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비평/기자 칼럼, 기자메모'에 해당되는 글 164건

  1. 2016.10.21 ‘백남기 상황속보’ 존재 오락가락…‘공문 관리’조차 못하는 경찰
  2. 2016.10.20 ‘케이블카 갈등’ 뭉개는 환경부 장관의 궤변
  3. 2016.10.20 ‘문’ 관련 내용만 샅샅이…저급한 ‘회고록 활용법’
  4. 2016.10.05 [이대근 칼럼]헌법무죄
  5. 2016.09.23 ‘최경환 인사청탁’ 부실수사…검찰의 자업자득
  6. 2016.09.22 ‘사드 효용성’ 검증보다 ‘안보 정략’…우왕좌왕 야당도 비겁하다
  7. 2016.09.08 “기사 나가면 실습 선원 더 힘들다” 선주업체의 엄포
  8. 2016.09.06 대통령에게 묻는다, 이럴 거면 인사청문회 왜 하자 했나
  9. 2016.07.22 사드 대안을 달라고?…대통령에 답한다 “외교다”
  10. 2016.07.19 [기자메모]외부 세력이라니…사드 배치가 성주만의 일인가
  11. 2016.07.06 ‘밑 빠진 독’에 물 부은 이유, 정부는 왜 설명 안 하나
  12. 2016.06.22 “금남로 군사 행진 몰랐다”…광주시장의 ‘유체이탈 화법’
  13. 2016.06.22 타당성 논란 빚은 도의원 성과금, 경기지사는 왜 침묵하나
  14. 2016.06.21 탈북 12인을 위험에 빠뜨린 건 정부
  15. 2016.06.10 부실 더 키운 ‘관치’ 그들의 ‘습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16. 2016.06.07 [김성호의 자연에 길을 묻다]알맞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17. 2016.06.06 보수정권 9년의 적폐
  18. 2016.06.02 [기고]윤동주 하숙집을 시민들 품으로
  19. 2016.05.30 누가 ‘박 대통령이 외교는 잘한다’ 했나
  20. 2016.05.27 [정수복의 도시를 걷다]신림동 고시촌의 밤

고 백남기씨 사건 당시 작성된 ‘상황속보’를 놓고 경찰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실망 그 자체다.

지난 6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의 경찰청 대상 국정감사장. 더불어민주당 김정우 의원이 상황속보 존재 여부를 묻자 이철성 경찰청장은 “관련 규정에 따라 보고 이후 폐기한다”고 밝혔다. 김 의원이 즉각 일부를 공개했다. 이 청장은 “일부 부서에서 갖고 있던 걸 (민사)소송 과정에서 발견해 제출했다”고 해명하며 사본을 제출했다. 그 사본에는 백씨가 물대포를 맞는 시간대 상황속보는 쏙 빠져 있었다.

지난 15일 오후 검은티행동 참가자들이 ‘물대포가 죽였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울 종로 일대를 행진하고 있다. 검은티행동 제공

지난 17일 김정훈 서울경찰청장 정례 기자간담회. 김 청장은 “보고 나면 지금까지 바로 파기해왔다”며 “남아 있는 것은 민사소송 등에 대비해서 모아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18일 민중의소리가 경찰이 당시 작성한 상황속보 30보를 공개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상황속보 25보에는 ‘백씨가 오후 7시10분경 서린로터리에서 물포에 맞아 부상’이라고 나와 있었다. 당황한 경찰은 이번에는 “형사소송용으로 법원에 제출된 것”이라고 둘러댔다.

파기했다고 해놓고 문건이 드러날 때마다 말을 바꾸는 경찰에 어떤 신뢰를 보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대포를 맞아 부상했다는 상황속보 내용을 숨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경찰이 설명하는 상황속보 작성 및 파기 규정도 이해하기 어렵다. 상황속보는 현장 경찰관이 작성한 최초 상황 및 초동조치를 관련 부서와 지휘라인으로 시간대별로 전파하는 문건이다.

경찰은 공공기록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 대외비로 지정할 만큼 정보가치가 있는 문건이다. 그래서 상황속보 문건에는 ‘열람 후 파기’라고 명기돼 있다.

그런데 김정훈 서울경찰청장은 “파기 안 하면 문제가 되는지는 분석을 해봐야겠다. 파기하지 않은 경우 처벌하는 조항은 없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김 청장의 주장은 상황속보는 파기하든지 말든지 당사자가 알아서 하면 된다는 말로 들린다. 이를 수긍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사회부 ㅣ 고영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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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은 20년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시범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국립공원위원회에서 20여년간 논의한 결과이고, 사회적 합의이다.”

환경부 조경규 장관은 지난 18일 세종시에서 기자들과 만나 양양군의 설악산 케이블카 환경영향평가서 부실, 조작 논란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조 장관은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사안이기 때문에 절차나 일부분의 문제로 취소할 수는 없고, 그대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도 했다.

출처: 경향신문 DB

그러나 전날인 17일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에서 열린 설악산 케이블카 관련 환경영향갈등조정협의회 5차 회의는 조 장관의 발언과는 정반대로 합의에 실패하며 파행으로 치달았다. 지난 10일 환경부 지방청에 대한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이 문제 제기한 ‘극히 부실하고, 조작된 환경영향평가서’를 원주지방환경청이 그대로 묵인하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국감 당시 밀렵전과자가 환경평가에 참여하는가 하면 참여하지 않은 전문가가 참여한 것으로 둔갑하고 현지조사표 다수가 누락, 조작된 사실이 확인되며 ‘유령보고서’ ‘허위보고서’라는 뭇매가 쏟아지고, 야당은 “환경영향평가서를 반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환경부는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다”고 강변할 뿐 구체적 근거를 내놓지 않고 있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장관은 “일일이 대응하면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입장에서 안 맞을 것 같다”는 수긍하기 어려운 설명만 내놨다.

17일 갈등조정협의회는 원주청이 일부 내용만 보완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파행으로 치달았고, 환경단체들은 법적 조치로 맞설 방침이다. 장관은 사회적 합의라 했지만, 합의는커녕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환경단체들의 지적대로 환경부가 “개발세력 대변으로 갈등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로 복귀하는 것”이야말로 현 정부가 강조하는 ‘비정상의 정상화’일 터이다.

김기범 |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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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68·현 북한대학원대 총장)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를 처음 봤을 때 정부·여당이 북한인권결의안 관련 부분을 문제 삼을 것으로 직감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인권결의안에 기권한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것으로만 예상했다. 새누리당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북한에 결재를 받고 기권했다”는 식의 저급한 정치공세를 펼칠 줄은 몰랐다.

당시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남북, 북·미 간 주고받기가 진행되던 시절이다. 따라서 그 책에는 새누리당이 종북·내통·반역이라고 들고일어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국 정부가 북한인권결의안 비난 수위를 낮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심각한 이적행위’도 문제 삼지 않는다. 새누리당이 오직 북한인권결의안만을 문제 삼는 이유는 유일하게 이 사안에만 야당 유력 대선주자인 문 전 대표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책이 나오자마자 문 전 대표를 걸고넘어질 만한 내용을 찾기 위해 55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샅샅이 뒤졌을 모습이 머릿속에 선히 그려진다. 대뜸 ‘북한에 결재받은 사건’이라고 이름 붙이고 직접 당사자도 아닌 문 전 대표를 향해 사생결단의 정치공세를 펴는 여당이 추악하다.

