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56·제2차관)이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실·국장 이상 간부들 명의로 “(블랙리스트로)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실망, 좌절을 안겼다”며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였다. 문체부는 사과문에서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또 “특검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질 것”이라며 “부당한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체부의 사과문 발표는 앞뒤가 바뀌었다. 블랙리스트의 작성 과정과 관여자를 밝혔어야 했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관여했는지, 그래서 소위 ‘부역자’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문체부의 대대적인 사과는 특검 수사로 인해 실체가 규명될수록 비난 수위가 높아질 것을 우려해 물타기를 한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왼쪽) 등 간부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진상을 밝혀 사과할 기회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블랙리스트 존재가 공론화된 것은 2015년 9월 국정감사 때였다. 9473명의 명단이 들어간 블랙리스트 문건이 공개된 시점은 지난해 10월이다. 문체부는 그동안 “블랙리스트를 모른다”는 조윤선 전 장관(51)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 전 장관이 구속된 이후에야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과에 나선 것이다.

조윤선 전 장관

블랙리스트에 관한 한 모르쇠로 일관했던 문체부는 현재 ‘풍비박산’이 났다. 현직 장관이 구속되는 첫 사례를 기록하며 이미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60), 김종 전 2차관(56), 정관주 전 1차관(53)까지 구속됐다. 한 부처에서 최고 수장인 전·현직 장차관 4명이 같은 사건으로 구속된 사례는 건국 이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앞으로 구속자 명단에 누가 더 포함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장 이날 사과문을 발표한 송 직무대행 역시 블랙리스트 관여자로 의심받고 있다. 이 외에 고위직부터 산하기관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한 관계자가 더 밝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체부의 사과를 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그만두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단체들로 구성된 ‘박근혜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공범자로 추정되는 범죄자의 사과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문체부가 진실 규명이나 관련자 처벌 없이 “졸속 사과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대국민사과는 문체부가 블랙리스트를 바라보는 안일한 시각을 여과 없이 드러낸 꼼수에 가깝다.

문화부 | 김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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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맘때쯤 신년회가 있었다. 예약한 중국집이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이라 오후 5시45분에 전철역에서 모여 가기로 했다. 5시35분쯤 도착하니 개찰구 앞에 상당수가 있었고, 5시44분에 마지막 멤버까지 40여명이 모두 모였다. 당시 어느 변호사단체의 옵서버이기도 했다. 여름 총회에서 2년 임기 회장을 새로 뽑았다. 이날 이사진이 모여 2년치 이사회 날짜도 정했다. 수첩들을 펼쳐 약속이 없는 날짜를 맞춰 가는데, 다다음해 봄의 약속이 잡힌 사람이 여럿이었다. 

“조센진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 시절 동네 술집 옆자리에서 들려온 얘기다. 나의 변변찮은 일본어를 알아채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역사와 정치를 시비하려는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올해 한국에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에 재협상을 요구한다고 하니, 일본 인터넷에 비난이 들끓는다. “처음부터 조센진과 약속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

‘정의의 회복’이라는 낭만적인 발상의 재협상 요구는 ‘조센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프레임에 뛰어드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프레임은 ‘약속의 절대성’이 아니라 ‘청구권의 유효성’이다.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의 결함을 반세기 만에 되풀이한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킨 협약으로, 이러한 약속은 있을 수 없다는 게 현대 국제사법의 상식이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야만적인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2차 가해’를 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니라고 우기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1년 동안 고령인 7명의 할머니들은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의 말 한마디 못 들어보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기 수요시위에서 일곱 명 할머니들의 사진 앞에 시민들이 바친 꽃이 정부를 대신해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듯합니다. 이상훈 기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이렇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2조1항). 이후 1980년대까지 군사정권이 계속됐고, 일본에 소송도 제기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위안부와 징용공들의 소송이 시작됐다. 하지만 2000년대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패소했다. 주요한 이유는 한일청구권협정이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한국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해 최종적으로 청구권을 소멸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사법부의 입장은 기존 행정부의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아무리 부정해도 일본의 사법부와 행정부는 유난히 긴밀하다).

사실 1990년대까지 일본 행정부는 일본 국민이 피해자로서 제기한 소송에서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1963년 일본인 원폭피해자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샌프란시스코 협정에도 불구하고 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했다. 또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인들이 소련 정부에 제기한 소송에서도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배상 요구가 가능하다고 법무성이 밝혔다.

일본 사법부의 청구권 소멸론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7년 최고재판소는 “국가 간의 행위로 개인의 실체적 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고, 재판상 청구권이 소멸된 것”이라고 했다.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다. 이에 따라 니시마쓰 건설은 화해 형식을 빌려 자발적으로 보상했다. 중국과 일본 역시 1972년 공동성명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했다.

상대로 나눠서 보면 일본은 미국, 소련, 중국과 달리 한국에만 청구권 소멸을 주장한다. 여기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이란 불필요한 문구가 한몫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문구로도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2015년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같은 반인도적인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합의는 무효다.

사회부 | 이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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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이렇게까지 고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받았을 때 교육을 위해 한몸 불사르리라 다짐했을 수도 있고, 가문의 영광이니 해보자고 자리욕심을 냈을 수도 있다. 부동산 투기·차녀 국적 포기 의혹이 제기됐지만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했을 때 어려운 고비는 다 넘었다 여겼을까.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1월13일 취임했다. 박근혜 정부의 세번째 교육부 장관이다.

이명박 정부의 장관 후보자 4대 필수과목이 병역비리, 세금탈루,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였다면 박근혜 정부 장관의 필수과목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넷째도 ‘자기최면’이다. 이 장관은 여러 부처 장관들 중에서도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함께 발군의 자기최면 능력을 보이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는 이 장관이 취임하기 전 발표됐다. 이 장관은 정권이 만든 “검정교과서의 좌편향이 심각해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되풀이했다(그가 8종 검정교과서들을 읽어봤는지는 모르겠다). 편찬기준도 집필진도 비공개해 ‘복면집필’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복면가왕>도 노래가 끝나야 가수얼굴을 공개한다”며 웃었다(요즘 말로 이런 걸 ‘×드립’이라고 한다). “국가가 역사관을 독점하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라는 지적엔, “교과서가 공개되면 논란이 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여기까지가 “우리는 ‘올바른 교과서(정부가 지은 국정 역사교과서 이름)’를 만들고 있다”는 1차 자기최면이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오른쪽 두번째)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중학교 역사 1·2, 고등학교 한국사 등 총 3종의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이 부총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정지윤 기자

2차 최면은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이후 시작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최면이다.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편향과 역사왜곡에 더해 기초적인 사실오류까지 무더기로 발견되자, 장관은 국정교과서 수정적용안을 내놨다. 2018학년도부터 국·검정교과서를 혼용하며, 2017학년도엔 원하는 학교만 연구학교로 지정해 국정교과서를 쓰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연구학교로 지정되면 가산점과 연구비 1000만원을 주며 연구학교 지정을 거부하는 교육청은 제재하겠다고 밝혔다(다시 말하지만 절대 강행하는 것은 아니란다). 연구학교 신청과 지정은 오는 2월10일까지 끝내야 한다(지금 학교는 방학 중이다). 2018학년도부터 적용되는 개정 교육과정 교과목들은 2021학년도 수능부터 반영되지만, 한국사는 1년 앞당겨 2020학년도 수능부터 적용한다(수능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겁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국정화 강행이 아니라 ‘국·검정혼용’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최소 2년 걸리는 검정교과서 개발도 1년 안에 끝내라고 통보했다(개발시간은 줄었지만, 검정교과서 심사는 강화하겠단다).

