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비평'에 해당되는 글 3616건

  1. 2017.11.16 [사설]판문점 교전수칙 변경은 위험한 발상이다
  2. 2017.11.16 [기자칼럼]있는 아이라도 지켜주는 사회
  3. 2017.11.15 [이대근 칼럼]균형은 우리의 운명
  4. 2017.11.14 괜찮아, 사랑이야? 아니야!
  5. 2017.11.14 [사설]전병헌 정무수석, 사퇴하고 검찰 조사 받는 게 순리
  6. 2017.11.14 [사설]새 보수의 험난한 길 개척해야 할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
  7. 2017.11.13 [사설]자신이 저지른 적폐 성찰 않고 청산작업 비판한 이명박
  8. 2017.11.13 [정동칼럼]‘여성의 몸’은 여전히 남성들의 전쟁터
  9. 2017.11.13 [아침을 열며]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전히 구치소에 있어야 하는 이유
  10. 2017.11.10 [편집국에서]생각하고, 말하고, 반대하라
  11. 2017.11.10 [정동칼럼]성장 논쟁
  12. 2017.11.09 보수, 그 치명적인 향기와 독
  13. 2017.11.09 [사설]국정원 정치개입 수사를 흔드는 불순한 목소리
  14. 2017.11.09 [사설]트럼프의 국회 연설이 남긴 숙제들
  15. 2017.11.08 [정동칼럼]초과세수를 넘어 복지증세로
  16. 2017.11.08 [사설]청와대 수석 전 비서관 비리 철저히 규명해야
  17. 2017.11.08 [사설]“한·미 FTA는 미국에 좋은 협상 아니었다”는 트럼프
  18. 2017.11.08 [사설]한·미 정상, 몇 가지 우려 해소했지만 북핵 해법은 없었다
  19. 2017.11.07 “전관 재취업 옛말” 국토부 간부의 빈말
  20. 2017.11.07 [조호연 칼럼]누가 더 위험한가

북한 군인 한 명이 지난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총격을 받으며 남측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측 군당국이 미온적으로 대응했다고 야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그제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 등은 송영무 국방장관을 상대로 북한 측에 대응사격을 하지 않은 점을 질타했다. 그래서인지 군이 판문점에도 한국군 교전수칙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한다. 판문점 내 북한의 공격에 적극 대응하도록 유엔군 대신 한국군 전투방식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한미 국방장관이 경기도 파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대북 메시지를 발표한 지난달 27일 오후 북한 병사들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을 둘러보는 한미 국방장관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드러난 허점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 당장 판문점 내 감시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 사건 당시 군은 북한군이 차량으로 넘어오는 것은 관측했지만 이후 상황은 놓쳤다. 군사분계선 남쪽 50m 지점에 쓰러진 북한 병사를 발견하는 데 15분이 걸렸다. 경비는 한국군이 맡는데 작전지휘권은 유엔사가 행사하는 지휘체계도 재고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판문점은 남북 대화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런 곳에서 총격을 자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정전협정 때부터 판문점 내에 권총과 비자동소총만 반입 가능한 것도 이곳을 평화의 장소로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판문점에 적용되는 교전수칙은 비무장지대에 적용하는 일반적인 유엔사 교전수칙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총격이 벌어져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에서만 대응함으로써 확전을 방지하도록 한 것도 그런 취지 때문이다. 그런 판문점에 한국군 교전수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국군 교전수칙은 비례성의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의 도발 수준에 따라 3~4배로 응징하게 돼 있다. 더구나 유사시에는 현장 지휘관이 스스로 판단해 ‘선(先) 조치, 후(後) 보고’ 하게 돼 있다. 사소한 갈등이나 우발적인 총격이 확전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판문점에서 군의 대응이 미온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꼬투리 잡기다. 북한군이 귀순할 당시는 판문점 방문객이 없는 날이라 경비병 자체가 배치되지 않았다. 북한군이 남측 지역으로 넘어와 사격을 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응사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판문점을 대화가 아니라 전투의 장으로 만들자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판문점에서까지 총질이 빈번해진다면 대화 장소로서의 의미는 상실하게 된다. 판문점에 한국군 교전수칙을 적용하겠다는 발상은 거두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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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황금연휴’를 시작하던 지난달 1일 부모와 놀이공원에 놀러온 4살짜리 아이가 숨졌다. 경기 과천시 서울랜드 주차장에서 SUV 차량이 부모와 함께 있던 아이를 덮쳤다. SUV 차량에는 운전자가 없었다. 경사가 진 주차구역에 차를 세운 운전자는 사이드브레이크를 제대로 채우지 않은 채 내렸다. 이 사고로 아이는 숨졌고 엄마와 아빠도 다쳤다. 엄마는 당시 임신 20주인 상태였다.

지난 6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란에 글이 올라왔다. 한 달여 전 서울랜드 주차장 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라고 했다. 아이 엄마는 “가해자는 기어를 드라이브(D)에 넣고 사이드브레이크도 안 잠근 채 자신의 가족과 매표소에 갔다”며 “그 끔찍한 일은 그 사람이 잘못한 게 맞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 엄마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이유는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아이 엄마는 “더 이상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는 사람이 없게 하도록 법을 만들어 달라”며 청와대에 청원을 넣었다.

아이 엄마는 “매일 울며 이 지옥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아이들에게도 닥칠 수 있는 불행을 막으려 했다. 아이 엄마는 “첫째로 경사진 주차장 특히나 아이들이 많이 있는 마트와 놀이동산 등 다중이용시설 주차장에는 사이드브레이크나 제동장치에 대한 안내문과 방송 등이 법으로 의무화되길 바란다”고 했다. 둘째로는 “자동차 사이드브레이크나 제동장치로 인한 사고 시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있길 바란다”고 했다.

관련법은 이미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지난 2월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이 대표발의한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이 9월에 상정됐다. 이 법은 ‘경사진 곳에 정차하거나 주차하려고 하는 자동차의 운전자는 고임목을 설치하거나 조향장치(操向裝置)를 도로의 가장자리 방향으로 돌려놓는 등 미끄럼 사고의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예산안 심의와 ‘더 중요한 법률’ 등에 밀려 온전히 처리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아이 엄마는 호소했다. “경사가 있는 주차장에 주차 방지 턱이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누군가 주차방지턱을 타넘는 차를 보며 소리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경사진 곳이니 사이드브레이크를 반드시 채우라는 방송이나 안내문이 곳곳에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이 끔찍한 사고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청원했다. “이런 끔찍하고 어이없는 사고는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됩니다. 지금 제 아이가 있는 납골당에는 사이드브레이크로 인한 사고로 천국에 간 아이가 또 있습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하루 수백건의 ‘국민청원 및 제안’이 올라온다. 이 중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추천’한 청원에 대해서만 각 부처 장관이나 대통령 수석 비서관, 특별보좌관 등이 답변한다. 이런 절차를 거쳐 지난 9월에는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비서관과 김수현 사회수석비서관이 ‘소년법 개정청원’에 답변을 내놓았다. 지난 9월30일부터 10월30일까지 23만5372명의 청원을 받은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도입’은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달 6일 마감되는 ‘조두순 출소반대’ 청원은 이미 40만명을 넘겼다.

지난 6일 올라온 ‘경사진 주차장에 경고문구 의무화와 자동차 보조제동장치 의무화를 요청합니다’란 청원은 열흘이 지난 15일까지 5만명도 모으지 못했다. 마감시한인 12월6일까지 20만명을 채우지 못하면 아이를 잃은 엄마의 청원은 그대로 사라질 것이다.

