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익 |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연구실장


서해에서 59년간 남과 북을 갈라놓은 북방한계선(NLL)이 최근 남한 국민들마저 둘로 갈라놓고 있다. NLL을 국경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을 종북세력으로 몰아세우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익 극대화를 지향해야 하는 국가전략의 관점에서 볼 때 현명하지 않은 행동이다. 서해상에서 한국의 국익은 통합의 리더십으로 NLL을 지키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역에 평화가 없다면 이를 만드는 것이 우리 정부와 국민이 해야 할 책무이다. 이 주제로 편 가르기를 해서 서로 싸우는 것은 국익을 저해하는 행위이다.


 그간 서해상의 잦은 갈등과 분쟁으로 우리 국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이 때문에 NLL 수호와 평화 만들기를 병행해 달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남북간 경제 격차가 30배 이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므로 서해와 한반도 평화를 잘 관리해 가면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통일이 달성될 것이다. 그러나 평화가 깨져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비록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우리 국민의 생명과 수십 년간 쌓아온 재산이 일순간에 파괴될 가능성이 크므로 평화 수호가 최우선적인 국가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NLL 인근이 최고의 꽃게 어장인데 우리 어선은 남북 대립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어선이 꽃게를 싹쓸이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방휼지쟁의 양상이다. 따라서 남북한 어민들의 어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NLL 수호와 평화 만들기가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책이다.


1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남쪽 해역에서 조업을 하다 붙잡힌 중국어선. (출처: 경향DB)


그런데 우리는 지금 NLL이 국경선인지에 대한 평가를 두고 내홍을 겪고 있다.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에 몰입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이며 창의적인 정책을 만들어 시행하는 데 국론을 모아야 한다. 특히 서해상의 평화는 북한과의 신사협정 없이는 보장될 수 없다. 왜냐하면 1953년 유엔사령관이 이 선을 공포했지만 법적으로 우리와 아직 전쟁을 끝내지 않은(휴전) 북한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1992년 남북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향후 계속 협의한다. 불가침 구역은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이제까지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이 합의에 따르면 우리가 해상불가침 경계선에 대한 협의에 응하는 것이 북한에 이 선을 존중하도록 하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이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에 이 지역을 서해평화협력지대로 만들자는 합의가 있었으나 현 정부 들어와 남북관계 악화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남북 간 신뢰가 회복되지 못한다면 합의가 이루어져도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뢰는 무엇보다 상호 인정과 공존 의지를 가지고 이를 내정불간섭과 비방 중지 등의 행위로 보여줘야 형성된다. 우리가 중시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NLL 지키기와 평화 만들기 그리고 우리 어선들의 어로를 보장하려면 결국 남북 간 신뢰 회복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서로 진정한 신뢰가 형성된다면 남북관계 정상화, 호혜적인 다양한 남북 경협 증진, 북핵문제 해결 여건 조성 등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우리는 NLL 평가에 대한 자기분열적인 편 가르기를 자제하고, 남북 간 신뢰 회복 방안을 강구하는 데 지혜를 모으고 이를 실현하는 데 국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정부 내 역할론에서 본다면 청와대가 기획·조정하는 가운데 국방부는 NLL을 사수하고 통일부가 남북협상을 진행하여 ‘한국’ 어민들이 평화롭게 꽃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1994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갈등과 분쟁의 아카바만을 ‘홍해해상공원’으로 만들어 평화를 정착시키고 관광지로 발전시킨 것을 모델로 삼아 우리도 서해를 남북한 평화·공영의 바다로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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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일본에서 또 수상자가 나왔다. 교토대학의 야마나카 신야(山中伸彌) 교수다. 이로써 교토대학은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요즘 일본과 대치하고 있는 중국의 역대 수상자 수와 같다니 놀랍다.


제대로 된 수상자가 없는 우리로서는 해마다 ‘노벨상 신드롬’을 앓는다. 그 원인을 따지는 데도 패턴이 생겼다. 문학 분야는 번역 인력의 부족을, 자연과학 분야는 국가적 지원의 미진을, 또는 이공계에 대한 천대를 그 이유로 꼽는다. 그 처방으로는 외국의 석학들을 모셔서 지식을 전수받자는 의견이 많다. 히딩크를 청해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기자는 발상과 같다.


 야마나카 교수의 소감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내가 선택한 난치병 연구에 푹 빠져 지냈을 뿐”이라는 말이다. 즐거워서 한 일이었다는 것.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소감을 훑어봐도 다를 바 없다. 노벨상을 목표로 또는 특허를 위해 밤새 노동한 것이 아니라, 재미가 나서 밤을 새웠다는 뜻이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쑥스러워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천성이 모두 겸손해서는 아니리라 싶다. 자기만의 ‘재미난 놀이’를 지원해준 국가와 학교에 감사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좋고, 또 자기 놀이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 비밀을 아는 동료들에게는 진정으로 미안하기 때문이리라(‘같이 놀아놓고, 나만 상을 받아서 미안해!’ 하는 그런 심정).


그렇다면 노벨상의 최소 조건은 재미나서 공부하고, 신나서 연구하는 것이다. 곧 즐겁게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기만 하면 언젠가는 노벨상이 나온다! 반면 노벨상을 목표로 삼는 공부로는, 상을 타기 위해서 행하는 연구로는 노벨상을 쥘 수 없다. 이쯤에서 일개 교토대학이 노벨상을 쏟아낸 원인을 분석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교토대가 노벨상의 산실이 된 비결은 엘리트 양성기관으로 성장한 도쿄대와 달리 특유의 자유로운 학풍과 개방성에서 찾을 수 있다. 14개 연구소, 27개 교육·연구시설을 갖춘 교토대는 좋게 말하면 자유, 나쁘게 말하면 방임에 가까울 정도로 학생의 개성과 독창적인 관심을 중시한다.”(경향신문)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야마나카 신야 일본 교토대 교수 (출처: 경향DB)


방임에 가까운 연구 환경과, 개성과 독창적인 학생들이 어우러진 생태계가 교토대학이었다는 말이다. 지방의 무명 대학 출신인 야마나카가 교토대학의 숲에 깃들이어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까닭도 이것이리라. 공자가 정치가 무엇인지 질문한 이에게, “가까운 사람은 기뻐하고, 먼 데 사람들은 몰려드는 것”(近者悅, 遠者來)이라던 대답이 떠오른다. 국가경영이든, 노벨상이든 좋은 것을 성취하는 비결은 같다. 둘 다 주형틀에다 물건을 뽑는 기계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몰려들 숲을 만드는 것이다. 


재미삼아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몰려들 나무들을 심고, 한 세월을 기다려 숲으로 우거질 때 노벨상은 나온다.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은 퍽 지혜로운 분들이었다. ‘나무를 기르는 것은 십년 계획이요, 사람을 기르는 것은 백년대계라’고 하였으니 인재를 키우는 것이 나무와 숲을 기르는 것과 같은 성질임을 알았던 까닭이다.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을 만든 사람이다. 당시 향교와 성균관은 국가경영을 위한 기술적 지식인을 배출하는 곳이었다. 입신양명을 위해서 공부하는 대학이었다. 그 폐단이 기묘사화를 위시한 자리싸움이었다. 이에 그는 배움 자체를 기쁨으로 누리는 인간을, 그 도중에 봉착할 가난조차도 즐길 수 있는 인간을 기르고자 서원이라는 ‘신(新) 대학 운동’을 펼친 것이었다. 서원은 학문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숲이었다. 


