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미 | 홍익대 교수·교육학

현행 법률은 정당의 선거 관여행위를 금지하고 있다(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제46조). 정당은 교육감 선거에 후보자를 추천할 수 없으며 선거에 관여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후보자 또한 특정 정당을 지지, 반대하거나 특정 정당으로부터 지지, 추천받고 있음을 표방해서는 안된다.


실정법의 논리가 절대적 준거로 내세워졌을 때 생기는 문제도 있지만, 정당의 선거 관여행위가 후보자 간의 공정경쟁을 저해하게 되는 것은 곤란하다. 이미 보수 진영 후보의 새누리당 관련 문제가 논란이 된 바 있고, 최근 불거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대한 민주통합당의 경선 개입 의혹도 이러한 점에서 우려된다.


 교육감 직선제가 시작된 이래 진영 간 후보 단일화 과정은 민감한 문제가 돼왔다. 곽노현 교육감의 경우도 단일화 과정과 관련한 문제로 지방교육자치법 제49조가 준용한 공직선거법의 적용을 받았다. 어떤 후보가 더 타당한가의 문제는 주민직선제가 작동하는 한 주민이 결정할 문제이며, 그 기준은 교육감이라는 공직 수행능력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 교육현장에 오래 복무하면서 교육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온 교사 출신 후보, 공교육 개혁의 모델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모색해온 교육전문가 후보, 공교육 개선을 위한 대안을 진보적 사회개혁 의제 속에서 추구해온 시민사회운동 후보 등 현재 민주진보 후보 경선 과정에 참여한 각 후보의 장점은 교육감직을 수행하는 데 손색이 없다.


서울시교육감 재선거에 출마하는 진보진영 예비후보들 기자회견 (출처: 경향DB)


누가 더 타당한 후보인가 하는 문제는 비전, 수행전략, 유관 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주민이 판단할 문제이다. 정당의 개입은 법적 문제를 떠나 명분이 없다. 교육감 선거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강조되는 이유도 교육이 파당적 이익을 넘어선 공익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민주진보 진영의 후보 경선은 보수 진영의 후보 낙점 방식과 출발 자체가 다르다. 교육개혁의 비전을 큰 틀에서 공유하는 민주진보 진영의 후보 단일화 경선 과정은 민주적 의사수렴 과정이기도 하다. 그 절차의 공정성은 존중돼야 하다.것이다.


경쟁과 효율을 앞세운 교육정책으로 인한 교육현장의 왜곡이 심하다. 이에 대한 복구 요청도 어느 때보다 강하다. 시험과 서열의 심화로 학생들은 경쟁 압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교육은 여전히 공교육을 압도한다. 학교는 학교폭력으로 신음하고 있다. 지성과 인성을 함께 키우는 교육공간으로 학교를 되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산적한 교육 의제들은 혁신적 교육 비전 없이는 해결되기 어렵다. 이는 공공적 관점에서, 교사·학생·학부모에 의해 공동체적으로 해결될 필요가 있다.이러한 대과업이 정당 개입과 파당적 논란으로 얼룩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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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배권 | (사)한국대중골프장협회 회장


회원제 골프장 세금 감면을 두고 시끄럽다. 회원제 골프장의 세금을 깎아주면 골프 치는 사람은 다 좋아하겠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문제가 매우 많다. 골프는 동호인이 400만명에 이를 정도로 대중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골프회원권을 갖는 것이 꿈이고 최대의 바람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회원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골프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원권 소지자는 12만명 정도로 전체 골프 인구의 3%밖에 안된다. 회원제 골프장 개별소비세가 감면되면 1년에 약 3000억원의 세수가 줄어드는데 회원제 골프장을 자주 이용하는 회원권 소지자들이 1500억원의 혜택을 보게 된다. 골프를 치는 사람 중에서도 회원권 소지자에게만 집중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전형적인 ‘부자감세’ 정책인 것이다. 골프를 치지 않는 국민 입장에서 보면 골프장 세금 감면 정책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세금수입 감소분은 결국 일반 국민들이 다른 곳에서 세금을 더 내서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금강산 아난티 골프장 (출처: 경향DB)


 정부는 회원제 골프장 입장료 20만원에서 2만원을 감면해주면 내수경기가 활성화되고 해외 골프 여행객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기획재정부의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은 2008년부터 2010년 회원제 골프장 개별소비세 시행 당시 지방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중제 골프장 이용객이 회원제 골프장으로 이동하는 현상만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평균 1억6000만원 수준인 골프장 회원권을 보유한 이용객에게 2만원 내외의 세금감면이 미치는 효과가 제한적이며 해외 골프 수요의 국내 전환 효과도 적으며 내수활성화에도 실효성이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최근 10여년 동안 대중제 골프장이 많이 만들어지다 보니 회원권 없는 사람들도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회원제 골프장 개별소비세가 면제되면 대중제 골프장은 회원제에 밀려 경영이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회원제 골프장은 회원권 분양을 통해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지만 대중제 골프장은 회원권이 없으므로 모든 비용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이제 골프장 경영 문화의 대개혁이 필요한 시기이다. 국민 누구나 골프 스포츠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회원권이 없는 사람들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대중 골프장이 많아져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경기활성화와 골프 대중화 그리고 골프 관광수요의 국내 전환 등의 모든 정책효과도 대중 골프장의 증가를 통해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정부는 회원제 골프장의 대중제 골프장 전환 유도 등을 통해 대중제 골프장과 회원제 골프장의 균형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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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검사급 검찰 간부가 다단계 사기범과 대기업 측으로부터 거액을 수수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올랐다. 경찰은 서울고검 ㄱ검사가 3조5000억원대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의 측근에게서 2억4000만원, 유진그룹 관계자에게서 6억원을 받은 정황을 포착해 그를 소환 조사할 방침이라고 한다. 사건에 연루된 현직 검사가 2~3명 더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오면서 파장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의혹의 당사자인 ㄱ검사는 가정 사정 때문에 친구와 후배 돈을 빌렸을 뿐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트 검사가 희대의 사기범 측으로부터 수억원을 챙겼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만으로도 검찰의 도덕성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 ‘벤츠 검사’ 등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뼈를 깎는 쇄신을 외쳐온 검찰이 아닌가. 이번에도 검찰은 철저한 진상 규명을 다짐하며 특임검사에게 수사를 맡기겠다고 밝혔으나 경찰과 충돌만 빚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경찰은 “수사 중인 사건을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자칫하면 검경이 이중수사를 하는 사태로 번질 수도 있다.


특임검사 비리의혹 유진그룹 압수수색 (출처: 경향DB)


검찰에 시급한 것은 특임검사 임명과 같은 단기적 대책이 아니라, 비리가 끊이지 않는 근본적 원인을 찾는 일이다. 특유의 폐쇄성과 특권의식, 엘리트주의와 집단이기주의 등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개별 사건에만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언제든 비리가 재발할 수밖에 없다. 검찰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도 스스로를 돌아보기보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의도를 의심하는 모양이나, 이는 적절한 대응이 아니다.