정부·여당이 ‘색깔론’으로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야당의 대응 방법도 틀렸다. 더민주는 송 전 장관이 문 전 대표를 흠집 내고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돕기 위해 책을 냈다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국민의당은 색깔론 비판과 함께 문 전 대표 비난도 곁들이는 양비론을 편다. 모두 대선과 정쟁만을 염두에 둔 정치공세다.

이 회고록은 북핵 문제가 가장 역동적이던 시절 직접 정책을 다룬 당사자의 기록이다. 이념적 성향과 무관하게 북핵 문제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하는 가치 있는 책이다.

참여정부 시절 북핵협상 과정을 설명하고 정권 말기 무리하게 남북정상회담에 매달려 외교관계를 헝클어놓은 것을 따갑게 질책하고 있다. 또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개 눈에는 똥만 보이는 법’이다. 이 책이 합리적인 논쟁 대상이 아닌 정쟁의 불쏘시개가 된 것이 안타깝다. 극히 일부분만을 집어내 색깔론을 입히고 정쟁 도구로 삼는 한심한 작태를 즉각 멈추고 여야 모두 이 책을 겸허히 정독하기를 권한다.

정치부 ㅣ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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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지식인 사이에서 헌법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민의 개헌 찬성률도 높다. 개헌에 관한 한 여당과 야당의 차이, 진보와 보수의 대립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헌법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왜 그런가?

먼저 우리는 개헌에 합의할 수 없다. 의견은 제각각이고, 어떤 의견이든 무시할 수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개헌론자 사이에서도 정부형태만 고칠지, 전면 개정할지 통일된 견해가 없다. 전면 개정하면 너무 많은 쟁점 때문에 갈등하다 시간을 허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정부형태만 바꾸면 기본권 확대와 같이 중요한 문제를 반영할 수 있는 30년 만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정부형태만 바꾸기로 의견이 일치해도 마찬가지다. 이견은 여전하다. 새누리당의 이정현·유승민은 4년 중임제를 주장한다. 김무성은 이원집정부제, 남경필·원희룡은 분권형 대통령제, 정병국은 내각제를 지지한다. 야당의 문재인은 4년 중임제, 박지원은 분권형 대통령제, 김부겸은 이원집정부제, 김종인·천정배는 내각제를 선호하고, 안철수·박원순은 특별한 의견이 없다.

이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정부형태에 합의해도 문제는 남는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은 4년 중임제를 제안했다. 당시 정가는 개헌에는 부정적이었지만 4년 중임제는 선호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때 국회의 미래한국헌법연구회는 중임제, 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 3개의 대안을, 국회의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중임제, 이원집정부제 복수안을 제안했다. 박근혜 정부 때 국회 헌법개정자문위원회는 분권형 대통령제 단일안을 마련했다. 요즘 추세는 중임제보다 분권형 대통령제다. 노무현 정부 때 중임제로 개헌했다면, 다시 개정하자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그동안 별로 조명받지 못했던 내각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렇게 선호도는 세월 따라 변하고, 우리는 무엇이 최선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개헌의 목적도 분명하지 않다. 권력분산 역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동원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분산이 정국 교착, 국정 마비를 초래한다. 권력집중, 필요할 때가 있다. 분산과 집중은 선악 혹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성공적 국정을 위해 어떻게 조화시키고 균형을 이루느냐의 문제다. 권력 집중과 분산은 정부형태가 아니라 정당체제의 종속변수다. 본래 권력집중형은 대통령제가 아니라, 국회의 다수파가 정부를 장악하는 내각제다. 내각제가 권력분산형으로 보이는 이유는 내각제 채택 국가들이 대체로 다당제 효과가 있는 비례대표제를 도입, 여러 정당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분산을 원하면 비례대표를 확대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말까지 선거구를 조정하라고 판결했을 때가 기회였다. 그러나 정치권은 오히려 비례대표를 축소하고 양당제를 강화했다. 정치개혁, 선거제도 개편만 해도 많은 변화가 가능하다. 그런데 정치개혁에는 소홀한 정치인들이 새 헌법 이야기만 하고 있다.

새 헌법을 만들면 좋은 세상이 올까? 그게 궁금하면 세계 최고의 바이마르 헌법을 따랐다는 제헌 헌법의 노동자 이익 균점권이 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987년 경제민주화에 복지 조항까지 명시했지만 30년간 어떠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현 대통령제가 미국식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장점만 살렸다는데도 왜 불만인지 돌아봐야 한다.

흔히 87년 체제를 탈피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극복 대상으로 헌법을 지목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87년 헌법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낡은 사회·경제 체제, 왜곡된 정치구조를 깨려는 의지와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신성한 언어가 넘치는 헌법에 전부 물을 수는 없다. 우리 삶이 나아졌다면 그것 역시 헌법 속 우아한 문장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향한 열정과 현실을 개선하고자 했던 피나는 노력 때문이다. 삶은 헌법보다 크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생각이라면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복지를 확대하고, 불평등을 완화하고 싶으면 헌법이 아니라 사회·경제 정책을 바꾸고, 그게 가능한 정치를 해야 한다. 검찰을 바로잡고 싶으면 검찰개혁을, 재벌체제를 고치려면 재벌개혁을 해야 한다. 헌법 개정은 아니다. 헌법에는 해결책이 쓰여 있지 않다. 불립문자(不立文字). 헌법에 쓰이지 않은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87년 체제는 우리가 스스로 가둔 공간이다. 헌법이 우리를 가둔 적이 없다. 방문은 잠겨 있지 않다. 방 안에 갇혀 있다는 공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왜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가?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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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의원이 그냥 (채용)하라고 했습니다.”

21일 수원지법 안양지원 법정. 검찰 신문에 박철규 중소기업진흥공단(중진공) 전 이사장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에서 최 의원은 인사청탁을 한 적이 없고 본인이 지시했다며 최 의원을 옹호했던 박 전 이사장. 그는 법정에서 최 의원의 인사청탁 지시를 폭로했다. 검찰은 휴정을 요청했고 재판이 중단됐다. 검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이 7월 6일 국회에서 8·9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한 뒤 기자들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예견된 폭로였다. 수많은 취업준비생을 울분케 한 최경환 의원실 인턴 특혜 채용 사건. 최 의원과 그 측근들의 청탁 정황은 수두룩했다.     

특히 중진공의 조직적인 점수조작에도 불구하고 2013년 7월31일 최종 탈락한 인턴은 8월1일 최 의원과 박 전 이사장의 독대 직후 합격자가 됐다. 권태형 중진공 전 실장은 검찰 조사에서 박 전 이사장이 최 의원과 독대 후 자신에게 “최 의원님이 (그 인턴은) 내가 결혼을 시킨 아이라고 하는데 합격시켜라”라고 말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형식적인 4쪽짜리 우편진술서만 받은 후 최 의원을 무혐의 처분했다. 친박 실세에 대한 면죄부 수사였다. 검찰의 방어막은 “‘결혼을 시킨 아이’라는 표현은 내가 지어낸 것”이라고 말한 박 전 이사장의 비상식적인 진술이었다.

그런 박 전 이사장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부실수사의 민낯도 드러났다. 그의 폭로는 검찰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수사 당시 검찰 내부에서도 박 전 이사장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검찰이 평소 부르짖은 ‘법과 원칙’에 따르면 최 의원 재수사는 순리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21일 공판에서 권 전 실장 측이 최 의원에 대한 증인신청을 요청했지만 반대했다.     

