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의 ‘2등 경쟁’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 달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 시간과 순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2017년 대선 정국이 안희정으로 요동치고 있다.

‘공적 됨됨이.’ 십수년간 지켜본 정치인 안희정에 대한 주관적 평가다. 1990년 3당 합당 후 이념도 정치도 헌 옷처럼 느껴져 여의도(이철 의원 비서관)를 나설 때, 1993년 친구 이광재와 서울 연신내 허름한 술집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도원결의 할 때, 2002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홀로 멍에를 짊어졌을 때도 안희정은 조직과 대의명분이 우선이었다. 2007년 대선 패배, 2008년 총선 공천 배제 땐 ‘폐족’이란 말로 친노를 일으켜 세웠다.

스스로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혁명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게 한국 야당사다. 가진 게 어정쩡해서다. 안락한 2등이 보장되는 소선거구제를 움켜쥐고 있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간다. 그래서 결정적일 때 늘 보수적이었다. 1987년 분열, 1990년 민자당 합당, 1997년 DJP 연합,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등은 선명한 궤적이다. 안희정은 그럴 때마다 “동의할 수 없는 가치와 타협할 수 없고, 더욱이 그 동의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권력으로 존재할 때 난 그 권력을 (중략) 관용, 용서, 이해할 수 없다”(2004년 7월3일 옥중일기)고 다독여 왔다. 이렇게 하지 않고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산다는 건 그저 세상의 대기권 밖을 서성이는 일이었을 테니.

안희정 충남지사가 2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4차 혁명과 미래인재’ 콘퍼런스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안희정은 이처럼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선한 의지’, 대연정 제안, 사드 배치 신중, 녹색성장과 창조경제 계승…. 파문도 이런 파문이 없다. 파문이 지나간 자리마다 기존 정치가 익숙하게 밟았던 경로 의존성도 흔적조차 없다. 안희정 ‘현상’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대선이라는 최고 권력 획득전에서 한 후보의 발언을 두고 전략이냐, 소신이냐는 격론이 연일 벌어진다. 즉위를 반대하는 노론을 상대로 ‘아버지의 원한을 갚으려 하지 않겠다’고 한 정조의 시그널도 어른거린다. 안방(야권)에서 쫓겨날 듯한 질타를 받으면서도 지지율은 고공상승 중이다. 순식간에 야권 대 야권의 대결로 대선 구도를 바꿔 버렸다. 여권은 ‘안희정 경계령’을 내렸고, 야권에선 선거철 전가의 보도였던 연대·단일화 논쟁이 사라졌다. 생존조차 불투명했던 진보정당은 회생 기회를 잡았다.

합리적 차별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국민정당(캐치올 정당)화된 여야, 길을 잃었지만 안길 곳 없는 보수 등 정치환경이 바뀐 이유도 있다. ‘노무현 적자’라는 배경 또한 안희정에겐 든든한 방어막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안희정 현상이라고 단언하진 못하겠다. 대선 주자가 개인 선의부터 확신한 것, 구체적으로 치열해야 할 때 담론의 늪을 만든 것, 민심의 언어로 세상을 읽지 않고 있는 것. 대연정만 해도 싸우지 않기 위해 손잡자는 게 아니다.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한 쓰임새가 더 크다. 분권형 개헌이 불가피하다. 법과 시스템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법과 시스템이 필요한 대목을 그는 지나쳤다.

무엇보다 정치인의 신념은 철학과 계몽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공동체 이익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약속하고, 실천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첫 의료보험제로 평가받는 오바마 케어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의료복지’라는 신념을 안겨줬듯이.

구시대 마지막 열차와 새시대 첫 열차는 같은 길목에서 만나겠지만 타고 내리는 통로는 분명히 다르다. 반미청년회 수장 ‘안희정’에서 재선 충남지사 ‘안희정’이 되기까지, 마음속 철조망을 걷어내느라 수천 수만번 찔리고 다쳤을 것이다. 현실 정치로 나왔다면, 안희정 현상을 입증하려면 숱한 생채기가 벗겨지고 새살이 돋는 동안 ‘내가 품었던 세상의 욕망’을 성찰만 하지 말고 뚜렷하게 보여달라. 지난 계절을 ‘불만의 겨울’(1970년대 말 영국 노동당 집권 후 대규모 공공노조 파업)로 기억하는 봄을 맞고 싶진 않다.

정치부 구혜영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나오는 이는 지드래곤이다. 다운받은 그의 사진이 아니라 함께 찍은 것이다. 그것도 한 팔은 그의 어깨에 두르고, 한 손은 V자를 그린 채로 말이다. 낫살이나 먹고 주책이라는 핀잔도 간혹 듣지만 부러움 섞인 반응이 좀 더 많다. 뭐가 됐든 유치찬란한 자랑질 맞다. 지금이야 바꾸기 귀찮아서지만 몇 년째 이 사진을 고수했던 데는 모종의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이 사진을 올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중학생이던 딸아이의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헐, 대박. 아줌마! 진짜 지드래곤이에요?” 한두 차례 통화했던 그 친구 전화기에 내 번호가 저장돼 있었나보다. 난 아이 친구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셀러브리티가 됐다. “저 ○○ 친군데요, 어떻게 하면 기자가 될 수 있나요” “아줌마, ㄱ이랑 ㄴ이랑 사귀는 거 진짜예요?” 따위의 문자부터 좋아하는 가수의 사인을 받아달라는 전화와 카카오스토리 친구신청까지 들이닥쳤다.

처음에 당황스러웠던 일은 생각지 않은 쪽으로 발전했다. 친구들을 통해 아이의 카카오스토리에 자연스럽게 접근하면서 아이의 학교생활이며 친구관계, 자주 쓰는 용어 등 평소의 대화나 생활에서 파악되지 않던 부분을 좀 더 세밀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가 친구에게 남긴 댓글로 행간의 의미가 읽혔고 사고방식, 습관 등도 유추할 수 있었다. 아이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도 쉽게 소재가 파악됐다.

나는 개방적이고 이야기 통하는, 쿨한 어른으로 비칠 것이라고 자부했고 쉽게 아이의 ‘사생활’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다고 자만했다. 유명인들이 자녀의 소셜미디어 글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는 것을 왕왕 보면서,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나름 안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아이는 진작에 페이스북으로 갈아탔다.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일종의 ‘권력’을 차단당할 때 생기는 금단현상 비슷한 것을. 온·오프 공간에서 아이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얼마간 하던 끝에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슬쩍 보냈다. 며칠 뒤 “가족끼리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라는 야멸찬 답변이 돌아왔다. 제 친구들이 내게 신청한 것까지도 야무지게 단속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던 욕구가 다시 살아난 것은 며칠 전 한 국회의원의 아들 논란이 불거지고서다. 저녁자리에서 한 지인이 “부모한테는 필요에 따라 자식 소셜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면서 “이놈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알 길이 없어 불안할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그의 말에 몇마디를 보태려던 찰나, 다른 동석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근본적으로 부모 자식 간에 유대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예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평소 생활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자식한테 성적 말고는 관심이 없는 거죠.” 몇차례 논박이 오갔다. 딱히 틀린 말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힘들었다.

자식문제로 논란이 일 때면 언제나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경구가 비판의 논거로 등장한다. 세상에 나서기에 앞서 수신제가가 이뤄져야 함도 옳다. 남을 향해 쉽게 할 수 있는 이 말들을 막상 내게 던져보니 한없이 위축된다. 금지옥엽 같은 자식이지만 살다보면 기가 막히고 속 터질 때,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가라앉히기 힘들 때가 좀 많은가. 도대체 누굴 닮아 저러나 싶다가도 결국 날 닮은 것이 서늘한 진실이다. 그러니 예로부터 세상만사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 자식 일이라고, 자식 문제로 절대 장담해선 안된다고 하지 않나. 어쩌겠나. 피하고 싶어도 평생 지고 가야 할 과제인 것을.

‘자식을 자랑거리 삼으려 말고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자.’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본 글을 수첩 맨 앞장에 적었다. 매일 아침 업무 시작 전에 이를 들춰 보며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단순한 이 시도와 반복이 의외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문화부 | 박경은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교육부가 20일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곳곳에 원망이 배어 있다. 올해 국정 역사교과서 연구학교가 한 곳에 그친 것은 외부세력의 방해 때문이라는 원망이다. 교과서 선택 과정에서 위법행위가 확인되면 사법처리를 요구하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무엇이 왜 잘못됐는지를 아직도 모르는 교육부의 현실 인식이 국정교과서를 ‘좀비’로 만들고 있다.