아이 엄마는 청원글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아이를 더 낳는 세상이 아니라 있는 아이나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원합니다. 제 아이처럼 이렇게 허망하게 가는 아이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됩니다.” 청와대와 정부의 답변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책사회부 홍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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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이래 문재인 정부까지 10년의 외교사는 미국과 중국 사이 균형에 실패한 시기였고, 또한 균형을 찾는 시기였다. 이 대통령은 한·미동맹 만능주의의 초기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균형의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법도 몰랐지만 균형의 가치는 인식했다. 보수정권으로서는 처음 균형외교를 뜻하는 ‘조화’라는 용어를 쓴 것도 박근혜 정부였다. 문 대통령은 사드·트럼프 요인에 흔들렸지만 균형외교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이 주변 강국 사이에서 평화와 번영의 국익을 추구하는 정상 국가라면 균형은 피할 수 없는, 냉정한 게임의 규칙이다. 이념이나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의 문제다.

본래 한·미동맹은 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이 동맹을, 미국이 한·중 협력을 상호 존중할 수 있었던 것도 동맹의 대상이 명확하고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민주주의·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가치 동맹’으로 성격을 바꿨다. 이념적으로 중국과 선을 그은 것이다. 그리고 군사동맹의 틀을 완전히 벗고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확장했다. 이젠 “아·태지역, 나아가 범세계적 안보 및 번영의 핵심축”이다. 박 대통령은 이를 발전시켜 ‘글로벌 파트너십’이라고 했고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미국이 적이라고 찍으면 우리에게도 적이 된다. 이제 적은 북한만이 아니다.

이렇게 달라진 동맹은 균형외교에 난관을 조성한다. 중국 견제 의미를 띤 동맹을 유지하면서 한·중관계를 발전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 집 나간 동맹을 한반도에 묶고 대중협력을 확대하는 실용적 접근을 해야 한다.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온전히 한 국가에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중 간 사드 갈등 때 미국이 그걸 입증했다. 미·중 간 전략적 이익 갈등이 사드 문제의 본질인데도 미국은 중국의 한국 경제 보복을 지켜보기만 했다. 미국이 사드 철수 카드로 북핵을 해결하도록 중국을 압박하자는 구상이 나돌 때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의 베이징행을 앞두고는 북핵 문제를 두고 시진핑과 최후 담판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있었다. 그런데 시진핑으로부터 2000억달러 통상 선물을 받고는 “중국을 비난하지 않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 오후 청와대에서 전통의장대를 지나 공식환영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취임 초는 그 반대였다. 중국에 무역불균형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100일의 시간을 줄 테니 북핵 해결에 나서라, 그렇게 못하면 미국 독자 행동으로 해결하겠다고 압박했다. 통상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안보를 얻겠다는 전략이 안보를 희생해서 통상 이익을 챙기는 거래로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이는 미국이 부쩍 커진 중국을 미국 뜻대로 움직일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이 중국에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무조건 미국을 따라야 한다는 편승외교, 동맹 만능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균형은 남북관계와 동맹 간에도 필요하다. 인도를 찾은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국제사회가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정지시켜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인도는 소통 창구를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거부했다. 그런데 인도 논리를 먼저 도입한 쪽은 미국이다. 북한의 국제적 고립을 주도한 틸러슨은 대북 채널이 2~3개라고 자랑했다. 한국은 하나도 없다. 남북대화와 동맹은 함께 가야 한다.

균형을 잃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 방법이 있다. 소리가 난다. 바로 나라 밖에서 주권, 주권 하는 소리다.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제약하는 강화도조약에서 조선을 주권국이라고 명시할 때 그랬다. 조선은 일본 것이니 다른 열강은 넘보지 말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미국 요구에 한국이 사드 배치로 기울 때도 그랬다. 중국에서 ‘한국은 주권국’이라고 했고, 미국에서도 그 소리가 났다. 이번에 한·중 간 사드 갈등을 봉인하면서 균형외교 논란이 일자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그랬다. “한국이 주권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에 온 트럼프가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 한국을 건너뛰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한국인들은 안도했다. 하지만 좀 이르다. 북핵 논의에서 한국이 밀려날지 여부는 한국이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북핵 문제를 미국에 맡겨 놓았다면 결코 안심할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를 떠올려 보자. 한국으로부터 같은 요청을 받은 미국은 형식적인 남북대화 기회 한 번 주는 절차를 거쳐 북한과 단독 협상했다. 자기의 운명을 남의 선의에 맡기는 자에게 돌아갈 것은 없다.

우리가 진정 주권국이라면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서야 한다. 오른발이 왼발에 필요 없는 발이라고 불평하지 않고, 왼발이 오른발을 쓸모없다고 무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뚝 설 수 있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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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사랑이야.’ 드라마 같은 제목의 기사에 눈길이 끌렸다. 훈훈한 로맨스 이야기인가 싶어 클릭해 몇줄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욕설을 쏟아내고 말았다. 여중생을 성폭행해 임신까지 하게 만든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내용. 법원은 피해자였던 여학생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 했고, 순수한 사랑을 나눴다는 남성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에는 무수한 댓글이 줄을 이었고 분노로 들끓었다. 2년 전의 일이었다.

며칠 전 같은 사안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결이 확정됐다. 달라진 건 없다. 아니, 통념상 납득되기 힘들거나 상식의 기준을 넘어서는 관계라도, 경우에 따라 위계나 강압에 의한 성폭행일지라도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게임의 룰만 잘 파악한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천하에 확인시켜 줬다.

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을 도와줘요.’ 2014년 10월29일 대학 캠퍼스 성폭행 반대를 위한 전국 행동의 날 시위의 포스터.

물론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건의 개요만을 본 나는 이 사안의 실체적 진실을 모른다. 또 다른 극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건지, 정말 그들의 관계가 순수한 사랑이었던 건지 단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40대의 유부남이 15세의 여자 중학생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뭐가 정상이고 상식인지 뒤죽박죽인 세상이 됐다지만 적어도 이건 아니지 않나.

법적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근거로 해야 함도 옳다. 하지만 이번 사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법을 다루는 이들 사이에 뿌리내린 성폭행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행위가 발생한 그 순간의 위력이나 협박 유무, 피해자의 대처 정도가 처벌과 판단의 주된 근거가 된다는 점 말이다. 어린 여학생이 쓴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와 문자메시지는 판결의 중요한 증거가 됐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부터 임신, 가출, 출산까지의 과정에서 그 여학생이 겪었을 무력감과 고통의 무게는 그 판단에 얼마나 작용했을까. 같은 판결문이 여학생에게는 “왜 그 정도 나이 먹고 앞가림도 못하냐”는 질책으로, 40대 남자에게는 “순애보의 주인공”이라는 감탄으로 들리는 것은 나뿐만일까. 성폭행 피해 여성을 두고 ‘흔들리는 바늘에 실을 꿸 수 없다’는 식의 가공할 망언을 일삼으며 능멸하던 우리 사회의 수준은 여전히 한발도 진전하지 않은 것 같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의제강간 연령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강해지고 있다. 의제강간은 사랑이나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강간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현행 법령에선 만 13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적용된다. 즉 이 나이 미만은 성적 행동이나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이 없으므로 이런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관계는 처벌받는다.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에서는 이 연령을 16세로 높이자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해왔고 개정 법률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논란은 분분하다. 그렇다면 성숙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적절한 연령대는 몇살인가. 문득 드는 의문은 정치적 결정권과 성적 자기결정권 연령의 판단기준이다. 투표권과 같은 정치적 결정권은 19세, 성적 자기결정권은 14세다. 둘 다 중요한 판단력이 필요한 일인데 그 차이가 너무 커 종잡을 수 없다.

성폭행에 대한 처벌은 엄정해야 하고 법적 장치도 잘 정비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청소년이 성폭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고민과 해결책이 시급하다. 위계관계에서 권력이나 경제력을 무기로 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상이 됐다. 그 기반엔 “어릴수록 좋다” “딸 같아서…”라는 말로 통용되는 남성들의 그릇된 성적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다.

얼마 전 코미디언 유병재씨가 낸 <블랙코미디>에 실린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맘 같아선 국회의사당과 법원, 검찰청, 경찰서마다 붙여놓고 싶다.