최 의원이 구체적으로 범죄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형근 수원지검 안양지청 차장검사는 22일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다만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밝혔다. 재수사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지만 검찰의 답변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혜리 | 사회부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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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문제에 대한 야당들의 대응이 점입가경이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아직까지 찬반 당론을 정하지 못한 채 여론 눈치를 보고 있다. 일찌감치 반대 당론을 정했던 국민의당은 북한의 5차 핵실험 후 “중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하면 (사드 배치를) 유보할 수 있다”며 퇴로를 찾는 중이다.

안보 정국을 조성해 판을 주도하려는 여당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도인 것 같다. 하지만 사드 문제와 같은 국가안보의 중대 사안을 놓고 ‘북한이 5차 핵실험까지 한 마당에 사드까지 반대하기는 어렵다’는 식의 정치적 접근법은 비겁하다.

사드 배치 문제의 최우선적 고려 요소는 ‘무기로서의 효용성’이다. 북한 미사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효용성이 입증된다면 반대할 수도 없고, 반대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효용성을 입증할 수 없다면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야당이 해야 할 일은 사드의 효용성을 철저히 검증해 찬반 결정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사드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지속적으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사드로 북한 미사일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2013년 미 상원에 제출된 국방부 보고서에는 한국에서 사드의 효용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적시돼 있다. 미 국방부 미사일운용시험평가국장도 2015년 상원 진술서에서 사드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세상에 쓸모없는 무기는 없다. 뭐라도 있으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식으로는 안된다. 안보·외교·경제적으로 잃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국가안보가 걸린 수조원짜리 무기체계를 선전용 카탈로그만 보고 들여올 셈인가.

핵실험은 핵실험이고 사드는 사드다. 핵실험 했다고 사드의 성능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드의 효용성은 제쳐두고 반대론자들을 종북·반미로 몰아세우는 정부·여당이나, 여론 눈치를 보며 정치적 유불리를 셈하기 바쁜 야당이나 이 문제를 국가안보가 아닌 정략적 차원으로 다루고 있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정치권의 사드 논란을 지켜보고 있으면 북핵 문제가 왜 20년을 돌고 돌아 이 지경에까지 오게 됐는지 알 만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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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 선원들의 저임금 노동착취 실태를 고발한 ‘항해사·기관사 실습생들 월 30만원에 인권 사각’(경향신문 9월7일자 10면) 보도가 나간 뒤 기자의 e메일에는 “내 얘기인 줄 알았다” “알려지지 않은 더 큰 사건이 있다” 등 공감과 추가 제보가 쇄도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네이버·다음 등 포털사이트 댓글에는 또 하나의 ‘열정페이’ 사건이라며 분노하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공명(共鳴)했다.

그러나 정작 실습 선원들을 관리·감독하는 해양수산부의 반응은 황당했다. 지난 6일 오후 8시20분 인터넷 기사를 본 해수부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다짜고짜 “어떻게 제보를 받은 거냐”고 캐물었다. 실태 파악보다 제보자 색출이 우선인 듯했다. 이 관계자는 앞서 4일 통화에서 “우리 딸은 실습비를 내고 교육을 받았다”면서 “ ‘노동’이 아니라 ‘교육’일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출처: 경향신문DB

선원을 양성하는 해사고·해양대와 이들을 채용하는 해운업계·선주협회 측 입장도 해수부와 똑같았다. 한술 더 떠 선주업계 관계자는 “처우를 문제 삼는 기사가 나가면 실습 선원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다. 실습생들만 더 힘들어질 뿐”이라고 엄포를 놨다. 기사에 등장하는 각종 심부름과 가혹행위 사례를 두고 ‘다 옛날 얘기’라고 치부하는 반응도 있었다. 이에 기자가 “그렇다면 실습 선원 처우에 관한 실태조사 보고서를 달라”고 따져묻자 돌연 입을 굳게 닫았다.

일부에서는 “실습기간에 적은 돈을 받더라도 이때만 버티면 정식으로 선원이 돼 4000만~5000만원 상당의 고액 연봉을 받지 않느냐”는 반론도 제기한다. 하지만 실습 선원들은 “유럽에서 배를 타는 친구들은 우리처럼 대우가 열악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 “호텔관광과 학생들이나 간호사들도 실습 선원 못지않게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한다”는 다른 직역의 유사 제보도 있었다. 정규직 채용 전 수습기간에는 어떤 부조리라도 눈 딱 감고 인내해야 한다는 통념이 한국에서만 유효하다는 게 재차 확인된 것이다.

교육부는 사회 각 부문에서 청년들을 상대로 한 ‘열정페이’ 논란이 확산되자 지난 3월 ‘대학생 현장실습 운영규정’을 제정했다. 이 운영규정은 “실습은 원칙적으로 주당 40시간을 초과하지 않아야 하고, 실습 과정이 실질적 근로에 해당하면 법정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실습 선원들은 교육부 고시나 근로기준법이 아닌 선원법 적용 대상이어서 교육부 발표 이후에도 아무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해수부는 올해 초부터 ‘참선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해양원격진료 확대와 선원퇴직연금제도 도입 등 근무여건을 개선해 부족한 인력공급을 원활하게 만들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만난 예비 기관사·항해사들에게 이 프로젝트의 존재를 물었으나 “알고 있다”고 답변한 사례는 단 1건도 없었다.

사회부 김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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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영어로 ‘opposition party’로서 ‘반대하는 당’이다. 우리가 반대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한마디로 국민을 싹 무시한 개각이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2006년 1월 노무현 정부 개각을 비판하며 한 얘기다. 박 대표는 2005년 4월8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선 “국회 인사청문회 대상을 확대하고 청문회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인사청문회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의 공언대로 석 달 뒤 한나라당은 인사청문회법 개정을 관철시켰다. 장관 후보자도 인사청문회 대상에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두번째줄 왼쪽)과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오른쪽)이 5일 국회 본회의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 노무현 정부를 공격하며 한 얘기를 글자 그대로 옮겨 지금 상황에 대입하면 박 대통령 자신을 겨누는 격한 논고(論告)로 읽히는 경우가 많은데, 고위공직자 인사 문제에 관한 것이 특히 그렇다.

현오석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 최문기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정종섭·강병규 전 안전행정부 장관, 이경재 전 방송통신위원장…. 박근혜 정부가 야당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을 강행한 전직 장관들이다.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정치적 편향, 자질 부족  등으로  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최근 이 리스트에 세 명을 추가했다.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고도 신분을 속인 이철성 경찰청장, ‘황제 전세’ ‘황제 대출’ 의혹이 제기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거액의 재산을 제대로 소명하지 못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김·조 장관의 경우 G20 정상회의 참석차 중국 순방 중 전자결재로 임명안을 재가했다.

현행법상 국무총리·대법관·헌법재판관·감사원장과 달리 장관은 국회 임명동의 대상이 아니다. 인사청문회를 거친 뒤 해당 상임위가 ‘적격·부적격’ 의견을 채택해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돼 있다. 이 제도의 취지는 국회 의견을 무시하고 대통령 마음대로 장관을 임명하라는 것이 아니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인사권을 존중하되 대통령은 국회 의견을 고려해 임명 여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대통령과 야당의 소통, 대통령의 민심 청취 의무를 전제로 설계된 제도인 셈이다. 야당과 여론에 대한 대통령의 정치적 반응도가 낮으면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 이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따위 인사청문회를 왜 하느냐”고 한다. 비단 제도의 무용성만 탓하는 말이 아니다. 여론에 귀 막고 막무가내로 임명한 장관의 권위 따위는 인정할 수 없다는 내심의 거부 선언이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5일 야당의 대통령 발목 잡기를 비난했지만 현 정부 권위를 밑동부터 흔드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박 대통령 자신이다.