시민들은 검찰을 불신하고 있다. 정권에는 면죄부를 주면서 야당은 표적수사하고, 민생범죄는 척결하지 못하면서 공안사건에는 과잉대응하며, 개별 구성원의 도덕성마저 믿기 어렵다는 게 대다수 시민의 검찰관(觀)이다. 여야를 불문하고 주요 대선 후보들이 검찰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시민들이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사건은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그 동력을 제공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지금 차관급 검사장 수를 지키거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사수하려 애쓸 때가 아니다.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는 도도한 흐름에 맞서는 대신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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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노조)가 예고한 대로 어제 하루 전면 파업을 벌여 일부 학교에서는 급식 차질 등 불편이 속출했다. 학교 비정규직은 급식조리원과 교무·행정보조, 사서 등 50여개 직종으로 종사자는 총 15만명이고 노조원은 5만명가량이다. 노조는 정규직 전환과 호봉제 실시, 교육감 직접 고용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학교 비정규직도 학교 현장에서 교육의 일익을 맡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처우와 고용 안정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는커녕 파업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조치하겠다고만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소외돼온 그들의 호소를 충분히 듣고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서길 바란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는 예산이 드는 만큼 정치권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학교 비정규직은 학교에서 절대 약자다. 온갖 잡일까지 하고 있지만 임금은 월 100만원에도 훨씬 못 미친다. 더욱이 고용도 불안하다. 교장이 임용권을 갖고 있어 재량에 따라 임의로 해고되는 일도 많다. 오죽하면 필요하면 쓰고, 불필요하면 버리는 ‘일회용직’으로 불릴까. 이런 처지의 학교 비정규직이 지난해 노조를 결성했지만 교섭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고용노동부가 교육감이 사용자라는 결정을 내렸으나 시·도 교육감이 교섭에 적극 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교과부가 여전히 교장이 사용자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탓이다. 노조가 누구보다 학생급식 차질 등의 문제를 잘 알면서도 파업이란 극단적 수단을 선택한 배경이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아진 두 손 (출처: 경향DB)


현재 전국 16개 시·도교육청 중 6곳이 노조와 교섭 중이다. 이미 학교 비정규직을 교육감이 직접 고용하는 내용을 담은 조례를 만들거나 전원 무기계약직으로 바꾼 교육청도 있다. 그러나 정규직으로의 전환이나 호봉제 실시는 추가 예산이 들기 때문에 시·도교육청 차원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정부가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도록 하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에는 안민석 전 민주통합당 의원이 학교 비정규직 지위 보장과 처우 개선을 담은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상정되지 않아 자동 폐기된 바 있다. 올해는 유기홍 민주당 의원이 그들의 바람이 담긴 법률안을 제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학교 비정규직을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함께 하나의 당당한 ‘교육 주체’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학교 현장에서 어떤 형태로든 교육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학교 비정규직 문제는 이런 인식을 바탕에 깔고 접근해야 원만히 해결될 수 있다. 정부는 물론 정치권과 시민도 학교 비정규직에 대한 기존 인식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교과부부터 “파업에 따른 급식 차질 등 학교 현장의 혼란은 모두 노조에 책임이 있다”며 노조의 파업 자체만 문제를 삼는 태도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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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엊그제 “기존 순환출자 부분에 대해서는 기업 자율에 맡기고, 앞으로는 순환출자를 하지 않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 후보가 경제5단체장과 만나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을 제한하거나 고리를 끊기 위해 대규모 비용을 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한 말이다. 그는 어제 기자들로부터 재확인 요청을 받고서도 “예전부터 그렇게 말해왔다”고 답했다.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으로 의견이 모아진 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의 공약 초안과 배치된다.


김종인 행복추진위원장을 비롯한 당내 경제민주화 추진 세력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김 위원장은 “기존 순환출자에 대한 의결권 제한은 비용과는 관계가 없다. 박 후보가 의결권 제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일에도 “기존 순환출자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경제민주화추진단의 한 위원도 “박 후보의 발언은 재계 논리의 판박이”라고 주장했다. 당내 경제전문가 중 한 명으로 통하는 이혜훈 최고위원은 순환출자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김 위원장이 만든 (경제민주화 공약) 방안들이 무리한 게 아니다”라고 김 위원장을 거들었다.


김종인위원장과 함께 입장하는 박근혜 후보 (출처: 경향DB)


순환출자 자체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공약을 총괄하는 김 위원장과 박 후보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은 문제다.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 의지가 의심받고 있는 이유다. 한 쇄신파 의원은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은 대규모기업집단법의 핵심 중 하나인 만큼 후보가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박 후보는 2007년 경선 당시 ‘줄·푸·세’로 대표되는 감세·성장론을 내세우다가 ‘경제민주화’로 전향한 근거도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 김 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가 이 문제로 충돌했을 때는 “두 사람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밝혀 진정성마저 의심케 했다. 최근 들어서는 경제민주화를 거론하는 일도 잦아들고 있다.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는 4·11 총선 승리를 비롯해 ‘대선 후보 박근혜’의 이미지 변신에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박 후보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각인된 이슈다. 박 후보가 선전 효과만 얻은 뒤 폐기하려 든다면 그 폐해는 상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더구나 박 후보가 일련의 과거사 논쟁을 계기로 ‘집토끼’를 지키기 위한 우향우 행보를 하면서 경제민주화를 버린 게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일고 있는 마당이다. 박 후보는 어떤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보다 분명한 구상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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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문 |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전문연구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개혁 방안으로 제시된 안철수 후보의 ‘국회의원 정수 축소’, 문재인 후보의 ‘비례대표 증원’에 대해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필자는 두 후보의 방안에 대한 지엽적인 찬반을 논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개혁은 무엇이고 이것을 어떻게 제도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더 앞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설령 두 후보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정치개혁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새누리당이 다수당인 현 19대 국회에서 지금 주장하는 방안을 정상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이것은 단지 새누리당 의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 의원들 역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의원 수 축소나 비례대표 증원에 소극적일 게 뻔하다. 


 그렇다면 단지 대선용 공약이 아니라 진정한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정치개혁 시민총회다. 추첨으로 선택된 시민들이 정치개혁 관련 방안들을 논의해 결정하고 이것을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것이다.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2006년 온타리오주에서 각각 구성되어 성공적으로 운용되었던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총회’ 방식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우리처럼 한 선거구에서 1등을 한 사람이 당선되는 단순다수대표제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유당이 1996년 선거에서는 신민주당보다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의석 수에서 뒤졌던 반면, 2001년 선거에서는 57.6%의 지지로 79개 의석 중 77개를 장악해 집권에 성공했다. 반면 12.4%를 얻은 녹색당은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는 심각한 사표 문제가 발생했다. 


자유당 지도자 캠벨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권하면 추첨으로 시민총회를 구성하고 이들이 권고한 제도를 주민투표에 회부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캠벨이 이러한 방식을 택한 것은 자유당 의원들 역시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선거제도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캠벨은 약속대로 시민총회를 구성했다. 비록 시민총회가 투표에 회부한 선거제도가 부결되기는 했지만 거의 1년간 운용되는 동안 단 한 명만이 중도에서 하차하고, 출석률이 95% 이상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온타리오주 시민총회 의장은 “지금까지 일반 시민이 중요한 이슈 결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좀 더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시민총회는 유권자에게 단지 투표에서 한 표 행사하는 소극적 대상이 아니라 정치 참여의 주체가 될 기회를 주었다는 데 진정한 의의가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오타와 (출처: 경향DB)


안철수·문재인 후보 역시 선거공약용으로 정치개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인 정치개혁시민총회를 진지하게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성, 연령, 지역 등을 고려해 무작위 추첨으로 선출한 500명 내외의 시민들로 구성된 정치개혁시민총회에서 두 후보가 제안한 정치개혁 방안을 학습하고 심의하도록 한 뒤 여기서 결정된 내용을 2014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회 입법권을 존중한다면 국회 본회의에 바로 상정해 수정 없이 찬반 투표로 처리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설령 국회의원들이 상정된 안에 거부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 여론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개혁은 단지 의원 수 축소나 비례대표 증원 같은, 어떻게 보면 지엽적인 현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당과 의원들만의 전유물인 논의에 일반 시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제도화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개혁이다. 시민총회가 보다 적극 논의되고 운용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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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훈 | 충북대 교수·독문학 mulmuni@chungbuk.ac.kr


이 칼럼을 학교 연구실에서 쓰고 있다. 지금은 화요일 오후 2시. 아직 비가 내리고 있고, 이 비에 은행잎은 더욱 노랗고 소나무는 더 푸른 듯하다. 하지만 곳곳은 지고 있거나 이미 떨어진 잎으로 가득하다. 가을이 절정에 이른 듯 어디서나 잎이 떨어지고 날리고 굴러다닌다. 하나의 나뭇잎도 이 세상의 사물이라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을에 수천 수만의 세계와 작별하고 있는 것이다.