‘딸 같아서 만졌다니, 딸 치려고 만졌겠지.’(‘딸 같아서 만졌다’)

<문화부 |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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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성폭행

검찰이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을 이번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 수석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 윤모씨 등은 2015년 4월 전 수석이 명예협회장이던 한국e스포츠협회를 통해 롯데홈쇼핑에서 3억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지난주 구속됐다. 전 수석은 당시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으로 홈쇼핑 재승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강현구 롯데홈쇼핑 사장이 전 수석을 직접 만난 것으로 파악된 점, 롯데홈쇼핑이 일개 의원 비서관인 윤씨를 의식해 e스포츠협회에 거액을 후원할 가능성은 낮은 점 등으로 미뤄 검찰은 이 돈이 전 수석에게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검찰은 전 수석 가족이 롯데홈쇼핑 기프트카드를 사용한 정황도 포착했다고 한다.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이 10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며 시계를 보고 있다. 김기남 기자

전 수석은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과거 일부 보좌진의 일탈에 유감스럽고 송구하게 생각하지만 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논두렁 시계 상황이 재현되는 것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2009년 검찰의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상황에 빗대 억울함을 호소했다. 전 수석 주장대로 그는 결백한지도 모른다. 검찰이 안팎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현 정부 실세인 전 수석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둥, 정부가 성역 없는 적폐청산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둥 뒷말도 많다. 그러나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소환이 임박한 상황이라면 전 수석은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서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이다. 전 수석이 기업으로부터 돈 한 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측근이 비리를 저질렀다면 그것만으로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청와대 정무수석은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국회 및 정치권과 소통하는 업무 등을 담당한다. 가뜩이나 여야 관계가 경색돼 있는데 정무수석이 검찰 수사까지 받고 있으면 국정이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다. 게다가 정부·여당의 각종 개혁법안과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위한 정기국회가 열리고 있다. 대통령이 후임을 임명할 수 있도록 전 수석이 길을 터줘야 한다. 대통령 수석비서관이 현직 신분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대대적인 적폐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야 한다. 전 수석은 사퇴하고 겸허하게 검찰 수사를 받는 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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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13일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선에서 낙선한 후 당 운영에서 뒤로 물러나 있다 보수통합 논의로 당이 흔들리자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험난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당장 보수통합론으로 반쪽이 된 당을 수습해야 한다. 통합파 의원 9명이 탈당해 자유한국당에 입당하는 과정에서 남은 의원들끼리도 갈등의 골이 생겼다. ‘시한부 동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여서 유 대표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면 당의 존립 자체가 어렵다. 어제 여야 원내대표 주례회동에서 제외된 데서 보듯 교섭단체 자격 상실에 따라 축소된 입지 회복도 그의 몫이다.

바른정당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된 유승민 의원이 13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진행된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지명대회에서 당 깃발을 흔들고 있다. 권호욱 기자

여기에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가 유승민 자신의 리더십이다. 유 대표는 의원들이 탈당하는 과정에서 대안은 내놓지 못한 채 ‘원칙 있는 통합’만 강조해 지나치게 경직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통합파의 집단탈당을 막으려고 전당대회를 연기하자는 중재안을 내놨을 때도 단호히 거부했다. 유 대표와 가까운 의원들마저 그의 태도에 실망해 등을 돌렸다고 한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함께할 세력을 모으지 못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결정적인 흠결이다. 이번에 당 소속 의원들이 ‘한 달 안에 중도보수 통합 논의를 진전시킨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당의 공중분해는 가까스로 막았다. 앞으로 유 대표 자신이 한국당, 국민의당과 연대·통합 논의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당과 다를 바 없는 유 대표의 고루한 안보관 역시 문제다. 합리적 보수를 주장하려면 달라진 현실을 반영한 안보정책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유 대표는 “낡고 부패한 기득권 보수, 철학도 정책도 없는 무능한 보수의 과거를 반성하고 진정한 보수의 길을 열겠다”고 선언했다. 대선공약을 재점검하고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겠다고도 했다. 그의 말대로 바른정당을 정책과 지향점이 분명한 정책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유 대표도 유연한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중도정당에 대한 시민의 수요는 분명히 있다. 다당 체제에서 시시비비를 명쾌하게 가리고 협치를 주도한다면 바른정당의 보수개혁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반면 유 대표의 독선이니 사당화니 하는 말이 나오면 당의 미래는 물을 것도 없다. 합리적 보수당의 성공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유 대표의 진화한 리더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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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검찰의 국군 사이버사령부·국가정보원 댓글공작 수사 등 문재인 정부 적폐청산 활동을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이 전 대통령은 12일 “지난 6개월간 적폐청산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며 “새로운 정부가 들어오면서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사회 모든 분야에 갈등과 분열이 깊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우리는 안보외교 위기를 맞고 있는데 군 조직이나 정보기관 조직이 무차별적이고 불공정하게 다뤄지는 것은 우리 안보를 더욱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불성설이고 적반하장이다. 적과 싸워야 할 국군 조직, 국가·국민을 위한 정보기관인 국정원을 정권의 통치기구로 전락시킨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이 전 대통령은 사이버사와 국정원 불법 활동의 결정권자이자 책임자다. 종범격인 김관진 전 국방장관이 구속되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법원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도 부족한 이 전 대통령이 반성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고 있으니 기가 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2일 초청 강연차 바레인으로 출국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국정농단의 원조는 사실 이명박 정권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재벌·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보수단체를 지원했으며, 공영방송 등 언론을 탄압했다. 정치보복을 한 세력도 이명박 정권이다. 검찰과 국정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이용해 전임 정부 인사 뒤를 캐고, 야당을 탄압했으며,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2012년 12월 치러진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정권이 갖은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박근혜 후보를 지원한 것은 도둑이 제발 저린 경우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전 대통령으로서는 문재인 후보 당선 시 후환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의 측근인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 전 대통령은 군과 정보기관의 댓글을) 시시콜콜 지시한 바가 없다”며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렇게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 전 국방장관은 사이버사 활동을 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관련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사이버사가 댓글조작을 하면서 청와대와 공모한 물증도 이미 나왔다. 법원은 “주요 범죄 혐의인 정치관여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며 지난주 검찰이 청구한 김 전 장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제 이 전 대통령이 설명해야 할 차례다. 떳떳하다면 검찰 수사를 피할 이유가 없다. 시간이 많지 않고, 국민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국민은 이명박 정권이 과거 5년간 저지른 반민주적·반헌법적 행위에 대해 실체 규명을 원하고 있다. 적폐청산 작업은 정치보복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다.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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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두 개의 사진이 화제였다. 겉보기에 별반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두 사진은 사실 젠더질서로 잘 봉합되어 있다. 하나는 11월4일 청와대 인스타그램이 공개한 것이다. 청와대 처마 밑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아래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신문을 읽고 있다. 설명에 따르면 하나하나 깎고 일일이 꿰어 관저 처마 밑에 널어두었다고 한다. 트럼프 방한 시기에 맞춰 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사이에 끼여 위태로운 한반도 정세 속에 인간안보와 평화의 의미를 재고할 요량이었을까. 소소한 삶의 정서가 넘치는 사람 사는 공간, 청와대를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향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전달하려 했을까. 그렇다면 의도는 선하다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한국을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와 7일 오후 청와대 접견실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은 젠더 위계질서뿐 아니라 여성들 간 분리라는 가부장적 전략을 무의식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다. ‘가정 안의 천사’는 군사패권주의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동북아 국제질서와 묘하게 분리되고, 풍전등화에 놓인 국가를 위해 ‘열 일하는’ 바깥양반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안방마님의 여유로움마저 풍긴다. 이로써 공적영역의 중요한 일은 남성의 몫이요, 사적영역의 돌봄은 여성의 역할이라는 고정관념은 케케묵은 이념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내조의 여왕’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여성 스스로도 가장 행복하다는 ‘여성성의 신화’는 다시 공고화된다. ‘보통’ 여성들의 힘겨운 일상과 괴리된 이 평화로운 장면은 각종 성차별의 현실을 밀어내고 비가시화하는 본의 아닌 효과마저 발휘한다.