<논어>를 펼치면 첫째 장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으랴’다.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목적은 제 스스로 기쁨을 누리는 데 있다는 말이다. 즐거운 공부라야 참된 공부라는 뜻이다. 이어서 ‘먼 데서 벗이 찾아오니 즐겁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알아채고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온 벗을 만난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랴’다. ‘남이 몰라줘도 성내지 않는다’ 함은 나를 인정해준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더라도 홀로 즐기며 제 길을 기껍게 걸어간다는 뜻이다. 


이렇게 <논어>의 첫장 세 구절은 희열과 즐거움으로 넘실댄다. 배움의 기쁨과 벗을 만난 즐거움 그리고 홀로 즐기며 살아가는 흥취가 겹겹하다. 공자는 지금 우리에게, 진짜 공부는 즐거운 것이라는 점을, 거꾸로 즐겁지 않은 공부는 노동에 불과하다는 점을 경고하는 셈이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두루 즐거워서 연구했노라는 토로와, 공자의 첫마디가 배움의 즐거움과 기쁨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배움을 즐기는 숲이 없는 곳에선 창의력이든, 상상력이든 나올 수가 없다. 노벨상은 거푸집에서 주물을 뽑는 기계적인 과정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유다르고 색다른 생각들을 기꺼워하고, 격려할 줄 아는 숲속에서야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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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한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협상 결과를 놓고 주변국들이 심상찮은 반응을 표출하고 있다.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은 물론, 한국 정부가 협상결과 발표 이전에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중국과 러시아마저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주변국들의 불안을 최소화하기는커녕 사거리 연장을 발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사일 능력 확장 의지를 공공연하게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경박한 태도가 상황을 악화시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8일 정례브리핑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데)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가 각 측의 이익에 부합한다”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어 북한이 거센 반응을 내놓자 다시 한번 ‘관련국들의 절제’를 당부했다. 러시아 외교부 역시 지난 9일 “한국 지도부가 한반도 긴장을 추가로 고조시키지 않을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표해주기를 기대한다”면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직접적으로 자제를 촉구했다. 북한은 국방위원회와 외무성,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모두 반발하고 있다. 북한은 특히 지난 4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계자들의 방북, 비밀접촉 사실을 폭로하면서 군사 목적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강행할 것을 분명히 했다.


국방부 미사일 사거리 확대 (출처: 경향DB)


정부는 협상 결과를 발표하면서 사전에 주변국들의 이해를 구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응은 사전 정지작업이 실패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정부 당국자들은 협상 결과를 과도하게 홍보하고, 미래의 미사일전력을 앞당겨 과시하는 데 열을 냈다. 지역 정세를 앞장서 휘저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방부는 미사일 지침 개정협상 결과 발표 다음날인 지난 8일 이미 내년부터 5년간 미사일전력 증강예산으로 2조4000억여원을 배정했다면서 사거리 550㎞·800㎞의 미사일을 5년 내 실전배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주변국들이 이번 협상을 주목하는 더 큰 이유는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구축 중인 미사일방어(MD) 체제에 어떤 형식으로든 한국의 참여가 커질 것이라는 의혹 때문이다. 청와대는 이와 관련한 이면합의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레이더망 제공을 비롯해 한국의 MD 기여 방안을 놓고 한·미 간에 진행 중이라는 논의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미사일 사거리 연장을 정권 차원의 치적인 양 호들갑 떨기에 앞서 과연 미국 측이 공개적으로 흘리고 있는 MD 참여설의 진실이 무엇인지부터 공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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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


경제민주화가 대세다. 여야를 가로질러 누구나 이를 외치니 참으로 반갑지 아니한가.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 이르기까지 대선을 앞두고 서로 앞장서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까. 좀 가까이 들여다 보면, 많이 허전하다.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경제를 민주화하자는 말이다. 그것은 사람의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을 사고 파는 곳, 곧 시장과 나아가 시장의 ‘힘’을 민주적으로 통제하자는 말이다. 


 시장에는 다양한 경제주체 예컨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국내기업과 국외기업, 경영자(자본가)와 노동자 등이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민주화한다는 말은 곧 대기업과 중소기업, 국내외 기업,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모든 경제주체가 공정, 공평한 룰에 따라 일을 하고, 또 일을 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말이다. 당장 이렇게만 보아도 경제민주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특히 재벌개혁을 통해 그들의 경제권력을 규제하는 데에서부터 골목상권을 보호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데까지, 그래서 한국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구조 변경마저 포괄하는 의미이다. 


경제민주화는 나아가 시장 자체의 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 다시 말해 비시장 영역, 무엇보다 ‘공공영역’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일도 포함된다. 지난 10여 년, 신자유주의에 의해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이 급속히 시장화, 상품화되었다. 특히 각종 민영화 결과 공공영역은 꾸준히 위협받아 왔고, 또 현저히 축소되어 왔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공공영역을 오히려 확장하고, 시장의 권력으로부터 이를 되돌려받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그 범위가 현저히 축소되어 있고, 아주 중요한 한 측면이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시장은 어떻게 정의해도 본질적으로 세계 시장이다. 경제민주화는 그러므로 그 시야를 국내에만 한정할 경우, 구조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설사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더라도 코끼리 뒷다리 긁는 효과 정도에 머물 공산이 크다. 지금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지난 10여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자 대응이다.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는 소위 저 ‘자유’무역과 분리될 수도 없고 언제나 한통속이었다. 설사 시장 내에서 재벌의 경제권력을 어느 정도 규제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시장은 언제나 세계시장인 까닭에 그 실질 효과는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코스트코 서울시 압박 (출처; 경향DB)


한국의 재벌이 이미 한국시장을 훨씬 벗어난 메이저급 글로벌 주체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 차원에서 중소 유통상인을 위해 골목상권을 보호하자고 해도, 이미 체결한 혹은 앞으로 체결할 통상협정은 이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한·EU 자유무역협정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또 코스트코 사례에서 보듯 초국적 유통자본에 지방정부는 무기력할 뿐이다. 경제적 약자이자 소수자인 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입법과 조치를 한다고 해도, 이른바 ‘자유’무역협정은 이를 공염불로 만들 뿐이다. 이 협정은 제주도 남단의 감귤 협동조합과 세계 최고의 농기업 델몬트의 오렌지를 자유 경쟁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델몬트에게 ‘내국민대우’를 해 주라고 한다. 이런 ‘내국민대우’와 경제민주화가 과연 양립가능한가. 


우리가 체결한 수많은 자유무역협정에서 정작 핵심은 수출증대 따위가 아니라, 차라리 우리의 혹은 상대국의 경제 구조 혹은 제도에 관계된 부분이다. 설사 경제민주화를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이미 우리 국내법이 되어 버린 수많은 자유무역협정은 언제나 걸림돌이다. 자유무역협정과 상충되는 경제민주화는 아예 가능하지도 않다. 투자자, 곧 국내외 초국적 자본의 우월적 지위의 항구화를 위한 장치인 ISD(투자자-국가소송제)를 그대로 둔 채 경제민주화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혹 ISD를 통해 공공정책이 무력화될 때, 경제민주화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아무리 봐도 지금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많이 허전하고 잘해야 ‘반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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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범 | 출판기획자·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만들자는 국민 여론이 높았지만, 올해도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은 채 지나갔다. 아쉽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이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국경일이라면 한글날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국경일이자 문화민족으로서의 품격을 되돌아보게 하는 날이다. 공휴일로 지정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우리말이나 한글에 대해 국어운동계에서, 그리고 언론에서 붙이는 그 수식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계가 경탄하는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 ‘한류의 뿌리이자 국가 브랜드’ 등의 말에서 민족주의 냄새가 너무 강해서일까? 물론 내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 이유가 필요하지 않듯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일에도 이유는 필요 없다. 