정치부 | 정제혁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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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21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대한 반발을 겨냥해 “사드 외에 북한 미사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부디 제시해보라”고 했다. 대통령의 말은 순서가 틀렸다. 사드 배치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보았으면 ‘소통하는 대통령’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밀실에서 다 결정하고 도장까지 ‘쾅쾅’ 찍은 뒤 이렇게 말하면 그저 호통이 되고 만다.

경북 성주군민 2000여명이 21일 서울역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박 대통령은 사드 말고 다른 방법이 뭐가 있느냐고 호통치기에 앞서 국민 보호를 위해 들여오는 사드가 왜 국가 주요 기관과 전체 인구의 절반이 모여 있는 수도권을 방어하지 못하는지 먼저 설명해야 한다. 사드는 미군시설 지역에 배치하고 수도권에는 기존 패트리엇 미사일을 보강해 방어한다는 국방장관의 계획이 사실이라면 사드가 국민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사드와 같은 미사일방어(MD) 체계는 기본적으로 적으로부터 공격받았을 때 반격하는 시스템으로, 자국의 군사적 자산 보호가 우선이다. 선제공격을 하면 다 같이 죽게 된다는 ‘상호확증파괴’ 논리에서 출발해 상대 공격력을 무력화시키고 전략적 우위를 점하는 단계로 진화한 것이 MD다.

만약 북한이 공격을 해온다면 군사적 관점에서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은 반격에 필요한 군 시설과 장비다. 미군이 사드를 수도권이 아닌 군 시설, 그중에서도 핵심적 전력인 미 군사기지를 보호할 수 있는 곳에 배치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미국 요구에 따라 사드를 들여오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사드는 군사적 효용성이 검증되지 않은 미완성 무기체계다. 북한이 사드를 피해 남측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너무 많고 다양하다. 이 때문에 사드가 북한의 도발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북한이 도발을 계획했다가 자제한다면 그것은 사드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미가 사드를 사용해야 할 상황이라면 이미 전면전이 벌어진 상태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명과 재산 피해는 발생한 뒤다. 결국 ‘사드 배치→북한 미사일 공격 차단→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논리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3단계 방법’만큼 허망하다.

사드로 전쟁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국민 보호는 사드가 아니라 ‘외교와 전략’으로 하는 것이다. 정말 국민 안전이 목적이라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국제 공조를 통해 평화유지 메커니즘을 만들고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동결·폐기시키기 위한 외교적·전략적 노력을 기울이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차분히 한발씩 걷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 사드 배치와 같은 단순한 조치로 이룰 수 있다면 한반도 문제가 왜 이 지경까지 왔겠는가.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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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경북 성주 배치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외부세력이 폭력시위를 유도했다고 주장하고 보수층 인사들은 외부의 종북세력이 선동한 결과라고 맞장구친다. 사법당국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했다.

18일 태평양 괌 미국기지에서 한국의 국방부 관계자들과 취재진이 사드포대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 국방부 관계자들과 취재진은 경북 성주지역으로 사드 배치지역이 결정된 후 제기되는 논란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괌 사드 포대 운용 실태와 레이더 전자파 인체 위해성 여부, 발전기 소음, 환경피해 등을 확인했다. 연합뉴스

이들이 말하는 외부세력은 성주에 거주하지 않거나 연고가 없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에는 사드 배치 문제가 ‘오롯이 4만5000명의 성주 군민들과 정부 간의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사드 배치를 ‘일개 포대중대 배치 문제’로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단순하고 저급한 인식이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을 깨고 군비경쟁을 촉발해 역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은 물론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요원하게 만드는 사안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대한민국 국민 중 외부세력이라고 구분해 제외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8일 태평양 괌 기지에 배치된 사드 포대에서 미군이 한국 취재진에게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이날 한국 국방부 관계자들과 취재진은 경북 성주지역으로 사드 배치지역이 결정된 후 제기되는 논란을 객관적으로확인하기 위해 괌 사드 포대 운용 실태와 레이더 전자파 인체 위해성 여부, 발전기 소음, 환경피해 등을 확인했다. 연합뉴스

외부세력을 찾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성주 군민들이 사드를 받아들이면 다른 지역 국민들은 사드 배치에 반대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만약 성주가 끝내 반대해 다른 지역을 찾아야 한다면 그때는 성주 군민들이 외부세력이 되는가.

‘외부세력론’은 사드 배치 문제를 성주 군민과 정부 간의 사안으로 국한시키고 이들을 보상으로 회유하든 종북세력으로 몰아 겁박하든 입만 다물게 하면 된다는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다. 

굳이 외부세력을 색출하고 싶다면 멀리 갈 것도 없다.

북한 핵미사일과 관련이 없는 전략자산을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해 한반도에 배치하고 이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외교적·경제적·국내적 혼란을 감수하라고 팔을 비틀고 있는 미국이 바로 가장 심각한 외부세력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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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이 지난해 10월29일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2000억원 지원방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한 기자가 질문했다. “불황이 예상되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당시 산업은행의 정용석 기업구조조정본부장은 “현시점에 이 회사를 정상화시키지 않을 경우 발생할 채권단과 국가경제의 손실을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인가 판단했다고 이해해달라”고 비켜갔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6월10일 . 경향신문DB

발표 일주일 전인 10월22일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최경환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종룡 금융위원장, 홍기택 당시 산업은행 회장 등이 청와대 서별관에 모여 대우조선 정상화 방안을 확정했다. 문제의 ‘서별관회의’다.

지난 4일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이 공개한 당시 서별관회의 문건에는 공교롭게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문건은 대우조선에 대해 ‘국책금융기관 주도 및 채권은행 협조에 의한 정상화’가 가장 적절한 방안이라고 제시하면서도 “조선산업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추가 자금 지원도 부실화될 우려가 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비판 가능성이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대우조선에 대한 대규모 지원자금이 허공으로 날아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국책은행 자금은 사실상 공적자금인 만큼 4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돈을 쓸 때는 촘촘한 근거가 제시돼야 한다. 하지만 문건에는 세 가지 방안과 방안별 장단점이 추상적으로 나열돼 있을 뿐이다. 서별관회의는 “국가경제 및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 국내 조선업 경쟁력 유지, 대우조선의 대외신인도 유지 필요성, 자율협약·워크아웃 시 채권은행의 이탈 가능성 등 다양한 측면의 손익과 리스크 감안…” 등을 근거로 4조2000억원 지원을 결정했다.

정부의 행태는 지금도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대우조선의 부실 규모를 명확하게 파악해 공개한 뒤 회생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순서였다. 회생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뒤 자금 지원방안을 마련해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서별관회의는 부실 규모가 채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향후 업황을 낙관적으로 판단한 채 내린 결론이다.