청와대 바깥의 대한민국 여성들은 실제 지난 몇 주 동안에도 취업과 인사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며, 각종 위협과 폭력에 힘겨워하고, 이중노동에 시달리면서, OECD 국가 중 예외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 여성노인 빈곤율과 전 세계 118위라는 성격차 지수에 절망했다. 실존을 위협하는 사건들에 맞서 거리에 나섰고, 낙태죄 폐지를 외쳤으며, 생리대 유해물질에 분노하고, 성폭력을 적절히 처벌하라고 절규했다.

‘청와대 곶감 말리기 사진’은 ‘여성문제’에 대해 소신 있는 발언을 한 번도 하지 않는 대통령 부인의 모습과 겹치면서, 이러한 일들이 사소한 것, 부차적인 것, 혹은 시끄럽고 드센 여자들의 무리한 요구로 치부될 수 있는 절묘한 알리바이까지 제공한다.

다른 하나는 11월7일, 청와대에서 열린 미국 대통령 부부 초청 공식만찬장의 한 장면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군 성노예제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를 초청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내하고 두 사람이 포옹하는 사진이다. 피해자들에겐 10억엔(약 100억원)으로 면피하려 들더니, 트럼프의 딸에겐 ‘제국의 공주’ 대접도 모자라 여성 기업가 지원기금으로 5000만달러(약 570억원)를 약속한 아베 총리의 위선을 지적하려 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생존자의 존재를 통해 ‘2015 한·일 합의’의 부당함을 호소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미·일 공조관계에 균열을 내고, 역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미·일 삼국 군사동맹은 어렵다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면 성공적 퍼포먼스였다. 일본 정부는 이용수 할머니 초청에 즉각적으로 반발했고, 이에 할머니는 한 방송에 출연해 ‘참견할 바 아니다’라고 응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은 포스트식민 젠더질서를 활용해 미국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알리바이로 작동한다. 패전국 일본이 어떻게 동북아 냉전체제의 방어벽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전쟁범죄의 최고 책임자 ‘천황’을 지킬 수 있었는가. 이로 인해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피식민 민중들의 고통이 오랜 침묵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 아닌가. 미국이 ‘2015 한·일 합의’의 막후 배경이라는 의혹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에어 포스 원을 타고 내린 오산 공군기지가 어떤 곳인가. 기지촌으로 악명 높았던 송탄이다.

그럼에도 피해자 여성의 몸에 당당히 내린 가해자는 서슴없이 자신들의 병사들을 격려하고, 스스로의 가해자성을 가린 채 다른 서발턴 여성의 구원자로 등극했다. 더 큰 아이러니는 성차별,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골프장에서 일본 총리와 화기애애하게 게임을 즐긴 이에게, 그 남성 때문에 ‘위험’에 빠진 유색여성을 구원하는 백인남성 역할을 맡긴 곳이 대한민국 청와대라는 점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2007년 2월 미국 하원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의 만행을 용감히 증언했던 당사자다. 어떤 정부도 들어주지 않던 시절부터 다른 생존자들과 한국의 운동단체들과 함께 열심히 말하고 활동해 오신 운동가다. 그러므로 이번 ‘트럼프 포옹’ 이벤트는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고, 연대하고, 정체성을 변화시키며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꿔온 여성들의 역사를 이미지로 봉쇄하고,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여성의 몸’은 여전히 남성들의 전쟁터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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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지상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지난달 16일 재판에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며 재판 거부를 선언한 후 구치소에서 나오질 않는다. 변호인단도 모두 사임하자 법원은 재판을 이어가기 위해 국선변호인을 5명이나 선임했다. 얼마 전 이들에게 12만쪽에 달하는 사건 기록이 전달됐다. 하지만 국선변호인들이 기록을 다 검토한 뒤에도 재판이 정상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가 국선변호인과 함께 법정에 나올 것 같진 않아서다. 그래서 재판부가 어쩔 수 없이 피고인 없는 궐석재판을 하면 그와 지지자들은 그것을 놓고 잘못된 재판이라고 열을 올릴 것이다. 그것이 그의 노림수다.

그는 왜 자신이 구치소에 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 이유를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알고 있는 이유다. 지난 여름휴가 때 그가 왜 구치소에 있어야만 하는지 실감할 기회가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남도로 향하는 휴가 길에 목포신항을 들렀다. 철망 너머 작열하는 태양 아래 누워 있는 거대한 고래 같은 세월호는 서서히 녹이 슬어가는 듯했다. 뜨거운 날씨에 평일임에도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대부분이 우리처럼 가족 단위였다. 아내처럼 누군가는 숨죽여 눈물을 훔치고, 누군가는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되뇌고, 아이들은 저 배에 타고 있던 언니, 오빠, 누나, 형들은 왜 죽었어라고 물었다.

그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고 구속된 것은 지난해 이맘때쯤 터진 국정농단 사태가 직접적 원인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사실상 그 훨씬 전인 세월호 참사 때부터다. 세월호 사고 발생 자체는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수백명의 목숨이 검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그의 대처는 너무나 미흡했다. 그리고 그는 사고 이후 피해자 가족들은 물론, 그들과 함께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국민들을 진정으로 위로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과 그의 정부의 잘못된 대처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을 잠재우는 데만 몰두했다. 국민들은 속지 않는다. 아무리 여론을 호도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억눌러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회복할 수 없는 실망감이 커졌고, 이는 국정농단 사태로 폭발했다.

그의 정치보복 주장은 형식논리학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모름지기 정치보복이라면 정권이 바뀌고 난 뒤 새 정권이 전 정권 인사를 탄압할 때 그나마 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그가 구속된 때는 현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이다. 그의 현재 상황은 그가 권좌에 있을 때부터 이미 절차가 시작됐다. 국정농단 사태로 최순실을 비롯해 안종범, 정호성 등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구속되고, 그로 인해 그는 탄핵심판을 받아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어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에서 벗어난 그가 공범들과 마찬가지로 구속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당초 그는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했다. 그는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득표율 3.53%포인트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그건 최근 드러나듯이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불법적인 사이버공작 덕도 컸을 것이다. 그가 정보기관의 불법행위에 힘입어 대통령이 됐다는 걸 숨기기 위해, 그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국정원에 파견나간 검사들은 위장사무실과 가짜 증거, 허위 진술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방해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어 그런 행위가 드러나 수사가 시작되자 당시 국정원 파견 검사 중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검사가 죽음으로 몰린 것도 따지고보면 그 때문이다.

그가 지금 구치소에 있는 것은 새 정부 때문도 아니고, 검찰 때문도 아니다. 정권교체가 확실시되자 검찰이 새로 들어설 정권의 눈치를 봐 그를 구속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그때 그를 단죄하지 않았으면 검찰도 함께 사망선고를 받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그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려 구치소에 보낸 것은 국민들이다.

세월호를 찾았을 때 우리 아이들에게 세월호 언니, 오빠, 형, 누나들에게 보내는 엽서를 쓰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 한 여학생이 있었다. 안경 너머에 맑은 눈빛을 가진 야리야리한 여학생은 목포에 사는 중학생인데 자원봉사를 나왔다고 했다. 이런 맑은 눈을 가진 국민들의 눈물과 분노 때문에 그는 구치소에 있다.

그가 지난달 법정에서 정치보복 운운하며 4분 동안 읽어내려간 문장들에는 자신과 함께 재판받는 공직자와 기업인들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말은 있었지만 국민들에게 미안하다는 언급은 없었다. 그것이 그가 여전히 구치소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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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연재한 <혐오를 넘어> 시리즈를 보면, 학교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는 욕은 엄마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이런 혐오표현에 거부감을 느낀다. 자칫 반대했다가 ‘왕따’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주저한다. 세상의 잘못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처음에는 묵인하고, 방관하다 대세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학교는 타인에 대한 혐오를 몸에 익히는 학습장으로 전락한다.