 내가 걱정하는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떠벌이 민족주의다. 그런 민족주의의 밑바닥에는 다른 민족에게 피해를 받았으니 이젠 복수하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일종의 광기와 맞닿을 위험이 있어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세계문자올림픽이라는 행사가 기독교 선교의 목적이라고 의심받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맞닿아 있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를 똑바로 보는 데에 방해가 된다. 우리네 말글을 잘 다듬는 일은 민족문화 발전이라는 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시야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넓히고 싶다. 어떠한 시민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무에서 배제당해선 안 된다. 여기서 언어가 중요하다. 정치나 행정의 절차, 또는 참여기회에 구멍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공적인 언어의 측면에서도 문제를 봐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의 사례로, 올 3월부터 5월까지 고용노동부가 냈던 보도자료를 분석해보니 양해각서를 뜻하는 ‘MOU’라는 영어 줄임말이 24번이나 나왔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연구·개발을 뜻하는 ‘R&D’가 43번이나 나왔다. 자판을 칠 때조차도 한글에서 영문으로 전환하여 대문자를 치고 다시 한글로 전환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생각하면 그다지 경제성이 있는 짓도 아니다. 그런데도 죽어라고 이 말을 쓴다. 


한글날 공휴일 촉구 플래시몹 (출처: 경향DB)

만일 국가가 규정한 의무교육을 마친 시민 가운데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는 그 정책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어떤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옆사람에게 슬쩍 물어보면서 자신의 무식을 한탄할지도 모른다. 작은 일이지만 굴욕이다. 보도자료가 이 정도라면 각종 알림글은 오죽하겠는가? 서울시 서초구청은 민원부서 이름을 ‘OK민원센터’라고 짓고 특허까지 냈다고 자랑을 하니. 


공문서를 이렇게 작성하는 일은 2005년에 만들어진 국어기본법을 위반하는 범법행위지만, 공무원 가운데 이 법을 알고 있는 이조차 드물다. 국어기본법은 우리말과 한글을 공무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규정하고 있고 공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한글로 표기하되 어쩔 수 없을 때에만 괄호 속에 외국어나 한자를 넣어 이해를 도우라고 정하였다. 국어문화의 발전이라는 목적도 있겠지만, 사회 전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의 정신 위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력과 대중문화가 세계인에게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마당에 한류나 한국어 세계화를 깎아내릴 마음은 전혀 없다. 하지만 수출 대기업의 금탑 뒤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중소기업이 신음하고 있다. 양극화는 경제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세계의 관심 뒤편에서 한국인의 언어 인권이 가려지고 나날이 뒷걸음칠까봐 걱정이다. 언어 문제를 세계화와 민족의 틀로만 보지 말고 인권의 잣대를 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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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이행(李行)은 조선 초기의 문장가로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늙어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황해도 강음현 산내면에서 살았다. 호가 기우자(騎牛子)이다. 사람들이 호를 지은 까닭을 묻자, “소의 걸음처럼 느릿느릿 걸어가면 사물을 살피고 이치를 탐구하기에 편하다”고 대답했다. 


양촌 권근이 이행과 함께 평해에서 지냈던 최참지로부터 이행의 말을 전해 듣고 한 편의 글을 지었다. 그 글이 <기우(騎牛)에 대한 설>(기우는 이행의 호)이다.


“나는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는 데에는 오직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어진 뒤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의 벗 이공 주도가 평해에 살면서, 매양 달밤이면 술을 갖고 소를 타고서 산수 사이에 놀았다. 평해는 명승지로 일컫는 곳이라, 이공은 옛사람이 채 알지 못한 묘한 유람의 즐거움을 다 알았을 것이다. 무릇 물체를 볼 때 빠르면 정(精)하지 못하고 더디면 그 묘한 것을 다 볼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 만사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긴 휘파람을 맑은 바람에 보내며 소를 놓아 가는 대로 따르고 생각나는 대로 스스로 술을 부어 마시면 가슴이 확 틔어 스스로 그 낙이 있으리니, 이 어찌 사사로움에 매인 자가 능히 할 바이랴! …소를 타는 즐거움을 그 누가 알랴!”


나는 자동차 운전은 물론이거니와 자전거도, 오토바이도 못 탄다. 중국의 창산을 오르면서 가슴 졸이며 말을 타 본 것 외에는 소도 타본 적이 없다. 1991년 가을에 받은 유일한 면허증인 2종 운전면허증이 10년 무사고가 되자, 운전 한 번 안 하고도 녹색면허증에 1종 면허증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으니 그야말로 ‘장롱 면허증’인 셈이다.


농촌체험행사 중 소달구지 타기. (출처; 경향DB)


얼마 전 일이다. 강연이 있어 논산시 벌곡면의 시골길을 가는데 어느 좁다란 농로에서 길이 끊겼다. 운전을 하고 있던 동행인이 앞으로만 갈 수 있지 뒤로 후진을 못한단다. 나는 도와줄 길도 없고, 그저 앞서가며 나를 따라오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차는 거의 제자리를 맴돌고 약속시간은 자꾸 다가오고 초조했다. 그때 마침 논물을 보러온 농부를 만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아직 운전도 못하느냐는 듯 측은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본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하는 것이라곤 두 발로 여기저기를 떠도는 재주밖에 없다. 뜬 구름만큼, 흘러가는 강물만큼 가없는 나그네 신세. 그것이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소를 탈 기회가 생겨도 성질이 급한 나는 내려서 걸어갈 게 뻔하고, 저만치 걸어가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소를 망연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터득한 것이 ‘느릿느릿 걷는 즐거움’이라면 그것마저도 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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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사회부 차장


과연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일까. 한국사학법인연합회 등 사학 관련 단체들이 대선을 앞두고 사립학교법(사학법)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현재의 사학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개방형 이사제, 이사장 친인척의 교장 임용 금지 등을 꼽았다. 정말 이들 조항에 그렇게 문제가 많을까.


1994년 3월14일의 일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들이 양심선언을 하고 나섰다. 학교에서 찬조금을 강제로 걷도록 하고, 내신성적을 조작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한 교사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졸업식 때 공로상을 타게 됐는데 학교 측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찬조금 명목으로 100만원을 받았다”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검찰이 곧바로 수사에 들어갔다. 바로 너무나 유명한 ‘상문고 비리’ 사건이다. 검찰 수사 결과 교사들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상문고 신입생 재배정 요구 피켓 시위 (출처; 경향DB)


 당시 이 학교 교장이었던 상춘식씨는 불법으로 학부모들로부터 돈을 걷어 빼돌렸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찬조금 명목으로 걷은 돈이 모두 12억3800만원이다. 상씨는 이 돈 대부분을 개인 용도에 썼다. 1992년 4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학생들에게 보충수업료로 받은 돈 가운데 6억여원도 마음대로 썼다.


당시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찬조금 때문에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가출한 지 두 달 만에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된 최모군의 어머니는 “전세방에 살면서도 명랑하던 아들이 학교에서 찬조금 요구를 받고 괴로워하다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상문고는 학생들의 성적도 조작했다. 교감이던 장방언씨 등은 학부모들로부터 특별히 부탁을 받은 학생의 내신성적을 고쳐줬다. 방법은 간단했다. 성적표에 적혀 있는 ‘미’를 수정액으로 지우고 ‘수’로 바꾸는 식이었다. 성적이 올라간 학생 중에서는 교장 상씨가 출입국할 때 도움을 받은 세관 공무원의 아들이나 고위층의 아들도 있었다.