정부는 지난달 8일 대우조선으로부터 자회사 매각 등으로 3조5000억원을 마련하는 내용의 추가 자구안을 제출받았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마련한 정상화 계획이 엇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가 올해 말까지 420%로 떨어뜨리겠다는 대우조선의 부채비율은 올해 1분기 6600%대다. 당국 스스로 우려하던 ‘신규 지원자금의 부실 우려’가 현실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세간에선 “정권이 바뀐 뒤에 또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지난해 10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결정을 왜 서둘러 내려야 했는지 설명을 해야 한다.

송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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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광주 호국보훈 퍼레이드는 광주시도 동의해 공동 주관하기로 했고, 2013년 11공수여단이 참여한 군 퍼레이드에는 시가 예산까지 지원했는데 알고 계십니까?”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돼 시민들을 학살했던 11공수특전여단의 광주 금남로 시가행진을 계획했던 국가보훈처는 지난 20일 비판 여론이 들끓자 “광주시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같이 항변했다. 지난 2개월여 동안 6·25 행사를 협의하면서 11공수여단 등도 참여하는 퍼레이드가 주요 행사임을 광주시에 충분히 설명했다는 주장이다.

광주시는 지난 4월12일 광주지방보훈청의 협조공문을 받았다. 광주보훈청은 “광주 호국보훈 퍼레이드 공동 주관 개최에 협조해 달라”며 군인과 참전유공자 등 2000여명이 금남로를 행진하려 한다는 계획을 전했다. 첨부된 계획서에는 담양에 주둔하고 있는 11공수여단과 31사단 군인들의 행진 순서 등도 적혀 있었다.


윤장현 광주시장이 삼성전자 광주사업장을 찾아 생산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_광주시 제공



같은 달 28일 열린 회의에서도 11공수여단과 31사단 관계자가 참여했다. 당시 광주시는 군인들의 시가행진과 실내에서 열리는 6·25 기념식의 순서를 바꾸는 것을 빼고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특히 보훈청·31사단과 함께 공동 주관 기관에 이름까지 올리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광주시는 2013년 7월에 개최된 ‘광주·전남 호국문화행사’에는 300만원의 예산을 지원했다. 6·25전승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는 31사단과 보훈청이 주관했다. 당시 11공수여단과 31사단 군인들이 금남로를 행진했다.

하지만 윤장현 광주시장은 21일 간부회의에서 “이번 행사를 진행한 보훈처의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고에 분노한다”고만 했다.

또 올해 행사 협의는 알지 못했다면서 부하 공무원들 탓으로 돌렸다. 윤 시장의 ‘유체이탈’ 화법은 비겁한 책임회피와 다를 바 없다.




전국사회부 | 강현석 기자 kaja@ kyunghyang.com



전국사회부 | 강현석 기자 kaja@ kyunghyang.com

Read more: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12220025&code=990105#csidx1bfbc9c539d1e6db7bd7c0e6a83cc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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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시·도의회의장협의회는 22일 대전에서 2016년 제5차 임시회를 개최한다. 전국 시·도의회의장이 정기적으로 모여 현안을 논의하고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한 의장에게는 조촐한 시상을 하기도 한다. 이날 임시회에서는 최근 주목받는 의견 한 건이 거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의장이 의견을 내 다음 모임에서 공식 안건으로 채택할지 여부를 논의할 것으로 21일 확인됐다. 이 예비 안건은 지방의원들이 지방재정 확충에 성과를 나타내면 피감기관인 집행부의 평가를 거쳐 일종의 포상금 성격으로 예산성과금을 받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다. 새누리당 남경필 경기지사는 지난 3일 경기도북부청사에서 열린 월례조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도의원 2명에게 예산성과금으로 각 2000만원을 지급했다. 1998년 예산성과금제가 도입된 이후 지방의원이 이를 받은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예산성과금은 예산절감과 세수증대에 기여한 공무원과 민간인에게 주는 일종의 포상금이다. 물론 지방의원들도 선출직 공무원 자격으로 의정활동을 통해 예산절감과 세수증대에 기여했다면 대상은 될 수 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



그러나 집행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이 주업무인 지방의원이 피감기관으로부터 역평가를 받아 예산성과금을 받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반대 여론이 우세하다. 어디까지가 지급 대상인지 기준도 모호하다. 기본 책무를 잘했다고 포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비판의 대상이다. 더 큰 문제는 집행부가 당근책으로 예산성과금제를 활용하면 의원들의 의정활동 제약 및 의회기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물론 지방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의정활동을 펼치는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없지는 않다. 경기도가 이 제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도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포상 신청을 권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도민들은 순수성을 의심하고 있다.

전국 자치단체의 이슈가 되고 있지만 정작 포상금을 도의원들에게 전국에서 처음으로 직접 준 남경필 지사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설명이 아직 없다.



전국사회부 | 경태영 kyeong@ kyunghyang.com

전국사회부 | 경태영 kyeong@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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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입국한 중국 북한식당 종업원들 중국 닝보의 북한 식당에서 근무하다 집단탈출한 종업원들이 4월7일 한국에 들어온 뒤 경기 시흥시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동하고 있다._통일부 제공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 있는 류경식당에서 근무하다 집단탈출해 지난 4월7일 한국에 입국한 북한식당 종업원들에게 다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여성 종업원 12명이 정부 발표대로 자발적 탈북인지 확인하게 해달라며 제출한 ‘인신보호구제심사청구’를 법원이 받아들여 이들을 21일 법정에 출석시키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대 총선을 불과 닷새 앞둔 4월8일 공식 브리핑을 갖고 이들의 입국 사실을 알렸다.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이들이 보호시설로 이동하는 사진과 이들이 진술했다는 탈북 이유 등도 상세하게 전달했다.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다. 올 들어 매달 탈북자가 평균 100여명 입국하지만 정부는 일절 공표하지 않았다. 북한 내 탈북자 가족의 신변 안전, 비슷한 경로로 탈북을 준비하는 다른 북한 주민들의 안전 등의 이유를 들었다.

북한식당 종업원들의 집단탈출은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북한의 1월 제4차 핵실험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새로운 대북 제재 결의를 채택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정부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이들의 이탈에 영향을 미쳤으며, 북한의 해외식당 종업원은 북한 사회에서 중산층에 해당한다는 ‘해설’을 내놓으며 이들에게 쏠리는 관심을 즐겼다.

정부가 설명한 대로 북한에서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집안의 젊은이들이 단체로 전광석화처럼 신속하게 탈출을 감행한 경위에 대해 의문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그들은 자유의사에 의해 입국했다”고만 밝힐 뿐이었다. 정부는 20대 총선이 지나자 침묵 모드로 돌아섰다.

민변이 신청한 접견요청을 거부해오던 정부는 이들을 법정에 출석시켜 자유의사로 탈출한 것인지 답하도록 하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여론을 유포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가족들을 앞세워 이들이 남한 당국에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마당에 이들이 자유의사로 한국행을 택했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북한 내 가족 안전을 걱정해 “납치된 것이 맞다”고 진술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는다.