시들어가는 이 땅과 하늘 사이에서 나는 계절의 가을처럼 생애의 가을을 떠올린다. 내 삶의 가을은 어떠한가? 나이 쉰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는데, 하늘의 운명을 알기는커녕 자괴감만 점점 더 커져간다. 잠시 돌아보는 시간. 이때 잘 어울리는 것의 하나는 브람스 음악인 것 같다. 그중에서도 실내악.


 브람스 실내악에도 종류는 많다. 다닐 샤프란이 연주하는 ‘첼로 소나타 1-2번’이나 율리우스 카찬과 요셉 수크 그리고 야노스 슈타커가 연주하는 ‘피아노 트리오 1-2번’도 좋다. 그러나 내가 가장 즐겨 듣는 것은 ‘피아노 4중주 1-3번’이고, ‘클라리넷 3중주 114와 115번’ 그리고 두 개의 ‘현악 6중주’다.


그중에서도 오후의 조용한 시간이나 늦은 밤 잠들기 전에 한 시간쯤 여유가 주어지면 자주 듣게 되는 것은 1891년에 작곡된 이 클라리넷 3중주와 5중주다. 이 곡에는 깊은 작별의 감정이 배어 있다. 이 무렵 브람스는 여러 친구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이미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자신의 창작력이 감퇴하는 것을 내밀하게 느꼈다. 1890년 가을부터 그는 가진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유서까지 썼다. 그는 소품 위주로 곡을 만들면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길 원했다. 뛰어난 클라리넷 주자인 뮐펠트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 악기의 아름다운 소리는 그의 만년의 체념적 분위기에 맞았을 것이다. 네 개의 클라리넷 곡은 이 음악적 로맨스의 열매인 셈이다. 여기서도 그의 음악은 중후하지만 명랑함을 잃지 않고, 견실한 전통주의자의 면모 속에서도 서정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클라리넷이 밝고 사랑스럽게 시작하면 피아노가 저음이나 고음으로 받고, 이렇게 대위법적으로 두 악기가 어울리면서 슬픈 선율이 온화하게 엮어진다. 그 화음은 명랑하면서도 우아하고, 우울하면서도 발랄하다. 그래서 두 악기는 “마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처럼” 어울린다고 누군가 적었다. 브람스는 실제로 클라리넷 소리를 듣고 ‘클라리넷 아가씨(Fraulein Klarinette)’라고 불렀다. 클라리넷 3중주나 5중주가 그렇고, 클라리넷 소나타도 그렇다. 어느 것이나 따뜻한 선율 속에서 어떤 정화된 슬픔을 자아낸다.


특히 ‘클라리넷 5중주’는 비통하리만치 아름답다. 우울하고도 비감에 찬 작별의 느낌이 모든 악장에 고루 스며 있다. 마지막 악장에서는 주 테마가 네 번 변하면서 다시 첫 악장의 출발점으로 돌아감으로써 전체적으로 원을 이루고, 그래서 이 작품은 마치 인생처럼 점차 느려지면서 끝내 침묵으로 잦아든다. 깊은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있고 이 슬픔에는 숭고함과 성스러움이 있다.


베를린필하모닉과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브람스 교향곡 전곡(全曲) 음반 (출처:경향DB)


작별의 선율 아래 떠나가는 것은 브람스만이 아니다. 이 계절이 가고 있고, 우리의 생애가 잦아들고 있다. 그러나 가장 슬픈 것은 이 모든 게 오직 유일무이한 형태로 체험되면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 있는 채 떠나가고 있다. 그래서 몽테뉴는 적었다. “우리는 항상 신발을 신고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죽음은 내가 양배추를 심고 있는 동안 와 주되, 그것이 왔다고 거리낄 일도 아니고, 텃밭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걱정할 일도 아니다.”


오후의 공기가 차갑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어져 여기저기 길 위로 흩날릴 때, 우리의 마음 한 가닥도 몸에서 떨어져 이리저리 나뒹군다. 우리는 매 순간 이 세계와 만나고 매 순간 이 세계를 떠나보낸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이곳에서 멀어져간다. 가을은 되돌아보는 계절이고, 다가올 작별을 예감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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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화 논설위원


걷기는 삶의 은유이다.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가족들은 환호한다.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인간의 움직임을 완성한 자체가 대견스럽다. 아기의 ‘걷기’는 철학과 명상의 발신지로 진화한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가 앨리스에게 “걸을 만큼 걸으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라고 건네는 말은 ‘걷기’야말로 생각의 지도이고, 처방전 없이 스스로를 치료하는 예방약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지난 10월30일 제주에서 열린 ‘2012 월드트레일콘퍼런스’에 참가한 프랑스 도보여행가 베르나르 올리비에(75)는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인간적인 행위인가”라고 강조하면서 “우리는 걷기를 억압당하고 있다. 차로 출퇴근하고, 앉아서 밥 먹고 차 마시고 TV를 본다. 더 이상 다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서 <나는 걷는다>로 유명해진 그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터키에서 중국까지 1만2000㎞의 실크로드를 걸으며 영혼의 자유를 얻었다.


올림픽공원 유모차 걷기대회 (출처 : 경향DB)


걷기는 몸의 자유도 선사한다. 엊그제 대한당뇨병학회에서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 5명 중 1명이 당뇨병 상태라고 밝혔다. 당뇨병 전 단계인 공복혈당장애까지 합치면 노년인구의 47.4%, 30세 이상 성인인구의 30%가 당뇨병에 노출됐다고 한다. 전체인구 중 약 1000만명이 당뇨증세를 보이는 셈이니, ‘당뇨대란’이라 할 만하다. 걷기, 자전거타기, 계단오르기, 조깅 등 꾸준한 운동과 채소 위주의 식단만이 살 길이다.


미국국립암연구소 연구팀도 40세 이후 빠르게 걸으면 수명이 2~7년 늘어난다고 발표했다. 1주일에 75분 동안 빠르게 걸으면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평균 1.8년을 더 살고 사망 가능성도 19% 줄어든다고 한다. 매일 20~40분 걸으면 평균 3.4년을, 20~60분 걸으면 4.5년을 더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걷기는 운동화만 있으면 되는 ‘착한’ 운동이다. 걸으면 신체의 말초까지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날씬해지고 심장 기능이 강화돼 심장마비를 예방할 수 있다. 골다공증 예방을 위해 칼슘을 먹어도 걷기운동 등을 하지 않으면 약효가 없다. 답은 나왔다. 마음과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빨리 걸어 보자. 굳이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택하지 않아도 된다. 어디를 걸어도 걷는 자체가 행복이고 건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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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 | 귀농본부 텃밭보급소 상임이사


지난 글에서 밀은 벼와 이모작이 안된다고 썼더니 독자 한 분이 연락을 했다. 우리 밀 농사짓는 분들은 거의 다 벼와 이모작을 한다고 해서 확인해봤더니 사실이었다. 대부분 따뜻한 남쪽에서 이모작을 하지만 중부 지방 일부에서도 최근 성공한 사례들이 있었다. 대단한 일이다. 방법은 늦게 심어도 되는 만생종 벼를 재배하거나 수확량이 줄어들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도시에선 가을 낙엽이 늘 골칫거리다. 단풍이 보기는 좋지만 낙엽이 되면 처치 곤란이다. 이 낙엽들은 대부분 석유로 소각한다. 비용이 만만치 않다. 1t 처리하는 데 드는 돈이 15만원에 육박한다. 서울 자치구마다 2000~3000t 발생한다고 하니 단풍 구경 대가치고는 엄청 비싸다. 사실 낙엽은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여름 내내 잎에 축적된 탄소가 땅에 저장된다. 그러나 땅에 저장되지 못한 낙엽은 석유로 태워지고 탄소는 하늘로 돌아간다. 아무리 녹색이 울창하다 해도 콘크리트 위에선 탄소가 순환하지 못한다. 저탄소 녹색성장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우려가 많았다. 콘크리트 위에서 저탄소는 가능하지 않다. 콘크리트를 깨고 흙을 살려 농사를 짓자는 도시농업 운동을 하고, 저질소 똥색순환이라는 안티구호를 내건 이유도 다 그 때문이었다.