이 장관은 “학교현장의 혼란을 막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장관들은 단체로 부끄러움을 잊는 주사라도 맞은 걸까. 서울대 교수로 20년을 재직한 장관이 ‘혼란’의 말뜻을 모를 리 없다. 자기최면이 아니고서야, 시정잡배나 쓸 법할 억지를 멀쩡한 얼굴로 반복할 리도 없다.

장관은 시한부다. 학생들이 국정교과서 몇 단원을 다 배우기도 전에 이 장관은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외에도 교육부는 ‘최순실 특혜’ 의혹의 중심인 이화여대에 대학재정지원사업 몰아주기, 청와대 입김에 따라 국립대 총장 지명 미루기 등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다.

내일이면 취임 1년. 이 장관은 장관직 제의를 받았을 때 품었던 꿈을 얼마나 이뤘을까. 그는 1년 전 취임사에서 “무엇보다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국민이 원하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항상 멀리 내다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조타수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최면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 홀로 설 장관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장은교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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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몰랐죠. 학적팀에서 e메일을 받고 깜짝 놀라가지고. ‘아이고, 정유라가 내 수업을 들었어요?’라고 해서 그쪽도 놀라고 저도 놀라고 그랬습니다. 하하.”

기자는 류철균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와 지난해 11월 여러 차례 통화했다.

류 교수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게 학점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취재 중이었다. 류 교수의 행적은 의심스러웠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원한 청년희망재단의 초대 이사였고 차은택씨와 함께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필명 이인화로 박정희 전 대통령 미화 소설도 썼다.

류 교수는 학점 특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정씨를 몰랐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김경숙 이화여대 신산업융합대학 학장이 정씨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습니다, 없습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했고, ‘이번 게이트와 정말 무관하냐’는 질문에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나 싶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정유라 이화여대 재학 당시 정 씨의 대리 시험 등 학사 특혜를 준 의혹으로 긴급체포된 류철균(필명 이인화) 교수가 지난 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하지만 그의 각종 비리를 밝힌 보도(경향신문 2016년 11월8일자 2면)가 나갔고 류 교수는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본지 기사에 대해 왜곡 보도라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고, 이 기사로 인해 삼성그룹 간부 대상 강연이 취소됐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본지는 중재위에서 “국회가 특검의 수사 대상으로까지 결정한 사안을 반론을 빌미로 언론사에 허위사실을 적시토록 하는 게 맞느냐”고 했지만 그의 대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류 교수는 해를 넘기지도 못한 지난달 31일 체포돼 수의를 입고 눈앞에 나타났다. 호송차에서 내려 특검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허탈함이 밀려왔다. 류 교수의 변호인이 밝혔다는 내용은 더 참담했다. “김경숙 학장이 정씨를 잘 봐달라고 부탁해 최씨를 만났다”는 해명이었다. 이번 논란에서 류 교수는 한번도 일관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공적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사법기능을 하는 중재위에서, 수사를 하는 특검에서 다른 말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문학과 게임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동안 여러 차례 표절 의혹을 샀고, 그때마다 혼성모방이니 판타지니 하는 말들을 했다. 그런 그가 법정에서는 또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하다.

이혜리 | 사회부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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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XX들! 박원순 지지하는 놈들은 다 빨갱이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저자를 한 대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2011년 10월, 박원순과 나경원이 맞붙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기자들 몇이 경제부처 과장급 공무원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누구를 지지하느냐가 자연스레 화젯거리가 됐다. 누군가가 즉석에서 가상투표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손을 들고 보니 박원순 지지가 일방적으로 많았다. 과장은 나경원 지지자였다.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삿대질과 함께 내던진 말이 “빨갱이 XX들”이었다.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항의 표시를 했지만 밤새 분이 삭지 않았다. 그 선거에서 서울시민들은 박원순을 택했다.

그닥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은 며칠 전 또 다른 자리를 계기로 되살아났다. 세종시의 모 부처 관료들과 가진 자리였다. 한 사무관이 대뜸 “요즘 언론은 너무 좌편향적”이라고 말했다. 비선 실세 최순실 관련 보도에 대한 항의로 읽혔다. “도대체 좌파가 뭐냐”고 물었다. “정부에 반대하면 좌파”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10년째다. 관료들은 한국 사회의 좌경화를 걱정하지만, 나는 되레 관료의 우경화를 걱정한다. 한국 사회가 왼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오른쪽으로 갔다. 한국에서 ‘우경화’는 ‘권위주의의 부활’과 이란성 쌍둥이다. 교육부는 국정교과서를 고집했고, 외교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나홀로 이뤄냈다. 국방부는 전격적으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를 결정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했다. 마치 새벽에 밀어붙인 군사작전 같았다. 대화는 없었다.

자신을 비판한 개인과 단체는 ‘블랙리스트’로 묶었다. 가차 없었다. 문학계의 노벨상이라는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한강도, 아시아 최고 영화제라는 부산국제영화제도, 경향신문도 딱지가 붙었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는 표현만 달리했을 뿐 빨갱이의 다른 이름이다.

관료 개개인이 우경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누적된 인사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청와대는 수첩에 말을 잘 받아적는 ‘올드맨’들을 복귀시켰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잘하는 관료들만 승진시켰다. 가뜩이나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특정 지역 인사들이 중용되면서 권위주의는 더욱 강화됐다. 부적절한 지시를 거부한 관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끝내 옷을 벗었다. 그러니 우경화는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짓궂은 상상을 해본다. 만약 정권교체가 되면 어떻게 될까라고. 새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빨갱이 정권과는 일 못하겠다”며 사표를 던질 관료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럴 관료가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10년 전 정권교체 때 과감히 낯빛을 바꾸었던 관료들을 하도 많이 본 탓이다. 한 고위관료는 노무현 정부 당시 “종합부동산세는 내가 만들었다”고 외쳤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실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세금”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는 제 손으로 종부세를 무력화시켰고, 공공기관장으로 영전했다.

새 정권의 출범을 바라는 마음 한구석에는 권위주의에 절어 우경화된 관료들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 갈망이 있다. 관료들의 도시인 세종시는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손을 들어줬다. 기저에 흐르는 공심(公心)은 현 정권 주류와는 달랐다. 낮은 자세로 국민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관료들이 많다. 이들의 앞길을 터주기 위해서도 새 정부가 필요하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7년 신년사에서 “우리 의회 민주주의는 강하다. 협력과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느냐고? 아니다. 반대와 비판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메르켈 정부와 같은 철학을 가진 정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경제부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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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1일 유명 영화감독과 배우의 스캔들이 한 매체 보도로 불거졌을 때, 그날 하루 네이버에 오른 관련 기사는 403건이다. 경향신문은 지면에도 온라인에도 내보내지 않았다. 나와 편집자는 온라인에 ‘무엇을 쓸 것인가’ 못지않게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사안을 두고 의견을 나누다  “쓰지 맙시다” 할 때가 많다.

