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한글 전용은 근대 이후 우리 역사의 큰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의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빠른 속도로 독서 공중을 만들어냈고 어려운 글자로 정보를 독점하던 계급의 인습을 몰아냈다. 그런데도 1945년 이후 한글로만 쓰기를 둘러싸고 시비가 끊어진 적이 없었다. 헌법재판소에 한글 전용이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지난해에 겨우 합헌이라는 결정이 났다. 왜 논란은 사라지지 않고 길게 이어진 것일까.

첫째, 우리말과 글에 대한 유교식 편견을 들 수 있다. 훌륭한 알파벳을 갖고도 500년이나 그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 것은 모화사상의 엄청난 무게 때문이었다. 중국과 다른 글자를 쓰면 오랑캐가 된다는 생각에 따라 오랑캐를 면하려고 끝없이 우리 고유문자를 버리려고 애썼다. 모범적인 사대조공국인 조선에서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유교를 받치던 한 기둥인 과거제도는 형식에서는 엄격한 중국식 한문 쓰기를 강요하여 극단적 귀족주의를 낳았고, 내용에서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 고전의 내용이 고대 중국의 역사와 문학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상사에서 볼 때 한글만 쓰기는 단순히 문자 생활을 편리하고 대중적으로 한다는 차원을 훌쩍 넘어가는 큰 뜻을 갖는다. 한글에서 자주적 학문과 사상을 위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둘째,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 때문이기도 하다. 한글을 일본의 가나와 같은 것으로 보는 한자 혼용론이 조직적으로 한글 전용에 맞섰다. 그러나 한글과 가나는 성격이 크게 다르며 한자와 한문도 조선과 일본에서 그 성격이 서로 판이하다. 한글로만 쓰기는 한글로만 적었을 때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낡은 어휘를 정리하고 쉬운 말을 쓰자는 것이다. ‘탄핵을 인용하다’는 낯선 말보다 ‘탄핵을 용인(승인)하다’로 쓰고, ‘화폐’보다는 ‘돈’을, ‘존재’보다는 ‘있음’을 쓰자는 게 한글 존중의 근본 뜻이었다. 일찍이 이희승은 언어의 ‘자연성’을 내세워 ‘명사’를 ‘이름씨’로 바꾸는 주시경 학파의 새말 만들기를 인위적이라 비판하였다. 그러나 ‘명사’나 ‘이름씨’나 모두 만든 말이다. 외국인이 만든 ‘명사’는 되고 우리가 만든 ‘이름씨’는 안된다는 말은 아무 근거도 없었다. 이는 사실상 우리말의 손발을 묶는 결과를 불러왔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말을 자꾸 짓지 않으면 우리말이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비행기’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날틀’이 못 쓰일 까닭은 없다. 이희승의 주장은 역사 비교 언어학에서 자연과학을 이상적으로 여기던 생각에 기댄 것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자연성을 어휘에까지 확장한다면 역사 비교 언어학자들도 놀랄 것이다.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은 해방 뒤에 서울대를 매개로 엄청난 세력을 얻었다. 한글로만 쓰자는 국어학자는 ‘주류’에서 비켜나 있었다.

셋째, 한자도 우리 글자라는 착각이 널리 번져 있다. 한글 사랑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지어낸 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유럽에서 라틴 알파벳이 쉽게 국경을 넘어 쓰이 듯이 한자도 그러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 알파벳의 낱자는 의미(기의) 없는 형식적 기표일 뿐이기 때문에 쉽게 국경을 넘어간다. 한자가 뜻글자인 한 뜻(기의)은 기표(음, 형)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일본처럼 한자를 뜻으로 읽을 때에는 중국식 음성 기표가 잊히면서 토착화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한자는 중국 글자일 뿐이다. ‘大橋’라고 써도 일본처럼 ‘큰 다리’ 식으로 읽지 않는 것이다. 들어온 지 1000년을 넘었다는 사실이 우리 것으로 되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한자가 외국 글자라는 사실이 배척받을 논리적 근거는 되지 않는다. 한자도 우리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나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다.

한글 전용은 우리 지성사의 큰 성취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낡은 한자식 어휘는 물러가지 않고 버티고 있고 영어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한글로만 적는다고 반길 수 있을까. 한글로만 쓰기라는 흐름은 단순히 대중의 실용적인 선택에 기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글은 우리가 세울 자주적인 겨레 문화의 집이자 민주주의적 소통의 매개체다. 역사적 타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세월을 필요없는 시비에 휘말려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김영환 | 한글철학연구소장·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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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가만두어도 될 것을 공연히 건드려 일이 잘못되거나 힘들어지는 것을 뜻하는 ‘긁어 부스럼’과 같은 속담으로 ‘공연한 제사에 어물 값만 졸린다’가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평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면 되고 사대부는 2대, 고위직은 3대까지만 제사를 지냈는데 남의 제사를 경쟁적으로 따라 하느라고 조선 중기 이후엔 양반이든 평민이든 사대봉사(四代奉祀)로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지내는 제사 횟수가 크게 늘어 생선이니 포니 제수(祭需) 마련하는 부담으로 살림이 휘청거리게 되었습니다. 조상에 대한 예의와 효심을 번듯하게 내보이려다 말입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제사상 차림은 정말 간소했습니다. 어린애 밥상만 한 작은 상에 음식 몇 가지만 올라가 있었으니까요(독상이라서 각 신위 앞에 똑같이 차린 상 하나씩 놓습니다). 지금도 종갓집 일부에서는 그렇게 독상마다 몇 가지 음식만 올립니다.

허균의 소설 <허생>에는 허생이 부자에게 10만 냥을 빌려 전국의 사과, 배, 대추, 감 등 주요 과일들을 싹쓸이하자 과일 없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열 배 값으로 되사간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허례허식을 비꼰 것이지요. 현대에 와서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홍동백서, 좌포우혜로 차리지 않으면 격식을 갖추지 못하는 것인 양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즐비하게 상을 채워 올립니다.

저희 집안은 이번 추석부터 전을 안 부치기로 했습니다. 요즘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고생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나이든 어른들이 나서 상차림을 간소화하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알뜰한 상차림도 이야기됩니다. 그 ‘알뜰하다’라는 말에는 일이나 살림을 정성스럽고 규모 있게 하여 빈틈이 없다는 뜻과 함께, 다른 이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참되고 지극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어물 값과 삶의 허리 모두 졸리지 않는, 진정 알뜰한 상차림이란 무엇일까요.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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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울적할 때 논어를 읽는다. 최근에는 집중해서 필사도 하였다. 쌀가마니를 기웃거리는 쥐처럼 손에 잡았다가 갉작거리기만 했던 게 여러 번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떤 깊은 자극을 받아 작심을 하고 덤벼들었던 것. 논어의 끝문장은 “不知言 無以知人也.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이다. 왜 말로 마무리를 했을까. 붓을 놓고 ‘言’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네모난 돌 위에 솔잎을 쌓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험한 한자. 문득 말의 바탕 위에서 늘 살아가면서도 이 글자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옥편을 뒤졌다. 이런 설명이 나왔다. “날카로운 칼과 口가 합친 것. 칼로 까칠까칠하게 만들 듯 하나하나 확실하게 발음되는 게 말이라는 뜻.”

대학을 갔는데 출석부는 이름의 가나다순이었다. 조상이 순서를 정해준 셈이다. 자연스레 같은 실험조가 되면서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있다. 성만 표기해 본다. <李, 全, 鄭1, 鄭2, 崔>. 이곳저곳에서 흩어져 살다가 중간지대인 예천에서 모처럼 모였다. 이름과 목소리는 그대로인데 얼굴은 조금씩 변했다. 다음날 全과 鄭1은 먼저 떠나고 李, 鄭2, 崔는 치악산 아래 원주의 박경리문학공원을 둘러보았다. ‘작가는 치열하게 언어를 찾는 존재입니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하여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군데군데 배치된 작가의 말을 읽으며 돌아다니는데 맞춤하게 돌담길에 ‘눈먼 말’이라는 시가 눈에 번쩍 뜨였다. 자연스레 논어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내용을 보니 말(言)이 아니라 말(馬)이었다. 시를 소개하는 입간판 뒤로 담쟁이덩굴이 담벼락에 빽빽했다.

담쟁이덩굴을 모르는 이 어디 있겠나. 벽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담쟁이덩굴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오늘 내가 주목한 건 담쟁이덩굴의 까칠한 잎이었다. 

그것은 나무의 혀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바람과 살랑살랑 호흡을 맞출 때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데 그걸 알아들을 귀가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추석 귀성객이 뭉텅 빠져나간 ‘훌빈한’ 공원에서 각별한 느낌으로 바라본 담쟁이덩굴. 포도과의 낙엽 덩굴성 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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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찐따’란 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비속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 읽었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일본어로 짝짝이를 뜻하는 찐빠(跛)에서 왔다고 추정될 뿐이다. 어린 시절 병을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작가 이철용은 이 때문에 주변에서 찐따란 놀림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주로 장애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대략 ‘한심한 부류’를 지칭하는 비하어로 쓰인다.