이들의 비리는 이들 외에도 많다. 기소될 때 적용된 법조항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업무상 배임, 업무방해, 뇌물공여, 뇌물공여 의사표시 등 5개에 이른다. 그래서 상문고 비리는 ‘단군 이래 최대 사학 비리’로 불리기까지 했다.


이후 관선이사가 파견된 상문고는 점차 정상을 찾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비리 사건이 뇌리에서 잊혀져갈 무렵 다시 문제 학교로 떠올랐다. 1999년 말 상씨의 부인과 측근들이 이사진에 복귀하고, 2001년 초에는 성적 조작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장방언씨가 교장으로 선임되면서다. 분규 재단에 파견된 관선이사의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고, 비리 전력이 있는 이사진의 복귀를 막는 장치가 없는 사학법이 문제였다. 일부 학부모들은 “비리 교장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자녀들을 등교시키지 않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사학법에 개방형 이사제, 이사장 친인척의 교장 임용 금지 조항 등이 들어간 배경에는 이런 ‘상문고 사태’가 있었다. 재단 이사장과 친인척이 족벌 체제를 만들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막아 학생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사학 관련 단체들은 주장한다. 이런 조항들이 ‘사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재단에 외부 인사들이 이사로 들어와 감시를 하면 불법으로 찬조금을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친인척이 아닌 사람이 교장이라면 성적표를 고치라고 시키기는 훨씬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학생들이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을 내지 않는 일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내신성적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걱정을 안 해도 되는 학교가. 좋은 일 아닌가.


재단 이사장들도 그렇다. 족벌 체제를 만들어 불법을 저지르기는 힘들어지지만, 상춘식씨처럼 감옥에 갈 일도 없을 테니 좋은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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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논설위원

만물을 금으로 바꾸고 만병통치와 불로장생의 꿈을 이룰 ‘현자의 돌’을 추구했던 연금술이 인간의 허황한 꿈임을 안 것은 근대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였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의 세계는 불가능을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증명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입자가속기를 이용하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고, 노화의 비밀도 속속 밝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론물리학자 미치우 카쿠 뉴욕주립대 석좌교수는 <불가능은 없다>는 책에서 물리학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현대 과학 기술을 세 부류로 나눴다. 투명인간·공간이동 등과 같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물리학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제1부류 불가능, 타임머신·초광속여행 등처럼 물리법칙의 위배 여부가 아직 분명치 않은 제2부류 불가능, 영구기관·예지력 등처럼 현재 알려진 물리법칙에 위배되는 제3부류 불가능이다. 그는 제1부류 불가능은 이르면 금세기, 늦어도 22세기 안에는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유럽물리학연구소, `빅뱅' 재현 실험 실시 (출처: 경향DB)


‘꿈의 컴퓨터’로 불리는 양자컴퓨터도 제1부류 불가능의 영역이다. 핵융합에너지, 상온 초전도체, 인공지능 등과 함께 이론적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실제 응용에 이르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은 기술이기 때문이다.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1982년 처음 제안한 지 30년이 됐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을 정도다. 최고 난제는 다수의 원자를 결맞음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양자컴퓨터는 물론 공간이동까지도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이 양자컴퓨터 개발을 가능케 한 두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미국표준기술연구소(NIST)의 데이비드 와인랜드 박사와 콜레주드프랑스의 세르주 아로슈 교수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각각 이온과 광자를 이용해 양자역학의 중첩 현상을 실험으로 보여주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고 한다. ‘양자컴퓨터 혁명’을 이끌고 있는 이들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할 정도이니 곧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양자컴퓨터를 설치하고 입체 프린터로 출력할 일은 없을 것 같다. 1985년 처음으로 양자컴퓨터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립한 영국 옥스퍼드대 데이비드 도이치 교수는 약간의 행운이 더해진다면 그럴 날이 50년 내에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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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불황이 계속되면서 자영업자,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기 이를 데 없다. 대기업의 영세업종 진출로 재래시장이나 골목상권이 무너지고 있다. 동반성장은 구호로만 그친 채, 중소기업들의 경영난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은 나름 잘나가고 있다. 지난해 30대 재벌 대기업의 매출액은 1345조원, 명목 국내총생산(GDP) 1237조원보다 많았다. 올해 삼성전자는 순익이 22조원, 현대·기아자동차는 14조원을 각각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경제가 지금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문제는 재벌개혁과 양극화 해소다. 재벌 총수들이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고, 재벌 대기업이 거둔 성과가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서민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어떤 경제민주화 공약을 들고 나올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문재인 후보 경제민주화위원회 회의 (출처: 경향DB)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어제 경제민주화 정책 공약을 내놓았다. 특별히 새로운 것이 있다기보다 참여정부가 검토했거나 지난 4·11 총선에서 내건 민주당 공약을 모두 망라했다. 민주당 공약은 재벌개혁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금산분리 강화를 통해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고 본다. 순환출자는 가공자본을 만들어 재벌이 적은 지분으로 회사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만큼 이를 막겠다는 것이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회사 자금으로 다른 회사 주식을 사들여 보유할 수 있는 총액을 제한해 문어발식 확장을 막겠다는 의도다. 금산분리는 금융자본인 은행이나 보험과 같은 제2금융권을 산업자본인 재벌이 갖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실효성이다. 하나의 조치보다 다양한 조치가 맞물려야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14일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할 예정이다. 새누리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킬 2개 이상의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먼저 마련하되, 구체적인 공약은 박근혜 후보가 다음달 중순 공개하기로 했다. 대선 후보 간 경제민주화 공약 경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은 셈이다. 이제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야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야 국민들로부터 대선 공약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지난 총선 때처럼 구색맞추기로 경제민주화 공약을 들고 나왔다가 제대로 논쟁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낸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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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안 전 대법관은 지난 7월 퇴임사에서 “헌법기관은 그 구성만으로도 헌법적 가치와 원칙이 구현돼야 한다”며 대법원의 성비 균형을 촉구했다. 자신의 퇴임으로 6년간 이어져온 ‘복수 여성 대법관 시대’가 저물게 됨을 우려한 것이었다. 어제 양승태 대법원장은 김소영 대전고법 부장판사를 신임 대법관 후보자로 제청함으로써 전수안 전 대법관의 간곡한 뜻에 화답했다. 김소영 후보자가 국회 동의를 받아 임명되면 사상 4번째 여성 대법관이 된다.



대법원은 김 후보자 인선 배경에 대해 “최근 국민들 사이에 대법원의 다양화와 여성 대법관을 희망하는 여론이 커졌다. 양 대법원장이 이러한 요구를 적극 수렴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 확보가 시대적 과제임을 강조해온 우리는 김 후보자의 제청을 환영한다. 동시에 이번 제청을 계기로 향후 대법관 인선에서도 다양성 구현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길 희망한다. 성별은 물론 출신 대학과 지역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균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다른 삶’을 살아본 대법관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다른 판결’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대법관 후보자 제청이 ‘김병화 낙마’ 이후 사법부의 명예회복을 위한 1회용 처방에 그쳐선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는 까닭이다.