낙엽은 거름으로 재탄생해야 탄소를 땅에 저장할 수 있다. 낙엽을 거름으로 만드는 방법은 아주 쉽고 다양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비와 눈을 맞히면서 야적장에 그냥 쌓아두는 것이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만 하면 된다. 더 좋은 방법은 오줌을 붓는 것이다. 


1년쯤 쌓아놓은 낙엽을 걷어보면 반 이상이 부엽토가 되어있는 걸 알 수 있다. 그 흙냄새가 보통 좋은 것이 아니다. 이 부엽토는 쓰임새가 매우 많다. 음식물이든 똥이든 이 부엽토와 섞으면 발효가 잘 된다. 이 부엽토는 상자텃밭의 훌륭한 흙재료가 된다. 성질이 알칼리여서 강산성인 수입 흙 피트모스, 펄라이트보다 훨씬 낫다. 또 이 부엽토를 마늘밭이나 양파밭 또는 고추 심을 밭에 깔아주면 최고다. 마늘, 양파밭에는 보온 효과를 주고 고추밭의 흙을 개량해주며 연작피해도 줄여준다. 봄에 부엽토를 깔았던 흙을 만져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부드러움은 아기 속살 같고 은은한 초콜릿 향이 나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빈에선 모든 낙엽을 모았다가 부엽토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짜로 나눠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조만간 그런 날이 올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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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범 | 작가·한글문화연대 대표


경제가 어려우니 일할 시간을 늘려도 아쉬운 판에 공휴일을 하나 더 만든다고? 한글날 공휴일 지정 입법예고를 놓고 경제단체들이 보이는 반응이다. 나도 길거리에서 한글날 공휴일 지정을 바라는 시민 서명을 받다가 어느 아주머니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루 더 놀면 일은 언제 하느냐고. 난 차분히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연중 노동시간이 2200시간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의 평균 연중 노동시간은 1800시간이라고. 400시간을 하루 8시간에 주 5일로 셈해 보면 두 달 넘게 더 일을 하는 꼴이니, 우리는 1년 열두 달이 아니라 열네 달 일을 하는 거라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한 게 아니지만, 한글날 공휴일 지정을 반대하고 있는 경총은 숫자를 조작해가면서 국민을 협박하고 있다. 연차휴가를 포함해 1년에 134일 이상을 쉬니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휴일을 갖고 있는 실정인데, 거기에 한글날 하루 더 놀면 경제에 타격이 오고, 특히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가 힘들어진다고. 


 헤아려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경총이 설마 거짓말을 할까 하며 끄덕일 수도 있는 주장이다. 계산은 간단하다. 토요일, 일요일이 52주니까 104일이 일하지 않는 날이라고 하자. 거기에 법정 공휴일은 15일이란다. 연차휴가는 15일에서 25일 사이다. 104+15+15(25)=134(144)니까 경총 주장이 맞는 것 아닐까?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가 도끼 상소 퍼포먼스 (출처: 경향DB)


아니다. 이건 숫자 조작이다. 경총은 빨간 날이 아닌 노동절까지 포함시켜 공휴일을 하루 늘려 놓았고, 그나마도 주말과 겹치는 공휴일이 평균 4일 정도 있다는 사정을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5일을 빼면 실질적인 공휴일은 10일이다. 또 우리나라 연차휴가일 수 평균은 15.3일이지만 실제 사용하는 날은 절반이 채 안된다. 나머지를 꼭 돈으로 보전해주지도 않는다. 후하게 계산해도 연차휴가는 8일이다. 다시 더해 보자. 104+10+8=122. 경총 주장보다 12일이 적다. 이는 경제 5단체가 10년 전에 주 5일제 도입을 반대하면서 내놓았던 선진국의 휴일 수 126.6일보다도 4일 이상 적은 수치다. 


10년 전에도 경제단체들은 일할 날이 줄면 경제가 망한다고 겁주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 따진다면 연중 노동시간이 1500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북유럽 나라들은 왜 아직도 망하지 않고 있을까? 가장 긴 시간 일하는 나라의 휴일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이 마술의 요령은 그저 ‘거짓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내는 추한 이기심이다. 한글날 공휴일 지정을 반대하면서 경제단체들은 늘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힘들어진다고 오지랖을 보였지만, 이건 정말 모욕이다. 상생을 거부하는 대기업, 골목상권까지 쌍끌이로 훑는 대기업들의 모임이 바로 경총이나 전경련 아닌가?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다. 휴일이 하루 늘면 기업은 생산이 줄겠지만, 문화와 관광 등에서는 1조8000억원의 생산유발효과가 있다. 굳이 이런 연구결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상식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이치다.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사랑, 우정, 긍지, 의리, 정의, 열정 등등 있으면 가난해도 삶이 풍요롭고, 없으면 돈이 많아도 삶이 구차해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난 경총을 비롯한 경제단체들의 태도에서 가장 못마땅한 게 이 부분이다. 문화와 자긍심을 돈으로 재려 하는 그 천박함을 감추기 위해 이 나라 경제를 걱정하고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의 어려움에 연민을 보내는 위선 말이다. 그렇게 나라가 걱정되면 세금 제대로 내고, 중소기업과 골목상권 등을 치는 짓부터 그만두겠다고 국민 앞에 맹세해야 마땅하다. 


그래, 나도 천박하게 물어보자. 당신들이 매일 작성하는 보고서와 서류, 당신의 자녀들과 주고받는 문자까지 모두 한글로 쓰고 있다. 그 사용료는 누구에게 얼마나 지불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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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내년에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국가주석의 자리에 오를 것이 확실하다. G2의 수장이 결정된 것이다. 물론 한국의 대통령도 바뀐다. 세계경제는 장기 침체에 들어갔고 지난 4년 동안 중국의 위상은 부쩍 높아졌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분쟁 때 그 힘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세계적 위기의 시대, 기축통화도 패권국가의 지위도 흔들리는 시대, “아시아 중심으로”(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과 지역 패권을 노릴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힘을 겨룰 것이다.


이 세계사의 전환기에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대선 유력 주자라면 당연히 제시해야 할 필수적인 국가 비전이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의 공약들이 어슷비슷해진 지금 차별화를 시도할 만한 굵직한 주제이다. 너무 큰 문제라서 유권자들의 관심 밖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귀가 솔깃한 전략을 듣지 못했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관해서만 간간이 소식이 들릴 뿐이다.  