지리적 요인이 아니라 계급, 연령, 성별, 종교, 인종 등과 같은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분화된 특정한 사회집단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어휘를 사회방언(social dialect)이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집단에서 흔히 사용되는 사회방언 중에 루저, 잉여, 삐조리, 왕따는 물론 ‘찐따+찌질이+버러지+거지’의 조합인 ‘찐찌버거’ 같은 합성어가 있다. 같은 대상과 개념이라도 표현하는 어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은 그 사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런 말이 넘쳐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흔한 속설 가운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어딜 가든 대충 중간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속설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정상성을 강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경쟁사회 논리와 맞물려 집단이 제시하는 정상성은 강력한 규범이 된다.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진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쉽게 루저, 잉여, 삐조리, 찐따, 찌질이가 되어 비정상으로 내몰린다. 학교나 집단에서 그런 부류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선 패거리를 만들어야 하고, 패거리의 인정이 필요하다. 찐따나 루저가 아니라는 걸 인증받기 위해선 집단 내부의 누군가, 주로 약자를 고발하고 배제시켜야 한다. 이런 방식의 폭력적인 왕따 사냥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흔히 ‘선빵’이라는 예방전쟁(preventive war) 구도로 포섭한다. ‘찐따’가 되기 싫어서라도 ‘일찐’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에 지배당하는 것을 교육현장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사실 그 출발은 가정에서 비롯된다. 친척끼리 모였을 때조차 내가 먼저 당하지 않으려면 ‘선빵’을 날려야 한다. 집안 식구 중 제일 처지는 사람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 잔소리의 과녁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조차 스스로 정상성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은 아닐까, 움츠러들고, 상처받는다. 명절에 친척끼리 모여 가장 즐기는 게임이 이른바 품평게임이다. 아이의 성적은 형제, 자매,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 치르는 대리전쟁이다. 말랐으면 말라서 걱정, 뚱뚱하면 뚱뚱해서 걱정이다. 수학을 잘하면 영어가 걱정이요, 영어를 잘하면 국어를 못해서 걱정이다. 대학 가기 전까지는 입시가 걱정이요, 대학 가면 취업이 걱정이고, 취업하면 결혼이 걱정이고, 결혼하면 출산이 걱정이고, 출산하면 집, 승진 걱정에, 다시 아이들 걱정으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의 무한체계가 반복된다. 가정에서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응축된 분노가 쌓여서 사회 전체가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조금만 싫은 소리를 들어도 폭발해버릴 것 같은 상태가 된다. 길에서 양보해주지 않는 차량을 발견했을 때, 순간 감정이 폭발하는 이유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란 경험을 어려서부터 반복적으로 체득한 결과인 셈이다.

집단이 제시하는 규범, 정상성의 추구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고민을 거세하고, 항상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형식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식의 외주화, 의식의 식민지화인 셈이다. 이번 명절에는 우리 모두 ‘친척’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 되어 만나면 좋겠다. 아이들의 성적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갖기를, 상대의 개성과 인격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와 그를 긍정하기를. 타인에게 정상이길 강요하기에 앞서 자신의 관용도가 충분히 정상적인지 먼저 되묻도록 하자. 가정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우리 모두 찐따와 루저를 벗어나기 위해.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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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연휴를 앞둔 목요일 저녁 대학로를 가기 위해 창덕궁 앞을 지나다가 신호에 걸려 대기 중이었다. 마침 눈에 정류장의 막 퇴근한 직장인들이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버스를 기다리는 그들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다음 주가 추석인지라 직장에서 나눠준 선물이 아닐까 여겨졌다. 길어진 옷차림과 조금은 어둡고 차분한 그들의 표정에서 느닷없이 명절 기분이 느껴졌다.

오늘날의 추석을 과거의 추석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지금처럼 흔적만 남아 있는 명절과도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최근까지는 추석이 되면 부모님, 형네 가족과 함께 설악산에 이박삼일 다녀오곤 했다. 속초가 어머니 고향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부모님과 형네 가족은 연휴 때 각각 여행을 떠나고 긴 연휴 동안 나는 집에서 놀 예정이다. 가족 모임은 지난주에 이미 가졌다. 사실 외부의 번다한 만남과 잡무로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연휴 때 집중해서 정리해버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연휴 첫날인 오늘 아침도 고요하고 적적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런 약속도 없고 연락 올 일도 없으며 고속도로에서 차 막힐 일도 없다. 명절 당일엔 산책 가듯 가까이 사는 처가에 다녀오면 된다. 이쪽도 한가하긴 마찬가지다. 딸만 넷인 우리 장인, 장모님은 약간의 음식을 해놓고 자식들이 오길 기다린다. 첫째네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에 파견근무를 나가 있다. 그래서 집엔 둘째부터 넷째까지 모이는데, 아이들이 있어 약간 시끌벅적하긴 하다. 그래도 잠시, 아주 잠시뿐이다. 곧 적적해진다. 돌아오는 길 보름달만 크게 휘영청 밝을 것이다.

아버지가 장손이라 어려서부터 집에 제사가 많았다. 시제까지 지내는 대단한 집안은 물론 아니었고, 증조부모의 제사와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도 연이어 돌아가시면서 제사를 모셨다. 어머니는 그걸 혼자 다 해내셨다. 내가 서른이 됐을 무렵, 엄마가 더는 못하겠다고 선언하셨다. 약간의 지지고 볶음이 있었지만 아버지도 순순히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우리 집의 제사는 없어졌다. 명절 때 지내는 차례도 당연히 없어졌다. 차례를 지내지 않으니 명절에 친척들 발길도 뜸해졌다.

처음엔 상실감이 있었다. 뭔가를 하다가 하지 않으니 허전했고, 사람들이 없으니 고립감도 들었다. 이 모든 게 음식 때문이라는 생각에 내가 음식을 해서 나르기도 했다. 우리 가족끼리라도 명절 기분을 내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곧 흐지부지되었다. 내가 어릴 때 명절은 고스톱 치는 날이었다. 음식 준비를 다 해놓고 어른들은 명절 전날부터 화투를 잡았다. 그리고 밤새워 쳤다. 목소리들도 커서 자다가 놀라 일어날 때가 많았다. “났다 먹고 고” “한 장씩 주시오” 암호와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럴 땐 눈을 비비며 기웃거리러 갔다. 새벽이 되면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 한 잔씩 두 잔씩 술이 들어간 고모들이 섭섭했던 옛일을 꺼내기 때문이다. 그 옛일이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들만 귀하게 키워 자기들은 고등학교, 대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고모가 돈을 딸 땐 조용히 넘어갈 때도 있었다. 담배연기 자욱했고 막걸리와 맥주 냄새도 떠다녔다. 다음날 아침 말끔한 얼굴들로 다시 모여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 내 어린 눈에 참 신기해 보였다. 추석이 되면 이런 기억이 나서 그리워지곤 한다. 이젠 친지들이 곁에 없다. 몇 분은 돌아가셨고, 남은 분들도 예순에 일흔이라 각자의 조촐한 가족 범위 내에서 명절을 보낼 것이다.

아무도 서로 연락하지 않고 방문하지 않는 명절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갑자기 모이기엔 이미 나 홀로 명절은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 그래서 나는 혼자라도 명절 기분을 내볼까 싶다.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장을 봐서 조촐하게 먹고 싶은 것만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사실 이건 대추나무 때문이다. 옛날 우리 집 대추나무가 매년 풍성하게 대추를 생산해 나에게 선물해주던 기억 때문에 지난해 꽤 큰 대추나무를 사다가 뜰에 심었다. 그해엔 몸살을 해서인지 대추가 열리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무사히 겨울을 넘기고 올봄에 거름을 두둑하게 해줬다. 내심 대추가 열리길 기대했는데 고작 네 알 열리는 데 그쳤다. 따서 먹어보니 달긴 달다. 아마 대추만이라도 풍성한 한가위는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싱싱한 대추를 사서 아작아작 씹으며 우아하게 장을 보고 싶다. 아니, 대추는 핑계일 뿐 사람이 많은 시장 구경을 가고 싶은 건 아닌지…. 아이고, 진짜 모르겠다. 장모님 갖다 줄 전이라도 부치면서 명절 기분을 좀 끌어올려 보자꾸나.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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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9월18일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에 대한 권고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9월20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성인 남녀 5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신뢰수준 95%, 표본오차 ±4.3%포인트)를 보면 찬성 68.7%, 반대 21.5%로, 공수처 설치를 지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지만 공수처 설치에 대해 검찰 일부가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정치권에 부정적인 의견이 있으며, 일부 언론에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왜 공수처가 설치되어야 하며, 일부에서 제기하는 문제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공수처는 검찰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기구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공수처와 같은 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예외적이고 생소하다. 그렇지만 그동안 검찰이 보여 온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한 수사 태도 및 그 처리 결과에 많은 문제점과 비판이 있었다. 이에 검찰개혁 방안 중 하나로 공수처 설치가 논의된 것이며, 현재에도 검찰을 신뢰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공수처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 일부에서 공수처를 가리켜 ‘옥상옥’ 조직이라거나 필요없는 조직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이야기라고 본다.

