지다.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다.

올해의 첫날 새해 결심을 한 사람이 많을 거다. 나도 그랬다. 뱃살도 줄일 겸, 건강도 위할 겸, 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피아노나 기타를 배우겠다는 (매년 반복하는) 다짐, 그리고 아내와 함께할 취미를 찾겠다는 결심도 했다. 첫날 다짐한 올해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처음 조건이 중요하다. 처음 위치뿐 아니라 처음 속도도 함께 들어있는 물리학의 처음 조건처럼, 올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처음 속도가 중요한 것은 아닐까. 다짐을 실천하는 첫날 처음 속도를 갖는 방법이 있다. 내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새 다짐이 있다면 하루 전인 오늘 당장 시작하는 거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오늘 했다면,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 당장 시작하자. 체중 감량 다이어트도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부터 말이다. 첫날인 내일, 이미 0이 아닌 처음 속도를 갖게 된다.

외부의 영향이 없다면 현재의 운동 상태를 지속하려는 경향을 물리학에서는 관성이라고 부른다. 외부에서 건드리지 않으면(외부의 힘이 없다면),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고, 일정한 속도로 직선을 따라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직선을 따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이어지는 다짐의 실천으로 생긴 관성은 습관이 되고, 몸에 밴 습관은 더 큰 관성을 가질 수도 있겠다. 아주 큰 관성을 가진 물체는 웬만한 외부의 충격이 있어도 지금까지의 운동 상태를 유지한다. 큰 관성을 갖게 된 습관은 하루나 이틀쯤의 주변의 영향으로 흔들려도 이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어쩌다 외부의 효과로 잠시 영향을 받으면 그다음 날에 앞으로의 궤적을 약간 보정하면 될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 시계를 보라. 오늘은 남아있는 내 삶의 처음이다. 내일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 내가 한 모든 것은, 반복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하루 전의 과거가 된다. 시간의 화살 위에 구체적 행위로 점 찍힌 모든 처음은 소중하다. 되짚을 수 없어 더욱.

<김범준 | 성균관대학교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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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고구마를 간식 삼아 자주 먹는다. 난롯불에 구운 고구마는 혀에 닿자마자 녹는다. 나도 먹고 강아지도 먹이고 하면서 둘이 볼살이 통통 올랐다. 고구마를 먹으면서 창문 밖을 똑같이 바라본다. 하루 일과의 꽤 많은 시간을 창문 밖 구경에다 쓴다. 신문 방송에서 보는 다사다난한 바깥 세계와는 다른 ‘내면과 자연의 세계’를 마주하는 유리창. 나란한 신발과 얼멍얼멍 자란 수풀과 아물거리는 별빛이 내다보이는 창가는 어쩌면 문명과 다른 세계와의 조우다.

한 기자가 수도자에게 찾아와 물었다. “무슨 기도를 바치시나요?” “저는 주로 말하기보다는 듣습니다.” “정말이오? 그럼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나요?” “그런데 그분도 듣는 걸 좋아하셔서 별로 말씀이 없으세요.” 이 동네 분들은 사투리가 입에 붙어서 하늘에 ‘동시통역사’가 있어야지 안 그러면 말이 안 통해서라도 피차 침묵. 사투리 덕분에 손주들 맡아보는 수고도 덜게 되니 더욱 사투리를 쓰는 듯싶다. 손주들 맡기 싫으면 무조건 사투리로 말을 하고, 밥을 씹어서 입에다 넣어주고, 말도 못 배운 아이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방바닥 닦는 걸레로 입이나 얼굴을 닦아주면 애 엄마 아빠가 펄쩍 뛰면서 아이를 냉큼 데리고 가버린다지. 그러면 이제 나름 재미나고 고요한 여생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고구마를 삶는 집집마다 연기가 송송 올라온다. 주민들은 고구마를 먹으면서 나처럼 창문 밖을 오래도록 구경하고 계실 것이다.