정부의 우려를 수긍한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만든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정부는 이들의 탈출을 ‘대탈주’라도 되는 양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써 관심을 최고조로 상승시켰다. 4·13 총선을 앞두고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집단 이탈을 대북압박 성과로 내세우려는 의도에서였다. 북한이 이들의 가족을 앞세워 ‘납치극’이라는 선전전으로 대응하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결국 정부가 잘못 끼우기 시작한 단추가 북한 내 가족의 신변 안전을 이들 북한식당 종업원의 ‘양심’에 떠넘기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정치부 | 김재중 hermes@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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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는 곳이라던 청와대 서별관회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결정한 밀실 회의였다. 산업은행이 관리하는 부실기업과 자회사에 청와대와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이 사이좋게 낙하산 자리를 나눠 가졌다. 청산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되는 기업에 국책은행이 무조건 돈을 대라는 압력을 가했다. 정부는 부행장급 인사 등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관여하면서도 증거가 남지 않는 구두지시를 남발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위협이 횡행했다. 관료와 금융기관 간에는 ‘까라면 까는’ 군대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이 지난 8일 보도한 홍기택 전 KDB금융그룹 회장 겸 산업은행장의 발언들을 통해 밝혀진 일면들이다.

홍 전 회장의 ‘의도하지 않은 발언들’의 불똥은 청와대와 금융당국을 넘어 여의도까지 번지고 있다. 지난해 서별관회의의 주인공이었던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며 청문회까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보도 이후 당사자들은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다”(책임 떠넘기기),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변명과 부인), “언급할 가치가 없다”(‘모르쇠’ 전략)로 일관하고 있다. 이 또한 전형적인 관치의 모습들이다. 서별관회의를 통해 3조원 가까운 혈세가 들어간 상황에서도 정부는 또다시 한국은행에 손을 벌리는 편법으로 ‘국민 돈’ 12조원을 마련했다. 치킨집 주인, 비정규직 노동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등 대한민국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조성한 천문학적 규모의 돈은 부실 대기업을 살리는 데 들어간다.


홍기택 KDB산업은행장_경향DB



그렇지만 ‘혈세가 혈세를 부르는’ 현 구조조정 국면의 원인은 무엇이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 유일호 부총리는 “구조조정에 정치 논리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구조조정 과정에 정치는 무관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관치는 없었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임종룡 위원장은 “대우조선 구조조정 과정에서 산업은행과 협의했고 충분히 의견을 존중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관료에 비하면 절대적 을(乙)에 불과한 산은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는지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저간의 사정으로 보면 “정책결정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홍 전 회장의 말에 무게중심이 쏠린다. 정부 지분이 없는 시중은행과 제2금융회사까지 무소불위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당국에 산업은행의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됐는지도 알 수 없다.

최경환 전 부총리의 한 측근은 “산은이 들고온 ‘대우조선 자구안’이 강도가 약해 반려시킨 게 당시 최 부총리”라고 전했다. 그러나 ‘진박 감별사’로 지난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 지원유세 당시 최 전 부총리가 “경제부총리는 그만두었지만 제가 친한 공무원이 수두룩하다. 제가 전관예우를 발휘해서 확실한 예산을 보내주겠다”고 말한 것을 감안하면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정부는 부실기업 문제가 불거지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그 결과 부실은 더 커지고 구조조정을 지연시켜왔다. 이 같은 적폐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대우조선 관치의 실상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산업부 |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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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소박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합니다. ‘소박하다’는 것은 꾸밈이 없고 까다롭지 않음을 일컫습니다. 꾸밈이 없으니 거짓이 있을 수 없고, 까다롭지 않으니 무던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소박하게 산다는 것은 거짓 없이 무던하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겉과 속을 이리저리 꾸미기에 바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더 서로에게 까다로울 수 있느냐를 두고 경쟁이라도 하듯 살아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소박하게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삶은 내가 나의 참된 주인이 되어 당당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더러는 그냥저냥 살아가기도 합니다. 가끔은 내가 아닌 남에 의해 내가 살아질 때마저 있습니다. 이래저래 삶이 버거워 소박하게 살지 못할 때,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심은 더 꿈틀거리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샘솟으면 하던 일을 잠시라도 멈추고 자연으로 향합니다. 거짓이 없고 무던한 모습의 중심에 자연이 있으며, 그 소박한 삶의 꼴을 고스란히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는 날이라면, 더군다나 알맞게 비가 내려주는 날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알맞게 내리는 비를 가장 먼저 반기며 좋아하는 것은 메말랐던 흙입니다. 마를 대로 말라 서로 붙잡고 있을 힘마저 잃어 먼지로 흩날리는 흙에게 비는 그야말로 단물이지요. 그런데 가랑비는 마른 땅이 젖어들기에 부족합니다. 폭우는 흙과 한몸으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스쳐 흘러가고 맙니다. 알맞은 굵기로 떨어지는 비는 흙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비를 천천히 음미하듯 빨아들이며 흙은 표정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빠짝 말라 희끗희끗하게 들뜬 빛깔로 있다 비를 만나 짙은 갈색으로 낯빛을 바꾸고, 마침내 생기마저 술렁거리는 흙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마음이 한결 차분해집니다. 알맞게 비가 올 때 흙과 더불어 신명이 나는 것은 흙에 생명을 기대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이겠으나, 그 중에서도 도드라지게 표가 나는 것은 들풀과 나무입니다. 비를 만난 들풀과 나무는 같은 녹색이어도 더욱 더 진한 녹색으로 그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먹구름이 드리워져 어두움이 슬쩍 내려 있더라도 들풀과 나무 주변은 오히려 더 밝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게다가 힘없이 처진 잎사귀가 몸을 바로 세우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른 더위가 너무 달린다 싶더니 결국 비가 오십니다. 비를 좋아합니다. 비는 물이며, 물을 좋아하는 천성에다 물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직업도 보태졌을 것입니다. 생명체의 70~90%를 차지하는 것은 물입니다. 생명체가 아득한 진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채울 가장 많은 물질로 선택한 것이 바로 물인 것이지요. 생명체에게 물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이 없는 생명, 물이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비를 만나 더없이 싱그러운 풀잎 위에 붉은 빛깔의 실잠자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비를 좋아하니 자연히 빗소리도 좋아합니다. 비는 굵기에 따라 내리는 소리가 다릅니다. 같은 굵기라도 어디에 닿느냐, 곧 누가 맞이하느냐에 따라 소리는 변합니다. 메마른 땅에 닿을 때와 젖은 땅에 닿을 때가 다릅니다. 흙이 비를 맞이하는 소리와 나뭇잎이 맞이하는 소리가 다르며, 잎도 어느 잎이냐에 따라 소리는 또 달라집니다. 소나기가 커다란 방석처럼 드넓은 가시연꽃 위로 격렬하게 북을 두드리듯 떨어지는 소리는 압권이지요. 비가 물에 닿는 소리도 특별합니다. 같은 물이라도 고여 있는 물과 흐르는 물 어디에 닿느냐에 따라 소리는 사뭇 다르고요.

오는 듯 마는 듯 그러다 멈추는 가랑비도 아니고, 하늘이 열린 듯 한없이 쏟아붓는 폭우도 아니고, 꼭 알맞게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하던 일이 급하게 시간을 다투는 것이 아니기에 그대로 펼쳐두고 밖으로 나섭니다. 산으로 갈 수 있고, 들녘으로 들어설 수 있으며, 강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연구실 문을 열고 나서 계단 몇 개 내려선 다음 몇 발짝 걸으면 바로 산으로 이어집니다. 산으로 들어서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조금만 더 걸으면 넉넉한 들녘이 펼쳐집니다. 서서히 비에 젖어드는 산과 들녘에 꾸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차에 올라 잠시 움직이면 섬진강에도 이르게 됩니다. 언제나 그렇게 주어진 결대로 흐르는 섬진강에 꾸밈과 까다로움 또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오늘은 섬진강으로 향합니다. 우산은 가져오지도 않았지만, 비를 그냥 맞기로 합니다. 강둑에 내려서서 강 가장자리를 따라 거닙니다. 비를 만나 적당히 폭신폭신해진 강가의 흙을 밟는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그러다 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비를 만나 더없이 싱그러운 풀잎 위에 붉은 빛깔의 실잠자리 하나가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비, 흙, 풀잎, 실잠자리 그것만으로도 자연은 이미 소박함의 완성인 듯합니다.