다음, 공수처의 규모가 ‘슈퍼’급으로 너무 크다는 지적이 있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 제시한 법률안을 보면, 공수처에는 공수처장 및 차장 이외에 공수처 검사 30∼50명, 수사관 50∼70명 정도를 둘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최대 총 122명으로 구성되는 ‘매머드’ 조직이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공수처는 고위공직자들의 직무와 관련된 범죄를 처음부터 수사하고, 혐의가 인정되면 공소를 제기하며, 제1심부터 대법원에 이르러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공소를 유지해야 한다. 고위공직자들의 범죄란 수사 자체가 쉽지 않고 공소 유지도 어렵고 힘든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건을 수사하고 공소를 유지하는 데 적어도 10명 가까운 검사들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공수처 검사를 모두 50명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 인원으로 구성할 수 있는 팀은 3∼4개밖에 되지 않는다. 한 팀이 수사한 사건의 판결이 기소를 거쳐 확정될 때까지 1년 이상 걸리는 상황이어서, 3∼4개 팀의 공수처는 연간 10건 정도의 고위공직자 범죄를 수사하여 처벌하는 데 그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수처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비판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공수처는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에 다른 수사기관보다 우선권이 있으므로, 특별수사의 대부분이 검찰에서 공수처로 넘어가게 된다는 비판이 있다. 공수처를 설치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공수처를 설치하는 마당에, 다른 수사기관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리고 그 우선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검찰에서 상당부분 수사가 진행되어 있다면 공수처는 그 사건을 검찰에서 계속 수사하도록 배려해 줄 것이다. 공수처는 그 조직 규모상 고위공직자 범죄를 모조리 수사할 수 없는 내재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상황과 사안에 따라 공수처장이 ‘운용의 묘’를 살려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한 수사를 다른 수사기관에 적절히 배분하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는 ‘갈등’이 아니라 ‘긴장 속의 건강한 경쟁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나아가, 검찰이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한 수사를 게을리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이는 오히려 권장할 사항이라고 본다. 사실 검찰권이 남용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검찰이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해 인지수사를 너무 많이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표적수사, 타건 압박수사, 심야조사 등을 통해 회유와 압박 등 적법하지 않은 수사를 많이 했다. 공수처로 인해 검찰이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한 인지수사를 줄인다면, 그 남게 되는 수사력을 형사부에 집중시켜 정말 억울한 고소인이나 피의자를 구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수처의 정치적 편향이나 권한남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공수처장은 국회 주도로 후보 2명을 추천하면 그중 1명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된다. 후보 추천과정에서 국회가 주도하는 이상 대통령의 지명권은 독선적일 수가 없고, 인사청문을 하는 이상 흠결있는 사람이 처장이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처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대통령이나 법무부 장관에게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해 임무를 수행하며, 국회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진다. 퇴직 후에도 일정 기간 특정 공직에 임용될 수 없다. 따라서 공수처장은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에게 예속된 검찰총장보다 더 독립적이고 중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고, 규모가 제한적이고 조사 대상 범죄가 한정되어 있으며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이상, 권한을 남용할 여지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것이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열과 성을 다하여 공수처 법안을 성안해 권고했다. 많은 국민들도 공수처 설치를 열망하고 있다. 따라서 검찰을 개혁하고 진정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이번엔 반드시 공수처를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수빈 | 변호사,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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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9월25일부터 27일까지 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주최로 ‘지속가능도시주간’ 포럼이 열렸다. 포럼 마지막 날 오전에 마을공동체, 도시재생, 사회적경제 등 주제별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이 중 마을공동체에 대한 주제는 ‘마을르네상스의 융복합 발전과제’였다. 이제는 마을의 부활을 넘어 여러 분야의 ‘융복합’을 이루는 게 마을공동체의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융복합이 이슈가 되는 맥락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관료제로 인해 수많은 부처와 부서로 나뉜 정부나 지자체의 구조와 달리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통합적이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러 분야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른바 ‘칸막이 행정’의 극복이 공동체 활성화의 관건인 셈이다.

둘째, 정부의 주요정책인 도시재생의 등장도 현장에서 융복합을 고민하게 하는 요인이다. 도시재생의 기본방침을 살펴보면 ‘주민역량 강화 및 공동체 활성화’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도시의 전반적인 쇠퇴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들이 직접 도시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이다.

그런데 도시재생은 주무 부처의 특성상 단기간의 개발성과 위주로 흐를 우려가 있다. 성과를 우선하는 정책은 경쟁을 부추기기에 연대와 협동을 기본철학으로 하는 공동체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과 예산에 의존해야 하는 지자체는 큰 예산이 편성되는 도시재생정책에 맞추어 정책과 조직을 조정하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지원센터’를 ‘도시재생센터’에 집어넣는 식의 개편이 이뤄진다. 정부 주도의 경쟁적인 도시재생은 공동체를 깨뜨릴 수 있으니 이런 위협을 막아내면서 공동체 활성화를 이루기 위해 현장의 활동가들은 도시재생과 공동체의 융합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 현장에 이런 고민을 안기는 ‘칸막이 행정’이나 ‘하향식 정책’은 지방자치가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으니 중앙의 칸막이마저 지역공동체까지 이어진다.

전쟁과 독재 아래에서도 꾸준히 유지되며 발전되던 지방자치는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1991년까지 중지되었다. 민주화 이후 지방자치가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1960년대에 비해서도 오히려 퇴보한 수준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1960년 기초의원은 1만6909명이었다. 총인구를 고려하면 기초의원 1명이 1500명 정도를 대표했던 셈이다. 그런데 현재 기초의원은 2898명이다. 기초의원 1인당 1만8000명 정도를 대표하는 셈이다. 공동체의 대표를 뽑는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풀뿌리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체 활성화가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발표한 ‘2016년도 공공기관 청렴도 측정 결과’를 살펴보면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등 중간지원조직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곳에서 종합청렴도가 높게 나타난다. 공동체 활성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지자체의 청렴도가 높은 것이다. 좀 더 연구해 봐야겠으나 활성화된 공동체는 적극적인 주민참여를 바탕으로 지방행정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올바르게 이끄는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어떤 광역지자체에서 공동체 관련 중간지원조직에 대해서 고강도의 감사를 진행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또 다른 광역지자체에서는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조직진단이 한창이라고 한다. 그 지자체의 거버넌스 담당 공무원은 중간지원조직의 활동가를 모아두고는 “당신들은 우리 업무를 대행하는 것에 불과하니 지시에 따르라”는 훈시를 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풀뿌리민주주의 활성화에 대한 공공의 반발이나 견제가 아니기를 바란다.

<강세진 | 박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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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장이 나빠 소화가 안되는 날은

배를 문지르며 고향으로 갑니다.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산골길

길 끝에 변소 하나

버섯처럼 기울어져 서 있고

그 안에 앉아 있는 어릴 적 나를 봅니다.

힘들어 찡그리며 쳐다보는 내 눈에

썩은 서까래 터진 지붕 틈새로

언뜻 나를 쏘아보던 밤하늘 별빛

독 안에서도 하얗게 내리깔리던 별빛.

겁에 질린 나는 얼른 뛰쳐나오고

밤이면 다시 그 근처를 얼씬 못하였습니다만

그 일로 내 마음 지붕도 그렇게 터져서

다른 곳은 다 고쳐도

그곳만은 꿰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라고

자라서도 또 망가진 변소 하나

몸속에 몰래 지어놓고 살았던가.

쭈그려 생각에 잠기거나

번뇌에 쫓기어 깊이 헤매는 밤이면

터진 몸의 지붕 틈새로

번뜩이며 나를 쏘아보던 별빛

고향 마을 뒷산 솔바람 소리

우주 저쪽의 몸짓까지 함께 묻어와

쏴쏴 나를 쓸며 다니는 소리.

 - 이성선(1941~200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눈비를 막지는 못해도 쏟아져 내리는 별빛은 마음껏 들어오는 허름한 지붕이 시인의 마음에 살고 있네요. 기억 속으로 우주를 끌고 들어온 별빛이 소화가 안되어 불편한 내장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네요. 어두운 마음으로 별빛이 터져 들어와, “다른 곳은 다 고쳐도/ 그곳만은 꿰맬 수” 없으니,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이 고향이고 유년이겠네요.