나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많은 숙소를 옮겨 다녔다. 카운터에서 똑같은 부탁을 반복하는데, 바깥 풍경이 좋은 방을 달라는 말. 커튼을 열었을 때 햇볕이 드는 방이었으면 좋겠고 나무 한 그루쯤 보이길 바란다. 요새 가난한 청춘들은 집이 아니라 방을 전전하고, 그 단칸방도 월세가 지독하여 좁아터진 방만큼 숨 막히는 세월이라지. 사람에게는 창문이 필요하고, 마당이 필요하고, 나무와 새와 별과 구름과 햇살과 바람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은 당장 바꿔내야 한다. 모든 이들이 근사한 창문을 한 개씩 가지는 세상. 오버 더 레인보, 창문 너머 무지개가 뜨고 행복은 거기 있으니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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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걷고 또 걷는다

기가 막히다. 나원참 정신병원까지 왔다.

퇴원이 기약 없다는 걸 석 달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됐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걷고 걷고’의 악보.

언제 나갈 거라는 걸 알기만 해도 희망을 가질 텐데.

바닷속 깊은 곳에 나? 내 존재? 그리고 공허한 재채기. 내가 한 거다.

방향도 없는 절망…. 반성을 했다.

내가 왜? 내가 한 짓….

정신병원에까지 왔다.

누군가의 푸념 “여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싼 곳이야.”

나와 내 주변을 생각했다. 면회는?

서로 다른 시차, 내가 기다릴 시간…. 그리고 역시 내가 왜?

구두가 안쪽만 다 닳도록 다녔었잖니.

나갈 기약이 없는 이곳.

 

그때 그 부질없던 내 손이 기억난다.

내가 한 잘못, 그것은 여러 번의 마약을 한 거다.

마약이란 가족의 행복과 상관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뼈가 저려서 낭떠러지 같기는 하다.

 

외로움을 동반하고 결국에는 아무도 없다가

힘 없는 선택만 남는 거.

전과가 더해지고 그때마다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예술인에 대해, 예술인은…, 그렇게 말해주고 편들어주기도 했지만

이젠 아니다.

 

그래도 자존심을 버리지는 않았다

빌렸던 돈들도 모두 갚았다.

고마움을 잊은 거 아니다

 

그분들을 배신한 거라는 생각이 정신병원에 가서야….

강금실님, 변호사 시절 변호를 참 멋지게 해주신 그분께

정신병원의 허술함을 편지로 쓰려다, 아… 내가 올 곳이니까 오게 됐겠지….

 

추웠다. 춥다. 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톰 행크스가 주연한

땅굴 폭파하는 은행털이범 그 영화(레이디킬러) 속

기독교 집회에 참석한 한 흑인 노인이 그 이상 없이 행복감에 취해

고잉홈 고잉홈

이라며 노래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이제 저 노인처럼 되어

집에서 만드는 부침개와 내 가족들…. 

 

그러다 상관없는 여기, 차가운 벽을 보며

벽에다 손으로

고잉홈 고잉홈을

썼다.

 

추웠고

그곳 사람들, 일하기 싫어한다.

훌쩍 오십대 말이 된 사람들은 병원이 너무 힘들어 모두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러다 자살에 실패하면?도 생각했고 서로 의논도 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제정신이다가 갑자기 달라진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만지고 싶은 손이, 좋고 싫은 걸 잘 안다)

 

나는 1년 4개월 17일 만에 퇴원했고

그동안 마약에 취해 못하던 연습을 했다.

기억력이 돌아오고 있었고(내 두뇌의 한 부분을 버렸다. 나는 love of my life의 스펠링도 기억 못했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버린 나머지 뇌는 고스란히 살아서 이 노래 ‘걷고 걷고’를 만들게 됐는데

나는 이 노래가 좋다.