 롬니가 아니라 오바마가 당선된 것이 상대적으로 낫긴 하다지만 미국의 두 후보는 한목소리로 중국의 환율조작과 무역불균형을 비난했다. 미국은 이미 제재 수단도 갖추고 있다. 말 그대로 자의적인 보호주의라 할 만한 ‘환율법’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치명적 무기를 함부로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마찰을 일으킬 때 희토류 수출 금지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 대해서도 중국은 가공할 무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조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 자체가 그렇다. 이 중 일부만 시장에 내다 팔아도, 아니 그럴 계획이 있다고 슬쩍 흘리기만 해도 달러 가치는 롤러코스터를 탈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경제전쟁의 와중에 한반도는 무사할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중국에 대해서 쓰지 못할 무기는 한국을 먼저 겨냥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위기가 시작된 2007년 이후의 환율변화 추이를 보면 위안화보다 원화가 덜 절상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고 있다. (출처 : 경향DB)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니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설득밖에 없다. 세계경제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의 대미(對美) 흑자는 줄어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공동 대응을 하는 것이 낫다. 이미 4조달러를 훌쩍 넘은 동아시아의 외환보유액과 환율을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중국을 설득해야 한다. 


물론 미국은 아시아통화기금(AMF)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이 계획을 견제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역내 수요를 증가시켜 미국의 대동아시아 적자를 해소할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다. 외환위기의 위험 때문에 동아시아 각국은 ‘과도하게’ 많은 달러를 쌓아 놓고 있다. 만일 공동으로 관리한다면 이 중 1조달러 이상을 ‘동아시아 개발기금’으로 만들어 역내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나 중국 내륙, 그리고 아세안에 투자할 곳은 얼마든지 많다. 말하자면 동아시아판 마셜 플랜을 스스로의 돈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역내 협력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다. 예컨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계획을 세우고 공동으로 재생에너지 기술개발을 한다든가, 작게는 사막화와 황사를 방지하기 위한 중국 북부의 조림사업,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북한의 조림사업도 할 수 있다. 나아가서 분산형 에너지체제에 필수적인 스마트그리드 등 각종 네트워크의 표준도 공동으로 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북한의 철도와 전력망, IT망을 동아시아의 돈으로 함께 건설할 수도 있다. 


요컨대 세계경제의 회복을 돕는 동아시아의 역내 협력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다. 10년 전 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내세웠던 ‘동북아 공동체론’을 부활시키는 사업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너무 앞서가서 단순한 구상에 그쳤지만 현재의 세계와 동아시아 상황에서 이 사업은 생생한 현실이 되었다. 누가 이런 구상으로 G2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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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석 방송통신위원이 김재철 MBC 사장의 해임을 막기 위해 청와대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캠프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양 위원은 어제 기자회견을 열고 “(여당 추천) 김충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에게 하금열 청와대 대통령실장과 김무성 박근혜 선거대책위 총괄본부장이 ‘김재철을 지켜라, 스테이시키라’는 전화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문진의 일부 여권 추천 이사들과 야당 추천 이사 3명이 지난달 하순 김 사장 해임 결의안에 찬성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으나 두 사람의 개입으로 합의가 무너졌으며, 이에 따라 지난달 25일로 예정됐던 해임안 상정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방문진에는 어제도 김 사장 해임안이 상정됐으나 부결됐다. 방문진은 여당 추천 이사가 6명, 야당이 3명으로 여당 이사 2명이 합류하지 않으면 과반수 해임안 가결(5명)이 불가능하다. 


사실이라면 충격적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현 MBC 체제가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김재철 지키기에 나섰다는 것인데,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명박 정권이 집권 내내 방송장악을 획책해왔고, 현 MBC 체제도 그 파생물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지나간 권력과 미래 권력이 야합해 문제 많은 공영방송 사장을 ‘스테이’시키라며 개입했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다. 


폭로 기자회견 하는 양문석 방통위원 (출처 : 경향DB)


우리가 ‘사실이라면’이란 전제를 단 이유도 그것이다. 거명된 여권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외압 행사 등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정황들을 살필 때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우선 차관급 방통위 상임위원이 공개된 기자회견에서 이런 중요한 얘기를 지어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양 위원은 “어리석게도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믿어 MBC 노조의 파업 복귀를 설득했다”며 이날 상임위원직을 사퇴했다. 방문진 야당 측 이사들도 어제 여당 이사들이 김 사장 퇴진을 포함한 MBC 정상화 결의안을 추진하다 지난달 말 갑자기 포기한다고 통보한 것은 외압 때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박근혜 후보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을 심도 있게 논의할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그 결과를 마련해 실천할 것을 약속한다”며 “공영방송 사장 선출도 국민이 납득가능한 수준으로 투명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같은 외압 의혹 앞에서 이런 다짐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선거를 목전에 두고 공영방송 사장 인사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사실무근이라고 잡아떼거나 예의 정치공세라며 빠져나가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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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 의혹과 관련된 증거물을 은폐·조작하려 한 정황을 이광범 특별검사팀이 포착했다고 한다. 특검팀은 이 같은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매입 실무에 관여한 청와대 경호처 직원 3명을 오늘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한다. 내곡동 사건의 핵심은 부동산실명제법 위반 및 배임 혐의지만, 청와대가 자신들의 비리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면 이는 더 심각한 사안이 된다. 민간인 불법사찰에 이어 청와대가 또다시 증거인멸과 말맞추기 등을 시도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 이명박 정권의 도덕성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광범 특별검사 출근 (출처: 경향DB)


특검팀은 청와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매매계약서 등 일부 서류가 위·변조된 정황을 잡고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가 이명박 대통령 아들 시형씨와 경호처 간 땅값 분담률을 사후에 합리화하기 위해 필지별 감정평가액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조사 중이라고 한다. 구체적 사실관계는 향후 특검 수사에서 드러나겠지만, 제기된 의혹만으로도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증거인멸이나 조작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경호처 실무자보다 훨씬 윗선의 인물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대통령이 직접 관여했거나 최소한 보고받았을 개연성도 있다고 본다. 청와대는 시형씨의 매입자금 차용증 원본파일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원자료가 공개되면 조작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인가.


오는 14일로 수사기간이 만료되는 특검팀은 기간 연장을 청와대에 신청키로 했다. 추가 의혹이 쏟아지는 데다,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와 이상은 다스 회장 부인 등 관련자 조사가 지연되고 있어서라고 한다. 검찰의 부실수사 흔적이 드러나고 있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수사도 불가피한 터이다. 청와대로서는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특검 수사를 중단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곡동 의혹은 지금 덮는다고 영원히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청와대의 비협조로 특검 수사가 좌초한다면 그 책임은 이 대통령 퇴임 후에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청와대는 수사기간 연장을 승인하고, 특검은 진상 규명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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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사회부 차장 skim@kyunghyang.com


몇 년 전 일이다. 한밤에 택시를 탔다. 내가 기자라는 얘기를 들은 택시기사 아저씨는 자신의 조카도 기자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낮에 한 검사에게 점심을 샀다고 했다. 그리고 이유를 얘기했다. 아저씨가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그는 한 의류 제조업체의 사장이었다. 그의 회사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공식 후원업체가 됐다. 월드컵이 시작되면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생각하고 미리 유니폼을 많이 만들었다. 월드컵대표팀의 주 유니폼이었던 흰색 상의였다.


 그런데 웬걸. 공식 응원단 ‘붉은악마’가 입고 나온 붉은색 상의가 전 국민의 인기를 모으면서 흰색 상의는 창고에 그대로 남았다. 회사는 부도가 났다. 전 재산을 털었지만 빚을 다 갚지 못했고, 고소를 당해 수사를 받게 됐다.