알맞게 비가 오는 날에는 잠시라도 밖으로 나가 자연과 벗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산도 멀고, 들도 멀며, 섬진강은 더 멀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디라도 흙과 들풀이 가까이 있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혹 실잠자리 하나의 자리가 비어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자연,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마음이 자연에서 멀 뿐입니다. 그래서 소박한 삶이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성호 | 서남대 의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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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정비하다 사망한 김모씨(19)의 어머니는 기자회견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책임감이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에게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며 키우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이 강하고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에게 개죽음만 남을 뿐입니다. 첫째(아이)를 그렇게 키운 것이 미칠 듯이 후회됩니다.”

그 어머니가 말하는 김씨 모습은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 말을 믿고 따랐다가 차가운 바다에 수장된 세월호 아이들과 겹친다. 그들은 나이도 같다. 세월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김씨처럼 사회 초년병이거나 대학 새내기일 것이다. 둘 다 착한 것, 성실한 것, 어른들 말을 믿고 따른 것이 죄라면 죄였다. 정직한 것, 반칙하지 않는 것이 패가망신 이유가 되고 죽음의 원인이 되는 사회는 내면 깊숙이 병든 사회다. 사회 규범이 무너지고 신뢰가 붕괴된 자리에선 거짓과 술수와 협잡이 ‘끼리끼리’ ‘짜웅’ ‘짬짜미’ 같은 말을 거느리고 독버섯처럼 자란다.

유명한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는 석연치 않은 변론으로 수백억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백 수십채의 오피스텔을 사들여 집장사를 하고 탈세했다. 거악을 징치한다는 특수통 검사의 노하우와 인맥을 범죄행위에 활용했다. 홍 변호사는 억울할 것이다. 그는 시쳇말로 재수 없게 걸린 케이스다. 최유정 변호사와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 간 진흙탕 싸움이 없었다면 그가 검찰 수사를 받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명망 있는 법조인이요, 능력 있는 변호사로 남아 음으로 양으로 돈을 긁어모았을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과 명망을 밑천 삼아 장차 국회의원, 장관, 총리가 될 수도 있었겠다. 어쩌면 시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청년들에게 정직하게 땀 흘려 노력하라고 훈계할 수도 있었을 게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전관예우, 논문표절 따위가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고위 공직자의 기본 스펙이 된 지 오래다. 위선과 기만, 후안무치와 이중잣대.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정신적 풍경이다.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전방위 로비 의혹에 연루된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가 2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탈세와 변호사법 혐의로 조사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_경향DB


‘반칙을 해서라도 남을 짓밟고 올라서면 된다’는 천민 신자유주의적 삶의 태도를 선도한 건 정부·여당이다. 민주주의는 절차와 과정의 정의를 중시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지난 대선 때 국가정보원은 현 집권세력을 위해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했다. 같은 시기 새누리당 실세들은 불법으로 유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을 침소봉대하며 색깔론을 펴 톡톡히 재미를 봤다. 선거에서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반칙을 일삼았다.

그래놓고도 이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명백하게 드러난 불법행위를 제대로 사과한 적도 없다. 법의 단죄를 받지도 않았다. 공안검찰은 2급 국가기밀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불법으로 유출해 선거에 활용토록 한 새누리당 정문헌 전 의원을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하는 데 그쳤다. 국가기밀을 불법으로 빼내 선거에 악용해도 벌금 500만원만 물면 된다는 것이 검찰에서 선거사범을 전담하는 공안검찰의 판단이다. ‘비용 대비 효과’를 생각하면 불법을 저지르라고 검찰이 권장한 셈이다. 정부가 앞장서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것이다. 공익은 집권세력의 사익에 압도됐다. 그런 정부를 시민들이 신뢰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보수정권 9년을 거치면서 사회는 한층 천박하고 비열해졌다. 염치를 잃은 사람들은 오늘도 ‘완장질’을 하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공동체는 붕괴됐고, 사회는 더 위험해졌다. 경제 사정은 나빠졌고, 일자리는 줄었으며, 남북관계는 악화됐다.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언론자유는 퇴보했다. 청년들은 미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난 9년간 무엇 하나 좋아진 것이 없다. 사회는 폐허가 됐다. 그 폐허에서 정직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



정제혁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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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의 안내책자에 실린 윤동주의 생애는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출생”으로 시작해서 “1945년 2월16일 오전 3시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약력을 읽으면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된다. 온 국민이 사랑하는 민족시인 윤동주가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고 다시 중국 고향 땅에 묻혔다면, 윤동주에게 서울은 무엇이었을까?

1938년 서울에 처음 올라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여름방학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 학생이던 후배 장덕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주 땅에서는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했고, 도처에 우리 국기의 상징인 태극 마크가 새겨져 있고, 일본말을 쓰지 않고, 강의도 우리말로 하는 조선문학도 있다.”

윤동주의 시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설명이 북간도 명동촌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다니던 시절의 명동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시기의 민족교육 학교가 아니라 인민학교였으며, 1915년에 발표된 중국 정부의 교육법에 따라 중국어와 일본어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쳤다. 그나마 6학년 때에는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해 공부했으므로 중국어로 배우고 생활하게 되었다.

광명학원 중학부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을 때 지은 시는 띄어쓰기도 되지 않은 국한문혼용체였는데, 윤동주가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지은 시 ‘새로운 길’은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처럼 한글 전용이 되었다.

시내에 들어갔다 학교로 돌아오는 날에는 창천 내를 건너서 연희 숲을 지나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이 구절은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우며 아름다운 모국어로 시를 짓게 된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다.

시인 윤동주_경향DB


졸업반 시절에 태평양전쟁 여파로 기숙사 음식이 시원치 않게 되자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하숙집을 찾았는데, 정병욱은 하숙집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해(1941년) 5월 그믐께,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윤동주보다 8세 위였던 김송은 함경도 출신으로 대표적인 항일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감옥 체험을 다룬 데뷔작 <지옥>을 신흥극장 창단 작품으로 공연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중단당했으며, 일본 경찰에게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누상동 9번지 하숙집에 살던 시절 윤동주의 동선은 글자 그대로 서울 산책이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하학 후에는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明治座)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다.” 윤동주가 기숙사에서 나와 누상동에 하숙집을 잡은 이유는 서울 문화산책을 하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하숙집에서는 조 여사가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렸으며, 식사가 끝나면 김송이 대청마루로 불러들여 한 시간 남짓 문학과 세상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김송이 요시찰 인물이라 고등계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와 윤동주의 책꽂이에서 책 제목을 적어 가고, 고리짝까지 뒤져 편지를 압수해 가며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하숙집을 옮겨야만 했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연세대학교 핀슨홀(당시 기숙사)과 누상동 하숙집뿐인데, 윤동주 하숙집을 검색하면 낯선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일본인 독자들이 윤동주 하숙집을 찾아왔다가 한옥을 헐고 새로 세운 주택 앞에서 허탈하게 찍은 사진과 “윤/하/뻔”, 즉 태극기와 윤동주 하숙집 터 안내동판 위에 크게 써붙인 “윤동주 하숙집터 뻔데기” 간판이다.