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새롭게 내놓은 방책은 ‘무료 배포’이다. 희망하는 학교 수요를 교육부가 직접 파악해 배부하겠다고 밝혔다. 연구학교로 지정되면 교과서를 공짜로 나눠주고 가산점·지원금까지 주겠다며 신청기간까지 연장했는데도 거부당하자, 이번엔 정식 교과서가 아니어도 좋으니 가져만 가라는 식이다.

국정교과서의 지위는 복잡해졌다. 교과용도서심의 규정을 받는 ‘교과용도서’이자 국가가 저작권을 갖는 ‘국정도서’이면서 경우에 따라 ‘보조교재’일 수도 있고 ‘도서관 비치 도서’나 ‘방과후학교 교재’가 될 수도 있다. 학교에서 쓰는 책의 지위가 무엇이냐는 법과 규정을 바꿔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다. 교육부는 2015년 말 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만 써야 한다는 고시를 발표했다. 2016년 말엔 2017년에는 연구학교에서만 쓰고, 2018년부터는 국·검정을 혼용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입법예고를 하고 이달 중 대통령령 개정까지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목적에 맞춰 스스로 세운 원칙까지 계속 바꾸다 보니 최소 44억원을 들인 국정교과서는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애매한 존재가 됐다.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왼쪽)이 10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옆 사람은 홍윤식 행정자치부 장관. 박민규 기자

신학기를 앞둔 학교는 한동안 또 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교의 경우 학교 구성원들이 반대해 연구학교 신청은 실패했으나, 보조교재 신청은 학교장과 재단에서 강행할 가능성도 있다. 초중등 교육법 32조는 교과용도서와 교육자료 선정을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심의 또는 자문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금용한 교육부 학교정책실장은 “활용 방안에 따라 학운위의 논의 필요성이 있다”고 모호하게 말했다.

연구학교 신청률이 저조한 이유를 교육부는 ‘교육감과 외부세력’ 탓으로 돌렸다. 금 실장은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순수하게 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며 “지정 과정에 위법·불법 행위가 확인되면 법적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접수된 위법행위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고 했다. 보수단체가 학교 밖에서 국정교과서 지정 촉구 시위를 벌인 것에는 “신고된 합법 집회”라고 감쌌다.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은 “깜깜이 예산으로 불량품을 만들어놓고 또다시 세금을 들여 무료 교재로라도 배포하겠다니 학생들 보기에 부끄럽다”며 “국회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금지법안이 반드시 통과되도록 힘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장은교 | 정책사회부 indi@kyunghyang.com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해 평양에서 7차 노동당 대회를 취재 중이던 영국 BBC 기자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 대한 무례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3일간 억류됐다. 이 무렵 일본 산케이신문 기자도 박근혜 대통령에 관한 기사 때문에 8개월 동안 억류됐다. 명예훼손과 출국금지라는 법률용어를 썼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명예훼손, 이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치권력이 부당하게 사용하는 탓이다. 정권들은 권력 감시를 개인 공격으로 몰아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형사처벌을 시도한다. 하지만 명예훼손 죄책을 따져묻는 것은 악이 아니다. 명예훼손은 헌법이 보장한 인격권의 침해이며, 인격권은 표현의 자유 못지않은 기본권이다.

언론(저술)의 명예훼손은 어디에서나 위법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엄중한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 수십억원의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는 일도 허다하다. 독일과 프랑스라면 손해배상에 더해 형사범으로 처벌된다. 다만 공익 목적이고 진실이면 책임을 벗는다. 진실 발견을 위해서만 인격 보호가 양보된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에 대한 1심 재판들이 끝났다.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위안부들의 명예를 훼손한 민사·형사다. 우선 2015년 민사법원이 책에 대한 삭제요구를 인용했고, 2016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했다. 지난달 형사법원이 명예훼손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박 교수는 “현명한 판결”이라고 했다.

문제의 그 책도, 이를 반박한 책도 거듭해서 읽은 나는 무죄 판결문을 구했다. 명예훼손을 인정한 2개의 민사 판결을 어떻게 돌파했을지 궁금했다. 피해자가 살아있는 역사적 사실을 어디까지 기술할 수 있는지 재판부는 치열하게 논증했을 터였다. 미국, 유럽, 유엔이 관여한 세기의 사건이고, 표현의 자유에 관한 세계의 재판이다.

판결문은 눈을 의심케 했다. 이렇다 할 논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서술은 사실(fact)과 의견(opinion)으로 나뉜다. 사실은 진실(truth)과 허위(false)로 갈린다. 명예훼손은 사실, 주로 허위를 적시한 경우에 해당된다. 의견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인 경우가 허다하고, 그래서 판사는 사례를 공부하고 판례를 연구한다.

앞서 2개의 민사사건은 뜨거웠다. 2015년 삭제요구 사건에서 민사법원은 34곳에서 (허위) 사실적시와 명예훼손이 있다고 했다. 2016년 손배해상 사건에서도 같은 작업을 거쳐 명예훼손과 인격권 침해를 인정했다. 형사사건은 이미 인정된 34곳을 포함해 35곳의 명예훼손을 다퉜다. 그런데 재판부는 30곳이 단순 의견이라고 했다. 논증은 하지 않았다.

이상윤 재판부는 35곳의 표현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가리지도 않았고, 역사 기술의 한계를 밝히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불명료한 개념이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 전후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서술 등이 다수 발견되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중략) 피해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평가에 유의미할 정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거칠게 말하면, 박 교수의 조악한 연구와 난삽한 표현 때문에 명예훼손을 하는 데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급한 일반화, 과도한 비약, 논리적 오류” 같은 학계의 평가도 재판부는 인용했다. 이렇게도 간단한 판결로 역사적 분쟁이 정리된 것일까.

“명예를 보호해주리라는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의사형성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는 개인 등의 전유물이 될 위험이 있다.” 법과대학 헌법교과서의 ‘표현의 자유’ 해설이다. 결론에 한 줄 무죄만 적는다고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는 게 아니다.

사회부 | 이범준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2000만원에 가까운 활동비를 받고 원자력발전소 신규 부지 선정 과정에 참여한 인사가 노후 원전 수명연장(계속운전) 심의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향신문은 2015년 2월 조성경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비상임위원에 대한 이런 보도를 했다. 조 위원은 2010년 12월~2011년 11월 한수원의 신규 원전 부지선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뒤 2014년 6월 원안위 위원에 임명됐다. 원안위설치법에 따라 최근 3년 사이에 원자력이용자(한수원) 사업에 관여한 사람은 위원이 될 수 없다. ‘선수’(원전 진흥)와 ‘심판’(원전 규제)을 분리한다는 원칙이다. 더구나 원안위는 경향신문 보도 전에 이미 조 위원의 위법한 경력을 알았다. 하지만 조 위원은 자리를 유지했다.

보도 다음날인 2015년 2월26일 오전 10시 시작한 원안위 회의는 정회와 속개를 반복했다. 결국 15시간 뒤인 27일 오전 1시10분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수명연장(계속운전)을 의결했다. 원안위 위원 가운데 2명이 퇴장한 다음이었다. 회의 시작부터 조 위원 기피신청이 있었지만, 이은철 위원장 등 다수 위원이 “법원 판단에 맡기자”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원안위의 독단적인 결정해 반발해 월성 1호기 인근 주민들은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7일 법원이 원안위 결정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2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지난 7일 서울행정법원은 무자격자인 조 위원의 참여가 수명연장 결정이 위법한 이유라고 했다.

기자는 원안위가 이렇게 무리한 위원 구성으로 의결을 강행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의심했다. 원전 안전성 평가에는 최신 기술을 쓰라고 원자력안전법에 정해져 있다. 하지만 원안위는 월성 1호기보다 뒤에 건설된 월성 2·3·4호기에도 적용된 최신 기술기준 ‘R-7’을 월성 1호기 평가에 쓰지 않았다. 법원도 이 부분을 위법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월성 1호기는 계속 돌아가게 된다. 원안위가 이번에는 고등법원 판결을 받아보겠다며 항소를 결정했다. 항소심에서 진다 해도 대법원까지 갈 것이고 원전은 2~3년 더 운영된다. 월성 1호기의 연장된 운영기간이 2022년까지니 소송을 이용한 지연작전만으로 ‘절반의 성공’은 거두는 셈이다.