그는 검찰에서 한 검사를 만났다. 검사는 조사가 끝나던 날 “300만원 있느냐”고 물었다. 검사는 “그 돈만 갚으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고 했다. 다른 문제는 검사가 모두 정리한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300만원도 없었다. 검사는 “그러면 내가 빌려줄 테니 나중에 갚으라”며 300만원을 빌려줬다. 아저씨는 그 돈을 받아 채권자들과의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아저씨는 그 뒤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돈이 생길 때마다 10만원, 20만원씩 검사에게 돈을 갚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택시를 탄 날. 그는 1년여 만에 빌린 돈을 마지막으로 갚고, 점심을 샀다고 했다. 아저씨는 “돈이 없어 5000원짜리 국밥 2인분을 사서 함께 먹었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간 30여분 동안 아저씨의 표정에서는 검사에 대한 고마움이 떠나지 않았다. 나 역시 ‘이런 훌륭한 검사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현직 검사가 10여일 전 검찰 내부전산망에 글을 올렸다. 제목은 ‘고언(검찰 개혁 논의를 바라보며)’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우리의 인식과 울분이 여론과 괴리되고”라고 했다.


이 검사의 생각이 나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분명히 동의한다. 검찰의 인식은 여론과 많이 괴리돼 있는 것 같다.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검사 얘기를 들은 지 몇 해 뒤 검찰은 법원의 조정에 응했다는 이유로 공영방송 사장을 기소했다. 이 공영방송 사장은 법원의 권고를 받아들여 국세청과의 세금 소송을 조정으로 끝냈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 공영방송 사장은 “친구들끼리 싸우지 말고 대화로 끝내라”는 선생님의 말을 따른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벌을 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돈이 있든 없든, 빚을 못 갚은 택시기사 아저씨는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 아저씨가 300만원만 갚고 벌을 받지 않게 한 검사는 직무를 유기했다. 그런 검사를 훌륭하다고 생각한 나도 문제였다.


MBC PD수첩의 촬영 원본 확보를 위해 압수수색에 나선 검찰과 MBC 노조원들이 대치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검찰은 보도 내용에 일부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방송사 PD와 작가들을 기소했다. 기사 내용에 일부 잘못이 있으면 정정보도를 해야 하고, 손해배상까지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민주화된 이후 한국에서 그런 이유로 언론인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아, 나는 정말 무지했다.


다행히 법원이 나를 위로해줬다. 이들 사건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 검찰의 생각이 소수였다.


직간접으로 검사들의 이런 부탁을 들었다. “제발 신문 만평 그릴 때 검사를 개로만 그리지 않게 얘기 좀 해달라.”


내부게시판에 글을 올린 검사는 이렇게 썼다. “비난받는 것에 이유가 없겠느냐. 옛글에 이르기를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길 짓을 한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긴다.”


화백들의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보이는 대로 그릴 뿐이다. 검사들이 악당을 무찌르는 슈퍼맨으로 보인다면 왜 개로 그리겠는가. 모든 만평에 검사들이 슈퍼맨으로 그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검사들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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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이 세상에 넘쳐나는 사람이 선생(先生)이다. 어떤 직업의 사람에게도 어울리는 직함인 ‘선생’은 ‘동무’나 ‘씨’보다 더 많이 불리는 호칭이다. 그대 역시 나를 선생이라 부르며, 나 또한 그대를 선생이라 부른다. 하지만 걷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내가 그대에게 선생이라 불리는 것도, 늘 걷기를 함께하는 그대에게 내가 선생이라 부르는 것도 과연 어울리는 호칭일까?


G B 쇼는 <결혼하는 것>에서 말했다. 


“나는 선생이 아니다. 다만 당신들이 길을 묻는 길동무일 뿐이다. 나는 갈 길을 가리켰다. 당신들의 갈 길과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갈 길도….”


그의 말처럼 나는 선생이 아니다. 어느새 공급 과잉이 되어버린 선생이라기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길동무요, 같은 길을 걸으면서 도를 닦는 벗, 즉 도반(道伴)일 뿐이다. 나는 그대의 곁에 있으면서 그대에게, 그대는 가끔 내게 길을 묻고 가르쳐 주기도 하는 길동무인 것이다. 또한 신새벽에 잠에서 깨어 어둠을 직시하다 어쩌지 못해 일어나 불을 켜고 습관처럼 잃어버린 길을 간절히 묻는 도반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목적으로 같은 도를 수행하는 벗을 도반이라 부른다. 형제보다도 더 큰 인연을 가진 것을 도반이라 여기며, 그 인연의 크기와 의미를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것을 도반이라 여긴다. 살아생전에 법정 스님은 그 도반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진정한 도반은 내 영혼의 얼굴이다. 내 마음의 소망이 응답한 것, 도반을 위해 나직이 기도할 때 두 영혼은 하나가 된다. 맑고 투명하게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도반 사이에는 말이 없어도 모든 생각과 소원과 기대가 소리 없는 기쁨으로 교류된다. 이때 비로소 눈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된다.”


도법스님과 함께 길을 가는 도반(道伴)중 가장 나이가 어린 13살짜리 김평화양. (출처; 경향DB)


진정한 도반은 선후가 따로 없다. 앞서가던 사람도 조금만 해찰을 하다보면 뒤처져 걸어가고, 뒤따라가던 사람도 어느 사이에 앞서갈 때가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면서 서로 이해하고 보듬고, 서로 존경하며 먼 길 가는 도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지금도 그대와 함께 길을 걷는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인연이 되어서 몸서리치도록 사랑하는 이 땅을 함께 걷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대를 도반이라 부르지 못하고 선생이라 부른다. “김 도반님, 박 도반님!” 하자니, 그건 마치 북조선에서 “김 동무, 박 동무”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긴다. 이보다 더 좋은 의미가 어디 있을까마는, 아직은 호칭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탓이다. 그래서 나직하게 속삭인다. “이봐, 박 도반. 내 말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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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차가 최근 미국에서 겪고 있는 ‘연비 사태’를 보면서 국내 판매 차량의 연비 실태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에서도 연비를 부풀려 왔을 것이란 의심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소비자 보호 장치가 허술하기에 더욱 그렇다. 현대·기아차는 “나라마다 주행 환경이나 연비 측정 조건에 대한 규정 등이 다른 만큼 국내 판매 차량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미국처럼 정부가 직접 나서서 소비자의 궁금증과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줘야 할 것이다. 때마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서울YMCA가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든 차량의 연비를 객관적·공개적으로 검증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사실 현대·기아차의 표시연비(공인연비)와 실제연비(체감연비)가 다른 데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운전자가 많다. 그러나 “운전습관 등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설명만 듣다 보니 소비자로서는 연비 불신이 클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공인연비’의 객관성을 보증해줘야 하지만 검증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현대·기아차는 차량의 연비를 자체 측정해 지식경제부 산하 에너지관리공단에 신고해 공인연비로 인증받는다. 물론 미리 시험설비·전문인력 등 자체 측정 요건을 갖췄다는 인정은 받았다. 문제는 공인연비의 사후검증이다. 공단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검증 대상은 연간 출시되는 차종의 10%도 안된다. 더욱이 검증 차종이나 검증 결과가 공개되지도 않는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일관제철소 제2고로 화입식’에서 첫 불씨를 넣고 있다. (경향신문DB)


정부의 자동차 정책은 아직도 소비자보다 기업 편이다. 그러나 국내 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기업의 꿈을 펼치고 있는 현대·기아차를 언제까지 치마폭 안에서 감싸고돌 수는 없다. 현대·기아차가 세계 일류기업이 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도 국내에서 먼저 가혹하리만치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국내 시장(수입차 제외) 점유율이 80% 이상인 현대·기아차로서는 소비자를 얼마든지 ‘만만하게’ 볼 수도 있다. 정부는 현대·기아차의 연비를 전면 조사해 소비자의 불신을 말끔히 지워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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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 에세이스트


 