고개만 들면 물방울처럼 떨어질 것 같은 별이 보이는데, 눈비를 막느라 별빛까지 막아버린 지붕 아래에서 문을 꼭꼭 닫고 사느라 별을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추석날 밤에는 탁 트인 벌판에 나가 일 년 중에서 가장 둥글고 환한 달빛과 사과처럼 탐스럽게 익은 별빛을 눈동자에 실컷 묻혀보고 싶습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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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어제는 제69주년 국군의날이었다. 그러나 현행 ‘10월1일 국군의날’은 국군의 역사적 뿌리와는 무관한 날이므로 광복군 창설기념일(9월17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제기돼 왔다. 수십년 관행으로 굳어진 기념일을 변경하면 혼란이 따르겠지만 군맥(軍脈)을 잇고 군의 정통성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

국군의날을 10월1일로 정한 것은 이승만 정부 때인 1956년이다. 육군 1월15일(조선국방경비대 창설일), 해군 11월11일(해병병단 결단식일), 공군 10월1일(공군 창설일) 등으로 육·해·공군이 각자 기념 행사를 치르느라 물적·시간적 낭비가 심하자 이를 통합하자는 취지였다. 10월1일은 공군 창설일이자 한국전쟁 중인 1950년 남침한 북한군에 반격을 가한 끝에 육군 보병이 38도선을 돌파한 날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삼일절인 3월1일이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고 독립선언문 낭독이 있었던 날이고, 광복절인 8월15일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인 것처럼 국군의날은 국군이 창설된 날로 정하는 게 원칙이다.

국군의 모체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다. 헌법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명문화하고 있다. 광복군은 1940년 9월17일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창설됐다.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은 ‘한국광복군 성립보고서’에서 “1907년 8월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국군의 항일 투쟁과 이들이 중심이 된 독립군이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였으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 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하여 광복군 창설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광복군은 영문표기를 ‘Independence Army’(독립군)로 하다가 1942년부터 ‘National Army’(국군)로 바꾸기도 했다. 광복군은 1946년 6월 미 군정에 의해 해체됐지만 일부는 국방경비대로 흡수됐다. 국군의 뿌리가 대한제국 국군의 항일투쟁과 독립무장투쟁을 계승한 광복군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경찰의날도 같은 맥락에서 변경을 고려할 수 있다. 현행 경찰의날은 미 군정이 경무국을 창설한 10월21일이다. 그러나 한국 경찰의 뿌리는 1919년 11월5일 임시정부가 설치한 경무국이다. 국군의날과 경찰의날 변경은 대통령령 개정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기념일 변경은 혼란과 부작용이 불가피하므로 여론을 충분히 수렴한 뒤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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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작성 시점을 놓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논쟁이 붙으면서다. 이번 소동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에 빗대어 ‘워터마크 게이트’로까지 부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이 편지가 등장한 것은 지난달 29일이었다. 문 대통령이 전사자·순직자 유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행사를 한 뒤 청와대 공식 트위터 계정에 한 통의 편지가 올라온 것이 발단이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시절이던 지난해 9월 제2연평해전에서 순직한 고(故) 윤영하 소령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라고 소개했다. “윤영하 소령의 어머니께서는 품속에서 ‘2016년 9월30일 문재인 올림’이라고 쓰여 있는 1년 전 편지를 꺼내셨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편지 사진 끝부분 오른쪽 하단에 ‘청와대 마크’가 찍혀 있는 것을 놓고 일부 누리꾼들이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문 대통령님은 올해 5월에 당선되셨는데 2016년에 청와대가 적혀 있는 편지지를 어떻게 얻었습니까?” “1년 전에 이미 청와대 종이를 가져다 쓴 것인가?” “당선될 것을 알고 미리 만들어서 쓴 것인가” 등등 의문과 비판이 섞여 쏟아져 나왔다.

일부에선 청와대 공식 행사를 기획하는 탁현민 선임행정관에게 화살을 돌리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아 풀렸다. 청와대가 공식 트위터 계정에 사진을 올릴 때마다 ‘워터마크’(인터넷에서 사진 저작권을 나타낼 때 쓰는 문구·표식)를 자동으로 새겨서 올리는 체계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밝혀진 것이다. 언론 매체들이 보도한 같은 사진에는 청와대 워터마크가 없거나, 해당 언론 매체의 워터마크가 찍혀 나온 사진이 돌자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정됐다.

그러자 ‘비판론’에 대한 역공이 쇄도했다. 김모씨는 페이스북에 “정당한 의혹 제기는 좋지만 흠집 내기 식은 자제해야 한다”고 썼다. 이모씨도 “‘워터마크 게이트’ 같은 음모론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는 것 아니냐”고 밝혔다.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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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윤철호)와 한국출판인회의(회장 강맑실)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예산 낭비적인 사업을 일방적으로 진행한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이기성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퇴진을 재차 압박했다. 두 단체는 지난 7월에도 “이기성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즉각 퇴진하고,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진흥원을 정상화하라”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이기성 원장은 지난 정권에서 임명된 인사다. “출판을 진흥이 아닌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하던 박근혜 정부 시절 ‘출판 통제’의 일환으로 임명된 인사”, 즉 구인물이란 게 퇴진을 주장하는 단체들의 얘기다. 한편,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으로 문제가 됐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의 사표는 도종환 문체부 장관 취임 직후 수리된 바 있다.

두 단체는 첫 번째 공동성명서에서 이 원장이 “출판진흥기금 조성, 공공도서관 도서구입비 증액, 저작권법 개정과 판면권 문제, 도서구입비 세제 혜택, 송인서적 문제 등 시급한 출판 현안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도 활동도 의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각종 예산 낭비, 원장과 특수관계에 있는 사업에 대한 편파적 지원 등으로 하는 일마다 구설에 오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 예산 집행권을 바탕으로 민간 출판단체들이 벌여온 출판 교육사업을 무력화하는 등 진흥원이 출판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단체의 공동성명서에 나오는 내용을 시시콜콜 다 알 수야 없지만, 진흥원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인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이하 ‘제작지원’)에 대해선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만큼 할 말이 있다는 얘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이 오리무중인 데다 진흥원의 각 분야 저자 및 출판사에 대한 제작지원 사업이 그야말로 로또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지난 6월 말 진흥원이 발표한 2017년 제작지원 선정작은 63편이다. 응모작은 선정작의 40배쯤인 2508편으로 알려졌다. 이를테면 응모작의 고작 2.5%쯤만 선정하는 제작지원인 셈이다. 말이 좋아 지원이지 그쯤 되면 신춘문예나 문학상에서 당선작으로 뽑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가히 로또 수준의 제작지원이라 할 만하다.

제작지원 사업 목적은 ‘우수출판콘텐츠 발굴’과 ‘출판 내수 진작’이다. 일단 2508편 응모작 중 고작 63편을 선정한 것은 ‘우수출판콘텐츠 발굴’은 될지 몰라도 ‘출판 내수 진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고작 63편 발간이 얼어붙은 출판시장에 아연 활기를 띠게 하리라 생각하는 출판인이나 저술가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작지원은 인문교양·사회과학·과학·문학·아동 등 5개 분야의 ‘기간 내 도서로 발간 가능한 원고 또는 기획안’을 응모받아 선정작에 각 1000만원(출판사 700만원, 저자 300만원)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작 63편 선정은 예산이 6억3000만원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출판된 책을 일정량 구입·지원하는 ‘세종도서’ 사업이 있다곤 하지만, 어느 한 분야만이 아니고 인문교양·사회과학·과학·문학·아동 등 출판 전반에 대한 정부 주도의 활성화 사업이 그 정도라면 대기업 메세나보다 못하지 않나?

더 의아한 것은 올해의 확 줄어든 예산이다.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이란 이름으로 사업을 실시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 동안 해마다 예산은 14억원으로 140편씩 선정됐다. 블랙리스트 여파로 예산이 반토막 이하가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제작지원이 로또 수준으로 전락한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선정에서 탈락한 2445편의 저자들이 가질 자괴감 내지 상실감이다. 탈락을 계기로 더 분발할 저자도 있겠지만, 많은 지원자들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하는 자괴감 내지 상실감으로 술깨나 마신다면 그것이 정부가 할 일은 아니다. 그야말로 로또 수준으로 전락한 제작지원의 예산 확대와 지원 방식이나 규모 등 전반적 개선책이 시급하다.