유희곤 | 탐사보도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초등학교 때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위인전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되라’는 뜻으로 학교에서도 권장했다. 위인들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했다. 탄생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공통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이 집안에 하늘과 땅의 정기를 품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오’라는 예언을 받는다. 위인의 부모는 본시 선행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허름한 행인에게 물 한 바가지나 밥 한 그릇을 대접한 뒤 예언을 선물로 받는다. 예언을 하는 사람은 알고보니 천하제일의 고승이거나 신선이 현신한 것이다. 위인은 특별한 태몽과 함께 태어나고, 어릴 적부터 비범하다. 또래 아이들이 먹고 노는 것에 집착할 때 아이는 먼 산을 바라보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거나 동무끼리 싸울 때 스윽 나타나 지혜로운 해법을 내놓는다. 효심은 극진하고 남들이 중2병이나 사춘기로 방황할 때 위인은 국가와 집안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빨리 커서 위인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께 태몽을 물어봤다 실망하기도 했다. 왜 나의 태몽에는 여의주를 문 용이 등장하거나 하늘길이 열리며 붉은 해가 집 안으로 내려오는 명장면이 없나 속상했다. 아, 나는 위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그러다가도 빨리 위기가 찾아와 멋지게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위인들은 누구나 한 번씩 나쁜 놈들의 계략에 빠져 위기를 맞지만, 담대하게 이겨냈다. 위인전의 첫 장 ‘태몽과 비범한 탄생’ 편은 쓰기 틀렸으니, 다음 장 ‘고난의 극복’ 편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한국의 위인전이 거창한 태몽과 미화일색의 서술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최근 ‘박근혜와 무리들’을 보며 이제는 읽지 않는 위인전 생각이 났다. 잘못을 빌고 부끄러움에 몸을 한껏 숙여도 모자랄 사람들이 피해자처럼 굴고 있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들은 지금 자신만의 위인전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1인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현 사태는 거짓말로 쌓아올린 커다란 산”이며 “오래전부터 기획된 의혹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전형적인 ‘나는 악의 무리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위기의 위인’이라는 설정이다. 같은 날 특검에 소환된 최순실씨도 “자유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 손자까지 멸망시키겠다고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독립운동가 또는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 조작간첩으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 난 이들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다. 그러고보니 박 대통령 측 서석구 변호사는 대통령을 예수와 소크라테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난 극복’ 장면을 쓰고 있다고 믿고 있다.

황당하지만 이런 가정이 아니고서야 그들의 언행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도 힘들다. 청문회에 나와 줄곧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김기춘·우병우·조윤선의 표정은 억울해보이기까지 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선출마를 묻는 질문에 “문 조심하세요”, “길이 막혀 있네요” 같은 발언을 남겼다. 옛날 정치인들의 알쏭달쏭 화법을 흉내낸 답변이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불량품으로 판명난 국정 역사교과서 제작이 교육을 위한 일이며 당장 연구학교에 보급해도 교육에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공분을 자아내는 이들의 뻔뻔함, 여유 있어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는 평범한 사고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들은 잘못을 저질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위기를 탈출했거나 한 번도 제대로 된 벌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을 정신차리게 해줄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있다. 과장된 위인전 따위에 나오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묵묵히 버텨내는 평범한 시민들의 상식. 그것만이 그들에게 위인전 대신 참회록을 쓰게 할 수 있다.

장은교 정책사회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학자적 양심을 걸고 이번 경제성 분석 결과를 확신합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경인운하 사업에 대해 비용 대비 편익(B/C) 분석이 기준점인 1을 넘는다고 설명하던 한 국책기관의 연구원이 이렇게 말했다. 기존의 같은 분석에서 1을 밑돌던 사업이 단번에 경제성 있는 사업으로 둔갑했다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끝에 나온 답이었다. 한반도대운하를 공약으로 내건 MB 정부 출범에 토건관료들은 경인운하를 다시 들고 나왔고, 사업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국책연구기관들을 압박했다. 이전에도 정부는 B/C 결과가 1에 못미치자, 평가항목을 수정해 재분석을 요구했고, 그래도 경제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자 용역비 지급을 미루기까지 했다. ‘학자적 양심’과 불도저 같은 정부의 밀어붙이기에 2조원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그 결과는 4대강 사업의 ‘녹조라떼’만큼이나 허탈한 상황이다.

정부가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 이유는 객관적 입장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신뢰 때문이다. 일반 시민의 의사 결정에도 전문가의 의견은 필수적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경제적 측면에서 시민들은 전문가의 의견을 들음으로써 정보취득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앤서니 다운스는 <경제이론으로 본 민주주의>에서 “합리적 시민들은 전문가의 의견에 필적한 만한 의견을 스스로 생산할 때 드는 비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전문가의 일반적 의견을 구매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적 갈등 속에서 전문가 의견마저 그 격차가 커지고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편으론(on the one hand) 어떻고, 다른 한편으론(on the other hand) 어떻다라는 백악관 안팎의 경제학자들에게 “외팔이(one-handed) 경제학자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비꼬기도 했다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반대다. 너무나 완고해서 논리를 통한 설득보다는 상대방 의견을 ‘순진한 생각’, ‘얼치기 수준’으로 무시하기 일쑤다.

더 씁쓸한 것은 전문가로서 쌓은 명성과 지식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등장하는 주요 인사들이 그렇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를 지내다 2005년부터 박근혜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해외출장을 가도 대통령 전용기만 타고 다녀서 면세점 갈 시간이 없다”며 명품가방을 요구했다는 소식에 쓴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미르재단과 보수단체에 필요한 돈을 수금하는 데 앞장섰던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 역시 완고한 시장우선주의자였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전경련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학자 출신이다. 대통령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얘기하던 달변가이기도 했지만 지금 보면 누구보다 반(反)시장적이었고, 권력을 좇는 ‘예스맨’에 불과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의 중심에 있는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 전 문체부 차관 역시 교수 출신이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이들은 ‘영혼 없는 공무원들’과 함께 헌법을 유린했다. 정유라 부정 입학과 학사 특혜 혐의 등으로 남궁곤·류철균 등 이화여대 교수들도 구속됐다.

시민이 전문가의 의견에 의지하다가는 주주와 전문경영인의 관계처럼 ‘대리인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고 신영복 선생은 지식인에 대해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라며 떨림이 없이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나침반이 아니라고 했다. ‘조기 대선’ 분위기에 전문가들이 캠프에 몰려들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신념과 그 신념을 펼치기 위한 자리 구하기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떨림’이어야 할 것이다.

산업부 | 박재현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 2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안쓰럽다.’ 국정 역사교과서 실무담당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2일 교육부를 통해 배포한 ‘국정 역사교과서 안창호 기술 오류 보도 관련 설명자료’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이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이 1일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에 도산 안창호의 설명이 잘못 기재돼 있다고 지적한 지 하루 만에 국편과 교육부는 해명자료를 냈다.

안창호는 최종본에 기재된 것처럼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의 초대 회장이 아니라 3대 회장인 것으로 확인됐으며, 연구학교 보급본 제작 시 정정하겠다는 내용이다.

해명자료의 백미는 그다음이다. 국편과 교육부는 잘못된 내용을 기재한 이유를 “도산안창호기념관·도산학회 자료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에 안창호가 초대 회장이라고 서술돼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2013년 8월 통과된 8종 검정교과서도 검정 통과 후 3년 동안 638건이 수정·보완됐다”며 검정교과서의 수정 내역을 표로 정리해 첨부했다.

역사교과서를 만들면서 원사료를 다양하게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더구나 국편이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에도 안창호는 초대 회장이 아니라고 나와 있다. 국편과 교육부에서 최고의 전문가라고 자랑하는 집필진들과 편찬위원들이 고작 하루 만에 확인할 수 있는 오류를 바로잡지 못해놓고 자료 탓을 하고 있다. 학생이 시험에서 오답을 적고 “제가 본 책엔 다르게 나와 있던데요”라고 하면 인정해 줄 것인가.

검정교과서에 오류가 너무 많아 국정화를 한다는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해명하며 검정교과서의 오류 사례를 내세우는 것도 꼴불견이다. 2013년 8월 검정 심사는 현 정부가 했다. 제 얼굴에 침 뱉는 줄도 모르는 해명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수준이다.