대량생산체제의 한국 온라인 뉴스시장에서 ‘우라까이’(베껴쓰기를 가리키는 일본어로 언론계 속어)든 ‘인용보도’든 수분이면 뚝딱 만들어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뷰를 보장하는 뉴스거리를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양적인 트래픽을 유지·상승시키는 것도 팀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정론을 표방하고, 독자들은 그 실천을 주문한다. 트래픽과 저널리즘의 동시 수행이라는 언뜻 불가능한 과제를 마주한 채 고민할 때가 많다.

경향신문 현장 기자들이 모든 온라인 이슈를 거르기는 힘들다. 온라인에서 불붙는 타지의 단독보도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슈를 받을지를 판단하는 건 모바일팀 일이다. 신뢰할 만한 언론사 또는 사람(단체)인가, 단독보도나 주장에 물적 증거가 있는가를 들여다본다. 유명인의 사생활을 쓸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까다롭다.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어떤 소문·의심·비난·주장·추정을 담은 것이라도 기득권을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듯한) 내용을 두고서다. ‘○○신문·방송이 보도했다’로 내보내곤 했다. 일하면서 찜찜한 부분이었다.

온라인 저널리즘 문제와 대안을 물었을 때, 박재영 고려대 교수가 우려한 부분도 이것이다. “검증하지 않은 센세이셔널한 정보가, 검증한 밋밋한 정보를 몰아내는 경향성이 온라인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겁니다.” 그는 조기대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은 올해 미확인 정보가 전례 없이 온라인을 휘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국 언론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 JTBC와 TV조선 등 여러 언론사의 실증 탐사보도는 언론사의 개가였다고 박 교수는 평가한다. 그러나 언론 전반으로 확대해보면, 과가 공을 앞질렀다. 다른 언론사의 단독보도, 유명인의 SNS 발언을 두고 사실 확인과 검증 없이 받아쓰는 ‘카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가 ‘디지털뉴스팀’ ‘온라인뉴스팀’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정보 불충분, 이해집단의 대결구도화, 마구잡이 비판은 각각 오해, 갈등, 냉소를 부추기며 언론을 증오와 독설의 배설구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정통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김세은 강원대 교수는 온라인 팀·기자의 과제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유혹에서 벗어나라.” 품은 적게 들이면서 트래픽은 많이 뽑을 수 있는 기삿거리에 매달려선 안된다는 말이다. 현장 기자들이 공들여 취재한 기사를 전면에 배치해 승부수를 띄우는 게 시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검증·확인의 저널리즘을 수호할지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다. 김세은·박재영 두 학자도 참여한 <한국 언론의 품격> 책 머리말엔 “신뢰할 수 있는 뉴스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비틀거린다”는 월터 리프먼(1889~1974)의 말이 적혀 있다. 지난 미 대선 때 페이스북에 트럼프 관련 가짜 기사를 써온 폴 호너라는 사람은 대선이 끝난 뒤 가짜 기사가 널리 퍼진 이유를 두고 “트럼프 지지자들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널리즘의 수행은 언론 몫이자 책임이지만 시민 역할도 중요하다. 다행히 한국엔 언론 비판에 적극적인 시민들이 많다. 언론의 자정 능력은 약하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여러 언론사의 자성은 시민들의 질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대선에서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사실보도 기준을 갖고 언론을 감시·독려해야 할 이유도 여기 있다.

모바일팀 |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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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1등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공부 잘하는 쓰레기만 만들어내는 걸….”

“그러게요. 배려하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울 기회나 있었을까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얼마나 떠받들어주며 오냐오냐 했겠어요.”

“아유, 그렇다고 1등 소용없으니 2등 하라고 하실 건가요? 인성이야 평소 부모 보고 배우는 거지 따로 시간 내서 가르칠 것도 아니고. 그런 쓰레기들한테 밟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우아하게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약간 과격한 뒤끝을 남기며 마무리됐다. 얼마 전 모처에서 열린 예비 고3 학부모 설명회 자리였다. ‘최저’니, ‘입결’이니 하는 기본적인 입시용어도 모르는 불량 엄마로 계속 남을 순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예약을 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수의 ‘포스’가 풍기는 엄마들 옆에 용케 자리를 잡은 뒤, 혹시 쓸 만한 정보라도 하나 건질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참이었다.

“도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라 걱정만큼이나 요즘 자주 들리는 하소연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해줄 답이 없다는 부모들의 방황과 고민은 지하철 안에서도, 막창구이집 옆 테이블에서도, 카트를 밀고 선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들려온다.

어린 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어나와 시국선언을 하게 만드는 작금의 사태를 보며, 기성세대 일원으로서 일말의 자괴감에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여기에 더해 청문회라는 이름으로 지난 몇 주간 펼쳐진 ‘초특급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수많은 이들을 충격과 분노, 끝모를 무기력감으로 밀어넣었다. 검사와 변호사, 대학교수, 고위관료 등 1등만 하고 살아왔을 소위 최상위권 초엘리트들의 적나라한 민낯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이면 어릴 때부터 누구나 한번쯤은 듣고 자랐음직한 권면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훌륭’은 사전적 의미가 아닌 세속적 성공일 테고, 그렇게 형성된 기득권층에 대단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국민도 많지 않다. 그래도 너무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 빛나는 재능을 어둠의 세력에 갖다 바치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이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천연덕스럽게 재연하고 확인시켰다. 그래서 충격파와 절망감이 더 컸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국회의원 박주민의 이야기가 잠시 화제에 올랐다. 대원외고와 서울법대, 로펌을 거쳐 거리의 변호사가 된 그는 ‘금수저’를 가지고 흙을 퍼 먹는, 또 다른 의미로 역주행의 아이콘이다. “대단한 건 맞는데 내 자식이 그렇게 산다면 싫을 것 같아요. 지금 같은 결말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같은 스펙이면 우병우나 조윤선처럼 살길 원하지, 박주민과 같은 길을 가길 바라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좀 더 인간답게 사는 세상, 아이들에게 물려줄 이상적 미래상을 저마다 설파하던 상황이었다. 내밀하게 감춰진 허위의식이 ‘뽀록’나고 있는데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모의고사 평균 5등급이 목표인 학부모 앞에서 너무한 처사 아니냐”는 또 다른 참석자의 이야기에 다들 빵 터지고서야 화제가 전환됐다.

입으로는 인성이 중요하다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휴대폰을 잡고 빈둥거리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 “도대체 언제쯤 정신 차리려나” 싶어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자아분열을 반복적으로 겪는 나 같은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갑이 아니어도,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듬는 것이다.