이번 제청은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4명의 제청 후보를 추천한 뒤 2주일 만에야 이뤄졌다. 대법원은 김병화 후보자의 낙마 사례를 고려해 검증을 강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찰과 청와대가 ‘검찰 몫’ 대법관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람에 인선이 늦어졌다는 설도 나온다고 한다. 압박설의 진위야 어떠하든 양 대법원장이 검찰 몫 대법관이라는 관행을 없앤 것은 잘한 일이다. 대법원에 특정 직역을 위한 쿼터를 두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 행태 아닌가. 더욱이 대법관은 정치적으로 엄정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리다.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범죄혐의를 덮었다고 자인하는 검찰 출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김소영 후보자가 국회 인준절차를 마치면 대법원에는 박보영 대법관을 포함해 여성이 2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대법원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고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대변하라는 시민적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대법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법조인들과 차별화된 시각을 보여줘야 한다. 여성 대법관 1·2호인 김영란·전수안 전 대법관은 주어진 책무를 다한 뒤 명예롭게 대법원을 떠났다. 여성 대법관 3·4호도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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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시민모임(소시모)은 그제 시중에 유통 중인 섬유유연제 10개 제품에 대해 방부제 성분 등을 조사한 결과 한국피앤지(P&G)가 수입·판매하는 베트남산 ‘다우니’에서 유독성분인 글루타알데히드가 98㎎/㎏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소독과 방부용으로 사용되는 글루타알데히드는 독성이 강해 두통과 졸림, 어지러움을 유발하고 장기간 노출되면 피부염과 천식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내용이 어제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소비자의 항의와 함께 환불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한다. 러나 한국P&G는 거의 모든 일간지 1면에 다우니의 안전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광고를 실었다. 다우니를 사용했거나 사용하고 있는 소비자로서는 불안하면서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소시모의 기자회견 모습 (경향신문DB)

글루타알데히드는 현재 환경부의 ‘과민성 물질 46종’으로 분류돼 있고 유해화학물질관리법상 유독물로 관리되고 있다. 또 농식품부는 지난해 구제역 발생 시 글루타알데히드가 소독제로 사용되면서 발암물질 논란을 일으키자 생체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공산품 안전 업무를 관장하는 지식경제부 산하 기술표준원은 섬유유연제의 유기성 유해물질 관리대상에 글루타알데히드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당연히 허용 기준도 없다. 과거 섬유유연제의 유해물질 규제 기준을 만들 때 이 물질을 사용한 제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루타알데히드가 독성물질이긴 하지만 제조업체가 섬유유연제에 넣어도 규정상 아무런 문제는 없다. 더욱이 소시모 조사에서 검출된 양이 인체에 유해한 수준인지, 유해하다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제품 안전관리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한국P&G는 미국산 다우니에는 방부제로 벤즈이소치아졸리논을 사용하고 있으나 함량이 국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베트남산 다우니를 들여온다고 했다. 글루타알데히드 규제 기준이 없는 허점을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시모는 한국P&G에 미국산과 베트남산에 사용한 물질이 다른 이유를 해명하고 베트남산의 안전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정부는 서둘러 베트남산 다우니의 유해성 여부를 정밀조사해 소비자의 불안을 해소해줘야 할 것이다. 글루타알데히드를 섬유유연제의 규제 대상물질에 포함해야 함은 물론이다. 한국P&G도 말로만 “다우니는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있다”거나 “전 세계 법규 및 안전 기준을 엄격히 준수해 제조·판매하고 있다”고 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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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 ‘야생초 편지’ 저자


 

싸이 광풍이 불고 있다. 연일 인터넷 조회수가 신기록을 작성하는가 하면 팝의 본고장에서 인기차트 최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심지어 싸이가 미국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엔 예정되어 있던 다른 공연을 제쳐두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대규모 무료공연을 열기도 했다. 그 광경은 마치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던 때 붉은악마의 응원 열기를 무색케 했다. 대한민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한 젊은 영웅에 대한 예우와 찬사가 빚어낸 일종의 광기다. 미리 얘기하지만 나는 싸이를 좋아하는 팬이다. 이 글은 싸이라는 가수가 아니라 그가 일으키고 있는 특이한 ‘현상’에 대한 한 은둔자의 삐딱한 관점을 적은 것이다.


 나는 해외를 나가게 되면 반드시 그 나라의 유명한 레코드점과 책방에 들러 정보와 문화의 흐름을 살펴본다. 그때마다 느끼는 참담한 기분이지만 적어도 문화에 국한해 볼 때 한국은 ‘없는 나라’이다. 비서구 음악코너에 가보면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제3세계 국가들의 음반은 수두룩하게 꽂혀 있어도 한국 관련 음반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그 옛날 문화공보부에서 만들어 보급한 것으로 보이는 꾀죄죄한 국악음반 정도이다. 피터 매뉴얼이라는 음악학자가 펴낸 <비서구 세계의 대중음악>이라는 책이 있다. 67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속에 유감스럽게도 한국과 일본은 없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을 미국 대중문화의 아류로 본 것이다.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J팝과 K팝이 일정하게나마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의 관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축늘어진 우승 후 모습 (경향신문DB)


이런 상황에서 서구인들은 싸이의 성공을 과연 어떻게 볼까?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싸이의 성공을 일제 치하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본다. 식민지에서 꽃핀 아류문화가 본토에 상륙해 반짝 인기를 누린 것 이상이 아니라고 말하면 지나친 패배주의일까? 만약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금발의 서양인이 금메달을 따고 모국으로 돌아가면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박수치는 것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한 양 호들갑을 떨며 난리를 친다. 이 호들갑의 이면에는 식민지 역사를 겪은 민족의 열패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가 이를 나무라겠는가?


이만큼이나마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싸이의 성공보다도 베를린 도심의 한 작은 문화공동체 앞마당에서 마주친 우리의 장승을 더 감격적으로 바라본다.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공연을 하고 기념으로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한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압도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 나라의 문화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교류하는 정도면 좋지 않을까 한다.


싸이 귀국 기자회견 (경향신문DB)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서구인들이 전파한 싸구려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세련되게 패러디한 노래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날것으로 드러내놓고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 보내자는 것이다. 식민지 강남 출신의 싸이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기에 서구인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말하자면 싸이는 고급스러움으로 포장된 서구 음반시장의 틈새를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즐기기에 이보다 더 유쾌한 음악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웃고 즐기는 가운데 세계문화의 다양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서구 팝음악의 다양성은 싸이나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에 의해 날로 풍성해지고 있으나 비서구세계의 음악은 다양성은커녕 원형 보존도 힘겨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확실히, 서구가 주도하고 있는 세계 문화시장에서 한국인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반갑고 대견한 일이지만 그에 걸맞은 우리 고유문화의 현대화에 과연 얼마만큼 투자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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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전국부 기자 shlee@kyunghyang.com


 

정치인이 쓴 책은 이사갈 때 퇴출대상 1순위라는 말이 있다. 정치인의 책이라고 무조건 폄훼할 순 없지만 선거철만 되면 느닷없이 등장하고, 내용도 뻔한 주장 등으로 채워진 경우가 허다하니 어찌보면 지나친 표현도 아닐 듯싶다. 오죽했으면 정치인의 책을 빗대 인터넷 검색만 잘해도 펴낼 수 있겠다는 조롱이 나오겠는가. 이런 비판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의 책은 당사자에겐 잘만 하면 ‘대박’이다. 출판기념회라는 이벤트를 통해서다. 