장은교 | 정책사회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 2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자기야 뭐해?’

카카오톡으로 물었다. 질문 앞 ‘1’이 지워지지 않는다. 10분쯤 지나니 ‘1’이 사라졌다. 읽었다는 얘기다. 답이 없다. 10분이 더 지났다.

‘피곤.’

‘화가 난 것은 아니지?’

20분 더 지나 답이 왔다.

‘그냥 피곤.’

이런 대화를 연인과 ‘카톡’으로 주고받았다 치자. 그(혹은 그녀)는 정말 피곤한 것뿐일까. 눈치가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면 이쯤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피곤하다’는 ‘너랑 대화하기 싫어’의 다른 말일 수 있다. 한창 좋아할 때라면 빛의 속도로 답변이 왔을 것이다. 겉으로 “별일 아니다”라고 하는데도 카톡의 문자만으로도 상대의 심기를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다.

지독히 눈치가 없는 남자의 최후는 20년 전 김건모가 ‘잘못된 만남’에서 경고했다. 내 친구를 여자친구에게 소개시켜줬더니 둘이 눈이 맞아서 결국 나를 차버렸다는 것이 스토리 라인이다. 여자친구와 ‘파투’가 난 것은 ‘심하게 다툰 그날 이후’였지만 징조는 있었다. 여자친구는 언제부턴가 나보다 내 친구에게 더 관심을 가졌고, 나 역시 알 수 없는 예감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애써 무시했다. ‘너를 믿었던 만큼 내 친구도 믿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사랑과 우정 모두 잃었다. 김건모는 훗날 이 노래가 자전적이라고 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를 결정한 이후, 중국을 바라보는 한국 정부가 딱 이 짝이다. 한류 드라마의 중국 방영이 중단됐고, 방한 관광객이 줄었다. 수출된 화장품은 대거 반송됐다. 국내 대기업의 전기차 배터리는 현지에서 사용 거부당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씨의 공연도 불발됐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잇단 세무조사와 소방점검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뿔테 안경을 썼다고 비자도 안 내준다. 이 모든 변화가 지난해 7월 사드 배치 발표 이후 벌어졌다.

정부는 “중국이 공식적으로 사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며 애써 상황을 부인한다. 연인이 토라졌다고 말을 안 하니 토라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그러면서 하는 말이 “화장품은 중국 통관기준에 못 맞췄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국내 기업 탓으로 돌린다. “유커 축소는 중국의 저가관광 축소 조치에 따른 것”이라며 중국 내부 정책 변화를 탓하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세계적인 소프라노 공연을 불허하면 중국만 손해”라는 말도 나왔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다.

사드 배치 결정이 난제였다면 정부는 공개적으로 국민들에게 물었어야 한다. 사드 배치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 우리가 얻거나 잃게 될 것들을 충분히 검토한 뒤 결정을 내렸어도 늦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랬다면 중국의 무역제재도 지금만큼 당황스럽거나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사드 배치를 결정할 때 그 정도의 위험은 함께 감내하기로 이미 국민적 합의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여전히 아니라고 하는데 중국의 죄기는 더 심해진다. 그러니 대기업도, 서울 명동 상인들도 불안한 거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중국의 무역제재가 존재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런 뒤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서는 게 옳다. 대미 안보외교를 펴는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 똑같은데 중국이 유독 한국만 치는 것은 한국 정부의 두루뭉술한 대처에도 원인이 있다.

그래도 답을 모르겠거든 정부는 ‘잘못된 만남’을 다시 들어보라.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울어보지만 또 다른 친구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해주는 말은 ‘잊어버리라’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한국의 입장을 중국이 정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어쩌겠는가. 국민에게 묻지 않고 결정한 사드 배치는 유감스럽지만, 중국의 보복에 이런 식으로 계속 끌려갈 수도 없다.

경제부 박병률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설 연휴라 뉴스 많이 못 보셨지요? 명절 사건·사고 소식부터 전해드립니다. <명절 다툼에 집나간 30대女, 만취 역주행…5명 중경상>, 제목만 봐도 내용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30대女’에 분개하는 댓글이 주르륵 달려 있군요. <명문대 ‘스펙 빵빵女’의 눈물 “피해 고스란히”>는 ‘최순실 사태’로 재벌 총수들이 조사를 받느라 조직·인사 개편이 뒤로 밀리면서 상반기 채용 일정이 올스톱됐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스펙 빵빵女’는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친구에게 성관계 들키자 “성폭행당했다” 신고>한 여성도 있었군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소식은 연휴에도 이어졌습니다. <최순실 뒤통수 친 장시호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클릭하니 특검이 설날에도 장시호를 소환했다는 좀 싱거운 내용이네요. <떡국은 먹었나? 면회도 없는 김기춘-조윤선> 기사에선 두 사람이 수감된 서울구치소가 수감자에게 설날 아침 떡국을 제공했다는 건 알 수 있는데, 두 사람이 ‘1500원짜리’ 떡국을 먹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조윤선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모르네요. <“조윤선 울고불고…” 충격폭로> <점점 초췌…조윤선 닷새 사이 변화> 등등.

정치 뉴스입니다. 유승민이 김종필을 만났다는 소식에 더해 <유승민 딸 유담, 엄청난 미모로 등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군요. 아버지 대선 출정식에 나온 딸이 ‘여전한 미모’였다는 걸 보여주는 사진 뉴스네요. <투병 중 이건희 1년 새…‘이럴 수가’>라는 제목의 경제 뉴스가 연휴 내내 [속보]로 떠 있네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보유주식 평가액이 1년 새 5조원 가까이 늘었다는 내용입니다.

연예 뉴스는 넘쳐납니다. 2NE1 멤버 씨엘이 일본의 택시에서 운전석과 승객석 사이 칸막이에 하이힐을 올려 무개념 논란에 휩싸였군요. ‘설현 못지않은 환상 뒤태’를 자랑하는 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모 아나운서는 ‘파격적인 비키니 자태’를 뽐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김구라와 한은정은 “연애한다면 무조건 공개 연애 할 것”이라네요. <BJ가 자리 뜨자, 옷 벗기 시작한 여성의 정체> 같은 뉴스는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 간추려 전하기 힘드네요. 네이버 스탠드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30일 오전 현재 ‘네이버 뉴스스탠드’의 ‘종합/경제’로 분류된 언론사(46개)에서 고른 뉴스들을 브리핑 형식으로 구성해 봤다. 네이버 뉴스스탠드는 언론사들이 직접 뉴스를 편집하는 공간이다. 이 ‘포털 뉴스 가판대’에서 종합지와 경제지, 연예지, 성인잡지를 구분하긴 쉽지 않다. 타블로이드와 정론의 경계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정치·사회 부문엔 사안의 핵심에서 동떨어진 파편적인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제목 뽑기, 성적 상품화·대상화도 여전하다. 각 신문사 기자들이 공들여 취재한 좋은 기사는 종이에선 찾을 수 있지만,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선 찾을 수 없다. 온라인 뉴스 편집자들이 ‘저널리즘’이 뭔지 몰라서, 추구하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선정적이거나 알맹이가 빠진 흥미 위주의 기사들로 도배하는 이유는 트래픽 때문이다.

언론사들은 경제·사회적 위기에 빠져 있다.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려면, 즉 수익을 내려면 트래픽을 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선정적인 뉴스를 더 ‘생산’해야 한다. 그 결과 악화된 건 ‘기레기’로 표상되는 저널리즘의 사회적 위기다. 돈을 제대로 번 것도 아니다. 온라인 광고 수익은 한계에 부딪혔다. 웹 트래픽은 하향 추세다. 모바일 트래픽은 확 늘어나지 않는다. 온라인 독자가 클릭할 거라 여기는 뉴스를 더 만들어야 하는 악순환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런 악순환에서 자유로운 언론사는 별로 없다.

십수년간 출근하면 종이신문을 들춰보다 모바일팀에 온 뒤로 네이버 뉴스스탠드를 훑어본다. 이곳에서 느끼는 건 공멸의 징후다.