노래할 때마다 내 모든 게 느껴진다

그러나 또 탐내는 인간들,

(제작했다는 이유로 뺏겼다. 뺏긴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걷고 걷고 걷는다

걷는 모양이 이상해도 걸어야 한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전인권 |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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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형사수용시설 및 피수용자 등의 처우에 관한 법률이라는 현행법이 있다. 제215조는 천재지변이 일어나 피수용자가 위태로운 경우 해방시키라고 정하고 있다. “지진, 화재, 기타 재해가 일어난 때에 유치시설 안에 피난방법이 없다면 유치업무 관리자는 피유치자를 적절한 장소로 호송해야 한다. 호송할 수 없을 경우 이들을 유치시설에서 해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은 서구의 법을 가져다 베낀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사람이 죽은 사건이 생겨 수습하려 만든 것도 아니다.

1657년 3월에 지금 도쿄인 에도에 커다란 화재가 있었다. 건축물 60~70%가 소실되고 사망자가 10만명에 이른 메이레키 대화재(明歷の大火)다. 1666년 런던 대화재와 함께 근대에 있었던 가장 큰 화재로 꼽힌다. 지금 도쿄 고덴마초에 있던 교도소도 불타고 있었는데 죄수를 풀어줄 이유나 근거가 없었다. 모두가 타 죽는 판에도 죄수를 풀어놓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곳 책임자 이시데 요시후카는 죄수 120여명을 풀어주면서 불이 꺼지면 아사쿠사의 절로 돌아오라고 했다. 죄수들은 빠짐없이 돌아왔고 이것이 제215조를 만든 계기가 됐다.

기자는 지난해 스티븐 브라이어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인터뷰했다. 워싱턴으로 떠나면서 브라이어 대법관의 이름을 담은 도장을 하나 새겼다. 미국 연방대법원 200여년 역사에 아시아 언론과는 첫 인터뷰이기에 작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도장을 건네면서 브라이어 대법관에게 “한국에서도 도장을 쓰지 않지만 판사들은 판결문에 찍는다”고 말했다. 21세기 판사가 옥새와 비슷한 도장을 찍는다는 얘기에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서구 제도를 이식한 우리 사법제도에서 그나마 한국적인 것을 궁리한 게 도장이었다.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은 기자에게 존 마셜 대법원장 기념주화를 줬다. 존 마셜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헌법재판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만든 법률을 법원이 위헌으로 폐지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에서이고 존 마셜 대법원장이 직접 판결문을 작성했다. 브라이어 대법관은 세계의 헌법재판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세계의 헌법재판을 취재한다는 기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집무실을 가득 채운 오래된 법서들이 브라이어 대법관이 미국 사법역사의 어디에 있는지 설명했다. 경외감이 들었다.

조규광 초대 헌법재판소장이 지난달 별세했다. 지난해는 헌법재판소 개소 30주년이다. 역대 헌법재판관 가운데 세상을 떠난 사람은 셋이다. 이영모 전 재판관(재임 1997~2001), 변정수 전 재판관(1988~1994), 그리고 조규광 전 소장(1988~1994)이다. 나는 운이 좋아 세 사람을 모두 인터뷰했고 그 인연으로 이들 장례에서 모두 분향했다. 내가 우리 헌법재판소 역사를 기록하자고 마음먹은 것은 미국 연방대법원과 일본 최고재판소의 역사를 읽으면서다. 우리나라 사법기관 역사를 기록한 저술이 없었다. 결국 10년 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재판관들을 찾아다녔고, 그때 지금은 세상을 떠난 재판관들과 만났다. 

초기 헌법재판관들은 해보지 않은 헌법재판을 걱정하면서도, 일본을 거치지 않고 도입한 헌법재판에 흥분했다. 독일과 미국 사례를 연구하고 모방했다. 지금은 사라진 입법촉구를 비롯해 한정합헌, 한정위헌, 일부위헌, 헌법불합치 등을 도입했다. 이에 법원과 의회는 위헌 여부(與否)를 결정하라고 정한 헌법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헌법이론은 아직 유치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와 같은 훈계성 결정을 자주했다. 초대 재판관들은 법복도 직접 디자인하고 청사 외벽에 새길 무궁화도 재판관 숫자와 같은 9개로 정했다.