출판기념회는 겉으론 출판사의 통상적인 영업행위로 치러지기 때문에 구매자가 책값으로 봉투에 얼마를 넣든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으며, 규제할 법도 없다. 수익금을 가늠할 수 없고, 누가 챙기는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최성 고양시장이 서울시 사용 불법건축물 철거에 대한 경고장을 부착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최근 수도권의 대표 도시인 경기 고양시 최성 시장이 사인회에 이어 출판기념회를 추진해 말이 많다. 선거철 출마 후보자도 아닌 각종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자치단체장이 임기 중에 출판기념회를 여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책의 질을 떠나 경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또 출간을 축하하는 순수한 자리가 아닌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 수밖에 없다. 


최 시장은 책이 나온 지 한 달 만인 지난 7월 서울 교보문고에서 이미 한 차례의 사인회를 가졌다. 고양지역 일부 사업가들이 상경해 눈도장을 찍기도 했다. 사인회에 이어 최 시장은 지난달 18일 일산킨텍스 그랜드볼룸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하고 다량의 초청장을 배포했다가 당시 태풍 북상을 이유로 연기했다. 


최 시장은 지난 5일 고양시청 기자실에서 연기된 출판기념회 일정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출판사가 준비 과정에서 지출한 돈이 많아 예정된 출판기념회는 치러야 할 것 같다”며 재추진 의사를 밝혔다. 고양시청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민원인과 사업가들은 최 시장의 사인회에 이은 출판기념회가 달갑지 않다.


고양지역 한 사업가는 “임기가 1년9개월가량 남은 시장이 출판기념회를 한다는데 지역에서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 모른 척한다는 게 쉽겠느냐. 책값으로 얼마를 내야 할지 솔직히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사인회 때 몇 권의 책을 산 또 다른 사업자는 출판기념회에서 추가로 더 구입할 예정이라고 했다. 고양시청 직원들도 고민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직원들 사무실 책꽂이에서 최 시장의 책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 시장은 기자가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대해 취재를 시작하자 연기 20여일 만인 10일 오후 전화를 걸어 “출판기념회는 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입장을 바꿨다. 최 시장은 이번에 펴낸 <대통령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라는 책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민심은 천심이다. 민심을 적극적으로, 정확히 읽으라”고 주문했다. 정작 최 시장 스스로가 그동안 사심이 앞서 민심을 정확히 읽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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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글쓴이가 사는 동네 육교에 ‘여유를 띄어 보세요’라고 쓰인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여유를 띠어 보세요’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띄어’가 아니라 ‘띠어’가 맞는 말이라고 지적한 모양이다.


‘띄다’와 ‘띠다’는 발음이 엇비슷해 서로 섞바꿔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띄다’와 ‘띠다’는 두 가지만 알면 헷갈릴 염려가 없다.


(경향신문DB)


먼저 ‘뜨이다’의 준말인 ‘띄다’는 “눈에 보인다, 청각을 긴장시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원고에 가끔 오자가 눈에 띈다” “아이의 귀가 번쩍 띄었다” 따위로 쓴다.


그리고 ‘띄다’는 “간격을 벌어지게 하다”라는 뜻을 지닌 사동사 ‘띄우다’의 준말이기도 하다. “두 줄을 띄고 써라” “다음 문장을 맞춤법에 맞게 띄어 쓰시오”처럼 쓰인다.


이 외에는 전부 ‘띠다’를 쓰면 된다. 즉 띠나 끈 따위를 두르다, 용무나 직책 또는 사명 따위를 지니다, 어떤 성질이나 특성·감정·표정을 갖다 등의 의미로 사용할 때는 ‘띠다’를 써야 한다.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에 띠를 띠다” “노기를 띠다” “보수적 성격을 띠다” “대화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등은 ‘띠다’가 적절하게 쓰인 사례다.


간단히 정리하면 눈이나 귀와 관련된 말일 때는 ‘뜨이다’의 준말인 ‘띄다’를 적고, 그 외에는 전부 ‘띠다’를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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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정 문화부 차장


최근 열린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민주통합당 신경민 국회의원이 간송미술관의 문화재 훼손 문제를 지적했다. 신 의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목격자들의 증언을 공개했다. 10여년 전 미술사학자인 고 진홍섭 전 이화여대 박물관장이 간송미술관 수장고에 들어가 본 뒤 제자들에게 “큰일이다! 큰일! 다 썩었어”라면서 “간송 측에 전적, 회화 관리 상태가 열악해 손질, 소독을 제안했으나 간송에서 거부했다”고 말했다는 것. 또 2008년 70주년 기념전을 관람한 한 언론인은 정약용의 ‘다산심획’ 첩 중간 부분이 너덜너덜 벗겨지고 심한 얼룩 자국이 있었다고 언론에 기고했고, 2009년 겸재 서거 250주년전을 관람한 한 한국화가는 “겸재 정선의 ‘필운대’ 진열관 내부에 살아 있는 벌레가 들어가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는 사실이다.


간송미술관의 ‘풍속인물대전’을 찾은 관람객들 (경향신문DB)


 올해로 설립 74주년을 맞는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국보 12점, 보물 8점을 포함한 유물 5000여점을 보유한 국내 최고의 사립박물관이다. 간송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없던 시대에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은 인물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대 법학부에 유학한 그는 종로 상권을 장악한 미곡상 집안의 아들로, 민족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의 보존이 민족정기 회복운동이라는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가르침을 지표로 삼아 독립운동 하듯이 미술품을 수집했다. 그런 그가 1938년 서울 성북동 언덕에 세운 개인박물관 보화각이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다.


간송미술관은 문화부 기자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다. 이곳은 1971년부터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주제를 정해 소장 미술품을 일반에 무료 공개하는데 전시에 앞서 담당기자를 미술관으로 초청해서 기자간담회를 갖는다. 미술관 측은 그 흔한 보도자료 한번 만든 적이 없다. 기자간담회 일시를 알려주면 미술관으로 찾아가고 최완수 미술관 산하 한국미술연구소장이 전시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알아듣기 어려운 간담회는 신참기자들이 진땀을 빼는 장소다. 그래도 어느 한 명 불평하는 기자가 없고 간송미술관 전시는 항상 문화면 톱기사가 된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전시장이 좁아 관람 인원을 제한하기 때문에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간송의 애국적 행위, ‘간송학파’라고 불릴 만큼 열정적인 연구로 미술관을 최고의 경지에 올려놓은 후학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제기됐던 간송미술관의 공공성 확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문화재를 퇴락시키는 시간은 논쟁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신경민 의원의 문제 제기 이후 간송미술관 측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수장고가 비밀이고 전체 문화재 도록조차 없어 문화재가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보안 때문에 수장고를 공개할 수 없는데다 자체 소장 유물 목록을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회화의 경우 20~30년마다 손질이 필요하고 비용이 1억원까지 소요되지만 문화재청으로부터 비용에 대한 지원책을 구체적으로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해명은 또 다르다. 유홍준 전 청장 시절부터 문화재 보호를 위해 정부가 지원해 주겠다고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간송 측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는 개인 소장이면서 공공성이 강하다는 딜레마가 있다. 사유재산이니 정부가 함부로 관리하려 들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방치해도 안된다. 지원이 먼저냐, 공개가 먼저냐. 간송미술관과 문화재청의 긴장을 지켜보는 제3자의 눈에는 양 기관의 협력이 절실해 보인다. 그것이 문화재를 통해 우리 문화와 민족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간송의 뜻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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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 | 변호사·자유경제연구원장


초한(楚漢)의 패권 경쟁이 오래 인구에 회자되는 건 반전(反轉)의 묘미 때문이다. 항우는 영웅의 풍모를 지닌 불세출의 역사(力士)였지만 인정이 많았고 위인이 반듯해 명분을 중시했다. 홍문연에서 책사(策士) 범증은 유방을 죽이라고 했는데 항우는 명분 때문에 천하를 다투던 적수를 살려보낸다.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유방은 원래 주색에 빠져살던 건달이었다. 그는 음흉하고 욕심이 많았다. 게다가 뒷날 일등공신 한신마저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 유방이 항우를 이긴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도대체 항우는 왜 진 것인가? 사가들은 항우가 진평의 반간계(反間計)로 범증을 내친 것을 패착으로 든다. 그 무렵 항우는 대세론에 취해 있었다. 천하는 곧 자신의 것이 될 터였고, 유방 따위는 한낱 검불에 불과해 보였다. 반면 유방은 책사 장량을 중히 썼다. 유방은 적은 병력으로 막강한 항우의 군대를 사면초가에 내몰았다. 항우는 결국 오만 때문에 오강에서 목숨과 천하를 다 잃었다.