문화부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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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생명을 잃은 대통령 앞에서 국정을 장악한 총리가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가 할 일은 한마음 한뜻으로 무너진 경제를 살리는  것입니다.” 국정 안정과 경제 회복을 강조하는 총리에게 질서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그 질서는 국민 1만5000명의 희생을 감춰야 가능했다. 탄핵소추 이틀 전 개봉한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다룬 재난 영화 <판도라>는 극장 밖 현실의 데자뷔로 가득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현실에서 “경제가 백척간두의 위기”라는 우려가 광장을 겨냥하고 있다. ‘정치는 탄핵당했어도 경제는 굴러가게 하라’ ‘광장을 향했던 민심을 돌려 경제 회생에 집중하라’는 주문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그동안 존재감 없던 경제부총리는 “중심을 잡고 가겠다”며 지휘계통의 질서를 다잡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탄핵이 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진실은 가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광장의 촛불을 정치혁명으로만 규정하기에는 그 넓고 깊은 분노를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 불평등과 고착화하는 계급질서에 대한 탄핵이자, 양극화를 부추기는 경제질서에 대한 탄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핵 정국→불확실성 증대→경제위기 증폭’이라는 도식에 막혀 촛불의 힘은 경제로의 확장을 방해받고 있다.

 

영화 '판도라' 포스터

 

정치와 경제의 경계는 두부 자르듯 가를 수 없다. 경제 역시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선택의 문제이고, 이해관계자들의 이해를 조정하는 정치적 과정과 설득을 위한 정치적 권위가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은 ‘1원1표’의 경제적 운영 원리가 ‘1인1표’의 민주주의 작동 원리 위에 서면서 정치를 경제에 종속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욕구들을 전부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중 일부를 선택하는 것이 경제와 정치의 본질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처럼 중요한 판단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일이 생기기 어렵다. 그 때문에 전문가들은 민주주의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든가 민주주의가 발전을 촉진하지 못한다며 곤혹스러움을 항변하기도 한다.”(윌리엄 이스털리 <전문가의 독재>)

 

지금 바닥을 기고 있는 경제는 민주주의 후퇴와 박근혜 정부 무능의 결합에서 비롯됐다. 오르는 전셋값을 막아달라고 하니 ‘억울하면 집 사라’라는 대책을, 정규직을 늘리라는 요구에 ‘시간제 일자리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려달라는 데는 꿈적도 않더니, 1억원이 넘는 급여를 받는 장관이나 금융기관장 등 고액연봉직은 “양심도 없이”(심상정 정의당 대표) 임금피크제를 쏙 빠져나갔다. 오발탄도 이런 오발탄이 없다. 일자리 부족과 1300조원의 가계부채로 서민들의 지갑이 꽁꽁 닫혔고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속출했다. 박근혜 탄핵 전 3년9개월은 경제위기 경고음의 연속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가 조금이나마 왜 그랬는지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죽을낍니더.” 영화 <판도라>에서 안전을 장담하던 정부, (원전)기업, 전문가들은 사고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사고 처리는 부상당한 원전 하청업체 직원과 소방대원들의 몫이었다. 탄핵 정국에서도 정부와 기업들은 여전히 경제성장을 위한 일사불란한 지원책밖에 없는 ‘박정희식 처방전’에만 기대고 있다. 규제완화와 ‘쉬운 해고’ 등을 되뇌고, 투자심리가 위축된다며 재벌 총수의 안위에 목을 매고 있다. 지금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에는 국가주도·재벌중심의 구시대 낡은 경제질서로 돌아가는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광장에 모인 촛불에 담긴 경제개혁의 요구를 구현할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게 나라냐”며 탄핵을 성취한 자신감은 시름시름 활력을 잃어가는 경제를 일으켜 세울 엔진이 될 수 있다. 단언컨대 탄핵은 경제에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그것도 아주 절호의 기회다.

 

산업부 박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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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간 감정싸움이 위험수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급기야 “박지원 원내대표는 총리 사심이 있다” “문재인 전 대표 측에서 박지원 총리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박 원내대표가 거절했다”며 진실공방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국민의당 박 원내대표는 13일 페이스북에 “문재인 전 대표 측 인사가 저의 지인을 통해 제가 총리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한 칼에 딱 잘랐다”고 썼다. 촛불정국 와중에 민주당 문 전 대표 측이 총리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는 취지다. 문 전 대표 대변인 격인 김경수 의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왼쪽)가 11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정국 수습 방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박 원내대표 주장은 문 전 대표 측근으로 알려진 노영민 전 의원의 당원 상대 강연 내용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노 전 의원은 지난 2일 충북지역 당원을 상대로 한 비공개 강연에서 “박지원 대표 본인이 꿈이 있다. 총리를 하고 싶어 하잖아”라며 “이 국면에서 그거 안 해주니까 저 난리를 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가 지난달 14일 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을 비판한 것은 ‘총리 사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기 대선을 앞둔 두 야당이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촛불혁명 성과를 사유화하려 이전투구를 벌이는 일이다. 촛불민심 꽁무니를 따라가기 급급했던 야당들이 마치 전리품이나 되는 양 총리 자리 문제를 입에 올리며 정쟁하는 건, 그 진위를 떠나 지켜보기 민망하다.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뿐 아니라 그런 흉물스러운 정부를 배태한 구체제 전체를 향해 타오르고 있다.

야당들도 구체제 일부임은 물론이다. 일신하지 않으면 함께 촛불민심에 쓸려내려 갈 수 있다.

정제혁 | 정치부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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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조카 장시호의 청문회 출석 소식을 다룬 기사도 어김없이 그 단어로 도배됐다. 의존명사 ‘년’이다. ‘닭년’ ‘무당년’ ‘미친년’…. 병신년(丙申年)을 앞둔 지난해 말부터 박근혜 관련 기사 댓글 서너 개 중 하나꼴로 ‘병신(病身)년’이란 욕이 들어갔다. “때론 언어가 의식과 행동을 규정한다”며 병신년 같은 말을 쓰지 않겠다는 지난해 12월31일 민주노총 성명의 울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근혜·최순실 두 사람의 범죄 혐의가 짙어질수록 욕설의 빈도는 높아지고, 강도는 세졌다.

‘년’은 11월5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2차 범국민행동’ 때 광장으로도 나왔다. 주최 측 무대 위아래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저잣거리 아녀자” “강남 아줌마” 같은 말이 터져나왔다. ‘병신년’도 빠지지 않았다. 권력에 대한 분노와 결합된 혐오 발화는 너그럽게 받아들여졌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린다고 치자. 퇴진에 뜻을 같이하는 흑인과 여성이 절반 이상 모인 집회에서 백인 남성들이 ‘비치(bitch·개 같은 년)’니 ‘니거(nigger·깜둥이)’니 욕을 내뱉는다. 니거와 비치가 정당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년’에 대해서도 그래야 한다.

여성단체들은 여성과 장애인을 비하·경멸·조롱하는 명백한 혐오를 비판했다. “박근혜를 몰아내고, 여성·소수자 차별을 중지시키자”는 슬로건을 내건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무대 안팎에서 벌어진 일을 사과했다. 평등집회 가이드라인도 배포했다. 광장의 혐오는 줄었지만, 온라인은 여전하다.

‘놈’은 되고, ‘년’은 왜 안되나? ‘욕설의 성평등.’ 가장 흔한 반론이다. ‘년’과 ‘놈’은 각각 여자와 남자를 낮추거나 욕하여 이르는 말이다. ‘놈’의 뜻엔 ‘년’엔 없는 게 있는데 바로 ‘남자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이다. 사전의 용례 “저기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놈이 제 둘째 아이입니다”의 ‘놈’ 자리에 ‘년’을 넣어 쓸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사전은 ‘년’의 함의를 다 적어놓지 못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조홍식 역)에서 “남자가 모든 암컷들을 한꺼번에 여자 속에 던져버렸다”며 적시한 “참을성이 없고, 교활하고, 어리석고, 음탕하고, 잔인하고, 비굴한” 모든 암컷들이 ‘년’에도 들어 있다.