당시 비교적 무명이던 조규광 변호사가 왜 초대 소장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4선 국회의원 출신인 한병채 초대 재판관의 증언이 유일하다. “1988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대법원장에 정기승 대법관, 헌재소장에 나 한병채를 내정해 두었다. 하지만 (전두환 시절 인물인) 정기승이 국회에서 동의가 부결되면서 아차 싶었고 내가 자리를 포기했다. 내가 조규광 변호사를 추천했다. 노태우 대통령, 윤길중 민정당 대표, 당사자인 나 3명만 아는 극비사항”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조규광 전 헌재소장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상주를 모르는 상가에 가는 일은 어색하다. 보통은 상주가 고인을 설명하는데 이런 곳에서는 상주에게 나를 설명해야 한다. 대뜸 기자라고 하면 무슨 일인지 의심하고 걱정하는 눈빛이 된다. 그래서 조규광 전 헌재소장 상가에서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공현 전 재판관이 분향하고 상주에게 자신을 설명했다. 기자를 발견하고는 “초대 헌재소장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데……”라며 문상하라고 했다. 장례식장을 나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일본은 이시데 요시후카를, 미국은 존 마셜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우리는 조규광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을까.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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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긴 얼굴로 어스레한 산을 올랐다. 마른 나뭇잎과 삭정이가 들러붙은 채 꽝꽝 언 흙길을 걷는 이들의 머리 위로는 산안개와 같은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길게 이어진 행렬의 보폭은 일정했다. 지난 1년간 안 쉬고 걸어왔을 그들은 새해 첫날 첫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사람들이 산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 낀 하늘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가족과 온 아이가 모자를 벗으며 팔을 뻗었다.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해야, 해!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도시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또다시 도심 한가운데 치솟은 75m 굴뚝 위에서 새해를 맞았다. 어쩌면 그들이 있는 곳은 새해 일출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바다 끄트머리에서 붉게 솟아오르거나 산봉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과 똑같은 태양을 굴뚝에서 바라봤을 거다. 416번째 태양을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도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을 사람들처럼 소망을 빌었을까?

굴뚝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은 까마득하게 떨어진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도 새해 아침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사사로운 바람이 있을 거라는 것. 부모님이 강건하시길, 아이가 무탈하게 잘 자라길, 사랑하는 이가 별 탈 없이 한 해를 살아주길. 그들이 굴뚝에 오른 것은 이렇게 누구라도 품고 있는 소망 때문일 것이다.

1931년 평양 을밀대에 올라 처음으로 고공농성을 한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49명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종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 직공의 임금 감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웅 따위나 되려고 높은 곳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작은 소망 하나씩 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위해, 그 삶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새해 아침 밝은 빛처럼 곧 그들에게도 밝은 소식이 닿길, 그들이 하루빨리 땅으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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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강한 나라, 강소국은 크고 강한 나라, 강대국만큼이나 우리가 추구할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 강대국은 규칙형성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반면에 강소국은 규칙적응자로서 신속한 전환능력을 발휘해 왔다. 세계도시에 기반한 싱가포르, 카타르, 파나마, 아일랜드 등은 기업식 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미·소의 중재자를 자임했던 북유럽이나 통치하기 어려운 문제에 맞서온 독일이나 프랑스가 우리에게 적합한 학습의 보고이다. 한국이 강중국의 미덕인 국내외 세력충돌의 조정자로 부상하려면 역량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이에 내셔널은 물론 로컬과 글로벌을 포괄해 거버넌스의 미래를 제안하고자 한다.

내셔널 거버넌스는 경제와 사회를 절충해야 한다. 한국은 이윤을 중시하는 경제적 가치가 우선하는 나라이다. 성장지상주의와 효율만능주의가 조장한 환상과 거품 속에서 형평, 공감, 생태 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간과해 왔다. 정부가 균형과 융합이라는 공공마인드를 망각하면 기업이익연합체, 전문사업자단체 등에 포획된다. 따라서 혁신적 포용국가에 부응하려면 창의적 기업가의 도전을 촉진하고 위축된 약자들의 안위도 대변해야 한다. 자본편향적 관료 행태나 문화를 혁신하기 위해 시민사회 파견과 교육기회 확대도 필요하다.