모바일팀 | 김종목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매주 토요일 광화문 촛불집회는 거대한 민주주의 야시장이다. 지난 석 달 동안 야시장 풍경은 분명 달라졌다. 탄핵이라는 절대 목표가 있던 때는 절박하게 뭉쳤다. 지금은 저마다 마음속 광장에서 다양한 담론의 분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마치 묵은 낙엽 위에 또 낙엽이 쌓여 숲은 잊혀져가지만 어느새 수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광화문 한 사케집은 붐볐다. 우리 일행은 작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파전과 어묵탕을 주문했다. 750㎖ 사케 반병은 차게, 또 반병은 따뜻하게 데웠다. 어묵탕 국물이 말갛게 끓어오를 때쯤 우린 광장 숲더미에서 골라온 나무를 꺼내보자고 했다.

가장 최근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다. 두 사람은 많이 다르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이 시장은 “물이 반밖에 없는데 참아야 하나”라면, 안 지사는 “아직 물이 절반은 있으니 여기서 시작해보자”는 식이다. 이 시장은 사적 고난을 통해, 안 지사는 공적 고난을 통해 성장했다. 촛불정신에서 봐도 이 시장은 촛불의 변혁에, 안 지사는 촛불의 평화에 가깝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23일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오리엔트 시계공장에서 열린 대선 출마선언을 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그런데도 왜 이 두 사람을 같이 거론하게 될까. 누군가 “시대 교체, 50대 기수(연합)론이 강렬해서”라고 했다. 50대는 한국 사회 주축이면서도 부모 부양에 자식 양육, 소득 불안정까지 가장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세대다. 세대별 유권자 지형 변화에서도 대선 캐스팅보터가 40대에서 50대로 이동했다는 ‘세대 이동’ 지표가 뚜렷하다. 결국 이들의 대표가 이들의 고통을 해소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다. 탄핵심판 이후 심판 프레임보다 미래 프레임이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도 시대 교체, 50대 기수론을 받치는 힘이다.

다른 누군가는 “정당 정치 발전”을 이유로 들었다. 쇼핑하듯 정당을 고르는 후보, 때만 되면 텐트 치기 바쁜 후보들 틈에서 이 두 사람은 ‘고향 까치’ 같다고 했다. 그런 느낌이긴 하다. 특히 안 지사는 구태와 동의어였던 ‘직업 정치’를 바꿔 놓았다. 당의 명령에 따라 불출마했고, ‘폐족’을 자처하며 성찰했다. 이 시장은 야권 촛불공동경선을 주장하면서도 민주당 대선 경선 룰에 승복했다. 정당을 당원들의 민주적인 의사 결집체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케 한 병을 더 시켰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됐다. ‘2등 경쟁’이 화두가 됐다. ‘문재인 대세론’을 기정사실화하고 두 사람이 2등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정책만 보면 이 시장은 문재인 전 대표 왼쪽에, 안 지사는 문 전 대표 오른쪽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 시장은 문 전 대표의 진보정체성 강화를, 안 지사는 문 전 대표의 외연 확대를 책임진 셈이다. 촛불 정국 최전선에 섰던 이 시장 덕에 색깔론 타깃이 될 뻔했던 문 전 대표는 1위 자리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이 시장은 문 전 대표와의 ‘사이다·고구마’ 공방도 확대하지 않았다. 안 지사는 ‘비문 우산론’ ‘개헌’ 등 치열하게 문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을 막았다.

은메달을 따려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는 없다. 두 사람도 문 전 대표의 페이스메이커가 아님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2등 경쟁은 합리적 의심으로 다가온다. 혹시 문재인 이후를 차지하려는, 그래서 지금은 밋밋한 경선의 흥행 코드면 된다는….

그냥 2등 경쟁은 김빠진다. 기왕 할 거면 색깔 분명한 젊은 주자들이 더 치열하게 2등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교체에 가려진 시대교체, 정당정치 발전이라는 ‘이재명·안희정’ 출마 의미가 살수 있다. 레닌은 “혁명은 하층계급이 과거 방식으로 살기를 원치 않는 것만으론 어렵다. 상층계급도 과거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상태여야 한다”고 했다. 촛불민심이 밀어올린 ‘아래’의 변화와 대표 주권자 후보들이 만드는 ‘위’의 변화가 만나야 새 시대를 열 수 있다.

마지막 사케 한 병은 다 비우지 못했다. 2등 경쟁이 만드는 변화를 우린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정치부 구혜영 기자

'정치 비평 > 기자 칼럼, 기자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건모에게 물어보라  (0) 2017.02.06
네이버 스탠드, 공멸의 징후  (0) 2017.01.31
이재명 안희정  (0) 2017.01.26
불사르다, 불태우다  (0) 2017.01.24
‘알맹이’는 쏙 빠진 문체부의 사과  (0) 2017.01.24
조센진의 거짓말  (0) 2017.01.1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명색이 기자라면서 대책 없이 혼동해 사용하는 단어가 꽤 많다. 최근에도 뒤늦게 의미의 차이를 깨친 단어들이 있다. ‘불사르다’와 ‘불태우다’이다. 열정을 불사르고, 이 한 몸 불태워 어쩌고저쩌고하는 식의 표현들을 뒤죽박죽 사용했으나 사실은 잘못된 것이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불사르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불에 태워 없앤다’와 ‘무언가를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 전자는 서류 더미나 책을 불사르다, 후자는 번뇌나 잡념을 불사른다는 것이 적절한 예문이다. 불태우다 역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무언가 불이 붙어 타게 하거나, 비유적으로 어떤 감정이 끓어 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열정을 불태우고 의지를 불태운다는 표현이 맞다. <더 건방진 우리말 달인>이라는 책을 보니 불사르면 없어지는 것, 불태우면 더 커지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돼 있다.

지난해 말 “한 몸 불사르겠다”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대권도전 포부가 태평양 건너에서 전해졌다. 별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진부하고 케케묵은 수사에 내가 집착하게 된 것은 그가 귀국 일성으로 이 말을 다시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불사른다는 것일까.

16일 반기문 전UN사무총장이 부산 남구 대연동 UN기념공원을 둘러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의 귀국 직전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원 스님이 소신공양했다. 소신공양은 ‘자기 몸을 불살라 부처님 앞에 바친다’는 뜻으로,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공양물로 바친다는 극한의 수행법이다. 이 의미를 찾아보면서 나는 그제야 앞서 설명한 ‘불사르다’와 ‘불태우다’의 차이점을 알게 됐다.

티베트의 여러 스님들, 가깝게는 7년 전 문수 스님이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실재하는 몸을 불사르는 이 극한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소외된 약자들의 처절한 자기 표현법이다. 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실재의 몸을 태우는 것이 아닌, 자신이 죽어 없어질 만큼 헌신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마도 반 전 총장은 그런 의도였겠지만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 자리는 이름 없이 희생하는 비천한 곳, 혹은 암흑을 떨치기 위해 몸소 헤쳐가야 할 가시밭길 같은 곳이다. 서로 하겠다고 기를 쓰는 대통령 자리는 아닌 것 같다. ‘불사르다’는 단어를 참칭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아마도 열정을 불태워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정도의 의미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게 한다는 동사 ‘불태우다’와 주로 조응하는 명사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먼저 열정이나 투혼, 의욕과 같은 단어다. 귀감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줄 때 사용된다. 또 다른 부류에는 욕정, 야망, 노욕 따위가 포함된다. 이런 단어로 묘사될 경우 남들에겐 분노와 짜증을 돋우고 본인은 망신살 뻗치는 결과를 맞닥뜨릴 확률이 높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민생 행보에 나선 반 전 총장의 모습에서 투혼과 열정을 불태우려는 그의 의지가 조금은 보였다. 어이없는 실수도 있었지만 시차적응 과정이려니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체는 금방 드러났다. “정 다른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하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나는 6·25 전쟁 때 땅바닥에서 공부했다” 따위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그의 언사는 형언할 수 없이 불쾌했다. “나이 들면 양기가 입으로 올라온다”며 성희롱을 합리화하거나 “우리 때는 말이야…” 하고 시절 지난 노래에 박자맞추기를 강요하는 ‘꼰대’의 모습이 겹쳐 보일 만큼.

열정과 투혼을 불태우고 싶은 청춘은 지금도 차고 넘친다. 문제는 거친 비바람 탓에 불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구를 100바퀴나 돌며 쌓은 소중한 경험과 자산까지 왜 불태우려 하나. 우리 청춘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람막이다.