 대선이 두달여 남은 지금 후보들 캠프에는 인재들이 모여든다. 오랫동안 보수 반열에 있었던 박근혜 곁에는 그 반대편 정객이었던 김종인이 있고, 진보를 외치는 문재인 옆에는 과거 보수의 책사를 자처하던 윤여준이 있다. 그리고 변화와 참신함을 내건 안철수에게 이 나라 금융을 좌지우지하던 노회한 이헌재가 갔다. 모두 천하를 내려다보던 범증의 나이이니 경륜만큼은 차고 넘친다. 다 당대의 학자요, 책사며, 행정가다. 집권 후 자리를 탐할 나이도 아닌 그들이 월급 한 푼 주지 않는 캠프에 간 건 나라를 구한다는 일념 때문일 것이다.


선거판의 책사는 적의 칼날이 늘 노리는 백척간두의 자리다. 말 한마디 실수로 목이 달아나는 건 고사하고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다. 게다가 이기면 모든 영광은 후보에게 가지만 졌을 때엔 온갖 비난을 받는 자리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념과는 상관없이 젊은 주군의 막사로 찾아든 건 주군을 도와 천하를 도모할 포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지막 멸사봉공의 기회라고 스스로 다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누가 장량이며 누가 범증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까닭은 세 후보의 정책이 같고 내건 슬로건이 같기 때문이다. 세 후보 다 경제민주화, 일자리, 복지를 외치고 대북정책을 바꿔 남북관계를 풀겠다고 한다. 그런데도 막상 구체적 정책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니 세 후보 곁에서 정책을 내고 책략을 강구하는 책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주군과 이 나라의 명운을 함께 틀어쥔 파워맨인 것이다. 


박근혜, 김종인과 함께 (경향신문DB)


박근혜에게 부족한 것은 좌파 유권자에 대한 유인책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왼쪽으로 가 있다. 그녀가 김종인을 책사로 삼은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다. 경제민주화 구호를 선점하면서 재벌과 대립하고 뭔가 현재의 구도를 바꿀 수 있다는 이미지다. 문재인도 굳이 반대진영의 책사를 모실 정도로 전략이 부족하지 않다. 그는 민주당에 합류해 오랫동안 선거를 준비한 손학규를 가볍게 제친 고도의 전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필요한 건 우파 유권자를 안도시키고 자신의 좌파 색깔을 옅게 만들어줄 인물이다. 안철수는 어떤가? 그는 성인(聖人) 이미지로 청년층의 열화 같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에게 불안한 요소가 있다면 바로 그 성인 프레임에 갇힌 것과 아무런 정치적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리즘이다. 게다가 아직 그는 구체적 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인 적이 없다. 이 점을 보완해줄 이로서 이헌재만 한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은 책사들이 무슨 전략을 내놓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 주군과 세 책사들이 과거 자신들의 이념이나 신념 따위와는 상관없이 뭉쳤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점을 겁낸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접는 경우가 몇 차례나 될까? 그렇다면 세 책사 중 생의 끝에서 자신을 버리고 주군에게 헌신하는 자는 누구며, 세 주군 중에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고 오로지 이기기 위해 책사의 진언을 수용하는 이는 누구인가? 뉴스에 박근혜 캠프의 분란이 뜬다. 차라리 좋은 징조다. 나는 자신의 철학을 가진 지도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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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만 변호사 |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위원


 

2005년 신세계그룹 회장의 딸이자, 이마트 대표의 여동생이 조선호텔 내 하나의 사업부를 따로 떼어 주식회사 조선호텔베이커리로 만들고, 그 회사의 주식 40%를 63억8000만원에 매입했다. 이후 이 회사는 전국적 유통망이 확보된 이마트를 비롯한 신세계 계열회사에 독점적으로 입점해 시중가격보다 30%가 싼 ‘이마트 피자’를 판매했고, 그 결과 2006년 당시 867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2010년에는 1677억원에 이르게 됐다. 여기까지가 2011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권보고서에 기재된 내용이다. 이후 조선호텔베이커리는 2011년 신세계 SVN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당연도 매출 2565억원을 기록했다.


(경향신문DB)


이 회사는 불과 5년 만에 원년 매출의 2배를, 그리고 6년 만에 3배의 성장을 거두었는데,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그 ‘고속성장의 비결’을 공개했다. 재벌의 계열회사에 대한 부당지원이 비결이라는 것. 신세계와 이마트 측은 ‘롯데 브랑제리’ 등 다른 ‘재벌 빵집’도 비슷한 방법으로 회사를 키웠는데, 왜 우리만 문제 삼느냐며 행정소송을 제기하겠다는 태도이다. 모기업에 무임승차해 초저가 판매전략으로 골목상권을 초토화시킨 것에 대해, 수십년간 일구어온 ‘동네 빵집’을 하루아침에 문 닫게 한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의식도 없는 듯하다.


 



이러한 재벌들의 행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재벌들이 골목상권으로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시켜야 한다. 막강한 자본력을 자랑하는 재벌들은 세계로 뻗어나가야지 굳이 영세한 골목상권 영역에 들어올 필요가 없다. 그것도 오너 일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공룡 재벌마트를 규제하고, 중소기업과 중소상인이 영위하기에 적합한 소규모 업종에 재벌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빵집들은 재벌 빵집의 탐욕에 맞서 고전하다가 하나둘 사라져갔다. 그리고 지금 전국 곳곳에는 죽을힘을 다해 재벌들의 탐욕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홈플러스 입점 저지 농성장, 울산 코스트코 입점 저지 농성장 그리고 인천 삼산동 식자재대형마트 입점 저지 현장이 그런 곳이다. 부디 국회는 골목상권을 터전으로 삶을 꾸려가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희망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골목상권 보호를 위한 조속한 입법개정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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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효 | 국민건강보험공단 건보정책연구원장


 

보험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보험사기로 전체 국민이 가구당 20만원, 1인당 7만원을 허비하는 셈이라고 한다. 보험사기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이 허위입원 사기인데, 최근에는 통원치료가 필요한 지방거주 환자들에 착안한 ‘모텔형 병원’ 사기가 적발되기도 했다. 적발된 병원들은 실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사무장과 간호사 등이 임의로 진료차트를 작성·조작하고 허위진단서를 남발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허위입원 보험사기는 국민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우선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민영보험회사의 재원이 누수되고, 이는 선량한 보험계약자에게 보험료 인상이라는 불합리한 결과를 야기하고,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에도 구멍을 내어 전체 국민들의 건강보험료 부담을 가중시킨다. 이처럼 선량한 보험계약자는 물론 전체 국민을 피해자로 만드는 허위입원 보험사기를 막기 위해서는 관련 주체가 힘을 모아 적극적이고 종합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경향신문DB)