아이의 세계는 세상의 축소판일 뿐이다. 인터넷 방송 역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나르며 혐오를 확산시키고, 온라인 스포츠 중계에는 욕설과 비아냥 댓글이 달린다. 정치인들은 혐오의 확성기로 활약하고 있다. 종교 역시 혐오의 주요 생산자다.

일러스트_김번 (출처:경향신문DB)

혐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서열화에서 싹을 틔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타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정상은 다수, 비정상은 소수일 뿐이다. 동성애는 동물의 세계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다. 한데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은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장애인, 외모가 남다른 사람도 비정상이란 딱지가 붙는다. 성적지향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사랑이나 관용의 대상이 아닌 개조나 배척의 대상으로 본다.

혐오의 제물은 소수자나 약자이기 마련인데, 누구나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글로벌 사회에서는 국내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부유층 청년들도 소수자다.

어빙 고프먼은 <스티그마>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한 남성은 오직 한 부류밖에 없다고 했다. ‘젊은 기혼의 백인으로 도시에 살고 북부 출신이면서 이성애의 성향을 가진 신교도 아버지로서, 대학교육을 받고 완전 고용되어 있으며 좋은 피부와 몸무게, 키, 그리고 최근의 운동경기에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 하지만 어떤 사람도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유지하기 어렵다.

서열화는 상대를 동료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지 않는 태도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과 생태계의 종으로서의 ‘인간’을 구분했는데,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라고 했다. 사람이 되려면 사회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는 자리를 내주기는커녕 자리 자체를 뺏는 태도다. 그래서 혐오는 사람됨에 대한 공격이며, 피해자 한 명에게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고통을 준다. 사람 사는 세상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우리는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범죄자를 처벌할 때도 ‘혐오적 처벌’을 피하고 있다. 소설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붉은 글씨를 새겨 망신을 주는 식의 징벌은 현대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죄에 대한 상응한 처벌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알코올중독자라고 고백한 세계적인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표지를 한다면 함께 차를 쓰는 ‘아버지, 동생, 나도 열등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각인될 수 있다’며 혐오적 처벌을 반대했다.

한나 아렌트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선생님이 만약 반유대인 발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와라.” 어머니의 말대로 아렌트는 유대인 혐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을 가르치던 교사와 충돌했고, 수업 거부를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아렌트는 미국에 정착한 후 평생 인간과 세계성을 고민했다.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같은 명저에는 아렌트의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유가 담겨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토대 위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과정과 체제, 태도라고 보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있다가 붙잡힌 홀로코스트의 책임자 아이히만의 재판 참관기이다. 아렌트가본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이었다. 아이히만과 그의 변호인은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를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것은 사유하지 못하니 말하지 못하고, 그래서 거부하고 저항하지 못한 무능이었다. 그게 책의 말미에 딱 한 번 나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혐오사회를 넘어서려면, 아렌트의 말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반대해야 한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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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성장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이 됐는데, 새 정부의 경제철학이 무엇인지 아직 확실치 않다. 출범 초기에는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하고 일자리를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고 했다. 일자리는 대통령이 직접 챙길 만큼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숫자로 접근하면 자칫 보여주기식으로 끝날 위험이 있다. 일자리는 경제정책의 종합적 결과다. 비유하자면 일자리는 마차이지 말이 아니다. 마차를 말 앞에 둘 수는 없다.

그 다음 단계에서 새 정부가 강조한 것은 소득주도성장이었다. 수년 전부터 세계노동기구(ILO)에서는 임금주도성장을 강조해왔다. 노동자들의, 특히 저임금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여주는 것은 시장에서 생산물에 대한 구매력을 높이므로 이것은 수요 증가를 통해 다시 소득 증가를 가져오는 경제의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논리다. 공급보다는 수요 측면에 착안하고 있으므로 케인스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론의 역사를 보면 한때 수출주도성장이 있었고, 그 뒤 부채주도성장이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제시된 성장론이 임금주도성장이다. 한때 수출을 ‘성장의 엔진’이라고 불렀는데, 임금을 성장의 엔진이라고 보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이다. 새 이론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논쟁이 벌어졌지만 지금처럼 오래가는 세계적 불황과 세계적 소득 양극화의 현실에서는 상당히 일리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불황 속에서 나홀로 수출 강행은 어렵고, 가계부채가 한계를 넘은 지금 부채주도성장은 위험하다.

한국에서는 임금주도성장이 소득주도성장으로 확대됐다. 임금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보다 자영업자들이 훨씬 많으므로 자영업 소득도 포함하고, 열악한 처지의 중소기업의 소득도 포함하여 소득주도성장으로 확대된 것이다. 임금주도성장의 논리에 바탕을 두면서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 소득주도성장이다. 경제학계에서 소득주도성장 연구를 주도해온 홍장표 교수가 대통령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홍 수석은 보수언론의 표적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은 귀에 익은 성장론이 아닌 소득주도성장이 못내 불편하고 불안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는 부쩍 혁신성장 이야기가 많다. 우리나라 경제학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적 경제학자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게 혁신성장이고, 보수적 정치인들도 당연히 혁신성장을 좋아한다. 성장을 위해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고, 어떻게 보면 혁신성장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에 가깝다. 지금 보수파들이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소득주도성장을 의심하면서 혁신성장을 앞세우는 것은 오래전 분배냐 성장이냐 하며 끊임없이 노무현 정부를 압박하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지금은 분배가 잘돼야 성장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세계은행, IMF, OECD가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세계 대세가 아닌가.

혁신 좋은 줄 누구나 안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왜 혁신이 잘 안되느냐, 어떻게 하면 혁신이 되나, 하는 것이다. 구소련에서는 기업이 기술혁신을 하면 당장은 포상을 받지만 그다음 해부터 생산목표가 올라가기 때문에 길게 보면 혁신 인센티브가 없었다. 그래서 소련의 기술혁신이 지체됐고 결국 사회주의 붕괴의 중요 원인이 됐다.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를 썼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인도 대사로 임명받아 근무한 뒤 인도 농촌의 빈곤에 관한 책을 썼다. 당시 인도 농민들은 답답하게도 기술혁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산성이 낮은 전통기술을 고수하고 있었다. 갤브레이스의 분석에 의하면 그 이유는 이렇다. 현재는 농민들이 전통적 기술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데 만약 기술혁신을 시도할 경우 잘되면 다행이지만 자칫 실패하는 날에는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기술혁신은 항상 실패 가능성이 높은 모험이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 북유럽 복지국가가 혁신을 잘하는 이유는 두꺼운 사회안전망 덕분이다. 한국에서 성장을 위해 혁신이 필수 불가결인데, 이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과 인센티브 체제가 갖춰져 있지 않다. 생존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이 어렵사리 기술혁신을 하면 재벌이 가로채 간다. 한국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갑을 관계 속에는 소련과 인도의 문제가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의 개혁 없이는 혁신성장이 불가능하다. 혁신성장, 물론 좋고 필요하다. 관건은 이를 위한 경제개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장 논쟁이 아니고 과감한 경제개혁이다. 새 정부 출범 반년이 되도록 개혁 이야기가 안 들리는 것은 걱정스럽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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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지난 60여년간 냉전반공에서 자유주의, 국가주의에서 공동체주의, 산업화에서 선진화로 끊임없이 탈바꿈했다. 흔히 “진보는 하나만 달라도 적이지만 보수는 하나만 같아도 동지”라는 말처럼 혁신과 변화 앞에선 보수가 진보보다 유능했다. ‘천막당사’ ‘뉴밀레니엄, 뉴○○○’ ‘○○○○ 연대’ 등 변화라 할 만한 행보는 대부분 보수가 주도했다.