<장세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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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나오는 기사를 ‘달력기사’라 한다. 기념일 관련 달력기사도 많지만 그중 명절 달력기사의 역사가 가장 유구하다. ‘추석 물가 비상’ 같은 보도 말이다. 추석이란 말을 빼고 거기에 ‘설날’을 집어넣어도 무방하다. 지역의 언론사들은 하나같이 군수나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명절 물가관리대책반을 꾸린다는 천편일률의 기사를 보도한다. 여기에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급 정도의 중량감 있는 관료가 나서서 명절 물가 안정과 치안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한다. 때로는 시장을 한 바퀴씩 돌면서 사과나 배를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대통령의 부인이 전통시장에 출현해서 장을 보기도 한다. 이전 정부의 독신 여성 대통령은 명절마다 친히 직접 시장에 나가서 장을 보기도 했지만 비서들 손에 넘겨진 까만 비닐봉지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좀 지겨운 반복이어도 명절에 막상 빠지면 허전한 성룡 영화 같은 익숙한 풍경이다.

올 추석엔 배추가 문제다. ‘금치’란 말은 식상한지, 배추 한 포기를 사려면 ‘배춧잎 한 장(1만원짜리 한 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추석을 앞두고 김치를 담그려 하는데 너무 올라 걱정이라는 주부의 인터뷰는 필수다. 포장김치 회사들은 배추값 때문에 원가 상승의 부담이 커서 팔수록 손해라며 하소연한다. 그런데 왜 배추값이 폭락할 때는 포장김치 회사를 취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때는 아마도 고추값이 폭등했을 터이다. 오래도록 명절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은 농산물이었다. 그 원인으로는 봄부터 이어진 가뭄과 폭염, 그리고 이어진 늦장마나 병충해가 거론된다 혹은 곤파스, 불라벤 같은 태풍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닥쳐와 작물에 ‘직격탄’을 때려서다. 올해처럼 태풍이 없을 때는 우박이라도 한 번 휩쓸고 지나가 농산물은 반드시 명절 물가 상승의 주범이 되어야만 한다. 

유독 올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추석 물가’ ‘명절 물가’라는 검색어로 신문을 찾아보니 1965년부터 2017년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비상사태다. 군부독재시대 땐 물량을 잡고 있다가 추석 때 비싸게 푼 유통업자를 구속시키는 패기를 종종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경제연구원에서 9월에 발표한 올해 ‘주요 농축산 품목별 추석 출하 및 가격 전망’을 보면 과일과 채소 출하량 증가로 가격이 작년 및 평년보다 낮을 것으로 예측됐다. 축산물 공급은 작년보다 감소했지만 이는 소비 부진에 따른 것일 뿐이다. 살충제 계란 여파로 계란값은 여전히 바닥세다. 설날에는 너무 올라버린 계란값 때문에 계란 없이 전 부치는 비법을 전하기도 했건만. 지금 배추·무 가격은 평년보다는 높아도 작년 이맘때보다는 낮다. 산지에서 물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날씨도 그럭저럭 받쳐주어서다. 게다가 올해 재배량 확대로 김장철 배추값 폭락에 대한 우려가 나올 정도다.

소비자물가 품목에는 농수축산물과 식음료, 그리고 공공요금과 각종 서비스요금이 들어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만만한 게 농산물이다.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낮다며 동네 바보친구 취급하다가 왜 명절 때만 되면 17 대 1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일진이 되어 있을까. 아무리 올라 봐라. 배추값이 무섭나? 애들 학원비가 무섭지. 돼지고기값이 무섭나? 2년 만에 오른 전셋값 4000만원이 나는 제일 무섭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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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제프 벡은 1985년 신작 앨범을 발표한다. 무려 4년 만에 등장한 음악적 결과물이었다. 기자가 물었다. 왜 그리 오랫동안 음반제작을 하지 않았느냐고. 제프 벡은 태연스럽게 답변한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무명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길거리와 연주장에서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자신보다 기타를 잘 치는 음악가가 수십 명에 달했기에 절치부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2001년 세상을 떠난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 그는 뛰어난 창작능력에도 불구하고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이라는 쌍두마차가 버티는 그룹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한다. 이후 솔로 음반을 통해서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역량을 마음껏 펼친다. 그는 음악가인 동시에 종교인이자 평화주의자로 거듭난다. 1971년 조지 해리슨은 뉴욕에서 기아에 허덕이던 방글라데시인을 위한 자선공연을 펼친다.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모진 학대를 당한다. 그는 피아노 꿈나무 양성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고통의 객관화에 성공한 것이다. 90살의 나이에도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피아니스트의 일갈이 인상적이다.

소개한 음악인은 모두 자기검증이라는 불편한 진실게임과 마주했던 인물이다. 유명인사에게는 명예라는 족쇄가 파파라치처럼 따라다닌다. 그들에게 명예란 대중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는 날까지 감당해야만 하는 통과의례이다.

한편 영화 <대부2>에서는 청부살인 혐의에 시달리는 마피아 두목 마이클 콜레오네가 등장한다. 그는 청문회장에서 자신은 살인과 무관한 사회사업가라고 말한다. 이후 자신의 변호사와 합작하여 군부대에서 보호 중인 살인사건의 증인을 자살에 이르게 만든다. 게다가 자신을 해치려 했던 친형을 부하를 시켜 암살한다. <대부3>에서 마이클 콜레오네는 이러한 범법행위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였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마이클 콜레오네 역시 자기검증을 실천했던 인물일까. 그렇다는 의견에 한 표를 던진다. 그는 <대부1>에서 마피아 두목의 자리를 물려받는 존재로 등장한다. 1세대 마피아 두목이던 돈 콜레오네는 막내아들이 폭력의 세계로 빠져드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결국 마이클 콜레오네는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마피아의 세계에 입성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배타적 자기합리화를 반복한다.

여기서 두 가지 형태의 자기검증을 엿볼 수 있다. 소개한 음악가의 자기검증은 유명인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는 가치재로 쓰여진다. 제프 벡의 자기검증은 음악적 진보라는 방향타로 작용한다. 시모어 번스타인과 조지 해리슨의 그것은 사회와 인류에 기여하는 동력으로 화한다. 이들의 자기검증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방향타를 제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반대로 마이클 콜레오네의 자기검증은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는 자신의 형제와 동료를 살해하면서까지 마피아 보스라는 상징물에 집착한다. 대부는 이 세상에 못 죽일 인간이란 없다고 자조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형태의 죽음은 현실에서도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권력투쟁의 역사에서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이들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정신적 육체적 살인을 자행하는 권력자의 자기검증이란 억지 합리화의 수단에 불과하다. 총칼을 앞세워 언로를 틀어막았던 20세기의 흑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시대의 통치방식은 조금 다르다. 총칼을 뒤로 숨긴 채, 진실을 말하려는 자의 밥줄을 끊어버리는 경제적 살인을 자행한다. 내용만 다를 뿐 올바른 형태의 자기검증을 무시한 악의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비뚤어진 자기검증 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다수결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소수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을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정상적인 자기검증의 과정에서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과 직면해야만 한다. 시모어 번스타인과 마이클 콜레오네. 그들의 노년기는 욕망을 해석하는 시각에서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자기검증의 현상학은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진행형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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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지난 7월4일 국토교통부 내 ‘도시재생사업기획단’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출범식에서 소위 ‘따뜻한 도시재생’을 강조했다. ‘따뜻한 재생’이란 아마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재난을 막겠다는 뜻이지 않을까 싶다. 도시재생 사업을 하다보면, 주변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고 자연스럽게 임대료도 상승해 임차인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낡은 도시를 재생하면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기본적으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관계는 상호 모순적이다. 도시재생은 어떤 점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억제하려는 공공 도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도시재생은 불가피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갈 수 없다. 도시재생은 도시의 경관과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거대 개발 정책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재생으로 인한 부동산 가치의 상승과 지역개발 논리를 완전히 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도 공간의 고급화로 부동산 가치를 극대화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도시재생의 공공적 원리에서 벗어나려는 본성을 가진다. 그것은 부동산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문화적 전환을 통해 시각적, 미적인 효과를 전유하고자 애를 쓴다. 처음에는 예술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하다가 나중에 그 장소가 유명해지면 예술인들을 배척하고 쫓아내려는 이중적 태도를 가진다. 홍대 앞, 경리단길, 성수동 수제화거리, 통영 동피랑 마을 등. 이것이 소위 문화 명소가 가지는 맹점이다. 도시재생으로 새롭게 생성된 문화적 공간이나 공공장소에서의 시각적 조형물들은 역설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심화시키는 미적인 토대를 제공해준다.