로컬 거버넌스는 지방분권을 재검토해야 한다. 지방분권의 동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주민들이 체감하는 실질적 자치가 요구된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강소국 논리이기에 아일랜드나 이스라엘과 같이 격차가 심화된다. 이에 공공기관이나 명문대학의 신속한 이전을 통해 독일이나 네덜란드처럼 특화도시를 조성해야 한다. 세종과 제주라는 특별자치시·도에 부가해 부산, 대구, 광주 등이 지역의 발전역량을 결집시켜야 한다.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심정으로 행정수도와 국제자유도시를 완성하고 세계도시의 육성을 통해 수도권을 발전적으로 해체해야 한다.

글로벌 거버넌스는 미·일에 편중된 기존의 외교패턴을 북방외교와 남방외교로 보완해야 한다. 북한 핵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미국과 일본의 거센 압박을 남북공조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후원으로 상쇄해야 한다. 또한 중국이 우리의 맞수로 부상한 상태에서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등 남방루트에 공을 들여야 한다. 교역이나 원조 같은 물자교류에 부가해 한류의 확산이나 유학생 유치를 통해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공공외교가 유용하다.

국가의 크기를 떠나 만국 공통으로 국민들이 원하는 강한 정부는 국가자율성을 발휘해 협소한 이해관계를 타파하고 국민적 이익을 보장하는 정부이다.

<김정렬 | 대구대 도시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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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뉴스만 들리는 요즘이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발걸음을 지하철로 향했다. 그러다 남자화장실을 청소하는 50대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그냥 지나치려다 먼저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덕분에 깨끗한 화장실을 기분 좋게 사용합니다. 감사합니다.” 순간 아주머니 얼굴에 기쁜 표정이 어렸다. 아주머니는 “월급으로 손자 용돈 주는 보람 하나 바라보며 일하는데,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런 고마운 말씀 한마디에 이렇게 힘이 나네요”라고 화답했다.

그날 이후 정모 아주머니와 소중한 연을 맺게 됐다. “좋은 일 해주시는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하면서 인사를 건네면 “고마운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면서 받는다. 정 아주머니는 가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만나 속상할 때도 있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들이 있어 견딜 만하다고 말하니 나 또한 뿌듯한 마음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주머니, 아무리 불경기라고 해도 떡볶이는 불황이랄 게 없지요?” 떡볶이를 먹으면서 포장마차 주인에게도 말 한마디 건네본다. “아유,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불황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게 포장마차예요. 경기가 침체되면 부모들이 아이들 용돈부터 줄이나봐요. 예전 같지 않아요.” “그러세요?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면 좋은 일 많이 생기실 거예요.”

기분 좋은 덕담 한마디 건넨 덕분에 어묵 하나를 덤으로 받는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잠깐 스치는 이웃들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보면 어떨까. 분명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것이다.

<김완규 | 한국산업기술협회연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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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곳곳에 일본어 잔재가 여전하다.

이은재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회에서 야유나 조롱을 뜻하는 ‘야지’, 견제라는 뜻의 ‘겐세이’, 분배라는 의미인 ‘분빠이’ 등 일본어를 잇따라 사용해 논란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파이팅’은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문화의 산물로 싸우자는 의미의 ‘화이토(fight)’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힘내라’ ‘잘해보자’는 의미로 운동경기나 단체 활동을 할 때 많이 쓰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고 한다. 또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간지나다’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데, 일본어 ‘간지’에서 유래됐으며 ‘느낌이나 감각’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적은 글’이란 의미로 쓰는 시말서는 일본식 한자의 조합으로, 옳은 표현은 경위서다.