첫째, 정부는 국민들이 보험사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적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보험사기를 억제할 수준의 형사처벌과 경제적 제재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보험사기에 가담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얻는 이익보다 처벌이 경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자, 의사, 병원 할 것 없이 부당이득을 환수하고, 보다 강력한 형사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지금의 제도를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 


둘째, 민영보험회사는 보험금 지급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을 좀 더 명확히 만들어 실질적 치료를 받는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를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보험사기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적발해야 하며, 이를 위해 충분한 인력과 효율적 시스템을 마련하고 운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보험사기의 적발과 예방을 위해 유관기관 간 긴밀한 협조체제가 구축돼야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금융감독원, 민영보험회사, 그리고 수사기관 간의 유기적인 공조체계를 더욱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건강보험과 민영보험 간의 균형 잡힌 발전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민영보험 가입자가 도덕적 해이와 보험사기를 통하여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보험상품 설계와 효과적인 모니터링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민건강보험이 미처 보장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민영보험이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역할분담과 상호협력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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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 호서대 교수·초록교육연대 상임대표


 

지난달 27일 경북 구미시 (주)휴브글로벌에서 발생한 불산유출 사고로 5명이 사망하였고, 정부의 초동대처 실패로 2차 피해가 급속히 늘면서 현재까지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두통, 구토, 피부발진 등 건강이상 증세로 병원치료를 받았다. 


사고현장에서 100m 남짓 떨어진 봉산리 주민들은 정부의 늑장대처에 분통을 터뜨리다 결국 스스로 안전지역으로의 이주를 결정했고, 정부는 사고발생 12일이 지나서야 사고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사고는 화학물질 사고에 대한 정부의 비전문적 대처는 물론이고 책임 모면에만 급급해 사고대처 매뉴얼까지 무시한 결과 수많은 거주민들의 건강을 해친 초대형 인재이다. 정부는 시민단체가 포함된 전문가위원회를 새로이 구성해 정밀대책을 마련하고 장기적 역학조사를 실시해 주민들 치료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경북 구미의 불산가스 누출 사고로 콧물 흘리는 소 (경향신문DB)


헬기를 타고 내려다본 사고현장은 산과 들이 온통 갈색으로 변해 마치 맹독성 제초제 폭우가 쏟아져 식물들이 다 고사해버린 죽음의 땅같이 보였다. 불산이 표면에 흡착돼 농작물은 죄다 말라 죽었고, 나뭇잎도 허옇게 타들어가며 떨어졌다. 비닐하우스 안의 고추도 얼룩덜룩 변했고 멜론도 허옇게 마르면서 땅에 떨어져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또한 인근 축사의 소들도 불산가스에 그대로 노출돼 피가 섞인 콧물을 흘리고 사료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등 이상 증세를 보였다.


불산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산화제로 유리는 물론 금은을 제외한 대부분의 금속을 녹인다. 게다가 표면장력이 아주 작아서 피부나 점막을 통해 쉽게 침투해 세포막을 망가뜨린다. 불산가스는 물과 쉽게 반응해 불소 이온으로 변해 혈류를 타고 칼슘이나 마그네슘 이온과 결합해 침전물을 만든다. 이 때문에 저칼슘·저마그네슘혈증이나 고칼륨혈증을 유발하며 심실세동을 일으켜 심장을 멎게 만들 수도 있다. 또한 만성중독을 불러오며 폐, 간, 신장 장애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 칼슘을 공격해 뼈를 약화시킨다. 


그런데 사고 당시 공장에서 석회수를 뿌려 불화칼슘으로 침전시켜 제거해야 하나 그냥 물을 뿌리는 바람에 불산가스가 주위에 확산되면서 더 큰 피해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시민들이 불산가스에 노출되지 않도록 장기적인 만반의 조치를 취해야 했으나 국립환경과학원은 장기노출에 의한 2차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안전 기준치를 해석해 발표했다. 구미시는 이를 믿고 사고종료 선언도 되기 전인 하루 만에 주민대피령을 해제하고 서둘러 주민들을 귀가조치시킴으로써 끔찍한 2차 노출 재난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사고책임 모면에만 급급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더구나 화학물질 재난 발발 시 피해가 예상되는 인근 주민들은 화학물질관리법 제39조 제3항에 근거해 사고 시 주민의 대피요령이나 사고물질에 노출 시 응급조치 요령, 방제진행상황의 홍보방법 등이 매뉴얼로 보급돼 정기적인 교육이 실시돼야 했다. 그런데 자체 방제계획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무사안일하게 재해예방규정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주민들은 무려 열흘이 다 돼서야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뒤 늦게 스스로 이주결정을 내렸는데 그동안 무방비 상태에서 열흘이 넘게 불산 공기를 다 마셨으니 죽으면 누가 책임질 거냐며 절규하고 있다.


환경부는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화학물질재난방제 종합대책을 세워야한다. 특히 불산의 인체에서의 반감기가 10년 가까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전문가들이 5~10년 정도 역학조사를 해 가능한 모든 인체증상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을 세워 대처해야 한다. 또한 재해구역에 폴리스라인을 설치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가축 분뇨가 등겨와 섞여 퇴비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피해의 주변 확산을 차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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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66돌이 되는 지금 한글과 우리말은 세계무대에서 날로 성가를 드높이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서툰 우리말로 흥얼거려지고 ‘세종학당’이 개설된 43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한글 배우기 열풍이 뜨겁다. 언어학자들은 “소리와 글이 체계적으로 연결된 완벽한 문자”라며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 과학성을 인정하고 있고, 심지어는 패션계를 중심으로 그 미적 가치까지 상품화하고 있다. 이런 흐름을 타고 정부는 ‘한글 한류’ 확산에 열을 올리고, 국회에서도 어제 여야 의원이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글날 광화문 서예 퍼포먼스 (경향신문DB)


하지만 막상 오늘 한글날을 맞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자부심보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한글과 우리말은 정반대의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차칸남자’ 파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에 만연하던 한글 파괴가 공영방송에까지 번지기에 이르렀고, 외국어 남발로 인한 한글 오염이 공문서에까지 활개치고 있다. 특히 어제 보도된 국가기관의 한글 파괴 사례는 도를 넘은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문화연대가 지난 3월부터 3개월간 입법·사법·행정부 보도자료를 조사한 결과 한글 설명 없이 영어 약자만 쓰는 등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사례만 건당 4.4회를 넘은 것으로 나타난 게 그렇다. 이를테면 ‘국회입법조사처(NARS)’ ‘자동출입국심사(SES)’ ‘국제군인스포츠위원회(CISM)’라고 써야 할 것을 그냥 ‘NARS’ ‘SES’ ‘CISM’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정부·공공기관의 외국어 남용과 영문 약어 남발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라든가 kobaco(한국방송광고공사),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KORAIL(한국철도공사)처럼 기관명에 영문 약어를 앞세운 지는 이미 오래다. 문서나 홈페이지에 ‘information’ ‘customer’ ‘contact us’ 등 아예 영문을 사용하는 곳도 비일비재하다. ‘솔라밸리 마스터 플랜’ ‘솔라 그린시티’ ‘에어로폴리스’ 등 영어식 사업명도 판치고 있다. 언론 등 민간부문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다.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외래어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국가기관과 공공부문이 앞장서 국어를 경시하고 파괴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인될 수 없다. 그것은 외국어를 모르는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자 법을 위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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