문화부 | 박경은 기자

'정치 비평 > 기자 칼럼, 기자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이버 스탠드, 공멸의 징후  (0) 2017.01.31
이재명 안희정  (0) 2017.01.26
불사르다, 불태우다  (0) 2017.01.24
‘알맹이’는 쏙 빠진 문체부의 사과  (0) 2017.01.24
조센진의 거짓말  (0) 2017.01.17
장관님의 자기최면  (0) 2017.01.1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56·제2차관)이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실·국장 이상 간부들 명의로 “(블랙리스트로)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실망, 좌절을 안겼다”며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였다. 문체부는 사과문에서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또 “특검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질 것”이라며 “부당한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체부의 사과문 발표는 앞뒤가 바뀌었다. 블랙리스트의 작성 과정과 관여자를 밝혔어야 했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관여했는지, 그래서 소위 ‘부역자’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문체부의 대대적인 사과는 특검 수사로 인해 실체가 규명될수록 비난 수위가 높아질 것을 우려해 물타기를 한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왼쪽) 등 간부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진상을 밝혀 사과할 기회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블랙리스트 존재가 공론화된 것은 2015년 9월 국정감사 때였다. 9473명의 명단이 들어간 블랙리스트 문건이 공개된 시점은 지난해 10월이다. 문체부는 그동안 “블랙리스트를 모른다”는 조윤선 전 장관(51)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 전 장관이 구속된 이후에야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과에 나선 것이다.

조윤선 전 장관

블랙리스트에 관한 한 모르쇠로 일관했던 문체부는 현재 ‘풍비박산’이 났다. 현직 장관이 구속되는 첫 사례를 기록하며 이미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60), 김종 전 2차관(56), 정관주 전 1차관(53)까지 구속됐다. 한 부처에서 최고 수장인 전·현직 장차관 4명이 같은 사건으로 구속된 사례는 건국 이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앞으로 구속자 명단에 누가 더 포함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장 이날 사과문을 발표한 송 직무대행 역시 블랙리스트 관여자로 의심받고 있다. 이 외에 고위직부터 산하기관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한 관계자가 더 밝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체부의 사과를 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그만두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단체들로 구성된 ‘박근혜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공범자로 추정되는 범죄자의 사과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문체부가 진실 규명이나 관련자 처벌 없이 “졸속 사과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대국민사과는 문체부가 블랙리스트를 바라보는 안일한 시각을 여과 없이 드러낸 꼼수에 가깝다.

문화부 | 김향미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맘때쯤 신년회가 있었다. 예약한 중국집이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이라 오후 5시45분에 전철역에서 모여 가기로 했다. 5시35분쯤 도착하니 개찰구 앞에 상당수가 있었고, 5시44분에 마지막 멤버까지 40여명이 모두 모였다. 당시 어느 변호사단체의 옵서버이기도 했다. 여름 총회에서 2년 임기 회장을 새로 뽑았다. 이날 이사진이 모여 2년치 이사회 날짜도 정했다. 수첩들을 펼쳐 약속이 없는 날짜를 맞춰 가는데, 다다음해 봄의 약속이 잡힌 사람이 여럿이었다. 

“조센진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 시절 동네 술집 옆자리에서 들려온 얘기다. 나의 변변찮은 일본어를 알아채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역사와 정치를 시비하려는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올해 한국에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에 재협상을 요구한다고 하니, 일본 인터넷에 비난이 들끓는다. “처음부터 조센진과 약속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

‘정의의 회복’이라는 낭만적인 발상의 재협상 요구는 ‘조센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프레임에 뛰어드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프레임은 ‘약속의 절대성’이 아니라 ‘청구권의 유효성’이다.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의 결함을 반세기 만에 되풀이한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킨 협약으로, 이러한 약속은 있을 수 없다는 게 현대 국제사법의 상식이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야만적인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2차 가해’를 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니라고 우기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1년 동안 고령인 7명의 할머니들은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의 말 한마디 못 들어보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기 수요시위에서 일곱 명 할머니들의 사진 앞에 시민들이 바친 꽃이 정부를 대신해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듯합니다. 이상훈 기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이렇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2조1항). 이후 1980년대까지 군사정권이 계속됐고, 일본에 소송도 제기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위안부와 징용공들의 소송이 시작됐다. 하지만 2000년대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패소했다. 주요한 이유는 한일청구권협정이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한국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해 최종적으로 청구권을 소멸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사법부의 입장은 기존 행정부의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아무리 부정해도 일본의 사법부와 행정부는 유난히 긴밀하다).

사실 1990년대까지 일본 행정부는 일본 국민이 피해자로서 제기한 소송에서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1963년 일본인 원폭피해자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샌프란시스코 협정에도 불구하고 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했다. 또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인들이 소련 정부에 제기한 소송에서도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배상 요구가 가능하다고 법무성이 밝혔다.

일본 사법부의 청구권 소멸론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7년 최고재판소는 “국가 간의 행위로 개인의 실체적 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고, 재판상 청구권이 소멸된 것”이라고 했다.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다. 이에 따라 니시마쓰 건설은 화해 형식을 빌려 자발적으로 보상했다. 중국과 일본 역시 1972년 공동성명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했다.

상대로 나눠서 보면 일본은 미국, 소련, 중국과 달리 한국에만 청구권 소멸을 주장한다. 여기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이란 불필요한 문구가 한몫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문구로도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2015년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같은 반인도적인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합의는 무효다.

사회부 | 이범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그도 이렇게까지 고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받았을 때 교육을 위해 한몸 불사르리라 다짐했을 수도 있고, 가문의 영광이니 해보자고 자리욕심을 냈을 수도 있다. 부동산 투기·차녀 국적 포기 의혹이 제기됐지만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했을 때 어려운 고비는 다 넘었다 여겼을까.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1월13일 취임했다. 박근혜 정부의 세번째 교육부 장관이다.

이명박 정부의 장관 후보자 4대 필수과목이 병역비리, 세금탈루,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였다면 박근혜 정부 장관의 필수과목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넷째도 ‘자기최면’이다. 이 장관은 여러 부처 장관들 중에서도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함께 발군의 자기최면 능력을 보이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는 이 장관이 취임하기 전 발표됐다. 이 장관은 정권이 만든 “검정교과서의 좌편향이 심각해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되풀이했다(그가 8종 검정교과서들을 읽어봤는지는 모르겠다). 편찬기준도 집필진도 비공개해 ‘복면집필’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복면가왕>도 노래가 끝나야 가수얼굴을 공개한다”며 웃었다(요즘 말로 이런 걸 ‘×드립’이라고 한다). “국가가 역사관을 독점하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라는 지적엔, “교과서가 공개되면 논란이 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여기까지가 “우리는 ‘올바른 교과서(정부가 지은 국정 역사교과서 이름)’를 만들고 있다”는 1차 자기최면이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오른쪽 두번째)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중학교 역사 1·2, 고등학교 한국사 등 총 3종의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이 부총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정지윤 기자

2차 최면은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이후 시작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최면이다.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편향과 역사왜곡에 더해 기초적인 사실오류까지 무더기로 발견되자, 장관은 국정교과서 수정적용안을 내놨다. 2018학년도부터 국·검정교과서를 혼용하며, 2017학년도엔 원하는 학교만 연구학교로 지정해 국정교과서를 쓰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연구학교로 지정되면 가산점과 연구비 1000만원을 주며 연구학교 지정을 거부하는 교육청은 제재하겠다고 밝혔다(다시 말하지만 절대 강행하는 것은 아니란다). 연구학교 신청과 지정은 오는 2월10일까지 끝내야 한다(지금 학교는 방학 중이다). 2018학년도부터 적용되는 개정 교육과정 교과목들은 2021학년도 수능부터 반영되지만, 한국사는 1년 앞당겨 2020학년도 수능부터 적용한다(수능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겁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국정화 강행이 아니라 ‘국·검정혼용’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최소 2년 걸리는 검정교과서 개발도 1년 안에 끝내라고 통보했다(개발시간은 줄었지만, 검정교과서 심사는 강화하겠단다).

이 장관은 “학교현장의 혼란을 막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장관들은 단체로 부끄러움을 잊는 주사라도 맞은 걸까. 서울대 교수로 20년을 재직한 장관이 ‘혼란’의 말뜻을 모를 리 없다. 자기최면이 아니고서야, 시정잡배나 쓸 법할 억지를 멀쩡한 얼굴로 반복할 리도 없다.

장관은 시한부다. 학생들이 국정교과서 몇 단원을 다 배우기도 전에 이 장관은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외에도 교육부는 ‘최순실 특혜’ 의혹의 중심인 이화여대에 대학재정지원사업 몰아주기, 청와대 입김에 따라 국립대 총장 지명 미루기 등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다.