이한섭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명예교수가 쓴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들어온 어휘는 무려 3600여개에 이른다. 대부분 ‘배달’ ‘노가다’ ‘납골당’ 등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단어다. 구라, 생떼, 고참, 무대포, 가처분, 납기, 다대기 등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식 중에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어 잔재가 사라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응답자의 27%는 ‘국민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답했다. ‘일본어 잔재에 대한 교육 및 홍보 부족’이나 ‘정부의 무관심’이란 응답도 각각 26.6%, 26.1%였다.

교육당국과 공공기관은 일제 잔재 언어를 바로잡고, 국어 발전과 보존에 나서야 한다. 또 국민들도 생활 속에서 올바른 언어 사용을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은경 | 서울 동대문구 답신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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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선생님들과 저녁식사를 한 후 일할 것이 더 있어 학교로 되돌아온 늦은 밤이었다. 복도에 선 채 그중 한 분과 남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편에서 한 학생이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었나, 마음에 걸렸다.

잠시 후 내 방으로 가려는데 “교수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친구였다. 상의드릴 게 있다고, 잠시 시간 내어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곧장 연구실로 함께 갔겠지만, 마침 그날 저녁 식탁에서 학생들 면담 시 주의할 지침들이 화제가 되었던 터라 멈칫했다. 학생 상담 시 방문을 열어두라, 이성 학생의 경우에는 반드시 둘씩 짝지어 오도록 해야 한다더라, 민감한 내용이면 만일을 대비해서 동의를 구하고 녹음하라 등의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다. 그건 학생을 ‘선생을 무고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원’으로 보는 비교육적 처사라며 절대 나는 그렇게 안 할 거라 반발했으면서도, 막상 그 순간에는 아까 들은 주의사항들이 떠올라 주저하게 되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이라 답하려다 학생과 눈을 마주친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항상 서글서글했던 그 친구의 눈길이 고통스럽고 절박해 보였다. 뭔지 모르지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내일 다시 찾아오라 하면 듣지 못할 것임을, 영영 내게는 들려주지 않으려 할 것임을 직감했다. “집으로 가시는 길이면 걷는 동안이라도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학생이 재차 청하였다. 원고 작업은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고 “그러자” 응하였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적요한 밤에 교정 한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들었다.

법적 쟁점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 그런다며 학생은 말문을 떼었다. 하지만 한참 들어보아도 해당 사안은 법률조언을 구할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무척 고통스러운 일임은 맞았으나 그 친구의 신상에 직결된 사안이 아니었고, 우리 학내 문제 역시 아니었다. 그러니 ‘법교수님’으로서도, 학과 교수로서도 내가 제시할 해결책은 마땅히 없었다.

위로든 조언이든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한마디라도 부주의하게 내뱉으면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아진 그 친구의 마음에 쨍그랑 금이 그어질까 두려웠다. 맞갖은 어휘와 표현들을 조심스레 고르고 이리저리 배열하는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다음 순간, 학생의 표정에서 타인에게 내보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속내를 털어놓은 이후 밀려드는 참담한 평온함 같은 것이 읽혔다. 그때 알았다. 이 친구는 지금 위로나 조언을 구하려는 게 아니구나. 누구한테도 말 못한 채 품고 있던 내면의 무거운 돌덩이를 감내하기 힘들어, 상담으로나마 꺼내어 보이고 싶었던 것이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학생이 겪고 있을 고통의 크기나 밀도는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거기에 오롯이 공감하긴 어려웠다. 그렇지만 상의한다는 구실을 빌려서라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간절함만큼은 무엇인지 온전히 알았고, 또 공감했다. 말한 다음 순간 밀려드는 참담한 평온함에 대해서도.

고르고 다듬던 조언의 문장들을 버렸다. 대신 밤늦게 불쑥 찾아와 이런 이야기해서 죄송하다던 그 친구에게 “고마워”라 답했다. 어쩌면 나는 네가 필요로 할 조언을 다 못 줄 테지만 그런 내게 네 이야기를 들려주어 참말로 고맙다고. 나는 네게 좋은 상담자 역할을 못한 걸 미안해하지 않을 테니 너 또한 내게 한밤에 찾아온 걸 미안해하지 않기로 하자고. 네가 말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후련해진 만큼 나도 ‘듣는 귀’가 되어주어 기쁘다고.