국정농단 시국에 다시 불거진 여성혐오는 범죄자와 ‘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연대책임을 지웠던 연좌제의 폭력과도 같다. 주요 남성 정치인들이 “광장은 광장 방식으로, 국회는 의회 방식으로” “명예로운 퇴진”을 말할 때 박근혜 수사와 구속을 앞서 외쳤던 여성들과 박근혜를 오로지 여성성 하나로 싸잡아 비난하는 게 타당할까. 그 모든 부정과 무능을 ‘닭년’과 ‘무당년’의 짓으로 환원하면 재벌 지배, 노동자·농민 탄압, 소외 현상, 관료 부패, 역사왜곡, 한반도 위기 같은 문제는 가려지기 쉽다. ‘중차대한 시국에 못된 권력에 욕 좀 한 걸 갖고 왜 시비냐’ 같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프레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여성·성소수자·호남·장애인·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조개 줍기’ 프레임에 가둬버리면, 멀리는 군사독재 정권부터 신자유주의 정권을 거쳐 9년째를 맞은 보수 정권까지 켜켜이 쌓인 체제 곳곳의 환부를 제대로 들어내지 못한다. 232만의 분노가 결집된 촛불 광장에서 언뜻 국지적으로 보이는 여성혐오와의 싸움은 그래서 중요하다. 성별·지역·세대·직업을 초월해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제각각 분출한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 변화의 의지를 되새기는 일은 ‘박근혜 퇴진’ 이후 어떤 미래·체제를 만들지와 이어지는 문제다.

최소한의 존중과 연대, 더 나은 세상에 관한 고민이 없다면, 국회가 탄핵을 결의하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하더라도, 정권을 바꾼다 한들 박근혜·최순실만 사라지고 나머지는 그대로인 세상일 수 있다.

김종목 모바일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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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온실가스) 국외 감축은 감축 관련 국제사회 합의, 글로벌 배출권 거래시장 확대, 재원조달 방안 마련 등 전제조건 충족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정부는 6일 ‘제1차 기후변화대응 기본계획’을 국무회의에서 확정해 발표했다. 이 중 배출전망치(BAU) 대비 11.3%의 온실가스는 국외 노력을 통해 감축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제출한 “2030년까지 배출전망치 대비 37.0%의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는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해 발표한 기본계획의 한 부분이다.

언뜻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언급한 전제조건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에 가깝다. 온실가스 배출권에 대한 국제 거래시장은 구체화되기는커녕 아직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온실가스 배출 시나리오별 기후변화 건강영향 누적비용 (출처: 경향신문DB)

정부는 “제반 조건 진행 현황 및 감축수단별 세부사업 발굴 결과 등을 반영해 2020년까지 온실가스 국외 감축 세부 추진 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전문가들은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11.3%는 감축하지 못한다’는 포기 선언에 가깝다”는 혹평까지 내놓고 있다. 정부가 국제사회에 약속한 온실가스 감축량 중 3분의 1은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 올해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린 제22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정부가 언급한 국제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시장에 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자국 내에서의 감축계획 비준조차 끝나지 않은 나라들도 있기 때문이다.

국외 감축 계획을 제외하고도 이미 망신살이 뻗친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정책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게 될지 걱정이 커지는 이유다.

국제 기후변화 연구기관들이 지난달 초 한국을 기후변화 대응에 가장 무책임하고 게으른 국가를 뜻하는 ‘기후 악당’ 국가로 선정했다. 이것이 국제적 비난 물결의 시작이 아니길 바란다. 정부는 허상을 버리고, 국내 감축에 더 집중해야 한다.

김기범 | 정책사회부 holjjak@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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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화면에 코를 박은 채 히죽거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정신을 문득 차려보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민망함을 수습해볼 요량으로 쓸데없는 말을 건넸다. “<더 케이투>(배우 지창욱이 최근 출연한 드라마) 보세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반색하며 손을 모아 쥐었다. “대~박이죠. <힐러>도 보셨어요?” 안 그래도 지창욱에 ‘꽂혀’ 그의 전작을 밤마다 몰아 보고 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몇십분 전만 해도 “약속은 하고 오신 거냐”며 심드렁하게 묻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곰살맞게 변해 있었다. 심지어 서랍을 열고는 초코바까지 내놓았다. 취재원의 사무실에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애매하고 어색하던 상황은 순식간에 십년지기의 만남처럼 화기애애해졌다.

드라마 하나로 생면부지의 남들과 대동단결했던 경험은 꽤 여러 번 있다. 올 초 <태양의 후예>가 방송됐을 때도 그랬다. 찜질방 TV 앞에 제각기 눕거나 퍼질러 앉았던, 일면식도 없던 ‘우리들’은 유시진이라는 이름 아래 맥반석 달걀을 나눠 먹으며 든든한 유대감을 다졌다.

‘할 일 없고 한심한 아줌마들이나 즐기는 하위 문화’라며 드라마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판단이야 자유지만 드라마의 미덕을 폄훼하진 말자. 당대의 욕망과 무의식을 반영하는 드라마를 통해 우린 시대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드라마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기도 한다. 대사 한마디가 영혼을 뒤흔들어 놓으며 인생의 큰 가르침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유명 인사나 스타가 나와 같은 드라마를 즐긴다면 괜히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히잡을 쓰고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누군가에게 “<태양의 후예>도 보셨느냐”고 묻던 박근혜 대통령의 그 벅찬 심정. 안다. 나도 무수히 느껴봤으니까.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17일 (출처: 경향신문DB)

드라마에 빠지고 즐기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하다. 드라마를 그렇게 사랑하는 대통령이라면 공감능력이 정상 수준은 될 법한데 공감은 고사하고 일상적 의사소통도 안된다. 100만명 넘는 국민이 매주 청와대 코앞에서 대놓고 외치는 소리가 ‘외계어’(알아듣기 어려운 신조어)로 들리는 게 분명하다. ‘길라임’이고 싶었으나 실상은 ‘별에서 온 그대’인 건가. 국민들의 말이 ‘외계어’로 들린다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드라마 주인공들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보시라.

먼저 유시진 대위다.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혹시 이게 마지막일지 몰라서…. 뭘 할래요? 당장? 하야할래요? 고백할래요?” 매주 광화문광장에 나서는 ‘오해영’도 외친다. “대통령이 꼼수 부리니 좋은 거 하나 있네. 광화문에 계속 나오고 싶어진다는 거. 일찍 일찍 좀 하야해라. 사과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 뚜껑 열린다. 진짜.” 함께 나온 길라임의 남자 ‘김주원’도 경고한다. “내가 이 밤중에 여기 왜 이러고 있겠냐. 알고 싶어 온 거잖아. 그러니까 네 말만 하지 말고 대답 좀 해라. 7시간 동안 뭘 했는지. 경고하는데 다시는 딴 놈 핑계 대며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마. 내려놓는 척하며 말장난도 하지 말고. 두 번 다시 그런 담화문 갖고 나 찾아오지 마.”