내일이면 취임 1년. 이 장관은 장관직 제의를 받았을 때 품었던 꿈을 얼마나 이뤘을까. 그는 1년 전 취임사에서 “무엇보다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국민이 원하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항상 멀리 내다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조타수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최면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 홀로 설 장관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장은교 정책사회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전혀~ 몰랐죠. 학적팀에서 e메일을 받고 깜짝 놀라가지고. ‘아이고, 정유라가 내 수업을 들었어요?’라고 해서 그쪽도 놀라고 저도 놀라고 그랬습니다. 하하.”

기자는 류철균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와 지난해 11월 여러 차례 통화했다.

류 교수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게 학점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취재 중이었다. 류 교수의 행적은 의심스러웠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원한 청년희망재단의 초대 이사였고 차은택씨와 함께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필명 이인화로 박정희 전 대통령 미화 소설도 썼다.

류 교수는 학점 특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정씨를 몰랐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김경숙 이화여대 신산업융합대학 학장이 정씨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습니다, 없습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했고, ‘이번 게이트와 정말 무관하냐’는 질문에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나 싶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정유라 이화여대 재학 당시 정 씨의 대리 시험 등 학사 특혜를 준 의혹으로 긴급체포된 류철균(필명 이인화) 교수가 지난 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하지만 그의 각종 비리를 밝힌 보도(경향신문 2016년 11월8일자 2면)가 나갔고 류 교수는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본지 기사에 대해 왜곡 보도라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고, 이 기사로 인해 삼성그룹 간부 대상 강연이 취소됐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본지는 중재위에서 “국회가 특검의 수사 대상으로까지 결정한 사안을 반론을 빌미로 언론사에 허위사실을 적시토록 하는 게 맞느냐”고 했지만 그의 대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류 교수는 해를 넘기지도 못한 지난달 31일 체포돼 수의를 입고 눈앞에 나타났다. 호송차에서 내려 특검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허탈함이 밀려왔다. 류 교수의 변호인이 밝혔다는 내용은 더 참담했다. “김경숙 학장이 정씨를 잘 봐달라고 부탁해 최씨를 만났다”는 해명이었다. 이번 논란에서 류 교수는 한번도 일관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공적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사법기능을 하는 중재위에서, 수사를 하는 특검에서 다른 말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문학과 게임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동안 여러 차례 표절 의혹을 샀고, 그때마다 혼성모방이니 판타지니 하는 말들을 했다. 그런 그가 법정에서는 또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하다.

이혜리 | 사회부 lhr@kyunghyang.com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빨갱이 XX들! 박원순 지지하는 놈들은 다 빨갱이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저자를 한 대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2011년 10월, 박원순과 나경원이 맞붙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기자들 몇이 경제부처 과장급 공무원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누구를 지지하느냐가 자연스레 화젯거리가 됐다. 누군가가 즉석에서 가상투표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손을 들고 보니 박원순 지지가 일방적으로 많았다. 과장은 나경원 지지자였다.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삿대질과 함께 내던진 말이 “빨갱이 XX들”이었다.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항의 표시를 했지만 밤새 분이 삭지 않았다. 그 선거에서 서울시민들은 박원순을 택했다.

그닥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은 며칠 전 또 다른 자리를 계기로 되살아났다. 세종시의 모 부처 관료들과 가진 자리였다. 한 사무관이 대뜸 “요즘 언론은 너무 좌편향적”이라고 말했다. 비선 실세 최순실 관련 보도에 대한 항의로 읽혔다. “도대체 좌파가 뭐냐”고 물었다. “정부에 반대하면 좌파”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10년째다. 관료들은 한국 사회의 좌경화를 걱정하지만, 나는 되레 관료의 우경화를 걱정한다. 한국 사회가 왼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오른쪽으로 갔다. 한국에서 ‘우경화’는 ‘권위주의의 부활’과 이란성 쌍둥이다. 교육부는 국정교과서를 고집했고, 외교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나홀로 이뤄냈다. 국방부는 전격적으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를 결정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했다. 마치 새벽에 밀어붙인 군사작전 같았다. 대화는 없었다.

자신을 비판한 개인과 단체는 ‘블랙리스트’로 묶었다. 가차 없었다. 문학계의 노벨상이라는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한강도, 아시아 최고 영화제라는 부산국제영화제도, 경향신문도 딱지가 붙었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는 표현만 달리했을 뿐 빨갱이의 다른 이름이다.

관료 개개인이 우경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누적된 인사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청와대는 수첩에 말을 잘 받아적는 ‘올드맨’들을 복귀시켰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잘하는 관료들만 승진시켰다. 가뜩이나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특정 지역 인사들이 중용되면서 권위주의는 더욱 강화됐다. 부적절한 지시를 거부한 관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끝내 옷을 벗었다. 그러니 우경화는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짓궂은 상상을 해본다. 만약 정권교체가 되면 어떻게 될까라고. 새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빨갱이 정권과는 일 못하겠다”며 사표를 던질 관료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럴 관료가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10년 전 정권교체 때 과감히 낯빛을 바꾸었던 관료들을 하도 많이 본 탓이다. 한 고위관료는 노무현 정부 당시 “종합부동산세는 내가 만들었다”고 외쳤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실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세금”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는 제 손으로 종부세를 무력화시켰고, 공공기관장으로 영전했다.

새 정권의 출범을 바라는 마음 한구석에는 권위주의에 절어 우경화된 관료들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 갈망이 있다. 관료들의 도시인 세종시는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손을 들어줬다. 기저에 흐르는 공심(公心)은 현 정권 주류와는 달랐다. 낮은 자세로 국민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관료들이 많다. 이들의 앞길을 터주기 위해서도 새 정부가 필요하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7년 신년사에서 “우리 의회 민주주의는 강하다. 협력과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느냐고? 아니다. 반대와 비판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메르켈 정부와 같은 철학을 가진 정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경제부 박병률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6월21일 유명 영화감독과 배우의 스캔들이 한 매체 보도로 불거졌을 때, 그날 하루 네이버에 오른 관련 기사는 403건이다. 경향신문은 지면에도 온라인에도 내보내지 않았다. 나와 편집자는 온라인에 ‘무엇을 쓸 것인가’ 못지않게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사안을 두고 의견을 나누다  “쓰지 맙시다” 할 때가 많다.

대량생산체제의 한국 온라인 뉴스시장에서 ‘우라까이’(베껴쓰기를 가리키는 일본어로 언론계 속어)든 ‘인용보도’든 수분이면 뚝딱 만들어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뷰를 보장하는 뉴스거리를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양적인 트래픽을 유지·상승시키는 것도 팀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정론을 표방하고, 독자들은 그 실천을 주문한다. 트래픽과 저널리즘의 동시 수행이라는 언뜻 불가능한 과제를 마주한 채 고민할 때가 많다.

경향신문 현장 기자들이 모든 온라인 이슈를 거르기는 힘들다. 온라인에서 불붙는 타지의 단독보도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슈를 받을지를 판단하는 건 모바일팀 일이다. 신뢰할 만한 언론사 또는 사람(단체)인가, 단독보도나 주장에 물적 증거가 있는가를 들여다본다. 유명인의 사생활을 쓸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까다롭다.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어떤 소문·의심·비난·주장·추정을 담은 것이라도 기득권을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듯한) 내용을 두고서다. ‘○○신문·방송이 보도했다’로 내보내곤 했다. 일하면서 찜찜한 부분이었다.