결혼 같은 건 남의 일인 줄 알았다. 요즘 결혼정보회사 광고도 ‘아버지 퇴직하신다, 결혼해듀오’ 라고 하며 ‘결혼해듀오’ 앞에 청혼의 이유로 당당히 ‘아버지 퇴직하신다’가 앞서는 이 세상에서, 제 돈도 없고 아버지 돈도 없으니 혹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해도 그가 나와 똑같이 여유 없는 이 시대의 청년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이라고는 고작 모텔이나 여관의 ‘대실’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은 현실이라 더 씁쓸했다. 어쨌거나 나는 확실히 결혼 시장에서 하자 있는 B급품이었다. 서른 넘은 나이, 게다가 작년에 부친을 잃어 홀어머니를 모시는 처지에 많지도 않은 월급, 돌아가신 아버지가 목사로 시무하시던 개척교회에 자취방 전세금까지 톡톡 털어 넣어 알거지나 다를 바 없었으니, 아버지 퇴직하시니 결혼해 달라는 사람들이 나를 단칼에 B급품으로 여긴다 한들 대꾸할 말이 없는 형편이었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그간 비정규 노동자로 멍하니 살다가 홀어머니 모시려면 그리 살아 되겠냐는 주변 분들 근심에 나도 정신이 바짝 들어 이력서니 자기소개서니 하는 걸 열심히 쓰고 입사 시험을 몇 번이나 치러 몇 년 만에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그때 즈음 청혼인지 맞선인지가 한 건 들어왔는데, 내가 월세 살고 있는 집 주인으로 좀 까다로운 영감님이었지만 늘 공손하려 애썼다. 당시 나를 받아준 고마운 회사는 서울문화재단이라는 곳이었는데, 월급이 많지는 않아도 문화에 관한 일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서울시 출연기관이다. 


 그런데 내 직장을 요것조것 묻고 난 영감님의 태도가 어째 묘하게 은근해졌다. 일찍 다녀라, 남자는 못 믿을 놈이다 등등 말씀이 너무 길어 간신히 네, 네만 하던 중 영감님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저녁을 함께 먹자 했다. 그 밥 먹다간 체할 듯해 용건을 여쭈니 당신께 아직 장가 안 간 아들이 있단다. 남자는 다 못 믿을 놈이나 우리 아들만은 아니고 마흔이 넘었지만 너무 착해 못 간 것이며 기술자라 가게를 차려줄 건데 아내의 내조가 필요하다는 것이 부자의 공통된 생각으로 그간 나를 좋게 보았다 하셨다. 그 분 머릿속에서는 이미 시나리오가 모두 완성돼 있었다. 전세 얻어줄 테니 친정 어머니와 셋이 살되 빨리 아이를 낳아 너는 일을 하니 너희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면 되고 공기업이라 여유로울 테니 퇴근 후와 주말에는 남편 빵집 일을 하라는 것이 그 시나리오의 전말이었다.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않는 법인데 이렇게 너그러운 시댁이 있겠느냐고 생색을 내는데 하나도 고맙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열 살 넘게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주중에는 돈 벌어오고 퇴근 후와 주말에는 남편 일을 같이하고 남편 나이가 있으니 얼른 아이를 낳되 그 애는 우리 엄마보고 키우라고?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아버지가 계셨어도 이 할아버지가 이토록 고마운 줄 알라는 식이었을까 싶어 부친상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 없는 신세가 서러웠다. 


어쨌거나 영감님은 내가 감지덕지하지 않는 걸 계속 의아해했는데 아버지 퇴직 전에 빨리 결혼하자는 세상에서는 B급품 주제에 감지덕지해야 할지 모르나 주중에도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고 얼른 애도 낳고 그 애는 우리 엄마에게 떠맡기되 고마운 줄도 알라는 이 제안이 나는 편치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볼 때마다 다그치는 건 물론, 업무시간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오고 이런 너그러운 제안이 없다는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아, 이 사람 눈엔 내가 참 만만한 B급품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혹시 순댓국집이라면 심각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르지만 빵이라면 절대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질색이라 더더욱 그 영광의 자리는 빵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양보하고 싶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간혹 비슷한 또래인 청년유니온 전 위원장 김영경씨를 마주치면 우리는 ‘결혼파업자’라고 떠들다가도 영경씨야 단단하고 당당한 사람이지만 나는 능력 없어 못 하는 ‘결혼실업자’다 싶어 종종 부끄러웠다. 그렇게 결혼실업자 주제에 이런 과분한 제안을 덥석 물지 않으니 영감님 보기에는 잘난 것도 없으면서 눈은 높아 중소기업 싫다는 백수 같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기뻐 날뛰지 않는다고 그토록 닦달을 했을 리가. 


어느 날 술기운이 흥건해서 남자 손을 잡고 비틀비틀 귀가하자 할아버지는 격노하여 집을 비운 엄마에게 수없이 그 한밤중에 전화를 걸었다. 당신 딸이 지금 남자와 놀아나는 중이다, 게다가 그 놈은 인상도 아주 나쁘다, 제발 딸 단속 좀 잘해라 등등 추상같이 호령을 했다는데 길길이 뛰는 기세가 흡사 내가 그 집 며느리인데 바람이라도 피운 듯했다 한다. 


어쨌거나 나는 그 남자와 ‘놀아나는’ 것도 모자라 제발 나와 결혼해달라고 무릎 꿇고 청혼을 감행했으며 그가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잽싸게 성공했다. 함께 짐을 가지러 간 날, 역시나 영감님이 바람처럼 나타나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인상 나쁜 내 남편이 집사람에게 하실 말씀은 제가 듣죠, 하자 할아버지는 당신이 도대체 뭐냐, 당신하고는 아무 할 말 없다 등등 알 수 없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골목이 쨍쨍 울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쌩하니 그를 뒤로 하고 단칸방에 들어앉아 끝없이 다투고 화해하는 중이며, 나는 빵집을 보면 가끔 영감님 생각을 한다. 


저기요, 고마우신 제안은 하나도 안 고마웠고 저 빵 진짜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우리 엄마가 댁의 손자를 뼈빠지게 키울 일 같은 건 절대로 없을 테니 참 흥입니다요, 하고 못되게 생각하는데 어째 전혀 미안하지가 않다. 진짜로 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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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민주당은 수권정당인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준다고 해도 통치역량(governability)이나 리더십, 또는 정책에서 지금의 민주당이 많이 부족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아예 일부에서는 민주당을 두고 계륵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모두 힘을 합쳐야 하니 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중히 쓰기에는 허술한 데가 많다는 논리다. 이런 태도는 유효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


정치현실주의 관점에서 보면 대개 정권교체는 야당의 대안이 온전해서라기보다 여당의 실정이 크기 때문에 발생한다. 물론 대안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후를 따지자면 실정이 대안보다 앞선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민주당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나 아예 부정하는 것은 과도하다. 비록 부족해도 민주당 없이는 정권교체도, 선거 후 새로운 사회의 건설도 불가능하다.


(경향신문DB)


 “정당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책무를 수행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 민주당만큼 준비가 덜된 정당도 없을 것이다.” 그냥 읽으면 마치 대한민국의 민주당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시의 민주당에 대해 샤츠슈나이더가 한 언급이다. 이 지질한 민주당이 훗날 30여년 동안 유지된 뉴딜체제의 주축이 되었다. 따라서 이 땅의 민주당에도 이번 대선에서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


1930년대 미국의 민주당이 못난 정당에서 좋은 정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상원의원 와그너 등 당정의 리더십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 man)’이란 개념으로 묶어냈고, 와그너는 노동조합의 결성을 정부가 지원하는 법을 만들어 보수세력의 공세를 돌파했다. 흔히 뉴딜체제를 계층과 지역의 절묘한 결합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뉴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정치예술이었다.