형편없는 새누리당을 향한 천송이의 일침이다. “이번에 나라꼴이 바닥을 치면서 기분 참 더러웠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어. 사람이 딱 걸러져. 진짜 국민 편과 국민 편을 가장한 ‘척’.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큰 기회가 아닌가 싶다.”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즐겨 봤다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도 엄청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뭐라 그러는 줄 알아요? 구제불능, 민폐, 걸림돌.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렇게 불러주고 싶어요. 똥! 덩. 어. 리.”

문화부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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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서울 중구 문학의집에서 열린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이곳만은 지키자’ 시민공모전 시상식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부문상 중 갑자기 ‘환경부장관상’이 사라지고 ‘환경보전특별상’이라는 새로운 상이 생긴 것이다.

시민단체가 주최해 시민들이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발굴해 추천하고, 환경부와 문화재청이 후원하는 방식으로 매년 민관이 뜻을 모으는 행사이기에 궁금증은 더욱 컸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따르면 올해로 14회째를 맞은 시민공모전에서 환경부장관상이 사라진 것은 환경부가 설악산 케이블카 예정지인 ‘남설악 오색지구’의 대상 선정을 이유로 돌연 후원을 못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국내 자연환경 보전에서 가장 큰 책임과 권한을 지닌 정부부처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자 국립공원인 설악산의 대상 수상을 반기기는커녕 사실상 수상을 반대하면서 시민단체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비상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환경부가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니 ‘이곳만은 지키자’ 상을 받은 설악산에 대해서 ‘이곳은 못 지킨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으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환경부가 ‘이곳만은 지키자’ 시민공모전의 후원 및 시상을 거부하는 치졸한 행태를 보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시상식에서는 수상작 중에 4대강 사업 예정지역이 포함되자 장관상을 시상하러 왔던 환경부 소속 공무원이 시상을 거부하고 퇴장한 일도 있었다. 각각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상징적 환경재앙으로 꼽히는 4대강과 설악산의 시상식에서 환경부가 유독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유가 있다. 4대강 사업에서 환경부는 국토교통부의 2중대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제 역할을 하지 않았고,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에서는 아예 사업자로 나선 것이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사업자의 대변인 구실을 하고 있다. “환경부가 아예 환경부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는 전문가, 환경단체 활동가들의 탄식도 점점 커져가고 있다. 환경부 소속 공무원들은 ‘이러려고 환경부 했나’라는 자괴감이라도 느끼고 있을까. 궁금하다.

김기범 | 정책사회부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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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돌아섰다. 검찰이 등을 돌린 것은 시민들에게 총을 겨눈 군과 경찰이 시민의 편에 선 것과 같다. 살아 있는 권력에 굴종하고 죽은 권력만 물어뜯는다는 ‘하이에나 검찰’의 재빠른 변신이다. 검찰은 촉이 빠르다. 검찰의 표변은 박근혜 대통령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니란 뜻이다. 오동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온 것을 안다.

국정복귀 일성으로 던진 ‘엘시티 철저 수사’ 지시는 지금 박근혜가 갖고 있는 패가 흑싸리 껍데기만큼 보잘것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한 꼴이 됐다. 특검 후보로 반짝 거론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엘시티 이영복 회장과 친분이 있다. 부산의 룸살롱 마담이었던 그의 내연녀 임모씨(혼외아들의 생모)에게 레스토랑을 차려준 사람이 이영복이다. 하마터면 채동욱에게 조사를 받을 뻔한 박근혜는 ‘채동욱 특검’ 시나리오를 좌절시켰다. 대통령의 엘시티 발언은 김수남 검찰총장을 겨냥한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김 총장도 이영복과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서초동 법조타운에선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는 검찰총장에게 보내는 모종의 메시지란 얘기가 돌았다. 문재인·김무성 연루설까지 더하면 1타3피, 1타4피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국정에 고심하는 수준이 이 정도다. 김 총장에게 물어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정무직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이영복 회장을 아시는가.

“그렇잖아도 범정(범죄정보기획관실)으로부터 그런 첩보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얼굴을 본 적도, 통화한 적도, 악수 한번 한 적도 없다. 난 부산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전혀 모른다.”

- 대통령의 철저 수사 지시는 뭔가.

“아마 대통령도 비슷한 정보보고를 받은 것 아닌가 싶다.”

- 검찰총장을 염두에 두고 한 얘기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 문재인·김무성 연루설은.

“지라시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써대는 소설이다.”

박근혜는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던지고 있다. 최순실을 덮으려 개헌을 꺼내든 것을 보면 그의 심리상태가 얼마나 비정상인지 알 수 있다. “거짓 자기를 스스로 자기라 믿으며 마음의 평화를 지켜가는 리플리 증후군과 비슷하다”(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박사)는 의학적 소견은 그래서 더 무겁게 들린다.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다. 미국의 여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쓴 범죄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에서 유래했다. 주인공 톰 리플리가 재벌 아들인 친구를 죽인 뒤 대담한 거짓말과 행동으로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자기 말이 탄로날까봐 불안에 떠는 단순 거짓말쟁이와 달리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의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는다.

박근혜의 거짓말은 리플리의 수준을 넘어섰다. 최순실 보도에 대해 “사회 혼란 일으키는 유언비어”→“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위사실”→“연설문 도움받은 정도”→“선의로 한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또 다른 거짓말을 내놓는 식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감찰에 나선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국기문란’이라며 내쫓았던 그다. 이제 와선 “나도 최순실에게 속았다”고 한다.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계속 맡아야 한다는 자기방어 논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비정상적 자기합리화, 자기왜곡, 공감능력 상실이다. 100만 촛불민심 앞에서 뻔뻔할 수 있고, 어떤 위기에서도 멘털 갑으로 버틸 수 있는 이유다. 불행히도 김종필 전 총리의 “5000만명이 시위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예언은 점점 맞아가고 있다. 의학 교재엔 리플리 증후군의 위험성도 쓰여 있다. ‘본인의 상습적인 거짓말을 진실인 것으로 믿게 되면 단순한 거짓말로 끝나지 않고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위험이 높아진다.’