온라인 저널리즘 문제와 대안을 물었을 때, 박재영 고려대 교수가 우려한 부분도 이것이다. “검증하지 않은 센세이셔널한 정보가, 검증한 밋밋한 정보를 몰아내는 경향성이 온라인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겁니다.” 그는 조기대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은 올해 미확인 정보가 전례 없이 온라인을 휘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국 언론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 JTBC와 TV조선 등 여러 언론사의 실증 탐사보도는 언론사의 개가였다고 박 교수는 평가한다. 그러나 언론 전반으로 확대해보면, 과가 공을 앞질렀다. 다른 언론사의 단독보도, 유명인의 SNS 발언을 두고 사실 확인과 검증 없이 받아쓰는 ‘카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가 ‘디지털뉴스팀’ ‘온라인뉴스팀’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정보 불충분, 이해집단의 대결구도화, 마구잡이 비판은 각각 오해, 갈등, 냉소를 부추기며 언론을 증오와 독설의 배설구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정통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김세은 강원대 교수는 온라인 팀·기자의 과제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유혹에서 벗어나라.” 품은 적게 들이면서 트래픽은 많이 뽑을 수 있는 기삿거리에 매달려선 안된다는 말이다. 현장 기자들이 공들여 취재한 기사를 전면에 배치해 승부수를 띄우는 게 시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검증·확인의 저널리즘을 수호할지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다. 김세은·박재영 두 학자도 참여한 <한국 언론의 품격> 책 머리말엔 “신뢰할 수 있는 뉴스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비틀거린다”는 월터 리프먼(1889~1974)의 말이 적혀 있다. 지난 미 대선 때 페이스북에 트럼프 관련 가짜 기사를 써온 폴 호너라는 사람은 대선이 끝난 뒤 가짜 기사가 널리 퍼진 이유를 두고 “트럼프 지지자들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널리즘의 수행은 언론 몫이자 책임이지만 시민 역할도 중요하다. 다행히 한국엔 언론 비판에 적극적인 시민들이 많다. 언론의 자정 능력은 약하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여러 언론사의 자성은 시민들의 질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대선에서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사실보도 기준을 갖고 언론을 감시·독려해야 할 이유도 여기 있다.

모바일팀 | 김종목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등, 1등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공부 잘하는 쓰레기만 만들어내는 걸….”

“그러게요. 배려하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울 기회나 있었을까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얼마나 떠받들어주며 오냐오냐 했겠어요.”

“아유, 그렇다고 1등 소용없으니 2등 하라고 하실 건가요? 인성이야 평소 부모 보고 배우는 거지 따로 시간 내서 가르칠 것도 아니고. 그런 쓰레기들한테 밟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우아하게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약간 과격한 뒤끝을 남기며 마무리됐다. 얼마 전 모처에서 열린 예비 고3 학부모 설명회 자리였다. ‘최저’니, ‘입결’이니 하는 기본적인 입시용어도 모르는 불량 엄마로 계속 남을 순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예약을 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수의 ‘포스’가 풍기는 엄마들 옆에 용케 자리를 잡은 뒤, 혹시 쓸 만한 정보라도 하나 건질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참이었다.

“도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라 걱정만큼이나 요즘 자주 들리는 하소연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해줄 답이 없다는 부모들의 방황과 고민은 지하철 안에서도, 막창구이집 옆 테이블에서도, 카트를 밀고 선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들려온다.

어린 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어나와 시국선언을 하게 만드는 작금의 사태를 보며, 기성세대 일원으로서 일말의 자괴감에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여기에 더해 청문회라는 이름으로 지난 몇 주간 펼쳐진 ‘초특급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수많은 이들을 충격과 분노, 끝모를 무기력감으로 밀어넣었다. 검사와 변호사, 대학교수, 고위관료 등 1등만 하고 살아왔을 소위 최상위권 초엘리트들의 적나라한 민낯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이면 어릴 때부터 누구나 한번쯤은 듣고 자랐음직한 권면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훌륭’은 사전적 의미가 아닌 세속적 성공일 테고, 그렇게 형성된 기득권층에 대단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국민도 많지 않다. 그래도 너무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 빛나는 재능을 어둠의 세력에 갖다 바치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이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천연덕스럽게 재연하고 확인시켰다. 그래서 충격파와 절망감이 더 컸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국회의원 박주민의 이야기가 잠시 화제에 올랐다. 대원외고와 서울법대, 로펌을 거쳐 거리의 변호사가 된 그는 ‘금수저’를 가지고 흙을 퍼 먹는, 또 다른 의미로 역주행의 아이콘이다. “대단한 건 맞는데 내 자식이 그렇게 산다면 싫을 것 같아요. 지금 같은 결말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같은 스펙이면 우병우나 조윤선처럼 살길 원하지, 박주민과 같은 길을 가길 바라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좀 더 인간답게 사는 세상, 아이들에게 물려줄 이상적 미래상을 저마다 설파하던 상황이었다. 내밀하게 감춰진 허위의식이 ‘뽀록’나고 있는데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모의고사 평균 5등급이 목표인 학부모 앞에서 너무한 처사 아니냐”는 또 다른 참석자의 이야기에 다들 빵 터지고서야 화제가 전환됐다.

입으로는 인성이 중요하다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휴대폰을 잡고 빈둥거리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 “도대체 언제쯤 정신 차리려나” 싶어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자아분열을 반복적으로 겪는 나 같은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갑이 아니어도,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듬는 것이다.

문화부 박경은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치적 생명을 잃은 대통령 앞에서 국정을 장악한 총리가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가 할 일은 한마음 한뜻으로 무너진 경제를 살리는  것입니다.” 국정 안정과 경제 회복을 강조하는 총리에게 질서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그 질서는 국민 1만5000명의 희생을 감춰야 가능했다. 탄핵소추 이틀 전 개봉한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다룬 재난 영화 <판도라>는 극장 밖 현실의 데자뷔로 가득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현실에서 “경제가 백척간두의 위기”라는 우려가 광장을 겨냥하고 있다. ‘정치는 탄핵당했어도 경제는 굴러가게 하라’ ‘광장을 향했던 민심을 돌려 경제 회생에 집중하라’는 주문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그동안 존재감 없던 경제부총리는 “중심을 잡고 가겠다”며 지휘계통의 질서를 다잡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탄핵이 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진실은 가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광장의 촛불을 정치혁명으로만 규정하기에는 그 넓고 깊은 분노를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 불평등과 고착화하는 계급질서에 대한 탄핵이자, 양극화를 부추기는 경제질서에 대한 탄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핵 정국→불확실성 증대→경제위기 증폭’이라는 도식에 막혀 촛불의 힘은 경제로의 확장을 방해받고 있다.

 

영화 '판도라' 포스터

 

정치와 경제의 경계는 두부 자르듯 가를 수 없다. 경제 역시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선택의 문제이고, 이해관계자들의 이해를 조정하는 정치적 과정과 설득을 위한 정치적 권위가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은 ‘1원1표’의 경제적 운영 원리가 ‘1인1표’의 민주주의 작동 원리 위에 서면서 정치를 경제에 종속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욕구들을 전부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중 일부를 선택하는 것이 경제와 정치의 본질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처럼 중요한 판단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일이 생기기 어렵다. 그 때문에 전문가들은 민주주의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든가 민주주의가 발전을 촉진하지 못한다며 곤혹스러움을 항변하기도 한다.”(윌리엄 이스털리 <전문가의 독재>)

 

지금 바닥을 기고 있는 경제는 민주주의 후퇴와 박근혜 정부 무능의 결합에서 비롯됐다. 오르는 전셋값을 막아달라고 하니 ‘억울하면 집 사라’라는 대책을, 정규직을 늘리라는 요구에 ‘시간제 일자리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려달라는 데는 꿈적도 않더니, 1억원이 넘는 급여를 받는 장관이나 금융기관장 등 고액연봉직은 “양심도 없이”(심상정 정의당 대표) 임금피크제를 쏙 빠져나갔다. 오발탄도 이런 오발탄이 없다. 일자리 부족과 1300조원의 가계부채로 서민들의 지갑이 꽁꽁 닫혔고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속출했다. 박근혜 탄핵 전 3년9개월은 경제위기 경고음의 연속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가 조금이나마 왜 그랬는지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죽을낍니더.” 영화 <판도라>에서 안전을 장담하던 정부, (원전)기업, 전문가들은 사고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사고 처리는 부상당한 원전 하청업체 직원과 소방대원들의 몫이었다. 탄핵 정국에서도 정부와 기업들은 여전히 경제성장을 위한 일사불란한 지원책밖에 없는 ‘박정희식 처방전’에만 기대고 있다. 규제완화와 ‘쉬운 해고’ 등을 되뇌고, 투자심리가 위축된다며 재벌 총수의 안위에 목을 매고 있다. 지금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에는 국가주도·재벌중심의 구시대 낡은 경제질서로 돌아가는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광장에 모인 촛불에 담긴 경제개혁의 요구를 구현할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게 나라냐”며 탄핵을 성취한 자신감은 시름시름 활력을 잃어가는 경제를 일으켜 세울 엔진이 될 수 있다. 단언컨대 탄핵은 경제에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그것도 아주 절호의 기회다.

 

산업부 박재현 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