윤동주가 아침마다 산책하고 세수하던 수성동계곡이 복원되면서 관광객들이 찾아오자 누군가 장삿속을 발동한 것이겠지만, 이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 집을 서울시민들에게 돌려줄 때가 되었다.

윤동주의 시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글자가 하늘과 우물과 길이다. 누상동 하숙집에서 청운동 시인의 언덕을 거쳐 윤동주문학관까지 이르는 길을 윤동주 산책길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기를, 서울시와 서울시의회에 제안한다.



허경진|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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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일본 히로시마 방문에서 정치적·역사적 의미를 배제하려 한다.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도 아니고 역사 청산도 아니라고 한다. ‘핵무기 없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순수한 동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정치적·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다.

미국이 사과 의미를 배제한 것은 옳지 않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민간인이 대부분인 수십만의 생명을 핵으로 절멸시킨 행위는 일본의 전쟁책임 여부와 별개로 사과해야 할 일인 것이 맞다.

현재 동북아시아에는 핵위협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이벤트라는 주장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오바마가 일본에서 핵 없는 세상을 말하려면, 먼저 주변국을 불안케 하는 막대한 양의 농축우라늄, 무기급 플루토늄을 일본이 보유하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공원을 찾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오른쪽)이 27일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한 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_AP연합뉴스

결국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은 큰 의미가 있는 행사가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주창해온 오바마 개인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다. 최소한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서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아베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미국 판단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향후 미·일동맹 강화를 통한 공세적 아시아 전략으로 한국이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릴 것임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한국인 희생자가 동등하게 언급됐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한국 정부 입장이 딱하다.

주변 정세가 이 지경인데 한·일 위안부 합의로 오바마의 히로시마행에 빗장을 풀어준 박근혜 대통령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업적을 부각시키는 데 매달리고 있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가 다른건 몰라도 외교는 잘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유신모 ㅣ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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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월의 끝자락이다. 입시생이나 재수생 못지않게 고시생들에게도 5월의 나른함은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흔들리게 하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과거 조선시대 양반 자제들은 세속의 유혹을 벗어나 과거 준비에 전념하기 위해 책을 싸들고 산속의 조용한 절을 찾았다. 그런 관습은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도 계속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법시험, 외무고시, 행정고시와 같은 고급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 준비를 위해 조용한 산사의 작은 방에서 젊음을 불살랐다.

그런데 1980년대 무렵부터 서울대 가까이 위치한 신림동 주변에 고시촌이 형성되면서 전국의 고시 준비생들이 절 대신에 고시원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사실 서울대 캠퍼스가 도심을 떠나 관악산 자락으로 이전하지 않았더라면 신림동에 고시촌이 형성될 이유가 없었다. 고시촌 주변은 원래 지방에서 올라온 서울대생들이 방을 빌려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하던 동네였다. 그러다가 점차 고시촌으로 변모했다. 서울대가 들어오기 이전 완만한 언덕이던 신림동 주변에는 묘지들이 즐비했고 서울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주민들의 철거반대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된 투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1974년 서울대는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 물려받은 동숭동 캠퍼스를 떠나 관악산 기슭 6백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부지에 새로 지은 캠퍼스로 이전했다.(원래 그곳에는 1963년에 만들어진 관악컨트리클럽이라는 골프장이 있었다. 현재 ‘교수회관’이라고 이름 붙은 건물이 과거 컨트리클럽의 식당과 연회장으로 쓰이던 곳이다.) 서울대 이전의 공식적인 이유는 서울대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동양 최고의 대학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도심으로부터 격리시켜 체제의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 서울대 주변에는 기본 여가시설이 없어서 학생들은 캠퍼스 뒤의 관악산으로 들어가 술판을 벌이기도 했고, 학교 철조망을 넘고 개울을 건너 생두부를 안주 삼아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러 가기도 했다. 그게 그 시절의 낭만이었다.

1990년대의 일이다. 학회에 참석하거나 외국 학자들의 강연을 듣기 위해 서울대에 갈 일이 있으면 나는 늘 낙성대 쪽에서 학교 안으로 진입했다. 캠퍼스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대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동네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5월 하순의 저녁 나는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내려 고시촌을 거쳐 서울대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쑥고개를 넘어 서울대입구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야간 산책’을 감행했다.

신림역에서 내려 거리로 나서니 신림사거리는 온갖 네온사인과 불빛으로 어지러웠고 밀려오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곳에서 서울대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걸어 올라가니 도림천이 나왔다. 말끔하게 정리된 천변으로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에는 “신림 경전철 예산 93억원 확보”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계속 걸어 올라가니 고시촌을 알리는 조형물이 나왔다. 인문사회과학 서점 ‘그날이 오면’이 겨우 과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책터나눔 ‘북션’도 보였다. 골목길로 들어서니 5층 규모의 공동주택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들이 즐비했다. 도로를 접하고 있는 1층에는 식당, 카페, 주점, 빨래방 등이 보였고 독서실, 고시학원 등의 간판도 보였다. 편의점 밖 테라스에는 캔 맥주를 마시고 있는 젊은이들도 보였다. 서로 동료의식을 느끼며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서로 경쟁의식에 불타 분발하기도 하면서 고시촌 분위기에 젖어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착잡했다.

고시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 있는 작은 단칸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원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곳에서 고시 준비생들의 숨 막히는 삶이 이루어진다. 주방, 화장실, 욕실, 세탁실 등은 공동으로 사용한다. 과거 가리봉동의 노동자들이 살던 ‘벌집’에 비교하면 훨씬 개선된 주거 환경이지만 그리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환경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이곳에 살면서 시험 준비에 전념하고 있다.

몇몇 건물의 외벽에는 사법시험 합격자의 이름이 새겨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젊은 시절의 몇 년을 그곳에서 보내고 ‘성공’해서 현재 부장판사로 일하고 있는 문유석은 20년 만에 신림동 고시촌 골목길을 다시 거닐며 이런 소감을 남겼다. “예전보다 많이 해사해졌지만 이 동네의 본질은 변할 리 없다. 미래에 대한 불안, 초조, 욕심, 좌절, 분노, 비뚤어진 욕망, 충족되지 않는 자존감, 과대망상, 성욕, 찌질함, 고시촌의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그때 누구보다 찌질하고 피폐했다. 내 안 밑바닥 어딘가에는 아직도 고시촌의 쾨쾨한 냄새가 남아 있다.”

도림천 양안 언덕에 고시 준비생들을 위한 건물들이 즐비한 언덕길을 걷다 지친 나는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아탔다. 운전기사에게 서울대 캠퍼스를 한 바퀴 돌자고 했더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잠시 후 국립서울대학교를 상징하는 ㄱ, ㅅ, ㄷ을 조합해 만든 철제 정문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자 왼쪽에 야간 조명등이 밝혀진 운동장이 나왔다. 택시의 창문을 열어놓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캠퍼스의 외곽도로를 한 바퀴 쑥 돌았다.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 근방에 이르자 뿌연 조명등이 켜진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내 눈앞에는 고시원의 책상 앞에 웅크리고 있을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들이 어디에서든 저렇게 활기차게 뛸 날은 언제인가?


정수복 ㅣ 사회학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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