그랬던 보수가 사라졌다. 정치컨설팅 민 박성민 대표는 “보수우위를 지탱해 온 지식인, 문화, 보수언론, 재벌, 권력기관, 기독교라는 물적 토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아예 ‘보수는 죽었다’고 규정했다. 탄핵과 대선 패배는 수순일 뿐이라는 말이다. 보수의 부활사를 기억하는 한 변화가 곧 시작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난망이다. 국정감사장에서 국민이 선택한 정권을 주사파라고 막말하는 집단, 그 집단을 ‘보수’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스스로 투항한 집단. 변하면서 지키는 게 보수의 본령이라면, 낡은 과거를 부수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게 혁신이라면 지금 보수는 보수가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혁신은 혁신이 아니다.

보수의 퇴행을 지켜보며 13년 전 한나라당을 떠올린다. 2004년 4월29일, 17대 총선 패배 후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엔 보수 혁명이 움트고 있었다. 프로젝트명은 ‘신보수를 위한 사상전(思想戰)’. 당선자 121명은 침울했다. 불법정치자금 수수(차떼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주도로 고사 직전까지 내몰렸다가 겨우 사지를 넘긴 했지만 보수의 암울한 미래는 가늠조차 어려웠다. 두 번의 대선에 이어 총선 패배까지 2007년 집권은 먼 꿈이었다. 박세일 당선자가 연단에 섰다. 총선 공동선대위원장, 보수의 경세가로 불린 인물이었다. 그는 “사상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보수는 집권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앞으로 정당 경쟁을 ‘20세기 과거 민주화세력 대 21세기 미래 선진화세력의 싸움’이라고 규정하며 당을 가치집단으로 바꾸자고 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공동체주의, 실용적 개혁이라는 4대 가치와 ‘공동체 자유주의’ 이념을 사상전 토대로 제시했다. ‘박세일발(發)’ 사상전은 보수의 토양을 빠르게 갈아엎었다. 오로지 북한과 자본이라는 프리즘만 정치에 투영했던 보수정당이 ‘따뜻한 대북정책’을 채택했다. 보수정치 외곽도 꿈틀댔다. 그 무렵 뉴라이트 조직이 탄생했고 우파 매체가 앞다퉈 창간됐다. 뉴라이트와 우파 매체는 외연 확대, 세대교체를 실천하며 사상전 진지 역할을 했다. 한나라당은 200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명박 당선자는 대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박세일판’ 사상전이 대선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 국정 화두로 채택된 것이다. 실패한 선진화가 보수의 부활을 이끈 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 해도 보수의 치열한 내부 투쟁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후 보수세력은 선진화조차 못 받아들이는 풍토였냐고 반문하게 된다.

유례를 찾기 힘든 보수의 위기다. 상대도 동반 하락이 불가피해졌다. 여권은 공공연히 “우리가 실력을 쌓아야 할 필요가 있나. 후진 야당이 있는데”라고 한다. 사람에겐 저마다 치명적 향기와 치명적 독이 함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강한 보수와 강한 야당이, 강한 진보와 강한 여당을 만들게 마련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보수 핵심 자산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던 ‘박근혜 한나라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세기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군림한 데는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라는 맞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촛불이 만든 다원화·분권 정치가 양당제, 지역주의라는 낡은 유산을 다시 끌어올릴 태세다. 정치의 불행도 예고돼 있다. 그런데도 해묵은 색깔론을 덧칠하며 수구와 개혁조차 가르지 못하는 한국 보수. 언제까지 치명적인 독만 품고 있을 텐가.

<정치부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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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던 변창훈 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일부 보수세력이 검찰을 공격하고 있다. “좌파 검사가 정통 공안 검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문무일 검찰총장과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한다. 적반하장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집권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은 검찰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충직한 검사였던 고인을 불법의 나락에 빠뜨린 장본인이 누구인지 국민은 알고 있다. 유족에 기대 문재인 정부를 향해 ‘정치보복’ ‘청와대 하명’ 운운하며 검찰을 흔드는 행위에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댓글조작, 선거개입, 야당 탄압,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간첩조작 사건 등 이명박·박근혜 정부 국정원이 저지른 비위는 실로 엄청나다.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는 정권의 통치기구로 민주주의 파괴에 앞장선 국정원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검찰의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피의자 인권을 존중하며 엄격한 증거와 법적 절차에 따라 사법부의 견제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변 검사는 2013년 국정원 법률보좌관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이 국정원 댓글조작에 관한 수사를 벌이자 변 검사 등 국정원 파견 검사 3명은 이른바 ‘현안 TF’를 꾸려 위장 사무실을 만들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국정원 직원들에게 증거 삭제와 허위 진술을 지시했다. 변 검사 사망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장호중 전 부산지검장과 이제영 대전고검 검사 등 같은 혐의(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와 위증교사)를 받고 있는 검사들의 구속영장을 모두 발부했다.

‘그 자리에 있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국정원 파견 검사들의 불법 행위를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공익의 대표자라는 검사에게 할 얘기는 아니다.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고발한 MBC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맞선 임수빈 검사의 사례에서 보듯 대부분의 검사들은 법과 원칙을 존중한다.

변 검사의 죽음은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에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검찰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국정원 수사를 엄정하게 진행해야 한다. 수사를 그만 덮는다면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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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어제 미국 대통령으로는 24년 만에 한국 국회에서 연설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굳건한 한·미동맹을 재확인하면서 6·25 이후 남북한이 걸어온 길을 극적으로 대비했다. 남한의 정치·경제적 성장을 극찬한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지옥” “감옥국가”라며 맹비난했다. 북핵에 대해서는 “김정은 당신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과 동맹국이 위협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면서 “미국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국을 지목하며 더 크고 강한 대북 압박과 제재를 주문하고 힘을 통한 평화 유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트럼프 국회 연설의 대북 발언 수위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발언에 비해 높다. 한국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연설에서 다 쏟아낸 듯싶다. 연설만 놓고 보면 트럼프가 대북 강경 기조로 돌아선 것 아니냐고 의심할 법하다. 보수야당들은 북한에 강력한 경고메시지를 보낸 연설이라며 환영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이후 24년 만에 미국 대통령으로서 국회 연설을 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애초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상대 없이 혼자서 진행하기 때문에 대북 강성발언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예상대로 트럼프는 억압과 경제적 궁핍으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일일이 열거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연설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남한에 대해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자유와 정의, 문명과 성취라는 미래를 선택했다”고 평가한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부패한 지도자가 압제와 파시즘, 탄압이라는 기치 아래 자국민을 감옥에 넣었다”고 지적했다. 번영하는 한국의 존재 자체가 북한 독재체제의 생존을 위협한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또한 “북한 김정은에게 직접 전할 메시지가 있어 왔다”면서 “당신이 획득하고 있는 무기는 당신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심각한 위협에 빠뜨리고 당신이 직면할 위협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적인 대북 인식은 새로운 게 아니다. 과거 그는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해 이보다 훨씬 더 심한 용어를 구사하며 비판해왔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열악한 인권과 독재, 핵·미사일 위협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건은 이런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가 “우리는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할 경우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것은 주목된다. 비록 탄도미사일 개발중단과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총체적 비핵화를 전제로 했지만 북·미관계 개선이나 대북 지원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북한에 대해 부정적 언급만 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메시지를 함께 보내며 나름대로 균형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제 한·미 정상회담 후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북·미 직접 대화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고 대답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트럼프의 발언 하나로 미국의 대북 기조가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과잉 해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핵 문제에서는 조그만 단서라도 놓치지 않고 포착해 기회로 활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제 한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길로 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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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의가 시작되었다. 올해 본예산 400조5000억원에서 429조원으로 7.1% 증가한 예산안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이끌기 위해 적극적 재정정책을 담았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특히 복지예산이 눈에 띈다. 내년부터 기초연금 인상, 아동수당 도입 등으로 16조7000억원이 늘어 증가율이 12.9%이다. 앞으로도 문재인케어, 부양의무제 기준 개선, 사회서비스 공공화 등이 본격화되면 복지는 더 커갈 것으로 전망된다.