지금 박근혜에게 나라를 맡기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미친 마부에게 말을 맡기는 것과 진배없다. 리플리는 소설 속 주인공이지만, ‘재능 있는 박근혜씨’는 현실의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그의 거짓말 릴레이와 막가파식 버티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검찰 수사도 못 받겠다고 하더니 국회 추천 총리도 철회하겠다고 한다. 중대범죄의 주범이 청와대를 진지 삼아 농성 중이다. 성(城)안에 갇힌 줄 모르고 성 밖 시민을 상대로 결사항전 태세다. 자기 살겠다고 나라야 결딴 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짓이다. 내일은 또 뭘 꺼낼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 대통령은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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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최순실 일당’에 대한 공소장에 등장하는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이 지난 20일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미 대통령이 10대 그룹을 만나고 안종범 전 수석이 전경련과 300억원 규모로 출연하기로 합의한 상황에서 실무적으로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 회의를 했을 뿐”이라며 “재단 규모나 참여 기업 결정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공소장을 보면 그의 해명대로 최 차관 이름은 미르재단 설립과 관련해 지난해 10월21~24일 열린 실무 회의 부분에만 나온다.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최 차관은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의 지휘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실무 회의에서 최 차관은 “10월 말로 예정된 리커창 중국 총리의 방한에 맞춰 300억원 규모의 문화재단을 설립해야 하고 출연하는 기업은 삼성, 현대차, SK, LG, GS, 한화, 한진, 두산, CJ 등 9개 그룹이다” “아직까지도 출연금 약정서를 내지 않은 그룹이 있느냐. 그 명단을 달라”며 지시·독촉한 것으로 공소장에 나온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이 5일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최상목 1차관(오른쪽)과 함께 답변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들과 단독 면담을 갖고 돈을 요구한 사실도, 뜬금없이 중국 총리의 방한 일정이 거론된 게 실은 기업들 출연이 지연되자 최순실씨가 때마침 예정된 외교일정까지 들먹이며 독촉 명분으로 삼은 것이라는 사실도, 기업들의 미르재단 출연금 규모가 3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갑자기 불어난 것도 전혀 모른 채 그저 직속 상관이 “지시한 대로” 실무를 봤을 뿐이라는 게 최 차관의 해명이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최 차관은 박근혜·최순실 주연의 블록버스터급 막장드라마에 ‘지나가는 사람 5’쯤 되는 단역배우 역할을 한 셈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맥락이나 앞뒤 정황도 모른 채 기업들에서 수백억원의 돈을 받아내는 일을 기계적이고 맹목적으로 처리해버린 이 고위관료에게 그가 생각하는 ‘국익’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만약 자신이 처리한 ‘실무’가 거대한 범죄행위의 일환이었다는 걸 당시에 알았다면 거부하고 맞서 싸울 수 있었을지도 묻고 싶다. 공손하고 침착한 톤으로 해명을 한 최 차관과의 통화를 마친 후 집에 가는 길 내내, 영혼 없는 엘리트 관료의 전형을 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경제부 | 이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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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정부가 설명하는 것처럼 급박한 사안이 아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정보는 이미 2014년 12월 체결한 한·미·일 군사정보공유약정(MOU)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정부가 2012년 이 협정을 체결하려다 실패한 이후 4년이 넘도록 방치해 놓은 것만 봐도 이 문제가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과 북한 정보를 공유할 필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안보 환경 변화를 감안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일본과 첫 군사 분야 협정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국민 동의를 얻는 절차도 필요하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앞)이 1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이석우 기자

정부는 그동안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은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누누이 밝혀왔다. 2012년 당시 새누리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국민적 동의를 얻기 위한 설득작업을 한 적이 없고 여론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정황도 없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이 이 협정을 강력히 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지금은 어렵다’고 하면 그걸 못 들어줄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상황은 정부의 강행 의지가 작용한 결과라는 의미다.

정부가 이처럼 서두르는 이유를 ‘정치적 의도’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국면 전환을 위해 개헌 문제를 꺼내고 국정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김병준 국무총리 지명처럼 박근혜 정부는 식물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협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번 일은 박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 지키기’에 필요하다면 국가안보 사안마저도 얼마든지 불쏘시개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지금 당장 퇴진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더 이상 엄포가 아니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simon@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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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일하던 역사학자 ㄱ씨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지난달 17일 세상을 떠났다. 3주 전 그는 자택에서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올해 초 취재차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소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재단 안팎의 평도 다르지 않았다. 성실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젊은 학자라고 했다.

ㄱ씨는 중국 지린(吉林)대에서 고구려 산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0년간 중국 곳곳을 답사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2013년 재단에 들어온 뒤로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연구자가 연구가 아닌 과중한 행정 업무에 시달려야 하는 환경이 문제였다. 최근까지도 그는 재단 10주년 기념행사와 학술회의, 비전 선포식 같은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지난 7~9월 3차례 중국 출장을 다녀왔고, 이 기간 현지 답사와 토론회, 학술회의 및 자료집 제작 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ㄱ씨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대학교수는 “매일 밤 10시까지 온갖 행사 준비에 쫓겨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더라”면서 “모든 일정이 끝난 다음에야 구석진 곳에서 남은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그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매일 야근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주말에도 출근했지만, 논문 한편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연구성과 50%·사업성과 50%’라는 재계약 기준도 그를 압박했다. 실제로 재단 내에서는 “연구가 너무 부족한데 재계약하면 안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과열된 고대사 논쟁도 그를 힘들게 했다. 지난 6월 부서 이동 전까지 재단 내 한·중관계연구소에서 일했던 그는 고조선 수도와 낙랑군 위치 문제와 같은 고대사 영역의 해묵은 논쟁거리들을 마주해야 했다. ‘재야’와 ‘강단’의 상충하는 견해를 두루 듣겠다며, 재단이 진행하고 있는 ‘상고사 토론회’ 실무 전반을 그가 처리했다. 재단을 ‘식민사학의 본거지’라 생각하는 이들의 항의에 응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영토와 국력에 집착하는 재야사학계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게 학계 일반의 평가다. ㄱ씨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상고사 토론회를 두고 “학문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행사”라며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평생 역사를 공부한 학자를 불러다 ‘왜 우리나라에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느냐’며 질책하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재단은 최근 몇년 동안 재야사학계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했다.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표기했다는 이유로 재야사학계의 공격을 받아 좌초·중단된 동북아 역사지도 사업이나 하버드대 연계 고대 한국사 연구 사업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를 아는 또 다른 사람은 “ㄱ씨가 학자로서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을 상대하느라 정작 자기 공부는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많이 힘들어했다”면서 “그의 죽음은 역사 과잉이 낳은 비극”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지금은 역사 과잉의 시대다. ‘위대한 상고사’를 외치면 환호받고, 있는 그대로 역사를 보자고 하면 ‘매국’이라 손가락질을 당한다. 그런 가운데 대다수 연구자들이 처한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이 역설적인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심진용 | 문화부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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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개성공단 폐쇄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결정. ‘통일대박’이라고 외치다가 ‘북한은 자멸할 것’이라고 말이 바뀌더니 급기야 북한 주민을 향해 “언제든 오라”는 대통령의 발언. 지금까지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 정책은 갈지자 연속이었고 언론과 국민에게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많다.

전문가들은 이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정부 결정에 최소한의 합리성이 남아있기를 기대했다.

이제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통일대박’이 등장한 드레스덴 선언 연설문과 대외비인 대통령 동선, 일본 총리 특사단 접견 자료 등 외교·안보 관련 문서가 사전에 민간인에 넘어갔음이 드러났다. 그간 설명되지 않았던 외교·안보 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의문은 ‘최순실씨 국정농단’이라는 정답을 얻은 모양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비선 실세’ 최순실씨 국정농단 파문이 터져 나온 지 일주일째인 31일 청와대와 외교·안보 부처는 ‘흔들림 없는’ 정책 운영을 강조했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정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확고한 대비태세를 유지하겠다” “주요 외교·안보 사안을 흔들림 없이 해내 갈 것임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누가 ‘흔들리는 외교’를 자초했는가. 외교·안보 정책 결정의 최정점에 서 있는 대통령이 누군가의 “주술적 예언에 현혹돼 남북 정책이나 외교 정책을 펼쳤다면 심각하다”는 비판이 야당 원내대표로부터 흘러나오는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가. 외교 선봉에 선 대통령이 특정인의 ‘꼭두각시’로 인식되고 샤머니즘,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는 표현이 외신에 등장하는 상황은 무엇 때문인가.