민주당을 언급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리더십이다. 후보 단일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더 넓게는 안철수 후보 캠프를 비롯해 야권에 정치 역량을 갖춘 혁신적 리더십이 존재하느냐, 없다면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민주당의 변화를 말할 때 그 핵심은 ‘노장(老將)’의 퇴진이 아니라 ‘새롭고 역동적인 리더십’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야권의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야권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다. 이 둘만큼 대중적 열망을 충실히 대표하고, 기민하게 응답하고, 온전하게 책임지려는 인물이 또 있으랴. 이 두 후보가 단일화를 계기로 삼아 야권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야 한다. 안 후보든 문 후보든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힘을 합쳐야 한다. 안 후보는 문 후보의 민주당 쇄신을 거들어야 하고, 문 후보는 안 후보의 혁신 드라이브를 지원해야 한다. 단일화와 대선 승리는 안 후보와 문 후보가 상호 신뢰를 갖고 굳건한 혁신동맹을 유지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민주당이든 안 후보 캠프든 끝까지 완주하자는 독자파와 후보 단일화에 응하자는 연대파 간의 다툼이 치열할 것이다. 독자파에게도 명분은 있다. 민주당은 당의 존립이, 안 후보 캠프는 정치혁신이 그것이다. 그런데 정권교체와 정치쇄신의 과제를 둘 중 택일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안 후보가 민주당의 실체와 역할을 인정하고, 문 후보가 비정당적 정치참여의 열망을 인정한다면 두 과제는 별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다. 문제는 두 후보의 리더십이지 일도양단의 강박관념이 아니다. 케네디의 말에 빗대 두 후보에게 충고하고 싶다. ‘두려워서 연대할 필요도 없지만 연대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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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 | 영상설치미술가 



1987년 대학교 3학년이던 나의 등굣길은 언제나 전경들이 지키고 앉아 있는 살벌한 풍경이었다. 어느 날, 유학파 교수는 한 화가의 꽃그림을 보여주면서 자유를 강조하고 토론을 부추겼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 그림을 삽화에 견주며 예술작품과의 차이에 대해 논했다. 교수는 화를 냈고 반성문을 써오라고 했다. 그 일로 학교를 그만둔 나는 표현의 자유 논쟁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더욱이 국가보안법이 헌법과 세트를 이루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귀결이 뻔한 논쟁이려니, 냉소와 체념을 체화하며 살아왔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가 몇 살이나 먹었나. 그저 성장통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묵념이나 하면서. 그런데 너무나 변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위협이 도를 넘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박경신 교수의 ‘검열자 일기’ 재판은 대법원까지 가게 됐다. 항소심에서 무죄를 이끌어 냈지만 검찰이 상고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록과 축적이라는 학술적 가치와 창조적 행위의 근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순한 위협으로밖에 볼 수 없다.


박 교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부당하게 삭제된 게시물들을 자신의 블로그 ‘검열자 일기’에 올리면서 검열기준의 공적 토론을 위한 예시로 써오고 있었다. 나로서는 어떤 법 적용보다 이번 사건에 더욱 특별한 분노를 느낀다. 그런데 하도 웃겨서 화도 안 난다. 예전에는 비판이 주로 검열의 대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농담을 해도 검찰이 ‘준동하시기’ 때문이다. 박정근의 리트윗 사건에 2년을 구형한 것도 황당했지만 김정도의 북한 가요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는 농담은 ‘찬양고무’ 혐의로 압수수색마저 당했다. 검찰은 이 시리즈에 종영본을 낼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럴 생각이 없고, 영상물등급위원회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집사님’ 정권의 마녀사냥에 동참하고 있다.


박경신 고려대 법대교수 등이 인터넷 실명제 헌법소원 제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DB)


허진호 감독의 <위험한 관계>는 한국에서 19금 판정을 받았었다. 그러나 영화 등급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 중국에서는 엄마 손 잡고도 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한국인의 ‘순수함’을 가늠할 수 있는 판정이다. 김선 감독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는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영화 틀지 말라는 뜻이다. 영화인들은 얼마 전 “예술의 기능과 범위를 ‘순수’로 일반화하는 천박한 발상”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무시하는 어이없는 태도”라고 반박하며 제한상영가 판정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을 청구했다. 


미국 대법원이 “공무원이나 공적 영향력이 있는 인물에 대한 풍자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의 손을 들어준 유명한 사례가 있다. 언론 관련법을 배울 때 반드시 나온다고 한다. 검열하시는 분들이 우리 국민들의 기본권은 무시하더라도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의 중요성을 대표하는 이 사례는 잘 알 것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정작 박경신 교수는 자신이 래리 플린트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표현의 자유는 모든 표현의 자유이지 사회적으로 좋은 표현을 할 자유가 아니다”라는 글과 함께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무엇을 차단하고 삭제하였는지를 국민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했다. 


래리 플린트도 검열이 법 위의 권력이라고 문제 삼았다. 그는 문제가 있으면 사법부의 판단을 따르겠다며 “나 같은 쓰레기가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보호받을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마르키 드 사드의 소설을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기 처분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규제하며 방송사 사장이 언론 탄압에 앞장서는 나라. 래리 플린트처럼 묻는다. 무엇이 더 외설적인가. 폭력과 전쟁에는 관대하고 애정 표현에는 엄격한 시청연령 등급을 눈여겨본다. 그래서일까, 가을비가 군홧발처럼 내리치는 거리에 사랑은 없고 낙엽만 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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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화 논설위원 

 

 

며칠 전 송금을 위해 은행을 찾았다. 은행 직원은 “통장에 서명된 자필사인만으로는 송금할 수 없다”며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아,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화면 속 사진과 은행을 찾은 사람이 동일인임을 증명했다. 통장 속 서명도 재현했고 주민등록번호도 알려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다음달부터 이런 불편이 사라진다. 인감도장 없이 서명만으로도 은행대출을 받거나 부동산거래를 할 수 있다. 1914년부터 99년 동안 시행된 인감증명제도와 서명제도의 공존시대가 왔다. 인감증명 대신 사용되는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동 주민센터나 읍·면사무소에서 본인 확인 후 전자패드에 자필서명하면 발급받을 수 있다. 민원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발급이 가능하다.


(경향신문DB)


그러나 서명만으로 부동산과 자동차 거래 등 민원을 해결하는 제도에 아직은 낯설어 하거나 우려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집을 사는 사람은 인감방식, 집을 파는 사람은 서명방식을 각각 고집할 때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본인이 직접 신청해야 하는 번거로움, 서명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복잡한 서명을 사용해야 하는 부담감도 지적한다. 



도장은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위의 상징이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신석기 시대부터 왕의 도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왕권과 왕위 계승의 징표인 옥새는 1949년부터 국새제도로 이어졌다. 개인의 도장은 신라시대에 이미 유행했고, 현대에도 도장 주인의 사주와 이름풀이에 따라 도장의 재질과 서체를 달리하며 사람과 도장을 하나의 운명으로 은유한다. 


서양에서도 교황이나 황제 등 지도자는 도장에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유 문양을 새겼다. 파죽지세로 유럽 전토를 석권한 나폴레옹도 카넬리안으로 만든 도장을 항상 몸에 지녔다. 카넬리안은 심신에 신성한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보석으로 유명했다. 이 도장을 몸에 지닌 사람은 원하는 일이 모두 이뤄진다고 믿었다. 


오는 12월1일부터는 이런 낭만 대신 편리함이 찾아온다. 도장을 함부로 찍어 패가망신했다거나 도장을 잃어버려 중요한 계약을 못했다는 말은 이제 타임캡슐에서나 만나는 옛날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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