예산안을 볼 때마다 문재인 정부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세법개정안이 연 5조5000억원 수준의 핀셋 증세에 그치지만 초과세수 덕택에 주요 복지공약의 내년도 몫을 예산안에 담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복지사업은 중앙정부가 복지를 확대하면 지자체의 대응예산도 늘어나는 구조이다. 이 비용마저도 내년은 초과세수에 따른 지방교부세의 자연증가로 충당될 듯하다. 집권 첫해부터 세수가 예상에 못 미쳐 재정 부족에 허덕이고 지방정부와도 갈등했던 박근혜 정부와 확연히 대비된다.

초과세수는 반갑지만 한편 우려도 생긴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면 그에 걸맞은 재정 기반을 갖추어야 하건만 조세제도 개혁 밖의 초과세수에 안주하는 경향이 보여서다. 지난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부터였다. 이 문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서 성격이라 대선공약의 실행프로그램을 기대했으나 재정방안이 대선공약과 너무 달랐다. 공약재정 178조원이라는 수치는 동일했으나 구성물은 전혀 딴판이었다.

대규모 초과세수가 새로운 카드로 들어왔다. 세법 개정과 탈루세금 과세를 통한 세입확충이 대선공약에선 61조원이었으나 17조1000억원으로 급감하고 대신 초과세수 60조5000억원이 추가되었다. 공약재정의 3분의 1을 경기 효과로 충당하는 셈이다. 또한 기금여유자금 등을 활용한 재원도 20조원에서 35조2000억원으로 늘렸다. 이는 사실상 전임 정부가 넘겨준 재정을 공약 이행 비용으로 사용하는 꼴이다. 물론 초과세수는 환영할 일이고 여유자금도 필요 이상으로 쌓였으면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에 크게 의존하면서 복지는 제도를 통해 확대되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증세개혁은 주변으로 밀려버렸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진행될 재정분권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시·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자치분권 로드맵(초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현재 8대 2인 국세와 지방세 비중을 7대 3을 거쳐 6대 4로 전환하는 강력한 재정분권이 담겨 있다. 이미 행정안전부에선 지방소비세와 지방소득세의 인상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번에 정부가 예산안과 함께 국회에 제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 재정분권을 위한 세금 수치는 담겨 있지 않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결국 ‘제로섬’이라며 재정분권에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앞으로 중앙권한의 지방 이양 정도를 봐야겠지만, 중앙정부도 임기 말 연 44조원의 재정적자를 예상하는 상황에서 국세를 쉽게 넘겨줄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재정분권을 위한 재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올해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GDP 19.3%로 전망된다. 초과세수 호조가 지속되면 실제 수치는 더 오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임기 첫해인 2013년에는 17.9%였다. 담뱃세 인상으로 서민증세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 고소득자 소득세 강화, 대기업 세금감면의 축소 등 박근혜 정부의 증세 조치도 조세부담률 상향에 한몫을 했다.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국가재정운용계획에 의하면 2021년에도 조세부담률이 19.9%에 머문다. 마치 20% 선을 레드라인으로 여기는 듯하다. 근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25.1%와 비교하면 약 5%포인트,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90조원이나 부족한 선이다.

내년은 초과세수로 재정을 충당하지만 항상 날씨가 맑은 건 아니다. 복지국가를 위한 조세제도 기반을 구축하고 지방재정 분권까지 달성하려면 임기 초반부터 적극적인 증세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아직은 증세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아니라고? 그나마 경기가 호전되는 시기가 좋은 때이다. 또한 복지가 빠르게 증가하는 지금이 더욱 적기이다. 실제 ‘복지가 늘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많다.

기초연금, 아동수당, 문재인케어 등 복지가 확대되는 만큼 관련 세금 공제를 줄여 소득세 실효세율을 높이고, 한발 더 나아가 ‘복지에만 쓰는 목적세’인 사회복지세 도입도 이야기하자. 대통령이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위해 소득에 따라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냅시다’라고 말할 순 없을까?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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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 윤모씨 등 보좌진 3명을 7일 전격 체포했다. 윤씨 등은 전 수석이 회장을 맡았던 한국e스포츠협회를 통해 롯데홈쇼핑에서 3억여원대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 수석은 19대 의원 시절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으로 홈쇼핑 재승인과 관련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지난해 검찰의 롯데홈쇼핑 비자금 수사 당시에도 전 수석 금품 수수설이 돈 바 있다. 홈쇼핑 재승인을 위해 허위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비자금을 만들어 로비에 사용한 강현구 전 롯데홈쇼핑 사장은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이번 수사는 검찰이 문재인 정부 들어 정권 실세를 상대로 벌이는 첫 번째 수사다. 검찰은 엄정한 수사로 전 수석 관련 의혹을 규명하기 바란다. 전 수석은 “어떠한 불법에도 관여한 바 없다”고 밝힌 만큼 검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전임 정부 적폐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에 더욱 엄격하고, 검찰이 정권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수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검찰도 권력에 굴종해 국정농단의 공범으로 추락했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최근 피의자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잇따르고 있다.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방해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변창훈 검사가 투신자살하고, 국정원 소속 정모 변호사도 목숨을 끊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검찰 수사가 위축되면 안된다. 검찰은 환부만을 도려내는 깔끔하고 절제된 수사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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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간 자유무역협정(FTA)에 문제가 있다”며 개정을 재차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한·미 FTA가) 자유롭고, 공정하며, 호혜적 무역협정이어야 하지만 지금 현재 협정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미국에는 그렇게 좋은 협상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기반으로) 개정협상이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무역적자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기존 한·미 FTA가 무역불균형을 초래했으므로 미국의 입장을 반영해 개정하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초청 국빈만찬에서 건배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요구는 이미 예견된 바다. 그는 직전 방문국인 일본에서도 “미·일 무역은 공정하지도, 개방되지도 않았다. 미국은 오랜 기간 일본에 의한 무역적자로 고생해왔다”며 무역적자를 줄이는 조치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한국은 일본과 같이 미국에 대해 무역흑자를 지속하고 있는 국가다. 미국은 적자폭이 한·미 FTA 발효 전인 2011년 116억달러에서 발효 후인 2016년에는 233억달러로 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이 같은 피해를 방치할 수 없으므로 FTA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미 통상압력이 실행에 들어간 부분도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삼성과 LG전자의 세탁기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을 예고한 것을 비롯해 한국을 상대로 31건의 수입규제조치를 가동하고 있다. 

한·미 FTA 개정협상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경제도 한·미 간 동맹의 하나의 축”이라며 “한·미 FTA를 신속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힌 만큼 협상이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 우려되는 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 기간 중에 무역적자를 재차 강조한 만큼 통상 관련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협상의 주요 쟁점인 자동차, 철강, 농업 분야에서 자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적극 나설 것이다.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맞설 다양한 옵션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협상이 끝난 뒤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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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어제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고한 한·미동맹과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회담 직후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두 정상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미국에 단순한 오랜 동맹국 그 이상”이라며 “우리는 전쟁에서 나란히 싸웠고 평화 속에서 함께 번영한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북한에 대해 핵과 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촉구하고 이를 위해 최대한의 제재와 압박을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두 정상이 단단한 한·미동맹을 재확인한 것은 의미가 크다. 흔들림 없는 동맹관계를 천명함으로써 북핵을 둘러싼 한·미 간 이견이 있다는 국내외의 우려와 비판에 일침을 가했다. 북핵 대응에서의 긴밀한 공조를 천명한 것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두 정상은 회견에서 “북한의 추가도발은 한·미동맹의 확고하고 압도적인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범주 군사능력 운용과 확장억제 제공 공약을 재확인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북핵 해법을 도출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양국은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제재와 압박이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미국 대통령의 25년 만의 국빈방문에 걸맞은 성과라고 보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핵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담판을 앞두고 한국에서 자신의 구상과 복안을 제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트럼프 방한을 계기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의 전기를 마련한다는 한국의 구상은 실현 가능성이 낮아졌다.