북핵, 사드 배치, 한·일 위안부 합의 파문 등 시급한 현안이라고 대통령이 수없이 언급해 온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며 국민은 ‘흔들리는 대통령’과 ‘흔들리는 외교’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지선 | 정치부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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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방패를 돌려주세요!”

지난 29일 오후 8시40분. 비선 실세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 2만여명이 모인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 일부 시민이 대치하고 있던 경찰관의 방패를 빼앗았다. 근처에 있던 20~30대 시민들은 “방패를 돌려줍시다”라고 외치며 방패를 머리 위로 파도타기 하듯 넘기면서 경찰에 돌려줬다.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사무금융노조가 연 '박근혜 하야 촉구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10분 뒤 “당신들 프락치 아니냐. 평화롭게 해서 청와대 어떻게 가느냐”고 외치며 시민들의 행진을 막아선 의경을 끌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번에도 많은 시민들이 “때리지 맙시다” “폭력으로 충돌 일어나지 않게 서로 어깨동무 합시다”라고 말하며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의 물리적 충돌을 막아냈다.

시민들이 하나둘씩 해산하기 시작한 밤 10시쯤에는 흰색 대형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니며 “쓰레기 여기 버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시민들도 등장했다. 그 덕택에 수많은 인파가 머물다 간 거리는 깔끔했다.

경찰은 30일 “시민들이 경찰의 안내에 따라주고 이성적으로 협조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향후에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준법 집회시위 문화가 정착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찰의 이례적 발표에 정부가 덧씌운 ‘불법·폭력 시위’ 프레임에 말려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껏 시위를 사전봉쇄하는 데 주력하며 헌법이 보장한 권리인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억눌러온 경찰과 보수언론의 악의적인 프레임에 갇혀 시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우려다.

이런 지적과는 별개로 현장에서 마주친 시민들은 냉정함을 유지했다. 사회 전체가 분노로 들끓고 있기에 자칫 경찰과 시민들 사이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평화시위의 상징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주장했다. 위법과 탈법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최순실씨와 청와대를 상대로 시민들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반응했다. 누가 비정상이고, 누가 정상인가.

김원진| 사회부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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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을 제의하기 직전까지 이런 내용의 칼럼을 쓰고 있었다.

경제는 바닥으로 내려앉고 민생은 파탄지경이다. 안보는 불안하고 사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찢어졌다. 정부 기능은 마비되고 장관들은 무기력하고 관료들은 나서지 않는다. 나라에 온전한 곳, 정상적인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권력에 균열이 생기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의 남다른 자질, 즉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킬 줄 아는 능력이다. 한 줌의 권력도 샐 틈을 허용치 않는 편집증적인 권력 집착은 정부와 집권당에 대한 완벽한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그게 아니면, 총선에 졌는데도 당내 반대 세력이 부상하기는커녕 지리멸렬해진 채 대통령 눈치를 보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씨에게 각종 연설문과 발언자료 등을 유출한 것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권력이 흔들리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운이다. 대통령 때문에 총선에 참패했는데도 그 비서가 여당 대표가 된 일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뿐 아니다. 친박 대선후보가 없던 차에 반기문이 대선 출마 의지를 굳히고 있다. 게다가 문재인에게 시비 걸 수 있는 송민순 회고록까지 나왔다.

그러나 집권 5년차를 앞두고 반전이 일어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 발언 시비 때 다져진 팀워크와 노하우면 문재인을 북한과 내통한 반역자로 모는 일은 식은 죽 먹기여야 하는데 먹히지 않는다. 반면 최순실 게이트는 가려지는 게 아니라 더 커지더니 대통령 목전까지 왔다. 대통령과 당의 지지율은 바닥을 향한 경쟁을 하고, 고정 지지층도 떠나고 있다. 어제의 행운이 오늘의 불운으로, 복이 화로 변하고 있다. 친박 지도부는 당의 적응력을 마비시키고, 지리멸렬 비박은 새누리의 대안 부재를 드러내며, 최순실·우병우는 분노하는 민심에 불을 댕기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개헌, 북한, 반기문이라는 세 개의 불씨를 키워 다가오는 어둠을 환하게 밝힐 생각에 마음 설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에 북한을 동원하는 낡은 수법이 먹힐지, 역풍이 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개헌은 대선 경쟁을 유리하게 바꾸려는 자에 의해 정략적으로 동원되는 순간 추진력이 떨어진다. 반기문이 계속 상승세를 탈지, 가라앉는 친박의 어깨 위에 올라탈지도 장담할 수 없다. 이대로 박근혜·이정현이 이끄는 쌍두마차를 타고 있다가는 함께 절벽으로 떨어진다. 박근혜는 몰라도 당은 살아남아야 한다. 새누리, 플랜 B를 준비해야 한다.

이렇게 칼럼의 마침표를 찍으려는데 박근혜가 개헌을 발표, 선수를 쳤다. 조용히 물러나지 않겠다, 죽어도 고삐를 놓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여러 얼굴을 하고 있지만, 국정 파행·난맥·추문을 불러온 단 하나의 원인은 바로 그였다. 그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개헌이라는 이름의 호리병을 던졌다. 그다운 한 수. 주변은 바다로 변하고 모두가 허우적거리며 헤맸다. 성공한 것 같았다. 정치권 전체를 개헌 소용돌이에 빠뜨리면 모두 대통령만 쳐다보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러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개헌? 개헌은 오직 한 사람의 탈출을 위한 것이다. 그에게 권력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반대다. 권력이 목적이고 그 외 모든 것이 수단이다. 그의 수많은 정책이 그런 것처럼 개헌 역시 권력을 위한 소도구에 불과했다. 그가 항상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것, 그가 언제나 절실히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순수한 권력, 권력 자체다.

박근혜의 개헌 장단에 잠시나마 기쁨에 겨워 춤춘 정치 지도자들이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은둔의 왕국이 열리고 박근혜 정부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최순실 정부가 드러나자 모두가 외면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왜 지난 4년간 박근혜의 ‘나의 투쟁’을 지켜보기만 하고 나아가 부추기고 때로는 앞장선 것일까? 특히 박근혜 몰락에 기여한 새누리당이 자문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박근혜 탈당 운운하며 책임전가부터 하고 있다.

우리 앞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많은 의문들이 있다. 엘리트 관료, 풍부한 정책적 대안을 갖고 있는 정부 자문기구, 유능한 참모를 그는 왜 마다했을까? 멀쩡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왜 그는 여전히 억지 변명 한마디뿐일까? 

황혼이 내리면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건 최고 권력을 가진 자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의 운명을 거부하다 모든 것을 잃을 처지로 몰렸다. 권력을 향한 그의 긴 여정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그의 탈권력은 이제 시작이다. 권력 축적만큼이나 해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고 심란할 것이다. 그러나 권력 해체에서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도록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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