그가 짊어진 돌덩이를 내가 얼마나 덜어줄 수 있을지를 떠나, 적어도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이 그에게 자책의 돌멩이를 하나 더 얹는 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상의드릴 것이 있다며 찾아가 돌덩이를 꺼내놓던 나로 인해 놀랐을 누군가에게 이해되었기를 빌었다. 저마다의 돌덩이를 짊어진 채 사회적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나와 그대들이 새해에는 때때로 테두리를 뜯고 서로에게 ‘듣는 귀’가 되어주기를, 또 거기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가 되어가기를 소망한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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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똑같은 하루인데도 잘 보내고 싶은 마음에 괜히 조급해진다. 일년을 마무리하는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지난 364일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벌써 2019년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등록금심의위원회(등심위)를 앞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학생 대표들이다.

대학가는 얼마 전 총학생회 선거를 마무리 짓자마자 2019년도 등록금 산정을 위해 각개전투에 돌입했다. 등심위는 학생으로부터 받는 등록금을 비롯한 기타 수익 등을 어떤 사업에 지출할지를 의결한다. 1년의 사업틀을 만들 뿐만 아니라 교육 주체들의 이해를 나누고 교육권의 방향까지 논의할 수 있는 회의체이기도 하다. 학교와 총학생회 사이의 온도차가 느껴지기도 한다. 학우들에게 보고할 첫 활동이다보니 당선의 기쁨도 즐기지 못한 채 등록금 인상 여부를 두고 팽팽한 긴장감에 싸여 있다.

학생 당사자가 참여하는 등심위라니, 언뜻 보면 민주적일 것만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학교 측 위원이 과반수인 경우가 열에 열이다.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사전에 제공하지 않는 학교들도 많다. 학교 측은 이러한 정보 불균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해왔다. 조와 억 단위로 적힌 교비 회계 장부가 낯설기만 한 학생들에게, 학교 측은 그동안 처리해왔던 내용이니 관행을 따르라는 강요로 어물쩍 회의를 마무리 짓거나, 회의 일정을 일부러 촉박하게 잡고는 충분히 논의할 시간이 없다면서 졸속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올해는 물가상승률과 입학금 폐지를 핑계로 등록금을 인상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장학금 지급에 있어 여론의 비난을 직격타로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동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동결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하가 답이다. 학교 당국에는 등록금을 인하할 여력이 충분히 있다. 학교는 예산안을 뻥튀기해 학생들에게 필요 이상의 등록금을 징수하고 남은 예산은 적립금으로 돌리는 등 횡령과 같은 사학비리가 관행인 것처럼 굴어왔다.

입학금 폐지는 불명확한 산정 근거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치게 높은 고등교육비 부담을 어떻게든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였다. 입학금 수입이 사라지면 대학 재정난이 극심해질 것이라는 사학재단의 주장은 현실과 달랐다. 몇몇 기사는 학생이 등록금을 충분히 내지 않아 당장 내년부터 대학이 망할 수 있다고 호도하고 있지만 그들은 건재하다. 외국인 학생의 등록금을 대폭 인상하거나 기존 학과를 공대나 예대와 같이 높은 등록금을 내는 단과대로 편입시켜 등록금을 추가 징수하려는 꼼수가 이어지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마르지 않는 돈줄인 걸까. 그로 인해 우리네 삶이 말라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든 대출을 받아 입학하고야 마는, 학위가 절박한 나라에서 수혜자 부담원칙이 고등교육을 설명하는 논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재정난의 이유는 교육 당사자인 학생이 충분한 등록금을 치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결산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학재단 역할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 1000만원의 등록금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피치 못한 선택을 하는 일가족의 뉴스도 우리의 일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민선영 | 청년참여연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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