두 정상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에 의견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군사옵션 카드를 완전히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트럼프는 그제 미·일 정상회담 직후 “모든 선택지가 테이블 위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밝힌 ‘한반도 5원칙’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특히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 정상회담에서 주요하게 논의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문 대통령이 “지금은 압박과 제재에 집중할 때”라며 대화를 미래에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 가능한 일로 미뤄 두었다. 북핵 해법으로 미제 첨단무기 구매와 한국에 대한 미사일 탄두중량 제한 완전 해제가 논의된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트럼프가 보수세력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주요 공격 소재인 이른바 ‘코리아 패싱’ 논란에 대해 일축한 것은 문 대통령의 국내 입지를 넓혀줄 것 같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굉장히 중요한 국가이며 한국을 우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북한에 대한 평가에도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북한을 “전 세계에 끔찍한 위협”으로 표현했지만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발언은 아니었다.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하다. 문 대통령이 균형외교에 대해 미·중 사이 균형이 아니라 외교 지평 확대로 설명한 것은 이를 중국편향 외교로 이해하는 미국을 의식한 수위 조절로 보인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해결된 문제보다는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더 많이 남긴 회담이었다. 하지만 북핵은 어느 한 국가나 지도자의 노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국제 문제다. 이번 회담에도 불구하고 당사국들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흔들림 없이 전개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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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기자분들이 지적을 하도 많이 해서 퇴직해도 아무 데나 바로 못 가요.”

지난 9월28일 열린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 배석한 국토부 고위 관료가 한 말이다. 그는 이날 명예퇴직한 실장(1급)을 가리켜 “한동안 집에서 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사실일까.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토부에서 받은 ‘2013~2017년 9월 4급 이상 고위 공무원 재취업 현황’을 보면 76명이 산하기관과 이익단체에 재취업했다. 6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에 확인한 결과 지난달 국토부 퇴직 공직자 2명이 산하 공공기관과 대형 건설사 자회사에 재취업했다.

국토부 고위 공무원이 재취업한 곳은 산하기관뿐 아니라 SR, 이레일, 공항철도 같은 민자사업 기업도 있다. 이익단체는 더 많다. 교통투자평가협회, 한국골재협회, 자동차산업협회, 항공진흥협회 등 20곳도 넘는다.

공무원이 휴직하며 민간기업에서 경험을 쌓게 하는 ‘민간근무 휴직제’를 경제부처가 얼마나 이용했는지 취재하던 지난달 29일 국회를 통해 자료를 요청했다. 민간기업과 공무원의 유착 통로가 됐다는 지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국토부만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하창훈 국토부 인사팀장은 지난 1일 “국정감사로 바빴고 상부의 결재도 받아야 하며 인사혁신처와 협의도 필요하다”고 했다. 전형필 국토부 운영지원과장은 이튿날 “국정감사 기간이 끝났는데 자료 요청에 급히 응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했다. 박찬대 민주당 의원이 인사혁신처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국토부 고위 공직자 2명은 지난해 손해보험협회와 현대건설에서 1억원 넘게 받으며 일했다. 최근 국토부 내부에선 산하 한국도로공사 간부급 퇴직자들이 휴게소 사업을 독점한 소수 업체에 재취업했다는 올해 국감 지적을 쉬쉬하는 분위기도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 중 하나로 퇴직 공직자와 민간기업의 유착이 꼽히면서 재취업을 규제하는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됐다. 국토부는 세월호 교훈을 잊었는지 ‘내 사람’을 챙기는 시대착오적 온정주의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퇴직해도 아무 데나 못 간다’는 국토부 고위 관료의 말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경제부 |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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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사태의 책임 소재는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 북핵 사태의 책임은 당연히 김정은에게 있다. 안보와 생존의 수단이던 핵을 공격 중심의 무력, 실질적인 위협으로 키운 당사자 아닌가. 그가 핵개발 명분으로 내건 미국의 핵우산과 한·미 합동군사연습은 이전부터 계속돼온 것으로,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북핵과 관련해 모두가 인정해야 할 사실이 더 있다. 이제 북핵의 완성을 막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핵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은 위험한 국가다. 가공할 무기와 적대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공공연하게 남한을 “쓸어버리고” 미국도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협박한다. 북한에서 신적인 존재인 김정은의 발언은 돌이킬 수 없는 지상명령이 된다. 북한이 당장 내일 전쟁을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일본 도쿄 인근 요코다 공군기지에서 5일 병사들을 상대로 연설하는 트럼프 대통령. 양복 상의 대신 공군점퍼를 걸쳤다. AP연합뉴스

미국은 위험한 나라라고 볼 수 없다. 한국에 안보 우산을 제공하는 나라, 매년 수백억달러의 무역흑자를 안기는 나라를 위험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미국은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갖춘 국가다. 권력을 견제하는 민주적 통제시스템이 구비되어 있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양심’들도 많다. 이들 모두 수령 결사옹위의 북한에는 없는 것들이다. 미국을 북한에 견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보다 덜 위험한 것이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미국에는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 그는 최강국 지도자답지 않게 무책임하고 무모하다. 파리기후협약 탈퇴, 오바마케어 폐기, 멕시코 이민장벽, 한·미 자유무역협정 폐기발언…. 그가 내놓는 정책마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요동친다. 북한과 대화한다고 했다가 다음날 북한 완전 파괴를 거론한다. 그는 총을 가진 아이처럼 위험하다.

미국은 ‘나쁜 대통령’ 재임 시절 외국과 전쟁을 한 기록이 많다.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런 이유를 댔다. “대량살상무기 보유 가능성 등 세계 안보 환경을 위협하고,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인 탄압 등 압정을 실시하고 있다. 이라크는 중동의 위협이며 무장해제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논리라면 핵을 가진 북한은 백번 공격해도 문제가 없다.

9·11테러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미국을 지금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이 늘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향해 미사일 공격을 시작한 2003년 3월 워싱턴의 포토맥공원에서는 벚꽃 축제가 열렸다. 필자도 거기에 있었다. 신문들은 상춘객 30만명이 몰렸다고 보도했다. 만리 밖에서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미국인들은 사진을 찍고 구운 소시지를 먹으며 벚꽃을 즐겼다.

미국인들은 감히 미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하룻강아지를 혼내주는 전쟁을 벌인들 어떻겠나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물론 전쟁터가 미국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라크는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않았는데도 공격을 당했다. 지금 북한은 본토를 공격하겠다며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미국에 실질적인 위협이다. 미국 조야에서 북한이 실력을 더 키우기 전에 선제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똑같이 핵버튼을 쥐고 있지만 성격은 크게 다르다. 김정은의 핵버튼은 자폭장치나 다름없다. 누르는 순간 미국의 반격으로 만사휴의다. 트럼프는 다르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는 파괴되더라도 대다수 미국 본토는 온전할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트럼프가 한국인들의 안위를 고려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다.

미 NBC는 엊그제 대북 대화 재개를 시도 중인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백악관이 대북 외교를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며 의회가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여야 하원의원 62명은 의회 승인 없이 트럼프의 대북공격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대표발의자인 존 코니어스 의원은 “군 통수권자(트럼프)가 무모한 태도로 한국 주둔 우리 군대와 동맹국들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뭔가 한국인들이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4년 전 무능한 대통령과 이슬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결합한 미국은 이라크전쟁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무모한 대통령에, 본토 공격 위협에 직면한 미국인들의 불안과 모멸감이 결합한 지금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트럼프는 오늘 한국에 온다. 누군가는 그를 통제해야 한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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