그런 점에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이 교차되는 지점에 문화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문화의 자원은 도시재생의 공간 활성화에 있어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부동산 가치 상승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의 개발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으려는 예술인들의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저항이 그러했고, 공덕동 경의선 공유지 늘장의 저항이 그러하다. 문화적 자원과 예술의 미적 감수성은 오히려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거나 그 확산을 억제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도시를 미적으로 아름답게 만들면서도, 그 문화적 가치가 부동산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길 말이다. 문화적 역량을 가진 주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문화는 도시재생의 대안적 장으로 전환될 수 있다. 문화와 예술은 반드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촉매제 혹은 희생양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문화적 전환은 ‘공간의 고급화’를 위한 자본의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동산 자본의 확장을 막을 수 있는 저항의 가능성도 내장하고 있다. 기획부동산 자본과 상업 시설들이 도시를 지나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예술가들이 도시공간 속에서 버틸 수만 있다면, 문화와 예술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시키는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예술인들이 연대하여 문화적 게토와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문화적 자원을 도시재생 활성화의 수단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문화적 투자는 도시재생으로 인한 투기 과열의 사회적 비용을 사전에 상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선 예술인들의 저항이 번번이 좌절하는 것은 ‘따뜻한 도시재생’을 위한 강력한 부동산 억제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개발이익의 상당부분을 환수한다거나, 임대료 상승의 상한선을 둔다거나, 임차인에게 장기적으로 살 권리를 부여한다거나, 문화예술의 자원들을 일종의 공유지 형태 안으로 수용한다거나 하는 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억제 정책이 수반된다면, 문화는 ‘따뜻한 도시재생’의 대안이 될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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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종편 방송의 <사서 고생>이라는 프로그램이 벨기에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방영한 것이 얘깃거리가 되었다. 동양인 비하 발언과 태도가 폭력적 충돌로 이어지기 직전에 제작진이 개입해서 당황스러운 상황은 마무리되었지만, 시청자들의 분노가 인터넷 매체들에 쏟아져 나왔다. 일부 시청자는 모욕적인 장면을 그대로 내보낸 제작진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 장면은 잊기 쉽고 잊고 싶은 사실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차별은 견딜 수 없이 쓰라리다는 것. 그리고 자리가 바뀌고 관계가 바뀌면 누구나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차별은 우리가 국외에서 경험하는 낯선 불의일 뿐 아니라, 우리가 타자에게, 서로에게 저지르는 낯익은 폭력이기도 하다. 너무 익숙해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국회 대정부질문 등에서 일부 야권 의원들이 최저임금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차등 적용하는 법안의 필요성을 논의했다는 보도는 듣는 이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그런 법 개정을 제안하는 정치인들은 타국에서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등적 임금을 받아야 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외국인 최저임금 차등지급이 법제화된다면, 성별이나 출신 지역에 따라 임금을 차등지급하자는 논리도 반박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법은 힘, 자산, 신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보호장치이다.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고용 및 직업차별에 관한 국제협약 등이 국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된다고 명시하는 이유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은 필요하지만 법이 차별을 제도화해선 안되는 것이다.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나온 “왜 소수자 보호만 강조하느냐”는 질문 또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이 질문은 “강자로 규정되는 사람에 대한 법의 불평등, 역차별”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하지만 강자의 수호를 대법원장에게 요구하는 것은 합당한가. 그리고 실질적, 상징적 권력을 가진 강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것은 정의상 가능하지 않다. 장애인 인권의 보호가 비장애인에 대한 역차별일 수 없으며, 흑인, 동양인에 대한 차별금지가 백인에 대한 역차별일 수 없고, 성소수자의 인권 신장이 이성애자에 대한 역차별일 수 없는 것이다. 역차별을 부르짖는 반론은 이미 누리고 있는 다수 강자의 독점적 편의와 특권을 소수자, 약자와 나누어 갖지 않으려는 저항이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 차별, 무시가 초래하는 고통에 취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보편적 취약성은 모든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서로 연결해 준다.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보편적 취약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다. 타인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는 순간 나에게 가해지는 차별에 맞설 방도는 사라진다. 불균등한 권력관계의 제도적 모순에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나의 불안정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내리는 행위, 특권을 나눠 갖는 ‘피해’를 피하기 위해 약자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침해된 인권에 무관심하기를 선택하는 행위는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다.

<사서 고생>에서 부당한 상황이 더 심화되었더라면, 영어를 할 줄 알고 체격도 좋은 박준형씨가 그저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러나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면서 말할 수도, 싸울 수도 없는 처지라면 어떨까. 그런 처지가 수년씩, 수십년씩 계속된다면? 강요된 수치심, 불안감, 분노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치고 병이 될 것이 당연하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때 훨씬 더 깊어진다. 차별, 소외, 고립, 착취, 불안 속에서 여성, 빈곤층, 장애인, 이주 노동자, 하청 노동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가 제도와 구조로 인해 받게 되는 아픔은 그 사회의 건강 혹은 불건강의 척도다.

김승섭 교수의 최근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말하지 못하고 싸우기 어려운 약자들의 질병과 고통에 대한 치밀하고 섬세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아픈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학교에서 받는 따돌림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다문화가정의 청소년,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여성들, 몸이 아플 때도 성과에 대한 평가 때문에 일하는 노동자들, 유해한 산업시설을 떠맡게 된 가난한 마을의 주민들은 가장 아픈 사람들이다. 국가의 방관 속에서 재난에 희생된 이들과 유가족, 가까스로 살아남았어도 특혜 의혹에 움츠려야 하는 생존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건강은 인권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들의 불건강은 약자를 볼모로 이윤추구, 기득권 독점을 위해 경쟁하는 우리 사회의 병적 구조의 반영이다. 아픔에 취약한 우리는 모두 이 사회가 강제하는 불건강과 불평등한 아픔에 대해 연대적 책임을 진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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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탱크전을 다룬 미국 영화 <퓨리>에서는 날아온 포탄이 탱크에서 튕겨나가는 장면이 몇차례 나온다. 탱크가 파괴된 줄 알고 환호했다가 반격당하며 당혹해하는 배우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인상 깊었다. 탱크에 특수 장비가 부착된 것은 아니다. 포탄이 다른 물체에 부딪쳐 튕겨나가는 도비탄(跳飛彈) 현상일 뿐이다. 성벽 외부를 사선으로 쌓는 축성기법과 2차 세계대전 시기의 경사장갑 탱크 등장은 이 현상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도탄 사격’ 전략도 있다. 전쟁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선 미군 병사가 사각에서 날아온 도탄 사격에 부상당한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국군의 날을 앞둔 28일 오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비탄 현상은 탄환이나 포탄이 바위나 대나무 등 주로 딱딱한 물체에 부딪쳤을 경우 발생한다. 이를 막기 위해 흔히 군부대 사격장 주변은 총탄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입자가 고운 마사토로 조성한다. 도비탄 현상은 물에서도 발생한다. 물수제비를 연상하면 된다. 특히 바닷물은 상당히 밀도가 높아 반탄력이 상당하다. 군부대가 많은 전방지역에서는 도비탄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경기 포천에서는 미군 사격훈련에 의한 도비탄으로 추정되는 총탄 2발이 민가 주변 목장에 떨어져 주민 대피소동이 벌어졌다. 군 복무 시절 기관총 예광탄 사격을 해본 사람들은 이 현상을 경험했을 것이다.

지난 26일 강원도 철원 육군 부대에서 진지공사 후 부대로 복귀하던 병사 한 명이 머리에 총탄을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병사는 사격훈련이 진행 중인 인근 군부대 사격장을 지나던 중 사고를 당했다. 병사의 몸에서는 사격장에서 사용된 K-2소총탄과 같은 탄환이 발견됐다. 군은 도비탄으로 추정했으나 유족은 의문을 제기한다. 시신에서 발견된 탄환이 찌그러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이므로 도비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북한 소행 주장도 나온다.

의문은 조사를 해야 풀리겠지만 군의 안전시스템이 고장난 것만은 분명하다. 사고 당일 사격장 인근에는 경계병들이 있었지만 숨진 병사 일행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인솔 장교도 별일 없을 것으로 보고 이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안타까운 사고 원인은 도비탄이 아니라 군의 안전불감증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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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한가위 연휴가 시작된다. 길게는 10일 동안이나 이어진다.

설날과 더불어 최대의 민속 명절을 맞는 한반도는 어느 때보다 군사적 긴장이 팽팽하다. 모두가 안타까워하고 염려한다.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북한은 핵·미사일 도발을 강행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거친 ‘말폭탄’을 주고받는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것 같다”(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는 국제사회의 비아냥도 잇따른다. 서로의 정치적 셈법이 시민들의 불안감, 공포를 자극한다는 날선 비판도 쏟아진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이 있다고, 극한 상황 속에서 대화 자리는 만들어진다고 위안한다. 하지만 우발적 충돌, 황당한 전략적 오판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은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공감대도 단단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된다는 다짐 속에 고향길에 나선다. 예년처럼 민족적인 대이동이다. 한국교통연구원은 명절 연휴 동안 전국 예상 이동인원이 37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한다. 국내외 여행길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고향으로 향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못한 부모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안부를 물으며 덕담을 나눈다. 먼저 살아간 조상들에게 다 같이 정성 들여 장만한 음식들로 제례를 올린다. 묘소를 찾는다. 밤이 되면 어릴 적 친구들이 하나둘 느티나무 아래 모여든다. 술잔을 나누며 북한과 미국의 대치, ‘코리아 패싱’도 걱정할 것이다. 적폐 청산과 경제를 둘러싼 의견이 오가고, 청년들의 일자리에 노후 염려까지 이어진다. 서로의 팍팍한 삶을 위로한다. 전형적 한가위 풍경이리라.

한가위는 그 유래를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시대의 ‘가배’에서 찾으니, 1500여년의 세월 동안 이어졌다. 시대나 삶의 양식에 따라 형식과 내용은 달라졌다. 하지만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며 자연과 신과 조상들께 감사드리고, 서로의 살아감을 보살피는 본질은 여전하다. 우리만이 아니다. 저 먼 고대부터,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디에서든 한가위 취지와 비슷한 의례의식이 전해진다. 중국의 중추절, 일본의 오봉절을 비롯해 미국 등의 추수감사절 같은 게 대표적이다.

시공을 넘어 인류 보편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화 속의 한 장면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쑥 솟은 극적인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빠와 엄마, 그 엄마와 아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렇게 대와 대를 잇는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어서다.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의 무덤 위에 자라난 잡초를 뽑아내며 문득 나의 존재를 알아채는 게 한가위다. 고향에서 보내는 시간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이다. 폴 고갱처럼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곤 자신이 길고 질긴 뿌리와 이어졌음을 깨닫는다. 그 뿌리를 인식한다면 삶을 허투루 살아가기 힘들다. 내 혼자가 아니라 자식이며 형제자매이고, 부모라는 사실, 나아가 만물이 얽히고설킨 인드라망임을 알면 몸과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나의 뿌리가 있다는 것, 뿌리에 대한 인식은 든든한 ‘빽’이다. 삶이 나를 속일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게 아니라 질경이처럼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귀성길은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는 깨달음의 길이다.

최근 민속 명절의 쇠퇴, 전통의 붕괴를 비판하는 견해도 많다. 명절 연휴에 고향대신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전통적 의례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워할 수 있지만 시대와 생활양식이 바뀌면 전통도 변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변하는 게 당연하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정밀하게 고찰했듯, 우리가 전통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시대에 따라 만들어지고 발명되기 때문이다. 실제 남녀의 이혼이나 재혼·재산상속에 있어 고려시대만 해도 평등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차별은 조선 중후기 들어 본격화되지 않았는가.

전통적 격식을 따져 의례의식을 치르는 것, 의례의식보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정을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 모두 의미가 있다. 저마다 자신의 뿌리를 새삼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한가위라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은 풍성한 연휴를 보내기를 기대한다.

<도재기 국제·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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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P씨는 흥겨운 보사노바 재즈 공연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곡이 끝나자 피아니스트가 객석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 감사합니다. 이제 일어나실 시간이군요.

그와 동시에 P씨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밴드를 벗어 들고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밴드를 사용한 지 이제 사흘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상쾌한 기상 시간을 맞은 것도 사흘째이다.

밴드 한쪽에는 두께가 2㎜ 정도 되는 작고 납작한 패널이 붙어 있다. 이번에 새로 출시된 알람용 머리밴드 역시 이 에너지팩을 전원으로 쓴다. P씨는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어린애처럼 그 팩을 계속 쓰다듬으며 손에서 놓을 줄을 몰랐다. 이 작은 팩은 지금 전 세계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20세기부터 꾸준히 연구 개발되던 대체에너지, 즉 태양전지, 풍력, 지열, 조력 등은 일부 장점에도 불구하고 비싼 원가, 산업후진국에서는 쉽사리 엄두를 내기 힘든 초기 투자비용, 낮은 에너지효율과 같은 여러 문제가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걸림돌들을 한 달음에 넘어서며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생체전력’이었다.

생체전력이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동식물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전기력을 뜻한다. 그러나 생체전력이 낼 수 있는 에너지는 매우 불안정하고 양도 적었기 때문에, 20세기만 해도 과일에 전극을 꽂아 그 에너지로 전자시계를 가게 하는 정도의 아이들 장난감 같은 물건만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전자공학과 나노기술의 발달은 모든 전자제품들의 소요전력을 점점 감소시켰다. 그에 더해서 배터리 기술도 발전을 거듭하여 휴대전화는 이제 한 번 충전하면 보름씩 지탱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소형화, 고효율화의 두 방향으로 진화하던 전기전자공학이 어느 순간 생체전력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인류의 에너지혁명은 바로 생체전력, 정확히 말하자면 인체전력의 활용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의 걷고 뛰고 움직이는 활동에서 발생하는 운동에너지를 활용하자는 정도의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몸 안에서 항상 발생하고 있는 미세 전기에너지를 축전할 수 있는 에너지팩이 개발된 것이다. 불안정한 인체전력을 일정한 형태로 변환해주는 마이크로인버터의 개발도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생활에 이용되는 거의 대부분의 소형 전자제품들은 별도의 전원이 없이 생체 에너지팩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국가 전체의 전력발전량에서 무시 못할 비중으로 잉여분이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다. 물론 에너지팩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또 인체에 부작용이 없다는 점이 완전히 검증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낮은 단가로 대량생산되는 에너지팩은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 이상씩 장만하는 데 큰 부담이 없었다. 그야말로 ‘에너지 복지’가 완벽한 실현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인류 문명에 새로운 전환점이 왔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P씨는 출근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동안 천연가스로 움직이는 버스를 이용해왔지만 오늘부터는 새로 개통된 무인경전철을 탄다. 정시에 맞춰 운행되던 버스 노선은 어제를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천연가스버스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지만 전용도로가 필요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녹지를 포함한 주변 환경을 강제로 단절시키고 세상을 차도와 차도가 아닌 곳으로 양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사실 이웃들 간에 꽤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승용차 같은 소형차량들은 진작 전기자동차로 바뀐 만큼 버스도 전기용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냐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면적을 대폭 줄이고 녹지의 비중을 늘리자는 쪽이 우세했다. 결국 도로는 왕복 2차로만 남기기로 합의가 되었다. 새로 개통된 경전철은 공중에 매달린 채 운행되는 모노레일이다.

전철을 움직이는 전력은 태양열과 풍력 등이 혼합된 다중소스 타입이었다. 전국 각지마다 운행하고 있는 경전철들은 지역맞춤형 에너지 설계가 되어서, 어떤 지역에선 바이오매스에서 얻은 에너지로 발전을 하기도 했고 바다와 인접한 지역 중에는 조력발전으로 전력을 끌어오는 곳도 있었다.

집에서 정거장까지 상쾌한 수풀 내음을 맡으며 걸어간 P씨는 이웃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전철에 올랐다. 그러고는 좌석에 앉아 소리 없이 지나가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언젠가는 숲속의 나무들에게 직접 에너지를 받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옛날 만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자기 몸과 연결해서 직접 에너지를 받던 외계인이 있었다. 인간들에게 쫓겨 녹초가 되었던 그 외계인은 그런 방법으로 원기를 차린 다음 자기 별로 돌아갔다.

다른 생물들을 괴롭히지 않고 서로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받는 식으로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에너지 유토피아가 아닐까.

P씨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세상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에너지 혁명의 진짜 모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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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와 같은 발상은 양날의 검이다. 20세기부터 각종 전기전자 제품을 대량 소비하게 된 인류는 평생 동안 다양한 파장의 전자파에 노출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영향이 여러 세대에 걸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지 아직 명확하게 결과가 나온 연구도, 데이터도 없다. 아마도 호모사피엔스에 어떤 생물학적 변화, 혹은 환경에 적응한다는 의미에서 진화의 새로운 양상이 나올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런 전자기적 환경이 인류 문명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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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최근 홍수 및 산사태 피해로 인한 시에라리온의 처참한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전염으로 국민 4000여 명을 잃은 시에라리온의 아픔이 재현된 듯하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에볼라 사태는 종식되었지만 시에라리온은 여전히 에볼라가 남기고 간 피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에볼라로 부모를 잃고 남겨진 고아들, 극심한 빈곤과 같은 상황들은 쉽게 짐작해봄 직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시에라리온에는 조기 임신과 방임으로 인해 어려움에 놓인 여아들의 사례가 특히 급증하고 있다. 에볼라 사태 동안 국가 전체의 사회 시스템이 마비되었고 극심한 빈곤과 배고픔은 여자아이들을 조혼과 성매매로 내몰았다.

올해 초,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의 슬럼가에서 만난 14세 빈타(가명)는 2살배기 남자아이의 엄마이다. 에볼라로 부모를 잃고 친척들에 의해 모르는 남자에게 강제 조혼을 당했다. 무책임한 남편은 결혼 6개월 만에 집을 나갔고 빈타는 수도로 올라와 시장에서 상한 과일과 야채를 주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빈타에겐 돌아갈 학교도, 가족도 없다. 좁은 단칸방에서 그 어떤 도움과 지원도 없이 홀로 아이를 돌보고 있다. 에볼라는 빈타의 부모만 감염시킨 것이 아니라 빈타의 인생까지 병들게 만들었다. 에볼라 바이러스 확산은 종식되었지만, 에볼라는 얼굴을 바꾼 채 여전히 아이들 앞에 있다.

이렇듯 재난 상황은 여자아이들에게 더 큰 위기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보통 가난한 나라에 닥친 재난 속에서 가장 큰 피해는 아동들과 여자들의 몫이라고 한다. 여아들은 여자로서 그리고 아동으로서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유엔 조사에 따르면 재난 상황에서 여자아이들의 조혼율은 급증한다. 학업을 중단할 확률은 남자아이들보다 2.5배 높다고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시리아 내전 상황에서 요르단 여아들의 조혼율은 20% 증가했고 자연재해가 빈번한 지역의 여아 조혼율은 유독 타 지역보다 높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인 네팔 대지진 때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영국 가디언은 3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신두팔촉 등 지방의 여아들이 도시 아이들보다 성매매 위험에 더욱 노출돼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이러한 어려움에 놓인 여아들을 위해 케냐, 시에라리온, 방글라데시, 네팔 등 다양한 국가에서 ‘아동보호’ 및 ‘교육’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아동보호를 위한 지역 아동보호 메커니즘 구축, 교육 기회 제공, 여아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권리 교육 등을 통해 조혼, 강제 임신과 같은 악습을 막고 양질의 교육을 통해 아동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의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차별과 착취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여아의 권리를 보호하고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길고도 어려운 여정이다. 개인, 지역사회, 정부 그리고 국제사회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국제사회는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수립을 통해 특히, 여아 보호를 위한 노력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다. 오는 10월11일 ‘세계 여아의 날’을 맞아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떠올려 본다. 탈레반의 여학생 교육 금지를 비판하다 총격테러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 고난을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으로 이겨내고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받은 그녀를 떠올리며 그래도 희망은 있음을 생각해본다. 멀고도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그 희망의 첫걸음이 우리의 관심임은 분명하다.

<신유나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해외사업본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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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지난 9월16일 타이베이에서 <옥중19년> 중국어판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출소한 지 27년 만의 일이다. 중국 독자들에게 내 책이 읽힌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벌써 한 세대 전의 독재시대 한국 정치범감옥에서의 투쟁이 젊은 중국 독자들에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지만, <옥중19년>이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지배의 역사, 특히 해방 후 냉전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국가폭력이라는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정치현상이기도 하고,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이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의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대만에서 장쥔홍(張俊宏)씨로부터 오찬 초대를 받았다. 장씨는 1979년 당시 잡지 ‘미려도(美麗島)’의 편집장으로, 대만 민주화의 물꼬를 튼 ‘미려도’ 사건의 핵심인물로 반란죄로 12년형을 받았다. 그는 5년 후에 출소해 민진당의 창당 사무총장, 당대표 대리, 네 번의 입법위원(국회의원)을 지낸 대만 정계의 거목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스캔들도 있었고, 일국일제도, 동아시아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민진당 주류에서 멀어지고 ‘외톨이(孤鳥)’ 소리를 들은 지 벌써 10년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미국과 북한의 핵 대치로 세계는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있으며, 평화가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했다. 평화를 위해서는 우선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평등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EU처럼 동북아 공동체를 만들어 국가 간의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함부로 하고 큰놈이 작은놈을 속이는 것이 평화의 길이 아니며, 북한에 핵무기를 포기케 하려면 먼저 미국이 무력 위협을 하지 말아야 하며, 핵무기는 생사의 위기에 직면한 북한의 자기보존을 위한 마지막 무기라고 했다. 북한도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처럼 안전과 번영을 원하고 있는데, 제재강화는 북한의 번영의 길을 뺏어버린다. 남북한은 언젠가 통일할 것이며, 상호통상을 강화하여 사람의 왕래를 증대시켜야 한다고도 한다. 장씨는 ‘동아시아 평화선언’을 내고, 전면적 핵 금지와 유엔의 통일적 관리를 호소하고, 만약 유엔에 능력이 없다면 먼저 대만과 한국의 민간단체가 공동협조로 평화선언을 추동하고, 전 세계에서 인터넷 투표를 실시하여 세계평화를 위하여 핵무기를 전면 통제할 것을 호소하자고 했다. 이 제안은 대만의 한 민간인이 제기한 것이며, 현실성이 약하지만, 한반도 평화문제를 동아시아 민간인도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약자와 소수자의 관점에서 북한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대만신문 ‘중국시보’에서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 “트럼프가 북한, 이란 등 4개국의 지도자를 ‘불량배’, ‘악당’이라고 매도했는데 진짜 악인은 누구일까요?”, “대만은 유엔 회원국이 아닌데 대북 제재에 동참해야 할까요?”이다. 투표는 진행 중이지만, 앞 설문에서 1위는 압도적으로 트럼프(71.5%)이며, 2위가 김정은(13.9%), 3위가 IS의 지도자(10%)로 나온다. 후자의 설문에는 90%가 필요 없음이고, 필요함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결과를 보편화시킬 수는 없지만, 직접 미국의 풍압을 받지 않는 곳의 민심 동향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대조적인 것이 아베 정권이다. 유엔 연설이 북한 비난과 강경 제재 주장으로 일관되어 “모든 선택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트럼프의 말을 전폭 지지한다면서 평화를 논해야 하는 유엔에서 무력 공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시사했다. 일본에 요즘 ‘해산 바람’이 불고 있다. 아베가 이달 28일에 국회를 해산하고 11월22일에 총선을 실시한다고 했다. 내각을 개조한 지 한 달도 채 안되는데, 당돌한 국회해산은 자민당 내부에서도 ‘대의 없는 해산’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야당의 내분과 분열의 틈을 탄 ‘약자 괴롭히기 해산’, 사학재단 비리 의혹에 얽힌 아베가 국회에서의 추궁을 피하기 위한 ‘적전도주 해산’ 등 비난이 비등하다. 선거 쟁점으로 소비세나 개헌문제를 내걸고 있지만, 북핵 미사일 위기가 고조하고 있어서 대북(강경)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물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다. 아베가 위기를 선동해놓고 그 안보위기로 국민을 겁박하는 자작자연이다. 세계에서 오로지 아베만이 인종주의자, 여성차별주의자인 트럼프의 ‘미친 정치’에 충성을 다 하는 척하면서 호가호위하고 전쟁 위기를 증폭시키고 일본의 군과 전쟁의 합법화에 골몰해왔다. 한국은 이들을 믿고 ‘한·미·일 동맹’을 신주처럼 모시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유엔에서 가장 강력한 대북 압력을 주장하면서 미·일의 뒷북을 칠 뿐, 평화 의지나 자주성을 부각하는 독자성도 동창성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800만달러의 대북인도지원 결정에 대해 아베로부터 훈계조로 견책을 받아 “인도지원과 정치는 별개”, “실시 기일 미정”이라는 변명에 시종하고 있다. 진정 인도지원이라면 떳떳하게 지금 바로 실시하면 된다. 생색내면서 줄듯 줄듯 안 준다면 상대를 능멸하고 약 올리는 결과밖에 안 된다. 문 대통령이 “석유 공급을 끊어달라”고 하다가, 푸틴 대통령에게 오히려 “인민생활에 피해가 간다”고 타이름을 받는 창피한 일이 있었다. 남에게 같은 겨레를 괴롭혀달라는 부탁은 입이 찢어져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어느 아둔한 참모가 보좌하는지 모르나, 지금 북한은 사생 결단으로 핵미사일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데, 평화를 보장받기 전에는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포기할 리가 없다. 정부는 제재니 압력이니 하는 헛발질을 그만하고, 진정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저지하고, 한반도 평화실현의 운전대를 잡으려면, 트럼프에게 “전쟁도발을 그만하고, 북한과 대화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직언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지역을 전쟁위기에서 구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든, 대만의 장씨 말마따나 시민들은 “전쟁반대!” “군사대치 중지! 즉시 대화!” “동아시아 비핵화, 평화!”를 외치고 스스로 평화를 지켜야 한다.

 

※미려도 사건 : 세계인권선언일인 1979년 12월10일, 대만 가오슝(高雄)에서 잡지 ‘미려도’가 주최한 시위에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주최자 8명이 투옥된 사건이다. 가오슝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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